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트기 전 한 시간 - 고이케 마사요
바람의 냄새 –윤의섭
은둔형 오후 – 유계영
월악산의 살구꽃-신경림
56억 7천만 년의 고독-함성호
봄내, 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함성호
나무는 뿌리 끝까지 잡아 당긴다-조은
무덤을 맴도는 이유
얼굴을 붉히다-송재학
슬픔이 나를 깨운다-황인숙
죽은자를 위한 기도
춘열 양반전-최두석
주기도문, 빌어먹을/박남철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장석주
동두천-김명인
침묵
우리들의 땅 – 신대철
노루귀꽃-김형영
65.첫사랑의 납골당-문정희
54 칸나
배롱나무의 안쪽/안현미
그루터기/박승민
고약한 사이/조성국
이런 낭패/도광의
휘영청이라는 말/이상국
여름 끝물/문성혜
동트기 전 한 시간 - 고이케 마사요
동트기 전 한 시간 이 한 시간 동안 당신이 눈을 뜨고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물론 이 질문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우선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야겠지요
만약 그 한 시간 동안 더 자고 싶다면
그 쪽을 택해야겠지요
동트기 전 한 시간 이 한 시간 동안 당신이 눈을 뜨고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겨울이 아니라면 창문을 열고
아직 어둑한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까요
떨어져 있는 애인들은 서로를 생각하겠지요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건 같이 있지 않거나 거리가 존재할 때
하늘은 포도색으로 물들었습니다
파랑색과 황색을 섞으면 녹색이 만들어지지만 새벽녘의 색깔
지붕의 윤곽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고
멀리서 가까이서 창문에 불이 켜지기 시작합니다
나처럼 잠이 깬 사람이 또 있다는 데에 이유 없는 친밀감이 생깁니다
부엌의 차가운 테이블 위
메이지 아몬드 초콜릿 상자를 집어 들고 기울이자
물결 모양의 골판지 위를 대굴대굴 구릅니다
마지막 한 알의 움직임이 멈추는 것을 확인합니다
커피물이 끓는 동안 그저 멍하니 서 있습니다
막 도착한 신문의 냄새를 맡아봅니다
'2003. 2. 26 한일 정상회담 대북 제휴를 확인'
동트기 전 한 시간 동안 내가 눈을 뜨고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우선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영화관은 닫혀 있고
전화로 그 사람을 깨우지도 못합니다
그 사람을 그저 혼자서 떠올리고
그리워하고 이처럼 시를 쓸 수밖에요
이는 그 무엇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보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새벽녘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낮동안 나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태양 아래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잡히지 않던 나만의 시간이
지금 제자리 걸음을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간신히 시간을 따라잡습니다
나 자신을 겨우 따라잡습니다
무언가를 하면 내게 들어온 시간이 사라질 듯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사색만을 합니다
동트기 전 한 시간 이 시간 동안 당신이 눈을 뜨고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어째서인지 질문을 할 때마다 슬픈 이 질문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몹시 지쳐서 죽은 듯이 깊이 잠든 우리의 잠 속
질문은 메아리처럼 울리며 수많은 꿈을 넘어서 갈 뿐입니다
바람의 냄새 -윤의섭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 보라
