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주,라는 말-김선우
밀례-박제영
11월의 끝-이운진
폭탄 돌리기-신미균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김인자
저 아무개 별에게-이영식
구슬이 구슬을-이향지
조껍데기술을 마시다-이상국
칠월 칠석-박경희
불효-구정혜
나도 한때는 요즘 애들이었다-권혁소
바깥으로부터-황규관
별을 삽질하다-허문영
원식이 아재-박제영
처마 끝-박남희
청성淸聲자진한잎-이성목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문효치
가슴이 먼저-고증식
소맥 한잔 말어?-차승호
화가 이중섭이 시인 구상에게-이승하
할수없이 사람에 관한 이야기- 박제영
무어라는 것-허림
희망비디오-김재룡
수몰 지구-전윤호
모란 위 옥탑방-민왕기
재녕 씨의 안녕 -박재연
견주,라는 말-김선우
주인 없는 개,라는 말을 들을 때 슬프다
주인이 없어서 슬픈 게 아니라
주인이 있다고 믿어져서 슬프다.
개의 주인은 개일 뿐인 거지.
개와 함께 사는 당신은 개의 친구가 될 수 있을 뿐인 거지.
이 개의 주인이 누구냐고요?
그야 개, 아닐는지?
이 개가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아는 좀 멋진 절친쯤 될 수 있겠소만.
- 『녹턴』(문학과지성, 2016)
밀례-박제영
아버지, 무덤을 파고 계신다, 칠십 년 봉분처럼 등굽은 사내, 봉분마저 지워진 고조부 무덤을 파고 계신다, 백년 전의 어둠을 조심스럽게 더듬는 아버지의 손, 마침내 드러나는 묘혈
아버지의 가난이 저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만석지기 재산 주색으로 노름으로 다 날리고 그예 자기 무덤마저 남의 산 귀퉁이를 빌려야 했다고 한다
칠성판 위로 수습된 황톳빛 뼈들, 어둠을 털어냈다지만 백년 전의 햇빛은 이미 흙으로 돌아갔음을 아버지도 알고 계신다, 다만 아버지는 오랫동안 짊어온 당신의 빚을 갚고 있는 것이다
- 할배, 인자서 넘으 더부살이 면하게 했다꼬 모라카지 마이소, 지도 할배 한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더
마침내 아버지는 깊은 잠을 주무셨다 봉분처럼
고조부도 그러셨을 것이다 새로 올린 봉분 속에서
11월의 끝-이운진
한 사람의 상처 입은 사랑을 덮으려면 저토록 많은 나뭇잎이 필요한가
우리가 한때 우리였다는 걸 말하려고 나무는 모든 잎을 버리나
애인아
어느 날 슬플 때
내가 네 이름을 부르는 억양도 나뭇잎만큼 바스락거리고
우리 사이에만 통하는 따스한 농담도
떨어진 잎처럼 바람에 찢기고 말까
죄가 되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무해한 사랑처럼 낙엽이 진다
언젠가 꼭 잊혀질 우리처럼, 낯선 영혼처럼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천년의시작, 2020)
폭탄 돌리기-신미균
심지에 불이 붙은 엄마를
큰오빠에게 넘겼습니다
심지는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맹렬하게 타고 있습니다
큰오빠는 바로 작은오빠에게
넘깁니다
작은오빠는 바로 언니에게
넘깁니다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에게 넘깁니다
내가 다시 큰오빠에게 넘기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겠다는 시늉을 합니다
작은오빠를 쳐다보자
곤란하다는 눈빛을 보냅니다
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딴청을 부립니다
그사이 심지를 다 태운 불이
내 손으로 옮겨 붙었습니다
엉겁결에 폭탄을
공중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엄마의 파편이
