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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사는 이야기

『핵풍』의 환경운동가 문승식을 추모하며

by 이성근 2020. 4. 30.

지난 27일 문승식 전 환경산업기술원 환경산업지원단장이  영면에 들었다. 난데 없는  소식 듣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큰 키에 큰눈망울을 가진 충청도 사내다. 2000년 이후엔 부산자원순환 관련 일로 가끔 내려 왔다. 어쩌다 그렇게 만나게 되면 형 하고 환하게 손 내밀던 그를 이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환경연합이란  곳을 떠나온 뒤 쉬 만나지 못했던 사람중의 한 명이지만, 또 만나면 그 거리감은 금방 지워지는 사이다.  예전 활동 인맥은 열에 아홉  그렇게 통하고  교감을 가지고 있다. 


고인은 우리나라 저탄소 생활 실천 제도 마련의 산증인이다.
20~30대 시절에는  공해추방운동연합 활동가로서 1990년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항쟁의 주역이었다. 안면도에 핵폐기물처분장 건설 계획 소식이 알려지자 그는 가장 먼저 달려가 지역 주민과 함께 안면도의 천혜의 자연을 지키고자 투쟁했다. ‘제2의 광주항쟁’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반핵운동을 이어간 이들은 결국 핵폐기장 계획을 백지화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핵풍』이라는 환경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문승식 전 본부장은 친환경상품진흥원과 환경산업기술원 등에서 활동하면서 「녹색 제품 구매촉진에 관한 법률」 제정을 이끌었고, 그린카드 제도를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환경운동이 추구하던 방향을 실생활에서 법률과 제도로 구현되도록 앞장선 자랑스러운 환경운동가였다. 고인을 추모하며 그시절 이야기가 있어 옮겨다 싣는다.  


秘錄환경운동25]안면도 반핵항쟁(1) 11·8대첩, 7일간의 드라마

안면도에 침투한 공추련 간사 문승식과 주민투쟁 이끈 건달들의 활약상

 

문승식(현 친환경상품진흥원 구매진흥국장)은 흥분을 억누르며 5일 간의 여정을 복기하고 있었다. 안면도와 태안반도를 이어주는 유일한 육로는 안면교였다. 이 다리를 끊으면 안면도는 육지와는 고립된, 말 그대로 이 된다.

 

날이 밝으면 대규모 경찰 병력이 이 연륙교를 통과해 안면도를 유린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깨질 것이냐, 저항할 것이냐. 깨지면 주민 조직은 와해되고 핵폐기장을 건설하려는 저들의 목적도 결국 달성될 것이다. 저항하면? 그 결과는알 수 없다.

 

안면도에서의 5일은 그에게 안면(安眠)이 아닌 불면(不眠)의 나날이었다. ‘주민조직 사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예까지 왔다. 주민들은 저항을 선택했다. 서울·대전으로 출장나간 지도부는 빈손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방금 상황실에서는 충남지사 면담을 끝낸 이들로부터 예정대로 집회 강행이라는 지침을 하달받았다.

 

이제는 싸움이다. 그것도 무조건 이겨야 하는 싸움이다. 패배는 파멸이고 죽음일 뿐이다. 어설픈 싸움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확실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경찰의 연륙교 진입을 막는 것일 터이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연륙교를 끊어버리고 안면도가 다시 고립된 섬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리고 주민들이 무장하는 것. 비밀 아지트에 모인 청년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아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연륙교를 폭파합시다.”

1990117일 늦은 밤 안면도핵폐기장건설결사반대투쟁위원회(이하 투위) 비밀집행부는 전대미문의 항전 계획을 수립했다. 연륙교 폭파, 자살조 투입, 도로 절단, 소방차 접수, 독극물 살포. ‘2의 광주항쟁’ ‘사노맹이 극찬한 민중봉기’ ‘80년 광주, 90년 안면도등의 수사(修辭)와 함께 반핵운동사에 굵은 획을 그은 11·8 안면도 반핵항쟁의 막은 이렇게 올랐다.


광주항쟁 이후 최악의 주민시위 사태로 꼽히는 안면도항쟁(반핵운동 진영은 안면도사태’ ‘안면도사건대신 이 표현을 즐겨 쓴다)은 양극단의 비화를 전하고 있다. 읍사무소가 주민에게 접수되고 공무원이 납치·감금·억류되며 지서가 방화로 전소된 것 등은 드러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엄청난 사태로 발전할 뻔했으며 주민들 스스로 그런 사태를 자제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노맹도 극찬한 2의 광주항쟁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 조직국 간사 문승식이 안면도에 침투한 것은 문제가 불거진 당일인 113일이었다. 안면도사태의 시작은 이 날자 한겨레신문보도였다. ‘안면도에 핵폐기물 영구처분장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전날 과학기술처(이하 과기처)원자력 제2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중·저준위 핵폐기물 영구처분장을 안면도에 건설하기로 했으며 9일께 열릴 제227차 원자력위원회(위원장 이승윤 부총리)에서 최종 확정하는 행정절차를 남겨두고 있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날 공추련은 즉각 대응에 착수, 석간신문 마감시간 전에 반대성명을 내고 보도자료를 각 언론사에 배포했다. 최열 의장(현 환경재단 대표)과 안병옥(현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박상철(현 환경운동연합 감사문승식 등 조직국 간사들이 이 숨가쁜 작업을 마친 때가 오전 11시쯤이었다.

 

이들은 이른 점심을 먹으면서 한숨을 돌린 뒤 현지에 파견할 간사로 문승식을 지목했다. 고향이 안면도와 인접한 태안군 남면 몽산포인데다 주민조직사업이 본업인 조직국 소속이니 그것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안면도 반핵항쟁을 이끈 투위 지도부 최규만, 공추련에서 파견된 문승식, 청년조직인 특공대의 김상희(왼쪽부터).

 

성균관대 산업심리학과 85학번인 그는 PD계열 학생운동권 출신이었다. 한창 노동해방을 꿈꾸며 의식을 갈고닦던 그를 변화시킨 것은 학내에 나붙은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의 대자보였다. 그것은 온산공해병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그는 노동운동·학생운동도 있지만 그 대자보가 가슴에 와 닿았다고 최근 회고했다. 그런 참에 고향에 대산석유화학공단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문연을 찾아가 최열을 만난 것이 반공해운동가의 길로 들어선 계기였다.

 

간단히 자료를 챙겨 귀향길에 오른 그가 안면도로 가는 길목인 서산에 도착한 것은 그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다. 그가 곧장 안면도로 가지 않고 서산을 경유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모교인 서령고가 있는 서산에는 지인이 많았다. 안면도에 가기 전에 우선 거기서 작업할 게 많았던 것이다.

 

주민 지원 사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주민과 정서적 일체감을 갖기 어려워 겉돌기 일쑤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외부세력으로 배척되는 예가 많기 때문이다. 안면도는 그의 고향인 남면과 같은 태안군이긴 하지만 정서적 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고, 미리 서산·태안·홍성 등 인근 지역의 지원체제를 갖춰둘 필요가 있었다.

 

뒷날 공추련이 낸 안면도 반핵항쟁자료집에 따르면 문승식이 서산에 내려간 그날 저녁 서산·태안공해추방운동협의회(회장 김기중, 이하 서태공추협)가 떴다. 이 조직은 이 지역 농민회·전교조·참일꾼청년회 등 운동권 성향의 단체로 이뤄진 만큼 상황 인식이나 대처 방향에 대한 의견 통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음날 이들은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낸 뒤 안면도로 향했다. 안면도는 중앙의 정보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운동성을 띤 단체도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지역 유력인사들을 중심으로 핵폐기장 소식이 전해져 반감이 조성돼 있긴 했지만 조직화된 상태는 아니었다.

 

안면도에서 주민을 규합할 수 있는 세력은 JC·로타리·라이온스·반도청년회 등 민간조직이었다. 이들이 주축이 돼 자발적으로 114일 구성한 조직이 안면도핵폐기장반대추진위원회(위원장 정충)였다. 보도에 의하면 안면도 핵폐기장은 9일 열리는 원자력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결정하게끔 돼 있었다. 불과 5일밖에 남지 않은 긴박한 상황에 추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띄울 정도로 긴장감이 약했던 것이다.

