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그린뉴딜'은 '회색뉴딜'
100마리 남은 토종 ‘양비둘기’를 만나다
인간이 미안해"..거대 향유고래, 그물에 묶였다 구사일생
재벌에 '그린라이트' 켜주면 '그린뉴딜'인가
반발 부른 서울~성삼재 버스 정기노선
부산환경단체들 "운촌항 마리나는 토건 세력 위한 특혜 사업"
문재인정부의 4대강
21대 지역구 의원 중 24%가 토건산업을 공약했다
지독한 근대적 미신...'대안이 없다'는 말은 진실인가?
불타오르는 시베리아, 우리와의 연결고리는?
온천천·석대천 수달 서식지 됐는데…개체수도 모른다는 부산시
10년 간 절반이 죽어갔다···돌고래 수족관은 '잔인한 수용소'
수령 70년 넘은 나무 1만8000그루 '싹둑'.."토사 논밭 덮쳐
오늘날 다시, 2016년 촛불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한국처럼 먹으면 지구 못 버틴다" 환경단체 식습관 분석결과
지구에서의 삶과 죽음
운촌마리나 개발 반대여론 커진다
정부의 '그린뉴딜'은 '회색뉴딜'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들이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진정한 그린뉴딜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손팻말을 들고 있다. / 권도현 기자
환경단체 청년 활동가들이 정부가 발표한 그린뉴딜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들은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진정한 그린뉴딜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온실가스 감축 시나리오조차 없는 정부 그린뉴딜은 ‘회색뉴딜’이나 다름없다”며 정부의 그린뉴딜 정책을 비판했다.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들이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진정한 그린뉴딜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손팻말을 들고 있다. /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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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발표한 그린뉴딜에 대해 “대통령은 지금도 ‘기후위기 대응’을 생존의 문제가 아닌 국제사회의 트렌드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며 “한국이 산업전환에 앞장설 것처럼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파리기후협약’에서 약속한 1.5도 목표에 한참 못미치는 감축목표를 수정 없이 발표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지금까지 추진된 그린뉴딜이 소수의 관료들의 손에 맡겨져 왔다”며 그린뉴딜에 온실가스 절반 감축과 탄소중립 명시와 석탄발전소 종료 및 내연기관차 퇴출 계획을 포함할 것 등을 촉구했다. 이들은 정부의 그린뉴딜이 ‘회색뉴딜’이라는 의미로 회색물감을 푼 물을 붓는 퍼포먼스도 진행했다.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들이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진정한 그린뉴딜 촉구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그린뉴딜은 회색뉴딜’이라는 의미로 회색물을 붓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100마리 남은 토종 ‘양비둘기’를 만나다
집비둘기 등쌀과 잡종화로 위기…원앙도 울고 갈 오글오글 사랑꾼
양비둘기 부부가 사랑을 나누고 있다.
양비둘기(낭비둘기, 굴비둘기)는 국내에 100여 마리밖에 남지 않는 것으로 추정하는 멸종위기 야생동물이다. 7월 4일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에서 이들을 만났다. 천년 고찰 화엄사의 웅장한 대웅전과 각황전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들의 서식지다.
화엄사 대웅전은 양비둘기의 서식처다.
높은 용마루 위에 비둘기 모습이 얼핏 보인다. 마음이 설렌다. 집비둘기인지 양비둘기인지 아직 알 수 없다. 그냥 집비둘기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다. 도심 공원에 주로 사는 애물단지 집비둘기와 큰 차이 없어 보인다.
양비둘기의 모습.
양비둘기 무리에 섞여 있는 집비둘기.
양비둘기와 집비둘기의 잡종. 날개 가장자리가 흰색이고 허리와 꼬리의 흰색과 검은색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양비둘기는 집비둘기와는 전혀 다른 종으로 해안의 깎아지른 높은 벼랑의 오목한 바위나 바위 구멍, 산악지역의 협곡, 바위투성이의 군락지에 둥지를 튼다. 표준 호칭인 양비둘기보다 낭비둘기라는 이름이 더 걸맞다는 생각이 든다. 굴비둘기라고도 한다. ‘양’이란 접두어는 흔히 서양에서 들어온 외래종에 붙인다. 양비둘기란 명칭이 토종인데도 서양 비둘기 혹은 외래종 비둘기로 착각하게 한다.
양비둘기는 허리와 꼬리 끝부분에 흰색과 검은색의 구분이 명확하다.
화엄사의 양비둘기가 대웅전과 각황전, 명부전 용마루와 처마 밑을 오가며 바쁘게 움직인다. 용마루는 구애와 짝짓기의 장소로, 처마 밑과 현판 뒤는 둥지로 이용하고 있다. 현판 뒤에 양비둘기 대여섯 마리가 나뭇가지와 식물 줄기를 사용하여 길고 평평하게 둥지를 만들어 각자의 자리를 정해놓고 알을 품고 새끼를 키운다.
양비둘기가 둥지를 만들기 위해 마른 솔잎을 입에 물었다. 마른 솔잎을 사용하는 이유는 송편을 빚을 때처럼 솔잎의 살균 효과를 염두에 두었을지 모른다.
양비둘기가 둥지를 만들기 위해 마른 솔잎을 입에 물었다. 마른 솔잎을 사용하는 이유는 송편을 빚을 때처럼 솔잎의 살균 효과를 염두에 두었을지 모른다.
쉼터와 짝짓기 자리로 이용되는 지붕과 용마루는 지정석이 있어 자리다툼을 하며 밀어내기를 한다. 평화로운 화엄사 가람에서 양비둘기의 영역 다툼은 일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사교적인 양비둘기는 물어뜯는 큰 싸움보다 기 싸움으로 밀어내기 방식을 택한다. 떼 지어 경작지에서 함께 먹이를 먹기도 한다. 양비둘기는 화엄사에서 약 3㎞ 떨어진 노고 마을 앞 대지 저수지 인근 평야에서 먹이 활동을 한다.
양비둘기는 슬며시 자주 땅바닥으로 내려와 태연하게 사람 눈치를 살피며 돌아다닌다. 사람을 그다지 경계하진 않지만 그래도 신중함이 보인다. 음수대를 거리낌 없이 이용한다. 각황전 앞 음수대와 심전 안의 음수대에서 물을 먹고 목욕도 마음껏 즐긴다. 물을 먹는 과정에도 서열이 명확하다.
7월 초인데도 화엄사에는 둥지를 만드는 양비둘기가 있는가 하면 짝짓기도 하고 알도 품고 이미 새끼를 기르는 개체도 보인다. 번식기는 3월에서 10월까지이나, 이르면 2월에서 늦으면 12월까지 지속해서 연중 번식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자기 영역에 들어온 상대에게는 코앞까지 다가가 제자리에서 서너 바퀴 빙글빙글 돌며 경고한다. 지붕이나 용마루 위에 있다면 끝까지 몰아붙여 날아가게 한다. 특이하게도 상대를 쫓아낼 때만 빙글빙글 도는 것이 아니라 구애할 때도 같은 행동을 보인다.
양비둘기의 입맞춤.
양비둘기의 애정 표현은 원앙이 울고 갈 정도다. 입맞춤도 하고 서로 몸을 비벼대며 부리로 서로의 깃털을 어루만진다. 충분한 사랑의 몸짓으로 애정을 주고받고 나서야 짝짓기를 시도한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짝짓기한다. 짝짓기 때마다 사랑의 몸짓 행위를 어김없이 되풀이한다. 오전보다는 오후 4시~6시께 짝짓기 행동을 자주 보였다.
짝짓기는 시간을 길게 허비하지 않는다. 짝짓기 전 충분한 사랑의 교감을 나누는 시간이 더 길다.
양비둘기는 집비둘기보다 몸매가 탄력 있고, 번잡하지 않고 여유로우며 유난히 빠른 걸음이지만 잔망스럽지 않고 당당하다. 옆으로도 걸으며 땅 위에서 사는 새처럼 행동이 능숙하다. 날다가 날개를 접고 쏜살같이 활공하기도 한다. 공원의 집비둘기와 비슷해 보이지만 독특한 야성의 모습이 돋보인다.
양비둘기는 한반도와 연해주, 중국, 시베리아, 티베트 중부, 히말라야 그리고 몽골과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에 분포한다. 세계적으로는 개체수가 많아 멸종 걱정은 없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먹성 좋고 번식력이 뛰어난 집비둘기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무엇보다 이종교배로 잡종 비둘기들이 많아지면서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추적 장치를 짊어진 양비둘기. 어딘가 힘겨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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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텃새인 양비둘기는 1980년대까지 전국 남·서해안 절벽과 사찰에서 흔하게 관찰되었으나 개체수가 급감하여 국내에 100마리 미만의 개체가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환경부는 2017년 양비둘기를 멸종 위기 야생생물 Ⅱ급으로 지정했다.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필자가 관찰한 결과 30여 개체가 확인되었다. 잡종 비둘기 2개체도 있었다. 연구를 위해 추적기를 단 양비둘기도 보였다. 화엄사 인근에 있는 천은사에는 2~6개체가 관찰되었으나 작년 하반기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양비둘기는 고풍스러운 처마나 기와의 문양과 잘 어울린다.
속리산 법주사, 임진각 등 내륙의 번식 무리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사찰 번식 개체는 배설물 탓에 성가신 존재로 여겨지고 집비둘기로 오해받기도 한다. 1995년까지 30여 개체가 서식했던 전남 청산도를 비롯해 도서 지역의 집단도 거의 사라졌다. 전남 고흥 거금도 등 극히 일부 도서 지역에서 적은 수가 번식한다.
몸길이 33~35㎝이며 몸무게 240~300g으로 수컷이 다소 크다. 암수 모두 머리, 얼굴, 턱밑은 짙은 회색이고 뒷목과 가슴은 광택이 있는 녹색과 분홍색 빛이 난다. 어깨, 날개덮깃, 가슴 아랫부분은 회색이며 허리는 순백색이다.
양쪽 날개에는 두 줄의 폭넓은 검은색 띠가 세로로 선명하다. 날개 밑면은 흰색이며 꼬리 끝에는 흰색과 검은색 띠가 분명하다. 부리는 검고 콧등은 흰색이다. 눈은 적색, 눈동자는 검은색이며 다리는 붉다.
흰색 알을 2개 낳으며 17~18일 동안 포란하고, 육추 기간은 17~19일이다. 양비둘기는 매우 작은 씨앗을 좋아하고 곡식과 달팽이 등 작은 연체동물로 식단을 보충한다. 일반적으로 1500~5500m까지 높은 고도에서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토종 비둘기인 양비둘기가 낭비둘기라는 이름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집비둘기에 밀려 우리나라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양비둘기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보호가 필요하다.
글·사진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한겨레 환경생태웹진 ‘물바람숲’ 필자. 촬영 디렉터 이경희, 김응성/한겨레
인간이 미안해"..거대 향유고래, 그물에 묶였다 구사일생
이탈리아령 지중해 섬에서 불법 낚시 그물에 몸이 묶인 채 발견됐다 구조된 향유고래
지중해의 한 섬 주변에서 거대한 향유고래가 낚싯줄에 걸려 몸부림치다가 극적으로 구조됐다. 지난 18일, 지중해에 있는 이탈리아령 섬으로, 시칠리아섬에서 약 50㎞ 떨어진 곳에 있는 에롤리에제도에서 그물에 몸 전체가 휘감긴 채 고통스러워하는 향유고래 한 마리가 발견됐다.
이를 처음 발견한 관광객들이 현지 해안경비대에 신고했고, 해안경비대 소속 다이버와 생물학자들이 곧장 현장으로 출동해 고래의 상태를 살폈다. 경비대 측에 따르면 발견 당시 향유고래는 온몸에 그물이 감긴 탓에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다이버들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위험한 상황이었다.
당시 다이버들이 촬영한 영상에는 머리끝부터 꼬리 끝까지 그물에 묶인 향유고래가 벗어나기 위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특히 꼬리 부분에 상당한 양의 그물이 묶여 있어 헤엄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다이버들은 조심스럽게 향유고래에 다가가 칼로 낚시 그물을 끊어내기 시작했고, 다행히 향유고래는 큰 부상 없이 건강하게 먼바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탈리아령 지중해 섬에서 불법 낚시 그물에 몸이 묶인 채 발견됐다 구조된 향유고래
에롤리에 제도에서 같은 이유로 향유고래가 구조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현지 해안경비대는 이미 3주 전에도 그물에 몸이 묶인 또 다른 향유고래를 구출해 먼바다로 내보냈었다.
해안경비대 측은 “일부 어민들이 불법으로 낚시 그물을 던져놓는 일이 많아, 경비대는 낚시 그물과의 전쟁을 치러왔다”면서 “불법 낚시 그물에 걸리면 안 되는 해양 동물이 우연히 잡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낚시 그물로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동물이 끊이지 않는 일은 전 세계인이 관심을 가져야 할 환경문제로 떠올랐다. 국제포경위원회에 따르면 매년 버려지거나 불법으로 놓은 낚시 그물로 목숨을 잃는 고래류 해양 동물은 적어도 30만 마리에 이른다. 바다거북이나 바다표범, 바닷새 등의 피해까지 합치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다.
에올리에 제도 해안경비대 측은 “올해 들어서만 총 100㎞ 길이에 달하는 불법 그물을 제거했다”면서 “해양 동물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불법 낚시 그물 사용을 더욱 엄격히 감시할 것”이라고 전했다.
사진=AP 연합뉴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재벌에 '그린라이트' 켜주면 '그린뉴딜'인가
한국판 그린뉴딜, '그린'도 아니고 '뉴딜'도 아니다
월 14일 정부가 '한국판 뉴딜' 종합 계획을 발표했다. '국민보고대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사뭇 결의에 찬 어조로 5년에 걸쳐 160조 원을 투입해 190만 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계획의 세 기둥은 안정망 강화와 디지털 뉴딜 그리고 그린 뉴딜이다.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과 녹색당이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그린 뉴딜이 포함된 것이다.
얼핏 보면, 그간 기후 위기 대응 운동에서 녹색 뉴딜의 주요 내용으로 이야기된 것들이 망라된 듯하다. 공공 건물을 친환경-에너지 효율 건물로 리모델링하겠다고 하며, 도심 녹지를 조성해 숲을 늘리겠다고 한다. 신재생에너지 산업 지원 계획도 담고 있고, 전기차-수소차 보급 확대 사업도 있다. 이런 그린 뉴딜 사업에 2025년까지 42조 7천억 원을 투자해 일자리 66만여 개를 창출하겠다고 한다.
많은 주요 국가들에서 아직도 논의만 되는 녹색 뉴딜이 대한민국에서는 벌써 날개를 단 것인가? 코로나19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려는 '촛불 정부'의 결단에 박수를 쳐야 할 때인가?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린 뉴딜'이라고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계획은 '그린'도 아니고 '뉴딜'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보기에 이 계획은 재벌에게 '그린 라이트'를 켜주었다는 의미에서만 '그린' 뉴딜이라 할만하다.
