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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11.2~11.14 한국 사회에는 없는 것, 통합능력

by 이성근 2019. 11. 17.

탈원전에 시비거는 언론들에게 미디어오늘 2019.11.03.

한국 사회에는 없는 것, 통합능력 한겨레 2019-11-05

진보의 틀을 바꿔야 한다 한겨레 2019.11.10.

총선 D-5개월, 3대 변수 경향 2019.11.11.

보통 사람이라는 존재 한국 2019.11.12.

11·9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장에서 매일노동뉴스 2019. 11.12

소득주도성장그리고 2년 반 경향 2019.11.13.

수능이 대체 뭐라고 경향 2019.11.13.

재정적자를 바라보는 노동운동의 태도 매일노동뉴스 2019. 11.14

제주공항과 제주의 미래 경향 2019. 11.14

전두환이 머리를 조아릴 때까지 한겨레 2019-11-14

비무장 중립국이라는 큰 그림 한겨레 2019-11-14

 





탈원전에 시비거는 언론들에게

2013년은 원전 즉 핵발전소를 둘러싼 주요 사건이 많았던 해다. 가장 큰 사건은 한국 천주교의 공식기구인 주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탈핵탈원전사회로의 전환을 촉구한 것이다. 마침 그해 여름부터 독실한 가톨릭신도인 성원기 강원대교수(전자공학)는 일행과 함께 탈원전의 기치를 내걸고 7년간 여름과 겨울마다 전국 4천여km를 걸었다. 성당마다 들러서 원전 없어도 대안이 있고, 후손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려면 그 대안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였다. 주교회의의 결정내용을 성교수가 제대로 전파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또 그 전 해 11월에는 1052인의 교수가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걸고 탈원전을 선언한 사건이 있었다. 그 일에 관여한 필자도 성교수의 영향을 받아 해직기간 40여개 절집을 1500km 걸어다녔다. 원전이 없어져야, 어느 선사의 발원문에 나오는 날적마다 좋은국토를 만들 수 있음을 스님과 불자들에게 자료와 함께 알리는 일을 해 왔다.

 

20133월에는 불교계와 원불교계가 주축이 되어 원전해체에 대한 국제세미나가 서울에서 열렸다. 국내외 유수의 원자력공학과 교수와 전문가들이 참여한 행사였고, 향후 원전분야의 일거리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큰 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며칠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549조원 원전해체산업육성을 선포한 것은 이 때의 그림이 초석이 되었다.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에는 시민사회뿐 아니라 이렇듯 종교계의 무게중심이 탈원전으로 이동하여 있음이 바탕으로 깔려있다. 그 무게중심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럼에도 최근 일부언론과 정계에서는 정부의 탈원전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있다. 착각하면 곤란하다.

 

또 탈원전 선언이 무색할 정도로 이 정권에서는 오히려 원전이 증설되고 있다. 수십년에 걸쳐 수명이 다한 원전을 해체하고 다른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로 바꾸겠다는 방향을 설정한 것인데, 마치 그것마저도 문제라는 식으로 보도하는 것은 혹세무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정부의 증설판단와는 무관하게 이미 시장경제쪽에서는 원전사업에 사망선고를 내리고 있다. 세계원자력산업현황보고(WINSR) 2019년판에 따르면 민간투자자 그리고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 등 국제적 개발은행들이 원전 건설 프로젝트에 대출해 주기를 꺼리고 있다. 원전 투자는 위험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대출 측에서는 최종적인 필요액이 어떻게 될지 혹은 원자로가 수입을 가져오기 시작하는 것이 언제가 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용평가회사들은 원자로를 건설하려는 생각의 존재를 크레디트 네거티브(격하 요인)로 평가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체코공화국의 것을 포함해 새로운 원자로 건설 프로그램 전체가 신용평가회사의 신용등급 강등을 경고받고 포기된 경우가 있다.

 

, 투자은행 라자드(LAZARD)의 계산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7년의 8년 동안에만 태양광 발전이 86%, 풍력 발전이 67%의 비용절약을 달성하는 한편, 같은 시기에 원자력 비용은 20% 올랐다. 라자드는 제12균등화 발전 원가 비교연례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보조금 없는 전력 회사 규모의 태양광(36~46달러/MW)과 풍력(29~56달러/MW)은 실질적으로 다른 모든 발전 기술과의 경쟁력을 갖는 한편, 원자력(112~189달러/MW)은 비싸다는 것.

 

WINSR를 발행하고 있는 원전전문가 마이클 슈나이더는 최근 미국 콜로라도주 사례를 들면서 에너지저장시스템, 특히 배터리의 비용 저하가 괄목할만하다고 지적한다. 즉 풍력 발전과 배터리조합세트의 2017년 입찰 가격은 21달러/MW시로서 핵발전소의 운전·정비 비용 27달러/MW~60달러/MW시 보다 월등하다는 것이다. 마이크로그리드 기술의 승리다. 원전이 자랑했던 기저부하의 안정성도 약진하는 에너지전환의 테크놀로지 앞에서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오래전부터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일부언론들은 이런 최근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구태의연하게 장안의 이목을 어지럽히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위험이다. 최근 한빛원전의 격납건물의 공극문제 그리고 한빛1호기의 제어봉 관련 열출력 급증사고는 전면적 가동중단까지 검토해야할 수준이다. 일본에서도 걱정하고 있다. 한국의 원전위험은 국제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 형편없는 안전관리수준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한빛원자력발전소. 사진=위키백과

 

또 재작년, 월성1호기 수명은 연장할 수 없다는 사법부 판결이 나왔고 그에 따라 정부가 작년 폐쇄를 결정했다면, 그 이전에 고의로 수명연장을 획책한 수천억원의 불법적 집행한 자에 대해 형사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 허공에 날아간 그 돈, 누군가의 배를 불려준 그 돈은 누구의 돈인가?

 

, 원전에 납품하는 변압기에 결함이 있음이 공중파방송에서 밝혀져도 제대로 바로 잡는 절차가 보이지 않고 이를 제보한 사람만 궁지에 몰리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울원전은 어떤가. 현장의 원전엔지니어가 위험을 감지하고 수년전부터 문제를 제기하여도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절차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이런 수준의 원전을 열렬히 홍보하는 언론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원천기술없이 수출을 꾀했다가 결국 미국이 허락해주지 않아서 성사되지 못한 사우디아라비아 수출실패사례도 있다. 미국의 소리 방송(VOA)는 한달전 크리스토퍼 포드 미 국무부 국제안보·비확산 담당 차관보가 전날 미 하원 외교위 아태 비확산소위에 참석, “한국전력(KEPCO)이 사우디에 제안한 원자로에 미국의 원전 기술이 포함돼 있다며 미국 정부의 수출입 통제허가 없이 한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원자로를 수출할 수 없다고 밝혔다고 알려왔다. 원전찬양 언론들이 이 소식에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원전의 고비용과 에너지생산지연의 특성 때문에 기후위기에 대한 대안도 전혀 될 수 없다. 미국은 착착 폐쇄하고 있다. 2025년까지 18기를 폐쇄할 예정이이고 이미 7기를 폐쇄했다. 세계적으로도 최근 10년간 30기나 폐쇄되었다. 통계의 착시를 일으키는 중국을 제외한다면 절대수치가 이처럼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레고리 얀코 전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 위원장이 올봄에 고백했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지구를 구할 것인가, 죽어가는 원자력 산업을 구할 것인가. 이제 원자력은 금지되어야 한다

 

원전수출은 무한 책임을 지는 자리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행여 수출이 성사될그런 상황이라도, 현지의 어떤 여건에 의해서 사고라도 난다면, 그것은 정권이 아닌 민족차원의 빚이 된다. 대대손손 말이다. 단 한번의 사고로 온 나라가 위기에 빠져있는 이웃나라의 사례를 뻔히 보고서도 혹세무민을 계속하는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 이는 언론이 아니라 언론을 가장한 마피아. 이원영 수원대 교수·한국탈핵에너지학회 창립준비  미디어오늘  2019.11.03


 