 

문승식과 서태공추협 인사들은 이들을 만나 안면도뿐 아니라 서산·태안, 그리고 홍성군까지 합심해서 싸워도 될까 말까한 일이라고 경각심을 불어넣었다. 특히 문승식은 자신이 서울의 공추련에서 파견됐음을 분명히 밝히고 중앙의 모든 반핵세력의 지원까지 받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벌금 5만 원에 끓어오른 불길

조직이 결성된 뒤 주민들의 반대운동은 일단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3일인 115일 주민 100여 명이 승언리에서 조계산까지 3거리를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조계산에서는 휴양림 조성 공사를 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를 핵폐기장 위장시설로 오해하고 공사를 중단시켰다. 이날 안면읍 이장 28명이 집단사표를 냈고 추진위는 투위로 확대개편됐다.

 

투위는 다음날 승언리 버스터미널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계획했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회에 참여시키기로 했고, 각 가구에서 한 명 이상은 꼭 나와야 하며, 불참 가구는 나중에 5만 원씩 벌금을 물리기로 했다. 하루 사이에 주민들은 눈에 띄게 격앙돼 있었다. 이제는 저절로 반핵의 불길이 타오르는 듯했다.

 

문승식은 차분하게 주민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는 서울의 공추련 상황실 및 서산의 서태공추협 사무실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상황을 보고하고 자료를 제공받았다. 공추련에는 김혜정 총무부장(현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등이 24시간 상황을 서고 있었고, 최열 의장도 수시로 정보와 지침을 내려주었다. 이처럼 안면도의 동향과 외부의 상황을 종합, 정확한 방향으로 싸움을 유도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가 볼 때는 투위는 부족한 구석이 있었다. 주민들은 핵폐기장에 대한 반감으로 들끓고 있었지만 지역유지들로 이뤄진 투위의 지도부가 투쟁을 주도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 즉 견고한 투쟁주체가 있어야 했다. 이 외진 섬에서 그런 세력이 있을 리 없고 단기간에 조직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묵고 있는 여관방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일단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안면읍에서 힘깨나 쓰는 주먹들인 이들의 등장으로 안면도 반핵항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당시 안면도에는 양대 라이벌 건달조직이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두 세력이 힘을 합치고 상당수가 그 후 건달 세계에서 손을 씻고 새 삶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1·8항쟁의 영웅가운데 한 명인 김상희가 그런 경우다. 안면읍 승언리가 고향인 그는 어릴 때부터 불량기가 있었다. 중학교 때 이미 술과 담배를 배웠다. 그가 본격적으로 운동을 배운 것도 담배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 가게의 담배를 훔치다 발각돼 실컷 얻어맞고 악이 받쳐 태권도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그는 태백이라는 서클을 만들었다. 나라의 등줄기인 태백산맥처럼 사회에 나가서 중요한 역할을 하자는 뜻이었지만 사실은 불량서클이었다. 기수마다 싸움 잘 하는 십수명씩으로 이뤄진 이 조직이 학교를 석권하자 반대파가 만들어졌다. 우정다방을 중심으로 모인 우정회였다. 그는 이 조직과 대판 싸움을 벌여 무기정학을 당했다.

 

그 뒤 그는 인천체대에 다니며 태권도 4단까지 오르는 등 뛰어난 기량을 보였으나 국가대표에는 이르지 못했다. 졸업 후 군복무를 위해 안면도로 귀향한 그는 태안읍을 근거지로 한 건달 조직에 몸담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그 동안 품어온 소박한 꿈을 실행했다. 체육관을 차려 후배를 키우는 것이었다. 안면읍에는 이미 체육관이 있었기 때문에 아래쪽 고남면으로 갔다. 그는 그 지역의 청년회장이자 실력자인 최규만(현 고남면 의용소방대장)을 관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사범으로서 체육관을 운영했다.

 

학생들 동원해 전경과 한판 붙고

건달 청년들의 방문에 문승식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는 생각했다. 이기기가 매우 어려운 싸움, 그렇지만 무조건 이겨야 하는 싸움인데 건달이면 어떻고 폭력배면 어떤가. 이들은 의지가 분명했다. 그를 찾아온 것도 지금의 투위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점에서 그와 뜻이 일치했다. 잠시 문승식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다음날 집회를 끌고 갈 전략을 짰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집회에는 벌금 5만 원 때문에 나온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런 군중으로는 안 된다. 결사대를 조직해야 한다. 전경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학생들을 동원해서 전경이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 거기서 한판 붙고그리고 깨진다. 이것이 그날 세운 작전이었다.”

 

아무리 건달이지만 오히려 이런 것이 그들에게는 더 겁나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들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경과 직접 붙어보고 선두에서 자녀들이 당하는 것을 보아야만 순박한 주민들도 안이한 생각에서 벗어나 비로소 적개심과 전의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승식은 말했다.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우리 서로 믿읍시다. 당신네들은 고향을 지켜야 하고 나는 이걸 막아야 합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4일인 116. 문승식의 예견은 적중했다. 학생들이 전과 다름없이 등교하고 있었다. 등교 대열에는 등교거부를 주도한 이장단의 자녀들도 끼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교문 앞에서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김상희가 동원한 서클 후배들이 미리 교문 앞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선생들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생들의 교문 진입을 막다가 300명쯤 모이자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김상희는 서클 회장과 3학년 반장을 앞세우고 결사반대라는 구호를 선창하며 운동장을 돌았다. 자연히 나머지도 그 뒤를 따랐고 그 후에 도착한 학생들까지 후미에 붙었다. 학생들이 모두 등교할 무렵 그는 선두를 집회장으로 이끌었다.

 

승언리 버스터미널 광장에는 20여 명의 건장한 학생들이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연단 앞에 도열해 있었다. 이들이 맨 앞에서 전경대와 싸울 결사대였다. 이날 집회장에는 각 학교에서 끌고나온 인원과 안면읍내, 북부의 창기리, 남부의 고남면 주민까지 6000여 명이 운집했다.

 

이날 집회는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지만 곳곳에 함정이 있었다. 투위 위원장은 질서를 강조하며 창기리 삼거리까지만 가두행진을 계획했고, 이 지역 국회의원인 박태권 의원(민자당)은 과기처가 말한대로 서해과학연구단지라고 주장했다. 정부와 충남도의 입장도 모호하게 전해져 주민들을 현혹시켰다.

 

안면도 반핵항쟁의 분수령이 된 이날 집회는 박 의원의 연설을 중단시키고 지도부의 창기리 회군을 저지한 문승식과 청년그룹의 뜻대로 진행됐다. 주민들은 연륙교에서 를 보고 분노했으며, 최루탄 맛을 보면서 공권력 앞에 군중의 의지가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 똑똑히 보았다.

 

5일인 117. 안면도 핵폐기장에 대한 유보설강행설이 나도는 가운데 주민들은 우왕좌왕했고, 투위도 양분되는 듯했다. 전날 박 의원의 연설을 중단시킨 문승식은 일부 주민으로부터 외부세력’ ‘운동권으로 공격받아 투위 상황실에서 철수, 청년그룹이 안전한 곳으로 빼돌렸다. 그곳이 투위와는 별도로 비밀 집행부 구실을 하게 됐다.

 

결국 과기처 장관과 충남지사 면담을 위해 떠난 최석칠 JC회장(현 안면도발전협의회장)과 최규만 고남청년회장 등 투위 지도부의 전갈을 통해 주민들은 미몽에서 깨어나 항전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날 안면읍사무소는 주민들에 의해 접수됐고, 투위 위원장도 그 자리에 없던 최석칠 회장으로 교체됐다.

 

이날 비밀집행부가 안면도의 남부·북부 건달조직과 손잡고 조직한 특공대의 작전계획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모래와 휘발유를 이용해 연륙교를 폭파하고 4명의 자살조가 분신한 상태에서 다리 아래로 투신한다는 것이 그 첫째였다. 자살조는 김상희 등 스턴트맨 경력이 있는 4명으로 구성됐다. 비록 방수복이나 구명조끼로 몸을 보호한 상태에서 뛰어내리는 속임수였지만 실제로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계획이었다.