과한 평가인가? 아니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린'도 아니고 '뉴딜'도 아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한 것은 정부의 그린 뉴딜 방안이 녹색 뉴딜의 내용들을 망라한 듯 보이면서도 정작 이 모두를 뒷받침할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빼놓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실효적이고 구체적인 탄소 배출 감축 계획이다. 정부안은 연도별 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물론 '저탄소, 친환경'이라는 말이 반복되며, '탄소 중립'을 지향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2050년까지 탄소 제로를 달성한다는 국제 사회의 합의에 맞춰 2025년까지 대한민국의 탄소 배출량을 어느 정도까지 감축하겠다는 목표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달성해야 할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가 없는 계획은 늘 그렇듯 관료의 책상 위에서 쉽게 사장되거나 축소, 왜곡될 수 있다. 탄소 배출 감축 의지가 없는 '그린 뉴딜', 이것을 과연 '그린' 뉴딜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는 그린 '뉴딜'이란 포장에 어울리지 않는 예산 규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50조 원에 육박하는 국비를 투자하겠다니까 엄청난 규모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5년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연간 예산으로는 10조 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작 이 정도 예산으로 과연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한 사회의 골간을 새로 놓는다는 엄청난 과업을 제대로 시작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기후 급변은 인류가 맞이한 초유의 위기이며, 각국은 이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시 상태에 준하는 역량을 투입해야 한다. 재정 규모가 450조 원이 넘는 나라에서 10조 원은 '전시'가 아니라 '일상'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결코 많은 액수라 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정부 계획이 연도별 탄소 배출 감축 목표를 제시하지 않은 이유가 더욱 뚜렷해진다. 현 정부는 탄소 배출 감축이 '급박한' 과제라 여기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한국 정부도 '그린 뉴딜'을 추진한다고 보여주는 게 중요할 따름이며, 따라서 예산도 딱 그만큼만 책정되면 된다.
이것이 '한국판' 그린 뉴딜이다. <21세기를 살았던 20세기 사상가들>(책세상, 2019)을 나와 공저하고 최근 <숲의 즐거움>(에이도스, 2020)을 낸 환경철학 연구자 우석영은 이를 '추격형' 그린 뉴딜이라 이름 붙였다. 이보다 더 정확한 규정도 없을 것이다. 현 정부는 인류 문명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대응의 국제적 양상에 근접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린 뉴딜'을 발표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추격형' 그린 뉴딜이기에, 과거 '추격형' 발전 과정에서 키웠던 그 주체들에게 다시 한 번 모든 기회와 자원을 몰아주겠다고 천명한다. 이번에도 국민의 모든 역량을 아낌없이 이들에게 쏟아 부어 사회 전체의 미래를 이들의 축적 전망에 예속시키겠다고 한다. 그들은 다름 아닌 재벌 대기업들이다.
새 경제 주체 육성 없이는 새 경제 없다
녹색 뉴딜이란 본래 생태적 전환을 하겠다는 것이다. 공공의 역할을 강조하며 일자리 창출 효과를 부각하는 프로그램으로 생태 전환을 구체화한 것이 녹색 뉴딜이다. 그렇다. 여기에서 핵심은 '전환'이다. 단지 기존 경제의 붕괴를 막겠다거나 성장률을 제고하겠다는 게 아니다. 지구 생태계 위기를 낳은 현 경제 체제에서 벗어나 새 경제 체제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새 경제 체제로 나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당연히 화폐를 비롯한 자원 전체의 흐름이 바뀌어야 한다. 또한 이를 뒷받침할 새로운 제도들도 갖춰야 한다. 하지만 기존 사회과학이 흔히 간과하는 또 다른 요소도 필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경제 주체들의 등장과 성숙이다. 이미 존재하거나 성장해 있는 경제 주체들은 기존 관성대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경제 체제가 전과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려면, 새로운 경제 주체들이 있어야만 한다. 이들이 일정한 정도로 성장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어떤 경제 계획이든 기존 체제의 전환을 목표로 삼는다면, 반드시 새로운 경제 주체들을 발굴하고 육성하며 세력화하는 내용을 포함해야만 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도 이런 실천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시장 규모를 늘리고 활성화한다는 목표에 맞게 이 과업을 담당할 주체들을 키워냈다. 관치 실행에서 유례없는 능력을 발휘한 경제적 국가기구를 발전시켰고, 재벌 대기업들을 육성했으며, 저축과 부동산 자산 형성에 일로매진하는 중산층 가정을 탄생시켰다.
생태 전환이란 이런 방식으로 구축된 한국 경제를 다시 한 번 철저히 재편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그렇다면 녹색 뉴딜 같은 생태 전환 프로그램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수준을 뛰어넘는 강력한 목적의식에 따라, 이 계획을 통해 등장하고 두 세대 넘게 한국 경제를 지배해온 경제 주체들과는 다른 주체들이 자라나게 만들어야만 한다. 국가 주도 발전주의를 거쳐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경제적 국가기구도, 재벌 대기업도, 추격 의식에 휩싸인 가계도 아닌 경제 주체들 말이다.
이런 새 경제 주체의 후보로 어떤 집단이나 조직을 들 수 있을까? 동네 수준에서 촘촘하게, 자연을 조금이라도 덜 파괴하는 방식으로 재생가능에너지 생산 기반을 구축하는 협동조합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역 일자리 수급 현황을 파악하고 일자리 창출 계획을 세우는 데 개입할 능력을 갖춘 노동운동, 주민운동도 필요할 것이다. 또한 이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공적 자금 투자를 투명하게 관리하면서도 정부에 대해 독립적인 공공 금융기관도 필요할 것이며, 탄소 제로 달성에 매진하는 새로운 국가기구도 수립돼야 할 것이다.
이런 주체들은 단지 탄소 배출량을 감축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어쩌면 인류는 이미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로 제한한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기후 대재앙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돼버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생태 전환은 이제 더 추진해봐야 소용없게 됐는가?
그렇지 않다. 기후 위기를 조절하는 데 이미 실패했더라도 기후 대재앙 속에서 생존 가능한 사회가 되려면 여전히 생태 전환은 필수 과제다. 변덕스러워진 지구 생태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제사회 체제는 최대한 유연해지고 회복 탄력성을 갖춰야 한다. 농업은 사멸하고 인구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으며 산업 생산조차 소수 대기업에 의존하는, 극도로 경직된 체제는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다른 경제 주체들의 등장과 성숙을 통해 생명체의 복잡성과 유연성에 보다 가까워진 체제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기후 위기가 어떻게 전개되든 새로운 경제 주체들의 육성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 계획에는 바로 이런 주체들이 없다. 새로운 경제 주체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그런 주체들을 발굴하겠다는 전망이나 의지조차 없다. 문제는 단순히 이들이 부재하다는 점만이 아니다. 이들이 없기에 그 자리를 전혀 다른 주체들, 이들과는 정반대되는 주체들이 차지한다. 대한민국의 낡은 경제 체제를 지탱하는 기둥들이 미래에까지 국민들이 의존하고 복종해야 할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디지털 뉴딜을 부픈 마음으로 기다리는 삼성 재벌, 그린 뉴딜의 결론은 수소차 지원일 뿐이라 선언하는 현대-기아차 재벌이 그들이다.
구 질서뿐만 아니라 변화의 담론까지 독점하는 지배 체제
백보를 양보해, 전기차-수소차로 전환하려면 기존 자동차 생산업체의 협력이 관건적이라고 치자. 전환 과정에서 기성 경제 주체들 역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수긍할만한 명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성 경제 주체들은 새 경제 체제에 맞게 전에 없던 관행과 규율을 받아들여야 하고, 새로운 위상과 역할에 맞게 진화해야 한다.
정부의 그린 뉴딜 계획은 이런 진실에 눈 감고 있다. 국고로 전기차-수소차 인프라를 구축해주고 국민들을 이들 시장의 소비자로 동원하겠다고 하면서도 그 수혜 대상인 현대-기아차 재벌에게 새로운 민주적-생태적 경제 체제에 부합하도록 변신을 요구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재벌 독재 체제를 끝낼 새 지배 구조를 제시하지도 않고, 이들의 지배력을 제어할 공공부문 구축이나 계획 기구 신설, 산업별 노사 협약 체제 도입에 대한 고민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린 뉴딜'이다. 국가 권력과 자본 권력의 새로운 결탁이 최첨단의 '좌파적' 용어를 뒤집어쓰고 미래를 약속한다. 낡은 지배 체제에 균열을 낼 수단으로 변화의 담론을 찾아 헤매던 이들은 바로 그 구 체제가 변화의 담론까지 제 것으로 독차지하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군림하고야 말겠다고 선언하는 광경과 마주해야 한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게 이런 식이다. 지배 체제는 구 질서뿐만 아니라 그 질서에 맞서는 무기로 등장한 변화의 담론까지 흡수하고 독점하며 수명을 이어간다. 일자리와 부동산, 학벌 등에서 온갖 기득권을 움켜쥔 계층-세대-집단이 '민주주의'를 독점하며, 여성들이 여전히 폭력과 모순에 노출돼 있는데도 정부-여당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한다. 그리고 이제는 석탄 화력발전소 신설에 미련을 보이고 그린벨트 해제에 집착하며 재벌 주도 경제 외에는 다른 무엇을 상상하지 못하는 정권이 '그린 뉴딜'을 선포한다.
말이 넘쳐나고 말이 오염된 사회다. 억눌리고 분노한 이들은 이제 말조차 빼앗기고 있다. 무서운 것은 더 이상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대중이 그것 말고 다른 수단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말의 성찬에 스스로 취한 자들은 이를 알고나 있는 것일까./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프레시안
아버지는 묶고 딸은 풀고…정권 따라 바뀐 그린벨트 운명
박정희 정부가 1964년 내놓은 ‘대도시 인구집중 방지대책’에서 시작한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운명이 달라졌다. 그린벨트가 처음 등장한 건 1971년 7월 30일이다. 이날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고시 447호에는 서울 세종로에서 반경 15㎞의 원형을 따라 폭 1~9㎞에 영구 차단 녹지를 지정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면적은 총 160.7㎢로, 경기도 293.5㎢ 등 서울·수도권 454.2㎢였다. 대한민국 부동산 지도에서 그린벨트가 쳐진 순간이다.
‘무조건 고수’에서 ‘제한적 활용’
1998년 헌재 판단 후 기조 변화
지자체, 정부 승인 없어도 해제
그로부터 1977년까지 8차례에 걸쳐 5397㎢가 그린벨트로 묶였다. 전 국토의 5.4%나 되는 엄청난 땅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그린벨트는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을 억제하고 녹지 쉼터 제공, 군사적 목적 등 복합적 성격이 강했다. 일각에선 경부고속도로 건설 재원 마련과 관련돼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유가 어찌됐든 그린벨트는 많은 논란을 낳았다. 그린벨트 면적의 80%인 4303㎢가 사유지였기 때문이다.
그린벨트엔 임야만 있는 게 아니다. 사유지인 과수원이나 전답(田畓) 등이 포함돼 있다. 벼락처럼 쳐진 그린벨트에 민심이 호의적일 리 없었다. 개발제한이 걸리면서 땅값이 급락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박정희 대통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관리했고, 재임 중 단 1㎡의 그린벨트도 풀지 않았다. 그러다 그린벨트의 운명이 바뀐 건 1998년 12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그린벨트 자체는 합헌이나 토지 소유자가 토지를 종래 용도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 등에까지 피해 보상 규정을 두지 않은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결정하면서다.
이후 들어선 정부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린벨트를 해제했다. 그린벨트 정책 기조가 ‘무조건 고수’에서 ‘제한적 활용’으로 선회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 이후부턴 서울의 주거난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도 민간기업형임대주택인 뉴스테이를 건설한다며 그린벨트 일부를 해제했다.
박근혜 정부는 특히 ‘규제 개혁’이라는 취지로 30만㎡ 이하 그린벨트 해제권을 지자체에 부여(2015년 5월)했다. 지자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중앙정부의 승인이 없더라도 언제든지 그린벨트를 해제할 수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국의 그린벨트 면적은 3846.3㎢로 당초 지정 면적 5397.1㎢에 비해 28.7%(1550.8㎢) 감소했다. 같은 기간 서울(167.9→150.7㎢)을 포함한 수도권도 1566.8㎢에서 1409.7㎢로 10%가량이 줄었다. /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반발 부른 서울~성삼재 버스 정기노선
전남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 성삼재 주차장과 지방도 861호 모습. 국시모 제공
환경단체인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모임(국시모)’이 ‘서울~지리산 성삼재’ 간 정기버스 노선 인가에 반발하고 나섰다. 국시모는 20일 ‘국토교통부의 서울~성삼재 버스 정기노선 인가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입장문을 통해 “국민 안전을 위협하고, 지리산국립공원 훼손을 촉진하는 서울~성삼재 정기버스 노선 인가를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무리한 산행·지리산 훼손 우려
환경단체, 노선 인가 취소 촉구
또 국시모는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은 성삼재 주차장 폐지 등을 포함한 성삼재도로 이용전환 계획을 수립하고, 성삼재를 오르는 지방도 861호를 국립공원도로로 전환하라”며 “성삼재 도로를 이용해 차량과 사람이 찾아도 지리산 일대 지역사회는 오히려 경제적 이익은커녕 손실만 봤다”면서 “이번 정기버스 노선도 지역사회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밤 11시 서울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에게 지리산으로 가는 길은 야생동식물이 사는 생태적 장소가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아스팔트길일 뿐”이라며 “이는 무리한 산행, 안전과도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인가결정은 취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달 10일, 함양지리산고속에 ‘동서울버스터미널~지리산국립공원 성삼재 구간 고속버스 운행 정기노선’을 인가했다.
이에 따라 함양지리산고속은 오는 24일부터 금·토요일 오후 11시 50분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하는 성삼재 운행을 개시할 예정이다. 성삼재에서는 토·일요일 오후 5시 10분 출발한다. 이와 함께 함양지리산고속은 이용객 상황을 검토한 뒤 평일 운행이나 증편 여부를 결정할 방침으로 환경단체와 마찰이 우려된다.
이선규 기자 sunq17@busan.com
부산환경단체들 "운촌항 마리나는 토건 세력 위한 특혜 사업"
부산지역 환경단체가 해운대 운촌마리나 사업은 특정 기업을 위한 특혜 사업이라고 규정하고 관계기관을 강하게 규탄했다.
부산시민운동단체연대와 부산환경회의 등 부산지역 시민사회단체는 21일 오전 11시 부산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시민단체는 "해양수산부와 부산시 등은 반대 의견은 반영하지 않고 운촌항 마리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는 부산시민으로부터 동백섬과 운촌 수변공원을 빼앗고 부산의 바다를 팔아 특정 업체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업"이라고 규탄했다.
이어 "바다라는 공공재와 공유수면을 특정 기업의 사적 이윤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명백한 특혜"라며 "지역주민과 부산시민, 해운대 관광객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수변공원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특히 지역주민들은 교통 지옥과 미세먼지, 바다 매립으로 인한 재난 등 위험을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된다"며 "해양공간을 토건 세력에게 제공하고 독점하도록 한다면 부산시와 해운대구, 해수부를 강력히 규탄하고 만 매립에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해운대구 등은 오는 23일 운촌항 마리사 사업 관련 주민 설명회를 예고했다.
부산CBS 송호재 기자
운촌 마리나 개발 해양 레저 활성화한다지만 환경 훼손·특혜 시비는 여전
부산 해운대구 동백섬 운촌항을 마리나 항만 시설로 개발하는 사업이 본격 추진되지만 해안 매립과 환경훼손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부산 해운대 동백섬 인근 운촌항을 거점형 마리나 항만 시설로 개발하는 사업이 본격 추진된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부산의 해양 레저 활성화와 지역 관광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다. 그러나 부산 명소인 동백섬 일대 해안을 매립한다는 계획까지 포함돼 있어, 환경 훼손과 특혜 시비가 일고 있다.
21일 해운대구와 개발사업 우선협상대상자인 ‘삼미컨소시엄(이하 삼미)’에 따르면, 해양수산부는 사업 부지 매립에 대한 부산시와 관할 지자체 의견을 수렴하는 등 운촌 마리나 개발사업과 관련한 공유수면매립기본계획 반영 절차를 앞두고 있다. 이는 운촌 마리나 개발사업 부지 확보를 위해 해양 매립 여부를 결정하는 행정적 단계이다.
