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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시사만평-주간 쟁점

9.18~9.9 그것이 궁금하다. 대통령의 지지도?

by 이성근 2013. 9. 17.

 

 

   9.18 경향                                                                                                  한겨레

 

 

                                                     9.18 서울신문

[朝鮮칼럼 The Column] 朴 대통령 취임 6개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는 까닭 9.5

김민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정치학

흔히 한국 정치는 언젠가 본 듯한 장면이 반복된다고 한다. 정부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비슷한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인데, 새 정부의 첫 성적표인 취임 6개월 평가를 보면 한국 정치의 데자뷔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멀리 갈 것 없이 3김 이후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취임 6개월 성적표만 봐도 다른 듯 유사하다. 우선 세 정부 모두 인사 난맥으로 삐걱대며 출범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코드 인사로, 이명박 대통령은 고소영, 강부자 인사로 비판을 받았으며, 박근혜 대통령은 수첩 인사로 비판을 받았다.

 

박근헤 정부 출범 6개월 신문들이 매긴 점수가... 8.23 미디어오늘

8월25일이면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6개월이 된다. 신문들은 각자의 기획을 통해 박 정부의 관료, 경제 분야 등을 평가했다.

세계일보는 “‘책임총리‧장관제’를 실현하겠다던 박 대통령의 약속이 집권 6개월 만에 공수표가 되고 있다”며 “총리와 장관이 정책 및 인사의 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높다”고 전했다. 그 이유에 대해 “각종 국정 현안에 대한 대책을 일일이 지시하는 박 대통령의 ‘깨알 리더십’이 장관의 자율권을 제약하고 청와대가 사실상 모든 정부 고위직 인사를 주도하면서 내각이 대통령 눈치만 보는 구태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정홍원 총리를 “‘책임총리’보다는 관리형 이미지가 강하다”며 “진주의료원 사태, 원전부품 비리 등 주요 현안에 대해 소신을 갖고 의견을 조율하거나 갈등에 선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부처 장관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며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여러 지적과 지시, 질책을 쏟아내면 참석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씀’을 받아적기에 바쁜 풍경이 매번 연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신문은 “청와대는 김기춘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한 ‘2기 참모진’ 구성으로 더욱 확고하게 국정 주도권을 틀어쥐면서 내각 우위에 설 것”으로 전망했다.

 

 

동아일보는 박근혜 정부 6개월에 대한 ‘경제 성적표’를 제시했다. 이 신문은 교수 등 경제전문가 20명을 대상으로 “현 정부가 경제 분야에서 ‘잘한 일’과 ‘못한 일’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10점 만점에 6.1점”으로 “박근혜 정부가 그동안 가장 잘한 일은 ‘재정을 동원한 경기 부양’이고, 가장 잘못한 일은 ‘증세 이슈에 대한 소통 부족’”이었다.

이 신문은 응답자가 정부가 잘한 일로 ‘경기부양’을 꼽은 이유가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의 경기침체로 글로벌 경제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던 만큼 경제성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경제부처 장관을 지낸 모 인사의 인터뷰를 통해 “추경 추진과 투자 활성화를 치적”으로 꼽으면서 “인사 잡음이 있었고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좌우에 휘둘리지 않고 정책을 밀고 나간 점이 좋았다”고 말했다.

 

  

                                                                                                                                                 시사저널 13.7.1

 

  9.18 한국                                                                                                                     국민

기존 교과서가 친북·반미…" 이념몰이 공세교학사 집필자들 회견  "날짜·연대 등 오류 수정… 시각은 절대 못 바꾼다" 9.17 한국

역사를 왜곡하고 오류가 많아 교과서로서 함량 미달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대표 집필자들이 "기존 교과서들이 오히려 친북ㆍ친소ㆍ친공ㆍ반미ㆍ반일ㆍ반자유주의에 입각돼있다"며 이념몰이 공세를 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번 논란은 이념이 아닌 그간 연구하고 배워온 상식적인 역사관의 문제"라고 일축했다.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와 이명희 공주대 교수(한국현대사학회 회장)는 17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교육부의 수정ㆍ보완 지시를 충분히 이행하겠다"며 교과서를 출간할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도 수정의 범위에 대해 권 교수는 "날짜, 연대 등 사실상의 오류는 수정하겠지만 시각은 절대 바꿀 수 없다"고 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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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첫날인 18일 이른 아침부터 귀성차량이 몰리면서 전국 주요 고속도로 곳곳에서 극심한 지·정체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현재 고속도로를 통해 수도권을 빠져나간 차량은 20만여대, 들어온 차량은 6만여대로 집계됐다. 이날 하루 동안 예상 차량 대수는 빠져나가는 차량 41만여대, 들어오는 차량 28만여대다.

 

같은 시간 서울요금소를 기준으로 승용차를 이용한 예상 소요시간은 ▲서울~대전 6시간 ▲서울~강릉 5시간30분 ▲서울~광주 8시간30분 ▲서울~목포 8시간20분 ▲서울~대구 7시간40분 ▲서울~울산 8시간30분 ▲서울~부산 8시간30분 등이다.

 

 

‘고향 땅’ 애착 줄어… 역귀성·해외여행 증가로 9.18 서울신문

당신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입니까… 태어난 곳=출생지? 살아온 곳=거주지?

6년 만에 5일을 쉬는 추석이다. 추석 연휴가 길면 귀성객은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올해 귀성인구의 전체 비중은 추석연휴가 3일이었던 지난해보다 적다. 역(逆)귀성과 해외여행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귀성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 ‘사는 데가 고향’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고향이나 출생지를 찾아가는 사람들과 거주지에 남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향의 의미가 변하고 있다. ‘고향’의 정의가 예전보다 복잡하고 다변화됐다는 얘기다.

 

고향’이라는 사회문화적 단어를 통계로 나타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본인이 태어난 ‘출생지’로 아버지의 고향과 겹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는 고향 땅이 어디인가를 중요하게 본다. 둘째는 ‘거주지’다. 태어난 지역보다는 체험을 기준으로 한다.

 

17일 통계청에 따르면 출생지를 고향으로 볼 때 16개 시·도 가운데 단연 1위는 서울이다. 전체 인구의 16.1%가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어 경기(12.4%), 경북(9.7%), 전남(8.9%), 경남(8.6%) 순이다. 그러나 고향의 기준을 거주지로 보면 경기가 23.4%로 1위다. 서울(20.1%), 부산(7.1%), 경남(6.5%), 인천(5.5%)이 뒤를 잇는다. 출생지 기준으로 6개 광역시 중 부산만 10위 안에 들지만 거주지로 보면 부산, 인천, 대구가 10위에 포함된다.

 

출생지를 기준으로 고향을 파악하면 세대 간 차이가 크다. 40세 이상의 출생지는 수도권과 광역시 이외 지역이 60%를 넘는다. 반면 30대 미만에서는 수도권과 광역시가 절반(50%)을 넘는다.

 

학계는 고향의 의미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고향 땅’에서 ‘자신이 살아온 곳’으로 변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출생지’보다 ‘거주지’가 중시된다는 의미다. 추석 기간 중 역귀성과 해외여행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고향 땅에 대한 애착과 절실함이 약해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부모가 지키는 땅’이 고향이라는 생각도 변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매년 실시하는 표본조사에 따르면 추석에 귀성하는 인구 비율은 2003년 24.0%에서 올해 20.3%로 줄었다. 지난해 추석(21.9%)보다도 1.6% 포인트 감소했다. 반면 역귀성은 지난해 5.3%에서 올해 13.1%로 크게 늘었고 같은 기간 해외여행은 1.2%에서 1.8%로 증가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사와 이동이 잦아지면서 고향의 중요성이 갈수록 줄고 있다”면서 “최근 들어 부모의 묘를 고향 선산 같은 곳이 아니라 자녀들의 거주지 주변에 많이 만드는 것도 이 같은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수도권 인구의 증가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불어넣고 있다. 40~44세의 경우 서울 및 경기에서 출생한 비율이 20%를 넘는다. 35~39세는 28%, 30~34세는 31.3% 등이다. 25세 미만은 40%를 넘는다.

 

한상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고향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버지들은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하지만 수도권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고향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는 자식 세대는 단지 2차 경험을 한 것일 뿐”이라면서 “자라면서 자연스레 거주지를 더 중요하게 받아들인다”고 설명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핵가족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고향 방문 그 자체보다는 미국의 추수감사절처럼 가족들이 만나는 것에 대한 의미가 커지고 있다”면서 “고향을 찾는 추석 귀성객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9.17   내일                                                                                                      한국

 

2000 언론인의 시국선언 [박래부 칼럼] 미디어오늘 9.18

언론인들이 지난 8일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시국선언을 했다. 16일에는 ‘공정보도 실천 결의문’도 채택했다. 전·현직 언론인이 대거 참여한 시국선언문은 근래 쏟아져 나오는 대학교수와 학생, 시민단체 등의 선언문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앞서 청와대 주인으로 들어서기까지, 국정원과 경찰이 조직적으로 모의하고 저지른 정권적 비리를 규탄하고 광정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규탄 대상이 이명박 정권의 야비하고 반민주적 행위라면, 요구되는 광정의 방향은 박근혜 정부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국민에 대한 사과 등이다. 민주주의를 신뢰하는 국민으로서 당연한 분노이고 준엄한 요구다. 또한 진실보도가 생명인 언론인으로서는 삶의 의미와 무게가 걸린 주장이고 절규다.

 

 

그러나 현실은 보란 듯이 배반당하고 만다. 16일의 국회 국정원 청문회를 보면, 범죄자들의 한 가닥 반성의 빛도 없이 오만하고 반지빠른 태도 앞에 국민은 농락당할 뿐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은 증인선서부터 거부했다.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한다. 진실 선서부터 거부하니 또 다른 거짓을 들어 무엇 하랴. 새누리당 의원들의 도움을 받은 그들이 거짓변명으로 재차 국민을 속일 기회만 제공한 셈이다. 인간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가 참담하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추상같은 정론언론이 필요할 때

이럴 때 국민에 희망과 위안을 주는 것이 추상같은 정론언론이다. 제도적 허점을 악용하는 그들의 오만방자한 자세를 질타하고, 주권재민의 신성함과 국기문란을 바로잡아야 할 중대성을 일깨우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언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다수 언론에서는 이를 기대하는 것조차 가당찮다. 많은 언론과 언론인이 순수한 정도에서 멀리 벗어나 타락해 있다.

 

 

이번 언론인 선언문이 다른 단체의 선언문과 다른 점은 반성과 자탄의 아픔으로 얼룩져 있는 점이다. 현재 언론인은 침묵하거나 왜곡보도를 강요당하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보루가 돼야 할 언론이 민주주의 파괴의 공범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자기고백이다. 그러나 모든 언론인이 이런 반성과 자탄을 한 것은 아니다. 지금 진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보수수구 매체의 언론인은 이런 모습조차 보이는 일이 없다. 그악스런 유신체제에서도 언론의 타락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1979년 8월의 YH무역 농성사건을 떠올려 본다. 경찰 1,000여 명이 노동자 172명을 강제해산시키고 신민당 의원과 취재기자들을 폭행하는 과정에 노조 간부 김경숙씨가 사망했다. 새벽에 발생한 이 사건은 당시 석간이던 동아·중앙일보를 비롯하여 다음날 조간인 한국·조선일보 등까지 1면과 사회면을 도배질하다시피 했다. 경쟁지보다 자기 신문이 이 사건을 얼마나 크고 상세하게 보도하는가가 당시 기자들의 관심사였다. 두 달 후 박정희의 독재체제는 처참하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다음해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언론사 통폐합과 언론인 대거 강제해직이 이어졌다. 그 때 ‘이런 상황에서 언론사에 남아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며 스스로 회사를 떠난 기개 있던 기자들도 적지 않았다. 다시 1987년 6월 혁명으로 부분적 민주화가 이뤄졌으나, 조중동은 상업적 자사 이기주의를 거쳐 반민주적·반역사적 길로 치달았다. 지금 공영방송에서도 국정원의 불법을 지적하는 프로와 뉴스가 방송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국기기관의 보도 통제도 자행되고 있다. 이에 저항하는 언론인에 대해서는 징계가 이어지고 있으니, 현 정부의 비열한 언론통제가 이명박 정권과 다를 바 없다.

 

 

진실보도는 언론의 기본철학

지금 언론계는 민주화를 위해 시국선언을 하는 이들과, 압제자 편에 서서 시국선언을 하게끔 반민주를 조장하는 이들로 분열돼 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에 대한 진실보도는 좌우나 진보·보수의 이념과도 상관없다. 그것은 언론에 들어선 자가 짊어져야 할 기본 철학이고 책임이고 숙명이다.

 

 

이번 시국선언은 단시일 안에 서명이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역을 중심으로 2,000명에 육박하는 언론인이 참여했다. 이는 우리의 언론현실이 치욕과 고통의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적인 예로 이명박 정권 때 언론자유를 외치던 언론인 20명이 강제해직됐고, 그들은 새 정부 아래서도 아직 복직이 안 되고 있다. 그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를 헤매고 있는 한, 누구도 한국에 자유 언론이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언론인이라면 자신의 상대적 안락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하여, 시국선언을 계기로 조중동 등 보수언론과 공영방송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이 예전처럼 최소한의 사실보도와 공정보도라도 하는, 언론인 본래의 자리로 복귀하기를 희망한다. 의롭고 따사로운 기자정신의 울타리 속으로 되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자의에 의하든, 타의에 의하든 변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9.18

   9.18 조선일보

  9.18 뉴스데일리안

 

 

정희진의 낯선사이]국정원과 그 타자들 한겨레 9.17

만일 종북을 ‘종북’으로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이 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이는 전적으로 국가정보원과 언론의 노고가 아닐 수 없다.

 

지하철에서 두 청년의 대화가 들린다. “야, 우리 둘이 은행을 털려고 작정했어. 그렇게 마음만 먹어도 죄냐?”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마라. 은행 터는 거랑 내란이랑 같냐?”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서 ‘내란음모 사태’로 뉴스가 바뀌었다. ‘종북세력 존재론’이 난무했으므로 놀랄 일은 아니다. 여론은 정치권과 국정원 모두 개혁하라는 양비론이 대세다.

 

유사 이래 국정원이 지금처럼 유능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통일전선 전술로 치자면, 차르와도 연대하라던 레닌도 칭찬할 만하다. 물론 현재 정황은 그들의 능력에 기인했다기보다는 상대방들이 -실책도 아니고- 워낙 무능, 황당한 까닭에 상황이 저절로 전개된 측면이 크다. 지금 국정원(one)은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세 정치 집단(the others)과 자유자재로 연대를 구사하고 있다. 국정원까지 네 진영 모두 주연이다. 떡고물은커녕 국정원 주최의 ‘잔치’ 근처에도 못 간 집단은, 어떤 말을 해도 욕먹는 야당뿐이다.

 

첫 번째 파트너는 말할 것도 없이 새누리당을 필두로 우리 사회의 반북 정서로 먹고사는 집단이다. ‘내란’ ‘혁명 조직’ ‘국가안보’라면 만사형통이니 일도 아니다. 사회 정서에 안보라는 당위까지 겹쳤으니, 이보다 편한 “음지의 업무”가 어디 있으랴.

 

두 번째 상대는 진보 진영이다. “통합진보당이 워낙 이상하니까 국정원이 대신 그들을 정신 차리게 했으면…”이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들은 국정원보다 ‘종북’의 말로에 더 관심 있는 듯 보인다. 물론 이들은 평소 원칙대로 국정원의 권력 남용과 정권 안보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 경우 양비론은 “국정원은 원래 그런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결국은 ‘종북’ 세력만 비난하는 모양새가 된다.

 

양비론의 실제 효과는 매카시즘 방관이다. ‘종북교(?)의 황당무계한 종교 활동’의 폐해와 별개로 국정원은, 일부 진보 진영과 ‘종북’ 세력의 오랜 반목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마지막 파트너는 공안 정국의 피해자, 통합진보당이다(통합? 기존 정당과 마찬가지로 당명 자체가 패권적이다). 종교집단은 탄압을 받으면 순교자가 된다. 개혁(改革)은 글자 그대로 피부를 벗겨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인데, ‘전통의 강호’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있으니 내부는 공고해지고 개혁은 저절로 양해된다. 이렇게 ‘레드’와 레드 헌트 집단은 비대칭적인 짝을 이루고 있다. 정치권에 패자는 없다. 민주주의만 후퇴했을 뿐이다.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타자를 만들어내는 방식과 결과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북한. 세계 최빈국, 남한 경제의 33~40분의 1, 세습, 올브라이트 미국 전 국무장관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구걸과 협박을 일삼는 ‘불량국가’, 수용소 이미지, 뼈만 앙상한 어린이들의 사진, 지도자 부부의 건장한 얼굴까지 거슬린다.

 

성숙한 시민은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이런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에게 전달되는 북한의 모습이 객관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효과다. ‘세계로 웅비하려는 대한민국’에 같은 민족인 북한은 부담스럽다 못해 창피한 존재다. 북한은 남한 사람이면 누구든 언제나 써먹을 수 있는 만만한 혐오 카드, 치사한 핑계거리다.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해주는 대상이 항상 그리고 영원히 대기한다는 사실은 두려운 일이다. 백인 노동자의 각성과 해방이 불가능한 이유는 흑인의 존재 때문이다. 흑인이 백인을 구성할 때, 백인은 절대로 인간이 되지 못한다.

 

 

자기 비리를 덮기 위해 ‘종교집단’을 내란 모의로 잡아넣는 국정원의 행위는 공권력 남동(濫動)이다. 굳이, 내란 세력을 지목하라면 어렵지 않다. 말 그대로 “정부(국민)에 반대하여 일정한 규모와 조직을 갖추고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4대강을 ‘녹차 라떼’로 만들고 쌍용차, 용산 사태 등에서 인명을 살상한 이들이 누구인가. 눈앞에서 일어난 국토 훼손과 살인에 증거가 필요한가?

 

‘종북’과 국정원의 불법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양비론은 올바르지 않다. 국가가 할 일은 범법행위에 국한되어야 한다. 그조차 늘 조작 논란과 물증 없는 언론 플레이로 끝나지만. 국정원의 목적이 처벌이라기보다 ‘진보=북한’이라는 이미지 공습과 자기들 ‘밥그릇’ 때문임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북한이나 ‘종북’이 없다면 국정원은 직원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한다.

