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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살아내면서 읽는 시

by 이성근 2020. 11. 28.

 

 

명편- 복효근

-넥타이를 매면서

-어느 대나무의 고백

 

가을잎- 도 종 환

사랑의 물리학-김 인 육

고래를 기다리며 - 안 도 현

· 1-김 환 식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 현 종

내 아내에게- 이 원 규

바다 - 문무학

 

나도 그들처럼- 백무산

-잡초 하나

-삶의 거쳐

-그런 날이 있다

-운문행산

 

-슬프고 놀라운

보석- 박철

식구 박제영

그런 저녁 -박제영

나의 고금가곡 -박이화

아내의 브래지어 박영희

-접기로 한다

 

삼학년-박성우

휴전선- 박봉우

홍련암 그 뒤뜰- 박라연

문풍지 박두규

 

논산 백반집-문태준

-가재미

-빈집의 약속

-극빈

-맨발

식민지의 국어 시간 문병란

운동의 추억 도종환

마른 물고기처럼-나희덕

너구리 저택의 눈 내리는 밤- 장이지

앵두-고영민

남겨진 가을- 이재무

한계령 (寒溪嶺)- 정덕수

내 안의 외뿔소- 이은봉

겨울나무-장석주

내가 강에 가는 이유 -장옥관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장석주

수배전단을 보고- 윤성택

-FM 99.9

 

눈보라- 황지우

가을햇살-정 양

비스듬히- 최정례

빗살무늬 상처에 대한 보고서 - 우대식

가라피의 밤- 이상국

 

감탄사-이생진

-바다를 담을 그릇

-바다의 오후

-저 세상

-외로움

-술에 취한 바다

-수평선

-보고 싶은 것

 

고인돌- 염 창 권

자전거 도둑 신현정

갈대들 -신현정

귀면(鬼面)으로- 신중신

막내 삼촌- 신미균

가마솥에 대한 성찰- 복효근

그래도 아름답다- 박 순 호

 

 

 

명편- 복효근

 

채석강 암벽 한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옳다 눈이 참 밝구나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그녀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 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비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 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넥타이를 매면서- 복효근

 

넥타이를 목에 걸고 거울을 본다 살기 위해서는 기꺼이 끌려가겠다는 의지로 내가 나를 묶는다 한 그릇 밥을 위해 기꺼이 목을 꺾겠다는, 또한 누군가를 꼬여 넘기겠다는 의지 그래서 무엇을 그럴싸히 변명하겠다는 듯 넥타이는 달변의 긴 혓바닥을 닮았다 그것이 현란할수록 끌려가면서도 품위는 유지하겠다는 위장술, 혹은 저 밀림 속으로 누군가의 멱을 끌고 갔었던 따라서 진즉 교수대에 올랐어야 할 자가 제 목을 감추는 보호색일지도 모른다 잘 보라 또한 넥타이는 올가미를 닮았다 그것이 양말이 아니라서 목에 두르는 것은 아니리라 마지막이듯 넥타이를 조이며 묻는다 죽을 각오는 되어있는가

 

 

어느 대나무의 고백 복효근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하건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사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 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있는 것이다

 

 

가을잎- 도 종 환

 

가을 가고 찬바람 불어 하늘도 얼고

온 숲의 나무란 나무들 다 추위에 결박당해

하얗게 눈을 쓰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도

자세히 그 숲을 들여다보면

차마 떨구지 못한 몇 개의 가을잎 달고 선

나무가 있다 그 나무가 못 버린 나뭇잎처럼

사람들도 살면서 끝내 버리지 못하는

눈물겨운 기다림 같은 것 있다

겨울에도 겨우내 붙들고 선 그리움 같은 것 있다

 

아무도 푸른 잎으로 빛나던 시절을 기억해주지 않고

세상 계절도 이미 바뀌었으므로

지나간 일들을 당연히 잊었으리라 믿는 동안에도

푸르른 날들은 생의 마지막이 가기 전 꼭 다시 온다고

죽은 줄 알았던 가지에 잎이 돋고 꽃 피고

설령 그 꽃 다시 진다해도 살아있는 동안은

살아 있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 생도 짙어져 간다는 것을

믿는 나무들이 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내내 버리지 못하는 아픈 희망

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푸르른 그리움과 발끝 저리게 하는 기다림을.

