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관청소부 ‘양파’로 건강 지키자 농민신문 2019.7.15.
죽창가와 서희 경향 2019 7.17
그런 정글은 없다 농민신문 2019.7.17.
굿바이, 자사고 한겨레 2019 7.21
트럼프의 백인 정체성 정치 경향 2019 7.23
일본 우익과 한국 보수의 데칼코마니 한겨레 2019 7 23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경향 2019 7.24
기후위기와 우리의 밥상 농민신문 2019.7.24.
상생과 협력의 장소, 도시 부산일보 2019 7.25
기후변화 보도에 유감 경향 2019 7.25
반도체 전쟁’의 전화위복 시사인 2019.7.26
설악산 케이블카 ‘불법과 거짓’ 경향 2019.7.28.
조국의 페북질? 총리·여당은 밥값 하셨나요 한겨레 2019 7.26
‘주전장’과 ‘영화 김복동’ 경향 2019 7.28
한반도 ‘번국’에 대한 일본의 공포 한겨레 2019 7.29
일본에 쫄지 않아도 되는 이유 노컷뉴스 2019 7.29
“내년 총선은 한·일전이 될 것” 경향 2019 7.29
징용 배상이 보수의 자존심이다
정치, 외치, 망치. 경향 2019 7.31
대기업 감세로 투자 살아날까 경향 2019 7.31
증세 없는 포용복지 경향 2019 7.31
아베의 일본, 반면교사로 삼을 나라 한겨레 2019 7.31
한일 갈등은 세계사적 쟁투 한겨레 2019 7.31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다고? 한겨레 2019 7.31
2.94% 그리고 2.87% 한겨레 2019 7.31
혈관청소부 ‘양파’로 건강 지키자
우리농산물 가운데 가격탄력성이 가장 큰 농산물 중 하나가 양파다. 해마다 널뛰는 양파가격에 따라 농가들은 울고 웃는다. 안타깝게도 올해는 양파농가들의 얼굴에 시름만 가득하다. 양파 재배면적은 지난해보다 줄었는데도 작황이 좋아 생산량이 크게 늘었고, 그 때문에 가격이 떨어져 고민이 크다. 정부는 수매비축을 통해 시장격리에 나서고 지방자치단체와 농협도 양파 소비촉진운동에 나서는 등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가격이 좀처럼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반면 양파농가들이 처한 안타까운 현실은 거꾸로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몸에 정말 좋은 양파를 싼 가격에 사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원래 양파는 ‘혈관청소부’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로 심혈관 계통의 질병 예방에 아주 유용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주성분은 케르세틴(Quercetin)이라는 물질이다. 이 성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혈액순환 개선을 통한 고혈압·동맥경화·중풍 등 성인병 예방 및 치료 효과다. 양파 속의 케르세틴은 피가 엉기는 혈전 형성을 방지, 혈액이 끈적거리지 않도록 해 순환기질환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한다. 또 혈관벽의 손상을 막고 혈액 내 지방분을 녹여 나쁜 콜레스테롤(LDL)을 감소시킨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다. 양파의 황화합물은 체내의 인슐린 분비를 촉진시켜 혈당을 낮추고 당뇨병 예방과 치료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인도의 전통의학서에 생양파는 체온저하·식욕감퇴·체중증가·변비 등에 효과가 있다고 적혀 있다. 또 중국의 <본초강목>엔 고혈압·황달·고열성질병·담석 등에 효험이 있다고 기록돼 있고, <동의보감>에도 오장에 효능이 있고 중풍치료에 활용된다고 기술돼 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경기침체에다 경쟁 심화, 미래 불안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심혈관 순환기계통의 질환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한다. 또 어릴 때부터의 비만 등으로 인한 당뇨와 복부비만증, 고지혈증, 저밀도 콜레스테롤 축적, 협심증 발생 등의 질병도 증가하고 있다. 그런 만큼 양파를 많이 먹으면 이런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고 심혈관질환의 치료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양파는 식품영양학적 가치도 매우 높다. 당분은 100g당 약 8g으로 포도당·설탕·과당·맥아당 등이 함유돼 특유의 단맛을 낸다. 무기질로는 칼륨·칼슘·철·인·엽산 등이 풍부해 임신한 여성에게 꼭 필요한 식품이다. 또 비타민C는 20㎎, 비타민B1은 0.04㎎, 비타민B2는 0.02㎎이 들어있는 비타민 창고다.
여기다 우리나라 양파 육종기술이 발전하면서 ‘컬러식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기존 황색 양파는 물론 자색·백색 등 색깔별로 항산화나 노화방지 등 기능성을 갖춘 양파들이 소비자들을 찾아가고 있다. 국민 한사람당 연간 양파 소비량은 30㎏으로 쌀 소비량 60여㎏과 견줘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따라서 양파 소비진작방안과 함께 소비맞춤형 품종 개발을 고민한다면 가격폭락으로 눈물짓는 농가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
현재 양파는 야채볶음이나 국, 찌개, 샐러드, 겉절이, 튀김, 샌드위치, 햄버거, 각종 찜, 수프, 파이, 장아찌, 피클 등으로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지만 부재료의 성격에 머물러 있다. 그런 만큼 양파를 주재료로 한 식품과 다양한 요리법 개발에 대한 정부나 지자체, 관련 단체 등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육종회사나 연구기관 역시 국내외에서 소비를 극대화할 수 있는 품종 개발과 보급에 적극 나서야만 한다.
박소득 (경남도농업기술원 양파연구소 전문경력관·농학박사) 농민신문 2019.7.15.
죽창가와 서희
국제정치 무대에는 문명과 야만이 공존한다. 대화·타협·배려·상호존중·설득에서는 문명이, 협잡·배신·모욕·완력·이기심에서는 야만이 얼굴을 내민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불만을 가진 국가가 만족하는 나라를 상대로 집적거리는 무질서한 세상”이라는 폴 케네디의 말을 빌리면, 문명보다는 야만의 힘이 우세한 세계임이 틀림없다. 이른바 문명국가라고 자부하는 한국과 일본에서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한·일 갈등은 대부분 과거사 문제에서 출발했다. 과거사에 대한 공감의 정도에 따라 한·일관계는 춤을 추었다. 요즘 상황도 궁극적으로는 과거사 정리가 미흡했기 때문이다. 1965년 한·일 양국은 모호한 내용을 놔둔 채 청구권협정을 체결했다. 양국은 이를 자국의 입맛대로 해석했고 국민 설득에 이용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음으로써 일본이 한일합병의 불법성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일본은 불법성과는 무관하게 경제원조라고 풀이했다.
지난해 대법원의 판결은 한일합병이 불법이었고 따라서 일본이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이미 청구권협정으로 5억달러를 한국에 지불함으로써 모든 배상이 끝났다는 입장이다. 일본의 반발은 불 보듯 했다.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행위들이 이뤄진 마당에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양국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방안을 찾아야 했다. 한·일관계는 청구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북, 한·중, 한·미, 나아가 동아시아와 글로벌 이슈에 머리를 맞대고 협조해야 할 국가다.
그런데 한일의원연맹 소속 의원과 일본 관련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정부가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선 모습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일본이 한국 정부에 한국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협의를 요구했으나 한국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의 반격 가능성을 전문가들이 정부에 경고했다는 말도 나온다. 한·일 간 정면충돌에 정부의 책임이 없다 할 수 없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아무런 외교적 협의나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 조치를 취했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정부는 일본이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한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에 허를 찔렸다. 일본은 무역보복 조치를 감행했다. 일본은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고순도 불화수소 등 3가지 품목의 한국 수출규제에 나섰다. 한국이 절대적으로 일본에 의존하는 소재다. 규제 이유는 ‘북한 화학무기나 독가스 개발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토당토않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이 갖은 이유를 대면서 앞으로도 보복수단을 동원할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은 수출규제를 하면서 적어도 2가지를 각오하고 있다. 먼저 한·일 간 신뢰관계의 균열이다. 일본은 “한국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밝혔다. 한·일 정부 간 믿음에 금이 갔고, 기업 간 수십년 동안 쌓아온 신뢰도 흔들리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신의 골은 깊어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이 자국 기업의 피해를 각오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나라 기업은 국제분업의 사슬에 매여 있다. 서로가 필요한 공생관계다. 한국 기업이 피해를 입으면 일본 기업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은 자해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생각이다.
아베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중국을 상대로 했던 방식을 원용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가장 아파할 곳을 찔렀다. 미국이 타깃으로 삼은 중국 화웨이는 미래산업인 5G산업의 총아다. 미국은 화웨이 규제 이유를 ‘미국 안보 위협’이라고 했다. 일본은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반도체산업을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이유도 ‘일본 안보 위협’이라고 했다.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규제 강도를 높이면서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저항하자 관세규제 대상을 전체 수입품으로 확대했다. 일본도 수출규제 품목은 3가지로 출발했으나 대폭 늘어날 것이다. 당장의 대처 방안이 없다. 시간은 공격자의 편이다. 미·중 갈등 속에 중국의 올 2분기 성장률이 27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외교는 도덕이 아니다. 정의(正義)도 각자의 해석에 달려 있다. 한·일 무역갈등이 장기화하면 한국의 미래산업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피해가 일본보다 크다. 자신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문제라면, 더 큰 문제는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반일감정이나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은 대책이 아니다. 우리 기업에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위정자는 감상이나 울분이 아닌, 냉정한 시각으로 세상을 진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죽창가가 아니라 거란 소손녕의 입을 틀어막고 강동6주를 획득한 서희의 외교술이다/ 박종성 논설위원 경향 2019 7.17
그런 정글은 없다
최근 한 인기 예능프로그램에서 태국 내 멸종위기종인 대왕조개를 채취해 먹는 모습이 방영됐고, 그 장면이 현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확산되며 논란이 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지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고, 제작진이 사과했지만 벌금형은 물론 조개를 채취한 출연자는 실형까지 살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현지업체가 규정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는 둥 무리한 촬영으로 언젠간 사고가 날 줄 알았다는 둥 다양한 반응이 이어지는 가운데, 또 한가지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
해당 예능프로그램은 마치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을 보는 것처럼, 큰 고생이라고는 안해봤을 것 같은 연예인들이 극한 오지에서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직접 마련하는 광경으로 인기를 끌어왔다. 하지만 이번 촬영이 안다만해역의 태국 핫차오마이 국립공원에서 현지 대행업체의 허가를 받고 이뤄졌다는 사실에서 보듯, 방송을 통해 우리가 보는 정글은 무법의 공간이나 미지의 세계가 아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름다운 자연이란 방치된 곳이 아니라 엄격하게 규제되고 관리된 곳일 확률이 높다. 이는 한국에서도 웬만한 경승지는 국립공원·세계문화유산·지역문화재 등으로 묶여 있는 상황과 같다.
사실 인류학자들 사이에 유명한 한 만평에는, 현대식 생활을 하는 원주민들이 망을 보고 있다가 인류학자가 오자 살림살이를 모두 치우고 서구인이 상상하는 옛 원주민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중국 연구를 하는 학자로부터 어느 소수민족 자치구 민속촌에서는 관광객들이 오는 시간에는 주민들이 전통복장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주민은 모두 민속촌 밖의 지역에 살면서 출퇴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필자가 조사한 캐나다 서부지역의 원주민들도 기본적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다. 그들 다수는 어떻게 하면 원주민으로서의 자긍심을 지키고, 삶의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사회 속에서 살아남을지를 고민한다. 그들은 오래전에 멸종한 인간들도 아니고 사라져가는 과정에 있지도 않으며, 지금 여기를 사는 중이다. 사실 1년에도 엄청난 수의 관광객이 밴쿠버를 비롯한 캐나다 서부 관광지를 방문하고, 거기서 원주민과 그들의 문화를 만나고 있다. 그럼에도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인구의 5% 이상을 차지하는 원주민이 현대 속에 함께 살아가는 주민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매우 놀랍다.