 

이런 특공작전은 새벽녘에 귀향한 투위 지도부가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그들을 설득하다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모든 준비는 완료됐지만 승언리가 분담한 굴삭기 동원에는 끝내 실패했기 때문이다.

 

연륙교 폭파, 자살특공대 분신

D데이인 118. 특공작전의 핵심인 연륙교 폭파가 무산된 가운데 집회장인 승언리 버스터미널 광장에는 약 15000명의 주민이 모여들었다. 당시 안면도 인구가 약 17000명인 것을 감안하면 주민 전원이 나온 셈이다. 약국·주유소·병원·LPG가게 등 4개 업종 외에는 모든 상가가 문을 닫았다.

 

이날 벌어진 상황은 당시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핵폭발이었다. 연륙교 차단 시기를 놓친 특공대원들은 읍내 한전지사 앞 좁은 길목에 휘발유를 담은 드럼통, LPG가스통, 폐타이어 등을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쳤다. 또 대형 배수관 여러 개를 언덕 위에 설치, 여차하면 버팀목을 빼 아래로 굴릴 수 있게 했다. 이 바리케이드 앞에서 특공대원 300여 명과 연륙교를 통과한 전경 8개 중대가 대치한 때가 1130분쯤이었다.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 직후였다. 안면지서로 막 부임한 지서장 차량이 성난 군중에 의해 불타고 집회 동향을 감시하던 태안군 공보실장, 서산경찰서 정보과 형사 등 공무원 8명이 발각돼 특공대에 체포된 것이다. 특공대는 이들을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긴 뒤 휘발유를 뿌린 바리케이드의 드럼통 위에 굴비처럼 묶어 일렬로 세워놓았다.

 

경찰은 지서장의 차가 불타는 광경을 눈 뜨고 지켜보았다. 이런 상황에 격앙된 주민을 자극했다가는 그야말로 큰일이 날 판이었다. 이렇게 안전(?)을 확보한 군중들은 안면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상여를 앞세우고 조계산 공사장까지 행진, 현장사무실과 장비를 불태우고 집회장으로 돌아오는 등 예정된 시위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경찰의 진압 작전은 병원으로 옮긴 바리케이드 위의 공무원들이 헬기를 이용해 섬 밖으로 빠져나간 직후인 오후 555분께 시작됐다. 다연발탄이 발사되면서 바리케이드는 화염에 휩싸였고 5분 만에 저지선이 무너졌다. 경찰 진입 후 안면읍내는 전쟁터가 돼 버렸다. 군중은 전경대와 곳곳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경찰이 퇴각한 것은 오후 750분경. ‘전투는 계속됐지만 암흑 속에서는 지형지물에 밝은 시위대가 유리한 상황이었다. 예비군 중대본부 무기고가 있는 안면지서에 화염이 치솟은 것은 바로 이때였다.

 

[秘錄환경운동25] 불 타 없어질 뻔한 안면공화국

안면도 반핵항쟁(2)

자생적 반핵운동가의 운명적 등장과 거세게 몰아친 11·8항쟁의 후폭풍

 

안면도 시위사태가 진정된 1110일 그동안 수업을 거부했던 학생들이 눈바람을 맞으며 경운기를 타고 등교하고 있다.

        

최규만(현 고남수산냉동 대표)이 안면도로 낙향한 것은 25세 되던 해였다. 중학교 때부터 가수가 된답시고 헌 기타를 메고 다니던 그가 고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난 것은 그리 이상할 게 없었다. 별스러운 점은 한창 나이에 다시 낙향한 것이었다.   서울에서 그는 밤무대에 출연하면서 연예계 진출을 노렸다. 이런 생활을 하면 대개 낮에는 백수 아니면 건달이 된다. 그는 영등포 시장통에서 반건달 노릇을 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하지 않았으면 그는 계속 서울에 살았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면 태진아·현철처럼 늦깎이 가수가 됐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의 성격이나 기질로 보아 서울에서 자수성가했을 것이다. 신군부가 자연인 최규만의 이런 개인사를 바꿔놓았고, 그것이 안면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건달 세계에 있던 그는 신군부의 숙정 리스트에 올랐다. 객지에서 쫓기는 신세가 되자 비로소 고향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그에게 안면도는 불량배사회악이든 상관하지 않고 받아주는 마지막 도피처였다.

 

고향에서 피신 생활을 하며 시작한 것이 건재상이었다. 형이 운영하다 말아먹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단계에 차고 들어간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쓰러져가는 가게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한술 더 떠 크게 성공시켰다. 안면도에서 가장 큰 종합건재상을 운영하는 청년 유지대열에 올랐다. 이때가 199011월 안면도에 핵풍(核風)’이 몰아칠 무렵이었고, 그의 나이 고작 35세였다.

 

주민의 기대를 뛰어넘는 성과

안면도 고남면 오점마을 출신 최일권(현 농·어업 종사)의 운명도 범상찮다. 그의 부모는 딸만 내리 넷을 낳은 뒤 그를 얻었다. 안면중을 거쳐 서울 삼육고를 졸업한 그는 군복무를 마친 뒤 25세 되던 해에 속세를 등졌다. 남에게 말하지 못할 개인적 아픔과 방황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절에 가서 공부를 실컷 해보고 싶었다.

 

부산 승학산 덕명사 토굴 암자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빠르게 법문에 들었다. 6개월 만에 승주 송광사로 거처를 옮겼다. 법명은 설진(設眞), 당호는 자운영(紫雲英). 안면도에 핵풍이 상륙하기 전까지 그는 신심이 깊고 모범적인 ‘FM 스님으로 불렸다.

 

속세의 인연은 끊을 수 있지만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법인가. 29세 되던 199010월 말 설진 스님은 잠시 하산했다. 맏아들이 출가한 줄을 꿈에도 모르던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큰누나가 매형과 함께 배 사고로 죽은 뒤 처음 맞은 추석에 그는 고향에 성묘를 하러 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그가 중이 된 사실을 알았고 그 충격과 상심으로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큰스님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고 아버지 상을 치르고 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렇게 출가한 지 4년 만에 승복을 입고 귀향했다.

 

2003년 엄홍길 대장이 이끄는 히말라야 로체샤르(8400m) 원정대의 정상 공격조로 나섰다가 정상 정복을 150m 앞두고 눈사태에 휩쓸려 실종된 산악인 박주훈은 1967년 안면도 고남면 장곡리에서 태어났다. 고남초·안남중을 졸업한 그는 천안북일고를 다니던 중에 결혼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저지른 사고로 인해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1988년 검정고시를 통해 고교 과정을 마쳤다.

 

안면도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그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핵풍의 반경에서 벗어나 있던 그에게 뻗친 운명의 손길은 묘했다. 199011월 초 그는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 프라이드 승용차를 몰고 귀향길에 올랐다.

 

전두환 신군부가 불량배들을 잡아 삼청교육대에 보내지 않았다면, 설진 스님의 아버지가 좀 더 오래 살아계셨다면, 박주훈의 예비군 훈련 날짜가 며칠만 일렀다면그랬다면 안면도 사태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안면도의 승리는 199011·8시위로 표출된 주민 항쟁의 규모나 격렬함에 있었던 게 아니다. 최규만·최일권·박주훈 등과 같은 자생적 반핵운동가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핵폐기장 후보지인 고남면 반핵투사 3인방. 왼쪽부터 최규만, 최일권(설진 스님), 박주훈.

 

외견상 11·8항쟁은 안면도민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이날 시위의 1차적 목표는 다음날 열릴 원자력위원회의 안면도 핵폐기장 부지 결정을 막는 일이었고, 최종 목표는 핵폐기장 건설 계획의 완전 백지화였다. 일단 정부는 안면도민의 이런 요구를 수용하는 차원을 넘어 그 이상의 조치를 취했다.

