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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서평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

by 이성근 2021. 12. 26.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 - 진 록스던 지음, 상추쌈 펴냄

 

GENE LOGSDON1931년 미국 오하이오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문을 닫은 가톨릭신학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미국학과 민속학 박사 요건을 채웠지만, 교수직을 거부하면서 학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저널리스트로서 시골살이에 관한 글을 쓰며 도시 근교에서 사는 동안, 자신에게 더 나은 길이 무엇인지 이미 열두 살 때 알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결국 남다른 자유를 찾아 헤맨 끝에 마흔두 살이 되던 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으로 돌아왔고, 끝내 자유를 찾았다.

아내와 함께 32에이커짜리 농장을 꾸리며, 자립적 소농으로서 과일과 곡물, 채소를 기르며 가축을 쳤다. 하루하루 쓴맛과 절망의 먹이가 되지 않고, 땅으로 한 걸음씩 더 나아가며 그 속에 깃드는 행복과 기쁨을 놓치지 않고 마주했다.

시간을 쪼개 꾸준히 글을 쓰기도 했는데, 2016년 암으로 돌아갈 때까지 자연의 속도로 살기, 젊은 농부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농업과 시골 문화를 다룬 여러 에세이와 어리석음의 제왕들같은 소설, 거룩한 똥과 같은 다양한 농업 길잡이 책을 30권이 넘게 펴냈다.

 

역자 : 이수영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오랜 시간 전문 번역가로 일해 왔다. 저자를 공들여 이해하는 기회를 누리는 것은 옮긴이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라 생각한다. 더 나아가 그 가르침대로 삶을 가꾸어 가고 확신을 지니게 된다면.

조화로운 삶의 지속, 사라진 내일, 지구를 가꾼다는 것에 대하여, 학교의 배신, , 발밑의 혁명과 같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GO BACK TO NATURE” VS “GO FORWARD TO NATURE”

진정한 대안은, 자연으로 돌아가는것이 아니라 자연으로 더 나아가는것이다.

 

목차

ㆍ여기 성벽에 남아

1 즐겁고 수월하게 일하기

2 들판과 숲의 경제학

3 텃밭, 모든 것의 시작

4 집짐승 기르기

5 농부에게 물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6 꼴밭 가꾸기

7 숲에서 거두는 풍요로움

8 옥수수, 화학적 기업농과 경직된 유기농 사이에서

9시시콜콜한 농기계 길잡이

10 소농이 심을 만한 여러 가지

ㆍ진 록스던이 소중하게 여기는 책

 

출판사 서평

1.

책을 펴낸 상추쌈 출판사는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에 있습니다. ? 주소지를 처음 본 이들은 으레 고개를 갸웃하기 마련이지요. 시골 마을 한가운데에 살면서, 600, 500평을 가꾸는 틈틈이 책을 만듭니다. 농사라니 어쩐지 거창하게 들리지만 얼마 되지 않는 땅(그래도 일하려고 들어서면 엄청나게넓어 보입니다. 원래 다 그렇지요.)에 엎드려 아이들 소꿉 살듯 꼼지락거리는 일명 소꿉살이 농법입니다. 큰 돈이 되는 농사는 아니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일이 그 무엇보다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에요. 재미. 그리고 직접 농사지어 거두는 것이 사들이는 것에 견줄 수 없을 만큼 맛있습니다. 그래서 책은 띄엄띄엄, 이 출판사가 일 접었나 싶은 생각이 들 즈음에야 한 권씩 나오고 있습니다. 2021년의 첫 책은 12월이 되어서야 나온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입니다. 어느 해나 그만저만한 사정이 있었지만, 올해는 밭에 조그맣게 창고도 직접 올려야 했고, 밭을 조각보처럼 조각조각 나누어 먹고 싶은 온갖 것, 또 새로운 것을 심어 본 해였습니다.

 

2.

