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낙지 먹기
생선구이
저녁상에서 비린내가 난다
절하다
눈 녹으니
껌
긴나무 의자
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에서
계단 오르는 노인
가려움
고양이 죽이기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삼겹살
본인이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화장터
비만 고양이
건강이 최고야
딸
회색양말
고속도로
미아재개발지구
황사
1976년의 어느날
버클리에서
막대기 속의 풍경
손가락들
황사 2
빗소리
옛날 사진속에서 웃고 있는
틈
생명보험
산낙지 먹기/김기택
한번도 죽음을 본 일이 없었기에,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에, 죽음은 접시 위에서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격렬하게 꿈지럭거렸다. 죽으면 꼼짝 않고 있어야 한다는 걸 몰랐기에 제 힘과 독기를 모두 모아 거친 물굽이처럼 요동쳤다. 어찌나 심각하게 꿈틀거리던지 자칫하면 죽음이 취소될 수도 있을 같았다. 죽음엔 눈과 팔다리가 달려 있지 않았기에 방향도 없이 앞으로만 기어가다 저희들끼리 마구 엉켰다.
흰 접시는 마치 제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동그라미 안에서 뻘판들을 물방울처럼 튀기며 거칠게 파도쳤다. 그러나 죽음이 달아나기엔 접시의 반경이 너무 짧았고 모든 길은 오직 우스꽝스러운 꿈틀거림으로만 열려 있었다. 토막난 다리와 빨판 들은 한 마리와 통일된 죽음이기를 포기하고 한 도막 한 도막이 독립된 삶이 되어 접시 밖으로 무작정 나가려 했고, 씹는 이빨 틈에 치석처럼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씹을 때마다 용수처럼 경쾌하게 이빨을 튕겨내는 탄력. 꿈틀거림과 짓이겨짐 사이에 살아 있는 죽음과 죽어 있는 삶이 쌘드위치처럼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는 탄력. 폭신폭신한 탄력. 다 짓이겨지고 나도 꿈틀거림의 울림이 여전히 턱관절에 남아 있는 탄력. 목 없고 눈 없고 손 없는 죽음이 터무니없이 억울할수록 이빨은 더욱 쫄깃쫄깃한 탄력을 받고 있었다.
생선구이
물기가 다 말라 딱딱한테도
지금은 불에 구워지고 있는데도
눈을 동그렇게 뜨고 있다.
생선 굽는 나를
지글지글 구워지는 눈으로 보고 있다.
눈꺼풀 없는 눈.
절대로 눈을 감을 수 없도록
눈꺼풀을 없애버린 눈.
졸리면
저절로 잠간 눈이 멀어
눈꺼풀 없이 잠드는 눈.
잠들면
광활한 바다가
다 푸른 눈꺼풀 되어
동그란 안식 덩어리를
장님처럼 꿈만 보이는 구슬덩어리를
덮어주는 눈.
아무것도 볼 필요가 없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아직도 눈을 뜨고 있다.
이글이글 익는 눈으로
눈을 태우는 불을 보고 있다.
저녁상에서 비린내가 난다
오늘 저녁상에 비린내가 난다.
비린 것은
흰 접시 위에 동그랗게 누워 있다.
산과 들을 헤매며 뛰어다니다가
지금 막 접시 위에 올라와 웅크리고 누운 듯
온몸으로 더운 김을 뿜어 올리고 있다.
가죽에서 내장까지
다 발가벗겨진 것도 모르고
쌔근쌔근 진한 김을 내쉬고 있다.
학의 부리처럼 길고 날랜 젓가락들이
찌르고 헤집으며 비린 김을 다투어 뜯어간다.
김은 곧 사그라지고 접시는 비워진다.
눈이 까만 어린 산짐승 하나가
햝고 긁고 뒹굴다가 하룻밤 자고 난 자리같이
식은 접시 한가운데 움푹 파여 있다.