한국 사회에는 없는 것, 통합능력

나는 그 부부를 20년 전에 서울에서 만났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특이하고 비극적이었다. 남자는 김일성대학을 나온 북한의 수재 출신이었다. 그는 1980년대에 유학생으로 소련에 갔다가 한 현지 여성과 운명적 사랑에 빠졌다. 북한은 1962년 이후로는 대개의 경우 국제결혼 등을 불허해온 사회다. 결국 사랑과 조국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그는 전자를 택했다. 때마침 소련이 붕괴 과정에 들어가고 그는 서방을 거쳐 서울로 들어와 탈북과 정착의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완벽한 러시아어 구사력과 정보기술(IT) 능력으로 무장한 그는 곧바로 옛소련 출신 엔지니어들을 모아 벤처기업을 만들어 성공으로 이끌었다. 한국의 보수 신문들은 그를 탈북자들에게 모범이자 희망이 되는 인물, 한국은 기회의 땅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알린 인물이라고 대내외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나는 그 부부의 모습에서는 코리안 드림실현에 대한 기쁨을 전혀 읽어낼 수 없었다. 그들은 한마디로 남한에서의 삶에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었다. 고난의 행군이 끝난 뒤인 그 시절에 들어온 대부분의 탈북자들과 달리 그들은 경제적으로 고생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북한 사투리가 들리기만 하면 이상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만 하면 위험하고 이질적인 분자 취급을 하는 배제의 분위기에 깊은 상처를 받은 그들은 더는 남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토로했다. 그들은 귀순자와 같은 비정상인으로 취급받지 않고 그저 남들과 다를 게 없는 일반적인사회 구성원으로 통합되어 살기를 원했다. 결국 그들은 머지않아 탈북에 이어 탈남까지 감행해 한 서방 국가에 정착하게 됐다.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혈통이나 민족 차원에서 아무런 인연도 없는 그쪽에서 그들은 오히려 남한에 비해 훨씬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살았을 때는 남한 사람들의 눈치가 너무 부담되어 주로 같은 탈북자나 옛소련 출신들과만 교제한 그들은, 외국에 나가서야 현지 사회에 통합될 수 있었다.


북한 출신에 대한 한국 사회의 통합 실패를, 오랜 분단과 적대의 영향,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레드 콤플렉스 등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과연 외부 출신에 대한 사회 통합의 실패는 북한 출신에만 국한되는가? 내가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에서 만난 각종 외부 출신들은 수백명에 이를 것이다. 그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거나 고된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중국 조선족 출신이나 중앙아시아 고려인 출신, 북한 출신들도 있는가 하면, 속칭 스카이(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명문대에서 교편을 잡고 상당한 연봉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사는 미국 내지 유럽 출신들도 있었다. 온갖 인권 침해를 당해온 약자들도 있었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살아온 중상층 구성원들도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국적이나 인종 차원에서도 각양각색인 한국 속 외부자들인 그들에게 나타나는 딱 하나뿐인 필수적인 공통점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한국 사회에 대해 강력한 소속감을 느끼며 내 자녀들도 자자손손 이 땅에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한국 사회는 그들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카이에서 교수님으로 불리며 지가가 매우 높은 부촌에서 살고 선망의 대상인 미국 여권을 소지하는 사람들마저도 나는 한국의 대학에서 전시품에 불과하다. 한국인 권력자들이 나에게 악감정이 생기거나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밀려날 수 있다는 것을 매일 느낀다는 불안감을 토로할 정도다. 식민 모국에 비견될 만한 영향력을 한국에 미치는 나라에서 온 부유한 고학력자조차도 그렇게 느낀다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연변 아주머니가 과연 한국 사회를 어떤 눈으로 볼 것인가?


우리는 매우 정당하게 한반도 국가들에 대한 배타주의적 적대감을 부채질하는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 같은 극우 정객들을 비판하고 있지만, 사실 외부 계통의 주민들이 몸으로 느끼는 사회적 배제 차원에서 보면 한국은 오히려 일본에 꽤나 가깝다. ·일 양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압축적 근대화의 사례로 꼽히는데, 이 두 나라에서 사는 외부자들이 체감하는 것은 근대 사회다운 개방성이라기보다는 매우 강한 폐쇄성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한국과 일본이 산업화된 세계에서 여성의 지위가 가장 낮은 사회로 알려진 이유와 같을 것이다. ·일 양국에서 근대화를 주도해온 것은 보수적 기득권층이었고, 그들이 원하는 근대란 인간의 해방이라기보다는 부국강병이었다. 이 부국강병의 개발주의적 계획 속에서는 양성평등도, 외부자에 대한 개방성도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일과 같은 방식의 반동적 근대주의는 군대나 군대를 빼닮은 국가 관료 기구 등이 사회의 준거집단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료 집단은 보통 서로서로 유사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명문대 선후배 네트워크가 장악하게 되는데, 군부대나 중년 남성 위주의, 관직에 잔뼈가 굵어진 명문대 출신 네트워크는 그 속성상 외부인들에게 쉽게 개방될 수 있는 조직들도 아니고 남녀평등을 제대로 실천할 만한 조직들도 아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근대 사회를 지배해온 또 하나의 주요 조직은 바로 특정 족벌이나 연공서열이 높은 고참 임원들이 운영하는 대기업인데, 그 조직 역시 개방적일 리가 없다. 그런데 배제되는 것은 외국인뿐일까? 사실 극도로 위계서열화되어 있는 한국 내지 일본 식 조직 문화에서는 배제를 당하지 않는 사람들은 출신 국가나 국적을 불문하고 오히려 소수다. 여성이거나, 학벌이 없거나, 특정 족벌의 구성원이 아니거나, 조직에 막 들어온 막내이거나, 비정규직이라면 배제를 당하거나 각종 괴롭힘이나 개인적 착취의 대상에 오른다. 평등이라는 게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반동적 근대는 내부자들마저도 한 줄로 세워 그 아래쪽에 속하는 사람들을 배제하거나 괴롭히는데, 하물며 외부자들의 신세는 어떻겠는가?


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서열적 사회의 통합 능력은 제로에 가깝다. 그래서 탈북 행렬 못지않게 탈남 행렬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사랑을 찾아 탈북을 감행한 김일성대학 출신 유학생은, 한국에서 성공을 해도 하루도 마음 편히 살지 못하고 평등과 사회 통합을 찾아 다시 탈남을 해야 했던 것이다. 평등이 없으면, 즉 주류와 같은 경제력이나 학력이 없어도 같은 인간이자 같은 시민, 주민으로 동등하게 대해주는 사회적 관행이 정착되지 않는다면 외모나 여권 색깔이 다른 사람들까지 안고 갈 수 있는 사회로 거듭나기는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평등, 사회적 서열의식의 파괴는 사회 통합의 전제조건이다. 그리고 고령화와 초저출산의 시대에는 사회 통합, 이민자들이 쉽게 정착해 대대로 같이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의 출현이야말로 대한민국의 핵심적인 장기 국가 과제가 돼야 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19-11-05

 

진보의 틀을 바꿔야 한다

최근 <한겨레>조국, 그 이후기획 연재 기사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다시 문제는 불평등이다편에 실린 이재훈·오연서 기자의 기사(‘조국대전에 낄 자리조차 없던 이들의 분노)가 감명 깊었다. 불평등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준 두 기자께 감사를 드리면서 내 생각을 조금 더 보태고 싶다.

불평등 담론엔 크게 보아 두 종류가 있다. ‘1% 99%’ 담론과 ‘20% 80%’ 담론이다. 그 중간에 ‘10% 90%’ 담론이 있는데, 이는 ‘20 80’ 담론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게 좋겠다. 아직까지 주류 담론은 ‘1 99’ 담론이기에, 아무래도 약한 쪽이 서로 힘을 합해 주류 담론의 문제를 폭로하고 교정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다.

        

불평등 완화를 위해 상위 1%를 문제삼을 것인가, 아니면 상위 20%를 문제삼을 것인가? 우리는 어느 쪽이건 별 상관 없지 않으냐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99%가 힘을 합해 1%의 몫을 줄인 뒤에 20%의 몫도 줄여나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건 환상이다. 20%는 자신의 몫을 줄일 뜻이 없다. 그들의 1% 비판은 자신의 몫에 대한 비판을 피해가기 위한 안전판의 성격이 농후하기에 정책으로 실현되기 어렵다.