정글이든 원주민이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우리가 방문하는 모든 지역 가운데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경우는 없다.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알고 거기까지 장비를 들고 찾아가 장기간 숙식을 해야만 촬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정글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좀 먹고살 만하게 된 한국사람들이 원주민은 야만인으로 취급하고 아무 데서나 야생을 떠올리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건에서 보듯이 정글이 아닌 곳을 정글로 보고 마음 편히 행동한 결과는 매우 현실적으로 치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농민신문 2019.7.17.
굿바이, 자사고
자율형사립고 지정취소에 대한 교육부 발표가 눈앞이다. 큰 틀에서는 일반고 전환으로 방향을 잡은 듯하다. 보수 언론이 자사고를 엄호하지만 국민 여론은 오래전부터 자사고 폐지에 공감해왔다. 자사고가 고교교육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고교 교사들의 호소는 긍정 응답의 세배를 훌쩍 넘는다.
정권 초기에는 시행령 개정을 통한 일반고 일괄전환이 간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 특히 입시제도는 쇠뿔을 단김에 빼는 방식이 쉽지 않다. 결국 정부는 일반고와 동시선발, 지정취소권을 활용한 단계적 전환을 거쳐 내년에 시행령 개정으로 고교체제를 개편하겠다는 우회로를 택했다. 결국 고개마다 벼랑을 탄다. 어쩌겠는가? 욕망을 부추긴 제도를 만든 원죄는 정부에 있다. 학생 학부모 입장에선 특정 정권이 아니라 나라가 한 일이다. 국민의 마음을 얻을 청사진을 내놓고 정중하게 설득하며 가는 수밖에 없다.
자사고 운명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가 많다. 당장은 자사고와 공동운명체인 외국어고와 국제고가 있다. 교육 관점과 입시 전략을 세워야 하는 현재 초·중학교 학생 학부모들에게도 발등의 불이다. 서열화된 체제 탓에 황폐화를 당연시했던 일반고도 비빌 언덕이 없어지는 현실 앞에 심박 수가 높아진다. ‘아찔한 텐션’은 아마도 사교육 시장과 이에 기대어 살아가는 자본과 권력에서 더할 것이다. 승자독식 학벌사회는 사교육 시장의 숙주이고 그 초입은 고입이다. 초·중학생과 학부모들에게 고입이 주는 심리적 압박은 대입보다 훨씬 전방위적이고 냉혹하다. 자사고 준비 학생은 일반고 희망 학생보다 고액 사교육비를 4.9배 더 쓴다. 재학 중 사교육비 또한 일반고에 댈 바가 아니다. 상산고에서 보는 것처럼, 수능에 특화된 학교 특성상 재수와 반수 비율이 매우 높고 이들은 고액 사교육 시장의 안정적 공급망이다. 한마디로 현재의 고교체제는 사교육 시장을 떠받치는 튼튼한 기둥이다. 이 체제가 무너지거나 완화되면 입지는 급격히 좁아진다. 이들의 불안이 또 어디에서 안심 영역을 구축할지 자꾸 불안해진다.
사실 자사고는 지금 상태로도 존립이 위태롭다. 선호도가 떨어져 정원의 90%를 채우지 못한 학교가 67%인 28곳에 이른다. 총 54곳이던 자사고 가운데 이미 12곳이 자율신청으로 일반고로 전환했다. 올해도 이미 4곳이 지정취소를 요청했고, 지정취소 대상인 11곳이 일반고로 전환되면 27곳만 남는다. 내년에도 올해 비율로 전환된다면 겨우 10여곳만이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이들 학교가 지정 목적에 충실한 학교로 존재 증명을 할지, 유통기한이 지난 특권교육 시스템을 안쓰럽게 부여잡다가 쓸쓸하게 퇴출당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1995년 정부의 5·31 교육개혁안에서 시작된 자립형사립고 설립 제안이 누더기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자사고 설립의 명분이었던 다양성 가치는 고교서열로, 자율성은 ‘입시 몰빵’ 사립학교 교육과정 운영 근거로, 창의성은 성적 우수 학생만을 위한 특별교육으로 ‘활용’되면서 교육생태계 전반을 비틀어왔다. 학교 선택권, 사립학교의 자율성, 영재교육 등은 엄격한 기준으로 제한적으로만 허용해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존엄과 평화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강남 쏠림 현상이 일어나서 부동산이 폭등한다거나, 미래인재 양성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진부한 이야기도 그만할 때다. 그때의 교육환경이 아니다. 독점적 정보의 알고리즘을 획득하며 소수의 엘리트끼리만 어울려 성장하게 하면 사회가 위태로워진다. 그들을 미래인재라 부르면 더더욱 안 된다.
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교를 다양하게 만들겠다는 고교 다양화 목표는 애초에 헛된 꿈이었다. 우리가 알던 ‘문제의 자사고’들과는 이제 굿바이 인사를 나눌 때다.
안순억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겨레 2019 7.21
트럼프의 백인 정체성 정치
미국 사회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단어 중 하나가 ‘멜팅폿(melting pot)’이다. 인종의 용광로, 즉 다양한 인종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란 의미다. 강대국 미국에는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모여 산다. 스타벅스를 가도, 동네 마트를 가도, 영화관을 가도 뜻을 알 수 없는 다양한 언어가 들린다. 나의 두 아들은 미국인들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립학교를 공짜로 다녔다. 초등학생 둘째 아들은 같은 피부색의 일본, 베트남 친구와 자주 어울렸지만 프랑스 여자 친구도 있었다. 큰아들은 공립학교이지만 인도, 중국 출신 학생들이 대부분인 고등학교에 다녔고 점심시간 식당에는 카레 냄새가 가득했다.
인종적 다양화는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브루킹스연구소가 2018년 미국 인구통계를 인종별로 분류한 데 따르면 백인은 전체의 60.5%였다. 유권자 중 백인 비율은 아직 절대 다수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전체 투표자 중 백인 비율은 72.8%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젊은층에서 비백인 인구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2045년이면 백인 인구는 49.7%로 과반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백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절대적 우위를 상실하고, 미국이 그야말로 소수민족의 나라가 되는 날이 머지않은 것이다.
백인들 사이에는 이 같은 미국 사회의 변화가 싫은 이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백인들의 지위, 미국 사회의 구조와 주류 문화가 달라지는 게 두려운 이들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많은 버지니아 북부 지역에서도 피부색이 다른 이들을 향해 별 이유 없이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는 백인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이 불만의 백인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이란 굴레를 벗어던지고 노골적인 백인 중심주의를 외칠 수 있게 해준 이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다.
역대 공화당 정치인들도 백인 유권자들을 선동했지만 특정 그룹만 속내를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를 보내는 ‘도그 휘슬(dog whistle)’ 정도였다. 하지만 트럼프는 다르다. 이제 이민자 출신 비백인 여성 하원의원까지 “원래 나라로 돌아가라”고 대놓고 공격한다. 그는 지지자들이 “그녀를 돌려보내라”고 외치는 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지켜본다. 트럼프 자신도 독일 이민자의 후손이고, 세 부인 중 두 명이 이민자다. 그가 공격한 여성 하원의원들이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와 다른 점은 피부색 하나뿐이다. 결국 트럼프는 미국은 백인 중심 나라이니 불만이 있는 비백인 이민자들은 본래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는 셈이다. 정말이지 뼛속까지 인종주의자다.
잇따른 인종주의 선동은 ‘정체성 정치’의 변종이다. 정체성 정치는 성, 종교, 인종, 성적지향 등 공유되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정치적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를 말한다. 여성운동, 민권운동, LGBT운동 등으로 표출됐다. 반면 트럼프는 미국 사회의 인구통계학적 다양성이 증가하면서 백인들 사이에서 사회적 소수가 될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되는 현실을 활용한 백인 정체성 정치를 재선 전략으로 공식화했다. 트럼프와 참모들은 여기에 더해 민주당 여성 의원 등 비백인 이민자들을 향해 미국을 사랑하지 않는 급진좌파, 사회주의자라고 공격을 퍼붓는다. 자신의 정적에 빨간 딱지를 붙이는 색깔론이자 매카시즘이다.
트럼프의 백인 정체성 정치가 시대 흐름을 바꿀 수는 없다. 누구도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다. 미국은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이민자들의 나라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미국 포크 음악의 아이콘 우디 거스리의 노래처럼 “이 나라는 너와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종주의와 색깔론에 기대는 트럼프의 재선 전략은 위험하다. 멜팅폿 미국 사회에서 인종적 조화를 어렵게 하고 사회의 건전성을 망가뜨릴 수 있다. 민주당 유력 대선주자 조 바이든의 비판처럼 트럼프는 재선을 위해 미국의 사회 조직을 갈기갈기 찢고 있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경향 2019 7.23
일본 우익과 한국 보수의 데칼코마니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으킨 ‘경제 도발’의 목표는 무엇일까. 아베 정부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발표’가 지난달 말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폐막 직후에 나왔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하다. 아베 총리는 G20 개최 성과를 국내 정치의 호재로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공들여 주최한 G20은 폐막 다음날 남-북-미 정상의 전격적인 판문점 회동에 스포트라이트를 빼앗겼고 전세계의 눈과 귀는 한반도로 쏠렸다. 아베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아베 정부는 곧바로 ‘보복’의 칼을 빼 들고 한국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반도의 급속한 냉전체제 와해는 아베 정권에는 재앙과 같은 일이다. 2012년 두 번째로 집권한 아베 총리가 전후 최장기 집권을 이어가는 데 한반도 긴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베 정권은 정치적 위기 때마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으로 조성된 긴장 국면을 활용해 곤경을 탈출하고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그랬던 것이 지난해 평창올림픽 이후 완연해진 한반도 긴장 완화로 정치적으로 써먹을 ‘외생변수’를 영구히 잃어버릴 처지에 놓였다. 아베의 꿈은 평화헌법을 바꿔 일본을 ‘전쟁하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승승장구하며 아시아를 지배하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아베의 꿈이다. 그 목표를 이루려면 평화헌법 개정을 반대하는 국내 여론을 제압해야 한다. 여론의 흐름을 바꾸려면 동북아시아의 긴장과 갈등의 지속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지난해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이후 이런 갈등 구조가 해체될 조짐이 커지고 있다. 게다가 이번엔 판문점에서 세 나라 정상이 한꺼번에 만났다. 아베 정권으로서는 결코 반길 수 없는 구조적 변화다. 어떻게 해서든 한반도를 대결 국면으로 되돌리는 것이야말로 아베 정권에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아베 총리가 지난 4일 ‘경제 보복’의 이유로 ‘전략물자의 대북 유출’을 들먹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문재인 정부의 강력한 반발에 한발 물러섰지만, 이 발언은 아베의 눈이 먼 곳까지 내다보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아베 정권은 앞으로 남북 화해가 진전되고 경제협력이 본격화할 경우, 남북 경제교류가 북한의 무기 개발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내세워 남북협력에 훼방을 놓으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이 대목에서 일본 우익과 한국 보수의 전략적 이해관계의 일치가 드러난다. 한국의 수구보수 세력은 남북의 대결과 한반도 긴장을 존립의 근거로 삼아 왔다. 북한의 위협을 앞세워 남한 국민의 안보 불안을 자극하고 그렇게 조성한 불안감을 이용해 기득권을 유지하고 키워왔다. 북-미 대화와 남북 화해는 그 안보 기득권의 토대를 흔들고 있다. 한국 보수세력은 이런 흐름을 어떻게든 저지하고 역전시키려고 한다. 일본 우익과 한국 보수의 관심은 데칼코마니처럼 닮았다. 한국 수구보수의 이데올로기 기관지인 <조선일보>를 비롯한 기득권 세력이 아베의 경제 도발을 규탄하기는커녕 오히려 두둔하거나 부추기고 그 파장의 책임을 문재인 정부에 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베 정권이 경제 도발로 한국 경제에 타격을 주는 것은 일본 경제에도 타격을 입히는 일일 수밖에 없다. 아베 정권의 경제 도발은 일종의 자해공갈이다.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문재인 정부를 흔드는 것이 자신들의 장기 전략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아베 정권의 자해공갈은 성공할 수 없다. 한-일 경제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가 사슬처럼 얽혀 있어서 어느 하나를 끊어내면 그 파장이 모든 곳에 미친다. 더구나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 냉전 해체는 되돌릴 수 없는 필연적 경로를 밟고 있다. 일본 우익과 한국 보수는 이 거대한 변화를 저지하려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며칠 전 <후지티브이> 논설위원이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들먹인 것은 일본 우익의 본심이 여과 없이 드러난 경우다. 한국 보수의 속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반동의 힘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는 못해도 창조를 가로막거나 파괴할 힘은 있다. 역사를 되돌리려는 일본 우익과 한국 보수의 이 몸부림에 온 국민이 두 눈 똑바로 뜨고 대처해야 한다. /고명섭 논설위원 한겨레 2019 7 23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폭염이 기승이다. 모두들 날씨에 민감하다. 반면 기후변화에는 무관심하다. 날씨와 기후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후는 지구온도가 장기간 균형을 이룬 상태를 말한다. 날씨는 그 균형에서 벗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눈앞의 날씨변화는 쉽게 알아차리지만, 소리 없이 진행되는 기후변화는 감지하지 못한다. 문제는 미세한 기후변화가 삶에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이다. 지구 평균온도가 0.5도만 올라도 해수면이 10㎝ 높아져 1000만명이 위험에 빠진다는 통계가 있다.
