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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竹과 洪娘의 애절한 사연이 내게 머물다

by 이성근 2022. 5. 27.

KBS 한국사   전(傳) 50회

1573년 가을(선조6)

최경창이 병마절도사의 부관인 정6품 북도평사(北道評事)가 되어 함경도 경성으로 부임하고 있었다.

부임하는 도중 흥원군수가 최경창의 벼슬길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난다

 

-간밤 비에 새 잎나가든 너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한 기생의 창이 끝나고 흥원군수가 홍랑을 지목했는데 그녀가 말하기를

저는 노래보다 시를 좋아 합니다

누구의 시를 좋아 하는냐

 

홍랑은 마주보고 있는 이가 고죽인줄 몰랐다.

고죽 선생의 시를 좋아 합니다

내가 바로 고죽이니라

 

최경랑과 홍랑은 이렇게 만났다

당시 서른 다섯 살의 최경랑과 그 보다 훨씬 어린 것으로 짐작되는 홍랑

최경랑은 처자식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최경창의 부임지인 경성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그러나 둘의 첫 만남은 짧았다.

홍랑이 따라와 막중(幕中)에서 같이 지냈다

두 사람의 행로를 추적할 수 있는 기록은 최경창이 써 놓은 서첩의 서문에 있다

서첨에 의하면 “홍랑은 경성에서부터 쌍성(함경도 영흥)까지 며칠 길을 따라오다가 나와 이별하고 돌아가는 길에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고 비가 내렸다. 이곳에서 홍랑이 내게 시를 지어 보내왔다.”고 적어 놓고 있다.

이듬해 봄 내가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홍랑이 쌍성(영흥)까지 따라와 이별하였다.

 

묏버들에 가려 꺽어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홍랑-

 

折楊柳奇與千里人 절양류기여천리인

爲我試向庭前種 위아시향정전종

須知一夜新生葉 수지일야신생엽

憔悴愁眉是妾身 초췌수미시첩신

-최창경이 홍랑의 시를 한시로 번역한 것 飜方曲번방곡

 

 

당쟁, 시대와 타협하지 않은 고죽 최경창

1539년 전남 영암 구림마을에서 태어난 최경창

백광훈(白光勳 1573~1582)은 나중 3() 시인의 한 명으로 평가받을 만큼 뛰어난 시인으로 그가 남긴 옥봉집(玉峰集)최경창은 열 두 살 때부터 청련 이후백(1520(중종 15)~1578(선조 11)의 문하에서 글을 배운 것으로 되어 있다.

최경창은 약관이 되긷 전에 잉이, 이상해, 송익필, 최립, 백광훈 등 당대 쟁쟁한 문인들과 함께 팔문장으로 불렸다.

최경창은 24세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선조 129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관직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15976월 최경창이 종성부사로 임명되자 대관들이 이를 반대했지만 재능을 높이 평가하던 선조에 의해 임명은 강행되었다. 이처럼 왕의 신임을 얻고 있었지만 일부 대신의 평가는 달랐다. 서애 유성룡(1542~1607)도 부정적 평가를 했다. (선조실록 1573.11.23. / 11.26/ 1579.6.8.)

 

결국 최경창은 정언, 도평사, 영암군수 등 미관말직을 전전했다.

더욱이 동서 붕단이 시작되는 그 시점에서 고죽의 처신이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창기를 데려다가 첩으로 삼았는데도) 서인들이 그를 지우(知友)라 하여 그 사실을 비호하였습니다” (선조실록1579.6.8.)

최경창은 본래 당인으로 지목된 인물이 아니었으나 비번사 당상관에 선배들이 많았기에 그를 둘러싼 논쟁이 특히 준엄했다”(수정 선조실록 선조 12 1579 6.1 )

 

최경창은 성격이 강직하고 호방하면서도 시에 대한 의식의 투철하여 남의 눈치를 보거나 타협하기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당대 정치인과의 관계에서도 부정적 영향에 더해 성장에도 장애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최경창은 스스로를 고죽(孤竹)’, ‘외로운 대나무라 지칭한다.