 

사회는 ‘종북세력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영원한 조직은 없다. 문제가 있으면 산으로 들어가 도를 닦든, 더욱 단결하여 더욱 고립되든, 억울함을 규명하여 국민을 설득하든, 스스로 변태(變態)될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말대로 “남은 일은 저절로 일어난다, 일어날 일이라면”.

 

                                9.17 국민일보

 

 

   9.17 경향                                                                                                한겨레

 9.17 한국일보

 9.17 오마이뉴스

  9.17 한겨레신문

  9.17 중앙일보                                                                                          9.16 한겨레

 

   9.16 경향                                                                                                         내일신문

 

“살아있네, 조선일보” 9.14 미디어오늘 [기자수첩]

영향력 급감하는 보수 언론의 패악질… 공포가 아닌 조롱 대상, 극우 언론 몰락 신호탄

조선일보는 역시 ‘1등 신문’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서슬퍼런 검찰총장의 음습한 사생활을 들춰내서 그것도 1면 머리기사로 뽑아 올렸다. 더 놀라운 사실은 채동욱 총장에게 혼외자식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하면서 정작 총장이나 아이 어머니에게 확인 취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슴 떨릴 정도로 무모하고 정말 무지막지한 자신감이다. 조선일보는 과감하게 베팅을 했고 의도했던 대로 판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조선일보는 아이 어머니의 편지가 공개되고 채 총장이 유전자 검사를 받겠다고 맞받아치자 당황한 듯 그 아이가 혼외자식이 아닐 가능성을 슬쩍 흘리기는 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심할 만한 정황이 충분했다거나 여전히 채 총장의 해명을 믿을 수 없다고 몰아세웠다. 여론의 비난이 조선일보를 향하고 채 총장이 물러날 것 같지 않자 급기야 법무부 장관까지 나섰다. 채 총장을 감찰하겠다고 밝힌 뒤 한 시간 만에 채 총장은 사의를 표명했다.

 

조선일보는 굳이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 수사를 방해하려 한다는 오해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 지난 며칠 조선일보 지면에서는 오해를 해도 할 수 없다, 뭐라고 비난하든 그런 비난을 모두 감수하고서라도 채 총장을 날리겠다는 강한 의지가 읽혔다. 국정원 검찰 수사가 윗선의 콘트롤을 벗어났다는 판단 때문이었을까. 조선일보의 혼외자식 보도는 약점을 들춰내 여론의 뭇매를 맞게 하고 검찰을 장악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지점에서 두 가지 시나리오를 모두 검토해 볼 수 있다. 첫째, 혼외자식이 맞다면 유전자 검사를 하면 밝혀질 일이다. 결국 채동욱 퇴출은 시간문제일 텐데 굳이 법무부 장관까지 출동해야 할 이유가 뭐였을까. 둘째, 혼외자식이 아니라면 조선일보는 상당히 난처한 입장이 된다. 채 총장에게 힘이 실릴 것이고 국정원 수사도 콘트롤이 어렵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 유전자 검사를 받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채 총장이 결국 뭔가 구린 게 있으니까 물러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면 법무부의 어시스트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납작 엎드리기로 작정한 이상 채 총장은 유전자 검사도 받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자연스럽게 조선일보 보도의 진위 여부도 미궁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채 총장은 검찰의 명예를 지키거나 부당한 수사 외압에 맞서기 보다는 자신을 적당히 희생양으로 포장하는 선에서 물러나는 타협을 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는 조선일보의 강력한 영향력을 다시 확인했다. 올드 미디어의 위기라고 하지만 아직도 1면 헤드라인에 뭘 뽑아 올리느냐에 따라 판을 뒤집고 여론을 흔들고 정치권력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 최근 일련의 사건은 조선일보가 마음만 먹으면 검찰총장 하나 날리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라는 무시무시한 교훈을 남겼다. 그게 조선일보가 권력을 이용하는 방식이고 권력이 조선일보와 공존공생하는 메커니즘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일보의 혼외자식 보도가 조선일보의 단독 작품이 아니라는 걸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사실이다. 법무부 장관은 리모컨일 뿐 훨씬 윗선이 개입돼 있고 이 모든 해프닝이 결국 검찰의 국정원 수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혹을 대부분 국민들이 공유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파괴력이 여전한 것으로 확인됐지만 대부분 국민들이 그 힘을 두려워한다기 보다는 냉소하고 조소하고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진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조선일보의 무리수는 역설적으로 박근혜 정부와 이에 기생하는 보수세력의 다급한 위기의식을 드러낸다. 조선일보의 영향력이 급격히 쇠락해 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언론윤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뉴스가 없으면 만들어내고 이슈가 안 되면 직접 플레이어가 돼서 이슈의 중심에 뛰어든다. 개가 사람을 무는 걸로 뉴스가 안 되니 사람이 개를 물겠다고 나선 판이다. 이번 일련의 사건이 우리 사회에 남긴 가장 큰 성과는 조선일보의 숨겨진 이빨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채 총장의 혼외아들 의혹 보도가 검찰의 국정원 수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면 조선일보의 일련의 보도는 폭력을 넘어 사실상 범죄에 가깝다. 모든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을 휘둘렀고 결국 의도했던 대로 국정원 수사를 진두지휘했던 채 총장을 끌어내렸다. 채 총장의 낙마로 아마도 국정원 수사에 제동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오히려 급격히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조선일보의 혼외아들 의혹 보도는 조선일보의 붕괴를 앞당기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은 이제 조선일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조선일보의 권력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오랜 동지였던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마저도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음만 먹으면 검찰총장도 날리는 조선일보, (사실 단칼에 날리지도 못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일보는 그 어느 때 못지않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무서운 강력범죄? '중구'를 조심하시라 9.17 오마이뉴스

[한눈에 보는 전국범죄지도①] 서울-부산-대구 빈발... 제주도 증가세

 

전국의 5대 범죄(살인, 강도, 강간·강제추행, 절도, 폭력) 발생 건수는 2008년 54만9644건에서 2012년 62만4965건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특히 강간·강제추행 등 성범죄는 1만5021건에서 1만9619건으로 증가했다. 이에 반해 5대 범죄 전체 검거율은 75.0%에서 61.2%로 13.8%나 감소했다.

 

<오마이뉴스>는 전국의 경찰서 250 곳과 행정구역 전국 230개 시·군·구를 216개 지역으로 분류해 인구 10만 명 당 5대 범죄 발생 건수를 분석했다.

통상 인구가 많은 지역은 범죄 발생 건수도 많다는 점에서 인구 대비 범죄 발생 건수로 비교했다. 2013년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5대 범죄 발생 건수를 지역별 인구로 나눈 후 10만을 곱해 10만 명 당 5대 범죄수를 구했다.

 

유동인구 많은 도심, 5대 범죄 비율 높아

그 결과 올해 상반기 전국에서 10만명 당 5대 범죄가 가장 많이 일어난 곳은 대구 중구(2293.0건)-서울 중구(1878.9건)-부산 중구(1814.3건)-서울 종로(1494.9건)-광주 동구(1488.4건) 순이다. 부산 동구(969.2건)-대구 서구(931.0건)-부산 부산진(929.7건)-제주 제주시(893.7건)-울산 남구(874.0건)가 그 뒤를 이었다.

 

 

 

 

 

10만 명 당 5대 범죄가 가장 적은 지역은 인구수가 적은 농어촌 지역이다. 강원 인제(52.4건)-대구 달성(123.8건)-강원 화천(144.3건)-전북 장수(146.6건)-전북 진안(148.4건)순이다.

 

상위 지역들은 주로 대도시의 도심이다. 거주 인구(10만 명 내외로)는 적지만 유동인구가 많아 범죄 발생 빈도가 높은 것으로 해석된다. 서울, 부산, 대구 3대 도시의 중심가인 중구가 10만 명 당 5대 범죄 수 1, 2, 3위를 차지해 눈길을 끈다.  대구 중구는 '대구의 명동'으로 불리는 동성로가 자리잡고 있다.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반월당역이 지나고 인근에 대구시청과 대구교대, 계명대 등이 위치해 인구 밀집 지역이다. 서울 중구에는 종로와 을지로 등에 대기업 본사 등의 업무 빌딩이 많고 유흥업소가 밀집해 있다. 부산 중구는 자갈치 시장, 국제 시장이 위치해 유동인구가 많다. 또 부산국제여객터미널, 용두산공원 등 관광객 수요가 많다.

 

도심은 검거율도 낮아... "상인들과 경찰의 치안 협력 활동 필요"

범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일어나지만 검거율은 낮았다. 이들 도심 지역의 평균 검거율은 전국 평균 69.9%에 비해 8.4%포인트 낮은 61.5%를 기록했다. 대구 중구(72.2%)와 부산 동구(72.0%)만 전국 평균 이상을 기록했고, 광주 동구(68.8%), 서울 종로(64.5%), 서울 중구(61.8%)는 전국 평균을 밑돌았다. 도심 지역 가운데 부산 부산진이 52.6%로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다.

 

도심은 인구 공동화 현상이 특징이다. 주간에는 인구밀도가 높지만 야간에는 인구밀도가 떨어져 새벽에는 치안이 불안하다. 또 도심에는 술집, 유흥업소가 밀집해 있다. 또한 이들 지역은 거주 인구가 아닌 유동 인구에 의한 범죄가 많아 사건 발생 후 피의자 신병 확보가 어려워 검거율이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도심 특성에 맞는 치안 대책을 주문했다.

박경래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유동인구가 많은 도심에서 범죄가 많다는 것은 시민들 사이의 비공식적인 감시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라며 "도심은 경찰 병력과 시민의 감시로도 메울 수 없는 치안 공백 지역이 다수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박 연구위원은 "도심에서 경찰은 인구 밀집 시간대와 치안 취약 시간에 일정 구역을 도보 순찰하거나 주요 인구 밀집 지역에 목검문소를 설치해 도심의 치안 공백을 메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최근 들어 상점의 24시간 영업 증가로 야간이 대낮같이 밝아지고 인구 공동화 현상이 약해져 범죄 발생 환경이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곽 교수는 "도심 발생 범죄를 가장 가까이에서 발견하는 유흥업소 종사자와 상인들과의 협력 활동이 중요하다"며 "경찰이 범죄 발생 빈도가 높은 유흥업소, 상가 상인회를 지정해 치안 예방 협력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광객 몰리는 제주도, 5대 범죄 꾸준히 증가

대도시와 다르게 제주특별자치도의 제주시가 인구 10만 명 당 5대 범죄 발생건수 10위 안에 들어온 게 눈에 띈다.

 

서귀포시도 766.2건(전국 19위)으로 전국 평균 580.4건에 비해 높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구성된 제주도는 지난 2008년에 10만 명 당 5대 범죄수가 1603.9건이었는데, 2012년에는 1733.7건으로 증가해 8.1%가 높아졌다. 2013년 상반기에만 893.7건으로, 이런 추세라면 지난해보다 높은 수치를 나타낼 것으로 예상된다. 5대 범죄 중에서도 절도가 2008년 664.1건에서 2012년 874.6건으로 31%가 증가했다. 올해 상반기에만 절도는 456.8건을 기록했다.

 

제주도의 범죄율 증가는 중국, 일본 혹은 국내 관광객의 유입과 관련된 것으로 풀이된다. 제주도관광협회에 따르면 지난 8월 제주도의 전체 관광객은 117만5651명으로 종전 최고기록인 올해 7월의 105만7328명보다 11.1%(11만8323명)가 증가했다. 올해 들어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제주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외부 관광객들의 소지품 분실·도난과 관광객 사이의 폭력 건수가 늘어나고 있다"며 "관광객이 많은 여름철에는 특별 대책반을 가동해 사전 예방활동을 전개하고 검거율을 높이는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9.13 내일

후쿠시마 주변 수산물 8000t 이미 수입"…못 믿을 정부9.16 조선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인근 5개현에서 냉동고등어와 냉장명태 등 주요 수산물 약 8000t이 국내에 대거 수입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가운데 2800t은 올해 수입됐다.

 

심지어 후쿠시마현과 북쪽으로 맞닿아 방사능 오염 우려가 큰 미야기현에서 수입된 수산물은 지난해 1800t으로 원전사고가 있던 해보다 줄지 않고 오히려 167배 늘었다.

 

16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임내현 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후쿠시마현 등 8개현 수입수산물 검사현황’에 따르면,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부터 지난달 31일까지 인근 5개현에서 총 403건, 7982t의 수산물이 국내 수입됐다.

 

 

 

수입 지역은 지바현, 미야기현, 아오모리현, 이바라키현, 이와테현 등 원전사고 지역 인근 5개현이다. 이외 후쿠시마현, 도치기현, 군마현 등에서 수입된 수산물은 없었다.

 

인근 5개현에서 수입된 수산물은 냉동고등어, 냉장명태, 횟감용 냉동방어, 활방어, 활참돔, 활돌돔, 활백합, 마른전복살 등으로 한국인 식탁에 자주 오르는 수산물이었다.

 

특히 미야기현에서 수입된 수산물은 2011년 11t이었으나 원전사고 이듬해인 2012년 1844t으로 167배 급증했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달 말까지 617t이 수입됐다.

 

후쿠시마 인근 수산물 오염 계속 악화 9.17 한겨레

5월 들어 다시 심해져…항만, 기준치 500~1000배  20km 앞바다 가자미, 우럭, 홍어, 넙치 등 ‘빨간불’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 여파와 관련해 한국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 수산물 오염일 것이다. 실생활에 가장 직접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정부가 최근 후쿠시마 인근 수산물 수입을 금지하면서 일반인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후쿠시마 원전 주변 수산물 오염 조사 결과는 제한되어 있다. 객관적인 연구 결과 가운데는, 지난 4월 국제 온라인 저널 <사이언티픽 리포츠>에 실린 2011년 후쿠시마 주변 민물 고기의 오염 실태 논문이 있다. (후쿠시마와 동일본 지역 민물 세슘 오염 개관(영문 PDF)) 이 논문은 두명의 연구자가 일본 정부 발표 자료를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객관적인 연구가 진행되더라도 발표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광범한 조사 자체도 쉽지 않다.

 

 

 

공개되는 최근 자료는 원전 운영사인 도쿄전력의 발표 자료가 가장 폭넓다.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 원전 바로 앞 항만 7개 지점, 원전 20킬로미터 이내 바다의 11개 지점에서 수산물을 채취해 방사능 오염을 조사하고 있다. 이 발표 자료 가운데 지난해 연말부터 지난 7월까지의 자료를 모두 취합해 정리했다. (당사자가 채취해서 검사한 것이고, 제3자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먼저 후쿠시마 원전 바로 앞 항만의 오염 실태를 보면, 최악이라고 해도 심하지 않다. 일본 정부의 방사능 세슘 기준치는 킬로그램당 100베크렐인데, 지난해말부터 지난 5월까지 측정 결과를 보면 최대 74만 베크렐까지 나온다. 기준치의 7400배다. 시기적으로는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3월까지 상대적으로 높다가, 4월부터 떨어지는가 싶더니 5월에 다시 상승했다. (모든 측정치는 반감기가 2년 정도인 세슘-134와 반감기가 30년이나 되는 세슘-137 수치를 합친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점점 통제하기 힘든 국면으로 접어든다는 우려가 높다. 일본과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은 앞으로의 상황을 계속 주시하면서, 적절한 보호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필요 이상의 과장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애써 위험을 외면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9.13  국민                                                                                                     경향

 

   9.13 한겨레                                                                                                           9.12 한겨레

 

 

원전 마피아의 마지막 논리를 깰 이 누구 9.15 미디어오늘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기고] ‘방사능안전기준치’를 따라 보도하던 언론들은 뒤통수… 원전마피아 논리를 깨라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이 차례로 폭발해서 고농도 방사능 증기가 대기 중으로 확산되고 방사능 오염수가 바다로 유출되었을 때 필자는 앞으로의 영향에 대해 문의하는 전화를 여기저기서 받았다. 필자는 이렇게 답했다. “이제 우리는 일상적으로 관리해야 할 발암물질 목록에 ‘방사성 물질’ 한 가지가 더 추가된 셈입니다.”

 

방사성물질은 대표적인 발암물질이다. 방사선의 생물학적 영향에 대한 미국 과학아카데미의 7번째 보고서(Biological Effects of Ionizing Radiation VII, BEIR VII)는 저선량 방사선 즉, 100mSv 이하의 방사선량에 대한 각종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아무리 적은 양의 방사능이라 하더라도 (암발생)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결론를 내고 있다. 방사성물질이 내는 방사선량에 대한 의학적 안전 기준치는 없다는 의미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면서 풍족하고 편리한 생활을 향유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위험요소가 더 늘어나고 더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들이 환경호르몬, 유전자조직식품 그리고 방사성물질이다. 환경호르몬에 대해서는 이미 사회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고 언론에서는 ‘환경호르몬을 피하는 생활법’도 소개되고 있다. 유전자조작식품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뜨거운 논쟁 중인데 선진국에서는 최소한 유전자조작 원료가 들어있는 식품인지는 표시하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방사성물질의 위해성에 대해서도 의학계에서는 결론이 난 얘기다. 핵의학 등 방사성물질을 이용하는 쪽에서는 기준치 이하의 방사성물질은 문제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방사성물질의 위해성에서 기준치는 없다는 것이 앞서 소개한 미국 과학아카데미와 예방의학분야 등 의학계 전반의 정설이다. 이런 방사성물질이 우리나라에서 발암물질로 인정받게 되는 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로 2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우리나라 정부와 원자력계가 일관되게 보여 온 세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편서풍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시 방출된 방사성물질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기준치 이하의 방사성물질은 안전하다는 것, 세 번째는 우리나라 원전 노형은 후쿠시마 원전 노형과 달라서 안전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주장의 논리는 사고 난 지 한 달만인 4월 초반에 후쿠시마원전 발 방사성물질이 섞인 방사능 비가 우리나라 전역에 내리면서 깨어졌다. 일년 후에는 사고 당시에 후쿠시마 원전 발 방사성물질 국내 유입 시뮬레이션을 한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의 자료를 폐기하도록 국가정보원이 외압을 행사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인접국가에서 대량의 방사성물질이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당연히 방사성물질 유입경로를 예측하는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이 국가기관의 역할이겠지만 어쩐 일인지 모두가 벙어리였다. 무능한 건 줄 알았는데 국가권력에 의한 외압이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이후 국정원의 외압사실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해당 언론사의 기자는 국정원으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국가권력의 횡포에 다수 언론은 침묵했다.

