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과 어울리기/서평

돌봄 선언

by 이성근 2021. 12. 8.

돌봄 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 저자 더 케어 컬렉티브 지음, 정소영|역자 정소영|니케북스 |2021.05.

저자 : 더 케어 컬렉티브2017년 영국 런던에서 학술 모임으로 시작한 단체. 오늘날 세계적으로 돌봄CARE’이 마주한 다면적이고 심각한 위기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각기 다른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이들은 개인적, 학술적, 정치적 영역에서 개별적으로 또는 단체로 활동해왔다. 안드레아스 차지다키스ANDREAS CHATZIDAKIS, 제이미 하킴JAMIE HAKIM, 조 리틀러JO LITTLER, 캐서린 로튼버그CATHERINE ROTTENBERG, 린 시걸LYNNE SEGAL이 활동 중이다.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그동안 간과되었던 돌봄이라는 이슈를 비극적인 방식으로 조명했다. 간호사를 비롯해 수많은 의료계 종사자들이 코로나 방역 현장에서 적절한 보상 없이 사투를 벌이고 있으며, 요양시설, 장애인 거주시설, 교정시설에서 집단 감염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학교가 문을 닫는 동안 빈곤층 아동들은 결식 상태로 방치되었으며, 택배 노동자가 업무량을 견디지 못해 길에서 쓰러지고, 복지 제도의 사각지대 속에서 빈곤 인구가 방치되거나 고독사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재난의 위험은 불균등하게 분포되며, 소수자와 취약 계층에게 이 위험은 가장 먼저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최근 수십 년간 심각해진 돌봄의 부재, 즉 무관심CARELESSNESS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인을 일차적으로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많은 나라가 수익 창출을 앞세워 복지제도와 민주적 절차를 파괴했고, 기업들은 셀프케어를 내세워 돌봄을 개인이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상품으로 돌봄을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몫으로 전가되어 평가절하되었던 돌봄 노동은 상품화되지 않으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지만, 시장화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열등한 노동으로서 저임금과 낮은 사회적 지위에 묶여 있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 가까운 이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자기 것 돌보기는 집단화되어 극우 포퓰리즘이나 인종차별주의로 치닫기도 하고, 지구적 차원에서는 무분별하게 생태계를 파괴해 기후위기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 책은 현재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무관심의 기저에 있는 상호연결성에 주목한다. 다양한 삶의 영역들이 모두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서문에서 무관심한 세상과 시장, 국가, 공동체, 친족 순으로 범위를 좁혀가며 무관심의 일상화가 궁극적으로 인간관계의 친밀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다시 개인 간의 관계로부터 시작해 지구적 차원으로 규모를 넓혀가며 페미니즘, 퀴어, 반인종차별주의, 생태사회주의를 아우르는 대안을 모색하며 보편적 돌봄을 제안한다.

 

목차

서문 | 무관심이 지배하다

1| 돌보는 정치

2| 돌보는 친족

3| 돌보는 공동체

4| 돌보는 국가

5| 돌보는 경제

6| 세상에 대한 돌봄

감사의 글

더 읽을 자료

옮긴이의 글

 

출판사 서평

돌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놓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리의 상호의존과 연결, 그리고 돌봄의 양면성에 대하여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돌봄이 개인 차원의 문제라는 생각은 우리의 취약성과 의존성, 상호연결성을 인지하기를 거부하는 데서 비롯되며, 돌봄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냉담하고 무관심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돌봄 선언은 인간은 어떤 형태든 돌봄에 의존하여 생존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상호의존interdependency은 인간의 존재 조건임을 주지시킨다.

 

이 책에서 돌봄은 가족 간의 돌봄, 돌봄 시설이나 병원에서 종사자들이 수행하는 직접적인 돌봄, 교사들이 학교에서 수행하는 돌봄, 그리고 다른 필수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일상적인 서비스를 모두 포괄하는 확장된 개념이다. 그뿐 아니라 사물도서관, 협동조합 형태의 대안경제나 연대경제, 주거 비용을 낮추는 정책들, 화석 연료의 감축과 녹지 공간 확대를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이 제공하는 돌봄도 포함한다. 즉 직접 누군가를 보살피는 대인 돌봄뿐 아니라 누군가의 안위를 염려하며 마음을 쓰는 정신적 돌봄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이념과 활동에 참여하는 정치적 돌봄을 포괄한다. 돌봄은 모든 규모의 생명체에 활성화되어 있고 필요한 것으로서, 사회적 역량이자 복지와 번영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이다.