우리들 머리 위로
분수처럼 쏟아집니다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파란, 2020)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김인자
첫 결혼기념일이 이혼기념일이 된 후배의 변은
걷잡을 수 없는 남편의 바람기가 원인이란다
40년을 한 남자와 살고 있는 나도
실은 한 남자와 사는 게 아니다
영화나 소설처럼 호시탐탐 친구의 애인을 넘보고
선후배에게 추파를 던지고 이웃사내에게 침을 삼켰다
단언하지만 이런 외식이 없었다면
나야말로 일찍이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
결혼제도란, 한 여자가 한 남자만을 거래할 수 있도록 규정지어진 공소시효가 불분명한 합법을 가장한 희대의 불법 사기극, 나는 달콤한 미끼에 걸려든 망둥어, 위장취업자, 아니 불법체류자, 결혼이라는 기업에 청춘의 이력서를 쓰고 정규직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상근봉사자, 가문의 대소사엔 대를 이은 비정규직 노동자, 자식에겐 만료가 없는 무보수 근로자,
이런 근로조건에서 이 정도 바람 없기를 바란다면
인간이 아닌 건 내가 아니라 후배일 터,
나는 삼류영화 삼류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고
후배는 너무 오래 교과서만을 탐닉한 결과다
―『당신이라는 갸륵』(리토피아, 2020)
저 아무개 별에게-이영식
내가 아는 어느 시인은
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취미가 있다
까뮤, 쌩떽쥐베리, 니체 같은 이름 붙여주며
가슴 환하도록
별들의 명명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 나는
저 별들의 이름을 지우기로 한다
철필鐵筆로 쓴 이름 떼어내고
별자리의 틀에서 풀어놓기로 한다
샛강 차오르는 은어 떼처럼
싸라기별들이 헤엄치게 하고 싶다
가끔은 내 꿈속에도 내려와 놀고
술잔 위에도 앉히고 싶다
이름을 벗고 알몸으로 온 별들
첫사랑의 키스보다 뜨거울 것이다
금싸라기 술 몸안에 퍼지면
내 허명虛名 또한 희미해질 것이고
수수깡 집처럼 무너져도 좋으리
그런 날에는 빗장 친 관념을 벗고
눈물방울 화석, 저 아무개 별과
한살림 차려도 좋겠다
―『꽃의 정치』(지혜, 2020)
구슬이 구슬을-이향지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안지 못한다
유리구슬이 유리구슬을 밀어내었다
구슬이 구슬을 치면 구슬 탓이냐
구슬 탓이다
동글동글 맨질맨질 전신이 정점인
저 잘난 구슬 탓이다
민다고 쪼르르 달려와서
저와 똑 같은 것을 쳐서야 되겠느냐
치자고 밀었겠느냐
둥글둥글 어울려서 놀자고 밀었겠지
놀자고 오는 걸음이 총알 같았겠느냐
밀었거나 퉁겼거나 친 것은 구슬이네
아픈 것도 구슬이네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안지 못하네
- 『시와사람』(2003 여름호)
조껍데기술을 마시다-이상국
드문드문 눈발이 날리는 저녁, 시인 몇 사람이 이장네 식당에 술 먹으러 갔는데 그 집 암탉 한 마리가 연신 머리를 문에 부딪치며 안을 기웃거린다. 기르던 닭 아홉 마리를 살쾡이 족제비가 다 물어가고 저게 혼자 남아 해만 지면 겁이 나서 저런다며
주인여자가 문을 열어주자 얼른 들어와 신발장 위에 올라가 잠자리를 튼다.
우리가 누구인가,
인간의 일은 물론 천지만물과 우주적 공사에까지 참여하는 시인 아닌가. 그런 자들이 밤마다 공포에 떠는 저 말 못하는 짐승의 고통을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공론 끝에 다음날 우리는 그를 푹 곤 백숙을 안주로 조껍데기술을 마시며 그의 고통과 슬픔을 나누어 가졌다.
