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사태, 세대가 아니라 계급이 문제다 한겨레 2019-09-16
다시 경계선을 넘으면서 경향 2019.09.16.
기득권의 어둠과 촛불 미디어오늘 2019.09.17.
삭발이나 하고 있는 정치인, 세금이 아깝다 경향 2019.09.17.
다음 세대 억압하는 전 세대의 관행 경향 2019.09.18.
‘교육개혁’이라는 ‘거짓말’ 경향 2019.09.18.
조국과 윤석열의 싸움이 아니다 경향 2019.09.20.
우파 뭉치면 총선서 이긴다? 한국 2019.09.23
조국의 길, 윤석열의 길 경향 2019-09-23
지금 ‘정의당의 길’을 가고 있는 걸까 경향 2019.09.23
멸종 저항의 시대, 재생에너지 100% 사회로 경향 2019.09.23.
‘조국 사태’ 이후 경향 2019.09.25.
정규직이 계급이 된 나라 한국 2019.09.25.
상위 1%를 위한 ‘민부론’ 경향 2019.09.25.
지금, '살아있는 권력'이란 누구인가? 프레시안 2019.09.26.
일꾼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주간경향 2019 9.27
검찰의 화려한 분장술 경향 2019 9.29
'조국'에서 '검찰개혁'으로…흐름을 바꾼 촛불의 힘 CBS 2019-09-30
이게 검찰이냐” 경향 2019.09.30
조국 사태, 세대가 아니라 계급이 문제다
법무부 장관 사태로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내상을 입었다. 국정 수행 평가와 당 지지도는 큰 변화가 없다. 위기를 느낀 지지층이 결집한 덕분이다. 그러나 지지층도 마음에 큰 상처가 났다.
장관 임명으로 사태가 끝난 것도 아니다. 검찰은 압수수색과 기소가 부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정치가 그렇듯이 수사도 생물이다. 뭐가 또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검찰이 성공하면 정권이 타격을 입는다. 실패하면 검찰이 치명상을 입는다. 위험한 대치다.
난세에는 요설이 판친다. 이른바 보수는 조국 사태를 계기로 정치 지형을 ‘박근혜 탄핵’ 이전으로 되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가장 위력적인 선동은 세대갈등 부추기기다. 조국 장관을 ‘운동권 출신 386’의 상징으로 세우고, 그 아래 세대를 ‘386세대’와 분리하려는 시도다.
이른바 보수의 세대갈등론은 매력적이다. 인류는 자신과 공동체의 문제를 늘 다른 세대 탓으로 돌렸다. ‘요즘 젊은것들’이 문제였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은 통했다. ‘위아래 사이에 낀 우리가 가장 불행한 세대’라고 생각했다. 그런가? 아니다.
1960년대생이 기득권 세력으로 비치는 것은 그들이 지금 50대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 50대가 주도한다. 1960년대생은 다른 세대에 비해 인구도 많다. 최근 20년 동안 386세대가 정치판을 좌지우지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건 386 정치인들의 문제지 386세대의 문제는 아니다.
조국 장관은 386의 대표가 아니다. 그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이었다. 사노맹은 일종의 ‘좌파 맹동주의’였다. 큰 조직도 아니었다. 안기부가 괴물처럼 부풀렸을 뿐이다.
386세대의 대표적인 정치인은 더불어민주당의 이인영·우상호·김영춘 의원, 임종석 전 의원 등 다른 사람들이다. 운동권 출신 386세대의 자식 중에는 조국 장관의 경우와 달리 상류층 진입에 실패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조국 사태의 본질은 ‘세대’가 아니라 ‘계급’이다. 개혁과 정의와 진보를 외쳤던 그의 삶이 알고 보니 다른 ‘강남 상류층’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중산층과 서민이 느끼는 배신감과 상실감이 핵심이다. 그렇다고 조국 교수가 외쳤던 개혁과 정의와 진보가 무가치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조국 사태로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1인 시위를 하고 삭발을 하고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당 지지도는 올라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유권자들은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를 ‘강남 상류층’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개혁과 정의와 진보를 외친 적이 없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은 ‘시선 돌리기’의 도사들이다. 계급의 문제를 늘 다른 쟁점으로 물타기했다. 박정희·전두환 시절에는 계급 모순을 타파하려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김영삼·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지역’을 전면에 내세웠다. 영남의 서민이 못사는 원인이 전라도 때문인 것처럼 선동했다.
기득권 세력이 ‘세대’를 들고나온 것은 노무현 정부 때였다. 노무현 대통령을 둘러싼 운동권 출신 386들이 나라를 망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명박·박근혜 10년을 건너뛴 문재인 정부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조국 사태로 세대갈등론의 서식 환경이 좋아졌다고 보는 것 같다.
최근 20대 연령층에서는 남녀 간 ‘젠더 갈등’이 시작되고 있다. 기득권 세력은 머지않아 20대 남자들이 불이익을 받는 이유가 여성 탓이라고 선동할 것이다. 내기해도 좋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조국은 조국대로, 조국 사태는 조국 사태의 해법은 훨씬 더 어렵다. 계층 간 격차가 점차 더 벌어지는데 계층 간 이동 사다리는 거의 다 끊어져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공정의 가치는 대학입시 제도를 바꾸는 수준에서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서울의 일류대학 출신이나 지방대학 출신이 취업과 연봉에서 크게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를 줄여야 한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십년에 걸쳐 조금씩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할 중대한 과제다. 호흡을 길게 가다듬어야 한다.
성한용 정치팀 선임기자 한겨레 2019-09-16
다시 경계선을 넘으면서
반세기를 넘긴 독일 생활을 뒤로하고 9월1일 포르투갈의 알가베로 이주해왔다. 베를린으로부터 무려 3000㎞나 떨어진 유럽 대륙의 끝자락이자,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이곳을 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기후 때문이다. 1년 중 평균 300일 이상 햇볕이 내리쬐는 이곳을 그래서 유럽인들이 많이 찾는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북유럽 사람들이 많고 최근에는 러시아 사람도 꽤 늘었다. 과거 포르투갈령 인도의 고아나 중국의 마카오가 지닌 역사적 배경으로 이주해온 인도와 중국 사람을 제외한 그 밖의 아시아인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교포나 관광객으로 온 우리 동포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최초의 글로벌 제국으로 지칭되는 포르투갈은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대항해시대’의 선두주자로서 세계를 제패했지만 후에 스페인에 밀려 쇠락하고 말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무려 40여년 동안이나 살라자르의 독재체제에 시달렸다가 1974년 젊은 장교단이 이끈 ‘카네이션 혁명’으로 민주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이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을 담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저자는 파스칼 메르시어인데, 이는 내가 1967~1968년 1년 동안 몸을 담았던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함께 철학을 공부했던 페터 비에리의 필명이다. 어떻든 동병상련의 심정에서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사회주의자들은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우리의 외로운 투쟁을 특별히 지지하고 성원했다.
나에게 독일 대학 강단에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동료 사회학자도 과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가 험난한 민족해방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한 기니비사우 정부의 고문이었다. 또 내가 47년 전 독일 대학 강단에 처음 섰을 때부터 인연을 맺은 제자도 아프리카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의 전문가로서 오랫동안 리스본대학의 사회학 교수였기에 포르투갈은 사실 나에게 그렇게 먼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연합 안에서 이주하는 문제가 단순히 이삿짐을 싸들고 같은 나라의 어떤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과 많이 다를 것이라고는 예견했다. 이번에 나는 유럽연합이 현재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이주를 통해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스웨덴의 공장 노동자와 포르투갈의 포도농장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비슷해지는지의 여부에 유럽연합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많이들 이야기했다. 핵심적인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단일 통화인 유로 덕택에 독일과 포르투갈 사이의 은행 결제가 당일로 가능할 정도로 경제적인 통합에서는 많은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2007년 말 리스본에서 열린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합의를 보았던 유럽연합의 헌법 제정이 여전히 오리무중인 것처럼 정치적인 통합은 아직도 어려운 숙제로 남아 있다.
‘유럽합중국’으로 가는 길 위에 민족국가의 긴 그림자가 여전히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은 여태 결론을 못 내리고 있는 ‘브렉시트’, 난민과 이주 문제를 둘러싼 유럽연합 내의 갈등과 극우세력의 약진에서 우선 확인할 수 있다. 유럽의 통합과 화합의 소리에 못잖게 불협화음과 파열음도 크게 들리고 있는 현실은 물론 유럽만이 유별나게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지역적인 것과 지구적인 것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조정하느냐 하는 과제다. 최근 격화한 한·일 간의 갈등에서도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흔히들 하나가 된 지구촌에서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는 모습으로 ‘디지털 노마드’의 예를 든다. 랩톱을 담은 배낭에 간단한 차림으로 전자상거래의 성지로 떠오른 카나리아제도의 라스팔마스나 인도네시아 발리섬의 우두 해변가를 찾아 노동과 자유시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삶을 꾸리는 젊은이들의 숫자가 부쩍 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삶도 머물고 있는 지역이 끈질기게 요구하는 거주 허가, 세금, 건강보험 등을 포함한 여러 제약 속에 묶여 있다. 우리도 베를린에서 가지고 있던 차를 포기하고 알가베에서 새로 차를 구입해야만 했다. 한마디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정도로 통관세와 각종 수수료가 너무 많은 데다 절차까지 복잡해서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역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제한 때문에 지레 겁먹고 스스로가 자신의 생활세계를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둘 수는 없다. 세계는 그래도 앞으로 보다 더 열리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 지역적인 것의 의미도 당연히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많은 경계선을 넘을 수밖에 없는 젊은 세대는 경계선을 뛰어넘는 것을 결코 두려워 말라는 말을 이 기회에 전하고 싶다.
포르투갈로의 이주를 결단하고 독일을 떠나기 전, 가까운 친지들에게 작별인사를 겸해서 이주를 앞둔 내 심정을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 나오는 시 ‘계단’을 빌려 전했다. “어느 곳에서도 고향처럼 집착해서는 안 된다/ 세계정신은 우리를 붙잡아두거나 구속하지 않고/ 우리를 한 계단 한 계단 높이며 더 넓히려 한다/ 삶의 한 계단에 머물며 슬퍼하자마자 우리는 곧 무기력에 빠진다/ 자리를 박차고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신을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임종의 순간에도 아마도 새로운 곳은 나타나리라/ 우리를 부르는 삶의 외침이 끝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내가 16년 전 한가위 때 귀국했다가 예기치 못한 고초를 겪을 당시 독일 괴테문화원의 원장으로서 이를 참담한 심정 속에서 지켜보았던 슈멜터 박사는 나의 작별인사에 대해 요한 가브리엘 자이들의 ‘방랑자가 달에게’(1826)라는 서정시와 이에 곡을 붙인 슈베르트의 노래로 화답했다. “나는 땅에서, 너는 하늘에서 우리는 활기차게 돌아다니는데/ 심각하고 우울한 나, 온화하고 순수한 너/ 도대체 그 차이는 무엇인지/ 나는 이방인으로 이 나라 저 나라 정처없이 아는 사람없이 떠돌지/ 산을 오르내리고 숲을 들락거려도, 하지만 어디에도 내 집은 없네/ 너도 이곳 저곳 돌아다니고 수많은 나라를 유유히 거쳐 가지만/ 그래도 네가 있는 그곳은 너의 집이네/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 너의 사랑하는 고향이라네.”