 

사랑의 물리학-김 인 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고래를 기다리며 - 안 도 현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 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 1-김 환 식

 

입 안에 갇혀 있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들이

얼떨결에. 불쑥 뛰쳐나와

온 산을 다 태울 불씨가 되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유혹 때문에

덩달아 입술도 가벼워지는 순간

고삐 풀린 말들은

야생마처럼 허공을 질주하는 것이다

사소한 말 한 마디가

가장 소중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한생을 한 순간에 무너트릴 수도 있다

그런 말 한 마디도

내 입 속에 가둬놓고 살 때는

노예처럼 맘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지만

남의 귀로 불쑥 들어간 순간에는

나는 내 말의 노예로 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 현 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 때 그 일이

노다지 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 때 그 물건이

노다지 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 벙어리 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내 아내에게- 이 원 규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수천 번을 말해도 아깝지 않은 내 아내에게

어쩌다가 나는 사랑한단 말 한번 제대로 못하는

멋없는 남편으로 살아왔던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햇살이 고와서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는 내 아내는

그 햇살보다 더 빛나는 미소를 가지고 있다

커피를 마실 때 크림과 설탕을 듬뿍 넣는 그녀지만

가끔은 바짝 말린 장미 꽃잎가루만 넣은 독한 커피를

기꺼이 같이 마셔주는 내 생애 단 하나의 여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변치 말고 헤어지지 말고 살아가자던

젊은 날의 약속은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나 이제 아내에게 고백합니다

당신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살아서든 죽어서든 당신만을 사랑하고 지켜주겠노라고

 

 

바다 - 문무학

 

'바다''바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받아'주기 때문이다.

 

'괜찮다'

그 말 한마디로

어머닌 바다가 되었

 

 

 

나도 그들처럼- 백무산

 

나는 바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계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비의 말을 새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측량이 되기 전에는

 

나는 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해석이 되기 전에는

 

나는 대지의 말을 받아 적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동산이 되기 전에는

 

나는 숲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시계가 되기 전에는

 

이제 이들은 까닭 없이 심오해졌습니다

그들의 말은 난해하여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내가 측량된 다음 삶은 터무니없이

난해해졌습니다

 

내가 계산되기 전엔 바람의 이웃이었습니다

내가 해석되기 전엔 물과 별의 동무였습니다

그들과 말 놓고 살았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소용돌이였습니다

 

 

잡초 하나 -백무산

 

종일토록 나는 지리산

잡초를 뽑고 있었다

 

깜장 고무신에 벗은 발등이 까만 여자

거친 손 까만 얼굴에 눈 푸른 여자

 

고물 트럭을 몰고 와 절집 볼일을 보고는

가던 길에 날 보더니

 

다가와 묻는다

잘 되느냐고

 

내사 별일 없는 사람이지요, 하니

공부란 것이 원래 별일 없는 일이지요, 한다

 

여자는 고물 트럭에 시동을 걸었고

나는 벼랑에 잡초 하나 붙들고 있었다

 

 

 

삶의 거쳐 백무산

 

강이 어디에 있냐고 그가 물었다

길을 묻는가 해서 내가 되물었다

이리 쭉 가면 다리가 나오느냐고 다시 물었다

비닐 가방에 때 절은 작업복

거친 손등에 머리는 반백인 사내

 

늦가을 찬바람 안고 돌아서는 그를 불렀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모든 걸 잃은 사람에겐

사람의 체온이 종교다

 

저들의 탐욕과 음모와 속임수로

많은 사람들 찬 거리로 내몰렸지만

우린 또 기억한다 그 숨 막히던 날들

모두가 졸부가 되던 뻔뻔스럽던 날들

 

그 사람 앞에 앉아 나도 밥 한 그릇 받는다

어쩐지 목숨 비치는 국밥 한 그릇 받는다

강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가

목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가

 

 

그런 날이 있다 백무산

 

생각이 아뜩해지는 날이 있다

노동에 지친 몸을 누이고서도

창에 달빛이 들어서인지

잠 못 들어 뒤척이노라니

이불 더듬듯이 살아온 날들 더듬노라니

달빛처럼 실체도 없이 아뜩해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언젠가 아침 해 다시 못 볼 저녁에 누워

살아온 날들 계량이라도 할 건가

대차대조라도 할 건가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삶이란 실체 없는 말잔치였던가

내 노동은 비를 피할 기왓장 하나도 못되고

말로 지은 집 흔적도 없고

삶이란 외로움에 쫓긴 나머지

자신의 빈 그림자 밟기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운문행- 백무산

 

운문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네

시골 낡은 정류장 무싯날 오후

온다는 차는 좀체 오지 않고

칠이 벗겨진 낡은 의자에 노인 두엇 졸고

매표구 안에는 남녀 서넛이 화투 패를 돌리고

뿌연 창에 비친 오후 햇살이 졸음을 몰고 오네

노인 하나 들어와 시간표를 하염없이 보다 가고

개 한 마리 어슬렁 대합실을 돌고 가네

 

신문을 사서 볼까 책을 읽을까 하다 말고

이럴 땐 생애를 읽어두는 게 좋을 듯하네

 

낡은 시간이 다 빠져나간 정류장에

글씨 몇 자 드러낼 것 같네

 

