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메타구조란 무엇인가 자크 비데 지음, 배세진 옮김 l 생각의힘 l
Jacques Bidet-1935년 프랑스 출생. 프랑스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연구자이자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에티엔 발리바르와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알튀세르의 사상을 계승해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기여해 왔다. 알튀세르는 생전에 비데의 작업을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에 공헌하는 중요한 시도로 인정한 바 있으며, 발리바르 역시 비데를 지속적으로 참조하고 있다.
박사학위 논문 「『자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1985)에서 구축한 ‘메타구조적 접근’ 혹은 ‘메타구조론’을 논문 출간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메타-마르크스주의’라는 또 다른 이름 아래 꾸준히 발전시켜 왔고, 특히 『근대성의 이론: 마르크스와 시장』(1990), 『일반이론』(1999), 『『자본』에 대한 설명과 재구성』(2004)에서 그 접근법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다. 『존 롤스와 정의론』(1995), 『세계-국가』(2011),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2014)에서는 이 메타구조적 접근을 존 롤스의 철학, 세계-체계, 미셸 푸코의 철학 등으로까지 확장했다. 『신자유주의: 또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2016)에서는 그런 이론 틀 안에서 동시대 신자유주의를 헤게모니 체제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했고, 『‘그들’과 ‘우리’?: 좌파 포퓰리즘에 대한 하나의 대안』(2018)을 통해 현재 진행 중인 좌파 포퓰리즘을 둘러싼 논쟁에 개입한 바 있으며,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에서는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의 논의에 기반해 ‘노동법 (개악) 투쟁’이라는 구체적인 정세에 실천적으로 개입했다.
국내에는 박사학위 논문이 『『자본』의 경제학, 철학, 이데올로기』(1995)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한국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도 제라르 뒤메닐과 함께 쓴 『대안마르크스주의』(2014)가 번역되어 있으며, 가장 최근에는 본서와 짝이 되는 저서인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이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 푸코와 함께 마르크스를』(2020)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목차
서문―왜, 그리고 어떻게, 마르크스와 푸코를 결합하는가?
1장 푸코/마르크스 쟁론: 규율과 통치 가능성
2장 소유-권력과 지식-권력
3장 마르크스적 구조주의와 푸코적 유명론?
4장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와 푸코의 ‘자유주의’
결론을 위한 요소들―아래로부터의 전략
부록―‘메타구조’란 무엇인가?
옮긴이의 글―푸코를 위하여 마르크스를 읽자: 자크 비데의 메타/구조론과 포스트-포스트-마르크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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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대안마르크스주의》 이후 국내에 오랜만에 소개되는 이 책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은 2016년 프랑스에서 전개된 ‘노동법 개악 투쟁’이라는 정세 속에서 마치 팸플릿처럼 간결하고 신속하게 집필되었다. 이 책의 강력한 참조점이 된 노동법을 둘러싼 일련의 투쟁은 프랑스 좌파 정치세력이 신자유주의의 원리를 본격적으로 채택하기 시작한 맥락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마르크스와 푸코를 다시 읽는 그의 작업은 바로 이 ‘노동법 투쟁’이라는 지점에서 유효해진다. 비데는 ‘노동법 투쟁’의 핵심 쟁점인 ‘노동시간’ 개념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그동안 종종 대척점에 놓여왔던 두 철학자의 관계를 그 뿌리부터 재구성한다. 무엇보다 비데의 작업은 노무현 정부 이래 ‘좌파-신자유주의적 전회’가 본격화된 한국의 상황을 검토해보는 강력한 토대를 제공한다
‘노동법 개악’과 ‘좌파-신자유주의’적 전회
프랑스의 2016년은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의 주도로 ‘노동법 개혁’이 실행된 해였다. 사회당 소속이었던 올랑드 대통령은 10퍼센트가 넘는 높은 실업률이 지속되자 기업 친화적인 노동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나섰다. 그 ‘개혁’이 사실상 ‘개악’임이 명백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올랑드 정부는 사회당의 핵심 노동정책이었던 ‘주 35시간 근로제’를 허물어 법정 근로시간을 연장하고, 기업의 해고 요건도 대폭 완화했다. 노동계와 다수의 시민들이 시위와 총파업을 벌이며 ‘개정안 철회’를 촉구했지만, 정부는 뜻을 굽히지 않고 개정안을 강행했다.
2016년의 이 ‘노동법 개정안’은 프랑스 사회가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원리’를 채택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프랑스는 양차대전 이후의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 전통으로 인해 어느 정도 ‘혼합경제’ 체제를 유지해오고 있었으나,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 이후부터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씩 신자유주의를 수용해오던 참이었다. 올랑드 정부는 그런 ‘좌파-신자유주의적 전회’를 본격화한 셈이다. 결국 프랑스의 좌파 정치세력 역시 노동법 개혁(개악), 즉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자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올랑드 대통령의 뒤를 이어 취임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역시 사회 전체의 신자유주의화를 가열차게 밀어붙이고 있다.