저자 진 록스던은 머나먼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32에이커(32에이커라니 무슨 대농 같지만, 미국에서는 초초초소농이라고 할 수 있지요.) 땅을 일구며 평생을 산 사람입니다. 온갖 농사를 지으면서도, 2016년 돌아갈 때까지 다양하고 구체적인 농사 길잡이 책부터, 에세이, 거기다 소설까지 무려 마흔세 권의 책을 남겼습니다. 한국에 그의 글이 처음 소개된 건 2001년입니다. 당시 귀농 붐을 이끌었던 책 가운데 하나인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그러니까 귀농 귀촌한 이들 집에 가 보면 그 집 책장에 거의 반드시 이 책이 꽂혀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몇 권의 책 가운데 한 권이지요.) 첫머리에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유를 찾는 법이라는 진 록스던의 연설문이 실려 있습니다. 귀농을 꿈꾸며 파주에서 출판사를 다니던 상추쌈 편집자 두 사람에게는 정말 강렬한 인상을 남긴 글이었습니다.

 

3.

한국에 소개된 글은 이것 하나였고, 대체 어떤 사람일까 싶어서 미국 아마존을 뒤져 보니, 나온 책이 꽤 많았습니다. 이 책The Contrary Farmer처럼 그 분야에서는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는 책들도 여럿이었습니다. 이만하면 곧 제대로 된 번역서가 하나 나오겠군 하면서 기다렸지만, 오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 사이 거름 만들기에 대한 설명서 거룩한 똥Holy Shit이 한 권 번역되어 나왔을 뿐, 그이의 생각과 삶을 훑을 수 있는 책은 20년 가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이 책은 우리가, 상추쌈이, 내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길게 떠들었지만 고백하자면 이 책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The Contrary Farmer는 결국 그 누구보다 저희가 읽고 싶어서 낸 책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번역자가 보내온 우리말 원고를 받아 든 날! 이어지는 밑줄과 밑줄과 밑줄, 장을 넘길 때마다 감탄 감탄 감탄이 그야말로 셀 수 없이 이어졌습니다. 이건 그 누구보다 농사를 지으며, 다른 일도 함께 이어가는 우리와 같은 이들에게 가장 잘 들어맞는 글이었으니까요. 모처럼 책을 만드는 이로서, 그리고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는 한 독자로서 아직 녹슬지 않은 이 그 어느 때보다 뿌듯했던 순간이었습니다.

 

4.

잘 훈련된 문장으로 자신의 교양을 그럴듯하게 내보이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세계와 사물의 본질을 파헤치는 영미권 에세이의 유서 깊은 전통 아래에서 진 록스던의 글은 종횡무진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달립니다.

하루하루 돌보아야 하는 짐승들이 사는 어릿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뭇 생명이 깃든 꼴밭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리는 한편, 농부의 한해살이를 어느새 갈무리하더니만, 숲의 은혜로움을 입으며 사는 삶의 보람과, 히커리너트 파이와, 10분 거리에서 따다가 쪄 먹는 옥수수 맛의 놀라움에 대해 적었다가, 자연과 멀어진 오늘날 생태주의자들의 민낯을, 경직된 유기농업주의자들의 모순을 짚고, 지역 주민들을 무시하며 멋대로 엉터리 결정을 내려 꽂는 책상머리 공무원들을 손가락질했다가, 이내 가르쳐야 할 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근대 교육을 비판합니다. 그랬다가는 다시 쓸만한 농기구는 어떻게 찾고 구하는 건지, 짐승들 겨울 먹이로 쓸 말린 꼴은 어떻게 마련하는 게 좋은지 하는 주제도 아랑곳해 보고, 반골 농부들이 함께 읽으면 좋을 책도 권합니다.

결국 그의 글은 땀과 수고, 고생스러움으로만 그려지는 농업에 대한 이미지를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속에는 아무리 바쁜 중에도 소프트볼 할 시간은 놓치지 않는, 다시 말해 게으름을 즐길 틈(윤구병)”이 있는 농민의 삶이 정직하게 담겨 있습니다. 대차대조표에는 잡히지 않는 충만한 기쁨 속에서 놀듯이 일하고 일하듯이 노는 농경 사회의 됨됨이가, 유머가 깃든 진솔한 문장에 기대어 펼쳐집니다. 어떤 이야깃거리를 앞에 두고도 두루뭉술하게 뭉개거나 세련되게 포장하지 않고, 비유가 없이는 말하지 않으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에둘러치는 법 또한 없는, 농민의 힘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글입니다.

 

5.

