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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9.30~10.15 ‘조국사태’와 교수사회

by 이성근 2019. 10. 16.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숙원 경향 2019.09.30

나는 조국이 아니다 오마이뉴스 2019.10.01.

촛불은 꺼져 가는가! 경향 2019.10.01

위기의 영호남 경향 2019.10.01.

조국사태와 교수사회 경향 2019.10.01.

윤석열과 검찰개혁의 역설 한겨레2019-10-02

'조국 수호'가 검찰 개혁인가? 프레시안 2019.10.04.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 경향 2019.10.06.

천정환 교수의 조국 사태와 교수사회에 대한 반론 - ‘조국 수호가 아니라 검찰개혁이다 경향 2019.10.07.

 

'부익부' 정년연장에 반대한다 경향 2019.10.07.

조국의 정치와 조국의 도덕성 프레시안 2019.10.07.

대통령, 약속대로 하면 된다 프레시안 2019.10.08.

대통령이 책임져라 경향 2019.10.08.

한글날에 생각하는 문화와 생명 한겨레 2019-10-8

지식인 좌파와 빈민 우파 한겨레 2019-10-9

 

보수반동의 세계 경향 : 2019.10.13.

성공과 승리를 측정하는 방법 경향 : 2019.10.13

진보의 위선 관리법한겨레 : 2019.10.13.

자산재분배, 피할 수 없는 화두 한겨레 : 2019.10.13.

불신만 키우는 한국경제 선방론 한겨레 : 2019.10.15.

 

촛불의 전진과 앙시앵레짐해체 한겨레 : 2019.10.15.

언제까지 허리띠 졸라맬 텐가 경향 2019.10.15.

SNS 함정에 빠진 조국의 아름답지 못한 퇴장 경향 2019.10.15.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숙원

고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은 무엇이었을까? 2003년부터 2008년까지, 그의 전 임기와 운명을 같이 한 6자회담은 강력한 후보 중 하나다. 이 기획은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에 이르지 못한 채 중단됐으며 2006년 북한이 1차 핵실험까지 했으니 결국 실패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북한과 내로라하는 4대 강국이 끝없는 협상을 통해 발표했던 ‘9·19 공동선언, 지금 돌이켜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성과였다. 노무현 대통령과 안보팀은 6자회담의 성공을 위해 온몸을 바쳤고 6개국의 합의로 우리가 꿈꾸는 동아시아의 평화체제, 그리고 경제공동체로 가는 여정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왜 이 귀중한 경험이 현재의 북핵 협상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는 걸까? 그 무엇보다도 북핵 문제는 우선 북한과 미국이 직접적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합의가 25년간 복잡다단하게 뒤엉킨 실마리를 푸는,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에 몰두하기 위해 북핵 협상이라는 골치 아픈 항해의 운전대를 중국에 맡겼던 데 비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 해결이 자신의 재선에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 점도 중요한 차이다. 더구나 그 스스로 평생 몸에 익힌 협상의 기술을 활용하면 단숨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여러 나라의 이해를 조정하는 다자회담은 별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지리멸렬하기 마련이라고 믿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나아가서 김정은 위원장 역시 통큰 결단으로 단칼에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한다. 하노이회담의 결렬에도 불구하고 양국이 막말을 애써 자제하고 있는 것도 양자협상이 여전히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노이에서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첫째, 북한은 체제안전에 대한 보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하여 북한은 국제제재의 해제는 더 이상 미국의 지렛대가 될 수 없다는 새로운 셈법을 선언했다), 둘째, 미국의 대내 협상이야말로 트럼프의 행동반경을 좁히는 가장 큰 제약이라는 사실이다.

 

20059·19 공동성명 직후 미국 재무부는 북한의 달러 위조지폐 문제를 폭로했고 뒤이어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의 북한 자산을 동결했다. 2년여의 협상 속에서 쌓은 신뢰는 깨졌고 북한은 핵실험으로 맞섰다. 미국이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고 판단한 미국 내 보수파들이 합의 파기를 유도했다는 혐의가 짙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제1차 북핵 위기를 일단락시킨 제네바 기본합의때도 미 의회는 북한에 제공할 중유 예산을 전액 삭감한 바 있다.

 

북한이 간절히 원하는 체제 안보는 미국 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미가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고 나아가 정상적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해도 주변국의 동의와 구체적인 평화체제의 수립이 없다면 양국 간의 오래된 불신과 오판은 언제든 사태를 뒤집을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북·러 정상회담에서 ·미 두 나라 간의 합의만으로는 북한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6자회담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는 6자회담의 소중한 경험을 되살려 2+4 협상을 준비해야 한다.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현재 북·미 협상의 주도를 전제로 해서, 2+4 회담이 양국 간의 기본 합의를 구체화해 실행에 옮기고 어느 한 나라가 되돌릴 수 없는국제제도와 규범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9·19 공동성명과 20072·13 합의를 현시점에서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즉 두 나라의 지도자가 양자회담의 장점을 살려 신속하게 굵은 줄거리를 그려내면 나머지 나라들은 그 실행과 영속화를 꾀하는 일종의 분업이다.

 

여러 나라가 참여한 합의는 미국 내의 정치적 공격을 무디게 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미국의 재정 부담을 나눠서 의회의 반대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중 양국이 책임있는 대국으로서 아주 중요한 국제문제를 해결한 경험은 앞으로도 계속 닥칠 투키디데스 함정에서 벗어나는 요령을 보여줄 것이다.

        

2+4 회담은 악화일로의 한·일 갈등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현재의 핵협상에서 일본이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현재 진행 중인 한·일 마찰의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국제제재 해제 이외의 추가적 대북 경제지원을 맡는다면, 그리고 그 일환으로 장차 북·일 식민지 배상 문제까지 합리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일본은 보통국가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될 것이다.

 

중국은 6자회담의 교훈, 그리고 현재의 미·중 무역전쟁을 의식하여 다시 도광양회를 실천하는 듯하다. 바로 지금이 우리가 2+4 회담을 제안해서 결국 남북 모두를 궁극적 승리자로 만들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6자회담의 부활은 노무현 대통령의 숙원을 기어이 해결할 신의 한수일지도 모른다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경향 2019.09.30

 

나는 조국이 아니다

할머니들 4~5명이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쇼핑백에 든 기념품을 들이밀었다.

"저기 있는 모델하우스 좀 들렀다 가줘요."

 

처음에 정중하게 거절하던 사람도 할머니가 끈질기게 쫓아오니 눈빛이 변했다. 혐오와 경멸의 눈빛에도 할머니는 끄떡 없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상대방이 등을 돌려 반대쪽으로 향하자 화단에 숨겨놓았던 물통을 찾아 한 모금 들이켰다.

 

그것도 잠시,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올라오자 주변의 할머니들은 사람들을 붙잡으러 재빨리 흩어졌다. 마음의 상처를 느끼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숨 가빴지만, 주름진 손과 얼굴은 지금껏 받아온 상처의 흔적이리라. 쇼핑백에는 신도시에 세워진 오피스텔에 투자하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확률은 낮아보이지만 이 노인들의 노력으로 건설사는 1억이 넘는 오피스텔을 팔고, 누군가는 투자를 통해 임대수익을 얻을 것이다. 반면 최선을 다한 노인들이 받을 임금은 8350원 최저임금이다. 감상에 젖을 새는 없었다. 내 손에는 배달해야 할 햄버거가 들려있었다. 넋 놓고 있은 만큼 음식이 식을 터였다.

 

배달을 마치고 다른 집으로 향하는데, 이번에는 폐지 줍는 할아버지가 차량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동정과 짜증의 표정을 함께 짓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리어카를 묵묵히 끌었다. 길가에 쌓여있는 박스라도 발견하면 과감히 멈췄는데,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종이만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이든 야밤이든, 도시에서 만나는 폐지 줍는 노인들의 튀어나온 핏줄에는 근면함과 성실함이 흐르고 있다.

 

문득 몇 년 전 화제가 된 국민연금공단의 광고문구가 떠올랐다. 65세 때, 어느 손잡이를 잡으시렵니까? 문구 위에는 폐지가 담긴 리어카, 밑에는 여행 갈 때 사용하는 캐리어가 있었다. 폐지 줍는 노인을 실패한 인생으로 박아버린 그 포스터에서 나는 다른 걸 뽑아내고 싶었다. 노력과 고통의 불평등.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끈 노동자들은 달을 보고 출근했다 달을 보고 퇴근했으며, 2회 정도 쉬었다. 단속반과 철거 깡패에 맞서 악착 같이 삶을 이어갔던 장사꾼들도 마찬가지다. 흔히들 젊을 때 놀면 늙어서 고생한다 생각하는데, 현실은 젊어서 고생한 사람은 늙어서도 고생한다. 물론 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노력을 통해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감당해야 할 현실의 고통과 할 수 있는 노력에도 차이가 있다.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는 고통과 해외 유학을 가서 겪는 고생은 개인에게 비슷하게 괴롭지만, 그 결과는 다른 법이다. 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해외유학의 고통을 바라겠지만. 누가 누가 더 힘들게 살았느냐를 경쟁하자는 게 아니다. 각자가 감수한 고통과 수행한 노력은 절대적이기에 비교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를 감수하고 쟁취할 수 있는 과실은 천지 차이다. 누군가는 몸이 부서져라 노력해서 비정규직을 쟁취하지만 누군가는 정규직을, 누군가는 공무원을, 누군가는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다.

 

지금까지 우리는 출발선이 다른 것에 주목해왔고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했다. 같은 출발선에서 경쟁하면 공정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뛸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한 사람들이 대다수다. 심지어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줄만 알았던 선수들이, 사실은 경기가 끝난 후 서로의 땀을 닦아주며 끈끈한 우정을 나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들이 흘린 학력, 문화, 인맥, 자녀교육의 땀방울들은 그렇게 서로를 이어준다. 최근 조국사태에 분노해 촛불을 든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세종캠퍼스 학생들과 시위를 같이 하는 것에 반발했다고 한다.

 

이런 예는 많다. 최근 정부는 정년을 65세까지 연장하려 하고, 노동계도 이를 환영한다. 평균수명이 높아지고 노후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고 합리적인 대우를 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정년이라는 결승선을 끊을 수 없는 사람들, 정규직이라는 트랙 위에서 달릴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다. 비정규직은 길어야 2년이고, 최근에는 근로자의 지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노동자, 프리랜서 등 비정규불안정 노동자들에게 정년은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닿을 수 없는 목표다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매주 열리는 촛불집회를 알리는 포스터 인터넷 커뮤니티

 

더욱 씁쓸한 것은, 고통과 공감에도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검찰의 압수수색에 대한 법무부 장관의 전화 통화는 외압이 되어 공분을 사거나, 인륜이 돼서 공감을 살 수 있지만, 점거 농성 중인 톨게이트 여성 노동자들이 경찰에게 행하는 항의는 비웃음을 사거나, 촛불을 들 정도의 공감을 살 수는 없다. 5평의 청년 주택에 대한 불만은 배부른 소리지만 법무부 장관의 10억짜리 낡은 아파트는 청렴의 상징이다. 고공농성과 천막농성으로 자식 생일날 케이크 하나 함께 먹지 못하는 것은 뉴스에 나오지 않지만, 법무부 장관의 고통은 공분과 연대를 일으켜 거대한 촛불을 만들어낸다.

 

'나도 조국이다'라는 항간의 포스터에 위화감이 드는 이유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어도 정작 운동장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라는 잔인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작금의 조국 사태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일 것이다. 운동장의 주변에서 폐지를 줍고 전단지를 뿌리는 노인들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것, 삼성을 상대로 하늘에 올라 있는 김용희를 땅으로 내리는 것, 하루에 6명씩 일하다 죽는 운동장바깥의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개혁의 과제다.

 

조국의 케이크가 아니라 김용균과 김군과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컵라면으로, 100만명이 촛불을 드는 날을 꿈꾼다. 나는 조국이 아니다. 박정훈(parti) 오마이뉴스 2019.10.01

 

촛불은 꺼져 가는가!

어느 때보다 정치가 필요한 지금, 정치가 없다. 정치 부재의 공간은 조국과 윤석열, 그리고 두 사람 간 대결에 뛰어든 유명인사들과 그들의 팬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들 배후의성난 두 집단도 정치 부재를 증명한다. 광화문 집회에서 조국 퇴진을 외치는 이들과 서초동에서 조국 수호를 촉구하는 이들, 조국 사퇴 성명을 낸 교수들과 검찰개혁·조국 지지 성명을 낸 교수들. 이들이야말로 정당을 대체해 지지와 반대를 조직하고 여론을 이끄는 진정한 정치적 실체다.

정치는 조국·윤석열 대치 국면을 풀 역량도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집권당은 지난 주말 서초동 집회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 간 대결의 결과가 나오기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보다 문제 해결 수단을 많이 갖고도 불확실성 속에 함께 휩쓸려 들어갔다. 민주당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이유가 있다. 당이 중구난방 나서고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분열하면 총선 필패라는 열린우리당 트라우마가 그 하나다. 하지만 다양한 논의를 허용치 않는 당내 분위기, 공천권을 쥔 당 지도부의 독재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분열 회피 강박증은 당의 경직을 초래하고, 경직된 당은 위기가 닥쳤을 때 효과적 대응을 방해한다. 조국 사태 악화가 입증한다.

 

민주당이 방치한 다른 이유는 총선까지 여유가 있다는 안이함이다. 민주당 계획대로라면 시민은 조국 문제로 크게 낙담했다는 사실을 총선 앞에서 싹 잊어야 한다. 그리고 집권세력을 향해 새로운 희망을 품어야 한다. 그건 황교안의 머리카락이 자라면 갑자기 고분고분해져 장외 투쟁을 접고 대화할 거라고 믿는 것과 같다.

 

·윤 대결이 어떻게 귀결될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두 사람 관계만 보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망하는 제로섬 게임이고, 나라 전체로서는 마이너스섬 게임이다. 이 대결에서 조국이 살아 돌아온들 더 이상 과거의 조국은 아니다. 상처투성이 조국, 껍데기 조국이다. 그때의 시민 역시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레던 시민이 아니라, 깊은 실망감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시민일 것이다.

 

다수 시민이 선출하고 받쳐주던 촛불정부가 이제는 핵심 지지층의 강력한 목소리에 의지하고 있다. 위기 신호다. 권력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초동 집회 규모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조국은 13% 지지율로 대선주자 3위를 기록했다. 집권세력은 반색했다. 그리고 더 기다릴 필요 없다고 판단했는지 갑자기 공세적 태도로 변했다. 대통령도 검찰을 직접 통제하기 시작했다. 검찰 권력은 일정한 한계에 직면했다. 청와대--지지자가 결속해 있는 한 권력은 공고할 것이다.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지지자 결집 현상은 진영 대결을 본격화하면서 대결 규모가 커졌다는 걸 말해줄 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할 때 위임받은 촛불개혁을 위해 다수가 결집한 것이 아니다.