자크 비데의 이 얇은 소책자가 참조하고 있는 프랑스의 이런 정세는 2020년 한국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노무현 전 정부의 좌파-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통과되었던 ‘비정규직법’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애초 ‘노동 존중 사회’를 표방하며 노동시간 단축, 노동기본권 보장,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 등을 내세웠던 문재인 정부 역시, 실질적으로는 국제노동기구의 협약에 위배되는 ‘개악안’을 제출한 바 있다. 사용자들의 숙원인 ‘탄력근로제 확대 적용’은 특히 큰 반발을 사고 있는데, 사용자들이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노동시간을 조정할 여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정치’: 푸코를 경유해 마르크스로 되돌아가기
비데는 이 ‘노동법 개혁’이라는 사건을 실마리로 삼아 마르크스와 푸코라는 두 사상가에게 접근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는 ‘푸코를 경유해 마르크스로 되돌아가는’ 여정이다. 비데는 마르크스의 그 유명한 《자본》 1권 3편 <노동일> 장에서 ‘생명정치’의 문제의식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이는 우리에게 푸코 개념을 떠올리도록 한다. 푸코는 자신이 ‘생명정치’라고 명명한 개념에서 18세기 이래 인구통계학과 공중보건, 사회적 예방, 사회적 정상성 등의 목표들을 체계적으로 전담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하나의 국가-정치적 실천을 특정한 바 있다. 국가는 더 이상 생명 보호를 위해 “죽게 할 수 있는 권리”만을 행사하지 않는다. 국가는 사회의 생물학적 조직 안으로 직접 개입해 들어오고, 생명의 행위자가 된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다룬 공장은 이전의 거대 산업체를 넘어 오늘날 국가 전체의 수준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자본의 생명정치는 더 이상 시장의 추상적 법칙이 아니라, 국가장치들이 실행하는 하나의 진정한 정치인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자본》은 경제적 메커니즘과 그 경향, 즉 부의 생산과 이윤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할 뿐, ‘생명에 대한 관리’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에게 푸코의 것과 유사한 ‘생명정치(학)’가 존재한다는 비데의 주장은 일견 자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면밀하게 분석하는 노동일, 즉 노동시간은 직접적으로 노동자의 신체 및 생명과 연결되는 문제로, 계급투쟁의 핵심 의제를 형성한다. 비데는 마르크스가 일찍이 이 노동시간과 결부된 (노동자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간파하고 있었음에 주목하며 그의 《자본》 1권을 다시금 소환한다.
노동시간, ‘정상적’ 삶을 위한 권리
《자본》의 결정적인 한 장(‘노동일’에 관한 장)에서 마르크스는 1840~1850년 무렵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기 위한 영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공들여 분석한다. 그는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사용한 단어들을 가지고서 자신의 철학을 이론화한다. 당시 노동조합은 ‘10시간 노동법안’과 ‘보편선거권을 위한 헌장’을 내걸었으며, 10시간 노동법은 1847년 정식으로 공포되기에 이른다. 이 두 가지 요구는 노동자들이 과연 ‘정상적 삶’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 질문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공명한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누가 ‘정상적’ 삶을 위한 공통의 법을 만들 것인지 확인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차티스트 운동 및 프랑스혁명 역시 ‘노동의 권리’라는 새로운 전선이 탄생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처럼 마르크스에게서 핵심이 되는 ‘노동시간’이라는 질문은 단지 ‘경제적 효율성’과 관련된 문제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비데가 보기에 이 ‘노동시간’은 ‘(노동자들에게) 체험된 삶’과 ‘정치적 대립’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촉발한다. 우리가 마르크스의 고유한 ‘노동의 생명정치(학)’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이 때문이다. 비데는 마르크스의 정치학이 삶에 대한 정치, 즉 하나의 생명정치(학)로서 ‘경제학 비판’과 한 몸을 이룬다고 진단한다.
‘노동일’이라는 개념은 마르크스로 하여금 ‘노동하는 삶’에 관한 하나의 정치이론을 구성하도록 하는 본질적인 발견이다. “마르크스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 즉 ‘우리가 맺은 계약은 무엇인가?’, 우리는 일만 하다 죽게 되는[‘정상적 삶’이 불가능한] 그러한 계약을 맺은 것인가 아니면 ‘정상적 삶’에 대한 계약을 맺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들을 수 있게 만든다.”
노동자, 그 ‘죽을 수밖에 없는 신체’에 관하여
즉 노동시간 투쟁은 ‘정상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를 획득하려는 투쟁이다. 마르크스는 공장의 전제정이 노동자들의 신체에 행사하는 폭력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노동시간 혹은 노동일을 제한하는 노동법에 주목한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푸코가 1973년의 강연 “진실과 법률적 형태들”에서 제시한 테제이기도 하다. 해당 강의에서 푸코는 “유일하게 신체에 행사되는 권력으로서의 규율권력, 더 나아가 이러한 신체들의 집합인 인구에 실행되는 권력으로서의 생명권력에 대한 사고”가 마르크스의 《자본》 1권 <노동일> 장에서도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범박한 해석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마르크스주의가 (법으로 대표되는) 정치와 경제 사이의, 그러니까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사이의 단순한 이분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푸코의 사상을 단순하게 대립시킬 수 없으며, 이 두 사상 사이에는 일종의 ‘선택적 친화성’이 존재한다는 테제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자본》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것은 노동자가 자본가와 맺는 그 계약이 근본적으로 “노동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종의 ‘거짓된 계약’이라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생명이 점차 소멸해가면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마르크스는 이를 공장 감독관들이나 영국 중부도시 노팅엄의 노동자들에 관한 글을 썼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다음과 같은 기술에서 빌려온다. “기아로 인해 살이 쏙 빠져 노동자들은 뼈만 남은 상태로 전락하고, 그들의 신체는 오그라들었으며, 그래서 그들의 얼굴 윤곽이 너무 두드러져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다. 노동자들의 존재 전체가 보기만 해도 오싹함을 일으킬 만큼 마비 상태 속에서 굳어져버린다.”
