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여자와 콩나물
절반의 습성
구름의 사춘기
달맞이꽃을 먹더니
갈대로 사는 법
저체온증
잃어버린 나에게
퇴원
실의 하루
어두운 사랑
듥 울음
이별과 독서
어둠이 꿈틀한다
봄날
무밭
알
꽃처럼 보이지만
철쭉제
고백
노랑나비
닿고 싶은 곳
빈집
소나기
외출
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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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금방 날아갈 휘발유 같은 말도 믿는다.
그녀는 낯을 가리지 않고 믿는다.
그녀는 못 믿을 남자도 믿는다.
꽃다발로 묶인 헛소리를 믿는다.
밑동은 딴 데 두고
대궁으로 걸어오는 반토막짜리 사랑도 믿는다.
고장난 뻐꾸기 시계가 네시에 정오를 알렸다.
그녀는 뻐꾸기를 믿는다.
뻐꾸기 울음과 정오 사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의 믿음은 지푸라기처럼 따스하다.
먹먹하여 가는 귀 먹은
그녀의 믿음 끝에 어떤 것도 들여놓지 못한다.
그녀는 못 뽑힌 구멍투성이다.
믿을 때마다 돋아나던 못,
못들을 껴안아야 돋아나던 믿음.
그녀는 매일 밤 피를 닦으며 잠이 든다.
여자와 콩나물
낡은 시루에 불린 콩을 넣고
여자를 기른다
그릇 안에
갇힌 여자는
싹이 난다
여자는 말없이 육탈한다
콩나물처럼 시루 위로 자라난다
울지마 울지마 하면서
바가지로 눈물을 퍼주는
물의 테러
쓸데없이 키가 크는
이 비린내 나는 성장을
가느다란 우울을
콩과 콩 사이를
그 사소한 구멍들을
오해와 이해 사이를
자객처럼 나타나
살아갈 발원수까지
깨끗이 내려주는 테러리스트
물
물에 빠져 죽을 뻔해야
콩나물이 되는
여자
절반의 습성
누군가 나를 잡고 흔들면
나는 호두알처럼 후드득 떨어지겠다
절반은 남겨두고 절반만 떨어지겠다
오뉴월 땡볕으로 나를 조르면
나는 익는다
절반이 시뻘겋게 익는다
푸르딩딩하고 떫은 절반의 맛은 남겨두고
절반을 아무리 털어내도
그냥 거기 붙어있겠다
나의 절반은 재가 되지 않는 불구
저녁나절 남겨둔 절반이 와르르 쏟아진다
뚝 부러진 절반이
지팡이 짚고 절뚝거리며 걸어 나온다
반쯤 이별한 사랑이, 반만 시 같은 시들이,
반만 성한 장기들이, 반만 남은 적들이
반쯤은 웃고 반쯤 울던 입술이, 반은 죽은 목숨이.......
