연꽃구경 -정호승
어느날 고궁을 나오며--- 김수영
백일홍 편지--- 이해인수녀
시인의 재산 --- 최서림
흙 노래--- 정연복
바람속을 걷는 법2 --- 이정하
바닷가에서 --- 정연복
마음 농사 --- 정연복
雨中의 나이- 기형도
실망했던 세상- 이생진
화엄에 오르다- 김명인
변명- 마종기
격포- 송재학
나의 싸움 신현림
바람 없는 날- 강윤후
빗방울, 빗방울- 나희덕
떠도는 환유 5 -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김승희
우물 이야기- 남진우
백두산을 오르며- 정호승
통곡- 김관식
내 마음의 지도- 김경미
정수사 가는 길- 김선태
쓰레기통처럼- 정호승
몽대항 폐선- 김영남
우포늪, 그 영원의 처소- 강연호
길 위에서의 생각- 류시화
사막- 오르텅스 블루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이기철
옹이- 류시화
엄마야, 누나야- 함성호
겨울나무- 문정희
겨울 그림자- 임동윤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1월- 이외수
대전역에서- 박영인
해남길 저녁-이문재
꽃잎 인연- 도종환
눈보라- 황지우
빈 가지- 도종환
유리창- 김기림
연꽃구경 -정호승
연꽃이 피면
달도 별도 새도 연꽃 구경을 왔다가
그만 자기들도 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나는데
유독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만이
연꽃이 되지 못하고
비빔밥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받아야 할 돈 생각을 한다
연꽃처럼 살아보자고
아무리 사는 게 더럽더라도
연꽃 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고
죽고 사는 게 연꽃 같은 것이라고
해마다 벼르고 별러
부지런히 연꽃 구경을 온 사람들인데도
끝내 연꽃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꽃들이 사람 구경을 한다
해가 질 때쯤이면
연꽃들이 오히려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가장 더러운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어느날 고궁을 나오며---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 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있다 절정 위에서 서 있지않고
암만 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들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나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나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백일홍 편지--- 이해인수녀
모든 것은 다 지나 간다
모든 만남은 생각 보다 짧다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 부릴 이유는 하나도 없다
지금부터 백일만 산다고 생각하면
삶이 조금은
지혜로워지지 않을까?
처음 보아도
낯설지 않은 고향친구처럼
편안하게 다가오는 백일홍
날마다 무지개 빛 편지를
족두리에 얹어
나에게 배달 하네
살아있는 동안은
많이 웃고
행복해지라는 말도
늘 잊지 않으면서....
시인의 재산 --- 최서림
누구도 차지할 수 없는 빈 하늘은 내 것이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새털구름도 내 것이다.
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내 것이다.
너무 높아서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다 내 것이다.
흙 노래--- 정연복
흙에서 와서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흙을 밟으며
잠시 나그네길 걷다가
언젠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너와 나의 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흙같이 순하고 포근하고
깊은 마음 하나를
번쩍거리는 보석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비록 짧은 목숨일지라도
기쁘게 정성껏 살다가
한 줌의 고운 흙으로 편안히
끝맺음하는 생은 얼마나 거룩한가.
바람속을 걷는 법2 --- 이정하
바람이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으르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약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 나가는 것이다.
두눈 똑바로 뜨고 지켜 볼것,
바람이 드셀수록 왜 연은 높이 나는 지.
바닷가에서 --- 정연복
파도가 치는
평화로운 바닷가에서
그림같이 아름다운
한 쌍의 연인
영원한 사랑을 꿈꾸며
백사장에 이름을 새긴다.
하트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쓰인
두개의 이름이
밝은 햇살 아래 빛나는데
밀려오는 파도에
사랑의 맹세
휩쓸려 지워지고
흰 거품만 남아 있다.