 

이런 대결에서는 우리 편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순수한경쟁심리가 발동한다. 이 국면에서 도덕과 가치는 사치다. 최소한의 명분만 필요하다. 그게 검찰개혁론이다. 하지만 검찰개혁이 촛불의제 가운데 최우선 순위여야 하는지 의문이다. 검찰개혁의 핵심은 이미 국회로 넘어갔다. 검찰개혁 과제로 남은 게 별로 없다. 정부가 제시한 것도 수사관행·조직문화의 개선, 특수부 축소뿐이다. 조국 맞춤형 검찰개혁론이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 법무부의 가상통화 불허와 같이 젊은층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생기면 신속하게 설득과 사과, 불허 취소로 반응했다. 각종 재난에도 기민하게 대응했다. 인사청문회 때 공직 후보자의 불법이 아니어도 도덕적 하자가 있거나, 여론이 나쁘면 임명하지 않았다. 시민 다수의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촛불정부라면 폭넓은 지지와 영향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자본, 상징자본, 사회적 관심, , 시간과 같은 자원은 불평등과 양극화 해소를 위해, 불공정의 늪에 빠진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쓰여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는데도 이미 많은 자원이 소진됐고, 그나마 남은 것들은 조국을 위해 다 써버렸다. 공공재인 촛불자원의 낭비이자 촛불의 사유화다. 문 대통령이 다수의 마음을 잡기보다 한 사람의 마음을 잡으려 한 결과다. 그 때문에 개혁세력도 분열 중이다. 이해할 수 없다. 촛불대의 앞에 조국은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조국을 위한 촛불은 없었다. 촛불정부 탄생에 참여했던 시민들의 배신감을 달랠 길이 없다.

 

문재인 정부에 위임한 촛불개혁의 시효는 이렇게 끝나는 건가? 문재인 정부는 다수파 전략을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대근 논설고문 경향 2019.10.01

 

위기의 영호남

이제 조국 장관 논란과 검찰개혁 논란이 충돌하는 형국이다. 경제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들은 이런 상황이 힘겹다. 최근에도 여러 지인들의 걱정을 전해 들었다. 현재 경제여건이 더 어려운 상황으로 가는 느낌이라는 것, 그래서 평시와는 다른 대책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업과 가계는 상당한 위기의식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한국은행이 글로벌 악재를 고려해 기존의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을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힘든 여건이지만 경제정책 당국은 치밀하게 상황을 챙기고 있을 거라 기대하고 싶다. 선진국들에서는 장단기 금리 역전, 마이너스 금리 등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우리도 여러 종류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

 

얼마 전 시중은행에서 판매한 독일 국채금리 연계 파생상품(DLF)이 원금 전액 손실로 확정된 바 있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전역의 불안감이 고위험 자산의 문제로 드러난 것이다. 독일은 여러모로 한국과 비견할 만한 점이 있다. 세계경제는 1990년대 이후 글로벌 밸류체인이 진전되었다. 동아시아 생산네트워크에 참여해 산업과 무역 성장을 주도한 나라가 독일, 한국, 중국 등이다.

 

독일과 한국은 제조업과 수출 비중이 높아 미·중 무역전쟁의 충격을 가장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2018년 국내총생산 중 공업(에너지 포함) 비중은 중국 33.9%, 한국 33.6%(2017), 독일 25.8%, 일본 25.5%, 미국 14.7%(2017) 등이다. 독일의 수출의존도는 39.4%로 한국의 37.5%보다 높은데, 무역전쟁 당사자인 중국은 18.6%, 미국은 8.0%이다(2017년 기준).

 

첨단부문 제조업 비중이 높은 독일과 한국은 중국의 산업 고도화에 따른 충격 위험이 가장 높은 두 개 국가다. 특히 중국과 연결된 자동차·전자산업 네트워크의 변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중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201729018000대로 정점을 찍은 이후 하락세로 전환했다. 벤츠, 폭스바겐, 현대, 푸조, 포드 등 자동차 업체들이 중국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고, 일본의 스즈키는 아예 중국시장을 포기했다.

 

독일과 한국은 중국 이외의 파트너와도 갈등하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독일에는 유럽연합(EU) 탈퇴를 시도하는 영국과의 문제가 있고, 한국은 일본과의 역사·경제·안보 갈등이 겹쳐 어려움 속에 있다.

 

독일은 글로벌 생산네트워크의 중심에 있고 한국은 그보다는 외곽에 있는 편이다. 2020~2021년에 본격화될 침체 국면의 영향을 어느 쪽이 더 세게 받을지는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산업충격을 흡수할 내부구조는 독일이 한국보다 훨씬 탄탄하다고 할 수 있다. OECD에서 내놓은 최근 실업률은 독일은 3.07%, 한국 4.03%, 미국 3.63%, 일본은 2.37%이다. 청년 실업률(15~24)은 독일 6.2%, 한국 10.5%인데, 독일은 통일 이후 최저치 수준, 한국은 사상 최고 수준에 가깝다.

 

생산의 지역구조를 보면 독일에 비해 한국이 충격에 훨씬 취약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독일은 동서독 격차가 있지만 넓은 서독 지역에는 경제력이 고루 분포한 편이다. 반면 한국은 서울과 다른 곳 사이에 깊은 크레바스가 놓여 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격차는 글로벌화가 진전된 198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생산네트워크에 연결된 수도권 지역에 성장 제조업의 구상기능이 집중되었다. 비수도권에서는 생산네트워크에서 조립의 실행기능을 맡은 산업도시가 성장의 일부 성과를 배분받았다. 그러나 지방 산업도시에서 발생한 생산소득의 상당 부분은 다시 서울로 되돌아갔다. 그 결과 전국 평균 이상의 소득 수준을 나타내는 지역은 서울, 울산, 충남뿐이다.

 

그런데 세계도시로의 집중, 4차 산업혁명의 진전으로 상황이 또 급변하고 있다. 세계도시들은 지능산업을 끌어들이고 있고 기존 산업도시는 쇠퇴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의 영향이 집중되는 농촌지역과 중소도시는 지방 소멸에 직면해 있다. 현재 추세에 2020~2021년의 세계경제 침체가 결합을 하면, 지역 균열은 더 심화될 것이다. 충청, 강원권은 수도권에 결합하려 할 것이나, 영남권과 호남권은 파국적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영호남 주민과 정치인들은 비상한 각오를 해야 한다. 각자도생은 공멸이다. 중앙정부와 협력해 시··, 광역시·도를 뛰어넘는 광역연합체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그 안에 능력과 매력

이일영 한신대 경제학 교수 경향 2019.10.01

 

조국사태와 교수사회

얼마 전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님을 어느 교수 모임에서 뵈었다. ‘김용균재단설립을 홍보하기 위해 오셨다. 그 어머니의 그 얼굴과 목소리에 서리고 새겨진 기운이나 감정을 뭐라 칭해야 할지? 슬픔, 눈물 같은 흔한 단어들은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세월호를 통해 좀 배우긴 했지만 이런 참척에는 여전히 다른 통사가 필요하다.

 

그 어머니가 용균이 같은 일이 없게 하려면 교수님들이 중요하다는 그런, 저절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는 말씀을 했다. 짧은 행사가 끝나고는 너무 공손하게 허리 숙여 교수들에게 인사하셨다. 낳고 키운 자식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건지 모르지만, 가슴에 치받는 무언가를 어쩌지 못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조국사태는 한국 대학과 교수사회의 참담한 모순과 기괴한 실상을 또다시 드러냈다. 한국 민주주의는 대학 문 앞에서 멈춘다. 특권적 교육 차별, 대학의 반민주성, 대학 내부의 불평등은 정규직 교수들의 무책임·무능과 긴한 관계를 갖고 있다. 특권층 자녀들이 대학 실험실과 연구실에 드나들며 1저자논문을 발표한 사실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대학이 계급재생산에 어떤 역할을 하며 교수들의 계급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일이다. 그들만의 공정촛불을 든 스카이학생들을 과연 누가 가르치는가? 그 특권과 서열의식은 어디서 왔겠는가? ‘주요 대학들은 고교서열화의 실질적 배후조종자다.

 

따라서 고교서열화와 대학 캐슬을 동시에 허무는 전략이 요청된다. 그렇지 않고는 한국 민주주의란 늘 반편이다. 혹자들은 서울대(학부)스카이가 없어지면 그걸 대신하는 또 다른 명문과 서열이 등장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일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의 네트워크가 얼마나 강고하게 정계·재계·언론계·학계 등 이 좁은 나라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그 역사와 특권의 연줄망이 얼마나 깊고 촘촘한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서 하는 소리다. 게다가 우리는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스카이캐슬의 지배에서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다.

 

무려 25년간 총장 자리를 지키며 군림해왔는데 알고 보니 허위 학력자라는 의혹이 불거진 동양대 총장의 경우는 어떤가? 상당수의 사립대학 총장 자리는 임기가 없다. 검증도 책임도 없다. 짬짜미로 구성된 이사회와 신에 준하는 권능을 지닌 교주(校主)가 자의로 뽑거나 꽂는다’. 그래서 전체 대학 구성원이 참여하는 총장 선출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중 직선제는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쯤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총장 직선제를 시행하고 있는 대학은 전국에 20여개밖에 되지 않는다. ‘이명박근혜정권은 총장 직선제를 많이 없애서 대학 민주주의에 치명타를 가했었다. 2015년 고현철 부산대 교수는 총장 직선제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했다. 그는 대학의 민주화는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의 보루다라는 말을 남겼다.

 

보통의 사립대 교수들은 찍힐까겁이 나서 정규직조차 정치행동을 거의 못한다.(이번 조국 반대교수들이 이름은 밝히되 소속 학교까지 밝히지는 못한 코미디도 이런 견지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이불 속이나 술집에서는 모르겠으나, 대부분은 침묵하며 거세된 시민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일베를 많이 하라고 청년들에게 권해온 류석춘 연세대 교수의 막말과 성희롱성 발언은 어떻게 또 가능했을까? 대부분 정규직 교수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표절, 성희롱, 연구비 횡령 등 비위는 왜 중단되지 않을까? 교수라는 존재의 권력과 권리가 극단적으로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학은 일종의 신분사회며, 그 하부는 노예화된 비정규직에 의해 지탱된다. 위는 고인 물이요, 아래는 불안정과 소외가 넘쳐나는 폐허다.

 

한편 진보 정규직 교수들은 이번 사태에서 검찰개혁 조국지지서명운동을 발의·주도했다. 5000여명의 교수·연구자가 동조했다. 그러나 우리 교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국수호대열의 앞장이 아니라, 깊은 자기반성과 그에 걸맞은 실천이다. 586세대 교수들은 대학에서의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고, 후배들과 젊은 세대로부터 불신당하고 있다. ‘지금 검찰개혁이 중요하다는 행동을 이끌던 교수들이 다음엔 노동개혁이나 교육개혁을 위해 이번처럼 열정적으로 직장이나 거리에서 싸울까? 고대해본다. 물론 노동개혁이나 교육개혁이 다음은 아니다.

 

수많은 검찰개혁 촛불로써 시민이 주체가 되는 사회개혁의 잠재력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민의 위대한 힘이 조국수호가 아니라 조국사태를 통해 드러난 철옹의 불평등과 계급 캐슬을 깨는 데 몰아닥치기 희망한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과 자기 아이의 평범한 삶을 위해서.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경향 2019.10.01.

 

윤석열과 검찰개혁의 역설

지난 주말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일대에 울려퍼진 시민들의 외침은 검찰개혁이 피할 수 없는 절박한 과제임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헌정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룬 19984, 김대중 대통령은 법무부를 찾아 자신을 핍박한 검찰에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선다고 말했고, 검찰은 이 말을 휘호로 써서 대검찰청 회의실에 걸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검찰은 바로 서지 못했고, ‘검찰개혁은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왜 그런가. 검찰개혁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명확히 답을 해야, 서초동 촛불집회의 염원이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 특별 지시로 서울지검에 12·125·18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된 199512,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문다고 어느 검사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불과 몇달 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희한한 논리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줬던 검찰이 이번엔 그들을 잡아넣기 위해 명운을 건 수사에 들어간 걸 두고 한 말이다. ‘검찰은 개다.’ 1218일치 <한겨레신문>에 실린 김인현 기자 칼럼의 이 구절은 두고두고 정치검찰의 상징으로 입길에 올랐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전례 없는 직접 대화에서 검사들이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도 그것이었다. 권력이 검찰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검찰을 독립시켜 달라, 대통령이 인사하지 말고 검찰총장에게 인사권을 달라, 정치권력과 분리되면 올바른 검찰로 거듭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수사에 개입하지 않고 검찰과 거리를 두려 애썼지만, 그것이 올바른 검찰을 만들지 못했다는 건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1980년대 화성 연쇄살인 사건 범인을 여럿 만들어낸 경찰의 강압 수사, 그리고 정보기관의 불법 수사가 밀려난 자리를 고스란히 차지한 게 최고의 엘리트와 법적 논리로 무장한 검찰 권력이었다. 정치권력이 검찰을 활용했지만, 어느 순간 검찰 스스로 여야를 이리저리 치며 정권을 판가름하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검사 출신의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검찰개혁의 요체는 검찰의 힘을 빼는 것이다. 검찰 권한이 약해지면 정치적 중립은 자연스레 따라온다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검찰개혁이 이슈가 되지 않는 건, 검찰이 우리처럼 막강한 권한을 갖지 않기 때문이란 뜻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가진 사법기관은 한국 검찰이 거의 유일하다. 과도한 힘을 가진 집단은 그 힘을 항상 착하고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적 중립이란 우산을 쓰고 스스로 절대 권력이 되려 한다. 한국 검찰이 지금 그런 단계에 와 있는 게 아닐까. 국회 인사청문회 전에 대대적 수사를 벌여 장관의 자진 사퇴를 압박하는 건 그런 징표로 읽힌다.

 

검찰 손에 예리한 칼을 쥐여주되 잘 제어해서 착한 칼잡이, 올바른 칼잡이로 만들겠다는 건 어리석은 기대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부 역시 이런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지난해 1월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권력기관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이미 검찰이 잘하고 있는 특수수사 등에 한해 직접 수사를 인정하겠다며 방대한 규모의 특수부를 용인했다. 그 특수부가 지금 대통령 인사권에 개입하고 국회 권한을 넘나들며 법무부 장관의 적격 여부를 가리겠다고 칼을 휘두른다. 역설적이다.

 

그러나 진짜 역설은 지금부터다. 조국 장관을 겨눈 검찰 수사는 진정한 검찰개혁, 곧 검찰의 힘을 확실하게 빼는 전기가 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며칠 전 검찰의 민주적 통제를 강조하며 형사부와 공판부 강화를 지시했다. 검찰의 직접 수사 기능을 축소하란 뜻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곧바로 서울 등 3곳만 남겨두고 나머지 지방청 특수부를 없애겠다고 밝혔다. 서울중앙지검엔 4개 특수부 말고도 공정거래조사부 등의 이름으로 직접 수사를 하는 부서가 여럿 있다. 간판만 바꿔 달거나 핵심인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지방 특수부 몇개 없애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윤석열 총장이 특수부 축소를 치고나온 건, 일단 소낙비를 피하겠다는 의도일 수 있다. 일시적 변화로 끝나지 않으려면, 대통령령 개정 등을 통해 법무부 장관이 치밀하고 뚝심 있게 제도 개혁을 밀어붙여야 한다.

