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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19.9.1~15

by 이성근 2019. 9. 16.

조국이 남긴 숙제를 푸는 방법 한겨레 2019-09-01

정녕 조국뿐일까? 경향 2019.09.02.

가까이에서 본 조국 경향 2019.09.02.

촛불을 다시 보며 경향 2019.09.02.

이승만 학당에서 탈식민주의를 경향 2019.09.03.

부끄럽고 무책임한 내년 예산안 디지털 타임스 2019.9 3

노무현의 실패, 문재인의 위기 경향 2019.09.04.

'금수저 출신 개혁가'들에 대한 경고? 프레시안 2019.09.04.

작두 위에 올라탄 검찰 한겨레 2019-09-04

'엘리트 대학생'들의 공정성 담론에 동의할수 없다 프레시안

누가 조국에게 돌을 던지나? 경향 2019.09.06.

서울대생의 촛불, 너릿재 너머의 아이들 한겨레 :2019-09-08

윤석열의 나라경향 2019.09.09.

주식회사를 떠받치는 자본주의 경향 2019.09.09.

역사 전쟁과 기---한미동맹 강화 한겨레 2019.09.09.

딸의 진로 놓고 드러난 아빠의 위선 한겨레21 2019.09.09.

조국 정국혼돈 부추긴 언론, 요원한 신뢰 회복 PD저널 2019.09.10.

서울법대 공화국의 파탄 경향 2019.09.10.

기후위기에 응답하지 않는 나라 한겨레 2019-09-11

'못난 부모들만드는 사회 한국 2019.09.12.

하부구조에 무관심한 상부구조경향 2019.09.15.

조국 장관의 승리 확률 기여도경향 2019.09.15.

형편에 맞는 꿈은 꿈이 아니다 경향 2019.09.15




조국이 남긴 숙제를 푸는 방법

언론이 비추는 요즘 세상은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축으로 돈다. 온갖 언론사가 쏟아내는 압도적인 기사량이 보여주듯이 자전 운동의 인력이 막대하다. 이 칼럼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 논란에 직접 참가할 생각은 없다. 단지 그가 남긴 숙제를 푸는 데 주력하련다.

거의 모든 언론이 후보자 딸의 특별한교육 이력을 겨냥한다. 특수목적고-명문대-의학전문대학원으로 이어지는 경력이 의심스럽다는 거다. 의심은 특히 두 지점을 지목한다. 한편에서는 선발 과정의 공정성을 의심한다. 혹시 특혜나 불법이 작용한 건 아닐까? 다른 한편에서는 선발 과정 전체의 편향성을 의심한다. 행여 선발 과정이 특정 계급이나 계층에게 유리하게 짜인 게 아닐까?

 

대학교 총학생회의 대응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난다. 얄궂게도 두 국립대 총학생회의 대응이 대조적이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촛불집회를 열었고, 경북대 총학생회는 성명을 발표했다.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에서도 갈린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특혜와 불법 의혹에 집중했고, 경북대 총학생회는 더 큰 틀에서 사안을 보고자 했다. 그러니까 후보자 가족만이 아니라 특권 계층, 무엇보다 고위 공직자 전체의 교육 전략을 살펴야 하며, 더 나아가 특정 계급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짜인 입시 제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서울대 총학생회는 입시 제도보다 특혜와 불법 의혹에 집중하고, 경북대 총학생회는 특혜와 불법 의혹은 물론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입시 제도를 문제 삼는다.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의 입장이 적절해 보이지만 그에 멈출 수 없다. 더 구체적으로 따져야 한다. 현행 제도는 왜 등장했고, 어떤 문제를 지녔는가.

 

현행 대학 입시 제도는 필기시험으로 일원화된 예전 제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안됐다. 필기시험을 위주로 하는 입시 제도의 문제는 명백하다. 학교를 학원처럼 만들고, 학생을 시험기계로 만들어 다양성을 저해하고, 사교육에 크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학생부종합전형이 도입됐다. 그것은 학생들의 다양한 학내외 활동을 고루고루 평가한다. 그로써 학교를 학교답게 만들고, 필기시험과 사교육 의존도를 낮추어 학생을 다양화하고, 결국 학업 경쟁을 완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러한 정책 목표 중에 어느 하나 제대로 달성된 것이 없다. 오히려 예전 문제점에 새로운 문제점이 추가됐다. 수능은 예전 시험과 다르지 않고 학생부종합전형은 부모의 영향력을 키웠다. 이를테면 학내외 활동이 다양하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그것은 적절해야 한다. 적절함을 가늠할 수 있는 감각을 부모가 가지고 있거나(문화 자본), 전문적인 입시 코디의 도움을 사거나(경제 자본), 그도 아니라면 부모 인맥(사회 자본)을 통해 적절한 경력을 만들면 된다. 나는 장관 후보자가 그 과정에서 불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가 소유한 압도적인 문화, 경제, 사회 자본이 딸의 특별한 교육 경력에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그와 함께 우리가 꿈꾸는 건 출신 계급으로 교육적 성공이 좌우되는 세상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남긴 고약한 숙제다.

 

숙제를 푸는 세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예전 제도로의 복귀다. 수능 점수에 따라 대학을 배정하는 거다. 그러면 최소한 사회 자본의 영향력을 제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이를 권할 수 없다. 이미 실패한 제도로의 복귀는 아무래도 꺼려진다.

 

둘째, 새로운 제도의 도입이다. 예컨대 <한겨레> 김규원 기자가 지난주 칼럼에서 소개한 대학입학자격시험의 도입과 대학통합네트워크의 구축(정진상 경상대 교수)이 유망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숙제를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른 계층보다 특권 계층이 새로운 제도에 더 빠르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입 제도의 잦은 교체는 사회적 차이를 공고하게 다질 기회를 제공하기 십상이다.

 

셋째, 대입 제도를 바꾸는 데 사용할 에너지를 아껴서 사회 개혁에 몰빵하는 방법이다. 공정한 교육을 통해 특권을 평준화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특권이 지속되는 한 그것을 새롭게 취하거나 이미 가진 특권을 지키려는 교육적 노력이 줄어들 리 없으며, 그 경쟁이 누구에게 유리할지도 명백하다. 요컨대 교육 개혁을 통해 사회를 바꾸기보다 사회 개혁을 통해 교육을 바꾸는 게 더 나은 방법이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19-09-01

 

정녕 조국뿐일까?

처음엔 가짜뉴스인 줄 알았다. 국정농단 대법원 판결 날, 포털 뉴스판에 뜻밖의 이름이 나란히 등장했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 찬반 간증대회에 온 동네 사람들이 출연에 나섰지만, 현직 대통령 아들과 국정농단의 주범 최순실이 동시에 조국 뉴스의 스피커로 등장하리라곤 차마 생각 못했다. <문 아들 준용씨 조국 딸 향해 이건 부당하다. 목소리 내라”><최순실 내 딸 유라 메달 따려 천신만고조국 딸은 거저먹어”>, 그날 저녁 포털에서 가장 많이 본 뉴스의 앞줄을 장식했다. 청문 후보자 논란에 현직 대통령 아들이 나선 것도 낯설지만, 그 최순실이 대법원에 제출한 최후진술서에 뻔뻔스레 조국을 거론했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조국 사태를 이리 희극적으로 간증하는 것도 없다.

 

엉망진창, 극단의 진영 깃발만 펄럭이면서 비롯됐다. 조국의 거취는 진영의 명운을 건 정치적 승부처로 바뀌었다. 불공정과 특권, 신분과 세습, 위선 등 제기된 의혹과 허물에 대한 검증과 성찰은 디딜 땅이 없다. 이제 진실과 도덕의 무게는 중요하지 않다. 싸움에서 이겨, 조국을 지키느냐 마느냐만 남아 있다. 자유한국당이 법적 절차인 국회 인사청문회를 무산시킨 것도, 여권이 국민청문회를 실행한 것도 승부의 유불리만을 따진 결과다. 국민청문회에서 조 후보자의 사과와 해명이 이 싸움의 성질을 바꾸기는 어렵다. 서로 진영의 확증편향에 활용될 뿐이다.

 

여권에는 조국을 지키는 것은 숙고의 영역이 아니라 신념의 영역이다. 그러니 불공정을 비판하고 박탈감을 토로하는 청년들에게 조롱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며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한국당이라는 거악에 맞서 조국을 지키는 것이 절대가치인 마당에 다른 고려는 들어오지 않는다. “동년배들이 가졌을 실망감이나 분노에 저도 아프도록 공감하고 있다는 이낙연 국무총리의 감수성이 별나라 얘기처럼 들리는 상황이다. 사활을 건 진영 대결이 된 조국 대전은 이제 이성의 영역을 넘어섰는지 모른다.

 

엉망진창, ‘조국 정국에 검찰이 등판하면서 가속됐다. 검찰이 청문회 전에 후보자 의혹, 그것도 수사지휘권을 가진 법무장관 후보자에 대해 직접 수사에 나섰다. 헌정사에 유례가 없다. ‘조국 대전의 심판을 자임한 꼴이다. 후보자에 대한 찬반을 떠나 검찰이 정치과정에 개입, 최종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비극이다. 초반 대처 실패와 높아진 부정여론이 검찰로 하여금 진격을 감행케 했을 터이다. 검찰개혁을 한다고 조국을 법무장관에 임명했는데, 검찰이 칼을 들고 우리가 판정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조국의 역설이다. 능히 윤석열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을 손댈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검찰개혁을 무디게 하는 결과를 꾀할 수 있다. 검찰의 손에 검찰개혁의 상징처럼 부각된 조국의 운명이 맡겨진 형국이다. 임명돼도 조국 법무장관의 검찰개혁 동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벌써 검찰에서 누가 누구를 개혁하느냐는 말이 나온다. 조국 법무장관 지명의 명분인 검찰개혁 전제가 위협받고 있는 셈이다.

 

노무현 정부 초대 법무장관이었던 강금실 전 장관은 노무현재단이 펴낸 정책총서 <진보와 권력>에서 참여정부의 검찰개혁은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청와대가 피의자 측 조사 대상이 되며 검찰개혁을 언급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당시 검찰개혁의 핵심 과제였던 대검 중수부 폐지를 실행하지 못했다. 하물며 피의자 신분의 법무장관이 인피를 벗기는 형벌에 준하는 검찰개혁을 밀고갈 수 있을까, 지난하다.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은 한 차원 높은 도덕성과 신뢰가 큰 무기다. 설득과 동의를 얻어 이뤄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조국은 신뢰의 위기에 처했다. 어제 국민청문회에서 신뢰를 회복해 다시 개혁 동력을 확보했는지는, 이후 여론에서 가름될 터이다.

 

예정대로 조국을 지키고가면 그 운명을 검찰 손에 맡겨야 한다. ‘조국 법무장관수사는 단순 개인의 검증 차원을 넘어선다. 검찰개혁의 향배와 문재인 정부의 남은 임기 운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과에 따라 조국 개인의 일을 정권 전체의 허물로 바꿔버리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

 

그래서 묻게 된다. 조국의 진퇴와 정권의 명운을 직결시키는 위험을 감수할 만큼 여전히 뿐인가. 총체적으로 엉망진창인 상황을 전복하기 위해 판 자체를 바꾸는 발상의 전환은 불가능한 것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는 다시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실패하지 않을 목적어의 앞줄에 노무현 정부가 못다 이룬 검찰개혁이 놓여 있을 터이다. 정녕 아직도조국 법무장관은 실패하지 않을 유일무이한카드일까.

양권모 논설실장 경향 2019.09.02.

 

가까이에서 본 조국

지난 보름간 쏟아진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기사와 사람들의 반응에 마음이 어수선하다. 의혹을 파헤치는 기사나 그를 비난하는 글도 안타깝고, 일방적으로 그를 옹호하는 말도 석연치 않아 불편하다. 어느 순간 차라리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싶었다. 이십대에 맺은 인연 때문이다.

 

그와 알고 지낸 것은 내가 석사 과정에 입학해 형법을 전공하면서부터다. 그는 학문에 뜻을 두고 박사 과정에 있었고, 이미 학교에서 존재감이 뚜렷했다. 함께 수업을 듣던 내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직후에 그는 진보적인 학술단체에서 활동할 것을 권했다. 대학 시절 변변한 활동을 하지 못해 목이 말랐던 나는 권유에 따랐다. 나는 석사 과정을 마치려 사법연수원 입소를 연기한 채, 학술단체 활동도 하고 자유로운 시간도 보내면서 지냈다. 조교인 그의 방에 가끔 들렀는데, 그가 스스로 다짐하려 적어놓은 독일어 표어가 지금도 기억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내게 노동자를 교육하는 단체가 있는데, 노동법 수업을 맡아 달라고 했다. 아직 서슬이 퍼런 군사독재 시절이었고, 관련자가 구속된 비합법단체였다. 잠시 고민했으나, 마다할 명분이 없었다. 아니, 세상에 기여할 기회를 주는 그가 고마웠다. 나는 미미한 활동을 했지만, 그로 인해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을 조금 덜 수 있었다.

 

그때의 후보자는 연구자로서는 명석했고, 운동에는 헌신적이었으며, 생활태도는 부유한 환경과 달리 청교도적이었다. 자유주의적 사고와 감정에 기울어 방만했던 내게는 보기 드문 인물로 비쳤고,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 사법연수원에 다닐 무렵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그의 변호인이 피고인의 요청이라며 변론을 도와 달라 하여, 변론의 일부를 작성해 전달했다. 재판을 방청하러 갔는데, 원래 렌즈를 사용하던 그는 임시로 구한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초췌한 모습에 마음이 쓰라렸다. 그가 지금 기준으로 과격한 활동을 했다고 한들, 폭압적인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활동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는 없다.

 

그 후 이십 몇 년이 흘렀다. 교류가 없던 때도 있었고 가끔 전화하고 만나던 시절도 있었는데, 각별한 사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가 달라 소원한 시기가 지난 몇 년간 이어졌다. 그사이 그의 존재감은 점점 커져갔고, 이제 후보자가 되었다.