 

 

感遇十首寄鄭季涵 감우십수기정계함

 

외로운 대나무 가지도 잎도 없이

바닷가 산 위에 몸을 붙여 산다네

해마다 서리와 눈에 묻힌 데다

벼랑에 내린 뿌리라 편안치 않네

이 재목을 어디 쓸 데가 있으랴만

귀한 것은 추위를 견딘 자태라네

 

 

送朝雲江 伯玉之任槐山  승조운강백옥지임괴산

直道難容世 직도난용세  곧은 도는 세상에서 용납되기 어려운데

微官且爲貧 미관차위빈  하찮은 관직 또한 가난 때문에 하시는 것

 

크게 쓰이지 못하고 지방으로 자천되어 가는 친구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고 있는 시지만 사실은 본인을 변호하는 시이기도 하다. 다시말해 나도 충분히 능력있는 사람인데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입장을 애둘러 표현한 것이라 본다.

 

최경창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여럿 있다 이중 고죽집 후서에 의하면

공은 후일 재상 된 이산해(李山海 1539(중종34)~1609(광해군 1)와 사이좋게 지냈으나 후에 그의 마음가짐이 공정하지 못함을 보고는 왕래를 끊었다

 

목숨건 사랑, 천리길을 건너다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있는 남학명의 회은집(晦隱集)에 의하면 최경창과 홍랑의 인연을 전하는 책이 한권 있다. 거기 두 사람의 재회와 죽고난 다음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영흥에서 헤어진 후  1년 뒤 

을해년에 내가 병이 들어 봄부터 겨을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홍랑이 이를 듣고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했다

밤낮을 칠일을 걸어 서울에 도착했다.

평안도 함경도 양계 지방민은 그 지역을 벗어나는 것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더욱이 홍랑은 관기(官妓)였고 1575년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국상이 있던 때였다..

兩界之禁 -조선시대 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출입을 금하는 제도

 

무제(無題)

임은 서울 계시고 첩은 양주에 살아

날마다 임 그리워 취루에 올라보면

방초는 짙어지고 버들은 쇠어가니

비낀 석양에 강물만 바라보는 빈 눈길

 

이 시에 대해 작가 이광이는 최경창이 홍랑이 되어서 쓴 시다. 앞 두 행은 정()이고, 뒤 두 행은 경()이다. 둘이 나란히 앉아 홍랑은 정을 쓰고, 고죽은 경을 쓴 것 같다. 그러면서 합일(合一)에 이른 듯한. 살아서 함께 하지 못한 많은 세월들이 죽어서는 흙이 되어 함께 묻혀있고...” 라고 칼럼(청절하고 담백한 시와 조선 최고의 로맨스)에서 쓰고 있다.

공감한다.

 

급기야 15765, 사헌부에서 최경창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홍랑 때문에 불거진 일이었다. 이 일로 최경창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積)에서 파직되고 말았다.

 

전적 최경창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 북방서 관비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불시에 데리고 와 버젓이 함께 사니 이는 너무 거리낌없는 행동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선조실록 1576.5.2.)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 돌아올까

홍랑은 경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기약없는 이별이었고 그런 홍랑에게 최경창이 시를 한 수 주었다(실은 두수다). 아무튼 이생의 마지막이었다.

 

증별(贈別)

 

相看永永 贈幽蘭 상간영영 증유난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운 난초를 건네노니

此去天涯 幾日還 차거천애 기일환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 돌아올까

莫唱咸關 舊時曲 막창함관 구시곡      함관의 옛노래는 부르지 마소

至今雲雨 暗靑山 지금운우 암청산      지금도 구름과 비에 푸른산이 어둑하니

증별(贈別()

옥 같은 뺨에 두 줄기 눈물로 봉성을 나서니

새벽 휘파람새도 이별을 알고 슬피 울어주네

비단적삼 좋은 말을 타고 강산 넘어 떠나는 길

저 멀리 아득한 풀빛만이 외로운 길 전송하네

 

시대의 금기를 뛰어 넘는 그들의 사랑

파직까지 감수한 최경창의 홍랑에 대한 사랑

 

최경창은 당대 조선의 시풍과는 다른 시세계를 보여 주었다. 체제나 국가에 대하 고민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고민 인간의 감정에 대해 솔직했다. 그 진정성이 그들의 만남을 말하고 사후에도 이어지는 것 아닐까.

 

고죽 최경창의 문집 고죽집에 수 수백여수가 전한다. 서문은 우암 송시열(宋時㤠) 썼고 후서는 박세채(朴世采)가 썼다.