 

정부는 118일 저녁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 강행 방침을 철회했다. 다음날에는 과기처 장관을 경질하고 충남도경국장을 직위해제했다. 지서·승용차·현장사무소·굴삭장비(포크레인)를 방화한 폭동 수준의 시위사태에 대해서도 김상희·김홍복·노정오·최규현 등 4명을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이 밖에 11·8사태와 관련해 사법처리한 주민은 8명이었다. 최석칠·명제관·김한중·원유현·김명천·강광석 등 6명이 불구속기소, 임남순·신형철이 지명수배됐다. 구속자들도 그해 1227일 금보석으로 석방된다. 나중에 사법처리되는 최규만·박주훈까지 포함한 이들 안면도 반핵항쟁 관련자들은 19933월 전원 사면된다.

 

그때는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안면도 사태에 개입했던 정치인들의 그 후 행보도 흥미롭다. 안면도민의 공적(公敵)이었던 심대평 충남지사(현 국민중심당 대표)는 뒷날 민선도지사를 지내면서 안면도를 각별히 배려하는 도정을 편다. 11·8사태 변호인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노무현 변호사(현 대통령)와 그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심대평 지사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이해찬 의원(전 국무총리)은 대통령과 총리로서 부안사태를 겪고 경주에 방폐장을 유치함으로써 역대 어느 정부도 못하던 원자력정책의 개가를 울린다.

안면도민이 11·8항쟁을 승리로 평가하는 까닭은 시위 규모나 양상, 장관 경질, 핵폐기장 유보조치 등 가시적인 성과 때문만이 아니다. 더 큰 폭력으로 발전할 뻔한 사태를 절묘하게 피한 데 있다는 게 항쟁 주역들의 후일담이다. 이 부분은 당시 정부가 11·8사태를 정치적으로 서둘러 봉합하는 바람에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당시 투쟁위 집행부, 특히 청년 중심의 특공대원(당시 공식적인 이름은 질서요원)의 작전은 무장봉기 수준이었다. 안면연륙교 폭파가 준비돼 있었고, 독극물 살포를 위한 소방차도 접수한 상태였다. 특공대를 최일선에서 진두지휘했던 김상희는 그때는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고, 말 그대로 전쟁 상황이었다고 최근 회고했다.

 

안면도는 안면송으로 유명한 소나무 숲과 해안의 백사장 등 수려한 자연경관뿐 아니라 쌀과 어족자원이 풍부해 자급자족이 가능한 섬이었다. ‘안면공화국 만세라는 구호를 쓴 마대자루 옷이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외부 불순세력 개입 의혹을 받은 이 구호를 생각해낸 이는 박주훈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연륙교 폭파계획에 많은 주민이 동조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핵폐기장을 받느니 차라리 육지와 단절하고 우리끼리살자는 뜻이었다.

 

특공대의 작전 중 또 하나는 소나무 숲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모기향을 이용해 시한장치를 만들어 주민들이 패배할 경우 발화한다는 계획이었다. 소나무 숲은 주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안면도의 명물이었다. “핵폐기장이 들어서면 안면도가 죽는데 송림을 다 태우고 같이 죽자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담은 작전이었다. 최일권에 따르면 실제로 시험에 성공했고, 실전에 사용할 모기향까지 준비해놓았다.

 

그런데 11·8항쟁 때는 이런 작전계획이 하나도 실행되지 않았다. 저지선의 인간 바리케이드라든가 지서 방화 등 외부에 알려진 사태는 오히려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그렇게 된 요인은 두 가지로 분석된다. 당시 작전의 일선에 있었던 김상희의 최근 회고.

 

그때 연륙교가 보수 중이었는데 난간 도면까지 입수한 상태였다. 고남에서 휘발유 섞은 모래를 드럼통에 담아 가지고 갔는데 전경들이 선수를 친 것이다. 연륙교 건너편에 있던 전경대가 아침을 먹고 들어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미 일부가 넘어와 창기리 참새골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굉장히 애석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이었다. 전경들이 일찍 들어오지 않았으면 큰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안면도가 다 불탈 뻔했다.”

 

경찰이 발 빠르게 대응함으로써 연륙교 점거에 실패한 특공대는 8후방에 있는 시위군중을 보호하는 게 급선무였다. 따라서 후속 작전도 무용지물이 됐다. 특공대는 퇴각에 퇴각을 거듭, 안면읍내로 들어가는 길목인 한전 안면출장소 앞 언덕에 겨우 바리케이드를 칠 수 있었다.

 

대형 참화를 막은 1차적 요인이 초동단계에서 기선을 잡은 경찰에 있었다면 2차적 요인은 주민들 몫이었다. 주민의 자율통제 기능이 기막히게 작동한 것이다. 즉 시위 효과는 극대화하면서 피해는 최소화하는 결과를 얻었다.

 

안면지서는 낡은 목조건물이었다. 곧 허물고 다시 지을 계획이었다. 주민들이 방화할 당시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와 지서 안의 서류는 이미 안전한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이 건물이 불탈 무렵 남쪽의 고남면 상황도 험악했다. 지서와 면사무소를 주민들이 접수한 상태였다. 뒤늦게 그 현장으로 달려갔던 최규만의 기억에 따르면.

 

안면지서가 불타는 것을 보고 고남 쪽으로 긴급히 갔는데 주민들이 면사무소와 지서에 휘발유를 다 뿌려놓고 있었다. ‘이건 남겨두자고 했다. 한꺼번에 다 써먹어버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느냐고 설득했다. 그래서 고남에서는 면사무소와 지서가 살았다.”

 

불타는 안면지서. 예비군 무기고의 무기와 지서 서류 등을 대피시킨 상태에서 주민들이 방화했다.

 

외부세력문승식의 대탈주

당시 후방에 있던 설진 스님은 전경의 진압작전이 시작된 뒤 군중의 혼란 상황을 목격했다. 1만 명이 넘는 군중이 협소한 읍내에 밀집한 것은 그 자체가 위험요소였다. 게다가 그와 박주훈·문승식(현 친환경상품진흥원 구매진흥구장) 등 후방 담당조가 고남면으로 가는 비석골의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다. 군중이 빠져나가 안면읍이 전경에게 점거돼 초토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의 최근 회고를 들어보면.

 

남고생은 전방에서 최루탄을 맞아가며 전경과 싸우도록 했고, 여고생과 중학생은 후방에 배치했다. 도망가려던 주민들은 비석골에서 스크럼을 짠 어린 학생들에게 막혔다. 학생들이 울면서 엄마·아빠, 고향을 살려주세요라고 외쳤다. 이렇게 퇴로가 막힌 읍내는 아수라장이 됐다. 이런 혼란 중에도 사망자는 물론 큰 부상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고, 약탈·절도 등이 한 건도 없었던 건 놀라웠다.”

 

유일한 외부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문승식이 수사선상에 오르지 않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11·8사태가 일어나던 날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에서 최열 의장(현 환경재단 대표)이 처음으로 현지에 내려왔다. 이날 그는 서산 집회에 참석해 연설한 후 안면도로 들어갔는데, 경찰이 외부인의 입도(入島)를 전면 통제하는 와중에도 무사통과했다. 이 즈음 경찰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위상이 높았던 셈이다.

 

안면도로 들어간 그는 청년그룹을 만났지만 문승식과는 소통하지 않았다. 문승식이 노출되면 주민들의 반핵항쟁에 대한 당국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공추련도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 공추련의 역할은 절묘했다. 핵 관련 정보, 정치권·정부의 동향, 운동 방법과 전략·전술, 언론플레이 등 모든 외곽 지원을 문승식을 통해 보이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우선 최열의 서산집회 연설 내용을 보면 안면도 주민 의식을 반핵으로 무장시킨 공추련의 논리를 엿볼 수 있다. 그의 기억을 빌리면.

 

핵폐기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 중 가장 무서운 것이다.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느낄 수 없다. 특히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플루토늄 2391g만으로도 인간 100만명이 폐암에 걸릴 수 있는 물질이다. 그리고 그 독성이 절반으로 주는 데 걸리는 기간이 24000년으로, 이론상으로 100만 년이 지나야 청산가리 정도로 독성이 줄어든다. 홍성은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인데 여기에 주민 몰래 이렇게 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걸 원래는 영덕에 추진하다가 주민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니까5000명이 모인 데서 이런 연설을 했다.”