진 록스던은 이 종횡무진을 통해 반골 중의 반골이라 할 만한 아미시들, 오하이오에서 평생 함께 살아온 이웃들, 두름성 넘치는 도시 텃밭 농부들, 혁신적인 농업 시장 경제를 열어 가는 도전적인 비정통파 유기 재배자들, 손수 땅을 일구지는 않지만 농촌에 살면서 그 속에 담긴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다양한 매체로 담아내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존경 어린 눈으로 따뜻하게 바라봅니다. 그들 모두가 즐거움과 만족을 거두는 자립 농부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리고 뜻있는 도시 소비자들 또한 새롭고 건강한 농업을 여는 중요한 축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는 먹을거리라는 공통분모위에 서 있는 모두에게 최선을 다해, 거침없이 말을 거는 책이기도 합니다.

 

6.

옮긴이 이수영도 북녘 땅이 가까운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삽니다. 20년 넘게 영어로 된 좋은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전업으로 해 온 사람입니다. 진 록스던이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에서 반골 농부 혁명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존경받는 두 지도자라고 쓴 스콧과 헬렌 니어링 부부가 함께 쓴 책 조화로운 삶의 지속2002년에 옮겼습니다. 아까 말한 그 귀농 귀촌인들 집에 반드시 꽂혀 있을 공산이 큰 또 다른 책이지요. 사전에도 잘 잡히지 않는 농업과 생태 관련 용어들이 숱한 글을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번역해 냈습니다. 출간 전 최종 검토를 마친 뒤 이이는 이런 글을 보내 왔습니다.

 

천천히, 내용을 새기며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고

요새 이야기처럼,

아니 요새 더욱 의미 있는 내용이라 여겨지네요.

 

그렇습니다. 농사가 그 무엇보다 재미있는 일이듯이, 이 책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농사가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시대를 넘어 먹을거리라는 공통분모를 둔 모두에게 의미 있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이 운 좋게도 독자 여러분보다 원고를 조금 먼저 읽은 번역자와 편집자가 자신 있게 건넬 수 있는 말입니다.

 

7.

마지막으로 진 록스던의 절친이었던 웬델 베리가, 그의 죽음 뒤에 남긴 글을 덧붙입니다.

 

진 록스던과 나는 텃밭에서 강가에 있는 바위 벌판으로 내려가 앉아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다른 곳, 다른 문화 속에서 자라 온 터여서 차이가 한층 도드라진 대화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농사를 지으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농사에 대한 감각과 생각이 똑같이 옛 방식에 가까웠습니다. 제가 보기엔 진은 주로 어머니한테서, 저는 대부분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방식인 듯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얼마나 의견이 일치하는지를 알게 되어서 내내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것이 마흔여섯 해 동안 이어진 우리 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대화는 저의 중요한 생명유지장치였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얼굴을 마주하고, 자주 편지를 쓰고, 때로는 전화를 주고받았습니다. 농사와 텃밭 가꾸기, 가족이나 역사를 비롯해 여러 중요한 주제들도 입에 올랐지만,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도 이어졌고, 언제나 큰 웃음이 넘쳤습니다. 저는 그의 글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그가 최근에 펴낸 소설을 읽고 기뻤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또 함께하는 순간이 훨씬 더 필요했습니다. 진은 저의 더없는 벗이었습니다.”

(2016, 진 록스던이 돌아간 뒤 쓴 글 가운데)

 

책속으로

소매업을 하며 농사까지 짓는다면, 삶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두 가지를 다 잘 해낼 만큼 시간이 넉넉하지 않을 뿐더러, 농부는 가게 주인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농사에 이끌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판매를 좋아하지 않으니 잘 팔지도 못한다. 물건을 잘 팔고,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 그이가 판매로 먹고살게 하는 쪽이 훨씬 낫다. 특별한 연장이 필요할 때는 기술자에게 돈을 내고 만들어 달라는 게 좋다. 그래야 더 행복해지고, 애초에 하려고 했던 일에 집중하여 돈을 벌 수 있다. 그래야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기대어 사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다.--- p.76

 

이렇듯 농사에서 실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실험장은 거의 한결같이 텃밭이다. 전업 농부들은 이미 있는 기술을 개선하는 일은 잘하지만 새로운 농법으로 바꾸는 일은 드물다. 경제면에서 대규모 시장에 묶여 있고, 농법을 바꾸는 과정에서 손해가 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농사의 새로운 발상은 당장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텃밭에서 비롯된다. 대체로 이런 텃밭은 도시 텃밭이다.--- p.86