 

불평등 완화는 경제의 영역인 동시에 소통과 설득의 영역이다. 20%에 속하는 사람들이 나도 양보했는데, 왜 당신들은 양보하지 않으려는가?”라는 당당하고 공평무사한 자세를 가질 때에 비로소 ‘1% 개혁도 가능해진다. 20%에 속하는 정책결정자와 전문가 집단이 자기 몫을 조금 양보하는 아픔을 느낄 때에 비로소 추상적 구호가 아닌, 정교한 정책 수단으로 ‘1%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1 99’ 담론은 일반 대중의 폭넓은 호응을 얻기도 어렵다. 대기업 노동자냐 중소기업 노동자냐,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에 따라 임금격차가 거의 두 배 또는 세 배나 되는 불공정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1% 개혁은 아무런 감흥이 없는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는 악착같이 이 모델을 고수하면서 자본 대 노동이라는 이분법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저소득층과 비정규직이 보수적인 대통령 후보에게 더 많은 표를 던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1 99’에서 ‘20 80’ 모델로 이동한다는 건 개혁 방법론의 차원을 넘어서 진보가 기존 사고의 틀을 혁명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체제에 살고 있지만 진보는 여전히 사회개혁을 민주화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고 실천하는 습속을 갖고 있다. 민주화 투쟁은 거대한 적을 무너뜨려야 하는 투쟁이었기에, 진보는 거대담론과 총론엔 능하고 강하지만 민생과 각론엔 무능하고 약하다. 이는 ‘1 99’ 모델의 정치적 버전으로, 오늘날엔 반드시 실패하게 돼 있다. ‘20 80’ 모델로 이동하면 진보에겐 전혀 다른 자질이 요구된다.

 

민주화 투쟁가들은 민주화의 은인이다. 하지만 그들의 습속과 자질은 민주화 이후의 정치엔 맞지 않는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게 세상사다. 자식을 위해 희생한 부모는 자식이 잘되는 걸 바랄 뿐 성인이 된 자식의 판단을 존중한다. 세상이 달라진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화 투쟁가들에겐 부모의 그런 마음이 없다. 이들은 보수를 거대한 적으로 내세워 시효가 끝난 민주화 투쟁 모델을 연장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고 있다. 물론 이는 보수의 한심한 수준과 행태에도 책임이 있지만, 그게 진보의 면책 사유는 될 수 없다. 민생을 소홀히 한 채 기득권과 정의를 동시에 독점하려는 이런 정치적 자질은 이젠 정말 곤란하다.

 

‘20 80’ 모델은 자본 대 노동이라는 1980년대식 사고를 넘어 노동 내부에 존재하는 불평등에 눈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대기업 노동자의 상당수가 20%에 속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들과 맺은 동맹을 넘어 우리 모두 80%를 생각하자고 설득하는 정책 전환을 요구한다. 자신들이 20%에 속하는 계급편향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최우선 정책 의제가 80%의 민생과는 무관한 자신들만의 습속에서 비롯된 아집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려운 마음으로 성찰하도록 요구한다. 보수와의 비교를 통해 자기 정당성을 강변하는 적대 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80%의 국민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 자세 전환을 요구한다. 민생을 돌보는 데엔 분노와 증오보다는 문자 그대로의 , , 눈물이 요구된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겨레 2019.11.10

 

총선 D-5개월, 3대 변수

내년 총선은 여야 모두 정치 명운이 걸린 격전장이 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후반기를 탄탄하게 끌고 갈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총선 승리가 절실하다. 자유한국당은 벼랑 끝에 몰려 있다. 자신들이 배출한 두 명의 대통령이 단죄받고 보수세력이 궤멸되다시피 한 마당에 총선마저 실패하면 더 이상 재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총선 D-5개월. 예측 가능한 변수는 세 가지다.

 

첫째, 대통령 지지율이다. 201511. 지금처럼 총선을 꼭 5개월 앞둔 때다.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 지지율은 39%, 야당인 민주당이 22%였다. 17%포인트 격차다. 여야가 바뀐 현재 민주당은 41%, 한국당은 25%. 놀랍게도 격차가 비슷하다. 그런데 다섯 달 뒤 총선에선 예상을 뒤엎고 민주당이 123석 대 122석으로 승리, 1당을 차지했다.

 

왜일까. 그때는 국민의당이란 3당이 있었지만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변수는 아니었다. 국민의당은 호남에서 민주당 표를 빼앗았고 수도권에선 새누리당 표를 분산시켰다. 양당 모두에 비슷한 손해를 안겼다는 게 당시 분석이었다. 국민의당 출현 이후에도 새누리당 37%, 민주당 20%, 국민의당 17%로 제1, 2당 간 격차는 여전했다. 그런데 총선 결과는 달랐다. 여론조사 전문가는 전국적인 지지율을 지역구 선거에 곧바로 연결시키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지역구 선거는 1만표를 이겨도 1, 1표만 져도 0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선은 대통령 지지율을 보고 전망하는 게 더 정확할 거라고 한다. 다시 4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201511월 갤럽 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 긍정평가는 41%, 부정평가는 49%였다. 엊그제 나온 같은 조사에서 문 대통령은 긍정평가 45%, 부정평가 47%였다. 거의 비슷하다. 주목할 부분은 그다음부터다. 이후 박 대통령 지지율은 추락세가 이어지다 총선 직전인 3월엔 36%까지 떨어졌다. 새누리당 지역구 득표율(38%)과 거의 똑같다. 박 대통령 지지율 추락을 보면 이미 새누리당의 총선 패배는 예고돼 있었다. 결국 내년 총선도 문 대통령의 지지율 추이를 보면 짐작 가능하다는 얘기다. 총선은 중간평가 성격이 강하다. 대통령 지지율이 50% 이상이면 중간평가는 희미해지고 여당 승리를 예측할 수 있다. 40% 이하면 여당 패배다.

 

둘째, 보수야당의 판도다. 한국당의 위기는 심각하다. 혁신과 감동, 비전과 전략, 오너십이 없는 ‘5불 야당이란 말도 나온다. 당 지지율은 조국사태 이전으로 돌아갔고, 황교안 대표의 대권주자 가치는 날로 폭락하고 있다. 황 대표는 취임 8개월이 넘도록 말로만 혁신과 통합을 외쳤다. 위기에 몰린 황교안은 보수대통합 추진을 선언했다. 보수야당이 한 묶음으로 뭉치면 총선 승리가 가능할까. 여론조사 전문가에게 물어봤다.

 

보수정당의 파이는 최대 35% 정도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전 지지율과 같다. 현재 지지율은 한국당 23%, 바른미래당 5%, 우리공화당 1%. 단순히 다 합치면 29%. 보수통합의 시너지 효과로 살이 더 붙을 수 있고, 도로새누리당에 실망해 빠져나가는 변수도 있을 것이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수도권의 경우 40% 이상 득표해야 당선권이다. 더 큰 모멘텀이 있어야 한다.”

 

 

- 더 큰 모멘텀이란.

보수야당의 지지율은 조국사태등 정부·여당의 실책으로 얻은 반사이익이 대부분이다. 경제가 나빠지고 정부·여당이 잘못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제는 자력으로 지지율을 끌어올려야 한다. 쇄신이나 혁신으로 감동을 줘야 한다.”

 

- 그러면 반등이 가능한가.

더 나쁜 건 비호감도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당 비호감도가 62%. 40대 이하에선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응답이 평균 74%. 한국당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의미다. 오래된 현상이다. 호감도는 몇 달 만에 갑자기 높아지지 않는다. 한국당은 웬만해선 표의 확장성이 크지 않다.”

 

셋째, 보수대통합은 가능할까. 지금 보수야당이 갈라져 있는 건 박근혜 탄핵에 대한 입장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바른미래당은 탄핵에 동조했고, 우리공화당은 탄핵을 인정조차 않고 있다. 한국당 내부는 친박이 친황으로 바뀌었을 뿐 탄핵 전과 후가 달라진 게 없다. 이들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한 선거법 개정은 통합의 최대 변수다. 연동형 비례제는 소수당에 유리하다. 선거법이 통과되면 유승민 신당도 독자생존의 살길이 열린다. 선거법이 무산돼야 통합은 급물살을 탄다. 선거법은 123일 다른 패스트트랙 법안과 함께 본회의에 오른다.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박래용 논설위원 경향 2019.11.11.

 

보통 사람이라는 존재

얼마 전 초등학교 1학년 조카가 숙제 하라는 제 엄마의 말에 아무리 공부해도 커서 아빠만큼 살기도 힘들 걸?”이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한참 웃었다. 어른 같은 소리를 천연덕스럽게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열심히 살아도 이전 세대보다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요즘 세태를 확인하는 듯해 걱정스럽기도 했다.

 

사실 지금 지구촌 곳곳은 평범한 삶을 위협받는 사람들의 아우성이다. 칠레에선 지하철 요금 인상에, 레바논에서는 스마트폰 메신저에 대한 세금 부과 계획에 폭발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서울에서도 불공정과 불평등에 분노한 사람들의 거리 집회가 두 달여간 이어졌다.