 

물론 돌봄을 삶의 모든 규모에서 우선시하며 중심에 놓는 것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사실 돌봄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역설과 양면성으로 넘쳐난다. 가령, 어머니가 아이를 기른다거나 간호사가 환자를 돌본다거나 하는 경우를 떠올려보면, 살아 있는 생명체의 요구와 취약함을 전적으로 돌본다는 것은 어렵고 지칠 뿐 아니라 혐오스럽고 더러운 일이 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염려는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변하기 쉽고, 종종 개인적 만족감이나 인정 욕구 등의 정서적 상태와 부딪치거나 죄책감이나 수치심 같은 감정과 얽히기도 한다. 이러한 보편적 양면성을 전제로, 돌봄은 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목표는 사회 전체가 돌봄의 보람과 짐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돌보는 공동체는 민주적 공동체다!”

친족 개념의 무한한 확대와 민주적 지역 공동체의 강화

현 체제는 돌봄을 가능한 한 가족단위의 문제로 제한하려 한다.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여성, 어머니가 수행해온 돌봄은 비생산적인 일로 여겨졌고, 시장화되어 임금노동 영역에 들어온 후에도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특히 가난하거나 유색인종이거나 이민자인 여성의 몫으로 남아 있다. 그동안 공동체의 다른 여성들이나 페미니스트 연대를 통해 집단에서 돌봄을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여성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최근에는 성소수자나 선택 가족, 대안 가족 형태를 소외시킨다는 문제점도 노출되고 있다(전통적 가족주의에 기반한 사회안전망이 다양한 가족 구성을 포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저자들은 의미의 범주가 훨씬 넓은 돌봄 개념이 필요하다며, 퀴어 문화에서 성적 분방함을 뜻하는 난잡함promicuity’의 긍정적 의미를 차용해 난잡한 돌봄을 제안한다. 이는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으로, 차별 없이 돌봄을 배가하는 것을 뜻한다.

 

한편 줄어든 공공 자원, 사람보다 이익을 우선시하는 문화, 개인에 집중하도록 하는 사회·정치적 분위기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공동체적 결속을 와해했다. 우리가 살고 활동하는 지역 공동체, 이웃, 도서관, 학교, 공원, 사회 네트워크, 우리가 속한 다양한 집단 등의 환경에 따라 돌봄 문제는 다르게 형성된다. 이 책은 돌보는 공동체를 만드는 네 가지 핵심 특성으로 상호지원, 공공 공간, 공유 자원, 지역민주주의를 꼽으며 각각의 특성을 어떻게 강화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시간과 재정 자원과 구조적 지원이 모두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각한다.

 

우리와 같은사람들에 대한 돌봄이 아닌, ‘다름을 넘나드는 돌봄

돌보는 국가, 돌보는 경제를 넘어 초국가적·지구적 차원의 돌봄 연대를 상상하며!

 

이 책의 목표인 보편적 돌봄을 성취하려면 국가 또한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국가는 기업의 이익 추구, 심화되는 불평등과 종족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한 돌봄 인프라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저자들은 전후 케인스주의가 상정한 복지국가를 계승하되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위계를 제거하고 반이민, 외국인혐오와 맞서며 공공서비스와 민주적 참여를 증진하는 돌보는 국가를 그린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의 힘과 영향 범위를 규제하고 돌봄 활동에 작용하는 문화적·법적 규칙들을 다시 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협동조합과 인소싱부터 핵심 서비스의 국유화에 이르기까지 탈물신화, 재규제, 시장의 지역화 그리고 더욱 민주적이고 사회화되고 평등한 소유의 형식을 도모한다. 동시에 경제의 핵심 영역을 탈시장화하고 통제를 벗어난 돌봄 인프라의 사유화와 금융화에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일련의 돌봄 구상은 진보적인 지방자치와 국가를 구축하는 데서 더 나아가 초국가적 기관들과 글로벌 네트워크와 동맹을 추구하며 지구적 차원의 생태사회주의 대안으로 도약한다. 이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보편적 돌봄이란 돌봄이 가정뿐 아니라 친족에서 공동체, 국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되고 중심에 놓이는 사회의 이상이다. 이렇듯 돌봄 역량을 증진하도록 사회적·제도적·정치적 장치들을 발전시켜 보편적 돌봄이 상식으로 여겨지며 자연스럽게 실천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돌보는 정치와 만족스러운 삶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관습적으로 돌봄으로 여겨지는 실천들, 예를 들면 양육과 간호 같은 행위에 대해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양쪽에-즉 우리 모두에게-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적절한 돌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돌봄이 역량과 실천으로서, 평등을 기반으로 교육되고 공유되고 사용될 때 가능하다. 돌봄은 여성의 일이 아니다. 착취되거나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된다.---p.19

 