마르크스가 노동하면 할수록 점차 죽음에 가까워지는 이들 신체에 주목하며 드러내려 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노동자의 신체가 마모되고 그 생명이 소진되어가는 그 순간에조차 노동자들에게서 단 몇 초, 몇 분의 시간이라도 더 강탈하려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선연하고도 촘촘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분 단위 시간을 슬쩍함’으로써 하루의 노동 시간을 늘리는, 그리고 노동자의 모든 땀구멍을 기계의 리듬에 따라 채워넣는” 공장의 실천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본원적 축적의 폭력 그리고 일회용-노동자들
폭력은 비단 공장 안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애초 자본주의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역사적 과정(사실상의 폭력) 속에서 탄생했다. 본원적 축적에서는 본래 한 명의 ‘생산자’였던 ‘노동자들’을 생산수단에서 떼어놓기 위해(특히 농민들을 그들 경작지에서 떼어놓기 위해) 전쟁에 가까운 폭력이 동원되었다. “결국 이는 노동자 혹은 농민을 죽이는 장치로서의 교수대에 비유될 수 있는 하나의 생명정치였던 것이다.”
게다가 자본은 자신의 필요에 비해 잉여적인 ‘상대적 과잉인구’를 처리하는 탁월한 수단으로 다양한 ‘산업예비군’을 발견해낸다. 이들은 자본 그 자신의 테크놀로지 변화의 리듬에 따라 마음껏 활용하고 또 버릴 수 있는 ‘일회용 노동자’로 다뤄진다. 자본은 가능한 한 가장 낮은 수준의 임금을 유지하며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논리만을 따를 뿐, 임노동자들의 재생산을 책임질 의무는 전혀 지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산업 생산체 중심의 주위 전체에서 뛰고 있는 생명정치의 맥박”이다.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의 생명력[즉 노동력]을 길어 올림과 동시에 더 이상 이윤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 이 생명력을 쓰레기처럼 내다버리는 장소인 자연환경에 기생하는 기생식물처럼 발전한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이전의 ‘생명 형태들’을 없애버리거나, 그것을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활용한다. 마르크스가 묘사하는 이 일련의 폭력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진실’로 확인되고 있는 바이다.
‘노동의 권리’를 ‘이윤의 편의’로 환산하는 시대,
’푸코’와 함께 ‘마르크스’ 읽기
“특히 노동자의 모든 땀구멍을 기계의 리듬에 따라 채워넣는 실천은 조립 공정 노동의 바로 전 단계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신자유주의적 성격의 기업이 채택하는 스트레스 가득한 현재의 장치들을 예고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장치들을 로마나 신대륙의 노예제처럼 ‘가장 저발전된’ 형태들에서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본의 본성’으로 이해된 자본주의의 피비린내 나는 지평”으로 옮겨놓는다.
비데는 마르크스가 간파했던 진실이 오늘날 아시아나 중남미 개발도상국 하청 노동자들이 겪는 노동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됨을 본다. 노동시간 단축을 외치는 법률들이 사실상 무의미해진 이 시대에 역설적으로 비데가 마르크스의 ‘노동시간’ 개념에 주목하는 이유다. 신자유주의 시대, “무제한적 시간의 재택 노동으로 변형된 IT 노동, 규정된 시간보다는 규정된 과업에 따라 맺는 노동 계약”은 사실상 ‘법적 노동시간’을 사실상 무효화한다. 현재 신자유주의는 세계 곳곳에서 ‘노동의 권리’를 ‘이윤의 편의’로 환원해버리는 다양한 법제화에 영감을 불어넣는 중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노동시간’은 더욱더 포기할 수 없는 쟁점이 된다. 노동일 제한을 무효화하고 신체를 무제한적으로 소진하도록 하는 이 반-혁명은 “노동일을 법적으로 제한했던 과정 자체의 혁명적 본성”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우리는 어떻게 마르크스와 푸코를 읽어야 할까? ‘노동의 권리’가 모조리 ‘이윤의 편의’로 환원되는 이 시대에 마르크스와 푸코에게서 어떤 진실을 낚을 수 있을까? 비데가 제안하는 독해법은 ‘마르크스와 푸코의 관계’를 재설정해 마르크스의 《자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두 철학자 모두에 대한 훨씬 더 촘촘하고 비판적인 탐구를 요한다.
마르크스와 푸코를 대립시키는 기존의 해석은 흔히, ‘유명론적 인간학’에 준거한 푸코가 하나의 중요한 쟁점으로 걸려 있는 ‘생명’을 (마르크스와 달리) ‘개인성’의 측면에서 파악했다는 점을 높이 산다. 반대로 마르크스의 강점은 ‘계급관계’라는 본질 속에서 사회 질서를 해독했다는 점에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런 대립 구도는 사실상 별 근거가 없는데, 오히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푸코의 질문을 활용해 “마르크스의 이론적 작업장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푸코가 정확히 파악했듯, 계급 간의 대립이란 실제로 ‘독특한 인격들’ 사이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 행위하고 노동하며 말하고 지배하며 저항하는 것은 계급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일 따름이다. 근대적 의미의 계약을 통과할 수 있는 이들은 계급이 아니라 바로 개인들이기 때문이다.
계급 대립에서 ‘적대하는 두 계급’이 아닌 ‘독특한 인격들’의 형상에 주목했던 푸코의 통찰이 유효한 건 그래서다. 만일 ‘노동자’와 ‘자본가’를 (개인이 아닌) 하나의 계급으로 표상하면, ‘지배’는 순수하게 ‘비인격적인 것’으로 치환되고 만다. 이런 구도는 개인들이 그저 사회구조에서 차지하는 위치의 자격으로서만 서로 대립하는 것일 뿐, 이상적으로는 모든 개인이 국가사회 안에서 평등하다고 상상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하나의 계급적 조건은 그 계급에 속하는 여러 개인들을 얼마든지 서로 교환될 수 있는 존재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하지만 노동자가 한 명의 ‘독특한 개인’으로서 발화하게 될 때, 그의 목소리는 바로 그 계급적 추상을 깨버리며, 지배의 비인격성 또한 제거한다.