 

미국 대선(2020113)1년여 앞두고 경선이 한창인 민주당의 변방 후보 앤드루 양에게 눈길이 가는 것도 그래서다. 대만계 미국인이자 변호사 출신 기업가인 그는 노련한 정치인 후보에 비해 인지도가 현저히 낮고, 18세 이상 성인에게 월 1,000달러씩 기본소득을 제공하겠다는 급진적 공약 자유배당금을 내걸어 당선 유력군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양갱(Yang Gang)’으로 불리는 열성적 지지자들이 꾸준히 늘면서 뉴욕타임스 등 주요 매체들도 지지율 3%에 불과한 그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양의 선거 캠페인은 자칭 인간 중심의 자본주의. 그는 출마의 변을 밝힌 책 보통 사람들의 전쟁(The War on Normal People)’에서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기술 대기업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여기는 미국 내 70%에 이르는 보통 사람들을 대량 실업으로 내몰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무인자동차 도입으로 미 전역의 350만명에 이르는 화물차 기사는 물론 그들이 이용하는 모텔과 화물차 휴게소 등 연관 산업 종사자 720만명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기본소득 공약도 교육과 훈련만으로는 기술 발전으로 인한 이 같은 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양의 진단은 비단 미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대형마트 계산원은 빠른 속도로 무인계산대로 대체되고 있다. ‘혁신이라는 절대선의 명분을 앞세운 플랫폼 기반 업체가 창출하는 일자리는 기존 일자리를 파괴할 위험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며 자동화와 일자리 상실로 인한 보통 사람들의 위기가 미래의 암울한 이야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이라고 강조하는 명쾌한 진단이 양의 인기 비결이다. 경제적 절망감이 혐오와 불안 등 공동체 파괴로 이어진다고 믿는 그는 서둘러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양은 그래서 정치 경험이 전무한데도 지방선거나 주지사 선거 등을 거치지 않고 곧장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노태우 군사 정권이 보통 사람이란 기만적 선거 구호를 내걸고 대선에서 승리한 게 벌써 32년 전이건만 그 대척점에 섰던 이들이 세운 현 정부에서조차 보통 사람이 살만한 환경은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후반기 첫날인 10일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강조한 정책 목표라는 것도 결국 밥 먹고, 공부하고, 아이 키우고, 일하는 국민의 일상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공허한 모토 대신 구체적 진단과 대안을 역설하는 앤드루 양의 출현이 반갑다. 동시에 내년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한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말마따나 좀비에 물린 것 같이보통 사람들이 고통 받는 동안 정쟁에만 매달리는 한국 정치가 요즘 들어 유난히 보기 싫다.

 

양은 기본소득 공약에 대해 일하려는 의욕을 꺾을 것이라거나 무상으로 받은 돈이니 엉뚱한 곳에 쓰일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 한결같이 인간을 믿는다고 반박한다.

 

어쩌면 양의 인기는 월 1,000달러의 기본소득 공약도, 현란한 지표 제시도 아닌, 이 시대 보통 사람이 직면한 고통에 공감한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일지 모른다.

김소연 국제부 차장 jollylife@hankookilbo.com

 

11·9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장에서

1. 해마다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였다. 그러니 올해도 전태일 열사 기일에 즈음해 민주노총이 개최한 노동자대회에 조합원들이 참여해 결의를 다졌다는 것이 특별한 소식은 아니다. 민주노총 노동자대회가 열렸다는 것만으로는 감흥이 없다. 참석자수를 헤아려 보며 서울 여의도공원 옆 여의대로를 가득 메울 정도로 많은 조합원들이 참석했다는 것에 감격도 없다. “노동개악 중단하라!” “이런 국회 필요 없다!” 지난 9일 노동자대회장에서 노동자들은 외쳤다. 그 외침은 달랐다. 특별히 들어야 했다. 사회자 선창에 따라 한 것인데, 이날 대회장에서 조합원들에게 배포된 피켓에도 같은 구호가 새겨져 있었다. 의례적인 행사인 양 나는 참석하지만, 거기서 노동자의 외침은 의례적인 취급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올해도 대회장에서 어떤 구호가 울려 퍼질 것인지에 귀 기울였던 것인데, 이런 외침을 들었다.

 

2. 문재인 정부는 최근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해 놓고 있다.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를 보완하겠다는 것인데,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를 통해 사용자들이 근로기준법상 주 52시간제에 따른 부담을 피하게 해 주겠다는 취지로 노골적으로 그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도대체 어째서 주 52시간제로 노동시간을 단축하겠다고 공약하고 추진해 왔던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기본협약) 비준을 위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해 놓고 있다. 그런데 그 노조법 개정안은 이 나라 노동자에게 파업의 자유 등 노동기본권 행사를 규제하는 노조법을 전면적으로 개폐하기는커녕 그동안 민주노총 등이 제소해 ILO가 한국 정부에 권고한 사항들에 대해서만 개정 내용으로 담고는 사업장 내 생산시설 점거행위 금지, 해고자·실업자 사업장 출입 제한 등 규제를 추가했다. 이렇게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노조법 개정안을 읽으면, 이날 대회장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노동개악 중단하라!”고 외쳤던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는 걸 알게 된다. 탄력적 근로시간의 단위기간 확대로 노동시간에 관한 노동자 권리를 저하시키고,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겠다면서 파업을 포함한 노조할 자유 등 노동자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노조법 개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규제를 추가하고 있으니 문재인 정부에 노동개악 중단을 요구하는 것은 이 나라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로 볼 때 타당했다. 오히려 이날 대회장에서 노동개악 중단하라는 피켓을 준비하지 않고 대회 사회자가 이를 선창하지 않았다면 민주노총은 이 나라에서 노동자 자유와 권리를 위한 자신의 소임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했다. 박근혜 정권 심판을 위한 촛불집회장에서 함께했기에, 그리고 여전히 적폐청산과 개혁을 함께해야 하기에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에 날을 세우는 걸 주저했다면, 민주노총은 전태일 열사 49주기를 기념하는 노동자대회에서 스스로 전태일 정신이 민주노총의 정신이고,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전태일의 후손이라고 당당하게 대회사에 쓰지 못했을 것이다.

 

민주노총은 이날 대회사에서 한국 노동자와 민중 희망을 넘어 세계 노동운동의 희망을 말했다. 하지만 결사의 자유 등 ILO 핵심협약이 보장한 노동자 자유와 권리조차도 아직 쟁취해 내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 노동운동에겐 그건 너무도 먼 희망이 아닐 수 없다. ILO 핵심협약이 보장한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는 선진 노동운동이 쟁취한 것이다. 그래서 이미 수십년 전에, 길게는 150년 전에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 목록이 됐는데도 이 나라에서는 아직이다. 이 나라 노동운동이 되살아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셈하더라도 30여년, 우리는 그동안 이 세상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에 어떤 희망이었던가. 민주노총 등 이 나라 노동운동이 어떤 새로운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 목록을 이 세상에 가져온 것일까. 여전히 오래된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 목록만 열거하면서 쟁취를 외치고 있을 뿐이다. 정말로 나도 우리 노동운동이 세계 노동운동의 희망이 되기를 바라지만, 희망을 말하기엔 오늘은 너무도 이르다.

 

3.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대회사에서 정부는 노동시간단축 외침에 탄력근로제 개악안을 던지고, ILO 핵심협약 비준 요구에 노조파괴법을 던졌으며”, “국회는 누가 더 개악하나 일 년 내내도 모자라 지금까지 다투고 있다며, “정부가 노동개악 운을 띄우면 국회가 더 많은 개악을 요구하는 노동절망 사회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바로 이렇게 보기에, 즉 문재인 정부의 노동법 개악 추진에 국회가 더 개악한 입법을 하고 있다고 여기기에 민주노총은 이날 대회장에서 이런 국회 필요 없다!”는 구호를 외쳤던 것이리라. 52시간제 근로기준법 개정, 최저임금법 개정 등 문재인 정부의 노동입법 추진을 겪고서 이렇게 외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는 대회장에서 이 구호를 들었을 때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았다. 조국 사태 등으로 인한 극심한 대립으로 오늘 국회는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지 못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이 정부안대로 6개월로 확대됐거나, 자유한국당 의지가 관철돼 그보다 더 확대됐을 것이고, 노조법도 마찬가지로 정부안이 의결됐거나 그보다 더 개악됐을지 모른다. 집권 더불어민주당은 일단 정부안의 국회 의결을 추진하고, 자유한국당 등 보수의 당들은 사용자 자본을 위해 더욱 개악하자고 추진했을 것이니 그 결과는 뻔했을 것이다. 차라리 국회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오늘이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에 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나는 감히 이런 국회 필요 없다!”고 외칠 수가 없었다. 사실 이런 국회를 지나서 다시 국회가 정상으로 작동되는 게 두렵다. 그러니 이런 국회가 필요하다고 외치고 싶다. 노동법이 개악되지 않도록.