마음 농사 --- 정연복
세상 살아가는 일
많이 복잡한 것 같아도
나이 육십 코앞에 두고
이제 알겠다
인생이란 본디
마음 농사 짓는 일
보이지 않는 마음 하나
잘 가꾸어 가는 일이라는 걸.
사랑과 우정
삶의 기쁨과 행복과 보람
따뜻한 이해와 용서도
결국 마음의 일이 아닌가.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에
이제 얼마쯤 남았을 나의 생
거추장스러운 것
미련 없이 가지치기하고
그저 마음의 집 하나
정성껏 지어야겠다.
雨中의 나이- 기형도
-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1
미스 한, 여태껏 여기에 혼자 앉아 있었어? 대단한 폭우라구. 알고 있어요. 여기서도 선명한 빗소리가 들려요. 다행이군. 비 오는 밤은 눅눅해요. 늘 샤워를 하곤 하죠. 샤워. 물이 떨어져요. 우산을 접으세요. 나프타린처럼 조그맣게 접히는 정열? 커피 드세요. 고맙군. 그런데 지금까지 내 생을 스푼질해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시한 소리예요. 기형도씨 무얼했죠? 집을 지으려 했어. 누구의 집? 글쎄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허물었어요? 아예 짓지를 않았지. 예? 아니, 뭐. 그저..... 치사한 감정이나 무상 정도로, 껌 씹을 때처럼.
2
등사 잉크 가득 찬 밤이다. 나는 근래 들어 예전에 안 꾸던 악몽에 시달리곤 한다. 시간의 간유리. 안개. 이렇게 빗소리 속에 앉아 눈을 감으면 내 흘러온 짧은 거리 여기저기서 출렁거리는 습습한 생의 경사들이 피난민들처럼 아우성치며 떠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간혹씩 모래사장 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건조한 물고기 알들.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면 그런 식으로 또 나의 일년은 마취약처럼 은밀히 지나가리라. 술래를 피해 숨죽여 지나가듯. 보인다. 내 남은 일생 곳곳에 미리 숨어 기다리고 있을 숱한 폭우들과 나무들의 짧은 부르짖음이여.
3
고양일 한 마리 들여놨어요. 발톱이 앙증맞죠? 봐요. 이렇게 신기하게 휘어져요. 파스텔같이. 힘없이 털이 빠지는 꼴이란..... 앗, 아파요. 할퀴었어요. 조심해야지. 정지해 있는 것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야.
4
시험지가 다 젖었을 것이다. 위험 수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충분한 숙면. 물보다 더욱 가볍게 떠오르기. 하얗게 씻겨 더욱 찬란히 빛나는 삽날의 꿈. 당신의 꿈은?
5
지난 봄엔 애인이 하나 있었지. 떠났어요? 없어졌을 뿐이야. 빛의 명멸. 멀미 일으키며 침입해오던 여름 노을의 기억뿐이야. 사랑해보라구? 사랑해봐. 비가 안 오는 여름을 상상할 수 있겠어? 비 때문은 아녜요. 그렇군. 그런데 뭐 먹을 것이 없을까?
6
그리하여 내가 이렇게 묻는다면. 미스 한. 혼자 앉아서 이젠 무엇을 할래? 집을 짓죠. 누구의 집? 그건 비밀. 그래. 우리에게 어떤 운명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품었던 우리들 꿈의 방정식을 각자의 공식대로 풀어가는 것일 터이니. 빗소리. 속의 빗소리. 밖은 여전히 폭우겠죠? 언제나 폭우. 아. 그러면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논리...... 300원의 논리. 여름엔 여름 옷을 입고 겨울엔 겨울 옷을 입고?
