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의, 그러나 인류사적 선거 한겨레 2020. 11.2
스웨덴에 상속세가 없는 이유 경향 2020. 11.3
끝나지 않은 가두방송 경향 2020.11.02.
돼지의 나라로부터 경향 2020.11.03.
콘크리트로는 빵을 만들 수 없다 경향 2020.11.03.
트럼프라는 재난, 또는 과제 |프레시안 2020.11.04
부동산정책 흔들리면 공든 탑 무너진다 경향 2020.11.04
"트럼프든 아니든, 전 세계는 이미 질렸다" 내일신문 2020 11.4
농업의 ‘탄소중립’을 이루려면 경향 2020 11.5
윤석열 대망론 대 추미애 커리어 하이 한겨레21 2020.11.6
국가채무 관련 기사가 뻔한 이유 미디어오늘 2020 11.7
디지털 유료 구독 늘어난 르몽드의 ‘독자 퍼스트’미디어오늘 2020 11.7
바이든 오다 경향 2020 11.7
‘좋아요’와 ‘하트’ 대신 무엇을 믿을 것인가 시사인 2020.11.08.
트럼프 패배에 절망한 일부 한국인들에게 매일경제 2020.11.08.
'복지국가가 된다'는 것은? |프레시안 2020.11.09.
피해, 피해자, ‘피해자 중심주의’ 경향 : 2020.11.11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한겨레 20.11.11
사람들이 집을 사는 솔직한 이유 한겨레 20.11.11
미 여론기관들, 이번에도 ‘소외된 유권자’ 놓쳐 시사인 20.11.11
남의 나라의, 그러나 인류사적 선거
미국 대선이 이번 주로 다가왔다. 거의 1년이나 걸리는 장기전인데다, 코로나 팬데믹의 혼란과 함께 달려온 시간이라 목전의 선거가 비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 우리가 남의 나라 선거에 관심을 넘어 초조함까지 느껴야 하느냐는 주변의 반응을 꽤 접한다. 미국은 하락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세계 최강이고, 국제정치경제의 규칙을 만들고 또 강제할 힘과 지위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평범하지만 큰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거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격변의 한가운데서 미국인들의 선택에 따라 많은 것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사는 시대가 변화의 중심이고, 그래서 가장 어려운 시기라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전문가의 관점으로도 대격변의 시기라고 단언할 수 있다. 2차대전 이후 이어온 미국 패권 질서는 정복을 일삼던 착취적인 유럽의 제국주의와 자칭 타칭 다르다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물론 이면에는 더 세련된 착취와 훨씬 침약기’가 깔려 있겠으나, 대다수 국가가 어느 정도의 자발성으로 민주주의, 시장경제, 팍스아메리카나의 질서를 기본 규범으로 수용해왔다.
그러나 절정은 곧 하락의 시작이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압도적 일극 체제를 완성했던 미국은 이후 10년의 전성기를 보낸 후 점차 균열을 드러냈다. 2001년 9·11 테러, 2008년 금융위기, 2016년 브렉시트 결정과 트럼프의 당선으로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국제협력의 대세가 꺾였다. 그리고 2019년 코로나는 급소를 강타했다. 트럼프의 미국은 자기가 만든 질서를 외면하고 규칙을 어겼다. 세계무역기구(WTO)와 세계보건기구(WHO)를 무력화시켰고, 유엔은 개점휴업이다. 금융위기 당시 G20으로 함께 위기에 대처했던 모습은 간데없고, 각자도생 속에 상호 책임전가에 여념이 없는 G0의 리더십 부재가 이어진다. ‘모두 안전하지 않으면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은 국제협력의 필요성을 일깨우지만, 세계는 오히려 파편화의 길을 걷고 있다.
미 대선이 한국에 큰 영향을 줄 것은 불문가지다. 동맹을 위해 바이든이 나은 선택이고, 북한 문제는 트럼프라는 것이 대체적 분석이다. 전자는 크게 이견이 없으나 후자는 두 사람 모두 장단점이 있다. 트럼프는 대북정책을 미국 외교의 우선순위에서 상당한 정도로 끌어올렸고, 재선되면 성과를 이룰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지만, 지난 2년의 실질 성과 부재의 이벤트 위주의 국면이 계속될 수도 있다. 바이든은 오바마 8년의 전략적 인내가 부활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대북정책을 새로 입안하고 대북라인을 구성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은 마이너스 요소지만, 캠프에 포진한 전문가들이 북한의 핵능력 증강을 일단 막은 후 비핵화로 가는 실용적 접근을 지지하는 것은 플러스 요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 문제에 관해서 한국이 운전석이라고 인정했던 1998년 클린턴처럼 민주당 정부는 한국의 충고에 귀 기울일 가능성이 크다.
누가 당선되든 우리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명분의 문제로만 머물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미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지렛대를 만들어 미국과도 국익을 위한 밀당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미 관계는 깊어져야 하지만, 한-미 군사동맹은 약화하는 것이 우리 국익에 낫다’는 말이나, ‘한-미 동맹이 아무리 중요해도 국익을 앞설 수 없다’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언급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자주성을 갖춘다면 미 대선 결과에 모든 것을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남의 나라 선거에 초조함을 느낀다고 비판할 필요도 없다. 그만큼 중요하다.
4년 전 세계 대다수 전문가의 예상이 빗나갔었다. 그러나 전문가는 여러 요소를 종합해서 어느 편이 상대적으로 더 가능성이 있는가를 예측할 뿐이다. 물론, 미국 바닥 정서와 ‘샤이 트럼프’의 존재를 인지해내지 못한 것은 반성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돌발변수를 너무 중시해서 종합적 예측을 다르게 할 수는 없다. 필자는 이번 대선 예측도 그런 방식으로 하려 한다. 한마디로 당시 힐러리 클린턴보다 현재 조 바이든의 승리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그런 예상은 미국을 위해, 세계를 위해 더 바람직해 보인다.
김준형 국립외교원장 한겨레 2020. 11.2
스웨덴에 상속세가 없는 이유
요즘 들어 스웨덴에 정말 상속세가 없느냐고 물어오는 이가 많다. 스웨덴은 높은 세율과 복지를 통해 강력한 부의 재분배를 이룬 나라로 알려져 있다. 소득분위가 마름모꼴로 중산층이 강하고 엄청난 부자나 찢어지게 가난한 인구가 적다. 한 사회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를 보면 스웨덴의 경우 세전 0.434에서 세후 0.275로 떨어진다. 지니계수가 0.3 이하이면 매우 평등한 사회라고 보는데 한국은 세전 0.406, 세후 0.355다. 세전과 세후 차이를 보면 소득재분배 정도를 알 수 있는데, 스웨덴의 경우 효과적으로 중산층을 강화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스웨덴에 특이하게도 상속세가 없다. 그러니 한국도 상속세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두 나라의 조세 징수 현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세금 징수율이 98%에 이르는 나라로 세금을 올리겠다는 공약을 내걸어도 당선이 되는 나라다. 대학시절 내 친구들은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국세청에 자발적으로 신고했다. 퀴즈대회에서 우승해 상금으로 50만크로나(약 8000만원)를 받은 후 30%를 세금으로 낸 친구에게 아깝지 않으냐 물으니 자신은 지금껏 사회가 제공하는 복지를 누리기만 했다며 이제 기여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세금은 복지국가의 엔진이라 탈세는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여긴다. 유명인사의 인터뷰를 보면 한결같이 사회가 제공한 인프라와 복지가 없었으면 자신의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답한다. 세금을 포탈하면 매국노 취급을 받는 사회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2017년 세계 67개국의 언론사가 참여해 전 세계 부자와 다국적기업의 조세도피 관련 문서를 분석한 ‘파라다이스 페이퍼스’를 공개했다. 보고서에는 한국인 232명과 이들이 세운 유령회사 거래 내역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은 중국, 러시아와 함께 조세포탈액이 큰 나라 중 하나로 분류됐는데 액수나 순위의 정확함은 따져봐야겠지만 한국 부자의 조세회피 내역이 상당할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다. 국세청 조세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재산을 상속받은 274만명 가운데 1.9%만이 상속세를 납부했다고 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공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속세 폐지를 말하기 전에 상속세가 제 역할을 해왔는지, 평소 탈세 없이 세금을 잘 냈는지 조사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럼 스웨덴은 왜 상속세를 폐지했을까? 전체 세액에서 상속세 비율이 0.3~2% 정도로 미미했기 때문이다. 스웨덴 중산층은 이미 소득의 상당 부분을 세금으로 납부하고, 노후엔 연금으로 생활이 보장되기에 부를 엄청나게 축적하는 사례가 많지 않다. 남길 재산이라고 해봐야 살던 집, 좀 더 여유가 있으면 요트 정도인데 과거 스웨덴의 상속세 최대 구간이 65%로 세금을 현금으로 내야 하니 평소 상당한 여윳돈을 비축하지 않은 이상 상속세를 내기 위해 상속받은 재산을 바로 팔거나 빚을 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중산층에서 상속세의 불합리성에 대해 지적하고 나온 것이다. 보수정권이 아닌 사민당 정권이 상속세 폐지를 추진한 이유다. 스웨덴의 상속세 폐지는 재벌이 아닌 평범한 다수를 위한 것이었다.
스웨덴에 상속세는 없지만 자본이득세가 있다. 상속받은 재산 자체에는 세금을 매기지 않지만 상속 재산을 처분하는 시점, 즉 상속받은 주식, 채권, 부동산 등을 매각하는 시점에 발생하는 이익에 과세하는 것으로 양도소득세와 비슷한 개념이다. 경제가 일정 규모 이상 발전한 여러 나라에서 도입하고 있는 제도다.
스웨덴은 한국과 비슷하게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라 몇 개의 기업가문이 스웨덴 경제를 구성한다. 안정적으로 소유권을 유지하고 경영권을 보장받게 된 이들 가문은 정부와 일종의 신사협약을 맺어 기업의 사회보험료를 높이고 사회환원을 활발히 해왔다. 스웨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40%를 소유한 발렌베리를 비롯한 주요 가문은 개인이 아닌 재단을 통해 재산을 소유하기 때문에 개별 자산은 몇 백억원 수준으로 한국의 재벌 2세에 비하면 약소하다. 스웨덴 재계의 문화를 선도하는 발렌베리 가문의 모토는 ‘스웨덴을 위해서’다. 소유 기업에서 발생한 수익 대부분이 재단으로 들어가는데 발렌베리재단은 스웨덴 학문의 후원자로 노벨상 연구 중에 발렌베리재단의 후원을 안 받은 경우가 없다고 할 정도다. 자연과학에 비해 연구기금이 부족한 인문사회 연구, 특히 평화, 분쟁조정, 사회통합 연구에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
세금은 최소한의 장치다. 상속세 폐지 여부는 제반 상황을 비슷하게 맞춘 후에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자 경향 2020. 11.3
끝나지 않은 가두방송
1980년 5월 광주에 바쳐진 소설 <소년이 온다>(2014)의 독일어판 출간을 앞두고 독일 취재팀이 내한했을 때 작가 한강은 그들과 국립5·18묘지를 방문했다. 무덤들 사이를 거니는 작가를 영상에 담고 싶다는 취재진에게 한강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중히 사양한다. “저는 그냥 한 권의 책을 쓴 것뿐인데요. 저에게는 그렇게 할 자격이 없어요.” 그러나 <소년이 온다>는 그저 ‘한 권의 책’만은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5·18 훼손 시도에 준엄한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큰일을 했다. 누적 판매량 40만부를 넘겼고 구매자의 80%는 2030 청년들이라고 한다. 이 책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1985년 이래로 교과서 역할을 해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개정판(2017)이 잇따라 나왔을 때는 쐐기를 박는 듯해 통쾌하기까지 했다.
.
이미 몇 번 읽은 <소년이 온다>를 예정된 행사 때문에 다시 읽었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는 제3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의 주제는 ‘아시아의 달: 아시아 문학 100년, 신화와 여성’이다. 한승원 위원장의 취지문에는 “아시아의 여성들이 어떻게 야만적인 폭력 속에서 사람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삶과 평화를 꿈꾸었는가”를 질문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이 질문이 ‘해방 정치의 주체로서의 여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 이해했다. <소년이 온다>의 영문판 제목인 ‘인간의 행위’(human acts)는 ‘인간’의 잔인함과 숭고함 모두를 깊이 성찰하겠다는 이 소설의 취지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소설을 ‘여성’의 서사로 읽는 것은 그 취지에 반하는 일이 될까? 그런 독법도 넉넉히 허용하는 면모가 이 소설에 있음을 이번에 알았다
주요 등장인물인 ‘정미’ ‘은숙’ ‘선주’ 등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항쟁 기간 중 실종된 스무 살 정미는 남동생을 공부시키려고 자신은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 노동자로 살던 중이었는데, 이는 그 시절 수많은 어린 누나들의 모습 그대로다. 내내 도청 민원실을 지키다 27일 진압 직전에 그곳을 떠난 고3 학생 은숙은 항쟁 이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내 상처 받으며 살아가야 했던 무명 여성들의 표상이다.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상무대로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블랙리스트 노동자인 선주는, 유신 말기의 노동운동과 5월 광주 사이의 연결고리로 존재한다. 소설 속에서 이들은 모두 스무 살 전후의 청년이다. 이 소설을 ‘항쟁 주체로서의 청년 여성 서사’라고 규정할 수도 있는 이유다.
