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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괜찮은 詩

이 가을에 시 안 읽고 뭐하랴

by 이성근 2020. 9. 26.

 

 

산이 나를 기다린다-이생진

똥지게 -심호택

미투(美鬪)-임 보

어느 법-박철

병든 짐승-도종환

상 처-박두순

눈물 부처 -서정춘

담장이 넝쿨 -권대웅

지상의 방 한칸-김사인

무심한 세월 -김용택

세상에서 가장 슬픈 세 가지----루이스 이븐

선운사에서 민병도

홀로 무엇을 하리-홍관희

욕 심-공광규

가 을- 김종길

중년이라고 이러면 안 됩니까 / 이채

 

 

 

산이 나를 기다린다-이생진

 

오늘도 산에 갈래요?"

비오는 날, 아내 목소리도 젖었다.

 

가 봐야지 기다리니까"

누가 기다린다고"

 

새가 나무가 풀이 꽃이 바위가

비를 맞으며 기다리지"

 

그것들이 말이나 할 줄 아나요"

천만에, 말이야 당신보다 잘하지"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시인데

아내는 아직 나를 모른다

 

 

 

똥지게 -심호택

 

우리 어머니 나를 가르치며

잘못 가르친 것 한 가지

 

일꾼에게 궂은 일 시켜놓고

봐라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된다

똥지게 진다

 

 

 

미투(美鬪)-임 보

 

진달래가 벌에게

당했다고 하니

 

민들레도 나비에게

당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매화, 산수유,

복숭아, 살구, 자두 들이

 

떼를 지어 나두! 나두! 나두!’

아우성을 쳤다

 

드디어 벌과 나비들이

얼굴을 싸쥐고 은둔에 들어갔다

 

그래서 그해

과일나무들은 열매를

 

못 달고 세상은 깊은

흉년에 빠졌다

 

 

 

어느 법-박철

 

초파일 절밥을 먹으러 산에 올랐다

김포 오일장 끄트머리집에서 왔을 법한

 

산채들 수그러진 비빔밥을 앞에 두고

문지방 너머 엉덩이가 다북한 이에게

 

아주머니 하고 부르니 답이 없다

아주머니 하면 못 알아들어요

 

보살님 여기 저분 주이소

돌아보는 보살 얼굴이 얼마나 고운지

얼마나 화한지

 

법당엔 들지도 못하고 산을 내려온

그이 오신 날

 

내게 님이란 언제나

고작 이렇게 왔다 간다

 

 

 

병든 짐승-도종환

 

산짐승은 몸에 병이 들면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다

 

숲이 내려보내는 바람 소리에

귀를 세우고 제 혀로 상처를 핥으며

 

아픈 시간이 몸을 지나가길 기다린다.

나도 가만히 있자

 

 

 

상 처-박두순

 

나무 줄기를 따라가 보면

상처 없는 나무가 없다

 

그렇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눈보라에 시달리지 않은 나무가

어디 있겠는가

 

흔들린 만큼 시달린 만큼

높이와 깊이를 가지는 상처

 

상처를 믿고

맘놓고 새들이 집을 짓는다

 

상처를 믿고

꽃들이 밝게 마을을 이룬다

 

큰 상처일수록

큰 안식처가 된다

 

 

 

 

눈물 부처 -서정춘

 

비 내리네 이 저녁을

빈 깡통 두드리며

 

우리 집 단칸방에

깡통 거지 앉아 있네

 

빗물소리 한없이 받아주는

눈물 거지 앉아 있네

 

 

 

 

담장이 넝쿨 -권대웅

 

김과장이 담벼락에 붙어있다

이부장도 담벼락에 붙어있다

 

서상무도 권이사도 박대리도 한주임도

모두 담벼락에 붙어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밀리지 않으려고

 

납작 엎드려 사력을 다해

견뎌내는 저 손

 

때로 바람채찍이 손등을 때려도

무릎팍 가슴팍 깨져도

 

