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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a consistent mind

by 이성근 2020. 11. 28.

2020 1014

 

 

타이어의 못을 뽑고-복효근

멧새 소리- 백석

멀리서 빈다-나태주

등 뒤의 사랑- 오 인 태

풍경 달다- 정 호 승

겨울 사랑- 문 정 희

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걸어두고.-.. 이 외 수

사랑 박철

포옹 박용하

나에게 묻는다 박순호

고독 문정희

동백 문정희

전화- 마종기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 이외수

장마전선- 이외수

면회사절 정채봉

애인 -장석주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새벽 편지- 정호승

목수 -유용주

백치 애인-신달자

푸르른날- 서정주

아무르 강가에서 -박정대

얼굴- 박인환

 

 

 

타이어의 못을 뽑고-복효근

 

 

사랑했었노라고 그땐

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를 너를 찾아

고백하고도 싶었다

 

- 그것은 너나 나나의 가슴에서 못을 뽑아버리고자 하는 일

 

그러나 타이어에 박힌 못을 함부로

잡아 뽑아버리고서 알았다

빼는 그 순간 피식피식 바람이 새어 나가

차는 주저앉고 만다

 

사는 일이 더러 그렇다

가슴팍에 대못 몇 개 박아둔 채

정비소로 가든지 폐차장으로 가든지

갈 데까지는 가는 것

갈 때까지는 가야 하는 것

치유를 꿈꾸지 않는 것

꿈꾼대로 결국 치유되지 않을 것이므로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는 것

 

때론 대못이

대못 같은 것이

생이 새어나가지 않게 그러쥐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2020.9.28

 

멧새 소리- 백석

 

처마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멀리서 빈다-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2020.10.24

등 뒤의 사랑- 오 인 태

 

앞만 보며 걸어왔다.

걷다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의 하얀 등이

보였다. , 그는 내 등 뒤에서

얼마나 많은 날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 그 수척한 등줄기에

상수리나무였는지 혹은 자작나무였는지,

잎들의 그림자가 눈물 자국처럼 얼룩졌다.

내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사랑을 좇아

끝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앞만 보며

걸어올 때, 이따금 머리 위를 서늘하게

덮으며 내가 좇던 사랑의 환영으로

어른거렸던 그 어두운 그림자는

그의 슬픔의 그늘이었을까. 때때로

발목을 적시며 걸음을 무겁게 하던

그것은 그의 눈물이었을까.

그럴 때마다 모든 숲이

파르르 떨며 흐느끼던 그것은

무너지는 오열이었을까.

미안하다. 내 등 뒤의 사랑

끝내 내가 좇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이렇게 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보게 되지만

나는 달려가 차마 그대의

등을 돌려 세울 수가 없었다.

 

 

 

풍경 달다- 정 호 승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2020.10.26

 

겨울 사랑- 문 정 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2020.10.27

 

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걸어두고.-.. 이 외 수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뜻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 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 감싸 안으며

나지막히 그대 이름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2020.10.29

 

사랑 박철

 

나 죽도록

너를 사랑했건만,

죽지 않았네

 

내 사랑 고만큼

모자랐던 것이다

 

 

 

포옹 박용하

 

희미한 어둠 속 계단에 서서

그대 등 뒤로 손을 깍지 껴서 이승을 불 밝히면

심장 저 멀리 낮게 엎드린 내 눈물

그대 머리카락 적시러 지상으로 온다

 

2020.11.3

 

나에게 묻는다 박순호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일이

남겨져 있는지

평생을 두고 그리워할 사람이

기다릴 사람이 있는지

나에게 묻는다

 

오랑캐꽃 한 송이가 온 하늘을

떠받들고 있음을

아직도 믿고 있는지

웃는 얼굴 감추며

눈물꽃 꺾어 바칠 수 있는지

나에게 묻는다

 

2020.11.5

 

고독 문정희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 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동백 문정희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

2020.11.9

 

전화- 마종기

 

당신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당신 방의 책장을 지금 잘게 흔들고 있을 전화 종소리, 수화기를 오래 귀에 대고 많은 전화 소리가 당신 방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출에서 돌아와 문을 열 때, 내가 이 구석에서 보낸 모든 전화 소리가 당신에게 쏟아져서 그 입술 근처나 가슴 근처를 비벼대고 은근한 소리의 눈으로 당신을 밤새 지켜볼 수 있도록.

 

다시 전화를 겁니다.

신호가 가는 소리.