물론 이것은 그저 소설적 상상이 아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광주, 여성>(2012), 그리고 올해 방송된 ‘SBS 스페셜 5·18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그녀의 이름은’의 곳곳에 여성 청년들의 헌신이 기록돼 있다. 5월19일 시작된 전옥주(당시 31세)와 차명숙(19세)의 가두방송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27일 새벽 3시50분, 도청 스피커에서 울려 나온 마지막 방송을 했던 박영순(21세)도 대학생이었다. 젊은 여성이었기에 추가적으로 감내해야 했던 오해와 고문은 40년간 그들을 아프게 했다. 그들은 제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지도, 항쟁 이력에 상응하는 사회적 대접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전옥주씨는 방송 때문에 희생자가 늘어났다고 자책하며 살았고, 박영순씨는 이름을 바꾼 채 숨어 살아야 했다.
역사가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이들도 있다. 다들 알다시피 ‘해방 광주’의 도청 민원실과 상무관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된 시신을 수습하는 고통스러운 일이 행해진 공간이었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최근 출간한 <5·18민주화운동>에서 묻는다. “그 많은 시신은 누가 수습했을까요? 시민들 중에서 주로 여고생들이 했다고 합니다. (중략) 대한민국 정부는 그 당시 광주에서 시신들을 수습한 여고생들한테 단 한번도 ‘고맙다’ ‘힘들었지?’ 같은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그 말을 꼭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뒤늦게 <소년이 온다>를 읽었는데, 그 이야기가 나와서 울게 되었다고 했다. 그 이름 없는 어린 여성들에게 한강은 ‘은숙’과 ‘선주’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리고 40년이 흘렀고, 나는 지금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라는 책을 앞에 두고 있다. 어린 여성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집단 성착취 사건인 N번방 범죄를 처음으로 취재하고 세상에 알린 ‘추적단 불꽃’이 쓴 책이다. ‘불꽃’의 구성원은 20대 초반의 두 여성이다. 이들이 지난 1년 동안 해낸 일은 1980년 5월의 저 가두방송을 생각하게 한다. 우연히 알게 된 범죄를 외면하지 못했고, 보복의 두려움을 감내해야 했으며, 피해자들의 참혹한 실상과 반복적으로 대면해야 했고, 여기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 외롭게 외쳐야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1980년 5월 도청에서 헌신한 청년 여성들에게 역사가 하지 못한 그 인사를 이번에는 해야 한다. 고맙다고, 그리고 당신들은 결코 불행해지면 안 된다고, 이제는 모두 함께하겠다고 말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경향 2020.11.02.
돼지의 나라로부터
내가 사는 곳은 본래 돼지의 땅이었다. 강원도 인제는 ‘기린 린’자에, ‘발자국 제’를 써서, ‘기린 발자국’이라는 이름. 기린은 신화에 나오는 상서로운 동물을 이른다. 이곳의 옛 지명 중에는 ‘돼지 저’자가 들어간 저족현도 있어, 그 상서로운 동물이 당연히 돼지일 것으로 짐작한다. 돼지 발자국이란 이름은 그만큼 돼지가 많은 땅이란 뜻이겠다. 그 돼지의 땅에 사람들이 스며들었을 것이고, 돼지는 산을 사람들과 나눴다. 그 옛날 이토록 깊은 산속까지 살려고 들어온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에게 집을 주고, 불을 주고, 먹고살게 해준 산은 어떤 산이었고, 돼지는 어떤 돼지였을 것인가? 신령하고 상서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 돼지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제 이름이 지명이 된 땅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길목마다 이런 플래카드가 붙어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발생, 입산 금지, 멧돼지 사체 발견 즉시 신고.” 그 앞에 설 때마다 저곳과 이곳을 나누는 결계 앞에 서는 기분이다. 이곳의 나는 안전한가? ‘포획 작전’이 있는 날은 인근 주민들에게 주의하라는 안내 문자가 온다. 멧돼지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총소리도 같이 들린다. “뭘 조심하란 말이야!” 불만을 토하는 노인들의 말에는 노기와 두려움이 함께 서려있다. 멧돼지 토벌작전은 옛날의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한양에서 온 높은 양반들이 사냥하다 사람을 돼지로 알고 죽였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떠도는 곳.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돼지의 죽음을 보고 있을까. 이곳은 또 다른 ‘접경지역’이다.
인간과 동물이 몸을 바꾸는 민중설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하다. 동물과 인간이 결혼을 하고 친족관계를 맺는 것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는 같은 땅에서 태어난 형제를 함부로 살해하지 못하도록 규율을 정한다. 귀족은 혈통으로 가계와 가문을 이루지만 민중의 가족은 언제나 ‘땅의 가족’이며 ‘동물 가족’이다. 숲의 가족들과 맺은 공유지의 협약은 지금도 산사람들에게 남아있다. 주는 것 이상으로 가져와선 안 된다. 산에서 욕심을 내다간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다. 증여의 규칙을 어기면 다음 해에 먹고살 것을 얻지 못한다. 다친 짐승은 도와주어라, 그러면 그가 반드시 너를 도와줄 것이다.
돼지가 죽어있다는 숲을 지날 때마다 나는 자꾸만 그 이야기들이 생각난다. 고대 그리스말로 ‘행복’을 뜻하는 ‘에우다이모니아’는 다이몬들이 평안한 상태를 말한다. 다이몬은 올림포스산에 사는 불사의 신들과는 다른 종류의 신들로, 인간의 거주지에 함께 사는 뭇 생명의 혼령들이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좋은(eu) 다이몬(daimon)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 돼지의 비명으로 가득 찼던 숲에 좋은 다이몬이 깃들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 연결되어 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다 함께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믿음이다.
동물신화로부터 우리는 인간과 동물이 맺을 수 있는 다른 관계를 상상할 수 있다. 그 속에는 현존하는 인간과 동물의 호혜적 관계뿐만 아니라 죽은 자와 산 자의 연대와 공존에 대한 민중적 감각이 남아 있다. 석탄과 석유도 죽은 몸들이 남긴 선물이었다. 자본의 손에 들어가 생명을 잡아먹는 기계의 동력이 되었을 뿐이다. 태양과 바람도 마찬가지다. 녹색이 자본주의의 동력이 되면 그때는 ‘착한 에너지’가 노동자를 잡아먹을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외부는 없다’는 주술에 너무 강력하게 포획되었다. 미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봉쇄를 해제하려면 무엇보다 ‘외부의 사유’가 필요하다. 대지의 상상력은 가장 급진적인 정치적 상상력이다. ‘동물정치’는 정치의 주체를 다시 재구성한다. 우리는 누구와 연대하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죽임의 자본권력에 저항하는 생명들의 연대 요청을 전한다.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경향 2020.11.03.
콘크리트로는 빵을 만들 수 없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타계했다. 반도체 신화와 정경유착이라는 빛과 그림자를 남기고 영면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물려받았다. 둘 다 짐일 것이다. 반도체 신화를 잘 발전시키는 것도,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 특히 그는 국정농단 사건과 불법합병 사건이라는 두 가지 소송에 직면해 있다. 외람되나 조금이라도 세상을 먼저 산 사람이 조언하자면 ‘자신의 허물을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라’는 것이다. 웅크리지 않고 더 멀리 뛸 수는 없다.
최근 대통령비서실에 대한 국감을 진행하던 국회 운영위원회가 핵심 관련자의 불출석으로 파행을 겪었다. 이번주에 재개된다고 하니 이번엔 제대로 해야 한다.
특히 김조원 전 민정수석의 금감원 청부감찰 내막, 라임과 관련하여 이강세 전 스타모빌리티 대표로부터 로비를 부탁받고 김상조 정책실장에게 연락했다는 의혹이 있는 강기정 전 청와대 정무수석 문제와 김정훈 전 행정관이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파견을 가게 된 경위, 옵티머스 사태와 관련되어 이진아 전 민정수석실 행정관이 청와대에 발탁된 경위와 영향력 행사 여부 등을 따져봐야 한다. 특히 라임과 옵티머스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진상규명에 적극 협조하라고 이미 청와대 비서실에 주문한 만큼 여당이 섣불리 그 말을 뒤집어서 대통령을 허풍쟁이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도규상 전 청와대 경제정책비서관이 최근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참으로 잘못된 일이다. 명시적 잘못과 암묵적 의혹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첫째, 도규상 전 비서관은 2005년 2월부터 2007년 7월까지 금융감독위원회 보험감독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삼성생명의 도둑 상장’을 지휘한 핵심 실무자였다.
삼성은 동방생명 인수 후 회사에 손실이 나면 보험계약자 돈으로 메꾸고 증자가 필요하면 자산 재평가로 계산상 이익을 만들어냈다. 특히 1990년의 자산재평가 차익 중 보험계약자 몫 878억원을 자본으로 계리하였다. 보험계약자가 주주로 기능한 셈이다. 따라서 삼성생명의 상장 차익 중 상당 부분은 계약자에게 배정하는 게 마땅했다. 그런데 당시 노무현 정부는 상장자문위원회란 조직을 앞세워 상장 차익을 계약자들에게 단 한 푼도 배분할 필요가 없다는 터무니없는 결정을 내렸다. 그 실무를 금감위 보험감독과가 했다.
둘째, 도 전 비서관은 2015년 3월부터 2016년 6월까지 금융위원회 금융서비스 국장으로 있으면서 인터넷전문은행 도입에 앞장섰다. 그러나 지난 20대 국회에서 김영주 의원실과 시민단체들이 밝혔듯이 이 과정은 탈법과 불법의 연속이었다. 은행업 감독규정을 보면, 케이뱅크의 최대주주인 우리은행의 재무건전성은 해당 업종의 평균치 이상이어야 했다. 하지만 케이뱅크 예비인가 심사 당시 우리은행의 직전 분기말 자기자본비율은 14%로 국내은행의 평균(14.08%)에 미달했다. 당연히 탈락이 마땅했으나 금융위원회는 법령해석자문위원회를 열어 김앤장이 써준 내용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서 ‘이상 무’를 외쳤다. 도 당시 국장은 2015년 11월29일 이 불법적 결과를 그대로 발표했다.
셋째, 도 전 비서관은 라임 사태와 관련하여 1심에서 징역 4년을 언도받은 김정훈 전 행정관을 경제수석실 파견자로 발탁한 장본인이라는 의혹을 받기도 한다. 당초 금감원이 청와대에 추천한 명단에는 김 전 행정관이 3순위자였는데 도 전 비서관이 1, 2 순위 추천자를 모두 제치고 김 전 행정관을 발탁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이번 국회 운영위 국감을 통해 그 진위 여부가 명확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서설이 길었다. 오늘 주제는 사실 세금이다. 기획재정부와 여당이 줄다리기 중인 세금 이슈는 두 가지다. 하나는 주식 양도차익에 대한 과세를 3억원까지 인하할 것인가 여부이고, 다른 하나는 공시지가 인상에 따라 재산세를 인하할 것인지다. 이 두 논점은 현행 제도에 대한 오해와 내년 보궐선거와 맞물려 진통을 겪고 있다.
우선 주식 양도차익 과세와 관련하여 대주주의 정의를 3억원으로 인하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선 ‘대주주’라는 용어가 불필요한 오해를 자아내고 있다. 여기서 대주주란 실제로 주식의 대량 보유를 통해 회사의 경영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그저 ‘주식 양도차익의 과세 대상’이란 뜻이다. 형식상의 대주주인가 아닌가에 따라 과세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어를 대주주 대신 ‘주식 양도차익 과세대상’으로 바꾸고, 양도차익에 대한 과세를 보편화하는 정책기조의 정당성을 잘 설명하는 게 중요하다.
둘째, 공시지가 인상에 따른 재산세 인하 문제에선 여당의 문제제기 자체가 잘못되었다. 무엇 때문에 공시지가를 현실화하는가? 세금을 더 매기기 위해서다. 그런데 공시지가는 올리면서 세금은 안 올리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선거를 앞둔 정략적 행동일 뿐이다. 금융자산과 부동산을 모두 합산하여 예외 없이 그 순자산에 대해 정확히 세금을 매기고, 만일 중산층의 세 부담을 경감시키고 싶다면 근로소득세를 깎아주는 방식이 더 낫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얼마 전 “비싼 집에 사는 게 죄냐?”고 일갈하면서 1가구 1주택의 세 부담은 완화하고 1가구 다주택에 중과하자고 주장했다. 나는 반대한다. 1가구 1주택과 다주택을 구분하는 순간 수많은 꼼수가 등장하게 되고 그만큼 조세회피라는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 비싼 집에 사는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자는 것이 아니라 세금을 매기자는 것이다.
자산 불평등도가 소득 불평등도보다 훨씬 심각하다. 또 소득은 생산에 참여하여 빵을 만든 대가이지만 콘크리트로는 빵을 만들 수 없다. 자산 과세를 강화하고 소득세를 인하해 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경향 2020.11.03.
트럼프라는 재난, 또는 과제
[창비 주간 논평] "'트럼프 팬데믹'이 삶을 지배하게 두지 마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금방이라도 미국 대선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시간이다. 순조롭지 않을 수 있고 나아가 순조롭고 말고 하는 차원을 넘는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경고도 있으나, 미국을 위해서나 우리 모두를 위해서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엄청난 사전 투표율이 나타내듯 미국인들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고 미국 바깥의 사람으로서도 이번 선거는 전보다 더 유의해서 지켜보게 된다. 이 선거가 낳을 정치적 파급과 국제적 영향, 한반도 상황과의 연관성에 관해 여러 진단이 나왔고,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부터 해당 분야의 구체적인 분석은 더 많이 쏟아질 것이다. 비전문가인 입장에서는 투표 직전까지 대다수 전문가들도 확답하길 마다했고 더구나 이제 조만간 밝혀질 결과를 예측하는 건 부질없다 못해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설사 곧 현실정치에서 이 인물을 진지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해도, 트럼프라는 미국의 재난 또는 과제를 새삼 되새길 이유는 남아 있다고 느낀다
그가 재난이라는 점은 실로 어마어마한 미국의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사망자 수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바이러스 그 자체를 제외하면 그토록 많은 시민들의 죽음과 고통에 무엇보다 그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날이 갱신되는 기록을 외면하며 한풀 꺾이고 있다느니, 모퉁이를 돌고 있다느니, 백신 개발이 코앞이라느니 하는 가짜뉴스로 2차 가해를 저질렀던 것이다. 이미 숱한 개탄을 촉발했지만, 그가 최상급 치료를 받고 병원에서 나온 다음 마스크를 벗어젖히며 의기양양하게 코로나바이러스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것이 삶을 지배하게 두지 말라고 역설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바다 건너 이쪽에서도 절로 한탄이 새어 나오며 적어도 내 나랏일이 아님에 안도하게 된다.