어느 성소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화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 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 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머리 내음
숲을 빠져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 나간 벤치의 추억
연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옆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 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느냐는듯이
바람이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가
그런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문득 문득 떠오를 때에도
도무지 이 바람이 전해 준 한 조각 내음의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이거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살내거나
길을 나서는 바람의 뒷자락에선 말라붙은 낙엽 냄새가 흩날렸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제 봄이 오기 전까기
저 바람은 빙벽 속에 자신만의 제국을 묻은 채 다시 죽을 것이다
은둔형 오후 - 유계영
맑은 날 비가 내리면 창밖을 봐주기를 염원하는 누군가의 기도가 통했다는 것
거울은 긴 팔로 방의 꼭짓점들을 끌어 안고 있다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은 핸드폰을 만지며
울고 웃는 한 사람을 지켜주려고
거울의 관심은 오직 자신뿐이지 그러나
운둔자의 관심사는 오직 외부에 있기 때문에
둘은 오랜 우정을 쌓을 수 있다
자나깨나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을 문득 극복해보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맑은데도 비가 내리기 때문에
운둔자는 거울을 떼어다 골목에 놓았다
가져가면 필요하시오 누구든 필요하시오
환영은 아무나
그는 방으로 돌아와
네 개의 꼭짓점을 백오십팔 개씩 겨누고 있는 서적들을 바라본다
그 위로 작고 부드러운 먼지들이 가라앉는다
거울의 민감한 팔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둥둥 떠다니던
사각형의 책상과 침대
의외로 육각형인 강아지 얼굴
인중이 뭉개질 때까지 콧물을 훔치게 했던 피크닉의 기억이
바닥에 잘 붙어 있는 것을 바라본다
허술한 태양이 자신의 꼭짓점을 놓칠 때
맑은 날 비가 내렸다
사선으로 내리는 비는 누군가 기도중이라는 의미일까
저주가 기도의 내용으로 부적격하지 않는다면
우산의 어설픔 때문에 온 얼굴이 침 범벅인 행인들 사이
거울은 빗방울을 속기하고 있다
자신을 다시 주워오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올
한 사람을 지켜주고 싶어서
월악산의 살구꽃-신경림
월악산에서 죽었다는 아들의
옷가지라도 신발짝이라도 찾겠다고
삼십 년을 하루같이 산을 헤매던 아낙네는
말강구네 사랑방 실퇴에 앉아 죽었다 한다
한나절 거적대기에 덮여
살구꽃 꽃벼락을 맞기도 하고
촉촉히 이슬비에 젖기도 하던 것을
여우볕이 딸깍 난 저녁 나절
장정 둘이 가루지기로 메어다가
곳집 뒤
바위너설 아래 묻었다
찾아다오 찾아다오 내 아들 찾아다오
너희들이 빨갱이라고 때려죽인
내 아들 찾아다오
이슬비 멎어 여우볕
깍 난 저녁 나절이면 아낙네는 운다
살구꽃잎 온몸에 뒤집어 쓴 채
머리칼 홑적삼이 이슬비에 젖은 채”
56억 7천만 년의 고독-함성호
21세기는 우리를, 마약과 동생애와 근친상간과 싸운
바보스러운 세대라고 기록할 것이다
성과 속과 천국과 지옥의 잠 속에서 나는 그대를 추모하지 않는다
당신은 꽃과 비의 정원에서
무엇인가에 불리어가는 듯한 썰물의 흉한 가슴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모든 죽음들에게, 입에서 항문까지
비로소 내장된 세상이 환하게 보인다
기껏 보살펴 주었더니 몸이 나를 배반한다
바람에 담쟁이덩굴이 온 집을 흔들어 놓고
당신은 안개꽃을 먹으세요