 

그리고 두 번째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벽이 방사성물질의 안전 기준치 주장이다. 일본 수입수산물에서 방사성물질이 꾸준하게 검출되었지만 정부는 ‘기준치 이하라서 안전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면서 자국민의 안전을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도 떳떳했다. 지난 2년 반동안 언론은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적어서 보도했다. 그런데, 시민들 사이에 ‘방사능 괴담’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는 그동안 방사능 오염수가 지속적으로 바다로 유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본정부가 인정했다. 방사능 괴담을 넘어서 방사능 공포가 전국을 뒤덮었다.

 

정부의 제대로 된 조치가 없자 국내 수산업의 타격이 심각해졌다. 결국, 정부의 방사능 안전 기준치 논리도 깨어지고 말았다. 미량이라도 검출되는 일본식품을 사실상 수입금지조치한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자국민 보호를 위해 한국정부가 취한 첫 번째 조치이다. 우리를 제외한 인접국가 대부분은 원전 사고 직후 취한 조치였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방사능안전기준치’를 따라 보도하던 언론들은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일본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는 미량의 방사성물질이라도 건강에 영향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셈이기 때문이라서 언론사들은 그동안의 보도 내용을 뒤집는 보도를 하게 된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정부의 세 가지 주장은 사실 원전 마피아 주장이다. 원전은 친환경적이고 안전한 에너지원이라는 점을 강조해온 원전 마피아들은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직간접적인 국내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세 가지 논리를 개발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일본산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로 원전 마피아와 정부 당국자간의 균열이 생긴 것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원전 마피아들의 논리, 후쿠시마 원전과 우리나라 원전은 노형이 달라서 우리나라 원전이 안전하다는 것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깨어질까. 거의 10년마다 대형 원전사고가 난 현실 앞에서 원자력계는 여전히 우리나라 원전에서 대형사고가 날 확률은 천만년의 한 번, 일억년이 한 번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마지막 원전 마피아의 논리가 어느 기자와 언론사에 의해 깨어질 지 자뭇 기대된다

     9.12 내일                                                                                                           경향

 

핵발전소 '펑', 해운대 30분-부산시 90분이면 초토화 9.12 프레시안

[정희준의 '어퍼컷'] 부산, 제2의 후쿠시마가 될 것인가?

 

수도권에는 핵발전소가 없다. 왜일까. 간단하다.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핵공학자들이 아무리 "핵발전소는 안전해요~"를 외쳐도 그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그간 가동한 전 세계 500여 개의 핵발전소 중 이미 세 개가 터졌다. 그리고 그곳은 죽음의 땅이 됐다. 서울 근처엔 절대 안 지을 것이다. 최근 정부의 데이터를 총괄하는 제3정부통합전산센터 건립을 위한 입지 선정 작업이 한창이다. 기획재정부는 부산을 선호한다고 한다. 해외에서 해저로 케이블이 들어오는 송정에 데이터베이스 망 기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제시한 입지 조건 중엔 이런 게 있다고 한다. 핵발전소에서 30킬로미터 이상 벗어나야 한다는 것. 송정은 고리 핵발전소 바로 옆 동네다. 이는 정부 역시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되겠다.

 

통합전산센터는 중요한 시설이다.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국민은? 부산, 울산, 경상남도에 사는 국민은 안전한 곳에 살 권리가 없는가. 정부는 입지 조건으로 '30킬로미터 밖'을 제시했다는데 바로 그 30킬로미터 안에는 343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살고 있다. 정부는 그들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는가. 그들의 목숨 값은 전산 데이터 값보다 못한가.

 

정부는 알고 있다

국토 면적당 핵발전소 밀집도는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핵발전소라는 사실상의 폭탄을 껴안고 사는 지역이 바로 부산이다. 부산은 기장군 고리 지역에 이미 6기가 가동 중이고 여기에 또 4기가 추가 건설 중이다. 인구 350만 대도시가 핵발전소 10개를 끼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문제는 고리 핵발전소 1호기다. 1호기는 2007년 30년의 수명이 만료됐음에도 이명박 정부가 10년간 재가동을 승인해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고리 1호기는 '노후 핵발전소'도 아니고 사실상 '폐 핵발전소'인데 이걸 땜질해서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국내 최초 핵발전소인 고리 1호기는 건설 당시 기술 부족으로 인해 세 조각을 붙여 만든 '용접 원자로'로 전체 핵발전소 사고 및 고장 건수 659건 가운데 129건을 기록한 '공포의 핵발전소'이다.

 

그런데 지난 4월 한국수력원자력은 연장 시한이 4년 밖에 남지 않은 고리 1호기에만 무려 2382억 원을 들여 부품 교체에 들어가기로 했고 또 곧 스트레스 테스트를 치를 것이라고 한다. 2차 수명 연장을 위한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든, 비행기든, 그 어떤 기계든 37년을 쓰면서도 그 성능을 유지하는 것이 있는가. 그럼에도 또 재연장을 해서 50년 쓰겠다고 나선 것이다. 전 세계 핵발전소 평균 수명은 19.3년에 불과하다.

 

핵발전소 사고는 시간의 문제, 내가 아니길 바랄 뿐

그렇다면, 원자로가 녹아내리는 노심 용융 사고는 가능할까. 한국수력원자력 측은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만약에 사태에 대비해 제1, 제2, 제3의 비상 발전기를 가지고 있고 후쿠시마 사고의 원인이 쓰나미로 인한 발전기 침수였기 때문에 비상 전원 차량까지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4단계의 비상 대비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다 무용지물이었다. 고리 1호기는 이미 2012년 2월 정전 사고가 났고 또 한국수력원자력은 이를 담대하게 은폐했다가 들통이 났다. 원자로에 전력 공급이 끊기는 완전 정전(black out)이 12분간이나 지속됐는데도 이를 숨긴 것이다. 이게 2시간 정도 지속되면 연료봉이 녹기 시작하고 이는 곧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한국판이 되는 것이다. 당시 우리는 '대재앙 100분 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다시는 이런 사고는 없을 것인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지난 7월 고리 1호기의 비상 발전기 2대가 무려 18시간 동안 멈췄다. 이마저도 또 은폐하려 했던 것인지 두 달이 지난 후에야 알려졌고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지금도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국민들은 고리 1호기의 연이은 사고를 잘 모를까. 핵발전소에서 거리가 먼 중앙 언론사들이 이 문제를 해외 토픽 보듯 하기 때문이다.

 

사고 나면 대피가 가능할까

그러면 실제 상황을 그려보자. 고리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터졌다고 말이다. 방사성 물질이 퍼지기 전에 대피가 가능할까. 그렇다면 방사성 물질은 얼마나 빨리 퍼질까.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직후 국방과학연구소의 화생방 시스템 모델에 기상청 자료 등을 입력한 시뮬레이션 결과 고리 핵발전소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규모의 사고가 날 경우 북동풍이 초속 4미터로 불면 기장군은 20분 만에, 50분이 지나면 서부산 경계 지점까지, 90분이면 부산 전역이 방사능으로 덮인다고 한다. 북동풍이 잘 부는 여름엔 더 빠르게 퍼진다고 한다. 결국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해운대 구민들에겐 30~40분, 부산 시민들에겐 90분 남짓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과연 그 시간 안에 대피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궁금함에 더해진다. 과연 이들 국민들은 사고 소식과 대피령을 얼마나 빨리 알게 될까. 사고 즉시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고리 핵발전소에서 제때 한국수력원자력으로 보고할까? 그러면 한국수력원자력은 원자력안전위원회 또는 한국전력으로 곧바로 보고할까? 그럼 여기서 국토교통부로, 그리고 청와대로 얼마 만에 보고가 될까. 시간 꽤나 걸릴 것이다.

 

그러면 국토교통부와 청와대는 얼마 만에 이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을까. 부산, 울산, 경남의 300만 명이 넘는 국민들에게 대피하라는 결정, 그거 쉽게 할 수 있을까. 이를 결정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마 부들부들 떨 것이다. 한 전문가에 물어봤다. 사고 후 얼마 만에 부산 시민들이 알게 될 지에 대해서. 그는 회의적이었다. 보고 라인을 통해 상부 기관에 올라가고 각 기관마다 혼란 속에 논의도 거칠 텐데 어느 세월에 시민들이 알겠냐는 것이다. 작년 고리 1호기 정전 은폐 사건도 조직적 은폐 기도와 상부 보고 지체가 뒤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핵발전소 사고가 터지면 대피할 시간도 없이 피폭되고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라는 것이었다.

 

핵발전소 사고의 그날은 '지속 가능한 아비규환'의 시작

핵발전소는 사고를 배제할 수 없다. '언제냐'의 문제일 뿐 대형 사고는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핵발전소 1기에 밸브만 3만여 개, 용접 부위는 6만5000여 곳, 배관의 길이는 170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부품이 고작(?) 2만 개라는 자동차도 가다가 그냥 서버리기도 하는데 핵발전소는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고리 핵발전소는 사고발생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우선 1호기는 폐원자로를 땜질해서 쓰고 있다. 사고 및 고장 건수 129회에 빛나는 공포의 핵발전소이다. 특히 한국은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전쟁 발발 시 적의 미사일이 최우선적으로 타격하는 곳은 통신기지와 원자로이다.  자연환경도 딱이다. 부산 인근 지역은 지난 10년간 핵발전소 4곳의 반경 50킬로미터 내에서 총 75차례의 지진이 발생한 곳이다. 바닷가에 있으니 당연히 쓰나미도 가능하다.

 

인적 환경은 어떠한가. 며칠 전 검찰은 핵발전소 부품의 품질 보증 서류 위조, 시험 성적서 위조, 인사 청탁 등의 핵발전소 비리로 총 43명을 기소하고 54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이중엔 그 유명한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과 한국전력 이종찬 부사장, 김종신 한국수력원자력 사장도 포함되어 있다. 핵발전소 집단은 사고 은폐 집단이자 사실상 비리 집단임이 증명된 것이다.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하기에 이만큼 탁월한 조건을 가진 핵발전소가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방사능 유출 사고가 나면 부산과 울산의 공장이 멈추고 세계 5위의 부산항이 폐쇄돼 경제적 손실이 600조 원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장기적 사망자가 30만, 80만 명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정말 사고가 터지면 이러한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대재앙, 사회적 아수라장이 발생할 것이고 이는 지속 불가능한 아비규환으로 연결될 것이다.

 

일단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때처럼 노심 용융 사고가 발생하면 '30킬로미터 내 343만 명'이라는 숫자는 사실상 주민 대피가 불가능한 숫자다. 후쿠시마는 30킬로미터 내 거주자가 고작 15만 명이었다.  이제는 아파트촌으로 변모하여 수시로 교통 정체에 시달리는 43만 해운대 구민들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울산은 또 어떻고.

 

이 위급한 마당에 전화는 분명 불통이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자식을 찾지 못해 공포감에 휩싸일 것이다. 또 일시에 그 많은 사람들이 차를 몰고 핵발전소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려 하겠지만 곧 길은 막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차를 버리고 짐을 지고 걷게 되지 않을까. 다 잘 됐다 치자. 그러면 대피한 이 수십만 또는 수백만 명을 어디서 묶게 하겠는가. 이건 대피소 수준이 아니다. 수용소를 수백 개 만들어야 한다. 수용소 생활 10년이면 집에 가게 될까? 20년?

 

아니면 일본이 지금 이순간도 찾아 헤매는 방사능 오염 제거 방법을 터득하는 그날까지? 그래서 그린피스도 "세계 어디에도 이런 곳이 없다"면서 만약 고리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나면 후쿠시마 사고를 훨씬 능가하는 세계적 대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요즘 유신 시대로 회귀했다고 걱정들이 많으신데 유신 시절이 아니라 아예 한국 전쟁 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다.

 

'유신 시절' 정도가 아니라 '동란 시절'로 회귀할 수도

사실 이 문제는 부산과 인근 지역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금 일본은 후쿠시마에서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도쿄에서도 방사능 오염 지수가 평소의 100배 이상 측정되는 경우가 빈번해 일본인들에게 두려움을 증폭시키고 있다. 사고가 나면 영남권 전체가 위험 지역이 된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해류를 따라 대전, 광주, 강원도, 서울까지도 방사능은 여행할 수 있다.

 

서울의 고급 백화점에 납품되던 기장 미역이 요즘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지금도 이러한데 사고가 터지면 일단 남쪽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해산물, 축산물의 교류가 끊기게 될 것이다. 다른 상품들도 거래가 끊길 것이다. 결국 부산, 울산 지역의 사람들은 인간관계도 타격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후쿠시마에서 온 사람들 만나기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기고 있다 한다. 정서적, 사회적 격리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나중에 복구라도 하지만 핵발전소가 잘못되면 아예 사람이 접근도 못하는 '죽음의 땅'이 된다. 핵발전소에서 적어도 20킬로미터 이내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한다. 한국 사람들 재산이라는 게 집이 전부인 경우가 많은데 적어도 수백만 명의 재산이 연기가 되어 날아간다. 자식 교육은 또 어쩌고.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모여 일본처럼 '사회적 낙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핵은 '인간이 다룰 수 없는 물질'이라고 한다. 강원대학교 성원기 교수는 핵은 "굉장히 위험한 물질" 정도가 아니라 "인류와 공존이 불가능한 물질"이라고 했다. 후쿠시마 사고 수습을 직접 지휘했던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는 후쿠시마 사고 2주기를 맞아 이렇게 말했다.

 

"핵발전소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핵발전 정책이다."

 

지금 밥상 위 생선구이가 어디서 왔느냐를 따질 때가 아니다.

채동욱 퇴출 청와대 개입설, KBS·MBC는 외면 9.15 미디어어늘

SBS “청와대·법무부, 사실상 사퇴 압박”…사표수리도 안 됐는데 MBC는 차기총장 후보거론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채동욱 검찰총장의 사퇴를 압박했다는 충격적인 증언이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국정원, 조선일보와 합세해 채 총장의 ‘혼외자식’ 의혹을 제기, 채 총장을 궁지로 몰았다는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지만KBS와 MBC 등 공영방송사들은 이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9.14 한겨레

 9.14 프레시안

 9.14 오마이뉴스

 

보이지 않는 권력의 손, 조선일보는 도구였을 뿐 9.13 미디어오늘

조선일보의 화려한 승리였다. 채동욱 검찰총장의 참패는 예상된 것이었다. 이제 전검찰총장이 된 채동욱에게 친자확인 소송, 정정보도 등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지난 3일 동안, 조선일보와 채 총장은 치열한 공격과 반격을 주고 받았다. 조선일보는 연일 지면을 동원하여 혼외자식 관련 내용과 그 어머니의 편지 등을 내세워 의혹을 키웠다. 압권은 9월 11일자 사설 ‘검찰총장의 처신과 판단’이라는 제목이었다. 의혹단계에 머물고 진실밝히기는 이제 시작이었지만 조선일보는 정부의 인사검증시스템을 꾸짖고 사실상 ‘검찰총장 그만 두라’며 더욱 그를 코너로 몰아붙였다. 채 총장도 정정보도 요청 거부에 따른 소송의지, DNA 검사를 통해서라도 진실을 밝히겠다는 결기를 내보였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듯 했다.

 

여기서 갑자기 등장한 곳이 법무부다. 법무부는 소란을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논란을 잠재우며 일방적으로 조선일보의 손을 들어줬다. 이것도 참으로 이례적이다. ‘검찰총장에 대한 감찰’ 착수는 채동욱을 바꾸겠다는 권력의 의지표명인 셈이다. 채총장은 시작부터 단호하게 “검찰을 흔들고자 하는 일체의 시도에 굳건히 대처하겠다. 직무 수행에 끝까지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전격 사퇴결정을 내린 것은 법무부 장관과 독대를 했든, 대통령 비서실장의 메시지를 받았든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채동욱의 중도하차는 그의 의지가 아니다. 보이지않는 권력의 손이 조선일보라는 언론을 이용해서 ‘법과 원칙’을 내세운 순진한 검찰총장을 찍어낸 사건일 뿐이다.

 

앞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새겨야 할 교훈내지 과제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언론의 국가인사권에 개입하는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언론은 권력기관이나 고위공직자에 대한 견제, 감시를 해야 하고 때로는 인사청문회와 별도로 언론은 검증도 하는 역할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사건은 특정인을 대상으로 특별한 시점에 표적으로 삼아 의혹만으로 집중포화를 퍼부어 결국 진실도 모르는 상태에서 낙마시킨 사례에 한정해서 봐야 한다. 권력기관이 된 언론의 횡포냐 정당한 감시견 역할이냐에 대한 정리가 쉽지않다. 권력간의 갈등에서 언론플레이를 통해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는 없는가 등도 검토대상이다.

 

두 번째, 권력과 언론의 결탁 의혹은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조선일보는 취재기자가 합법적으로 입수할 수 없는 내밀한 사적정보들을 이용하여 검찰총장을 압박했다. 법무부나 교육청, 국정원 등의 협조없이는 확인할 수 없는 사생활 영역의 정보를 이용하여 단독보도할 수 있었다. 저널리즘에서는 검찰총장이 아닌 혼외자식으로 보도된 어린이나 그 어머니에 대한 사생활보호는 철저하게 보호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부분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는 판단이다. 무엇보다 언론보도를 활용하여 권력이 정적을 제거했다면...특히 법무부가 진실의지를 천명한 검찰총장에게 감찰을 통보하고 사실상 사퇴시킨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언론의 보도가 순수했는지에 대한 감찰과 토론이 필요하지 않을까.

 

세 번째, 의혹이 진실을 이겨도 좋은가.