더 나아가 푸코를 참조할 때 우리는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특유의 호명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일한 지배계급의 두 가지 극에서 발생한다는 사실 또한 인지할 수 있게 된다. 비데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근대성의 핵심인 원초적 호명, 즉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까지도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인지하는 원초적 호명을 식별해낸다. 근대 노동자의 이 자유는 “노동자가 자신의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점과 관련된다”. 하지만 이 주인이라는 형상은 언제나 ‘소유에 의한 주인’과 ‘조직에 의한 주인’으로 이중화되어 있다. 시장의 편에서 호명은 노동자에게 언제나 탈출 가능성과 자유를 제시하는 반면, 조직의 편에서 호명은 명령의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푸코는 바로 그 조직의 역량(기업 내에 존재하는 권위, 역량을 부여받은 관리자의 힘)을 마르크스와 다르게, 또한 매우 생산적인 방식으로 탐구했던 이였다. 다시 말해 푸코의 문제의식 속에서 우리는 노동자-인민 계급이 행하는 정치적 투쟁의 복잡성을 진정 깨닫게 된다. “구별되면서도 동일한 하나의 지배계급으로 스스로를 구성하는, 자본가와 관리자-역량자라는 두 사회적 힘들”에 맞서야 하는 그 투쟁은 전혀 단순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푸코를 경유해 마르크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뜨거운 지점이며, 푸코의 문제의식으로 건져 올릴 수 있는 마르크스의 고유한 생명정치, 즉 “위로부터의 명령에 반대하며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적 독재를 요청하는 생명정치”이다.
푸코와 마르크스. 우리가 두 이름을 연결하는 것은 많은 경우, 이 둘을 대립시키기 위해서다. 노동자 운동의 이론가이자 총체성의 철학자인 마르크스에게, 특이성과 미시-권력의 사상가이자 숨을 헐떡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가이기도 한 푸코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현존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로 꼽히는 자크 비데의 신간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 메타구조란 무엇인가』는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는 둘 사이의 상보성을 인지하는 것, 둘 사이의 잠재적인 마주침의 지점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주의가 탐험하지 않고 내버려둔 착취의 어떠한 측면에서 푸코를 추수하는 것, 그리고 마르크스의 것이었던 전체적 관점 내에 푸코의 작업들을 재기입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지식-권력’에 기대어 있지 않은 ‘소유-권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계급관계를 떠받치지 않는 규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통치성 속에서 희미해지지 않는 국가란 존재하지 않으며 ‘조직’ 없는 ‘시장’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렇다.
전작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 푸코와 함께 마르크스를』(오월의봄, 2020)이 마르크스에서부터 출발해 푸코에게로 도달하는 방식으로 푸코와 마르크스를 결합했다면, 이 책은 푸코에서부터 출발해 마르크스에게로 도달하는 방식으로 푸코와 마르크스를 결합한다. 요컨대 푸코의 사상을 배경으로 삼고 메타-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한 저작과 마르크스의 사상을 배경으로 삼고 푸코의 철학을 연구하는 저작이 짝을 이룬다. 이러한 비데의 작업은 푸코-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 아래 결국 메타구조론 그 자체를 완성한다. 그리고 이 모든 시도는 비데 사상의 정수를 집약하는 ‘메타구조적 정사각형’에서 출발한다.
비데는 세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에티엔 발리바르와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의 충실한 이론적 제자이지만, 발리바르가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에 더 방점을 찍는 것과 대조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유연하게 탈구축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에 더욱 고집스럽게 머무르려 한다.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은 비데의 이러한 메타구조론의 관점에서 푸코와 마르크스를 이론적으로 치밀하게 화해시키려는 시도다. 비데는 마르크스를 메타구조적 관점에서 재독해해 메타-마르크스주의를 구축하고, 이 메타-마르크스주의의 공백을 푸코의 철학으로 메운다.
마르크스와 푸코 사이의 ‘쟁론’은 아카데믹한 질문들의 핑곗거리로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투쟁의 지형 위에서 푸코와 마르크스는 서로 교차한다. 자크 비데가 말하듯, 우리에게는 ‘아래로부터의 공통의 전략을 위해’ 푸코의 진실과 마르크스의 진실 서로가 서로를 들을 수 있게 만드는 과업이 여전히 남아 있다.
책 속으로
따라서 나는, 하나의 동일한 이론적 구축물 내에 이 마르크스의 접근과 푸코의 접근을 모두 함께 포함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매우 위험천만한 하나의 기획, 전쟁의 천재라면 아마도 이 표현에 부여할 그러한 의미에서의 ‘하나의 힘 조작’[즉 마르크스의 사상과 푸코의 사상을 인위적 힘을 가해 절합시켜 보는 ‘조작’ 혹은 ‘작전’]을 시도해 볼 것이다.--- p.14
푸코는 계급관계와 그 재생산이 아니라, 개인에 의한 다른 개인에로의 그리고 특히 공적 혹은 사적 제도가 자기의 대상으로 취해 통제[관리]하고 노동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담당하는 그러한 개인에로의 ‘계급’(푸코 자신이 이 용어를 사용한다) 권력의 실행을 고려한다.