 

안면도민에게 이런 논리가 그대로 이식돼 핵폐기장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불어넣은 것은 11·8사태의 전개 과정이 잘 말해준다. 뒷날 소설 형식으로 11·8항쟁의 전말을 정리한 핵풍’(문승식, 참빛출판사, 1994)에도 문승식을 고리로 한 공추련과 투쟁위의 커넥션이 잘 기술돼 있다. 주민과 투쟁위의 향방을 결정지은 11·6집회 상황을 인용하면.

 

상황실에 있던 진수(문승식을 지칭-필자 주)1030분 쯤에 공추련 최열 의장의 연락을 받았다. 오후 2시에 과기처 장관이 핵폐기장 설치문제와 관련된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인데, 잘 되어야 건설 계획을 유보한다는 조치를 내릴 것으로 보이니까 그 말에 주민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당부의 얘기였다.”

 

최열 의장의 예견은 적중했다. 당국의 교란작전에 투쟁위가 강·온파로 양분될 수 있는 상황이 되고 이날 집회·시위가 강경파인 문승식과 청년그룹의 주도로 강행됨으로써 대세가 갈리게 된다.

 

최대의 효과 거둔 최소 실력행사

 

경찰에 압수된 시위용품. 11·8시위는 투쟁위 집행부가 세운 작전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다시 11·8시위 후 문승식의 행적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날 상황 종료 후 그에게 닥친 시급한 과제는 무사히 안면도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쉽지 않았다. 연륙교가 봉쇄된 이상 그는 독안에 든 쥐였다. 유일한 도주로는 배를 띄우는 것인데 그것 역시 경찰에게 나 잡아 가슈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에는 경찰이 연행자를 조사하면 그의 존재가 드러날 것이고, 날이 새면 전경대와 형사들이 재진입해 섬 안을 이 잡듯이 뒤질 게 뻔했다. 그는 일단 고남으로 철수해 기회를 엿보았다. 그의 탈출을 책임지기로 한 이는 설진 스님과 박주훈이었다. 이들은 일단 고남면 소재지에 있는 조종오(작고)의 집에 그를 숨겼다.

 

안면도 반핵항쟁을 이끈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인 조종오는 다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한 몸이었지만 최규만과 설진 스님, 박주훈 등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투쟁을 뒷받침했다. 괄괄한 성격의 최규만과 정반대로 차분하고 온화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후배들을 다독거리는 역할을 했다. 특히 그의 다방에서 동원된 현금은 재정 면에서 윤활유가 됐다.

 

문승식은 조종오의 집에서 1박한 뒤 노출되기 쉬운 소재지에서 벗어나 장곡리 박주훈의 집에 은신하면서 배가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3일 후 그는 설진 스님이 마련한 배로 영목항을 떠나 홍성군 천북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일설에 따르면 최규만 등이 고남지서의 방화를 막아준 보답으로 지서에서 눈감아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어쨌든 대학생 200여 명이 주민으로 위장해 폭력시위를 일으켰다며 외부세력 색출에 나섰던 경찰은 대학생은커녕 안면도 주민이 아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잡지 못했다.

 

11·8 안면도항쟁은 민민운동 진영에서 반핵운동의 승리이자 주민운동의 모범적 사례로 회자됐다. 이 무렵 활기를 띠기 시작한 골프장 반대운동 등 주민운동 현장에 이런 플래카드가 나붙곤 했다. ‘안면도도 이겼다! 우리도 이기자!’

 

시위는 상대를 굴복시킬 정도의 실력행사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일 터이다. 너무 얌전하게 해서는 상대를 움직일 수 없고, 너무 무리하게 해서는 되레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이 점에서 11·8시위는 적정선을 지켰다. 못 쓰는 지서 건물을 태우는 등 최소한(?)의 실력행사로 주무장관을 경질시키는 등의 최대한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다만 주민들에게 아쉬운 것은 바리케이드를 불태울 때 당제를 지내던 소나무 고목도 함께 산화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안면도의 상징인 그 소나무가 자신을 불태워 안면도를 지켰다고 자위했다고 한다.

 

그런데이게 웬일인가.

최규만은 10년 동안 고향에서 땀 흘려 이룩한 부와 명예를 모두 날리고 빈털터리가 된다. 부친의 상을 치르러 잠시 속세로 나왔던 설진 스님은 산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환속한다.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고향에 왔던 박주훈도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조종오는 병마를 얻어 가장 먼저 이들 곁을 떠나게 된다. 안면도를 탈출해 무사히 공추련에 복귀한 문승식도 결국에는 공추련을 정리하고 안면도로 하방한다.

 

이들의 인생을 바꿀 11·8항쟁의 후폭풍이 안면도를 엄습했다. 그것은 더 강력하고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주간경향 2006.07.25./ 08.01


秘錄환경운동25]‘신화완성한 최후의 양심선언

안면도 반핵항쟁(3)

정부·주민유치위의 치밀한 작전과 분열된 반핵진영의 ‘5·16 여관 습격


   

안면도 핵폐기장 유치활동으로 주민과 갈등을 겪었던 김남영. 그의 양심선언으로 원자력 관련 기구는 큰 타격을 입고 주민 유치 조직은 완전히 와해, 안면도 반핵항쟁은 승리로 끝난다.

 

쨍그랑-.”

 

소주병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서산 현대장 여관 306호실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일단의 청년들이 여관에 난입해 투숙객들에게 깨진 소주병을 휘둘렀다. 침입자들은 분기탱천, 살기등등했고 여관방은 순식간에 유리 파편과 피, 고함, 비명으로 얼룩졌다.

 

1992516일 밤 10시께 고남면핵폐기물처분장설치반대투쟁위원회(위원장 최규만, 이하 고남면투쟁위)는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환경연구센터의 핵폐기장 유치 관련 서류를 확보하는 전과를 거둔다. 주민의 제보를 받고 여관을 급습, 비밀리에 작업 중이던 공작 서류일체를 빼앗은 것이다. 세간에 ‘5·16 현대장 여관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을 경찰은 서류탈취사건’, 고남면투쟁위는 서류압수사건이라고 불렀다

 

주민의 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안면도 2차 반핵항쟁의 분수령이 된 이 사건으로 박주훈(2003년 히말라야에서 실종)은 구속, 최규만(현 고남수산냉동 대표)은 불구속 기소된다. 최규만은 이 작전을 총지휘했고, 박주훈은 소주병을 깨는 등 현장 상황을 주도했다. 이들과 함께 간 편진범·김종익·전재진은 경찰 조사 후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반핵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11·8시위는 안면도 신화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일주일 간의 전투로 얻은 짧은 승리 뒤에는 그보다 더 험난한 25개월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처절한 전개와 상처투성이의 결말은 원자력정책과 반핵운동 양쪽에 크나큰 교훈을 남겼다.

 

공권력의 보루인 지서를 불태운 199011·8시위 후 정부는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을 포기한 듯 보였다. 지서가 불타고 약 한 시간 뒤인 그날 밤 9시 뉴스에 과기처 장관이 나와 주민들의 오해가 풀리지 않는 한 어떤 신규시설도 안면도에서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7개월 후인 199167일 원자력위원회는 제227차 회의를 열어 2원자력연구소 건설부지 선정방침 철회안을 가결했다. 주무장관이 구두로 행한 취소 약속을 사후적으로 공식화하는 절차까지 밟은 것이다.