조선일보는 의혹만을 내세웠다. 관련당사자들은 명시적으로 부인했고 정정보도 청구 소송은 물론 조속한 시일내에 DNA를 받겠다는 의지까지 보였다. 진실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무엇이 급하여 그렇게 채총장을 내몰았을까. 국정원에서 검찰로 이송된 이석기 국회의원 재판 등 향후 공안사건을 두고 법무부와 검찰총장의 대립과 갈등을 차단하기 위한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일각의 의혹은 어떻게 봐야 할까. 어느 사회든 진실이 존중받아야 한다. 그 어려운 인사청문회 과정을 거치고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의혹보도 하나만으로 사퇴시킨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되겠는가. 이 사건은 역시 권력말기나 정권이 바뀌어야 진실이 나오게 될 것 같다. 왜 우리는 항상 그 당시에 진실은 알 수 없고 세월이 가야만 변색된 진실에 접하게 되는가.

 

네 번째, 오보에 대한 법적 책임이 이대로 좋은가.

국내 언론사에 대한 오보의 법적 책임은 논란거리다. 서양에서는 ‘악의적 오보’로 판명나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punitive damage;돈으로 오보에 따른 피해를 보상하라는 제도)를 적용하여 엄청난 금액을 내놓아야 한다. 언론사가 문을 닫는 경우도 있다. 한국은 그럴 염려가 전혀 없기 때문에 사실상 마음놓고 오보를 해도 된다. 물론 외국과 달리 형사처벌 등이 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과도한 징계라고 엄살을 부리지만 한국은 언론에 관한한 ‘탈세, 불법을 저질러도 웬만하면 넘어간다’고 인식한다. 한국 사회에서 언론사는 권력의 하수가 아니라 권력기관 그 자체가 됐기 때문이다. 미국 등 서양사회에서는 ‘언론자유를 보장하지만 그 자유를 훼손했을 때는 엄청난 액수의 돈으로 부담하라’는 제도적 압박을 하고 있다.

 

한국의 언론관련 판결을 보면, 패소해도 푼돈으로 떼울 수 있다. 물론 대통령 아들이나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판사들이 제법 고액을 물리기는 하지만 거의 예외로 보면 된다. 언론자유를 존중받기 위해서는 오보에 대한 자율규제가 작동돼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공직자들의 자기관리에 대한 물음이다.

공직자들 치고 한국만큼 술 많이 마시는 나라가 있을까. 내가 기자시절 가장 어려웠던 일은 한국의 너도나도 폭탄주 문화였다. 공직자와 기자, 교수와 학생...너나 구분없이 한국사회는 폭탄주 문화가 횡행한다. 내가 만났던 4명의 공보관은 하나같이 술고래였다. 검사도 인간이라 술을 마실 수 있지만 공직을 택했다면 사정이 다르다고 나는 믿는다. 채총장이 부장검사 시절 술집을 출입하면서 알게된 여자문제로 결국은 검찰총장직을 물러나게 될 줄은 당시에는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9.13 경향 장도리                        9.12                                               9.11                                              9.11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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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프로젝트>, 진실 알고 나니 화가 난다 9.9 오마이뉴스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감독 백승우)는 다큐멘터리다. 분량도 75분이라 극장보다는 TV 탐사보도 프로그램으로 방송되는 것이 더 어울려 보이는 그런 작품이다. 이런 시사적인 다큐멘터리를 공중파 TV가 아니라 영화관에서, 그것도 극히 일부의 제한된 상영관에서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 우리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무척 씁쓸하다.

 

천안함 사건은 21세기 들어서 대한민국이 겪은 가장 충격적인 비극 가운데 하나임에도 그 진상을 둘러싼 논란이 첨예하게 지속되고 있다. 정부의 합동조사단(합조단)은 북한의 버블제트 어뢰가 천안함을 폭침시켰다고 공식 발표했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의혹은 사실 전방위적이어서 합조단이 발표한 공식 결과 가운데 천안함이 2010년 3월26일에 침몰했다는 사실 말고는 거의 모든 대목에 걸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 주도의 공식 조사단의 결과가 이렇게 신뢰받지 못하는 일도 매우 드문 경우가 아닐까 싶다.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는 그러한 의혹들을 요약정리한 다큐멘터리다. '요약정리'이기 떄문에 제기된 모든 의혹을 다루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 모든 의혹을 다 다루었다면 상영시간은 두 시간을 훌쩍 넘겼을 것이다. 예를 들면 숨진 장병들의 시신 상태, 생존자들의 외상 정도, 물기둥, 어뢰파편, 물고기 사체 등과 관련된 의혹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천안함 프로젝트>에서 주로 다룬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어뢰 폭발이 아닌 좌초나 잠수함과의 충돌에 의해서도 천안함의 침몰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천안함 함정과 사고 해역에 남겨진 사고의 흔적들, 사건 초기 이른바 '제3의 부표' 및 TOD(열영상관측장비) 영상을 토대로 재구성한 결과이다. 달군 쇠몽둥이를 바닷물에 넣고 TOD로 촬영한 실험도 흥미로웠다. 이에 따르면 300여 도씨 정도로 가열한 쇠몽둥이를 바닷물에 넣고 TOD로 촬영했더니 그 주변의 바닷물 온도가 조금 올라간 것을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문제는 두 동강난 직후의 천안함을 찍은 TOD 영상에서는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만약 천안함이 어뢰폭발로 침몰했다면 왜 TOD 영상에 그 열흔이 보이지 않느냐는 주장은 사건 초기부터 꾸준히 제기된 의혹이었다.

 

<천안함 프로젝트>의 다른 한 축은 현재 진행 중인 천안함 관련 재판 내용이다. 초기 천안함 진상조사 합동조사위원이기도 했던 신상철은 군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명예훼손 여부를 가리려면 그와 관련된 내용의 진실성을 우선 따져야 하기 때문에, 이 사건이 천안함 침몰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사법부의 일차적인 판단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천안함 프로젝트>에서는 이 재판 과정의 일부를 재연 형식으로 보여준다.  일부 재연이기 때문에 실제 재판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감독의 편집에 의한 왜곡은 없는지 등을 판단할 길은 없다. (아마 그런 대목이 있다면 이후 군 당국 등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천안함 프로젝트>에서 보여 준 재판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무엇보다 천안함의 함수가 사건 다음날인 2010년 3월27일 오후까지 완전 침몰하지 않고 수면 위로 조금이긴 하지만 계속 떠 있었음에도 군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군은 해당 위치의 좌표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육안으로도 그 위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함수를 수색하거나 인양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게다가 왜 아무런 조치가 없었는지를 증언대에 선 군 관계자들로부터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비록 재연방식이긴 했지만, 나는 그 재판과정을 보면서 왜 군 당국이 사전에 <천안함 프로젝트>에 대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는지 이해할 만했다. 아마도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이라면, 대한민국 군대가 정말 저런 식으로 굴러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국방비에 들어가는 돈은 연간 30조원이 넘는다. 그렇게 천문학적인 돈을 쓰는 군대에서 눈에 빤히 보이는 함수 하나 제대로 건지지도 못하고 법정에서도 책임회피에만 급급하는 모습이라니, 46명의 장병 목숨을 잃은 사고 책임자들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이와 관련해, <천안함 프로젝트>에서 아주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함미 탐색과 인양에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틀)이 걸렸는가 하는 점도 천안함 사건에 무척 중요하다. 함미에는 숨진 46명의 장병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함미의 위치를 처음 확인한 것은 사고 이틀 뒤인 3월28일 오후였고 그나마도 그것을 발견한 주인공은 수색에 협조한 어선의 250만 원짜리 어군탐지기였다. 조그만 어선이 불과 세 시간 정도의 수색으로 찾을 수 있었던 군함의 반쪽을 대한민국 해군이 근 이틀 동안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게다가 당시 천안함 함미의 위치파악은 전 국민적인 관심사였다. 이 대목은 천안함 침몰의 원인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철저하게 진상을 밝혀야 할 사안이다.

 

사상검증의 리트머스로 악용된 천안함 사건

천안함 사건은 이 사건 자체의 진상규명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그 뒤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돌아볼 필요도 있다. 천안함 사건은 한국에서 사실상 사상검증의 리트머스로 악용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또는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하면 십중팔구는 "너 종북이지?" 하는 붉은 딱지가 발급된다.  천안함과 전혀 상관없는 토론을 하다가도 불쑥 "당신은 천안함이 북한 소행임을 인정합니까?"라는 질문이 나오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리트머스는 이성적인 판단과 합리적인 토론을 무력화시키는 마력을 갖고 있다. '나는 단지 합조단의 결과발표를 신뢰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름의 상당한 이유가 있다'라는 식의 주장은 사실 우리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흔하게 접할 수 있고 또 받아들여지지만 천안함 사건에서만큼은 예외이다.

 

내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합조단의 주장은 거의 모두가 의심스럽다. 이것이 잘못된 것인가? 내가 의식적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의혹, 그것이 사실일 리가 없잖아 하는 인간 본원의 의혹과 호기심이 그렇게 큰 죄란 말인가?  이런 항변이 국가에 무슨 큰 죄를 짓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정신적인 테러행위에 다름 아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야당이 추천한 헌법재판관 후보를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낙마시켰고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를 개봉관에서 상영중지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야기했다. 천안함에 대해 이렇게까지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혹시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자기 입맛에 맞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거기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춰 억지로 강요하려 드는 건 아닐까 하는 의혹마저 생긴다.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의 경우 앞서 그 내용을 소개했던 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왜 우리 사회가 이 정도의 내용도 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개탄하는 마음이 앞선다. 오히려 천안함 관련 재판에서 새로 나오는 내용들은 크게 보도되지도 않았다. 사안의 중요성에 비하면 참 이상하지 않은가?

 

'일부단체'의 협박 때문에 영화를 내렸다는 메가박스의 변명도 구차해 보인다. 관람객의 안전이 위험하다고 판단될 정도의 협박을 받았다면, 경찰에 신고해서 그 협박범을 잡는 것이 상식 아닌가?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영화 한 편 보기 위해 자신의 안전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치안과 질서가 엉망이 되어 버렸나? 혹시 천안함에 대해 의혹을 가진 국민은 '일부 단체'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메가박스 상영중단이 의미하는 것

"파시즘은 이미 시작되었다." 메가박스의 상영중단 소식이 전해지던 날 어느 누리꾼은 이렇게 말했다. 진실을 알고 싶다는 욕심이 종북으로 몰리고,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신변의 위협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는 세상이라면, 그래, 파시즘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천안함의 진실이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다큐영화 <천안함 프로젝트>를 보면 된다. 이왕이면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는 것이 더 좋겠다. 다만, 천안함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이 75분짜리 필름 속에 있지 않다. 사고 원인도 사건처리 과정도 뭐 하나 속 시원하게 새로이 드러난 것이 없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군 당국 때문이고, 여타의 합리적인 문제제기조차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마녀사냥에 여념이 없는 정권과 언론 때문이다.

 

대신 <천안함 프로젝트>는 또 다른 진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천안함 사건에서 "진실이 빠져 있다는 진실"과 "진실을 갈구하는 것이 죄가 되는 진실"을 고발한다. 이 또 다른 진실은 필름 속에 있기도 하지만 필름밖에서도 볼 수가 있다. 갑자기 줄어든 상영관 때문에 예매에 곤란을 겪는 순간부터 혹시나 '일부단체'가 해코지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엄습하는 순간, 천안함의 또 다른 진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영화를 본 뒤 그 취지에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하거나 글을 남길 때, 조용환 헌법재판관 후보의 경우가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멈칫거리게 되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순간에도 천안함의 숨겨진 진실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약간의 수고로움과 약간의 용기를 발휘하지 않는다면 '이미 시작된 파시즘'은 머지않아 수많은 목숨을 내걸어도 막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 불행했던 경험이 우리에겐 이미 있지 않은가. 다행히 아직까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꽤 있는 듯하다. 75분짜리 영화 한 편 보러 가는 것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겠다.

 

 9.9 프레시안

 9.9 미디어오늘

이재명 성남시장 “내가 종북이면 MB와 김문수는 고정간첩인가” 9.9 경향

이재명 경기 성남시장이 최근 자신을 둘러싼 종북 논란에 적극 해명에 나섰다. 성남시의회 새누리당 의원들이 2010년 지방선거시 이 시장이 민노당(현 통합진보당) 인사들과 야권연대를 통해 당선된 것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면서부터다. 지난 6일 시의회 새누리당협의회는 이 시장을 종북세력으로 몰고 나섰다. 이날 기자회견을 자청해 “민주당 출신인 이 시장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야권과 연대해 당선된뒤 경기동부연합 출신인 김미희 의원 등 10명 안팎을 인수위원에 포함시켰고, 이후 이들은 시 산하기관에 포진했다”면서 “특히 이들 출신이 대표로 있는 사회적기업 ‘나눔환경’에 일감을 몰아줬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협의회는 “불법사실이 포착되면 이 시장을 검찰에 고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이 시장은 반격에 나섰다. 자신의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새누리당 출신인 김문수 경기지사와 이명박 전 대통령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까지 거론하며 반박했다. 이 시장은 트위터에서 “미화원들이 만든 협동조합(시민주주기업)인 나눔환경은 김문수 경기지사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사회적기업으로 심사 선정한후 박근혜 대통령까지도 수억대 국비 지원중”이라며 “일감 준 내가 종북이면 MB와 김문수는 고첩(고정간첩)이냐”고 반문했다.

    9.9 내일                                                                                                           국민

 

 

한국 서화숙 칼럼/9월 13일] 거짓말과 친일이 보수인가

가끔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가면 자칭 보수라는 분들이 수치를 제멋대로 창작하면서 좌파니 종북이니 위험하다고 비판한다. 도대체 어디에 그런 자료가 있냐고 물으면 자기는 아는 자료라고 대답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국에서 근대화가 시작됐다고 주장할 수 있다. 개인소득이 올랐고 주거와 보건이 향상됐다, 산업국가로 나아갈 토대가 생겼다,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일제가 얼마나 많은 자산을 수탈해갔는가, 얼마나 많은 양민을 끌고 가고 죽였는가도 밝혀야 한다. 식민체계에 길들이기 위한 교육과 공안체계도 밝혀야 한다. 그래야 개인에게 풍요가 확대돼 보이나 철저한 수탈의 기반에서 이뤄졌다는 식민지의 참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상식을 벗어난 주장을 한다. 의병을 '소탕'하고 '토벌'했다고 쓰고 자생적 근대화의 토대가 될 뻔했던, 동아시아 전체에 자주적인 저항운동이 일어나는 데 영향을 미친 동학농민혁명을 '전통적 질서를 복구'하려는 '민란'이라고 쓴다. 일제의 강제동원 수치는 일본 공식통계보다도 적고 관동대지진에서 일어난 한국인 학살도 쓰지 않았다. 이런 역사교과서라면 보수교과서가 아니라 친일교과서이다.

 

이 교학사판 '친일교과서'를 쓴 3인의 공동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명희 공주대 교수는 11일 새누리당 의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좌파 진영이 교육계와 언론계에 70% 예술계에 80% 출판계에 90% 학계에 60%를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한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나온 수치인가. 시속어로 '뻥'이고 정확하게 말해 거짓말이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말했다"고도 주장했다. 경향신문이 언제 일이냐 물으니 2006년쯤 나온 말이라고 답변했다. 공식기록에는 없다는 게 노무현재단의 설명이다. 저 정도 발언이면 보수진영이 난리를 쳤을 텐데 기사검색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 교수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연도까지 창작하면서 거짓말하는 버릇이 몸에 밴 것은 아닌가.

 

 

이 날 강연을 유치한 사람은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다. 작년 대선 투표일 닷새 전인 12월 14일 부산 유세에서 2007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줄줄 읽었다. 당시 박근혜 캠프 선거대책본부장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누구한테 얻은 국가기밀인가? 국회가 국정조사를 벌이자 그는 싱가폴 몽골 중국을 다니다가 국정조사가 끝나자 귀국했다. 진실을 밝히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는 '새누리당 근현대 역사교실'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런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수라고 부른다.

 

가장 심각한 거짓말은 작년부터 국정원과 경찰에 의해 이뤄졌고 새누리당의 비호 아래 계속되고 있다. 한국일보가 11, 12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국정원의 정치개입이 작년 12월 11일 김하영 직원의 노출로 공개될 상황에 처하자 차문희 당시 국정원 2차장, 박원동 국익정보국장이 서울경찰청 김용판 전 청장, 권영세 당시 박근혜 캠프 종합상황실장, 국회 정보위원장인 서상기 새누리당 의원과 여러 차례 통화했다. 그 결과 국정원은 댓글을 지우고 서울경찰청은 축소은폐수사로 갈피를 잡았다는 것이 검찰의 분석이다. 그런데도 국정조사에서 국정원과 서울경찰청 사람들은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거짓말을 했다. 국정원 직원들이 '대북심리전'을 위해 달았다는 댓글을 보면 어린이 성폭행까지 언급해서 글로 옮기기 힘들 정도이다. 일베의 글 역시 마찬가지. 이들 역시 보수를 자처한다.

 

 

보수는 기존의 체계를 지키려는 이들이다. 도덕적으로는 완고할 정도로 원칙을 지켜야 보수이다. 그런데 왜 2013년의 한국에서는 거짓말과 친일과 혐오스런 행위가 보수가 되었는가. 이유는 명백하다. 2013년 한국의 정부가 이런 짝퉁 보수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란 신뢰가 기반인 체계이다. 언제까지 거짓을 옹호하며 국가가 유지될 수 있을까. 진짜 보수가 지키는 진짜 자유민주국가를 원한다면 거짓말과 친일과 혐오스런 행위부터 끊어야 한다.

                                                                                                                           9.9 경향

 

토목예산 연 1조 샌다정부 "예산부터 따자" 묻지마 발주 한국9.9

대규모 토목 공사를 발주하는 정부의 안이한 태도와 수주 기업의 도덕적 해이가 겹치면서 매년 1조원 안팎의 혈세가 낭비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토지 보상이나 민원이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일선 부처가'예산부터 확보하고 보자'는 식으로 공사를 발주하면, 민간 업체가 저가에 수주한 뒤 설계 변경이나 물가 상승을 이유로 사업비를 증액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

 

 

8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놓은 '대규모 재정사업의 효율적 관리방안'에 따르면 2009~11년 3년간 정부가 진행한 도로ㆍ철도부문 총 178조원 규모의 452개 공사를 점검한 결과, 최초 발주 후 다양한 사정 변경을 이유로 건설 업체가 추가로 챙긴 공사비가 2조8,298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발주처인 정부 부처가 공사 원가를 부풀리려는 건설 업체의 잔꾀를 묵인하면서 연 평균 1조원 안팎의 정부 예산이 추가 집행되고 있는 것이다.