한가위의 밝은 보름달은 유럽 대륙의 끝자락인 이곳 포르투갈의 알가베도, 분단의 슬픔이 아직도 드리운 산하도 금년에도 어김없이 비추겠지. 희로애락이 서로 얽힌 인간의 삶을 생각할 때 단지 회한만을, 아니면 기쁨만을 남기는 작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넘는 경계선일 수도 있다는 긴장감은 있지만 꿈과 희망 속에서 나는 다시 경계선을 넘는다./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경향 2019.09.16
기득권의 어둠과 촛불
기득권을 들먹이면 대뜸 눈 홉뜨는 부라퀴들이 있다. 기득권이 죄인가 묻는다. 불법 여부를 따질 때는 사뭇 진지하다. 딴은 사전적 뜻을 짚으면 옳다. 오히려 “특정한 자연인이나 법인이 정당한 절차를 밟아 이미 획득한 법률상의 권리”라는 풀이처럼 법적 권리다.
그런데 ‘기득권층’을 찾으면 결이 다르다. 같은 사전에서 기득권층은 “사회, 경제적으로 여러 권리를 누리고 있는 계층”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손잡는다. 그래서다. 영국의 정치평론가 오언 존스는 기득권층을 집중 분석한 책을 펴내며 “다수에 맞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자들”로 정의한다.
한국에서 ‘386’으로 불린 세대가 도매금으로 몰리고 있다. 그것도 군사독재 정권과 야합한 언론에 의해 그렇다. 1980년대에 군부독재와 맞서 싸웠던 대학생들을 학살정권과 손잡고 ‘빨갱이’로 살천스레 몰아친 언론이 2020년을 앞둔 지금도 ‘사냥’에 한창이다.
기막힌 살풍경이다. 그들에 맞서 참된 여론을 형성하려는 열정은 포탈의 검색어 다툼으로 나타난다. 일본이 선전포고한 ‘경제전쟁’ 초기에 되레 문재인 정부를 비난했던 언론권력에 대한 분노는 당연하다. 언론개혁도 마땅히 이뤄야 한다.
다만 아무리 울뚝밸이 치밀더라도 성찰할 지점이 있다. 개혁 주체의 정당성이다. 그 정당성이 없을 때 ‘개혁’은 조롱으로 전락할 수 있다. 실제 개혁은 정당성을 갖춰도 힘겨운 과정이다. 기득권층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른바 ‘조국 사태’를 차분히 짚어보자. 민정수석에서 법무장관에 취임하기까지 그를 둘러싼 보도는 넘쳐났다. 분명 과하다. 사생활 침해의 우려도 컸다. 검찰 개혁에 저항도 깔려 있다.
다만 옥과 돌을 다 불태울 수는 없는 일이다. 박근혜 정부 때 ‘살아있는 권력’ 수사로 좌천되었던 ‘검사 윤석열’에게 조직적으로 엿을 보내거나 청와대에 총장 해임을 청원하는 풍경은 대통령에게도 부담 주는 언행이다. 청문회에서 조국 후보자에게 젊은 세대의 아픔에 정중히 사과하라고 권한 여당 의원에게 보내는 야유는 또 어떤가. 눈부신 의정 활동을 편 박용진 의원을 ‘배신자’로 낙인찍어도 좋은가. 포탈에 실검 순위를 조직적으로 바꿔도 괜찮은가.
명토박아 둔다. 나도 조국 법무의 진실이 궁금하다. 고교생이 학술지 논문에 제1저자로 오른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부모의 후광 없이 과연 가능한가. 공시가 기준으로도 50억이 넘는 재산을 지닌 교수 부부 집안의 성인 대학생이 심지어 낙제를 하면서도 여기저기 장학금을 챙겼는데 부모는 몰랐다는 말인가. 대학총장이 준 표창장의 진실도 가려야 한다. 설령 표창장이 전결이라 해도 그렇다. 자신이 직접 딸에게 총장 명의로 표창장을 주는 모습은 희극이다.
더 큰 문제는 논문이나 표창장이 대입과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에 활용됐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합격 여부를 결정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의문이 불거진 상황에서 덮고 갈 수는 없잖은가. 그것에 합리적 의심을 던지는 언론이 ‘기레기’인가. 법무장관 후보자에게 나타난 의혹을 두고 정쟁이 전혀 접점을 찾지 못할 때 진실을 밝히려 나선 검찰이 ‘정치 검찰’인가.
도대체 어쩌자는 건가. 보라, 그 모든 의문에 모르쇠를 놓고 검찰을 몰아붙이는 민주당 안팎의 386들을, 조국이 무엇이 문제이냐고 곰비임비 나선 저 숱한 ‘진보 명망가’들을, 검찰 수사를 처음부터 ‘정치 개입’으로 부각한 이른바 ‘진보 언론’을. 윤석열을 마구 흔들고 검찰을 개혁할 수 있는가. 수사 결과, 조국의 의혹이 말끔히 풀릴 가능성은 없는가.
물론, 진보도 기득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들마저 기득권층이 된다면, 서로 두남둔다면 이 땅의 무지렁이 민중은, 힘없는 민중을 부모로 둔 1020세대는 대체 어찌 살라는 말인가.
무릇 어둠은 수구‧보수에만 있지 않다. 진보에도 있고, 내 안에도 있다. 어쩌면 더 깊은 심연일 수도 있다. 촛불은 모든 어둠을 벅벅이 밝혀야 옳다. 촛불의 어둠도 그렇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19.09.17
삭발이나 하고 있는 정치인, 세금이 아깝다
머리카락은 하루에 0.35㎜가 자란다. 1년 동안 자란 한 사람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이어붙였을 때 총길이는 10㎞나 된다. 이렇게 끝없이 자라는 탓에 고대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생명 순환의 상징이라고 봤다. 또 머리카락이 인간과 신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여겨 아즈텍족의 제사장은 머리카락을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게 늘어뜨렸다. 바빌론 시대엔 영웅의 조건이 건장한 신체, 긴 머리카락이었다. 바빌론의 영웅 길가메시가 병을 얻어 탈모가 생기자 장거리 여행을 떠나 머리카락이 다시 나길 기다렸다는 얘기도 있다. 황제를 가리키는 ‘카이저’, ‘차르’는 본래 머리카락의 숱이 아주 많거나 긴 머리카락을 뜻하는 낱말이었다.
이처럼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머리카락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보니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오랫동안 어떤 의식과도 같았을지 모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10여 년 전에 서울 정독도서관 앞에는 50년이 넘은 이발소가 있었다. 벽에 매달린 삼색 기둥이 빙글빙글 돌아가던 이발소의 새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바닥에서 절대로 떨어질 것 같지 않은 육중한 이발 의자의 가죽은 반질반질 닳아 있었고, 세면대는 목욕탕처럼 작은 타일을 붙여 만든 것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제2호 이발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백발의 이발사가 흰 가운을 입고 가위질을 하는 모습은 그저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아니라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그의 가위질은 신중하고 진지해서 정말 한 올 한 올 집어 잘라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손님에게 맞는 스타일을 잘 읽어내 머리를 깎은 사람마다 흡족해했다. 이제 그 오래된 이발소는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거리로 옮겨졌고, 이발사는 가위를 놓은 채 노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여의도에서 삭발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늙은 이발사의 신념에 찬 가위질이 생각났다. 삭발은 가위질을 당하는 이의 신념을 드러낸 지 오래,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과 싸울 수 있는 수단이 몸뚱어리밖에 없는 약자들의 신념이며 항거다. 그런데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모여서 머리나 밀고 있으니 힘써 일하라고 준 세금이 아까워진다.
김해원 동화작가 경향 2019.09.17.
다음 세대 억압하는 전 세대의 관행
과학자들이 원숭이를 가둬놓고 실험을 했다. 과학자들이 하는 일이 대부분 그렇듯 이번 실험도 고약하다. 실험장인 스키너 박스 안에 나무를 설치하고 그 위에 바나나를 매달아 놓았다. 물론 공짜 바나나는 아니다.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려고만 하면 가장 질겁하는 물을 뿌려댔다. 원숭이 뇌에 전극을 꼽거나 전기고문을 하는 실험에 비하면 양반이니 너무 분노하지는 말자. 몇 번 짜릿한 물벼락을 경험하자 원숭이들은 아무도 나무에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평형상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 평형, 평정 상태를 파괴하고 극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과학자들은 원래 있던 원숭이 중 한 마리를 빼고 대신 새로운 원숭이를 집어넣는다. 물벼락을 맞아본 적 없는 신참 원숭이는 바나나를 보고 환장하여 나무에 오르려고 한다. 그러자 고참 원숭이들이 질겁하며 신참을 말렸다. 물정 모르는 신참놈 때문에 자신들까지 물에 맞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원숭이들이 말리자 신참은 나무에 오르는 것을 단념했다. 이런 식으로 원숭이를 하나씩 빼고 그 자리에 신참 원숭이들을 채워 넣었다. 매번 신참들은 나무를 오르려다 다른 원숭이들의 제지를 받았고, 나무에 오르는 것을 포기했다. 결국 스키너 박스에 원래 있었던 원숭이들은 모두 빠지고 물을 맞아본 적이 없는 신참들로만 채워졌다. 하지만 그 어떤 원숭이도 나무에 오르지 않았다. 실제 물을 맞은 원숭이들은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관행이 되어 울타리 안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실험이 이뤄졌다. 과학자가 진료대기실에 미리 지시를 받은 실험자 10명을 앉아 있게 했다. 실제 환자가 진료대기실에 들어오면 실험이 시작된다. ‘삐’ 하는 버저 소리가 들리면 실험자 10명이 일제히 일어났다가 앉는 것이다. 이를 본 환자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 이내 엉거주춤하고, 곧 다른 사람들처럼 일어섰다 앉는 것을 따라 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지 않은 동조 효과, 동화 본능 때문이다. 처음 환자가 동조 현상을 보이면 다른 환자를 집어넣고 실험자 1명을 뺀다. 두 번째 환자도 첫 번째 환자와 동일한 반응을 한다. 결론은 원숭이와 동일하다. 10명의 실험자가 모두 빠지고 환자들로만 채워져도 그 진료대기실에 있는 환자들은 버저 소리에 모두 일어섰다 앉는 행동을 하게 된다.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나 그 행동은 대기실을 지배한다.
물론 모든 관행과 습관에는 그 배경이 있다. 유대인이 피를 빼고 고기를 먹는 것이나 무슬림이 돼지고기를 피하는 것, 여자에게 히잡을 씌우는 것 등은 당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그 배경이 사라진 이후에도 관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의 상황이 특별히 나쁘지 않으면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현상유지바이어스(status quo bias)나 손실회피성에서 나오는 현상이기도 하나 비합리적이다.
나이트 샤말란이라는 영화감독이 있다. ‘절름발이가 범인이다’(<유주얼 서스펙트>) 이후 가장 저주받을 스포일러인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를 낳은 <식스센스>라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그가 만든 작품 중에 <빌리지>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숲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마을이다. 기계도, 전기도, 범죄도 없는 조용한 마을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는 매우 무서운 금기가 있다. 마을 사람이 숲으로 들어가면 그 숲에 있는 ‘괴물’이 사람들을 해치는 것이다. 늘 역대급 반전을 보여줬던 감독의 작품치고는 극히 시시한 공포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반전이 펼쳐진다. 이 영화의 최대 반전은 배경이 현대라는 점에 있다. 이 마을은 현대 미국의 한복판에 위치한다. 과거 도시에서 범죄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모여 이 마을을 만든 것이다. 현대문명이 범죄를 낳는다고 믿는 그들은 산업화 이전의 공동체를 건설한다. 그들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자라나는 새 세대에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숲속의 ‘괴물’을 만든 것이다.