- 『국수』(강, 2019)
칠월 칠석-박경희
내가 먼저 가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어 너 혼자 남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증이 일어나 나이 사십에 옆댕이서 젖 만져줄 놈 하나 없는데 코 골고 자는 모습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성질도 나고 내가 니 아비 먼저 보내놓고 사방의 온 병 끌어모아 이 고생인데 안 봐도 비디오여 나 가고 나면 가슴 쥐어짜고 살 텐데 내가 그 꼴을 저승 가서 어찌 보겠냐 아, 견우직녀도 매년 새 대가리 밟고 손모가지 붙잡는데 너도 아무 놈 손모가지라도 끌고 와 그래야 내가 편히 눈감어 온몸이 종합병원인데 너는 어찌 어미 맘을 모르냐 뭣 모르고 대가리 벗겨진 콩처럼 튈 궁리만 하고 앉아 있고 사는 게 별거 아니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니 너도 대가리 그만 굴리고 나가서 한 놈만 잡아와봐 그러면 어찌 아냐 저승 간 니 아비 새 대가리 밟고 와서 손잡고 예식장 들어가줄지!
-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창비, 2019)
불효-구정혜
간혹 뜬금없는 말씀을 하신다고
그것을 치매라고 여기며
아흔한 살의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계신다
옛말에 부모보다 앞서 이승을 떠나면
가장 큰 불효라는 말이 있어
내가 먼저 저승에 갈까 봐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더 고생 않고 이쯤에서
돌아가시면 좋겠다"
동생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 『말하지 않아도』(시산맥, 2019)
나도 한때는 요즘 애들이었다-권혁소
권 선생, 잊지 말게
그대도 한때 교복 단추 한두 개쯤 풀어놓고
검은 운동화 꺾어 신던 요즘 애들이었네
교납금 미납으로 학교에서 쫓겨나
울 엄마가 가난하지 내가 가난해, 씨발
까닭 모를 질문 세상에 게워내던
빡빡머리였다는 사실, 잊지 말게
그대도 한때는 무서운 요즘 애들이었네
잊지 말게, 요즘 애들이 커서 끝내는
광장이 된다는 사실
나라가 된다는 사실
- 『우리가 너무 가엾다』(삶창, 2019)
바깥으로부터-황규관
이제는 아무도 바깥을 보지 않는다
고속 열차의 창문에는 언제나
어둑한 블라인드가 쳐져 있고
이 옷을 입었다 저 옷을 입었다 하는 가을 산은
버려지듯 지나가고 있다
바깥을 바라보는 일은
바깥에게 나를 조심스레 허락하는 일
내가 바깥이 되고 바깥이
도착지를 변경해주는 일
그러나 아무도 바깥을 보지 않는다
메말라가는 산자락의 밭을
혼자이게 내버려둔다
눈동자는 바깥의 흔적
영혼은 바깥이 쌓아올린 오두막
누구도 바깥이 되려고 하지 않을 때
바깥은 버려지고
안은 점점 작아져간다
모래알처럼 작아져간다
흙먼지처럼 떠돌기만 한다
-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문학동네, 2019)
별을 삽질하다-허문영
오대산 북대 미륵암에 가면 덕행 스님이 계시는데, 매일 밤 별이 쏟아져 내려 절 마당에 수북하다고 하시네.
뜨거운 별이면 질화로에 부삽으로 퍼 담아 찻물 끓이는 군불로 지피시거나, 곰팡이 핀 듯 보드라운 별이면 각삽으로 퍼서 두엄처럼 쌓아두었다가 묵은 밭에다 뿌려도 좋고, 잔별이 너무 많이 깔렸으면 바가지가 큰 오삽으로 가마니에 퍼 담아 헛간에 날라두었다가 조금씩 나눠주시라고 하니, 스님이 눈을 크게 뜨시고 나를 한참 쳐다보시네.