그 밖에도 그가 왜 미국의 재난인지 보여주는 증거는 차고 넘치며 그에 대한 폭로와 조롱과 비난도 숱하게 쌓여왔다. <신곡>을 쓴 단테에게 잠시 '빙의'하여 트럼프의 사후 운명에 어떤 지옥이 가장 어울릴지 짐짓 세심하게 논한 글마저 설득력 있다.(☞ 관련 기사 : <톰디스패치(TomDispatch)> 10월 22일 자 Ariel Dorfman 칼럼 'Trump's Divine Fate') 그러나 트럼프라는 재난으로 물질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며 토해낸 이 비판들에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너무 열렬히 몰입하게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직접 겪는 일이 아니어서, 너희도 고생 좀 해보라는 심사가 들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트럼프를 공격하는 일이 트럼프라는 과제를 해결하는 일과 같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트럼프가 일종의 재난이라면 우리 모두가 겪는 지금의 이 재난, 팬데믹과 비교해도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다. 팬데믹을 두고 흔히 더 큰 위기의 리허설이며 이제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트럼프 자신이 극구 묵살하는 이런 깨달음이야말로 트럼프를 바라볼 때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4년을 겪은 이후에도 그가 여전히 다음 임기를 시작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건 예사롭지 않은 사실이며 그를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리버럴한' 사람들이 무엇보다 참아내고 대면해야 하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를 두고 미국 내부에서는 '건강한 리버럴'을 선택함으로써 '건강한 보수'를 회복해야 하는 문제라는 말이 있고 그 논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탈을 정상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라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제껏 정상으로 여겨온 것이 팬데믹을 야기했듯, 트럼프를 낳은 것이 다름 아닌 '건강한' 리버럴의 세계였거니와 그는 '건강함'의 선을 당당히 위반함으로써 그 선이 얼마나 허약하며 어딘가에서 얼마나 간단히 무시되어왔는지 실증해주었다. 은밀한 잠식보다는 정직한 파괴가 낫다는 사람들, 트럼프보다 건강한 리버럴을 더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건강한 보수라는 것이 설사 가능하더라도 그것을 낳는 것은 '대체로' 또는 '비교적' 선을 지키는 건강한 리버럴일 리 없으며, 스스로의 건강함에 그나마 충실하려는 리버럴이라면 트럼프가 자신의 진정한 짝패임을 인정해야 한다.
일찍이 영국 작가 D. H. 로런스는 <미국고전문학 연구>라는 책을 통해 19세기 미국문학이 보여주는 미국의 '진실'을 독특하고도 탁월하게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왔고 그리하여 신대륙 미국에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다고 소리높여 외치는 미국인이야말로 '탈선한 유럽인'에 불과하기 쉽다. 하지만 이 탈선에도 그 나름의 역할이 있는바, 그것은 민주주의를 포함한 유럽의 낡은 삶이 갖는 '절반의 진실'을 교묘히 파괴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로런스의 논법을 빌려 말하면, 트럼프로 상징되는 '탈선한 미국인'은 멀쩡한 미국이 이미 탈선한 상태라는, 세계의 나머지는 이미 짐작하던 그 사실을 비로소 미국인들 스스로에게도 부인할 수 없도록 가시화해주었다.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산다는 것이 미국식 자유에 늘 따라붙는 이미지가 아니었나. 트럼프는 다만 그렇게 살자면 눈에 거슬리는 것을 (무엇보다 자유로이 소지한 총기를 사용하여) 쓸어버리는 일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 아닐까. '아무것도 너를 지배하게 두지 마라'에서 '팬데믹이 너의 삶을 지배하게 두지 마라'까지는 기껏 반 발짝의 거리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지만 더는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가 백악관에서 사라진다 한들 저절로 해소되지 않은 이 재난의 현상은 민주주의를 위해 질적으로 새로운 인식과 다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팬데믹이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 가리키는 것은 팬데믹이 부득이 만들어낸 변화, 그래서 팬데믹이 사라지는 순간 되돌려질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팬데믹이 다시 도래하지 않도록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일 것이다. '트럼프가 미국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무엇이 그럴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이 질문은 트럼프를 하나의 과제로 받아들이자는 주장과 다름없으며, 자유주의의 한계와 민주주의의 도약에 관련되는 한 이 과제 역시 미국인들에게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황정아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프레시안 2020.11.04
부동산정책 흔들리면 공든 탑 무너진다
지난여름 다주택자, 단기투자자, 초고가 주택에 대한 부동산 세부담 강화안, 대규모 주택공급대책이 발표되었고 주택임대차 3법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시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공시가격을 서서히 시가에 맞추겠다는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이 발표됨으로써 부동산시장 정상화를 위한 정부의 노력이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이에 최근 들어 이러한 정책들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신호들이 감지되고 있다. 서울지역 아파트 매물이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와 임대주택 안정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보도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한국주택금융공사의 전세대출 공적 보증 실적 등도 갱신청구권 행사가 시작된 9월에 5억원 이하 공적 보증 갱신율이 연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는 등 갱신계약이 늘었다고 한다. 부동산시장이 이대로 안정세로 접어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 세제 강화안이 올해 통과되더라도 내년 6월부터 적용하도록 되어 있고 현재 제시된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도 강력하지는 않아서 시장은 아직도 관망세를 보이며 흔들기에 나서고 있다.
최근은 전세가격 상승, 전세난이 주요 흔들기 포인트이다. 즉 임대차 계약을 연장해 기존 주택에 2년 더 눌러앉는 사례가 늘어난 것이 전세 잠김 현상을 부추겨 서울·수도권뿐 아니라 지방까지 전세 매물의 씨를 말리고 전셋값의 고공행진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이에 따르면 과거엔 2년이 되면 이사를 다녀야 했으나 지금은 이사를 가지 않을 수도 있게 되었는데, 그게 문제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세매물(공급)이 줄어든 만큼 전세를 찾아다니던 사람(수요)도 줄었는데, 이게 왜 전세난의 원인인가? 다른 주장을 보자. 전세난이 부동산정책 실패 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양도세 비과세 혜택의 거주요건을 강화한 것 때문에 집주인이 기존 세입자를 내보내고 입주를 하고자 해서 전세매물이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주인이 거주요건을 채우려고 자기 집으로 들어간다면 그 집주인이 살고 있던 원래 집은 임대주택으로 다시 시장에 나오는 것 아닌가? 이외에 정부가 3기 신도시 정책을 발표해서 대기 수요가 증가한 탓에 전세 수요는 늘고 있는 것이 전세난을 부추긴다고 주장하는데 설령 그렇더라도 이들이 살고 있는 집은 다시 시장에 풀릴 것이다.
따라서 최근의 부동산정책이 전세가격 상승의 주요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그동안 올랐던 매매가격이 이제야 반영되고 있다고 보는 게 더욱 타당하다. 실제로 2017년 매매가 대비 70%였던 전세가 비율이 그동안 매매가가 급등함에 따라 2020년 들어서는 57% 정도로 떨어졌다. 이렇게 벌어진 갭으로 인해 최근 전세가가 매매가를 따라잡느라고 전세가격이 상승하고 있다. 결국 전세가를 잡는 근본적인 정책은 매매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고, 그것은 현재 제시한 정책들을 흔들림 없이 추진함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이 진실임에도 투기세력은 어떻게든 정부정책을 흔들어 후퇴하게 만들고자 한다.
최근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 안 발표 후 세금폭탄이라는 또 다른 흔들기가 시도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시세에 한참 못 미치 는 공시가격 시세반영률(시세의 68%), 공시가격을 더 깎아주는 공정시장가액비율(공시가격의 60%) 때문에 과표(시세의 48%)가 매우 작아져 실제 내는 재산세는 매우 적다. 시세 9억원 아파트라면 현재 연간 84만원의 재산세만을 낼 뿐이다. 발표된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 1안에 따르면 2030년까지 현실화율이 90%가 될 것이므로 세금은 131만원이 된다. 공시가격 현실화로 세금폭탄이 떨어진다는데 시세 9억원짜리 집이 10년 후 47만원을 더 내는 셈이다. 이게 어떻게 세금폭탄인가?
이번 정부 들어 집값을 잡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정권 초반 부동산시장 안정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못한 것이다. 지난여름이 되어서야 부동산정책이 다주택자, 단기투자자 등 소수 투기세력을 대상으로 강화되었다. 이 정도도 유지하지 못한다면 정말 답이 없다. 전세난도 매매가격 안정화가 근본적인 해결책임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임대차 3법을 지켜가야 할 것이다. 전·월세 상한제에도 불구하고 갱신 시 보증금을 더 높게 요구하는 일부 집주인들에게는 강력하게 대응하고 내년 6월 전·월세 신고제가 시행되면 전·월세 시세도 투명하게 공개되므로 신규 계약에 대한 전·월세 상한제나 표준임대료 도입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몇 번이든 정부대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정세은 충남대 교수 경향 2020.11.04
"트럼프든 아니든, 전 세계는 이미 질렸다"
파키스탄계 영국 작가 하니프, 영국 가디언 칼럼
"누가 대통령 되든 전 세계를 악으로 삼아 싸워"
전 세계인의 이목이 미 대선 결과에 쏠려 있다. 그동안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이냐, 조 바이든의 입성이냐를 놓고 예측과 분석이 난무했다. 각국은 결과에 따른 이해득실을 놓고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나 바이든 누가 당선되든 전 세계 시민들이 미국 대통령들로부터 받아온 고통은 여전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파키스탄계 영국 작가 모하메드 하니프(사진)는 3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지에 기고한 '트럼프든 아니든, 전 세계는 이미 질렸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미국인들은 미국의 영혼을 구할 인물을 선택하라. 대신 세계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그를 국제 무대에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촉구했다.
하니프는 세계 3대 문학상인 영국 부커상 후보에 오른 인물이다. 다음은 칼럼의 요약.
미국인 친구들은 자국의 현직 대통령을 걱정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아프다고, 파시스트라고, 미국의 참된 대통령이 되기엔 터무니없는 인물이었다고. 하지만 미국 대통령들이 장악한 세계에서 오랫동안 고통 받아온 시민으로서, 나는 그들에게 '트럼프는 전임 대통령들과 비교해 아주 많이 다르지는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나와 전 세계 사람들은 미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난 반세기 고통을 겪고 있다. 미국인들은 "내가 트럼프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연대의 차원에서 누군가가 "맞는 이야기다. 우리 역시 트럼프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덧붙여야 할 사실이 있다. 미국의 전임 대통령들이 트럼프보다 더 나은 화법을 구사하고 더 세련된 의상을 입고, 트럼프처럼 교활한 탈세를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전 세계를 무대로 깡패짓(bullying)을 하는 건 언제나 미 대통령의 임무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언제나 약자를 괴롭히는 깡패(bully)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를 키웠고 그에게 세계 무대에 나가 대통령의 임무를 완수하라고, 전 세계 모든 이를 악으로 삼아 싸우라고 부추겼다. 동시에 그들은 대통령이 자국내에선 좋은 사람이기를, 추수감사절 칠면조에 사면을 베풀고 미국의 위대한 꿈을 이야기하고 양질의 보건의료를 제공하는 사람이기를 기대했다.
해외에서 미국 대통령들은 재앙을 일으켰다.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하는 이름을 가진 역사적 장소들을 침략하고 파괴했다. 전 세계 독재자들을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로 불렀다. 이들이 맘에 안 들 경우 더욱 피에 굶주린 잔혹한 이들을 골라 그들을 대체하도록 했다. 트럼프는 그같은 깡패짓을 자국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
어린아이였을 때 내가 접한 첫 번째 미국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이었다. 그는 1970년대 초 방글라데시(옛 동파키스탄)에서 벌어진 대량학살과 군부쿠데타를 방치하거나 은밀히 지원했다.
후임 지미 카터는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깡패짓을 즐기는 게 아니라 마지못해 하는 듯 보였다. 카터에게서 '인권'(humal rights)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1979년 내가 나고 자란 파키스탄에선 군부독재자 지아 울 하크가 선거로 선출된 총리 줄피카르 부토를 반란 혐의로 교수형에 처했다. 카터는 지아 울 하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백만달러를 건넸다. 그는 '껌값'(peanuts)이라며 거부했다. 이 때문에 카터는 한때 '땅콩 농부'(peanut farmer)라는 농담이 돌았다.
그리고 점잔빼는 로널드 레이건이 등장했다. 그는 전 세계에 카우보이식 정의를 펼치겠다고 다짐했다. 레이건은 스스로를 '자유세계의 리더'로 불렀다. 전 세계에 자유를 퍼뜨리겠다며 칠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파키스탄 지아 울 하크와 같은 독재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지원했다.
