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나비 몽양의 붉은사랑, 진옥출 저자 최산|목선재 |2021.12.
저자 : 최산-고려대학교 법학과와 UCLA 정치학과에서 학사와 박사 과정을 마친 후 정치학 교수로 살아왔다. 그동안 한국의 정치제도 개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학술 활동과 시민사회운동에 특별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정치경영연구소와 비례대표제포럼 등의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고, 정치 개혁 강연이라면 전국 어디든 달려갔으며, 수년간 신문 칼럼도 연재했고, 정치가와 정당의 정치 개혁안 작성에도 적극 참여했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 쟁점들에 관한 책도 여럿 저술했고, 심지어는 소설을 써보기도 했다.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대중이 쉽고 편하게, 그리고 가급적이면 재미까지 느껴가며 이해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2018년에 출간된 『청년의인당』이 바로 그 소설이었다. 하지만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읽지 않으니 개혁여론 조성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책은 소설의 형식을 빌린 정치 개혁 팸플릿에 가깝다는 평을 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걸 쓰며 ‘소설 쓰기의 맛’을 알아버렸다. 글을 쓰면서 처음 느껴 보는 자유와 해방감, 충일감 등에 스스로 놀랐던 것이다. 그 이유 하나만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그는 그 책이 나 온 2년 후 전업 작가로 살겠다며 조기 퇴직을 하고 학교를 나왔다. 최산崔刪은 남은 평생 동안 스스로를 ‘깎으며(刪하며)’ 살겠다는 의지가 담긴 그의 필명이다. 『파란 나비-몽양의 붉은사랑, 진옥출』은 최산의 첫 ‘순수’ 문학작품이다.
목차
프롤로그 5
1장 예, 제가 진옥출입니다 15
(1942년 상하이)
2장 뭐라고? 민중해방 운동? 53
(1931~35년 서울)
3장 난 자유로운 사회주의자가 되고 싶어 103
(1936~37년 서울)
4장 그래서 일본으로 가셨군요 147
(1937~38년 서울)
5장 태항산은 왜? 201
(1940~42년 도쿄)
6장 몽양 형님 걱정은 하지 말기요 277
(1942~43년 타이항산)
7장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네요 359
(1944~48년 타이항산·북간도·평양)
8장 날게 해주세요! 417
(1950년 서울·재령·평양)
에필로그 498
작가 최산은 몽양 여운형의 막내딸인 여순구, 그 여식의 생모였던 실존인물 진옥출에 관한 짧은 글을 언젠가 우연히 처음 접하고는 오랫동안 그녀에게 사로잡혀 있었다고 고백한다. 도저히 떨칠 수 없는 관심과 연민으로 가득했지만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막상 소설로까지 집필하기 막막해하던 어느 날, 문득 그녀가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와 막아서선, 자신의 얘기를 꼭 써달라고 간절히 애절히 말하는 걸 느꼈다 한다. 그것이 작가로서의 소명이요 사명이라 새기고 또 새겨가며 숱하디숱한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 마침내 이 역작을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현대사, 특히나 해방전후사의 공간에서 불꽃과도 같은 삶, 아니 불덩이 그 자체와도 같은 삶을 살았던 진옥출 그녀의 일생과 행적이 흡사 오늘의 것처럼 생생하고 리얼하게 부활하고 복원되었으니. 1917년 충주 노은면에서 태어나 경성에서 숙명여고보와 이화여전을 나온 후 20대 중반의 동경 유학생 시절, 물경 31살 위인 50대 중반 여운형과 사이에 딸 여순구를 낳은 여인. 그러나 불현듯 홀로 상해를 거쳐 태항산으로 들어가 무정 장군이 이끄는 조선의용군의 전사로 항일무장 독립투쟁을 한 여인. 와중에 태항산에서 결혼한 허갑을, 일제의 밀정으로 드러난 남편 허갑을 단박에 사살, 처단한 여인. 그리고 도둑 같은 해방을 맞이하고 이어서 민족비극의 피바다였던 6.25 한국전쟁 중 서른넷의 나이로 평양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평생 몽양과의 붉은 사랑, ‘적연(赤戀)’을 간직했던 여인. 그 여인이 바로 옥출, 옥출, 진옥출인 것이다.
책속으로
옥출은 바닥에 쓰러진 청년을 보곤 바로 고개를 돌려 골목 안쪽을 살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그게 무엇이든 손쓸 여유는 전혀 없었다. 대여섯 명의 일본 순사가 이미 침침한 지점을 벗어나 가까이 오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서 피가 많이 흐르는데도 청년은 오른손만으로 몸을 일으켜 다시 달리려 했다. 무리였고, 너무 늦었다. 일어선 그는 장총을 든 순사들에 둘러싸였다.--- p.21
“거기엔 일본의 수많은 정관계 인사와 내외신 기자가 운집해 있었는데 여운형 선생님은 3·1운동의 의의를 딱 한마디로 정리하셨대요. ‘대한민족은 3·1운동을 통해 전부 각성하였다!’라고요. 감히 우리 민족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메시지였죠. 고모부는 그 연설을 들으면서 온몸에 전율이 솟는 느낌을 여러 번 경험하셨대요. 특히 선생님이 말미에 ‘조선의 독립운동은 신의 뜻이다’라고 외치실 때는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래요.”--- p.32
“그래서 결국은 독립운동이 최우선이라고 하는 건가? 우리 고모부가 그러셨잖아. 여운형 선생님이 제일 강조하시는 건 언제나 나라 찾는 일이라고. 좌파든 우파든, 사회주의자든 민족주의자든, 조선 사람이라면 일단은 모두 힘을 합쳐 그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이야.”--- p.67
옥출은 개회식이 끝나고 마련된 오찬 석상에서 몽양과 처음 대면했다. 유일한 학생 참석자였지만 어른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조금도 기죽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안내된 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밝고 상냥하게 주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으려니 몽양이 저 멀리 홀 입구에서부터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p.120
옥출은 그해 겨울을 몽양을 생각하며 맞았다. 큰고개골에 부는 바람이 매서워졌음을 느끼면서, 강의실 창밖으로 첫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안동교회 앞마당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워 장식하면서, 그리고 본정통을 흐르는 크리스마스캐럴을 들으면서 문득문득 그를 생각했다.--- p.124
저게 바로 일본 제국주의 지도층의 전형적인 삶이야. 자기네 군대를 시켜 멀쩡한 남의 나라를 잔인무도하게 빼앗고 나선, 막상 자기네들은 그 식민사회에서 점잖고 예의 바른 문명인 행세를 하며 온갖 영화는 다 누리는 거지. 그렇게 살아온 삶을 지금 내 앞에서 어릴 적의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들려주는 거야? 자기가 이 땅에서 얼마나 격조 있고 품위 있게 자라왔는지 알아달라는 거야? 난 식민지의 딸이야! 달라, 당신과는 너무 달라.--- p.172
몽양이 그리웠다. 요코하마 항구에서 상하이 가는 배에 올랐을 때 그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홀로 부두에 서 있었다. 잘못 봤는지 모르지만, 거기 그냥 우두커니 서서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자주 떨어져 있긴 했어도 햇수로 3년에 걸친 그와의 일본 생활이, 그때의 하루하루가 활동사진처럼 빠르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p.215
그러나 역시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콜론타이의 글이 최고였다. “남녀 간의 사랑은 동지적 사랑이며 자각한 남녀의 사상적 결합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매력을 느낄 때 연애하는 것은 누구하고도 언제든 자유이다. 그 연애가 사회 진보에 공헌할 수만 있다면…….” 옥출은 마음속으로 자기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또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p.230
고모는 끝부분에 허정숙 얘기도 길게 썼다. 항일 무력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 타이항산에 있는 조선의용대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남들은 모두 죽을 길이라며 말렸지만, 그게 당당히 살 수 있는 길이라며 떠나갔다고 했다. 그 대목에서 옥출은 가슴이 마구 뛰었다. 항일 무력투쟁! 당당한 삶! 조선의용대!--- p.262
“전 독립된 주체로 살길 작정하고 여기로 왔습니다. 일제와 싸울 거예요. 그들을 몰아내는 데 앞장설 거예요. 그래서 조선이 해방되고 민주공화국이 들어서면 그때 당당하게 몽양의 여자로 살겠습니다. 그 전엔 저 혼자예요. 그저 조선의용군으로만 살 거예요.”--- p.282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일제의 주구 하나가 푹 고꾸라졌고, 또 한 번 당기자 또 하나가 맥없이 쓰러졌다. 고백하건대, 쾌미와 비애가 동시에 느껴졌다. 사실은 그들도 사람인데…….
스스로 악을 응징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는 쾌감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러나 살인의 죄책감 역시 만만치 않았다. 숨을 크게 내쉬면서 눈을 감고 자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겁에 질려 파르르 떨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전의로 뭉쳐 있는 조그맣지만 악착같아 보이는 존재가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내일 또다시 전장으로 나갈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단호했다. 거부할 수 없어 보였다. ‘그래! 그렇다면 이제 자자’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잠이 부족하면 안 될 일이었다.--- p.308
그때 드디어 옥출의 손에 그녀가 찾던 그것이 잡혔다. 차갑고 묵직한 금속 덩어리였다.
“이런 더러운 밀정 새끼!”
탕탕! 탕!
허갑이 가슴에 두 발, 얼굴에 한 발의 총을 맞고 머리가 터진 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즉사였다.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이 막 열두 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크리스마스였다.--- p.358
옥출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기획이나 섭외 등과 같은 머리 쓰는 일보다는 경계와 호위 등과 같은 총 쓰는 일을 주로 맡아 했는데, 많은 공작원이 그녀의 사격술과 판단력 덕분에 일경이나 일제 헌병대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수행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그녀의 활동 지역은 점점 확대되었다. 처음엔 타이위안, 스자좡, 한단, 신샹新鄕 등의 타이항산 주변 도시에서 활동했지만 나중엔 동쪽으론 지난과 칭다오靑島, 북쪽으론 톈진天津과 베이징까지 갔다. 옥출은 1945년 6월까지 1년 넘게 그 일을 하면서 ‘타이항산 스라소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p.362~363
옥출이 북쪽의 몽양이라고 여겨오던 무정도 죽은 목숨과 진배없었다. 김일성은 우상으로 떠받쳐질 만큼 절대 권력의 소유자가 되었건만 무정은 갈수록 그에게서 멀어져 실질적인 권한은 아무것도 없는 껍데기로 살고 있었다. 그는 남쪽은 물론 북쪽 세상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위치에 고립되어 막연히 세상 좋아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이 되면 주권재민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리라던 양쪽의 영웅은 사라졌다. 해방이 되자 외려 그 영웅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 p.411
다리 한가운데에 이르러서도 그녀는 춤추듯이 걷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부서지고 뒤틀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지점들도 그저 무심하게 지나쳐 갔다. 마지막 절단 부분에 이르렀을 때, 그제야 겨우 멈춰서는 듯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잠깐 멈칫하며 하늘을 봤을 뿐 지금까지의 속도 그대로 공중으로 걸어 나갔다. --- p.497
'몽양의 연인' 너머로, '붉고 푸른' 진옥출의 생애
수려한 외모, 당당한 체구, 출중한 웅변력, 폭넓은 식견, 탁월한 정세인식, 굽힘 없는 소신, 넉넉한 품성…. 해방 전후 영웅담에 묘사된 몽양 여운형은 '사기캐'다. 테러리스트의 흉탄에 스러진 비운의 최후마저 굴곡진 민족적 서사와 엇물려 잔영을 길게 남긴다.
진옥출에 관한 사료는 거의 없다. 천석꾼의 여식, 빼어난 미모, 일본 유학까지 간 인텔리라는 소문들이 조각나 있다. 매우 상반된 행적이 담긴 풍문도 있다. 무정이 이끈 조선의용군 일원으로 항일 무장투쟁 가담, 일제 밀정으로 밝혀진 남편 살해.
'신여성'과 '여전사' 이미지가 중첩된 진옥출의 실존성은 여운형과의 인연을 꼭짓점으로 갈래를 뻗는다. 두 사람은 혼외 관계로 딸을 낳았다. 여운형의 막내딸인 여순구의 친모가 진옥출이다. 해방 전 진옥출이 도쿄 유학 중이던 때였다고 한다.
소설가 최산이 해방전후사 무대에 진옥출을 불러냈다. <파란나비>(목선재 펴냄). 뒷말이 무성했을법한 내연 스토리에 '몽양의 붉은 사랑, 진옥출'이란 부제를 과감하게 얹었다. 명망 있는 민족지도자와 젊고 아름다운 유학생의 스캔들. 이 아슬아슬한 통속성의 덫을, 작가는 발품으로 뛰어넘어 전혀 다른 길을 열었다.
옛 언론기록들을 뒤졌다. 진옥출의 여고보 학적부를 찾아내 고향집부터 샅샅이 훑었다. 중국 타이항산으로 건너가 조선의용군이 항일 격전을 벌였던 자취까지 발로 쫓았다. 파편처럼 흩어진 흔적들을 맞춰 보니, '몽양의 여인' 너머가 그려졌다. 해방과 분단의 소용돌이에 청춘을 던진 한 여성의 생애가 픽션으로서 얼개를 드러냈다.
