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과 판단 한나 아렌트 지음, 서유경 옮김, 필로소픽 펴냄 2019.12.
원제Responsibility and judgment.
한나 아렌트
1906년 10월 14일 독일 하노버 근교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보냈는데, 이때 어머니를 통해 유대인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조숙하고 명석했던 그녀는 고등학교에서 교사에게 반항하다 퇴학당했지만, 가정교육과 베를린 대학교 청강을 거쳐 1924년 마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하이데거에게 수학하지만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실존철학자 야스퍼스의 지도 아래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1929)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9년 스테른(Gunter Stern, 1936년 이혼)과 결혼하여 베를린에 정착한다. 이후 아렌트는 정치적 억압과 유대인 박해가 첨차 심해지던 독일에서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뒤, 1933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다. 망명 후 발터 벤야민 등 많은 지식인을 만나 유대인 운동을 하던 아렌트는 다시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0년에, 아렌트는 독일 시인이자 철학자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결혼했다. 1941년에는 아렌트를 포함하여 2500명 정도 되는 유대계 망명자들에게 불법으로 비자를 발행해 준 미국 외교관 하이램 빙엄 4세의 도움으로 남편과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아렌트는 1951년에 이르러서야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는데, 1959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완전한 교수직에 지명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경험한 18년간의 무국적자 경험을 바탕으로 첫 번째 주저인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을 출간하고, 더불어 정치이론가로서 정치현상의 근본적 의미를 밝히는 데 전념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사상가의 길을 걷는다.
이후 『라헬 바른하겐 : 유대인 여성의 삶』(Rahel Varnhagen : The Life of a Jewish Woman, 1958),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 『과거와 미래 사이』(Between Past and Future, 196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진부성에 대한 보고』(Eichmann in Jerusalem :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 『혁명론』(On Revolution, 1963),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Men in Dark Times, 1968),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 Lying in Politics, 1969), 『시민적 불복종』(Civil Disobedience, 1969), 『폭력의 세기』(On Violence, 1969) 등 중요 저작들을 연이어 출간한다. 이 가운데 『혁명론』에는 아렌트의 최종적인 '정치' 사상이 담겨 있는데, 그가 1956년 헝가리 혁명을 계기로 혁명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프린스턴 대학 세미나에서 「미국과 혁명정신」이란 주제로 강연한 것을 정리해서 완결지은 것이다. 『혁명론』은 '새로운 시작' 과 자유를 기리는 혁명송이자, 정치학도들에게 다양한 정치적 통찰력을 제공하는 귀중한 교과서로서 의미 있는 저작이다.
아렌트는 1973년 에버딘 대학에서 '정신의 삶―사유'라는 주제로 기퍼드 강의를 요청받은 후 사유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으며, 이듬해 '정신의 삶―의지'라는 주제로 다시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 연구를 진행했다. '정신의 삶―판단'이라는 주제로 정신의 삶 3부작의 마지막 연구를 진행하던 중 1975년 12월 심근경색으로 생을
마쳤으며, 남편이 오랫동안 강의한 뉴욕주 허드슨 강 유역 애넌데일(Annandale-on-Hudson, New York)에 있는 바드 대학에 묻혔다. 그녀의 사후 『정신의 삶―사유』와 『정신의 삶―의지』가 1978년 출간되었으며, 완성되지 않은 3부에 해당하는 「판단」 부분은 유고집으로 『칸트 정치철학 강의』라는 제목으로 1982년 출간되었다. 그후 이미 발표된 글들 및 미발표 원고 등을 주제별로 편집하여 『이해에 대한 에세이』(1994), 『책임과 판단』(2003), 『정치의 약속』(2005), 『유대적 저술』(2007), 『문학과 문화에 대한 성찰』(2007) 등이 출간되었다.
옮긴이의 말
편집자 제롬 콘의 서문
이 책에 수록된 문건에 관한 보충설명
감사의 글
|서언|
1부 책임
1장 독재 치하에서의 개인적 책임
2장 도덕철학에 관한 몇 가지 질문
3장 집합적 책임
4장 사유함, 그리고 도덕적 고려 사항들
2부 판단
5장 리틀록 사건에 관한 성찰
6장 [대리인]: 침묵한 죄?
