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ㅡ박세현
독락당 -조정권
달빛ㅡ이시형
짝사랑-손종수
가을- 함민복
하늘- 홍해리
그물-홍해리
운주사에서- 허형만
방문객 ㅡ정현종
폐허 이후ㅡ도종환
오래되어야 좋다ㅡ오희창
새3ㅡ오세영
빗소리 듣는 동안ㅡ안도현
잘 지내나요,내인생ㅡ최갑수
그 꿈 다 잊으려고ㅡ정양
어머니 3 ㅡ백승호
경운기를 보내며 ㅡ박노해
폭풍의 노래ㅡ성춘복
왈ㅡ김상경
잡것동네ㅡ정연순
마지막 선물ㅡ김기순
거룩한 식사- 황지우
아픈 세상 - 황규관
가을 들녘에 서서- 홍해리
오동나무 사리- 홍해리
화신 花信- 홍사성
夏安居- 허형만
토굴(土窟)- 허형만
운주사 - 함민복
아내의 문장성분- 한성춘
독 -최윤희
폐가-최영철
본전 생각- 최영철
묵상 8- 천양희
저녁의 말을 들었다-천양희
눈보라- 차승호
대화- 차승호
노인네 길 다방엘 가신다- 차승호
민지의 꽃- 정희성
아버님 말씀- 정희성
아버지의 나이- 정호승
金洙暎 사진- 정호승
부치지 않은 편지- 정호승
보일러 만트라- 정일근
가을 억새- 정일근
가을 햇살- 정양
행복ㅡ박세현
오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뉴스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초창기 일화다
나는 그 시대에 감히
행복이라는 말을 적어 놓는다
독락당 -조정권
독락당 대월루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 버린 이.
달빛ㅡ이시형
해병대 야외 막사 화장실에 간 송모 중위가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충성!"위병소 앞 플래시 불빛 요란한 탈영이었다.수십년이 지난 후 안국동 기원에서 앙증맞도록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에쎄 담배를 끼운 그에게 물었다."아니 그때 왜 그런 거요?"그의 대답이 의외로 간단했다.달빛이 너무나 밝어서..."
짝사랑-손종수
바스락 말라 부서질 눈물이에요.
고백 따윈 오금도 펴지 못했죠.
외면조차 놓지 못하는 미련 한 잎.
가을-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하늘- 홍해리
그곳이 좋긴 좋은가 봐
가지 않는 사람 하나 없는 걸 보면,
가본 사람 아무도 없지만
한번 가면 돌아오는 이 하나 없네.
그물-홍해리
어떤 자는
던지고,
어떤 이는
걸리고,
어떤 놈은
빠져나가는,
세상이라는
허방.
운주사에서- 허형만
운주사에 오면
눕고 싶다
저 와불처럼 나도 누워서
한쪽 팔 턱에 괴고
세상사 지그시, 두 눈 깔고
그만큼만 보거나
아예 몸도 생각도
다 비운 채
허청허청 시린 별로
흐르거나.
방문객 ㅡ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ㅡ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폐허 이후ㅡ도종환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 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풀무더기에 덮여 메말라 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오래되어야 좋다ㅡ오희창
추억은
누룽지처럼 구수해야
오래 남는다
첫사랑은
봉숭아 물 곱게 들인
새끼손톱처럼 이뻐야
오래 남는다
첫정은
살짝 드러난
옥수수 같은 앞니
간장종지 같은 젖가슴이래야
더욱 오래 남는다
그리움은
더는 못 참는다고
앙가슴을 두들겨 패야
오래 남는다
장맛도
오래된 것이 좋듯
나의 인연도 우정도
오래 오래 이어지면
좋겠다.
새3ㅡ오세영
이정표도 없이 신호등도 없이
새들은 하늘을 난다
나침판도 없이 전조등도 없이 새들은
깜깜한 밤하늘을 난다
아아,새들은 하늘에
발자국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길만이 길이 아니고
이 세상 모든 것이 길임을 아는 자들은
누구도 어디에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봄바람처럼.