레이건은 아프가니스탄 무장 게릴라 조직인 무자헤딘에게도 자금을 지원했다. 미국의 검은 돈으로 자란 3세대 어린 아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아프간에서 총을 들고 싸우며 협상을 하고 있다. 아프간의 4세대는 난민촌에서 자란다. 아이의 어머니들은 미국과의 평화회담이 마무리된다 해도 안심하고 살 나라를 갖게 될지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아버지 부시는 이라크 바그다드의 지평선을 각종 화기의 불꽃으로 물들였다. 그는 한쪽 편을 해방한다며 다른 폭군 지도자로부터 돈을 받았다. 둘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이라크 반군에 자금을 대려 노력했다. 그리고 이들을 제3의 폭군 사담 후세인의 처분에 맡기고 무책임하게 떠났다.
빌 클린턴은 트럼프와 정반대로, 상냥하고 매력 넘치는 인물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는 모니카 르윈스키의 부적절한 관계로 탄핵 위기에 몰렸을 때,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아프간과 수단에 순항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인은 아들 부시를 사랑했을 것이다. 두 번이나 그를 뽑았다. 부시는 아프간과의 전쟁에 착수하는 게 미국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전임자들이 그를 위해 남긴 전쟁터가 없었다. 타깃을 찾던 차에 이라크가 눈에 들었다. 구실을 조작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서 승리를 선언했다. 수백만명이 죽도록 내버려둔 채 자국으로 돌아갔다. 관타나모와 아부 그라이브에 수용소를 만들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다며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자국내에서 온화한 매너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 대통령들도 세계 무대에선 대량 학살자였다. 그게 미 대통령직에 어울리는 임무였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는 최근 들어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 중 한 명이다. 실제 서민들과도 맥주 한잔 나눌 수 있으리라 상상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학살을 알고리즘과 드론의 손에 넘겼다. 그의 외교정책은 리비아를 전멸시켰다. 2009년 오바마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런 그의 임기 말, 미국은 전 세계 곳곳에서 매일 시간당 3발의 폭탄을 투하했다.
미국인은 세계 최고 연예인들이다. 하지만 쉽사리 지루해 한다. 그리고 허구적인 천진난만함으로 전 세계를 구하겠다며 곳곳을 돌아다닌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이 아닌 파괴다.
트럼프는 미국을 꼴사납게 만들었다. 백인 중심으로 만들었다. 국민 서로 악담을 퍼붓게 만들었다. 국민을 행동이 방정치 못한, 탐욕에 찌든 사람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 세계 많은 이들은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더라도 미국이 바뀌지 않을 것으로, 약간의 분장을 하는 정도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 필요한 건 날씬한 마스코트다. 옷을 더 잘 입는 누군가이다. 대놓고 인종차별할 정도의 무뢰한은 아닌 누군가이다. 미국 대통령들은 직원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보스다. 하지만 집에 와서는 행복과 사랑을 전파하는 좋은 사람이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트럼프를 처리하라. 문을 잠그고 열쇠를 던져 버려라. 미국의 영혼을 구할 것이라 생각하는 인물을 선택하라. 대신 전 세계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그를 국제무대에 내보내지는 말아달라.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내일신문 2020 11.4
농업의 ‘탄소중립’을 이루려면
문재인 대통령이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했다. 온실가스 순배출량 제로(넷제로)로 가자는 것이다. 그레타 툰베리는 “행동이 말보다 훨씬 의미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치적 공방이 공론장을 가득 뒤덮고 있다. 한국은 과연 ‘행동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2020년 정부 예산 편성에서 중요한 대목이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새로운 농업정책의 비전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19년 4월에야 농어촌농어업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2020년 공익형 직접지불제 예산으로 2조4000억원이 편성되었다. 그간 직접지불제는 쌀농사에 편중되었다. 이제 공익적 기능에 비중을 두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9월 정부는 국회에 ‘2020~2024년 국가운용재정계획’을 제출하면서 공익형 직불금 예산을 그대로 5년간 유지한다는 안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농업계에서는 예산 증액안이 없다는 점에서 농정개혁의 후퇴라고 비판했다. 정책기획위원회 농정개혁TF팀은 직불제 예산 규모를 2022년까지 5조2000억원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지금 단계에선 예산액 규모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익형 직불제로의 농정 방향 전환은 의미 있는 진전이지만, 또 중요한 문제는 공익적 기능의 개념과 실현 수단이다. 한국 실정에 맞는 공익 개념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제 시작 단계다. 농업이 행하고 있는 다원적 기능 중 어떤 것이 공익적 기능인지, 농업이 환경 및 기후변화에 미치는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농업엔 친환경적 기능도 있지만 반환경적 기능도 있다. 선진국들은 환경보호 관련 법규를 농민들도 준수토록 요구하는 제도를 발전시켜왔다. 이를 ‘교차준수’ 제도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선 농업과 환경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부족하고 교차준수의 구체적 방안도 마련돼 있지 않다.
일각에선 농민기본소득이 생태적 전환의 주요 방책이라 주장한다. 농민기본소득은 농업인에게 무조건 일정액을 지급하는 것이다. 현실에선 ‘농민’들에 한해 소득보조를 행하자는 주장이 많다. 지자체별로 소액의 농민수당 지급 사례가 생기고 있다.
농민기본소득은 상대적으로 영세농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영세소농이라고 해서 반드시 더 생태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고령화된 농가가 생태적 기준을 지키기는 더 어려울 수 있다. 또 농촌의 모든 사람에게 지급하지 않고 농업경영 여부를 선별하는 것은, 기본소득의 본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기본소득은 재원에 따라 연령 기준으로 지급하는 것이 타당하다.
보다 근본적인 방책은 도시와 농촌이 함께 생태적 전환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높은 농지가격 수준이 유지되면 농업·농촌은 외부로부터 폐쇄된 성이 된다. 도시에서 이주한 청년들이 농지를 획득하기 어렵고, 생산주의 농업에서 탈피할 동력이 형성되지 않는다.
도시농업을 농촌으로 확장하는 경로가 생태적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자력 생존’의 영역을 만들자. 여기에는 경영주체로서의 공동체와 핵심적 생산요소로서의 토지·시설·유통 인프라가 필요하다. 공동체의 발전에 따라 정부 차원에서 공유자원을 조성하고 공동체와 그 이용에 대한 계약을 맺도록 한다.
특히 생태적 전환을 주도하는 경영체를 뒷받침하기 위해 토지 기본자산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토지 기본자산은 관련 기관들이 협력하여 점차적으로 확대해가면 된다. 이 기본자산을 이용하여 도시와 농촌 양쪽에서 생태적 스마트팜을 운영한다. 농촌의 경관 유지도 반드시 농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으로 할 필요는 없다. 생태적 조건을 따져 재야생화하는 방안도 모색한다.
기후위기는 절체절명의 문제이다. 농업·농촌에도 좀 더 근본적인 생태적 전환 방안을 실천해야 한다./ 이일영 한신대 경제학 교수 경향 2020 11.5
윤석열 대망론 대 추미애 커리어 하이
법무부와 검찰의 패싸움, 갈수록 가관
추미애 법무부 장관(사진)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충돌이 갈수록 가관이다. 검사들의 항의성 댓글이 줄줄이 올라오고 그런 검사들 사표 받으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치달았다. 거의 패싸움 양상이다. 이 대목에서 ‘대통령은 왜 가만히 있나?’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다. 두 사람의 거취를 두고 대통령이 결단하라는 요구도 나왔다. 청와대는 묵묵부답이다.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용인하는 건가, 아니면 뭘 어쩔 수 없어서 손 놓고 있는 건가.
복잡할수록 ‘액면가’대로 이해해보자. 세상 시끄럽긴 하지만 딱히 누굴 하나 자를 수도, 자를 이유도 없어 보인다. 윤 총장은 대통령이 적절한 메신저를 보내 임기를 다 마치라 했다 하고, 추 장관은 대통령이 그렇게 비선으로 뜻을 전할 분이 아니라고 한다. 청와대 정무수석은 방송에 출연해 ‘메신저’ 운운한 표현은 부적절하다면서도 진위는 끝내 확인해주지 않았다. 비서실장은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법과 원칙에 따른다”며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통해 대통령은 결과적으로 둘 모두를 신임한 모양새다. 그럼 저마다 제 소임에 충실하면 된다. 장관은 검찰에 대한 지휘권·인사권·감찰권을 제대로 행사하고, 총장은 살아 있는 권력을 잘 수사하고 정치적 중립도 지키는 거다. 그야말로 각자 할 일이다. 그런데 세상 시끄러운 게 도무지 가라앉질 않는다. 개혁은 어디 가고 총장만 정치의 한복판에 들어와버렸다.
말이 너무 앞서거나 부풀려진 탓은 아닐까. 추 장관의 절제되지 않은 에스엔에스(SNS) 언설이 이를 부추긴 게 사실이다. 검찰이 라임 비리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수사지휘권을 발동하고 총장이 이를 수용했으면 됐지, 굳이 덧붙여 “(야당과 언론은) 대검을 먼저 ‘저격’해야 한다”고 열을 낼 필요가 있었나. 장관 비판 글을 검찰 내부 게시판에 올린 검사를 특정해 “이렇게 커밍아웃해주면 개혁만이 답”이라고 조롱할 이유는 무엇인가. 표적 삼아 분풀이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표현도 대상도 대단히 부적절했다. 지휘권자로서 권위와 자제력을 스스로 던져버린 셈이다.
윤 총장도 이런 민감한 시기에 전국 순회는 굳이 왜 하는지 모르겠다. 통상의 업무로 일선 검사들과 간부들을 만난다면서 ‘강연회’는 또 뭔가. ‘골질한다’는 뒷골목 용어밖에 안 떠오른다. 그나마 그가 페이스북을 안 하는 건 천만다행이다.
두 사람의 갈등은 우리 정치에도 부담이지만 당사자에게도 큰 부담이다. 피해는 추 장관 쪽이 더 커 보인다. 윤 총장은 엉겁결에 (흥하든 망하든) ‘대망론’에 올라탔는데 추 장관은 그와의 ‘ㄱ싸움’으로 사실상 ‘커리어 하이’(스포츠에서 개인이 가장 잘했던 시즌)를 찍어버린 꼴이다. 검찰 개혁을 향한 열망이든 검찰권 남용에 대한 경계이든 사람들은 추 장관에게 바라는 바가 있었고 그래서 힘을 주었다. 그는 그 힘을 적절히 조절하지 못했다. 중심을 제대로 크게 치라고 쥐여준 북채로 변죽만 울려댔다. 그런 고수에게 다시 북채를 맡길 사람이 있을까.
검찰 개혁은 차분히 추진하면 될 일이었다. 이른바 ‘조국 사태’를 처절하게 치른 뒤 아닌가. 내 편은 아니지만 저쪽 편도 아닌 검찰총장이 있고, 압도적인 의석수의 국회 지형에 법안도 이미 다 만들어져 있다. 게다가 처음으로 레임덕(지도력 공백) 없는 대통령이란 말을 듣는 통치자 아래 있다. 총장을 비롯한 검찰주의자를 타이르고 다독이며 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추 장관의 감정적이고 소모적인 언행이 순리대로 해도 될 일을 정쟁과 혼란 속으로 밀어넣었다. 시비 걸고 싶은 이들의 불안을 돋워 목소리를 키웠다. 호랑이는 잡아먹지도 않을 쥐를 향해서는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다. 추 장관은 대체 왜 그럴까. 호랑이가 아니거나 사냥감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본인의 페이스북에 ‘좋아요’ ‘화나요’ ‘슬퍼요’를 누르는 이들이 여론을 대표한다고 믿는다면 큰 오산이다. 더 늦기 전에 ‘에스엔에스 디톡스’부터 권한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한겨레21 2020.11.6
국가채무 관련 기사가 뻔한 이유
뻔한 것은 재미가 없다. 나는 한화 팬이긴 하다. 그러나 올해 9회까지 본 한화 경기는 거의 없다.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 가을야구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탈꼴찌의 가능성도 없다.
마찬가지다. 나는 재정을 분석하는 사람이기는 하다. 그러나 국가채무 관련 언론 기사 중 끝까지 읽은 기사는 거의 없다.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 “국가채무 비율 40%를 넘었는데, 이는 재정건전성에 위배된다.” 정도의 논리다. 언론사 성향에 따라 “코로나19의 위기에서 국가채무 비율 40% 초과는 불가피하다. 미국이나 일본 등 채무비율은 더 높다” 정도의 논리를 첨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큰 틀에서는 마찬가지다. 국가채무 비율 40% 초과 여부가 재정건전성을 가르는 잣대라는 대전제는 같다. 그러나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판단하는 데는 여러 평가 기준이 있다. 국가채무비율은 여러 잣대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일단 국가채무 비율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보자. 국가채무 비율은 국가채무를 GDP로 나눈 값이다. 그럼 국가채무가 무엇일까? 국가채무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채무를 뜻한다. 올해 국가 채무 847조원 중에서 국채만 815조원이다. 결국 국채나 차입금 등을 GDP로 나눈 값이다. 개념은 간단하다.
그런데 국가채무도 국가채무 나름이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연봉이 5000만원인 두 사람이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빚이 1억원이고, 다른 사람은 빚이 1000만원이다. 누구 재정 상태가 더 건전한가? 정답은 “알 수 없다”이다. 빚이 1000만원인 사람은 생활비가 없어서 카드론 대출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빚이 1억원이 있는 사람은 10억원짜리 주택을 사면서 담보대출을 받은 사람이다. 단순히 빚을(국가채무를) 연봉(GDP)으로 나눈 수치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채무 중 대응 자산이 있는 채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채무도 있다. 대응되는 자산이 있는 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외화 매입 용도로 발행하는 국채다. 기축통화국이 아닌 한국은 정부에서 많은 외화를 보유해야 한다. 외화를 사려면 돈이 필요한데 대부분 국채를 발행해서 마련한다. 즉, 외화를 매입하고자 국채를 발행하면 발행량 전체가 국채가 된다. 그러나 외화라는 대응 자산이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채무다.