절반이, 절반의 반이 또 그 반의 절반이
어쩌나, 이 절반의 악몽을
구름의 사춘기
구름도 사춘기가 되면 잠들지 못하지
구름은 잠들지 못하는 여자들의 창문을 찾아가지
저기 저 신부가 입은 순백의 웨딩드레스
구름이지
여자들은 이유 없이 구름을 이해하지
나쁜 남자들은 이해하는 그 구름 속에 서 있지
새들도 알을 낳지 않는다는 곳
위험한 낭떠러지
구름 속
여자들은
나쁜 남자의 혀끝에서 떨어졌던 구름의 말들을 이해하지
구름으로부터 온 구름신문을 읽고
구름 처럼 구름을 이해하지
앙고라 털이라고 이해하지
저 노을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겁이 나지
불붙는 구름잎사귀 구름의 얼굴 구름의 뼈 구름의 머리카락
나쁜 남자가 몰래몰래 불타고 있었지
구름의 사춘기는 속속들이 빗물이었지
구름이 퉁퉁 불은 나쁜 남자의 질퍽질퍽한 신발을 신고
나쁜 비로 태어나던 날
여자들은 왜 그렇게 소낙비로 울었는지
몰랐는데 장맛비로 살고 있었지
뒤늦게 큰 우산을 펴대지
구름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울며 말해도
눈물을 이해하지 않지
달맞이꽃을 먹더니
감마리놀렌산이 혈행에 좋다고
그렇다고 그 꽃을 으깨다니
그 꽃 종자를 때리고 찢어서
캡술 안에 쳐넣다니
그 피범벅 꽃을 먹고
혈관의 피가 잘 돌아가다니
욕심껏 부풀린 콜레스테롤이 그 꽃에 놀아다나니
그렇다고 나까지
하루 두 번 두 알씩 그걸 삼키다니
머지 않아 꽃향기로 가득 찰 혈관
그렇다고
하필 그 환한 꽃을 죽이다니
밤마다 달을 바라보던 그 꽃을
꽃 심장에 가득 찼을 달빛을
그 달빛으로 기름을 짜다니
노오란 꽃에 앉았던 나비의 기억까지
모두 모두 으깨다니
부서진 달빛, 꽃잎, 나비
두 알씩 삼키고 내 피가 평안해지다니
생수 한 컵으로 넘긴 감마리놀렌산 두 알
혈관에 달맞이꽃 몇 송이 둥둥 떠다니다
갈대로 사는 법
나무가 격해지는 건 떨어뜨려야 할 것들이 떨어지지 않는 것, 내장이 비워지지 않는 것, 열매들이 감정을 가지고 줄기차게 매달려 있는 것
꽃이 격해지는 건 씨가 될 때까지 꽃이 꽃에서만 꽃으로 살려고 하는 것
무거운 나무와 무거운 꽃 사이에 스캔들 같은 은밀한 바람 한 점 없는 건 매일 더 격해지는 것
이별은 가벼움으로 격해지는 것
가릴 것 없는 갈대로 사는 것
그해
습지 모퉁이에서 피를 다 쏟았다
꿇을까 봐 아예 무릎을 없앴다
가느다란 비밀만 남겼다
뜍뚝 잘라낸 무거움이 그리울 적마다 바람을 불렀다.
영혼은 울창해도 매일 어푸러졌다
가끔
이별할 듯한 연인들이 찾아와 허옇게 피를 말리고 갔다
저체온증
그동안
나보다 높은
새의 체온으로 살아왔다
나보다 높은 허공에
집을 짓고
나보다 높은 체온의
남자를 사랑했었다
무더기무더기 두고 간 격력한 체온
마른 나뭇가지에 온종일 걸려있어도
식지 않았었다
찬 세상이 늑막까지 차오르고
그가 새처럼 날아갈 때
위험했다
겨울을 예감하던 장기
뚝뚝 떨어지던 체온
서리 속 마지막 남은 사과 한 알을 지나
그 누구에게로 날아간 체온
아무도 모른다
이 저온의 수심을
잃어버린 나에게
폭풍경보가 내리던 날
사람들은 다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강으로 갔다
나보다 저만큼 앞서 걸어가는 나.
희끗희끗 강쪽으로 가는 나.
나보다 먼저 설레더니
나보다 먼저 사랑해버린
나보다 먼저 목숨 걸다
나보다 먼저 산산조각 난
저 강물 속으로 빠지러 가는
몇 번 솟구치다
끝내 지워져가는 나
어쩌자고 어쩌자고 꺼내 놓으면
헉헉 눈물만 토해놓는 나에게
바람도 자고 눈물도 자고
식탁 모퉁이에 죽은 듯 돌아와 있는 나에게
내가 빠져나간 껍질뿐인 나에게
얼음으로 엉겨붙은 나에게
지익, 성냥을 그어대도 불이 붙지 않는 나에게
퇴원
문병 왔다가 듬뿍 꽃아놓고 간 안개꽃과 장미꽃 다발
그들은
썩은 시간을 느껴본 적이 있을까?