이토록 한없이 늘어진 졸음 끝에

글귀들이 먼지를 털고 일어날 것 같네

 

이럴 땐 갈 길도 잊어버리고

하염없이 졸다 차도 다 놓쳐 버리고 싶네

운문이 졸음 끝에 매달려 기둥이 썩고 있네

 

 

슬프고 놀라운- 백무산

 

내가 가꾼 텃밭에 잡초만 무성하네

내가 심어 싹을 틔운 것은

그늘에서 햇빛도 받지 못하였네

 

잡초들만 꽃을 피워 가득하네

내가 가꾼 것은 꽃망울도 맺지 못하였네

 

내가 꿈꾸어 온 것은 어디 가고

낯선 것만 내 텃밭에 뿌리내렸네

 

어쩌다 이리 낯선 삶만 무성한가

 

그래도 저것은 모두 내 텃밭에 핀 꽃들

저 꽃들 모두 날 찾아온 꽃들

 

뱉고 나면 언제나 낯선 말처럼

삶은 낯설어 슬프고 놀라운 것

백무산 시인 약력 >

1955년 경북 영천 출생(본명 백봉석)

1984<민중시>1집에 지옥선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1988년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간행.

1989년 제1회 이산문학상 수상.

1990년 제2시집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간행.

(이 시집은 1988~1989년까지의 현대중공업 파업사건을 주제로 씀.)

1996년 제3시집 <인간의 시간> 간행.

1997년 제12회 만해문학상 수상.

1999년 제4시집 <길은 광야의 것이다> 간행.

2003년 제5시집 <초심> 간행.

2004년 제6시집 <길 밖의 길> 간행.

2007년 제6회 아름다운 작가상 수상.

2008년 제7시집 <거대한 일상> 간행.

2009년 제1회 임화문학상, 2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2012년 제8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 육필시선집 <그대 없이 저녁은 오고> 간행.

<노동해방문학> 편집위원, 노동운동가로 활동.

 

 

 

 

보석- 박철

 

싼 것이 편한 인생이 있다 팬티도 양말도 런닝구도

싼 것을 걸쳐야 맘이 편한 사람들이 있다

한 번 산 운동화를 사골 고듯 신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이 보석처럼 지키는 한 가지가 있다

그렇게 싼 것을 걸침으로써 그들에게

발렌스를 맞추고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소중한 무언가가 하나씩은 있다

지금 나의 남루 속에

천금같이 숨겨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청노새 눈망울처럼 절실한 그리움의 보석은 무엔가

무엔가 말이다

 

어제는 분명 긴 봄밤이었는데

오늘 잠을 깨니 단풍이 이는 가을 새벽이었다

짧은 꿈속에서 조용히 흔들리던 붉은 떨림

일장춘몽 속에 나 진정 세상 모두를 사랑하였으므로

내겐 세상 하나가 반짝이는 옥빛 구슬이었다

사랑은 덧없이 싼 가을 낙엽이었으나 나

오늘도 보석같은 단 하나의 사랑을 따라간다

 

 

 

식구 박제영

 

사납다 사납다 이런 개 처음 본다는 유기견도

엄마가 데려다가 사흘 밥을 주면 순하디순한 양이 되었다

 

시들시들 죽었다 싶어 내다버린 화초도

아버지가 가져다가 사흘 물을 주면 활짝 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남모르는 비결이 있을 줄 알았는데,

비결은 무슨, 짐승이고 식물이고 끼니 잘 챙겨 먹이면 돼 그러면 다 식구가 되는 겨

 

 

 

그런 저녁 -박제영

 

바람이 지나간 후에도 시누대가 저리 흔들립니다

새가 날아간 후에도 댓잎이 저리 흐느낍니다

내 생애 전부를 흔든 사람

내 생애 전부를 울린 사람

대숲 사이로 옛사랑이, 옛 문장이 스미어

붉은 노을로 번지는 그런 저녁이 있습니다

 

모처럼의 산책이라 시 한 수 읊은 것인데

그 사람이 누구냐고 도대체 옛사랑이 누구냐고

그 사람이 자기인 줄도 모르고

옛사랑이 자기인 줄도 모르고

노을 사이로 당신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지는

붉어도 좋은 그런 저녁이 있습니다

 

 

 

나의 고금가곡 -박이화

 

선 잘 만나 광 파는 인생도 있고 광 들고 피박 쓰는 인생도 있네.

그래서 세상만사 고도리판이라 했던가? 경거망동 말라고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다시 올 수 없다고 낙장불입이라 했다.

살다보면 희희낙락 쓰리고 부를 때도 있고 금상첨화로 싹쓸이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애써 돌던 판 나가리 될 때는 더 많고

죽어라 죽어라 패 안 풀리는 그런 날은 또 살상가상으로 독박마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봐라 삶이 어디 경전에만 있더냐?