7장 심판대에 오른 아우슈비츠
8장 자업자득
찾아보기
책속으로
당신은 특수한 사례들을 그 밑으로 복속할 수 있는 선취 기준, 규범, 일반 규칙에 매달리지 않고서 어떻게 판단을 하는가? 아니, 다른 표현을 사용해보자. 가령 모든 관례적 기준의 붕괴를 증거하는 사건들과 직면하게 된다면, 그래서 일반 규칙들로는 그 결과를 예견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전례가 없는, 심지어 그런 일반 규칙들의 예외사항 중에서도 전례가 없는 사건들과 직면하게 된다면, 판단이라는 인간의 능력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 이런 질문들에 타당한 답변을 하려면 아직도 매우 신비로운 영역인 인간 판단의 본질에 관한 분석, 판단이 성취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분석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감정이나 자기 이익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기능이 작동되는, 다시 말해 특수한 사례들이 그 밑으로 간단히 복속되는 기준이나 규칙에 묶이지 않은 채로 기능을 수행하면서 판단 활동 그 자체를 통해 그것만의 원칙들을 창출하는 어떤 인간의 능력이 현존한다고 가정할 경우에만, 우리가 확고한 [판단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이 매우 미끄러운 도덕적 지반 위에 [스스로] 발을 내딛는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된 것이라 하겠다.--- p.97
내가 이렇게 플라톤의 가르침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여러분이 양심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문제들이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지―아니 ‘되었을지’라고 해야 맞나?―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 양심이라는 말의 어원―즉 원래 그것의 정체가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양심은 인간이 자신의 말보다 신의 말씀을 경청하는 기관으로서 이해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의 구체적인 도덕적 성격을 획득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안들을 세속적인 용어로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기독교 이전의 고대 철학 말고는 기댈 것이 거의 없다. 그건 그렇고, 여러분이 거기서, 즉 그 어떤 방식으로도 어떠한 종교적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은 철학적 사유의 한중간에서, 어떤 지옥과 연옥 그리고 낙원에 관한 이론, 그것을 보강하는 최후의 심판, 보상과 처벌,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 구분, 그리고 그 최후의 심판의 나머지 요소들 모두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지 않은가? 여러분이 찾다가 허탕칠 것이라곤 오로지 죄는 용서될 수 있다는 [기독교적] 관념뿐이다.--- p.186
우리야말로 서구에서 기독교가 등장한 이래 처음으로 소수 엘리트층뿐 아니라 대중들도 더 이상?미국의 건국 선조들이 여전히 그렇게 표현했듯이?“미래의 위엄”을 믿지 않는 첫 번째 세대다. 따라서 우리 세대는 양심을 보상의 기대나 처벌의 두려움 없이 반응하는 기관으로 생각하려고―아마 그렇게 보일 것이다―한다.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이 양심이 어떤 신성한 목소리로부터 통지를 받는다고 생각하는지는 솔직히 말해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리의 사법제도들이 적어도 범죄행위와 관련해서만큼은, 모든 사람이 비록 법률서에 정통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에게 옳고 그름을 알려주는 그 양심이라는 기관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양심이 현존한다는 것을 옹호하는 논거일 수는 없다. 제도들은 종종 그것들이 근거하고 있는 기본 원칙들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p.187
당신 자신은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당신과 당신 자신 사이의 담론 과정에서 명료해진 것의 사실성에 도달했다. 가령 당신이 자신의 자아와 불화 상태라면 그것은 마치 억지로 자신의 적과 동거하면서 일상적인 교제를 갖는 것과 같다. 누구도 그런 것을 원치 않는다. 가령 당신이 불의를 저지르면 당신은 불의를 저지른 사람과 동거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자기 이득을 위해 불의를 저지르기를 선호하는 한편, 그 누구도 도둑이나 살인자 혹은 사기꾼과 함께 사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살인과 협잡으로 권좌에 오른 전제자를 칭송하는 사람들이 잊고 있는 점이다.--- p.189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위중한 악행들은 그 악인이 [사유함의 과정 속에서] 자신과 다시 대면해야만 하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거나 그가 망각할 수 없는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확신한다. 최악의 악인들은 그 일에 대해 조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으며, 그래서 기억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그들을 자제시킬 수가 없다. 인간들에게 있어 지난 일들을 반추하는 일은 깊이의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 요컨대 뿌리를 내리고 자신을 안정화시킴으로써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시대정신이든 역사든 혹은 단순한 유혹이든―에 휩쓸리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최대의 악은 [그 성격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아무 뿌리도 없고 뿌리가 없으므로 한계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극단들로까지 치달을 수 있으며 전 세계를 완전히 휩쓸어버릴 수도 있다.--- p.196