그렇게 완성된 소설은 붉고 푸르다. 눈부신 파란 원피스 차림으로 종로를 거니는 '모던걸' 진옥출의 내면을 '러시아의 붉은 장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로 채색해 간다. "남녀 간의 사랑은 동지적 사랑이며 자각한 남녀의 사상적 결합이어야 한다"는 콜론타이의 혁명성을 여운형‧진옥출 사랑의 테마로 잡았다.
자유연애든 동지적 사랑이든, 러브스토리에 머물렀다면 21세기 한국사회에 진옥출의 생명력을 살려내려던 작가의 시도가 빛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500페이지 장편을 꽉 채운 작가의 도전적인 상상력은 과거로부터 들려온 진옥출의 무의식적 호소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녀가 내 생각 안으로 스며들어와 나를 막아섰다. 그리고 무엇인가로 그녀의 의사를 전달했다. 자신의 얘기를 꼭 써달라고…." 마치 낡은 무전기를 통해 간절한 요청을 보낸 과거의 누군가와 교감하는 드라마 <시그널>처럼.
최산은 정치학자 최태욱 교수의 소설가 데뷔 필명이다. 학자로서 진보적 자유주의를 위한 정치제도에 천착해온 이 늦깎이 소설가의 이력을 겹쳐보면, 진옥출과 교감한 그의 타임슬립이 얼추 이해된다. 1980년대에 대학시절을 경험한 작가에게 1930~40년대에 20대 격랑을 겪은 진옥출의 사연은 기시감이 느껴졌으리라.
일제강점 터널을 빠져나온 지 40년이 흘러도 독재 정치가 계속됐다. 진보주의도 자유주의도, 보수우파가 점령한 제도정치에 진입경로가 틀어 막혔다. 좌파 내에선 급진과 온건, NL과 PD의 다양한 분파들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그러던 열혈 청년들 대부분은 시간이 흘러 얌전한 소시민으로 돌아갔다. 각자의 이상을 좇던 이들도 대개는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방향을 틀었다.
소설 속 진옥출이 해방을 전후해 우익분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온건개혁론자들과 벌인 다양한 사상적 대립과 그들의 뒷모습은 1980년대 지식인들을 무척 닮았다. 해방 공간에서 좌우 합작 민주공화국 건립을 향한 몽양의 염원이 권력 쟁투에서 밀려났듯, 1987년 민주화의 짧은 영광을 밀어낸 정치의 실패도 반복된 패턴이다.
남쪽에선 여운형이, 북쪽에선 무정이 그렸던 세상의 좌절을 담아내며, 작가는 진옥출의 눈으로 끊임없이 '정치의 문제'를 되새김질한다. 여운형의 목소리를 빌어 다원적 민주국가를 향한 소명의식도 심어 놨다. "어느 정당이든 열심히 하면 한 만큼 자기네가 꿈꾸는 세상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야."
여운형이 이르지 못한 이상향을 진옥출의 생애로 압축한 이 소설은 해방정국에서 1980년대로, 또 40년이 지나 대선을 코앞에 둔 2021년 한국 정치에 던지는 작가의 비관적인 물음 같다. 계급과 진영으로 갈려 '같은 시간을 살아도 각자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정말로 저마다 꿈꾸는 세상에 가까워지고 있는가?
임경구 기자 | 프레시안 2021.12.25
식민지·해방공간의 '거인', 몽양에 관한 오해와 진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몽양 선생과 꼭 결혼했을 것이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 선생과 결혼할 텐데 불행하게도 난 남자로 태어났다.”
조선의 6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는 영향력 있는 조선의 지도자를 포섭해 본격적인 황국신민화 작업을 추진하기 위해 임기 내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그는 특히 몽양 여운형에 집중했다. 반일 연설로 투옥 중이던 그를 형기 만료 전에 풀어준 뒤 대규모 농장을 제공하겠다고 유혹했지만, 정작 사로잡힌 건 몽양이 아니라 우가키 총독의 사위 야노였다. 저 낯간지러운 고백은 몽양을 너무도(?) 사모했던 야노의 토로로, 일본인, 중국인을 가릴 것 없이 당시 몽양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교우를 나눴던 사람이라면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를 해방정국의 소란 속에 피습당한 공산주의자로 알고 있지만, 그의 행보를 면밀히 살펴본다면 이는 큰 오해이자 오독이다. 70년 전 오늘, 혜화동 로터리에서 급작스런 피습에 눈을 감은 여운형을 똑바로 이해하기 위해 다섯 가지 키워드를 놓고 오해와 진실을 풀어보려 한다....
4. 바람둥이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시대였음을 감안하더라도 그에게는 여인과의 염문이 늘상 함께했다. 14살에 조혼한 부인은 3년 만에 임신 중 사망하고, 모친의 강권에 19세에 재혼한 아내와 일생을 함께하지만, 그는 연애결혼이 아닌 조혼으로 배우자를 만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일본인 첩에게서 막내아들을 얻었고, 이후 아들의 일본유학으로 함께 일본에 머물던 시절 유학생 진옥출과 연을 맺어 막내딸을 얻은 사실은 한국 근대사의 연애 상에 비춰볼 때 크게 흉이 될 일은 아니었으나, 민족 지도자의 추문으로 해방 이후 좌우합작 운동에 힘쓰던 그의 발목을 잡는 스캔들이 되었다. 잘난 외모와 빼어난 스펙, 그리고 한시도 몸을 가만두지 못하는 성정의 남성이 혼란의 시대를 살아내며 자행한 실수 아닌 실수는 인생에 있어서 귀한 자녀로, 지도자의 삶에 있어 오점으로 남았다.
해방직후 여운형을 담은 영상, 이때 여운형은 60세였다. 사진 = KBS 영상실록 화면 캡쳐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2016.07.19.
몽양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출처: https://blog.naver.com/ohyh45/220539884202 진보적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 평전
제 1장 왜 나는 몽양 여운형 평전을 쓰는가
지난 7월 19일은 1947년 몽양 여운형 선생이 향년 61세로 서울 혜화동 로타리에서 암살당한 지 66주년이었다. 우리는 “한국이 가장 위급한 시기에 중심적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윌리엄. R. 랭턴)
이승만ㆍ박정희 추종세력이 김구ㆍ여운형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존의 교과서 기술을 ‘테러리스트’, ‘남로당 사관’ 따위로 왜곡하면서 교과서를 바꾸고, 독재ㆍ친일부역자들을 ‘건국의 아버지’, ‘부국의 아버지’로 미화하는 반역사, 반이성의 시대가 끝간 데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우파 세력과 한국의 우파 지식인ㆍ언론인들은 이 점에서 일란성 쌍둥이다.
한국의 보수세력이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는 몽양이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해외 망명가들이어서 자신들이 추종하는 친일파들과 직접 비교하기가 어렵지만, 몽양은 일제 말기 국내에 있으면서도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일제와 싸우면서 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건준) 등을 조직하여 해방에 대비하였기 때문이다. 해서 기회만 있으면 물귀신 작전으로 몽양도 친일을 했다고 끌어들인다. 친일에 뿌리를 둔 신문과 그 영향권의 언론ㆍ지식인들이 앞장 선다.
해방 후 국내 우파와 친일파들은, 백범 김구는 너무 철저한 항일투사여서 자신들의 행적으로 보아 접근하기가 어려웠고, 몽양은 국내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두려웠다. 그래서 친일ㆍ반일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이승만 곁으로 몰려들었다. 권력을 추종하는 ‘해바라기족(族)’들은 미 군정이 이승만을 옹위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금상첨화격이었다. 그들에게는 ‘양지쪽’만 보장되면 친명ㆍ친청ㆍ친일ㆍ친미를 가리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몽양이 일제 말기에 일부 좌파 인사와 손을 잡게 된 것은 그의 사상 탓이라기보다는 민족진영에 지하운동을 할 만한 인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송건호)
몽양은 참 담대하고 당당하며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20세기 세계혁명가의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었다. 다방면에 그 이처럼 많은 것을 두루 갖춘 혁명가도 흔치 않았다. 신언서판에 호방함과 용기, 식견, 용량이 넓어서 세계 각국의 지도자와 교유하고, 이데올로기의 경계선을 거침없이 넘나들었다. 여러 분야ㆍ계층에서 활동하면서도 호감을 사는 인간적 매력이 물씬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고 몇 번씩 옥고를 치러도 시들지 않고 항상 싱싱한 지성과 활력을 유지하는 ‘만년 청춘’이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면서도 권위주의와는 담을 쌓고 유모어와 촌철의 언어를 구사하는 비범한, 그러나 평범한 이웃이었다.
그는 동양의 유학자적 지사라기보다 광기의 시대에 맞서는 풍운아였다.
그는 반이성의 시대에 살면서도 심장이 뜨겁고 영혼이 밝은 흔치 않은 민중의 지도자였다. <정관매진(正觀邁進)>, “바르게 보고 힘써 전진하라”는 휘호를 즐겨 썼던 그대로, 정도(正道)를 담대하게 걸으면서 행동한 혁명가였다.
“여운형은 익(翼)의 좌우를 자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와 싸운,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민족만을 사랑한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송건호)
친일의 혈통을 잇고 군사독재와 사이비 민간정부의 모유로 성장해온 한국의 이른바 주류 언론ㆍ지식인들은 현미경으로 그의 행적을 ‘더듬이’하는 물귀신 작전을 펴고, 저들은 냉전의 프리즘으로 몽양의 본모습과 투쟁, 업적을 왜소화, 왜곡화하는데 힘을 쏟고, 그를 독립운동사의 정통에서 거세하려 든다.
하지만 그의 타고난 호방한 성품과 신념의 주조가 된 ‘혈농어수(血濃於水)’ -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민족주의신념, 이외의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나, 좌우를 넘나드는 갈지 자(之)자 걸음은, 이 목표를 향하는 곁가지이거나 수단치일 뿐이었다.
한마디로 그의 가치와 행동의 다양성 속에서도 일관되게 흐르는 사상의 수맥은, 정맥(正脈)은 진보적 민족주의였고, 그는 이 소임을 위해 불온했던 시대를 불우하게 살다 갔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에서 몽양과 같은 지도자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굴종과 혼란기를 살아온 국민에게는 한 줄기 서광이고 위안이었다. 그가 지하수맥의 역할을 했던 3ㆍ1운동이 좌절되고 한민족이 무서운 공포에 시달릴 즈음, 그는 맨 손으로 적도(敵都) 도쿄로 건너가 일본 조야를 사로잡는 사자후를 토하고, 해방 후에는 재빨리 건준을 조직하여 국내 치안을 유지하였다. 건준이 아니었으면 8ㆍ15후의 정치적 공백기는 그야말로 완전히 무정부상태가 될 뻔했다.
그의 생애는 드라마틱하면서도 낭만적인 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지하의 투사 지상의 신사”라 불리고, 혁명가로서 독립운동, 정치인, 언론인, 체육인 등 좀체로 겸비하게 어려운 일들을 수행하였다. 그는 혁명가이기보다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도 따른다. 행보가 지극히 현실적이었고, ‘원칙의 고수’보다 융통성이 많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의 융통성은 술수, 술책과는 달랐다. 그가 이승만과 같은 권모술수가였다면, 충분히 미국과 손잡고 행방정국의 승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참 언론인이었기에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에 베를린올림픽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찍힌 일장기를 맨 먼저 삭제해 버리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고, 신문사의 폐간도 감수할 수 있었다.
조직에 철저하지 못하고 정치적 신념에서 우유부단하며 상대를 너무 믿는, 그래서 대국을 놓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결함으로 지적되는 부문이다.
또한 김구의 ‘건국 강령’, 안창호의 ‘대공주의’,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같은 ‘건국방략’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의 임시정부 조직과 건준조직 등은 큰 평가가 주어진다.
몽양의 전기와 평전이 여러 권 나와 있는 데도 불구하고 다시 쓰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더러는 너무 소략하고, 더러는 너무 학술적이거나 방대하여 일반시민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더러는 해방후사에만 집중되고 있어서, 감히 새로 도전하게 되었다. 선학들의 연구성과는 나의 작업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분들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또한 암살관련 부문도 철저하게 추적해 볼 작정이다. 해방정국에서 대통령감 1번으로 꼽혔던 그를 죽인 배후 세력은 누구일까, 왜 그는 죽어야만 했는가, 많은 자료를 찾아서 따져 보겠다.
이 기회에 증언과, 미발표 자료를 갖고 계신 분들의 지원이 있었으면 한다.
아울러 ‘혈농어수’, ‘정관매진’의 몽양정신과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현재성’, 강대국 지도자들을 상대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했던 ‘주체성’을 견지했던 자주정신을 오늘에 대비해보고자 한다.
제 2장 한국현대사에서 여운형의 위치
1. 생애를 관통하는 독립과 통일의지
한국 근현대사에서 여운형은 특출한 인물이다. 독립운동 시기와 해방공간에서 그의 존재를 빼면 ‘주연 없는 연극’이 될 것이다.