 

이로써 안면도 사태는 외견상 완전히 마무리됐다. 11·8시위로 인한 구속자의 석방과 핵폐기장 백지화 결정의 문서화 등 주민들의 요구가 모두 관철됐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승리를 자축하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운동의 비극적 속성이다. 주민이 정부와 싸우는 것은 달걀로 바위 치기에 비유될 수 있다. 주민이 법과 행정력, 경찰력, 자금력 등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정부에 대항할 수단은 단합 말고는 없다. 주민은 목적이 달성된 뒤 각자 생업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정부는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함정이 있었다. 전제조건이 붙은 말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반드시 뒤집어서 생각해봐야 한다. ‘주민들의 오해가 풀리지 않는 한주민의 오해가 풀리면으로 바꿔놓고 보면 뒤의 말은 긍정문이 된다. 즉 정부가 안면도민의 오해를 푸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된다면그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이런 불길한 생각이 현실로 나타난 것은 원자력위원회의 공식철회 결정이 있은 지 고작 한 달 남짓 지났을 때였다. 1991716일 충남대 사회과학대학이 핵폐기장과 관련한 설문조사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면도민에게 알려졌다. 이 조사는 과기처가 서울대 인구및발전문제연구소에 용역의뢰한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부지선정 및 지역지원에 관한 연구의 일환으로, 충남대는 안면도를 담당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정부가 안면도 핵폐기장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벌어질 일은 뻔하다. 정부의 여론 수렴은 반핵진영에는 주민 분열이다. ‘주민 설득은 곧 회유 공작이다. 실제로 그랬다. 안면도는 걷잡을 수 없는 내부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최규만 고남면투쟁위원장의 당시 모습과 만화가 신영식이 그린 박주훈 캐리커쳐, 공추련에서 지원활동을 하다가 아예 안면도로 주민등록을 옮기고 투위에 합류하는 문승식(왼쪽부터).

 

쓰레기통에 처박힌 철회 결정

11·8항쟁과 그 후 수습을 주도한 지도부는 지역 유지들이었다. 순수한 주민조직으로서 반핵운동을 전문적으로 이끌어갈 의지와 역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찬핵진영은 안이하게 대응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거울삼아 면밀한 전략·전술과 모든 가용 자원을 총동원할 것이 분명했다. 그야말로 프로와 아마추어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지역운동이나 주민운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아이러니가 있다. 치열한 싸움 가운데서 영웅이 탄생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영웅은 훼절·변절·좌절하거나 고립되기 쉽다. 전쟁터의 영웅은 일상으로 돌아오면 더 이상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면도도 그랬다. 11·8항쟁 지도부의 태도가 이상해지기 시작했고 김상희 등 구속된 영웅들도 어쩐 일인지 취직이 차단되는 등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

 

이런 와중에 11·8항쟁을 지도했던 안면도투쟁위는 1991102일 안면읍투쟁위와 고남면투쟁위로 양분된다. 외적으로는 조직의 확대개편이었지만 사실상 분열의 전주곡이었다. 안면읍투쟁위가 위원장의 타협적이고 온건한 태도로 인해 무력화되는 길을 걷기 때문이다. 핵폐기장 예정부지인 고남면에도 묘한 기류가 흐르면서 주민 간에 불화가 시작됐다.

 

대학의 연구 용역이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의 오해를 푸는작업을 하던 정부도 슬슬 본심을 드러냈다. 19911119일 과기처는 핵폐기장 후보지를 7개 지역으로 축소 발표하면서 안면도를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런데 묘한 사족을 달았다.

그러나 안면도도 대다수의 주민이 합의해올 경우 고려할 것이다.”

 

한 달여 후인 1227일 서울대 연구 용역 결과 발표 때는 아예 강원 고성·양양, 경북 울진·영일, 전남 장흥과 함께 안면도가 위치한 충남 태안을 협의대상 지역에 포함시켰다. 6개월 전 원자력위원회가 의결한 공식 철회 결정을 역시 공식적으로쓰레기통에 내동댕이친 셈이었다.

 

이 무렵 안면도 반핵운동은 크게 약화돼 있었다. 안면읍투쟁위는 무력화되고 고남면투쟁위가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일부 주민이 유치활동에 나서는 상황이었다. 1992년 들어서는 3·24총선정국이 지역사회를 휩쓸면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반핵활동도 중단되고 말았다. 이런 답답한 국면을 타개한 것이 바로 ‘5·16 현대장 여관 사건이었다.

 

지역반핵운동을 연구한 박재묵 박사(현 충남대 교수·사회학)는 안면도 반핵운동의 특징을 치열성의 수준이 매우 높은 점에서 찾고 있다. 그는 치열성이 가장 고조된 시기를 11·8항쟁과 ‘5·16 현대장 여관 사건으로 꼽고 있는데, 그 강도에 있어서는 11·8(41)보다 5·16(84)을 더 높게 평가했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199011월이 아닌 19925월에 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것은 뒤의 시기가 서류탈취사건이 일어난 직후로 주민 내부의 갈등이 거의 매일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면도의 반핵운동은 특정의 쟁점이 주어진 시기에 집중적이고 폭발적인 형태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박재묵, 지역반핵운동과 주민 참여,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1995)

 

안면도 반핵항쟁의 중요한 성공 요인이 치열성에 있다면 이를 주도한 인물은 단연 최규만 고남면투쟁위원장이다. 그는 자신처럼 운명에 이끌려 귀향한 박주훈과 설진 스님(속명 최일권, 현 고남에서 농·어업 종사) 등과 함께 고군분투했다.

 

그는 성격이 매우 급하고 고집이 셌다. 그의 독선적인 면모는 안면도뿐 아니라 태안읍·서산시에서도 알아주었다. 이런 기질은 좋게 보면 뚝심과 추진력으로 나타난다. 안면도 반핵항쟁을 지원한 서울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의 김혜정(현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그렇게 터프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면서 그런 점이 핵폐기장 저지운동의 동력이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찬핵 진영의 회유 공작과 반전

‘5·16 현대장 여관 사건을 주도한 박주훈 역시 소주병을 깰 정도로 격정적인 성격이었다. 핵폐기장 문제 때문에 다니던 직장까지 내팽개친 그가 구속당하자 그의 부친 박갑순씨(전 안남중 교사)가 최규만 위원장을 찾아왔다. 항의하러 온 줄 알고 단단히 각오하고 있던 최 위원장은 다음과 같은 박씨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나에게 아들이 둘 있으니 투쟁위원회에 데려다 쓰시오.”

 

안면도 2차항쟁 상황실에 모인 주민들.

박주훈은 실종되기 3개월 전인 20035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50m)를 정복하는 등 산악인으로서 기개를 떨쳤지만 안면도에 머무는 동안은 열렬한 반핵운동가였다. 당시 안면도를 비롯한 6개 후보지역은 어떤 점에서는 경쟁관계였다. 어느 한 쪽이 후보지로 선정되면 자기 지역은 승리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문승식(현 친환경상품진흥원 구매진흥국장)주훈이는 6개 후보지역 연대조직 결성에 앞장서는 등 지역을 뛰어넘는 반핵활동을 벌였다고 최근 회고했다.

 

부친상을 치르러 하산했던 설진 스님도 핵폐기장에 발목 잡혀 부처님에게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박주훈이 압수한 서류에 부모를 여읜 중학생 조카의 도장까지 찍혀 있는 것을 보고 흥분해 그 담당자가 운영하는 이발소를 때려부쉈다. 막노동으로 벌어 그 벌금을 갚아준 때가 핵폐기장 사태가 마무리된 1993년 초였다. 그때서야 다시 절로 돌아갔지만 돌볼 사람이 없는 어린 동생과 조카 때문에 199610월 환속했다.

 

이들 3명과 상황실장 조종오(작고), 공추련에서 수시로 지원차 내려온 문승식 등이 안면도 2차 반핵항쟁을 이끈 고남면투쟁위의 핵심 주역이다. 나중에 문승식은 아예 공추련을 정리하고 안면도로 주소지를 옮겨 가두리양식장을 하며 반핵활동에 올인했다.

 

2차 항쟁은 치열함은 무엇보다 내부 갈등에 있었다. 주민 일부가 충남대·원자력연구소·서산경찰서 등과 은밀히 내통하며 유치활동을 벌이면서였다. 이들의 유치활동이 알려진 것은 19911022일이었다. 고남면 주민 53명이 과기처에 유치신청서를 제출한 것이다. 고남면투쟁위는 이들에 대한 강도 높은 설득과 협박 등으로 53명 중 41명이 철회서에 서명해 과기처에 전달케 했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5·16 현대장 여관 사건은 그 동안 설로만 떠돌던 찬핵 진영의 회유 공작을 주민들에게 확인시켜 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압수한 서류는 유치서명 담당자 명단, 주민 접대용으로 보이는 대전·유성지역의 술집 명단, 유치 찬성서명 연명부 및 반핵대책지원반 활동 서식 등이었다.