 

사업비 증액은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대규모로 이뤄졌다. 지역 정치인과 토착 건설업체의 유착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단순한 소문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총 69개가 진행된 '지방도' 사업은 최초 총 7조원이던 사업비가 11조3,000억원으로 불어나 증액률이 50.3%에 달했고, 산업단지 일반도로 사업비도 3년간 36%나 늘어났다. 이는 같은 기간 고속도로 사업의 해당 비율(15%)보다 2~3배 이상 높은 것이다.

 

 

기획재정부 연구 용역으로 분석 작업을 진행한 KDI는 공무원들이 땅 주인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여 수용토지에 과다 보상을 해주는 것도 착공 후 사업비 부담을 높이는 원인으로 지적했다. KDI는 "수용 토지의 가치를 땅 주인이 지정한 감정기관 대신 제3의 객관적 기관이 평가하도록 제도를 바꾸면, 연간 최대 1조원의 보상액 절감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KDI는 "용지 보상이 80% 이상 이뤄진 뒤에 발주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사업비를 부풀리기 위한 건설 업체의 꼼수(설계변경)를 감시할 전문 인력 확충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또 완공 후 최종 사업비가 최초 사업비보다 적거나 증가율이 상대적으로 낮을 경우 일정 규모의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안도 예산 절감 방안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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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처벌이 가벼워 온통 도둑놈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수백억 수천억을 해 먹어도 1~2년 살고 나온다 그것도 제대로 징역살이하나?갑자기 죽을병에 걸린것처럼 온갖 쇼를 한다..뻥인걸 알면서 받아주는 무능한 정부..도둑질 하도록 처벌이 가벼우니 도둑질 하는 놈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나라 법은 배우고 돈좀있는 놈들이 합법적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도있다. 유전 무죄 무전유죄 정말 명언이 아닐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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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6) 유신시대 문단권력과 현대문학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9.6 경향

지난 8월7일 ‘인문정신문화계’(?)에서 존경받아온 학자·지식인들의 청와대 오찬과 그 자리에서 나왔다는 ‘영원의 여인’ 발언은 후학과 후배들에게 상당히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사태의 전말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런 언행은 기본적으로 문학과 인문학의 본연을 위배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보다 훨씬 더 진하고 상징적인 일이 문예지의 지면에서 벌어졌다.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예지인 ‘현대문학’ 9월호는 영문학자 이태동의 권고를 받아 한국문인협회 소속 ‘문인 박근혜’의 수필 4편을 게재했다. 신작이 아니라 15년 전에 단행본으로 발표된 책에 이미 실린 글이라니, 대단한 특전이며 일종의 반칙이라 볼 수도 있다.

 

이를 변명하기 위해 ‘현대문학’ 측은 편집후기를 통해 “절제된 언어로 사유하는 아름다움의 깊이를 보여주는 문인 한 개인을 넘어,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라고 썼다. 이 원고의 게재를 주선하고 비평문을 쓴 이태동 왈, 대통령의 수필이 “우리들의 삶에 등불이 되는 아포리즘들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진주와도 같다”며 “부조리한 삶의 현실과 죽음에 관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의 코드를 탐색해서 읽어내는 인문학적인 지적 작업에 깊이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성이 있는 울림으로 다가”온단다. 그래서 만약 “문단과 독자들이 그의 수필을 멀리한다면 너무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언행들 앞에서 대학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가르쳐온 사람으로서 눈앞이 막막해진다

 

혹 한국문인협회 소속 수필가 박근혜의 글이 정말 뛰어난 문학성을 갖고 있다 해도, 그리하여 ‘세계 수필계’(?)의 거두(?) 몽테뉴와 베이컨의 전통을 잇고 있다 해도, 진정한 학자거나 평론가라면 저런 ‘빨대성’ 단어들을 늘어놓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학부 수업 시간에 어느 학생이 저런 평문을 제출했다면 그는 C학점 이하의 점수를 받아야 할 것이다. 작품을 과대해석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비평이 견지해야 할 최소한의 객관성이나 비판정신을 내버리고 과장되고 상투적인 찬사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 청와대 오찬의 아양이나 ‘현대문학’이 한 일은 기실, 한국문학사의 한 전통에 닿는 일이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문학사가 그 무엇에도 자유로운 개인의 꿈과 내면성을 추구한 자유주의적 전통이나 ‘민족’과 ‘민중’ 따위의 코드로만 점철된 것처럼 ‘오해들하고 그러는데’, 그것은 일면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기실 현대 한국문학사의 한 축은 처음부터 제국주의와 권력에 대한 협력과 애틋한 흠모로 꽉 차 있었다. 계속 그랬다. 한국 현대문학의 비조격인 이광수·최남선은 물론, 가장 존경받는 국민 시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서정주나 대표적인 소설가·평론가로 꼽히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김동리·조연현 등 셀 수 없는 예가 있다. ‘현대문학’은 전쟁 직후 조연현이 창간·운영하며 문단 주류의 기관지 노릇을 했고, 한국문인협회는 가장 크고 주류적인 문단의 가장 큰 권력기구이자 ‘직능’단체였다. 이를테면 문인협회는 전두환이 학살을 통해 국가권력을 탈취했을 때도 태평가를 부르고 찬양성명서를 제출했다. 지지난 대선에서는 이명박을 공개 지지했다. 따라서 ‘현대문학’과 문인협회는 이 나라 지식인·문인의 ‘흑역사’며 반지성사의 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제자·동료 문인과 기자들이 감옥에 잡혀가 고문당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던 유신 때도 한국문인협회는 꿋꿋이 ‘협력’했다. 흔히 저항과 민족·민중문학의 견지에서 유신시대 지식인과 문인의 상황을 조명한다. 그 저항은 분명 오늘날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언론자유와 지식인의 사회적 소명에 대한 한국적 전통을 형성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실은 그보다는 더 많고 큰 ‘협력’과 곡학아세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협력’과 ‘저항’은 때로 뒤엉키기도 했다. 그 현장을 되돌아보는 것은 한국 지식사회와 문학판이 어떤 기원과 약점을 내장한 것인지를 살펴보는 의미가 있다.

 

 

■ 문학사상 가장 권력지향적이었던 조연현·서정주

분단과 전쟁 때문에 식민지시대를 대표하던 중견 문인들은 물론 웬만한 진보적인 문인·지식인들이 거개 월북하거나 죽자 문단은 젊은 우파들의 차지가 되었다. 해방 당시 조연현은 불과 26세, 김동리는 32세, 서정주는 30세였다. 흥미로운 것은 문단의 좌우 대립이 분단의 고착으로 종식되자마자 남한에 남은 문인들끼리의 내용 없고도 새로운 사생결단 분란이 시작되고, 주류 문인이 권력에 밀착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한국 문인 일부의 체질처럼, 또는 주류 문단의 일상처럼 되었다.

 

문인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권력지향적이었던 조연현이나 타고난 모국어 구사력을 권력을 향한 광대짓에 사용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던 서정주 같은 이들이 그 대열에 있었다. 그들은 한 치의 오차와 일탈 없이 ‘친일-친이승만-친박정희-친전두환’의 한길을 올곧게 걸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문단 내에서 파벌을 만들고 정치꾼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행태로써 문단권력을 사냥하는 데 집착했다. 그 대상은 문인협회, 한국펜클럽, 소설가협회, 시인협회들이었다. 김동리 조경희 박종화 등도 이런 판에 끼어 있었다. 이들 단체가 가졌던 이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협회장 선거에서는 거의 언제나 정치판보다 더 심한 이전투구가 벌어졌다. 점잖고 꼿꼿해서 세속의 일에 무관심했다던 김광섭, 황순원 같은 작가나 이름 없는 젊은 작가들과 지역 문인들도 이 싸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신 때 이런 행태가 극에 달했다는 점이 교훈적이다. 1973년 1월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에서는 문협 사상 가장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김동리 대 조연현의 이 싸움은 비루한 비방 모략전과 후배 문인 줄세우기를 야기한 돈선거이기도 했다. 결과는 321 대 312로 김동리의 신승, 하지만 과반수 미달. 선거는 두 달 뒤로 연기됐고 1차전의 패자 조연현은 치밀한 전략을 구사했다. 서정주 황순원 등 영향력 있는 이들을 끌어들여 지지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다른 분과장 선거를 적절히 이용하고 거래하여 부동표를 흡수했다. 조연현의 최종 승리.

 

1975년 1월 또다시 열린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는 더 가관이었다. 이때는 젊고 진보적인 소설가 이호철이 출마하여 썩은 기성의 문단권력에 도전했다. 이사장 조연현 측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금품 살포와 비방은 물론 기본수단이었고, 지방 문인들을 단체로 버스를 대절하여 서울의 고급 호텔에 묵게 하고 푸짐한 향응을 제공했다. 그리고 급기야 ‘문학’을 거래하였다. 몇몇 젊은 문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조연현 지지를 대가로 작품을 ‘현대문학’ 등에 게재해 줄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이 폭로되었지만, 당선은 당당 또 조연현.

 

왜 주류 문인들은 이다지 심하게 타락했을까? 이런 분열과 병통의 뿌리에는 어떤 정치적 무의식과 ‘지성’이 있었을까? 가깝게는 1972년 유신 이래 이어진 지식계와 문단 상황이 있다. 유신이 발표되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 문인협회는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박정희 총통체제의 꼭두각시 대의기구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문인 몫으로 박종화 장덕조 전숙희 등이 진출했다. 그러나 한쪽에서 양심적인 지식인과 문학인들의 유신반대운동이 서서히 타오르고 1974~1975년 정점에 올랐다. 바로 그때 한국의 글쟁이들과 먹물들이 겪었던 고난은 분명 지성사 전체에서 특기되어도 좋을 한 페이지라고 본다. 박정희는 1974년이 되자마자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재야인사들과 조작된 ‘문인간첩단’의 소설가와 평론가들을 감옥에 가뒀다. 동아일보 사람들 180여명이 직장을 뺏겼고 와중에 장준하·김상진 그리고 인혁당 사람들이 목숨까지 잃었다.

 

 

■ 저항, 새로운 지성과 문학의 미래를 낳다

그러나 저항은 문단에서도 타올라 1974년 11월에 드디어 자유실천문인협회가 결성되었다. 그 세는 아직 작았지만, 이 새로운 단체는 광기어린 권력과 기성 문학판에 반감을 가진 젊은 지식인과 문인의 지적 구심이 되고, 결국 문학판을 재편하여 문학사를 새로 쓰게 할 예정이었다. 유신은 이처럼 역설로써 새로운 지성과 문학의 미래를 배태한 것이었다. 이런 정황이니 조연현과 문인협회는 기를 쓰고 기득권을 지키려 한 것이겠다.

 

그런데 왜 그 시절의 일부 주류 문인들은 권력에 아부하며 한몸이 되고 서로 이전투구하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됐을까? 일제의 총동원체제에서부터 분단과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버티고 살아낸 그들의 정치적 무의식에는 권력에 대한 강한 열망과 동일화가 있었다고 보인다. 즉, 타락과 분열의 뿌리에는 식민지와 분단경험의 상처가 있는 것이다. 타자가 사라지자 이념 없는 ‘순수문학’, ‘문학을 위한 문학’은 오직 서로 싸우며 지배에 봉사할 일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때 ‘문학성’을 위시한 문학의 제도란 곧 헛된 권위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만인의 복종을 요구할 때, 지식인과 문인도 대개 굴종하게 돼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문학과 문학의 또 다른 본연이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저항을 만들어내고, 지성과 문학을 분열시킨다. 유신시대는 이런 역사적 교훈에서도 ‘갑’이다. 그런데 이번 8월의 일들은, 유신이 문학을 통해서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미나 문학성 같은 가치가 때로는 얼마나 허약하고 자의적인 것인지, 문학이 얼마나 쉽게 지배의 장난감이 될 수 있는지 알게 한다. 문학은 권력과 자본의 품에 은밀히 안겨 뒷길로 지배에 봉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지배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저 ‘현대문학’은 더 대단하다. 문학이 기성의 질서와 권력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어야 한다는 따위의 관념을 정면으로 이기고, 고고한 문학성의 성채를 이룬다. 문학성이란 역사적 인간주의나 공리주의적 주박과는 아무 상관없는, 언어의 완미하고 자율적인 운동, 또한 인간적 고요의 ‘순수’한 결정체이어야 함을 가장 오래된 문예잡지가 재증명한다.

 

앞으로 청와대 만찬이나 ‘현대문학’에서와 같은 일은 늘어날지 모른다. 관료문학이나 궁정문학이 융성할 태평성대가 올 것을 미리 대비해야겠다. 그렇다면 특히 다음 겨울호 계간지엔 국정원 작가 특집이 어울리지 않을까? 그들은 댓글달기를 통해 2010년대 인터넷문학을 주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북정상회담과 내란음모 사건의 두 녹취록을 통해 이제껏 안일하게만 다뤄진 분단정치의 실재를 하이퍼리얼리티 수준에서 구현해보여주었다. 나아가 그 녹취록들이 불러일으킨 이런저런 논란은 온 국민의 텍스트 해석 수준을 한껏 높여 주지 않았는가.

 

박정희 vs 박근혜, 숨은 차이 찾아보니… 한겨레 9.13

사람들은 그에게 모든 공로를 떠밀거나 책임을 떠넘긴다. 사실 한국인에게 박정희라는 인물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매직 키워드’다. 찬양자들은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먹고산다고 말하고 그가 물려준 폐해는 후임자들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한편 비판자들은 한국 사회의 모든 구조적 문제를 그의 탓으로 돌리면서, 그의 성취는 다른 이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를 둘러싼 시민들의 정치 평론은 본질적으로 이 두 가지 구전 설화의 대립이다. 심지어 연구자들조차 두 설화의 틀에서 자유롭지 않다.

 

박정희=박근혜 vs 박근혜=박정희

그리고 지금 우리는 ‘파더콤’(아버지 콤플렉스)을 떨치지 못한 듯한 그의 딸을 대통령으로 맞이했다. 대선 과정에서 그녀는 경제민주화나 복지정책 같은 영역은 야권의 구호를 선도적으로 제기하거나 흡수하면서도, 유달리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녀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은 그녀의 무엇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차라리 ‘귀태’(鬼胎)와 같이 그 아버지를 비판하는 말이다. 한편, 그녀보다 그녀의 아버지에 더 민감한 건 그녀의 정치적 적대자들도 마찬가지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던 진보주의자들은 두 사람이 사실상 ‘한몸’임을 밝히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와 박근혜의 차이를 찾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아마 이런 역설을 통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진보주의자는 ‘박근혜=박정희’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보수주의자는 그녀를 전적으로 신임하는 것 역시 그 등식 때문이라는 역설 말이다.

 

따라서 박정희와 박근혜의 ‘숨은 차이’를 말하는 것은 보수주의 측면에서도 진보주의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다. 보수주의자의 시선에서는, 비록 박정희가 ‘성공한 보수주의자’라 할지라도 지금 시대에 그것을 답습하는 것이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의 전략일 수 없으며, 더군다나 박근혜는 그것을 해낼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보수주의자가 진정으로 이 시대에 적응하고 싶다면 말이다.

 

진보주의자의 시선으로는, 비록 박근혜가 ‘아버지’의 정치적 자산을 승계한 정치인이기는 하나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6공화국 헌법의 틀 안에 있는 대통령이기에 그녀가 행사하는 리더십에 대한 비판은 ‘독재자’에 대한 비판과 달라야 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시나 진보주의가 관습화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넘어 이 시대의 진보적 과제들을 대면하고 싶다면 말이다.

 

꼼꼼히 따져 생각하면 이 부녀는 출발점부터 너무 다른 사람들이다. 생물학적 출발점을 봐도, 정치적 출발점을 봐도 그렇다. 한 사람은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축복받지 못한 아들이다. 그를 지우려던 어머니는 죄책감에 지극정성으로 키운다.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던 아버지가 전쟁 이후 군에 복직하고 인생이 풀리려고 할 때쯤 축복받으면서 태어났다. 그녀가 열 살 때 그의 아버지는 나라를 뒤엎겠다는 시도를 하고 그에 성공한다.

 

지극히 다른 부녀 대통령의 출발점

그 시도는 그 아버지의 정치적 출발점이었다. 박정희는 출발점에서부터 모든 것을 한번에 얻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의 삶은 끝없는 좌절과 이를 극복해내기 위한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시골에서 ‘천재’ 소리를 들으며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많은 ‘시골 수재’가 그렇듯 기대한 만큼 공부에 재능이 없었고 성적은 바닥이었다. 간신히 졸업하고 교사가 된 그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긴 칼 차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 만주 육사 2기생으로 졸업 후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하고 관동군 소위가 될 때까지는 인생이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는 해방되고, 그는 실업자가 돼 다시 가족들의 눈총을 샀다. 공산주의자던 형 박상희가 1946년 대구 10·1 사건으로 사망한 이후 박정희는 남로당에 들어갔다, 여수·순천 사건(1948년 10월 19일) 이후 숙군(肅軍)수사(군부 안의 좌익 색출)에서 발각되자, 동지들을 밀고하고 목숨을 건졌다. 물론 형 집행을 면제받은 것뿐만 아니라 정보과에서 문관으로 근무한 건 만주국 인맥을 넘어 그 자신의 능력이 받쳐주었을 것이다. 6·25 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은 청년 박정희가 다시 군인이 되게 하는 개인적 축복이었다.