동백섬 해안 1만 9277㎡ 매립
기본계획 앞두고 의견 취합 중
‘국제적 체류형 마리나항’ 기대
환경 오염·교통 대란 불가피
“특정 업체 이익 몰아주기 안 돼”
운촌 마리나 개발사업은 2014년 12월 해수부의 마리나 항만 민간투자사업 공모로 시작됐다. 2015년 8월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삼미는 해수부와 협의를 거쳐 국비 289억 원과 민간자본 547억 원, 총 840억 원가량을 투입해 12만 4000㎡ 면적을 거점형 마리나항만으로 개발하는 계획을 세웠다. 사업 부지 내에 공원과 해양 마리나 학습장, 전시관, 육상계류장 조성 등도 계획돼 있다.
특히 이 사업안에는 매립 계획이 포함됐다. 매립 면적이 1만 9277㎡에 달한다. 이 중 1만 5925㎡는 마리나 항만 개발 부지이며, 나머지 3352㎡에는 방파제가 들어선다. 방파제 길이는 335m이다.
이와 관련해 해수부는 현재 부산시와 지자체 의견을 취합하고 있다. 해운대구는 23일 해안 매립과 관련한 주민설명회를 개최한다. 구는 당일 주민 의견을 취합한 뒤 매립에 대한 해운대구의 의견을 해수부에 넘길 계획이다. 이후 해수부는 중앙연안관리심의위원회를 열고 공유수면매립기본계획에 대한 심의를 거치게 된다.
해당 사업이 차질없이 진행될 경우, 삼미 측은 기존 운촌항이 국제적 규모의 체류형 복합 마리나항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마리나 개발 사업으로 그동안 누락된 해양 레저 기능을 전면 회복하고 지역 관광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바다 일부를 매립하는 대규모 개발 계획에 지역 환경단체 반발도 만만찮다. 이들은 공공재로 볼 수 있는 해양이 특정 업체의 이윤 추구에 이용된다고 주장한다. 또 대규모 개발과 시설물 조성으로 수질과 환경 오염은 물론 교통 대란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또 해수부와 삼미가 맺은 실시협약서상 사업부지 사용 기간이 특혜 의혹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공유재산법에 따르면 사업부지 사용 기간이 최장 20년이지만. 관련 협약서에는 준공 확인일로부터 30년을 운영 기간으로 규정했다.
이에 부산시민운동단체연대와 부산환경회의 등 지역 시민사회단체는 21일 부산시청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들은 “관련 개발 사업은 부산시민으로부터 동백섬과 운촌 수변공원을 빼앗고 특정 업체에 이익을 몰아주는 사업”이라며 “지역주민들은 교통 지옥과 환경 오염, 매립으로 인한 재난 위험을 떠안게 된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삼미 측은 환경단체의 지적에 ‘문제없다’는 반응이다. 삼미 측은 개발에 따른 재해 위험과 환경적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다는 입장이다. 또 특혜 시비에 대해서도 삼미 측은 ‘개발 구간이 국공유지가 아니기 때문에 해당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잘못된 해석’이라고 반박했다.
삼미 측 관계자는 “해수 순환용 설비 설치 계획 등 수질 개선 대책도 마련했다. 태풍과 해일에 대비한 양방향 방파제도 조성 계획에 있어 자연재해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검토했다”며 “국가 사업 차원에서 마리나항을 개발하는 것으로 특혜하고는 전혀 상관 없다. 지역경제 활성화와 해양관광 교통거점 기지 조성 등에 집중하고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곽진석 기자 kwak@busan.com
문재인정부의 4대강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로 추진해온 4대강 재자연화가 좌초 위기다.
2018년 말까지 4대강의 보 철거 여부를 결정하고 19년부터 자연성 회복, 복원사업을 하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보 처리 방안을 2019년 말까지는 확정하겠다며 한 차례 미루기도 했지만 그 시한도 지키지 않았다.
보 처리 방안을 확정짓는 임무가 부여된 국가물관리위원회의 허재영 위원장은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언제까지 결론이 난다고 시한을 약속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염형철 국가물관리위원회 위원(간사)은 “지금 결정하더라도 환경영향평가다, 예비타당성조사다 해서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2년 내에는 재자연화를 착수하기 어려운데 정부는 결정이라도 하겠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나마 금강과 영산강은 보가 개방돼 수질과 생태계가 개선되고 있는 상태지만 가장 큰 규모의 공사가 이뤄진 낙동강은 보 개방도 거의 되지 않아 녹조가 심해지는 상황이다. 지난 9일 낙동강유역환경청 건물 앞에서 낙동강에서 떠온 녹조물을 뿌리며 보 개방을 요구한 배종혁 낙동강 경남네트워크 상임대표는 “녹조물을 약품으로 정수처리해 먹이는데 수도요금 납부 거부운동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고 분개했다.
4대강 문제에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국제적인 하천학자 한스 베르하르트 독일 칼스루에 공대 교수는 “모든 댐(보)를 없애야 한다. 4대강의 댐은 아무 효용이 없다. 시간이 갈수록 비용만 늘어나고 강은 파괴될 뿐이다”라고 충고했다.
뉴스타파는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4대강 재자연화가 왜 좌초 위기에 놓이게 됐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취재했다.
우리에게 남겨진 ‘이무기 운하'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4대강의 보 개방과 4대강 사업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지시했다.
감사원은 그동안 많은 의문을 낳았던 ‘수심 6미터의 비밀'을 밝혀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운하를 염두에 두고 4대강 사업을 착수했고 낙동강을 최저 수심 6미터로 준설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대단한 비밀을 밝혀낸 것 같지만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그를 옹위한 공무원, 어용 학자들의 주장처럼 홍수를 예방하고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강의 한 복판을 최저수심 6미터가 되도록 깊게 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운하가 되다 만 강’이다. ‘이무기 운하'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강이다. 처절하게 망가진, 고통에 울부짖는 강이다.
▲ 출처 : YTN뉴스
촛불로 되찾은 민주정부가 망가진 강을 되살리리라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2017년 5월 22일 , 취임하자마자 보 개방부터 지시한 것은 대통령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듯 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경북지역에서 보 개방에 반발하자 내려간 이낙연 총리는 농업용수가 걱정된다며 추가 개방은 어렵다고 후퇴했다. 그나마 금강의 세종보와 공주보가 개방돼 자연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2018년까지 보 처리 방침을 확정짓겠다고 했는데, 그 업무를 할 4대강조사평가단이 환경부에 설치된 것은 2018년 가을이었다.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장이 기획위원장으로 임명돼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2018년 11월이었다.
홍 위원장은 경제성 검토를 통해 보 처리를 결정하겠다는 방향을 잡았다. 보를 남겨뒀을 때 있을 수 있는 편익과 철거할 때 드는 비용을 비교해서 편익이 크면 철거하는 방식이다. 공정성 시비를 우려한 홍 위원장은 환경경제학 전공자들이 아니라 정통 경제학자들을 영입해 경제성 검토를 맡겼다.
2019년 2월 일, 4대강조사평가단은 금강의 세종보, 영산강의 죽산보를 철거하고 금강의 공주보는 공도교를 남기고 나머지를 철거하며 금강의 백제보와 영산강의 승촌보는 상시 개방한 채로 모니터링을 계속한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공주보를 포함해 3개의 보는 사실상 해체하는 결정이다. 백제보, 승촌보는 해체 결정을 하기에는 데이터가 부족해 보를 개방한 채로 더 관찰해보자는 것이었다.
3개는 사실상 해체, 2개는 상시 개방이라는 결과는 어정쩡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
4대강의 보들은 뱃길을 만들기 위해 강을 깊게 판 뒤 물을 채울 용도로 세운 구조물이다. 4대강 추진자들은 보로 막아서 생긴 물이 가뭄을 해소시켜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 물을 쓸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물을 채운 4대강 본류 주변은 항상 물이 넘치는 곳이고 가뭄지역은 그로부터 먼 산간지역이나 섬 지방이기 때문이다. 본류에서 가뭄지역까지 물을 공급하려면 관로를 뚫어야 하고 가압 펌프로 높은 지역까지 물을 밀어올려야 한다. 공사비와 전기료 등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차라리 가뭄지역 주변에 소규모 물 공급시설을 만드는 것이 낫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국토해양부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지시대로 4대강 사업을 진행했지만 물 공급계획은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감사원 감사 발표(2017년)에 따르면 “국토해양부는 2009년 2월 정종환 당시 장관에게 ‘대통령 지시사항인 준설과 보 설치만으로는 수자원 확보의 근본 대안이 안 된다’고 보고했으나 정 장관이 ‘그런 내용을 어떻게 보고하느냐'고 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못했다”고 한다.
국토부 공무원들은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수심을 깊이 팔 것을 지시하자 4대강 사업은 진행됐다.
결국 보는 녹조 가득한 더러운 물을 가두는 수단이 됐다. 보는 아름다운 산하를 자유롭게 흐르던 강을 막아 저수지로 만들어버렸다. 짧은 시간 내에 흐르는 강에 살던 생물종들은 호수나 저수지에 사는 종으로 바뀌었다. 서식처가 물에 잠기자 생물 다양성은 급격히 떨어졌다. 보는 물을 공급하지도 못하면서 수질을 악화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시설이 되었다.
효용이 없다면 철거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그 방향을 택하지 않았다. 많은 돈 들여 만든 시설을 이념으로 때려부순다는 비난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래서 경제성 검토라는 다소 덜 원칙적이지만 국민 설득에 유리한 방향을 선택했다. 환경단체들은 그 방향을 비판하고 반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함께 갔다.
금강과 영산강에 대한 보 처리 방침은 문재인 정부 뿐 아니라 4대강조사평가단에 참여한 환경단체들도 함께 고안한 제안이었다. 그 방침대로 이행됐다면 지금쯤이면 일부 보에 대한 철거도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고 남아 있는 낙동강과 한강에 대한 보 처리도 결정됐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4대강 재자연화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진척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 처리 방침 발표 이후 문재인 정부는 사실상 4대강 재자연화라는 국정과제를 우선 순위에서 밀어냈다.
국가물관리위원회로 넘겨진 공
문재인정부는 환경부 4대강조사평가단이 제안한 보 처리 방침을 그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 출범하는 국가물관리위원회가 이 문제를 심의해 최종 결정하도록 넘겼다. 홍종호 전 4대강조사평가단 기획위원장은 김혜애 당시 청와대 기후환경 비서관이 자신에게 기획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면서 정부의 로드맵을 설명했다고 했다.
“2019년 초에 4대강조사평가단의 발표가 나면 6월 정도에 국가물관리위원회가 결성될 것이고 거기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조사평가단의 제안을 수용할 것이다. 국가물관리위원회는 연구하는 기관은 아니기 때문에 그 결과를 그대로수용할 것이다 . 그런 절차를 거쳐서 확정이 되면 하반기에 집행을 할 것이다.”
결국 국가물관리위원회는 사실상 4대강조사평가단의 결정을 추인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꼭 국가물관리위원회에 그 결정을 넘겼어야 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허재영 국가물관리위원장은 “보 처리 문제가 국가물관리위원회의 논의 사안으로 법에 규정돼 있지는 않다. 굳이 근거를 찾는다면 기타사항으로 ‘물관리위원장이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4대강조사평가단의 결정을 바로 이행할 수도 있었겠지만 국가물관리위원회에 논의해달라고 넘겼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회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했다.
국가물관리위원회가 4대강 재자연화라는 큰 국정과제에 대한 최종 결정을 하도록 했다면 그 과제가 이행되도록 관리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우선은 재자연화라는 방향을 공감하는 위원들이 선정됐어야 한다. 그러나 청와대는 친4대강 인사로 분류될 수 있는 이른바 전문가들을 대거 국가물관리위원으로 선임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4대강 문제는 공전만 거듭하고 있다.
국가물관리위원 선정과정을 담당한 김혜애 당시 청와대 기후환경비서관에 의하면 위원 선정은 각 부처에서 3배수를 추천해 최종 결정은 청와대에서 했다. 4대강조사평가단에 참여했던 4대강 비판 인사들은 거의 배제됐다.
김 전 비서관은 “4대강조사평가단에서 만든 제안을 심의하는 곳이기 때문에 제안에 참여한 사람들은 빼는 게 당연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검증이 부족했는지 친4대강으로 불릴 법한 인사들이 대거 들어갔다.
운하정책자문단 혹은 4대강 사업 정책자문단의 일원이었던 교수들도 있고 각종 기고와 발표를 통해 4대강 사업을 지원한 전문가들도 있었다. 4대강 턴키 심사위원 출신도 두 사람 있었다. 4대강조사평가단의 보 처리 발표 후 보수언론에 졸속 발표라는 비판글을 기고한 사람도 있었다.
4대강 사업을 비판해온 한 국가물관리위원은 뉴스타파에 “4대강 재자연화를 지지하는 위원과 반대하는 위원의 숫자가 6 대 12 정도 된다”고 한탄했다.
김혜애 전 비서관은 취재진에 “저나 정부로서도 물관리위에서 그렇게 문제제기가 되고 논란이 될지 사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했다. 또한 그는 “우리 정부가 위원회를 만들어놓고 몇몇 위원들에게 지침을 주어 밀어붙인다면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무조건 밀어붙인 것과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덧붙였다.
이 말대로라면 현재의 국가물관리위원회 구성 하에서 4대강 복원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위원 구성은 불리한데 정부가 이니셔티브를 갖고 밀고 가지도 않는 것이니 말이다. 4대강 복원이라는 국정과제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 환경단체들의 한탄이다.
김혜애 전 비서관의 상사인 김수현 전 정책실장은 취재진의 취재요청에 답하지 않았다.
정부 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의 입장도 변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입장 변화다.
2016년 9월 30일 이해찬 당시 무소속 의원은 수자원공사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이학수 사장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 다른 보 전체를 없앤다는 건 무리란 말씀이신데. 실제로 필요 없는, 세종보는 정말로 필요 없는 보거든요. 거기만 보를 철거한다든가.(마이크 꺼짐)...”
세종보 철거를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이해찬 대표는 집권 뒤 입장을 바꿨다. 2019년 6월 7일 이 대표는 조명래 환경부 장관을 만나 세종보 철거를 재검토했으면 좋겠다고 요구했다. 엄연히 문재인정부의 국정과제로 남아 있는 4대강 재자연화에 역행하는 입장을 당의 대표가 전한 것이다.
정부 여당의 의지 실종과 국가물관리위원회의 공전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금강유역물관리위원회와 영산강유역물관리위원회에서 보 처리에 대한 의견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양 유역의 물관리위원회는 4대강조사평가단이 작성한 자료에 대한 오랜 검토를 통해 조사평가단의 제안에 거의 부합하는 수준으로 합의를 할 수 있는 분위기라고 한다. 두 유역물관리위원회가 보 처리에 대한 결의를 하면 그 결론이 국가물관리위원회로 올라가게 되는데 극단적인 경우 정반대 결정이 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총리실에서 국가물관리위원회에 또 다른 부담을 지우고 있다. 허재영 국가물관리위원장은 뉴스타파에 “총리실에서 최근 ‘마지막 결정단계에서 여론조사를 한 번 더 해봤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왔다.”고 밝혔다. 이미 여러 차례 여론조사를 한 상황에서 다시 하라는 것은 사실상 보 처리에 대한 결정을 미루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반발이 있다. 청와대와 총리실, 여당까지 4대강 재자연화에 대한 의지 부족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방해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지경이다.
염형철 국가물관리위원회 위원(간사)은 “지금 결정하더라도 환경영향평가다, 예비타당성조사다 해서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2년 내에는 재자연화를 착수하기 어려운데 정부는 결정이라도 하겠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지금 결정해도 다음 정부 들어서 실행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있다. 그런데 만약 그런 결정조차 미루면 대선 등 정치일정에 따라 4대강 재자연화는 좌초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장(전 4대강조사평가단 기획위원장)은 “2022년이면 다음 정부가 출범하는데, 그 때면 벌써 4대강사업이 완공된지 10년이 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10년이면 이미 보가 만들어지고 나서 생태계 다 바뀌고 수질도 거기에 다 변화돼버리고 맞춤형 농사도 자리잡고, 심지어 배도 띄우고 이런 식으로 이제 생활환경, 경제 환경이 바뀌어버리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바꾸기 위해서는 또 엄청난 설득의노력과 엄청나게 많은 재원과 갈등이 생길 소지가 많을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4대강사업으로 망가지는 한국의 강에 깊은 관심을 가져온 한스 베른하르트 교수(독일 칼스루에 공대, 하천학)는 뉴스타파와의 영상 인터뷰에서 “모든 댐(보)을 철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어떤 논리도 미친 주장일 뿐이라고 못박았다.