갈바람처럼.
빗소리 듣는 동안ㅡ안도현
1970년대 편물점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히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 듣는 동안.....
연못물은 젖이 불어
이 세상 들녘을 다 먹이고도 남았다네
미류나무 같은 내 장딴지에도 그냥,살이 올랐다네
잘 지내나요,내인생ㅡ최갑수
앓던 사랑니를 뽑았다
통증 하나쯤 몸에 지니고 사는 것도 괜찮으려니 했는데
그런 것도 사랑 아니겠냐고 여겼는데
뽑고 나니 마음이 그믐달처럼 적막하다
저녁에는 밥을 물에 말아 먹었다
밥알이 입속에서 헛돌았다
밥을 먹으며 슈베르트를 들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당신과 이별하던 때가 그랬다
당신은 늘 옆에 있을 거라고 여겼었다
붙들 수 없는 것들이 자꾸만 늘어 간다
내일도 아마 비슷한 하루가 될것이고----
잘 지내나요,내인생?
그 꿈 다 잊으려고ㅡ정양
밤마다 꿈을 꾸어도
아침마다 대개는 잊어버리고
어쩌다 한토막씩
말도 안되게 남아 있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나
잊어도 좋은 꿈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고,꿈꾸며 살 날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잊었나
사는 것이 잊어버리는 연습이라면
말도 안되게 남은 꿈들은
언제 다 잊을 것인가
그 꿈 다 잊으려고 아침마다
잠이 모자라나보다 아침마다
말도 안되는 몇토막 그리움으로
모자란 채로 나는 남는다.
어머니 3 ㅡ백승호
광주리 위가 더 높게
아픈 허리 희도록 열무 이고
산을 넘어 십 리 길 장에 가셨는데
다 팔기는 하셨는지
핼쓱한 바람 가지에 걸리고
어느새 쓸쓸한 초승달도 서러운데
"엄마 왜 안 와~?"
네 아우 배고파 칭얼거리고
연탄불 위에서 물은 끓고 있는데
오늘도 늦으시는 어머니
어머니가 오셔야 국수도 오는데
물 한 바가지 더 부으며 불러 보는, 어머니!
경운기를 보내며 ㅡ박노해
11월의 저물녘에
낡아빠진 경운기 앞에 돗자리를 깔고
우리 동네 김씨가 절을 하고 계신다
밭에서 딴 사과 네 알 감 다섯 개
막걸리와 고추장아찌 한 그릇을 차려놓고
조상님께 무릎 꿇듯 큰절을 하신다
나도 따라 절을 하고 막걸리를 마신다
23년을 고쳐 써 온 경운기 한 대
야가 그 긴 세월 열세 마지기 논밭을 다 갈고
그 많은 짐을 싣고 나랑 같이 늙어왔네 그려
덕분에 자식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고맙네 먼저 가소 고생 많이 하셨네
김씨는경운기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준 뒤
폐차장을 향해서 붉은 노을 속으로 떠나간다
폭풍의 노래ㅡ성춘복
바람이었네, 천둥이었네
가슴깊은 모래펄을 쓸고 가는
가을밤의 폭풍이었네
고목 사이 손을 뻗으면
새 한 마리
슬퍼도 울지 않는 둥지였네
빗소리였네, 어둠이었네
뱃머릴 흔드는
사나운 흐름이었네
곤히 잠들었던 내 출항지
한 방울의 파문으로도
가라앉으려 하네
바람은 없었네, 어둠은 없었네
썰물과 밀물에 들고 나는
나의 길도 없었네
왈ㅡ김상경
아버지라 불러 줄
자식이 있어야
누가 뭐래도
아버지가 되지요
그렇고 말고요
스승의 그림자
함부로 밟지 않는
제자가 있어야
누가 뭐래도
스승이 되지요
그렇고 그렇지요
생명을 다하여
따르는 백성이 있어야
누가 뭐래도
나라님 되지요
암! 그렇지 그렇지요
씨앗 없는 씨앗은
생명줄 없는 거지요
잡것동네ㅡ정연순
저만 옳고
다 남 탓이다
잡것들은
모로 돌아간 눈자위
아니면 말고,입이 험하다
잡것들은
익명의 무단 배설을 즐거워하며
음지에 서식한다
해충처럼
그것들을 흔적 없이
밀어버리기는 지난하고
연꽃을 피우기는 기적이라는데
머리속 연습만 골백번
만성이 된 환멸증으로
우울하고 피로한 노동을 계속한다
마지막 선물ㅡ김기순
임종 직전
의식이 가물가물한
남편의 귀에 대고
여보! 사랑해요!