나는 장미꽃을 다 먹어치우지요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내일 신문에 코를 박고
방금 자신들이 떠나온 세상의 풍경들을 읽어내며
간단없을 생을 수근거립니다
권채롭듯이 아버지가 실내 낚시터에서 돌아오지 않고
형은 노래방에서 하루 종일 살았습니다
적막강산-, 오늘은 비가 징벌의 연대기처럼 내려
만화방창의 정원에서 식구들은
내 머리에 자라 있는 무성한 숲을 보고 놀라
시퍼런 낫을 들고 쳤지만는요 나는 늘 시원했습니다
나도 뜨겁거나 차지 않은 것들은 모두
내 입 밖으로 뱉어버리겠습니다
당신의 그 지루한 기다림만큼
아무것도 제시할 수 없는 이 위증의 세계에서
나도 그댈 겁나게 기다립니다
당신은 오래 꽃과 비의 정원에서 서 계세요
나는 넘치는 술잔을 들고 삼독번뇌의 바람을 기다리지요
봄내, 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함성호
바다를 보지 못해 나는 병들었다
헛헛한 꽃들이 마른버짐처럼 피어나는 한 철 송홧가루 날리는 독백의 산 그림자 속에서 나는 변절의 수상스런 기포를 끊임없이 뿜어 올리는 눈먼 쏘가리였다 청춘의 푸른 가시에 상처 입은 맨살 위로 축축한 안개에 불을 지르는 자학의 방화법, 얼른 잿더미로 화해 버리지 못해 안달하곤 하던 번제의 부정한 제물이었다 솔잎흑파리에 침식당한 소나무숲을 가로질러 은, 백, 화색의 나무들을 기르는 긴 강이 비에 젖을 때 내 광활한 불의 나무숲도 그 중심으로 푸르게 젖어갔다 살아 있다면 흐르는 푸른 색으로 보호받고 싶었다- 짙푸른 밤의 바다뱀 자리가 눈부신 햇살을 인 자작나무처럼 별들은 사원 목어의 빈 배를 두르리며 죽은 수맥으로 흘러갔다 봄볕에 투사된 연녹색 이파리 위에서 봄볕에 투사된 연녹색 이파리 위에서 봅볕보다 더 투명해져가던 카멜레온의 진정한 색은 무엇이엇을까- 무성한 수풀이 가르마처럼 갈라지며 종다리 우짖는 창천의 하늘 아래로 한 마리 정결한 산뱀이 사라져가고 가는 가지에서 막 자라는 순결한 잎은 마지막 내려앉은 불은 삐라처럼 빛났다 엄청난 수압의 폭포를 뚫고 둥지를 키우는 물까마귀의 날개처럼 몰래 키워 온 내 어린 철쭉의 붉은 꽃잎도 폭설에 부러지는 예각의 솔가지로 눈멀어갔다 강의 상류로 흘러가는 일점 바람은 뛰어오르는 잉어의 아가미를 꿰어내고 봄내, 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나무는 뿌리 끝까지 잡아 당긴다-조은
비는 내리고
나무들이 낮아지는 하늘을 흔들고 있다
높은 새집이 위태롭다
빗속에서 이 하루의 남은 빛을
나무는 뿌리 끝까지 잡아당긴다
어둡다
오늘도 병같은 우리를 덮치는 밤은 어디에서 오는지
온갖 소리들이 젖어 몸에 감기고
기둥 같은 내 슬픔도 완강하게 불어난다
어둠은 늘 내 몸에서 시작된다
내가 있는 곳은 유독 어둡고
바람은 밝은 물방울들을 훑어서 간다
어제의 그 슬픈 별도 숨은 이곳을 등지고
얼마나 멀리 나는 갈 수 있을지
빗물은 낮은 땅을 지우고
물속까지 어둠이 자꾸 모여드는데
무덤을 맴도는 이유
알 수가 없다
내가 자꾸 무덤 곁에 오게 되는 이유
무덤 가까이에 몸을 둬야
겹겹의 모래 구릉 같은 하늘을 이고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
무덤처럼 형체를 갖는 이유
그러나, 알고 있다. 오늘도 나는
내 봉분 하나 넘어가지 못한다
새들은 곳곳에서 찢긴 하늘처럼 펄럭이고
그들만이 유일한 출구인 듯 눈이 부시다
알 수가 없다
무덤만 있는 이곳에 멈춰 있는 이유
막막함을 구부려 몸속으로 되밀어 넣으며
싱싱했던 것들이 썩는 열기를
느끼고 있는 이유
사람들이 몇 줄 글로 남겨놓은
비문을 찾아 읽거나
몸을 잿더미처럼 뒤지며
한 생명이 무덤 곁에 있다
얼굴을 붉히다-송재학
임하댐 수목 지구에서 붉은 꽃대가 여럿 올라온 상사화를 캤다 상사화가 구근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놀랍도록 크고 흰 구근을 너덜너덜 상처 입히고야 그놈을 집에 가져올 수 있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얼굴은 붉어지고 젖은 신문지 속 구근의 근심에 마음을 보태었다 깊은 토분을 골라 상사화를 심었어도 아침에 시들한 꽃대를 들여다보면 저녁에는 굳이 외면하고 말았다 여기저기 물어 비료며 살충제며 잔뜩 뿌리고 잔손을 대었지만 상사화의 꽃을 보고자 함은 물론 아니었다 살릴수만 있다면 꽃은 아주 늦어도 대수롭잖다고 다짐했다 상사화 꽃대가 차례로 시들어갈 때 내 귀가는 늦어졌다 한밤중에 일어나 바깥의 상사화를 들여다보고 한숨 쉬는 내 불안을 알아보는 식구는 없었다 나는 꽃 필 상사화에 기대어 이제는 물 아래 잠긴 땅으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언젠가 이곳도 물에 잠기리라 결국 내가 시든 줄기를 토분에서 뽑아낼을 때 상사화는 그러나 완전한 구근과 수많은 잔뿌리를 토해내었다 그 아래 두근거리는 둥근 세계가 숨어 있었으니, 시든 꽃대 대신 뾰족한 푸른 잎이 구근과 무거움을 딛고 겨울을 준비하였으니! 내 근심은 겨우 꽃의 지척에만 머물렀던 것이다 나는 얼굴을 붉히고 상사화가 스스로의 꽃대를 말려 죽인 이유를 사람의 말로 중얼거려보았다