사유 과정에 관한 소크라테스 - 플라톤적 설명이 내게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비록 지나가는 말투로 언급되고는 있지만 사람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한다는 사실 요컨대 단 한 사람Man이 아니라 여러 사람men이 지구상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다만 혼자서 존재할지라도 우리가 이 ‘홀로 있음’을 말로 명료하게 표현하거나 실현할 때 우리가 동석 상태임을, 즉 우리 자신과 동석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된다. 외로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군중 속에서도 우리를 덮치는 그 악몽은 바로 이 ‘홀로 있음’이 자신에게 버림받은 상태, 말하자면 친구가 되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일시적으로 ‘하나 속 둘’이 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처신이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처신에 좌우될 것이라는 점은
실제적인 사실이다. 오직 어떠한 구체적인 내용도, 특별한 의무들과 책임 사항들도 관련되지 않을 경우에만 사실상 사유와 회상의 순전한 능력이나 그것의 상실이 문제시되는 것이다.--- p.197~198
사유함과 행위함 사이에는 단순한 구분 그 이상의 내용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유형의 활동 사이에는 모종의 내재적 긴장 관계가 현존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결코 멈추지 않는 바쁜 사람들에 대한 플라톤의 경멸은 이후 모든 진실된 철학자에게 이런 저런 형태로 나타나게 될 어떤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나 이 긴장 관계는 모든 철학자에게 소중한 어떤 관념, 즉 사유하는 것도 일종의 행위함acting이라는 생각에 의해서 그럴싸하게 얼버무려져 왔다. 부연하면 사유함이란 때때로 일컬어지듯이 일종의 “내부 행위inner action”라는 것이다. 이런 혼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철학자가 행동하는 사람들과 시민들 측으로부터 받고 있는 비난들에 대한 자기방어 형식으로 말할 때 제시하는 부적실한 이유들과 사유의 본질 자체에서 기인하는 적실한 이유들이 함께 존재한다.--- p.211
정치적으로 말해서 사유와 행위의 주된 구분은 다음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유하는 동안 나는 오로지 나 자신의 자아나 또 다른 [나의] 자아와 함께 있는 반면, 행동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많은 사람과 동석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전능하지 않은 인간들의 힘은 오직 인간 다수성human plurality의 여러 형태 중 하나 속에 있다. 다른 한편, 인간 단독성human singularity의 모든 양태는 정의상 무력하다. 그러나 나는 비록 하나지만 둘로 분열하는 방식에 의해서만 내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다수성은 심지어 [나의] 단독성이나 사유 과정에서 나타나는 [나의] 이원성에서조차 하여튼 근원적으로 현전한다. 그러나 인간의 다수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 ‘하나 속 둘’은 마치 최후의 동행 흔적―내가 나 자신과 더불어 하나인 상태일 때조차 나는 둘이거나 둘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한 것과 같다. 이 사실은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못할 곳에서 [인간] 다수성을 발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타인들과 함께 있음에 관한 한 그 발견은 여전히 하나의 주변적인 현상으로 간주될 것임이 틀림없다.--- p.212
우리는 시민들로서 우리들 모두―불의를 행한 자, 불의를 당한 자, 그리고 관중―가 함께 공유하는 세계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불의가 행해지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 여기서 실제로 불의를 당한 것은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도시[세계]이기 때문이다. --- p.331
불의의 시대, 정치판의 ‘허무주의’에 속지 말아야 할 이유
ⓒ한성원 그림
끔찍한 짓을 저지른 이들의 얼굴이 공개될 때마다 평범한 모습에 놀란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할 순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괴리엔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럴 때 등장하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다. 이 개념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해 유명해졌는데, 하도 많이 언급되기에 나도 읽어봤으나 장황하고 난해했다. 글줄만 좇다 책을 덮었고 개념에 대한 의구심은 인용문을 볼 때마다 커졌다.
평범한 보통 사람도 악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라면 누가 부정하겠는가. 문제는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모두가 악에 연루되어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가령 1980년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났을 때 이를 설계하고 행한 자들만이 아니라 침묵하고 방관한 당대인 모두가 악의 방조자로서 책임이 있다는 식이다. ‘모르고 짓는 죄도 죄’라고 믿는 나는 이런 주장 앞에서 속수무책, 오랫동안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런 주장이 악을 보편화하고 선을 (실현하기도 실행하기도 어려운)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악의 평범성이 소수가 저지른 악을 모든 인간의 조건처럼 합리화하는 건 아닌가, 이런 식으로 ‘모든 인간은 잠재적 악인이다’라고 규정하면 선을 행하는 게 특별한 일이고 악을 단죄하는 것이 어불성설이지 않나 싶었다.
