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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가을 저녁의 시 -사랑 혹은 그리움

by 이성근 2020. 9. 1.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꽃 한송이 -김용택

6---김용택

노을빛 그리움--- 이외수

고독의 깊이- 기형도

사곶 해안- 박정대

자작나무 뱀파이어- 박정대

숨길 수 없는 노래 3 이성복

모슬포에서- 김영남

비 그치고- 류시화

고사(古寺)- 김달진

멧새소리- 백석

사랑니- 고두현

소나기- 곽재구

고독- 문정희

선천성 그리움 -함민복

이별한 자가 아는 진실- 신현림

달 하나 묻고 떠나는 냇물- 이성선

그리움은 풀잎으로 솟아오른다- 이재무

작은 엽서9-기다림- 김선태

밥과 잠과 그리고 사랑- 최승희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월식- 강연호

쓸쓸한 날에- 강윤후

가을 편지- 고정희

편지- 김남조

낙화유수- 함성호

미완성을 위한 연가- 김승희

어떤 그리움- 원성 스님

적막한 바닷가- 송수권

가만히 깊어 가는 것들- 장석남

목숨- 조정권

상처- 정현종

가을엽서 2 정일근

감은사지 13 정일근

달팽이의 사랑- 김광규

늦가을 배추벌레의 노래- 강연호

내 속의 가을- 최영미

가을 범종- 문정희

슬픔을 버리다- 마경덕

거울- 이성복

멸치의 사랑- 김경미

겨울 나무- 김혜순

편지1- 이성복

겨울비- 이외수

강변역에서- 정호승

홀로 걸어가는 사람- 최동호

너무 오랜 기다림- 유하

이름이 없으면, 장미의 향기도 사라지리라- 함성호

겨울 편지- 안도현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다는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 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는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거가 버리는가보다

 

 

꽃 한송이 -김용택

 

간절하면 가 닿으리

너는 내 생각의 끝에 아슬아슬 서 있으니

열렬한 것들은 다 꽃이 되리

이 세상을 다 삼키고

이 세상 끝에 새로 핀

꽃 한 송이

 

 

 

6---김용택

 

하루 종일 당신 생각으로

6월의 나뭇잎에

바람이 불고 하루해가 갑니다

 

불쑥불쑥 솟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마음을

주저앉힐 수가 없습니다

 

창가에 턱을 괴고 오래오래 어딘가를

보고 있곤 합니다

 

느닷없이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당신 생각이었음을 압니다

 

하루 종일 당신 생각으로

6월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해가 갑니다

 

 

 

노을빛 그리움--- 이외수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을 감싸안으며

나즈막히

그대 이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고독의 깊이- 기형도

 

한차례 장마가 지났다.

푹푹 파인 가슴을 내리쓸며 구름 자욱한 강을 걷는다.

바람은 내 외로움만큼의 중량으로 폐부 깊숙한

끝을 부딪는다

상처가 푸르게 부었을 때 바라보는

강은 더욱 깊어지는 법

그 깊은 강을 따라 내 식사(食事)를 가만히 띄운다.

그 아픔은 잠길 듯 잠길 듯 한 장 파도로 흘러가고.....

아아, 운무(雲霧) 가득한 가슴이여

내 고통의 비는 어느 날 그칠 것인가.

 

 

 

사곶 해안- 박정대

 

고독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

주름진 치마를 펄럭이며 떠나간 여자를

기다리던 내 고독의 문턱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의 밑바닥

그곳에서 橫行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내가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을

끝내 갈매기들이 얻어가곤 했지

모든 걸 떠나보낸 마음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렇게 넓은 황량함이 내 고독의 터전이었다니

이곳은 마치 한 생애를 다해 걸어가야 할

광대한 고독 같다. 누군가 바람 속에서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다

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

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

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

사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도

그 뒤에 남는 건 오히려 부드럽고 견고한

백령도, 백년 동안의 고독도

규조토 해안 이곳에선

흰 날개를 달고 초저녁별들 속으로 이륙하리니

이곳에서 그대는 그대 마음의 문지방을 넘어 서는

또 다른, 의 긴 활주로 하나를 갖게 되리라

 

 

 

자작나무 뱀파이어- 박정대

 