고도리 십계명을 알고 나면 인생만사 이 손안에 있는 것을

. . . . . 삼 이 패 안에 있는 것을!

 

 

 

아내의 브래지어 박영희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 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을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존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접기로 한다 박영희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 순간,

햇살에 배겨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삼학년-박성우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휴전선 박봉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상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홍련암 그 뒤뜰- 박라연

 

죄 없는 이

아픔 없는 이 예 올 리 없고

한숨 먹고 자란 저처럼 눈부신가

 

참선 중()인 영혼 몇 되

계곡 물소리

새소리 아마 몇 섬쯤은 마셨겠다

 

홍련 수련 백련 가시연 개구리밥

물에 사는 저들은 왜 둥근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둥근

꽃잎 연잎 연뿌리 연밥 너희 육체에

이다지 외로워지는 것

연향 머금은 이슬을 마신 탓이다

오늘은 내 몸에 이슬 내린 날

몸속 이슬 저울에 생()의 무게 달았다

용케도 이슬 몇 잔 살았다

 

 

 

문풍지 박두규

 

폭풍한설에 풍경소리마저 얼어붙은 겨울 산사에서

온 밤을 통째로 우는 건 문풍지뿐이다.

문의 틈새를 살고 있으나

사실은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솜이불이 깔린 따뜻한 아랫목에 몸을 누이고

바람 타는 생을 마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멈추고 울음을 그쳐도

문풍지는 문풍지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

차라리 바람에 온몸을 치떠는 것이

몸부림치며 우는 것이, 살아있는 이승의 시간인 것을.

안이어서도 안 되고 밖이어서도 안 되는

안과 밖의 경계를 살아야 하는 문풍지.

 

 

 

논산 백반집-문태준

 

논산 백반집 여주인이 졸고 있었습니다

불룩한 배 위에 팔을 모은 채

고개를 천천히, 한없이 끄덕거리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며 왼팔을 긁고 있었습니다

고개가 뒤로 넘어가 이내

수양버들처럼 가지를 축 늘어뜨렸습니다

나붓나붓하게 흔들렸습니다

나는 값을 쳐 술잔 옆에 놔두고

숨소리가 쌔근대는 논산 백반집을 떠나왔습니다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별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는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극빈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식민지의 국어 시간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에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 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 선생,

내 곁에 뽐내고 앉아 있는 영어 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 시간이여.

 

* 히노마루: 일장기를 가리키는 일본말.

* 기타나이:'더러운 놈'이라는 뜻의 일본말.

* 센세이:'선생님'이라는 뜻의 일본말

 

 

 

운동의 추억 도종환

 

추억으로 운동을 이야기하는 사람 많다

운동한 기간보다

운동을 이야기하는 기간이 더 긴 사람이 있다

몸으로 부닥친 시간보다

말로 풀어놓은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운동

현재가 없는 운동을 현재로 끌어오는

그들의 공허함

 

 

 

마른 물고기처럼-나희덕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며야 하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울 네가 알았을 리 없다

밖이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여진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의 얼음 위에 앉아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 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莊子>大宗師에서 빌어옴.

"샘의 물이 다 마르면 고기들은 땅위에 함께 남게 된다.

그들은 서로 습기를 공급하기 위해 침을 뱉어주고 거품을 내어 서로를 적셔준다.

하지만 이것은 강이나 호수에 있을 때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 못하다."

 

 

 

너구리 저택의 눈 내리는 밤- 장이지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12월 바람, 눈은 내리는데,

푹푹 쌓이는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할아버지 혼신,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아버지, 수북한 털가죽에

손을 찔러 넣고 체념하지 못한 꿈을 노래하는데,

막걸리 한 잔씩을 걸치고 날생선을 뜯으며.

세상은 머리까지 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꼬대를 하는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고양이, 강아지, 수한무,

개그맨, 회사원, 꽃집 아가씨, 약국 아저씨, 농부,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두꺼비, 탐정, 손자놈, 전경 아우들,

썩은 굴참나무 밑 너구리 저택은 흥청흥청.

눈보라가 빗금을 그으며 떨어지는 12,

너구리 가죽 가득 눈꽃들을 받아주겠다고

손녀딸의 잠을 툴툴 털어 주고 계신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선생님, 우와, 하고 입을 쫙 벌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조직 폭력배, 동승, 소설가 김씨, 사실은 순진했던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국회의원 양반,

통속적인 활극을 연출하는 너구리 삼인조,

왁자지껄, 수한무를 찾는 숨이 넘어가는 만담,

모두가 즐거운 한때, 눈은 쌓이는데,

두런두런 유년을 찾아가는데, 종종 미끄러지는데,

청어를 굽는데, 날치 알을 먹으며 깔깔대는데,

하얀 눈은 아랫마을을 재우고는 재 너머 공동묘지에도 내리는데,

썩은 굴참나무 그림자에 빠져 죽은 수상한 허물들 위에도 내리는데,

누군가 죽은 친척 이야길 꺼내 시무룩해졌다가는,

다시 만월(滿月)의 잔이 도는데,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어떤 갠 날도 좋고,