전 세대의 규범과 기억은 다음 세대를 억압한다. 그들의 순수한 마음은 때로는 세상을 자신들의 기억 속에 가두기 위해 공포와 거짓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러한 기억이 억압으로 작용할 때 새 세대가 할 일은 타인의 과거와 주어진 미래에 저항하는 것이다. 의심하고 도전하고 주변으로부터 달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나이가 적다고 새 세대는 아니다. 진정 새로운 세대는 과거의 강화된 기억과 그 부작용인 공포와 무분별한 추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시작된다. 물론 변화는 어렵고 이를 막으려는 시도는 거짓과 강압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관성은 물리적 세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세계에서도 작용’하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야말로 실체의 정상적인 상태이다. 살아있는 존재라 함은 어떤 과정의 이른 단계에서 나중 단계로 발전하여 가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는 도토리가 참나무로 자라듯 본질에 따른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했다./김웅 법무연수원 교수·<검사내전> 저자 경향 2019.09.18.
‘교육개혁’이라는 ‘거짓말’
조국 사태’가 느닷없이 쏘아올린 불씨 중 하나는 ‘교육개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입제도 재검토’를 언급한 데 이어 지난 9일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장 수여식에서 “고교 서열화와 대학입시의 공정성 등 기회의 공정을 해치는 제도부터 다시 한번 살피고, 특히 교육 분야의 개혁을 강력히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히면서 ‘교육개혁’ 논의가 급물살을 탈 기세다. 맥 빠지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큰 기대는 하기 어려워 보인다.
지난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14개국의 입시전형을 분석한 <세계 각국의 대학입시제도 연구> 보고서를 보면 주요 대입 전형요소는 몇 가지로 모아졌다. 국가수준 대입시험과 고교 내신, 대학별 고사, 비교과 활동 등 4가지를 혼합하는 방식이다. 어떤 요소들을 택해 어떤 비율로 사용하는지, 대입시험의 성격이 선발인지, 고교 졸업 자격시험인지, 몇 번의 기회가 있는지, 내신이 절대평가인지, 상대평가인지 등 세부 차이만 있을 뿐 하늘 아래 뚝 떨어진 새로운 방법은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건 이런 부분이다. 62.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1.8%)의 2배에 이르는 고등교육의 민간 부담 비중, OECD 평균(44.3%)보다 한참 높은 최고 수준의 고등교육 이수율(69.6%) 같은 것. 최근 ‘OECD 교육지표 2019’에서 발표된 이 수치들은 뭘 말하나. 대부분 대학교육 이상을 받으니, 대학 졸업장은 아무리 비싸도 기본으로 따 놓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일명 ‘스카이’ 출신들이 각 분야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스카이 공화국’이기도 하다. 20대 국회의원 중 47%(140명), 장차관급과 중앙행정기관 1급 이상 공무원 중 핵심 직위 232명을 대상으로 한 경향신문의 ‘파워엘리트’ 조사(2019년 5월)에선 64.2%(149명)를 이들 3개 대학 출신들이 차지했다. 전국의 4년제 일반대가 201곳이나 되는데도 말이다. 한편으론, 대기업과 중소기업 격차가 참으로 아득한 사회다. 통계청이 올해 초에 발표한 ‘2017년 임금근로 일자리별 소득 결과’에 따르면 중소기업 노동자 중 가장 소득이 높은 40대의 월평균 소득은 260만원으로, 대기업에 다니는 20대 평균소득(271만원)보다도 낮았다.
우리 모두는 실상을 알고 있다. ‘교육개혁’이라고 말할 때의 관심은 대개 입시와 학벌, 좋은 직업에 진입해 안정적 삶을 보장받기 위한 일종의 ‘증명서’ 받기에 집중돼 있다는 것을. 교육이라고 말하지만 교육의 본질인 ‘배움’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우리 사회는 승자독식 사회다. 한 번의 성공, 혹은 실패의 대가가 너무 과도하거나 혹독하다. 입시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하는 개인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하다.
결론은 뭔가. 여러 얘길 할 수 있겠으나, 우선 한 가지만 구체적인 제안을 하고 싶다.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학과, 치열한 경쟁을 거치는 직업군의 특권을 내려놓도록 했으면 한다. 의사, 법조인, 대학교수 정도가 대표적일 것이다. 조국 사태가 드러낸 욕망과 질시, 분노의 고리엔 우연히 이 3가지 직업이 겹쳐 있다. 일종의 묵시일지도 모른다. 다들 그렇게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데 의료사각지대는 왜 그렇게 늘어나고 외과전문의 등 꼭 필요한 의사가 부족해 수술절벽까지 걱정해야 하나. 로스쿨의 도입취지는 다양한 배경과 역량을 갖춘 인재를 대량으로 배출해 법조 문턱을 낮추자는 것인데, 왜 법조인의 문을 다시 좁혔나. 대학교수와 시간강사의 처우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날 이유가 있나.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대폭 늘려 특권은 줄이고 좋은 일자리는 나눴으면 한다. 나아가 고위공무원이나 정치인, 대기업 직원들의 과도한 특권을 내려놓을 방법도 논의하자.
너무 이상적이라고? 다시 말하지만 문제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 한 교육개혁은 거짓말이다. ‘격차사회’ 완화 없이 학종 몇 프로, 정시 몇 프로는 의미가 없다. 어떻게든 ‘직업세습 2라운드’가 시작될 테니까. 귀화한 러시아 출신 학자 박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본질을 외면하고 해결책을 찾는 우리 모습은 “정로환으로 암을 치료하는 시도”다.
성공의 관건이 있다. 미국인이 썼지만 한국 상황과 무척 높은 싱크로율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책 <20 VS 80의 사회>가 힌트를 준다. 중상위층들은 최상위 1%를 손가락질하며 불평등을 비판하지만 이는 위선이라는 것, 발언권과 정치력을 독점하는 중상위 20%가 바뀌어야 세상이 변한다는 것이 책의 주제다. 자발적으로 안된다면, 시스템으로 어느 정도 강제하자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사회의 어디쯤 서 있는가. 겉으론 욕하면서 어떻게든 승자독식의 대열에 속하려는 열망을 나와 당신이 고쳐먹지 않는 한, 교육도, 개혁도 기대할 수 없다./ 송현숙 논설위원 경향 2019.09.18.
조국과 윤석열의 싸움이 아니다
검찰을 비롯한 공직자에 대한 직무감찰 강화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상시적으로 이뤄져야 할 당연한 조치다. 그런데 왜 검사는 감찰을 제한이나 간섭으로 받아들일까. 한 마디로 “감히 누가 우리를 건드려?!”라는 권위의식이다. 입직(入直) 루트 차이 때문에 특권을 당연하게 여긴다. “사법시험(2017년 폐지)을 패스했으니 판사와 동급이고, 여타 고시 출신과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것이다. 법조 3륜이라는 말도 이들이 특별한 존재라는 걸 은연중 강조한다.
수사권, 지휘권, 기소권을 다 틀어쥐었으니 사법시험이 시행된 54년간 이너서클 권위의식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치권은 툭하면 검찰에 문젯거리를 갖다 바치니 칼자루를 쥐여준 꼴이고, 호랑이 입에 자진해 목을 들이민 형국이다. 임관 후 불과 2~3년 만에 우월감이 몸에 밴다. 40·50대 삼촌뻘 경찰도 20대 검사 앞에서 설설 긴다. 품성이 그렇지 않았던 사람도 도취되기 마련이다. 권한 집중 탓이다.
특권의식의 또 다른 사례. 수하로 여겨온 경찰의 총수가 ‘청장’이니, 청장이란 용어를 같이 쓰는 건 자존심 때문에라도 도저히 아니될 일.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 쓰던 ‘검사총장’ 직함을 정부수립 후 직제개편을 거치면서도 계속 ‘총장’으로 쓰고 있다. 행정부 외청 중 유일하다. 이런 특권의식은 기본적으로 일제 잔재다. 검찰은 법질서 유지라는 업무특성상 체제순응적일 수밖에 없는 데다, 선발과정의 희소성이 특권의식을 심어줬고, 결국 집단적 유전자로 새겨졌다. 검사동일체와 상명하복, 조직보위가 생명처럼 중한 이유다. 개혁에 대한 반발은 ‘특권 철옹성’의 금단증상이다.
검·경 임용시험이 다른 점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부하와 상사 개념이 아니라 권한구분을 통해 역할을 나누면 된다. 검찰은 수십년간 부하로 다뤄온 경찰과 수사권을 조정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되는 것이다. 특권의식을 혁파하지 않는 한, 개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검찰권한 축소가 그 첫걸음이다. 그게 검경 수사권 조정인데, 여기엔 경찰 자질 향상과 수사권 남용 통제장치가 필수적이다. 검찰의 부작용이 경찰로 자리만 바뀌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검경 간 견제·균형과, 독립적 특별수사기관(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 호출되는 이유다.
수사권과 형벌권은 정착되는 순간 권한의 사유화와 부패가 시작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검찰이 특별한 힘을 부려왔다 해서 특별한 존재는 아니다. 특별한 힘을 써온 게 잘못이다. 그걸 고쳐 제자리에 놓자는 게 검찰개혁이고, 수사권 조정이며, 권력기관 개혁이다.
언론도 문제가 많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취임 직후 검찰에 대한 감찰강화를 지시하자, “장관과 총장 간 싸움이 시작됐다”는 보도가 곧바로 나왔다. 없던 감찰기능을 신설하는 것도 아닌데 검찰 탄압이라도 되는 양 써댄다. 그 피상적 관점과 습관적 보도행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언론 역시 시대정신에 눈 감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심지어 TV조선은 “조국 차량, 자택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 중”을 속보라고 빨간색 바탕의 자막으로 띄우며 호들갑을 떨었다.
감찰은 모든 공기관에 있는 부서이자 기능이다. 성폭행 검사, 비리 검사, 스폰서 검사 독직사건으로 분노가 비등할 때마다 감찰 강화가 지적됐다. 별 소용 없었다. 이 점은 경찰도 마찬가지. 둘 다 신뢰의 위기다.
장관과 총장의 싸움? 수사받고 있는 장관이 자신을 수사 중인 총장을 상대로 싸움을 건다? 어불성설이다. 조국과 윤석열의 싸움을 부추기며 불구경을 즐기겠다는 방관자적 흥미본위의 무책임 그 자체다. 다만,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고쳐매지 말라”는 격언처럼, 이런 때일수록 법무부는 오해받을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장관수사팀을 바꾸는 건 어떠냐”는 타진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촛불로 형성된 시대정신에 맞춰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고, 인식의 지평을 새롭게 할 때다. 지금은 격렬한 과도기다. 과도기에는 몸살이 온다. 몸살이 싫다고 대충 뭉개려다 큰 수술 받는다./이강윤 언론인 경향 2019.09.20.
우파 뭉치면 총선서 이긴다?