2020년 국가채무 847조원 중 약 40%에 가까운 330조원은 이렇게 대응되는 자산이 있는 채무다. 그런데 이렇게 걱정할 필요 없는 채무(대응자산이 있는 채무, 금융성 채무)와 걱정해야 하는 채무(대응자산이 없는 채무, 적자성 채무) 두 개를 다 섞어놓고, 이 둘을 합친 채무비율이 40%를 넘어가면 재정이 건전해지지 않는다는 기준은 좀 불완전한 기준이다. 이 둘을 합친 채무비율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면, 정부는 꼼수를 쓰고 싶어진다. 실제로 정부는 올해 2차 추경에서 ‘세출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외평기금 지출을 2.8조원 줄였다. 2.8조원의 국채는 덜 발행했으나, 이를 통해 지킬 수 있는 재정건전성 효과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다들 국채비율이 40%가 넘는지만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재정건전성과 상관이 없는 금융성 채무라도 줄여서 국채비율을 줄이고 싶은 생각은 들기 마련이다
참고로 말하면, 한국 국가부채 비율은 2020년 GDP대비 48.4%이지만 대응되는 자산이 있는 부채를 제외한 순부채는 GDP 대비 18%다.(IMF outlook, oct. 2020) 한국보다 부채비율이 더 건전하다고 알려진 뉴질랜드(총부채 48%, 순부채21.3%)나 체코(총부채39.1%, 순부채27.3%) 보다 GDP 대비 순부채 비율은 더 건전하다.
그런데 ‘국가채무’ 비율 40%를 절대적 기준인 양 쓰는 언론도 문제지만, ‘국가부채’ 비율 40%는 아예 팩트가 틀리다. 채무와 부채는 다른 개념이다. 채무는 현금주의 개념의 국채나 차입금 등을 뜻한다면, 부채는 발생주의 개념으로 실제로 갚아야 할 모든 경제적 지출을 의미한다. 국가부채(일반정부 부채, D2) 비율이 40%를 넘은 것은 이미 2015년도다.
결국,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는 잣대는 국가채무비율 말고도 많은 기준이 존재한다. 앞서 말한 순부채 비율이나 국가부채 비율(D2)은 물론이고, 국채이자 비율이나 공공부문 부채비율, 재정수지 비율 등 많다. 이러한 기준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기사를 보는 것과 한화가 우승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쉬운일일까?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미디어오늘 2020 11.7
디지털 유료 구독 늘어난 르몽드의 ‘독자 퍼스트’
최근 르몽드의 디지털 유료 구독자는 34만 명가량으로 올 초에 비해 50%가량 증가했다. 물론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유럽 언론사들의 구독자 수가 증가 추세라고는 하지만 르몽드의 경우는 그 추세가 가히 독보적이라 할만하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르몽드의 편집국장 제롬 페노글리오에 따르면, 그건 바로 저널리즘의 퀄리티와 독자 관계의 심화다.
얼마 전부터 유럽에서는 보다 덜, 그러나 좋은 정보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트래픽에 목메는 언론사들은 재정적으로 점점 힘든 상황에 처하는 반면, 가치 없는 정보를 과감히 포기한 언론사들은 비즈니스 측면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르몽드도 마찬가지다. 이 신문은 2018년 이후 기사량을 25% 가량 줄이고 분석과 심층 보도를 늘렸다. 그러자 독자가 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략이 ‘르몽드는 주요 사안들을 단순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너머에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지 보여주려 애쓰는 언론’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독자와의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면서 등 돌린 독자들을 돌려세운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비결은 독자와의 관계 강화에 있다. 굳이 비용을 들여 뉴스를 구독하지 않아도 웹에서 꽤 괜찮은 무료 정보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시대에 퀄리티 기사만으로 언론사의 유료서비스가 성공할 리 만무하다. 그래서 르몽드는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와의 관계 회복에 나섰다. 그 중 하나는 독자의 삶에 가까이 가거나 그들의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선언에 불과한 독자 서비스가 아니라 ‘진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3~5월 봉쇄 기간에 선보인 실시간 동영상 서비스 ‘Nos Vie Confinées(우리의 격리생활)’가 아닐까 싶다. 팬데믹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야 하는 독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야심찬 의도로 출발한 이 서비스를 위해 두 달에 가까운 봉쇄 기간 동안 르몽드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동영상 라이브를 진행했다.
독자와 함께 일상생활에 관해 대화하고, 코로나19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이 동영상 서비스는 ‘슬기로운 집콕 생활’을 위해 전문가들의 상담을 제공하기도 하고, 전대미문의 일상에서 겪는 독자들의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거나, 장난기 가득한 대화를 통해 독자의 불안감을 해소하도록 돕는 등 작은 커뮤니티 속에서 독자들이 따뜻한 위로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언론으로서 독자와 세상을 연결시켜주고자 마련한 이 서비스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매일 7만2000여명 가량이 방문해 평균 15~20분가량 참여한 것이다. 당시 이 서비스를 주도했던 기자, 세실 프리에르에 따르면 “연결되고자 하는 독자들의 의지는 강했고, 이들은 정기적으로 라이브 서비스에 찾아와 서로를 격려해주고 수많은 경험들을 공유했다.” 독자의 힘겨운 일상을 함께하고 이를 통해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커뮤니티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즈니스 측면에도 긍정적인 결과를 제공했다.
수많은 정보 채널이 우후죽순 등장하는 시대, 르몽드는 독자와의 소통을 통해 강력한 독자 공동체를 형성하고, 매체에 대한 소속감을 불어넣으려 노력 중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광고 시장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면서 언론이 독자에게 좋은 기사에 대한 비용 지불의 필요성을 설득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델은 독자의 관심사를 파악하고 체계화해서 효능감을 제공하는 콘텐츠를 생산하도록 만든다는 측면에서 고무적이다. 나아가 이는 신뢰할만한 검증된 정보를 기반으로 ‘독자 퍼스트’를 실천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보이지 않는 ‘대중’을 상대로 헛발질을 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시민 독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가치 없는 정보 생산을 멈추고, 이를 통해 건강한 뉴스 생태계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
진민정 한국언론진흥재단 선임연구위원(파리2대학 언론학 박사) 미디어오늘 2020 11.7
바이든 오다
미국 대선이 투표 종료 24시간이 지나도 최종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소송을 걸었지만 큰 이변이 없는 한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가 미국 대선 역사상 최고의 득표로 제46대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16년 대부분의 여론조사 기관과 정치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트럼프 대통령이 전체 득표에서는 민주당 힐러리 후보에게 300만표가량을 뒤지고도 선거인단에서는 306 대 232로 신승을 거두는 이변을 연출했다. 특히 전통적으로 민주당 강세지역으로 불리는 러스트 벨트(제조업 기반을 둔 중서부 주)인 위스콘신주, 미시간주, 펜실베이니아주에서 간발의 차로 승리함으로써 막판 역전 승리를 거머쥐었다.
지난 4년 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막말을 포함한 트위터 정치, 러시아 스캔들 등 부패 의혹, 반 이민정책, 미·중 관계 악화 등 미국 자국 우선주의로 인한 외교 갈등, 코로나19 대응 부실 등 수많은 문제점과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을 의심받는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국내외에서 고립을 자초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수많은 여론조사 기관과 전문가들은 조심스럽게 바이든의 승리를 예상하면서도 일말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2016년의 뼈저린 오류와 실패 경험과 소위 ‘샤이 트럼프’라고 불리는 숨겨진 트럼프 지지자들이 이번에도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를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문제점과 자질
이번 선거는 코로나19로 여느 선거와는 다른 상황에서 진행되었기에 사전투표와 우편투표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또 개표상황도 현장투표가 먼저 진행되고, 우편투표는 추후에 진행되는 주들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현장투표에서는 트럼프 지지세가 많고 우편투표에서는 바이든 지지세가 많아 개표 초반에는 트럼프가 두 자릿수 이상 앞서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종반에 이르면서 대도시 투표함과 우편투표함이 개표되면서 바이든이 대거 역전하거나 표차를 줄여가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대선은 선거인단의 숫자인 538석을 주별로 인구수와 독립적인 주로서의 위치를 감안해 나눈다. 승자독식 주의가 적용돼 한 주에서 한표라도 더 많이 나온 후보가 그 주에 배당된 선거인단의 수 전체를 확보하게 된다. 대부분 전통적으로 민주당 강세지역과 공화당 강세지역으로 나뉘지만, 선거 때마다 민주당 후보나 공화당 후보를 넘나들면서 지지 후보를 당과 상관없이 바꾸는 소위 ‘스윙’ 주가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주가 미시간,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애리조나,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다. 특히 이 주들은 지난 2016년 트럼프 후보가 모두 승리하면서 대선 승리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번 2020년에는 이 주들의 상당수가 바이든 후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면 2020년에는 민주당의 바이든 후보가 어떻게 많은 표를 확보할 수 있었을까?
첫째, 역대 최고의 투표율이다. 역대 미국 대선 투표율은 50%대다. 2016년 59.2%였고, 2008년 오바마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도 57.1%였다. 이번에는 지난 대선보다 무려 3000만명이나 많은 1억6000만명이 투표해 1900년 이후 최고 투표율인 66.8%를 기록했다. 바이든은 역대 최고의 득표인 7200만표 이상을 득표했다. 이는 힐러리 후보가 거둔 6500만표보다 700만표 이상 많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도 2016년 자신이 득표한 6300만표보다 500만표 많은 6800만표를 얻었지만, 바이든보다는 400만표 이상 적다. 전반적으로 반트럼프 전선의 강화 현상이 깊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바이든은 고령, 성희롱 및 아들 스캔들, 미지근한 중도적 태도 등으로 유권자들을 적극적으로 투표장으로 유인할 수 있는 매력은 부족했다.
하지만 반트럼프 전선의 강화는 이러한 바이든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대거 투표장으로 유입했다. 예를 들면 대학생 등 젊은 유권자들이 4년 전에 비해 월등히 높은 비율로 민주당 후보인 바이든에게 표를 던졌다. 트럼프가 막판 유세와 SNS를 통해 지지자를 결집했지만, 그 결집도가 지난 대선 만큼은 강하지 못했다.
둘째, 백인 남자들의 트럼프 지지세의 약화다. 지난 대선에는 고졸 이하의 백인 남성에서 60% 이상의 지지를 받았던 트럼프가 이번 대선에서는 그 지지세가 8~10%포인트 줄어들었다는 출구조사 결과가 나왔다. 트럼프 핵심 지지층이었던 저학력 백인 남성들의 지지세 약화가 트럼프에게는 뼈아픈 패배의 원인이 됐다.
■바이든 역대 최고 득표
셋째, 이와 관련해 소위 러스트 벨트라고 불리는 미시간주, 위스콘신주,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트럼프는 지난 대선과 달리 패했다(11월 5일 기준). 바로 저학력 백인들의 지지세 약화가 주원인이다. 4년 전 이들은 높은 실업률, 침체한 지역경제, 빈부격차 확대 등 기존의 정치 질서에 대한 반감과 분노로 아웃사이더인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지난 4년간 트럼프가 이들의 경제적 욕구를 해결해주지 못했고, 이들에게 트럼프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자각이 일어난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위기상황에서 미국의 실업률은 7.9%를 기록하고 있고, 실업자 수는 1000만명을 넘어섰다. 미 대선은 경제상황에 심판의 성격이 강한데,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가 트럼프의 직접적인 실정은 아니더라도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넷째, 소위 남부 지역이라고 할 수 있고, 지난 대선 때 트럼프를 지지했던 애리조나주, 조지아주,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도 트럼프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노스캐롤라이나주와 조지아주는 애틀랜타 등 대도시 흑인을 중심으로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기폭제로 높은 정치 참여 현상이 나타나 이들이 대거 투표장으로 향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애리조나주는 히스패닉이 많은 주로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이 히스패닉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했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이번에도 대도시는 민주당, 농촌은 공화당이라는 공식이 어김없이 적용됐다. 지난 대선 때 상당수의 도심 외곽 거주자인 백인 중산층 거주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했는데 이번에는 바이든에 대한 지지가 증가했다. 즉 중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지난 4년 동안 트럼프의 실정을 심판했다는 얘기다. 특히 바이든 지지자의 80%가 코로나19 대처가 미국의 현안 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답한 것은 트럼프의 코로나19에 대한 미흡한 대처가 중산층의 바이든 지지 선회를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지난 2016년 대선은 역사상 가장 특이하고 이변인 선거였다. 세계 최고의 지위를 누렸던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빈부격차와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해 보려고 광대와 같은 아웃사이더를 대통령의 자리에 앉혔지만, 그것이 엉뚱한 행위였다는 것을 미국민은 자각하기 시작했다. 2020년 대선은 그 자각이 만들어낸 첫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유승권 미국 미주리대 한국학 연구소장 경향 2020 11.7
‘좋아요’와 ‘하트’ 대신 무엇을 믿을 것인가
작년 이맘때 페이스북에서 꽤 놀라운 게시물을 봤다. 페이스북 친구 중 한 명이 미국에서 엽기적인 일이 발생했다며 클린턴 전 대통령, 빌 게이츠, 그리고 할리우드 배우들이 소아성애 및 사탄 종교의식에 연루된 것 같다는 포스팅을 한 것이다. 쇼킹한 뉴스인 만큼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어디서 보셨어요?” “진짜예요?” 등등. 그러자 원글 작성자는 이미 트럼프가 수사까지 지시했다는 코멘트와 함께 기사 하나를 링크했다. 읽어보니 포스팅 내용과는 크게 관계없는, 한 유명인이 투옥 중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연히 헛소문일 게 뻔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 상황이 매우 흥미로웠던 것은 가짜뉴스가 만들어지고 전파되는 과정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누군가는 이걸 진짜로 믿겠구나. 그러고서 어딘가 퍼다 나르고, 그걸 또 누군가 믿으면 그게 가짜뉴스가 되겠구나. 물론 원글 작성자가 일부러 가짜뉴스를 퍼트리기 위해 그런 게시물을 올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단순하게 매우 흥미롭고 자극적인 소식이기에, ‘좋아요’를 받기 쉽다고 판단해서 가져왔을 터이다. 그리고 거기에 바로 가짜뉴스의 비밀이 있다. ‘흥미’ ‘재미’ ‘자극’ 등등.