베른하르트 교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4대강사업으로 만들어놓은 강의 모습은 ‘변종 운하'라고 규정했다. 그는 “처음부터 4대강사업으로 만든 댐(보)은 아무런 효용이 없이 피해만 발생시키는 구조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댐(보)이 있으니 쓸 방법을 찾자는 것은 말도 안되는 발상”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말했다. “강을 흐르게 하라. 그러면 자연이 돌아올 것이다”
최승호/뉴스타파
21대 지역구 의원 중 24%가 토건산업을 공약했다
토건과 반기후에서 그린으로
21대 국회가 문을 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국가사회적으로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았다는 비명이 세상 가득한데 21대 국회와 그들의 세상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산적한 현안과 과제 해결을 위해 용맹정진해도 모자랄 판인데 원 구성부터 쉽지 않다. 여야 각자 나름의 명분을 가지고 다투다 끝내 야권의 전 위원회 위원장 포기선언도 나왔다. 정작 국민은 상임위원장이 어느 당 몫인지 관심 없다. 국민의 관심은 그 위원회가 심의할 법안과 그 법안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있다. 국민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정쟁 어디에 코로나19로 야기된 현실 세계체제의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한 의지가 있단 말인가. 그들을 지켜보는 국민은 국회와 정부가 부실하면 '직접 행동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촛불시민들'이다. 그들의 눈에 21대 국회가 어찌 보일지 알만한 일이다.
'151명'이다. 21대 국회의원 300명 중 초선의원 비율은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변화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그들을 당선시켰다. 초선의원들은 그들에게 투표한 민심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당장 시민들의 기대와 열망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해 법과 정책으로 제도화하기 위한 활동에 착수해야 한다. 그 첫 순서는 다름 아닌 '냉정한 자기 점검'이다. 왜냐하면 '초선'이라는 레테르(상표)에 묻혀있지만, 그들이 선거에서 내걸었던 공약을 분석해보면 전혀 과거의 토건 국회의원들과 차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함께사는길
환경운동연합이 21대 국회의원 당선자 공약을 전수 조사한 결과 케이블카 19건, 개발제한구역 완화 36건 등 환경파괴 공약이 다수였다. 환경파괴 공약에 여야가 따로 없었다. 미래통합당 31명, 더불어민주당 28명, 정의당 1명, 무소속 1명이다. 전체 지역구 당선인 253명 중 24.1%인 61명이 토건사업을 약속했다. 환경파괴 사업을 공약한 지역구 의원 중 절반이 초선의원이다. 그러므로 21대 국회가 해야 할 첫 과제는 자기 안의 개발주의, 토건주의와 결별하는 일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자연을 착취하고 기후를 유린하는, 이윤율 추구에 맹목적인 기존 세계체제의 결함'이 드러났다. 그러한 과거를 떠받치던 기둥의 하나가 토건주의다. 과거의 토건개발 정책에 목매는 국회가 지구적 차원에서 격변의 시대를 맞은 미래 4년을 책임질 수 있다고 믿기 어렵다. 21대 국회는 전기까지 의회가 구축한 토건개발의 정책 관행과 결별하는 것으로부터 위기의 시대를 돌파할 동력을 조직해야 한다.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체제의 건설을 강제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는 경제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유럽의 대안, 심지어 미국의 대안도 '그린'이다. 그린뉴딜은 이제 경제 밖의 권역에 밀쳐두었던 그린, 자연, 생태, 기후, 에너지가 철저하게 경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세계적 각성의 목소리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그린뉴딜은 그래서 절박하고, 전격적이었지만 당연한 발상이고 올바른 방향 설정이라 말할 수 있다. 다만, 이 제안을 즉시 실행할 만큼 우리 사회의 고민과 논의는 축적된 상황인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애초 디지털 위주의 경제 건설에 치중됐던 제안에 그저 수사였던 그린의 내용을 덧붙이는 정도로는 그린뉴딜이라 하기 어렵다. 산업 선진국들이 먼저 달리면 그들을 빠르게 좇는 전략으로 우리는 산업화에 성공했다. 이 전략의 유효성이 다한 상황이다. 지구 차원의 전염시대는 지구 차원의 경기하강을 불러왔다. 전염 없는 경제의 기획이 그린뉴딜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가 제시한 내용으로는 '그린'은 흐릿하고 '뉴딜'조차 확인이 어렵다.
재정사업 중심의 뉴딜 전략은 한계가 명확하다. 정부가 제출한 3차 추경 규모는 35조3000억 원이다. 기존 추경을 포함하여 코로나19 대응으로 270조 원을 투자한다고 한다. 35.3조 원의 3차 추경 중 경기 부양 11.4조 원, 일자리 금융 지원 5조 원, 고용, 사회안전망 확충과 경기 보강에 18.9조 원을 쓸 계획이다. 환경부가 제출한 3차 추경 규모도 7000억 원에 달한다. 저탄소 구조 전환, 녹색산업 혁신, 기후탄력사회 실현 사업에 쓸 계획이다. 환경부 계획은 기존 사업의 네이밍 교체 수준이고 기존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는 경기 부양책에 쓸 돈만 두드러진다. 무엇보다 행정부의 그린뉴딜에 대한 이해가 높지도, 동일하지도 않다. 총리실을 비롯해 관계부처 회의에서 반복적으로 '그린뉴딜'에 대한 다른 이해가 돌출된다. 수사와 내용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어떤 명분으로든 경기를 살려야 한다'라는 목표에 떠밀려가는 형국이다. 3차 추경예산이 투입된 사업에 대해 "추경은 올해 중에 사용되어야 하는 사업들이기 때문에 급하게 배정되었고, 시민사회가 제기하는 목적과 방향에 맞는 사업들은 내년 예산 수립 때 반영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잘못 든 길을 계속 달려가면서 '방향 수정을 위해 깊이 생각해보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린뉴딜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기 해결을 위한 정책인가, 코로나19로 드러난 세계체제의 구조적 결함, 기후와 지구생태계의 파괴를 수선하고 중단시키는 새로운 경제를 위한 기획인가? 전자라면 필패이고 후자라면 당장 국민, 시민사회와 함께 새로운 세계와 삶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해야 한다. 국민의 이해, 시민의 지지 없는 방향 전환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책 홍보나 강제를 위한 보여주기식 공론화가 아니라 '삶의 방향'에 대한 진짜 공론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미래 정향에 대해 합의해야 진짜 '그린뉴딜'의 작동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이대로 경제 해체 수준까지 코로나19 정국이 몰려가게 방치해선 안 된다. 그것과 그린뉴딜에 대한 국민적 논의는 선후의 관계가 아니라 동시 진행의 관계다. 우리는 변화하면서 생존해야 한다.
변화의 목표와 방향에 대한 국민적 논의와 합의를 조직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에 더해, 현재 민의를 행정에 수혈하도록 보장된 다양한 정부 내 위원회의 거버넌스와 해당 위원회의 실효성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최근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위원장이 취임 1년 만에 사임했다. 농어업과 지역사회에 관한 현장 이해도가 높은 전문가가 '농정 개혁 의지'를 가지고 시작한 특별위원회에서 사임하자 위원회 자체가 흔들리는 중이다. 물관리 정책의 획기적인 전환이라고 평가받는 물관리기본법 제정과 그에 따라 설치된 물관리위원회 역시 순항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들이 가장 심각한 환경문제로 꼽는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국가기후환경회의 정도가 나름 성과를 내며 작동 중이지만 그 성과가 이 기구 덕분이라고 국민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 총리실 산하의 녹색성장위원회,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와 국정과제협의회 소속 위원회까지 다양한 위원회와 조직들이 현안을 다루고 장기전망과 전략을 구상해 행정부 수반과 행정부처에 전하지만, 이들이 다룬 의제들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여전하고, 결국 갈등의 이해당사자들은 청와대로 몰려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일이 반복된다.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각기 다른 부문의 이익 최대화를 위한, 각기 다른 시간표를 가진 기획과 구상이 이들 위원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들 위원회에 논의의 기반이 될 통합된 목표와 시간표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책 충돌이 필연적이고 갈등의 발생 또한 자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구시대의 행정과 정책 관행에 익숙한 공공조직 내부의 과거지향적 저항도 여전하다. 코로나19로부터 국가사회를 정상성의 범주로 지켜내고 있는 질병관리본부를 청으로 승격시키는 과정에서 불거진 행정부 내의 논란과 불협화음이 그 방증이다.
'그린뉴딜'은 그렇지 않을 거라 예단하기 어렵다. 공조직 내부의 저항과 토건과 핵 마피아 등 사회 곳곳의 구시대 이익결사체들의 저항 연대가 준동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21대 국회에 교두보를 마련한 세력이 저항의 전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7월 중에 한국형 뉴딜 종합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하여 시민사회도 정부가 그린뉴딜의 목적과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도록 돕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자칫 에너지와 경제 정책에만 집중될 수 있는 그린뉴딜이 성공하려면 행정부와 국회 토건개발 세력의 '반(反)그린 연대'를 견제하고 제동을 걸어야 한다. 녹색과 토건이 연합한 녹차라테의 서글픈 현실을 불러왔던 이전의 MB표 '녹색성장' 전철을 되풀이할 순 없다.
▲ 4대강사업은 대표적인 토건산업이었다. ⓒ함께사는길(이성수)
지난 6월 5일 환경의날, 전국 226개 기초지자체가 '기후위기비상선언'을 선포하고 정부와 국회에 '기후위기비상사태' 선포와 '2050년 탄소순배출량 제로'를 촉구했다. 일국의 기초지자체들이 모두 기후선언에 나선 최초의 사례다. 그 배경에 '전염시대를 부르는 등 현실이 된 기후위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시민의 목소리가 있다. 정부와 국회가 답해야 한다. 그린뉴딜은 사회를 작동시키는 다양한 체제의 변화를 기반으로 가동돼야 한다. 에너지 전환은 그 기본이다. 그런 차원에서 현재 검토 중인 '9차 국가전력기본계획(이하 9차 계획)'의 재점검이 필요하다. '9차 계획'대로라면 2030년 발전량 비중은 석탄 31.4%, 원자력 24.4%, LNG 22.4%가 된다. 10년 뒤에도 석탄은 여전히 최대 발전원이다. 석탄과 핵을 전원으로 하는 에너지 사업은 필연적으로 거대 토건개발과 연계된다. 에너지 전환이 토건과의 결별을 포함하는 까닭이다.
한 시대의 변화에 통증이 없을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이 변화의 통증은 우리 사회가 아직 활력을 가지고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고통을 참고 토건주의, 반기후 연대와 결별하는 용기를, '그린뉴딜'의 내용으로 에너지 전환, 지구생태계 보전, 기후안보의 경제와 사회의 재조직화 과정에서 발휘해야 한다. 지금 국회와 정부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국민의 열망을 실현할 정책을 생산하고 집행하려는 정책 의지이다./최준호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함께 사는 길]
지독한 근대적 미신...'대안이 없다'는 말은 진실인가?
[김종철 선생을 기리며]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를 향하여
2008년 8월 3일 모스크바 근교에서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작가 솔제니친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신의 하나였다. 한때 한국의 독자들 사이에서도 그는 상당한 인기가 있어서 적지 않은 작품이 번역되어 읽혔다. 많은 사람들에게 솔제니친은 전체주의체제하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 체제의 실상을 용기 있게 폭로하고, 꺾이지 않는 인간정신을 증언하기 위해서 비타협적으로 싸운 불굴의 이름으로 기억되어왔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솔제니친은 단순한 반공 작가가 아니었다. 1974년 <수용소 군도>가 국외에서 발간된 직후, 소련당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추방된 뒤 미국에서 20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그가 일관되게 보여준 반서구적(反西歐的) 언동은 물론이고, 실제 작품들을 읽어보면 그 점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비교적 초기에 쓴 중편소설 〈마트료나의 집〉이 특히 그렇다.
혁명 후 러시아 오지(奧地) 풀뿌리 농민들의 삶에 관한 이 뛰어나게 감동적인 이야기는 솔제니친이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거쳐 전승되어온 러시아의 심오한 정신적·사상적 맥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작가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스탈린이 강제적으로 추진한 집단농장화로 인해 러시아의 옛 농민공동체가 어떻게 철저히 파괴되었는가를 암시하면서, 농민들이 집단농장의 일개 타율적인 노동자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농민으로서의 심리와 정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성마저 잃어가는 비참한 상황을 묘사한다. 하지만 모두가 모두에 대해서 사나운 늑대가 되어가는 이 상황에서도, 러시아 사회의 오래된 ‘거룩한 바보’의 전통, 즉 자기주장이 아니라 자기희생을 습관적으로 실천하는 철저히 겸허한 정신이 끝끝내 살아 있음을 작가는 발견한다. 솔제니친에 의하면, 아무리 타락한 세상이지만 아직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은 자기희생의 습관이 몸에 밴 이러한 '거룩한 바보'의 존재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데다가 늙고 병든 이 '바보'에게 ‘마트료나’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녀가 만물을 품 안에 기르는 어머니―대지(大地)를 표상하는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마트료나'는 '마티'에서 왔고, 러시아어에서 ‘마티’는 어머니라는 뜻이다).
사실, 솔제니친의 저작 속에서 러시아 농민이나 농민공동체에 대한 언급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농민에 관한 일을 묘사하거나 언급할 때 그의 어조는 매우 날카롭고 강렬하다. 예를 들어, <수용소 군도>는 혁명의 과정과 혁명 후 소련에서 일어난 수많은 부조리, 잔혹함, 비극적 사건들을 엄청난 치밀성과 정확성을 가지고 기록한 방대한 기록이다. 그렇게 기록된 사건의 하나로, 1932년 모스크바 근교 집단농장에서 다섯 명의 농민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처형당한 일이 있었다. 그 이유는 기막힌 것이었다. 그날 집단농장에서 다른 농민들과 함께 풀베기 공동작업을 끝낸 뒤에 이들 다섯 명이 농장에 남아서 자기들이 개인적으로 키우는 말에게 먹이려고 따로 풀을 베어서 갖고 간 사실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솔제니친이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드러내는 극도의 분노이다. "만일 스탈린이 이 다섯 농민 이외에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사건만으로 그는 극형에 처해졌어야 마땅하다"라고 그는 쓰고 있는 것이다.
스탈린에 의해 저질러진 반인륜적 범죄가 한둘이 아닌데도, 특히 이 농민들의 죽음에 관련해서 솔제니친이 이토록 강경한 태도를 드러낸 것은 어째서인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러시아 옛 농민공동체에 대한 그의 본능적인 애정이었을 것이다. 솔제니친은 특히 혁명 전까지 계속되었던 농촌의 협동적 자치조직, 즉 '젬스트보'에 대해 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 지식인들이 흔히 들먹이는 솔제니친의 이른바 '슬라브주의'라는 것도 실은 이러한 자치적 협동성의 생활기반 위에서 생을 영위하던 옛 러시아 농민의 세계를 옹호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부활시키고 싶다는 갈망에 깊이 관계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실제로 이와 같은 농민공동체는 따져보면 모든 인간다운 삶의 토대 중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나 작가로서 솔제니친의 위대성은 그가 평생 유지했던 강인한 정신적 에너지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에너지는 바로 이 농민적 세계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향수나 갈망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충전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집단농장의 풀을 개인적 용도를 위해서 베어 갔다고 해서 사형을 당한 농민들의 이야기에서 좀더 생각해볼 것이 있다. 즉, 그 이야기는 무엇보다 소비에트사회주의체제의 본질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체제는 인간사회의 오랜 관습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고, 심지어 인간성에 반하는 폭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던 것이다. 집단농장만 하더라도 그렇다. 기본적으로 집단농장화는 농민의 심리와 정서를 아예 무시하는 폭거였다. 그뿐만 아니라, 생산력이라는 견지에서도 소농 중심 경제가 우월하다는 유력한 학문적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견해를 표명한 당대의 저명한 농업경제학자 알렉산드르 차야노프 등의 지식인은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그리하여 1928년에서 1933년까지 강행된 집단농장화의 직접적인 결과는 사회적 갈등과 비극적인 대기근과 그에 따른 엄청난 인명 손상이었고, 그 궁극적인 결과는 소비에트사회주의 자체의 붕괴였다.