 

나는 의혹 중 몇 가지는 모함이라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박사학위 없이 울산대 교수가 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당시에 종종 있는 일이었고, 성실하고 명민한 그에게 그런 정도의 자격은 있다는 것을 주위에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녀가 의외의 장학금을 받았거나 고교 때 의학논문의 저자가 된 문제, 그리고 민정수석 시절에 투자한 펀드에 대해서는 나도 당황했다. 위법 여부는 어차피 절차에 따라 가려질 것인데, 정확한 내막을 모르는 나로서는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다만, 언론이 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후보자가 관여한 것이라면, 그가 천명한 원칙이나 타인에게 적용한 잣대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물론 과연 위법인지, 또는 장관 부적격 사유인지는 더 살펴봐야 할 것이다.

 

나는 오랜 기억 속 후보자를 떠올리며, 괴롭고 서운한 마음으로 계속 생각해 본다. 어느 날은 잠도 오지 않는다. 내가 알던 성품이나 언행으로 보아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정황상 소극적으로 용인했을 가능성은 엿보인다. 자기관리가 철저했던 그가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그를 잘못 알고 있던 걸까. 세월 속에서 그도 약육강식의 세계에 적응한 생활인이 된 걸까. 그가 가진 많은 자질과 자원이 성찰의 힘을 빼앗은 걸까. 어느 이유든 서글플 따름이다. 물론 누군가 나를 샅샅이 뒤질 것도 없이 슬쩍 흔들어 보기만 해도, 나의 여러 잘못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겨우 조광희이고, 그는 내가 흠모했던 조국이 아닌가.

 

그가 적극적으로 선을 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 믿음이 잘못인 게 밝혀진다면, 기꺼이 바보가 되어 비웃음을 받겠다. 하지만 작은 틈을 부주의하게 허용해도 유죄가 될 수 있고, 후일에 무죄가 되더라도 몇 년을 힘겹게 싸워야 한다. 검찰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젊은 조국은 구속되고 유죄가 되어도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었다. 불의한 법과 사회적 구조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채 선한 의지와 용기로 맞섰기 때문이다. 지금 제기된 문제들은 그 선한 의지와 용기를 무색하게 한다. 그 점이 괴롭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로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된 사안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적극적인 해명을 통해 의혹의 눈초리가 누그러지고, 대통령이 흔쾌히 임명하며, 검찰개혁을 완수하는 것이 그로서는 최선이다. 나는 이 정부의 역량과 비전에 여러 아쉬움이 있지만, 후보자를 편애하는 마음 때문에 그 최선을 희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임명은 대통령의 권한이지만, 임명 이후에도 그와 주변인 모두가 조사를 받아야 할 처지다. 아무리 좋은 의도와 대단한 능력이 있어도, 그 와중의 개혁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자신만이 아니라 몸담은 정부마저 위태로울 가능성은 과연 없을 것인가.

 

더위는 누그러지고 있지만, 이제 그에게는 불같이 뜨거운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의 잘못이 밝혀져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비난할 사람은 많다. 그가 이십대의 내게 준 삶을 생각하면 나는 그럴 수 없다. 그저 애통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잘잘못을 떠나서 이 논란은 나와 후보자가 포함된 세대가 이른바 헬조선의 기득권자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 세대가 앞으로 더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개개인이 아닌 세대라는 덩어리로서 윤리적 리더십을 주장할 명분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한다. /조광희 변호사 경향 2019.09.02.

 

촛불을 다시 보며

대학생들이 다시 촛불을 드는 것을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박근혜 퇴진운동을 벌이며 들었던 촛불은 박 전 대통령의 밀실 측근이라는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받은 성적 특혜라는 반칙 행위에 대한 분노가 단초가 됐다. 이후 광화문의 촛불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퍼졌고 결국 박근혜 정권을 몰락시켰다.

대학생들이 이번에 들고 있는 촛불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의 대학과 대학원 입학, 장학금 수혜 등의 과정에서 나타난 반칙과 특혜와 편법에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보수 우파는 기득권층과 동의어로 간주됐고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기피했다. 반면에 진보 좌파는 정의의 화신으로 자처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기회는 공평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문재인 정부의 아이콘이며 진보 좌파의 대표주자인 조국 후보자는 그동안 각종 매체와 연설을 통해 이를 설파했고 많은 국민이 이에 열광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조국 후보자는 앞에서는 정의를 외치고 뒤에서는 기득권층으로서 온갖 편법과 특혜를 향유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조국 후보자 딸이 고교시절 2주간의 인턴으로 전문 학술지에 제1저자로 이름을 올리고, 무시험으로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고 장학금을 받은 사실들은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서 보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신기(神技)에 가깝다.

 

이번에 또다시 대학생들이 들고 있는 촛불도 분노의 촛불이다. 이건 보수와 진보 간의 이념 투쟁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정의냐, 불의냐의 문제다. 모든 철학자들이 합의한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意)는 없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내세운 대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게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모두가 용이 될 필요가 없다. 개천에서 붕어나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는 조국 후보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고 싶어 한다. 이들 중 하나라도 얻는 것이 용이 되는 것이다. 이를 얻기 위해 밤잠을 줄이며 공부하고 일을 한다. 그런데 개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붕어나 가재로만 살라면 행복할 수 있겠는가. 특히나 이미 용이 된 기득권층들이 편법과 특혜와 반칙을 하면서 대를 이어가며 더욱더 많은 돈과 큰 명예와 권력을 얻는 사회라면 국민은 절망하고 분노하지 않겠는가. 촛불이 주장하는 것은 강남의 양재천뿐만 아니라 어느 개천이든 용이 나올 수 있도록 기회를 평등하게 하고 과정을 공정하게 해 달라는 거다. 그게 정의로운 사회다.

 

그동안 진보 좌파는 촛불정신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내세웠다. 그러나 촛불은 진영논리와 상관없이 기득권층이 정의롭지 못할 때 타오른다. 학생들이 지금 들고 있는 촛불은 이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조국 후보자 딸의 입시와 장학금과 관련한 불의에 항의하는 촛불이다. 그러나 이 촛불을 일부 언론과 야당의 선동에 의한 거라는 식으로 폄훼하고 조롱한다면, 이 촛불은 캠퍼스를 넘어 광화문으로 번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법무부를 영어로 정의부(Ministry of Justice)라고 한다. 우리나라 법무부의 영어 표기도 이렇게 되어 있다. 조국 후보자는 정의 구현을 책임지는 정의부 장관 후보자다. 조국 본인이 정의롭지 않은데 어떻게 조국의 정의를 책임질 수 있는지 국민 다수는 믿을 수 없어 한다.

 

지금이야말로 문재인 정권이 핵심가치로 내세운 평등·공정·정의를 바로 세울 때다. 그걸 대통령이 못하면 검찰이 해야 하고, 검찰도 못하면 국민이 할 것이다. 개인 조국(曺國)의 운명과 함께 우리 조국(祖國)의 운명이 갈리는 기로에 있다. 촛불을 다시 보며 교차하는 만감 중에 떠오른 단상이다.

이현훈 | 강원대 국제무역학과 교수 경향 2019.09.02.

 

이승만 학당에서 탈식민주의를

언론인 송건호는 1979, ‘이승만 박사의 정치사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박사처럼 시비가 많았던 사람도 드물지만 그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인물도 드물다. 그가 말하는 국가란 곧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개인 이승만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평가, 즉 그가 미국을 협박하여 안보 자원을 얻어낸 건국의 아버지(애국자)라는 주장과 해방 후 새로운 점령자인 미국으로의 종속을 더욱 강화시켰다는 입장(사대주의자), 동일한 논리가 아닐까. 이광수의 친일 내셔널리즘처럼, 그에게 미국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겸사겸사 좋은 일이었다. 애국도 하고 국부로 등극했으니 말이다.

 

194610, 당시 이승만을 취재한 시카고 선() 특파원 마크 게인의 평가대로, 그는 파쇼가 아니라 파시즘보다 2세기 이전인 ‘(무능력하면서 왕족 행세나 하는) 부르봉파()’ 수준의 인물이었다. ‘미국 박사 이승만은 근대의 상징이 아니라 봉건적인 인물이었다는 언급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74년이 과연 진정한 광복(光復)’의 시간이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언제나 우리의 8월은 예사롭지 않다. 특히 올해는 아베로부터 시작된 도발과 그 파장으로 인해 대내외적 대립이 유난했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어온 논쟁,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 지배, 약탈했고 우리는 저항했다일본 덕분에 근대화가 도입, 실현되었다는 이분법이 여전히 반복되었다.

 

지구상의 모든 근대는 식민지를 동반한 근대화였다는 점에서, 위의 두 가지 주장은 동일한 논리다. 제국주의가 수탈을 하려면 식민지에 철도와 항만을 만들어야 하고, 노동력도 착취해야 한다. 당연히, 이러한 과정이 일본 우익의 논리대로 한반도를 문명화시킨 것은 아니다. 동시에 식민지 국가에는 부역자가 있기 마련이며,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이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지위를 가졌던 것도 아니다. 그들도 내부의 계급과 성별, 인종에 따라 근대화의 경험은 천차만별이었다. 서구 역시 근대 국민 국가는 지향이었을 뿐 현실이 아니었다. 국민들 간의 불평등은 지금도 여전하다. 여성은 이등 국민이었고, 흑인은 노예였다. 국가 단위를 넘어서(트랜스 내셔널) 사유하지 않는다면, 흑백 논리는 지속될 것이다.

 

역사는 깔끔하지 않다. 역사는 팩트라기보다는 해석, 여파(餘波)에 가깝다. 팩트도 누군가의 기록이며 인간의 인식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정사(正史)나 정명(正名)을 시도하는 작업은 위험하다. 배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올바른역사는 다양한 목소리들의 경합 과정에서의 윤리를 의미하는 것이지, “기록이 없기 때문에 군 위안부는 없었다거나 증언은 무조건 진실이다라는 주장은 모두 신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진보와 보수 불문, 한국 사회의 여론 주도층은 스스로를 양 진영의 대표자 혹은 순교자, 저항자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입장이 유일한 진실이라 확신한다는 것이다. 우리 내부 인식의 분단체제,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문화 지체 현상을 겪었다. 이제는 좀 더 나은 논쟁을 할 의무가 있다. ‘친일파’ ‘빨갱이처럼 편리한 정치적 도구(낙인)가 있는 한, 우리는 성장할 수 없다. 사회·문화적 검열이 국가보안법보다 무서운 세상이다. 예전의 다른 목소리는 민주화 열사였지만, 지금은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증류수 같은 순수한 현실은 없다. 하물며 식민 지배와 피지배로 얼룩진 근대의 글로벌 자본주의체제에서 문화의 잡종성(hybridity), 모순은 당연하다. 식민주의는 한일합병 바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가 1945815일 중단된 그런 체제가 아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은 싫어하지만 일본산()’은 좋아한다. 한국 사회에서 반도체 부품만 일본의 것인가? 재일 조선인의 노동 없이 일본의 근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일본의 경제 성장을 한국전쟁과 한반도 분단 없이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유는 식민주의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 이른바 포스트 콜로니얼이라는 상황 인식이 아닐까. 포스트 콜로니얼이 ‘~ (·de), 탈식민주의로 번역되면서 마치 식민주의가 끝난 것처럼 오해되고 있지만, 식민주의든 자본주의든 가부장제든 경험은 몸에 각인되기 마련이다. ‘포스트는 정확한 번역이 불가능하다. 반대, 대항, 변환, 넘어섬, 해체, 문제 제기, 극복 등 다양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국민국가, 포스트 휴먼처럼 포스트는 어떤 것 자체이면서 더 이상은 그것이 아닌 것에 가깝다. 공식적 주권 회복 이후에도 지속되는 식민주의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피해의식이나 선진국 콤플렉스 대신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과정이 진정한 탈식민 아닐까.

 

이승만 학당홈페이지에 따르면, “이승만의 정치경제사상, 독립운동과 건국의 업적을 연구, 교육, 홍보하는 곳이다”. 이승만에게 정치경제사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지만, 나는 이런 학당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승만 학당은 그의 업적을 홍보하는 곳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찬반 논쟁, 식민지냐 근대화냐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는 논쟁의 장이 되어야 한다   정희진 여성학자 경향 2019.09.03.

 

부끄럽고 무책임한 내년 예산안

지난달 29일 정부는 내년 예산액을 올해보다 9.3% 늘어난 5135000억 원으로 확정했다. 올해 예산액이 전년 대비 9.7% 인상되었던 점을 감안해 보면 2년째 9%대 증액된 것으로 경제성장률보다 대략 3.5배 증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연히 적자 국채 발행 규모도 올해 338000억 원에서 내년 602000억 원으로 약 2배 가량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해 홍남기 부총리는 국가부채 증가는 불가피하며 아직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당이 기대하는 만큼 예산이 증액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홍 부총리는 예산증액 이유로 경제성장률 제고를 통한 경제선순환 구조확립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증액예산 가운데 반 이상이 복지예산인 점을 감안해 보면 홍 부총리의 재정확대 이유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이번 재정확대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률이 상승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 대책이 무엇인지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최소한 현 시점에서 홍 부총리가 제시한 가설이 채택될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이 사실이다.