또 하나 미심쩍은 것은 악의 평범성과 사유 불능성을 연계시킨 설명이다. 많은 이들이 이 개념을 가져와서 ‘생각하지 않음’을 악의 근거로 제시하고 사유의 중요성, 인문학의 필요성을 역설하곤 한다. 책으로 먹고사는 내가 딱히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하나 의문은 남는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 해서 악을 행하지 않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사람이 악을 행하거나 그에 편승해 삶을 도모한 뒤 자신의 앎으로 악행을 합리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유를 업으로 삼는 철학자가 불의한 독재의 충실한 지지자가 된 예는 많다. 그렇다면 사유하지 못함에서 악이 연유한다는 아렌트의 설명은 너무 순진하거나 너무 엘리트적인 것이 아닐까?
이런 의구심 때문에 한동안 아렌트를 멀리했는데 얼마 전 그의 유고집 〈책임과 판단〉을 읽고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책은 생애 마지막 10년간 아렌트가 남긴 강의록, 연설문, 논문 등을 묶은 선집이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물론 그의 사상, 정확히 말해 그의 사유방법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편집자 제롬 콘의 서문은 유명한 사상가-스승을 다룰 때 흔히 보이는 신화화가 전혀 없는 해제로 아렌트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돕는다.
사유 능력은 지적 능력과 다르다
책에 실린 여러 글에서 아렌트는 “모두가 유죄라면 어느 누구도 유죄가 아니다”라고 언명한다. 그는 “피고는 인류 전체”라고 주장하거나 같은 독일인으로서 죄의식을 느낀다고 하는 데 단호히 반대한다. 언뜻 고매해 보이지만 실제론 잘못한 자들의 죄를 희석할 뿐이란 것이다. 그에 따르면 죄는 “의도나 잠재성이 아니라 특정 행위를 지목”하는 것으로, 오직 개인에게만 물을 수 있고 그래야 의미가 있다. 모두 죄가 있다면 누가 누구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관료제적 시스템 아래서 개인은 하나의 톱니일 뿐이라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주장도 비판한다. 그는 아이히만 재판이 “당신은 왜 톱니가 되었고 계속 톱니로 남았는가?” 하고 물음으로써 개인적 책임과 법적인 죄를 따질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톱니들은 관료제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역할을 하고도 으레 “시스템이 한 일”이라며 책임을 전가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톱니 역시 한 인간이며 특정한 한 사람으로서 구체적인 책임을 지닌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집단엔 아무 책임이 없는가? 아니다. 아렌트는 독일인에게는 나치 정권의 탄생에 기여하고 지지한 책임이 있고 제국의 후손에게는 식민의 역사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그 역사에 책임이 있다. 도덕적 책임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이다. 아렌트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도덕적 책임과 집단에 적용되는 정치적 책임을 구분하고 우리에게 개인적 죄와 집단적 책임을 묻는다.
20세기의 정치적 위기는 “우리의 판단을 확실히 규정해줄 일반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아렌트는 이런 상황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려면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유함(thinking)이 왜 악행을 거부하게 하는가? 사유함은 “자신과의 무성의 대화”이며 “멈추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던 일을 멈추고 돌아보는 것, 세평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 자체로 “규칙에서 벗어난” 활동이다. 사유하는 사람은 사회에 통용되는 일반 규칙을 의심하며 세류에 합류하기를 거부한다. 반면 사유하지 않는 사람은 상투적인 말, 관행적인 처신을 고수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된 양식을 통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기를 피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런 사유 불능이 지식인에게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며 사유 능력은 지적 능력과 다르다고 지적한다.
불의의 시대에 한나 아렌트는 “불의를 행하기보다 불의를 당하는 편이 낫다”라고 말한 소크라테스로 돌아가 정의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악의 평범성을 목격하고도 절망하고 냉소하는 대신 우리의 판단 능력이 재앙을 막아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허무주의야말로 악의 배양토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치판이 아무리 허무주의를 부추겨도 거기 넘어가면 안 되는 이유다./시사인/ 김이경 (작가)
정신의 삶 한나 아렌트 저/홍원표 역 | 푸른숲 | 2019년 06월
Thinking / Willing / Judging
목차
옮긴이의 말
편집자 서문
1권 사유
서론
1. 현상
현상을 특성으로 하는 세계
진정한 존재와 ‘한낱’ 현상: 이원적 세계론
형이상학적 위계질서의 반전: 표피의 가치
육체와 영혼; 영혼과 정신
현상과 가상
‘사유하는 나’와 자기(신): 칸트
실재와 사유하는 나: 데카르트의 회의와 공통감
과학과 공통감; 칸트의 지성과 이성 구별; 진리와 의미
2. 현상세계 속의 정신 활동
비가시성과 이탈
사유와 공통감 사이의 골육상쟁
사유와 동작: 구경꾼
언어와 은유
은유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
3. 무엇이 우리를 사유하게 하는가?