절하다
수십 마리의 통닭들이 자판 위에 납작 엎드려
절하고 있다 털을 남김없이 벗어버린 나채로
절하고 있다 발 없는 다리로 무릎 꿇고 머리 없는 목을 공손하게 숙여
절하고 있다 목과 발을 자르고 털을 뽑은 주인에게
죽음의 값을 흥정하는 손님에게
이미 죽은 죽음을 끓여서 한번 더 죽이려는 손님에게
절하고 있다 포개지고 뒤집어져도 조금도 자세를 흐트려뜨리지 않고
시장 한복판이 경건해지도록
호객하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조차 청아해지도록
절하고 있다 한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일어날 생각도 없이
절하다가 그대로 굳어져 다시는 펴지지 않도록
절하고 있다 털 뽑히고 목 잘리자마자 수치가 되어버린 몸을 다하여
수치가 온몸에 오톨도톨 돋은 몸을 다하여
눈 녹으니
녹는 눈은 누더기처럼 헤어진다
부스럼 난 살갗처럼 푸석푸석 갈라진다
흰 철문에서 붉은 녹을 드러내며 들드는
낡은 페인트처럼 벗겨진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눈 사이로
달동네 추운 맨살이 드러난다
천막으로 지붕을 기운 집들
연탄재와 쓰레기와 개똥 위에 서 있는 담장들
지붕에 어지럽게 얹어놓은 잡동사니들
양분 부적으로 누렇게 말가는 삶들이
억지로 잠에서 깬 듯 드러난다
개구멍 같은 쪽문에서
가금 연탄재로 들고 나오는
무릎 튀어나온 파자마와 슬리퍼 산은 맨발
햇빛을 받자마자 녹슨 철사처럼
헝클어지는 머리와 축 늘어지는 주름이
돋보기로 확대해놓은 듯
어쩔수 없이 곰꼼하게 드러난다
누군가가 내장의 힘을 다해 개워놓은 것 같은
걸쭉하고 벌건 국물을 길가에 튀기며
차 한 대가 지나간다
녹는 눈은 순순히 으깨어지며 또
녹는다 문드러진다 진물 흘린다 질척거린다
지난밤 백설공부를 덮었다
순백의 그 눈부신 살갗이
한나절도 되지 않아 해골을 다 드러내며 녹는다
껌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적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찢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지고 걸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긴나무 의자
한적한 길가에 긴 나무의자가 하나 있습니다.
종일 움직이지도 않고 한자리에만 서 있습니다.
채찍을 휘둘러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다리인데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감시하는 사람없어도 앉거나 눕지 않습니다.
쇠사슬을 채워놓으니까 뭉툭한 다리가 정말 움직일 것 같습니다.
고지식한 의자도 쇠말뚝에 단단하게 묶어둔 걸 보면 도망갔다 온 전과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의슥한 밤중에도 도둑의 어깨를 마차처럼 타고
언덕 너머 골목길을 돌아 관절 없는 다리가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으로 가본 듯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등에 태울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묵묵히 서 있습니다.
의자 등은 거의 종일 비어 있지만, 가끔
맑고 신선한 밤이 되면 할머니 몇이 나와 앉아 있습니다.
그때 할머니들은 의자가 쇠사슬에 단단히 매여 있나 확인하기도 합니다.
언제든 달아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꼼짝 못하는 척하는 걸 다 안다는 듯 말입니다.
의자 머리와 등을 조랑말처럼 쓰다듬거나 툭툭 두드려 주기도 합니다.
저녁에 그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벽과 천장이 없는 바람과 별빛을 받아 밤하늘 멀리 퍼져나갑니다.
그러면 의자 다리도 흥분한 듯 조금씩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야기가 활기를 디면 의자는 할머니들을 태운 채로 밤하늘 높이 오를 것 같습니다.
의자가 들싹거리거나 말거나 밤하늘이 높거나 말거나
쇠사슬은 튼튼하고 이야기는 밤하늘에 끝이 없고 할머니들은 태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들 없는 날, 하루는 길고 쇠사슬은 할일이 없어
의자는 궁금한 길가 구름을 놔두고 홀로 무뚝뚝한 시간을 견딥니다.
차갑고 성실한 쇠사슬도 녹슨 시간을 견디며 의자 다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에서
덤프트럭 앞에서 짐자전거가 앞만 보며 달린다
갓길 없는 좁은 이차선 도로
아무리 빠르게 페달을 밟아도
느릿느릿 돌아가는 자전거 바퀴
사자 아가리 같은 경적이 쩌렁쩌렁 울며 뒷바퀴를 물어도
헛바퀴만 돌리며
아직도 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을 지나가고 있는 자전거
자전거를 삼킬 듯 트럭은 꽁무니에 붙어서 오고
거대한 코끼리 한 마리 줄에 달고 가듯 바퀴는 한적하고
발과 페달은 자전거 바뀌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계단 오르는 노인
내가 열 계단 오르는 사이
한 계단
가벼운 내 열 계단 뒤에서 늙고 거친 숨과 함께 내딛는
또 한 계단
노인은 무릎 관절에게 심장에게 묻는 모양이다
괜찮으냐고,
가늘고 예민한 관절의 저울 위에 위태롭게 얹혀진
이 뚱뚱한 허공과 무게를
한 계단만 더 올려줄 수 있겠느냐고,
관절이 신음같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로
겨유 허락하는 사이
쓸데없는 무게만 보태면서 거져 올라온 머리통은
계단 주변의 도로며 교회며 하늘을 마지막인 듯 한번 들려보고는
또 한 계단.