실망했던 세상- 이생진
누구나 한번쯤은 실망했던 세상을
그래도 달래가며 살아가는 것은 기특하다
어지러운 틈새로 봄이 순회처럼 들어오면
꾀꼬리 걱정을 하고
나뭇잎이 푸르르면 내 몸매도
유월로 차리던 사람
일시불을 꺼내주며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살라고 졸라도
살아가기 막막한 때가 있겠지만
월부를 꼬박꼬박 치르며
끝까지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은 기특하다
그 누구의 노예로도 남아있길 부정하며
모르는 사이에 노예로도 살고
그 누구의 그리움에도 한번은 미쳐 살며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리운 표정을 하는 것을 보면 기특하다
남이 보기엔 쓸모없는 누구일망정
옷깃을 여미며 꼿꼿이 예절을 바로 세워놓는 것을 보면 기특하다
생활이 하도 쓸쓸해서
시간을 피해 나와 서성거리다가도
다시 그 생활로 되돌아 가는 것을 보면 기특하다
털어놓고 보면
누구나 한번씩은 해보았을 자살미수
그래도 껄껄 웃다가 가는 것을 보면
사람은 기특하다
화엄에 오르다- 김명인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山門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雲板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운다, 마음이 九折羊腸인 듯
길을 뚫는다는 것은
그렇다, 언제나 처음인 막막한 저 낯선 흡입
묵묵히 앞사람의 행로를 따라가지만
찾아내는 것은 이미 그의 뒷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 산을 힘들게 오르게 하는가
길은, 누군들에게 물음이
아니랴, 저기 산모롱이 이정표를 돌아
의문부호로 꼬부라져 羽化登仙해 버린 듯 앞선 일행은
꼬리가 없다, 떨어져도 떠도는 산울림처럼
이 허방 허우적거리며 여기까지 좇아와서도
나는 정작 내 발의 티눈에 새삼스럽게 혼자 아픈가
길섶 풀물에 든
낡은 經소리 한 구절 내내 떨쳐 버리지 못해
시큰대는 발자국마다 마음 질척거리는데
화엄은 화음 속에 얼굴을 감추고 하루종일
굴참나무 잔가지에 얹히는 經典을 들어 나를 후려친다
변명- 마종기
흐르는 물은
외롭지 않은 줄 알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흔들며
예식의 춤과 노래로 빛나던 물길,
사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가볍게 보아온 세상의 흐름과 가버림
오늘에야 내가 물이 되어
물의 얼굴을 보게 되나니
그러나 흐르는 물만으로는 다 대답할 수 없구나
엉뚱한 도시의 한쪽을 가로질러
길 이름도 방향도 모르는 채 흘러가느니
헤어지고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우리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마음도 알 것 같으다
밤새 깨어 있는 물의 신호등,
끝내지 않는 물의 말소리도 알 것 같으다
격포- 송재학
격포에 간다는 것은
사소한 나만의 일몰을 가진다는 것!
머리통만한 물거품과 폭설이
서쪽 바다를 죄다 세로로 앞장세웠다가
가로로 눕히곤 한다
나에 속한 죄를 끄집어내어
바다에 헹구어본다
아귀가 맞지 앉는 날의
오물이 자주 막히는 몸이 싫다
구석바닥에 쪼그려 울어보기도 한다
갈라터진 마음마저 염전으로 맡기고픈
격포에선
무엇이든 다 눈동자가 있어
그리 많은 눈이 내리는가 보다
무엇도 용서할 수 없었던 내가
아무에게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시선을
받아들였던 격포
아직 날은 어둡지 않은데
벌써 눈뜨는 불빛은 무어냐
거기 옹이처럼 박히자
나의 싸움 신현림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한 쓸쓸함
줄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바람 없는 날- 강윤후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나는 나부낀다
이 도시 모든 깃발들이
죽은 바람에 젖어 축 늘어지고
저인망처럼 훑고 지나가는 햇살에
고층건물의 그림자들이 일제히 목을 뽑고
순순히 끌려가도 미등기의 내 욕망에는
상표가 따로 없다
누가 저 거리에서 발을 멈추는가
선뜻 발 멈춰 나부끼는가, 바람 불게 하는가
바람 없는 걸음은 분주하고
바람 없는 길은 어디로든 닿아 있어