윤석열 총장의 오만이 없었다면, 검찰주의자들의 진면목을 국민이 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수십만명이 검찰청사를 에워싸고 개혁을 외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예정된 길로만 흐르지 않는다. 박찬수논설위원실장 pcs@hani.co.kr 한겨레2019-10-02

 

'조국 수호'가 검찰 개혁인가?

끝없는 '조국 블랙홀', 집권세력이 결단해야

한국 정치사회의 진영 정치가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는 '조국 사태'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조국 장관을 둘러 싼 대립은 한국사회의 총체적 갈등을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안에 대한 이성적 접근과 팩트 보다는 감성과 이분법적 대결 논리로 점철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대통령의 조국 논란 가세와 정권적 이해 및 선거공학이 중층적으로 작동하면서 갈등은 비등점을 향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집권 세력은 윤석열 검찰총장이 정권에 저항하고, 항명한다는 인식의 바탕에서 조국 장관의 사퇴는 핵심 지지층의 이탈을 가져오고, 이는 국정동력의 상실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갈등의 증폭을 감수하면서 조 장관을 수호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여기서 이러한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이탈하는 중도층은 생각하지 않는가. 더불어민주당 등 집권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중도층과 무당층, 이른바 스윙 보터는 자유한국당으로 가지 않을 거라는 정치공학적 계산에서 극한적 갈등이 오히려 지지층 결집에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게다가 박근혜의 입원 기간이 석 달쯤 걸리고, 이후 형 집행정지 등의 변수라도 생기면 우리공화당을 지지하는 친박 유권자들과 한국당, 바른미래당 등의 보수분열이 가속화한다면 표심의 차원에서 잃을 게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직하다. 선거구도와 프레임 설정에 지금의 집권세력은 어느 정파보다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치는 언제나 요동칠 수 있고, 민심의 향배 또한 점치기 어렵다.

지난 주말과 개천절, 갈라진 시민들이 '검찰개혁 및 조국수호''조국 퇴진'을 외치며 서초동과 광화문에 집결했다. 검찰개혁은 조국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조국 장관과 그의 가족에게 제기된 여러 의혹에 대한 지적과 비판을 하는 자는 바로 검찰개혁을 저지하고 저항하는 수구세력으로 낙인찍는 구도, '검찰개혁=조국수호'의 등식 프레임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 등치에 의하면 조 장관 일가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검찰은 반()혁 세력으로서 정권에 저항하고, 대통령의 인사권에 항명하는 세력일 뿐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검찰개혁이 두려워 검찰 권력과 검찰 조직을 동원해 필사적으로 개혁에 저항하는 수구기득권의 상징이 되는 구도다. 이의 변곡점은 지난 27일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다.

급기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검찰수사를 '검란', '위헌적 쿠데타', '윤석열의 난'이란 표현을 썼다. 지지자들에 대한 총동원령에 다름 아니다. 조국 사태가 진영정치와 대결 구도로 전화된 상황에서 민주당 일부 의원들과 유 이사장의 이러한 표현은 진영논리를 확대재생산한다. 그러나 박근혜 국정농단을 단죄했던 촛불의 데자뷔가 윤석열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정상적이지 않다

 

검찰 수사의 범위나 압수수색 시점 등 검찰수사 방식이 조국을 임명하려는 대통령의 의지를 꺾으려 했다는 인식은 집권측으로선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박근혜 국정농단 압수수색 장소보다 더 많은 곳에 대한 압수수색은 이러한 인식을 강화시키고 있다. 정치에 개입하는 전형적 정치검찰이고, 과거의 못된 '버르장머리'가 나온다는 프레임이 나온 배경일 게다. 그렇다면 조 장관 일가에게 제기된 의혹도 완전하게 검찰이 만들어 낸 허구인가. 윤석열을 정권 저항에 등치시키려는 구도는 아무리 봐도 과하다.

목적을 위해 논리를 조작적으로 재구성하고, 불리한 상황을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정치기술을 우리는 정치공학이라 부르고, 프레임 정치라고도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역사'에 남을 이번 '조국 사태'를 극단적 진영대결로 몰아가며, 프레임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금의 정치권은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 검찰개혁이라는 대의를 방패막이로 내세우면 안 된다

 

이제 이성과 합리를 회복해야 한다. 검찰개혁을 반대하는 국민은 없다. 그동안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고 권한을 남용했다는 인식이 국민 일반의 확고한 인식임도 다시 확인됐다. 검찰개혁은 시대적 당위다

 

민심은 천심이다. 국민이 조국 장관만이 검찰개혁을 할 수 있다고 믿고, 그러한 여론이 압도적으로 형성된다면 검찰은 당장 조국 관련 수사를 멈추는 게 맞다. 그러나 법치는 어떻게 하는가. 대한민국의 사법체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주주의와 사법주의의 충돌은 또 어떤가. 문 대통령은 27일 메시지에서도 "검찰이 해야 할 일은 검찰에 맡기고, 국정은 국정대로 정상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도록 지혜를 함께 모아 주기 바란다"고 했다.


조국을 둘러싸고 찢기고 나눠진 지금의 상태는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집권세력은 물론 자유한국당도 조국 사태를 오로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퇴행적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검찰도 과잉수사라는 지적에 대해 겸허히 귀 기울이며, 본질에 다가가야 한다. 본질은 실체적 진실의 규명이다. 더 이상 갈라지고 찢기기 전에 정치 복원을 위한 집권세력의 결단이 필요하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프레시안 2019.10.04.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

광장의 파시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검찰개혁을 통해 조국 사태의 국면 전환을 시도하였던 지난달 28일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인근에서 열린 검찰개혁 촛불문화제는 광장정치에 불을 댕겼다. 개천절에는 조국 사퇴를 촉구하는 범보수 진영의 집회가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참가인원이 5만인지, 200만인지, 300만명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토론을 통한 합의와 타협의 장소인 국회는 공동화되고, 정치적 구호만 난무하는 광장이 세력을 보여주는 전시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광장이 단순한 힘의 전시 공간이 되는 순간, 참여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광장에서는 오히려 파시즘이 싹튼다.

 

조국 사퇴조국 수호의 광장 집회가 거듭할수록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민주주의는 퇴보할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국민통합의 약속을 저버리고 독선의 정치를 일삼은 집권세력의 책임이 크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이 정권이 흠집난 도덕성을 덮기 위해 다시 촛불을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촛불집회를 통해 표출된 민심을 반영하여 검찰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통치행위처럼 보인다. 여기서 파시즘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파시즘은 자유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파시즘은 권력을 위해 민중을 동원하는 방식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가 반대세력을 포용하기는커녕 대화조차 안 하고 국민과 직접소통하겠다는 것은 파시즘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민주주의는 우리 안의 파시즘을 경계하지 않을 때 위기에 직면한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가의 지도자가 비민주적 행태를 보이는 새로운 파시즘을 목격하고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정권이 붕괴하였다고 전체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한나 아렌트의 경고가 현실이 되고 있다. 파시즘도 마찬가지다. 민주적 열린 사회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야수로 되돌아갈 수 있다. 집권세력에 의한 권력의 사유화와 정치적 불의를 처벌하기 위해 스스로 촛불을 들고 광화문광장으로 나갔을 때는 새로운 정치가 시작할 것이라는 뜨거운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기득권 세력은 좌우와 관계없이 똑같다는 차가운 인식만이 남았다.

 

이 정권이 설령 광장 민주주의로 집권하였다고 하더라도 제도와 절차를 통한 민주주의 개혁에 힘썼어야 한다. 광장의 힘을 맛본 정권이 광장의 유혹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정권이 다시 민심을 반영하는 촛불집회의 이름으로 광장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에 호소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집권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광장의 민중을 동원할 때 여지없이 파시즘이 함께 등장한다. 지금처럼 의회정치가 실종되고 광장정치만 남아 있게 되면 파시즘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첫째, 파시즘은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파편화된 민중을 결집한다. 기득권 세력의 불법과 비위를 밝히기 위해 광장에 모이는 것은 깨어 있는 시민의 참여행위이지만, 부정과 불의의 의혹을 받는 자를 보호하기 위해 광장에서 집단의 힘을 과시한다면 파시스트 중우정치이다. 검찰개혁을 위한 촛불집회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인다 하더라도 검찰개혁=조국지지라는 프레임이 굳어진다면, 촛불을 들고 광화문광장에 나갔던 상당수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국민의 반은 등을 돌릴 것이다.

 

둘째, 파시즘은 권력 쟁취의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낸다. 우리 사회가 이미 촛불과 태극기로 양분되어 있음에도 운동권 출신 기득권 세력은 새로운 적을 찾아낸다. 타도할 부정부패 세력이 있을 때 저항 운동은 명료하고 강력하다. 싸울 상대가 뚜렷하지 않을 때 운동권은 스스로 부패한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노선과 맞지 않는 사람을 모두 적으로 낙인찍는다. 괴물과 싸우다 보면 스스로 괴물이 된다는 니체의 말처럼 이분법에 저항하던 사람들이 선악의 이원론에 갇혀 있는 것이다.

 

셋째, 파시즘은 차이와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하더라도 한 의견만 있는 곳에서는 건강한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다. 조국 사태에 대처하는 집권세력은 일사불란하다. 청와대, 민주당, 친정부 시민세력 모두 한 사람처럼 움직인다. 어쩌다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소위 작가, 지식인이라는 운동권 엘리트들이 나타나서 궤변으로 인신공격을 한다. 집단성이 도덕성을 넘어설 때 파시즘은 고개를 쳐든다.

 

넷째, 최고의 통치자가 민중과 직접 소통하려는 방식이 파시즘이다. 독일 철학자 베냐민이 파시즘의 핵심으로 꼽고 있는 것은 바로 정치적 권력이 민중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다. 민심을 듣겠다고 의회를 무시하면,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오늘날 민심을 조작하고 호도할 수 있는 많은 매체 기술이 발전하면서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파시즘은 이렇게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한국 민주화에 많은 기여를 했던 운동권 좌파 정부에서 파시즘의 기운이 엿보이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요즘 광장만 있고 의회는 없다. 정쟁만 있고,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촛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해야 한다.

이진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경향 2019.10.06.

 

천정환 교수의 조국 사태와 교수사회에 대한 반론 - ‘조국 수호가 아니라 검찰개혁이다

이 글은 102일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가 쓴, ‘조국 사태와 교수사회라는 칼럼에 대한 반론이다. 해당 칼럼은 조국 사태라는 창을 통해 한국 대학사회의 불평등과 특권계급화된 교수집단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천 교수는 글의 말미에서 전혀 엉뚱한 주제를 결합시키고 있다. “한편 진보 정규직 교수들은 이번 사태에서 검찰개혁 조국 지지서명운동을 발의·주도했다. 5000여명의 교수, 연구자가 동조했다. 그러나 우리 교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국 수호대열의 앞장이 아니라, 깊은 자기반성과 그에 걸맞은 실천이다라고 쓴 것이다.

 

그의 주장은 두 가지 지점에서 중대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 국내는 물론 미국, 중남미, 유럽, 아시아, 심지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수천 명 교수, 연구자들이 참여한 검찰개혁 촉구 시국선언을 일부 진보 정규직 교수들의 배타적 계급권력을 투사하는 이벤트로 치환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국선언이 기자회견에서 공개 발표된 이후 수십 여 언론에서 선언의 의미와 핵심 주장을 반복적으로 보도했다. 모든 미디어가 일관되게 강조한 것은 이 시국선언이 조국 개인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시급한 역사적 과제로서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선언이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 교수는 이를 조국 수호대열에 앞장서는 행위라고까지 강변하고 있다. 이 확고한 명제가 어떻게 조국 지지나아가 조국 수호서명운동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지점이다. 이 칼럼은 시국선언에 참여한 수많은 비정규직 교수 혹은 시간강사 선생님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90명의 공동발의자 가운데 이른바 비정규직 교수가 포함되어 있음을 망각한 것이다. 선언 발표 즉시 서명한 분들 중 모 대학교의 시간강사노조 위원장이자 비정규직 대학강사법 개정에 앞장선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해당 칼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처럼 사안과 관련된 기초적 사실관계(fact) 확인이 부실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반론을 통해 시국선언 참여자 일동은 강조드린다. 첫째, ‘시급한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국내 및 해외 교수, 연구자 시국선언은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이자 사회적 합의인 검찰개혁을 촉구하기 위한 선언이라는 것이다. 둘째, 시국선언 참여 교수 일동은 대학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언문 본문에서 이 나라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관건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왜곡된 분배문제와 노동현실개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천 교수에게 제안드린다. 현재는 우리 사회의 중첩된 질곡적 과제를 향하여 함께 싸워 나가야 할 때라고. 그중 전면에 대두된 검찰개혁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시점이라고.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계급 문제가 검찰개혁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순들은 모두가 기득권이란 이름으로 통칭되는 철옹성의 각기 다른 돌출점인 것이다.

 

같이 어깨 겯고 행동하자고, 토요일마다 서초동을 밝히는 거대한 촛불의 물결이 겨냥하는 거대한 기득권력의 성곽을 부수기 위해 함께 부딪치자고 곡진히 요청드린다.

김동규 | 동명대 교수·검찰개혁 촉구 시국선언 대변인 경향 2019.10.07.

 

'부익부' 정년연장에 반대한다

논설위원실을 떠나 취재현장에 돌아온 지 두 달쯤 된다. 기삿거리를 찾고, 자료를 읽고, 현장에 가고, 취재원을 만나거나 전화로 인터뷰하고, 기사 계획을 확정하고, 기사를 쓰는 일. 보직부장을 맡기 전까지 20년가량 매일 했던 일이니 낯설지는 않다. 문제는 업무 효율성이다. 순발력이 떨어졌다. 취재를 하다보면 허들을 만나게 마련이다. 멋지게 뛰어넘거나 요령 있게 비켜가야 한다. 이 대목에서 당혹감을 느낄 때가 많다. 집중력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신문 최종판 마감 후 텅 빈 편집국을 좋아했다. 혼자 컴퓨터와 씨름하다 창밖이 부옇게 밝아오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최근 토요판 커버스토리를 마감하며 편집국에서 두 번의 새벽을 맞았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젠 이렇게 하면 안되겠구나, 나를 위해서도, 회사를 위해서도.

 

정부가 2022년에 계속고용 제도도입을 검토키로 했다. 기업이 60세 정년을 넘긴 고령자를 의무 고용하되, 재고용·정년연장·정년폐지 중 선택하게 하는 방안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2일 노인의날을 맞아 어르신들이 정규직 일자리에 더 오래 종사할 수 있도록 정년을 늘려나가겠다고 말했다. 정년연장 논의가 사실상 본격화한 것이다. 저출생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정년과 연금 수급연령의 불일치로 소득 크레바스가 확대되고 있다는 게 배경이다.