세월은 튼튼한 다리를 가진 젊은이들처럼
바로 옆에서 열 계단 스무 계단씩 오르막내리락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큰절 같은 한 호흡.
또 물음.
또 가늘게 삐걱거리는 대답.
또 한번의 하늘 그리고
또 한 계단.
숨 한번에도 무게가 느껴지는 경지.
한 계단에 하나의 생이 느껴지는 경지.
뼈에 살 한번 붙이는 것,
살에 삶 한번 붙이는 것
삶에 무게 한번 붙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무릎 관절의 바늘 하나에 온몸이 찔릴때마다 깨닫는 경지.
산동네로 가는 길고 좁고 구불구불한 계단은
깊은 주름처럼 쭈그려져 있고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내 옆 계단 옆에서
머리카락 한 올, 실핏줄 한 가닥, 주름 한 줄, 땀 한 방울. 때 하나의 무게까지.
남김없이 관절 하나에 실으며 오르는
또 한 께단.
가려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관을 도로 꺼내려고
소복 입은 여자가 달려든다
막 닫히고 있는 불 구덩이 철문 앞에서 바로 울음이 나오지 않자
한껏 입 벌린 허공이 가슴을 치며 펄쩍펄쩍 뛴다
몸뚱어리보다 큰 울음덩어리가
터져나오려다 큰 울음덩어리가
터져나오려다 말고 좁은 목구명에 콱 걸려
울음소리의 목을 조이자
목맨 사람의 팔다리처럼
온 몸이 세차게 허공을 긁어대고 있다 가려움
긁어도 긁어도 긁히지 않는
겨드랑이 없는
손톱에서 피가 나지 않는 가려움
고양이 죽이기
그림자처럼 검고 발걸음 소리 없는 물체 하나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 들었다
급히 차를 잡아당겼지만
속도는 강제로 브레이크를 밀고 나아갔다.
차는 작은 돌멩이 하나 밟는 것만큼도 덜컹거리지 않았으나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타이어에 스며든 것 같았다.
얼른 싸이드미러를 보니 도로 헌가운데에
털목도리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야생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호랑이나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
잇몸처럼 부드러운 타이어라는 걸 알 리 없는 어린 고양이였다.
승차감 좋은 승용차 타이어의 완충장치는
물컹거리는 뭉개짐을 표나지 않게 삼켜버린 것이다.
씹지 않아도 혀에서 살살 녹는다는
어느 소문난 고깃집의 생갈비처럼 부드러운 육질의 느낌이
잠깐 타이어를 통해 내 몸으로 올라왔다.
부드럽게 터진 죽음을 뚫고
그 느낌은 내 몸 구석구석을 햝으며
쫄깃쫄깃한 맛을 오랫동안 음미하고 있었다
음각무늬 속에 낀 핏자국으로 입맛을 다시며
타이어는 식욕을 마저 채우려는 듯 속도를 더 내었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비틀거리며 그는 밤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한순간 그는 나를 보았으나
그 눈동자는 이미 나를 투시하고
거리와 차들과 행인들을 넘어
세상과 허공과 무의식이 뒤범벅이 된 어느 곳을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엔 보이지 않는 어느 곳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어라고 그는 중얼거리고 있었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억양과 리듬은 있었으나
정작 발음 달린 단어와 문장은 그 말에 없었다.
이미 뭉개져 말의 형태가 없는데도
그 말에는 울음과 한탄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가끔 밤공기를 붙들고 후려치고 뒤흔들며
비명 같은 노래가 되기도 하였다.
말과 노래가 흔드는 대로
그의 가볍고 허름한 몸은 마음껏 비틀거리고 있었다.
취한 시간에만 보이는 그곳
취한 시간에만 나오는 그 말을
그러나 술이 깬 그는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삼겹살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한 시간이 넘도록
내 몸에서 고기냄새가 지워지지 않는다
불에 익은 피, 연기가 된 살이
내 땀구멍마다 주름과 지문마다 가득 차 있다.
배고플 때 허겁지겁 먹었던
고소한 향은 사라지고
도살 직전의 독한 노린내만 남아
배부른 내 콧구멍을 솜뭉치처럼 틀어막고 있다.
고기냄새를 성인의 후광처럼 쓰고
나는 지하철에서 내린다.