고죽서 후서에는 최경창의 최후에 대한 짧은 기록이 전한다

 

직강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오는 도중, 종성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시신은 파주 선산(교하면 교할리)에 모셔졌다.

 

그런데 최경창이 죽은 후 홍랑은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병든 최경랑을 간호하고 서울에서 헤어진지 약 7년만이었다.

“(홍랑은) 최경창이 죽은 뒤에 자신의 용모를 훼손하고 파주에서 시묘하였다” -(회은집)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홍랑이) 최경창의 원고()를 짊어지고 피신하여 전쟁의 불길을 면하였다”-(회은집)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전쟁이 끝난 뒤 홍랑은 고죽의 유작을 해주최씨 문중에 전한 뒤에 그의 무덤 앞에서 자진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최경창의 시집 <고죽집>은 이런 곡절을 거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최경창은 사후에 정2품 이조판서에 추증됐고,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됐다. 강진의 서봉서원(瑞峯書院)에 모셔져 있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율하리에 고죽 최경창과 부인 임씨의 합장묘가 있고 그 아래 홍랑의 묘가 있다.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었던 홍랑의 순애보는 양반문중을 감동시켰고, 문중은 홍랑을 고죽의 무덤 아래 묻어 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다.  ‘최 즙’ 이라고 전해진다

한편 인터넷 신문 파주in에 따르면 "최경창 부부 합장묘와 홍랑의 묘는 원래는 월롱면 영태리에 있었는데, 1969년 선산이 군용지로 선정 되어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게 되었다고 하며 본래 있던 자리에는 미군부대가 들어섰는데, 지금은 부대도 떠나고 없다. 묘를 이장할 때, 홍랑의 무덤에서 옥으로 된 목걸이며 반지, 귀고리와 옷 등이 있었다는 얘기를 당시 이장(移葬)을 도와 일을 했던 그의 선친에게서 들었다는데, 이장을 하는 와중에 없어져버리고 지금 문중에 전해지는 유물이 없어 매우 안타깝다" 는 이야기를 8대째 다율리에 살고 있는 후손으로부터 전해들었다고 한다.

 

 

최경창(崔慶昌)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 전라도 영암 출생. 최충(崔冲)18대손이며 최자(崔滋)13대손이다. 아버지는 최수인(崔守仁)이다. 박순(朴淳)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최경창은 백광훈(白光勳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55(명종 10) 17세 때에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1561(명종 16) 23세 때부터 상상(上庠)에서 수학했다. 1568(선조 1)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됐다. 예조·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선조 8)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선조 9)영광군수로 좌천됐다. 이때에 뜻밖의 발령에 충격을 받고 사직했다. 그 뒤에 가난에 시달렸다. 다음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했다. 1582(선조 16) 5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별히 제수했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었고 대간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고치도록 명했다. 최경창은 상경 도중에 종성객관에서 죽었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최립(崔岦)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또한 정철(鄭澈서익(徐益) 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했다.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그의 시는 청절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얻었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송익필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다. 서화에도 뛰어났다.상훈과 추모숙종 때에 청백리에 녹선되고 강진(康津)의 서봉서원(瑞峯書院)에 봉향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고죽최경창론(최명환,동악어문논집17,1983)최경창의 시세계와 삶의 안정성에 대한 회의(안병학,태동고전연구2,1986)

 

 

고죽집(孤竹集)

조선전기 문인 최경창의 시 이소부사·번방곡등을 수록하여 1683년에 간행한 시집.

1(87). 목판본. 1683(숙종 9) 손자 진해(振海)가 수집하고 증손 석영(碩英)이 간행하였다.

책머리에 송시열(宋時烈)의 서()가 있다. 그 뒤에 권을 나누지 않은 시가 실려 있다. 모두 245수로 오언절구 33, 칠언절구 105, 오언율시 42, 칠언율시 30, 3·5·72, 오언고시 28, 칠언고시 5수이다.권말에는 부록으로, 최립(崔岦)정옥봉고죽집합간불가설(訂玉峯孤竹集合刊不可說), 이호민(李好閔)정조사주행촌소첩(呈詔使朱杏村小帖), 송한필(宋翰弼)제최종성문( 祭崔鍾城文), 신흠(申欽)옥봉전고서략(玉峯全稿序略), 박세채(朴世采)고죽시집후서(孤竹詩集後敍)등이 있고 끝에 이민서(李敏敍)의 발문이 붙어 있다.고죽집에는 최경창의 손자이며 이 책을 편집한 진해(振海)의 시집인 늑촌유고(櫟村遺稿)가 함께 실려 있다. 늑촌유고에는 오언절구 15, 칠언절구 47, 칠언율시 7수 등 모두 69수의 시와 남구만(南九萬)의 발문이 들어 있다.