정치란 한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정당이라면 나라를 어떻게 운영할지 비전과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이를 실현하는 건 사람이다. 국회의원 면면을 보면 어떤 나라를 지향하는지 알 수 있다. 자유한국당은 국정 농단으로 나라를 거덜내고도 일절 참회나 반성이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아부해 금배지를 딴 무능하고 부패한 인물들 그대로다. 그러면서 가장 큰 우파 세력인 한국당 중심으로 통합해야 총선에서 이긴다고 주장한다. 황교안 대표 등이 18일 청와대 앞에서 정권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오대근 기자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일화 한 토막. 2000년 4월 16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합리적 보수 성향인 그를 총선기획단장에 임명했다. 윤 단장은 김윤환, 이기택 등 구시대의 상징적 인물들을 바꿔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 총재는 팔짝 뛰었다. “당신 미쳤구먼. 우리 당은 김윤환 사단과 이기택 사단이라는 양대 산맥으로 구성돼 있는데, 지금 그 양대 산맥의 목을 치라고. 비록 정치한 지는 얼마 안 되지만 그 어려운 기간 동안 내가 가장 신세를 많이 진 사람이 허주(김윤환의 호)와 이기택씨야. 그런데 어떻게 목을 치나. 난 인간적으로 못한다.”(이철희 ‘7인의 충고’)
16대 총선은 DJ 정부 중간평가 성격이 강했는데도 한나라당 열세가 점쳐졌다. 시민사회단체가 낙천ㆍ낙선 운동에 나서는 등 정치 개혁 열망이 분출하면서 수구 이미지가 불리하게 작용한 탓이다. 윤 단장은 ‘위험한 이상주의자’라는 당 안팎의 거센 공격에도 “민심을 거스르면 한 방에 죽는다”며 개혁 공천을 밀어붙였다. 이 총재는 고심 끝에 윤 단장 손을 들어줬다. ‘킹 메이커’로 통하던 허주를 비롯해 이기택, 서석재, 신상우, 김광일 등 영남권 거물 정치인이 공천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대신 오세훈, 원희룡, 김영춘 등 386세대를 과감히 영입했다. 언론이 ‘금요대학살’이라 부른 파격 공천이었다. 그 결과 한나라당(133석)이 집권 여당인 민주당(115석)을 압도했다.
내년 총선은 문재인 정부 중간평가가 될 것이다. 대개 총선은 국정을 책임지는 여당에 불리하기 마련이다. 야당은 정권을 견제하는 입장이라 국정 비판만 해도 기본 점수는 먹고 들어간다. 더욱이 조국 사태로 문 대통령 지지율은 취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자유한국당이 우파 규합에만 성공하면 총선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 여길 법하다.
한국당 지도부는 연일 ‘보수 통합론’을 띄우고 있다. 황교안 대표는 “한국당이 통합만 하면 이길 수 있다”며 ‘반조 연대’를 고리로 우파 규합에 나섰다. 황교안 유승민 안철수 오세훈 원희룡 등이 뭉치면 내년 총선에서 무조건 승리한다는 셈법이다. 앞서 나경원 원내대표가 “유승민과 통합 안 하면 한국당 미래는 없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당 희망대로 우파만 뭉치면 총선에서 이길 수 있나. 착각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보수 궤멸까지 거론됐던 한국당이 지금 달라졌다고 느끼는 국민은 거의 없다. 국정 농단으로 심판받은 세력인데도 진솔한 반성과 사죄는 일절 없었다. 오만하고 무능하며 뻔뻔하고 몰염치하다. 조국의 불공정에 실망한 젊은 세대와 중도층에게 한국당은 여전히 ‘기득권 정당’ ‘부패 정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조국에 실망해도 한국당 지지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다.
정당은 국민 다수가 지향하는 바를 수렴해 비전과 가치를 제시하는 정치 결사체다. 한국당은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비전과 가치를 보여준 적이 없다. 더 중요한 건 인물이다. 법과 제도를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속 국회의원 면면을 보면 그 정당이 어떤 나라를 지향하는지 알 수 있다. 한국당은 국정 농단을 주도했던 인물, 부패하고 무능한 구시대 인물, 박근혜에게 충성한 대가로 금배지를 딴 영남권 의원들로 가득하다.
윤 단장은 16대 총선 결과를 보고 “국민이 이렇게 무섭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났다”고 했다. 국민이 개혁 공천의 진정성을 믿어준 것이다. 한국당 의원 전원이 삭발을 하면 진정성이 통할까. 난망이다. 황 대표는 “거대 야당 한국당이 (보수 통합의) 중심이 되는 게 자연스럽다”고 했다. 국민 다수가 대안 세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정당이 통합의 주체로 나서겠다는 건 코미디다. 구태 정치인들을 모아 세를 불린다고 국민 마음이 돌아설 리도 없다. 정치란 한 시대를 책임지고 꾸려가는 것이다. 비전과 가치를 제시하고 그에 걸맞은 참신한 인물들을 배치하는 게 관건이다. 다른 우파보다 세력이 크니 한국당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는 보수 통합론은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고재학 논설위원 겸 지방자치연구소장 한국 2019.09.23
조국의 길, 윤석열의 길
‘미국 소송 변호사 수임료 누가 냈는지 한번 알아봐.’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다스 소송 수임료 수뢰 사건은 오로지 특수통으로 로펌 변호사까지 해본 윤석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의 ‘감’에서 시작됐다. 미국의 소송비용이 엄청난데 자기 돈 냈을 리 없다는 판단은 적중했다. 삼성에서 119억원 뇌물 수수 사실이 드러났다.
이른바 ‘조국 의혹’ 수사 역시 대검에 축적된 기존 ‘정보’에 론스타 등 펀드 수사 경험이 많은 윤 검찰총장의 ‘감’이 더해져 시작됐다는 관측이 많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 지명 뒤 윤 총장이 임명권자에게 ‘위험성’을 직접 알리려 했다는 얘기도 있다.
장관 후보자 자녀의 논문·장학금 등 도덕성 논란 와중에 검찰이 뛰어든 것도 ‘사모펀드’에서 불법 소지를 봤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검찰은 조 장관 부인 정경심 교수가 단순 투자자 이상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본다. 차명으로 주식을 관리하는 코링크의 실소유주라는 혐의를 두고 주변 인물들을 추궁하고 있다고 한다. 정 교수를 옹호하는 이들이나 일부 여당 의원들은 정 교수가 조 장관 오촌조카에게 단순히 돈을 빌려준 거라면 문제될 게 없다고 반박한다. 설사 투자자인 정 교수가 펀드 운용에 깊이 개입했다 해도 법률상 운용자로서의 형사책임까지 묻기는 어렵다는 전문가 견해도 있다.
조 장관 일가의 혐의 내용과 별개로 지금까지 수사 과정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무엇보다 국회 청문회 일정이 합의된 직후 압수수색에 들어감으로써 대통령의 임명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치게 한 건 ‘윤석열 검찰’의 패착이다. 임명권자에게 ‘조국 법무장관 부적격’이라고 간언한 검찰총장으로선 이제 그걸 입증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에 몰렸다. 수사의 객관성·중립성을 의심받을 꼬투리를 스스로 만든 건 안타깝다.
특수부 검사를 20여명이나 투입했으나 ‘권력형 비리’라고 할 만한 이른바 ‘스모킹 건’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일까. 소소한 피의사실까지 속속 흘러나온다. 대학 표창장 위조 방법까지 시시콜콜 국민에게 알려야 할까. ‘기생충 수법’ 흘리기는 특히 유감스럽다. 일부 기사는 ‘검찰 내부’발이다. ‘논두렁 시계’ 못잖은 모욕주기다. 일각에선 그런 방식의 위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어 사실관계조차 맞는지 의문이다.
검사에게 공익의 대표자로서 ‘객관 의무’를 지우는 것은 표적수사, 먼지털기 수사가 아니라 실체적 진실을 최우선 가치로 삼으라는 취지다. 윤 총장이 취임사에서 수사의 개시·종결도 헌법 정신에 비춰 고민하고, 비례와 균형을 찾자고 한 것도 이런 뜻일 것이다. 이번 수사도 ‘권력형 비리’나 ‘권력자 비리’에 초점을 맞춰야 정당성을 갖는다.
검찰이 23일 조 장관 자택을 압수수색하고, 부인 정 교수도 곧 소환할 것으로 보인다. 새달 2일이 오촌조카 조씨의 기소 시한임을 고려하면 이번주 정 교수 신병 처리 결과에 따라 조 장관 거취가 다시 논란이 될 것이다.
오래전 법무장관 하마평이 나오던 초기부터 조국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은 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여러 정황에 비춰보면 그를 장관으로 기용하려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검찰개혁은 문 대통령이 정치에 참여하기로 결심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동기가 됐다. 조 장관 역시 학자 시절부터 시민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오랫동안 검찰개혁에 몸바쳐왔다. 문 대통령은 민정수석 임명 때부터 ‘검찰개혁’ 실현을 위한 자신의 대리인으로 그를 꼽았던 것 같다. 그가 장관직을 고사하지 못한 데는 그런 사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여론은 그가 장관직을 고수하는 데 비판적이다. 청와대는 “일희일비 않는다”지만 총선을 치러야 하는 여당 내 기류는 조금 결이 다르다. 정당 지지도가 다시 곤두박질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를 둘러싼 논란 사안들은 사실 과거의 ‘사퇴’ 기준을 이미 넘어섰다. 그를 지키자는 지지층이나 문 대통령의 뜻은 ‘검찰개혁’ 명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가 거취를 판단하는 기준 역시 개혁 추진의 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가 될 것이다.
이른바 ‘86세대’를 놓고 여러 비판이 있으나 그래도 그 주축은 젊은 시절 ‘민주주의’라는 큰 가치를 위해 개인의 영달과 출세를 모두 버린 이들이다. 조 장관이 말하는 ‘앙가주망’도 그 연장선에 있을 것으로 믿는다. /김이택 논설위원 경향 2019-09-23
지금 ‘정의당의 길’을 가고 있는 걸까
2017년 5월 대선에서 정의당 후보(심상정)가 201만7458표를 얻었다. 진보정당 대선 도전 25년 만에 200만표를 넘어섰다. 기존 진보정당 지지층과는 결이 다른 불안 노동자, 청년, 여성, 소수자들의 지지가 더해지면서 이뤄낸 성취다. 당시 20대 득표율은 전체 득표율의 2배가 넘는 12.7%에 달했다. 노쇠한 진보정당을 떨치게 할 만했다.
한국 정치의 신기원을 연 2004년 4월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정당득표에서 277만표를 획득했다. 모두 10석을 얻어 진보정당으로선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신자유주의에 반발한 2030세대의 적극적 지지가 핵심 기반이 되어 당시 민주노동당 지지율은 15% 안팎을 유지했다. “땀흘려 일하고,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열렬히 대변한 ‘거대한 소수’는 그렇게 진보정당의 황금기를 일궜다.
불행히도 민주노동당의 분당과 이합집산, 끝내 ‘진보’마저 당명에서 사라진 정의당이 원내 진보정당을 잇는 과정은 청년이 중심에서 사라지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 절로 기존 지지층이 당과 함께 나이를 먹으면서 ‘늙은 정당’이 되어갔다. 2017년 대선 ‘200만표’는 그 퇴행을 되돌릴 불씨를 던졌다. ‘노동이 당당한 나라’에 호응한 노동자, 청년, 여성 등이 가리킨 게 있다. 진보정당의 길이 있음을, 정의당이 누구를 보고 진보정치를 해가야 할지를 보여줬다.