지하철 안,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모습의 허공을 덮고 있는 고기냄새의 거푸집이
아직도 손잡이를 잡은 채
계단으로 빠져나가는 나를 차창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상쾌한 바람이 한거번에 고기냄새를 날려보낸다
시원한 공기를 크게 들이쉬는 사이
고기냄새는 잠깐 파리떼처럼 날아올랐다가
발 끈적끈적한 발을 내 몸에 찰싹 붙인다.
제 몸을 지글지글 지진 손을
제 몸을 짓이긴 이빨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아직도 비명과 발악이 남아 있는 비린내가
제 시신이 묻혀 있는 내 몸속으로
끈질기게 스며들고 있다.
본인이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죽은 지 여러 날 지난 그의 집으로 청구서가 온다 책이 온다 전화가 온다
지금은 죽었으므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가 나면 메씨지를 남겨주세요
반송되지 않는다
눈 없고 발 없는 우편물들이
바퀴로 발을 만들고 우편번호로 눈을 만들어
정확하게 달려온다
받을 사람 없다고 말할 입이 없어서
그냥 쌓인다 누군가가 뜯어봐주기를 죽도록 기다리면서
무작정 쌓이기만 한다
말을 사정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혀들은
발육이 잘된 성욕을 참을 수 없어 꾸역꾸역 백지를 채우고
종이들은 제지공장에서 생산되자마자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책이 된다
서류양식이 된다
백골징포를 징수하던 조직적인 끈기가 글자들을 실어나른다
아무리 많이 쌓아도 반송할 줄 모르는
바보 햇빛과 바보 바람이
한가롭게 우편물 위를 어정거리고 있다
화장터
굴뚝이 누르스름한 연기를 매달고 있다.
굴뚝에서 떨지지 않으려고
허공이 되지 않으려고
연기가 기체의 손가락으로
굴뚝을 꽉 붙들고 있다.
거대한 허공을 머리 대신달고 있는
굴뚝 모가지에서
연기가 머플러처럼 휘날리고 있다.
굴뚝 아가리에 머리를 쳐박고
하루종일 어둡고 긴 구멍을 빨아들이고도
조금도 뚱뚱해지거나 길어지는 일 없이
연기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한 통공이 끝나면 새 울부짖음이 이어지고
한 장의차가 떠나면 새 장의차가 오고
연기는 땅에 박혀 있는 굴뚝처럼 굳세게 붙어 있다.
비만 고양이
쥐구멍이 없는 아파트
쥐약과 덫이 없어도 쥐가 살 수 없는 아파트
쥐 대신 바퀴벌레를 잡을 수도 없어
종일 누워 있는 고양이
어두운 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지 않는 먹이들
눈과 귀가 달려 있지 않아 뛰어 도망다니지도 않는 먹이들.
발버둥 칠 다리가 없는 먹이들.
한번 갖다놓으면 접시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한자리만 고집하며 얌전하게 담겨 있는 먹이들.
가르롱거리는 목과 등을 쓰다듬는 흰 손이
시계와 저울처럼 정확하게 갖다주는 먹이들.
피가 묻어 있지 않는 먹이들.
비명과 비린내와 체온이 위생적으로 제거된 먹이들.
수저 같은 혀만 있으면 목만 움직여도 편히 먹을 수 있는 먹이들.
아파트 최적화된 발소리 없는 발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뒤어도
아래층에서 씩씩거리며 올라올 목소리도 없지만
고기처럼 먹음직스럽고 뚱뚱한 쏘파 위에서
쿠션처럼 종일 누워 있는 고양이.
맨 처음 갖다놓은 자리에 아직도 그대로 있는 가구처럼
한번 심어놓으면 절대로 화분을 떠나지 않는 화초처럼
정해준 자리에만 가만히 누워 있는 고양이.
건강이 최고야
건강은
너무 건강한 건강은
건강이 너무 많아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르는 건강은
겨울에도 반팔 입고 조깅하고 찬물로 사워하는 건강은
몸에 좋다는 것 찾아 먹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건강은
음모처럼 막무가내로 돋아나 아무때나 아무데서나 뜨거워지는 건강은
범행은 완강히 부인해 왔다. 그러나 경찰이 렌터카에 묻어 있는 두 어린이의 혈흔을 확인하고 법행동기를 추궁하자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운전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에서 혼자 두 병 넘게 먹은 것 같다."고 진술을 번복했다가 다음날 다시 말을 바꾸어 "술에 취해 차를 몰고 가다가 아이들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데 반항해서 죽였다"고 범행을 일부 시인했다. 사건 초기 탐문수사에서도 경찰은 다세대주택 반지한방에서 건강을 검문한 적이 있었으나 너무 건강해서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영재의 흰 넓적다리 속에 삽입되는 순간 발기되는 이빨. 부드러운 근육의 탄력으로 이빨을 조여오는 육질, 쫄깃쫄깃하게 저항하다가 뜯겨지는 난폭한 뿌리들. 끈적끈적하게 분비되는 침들. 맛의 오르가슴을 느끼고 부르르 떠는 엄지발가락. 혀를 꽉 껴안고 전율하는 닭살.)으으, 먹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 핫크리스피 치킨!