우리는 이 선언문에서 너무 오랫동안 무시되고 거부되었던 돌봄이라는 개념을 구성 원칙으로 삼는 세상에 대한 진보적인 비전을 제안한다. 이러한 비전은 보편적 돌봄universal care’ 모델을 발전시키는데, 이는 돌봄이 삶의 모든 수준에서 우선시되고 중심에 놓이는 사회의 이상이다. 보편적 돌봄이란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모든 돌봄이 우리의 가정에서뿐 아니라 친족에서부터 공동체, 국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적 돌봄을 우선시하고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것, 그리고 이것이 상식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돌보는 정치, 만족스러운 삶,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p.41

 

돌봄에 관련된 가장 커다란 아이러니 중 하나는 돌봄 종사자들에게 가장 의존하는 사람들이 바로 부유층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개인적인 일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을 고용한다. 유모부터 가정부, 요리사, 집사, 정원사, 또 집 밖에서 그들의 온갖 필요와 욕구를 보살피는 수많은 사람까지.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지속적인 도움과 관심에 의존하는지가 부분적으로 사회적 지위와 부를 나타내는 표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뿌리 깊은 의존은 부유한 사람들이 가지는 자율성, 다시 말하면, 그들을 돌봐주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해고하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는 능력에 가려지고 부정된다. 부유층은 그들의 의존성을 그들이 고용한 돌봄 종사자들에게 투영한다. 의존의 의미를 저임금 돌봄 노동에 내몰린 사람들의 경제적 종속으로 한정하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p.49

 

돌봄 제공자와 수혜자 모두에게 만족스럽고 창의적인 돌봄 체계를 정착시키고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체의 전반적인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적절한 물질적 자원이 필수적이다. 충분한 자원과 시간은, 나와의 관계가 가깝든 멀든 다른 사람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환경을 만든다. 이런 인프라를 확실히 하는 것만이 돌봄 관계-돌봄을 제공하는 쪽과 돌봄을 받는 쪽 모두-에 필연적으로 엮여 있는 부정적인 정서를 조금이라도 해소할 방법이다.---p.60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 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돌봄이 필요와 지속가능성에 따라 공평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난잡한 돌봄의 윤리라고 부른다. 난잡함이란 더 많은 돌봄을 실천하고 또 현재 기준에서는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돌봄 요구를 너무 오랫동안 시장가족에 의존해 해결해왔다. 우리는 그 의미의 범주가 훨씬 넓은 돌봄 개념을 만들 필요가 있다. ‘난잡하다는 것은 또 차별하지 않는것을 의미하고, 우리는 돌봄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pp.80~82

 

분명히 하자면 돌보는 공동체는 사람들의 남는 시간을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돌봄의 공백을 메우는 데 사용하는 것을 절대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돌봄 역량을 확장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끝내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기업의 횡포에 종지부를 찍고 협동조합을 만들고 아웃소싱을 인소싱으로 대체하는 지방자치 돌봄의 유형들을 포함한다. 그러면 기업의 통제로 점점 개인화되고 빈곤해지고 위태로워지고 분열되는 공동체 대신 협동조합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pp.110~111

 

돌봄 인프라는 또 임금노동 시간의 단축을 포함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가족 내에서나 다른 돌봄이 필요한 환경에서 돌봄 역량을 확장하도록 적절한 시간과 자원을 허용한다. 가장 좋은 직접적인 대인 돌봄은 서두르지 않고 관계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돌봄을 받는 사람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주체적 능력과 웰빙을 계발하는 데 최대한 사용할 수 있도록 여러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고 이는 시간이 요구되는 일이다. 4일제 캠페인을 통해 호응을 얻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이 돌봄에 대해 교육하고 돌봄 역량을 확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핵심인 이유다.---pp.124~125

 

보건의료, 교육, 주택 같은 경제의 핵심 부문이 너무 오랫동안 무자비한 시장화와 민영화를 앞세우는 신자유주의 도그마에 종속되어 있었다. 분명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보다 이를 잘 드러낸 예는 없을 것이다. 몇 주 동안 경제 최선진국들은 국가 보건의료제도에 엄청난 규모의 재투자를 시작했고, 공공의 이익보다 사업수익을 매우 위험할 만큼 우선시했던 민관 협력관계를 중단했다. 스페인 같은 국가는 모든 민영 병원과 보건의료 서비스 제공기관을 국유화했다.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가 마스크와 인공호흡기를 공급하기 위해 기존 산업시설을 용도 전환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돌봄은 시장 논리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 정곡을 찌른 것이다.---pp.146~147

 

보편적 돌봄은 직접적인 돌봄 노동뿐 아니라 타인들과 지구의 번영에 대해 관여하고 염려하며 공동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의 형식을 되찾는 것과 자본주의 시장의 대안을 수용하고 돌봄 인프라의 시장화를 환원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의 복지국가를 중앙정부와 지역 차원 모두에서 회복하고 근본적으로 심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국가적차원에서 그린뉴딜을 창조하는 것, 돌보는 국제기관들과 좀 더 느슨한 국경, 일상적 세계시민주의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p.178