혜성같이 울퉁불퉁한 별은 막삽으로 퍼서 무너진 담장 옆에 모아두었다가 봄이 오면 해우소 돌담으로 쌓아도 좋고, 작은 별똥별 하나 화단 옆에 떨어져 있으면 꽃삽으로 주워다가 새벽 예불할 때 등불처럼 걸어두시면 마음까지 환해진다고, 은하수가 폭설로 쏟아져 내려 온 산에 흰 눈처럼 쌓여 있으면 눈삽으로 쓸어 모아 신도들 기도 길을 내주시자 하니, 하늘엔 별도 많지만 속세엔 삽도 많다 하시네.
- 『별을 삽질하다』(달아실, 2019)
원식이 아재-박제영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김추자를 입에 달고 다니던
한 쪽 다리와 맞바꾼 것이라며 무공 훈장을 가슴에 달고 살았던
아랫샘밭 원식이 아재는 베트남 참전 용사였습니다
어쩌다 술판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아재들은 저마다 무용담을 늘어놓곤 했는데요
검은 비가 쏟아지는 월남의 밀림을 종횡무진 누비던
원식이 아재의 무용담을 감히 누구도 당해내진 못했습니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박상사, 원식이 아재의 무용담이 끝난 건
길고 긴 무용담이 끝난 건
원식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88년의 일입니다
그해 여름, 열아홉 살 원식이가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원식이 아재 핏속에 흐르는 고엽제가 원인이었습니다
고엽제가 대물림될 줄 몰랐다며
내가 자식을 죽였다며
사흘낮밤을 통곡하던 원식이 아재는 농약을 마셨고
원식이 아재의 무용담은 마침내 그렇게 끝났습니다
부검을 했는데 원식이 아재의 뱃속에서 무공훈장이 나왔다는 얘기를 끝으로
우리집 아재들의 오래 된 무용담도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 『그런 저녁』(솔, 2017)
처마 끝-박남희
사랑의 말은 지상에 있고
이별의 말은 공중에 있다
지상이 뜨겁게 밀어올린 말이 구름이 될 때
구름이 식어져서 비를 내린다
그대여
이별을 생각할 때 처마 끝을 보라
마른 처마 끝으로 물이 고이고
이내 글썽해질 때
물이 아득하게 지나온 공중을 보라
이별의 말은 공중에 있다
공중은 어디도 길이고
어느 곳도 절벽이다
공중은 글썽해질 때 뛰어내린다
무언가 다 말을 하지 못한 공중은
지상에 닿지 않고 처마 끝에 매달린다
그리곤 한 방울씩 아프게
수직의 말을 한다
수직의 말은 글썽이며 처마 끝에 있고
그 아래
지느러미를 단
수평의 말이 멀리 허방을 보고 있다
구릿빛 지느러미는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걷는사람, 2019)
청성淸聲자진한잎-이성목
바람이 불었다. 밤새 산비탈을 쓸던 바람은 날이 밝자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바람은 덧없다. 들어앉을 몸을 얻으려고 산죽을 바닥까지 휘어놓고도, 들어앉는 삶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다. 깊은 잠 속의 흐느낌처럼 소리로만 육체를 드러낸다.
당신은 시김새 없이도 한 생을 이루었다 저 바람처럼, 어쩌면 몸 없이 회오리치는 것이 생일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소리로 인해 일어서고 드높아진 영마루 같다.
바람이 누웠다 소리로 와서 소리 없이 사라질 줄 아는, 높새바람이었다.