그리움이 이빨처럼 자라난다

시간은 빨래집게에 집혀 짐승처럼 울부짖고

바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별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상처,

눈물보다 더 깊게 빛난다, 성소(聖所)

별들의 운하가 끝나는 곳

그 고을 지나 이빨을 박을 수 있는 곳까지

가야한다, 차갑고 딱딱한 공기가

나는 좋다, 어두운 밤이 오면

내 영혼은 자작나무의 육체로 환생한다

내 영혼의 살결을 부벼대는

싸늘한 겨울바람이 나는 좋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욕망이 고드름처럼 익어간다

눈에 덮인 깊은 산 속, 밤새 눈길을 걸어서라도

뿌리째 너에게로 갈 테다

그러나 네 몸의 숲 속에는

아직 내가 대적할 수 없는

무서운 짐승이 산다

 

 

 

숨길 수 없는 노래 3 이성복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길이 끝난 자리에 서 있는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엔 아무도 발 디딜 수 없는 고요한 사막이 있습니다 나의 일생은 두개의 다른 죽음 사이에 말이음표처럼 놓여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오랜 저녁빛에 눈먼 두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내게로 오는 그대의 먼 길을 찾아서입니다

 

 

 

모슬포에서- 김영남

 

오래도록 그리워할 이별 있다면

모슬포 같은 서글픈 이름으로 간직하리.

떠날 때 슬퍼지는 제주도의 작은 포구, 모슬포.

--을 하고 뱃고동처럼 길게 발음하면

자꾸만 몹쓸 여자란 말이 떠오르고,

비 내리는 모슬포 가을밤도 생각이 나겠네.

그러나 다시 만나 사랑할 게 있다면

나는 여자를 만나는 대신

모슬포 풍경을 만나 오래도록 사랑하겠네.

사랑의 끝이란 아득한 낭떠러지를 가져오고

저렇게 숭숭 뚫린 구멍이 가슴에 생긴다는 걸

여기 방목하는 조랑말처럼 고개 끄덕이며 살겠네.

살면서, 떠나간 여잘 그리워하는 건

마라도 같은 섬 하나 아프게 거느리게 된다는 걸

온몸 뒤집는 저 파도처럼 넓고 깊게 깨달으며

늙어가겠네. 창 밖의 비바람과 함께할 사람 없어

더욱 서글퍼지는 이 모슬포의 작은 찻집, '()'에서.

 

 

 

비 그치고- 류시화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고사(古寺)- 김달진

 

밤이 깊어가서

비는 언제 멎어지었다.

꽃 향기 나직히

새어들고 있었다.

모기장 밖으로

잣나무 숲 끝으로

달이 나와 있었다.

구름이 떠 있었다.

풍경 소리에 꿈이 놀란 듯

작약꽃 두어 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의희한 탑 그늘에

천 년 세월이 흘러가고, 흘러오고....

, 모든 것

속절없었다.

멀리 어디서

뻐꾸기가 울고 있었다

 

 

 

멧새소리- 백석

 

처마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사랑니- 고두현

 

슬픔도 오래되면 힘이 되는지

세상 너무 환하고 기다림 속절없어

이제 더는 못 참겠네.

온몸 붉디붉게 애만 타다가

그리운 옷가지들 모두 다 벗고

하얗게 뼈가 되어 그대에게로 가네.

생애 가장 단단한 모습으로

그대 빈 곳 비집고 서면

미나리밭 논둑길 가득

펄럭이던 봄볕 어지러워라.

철마다 잇몸 속에서 가슴 치던 그 슬픔들

오래되면 힘이 되는지

내게 남은 마지막 희망

빛나는 뼈로 솟아 한밤내 그대 안에서

꿈같은 몸살 앓다가

끝내는 뿌리째 사정없이 뽑히리라는 것

내 알지만 햇살 너무 따뜻하고

장다리꽃 저리 눈부셔 이제 더는

말문 못 참고 나 그대에게로 가네.