 

이미 미·중과 한·일 무역 분쟁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내외적으로 경제성장률이 견인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올해는 물론이고 내년에도 국세수입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서 복지예산증액을 통한 경제성장률 제고라는 홍 부총리의 가설은 사실상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정부의 재정확대는 내년 총선용이라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모든 정부는 재정확대를 통해 국민들로부터 환심을 사고 싶어하는 유혹에 빠져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경제성장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증액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 때 예산증가율은 평균 5.9%였으며, 박근혜 정부 때는 4.0%에 불과했다. , 경제성장률과 거의 유사한 수준에서 예산증가가 이뤄졌던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경제성장률은 2% 대 임에도 불구하고 예산증가율은 8% 중반대를 넘어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에는 예산증가율이 10.6%에 달한 바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헌법 제126조에서 말하는 국민경제상 긴절한 필요가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문 대통령도 지속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제지표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는 현 시점에서 금융위기 때처럼 과도한 재정확대정책을 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번 예산증액이 의혹대로 총선용이라면 현 정부와 여당은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포퓰리즘정책을 통해 국가부도 위기에 몰린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모습을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 진다.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우리 헌법 제58조의 해석상 국회의 의결만 거치면 국가채무가 무한대로 증가해도 합헌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에는 헌법 제115조 제2항에서 국가예산 수립 시 원칙적으로 국가부채 증가가 명목 국내총생산의 0.35 퍼센트를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를 기준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올해나 내년 모두 넉넉잡아도 10조원을 넘는 국채발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올해 33조원, 내년에는 60조원이 넘는 국채를 발행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래세대에게 정말로 부끄럽고 무책임한 예산안인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국회는 사명감을 갖고 미래세대의 짐을 덜어주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전삼현 숭실대법학과 교수 디지털 타임스 2019.9 3

 

노무현의 실패, 문재인의 위기

이 나라 주류는 보수이고 그 중심에 법조가 있다. 이 법조에서 대통령을 두 번 냈는데 노무현과 문재인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자 가장 강하게 반발한 그룹이 법조다. 경기고는 커녕 그 흔한 서울대 출신도 아닌 고졸의 노무현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나이도 많은 상고 출신이 떡하니 연수원 교실 가운데 앉아서 말이야.” 수십년 전 기억까지 끌어다 미워했다. 합격자가 겨우 60명이던 시절 사법시험에 붙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법시험 합격은 법조에서 시민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검찰에 불려 다니다가 목숨을 끊자, 얼음장 같은 말로 조소하던 그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험과 성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곳이 법조다. 경기고를 졸업해도 서울대에 붙지 못하면 소용이 없고, 같은 서울대라도 법학과를 졸업해야 한다. 이런 잣대의 최정점에 사법연수원 졸업 성적이 있다. 더 이상 수험생이 아닌 예비 법조인을 상대로 고도의 논리력과 분석력을 강도 높게 검증한다. 머리 좋은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렇게 나오는 연수원 순위이기에 서로들 인정한다. 목포상고 출신에 성균관대 야간대학을 졸업한 연수원 5기 수석이 김오수 변호사다. 연수원 수석인 그를 상고 출신이라거나, 야간대학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이런 수석들 가운데서도 우수하다는 사람이 12기 김용덕 전 대법관이다. 자신의 능력을 지난 35년 법관 생활로 입증했다.

 

김 전 대법관이 수석이던 해 차석이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19804월 학생시위를 주도하면서 2차 시험을 치렀고 유치장에서 합격했다. 연수원 순위에 합산되는 사법시험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연수원 시험만으로는 문재인이 수석이라는 얘기도 있다. 김용덕보다 우수한 사람이 문재인 아니냐고 하면, 법조인 누구도 대꾸하지 못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에게도 문재인 같은 친구가 있다고 한 데는 이런 의미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 대통령이 법원개혁의 적임자로 택한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거치지 않은 김명수 춘천법원장이다. 김 대법원장을 임명한 것 자체가 개혁이고 성적과 같은 낡은 틀을 부순다고 했다.

 

하지만 법원개혁이 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최근 사법행정자문회의라는 기구를 대법원이 만들었다. 민변에서는 개혁안이라 부르기 어려우니 철회하라고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농단 핵심인 법원행정처 개혁안을 만들라고 지난해 10월 지시했다. 이에 법원 내부독재를 막으려면 외부인사가 과반인 기구가 법원행정처를 대체해야 한다고 사법발전위원회 추진단이 건의했다. 김 대법원장은 이 의견을 무시하고 행정처를 사실상 부활하는 방안을 밀어붙였다. 이 부활안은 추진단이 생기기 전인 같은 해 8월에 법원행정처가 만든 비밀문건임이 경향신문 보도로 드러났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비밀문건대로 추진했고, 이것이 민변도 반대하는 사법행정자문회의다.

 

왜 이런 일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달리 법조장악 조건을 갖춘 듯 보이는 문재인 정권에서 벌어질까. 흔히 생각하는 진보와 보수, 개혁과 반개혁이 쉽게 구분되지 않고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곳이 법조이기 때문이다. 당장 사법농단 사건을 주도한 판사들 상당수가 우리법연구회 소속이고, 법원행정처 권력화는 노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작품이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이용훈 대법원과 양승태 대법원은 다르지 않다. 이들끼리 누구는 진보이고 누구는 보수라고 말해 정권의 신임을 돌아가며 얻을 뿐이다. 노 전 대통령이 민주화에 헌신했다고, 문 대통령이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법조라는 거대한 집단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법조에는 단단하고 치밀한 자기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요즘 법원의 권위 회복을 호소하는 판사들이 양승태 대법원을 무너뜨린 사람들이다. 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한 대통령이라도 쉽게 장악하지 못하는 곳이다. 지난해 사법발전위원회 추진단이 사법독재를 극복한 유럽처럼 주권자인 국민이 사법부 감시에 관여하는 방식이 우리에게 좋겠다고 건의했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은 법관 대다수의 뜻을 내세워 거부했다. 실제로 법관 다수가 시민의 통제를 거부한다. 이 무렵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개혁을 추진할 법무장관에 조국 서울대 교수를 지명했다. 지금은 금수저의 상징이 되어 있지만 진짜 금수저가 수두룩한 법조에서는 사법시험 출신도 아니지 않으냐는 말부터 나왔다.

조국 후보자가 금수저들의 실상을 드러내며 위기에 몰리자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수사에 착수했다. 청문회가 무산되자 다시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그로기로 몰고 있다. 이제 조국 후보자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검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검찰이 정치를 주도하고 흔들지 못하게 만들자는 것이 조국 후보자의 신념이었다. 노무현에 이어 문재인마저 법원개혁과 검찰개혁에 실패한다면 당분간 희망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경향 2019.09.04.

 

'금수저 출신 개혁가'들에 대한 경고?

저들의 진정한 의도는 성공한 듯하다

중세 시대 마녀를 판별하는 방법 중 하나가 마녀로 지목된 사람의 몸에 무거운 바위를 묶어 강물이나 운하에 던지는 것이었다. 가라 앉으면 마녀가 아닌 것으로, 물 위로 떠오르면 마녀로 각각 간주됐는데 결백이 입증되건 아니건 마녀로 지목된 자를 기다리는 건 죽음이었다.

 

마녀사냥 시스템에서 중요한 건 그녀 혹은 그가 마녀인지 여부가 아니었다. 마녀사냥 시스템의 본질은 현실 권력(교황, 봉건 영주와 국왕 카르텔)의 부당한 지배 체제를 극단적 공포 기제를 이용해 공고히 하고, 지배 체제의 실정에 쏟아져야 할 민중의 불만과 분노를 대게 사회적 약자였던 마녀(?)에게 전가하는 것이었다. 마녀로 지목된 자의 목숨을 뺏고 덤으로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게 마녀사냥 시스템의 작동 방식이었다.

 

최근의 조국 사태를 통해 문명 사회에서 추방됐다고 믿은 마녀사냥 시스템의 현대적 부활을 목격하는 느낌이다. 현 국면에서 마녀사냥 시스템의 주관자는 공식 권력의 일부 및 비공식 권력 대부분을 소유한 특권과두동맹(특히 특권과두동맹의 정치적 호민관 정당과 일부 비대 언론의 주인들)이며, 마녀 심판관은 압도적 다수의 미디어다. 조국을 마녀로 지목한 특권과두동맹과 압도적 다수의 미디어는 대중의 정념을 최대한 자극하는 방식을 통해 현대판 마녀사냥의 정당성을 획득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시도는 꽤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현대판 마녀사냥의 주관자 및 마녀 심판관에게 조국의 마녀 여부(조국 일가에 드리운 이런 저런 위법혐의 및 그 위법혐의에 조국이 개입했는지 여부 혹은 위법 행위는 아니나 조국이 수인해야 마땅한 도덕적 비난가능성 여부)는 전혀 중요치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들에겐 중세 마녀로 지목된 자의 운명이 그러하듯 조국도 죽어야(사회적 죽음) 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다면 현대판 마녀사냥 시스템의 주관자와 이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미디어들은 도대체 왜 조국을 마녀로 만들어 죽이려 하는 것일까? 조국이 법무장관이 되는 걸 저지하고, 문재인 정부에 심대한 정치적 타격을 주려는 셈법이라는 건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런 정도의 전술적 목표 달성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조국에 대한 이들의 적의와 증오가 너무 강하고, 조국 낙마에 투입하는 에너지가 지나치게 크다.

 

혹시 이들에겐 메인스트림 내에서 조국 같은 자들(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나 흙수저들의 정치사회경제적 처지를 개선시키려는 의지와 지향을 지닌 이들)의 재출현을 사전적으로 봉쇄하고 위하(威嚇)하려는 심모원려가 있는건 아닐까? 만약 이들이 그런 의도라면 이들의 의도는 얼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설사 조국이 법무장관이 되더라도 금수저 출신의 또 다른 조국의 출현은 당분간 쉽지 않아 보이니 말이다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대표 프레시안 2019.09.04.

 

작두 위에 올라탄 검찰

15대 대통령선거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9710, 신한국당의 이회창 후보 쪽은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67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의혹이 있다며, 김 후보를 조세포탈 및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전국고등검사장 회의를 열어 수사 개시 여부를 논의했으나 신중론과 강행론이 팽팽히 맞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이 사태는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이 수사를 대선 이후로 유보한다고 전격 발표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고 보면 당시 검찰의 수사 유보는 너무나 당연한 해답이었다. ‘비리 의혹 수사는 어떤 성역도 없어야 한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 명제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특히 국민의 판단에 맡겨야 할 사안에 검찰이 칼을 빼 들면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기 쉽다. 훗날 김태정 검찰총장은 “(당시 수사에 착수했다면) 호남에서 민란이 터졌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민란 발발여부를 떠나 유권자의 선택을 앞두고 검찰이 정치적 사건에 끼어드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다.

 

같은 맥락에서 검찰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수사에 나선 것은 아무리 봐도 잘못된 결정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청와대든 정부든 집권 여당이든, 권력형 비리가 있다면 엄정한 자세로 임해주길 바란다고 한 말이 수사의 정당성 근거로 거론되지만, 그 말이 이번 경우에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문 대통령이 말한 것도 권력형 비리에 대한 철저한 수사였다. 그런데 지금 검찰이 하는 수사는 주로 조 후보자의 과거 교수 시절에 벌어진 일들이다. 사모펀드 문제 정도가 청와대 민정수석 취임 이후의 일이지만, 이 역시 명백한 권력형 범죄혐의가 드러나 수사에 착수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조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은 도덕의 문제이지 법의 문제가 아니다. 딸의 논문 제1저자 등재, 장학금 수혜 등등을 통해 나타난 특권과 특혜, 조 후보자의 언행 불일치 등에 많은 사람이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검찰은 고위공직자 후보의 도덕염치에 대한 국민적 판단을 구할 사안을, ‘불법탈법에 대한 사법적 판단을 들이대겠다고 나선 것이다. 사실 검찰이 수사까지 착수하는 상황에 이르면 후보자가 더는 못 견디고 사퇴하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졌지만, 이번에는 그런 일반적 예상도 빗나갔다. 조 후보자는 수신제가를 하지 못한 부분은 사과하면서도 치국을 위해 양해해 달라며 버티고 있다.

 

검찰은 조 후보자의 국회 기자간담회가 끝나자마자 대대적인 압수수색에 나서는 등 임전무퇴의 결의를 더욱 불태우고 있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아 줄 곳은 검찰뿐이라며 “(조 후보자는) 시퍼런 작두 위에서 춤추는 선무당처럼 내려올 수도 없고 앞으로 나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더 날카롭고 위험한 작두 위에 올라탄 것은 오히려 검찰인 것 같다. 윤석열 검찰총장 임명에 기를 쓰고 반대하던 세력이 믿을 사람은 윤 총장뿐이라고 응원을 보내는 반면에 윤 총장 지명에 박수갈채를 보냈던 많은 사람이 이제는 그를 향해 비난을 쏟아내는 역설적인 상황이 지금 검찰이 처한 처지를 웅변한다.

 

-검 대결의 결말은 과연 어떻게 될까. 워낙 많은 변수가 잠복해 있어 누구도 예단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양쪽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칼날 위의 위험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검찰의 특성상 이미 빼 든 칼을 칼집에 도로 넣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검찰이 조 후보자가 직접 관여한 불법행위를 밝혀내 기소를 할 정도가 돼야 하지만 수사 양상은 그런 차원을 벗어나 흘러가고 있다.

 

결말이 어떻게 나든, 검찰의 이번 수사는 두고두고 개운찮은 뒷맛을 남기게 돼 있다. 앞으로 주요 공직 후보자에 대해 고발이 들어오면 국회 인사청문회에 앞서 검찰이 먼저 수사를 해야 할 상황이 돼버렸다. 무엇보다 검찰은 이번 수사를 통해 검찰공화국의 의미를 다시 썼다. 검찰공화국이라는 말은 검찰이 정치권력과 야합해 나라를 자신들의 세상으로 바꿔놓았다는 뜻인데, 검찰은 아예 독자적인 정국 해결사를 자처하고 나섬으로써 검찰왕국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만들었다. 이래저래 검찰 개혁의 실행은 더욱 절실한 과제가 됐다.   김종구 편집인/ 한겨레 2019-09-04

 

'엘리트 대학생'들의 공정성 담론에 동의할수 없다

씁쓸한 학생들의 선택적 분노

기성세대가 현 20대의 열패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조국 전 수석을 둘러싼 사태에 20대가 그 어떠한 사건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그러한 답답증과 울분에서 기인했으리라.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런 청년들의 성토에서 나는 가장 암울한 징후를 엿본다.