별을 찾아 몸을 별로 바꾸는 이야기가 있다
결국 고무나무는 죽었다, 그 나무를 살리지 못한 죄책감이 나무를 버리지 못해서 베란다 한구석 소철 화분 옆에 옮겼다 고무나무가 시들기 시작한 이후 몇몇 꽃집에 전화를 넣었지만 한결같이 숨을 쉬지 못해 그럴 거요, 한다 나는 결코 고무나무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사과나무 같은 부드러운 살결을 지니고 있었지만 더욱이 고무라는 어감! 그 어린 열대 식물은 아파트의 공기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잎이 누렇게 뜨면서 나무는 살결마저 검게 변해갔다 그 나무를 통해 내가 꿈꿀 수 있는 인조차이나는 없었다 먼저 아이들이 못 견뎌 했다 새벽이면 잠깐 생기를 찾는 듯했으나 퇴근 무렵이면 어김없이 잎들이 졌다 그 나무가 완전히 죽기까지 몇 달이 걸렸다 어느 날 나무를 흔드니 남은 잎들이 남김없이 떨어졌다 버쩍 갈라진 고무나무 근처 봄이 시작되고 식구들은 소철의 부쩍 커가는 잎을 즐거워했다 어머니가 죽은 나무 아래 망개를 심었다
몇 달이 지나 여러 화분 틈에서 그 나무는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인다 망개 덩굴이 치렁치렁 감고 올라간 고무나무는 푸른 잎과 푸른빛을 내뿜는다 흰 살결에 덩굴 흔적이 제대로 패고 오래 전부터 망개 덩굴을 위해 잎을 모두 털어버리고 몸을 바꾼 것처럼 여겨지는 .....어쩌면 그 나무는 예쁜 망개 열매를 떨어뜨릴 수 있으리라
슬픔이 나를 깨운다-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 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돌아 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 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죽은자를 위한 기도
이 밤
대지 밑 죽은 자들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내 잠을 깨운다
지하를 흐르는 물줄기가
누워 있는 내 귓속으로 흘러들러와
몸 가득히 어두운 말을 풀어놓는 시각
죽은 자의 입에 물린 은전의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 몸 곳곳에 번져 나간다
죽은 자들로 가득 찬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가보면 멀리 밤하늘에 떠 있는
차가운 달의 심장
대지 저 밑에서
죽은 자들의 손톱과 머리칼이 소리없이 자라듯
나는 이 밤
그들의 말이 두근대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어둠 저편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눈빛을
막막히 마주 보고 있다
춘열 양반전-최두석
미쳤어도 그른 말 해본 적 없는 이라고 동네 사람들은 말했다. 자식 학비에 쪼들린 춘열댁이 당ㅇ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논을 떼어 판 뒤 봄마다 거기에 못자리를 하겠다는 시비가 계속되었다. 춘열댁이 뒤주에서 몰래 쌀을 퍼내서라도 수리세는 어차피 내어야만 하는 것인데 저수지 물은 기어이 대지 않는 주의였다. 비료도 농약도 쓰지 않았다. 이장이나 면직원을 절대로 믿지 않았다. 가을이면 볏단을 집으로 옮기는 일 없이 들에서 타작하고, 지푸라기는 어차피 퇴비 만들 것, 논 가운데 수북이 쌓아두었다. 대보름 밤 그 짚더미에 불을 놓으면 아이들 축제의 절정 그대로였다. 당신은 그걸 태우지 못하게 아들까지 동원해 지켰지만 어떻게든 우리는 불을 지르고 말았다. 아, 생각하면 죄스러운 일이지만, 당신의 광증이, 마을 청장년 집단으로 요절난 인공 직후부터라는 사실을 안 것은 아주 먼 훗날이었다.