최근 독일 연구진은 기후변화의 속도가 동물들이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기후변화가 인간에 앞서 동물의 위기를 부를 것이라는 불길한 소식이다. 과학자들은 현재 상태로 12년이 흐르면 기후위기는 최악의 상태에 직면한다고 예측한다. 지금의 탄소에너지 소비를 절반 이하로 줄이지 않으면 지구 문명은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중국조차 공산당 당헌에 ‘생태문명’을 삽입했을까. 21세기를 충적세와 다른 지질시대인 ‘인류세’로 규정하는 학자도 있다. 인류에 의한 자연파괴가 본격화되고 있는 시대라는 뜻이다. ‘기후변화’가 아니라 ‘기후위기’의 시대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의 화두는 기후위기다. 1991년 ‘녹색평론’을 창간한 이후 30년 가까이 이 문제를 붙잡고 있다. ‘녹색평론’ 최신호(2019년 7~8월호)에는 모두 20편의 글이 실려 있다. 시, 서평, 연재물 등을 빼면 기후위기(6편), 민주주의와 정치(3편), 기본소득제(2편)와 관련된 게 대부분이다. 기후위기 해결이 당면 과제라면 민주주의는 문제 해결의 방법이고, 기본소득은 최소한의 경제적 삶을 위한 장치다. 비핵화, 한·일관계 등 현안에 관심 있는 이들은 ‘녹색평론’이 비정치적이고 탈시사적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녹색평론’만큼 정치적인 잡지도 없다. 김종철은 정치를 다루되 현상이 아니라 근본을 얘기한다.
김종철은 ‘근본적 생태주의자’다. 생태문제를 문명사적 차원에서 고민하는 ‘녹색사상가’다. 그는 이번호 ‘녹색평론’ 권두에세이에서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를 녹색화라는 큰 틀에서 접근하자고 제안했다. 모두가 비핵화 논의에 매달리고 있을 때, 김종철은 비핵화 이후, 통일 이후의 한반도를 그리고 있었다. 물론 한반도의 녹색화는 비핵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는 가까운 곳과 먼 곳, 현재와 미래를 함께 보는 복안(複眼)을 가졌다. 황우석 사건이 터졌을 때, 그리고 한·미 FTA가 논의됐을 때 그는 여론과 다른 의견을 냈다. 그때는 호된 비난을 샀지만, 지금은 다르다. 10여년 전 기본소득제를 얘기했을 때도 반향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적 의제가 됐을 뿐 아니라 일부 농촌은 이미 시행 중이다.
김종철은 단순한 환경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환경과 기후의 위기를 문명사적 측면에서 조명하면서 위기의 근원을 근대 문명으로 지목한다. 자본주의의 대량생산에 근간을 둔 산업경제가 지속되는 한 환경과 기후의 위기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기후위기의 해법은 자본주의 성장과 발전의 고리를 끊는 데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김종철이 여느 환경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끊임없이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아나선다는 점이다.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그의 대안은 ‘소농을 기반으로 한 생태적 순환사회’다. 그가 근대문명이 아닌 소농 중심의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은 ‘비근대 사회’에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고 인간 본성을 지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마을자치와 협동조합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김종철 생태사상론집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참조)
‘녹색평론’은 줄곧 생태에 대한 근본주의적 입장을 견지해왔다. 전국에서 50여곳의 ‘녹색평론’ 읽기 모임이 운영될 정도로 열성독자도 꽤 된다. 그러나 ‘녹색평론’의 생태주의는 아직 사회의 주류 담론이 되지 못하고 있다. 모두 ‘기후위기’를 머리로는 알면서도 발등의 불로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스웨덴의 16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위기 대책을 촉구하는 1인시위에 나선 이후 유럽 전역에서 청소년들의 ‘기후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기후 문제에 대해 너무 조용한 한국의 상황과 대조적이다. 구약시대의 선지자 이사야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을 것이라며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라고 예언했다. 그의 예언은 수백년이 지나 현실화됐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선언하고 예수 영접에 나섰다. 김종철과 ‘녹색평론’이 울리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고음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그 외침이 도시로, 마을로 울려퍼져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지구의 ‘기후재앙’을 막을 실천에 나서야 한다./조운찬 논설위원 경향 2019 7.24
기후위기와 우리의 밥상
만 16세의 스웨덴 소녀 그레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겐 이제 변명거리가 고갈됐다. 시간이 얼마 없다. 인류에게 큰 화가 다가온다. … 이제 당신들은 패닉을 느껴야 한다. 소리치고 마구 날뛰는 패닉이 아니라 노트르담 화재 때처럼 차분하게 지구를 구하는 패닉이 필요하다. 막연한 희망보다 중요한 게 행동이다. 행동을 시작하면 희망이 생긴다.”
매일 보던 푸른 하늘이 사라진 대신 (초)미세먼지와 우중충한 하늘, 때아닌 가뭄과 홍수, 전례 없는 무더위와 폭풍 등이 직접적 기후위기의 징후다. 이것은 농어업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생물종 다양성이나 생존가능성에 영향을 준다. 빙하와 만년설이 녹아 바닷물이 차오르면서 가라앉는 나라가 생긴다. 기후위기로 인한 자연재해는 식량위기와 연결돼 매년 세계인구 77억명 중 8억명을 만성적 기아에 시달리게 한다.
그렇다. 현재 지구는 위기다. 우리의 총체적 삶이 위기다. 지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지구를 구해야 한다. 지구를 구하려면 우리의 총체적 삶을 되돌아봐야 한다. 생산·소비·노동·교육·교통·가정·학교·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가 성찰 대상이다.
그중 농업과 가장 밀접한 식생활을 살펴보자. 기후위기를 초래한 온실가스는 자본주의 사회경제시스템뿐 아니라 우리의 생활방식에서 비롯됐다. 동식물 생산·가공·포장·운송 과정에서 전체 온실가스의 4분의 1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크게 세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첫째, 식품 생산과정에서의 온실가스 발생이다. 현재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에너지의 30%가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에 쓰인다. 먹고살자니 어쩔 수 없긴 하다. 그런데 유독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과정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비닐하우스, 대량 축산과 육가공, 기계식 영농, 화학 농약·비료 사용, 자동화한 식품가공, 비닐 또는 플라스틱 포장 등이 문제다.
둘째, 푸드마일리지 차원, 즉 식료품(완제품 내지 원료)의 운반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소비와 그로 인한 온실가스 발생이다. 현재 23% 정도인 곡물자급률을 70%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 많은 선진국의 자급률이 100% 이상인 것은 시사적이다. 각 나라가 자급하되 꼭 필요한 것만 교류하면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다. 사실 우리의 밥상을 잘 살펴보면 수백, 수천㎞를 달려온 음식들이 많다. 대형 트럭이나 배·기차·비행기 등을 통해 장거리 운송이 이뤄지는 경우가 문제다.
셋째, 일상화한 육식생활과 대형 냉장고가 온실가스 발생을 악화한다. 크게 세가지 차원이다. 우선 육식품의 생산·가공·운송·보관이 문제다. 일례로 쇠고기 생산은 이산화탄소(CO2)를 많이 배출한다. 50g의 쇠고기를 얻는 과정에서 CO2가 17.7㎏ 배출된다. 소가 먹을 사료 생산이나 고기를 가공·운송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온실가스를 모두 합친 결과다. 같은 식으로 보면 50g의 양고기 생산은 9.9㎏, 치즈는 5.4㎏, 달걀은 2.1㎏의 CO2를 배출한다. 식물성 단백질에 비해 동물성 단백질이, 그중에서도 붉은 고기일수록 CO2 배출이 많다.
다음으로 대량 축산을 위해 숲이나 들판을 대대적으로 파괴함으로써 CO2를 흡수할 공간이 사라지는 것도 문제다. 숲이나 들판이 살아 있다면 온실가스의 악영향을 훨씬 줄일 수 있다. 끝으로 대형마트와 대형 냉장고다. 한꺼번에 많은 식료품을 사다가 대량 보관을 하며 결국 음식쓰레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전기 소비량과 냉장고 냉매가 문제다.
이제 우리는 밥상과 식생활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우선 온실가스를 많이 유발하는 음식을 줄여야 한다. 육식보다 채식을, 장거리 식품보다 로컬푸드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포장을 줄이거나 비닐·플라스틱 사용을 줄여야 한다. 작은 식품 하나라도 온실가스 유발과 연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기계농·화학농·대농보다 유기농·지역농·소농을 지원하고 자급률을 높여야 한다. 물론 식생활 변화만으로 온실가스나 기후위기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자본주의적으로(즉 화폐·상품·노동·자본 등으로) 구성된 식량 생산과 소비 전반, 나아가 사회 전반을 바꿔야 하기에. 강수돌 고려대학교 융합경영학부 교수 농민신문 2019.7.24.