 

박정희는 처음부터 정치군인이었다. 정치군인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나, 성향상 그랬다. 그는 언제나 ‘가져본 적 없는 것’을 향해 새롭게 손을 뻗었고, 이에 실패하거나 성공했다. 어쩌면 그는 좀더 멋있게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다. 가령 박정희는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 연장 시도인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이나 1960년 3·15 부정선거 상황에서도 군부의 정치 개입을 꿈꾸었는데, 그가 주동이 될 수는 없더라도 이 시점에 군부가 나섰다면 이는 후세에도 평가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으로서는 다행스럽게 그가 4·19혁명 1년 이후에야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위헌적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얘기는 듣지 않아도 된다.

 

이에 비하면 박근혜는 ‘한때 가졌던 것을 다시 가지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다. 사춘기를 청와대에서 보냈고, 20대의 5년을 ‘퍼스트 레이디’로 살던 그녀는 아버지가 죽은 후 자신의 ‘왕국’과 ‘세계’가 무너지는 체험을 했다. 그녀를 싫어하는 이들은 새로운 독재자가 그녀에게 ‘6억 원’을 건넨 것에 주목하고, 그 독재자가 ‘같은 부류’에 은혜를 베풀었다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으로 보면, 그 ‘6억 원’은 마땅히 자신이 가져야 하는 수많은 것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실제로 그것은 박정희가 청와대에서 쓰다 남은 정치자금 중 일부일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아첨하던 수많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새로운 ‘군주’에게 아첨하는 것을 보았고, 제5공화국은 자신들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전임자의 정치적 비리를 적당히 까발렸다. 이는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 명백한 ‘배신’이었다. 그녀는 그러한 ‘배신’들을 바라보며 와신상담 재기의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새로운 기회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독재자마저 물러나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시작한 1990년대 한국의 대중이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느끼면서, 또는 보수 세력이 이를 조직적으로 유포하면서 돌아왔다.

 

급조된 쿠데타 ‘우연’ 정치적 유산상속 ‘필연’

흔히 박정희는 ‘필연’으로 치장되고 박근혜는 ‘우연’으로 취급한다. 보수 세력에도 그렇고 진보 세력에도 그렇다. 가령 진보적 사회학자 김동춘은 ‘5·16은 4·19 혁명 이후 비등했던 민주화, 민족통일 요구에 대해 체제 자체의 위기를 느낀 보수세력의 방어적 쿠데타’라 규정했고, 이는 진보 인사들의 평균적인 시각이다. 반면 박근혜에 대해선 많은 사람이 ‘그녀가 끝내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가능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꼼꼼히 따지면 오히려 상황은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것은 우연이고 보수세력으로 규정된 것도 우연이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군 내부에서도 3·15 부정선거에 가담하고 부정부패한 고위 장성들을 축출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군 운동’이 벌어졌고, 박정희와 김종필 등은 그 주동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을 물러나게 만드는 데엔 성공했지만 장군들에 대한 지나친 비판으로 오히려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박정희는 곧 군복을 벗고 예편될 예정이었고, 군복을 벗으면 인생의 다음 기회는 없을 거라고 느꼈다. 결국 5·16은 예편되기 직전의 박정희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일으킨, 어이없이 급조된 쿠데타다.

 

그 혼란기에 그들이 보수 세력이나 지배 계급의 대표자가 된 것은 분명히 우연한 일이다. 초창기 그들은 지배 계급이나 대자본의 대변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군정의 초기 조처들은 농촌 냄새 물씬 풍기는 얼치기 민중주의자의 것이었다. 그들은 빈민에게 쌀을 나눠줬고, 대낮에 춤을 춘 남녀를 구속했으며, 상위 재벌 그룹 총수들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했다. 이정재 등 정치깡패를 붙잡아 유치한 거리행진을 시킨 것도 유명한 일이다.

 

그래서 박정희를 옹호해야 할 뉴라이트 역사학자 이영훈은 ‘군부 세력의 초기 정책들은 어설펐지만 곧 시장주의적으로 흘러갔다’고 서술한다.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이 시장경제를 발달시켰다는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자본주의 이념과 거리가 먼 인간들이었는지를 무시한다. 결국 진보든 보수든 그들이 원래부터 보수 세력이라기보다 쿠데타 이후 권력을 장악하면서 보수 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 않는 셈이다.

 

반면 박근혜라는 정치인은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상속했고, 그 ‘가산’은 성격이 분명한 것이었다. 박근혜는 한국의 보수 세력을 지탱한 ‘강남’과 ‘영남’을 온전히 취할 수 있었고, 모든 지역 모든 연령대에서 기본 10% 정도의 탄탄한 지지율을 가졌다. 그녀의 지지율은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산업화 성공에 대한 신뢰 내지는 향수를 보여주었다. 문화평론가 이택광의 평가를 빌리면, 역량이건 우연이건 ‘한국은 우익이 성공한 보기 드문 나라’이며, 이런 나라에서 민주화 세력은 독재 세력의 공과를 어떻게 평가하고 산업화와 민주화에서 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대중에게 납득시키는 데 실패했다.

 

산업화를 추구한 독재 세력과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한 운동 세력의 타협을 통해 탄생한 ‘87년 체제’는, 민주화 운동가와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대통령으로 만든 이후 역설적으로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으로 완성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2012년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박근혜를 이길 가능성도 존재했지만, 그들이 박근혜를 이겼다면 2017년엔 여전히 박근혜가 가장 강력한 대선주자로 존재할 것이다. 반대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지금 상황에선 다음 선거의 유력한 주자가 누구인지 예측하는 것조차 힘들다. 반대 세력은 그녀의 집권이 ‘유신으로의 회귀’라고 호들갑 떨기를 좋아하지만, 우리가 ‘87년 체제’에 목소리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안에선 독재자의 딸이라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느니라. 하지만 그녀라도 내 안에선 단지 5년간만 대통령일 수 있느니라.”  그렇게, ‘박근혜 대통령’은 ‘87년 체제’가 어떤 타협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보다 더욱 ‘필연’에 가깝다.

 

부당성 메우려 ‘민중에’, 정당성 있으니 ‘엘리트에’

그 ‘우연’이 체제를 폭력적으로 전복한 비도덕적인 것이라면, 저 ‘필연’은 수많은 사람의 분개에도 그 체제 안에서 일어난 상대적으로 ‘정당한’ 일이었다. 물론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에서 드러나듯 보수 정부 시절 권력기관은 중립화에서 역행해 편향성을 지니게 되지만, 그렇다고 이번 선거가 1960년대나 1990년대의 직선제 선거만큼 불공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박근혜는 전두환에게 빚이 없다고 여기듯 이명박에게나 국정원에도 빚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아마 “국정원에서 도움 받은 것 없다”는 그녀의 말은 진심이고, 그녀는 오직 아버지에게만 빚이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 ‘우연’의 정치인이 민중주의적 열망을 적극적으로 껴안으면서 정당성 부재를 극복하려 했다면, 저 ‘필연’의 정치인은 엘리트주의자로서 민중의 열망을 제대로 대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박정희는 비록 군부 쿠데타로 등장한 독재자이지만, 전쟁 폐허에서 벗어나 삶을 일구고 싶던 당대 민중의 열망을 국가적으로 뒷받침했다. ‘잘 살아보세’는 국가가 주입한 것일 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열망을 대변하기도 했기에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쿠데타 자체야 정당화될 수 없지만 당시 시대 상황이 쿠데타에 관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5·16은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유행처럼 번진 제3세계 군사 쿠데타의 한 사례다. 다른 집단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군과의 교류로 해외연수까지 받은 군부는 민중 출신의 교육받은 이가 가장 많은 집단이었다. 소설 <태백산맥> 등에서 보이듯 해방 직후 상황에서는 경찰이 친일파의 상징이고 경찰에 탄압받은 이들이 군인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1954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이집트의 나세르가 비동맹 중립주의 노선으로 국제적 명성을 떨치면서 한국에서도 나세르의 등장을 바라는 이가 많았다. 김종필이 5·16을 나세르의 쿠데타와 비교한 것도 이런 문맥에서 이해가 된다.

 

그래서 훗날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되어선 안 되는 단 한 사람’이라고 박정희를 비난한 장준하도 5·16 당시 일정한 기대를 드러냈고, 미군과의 인맥이 없는 그들 ‘혁명세력’을 위해 미군 인사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파티를 열기도 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단지 박정희가 남로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기쁨의 사설을 썼다. 물론 그는 미국에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던 박정희에 의해 곧 사형당할 운명이었다. 친미 국가에서 쿠데타를 한 박정희는 나세르가 될 수 없었고, 그렇기에 더욱 경제성장 문제에 천착했다.

 

반면 박근혜는 아버지로 인해 이 나라의 국민소득이 현격하게 높아진 한 세대 이후에도 ‘먹고사는 문제’에 가장 민감하고 뜨겁게 반응한 이 사회의 각박한 현실 문제에 천착해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그는 통치에서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라는 말에 진정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시대가 아닌 자신의 시대에서 이를 실현하려면 야당과 일정 부분 타협하는 등 복잡한 정치적 행위가 필요함을 애써 인지하지 않는 듯하다. ‘왕국’을 구성했던 사람들, ‘아버지의 친구들’이나 ‘그 친구의 아들들’로 정치를 하려는 그녀의 태도는 출발점이 다른 아버지의 그것과는 달리 엘리트주의일 수밖에 없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든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박정희의 시대’란 건 존재했다. 박정희의 공과를 평가하는 문제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박정희는 자신이 느낀 역사적 소명이 시대정신을 얼마나 대변하고 있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본질적으로 독재자였다. 그는 그저 권력을 잡기 원했고, 독재정권이 아닌 민주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쿠데타 이전부터 가졌는지 그 후 생성되었는지 불분명한 ‘경제성장’이라는 역사적 소명을 실행하기 위해 무조건 자신이 대통령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직선제 선거를 통해 집권하든 헌법을 바꿔 간선제 선거를 통해 집권하든 군대를 동원하든, 그 결말은 같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의 정치적 궤적과 민중의 욕망이 포개지는 시기는 존재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1963년과 1967년 대선에서의 윤보선에 대한 승리였다고 볼 수 있다. 1963년엔 신승을 거두었고 1967년엔 제법 여유 있게 이겼다. 그가 선거에 졌다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와 상관없이 이 시기의 민중은 그의 목표에 제법 공감한 구석이 있었다. 민주화 세력과의 갈등이 있었고, 그 갈등에서 승리하기 위해 경제성장이라는 인민의 욕구를 대변하려 안간힘을 썼으며, 그 결과 일정 부분 인민의 지지를 얻었다.

 

‘필연의 대통령’ 박근혜의 결말은

말하자면 1960년대는 국가가 나아갈 길이 ‘합의’되어 있고 그 결과물이 박정희라는 환상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일하는 정부’와 ‘불평하는 국민’의 이분법이 작동하던 시대다. 그 환상을 깨버린 것이 전태일이다. 합의한 적 없는 이들, 목소리를 낸 적 없고 몫이 없는 이들을 대변하며 불타오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가 파열음을 내며 무너진다. 1970년 11월 전태일은 분신했고, 1971년 새해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은 ‘전태일 정신 구현’을 말했으며, 그해 대선에서 박정희는 광범위한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민중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하지 않았고, 대신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이는 합의를 넘어선 군부독재의 폭주였고, 그 결말이 사회에나 그 개인에게나 비극적이고 불행하리라는 것은 뻔히 예측된 바다.

 

박근혜의 경우는 어떨까. 박정희가 부당하지만, 시대의 문제는 인지했고 어느 정도 시대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면 , 박근혜는 정당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결말로 치달을지도 모른다. 현재 박근혜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이 야당인 민주당이기보다 ‘촛불시민’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1987년 이후 4반세기 동안 발전시킨 민주주의가 ‘다른 지향을 가진 정치세력 간의 경쟁’이란 층위로 올라오지 못했고, 여전히 박정희 시절에도 있던 ‘일하는 정부’와 ‘불평하는 국민’의 이분법 안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쩌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의 수준에서 우리는 1960년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는지 모른다. ‘87년 체제’의 핵심이 유신체제와 5공화국에서 상실한 직선제의 부활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의식이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실질적 수준이 1960년대의 그것은 아니다. 박정희는 야당의 협조를 구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던 반면, 박근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박정희는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데모의 주역들을 청와대에까지 불러서 만난 적이 있는 반면, 박근혜는 자신을 반대하는 시민을 품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보다 절차적으로 정당하지만, 그녀는 그 이점을 전혀 누리려고 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이도 그녀가 단지 ‘잃은 것을 되찾는 데에’ 관심이 있을 뿐 그 아버지처럼 하나의 목표를 성취하면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하고 끝없이 이를 추구하는 유형의 인간은 아니기 때문일 수 있다. 부녀지간이지만, 박정희와 박근혜는 이토록 다른 인간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대단히 낙관적으로 해석하면, ‘박근혜 대통령’이란 필연은 한국의 보수 세력과 민중에게 ‘박정희가 다시 살아 돌아와도’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글·한윤형

 

 

이땅의 청년들이여, 마음껏 '월경'하라!" 9.8 프레시안[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목수정 작가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한국에 오자마자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대한문으로, 시청으로 향했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이미 가슴속 깊이 지펴놓았던 촛불을 꺼내 들고 동료들과 친구들과 함께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 시간이 참 그리웠노라면서….

 

야만의 시대와 민주화의 시대 사이에서,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사이에서, NL과 PD 사이에서, 개인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 사이에서, 혼인과 비혼 사이에서, 프랑스와 한국 사이에서, 구속(拘束)과 자유 사이에서, 인간에 대한 실망과 환멸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어떤 벽돌을 차곡차곡 쌓으며 단단한 내면을 만들어갈 수 있었을까. 앞으로 그가 더욱 자유로이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들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내가 당당하게 선택한 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를 위해서 내 인생을 살겠다고 간단히 결정하는 순간 아무것도 거치적거릴 게 없어진다. 누군가 어떤 삶에 대해 완전히 확고한 사람이 있으면 그 확고함이 다른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린다."

"세상이 나한테 요구하는 욕망이 아니라 내 가슴속에서 욕망이 솟아올랐을 때 그걸 움켜쥐고 실천하라고 하고 싶다. 그게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첫 단계다. 그때부터 비로소 내 인생이 시작되는 거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유명한 예술가'가 되는 것과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것 사이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용기 있게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사회가 되는데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인 지난 6월 '재불 한인 시국 선언 서명 운동'을 공동 발기해 현지에서 150여 명이 이 서명에 동참했다. 국가정보원을 비롯해 정부가 이 사안에 대해 예의 주시하고 있을 텐데, 한국에 들어오기 두렵지는 않았나.

"국정원이나 한국 정부에 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마침 지인들과 다른 프로젝트를 도모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한국이 시국 선언 정국에 돌입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다들 동의했다. 함께 글을 작성하고 한인 사이트에 올려 온라인으로 서명을 받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참여가 많지 않아 한인 마트나 공연장, 한국 관련 행사가 있는 곳에 직접 가서 서명을 받았다. 처음에는 신이 나서 진행했는데, 막상 (한국에 오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니까 살짝 걱정이 됐다. (웃음)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집에는 내가 공항버스를 타고 바로 집으로 간다고 했기 때문에 아무도 마중을 나오기로 한 사람이 없었다. 만약 도착하자마자 '(당국에서) 나를 데려가면 아이는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릴 때쯤 되니까 아무 걱정이 안 됐다. 지금 정국에 시국 선언했다고 누군가를 잡아가면 이것은 완전히 불붙은 데다 기름을 붓는 격이 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해주면 나야 고맙지, 해봐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당시 박근혜 후보가 알지 못했다 해도, 불법으로 치러진 선거는 무효라는 그 명백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가장 엄중한 헌법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그 지위의 정당성도 자격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실토한 셈이다. 부정선거의 결과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준엄하게 요구한다"는 내용의 시국 선언을 했다. 어떻게 사퇴까지 요구할 생각을 했나?

"사람들이 '박근혜 하야'를 말하지 않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국정원을 개혁하라'는 정도만 말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결국 선거가 부정으로 치러졌다면, 선거 결과는 무효가 되는 거다. 그렇다면 당선된 사람이 물러나고 선거를 다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1960년 3·15 부정선거 때는 학생들이 '이승만 하야' 요구를 바로 했었는데, 지금 우리는 왜 퇴진 요구를 직접 하지 않을까 의아하다. 시국 선언을 할 때 우리는 '다른 것 다 필요 없다. 선거는 무효니까 박근혜 당선인은 사퇴하라'고만 얘기하기로 했다. 파리 한인 시국 선언 이후, 이것을 그대로 불어로 번역해 프랑스 서명 사이트에 올렸다. 제목은 "2012년 대한민국 대선 무효 선언에 대한 서명 운동"이라고 붙였다. 지금까지 프랑스인들을 포함해서 약 2000명 정도가 서명을 했다. 이 사안과 관련된 책임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해뒀다.

이런 것들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가지고 계산기로 두드릴 필요는 없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결과와 상관없이 나서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동참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동참해주길 바랄 뿐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사퇴 요구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나?

"사퇴는 박근혜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지도자도 스스로 혼자 힘으로 세상을 바꾼 적은 없다. 이승만도 그랬고 박정희도 그랬다. 결국 시민 혁명을 통해서만이 부패한 정권과 지도자를 무너뜨릴 수 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총으로 쐈지만 그것으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 정권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 학창 시절, "운동이 권력이던 때, 선배들이 주도하는 소위 '세미나'는 멀리하고, 20세기 초 러시아 시의 참혹한 아름다움의 세계에 넋을 잃는 반동의 시절을 보냈다. 종종 마음이 움직이면 종로, 대학로 등지에서 열리는 집회에 평소처럼 원피스를 입고 참석하기도 했다"고 했다. 학창 시절 목수정은 어떤 사람이었나?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이라서 대학에 오면 글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과 문학적인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소양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많이 했다. 그런데 학교 안에 있는 신문사, 문학 동아리를 포함해 모두가 운동권적인 어휘가 아니면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것에 대해 거부감이 들었다. 모든 시나 산문 등이 운동권의 어휘가 아니면 아예 실리지가 않았다. '이 또한 독재다, 갑갑하다, 어떻게 세상에 이것만 존재할 수 있나? 이건 거짓말이다' 하는 생각에 늘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나한테 다가오는 인간들이 딱 두 부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운동권 선배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동아리였다. 이 둘의 접근 방법이 너무 똑같았다. 이데올로기와 종교는 서로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포섭하고 맹목적으로 순수한 양심에 강요하는 방식을 택한다. '독재자' 혹은 '신'이라는 신성불가침의 존재를 뒤에 세워두고 그의 말이 곧 과학인 것처럼 얘기하는 방식 말이다. 그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래서 둘 다를 거부했다. 한 학생이 소위 운동권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계기는 본인이 스스로 사회에 대한 모순을 느껴서라기보다 선배들의 포섭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게 대세였고, 대학 생활에 응당 누려보는 객기였다. 당시 운동에 앞장섰던 선배나 동기 중에 지금까지 운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 이력을 발판삼아 권력깨나 쥐는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은 있을지언정 말이다."