철학 시대 이전 그리스 철학의 가정들
플라톤의 답변과 그 반향
로마인의 대답
소크라테스의 답변
하나 속의 둘
4. 우리는 사유할 때 어디에 있는가?
“나는 때론 사유하고, 때론 존재한다”(발레리): 있을 것 같지 않은 곳!
과거와 미래 사이의 틈새: 현재
후기
2권 의지
서론
1. 철학자들과 의지
시간과 정신 활동
의지와 근대
중세 이후 철학: 의지에 대한 주요 반론
새로운 것의 문제
사유와 의지 사이의 충돌: 정신 활동의 주요 특성
헤겔의 해결책: 역사철학
2. 내면적 인간의 발견
선택 능력: 의지의 선행 개념
사도 바울과 의지의 무기력
에픽테토스와 의지의 전능
아우구스티누스, 첫 번째 의지철학자
3. 의지와 지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지성의 우위성
둔스 스코투스와 의지의 우위
4. 결론
독일 관념론과 개념의 무지개다리
니체: 의지에 대한 거부
하이데거: 의지하지 않을 의지
자유의 심연과 시대의 새로운 질서
편집자 발문
판단: 칸트 정치철학 강의 발췌문
옮긴이 해제: 정신의 삶과 정치적 삶의 원형을 찾아서
아렌트 연보
찾아보기
『정신의 삶』은 각기 ‘사유하기, 의지하기, 판단하기’라는 비가시적인 활동이 인간이 살아가는 한 앞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며,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어떻게 연결시켜 현실에서 적용시킬지를 고민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유하기, 의지하기, 판단하기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결국 이 세계 속에서 이 세계를 구성하는 일원으로 살아가는 내가 이러한 정신의 삶을 행하지 않고는 결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말한 정치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의 정치는 내가 속한 공간과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치적 삶과 정신의 삶은 인간다운 삶으로 연결된다. 공공영역이 그 정체성을 상실할 때, 정치적 삶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때 시민들의 정치행위, 그리고 현실을 비판하는 능력을 발휘하면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2016년 말부터 2017년 초까지 우리나라의 시민들이 보여준 촛불집회를 들 수 있다. 당시 외신에서도 주목할 만큼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일상의 정치를 보여준 가장 민주적인 사건 중 하나다. 아렌트가 주장한 정신의 삶이 극적으로 실현된 이 사건은, 결국 사유, 의지, 판단이 하나의 행위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며 정신의 삶과 활동적 삶이 서로 밀접하게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출판사 리뷰
『정신의 삶』은 오늘날 가장 위대한 지성인으로 평가받는 아렌트가 평생에 걸쳐 사유에 관해 탐구한 내용을 생의 말년에 집필한 책으로, 아렌트가 자신의 저작물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긴 그의 마지막 저서다. 이 책은 ‘정신의 삶’을 구성하는 사유 자체를 탐구한다. 정신 외부 세계를 중점적으로 연구했던 이전의 저작들과 달리, 아렌트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 활동을 사유, 의지, 판단이라는 세 가지의 정신 활동으로 분류해 조명한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방대한 철학적 자료를 아렌트만의 집요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인류가 어떻게 사유를 하며 삶을 살아왔는지 기술한다. 기존의 전통적인 철학적 관점을 전복시킨 이 책은 아렌트 사유의 정수가 담긴 책이자, 도전적인 분석서다. 하나의 통합본으로 출간된 이 최종 결실은 우리 세대와 미래 세대의 유산으로 평가될 수 있다.