, 고죽집고죽유고(孤竹遺稿)늑촌유고의 합책한 것이다.최경창은 조선 중기의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당시풍(唐詩風)을 진작하였다. 그리고 최경창은 팔문장(八文章)’에 들 정도로 문장과 학문에서도 일가를 이룬 문인이다. 이이(李珥)는 그의 시를 청신준일(淸新俊逸)’하다고 평가(송시열(宋時烈)의 고죽유고 서문)하였고 허균(許筠)청경(淸勁)’하다고 평가(허균(許筠)의 학산초담(鶴山樵談))하였다.이이와 허균의 평어들은 최경창 시의 신선하고도 활달한 면모를 지적한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시인들의 시와 비교될 수 있는 특징이다. 한편으로 그의 시는 차분한 필치로 붕당기(朋黨期)에 처한 지식인의 고민과 불만을 토로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피폐한 현실의 모습을 담고 있다.최경창의 이소부사(李少婦詞)와 같은 작품은 조선조 여인의 한()을 전형적으로 표출시켜놓았고, 번방곡(飜方曲)은 사랑하는 여인의 정감의 세계를 아름답게 그려내었다.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최경창의 시가 당시(唐詩)의 풍격에 상당히 접근된 것으로 평가된 것 같다.고죽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서문을 비롯하여, 수편의 부록문장들이 모두 서인(西人)측 인사들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최경창이 서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문집인 고죽집은 서인 집권기인 17세기 말엽에 이루어진 것 같다. 규장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高峰山齋

古郡無城郭(고군무성곽) 옛 고을이라 성곽은 없고

山齋有樹林(산재유수림) 산집이라 나무숲만 있네

蕭條人吏散(소조인리산) 쓸쓸히 사람과 관리 흩어진 뒤

隔水搗寒砧(격수도한침) 물 건너엔 겨울옷을 다듬이질하네

 

奉恩寺僧軸

三月廣陵花滿山(삼월광릉화만산) 삼월이라 광릉에는 꽃이 산에 가득한데

晴江歸路白雲間(청강귀로백운간) 맑은 강 따라 돌아가는 길은 흰 구름 속에 있네

舟中背指奉恩寺(주중배지봉은사) 배에서 등지고 봉은사를 가리키니

蜀魄數聲僧掩關(촉백수성승엄관) 소쩍새 몇 소리에 스님은 빗장을 내리네

 

白苧辭 백저사

憶在長安日(억재장안일) 서울에 있을 때를 추억해 보니

新裁白紵裙(신재백저군) 새로 하얀 모시 치마 지었네

別來那忍着(별래나인착) 이별한 뒤 어찌 차마 입을 수 있겠습니까?

歌舞不同君(가무부동군) 노래와 춤을 그대와 함께할 수 없는데

 

映月樓 영월루

玉檻秋來露氣淸(옥함추래로기청) 옥을 새긴 난간에 가을이 오니 이슬 기운 맑은데

水晶簾冷桂花明(수정렴랭계화명) 수정 발은 차갑고 계수나무 꽃은 밝네

鸞驂不至銀橋斷(난참부지은교단) 난새가 끄는 수레 오지 않고 은빛 다리 끊어졌으니

惆悵仙郞白髮生(추창선랑백발생) 슬프다, 선랑은 흰머리만 자라나네

 

楚調 초조

楚國傷讒日(초국상참일) 초나라에서 참소에 슬퍼하던 날

懷沙怨屈原(회사원굴원) 회사부(懷沙賦)로 원망하며 죽은 굴원아

湘江流不歇(상강류불헐) 상강의 물은 흘러 마르지 않는데

千載寄遺魂(천재기유혼) 천 년간 남긴 원혼만 붙여 놨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