 

4. 돌이켜 보면 이 나라에선 민주니 진보니 하는 당의 집권이 더 두렵다. 그들이 집권하지 않았을 때에는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요구하는 외침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공약 보따리에 담는다. 집권 보수세력에 반대해서 투쟁할 때에는 작은 차이만 존재하는 동지인 것처럼 행세한다. 하지만 집권하면 달라진다. 아직 공약집의 잉크가 마르지 않은 집권 초기를 지나게 되면, 경제 운운하면서 노동자의 권리 삭감이 경제 살리기인 양 사용자를 살리기 위해 덤벼들며 각종 노동개악 정책을 쏟아 내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되면 사용자 자본을 노골적으로 편드는 보수의 당이 합세해서 국회 등에서 너무 쉽게 노동개악이 이뤄지게 된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파견법 등 비정규법과 근로기준법·노조법 입법추진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박근혜 정권에서 노동시장 구조개혁에 관해 2015915일 한국노총이 참여한 노사정 합의가 있었는데 그 합의의 입법 추진을 정권과 집권 새누리당이 밀어붙였음에도 더불어민주당의 반대로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아래서 노사정 합의의 주요 내용인 주 52시간제에 관한 근로기준법 개정 등을 보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여야 합의로 너무 쉽게 입법됐다. 일요일 등 휴일이 1주일에 포함되지 않아 1주일이 휴일을 제외한 6, 5일이라는 고용노동부의 행정해석을 비판하며 그 행정해석을 철회하라고 주장하던 민주의 당 의원들은 태도를 바꿔 행정해석 철회가 아닌 근로기준법에 1주일은 휴일을 포함해 7일이라는 황당한 입법을 추진해 의결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은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 등 노동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으니 두려운 것이다. 이렇게 나처럼 두려워 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이 이런 국회 필요 없다!”고 외쳤던 것일까. 그랬다면, 상황 파악을 못해 잘못된 대응방안을 찾는 실수는 면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오늘도 이 나라 노동운동이 촛불집회장에서 함께했던 날의 추억을 떨쳐 내지 못한 채 여전히 보수의 당 정권 아래서보다는 노동개악을 덜 하도록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의 깃발이 중심 없이 흔들려서는 세계 노동운동의 희망을 만들 수 없다. /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매일노동뉴스 2019. 11.12

 

소득주도성장그리고 2년 반

촛불혁명이 구체제를 무너뜨렸고 신체제의 2년 반이 지났다? 아니다. 혁명에 걸맞으려면 구체제와 신체제의 뚜렷한 차별이 있어야 한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독재에서 민주로, 부패한 기득권 세력의 숙청, 이런 초법적 변화까지는 아니라도 재벌 해체, 공정한 시장질서의 확립, 관료와 공직사회의 부패척결과 공적 감시기능 정상화 등은 있어야 한다. 그런 변화는 아직 없었다! ‘촛불혁명은 헌법과 민주적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 시민저항이었고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 정부가 탄생하여 그 절반의 임기가 지났을 뿐이다.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무성했던 논란이 무색하게 새 정부가 추진했던 경제정책의 실상은 지난 보수정부도 진행했던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 강화, 청년 실업과 일자리 정책, 최저임금 인상, 경제민주화와 동반성장 정책 등을 체계화하고 우선순위를 높인 정도라 할 수 있다. 지지했던 쪽에서는 과감한 개혁과 쇄신을 희망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건설적이고 합리적인 비판보다는 전례 없이 위험한 정책실험인 양 혹은 사회주의 경제로의 체제 전환인 양 무책임한 힐난과 맹목적 색깔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양쪽 다 틀렸다. 무역전쟁과 세계 경제의 침체로 과감한 개혁과 쇄신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였고, 한국 자본주의가 체제 전환의 위험에 빠지는 일도 없었다. 대외적 충격이 경제정책의 전망을 어둡게 했고, 탄핵과 함께 사라졌어야 할 탄핵의 그림자들과 고장 난 정치가 경제의 길을 막고 시간만 허비하는 소모전의 연속, 2년 반이 지난 것이다.

 

경제정책은 시장 안팎의 충격과 요동이 국민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줄이는 경기관리 기능과 근본적 체질개선 및 산업구조 조정으로 국가경제의 잠재력을 높이는 기능으로 구분된다. 불안정한 저층 대기를 뚫고 구름 위로 이륙하여 적정 고도에 접어들면 비행기는 안정적으로 순항한다. 경제의 발전단계에 걸맞은 순항고도가 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지금 우리의 발전단계에 걸맞은 순항고도를 찾아 정부의 재분배 기능을 강화하고 공정경제와 구조조정을 통해 국민경제의 잠재력을 키우자는 것이고 모든 선진국들이 우리와 같은 경제발전단계에서 경험했던 일을 하자는 것이다. 경제성장률, 고용률, 국가채무비율 등 어떤 자료를 봐도 설명되기 어려운 한국경제 위기론을 내세워, 추락하니 이런 정책 기조를 포기하라는 비판은 순항고도를 찾지 말고 불안정한 저고도 비행만 계속하자는 말이다. 세계 경제가 위태로우니 개혁도 구조조정도 없이 현상유지나 하면서 지켜보자는 얘기다. 특히 일부 정치권은 재벌 중심의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으로 회귀하고, 많든 적든 위에서 떨어지는 물이나 받아먹으라는 벌부론(閥富論)을 민부론(民富論)이라 호도한다. 수십년의 경험에서 보면 그것은 민빈(民貧)으로 가는 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상유지가 위험을 가중시킨다는 점이다. 중국경제성장이 둔화되어 세계무역량이 정체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12년 무렵이고 그 이후 보호무역주의 부상과 함께 사태가 더 악화되었다. 자동차산업과 조선업 등 제조업 위기의 전조도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를 덮고 돈 빌려 집 사기를 장려하는 후진국형 건설경기부양 정책으로 현상 유지에 급급했던 결과 가계부채와 수요 위축이라는 부작용만 커졌다. 국가경제는 대외 충격에 더 취약해졌고 대형 조선업체 부도와 자동차공장 폐쇄로 이어졌던 것이다. 건설경기 부양으로 억지로 높인 성장률 1%를 빼면 이미 우리는 1%대 성장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 그때 후진국형 경기부양을 주창했다면 지금은 더더욱 정부의 재정확장과 적극적 경기관리에 협조해야 한다. 그 내용이 후진국형이 아닌 것은 천만다행이다.

성장률을 올리는 데 급급할 게 아니라 재정확장을 통해 근본적인 경제의 체질 개선과 구조 전환에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을 여야가 합심해 모색해야 한다. 발전 잠재력도 높고 대외적 위험에 강건한 체질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그 중요한 축이 사람에 대한 투자다. 줄어드는 인구가 최대한의 힘을 발휘하려면 임신에서 출산과 사망에 이르는 전 기간에 걸쳐 복지와 사회안전망이 갖춰져야 한다. 이를 선심성 공약 정도로 생각하는 잘못된 사고는 고쳐야 한다. 가난한 이웃의 딸과 아들이 한국 경제의 주축이 되어 내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생각을 왜 못하는가? 시장질서의 불공정과 노동양극화가 해소되어 국민 삶의 질이 개선되어야 혁신적 창업과 교육에 대한 투자가 활성화된다. 가계소득을 높여 내수 기반을 확충하고 미래 성장산업에 대한 선도적 투자를 확대한다면 대외 의존에서 오는 위험을 줄이고 추격경제에서 명실상부한 선도경제로 탈바꿈할 것이다. 희망을 갖고 합심해 노력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분배정의연구센터장 경향 2019.11.13.