 

공정함이 무엇인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올바르다는 것이다. 그럴싸해 보이는가? 그런 와중에 당신도 모르게 그 단어 안에서 당파성은 죽어간다. 공정함이 정의와 등치로 여겨지는 20대의 공허한 담론 속에 정치는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담론에 필수적인 상호투쟁의 장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구시대적 산물로 치부된다. 따라서 그것은 애당초 담론이 될 수도 없다. 공정성 '담론'을 나는 혐오한다. 담론이 아닌 것이 담론 행세를 하는 것은 가장 해악적이기 때문이다.

 

무슨무슨 시험과 제도를 통해 입신양명의 출세길을 천편일률적으로 구속해 놓은, 사악하기 그지없는 시스템이 우리 머리 위에 있다. 머리 안에 있다. 공정성을 외치는 자들은 그런 시스템의 항구성을 전제한다. 전후좌우와 내외에 뺑 둘러진 시스템에 압도되어, 그 바깥을 볼 용기를 현실타협주의로 억누른다.

 

제한된 먹이를 일부가 배불리 독점하는 구조를 지적하지 않고, 나도 좀 먹자고 들러붙어 있는 꼴이다. 언뜻 정의로움을 자처하며 기회의 불균등을 성토하고 피해자 서사를 주섬주섬 차려입지만, 그들에게 먹이 부스러기를 던져주면 ('불공정'한 제도를 개정해 주면) 불만은 쏙 들어간다. 애당초 그들의 불만은 근본적으로 담론화할 수 없는, 범박하고 지독히 한갓된 요구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물론 거대 양당의 어느 편을 막론하고, 기득권층은 너나 할 것 없이 제한된 자원과 기회를 독점하고 저들끼리만 나눠왔다. 이런 작태를 우리가 비판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만 먹냐? 나도 좀 먹자"의 층위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공정은 평등의 보조를 받지 않고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너와 내가 왜 마주볼 수 없는지를 묻지 않고서 다음 질문을 성급히 던져서는 안 된다. 촛불을 들고 서울대학교 아크로폴리스에서 "조국 OUT"을 외치는 이들 중에 청소노동자의 죽음을, 탈북민 모자의 죽음을, 서울대학교 교수 사회의 지성적 퇴락을 똑같이 성토한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먼저 짚어 볼 일이다. 왜 청소노동자는 쉼터에서 에어컨을 가질 수 없었는지, 왜 탈북민 모자는 생명을 지속할 수준이나마의 음식조차 가질 수 없었는지, 왜 대학원생들은 기본적인 수준의 인간적 존중을 요구할 수 없었는지 우리는 관심을 가져 보았는가? 이번 일을 계기로 아니나 다를까 "모든 입시 체제를 정시로 돌려야 한다"는 의견이 불쑥불쑥 온 커뮤니티에서 고개를 내민다. 있는 놈들이 자소서니 생기부니 다 해 먹으므로, 공정한 일괄평가와 점수 줄 세우기로 과정상의 입말들을 막자는 것이다. 평등에 대한 고찰은 없고 공정에 대한 분노만 있다. 소박하고 소박하다.

 

이번 조국 반대 시위를 최초로 조직한 학생들의 정체를 듣고, 나는 서울대학교 안에서 그간 벌어져 왔던 수많은 투쟁 사례를 떠올렸다. 그들은 시흥캠퍼스, H교수, A교수, 청소노동자 사망, 비학생조교 파업, 서울대 기계·전기노동조합(기전노조) 파업 등등의 그 모든 사태에서 수동적으로 일관하거나, 관조하거나, 가끔은 싸우는 이들의 입을 막으려고 애쓰던 이들이었다. 그 모든 얼굴들이 아른거렸다. 집회에서는 그들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 부탁한 발언들은 취소되기 일쑤였다. 내민 연대의 손은 차갑게 식었다. 기전노조가 파업하자 그들은 본부로 달려가지 않고 노조로 달려갔다. 싸워 온 사람들을 '운동권 정치'로 간편하게 개념화하고, 그들의 방식을 '투쟁을 위한 투쟁'이라고 조소했다. (참 속편히 생각해서 좋겠다)

 

그들에게 학생사회의 모든 투쟁 사안들은 합리성의 손길을 기다리는 정념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기계의 눈으로 손익계산을 했다. 본부의 지원금이나 표결 결과 정도가 그들의 최고 당위였다. 그것을 '현실투쟁 노선'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덤이었다. 자신들의 범박한 실증주의적 세계관이 권력을 만나면, 실증할 수 없는 인간의 세계에 얼마나 큰 폭력을 유발하는지 알고 있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적 행보가, 자신들이 구조적 평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영달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었음을 알고 있을까?

 

오해 말아 달라. 그들이 집회에서 외치는 말들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조국 사태에 화가 난 심리를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점점 좁아져 가는 기회와 암울한 미래에 똑같이 절망하고 있는 20대로서, 기득권과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의 정동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분노의 자장을 더욱 확장해 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모든 약자들 앞에서는 그간 차갑고 도도한 엘리트의 얼굴로 일관해 온 이들이, 이번 일에 유독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이러니할 뿐이다. 서울대, 고려대 등지에서 일어난 모든 집회가, 나는 딱 그 모순만큼 슬프다. 그들에게 매번 내밀었던 손만 따뜻했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 황운중 대학생 프레시안

 

누가 조국에게 돌을 던지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성경에 나오는 예수 말씀이다. 한 사람을 죄인으로 내몰며 돌을 들고 단죄하려는 분노한 군중이 있었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다. 죄 없는 자가 없었기에.

 

2000년 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검증 논란 때문이다. 당시 군중이 오늘의 많은 군중(언론 포함)과 다른 점은, 스스로 죄를 인정한 것! 지금은 예수가 없어서일까? 특히, 많은자들이 돌로 융단 폭격하는 건 왜? 사회심리학적으로, 경쟁과 차별의 사회에서 상처받아 두려움에 빠진 이들은 그 트라우마를 특정 대상에게 공격적으로 투사하기 쉽다. 이를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사람 그 자체를 볼 것인가 아니면 그를 둘러싼 시스템을 볼 것인가? 물론, 사람도 시스템도 봐야 한다. 일례로, 후보자는 (학교법인까지 가진) ‘있는집 출신으로, 일류대 졸업 후 박사 학위까지 한 다음 모교 교수가 되었다. 문재인 촛불정부의 민정수석을 거쳐 장관 후보가 됐다. 게다가 10억원대 사모펀드 투자까지 한, 이른바 강남 좌파. 그 딸은 고교 때 영어 논문의 제1저자가 될 정도로 특출했다. 이래저래 욕먹을 일도 있겠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시스템을 보란 지적은, ‘빈익빈 부익부사회구조를 고쳐야지 사람 탓만 해선 안된단 얘기다. 사실 현 시스템은 부의 격차가 교육 격차로, 또 이게 직업 격차와 수입 격차로 이어져 확대 재생산된다.

 

따라서 이런 격차 사회의 틀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고 개인만 탓하는 건 문제다. 그러나 그렇다고, ‘열심히해서 탁월한 성과를 냈으니 문제없다거나 심지어 누구 말처럼 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이라 할 순 없다. 후보자가 기자간담회에서 정치적 민주화만 신경 쓰고 사회적 불평등 해결에 앞장서지 못해 제 아이가 혜택을 입은 점은 반성한다거나 젊은 세대에게 실망과 상처를 준 점은 죄송하다고 한 건 그 나름의 사회적 책임감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이른바 ‘586세대가 직면한 공동의 현실이다. 박정희 세대가 산업화만이 잘사는 길이라 했다면, 1970~80년대의 피 끓는 청년들에겐 민주화가 시대정신이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전되자 당황한 국내외 자본은 세계화를 밀어붙였다(물론, 자본주의 적응이 아니라 그 극복은 늘 금기다). 그사이 정치 민주화는 약진하되, 사회경제 민주화는 걸음마다. 지금도 여전한 장시간 노동과 고용불안, 차별과 불평등, 노조 억압, 일중독, 산업재해, 취약한 복지 등이 그 증거다. 결국, 개인을 넘어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

 

둘째, 인물 자체도 직무수행 능력과 의지에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신상털기하듯) 위법이 의심되는 그 모두를 완벽검증할 것인가? 예수가 간파했듯, 누구나 잘못은 범한다. 이를 겸허히 인정한다면, 인물 검증의 현실적 기준은 완벽성이 아니라 수행성이어야 한다. 인간적 망신주기나 관음증은 더 안된다. 무엇보다 법무부 장관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모순을 척결하고, 국회의원 등 공직자 비리를 없애야 한다. (가진 자) ‘만 명에게만 평등한 법을 만인에게 돌려주고, ‘전관예우도 없애야 한다. (김기춘-우병우-황교안-양승태식 사법농단을 넘어) 검찰개혁과 사법정의 구현을 위한 진정성과 역량이 있으면 충분하다. 사실, 장관보다 중요한 건 사법 시스템의 신뢰를 높이는 것. 다만, 무능이 거듭 드러나면 언제든 소환할 장치를 만들자! 역으로, 완벽성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묻는다. 같은 잣대로 역대 법무부 장관들을 재검증하면 어떨지? 또 그 완벽성을 바로 자신에게 적용하면 어떤가?

 

셋째, 합법성의 잣대에 갇힐 것인가, 물신성에 주목할 것인가? ‘가진자가 갖기 위해 펀드에 합법투자를 했다 치자. 그러나 불평등이나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려면 합법성 잣대를 넘어 물신성을 극복해야 한다. 노동, 상품, 화폐, 자본, 경쟁, 시장, 종교, 학벌, 권력의 물신성이다. 물신성이란 특히 화폐(권력)의 지배 아래 본연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그들을 우상 숭배하는 것이다. 이 물신성 극복은 장관에 임명되더라도, 또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더라도 쉽진 않다. 물신주의가 사회 전반에 깊이 내면화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2000년 전 예수의 말을 경청했던 군중들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과 사회를 깊이 성찰할 일이다. 장관 임명과 무관하게, 이런 성찰 과정이 사회를 한층 고양할 것이다. 이 과정이 없다면 인사 검증이란 늘 () 잔치에 그친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나

강수돌 고려대학교 융합경영학부 교수 경향 2019.09.06.

 

서울대생의 촛불, 너릿재 너머의 아이들

서울대생들이 조국 교수의 일로 촛불을 들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저 촛불을 광주의 전남대생들이나 나주의 동신대생들이 같이 들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만약 같이 들 수 있다면, 그것은 새 아침을 부르는 촛불일 것이다. 아니라면? 그것은 공동묘지 도깨비불일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를 위한, 모두에 의한, 모두의 좋음만이 참된 공공선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소수를 위한, 소수에 의한, 소수의 좋음은, 타도해야 할 특권일 뿐이다. 촛불 아니라 횃불이라도, 우리 모두가 같이 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불장난일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촛불을 드는 사람 역시, 그것이 정녕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자기가 든 촛불을 남들도 같이 들자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내 물음은 필요 없는 물음이었다. 주최 측에서 학생증을 검사하고 서울대생들만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한다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고려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유를 물으니, 외부의 정치 세력의 개입을 우려해서라 한다. 하지만 그 촛불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 내부와 외부를 나눌 까닭이 무엇이며, 처음부터 정치적인 촛불집회에 누가 오든, 같이 동참하겠다는데 마다할 까닭은 또 무엇인가?


답은 없고, 무심히 불구경을 하다, 다시 보니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 대다수가 서울대 출신이었다. 주연 배우, 조국 서울대 법대, 조연 배우, 나경원·윤석열·원희룡 서울대 법대, 유시민·이진경 서울대 사회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번엔 도대체 이 드라마의 끝이 어디일까 하는 궁금증을 억누를 수 없었다. 만약 아베 정부가 수출 규제로 못 이룬 문재인 정부의 붕괴를 엉뚱하게도 조국 사태가 이루어주면, 그 뒤에 황교안이 대통령이 되어 나경원을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하고, 이번에는 그 가족이 운영하는 학교에 압수수색이 들어가고 딸의 대학 입학을 빌미로 다시 서울대생들이 정의의 촛불을 들면, 서울대 학생증도 졸업증명서도 없는 나는 관악산 공동묘지에 어른거리는 좀비들의 불장난을 무심히 바라보며, 술잔이나 비우고 있을 것인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조국 교수가 젊은 시절 몸담았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은 의장이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백태웅이었지만, 학생증 검사 따위는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금 서울대생들의 촛불보다 훨씬 나았다. 그래서 그 시절, 낮엔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선린상고 야간을 마친 박노해 시인도 사노맹 중앙위원으로서 백태웅, 은수미와 함께 선언문을 기초했던 것이다. 박노해가 7년이나 옥살이를 할 때, 비슷하게 6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고문 후유증으로 끝내 불임이 되어버린 그 은수미 성남시장도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이었는데, 건강한 젊은 여성을 불임이 되도록 만들려면 어떻게 고문해야 되는지, 그리고 그런 상처는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야 아무는지, 나는 아무 것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 모두 야간 상고 출신 노동자와 서울대 법대 출신의 신출내기 교수가 출신학교를 묻지 않고 세상의 악과 같이 싸울 수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시간의 맷돌은 한 때 사랑과 우정 속에 하나였던 조직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분리되어, 원자로 돌아간 개인은 엠페도클레스의 네가지 원소처럼 가벼운 불은 위로 올라가고 무거운 흙은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같이 고문 받고 같이 옥살이를 했어도, 서울대 나온 사람들은 강남좌파가 되어 청와대나 국회로 올라갔고, 야간 상고를 나온 사람은 시인이 되어 카메라를 들고 지상에서 가장 낮은 땅, 팔레스타인으로 내려갔다.