 

2020.11.10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 이외수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부는 날에는

바람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더라

 

꽃 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 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더러는 인생에도 겨울이 찾아와

일기장 갈피마다

눈이 내리고

참담한 사랑마저 소식이 두절되더라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침묵으로

세월의 깊은 강을 건너가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2020.11.20

 

장마전선- 이외수

 

흐린 날

누군가의 영혼이

내 관절 속에 들어와 울고 있다

내게서 버림받은 모든 것들은

내게서 아픔으로 못박히나니

이 세상 그늘진 어디쯤에서

누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가

저린 뼈로 저린 뼈로 울고 있는가

대숲 가득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2020.11.22

면회사절 정채봉

 

오지 마라.오지 마라.오지 마라.

내 이대로 너를 사모하게 하라.

내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면

나의 수의는 너의 사랑 한 벌이면 된다.

 

아직은 절망하기 싫다.

아직은 소유하고 싶다.

면회사절을 할 수 있는 것도

살고 싶기 때문이다.

 

꿈길밖에는

길이 없다고 하지 마라.

나는 지금 너에게로 가는

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2020.11.25

 

애인 -장석주

 

누가 지금

문 밖에서 울고 있는가

인적 뜸한 산 언덕 외로운 묘비처럼

누가 지금

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

 

그대 꿈은

처음 만난 남자와

오누이처럼 늙어 한 세상 동행하는 것

작고 소박한 꿈이었는데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어

한 번 엇갈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메마른 바위를 스쳐간

그대 고운 바람 결

그대 울며 어디를 가고 있는가

 

내 빈 가슴에 한 등 타오르는 추억만 걸어놓고

슬픈 날들과 기쁜 때를 지나서

어느 먼 산마을 보라빛 저녁

외롭고 황홀한 불빛으로 켜지는가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2020.11.27

 

새벽 편지- 정호승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목수 -유용주

 

좋은 목수는

못의 크기와 나무의 각도에 따라

가장 힘 받을 부분에 정확한 조준으로

못을 박는다

못은 박을 때보다 잘못 박아

뺄 때가 훨씬 힘이 든다

한번 구부러진 못은 다시 휘어지기 쉽고

펴서 다시 박는다 해도 부러져

다시 쓰기가 어렵다

진짜 목수는 단 일격에 나무의 급소를 강타해

다시는 금가지 않을 옹벽을 구축한다

굳센 사랑의 기둥을 세운다

목수는 물에도 못을 박을 수 있을까

나무의 살과 뼈,

향기까지 맡아볼 수 있을까

혈관 속에 흐르는 피냄새까지

정확하게 찌를 수 있을까

세상 모나고 거칠고 딱딱한 곳엔

늘 크고 단단한 못이 필요하다

좋은 목수는 그것들을 순하게 길들여

수평과 수직을 긋는다

수평과 수직이 만나는 화평의 마을에

한 채의 든든한 사랑의 집을 짓는다

 

2020.11.28

 

백치 애인-신달자

 

나에게는 백치애인이 있다

그 바보됨됨이가 얼마나 나를 슬프게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모른다

별볼일 없이 정말이지 우연히 저를 만날까봐서

길거리의 한 모퉁이를 지켜 서서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제 단골다방에서 다방 문이 열릴 때마다

불길 같은 애수의 눈물을 쏟고 있는지를 그는 모른다

또는 시장 속에서 행여 어떤 곳에서도

네가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착각 속에서

긴장된 얼굴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이 안타까움을 그는 모른다

 

밤이면 네게 줄 편지를 쓰고 또 쓰면서

결코 부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을

그는 모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는

아무것도 볼수없는 장님이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며

한 마디도 하지 않으니 그는 벙어리다.

바보애인아.

 

 

푸르른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아무르 강가에서 -박정대

 

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아나고 발 밑으로는

어둠이 조금씩 밀려와 채이고 있었습니다, 발 밑의 어둠

내 머리 위의 어둠, 내 늑골에 첩첩이 쌓여 있는 어둠

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나무로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대 떠난 강가에서

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다 보면 내 안의 돌멩이 하나

뜨겁게 달구어져 끝내는 내가 바라보는 어둠 속에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날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야광나무 꽃잎들만 하얗게 돋아나던 이 지상의 저녁

정암사 적멸보궁 같은 한 채의 추억을 간직한 채

나 오래도록 아무르 강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별빛을 향해 걷다가 어느덧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얼굴- 박인환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