애들아, 학원 갔다 이제 오는구나. 이 귀여운 얼굴로 몇시간 동안 칠판만 쳐다봤니? 건강도 생각해야지. 이 아저씨는 너무 건강해서 미치겠구나. 텔레비전에서 광고하는 핫크리스피 건강 알지? 한 마리 살줄게 따라올래?
딸
바퀴 달린 커다란 바윗덩어리, 지게차에
정면으로 받혔다고 한다. 아빠는
피가 쏟아져나오던 콧구멍으로
몇번인가 강제로 숨을 더 몰아쉬었다고 한다. 까르르
세살 여자아이가 장의버스 안에서 웃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말이
한번도 건드려본 적 없는 그 웃음을 보고
겨우 참았던 울음이 여기저기서 나적하게 터지고 있다.
회색양말
회색양말을 신고 나갔다가 집에 와 벗을 때 보니
색깔이 비슷한 짝짝이 양말이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것인가.
비슷하면 무조건 똑같이 읽어버리는 눈.
작은 차이를 일일이 다 헤아려보는 것이 귀찮아
웬만한 것은 모두 하나로 묶어버리는 눈.
무차별하게 뭉뚱그려지는
숫자들 글자들 사람들 풍경들 앞에서
주름으로 웃는 눈.
웃음으로 얼버무리면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이젠 아무래도 좋단 말인가.
빨래바구니에 처박히자마자
저마다 다른 발모양과 색깔과 무늬와 질감을 버리고
빨랫감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양말들.
고속도로
거무스름한 길이 뽑혀져 나온다.
지름이 십 미터도 넘을 것 간은 굵은 밧줄이 뽑혀져나온다.
지평선에서 산허리에서 숲에서 쉴새없이 뽑혀져나온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지치지 않고 뽑혀져나온다.
박찬호의 직구 같은 속도로 뽑혀져나온다.
거칠 것 없이 뽑혀져나오는 속도에 다치지 않으려고
논과 밭, 나무들과 건물들이 좌우로 재빠르게 비켜선다.
산과 부딪치면 산이 단숨에 두 쪽으로 갈라지고
절벽이 가로막으면 밑으로 가차없이 기다란 구멍이 뚫린다.
뽑혀져나온 길이 가만히 서 있는 자동차 바퀴를 맹렬하게 굴린다.
자동차는 가만히 있는데 바퀴는 맹렬하게 굴러서
바람이 전기톱으로 베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삼겹살처럼 얇고 넓적하게 잘린 바람이 창틈으로 들어와
눈을 후벼파고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긴다.
올챙이 다리 달리듯 가로수와 전봇대와 건물에 시간이 돋아난다.
풍경은 속도와 반죽되어 윤곽이 지워지며 흐려지고
시간은 엿처럼 쩍쩍 늘어지며 창밖으로 지나간다.
미아재개발지구
집들이 덤프트럭에 실려간다
트럭이 느릿느릿 흔들릴 때마다
냉동육처럼 족발과 순대처럼 흔들리며 실려간다.
포클레인이 집을 떠내 트럭에 싣고 있다.
트럭에 실리기를 묵묵히 기다리며
집들은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포클레인이 잘 떠낼 수 있도록
기왓장과 벽돌담, 철근과 변기, 타일과 스티로품,
깨진 거울과 계란판, 십자가와 콘돔이 뒤엉켜 붙어 있다.
연탄 리어카가 겨우 들어가던 골목길도
모과빛 창문이 새어나오던 판잣집도
발걸음 소리만 나면 컹컹 짖어내던 녹슨 철대문도
씨멘트 덩어리 사이에 뒤죽박죽 기여 있다.
아직 도살되지 않은 헌집 몇채가
거대한 집 더미 바로 옆에 서 있다.
오랫동안 떨고 있었는지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다.
문짝들은 너덜거리거나 떨어져 있다.
'사람 있음'이란 판자때기를 세워놓고
끝까지 살며 버티던 사람들이 빠져나가자마자
갑자기 늙어버린 집들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듯이 서 있다.