생각하면 운명의 여신은 얼마나 비정한가? 오이디푸스가 파멸에 이른 것은 그가 특별히 사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절대 아니다. 그의 잘못은 단지 그가 코린토스가 아니라 테바이를 향해 갔기 때문이다. 그 길 위에서 우연히 부딪힌 사람을 제 아비인 줄 모르고 살해한 것은 누구라도 그럴 법한 정당방위였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할아비의 피 값을 손자에게 받아내기도 하고, 딸이 받은 특혜의 청구서를 아비에게 내밀기도 한다. 저주도 축복도 개인이 아니라 집안에 내린다. 그것이 역사고, 그것이 우리 존재의 서로주체성이다.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 속에서만 내가 되니까.


조국 교수가 당하는 봉변도 그가 우리보다 특별히 더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가 개인으로서 단정하게, 공인으로서 헌신적으로 삶을 살아온 것을 존경한다. 그런데도 그가 지금 같은 봉변을 당하는 까닭은 그가 이른바 강남좌파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가 그 길로 가지 말았어야 했던 것처럼, 그도 스카이 캐슬의 저주를 피하려면 강남 길로 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강남 길로 갔고 더불어 그의 딸도 본의 아니게 강남 길을 따라 걸었다. 걸으라고 열려 있는 길이었으니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다들 그렇게 그 길을 걸어 서울대도 가고 고대도 갔으니까.


그러나 열린 길이라고, 모두가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카이 캐슬의 자식들이 대학에서 인턴도 하고, 무슨 논문도 쓰고, 장관이나 총장의 상도 받고 하던 무렵, 너릿재 너머 화순의 학생들 가운데 거칠게 말해 3분의 1은 집에서 할머니를 돌보고, 3분의 1은 읍내에서 5만원 짜리 단과반을 듣고, 3분의 1은 고개 넘어 광주에서 20만원 짜리 종합반을 들었다. 강남 길이 열려 있다 한들, 그 아이들이 그 길을 같이 걸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것은 조국도, 그의 딸도 아니고, 강남 길이며, 그 길의 처음과 끝에 버티고 선 스카이 캐슬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그 강남 길을 걸어 서울대도 가고 고대도 간 학생들이 촛불을 든 것은 무슨 희극인가? 똑같이 상장도 모으고 스펙 쌓아 거기 들어간 것이 드러날까 봐, 알리바이를 만들려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강남 길을 걸어 스카이 캐슬에 들어왔으나, 그의 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그러나 입시가 아무리 공정하게 관리되더라도 너릿재 너머 아이들이 강남 길을 걸을 수는 없다. ‘스카이 캐슬사람들이 대학입시와 선발제도를 끊임없이 더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이해하려면 입시 설명회가 필요하고 그 길에서 앞서려면 입시 컨설턴트도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스카이 캐슬에 살지 않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입시 자체가 불평등의 재생산장치가 되어 버린 지가 너무 오래 되었다. 서울대 촛불은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연막이다.


그러니, 학생증 검사가 없더라도, 광주나 나주의 대학생들이 그 촛불을 같이 들 일은 없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열심히 촛불을 들어라. 닥쳐올 분노의 심판 날에 그 불장난이 그대들의 성채를 잿더미로 태워버릴 때까지! 전봉준과 유관순과 전태일과 윤상원이 물려준 이 나라는 별장에서 살뜰하게 접대 받으면서 살 너희들만의 것이 아니라, 또한 너릿재 너머에 사는 대지의 아이들 것이기도 하므로. /전남대 철학과 교수 한겨레 :2019-09-08

 

 

윤석열의 나라

윤석열 검찰총장이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에 대해 수사에 들어간 이유가 뭘까. 검찰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이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윤 총장은 최근 무리한 검찰 인사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윤 총장은 취임 후 검찰 간부 인사에서 자신과 호흡을 맞췄던 검사들을 대거 요직에 앉혔다. 통상 검찰간부 인사의 경우 청와대와 법무장관, 검찰총장이 협의하는 게 관례다. 이번의 경우 사퇴가 기정사실화된 박상기 장관은 인사에 사실상 손을 놓았다고 한다. 청와대 민정수석도 교체기였다. 윤 총장의 독식이 가능했던 이유다. 문재인 정부 주변에 수사의 칼날을 들이댄 검사들은 줄줄이 좌천됐다. 인사에 물을 먹은 중간간부급 검사들은 50명 넘게 사표를 냈다. 전례 없던 일이다. 검찰 내에선 해도 너무 했다” “윤석열도 다를 게 없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내부 동요는 심상치 않았다. 윤 총장은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할 필요가 생겼다. 그는 윤석열 검찰 1호 사건으로 조국을 선택했다. 그건 살아 있는 권력도 수사할 수 있다는 기개를 보여줌으로써 , 윤석열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내부에 보내는 메시지였다.

 

둘째, 윤석열은 조국의 사퇴를 기대했다. 야당이 검찰에 고발한 정치적 사건은 수두룩하다. 통상 이런 사건은 세월아, 네월아 묵히는 게 상례다. 더구나 상대는 문재인 대통령의 분신으로 불리는 조국이다. 그러나 검찰은 정치권이 청문회를 협의하는 도중에 보란 듯이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이고 수사 착수를 선언했다. 고위공직자의 경우 검찰수사가 시작되면 옷을 벗고 야인(野人) 신분으로 포토라인에 서는 게 관행이다. 조국이 장관에 임명될 것이라 생각했다면 결코 꺼내지 못할 칼이었다. 그건 조국에게는 자진 사퇴하라는, 대통령에게는 지명 철회하라는 통고장이었다. 그 뒤에도 검찰은 결정적인 국면마다 수사기밀을 흘려 사태를 악화시키고 조국의 사퇴를 압박했다. 조국 부인 기소는 임명을 막기 위한 검찰의 마지막 저항이자 승부수였다. 검찰은 정치적 판단을 하고, 정국 해결사를 자처하고, 정치를 지휘했다.

 

셋째, 그러나 상황은 윤석열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조국은 사퇴하지 않았고, 문 대통령은 임명을 강행했다. 여권에선 믿을 수 없는 사람이란 인식이 퍼졌다. 윤석열은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살길은 하나, 조국을 기소하는 방법밖에 없다. 부인의 표창장 위조 같은 혐의로는 약하다. 중요한 건 조국 본인에 대한 혐의 유무다. 조국을 잡으면 살고, 잡지 못하면 죽는다. 외길이다. 윤 총장은 특수2부에 특수3부 검사까지 추가 투입했다.

 

윤석열은 역대 가장 강력한 검찰총장이다. 과거 검찰총장의 경우 본인도 정권과 연이 닿아 있지만, 산하의 대검 중앙수사부장, 서울중앙지검장도 나름 만만치 않은 친정권 인맥이어서 일사불란하게 통제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지금 윤 총장은 대검 반부패부장(과거 중수부장), 서울중앙지검장에 차장, 특수부장까지 모두 윤석열 사단으로 채웠다. 그가 결심하면 언제 어느 수사든 가능한 구조다. 이제껏 법무장관 수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단행하는 게 역설적으로 윤석열의 슈퍼 파워를 증명하고 있다. 윤석열의 검찰은 마치 정당처럼 성명을 내고 청와대와 여당을 비난했다. 그 과정에 제동을 거는 참모 기능은 작동되지 않았다.

 

윤석열은 국회의 정치협상 과정에 끼어들어 후보자를 낙마시키려 했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정치로 해결할 문제를 검찰이 전면에 나서 사회를 지배하려 했다. 윤석열은 서울중앙지검장 재직 시절 보수언론 사주를 잇따라 만난 적이 있다. 그를 만나고 온 한 사주는 저 친구, (검찰)총장 이상을 꿈꾸는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윤 총장 임기는 20218(2)까지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앞으로 총선, 대선에서도 이러한 정치행위는 얼마든지 재연될 수 있다. 정치행위의 동기는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중요한 건 지금의 윤 총장과 검찰에는 그런 막강한 힘이 있다는 점이다.

 

다행히도 이번 수사, 검찰의 정치개입은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케 해줬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왜 분리돼야 하는지도 알려줬다. 윤 총장보다 더 강력한 비검찰 출신 장관만이 검찰을 바로 세울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윤 총장과 검찰을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은 조국밖에 없다. 문 대통령도 이번 검찰의 행태를 보고 논두렁 시계의 악몽을 떠올리며 조국 임명 결심을 더 굳혔을 것이다. 조국은 윤석열 검찰과 싸워야 한다. 그건 윤석열과 문재인의 싸움이기도 하다. 싸움은 지금부터다./ 박래용 논설위원 경향 2019.09.09

 

주식회사를 떠받치는 자본주의

고객님이라는 해괴한 단어가 생기기 전에는, 음식점이나 상점 종업원들이 중장년 남성을 부를 때 흔히 사장님이라는 말을 썼다. 하고많은 직업 중에 왜 꼭 사장일까? 집에 전화기가 있으면 큰 부자로 대우받던 시절에는 많은 사람이 다방을 개인 연락사무소로 이용했다. 종업원이 김 사장님 전화 받으세요라고 소리치면 다방 안에 있던 사람 반이 일어났다는 우스개가 전한다. 고도 경제성장이 시작된 1960년대 중반 이후 회사는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고, 사장도 그만큼 많아졌다. 중장년 남성을 사장님으로 부르는 관행은, 모르는 상대를 높여 주던 전래의 미풍양속과 회사가 속출하던 시대 상황이 결합해서 생겼을 터이다.

 

물론 사장보다 훨씬 많아진 사람은 사원이다. 오늘날 직업을 가진 한국인의 반 가까이는 사원이다. 회사원, 월급쟁이, 직장인은 모두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사무직 노동자와 생산직 노동자, 유통업 노동자와 서비스업 노동자는 서로 다른 직업인이지만, 그래도 모두 회사원이라는 통합된 이름으로 불린다. 회사원이 아닌 사람도 회사와 관계 맺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먹는 것 일부를 제외하면, 현대인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에 회사 로고가 붙어 있다. 현대는 회사의 시대다.

 

우리나라에 회사라는 이름의 기업 조직이 처음 출현한 해는 1883년이다. 이해 1021일 한성순보에 회사설이라는 논설이 실렸고, 같은 무렵 평양 상인들이 대동상회, 서울 상인들이 장통회사를 설립했다. 이때의 회사는 결사영상(結社營商)’, 즉 상인들의 동업조합 같은 것으로서 출자자를 사원, 경영자를 총무라고 했다. 사장은 대개 고위 관료가 겸했다. 오늘날의 사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고원(雇員)이나 용인(傭人)이라고 불렀다. 자본주의의 모국인 유럽의 회사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초창기의 회사들도 일종의 특권적 상업 조직이었다. 중앙정부가 발급한 회사 인허장은 잡세 면제증과 같았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정부가 상업 자유의 원칙을 천명한 뒤에도 회사의 특권은 바로 사라지지 않았으나, 점차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의 회사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주식회사라는 이름을 처음 쓴 회사는 1898년 김익승이 설립한 부선주식회사였다. 재고, 자산, 나무 그루 등을 의미하는 영 단어 stock을 중국인들은 고본(股本), 일본인들은 주()로 번역했는데, 한국인들은 처음 깃()이나 고본이라고 부르다가 이윽고 일본식 주()로 바꿨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정부의 중상주의적 정책에 발맞추어 여러 개의 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1907년에는 사설 주식 거래소도 생겼다. 이때부터 주식회사의 시대가 열렸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시대 기업 유형 중 하나에 머물지 않았다. 이것은 온 사회 구성원을 자본 아래 통합시키는 마력을 발휘했다. 주권(株券)은 누구나 살 수 있는 물건이고, 10만주를 가진 사람과 100주밖에 못 가진 사람을 같은 이해관계인으로 묶어준다. 갑 회사에 다니면서 을 회사의 주권을 산 사람은 자기 회사 실적보다 을 회사의 실적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무엇보다도 주식회사는 자체로 압축된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가 곧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둘은 운영 원리가 같을 뿐 그 주체와 기본 이념은 전혀 다르다. 민주국가의 국민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등하게 1표씩을 갖는다. 인간을 기준으로 하는 다수결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는 인본주의(人本主義)이다. 반면 주식회사의 주권은 돈에 있으며, 모든 권력은 돈으로부터 나온다. 다수결의 주체는 전적으로 평등한 액면가의 주식들이다. 주식회사를 떠받치는 기본 이념은 문자 그대로 자본주의(資本主義)’이다. Capitalism을 자본주의로 번역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아마도 그 속성이 인본주의에 대립한다는 점을 간파했을 것이다.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다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것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민주주의가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이 병립하는 상황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고민거리를 던져 준다. 어떤 사람이 국가기관이나 공기업에 특혜 입사했다는 소식을 접하면, 모든 사람이 분노한다. 하지만 재벌가 3세가 자기 가족이 대주주로 있는 주식회사에 특혜로 입사하여 초고속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에 분노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공적 기관에는 인본주의를, 사기업에는 자본주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문제는 이 둘 사이에 펼쳐진 회색지대가 매우 넓다는 점이다.

 

특히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사립 법인들에서는 인본주의와 자본주의 중에서 어떤 원칙에 따를 것이냐를 두고 늘 문제가 발생한다. 종교재단에서 원로 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직위를 세습하는 것은 온당한가? 사학재단이 이사장 자녀를 교수로 채용하는 것은 온당한가? 언론사가 가족기업처럼 운영되는 것은 온당한가? 다 알다시피 자본주의 원리는 사립 법인 내부에서만 관철되는 게 아니다. 얼마짜리 학원에 보내느냐에 따라 학생 성적이 달라지고, 변호사가 대형 로펌 소속이냐 국선이냐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진다. 인류평등이라는 인본주의의 대의는 말뿐이고, 일상생활 전반을 자본주의가 지배한다. 인본주의적 선심(善心)이란 본래 아래를 향하는 것인데, 자본주의적 선심은 위를 향한다. 가난한 사람 무시하고 부자에게 선심을 베푸는 건 현대인의 생활 윤리다.