 

수능이 대체 뭐라고

수능일이다. 응시생들에게 나눠주는 수능샤프가 바뀐다는 소문에 청와대에는 제품명을 알려 달라는 국민청원까지 올라왔다. 몇 달간은 학교급식 대신 도시락을 싸는 집도, 며칠 전부터는 실전 과목 순서대로 공부하고 아예 수능일 도시락 메뉴로 실전 적응 훈련을 하는 경우도 꽤 많다고 한다. 모두 오늘 하루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서다.

 

1994학년도부터 대학 입시에 도입된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이름대로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준비가 됐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둔 아이들은 대학에서 큰 배움을 시작할 준비가 잘되어 있을까. 안타깝게도 10년 이상 이날만을 위해 달려온 아이들은 이미 번아웃(소진, Burnout)’ 상태로 대학문을 연다. 대부분 아이들의 배움은 이 순간 멈춘다. 교육과 혁신연구소 이혜정 소장은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에서 배움의 흥분이 사라진 맥빠진 수업, 수용적 교육현실을 질타한다. 한숭희 서울대교육학과 교수는 우리 교육을, 상을 타기 위해 샌드위치를 욱여넣고 돌아서면 다 토해버리는 샌드위치 많이 먹기대회와 비교했다.

 

수능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 아이들을 소진시키는가.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고위험 시험(high risk test)’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대학 졸업장보다 셰프 자격증, 독창적인 유튜브 콘텐츠 등이 중요하다. 명문대 졸업 후 전문대에 진학하는 경우도 낯설지 않다. 점점 많은 직장에서 명문대 학위보다 업무능력을 먼저 보기 시작했다. 필요한 능력을 즐겁게 배우는 태도, 열린 마음과 소통 등이 성공의 필수덕목이 되어 가고 있다. 사회는 변하고 있는데, ‘설마 나까진 아니겠지생각으로 물이 뜨거워지는 걸 외면하다 끓는점에 이르러서야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정시·수시 논쟁을 할 때가 아니다. 땅을 갈아엎는, 객토 수준의 더 큰 교육개혁을 얘기해야 한다.

 

새로운 길을 상상해 본다. 수능, 입시의 부담을 여러 번으로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필요할 때 언제든 대학에 갈 수 있고, 일정 기준만 갖추면 원하는 전공, 학교로 자유롭게 옮길 수 있다면. 생계 걱정 없이 업무상 보완해야 할 능력을 한 학기나 한 달간 집중 교육을 받을 수 있고, 현재 직업의 전망이 어두울 때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다면. 정육점에서 10년 넘게 일하던 이가 진로를 변경해 경제학 박사학위까지 받고 예산을 관리하는 공무원이 되는 경우도, 간호사로 일하면서 특정 질병에 관심이 생겨 학습 휴직 후 복귀한 경우도, 통계 전공이 맞지 않아 IT 전공으로 옮긴 대학생이 수강한 과목과 학점만으로 평소 가고 싶었던 영화 관련 회사에 취직해 미련 없이 한 학기 남은 대학졸업장을 포기하는 일도 가능한 사회라면. 모두 해외에서 직접 보거나 들은 사연들이다. 이리저리 이동하고 도전하는 가운데, 융합도 틈새도 활력도 생기지 않을까. 요즘 뜨고 있는 소위 컬래버레이션은 이런 토양에서 만발할 것이다.

 

이런 사회에 맞춰 교육을 통째로 재구성해야 한다. 누구에게라도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이 열려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선진국들은 교육의 방점을 평생교육에 찍은 지 오래다. ‘수능·학종이라는 제로섬 게임이 아닌, ‘윈윈의 교육개혁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15세 대상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선 늘 수위권에 들지만, OECD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선 평균 이하 점수로 뚝 떨어지는 나라다. 대학 입학까지 죽어라 공부하고, 이후엔 배울 이유가 없는 사회에서 가장 똑똑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멍청한 어른이 되어간다. 개인도 사회도 성장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 학습흥미도 최하위권 사회의 필연적 결론이다.

 

<앞서가는 아이들은 어떻게 배우는가> 저자의 한국교육 평가도 참고하자. 영국의 교사 출신 알렉스 비어드가 교육의 미래를 고민하며 주요 현장들을 찾는 책 서문엔 3년 전 인천 송도국제도시 한 고교 앞에서 지켜본 수능일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는 이날 그토록 대단한 효력을 보였던 한국의 교육방식이 더 이상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신호를 엿볼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묻는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시험일까라고.

 

날씨까지 추웠던 하루, 몇 시간 후면 장장 8시간의 피말리는 시험을 치른 아이들이 시험장을 나설 것이다. 너무 우쭐하지도, 실망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스스로의 능력과 가능성을 숫자 몇 개, 대학 합격증에 가두지 말았으면 좋겠다. 뭔가에 도전하고 배우고 싶다는 마음만 놓지 않는다면 역전의 기회들은 넘칠 테니까. 누구라도 각자의 속도에 맞게 꽃피울 수 있는 그런 사회를 같이 만들자. 고생했다, 얘들아.

송현숙 논설위원 경향 2019.11.13.

 

재정적자를 바라보는 노동운동의 태도

올해 9월 말까지 재정수지가 역대급 적자를 기록했다. 통합재정수지가 26조원, 관리재정수지가 57조원 적자다. 보통 하반기에 조정이 있기 때문에 최종 적자는 이보다는 줄 것이다. 그럼에도 세입 감소분을 감안하면 올해 재정적자는 세계금융위기가 있었던 2009년 이후 가장 클 것으로 보인다. 야당과 보수언론은 일제히 정부가 재정 중독에 걸렸다며 비판을 쏟아 냈다. 청와대는 곳간에 재정을 쌓아 두면 썩는다며 경기하강에 재정확장으로 적극 대응하는 것이 옳다고 반박했다.

 

노동운동은 정부가 돈을 써서 사회복지를 늘리는 것에 호의적이다. 세입에 대한 고려보다는 복지지출 확대를 강조하는 것이 진보진영의 오래된 태도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태도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성장-고령화라는 장기 흐름을 감안하면, 보수세력의 균형재정에 대한 강박보다 오히려 진보세력의 재정적자에 대한 우호적 태도가 더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조세를 더 거두거나 국채를 발행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상위소득자가 하위소득자에게 소득을 이전하는 재분배 효과가 발생하고, 후자의 경우 현세대의 비용을 후세대가 지불하는 세대 간 이전효과가 발생한다. 전자의 대표적 사례는 국가채무 증가 없이 재정지출을 늘리는 스웨덴이고, 후자의 대표적 사례는 국가채무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본이다. 문재인 정부의 경우 증세 없는 복지를 강조하고 있어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국채로 정부지출을 늘리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기업의 경우 부채를 늘려 미래 사업기회를 잡는 것을 레버리지(지렛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기침체 기간을 줄이고,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재정적자를 늘린다면 결과적으로 후세대에 이득이 될 수 있다. 재정적자의 선순환이다. 그런데 문제는 반대의 경우다. 국채로 재정지출을 늘렸는데, 국채 이자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 실적이 나쁘면 적자가 또 다른 적자를 낳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악순환이 이어지면 세대 간 정의 문제가 첨예해지는데, 적자로 인한 혜택은 현세대가 누리면서 적자 비용은 후세대가 책임지기 때문이다.

 

저성장-고령화라는 불가항력적 조건은 재정적자의 선순환보다 악순환과 친화적이다. 성장이 안 되면 후세대 소득이 증가할 수가 없고, 고령화가 계속되면 적자의 혜택을 입는 사람은 늘어나고 비용을 대는 사람은 줄어든다. 추격성장의 한계와 세계경제 침체로 인한 한국경제 저성장은 노력한다고 당장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출산 역시 뿌리 깊은 사회구조와 연관된 문제로 어떤 전문가도 단기간에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장기간은 아니더라도 당분간 재정적자를 늘리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40% 미만으로 다른 선진국에 비해 낮다는 것이 그 근거다. 하지만 이는 그다지 타당한 주장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국가채무 비율이 높은 나라들은 미국(104%)과 일본(237%), 유로 국가(85%)처럼 오랜 기간 정부 신뢰를 바탕으로 자국 화폐를 세계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나라들이다. 한국과 비슷하게 무역비중이 높고 기축통화가 아닌 화폐를 사용하는 나라들은 스웨덴(38%)·호주(41%)·대만(35%)처럼 국가채무 비율이 50%를 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국민연금 같은 사회보장기금 흑자로 지금까지 그럭저럭 국가채무 비율을 유지했지만, 이것이 역전되면 단숨에 통합재정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는 구조다. 한 방에 훅 가는 것이 우리나라 재정구조다.