조국해방이라는 씨줄과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날줄로 교직된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사상적인 스펙트럼에는 간혹 이물질이 섞이기도 했으나 이념의 원형질은 진보적 민족주의라 하겠다. 요약하면 몽양의 생애를 관통하는 DNA는 진보적 민족주의다.
여운형은 당대의 시류를 넘어 역사를 폭넓게 조망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격동의 시대인지라, 여러가지 시대사조와 국내외의 다양한 인물들과 접하게 되고, 활동면에서도 단순성보다 복합성을 띄게 되었다. 산골짜기 맑은 청량수이기보다 넓고 깊은 도저한 호수와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시대에 한 발 앞서 민족의 미래와 나아갈 길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개척한 지도자였다. 따라서 걸림돌이 많았고 폄훼와 모함도 적지 않았다. 우파는 좌파로, 좌파는 우파로, 때로는 중도파 또는 기회주의자로 따돌림되었다. 일본 정계의 거물들과 만나다보니 친일파로 오해받기도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첫째그룹에 속하는 민족지도자이고, 해방 뒤 통일조국의 건설을 위한 1급의 인물이었다. 20세기 전반기 우리 민족이 포악한 일제에 병탄되고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도 한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여운형을 비롯하여 소수나마 백절불굴의 신념으로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애국지사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여운형을 좌경 이념으로 색칠하려 하고 일제 말기의 반민족행위자로 낙인하려는 자들이 없지 않지만, 여운형을 특정한 이념의 따옴표를 분류하기에는 활동 영역과 무대가 너무 넓고 그릇이 너무 커서 쉽게 묶이지가 않는다. 여운형에 대한 친일 음해는 친일파 후손들과 그 동조자들이 자신들의 친일행각을 희석시키기 위해 여운형을 끌어들이려는 일종의 물귀신 작전이다. 필자는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을 마치면서 저들이 얼마나 극악스럽게 여운형을 물고 늘어지는가를 체험한 바 있다.
여운형은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레닌과 트로츠키 등 러시아혁명의 지도자들을 만나고,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번역한 사람이지만 공산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여운형은 중국 신해혁명의 지도자 손문을 만나 그의 권고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고, 중국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중화주의자는 아니었다.
여운형은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고위 정객들을 만나고 총독부 고위층과도 접촉하였지만 친일파는 아니었다.
일제 패망 뒤 미군 환영을 위해 대표단을 인천에 파견하여 하지 장군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유창한 영어로 미 군정청을 드나들며, 미군 고위 장교들과 교우했으나 친미주의자는 아니었다. 소련 군정과도 접촉했지만 친소주의자는 더욱 아니었다.
해방 뒤 11차례에 걸쳐 김일성ㆍ김두봉 등과 서신왕래를 하고 미 군정 포고령을 무시하고 5차례나 평양을 방문했지만 친북주의자가 아니었다.
여운형을 일러 공산주의자, 민주사회주의자, 민족적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진보적민주주의자, 진보적 민족주의자 등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적용되지만, 그는 오직 조국의 독립과 해방,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진보적 민족주의자였을 뿐이다.
여운형은 민족의 독립과 자주ㆍ통일ㆍ평화ㆍ평등을 위해 온갖 이념을 섭렵하고 체제를 극복하면서 굽힘없이, 사심없이 민족주의의 대로를 당당하게 걸었다. 그릇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일제도 미 군정도, 북한 당국도 함부로 어쩌지 못했다.
여운형이 일본의 적도에 뛰어들어가 조선독립의 사자후를 토하자 감동받은 일본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까에(大彬榮)의 선창으로 참석자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할 만큼 담대한 호걸이였다. 당시 여운형의 연치 33세 때의 일이다.
여운형은 접두사 ‘첫 번째’의 여러 가지 기록 보유자이다.
① 반가집 자녀로서는 가장 젊은 나이(22세)에 집안의 노비 해방
② 가장 먼저 근대적 정당인 신한청년당 조직(1919년)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1918년)
③ 가장 먼저 3ㆍ1운동 추진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
④ 한국인 최초로 <공산당선언> 번역(1920년)
⑤ 한국인 최초로 국민당군의 무한ㆍ삼진 점령시 20만 군중 앞에서 연설(1926년)
⑥ 국내에서는 가장 먼저 베를린 올림픽대회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1936년), 이로써 <조선중앙일보 폐간>
⑦ 1945년 8월 16일 휘문중학에서 가장 먼저 민족해방의 군중연설
⑧ 가장 먼저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를 방문, 독립운동 수감자 석방(8월 15일)
⑨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많은(10차례 이상) 테러와 결국 암살 당함
⑩ 해방 뒤 짧은 기간(건국준비위원회 출범 한 달)에 남한 145개 시군에 지부 설립 등 건준 조직활동.
광복 직후 <매일일보> 조사에 따르면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 중에서 여운형은 33%를 차지하여 첫번째가 되었다. 존 하지 미 군정장관이 미국 정부에 보낸 극비 보고서에서 “남쪽에서 대통령선거를 하면 국내파 여운형이 당선된다. 차점자는 중국파 김구이고 미국파 이승만은 3위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미 군정이 아니었다면 여운형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실책과 비교할 때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여운형의 서거로 국민은 희망과 큰 지도자를 한꺼번에 잃게 되었다. 민족사의 비극이고 국가적으로 크나큰 손실이었다.
여운형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진취적인 독립운동가와 줏대 없는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로 갈리고, 투철한 민족주의자와 진보적 사회주의자라는 평판으로 나뉜다. 하지만 그는 방법과 수단을 달리했을 망정 조국해방과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큰 목표에서는 이탈하지 않았다
2. 3ㆍ1운동의 '지하수맥' 역할
미소공위 당시, 옆에 한복을 입고 계신 분이 몽양 선생과 함께 좌우합작을 이끄셨던 김규식 선생이십니다. 사진은 몽양 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여운형이 독립운동과 남북통일운동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큰 줄기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몽양은 누구보다 국제정세의 흐름에 민감하여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에 주목하고, 1919년 1월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대표 파견을 시도하였다. 강화회의 대표들이 극동의 변방에 자리한 한국의 존재에 대해 알 리가 없을 뿐아니라, 개인자격으로 회의장에 접근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동지들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당의 이름으로 대표를 파견하려는 계획이었다.
여운형은 1918년 8월에 터키 청년당의 강령에 준한 ‘신한청년당’의 조직을 주동하여 그 총무가 되었으며, 이 당을 통하여 국권회복투쟁만이 아니라 풍속, 문화, 도덕을 새롭게 한다는 진취적 목적을 가지고 20세 이상 40세 이하의 청년, 학생을 규합하는 데에 힘썼다. 이때의 여운형의 사상은, 망각된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신기원을 이룩해야 한다는 열정적인 독립사상이었다.
신한청년당은 프랑스조계 백이부로(白爾部路) 25호에서 여운형ㆍ장덕수ㆍ조동우ㆍ김철ㆍ선우혁ㆍ한진교 6명이 발기인이 되어 조직되었고, 부서는 총무만을 두기로 하되 국내의 손병희를 총재로 추대하기로 했으나, 교섭이 이루지지지 못하였다. (주석 1)
여운형은 장덕수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작성했다.
“조선은 4천년의 역사를 가졌고, 동양의 문화에 적지 않게 공헌을 했던 나라이지만 한일합방 후는 민족의 정치적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정치, 경제, 교육, 종교상의 압박을 받아….” (주석 2)로 시작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윌슨 미국대통령의 특사 그레인이 상해에 왔을 때 그에게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그로부터 고무적인 격려를 받자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영문으로 2통을 작성, 미국 언론인에게 주었다. 만일 한국 대표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 1통은 윌슨 대통령에게, 1통은 평화회의 의장에게 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서 여운형은 1919년 1월에 톈진에 있던 김규식을 상해로 초청하여 그를 파리로 파견하기로 결정한데 이어 장덕수를 국내로 보내어 이상재ㆍ손병희 등과 접촉케하고 자신은 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이동녕ㆍ문창범ㆍ박은식ㆍ조완구 등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당시 국내외 각처의 지사들은 모두 강화회의에 조선대표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미국과 하와이에서,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에서, 그리고 중국 광동성에서 대표파견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여운형이 파송한 김규식만이 회의 중에 파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규식의 파송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여운형의 장래의 갈림길이 되었다. 각처의 단체들이 하고자 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일을 성공적으로 이룩함으로해서 전도사 여운형은 무명씨(無名氏)의 신분에서 일약 독립운동가 여운형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주석 3)
신한청년당의 결성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은 몽양의 정치적 위상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도쿄 유학생들의 2ㆍ8독립선언과 국내에서 3ㆍ1운동의 촉발재 구실을 하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신한청년당의 역할이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도쿄의 유학생들은 영국인이 일본에서 발행하는 <저팬 에드버타이저>를 통해 파리강화회의 개최와 신한청년당의 결성, 대표파견 기사를 알게 되었다. 또 국내에 파송된 장덕수는 각계 지도급 인사들을 만나 국제정세와 신한청년당 대표의 파리 파송 등을 설명하였다.
실제로 김규식의 파송은 3ㆍ1운동을 일으키는 데에 도화선이 되었다.
3ㆍ1운동이 국내의 기독교계와 천도교계, 그리고 불교계의 지도자들의 주동으로 조직되고 진행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지도자들이 어디에서 영감을 받고서 그 엄청난 사업을 추진했던가 하는 질문을 추궁해 보면 김규식이 상해를 떠나기 전에 남겼던 말로 귀착이 된다.(…)그 말은 그가 떠난 후에 국내의 지도층에게 전달이 되었고 3ㆍ1운동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 여사가 필자(이정식)에게 전한)"나는 가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겠다. 그러나 나 혼자의 말만을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신한청년당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어 독립을 선언해야 되겠다. 가는 그 사람은 희생을 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고, 우리나라의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다." (주석 4)
거대한 3ㆍ1독립항쟁 발발의 ‘지하수맥’(地下水脈)에는 여운형의 숨은 역할이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찾게 된다.
주석
1> 김준엽ㆍ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1)>, 177~178쪽, 청계연구소, 1987.
2> <여운형 조서>, 398쪽.
3> 이정식, <몽양 여운형>, 160~161쪽,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4> 이정식, 앞의 책, 166쪽, 재인용.
3.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주역 중의 주역
1919년 7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령 제62호에 의해 [대한적십자회]가 설립됐습니다
3ㆍ1운동 후 상해에는 국내외에서 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여들었다. 임시정부를 세워서 조직적으로 항일전을 수행하려는 뜻이었다. 3ㆍ1운동 직후인 3월말 신규식 중심의 동제사와 여운형 등의 신한청년당 멤버들이 상해 프랑스조계 안의 보창로 329호에 합동으로 독립임시사무소를 차리면서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여운형은 1929년 2월 말 만주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있던 이 지역의 유력자 여준을 만나 파리대표 파송문제를 의논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저명 애국지사들과 접촉하면서 상해로 모일 것을 종용하였다. 귀로에는 북간도에서 정재면, 김약연 등을 만나 같은 논의를 하였다. 그리고 상해로 돌아와 동제사와 함께 독립임시사무소를 열었다.
독립사무소 출범 초기의 주요 구성원은 신한청년당의 대표들과 일본에서 2ㆍ8운동에 참가하고 상해로 온 이광수ㆍ최근우, 미국에서 온 여운홍, 그리고 국내에서 3ㆍ1운동 주역들이 파견한 현순 등이었는데, 이 가운데 현순이 총무를 맡았다.
그 뒤 3월 말에 이르러 각지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인물들이 여기에 집결하였으니, 대표적인 인물은 본국에서 온 최창식, 일본에서 온 신익희ㆍ윤현진,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온 이동녕ㆍ조성환ㆍ이시영ㆍ조성환ㆍ조소앙ㆍ김동삼 등이었고, 총 30명이 넘었다. (주석 5)
이들은 독립사무소에 모여 3ㆍ1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독립을 쟁취할 조직체 결성을 논의하고, 마침내 의정원을 먼저 구성하기로 하였다. 몽양의 증언이다.
재(在) 상해 조선인 중, 조선 각도별로 즉 경기도에서 나, 최근우ㆍ최창식, 황해도에서 김웅섭ㆍ이규홍ㆍ장건상ㆍ전라도에서 나용균ㆍ김철, 함경도에서 동림ㆍ이춘숙, 강원도에서 김세준, 평안도에서 선우혁ㆍ이유필ㆍ고일청을 위원으로 뽑아 의회의 조직관제의 제정 등을 맡기고, 우리 의원 일동은 동년 4월 10일경 앞서 말한 빌린 집에 모여 이동녕을 의장으로 추대하여 합의한 후 먼저 의회를 창설하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이라 이름붙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외무부, 내무부, 재무부를 설치했는데, 외무부 위원장에 나, 동부위원장에 장건상ㆍ백남칠, 내무부 위원장에 조완구, 재무부 위원장에 김철을 뽑고 동시에 임시헌장을 제정했다. (주석 6)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이 된 여운형은 외무위원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당초 그는 정부 수립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당 중심의 조직을 원하였으나 다수 의견에 밀리게 되었다.