 

- 동료들이 운동 현장으로 나갈 때 일종의 부채의식 같은 것은 없었나?

"어떤 부채의식도 갖고 있지 않다. 당시는 87년을 계기로 큰 싸움이 끝난 시점이었다. 그렇지만 노태우가 여전히 군부를 이어갔고 학교에서는 그동안 다져진 운동권의 세력은 여전했다. 학생운동의 이슈가 학내 문제로 넘어가면서 경찰과 계속 부딪치고 있었는데 1991년 명지대학교에서 '강경대 사건'(명지대학교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의 강경 대응으로 맞아 죽었던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노태우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분신 자살이 이어졌다.)이 발생했다. 그 당시에도 이번 국정원 선거 개입으로 시민들이 선거 무효를 외치는 것처럼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과 군부가 종식되지 않고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굉장히 컸다. 그런 이슈에 대해서는 나도 현장에 나갔다. 다만 동료들과 같이 간 것이 아니라 혼자 갔다. 가급적 전투적이지 않은 스커트 복장으로 말이다. 전경들이 덮치려 들면 시민들 사이에 끼어들기만 하면 되니까 구타를 당하거나 구치소에 가는 일은 없었다."

 

- 스커트를 입고 시위를 나간 모습이 상상이 된다. (웃음) 자기 세계가 뚜렷했고 글을 좋아하던 소녀가 어떤 계기로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되었나?

"대학에 오기 직전 87년에 대선이 있었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KAL기 폭파 사건이 발생했고, 대선 하루 전에 당시 주범으로 지목된 마유미(김현희)가 잡혀서 비행기에서 내리는 장면이 방송에 나왔다. 이것이 당연한 사실로 알고 대학에 들어와 보니 학내 게시판에 김현희는 조작된 인물이고 KAL기 폭파 사건은 정부가 만들어낸 사건이라는 내용의 대자보가 많이 올라와 있었다. 그 대자보의 내용을 완전히 믿건 안 믿건, 지금까지 내가 알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과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발족했는데 많은 교사들이 우리 교단에서 벌어지는 모든 옳지 않은 것들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했다. 이들의 가치와 연대에 동의했고 공감이 많이 됐다. 그 당시 내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가 바로 전교조의 '참교육의 함성'이었다. 그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핑 돌았다. 조직적으로 운동에 몸을 담고 있지 않았지만, 닫혀 있지는 않았다. 전교조를 지지했고, 전교조 활동을 하는 옛 은사들을 응원했다.

그렇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나에게 있어서 화두는 '문화'였다.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문화 사회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동숭아트센터에서 일하면서 자본에 문화가 종속되는 현실을 아프게 경험하면서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 때문에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고, 이러한 문화 부분에 대한 고민을 사회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사안으로 연결시키게 된 계기는 오히려 프랑스에 있으면서 생긴 것 같다."

 

-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동숭아트센터에 연극 기획자로 일하면서 "처음 연극 동네에 발을 디뎠을 때 감격의 눈으로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 있는 듯 새로운 부류의 인류를 만났다. 하지만 온통 '예술가님'들만 득실거리는 세계에서 예술은 그들에게 맡기고, 나는 서류를 만들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다"라고 했다. 연극 동네에서 경험했던 한국 문화의 취약점은 무엇이었나.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연극계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그나마 내가 있던 동숭아트센터가 비교적 규모가 큰 곳이라서 자본금도 상당히 갖고 있었다. 극장을 갖고 있어 공연장을 대관하기 위해 돈을 빌릴 필요는 없었다. 빚으로 시작해서 표를 팔면 그 돈으로 빚을 갚는 곳도 많았고 배우들에게 한 푼도 주지 못하고 운영을 하면 할수록 빚만 쌓이는 극단이 허다했다. 동숭 공연팀도 인원이 달랑 3명밖에 없어서 홍보, 기획에서부터 경리, 협찬을 구하는 일까지 다 해야 했다. 그중에 제일 싫었던 일은 매 공연마다 기업 후원을 받으려고 기획안을 가지고 기업에 굽실거리며 들어가 브리핑을 하는 일이었다. 한 50군데를 돌면, 한 군데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가 이 일을 왜 해야 되지?' 하는 환멸이 컸다. '우리가 생산하는 문화가 사실은 전 국민이 같이 누리는 문화적 자산이 되는 건데,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정말 이 방법밖에는 없는 건가'라는 고민이 굉장히 많았다."

 

- 그래도 일하면서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지 않나?

"대학로는 마치 연극을 매개로 한 작은 커뮤니티 같은 곳이어서, 연극 동네에 있으면 마치 시골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너무 순박했다. 연극은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비교적 작은 단위의 돈으로 시작한다. 주연 배우가 300만 원, 나머지는 50만 원 정도였다. 3개월 연습해서 한 달 동안 공연하는데 그만큼 받고 하는 거다. 그렇게 공연을 올리고 나면 버는 돈도 크지 않기 때문에, 또 애초에 공연을 통해 큰돈을 벌어야겠다는 욕심이 없어서 그 덕에 편안함과 포근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 뒤에는 연습도 공연도 지하에서 하고, 옥탑방이나 반지하에서 사는 연극인들의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희생이 있었다. 송강호, 유오성, 장희순, 정은표, 성지루 등 지금은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배우들이 작은 공연장에서 땀 흘리며 연극을 하던 시절을 공유했던 것도 큰 기쁨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들의 희생으로 연극이 생존해야 할까 하는 물음이 가슴을 쳤다. 좋은 배우들이 영화나 TV로 옮겨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현실도 아팠다.

모든 것이 자본이라는 단 한 가지의 가치를 기준으로 일렬종대로 나열되는 사회에서는 결국 문화도 투자의 대상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문화란 사회 전체가 그것을 공공의 영역이라 인정하고 장기적으로 아낌없이 투자해야지만 광범위한 결과물들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기에 오늘 투자하고 바로 내일 결과를 봐야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약화되지 않는 한 문화 사회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경험했다. 자본을 제어할 수 없는 정치의 한계를 느끼며 문화 정책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 누구에게나 젊은 날의 실패와 실연의 아픔이 존재하는 것 같다. 기획했던 공연이 큰 손해를 끼치며 막을 내렸고, 같은 시기 '내 머리카락 한 오라기까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불행 중독증에 걸려 광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야만'을 경험했다고 했다. 그리고 프랑스로 떠난 당시 심정은 어땠나?

"연애가 실패로 끝났지만, 그 경험이 약이 됐다. 나와 그와의 문제는 두 개인이 서로 조화롭게 만나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실패한 만남으로 끝난 것을 넘어선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평생을 지독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 권위 아래서 꼼짝 못하고 살아왔던 한 남자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여자와 부딪쳤을 때 생겨나는 생각의 파열들이 폭력적으로 드러났다고 받아들였다. 나는 거기에서 처음으로 가부장제에 이마를 쾅 박은 것 같았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두 남녀 사이의 불화를 경험했다기보다는 지난 수세기 동안 그동안 수많은 여성들과 남성들이 겪어왔던 불평등과 억압, 착취의 구조를 경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희생양인 줄 모르고 아버지의 목소리에 꼼짝달싹 못하고 짓눌려 살고 있던 남자를 보았다. 그로 인해 아픔을 겪었던 그 순간은 힘들었지만 동시에 껍질을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페미니즘의 첫 싹이 내게 싹텄다'고도 말할 수 있다."

 

- 우리는 보통 자신의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힘들어하곤 한다. 어떻게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확장시켜서 소화할 수 있었나?

"고등학교 이후 교회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겼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위안을 구하기 위해 교회를 가지는 않았고 정신과의사를 찾지도 않았다. 대신 책을 읽었다. 책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에서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과 사회를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아, 이게 이런 거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게 많았다. 고2 때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갑작스럽게 닥친 큰 불행이었고, 우리 가족은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었다. 그러나 이건 긴 인생사에서 약간의 굴곡을 내게 선사하는 사건일 뿐이란 생각이 있었다. 이미 책 속에서 많이 보았던 일들이 내게도 일어난 것이고 분명히 반전의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상황을 객관화했다. 그러니 담담하게 고통으로부터 무뎌지게 되고 물리적인 어려움을 정신적 어려움으로 확대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제를 겪은 모든 여성들에게 그 문제를 가지고 혼자서 힘들어 하는 것보다 사회로 나오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제안하고 싶다. 모든 개인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다. 나 혼자만 겪을 수 있는 문제는 없다. 내가 살고 있지 않은 다른 나라에도 내가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준다."

 

- 1999년에 프랑스로 갔을 때가 서른이었다. 그런데 파리에 도착해 파리 8대학 공연학과에 학부 3학년으로 편입했다. 어떤 마음으로 다시 학부 공부를 하게 되었나?

"한국에서 학부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지만 공연계에서 3년을 일했기 때문에 원한다면 석사 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석사 과정에서는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수업이 두 번밖에 없고 나머지는 학사 시절에 공부한 것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한 준비 과정에 해당했다. 바로 논문 과정을 들어가면 시간을 단축할 수는 있었겠지만 왠지 그것은 정직하지 않은 방법인 것 같았다. 대신 프랑스는 학부가 3년인데 나는 어학을 병행하면서 차근차근 2년 동안 3학년 License 과정을 들었다. 불어를 제대로 공부해야 프랑스의 문화 정책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와서 오늘의 결과를 낳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순히 '문화란 무엇일까?' 하는 광범위한 주제에서 프랑스의 문화 정책이라는 구체적이고 예민한 주제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다른 누군가가 내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학교 안에 외국인을 위한 무료 불어 강의를 있는 대로 다 들으면서 불어 공부 반, 전공 공부 반 열심히 공부했다."

 

- 프랑스에 있으면서 한국에서 경험했던 자본주의 하 문화 분야의 문제점들을 풀어나갈 답을 얻을 수 있었나?

"유학을 갔던 1999년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은 한국과 굉장히 달랐다. 한때 '트로츠키주의자'(레프 트로츠키의 마르크스주의 혁명 이론. 트로츠키가 제창한 영구 혁명론의 입장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에 반대하며, 세계 혁명 없이는 사회주의의 달성은 불가능하다고 주장. 아울러 전투적인 노동자 봉기와 노동자 독재 집권을 주장했다.)였던 리오넬 조스팽이 총리를 맡고 있었다. 그는 총리 재임 당시에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좌파로 분류되는 총리였다. 또 대통령은 좌우 동거 정부의 수장이었던 자크 시라크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정당들이 의회를 통해 제도들을 법제화하면서 문화 예술인을 위한 좋은 복지 정책들이 시행됐다. 그것을 보면서 '아, 여기는 문화에서 자본주의의 독주가 무력화되는 시스템을 굉장히 많이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가 자본주의 정책을 바꿀 수 있는 정치적인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독자적으로 입지를 펼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프랑스에는 연극, 영화, 공연과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복지 제도가 존재한다. 좌파 정부에 의해 1960년대부터 실행되어온 '앵테르미탕 제도'(앵테르미탕 제도는 1936년 당시 영화 산업 종사자들의 적은 임금을 감안해 부족한 수당을 보충하자는 의도로 시작되었다. 1958년 드골 정권 하에 국가상공업협회(Association pour l'emploi dans l'industrie et le commerce, Assedic)가 창설되면서 실업 수당이 본격화되었으며, 1969년부터 영화·공연·오디오영상 분야의 인력들을 대상으로 하는 현재의 실업 급여 제도로 확대되었다)는 정부가 연극, 영화, 공연과 같은 분야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실업 급여와 같은 사회적 안전 시스템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제도로 1년에 2개월 정도의 계약에 근거해 일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나머지 기간에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있다.

한국에 돌아와 이 제도만큼은 꼭 도입시키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때 문화부에서는 "프랑스에서 그런 시스템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 노동조합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노동조합이 요구를 해야 들어주는 거지, 정부가 알아서 해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 우리나라 예술인들도 노조 이야기를 하면 기겁을 하면서 '우리가 무슨 노동자냐 예술가지'라고 말한다. 다행히 '영화산업노조'가 만들어져서 그분들이 내가 제안한 제도에 전폭적으로 환영하면서 쟁취하려고 노력했다. 처음에 문화부를 통해서 했다가 안 되어 결국 노동부를 통해 프랑스 제도와 비슷한 한국식 제도를 얻어냈다. 이제는 영화 산업 노동자들이 촬영 이외의 기간에는 자신들의 기술적인 노하우를 기를 수 있는 연수 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어떠한 사회 경제적인 문제들이 정치영역 속에서 해결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자본주의 하 소외되어 있는 경제적 약자들의 요구들이 정치에서 반영되기는 힘든 구조이다.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 연대하여 요구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절대로, 저절로, 진보할 수 없다. 아무도 그걸 대신해주지 않는다.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큰 목소리로 요구하지 않으니 정치 영역에서 그들의 요구가 내팽개쳐져 있는 것이다. 요구하고, 만들어내고, 이후에 만들어진 제도들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행되도록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또한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그것을 같이 공유하고 공감하는 작업들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서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그 어떤 활동도 할 수 없도록 지원금도 끊고 탄압했다. 너무나 많은 시민단체들이 파괴되어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먹고살기에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 한국에 돌아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민주노동당에 들어가 4년 동안 문화 담당 정책 연구원으로 일했다. 당시 여러 당이 있었는데, 어떻게 민주노동당으로 입당할 결심을 했나.

"석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마침 그때 총선이 있었다. 총선 때 각 당이 어떤 문화 공약을 냈는지를 살펴보는데 그 중 민주노동당이 눈에 띄었다. 사실 그런 당이 있는 줄도 몰랐다. 권영길 의원에 대해서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공약집을 보니 꼭 내가 쓴 것 같았다. 나보고 쓰라고 했으면 '이렇게 썼겠다' 싶은 것들이 다 있었다. '한국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진짜 있었어?' 하고 너무 놀랐다. (웃음)

반면 다른 당은 완전히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공약만 걸어 놨었다. 민주당도 '부자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문화도 '부자 나라'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었다. 문화 정책에 대한 그 어떤 철학도 볼 수 없고, 그저 문화예술인들한테 사탕발림하는 식이었다.

그에 비하면 민주노동당은 거의 100대 0의 스코어로 완벽한 문화 공약을 냈다. 그래서 여기 들어가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들어가서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그냥 거기서 일하고 싶다는 편지와 함께 이력서를 보냈다. 그런데 마침 당시 민주노동당이 나름의 정책 정당을 표방하면서 연구원을 뽑으려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이력서를 받아본 사람이 '아직 공모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아셨냐'고 하길래, 그러면 가지고 있다가 공고를 내고 거기에 내 서류를 포함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중에 면접을 보러 갔고 일하게 된 것이다."

 

- 정책 연구원 초반, "정책은 상상력의 산물이다"라는 말에 행복해하며 즐겁게 일했다고 했다.

"면접을 보고 합격이 되어 들어가서 봤더니 거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 민주노동당이 내건 문화 공약을 아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웃음) 서너 명이 앉아서 문화 관련 공약을 다 만들었던 것이다. 굉장히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과 각 분야에 정통한 몇몇 교수들이 함께 만든 공약이라고 했다. 나는 당에 들어가서 내가 가진 새로운 생각들을 전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전할 것도 없었다. 이미 그들이 다 하고 있었던 거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틈에 싸여 함께 일하면서 정말 행복했다. 정말 파라다이스 같았다. 세상 어딜 가도 개중에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섞여 있어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 머물 때면 숨쉬기조차 힘들었는데, 그 와중에 이렇게 마음과 뜻이 맞아 협력할 수 있는 동네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 같았다. 그 시절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얻었다."

 

- 그랬던 민주노동당이 2005년부터 재선거 패배와 잇따른 '일심회 간첩단' 사건, NL과 PD의 정파적 갈등이 불거지면서 결국 2008년에 분당됐다. 갈라지는 민주노동당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솔직히 나는 당이 갈라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민주노동당은 당시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당으로 노동자 문제, 계급 문제가 핵심인 당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NL들이 들어온 것이다. 장사가 잘 된다 싶으니 막판에 마구 들어왔다. 그들은 지난 총선에도 보여줬듯이 당선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실제로 평생을 그렇게 해 온 사람들이다. 그들을 보며 '어쩌면 이 사람들이야말로 극우에 가까운 사람들이구나'라고 생각했다.

NL은 거의 종교 단체와 비슷하다. "다단계 생계형 정치 그룹"이었다. 한번 발 들여놓으면 발을 빼기도 어렵고, 그 안에서 인간관계와 생계와 생각이 온전히 통제된다. 그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보다 당과 정파가 더 중요하고 목적을 위해선 그 어떤 수단도 정당화시켜버린다. 그런 사람들과 남한에서 가장 좌파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한 정당 안에서 한 살림을 꾸릴 수 있겠는가.

민주노동당 막판에는 정파 싸움만 계속했다. 그것을 보면서 더 이상 발전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더니'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씁쓸하겠지만, 깨지는 아픔을 딛고서라도 한국 좌파로부터 주사파를 떼어내야 하는 게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당이 콩알만 하게 다 쪼개져 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과도기적인 아픔이라고 생각했다."

 

- 당을 나오기 직전, 민주노동당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노조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끝까지 남아 있는 당직자들의 체불임금과 퇴직금을 청산하겠다는 각서를 확정하고 나왔다.