꽃병이 며칠이나 꽃에게 시달렸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썩은 꽃의 음부도
마지막까지 꽃이라고 확신하는
저 믿음
썩는 것이 꽃인 줄 몰랐다
살기를 열망하는 자 옆에서
죽기를 결심하는 꽃
퇴원하는 날
간병인이 쓰레기통에 꽃을 쑤셔 박았다
복도 끝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말기 자궁암 환자였던 주검이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버린 꽃잎을 지났다
시달리던 꽃병들이 뒤를 따랐다
실의 하루
엊저녁 그가 실 한가닥 잡아당겼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입 앙다물고 실이 엉켜 있었다. 앙심 먹은 그 곳이 딱딱했다.외출하면서 그가 딱딱한 그 곳을 억지로 벌렸다.내가 뚝뚝 끊어졌다. 실밥이 이방 저방에서 너풀거렸다.저녁나절 귀가한 그가 끊어진 실을 길게 이었다.몸 전체가 매듭이다. 매듭이 파를 다듬고 매듭이 마늘을 깔 때 그가 매운 매듭까지 잡아당겼다. 실은 매듭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
끌려가지 않는 어둠의 덩어리.
매듭은 처음엔 실이었는데 끝이 나풀나풀 풀려 활짝 핀 목단을 수놓던 색실이었는데...
수틀 위에서 실의 하루가 힘없이 엉키어 간다.
어두운 사랑
장미꽃 담장 아래
그가 서 있다
달도 없는 그믐밤
더듬더듬
꽃 몇 송이 뚝뚝 꺾어
마음 섞어
나에게 줄 때
수혈하고 난 듯
오오 새로 살고 싶어질 때
그때 자꾸 목말라 하던 꽃
집까지 걸어오면서
잔인하도록 내가 황홀해야할 때
그때 핏방울 맺히던 꽃
결국
참을 수 없어
내 앞에서 배배 말라죽던 꽃
결국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던 꽃
그믐밤
어둠 속을 싸락눈처럼 날아다니다가
오오 검은 점으로 부서졌다가
새가 된 꽃
듥 울음
그대에게로 가는 길
커브에 서 있는 나무
둥근 소나무
이게 창문인지 몰라
열리지 못하는 둥근 창문
그와 헤어지고
얼마나 어두웠는지
그대에게 가던 길 그 길을
복도 끝에서 구부리고
나무를 돌아 커브를 돌아 자꾸 돌다
한밤중 들판으로 차 타고 나갔었다
갈데없는 들개라도 한 마리 만나고 싶었다
혀를 삼킨 뱀들과
이빨을 하얗게 다문 짐승들과
누꺼플 내린 꽃들과
불도 불을 끄고 모두 깊은 잠 빠진 틈새에 끼여
푸른 들개의 눈을 달고
들개처럼 울고 싶었다
한밤중 커브를 도는
괴기한 들개 울음소리
이별과 독서
이별 체험 그 끝이 아파
장자를 읽다가
그를 용서할 뻔 했다
들이박힌 허리가 가랑잎처럼 가볍기를 바라며
용서를 잠깐 빌려준 상자
피는 닦아주지 못했다
끈적하게 생과일 즙으로 고여 있는 피
그 앞에
주르르 흐르지 못한
테두리가 무쇠였던 피
아랫배를 움켜쥘 때마다
부풀어 오르던
그런 꽈리들이
마를까 터질까 꿈꾸는 사이로
장자가 팔을 휘젓고 다닌다
이별의 칼끝으로 짚으며 장자를 읽었다
어둠이 꿈틀한다
평창으로 갔다
참을 수 없어서