 

인구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한다. 하지만 정년을 연장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라는 노인빈곤율이 개선될까? 청년고용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정년연장 외에 노동력을 확보할 길은 없을까? 그래도 정년연장이 필요하다면 어떻게해야 할까? 전문가들 견해를 들어봤다.

 

첫째, 정년연장은 노후 격차만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노인빈곤 대책의 타깃이 되어야 할 폐지 줍는 노인은 정년연장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는 공공부문이나 대기업 정규직 등 일부 상층 노동자만 정년연장의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제평론가인 이원재 LAB2050 대표 역시 영세 소기업에서는 60세 정년도 의미가 없다. 좋은 직장 들어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 노후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둘째, 청년고용에 미칠 영향은 보다 엄밀히 살펴봐야 한다. 남재량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달 한국노동연구원이 연 고령시대, 적합한 고용시스템의 모색세미나에서 고령노동력이 청년노동력과 보완관계라는 연구가 있으나, 업종·직종별로 미시적 분석을 할 경우 달라질 수 있다고 밝혔다. 계속고용 제도는 일본 사례를 벤치마킹한 것이지만, 한국은 상황이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이강국 교수는 일본은 아베노믹스 이후 경기가 나아지고 고용률이 높아졌다경기가 좋지 않은 한국 상황에서, 기업이 고령층 재고용 압력에 직면할 경우 청년고용을 줄이는 쪽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셋째, 경력단절여성이라는 대안이 있다. 0~14세 자녀를 둔 한국 여성의 고용률은 55.2%OECD 31개국 중 27위다(국회 입법조사처).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노동연구원 세미나에서 고령노동은 급감할 청년노동을 대체하기 어렵다경력단절 문제가 심각한 30대와 40대 초반 여성 고용의 확대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넷째, 정년연장이 불가피하다면 정교한 보완책은 필수다. 전문가들은 연공급제(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을 정하는 형태) 약화 및 강력한 임금피크제 시행 등을 주문한다. 한 노동경제학자는 익명을 전제로 공공부문에서 연공급제를 축소하고, 정규직·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를 줄이는 등 개혁을 선도해 민간부문이 따라오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조치 없이 정년을 연장할 경우 최저임금 인상 때의 혼란이 재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년연장 자체에 부정적인 이원재 대표는 인생 다모작을 지향하는 고용정책과 함께 기초연금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2027년 이전 정년이 연장되면 나는 수혜자가 된다. ‘갓물주가 아닌 한, 오래 일할 수 있다는데 싫어할 사람은 드물 터다. 하지만 청년이나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을 위한 보완책 없이 정년부터 늘리는 데는 반대한다. 기존 임금체계 아래서 정년연장 혜택을 입는 것도 낯부끄러운 일이다. 지금 51세인 나의 노동생산성은 40대에 미치지 못한다. 55세가 되고 60세가 되면 더 떨어질 것이다. ‘월급 루팡’(하는 일 없이 월급만 타 가는 직원)은 싫다. 일한 만큼 떳떳하게 받으며 다니다가 명예롭게 떠나고 싶다. 정부는 나 같은 노동자를 위한 길을 찾아달라. 그 길이 없다면, 나는 정년연장 대신 64세에 국민연금 수급자가 되는 쪽을 택하겠다.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경향 2019.10.07.

 

조국의 정치와 조국의 도덕성

왜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가?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을 둘러싼 최근의 장기적인 논쟁에서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장관 개인의 이른바 '위선적' 삶도 아니고 검찰의 매우 '적극적' 수사도 아닌, 정치와 도덕의 분리를 당연히 죄악시하는 태도가 별다른 반론이나 검증 없이 공인된 '이론'인 것처럼 주장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공직자의 윤리나 소신을 검증하는 일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이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정치와 도덕이 분리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치적 행위와 도덕적 원칙이 여전히 대립하고 갈등하면서도 충분히 양립이 가능하다고 믿는 편이며, 또한 양립해야만 한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이 지면을 빌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도덕의 분리가 유지되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실 정치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정치와 도덕의 분리는 별도로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자명한 교과서적 지식으로 통용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러한 분리를 통해서만 근대와 현대의 정치학이 성립될 수 있었고, 중세 봉건제의 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세속 정치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까지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치학의 교과서적 지식이 정치학 바깥의 세계에서도 반드시 좋은 평가를 받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정치와 도덕의 분리를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사상가를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15-16세기 피렌체 공화국의 공직자였던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19-20세기 독일의 정치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군주제 국가들에 포위된 국제 정세에서 시민의 자유를 본질로 하는 공화제 도시 국가는 결코 도덕적인 수단만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민의 자유와 평등은 공화정이 추구하는 도덕적 목표가 맞지만, 반드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정책 수단들만을 고집하게 되면 절대로 그 도덕적 목표를 구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것만으로도 그는 그 이후 오랫동안 통치자에게 악마의 가르침을 설파한 자로 낙인찍혔다. 베버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이 제정으로부터 공화정으로의 이행을 성공시키면서 동시에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승전국들과 강화를 맺어야 하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가 보기에 새로운 지도자는 우선 강화조약의 당사자로서 그 직전까지 독일의 전쟁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이 지도자는 또한 전선에서 돌아올 남성 참전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서 왕정복고를 막고 민주공화정을 지켜낼 수 있는 뛰어난 '선동가'여야 했다. 그러나 베버 역시 이러한 입장 때문에 전쟁 이후 독일에서 히틀러가 대중의 지지를 얻어서 '인류의 반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장본인이라고 평가를 받았다.

 

마키아벨리나 베버의 판단을 현대 민주주의에 적용하자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시도는 명백한 시대착오 오류의 위험을 안고 있다. 그들의 시대에 정치란 남성의 전유물이었으며, 또한 일정 정도 시민의 참여가 인정되는 경우에도 대체로 고위 엘리트들이 전쟁과 직결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무리가 아니었던 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수용된 역사, 특히 그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역사에는 분명히 우리가 참고할만한 진실이 담겨져 있다고 본다. 그 진실이란 바로 정치적 판단과 행위가 본질적으로 어떤 경우에도 결코 완벽하게 정당화될 수 없고, 그래서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 결단에 흔히 따라오는 수식어 중에는 '비정함'이 있다. 정치의 비정함이란 '필요하다면' 옳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폭력과 강제력을 사용하는 결단을 내려야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정치적 결단이 언제나 100%의 정당화가 불가능한 선택지들 사이에서 반드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는 사실, 그리고 다가오는 결단의 순간을 결코 회피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운이 좋아서 51% 49%의 정당화가능성의 선택지들 사이에서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1% 0%의 선택지들 사이에서 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말처럼 망설임 없이 책을 덮고 무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 공화정 시민의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이를 결정의 순간은 피할 수 없고, 어떤 결정이든 내려져야 하니, 일단 결정이 내려지고 나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치적 결정이 도덕 원칙과는 달리 완벽하게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말은 곧 모든 정치적 결정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이다. '정치는 결과로 말한다'는 의미에서 '결과'란 곧 정치가 이뤄내는 성과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정치적 결정에는 어쨌거나 '대가', 혹은 덜 실존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비용'이 따른다는 점을 의미한다. 혹시라도 우리가 A라는 결정 대신에 B라는 결정을 내리게 되면 이 비용을 면제받을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설사 BA보다 도덕적 견지에서 보다 바람직한 결정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인데, 보다 도덕적 결정이고 더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로 낙관적인 희망이며, 각자의 세계관 안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는 주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믿는 세계관에서 봤을 때 비도덕적 선택을 하는 다수가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그 결정에 반대하고 있다면, 도덕적 결정의 비용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증가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각자의 도덕 원칙에 대한 상대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이러한 충돌은 당연하게도 불가피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은 대가를 치루는 한이 있더라도 도덕 원칙에 최대한 부합하는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기를 희망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도덕 원칙과 달리 정치적 결정에는 대가가 따르기 때문에, 또한 책임이 발생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책임'이란 대가나 비용처럼 단순히 불가피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책임 덕분에 이미 내려진 결정에 대해 반추할 수 있고, 앞으로 반드시 다가올 결정의 순간에 더 나은 선택을 준비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책임이란 언제나 타인에게 지는 것이며, 타인에게 묻는 것이다. 비도덕적 정치가는 자신의 권력욕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게 책임을 진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도덕적 비정치가는 분명히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책임을 지고 있다고 확신하겠지만, 실제로는 살아있는 타인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원칙에 대해서 충실한가 여부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전자는 정치에서 도덕을 배제하려 하고, 후자는 정치를 도덕에 일치시키려 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서로 완전히 다른 입장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정치에서 책임의 공간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물론 정치와 도덕의 불일치는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불만족과 불안감의 지속적 원천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와 도덕이 분리되고, 그 사이에 긴장관계가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했을 때에만 불가피한 대가를 전제로 내려지는 정치적 결정이 비로소 책임의 문제와 결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때에만 결정을 내리는 자는 또한 기꺼이 책임지려는 자가 될 것이다        

홍철기 서울대학교 강사 프레시안 2019.10.07.

 

대통령, 약속대로 하면 된다

대학 서열 구조는 입시 경쟁과 사회 불평등의 연결고리

조국 논란은 한국 사회에 소중한 기회다. 검찰 개혁 뿐만 아니라 교육 불평등과 계급-계층 사다리 같은 근본 문제들을 새삼 강렬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국 논란은 또한 장벽이기도 하다. 모처럼 화제에 오른 이 문제들을 조국 찬반의 회오리로 다시 가려 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930일 발표된 전국 교수-연구자-대학원생 성명서는 마치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처럼 반갑다. "촛불항쟁의 정신을 되살려 전면적 사회대개혁에 나서자!"라는 제목의 이 성명서는 "검찰 개혁의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하면서도 "구조적 불평등과 소수 특권집단이 구축한 '캐슬'의 교육적-문화적 특권과 차별, 이로 인한 광범위한 박탈감과 환멸이 근본적 문제임"을 직시하자고 촉구한다. 성명서가 강조하는 대안은 "전 방위적 경제 개혁, 노동 개혁, 교육 개혁"이다.

 

정확한 지적이다. 경제, 노동 그리고 교육 개혁이 시급하다. 이 중 교육 개혁에 대해서는 이미 조국 논란 초기부터 정부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벌써 한 달도 더 지난 91일에 문재인 대통령은 "대입 제도 재검토"를 지시했다. "현행 입시 제도가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많다"는 것이었다. 조국 논란 와중에 학생부종합전형(이하 학종)이 쟁점이 된 탓에 나온 발언이기도 하지만, '교육 개혁'이라고 하면 입시 제도의 이러저런 변경부터 떠올리는 한국 사회 상식을 충실히 반영한 대응이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입시가 좀 더 '공정'해지기만 하면 되는가? 정말 입시 제도 변경이 지금 필요한 교육 개혁의 핵심 내용인가?

 

대학 서열 구조는 입시 경쟁과 사회 불평등의 연결고리    

입시 제도가 문제라는 이들은 대개 학종 같은 수시 비중을 줄여야 한다고 한다. 금수저에게만 유리한 입시 제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은 정시 확대가 된다. 더 나아가 아예 정시가 100%였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도 있다. 시험 한 번으로 대학을 결정하던 방식이 더 '공정'했다는 것이다.

 

물론 학종은 문제가 많다. 학생부 수상 경력 기재나 자기소개서처럼 부모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하는 요소들은 폐지해야 한다. 그러나 수시 안에 학종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학생부교과전형도 있고, 금수저와는 가장 거리가 먼 이들에게 대학 교육의 문을 여는 고른기회 전형이나 지역균형선발 전형도 있다. 이들을 다 없애거나 줄여서 정시 중심 체제로 돌아가는 게 과연 바람직한가?

 

만약 정시 중심 체제로 돌아간다면, 2000년대처럼 사교육이 다시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미 경험했듯이 사교육의 비대한 성장은 공교육을 황폐화시킨다. 하지만 이것만 문제가 아니다. 돈 많은 집안일수록 더 많은 과외 수업을 시킬 수 있고 웬만하면 이는 시험 성적 차이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미 작년에 서울대는 정시 비율을 늘리면 강남3구 출신 합격자 비중만 늘어난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정시가 모든 계층에게 더 '공정'하다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

 

이렇듯 입시 제도는 이리 바꾸든 저리 바꾸든 한계가 많다. 뭔가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한, 입시 경쟁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고 입시 제도 변경은 늘 변죽만 울릴 것이다.

 

그 문제란 결국 계급-계층 불평등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입시 경쟁을 통해 특정 대학 졸업 증명서를 획득하느냐 혹은 못하느냐에 따라 계급-계층 지위가 결정된다. 4년제 대학 졸업장을 지닌 사무직-기술직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의 임금 격차가 너무나 크다. 게다가 전자 안에서도 이른바 '수도권 명문대학' 졸업장을 갖춘 이들은 관료 체계를 통해 안정적으로 성공 사다리를 오르는 반면 나머지는 이를 바라보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려야 한다.

 

그래서 교육 개혁 무용론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어차피 계급-계층 구조 자체를 손보지 않는 한, 교육 제도는 아무리 바꿔봐야 소용없다는 것이다. 헛되이 교육 개혁을 논하며 시간을 허비할 바에는 차라리 노동 개혁에 매진하는 쪽이 낫다고도 한다. 노동시장을 뜯어고쳐 임금소득자 내부의 소득 격차를 줄이면 계급-계층 사다리에서 더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입시나 취업 경쟁도 줄어들지 않겠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언제나 실현될 수 있을지,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해법이기도 하다. 게다가 임금 격차 완화는 제도의 문제만은 아니다. 계급-계층 간 힘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득 격차를 줄이려면 저임금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단결하여 임금 차이를 최소화하는 단체협약을 쟁취하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 그러나 21세기 한국 노동조합운동이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여러 계기, 숱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입시 제도 개혁론과 노동 개혁 우선론은 한국 교육 문제를 바라보는 양 극단의 시각이라 할 수 있다. 한 쪽은 지나치게 부분적 문제에 집착하고, 다른 한 쪽은 너무 근본적인 문제만 바라본다. 전자에만 매몰되다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기성 질서 안에서 맴돌 테고, 후자만 강조하면 교육 문제에는 손을 놓게 될 것이다. 둘 다 기존 교육 '구조'를 방치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혹시 두 접근법이 서로 만나는 중간 지점은 없을까?

 

있다. 입시 경쟁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경쟁인가? 서울대를 정점으로 피라미드처럼 늘어선 대학 서열 구조에서 보다 위쪽으로 진입하려는 경쟁이다. 다른 한편 노동시장 불평등 구조의 골간에 자리 잡은 것은 무엇인가? 대학 졸업 여부, 명문대 졸업 여부다. , 입시 제도와 계급-계층 불평등의 중간에 바로 대학이 있다. 대학 서열 구조가 입시 경쟁과 사회 불평등의 이음매 구실을 한다.