푸코는, 이 제도가 예속화assujettissement 기능과 억압적 차원을 지녔음에도, 그 안에서 인구가 문화와 역량puissance에서 더 우월한 형태로 상승되는 그러한 합리적 장치를 확립하는 본성을 이 제도가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한 부분에서는, 사회과학 그 자체의 기원적 중핵이다. 감옥의 경우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경우에서, 규율은 권력에 상관적인 지식, 즉 지식-권력의 작동을 자신의 상관항으로 지닌다.
이것은 동시에 새로운 지배의 질서이기도 한 것으로서의 새로운 이성이 취하는 질서이다. 전체적으로, 그리고 특히 이러한 양가성과 관련해, 푸코의 논의는 마르크스의 논의와 가족유사성을 지니는데, 이 마르크스의 논의 또한 지성의 억압자이자 동시에 그만큼 지성의 요인이기도 한 자본주의에게, 이 자본주의 자신으로부터 빚지고 있는 바를 되돌려 주고자 한다.--- p.52~53
나는 푸코의 개념성을 대상으로 다시 작업함으로써 이러한 질문들에 답변하고자 시도할 텐데, 이 푸코의 개념성이 취하는목표는 분명 이러한 관점으로 정식화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나에게는 푸코가 (마르크스의 기획을 다시 의문에 붙임과 동시에) 마르크스의 기획을 이러한 방향으로 확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푸코는 현대사회의 중심에서 자본과 평행하게 존재하는, 권력과 지배의 또 다른 극autre po?le을, 그러니까 지식-권력의 극을 식별한다(2.1). 푸코는 이 지식-권력이라는 극에 고유한 하나의 이론화, 지식과 권력을 절합하는 하나의 이론화를 우리에게 제공한다(2.2). 그리고 푸코는 이 지식-권력이라는 극에 대한 비판 또한 생산하는데, 이 비판은 이 지식-권력의 지배에 대항할 수 있게 해주는 무기들을 우리에게 제공하고자 함과 동시에 이 지식-권력을 사회적 해방을 목적으로 동원하고자 한다(2.3).--- p.106~107
사회와 개인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 사회학의 이러한 고전적인 문제, 이렇듯 이질적인 두 철학에 대한 준거를 통해 극화되는dramatise? 이러한 문제는 여기에서 하나의 예리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작업이 증거하는 개념적 노동과의 관계 속에서, 마르크스를 구조에 관한 하나의 현실주의 내에, 푸코를 존재와 사물[즉 실재]에 관한 하나의 유명론 내에 정당하게 가두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양자택일로부터 드러나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개의 정치적 선을 하나의 선이 다른 하나의 선에 대립되는 방식으로 그어내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어떠한 조건 속에서, 이 두 개의 정치적 선을 모두 그 어떠한 절충주의에도 빠지지 않으면서 하나의 정치적 길―그 안에서 다양한 사회적 전복 전체가 스스로를 인지할 수 있을―이 취하는 부조화하면서도 분리 불가능한 두 요소로 떠맡는 결론으로 향해 가는 이론적 시련을 기도할 수 있는가?
이 두 개의 개념성 모두에 내재하는 한계에 관한 하나의 비판적 분석, 이 두 개의 개념성이 하나의 일반이론 내로 통합되는 것이 불가능함을 표현하는 이러한 한계에 관한 하나의 비판적 분석은 필수적 전제로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3.3).--- p.193
우리 시대 고유의 ‘사회적 생산성’이라는 바로 이러한 도식에서부터 출발해, 나는 이 마르크스와 푸코 각자의 사고방식을 비교하고 이 사고방식들 간 모순을 넘어 서로의 사고방식을 절합하고자 한다. 결국 우리의 질문은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인 이 세계와 그 미래에 관한 이해를 위해 이 [대문자] 자본주의, [대문자] 자유주의, [대문자] 신자유주의라는 이름들이 지니는 가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 이름들은 인식의 도구인가 인식론적 장애물인가? 이 개념들로부터, 그리고 사회과학과 정치철학의 전장 위에서 전개되는 이 개념들 간의 경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p.280
이제 우리는 서론에서 언급된 우리의 출발점 ‘인민 내부의 모순’으로 되돌아온다. 물론 우리는 모두 소유와 지식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항상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을 잘 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소유와 지식에서 현대 계급권력의 두 가지 요인을 읽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개념들은, 서로에 대해 적대적인 철학들에 의거하는 경향이 있으며 인간 해방에 관한 서로 분기하는 판본들을 제시하는 이질적인 이론적 접근[즉 푸코의 접근과 마르크스의 접근]에 속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서 영감을 얻는 이들과 푸코에게서 영감을 얻는 이들이 자신들 사이에서 전략적 관점에서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전혀 쉽지 않다.--- p.347
소유와 지식, 지배계급이 지닌 두 개의 머리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자크 비데
마르크스와 푸코 지적 유산의 협업
메타구조론으로 구조의 선전제 따져
소유-지식의 헤게모니적 역동성 주목
카를 마르크스, 미셸 푸코. 한겨레 자료사진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모든 것이 상품화된다는 카를 마르크스(1818~1883·아래 사진)의 말은 분명한 현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에 대항해 계급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은 현실과 더욱 거리가 벌어졌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선 ‘해방된 생산자’가 아니라 규범화하고 통제하는 권력에 예속된, 미셸 푸코(1926~1984·아래 사진)가 말하는 주체와 그 분열, ‘인민 내부의 모순’이 더욱 도드라진다. 현대사회의 어떤 고갱이를 서로 다르지만 적확하게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푸코는 그 각각뿐 아니라 둘 사이의 접점까지도 오늘날 사유의 커다란 숙제로 꼽힌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자크 비데(86)가 2014년에 쓴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은 “마르크스적이고 푸코적인 두 유산을 서로가 서로에 의해 재교차되도록 함으로써 이 두 유산을 작업장 위로 다시 올려놓”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루이 알튀세르의 영향에 따라 마르크스주의를 재해석하는 데 집중해온 지은이는, 전작 <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오월의봄)에서 푸코에 도달하기 위해 마르크스를 참조한 데 이어 이번 책에서는 마르크스에 도달하기 위해 푸코로부터 출발한다. 무엇보다 지은이는 “착취라는 영역을 마르크스에게, 지배라는 영역을 푸코에게 할당”하는 식의 절충주의적 분할을 비판하며, “마르크스의 접근과 푸코의 접근을 모두 함께 포함하는 하나의 동일한 이론적 구축물로서 현대사회에 대한 일반 이론”을 지어보겠다고 말한다. 그 핵심에는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메타구조’가 있다.