알지요?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ㆍㆍㆍ
알아들었으면
눈 좀 떠봐요?
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내가 주는 마지막 고백이자 선물이었다.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 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아픈 세상 - 황규관
없는 사람에게는 늘 아픔이 있다
먹구름 잔뜩 품은 하늘이
언제나 천둥을 만들어내듯
지상의 눈동자에 휘두를 번개를 깊이 품고 있듯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랑도
아픔이거나 그 깊은 흉터다
허리에 침을 꽂고 엎드려 있는데
먹고살기도 힘든데 안 아픈 데가 없다는
중년 여자의 서글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픔을 낫겠다고 약도 먹고
침도 맞는 거겠지만
아픔은 항상 어디선가 샘솟는다
아니, 아파서 산다
청춘을 불로 지진 사랑이
식지 않은 분화구가 되어
더러는 아픔을 빛나게 증명하듯
사는 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아프고 아파서 아픔이 웃을 때까지
천천히 가는 길이다
가을 들녘에 서서- 홍해리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둬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오동나무 사리- 홍해리
삼각산 도선사 앞 산록
옛 암자터
백년 된 오동나무 성자가 서 계시다
한때는 까막딱따구리의 집이 되어 주던 나무,
속살로 새끼를 품어 기르던 때
그때가 한때였을까
지금은 사리로 서서 화엄의 경을 펼치고 있다
자연의 조화를 보여 주기 위해
자연의 질서를 설법하기 위해
죽어서도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온몸이 하나의 흰 뼈다
천년의 자연은 이런 것이라고, 그리고
천년의 순환을 보여 주기 위해
평생 단벌로 살다 가신 스님
죽어서도 환하게 웃고 계시다.
화신 花信- 홍사성
무금선원 뜰 앞 늙은 느티나무가
올해도 새순을 피워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인즉 별것은 없고
세월 밖에서는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말만 다를 뿐 똑같은 것이라는 말씀
그러니 가슴에 맺힌
결석(結石) 같은 것은 다 버리고
꽃도 보고 바람 소리도 들으며
쉬엄쉬엄 쉬면서 살다 가란다
夏安居- 허형만
나도 이젠 홀로다, 이 나이에.
언제라도 목숨 건 사랑 한번 있었던가.
저 미치게 푸르던 하늘도 눈에 묻고
살결 고운 강물도 귓속에 닫은 채
시간의 토굴 속에 가부좌 튼다.
내 살아온 긴 그림자 우련하거니,
누구를 만났던 기억은 더욱 가뭇하거니,
아직도 무슨 미련 그리도 짙어
설풋설풋 서러워지느냐, 울고 싶어지느냐,
알고보면 인연이란 참으로 깊은 우물과 같은 것,
평생을 누추한 내 안에서
우물을 파며 살아온 햇살이며 별들까지
목구멍에 손가락 쑤셔넣어 토해놓고
나도 이젠 홀로다, 이 나이에.