 

그렇다면 출발점은 분명하다. 대학 개혁에서 시작해야 한다. 대학 서열 구조 해체에 나서야 한다. 대학 서열 구조 해체야말로 한계가 너무 큰 개혁 방안인 입시 제도 변경과 너무 장기적 개혁 과제로만 보이는 계급-계층 불평등 해소를 잇는 꼭짓점이다. 대학 개혁을 추진하기만 한다면, 이는 부분적 개혁과 근본적 개혁, 두 방향 모두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이미 구체적인 대학 개혁 방안이 있다. 공동 선발-공동 수업-공동 학위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대학 평준화가 그것이다.

 

대학 개혁의 요체는 대학 서열 구조 해체     

입시 중심 교육과 대학 서열 구조에 문제의식을 지닌 이들은 이미 20여 년 전인 2000년대 초부터 대학 개혁 방안을 고민했다. 정진상 교수(경상대, 사회학)<국립대 통합네트워크: 입시 지옥과 학벌 사회를 넘어>(책세상, 2004)가 이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저작이다. 이 책에서 정진상은 서울대를 포함한 국공립대학들을 학생 선발과 수업, 학위 수여를 함께 하는 통합네트워크로 묶자고 제안했다. 이 통합네트워크는 별도 입시 없이 대학입학자격고사를 통과한 학생들을 지역별로 선발한다. 이러한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 방안은 곧바로 민주노동당 등 진보 세력의 교육 개혁안으로 채택됐다.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지나면서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 안도 진화를 거듭했다. 기존 국공립대학들을 바탕으로 공동 선발-공동 수업-공동 학위의 대학연합체제를 구성하고 현행 입시는 대학입학자격고사로 대체한다는 기본 내용은 유지됐지만, 논의와 연구를 거듭하며 여러 내용이 덧붙여졌다. 너무 복잡해져서 때로는 이 점이 대학 개혁 운동의 대중화를 방해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가령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가 펴낸 <입시-사교육 없는 대학 체제: 대학 개혁의 방향과 쟁점>(한울, 2015)에는 참으로 다양한 세부 방안과 실행 계획들이 실려 있다.

 

그러나 골자는 복잡할 게 없다. 공동으로 학생을 뽑고 공동으로 학위를 주는 대학연합체제를 구축하여 현재의 대학 서열 구조를 타파한다는 것이다. 자사고와 특목고가 등장하기 전에 고등학교 체제를 비슷한 방식으로 개편했던 전례에 따라 이름 붙인다면, '대학 평준화'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방향에서 지금껏 제출된 개혁안들의 핵심을 가장 간명하게 정리한 문헌으로는 교육혁명공동행동 연구위원회가 펴낸 <대한민국 교육혁명: 교육 체제의 혁명적 전환, 미룰 수 없다>(살림터, 2016)가 있다.

 

<대한민국 교육혁명>의 개혁안이 2000년대 대학 개혁안과 크게 달라진 점은 공동 선발-공동 학위의 대학연합체제에 상당수 사립대학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국공립대학 비중이 24%에 불과하다. 비슷한 경제 수준 국가들 가운데 국공립대학 비중이 이렇게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혹시 이것 역시 일제 잔재인가. 아무튼 이런 상태에서 국공립대학들만 통합해서는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특히 수도권에는 사립대학들이 밀집한 반면 국공립대학은 서울대, 서울시립대, 서울과기대 정도다.

 

그래서 <대한민국 교육혁명>은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사립대학들을 대학연합체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립대학들은 공적 재원을 지원받는 만큼 이미 준공영 체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실은 연세대나 고려대 같이 대학 서열 구조의 수혜를 받는 이른바 '명문' 사립대학일수록 현재 더 많은 정부 지원을 받고 있다. 계속 이런 지원을 받는다면, 이들 대학 역시 대학연합체제에 합류해야 할 것이다. 이를 반대한다면, 이들 대학은 국고 지원 없이 완전히 자력으로 생존해야 할 것이다.

 

남는 문제는 대학 서열 구조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서울대다. <대한민국 교육혁명>은 서울대를 수도권 대학연합체제에 통합시키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만 되면 대학연합체제가 구축되더라도 다시 그 안에서 수도권-비수도권 간 서열화가 나타날 위험이 있다. 어쩌면 서울대의 학부 과정은 수도권 대학연합체제에 통합하되 대학원은 학과별로 지역 거점 국립대로 이전하는 방안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런 조치는 권역별로 계열이 특성화된 대학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손우정, "서울대 전국 대학화 전략?: 권역별 계열 특성화 공공네트워크 모델", <입시-사교육 없는 대학 체제>) 강력한 지역 균형 발전 전략이 될 수도 있다.

 

이렇듯 방책들은 이미 갖춰져 있다. 그리고 이 중 일부는 현 집권 세력이 지난 두 차례 대선에서 약속한 내용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조기 대선을 앞두고 펴낸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 완전히 새로운 나라, 문재인이 답하다>(21세기북스, 2017)에서 이렇게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대학 서열화를 없애고 전문 분야로 재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대학 평준화가 필요하다고 보는 거죠. 예를 들면 공동입학, 공동학위제가 가능합니다. 이 과목은 저 대학에서, 저 과목은 이 대학에서, 단순히 학점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공동학위를 주는 겁니다. 제가 지난 대선[2012년 대선-인용자] 때 국공립대학부터 먼저 공동입학, 공동학위제를 하겠다고 공약을 했었습니다 ... 그러면 적어도 서울대학과 지방 국립대학 간의 서열화는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 이 제도가 정착되면 사립대학으로 확대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약속: 행동하는 양심,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약속", <대한민국이 묻는다>)

 

이 약속대로 하면 된다. 이제 우리는 더는 주저하지 말고 이 약속의 즉각적 이행을 요구해야 한다.

 

대학 평준화와 무상화를 결합하자

 

대학 평준화는 대학을 둘러싼 또 다른 중요한 개혁 과제들과 결합해 상승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예컨대 대학 교육 무상화가 그렇다. 대학 무상화는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현실이고, 버니 샌더스 운동이나 영국 노동당 같은 영미권 좌파의 핵심 정책이기도 하다. 우리의 경우는 대학 평준화와 연동해 단계적으로 대학 교육을 무상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대한민국 교육혁명>이 이미 제시하는 대로 대학연합체제에서는 등록금을 대폭 낮춰야 한다('반값 등록금'). 대학연합체제에 합류한 사립대학은 국고 지원을 받는 대신 학생들에게 받는 등록금을 인하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대학연합체제에서는 등록금을 폐지해야 한다. 대학연합체제의 이러한 단계적 무상화는 학생들이 서열화된 잔존 사립대학 대신 대학연합체제를 선택하게 만드는 중대한 유인 요소가 될 것이다.

 

사실 지금 한국 대학이 요구받는 개혁 과제는 하나 둘이 아니다. 인구 구조와 지식-기술 환경 변동에 따라 앞으로 대학은 성인을 위한 평생 교육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 또한 정보화 혁명(유행에 따라 과장을 좀 섞으면 "4차 산업혁명")에 부응해 교육 체계와 방식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지구 자본주의, 지구 정치 질서, 지구 생태계의 3중 위기에 맞서 교육 내용도 새로 짜야 한다. 이 가운데 어느 과제도 관료화되고 기업화된 현 대학 체계를 뒤흔들지 않고서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

 

대학 평준화는 이런 화석화된 대학 체계를 크게 흔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단순한 대학 '개혁'이 아니라 이 시대가 요구하는 대학 '혁명'의 출발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

 

조국 논란은 의도치 않게 한국 사회에 이 혁명의 시급함을 상기시켰다. 진보 세력이 오랫동안 주장하기는 했지만 가장 급한 과제들 목록에서는 항상 빼놓기 일쑤였던 대학 개혁을 이제는 맨 앞에 내세우자. 소리 높여 입시 철폐-대학 서열 구조 타파를, 대학 평준화-무상화를 외치자.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프레시안 2019.10.08.

 

 

대통령이 책임져라

2014년 세월호가 침몰하고 보름 뒤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손팻말에는 박근혜, 네가 책임져라라고 적었다. 세월호 집회 때 박근혜 퇴진구호가 나오면 시비가 붙곤 했다. 대통령에게 최종적 책임이 있다는 사람들과 슬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람들 사이의 다툼이었다. 하지만 2016년 촛불광장은 세월호 침몰이 그 누구도 아닌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 박근혜의 책임이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지금 나라가 갈가리 찢겨 싸우고 있는 것도 바로 대통령에게 그 책임이 있다.

 

이런 적은 없었다. 해방 정국 찬탁과 반탁, 좌익과 우익 시위가 경쟁적으로 개최됐지만 정부가 수립되기 전의 일이다. 그 뒤로 대규모 시위는 정권을 향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정치권력은 공권력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성난 군중과 대결케 했지만 스스로가 대규모 군중을 조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권력이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살아있는 권력을 대신한 군중들이 그에 반대하는 군중들과 맞붙고 있다.

 

이런 적은 없었다. 수구와 진보가, 보수와 개혁이, 친여와 친야가 갈등하고 대립한 적은 있었어도 진보와 개혁과 민주세력이 이처럼 반목하고 불화한 일은 없었다. 김대중이냐, 백기완이냐를 두고 논쟁하고 NL이냐, PD냐를 놓고 다툰 적은 있었어도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이었다. 지금처럼 온 나라가 시끄럽게 끝이 안 보이도록 대결하고 적대하는 일은 없었다.

 

대통령 때문이다. 검찰도 조국도 아닌 대통령 때문에 나라가 갈가리 찢기고 있다. 대통령이 할 일을 국민에게 미뤄서다. 임명권자가 결단을 하지 않아서다. 검찰총장이 검찰개혁에 방해가 된다면 총장을 해임하고 정의부(Ministry of Justice, 법무부)의 수장이 정의 구현에 장애가 된다면 장관을 해임해야 한다. 윤석열을 택할 것인가, 조국을 택할 것인가 임명한 사람이 결단을 해야 한다.

 

촛불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되 촛불로 국정을 운영하려 해서는 안된다. 검찰개혁의 추동력을 국민으로부터 얻으려 해서는 안된다. 이미 수많은 국민들이 투표로써 권력을 위임했다. 수임한 권력을 방기하고 국민 뒤에 숨으려 해서는 안된다. 대통령은 이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이고 최고 권력자다. 검찰이라는 권력기관의 개혁은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가 해야 하는 것이지 국민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

 

국민들이 검찰청 앞에서 검찰개혁을 외치고 있다. 물론 국민들이 권력기관의 개혁과 해체를 요구한 일이 없지는 않다. 2008년 촛불시민들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와 함께 KBS의 낙하산 사장 반대와 공영방송 수호를 외쳤으며 2013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은 국정원의 해체를 요구하며 촛불을 들었다. 그러나 지금과 다른 것은 대통령을 대신해 공영방송 수호와 국정원 해체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도 함께 퇴진할 것을 외쳤다는 데 있다.

 

대통령의 의지로도 할 수 없는 게 검찰개혁이라면, 검찰이 대통령도 어찌할 수 없는 권력기관이라면 국민들은 대통령을 선출할 것이 아니라 검찰총장을 선출해야 한다. 그러나 아니지 않은가. 대통령은 스스로의 인사권을 행사해 검찰총장을 임명하지 않았는가. 지금 서초동에서 국민들이 외치는 요구는 윤석열더러 스스로 물러나라는 소리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왜? 임명도 해임도 인사권자가 해야 할 일이지 국민이 대신해서 요구하는가.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윤석열이든, 조국이든 어느 한쪽의 인사가 잘못됐음을 인정해야 한다.

 

수개월째 조국사태에 모든 이슈가 묻히고 있다. 103일로 일진다이아몬드 노동자 파업이 100일이 됐고 105일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희망버스가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의 김천 도로공사 본사 점거농성에 결합했다. 이틀 뒤면 삼성에서 노조를 설립하려다가 불법해고된 김용희씨의 강남역 고공농성이 100일째로 접어든다. 그러나 조국 관련 뉴스가 연일 언론을 도배하면서 노동자들의 목숨 건 생존권 투쟁은 외면당하고 있다. 106일엔 세월호 참사 2000일 추모제가 열려 전면 재수사를 촉구했지만 이곳도 조국사태란 블랙홀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부실수사, 편파수사의 책임은 온전히 검찰에 돌려졌고 청와대와 정부로 향했어야 할 진상규명 요구는 검찰, 언론, 사법부를 바로잡고 나라도 바로 세우자는 한 여당 의원의 촉구로 대체됐다.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 친여와 친야가 교대로 광장을 점령하게 만든 책임, 지난 역사에서 김대중과 노무현, 그리고 지금의 문재인에게 투표함으로써 정치적 이해를 함께해온 친구와 동지들이 서로 낯을 붉히며 반목하게 한 책임은 바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있다. 정당의 대표가 아니라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책임을 지고 사태를 수습하라. 그것이 대통령의 할 일이다.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경향 2019.10.08.

 

한글날에 생각하는 문화와 생명

일제강점기에 소학교를 다녔던 선친께서 들려주신 일화다.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했지만 아이들은 대화 중에 계속 조선말을 썼다. 어느 날 일본인 교장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앞으로 조선말을 쓰다 걸리면 운동장 구석에서 큰 돌덩이를 들고 서 있는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벌을 받게 되었는데 다른 아이가 잡혀 차례를 넘겨줄 때까지 울면서 계속 돌덩이를 들고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억압적 언어정책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깊은 정신적 상흔을 남겼을까.

 

언어와 인권에 관하여 유명한 사례가 있다. 캐나다의 백인 지배자들은 원주민들을 주류 사회에 동화시키기 위해 19세기 초부터 기숙학교 시스템을 운영했다. 원주민 부족의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떼어내 수백킬로 떨어진 기숙학교에 입교시켜 영어나 프랑스어, 서양 문화, 서양 종교를 가르친 것이다.

 

원주민 아이들은 분리 트라우마, 언어와 문화 박탈, 체벌, 열악한 생활환경 때문에 수천명이 죽었고 열등감, 자존감 상실, 정체성 혼란으로 평생 고통을 겪었다. 자기 부족의 언어를 썼다는 이유로 묶여 있거나 비누를 먹는 벌을 받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서 이런 학교들이 없어졌지만 이미 원주민들의 영혼은 상할 대로 상한 상태가 되었고, 이들의 과거사 문제는 지금까지도 캐나다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최근 들어 가톨릭과 개신교에서는 자기들이 기숙학교 운영에 관여했던 역사적 죄과를 통회한다는 발표를 했다. 연방정부 차원에서 배상금을 지급하였고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상 조사와 화해를 위한 정책적, 교육적 조처를 발표하였다. 원주민 아이들에게 모어 사용을 금지시킨 일이 문화적 제노사이드에 해당된다고 결정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자신의 언어를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상태를 인권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부터이다. 원래 인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누리는 개인적 권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런 면에서 1세대 시민적·정치적 권리와 2세대 경제적·사회적 권리는 내용상 다르지만 개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런데 언어는 한 무리의 사람들 전체 정체성의 일부로서, 그리고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언어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권리라기보다 집단의 권리라는 특징이 있다. 이 논리를 확장하면 어느 집단이 공유하는 역사, 제의, 생활양식, 의식주 등과 관련이 있는 인간의 모든 공통적 활동을 집단적 권리로 규정할 수 있다. 음악, 미술, 문학 등 예술 활동만이 아니라 인류학적 의미에서의 문화를 생각하면 된다.