대선 후 2년여, 정의당의 시간은 거꾸로 흘렀다. 계급 의제와 노동을 뒤로 물리면서까지 대중적 외연 확대에 집중했으나 결과는 미약하다. 7% 안팎에 정체되었다가 이제 5%선마저 위협받는 지지율이 아픈 증좌다. “세습자본주의 혁파”든, “불평등과 불공정의 극복”이든 그걸 분명한 대안과 목소리로 실천하지 못한 결과다. ‘6석’ 소수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선거제 문제를 빼고는 정의당을 소환시키는 이슈가 기억나지 않는다. 국회 특활비 폐지가 원내 진보정당의 최대 성과로 꼽히는 판이다. 무상보육, 무상의료, 무상교육, 경제민주화 등을 의제화시켜 시대정신이 되게 한 과거 진보정당의 결실에 비춰보면 너무 빈한하다.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 대형마트·SSM 규제 입법화에서 ‘소수’ 민주노동당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물며 지금은 촛불정부 시절이다. 경제사회 개혁 부진과 노동에서의 후퇴 속에서 정의당은 견제도, 견인도, 등대 역할도 다하지 못했다. “민주당이 진보를 과잉대표”토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정의당이다.
조국 정국을 겪으면서 “정의당 내상이 깊다”(윤소하 원내대표). 내상이 깊어진 건 이른바 ‘데스노트’ 때문이 아니다. ‘조국 사태’가 까발린 불공정과 불평등, 특권 문제를 진보정당의 목소리로 의제화하지 못하고, 청년 세대의 상실감을 직시하지도 못한 때문이다. 조국의 거취를 떠나 불평등과 불공정의 이슈를 진보적으로 대변하고 대안을 제시할 기회를 차버렸다. ‘데스노트’ 등재 여부가 진보정당 역할의 전부인 것처럼 부각되는 과정을 정의당은 대책 없이 따라가기만 했다.
추석 연휴를 지나고 나온 여론조사에서 정의당의 지지율 흐름이 심상치 않다. 리얼미터의 23일 정기조사에서는 2주 연속 하락해 5.3%를 기록했다. 낯뜨거운 집안싸움으로 날새우는 바른미래당에도 밀렸다.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정의당도 동반 하락했다. 정의당이 민주당 ‘왼쪽’에서 대안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징표다.
심각한 건 20대의 정의당 ‘손절’ 조짐이다. 이번 조사에서 20대 지지율은 3.9%를 기록했다. 바른미래당(8.8%) 절반도 안된다. “불평등한 세습사회와 정면으로 싸울 수 있는 정치세력이라는 신뢰를 주지 못한” 업보다.
미국의 버니 샌더스와 오카시오코르테스, 스페인의 포데모스, 영국 제러미 코빈이 이끄는 진보정치는 밀레니얼 세대의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다. 프랑스 ‘노란 조끼’ 시위에서도 보듯 청년은 불평등 세습사회에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다. 청년 세대가 정의당을 손절하다시피하게 된 것은 그들이 갑자기 보수화되어서가 결코 아니다.
만일 보수정당의 언저리에서 신진세력이 세습자본주의 비판 흐름 가운데 경쟁의 공정성만 강조하는 쪽과 결합해, 이들이 특권층 견제의 대표성을 인정받고 나면 정치지형을 바꾸기 힘들어진다. 유승민과 안철수 세력의 새 정당 과녁이 그 어간에 있을 게다. 정의당의 책임 방기가 우파 포퓰리즘 부상의 토양을 제공하는 뼈아픈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지난해 7월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정미 당시 정의당 대표는 엄중히 물었다. “민주당은 진보인가. 민주당은 과연 불평등과 불공정을 극복할 정치적 비전과 의지를 갖고 있는 정당인가.” 지금 그 주어 자리에 ‘정의당’을 올려놓고 자문할 때이다
양권모 논설실장 경향 2019.09.23
멸종 저항의 시대, 재생에너지 100% 사회로
2020년을 목전에 둔 지금 세계는 전환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획기적인 기술 발전으로 4차 산업혁명을 경험하는 한편 기후변화가 위기로 치닫고 있는 시대다. 자율주행차와 자동화 시스템, 인공지능으로 인간의 노동과 두뇌를 대체하는 혁신의 다른 한편에는 ‘홀로세 절멸’이라고 불릴 정도의 주목할 만한 생물종 멸종이 기후위기로 인해 인류의 생존조차도 위협할 정도로 확대되고 있다.
‘홀로세’ 또는 ‘현세’는 기원전 1만년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질시대다. 이를 최근에는 ‘인류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생물종 멸종, 썩지 않는 플라스틱 쓰레기, 콘크리트 덩어리와 아스팔트, 화학물질과 방사능 오염 등 인류의 영향이 절대적인 시기로 각종 흔적이 지층에 남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멸종을 앉아서 맞이하는 암울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한 단체인 ‘멸종 저항’(Extinction Rebellion)의 이름에서 보듯이 인류는 멸종조차도 저항하는 의지와 힘을 지녔다. 그리고 기술 진보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기후변화는 대기 중에 온실가스, 즉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높아지는 것이 원인이다. 이산화탄소는 화석연료 사용으로 발생한다. 화석연료 사용은 우리의 거의 모든 일상에 스며 있다. 전기의 약 70%를 화석연료로 생산한다. 수송연료도 휘발유, 경유, 가스 등 화석연료다. 난방에도 도시가스, 등유, 엘피지(LPG) 등 화석연료를 쓴다. 제철제강, 시멘트 등 에너지를 많이 쓰는 산업에서도 화석연료를 쓴다. 온실가스 발생량의 87%(2016년 기준)가 에너지 사용으로 발생한다.
그래서 온실가스를 줄이는 방법은 오히려 간단하다.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고 공급하는 에너지원에서 화석연료를 줄이면 되는 거다. 그렇다고 원전을 늘리기에는 또 다른 부담이 뒤따른다. 핵 폐기물과 원전 사고, 방사능 오염이 우려되기도 하지만, 원전은 계획하고 부지를 찾고 건설하고 운영하기까지 시간도 너무 많이 걸리고 입지도 제한적이며 안전 비용으로 비싸기까지 하다. 전력생산량을 조절 못 하는데다 예측 불가능한 원인으로 가동 중단이 될 경우가 있다 보니 날씨로 예측 가능한 풍력과 태양광발전원보다 불확실성이 높아 전력망 안정성을 떨어뜨린다.
재생에너지 100% 사회가 답이다. 재생에너지원은 태양광, 풍력, 지열, 바이오, 해양에너지 등 발전원도, 위치도, 규모도 다양해서 마치 개미들의 협력이나 벌들의 역할 분담처럼 개별과 집단의 컬래버레이션이 뛰어나다. 몇개의 발전소나 어느 지역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전체가 무너지지 않는다. 독일은 2000년 재생에너지발전소 비중이 6%(3만개)였던 것이 2018년 41%(약 200만개)로까지 늘었다. 평균 정전 시간이 연간 13분가량(2016년 기준)으로 원전 비중이 75%인 프랑스의 52분보다 적어서 전력계통을 좀 더 안정적으로 유지시킨다. 전국에 고르게 분산되어 있는 계통과 운영 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재생에너지는 연료가 필요 없고 설비만 갖추면 ‘무한’하게 리필되는 자연에너지이다 보니 기술의 발달에 따라 설비비 회수 기간이 짧아져 단가는 계속 내려간다. 최근 영국의 3차 해상풍력단지 5.5기가와트 건설 계획이 확정됐는데 계약 금액이 메가와트시당 39.65파운드를 기록해 건설 중인 힝클리 포인트 원전 단가인 92.5파운드의 절반 이하 가격이다.
이런 기술 혁신으로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에는 정부의 정책 지원과 더불어 높은 전기요금이 한몫했다. 덴마크의 전력단가에서 발전단가는 9%밖에 되지 않는데 세금이 70%를 넘는다. 거둬들인 세금으로 재생에너지에 다시 투자했고 높은 전기요금은 혁신적 효율 기술이 시장에서 제 구실을 하게 했다. 결국 에너지 소비가 줄어들고 재생에너지는 늘어났으며 온실가스 배출량은 줄었다.
얼마 전 국가기후환경회의에서 이번 겨울과 봄에 미세먼지 원인 중의 하나인 석탄발전소를 최대 22기까지 가동 중단하는 데 따라 인상되는 전기요금을 받아들이겠느냐고 국민참여단 500명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93%의 찬성률은 미래세대를 지키고자 하는 현세대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자세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고 믿는다.
양이원영 에너지전환포럼 사무처장 /경향 2019.09.23.
‘조국 사태’ 이후
당대 최고의 검사’로 불리는 이명재 전 검찰총장은 2002년 취임사에서 “진정한 무사는 얼어죽을지언정 곁불은 쬐지 않는다”고 했다. “선비는 목을 치더라도 욕을 보이지 않는 법이다” “조직을 위해 벚꽃처럼 지겠다” 등 고위 검사들의 퇴임의 변에는 늘 ‘절개’가 묻어 있다. ‘스폰서 검사’ 등 그렇지 않은 인사들도 있지만, 그들은 시작부터 검사라는 자부심이 크다. ‘검사 동일체 원칙’도 엄존한다. 당초 취지는 일선 검사의 기소 독점권이 잘못 행사되는 것을 막는 안전장치다. 그런데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한, 상하복종의 조직문화의 기제로도 작동한다. 이의제기권이 신설되고 소속 상급자로 지휘·감독의 범위가 제한되긴 했지만 검사는 여전히 이 원칙에 충실하다. ‘검사는 한 몸이다’라는 의식이 지배하면서 단단한 결속력이 생긴다. 그사이 검사의 독립은 외면되기 일쑤고, 조직의 특권의식은 강화된다.
이런 특권의식이 권력과의 야합을 통해 부당한 수사로 이어진 사례는 일일이 셀 수조차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여러 저서에서 “참여정부 당시 검찰개혁의 실패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통탄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이 검찰개혁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꼽은 것은 권한의 분산 없이는 검찰의 민주화는 ‘먼 길’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이를 강제할 장치로 검경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방안을 내놓은 이유다. 이를 위한 두 법안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통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 그런데 이 법안이 시행된다고 검찰이 특권을 내려놓을지는 의문이다.
2005년 당시 천정배 법무장관은 “강정구 교수를 불구속 수사하라”는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그러자 김종빈 당시 검찰총장은 사퇴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게 사퇴의 변이었다.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은 검찰청법에 적시된 법적 권한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반발했다. 제도적 통제조차 거부한 것이다. 지금의 검찰은 2005년의 검찰과 다를까. 서지현 수원지검 성남지청 부부장검사는 최근 “검찰의 배당, 인사, 징계 등 모든 시스템은 ‘절대복종 아니면 죽음’을 의미한다. 조직 내에서 죽을 뿐 아니라, 나와도 변호사는 물론 정상생활조차 불가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검찰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검찰이다.