나는 외무부 위원장의 자격으로 프랑스 영사 윌튼을 방문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의 전말을 진언하고 양해를 얻어 보호를 의뢰함과 동시에 프랑스정부에도 그 뜻을 타전(打電)하였고, 중국 신문인 <신보>, <민국일보>, <시보>, 영자신문인 <노스차이나 데일리 뉴스>, <챠이나 프레스>, <샹하이 더 타임즈> 등에 조선 독립운동 상황을 게재하여 각국의 이목을 끌고 성원을 얻기에 노력했으며…. (주석 7)
주석
5>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연구>, 87쪽, 지식산업사, 2004.
6> <여운형 신문조서>, 372쪽.
7> <여운형 신문조서>, 569~570쪽.
4. 적도에서 당당하게 조선독립을 요구
1919년의 여운형
여운형은 1919년 11월 16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정부의 초청에 의한 것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대부분 찬성했으나 이동휘ㆍ신채호ㆍ한위건 등이 강경하게 반대했다. 원수와의 대화는 악마들과의 대화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초청에 응하는 것은 반역행위라는 매서운 성토가 따랐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일제는 이를 파괴할 목적으로 여운형ㆍ손정도ㆍ이시영 등을 체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것이 좌절되면서 전략을 바꾸었다.
3ㆍ1운동 당시 일본군경의 무자비한 만행으로 국제사회로부터 규탄을 받고 있던 일본정부의 유화책을 보이고자 임시정부 수립의 핵심이었던 여운형을 초청하여, 조선문제를 논의해 보자는 전략이었다. 그는 일제의 기만 술책을 꿰뚫으면서도 초청에 응하여 도일한 것은 이를 역이용해보자는 배짱이었다.
아무리 일본 정부의 신변안전 약속이 있다하더라도 제국주의의 야만성이 지배하는 적도에 맨 손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스스로 호랑이굴에 기어드는 것 같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여운형과 같은 배포가 아니고는 단행하기 어려운 모험이었다. 케네디스쿨의 데이비드 거젠이 “올바른 대의를 위해서는 칼 아래 쓰러질 용기가 없다면 그 누구도 정치적 성공을 거둘 수 없다.”고 말했듯이 여운형은 ‘왜적의 칼 아래 쓰러질’ 용기와 담력이 있었기에 도쿄행이 가능했다.
여운형은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장덕수를 통역으로 대동한다는 단서였다. 전라도 외딴 섬 하의도의 유배생활을 그치게 하려는 동지적 배려도 작용하였다. 여운형은 11월 14일 최근우와 신상완을 대동하고 상해를 출발하여 18일 오후 도쿄에 도착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장덕수는 현지에서 합류했다.
만 34세의 여운형은 국빈대우를 받으며 일본 정부와 언론, 학계 인사들을 상대로 거침없이 연설을 하였다. 자신을 초청한 코가 척무성 장관에게 한 말이다.
한일합병을 말하면 그것은 결코 우리 민족의 의사가 아니다. 소수 당국과 즉 매국자들이 한 짓이며, 또 당시 주권자의 진정한 의사도 아니었다.
일본은 합병이 양국민의 호의로 되었다고 하지만, 조선국민은 이에 대하여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요컨대 이것은 강제로 된 정치적 불공정이라 즉 합병이 아니라 병탄이다. 일본사람들은 한일합병을 한인의 행복이오 동양평화라 하나 한국사람들의 재앙이요 수치요, 동양평화의 환란과 시기(猜忌)를 생기게 한 것이다. 소위 선정, 덕정을 표방한다는 현재의 총독정치를 보아도 우리 민족적 요구인 독립운동을 압박하고 있지 않는가? (주석 8)
여운형의 방일 중 하이라이트는 테이코쿠 호텔의 연설이다. 일본신문 기자단과 각계 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침없이 열변을 토하였다.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 것처럼 한민족에도 생존권이 있고, 한국민이 민족적 자각을 하여 자유평등을 요구하는 데 대해 일본정부가 이를 방해할 권리는 없다. 세계는 약소민족의 해방, 노동자의 해방 등 세계개조를 절규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 신의 의사 및 한국민의 각성에 의해서 일어난 필연의 운동이다.
일본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여러 이해타산적인 견해로 첫째, 자기방위상 한국병합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궤멸한 이상 이미 그 이유가 소멸되었다. 둘째, 한국민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독립하더라도 유지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한민족은 열화와 같은 애국심이 충만하여 피와 생명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고 유지하기에 충분하여 일본이 만약 솔선해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면 민주공화국으로 할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족의 절대 요구이다. (주석 9)
여운형의 기자회견은 일본 정계에 태풍을 불러왔다. 일본 신문들은 그를 ‘조선가정부’(임시정부)의 대표로 등장시키면서 연설과 기자회견 내용을 크게 보도했다. 그를 초청한 일본 정부에 책임론이 제기되고 제국의회의 해산과 총선거를 불러왔다.
이른바 대정 데모크라시의 대표적 사상가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여운형과의 회견담을 다음과 같이 썼다.
여운형씨의 주장 가운데는 분명히 침범할 수 없는 정의의 번득임이 보인다. 그 품격에 있어서나 그 식견에 있어서 나는 드물게 보는 존경할 만한 인격을 그에게서 발견했다.… 우리들이 그가 갖고 있는 일편의 정의를 포용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장래의 도덕적 생명은 결코 신장되지 않을 것이다. (주석 10)
여운형의 연설이 끝나자 일본의 대표적 아나키스트 오스키(大彬榮)의 주창으로 참석자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한 것은 일본 정계에 쓰나미 현상을 불러왔다.
여운형은 일본에서 다나까 육군대신을 비롯하여 내무대신, 체신성 대신, 척식국 대신 등 각료들을 만나고, 재일 한국유학생들을 격려한 다음 12월에 유유히 상해로 돌아왔다. 그의 도일을 반대했던 이동휘는 무사귀환을 축복하고, 임시정부에서도 일본에서의 활동을 크게 환영하였다.
여운형의 도쿄 한 달여 활동을 시종 지켜보았던 수행원 최근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때 연설은 참 웅변이었다. 만좌가 박수갈채를 하였고, 끝난 뒤 <태평양> 잡지사 사장은 조선독립에 대한 이론이 명쾌하였다고 말하였다. 몽양은 당시 연령이 34세였다. 다나까 육군대신과 만나는 자리는 우스노미야 조선군사령관을 비롯하여 관동ㆍ청도ㆍ대만 각지의 군사령관과 미즈노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노 체신대신, 코가 척식국장관 등 정계ㆍ군계 거두들이 열석하였다.
다나까와 몽양을 비교해 보니 저 편은 연장자요, 주권국 대신이요, 군국 권위의 배경이 있는 사람이요. 여기는 나이 젊고 식민지 한민이요. 피압박민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좌석을 몽양 혼자서 휘어잡고 압도적으로 압력을 내어 내리누르며 정의로 싸우는데 자기는 처음 느끼는 통쾌이었고, 정의가 무섭다는 것을 그때 목도하여 깨달았다. 몽양의 호담, 웅변, 제압을 예를 들면 퍽 많다. (주석 11)
주석
8> 이정식, 앞의 책, 209~210쪽.
9> <여운형 신문조서>, 517쪽.
10>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중앙공론> 1920년 1월호, 178쪽, 동경.
11> 몽양연구소 편, <여운형노트>, 4~5쪽, 학민사, 1994.
5. 동방피압박자대회 한국대표로 참석
여운형의 활동반경은 호방한 그의 성격 그대로 국경과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었다.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전후처리를 위해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이에 대항하여 러시아는 1922년 모스크바에서 동방피압박자대회를 소집했다. 태평양회의에 실망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모스크바회의에 큰 기대를 걸었다.
임시정부에서도 김규식ㆍ김상덕ㆍ김승학ㆍ라용균 등이 파견되고, 조봉암을 비롯하여 사회주의계열, 학생 대표 등 무려 56명이 참석하였다. 여운형은 고려공산당의 자격으로 참석했다.
김규식과 함께 의장단에 한국대표로 뽑힌 여운형은 회의 기간에 레닌과 트로츠키 등 러시아의 지도자들과 만나 한국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하였다. 다음은 레닌과의 대화 내용이다.
조선에 있어서는 아직 공업이 발달하지 않고 또 계급의식이 유지함으로 계급운동은 시기상조이며 조선은 농업국으로서 일반대중은 민족운동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운동자는 독립운동을 후원 지지하라는 방침을 결정하였고, 상해 임시정부는 명칭만 너무 과대하고 실력이 이에 따르지 않고 있는고로 임시정부의 조직을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 바 있고, 이외 레닌으로부터 일본에서는 무산계급은 의회운동을 표어로 삼고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손잡고 그 운동을 추진하여, 조선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지후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시한 바 있소. (주석 12)
다음은 여운형이 레닌과 나눈 대화 중에 그의 동방정책 즉 민족해방에 관한 부문이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다. 그때까지는 러시아가 조선에 공산주의를 그대로 선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지만, 레닌이 조선의 교통ㆍ국어에 관해 물었을 때, 교통은 자동차로 하루 만에 달할 수 있는 정도, 언어는 하나라고 대답하자, 레닌은 조선은 이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현재는 민도가 낮기 때문에 지금 당장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것은 잘못이고, 지금은 민족주의를 실행하는 편이 낫다고 했다. 이는 나의 이전부터의 주장과 일치하는 말이었다. (주석 13)
여운형은 레닌과 만나서도 당당하게 조선은 공산주의보다 민족주의를 실행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그리고 피체되어 심문을 받을 때에 이것이 오래 전부터 자신의 신념임을 일제 관헌에게 진술하였다. 해방 후 반대세력에서는 이 때 레닌을 만난 것을 두고 용공주의자라고 비난을 퍼부었고, 이같은 음해는 아직까지 가시지 않고 있다.
주석
12> <여운형 신문조서>, 413쪽.
13> 앞의 자료, 544쪽.
6. 손문 등 신해혁명 지도자들과 ‘중한호조사’ 결성
러시아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여운형은 중국 신해혁명의 지도자 손문을 만나 같은 처지에 놓인 한ㆍ중 양 민족이 서로 돕자는 목적으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결성하였다.
몽양이 가산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것은 손문이 주도한 1911년 신해혁명을 지켜보면서였다. 이런 연유로 1916년 중국 신문 기자의 안내로 손문을 만난 이래 1919년 11월과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그와 만나 교분을 쌓게 되었다. 중한호조사의 결성은 이와 같은 교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한호조사의 중국측 발기인 중에는 모택동도 들어 있었다.
중한호조사는 유형무형으로 독립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각 지방의 능동적인 유지들에게 두 민족간 공감대를 이룩한 것이 우선 큰 성과였다. 상해의 경우는 중국인 52명, 한국인 104명이 참가했고, 광주의 경우는 광동정부 사법부장 쉬젠과 국민당의 왕징웨 등이 참가하여 중한협회를 설립했는데 중한호조사 또는 중한협회에 관여했던 모든 인사들은 한국문제, 즉 한국의 참상과 한국인들의 염원을 알게 된 것이었다. (주석 14)
지도자, 베트남의 호치민, 중국에서는 손문을 비롯하여 장개석 등 신해혁명의 지도자들과 만나거나 교분을 유지하면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논의하였다. 장개석의 중국국민당과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에서 특별 당원 대우를 받고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할 만큼 그의 교우 관계와 보폭이 넓었다.
나는 손문이 살아 있는 동안 십 수년 간의 지기(知己)였다. 1925년 봄 국민정부 고문인 러시아인 보로딘 부인이 상해에 와서 손문 부인과 회견하고 중국혁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적이 있는데, 당시 상해에서는 손문의 추도식이 있었다. 나도 거기에 참석했는데 손문 부인으로부터 보로딘 부인을 소개받았는데, 그이는 나더러 중국혁명은 점차로 발전해왔는데 이를 위해 전력을 기울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북경에 가서 카라한(대사)과 만나라고 하면서 소개장을 써주었기 때문에, 나는 같은 해 4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북경에 도착하여 노농(정부) 대사 카라한과 회견을 가졌다. (주석 15)
제2차 중국 국민당대회에서 호치민ㆍ모택동 등과 함께 연설을 했던 몽양은 뒷날 국내언론 대담에서 당시의 모택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나는 모택동을 잘 압니다. 그 사람은 지금 수도 루이진(瑞金)에 있으면서(소베트) 중앙정부의 주석으로 부주석 장국도와 함께 정치공작에 열중하고 있지요. 그런데 외형으로 보기에는 몸이 가늘고 약하고 허술구레하게 생기어서 풍채가 보잘것 없지요. 그래서 누구나 그가 주석인가 하고 모르는 사람은 다 놀랍니다. 또 히틀러나 뭇소리니 모양으로 풍우(風雨)를 부르는 웅변가도 아니고 말할 때 보아도 조용조용 말하지요. 촌부자(村夫子) 식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같이 뜻이 굳은 사람이 없어요. (주석 16)
주석
14> 이정식, 앞의 책, 357쪽.