 

 

 

소나기- 곽재구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를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쉼을 하다가

그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격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이를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고독- 문정희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 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선천성 그리움 -함민복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이별한 자가 아는 진실- 신현림

 

담배불을 끄듯 너를 꺼버릴 거야

다 마시고 난 맥주 캔처럼 나를 구겨버렸듯

너를 벗고 말 거야

그만, 너를, 잊는다,고 다짐해도

북소리처럼 너는 다시 쿵쿵 울린다

오랜 상처를 회복하는 데 십년 걸렸는데

너를 뛰어넘는 건 얼마 걸릴까

그래, 너는 나의 휴일이었고

희망의 트럼펫이었다

지독한 사랑에 나를 걸었다

뭐든 걸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네 생각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너는 어디에나 있었다 해질녘 풍경과 비와 눈보라,

바라보는 곳곳마다 귀신처럼 일렁거렸다

온몸 휘감던 칡넝쿨의 사랑

그래, 널 여태 집착한 거야

사랑했다는 진실이 공허히 느껴질 때

너를 버리고 나는 다시 시작할 거야

 

 

 

달 하나 묻고 떠나는 냇물- 이성선

 

아낌 없이 버린다는 말은

아낌 없이 사랑한다는 말이리.

너에게 멀리 있다는 말은

너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는 말이리.

산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안 보이는 날이 많은데

너는 멀리 있으면서

매일 아프도록 눈에 밟혀 보이네.

산이 물을 버리듯이 쉼없이

그대에게 그리움으로 이른다면

이제 사랑한다는 말은 없어도 되리.

달 하나 가슴에 묻고 가는 시냇물처럼.

 

 

 

그리움은 풀잎으로 솟아오른다- 이재무

 

소래 포구에서 부평 쪽으로 난 철도를 따라 걷는다

철도는 언덕 넘어온 잡풀로 뒤덮여 있다

먼 길 에돌아오는 기적의 추억 더듬으며

나는 바지에 흙을 묻힌다

버리려 왔으나 가슴에 담긴 돌멩이

걸음 더욱 무겁게 한다

버려진 철도에 녹슨 몸 부리고

바람 물결에 흔들리는 갈대밭 바라본다

저곳에 마음 묶던 날이 있었다

그때 나는 슬펐던가 흔들린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속도에 실린 생은 끝내 알지 못하리

목표 없는 전진의 대열에서 이탈한 자의

이 불안과 고적 그리고 간장 종지만한 평온이,

문득 오래 된 신발처럼 나는 편하다

몸 밖으로 떠돌던 그리움

불쑥 도둑처럼 돌아와 둥둥 풀잎으로 솟아오른다

 

 

 

작은 엽서9-기다림- 김선태

 

어떤 날은 네가 무섭도록 보고팠다

그러나 가장 절실할 때 널 찾지 않기로 했다

그 숱한 그리움으로 수일을 앓고

물빛 투명한 심상으로 너를 떠올릴 때도

못내 널 찾지 않기로 했다

어느 외진 바다 기슭에서

수없이 파도에 씻겨 닳아진 차돌처럼

견고하게 다져진 외로움 그대로

끊어질 듯한 기다림의 목울대 그대로

혼자서 살아가는 날의 그 공허한 행복감

쨍쨍 맑은 어느 날 높고 외딴 봉우리에

흰 한숨처럼 감기는 구름인 듯

사랑이여, 그때 홀연 네가 오려나

 

 

 

밥과 잠과 그리고 사랑- 최승희

 

오늘도 밥을 먹었습니다.

빈곤한 밥상이긴 하지만

하루 세 끼를.

오늘도 잠을 잤습니다.

지렁이처럼 게으른

하루 온종일의 잠을.

그리고 사랑도 생각했습니다.

어느덧 식은 숭늉처럼 미지근해져 버린

그런 서운한

사랑을.

인생이

삶이

사랑이

이렇게 서운하게 달아나는 것이

못내 쓸쓸해져서

치약 튜브를 마지막까지 힘껏 짜서

이빨을 닦아 보고

그리고 목욕탕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봅니다.

자신이 가을처럼 느껴집니다.

참을 수 없이 허전한

가을 사랑

하나로.