‘윤석열 검찰’이 조국 장관 가족비리 의혹을 수사하고 있다. 사태 초기 국민 대다수는 ‘부모 찬스’로 함축된 특권층의 불공정에 좌절했다. 특히 청년들은 자녀 입시 과정에서 드러난 ‘불평등’에 절망했다. 분노는 수사가 장기화하면서 국민 분열로 심화됐다. 갈라진 국론은 국정동력마저 약화시키고 있다. 경제난 해소 등 할 일 많은 정부와 국회가 ‘조국 수사’로 허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조국이 살면 검찰개혁이 이뤄질 것이고, 윤석열이 살면 살아 있는 권력을 쳐낸 ‘칼’로 반칙과 부정·불법이 없는 세상을 열게 될 것”이란 기대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조국 장관이 혐의를 벗는다고 검찰개혁이 물 흐르듯 이뤄질 가능성은 크지 않아보인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이 조 장관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검경수사권 조정법 등의 국회 통과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와 다를 바 없는’ 검찰이라면 조직적 저항도 예상된다. 한 평검사는 모 인터넷 커뮤니티사이트에 “평검사들이 단체로 목소리를 낼 경우 검찰개혁에 반대하는 조직적 검란으로 해석되고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발악으로 비쳐 수사에 부담을 줄까 우려된다”는 글을 올렸다. 검찰개혁은 사실상 조국 수사 후 ‘사활을 걸어야 할 싸움’이 될 것이다.
검찰의 의도대로 수사가 끝날 경우 살아 있는 권력을 무릎 꿇린 ‘칼’은 더 무섭게 춤출 것이다. 이는 검찰개혁의 본질이 아니라 특권의 확장이다. 임은정 울산지검 부장검사는 “정의를 부르짖으며 특수부 화력을 집중하여 파헤치는 모습은 역시 검찰공화국이다 싶다”고 했다. 무리한 기소와 70여곳에 달하는 압수수색, 여론을 흔들어보려는 피의사실공표 등은 과도하다. 권력화된 검찰수사의 전형이다. 이런 모습은 도리어 검찰개혁을 앞당길 명분도 제공한다. 법안의 국회통과 동력이 커지는 것이다. 검찰권력 비대화를 우려한 견제장치가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를 조국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한다면 지금 겪고 있는 진통은 의미가 없다. 검찰개혁과 사회적 공정성 확립이란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조국 대 검찰, 정부·여당 대 야당, 조국 지지 대 반대로 형성된 현재의 사회적 구도는 안타깝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없다면 ‘조국 이후’에도 또 다른 ‘조국 사태’를 반복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김종훈 논설위원 경향 2019.09.25.
정규직이 계급이 된 나라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들이 직접 고용을 촉구하며 점거 농성 중인 경북 김천시 한국도로공사 본사 외벽에 23일 오후 도로공사 측이 준비한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또 한국도로공사 이야기를 쓴다. 그 사이 큰 변화가 있었다. 대법원이 한국도로공사가 수납원들의 사용자라는 점을 인정했다. 풀어 말하자면, 한국도로공사는 한국도로공사서비스 같은 자회사를 만들든 만들지 않든, 그 자회사를 어디에 쓰든 원래 일하던 수납원들을 한국도로공사의 정직원으로 채용해야 할 법적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도로공사는 여전히 직접고용을 거부하고 있다. 수납원들은 법원 판결 이행을 촉구하는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도로공사 본사 건물에는 “너무 힘들어요! 동료가 될 우리! 농성은 이제 그만!”이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동료가 되기 위한 첫 단계인 직접고용은 할 생각이 없지만 어쨌든 자신들도 힘드니 농성을 그만 하라는 것이다. 1심부터 대법원까지 몇 년 동안 법적 다툼을 해 온 근로자들, 대법원에서 승소하고서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수납원들, 정규직과 경찰들이 의료진 출입도 방해하는 상황에 고립된 농성자들 앞에서 ‘너무 힘들다’니 염치도 없다.
이 당당한 몰염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한국도로공사는 사기업도 아닌 공기업이고 국가기간산업의 한 축을 맡고 있다. 법원 판결을 준수하여 지금까지 일해 온 수납원 천 몇백 명을 직접고용한들 망하지 않는다. 간접고용한다고 인건비가 0원인 것도 아니다. 사기업들도 변칙적으로 채용했던 비정규직을 직접고용한다고 딱히 망하지는 않지만, 여하튼 공기업인 한국도로공사는 대법원 판결을 따르더라도 파산할 만큼의 경영상 치명적 손해를 입을 위험은 낮은 반면, 사법부의 종국적 판단을 따를 의무는 높은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어째서 직접고용을 하지 않을까? 대법원이 판결한 대로 따르는 것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공기업이 수십 층 높이의 현수막까지 걸어가며 ‘힘들다’고 징징거릴 일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여기에는 손익이나 당부를 넘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라는 쟁점에 대한 이념적 저항이 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더 이상 고용 형태에 따른 중립적 구분이 아니다. 계급이다.
본래 전속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는 당연히 정규직이다. 여기에 시장의 필요 등 때문에 예외적이었던 비정규직이라는 개념이 입법되고, 시간제 노동자(아르바이트)나 전문직 노동자뿐 아니라 점점 더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채용되기 시작했다. 처음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소년이나 청년 노동자, 경력단절 후 재진입하는 여성 노동자, 생계를 위해 고령에 다른 노동을 다시 시작한 고령 노동자 등은 처음부터 비정규직으로 계약을 한다. 정규직이었던 사람들이 한국도로공사의 예처럼 자회사 분리, 파견이나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통해 비정규직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이제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은 660만명에 달한다. 전체 임금노동자의 33%다. 비정규직은 더 이상 ‘정규직이 아닌 고용 형태’라는 중립적 개념이 아니다. 정규직보다 적게 일하는 대신 고용유연성을 선호한 사람이 아니다. 비정규직의 임금이 정규직의 70%에 불과한 한국에서, 비정규직을 노동자의 이상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라 말하기는 어렵다.
현실에서 비정규직은 더 적은 임금을 받고, 더 긴 시간 일하고, 더 열악한 환경에서 더 험한 일을 맡는 사람을 뜻한다. 경조사비를 못 받는 사람, 파견처에 어떻게든 빨리 적응해야 하는 사람, 급여가 딱 최저임금 인상분만큼만 높아질 사람, 쉽게 해고될 수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비정규직은 이제 정규직의 작고 좁은 문을 통과할 힘이 없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어떤 계급이 되었다. 한국도로공사의 저 ‘동료가 될 우리’라는 괴물 같은 현수막과 그 아래를 가득 메운 경찰과 정규직 구사대가 보여 주듯, 비정규직은 이제, 계급이다.
정소연 SF소설가ㆍ변호사 한국 2019.09.25.
상위 1%를 위한 ‘민부론’
최근 자유한국당이 내년 4월 총선과 차기 대선을 겨냥해 당의 경제정책 방향과 과제를 담은 ‘2020 경제대전환: 민부론’을 발표하였다. 공안검사 출신의 삭발한 당 대표가 애플의 스티브 잡스 흉내를 내면서 정책을 발표할 때 우스꽝스러웠지만, 그래도 제1야당이 그나마 정책으로 국민 평가를 받겠다고 나선 것은 격려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자유한국당이 ‘민부론’에서 제시한 경제정책의 방향과 과제를 꼼꼼히 살펴보면 이름만 민부론일 뿐 실상은 ‘시장근본주의’라는 흘러간 유행가의 ‘표절’이었다. 현재의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경제개혁의 과제를 전혀 담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과거 자신들이 집권당 시절 주장하면서 실패하였던 정책들을 포장만 바꾸어 다시 내놓은 것들이 태반이다. 낙수(落水)효과는 유수(流水)효과로 이름만 바뀌었다. 규제완화, 유연한 노동시장, 법인세와 상속세 인하 등은 우리 국민들에게 이미 친숙한 시장근본주의의 레퍼토리들이다. 트로트를 약간 다르게 각색하여 제목을 바꾼다 한들 트로트가 랩이 되지는 않는다. 하물며 랩이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담을 리 없다.
민부론은 거의 모든 것을 일단 안티 문재인에서 출발한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이 저성장과 양극화 심화 등 한국 경제를 총체적 위기에 빠트렸”다고 진단하면서 “민간과 시장 주도의 자유시장경제로 대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경제가 저성장과 양극화에 빠진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를 ‘양극화된 저성장의 덫’이라고 부른 바 있다. 그런데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제성장률은 노무현 정부 5%대, 이명박 정부 3%대, 박근혜 정부 이후 2%대로 계속 하락하여 왔다. 불평등과 양극화는 외환위기 이후 지속되어 온 현상이다. 우리 경제가 ‘양극화된 저성장의 덫’에 빠진 이유는 그 역사적 시효를 다하였음에도 지속되어 온 재벌 위주의 성장정책과 외환위기 이후 급속히 확산된 시장근본주의 탓이 크다. 촛불혁명 이후 양극화를 더 이상 묵인해서는 안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고 문재인 정부의 ‘포용적 성장’은 이런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양극화된 저성장의 덫을 문재인 정부 탓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자신들의 과오로 화재가 난 집에 불 끄러 달려온 소방수를 보고 당신 때문에 화재가 났다고 비난하는 격이다. 사실 자유한국당도 자신들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양극화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그 해소를 위해 소득주도성장에서 제안하는 정책과 비슷한 내용의 정책들을 여러 번 제안한 바 있었다.
자유한국당이 한국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반성과 성찰 없이 문재인 정부를 ‘사회주의 정권’으로 규정하면서 시장근본주의라는 ‘흘러간 노래’를 제목만 바꾸어 다시 트는 것은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말했던 자신들의 과거 정부보다도 못한 퇴행적 경제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큰 정부’가 우리 경제를 망치고 있다고 비판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너무 커서 문제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 도처에 포진해 있는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집요한 방해에 의해 그리고 일부 정책담당자들의 기회주의로 인해 과감한 경제구조개혁과 제대로 된 재정정책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저성장이라는 뉴노멀 시대에 대비하여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재정을 확대하고 있는데 이 와중에 역사적 시효가 끝난 시장근본주의와 퇴행적인 불평등 성장모델을 주장하는 민부론은 시대착오적이다.
민부론 집필에 참여한 교수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은 지난 정권에서 경제정책 입안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사람들이다.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론에 대해서는 소득으로 소득을 증가시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느니 소득주도성장론은 ‘경제학 족보에도 없는 이론’이라고 하면서 비판의 날을 세우던 사람들이다. 그러던 그들이 정말로 경제학 족보에도 없는 ‘민부론’을 내놓으면서 적절한 인용도 없이 시장근본주의를 표절하고 있다.
민부론은 203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은 5만달러로, 중산층 비율은 70%로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한다. 2019년 현재 3만달러인 국민소득을 11년 만에 5만달러가 되게 하려면 연평균 성장률이 4.8%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상식 있는 경제학자가 주장할 바가 아니다. 우리나라 중산층(소득이 중위소득의 50~150%에 놓인 계층)의 비율감소는 2013년 이래 지속된 현상으로 이는 한계적 상황에 놓인 가구의 증가 때문에 발생하는 일인데 시장근본주의적 정책으로 이 비율을 어떻게 70%로 회복시키겠다는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자유한국당은 민부론이 특정 계층이 아닌 국민 ‘모두’를 위한 통합의 경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장근본주의 경제정책은 국민 99%의 희생하에 상위 1%에게 막대한 소득과 부를 가져다주었음은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이우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경향 2019.09.25.
지금, '살아있는 권력'이란 누구인가?
[기고] '살아있는 권력'의 의미
헌정 사상 유례없는 현직 장관의 가택압색을 보면서 이른바 '조국' 논쟁의 극단적인 권력투쟁의 정점이 형성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와 걱정을 감출 수가 없다. 이 상황을 보도하는 언론과 그러한 언론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일반적인 입장은 세 가지 정도로 좁혀진다.