15> <여운형 신문조서>, 255~256쪽.
16> <삼천리>934년 8월호, 24~25쪽.
7. 일제에 피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여운형은 1929년 7월 10일 상해 대마로 경마장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총독부의 유죄 판결내용은 신한청년단 조직, 미국인 중국 파견특사 크레인에게 파리강화회의ㆍ윌슨대통령에게 청원서 제출,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극동피압박민족대회 참석, 상해임시정부 조직, 임시의정원 조직, 임정 외무부장, 미국의원단 방문, 국민대표회의 조직, 고려공산당 입당, 상해 노병회 조직 등이었다. 18년간 중국 망명시절 몽양의 주요 항일운동이 그대로 드러난다.
여운형은 1932년 7월 만기 4개월을 남겨놓고 가출옥할 때까지 3년여를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감옥에서 치질, 신경통,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등 건강악화로 병보석을 신청했으나 허용되지 않았다. 대전형무소에서는 기결수로서 하루종일 앉아서 그물뜨기의 노역으로 소화불량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총독부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몽양에게 검사가 15년 만에 돌아온 고국의 산하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부산에 상륙해 해안 일대의 산들을 보았소. 20년 전에 본 민둥산이 일변하여 청산(靑山)이 되어 있는 것을 보니 놀라웠소. 그러나 철도 연선에 있는 동포의 부락의 상태를 보니 10년이 하루와 같이 하등의 변화 진보의 자취를 보지 못해 자못 실망했소. 총독정치가 민둥산을 청산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국민의 생활과 풍속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중에 일종의 희열을 느끼기도 했소. (주석 17)
심산 김창숙은 몽양이 서대문형무소 수형생활을 할 때 옥리를 보면 반드시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했고, 안창호 역시 감옥의 규칙에 잘 복종했다고, 회고록 <심산유고>에서 썼다.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보석을 바랐던 행동이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 보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운형은 1942년 12월 치안유지법, 육해군형법, 조선임시보안령의 위반혐의로 경성헌병대에 검거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며칠 동안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을 당하고 1943년 4월 경성복심 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반년 동안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옥중에서 조선건국동맹을 구상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주석
17> <여운형 신문조서>, 66~67쪽.
8. 신문사 사장 등 국내활동
여운형이 18년 간의 중국 망명생활을 마감하고 피체되어 옥고를 치른 후 새로 시작한 국내 활동은 어쩌면 그 자신에게는 행운이었다.
1933년 2월,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취임사에서 “공통된 환경 속에 있는 조선의 언론기관이 마땅히 우리의 생활, 우리의 요구에 부합하는 목표를 세워 동일한 보조로 협력해야 한다”고, 언론을 통한 민족해방운동의 전위가 되겠음을 밝혔다. <동아>, <조선>의 친일성향을 경고하면서 차별성을 천명한 것이다.
일장기말소사건’을 처음 시도한 것이 몽양의 <조선중앙일보>였다. 이 사건으로 몽양은 일제와 타협을 거부하고, 1937년 신문사를 자동폐간시키는 길을 택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조선일보> 광산왕은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송진우는 인력거로 꺼덕꺼덕,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이라는 말이 나돌았다.(주석 18)
식민지 백성들의 언론인 몽양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주석
18> <개벽> 신간 제14호, <조선 민간신문계 총평>, 1935년 3월 1일.
9. 건준 조직, 통일정부 수립에 앞장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해방 후 여운형의 활동은 단연 ‘물 만난 용’이었다. 1943년에 조직한 비밀결사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모태로 하여 해방 직후에 결성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출범 한 달 만에 남한 145개 시군에 지부를 결성할만큼 국민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점령한 미국이 건준을 활용했더라면 한국의 건설이 더욱 신속했을 것이다.”(에드가 스노우)
건준은 3대 강령을 세웠다.
①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 ② 전체 민족의 정치적ㆍ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하는 민주주의 정권 수립 ③ 일시적 과도기에 자주적으로 국내 질서 유지와 대중생활의 회복 등이었다.
미 군정기 초기 남한에는 5개의 정치세력이 할거하고 있었다.
1. 미군정부. 2. 김구 등 임시정부세력. 3. 이승만의 미주세력. 4. 송진우 등 국내 우파세력. 5. 박헌영 등 민족주의 좌파세력이다. 이들 세력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과 위치에 있었던 여운형은 미 군정당국이 점령 초기 주로 친일파와 일본측의 정보를 통해 여운형을 공산주의자로 인식하고, 전국 규모로 확대되는 건준을 불법단체로 차단시키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송진우ㆍ장덕수 등 우파들이 자신들의 과거 행적 때문에 새로운 권력의 실체로 등장한 미 군정의 눈치를 살피면서 ‘임시정부 봉대’를 명분삼아 건준 참여를 거부한 것도 몽양의 좌절을 가져온 요인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건준 내의 좌익세력이 재빨리 조직을 확대하여 주도권을 장악하고 미군이 진주하기 이틀 전인 9월 6일 전격적으로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이 여운형에게는 치명타가 되었다.
미 군정 고위 당국자가 몽양을 외모는 그럴듯해도 쓸모가 없는 ‘은도끼’라고 비아냥을 퍼부을 만큼 조선민중으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그를 홀대 또는 적대시했다.
그런 속에서도 여운형은 민족통일전선을 구성하고 5차례나 방북을 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에 마지막 정열을 불태웠다. 해방 후 11차례에 걸쳐 김일성ㆍ김두봉 등과 서신왕래를 하고 미 군정 포고령을 무시한 채 평양을 방문한 것을 두고 미 군정이 문제 삼자 “집주인이 제집에서 아랫방으로 내려가건 윗방으로 올라가건 손님들이 왠 참견이냐”고 호통을 쳤다. 그에게는 통일조국 건설 이외에 미국도 소련도 안중에 없었다.
10. 의문투성이의 암살배후 밝혀야
1947년3월17일 폭탄테러로 파손된 몽양 계동 자택
1947년 7월 19일 북한에서 한달 전에 내려왔다는 19세의 청년 한지근에게 암살당했다.
배후에는 백색테러 조직인 백의사(白衣社)가 지목되고, ‘독립운동가 잡는 귀신’이라는 노덕술 등 친일경찰과 이들을 비호하는 정치세력이 거론되지만 사건은 오늘까지도 미궁에 빠져있다.
1992년 6월호 <월간 말>에는 여운형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기사가 실렸다.
“여운형 암살배후에 노덕술이 있었다 - 여운형 암살범 4인의 최초고백”이란 제목의 글이다.
여운형은 해방공간에서 10여 차례의 테러와 암살위기를 겪었다. 암살당하기 바로 전날 밤 미소공동위원회의 미국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을 만나 자신에 대한 테러위협에 대책을 요구했던 기록이 전한다. 다음은 미군의 정보자료 중 <브라운이 하지에게 보낸 비망록>이다.
여운형은 7월 18일 저녁에 브라운 장군과 개인면담을 가졌다. 여운형은 장택상 청장이 그에게 서울을 떠나라고 경고하면서 만약 그가 서울에 남아 있으면 자기는 그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주석 19)
미 군정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여운형에 대한 모종의 암살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암살음모를 저지하지 않고 서울을 떠나라고 오히려 겁박했다. 여운형 암살에는 이승만도 관여했던 것으로 G-2의 주간보고서 99는 기록하고 있다. 하지는 여운형 암살 20일 전에 이승만에게 여운형 암살계획을 중단하도록 충고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 장군은(1947년) 6월 28일자로 이승만에게 발송한 편지에서 이승만과 ○○의 테러계획에 대한 고발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 장군은 한국인의 애국심이 건설적인 방법을 통해야지 유혈을 포함하는 낡은 방법을 통해 그 출구를 발견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주석 20)
여운형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독립운동, 해방 후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헌신을 되돌아보면, 어떻게 그 같은 인재가 해방된 조국에서 암살당하게 되는 지, 가슴 아프면서 여전히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조차 주위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도벌꾼이 곧게 잘 자란 나무를 선호하듯이, 해방공간에서 정치도벌꾼들은 여운형과 백범 김구 등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치고, 통일운동에 여생을 아끼지 않던 거목들을 골라서 도끼질을 했다. 하나의 대들보감이 자라려면 100년의 풍상을 필요로 하듯이, 한 사람의 국가민족의 동량(棟梁)이 성장하기에는 이에 못지않는 시련과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한다. 그럼에도 정치도벌꾼들은 이데올로기에 눈이 멀거나 작은 이해관계 혹은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어 도끼질을 한다. 민족사의 비극이고 국가적으로 손실이다. 여운형이 그 첫 희생자가 되었다.
주석
19> <월간 말>, 1992년 6월호, 83쪽.
20> 앞과 같음.
독립운동사에서 묻혀버린 몽양 되살려야”
여운형 평전’ 펴낸 강덕상 일본 시가현립대학 명예교수
분단민족 설움 절감한 재일동포 학자
“몽양 살았다면 전쟁·분단 없었을 것
잘못된 역사 바로잡고 통일 보탬 되길”
근대 중국의 시작을 알린 5·4운동을 촉발시킨 불씨가 조선의 3·1운동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지만, 그 의미는 평가절하돼 있다. 3·1운동 발발 직후인 1919년 3월호 <매주평론>에 실린 중국공산당 창시자 천뚜슈(진독수)의 ‘조선독립운동의 감상’의 일절은 다음과 같다. “위대하고 성실하며 비장하고 정확 명료한 민의를 바탕으로 … 세계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조선민족에게 이러한 영광이 나타나 … 움츠르던 우리 중국민족을 더욱 부끄럽게 했다. … 보라 조선인의 활동을 … 조선인에 비해 우리는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전 3권 중 먼저 1권이 나온 <여운형 평전>(김광열 옮김·역사비평사 펴냄)의 지은이 강덕상 일본 시가현립대학 명예교수는 13일 전화인터뷰에서 “3·1운동과 5·4운동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쑨원과 조선인청년단이 연결돼 있었으며 이를 통한 조-중 연대운동에 일본이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3·1운동 직후에 결성된 상하이 임시정부 활동이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등 당시 동아시아 변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일제정부는 임시정부를 일대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며 그 중심에 몽양 여운형이 있었다고 했다. 강 교수는 자신이 접한, “일제가 식민지배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수집한 방대한 정보”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분야는 민족운동 관계자료였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독립운동가 가운데 가장 빈도가 높고 또 지속적으로 거론된 인물이 바로 여운형이었다고 했다.
1919~20년 제42회 일본 제국의회는 당시 하라 다카시 내각이 여운형을 도쿄로 초청해 회유하려 했다가 실패한 문제를 놓고 여야간에 일대 논전이 벌어졌고 결국 하라 내각은 이 문제로 무너진다. 강 교수가 보기에 몽양은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 군상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일등성”이었다. 몽양은 “쑨원, 레닌, 호치민, 왕징웨이 등 각국 지도자들과 교류했고, 하라 다카시, 고노에 후미마로, 우카기 가즈시게, 오가와 슈메이 같은 일제 지도자들과도 얘기할 수 있었던 유일한 독립운동가였으며 그러고도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암흑기에 희망을 준 사람”이었다. 해방 뒤 직접선거가 치러졌다면 “그가 틀림없이 대통령에 뽑혔을 것이고, 그랬다면 우리 힘으로 분단장벽을 없애 전쟁도 없었을 것이며 친일파문제도 자연스레 해소됐을 것”이다.
하지만 몽양은 남·북한과 일본 모두에서 거의 잊혀졌다. 지금가지 나온 몽양 연구서들은 이만규의 <여운형 전집>(1997)과 정병준의 <몽양 여운형 평전>(1995) 정도를 빼고는 볼 만한 게 없고, 정병준의 것은 그나마 주로 해방 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강 교수는 “독립운동사 분야에서 여운형을 살펴본 선행연구는 거의 없다”며 <여운형 평전>이 바로 그 시기 연구에 중점을 둔 의의를 강조했다. 옮긴이 김광열 광운대 교수는 <여운형 평전>이 “한 독립운동가의 전기라기보다는 여운형을 통해 본 시대사이며, 개별 논문으로 구성된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서”라고 말했다.
1947년 몽양은 이승만 일파에 의해(강 교수는 “당연히 그렇게 본다”고 했다) 암살당했고 한때 그의 동반자였던 장덕수도 암살당했다. 저명한 재일동포 사학자 김달수는 몽양의 죽음을 두고 “우리 조선에 이 이상의 손실이 있을까”라며 탄식했다. 1986년에야 처음 고국을 방문한 강 교수는 서울 수유리의 몽양 묘소와 고향 양평의 생가, 계동의 집을 찾아봤다고 한다. 무너지고 노숙자들 삶터로 변하고 음식점이 된 퇴락한 그 장소들에 “해방 뒤 한국의 분단사관이 집약돼 있다”는 걸 그는 그때 체감했다. 민족 암흑기에 가장 영향력 있고 비중이 컸던 인물, 관련 자료도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인물이 홀대받고 잊혀진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이 “분단에 의한 허구의 역사인식을 바로잡고 통일로 가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사하면 할수록 싫어지는 이승만”과 김일성 신화를 깨는 데도 자신의 책이 일조할 것이라고 했다.