세월이 허무는 담장 너머로
찬란하게 열리는 폐허
죽음을 바라는 바람이
죽음을 불어와서
세상이 성가신 나무는 꾸역꾸역 물을 게워내고
무성한 포장육들 번들거리며 썩어간다
이제 벌거벗은 네온사인에도 피가 통해
살갗 터져 바스라지나니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나는
나부낀다, 설움도 없이 나부낀다
빗방울, 빗방울- 나희덕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 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떠도는 환유 5 -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김승희
사랑도, 눈물도, 진짜가 아닌 것 같애,
사랑 비슷한
눈물 비슷한
흔적 비슷한
분노 비슷한
그런 비슷한 것들이 나 비슷한 것들을
감싸고
한 줄기 햇빛의 선 속에 우우 우우
갇혀 떠도는 먼지처럼
생 비슷한 것들을 이루고 있어
나 비슷한 것들아
시대 비슷한
나라 비슷한
지식인 비슷한
고뇌 비슷한
외침 비슷한
절망도 낙천도 아닌
어스름 비슷한
이 향방의 묘혈 속에서
죽음 비슷한 生이 있어
살지도 죽지도 못한고
엄마 비슷한
아내 비슷한
자식 비슷한
교수 비슷한
시인 비슷한 것들을
배우 비슷하게
은막 비슷한 곳에서
너, 참, 정말, 무엇에 널 걸 거니?, 응?, 말해봐,
참, 무엇에든 널 걸어야 할 거 아냐?
이런 닦달 속에서도, 아무데도 날 걸지 않는,
아무데도 날 걸 수가 없는, 걸 것이 없는, 파쇄된
나를, 아니 나 비슷한 것들을 데리고,
사전꾼처럼 사기꾼, 아니 무한히 높은 곳에서
밀어버려 무한낙하로 산산이 엎어지고 있는
사닥다리의 해방처럼......
우물 이야기- 남진우
저녁이 되면
그 우물은 우우 낮게 울음소리를 내곤 했다
자욱한 안개가 들판을 지나 우리집 마당으로 스며들 때
집 뒤안에 버려진 우물 속에서
느릿느릿 풀려나오던 어둠
아무도 그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 듯
저녁 밥상에 모인 식구들은 부지런히 숟가락질만 할 뿐
어둠이 짙어갈수록
우물이 내는 소리는 더 깊어지고
근심 어린 얼굴빛으로 등불 아래 모여
식구들은 짐짓 먼 바다를 떠도는 새 얘기에 정신을 쏟곤 했다
흙으로 메워버린 그 우물 속에 어떤
잠들지 못한 넋이 있어 저녁마다 그토록 울음 우는 것인지
문풍지 떠는 소리와 함께 꿈속으로 잦아들면
멀리 불빛 깜박이는 안개 속 마을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짙어지는 안개 속에
여기저기 뒹구는 시체들 사람들은 차례로
우물 속에 몸을 던지고 서서히 집과 숲은
어둠 속에 묻혀갔다.
저녁이 되어도
이제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우물 옆에 서서
나는 안개가 몰려오는 먼 들판을 바라본다
한 손에 낫을 들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남자들
목을 매고 나무에 매달린 여인들
이 밤
내 꿈속의 우물을 피로 물들 것이다
백두산을 오르며- 정호승
백두산에 도착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흰 자작나무 사이로
외롭게 걸려 있던 낮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잣까마귀들이 떼지어 날던 하늘 사이로
서서히 함박눈은 퍼붓기 시작했다
바람은 점점 어두워지고
멀리 백두폭포를 뒤로 하고
우리들은 말없이 천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눈 속에 핀 흰 두견화를 만날 때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우리들은 저마다 하나씩 백두산이 되어갔다
눈보라가 장백송 나뭇가지를 후려 꺾는 풍구(風口)에서
마침내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올라갈수록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내려갈수록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눈보라치는 백두산을 오르며
우리들은 다시 천지처럼
함께 살아가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통곡- 김관식
해가 떨어지면
목구멍에 타오르는 불길을 뽑아 바닷물이 들끓도록 울어라... 울어...