 

어느 인구 집단이 자신의 문화와 삶의 양식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그 집단이 몸담고 있는 대지와 산과 강과 숲, 그 안의 동식물, 자연환경, 생태, 경관 등의 조건이 유지되어야 한다. 이런 조건 역시 그 사람들이 공통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하는 집단권리이다. 얼핏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문화와 환경이 인권에서 이런 식으로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된다.

 

이런 깨달음에서 뒤늦게 3세대 문화적·환경적 권리가 집단권으로 개념화되었다. 이처럼 3세대 인권이 비교적 최근에 등장하긴 했지만 그것은 상당히 긴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식민지배와 착취, 2차대전 이후 개발 시대의 도래,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그것이다.

 

이런 눈으로 보면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의 한국 역사가 문화적 정체성의 유지와 지속가능 발전을 고민한 3세대 인권투쟁의 파노라마로 그려질 수 있다. 언어라는 관점에서 보면, 중국어에 치였고, 일본어에 치였고, 지금은 영어에 치이고 있는, 그러나 끈질기게 생명을 잃지 않은 한국어의 인정투쟁, 언어권리의 수호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최근 기후위기와 대멸종의 징후를 암울하게 전망하는 여러 논의가 나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언어와 환경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가 이목을 끈다. 언어다양성과 생물다양성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소수언어가 사라지면 생물다양성도 크게 낮아진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에 인간 언어의 비밀이 숨어 있다.

 

모든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의 경험과 집단지성이 녹아 있는 인류 지혜의 백과사전이다. 단순한 팩트가 아닌 세상을 보는 관점과 가치관까지 언어 속에 들어 있다. 자연계를 대하는 태도 역시 언어에 나와 있다. 생물종의 명명, 동식물과 관계 맺는 표현, 절기를 구분하고 날씨에 맞춰 농사를 짓는 지식집약적 노동관 등이 언어의 형태로 표현되고 전승된다.

 

그런데 자연을 돈벌이 수단으로 착취하는 자본주의형 개발과 현대농업이 기승을 부리면서 전승지식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과 생물다양성이 함께 사라지고 있다. 단일경작과 화학농법으로 인해 농업 섹터가 온실가스 배출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토착어의 소멸과 생물다양성의 감소와 기후위기의 심화는 하나의 사이클로 돌아가는 악순환이다. 이제 언어권리는 한 집단이 자기 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넘어, 인간 생존의 바로미터가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한국에 적용해보면 맨 먼저 제주도의 상황이 떠오른다. 유네스코는 2010년에 위험에 처한 세계의 언어 현황이라는 조사에서 세계 모든 언어의 건강도를 여섯 단계로 분류하였다. 안전 취약 확실한 위험 상태 심각한 위험 상태 위중한 상태 소멸. 여기서 제주어는 소멸 직전의 위중한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다. 제일 젊은 사용자가 조부모 또는 그 이상 세대이며 모어를 부분적으로 또는 간혹 사용하는 상태인데, 당시에 이미 70~75살의 세대 5천명에서 1만명 정도만 이 범주에 속한다고 했으니 지금은 더 줄었을 것이다.

 

나는 제주 강정 해군기지, 개발과 부동산 투기 광풍, 비자림 도로, 신공항 건립과 같은 소식을 들을 때마다 소멸의 길에 들어선 제주어를 함께 기억한다. 제주어의 운명이 제주의 문화, 제주의 환경, 제주도민의 생존권과 거대한 인과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개발론자들은 알고 있을까. 개발을 부추기는 정치인들은 현세대와 자식세대와 환경에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 인식하고 있을까.

 

강영봉 제주어연구소 이사장은 양전형 시인의 사라오름이라는 시를 인용하면서 제주어를 살리자고 호소한다. 가장 아름다운 토착어로 표현된 가장 격렬한 생명권 선언이다.

 

올해는 유엔이 정한 세계 토착어의 해이다. 토착어는 곧 생명이다. 한글날의 의미를 언어만이 아니라, 문화다양성과 만물의 공생을 지향하는 날로 넓혀 잡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한국인권학회장 한겨레 2019-10-8

 

지식인 좌파와 빈민 우파

불평등 문제의 세계적 석학인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최근 브라만 좌파 대 상인 우파라는 논문에서 1948~2017년 프랑스·영국·미국의 정치를 분석한 바 있다. 피케티는 불평등을 분석하던 자신의 종래의 연구방식을 뛰어넘어 이 논문에서는 불평등의 해소를 가로막는 정치지형의 변화를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다. 브라만은 인도에서 최상층인 지식인 엘리트를 지칭하며 상인은 비즈니스 엘리트를 지칭한다. 브라만 좌파의 경우 원뜻에 더 충실한 말은 아마도 지식인 좌파일 텐데 강남 좌파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피케티는 브라만 좌파를 비난받아야 할 위선자라는 뜻으로 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보수언론과 보수정치인들은 강남 좌파 혹은 브라만 좌파를 위선자로 색칠하고 있다.

 

피케티의 분석에 의하면 1950~1960년대에 사회당, 노동당 그리고 민주당 등 각 나라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사람들은 주로 저학력과 저소득층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고학력의 지식 엘리트 계층이 진보정당에 더 많이 투표하는 반면, 부자 엘리트는 여전히 보수정당에 투표한다. 따라서 이제 진보정당은 전통적인 지지층이었던 노동자, 중하류층의 유권자를 더 이상 대변하지 않는다. 결국 각국의 정치지형은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가 서로 대립하는 구도(피케티는 이를 다층적 엘리트정당 체제라고 부른다)로 바뀌었기 때문에 불평등 완화에 미온적이라는 것이다. 정당들이 모두 엘리트들에 의해 포획되다 보니 대다수 유권자는 자신을 대변하는 정당이 없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극우정치인들은 그 틈새를 파고든다.

 

나는 피케티의 결론에 많은 부분 공감을 한다. 특히 좌파정당들이 무분별하게 추진한 세계화와 금융자유화에 대한 비판은 경청할 만하다. 하버드대학의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 역시 미국의 진보들은 불평등의 증가를 초래한 정책, 즉 세계화와 금융규제철폐 같은 정책의 공범이었으며, 결국 지난 20년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나는 피케티의 논의에 빠진 한 가지를 추가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빈민 우파혹은 강북 우파의 존재이다. 이들의 존재는 불평등 심화에 지식인 좌파의 존재만큼 아니 그보다 오히려 더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정치학자들은 정당의 이념을 나눌 때 경제적 차원을 중심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현대정치를 잘 살펴보면 이민 문제, 인종주의, 젠더 문제, 지역 문제, 반공이데올로기 등 비경제적 이슈들에 의해 각국 좌우정당들의 지지기반이 재조정된다. 미국의 흑인들이나 라틴계 미국인들이 미국의 민주당을 강력히 지지하는 것, 그리고 저임금, 저학력의 남부 백인유권자들이 공화당을 강력히 지지하는 것은, 단지 소득이나 부와 같은 경제적 변수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없으며, 공화당이 선거 때마다 끊임없이 사용하는 인종 카드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공화당이 사용하는 인종 카드는 의도적으로 소수인종에 모멸감을 줌으로써 남부 백인들의 지지를 반사적으로 유도해 내는 데 목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보수정당은 선거 때마다 지역 카드반공 카드를 공격적으로 사용해 왔고 그럼으로써 가난하고 저학력의 고령층 유권자들을 자신들의 강력한 지지세력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사실 2차원으로 정치적 경쟁을 분석하면 강남 좌파강북 우파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는 몇 년 전 일련의 논문들과 저서에서 미국에서 인종 카드의 사용은 불평등 완화를 위한 정책 시행을 그만큼 더 어렵게 만들고 진보정당으로 하여금 경제적 이슈보다 비경제적 이슈에 더 집중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음을 보인 바 있다. 피케티는 좌파들이 무분별하게 추진한 세계화로 인해 빈민 우파들이 생긴 걸로 보고 있지만 이들의 존재는 세계화로 생긴 단순한 반동이 아니라 그 훨씬 이전부터 존재한 현상이다.

 

빈민 우파들의 존재에 직면하여 진보는 무엇을 할 것인가? 진보는 무엇보다 불평등 완화에 초점을 맞춘 강력한 진보적 의제를 채택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경제적 이슈에 포획된 저임금, 저학력의 유권자들을 통합하고 불평등을 물리칠 수 있는 드넓은 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 불평등 완화에 미온적일수록 비경제적 이슈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또 지식인 좌파임을 부끄러워하기보다 자신들의 이익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을 유권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거의 모든 진보적 개혁은 초기에는 브라만 좌파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들이 모두 위선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선거가 다가온다. 빈민 우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강력한 경제개혁과 불평등 완화 정책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이우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경향 한겨레 2019-10-9

 

 

보수반동의 세계

요즘 국제뉴스들을 보면 보수반동의 득세라는 말이 실감난다. 세상이 그렇게만 돌아가지는 않을 텐데도, 그리 비친다. 세계 주요 국가 정상들의 비정상적 행보가 튀어 그럴지 모르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상식 밖 언사는 질릴 만한데도, 최강국 대통령 말이다보니 여전히 신경이 쓰인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과거 지우기행태는 또 어떤가. ‘지구의 허파라는 아마존 열대우림의 화재가 지속되면서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까지 조명됐다. 이들의 극단적 언행은 2차 대전 즈음 유럽을 휩쓸었던 파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는 퇴행하고 있는가.

 

트럼프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파시스트다. 이주민·난민·빈민·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노골적 편견을 드러내고, 환경이슈는 제쳤다. 힘의 논리를 앞세워 세계 곳곳에서 분쟁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 미국 대통령이야. 어쩔래?” 하는 식이다.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대처하는 행태는 고개를 흔들게 했다. 지난 725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대선 라이벌인 민주당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부자의 부패 의혹 조사를 압박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정황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가짜뉴스라고 우긴다.

 

현안에 대한 입장도 편의에 따라 바뀐다. 터키군의 시리아 쿠르드 자치지역 침공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국제사회의 비판이 커지자 터키 경제를 쓸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홍콩 사태를 두고 인도적 해결운운하더니, ·중 무역협상이 일부 타결되자 “(시위가) 많이 누그러졌다고 했다. 사실,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보며 잠시나마 그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조변석개 행태를 보면서 그가 소명의식을 갖고 다뤄야 할 비핵화 이슈를 재선과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한 한갓 이벤트 정도로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만 커지고 있다.

 

아베는 제국주의 일본의 재림이 가능하다는 헛된 공상을 한다.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징용 등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수준을 넘어 과거를 적극 미화한다. 지난 4일 임시국회 연설에서 일본이 내걸었던 큰 이상은 세기를 초월해 국제인권규약을 시작으로 국제사회의 기본원칙이 됐다고 주장했다.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도 불편한 과거를 묻어버리려는 막가파식 속성에서 비롯됐을 테다. 후쿠시마의 파국적 상황을 덮는 수단으로 도쿄 올림픽을 활용하겠다는 발상은 일본 내에서도 비판받는다.

 

문제는 유사 트럼프유사 아베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브라질의 트럼프라는 보우소나루는 아마존의 무분별한 상업적 개발을 허용, 두 달째 지속되는 아마존 열대우림 화재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그는 세계의 비판 여론을 음모론과 막말로 대응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국제사회 반대에도 시리아 쿠르드 자치지역에 대한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비판이 커지자 군사작전을 비난하면 (터키에 있는) 시리아 난민 360만명을 유럽에 보낼 것이라고 협박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법을 넘는 공권력으로 징벌자별명이 붙었다.

 

극단적 지도자들의 행태에는 공통점이 있다. 도 넘은 자국 제일주의. 어느 나라 대통령이든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들의 행태는 지나치다. ‘주판알만 튀기느라 동맹에 대한 신의도 저버리는 트럼프나, 과거의 잘못을 보복으로 되갚는 아베의 근본은 똑같다. 그런데도 이들의 지지기반은 비교적 탄탄하다. ‘우크라이나 스캔들같은 사건이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많은 수의 국민들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을 테지만, 미국 내에서 트럼프의 골수 지지층은 여전하다 한다. 아베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50%대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가능한가. 이들이 내세운 자국 제일주의가 일정부분 국내 지지를 얻는 건 분명해 보인다. 이들이 외부 적을 설정하고, 곪고 있는 내치에 쏠리는 국민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일견 타당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테다. 상식적 정치세력의 지지부진, 혹은 실패가 보수반동 득세를 부른 것은 아닐까. 실제 트럼프는 지난 대선 때 기성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감을 파고들어 뜻밖의 승리를 거뒀다.

 

그래서 보수반동의 득세를 남의 나라 일로만 볼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트럼프나 아베 같은 극단적 지도자가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보수야당 리더들의 면면을 보라. 시민들은 눈을 부릅떠야 한다. 조국 논란을 관리 못해 중도층 이탈을 부른 여권도 현 상황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용욱 국제부장 경향 : 2019.10.13

 

성공과 승리를 측정하는 방법

지난 2년 동안 국정을 이끌어 온 문재인 정부를 100점 만점으로 평가하신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조사회사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치자. 당신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을 할 것이다. 90점이든 40점이든. 이어서 그 점수를 주신 기준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과연 당신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합당한 기준인가? 남들도 그 기준에 동의할 수 있을까? 혹시 20년 전에나 통용되던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 더힐티브이(The Hill TV)의 크리스털 볼과 인터뷰를 한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앤드루 양은 매우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일부 발췌인용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제 우리 자신의 행복을 지향하는 경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GDP는 우리를 벼랑 끝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의) GDP는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지만 자살, 약물 남용, 스트레스, 가정경제의 불안정도 기록적입니다. 측정도구가 잘못된 겁니다. 우리의 행복과 건강, 약물로부터의 해방, 깨끗한 공기와 수질, 우리 아이들의 행복 등에 최적화된 지표를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경제분석국에 가서 말할 겁니다. 이봐요, GDP는 거의 100년이 되었어요. 낡고 거의 무용지물이 됐다고요. 업그레이드를 합시다. 시대에 맞는 미국 채점표(scorecard)’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건강과 수명, 정신 건강 등이 반영된 지표 말입니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여전히 100년 전 기준을 가지고 우리의 (혹은 남들의) 성적을 매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공을 측정하는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 발전의 기준도, 승리의 판정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대학교수의 평가방식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무조건 연구를 많이 해서 논문만 많이 쓰면 점수가 올라갔는데, 이젠 그 논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고 활용하는지에 따라 점수가 바뀐다. 야구선수의 성과를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따졌던 투수의 승수나 타자의 타율도 이제는 평균자책점이나 진루/장타율에 그 자리를 내줬다. 확고해 보이던 기준도 시대가 바뀌면 성긴 구석이 발견되고, 환경이 바뀌면 정당성도 떨어진다.