 

한편 국가채무 수준은 화폐 안정성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관리통화제도의 화폐는 국가지불능력에 그 가치를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채무 증가로 국가지불능력에 의문이 생기면, 화폐가치가 폭락한다. 남미에서 반복되는 화폐위기가 그런 사례들이다.

 

형식적으로 보면 화폐가치는 중앙은행 자산가치에 대응한다. 100조원의 화폐를 발행하려면 100조원 가치가 되는 중앙은행 자산이 있어야 한다. 미국·일본 같은 나라들은 중앙은행 자산을 국채로 구성한다. 국채 상환에 쓰이는 자국 시민들의 세금이 화폐가치를 지탱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한국은행 자산은 한국 국채가 아니라 미국 국채 같은 국외증권으로 구성돼 있다. 복잡한 과정이지만 간단하게 말해, 한국은행이 수출기업이 벌어 온 달러를 가지고 자산을 채워서 원화가치를 지탱한다. 외환위기 이후 국가지불능력에 대해 국내외 신뢰가 사라져서 이렇게 됐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는 수출기업 부진이 곧바로 원화가치 위기로 전화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요컨대 한국의 적정 국가채무 수준은 수출기업의 국제경쟁력에 따라 상승할 수도 하락할 수도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반도체 정도를 제외하면 수출기업들의 미래 경쟁력에 여러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수출기업 경쟁력과 화폐가치가 연결돼 있어 쉽게 국가채무 수준을 높이자고 주장하기가 어렵다.

 

노동운동은 이런 정세조건 때문에 세대 정의와 국가경제 지속가능성을 무시하면 안 된다. 특히 노동운동은 세대 정의에 약점이 있는데, 노동운동의 성장이 대부분 고성장-인구증가 상황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세대 문제에서 기득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착한 적자같은 미사여구로 현재의 재정적자를 옹호하는 것은 기득권 강화에 불과하다. 세대 부정의는 청년 친화적 조직문화나 청년 조직화에 힘을 쏟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필자는 노동운동이 세대 간 정의의 경제적 의미에 대해 깊게 생각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세대는 후세대에 성장의 과실을 주지 못한다. 그러니 빚도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적자재정보다 균형재정이 차라리 낫다고 볼 수도 있다. 필요한 복지는 세대 내 재분배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더불어 현세대 임금보다는 후세대 임금을 증가시킬 수 있는 임금체계 개혁이나, 일자리를 두고 현세대와 후세대가 경쟁하지 않도록 하는 여러 개혁에 힘을 쏟아야 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매일노동뉴스 2019. 11.14

 

제주공항과 제주의 미래

제주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공항의 하나다. 1~2분에 한 대씩, 거의 쉴 새 없이 항공기가 뜨고 내린다. 이착륙 지연은 일상이다. 지난해 제주공항 이용객은 3000만명에 달했고, 국토교통부는 2045년에는 이용객이 45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한다. “현재의 공항으로는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다. 공항을 신설하면 더 많은 사람이 제주에 올 것이고, 그만큼 경제적 효과도 커질 것이다. 대부분의 운항 노선을 제주에 의존하는 지방 공항들도 활성화될 것이다.” 2공항 건설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논리다.

 

제주공항의 수용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 공항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국토교통부가 사전타당성조사를 의뢰한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ADPi)이 기존 공항의 개선과 확장으로 미래 수요를 충족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용역사업 자체와 보고서가 수년간 은폐되었다는 것이 지난 5월 드러나면서 의문은 증폭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가 제주공항은 제주도에 있다는 사실과 그 함의를 외면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 진짜문제는 제주공항의 수용력이 아니라 제주도라는 의 수용력이다. 2공항은 제주공항이 아니라 제주도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받을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제주는 이미 사회적, 환경적 수용력에서 한계에 이르렀다. 2005년에 500만명 정도였던 관광객이 2015년에 1500만명으로 급증했다. 제주도보다 넓은 하와이나 오키나와의 연간 관광객 900만명보다 훨씬 많다. ‘오버투어리즘’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은 제주도의 현실을 묘사할 때 으레 등장하는 말이다. 공항을 나서면 교통난과 주차난이고, 거의 언제나 공사 중이다. 쓰레기매립장은 포화상태이고, 매립하지 못한 쓰레기는 노상에 방치되기 일쑤다. 지난 3월엔 쓰레기를 필리핀에 불법 수출했다가 들통이 나서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제주하수처리장에서 정화하지 않은 오폐수를 제주 앞바다에 무단 방출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제주에 사람이 너무 많다. 제주공항보다 제주도가 견디질 못한다. 그런데 공항은 하나 더 지을 수 있어도, 제주도를 하나 더 만들 수는 없다. 기존 공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서, 2공항 건설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악화이고 확대이다. 지금도 숨이 차 헐떡이는 사람의 숨통을 조이는 격이다. 이렇게 가면 제주에 지속 가능한 미래는 없다.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사회는 현 정부의 공약이다. 공약이 아니라도, 사회의 안전과 지속 가능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제주의 진정한 안녕과 발전은 공항의 확대가 아니라 섬의 한계를 존중할 때만 가능하다. 2공항 문제는 성장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성장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인가? ‘거인증은 성장호르몬의 과다분비로 생기는 질병이다. 한계 없는 성장은 당사자에게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준다. 우리 사회의 성장호르몬은 적정한가? 기후위기와 쓰레기를 비롯해 과잉의 징후는 이미 도처에서 넘쳐난다.

지금의 인구만으로도 힘든데, 2공항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늘어나는 그만큼 제주 주민의 삶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제주의 자연과 생활환경은 더 많이 훼손될 것이다. 관광객들은 망가진 제주의 모습에 실망하고 사람에게 치인 채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공항 건설인가? 공항 건설로 누가 혜택을 보는가? 반짝 경기라도 아쉬운 정부인가? 토목건설 업체인가? 공군기지가 필요한 건가? 제주도민 대부분이 찬성하는 공론조사는 왜 거부하나? 정부는 왜 합리적인 비판에 눈과 귀를 막고 결론을 미리 정해놓은 듯 밀어붙이기만 하나? 이렇게 제2공항 사업은 의문투성이다. 그리고 의문을 해소할 책임은 입만 열면 공정과 소통을 강조하는 정부의 몫이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상임대표 경향 2019. 11.14

 

전두환이 머리를 조아릴 때까지

 

1979‘12·12 군사반란의 주역인 전두환 보안사령관. 그는 1980년 광주민주항쟁 40주년을 1년 앞둔 현재까지도 광주학살을 불러온 발포 명령 등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뭔 소릴 하든 무슨 상관이야, 알츠하이머라는데. 사실 치매가 아니라도 줄곧 그를 무시해왔다. 201511월 김영삼 전 대통령 상가에서 그의 살굿빛 얼굴을 봤을 때, 욕먹고 나쁜 짓 해도 잘 산다는 옛말이 틀린 게 없다고 생각했다. 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 전두환을 암살하려는 5·18 유가족을 다룬 영화 <26>의 애절함이 잠깐 떠올랐지만,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노인의 삶이 뭐 그리 대수일까 싶었다.

 

전두환이 최근 강원도 홍천에서 골프를 즐기다 딱 걸렸다. 너무 멀쩡했고, 참 뻔뻔했다.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묻는 임한솔 정의당 부대표에게 너 군대 갔다 왔냐는 조롱과 함께 명령을 내릴 위치에도 있지 않았다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고인이 된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광주지법에 구인된 그가 밀려든 기자들에게 이거 왜 이래라고 역정 낼 때만 해도, 잠시 없던 측은지심이 생겼다. 법원이 치매를 이유로 이후 재판 불출석을 허가했을 때도, 그럴 만하다고 넘겼다. 이제는 의심스럽다. 치밀하게 기획된 사기극에 그의 악행을 잊고 너무 관대했던 게 아닌지.