한쪽 가슴엔 칼을 지니고
또 한 가슴엔 숫돌을 지녀 남몰래 밤낮 없이 갈고 갈아서
만나는 원수마다 산멱을 찔러 쏟아지는 피를 마시어 목을 축이고
백년 삼만 육천 날을 울음으로 새우리라.
오! 타고난 이 설움을 낸들 어이하리야.
어이하리야.
내 마음의 지도- 김경미
천천히 심장 속을 들여다보니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풍길과
거기, 리아스식 해안과 아픈 톱니들 사이 다도해 어둠들
제풀에 섬이 되어
주먹밥 크기들로 놓여 있는 눈물도 보여요
너무나 오래 헛되고 외로웠으며
어찌 다스릴 수 없었던 몇채의 무너짐,
그리움들은 많이도 줄 끊어져 나부끼고
사랑
아파서 아름답다니요
자꾸 무릎을 다치면서 깊이 돌아보니
행복은 왜 꼭 그렇게 나와 멀리 떨어져 앉아 서먹했던 것일까요
정수사 가는 길- 김선태
늦가을, 정수사 깊숙히 꼬부라져 들어간 길목에 서 있었습니다. 삶이 어떤 행색을 하고 있는 것이더냐고 혼자 중얼거릴 때, 저 길목 늘어선 늙은 바위들은 무어라 말을 건네주지 않았습니다. 삶이 무어라고 말하면 이미 삶은 거기에 없다는 듯, 풍경 하나를 제대로 만나려면 그 풍경과 몸을 바꿔야 한다는 듯, 비밀을 미리 탐하려는 자의 우매를 이끼 낀 세월의 무게로 지긋이 눌러버렸습니다.
정수사 깊숙히 꼬부라져 들어간 길 위를 나도 아련히 꼬부라져 들어가노라면, 옴팍진 산기슭마다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고, 묵묵히 세월을 견뎌온 사람들이 아랑곳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저수지 위를 느릿느릿 소요하는 바람들이며, 산허리에 걸리는 땅거미, 머언 계곡을 헤매다 되돌아온 메아리도 다들 조금씩 얼굴이 야위었습니다.
정수사 깊숙히 꼬부라진 길을 터벅이며 절에 다다를 무렵, 어슴어슴 저녁이 내리고 산어깻죽지 위로 달이 뜨더니, 소복한 산길이 하나 술에 취한 듯 비틀비틀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늙은 대처승과 함께 가을밤이 깊었습니다. 이윽고 절간의 넉넉한 고요 속으로 콩알만한 마음이 들어가 이부자릴 펴고 누웠습니다.
쓰레기통처럼- 정호승
쓰레기통처럼 쭈그리고 앉아 울어본 적이 있다
종로 뒷골목의 쓰레기통처럼 쭈그리고 앉아
하루종일 겨울비에 젖어본 적이 있다
겨울비에 젖어 그대로 쓰레기통이 되고 만 적이 있다
더러 별도 뜨지 않는 밤이면
사람들은 침을 뱉거나 때로 발길로 나를 차고 지나갔다
어떤 여자는 내 곁에 쪼그리고 앉아 몰래 오줌을 누고 지나갔다
그래도 길 잃은 개들이 다가와 코를 박고 자는 잠은 좋았다
세상의 모든 뿌리를 적시는 눈물이 되고 싶은 나에게
개들이 흘리는 눈물은 큰 위안이 되었다
더러 바람 몹시 부는 밤이면
또다른 고향의 쓰레기통들이 자꾸 내 곁으로 굴러왔다
배고픈 쓰레기통들이 늘어나면 날수록
나는 쓰레기통끼리 서로 체온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쓰레기통끼리 외로움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몽대항 폐선- 김영남
저기 졸고 있는 개펄의 폐선 한 척이
앞에 서 있는 여자 한 명을, 아니
그 옆의 친구들의 친구들까지를
그립게 했다가 외롭게 했다가 한다.