그래도 우리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영원의 색인을 찾듯이

사랑하는 사람 그 마음의 제목을 찾아

절망의 목차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아야

따름이

아닌가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월식- 강연호

 

오랜 세월 헤매 다녔지요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대 찾아

부르튼 생애가 그믐인 듯 저물었지요

누가 그대 가려 놓았는지 야속해서

허구한 날 투정만 늘었답니다

상처는 늘 혼자 처매어야 했기에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흐느낌

내가 우는 울음인 줄 알았구요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대 가린 건 바로 내 그림자였다니요

그대 언제나 내 뒤에서 울고 있었다니요

 

 

 

쓸쓸한 날에- 강윤후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더러운 치사한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알려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질없이

바람에 기대어 귀를 연다, 어쩌면 그대

보이지 않는 어디 먼 데서 가끔씩 내게

안부를 타전(打電)하는 것 같기에

 

 

 

가을 편지- 고정희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낙화유수- 함성호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 꽃이 피는 날엔 목련꽃 담밑에서 서성이고, 꽃이 질 땐 붉은 꽃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가지 거기에서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 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배 고파서 먹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니 남아일언이라도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르니 단지, 변치 말자던 약속에는 절절했으니 나는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힌 거지 운명이라고 해도 잡놈이라고 해도 나는, 지금, 순간 속에 있네 그대의 장구한 약속도 벌써 나는 잊었다네 그러나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모든 진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속삭인다 해도 나는 말하고 싶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절없이, 어찌할 수 없이

 

 

 

미완성을 위한 연가- 김승희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어야 하리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려는

저물 무렵 단애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고

서로에게 깊이 말하고 있었네

하나의 손과 손이

어둠 속을 헤매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스치기만 할 때

그 외로운 손목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무엇인지 알아?

하나의 밀알이 비로소 썩을 때

별들의 씨앗이

우주의 맥박 가득히 새처럼

깃을 쳐오르는 것을

그대는 알아?

하늘과 강물은 말없이 수천년을 두고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네

쳐다보는 마음이 나무를 만들고

쳐다보는 마음이 별빛을 만들었네

우리는 몹시 빨리 더욱 빨리

재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기에

어디에선가, 분명,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네,

수갑을 찬 손목들끼리

성좌에 묶인 사람들끼리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그리움이 시작되어야 하리,

하나의 긴 그리움이 시작되려는

깊은 밤 단애 위에 서서

우리는 이제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필요치가 않다고

각자 제 어둠을 향하여 조용히 헤어지고 있었네……

 

 

 

어떤 그리움- 원성 스님

 

'보고 싶다'

진실로 그렇게 마음 깊이

가슴 싸 하게 느껴 본 적 있으신지요.

아마 없으시겠지요.

앞으로도 없으시겠지요.

하늘을 보고 허공을 보다가

누군가가 보고 싶어

그냥 굵은 눈물 방울이 땅바닥으로

,뚝 떨어져 본 적이 있으신지요.

없으시겠지요,

없으실 거예요.

언제까지나 없으시길 바래요.

그건 너무나, 너무나....

 

 

 

적막한 바닷가- 송수권

 

더러는 비워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 서서

,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바삐 서녘 하늘을 깨워가는

갈바람 소리에

우리 으스러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가만히 깊어 가는 것들- 장석남

 

가을이 와서 어느덧 깊어 가고 있습니다.

깊어 가다니요.

어디로 깊어 간단 말일까요.

가을 나무들은 길었던 푸른 세월을 마침내 붉은빛으로 익혀서는 내면으로 들입니다.

그리고는 긴 동안거冬安居에 임합니다.

마침내는 중심을 열어 청정한 나이테 하나를 얻습니다.

나무들은 그렇게 깊어지는데 우리들 인연의 여러 얽힘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깊어지는 걸까요.

벌레들은 밤새워 고요 속에다가 갖가지 수를 놓는 듯 싶습니다.

처음엔 몇 필될 듯싶더니 지금은 그저 손수건 한 장쯤에 짜는

모양입니다. 그만큼 밤도 깊습니다.

밤이 깊으면 병인 듯 이런저런 먼 곳의 일들이 궁금해지곤 합니다.

먼 곳의 빛과 소리들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밤이므로 길을 나설 수는 없습니다.

그저 창 앞을 서성이며 그렇게 그리워 할 뿐입니다.

어쩌면 그곳은 내 발길이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인지도 모릅니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그리움만이 갈 수 있는 그런 곳 말입니다.

당신을 만나고 온 지 벌써 오래입니다.