 

돌봄이 이제는 개인적 관심사나 본질적 여성성에 대해 추측하는 도덕주의자들만이 몰두하는 주제가 아니다. 돌봄 선언은 돌봄을 신자유주의 이윤 추구에 대한 신선한 비판의 형식으로 제시한다. 돌봄 선언은 친족 구조, 젠더 구분에 따른 노동분업, 생태적 활동의 변화를 향한 길을 만들고 진보적인 초국가적 기관들을 이끌어갈 상호의존 원칙을 확실히 한다. 더 케어 켈렉티브는 돌봄 위기의 시대에 설득력 있는 명료함과 비판적 숙고의 역량을 담은 글로 돌봄이 복잡한 역사와 희망찬 미래를 가지고 온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들이 지적한 것처럼 옛 영어 caru의 의미 중에는 보살핌, 근심, 걱정, 슬픔, 애통, 괴로움이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 시대와 공명하는 단어들이다. 돌봄은 우리 시대를 위한 희망의 정치를 계획하고 그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한다.

-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철학자이자 젠더 및 퀴어 이론가, 젠더 트러블저자)

 

가사/돌봄 사회화 공동선언문

1. 재난과 위기의 시대, 가사/돌봄의 혁명이 필요하다

코로나 재난과 반복되는 경제·사회 위기는 가사/돌봄의 위기를 드러냈다. 경제적 어려움과 코로나 감염을 위한 방역조치는 가정()의 책임을 증가시켰다. 이로 인해 여성에게 가사/돌봄 노동이 전가되고 있고, 가정폭력까지 증가하고 있다. 여성들은 의료-돌봄의 최전선에서 온갖 헌신과 희생을 강요받고 있으며 권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빈곤층은 건강과 생명, 삶의 위협을 겪고 있다.

 

이대로 살 수 없다. 성별분업으로 여성에게 전가되는 가사/돌봄, 가치로 매겨지지 않는 가사노동, 배제와 소외를 전제하는 법과 제도, 경제적 착취와 수탈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성장이 만들어내는 여성 불평등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꿔내야 한다. 바로 가사/돌봄 혁명이다.

 

2. 노동의 위계화와 성별 분업 체계로 유지되는 자본주의는 우리의 삶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여성의 역할로 규정되는 가사/돌봄노동이 생산노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지만 자본주의체제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가사/돌봄을 여성의 일로 규정하면서 이를 사랑’, ‘모성애’, ‘집안일로 부르며 무급노동을 강요했다. 이를 통해 자본의 비용을 절감했고, 자신들의 이윤을 증식시켰다. 여성이 임금노동자로 시장에 나왔을 때도 이는 변하지 않았다. 가치로 매겨지지 않는 집안일을 저임금노동으로 만드는 것은 자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듯 여성에게 전가된 가사/돌봄 노동은 자본의 위기를 흡수하는 완충제이자, 적은 비용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 결과, 가사/돌봄의 시장화는 복지의 축소로 이어졌고, 공공의 영역까지 자본의 이윤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사람보다 이윤이 더 우선되는 사회에서 공공의 가치는 약화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은 각자 도생해야 했다. N포세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래조차 설계할 수 없는 사회, 노인·여성 빈곤의 확대, 권리 사각지대의 증가 등 삶의 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3. 가사/돌봄의 시장화는 여성의 저임금 노동과 낮은 질의 서비스를 재생산 할 뿐 삶의 위기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가사/돌봄의 시장화는 공공서비스의 확충을 가로막았다. 90%가 넘는 민간 중심의 가사/돌봄의 공급은 다수 이용자의 선택을 오히려 제악했다. 이용자는 지역사회와 분리된 시설에서의 생활을 강요당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했다. 반면에 소수의 부유한 자들은 가사/돌봄 서비스를 아주 저렴한 비용을 지불하면서 높은 수준의 삶의 질을 보장받았다.

 

시장을 통해 공급되는 가사/돌봄으로 노인, 빈곤층, 아동, 청소년에게 필요한 가사/돌봄 서비스는 민간(자본)의 영리에 종속돼 축소되거나 그 질이 낮아졌고, 가사/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 역시 저임금·불안정 노동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위태로워지고 삶은 더욱 심각하게 양극화됐다.