상생과 협력의 장소, 도시
최근 부산시 도시·건축정책의 긍정적 변화가 반갑다. 총괄건축가 영입, 난개발 논란이 많았던 뉴스테이 정책 전면 재검토, 경관 관리 강화를 위한 건물 높이 제한 용역, 주변 지역과의 조화로운 재개발·재건축사업으로의 심의 강화와 재정비계획 재수립, 부산시민공원을 둘러싼 주변 재개발 관리 등 ‘공공성’ 강화를 목표로 한 정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특히, 지난주 언론에 발표된 2040년 부산시 도시기본계획의 계획인구 축소에 대한 정책 방향은 이런 부산시 변화에 대한 논리적 기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계획인구 축소로 방향 전환한 부산시
공공성 강화한 도시 정책 변화 바람직
공유자산 관리에 따르는 사회적 갈등
공동체 구성원 간 조정·협의로 풀어야
기존의 도시기본계획에서 가정한 비현실적 계획인구 증가는 대규모 주거 개발과 도시기반시설 확대 공급 정책의 정당성을 제공해왔다. 이는 그린벨트 해제 등 자연환경 훼손을 통한 주거·산업단지 개발, 외곽지역의 개발 확대와 고지대 고층 개발의 난립으로 이어졌다. 이에 반해 기존 도심 내 소규모 주거나 공장 건물 리모델링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도심의 악화된 주거·생활 환경은 거주 인구의 대규모 이탈로 이어졌고, 기존 기업의 타지역 이주를 유발했다. 전통적인 개발 확대 정책은 부산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실패했으며 오히려 자연·경관 훼손, 도심 쇠퇴, 교통량 증가, 대기환경 악화, 공공자산의 사유화 강화 등의 부작용을 낳았음을 인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공공성이 강화된 도시·건축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공공성이 강화된 정책에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갈등이 동반된다. 이런 정책으로 인해 의도치 않은 영향을 입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부산 시민 전체 이익을 위한 공공성 강화정책의 기조는 철저히 다져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부산시 정책담당자뿐 아니라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지가 필수적이다. 공공성 강화와 해당 주민 간 갈등은 시민공원자문위원회에서 극명히 나타났다. 10여 년 전 도시계획위원회에서 통과됐던 시민공원 주변을 둘러싼 65층 건물 초고층 재개발에 대한 공공성 강화 방안은 해당 지역 조합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부산 시민 무작위 설문조사에서 80% 이상이 시민공원 주변 초고층 개발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했다. 절차적 합리성보다 시민공원이라는 공유자산에 관한 지지, 즉 실제적 합리성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분명했다. 현재 부산시와 해당 조합은 재개발의 공공성 강화에 관한 합리적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일찍이 공공성 강화의 핵심인 공유자산 문제에 주목한 학자가 있었다. 1968년 생물학자 개릿 하딘은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론’을 발표했다. 그는 어떤 공동체의 강제적 규칙이 없다면 공유지의 공유자원이 많은 사람의 무임승차 탓에 결국 파괴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마을 공동 소유의 초지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소 떼를 풀어놓거나, 공유 어장에서 물고기를 무분별하게 많이 잡는다면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0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은 이에 대한 해결책, 즉 상생을 위해서 이해관계자 간 조정이나 협의를 통해 공유지 비극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녀는 경관, 공원, 환경 등 소유권을 확정하기 어려운 도시의 공유자원 또는 공유자산 관리에서 구성원 간 상호 감시와 상호 제재를 통한 공동체적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 내 상호 신뢰를 기초로 하여야 하며, 적절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현재 부산시 도시·건축 분야의 공공성 강화 정책은 오스트롬의 충고대로 이해관계자의 조정과 협의 등 정책적 노력이 함께 결부되어야 한다. 도시문제는 사악한 문제(wicked problem)로, 다양한 이해가 실타래처럼 얽혀있어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문제 해결 과정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참여, 협의, 조정을 통해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작금 부산의 도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한 걸음씩 양보하고, 다 함께 머리를 맞대어 만든 정당한 규칙을 통해 공정한 경쟁이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과정들이 공공성 강화로 이어져 상생을 위한 공동체 사회의 초석이 될 것이다.
/정주철 부산대 도시공학과 교수 부산일보 2019 7.25
기후변화 보도에 유감
아침마다 기후환경 뉴스 클리핑을 하고 있다. 환경재단 주요 후원자께 보내드리고 페이스북을 통해 지인들과 나누고 있다. 2016년 5월26일부터 시작한 게 오늘 아침자로 755호가 되었다. 깜찍한 속셈은 후원자께 일 년에 한두 번 얼굴 비치면서 돈 달라고 하기 민망해서 매일 아침 인사 겸 환경 문제에 대해 공감대를 가져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오전 5시쯤 일어나서 인터넷 검색을 시작하는데 6시30분이면 발송했던 문자를 요새는 7시 넘어서야 겨우 완성한다. 극단적인 재난 상황일 때만 반짝 보도되고 기후환경 문제를 제대로 다루는 뉴스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그렇다. 뉴스가 없다고 기후 문제가 없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게 함정이다.
언론을 흔히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언론 속 기후변화의 빈도는 우리 사회의 무관심을 반영하는 걸까? 최근 세계일보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빅데이터 분석도구인 ‘빅카인즈’를 이용해 11개 종합일간지에서 기후변화(지구온난화 포함) 관련 기사를 검색한 결과에 따르면 2009년 12월까지 꾸준히 늘던 기후변화 기사는 사건 기사처럼 이벤트성으로 바뀌게 된다. 최근 5년간 월평균 기후변화 기사는 161건에 불과한 데 비해 ‘부동산’ 기사는 2209건이나 된다. 그렇다면 11개 종합지들이 한 달에 평균 0.5회 보도한 셈이다. 이슈의 엄중함에 비해 너무 적어서 한숨이 나온다.
보도량도 문제지만 보도내용 또한 문제다. 미세먼지가 요동을 쳤던 지난 3월에는 2459건이 보도되었는데, 지금은 미세먼지 기사를 찾기도 어렵다. 전 국민이 불안에 떨며 대통령 직속으로 국가기후환경회의까지 만들었는데, 미세먼지가 좀 덜한 지금 이 시점에선 침착하게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찾으려는 보도는 찾기도 어렵고, 보도가 된다 한들 주목받지도 못한다.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는 쓰레기 대란이 일어나서야 비로소 보도되었고, 필리핀으로 위장 수출된 건이 드러나자 환경부를 비난하기 바쁘다.
<팩트풀니스(Factfullness)> 저자 한스 로슬링은 의사이자 공중보건 전문가인데 특이하게 통계학자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사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실상을 체계적으로 오해하는 10가지 이유를 ‘사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뉴스 클리핑 경험상 이 10가지 중 ‘부정본능(The Negativity Instinct)’과 ‘비난본능(The Blame Instinct)’이 우리나라 뉴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것 같다. 어느 나라든 뉴스는 극적이고 부정적인 소식을 주로 보도한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극적인 상황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건사고 많은 우리나라에서 부정적인 뉴스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건의 원인이나 문제 해결에 대한 탐사보다 너무 즉각적인 결론, 몰매 때리기, 편갈라 공격하기로 비난에 그친다는 게 사건보다 더 큰 문제로 보인다. 앞으로 서울의 온도가 40도를 넘기고, 미세먼지 때문에 사망자가 속출하고, 6개월 이상 비가 안 와서 식량 수급에 차질이 생기고, 해운대에 쓰나미가 덮쳐 고층아파트가 붕괴된다면… 기사가 넘치겠으나 얼마나 살아남아 기사를 읽어줄지는 잘 모르겠다.
빌 게이츠는 2010년부터 매년 5~6월 대학생들이 읽으면 좋은 책을 추천해왔는데, 이번에는 추천을 넘어 미국의 모든 대학 졸업생들에게 직접 <팩트풀니스>를 구입해 선물했다. 이제 막 사회로 진출하려는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명확히 이해하려면 자신의 신념과 실재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정확한 사실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리라. 우리도 언젠간 이런 부자 한 명쯤 볼 날 있겠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의 가장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인간활동 때문에 기후변화가 나타났을 가능성은 95~100%다. 기후변화는 피할 수 없는 팩트다 /이미경 환경재단 상임이사 경향 2019 7.25
반도체 전쟁’의 전화위복
삼성과 SK 등이 대규모 투자로 실리콘밸리 같은 혁신 클러스터를 만들 수 있다면 일본과의 무역분쟁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대기업이 관행에 따라 설계하면 반드시 망한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역대 정부는 부품소재 산업의 국산화를 거듭 천명했다. 자동차 산업은 엔진과 트랜스미션 등 핵심 부품 90% 이상의 국산화라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반도체 산업은 별 변화가 없다. 삼성의 설비투자 및 증산은 대일본 적자를 거의 같은 비율로 증가시킨다.
한국의 IT 산업과 일본의 부품소재 산업은 동아시아 고유의 장기 거래에 기초한 분업을 이뤘다. 장기 거래는 신뢰를 낳고 상대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므로 안정적이면서도 안성맞춤인 기술 발전도 일궈낸다. 하지만 이 관계가 쌍방 독점에 가까워지면 이른바 “근본적 전환”(경제학자인 올리버 윌리엄슨의 용어)이 일어나서 발목잡기 문제(hold up problem)가 발생한다. 이제 상대가 배반을 해도 응징할 수단이 마땅치 않으므로 일정 정도 이상의 특화를 초래하는 투자를 꺼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도 ‘죄수의 딜레마’에 속하며 해법은 수직통합, 또는 자체 생산이다.
마침 삼성은 시스템 반도체에 133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고, SK도 122조원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용인에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만일 이들 대기업의 대규모 투자로 실리콘밸리 같은 혁신 클러스터를 만들 수 있다면 일본이 일으킨 무역분쟁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기존 기업이나 대학교와 연구소의 입지, 연구 인력의 선호, 금융 등 지원서비스의 질 등 클러스터의 핵심 구성 요소 측면에서 수도권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러나 수도권 규제와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목표 때문에 중앙정부는 이 지역의 혁신 클러스터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판교와 광교의 연구개발 중심 혁신 클러스터(테크노밸리)가 지방정부 주도형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클러스터를 형성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대기업 투자가 곧바로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앞으로 경제적 의존이 정치적 압력의 빌미가 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라면 한국 내부에서 핵심 부품과 소재를 생산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 이래 실리콘밸리의 재현은 각국 정부의 꿈이었지만 현실이 된 사례는 별로 없다. 실리콘밸리의 대부로 알려진 프레더릭 터먼 스탠퍼드 대학 교수도 미국 곳곳에서 실험을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예컨대 뉴저지 지역의 경우에는 저 유명한 벨 연구소가 주도했지만 기존 기업들 간 협력을 유도하지 못했고, 코넬 대학은 학술적 연구에만 관심을 쏟을 뿐이었다.
삼성의 폐쇄적 네트워크, 연구기관 등에 개방되어야
한국의 카이스트 설립은 터먼의 실험 중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힌다. 과학기술부 산하에 최고 수준의 대학을 설립해 한국 산업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것이다. 공동학습을 통해 혁신을 이루고 그 성과를 공유하는 것(네트워크 외부성)이야말로 클러스터 성공의 핵심인데, 카이스트는 미국 거주 한국인 연구자를 유치하고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했다.
문제는 현재의 대기업이 과연 단기적인 이익 극대화를 넘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느냐이다. 무엇보다도 삼성의 악명 높은 폐쇄적 네트워크가 연구기관과 중소기업에 개방되어야 한다. 휴렛팩커드와 인텔 등 실리콘밸리의 대기업은 공동의 장비 사용(삼성도 최근에 외부 기업이나 연구자에게 파운드리를 개방하기 시작했다)을 촉진하고 스타트업의 투자를 지원했다. 캘리포니아는 노동자의 이직에 따른 정보 유출에 관대한 법을 지니고 있으며 대기업은 스핀오프를 장려하기도 한다.
지식과 정보의 공유를 통한 생존 전략은 현재 재벌의 행동양식, 규범과 날카롭게 맞부딪친다. 단 20년 만에 실리콘밸리에 버금가는 규모와 네트워크의 질을 확보한 중국 중관촌(베이징)과 선전의 혁신 클러스터를 이제라도 따라잡지 못한다면 조만간 중국 기업에 추월당할지 모른다. 대기업이 관행에 따라 클러스터의 거버넌스를 설계하면 반드시 망한다. 정부가 인프라를 제공하고 대기업이 목표를 설정하되 대학이나 연구소, 중소기업들이 자신의 혁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시사인 2019.7.26
설악산 케이블카 ‘불법과 거짓’
외설악의 정상, 권금성에 케이블카가 놓인 건 1971년 일이다. 유신 선포를 얼마 앞둔 박정희는 사위에게 권금성 케이블카를 허가한다. 설악산은 이미 1965년 천연기념물,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명백한 특혜였다. 이곳은 50년 가까이 한 일가가 매년 수십억원의 수익을 남기며 독점 운영하고 있다. 이후 케이블카 추가 설치 요구는 1982년, 2012년, 2013년, 2015년 끈질기게 이어졌고, 대상지는 내설악 보호구역 핵심지역을 향했다. 지금도 강원 양양군이 제출한 오색~끝청 구간 케이블카 환경영향평가서를 환경부가 검토 중이다. 설악산 국립공원 케이블카 50년의 논쟁, 이제는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을 다시 살펴보자. 작년 3월 환경부 ‘환경정책제도개선위원회’는 2012년, 2013년 불허된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이 2015년에 어떻게 통과되었는지 조사해 발표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정책 건의와 제6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의 대통령의 지시, 경제장관회의에서의 후속 조치에 따른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내용이다. 최순실과 연관된 경제인단체가 자연공원 내 케이블카, 산악승마와 열차, 정상부 리조트 등 산악관광 활성화를 건의한다(2014년 6월9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직접 ‘친환경 케이블카 확충 방안’을 지시한다(2014년 8월2일). 최경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산지관광 활성화, 친환경 케이블카 확충을 중점 과제로 별도 관리하겠다고 발언한다(2014년 8월27일). 문화체육관광부는 김종 제2차관실 산하 관광레저기획관실 주도로 ‘친환경케이블카 확충 TF’를 이끌고, 2차 회의 때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노선으로 오색~끝청 구간을 확정한다(2014년 11월7일). 평창 동계올림픽 이전 완공이 목표였다.