'세입자 주거권도 보장하라'고 데모하던 사람들도
다 떠나고 나니
이젠 포클레인이 툭 건드려주기만 하면
와르르 무너져 즉시 쓰레기가 되어버리겠다는 듯
마지못해 직립하고 있다.
라면봉지, 캔, 우유팩, 생리대와 뒤섞여
집들이 덤프트럭에 실려가고 있다.
황사
흙먼지 비린 냄새.
중국 냄새, 몽골 냄새.
고비 사막 냄새, 타클라마칸 사막 냄새.
사막에서 햇빛에 곱게 갈린
죽음들의 냄새.
모든 분비물과 소리와 동작이 정화된 후에
고요하고 거대한 흙의 질서 속으로 들어간
살과 피와 뼈들의 냄새.
내 코에 안착할 때까지
바람의 길을 따라 멀리도 날아왔구나.
바람의 입자처럼 미세한 알갱이에
사막과 바다를 덮고도 남을 거대한 날개를 달고
살아서 이동한 거리보다
더 멀리 항해했구나.
하나의 몸이
하나의 생에 그토록 단단하게 결박되었던 몸이
흙과 바람으로 깨끗하게 씻기고 나서
무수히 많은 입자로 쪼개지고 나서
이렇게도 광활하게 대기와 대지에 퍼지고 있구나.
숨쉬는 것들마다 찾아다니며
모든 구멍과 틈으로 스며들고 있구나.
그 개끗한 향기에 매연과 중금속을 뒤집어쓰고
다시 세상의 상처가 되어
지금 막 내 폐 속으로 들어왔구나.
또다른 몸
또다른 결박 속으로 들어왔구나.
1976년의 어느날
나의 어머니는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천변의 작은 방으로 세간을 옮긴다. 이웃에게 빌린 낡은 리어카에 실린 수십년 삶의 궤적들은 매우 초라하고 그것은 나의 어머니에게 지루하고 견딜 수 없는 다가 올 날의 불안으로 나타난다. 어머니는 작은 항아리를 들고 리어카 뒤를 쫓아 걸어가는 나에게 묻는다. 문도는 어디에 있지? 대답대신 나는 유액이 발라진 붉은 항아리를 가슴까지 치켜 올린다. 두 손을 깍지 끼고 힘껏 끌어안는다. 마치 그것이 문도인 것처럼. 새카맣게 윤이 나는 간장이 담겨있던 작은 항아리는 비어있다. 어깨에 힘이 빠지면 더 이상 안을 수 없게 된 항아리를 내려놓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과 걸어가야 할 시간들을 가늠해 본다. 알 수 없다.
몇 개의 교차로를 지나는 동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긴다. 기와가 없고, 대신 폐타이어와 루핑, 질 낮은 비닐 천으로 이루어진 지붕을 가진 집에 도착한다. 쪽문을 열고 나의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은 짐을 나른다. 유월의 한 낮은 매우 뜨겁고 물이 말라버린 폐수가 시커멓게 잠식하고 있다. 두려운 꿈처럼 자꾸자꾸 커지는 거품에는 이름 모를 화공약품의 냄새가 나고 있으며 주변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더러운 공기가 떠다닌다. 물이 나오지 않는 수도가 없는 좁고 어두운 부엌에서 어머니는 환희를 피우고 있다. 오비 맥주 컵에 소주를 따라 마시는 어머니가 나에게 묻는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을까?
버클리에서
굿모닝, 하우아유!
아는 사람이 없는 버클리 거리에서
누군가 친근하게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얼른 돌아보니
따뜻한 날씨에도 겨울옷을 입고
때 묻은 이불을 들고 다니는 홈리스였다.
지나가는 아무에게나 말을 걸면서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그 말은 지나가는 누구의 귀로도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 쓸모가 없어 말의 기능을 잃은 말.
성대의 울림과 혀의 발음으로 겨우 버티는 말.
지나가는 이들을 건드려보지만
걷는 속도에 부딪쳐도 힘없이 나동그라지는 말.
듣는 이 없어 모든 허공이 귀가 되는 말.
고막들이 자물쇠처럼 굳게 채워져 있는 수많은 귓속에서
몇가닥 발음으로 겨우 말이 되려는 말.
무시하고 바삐 걸어가는 행인들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가볍게 튕겨냈어야 할 그 말을
나는 그만 듣고야 말았다.
그 말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그 말을 발음한 얼굴의 눈을 쳐다보고야 말았다.
그 순간 아무런 힘도 의미도 없던 말은
그 눈빛의 의미를 받아 갑자기 생기가 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떠돌던 모든 귀들이
재빨리 그의 눈과 내 눈 사이로 모여들었다.