주기도문, 빌어먹을/박남철
지금, 하늘에 계신다 해도
도와주시지 않는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아버지의 나라를 우리 섣불리 믿을 수 없사오며
아버지의 하늘에서 이룬 뜻은 아버지 하늘의 것이고
땅에 못 이룬 뜻은 우리들 땅의 것임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보시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고통을
더욱 많이 내려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미움 주는 자들을 더더욱 미워하듯이
우리의 더더욱 미워하는 죄를. 더, 더더욱 미워하여 주시고
제발 이 모든 우리의 얼어 죽을 사랑을 함부로 평론하지 마시고
다만 우리를 언제까지고 그냥 이대로 내버려둬, 두시겠습니까?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이제 아버지의 것이
아니옵니다(를 일흔 번쯤 반복해서 읊어보시오)
밤낮없이 주무시고만 계시는 아버지시여
아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장석주
어렸을 때 내 꿈은 단순했다. 다만
내 몸에 꼭맞는 바지를 입고 싶었다
이 꿈은 늘 배반당했다.
난 아버지가 입던 큰 바지를 줄여 입거나
모처럼 시장에서 새로 사 온 바지를 입을 때조차
내 몸에 맞는 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한참 클 때는 몸집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니
작은 옷은 곧 못 입게 되지, 하며
어머니는 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사 오셨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나를 짓누른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내 몸을 입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충분히 자라지 못한 빈약한 몸은
큰 바지를 버거워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통 사이로
내 영혼과 인생은 빠져나가버리고
난 염소처럼 어기적거렸다
매음녀처럼 껌을 소리 나게 씹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나는 바지에 조롱당하고 바지에 끌려다녔다
이건 시대착오 적이예요, 라고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향해 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모멸스런 인생
바지는 내 꿈을 부서뜨리고 악마처럼 웃는다
바지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참견한다
원치 않는 삶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진작 그 바지를 찢거나 벗어버렸어야 했다
아니면 진작 바지에 길들여졌어야 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급진적인 바지
내 몸과 맞지 않는 바지통 속에서
내 다리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언제까지나 불사조처럼 군림하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검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끝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동두천-김명인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고만고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혀 와 끼얹는 바람
철철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할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닮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침묵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 숲을
바람이 흽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땅 - 신대철
"X제국주의자들을 물러가게 하라! X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인 X도당들의 독재들 때려 부수어라!"
"자유없이는 행복도 없습니다. 자유는 제2의 생명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야음을 통해 비무장지대로 몸을 숨겼다가 날이 아주 밝아졌을 때 국군 초소로 오십시오. 총구를 땅에 향하고 흰 헝겊이 있으면 흔드십시오."
풍어진 몸. 김이 모락모락 난다.
낡은 지뢰탐지기를 선두로
도로정찰조가 들어오온다.
조금 비 개인 날.
모래들은 산 밑에 하앟게 씻겨 있다. 강물굽이를 돌아나온 놀란 물새 때 안개를 강가로 몰며 하나씩 안개속으로 사라진다.