 

광화문과 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의 수를 세면서 내가 이겼네 네가 이겼네 하는 다툼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198712,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는 각각 여의도 광장에서 유세를 벌이며 서로 100만명을 넘겼다고 우겼다. 소위 군중 숫자로 세 싸움을 하던 시절이다. 불과 5년 후 선거에서는 후보들이 대규모 유세를 안 하기로 합의하면서 소위 ‘100만 유세는 사라졌다. 27년 전이다.

 

이 쓸데없는 싸움을 부추기는 언론의 보도기준은 무엇인가? 인근 지하철역 하차 승객이나 휴대전화 접속 기록을 따지며 부득부득 승패를 결정짓겠다는 언론사들은 이 시대 언론의 사명이 방문자 수 증가와 수익의 극대화라 생각하나? 양극화시켜놓고 양극화가 문제라며 한탄하면 회사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가? 남들 페이스북 내용 쫓아다니며 특종, 단독 타이틀 붙여 클릭 장사하는 기자들이 생각하는 대한민국 언론사의 성공 기준은 무엇인가?

 

앤드루 양의 발언은 정곡을 찌른다. 그는 측정도구가 과연 타당한지 묻는다. 정확하고 엄밀하게 측정하면 신뢰도는 올라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애초에 측정하고자 했던 그 무엇을 측정했다는 보장은 없다. 최첨단 디지털 저울로도 키를 잴 수는 없듯이. GDP는 우리의 행복을, 우리 자손들의 건강을 절대 보여줄 수 없는 수치이다. 지금 우리는 이 정부의 성공을, 혹은 여야 대결의 승자를 무슨 기준으로 따지고 있는 것인가? 일단 군중의 숫자는 아닌 것 같다. 뜬소문 하나로 들쭉날쭉하는 지지율도 타당한 잣대는 아니다.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자. 국정 운영의 점수를 매기는 우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언론의 보도행태를 욕하거나 상찬할 때의 기준은 무엇인가? ‘조국 수호조국 파면도 이 시대 이 사회의 안녕함을 판정할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검찰개혁도, 대통령 탄핵도 결국 더 큰 목표를 위한 수단이고, 언론의 팩트 체크도 공정한 보도와 건전한 비판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양비론이 아니다. 양비론을 넘어서자는 얘기다. 무엇이 중요한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이 중요할지에 대한 논의를 좀 하자는 것이다. 그런 자리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 자리에 나와 또 표창장 얘기나 한다면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고, 옳다구나 싶어서 삿대질 사진을 특종으로 싣는 언론이 있다면 우리나라 기자들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한다. 아직 기대라는 것이 남아있다면./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경향 : 2019.10.13

 

진보의 위선 관리법

진보는 억울하다. 똑같은 도덕적 잘못을 저질러도 보수에 비해 훨씬 더 호되게 당하니 말이다. 그래서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그걸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며 진보는 도덕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을 아예 내팽개치자는 주장은 아닐 테고, 아마도 도덕적 굴레에 너무 얽매이지 말자는 걸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유권자들은 정책을 완전히 외면하는 건 아니지만 정책보다는 사람을 보고 표를 던지는 걸 어이하랴. 진보는 지금 이대로의 세상이 문제가 많다며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 과정에서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판을 하면서 사실상 도덕적 우월감을 드러내거나 과시하기도 한다. 그래놓고선 보수와 같은 수준의 도덕을 누리겠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물론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유권자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도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다.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맞붙었던 이 대선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바로 위선 문제였다. 트럼프는 대선 기간 내내 힐러리를 위선자로 몰아붙였다. 트럼프는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막말도 서슴지 않았지만, 그마저 솔직으로 포장하면서 자신은 위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강조했다.

 

단지 그 정도였으면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는 힐러리의 위선이 부도덕한 축재에서 각종 특권의 향유에 이르기까지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게 대선 기간 내내 주요 이슈로 부각됐다는 점이다. 이는 트럼프의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언행에 비하면 비교적 사소한것이었지만, 스스로 악당을 자처한 트럼프에겐 그런 몹쓸 언행마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보의 입장에선 기가 막힐 일이었지만, 이는 위선에 대한 대중의 혐오가 얼마나 강한지를 간과한 자업자득이었다.

 

진보는 위선에 둔감하다. 왜 그런가? 개인적으로 먹고사는 문제나 자녀 교육에서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되었다. 진보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분리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상식의 함의를 깨닫는 데에 무능하다. 진보는 늘 중하층의 민생을 염려하면서 최상층을 비판하는 말을 많이 한다. 적당히 대충 하는 게 아니라 온갖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가면서 한다. 가능한 한 유권자들의 심금을 울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감성적 수사가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이었지만 과욕이었다. 이 명언은 지식인이 당위적 선언으로나 할 수 있는 꿈과 같은이상이었기 때문이다. 5년 임기의 정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를 빼고 우리 대한민국은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를 추구하는 나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정도로 만족했어야 했다.

 

지금 우리는 조국 사태의 와중에서 이 명언이 엄청난 부담과 책임 추궁으로 돌아오는 부메랑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그게 얼마나 타당한가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전체 국민의 절반가량이 그런 추궁을 하고 있다는 정치적 현실이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최저임금 인상’ ‘52시간 초과 근로 금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강사법 시행등 일련의 정책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아름답고 훌륭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정책 시행 때 일어날 수 있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나 부작용에 대한 대처 방안이 사전에 제대로 검토조차 되지 않았다는 게 충분히 드러났다. 이 또한 진보가 선호하는 추상적 당위의 함정이다. 이는 결과적 위선으로 지탄받기 마련이다.

 

진보는 여전히 억울하겠지만, 위선은 관리의 대상임을 인식하고 말을 앞세우는 걸 자제해야 한다. 적어도 정책 영역에선 현실을 당위적 수사에 종속시키지 말고, 실천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책임 윤리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반대 세력과도 소통하고 타협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위선에 민감해지기 위해선 일부러 악역을 맡아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하는 악마의 변호인제도를 광범위하게 도입해야 한다. 내부 고언을 하는 사람을 내부의 적으로 몰아 몰매를 주는 현 상황에선 그 방법밖엔 없지 않은가.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겨레 : 2019.10.13.

 

자산재분배, 피할 수 없는 화두

필시 명절 대목이었을 것이다. 떡집네 다섯 식구는 힘들고 벅찬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수북이 쌓인 돈더미를 센다. 2짜리 딸 은희는 돈을 세다 손이 아파 손목을 털고 있다. 피곤에 전 탓일까, 가족은 말이 없다.

 

얼마 전 본 영화 <벌새>의 한 장면이다. 관객들이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을 것 같은 이 짧고 평범한 장면에서 나는 울컥했다.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틀림없이 자영업자 집안에서 성장했을 것만 같다.

 

나는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영업자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노동만으로는 살림 건사가 어려워 어머니가 자영업에 나섰다. 아버지의 해고 후 두 분이 함께 가게를 꾸렸다. 새벽 여섯시부터 자정까지, 작은 가게와 딸린 방 두 칸이 두 분의 노동과 삶의 세계였다.

 

1년에 한번 대목 무렵이면 온 가족이 동원됐다. 나도 학업을 작파하고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길고 고된 노동이 끝나면 보람찬 시간이 돌아왔다. 수북한 돈더미를 색색이 나누고, 아픈 손목 털어가며 세어서 권종별로 액수를 맞춘다. 서로 바꿔가며 검산을 마치면 고무줄로 묶어 가지런히 쌓는다. 이윽고 장부에 매출을 적는다. 어머니는 글씨체가 반듯하다며 늘 내게 매출을 적게 했다. 돈맛도 좋았지만 그걸 세는 손맛은 더 좋았다. 그 손맛에는 내 노동이 살림에 기여했다는 보람 같은 것이 묻어 있었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한반도 역사상 가장 호황기였다. 대목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두 분의 자영업은 아버지 여든까지 이어졌다. 하루 열여덟시간 초장시간 노동도 계속 이어졌다. 자식들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자기 자본에 자기 노동을 더해 생계를 꾸리는 소자산계급의 노동은 종종 자기착취에 이를 정도로 과도해지곤 한다. 그 동기는 무엇일까? 더 많은 소득에 대한 욕망은 물론이지만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 보람 같은 주관적 동기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실행된 농지개혁은 이 소자산계급의 동기가 지닌 거대한 힘을 잘 보여준다. 농지개혁은 시대의 화두였다. 일본인 지주를 조선인 지주로 바꾸자고 독립을 염원했던 것은 아니다. 해방은 지주의 나라를 소농의 나라로 바꾸는 과업이었다. 친일 지주 주축의 한민당 등의 저항이 있었지만, 민중의 염원과 북한의 선제 실행, 미국의 압력이 겹치면서 농가 1호당 3정보(9030)를 분배하는 농지개혁이 단행됐다.

 

1980년대 후반 이래 연구의 진전으로 농지개혁의 사회경제적 효과가 상당히 규명됐다. 식민지근대화론에 맞서온 경제사학자 허수열의 논문 ‘1945년 해방과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보면, 미곡 등 여러 곡물의 생산량은 농지개혁이 일단락되는 1955년부터 20여년간 가장 가파른 속도로 증가했다. 이 시기에 우리는 보릿고개를 넘었다.

 

제 땅이 생긴 농민들은 더 많이 일했고, 추가소득을 자녀 교육에 투자했다. 그 자녀들이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을 이끌었다. 토지경제학자 전강수의 논문 평등지권과 농지개혁, 그리고 조봉암을 보면, 1960년 한국의 토지분배 지니계수는 0.3 수준, 세계에서 토지분배가 가장 평등한 나라 중 하나였다. 한국, 대만, 일본 등 토지분배가 가장 평등했던 나라들이 2000년까지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계수가 2005년에는 0.8 수준으로 악화됐다. 완전 불평등에 가깝다. 금융자산의 불평등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지난 칼럼에서 기회평등론이나 복지강화론 같은 온건한 비판담론이 한계에 처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미국에서는 자유주의자들조차 급진적인 자산재분배의 필요성을 제기했다고 환기하기도 했다. 이미 자산의 분배가 극도로 양극화된 상황에서 그 재분배에 대한 고려 없는 기회평등론과 복지강화론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마침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신간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기본소득을 넘어선 기본자본 개념을 역설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역시 자산재분배 문제일 것이다. 참여사회주의라는 대안을 제기했다고도 한다. 연말이면 번역본이 나온다니 읽어볼 일이다.

 

기본소득이든 기본자본이든 왜 그것이 모든 사람이 받을 자격이 있는 정당한 몫인지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 자산계급은 터무니없는 요구라며 반발할 것이다. 옛날의 지주도 그랬다. 중요한 건 이 화두로 논쟁하는 것이다.

조형근 사회학자·한림대 일본학연구소 HK교수 한겨레 : 2019.10.13.

 

불신만 키우는 한국경제 선방론

지난 일요일 이호승 대통령 경제수석이 기자 브리핑을 통해 “(한국 경제가) 비교적 선방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세계 경제와 무역량이 정체에 빠지면서 수출에 의존하는 한국 같은 나라가 경기에 영향을 받는 것은 불가피하며, 현 경기 하락은 경기 사이클에 따른 일시적 등락 현상인데 이를 두고 위기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한국 경제가 나름 선방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최근 3년간 30-50 클럽 7개 나라 중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거나 두번째로 높다는 점을 들었다.

 

앞의 말은 맞으나 뒷부분 선방론은 심각한 왜곡이다. 엉뚱한 나라들과 비교를 했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이들 나라의 경제성장률을 그래프로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국은 이들 중 가장 후발국가여서 경제성장률이 압도적으로 1등이었다. 심지어 2010~2018년 동안에도 한국의 경제성장률 단순 평균(3.4%)은 이들 국가 평균(1.5%)보다 1.9%포인트나 더 높았다. 그러나 2012년부터 세계 무역량이 정체되면서 우리의 성장률은 그들 수준으로 빠르게 근접해가서 요즘은 이들 국가와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 마당에 후발국가가 자기를 이들 국가와 비교해 1~2등을 하고 있다고 선방론을 펼치면 듣는 사람이 갑갑해진다.

 

이 수석이 비교 대상으로 선정한 30-50 클럽은 1인당 소득이 3만달러 이상이면서 인구가 5천만명 이상인 나라들을 일컫는 명칭으로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이 여기에 속한다. 이 말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조선일보>가 느닷없이 20-50 클럽을 들고나오면서 시작되었다. 5천만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나라이면서 선진국 진입의 기준이 되는”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이상을 달성한 나라의 그룹을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 그해 6월에 드디어 인구 5천만명이 넘어 한국이 그 클럽에 들게 되었다면서 이는 업그레이드된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 명칭이 국뽕의 일종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틀린 얘기다. 이명박 정부의 초라한 경제성장 성적을 감추고, 박정희 향수를 불러일으켜 박근혜 후보를 도와주기 위해 <조선일보>가 조작해낸 말이었다. 워낙 족보가 없어서 한국에서만 쓴다. 그 뒤 이 명칭은 2015년에 한국의 국민총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가게 되면서 30-50 클럽으로 바뀌었다.

 

이 명칭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는 20-50 클럽에 속한다는 나라들이 언제 그 기준에 맞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세계 최초로 20-50 클럽 멤버가 된 나라는 1987년 일본이었다. 그 뒤 미국(1988), 프랑스(1990), 이탈리아(1990), 독일(1991), 영국(1996)이 들었는데 드디어 한국은 2012년에 세계 7번째로 들었다고 추어올렸다.

 

그런데 어쩌나! 저 나라의 2만달러는 이 나라의 2만달러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2만달러는 불변가격으로 통일해서 비교한 소득이 아니라 경상가격 기준으로 측정된 숫자다. 예를 들어 1988년에야 미국의 인당 소득이 2만달러를 넘었다고 하지만 그 2만달러는 2012년 불변가격으로 대략 37천달러에 가깝다. 그런 마당에 1988년 미국의 인당 소득 2만달러를 20년도 더 지나서 한국의 2012년 경상소득과 비교하면 남들이 웃는다.

 

게다가 <조선일보>는 그해 6월 드디어 인구가 5천만명이 넘는 나라가 된다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의미나 있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인구 강국이니 인구 경쟁력이니 너스레를 떨었다. 무슨 근거로 4천만이면 인구 강국이 아니고 5천만이면 인구 경쟁력이 생기나? 참으로 가소로운 소리였다.

 

한국 언론은 종종 이런 허튼소리를 한다. 보통 때 같으면 이런 실없는 소리를 들어도 혀를 차면서 그냥 넘기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하지만 만약 그런 소리를 한 나라의 대통령 경제수석이 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세계 경기둔화가 한국 경기둔화의 주요 원인이라는 그의 주장은 큰 그림에서는 맞다. 현 정부의 정책 성과가 부진하니 억울하고 변명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로 끝내지 않고 거기서 선방론으로 가버리면 도를 넘는 짓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수석이 <조선일보>의 정치 조작을 통해 탄생한 30-50 클럽을 들고나와 경제성장 선방론을 주장하는 모습은 한편의 부조리 코미디 같다. 현 경제 상황을 엄중하게 본다는 대통령 옆에서 그러고 있으면 국민이 도리어 대통령을 불신하게 된다.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 한겨레 : 2019.10.15.