 

4. 가사/돌봄은 연대와 협력에 기반을 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가사/돌봄이 결여된 세상을 상상해보았는가? 그런 세상이 가능한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자녀 양육과 노인 요양뿐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인해 누구나 가사/돌봄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은 온다.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사/돌봄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노동이며 동시에 연대와 협력 없이는 지속가능하지 않는 노동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를 인식할 때 비로소 사회도, 인간의 삶도 지속할 수 있다.

 

5. 우리 모두가 가사/돌봄의 제공자이자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

가사/돌봄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면 이 책임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있다. 실제로 가사/돌봄 노동은 고립된 방식으로 완성될 수 없다. 우리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긴다. 아프면 의료/재활기관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아픈 동료나 가족을 돌보기도 한다. 부모(또는 부양자) 돌봄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으로 성장한다. 이렇듯 가사/돌봄 노동의 본질은 모두가 노동에 참여하면서 그것을 함께 공유하는 협업의 형태를 띠고 있다. 자본주의는 성별분업과 위계화룰 통해 가사/노동의 본질을 왜곡하면서 착취하고 수탈해왔을 뿐이다. 이 속에서 여성의 노동이 고립되고 권리로부터 배제당하며 불평등하게 살아온 것이다.

 

이제 가사/돌봄의 본래 의미를 공동체적 협업으로 되돌려야 한다. 우리는 언제든 가사/돌봄의 수혜자가 될 수 있고, 제공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착취에 동원하는 생산노동시간을 줄이고, 가사/돌봄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6. 보편적 가사/돌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공급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사/돌봄의 국가 책임이 부각되었다. 하지만 국가(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은 민간(자본)의 주도성 인정을 전제로 국가(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가사/돌봄의 공공성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보편적인 가사/돌봄은 필요한 누구에게나 제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선 가사/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적정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그랬을 때 가사/돌봄은 평등을 기반으로 공유되고 사용될 수 있으며 보편적 권리로 실현될 수 있다. 이를 가능케 하는 필수조건은 가사/돌봄의 공적/사회적 공급체계 구축이다. 이제까지 개인과 가족, 여성이 부담하고 책임져왔던 가사/돌봄 공급체계를 국가와 사회, 지역이 책임지는 공급체계로의 전환을 통해서 누구나, 자유롭게 권리를 누리고, 연대와 협력을 통해 질 좋은 가사/돌봄의 실현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7. 보편적 가사/돌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사/돌봄의 가부장적 성별 분업 체계를 철폐해야 한다

여성은 생산영역에서 임금노동을 하는 동시에, 가족삶의 영역인 재생산 공간에서도 노동(가사, 돌봄, 감정노동 등)하고 있다.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여성들은 가사/돌봄 노동을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떠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런 형태로는 보편적 가사/돌봄을 실현할 수 없다.

 

우리는 가사/돌봄이 여성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를 깨지 못하면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 비정규직의 70%를 여성노동, 성별임금 격차, 서열화(위계화)되는 노동, 극단적인 저임금, 빈곤, 배제되는 사회보장제도 등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또한 가치화되지 못하고 있는 집 안에서의 노동을 평등하게 분담할 수 없다. 이는 가부장제와 결탁한 자본주의의 착취와 수탈, 배제와 소외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8. 가사/돌봄 노동자의 적정한 임금, 안정된 일자리, 안전한 환경, 노동기본권이 보장돼야 한다.

여성 노동의 가치를 저평가하는 핵심에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노동에 대한 평가 절하 논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가사/돌봄 노동은 무급노동으로, 시장화 된 가사/돌봄 노동은 가장 열악한 환경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가사/돌봄 노동자의 노동권 제약(박탈)을 정당화하고 있다. 가사/돌봄 노동자의 노동권이 사회적 논의로 부상했지만 여전히 다수의 법제도는 가사/돌봄의 노동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가사/돌봄이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노동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가사/돌봄 노동자의 임금, 고용, 환경, 노동3권 보장은 기본적 권리로 보장돼야 한다. 이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사회구조와 법제도로는 보편적 가사/돌봄을 실현할 수 없으며, 우리는 모두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

 

9. 가사/돌봄 사회화는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운동이다.

코로나19 재난은 이 사회에서 가사/돌봄이 어떤 의미인지를 되묻게 했다.

의료·돌봄 노동자들은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코로나 방역을 지켰다. 급증하는 물량 속에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사가 이어졌다. 학교가 문을 닫자 빈곤층 아이들은 굶어야 했고, 홀로 방치됐다. 홀로 사는 노인들이 고독사를 하고, 고립된 채 갇혀 지내야 했다. 장애인, 노인 요양 등 시설에 있던 사람들은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고, 아무런 결정권도 갖지 못한 채 갇혀 집단 감염을 겪어야 했다. 기후위기와 불평등이 심각해질수록 우리는 가사/돌봄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한다. 기후위기는 자연속에 존재하는 자원과 지구 생명을 필요이상의 생산과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무한정 약탈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또한 필요이상으로 소비함으로써, 지구 상에는 쓰레기가 넘쳐난다. ‘과잉 생산과 소비의 경제는 이제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경제로 바뀌어야 하며, 가사/돌봄노동과 같은 필수노동중심의 경제는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기초가 될 수 있다.