 

최규만을 비롯한 고남면투쟁위는 주민들의 배신행위에 강력하게 대처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치선동자에게 내려지는 제압조치였다. 그것은 애경사 때 조문이나 하객으로 가지 말고 초상 때 동네 상여를 빌려주지 않으며 유치선동자 자녀와 혼사 등 제반문제를 견제하며 계나 부녀회 등 모든 모임에서 제외시키고 일체의 상거래를 금지하는 조치’(전재진, 핵 그리고 안면도 항쟁, 충남저널, 1993)였다. 실제로 한 유치신청자의 장례식에 상여가 대여되지 않아 상주가 이장을 고소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고남면에는 남자들이 다 구속되면 여자들이 나서겠다는 결의로 여성투쟁위원회(위원장 홍설자)가 조직됐는데 이들이 안면농협 고남지소로 몰려가 유치신청자 자녀의 해고를 요구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최규만에 따르면 유치활동 의혹을 산 유지나 주민을 하나씩 소환해 인민재판식 청문회를 열기도 했다. 이밖에 쌍방간에 전화 협박, 인분 투척, 고소, 폭력 등으로 지역공동체는 회복하기 힘든 갈등으로 치달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고남면투쟁위가 거둔 가장 큰 성과는 유치신청자의 활동에 제동을 건 것이었다. 도덕적 상처를 입은 원자력연구소 측도 활동력이 약화됐다. 이런 상황에 투쟁위가 할 수 있는 것은 역공작이었다. 그것이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1993118일 터진 김남영 양심선언이었다.

 

김남영(현 농업 종사)은 강준길(현 어업 종사)과 함께 안면도에 ‘2차 핵풍을 부른 장본인이었다. 핵폐기장 유치에 앞장서서 투쟁위·주민과 가장 큰 갈등을 일으킨 당사자였다. 하지만 이들은 ‘5·16 현대장 여관 사건이후 원자력연구소와 투쟁위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일으켰다.

 

나는 유치 공작의 총알받이였다

 

투쟁위 측에 서서 양심선언을 했다가 다시 원자력연구소 측에 서서 신변위협에 의한 것이라는 기자회견을 하는 등 공황상태에 빠진 김남영은 결국 나는 속았다. 나는 핵폐기장 유치 공작의 총알받이였다면서 안면도 사태에 종지부를 찍는 양심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찬핵 원흉에서 반핵 영웅으로 극적인 반전을 이루는 것이다.

 

문승식이 3·24총선을 통해 서산·태안에서 당선된 장기욱 의원(현 변호사) 측과 손발을 맞춰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결행한 이 양심선언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김남영은 양심선언을 통해 유치신청에 착수하게 된 배경과 원자력연구소의 활동 내용, 금품 제공과 혜택 내역 등을 낱낱이 밝혔다. 이로써 원자력 관련기구의 도덕적 정당성은 결정타를 맞았고, 유치신청위원회는 완전히 붕괴됐다.

 

199339일 새로 출범한 김영삼 정부의 김시중 과기처 장관(현 고려대 명예교수)안면도는 원자력위원회 제227차 회의에서 철회한 지역이므로 주민 90% 이상이 찬성하지 않으면 핵폐기물처분장을 설치하지 않겠다고 발언했다. 비록 공식적인 철회는 아니었지만 고남면투쟁위는 이 발언을 전략적 차원에서 승리로 받아들였다.

 

투쟁위는 보름 후인 325안면도 핵폐기장 백지화 승리 기념 주민화합 큰잔치를 열었다. 김 장관의 발언을 기정사실화하고 지역주민 사회에 승리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시위였다. 김남영·강준길은 이 자리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스스로 낸 생채기를 스스로 치유하려는 노력, 이것이 안면도 신화’ ‘안면도 승리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라고 할 것이다.

 

11.8 안면도 반핵항쟁 1990118일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설치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안면읍 터미널에 모여 반대운동을 펼쳤다. 정대희 오마이뉴스


    


2의 반핵운동 핵폐기물처리장 설치사업 총괄을 해오던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설 원자력환경관리센터가 안면도 지역 주민들 중 유치찬성자를 확대 꾀하기 위해 은밀히 유치작업을 벌여온 사실이 1992516일 현대장 여관 사건으로 공개됐다. 정대희 오마이뉴스


[반론보도문]2006.08.22뉴스메이커 688

686호 본 시리즈 안면도 반핵항쟁(3) ‘신화완성한 최후의 양심선언기사에 대해 김남영씨(현 안면고남농산 대표)가 반론을 제기해왔습니다.

 

먼저 기사 내용 중 안면도에 2차 핵풍을 부른 장본인’ ‘핵폐기장 유치에 앞장서서 투쟁위·주민과 가장 큰 갈등을 일으킨 당사자’ ‘찬핵 원흉에서 반핵 영웅으로등의 표현이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습니다. 김씨와 강준길씨는 핵폐기장 유치에 앞장선 것이 아니라 안면도 유지급 및 많은 주민이 유치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찬성 입장을 가졌을 뿐 찬핵이 아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김씨가 양심선언을 하게 된 배경이 투쟁위와 원자력연구소 사이에서 내면적 갈등을 일으켜서가 아니라 당시 강모 이장 등이 핵폐기장 유치 찬성 쪽으로 기울면서 주민 내부의 갈등이 증폭되자 찬성측 주민에게 하지 말 것을 권유하다 듣지 않아 이런 갈등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이 양심선언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고 합니다.

 

1993325일 열린 안면도 핵폐기장 백지화 승리 기념 주민화합 큰잔치에서 감사패를 받았다는 기사 내용도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습니다. 감사패를 받을 이유도 없고, 받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당사자와 주변 증언으로 확인됐으므로 제686호 본 시리즈 기사에 김씨의 위 반론 내용을 반영하고 이 부분을 정정합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서태환경연합의 해안사구 살리기

 

해안사구 보호에 앞장선 이평주 서태환경연합 사무국장

 

안면도가 소속된 태안군은 서산시와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고 있다. 태안군은 1989년 서산이 시로 승격되면서 복군(復郡)되기 이전 서산군에 속하기도 했다. 서산(瑞山태안(泰安안면(安眠)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 이 지역은 상서롭고 편안한 곳, 즉 환경이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도 개발 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환경 파괴가 심하다. 서산·태안환경운동연합(이하 서태환경연합)의 탄생 과정이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서태환경연합의 창립 주역 중에는 외지에서 활동하다 귀향한 인사들이 유독 많다. 안면도 반핵항쟁의 주역 최규만이 그렇고, 남현우 변호사(현 서태환경연합 고문)1989년 사법연수원 시절 환경법학회 소속으로 공추련 배움마당 출신이다. 이근수 교수(현 서태환경연합 고문)는 이화여대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다 정년퇴임했다. 이들 창립 주역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활동가로 성장한 인물이 이평주(현 서태환경연합 사무국장)라고 할 수 있다.

 

서산시 대산읍 독곶 출신인 이평주는 경희대 조경학과 83학번이다. 그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재학 중 골프장 조경 아르바이트를 하면서였다. 거기서 골프장 실태조사를 나온 공추련 활동가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 골프장에 문제가 많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고 뒤늦게 환경문제에 눈뜬 것이다.