강 교수는 몽양 암살 뒤 뒤틀어진 우리 민족사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자신과 같은 해외동포들이었다며 조국의 분단이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의 차별을 얼마나 더 심화시켰는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최근에 0.5와 0.5를 곱하면 0.25가 된다는 말을 하곤 한다. 분단 때문에 주위에서 보면 우리는 0.25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인 내가 여태까지 살면서 좋은 일이 별로 없었던 원인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 때문에 더더욱 분단은 민족의 원수이며, 통일만이 우리의 소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차별이 심하냐고 묻자 “당연한 얘기”라며 “(일본인) 납치문제로 일본에서 배척당하는 데는 남·북한 구별이 없다”고 했다.
바로 그 차별 때문에 강 교수는 한국 근대사 및 한-일관계사 분야에서 커다란 연구업적을 쌓았는데도 1980년대 후반 56살이 돼서야 히토쓰바시대학 교수가 됐다. 1990년대 후반 강상중 교수가 재일동포로서는 처음으로 도쿄대 정교수가 되지만 일본 국립대학에서 외국인으로 처음으로 정교수가 된 사람은 강덕상 교수다. 두 살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일본에 갔던 강 교수는 1996년 시가현립대로 옮겼고 2002년 현역 은퇴 뒤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여운형 평전 출간을 “만년의 숙제”로 삼아왔다. 모두 3권으로 기획된 평전의 제1권은 2002년에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2권은 2005년에 나왔고 마지막 3권은 내년 3월에 출간될 예정인데 이미 집필은 완료했다. “다음 숙제로 <재일동포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가제)을 준비중인데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2007.12.14
박태균의 버치보고서(2)미 러브콜과 여운형의 거부
미국 정책에 적합하지 않아 골치 아프지만…
소련에 우호적인 좌파를 갈라놓으려면 여운형은 여전히 중요하다
“돌아가신 위대한 선생님에 대하여 나는 조선말로 한마디 하겠습니다. 그는 영원히 침묵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와 나는 항상 선생으로부터 감화받은 교훈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조선 사람들은 울고 있지만, 여운형 선생의 정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돌아가신 사람이 아닙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인물입니다. 우리 이제 남아 있는 사람에게 큰 교훈을 준 사람입니다.”
버치는 서툰 한국어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발음을 영어로 바꾸어 조사를 읽었다. 잘못된 발음도 적지 않아 제대로 된 한국어로 이해되기도 쉽지 않은 조사였다. 아마도 그가 한국에서 근무했던 2년 반 정도의 기간 동안 유일하게 한국어로 한 연설이었을 것이다. 버치 문서에 있는 유일한 한국어 연설문이다. 제대로 할 수도 없는 한국어로 조사를 읽어나간 버치는 여운형에 대한 최고의 존경심과 그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을 표현한 것이다.
냉전시대,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로 규정되었던 여운형에게 버치는 왜 이렇게 최고의 존경을 표했던 것일까? 버치뿐만 아니라 또 다른 미군정 관리이자 <주한미군사>의 저자였던 로빈슨 역시 그의 책 <미국의 배반: 미군정과 남조선>(과학과사상, 1988) 맨 앞 장에 다음과 같이 여운형에 대한 최고의 존경심을 표했다.
버치보고서에 들어있는 여운형 추도사. 한글발음을 영어 알파벳으로 옮겨 썼다.
‘추모: 1947년 7월19일 한국의 서울에서 암살된 여운형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 그는 미국의 분별없는 외교정책의 비극적인 희생자이다. 인민의 대의를 옹호하던 위대한 진보적 민주주의자인 그는 좌익과 우익의 전체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여운형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를 주도하고 있었던 버치 중위를 하지 사령관과 함께 가장 위험한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 버치 중위와 하지 사령관이 여운형이 참여하고 있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38선 이남에서 정부를 수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버치에게, 그리고 당시 미군정에 여운형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여운형은 미국의 대한정책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해방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 목표는 한국을 전범국가인 일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면서 동시에 강대국 중 한 국가의 절대적 영향력을 받지 않으면서도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친소비에트연방(소련·현 러시아) 성향의 정부가 들어서지 않아야 했다.
미국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공적이지도 않았던 여운형은 이러한 미국의 대한정책에 적합한 지도자가 아니다. 여운형은 조선공산당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공산당과 함께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하였고,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을 조직하였다. 아울러 그는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일성, 김두봉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버치의 문서 중에는 여운형과 김일성, 김두봉 사이에서 오고 간 편지의 번역본이 있으며, 거기에는 미군정을 비난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여운형을 끌어안으려 했다. 버치가 한국 땅을 밟기 이전에 여운형은 이미 미군정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미군정은 한국 통치를 위해 1945년 가을 자문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보수적이고 자산가이거나 친일 경력이 있었던 한국민주당 소속의 인물들을 임명하면서, 예외적으로 여운형을 자문위원의 한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여운형은 그러나 미군정의 자문위원 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의 러브콜과 여운형의 거부는 1946년 2월 다시 재현되었다. 버치 중위가 한국에 부임해 정치인들을 담당하는 정치자문단(Political Advisory Group) 소속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직후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이 결성될 때 미군정은 여운형이 여기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이승만과 김구가 주도하는 민주의원 참여를 거부했다. 특히 ‘친일파’로부터 정치자금을 수수했고, 그들에게 관대한 이승만이 주도하는 조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여운형은 1946년 가을 미군정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위원회에 좌파의 리더가 되었지만, 당시 조선공산당의 후신으로 창당된 남조선노동당과의 갈등, 그리고 개인적인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들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미군정 내에서 정치공작에 관여하고 있었던 또 다른 인물이던 링컨 대령은 경제정책을 담당하고 있었던 번스 참사관에게 보낸 문서에서 ‘여운형은 미군정의 정책으로부터 잘 도망다니고 있다’고 지적했다(1947년 4월4일자, 버치 문서 박스 2). 이렇게 잘 도망다니는 여운형을 미군정은 왜 그가 암살당하는 순간까지 붙잡으려 했고, 일부 요원들은 그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했을까?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의 대중적 영향력이었다. 여운형은 사회주의 좌파 계열에서 가장 높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그는 청년들의 영웅이었다. 여운형뿐만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좌냐 우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과 서울대 사회학과의 창시자이며 한국 농구계의 산증인인 이상백 교수와 가까운 관계였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군정으로서는 이렇게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여운형이 38선 이남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했다.
또 하나의 이슈는 한국 내 좌파를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해방된 한국에서 조선공산당은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정당이었다. 이는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아시아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점과 함께 미국과 달리 소련이 식민지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당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국제정치학자 게디스가 언급한 것처럼 동유럽의 공산정권은 ‘내부로부터 초대받지 않은 정권’이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중국과 베트남 공산정권은 대중적 지지를 통해 수립되었다. 한국 역시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건하고 미군정뿐만 아니라 일본 총독부와 소통이 가능했던 여운형을 통해 좌파를 분열시키고 강경한 입장의 공산주의자들을 고립시킬 수 있다면, 이는 소련에 우호적인 좌파 전체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조선공산당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방안이 될 수 있었다.
미군정이 벌였던 공작에는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을 갈라놓는 전략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여운형의 힘을 빼는 것 역시 또 다른 중요한 공작의 하나였다. 여운형의 힘을 뺀다면 잘 도망다니는 그에게 계속 구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 첫 번째 공작은 여운형으로부터 그의 동생 여운홍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여운홍은 미국 유학을 했고,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지만, 여운형만큼 정치적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의 동생이 그로부터 떨어져 나온다면, 여운형 개인과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만든 조선인민당에는 큰 타격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에게 타격을 입히는 공작은 이승만의 정치고문이었던 굿펠로로부터 시작되었다. CIA의 전신인 OSS(전략사무국)의 대령 출신인 굿펠로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부터 이승만을 옆에서 도운 인물이었다. 미국 국무성에서 해방 직후 이승만의 귀국 비자 발급을 거부하자, 굿펠로는 비자 발급을 도왔다. 준장 진급에 실패한 굿펠로는 이승만의 요청으로 1945년 12월25일 방한했고, 하지 사령관의 특별정치고문으로 1946년 5월26일까지 한국에서 근무했다(이상,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참조). 그는 처음에는 보수우익으로만 구성되어 ‘대표’도 아니고 ‘민주적’이지도 않은 민주의원에 여운형을 참여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하자, 여운홍을 여운형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공작에 나선 것이다.
굿펠로는 여운홍으로부터 조선인민당에서 탈당하여 새로운 정당을 창당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정치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는 버치 중위도 함께 있었다. 그러나 여운홍의 탈당(동아일보 1946년 5월10일자)이 가져온 정치적 효과가 미미하자 정치자금 지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버치 문서 박스 2). 굿펠로의 공작으로도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따라서 링컨 대령의 1947년 4월4일자 문서에는 ‘여운형은 아직도 중요하다’고 하면서 ‘우리가 여운형 때문에 골치가 아픈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소비에트에는 더 위험이 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소비에트에는 더 위험이 되고 있다’는 점은 소련이 지원하고 있는 조선공산당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여운형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미군정은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한 2단계 작업에 들어갔다. 여운형의 친일행위를 찾는 것이었다.
박태균 | 역사학자·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경향 : 2018.04.08.
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③“여운형 친일행적 찾아라”
“여운형은 순수한 민족주의자”
ㆍ“그는 한국 지도자로 적합한 사람”
ㆍ조선총독부 간부들 미군정에 진술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가 당수로 있었던 조선인민당에서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에게 탈당하도록 했던 미군정의 정치공작은 실패로 끝났다. 이승만의 좋은 친구인 굿펠로(Goodfellow)의 공작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젊은이들 사이에서 여운형의 명성과 영향력은 컸고, 친일 경력의 논란이 있었던 여운홍의 탈당은 조선인민당의 분열로 보도되었을망정 그다지 큰 정치적 타격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당시 동아일보 1946년 5월10일과 13일자에 보도되었지만, 한 줄로 짤막한 기사가 실렸을 뿐이었다.
미군정은 ‘잘 도망다니는’ 여운형의 정치력에 타격을 입히기 위한 2단계 작업에 돌입했다. 여운형의 친일행적을 찾는 것이었다. 1946년 8월2일 버치는 ‘여운형의 관계에 대해 제안된 조사’라는 제하의 문건을 작성했다.(이하 버치문서 박스 1) 여운형이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고위층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정보가 있어서 조사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여운형이 1939년부터 1945년 사이 있었던 수차례(8번에서 14번 사이) 일본 여행이 조사대상이었다.
여운형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전쟁의 총책임자였던 도조히데키(東條英機),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총독이었던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를 만났으며, 이들과의 협상을 통해서 ‘일본 제국 내에서 한국이 제한적인 자치를 얻고, 이를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영속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 그 혐의였다. 버치는 “그가 미군정과 어떤 관계를 갖든 간에 그와 일본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여운형이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여운형의 친일과 관련된 자료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론했다.
버치는 이러한 조사를 위해 한국 정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오리오단(Charles O’Riordan) 소령을 조사 실무자로 추천했다. 또한 도조 히데키와 고이소 총독, 그리고 아베 총독을 조사해야 하고, 일본 내에 있는 관련 문서들을 찾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만큼 여운형의 친일행적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고, 그의 친일행위가 있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갖고 있었다. 극우계 신문이자 여운형 암살이 필요하다는 사설을 썼던 대동신문은 1946년 2월10일 여운형의 친일행위에 대한 기사를 게재한 적이 있었다. 여운형이 1943년 학병동원 회견을 했다는 것이었다. 1946년 8월10일 하지는 조사 명령을 내렸다.
일본에서의 조사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일부 요원들은 일본 정부와 국회도서관 내의 문서자료를 찾기 시작했고, 오리오단 소령과 호프(Hope) 소령은 1945년 이전에 여운형을 만났거나 만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사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 조사와 관련된 일부 심문 자료는 정병준의 <몽양 여운형 평전>, 234~236쪽에 일부 수록되어 있다.) 조사는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주한미군정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은 8월29일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9월18일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9월20일 고이소 등 전 총독, 11월17일 니시히로 다다오 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12월12일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전 정무총감, 12월19일 이소자키 히로유키 전 조선총독부 경찰국장, 그리고 도조 히데키 전 일본 내각수반(일자 미상) 등을 심문했다. 이들에 대한 심문 과정에서 나온 질문은 미군정이 파악하고자 하는 사실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질문의 첫 번째 범주는 여운형과 일본 총독부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다. “여운형과 친한 일본인이 있었는가? 여운형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했는가? 여운형이 총독부의 돈을 받았는가? 그는 반일활동을 했는데 왜 체포하지 않았는가?” 두 번째 범주는 그가 공산당과 연결돼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가 스탈린의 친구였다는 것을 아는가?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아서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것을 아는가?” 마지막으로 여운형이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는 민족주의자인가, 기회주의자인가? 그는 중국과 러시아의 꼭두각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의 약점을 얘기해줄 다른 친구가 있는가?”