 

가사/돌봄 사회화는 이를 바꿔내는 출발이다. 가사/돌봄의 공적 공급체계를 구축하고, 이용자와 제공자 모두가 안전한 환경에서 보편적 가사/돌봄을 실현하기 위한 평등한 분담체제, 민주적 의사결정과 운영의 주체성, 모두가 함께 돌보는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10. 가사/돌봄 사회화로 자본주의 철폐, 평등과 연대의 대안사회로 나아가자!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는 인간의 존엄이 보장되고,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면서,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다. 가사/돌봄의 사회화 선언은 바로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사/돌봄의 시장화에 단호하게 맞설 것이다.

우리는 가사/돌봄 노동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면서 여성의 저임금·불안정 노동을 강요하는 모든 법과 제도에 저항할 것이다

우리는 여성에게 전가되는 가사/돌봄의 성별분업과 노동의 위계화를 거부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참여하고 주체가 되는 가사/돌봄 노동,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는 가사/돌봄의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가사/돌봄의 사회화로 자본주의 철폐, 평등과 대안사회로 나아가자!

 

"한국인과 똑같이 일하면서도 돈은 더 적게 받지요"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 중국동포 여성 요양보호사의 삶

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영애(가명)씨를 만나기로 한 곳은 양천구의 어느 전철역 앞이었다. 경기도 북부에서 수도권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서울의 약속 장소까지 오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지 상상해 보았다.

 

중국동포와의 만남은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서울역과 덕수궁 주변 그리고 탑골공원 후문 근처에서 낯선 행색의 사람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한약재를 파는 광경을 눈여겨본 적은 있다. 식당에서 음식을 서빙할 때 특유의 억양으로 말하는 분들이 중국동포일 것이라 짐작한 적도 있다. 잠깐 스쳐지나가는 상황을 '만남'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럴 때마다 '조선족' 혹은 '연변 사람'이라는 명칭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곤 했다.

 

'중국동포'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9년 국립국어원의 제안 이후였다. 지금은 공공기관에서 '중국동포'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전에 쓰던 '조선족'이라는 말 자체에는 아무런 폄하의 의미도 들어 있지 않다.

 

1955년 중국에 옌볜 조선족 자치주가 생기면서 조선족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 소수민족에 중국 공민의 지위를 주는 명칭이었다. 조선족을 낮춰 보던 한국인의 시각이 그 단어가 품은 사회성 혹은 역사성을 오염시켜 공식적인 자리에서 밀려나게 했다. 어떤 이들은 오히려 중국동포라는 명칭이 한국인 중심의 표현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돌봄노동의 자리

전철역 앞에서 금세 서로를 알아보았다. 영애씨는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나의 제안에 근처에 유명한 김치찌개 집이 있다면서 앞장섰다. 중국에서 오신 분을 잘 대접하려면 양고기 집이나 중화요리 집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궁리하던 나로서는 뜻밖의 선택이었다. 한국 음식이 입에 잘 맞으시냐는 나의 어리석은 물음에 영애씨는 미소를 지으며 1997년에 한국에 와서 20년 이상 살았다고 대답했다.

 

영애씨는 1975년에 중국 선양시에서 태어났다. 선양은 옛 만주의 중심 도시이며, 일제강점기에 펑톈 혹은 봉천이라 불릴 때 우리의 독립지사들이 많이 활동하던 곳이다. 영애씨의 할아버지는 원래 청주가 고향인데 잘 살아보겠다는 각오로 식솔들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했다. 영애씨의 부모님은 모두 중국에서 태어난 분들이다. 영애씨 가족의 이주사를 들으면서 문득 만주 어딘가에서 돌아가셨다고 들은 나의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만주에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했더라면 나 또한 영애씨처럼 그곳에서 태어나 조선족으로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터뷰중인 영애씨 부희령

 

영애씨는 조선족학교인 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 철강회사와 중국에 진출한 한국 신발회사에서 일하다가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친척 방문으로 먼저 한국에 나와 있던 고모가 중매를 서서 결혼하게 되었어요. IMF가 터진 직후였죠. 저는 한국에 들어올 때나 한국에 살면서 그렇게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어요. 정말 치열하게 사신 분들이 많아요."