맨손으로 암벽을 타듯이

엉키고 밀어내고 파고들며

 

올라가는 저 생존력

모두가 그렇게 붙어 있는 것이다

 

이 건물 저 건물

이 빌딩 저 빌딩

수많은 담벼락에 빽빽하게 붙어

 

눈물나게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방 한칸-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무심한 세월 -김용택

 

세월이 참 징해야

은제 여름이 간지

 

가을이 온지 모르게

가고 와불제인

 

금세 또 손발 땡땡

얼어불 시한이 와불것제

 

아이고 날이 가는 것이

무섭다 무서워

 

어머니가 단풍 든

고운 앞산 보고 허신 말씀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세 가지----루이스 이븐

 

할 수도 있었는데

했어야 했는데

해야만 했는데

 

 

 

선운사에서 민병도

 

때늦은 꽃 맞이에 대웅전이 헛간이네

부처 보기 민망한 시자侍者마저 꽃구경 가고

절 마당 홀로 뒹구는 오금저린 풍경소리

 

무시로 생목 꺾어 투신하는 동백꽃 앞에

너도 나도 돌아앉아 왁자하던 말을 버리네

짓다 만 바람집 한 채 그마저도 버리네

 

비루한 과거 따윈 더 이상 묻지도 않네

저마다 집을 떠나 그리움에 닿을 동안

오던 길 돌려보내고 나도 잠시 헛간이네

 

 

 

홀로 무엇을 하리-홍관희

 

이 세상에 저 홀로 자랑스러운 거

무어 있으리

 

이 세상에 저 홀로 반짝이는

거 무어 있으리

 

흔들리는 풀잎 하나

저 홀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

 

서있는 돌멩이 하나

저 홀로 서있는 게 아니다

 

멀리 있는 그대여

행여

 

그대 홀로 이 세상에 서있다고 생각하거든

행여

 

그대 홀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우리 함께 어린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자

 

밥그릇 속의 밥알 하나

저 홀로 우리의 양식이 될 수 없고

 

사랑하는 대상도 없이

저 홀로 아름다운 사람 있을 수 없듯

 

그대의 꿈이 뿌리 뻗은 이 세상에

저 홀로 반짝이며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나니.

 

 

 

욕 심-공광규

 

뒤꼍 대추나무

약한 바람에 허리가 뚝 꺾였다

 

사람들이 지나며 아깝다고 혀를 찼다

가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나?

 

과거에 남 모를 깊은 상처가 있었나?

아니면 바람이 너무 드샜나?

 

그러나 나무 허리에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너무 많은 열매를

나무는 달고 있었다

 

 

 

가 을- 김종길

 

먼 산이 한결

가까이 다가선다.

 

사물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진다.

 

가을이다

아 내 삶이 맞는

또 한 번의 가을!

 

허나 더욱 성글어지는

내 머리칼

 

더욱 엷어지는 내 그림자

해가 많이 짧아졌다.

 

 

 

중년이라고 이러면 안 됩니까 / 이채

 

중년이라고 흔들리면 안 됩니까

마음조차 세월은 아닐진대

벌거벗은 바람에

흔들리는 마음을 어찌합니까

그리움 반

아쉬움 반

미련 반

희망 반

안아줄 사랑도 반은 남았습니다

중년이라고 꽃이 피면 안 됩니까

세월조차 마음은 아닐진대

뜨거운 가슴에

때깔 고운 꽃바람이 일렁입니다

그대 꽃에 머물다

가장 예쁜 빛깔을 보고

가장 고운 향기를 맡고

스스로 황홀하여 돌아서지 못합니다

바람도 부는 걸 잊은 채

단잠 든 그대 숲에

노닐다 가는데

뭉클한 가슴 볼을 부비며

오늘 밤 그대와 나

별로 뜨는 꿈을 꾸면 안 됩니까

중년이라고 이러면 안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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