사유하고, 의지하고, 판단하는 삶은인간적인 삶을 위한 우리의 근본적 활동이다
- 아렌트 생전의 마지막 저서이자 가장 철학적인 책, 『정신의 삶』
『정신의 삶: 사유와 의지』(이하 『정신의 삶』)는 1977년과 1978년도에 각각 단행본으로 출간된 『사유』와 『의지』를 한 권으로 합본한 책이다. 책의 형태로 저술하지 못한 [판단] 부분은 아렌트가 생전에 쓴 강의록을 그대로 살려 부록으로 실었다. 아렌트 스스로 꼽은 가장 중요한 저서인 『정신의 삶』은 전통적인 정치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상적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한마디로 아렌트의 정신의 삶 3부작은 ‘구체적 행위로서의 정치’와 ‘패러다임적 틀로서의 정치’ 사이의 연결성을 완성시킨 ‘독자적인 정신의 산물’이다. 이 책은 아렌트의 친구인, 에세이스트이자 비평가 메리 매카시가 편집했다. 푸른숲 출판사에서 이번에 새롭게 펴낸 『정신의 삶』은 『정신의 삶: 사유』(2004) 재번역본과 『정신의 삶: 의지』 초역본을 한 권으로 묶어, 한나 아렌트 연구의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홍원표 교수가 번역했다. 30년간 아렌트를 연구하고 아렌트 학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이 책이 지닌 학문적 공헌을 이렇게 말한다. “2,500년 전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이 정신의 삶으로서 사유, 의지, 판단을 주로 개별적으로 조명해왔다면, 아렌트는 이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종합한 ‘정신의 삶의 역사’를 우리에게 남겼다. (…) 우리는 매일 사유하고 의지하고 판단하며 삶을 영위한다. 이러한 활동은 우리 삶의 일부다.”(21, 24쪽)
- 정신의 삶은 나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
아렌트는 자아 정체성 형성과 관련된 ‘사유’, 품성의 형성과 관련된 ‘의지’ 그리고 인간성 형성과 관련된 ‘판단’이라는 세 가지 정신 활동을 포괄하는 ‘정신의 삶’에 관한 내용을 초기 저서에서부터 제시한다. 전체주의에 대한 체험이 그 연구의 출발점인데 특히 1961년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과정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사유의 부재(무사유)’에 주목한다.“악이 마력을 지닌 무엇”이라는 오랜 사상적 전통을 의심하고(48쪽) “옳고 그름을 말하는 능력이 우리의 사유 능력과 연계될 수 있을까?” 그리고 “사유하는 그 자체는 악행을 자제하도록 하는 조건들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악행에 맞서는 실제적 ‘조건’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자문한다.(49쪽)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고찰한 아렌트는 이전부터 자신을 “꾸준히 괴롭혀왔던” 내면의 의심, 즉 “사실적 경험에서 형성되는 동시에 시대의 지혜―철학의 한 분야인 ‘윤리학’이 ‘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응하는 다양한 전통적 해답뿐 아니라 철학이 ‘사유란 무엇인가?’라는 훨씬 더 절박한 질문들에 대비해 제시한 훨씬 더 풍부한 해답―를 거스르는 도덕적 질문들”(49쪽)을 마주한 것이다.
- 아렌트의 가장 완숙한 정신세계를 보여준 정치철학의 진수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에 참관한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나타나는 천박함에 충격을 받았다”고 이 책의 1권 [사유] 서론에서 밝힌다.(47쪽) 이것이 이 책의 집필 동기가 되어 평생의 숙제로 남게 된다. 아렌트는 ‘사유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사유하지 않음’이 악의 원인이라고 결론 내린다. 아렌트는 어떤 전통이나 학파에 머물지 않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고대 그리스부터 당대까지의 철학 사상을 연구한다. 아렌트는 전통적인 철학에서 말한 사유와 의지와 판단을 해체하는데, 가령 사유를 직업적인 사상가들의 몫으로 둔 것이랄지, 사유의 최상의 형태인 관조를 활동의 우위에 놓는다는지, 의지를 욕구로 이해한다든지 하는 식의 형태를 촘촘하게 비판한다.