모든 심문자에게 공히 ‘이 조사는 전범에 대한 조사가 아니다’라는 전제하에서 솔직하게 진술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조사기록을 보면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가키·고이소 전 총독들을 심문한 문서.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고, 영어 번역본이 따로 만들어졌다.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에 전범이 아니었던 우가키는 조선 총독 중 여운형에 대한 신뢰가 가장 두터운 인물이었다.
“나는 그와 친구가 되었다. … 나는 진실로 여운형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은 건전했다. … 여운형은 천성적으로 온화하기 때문에 그는 전쟁 후 한국인들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이소)
“내가 총독부에 있는 동안 공산당은 없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을 원하는 사람은 많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젊은 사람들이 여운형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의 운동에 적극적이었다고 들었다.”(아베)
“그는 극단적인 반일주의자였다. 그는 한국을 떠나 상해로 갔지만, 내가 한국에 간 이후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 했다. … 상해로부터 돌아오면서 그는 한국이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훌륭한 성격을 가진 겸손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아 있다. … 만약 한국이 정치적 힘이 있다면 그가 한국의 지도자로서 적합한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우가키)
“여운형은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 그에게 돈을 준 적이 없다. … 러시아인들이 들어오면 급진적인 사람들이 풀려나 어디로 갈지 모르기 때문에 여운형의 권고대로 그 전에 이들을 풀어주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여운형에게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약속을 깼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해 대단히 만족하지 못했다. … 그는 매우 세련된 사람이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 그는 기회주의자이지만, 그건 한국인들의 공통적인 성격이다. … 나는 그가 순수한 민족주의자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한국이 러시아나 중국(국민당)을 따라갈 것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 내가 아는 한 그는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 그는 일본 정부 또는 총독부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 일본은 그를 중요한 직책에 앉히고 싶어 했다.”(엔도)
“일본의 전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으로부터의 협조를 얻기 위해 그와 얘기했다. … 불가능했다. 우선 그는 독립을 원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독립과 상호 양보의 정신하에서 함께 간다’는 선언을 원했다. 이것은 자치나 반(半)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은 그것을 동의할 수 없었고,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 … 그는 민족주의자다. … 그는 한국의 이익을 위해 일할 것이다. … 우리는 그에게 돈을 조금 주었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돈을 준 목적은) 공산주의자들과 급진적 젊은이들의 무질서를 막기 위해서였다. … 그는 한국 독립을 원했지만,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에서의 피의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고 항상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의 협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 외교적 군사적으로 일본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그는 전쟁 직후에 방송을 통해서 일본인들에게 비극적인 학살을 모면하도록 해 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일본인들을 죽이지 말라는 생각을 주려고 한 것 같다.”(니시히로)
“그는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고, 일본 지배의 반대자였다. … (여운형이 100만엔을 받았다는 것) 단지 소문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그를 기회주의자로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와 긍정적으로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전쟁에 협력하도록 하려고 했다.”(이소자키)
심문과정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던 미군정의 요원들은 일본 외무성의 문서를 조사했다. 조사관들이 찾아낸 외무성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3년 미나미 총독은 남경으로 특사를 보내서 여운형에게 과거를 잊고 돌아와서 젊은이들의 조직을 이끌어달라고 했다. 고노에 내각의 시기인 1940년 여운형은 동경에 가서 고노에 총리를 만나 장개석과의 사이에서 중재를 하겠다고 했다. 아베 총독의 초대로 1945년 8월16일 아베를 만났다. 아베는 여운형에게 평화와 질서 유지를 부탁했다. 이후 허헌, 김일성과 함께 여운형은 그때부터 한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했다.’
일본 정부 내 중앙 연락사무소의 문서에 대한 조사도 있었지만,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미군정 요원의 수도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여운형 개인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에 정예요원을 파견했건만, 이들이 얻은 정보 중 여운형의 명성에 금이 갈 수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1947년 1월 11일 최종 ‘조사보고서’가 하지 사령관에게 제출되었다.(버치 문서 박스 1) 최종보고서는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2018.04.15.
버치문서와 해방정국-저자 박태균|역사비평사 |2021.10.
저자 : 박태균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국제대학원 원장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2007년과 2017년 ‘한국현대사’와 ‘한미관계사’로 학부와 대학원 강의를 했으며, 계간지 「역사비평」 주간과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주간을 역임했다. 쓴 책으로는 「조봉암 연구」,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원형과 변용: 한국경제개발계획의 기원」, 「베트남 전쟁」,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사건으로 읽는 대한민국」 등이 있다.
1 미군정은 왜 실패했는가 ― “맥아더는 완고”했고, “하지는 순진”했다
2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의 구애 ― “잘 도망 다니고 있지만, 여전히 중요하다.”
3 여운형의 친일 행적을 찾아라
4 여운형의 친일 행위에 대한 최종 조사 보고서
5 “내가 테러리스트들의 애국적 행위를 중지시켜야 하는가”
6 이승만의 귀국을 막아라
7 이승만과 김구 ― 문제는 돈이었다
8 내조의 여왕인가, 국정농단의 기원인가 ― 프란체스카 여사
9 강용흘을 아시나요
10 현직 경찰은 왜 장덕수를 죽였을까
11 김구의 권위를 떨어뜨려라 ― 1년 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김구 암살
12 미군정이 믿는 구석은 경찰, 경찰이 믿는 구석은 이승만
13 ‘한민당 코트’라는 말은 왜 나왔을까
14 이승만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 경찰과 청년단
15 서북청년단이 못마땅했던 미군정
16 친일파의 악행을 고발한다
17 우익의 정치자금은 어디에서
18 어떻게 음식을 확보할 것인가
19 미군정이 발간한 ??당신과 한국??
20 해방 후 최초의 복권, 올림픽 복권
21 장군의 아들인가, 테러리스트인가
22 여운형의 죽음과 친일 경찰
23 미군정이 만들려고 했던 정부 ― 해방 직후 최초의 헌법 초안
24 농지개혁으로 혁명을 막아라
25 버치와 한국민주당의 갈등, 그리고 내각책임제의 실패
26 버치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 김규식
27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28 버치가 평가한 미군정과 해방 한국
29 현재 한국 사회의 기원을 찾아서 ― 미군정기의 역사
[부록 l 버치 문서 Box의 자료]
· 여운형 조사를 위해 전 일본 총독부 인사들을 심문한 기록
· 여운형과 일본 정부의 관계에 대한 조사의 최종 보고서
· 정치 관련 자료
· 가짜 뉴스 관련 자료
· 지방 정세 분석
· 메모와 편지
· 버치가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의 자료
출판사 서평
미군정 시기는 오늘날 한국 정치가 지닌 흑역사의 기원일지도 모른다
저자 박태균이 ??버치 문서와 해방 정국??을 저술한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의 상황을 좀 더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 나타나는 폐단의 기원을 찾는 것이다. 특히 후자는 그때로부터 70년이 넘도록 고치지 못한 정치적 악습들인데, 가짜 뉴스를 이용한 정치 구도 왜곡, 가장 합리적인 정치인들의 배제 혹은 도태, 보수 정치 세력을 등에 업은 극우단체의 폭력성, 기득권 주류 세력을 대체할 건전한 세력의 부재 등은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고스란히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상기시키고, 또 희망하면서 책을 마무리했다.
“버치 문서는 미군정기의 실패와 함께 한국 사회가 겪었던 좌절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해방과 통일 독립국가 수립이라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를 상실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기회의 상실은 곧 전쟁이라는 위기로 다가왔으며, 또다시 그런 경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의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는 오늘, 버치 문서를 통해 보는 미군정기 한국 사회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더 소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2016년과 2017년 시민의 힘이 좌초 직전의 한국호를 구해냈다면, 이제 그 한국호가 또다시 좌초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버치가 가장 존경했던 김규식과 여운형이 그렸던 꿈이 7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실현될 수 있다면, 좌우합작위원회를 지원했던 버치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게 될 것이다.”
책속ㅇ로
이승만은 그에 대한 우리의 혐오를 알고 있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두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는데 하지 장군과 버치 중위’라고 했다.--- p.19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에 진정한 정치를 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식민지에서 핍박받고 있었던 조선인들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총독부에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적과도 대화하고,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자세, 그것이 진정한 정치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라고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정치는 하지 않고 공작만 하는 한국 현대사의 대통령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여운형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p.48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한 이래로 통합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분열의 상징이었다. “덮어놓고 뭉치자.”라고 했지만, 실상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빼고’ 덮어놓고 뭉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비난했다.--- p.72
돈에 대한 두 사람(이승만과 김구)의 태도는 두 사람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며,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돈에 대한 이승만의 욕심은 권력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권력 그 자체는 돈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 작동한다. 반면에 김구는 집단의 수장으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돈을 추구한다. 돈이 많았을 때 그는 북한으로부터 월남한 난민을 위해 사용했고, 극빈자를 구호하는 데 썼으며, 그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기부했다.--- p.78~79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암살을 했다는 것은 과도정부의 한국인 관료들을 놀라게 하는 효과가 있다. 암살자들은 장덕수의 부인에게 그들의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p.115
친일 지주는 지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청년단을 불러들였다. 서북청년단과 광복청년단이었다. 이들은 그 지역 출신이 아니었다. 조용했던 마을은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하기 시작했다.--- p.163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정치는 국민들의 정서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들이 정권을 잡는 데만 몰두했다. 해방은 한국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p.183
결과적으로 볼 때 미군정의 정책은 모두 실패했다. 여운형 암살과 장덕수 암살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한국민주당 자체 가 다수당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정당이었는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남은 희망은 김규식밖에 없었다. 특히 버치로서는 이승만과의 관계가 안 좋았기 때문에 김규식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정치 세력들을 묶어야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결코 버치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김규식의 대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었다.--- p.243
분단 정부를 수립해서는 안 된다는 김규식의 신념, 그리고 이승만이 갖고 있었던 돈과 지방에서의 정치적 힘이라는 두 요소를 제외하고도 김규식이 지도자가 될 수 없었던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바로 여운형의 죽음이었다. … 1949년 6월 김구의 암살은 김규식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p.259
한국을 떠난 직후 쓴 글에서 버치는 특히 미군정의 정책에 대해서 비판했다. 즉, 친일파를 기용했던 미국의 정책,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대한 미군정 요원들의 잘못된 태도 등은 미군정이 실패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p.267
하지와 버치의 예상은 적중했다. 미군정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지 못했다. 미국의 대한 정책은 번번이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과 미국은 동맹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p.277
버치 문서는 미군정기의 실패와 함께 한국 사회가 겪었던 좌절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해방과 통일 독립국가 수립이라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를 상실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기회의 상실은 곧 전쟁이라는 위기로 다가왔으며, 또다시 그런 경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 p.286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한 이래로 통합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분열의 상징이었다. "덮어놓고 뭉치자"라고 했지만, 실상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빼고' 덮어놓고 뭉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비난했다.-72쪽
이 책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한국에 들어와 1948년 5월 총선거 무렵까지 한국 정치인을 담당하는 미군정 정치고문단에서 활동한 레너드 버치 (Leonard Bertsch) 중위가 기록한 문서를 박태균 원장이 분석했다. 경향신문에 6개월동안 연재한 기고문을 보완해 출간한 책이다.
미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서 발견한 '버치 문서 박스'에는 버치가 한국 정치인과 소통하면서 기록한 자료들이 가득했다. 특정 인물이나 단체에 대한 조사ㆍ분석ㆍ보고의 문서부터 명함, 편지, 사진, 메모에 이르기까지 보물같은 자료들이 수록돼 있었다
텍사스 출신인 버치는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와 오하이오 주의 변호사로 활동하다 법무담당관으로 입대한 뒤 한국에 배치돼 존 하지(John Reed Hodge) 미군정 사령관의 지원을 받으며 30대 중반의 나이에 한국의 쟁쟁한 정치인들을 만나며 거물이 됐다. 그는 수시로 정치인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정치적 동향을 미군정의 상관들에게 보고했다.
때로는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 정치적 흐름의 방향을 조정하는 역할도 했다. 게다가 그는 정치자금과 정치인들의 숙소와 당사를 마련하는 작업에도 관여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국내와 해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던 유수한 한국의 정치인들이 버치를 만나고자 했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기도 했고, 다양한 상황에 대해 청원을 하기도 했다. 당시 악명 높던 경찰이 불법적으로 체포한 사람들을 풀어달라는 요청도 끊이지 않았다.