 

영애씨 말대로 결혼은 중국동포 여성이 가장 쉽고 간단하게 한국으로 이주하는 방법이었다.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문화와 언어가 달라서 적응이 힘들었어요. 한국 사람들은 외래어를 많이 쓰잖아요. 못 알아듣는 말들이 많았어요. 대부분 중매 결혼을 하니까 한국에 와 보니 속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대요.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밭에 나가서 일했다거나 시어머니가 화장실 앞까지 따라와 감시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우리 때는 천 명이 결혼해서 들어왔으면 백 명 정도는 기막힌 사연을 안고 중국으로 돌아갔어요.“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는 중국동포가 한국에 들어오려면 복잡한 서류 절차와 값비싼 비용이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산업연수생 비자나 친척 방문 등으로 한국에 들어오려면 중개인에게 알선료 명목으로 300만 원에서 1000만 원 정도를 지불했다. 거의 다 빚이었다.

 

산업연수생으로 들어간 회사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쉽게 갚을 수 없는 돈이었으므로 대부분은 회사에서 이탈하여 식당 등으로 일하러 갔다. 그러나 식당은 숙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주거비를 아낄 수는 있으나 오랜 시간 강도 높은 노동이 필요한 자리라서 고연령 여성이 오래 일하기는 힘들었다.

 

그런 여성들이 돌봄 노동의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2004년에 개인 자원봉사 자격증을 따서 장애인 돌봄 봉사활동을 시작했어요. 어떻게 해서든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려고 시작한 거였어요. 그때 알게 된 한국 언니들이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이 있다고 알려줬어요. 나중에 쓸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격증부터 땄지요."

 

2005년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으나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였다. 요양보호사들이 일하는 곳은 재가방문요양센터, 주야간노인보호센터 그리고 요양원이다.

 

영애씨는 처음에는 재가방문요양센터에서 일했다. 공공기관이 아니라 개인이나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민간기관에서는 운영자의 재량에 따라 시급, 추가수당, 4대보험과 같은 노동조건이 정해진다. 따라서 추가수당을 요구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아무리 고충을 호소해도 참으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노인들 가운데 의심병이 있는 분들이 있어서 자꾸 물건이 없어졌다면서 추궁을 해요. 또 같은 아파트 단지의 누구네 요양보호사는 손톱 발톱까지 다 깎아주더라 하면서 비교도 하죠. 노인을 돌보러 왔는데 가족들이 아줌마, 아줌마 부르면서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하는 것도 괴롭고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말동무만 해드리면 되는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씻겨드리는 일처럼 육체적으로 힘든 일도 해요. 똑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해야 해서 스트레스도 심하고요."

 

민간기관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져 을의 처지인 요양보호사들은 더 많은 수익을 확보하려는 센터장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추가수당을 입금했다가 다시 돌려달라는 요구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주야간보호센터도 마찬가지다. 영애씨가 민간기관에서 나와 프리랜서 간병인으로 알음알음 일을 하게 된 이유다.

 

한국인 10만원, 중국동포 9만원

프리랜서 간병인은 추가 수당이나 산재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영애씨는 보통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환자의 식사를 챙겨 주고, 몸을 씻기고, 운동을 시킨다. 그리고 용변 보는 것을 도우며 저녁 여덟 시까지 일한다. 간이침대에서 자면서 밤중에도 수시로 환자를 보살핀다. 이 때문에 손목과 허리의 통증을 달고 산다. 간병인의 직업병 같은 것이다.

 

열두 시간 이상 일하지만 시급은 열 시간으로 계산한다.

"한국인 요양보호사와 똑같이 일하면서도 돈을 더 적게 받지요. 한국인이 10만 원을 받으면 중국동포는 8~9만 원을 받는 거죠. 내야 할 세금은 똑같이 내고 있고요. 돈을 적게 주면서도 네가 살던 나라에서는 그것도 큰돈 아니냐고 말하죠.“

 

영애씨의 시급과 월수입을 물었다. 시급 1만 원, 월수입 평균 80~100만 원. 지금은 다른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지만, 막상 영애씨 자신의 노후가 가장 큰 걱정이다. 그래도 영애씨는 요양원이나 요양보호사 자격증 없이도 일할 수 있는 요양병원에서는 일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곳은 노동강도가 엄청나게 높은 곳이다.

 

대소변 처리도 식사도 혼자 할 수 없는 환자 7~8명을 한 사람의 간병인이 24시간 돌보는 시스템이다. 규정대로라면 24시간 일하고 24시간 쉬어야 하지만, 숙식을 해결할 곳이 마땅치 않은 중국동포 간병인들은 휴무 없이 일하고 따로 잠자는 곳도 없이 병실의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잔다.