물론 소비에트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은 스탈린의 폭압통치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와 같은 압제체제의 근간에는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적 인식에 있어서의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초기 소비에트의 이상이 무엇이었든, 그것은 결국 산업화와 생산력 제고를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환원되어버렸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요체가 생산수단의 국유화였다. 그 결과 농촌은 단지 도시와 공장에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는 생산기지로 전락하고, 공동체는 파괴되고, 농민들은 자기 땅에서 유리된 채 집단농장의 한갓 노동기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다고 해서 생산력 경쟁에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가 일차적으로 효과적인 산업화 혹은 경제성장의 도구로 인식되는 순간, 국가가 독점적인 자본가가 되고 인민은 전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고 마는 기형적인 사회주의체제의 출현은 거의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 겸 발행인 ⓒ프레시안
근대적 발전사관의 덫
돌이켜보면, 현대 사회주의운동을 사실상 독점적으로 주도해왔던 맑스주의 자체 속에 이미 사회주의의 기형적인 발전을 예고하는 논리가 내포되어 있었다. 우선, 사회주의가 성립하려면 먼저 물질적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자본주의 문명의 발달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맑스 자신의 논리가 그러했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바 있듯이, 이러한 논리에 이미 혁명이 “자유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함”을 겨냥하는 운동으로 왜소화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 나아가서, 여기에 내포된 역사 발전에 대한 일원론적이며 단계론적인 관점은 결과적으로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비서구 민중공동체에 대한 공격과 침탈을 정당화하는 매우 위험한 논리로 이어지고 만다.
1857년과 58년에 걸쳐 일어났던 인도 민중의 대대적인 봉기에 대해서 영국 식민당국이 무자비한 탄압으로 맞섰을 때, 맑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인도의) 이 목가적인 마을공동체들이 '동양적 전제주의'의 견고한 토대가 되어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문제는 이러한 아시아의 사회 상태에 근원적인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인류가 그 운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영국의 죄악이 무엇이건, 영국은 그런 혁명을 위한 역사의 무의식적인 도구였다.
이렇게 '문명화'라는 개념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맑스의 논리는 "아시아의 '근대화'를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일본에는 아무런 전쟁책임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도 없다"는 오늘날 일본 보수우파의 논리나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를 미화하는 한국의 뉴라이트 그룹의 논리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그렇게 해서 비록 한정된 논리에서일지라도 오늘날 한일 우익 논객들이 뜻밖에도 맑스의 충실한 제자가 되어 있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핵심은 '근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맑스를 단순히 근대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는 얘기가 되겠지만, 비록 잠정적으로나마 맑스에게도 '자본주의 근대'는 역사 발전의 불가결한 단계로서 긍정하고 옹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근대'를 통해서만 사회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근대'를 허용해야 할 잠정적인 기간이 과연 얼마 동안이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근대문명이 과연 어떤 수준까지 발전해야 사회주의혁명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줄 객관적인 척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역사법칙에 의해서 언젠가는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만 말했다. 이렇게 되면 '과학적 사회주의'가 그토록 강조한 '과학'과는 상관없이, 혁명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맥락에서 또 희극적인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지금 오키나와(沖繩)에서 평화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정치사상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어떤 글에서 자신이 아는 일본의 한 젊은 맑스주의 운동가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그 젊은이는 일본 자본주의가 혁명이 일어나기에는 아직 미숙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혁명적 수준까지 자본주의가 도달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지금까지 하던 운동을 접고, 대기업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런 터무니없는 희극들이 발생하는 것은 서구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경제성장에 의해서만 문명생활도 가능하고, 더 높은 단계로의 인간해방이 가능하다고 믿어온 뿌리 깊은 ‘근대적 미신’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생존의 궁극적 테두리인 우주와 자연은 순환의 법칙에 의해서 돌아갈 뿐인데도, 서구 근대문명은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내세워 직선적인 진보를 끝없이 추구·확대해왔고, 그 과정에서 생태적·사회적·인간적 한계는 계속해서 무시되어왔다. 근대문명이란, 간단히 말해서, 재생 순환적인 태양에너지 체계의 근본적인 제약을 뛰어넘어 장구한 세월 동안 땅속 깊숙이 묻혀 있던 석탄,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 및 기타 지하자원을 채굴하여 마구잡이로 사용하자는 지극히 근시안적인 발상에 근거하고 있는 문명이다. 그러니까 이런 종류의 문명이 영속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옛날 도쿠가와(德川)막부 말기 개국 초에 일본에 와 있던 영국 공사가 당시 일본의 석탄 생산이 전근대적이어서 일본에 기항하는 영국의 선박에 원활한 연료공급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한 나머지 막부의 관리에게 근대적인 석탄 채굴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제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막부의 담당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 "일본의 석탄은 우리 세대에만 쓰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은 전형적인 '비근대인'의 세계관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는 단순히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적으로 소비한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 세계인식의 문제이다. 무엇이 정말 좋은 삶이고, 인간다운 삶인가, 혹은 어떤 사회가 진실로 선진사회인가 하는 것에 대한 기준이 오로지 서구 근대적 발전사관에 의거해 있을 때, 위기상황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맑스주의를 포함한 사회주의운동 세력 대부분이 지금까지 파행을 거듭해온 것도 결국 이러한 발전사관의 덫에 걸려온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란다우어의 '사회주의'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지배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통설에 대부분 굴복한 채 나날을 보내고 있다. ‘대안이 없다’는 구호 밑에 강화되어온 것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것보다 어쩌면 더 지독한 전체주의체제라고 할 수 있다. 감세, 노동유연화, 규제철폐, 민영화, 자유무역 등등, 그럴싸한 언어유희 밑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은 갈수록 벌어지는 사회적 격차, 부와 권력의 극심한 편중, 토지와 물을 포함한 공공재의 상품화, 국가기구의 사유화,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는 환경파괴이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강탈에 의한 자본축적"이라고 부를 만큼 거의 노골적인 형태로 진행되는 이 수탈 구조를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정말 이 시점에 ‘대안’이 없다는 게 진실일까.
그러나, 깊이 생각해볼 때, '대안이 없다'는 논리에 굴복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물질적 풍요와 계속적인 경제성장이 인간다운 삶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는 고식적인 관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용기 있게 이 상투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사실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류사회는 장구한 세월 동안 공동체의 호혜적 관계망을 토대로 다양한 상호부조의 경제를 경험해왔고, 그것은 아직도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형태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생활을 떠받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산업화된 세계에서 우리들은 현금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상호부조의 경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이 두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필요한 것은 이 상호부조의 경제를 시급히 복구하려는 노력이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온 글로벌 자본주의시스템에 대한 계속적인 굴종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활로가 열리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사람들은 '상호부조의 경제'라는 개념에서 대뜸 '가난'을 연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상호부조의 경제란 기본적으로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적으로 사용할 것을 강요하는 성장경제시스템의 바깥에 있는 경제이다. 따라서 이른바 생활수준의 저하는 어느 정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가난'은 회피할 게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껴안아야 할 미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철학자 프루동에 의하면, 정상적인 인간생활은 원래 가난한 생활이었다. 중요한 것은 '가난'을 견딜 만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가난'을 삶의 축복이 되게 하는 사회적 토대, 즉 공생공락의 네트워크를 확보하는 일이다.
구스타브 란다우어는 유태계 독일인으로 20세기 초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뛰어난 문예비평가, 사상가, 평화운동가였다.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위해서 헌신적인 생애를 살다가 1차 대전 직후 짧은 순간 존립했던 바이에른 소비에트공화국 혁명정부의 문화 담당 각료로 활동하던 중 1919년 49세의 나이로 반동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란다우어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 언젠가 필연적으로 도래할 미래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진보'를 믿지도 않았으며,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찬성하지도 않았다. 그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철저히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협동적 공동체들의 연합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의 기초는 생산력의 발전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사회적 관계였다. 그는 자본주의국가가 혁명에 의해서 전복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고, 새로운 사회공동체가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믿지도 않았다. 그에게 국가는 "하나의 조건, 어떤 종류의 인간관계이자 행동양태"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즉 우리가 서로서로에 대하여 종래의 방식과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지금 당장 국가의 지배를 벗어나거나 심지어 국가를 폐기할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게다가 그는 생애의 후반기로 갈수록 땅과 농촌공동체를 무엇보다 중요시하게 되었다. 그는 토지를 떠난 인민은 자본가에 맞설 수 있는 독립성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산업노동자들이 도시의 공장으로부터 퇴각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들이 만일 '협동적 사회주의'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대도시를 떠나 농촌공동체에서 농업과 소규모 공업의 결합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란다우어의 생각이었다.
구스타브 란다우어의 '사회주의' 사상은 주류 사회주의 사상들에 밀려나 오랫동안 잊혀졌다. 그러나 '사회주의'란 무엇보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의미한다는 그의 명료한 메시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들에게 요긴한 지침이 될 수 있다. ‘경제’라는 덫에 걸려 사고력이 정지되어 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그의 메시지는 강력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란다우어와 함께 우리는 우리 각자가 새로운 인간관계를 통해서, 이웃들과 더불어 자발적인 협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당장에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2008년)
출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녹색평론사, 2019년, 74~82쪽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 겸 발행인 /프레시안
불타오르는 시베리아, 우리와의 연결고리는?
시베리아의 고온현상이 심상치 않습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최근 북극권에서 이어진 고온 사례들을 분석하고 있다면서 인간에 의한 '기후변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WMO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올 상반기 시베리아의 평균기온은 평년보다 5℃ 높았고 6월 기온만 봤을 때는 10℃나 치솟았습니다.
WMO “시베리아의 장기 고온현상이 기후변화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WMO “시베리아의 장기 고온현상이 기후변화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
특히 러시아 극동부의 도시인 베르호얀스크(Verkhoyansk)에선 기록이 세워졌습니다. 올 들어 최고기온의 일별 추이를 봤더니 2월 중순부터 붉은색으로 보이는 고온현상이 뚜렷해졌고 이후 파죽지세로 상승했습니다.
6월 20일에는 38℃까지 올랐는데 지난 30년간 평균과 비교하면 20℃ 가까이 높습니다. 같은 날 중위도의 서울은 29.7℃로 북극권보다 '시원'했습니다.
러시아 베르호얀스크 최고기온(℃)러시아 베르호얀스크 최고기온(℃)
WMO는 "인간의 영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기후학자들의 시뮬레이션 결과 이러한 현상은 8만 년에 한 번 찾아올 만한 이변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기후에선 130년 주기로 발생 빈도가 짧아졌는데요. 인간에 의한 기후변화가 고온현상이 발생할 확률 빈도를 615배나 높인 겁니다. 그 주기가 앞으로 더 짧아진다면 수십 년마다 비슷한 일이 되풀이될지도 모릅니다.
시베리아 산불로 이산화탄소 5,600만 톤 배출
시베리아의 고온현상으로 산불도 비상입니다. 6월까지 불 타버린 면적은 115만 헥타르(11,500㎢)로 서울 면적의 20배에 이릅니다. WMO는 5,600만 톤의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으로 배출된 것으로 추정했는데, 스위스나 노르웨이의 1년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맞먹습니다.
인간에 의한 '기후변화'로 촉발된 '시베리아 고온현상'이 '산불'로 이어지며 또다시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기후변화를 가속화시키는 이른바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 현상이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달 들어서도 산불이 계속되면서 영구 동토층까지 녹아버리고 그 안에 갇혀있던 메탄가스가 대기 중으로 뿜어져 나오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메탄 역시 강력한 온실가스입니다.
메뚜기보다 무서운 '실크나방'…. 산불 취약성 높여
최근 아프리카와 남아시아에서 메뚜기떼가 나타나 큰 피해를 보았다는 외신 보도가 많았습니다. 메뚜기떼의 창궐은 농경 지역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재해로 순식간에 곡창지대를 '초토화'시키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10가지 재앙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시베리아 실크나방과 애벌레, 침엽수에 매달려있는 알(오른쪽 위), 출처: conifersociety.org시베리아 실크나방과 애벌레, 침엽수에 매달려있는 알(오른쪽 위), 출처: conifersociety.org
추운 시베리아에선 메뚜기보다 나방이 더 무섭습니다. 정확히는 실크나방(Siberian silk moth)의 애벌레가 무서운 존재인데요. 침엽수의 잎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기 때문입니다. 원래 실크나방의 활동 시기는 봄부터 여름과 가을에 국한되지만, 올해는 겨울부터 왕성한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고온현상으로 서식지도 이전보다 150km나 북쪽으로 확장됐습니다.
이렇게 실크나방 애벌레가 수분을 머금고 있는 침엽수 잎을 다 먹어 버리면, 해당 지역은 산불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비단 시베리아만의 일일까요? 우리와 관계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시베리아 발' 이상고온 현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지구의 기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올 상반기, 전 지구 기온 관측 이후 두 번째로 높아
2020년 1월부터 6월까지 지구의 평균기온은 관측 이후 두 번째로 높았습니다. 평년과 비교해서 기록적으로 따뜻했던 지역은 진한 붉은색으로 표시돼있는데요. 러시아 시베리아를 비롯해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남부도 기록적으로 따뜻했습니다.
코로나19로 온실가스 배출이 일시적으로 감소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는 몇 달 주기로 등락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수십 년에서 수백 년에 이르는 장기 변동입니다. 이산화탄소는 한 번 배출되면 수백 년간 대기 중에 머물기 때문에 지금 배출을 멈춰도 그 효과는 수백 년 뒤에 나타나기 때문인데요. 시베리아의 고온현상 역시 '왜 하필 올해 발생했느냐'가 아니라 지난 과거 동안 쌓여온 온실가스의 영향이라고 보면 됩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현재가 과거에 발목 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북극 얼음도 관측 사상 최소, 우리 영향은?
북극해와 가까운 시베리아에 폭염이 이어지면서 북극의 얼음 상황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파란색으로 보이는 올해 북극의 얼음 면적은 역대 가장 많은 얼음이 녹았던 2012년(점선)보다도 적은 상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7월 들어서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북극의 얼음이 많이 녹으면 전 지구적으로 기상이변을 몰고 올 확률이 높아집니다.
출처: 미 국립 빙설데이터센터(NSIDC)출처: 미 국립 빙설데이터센터(NSIDC)
특히 북극에 온난한 고기압이 장기간 정체하면서 그 영향이 한반도까지 미쳤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우리나라도 6월까지는 더웠습니다. 전국의 평균기온이 22.8℃로 1973년 이후 가장 높았고 폭염 일수도 평년보다 1.4일 많은 2일을 기록해 역대 1위를 기록했는데요.