당신 곁을 흐르던 강물은 여전하겠지요.

강물 속의 까만 돌들도 나란히들 누워 가을빛을 받아 어른거리고 있겠군요.

지난 여름 장마의 무섭던 물너울들을 넘기고는 한껏

깨끗한 정신으로 그렇게들 누워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흙과 나무와 돌들로 지어진 당신의 집은 어떻습니까.

세월의 한쪽 기슭에서, 호젓하게 세상살이의 여러 비밀들에

대해 근심하며 어떤 따뜻한 상징처럼 낮게 앉아 있을 당신의 집.

내가 종내는 당신과 함께 살다가 죽고 싶은 그집.

당신은 그렇게 거기 있고 나는 이 번잡한 구획의 한 모퉁이에서

쉬 떠날 수 없어 돌을 들여다보듯 내 그리움의 속살들이나 들여다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무엇인가를 삭히듯 돌 하나를 꺼내

나 자신도 잘 알지 못할 무늬 같은 것들을 새겨넣어 보기도 합니다.

새벽녘 하늘엔 말굽만한 하현달이 걸려 있습니다.

당신도 혹 보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당신의 시선 위에 내 것이 겹쳐진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울렁입니다.

그 울렁임의 무늬로 혹 이 가을이 깊어지는 것인지......

당신은 너무 멀리 있으므로 나는 그저 저 달에게

그리움의 수레를 매 놓고서는 마음만 뒤척일 뿐입니다.

꽤나 오랜 서성임입니다. 가을이 깊습니다.

가만히, 내 마음으로부터 당신의 마음속으로 깊어 가는 것이 또한 있습니다.

달은 내 그러한 관념의 마을을 넘어서 마침내 당신에게 가 닿을 것입니다.

 

 

 

목숨- 조정권

 

마음의 어디를 동여맨 채 살아가는 이를

사랑한 것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눈을 감고

오늘 죽은 이는 내일 더 죽어 있고

모레엔 더욱 죽어 있을 거라고 너는 말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이 세상 여자면 누구나 바라는 아주 평범한 일

아무것도 원하지는 않으나 다만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눈부신 일이 차례가 올 리 없다고 너는 말했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오늘 오늘 오늘의 연속

이제까지 이렇게 어렵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야 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길이 쉬운 거라고 너는 말했다

버림받고 병들고 잊혀지는 일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잊혀져가는 것이라고 했다

꽃과 나무와 길들로부터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이라고 너는 말했다

잊혀진 일은 내일이면 더 잊혀져 있고

그것은 세상일과 가장 많이 닿아 있는 일이라고 너는 말했다.

 

 

 

 

상처- 정현종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 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가을엽서 2 정일근

 

그대의 일자무소식과

막막한 내 그리움 사이

가을만 저 홀로 차다

그대에게 가까이 가기에는

늘 손 시린 새벽,

유리창 가득 호호 입김 불며

그리운 그대 이름 적는다

그립다, 라고만 쓰기엔

가을꽃밭 붉은 꽃대궁처럼

너무 더운 그대

빈 손톱 밑으로 스며드는

그리운 그대

 

 

 

감은사지 13 정일근

 

사라지는 것들은 상처를 남기지 않지만

절은 사라지고 절터만 남은 이 저녁 감은사처럼

사라질 수 없는 것들은 상처로 남아 슬픔을 만드네

무너지는 세월의 무거운 몸을 안고

아픈 허리를 곧추세우고 섰는 동서 쌍탑과

땅 속에 두 발을 묻고 잠들어 버린 깨어진 모퉁잇돌

알 수 없는 바다 깊숙이 달아나버린 목어의 숨소리와

유사의 행간 사이사이 뱀처럼 숨어 바스락거리는 신화 곁에서

나는 보네, 사라진 절터가 남긴 천 년 세월의 상처를

신라사람들이 남긴 쓸쓸한 상처의 저 아름다운 흉터를!