 

천진하게 자연을 사랑하는 이는 자연으로 가기만 하면, 잠깐의 고요를 마치 물병에 담아 파는 샘물처럼 들이마실 수 있다고 여긴다. (중략) 캠핑카를 타고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비행기를 타고 외딴 호수에 내린다. 산업사회의 사치품을 충분히 갖고 와서 한두 주 동안 편안히 묵는다. 그들은 잠깐 자연을 맛본다. 총을 쏜다.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맥주를 퍼마신다. 카드놀이를 한다.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삶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나. 하지만 음식과 필름이 떨어질세라 서둘러 문명으로 돌아간다. 자연은 거대한 도살장이다. 어떤 곤충이나 식물, 사람과 같은 동물이 살 수 있는 건 다른 곤충과 식물과 동물이 죽는 덕분이다.--- p.110

 

삶은 본질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교육이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내용이지만 교육은 알려 주지 않는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 인간 사회는 위험성이 0인 환경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p.112

 

사람이 부치는 땅 100에이커마다 숲 10에이커를 남겨 두는 건 전통적인 관습이었다. 환경을 위한 십일조라고나 할까, 하지만 피스톤 엔진이 농부들을 위험한 수준까지 탐욕에 물들게 했다.--- p.239

 

우리 문명이 숲 문명이라는 걸 잊는다면 우리는 천천히 쇠퇴하여 사라질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몇 안 되는 이들이 끝내 소농이자 목공인이 되고, 나무를 심어 작은 숲을 가꾸며 거기서 산다. 사실 이들은 지난 암흑의 시대에 수도원이 그랬듯이, 지구를 가혹하게 약탈하는 이 암흑의 시대에 문명을 지키는 작은 근거지를 세우는 것이다.--- p.241

 

나무로 무엇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든, 그것을 해 보라. 거룩한 가능성은 우리 반골 농부가 하기 나름이다. 이른바 우리 경제는 지금부터 20, 40, 또는 60년 뒤에나 벌이가 될 사업이 끼어들 자리가 아예 없다. 자신의 삶이, 아니 적어도 삶의 일부라도 그런 경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 이들만이 옥수수와 목화 대신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고자한다.

--- p.248

 

지금 내가 소중히 돌아보는 것은 바심 품앗이의 경제성이 아니라 그 즐거움이다. 우리 두레는 열다섯 사람쯤 됐는데 밭에서 함께 일하고, 농담을 던지고, 콜레스테롤이 잔뜩 든 음식을 하루에 다섯 끼, 정말로 다섯 끼나 아무 거리낌 없이 기분 좋게 먹었다. 여러 가족이, 서로 좋아하든 싫어하든, 같은 경제적 이해관계, 다시 말해 작물 수확으로 묶여 있었다. 그것은 참된 공동체였다. 텔레비전 화면의 흐릿한 빛을 바라보며 우리가 오늘날 공유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p.398

 

역사학자들은 시골과 도시 경제의 정확한 인과관계를 따지고 들지만, 사실인즉슨 도시 사회가 튼튼하고 활기차려면 반드시 튼튼하고 활기찬 시골 사회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로마제국, 대영제국, 소비에트 공산주의 제국의 전체적인 쇠퇴는, 그 시골 사회의 쇠퇴와 함께, 혹은 그에 뒤이어 일어났다. 똑같은 일이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할 뿐이다. --- p.406

 

자연의 속도로 살다 간 유쾌한 문명의 파수꾼 진 록스던을 한국에 소개하는 첫 책이다.

 

1931년 미국 오하이오의 한 농장에서 태어난 진 록스던은 가톨릭신학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미국학과 민속학 박사 요건을 채웠지만, 교수직을 거부하면서 학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저널리스트로서 시골살이에 관한 글을 쓰며 도시 근교에서 살는 동안 아내와 함께 32에이커짜리 농장을 꾸리며, 자립적 소농으로서 과일과 곡물, 채소를 기르며 가축을 쳤다.