토굴(土窟)- 허형만
일찍이 다산 선생께서 이르시길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거든 행동하지 말라 하셨거니
그 말씀 새삼 뼈에 사무쳐
수도원으로 갈까 절집으로 갈까
아니면 그 옛날 교부들처럼 사막으로 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방법이 없더니
궁하면 통한다고 떠오른 묘수
바로 내 심장을 토굴로 삼기로 했지
이 심장 토굴에서 가부좌 틀고
눈 막고 귀 막고 입도 막기로 했지
운주사 - 함민복
비 내려
와불의 눈에 빗물 고인다
내 아픔이 아닌
세상의 아픔에 젖을 수 있어
내리는 비도
눈물이구나
그렇게, 다 그렇게 되어
세상에
눈물의 강 흐르면
그 위를
마음 배들
구름처럼 평화롭게
떠갈 수 있다는 설법인가
북두칠성 낮게 끌어내린 뜻도 알 듯한
아내의 문장성분- 한성춘
내 청혼을 도도하게 퇴짜 놓았던 아내는 감탄사
한 떨기 백합처럼 핀 결혼식장에서는 형용사였고
봄과 같이 살포시 다가 왔을 때는 부사였다
결국 그녀는 내 갈비뼈에서 파생된 파생어였다
싼 셋집을 찾아 구석구석 뒤지고
손때 묻은 세간 꾸려 이사 다닌 아내는 접속사였으며
가족들의 옷은 백화점에서 사고
당신의 옷은 늘 남대문시장에서 샀던 아내는 접미사였다
가족들에게는 항상 따뜻한 밥을 차리고
늘 식은 밥을 먹던 아내는 보조어간이었다
내가 숨소리만 한번 크게 내쉬어도
휘어진 등 더 휘어진 아내는 보어였으며
희망이 없는 싸움에 약 한 첩 쓰기에도 주저했던
아내는 관계대명사였다
평생 큰 소리 한번 치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한 아내는 소리 없는 명사엿으며
평생 누구엄마로 불린 인칭대명사였다
아, 그리운 나의 추상명사여
이제야 깨닫노니 당신은 나의 대명사입니다
독 -최윤희
속이 쓰려 복국을 먹는다
누가 독을 탔는지 속이 시원하다
독에는 가시가 있어
씹을 때 찌릿찌릿한 전기가 통한다
독은 살아있다는 증거
눈물이 흐를 때 비로소 독이 생긴다
새파란 고사리 줄기도 그렇고
감자 어린싹도 독기를 품고 자란다
치명적인 독은 달다
소싯적 네 가슴에 쏜 것도 독화살이고
사랑한다는 말에도 달콤한 독이 들었다
독은 독할수록 맛있다
서로 목을 걸기 때문이다
폐가-최영철
큰방 문설주 위에 걸어놓고 가버린 컬러 가족사진
햇볕에 색 바랜 흑백사진 같다
무슨 큰 난리처럼 휩쓸고 간 세파에 밀리다가
이 집 일가족은 외양간 여물통에도 숨고 디딜방아
절구통에도 숨고 뒷간 지푸라기에도 숨고 부엌
불쏘시개로도 숨고 뒤란 우물 수렁에도 숨고
그때마다 요령소리 나게 달리다 울긋불긋
혈색도 고우시던 얼굴 물 다 날아갔다
붉은색은 육이오에 훨 날아가고 노랑색은
오일육에 훌 날아가고 파랑색은 오일팔에 활 날아갔다
그을린 흙벽 중간 더러 날짜를 건너뛰며 동그라미 쳐진
새마을달력 동네 경조사 메모 위에서
의원님은 근엄한 치사를 하고 있다 땅속에서
갓 건져올린 미라처럼 눈이 움푹 파인 괘종시계 아래
반쯤 남은 대병 소주 아직 아릿하다 팔순 잔치
저마다 차려입은 알록달록 치마저고리 단물 다 빠져나간
액자 속 까만 눈과 하얀 이빨이 웃고 있다 배꼽마당
수북한 잡초 안으로 빨강 파랑 노랑은 숨고
까맣게 탄 머리칼과 하얗게 센 손가락이 비죽 나와 있다
본전 생각- 최영철
파장 무렵 집 근처 노점에서 산 호박잎
스무 장에 오백 원이다
호박씨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씨를 키운 흙의 노고는 적게 잡아 오백 원
해와 비와 바람의 노고도 적게 잡아 각각 오백 원
호박잎을 거둔 농부의 노고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그것을 파느라 저녁도 굶고 있는 노점 할머니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 원
그것을 씻고 다듬어 밥상에 올린 아내의 노고는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사들고 온 나의 노고도 오백 원
그것을 입에 다 넣으려고
호박 쌈을 먹는 내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묵상 8- 천양희
말하지 말아야 할 것 수없이 말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 수없이 걸어가고
버려선 안 될 것
수없이 버렸습니다
사랑 하나에도 목숨 걸지 못하고
진실 하나에도 깃발 들지 못하고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세상 원망했습니다
혀끝으로 수없이 맹세하며
혀끝으로 수없이 배반하며
혀끝으로 수없이
거짓을 보탰습니다
들리는 귀 보이는 눈 모두 닫고
비바람 피하며 교묘하게
이렇게 한세상 살았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십니까?