그날 밤 늦게 남방한계선 철책문을 열고 들어 섰을 때뻑뻑하여 말 안듣던 팔다리,열쇠 채우는 소리 땜에 앞으로 앞으로만 내디뎌야 했다. 총부리를 정신없이 돌리다 보면 바람 소리, 작은 밤짐승. 안개자욱이 밀리는 소리, 별똥이 시끄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지뢰표지판이 길을 안내하며 좁혀들고 있었다. 결승전 스포츠중계같이 열띤 어조로 밤새 방카와 골 속까지 뒤흔들던 대남 방송 스피커 소리, 되풀이. 막 펼쳐진 아침밥 짓는 연기에 젖어도 부드럽게 들리지 않던 그 억양.
또 무지개가 뜬다. 동그런 무지개
저 둘레 속으로 뛰어들고 싶구나.
강기슭에서 은은히 피어 올라
군자분계선을 덮고
산과 산 사이를 까마득히 잠겨놓은 안개가
제 몸을 비틀어 짜내 띄어 놓은 무지개
유난히 빨강 파랑이 두드러진 저 무지개 속엔
어른어른 그림자가 비친다.
무지개는 누구의 혼인가? 저 자리서 죽은 자와 죽은 자를 기다린 자가 이제 만나 손잡고 윤무를 즐기는 가? 왜 저 자리서만 떠야 하는가? 자세히 보면 볼수록 내가 볼 땐 내 그림자만 네가 볼 땐 네 그림자만, 이상하다.
우리들이 한데 어울려 박자를 맞추려 하는 동안 갑자기 춤은 멎고 다시 한 겹 벗겨지는 안개, ..........강물은 푸르다. 저 푸름이 온 산에 가득 안개를 씌우는 걸까? 강물은 우리들의 군화를 적시며 흐르기만 했다. 끊임없이. 바랆이 잔물결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쓸어낼수럭 더욱 푸른 물가엔 조용히 물고기 떼들이 나와 놀고 있었다. 마주, 중태기, 꽃붕어, 징거미, 산 그늘진 데를 닮은 물속에 뫃아줘야 하는 산고기, 불길하다. 하필 이 강에 산고기가 그리 많을까? 좀 깊은 물속에선 무릎이 떨어지고 가랑이가 찢어진 군복하의들이 물이끼에 감춰져 있고 쭈구러진 수통, 뼈들, 녹슨 쇠붙이며 탄피, 종아돈, 각종 불발탄들. 화약낸지 풀낸지 가려내기 어려운 고리타분한 냄새들이 발길에 체어 흩어지곤 햇다. 불내, 어디선가 불내가 난다. 후욱 끼쳐오는 불내, 불똥이 튀기고 토끼 노루ㄸ똥이 젖은 채 타는 냄새. 탁 타닥 나무 껍질 타는 소리. 실탄 터지는 소리. 거무튀튀했다. 연기 속에 날름날름거리던 불길. 순식간에 산 하나를 잡아먹고 꿈틀거리며 북방한계선 목책 있는 대로 불쑥 방향을 틀던 불길. 시뻘겋게 솟구쳐 오른 불꽃. 하나 둘 셋 넷 불꽃에 흠뻑 취해 있을 때 쾅쾅. 쾅쾅. 산산조각 나던 우리들.
멀리서 들리는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
산, 산, 산, 군대
몇 조각 구름들이 뭉쳐서 산 밖으로 몰린다.
능선들은 시퍼렇게 위장되어 까져 있고
토굴 속에 들어가선 나오질 않는 군용차들.
모래 운반차? 군용차? 그리고 무슨 차들일까?
아침엔 구보병력이 보이고 연달은 기합. 초포훈련. 소리 치면 한 번 이상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우리들 옆 GP엔 나지막한 산들
싱싱하게 깃발이 펄럭거린다.
깃발이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 말고 깃발도 살아 있었어..... 친구여 보고 싶다. 2Km내의 너를 만나는 데 6개월론 모자라구나. 네 앞산 우물길에 사람이 나타나 있다. 우중충하다. 사람. 무장된 사람. 간밤 총소리는 오발이라구? 자발적이었다구? 늘 들어도 네 목소리가 그립구나. 산도 배경으로 만들고 싶다. 고집도 가려진 네 얼굴. 코마저 작게 보인다. 포대경에 잡히는 허탈하고 어색하게 웃는 네 얼굴. 나무들이 점차 가을로 돌아서는 것도 잊고
딸딸이를 들고 포대경을 들고 마주 보며 바보같이 웃는 우리들. 생이란 무엇일까? 적? 죽음이란? 적? 땅이란? 이념이란?