음정 박자 무시한 한 오백 년도 좋은데, 엉덩이춤을 추는데,

정부도 없고 계급도 없고 빈부마저 없이

너구리 가죽끼리 따뜻한데,

썩은 굴참나무 밑 너구리 저택에도 눈은 시간처럼 쌓이는데,

작은 혁명의 밤이 하얗게, 하얗게 지워지는데,

바람의 말을 자꾸 헛들어도 좋은,

너구리 말로도 그대로 좋은 너구리 저택의 밤.

 

하얀 눈 위에 찍힌 너구리 발자국,

그리고

천 년만큼 깊이 내려간 쓸쓸함, 눈을 툭툭 털고 들어오는.

 

 

 

앵두-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 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부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남겨진 가을- 이재무

 

움켜쥔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한계령 (寒溪嶺)- 정덕수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메일지.

삼만 육천오백 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 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내리네

 

,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매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 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 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 1981103일 한계령에서 고향 오색을 보며 정덕규 시인이 쓴 이 시는 작곡자 하덕규가 극에 달한 고뇌를 표현한 곡으로 자살의 유혹을 느낀 상황에서 설악산 한계령에 올라 만들어낸 곡으로 알려 져 있다

 

 

 

내 안의 외뿔소- 이은봉

 

내 안에도 남들처럼 여러 놈의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몇 마리의 나, 몇 놈의 나, 몇 개의 나, 몇 포기의 나,

몇 자루의 나...... 심지어는 낯 뜨겁게 몇 새끼의

나까지도 내 안에 살고 있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내 안의 저 많은 나들 가운데 어느

놈이 진짜 나인지 알기 어려웠다.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나를

지켜볼 때마다 나는 내가 싫었다

 

내가 무슨 카멜레온이라도 되는가 함부로, 제멋대로,

뻔뻔하게, 아무데서나 얼굴을 바꾸게!

 

한편으로는 이렇게 많은 나를 내가 크게 미워하지 않으며

잘 살고 있는 것이 대견하기도 했다

 

대견하다니?

정작 대견한 것은 내 안의 또 다른 나 가운데 외뿔소라는

놈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외뿔을 들이밀며 제 생의 평원을 향해 불쑥불쑥 걸어 나가는

외뿔소라는 놈! 이놈은 인내심과 성실을 상표로 삼아 제게

주어진 역사를 향해 언제나 뚜벅뚜벅 잘도 걸어 나갔다

 

너무도 느려터진 이놈으로 하여 나는 내 안의 수많은 나와

크게 다투지 않으면서도 그런대로 잘 살 수 있었다

 

가끔은 어디서든 불쑥불쑥 제 주둥이를 열어젖히는 놈이 있어

마음이 상할 때도 있기는 했다

 

내 안의 나와 심하게 다투고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목에

동아줄을 걸고 싶어 안달복달하던 내가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나는 끝내 고통을 견디지 못해 흘쩍 이 세상에서 저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어 우울해하고는 했다

 

그러니 내가 어찌 내 안의 수많은 나와 잘 놀기 위해 서로를

다독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안의 저 싸가지 없는 나들을!

 

시간의 불수레를 타고 종종대며 달려가다

보면 더러는 꽤 괜찮은 나를 만날 때도 있기는 있다

 

 

 

겨울나무-장석주

 

잠시 들었다 가는 길입니다

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빈 벌판

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거름 속에

말없이 서있는

흠없는 혼

하나

당분간 폐업합니다 이 들끓는 영혼을

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

마음도 떼어 버리고

문패도 내렸습니다

그림자

하나

길게 끄을고

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

 

 

내가 강에 가는 이유 -장옥관

 