메타구조론은 지은이가 마르크스주의의 약점을 보완하고 새롭게 만들기 위해 천착해온 일종의 방법론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현대의 사회적 구조를 만드는 토대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가 실존하기 위해 먼저 존재하는 허구적인 조건(선전제)이 무엇인지 따져묻는 접근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이미 합리적인 ‘시장’을 선전제로 삼는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들여다봤다. 자본주의적 계급구조는 노동을 상품으로 변형해 착취하지만, 합리적이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계약이라는 기반 위에 세워져 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 때 노동력은 스스로 상품이 되니, 자본주의는 이것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만드는 주장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를 두고 지은이는 “현대성(또는 현대적 사회질서)은 ‘이성의 도구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마르크스가 단지 “사회적 장(場)의 절반만을 취급했다”고 지적하며, ‘현대적 계급관계’는 시장뿐 아니라 ‘조직’이라는 두 매개를 모두 함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조직이라는 매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장을 연 사람이 바로 1970년대에 ‘자유주의적 통치성’ 문제를 파고들었던 푸코다. 푸코는 ‘구조’가 인간을 취급하는 마르크스적 사회적 장이 아닌, 인간에 의한 인간 취급이 이뤄지는 사회적 장을 새롭게 발견했다. 집합적 생명(인구)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 생산력 자체를 생산하기 위해, 자유주의적 통치성은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이 목적인 자본주의적 권력과는 다른 종류의 권력을 행사한다. 개인들을 하나의 규범 주위에 나누어 배치하고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 사이에서 위계화하고, 극단적인 경우엔 자격을 박탈하거나 무효화하는 힘이다. 이 힘은 ‘시장에서의 소유’가 아니라 ‘조직에서의 역량’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소유-권력’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지식-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역량은 자격을 부여하는 권위, 곧 “‘진실’의 담지자로 스스로를 인지하도록 만드는 능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 참조하면서, 우리는 ‘이성의 도구화’를 수행하는 두 가지 양식을 모두 시야에 넣을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현대적 사회질서는 계급요인으로 도구화된 것들로서의 시장과 조직의 함께-포개어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시장과 조직이라는 두 가지 극은 서로 구분되지만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늘날 자본이 지식-권력에 의해 공공 서비스라는 형태 아래, 이전에는 비-상품적인 방식으로 보장됐던 영역(병원, 학교, 감옥, 연구소 등)을 강력하게 장악한 것을 사례로 들 수 있다. 고위 관리자가 자본가의 이윤을 나눠 갖거나 거대 자본가가 정책을 움직이는 등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것은 “시장의 높으신 나리와 대결함과 동시에 조직의 권력자와도 대결하는 이중전선”이다.
다만, 이런 사회적 힘들은 어떤 단일한 구조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에 되레 ‘헤게모니’적 역동성을 지니게 된다. 권력은 특권 계급이 지니는 두 극에 위치해 있는 사회적 힘의 대결 안에서 벌어지는 저항과 주도, 지배와 탈지배, 동맹과 타협 등 끊임없는 작용들 속에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역동성은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근본계급(인민계급)의 전략 또한 이전과 다르게 확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시한다. 지은이는 “현대사회 내에는 분명 두 가지 계급이 존재하지만, 계급투쟁은 3항적으로 이루어지는 작용”이라며, ‘아래로부터의 전략’을 말한다. 소유의 특권을 통해 시장을 지배하는 자본가들의 힘과 역량의 특권을 통해 조직을 지배하는 관리자의 힘이 있다면, 사회-생산적 과정에 참여하는 인민계급 역시 소유와 역량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유의미한 하나의 사회적 힘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전략은 그 무엇도 약속하지 않는다. 다수로 존재하는 근본계급이 과연 자신의 다양한 분파들 속에서 어떤 통일적인 자기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함께 갈수록 벌어지는 내부의 분열과 간극들 속에서, 지은이는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에 보편적인 것의 담지자로서 우선성을 부여해야 할 것이라고도 말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
왜 지금 다시 마르크스인가 : 마르크스 사상의 비판적 재해석 및 재구성에 관한 실천철학적 성찰 사회와 철학 연구회 지음 서울 : 씨아이알, 2021
저자 -저자: 권정임, 김원식, 선우현, 이국배, 임경석, 진태원, 최치원, 한상원, 홍승용, 홍윤기
목차
1. 왜 마르크스인가: 해방적 비판의 재해석을 위하여_임경석
2. ‘실재적 관계들 안의 현실적 인간’ 또는 ‘인간’ 개념의 변증법적 의미 전형(轉形)을 통한 사적 유물론의 철학적 근거 정립_홍윤기
3. 공산당 선언 탄생사_최치원
4. 마르크스와 링컨 그리고 노예제_이국배
5. 사회주의의 재구성: 인간중심 민주주의론의 경우_김원식
6. 마르크스와 유령적 모더니티: 상품의 이중성과 ‘객관적 사유 형식’_한상원
7. 변증법적 ?자본론? 독해_홍승용
8. 생태적 재생산과 생태기본소득: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적 변형_권정임
9.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한계와 그 극복 방향: 인간중심 변증법의 비판적 지적과 그 대안의 타당성 검토_선우현
10. 마르크스와 알튀세르 사이의 푸코_진태원
칼 마르크스는 사상사에서 사장 위대한 실천 철학자이자 혁명적, 저항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초기 자본주의 체제에 관한 비판적 규명, 아울러 그로부터 드러난 모순과 난점들을 극복할 현실적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던 마르크스의 사상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이론적, 실천적 성과마저 극단적인 불신과 회의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마르크스 사상의 타당성과 효용성은 완전 소진되었다고 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던 19세기 당시의 서구 자본주의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비인간적인 억압적 실태에 관해 비판적․과학적 규명 작업을 벌여나갔던 비판적 지식인이자,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가장 소외되고 착취당했던 노동자 계급의 처지와 입장을 대변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 자신의 삶 전부를 바쳤던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나아가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그 어떤 착취나 수탈, 억압도 존재치 않는 진정한 ‘인간 해방’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현실화 가능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이를 구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던,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추구하고 체화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천 철학자였다.