잠을 좀 자야 한다.
총을 휴대한 사람들에겐 꿈이 차례가 오지 않는 잠.
며칠째 개꿈도 들지 않는다. 신경만 뿌릴 잡는다. 물차는 아직 오지 않고있다. 담배 한 대, 자기 매질, 무조건 용서, 무조건 체념, 꿈이 갖고 싶다.
초가집이 두어 채 양지 쪽에 쓰러져 있다.
그 옆에 황색 팻말이 주위를 황색으로 물들인다.
팻말이 군사분계선을 말해주고 있을 뿐.
낯익은 풀꽃들이 팻말에 기대어 피어 있었다. 산길은 강 가까이 이를수록 희미했다. 마을 골목터엔 박쥐가 날고 웬일로 울지 않던 매미, 매미는 사람 있는 마을에서 사람을 보며 우는가? 이 마을 사람들은 신발과 밭을 버려두고 나룻배를 부숴놓고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가? 갈대밭이 된 과수원, 봄이면 갈대밭에 흐드러지게 피는 복사꽃 . 아아. 우리들과 여기서 임시 헤어진 자여, 내내 무사하라.
무사하라, 발목이 떨어져 지뢰밭에 뒹굴던 얼굴들
몇 푼의 휴가비를 만지작거리며 혹은 흔들던 웃음들
맞출 수 없어 흩엊어ㄴ 사진 조각들. 편지 글귀들
죽어서 지뢰표지판 하날 남긴 사람들
죽어서 오래오래 잠들 수 있고 오래오래 무사한 사람들
제대 특명을 기다리며 군대 때가 묻은 생각들을 산병병ㅗ에 강 쪽에 내버리며 햇빛 고참병들도 보금차 편에 사라진다.
산병호에 어둠이 스며든다.
깊은 한밤에만 사람이 다니는 길.
산길 도처에 조명지뢰를 설치하며 클레이모어 위치를 확인하는 사이 우리들은 어느새 군인이 되어 있다.
완전한
하루가 가고
갈라진 땅에서 또 하루
스스로 갈라진 군대로 만나는 우리들. 한국인들.
노루귀꽃-김형영
어떻게 여기 와 피어 있느냐
산을 지나 들을 지나
이 후미진 골짜기에
바람도 흔들기엔 너무 작아
햇볕도 내리쬐기엔 너무 연약해
그냥 지나가는
이 후미진 골짜기에
지친 걸음걸음 멈추어 서서
더는 떠들지 말라고
내 눈에 놀란 듯 피어난 꽃아
65.첫사랑의 납골당-문정희
건너편 아파트에 내 첫사랑 살고 있다
그의 아내가 유난히 예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베란다에 세워 둔 유모차도 보았지만
내가 딴 데 시집가서 아이가 열 명이 되더라도
나를 기다리겠다고 한 약속 잊지 않고 있다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이면
목소리 가다듬고 가끔 건너편 아파트를 쳐다본다
나 아직 아이가 둘뿐이라고 소리쳐 줄까
그러다가 멈칫 앞마당을 내려다본다
웬 여자가 아이 둘을 양손에 잡고
내 남편의 방 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창문을 드르륵 닫는다
밤바람이 사뭇 상큼하다
사랑이 식은 재가 칸칸이 담긴 탓일까
건너편 아파트 불빛이 남골당처럼 교교하다
54 칸나
칸나를 사러 가네
연애를 해도 외로워
연애도 싫어
사랑은 없고 스캔들만 무성한 시대
정사도 정사도 가뭇없기는 마찬가지여서
나 오늘 칸나를 사러 가네
하늘의 심장을 만지러 가네
사랑은 꼭 신고한 사람과 해야 하나
사랑과 서류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하려다
태양의 뿔 하나를 사러 가네
칸나가 핏빛인 것은 우연인가
땅 위의 모든 것이 참 의미심장하네
붓다는 오직 비었다고 했고
야소는 사랑의 죄를 대신 졌지