사람들은 묻는다, 왜 강에 가느냐고. 인적 드문 적막 강변에 무슨 볼일이

있느냐고. 아내가 싸 준 도시락 들고 집 나서면서 나도 물어본다. 나는

왜 강으로 가는가. 비둘기를 실은 낡은 바퀴 구슬프게 굴러가고 시절을

잊은 시집은 차 바닥에 뒹구는데 부지런한 버스가 부려놓은 씩씩한 공장

지나쳐 나는 왜 날마다 강으로 가는가. 반듯한 교과서 명랑한 군대, 나날의

구름 안색 저리 훤하건만 눈 흘기는 물총새 삐죽이는 자갈 비웃음 받으며

평일 대낮에 나는 왜 강으로 가는가. 곰곰이 생각해봐도 답 찾을 길 없을

때 풀숲 자갈밭에 퍼질고 앉아 밥이나 먹는다. 뜨겁게 끓어올랐다가 식은

쌀밥은 말없음표처럼 촘촘하고 흰 두부의 먹먹함 사이 비쩍 마른 멸치의

서러움을 키 큰 붉은여뀌 목 빼어 기웃거린다. 태풍 매미에 할퀸 제방은

벌건 살점을 드러내고 손발 다 잃은 버드나무 찢어진 비닐을 날개인 양

달고 서 있다. 거센 물살에 떠밀려와 눈뜬 채 제 살점 개미떼에게 떼어

주는 참붕어. 모로 일제히 쓰러진 갈대풀 속에는 누가 옮겨 놓았을까,

붉은 우단 의자 하나. 그 위에 내려온 하늘이 턱 괴고 앉아 물소리를

듣는다. 예나 제나 한결같은 모습은 쉼 없이 부닥쳐오는 입술에 귀

맡겨둔 물 속의 돌멩이. 어룽대는 물빛에 내 낯빛 비춰보고 저물녘

나는 말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와서는 말하리라. 돌멩이 얼굴에 꽃이

피었네, 능청부리면 짐짓 모르는 척 받아주는 아내의 몸에 찰박이는

물소리는 서럽게 내 몸에 울려 퍼지리라.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장석주

 

희망은 절망이 깊어 더 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을 때

온다.

연체료가 붙어서 날아드는 체납이자 독촉장처럼

절망은

물빠진 뻘밭 위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감은 눈 앞에

환히 떠오르는 현실의 확실성으로

온다.

절망은 어둑한 방에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서랍을 열어 서랍 속의 잡동사니를 뒤집어 털어내듯이

한없이 비운 머릿속으로

다시 잘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두 사람의 냉냉한 침묵과

옛날의 에 대한 희미한 기억처럼

희미하고 불투명하게 와서

빈 머릿속에 불을 켠다.

실업의 아버지가 지키는 썰렁한 소매가게

빈약한 물건들을

건방지게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백열전구처럼.

핏줄을 열어, 피를 쏟고

빈 핏줄에 도는 박하향처럼 환한

현기증으로,

환멸로,

굶은 저녁 밥냄새로,

뭉크 畵集의 움직임없는 여자처럼

카프카의 K처럼

와서,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주인을

달래서, 살고 싶게 만드는

절망은

 

 

수배전단을 보고- 윤성택

 

귀갓길에 현상수배 벽보를 보았다

얼마나 많은 곳에 그의 자유를 알려야 하는지

붉은 글씨로 잘못 든 생의 내력이 적혀 있다

어쩌다 저리 유명해진 삶을

지켜 봐달라는 것일까

어떤 부릅뜬 눈은

생경한 이곳의 나를 노려보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이름 석자로 수배중이다

납부 마감일로 독촉되는 고지서로

열자리 숫자로 배포된 전화번호로

포위망을 좁혀오는지도 모른다

 

칸 속의 얼굴은 하나 둘 붉은 동그라미로

검거되어 가는데, 나를 수해한 것들은

어디서 잠복중일까

 

무덤으로 연행되는 남은 날들,

그 어딘가

잡히지 않는 희망을

일망타진할 때까지

나는 매일 은신처로 귀가하는 것이다

 

 

 

FM 99.9 -윤성택

 

육십 촉 전구가 긴 하품처럼 흔들린다

목젖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골목 어귀 바람은

기댄 리어카 헛바퀴로 다이얼을 맞춘다

주파수를 잃은 낙엽이 쓸려간 후미진 끝

별들의 수신음이 가득하다 별과 별

이어보는 별자리는 전선으로 잇댄 회로,

때로 on표시처럼 스탠드 불빛 새어나온다

조금씩 뚜렷해지는 스테레오 같은 창들,

산다는 건 어쩌면 막막한 어둠 속에서

불빛이라는 채널을 갖는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시간 같은 음악을 듣는 이들은

서로를 잇대며 이룬 외로운 기지국이다

붉은 막대채널 같은 가로등이 길 위를

밀려가고 가끔 개 짖는 소리가 잡힌다

거미줄은 이제 스피커처럼 웅웅거린다

배달오토바이가 LP판 소릿골을 긁으며

좁은 골목을 돌아 나온다 불빛에 꽂혀진

사소한 소음도 이제는 모두 음악이다

 

 

눈보라- 황지우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 숲을 상봉으로 데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데, 아주아주 추운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 하는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때리는 눈보라속에서 흩어진 백만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가을햇살-정 양

 

산 모퉁이 빈집

바랭이풀이 토방까지

술 취한 여자처럼 쓰러져 있다

초가을 햇살이

툇마루에 걸터 앉는다

 