 

자본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이른바 흙수저들은 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관건은 인본주의가 지배하는 영역을 어떻게 얼마나 넓힐 수 있느냐에 있다. 인본주의가 차지하는 공간이 넓은 자본주의가, ‘사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경향 2019.09.09.

 

역사 전쟁과 기---한미동맹 강화

1954년 중국을 방문한 일본 의회 대표단한테 마오쩌둥은 매일 사죄를 강요받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며, 일본에 과거사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기본 방침을 밝혔다. 마오는 한번에 한 국가만 틀어쥐는전술을 제시하며, 특유의 게릴라전 이론을 외교에 적용하는 문건을 발표하기도 했다.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후 보수 본류들도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아시아에서 지위와 영향력 회복을 꿈꿨다. 1948년부터 54년까지 총리로 장기 재임한 요시다는 빨간색이나, 초록색이나상관없이 중국과 유대를 쌓겠다고 선언했다.(리처드 맥그레거의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에서)

 

미국은 A급 전범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기시 노부스케의 집권을 도우며, -일 접근을 차단했다. 기시가 주도한 미-일 안보조약 개정으로 일본은 미국의 반소·반중 군사기지의 역할을 강화하고, -일 접근은 물 건너갔다. 70년대 초 전격적인 미-중 화해가 전개되자, 재빨리 일본은 1972년에 중국과 수교했다. 미국은 1979년이 되어서야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했는데, 일본은 그 1년 전에 중국과 평화우호조약을 맺기도 했다. 중국은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고, 일본도 사죄하지 않았다. 양국의 최대 사안인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 영유권 문제에서도 덩샤오핑은 우리의 미래 세대가 결정하도록 하자며 일본에 양보해줬다.

 

이때까지 동아시아 역사 문제는 오히려 미··일 서로가 상대에게 대범함과 우호를 보여주는 재료였다. 하지만 각국의 국내 정치와 아시아 패권 추구가 결부되며, 역사 문제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일본에서 강경한 재무장파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80년대 전반 집권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에 따른 대중의 불만을 반일 민족주의로 돌리려 했다. 미국은 천안문 사태로 인한 중국에 대한 회의, 그리고 사회주의권 붕괴에도 급속히 부상한 중국 견제를 위해 다시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일 관계를 최악으로 만든 역사 문제는 미국·중국·일본이 전후 아시아 패권을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휘두른 소재이다. 필요에 따라 덮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격화시켜 왔다.

··일의 합종연횡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베의 일본이 미국에 올인하는 건 아니다. 일본의 아베 정권은 전후 기시의 보수 방류가 요시다의 보수 본류를 흡수한 정권이다. , -일 동맹을 기축으로 하면서도, 아시아에서 미국으로부터의 영향력 독립과 위상 강화를 동시에 노린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기시이고, 내각의 실력자이자 전임 총리 아소 다로가 요시다의 외손자이다.

 

지난해부터 아베의 일본은 -중 관계 신시대’ ‘영원한 이웃나라로 중국과 관계 회복을 시도하며 두 나라 사이의 역사 문제를 다시 묻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인도·태평양 전략을 선창해 아시아에서 일본의 방위 역할을 확대하며 미국과의 안보관계를 수직관계에서 수평관계로 바꾸려 하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호응하는 것도 무역 압박을 가하는 트럼프의 미국에 맞서려는 보험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에 맞서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지소미아)을 종료한 한국으로서는 삼면초가일 수도 있고, 세 나라를 상대로 철저한 현실주의를 구사할 기회이기도 하다. 일본이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로 한-일 관계를 파국으로 이끈 것은 중국과의 관계 때문이다. 한국 선에서 방어막을 치지 않으면, 언제라도 중국과의 더 큰 역사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미국의 국무·국방부 내의 친일 실무관료들을 동원해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철회를 압박하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지소미아가 미국을 통하지 않는 최초의 군사협력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베의 일본이 트럼프의 미국과 밀월관계도 아니다. 거세지는 무역 압박과 미-일 동맹에 대한 폄훼를 서슴지 않는 트럼프 때문에 미국의 옥수수를 구매하는 등 일본이 그동안 애지중지하던 농산물 시장도 개방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확실히 해둘 것이 있다. 일본이 이제 원하는 것은 한-미 동맹 강화인가, 아니면 미국을 통하거나 안 통하거나 한국과의 군사협력 강화 등 영향력 확장인가? 그렇다면, 지소미아 종료를 놓고 한·미의 틈을 벌리려는 것이 누구인지이다.

하지만 남북관계나 한-일 분쟁이나 어떠한 외교안보 이슈와 문제가 발생해도 더 기승을 부리는 언제나 똑같은 레퍼토리의 기---한미동맹 강화 주장 앞에 이런 질문은 무력해진다.

정의길 선임기자 한겨레 2019.09.09.

 

딸의 진로 놓고 드러난 아빠의 위선

아이의 꿈은 자주 바뀐다. 첫 꿈은 마트 계산원이었다. 집 앞 마트에서 모든 물건의 바코드를 찍은 뒤 돈을 받는 점원이 주인이라고 생각했나보다. 과자 욕심 많은 어린아이 눈에 계산원이 되면 온 세상 과자가 다 제 것이다. 시간이 좀 지나 유치원 선생님, 좀더 자라자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꿈이 바뀐다. 그것도 잠시, 이제 파티시에(제과제빵사).

1이 된 지 얼마 안 돼 학교에서 진로상담을 받고 온 둘째 아이가 특성화고등학교를 가겠다 선언했다. 요리경연대회에도 나가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단다. 초등학교 때까지 아침 인사로 잘 놀다 와를 건네던 내 입에서 조금씩 숙제는 해야 하지 않니” “휴대전화 그만 좀 보고 책을 읽든지 공부를 하든지 해라는 말의 횟수가 늘 때였다.

 

그럼 대학은?”

선생님이 그러는데 특성화고 가면 내신이 더 유리해서 대학에도 들어가기 쉽대.”

대학 가려는 친구들 틈에서 공부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언제 대학 안 간대? 아빠보다 더 좋은 대학 갈 거야.”

특성화고 가면 대학 가기 어려울걸. 대학 나와서 파티시에 해도 늦지 않잖아. 그래야 살면서 기회도 많아져.”

 

당황한 나는 딸과 대화하면서 오랫동안 숨겨온 위선을 드러내고 말았다. 대학을 가든지 안 가든지 네 선택을 존중하고, 학벌을 따지면 안 된다는 입바른 소리를 하던 아빠였다. 출신 대학을 묻는 딸을 훈계했다. 사회에서도 일부러 대학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 잣대로 세상을 판단했다. 내 아이의 문제로 닥치자 숨겨진 욕망, 세상이 우열을 매긴 욕망이 나의 일부였다는 게 탄로 났다. ‘고졸을 차별하는 세상에 분노하고, 학벌로 줄 세우는 데 반대하고, 학벌과 능력은 별개라고 외치던 나는 딸의 진로 앞에서 어이없이 무너졌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다. 어릴 적 시골 친구들은 대개 공고와 상고, 농고를 갔다. 지금은 특성화고나 마이스터고라고 한다. 인문계고등학교를 간 친구는 소수였다. 부모의 직업은 서넛을 빼곤 다 농업이었다. 대학까지 간 초등학교 동창생 비율은 20% 밑이었다. 고향 친구의 눈에 대학을 나온 나는 특별했다. 특별함은 시선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강력히 작동한다. 대학, 그것도 한 줌 이름 있는 대학을 나온 이들이 계층 사다리 더 높은 곳에 오르는 세상이다. 다수를 배제한 공간 안에서 소수의 자리다툼 경쟁이 있을 뿐, 다수에게 기회균등은 허락되지 않는다. 고교 졸업생 열에 일곱이 대학을 가는 현재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더 심해졌는지 모른다. 그래서 2년제가 아닌 4년제, 지방이 아닌 수도권, 수도권이 아닌 (in)서울’, 인서울이 아닌 스카이’(SKY)로 몰린다.

 

간판의 순위는 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란 조건에 좌우된다. 대학별로 학생 부모의 소득과 자산을 계산해 많은 순서대로 줄 세운다면, 끔찍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부의 크기와 대학 서열이 비슷한 차례로 나열될지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그런 실증 통계는 없다. 미국에서 그와 유사한 통계가 있다. 최고 대학 중 하나인 하버드대학 학생 부모의 연소득은 평균 45만달러(54천만원) 정도로, 미국 소득 상위 2%에 든다(<21세기 자본>에서).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D공고 3학년 1반 학생 32명은 처음부터 불리했다. 하어영 기자가 2011년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62%가 차상위계층 이하였다. 8년이 지났다. 하 기자가 방준호 기자와 함께 그중 20명을 다시 만났다. 그들 삶의 궤적을 그려봤지만 부모를 딛고 성공적으로 계층 사다리를 오른 사례는 꼽기 어렵다. 아직 평가하기 이르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들의 삶을 짐작했기에, 1 아이의 특성화고 진학을 만류했던 걸까. 가치와 현실 속에 비겁한 또 한 인간의 모순이 고발된다. 류이근 편집장 한겨레21 2019.09.09.

 

조국 정국혼돈 부추긴 언론, 요원한 신뢰 회복

문재인 대통령이 보수 야권의 격렬한 반대와 부정적 여론에도 9일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문 대통령이 임명을 결정했지만, ‘조국 정국은 살벌한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여기에 조국 의혹을 쏟아낸 언론은 또 다시 검찰과 야당과 함께 삼각편대를 구축할 것으로 보인다.

 

언론은 지난 한달 간 유례없는 보도량과 의혹 제기로 광풍에 불을 지폈다. 문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지명한 후 쏟아진 기사가 60여만 건에 달하며 이를 기반으로 재생산된 뉴스는 1백만건이 넘는다는 주장이 청문회 과정에서 나왔다. 인사청문회에서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네이버 검색을 기준으로 한달간 조국 법무부 장관 관련 보도가 118만건이었다며 세월호 참사 사건’(24만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119천건)보다 많았다고 주장했다.

 

조국 후보자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국무위원 후보자에 대한 정당한 검증이었을까, 아니면 검증이란 미명하에 자행한 후보자 죽이기였을까.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9일자 <경향신문>에 실은 칼럼 조국 사태와 언론 개혁에서 “...(언론이) 권력비판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방법이 부실하고, 양식은 허접하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 도식적 관행을 따르고, 관행을 따른 사실적 근거가 곧 기사라는 듯이 글을 쓴다고 비판했다. 맥락 없이 부실하고 단편적인 의혹 보도가 넘쳐났다는 지적이다.

 

언론이 대대적으로 조국 관련 보도를 내놨지만, 여론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포털 사이트에 근조한국언론’ ‘’기자질문수준등의 검색어가 오르내린 건 조국 후보자 지지자를 포함한 대중의 시선이 일부 반영된 것이었다. 특히 지난 3일 조 후보자 청문회가 무산되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이 던진 질문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검찰의 언론플레이로 의심되는 보도가 수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인사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제시한 조 후보자 딸 논문 초고 파일에 대한 포렌식 자료는 검찰이 자료를 유출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검찰 출신 야당 의원의 손에 들어간 정보는 곧바로 일부 언론을 통해 공개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TV조선은 부산대병원 압수수색 당일 노환중 부산대병원장의 PC 문건 내용을 단독보도라면서 내보내기도 했다. 자료유출로 고발까지 당한 검찰은 이를 부인하며 언론자체 취재라고 주장하지만 수사권이 없는 언론이 취재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주장은 공허하다.

 

검찰 특수부는 일종의 수사기법의 일환으로 주요 정보를 적당히 흘리는 수법으로 수사의 동력을 얻는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논두렁 시계보도가 꼽힌다. 결국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그 사건은 국정원과 검찰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사이 이를 보도한 언론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이런 비판을 받은 뒤에도 언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취재할 시간은 없고 타사와 하나라도 다른 보도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취재기자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답답할 수 있다. 하지만 우르르 몰려다니며 검찰이 흘리는 의도된 정보를 단독, 특종으로 포장 보도하는 관행에서 탈피하지 못하면 한국 언론의 신뢰도 회복은 요원하다.

 

이제 조국 정국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뿐만 아니라 사회통합과 화합도 저널리즘이 추구하는 주요한 가치다. 수사는 검찰에 맡겨야 한다. 의혹이란 이름으로, 취재란 명분으로 개인의 명예나 사생활 등 법익을 훼손하는 보도 행태는 자제해야 한다. 장관은 공인이지만 장관 가족 모두가 공인이 될 수 없다.

 

한국 언론의 나쁜 관행은 이번에도 두드러졌다. 언론사마다 공정보도,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면서 정파적 보도를 하는 건 미디어 소비자에게 유용한 서비스가 아니다. 차라리 공개적으로 정치적 커밍아웃을 하든가 아니면 홈페이지에 명시한 공정한 보도를 실천하든가 선택을 하고 소비자들의 평가를 받는 게 옳다.

김창룡 인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PD저널 2019.09.10.

 

 

서울법대 공화국의 파탄

엘리트’(elite)에 대립되는 말은 대중’(mass)이다. ‘정치는 대중이 아니라 엘리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엘리트에 의해 대중의 머릿속에 당연한 것으로 각인됐다. 스파르타의 엘리트 정치를 이상적 모델로 제시한 소크라테스, 그의 제자이면서 철인정치를 주장한 플라톤, 그의 제자이면서 민주주의를 열등한 정체로 여긴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엘리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왕의 스승이니 그들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학벌의 최대 수혜자이기도 했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를 둘러싼 정치 드라마는 그가 장관에 임명돼 1막이 끝난 것 같지만 주요 역을 맡았던 인물들은 무대에서 내려갈 생각이 없다. 세계 정치·언론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선정주의가 난무한 드라마의 출연진은 어떤 이들이었나?