생태계 보전의 최일선에 서야 할 윤성규 전 환경부 장관은 케이블카 사업을 직접 ‘컨설팅’한다. 환경부는 2015년 별도 비밀TF를 운영하고, 사업자 양양군과 현장 조사계획을 사전에 논의한다. 국립공원위원회 민간전문위원회 현장 조사 및 검토보고서를 양양군이 유리하도록 지원, 점검한다. 해당 사업이 국립공원위원회 심의를 통과하도록 환경부가 불법과 거짓에 앞장선 것이다. 당시 양양군은 제113차 국립공원위원회에 극상림과 아고산대에 대한 잘못된 언급을 하고, 경제성을 부풀리고, 산양 개체 수는 단 1마리로 ‘산양 주 서식지’가 아닌 것으로 기재된 부실한 ‘자연환경영향검토서’를 제출했다. 국립공원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정연만 전 환경부 차관은 미리 투표함까지 준비해 사업을 승인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양양군 삭도추진단 공무원 2명은 사문서 조작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감사원은 실시설계 용역계약 부당 체결과 3억원 넘는 예산 손실을 이유로 해당 공무원의 징계를 권고했다. 양양군이 제출한 환경영향평가서는 ‘유령 보고서’ ‘슈퍼맨 보고서’로 불렸는데, 조사자가 없거나 거짓으로 작성된 정황이 확인됐다. 최근 환경부 원주지방환경청은 보도자료(2019년 7월19일)를 내고 ‘공사구간이 아닌 주변지역에서 식생을 조사한 것’ ‘식생조사와 매목조사 결과가 대부분 불일치’ ‘조사의 적정성에 문제가 있으며, 상류정류장 희귀식물의 이식계획도 적정하지 않다’고 밝혔다.
오는 8월, 설악산 케이블카 최종 검토와 발표를 앞두고 있다. ‘불법과 거짓’의 과거를 바로잡는 것은 설악산 케이블카 ‘부동의’와 ‘환경부 장관 고시 철회’ 결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설악산에 대한 최소한의 배상이며, 기본적인 염치다 윤상훈 | 녹색연합 사무처장 경향 2019.7.28.
조국의 페북질? 총리·여당은 밥값 하셨나요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 통화에선 ‘아베의 요구’가 자주 의제에 오른다. 아베 총리가 일본인 납치, 중·단거리 미사일, 생화학무기, 북한에 대한 불신 등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직접 ‘아베의 요구’를 전한 적도 있다고 한다.
문 대통령에게 아베 총리는 ‘짜증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남북관계 발전에 재를 뿌리고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에 딴죽을 거는 훼방꾼 노릇을 해왔기 때문이다. 평창 올림픽 개막식 직전인 2018년 2월9일 한-일 정상회담, 키리졸브 연습 연기 방침을 밝힌 문 대통령에게 아베 총리는 “동북아 군사 균형이 흔들린다”며 맹렬히 비난했다. 문 대통령은 “주권의 문제, 내정에 관한 문제”라고 맞받았다. 반도체를 겨눈 일본의 ‘3대 핵심소재 수출규제’도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만남 다음날 전격 발표했다. 전략물자 북한 유출, 신뢰 훼손…. 일본은 수시로 말을 바꾸며 합리화한다.
우리 내부에선 자기학대가 한창이다. 한국이 피해를 본다,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이 문제다…. ‘과잉 민족주의에 기댄 맞보복은 아베와 일본 우익에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라 꾸짖기도 한다. 러시아의 독도 영공 침범까지 겹치자 ‘구한말 상황’이라며 정부를 공격한다. 약소국의 비루함을 탓하며 자학하는 태도야말로 ‘구한말 버전’이다. 경제 도발에 대비하지 못한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강대국의 가랑이 밑을 긴다고 문제가 풀릴지 의문이다. 남북관계에 더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하청국가를 자임할 때까지 한국 경제를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위협을 명분 삼아 결속을 다지며 전쟁 가능 국가를 향해 달려온 아베 정권이 한국마저 미래의 위협으로 설정하고 싹을 밟겠다고 나섰다면 당당히 맞서는 게 정답일 수 있다.
지난 13일 페이스북에 ‘죽창가’를 링크한 것으로 시작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의 ‘대일 여론전’에 대한 비난도 유사한 맥락이다. 친일·반일로 편가르기를 한다고 비난하고, 대통령의 뜻이냐며 청와대를 공격했다.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까지 “공직자로 갈등을 확산·심화시키는 역할은 적절치 않다”고 거들었다. 여야와 보수언론이 합세해 ‘조국 입막음’에 성공했다.
‘조국의 페북질’은 잘못인가. ‘죽창가’로 시작한 44건의 페북 활동 가운데 정두언 전 의원 별세에 대한 글을 빼면 43건이 일본 관련 사안이다. 대부분 대법원 강제노역 배상 판결의 정당성, 1965년 한일협정으로 배상권이 사라졌다는 일본 주장에 대한 국내외 반박 보도 등을 링크했다. 그의 주장도 이 부분에 집중됐다.
“애국이냐 이적이냐”(18일), “마땅히 ‘친일파’라 불러야 한다”(20일)는 글이 큰 논란거리다. 독재정권에서 반대세력을 탄압할 때 쓴 ‘이적’이란 용어를 끌어다 쓴 건 적절치 못하다. 그러나 일본의 논리를 공박하고, 내부의 ‘친일적 태도’를 일갈한 건 할 수 있는 얘기다. 국민은 ‘독립운동은 못 했지만 불매운동은 한다’는데 불매운동의 후진성을 문제 삼고, 경제 도발에 맞서기보다 구한말에 빗대 자기학대에 몰두하는 행태를 많은 국민은 ‘친일적’이라 생각한다.
민정수석이란 자리가 ‘메신저’로 적절한지는 논쟁이 필요한 지점이다. 하지만 일본은 관방장관이, 내각이 한국을 직접 공격한다. 총리와 장관, 여당 의원들이 ‘아베의 노림수’를 직격하고, 대통령과 청와대는 적절히 수위를 조절하면서 일본과 물밑 대화를 모색하는 게 이상적인 역할분담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대부분 입을 닫았다. 자타 공인 일본통인 이낙연 총리부터 제 역할을 했는지 의문이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에게 “말 많다”고 면박을 준 것 말고 인상적인 행적이 없다. 문 대통령이 대법 강제노역 판결과 ‘위안부 합의’는 해법이 쉽지 않은 문제이니 총리실에서 면밀히 대처해 달라고 몇 차례 당부했다는데, 총리실이 뭘 했는지도 불분명하다.
여당 의원이라도 ‘아베와 맞짱’을 떠야 하는데 침묵이 대세다. 되레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전략물자 북한 반출이라는 일본 논리를 격파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폐기’ 카드로 일본과 미국을 압박했다. 이낙연 총리와 장관들, 뒤늦게 내부 총질에 가담한 여당 의원들은 제 밥값을 했는지,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신승근 논설위원 한겨레 2019 7.26
‘주전장’과 ‘영화 김복동’
일본 아베 정권의 대(對)한국 수출규제로 촉발된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한창인 가운데 <주전장(主戰場)>과 <영화 김복동>, 두 다큐멘터리영화가 화제다. 지난 7월25일 개봉한 <주전장>은 일본계 미국인 미키 데자키 감독의 작품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일본 우익의 민낯을 낱낱이 들춰낸다. 감독이 지난 3년여간 한국과 미국, 일본을 넘나들며 직접 진행한 30여명의 활동가·정치인·연구자들의 인터뷰와 수집 문서자료를 바탕으로, 위안부 문제의 쟁점을 둘러싼 진보·보수 양측의 논거를 교차 편집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감독의 문제의식은 일본의 인종주의에서 출발한다. 일본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던 당시 일본의 인종주의와 차별을 지적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올린 후 극우 민족주의자에 시달리던 감독은, 같은 집단에 시달리던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에게 주목한다. 그는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일본에 최초로 보도하며 위안부 문제를 일본 사회에 던진 인물이다. 일본의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실체는 무엇인가. 주요 쟁점은 무엇인가. 감독은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 하나하나에 문제풀이를 시도한다. 병렬적 구조로 답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단단한 과일껍질 벗기듯 동심원 구조로 문제의 핵심에 깊숙이 들어간다.
영화는 “위안부는 매춘부였다”라는 익숙한 주장에서부터 난징 대학살 ‘날조설’을 거쳐 “(소녀상 옆에서) 이 추악한 대형 쓰레기에는 종이봉투가 딱이다” “한국은 시끄럽게 구는, 버릇없는 꼬마처럼 귀여운 나라다”라는 등의 일본 우익들 발언을 전달하고, 이를 반박하는 다른 활동가와 연구자들의 주장과 자료를 통해 관객의 판단을 유도한다. 한 걸음 물러난 듯 보이는 감독의 위치는 일본 우익의 수상한 로비와 역사왜곡의 체계적 과정을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화면 위로 튀어 오른다. 역사적인 것, 외교적인 것, 정치적인 것은 무엇인가. 인종차별, 성차별, 제국주의, 식민주의는 어떻게 교차하며 재생산되는가. ‘2015 한·일 합의’에 항의하며 외교부 고위 공무원에게 호통치는 이용수 할머니의 발언으로 시작해 김학순 할머니의 1991년 공개 기자회견장의 발언으로 영화가 마무리되는 이유다.
8월8일 개봉할 <영화 김복동>은 올해 초 세상을 떠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할머니에 대한 영화다. 1992년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이후 27년간, 할머니가 어떻게 살아오고 싸워왔는지 일상과 공적활동을 담담하게 포착해낸 다큐멘터리다. 감독인 ‘뉴스타파’의 송원근 프로듀서는 자신이 직접 찍은 영상 이외에 음성파일, 사진, 다른 사람이 찍은 비디오 등으로 할머니의 삶을 조명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의 책임을 우회적으로 건드린다. 미디어 몽구와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위한정의기억연대 측과 함께한 사실상의 공동 작업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할머니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배우 한지민씨의 내레이션과 가수 윤미래씨의 노래에 덧입혀져 풍부하되 절제된 감정구조를 구축한다.
“저는 서울에서 온 피해자, 나이는 90세, 이름은 김복동.” 세계를 누비며 증언했던 할머니, 재일조선인 학교 청소년들과 만나고 이들에게 남은 전 재산을 기부하는 할머니, 암과 싸우는 와중에도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위해 1인시위를 감행하는 할머니, “우리는 용서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라며 당당하게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할머니. 생전의 할머니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은, 역사 속에서 아무런 이름도 없던 존재, 아니 지워져야만 했던 한 여성이 어떻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집단 정체성을 획득하고, 인권운동가로 살아가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외로운 피해자가 활동가들과 만나고, 이들이 손잡고 공감하는 대중들을 확장시켜가는 과정 속에 무심했거나 무지했던 나는 어디에 있었는지 질문하게 되고, 그들이 좌절하고 아파하는 장에 혹시나 작용했을지 모를 나의 역할을 성찰하게 된다.