무밭에 서 있다가 파밭에 서 있다가
달이 뜨는 줄도 몰랐다
깊은 산 밑으로
어둠이 개 한 마리 끌고 왔다
짖는 소리까지 질질 끌고 왔다
흐린 달빛 흠뻑 뒤집어 쓴 개가
따라오며 계속 짖었다
나를 끌어다 놓고 짖었다
네가 수상하다
내 안 컴컴한 덤불 속
물어뜯고 할켜본 적이 있는 어둠이 꿈틀한다
그걸 보고 짖었다
외지인의 검푸른 피멍이 낯설어 짖었다
평창까지 와서도 쫒긴다
개와 달빛에게
봄날
오늘 나무가 수상했다
하루 종일 가슴이 불룩했다
우연히 깃들었다가 날아가지 못한 바람을 붙잡고
우드득 우드득 이빨을 갈다가 가슴을 열었다
가슴에서 튀어나온 말 한마디 같은 서툰 꽃 한 송이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길 어귀
늘어진 꽃가지를 확 제치니
길바닥에 봄이 벌렁 나자빠져 있었다
이제껏 어디가 무슨 짓을 하다 왔는지 벌게진 꽃가지 불두덩이 사이로
아슬아슬한 곳만 가린 고백들이
여기저기 불룩했다
며칠은 더 지나야 이해될 꽃의 말
만개될 꽃의 문장
아직은 더듬더듬 꽃 몇 송이 내놓고
가슴만 불룩하다
오늘 사람들도 수상했다
하루가 불룩하니 수상쩍었다
무밭
깊은 산에 와서도 산보다
무밭에 서있는 게 좋아
푸른 술 다 마시고도 흰 이빨 드러내지 않는
깊은 밤의 고요
그 목소리 없는 무청이 좋아
깨끗한 새벽
저 잎으로 문지르면
신음소리 내며 흘러내릴 것 같은 속살
밤마다 잎에다 달빛이 일 저질러 놓고 달아나도
그때마다 흙 속으로 하얗게 내려가는
무의 그 흰 몸이 좋아
땅속에 백지 한 장 갘추고 있는 그 심성도 좋아
달빛이 놓고 간 편지 한 장 들고
무작정 애를 배는 대책 없는 미혼모 같은
배불러오는 무청의 둥근 배가 좋아
무밭을 걷는 게 좋아
내 정강이를 툭툭 건드릴 때 좋아
뽑으면 쑤욱 뽑힐 것 같은
철없는 그 사랑이 좋아
알
평창을 돌다가 감자밭 귀퉁이에 앉아
감자 심는 것을 구경했다
씨눈 한 점에게 묻고 싶었다
질끈 눈 감은 시력 하나 가지고
도려낸 회흠부 반쪽으로
어떻게 감자의 일을 부풀렸는지
잎이 안 보여 수없이 찡그렸을 오그렸을
오목오목 들어간 그늘 그 캄캄함
거기 고여 있던 흙이 그랬을까?
그 쪼개진 불구의 몸에다
안 보여도
몸 섞는 끝마다 아이들 벤 줄기
흙 속에 태아들이 둥글게 커간다
빈 항아리 같은 고요가
감자밭을 지키고 있다
알을 들여다보고 있다
꽃처럼 보이지만
사랑이 꽃처럼 보이지만
꽃과 뿌리 사이
가는 틈새
거기 몸 처박고
한철 피고 나면
끓는 심장 만지고 돌아오면
헐덕거리는 신발처럼 자꾸 벗겨지는 것이
피 마른 꽃잎처럼
자꾸 흘러내리는 것이
꽃철이 아닌데도 뒤흔드는 것이
꽃처럼 보이지만
모래바람이야
철쭉제
분홍 다음에 백철쭉 꽃무더기
박하사탕처럼 화환 그곳을 지났다
백철쭉 흰빛이
내 안의 먹빛 잎을 어떻게 지나갔는지
와인 잔을 들고 휘청였는지
왈칵 눈물 쏟으며 섰었는지
꽃마다 젖어있었다
나를 지나가는 하얀 힘
박하사탕 삼킨 먹빛 내장
백철쭉 몇 송이 들어가 활짝 폈다
먹 빛 다음에 흰 꽃 무더기
고백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노랑나비
사랑은
내게 마지막 남은 들판이다.