저녁의 말을 들었다-천양희
여자는 깊게 보고
남자는 멀리 본다는 말을 들었다
남자에게는 세계가 심장이고
여자에게는 심장이 세계라는 말을 들었다
여자는 약해졌을 때 음모를 꾸미고
남자는 강해졌을 때 음모를 꾸민다는 말을 들었다
여자는 남자보다 아홉 배는 더 사랑하고
다섯 배 더 운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저녁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였을 것이다
눈보라- 차승호
직빵이다
어디로 토껴야 하나?
잰걸음으로도 피할 곳 없다
씨벌늠으거, 이럴 거면
너무 착하게 살았다
대화- 차승호
넌 툭허먼 뭘 쓴다구 껍적거리더니
맨날 다 떨어진 삽자루 얘기냐?
아능 게 것밖에 읎유
것두 다 우려먹어 동냥 다닐 판이구먼
동냥 다녀, 워디루?
지름 묻은 공장으루? 넥타이 맨 은행으루?
말이 그렇다는 거지 동냥은 워디루 다니겄유
허기사, 사람이나 작물이나 뿌리 옶넌 게 있간디
넌 태생이 땅 파먹는 다니께
그냥 죽을 때까지 삽자루만 써야 되겄다
정 쓸 게 옶거든 삽으루 밥 퍼먹었다구 쓰던지
그러잖아도 어머니나 나나
삽으루 밥 퍼먹는다구 쓰구 있유
평생 신물나두 무녀리마냥
아능 게 것밖에 읎다구유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구유
노인네 길 다방엘 가신다- 차승호
길다방에 꿀단지라도 묻어 놓으셨나
아침 일찍 논두렁 휘휘 둘러보고
노인네 길다방엘 가신다. 길다방
마담이 이쁜지 미스 문양이 이쁜지
말본새도 신식으로바꾸고
말씀뿐인가 이력 때 아니면 입지도 않던 양복에
넥타이까지 접수시고
개화청년 스타일로 함덕 읍내 길다방엘 가신다
어머니랑 왜 다투셨유?