버치는 자신이 만난 정치인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미군정의 상관들에게 전달했는데, 그 복사본은 물론 중요도가 떨어지는 일부 문서들이나 개인 메모 역시 보관했다. 그가 보관하고 있던 문서들은 사후 그가 졸업한 하버드 대학교 옌칭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에 진정한 정치를 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식민지에서 핍박받고 있었던 조선인들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총독부에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적과도 대화하고,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자세, 그것이 진정한 정치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라고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정치는 하지 않고 공작만 하는 한국 현대사의 대통령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여운형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48쪽
결과적으로 볼 때 미군정의 정책은 모두 실패했다. 여운형 암살과 장덕수 암살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한국민주당 자체가 다수당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정당이었는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남은 희망은 김규식 밖에 없었다. 특히 버치로서는 이승만과의 관계가 안 좋았기 때문에 김규식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정치 세력들을 묶어야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결코 버치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김규식의 대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었다.-243쪽
분단 정부를 수립해서는 안 된다는 김규식의 신념, 그리고 이승만이 갖고 있었던 돈과 지방에서의 정치적 힘이라는 두 요소를 제외하고도 김규식이 지도자가 될 수 없었던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바로 여운형의 죽음이었다. … 1949년 6월 김구의 암살은 김규식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259쪽
버치는 한국에 머물면서 여러 정치인을 만났는데 그중 여운형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버치는 "여운형 선생의 정신을 기억하겠다"며 "남아 있는 사람에게 큰 교훈을 준 인물"이라고 여운형 조사(弔辭)에 썼다. 저자는 반공적이지 않았던 여운형이 미국 정책에 부합하는 정치인은 아니었으나, 대중적 영향력이 컸고 좌파를 분열시키는 효과도 노릴 수 있어 미군정이 여운형을 끌어안으려 했다고 주장한다. 미군정은 여운형이 계속 거부하자 그의 힘을 빼기 위해 친일 행적을 찾으려 일본에까지 가서 조사를 벌였지만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CBS노컷뉴스 곽인숙 기자 2021-11-10
"혁명가는 거리에서 죽는 법"
[여운형 70주기⑥]통일정부의 마지막 희망 사라지다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의 첫 회동이 열린 3일 후인 1946년 1월 19일, 좌파정당 및 조직들의 전선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의 발기인 대회가 개최됐다. 미소공동위원회에 대응하자는 여운형의 제안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화답한 형식이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준비된 각본에 의한 전선체의 색채가 짙었다.
미군이 국내에 진주한 초기에 박헌영은 치명적인 실책을 하고 말았다. 일제의 잔재와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이 1순위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미군도 동일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예단한 것이다. 이를테면, 이 문제에 관한한 미군과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박헌영의 정세판단은 완전히 빗나갔다. 미군은 국내에 들어오자 준(準)정부에 해당하는 미군정을 선포하고 여운형의 건준과 임시정부까지 불법조직으로 규정했다. 곧바로 조선공산당의 활동을 제약하고 당원들의 회합을 방해하고 불법적으로 연행하는 것을 반복했다. 위기에 빠진 박헌영은 좌파들을 전선체 형식으로 하나로 모은 다음, 조선공산당을 새롭게 탈각시키는 기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운동
민전의 공동의장으로 선임된 사람들은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 5명이었다. 여운형은 건준과 조선인민당의 위원장이었고, 김원봉은 조선인민당의 부위원장, 허헌은 건준의 부위원장이었다. 평양에 중앙당(위원장 조만식)이 있는 남조선신민당의 백남운 위원장은 중립적인 행보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여운형과 친밀한 관계였다.
의장단만을 놓고 보면 여운형이 주도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민전의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국장은 조선공산당의 이강국이었고, 조직총괄 역시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인물 중에 하나인 홍덕유였다. 재정을 총괄하는 자리는 국내 상해파 출신인 정노식이 맡고 있었지만 이때는 이미 조선공산당에 가담하고 있었다. 중앙실무, 조직, 재정을 조선공산당의 인물이 맡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상 민전의 조직을 조선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급박한 정세이기도 했지만 여운형이 발 빠르게 움직인 다른 이유도 있었다. 2월 1일 임시정부의 김구는 준(準)정부에 해당하는 비상국민회의를 선포하고 곧바로 의회에 해당하는 대한국민민주의원을 조직한 후 이를 미군정의 자문기관이라고 선언했다. 김구는 미군정의 실체를 일단 인정하는 동시에 정권을 인수할 행정부와 의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한 것이다. 여운형은 미소공동위원회와 김구의 선제공격에 대응하는 조직을 결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조선공산당에 비판적이었지만 민전에 참여한 것은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
3월 20일, 공식적인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됐지만 소련이 3상회의 결정에 동의하는 정치세력에게만 정부에 참여할 기회를 주자는 안을 들고 나오면서 난항을 거듭한 끝에 결렬됐다. 미소공위에 냉기류가 흐르면서 차기 회의는 개최되지 못한 채 출처불명의 소문들만 떠돌았다. 이승만이 이른바 ‘정읍발언’을 들고 나온 것은 그때였다. 영·호남을 방문 중이던 이승만이 정읍연설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의 수립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발언은 정국을 단독정부 논쟁으로 치달았다. 여운형은 즉각 단독정부 수립은 “10년이 지나도 고칠 수 없는 (민족)분열의 원인”될 것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여운형은 박헌영에 반대하며 민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안재홍과 김규식을 포함하여 본격적인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여운형은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유일한 방법은 좌우합작이라고 판단했다. 여운형에게 작은 희망을 실어 준 것은 예상외로 미군정청이었다. 군정청도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며 지원할 의사를 비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군정청은 소련과의 불필요한 대립을 피하자는 입장이었다. 요컨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아직은’ 동의하지 않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좌우합작에 대한 군정청의 입장은 박헌영과의 단절을 조건으로 내걸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을 배제한 좌우합작은 무의미한 구호에 불과했다.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은 시작부터 암초에 직면했다. 이른바 정판사 사건이 터지면서 군정청은 조선공산당을 배후로 지목하고 사실상 불법정치단체로 규정하며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위기에 직면한 박헌영은 그동안의 노선을 전면 수정하면서 막대기를 좌측으로 구부렸다. 그동안 박헌영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1주기 추모식에 참여해 추도사를 하는 등 군정청체제에서 합법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기 위한 행보를 계속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정판사 사건을 기점으로 박헌영은 때 이른 전면전을 선택했다.
박헌영과의 대립과 정계은퇴의 위기
박헌영은 좌우합작의 5대원칙으로 토지의 무상몰수와 무상분배, 군정청의 사실상 폐지와 행정부의 기능을 인민기구에 넘길 것을 주장했다. 박헌영의 극단적인 회전은 조선공산당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대중정치의 장악력을 급속히 상실했다. 여운형은 5대원칙을 반대하면서 박헌영을 설득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허사였다. 여운형이 대외활동에 주력하는 동안 1인 대주주 정당에 가까운 조선인민당이 안으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박헌영은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을 필요에 따라 흔들기 위해 당 조직을 조선인민당에 계속해서 침투시키고 있었고, 상층 중심인 조선인민당은 점점 유명무실해지고 있었다.
1946년 8월, 조선인민당을 사실상 장악한 조선공산당은 조선신민당과 3당 합당을 결의하는 당내 쿠데타를 실행했다. 여운형은 군정청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한 후 당수직을 사임하며 후퇴해야 했다. 좌우합작을 위한 마지막 회한이었을까? 박헌영에 저항했던 여운형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위원장을 고민 끝에 수락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을 계속 주장했지만 남로당을 장악하고 있는 박헌영 부위원장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당을 점점 극단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1946년 12월, 여운형은 남로당 탈당과 함께 잠정적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기회를 모색했다.
잠정적인 정계은퇴를 선언한 것은 여운형에게 위기를 불러왔다. 여운형을 둘러싸고 있던 조직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극좌와 극우세력 모두가 그를 겨냥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7년 3월 새벽 여운형의 계동집에서 폭탄이 터져 집이 반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 군정청은 제대로 된 수사마저 진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계를 은퇴하고 고향인 양평으로 귀향하라고 압박했다. 모두가 남로당이 배후라고 주장했지만 여운형이 죽은 후 극우단체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여운형에 대한 위협은 그치지 않았다. 불과 한 달 후 여운형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권총 저격을 받았지만 극적으로 위기를 피했다. 사건과 범인은 미궁에 빠졌고 이를 계기로 여운형은 자신의 두 딸을 북한으로 보냈지만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1947년 봄이 되면서 개점 휴업 상태였던 미소공위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자 여운형은 다시 전면에 나섰다. 여운형은 영·호남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통해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로 유명한 그의 연설능력으로 지지기반을 재건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남로당에 흡수된 조선인민당이 어느 정도 건재한지 직접 확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여운형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지방을 순회하면서 확인한 결과 상층부만 형식적으로 흡수된 경우가 다수였고 기층당원들은 남로당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온 여운형은 즉시 남조선신민당의 백남운과 회동했다. 우파정당만이 아니라 남로당과도 거리를 두고 있던 백남운은 여운형의 신당 결성에 동의했다. 여운형에게 원군이 되어준 다른 인물이 있었다. 김구의 임시정부에서 탈퇴한 후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던 장건상이 합류의사를 밝힌 것이다.
1947년 5월 24일 통일정부 수립과 좌우합작을 내건 근로인민당이 창당됐다. 위원장에는 여운형, 부위원장은 백남운과 장건상이 선출되었다. 노정객 홍명희가 참여하면서 근로인민당은 빠르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여운형이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좌우합작위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신탁통치는 새롭게 건설될 정부가 결정할 문제”라는 조건부 노선을 채택하고 미소공위 참가를 결정했다. 사실상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의미였다.
혁명가는 거리에서 죽는 법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IOC 가입을 기념하는 영국과의 친선축구경기를 참관하기 위해 서울운동장으로 향했다. 하루도 운동을 거르지 않는 여운형은 조선체육회 회장을 맡고 있었고 이듬해 열리는 런던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IOC 가입을 추진했다. 이날 오후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정장관 수락을 위한 면담이 잡혀 있었다. 축구경기가 끝난 후 옷을 갈아입기 위해 계동 집으로 향하던 중 혜화동 로터리에서 트럭이 여운형의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그때 골목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한지근(이필형)이 자동차로 다가와 권총을 발사했다. 심장과 복부를 관통당한 여운형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절명했다.
1947년 8월 3일 여운형 장례식. 60만여명의 추모인파가 몰렸다.
여운형 배후라고 주장한 백의사의 김영성(맨 앞)
평안북도 영변출신인 한지근은 서울로 내려왔지만 번번한 벌이가 없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같은 영변출신으로 먼저 월남한 중학동창 김훈을 찾아가자 그는 숙식이 가능한 집을 소개해주었다. 집은 ‘격몽의숙’이라고 자칭했고 집주인은 송진우 암살범으로 극우테러 조직을 이끌던 한현우였다. 감옥에 있는 한현우를 대신해 백의사를 유지하며 집에 기거하던 인물은 신동운이었다. 신동운은 송진우의 경호원이었다.
신동운은 파시즘 내용이 다분한 한현우의 옥중수기를 한지근에게 읽도록 권유하며 민족의 분열을 유도하는 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논리를 주입시켰다. 신동운은 한현우의 결심공판에 한지근을 데려가는 등 테러요원으로 양성했다. 한지근은 신동운이 지어준 가명이었다. 여운형 암살은 한지근의 단독범행이라고 발표되었다. 하지만 1974년 김흥성, 김영성, 김훈, 유용호 4명이 자신들이 배후라고 공개 기자회견을 열었다. 공소시효가 지난 탓에 이들에 대한 조사와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여운형이 죽으면서 좌우합작은 표류했다. 중간지대가 사라지자 정국은 찬탁과 반탁으로 대립하면서 출구를 찾지 못했다. 미소공위는 공전을 거듭했고 미국은 철수를 결정하고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김규식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끌고 있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고 그해 겨울 위원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부터 죽을 때까지 여운형은 10여 차례나 테러를 당했다. 해방 후부터는 테러가 더 빈발했고 좌우합작노선으로 활동하면서는 극우와 극좌 모두에게서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테러와 암살위협을 동지들과 측근들이 걱정할 때마다 여운형은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최백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2017년 10월 30일
"바위 같은 의지 보였던 몽양... 남북 당국자도 잊지 말아야“
우이동 몽양 여운형 선생 묘소에서 72주기 추모식 열려
추모식에서 애국가 부르지 않은 이유
이날 눈에 띈 것은 추모식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은 것이다. 추모식 말미에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친일파 안익태씨가 작곡한 곡을 몽양 선생님 앞에서 부르는 것을 몽양 선생님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고민 속에 애국가를 부지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면 충격을 받을 국민들이 많을 것이다. 극우세력은 몽양 추모식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으면 '몽양이 빨갱이다'고 비난할 지 모르지만, 몽양 선생 추모식에서 이런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본다면 우리 후손들이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번에 애국가를 부르지 않고, 8월 8일 2시 국회에서 '애국가를 불러야 하느냐 마느냐'에 관한 공청회를 열 것이다."
▲ 기념사업히 이부영 이사장의 초모사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의 이부영 이사장이 추모사와 더불어 친일파 안익태의 애국가을 부르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 김광철
[오마이뉴스 김광철 기자] 2019.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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