<주전장>이 정지된 머리를 흔들어 이성적 판단을 이끌어 낸다면, <영화 김복동>은 딱딱한 심장을 공략해 정치적 판단을 중지시킨다. <주전장>이 문제 발생과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원인을 찌른다면, <영화 김복동>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넌지시 던진다. <주전장>의 크고 날카로운 칼날이 외부를 겨누고 있다면, <영화 김복동>의 작은 비수들은 아프게 내부를 향하고 있다. 그래서 두 영화는 반드시 한 쌍으로 묶어서 봐야 한다.
오는 8월14일은 1992년 1월부터 진행된 수요시위가 1400차를 맞이하는 날이다. 그 자리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지켜낸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일본을 향한 우리의 분노가 어떻게 가야 할지 두 영화를 통해 가늠해 보시길 진심으로 권한다 이나영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19 7.28
한반도 ‘번국’에 대한 일본의 공포
고대 이래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우월과 공포로 교직됐다. 양자관계 착종의 근본 원인이다. 중화 질서에 있던 한반도는 일본을 교화의 대상인 열등한 ‘인국’(隣國)으로 바라봤다. 반면, 중화 질서에서 비켜나 있던 일본은 천황 체제 속에서 한반도를 자신들의 ‘번국’(蕃國)으로 취급하려 했다. 이는 서로에 대한 공포의 외연이었다. 한반도에 일본은 수시로 침탈하는 세력이었고, 일본에 한반도는 대륙세력이 열도로 침략하는 통로였다.
백제·신라·가야는 쟁패 과정에서 왜와 연합하려 했고, 때론 그 무력을 이용했다. 이는 현대 국제정치학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에서 패권세력 형성을 저지하려는 일본의 세력균형 정책이다. 한반도에 통일된 패권세력이 등장하면, 그 여파가 일본열도에도 미친다고 우려했다
당의 침공에 동맹인 백제가 패망하자, 왜가 백제부흥군을 지원하려 최대 4만2천명의 병력을 파견했던 백강구 전투가 대표적이다. 당의 개입으로 인한 신라의 삼국통일은 나당 연합의 일본 침공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나당 연합이 일본열도를 침공할 가능성에 전전긍긍한 왜는 서부 각지에 백제 망명 귀족들의 도움으로 조선식 산성을 쌓으며 방어책에 골몰했다.
삼국통일 뒤 나당전쟁이 벌어지자, 왜는 신라에 물자를 공여했다. 나당전쟁 격화로 일본열도 침공 가능성이 사라지자, 왜는 신라에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한반도는 번국이라는 인식을 본격적으로 조성했다. 일본은 701년 ‘대보령’을 반포해 당은 인국, 신라는 번국이라고 규정했다. 신라 사신을 번국의 사신으로 대우했다. 신라는 당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 이런 조처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에는 일본에 고압적으로 나갔다.
중국과의 관계가 회복된 한반도의 통일왕조에 대한 공포로 일본은 8세기 중반 신라 침공을 준비했다. 당이 안녹산의 난에 시달리는 상황과 발해-신라의 불화를 이용하려다, 주동세력인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실각으로 포기됐다. 그 이후 한반도와 일본은 조선 초기까지 국가 차원의 외교관계가 단절되는 긴 시간을 보냈다.
일본에서 열도 전체를 장악하는 중앙정권이 부재했고, 허약한 막부 정권들은 공식 외교관계 단절로 한반도로부터 영향력을 차단했다. 이 기간 중 고려 때 여몽 연합의 일본 침공은 일본의 국가 정체성과 한반도에 대한 인식을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대마도 정벌도 일본에 명-조선 연합의 침공 서곡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서로에 대한 양쪽의 인식 괴리를 심화했다. 일본은 규슈의 지방기관인 다자이후를 통해 한반도의 사신과 먼저 교섭하고 통제하는 외교 행태를 보였다. 일본 내지를 보여주지 않겠다는 공포의 발현이었으나, 외교적으로는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착각을 심화시키는 과정이었다.
한반도의 국왕은 기껏해야 막부 쇼군의 상대역이고, 천황은 그 위에 있다는 것이 일본의 인식이었다. 고려와 조선도 창궐하는 왜구나 임진왜란 같은 침탈에 시달렸기에, 왜구의 발진지인 쓰시마 등 일본 서남부의 번주들이나 막부 정권에 대처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고려 때 진봉 무역이나 조선 때 통신사 파견을 자신들에 대한 조공 무역이나 사신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일본의 우월 의식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일본열도에 내리꽂히는 칼날’이라는 한반도에 대한 공포와 동전의 양면이다. 한국전쟁을 보면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공포를 확인하며 한국을 우호 정권으로 안정화시키려는 것이 전후 대한반도 정책의 기본이었다. 한-일 기본조약이나 그 이후 한-일 경제협력은 우월과 공포의 산물이다. 최근 대한 수출규제 역시 한-일 관계의 현상변경을 요구하며 고분고분하지 않은 한국을 우월과 공포라는 프리즘으로 바라본 결과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동해에서 첫 합동 초계비행을 하고, 북한은 다시 미사일을 발사했다. 트럼프의 미국은 일본을 배려하지 않고, 북-미 관계 개선 등 대한반도 정책을 펼친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관계 악화는 일본이 더 견디기 힘들다. 우리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우월과 공포를 이해하고, 외교적 재료로 쓰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이번 분쟁에서 한국이 열세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곧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가 열리고, 10월에는 일본 천황이 취임한다.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일본 내 진보·리버럴 세력을 배려하고, 한-일 관계 안정을 바라는 온건보수세력을 견인해야 한다. 원칙은 있되 유연한 외교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 정의길 선임기자 한겨레 2019 7.29
일본에 쫄지 않아도 되는 이유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그리고 러일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끈 일본은 1900년대 초반 동북아의 패권을 잡았다.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은 일본과 전쟁 한번 해보지 못하고 망했다. 청나라는 종이호랑에 불과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러시아 발틱함대도 일본 연합함대 앞에 무너졌다. 승승장구하던 일본은 미국의 원자폭탄에 항복하고 말았지만 아직까지 미국과 맞짱 뜬 나라는 일본 말고는 없다.
그 후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2019년 여름.
지금의 동북아 질서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일본이 한국을 향해 무역 선전포고를 단행한 감추어진 저의가 무엇 때문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1900년대 초반 동북아에서 누렸던 패권을 잃은 지 오래다. 1950년 한국전쟁을 발판으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며 경제대국으로 부활했지만 지금은 그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던 중국은 미국과 경쟁하며 세계 2위의 경제·군사대국으로 부상했다. 푸틴의 러시아도 군사력을 키우며 북극의 곰처럼 강자가 됐다. 군사력만 보아도 중국과 러시아는 일본을 앞서고 있다.
일본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대한민국이다. 일본인들에게 한국은 약소국이고 하급민족이다. 그런 한국이 그사이 세계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군사력에서도 일본을 위협하고 있다.
GFP(Global Force Power)가 내놓은 2019년 세계 군사력 순위를 보면 한국은 7위다. 일본은 우리보다 한 단계 위인 6위를 차지했지만 지난해(2018년) 순위에서는 우리보다 한 단계 아래인 8위였다. 동북아 열강인 러시아와 중국이 미국에 이어 각각 2위와 3위다. 동북아의 패권국가로 자임해온 일본의 군사력이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한국에도 뒤진 것이다.
새롭게 부상한 북한은 일본에게는 '턱밑의 송곳' 같은 존재다. GFP가 발표한 2019년 세계 군사력 순위에서 북한은 18위다. 그러나 GFP의 평가에서 핵무기는 제외시키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감안하면 동북아의 군사력에서 일본에 밀리지 않는다. 아베의 보수우파 정권이 겉으로는 강자의 포즈를 취하면서도 속으로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같은 동북아 질서 속에 일본의 보수우익 정권이 꺼낼 수 있는 묘수는 뻔하다. 그 첫 번째가 한국에 대한 무역 선전포고다. 한국의 경제 성장을 지금 꺾지 않으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두 번째는 무력 충돌이다. 동북아의 군사적 균형을 새롭게 짜지 않으면 자칫 자신들이 설 자리가 좁아지거나 추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헌법을 수정해 적대국을 공격하고 전투할 수 있는 군대를 보유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왜 한국이 타깃일까.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한국을 자신들의 발판으로 삼지 않고는 중국과 러시아와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급성장한 한국을 서둘러 주저앉혀야 하는 초조감 뒤에는 북한도 있다. 한국을 자신들의 수중에 넣지 않고서는 북한과 맞서기에 버겁기 때문이다. 이미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은 한국 못지않은 장벽이다.
어쨌거나 일본이 바라보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100년 전과 확연히 다르다. 동북아 열강들과 맞설 경제력과 군사력이 있다. 중·러·일 보다 경제·군사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위협적이다. 군사력 세계 7위. IMF가 발표한 2018년 국가별 GDP 12위의 나라로 동북아 근대사에서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강했던 적이 없었다.
일본은 불안하다. 동북아에서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첫 관문은 한국을 정복하는 일인데, 100년 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뒷짐 지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반도체 부품소재를 무기로 한 무역 선전포고는 첫 시험대다. 점차 전선이 확대 될 것이 분명하다. 응전에 나설 대한민국의 전략도 초유의 관심사다.
그러나 만약, 만약에 일본의 무역 선전포고의 최종 목적이 19세기 정한론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면…… 상황은 위중해 진다. 문재인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준엄한 경고와 자신감도 이런 전후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봐야 한다. 우리가 일본에 쫄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이처럼 명백하다. 당장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오히려 동아시아 열강으로 동등하게 자리매김할 절호의 찬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조중의 기자 jijo@cbs.co.kr 노컷뉴스 2019 7.29
“내년 총선은 한·일전이 될 것”
드라마에서 연기와 실제는 다르다. 악역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직업으로서 연기를 하는 것이지, 실제로 악당인 건 아니다. 한데도 악역 연기자들은 실제로 나쁜 사람으로 오인받아 종종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연쇄살인마 역을 맡은 어느 배우는 마트에 장보러 갔다가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한 적이 있다. 지나가던 시민에게 물세례를 받거나 욕을 들은 경우는 허다하다. 억울하겠지만, 그만큼 연기력이 뛰어난 때문이겠다.
대한민국 정치판이란 대하 드라마에서 악역은 제1야당이 맡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 무역보복 조치를 취하자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해서는 왜 그런 판결을 내렸느냐고 한다. 황교안 대표는 정부 대응을 구한말 쇄국정책과 같다고 했는데, 그 쇄국정책이란 반도체 소재·부품 핵심기술을 국산화하고 경쟁력을 강화해 대일 의존도를 줄이자는 것이었다. 김문수는 “지금은 토착왜구가 아니라 토착빨갱이를 몰아내야 한다”고 이 와중에 또 색깔을 칠했다.
대안은 없다. 한국당은 ‘일본 경제보복 원인과 해법’이란 의원총회를 열었는데, 특강만 듣고 끝냈다. 정책 대안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 한·일전은 치킨 게임과 같다. 야당은 일본의 보복조치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일본이 조치를 취소할 수 있도록 어떤 강경 대응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부에 힘을 실어줬어야 한다. 그게 정부의 협상력을 높여주는 길이다. 그러나 3국 중재위안을 내놓은 일본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했다. 전쟁 초반 협상에 들어가는 건 굴욕 외교를 하라는 말이다. 시민들 사이에선 100년 전엔 나라가 넘어갔지만, 이젠 순순히 당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독립운동은 못해도 불매운동은 하겠다고 한다. 외적이 침입하면 하던 정쟁도 중단하고 단합하여 함께 맞서는 것이 당연하다. 한데 한국당은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면 한심하다고 하고, 말을 하지 않으면 이 마당에 침묵이냐고 한다.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 철회를 촉구하는 결의안 처리조차 거부하고 있다.