 

그 역시 안면도 사태로 인해 고향에 내려와 정착하게 됐다. 안면도 항쟁을 바깥에서 지원한 서산·태안지역공해추방운동협의회(이하 서태공추협)의 김기중 회장을 만난 그는 고향 독곶에 조성되는 대산공단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는 주민들을 규합해 독곶공해대책위원회(뒤에 대산공해책위로 개칭)를 결성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1993년부터 서태공추협 등과 자연스럽게 결합, 이듬해 서태환경연합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서산·태안은 안면도 반핵항쟁 이전에도 많은 환경 피해를 겪었다. 대산공단 공해 외에도 한국유리 정사공장으로 인한 방포 앞바다 어장 피해, 서산 A·B지구 간척사업이 부른 천수만의 황폐화 등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중반 27000명이 넘던 안면도 인구가 반핵항쟁 당시 17000여명으로 급감할 정도로 이농이 심했던 데는 환경문제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

 

서태환경연합이 주력하는 특징적인 활동은 해안사구 보호운동이다. 유럽 등 선진국은 가장 민감한 생태환경 영역인 해안사구 보호에 각별한 배려를 하고 있다. 해안사구는 흡수력이 뛰어나 해풍이나 파도에 밀려온 모래를 해변에 공급하고 짠물의 침입을 막아 지하수를 보호하는 등 주민생활 터전을 지켜주는 구실도 한다. 태안반도에는 이러한 해안사구가 널리 분포돼 있지만 각종 개발과 무지로 급격하게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예 전업 환경운동가의 길로 나선 이평주는 2000년 국제꽃박람회에 대비해 건설하는 안면도 해안관광도로가 사구를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단신으로 무기한 현장 천막농성을 벌여 기어이 노선을 변경시키기도 했다.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은 예전에 설치한 옹벽 때문에 지금도 해마다 많은 모래가 유실되는 실정이다. 서태환경연합은 무분별하게 축조된 해안옹벽을 허물자는 주장과 함께 모래포집기 설치를 제안, 좋은 결과를 얻고 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2006.08.08뉴스메이커 686




[안병옥] [오전 8:32] 문승식 군이 어제밤 9시경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구자상] [오전 8:37] 뭐라고  이기 무슨
[김현주] [오전 8:37] 톡을 보자마자 황당함을 감출수 없네요 다들 잘 지내신다고만 생각했는데..안타까운 소식이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성실] [오전 8:39] 아이고ᆢ 본인도  가족도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요.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ㆍ
[신진옥] [오전 8:40] 안타까운 일입니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가슴이 무너집니다.
[장춘학] [오전 8:4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박숙현(유빈-민우)] [오전 8:45] 편찮으시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는데 병문안 한번 못 가 뵈었는데... 이렇게 부고를 들으니 너무 안타깝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박미경] [오전 8:46] 맘이 아프네요. 너무 안타깝습니다. 안식하셨기를...
[조수자] [오전 8:50] 이게 무슨소리?. 안타깝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위의환] [오전 8:54]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투쟁에서 열일 했던 기억이 생생한 데 인생 무상이로구나. 천상세계에서 안식하길 비나이다.
[유미경] [오전 8:56] 함께 봤던 기억이 생생한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안식하길 기도합니다
[박찬석] [오전 8:56] 사진
[김근배] [오전 8:57] 너무 안타까운 소식이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은희] [오전 9:00] 제 기억속에는 아직 젊고 씩씩한 활동가로남아있는데 먼저 떠났다니 슬프고 가슴아프네요 고단한몸 편히쉬시길~~~~
[서희순] [오전 9:01]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밝게 웃으며 열성적으로 일하던 모습 떠오르네요 마음아픕니다..
[노 혜경] [오전 9:03] 멍 하네요. 무슨 말을 해야할지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영란] [오전 9:06]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언제나 웃으며 주변사람 배려하던  승식씨 모습 기억하겠습니다
[황상규] [오전 9:13] 아~~ 곧 일어나리라 믿었는데...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혜정] [오전 9:19]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삼가 머리숙여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두연] [오전 9:19]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밝고 건강하고 활동적이었던 분이셨는데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김호철] [오전 9:20]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선하고 유능한 우리 동료가 떠나다니...
[이영란] [오전 9:33]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류정란] [오전 9:49] 아~ 너무  충격이 크네요. 잘 살고 있으리라 믿고 있었는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밝고 맑은 미소 기억하겠습니다!
[김선종] [오전 9:55] 아 승식이 아프단 소리만 들었는데 못봐 미안하네
[이성근] [오전 10:01] 아이고 이 무슨
[유수훈] [오전 10:0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해야할 일이 많은 친군데 이제 평안히 쉬시길...
[박상철] [오전 10:06] 승식아 너무 마음이 아프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거라.  오늘 저녁에 인사하러 갈께.

[임낙평] [오전 10:28] 너무 가슴아픈 소식이네요. 몇년 전 아프다는 소식을 접하긴 했습니다. 통화라도 해보려고 연락했습니다만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에도 통화를 시도했습니다만...... 결국 떠나고 말았네요. 안타깝고 애통합니다. 언젠가 광주 출장왔을 때 만났는데...그게 마지막이었네요.  문승식 후배님. 유난히 정이 많았던 친구인데.....안녕히 잘 가소. 그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곽정은] [오전 10:44] 갑작스런 비보에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위의환] [오전 10:45] 차 수확을 하고 있어 조문을 가고 싶어도 형편이 안되니 작은 조위금이라도 보내고 싶으니 조의금 전달할 계좌 부탁드립니다.
[최인화] [오전 10:54] 언제부터 어디가 편챦으셨다는건지... 너무 갑작스럽군요. 부디 아프지 않은 곳에서 편안히 쉬시길 바랍니다.
[한명숙] [오전 11:16] 놀랍고 슬픈 소식이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choiyeyong] [오전 11:50] 본인을 만날수 없어 간간이 승식이가 일했던 환경산업기술원 사람들에게 안부를 물었는데   승식이네집이 기술원 근방이라 가끔 지나치는데 몰라본다고 안타까워 하더하구요...  안병옥선배가 차관 임명되어 한잔할때 좋아하고 할말도 많고 그런다고 했었고, 가습기살균제 문제도 기술원이 맡아서 잘해보겠다고 몇번 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반핵투사 공추련오비 문승식이 먼저 갔네요... 시간되는 분들은 비슷한 시간에 문상가서 조문하고 서로 얼굴도 보고 그러죠
제안시간: 4월28화 오후9시 가톨릭대 은평성모병원 장례식장 7호

그리고 공추련 공동으로 조의금을 모아서 전달하자고 조금전 안병옥선배와 의견나눴습니다 내시는 분들 공동봉투에 개별이름과 조의금을 적어둘게요

화욜 저녁9시에 오실분이나 조의금을 송금하실분 여기에 댓글로 알려주세요  통장번호: 우리은행 124-07-079008(최예용)
[이상훈] [오전 11:59]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문 후  화요일 밤 9시에 같이 하겠습니다.
[이덕희] [오후 12:09]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나이다
[박종권] [오후 12:11] 안타깝네요.명복을 빕니다. 우째 이런일이..
[박찬석] [오후 12:14] 예전에 승식이가 쓴 책이 하나 있습니다. '핵풍核風'으로 기억하는데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신가요?
[이근행] [오후 3:22] 이근행, 주선희는 점심때 장례식장 다녀왔습니다. 홍혜란님도 함께, 그리고 구자인님이 부탁한 조의금도 전했습니다. 아들이 찍어주었다는 영정 사진은 우리가 기억하는 환한 승식이가 맞아주었습니다. 20대 후반부터 함께 활동하던 친구를 이렇게 먼저 보내네요...
주된 활동공간이 다르다보니 저도 승식이 얼굴 본 지 5년도 넘었는데 이후로 몸이 안좋단 얘기, 사람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얘기 들었는데 2,3년 사이에 오히려 건장했던 몸이라 더욱 쇠약해지고 노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은 잠이 들었다가 편히 눈감았다고 합니다.

지난 주에는 갓 50넘은 연구활동가 후배 문상을 다녀왔는데, 주변 지인들의 안타까운 소식 들려오면 우리도 그렇게 가는구나, 하루하루 감사하며 옳게 살아야지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익숙해진 일상에 파묻힙니다. 안면도 바람아래 너른 백사장에서 소금 뿌려 갯것 잡으며 껄껄대던 친구 문승식을 기억합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이시재] [오후 4:39] 왠일이냐.. 세상에...놀랍고 두렵네요.  명복을 빕니다.


R.E.M. - Wicked Game

(studio version) Original by Chris Isa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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