뜨거운 이 피로 나는 무엇을 좀 해야 하나
칸나를 사러 가네
연애를 해도 외로워
연애도 싫어
-시집 -응
배롱나무의 안쪽/안현미
마음을 고쳐먹을 요량으로 찾아갔던가, 개심사, 고쳐먹을 마음을 내 눈앞에 가져와 보라고 배롱나무는 일갈했던가. 개심사, 주저앉아버린 마음을 끝끝내 주섬주섬 챙겨서 돌아와야 했던가. 하여 벌벌벌 떨면서도 돌아와 약탕기를 씻었던가, 위독은 위독일 뿐 죽음은 아니기에 배롱나무 가지를 달여 삶 쪽으로 기운을 뻗쳤던가, 개심사, 하여 삶은 차도를 보였던가. 바야흐로 만화방창을 지나 천우사화로 열리고 싶은 마음이여, 개심사, 얼어붙은 강을, 마을을 기어이 부여잡고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만삭의
그루터기/박승민
벼를 베어낸 논바닥이 누군가의 말년 같다
어느 나라의 차상위계층 안방 속 같다
겨울 내내 그루터기가 물고 있는 것은 살얼음 속의 푸르던 날
이 세상 가장 아픈 급소는 자식새끼가 제 약점을 고스란히 빼다 박을 때
그래서 봄이 오면 농부는 자기 생을 이삭한 흉터를 무자비라게 갈아엎고 논바닥에 푸른색 도배를 하는 것이다
등목을 하려고 수건으로 탁, 탁 등을 치는 순간 감쪽같이 그의 등판에 업혀 있는 그루터기들
고약한 사이/조성국
욕부터 튀어 나온다
알잘 알장 옛일 돌이켜보면
일계급 특진이 걸린
현상수배전단
점퍼 안주머니 깊숙이 구겨 넣고
밤마다 잠복하던
말단형사 꼴통 새끼!
이따금 술 취해 와서
빨갱이자식 내놓으라고
가살스럽게 눈알 부라릴 적마다
봉선화 우북한 뒤란
장독대에 한껏 웅크렸다는
엄니를 생각하면
우수수 만정이 다 떨어지는
개 같은 놈의 새끼!
상스럽다 하신다 어머니는
아가, 깨복쟁이 불알친구들끼리 그러면 못 쓴다며
되네 나무라신다
이런 낭패/도광의
오랜만에 고향에 갔다
간밤에 마신 술 탓에
새순 오는 싸리울타리에
그만 누런 가래 뱉어놓고 말았다
늦은 귀향 길 안쓰런 마음 더해가는
고향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실수에
무안해 하는데
때마침 철 늦은 눈이
내 허물을 조용히 덮어주고 있었다
휘영청이라는 말/이상국
휘영청이라는 말 그립다
어머니가 글을 몰라 어디다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누구 제삿날이나 되어
깨끗하게 소제한 하늘에 걸어놓던
그 휘영청
내가 촌구석이 싫다고 부모 몰래 집 떠날 때
지붕위에 걸터앉아 짐승처럼 내려다 보던
그 달
말 한마디 못해보고 떠나보낸 계집아이 입속처럼
아직도 붉디붉은,
오늘도 먼 길 걸어
이제는 제사도 없는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의 타관 객지를 지나 떠오르는
저 휘영청
휘영청이라는 말
여름 끝물/문성혜
여문 씨앗들을 품은 호박 옆구리가 굵어지고
매미들 날개가 너덜거리고
쌍쌍이 묶인 잠자리들이 저릿저릿 날아다닌다
얽은 자두를 먹던 어미는 씨앗에 이가 닿았는지 진저리치고
알을 품은 사마귀들이 뒤뚱거리며 벽에 오른다
목백일홍이 붉게 타오르는 수돗가에서
끝물인 아비가 늙은 오이 한 개를 따와서 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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