싸우긴 누가 싸워, 쪽 팔린 소리 좀 자그매*해라
국물 싱거운 원두커피 노른자 띄운 쌍화차
텔레비전 야구중계 걸쭉한 이바구
모두 다 신문물이니
길다방을 제물포쯤으로 여기시는 게 틀림없다
수시로 외식을 해가며
신문물 접하는데 짬뽕쯤은 일도 아나지
노인네 길다방에 가신다
마담 손금 봐주고 회춘 하실랑가
한 사나흘 휴가 내서 나락 떨어라이
나는 중요한 약속 때문에
안되는 중이나 알구
* 자그매 - 작작, 어지간이
민지의 꽃-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아버님 말씀- 정희성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무장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고
옥신각신 밀리다가 관악에서도
안암동에서도 신촌에서도 광주에서도
수백 명 학생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피 묻은 작업복으로 밤늦게
술취해 돌아온 너를 보고 애비는
말 못하고 문간에 서서 눈시울만 뜨겁구나
반갑고 서럽구나
평생을 발붙이고 살아온 터전에서
아들아 너를 보고 편하게 살라 하면
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
너더러 정직하게 살라 하면
애비같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
이 땅의 논리가 무서워서
애비는 입을 다물었다마는
이렇다 하게 사는 애비 친구들도
평생을 살붙이고 살아온 늙은 네 에미까지도
이젠 이 애비의 무능한 경제를
대놓고 비웃을 줄 알고 더 이상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구나
그렇다 아들아, 실패한 애비로서
다 늙어 여기저기 공사판을 기웃대며
자식새끼들 벌어 먹이느라 눈치 보는
이 땅의 가난한 백성으로서
그래도 나는 할 말은 해야겠다
아들아, 행여 가난에 주눅들지 말고
미운 놈 미워할 줄 알고
부디 네 불행을 운명으로 알지 마라
가난하고 떳떳하게 사는 이웃과
네가 언제나 한 몸임을 잊지 말고
그들이 네 나라임을 잊지 말아라
아직도 돌을 들고
피 흘리는 내 아들아
아버지의 나이- 정호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金洙暎 사진- 정호승
때묻은 런닝셔츠 바람으로
턱을 괴고
어디를 향해 있는지도 모르는
분명 열흘 곡기를 끊은 듯한
그 궹한
김수영의 눈빛을 평생 따라가다 보면
한순간 만난다
그 눈빛이 흘리는 눈물과
그 눈물이 이루는 강물과
그 강물의 따라 흐르는 나뭇잎 한 장을
만난다
그 나뭇잎 위에 말없이 앉아
어머니를 생각하는
한 마리 개미를 만난다
부치지 않은 편지- 정호승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믈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보일러 만트라- 정일근
우리집 나무 보일러는 전생이 티베트 라마승 같다
나무불 넣면 보일러는 염불부터 먼저 한다
하루는 옴마니반메훔을 중얼거리고
또 하루는 히말라야 만트라를 노래한다
그렇게 긴 염불 뒤에 사람 한숨을 쉬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벽 하나 사이에 사는 늙은 라마승에게
오체투지의 경배를 올린다, 그 해
히말라야 가우리 상카르산山*의 곰파에서 만나
호흡으로 생명을 나눠 준 그 늙은 라마승
낮은 숨소리와 똑같아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다
착하게 낡은 것에게는 영혼이 깃드는 법이니
내가 왔다는 동쪽이 궁금했던 늙은 라마승
잠시 몸을 바꾸어 우리집 나무 봉일러 속에 앉았는지
겨울밤 내내 나무 보일러의 만트라를 들으며
내 몸 안에서 터지는 설산 눈꽃에 아득해진다
* 높이 7,144m, 에베레스트 서쪽 약 58km 지점에 있는 산.
가을 억새- 정일근
- 경주 남산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이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에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가을 햇살- 정양
산 모퉁이 빈집
바랭이풀이 토방까지
술 취한 여자처럼 쓰러져 있다
초가을 햇살이
툇마루에 걸터 앉는다
누가 보든 말든
두엄자리 옆 호박잎들은
넙죽넙죽 햇살을 받아 먹고
비탈길 칡넝쿨은 너풀너풀
그 햇살을 뒤적거리고
바랭이풀 함부로 쓰러진 텃밭에
팔랑거리는 메주콩잎이 띄엄띄엄 서서
연신 아는 체를 하고 있다
대숲에는 댓잎들이
보일 듯 말 듯 자디잘게
그 햇살을 쪼개 먹는데
해갈이하는 먹감나무는 온통
눈부시게 반짝거려서
드문드문 매달린 햇감을 감추고 있다
드문드문 매달린 햇살이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낯을 붉히며
도망도 못 가고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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