그렇게 밀고 당기는 속성이
그 폐선 위에도 살고 있는 것인지
기러기가 몇 마리 뜨니 더욱 그런다.
난 예 풍경을 눈에 꼭 담고 상상한다.
폐선이란
낡아 저무는 모습이 아니라
저물어선 안 될 걸
환기시키는 어떤 힘이라는 것을.
그런 힘이 밀물 썰물처럼
주변을 끌어당겼다 놓았다 할 때
그게 진짜 아름다운 폐선이란 것을.
나도 언젠가는 저처럼
누굴 그립게 끌어당겼다가 놓았다 하는
몽대항 폐선이 되리란 꿈을 꾼다.
우포늪, 그 영원의 처소- 강연호
저것이 영원의 처소란 말인가
경상남도 창녕군 우포,
1억4천만 년 전의 태고 위로
안개 속의 늪을 건너보지만,
늪에서 만나는 개구리밥과 가시연....
수많은 새떼.
오늘 우포를 보고 가지만
늪의 바닥에 켜켜이 쌓여있는
올 퇴적된 햇빛과 바람과 공기와 말씀들,
누가 우포늪을 보았단 말인가
늪은 낙동강 한 켠으로
은밀하게 비켜 앉아
시간을 외면한 채 제 안으로 깊어지고
나는 강물처럼 흘러 저물어가는데
한때 공룡이 풀을 뜯던
그때 그 원시로 남아
그저 견고한 침묵으로 썩지 않는 속 깊은 우포늪.
왜 자꾸만 마음이 그 수렁으로 빠져드는가.
길 위에서의 생각- 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 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 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간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 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 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 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 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사막- 오르텅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농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알 한 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의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묻은 손으로 짚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이기철
내 몸은 낡은 의자처럼 주저앉아 기다렸다
병은 연인처럼 와서 적처럼 깃든다
그리움에 발 담그면 병이 된다는 것을
일찍 안 사람은 현명하다
나, 아직도 사람 그리운 병 낫지 않아
낯선 골목 헤맬 때
등신아 등신아 어깨 때리는
바람 소리 귓가에 들린다
별 돋아도 가슴 뛰지 않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꽃잎 지고 나서 옷깃에 매달아 둘
이름 하나 있다면
아픈 날들 지나 아프지 않은 날로 가자
없던 풀들이 새로 돋고
안보이던 꽃들이 세상을 채운다
아,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삶보다는 훨씬 푸르고 생생한 생
그러나 지상의 모든 것은 한 번은 생을 떠난다
저 지붕들, 얼마나 하늘로 올라가고 싶었을까
이 흙먼지 밟고 짐승들, 병아리들 다 떠날 때까지
병을 사랑하자, 병이 생이다
그 병조차 떠나고 나면, 우리
무엇으로 밥 먹고 무엇으로 그리워할 수 있느냐
옹이- 류시화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눈부시게 꽃물을 밀어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면 살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을 것이면 붙잡지도 않았다
침묵할 것이 아니면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지지 않을 것이면,미워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옹이라고 부르지 말라
가장 단단한 부분이라고
한때는 이것도 여리디 여렸으니
다만 열정이 지나쳐 단 한 번 상처로