- 『세상에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천년의시작, 2019)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문효치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를 뻗어 휘젓는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될
온몸을 태워서
찬란한 한 점의 섬광이 될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빛깔이 없어 보이지 않고
모형이 없어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무엇으로든 태어나기 위하여
선명한 모형을 빚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되어라
-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달아실, 2019)
가슴이 먼저-고증식
딸아이와 한바탕하고
가방 싸서 집 나간 엄마
그래 나 없이 어디 잘살아 봐라
되는대로 몇 자 적어 놓고
참말이지 삼대 구 년 만에
훌쩍 친정집 기차 탄 엄마
나쁜 가시나
돈 처들여 키워놨더니
따박따박 따지고 들기나 하고
사과 안 하면 내 절대 오나 봐라
딸도 엄마도 며칠째 신경전인데
가시내야, 그게 아니란다
니들은 머리로 엄말 대하지만
엄만 가슴이 먼저란다
늘 그게 먼저란다
- 『얼떨결에』(걷는사람, 2019)
소맥 한잔 말어?-차승호
뭘 그걸 갖고 그려? 취직시험 떨어졌다고 으등그릴 필요 읎다니께 일 못할까 걱정되능 겨? 쓰잘머리 읎는 걱정여 너 흙수저가 노는 거 봤니? 너는 대물림으로 확실한 흙수저니께 안달복달 이유가 읎능 겨 흙수저도 그냥 흙수저냐 애비나 너나 예당평야 무량수로 내려온 내력 고스란히 이어받은 원조 흙수저란 말이지
둥둥둥 내 딸이야 어화둥둥 내 딸이야, 경부선 끄트머리 자갈치 어판장 둥둥둥 뜬살이로 흔들릴 때 너를 얻어 세상을 얻은 듯, 둥둥둥 내 딸이야 어화둥둥 내 딸이야
한잔 헐텨?
우리끼리
흙수저끼리
얼굴만 봐도 흥겨운 못난 놈끼리
소맥 한잔 말어?
- 『난장』(애지, 2019)
나무도 자살을 한다-유용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공원의 나무들이 말라 죽었다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나무도 자살을 한다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나무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 『어머이도 저렇게 울었을 것이다』(걷는사람, 2019)
화가 이중섭이 시인 구상에게-이승하
상常이
보고 싶구려
사흘만 안 봐도 보고 싶으니
우리는 전생에 형제였나 부부였나
집을 갖고 싶었지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살 집 한 채면
나 먹지 않아도 배부를 수 있고
마시지 않아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지
50년 10월 송도원의 집 폭격으로 불타고
부산 범일동의 창고에 살면서
낮이면 부두에서 하역 작업
무얼 짊어져도 자식 굶기는 아비였지
제주시까지는 배편으로 서귀포까지는 걸어서
게 잡아먹고 조개 캐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넓고 넓은 바닷가의 오막살이 집 한 채
쌀 사 먹을 길은 막막하였다
다시 범일동으로 범일동 판잣집으로
자네는 집이 있지 가족이 있지
아, 하늘 아래 나는 집이 없구나
장남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노는 상이! 洪홍이!
具常兄前 李仲燮弟*
* 구상형전 이중섭제具常兄前 李仲燮弟 : 이중섭은 구상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시인의 인품을 높이 사는 의미에서 늘 '형'으로 불렀다. 구상 시인의 장남 이름이 구홍이었다.
- 『생애를 낭송하다』(천년의시작, 2019)
브룩 바커의 『동물들의 슬픈 진실에 관한 이야기』에 나오지 않는 어떤 동물,
할수없이 사람에 관한 이야기- 박제영
대한민국 상위 1%라는 당신들
국민이라 쓰고 개돼지라 읽는 당신들
은 사람일까
키위라는 새는 아픈 기억을 5년 이상 간직한다는데,
그 많은 아픔들을 잊은, 키위보다 못한 당신들을
뭐라 읽어야 할까?
닭? 개똥지빠귀?
뭐라 읽어야 할까?
생쥐는 동료 생쥐의 아픔을 이해하고 똑같이 아파한다는데,
그 많은 아픔들을 아파하지 못하는, 생쥐보다 못한 당신들을
또 뭐라 읽어야 할까?
두더지 아니면 스컹크?
라고 읽어야 할까?
두 마리의 개구리가 같은 연못에 있어도 종이 다르면 서로의 소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데,
같은 종인데도 사람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개구리보다 못한 당신들을
도대체 뭐라 읽어야 할까?
코모도왕도마뱀?
게코도마뱀?