 

1111일 광주지법, 전두환 사자명예훼손 8차 재판정. 전두환 쪽 정주교 변호사는 전씨 불출석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지 의무사항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너무 멀쩡한 골프 라운딩 모습이 공개돼 불출석 허가가 취소되고, 다시 법정에 불려 나올까 봐 법 논리 뒤에 숨는 전두환에 견줘 우리는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여전히 각하였다. <뉴스타파>의 전두환 추적 프로젝트 덕분에 많은 사실을 알게 됐다. 1024일 노신영 전 국무총리 장례식장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조문 온 전두환에게 안녕하십니까, 반기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알아요. 반기문을 모를까 봐라고 답한다. ‘광주학살사죄를 요구하는 취재진에겐 묵묵부답, 차에 올라탄 그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반 전 사무총장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했다. 여전히 각하로 대접받는 현실, 전 재산 29만원뿐이라며 경호원을 대동하고 골프 치고, 1021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하고도 연희동 자택은 부인 이순자와 비서관 재산이라며 강제집행을 피하고. 그는 국민과 법정을 그렇게 조롱하며 잘 살아왔다.

 

올해는 12·12 군사반란 40, 내년이면 광주학살’ 40년이다. 1988년 광주 청문회, 1997년 역사바로세우기, 2007년 과거사조사위 조사, 2017년 국방부 특별조사단 조사까지 네번의 진실규명 시도가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과 그 일당이 잠시 감옥에 갇혔다 풀려났을 뿐 발포명령자는 밝혀지지 않았고, 암매장 의혹도 여전하다. 헬기 기총소사, 계엄군의 시민 성폭행 사실 등이 새로 드러났지만 관련자들은 딱 잡아뗀다.

 

<뉴스타파>전두환과 잔당들그들은 잘 산다를 보면 전두환과 그 측근 77명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전두환 일당은 반란군이 아니라 각하, 보수 원로로, 수십 수백억 자산가로 안온한 삶을 살고 있다. 특전사령관 출신 정호용은 1천억원대 자산가다.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등을 지낸 허화평은 전두환이 설립한 것으로 의심되는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침묵의 미덕도 없다. 태극기부대의 주역으로 좌파공격에 앞장선다. 1공수여단장 출신 박희도는 무장폭도가 민주화투사가 되고, 군은 반란자가 돼 훈장을 박탈당했다” “나라가 폭동세력한테 넘어간다고 선동한다. 허화평은 희생자가 용서할 때 가장 아름답다. 내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살해당한 자식의) 부모가 찾아가 사과할 때 국민이 감동한다며 되레 피해자에게 통 큰 용서를 요구한다.

 

북한군 개입설, ‘5·18 유가족 괴물집단비난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우리가 극장에서 <택시운전사> <1987>의 저항과 감동을 공유할 뿐 학살자의 돈과 강고한 수구 네트워크’, 그 뻔뻔함의 벽을 허물 만큼 집요하지 못할 때 그들은 발호한다. 임한솔 부대표, <뉴스타파>처럼, 끊임없이 전두환과 그 일당의 책임을 묻고 단죄하는 게 일상이 돼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최소한 입이라도 다물 것이다. 신승근논설위원 한겨레 2019-11-14

 

비무장 중립국이라는 큰 그림

최근에 나온 <배를 돌려라대한민국 대전환>은 매우 중요한 책이다. 저자 하승수씨는 녹색당 창당의 주역일 뿐만 아니라, 비례대표제 확대를 위해 지난 수년간 불철주야 헌신해온 시민운동가이자 진보적논객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크게 눈에 띄는 것은, 그가 큰 그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그는 해방 후 실시된 농지개혁의 예를 들어, 지금 그와 유사한 과감한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지금 국회는 완전 마비 상태이고, 대통령은 남북관계 개선에 매진한 것 외에는 촛불정부를 자임한 취임 초의 장엄한 약속은 어느새 희미해져 가고 있다. 마치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스의 야만인들을 기다리며라는 시에 묘사된 것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들의 임무는 팽개치고 오로지 야만인들이 와서 구원해주기만을 바라는모습이 그려져 있는 이 시에서, 우리는 철저한 무책임과 무능 탓에 아무것도 결단하지 못하고 막연히 큰 이변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속수무책의 정치 상황을, 전율을 느끼며 볼 수 있다.

나는 현재 우리나라(그리고 나아가 세계 전체)의 정치적 기능 부전 상태는 고도의 산업기술문명 속에서 우리들의 시야가 갈수록 좁아지고, 정신력이 쇠약해지고 있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큰 그림없이는 실종된 사회정의를 되찾을 수도 없고, 임박한 생태적 위기를 타개할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은 상상력을 키우고, 마음을 크게 갖는 것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소나마 낯선 풍경을 자주 접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왜소한 정신세계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를 계속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 코스타리카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현대 세계에서 군대 없는 나라가 있으랴 싶지만, 실제 그런 나라가 있다. 아이슬란드와 코스타리카가 그렇다. 아이슬란드는 북대서양의 외딴 섬나라이니 예외적이라 할 수도 있다면, 정말 흥미로운 나라는 코스타리카다. 놀랍게도 소규모 도시국가도 아닌, 인구 500만명의 버젓한 근대국가가 1949년에 헌법에 군대 폐지를 명시하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영세중립국 스위스도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스위스는 10만명 이상의 상비군에다가 유사시에 즉시 동원 가능한 10만명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는 무장 국가다.

 

<군대를 버린 나라코스타리카 사람들의 평화 이야기>라는 일본인 청년이 쓴 책을 보면, 코스타리카가 군대를 없앤 배경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원래 군대를 없애자고 제일 먼저 제안한 것은 뜻밖에도 국방장관이었다. 오랫동안 라틴아메리카는 빈발하는 쿠데타 때문에 세계에서도 가장 불안한 지역이었다. 그 상황에서 군대의 폐지란 쿠데타 방지책으로 유효한 방책이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군대의 최고 지휘자가 이를 발의하고, 대통령이 수용한다는 것은 비상한 용기가 없으면 안 될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군대를 없앤 후, 코스타리카는 별문제 없이 주권과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왔다. 두어 차례 니카라과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외교력을 발휘하여 위기를 넘겼다. 그 외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이 비무장 국가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늘의 국제 질서가 약육강식의 논리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국제법이 있고 명분을 중시하는 국제관계라는 게 있다. 그러니까 코스타리카는 비무장 국가가 됨으로써 도리어 더 큰 힘을 갖게 된 것이다.

 

군대를 없앰으로써 얻는 구체적인 이익은 무엇인가. 우선 막대한 국방 예산이 필요 없어졌으니 당연히 그 돈을 빈민에 대한 지원, 교육과 의료, 사회보장 강화에 쓸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익은 대다수 국민의 심리와 정서가 극히 평화스러워진다는 점이다. 실제로 군대를 폐지하고도 문제가 없음을 체험한 코스타리카 국민들은 국가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오히려 국가와 자신의 일체화를 느끼게 되었다. 근대국가란 정당한 폭력행사를 독점하고 있는 조직체이다. 따라서 국가 질서는 기본적으로 큰 폭력이 작은 폭력들을 억압하는방식으로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국가권력은 언제라도 괴물로 변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국민들에게는 늘 잠재적인 국가공포증이라는 게 있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코스타리카 국민은 오늘의 세계에서 예외적인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다. 코스타리카는 반세기 이상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주의를 유지해온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질을 증언해주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시, 미국은 최소한의 명분 확보를 위해서 유엔의 승인을 얻으려 했지만 실패하자, 영국·일본·한국 등 만만한 동맹국들로부터 전쟁 지지 표명을 얻어냈다. 어떤 경위인지 모르지만 코스타리카도 거기에 동참했다. 그러자 한 대학생이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제소를 했고,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행위가 위헌적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 결과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 지지 명단에서 코스타리카를 삭제해달라고 미국에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코스타리카는 인간이 자유인으로 살면, 얼마나 생각이 넓어지고 지혜로워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 농어업과 관광업 중심으로 경제가 돌아가고 있는 코스타리카에서 대다수 국민은 아름다운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과도한 공업화를 반대하고 있다. 그래서 코스타리카에는 호사스러운 호텔도, 대규모 골프장도, 카지노 따위도 없다. 그들은 외국인들이 세계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5성급, 6성급 호텔에 투숙하고 골프를 치고 도박을 하기 위해 코스타리카로 오는 게 아니라 빼어난 자연경관과 평화로운 사회를 보러 온다고 생각한다. 부러울 정도로 건강한 상식이 살아 있는 나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한국이 분단국가인 이상, 군대를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고착관념이 바로 우리를 가두고 있는 근원적인 질곡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군대 없는 나라가 될 거라는 신념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그런 신념의 유무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에는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북한의 자원과 노동력과 결합됨으로써 우리 민족이 웅비할 수 있다는, 낡은 성장시대의 왜소한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간 겪어온 분단의 고통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마음을 크게 먹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한겨레 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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