정치판 드라마를 지켜본 시민들은 한국당의 악역이 연기가 아니라 진짜 악당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문 대통령 지지율은 50%대로 치솟았고, 맨날 비판만 하는 한국당은 20% 아래로 추락했다. 황교안 대표 취임 후 반짝하던 상승세를 다 까먹고, 정부 실정(失政)에 따른 반사이익도 챙기지 못하고 있다. 비판과 견제는 야당의 책무지만, 그 선을 넘어섰다고 본 것이다. 아침 드라마에서 악역의 얼굴에 김치 싸대기를 치는 장면에 속 시원해했던 시민들은 지금 야당 얼굴에 싸대기를 치고 있다. 한국당은 정부·여당을 때렸는데, 멍은 자기들 얼굴에 들었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고 했다. 내가 먼저 산 다음에 상대를 잡으러 가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당은 남의 집 탄불을 놓고 뭐라 할 입장이 아니다. 사법개혁특위 위원장, 예결위원장, 사무총장 등 주요 국회직과 당직은 친박계가 꿰찼다. 각 상임위 간사도 친박계로 교체하려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어느 상임위원장은 자리를 못 내놓겠다고 버티다 정당 사상 유례없는 징계를 받았다. 이 당에서 막말은 흠도 아니다. ‘5·18 망언’ 3인방은 모두 이전 상태로 복귀했다. 충성경쟁에 나선 행동대원들은 막말을 사시미 칼처럼 휘두르지만, 당의 보스는 “그 말 그대로 이해해 달라”고 한다. 우리 애들이 주먹을 휘두르면 아무 말 말고 그냥 맞으라는 얘기다. 급기야 박근혜 탄핵 이후 한국당, 우리공화당, 바른미래당으로 뿔뿔이 흩어진 보수세력이 빅텐트를 치고 반문재인 연대를 구축하자는 얘기가 솔솔 나오고 있다. 돌고 돌아 ‘도로 친박당’이요, ‘탄핵 연대’다. 혁신과 인적쇄신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정치신인 황교안은 기성 정치인과 다를 바 없다는 실망감을 안겨줬고, 제1야당다운 대안을 보여주지 못했고, 야당으로서 존재의 필요성을 각인시키지 못했다.
드라마에서처럼 여기에도 입바른 소리를 하는 참모들이 있다. 한국당은 지금보다 경제가 더 악화되면 야당이 유리할 것이라고 보고,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총선에서 이길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사무총장을 지낸 김용태 의원은 “그건 대단한 착각”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참모는 조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정치는 이미지 싸움이다. 드라마에서 못된 시누이, 동네 깡패, 직장갑질 상사가 잘되는 경우는 없다. 한국당엔 친박에 친일 이미지까지 덧씌워져 있다. 그래서 내년 총선은 여야 대결이 아니라 한·일전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시민들은 ‘4·15 대첩(大捷)’을 기다리고 있다. 박래용 논설위원 경향 2019 7.29
징용 배상이 보수의 자존심이다
지난해 2월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33위가 서울 김포공항을 통해 국내로 봉환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명박ㆍ박근혜 전 대통령이 싫었다. 광우병? 불도저? 4대강? 세월호? 불통? 블랙리스트? 그런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 오히려 되묻고 싶다. “정말 그 사람들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나라를 이끌리라고 생각했나요?”라고. 어쨌든 그런 사람들을 뽑은 건 우리 선택이니,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정치할 권리(?)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간단히 말해 이명박 뽑았으니 삽질 좀 하고, 박근혜 뽑았으니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레이저만 쏠 게 아니라 불러다 주리도 틀고 할 법하다.
두 전직 대통령이 싫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적어도 ‘한강의 기적’을 내세우는 보수주의자라면, 1960~70년대 함께 땀 흘렸던 그 세대들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그건 말하자면, 보수의 자존심 문제라 생각한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이명박ㆍ박근혜 두 정권 아래서 제대로 된 노년층 대책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나 박수치고 지지를 보냈는데도 그랬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제 잘난 척하거나,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키워놓은 나라인데“ 중얼거린 게 전부였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명박ㆍ박근혜 두 대통령이 광주, 제주처럼 한국 현대사의 한이 어려있는 곳에 가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고생했다고, 고맙다고 싹싹 빌고 다녔다면 어땠을까. 진보가 그러면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하는 나쁜 짓이었겠지만, 저들이 그랬다면 국민 대통합의 참다운 한 길이라 찬사 받았을 게 분명하다. 극좌 선동꾼이 극우 선동꾼으로 변신했을 뿐인데 ‘뉴라이트’라 치장해주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 운운하는 분들이 가만 있을 리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강제징용 노동자 배상 문제로 촉발된 친일ㆍ반일 논란은 그 자체가 웃긴다. 문제는 친일ㆍ반일이 아니라, 보수의 자존심이다. 간단하다. 나라가 제 구실을 못해 희생양이 된 이들에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지불해야 한다. 그게 보수다. 경제성장이 그저 온전히 제 덕인양 여기는 한국 보수 아니랄까봐 이번엔 아예 대법원 판결 자체가 문제라는 둥, 국제정세에 능통한 개명한 코즈모폴리탄 코스프레나 한다. 일본 보수는 이 문제가 자신들이 그토록 합법이라 강변하는 한반도 식민지화의 산물임에도, 그저 청구권 협정으로 다 끝났다고 회피하려 든다. 바다 건너 사이 좋게 합동으로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는 보수다.
개인적으론 일본 사회학자 오구마 에이지의 책 ‘일본 양심의 탄생’(동아시아)를 추천하고 싶다. 저자 오구마 에이지가 이 책에서 다루는 건 아버지 오구마 겐지 변호사의 삶이다. 겐지 변호사는 패전 뒤 정부를 상대로 전후 피해 배상 소송을 진두 지휘했다. 처음엔 일본인 중심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한국인과 중국인 등도 지원한다. 겐지 변호사의 논리는 간단하다. 그 어느 누구라도 일본이란 국가의 이름 아래 동원되어 희생당했다면, 그에 합당한 배상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했을 때에 “비로소 일본이라는 국가의 신뢰가 회복된다”는 것이었다.
겐지 변호사는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이라면 늘 거론되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교수 같은 좌파인사가 아니다. 아베의 외조부이자 일본 극우의 상징으로 꼽히는 정치인 기시 노부스케처럼, 패전 뒤 소련군에 억류돼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된 경험도 있는 반공인사다. 조국 일본이 멋지게 성장하길 바라는, 애국심을 소중히 여기는, 굳이 따지자면 일본의 보통 우익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자신의 조국이, 나라의 영광을 팔아 동원하고 희생시켰던 보통 사람들을 외면하는 걸 차마 지켜볼 수 없었을 뿐이다. 이런 겐지 변호사가 오늘날 아베 총리를, 한국 보수를 본다면 대체 뭐라고 할까. 보수의 자존심을 지켜줄 사람이 이렇게도 없나 싶다.
/조태성 사회부 차장 한국 2019 7. 30
정치, 외치, 망치
한국인에게 외교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한국의 평화와 번영은 주변국과의 화해·협력에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운명이다. 그걸 입증이라도 하듯 최근 한국은 북한, 일본, 중국, 러시아로부터 전 방위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 평소 경쟁하고 대립하던 정치세력들이라도 이런 때는 힘을 합치기 마련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는 그런 장면을 볼 수 없다. 한국의 창의적인 정치인들은 이때야말로 상대를 몰아붙일 좋은 기회로 여기며, 공동의 적을 잊은 채 서로를 적이라고 부른다.
여야는 지금 결투로 승부를 가리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팽팽히 대치하고 있지만 뜯어보면 외교정책 차이는 크지 않다. 일정한 재임 기간을 갖는 통치자가 선택할 수 있는 외교정책의 폭은 제한적이고, 대격변이 닥치지 않는 한 누가 집권해도 국익에 관한 정의, 동원 가능한 자원, 협상 수단은 거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정학의 지배를 받는 한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야당은 외교정책을 전면 폐기하라고 정부를 공격하지만, 그들이 집권한들 말대로 하기는 어렵다. 외교정책만큼 집권세력에 대해 비탄력적인 것이 없다.
일본의 무역보복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너무 무능하다’고 비판하는 야당이 대책이라며 내놓은 것이라고는 겨우 특사 파견, 한·일 정상회담 개최, 한·미·일 공조 복원이다. 문제의 핵심과 무관한, 협상 전술에 관한 것으로 정부에 맡기면 될 일이다. 러시아의 독도 영공 침범에 더 강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 역시 야당이니까 하는 말에 불과하다. 야당이 집권했다 해도 주변국 모두와 동시에 대립을 심화시키는 행동은 하지 못한다.
여야 간 차이가 커 보이는 게 있기는 하다. 대북정책이 대표적이다. 자유한국당은 정부의 비핵 평화정책 전면 수정,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군사합의 파기를 주장한다. 그건 남북관계에 파국을 부르는 일이다. 현실적 대안이 아니다. 그저, 자기 이념의 표현, 차별성·존재감 과시를 위해 대북정책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 차이는 대북정책 방향이 아닌, 특정 현안과 사건을 다루는 방식과 태도에서 나타나지만 그것이 초당 외교 거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차이에도 불구하고 추구해야 하는 게 초당 외교다. 초당적 대응과 협력은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외교 실책이 있으면, 야당으로서 당연히 지적하고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면한 외교 현안을 해소해야 할 시급성·중요성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아무리 당파성이 필요하다 한들 당 대표와 원내대표가 굳이 나서서 대통령을 ‘적’이니, ‘안보의 가장 큰 위협 요인’이니 비난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끌겠다고 준비하는 정당이 할 일이 아니다. 대외관계의 난제를 헤쳐 나가야 할 대통령을 흔들어 나무에서 떨어뜨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 나는 법이다. 정부·여당 또한 야당으로부터 협력을 이끌어내려 노력했어야 한다. 야당 존중 없는 초당 외교는 가능하지 않다. 정부·여당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 야당이 알아서 도와주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초당 협력은 야당에 대한 청구권이 아니다. 대야 압박 수단도 아니다. 대야 압박 공세와 초당 협력은 병존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권은 친일이냐 반일이냐 이적이냐의 이분법으로 제1야당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격적 언어를 구사했다. 한국당이 남북 화해·협력 문제를 친북이냐 반북이냐 이념 문제로 왜곡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접근법이다. 정부가 초당적 지원을 받으며 일본의 도발에 대처해야 한다는 건 반일이 아니라 양국관계 정상화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외교 문제를 정당 정체성 혹은 이념 논쟁으로 끌고 가는 게 내부 정치 싸움에 효과적일 수는 있다. 그러나 외교 현안 해결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
사람들은 외교 문제가 국내 갈등을 초래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국내 갈등의 불쏘시개로 외교 문제가 동원됐다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이다. 무엇이든 끌어들여 충돌을 일으키는 게 한국의 정치 공간이다. 외교 문제 해결의 중심축이 굳게 세워지는 대신 반일과 친일, 애국과 이적, 여와 야의 대립 축이 우뚝 서 있는게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현실이다.
외교 문제가 내부 문제로 수렴되고, 모두가 내부 투쟁에서의 승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불안정한 대외 정세에도 한국인의 시선은 밖이 아닌, 안을 향해 있다. 모두 ‘한국 정치’ 때문이다.
망치를 들고 있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여야 모두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놔야 한다./ 이대근 논설고문 경향 2019 7.31
대기업 감세로 투자 살아날까
“대기업에 한시적 감세를 해서라도 투자 마중물을 만들자” 촛불혁명 이전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쳤던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내걸었던 구호가 아니다. 집권 3년차를 맞은 문재인 정부가 지난주 발표한 올해 세법개정안에서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세금을 대폭 깎아주겠다고 나섰다. 투자세액공제의 규모와 대상을 대폭 확대해 법인세를 감면해주고 가업상속공제 요건과 주식 할증평가를 완화해 상속·증여세를 줄여준다는 것이다. 모두 그동안 대기업과 재벌 기업주들이 재계와 언론을 통해 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해온 ‘주문서 목록’이다.