그런데 7월부터는 북극의 직접 영향으로 상황이 급반전됐습니다. 위 그래프를 보면 6월에는 평년보다 높은 기온(붉은색) 분포가 많았지만 7월부터는 파란색이 대부분입니다. 7월 들어 어제(21일)까지 전국 평균기온은 22.5℃로 예년보다 1.4℃ 낮았고 폭염과 열대야 일수 역시 0.1일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는데요. 주변에서도 '7월인데 왜 이렇게 시원하냐', '밤에 창문을 닫고 잔다'라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원인은 동서의 기압계가 막혀있는 가운데 북쪽에서 밀려온 한기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6월 말부터 우리나라 주변에 찬 공기가 정체하면서 남쪽의 북태평양 고기압이 북상하지 못했고 여기에 장맛비가 오는 날도 잦았는데요. 기상청은 북극의 고온현상으로 중위도에 고압대가 정체하면서 동서 방향의 대기 순환이 느려졌고 찬 공기가 밀려오기에 좋은 조건이 유지됐다고 분석했습니다.
"북극 영향이 여름까지?"...심층적 연구 필요
그동안 북극이나 시베리아의 영향은 주로 겨울이나 봄에 받았습니다. 여름철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앞으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부분은 WMO의 발표대로 시베리아의 고온현상이 인간에 의한 기후변화로 촉발됐고,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지구의 기후와 연결고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당장 극지방과 적도 사이의 기온 편차가 줄면서 기압계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올여름 장마가 언제 끝날지도 베일에 싸여있는데요.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제부터 북쪽보다는 남쪽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이 커지면서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질 거란 점입니다. 기상청은 장마가 끝난 뒤 8월부터는 예년보다 높은 기온 분포를 보이겠고, 9월까지도 중국 내륙의 건조한 공기가 유입되면서 더위가 오래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신방실 기자weezer@kbs.co.kr
온천천·석대천 수달 서식지 됐는데…개체수도 모른다는 부산시
부산지역 하천 최근 목격담 늘어, 농산물시장 인근 수영강도 출몰
市는 기본 현황 파악조차 안 돼
- 보호대책 마련한 대구시와 대조
- 전문가 “사람과 공존안 모색을”
부산지역 하천에서 멸종위기의 천연기념물인 수달이 잇달아 출몰하지만 부산시는 개체 수 등 기본적인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왼쪽부터 지난 21일 부산 해운대구 수영강 세월교, 5월 24일 금정구 온천천 이마트 부근에서 발견된 수달. 독자 강동원 씨·부산대 주기재 교수 제공
환경단체와 전문가는 하루빨리 서식 현황을 확인해 수달 보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 21일 오전 8시께 부산 해운대구 세월교와 반여농산물도매시장 사이 수영강에서 헤엄치는 수달 한 마리가 발견됐다. 수영강변을 따라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주민 강동원(69) 씨가 이를 목격했다. 강 씨는 “지난해 수달을 처음 본 뒤 벌써 두 번째다. 지난번에는 수달이 수영강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갔는데 이번에는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갔다”며 “그만큼 물이 깨끗하다는 증거인데 수달 보호대책은 별다른 게 없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해운대구 석대천과 금정구 온천천 인근에서도 수달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다. 특히 올해 초부터 금정구 이마트 부근의 온천천에서 밤 9시 전후에 자주 출현했다. 지난해 9월에는 해운대구 새반송교 인근 석대천 지류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환경단체와 전문가는 수달 보호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부산대 주기재(생명과학과) 교수는 “온천천 석대천 수영강 등에서 계속 발견되는데 사람과 함께 공존하기 위한 대책은 부족하다”면서 “사람의 접근이 차단된 후미진 곳에 피난처를 마련하고, 야간조명 밝기를 조절하는 등 조처가 필요한데 이대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달이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부산시는 아직 수달이 몇 마리나 서식하는지조차 모르는 실정이다. 시 관계자는 “(대책을 마련하라는) 환경단체 제안을 검토하는 단계라 우선 수달의 서식 현황부터 파악 중”이라면서 “개체 수가 먼저 파악돼야 연구용역이나 보호대책 방향 등이 잡힐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시와 달리 대구시는 2018년 ‘수달 행동생태 및 보호 전략 연구용역’을 진행해 도심하천인 신천, 금호강 유역에서 수달 24마리가 서식하는 것을 확인하고 서식처와 계단형 이동통로를 만드는 등 장기적인 보호 조처에 나섰다.
수달은 천연기념물 제330호로 정부가 지정한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1급 동물이다. 1급은 자연적 또는 인위적 위협요인으로 개체 수가 현저히 감소해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을 뜻한다. 국제신문 김진룡 기자 jryongk@kookje.co.kr
10년 간 절반이 죽어갔다···돌고래 수족관은 '잔인한 수용소'
지난달 27일 경남 거제의 수족관 거제씨월드에서 벨루가(흰고래)를 타는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핫핑크돌핀스 제공.
29마리 폐사···세균 침투로 인한 패혈증·패렴 다수
일부 수족관, 꾸준한 지적에도 사람과 직접 접촉 프로그램 운영
전문가들 “사육 자체가 잘못···장기적으로 방류, 우선 접촉 금지부터”
최근 10년 사이 국내 수족관에서 사육 중이던 돌고래의 절반가량이 스트레스와 열악한 환경 등의 이유로 폐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족관들이 돌고래를 가둬두고 쇼를 시킬 뿐만 아니라 돌고래를 학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강제수용소 역할을 한 셈이다.
2013년 7월18일 제주 남방큰돌고래 제돌이를 방류한 지 7년. 그사이 시민들의 눈높이는 동물권을 논의할 정도로 높아졌지만, 수족관 업계와 관계 당국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양이원영 의원(더불어민주당)이 해수부로부터 제출받은 ‘국내 수족관의 돌고래 보유 현황’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돌고래를 보유한 국내 수족관 8곳에서 전체 61개체 중 29개체가 폐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47.54%에 달하는 높은 폐사율에 대해 전문가와 환경단체들은 돌고래가 수족관에서 사육하기에 적합한 동물이 아니라는 점이 확인됐다고 주장한다. 애초에 돌고래를 사육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며 남은 돌고래들도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라는 얘기다. 특히 야생에서 수명이 40~50년에 달하는 돌고래들이 대체로 10~20대 미만의 젊은 나이에 죽어나가는 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해수부 자료에 따르면 돌고래들의 사인은 패혈증이 11개체로 가장 많았고, 폐렴이 7개체로 뒤를 이었다. 수의사인 세계자연기금(WWF) 이영란 해양보전팀장은 “패혈증, 폐렴 등 세균 원인의 질병이 사인이 된 것은 돌고래들의 면역체계가 약해졌거나 자연적인 무리 생활을 하지 못하는 환경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 팀장은 “수족관에서 태어난 새끼들의 생존율이 낮은 것도 폐사율이 높은 것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거제씨월드에서 사육 중인 벨루가들의 모습. 핫핑크돌핀스 제공.
실제 전체 12마리 중 7마리가 폐사한 울산 장생포고래생태체험관에서는 환경단체들의 지적을 무시하고 4마리를 출산시켰으나 이 중 3개체가 생명을 잃었다. 장생포고래생태체험관은 기업들이 운영하는 다른 수족관들과 달리 울산 남구청에서 운영하는 공공기관임에도, 암수를 분리하지 않고 돌고래들을 출산시켜 논란이 되어왔다.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은 거제씨월드처럼 사람이 돌고래를 만지고 타는 등 직접 접촉하는 것이 돌고래들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이 돌고래를 타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동물학대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거제씨월드에서는 2015~2019년 20개체 중 45%에 해당하는 9마리가 죽어나갔다.
지난 7일 제주 서귀포시의 수족관 퍼시픽랜드에서 한 조련사가 돌고래를 물밖으로 나오게 해 관람객들에게 가까이 보이도록 하고 있다. 김기범기자
돌고래와 인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금지해야 한다는 지적은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하지만 논란이 된 거제씨월드 외에도 여러 수족관에서 사람과 돌고래가 직접 접촉하는 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있다. 지난 6일과 7일 사이 방문한 제주 지역 수족관 마린파크와 퍼시픽랜드가 대표적인 사례다.
마린파크에서는 돌고래쇼는 중단했지만 조련사 체험, 돌핀스위밍, 돌핀태교 등의 이름으로 돌고래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는 체험 프로그램을 여전히 운영하고 있었다. 6일 오후 마린파크 내의 수조에서는 어린이가 포함된 두 가족이 수조에 들어가 돌고래를 만져보고, 조련사들을 따라해보는 등의 체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의 수족관 마린파크 내의 체험프로그램 안내 포스터.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인수공통전염병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사람과 동물의 불필요한 접촉을 줄여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한 전문가는 “돌고래쇼는 그나마 돌고래가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갇혀만 있는 것보다는 나은 측면도 있지만 돌고래를 만지거나 타는 등의 체험은 돌고래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준다”고 지적했다.
퍼시픽랜드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돌고래를 만지는 프로그램은 중단했지만, 돌고래를 수조 바깥으로 나오게 하거나 사육사가 고속으로 헤엄치는 돌고래에 매달리고 함께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을 연출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퍼시픽랜드는 과거 불법 포획된 제돌이 등을 쇼에 동원하다 압수당한 수족관이다.
지난 7일 제주 서귀포시의 수족관 퍼시픽랜드에서 조련사들이 헤엄치는 돌고래에 매달려 있는 쇼를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돌고래쇼는 수족관에서 돌고래를 사육하는 한 필요악일 수 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사람도 감옥에 갇혀있기만 한 것보다는 매일 짧은 시간이나마 운동 기회를 주는 것이 더 나은 것과 다름없다는 얘기다. 서울대공원에서 사육하다 서울시의 돌핀프리 정책으로 인해 퍼시픽랜드에 양도된 돌고래 태지의 경우도 서울대공원 수조에 혼자 남았을 때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다가 퍼시픽랜드에 내려와 다른 돌고래들과 함께 지내고, 쇼에도 동원되면서 호전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서울대공원은 고 박원순 시장의 돌핀프리 선언 이후 사육 중이던 돌고래를 모두 야생으로 돌려보냈지만 국내 원산이 아니라 일본 타이지에서 온 태지의 경우 방류할지, 계속 인간이 보호해야 할지 등을 놓고 이견이 존재했었다.
이로 인해 장기간 홀로 지내던 태지를 서울대공원과 시민단체, 전문가들이 논의한 끝에 야생에 방류하거나 바다쉼터로 가기 전까지 퍼시픽랜드에서 보호하기로 했던 것이다. 퍼시픽랜드 관계자는 “대니(태지의 바뀐 이름)는 제주에 온 뒤 살이 붙어서 체중도 늘어났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민단체들은 태지가 쇼에 동원되는 것 자체보다는 태지를 제주에 보낸 뒤 서울시의 무책임한 태도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서울시가 사실상 퍼시픽랜드에 태지를 떠넘긴 후 때때로 건강 상태 정도만 확인할뿐 나몰라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드러난 수족관 돌고래의 높은 폐사율을 감안하면 퍼시픽랜드에서 아무리 정성껏 태지를 보호한다 해도 언제 태지가 폐사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럴 경우 태지를 떠넘긴 서울시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해양생물보호단체 핫핑크돌핀스 조약골 대표는 “사육 시설에서 돌고래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음을 생각해서라도 태지가 수족관에서 죽지 않도록 서울시 예산 및 국가 예산으로 ‘바다쉼터’를 조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제돌이 방류의 성과를 이어가기 위해 서울시 차원에서 해양생물과 생태에 대한 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공원에서 사육하다 지난해 퍼시픽랜드에 양도한 큰돌고래 태지의 모습.
그러나 만지는 체험보다 낫다고는 해도 돌고래쇼 역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마찬가지다. 해양생물보호단체 핫핑크돌핀스에 따르면 마린파크나 퍼시픽랜드 양쪽 모두 돌고래들이 쇼 도중 사육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모습이 확인되기도 했다. 지능이 높은 돌고래들이 먹이를 이용한 조련을 거부하고 ‘파업’을 벌인 셈이다. 일부 수족관들의 주장처럼 돌고래들도 쇼를 즐긴다면 이 같은 돌고래가 지시를 거부하는 듯한 행동을 보일 이유가 없기도 하다.
이처럼 쇼나 체험 프로그램은 물론 사육 자체가 학대에 가깝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돌고래 사육 금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해양동물생태보전연구소(MARC)와 생명다양성재단은 지난 10일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을 통해 “고래는 그 어느 동물보다 사육환경에 부적합하며 사육하는 것 자체가 학대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두 단체가 이 같은 성명을 낸 것은 거제씨월드 측이 비난 여론에도 돌고래에 타는 체험 프로그램을 지속할 것이라며 “해양동물들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행동 풍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 농무부에서 권고하고 있는 규칙 하에 돌고래(벨루가)를 관리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 차원이었다. 이들 단체는 “고래 타기는 행동풍부화가 아님은 물론 정반대 행위”라며 “고래를 타는 것이 해당 동물에게 약간이라도 이득을 준다는 것은 가해를 친절이라고 말하는 파렴치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어떤 과학적, 국제적 기준에서도 사람이 동물을 타는 것을 행동풍부화라 하지 않는다”며 “행동풍부화는 동물이 야생의 서식지에서 누렸을 다양한 자극을 최대한 재현시킴으로써 스트레스와 정형행동 등을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돈을 많이 낸 고객을 태우는 명백한 상업적 행위를 행동풍부화와 같이 동물을 위한 용어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극도의 위선이자 동물권 및 동물행동에 대한 과학을 조롱하는 것과 다름없다”며 “고래를 타는 것은 단 한 차례라 하더라도 행동풍부화가 아님은 물론이며 오히려 정반대에 해당되는 가해적, 침해적, 반생명적,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지난달 27일 경남 거제의 수족관 거제씨월드에서 벨루가(흰고래)를 타는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핫핑크돌핀스 제공.
이들 단체는 “벨루가를 사람이 얼마든지 밟고 올라타도 무방한 존재로서 표현하는 것은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와 가장 대척점에 있으며 매우 비교육적이고 심지어는 반교육적”이라며 “거제씨월드는 벨루가 타기를 즉각적으로 중단하고 지금까지 고래 타기를 해온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핫핑크돌핀스 조약골 대표는 “지나치게 높은 폐사율에도 관리 주체인 해양수산부는 평소 사육 시설과 사육 동물에 대한 관리를 전혀 실시하지 않고 있다”며 “시민단체들이 해수부에 고래류 사육 시설의 문제점을 전달하면서 정기적인 점검, 건강하지 못한 개체들을 바다쉼터 조성 후 이송하도록 얘기해 왔지만 해수부는 이를 거부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좁은 수조에 갇혀 고통스러워 하는 해양포유류에 대해 해수부는 책임을 방기한 것”이라며 “해당 기업에만 맡긴 채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이처럼 높은 폐사율로 이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해양동물생태보전연구소(MARC)와 생명다양성재단은 “사육 중인 고래를 당장 방류할 수 없다면 그때까지 최대한 좋은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데 사람이 고래에 타는 것은 반생명적, 비윤리적 행위”라고 지적했다. 양이원영 의원은 “동물을 쇼로 이용하고 있는 실태를 당장 해소하기 어렵다면 우선 번식을 금지하는 등 즉각 실시 가능한 조치부터 해야 한다”며 “근본적으로는 수족관 돌고래들을 바다로 돌려보내기 위한 계획을 정부와 지자체가 함께 세워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향 김기범기자의 '사람과 자연']
수령 70년 넘은 나무 1만8000그루 '싹둑'.."토사 논밭 덮쳐
건설업자 1만8000평 훼손..기소의견 검찰 송치
원상복구 명령 무시.."밭 일구려고" 진술
개발제한구역인 광주 서구 용두동 한 야산이 한 건설업자의 불법 공사로 훼손돼 있다.2020.7.23/뉴스1 © News1 허단비 기자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1만8000평을 무단으로 훼손한 50대 건설업자가 검찰에 넘겨졌다. 광주 서부경찰서는 개발제한구역을 무단으로 훼손하고 지자체의 원상복구 행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혐의(개발제한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관한 특별조치법)로 A씨(54)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24일 밝혔다.