다시는 피어나지 못했으니
엄마야, 누나야- 함성호
누나야, 사는 게, 왜, 이러냐
사는 게, 왜, 이리, 울며, 모래알 씹듯이 퍽퍽하고
사는 게, 왜, 진창이냐
엄나야, 누나야
이젠, 웃음마저도 시든 꽃처럼
무심한 손길도 왜 가슴 데인 화열처럼
왜, 쉬이 넘기지 못하고, 가벼이 사랑치 못하고 말이다
우리는 자꾸 흐린 앙금처럼 가라앉고 마는 건지
정말 우리는 못됐구나, 누나야
관음보살 같던 고운 네 손도
음울한 기계음에 피멍져
니, 이제, 천상, 야근에 찌든 노동자구나
가슴에 어린 죽음을 묻고 파도처럼 가라앉던
술집 간나이들 빨래 더미에 허리 휘던
밤이면 훤한 창에 보호수 소나무 흔드리던 방
엄마야, 누나야
햇빛에 현란한 은수원 사시나무의 황홀한 발광도
나는 꼭 더럽게 심사가 꼬여 눈감고 말았다
사는 게 왜, 이리, 숨막힌 것인지 엄마야
강변에 햇살이 표창처럼 반짝일 때 누나야
저 억장 무너지는 바다에
물안개가 니, 부서지는 웃음처럼 번져올 때
나는 이 악물고 이 모든 아름다움을 부정한다
엄마야, 누나야
네 얼굴에 박힌 웃음이
언 강 물밑처럼 풀려나갈 때까지
모든 꽃들은 사기다
겨울나무- 문정희
열어 주소서
눈 속에 슬픈 발을 묻고
저 나무들이 서서 울고 있습니다.
당신의 신(神)의 터전에
바람이 휘몰아치면
삶은 꽃처럼 흔들립니다.
이곳은 어느 곳일까
제가 앉아서
입 맞춘 소중한 모습.
이제 저의 두 눈이 멀어도
살이 터져서 닫을 수 없는 뜨거움을 …
벗은 나무여, 벗은 나무여,
제 밀물을 소리치게 해 주소서.
겨울 그림자- 임동윤
연 이틀 눈이 내린다
읍내로 가는 길은 진작 끊기고
나지막한 양철지붕 길길이
눈이 쌓인다
처마가 낮아진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마당귀에 날아와 모이를 찾던
참새 떼도 몰려오지 않고
삽살이도 툇마루 밑에서 눈을 감고 있다
바람이 추녀 끝을 빠르게 스쳐 가면
소나무 허리 꺾는 소리만 환하다
뚝뚝,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
지붕이 무너지고
반쯤 썩은 싸리나무 울타리가
모로 누우며 관절을 꺾는다
하늘과 땅이 아득해진다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1월- 이외수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 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에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 죽여 흐르는
불면의 강물
기다리는 마음 간절할수록
시간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추억을 살해한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황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 심은 감성의 낱말들
해맑은 풀꽃으로 피어날까
오랜 폭설 끝에
하늘은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
결빙된 햇빛의 미립자를 털어 내며 일어선다
백색의 풍경 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눈부시다
대전역에서- 박영인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
꿈인가
꿈의 상실인가
기차는 오늘도 가고 오지만
아무도 떠나가지 못하였고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철로변엔 무성한 잡초와 자갈들
그 사이로 그리움처럼 들꽃이 피어나고
나그네는 고향생각에 잠긴다
유년시절의 꿈
다 부르지 못하는 옛노래와
어려서 죽은 단짝 친구
시냇물은 마르고 돌담은 무너졌다
세월은 모든 것을
검은 재 속에 묻어 버렸고
그의 가슴이 바로
재를 담은 그릇이 아닌가
나그네는 길을 버렸다
그리하여
이제는 자유로운지?
자유:
묶은 이도 풀 이도
오직 그대 자신이며
처음부터 구속이란 없으니
모두가 마음의 조화라는데
그러면
그대는 언제쯤 자유를 회복 할 거냐고
물어야 할지?
떠난다는 것
무엇으로부터의 떠남인가
머문다는 것
무엇에의 머뭄인가
기차는 우리의 꿈마다 달려갔지만
그 어디로도 데려가지 못하였음을
알고 있을지?