 

가장 큰 공통분모는 서울법대 출신이라는 점이다. 국회 청문위원 18명 중 여상규 위원장을 포함한 7명이 서울법대 출신이다. 조국 후보도 그렇고, 나경원 원내대표와 함께 후보 사퇴를 요구한 원희룡 제주지사는 법대 동기다. 윤석열 검찰총장도 동문이다. 범위를 넓혀보면 국정농단이나 사법농단혐의로 수감되거나 재판 중인 자 중에도 김기춘, 우병우, 양승태 등 서울법대 출신이 너무 많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수모를 주려고 기획한 논두렁 시계로 거명되는 이인규 전 중수부장도 동문이다. ‘조국 후보 딸이 포르쉐를 탄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린 강용석 변호사, ‘별장 성폭력의혹을 받은 김학의 전 법무차관, 극우적 언행으로 주목받은 차기환 변호사가 모두 동문이다.

 

서울법대 출신 상당수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첫째, ··고에서 대부분 일등을 놓친 적이 없을 만큼 머리가 좋고 성취욕구가 강하다. 이런 이력은 지고는 못 배기는 경쟁지상주의와 자기가 주역이 되지 않으면 친구도 끌어내리는 자기중심주의를 키우는 토양이다. 나경원과 원희룡이 조국에게 퍼부은 독한 말들은 여느 대학 동기 간에는 나오기 힘든 것이다. 둘째, 선민의식에 빠져 남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태극기 집회에서 세월호 유가족의 상처를 후비는 말을 한 김진태 의원 같은 이들이 많은 이유다.

 

셋째, 학교 공부가 다라고 생각한다. 대학시절 서울법대에 다니는 친구 하숙집을 방문했다가 고시과목 말고는 책이 전혀 없어 왜 이렇게 책이 없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다른 책은 사시의 방해물일 뿐이라는 그의 대답에 죄짓지 말아야지, 너한테 재판받을까 겁난다고 대꾸했다. 예전에는 인문학자인 목민관이 재판장이 되고 법전문가는 형방의 지위에 머물렀지만, 이젠 법전문가가 법조는 물론 정치까지 장악했다. 넷째, 학벌 등 기득권을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편법도 불사하며 무한 노력을 기울인다. 부르디외가 말한 재생산의 핵심 기구가 학교라는 사실을 신봉하는 건데 조국도 나경원도 예외가 아니다. 학벌은 정·관계를 언론과 재벌로 연결해 공고한 기득권동맹을 형성한다. 그나마 조국은 금수저는 반드시 보수로 살아야 하느냐사회개혁에 기여하겠다했으니 싸잡아 말할 수는 없겠다.

 

다섯째, 이들은 대개 검찰주의자다. 판사 출신 나경원조차 조국을 법무장관으로 임명하자 역린을 건드렸다고 했다. ‘역린임금의 노여움을 뜻하는데, 대통령이 검찰의 역린을 건드렸다 한다.

 

이 글을 읽은 독자는 일반화의 오류가 심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서울법대는 직무에 충실한 법조인은 물론 황인철, 홍성우, 조영래 등 인권변호사를 대거 배출했고, 민주화 운동에 자신을 희생한 이도 많다. 그러나 한 전공, 한 대학 출신이 일국의 정치와 사법체계를 과점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명문대 출신은 현 체제의 승자이기에 대개 보수적이고 불평등에 관한 문제의식도 희박하다.

 

민주주의 요람인 영국도 명문 학교 출신이 요직을 과점하면서 브렉시트라는 엘리트 정치의 파탄을 겪고 있다. 예전에는 중졸인 캘러헌과 고중퇴 학력의 메이저 총리도 나왔으나, 이젠 이튼과 옥스퍼드 출신인 캐머런, 메이, 존슨으로 이어지며 극우 총리까지 등장했다. 불평등에 분노한 노란조끼 시위로 몸살을 앓는 프랑스에서는 엘리트 정치인의 산실인 국립행정학교(ENA) 폐지론이 대두했는데, 제안자가 그 학교를 나온 마크롱 대통령이다. 우리도 국공립대학 통합 등 획기적인 교육체제 개편이 절실한 시점이다. 대중의 각성도 중요하다. 선거할 때도 사회를 위해 살아온 이력이 아닌 학벌이 선택 기준이 돼서는 안된다.

 

검찰개혁이 안되는 것도 검사 등 법조 출신 국회의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법안 한 건 처리하지 못한 채 끝난 사법개혁특위 유기준 위원장 역시 서울법대 출신이다. 엘리트 정치인들이 개혁은커녕 기득권체제 유지에 급급하는 모습과 검찰이 정치영역까지 넘나드는 검찰공화국의 진상을 전 국민이 봤다. 그들의 저항을 뚫고 이번에는 검찰개혁에 성공할 수 있을까? 역설적인 것은 엘리트 정치의 파탄을 수습하는 일도 엘리트에게 맡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거참

이봉수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경향 2019.09.10

 

기후위기에 응답하지 않는 나라

국내에선 큰 반향이 없지만, 최근 국제사회의 큰 관심사는 기후위기문제다. 2015년 세계 각국은 파리 협정을 통해 지구 평균 온도 상승폭을 산업혁명 이전 대비 2도로 제한하는 목표를 잡았다. 또한 이 목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1.5도까지 기온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합의했다. 이미 산업화 이전보다 지구 평균 기온이 최대 1.2도 정도 올라간 상황에서 지구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마지노선을 잡은 것이다. 1.2도 상승이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날씨는 혼란에 빠졌다. 올해 서유럽은 전례 없는 폭염으로 프랑스 파리 최고 기온이 42.6도까지 올랐다. 알래스카에서는 이상 폭염으로 빙하가 녹아 홍수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제 기상이변 뉴스는 너무 많아 이를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영국 <가디언>은 기후변화(climate change)라는 용어를 기후 위기(crisis)나 붕괴(breakdown)로 바꾸기로 했다. 과학자들은 최근 상황이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데 언론이 주로 쓰는 기후변화라는 말은 수동적이고 너무 공손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상황은 한가하지 않다.

 

하지만 향후 전망은 더 어둡다. 파리 협정에 따라 각국 정부가 제출한 온실가스 감축계획을 모아봤더니 이 계획을 100% 달성해도 ‘2도 이내 억제 목표는 달성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법적 강제조항조차 없는 이 계획이 실현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생각할 때 위기 상황은 파국을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이 세계 각국 정상들에게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UN Climate Action Summit)를 제안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달 21일부터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이 회의는 이제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회의다. 그간 정치인들의 사진촬영과 말잔치로 진행됐던 회의로는 지구 생태계를 살릴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6, 영국 에너지부 장관은 탄소 중립화법에 서명했다. 탄소 중립은 탄소배출량을 줄이고 피치 못한 배출에 대해서는 탄소를 흡수하는 상쇄 방안을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탄소의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법에 따라 영국은 2035년까지 신차를 모두 전기차로 대체하고, 205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1990년 기준 80%까지 감축할 예정이다. 프랑스 역시 2050년 탄소 배출 제로 내용을 담은 법을 제정했다. 노르웨이(2030)나 핀란드(2035)처럼 빠르게 탄소 배출을 줄이는 나라도 있고, 일본처럼 21세기 후반으로 느슨하게 목표를 잡은 나라도 있지만 주요국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둔 미국의 경우, 얼마 전 민주당 샌더스 후보가 무려 163천억달러 규모의 공적 투자를 통해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전력 생산을 100%로 늘리고, 2050년까지 완전한 탈탄소화를 하겠다는 그린뉴딜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문제는 우리나라다. 다양한 현안에 묻혀 기후문제가 정치 현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너도나도 내연기관 자동차 퇴출을 선언하고 있는 가운데 자동차산업의 일자리는 여전히 내연기관에 맞춰져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탄소 배출 제로란 단어는 언급조차 않고 있고 더 많은 에너지 사용을 미덕으로 보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경제와 산업에서 저탄소 전환 문제가 제기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기후문제는 우리나라에선 남의 나라북극에 사는 곰이야기에 불과하다. 더 끔찍한 것은 에너지정책에 대한 합리적인 토론은 없고 몇몇 전문가와 시민단체는 끝도 없는 가짜뉴스를 해명하기에 급급한 현실이다. 세계 각국 정상들이 지구 생태계를 걱정하고 행동을 논의하는 자리에 우리나라 대통령은 참석 계획조차 없다. 누군가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대한민국은 뭘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솔직히 답할 말이 없다. ‘그건 다른 나라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 아닌가요?’라는 정치인들의 솔직한(!) 대답도 종종 듣는다. 대한민국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닌 걸까?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한겨레 2019-09-11

 

'못난 부모들만드는 사회

그간 많은 취재원들로부터 들은 수 많은 이야기 중에 유독 뇌리에 박혀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다. “당신의 자녀는 당신이 나온 대학이나 그보다 더 좋은 대학에 못 들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2014년 교육 담당기자로 옮긴 지 얼마 안 돼 만난, 유명 입시업체 전문가의 말이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고 동의할 수 없었다. 나에게 그의 말은 소위 명문대 입시는 진입 장벽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물수능불수능을 한 해에 치러야 했던 수능 1세대이자, 학교별 본고사까지 치르고 대학에 들어갔던 나와 비슷한 세대에게 입시는 학창 시절 노력의 결과물이었던 터였다. 화도 치밀었다. 내뱉진 못했지만 당신이 내 아이를 알아?’라는 말이 솟구쳤다. 당시 만 5세였던 내 아이는 이미 한글을 줄줄읽고, 구구단을 벌써’ 6~7단까지 외고 있었으며, ‘banana’바나나로 읽을 줄 아는 아이였다. ‘이렇게 똑똑한 아이인줄도 모르면서 예단하다니. 두고 보라고를 되뇌며 부글부글 차오르는 괘씸함을 애써 눌러댔던 기억이다.

 

그러나 그의 말이 이해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학여행 뱃길에서 꽃다운 고교생들이 대거 희생된 세월호 참사는 우리 교육의 현실을 짚어보는 계기가 됐다.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다시 희망이자 계층 이동 사다리가 되기를 기대하며 준비한 기획 시리즈(교육 희망 프로젝트)를 취재하는 도중 나는 그 진입 장벽을 목도했다. 성적 지상주의에 빠진 교육 현장에서 공부와 담을 쌓은 학생들을 보듬지 않는 학교, 부모나 입시 컨설턴트의 도움 없이는 쌓기 힘든 수십개의 스펙과 불합격기준을 가늠하기 어려운 수천개의 입시 전형,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로 쌓아 올린 학벌이라는 공고한 철옹성까지. 부모의 꼼꼼한 관리와 적극적인 지원이 없으면 똑똑한 내 아이가 언제든 ‘(부모가)열심히 하면 잘 할 아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노력의 결과물이던 입시는 어느덧 부모의 재력과 정보력과 네트워크의 결과물이 돼버렸고, 다양한 인재를 포용하겠다고 쪼개놓은 전형은 되레 가진 사람들의 선택지를 넓히는 도구로 변질됐다. 개천에서 용을 배출할 수 있었던 힘이던 교육은 이제 개천과 하늘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계급을 구분 짓는 수단이자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하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작용하고 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언제든 넘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누구는 넘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누구는 그 선 아래에서도 잘 살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하지만, 허황된 꿈이자 헛된 약속이며 이율배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조국 법무부 장관 인사 검증 과정에서 확인했다. 고교생 신분으로 서울대 의대에서 인턴을 하고 국제 학술회의 연구 포스터에 제1저자로 이름을 올려 논란이 된 아들 문제와 관련해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서울대 실험실 사용을 아는 분(의대 교수)에게 부탁한 것이 특혜라고 읽히는 부분이 있다면 유감이라고 말한 점은 기득권 층이 그 기득권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낸다.

 

최근 만난 한 고위 공무원은 조국 장관 딸의 입시 과정을 보면서 대학에 들어간 딸 아이가 아빠 엄마는 뭐 했냐고 묻더라. 그런 네트워크가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해줬다고 씁쓸해했다. 이렇듯 조 장관 검증을 계기로 많은 평범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미안해하는 현실을 보면 애달프다. 뒤늦게 나마 문재인 대통령이 입시제도가 개선 노력에도 불구, 여전히 공평하지 못하고 공정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다며 대입제도 전반에 대한 재검토를 지시한 점은 높이 산다. 다만 그 입시제도를 손보는 주체가 예전과 같이 기득권층일 테고, 그들이 만든 개선방향이 더욱 교묘히 그들의 입지를 넓히고 공고히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적진 않다. ‘사회적 특수계급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헌법 제11조 제2항이 지켜지고 있다고 믿는 국민들이 지금 많지 않은 것처럼.

이대혁 경제부 차장 selected@hankookilbo.com 한국 2019.09.12.

 

 

하부구조에 무관심한 상부구조

어느 날 갑자기 시작한 조국 정국은 그가 장관이 된 후에도 끝날 줄을 모른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한국 사람들은 완벽하게 두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여러 사람이 많은 얘기를 보탰는데, 그중에서는 손학규가 한 얘기가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다. 조국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탄핵으로 물러난 사람들이 할 얘기는 아닌 것 같다는. 깨소금 맛이었다. 하여간 이게 며칠 내에 진정될 일은 아닌 것 같다. 짧으면 이번 겨울, 길면 내년 총선까지 아주 오래갈 사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자본주의를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설명했다. 하부구조는 생산력을 형성하는 경제이고, 법과 제도 혹은 윤리 같은 것들이 경제 위에 서 있는 상부구조라는 의미다. 이 얘기를 지나치게 하면 경제 결정론이라고 비판받았다.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의 핵심이 하부구조의 변화이지만, 그 핵심은 경제와 경제 아닌 것 사이의 관계다. 조국 사건을 보면서 나도 20대 이후로는 거의 써 본 적이 없는 이 단어가 문득 생각났다.