"대선이 다가와서 당이 정신없이 돌아가던 시점이었다. 그 때 있었던 정책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PD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을 때 들어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NL이 보기에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어디선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 20명 정도를 선거 요원으로 대거 뽑아 와서 선거물 인쇄 등을 시켜가며 월급을 주고 아르바이트같이 일을 시켰다. 그래서 노조를 만들었다. 그러자 NL은 우리가 정파적인 싸움을 걸기 위해 다른 조직을 만드는 거라면서 반발했다. 결국 노조가 만들어졌는데, 그 이후에 사사건건 싸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노조라는 이름으로 지도부 회의에 들어가 그들이 하는 이상한 짓들을 다 기록해서 올리기도 했다. 그 중 내가 가장 많이 분노했던 것 같다. 대학 시절부터 PD와 NL 싸움에 길들어 있던 사람들이야 '쟤네들은 원래 저래' 하면서 새삼스레 분노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처음 봤으니 눈에서 불이 마구 튀었다. 심지어는 월급을 안 주고도 아무런 말을 안 하는 것이 이해가 안됐다. 어이가 없었다. '이것들이 무슨 노동자의 희망이냐, 너희들은 노동자의 절망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선거 막판에 가니 체면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고 오직 정파의 이해만 중요시되더라. 우리는 우리대로 노조의 힘으로 싸우겠다고 하고 의원들은 각개 전투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NL에 의해 권영길 씨가 대선 후보가 되는 순간, 모두가 배신감을 느꼈다."

 

- 민주노동당 안에 노조가 생겼다는 말이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씁쓸하다. 어떻게 해서 직접 노조 사무국장까지 하게 되었는가.

"'노조를 만들어야겠다, 같이 만들자'라고만 생각했지 내가 무언가를 해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노조를 만드는 모임에 따라 갔다가 상황이 계속 좋아지지 않으니 내가 "도대체 노조는 뭐하는 거냐"며 매일 투덜댔다. 그러니까 옆에서 "그럼 네가 노조 사무국장을 해라"고 해서 하게 된 것이다. (웃음) 사무국장 자리에 있으니 스스로 조직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이 치고 나갈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파업이라도 하자!'라고 하면서 치고 나갔다. 그런 순진한 눈과 마음으로 NL을 비롯한 지도부와 싸움을 벌였다. 그때 내가 NL의 철천지 원수가 됐다. (웃음)

한번은 그들이 '코리아 연방공화국'이라는 슬로건으로 대선 포스터를 찍었는데, 그것은 북한의 고려연방제를 그대로 표방한 것이었다. 그게 한 장에 얼마짜리인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말도 안 되는 공약을 포스터에 담아 찍어낼 수 있는가. 이미 당내에서 그렇게 찍어낼 수는 없다고 폐기된 결정을 정파적 영웅심으로 찍어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폭로하고 포스터를 못 찍게 돌아가는 인쇄기를 멈추고 그것을 명령한 사람을 비판했다. 내게 개인적으로 '무릎 꿇고 사죄하라'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내 이름을 당의 '오적' 중 한 명으로 올려놓기도 했다."

 

- 민주노동당을 나와 프랑스로 다시 돌아갈 때의 마음은 어땠나?

"당시 희완이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나 때문에 그를 계속 한국에 살게 하는 게 미안했다. 또 민주노동당에서 진하게 경험을 하고 나니 당장은 내가 할 일이 없겠다 생각했다. 멀리서 같이 싸워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이제는 또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야 하는 시기도 마침 맞았다. 프랑스는 유치원부터가 정규 교육인데 아이가 프랑스 생활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나 또한 프랑스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으로서 거기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에 미련이 많지는 않았다.

프랑스로 갈 무렵 책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레디앙 펴냄)이 나왔다. 한국에 있을 때 짧은 기사를 한번 쓰고 나면 굉장히 많은 비난 댓글(악플)에 시달렸는데, 책 반응은 굉장히 좋았다. 책이 많이 팔리고 안 팔리고를 떠나서 사람들이 보여준 커다란 반응에 내 마음이 녹았다. 그러면서 '아, 책을 쓰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을 짧은 글에 담아내면 오히려 오해를 많이 부르지만, 긴 글에 쓰면 공감을 얻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 책을 계기로 다른 책을 또 쓸 기회가 생기면서 앞으로 이 길로 가도 나쁘지 않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프랑스에 있으면서 한국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도 싶었다."

 

- 어쩌면 책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이 그동안 목수정의 힘들었던 삶에 위로가 된 것 같다.

"보통 내 책을 읽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고 위로가 됐다고 말해 주는데, 그런 반응이 나에게도 큰 위로가 됐다. 책이 나온 지 5년이 지났는데, 지금까지도 거의 한 달에 한 명 정도 독자가 파리로 찾아온다. 그러면 함께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한다. 그들은 내게 내가 잊고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준다. 그러면 나는 '맞아요, 정말 그래요'라면서 서로에게 힘을 주는 시간을 가진다."

 

-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던 목치숙 씨, 아버지는 '누가 누가 잠자나',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등을 작사한 유명한 아동문학가 목일신 씨였다. 두 분 모두 사회에 메시지를 주는 분들이었다. 이런 가정적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웃음)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40대에 돌아가셨다. 주동자이셨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가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동조자 이름을 단 한 사람도 말하지 않아서 엄청난 고문에 시달렸다고 들었다. 아빠는 중학생이셨고 아래로 네 명의 동생이 있었다. 먹고 살기조차 막막한 상황이었다. 집이 매우 가난했지만, 다행히 목사였던 할아버지 주변의 선교사들 도움으로 아버지가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실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귀국 후 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했다. 아버지가 지은 동시들은 스스로가 어릴 때 쓴 것인데, 할아버지가 그 시를 <소년 동아일보>, <소년 한국일보> 등에 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당선이 되니 어린 소년이 힘을 얻어 계속 동시를 썼다고 한다. 그 시들이 나중에 곡이 붙어 동요가 되고 널리 불리게 된 것이다.

기독교 집안이긴 했지만, 보수적이진 않았다. 개인적으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자기 세계관이 확고하신 분들이었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글을 계속 쓰고 남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강연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러니 정년 퇴직 후에도 아버지만의 삶이 따로 있었던 거다. 어머니는 보통 엄마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이들의 성공이 내 삶의 전부라고 여기지 않으셨다. '공부해라, 무슨 대학에 가라'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냥 밥만 해주고 건강 챙겨주고, 그다음에는 책을 보거나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자기 생활을 하셨다. 남동생이 마흔이 넘었는데 '너는 왜 결혼을 안 하니?'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각자 자기 인생을 사는 거지'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갖고 계시다. 어떻게 보면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본인들 스스로는 검약하고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 22살이 많은 프랑스인 희완 사이에서 아이를 낳을 것이고, 프랑스에 가겠다는 결정을 했을 때 보통 한국 정서상 가족들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당에서 일할 때 아이를 가졌다. 그땐 희완이 프랑스로 떠난 시점이었다. 그가 나더러 프랑스에 와서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가 임신 5개월쯤 됐을 때였는데, 어머니께 '내가 아이를 가졌고, 아이를 낳을 거고, 엄마가 이웃사람들 보기 민망하지 않도록 프랑스에 가서 낳을 거다'라고 말했다. 아이를 조금 키워 다시 오겠다고 하니, 엄마가 아무 말씀을 안 하셨다. 화가 나셔서 두 달 정도 대화를 끊으시더라. 그리고는 내가 프랑스로 갈 때 '다시는 오지 마라'고 하셨다. 엄마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남자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으니 얼마나 미웠겠나. 그런데 내가 칼리를 데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아이를 너무 예뻐하셨다. 아이 아빠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을 안 하셨다. 그것은 너의 선택이라는 뜻이었다."

 

- 한국에서 나이 차, 비혼, 동거 등으로 정의되는 희완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갑지만은 않을 것 같다. '다름'에서 오는 생각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했나.

"실제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이 내 앞에서 직접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또 있더라도 그 사람은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다. 내가 당당하게 선택한 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모두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항상 남을 위해 사니까 말이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이혼도 못하고 살고, 자식들도 부모를 위해서 산다. 남들 핑계 대면서 자기 자신의 삶을 제대로 못사는 대신, 나를 위해서 내 인생을 살겠다고 간단히 결정하는 순간 아무것도 거치적거릴게 없어진다. 세상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더 많다. 여기서 누군가 어떤 삶에 대해 완전히 확고한 사람이 있으면, 그 확고함이 다른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린다. '저 사람이 저렇게 확고하다면 거기에 뭔가 있을 거야'라고 하면서 다들 따라간다. 그러니 자기만 확고한 게 있으면 그만이다. 주저하고 말 게 없다.

만약 내가 희완과 함께 칼리를 낳고 함께 사는 것을 괴로워하다가 어쩔 수 없이 결정했다면, 엄마는 '이것아, 그러게 내가 뭐랬어'라고 하면서 나를 쥐어박고 나무랄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에 너무 행복해 하면서 좋아하는 모습이 엄마에게도 전해진 것 같다. 실제로 나는 아이를 가진 것이 너무 기뻤다. 당시 내 나이가 36살이었지만 아이를 갖는 것은 내 인생의 큰 소원이었고, 이 사람이라면 내가 아이를 낳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사람의 아이었기 때문에 낳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가족들이나 주위 사람들을 말로 설득하지 않았다. 내 태도에 엄마가 전염이 되고 다른 식구들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 가족들이 그러니, 다른 친척들이라고 뭐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러니 자기 인생을 본인 스스로 선택해서 산다면 사회가 개혁되길 바랄 필요도 굳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선택을 하고 살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다."

 

- 목수정에게 희완이란 어떤 존재인가?

"칼리도 이 질문을 많이 한다. 희완과 내가 정말 많이 싸우기 때문이다. (웃음) 칼리가 우리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왜 둘이 결혼했어?'라고 물어보면 나는 '결혼 안 했어'라고 답한다. 그러면 또 '왜 둘이 나를 낳았어?'라고 묻는다. 그럼 나는 '너의 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 이 사람이랑은 내가 칼리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그랬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정말 진심이다. 희완을 보면서 '이 사람이라면 내 마음에 드는 아이를 같이 만들어서 키울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어떤 점에서 그런 것을 느꼈나?

"지적인 면을 비롯한 여러 가지 면에서 그랬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내가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완전무결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그동안 내가 구축한 이상적인 남자상이 있었는데, 그걸 모두 충족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지적이면서도 행동하는 사람이고, 나이는 많지만 어떤 사람보다도 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가식이라는 게 하나도 없다. 문학을 전공해서 젊었을 땐 고등학교에서 불어 교사를 했다. 30대 이후 전업 작가가 되었는데, 예술가이면서도 굉장히 과학적인 사고를 한다. 그는 과학과 수학에 대하여 굉장히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고, 과학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세계는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보기 드물게 균형 감각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함께 살면서 새롭게 발견하는 모습들도 있다. 희완의 아버지는 1차 세계 대전 때 아버지를 잃고 본인은 2차 세계 대전 때 끌려가서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나온 사람이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1,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인류의 가장 거대한 슬픔과 비극의 역사가 이 사람 안에도 축적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반면, 나는 무모할 정도로 긍정적이고 걱정을 잘 안 하는 스타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와 비슷하게 사고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근본적인 세계관이 굉장히 달랐던 거다. 우리가 싸움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적은 똑같지만, 그 싸움의 방식은 다른 색깔이었다. 사실은 칼리가 그런 면에서 그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에 희완이 너무 아는 것이 많아서 신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는데, 나중엔 학교 같다는 생각을 했고, 시간이 더 지난 지금은 그냥 넓은 가지를 가진 나무 같다고 느꼈다. (웃음) 싸우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반가워한다. 우리는 서로가 출퇴근해서 잠깐잠깐 보는 삶이 아니다. 하루 종일 지겹도록 본다. 희완은 1층에서 작업하고, 나는 2층에서 글을 쓰거나 내 일을 한다. 밥 먹을 때 잠깐 보는데도 서로 무척 반가워한다. 희완은 움직임이 크게 없는 넓은 가지를 나한테 드리워주는 사람 같다."

 

- 자유로운 삶에 칼리는 사랑이자 동시에 구속이진 않는가?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는 내가 아이의 젖병이기 때문에 1년 정도 수유를 하는 동안 어디를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런 여자들의 약점을 이용해 남자들이 권력을 잡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웃음)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가 전적으로 육아를 맡으면서 사회적인 역할을 하지 않은 채 무력하게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아이를 계속 낳게 되면, 이 시절이 연장되는 것이고 말이다. 그 사이에 남자들은 먹이를 구해 올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권력을 장악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웃음)

칼리를 키우면서 내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지는 시절을 조금 겪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프랑스 사회에선 거의 모든 엄마들이 일을 한다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의 '전업 주부'라는 단어 자체가 프랑스에는 없다. 성인 중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실업자'일 뿐이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사회가 아이들을 돌봐주기 때문이다. 아이가 3살 때부터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어 4시 반에 끝난다. 부모 사정에 따라 별도의 놀이학교가 있어 6시까지도 학교 안 다른 팀들이 아이를 더 봐준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올라가면 그 놀이교실이 일종의 활동, 연극, 춤, 무용 등을 배우는 시간으로 바뀌어 아이들이 방과 후에 다양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대부분 일을 하는 부모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제도들이 학교에 마련되어 있어 6시경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제도 속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이가 학교에서 늦게 오니까 그 시간 동안 나가서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고 일도 할 수 있다."

 

- "내가 아이한테 배우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건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이다"라고 했다. 한국 엄마들은 특히 자신의 삶의 살지 않고 아이들에게 올인하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칼리를 너무 좋아해서 얘를 보면서 아이의 미래를 혼자 상상하곤 한다. 그러면서 내가 상상하는 쪽으로 아이를 끌고 가려는 내 모습을 스스로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러면 안 된다'라고 혼자 중얼댄다. (웃음) 내 어머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밥을 해 주고, 책을 사 주고,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연필이나 물감을 사주면서 아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게만 해주면 된다. 가끔 아이에게 생각을 환기해줄 질문을 해주는 건 아주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는 아이의 인생에 참견하는 대신 나의 인생을 열심히, 즐겁게 누리는 거다.

동숭아트센터에서 있을 때 그곳 대표님이 항상 질문을 하셨다. '너에겐 문화가 뭐니?'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모두들 그런 질문을 괴로워했지만, 그럼에도 계속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면접시험도 아닌데 20대 중반의 나이에 매일 '너는 여기에 왜 왔니?', '너는 기획자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니?'와 같은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부터 질문을 받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질문을 하면 그때 바로 대답이 나오면서 내 안에 있던 생각들이 말로 구축된다. 질문을 통해 내가 잊고 있었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을 듣는 것이 참 재미있다."

 

- 아이와 어떤 문답을 할 수 있을까?

"칼리는 우리에게 질문을 많이 한다. '왜 여자들은 하이힐을 신어?', '왜 여자들만 화장하고 남자들은 안 해?', '왜 한국 사람들은 초록색 불을 파란불이라고 말해?'와 같은 무수한 질문을 한다. 그러면 나는 근본적으로 그 질문에 대해서 고민하고 답한다. 언젠가 칼리한테 "칼리, 너는 꿈이 뭐니?"라고 물었더니 첫 번째로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유명해지는 것, 세 번째로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한참 후에 "어떻게 하면 피카소처럼 유명해질 수 있어?"라고 물었다.

나중에 이것 때문에 부부싸움이 났는데 (웃음) 희완이 "유명해지는 거? 그건 마요네즈지"라고 하는 거다. 그러면서 "마요네즈를 만들려면 식초하고 계란하고 기름이 필요해. 이것을 넣고 저으면 되는데 ,어떤 사람은 열 번을 저었을 때 마요네즈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백번을 저었는데도 안 되는 사람이 있지. 결국 마요네즈가 되는 것은 우연인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졌다. 노력하면 유명해진다고 이야기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희완이 버럭 화를 내면서 "칼리에게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것과 유명한 예술가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알려줘야 된다"고 이야기하더라.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유명해지는 것은 정말 우연히 한 순간에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나이 대의 아이에게는 그런 얘기부터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나도 엄청 화를 냈다. 또 싸움이 났었다. (웃음)

 

- 프랑스에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정치적 현안들에 대해서 블로그나 페이스북을 통해 가감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내는 목소리가 센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나마 내가 외국에 있으니 정부가 나를 미워해서 '얘를 한 번 손 봐 줘야겠다' 싶어도 시간이 더 걸린다. 내가 프랑스 국적은 없지만, 그래도 한국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덜 위험하지 않겠나. 그럴수록 '이런 건 내가 해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세게 이야기하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위험하게 쓴 것도 없는 것 같다. (웃음) 이런 이야기가 한국에서 유익하다면 계속 할 것이다."

 

- 앞으로 어떤 꿈을 꾸며 살고 싶은가?

"가끔 내 이름이 어디에 날 때 '작가'라고 나오는 것을 보면 정말 부끄럽다. 고작 책 몇 권 냈다고 작가인가. 다른 직함이 나한테 없기 때문에 그냥 작가라고 붙이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진짜 내 꿈은 내 이름에 작가라는 직함이 붙여졌을 때 내 스스로 낯 뜨거워지지 않는 날이 오는 것이다.

아주 단기적으론 이번에 출간한 <월경독서>(생각정원 펴냄)라는 책이 호응을 얻었으면 좋겠다. '월경(越境)'이라는 단어는 생리적인 용어가 아니라 경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람들이 여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치르는 월중 행사인 월경(月頃)을 떠올린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 경계를 넘는 일고, 한 달에 한 번씩 피를 쏟고, 다시 아이를 생산해 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는 일은 매우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쓰는 과정은 나를 만들어준 벽돌들, 이 혼란스런 시기를 건너게 해주는 벽돌들을 꺼내서 다시 만나는 일이었다. 행복했고 위안과 힘을 함께 얻었다. 독자들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 목수정에게 자유란?

"자유는 우리가 누릴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다."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세상이 나한테 요구하는 욕망이 아니라 내 가슴속에서 욕망이 솟아올랐을 때 그걸 움켜지고 실천하라고 하고 싶다. 그게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첫 단계다. 그때부터 비로소 내 인생이 시작되는 거다. 우리는 스스로 내가 어떤 욕망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연구원이 진행하고, 정리는 조경일, 정인선이 맡습니다.

노래출처: 다음 블로그 아름다운 음악여행

Peter, Paul & 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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