흰 눈에 내 모든 비밀을 알아보았다는 듯
그의 눈은 오만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오랫동안 노숙의 어둠으로 단련된 컴컴한 눈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어떤 순간을
나에게서 발견했다는 듯 의기양양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지만
그것은 이미 한눈에 내 속의 어둠을 들키고 난 후였다.
하마터면 나도 그의 어둠을 알아보고 반가워서
그에게 가 말을 붙일 뻔했다.
언제라도 다시 오라는 듯 웃는 눈빛을 등뒤로 받으며
내 발걸음은 앞으로만 나아갔다.
홈리스의 말은 다시 가벼운 소음이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악의 없이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듣는 귀는 하나도 없지만
거대한 허공이 모두 자신의 집이라는 듯
말들은 허공 속으로 마구 퍼져 스며들고 있었다.
막대기 속의 풍경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막대기 같은
길고 좁은 틈이 있다
길들, 푸른 나무들. 움직이는 것들은
그 투명한 막대기 속에 있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 아줌마들 웃음소리, 엔진소리도
그 대롱 속에서 회오리치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다.
먼 산의 고요한 능선은 연필심처럼 짧아
언제나 직선이다.
아침이 되면
막대기에 형광등같이 희고 기다란 빛이 들어온다.
어둠도 눈도 비도 바람도
곧고 좁은 수직선 안에 기여서 온다.
가끔 검은 막대기 끝에서 별이 뜨기도 한다.
손가락들
옷을 갈아입고 외출하다
뭔가 쓰려고 보니 주머니에 볼펜이 없다.
적어놓지 못한 생각들이 불안하다.
얼른 종이에 찰싹 들러붙지 못해 우왕좌왕한다.
쓰는 데 중독된 손가락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공연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으로 수첩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손가락들
다섯 가락으로 갈라지고 마디가 있는
포클레인처럼 방향으로만 굽어지는
버스 손잡이든 신문이든 쥐고서
흙과 돌을 잔뜩 움켜쥔 뿌리를 흉내 내고 있는
잇몸에서 돋은 이빨처럼 무엇이든 곧 물 준비가 되어 있는
손가락들
겨울나무처럼 이파리 하나 없이 비어 있는 동안
손가락은 볼펜심처럼 단단하고 뾰족하다.
무언가 쓰려는 듯 올라와서
허공에서 어디로 갈까 멈칫거리다
하릴없이 머리를 긁고 또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코를 만지작거리고 콧구멍을 더 깊이 후비고
황사 2
2006년4월 8일. 눈알이 서걱거린다. 입안이 지근거린다. 거리로 나서니 갑자기 물컹한 안개덩어리가 얼굴을 확 덮는다. 하늘로 번쩍 들어올려진 황토사막. 기화되어 날아다니는 거대한 땅덩어리. 바람에 걸쭉하게 반죽되어 국숫발처럼 콧구멍으로 들어오고 있는 땅덩어리.
철세처럼 중국대륙과 황해를 건너온 고운 흙먼지. 하나를 마신다. 온몸이 날개인 몸 하나를, 날지 않아도 스스로 부력을 얻은 날개 하나를. 무게와 온도와 물기와 에너지를 버린 후에도 남은 최후의 몸 하나를, 너무 많은 죽음을 거쳐오느라 더이상 쪼개지지도 않고 가벼워지지도 않는 몸 하나를.
점심시간, 밥 먹으로 나가는 내 눈 속으로 들어온 흙 한줌. 내 지문으로 들어와 빙빙 돌고 있는 흙길 하나. 내 땀구멍에 박힌 모래산 하나. 내 주름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리잡은 중국 북부의 마을 하나. 내 이빨 사이에 낀 타클라마칸 사막. 침과 함께 내 목구멍을 넘어가는 고비사막. 내 재채기와 입에서 부챗살로 퍼져나가는 덴칼 사막. 생선냄새에 붙어서 코로 들어오는 황토고원, 후춧가루와 조미료에 섞여 국물에 뿌려진 네이멍구 고원. 긴 소장과 대장을 지나 오줌에 섞여 변기로 빠져나가는 중국대륙.
식당에서 나온다. 묵처럼 물렁물렁한 공기를 휘저으며 걷는다. 흙탕물 같은 공기덩어리를 사방으로 튀기며 차들이 질주한다. 이 뻘늪은 참 헐렁하다. 뻘늪 속에 빠지고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직거리는 텔레비젼 영상처럼 내 옆을 지나간다.
빗소리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빗소리는 산에 가득하였다.