첫째는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의 엄정한 법집행의 의지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입장이다. 검찰 법집행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사들과 이를 지지하는 국민들의 여론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둘째는 '살아있는 권력'의 상징인 조국 장관을 지지하면서, 가택압색을 검찰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인식하고 조속하고 변함없는 검찰개혁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검찰의 수사방향과 과정을 비판하는 일부 기사들과 SNS 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검찰 비난의 다양한 의견과 여론이 이러한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셋째는 조국 장관이 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고 결국 사퇴해야한다는 입장이다. 가택압색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유한국당이 조국 장관의 직무정지가처분 소송을 헌재에 제출한 것은 이러한 입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가택압색을 두고 수많은 지식인들과 언론 및 시민들이 제각기 다양한 입장과 주장을 담은 글과 기사들을 쏟아내었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한 정국을 보면서 드는 의문 한 가지는 '살아있는 권력'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가이다. 거의 모든 기사들과 대부분의 글에서 지칭하는 ‘살아있는 권력’은 현재의 집권 세력인 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을 지칭하는 공통점이 있다. 필자가 드는 의문은 바로 이 점이다. 과연 ‘살아있는 권력’이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일까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굳이 정치권력의 속성을 이야기했던 수많은 학자들과 이론가들의 주장을 빌리지 않더라도 권력은 획득하고 실행하는 순간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절대적인 힘이다. 더군다나 그 권력이 '살아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면, 그 권력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닥칠 수 있는 재앙이자 공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현직 대통령이나 집권여당을 ‘살아있는 권력’으로 지칭할 수 있을까? 아마 이렇게 부르는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지난날 독재자와 같은 대통령들이 통치했던 시대의 정치권력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구시대 사고를 가진 이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의 문재인 정부는 '촛불 시위'를 통해 탄생한 국민의 정부이다. 집권 2년차를 지나고 있지만 3년 후에는 국민들이 선택할 다른 대통령에 의해 정부가 바뀌는 기한이 정해진 위임 권력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권력은 유권자인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모든 공직과 직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속성이다. 따라서 '살아있는 권력'은 현재 위임된 권력으로 정부를 구성하여 통치하고 운영하는 현 정부가 아닌 언제나 그러한 정부 구성의 기회를 부여할 국민인 것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살아있는 권력인 국민은 현재의 조국 장관 사태를 그저 바라보고 판단하며 예상하는 수준의 사고와 행동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다. ‘살아있는 권력’인 국민을 대신하여 행정부 조직의 일부인 검찰이라는 사정기관이 이 모든 상황을 좌우하는 권력집단으로 행동하고 있다.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살아있는 권력'이 검찰이라면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무엇이 검찰을 '살아있는 권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렇게 비정상적인 '살아있는 권력'이 검찰이라는 조직으로 집중된 것일까? (이 글은 필자가 조국 장관과 가족을 옹호하거나 변명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필자가 보기에 가장 큰 원인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제대로, 아니 전혀 쓸 생각이 없는 국회의원들(입법부)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검찰은 행정부의 일원으로 사정을 담당하고 있는 행정기관일 뿐이다. 행정부 조직의 역할이나 권한은 입법사항으로 제도적인 측면에서 규정하고 명시할 수 있다. 그런데 작금의 사태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정치적 판단과 해석이 필요한 사건들의 최종 판단을 검찰에게 맡기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국회의원들이다. 검찰이 본연의 정치적 중립과 범죄 혐의를 소명하고 수사하는 역할에 집중하고 지나친 권력 남용이 되지 않도록 금지하는 법률과 제도를 만들 수 있는 국회의원들이 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입법과정과 활동으로 권력 기관의 역할과 권한을 정해주어야 할 국회의원들(특히 야당 의원들)이 현재의 집권 세력의 도덕성과 위법성을 빨리 판단해달라고 검찰에게 애걸복걸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집권 여당 의원들 역시 이번 사건을 다가올 총선의 유불리나 이해득실 수준에서 판단하고 대처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권력’으로서 검찰의 위상은 견고해지고 있다.
두 번째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언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모든 언론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만, 신문이나 인터넷, 혹은 방송에서 표출되는 기사나 보도 등은 이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분석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하게 된다. ‘조국 대 윤석열’ 혹은 ‘개혁 대 저항’이라는 프레임은 언론에서 가장 빈번하게 거론되는 구도이다. 그러나 작금의 사태를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고 구조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의 모든 구조적 결함과 모순이 작동되어 진행되고 있는 이번 사태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판단이 든다.
실제 이번 사태의 출발에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임명으로부터 촉발되었다. 이후 전(前) 민정수석이었던 조국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되면서 임명을 둘러싼 과정에서 한국사회 기득권과 지배계급의 구조적 모순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사건이었다. 입시제도의 문제, 수저론의 확인, 기득권의 재산유지 방식, 불평등과 불공정의 문제, 비정상적이고 부패한 사회의 모순, 상위 1%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 등이 복합적으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저급하고 모순에 가득 찬 일면이었다. 따라서 언론 본연의 역할이 발휘되었다면 이번 기회는 우리 사회 모순과 불공정의 문제를 짚어보고 진지하게 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와 해법을 담아야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모습 대신에 한 가족의 모든 삶의 모습이 전국민에게 드러나도록 일조했고, 범죄 혐의의 확정 여부나 사법 처리와는 별개로 한 가정이 파괴될 수 있는 가능성(그 가능성은 주변의 혹은 조국 사태를 즐기던 이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마찬가지의 가능성)을 부여했다.
이외에도 국민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던 수많은 여론 조사 결과들이나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일반 시민들 역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 사태에 대한 의견을 표명했다. 결국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조국 장관과 그 가족들의 최종적인 위법성과 잘잘못의 유무는 검찰과 사법부의 몫이 되고 말았다. '살아있는 권력'인 국민이 위임해준 권력을 일정 기간 동안 제대로 활용하여 국민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는 여망을 저버리고 단순한 행정부의 사정기관인 검찰에 무소불위의 '살아있는 권력'을 부여하고 휘두르게 한 이들은 이번 사태의 최종 결과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살아있는 권력'이 되어 현 집권 세력의 상징이 되어버린 조국 장관을 향하는 검찰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살아있는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는 비이성적인 편가름과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의 추론이나 추측으로 검찰의 정당성을 인정해버리는 우를 더 이상 범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영화 <더 킹> 속의 검찰을 꿈꾸고 있는 이들이 다수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매번 반복되는 '검찰개혁'이라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는 현실의 정상적인 검찰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살아있는 권력'의 국민을 기대해 본다
김종법 대전대 교수 프레시안 2019.09.26.
일꾼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정치인을 향한 팬덤 문화는 만고에 쓸모가 없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된 것처럼 그들이 가진 정치권력은 결코 그들 고유의 것이 아니며 우리가 한시적으로 위임한 것에 불과하다. 즉, 그 권력은 본디 내 거, 우리 거다. 그들이 선거철마다 자칭 ‘일꾼’이니 ‘머슴’이니 하는 말을 하는 것도 100년 전 목숨을 내놓고 만민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은 3·1의 이름 없는 영웅적 시민들과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의 피, 땀,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꾼을 섬기고 일꾼에 조아리기도 한다. 100주년을 맞아 우리 이제 더 이상 그러지 말자.
내가 식당의 주인이라고 상상해보자.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해 소소하게 운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백종원도 울고 갈 요식업의 모차르트 같은 직원을 채용한다. 팔자에 없는 대박집 사장이 되어 집 사고 땅 사고 그 직원이 너무 고마워서 연봉을 올려주고 차도 뽑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일을 잘해도 사장이 직원한테 인감도장에 통장까지 내주지는 않는 법이다. 사장이 가게 내팽개치고 돈이나 쓰러 다니면 쪽박집 되는 것도 하루아침이다. 오너면 오너답게 해야 할 일이 있고 지켜야 할 자리가 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오너다. 그게 헌법 제1조다.
일꾼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정치인도 주인 행세, 판·검사도 주인 행세, 공무원은 더더욱 주인 행세를 한다. 말은 번드르르, 뽑아 주시면 백종원 뺨치게 일하겠다더니 계란프라이도 제대로 못 부치는 정치인들에게 카운터를 맡긴 진짜 주인들 책임도 크다.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쪽박 찬다’고 일찍이 초등학교부터 가르치지 않는 건 더 큰일이다. 주인들이 일꾼의 팬덤이 되어 ‘저희를 잘 다스려 주세요. 저는 일꾼님만을 믿어요’라고 해서는 가게가 잘 돌아갈 수 없다. (분명 내 가게 일인데 뒷짐 지고 일꾼들 흉이나 보는 주인들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요새 가게 꼴이 말이 아니다. 일꾼들이 주인 눈치도 안 보고 진흙탕 싸움 중이다. 누가 더 염치없는지 겨루는 것 같다. 망하거나 말거나 꼴도 보기 싫을 정도지만 이런 때일수록 주인이 나서야 한다. 이러라고 일자리 준 게 아니라고 일갈해야 한다. 누가 진짜 주인인지 일깨워줘야 한다. 조국 법무부 장관의 가장 큰 과오는 (특히 젊은 세대로 하여금) 정치혐오를 부추긴 것이라고 페이스북에 썼더니 “또 병이 도졌네. 장하나 아직도 탈당 안했냐?”며 난리도 아니다.
그러나 조국 장관의 표리부동함을 보며 정치에 대한 환멸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수정당 기득권자들은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외면하더니 하필 조국 장관 사퇴를 위해서 삭발 릴레이를 감행해 정치혐오에 기름을 붓고 있다. 조국 사퇴 목소리를 내는 청년들을 향해 일베, 뉴라이트 운운하는 자칭 진보인사들. 검찰개혁을 비롯한 문재인 정부의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조국 장관의 과오까지 감싸 안아야 한다는 무리한 논리들. ‘당신은 조국 편이냐? 삭발인 편이냐?’라는 말도 안 되는 질문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라도 한 말씀 드리고 싶다. “정치혐오는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이 필요합니다.”
<장하나 정치하는 엄마들 활동가> 주간경향 2019 9.27
검찰의 화려한 분장술
세월호 뉴스로 신문이 도배되던 2014년 어느 날. 후배의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제법 큰 특수수사를 벌여 여럿 구속시켰는데, 구속기간을 연장하려고 하자 부장이 “세월호 뉴스를 덮어야 하니 바로 기소하고 보도자료 뿌려라. 보완수사는 기소 후 해라”고 했다던가. 당연히 그리고 다행히, 후배가 항의하여 구속기간을 연장하였고 보도자료는 수사가 마무리된 뒤 배포되었습니다. 일선 지검에 보도거리를 빨리 생산하라는 지시가 명시적으로 내려오지는 않았을 터. 보도자료 배포시기 즉, 기소시점을 정함에 있어 인사권자의 심기를 알아서 경호하는 우국충정(?)에 황당했습니다. 그 간부의 놀라운 배려는 수사결론을 정할 때도 일상적으로 발휘되지 않았을까요.
지난 7월, 중앙지검 4차장으로 발령 난 한석리 검사에 대해 “2012년 당시 중앙지검 형사1부 검사로 이명박 대통령 일가의 내곡동 사저 부지 헐값 매입 사건을 맡았다. 당시 무혐의 결정했지만 대검의 무혐의 지시에 맞서면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일화가 미담으로 언론에 소개됐습니다. 내곡동 사저 사건 불기소 결정 당시, 저는 중앙지검에 근무하였기에 그때 이미 알고 있었지요. 무법천지 아수라장을 목도하며 얼마나 황망하고 참담했겠습니까. 검사선서문에서 요구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와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정함을 가진 검사들은 현실에 없었습니다.