진주조개의 상처가 영롱한 진주를 빚듯

시간의 상처는 눈물같은 슬픔으로 독한 술을 빚어

세상 모든 그리움들을 불러 저녁놀로 불타고

슬픔이 내 마음이라면, 저녁 감은사여

마음의 우주에 칼금 그어진 깊은 상처같은 별을 보네

서쪽 밤하늘 붙박이별로 반짝이는 그대를 보네

 

 

 

 

달팽이의 사랑- 김광규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늦가을 배추벌레의 노래- 강연호

 

서리내린 저 밭의 배추잎 끝에서

이제 나는 가을 하늘을 볼 테다.

추위가 몰려 오면 흙벽에

제 눈만한 창문을 내고

울며 울리는 사람들.

날 부르는 뜨거운 눈물이 안 보일지라도

이제 나는 꿈을 꿀 테다.

삽날이 밀려와

내 집 밑둥을 자르고

밤마다 흙더미 사이로 별이 보이면

내 사랑은 흐르는 한 줄기 강물

가을 빛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잘 있거라. 누런 들판아, 탱자나무야

속삭이는 낙엽소리와 연기 내음도 두고

캄캄한 땅 속에서

이제 나는 꿈을 꿀 테다.

 

 

 

내 속의 가을- 최영미

 

바람이 불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없어도

뒹구는 낙엽이 없어도

지하철 플랫폼에 앉으면

시속 100킬로로 달려드는 시멘트 바람에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따뜻한 커피가 없어도

녹아드는 선율이 없어도

바람이 불면

오월의 풍성한 잎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보이고

거쳐온 방마다 구석구석 반짝이는 먼지도 보이고

어쩌다 네가 비치면 그림자 밟아가며, 가을이다

담배연기도 뻣뻣한 그리움 지우지 못해

알미늄 샷시에 잘려진 풍경 한 컷, 우수수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팔짱을 끼고

-

 

 

 

 

가을 범종- 문정희

 

빙초산을 뿌리며 가을이 달겨들었다.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며 저 아래

강이 흐른다고 했지만

흘러서 어디로 갔을까.

다리 아랜 언제나 강이 있었다.

너를 사랑해! 한여름 폭양 아래 핀

붉은 꽃들처럼 서로 피눈물 흘렸는데

그 사랑은 어디로 갔을까.

사랑은 내 심장 속에 있다가

슬며시 사라졌다.

우리 사이엔 지금 아무것도 없다.

상처가 쑤시어 약을 발라주려고 했지만

내 상처에 맞는 약 또한 세상에는 없었다.

나의 몸은 가을 날 범종처럼 무르익어

바람이 조금만 두드려도 은은한 슬픔을 울었다.

햇살이 빙초산처럼 뿌려지는 가을날

다리 아랜 여전히 강이 있었다.

 

 

 

슬픔을 버리다- 마경덕

 

나는 중독자였다

끊을 수 있으면 끊어봐라

사랑이 큰소리쳤다

네 이름에 걸려 번번이 넘어졌다

공인된 마약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문 앞을 서성이다 어두운 골목을 걸어 나오면

목덜미로 빗물이 흘렀다

전봇대를 껴안고 소리치면

빗소리가 나를 지워버렸다

늘 있었고 어디에도 없는

아득한 너를 만지다가

슬픔에 털썩, 무릎을 끓기도 했다

밤새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아무데도 닿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네게 감염된 그때, 스무 살이었고

한 묶음의 편지를 찢었고

버릴 데 없는 슬픔을

내 몸에 버리기도 하였다

 

 

 

거울- 이성복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죽음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 있습니다 나도 당신도 두렵기만 합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당신이 나의 길을 숨기고 있습니까 내가 당신의 길을 가로막았습니까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거울처럼 당신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멸치의 사랑- 김경미

 

똥 빼고 머리 떼고 먹을 것 하나 없는 잔멸치

누르면 아무데서나 물 나오는

친수성

너무 오랫동안 슬픔을 자초한 죄

뼈째 다 먹을 수 있는 사랑이 어디 흔하랴

 

 

겨울 나무- 김혜순

 

나뭇잎들 떨어진 자리마다

바람 이파리들 매달렸다

사랑해 사랑해

나무를 나무에 가두는

등 굽은 길 밖에 없는

나무들이

떨어진 이파리들 아직도

매달려 있는 줄 알고

몸을 흔들어 보았다

나는 정말로 슬펐다. 내 몸이 다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 흩어져버리는 몸을 감당 못해 몸을 묶고 싶었다. 그래서 내 몸속의 갈비뼈들이 날마다 둥글게 둥글게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쨌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내 몸 전체에 박혔어.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일 거야. 아마.