리 매킨타이어의 〈포스트트루스〉는 탈(脫)진실과 가짜뉴스를 다루는 책이다. 가짜뉴스의 정의, 가짜뉴스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왜 사람들이 가짜뉴스를 무분별하게 믿고 거기에 빠져드는지, 거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까지 나아간다. 230쪽의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챕터별로 나뉘어 압축적이고 체계적으로 쓰여 있는 데다 다양한 사례가 등장하여 읽기 쉽고 재미도 있다.
인류는 소문을 좋아하기에 가짜뉴스와 음모론은 오래전부터 늘 있어왔지만, 책에 따르면 지금처럼 가짜뉴스가 본격화된 것은 2016년 트럼프와 힐러리의 대선이 기점이었다고 한다. 언론이 우연히도 대중이 힐러리보다 트럼프에게 훨씬 더 강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아내면서부터. 그때부터 언론은 점차 힐러리보다 트럼프 쪽을 더 많이 다루기 시작하고, 동시에 온갖 가짜뉴스 사이트들이 생겨난다.
말 그대로 ‘찌라시’, 음모론 사이트들이었는데,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대중의 클릭을 유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무 말이나 던지고 본다. 그리고 소셜미디어의 헤비 유저들은 다른 이용자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이러한 자극적인 소식을 퍼다 나르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대중은 어떻게 믿게 되었을까? 그것은 인간이 본래 비합리적인 데다가 소셜미디어 자체가 굉장히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친구 추가와 삭제, ‘팔로’와 ‘언팔로’가 비교적 자유로운 소셜미디어에서 이용자들은 대개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과 언론으로만 타임라인을 구성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자신이 ‘원하는’ 소식만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진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 역시 비슷한 지적을 한다. 소셜미디어를 이용하는 사이 우리의 뇌는 점차 ‘좋아요’ 버튼과 ‘하트’ 등이 주는 즉각적인 보상(도파민)에 익숙해지는데, 그러한 도파민은 마치 마약처럼 작용해 소셜미디어 자체에 중독되는 현상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결국 사용자들은 더욱 많은 ‘좋아요’를 받기 위해 점차 자극적인 게시물, 눈에 띄는 흥미 위주 게시물을 올리게 되고, 사람들의 이용시간이 늘어날수록 큰 보상을 얻게 되는 소셜미디어 회사들 역시 사람들이 반응하기 쉬운 자극적인 정보 위주로 노출해서 결국은 가짜뉴스가 범람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뻔하지만 해결책은 하나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어차피 음모론인데 뭐 어떠냐고, 그냥 일부의 문제일 뿐이라고, 무시하면 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짜뉴스들은 단순히 불쾌한 헛소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 전반에 걸쳐 직접적인 영향을 일으키기에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일례로 미국에서는 어느 피자집이 힐러리의 소아성애 조직의 자금줄로 사용된다는 가짜뉴스를 듣고 흥분한 남성이 총을 들고 해당 피자집에 쳐들어가 마구 갈긴, 일명 ‘피자 게이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페이스북이 곧 뉴스의 대명사인 미얀마에서는 페이스북 내의 혐오 발언에 휘말린 미얀마 사람들이 이슬람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을 배척하다 결국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어쩌면 오늘날 전 세계에 극우적인 흐름이 자꾸 꿈틀대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지난해 여름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난민을 받아들이는 문제로 매우 말이 많았는데, 당시 내게는 20~30대 젊은 여성들이 난민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라는 것이 굉장히 놀라운 지점이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는 난민에 의한 강간의 두려움을 호소하는 여성들, 맘카페에서는 아이들 걱정을 하며 몸을 사리는 엄마들이 넘쳐났다. 이들은 ‘난민 남성이 어린아이와 여성을 성폭행한다’는 가짜뉴스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간혹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단칼에 제거되었다. 그러면서 편향은 점차 강해졌다. 전부 가짜뉴스가 불러온 비극이다. 결국 소셜미디어의 발전, 가짜뉴스의 횡행, 집단적 사고와 편향이 모두 이어져 있다.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인데, 이에 대해 책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믿을 만한 언론을 선정해서 이들이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도록 후원할 것. 둘째, 문해력을 기를 것.
뻔한 말이지만 이것 말고는 대안이 없기도 하다. 이에 더해 소셜미디어에서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골라서 하는 이들을 주의해야 한다. 사실 어디에서나 그렇다.
시사인 한승혜 (작가·칼럼니스트) 2020 1108
|
트럼프 패배에 절망한 일부 한국인들에게
한국인들에게 미국 대선 결과는 월드시리즈 향배보다 큰 관심사라고 할 수 없었다. 실은 훨씬 중요한 문제지만 뭐 그래봐야 남의 나라 대통령 얘기 아닌가. 그보다는 류현진이 우승 반지를 끼는게 중요했다. 트럼프 이전에는 그랬다.
조 바이든이 승리를 확정지은 지금까지도 많은 한국인들이 트럼프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수십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들이 미국 현지의 음모론을 그대로 퍼 나르고 있다. 어마어마한 투·개표 부정이 벌어졌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야당이 투개표 부정했다는 얘기를 다 들어본다. 상당수는 4·15 총선이후 같은 부정선거 주장을 하면서 구독자를 늘렸던 사람들이다. 이들이야 장삿속으로 그런다치고 여기에 혹해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한국의 두 극단적인 정치세력이 트럼프 당선을 열망했다. 먼저 미북 정상회담이라는 톱다운 방식 남북문제 해결을 희망하는 `친문` 진영이 지지했다. 이들은 트럼프가 재선돼야 차기 한국 대선 국면에서 종전선언을 비롯해 또 한번의 남북미 화해쇼가 가능할 것으로 봤다. 다른 한쪽은 극렬 우파로 분류할수 있는 세력인데 첫째 세상의 리버럴을 모두 위선이라며 혐오하는 사람들, 특히 PC(Political Correctness) 색채가 갈수록 강해지는 미국 민주당에 반감을 지닌 사람들이다. 둘째 다른건 제쳐두고 트럼프가 중국 다루기 하나는 잘 했다고 보고 이 참에 중국을 `옥쇄`시켜 버리기를 바랬던 반중주의자들이다.
두 진영중 전략적 사고가 돋보이는 쪽은 친문이다. 이들은 정치성향으로는 트럼프나 미국 공화당에 터럭만한 매력도 못느낄 집단이지만 `한국 대선에 활용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트럼프를 응원했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두번 만났다. 세번 못만날 이유가 없고 그것은 분명 여당의 선거전략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이들이 트럼프 패배에 아쉬워하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런데 의외로 조용하다.
이에 비해 `반문`이면서 트럼프를 지지한 쪽은 무척 시끄럽다. 부정선거 음모론을 제기하는 쪽도 주로 이쪽이다. 왜 그럴까. 요즘 미국 민주당은 매력이 없어졌다. 버니 샌더스같은 `칵테일 좌파`(미국판 강남좌파)들이 위선 냄새 폴폴 풍기며 대중을 선동한다. 예전엔 주변부였던 이들이 지금은 주류다. 한국 보수층이 이들에게 느낄 역겨움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강남좌파가 혐오스럽다면 칵테일 좌파라고 좋아보일수 없다. 그러나 그건 비교적 작은 문제다.
칵테일 좌파가 인류에 미치는 악영향은 트럼피즘에 비하면 사소하다. 트럼프는 지난 4년 미국의 민주주의를 망가뜨렸고(대선 불복이 클라이맥스다) 세계의 민주주의도 덩달아 수준이 떨어졌다. 내로남불과 억지, 뻔뻔함, 절차 무시, 대놓고 하는 거짓말, 국가의 폭력은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일상사로 벌어진다. `이게 민주주의냐`고 하면 `미국도 그렇지 않느냐`고 한다. 사실이 그렇다. 세계 곳곳에서 트럼피즘과 그 아류가 동시다발로 극성을 부린다.
이런 트럼프를 `보수`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실은 허무한 얘기다. 보수는 정상을 지향하는 가치인데 트럼프는 비정상이고 돌연변이다. 세상에 비정상을 선호하는 보수주의는 없다. 스탈린이 싫다고 히틀러를 지지하면 그는 보수주의자인가. 아니다. 독재자의 선동에 넘어간 우중(愚衆)일 뿐이다. 칵테일 좌파는 역겹지만 그렇다고 스탈린은 아니다. 이 문제는 미국민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둬도 된다. 우리가 사는데 아무 지장없다. 그러나 트럼피즘은 우리가 사는데, 우리 민주주의에 실시간으로 지장을 준다.
두번째로 중국을 잘 두들겨서 트럼프가 좋다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자면 샤라포바처럼 소리를 크게 지른다고 경기에서 이기는게 아니다. 지금 미국은 대통령이 누가 됐든 중국을 억제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았다. 싸움의 방식이 중요하다. 미국이 소련과 냉전에서 이기는데 45년가량 걸렸다. 자유진영 동맹국들과 힘을 합쳐 엮은 봉쇄 사슬로 소련을 서서히 고사시켰다. 중국은 소련보다 인구도,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비교할 수 없이 큰 나라다. 전면전은 생각할수도 없다. 장기 봉쇄로 가야 하고 또 한번의 거대한 자유연대가 필요한데 트럼프는 동맹들의 인심을 잃었다. 역사적인 싸움은 명분을 쌓는 쪽이 이긴다. 동맹 중시론자인 바이든이 훨씬 잘할 것이다. 미국이 동맹을 중시하면 한국의 공간도 커진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에서 투개표 부정, 그것도 야당이 저질렀다는 주장이 나오는 세상을 상상해 본 일이 있는가. 이게 트럼프가 만든 세상이다. 트럼프의 가장 큰 해악은 세상을 저질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이든의 승리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정상 회복`이 아닐까 한다. 지난 4년 세상이 얼마나 비정상으로 돌아갔는지 한번 돌이켜보라. 그 비정상이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누가 가장 큰 득을 보았는지도 한번 따져보라. 구독자 늘리기, 슈퍼챗 따먹기가 주목적인 유튜버들 말장난에 너무 귀 기울이지 말라. 그 사람들은 보수도, 뭣도 아니다. 트럼프가 만든 비정상적 세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노원명 오피니언부장 매일경제 2020.11.08.
'복지국가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 연대'가 복지국가의 핵심 가치
우리나라도 이제 국민의 삶을 기준선 이상으로 유지하려는 노력, 즉 국가의 의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가 됐다. 우리나라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고, 더 이상 돈이 없어 잘 곳을 얻지 못하고, 병원비가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사회가 아니다. 차츰 복지가 대세인 나라가 되고 있다. 복지를 늘리고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성찰해보면, 복지국가가 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스웨덴과 같은 선진 복지국가처럼 복지 재정을 늘리고 선진국에서 잘 작동하고 있는 복지제도를 도입하면, 그것으로 어느 정도 완성된 복지국가가 될 것이라고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
경제성장만으론 복지국가 되기 쉽지 않다
국민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려고 노력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겐 부정적 사회 문제가 많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룬 대가로 세계에서 가장 참혹한 초저출산 국가가 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고,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며, 양극화와 불평등은 주요 국가들 중에서 가장 심각하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나라가 됐고, 세계가 우리나라에게 K-POP과 K-방역 등으로 찬사를 보내는 것의 이면에는 이런 우울한 자화상이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사회·경제·문화의 여러 차원에서 긍정적 부분과 부정적 부분이 공존한다. 그래서 사회 운영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하는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이 필요한 과도기에 놓여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남이 갔던 길, 즉 미국·일본과 유럽의 제도들 중에서 좋은 것을 취사선택해왔다. 경제성장에 따른 재정 확보를 통해 사회보험을 늘려왔고, 공공부조로 사회적 약자의 삶을 지지했으며, 바우처를 포함한 사회서비스의 제도화를 통해 복지의 질을 높여왔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가장 선진적인 복지 시스템이 있음과 동시에 자선·시혜와 배제·격리, 통제·관리의 관점에 따른 수용시설도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자선의 관점에서 불쌍한 사람을 돕는 복지와 모든 국민의 삶을 보장하려는 보편적 복지가 혼재되어 있다.