이 책에서는 ‘오늘의 시점에서 왜 마르크스 철학이 다시 요청되는가?’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새롭게 살펴본 마르크스 사상에 관한 비판적 논구 작업은, 빠르게 변모해나가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규명하고 드러난 난제들을 해결해나가는 데 기여할 새로운 철학적 접근 방식과 조망점, 분석틀과 실질적 극복 방안 등에 관한 유의미한 논변들을 우리 실천철학계에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한국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 난맥상들을 제대로 짚어주고 그로부터 벗어날 현실적 타개책 및 한국 사회의 변혁 방안 등을 모색․제시해줄 ‘자생적 사회철학 모델’의 정립과 관련해서도 적지 않은 지침과 시사점, 교훈 등을 개진해줄 수 있을 것이라 감히 기대해본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외재적 비판’의 준거점이 상실된 현 시점이야말로, 이전과 질적으로 달라진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한계와 모순 등을 보다 철저히 직시하고 규명해야 할 적기라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마르크스의 사상은 조소와 냉소의 대상으로서 ‘죽은 개’ 취급은 아직 받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이제껏 살펴본 것처럼 기존의 마르크스 사상으로부터 오늘의 시대 상황에 부합하게끔 새로이 그 이론적․실천적 함의와 의의를 끄집어내어 규명해볼 경우, 마르크스의 실천철학은 현존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한계에 대해 신랄하게 ‘짖어댈(비판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개’로서의 역할을 여전히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런 한에서 이 책은 이 점을 보다 더 설득력 있는 다양한 논변의제시를 통해 확인시켜줄 것으로 기대된다.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齋藤幸平, 1987- 김영현, 역 다다서재, 2021
사이토 고헤이-1987년생. 오사카시립대학교 대학원 경제학연구과 부교수.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문 분야는 경제사상, 사회사상이다. 새롭게 출간되고 있는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EGA)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의 경상대학교 ‘포스트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혁신’ SSK 연구팀에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2018년 박사 학위 논문에 기초한 『Karl Marx’s Ecosocialism: Capital, Nature, and the Unfinished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로 전 세계적으로 뛰어난 진보적 저술에 주어지는 ‘도이처 기념상’을 역대 최연소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마르크스와 생태주의』(공저) 『미래를 향한 대분기』(공저) 등이 있다.
들어가며
SDGs는 ‘현대의 아편’이다!
제1장 기후 변화와 제국적 생활양식
제2장 ‘기후 케인스주의’의 한계
제3장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탈성장이 가능할까
제4장 ‘인신세’의 마르크스
제5장 가속주의라는 현실도피
제6장 결핍의 자본주의, 풍요의 코뮤니즘
제7장 탈성장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한다
제8장 기후 정의라는 ‘지렛대’
마치며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서
도이처 기념상을 역대 최연소로 수상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사이토 고헤이의 현대 사회 위기 진단 및 해법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기후 변화와 경제 격차 등 전 지구적 위기의 원인이 바로 ‘자본주의’라고 진단한다. 마르크스가 만년에 열중했으나 <자본>에 미처 담지 못했던 생태학과 공동체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의 궁극적 도달점 ‘탈성장 코뮤니즘’을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하며, 세계 각지에서 시도되고 있는 실현 가능한 제도적, 사회적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란 없다
그린 뉴딜은 알리바이 공작에 불과하다!
기후 위기 시대의 탈성장을 위한 해답
토머스 프리드먼, 제러미 리프킨이 지지하고 버락 오바마와 조 바이든의 대선 공약이 되기도 했던 ‘그린 뉴딜’은 기후 위기와 경제 불황을 동시에 타개할 ‘만능 치트키’로 군림해왔다. UN은 그린 뉴딜을 환영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를 내걸었고 SDGs는 선진국과 대기업의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재생 에너지 개발에 투자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탄소세 부과로 재원을 확충하며, 전기 자동차를 만들어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인다.’