영애씨 부희령

 

시간당 급여도 한국인 간병인보다 적고 추가수당 같은 것은 생각도 못 하며 퇴직금이나 4대 보험도 보장받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요양병원들은 중국동포 간병인을 선호한다. 오죽하면 노동자를 내보내고 노예를 고용하려 한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10월 초에 20대의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여성을 돌본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간단한 검사와 시술만 받으면 된다고 해서 2~3일 병원에 머무를 작정을 하고 갔거든요. 그런데 검사를 받아보니 환자의 상태가 꽤 위중했어요. 수술하고 회복하는 기간이 일주일이 넘었지요. 혼자 한국에 일하러 나온 아가씨라 주위에 돌봐줄 친구도 친척도 하나도 없고, 말도 잘 안 통해요. 제 몸이 힘들어도 어떡해요? 나밖에 돌볼 사람이 없는데. 아가씨가 안쓰러워서 일주일 동안 병원에 갇혀 돌봐줬어요."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고 나서 요양보호사들은 아예 일터에 갇혔다. 보통은 2교대나 3교대로 일하는 주야간보호센터에서는 아예 숙식까지 하며 한 달에 한 번도 외출을 못 했다. 병원이나 요양병원의 간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는 중국동포 요양보호사에게는 더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단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처음 발견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중국동포인 요양보호사를 기피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실제로 일할 여건이 안 되어 중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영애씨는 환자든 보호자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자신이 중국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밝힌다고 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보이지 않는 심장'

영애씨는 중국동포를 포함하여 이주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통역과 서류 안내 상담 등의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영애씨 자신이 2009년 무렵에 궁금한 문제들을 상담하기 위해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와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을 찾아다닌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런 지원센터에서 중국동포를 별로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예산이나 인원이 부족한 상태였고, 다른 외국인과 비교했을 때 언어 소통이나 문화적 차이의 문제가 별로 없을 거라고 치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중국동포들도 결혼이민자의 적응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같은 것을 이용할 수 있다.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산재나 추가수당 같은 문제를 상담받을 수 있다.

 

"지원센터 같은 곳을 찾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거예요. 절박한 사람들은 일과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어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이주여성지원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만난 친구들과 2019년부터는 독서 모임도 하고 있다.

"보통 다섯 명에서 열 명 정도 모여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요. 베트남에서 온 친구도 있고 중국동포도 있고 한국 친구도 있어요."

 

읽는 책들은 주로 베스트셀러 중에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다룬 책들이란다.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스마트폰을 꺼내어 사진을 보여주었다. <돌봄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돌봄이 종종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또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페미니스트 경제학자인 낸시 폴브레가 말했듯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보이지 않는 심장'을 생각해야 한다. 즉 우리는 돌봄과 연민의 힘이 시장화된 개인의 이기심보다 항상 앞서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영애씨와 만나고 나서 며칠 뒤 '돌봄선언'을 사서 읽다가 발견한 구절이다. 현재 우리 사회 돌봄의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심장'은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모두에게 간절하다. 2020년도 업계 분석에 의하면 서울·경기권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는 사람의 80%는 중국동포라고 한다. 영애씨의 말에 의하면 그들 대부분이 50~60대 여성이며, 70대도 있다고 한다.

 

"병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분들도 있고요. 월세냐 전세냐에 따라 얼마나 힘들게 일해야 하는지가 달라져요. 저는 다가구주택이지만 전세로 살고 있어서 형편이 나은 거지요. 아등바등 돈만 벌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현재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 약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곰곰이 따져본다. 여성, 노인, 이주민, 빈곤층. 요양보호사 혹은 간병인으로 일하는 중국동포 여성은 이런 조건에 모두 해당하는 이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한국인과 임금 차별을 받으며 취약한 상태의 환자와 노인을 돌보고 있다.

 

영애씨는 이야기할 때 이따금 '내 부모를 돌보는 마음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씁쓸한 심정이 되었다. 지금 이곳에서 내 부모를 직접 돌보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는 말인가. 돌봄의 문제를 개인의 선의나 민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장에 맡겨서는 악순환만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돌봄의 공공성이 확보될 때 '보이지 않는 심장'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 _ 이주자의 삶을 기록하다> 연재는 사회적 소통과 대화의 문화를 만들어가려는 익천문화재단 길동무가 주관하고, 12명의 이주인권활동가와 작가들이 함께한다. 필진은 다음과 같다. 고기복(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 대표), 김종필(시인), 반수연(소설가), 부희령(소설가), 우삼열(아산이주노동자센터 소장), 이경란(소설가), 이란주(아시아인권문화연대 활동가), 이소연(지구별살롱 대표), 이수경(소설가), 정은주(지구인의 정류장 활동가), 홍주민(한국디아코니아 대표), 희정(기록노동자). (이상 가나다순).

 

오마이뉴스 부희령(ilsang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