누가 보든 말든

두엄자리 옆 호박잎들은

넙죽넙죽 햇살을 받아 먹고

비탈길 칡넝쿨은 너풀너풀

그 햇살을 뒤적거리고

바랭이풀 함부로 쓰러진 텃밭에

팔랑거리는 메주콩잎이 띄엄띄엄 서서

연신 아는 체를 하고 있다

대숲에는 댓잎들이

보일 듯 말 듯 자디잘게

그 햇살을 쪼개 먹는데

 

해갈이하는 먹감나무는 온통

눈부시게 반짝거려서

드문드문 매달린 햇감을 감추고 있다

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이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낯을 붉히며

도망도 못 가고 두근거린다

 

 

 

비스듬히- 최정례

 

 

복숭아나무 똑바로 서 있는 거 못 봤다

꼭 비스듬히 서 있다

길가에서 길 안족으로 쓰러지는 척

구릉 아래쪽으로 기울어

몸 가누지 못하는 척

 

허공에 진분홍 풀어

지나가는 사람 걸어 넘어뜨리려고

 

안 속는다, 안 속아

 

몸은 이쪽에 머리는 저쪽에 풀어 두고

왜 서 있나

비틀비틀 무슨 생각하며 걸어 왔나

 

도화

길 박으로 꽃잎 다 흘리고

 

안 속는다, 안 속아

 

 

 

빗살무늬 상처에 대한 보고서 - 우대식

 

 

아내의 가슴에서

못 자국 두 개와 일곱 개 선명한 선이

발견되었다

 

못 자국 두 개의 출처는 내 분명히 알거니

빗살무늬 상처는 진정 알지 못한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 해변에서 보낸

나날들의 기록인가 생각해보았다

 

혹 주막에서 보낸 내 생을

일이 년 단위로 가슴 깊이 간직한 탓이라고도

생각해보았다

 

매일매일 생의 싸움터를 헤매인 것은

나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왜 저의 가슴에 저토록 선명한 상처의 보고서가 남아 있는가

 

나 바다에서 죽음을 꿈꾸었을때

그는 지상에서 죽어갔던 것

 

 

가라피의 밤- 이상국

 

 

가라피의 어둠은 짐승 같아서

외딴 곳에서 마주치면 서로 놀라기도 하고

서늘하고 퀴퀴한 냄새까지 난다

나는 그 옆구리에 누워 털을 뽑아보기도 하고

목덜미에 올라타보기도 하는데

이 산속에서는 그가 제왕이고

상당한 세월과 재산을 불야성에 바치고

어느날 앞이 캄캄해서야 나는

겨우 그의 버러지 같은 신하가 되었다

날마다 저녁 밥숟갈을 빼기 무섭게

산을 내려오는 시커먼 밤에게

구렁이처럼 친친 감겨 숨이 막히거나

커다란 젖통에 눌린 남자처럼 허우적거리면서도

나는 전깃불에 겁먹은 어둠들이 모여 사는

산 너머 후레자식 같은 세상을 생각하고는 했다

또 어떤 날은 산이 노루새끼처럼 낑낑거리는 바람에 나가보면

늙은 어둠이 수천 길 제 몸속의 벼랑에서 몸을 던지거나

햇어둠이 옻처럼 검은 피칠을 하고 태어나는 걸 보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들과 냇가에서 서로 몸을 씻어주기도 했다

나는 너무 밝은 세상에서 눈을 버렸고

생각과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어둠을 옷처럼 입고 다녔으므로

나도 나를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밤마다 어둠이 더운 고기를 삼키듯 나를 삼키면

그 큰 짐승 안에서 캄캄한 무지를 꿈꾸거나

내 속에 차오르는 어둠으로

나는 때로 반딧불이처럼 깜박거리며

가라피를 날아다니고는 했다

 

* 가라피 : 양양 오색에 있는 산골 마을

 

 

 

감탄사-이생진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 사투리로 말한다

그러다가도 해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더 쉬운

감탄사를 쓴다

손을 대면 화끈 달아오르는

감탄사를 쓴다

 

 

바다를 담을 그릇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바다의 오후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 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저 세상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외로움

 

날짐승도 혼자 살면

외로운 것

바다도 혼자 살기 싫어

퍽퍽 넘어지며 운다

 

큰산이 밤이 싫어

산짐승 불러오듯

넓은 바다도 밤이 싫어

이부자리를 차 내버린다

 

사슴이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밤을 피해가듯

바다도 물 속으로

물 속으로

밤을 피해간다

 

 

 

술에 취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수평선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을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든 파도에

귀를 찢기고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 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긴 적은 없었다

 

 

 

보고 싶은 것

 

모두 막혀 버렸구나

산은 물이라 막고

물은 산이라 막고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차라리 눈을 감자

눈을 감으면

보일 거다

떠나간 사람이

와있는 것처럼

보일 거다

 

알몸으로도

세월에 타지 않는

바다처럼 보일 거다

밤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태어나

바다로도 닳지 않는

진주로 살 거다

 

 

 

고인돌- 염 창 권

 

 

죽음이 너무나 가벼워서

날아가지 않게 하려고

돌로 눌러 두었다.