아직도 정신장애인 시설이나 노숙인 시설의 경우 500명 이상을 수용하는 시설이 존재하고 있다. '탈시설'을 이야기하고 보편적 복지가 대세이지만, 그와 함께 선별적 복지, 아니 과거의 잔여주의 복지의 관점에 따른 복지 시스템도 국가의 보조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특수학교나 장애인 복지관을 혐오시설로 생각하고, 소위 혐오시설에 대한 님비현상(Not In My Backyard, NIMBY)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공공연하게 임대주택을 반대하고, 청년주택을 반대한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복지 재정을 더 확충하고 복지제도를 정비하면, 이런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까. 우리나라가 정말 살기 좋은 복지국가가 되는 길은 현재의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수준에서 미국이나 스웨덴 수준인 6만 달러까지 올라가는 경제성장을 통해 이 모든 것이 해결될까. 그래서 우리는 삼성이나 LG 같은 기업들이 초일류에서 초초일류가 되는 것에 기대를 걸고, 게임 기업들이 세계에서 가장 흥행하는 게임을 만들어내고, 바이오 산업에서 확실한 비교우위를 갖는 등 4차 산업혁명의 과실을 가장 성공적으로 거둬 이들 기업이 내는 세금으로 현재의 모든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면 되는 것일까.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그런 길을 걸어왔다. 경제성장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아 사회를 발전시켜 왔고,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 경쟁 위주의 학교 교육, 그를 통해 순치된 양질의 노동력 확보 등이 지난 60년간 조화를 잘 이룸으로써 경제·복지·문화·교육 등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우리는 성장을 통한 분배, 개인 간의 시장 경쟁을 통한 성공, 능력과 노력이 지배하는 사회문화를 이루어왔다. 그런데 이런 가치는 미국의 가치와 연결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복지국가의 가치로 보긴 어렵다. 성장이 없으면, 경쟁에서 실패하면, 능력이 없으면, 패배자(루저)가 되는 게 당연하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지닌 나라가 미국이다. 이런 인식의 토대 위에선 복지국가는 쉽지 않다.
사회의 핵심 가치가 '연대'라야 복지국가 가능해져!
현재 한국의 사회문화 의식도 주로 이런 가치에 기초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가치에 기초해 사회를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 아니면 기존과 다른 대안적 가치로 사회를 재구성하는 선택을 할 것인지, 이제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포용성과 역성(易姓)성이 큰 보편적 복지국가로 질적 전환을 이루고자 한다면, 다시 말해서 스웨덴과 같은 선진 복지국가로 제대로 발전하기를 바란다면, 사회의 핵심 가치가 변화해야 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가 이야기한 '각자도생'의 사회의식이 사회적 연대(Solidarity)에 기초해 변화해야 한다.
복지국가는 무엇인가. 민주국가의 핵심이 시민의 참여 민주주의에 기초들 둔 국가라면, 복지국가는 모든 국민의 '삶의 질'을 책임지려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삼성이나 셀트리온이 번 돈을 나누는 게 아니다. 상속세를 많이 걷어 복지 재정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복지국가는 국가의 구성원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국가 개념이다. 남이 낸 세금이 아니라 모든 '나'들이 낸 세금으로 복지국가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 중심에는 사회적 연대 'SOLIDARITY'가 있다.
사회의 핵심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문화와 구성원들의 삶이 결정된다. 미국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이루는 핵심 가치는 개인주의와 경쟁이다. 학교에서 총기 사고가 급증해도 개인의 총기 소유는 불가침의 영역이며,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영리 의료로 인해 미국인들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아도 높은 병원비 때문에 가계가 풍비박산 나도 미국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적 의료보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국이라는 국가 내의 구성원으로 성공해 수백억 달러의 부자가 되던, 실패해 노숙자가 되던, 그것은 국가의 책임 영역이라기보다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일 뿐이라는 게 미국의 핵심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보편적 복지국가 모델인 스웨덴은 다르다. 미국과 스웨덴 둘 다 1인당 GDP가 6만 달러이 넘나들지만, 사회의 구성 원리는 정반대다. 미국이 파편적 수준의 개인주의에 기초한다면, 스웨덴은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는 개인주의, 즉 Solidarity에 기초하여 사회의 발전과 국민의 삶을 보장한다. 요즘 문재인 정부는 각종 복지 제도의 지향을 스웨덴에 두고 있지만, 경제·사회의 핵심 원리나 시스템의 많은 부분은 미국의 경제·사회 운영 원리와 겹쳐 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복지국가를 완성시키고자 한다면 복지국가를 구성하는 가치와 철학에 대해 검토하고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원리가 변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는 무엇일까. 개인, 성공, 경쟁, 물질주의가 우리 사회를 이루는 핵심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성공이란 공부 잘해서 돈 많이 벌 수 있는 좋은 대학의 인기 과에 입학하는 것이다. 머리 좋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최고의 성적을 얻는 학생들이 높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획득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선 공정과 정의이다. 의사, 교사, 변호사, 공무원은 모두 안정적인 돈벌이 수단으로 선호되고, 학교에서 성공한 학생들이 이 자리를 차지한다. 시험을 잘 보는 모범생이 성공한다는 게 공식이다. 학교는 지난 수십 년간 계층 상승의 도구로, 또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열악한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는 게 당연하다는 원리를 충실히 수행해 왔다.
따라서 학교 교육의 목표가 공부하는 '나의 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부 잘하는 서열'을 정하는 데 있다. 같은 반의 친구들이 경쟁 상대이고, 그들보다 나은 지위를 차지하려면 그들보다 성적이 좋아야 한다. 경쟁과 성공의 도구가 학교 교육인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부러워하는 핀란드 등 북유럽 복지국가의 학교는 계층 상승의 도구가 아니다. 경쟁이 학교 교육의 핵심 원리가 아니다. 노르웨이의 학교에서는 최중증 장애인이 일반학급에서 완전 통합 교육을 받는다. 중증의 장애 학생이 계속 고개를 흔들고 소리를 지르는데,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수업을 듣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북유럽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학교 수업을 저해할 수 있는 장애 학생을 당연히 같은 학급의 급우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약간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도 괴롭힘을 당해 중학교부터는 다시 특수학교로 진학해서 공부한다. 장애 학생이 같은 반에 있으면 그 학급은 경쟁에서 뒤처지게 되고, 입시 준비가 목적인 학교 교육이 실패할 것이기에 장애 학생이 같은 학급에 있는 것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장애 친구를 배려하고, 학생들 하나하나가 목적이 되는 교육은 경쟁과 성공·계층 상승의 도구라는 패러다임의 학교에서는 불가능하다.
장애 학생이 존중받는다는 것은 학생 한명 한명이 존중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를 못해도 학교에서는 소중한 학생으로 대우한다. 학교의 교육 목표는 좋은 대학에 가는 서열을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가진 가능성과 희망을 현실화시켜 주는 데 있다. 공부를 못하는 것이 학교에서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SOLIDARITY는 개인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을 존중하고 인간다움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바로 SOLIDARITY이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는 소수가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래서 개인 한 명 한 명의 존엄을 기초로 하는 다수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로 자리를 잡으려면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도 바뀔 부분이 많다. 개인주의가 강한 미국 같은 나라의 기업은 노사 간 갈등이 심하고, 해고가 쉽고, 주주 이익의 극대화라는 자유 경쟁 자본주의 구조라면, 스웨덴 등의 복지국가는 노사 관계도 연대의 관점에서 형성된다. 물론 복지국가에서도 생산성이 중요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핵심적 활동이지만, 그에 맞먹게 노동자의 삶을 보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복지국가에서는 이윤추구와 함께 고용이 핵심 가치이며, 기업이 일차적으로 노동자를 책임지지만, 실업자는 국가가 책임진다. 그래서 스웨덴 모델의 복지국가들은 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좋은 나라가 되고 있다.
실업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그 차이는 분명해진다. 미국과 같은 개인과 경쟁 중심의 국가에서는 실업수당이 1년 이상이면 놀고먹는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보장성이 강화되면 놀고먹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어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되니 다 같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Solidarity가 핵심 가치인 스웨덴 같은 국가에서는 실업자가 된 노동자들이 놀고먹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웨덴의 경우 일을 하다가 학업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서 공부한다고 해도 가능한 지원을 해주며, 개인의 성장을 돕는다.
노동자 개개인이 성장하는 것이 사회의 이익이며, 이는 연대의 관점에서 당연한 상식이다. 복지국가에서는 구조조정이나 실업에 처해도 노동자의 삶이 파괴되지 않는다. IMF 때 은행들의 구조조정에 따라 해고된 은행원들의 삶이나 쌍용차 해고 노동자의 삶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취약한 사회인지를 보여준다. 공무원이나 대기업 직원, 교사, 의사 등 안정적인 직업을 삶의 목표로 삼는 사회가 되는 것도 '각자도생'의 사회 시스템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교도소와 같은 교정 복지 영역도 복지국가에 맞지 않는 시스템이다. 미국은 10만 명당 교도소 입소자 비율이 600~700명이고, 스웨덴은 50명 선이며, 우리나라는 150명 선이다. 범죄를 개인의 책임으로 보면 교도소는 계속해서 늘어나야 한다. 스웨덴은 교도소를 어떻게든 줄이고자 한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어떻게 사회로 돌아와 건강하게 살 것인지를 중심으로 교정 복지를 구성한다. 재소자들을 사회에서 격리하고 범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부과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범죄의 원인을 파악하고 환경을 개선해서 다시 범죄를 하지 않게 하는 게 교정 복지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선진 복지국가에서는 전과자도 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러므로 배제보다 연대의 정신으로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실천한다.
반면, 미국이나 한국은 처벌과 배제가 교도소의 주요 목적으로 간주된다. 그에 따라 사회에 건강하게 복귀하지 못하게 되고, 전과가 누적돼 사회 부적응자가 많은 사회가 되고 있다. 스웨덴 같은 복지국가는 교도소 환경을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게 하면서 범죄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나라는 국민의 복수감에 기초해 형벌 감정이 생겨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중학생이 친구를 폭행하거나 가혹 행위를 했을 때, 성인과 다르지 않은 강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법 감정은 범죄를 사회의 책임이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전과자도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정책이 필요하다
복지국가의 제도와 정책들 하나하나가 선진국에 가깝거나 그 이상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운영하는 사회의 핵심 가치가 개인주의와 경쟁주의로 남아 있어서는 올바르고 공정한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의 부정수급의 문제를 심각한 도덕적 해이로 보고 있다. 그런데 부정수급은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되는 경우만 있는 게 아니다. 수급자가 열심히 일해 돈을 벌면 정부는 다시 일정액을 넘는 금액을 환수해간다. 일을 해도 떳떳하게 하는 게 아니라 몰래 해야 하고, 그러다 적발되면 부정수급자가 된다. 수급자에서 차상위로 자립하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세금을 눈먼 돈이라고 한다. 세금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가 거의 없다. 아끼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연대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낸 세금은 내 돈이고 부정수급은 상상할 수 없으며, 복지국가의 적이고 공동체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연대는 공동체 단위의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국민들이 자기 수입의 40~60%를 세금으로 내는 게 가능해지는 것이다. 세금은 내 돈이며, 세금을 허투루 쓰거나 착복하는 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이기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낸 세금이 제대로 자신(연대에 기초한 공동체 내의 개개인들)에게 쓰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나라가 바로 복지국가다.
복지국가가 된다는 것은 복지 재정을 늘리고, 복지제도를 완성해가는 단선적인 작업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성 원리와 가치 철학의 변화를 수반하는 패러다임이 바뀌는 거대한 과정이다. 복지를 비용으로 보지 않고 사회의 구성 원리로 바라보고, 사회를 성장시키는 핵심 동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이런 연대의 정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선진 복지국가의 것을 베껴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우리 사회의 필요와 문제를 정확히 파악·기획·실천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만들어가야 한다. 이제 경제와 사회 전반을 성찰하면서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확장해가는 방향에서 우리가 원하는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조준호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프레시안 2020.11.09
피해, 피해자, ‘피해자 중심주의’
성별 권력 관계(젠더)는 오랜 역사 동안 사적인 문제로 간주되어 왔다. 남성과 여성의 권력 관계를 둘러싼 판단은 개인과 사회 공동체가 모두 혼란을 겪는다. 남성 중심적 사고는 공기와 같아서, 인종 문제처럼 피해와 가해 여부가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여성 조지 플로이드’는 매일 발생하지만, 보고되지 않는다.
이에 대응하는 여성주의 세력도 소위 ‘성인지 감수성(여성주의 의식)’과 여성학적 의견이 일치를 보는 것도 아니다. 여성주의자 사이의 이견이 활발한 논쟁으로 발전할수록, 남성 개인도 사회도 성숙해지지만 아직 갈 길이 먼 듯하다.
나는 2005년 <페미니즘의 도전>이란 책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동어 반복일 뿐 아니라 여성에게 불리한 논리라고 주장했다. 15년이 지난 지금 이 논리는 더 힘을 얻는 듯하다. 어떤 여성은 이 말이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일종의 인식론적 ‘가산점’으로서, 여성의 입장을 더 고려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반면, 남성 사회는 “여성‘주의’도 이상한데, ‘여성=피해자’에 ‘피해자 중심주의’라니,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한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옹호하는 여성과 반대하는 남성의 공통점은 논의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데 있다.
사회적 약자의 피해와 고통이 저절로 규명된다면 이미 유토피아고, 사회운동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 입장에서 피해가 자명한 사실로 인정되고, 가해자가 ‘내가 받은 상처 이상으로’ 처벌받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피해·가해 여부는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가 결정한다. 문제는 성 중립적 사회는 없다는 것이다.
피해는 객관이 아니라 경합적 가치다. 즉 피해당했다고 곧바로 피해자가 되는 게 아니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모두가 피해자로 인정받는 건 아니다. 피해자는 투쟁으로 ‘획득되는 지위’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피해자의 저항은 평생에 걸친 과정일 수도 있고, 생전에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해자가 피해자라고 나서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4·3도, 5·18도 그러했다. 일상적으론 여성이 겪는 성폭력이 대표적이다.