A씨는 지난 2019년 5월 광주 서구 용두동 한 야산 8000평에 심어진 나무를 모두 베고 이를 원상복구하라는 지자체 행정명령을 어기고 지난 4월 재차 1만평을 훼손, 총 1만8000평의 그린벨트 구역을 무단 훼손한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개발제한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3년 이하의 징역을 받을 수 있다.
임야 1만8000평에는 70년생 이상 나무 1만8000여 그루가 심어져 있었지만 A씨가 무단으로 이를 베어버리며 산림 훼손이 심각해졌다. 지난 13일에는 광주에서 150㎜이상의 장대비가 쏟아지자 A씨가 훼손한 임야에서 토사가 유출돼 산 아래 마을의 논밭을 덮치기도 했다. 광주 서구는 원상복구 계획서를 제출하도록 해 이를 감독했지만 재차 훼손이 발생하자 지난 5월21일 A씨를 경찰에 고발했다.
A씨는 "밭을 일구려고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경찰 관계자는 "A씨는 개발제한구역 특별법 위반 혐의로 처벌을 받는 것과 동시에 해당 임야에 대한 원상복구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 1 허단비 기자
오늘날 다시, 2016년 촛불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김종철 선생을 기리며] 촛불시위와 '시민권력'
시인 김해자는 근작 시 <여기가 광화문이다>에서 "대통령 하나 갈아치우자고 우리는 여기에 모이지 않았다"고 일갈한다. 이것은 지금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수많은 시민들의 공통적인 심경일 것이다. 우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빛이 사방을 덮어 세상 곳곳으로 퍼진다는 광화문"으로 모이는 까닭은 명백하다. 세습권력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충성해온 직업정치인, 관료, 언론, 각종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배체제를 탄핵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연민과 분배와 정의가 얼어붙은 사이/농촌은 해체되고 청년들은 미래를 빼앗기고 노동자들의 삶은 망가져버린" 나라를 다시 일으켜 "만인이 만인에게 적이 되고 분노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만인이 만인에게 친구가 되고 위안이 되는 세상을” 열자고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경이롭게도, 토요일의 광화문 풍경은 우리가 평소에 안다고 생각했던 그 한국 사회가 아니다. 거기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배려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로 충만한 공간이다. 물론 같은 목적을 갖고 나왔기 때문에 그곳이 환대의 장소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엄청난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안전을 배려하여 몹시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뭐든지 기꺼이 남에게 양보하려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바로 어제까지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도생에 열중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뿐만 아니다. 시위가 열리는 광장에는 개인 돈을 들여 마련한 촛불이나 핫팩 혹은 김밥을 참가자들에게 열심히 나눠 주는 이들이 있고, 자기 장사는 접고 차와 음식과 떡볶이를 무료로 나눠 주는 소상인들도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젊은 자원봉사자들은 여기저기서 임시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팻말을 들고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이고 서 있거나 대규모 집회와 시위에 필요한 경비 마련을 위해 모금함들을 들고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를 돌고 있다.
놀라운 이야기는 이 밖에도 많다. 시위가 있는 날은, 가령 청와대 근처의 도로는 경찰차들이 철벽처럼 길을 막아 놓고 있는 탓에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동네, 특히 세검정 일대의 주민들은 시위에 참가하려면, 그리고 참가한 뒤 귀가하려면, 걸어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 중간에 자하문터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몇몇 인근 주민들이 자신들의 승용차를 가지고 나와서 터널 구간을 무료로 태워주는 일종의 셔틀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내놓고 시위에 참가하고, 참가를 독려하는 이런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가 결코 ‘이상한’ 대통령 하나 때문에 광화문에 모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참으로 실감 난다. 사람들의 열망은, 말할 것도 없이, 이제는 썩어 문드러진 구체제를 제대로 청산하고 정말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세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 세상은 어렵고 복잡한 말로 묘사할 필요가 없다. 주말의 광장에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과 지혜가 놀랄 만큼 선명하게, 풍부하게, 강력하게 분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 오른 어떤 밴드 가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옛마을운동"이라고 노래 불렀다. 그 노래의 뜻은 일찍이 박정희 정권이 요란하게 떠들고 유포시킨 '새마을정신'이란 실은 황금 물신주의를 조장하고 (농촌)공동체를 와해시킨 원흉이었다, 따라서 지금은 사람들이 정을 나누며 서로 돕고 살았던 '옛 마을'의 정신을 되살리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노래를 부르는 중간에, 이 나라 정치인들이 "밥값을 못하고" "서비스 정신"이 몹시 부족하다고 신랄하게 꼬집고, "서비스를 제대로 못하는 업체는 갈아치우는 게 당연하다"고 읊조렸다.
주말의 광화문광장에서 듣는 발언은 감동적인 게 한둘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정치인, 기성 언론, 지식인들의 발언에서도 느낄 수 없는 생생한 힘이 넘쳐난다. 그것은 풀뿌리 삶의 현장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마음과 생각들이 가식 없이 진솔하게 개진되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를 또박또박 설명하는 어린 학생들, 갑갑해서 강원도 산촌에서 서울로 한달음에 달려왔다는 시골 할머니, 지금 농촌이 어떻게 황폐화되고, 노동자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지를 비통한 어조로 말하는 늙은 농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등등. 광화문광장에서 지금 표출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수준 높고 품위 있는 언어들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새삼 느끼는 것은 종래의 정당정치, 대의제 민주주의로써 과연 이러한 민중의 민주적 열망과 지혜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 민중의 지적·정신적 수준을 반영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런 기준에서 본다 하더라도 지금 대한민국 정치의 수준은 민중의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게 아닌가?
주말의 광장에서 울려 나오는 구호 가운데는 쌀값 문제, 노동 탄압, 인권 및 환경 문제 등등 개별적 이슈에 관련된 것들도 있지만, 가장 집중적으로 말해지는 것은 물론 대통령의 퇴진 문제이다. 완전히 무자격자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사람이 한순간이라도 더 대통령직에 머무르는 것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 그러니까 스스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릴 것 없이) 당장 물러나는 게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대통령의 퇴진 문제 이외에 또 하나 강력하게 울리고 있는 구호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재벌문제를 척결하자는 외침이다. 실제로 이번 탄핵 사태에서도 역시 재벌이 문제였다는 것은 단순히 의혹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즉, 이번에도 재벌과의 부당한 거래에 국가권력이 남용 내지는 요용되었다는 언론 보도와 검찰의 수사 결과가 나왔고, 그 결과 지금 광장에서 재벌 척결을 외치는 구호가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제 재벌 문제야말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좌절시키고, 한국 사회가 인간다운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원흉이라는 인식이 이 사회에서 광범하게 공유되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의 한국 사회가 ‘헬조선’으로 돼버린 것은 무엇보다 소위 정경유착, 즉 정치가 금권에 의해서 유린·농락돼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이제는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된 느낌이다. 이른바 정계뿐만 아니라, 나라의 근본 중의 근본인 도덕적·윤리적 기초를 수호해야 할 언론도 학계도 사법부도 얼마나 금권에 의해 오염되고 타락 일로를 걸어왔는지는 지금 대다수 시민들이―아이들까지도―뼛속 깊이 알고 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은 정치권력과 금권의 부정한 결탁에 의해서 우리들의 삶이 끝없이 훼손되고 피폐해지는 상황을 더는 인내할 수 없다는 결의를 다지고 그 의지를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촛불을 들고 전국의 광장과 거리에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선거민주주의를 넘어서
이 겨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래 처참한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끝끝내 꺾이지 않고 역사의 저류(底流)로 면면히 지속돼온 풀뿌리 저항정신이 다시 전면으로 분출하고 있는 장면임이 분명하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지금 우리는 심히 긴장된 흥분 속에서 하루하루 보내고 있다. 되돌아보면, 불과 두어 달 사이에 엄청난 일들이 신속히 진행되어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되새겨볼 가장 중요한 점이 있다. 즉, 지난 몇 년간 공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알지도 듣지도 못한 일개 사인(私人)에 의해서 이 나라 국가 운영이 철저히 농단·유린돼왔다는 황당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된 뒤, 국회에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되고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는 단계가 된 지금까지, 이 상황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것은 시민들의 대규모 촛불시위였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정말로 촛불의 위력은 굉장했다. 사태 초기에는 무슨 계산을 하는지 탄핵을 망설이며 우물쭈물하던 국회가 마침내 야당 의원들은 물론이고 여당 의원들의 일부까지 가세하여 탄핵안을 처리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촛불의 힘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던 검찰이 결국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하여 수사에 돌입하게 된 것도 촛불의 거스를 수 없는 명령 때문이었다. 또한, 법원이 전례 없이 청와대 근접 거리에까지 시위대의 행진을 허용하고, 경찰이 습관처럼 취하던 시위대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일찌감치 포기한 것도 다름 아닌 촛불의 위력 때문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은 비록 매우 평화적인 시위라고는 하지만, 촛불을 통해서 발산되고 있는 시민들의 민주적 열망과 요구가 상상 이상으로 뜨겁고 강력한 것을 확인한 지배세력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에서 민중의 뜻을 거역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게 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둔감하고 무책임하다 하더라도 이 엄청난 민중의 결집된 힘을 무시하고서는 결코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늦게나마 그들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이 매우 불안한 상황이라는 것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끈질기게 계속한다 하더라도 광장에서의 항거와 싸움은 어차피 영구적 지속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조만간 촛불의 크기는 줄어들고, 마침내 식어버리는 날이 온다는 것을 냉정히 고려해야 한다. 뭔가 이 상황에 '급진적인' 개입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이 대규모 촛불시위를 통해 전면으로 부각된 '시민권력'은 조만간 힘을 잃고, 민초들의 목소리는 또다시 억압되고 무시당하는 수모를 겪는 날이 올 것이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근대 민주주의의 역사를 돌아보면, 어디에서나 '살아 있는 민주주의의 순간'은 일시적이고 단명한 것이었다. 민중항쟁에 의해 수세에 몰린 지배층은 일시 물러나서 양보를 하지만, 결국은 상황이 역전되고 역사적 반동이 시작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원래 근대 민주주의라는 게 철두철미 유산자들의, 유산자들에 의한, 유산자들을 위한 정치제도로 출발했고, 그 기본적인 틀이 수 세기 동안 조금도 변경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하기는 산업시대를 거치면서 무산계층과 여성들에게까지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민주주의가 계속 변화·발전해왔다고 보는 견해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근대 민주주의는 그 외관상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늘 기득권층의 계속적인 지배를 합법화하고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으로 기능해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근대 민주주의가 이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선거라는 제도가 큰 작용을 해왔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선거라는 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알 수 있듯이 본시 그 한계가 명확하다. 즉, 선거판에서는 거의 언제나 명망가나 재산가 혹은 그들의 비호와 지원을 받는 이른바 특권적인 '엘리트'들이 승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선거란 본질적으로 기득권층이 계속해서 집권하도록 돕는 장치, 다시 말해서 기득권층끼리 돌고 돌면서 권력을 ‘세습’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매우 편리한 장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선거를 통한 정치는 불가피하게 금권에 의해서 오염·타락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물론 정치가의 자질에 따라 부패의 정도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란 본시 나약한 존재이고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든지 거의 예외 없이 특정한 상황에 처하면 타락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이 본원적인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토대 위에서 정치가의 개인적 자질에 관계없이 합리적인 정치가 가능한 제도를 만드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 고대 그리스인들, 공화정 시대의 로마인들, 혹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자유도시인들은 매우 현명한, 그리고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오랫동안 안정되게 유지했던 민주정이나 공화정 체제는 권력의 세습이나 집중화를 막고, 난폭하고 무책임한 정치가 불가능하도록 미리 구조적으로 설계돼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의 핵심적인 기제가 바로 제비뽑기였다.
오늘날 우리는 너나없이 모두 ‘선거 근본주의자’가 되어버린 결과, 선거만이 공정한 정치제도를 보장한다는 근거 없는 미신에 빠져 있다. 하지만 원래 선거는 고대 이래 귀족 혹은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과두정(寡頭政) 체제가 즐겨 채택해온 제도였다(선거를 통해야 엘리트들이 계속 권력을 장악할 수 있기에). 반면에 민주주의 정신이나 공화주의 정신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한정된 공직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공직자는 제비뽑기로 뽑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제비뽑기로 뽑힌 대표자나 공직자들의 임기는 짧았고, 퇴임 이후에는 재임 중의 직무성과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평가와 감사(監査)가 실시되곤 했다. 가장 철저했던 예가 고대 아테네인데, 거기서는 심지어 실제로 아무런 과오도 저지른 바 없는 사람인데도 잠재적으로 독재자가 될 소질이 있어 보이는 인물은 시민투표를 통해서 10년간 국외로 추방하는 ‘도편추방제’라는 특이한 제도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라고 오늘날의 우리는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게 했기 때문에 아테네가 200년 동안이나 인류사에서 가장 수준 높은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아테네인들이 현명했던 것은 ‘권력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믿지 않고, 그 대신 부정·부패를 막는 사전 예방 장치로서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어 운영했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민권력'의 제도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엄청난 역사의 분기점에 서 있다. 이 촛불항쟁은 명백히 "대통령 하나 갈아치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지금으로서는 불명료하지만, 어떻든 우리가 이 상황을 통해서 보다 새롭고 좋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길은 보다 밀도 높은 민주주의를 향한 길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광화문을 비롯해서 전국의 광장과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힘주어 말하는 게 있다. 즉, 나라의 주권은 '우리'에게 있지, 일시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1987년 6월이나 2008년 광우병 파동 때의 시위 상황에 비해서도 한결 더 진전되고 구체화된 민주주의적 요구의 직설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제 한국인들 대다수는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고 결정할 때 그 의논과 결정의 주체는 직업적 정치인들도, 관료들도, 소위 전문가들도 아니고, 평범한 시민들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훨씬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촛불시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최근 들어 지식인들 사이에서 '시민의회'나 '시민주권회의' 혹은 그 밖의 이름으로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논의 및 결정 기구를 만들자는 제안이 나오는 것도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예전의 시위 때에는 없었던 이런 제안이 지금 여기저기서 동시적으로 개진되고 있는 것은 지금은 개별적인 사회문제를 하나하나 제기하기 이전에 무엇보다 보다 합리적인 정치가 가능한 틀, 즉 민주주의의 강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의 상황은 세계적으로도 예외적인 선진성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오늘날 극심한 사회적 격차 속에서 날로 삶이 피폐해지고 있다고 느끼는 미국의 평민들은 도널드 트럼프라는 파쇼적 기질이 농후한 무교양의 부동산 부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선택을 했다. 물론 여기에는 선거제도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거나 선택의 폭이 극히 협소했다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해서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극우 파쇼 세력을 지지하는 경향으로 쉽게 기울고 있는 오늘날 세계의 일반적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대다수 한국인들은 보다 강화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 이 점은 분명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시민들 중 상당수는 ‘시민의회’ 혹은 ‘시민주권회의’ 등의 제안에 대해서 ‘뜬금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런 개념 자체가 생소하고 이질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일지 모른다. "국회가 있는데 왜 별도의 '의회'가 필요하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현재의 국회와 정당정치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행할 수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탄핵정국이 발생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앞으로 국회가 할 수 있을지, 근본적으로 의심할 필요가 있다. 이번의 대규모 촛불시위에서 우리의 정치가들이 배운 바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환골탈태할지 모른다고,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가의 선의를 믿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즉, 시민들이 상시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을 만들어, 기성의 정치가들이 민중의 의사를 정당하게 대변하는 정치를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새로운 제도로 지금까지 나온 아이디어 중 가장 합리적인 것이 ‘시민의회’(혹은 ‘시민주권회의’)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민의회는 전국의 평범한 시민들 중 (제비뽑기에 의해) 무작위로 뽑힌 대표자들이 자유로운 토론과 숙의가 가능한 규모의 회의체(mini―publics)를 구성하여, 거기서 전문가들의 조력을 받아서 국가나 지방의 주요 현안을 의논·결정하여 국회와 정부로 하여금 이 결정을 수용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숙의민주주의’적 제도이다. 그러니까 개헌이든 선거법 개정이든 필요한 개혁에 대한 입안도, 사심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기성 정치가들에게 맡겨 놓지 말고, 이 시민의회가 주도적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 방법은 근년에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가 개헌을 포함하여 주요 정책을 변경할 때 실행했던 방법이다(2016년 10월, 아일랜드는 낙태 합법화 문제를 비롯하여 몇 가지 현안을 토의하기 위해서 다시 시민의회를 출범시켰다).