 

땅으로 한 걸음씩 더 나아가며 그 속에 깃드는 행복과 기쁨을 놓치지 않고 마주하는 한 방편으로 꾸준히 글을 썼는데, 2016년 암으로 돌아갈 때까지 농업과 시골 문화를 다룬 여러 에세이와 다양한 농업 길잡이 책을 30권 넘게 펴냈다.

한편 이 책을 펴낸 상추쌈 출판사 대표도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에서 논 600, 500평을 가꾸는 틈틈이 책을 만는 곳이어서 이목을 끌고 있다.

 

상추쌈 출판사의 2021년의 첫 책이 12월이 되어서야 나온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인 셈인데, 올해는 밭에 조그맣게 창고도 직접 올려야 했고, 밭을 조각보처럼 조각조각 나누어 먹고 싶은 온갖 것, 또 새로운 것을 심어 보다 책 출판이 늦어졌다고 설명했다.

 

상추쌈 출판사의 고백에 따르면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는 그 누구보다 본인들이 읽고 싶어서 낸 책이다.

 

때문에 마침내 번역자가 보내온 우리말 원고를 받아 든 날! 이어지는 밑줄과 밑줄과 밑줄, 장을 넘길 때마다 감탄 감탄 감탄이 그야말로 셀 수 없이 이어졌다.

 

이건 그 누구보다 농사를 지으며, 다른 일도 함께 이어가는 우리와 같은 이들에게 가장 잘 들어맞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책을 만드는 이로서, 그리고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는 한 독자로서 아직 녹슬지 않은 이 그 어느 때보다 뿌듯했던 순간이었다는 설명이다.

 

진 록스던은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에서 하루하루 돌보아야 하는 짐승들이 사는 어릿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뭇 생명이 깃든 꼴밭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린다.

 

또 농부의 한해살이를 어느새 갈무리하더니만, 숲의 은혜로움을 입으며 사는 삶의 보람과, 히커리너트 파이와, 10분 거리에서 따다가 쪄 먹는 옥수수 맛의 놀라움에 대해 적었다가, 자연과 멀어진 오늘날 생태주의자들의 민낯을, 경직된 유기농업주의자들의 모순을 짚고, 지역 주민들을 무시하며 멋대로 엉터리 결정을 내려 꽂는 책상머리 공무원들을 손가락질했다가, 이내 가르쳐야 할 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근대 교육을 비판한다.

 

그랬다가는 다시 쓸만한 농기구는 어떻게 찾고 구하는 건지, 짐승들 겨울 먹이로 쓸 말린 꼴은 어떻게 마련하는 게 좋은지 하는 주제도 아랑곳해 보고, 반골 농부들이 함께 읽으면 좋을 책도 권한다.

 

결국 그의 글은 땀과 수고, 고생스러움으로만 그려지는 농업에 대한 이미지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속에는 아무리 바쁜 중에도 소프트볼 할 시간은 놓치지 않는, 다시 말해 게으름을 즐길 틈(윤구병)”이 있는 농민의 삶이 정직하게 담겨 있다.

 

대차대조표에는 잡히지 않는 충만한 기쁨 속에서 놀듯이 일하고 일하듯이 노는 농경 사회의 됨됨이가, 유머가 깃든 진솔한 문장에 기대어 펼쳐진다.

 

어떤 이야깃거리를 앞에 두고도 두루뭉술하게 뭉개거나 세련되게 포장하지 않고, 비유가 없이는 말하지 않으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에둘러치는 법 또한 없는, 농민의 힘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글이다.

 

진 록스던은 또 이 종횡무진을 통해 반골 중의 반골이라 할 만한 아미시들, 오하이오에서 평생 함께 살아온 이웃들, 두름성 넘치는 도시 텃밭 농부들, 혁신적인 농업 시장 경제를 열어 가는 도전적인 비정통파 유기 재배자들, 손수 땅을 일구지는 않지만 농촌에 살면서 그 속에 담긴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다양한 매체로 담아내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존경 어린 눈으로 따뜻하게 바라본다.

 

그들 모두가 즐거움과 만족을 거두는 자립 농부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리고 뜻있는 도시 소비자들 또한 새롭고 건강한 농업을 여는 중요한 축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문명을 지키는 마지막 성벽 위에서는 먹을거리라는 '공통분모' 위에 서 있는 모두에게 최선을 다해, 거침없이 말을 거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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