 

 

 

편지1- 이성복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겨울비- 이외수

 

모르겠어

과거로 돌아가는 터널이

어디 있는지

흐린 기억의 벌판 어디쯤

아직도 매장되지 않은 추억의 살점

한 조각 유기되어 있는지

저물녘 행선지도 없이 떠도는 거리

늑골을 적시며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모르겠어 돌아보면

폐쇄된 시간의 건널목

왜 그대 이름 아직도

날카로운 비수로 박히는지

 

 

 

강변역에서- 정호승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없이 지나갔다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산에서

저녁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홀로 걸어가는 사람- 최동호

 

과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조금 비켜가는 화살처럼

마음 한가운데를 맞추지 못하고

변두리를 지나가는 바람처럼

먼 곳을 향해 여린 씨를 날리는

작은 풀꽃의 바람 같은 마음이여.

자갈이 날으면 백 리를 간다지만

모래가 날리면 만 리를 간다고

그리움의 눈물 마음속으로 흘리며

느릿느릿 뒤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사람

 

 

 

너무 오랜 기다림- 유하

 

강가에 앉아 그리움이 저물도록 그대를 기다렸네 그리움이

마침내 강물과 몸을 바꿀 때까지도 난 움직일 수 없었네

바람 한올, 잎새 하나에도 주술이 깃들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은 모두 그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네

매순간 반딧불 같은 죽음이 오고 멎을 듯한 마음이 지나갔네

기다림, 그 별빛처럼 버려지는 고통에 눈 멀어 나 그대를 기다렸네

 

이름이 없으면, 장미의 향기도 사라지리라- 함성호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괴롭다

얼마나 가슴 깊은 곳에서

너의 이름을 불렀는지

그만, 마음이 흐려져버렸다

어떻게 너를 잊어

우리 영영 이별할 수 있을까?

어느 외마다 비명 소리라도

너의 이름 아닌 것이 없으니

이름이 없으면,

이 사무치는 불의 마음도 사라지리라

씨앗은 숲을 괴로워하니

숲의 나무가 거리의 나무에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잎과 줄기를 반복해서 피워 올리니

왜 늙음을 경험하는 것일까?

누가 땅속 깊은 곳에 있는 그의 이름을 불러

어떻게 너를 잊어, 우리 서로 모르는 채

자주꽃방망이 핀 습지를 지나칠 수 있을까?

어두운 너를 깨우는 것도 늘 나였으니

너는 항상 겹겹의 옷을 입고

걸인처럼, 우리가 하나하나 그 남루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추위에 떤다

다시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게

꽃을 보려거든, 이름 없이 태어나라

봄 한 시절에 피는

저게 무슨 꽃인지 나는

그해 여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얼마나 고요히 너의 이름을 불렀는지

몸은 안개처럼 흩어져

너의 이름 아닌 것이 없으니

이름이 없으면

속으로만 한없이 부르던 노래도

세상의 모든 향기도 사라지리라

 

 

겨울 편지- 안도현

 

댓잎위에 눈 쌓이는 동안 나는 술만 마셨다

눈발이 대숲을 오랏줄로 묶는 줄도 모르고 술만 마셨다

 

거긴 지금도 눈 오니?

여긴 가까스로 그쳤다

 

九耳들판이 뼛속까지 다 들여다보인다

 

청둥오리는 청둥오리 발자국을 찍으려고 왁자하게 내려앉고,

족제비는 족제비 발자국을 찍으려고 논둑 밑에서 까맣게 눈을 뜨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으러 왔다가 저 저수지를 건너갔을 것이다

 

담배가 떨어져 가게에 갔다 오느라

나도 길에다 할 수 없이 발자국 몇 개 찍었다

이세상에 와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것을 땅바닥에 찍고 다니느라

신발은 곤해서 툇마루 아래 잠들었구나

상기도 눈가에 물기 질금거리면서.

 

눈 그친 아침은, 그래서

이세상 아닌 곳에다 대고 자꾸 묻고 싶어진다

넌 괜찮니?

넌 괜찮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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