 

20, 넓게 보면 10대와 30대까지 포함한 청년들의 분노는 하부구조에 관한 얘기다. 사회적 격차와 경제적 불평등, 그들의 불만에는 우리 시대를 형성하는 하부구조의 부조리가 영향을 미친다. 경제와 경제정책, 이런 것들이 대부분 하부구조에 속한 것이다. 반면 조국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조국 외에는 사법 개혁의 적임자가 없다는 말은, 전형적으로 상부구조 얘기다. 국가라는 기구 자체가 상부구조인데, 그중에서도 검찰 개혁은 상부구조의 일부분에 관한 얘기다. 청년들은 하부구조에서 불만이 생긴 것인데, 청와대를 비롯해 조국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상부구조의 변화에 대한 얘기를 하는 중이다. 당연히 서로 말이 겉돌고, 서로 통하지 않는다. 상부구조를 개혁하면 하부구조에 변화가 올까? 한쪽은 상부구조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갸우뚱, 도무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듯하다.

 

이 바벨탑의 대화 같은 얘기를 지켜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조국에 대해서 하던 얘기나 관심의 10만분의 1이라도 하부구조에 기울였다면, 벌써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엄청난 뉴스를 토해낸 조국 청문회와는 달리 하부구조에 속한 것, 특히 경제정책에 속한 것들은 뉴스 한번 타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힘들게 나간다고 해도, 사실 별 관심도 없어서 금방 묻힌다. 정말이지, 여당이든 야당이든, 하부구조에 속한 것들은 그다지 인기 좋은 이슈들이 아니다. 개혁? 상부구조의 개혁만 개혁인가?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개혁은 하부구조에서 불평등을 줄이고, 격차를 줄이는 것 아닌가? 문재인 정부 절반이 지나는 동안, 우리가 하부구조에 대해 논의한 게 뭐가 있는가? 농협 개혁 얘기를 했나, 한전 개혁 얘기를 했나, 하다 못해 맨날 금융 사기 터진다고 하면서 금융위와 금감원 개혁 논의를 했나?

 

상부구조만 보다 보니까 맨날 프레임타령만 했다. 이 정권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일부 종편은 그래도 된다. 공영방송도 똑같이 이쪽 프레임, 저쪽 프레임, 프레임 타령만 했다. 프레임을 이렇게 보든, 저렇게 보든 하부구조에서 발생하는 격차 현상이 사라지는 게 아니고, 교육에서 발생하는 경제 불평등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게 이번에 터진 것 아닌가?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이 점점 더 불평등한 것으로 변하고 있다. 상부구조를 아무리 개선한다고 해도, 이 하부구조의 양상에 변화를 주지 않으면 세습 자본주의 성격이 너무 강해진다. 적당히 살아도 밥은 먹고사는 경제로 가야지, 엄마가 죽어라고 대신 뛰어주어야 하는 하부구조, 이건 아니다.

 

제발 부탁이다. KBSMBC, 뭔가 하부구조에 대한 방송들 좀 만들어주시기 바라고, 신문들도 하부구조와 경제 얘기도 좀 다루어주시기를 바란다. 뒤를 돌아보면, 노무현 정권 때만 해도 공영방송에 경제 문제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얘기를 다루고 싶어하는 PD나 작가들이 꽤 있었다. 보수정부 9년을 거치다 보니까, 이 논의의 인프라들이 다 부서지고 상실되었다. 하부구조를 그대로 둬도 보수정권은 상관없지만, 촛불 이후의 개혁파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 프레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기반인 경제가 장기적으로는 진짜 중요한 요소다. 클린턴도 그렇게 말했다.

 

조국 사건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 국면이 영원히 가지는 않는다. 개인은 실수할 수 있다. 시스템은 그때 드러난 문제점을 뒤늦게라도 고쳐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동 욕하고, 종편 욕해도 된다. 그렇지만 그들도 상부구조에만 관심 있지, 하부구조의 개혁에는 아무런 관심 없다. 정치 프레임 싸움에서 이긴다고 경제에서 이기는 것 아니다. KBSMBC 사장 두 분에게 각별히 부탁한다. 조국에 사용한 방송 분량과 에너지의 10만분의 1만 하부구조에 써주시라. 현 정부가 성공할 가능성이 아직은 남아있다. 종편 따라가지 마시라. 그리고 상부구조의 화려함과 뜨거움만 좇아가지 마시라. 하부구조의 공론장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게 청년들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 해야 할 논의 아니겠는가? 우리가 조국에 대해서 논하던 열정의 10만분의 1만 하부구조에 써도, 한국이 정말 좋은 나라가 될 것 같다. 이제, 경제 얘기 좀 하자

우석훈 경제학자 경향 2019.09.15

 

조국 장관의 승리 확률 기여도

달이 유난히 큰 추석이었다. 밝은 달과 맛난 음식들도 좋지만, 오랜만에 가족·친지를 만나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추석의 즐거움이다. 하지만 명절 때 해선 안되는 이야기도 있다. ‘취준생에게 취업은 했냐고 물어선 안된다. 언제 결혼할 생각이냐, 언제 애 낳느냐, 이런 이야기도 금기어가 된 지 오래다. 또 하나 불문율은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얼굴을 붉히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치 이야기가 아예 안 나올 수는 없다. 사람들 눈치 보면서 적당한 선까지만 이야기를 한다. 정치인들이 명절을 여론 추이의 변곡점으로 보곤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올 추석은 특히나 민감했을 듯하다. 장관과 검찰총장, 야당 대표 이름이 적당한 비율로 섞여 호명되었을 것이다.

 

소위 조국 정국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여론조사 결과도 지겹게 기사화될 것이다. 장관 임명에 반대하는 사람이 과반수라더니 차기 대권후보 3등이라는 결과도 나왔다. 하여 해설분석이 분분한 작금의 어지러운 정치상황에 잡문 하나를 보태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는 것 같기에 새삼 묻는다. 여야 어느 쪽이건, 자기네 지지도가 높으면 승리이고 반대 여론이 높으면 패배인가? 누가 무엇을 근거로 승패를 선언하는가? 의학논문 제1저자와 표창장과 봉사활동과 사모펀드 이야기가 끝나면, 승자와 패자가 분명해지는 건가? 조국 장관 개인의 승패인가, 여당의 승패인가, 정권의 승패인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이기려 하는가?

 

야구팬들이라면 익숙할 승리 확률 기여도라는 통계치가 있다. ‘WPA(Win Probability Added)’라 불리는 이 숫자는 선수의 특정 플레이가 팀의 승리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따진다. 같은 홈런이라도 영양가에 따라 WPA는 달라진다. 자기 팀이 10-0으로 이기고 있는 게임의 9회초에 때린 홈런과 동점 경기 9회말의 굿바이 홈런은 그 가치가 다르다. 우리 팀의 승리 가능성이 이미 99%였는데 홈런으로 99.5%가 됐다면 이 선수의 WPA0.005밖에 안되지만, 홈런 덕에 승리 가능성이 40%에서 100%로 바뀌었다면 이 홈런타자의 WPA0.6이나 된다. 반면 결정적인 기회에서 병살타를 쳐 팀의 승리 가능성이 60%에서 40%로 떨어졌다면 이 선수의 WPA는 마이너스0.2가 된다. 이런 상황들이 축적되면서 특정 선수의 승리 확률 기여도는 차곡차곡 쌓여 숫자로 표시된다. 1년 동안 쌓인 WPA5.0이 넘으면 최고 수준의 선수로 간주된다.

 

뜬금없이 야구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정치인의 발언이나 행동도 팀의 승리에 기여하는 정도로 측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에서의 승패 기준이 정권 획득이라면, 대통령 선거의 승리 확률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WPA가 부여될 것이다. 사소한 말실수는 마이너스0.01 정도 될 수 있고, 좋은 정책이나 법안을 만들면 플러스0.1을 받을 수 있다. 지난 한 해 동안의 WPA가 마이너스2인 정치인도 있을 테고 플러스3쯤 되는 정치인도 있을 것이다. 조국 교수의 법무부 장관 임명이라는 플레이의 WPA는 양수인가, 음수인가? 절대값은 어느 정도 되는가? 누군가는 지금 이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부질없지 않은가. 정치의 목표가 선거 승리라면, 승리 이후의 목표는 그저 다음 선거의 승리가 될 수밖에 없다.

 

정치 WPA‘W’는 선거의 승리를 의미해선 안된다. 평범한 시민들의 삶이 나아지고, 사회가 진보하고, 인권과 정의가 보장되는 방향의 변화가 승리여야 한다. 승리라는 표현이 어색하다면 발전정도로 해두자. ‘승리 확률 기여도가 아닌 발전 확률 기여도를 따져보자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조국 장관 임명이라는 사건의 WPA는 양수(+)로 보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주었고,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를 강화시킨 사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전 확률 기여도는 장기간에 걸쳐 여러 사건들 점수가 축적되어 측정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병살타를 날린 선수가 굿바이 홈런을 쳐서 준수한 WPA를 기록할 수도 있다. 그러니 임명 이후 조국 장관의 WPA는 양수가 될 수도 있고, 점수를 축적하다보면 플러스5.0을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조국 장관 임명을 강행한 문재인 대통령이나 조국 장관 본인이 선거 승리검찰개혁정도를 목표로 삼지 않기를 바란다. 검찰개혁도 결국 더 큰 목표를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크고 분명한 목표를 설정해놓고, 오늘은 WPA를 몇 점이나 획득했는지, 혹은 잃었는지 매일 따져보길 바란다. 만루홈런이 아주 미미한 점수밖에 안될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족을 달자면, 야당도 다르지 않다. 조국 장관 퇴진이나 대통령 탄핵을 승리로 여기는 한 진짜 WPA는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경향 2019.09.15

   

형편에 맞는 꿈은 꿈이 아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에 중2였던 소녀의 눈으로 부조리한 사회를 응시한 영화 <벌새>를 보다 나에게도 잊히지 않는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등교시간이 오전 7시까지였다. 3은 오전 630분으로 당겨졌다.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는 게 유일한 자랑거리인 학교였다.

 

평상시처럼 새벽같이 등교해 아침자습을 마치고 나니 수업하러 들어온 선생님이 담담한 목소리로 오전 740분쯤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추락한 버스에 등교 중이던 여고생 8명이 타고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무거운 교실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던지 그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덧붙였다.

 

그 학교 등교시간이 우리처럼 빨랐다면 그 시간에 성수대교를 지나는 버스를 탈 일은 없었을 텐데. 너네는 (등교시간에) 불만이 많겠지만, 원래 등교시간은 빠를수록 좋은 거야. 다 나중에 보답받을 날이 올 거다.”

 

그의 말은 마치 1990년대의 모순이 응축된 한 장면처럼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성수대교 붕괴로 희생된 학생들을 애도했을 그의 속마음까지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사건을 통해 그가 제자인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교훈이 고작 그런 정도였다는 것에 할 말을 잃었을 뿐이다. 달리는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작은 부조리를 거대한 부조리로 합리화하며 순응했던 그 시대의 자화상.

 

어차피 그런 시대 위에 쌓아 올려진 2019년이니, 지금의 사회라고 다를 리 있겠는가. 현실의 부조리에 순응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부적절한 교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좀 더 솔직해진 것뿐이다.

 

최근 한 지방의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형편에 맞는 꿈을 가지라고 훈시해 논란이 됐다고 한다. 학생들이 가난하면 꿈을 크게 갖지 말라는 것이냐고 반발하자, 그는 M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해명했다. “꿈을 고민할 때 자신의 능력과 (집안) 형편을 함께 고려하라는 취지였다. 일부 내용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절대 희망을 갖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크게 다르지 않은 말 같다.

 

그러나 진짜 뼈아픈 것은 그의 말이 부적절하긴 했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란 데 있다. 성수대교 붕괴로 학생들이 희생된 것은 너무 당연하게도 등교시간 탓이 아니었다. 당시에도 이미 한물가기 시작한 사당오락의 법칙을 강조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끌어다 붙인 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조국 법무부 장관 딸의 입시 문제를 계기로 다시 한번 민낯을 드러낸 우리 사회의 공고한 계급 대물림은 노력은 보답받을 것이라던 1990년대의 힘없는 교훈을 형편에 맞는 꿈을 가지라는 뼈아픈 충고로 변화시켰다. 조 장관 딸의 입시 문제에 맹공을 퍼붓던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역시 아들 제1저자 청탁 논란에 휩싸였으니 점입가경일 따름이다.

 

조국 대전이 쏘아올린 공은 대한민국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대입제도 문제를 다시 도마에 올려놓았다. 아이들이 형편에 맞는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수십년째 도돌이표를 찍고 있는 교육개혁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작 우리 사회가 언제나 형편에 맞는 꿈만 꿔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대학 서열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능력주의 사회에서 문화자본과 사교육으로 중무장한 부유층 아이들이 실력으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긴 어렵다는 한계를 받아들인 후 형편에 맞는 수준에서만 고치려고 하니, 학생부종합전형(학종)과 정시 비율 논쟁에만 함몰된다.

 

최근 한국사회학에 실린 논문 배제의 법칙으로서의 입시제도’(한국교원대 문정주·최율)입시제도를 둘러싼 오랜 논쟁의 흐름이 기회의 평등이나 평가의 공정성 같은 능력주의의 속성으로 상징돼 왔지만, 계층 간 투쟁의 전략적 측면은 간과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어차피 소수의 최상층은 입시제도를 어떻게 바꾸든 물적·인적 자원 공세로 우위를 점하고, 하층은 입시제도 논쟁에서 배제되기 쉽다. 결국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상층이 얼마 남지 않은 합격자 쿼터를 차지하기 위해 중간층과 치열한 입시경쟁을 벌이면서 입시제도를 유리하게 바꾸기 위해 계급투쟁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주어진 사회의 형편 안에서, 각자 계층에 따른 형편에 입각해, 유리한 입시제도를 선점하고자 투쟁하는 끝없는 개미지옥. 대학 서열화, 그것도 그냥 서열화가 아니라 수도권의 주요 몇개 대학만 포식자로 군림하는 이 첨탑형대학 서열화 구조를 재편하지 않고서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각자의 형편을 뛰어넘는 더 큰 상상력이다.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경향 2019.09.15

 

   

A Five Hundred Miles (Peter, Paul & Mary)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