 

촛불의 전진과 앙시앵레짐해체

역사는 어떤 혁명도 단번에 완수되지 않으며 예외 없이 성장과 도약의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바스티유 함락으로 끝나지 않았다. 베르사유궁에는 여전히 루이 16세가 왕좌를 지키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입헌군주제를 거쳐 왕의 자리를 없애는 공화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2단계 과정을 거쳤다. 시야를 더 넓혀, 1871년 파리코뮌에 이은 제3공화정의 확립에서야 혁명이 목표에 이르렀다고 보는 학설이 있는가 하면,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의 대통령 당선으로 사회당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혁명이 완수됐다는 평가도 있다.

 

촛불혁명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2016년 겨울 내내 1700만 촛불 시민이 모여 부패한 정권을 축출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가치에 조금 더 충실한 세력으로 정부가 바뀌었을 뿐이다. 기껏해야 혁명의 1단계라고 할 정권 교체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70년 동안 구축된 앙시앵레짐을 뒷받침하던 권력 집단은 온전히 남아 여전히 강고한 성채를 지키고 있다.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해온 옛 체제의 기둥과 초석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촛불 시민의 열망인 참된 민주주의 사회는 오지 않는다. 촛불혁명이 내건 높은 목표와 정권 교체 이후 펼쳐진 현실 사이 커다란 격차는 혁명의 전진과 도약을 요구한다.

 

조국 일가 수사로 촉발된 서초동 촛불집회는 2016년 촛불혁명의 관점에서 거듭 주목해야 할 현상이다. 100만을 헤아리는 시민이 주말마다 검찰청을 에워싸고 촛불을 들어올렸다. 수백만 시민이 거대한 직접행동으로 검찰 개혁을 시대의 과제로 내세운 것은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서초동 촛불의 구호는 검찰 개혁조국 수호로 요약된다. 이 두 구호는 같은 층위의 것이 아니다. ‘조국 수호가 대중의 마음에 불을 지핀 직접적 발화점을 가리킨다면, ‘검찰 개혁은 촛불혁명이 목표로 삼은 앙시앵레짐 해체라는 본질적 요구를 가리킨다. 모든 혁명은 우연적인 계기와 필연적인 목표의 결합에서 탄생한다. 우연적인 사건은 필연적인 내용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일 뿐이다. 조국이라는 우연을 통해 검찰 개혁이라는 필연이 절박한 국민적 과제로 떠올랐다. 기득권을 지키려고 법의 이름으로 권한을 남용하고 인권을 짓밟는 검찰권력의 민낯이 조국 일가 수사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혁명의 진전에는 물리학의 법칙처럼 반작용이 뒤따른다. 반란에 가까운 검찰의 행태는 촛불의 요구를 제압하려는 검찰권력의 조직적인 저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저항의 대열에서 앙시앵레짐의 몸통에 해당하는 기득권 세력이 일사불란하게 손을 잡았다. 사회학자 이진경이 진단한 대로 그 반란의 작전사령부 역할을 한 것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 언론권력이다. 수구 언론은 반도덕적 도덕주의라는 프레임을 앞세워 검찰 개혁 요구를 무력화하려고 했다.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한 집단이 도덕을 무기로 내세워 상대방을 공격하고 탄핵했다. 그 자신들도 전혀 믿지 않는 도덕적 순결주의를 프레임으로 들이밀어 여기에 동참하지 않는 언론과 집단을 부도덕한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이진경은 조선일보가 짠 이 프레임에 걸려든 언론 일반의 증상을 조선일보 증후군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오랜 민주주의 훈련을 거쳐 촛불혁명을 이룬 대중은 수구 언론권력의 프로파간다에 속지 않았다. 페이스북과 유튜브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쌓은 집단지성으로 사태의 진실을 추적해 수구 언론의 프레임을 격파했다. 그 결과가 서초동을 뒤흔든 장대한 촛불 십자가의 함성이다. 이진경의 말대로 서초동 촛불은 현명한 대중의 정치, 곧 중현(衆賢)정치의 발현이다.

 

검찰 개혁은 촛불혁명이 내건 과제의 일부일 뿐이다. 기득권 체제를 떠받쳐온 언론권력, 사법권력, 경제권력, 정치권력의 해체와 재편이 이뤄질 때 촛불의 요구는 완수될 수 있다. 혁명은 중도에 멈추면 역풍에 휩쓸리고 만다. 수많은 혁명이 그렇게 유산되고 좌절했다. 촛불혁명의 성패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얼마나 꿋꿋하게 반작용의 힘을 뚫고 나아가느냐에 달렸다. 조국 사퇴는 촛불의 목표를 앞당기는 동력이 돼야 한다.

고명섭 논설위원 한겨레 : 2019.10.15.

 

 

언제까지 허리띠 졸라맬 텐가

세계경제포럼은 매년 국가경쟁력 지수를 발표한다. 올해 한국 국가경쟁력은 141개국 중 13위로 작년보다 두 단계 올라갔다. 정보통신 보급과 거시경제 안정성은 세계 1위인 반면, 생산물시장 59, 노동시장 51위였다. 생산물시장과 노동시장 평가는 기업인의 주관적 반응을 점수화한 것이다. 노동시장 51위는 정규직 노동의 경직성에 대한 기업인들의 주관적 불만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생산물시장 59위는 기업인조차 대기업집단의 시장지배력 독과점 폐해를 인정하는 것으로 공정경제 정책의 중요성을 함의한다.

 

세계경제포럼은 거시경제 안정성을 소비자물가상승률 안정과 국가채무 증가, 국가채무 비율, 국가 신용등급을 종합해 평가하는데, 작년부터 한국의 거시경제 안정성을 세계 1위로 평가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한국을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등과 함께 세계에서 재정여력이 가장 좋은 나라로 평가한다. 신임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취임 후 첫 연설에서 수요 확대와 성장잠재력 강화를 위해 확장 재정정책을 펼 수 있는 대표적인 나라로 한국, 독일, 네덜란드 세 나라를 콕 집어 말하고 있다. 이처럼 국제기구들은 한국의 거시경제 안정성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하고 풍부한 재정여력을 활용해 불황에 적극 대응하고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재정투자를 하라고 정책 권고를 하지만, 일부 보수 언론은 2년 연속 초슈퍼예산 편성으로 국가채무 비율이 악화된다며 베네수엘라처럼 경제 파탄이 날 수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세계경제포럼이 평가한 베네수엘라의 거시경제 안정성 순위는 141개국 중 141위로 한국 거시경제를 베네수엘라와 비교하는 것은 비상식을 넘어 몰상식에 가깝다.

 

한국경제가 지금은 재정건전성이 좋지만 급속한 고령화로 일본을 20년 격차로 쫓아가고 있어 20년 뒤엔 지금의 일본처럼 재정건전성이 악화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국회예산정책처 장기재정 전망에 따르면 한국의 국가채무 비율은 204065.6%, 205085.6%로 현재 일본 국가채무 비율 233%3분의 1에서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일본은 국가채무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지만, 세계경제포럼은 일본의 재정안정성을 세계 42위로 중상 수준으로 평가한다. IMF도 일본의 재정여력을 중간 정도 국가로 평가한다. 제로 금리인데도 외국인들이 일본 국채의 10%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국제투자자들이 일본 국채를 안전자산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아일랜드 등 유럽 재정위기 국가들의 국가채무 비율이 일본보다 훨씬 더 낮았는데도 재정위기를 겪은 것은 이들 국가의 유로 표시 국채가 사실상 외화표시 국채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국가채무 비율이 높지만 엔화 표시 국채고 국채의 43%를 일본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고 경상수지도 흑자여서 유럽 재정위기 국가들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일본의 국가채무 비율 증가는 고령화로 사회복지 지출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졌지만, 사회간접자본(SOC) 등 다른 예산이 감소하면서 일본의 재정지출 규모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큰 폭으로 증가한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일본 재정수지 악화의 주원인은 성장률 하락으로 조세 수입이 정체 내지 감소했기 때문이다. 2014년 이후 일본 국가채무 비율이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 것은 아베노믹스로 경제가 다소 회복해 세수가 증가하고 재정수지 적자가 줄었고 국채금리가 0%대로 하락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에서 반면교사로 배워야 할 것은 부동산 투기와 거품을 막고 늦기 전에 국가경쟁력 강화 투자를 과감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저출산 고령화로 잠재성장률 하락이 고착화되기 전 구조개혁과 사회안전망 확충, 저출산 대책, 에너지·생태 전환, 4차 산업혁명의 기반을 확립해야 한다.

 

우리는 거시경제 여력이란 구슬을 충분히 갖고 있다. 지금은 구슬을 쌓아둘 게 아니라 꿰서 활용해야 할 때다. 전 세계적으로 경상성장률보다 국채금리가 낮은 상황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한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방어적 국가전략이나 불황 탈출 경기대응 수준을 넘어 미래를 위해 현명하게 투자하는 적극적 국가전략을 짜야 할 때다. 시장은 불확실성 공포 탓에 기준금리를 인하해도 이자 부담이 줄고 수도권 부동산만 들썩일 뿐 실물경제 투자 활성화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재정정책의 장점은 예산 투입으로 미래 투자 방향을 선도할 수 있다는 거다. 한국은행도 기존의 통화정책 타성에서 벗어나 적극적 국채 매입과 양적 완화 등 재정정책과 공조하는 새 거시경제정책을 시도해야 한다.

조영철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 경향 2019.10.15.

 

SNS 함정에 빠진 조국의 아름답지 못한 퇴장



우리나라 최고의 무장을 뽑으라면 십중팔구 이순신 장군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업적이 가장 큰지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도 있으리라.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일본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우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3국을 통일한 김유신의 업적이 더 커 보인다. 우리에게 대국이었던 수나라 군사를 수장시킨 살수대첩의 명장 을지문덕도 업적 면에선 이순신에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순신이 최고의 무장이 된 이유는 뭘까? 모함으로 인한 투옥과 백의종군, 12척으로 133척에 달하는 적을 물리친 명량해전, 자기 죽음을 부하에게 알리지 말라 한 마지막 순간까지, 이순신에게는 다른 이들이 갖지 못한 드라마가 있었다. 김유신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거라곤 자기 잘못을 말한테 뒤집어씌워 목을 벤 게 다이지 않은가?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 이순신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다. 접촉사고가 났을 때 상대방이 잘못했다며 서로 삿대질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접촉사고의 경위를 글로 써보면 어떨까. 싸울 때는 몰랐던 자기의 잘못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종이 위에 쓰인 사건은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는 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글이 주는 자기 객관화의 힘’, 즉 일기를 쓰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고, 이는 자기성찰로 이어진다. 이순신이 고매한 인격을 갖출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일기를 쓴 덕분이란 얘기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14일 전격 사퇴했다. 그로 인해 두 달여 동안 극심한 국론분열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사퇴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때 우리가 믿고 따른 지식인이었던 분이 이렇게 몰락한 이유는 그가 SNS 중독자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박근혜 정권의 무능함에 신음하던 시절, 조국은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SNS 글을 지속해서 써댔다.

 

- 1명의 피의자 때문에 5천만이 고생이다 : 201611,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여 박근혜 하야를 외쳤을 때.

- 이제 민심은 즉시 하야(下野)’를 넘어 하옥(下獄)’을 원하고 있다 : 201612, 200만이 넘는 인파가 광화문에 모였을 때.

- 검찰은 왜 최순실을 긴급체포하지 않고 귀가시켜 공범들과 말 맞출 시간을 주는가 : 201610, 국정농단 사건 당시 해외에 머물던 최순실이 귀국했을 때.

- 피의자 박근혜, 첩첩이 쌓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모른다아니다로 일관했다. 구속영장 청구할 수밖에 없다 : 20173, 박근혜 재판 때.

 

잘생긴 서울대 교수가 저리도 멋진 말로 정권을 비판하자 사람들은 열광했고, 조국은 스타 지식인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SNS엔 치명적인 함정이 있었다. 차분하게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일기와 달리 SNS는 그 속성상 촌철살인을 지향한다. 어떻게 하면 더 멋지고 임팩트 있는 글을 쓸지 노력하게 된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허세가 끼어들고, ‘내가 머리가 아픈 것은 남보다 열정적이기 때문인가같은 오글거리는 말도 SNS에서는 일상이다. 그러다 보면 실제의 자신이 아닌, 가상의 인물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소위 조국사태에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웠던 것도 조국의 삶이 그가 SNS에서 했던 말과 전혀 다른, 기득권의 관행에 절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조국이 과거에 썼던 SNS 글들은 결국 그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조국이 구린 일은 죄다 아내에게 미루고 자신은 몰랐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그가 반기문을 향해 날린 알았으면 공범이고 몰랐으면 무능이다를 찾아왔고, 그의 딸과 관련해 불거진 입시비리 의혹엔 대학 수험생 입시 관리를 하다 보면, 어떻게 이런 스펙을 만들어 오지, 하며 놀랄 때가 많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가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를 못마땅해할 때는 편집과 망상에 사로잡힌 시민도, 쓰레기 같은 언론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 특히 공적 인물에 대해서는 제멋대로의 검증도, 야멸찬 야유와 조롱도 허용된다, 온갖 의혹에도 물러나지 않고 버틸 때는 도대체 조윤선은 무슨 낯으로 장관직을 유지하면서 수사를 받는 것인가? 우병우도 민정수석 자리에서 내려와 수사를 받았다를 가져왔다. 조국 때문에 지지자와 반대자들이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나뉘어 집회를 할 때는 “1명의 피의자 때문에 5천만이 고생이다를 찾아왔다.

 

이런 일이 잦자 사람들은 ()조국()조국이 다른 사람이라거나, 조국이 자신의 앞날을 예언한 조스트라다무스였다는 식으로 그를 조롱했다. 더 충격적인 건 그 와중에도 조국이 SNS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기 아내가 검찰에 소환돼 조사받는 동안, 조국은 SNS의 프로필 사진을 서초동 조국수호 집회로 바꿨다가 50분 만에 내리고 잇따라 서로 다른 자신의 사진으로 수차례 변경했다.

 

수만개의 글을 SNS에 쓰는 대신 그가 그 열정으로 조국일기를 썼다면 어땠을까. 자신의 허물을 잘 알았을 테니 법무장관은 꿈도 꾸지 않았겠고, 설령 후보자로 지명됐다 해도 바로 물러났을 것이며, 사퇴 할 때 자신이 검찰개혁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단 말로 사람들을 실소하게 만들진 않았으리라. 그의 사퇴에 대해 2017년 탄핵 당시 박근혜를 가리킨 구조국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하련다. “일말의 연민이나 동정심도 사라지게 만드는 퇴장이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경향 2019.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