성폭력 범죄는 범인이 아는 사람인 데다 범행 장소도 가해자나 피해자의 집인 경우가 70%가 넘는다. 증인이 없는 경우도 대부분이다. 검경은 피해자에게 피해 증명을 떠맡긴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성 범죄는 피해자나 여성단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피해자가 사법기관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 취조받는 현실도 변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구호가 피해자 중심주의다. 사기나 절도엔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당연하기 때문이다. 어느 범죄나 신고가 접수되면, 피해자 말부터 듣는 게 상식이다.
왜 여성운동 스스로 상식을 부정하는 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여성의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주장은, 역설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낮은가를 보여준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여성에게 불리할 뿐 아니라 실현 불가능한 개념이다. 피해 여성의 말을 포함, 인간의 모든 발화는 상대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에는 규범적 피해자의 이미지가 전제되어 있다.
범인의 성별이 압도적으로 남성이라는 사실 외에는, 성폭력도 다른 범죄처럼 사건마다 성격이 크게 다르다. 진상 규명은 피해 여성의 말을 무조건 옹호한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라 평소 사회가 성폭력의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얼마나 존중해왔는가에 달려 있다.
나의 경험이 “피해였다”는 자각과 피해 의식은 다르다. 피해는 상황이다. 정체성이 아니다. 피해자 정체성은 더 위험하다. 피해자라는 위치가 곧 피해의 근거가 된다는 사고방식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 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이토록 만연한가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구체적 정책이 필요할 뿐이다. 집단적 억압이든 개인적 사건이든 가해자는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고 피해자는 성장하기 어렵다(나부터 그렇다). 이것이 식민주의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를 존중하는 언설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의 곤경과 그들을 위한 언어가 얼마나 빈곤한지 보여줄 뿐이다./ 정희진 여성학자 경향 : 2020.11.11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미국 대통령이 바뀌고 있다. 초강대국 최고 지도자의 교체는 한반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알 수 없다. 조 바이든 자신도 아직은 잘 모를 것이다.
조 바이든은 지난달 29일 한국계 미국인 200만명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기고문을 <연합뉴스>에 보냈다. 한반도 정책은 딱 한 문장이었다.
“나는 원칙에 입각한 외교에 관여하고 비핵화한 북한과 통일된 한반도를 향해 계속 나아갈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는 전혀 없다. 당연한 일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제부터 외교·안보 참모들과 함께 서서히 채워 가야 한다. 조 바이든에게 한반도는 우선 과제가 아니다.
우리 정부와 국회와 여당과 야당 인사들이 줄줄이 미국에 간다고 난리다. 조 바이든이나 측근 인사들과의 인연을 앞다퉈 자랑한다. 창피하다. 좀 차분했으면 좋겠다.
미국에 가서 누구를 만나려는 것일까? 만나서 대화하면 효과가 있을까? 별로 없을 것이다. 조 바이든은 아직 정권 인수 작업을 시작도 하지 못했다. 트럼프는 정권을 순순히 넘겨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때를 기다리며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과 참모들을 설득할 수 있는 해법과 논리를 가다듬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 새 대통령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갑자기 핵실험을 하거나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정부와 여당, 야당의 의견을 미리 조율해 두는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우리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군사동맹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한반도에 대해 무지하다. 조 바이든 역시 한반도를 잘 모른다. 어차피 문재인 대통령과 긴밀히 협의할 수밖에 없다. 조 바이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역대 미국 행정부가 대체로 다 그랬다.
1998년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빌 클린턴 대통령이 대북 정책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 정책은 따지고 보면 미국의 성공에서 배운 것”이라며 미국의 화해 정책으로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과 베트남이 개방한 사례를 들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렇게 화답했다.
“김 대통령의 비중과 경륜을 볼 때 이제 한반도 문제는 김 대통령께서 주도해 주기 바랍니다. 김 대통령이 핸들을 잡아 운전하고 나는 옆자리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대북 정책 조정관으로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을 임명했다. 페리는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전면전을 준비하면서 영변 핵 시설을 공격하자고 했던 강경파였다.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은 그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1999년 9월 “핵과 미사일 위협을 종식하기 위해 북한의 협력을 확보할 수 있다면 미국은 대북 수교를 포함해 관계 정상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페리 프로세스’가 완성됐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북한의 조명록 차수가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중동 평화 협상에 발이 묶여 북한에 가지 못하고 퇴임했다. 2년 동안 공들여 쌓은 한반도 평화의 기회를 아깝게 놓친 것이다.
정반대 상황도 벌어졌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재임 동안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전략적 인내’였다. 북한 핵 개발을 사실상 방치한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대북 강경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남북관계가 악화하면서 북-미 대화도 원천적으로 막혔기 때문이다.
2018년 한반도에 평화의 기류가 다시 감돌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를 동시에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는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한반도 평화를 원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참모였던 존 볼턴이 협상을 깼다.
2020년 미국 대선이 끝났다. 조 바이든이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로 돌아갈지, 트럼프의 대북 협상 성과를 이어받을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섣불리 예측하는 것은 위험하다.
중요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과 우리 정부의 주도권이다.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고 북한과 미국과 국제사회를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국제사회는 대북 제재를 풀고, 북-미 수교가 성사될 수 있다. 우리가 바로 한반도의 주인이다.
성한용 ㅣ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한겨레 20.11.11
사람들이 집을 사는 솔직한 이유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30대의 영끌이나 홍남기 부총리의 임차인 위로금도 있겠지만, 저에게 가장 아프게 다가오는 건 군대 병장들의 주식과 부동산 열풍입니다. 지금 병장들 사이에는 사회 복귀를 위한 취업 열공이 아니라 이생에서 살아남기 위한 주식과 부동산 열공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블루보다 더 우울한 코리아 블루입니다.
금 전 의원께서는 제가 전한 시중의 얘기, “정부가 집값 잡는 데는 관심이 없고 세금을 더 걷고 싶은 것일 뿐”이라는 말은 사실과 다르며 단지 정부의 효과 없는 대책을 풍자하고 비꼬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문재인 정부는 자기만의 이념과 지식에 입각하여 부동산을 잡겠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번번이 실패하자 아예 세금을 더 많이 거두고 이를 국가가 국민에게 나누어주자는 식으로 방향을 틀었다 판단합니다. 정부가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섰다면 당장의 비판과 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미 실패가 확정된 정책을 바꾸는 것이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부동산 급등은 정책 실패가 아니며 아직 정책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과연 정부 체면이나 정책 일관성 때문에 실패한 정책을 고수하는 것일까요?
세상살이에는 선뜻 인정하기에 불편한 진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실을 외면하면 할수록 모순이 쌓여 현실은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그중 하나가 “사람들은 언제 집을 살까?”라는 질문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 질문에 너무도 명쾌한 답을 갖고 있습니다. “집은 거주 공간이지 투자 대상이 아니다.” 관념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신성한 거주 공간인 집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용납할 수 없으며 그것이 전문 투기꾼이든 일반 국민이든 용서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왜 집을 사냐고 물어보면 뭐라 답할까요? 솔직하게 대답해봅시다. 집값이 오를 것 같으니까 집을 사는 것,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집 사는 이유일 겁니다. 일부 돈 많은 사람들에겐 집이 투기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집이란 거주의 공간이자 소유의 대상이며, 내가 가진 재산의 대부분이자 자산을 불려주는 투자의 수단입니다. 거주와 교육 환경이 좋고 좀 더 크고 새로 지은 집으로 옮겨가기 위해 내 집값이 오르기를 바라는 욕구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며 죄악시되어선 안 될 인간의 본성입니다.
정부의 역할은 집에 대한 사람들의 이러한 욕망을 인정하고, 그것이 안정적으로 분출되고 선순환될 수 있도록 정책을 펴나가는 것입니다. 실물 경제에서 물가는 조금씩 안정적으로 오르는 것이 건강한 경제의 표상입니다. 나라 경제가 커지고 국민소득이 늘면 물가가 오르게 마련입니다. 집값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집값이 일반 물가보다 훨씬 가파르게 오르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곳에 살고 싶은 집이 공급되도록 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부동산 대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부가 아무리 크다 해도, 공무원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시장을 대신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민간 재개발 재건축을 죄악시하며 민간 공급을 틀어막습니다. 부동산값 폭등 우려를 핑계 삼지만 재개발 재건축으로 돈 버는 꼴 못 보겠다는 생각이 더 커 보입니다. 그러나 공급 부족은 가격 폭등으로, 세금 폭탄은 또다시 매물 부족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민간의 재개발 재건축 시장을 열어 민간이 원하는 주택 공급을 늘리고 취득세와 양도소득세를 낮추어 기존 주택의 매물 공급을 늘리는 주택 공급 선순환 정책으로 과감히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한편, 도를 넘는 개발초과이익은 정부가 적절한 방식으로 환수하여 또 다른 공급에 투입하는 선순환 정책이 필요합니다. 여러 이유로 집 살 형편이 되지 않는 국민들, 특히 청년들을 위해 이들 눈높이에 맞는 공공주택, 그것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소유권을 보장하는 주택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늙어가듯이 세월이 흐르면 도시도 낡아갑니다. 1인가구 비율도 30%를 넘어섰습니다. 청년들의 기호와 필요에 맞추어 구도심을 중심으로 접근성이 좋은 고밀도 집적개발을 하는 데 정부가 적극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부동산이 워낙 초미의 관심사이다 보니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이수정 박사의 스토킹 범죄 방지법을 반대할 리가 있겠습니까? 비록 원외이긴 하지만 보탬이 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트럼프가 가고 바이든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렇다고 미-중 패권전쟁이 약화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격화되는 미-중 대결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김용태 ㅣ 정치인 한겨레 20.11.11
미 여론기관들, 이번에도 ‘소외된 유권자’ 놓쳐
바이든 52%, 트럼프 42%. 대선 하루 전날인 11월2일 〈월스트리트저널〉이 NBC 뉴스와 공동으로 발표한 유권자 지지율이다. 12개 경합 주에서도 바이든은 트럼프를 6%포인트 앞선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 날 정치 여론조사 웹사이트 〈리얼클리어폴리틱스〉가 발표한 경합지 여론조사에서도 바이든은 플로리다주에서 1%포인트, 펜실베이니아주에서 4%포인트, 미시간주에서 5%포인트, 위스콘신주에서 6%포인트 이상 트럼프를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실제로는 막판까지 트럼프와 혼전을 벌였다. 먼저 전국 득표율을 보면 11월4일 저녁 현재 바이든 50.4%, 트럼프 48%로 두 후보의 차이는 불과 2%포인트 안쪽이다. 당초 대다수 여론기관들이 예측한 10%포인트 차이와 거리가 멀다.
플로리다주의 경우 바이든 우세 예측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이 오히려 3%포인트 앞서 선거인단 29명을 모두 차지했다. 미시간주에선 5%포인트, 위스콘신주에선 6%포인트 이상 바이든 승리가 예측되었지만 실제 차이는 1%포인트 안팎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애리조나주의 결과에 대한 예측치가 가장 근접했다. 〈리얼클리어폴리틱스〉는 최대 3%포인트의 근소한 우위로 바이든 승리를 예측했는데 실제 개표에서는 4%포인트 이상 나왔다.
4년 전 대선에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압승을 예측해 망신을 톡톡히 당한 여론조사 기관들이 이번 대선에서도 정확한 예측치를 내놓지 못했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여론조사를 믿지 않는 친트럼프 유권자들이 조사원들의 전화 설문에 응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조사 대상의 표본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트럼프 지지 성향이지만 드러내기를 꺼리는 ‘샤이 트럼프’ 유권자들이 설문 대상에 대거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미국 정치여론연구협회(AAPOR)에 따르면 지난 80년 동안 대선에서 전국 차원의 후보자 지지율 여론조사는 상당히 정확했다. 이를테면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후보는 전국 지지율에서 트럼프 후보를 3%포인트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는데 실제 개표 결과 2%포인트 앞섰다. 문제는 전국 규모의 여론조사와 달리 각 주별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편차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선의 당락을 가늠하는 경합 주에서 예측치가 빗나가는 경우가 많다.
선거 전문가들은 표본 선택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2016년 대선 당시 경합 주의 여론조사원들이 표본 대상에 대학 졸업생들을 많이 넣고 대신 노동자나 대학 졸업장이 없는 백인을 충분히 포함하지 않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이들의 트럼프 지지를 간과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설문조사를 하다 보니 주별 예측이 잘못 나온 것은 당연했다. 이번에 예측이 완전히 빗나간 플로리다주의 경우 ‘샤이 트럼프’ 유권자들의 규모를 여론조사 업체들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여론조사 기관들은 이번 대선을 앞두고 2016년 대선 당시 조사방법의 오류를 시정하고 보완했다. 트럼프의 주된 지지층인 고졸 백인 유권자 비중을 높이고, 거주지·인종·교육수준별 가중치를 변경해 농촌지역 유권자들과 백인 노동자, 고졸 학력 이하 유권자의 가중치를 높이는 방식으로 설문을 세분화해 정확도를 높이고자 힘썼다. 그럼에도 플로리다주를 비롯해 일부 팽팽한 경합주의 경우 유수한 여론조사 기관들조차 정확한 예측의 한계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시사인 20.11.11
|
'세상과 어울리기 > 외부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1.4 ~14 촛불 민주주의는 어떻게 벼랑 끝에 몰린 것일까 (0) | 2021.01.17 |
---|---|
2020.11.16~12.31 (0) | 2021.01.01 |
9.30~10.31 소득 3만 달러 시대,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는가 (0) | 2020.11.04 |
9.16~9.29 음모론의 시대 (0) | 2020.09.29 |
8.31~9.15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0) | 2020.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