그의 귀가 너무 밝아

들억새 서걱이는 소리까지

뼈에 사무칠 것이므로

편안한 잠이 들도록

돌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대 기다리며

천년을 견딜 수 있겠는가

 

 

 

자전거 도둑 신현정

 

봄밤이 무르익다

누군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자전거를 슬쩍 타보고 싶은 거다

복사꽃과 달빛을 누비며 달리고 싶은 거다

자전거에 냉큼 올라가서는 핸들을 모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은빛 폐달을 신나게 밟아보는 거다

꽃나무를 사이사이 빠지며

달 모퉁이에서 핸들을 냅다 꺾기도 하면서

그리고 불현듯 급정거도 해보는 거다

공회전하다

자전거에 올라탄 채 공회전하다

뒷바퀴에 복사꽃 하르르 날리며

달빛 자르르 깔려들며

자르르 하르르.

 

 

 

갈대들 -신현정

 

갈대들이 아무래도 더 이상은 끌려가지 않을 작정으로

바람과 필사적으로 힘 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어쩌면 갈대는 이미 저 세상 바깥 어디까지 끌려갔다가

다시 대오를 정비했는지도 모르는 일

허허실실, 그것만도 아닌 것 같은.

 

 

 

귀면(鬼面)으로- 신중신

 

예사로운 들녘 어디서든

바닥을 타고 너풀대던 민들레

치솟은 꽃줄기 끝마다 노란 꽃을 매달았다.

설핏한 무렵엔

찢겨진 잎은 바닥에 더 드러눕고

꽃잎은 새침해진다.

벌이 찾아주지 않아 소조(蕭條)해 보이는 걸까

(이래서 이해는 오해의 불가결 조건이다)

사려 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꽃이 피기까지의 저간의 사정,

암내 콧김을 풍기기 시작한 것의 들썩거림, 그 들척지근함을

연결시켜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녀가 몇 번인가 자신의 배를 그에게 밀어붙였음으로*

불쾌함에 휩싸여 발버둥을 쳤다 하더라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때문에

교미 뒤에 모든 동물은 슬프다.**

 

꽃은 미상불

기억 저편의 흐리터분하고 칙칙한

성장기의 (아마도 우리 모두의) 애매한 무의미에 걸려 있다.

민들레꽃이 수줍음 타듯

때론 살쩍을 무심한 듯 걷어올리기도 하나

그 천연스러움은 희극이다.

 

* 카프카의 장편소설 <아메리카>에서.

**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막내 삼촌- 신미균

 

게시판에 붙어 있는

압핀을 본다

무얼 붙이고 있기는 했는데

그 무엇이 떨어져 나가자

할 일 없이 그저 숨죽이고

납작하게 붙어있다

아무런 무늬도 없고

평범하게 생긴 조그만 쇳조각이라

손톱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쉽게 떨어질 것 같다

 

회사가 문 닫았다고

식구들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아침마다 어디론가 출근했다가

들켜버린 막내 삼촌 마냥

겸연쩍게 씩 웃으며

그냥 힘없이

툭 떨어질 것 같다

 

나는 압핀이 잘 붙어있게

손으로 지그시

눌러주었다

 

 

가마솥에 대한 성찰- 복효근

 

어디까지가 삶인지

다 여문 참깨도 씹어보면 온통 비린내뿐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 순간에도 또 견뎌야 할 날들은 남아

 

참깨는 기름집 가마솥에 들어가 죽어서 비로소

제 몸을 참깨로 증명하는구나

 

그렇듯 죽음 너머까지가 참깨의 삶이라면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다

살과 피에서 향내가 날 때까지

어떻게 죽음까지를 삶으로 견디랴

 

세상의 가마솥 속에서

삶까지는 멀다

 

 

 

그래도 아름답다- 박 순 호

 

공원은 아이들을 기다리지 않는다

일터를 잃고 돈내기 윷판을 벌이는

대낮을 향해

윷짝을 던질 때마다

우울한 현실이 사라지듯 들썩들썩

공원 안이 술렁이고 있다

어찌 되었거나 한 세상

도 개 걸 윷 모오다아

그럭저럭 해가 떨어지고 나면

걱정이 어둠처럼 몰려와 발이 묶인 사람들

묶인 발을 질질 끌며 사라져 가는

가장들의 어깨 위에

배고픈 등불이 켜지고

근심이 머물다 간 곳에

잠들지 못하고 고개를 쳐드는 달

그래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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