아서라, 개돼지가 울고 웃겠다
닭이 울고 웃고 개똥지빠귀가 울고 웃고 두더지가 울고 웃고 스컹크가 울고 웃고 코모도가 울고 웃고 게코가 울고 웃겠다
세상의 모든 포유류 양서류 조류 어류 하다못해 아메바 플라나리아 무척추 동물까지 모두 다 울고 웃겠다
억울해서 울고 어이없어 웃겠다
안 되겠다 당신들은 그냥
할수없이사람
이라고 읽을 수밖에 없겠다
대한민국에는 할수없이사람이라는 희귀종이 서식하고 있다
- 『시와경계』(2019년 여름호)
무어라는 것-허림
무어라도 돼라
그게 엄마의 좌우명이었다
콩나물 키워 열두 가지 반찬 만들고
아구든 아귀든 강냉이든 옥씨기든 올갱이든 고디든
먹도록 만들어 상 위에 올리는 것
그게 엄마가 할 줄 아는 전부였다
노상 소핵교만 졸업했어도
무엇이든 됐을 거라는 말
게우 소핵교 이학년도 다니다 말고
부엌떼기로 들어섰다가
위안부 소녀들 공출해 간다고
한동안 도광동에 숨어 살면서도
콧구멍이 새까맣도록 고골에 불을 피워 상을 차렸다는
그 먼 날들을 들려주며 뭐든 돼라 했는데
돌아보니 온 길도 없고
내다보니 갈 길도 아물거려
주저앉고 말았다
시인은 되는 게 아니라고
엄마는 말할 뻔했는데
뭣 땜에 그랬는지
엄마가 간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엄마도 생각이 참 많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 『엄마 냄새』(달아실, 2019)
희망비디오-김재룡
1
희망을 빌려드립니다.
희망비디오 가게에는 오늘도 사람들이 빌려가지 않은
희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습니다.
면목동 전세방에서
전세 보증금도 못 받고 쫓겨난 리을이네 식구들은
이곳저곳을 떠돌다, 지금은 인천하고도
저 주안사거리 쪽에서
보험사 융자를 얻어 비디오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천오백원이나
이천 원씩 받고 비디오를 빌려주는 희망비디오 가겝니다.
리을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비디오 게임을 합니다.
아 게임을 할 줄 모르는 새하가 블록 쌓기를 합니다.
조금 있으면 사람들이 하나둘 빌려간 희망들을
다시 되돌려주기 위해 들렸다,
방울 소리 울리는 가게 문을 열고는 또 다른 희망을 찾아
집으로 거리로 나서겠지요.
새 봄이 오고 있습니다.
대통령도 바뀌고 날이 날마다 바뀌는데
사람들의 희망은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빌려간 희망만을 사람들은 다시 빌려가거든요.
간혹 다른 사람들과 다른 희망들을 찾는 이도 있지만
역시 대박 프로가 안겨주는 희망이 가장 잘 팔립니다.
장사라는 게 돈 놓고 돈 먹기인 줄 알지만
희망마저도 희망 놓고 더 큰 희망 따먹기 하는 것 같아
빌려줄 희망들을 모두 갖고 있지 못한
리을이네 희망비디오 가게에는,
융자 받은 돈 이자만 쌓여가듯이
별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찾아옵니다.
2
아내의 희망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을 게다.
내가 출근을 하고 리을이도 학교에 가고 나면
청소를 끝낸 이른 아침의 가겟방엔
새 영화 포스터를 촘촘히 붙여놓은 유리창 사이로
화사한 햇살이 스며들 것이다.
그러면 아내는 난로를 피우고
카세트에 맑은 음악이 흐르게 할 것이다.
둘째 놈이 늦잠을 깰 때쯤이면
뜨거운 차 한잔의 여유,
그 정도였으리라는 생각이다.
아내의 희망은
사실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을 게다.