시민의회를 잘 활용하면 보다 밀도 높고 건강한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연간 1~2회 정도 시민의회를 소집하여 정부와 국회가 해당 기간 동안 행한 일들을 검토, 평가, 감사하고, 만약 오류와 부정이 있다고 판단될 때 정부와 국회에 주권자의 이름으로 시정명령을 내리는 제도도 충분히 구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숙고해야 할 것은, 이런 제도를 고안하지 않는다면 오늘의 이 촛불시위에서 발휘된 '시민권력'이 지속적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시민의회'는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시도해보지 못한 구상이고 가설이다. 하지만 우리가 염원하는 인간다운 세상은 우리들 자신의 용기 있는 상상력과 집단적 지혜로부터만 열린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2016년)
출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녹색평론사, 2019년, 324~333쪽
pressian.
"한국처럼 먹으면 지구 못 버틴다" 환경단체 식습관 분석결과
탄소배출량 지속 불가.."2050년까지 지구 하나 더 필요"
아르헨·호주·미국 특히 심각..G20 중 인도·인니만 합격점
지구에서 모든 사람이 한국인과 같이 고기와 야채 등을 먹는다면, 2050년에는 이를 감당하기 위해 지구가 하나 이상 더 있어야 할 것이라는 추산이 나왔다. 우리나라의 1인당 음식 소비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은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고, 붉은 고기 소비량은 적정량의 3배에 가깝다.
[EAT 보고서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16일 노르웨이 비영리 단체 EAT가 식습관과 건강, 기후변화의 인과관계를 분석해 발간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식습관'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에 사는 77억명을 위한 식량 생산은 기후변화를 불러오는 글로벌 탄소배출의 4분의 1을 불러오는 요인이다. 이 중 40%는 가축사육, 음식물쓰레기, 쌀재배, 비료사용, 농지조성, 산림벌채등에 기인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20개국(G20) 중 1인당 음식소비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이내인 국가는 인도와 인도네시아뿐이었다.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는 2021년부터 적용되는 신기후체제인 파리협약의 장기목표인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섭씨 1.5도 이하로 제한하는 범위 내로 설정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에서 모든 사람이 현행 한국인과 같은 음식 소비를 한다면 2050년에는 해당 분량의 음식을 생산하기 위해 지구가 2.3개 필요하다.
지구에서 모든 사람이 미국이나 브라질과 같은 음식 소비를 한다면 2050년에 지구는 각각 5.6개, 5.2개가 필요하게 된다. 인도(0.8개)와 인도네시아(0.9개)만 2050년이 돼도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내 음식 소비를 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중국(1.77개)과 일본(1.86개)은 우리나라보다 지속가능한 음식 소비를 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EAT 보고서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한국의 1인당 음식소비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은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G20 국가 중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내에 있는 국가는 터키뿐이었다. 한국의 하루 붉은 고기 소비량은 80g을 넘어서 적정량인 0∼28g의 3배에 육박한다. 붉은 고기 소비량이 적정량 이내인 국가는 G20 중 인도네시아와 인도뿐이었다.
[EAT보고서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보고서는 현재 음식 소비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은 5.6Gt으로 이중 G20 국가는 3.7Gt을 배출하고 있다면서, G20국가를 중심으로 국가별 음식섭취 가이드라인을 지킨다면 이를 5.0Gt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5.0Gt는 현재보다 12% 줄어든 규모로, 이를 준수하면 파리협약 기준을 지킬 수 있다.
보고서 대표집필자 브렌트 로큰은 AFP통신에 "지금 몇몇국가의 일부 사람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음식을 먹어 전 세계가 비용을 치르고 있다"면서 "몇몇 부유한 국가의 불균형한 음식 섭취는 기후와 건강, 경제에 손상을 초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EAT보고서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지구에서의 삶과 죽음
이상기후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계절은 바뀌고, 이제 스산한 가을바람에 낙엽이 지고 있다. 이런 날 산책길이든 어디서든 떨어진 낙엽이나 아직까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잎사귀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빛깔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몸뚱이에 아무 상처가 없는 잎사귀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봄에서 여름 그리고 가을의 결실기에 이르는 동안 향기와 그늘과 소리와 빛깔로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던 나뭇잎들이었건만, 하나하나의 잎사귀들에게 있어서 계절의 변화와 성숙은 비바람에 찢기고, 햇볕에 타고, 벌레들에게 먹히며, 스스로의 피로로 쇠잔해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고, 늙어간다는 것은 결국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처를 통해서만 나뭇잎이든 사람이든 조만간 닥쳐올 죽음에 대한 육체적·정신적 준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은 물론 회피해야 할 재앙이 아니다. 땅에 떨어진 낙엽이 이윽고 썩어서 거름이 되고 또다시 흙이 됨으로써 거기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듯이 죽음은 모든 것의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씨앗이다. 죽음은 삶의 단순한 끝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며, 끝없이 순환하는 생명과정의 필수적인 고리이다. 또는 거꾸로 생각해서, 삶이 죽음의 일부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20세기의 정신과학자로서 인간의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에 대하여 가장 골똘한 관찰과 사색의 기록을 보여준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어 말하면, 우리가 삶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애벌레의 상태에서 벗어나 훨훨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나비로 탈바꿈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큐블러―로스는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낯선 경험을 앞두고 느끼는 두려움일 뿐이며, 실제로 그것은 근거없는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죽은 뒤에 사람이 반드시 나비로 변신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 ― 미망(迷忘) ― 에 연유한다는 것은 인류의 스승들이 줄곧 말해온 핵심적인 가르침이었다. 권력과 재화와 명예에 대한 끝없는 탐욕의 궁극적인 근원은 따져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죽음을 용기있게 대면할 수 없는 결과로서 우리가 끊임없이 쌓아가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수록 더욱더 죽음은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회피하고 싶은 공포의 재앙으로 다가올 뿐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본능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의 의지로써 어떻게 달리 변경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한계 내에서도 사람이 어떠한 세계관과 문화 속에서 살고, 어떠한 삶의 방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산업주의 문화가 사람들의 생활 전체를 지배하기 이전의 동서양의 전통사회들이나 또는 좀더 나아가서 오늘날에도 산업문명의 주류 바깥에서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적지않은 토착민족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의미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피그미족이나 아마존의 인디언들의 문화에 대한 여러 인류학적 보고들 가운데는 이들 토착민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의연한 태도에 놀라움과 존경을 표시하고 있는 증언이 적지않다. 인적이 없는 숲속에서 홀로 되었을 때에도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토착민들은 결코 겁먹거나 공포에 떨지 않는다. 북미 인디언의 한 지도자는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유럽 백인들에 의해 자기 종족의 삶의 터전이 무자비하게 침탈당하고 그 결과로 종족 자체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온 상황에서도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 가는" 인간의 운명에 너그럽게 순종해야 할 필요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점은 무엇보다도 자연과 세계를 자기자신과 동떨어져 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고 만물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세계관과 감수성에 연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생과 조화의 세계를 근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토착민들은 자신을 생명의 그물의 한가닥으로 인식할 뿐 배타적인 이익이나 권력을 탐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남루하고 뒤떨어져 보일지 모르지만, 토착민들의 문화는 이처럼 비상하게 비폭력적인 공생의 세계관에 뿌리를 박고 있기에 그들은 자연히 깊은 내면적 안정과 행복을 누리는 삶을 오랫동안 누려왔다.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마도 가장 결여된 것은 이와 같은 내면적 평화일 것이다. 산업사회를 뿌리로부터 지배하고 있는 성장의 논리 자체가 인간의 삶을 그 자신의 내면과 그의 이웃과 자연세계에 대하여 끝없는 폭력을 자행하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궁극적인 한계를 쉽게 망각하고, 끊임없이 기술수단을 개발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통제력을 갈수록 크게 하고, 우리 자신의 자아를 무한히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새로운 첨단기술을 통해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면 할수록 우리의 내면은 더욱더 공허하고 우리의 삶은 갈수록 황폐화하며, 생태적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우리는 갈수록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산업주의 문화와 그것을 떠받치는 과학기술이 근원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가장 단적인 예는 이른바 유전자 기술을 비롯한 첨단기술의 발전이다. 지금 각국 정부의 비호까지 받아가며 대대적으로 연구가 진행 중인 이러한 기술개발들의 주요 명분은 인류의 건강을 지키고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인간게놈 프로젝트를 통하여 인간 유전자의 전체 지도를 읽어내는 일도 이제 거의 시간문제가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의 모든 질병치료는 물론이고 노화방지도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 곧 다가온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유전자 조작기술을 통해 종래의 육종, 교배방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종(種)간의 벽을 가로질러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닌 새로운 생물이나 작물을 인공적으로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양이나 소와 같은 포유류 동물의 복제도 가능해졌고, 인간복제는 이제 기술문제가 아니라 단지 윤리적 저항에 부딪쳐 있을 뿐이다.
유전자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초래할 수 있는 생태학적 위험에 대해서는 이미 심각한 경고가 있어왔다. 예를 들어, 지구상의 생물진화의 오랜 역사에서 한번도 나타나본 적이 없는 새로운 생물이 유전자조작에 의해 돌연히 자연계에 투입되었을 때 그것이 생태적 균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리하여 어떤 가공할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는 예측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전예방 원칙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조금이라도 사려있고 책임감있는 사람이라면 유전자조작은 마땅히 거부해야 할 프로젝트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심스러운 생각은 첨단기술이라면 덮어놓고 환호하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분위기에서는 무시되거나 조소를 당할 뿐이다. 말할 것도 없이, 현재 유전자조작을 비롯한 생명공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이 분야의 새로운 시장을 통한 엄청난 이익을 노리는 다국적기업의 이해관계 때문이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사태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어떤 식으로든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널리 퍼져있는 오늘의 산업주의 문화와 그 문화에 깊이 세뇌된 대중들의 의식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인 것이다.
생태적인 또는 건강상의 위험성 여부를 떠나서도, 과연 유전자 조작기술이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실은 엄격히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미 여러 비판자들이 지적해온 것처럼 유전자 조작기술은 오히려 전통적인 농민들의 손으로 오랜세월 동안 보존되어온 생물 및 작물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토양의 질을 떨어뜨림으로써 전세계적인 범위에 걸쳐 인공적인 기근을 불러올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유전자 조작기술은 부분적인 합리성에 매달리다가 전체 국면을 돌이킬 수 없이 손상시키는 전형적인 현대기술의 무모함과 무책임성을 대변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무책임한 기술의 근저에 있는 정신적·심리적인 토대이다. 이것은 유전자 기술들이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또하나의 주요 혜택, 즉 인간의 모든 질병을 퇴치하고 노화를 방지한다는 생각에서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요컨대, 이제 인간은 아프지도, 늙지도, 그리고 가능하다면 죽지도 않으려 하는 것이다. 하기는 건강과 장생 또는 영생에 대한 꿈은 인류사의 시초부터 있어온 자연스러운 심리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러한 단순한 꿈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끝없는 자기확대를 겨냥하는 권력욕망의 극치, 다시 말해서 자신이 운명적으로 죽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마저 부정하려고 하는 엄청난 교만성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극단적인 교만성의 뿌리에는 치유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빈곤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리어 죽음을 자신의 기술적 재간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는 것은 결국 정신적인 미숙함의 결과이며, 어리석은 망상일 뿐이다. 우리가 실지로 병들지도,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장생불사에 대한 꿈이 아무리 큰 것이라 해도 그것이 단지 소박한 꿈으로 남아있는 동안에는 인간의 정신적 건강은 근본적인 손상없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러한 꿈이 소박한 수준을 넘어서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광적인 열정으로 추구되는 상황에서는 이야기는 전혀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될 때, 그러한 과학기술은 자연의 전체적 질서와 균형을 무시하는 폭력의 기술이 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은 자기중심적인 비뚤어진 욕망충족에만 매달리는 심히 야만적이고 천박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초음파 기술로써 태아의 성과 건강상태를 미리 감별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일이 거의 관습화된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러한 상황에서 생명의 신성함과 존엄성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을 수 있을까?
오늘의 첨단기술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키고, 인간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다. 불임부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난치 또는 불치병 환자를 위해서, 기형아 출산을 예방하기 위해서, 노화방지를 위해서 인공수정, 장기이식, 유전자치료, 초음파검사, 기적의 약품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이 실지로 실현된다고 할 때 인간의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이겠는가.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의 신비를 느끼고, 생명의 근원적인 거룩함을 느끼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결핍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성숙과 교육에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예를 들어, 난치병으로 고통을 겪는 환자나 그를 돌보는 가족이나 이웃의 경험은 단순히 소모적인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고통과 보살핌의 체험을 통해서 사람은 사람살이의 궁극적 테두리와 한계를 성찰하고, 자기보다 더 큰 존재에게로 다가가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점점 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는 사회적·생태적 위기의 현실에 직면하여,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의존심리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일방적인 의존이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건강한 인간생존은 태어남과 삶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 가운데서만 가능하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또하나의 눈부신 기술이 아니라 인간생존의 근원적인 바탕을 늘 잊지 않게 해주는 인문적 지혜와 종교적 감수성이다.(1998년)
출처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개정판), 녹색평론사, 2010년 246~252쪽/ 프레시안
운촌마리나 개발 반대여론 커진다
해운대구, 주민 의견 청취 행사
- 동백섬 환경훼손 우려 강력 반발
부산 해운대구 동백섬 운촌항 일원에 추진되는 마리나 사업(국제신문 지난달 4일 자 2면 보도 등)에 주민이 강력한 반대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23일 부산 해운대구문화복합센터에서 운촌항 마리나 사업과 관련한 주민 의견 청취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김종진 기자
해운대구는 23일 오후 해운대구문화복합센터 대강당에서 운촌 마리나 항만 공유수면 매립 기본계획 반영에 관한 주민 의견 청취 행사를 열었다. 주민 100여 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 구는 그동안 사업 추진 경과 등에 관해 설명했다. 구 관계자는 “매립을 통해 공공재인 바다가 사유화하는 이 사업의 타당성에 관해 주민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주민은 구의 사업 설명 이후 환경 훼손 가능성 등의 문제를 제기하며 사업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마린시티 주민인 박덕호 씨는 “인근 수영만 요트경기장 시설을 재개발하는데 이곳에 왜 또 마리나를 건설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동백섬은 우리나라 천혜의 환경을 가진 관광지다. 건설업체 한 곳을 위해 공유수면 일부를 매립하기보다 후손에게 이 자연을 물려주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반면 신속한 사업 추진을 촉구하는 의견도 나왔다. 장영국 구남로상가번영회장은 “해운대는 관광특구이자 해양레저특구다. 해양산업을 일으켜 코로나19 시대 지역 소상공인을 살리기 위해 마리나가 꼭 필요하다”면서 “이곳이 발전하면 지역 주민도 더 잘 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양수산부는 해운대구 우동 747번지 동백섬 인근에 836억 원(국비 289억 원, 민자 547억 원)을 들여 12만4085㎡(육상 4만5204㎡, 해상 7만8881㎡)에 선박·요트 계류시설과 요트 클럽하우스 등을 조성하기로 했다. 사업 계획 공모를 통해 삼미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국제신문 김진룡 기자 jryongk@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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