아직도 노랑나비 비릿한 속삭임으로 꽉 차 있다.
들판에 서면
물결 같기도 하고
눈물 같기도 한 노랑나비가
들풀의 정강이에서 글썽이고 있던 들판이다.
울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날아가던 노랑나비 들판.
사랑의 문장을 노랗게 새긴 꽃잎을 들판에 놓았었다.
홀라당홀라당 허물을 벗어놓고
문장을 건너뛰던 노랑나비
메두기 다리로 뛰어가던 노랑나비 들판
내가 쓴 시에서
노랑나비는 십 년 이상 날아다녔다.
닿고 싶은 곳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다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빈집
나를 거둬 가는 그대 때문에
나는 빈집이예요.
아주 고요해서
불마저 켜기 싫은
고통의 부위만 남겨놓고
나의 집은 비어 있어요.
당신은 언제나 날카롭게 직립하세요.
내 쪽으로 오는 저 칠흑의 어둠을 안고
내가 쓰러질게요
.질벅한 눈물의 한 부피로
생생하게 쓰러질게요.
다시 살아날까 겁이 나서
혼자 흔들리는 문을 잠그고
살듯이 투명하게 죽을게요.
소나기
선바위역 근처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물이 무작정 손 발 다 씻어 줬다.
세상의 것들이 모두 우산을 폈다.
젖을 수 없는 부위에다 우산을 씌웠다.
묽어진 세상에 더 물을 붓는다.
없었던 것들이 떠올라 비를 맞고 있다.
풀들도 제 뿌리에서 나와 아무데로나 가고 있다.
어떤 것의 발자국도 남아 있지 못하고 흐르고 있다.
그 사람만 아직 가만히 있다.
당분간 젖지 않을 양
나에게 마른 풀잎으로 바스락거린다.
우산을 쒸우지 않아도 젖지 않는 마른 풀이 있다.
외출
시인이 생선을 고른다
값을 물어보기 전에
깊은 바다에 얼마나 드나들었나?
아가미를 열어본다
바다에서 나와 땅에서 떠돌기 얼마나 쓸쓸했나?
지느러미 힘줄을 들쳐본다
정말 바다의 자식인지
등짝에서 파도에게 매맞은
푸른 멍자국을 찾아본다
얼마나 바다를 토애내야 죽을 수 있었나?
핏발 선 눈알을 들여다본다
아직도
뻐끔거리던 입마다 바다가 몰려있는데
와르르 와르르 파도가 몰려와 좌판을 때리고 가는데
싸요, 싸
단 돈 오천 원에 싱싱한 주검이 두 마리
수산시장 비린내만 묻히고 그냥 돌아온다
나를 따라 일어서는 겨울 바다
노량진 역에서 같이 지하철을 탄다
정거장
강 건너 저 편
내 철없는 정거장에
기차 한 대 멈춰서 있었다
긴 가을 건너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도착한 기차
가슴까지 밟고 서 있다가
슬금슬금 떠나고 나니
번갯불로 바퀴를 껴안았던 레일
쓰러져 울다 지쳐 잠들었다
들꽃 한 무더기가
피다 흔들리다 흠뻑 비를 맞는 곳
강 건너 저 편
철없는 내 자리에
싹을 못내는 검은 침묵들을 눕히고
새로 레일을 놓는다
안개 낀 가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들이닥친 기차를 위하여
최문자 시인
1943년 서울 출생
1982년 <현대문학>등단
시집 < 귀 안에 슬픈 말 있다>,< 나는 시선 밖의 일부다>,< 사막일기>
< 울음소리 작아진다>,< 나무 고아원>,<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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