내 봉급 받아선 융잣돈 꺼나가고
이것저것 월부금이며 곗돈, 카드 결제를 하고
장사해서 번 돈으론
테이프값 주고 가겟세 주고도
밥이야 못 먹고 살겠냐는 것이었을 게다.
그렇게 아내의 희망은
사실, 그렇게 큰 것이 아니었을 게다.
한 이삼 년 고생을 하고 나면
최소한 남편 승용차 한 대는 사줄 수 있으리라
그런 정도였으리라는 생각이다.
나의 희망은
아내의 그렇게 크지 않은 희망이
잘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 후, 나의 희망은
장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아내의 잘 되지 않는 장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되었다.
아내의 그렇게 크지 않은 희망이
무너져 내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희망이 되었다.
지금 나의 희망은
자꾸만 희망을 잃어가는 아내가,
우리가 산다는 것이
산다는 것의 소금밭을 뒹굴며
거듭 희망을 잃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나의 희망은
우리의 희망이 어느 순간
절망으로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산다는 모습이란 걸
가능하면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 『개망초 연대기』(달아실, 2019 근간)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시삼백 일언이폐지 왈사무사)"
"무릇 시란 그 생각에 삿됨이 없어야 한다"는
수몰 지구-전윤호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 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 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는 내리고
흘러 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 『세상의 모든 연애』(파란, 2019)[
모란 위 옥탑방-민왕기
항구에 옥탑방을 하나 얻어, 둘만 아는 시를 쓰고
세상은 없다 그리고 기절하는 햇살만 있다
찬거리를 사오는 오후에도 당신 어깨 위 모란은 황홀하고
하루 종일 이 햇살의 햇살 속을 걸을 수 있다
세상에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을 때만, 가질 수 있는 삶이 있다
너의 어깨, 모란 같은 사소한 인정으로도 문학적일 수 있다
바다 끝 하늘에는 닿을 수 없는 태초의 무료함이 있고
그 끝에 아무것도 없어서
당신 어깨 위에서 어느 날은 종일 걷고 어느 날은 종일 쓴다
무료해지면 무료한 섹스 끝에 서로 안고 적막해지고
모란 위에 귀를 대고 기다린다 잠잠하라,는 바람소리가 난다
-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달아실, 2019)
재녕 씨의 안녕 -박재연
사람 좋은 재녕 씨가 몸보신이나 하라며 개고기 서너 근을 베어왔네
나는 전날 법흥사에 가서 백팔 배를 하고 왔다며 정중하게 사양했지
현관문을 열고 허리를 반 쯤 수그려 문 앞에 놓으려다 다시 들고 나가는 재녕 씨
겨울이 되자 알밴 개구리를 비료 포대로 가득 잡아 놓았으니 먹으러 오라고 전화가 왔네 살생은 싫어요 개구리는 사람같이 생겼잖아요 두 번 사양했네 전화기 안쪽에서 섭섭하게 쓸어가는 산골바람 소리
두어 달 지나 이번에는 럭비공만 한 타조 알을 들고 집으로 찾아왔네 세 번 사양하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잖아요 타조 알을 조심히 받았네 커다란 냄비 안에서 콩탕콩탕 끓어대는 타조 알 슬슬 농담을 걸어오네
이웃집 오리와 등이 맞은 암탉이 있었대
날마다 남편 수탉에게 매를 맞으며 살았다나
어느 날 오리 알을 낳다가 그만 죽었다는 거야
죽은 암탉보다 오리놈이 더 나빠 암탉 편을 드는 사이 부글부글 끓던 타조 알이 그만 냄비 둑을 타고 넘쳐 싱크대가 벌창이 됐네
잘 먹었느냐고
아주 잘 먹었다고
하회탈처럼 웃으며 물으니 더 미안하잖아요
귀한 선물을 난감하게 받아서 타조 알은 넘쳤네
농담을 모르는 내게 농담을 걸어와서 타조 알은 넘쳤네
- 『텔레파시폰의 시간』(한국문연, 2018)[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