수사팀이 무혐의 이유가 써지지 않는다고 버틴 걸 괘씸해하는 수뇌부의 조치로 인사 불이익을 받고, 결국 무혐의 결정했다며 정치검사로 욕도 먹는 수사팀을 바라보며, 검사들은 “버티려면 끝까지 버티고, 엎드리려면 잽싸게 엎드려야 한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 해 12월. 저는 과거사 재심사건 무죄구형 강행을 위해 공판검사 출입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저는 끝까지 버티기로 결심했었으니까요.
상명하복이 지고지순의 대명제인 양 하는 조직문화가 팽배한 검찰에서, 2013년 국감장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사건 수사 내압을 폭로하였던 윤석열 검찰총장이나 내곡동 사저 사건 한석리 차장 같은 검사조차 드물어 언론에서 강직한 검사로 소개되고 있고, 검찰의 초라한 현실에서 그게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기소해야 할 사건을 상사의 지시에 따라 불기소 결정한 검사는 더 이상 검사일 수 없지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불구속 기소할 때, 이종명 전 3차장,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을 기소유예해버렸던 윤 총장 등 위법하거나 부당한 내압에 결국 타협한 검사들, 이런 아수라장을 알고도 동조하거나, 못 본 척 외면하고 침묵하거나, 막지 못했던 저를 비롯한 모든 검사들이 과연 막중한 검찰권을 감당한 자격이 있을까요. 검찰에 검찰권을 위임한 주권자들 앞에 저는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과거사 재심사건 무죄구형 강행으로 중징계를 받고 징계취소소송을 진행하며, 당황했었지요. 검찰이 정치검찰임을 공연히 자백할 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요. 무죄이므로 무죄라 말하려는 제 입을 틀어막으려던 수뇌부의 위법한 지시를 변명하기 위해 “증거가 부족할 경우 무죄 판결을 해야 하는 법원과 달리, 검찰은 자기반성이 초래할 파급 효과, 검찰 내부 여론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장황하게 쓰인 준비서면을 읽으며 낯이 화끈거렸습니다. “준사법기관인 검사는 법관과 동일하게 오로지 법의 실현을 우선해야 한다”는 반박서면을 바로 제출했지만, 밀려드는 절망까지 밀어내지 못했습니다. 검사는 오로지 법과 원칙만을 고려해야 함에도, 검찰이 오랜 세월 정치적 고려를 하다 보니 이를 당연시하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서면으로 확인했으니까요. 암담했고, 여전히 암담합니다.
검찰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노무현정부 시절에는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다가, 검찰을 권력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이명박, 박근혜정부 시절에는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외압을 흔쾌히 내압으로 전환시켜 검찰권을 오남용하는 수뇌부의 변신은 검찰공화국을 사수하는 카멜레온의 보호색과 같습니다.
검사선서문에서 천명하는 바와 같이 검사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함,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함을 갖추어야 하고, 스스로에게 더 엄격해야 합니다. 그런 검사임을 전제로 주권자는 검찰권을 검찰에 부여했지요. 만약, 현실의 검사가 선서와 다르다면, 이런 검사들이 검찰권을 감당할 자격이 있을까요.
검찰은 정권교체 때마다 변신하며 권력의 총애를 받거나 여론의 환호를 받아 검찰권 사수에 성공하곤 했지요. 문재인정부가 출범한지 2년이 넘도록 개혁이 지지부진한 이유 역시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언제까지 속으시겠습니까. 이제라도 검찰의 화려한 분장술 너머의 진실을 직시하고 검찰권을 나누고 견제하는 개혁이 조속히 추진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임은정 울산지검 부장검사 경향 2019 9.29
사진: 한겨레
'조국'에서 '검찰개혁'으로…흐름을 바꾼 촛불의 힘
지난 28일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는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조차 놀랐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개혁대상으로 지목된 검찰과 여야 정치권, 청와대와 언론까지 이른 바 '조국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세력은 물론 전 국민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우려표명에도 '원칙대로' 수사하겠다며 흔들릴 기세가 아니었던 검찰은 검찰개혁에 대한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며 이례적으로 논평을 내기도 했다. 조국 장관에 대한 검찰 수사에 힘입어 조 장관과 정부, 여당에 대해 거센 공세를 가하던 야당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유한국당은 집회측과 여당에서 주장하는 2백만 인파는 부풀려진 것이라며, 경찰에서 집회참석인원을 추산하는 페르미추정법까지 동원해 반박했다.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등 야당 지도부는 '홍위병', '인민재판', '발악'같은 거친 표현을 쓰며 촛불집회를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태풍예보에도 불구하고 10월 3일로 예정된 광화문 집회를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거친 언사와 무리한 집회강행에서 야당의 다급한 심경이 읽힌다. 더구나 150만명이 모이는 집회를 추진하겠다며 참여인원을 언급한 것은, 부풀려진 것이라 비난했지만 촛불집회의 참여규모를 의식한 것이 분명하다.
반면 수세적인 입장이었던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은 촛불집회를 등에 업고 반격에 나섰다. 문 대통령은 법무부장관의 업무보고 자리에서 개혁의 주체는 검찰이 돼야 한다며,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검찰개혁안을 마련하라고 윤석열 총장에게 '지시'했다. 여당 역시 검찰개혁특위를 구성하는 등 움직임이 바빠졌다.
하지만, 촛불집회의 참여인원이 5만이던 2백만이던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국의 주도권을 누가 잡게 되는지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논의의 프레임이 '조국'에서 '검찰개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바꾼 주체는 다시 촛불을 치켜든 '국민'이라는 점이다.
여러 가지 결함에도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조국수호'를 외친 것은, 검찰개혁의 필요성이 검찰의 과잉수사를 통해 오히려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서초동에 모여든 자발적인 촛불은 단순히 검찰의 과잉수사에 대한 반발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반성 없이 정치공세만 일삼는 야당과 검찰에 기대 무분별한 기사를 남발하는 언론, 그리고 문재인 정권에 대한 비판도 함께 담겨 있다. 4.19과 6.29 그리고 박근혜를 탄핵한 주체 세력은 정치세력이 아니라 바로 국민들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CBS 노컷뉴스 문영기 논설실장 CBS 2019-09-30
이게 검찰이냐”
검찰이 조국 법무부 장관 일가에 대해 전격 수사에 착수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이제 조 장관 부인 정경심 교수에 대한 검찰 소환과 구속영장 청구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마침내 끝이 보이는 걸까. ‘조국 대전(大戰)’의 결말은 네 가지로 예측할 수 있다.
첫째, 법원이 정 교수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할 경우다. 검찰은 정 교수에 대해 표창장 위조혐의로 불구속기소한 상태지만, 이걸로는 약하다. 검찰은 여기에 사모펀드 개입 등 몇 가지 혐의를 얹어 영장을 청구할 것이 분명하다. 현직 법무장관 부인이 사상 처음 포토라인에 서고,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만으로도 여론은 출렁일 것이다. 여기에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면 여당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청와대에 사퇴 불가피론을 전할 수밖에 없다. 조 장관 사퇴 후폭풍은 청와대와 여당을 직격할 것이다. 문 대통령 지지율은 떨어지고 국정운영 동력도 힘을 잃게 된다. 지지율 35%가 무너지면 레임덕의 시작이다. 민주당은 조국을 엄호했던 친문계에 대한 비판이 커지면서 위기론, 책임론, 자성론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위기가 현실화되면 민주당은 내년 총선에서 제1당의 지위를 상실할 것이고, 문재인 정부는 사실상 식물정부가 된다.
둘째, 법원이 영장을 기각할 경우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검찰은 공적(公敵)이 되고, 윤석열 검찰총장은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시민들의 검찰개혁 요구는 최정점까지 끓어오를 것이다. 이번 수사의 목표는 단 한 가지, 조국의 장관 임명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윤석열은 대통령의 인사권과 국회의 검증 절차를 무력화하고 정치와 사회를 지휘하려 했다. 이를 위해 특수부 검사 20여명을 투입했는데, 이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12·12 및 5·18 쿠데타 수사와 맞먹는 규모였다. 검찰 최고 역량의 특수부 검사들은 자녀의 고교, 대학 시절 받은 표창장과 인턴증명서가 가짜인지를 한 달이 넘게 파헤쳤다. 검찰은 범죄와의 전쟁에서 조직폭력배 잡듯이 조국 일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건 정의를 위한 수사가 아니었다. 윤석열의 검찰은 청와대와 여당을 상대로 수차례 성명을 냈는데, 그중엔 “압수수색팀이 먹은 건 짜장면이 아니라 한식”이라는 것도 있었다. 마치 여야 간 주고받는 실시간 성명전과 다를 바 없다. 검찰은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기 위해 패스트트랙 수사도 혹독하게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 검찰은 30일 패스트트랙으로 고발된 자유한국당 의원 20명에게 소환을 통보했다.
셋째, 부인 영장이 기각되더라도 조 장관에 대한 사법처리가 남아 있다. 조 장관은 딸의 인턴확인서 위조(공문서 위조), 웅동학원 공사대금 허위소송(배임), 하드디스크 교체(증거인멸 교사)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정도 혐의로 영장을 청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조 장관은 혐의를 모두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소명하고 있다. 장관에 대한 영장 청구는 검찰도 부담이다. 기각될 경우 역풍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검찰은 영장 청구 단계를 생략하고 곧바로 불구속기소하는 쪽을 택할 수 있다. 조 장관은 “재판에서 무죄를 입증하겠다”고 맞설 것이다. ‘조국 사태’는 종결이 아니라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 총선을 앞두고 현직 법무장관이 형사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을 오가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부담이다. 문 대통령은 또 한번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넷째, 조 장관이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현직을 유지하는 경우다. 패스트트랙에 올려 있는 공수처 설치, 검경 수사권 조정 등 검찰개혁안은 속도를 낼 것이다. 검찰개혁안은 패스트트랙 숙려기간을 지난 뒤 11월 본회의 자동상정이 예고돼 있다. 조 장관은 특수부 축소 등 대대적인 내부 수술에 나설 것이다. 그는 검찰개혁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내부 개혁이 마무리되면 “내 역할은 여기까지”라며 사퇴할 수 있다. 여권으로선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관건은 여론의 흐름이다. 여론은 생물이다. 지난 주말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대규모 촛불이 일례다. 시민들은 지난 두 달간 조국 사태를 지켜보며 더 나은 나라로 가기 위해, 무엇을 바로잡아야 할지 스스로 학습하고 있었다. 불의한 권력을 무너뜨린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었고, 그 대상은 검찰로 바뀌었다. “이게 나라냐”를 물었던 시민들은 다시 “이게 검찰이냐”를 묻고 있다. 검찰은 선출된 권력 위에 선 대한민국 최고 권력처럼 행세했다. 2년 전 시민들은 국정농단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거둬들였다. 시민들은 이제 통제받지 않는 검찰로부터 권력을 회수하려 한다. 앞으로 어떤 시나리오가 전개되든 간에 검찰개혁의 방아쇠는 당겨졌다. 그건 조국 거취와 무관하다. 정치검찰이 주도해왔던 정국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바뀌고 있다. 박근혜가 몰랐듯, 검찰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 박래용 논설위원 경향 2019.09.30
신촌블루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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