얼핏 환상적으로 들리는 이 ‘녹색 성장’의 지지자들은 그린 뉴딜 정책에 투표하고 텀블러와 에코백을 사용하며 스스로 지구를 위해 무언가 하고 있다는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정부와 기업은 안도한다. 이제 지구 환경을 ‘보호하는 척하면서 경제 성장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진보적 저술에 주어지는 도이처 기념상을 역대 최연소 수상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사이토 고헤이의 최신작이다. 저자는 기후 변화와 경제 격차 등 전 지구적 위기를 각종 데이터에 기초해 분석하며, SDGs와 그린 뉴딜은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룰 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환경 위기, 식량난과 주거난, 양극화는 끊임없이 가치 증식을 꾀하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다다른 결과인데도, 경제 성장을 포기하지 못하는 정부와 기업이 별다른 효과가 없는 그린 뉴딜로 알리바이 공작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탈탄소 사회를 이루기 위해 지금 경제에 필요한 것은 ‘규모 축소’ 및 ‘속도 둔화’, 즉 ‘탈성장’이라고 강조한다. 최근 세계적으로 탈성장이 주목받고 있지만, 이 책은 탈성장파가 간과하고 외면하는 점을 지적한다. 구세대 탈성장파는 “이윤 추구도, 시장 확대도, 외부화도, 전가도, 노동자와 자연을 수탈하는 것”도 그만두자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길들이려 하는 ‘탈성장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제거해도 자본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공상주의’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벗어나 ‘탈성장’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하며, 산업혁명 직후 ‘자본’을 고찰했던 카를 마르크스를 불러낸다.
“마르크스로 탈성장을 논한다니 제정신이냐. 이런 비판이 사방에서 쇄도할 것을 각오하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좌파의 상식에서 보면 마르크스는 탈성장 같은 걸 주장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마 우파는 또다시 소련의 실패를 반복할 셈이냐고 비웃을 것 같다. ‘탈성장’이라는 단어에 대한 반감은 리버럴 내에도 매우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반드시 써야 했다.” ―본문 중에서
마르크스가 쓰려 했던 마지막 연구
자본주의의 대안, 탈성장 코뮤니즘
사이토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말년에 열중했던 연구에서 오늘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답을 찾아낸다. 새로운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EGA)의 편집위원이기도 한 저자는 마르크스가 남긴 방대한 노트와 서간을 바탕으로 마르크스 사상에 대해 누구도 한 적 없는 해석을 시도한다. 마르크스가 『자본』 2권 집필도 미룬 채 생태학과 공동체 연구에 몰두하며 ‘생산력 지상주의’와 ‘유럽중심주의’로 대표되는 과거의 자신과 어떻게 결별했는지, 오랜 사색 끝에 어떤 사상에 이르렀는지를 밝혀낸다.
저자는 만년의 마르크스가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평등’을 중시하며 궁극적으로 도달하려 했던 지향점이 ‘탈성장 코뮤니즘’이라는 결론을 낸다. 지구 자체를 ‘커먼(common)’으로 삼아 다 함께 민주적으로 관리하면 경제 성장을 하지 않는 순환형·정상형 경제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탈성장 코뮤니즘’이 만들어내는 사회는 기존의 소비주의적 풍요가 아닌 지속 가능하며 공정한 ‘근본적 풍요’가 실현되는 곳이다.
유럽과 미국의 좌파 진영에서는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을 키워 코뮤니즘을 이룩하자는 ‘가속주의’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 역시 “‘생산력 지상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다’라는 150년에 걸친 오해의 산물이자, 만년기 마르크스의 도달점을 모른 채 나아간 결과 생겨난 이물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는 결국 자본의 강력한 포섭과 전제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탈성장 자본주의’와 ‘가속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짚은 저자는 우리에게 남은 길이 ‘결핍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풍요의 코뮤니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결핍의 자본주의를 넘어 풍요의 코뮤니즘으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주목하며
인공적으로 ‘희소성’을 만들어내며 작동하는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결핍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브랜드화와 마케팅이 만들어내는 욕망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고, 상품은 생산과 동시에 폐기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오로지 돈벌이를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노동일수록 외려 경시되고, 모든 것을 상품에 의존하게 된 사람들은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생활수준 저하와 건강 악화를 감내한다.
그에 비해 탈성장 코뮤니즘은 ‘근본적 풍요’를 추구한다. 자본주의가 해체한 커먼을 되찾아서 본래 커먼에 있던 근본적 풍요를 다시 사람들의 손으로 돌려보내고, GDP로 환산할 수 없는 생활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다. 저자는 탈성장 코뮤니즘을 실현할 다섯 가지 조건(① 사용가치경제로 전환 ② 노동 시간 단축 ③ 획일적 분업 폐지 ④ 생산 과정 민주화 ⑤ 필수 노동 중시)을 제시하며, 진정한 변화는 소비가 아닌 생산 영역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은 탁상공론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 글로벌 사우스를 중심으로 지방자치단체, NGO, 협동조합 등이 자본주의의 무한한 성장에 저항하는 활동을 활발히 하며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운동에 변화를 촉진하여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체제의 대전환을 이끌어낼 잠재력이 있다고 높이 평가하고, 선진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제는 글로벌 사우스로부터 배우며 새로운 사회를 상상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되어 40만 부 이상 판매된 이 책은 일본의 청년층 사이에 탈성장과 마르크스 새로 알기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사이토 고헤이는 책 출간 후 일본에서 가장 뜨거운 지식인이 되어 각종 매체에서 자본주의와 기득권의 문제점을 통렬히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기후 위기뿐 아니라 세대 갈등, 계층 격차, 노동 착취, 경제 불황 등 여러 사회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우리 사회에 이 책이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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