아렌트 스스로 꼽은 가장 중요한 저서이자 정치철학적 연구의 ‘최종 결실’인 이 책은 궁극적으로는 사유하고 의지하고 판단하는 정신 활동을 무시한 삶은 진정한 삶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아렌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일관되게 강조한다. “정신의 삶은 전문적인 철학자들을 포함해 정상적인 모든 사람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활동적 삶과 정신의 삶 속에서 동시에 살아가기 때문에, 정신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당연히 나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의 일부인 셈이다.”(20쪽)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활동적이며,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롭다.”_ 카토
사유란 무엇인가 - 현상세계를 넘나드는 사유 활동
이 “질문은 ‘우리는 왜 사유하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에 사유”하고 그것은 “진정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691쪽) 아렌트는 ‘사유’를 “나와 나 자신의 소리 없는 대화”(50쪽)라 정의히는데, 사유 · 의지 · 판단 활동이 지성이나 감정과 달리 현상세계로부터 잠정적으로 이탈할 때 비로소 시작하기 때문이다.(20, 111쪽) 즉, “사유하는 나는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지만 “무(無)는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비가시적인 것에 열중하는 정신 활동은 말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168쪽)
이 책의 1권 [사유]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사유란 무엇인가?’를 밝히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비판이다. 형이상학 전통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고 첫 번째 축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전통적인 철학에 따르면, 관조적 삶은 활동적 삶의 위에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러한 개념적 틀을 거부하고 활동적 삶과 정신의 삶 사이의 관계를 수평 관계로 구성했다. 활동적 삶과 정신의 삶은 긴장 관계를 유지하지만 대칭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해, 결정,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행위 과정이 사유, 의지, 판단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구성하는 데 두 가지 형태의 삶이 상호밀접하게 연계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20쪽)
활동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즉 활동이 곧 삶이다. 가시적 형태의 활동인 노동·작업·행위가 구체적 삶을 구성하며 신체의 눈에 드러나지만, 사유 활동 역시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면서도 정신의 눈에만 드러난다. 현상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사유하는 내가 머무는 모든 곳 ─ 사유가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넘나드는, 시간이나 공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자유자재로 현재화할 수 있으므로 ─ 은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다.”(308쪽) “만약 우리의 공간적 실존에 의해” 우리가 있는 곳이 결정된다면, ‘우리가 사유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레리의 표현은 옳을 것이다.(309쪽) 이렇듯 비가시적 영역에서 진행되는 소리 없는 대화는 언어라는 도구 덕택에 현상으로 드러날 수 있다.
정치행위가 말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듯이, 사유 활동 역시 언어를 매개로 진행된다. 앞서 말했듯이 “언어는 정신활동을 외부세계뿐만 아니라 사유하는 나 자신에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다.”(674쪽) 언어가 소통수단으로서 필요하지만, 사유는 나와 나 자신이 말을 주고받더라도 청중을 대상으로 하지 않기에 소통을 전제하지 않는다. 현상세계에서 나와 친구의 관계, 그리고 사유할 때 나와 나 자신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차이점과 공통점을 고려해보자. 나는 현상세계에서 친구와 우정을 나누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원만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사유는 가까운 친구와 헤어져 ‘혼자’ 활동하기 때문에 고독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유형의 고독은 고립은 아니다. 하나 속의 둘의 이원성은 “대화를 수행하는 두 사람이 훌륭한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즉 상대자를 친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을 의미한다.(674쪽) 우리는 또한 이 과정에서 “질문하는 사람이며 답변하는 사람”이다.(674쪽)
의지란 무엇인가 - 의지의 집중과 외부세계의 내재화
의지란 정신의 내면성과 외부세계를 통합하는 능력으로 정신 활동에 머물지 않고 행위를 촉진하는 근원을 말한다. 이러한 의지는 감각의 관심을 인도하고 기억에 각인된 상을 주관하며 이해를 위한 자료를 지성에 제공함으로써 행위가 발생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기존의 철학자들은 의지를 단순한 환상이나 의식의 환영, 의식의 구조 자체에 내재된 일종의 기망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의지 능력을 인위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창안한 인위적 개념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또한 “욕구로 이해된 의지는 욕구 대상이 소유될 때 중단”되기 때문에,“의지와 욕구의 차이를 강조”한다.