큰비가 올 것 같아 서둘러 피할 곳을 찾았다.
한참 지나도 비는 오지 않고
빗소리는 더욱 세차게 울렸다.
귀를 한껏 열어 소리를 따라가보니
빗소리가 나는 곳은 바람 속이었다.
날아오르려고 몸부림치는 나뭇잎들이었다.
그 많은 잎들을 다 붙잡고 어쩔 줄 몰라
마구 흔들리기만 하는 가지들이었다.
터질 듯 부풀어올라 곧 토할 것 같은 내 허파였다.
소리는 그냥 쏟아져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납게 솟구쳐오르기도 하고
숲을 통째로 들어올릴 듯 뒤흔들기도 하고
점점이 흩어져 날리기도 하였다.
빗소리에 맞아 나무 근육들은 꿈틀거렸고
뿌리들은 땅 위로 기어나와 들썩거렸고
잎들은 하얗게 뒤집혀 버둥거렸고
땅은 콧김을 뿜어댔고
내 입에서는 비린내가 덩어리처럼 확확 뽑혀나왔다.
산꼭대기에 이르도록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내 몸은 휘돌아친 비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옛날 사진속에서 웃고 있는
나를 보고 있다. 카메라를 쳐다보는 순간 정지되어 있는 나를. 스물두살에서 정지된 내 나이를. 48킬로그램에서 정지된 내 몸무게를. 아직도 30년 전의 짜장면을 소화시키고 있는 내 배를. 무엇이 즐거운지 이빨이 다 보이도록 벌어져 있는 내 웃음을. 웃음 때문에 증오가 조금 지워지고 있는 내 표정을, 웃음 속의 내 치석을
내가 보고 있다. 너무 많이 변하여 한번도 나였던 적이 없는 내가. 시간을 겹겹이 처바르고 껴입어 이제는 전혀 다른 인간인 내가. 시간의 열기와 압력으로 튀겨지고 뒤틀리고 구겨진 내가, 이미 늙은 생각이 두개골에 가득 한 내가, 수백번 고이고 배출한 후에 이제 막 새 정액으로 갈아넣은 고환을 달고 있는 내가
나를 보고 있다. 찬물에 빨랫비누로 머리 감은 나를. 빵구난 양말을 구두로 가리고 있는 나를, 누런 냄새 나는 속옷을 양복으로 가리고 있는 나를, 겁 많은 눈을 어색한 웃음으로 가리고 있는 나를. 자폐적인 수줍음을 겸손처럼 보이는 침묵으로 간신히 가리고 있는 나를, 빛에 낱낱이 드러났는데도 여전히 사진 속에서 숨을 곳을 찾는 나를
내가 보고 있다. 소닭돼지를 열심히 씹어 비듬과 무좀으로 만들고 있는 내가, 옆머리를 빗어올려 가까스로 가린 대머리로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애쓰는 내가, 건조되고 있는 안구로 자꾸 무얼 보려는 내가, 뒤꿈치에서 각질이 벗겨지는 발로 어딘가를 부지런히 가고 있는 내가, 아직도 수염에서 슬픔과 두려움이 자라고 있는 내가
틈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 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 온 것이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필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빧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 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생명보험
병원마다 장례식장마다 남아도는 죽음,
밥 먹을 때마다 씹히고
이빨 사이에 고집스럽게 끼어
양치질해도 빠지지 않는 죽음이
오늘 밤은 형광등에 다투어 몰려들더니
바닥에 새카맣게 흩어져 있다.
삶은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 하나를 주리라.
무엇이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내 두 손은
공짜이므로 넙죽 받을 것이다.
무엇이든 손에 들어오는 것은 일단 움켜쥐고 볼 일이다.
걱정은 나중에 해도 된다.
그렇잖아도 죽음에 투자하라고
부동산 투자보다 훨씬 안전하고 수익도 높다고
투자만 해놓으면 다리 쭉 펴고 맘 놓고 죽을 수 있다고
보험설계사가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죽음에는 다리들이 참 많이도 달려 있다.
이젠 길이 땅에서 하늘로 바뀌었다는 듯
하나같이 다리들을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고 있다.
세상 모든 죽음을 낱낱이 겪어 알고 있으면서도
허공은 아무 대책이 없다.
공짜였던 죽음이 언제부터 선불로 바뀌었나요?
선불이 아니라, 아버님, 가족에 대한 사랑이에요.
보장성과 수익성이 풍부한 사랑이요.
사랑이 얼마나 진지한지 견적 뽑으면 다 나와요.
죽음에다 돈과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투자를 하고 나면
어서 죽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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