해남길 저녁-이문재
먼저 그대가 땅끝에 가자 했다
가면,저녁은 더 어둔 저녁을 기다리고
바다는 인조견 잘 다려놓은 것으로 넓으리라고
거기,늦은 항구 찾는 선박 두엇 있어
지나간 불륜처럼 인조견을 가늘게 찢으리라고
땅끝까지 그대,그래서인지 내려가자 하였다
그대는 여기가 땅끝이라 한다,저녁 놀빛
물려놓는 바다의 남녘은 은도금 두꺼운
수면위로 왼갖 소리들을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게 한다,발아래 뱃소리가 가르릉거리고
앞섬들 따끔따끔 불을 켜대고,이름 부르듯
먼데 이름을 부르듯 뒷산숲 뻐꾸기 운다
그대 옆의 나는 이 저녁의 끄트막이 망연하고
또 자실해진다,그래,모든 끝이 이토록
자명한다면야,끝의 모든 것이 이땅의 끝
벼랑에서처럼 단순한 투신이라면야...........
나는 이마를 돌려 동쪽하늘이나 바라다 보는데
실루엣을 단단하게 잠근 그대는 이땅끝에 와서
어떤 맨처음을 궁리하는가 보다,참 그러고 보니
그대는 아직 어려서,마구 젊기만 해서
이렇게 후욱 비린내나는 끝의 비루를
속수한 것들의 무책을 모르겠구나
모르겠는 것이겠구나
꽃잎 인연- 도종환
물끝을 스치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마음을 흔들고 간 이는 몇이었을까
저녁 하늘을 만나고 간 기러기 수만큼이었을까
앞 강에 흔들리던 보름달 수만큼이었을까
가지끝에 모여와주는 오늘 저 수천개 꽃잎도
때가 되면 비오고 바람불어 속절없이 흩어지리
살아있는 동안은 바람불어 언제나 쓸쓸하고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도
빗발과 꽃나무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과 같으리
눈보라- 황지우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빈 가지- 도종환
잎진 자리에 나뭇잎 있던 흔적조차 없다
두고 떠나온 자리에 이젠 내 삶의 흔적
흘린 땀방울 하나 자취조차 없다
누구도 서로에게 확실한 내일에 대해
말해줄 수 없는 시대
돌아보면 너무도 많은 이가
벌판이 되어 쓰러져 있는 저녁
얼음을 만진 듯한 냉기만이 얼굴을 쓸고 가는데
우리 생의 푸르던 날은 다시 오는 걸까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긴 겨울
잡목덤불 헤쳐 새 길을 내야 하는 이 늦은 시각에
다시 등을 기대고 바라보는 나무의 빈 가지
그러나 새 순 새 가지는 잎 진 자리에서
다시 솟는 것임을 믿을 수밖에 없는
그렇게 나무들이 견디며 살아왔듯
그때까지 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유리창- 김기림
여보
내마음은 유린가봐 겨울 한올처럼
이처럼 작은 한숨에도 흐려버리니……
만지면 무쇠같이 굳은 체하더니
하로밤 찬 서리에도 금이 갔구료
눈포래 부는 날은 소리치고 우오
밤이 물러간 뒤면 온 뺨에 눈물이 어리오
타지 못하는 정열 박쥐들의 등대
밤마다 날어가는 별들이 부러워 쳐다보며 밝히오
여보
내마음은 유린가봐
달빛에도 이렇게 부서지니
'시(詩) > 괜찮은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읽는 밤 (0) | 2020.09.13 |
---|---|
시 읽는 저녁 (0) | 2020.09.13 |
가을 저녁의 시 -사랑 혹은 그리움 (0) | 2020.09.01 |
가랑잎처럼 가벼운 숲 (0) | 2020.08.29 |
그리움 (0) | 2020.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