(486쪽)
아렌트는 의지 능력을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대상들이나 목표들 가운데 선택하는 능력, 즉 목적에 도달하는 수단을 자유롭게 심의하는 능력이며, 다른 하나는 ‘시간 속에서 일련의 계기적인 것을 자발적으로 시작하는 능력’ 또는 ‘인간 자신이 새로운 시작이기에 갖게 된 인간의 시작 능력이다.(500쪽)
아렌트는 의지가 순수한 정신 활동뿐만 아니라 감각지각에서 나타내는 힘(결합력)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이는 정신, 특히 ‘의지의 집중’에서 비롯된다. “의지는 집중 덕택에 첫째로 우리 감각기관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현실세계와 결합시키고, 이어서 이 외부세계를 사실상 우리 자신으로 끌어들인다.”(678쪽)
“의지는 근본적으로 긍정 형태의 의지하기(willing)와 반대 또는 부정 형태의 의지하기(nilling)로 구성된다. 가령, 이 순간 ‘나는 글을 쓸 것인가’ 아니면 ‘쓰지 않을 것인가’라는 표현에서 전자는 ‘willing’, 후자는 ‘nilling’이다. 일상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의지하다(뜻하다, 의도하다, 원하다, 의욕하다)’와 ‘싫어하다(반대로 의지하다)’로 대비된다. 이러한 대비는 바로 의지의 이중성을 기본적으로 나타낸다. 아렌트는 두 가지 요소를 포괄하는 추상적 형태의 ‘의지’를 주로 대문자 ‘Will’로 표현하며, 개별적 형태의 의지를 소문자 ‘will,’ ‘willing’, ‘counter-willing’으로 표기한다.”(677쪽)
“의지는 사유와 마찬가지로 현상세계 속에서 진행되지만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한 상태에서 수행되는 정신 활동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의지는 현상세계와 사유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사유보다 더 많은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다. 즉 의지는 일반성을 지향하는 사유와 달리 특수성을 지향하므로 현상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현상세계와 의지 사이의 공간적 거리는 사유의 경우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다.”(677~678쪽)
판단이란 무엇인가 - 현상세계에 대한 ‘비관여적’ 관심
아렌트에 따르면, “판단은 정신의 산물인 일반성과 감각기관에 있는 특수성을 결합시키는 신비스러운 기본 재산”이다.(681쪽) “사유는 일반화를 의미하지만, 판단은 특수성과 일반성을 결합시키는 능력”이 된다.(681쪽) “판단은 시각·청각·촉각과 달리 가장 사적인 감각, 즉 취미와 연관되며 오감을 종합하는 육감”이라고 할 수 있다.(681쪽)
사건의 종결 이후에 비로소 형성되는 판단은 다른 정신활동들과 마찬가지로 현상세계로부터의 이탈과 거리감을 필요로 한다. “판단은 현상세계를 버리지 않고 현상세계에 대한 적극적 관여 상태에서 전체를 관조하기 때문에 특권적 위치로 물러선다.”(680쪽) 따라서 판단과 현상세계 사이의 거리감은 사유의 경우와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형태의 이탈을 이해하기 위해 행위자와 구경꾼(관찰자)이 서 있는 위치와 정신 상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행위자는 전체의 일부로서 자신의 역할을 하며 현상세계의 일부를 구성한다. 철학자는 사유활동을 할 때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하지만, 구경꾼은 현상세계에 있으면서 그곳에 함몰되지 않은 채 그것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전체를 관찰한다.“관찰자의 관점은 그가 사태를 전체로서 본다는 것이다.”(680쪽) 운동경기에서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는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지만 관찰자는 관람석에 앉아 거리를 유지한 채 경기 전체를 조망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는 역사적 사건의 참여자와 역사가의 관계에도 적용된다.“역사가는 과거에 대해 판단하는 탐구자”다.(680쪽) 달리 표현하면, 판단하는 나는 피타고라스의 구경꾼과 같다. 구경꾼은 행위자들의 활동을 관찰하면서 “초연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고독하지 않다.(680쪽) 물론 이를 가능케 하는 정신작용은 상상력과 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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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의 싯구 "어두운 시대의"에서 따온 이 제목은 1890~1920년 사이에 태어난 유럽의 잃어버린 세대 중 그 시대를 밝힌 사람들이 이야기다
후손들에게
참으로 나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구나
악의 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 없는 이마는
무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웃는 사람은
아직 끔찍한 소식을 듣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나무들이나 이야기하는 행위가 범죄가 된ㄴ 시대
곧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한 침묵을 내포하고 있으니
천천히 길을 건너 가는 사람은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을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Men in Dark Times)의 ‘어두운 시대’는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세계대전 전후를 말하는 정치적 은유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75)는 이 책에서 특정 정치체제나 정치적 사건을 다루지 않고 특정 인물이 ‘어두운 시대’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이를 어떻게 극복하려 했는지를 다룬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 나오는 인물들은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1892-1940) 등 20세기에 활동했던 시인, 작가, 철학자, 성직자다. 그들이 “시대정신의 대변자는 아니지만 어두운 시대에 빛을 밝히려고”(17쪽) 했으며 각자의 방법으로 인간의 자유와 인간됨을 조명했다.
하지만 아렌트는 “‘어두운 시대’가 한 시기를 특징짓는 것은 아니며 역사 속에서 드문 현상도 아니다”(62쪽)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어두운 시대’는 언제 어디서나 있었으며 공공영역이 ‘신뢰성을 상실’하고 “빈말이나 허튼소리”(60쪽)가 진실을 은폐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사유는 바람과도 같다 (the winds of thought)
思惟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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