불과 2년 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금기시되던 ‘증세’를 직접 거론하고 호기롭게 초고소득 자산가와 대기업에 대하여 소득세와 법인세 최고세율을 전격적으로 인상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정부가 재정의 안정적 조달과 국민편익을 위한 세제개혁 방안을 소상히 밝히는 세법개정안이 증세는커녕 ‘대기업 친화적’ 세제지원으로 급격하게 바뀐 것은 심각한 위기감 때문이다. 수출과 대기업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가 미국·중국 무역분쟁과 일본발 수출규제 앞에 있고, 투자 확대 없이는 경제성장도 어렵다는 인식을 했을 것이다. 투자감면에 좋아하는 고용연계도 포기했으니 그 비장함을 알 수 있다. 세제까지 총동원령이 내려진 것이다.
이번 세법개정안의 대표상품인 ‘투자인센티브 3종 세트’는 설비투자하는 기업에 1년간 5320억원의 세금감면을 해준다. 지난 20여년간 존치된 ‘임시투자세액공제’ 이후 투자감면으로는 가장 큰 규모다. 임시투자세액공제가 감면액 전체의 50%를 10대 재벌이, 80~90%인 약 2조원을 매년 대기업들이 독식했듯이 이번에도 그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에 돌아갈 것이다. 단 1년 한시 시행을 예정하지만 투자감면제도의 속성상 조기폐지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세금 많고 감면제도가 제대로 없어 투자를 안 한다는 대기업은 ‘핀셋증세’도 유보하고 국민의 혈세보조금까지 지원해주니 투자에 적극 나설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실질 경제성장률은 설비투자 증가율과 그 관련성이 매우 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 설비투자는 투자세액공제제도의 시행 여부나 지속성과 무관하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었다. 경기전망이 불투명하고 투자해서 자본을 회수할 수 없는데 사후적 세제 혜택을 받기 위해 과감한 투자에 나설 리 없기에 당연하다.
게다가 중소기업과 달리 대기업은 지금 돈이 없어서 투자를 안 하는 게 아니다. 훨씬 더 감세 규모가 컸던 과거 임시투자세액공제나 법인세율 인하 때도 투자와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했지만 공염불이었다. 주된 수혜자인 대기업은 같은 기간 투자가 아니라 계속 사내유보금만 늘렸고, 지금 30대 대기업만 따져도 약 950조원에 달한다. 이런 이유로 박근혜 정부는 넘쳐나는 대기업 유보금을 투자에 쓰게끔 과도한 유보금에 세금을 매기는 ‘기업소득환류세제’까지 도입했지만 실패했다. 이런 현실에서 정부가 또다시 국민의 혈세인 ‘세금 보조금’을 대기업에 몰아주면서 투자를 기대하는 것은 무모한 세금낭비가 아닐 수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재정건전성이다. 정부는 긴축재정에서 벗어나 초과세수를 활용한 확장재정을 선언하고 양극화 해소와 경제활성화를 위한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에 나섰다. 그 결과 정부부문이 경제성장에도 일정 부분 기여하고 경기부양에도 작지 않은 효과를 보고 있다. 하지만 대내외 상황이 빠르게 악화되면서 세입여건이 녹록지 않은 데다 재정분권 등 세입 감소 요인이 겹쳐 이 정부 들어 처음으로 세수 부족이 현실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이런 때 확장재정에 필요한 세입기반 확충과 필요한 증세는커녕 이전 정부처럼 다시 대기업 감세에 나선다면 재정의 적극적 역할은 대폭 축소되고 국가부채와 이자 증가로 인해 재정건전성이 크게 악화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집권 2년, 고질적인 양극화를 해소하고 대기업 중심 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핵심 정책들이 줄줄이 수정되거나 약화되고 있다. 척박한 토양에 심은 어린 나무이니 물 주고 정성껏 가꿔야 하지만 열매를 따먹을 수 없다는 조급증과 불안감에 초조하기만 하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사회를 포용국가로 만드는 든든한 밑바탕인 국가재정을 위해 ‘소득재분배 세제’는 결코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어려울수록 세금과 세제가 할 일은 과거 정부처럼 막연한 대기업 세금 퍼주기가 아니라 본연의 임무인 확실한 소득재분배와 재정 확보다. 또다시 나라 곳간을 ‘양치기 소년’ 재벌 대기업에 맡길 순 없다.
구재이 | 한국납세자권리연구소장·세무사 경향 2019 7.31
증세 없는 포용복지
지난주 정부가 세법개정안을 발표했다. 재정의 역할이 강조되는 때라 혹시 세입 확충 계획이 담길까 기대했는데 역시 없었다. 5년간 누적해 총 5000억원의 세입이 감소한다. 최고소득층에 세금을 조금 더 부과하고 기업에 법인세를 깎아 주지만 규모가 미미해 사실상 현행 수준을 유지하는 방안이다. 작년에 발표된 총 2조5000억원의 감세안을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러다간 (박근혜 정부가 천명했으나 실제로는 증세 정책을 펴서 이루지 못했던) ‘증세 없는 복지’가 문재인 정부에서 구현될 듯하다.
올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재정의 과감한 역할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세법을 그대로 두고 과감히 지출을 늘리는 방법은 뭘까? 임기 2년은 예상보다 많은 세입이 있었으나 이제 초과세수 행진도 끝났다. 올해 국세 수입은 작년과 비슷한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국채로 갈 듯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가부채 수준은 외국에 비해 낮아 국채를 발행할 여지가 존재한다. 필자 역시 지출 확대를 위해 국채를 활용하자고 말한다. 정부가 포용국가 복지를 주창하지만 여전히 기초생활보장, 장애인복지, 기초연금, 건강보험, 사회서비스, 공공임대주택 등 핵심 분야에서 추가 지출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국채가 지니는 한계도 직시해야 한다. 여기서 조달된 재정은 일회성, 즉 마중물일 뿐이다. 대체로 사회지출은 비가역적이어서 한두 해는 국채에 의존하더라도 그다음부터는 세입제도에서 지속적으로 재원이 마련돼야 한다. 국채 확대를 추진한다면 증세 계획도 함께 논의해야 하는 까닭이다.
대통령은 재작년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중산층과 서민들 증세는 없다, 이는 5년 내내 계속될 기조’라고 못 박았다. 이에 대한 비판이 여당에서도 제기되자 겨우 핀셋 증세로 생색을 내는 데 그쳤다. 시민들의 어려운 가계를 감안한 거라지만 ‘나라다운 나라’의 재정전략과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문재인케어’에선 지난 정부가 물려준 누적적립금이 있다며 법정 국고지원액을 과소지원하고, 국민연금에선 현행 재정불균형을 그대로 놔두는 개편안을 추진하며, 복지 확대 재정은 국채에만 의존하려 하니 참 마음 편한 정부이다.
작년에 3873명을 면접조사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를 보면, “세금을 더 거두어 복지를 확대하는 것”에 대하여 4분의 3이 정당하다고 답변했다. 또한 “복지를 늘리기 위해 지금보다 세금을 더 내야 할 계층”으로 상위 20%만 꼽은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3분의 1에 그쳤다. 시민들이 복지를 체험하면서 재정의 책임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통령이 곰곰이 숙독해야 할 대목이다.
복지가 발전하는 만큼 증세도 이야기해야 한다. 중간계층까지 포함하더라도 직접세 구조에서는 누진증세 혹은 부자증세 효과가 발생한다. 특히 세금의 사용처를 사전에 정하는 ‘복지증세’ 방식이면 세금의 신뢰도 확보할 수 있다. 몇몇 복지단체들이 전체 세목의 개혁 로드맵과 함께 시민의 참여를 이끄는 상징으로 ‘복지에만 쓰는 세금, 사회복지세’ 도입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발표한 1차 사회보장기본계획에서 안정적 재원 방안을 강조하면서 참고사례로 프랑스와 일본의 사회보장세를 소개했다. 보수 정부였지만 복지재정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흔적으로 읽힌다. 반면 문재인 정부가 올해 발표한 2차 기본계획에는 해당 주제의 내용이 거의 복사하듯 1차와 같은데 유독 사회보장세 부문만 빠져 있다.
프랑스에는 복지재정을 감당하기 위해 별도로 사회보장재원조달법이 존재한다. 근로소득에 부과되는 사회보험료뿐만 아니라 여러 세목들이 복지지출과 연계되는 복지증세 구조이다. 일본 역시 소비세를 올리면서 인상액을 모두 복지에 사용하기로 법에 담았다. 복지 재정을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세금이 복지에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세 전략이다.
우리나라에서 사회복지세를 도입한다면 소득세,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등에 다시 일부 세금을 부가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예전의 방위세, 지금의 교육세와 같은 목적세이기에 지출 항목을 미리 명시하면 가구 유형별로 세금액과 복지급여가 정해진다. 시민들은 자신에게 해당되는 안내서에서 추가로 내는 세금액과 새로 누리게 될 복지를 알 수 있고, 대다수는 낸 세금보다 더 복지로 돌려받는 ‘재분배’를 확인할 것이다.
무상급식 논란을 계기로 복지 바람이 분 지 10년째다. 이제 시민들은 복지를 경험하고 세금에 대한 책임도 인식해 가고 있다. 복지증세 이야기를 주저하지 말자. 촛불로 만들어진 정부가 ‘증세 없는 포용복지’ 정부로 기록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경향 2019 7.31
아베의 일본, 반면교사로 삼을 나라
현 런던 시장의 이름은 사디크 칸이다. 전형적인 영국 이름으로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맞다. 파키스탄 출신 부모를 가진 이민 2세다. 그가 미래의 국무총리감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 런던의 시장이 되기 전에는 국회의원이나 내각 각료 등을 지냈다. 옛 식민지 출신이 과거 식민 ‘모국’ 수도의 시장이 됐다는 것은 좀 예사롭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옛 식민지 출신 정치인들은 영국에서 흔하다. 영국 국회 하원의원 650명 중 52명은 옛 식민지 출신의 종족적 소수자들이다. 이는 대체로 영국에서 옛 식민지 계통 주민들의 인구 비율에 비례한다. 물론 이와 같은 소수자들의 정계 진출이 투쟁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981년의 ‘인종 폭동’, 즉 인종주의로 악명이 높은 경찰과 소수자 사이의 난투극 등 소수자들의 저항에 충격을 받은 영국의 권력자들은, 소수자들의 급진화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그 엘리트들을 기존의 제도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좌우간 차별 문제 등이 완전하게 해소되지는 않았다 해도 영국에서 대대로 살아온 옛 식민지 출신들이 스스로를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난민으로 여기기보다는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시민이라고 인식하는 건 사실이다.
제국주의 유산을 완벽하게 청산한 옛 식민 종주국이란 없다. 영국만 해도 문제투성이다. 5년 전 한 여론조사에서 영국인 응답자의 59%가 “자유와 민주주의 같은 가치를 확산시킨 대영제국의 역사”에 “자긍심을 느낀다”고 말한 반면 “제국주의적 과거에 수치심을 느낀다”는 응답자는 19%에 그치고 말았다. 다수자들의 여론이 이렇다 보니 2005년 당시 재무장관 고든 브라운처럼 가끔가다가 “대영제국에 의한 민주주의 가치의 세계화”를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친제국주의적인 발언들을 하는 정치인들은 있다. 그래도 사실 관계가 분명한 제국주의적 대형 범죄(예컨대 3·1운동보다 약 한달 늦은 1919년의 암리차르 학살)를 부정하는 망언들을 정계에서 듣기는 쉽지 않다. 아무리 보수적 정객이라 해도 옛 식민지에서의 여론과 영국 내부의 소수자들의 시선, 그리고 제국주의의 범죄성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된 의견을 통념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주류 학계를 고려해 말을 잘 걸러서 해야 한다.
굳이 계량화해 ‘과거사 청산’에 대해 옛 식민 종주국들에 점수를 준다면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도 디(D)나 이(E)를 면하기는 힘들 것이다. 영국을 현재와 같은 부국으로 만드는 데에 시초 축적의 가능성을 제공한 노예무역 피해자들의 후손들에게 공식 사죄와 배상을 하지 않는 것부터 커다란 감점 요인이 될 터이다. 대영제국의 노예무역은 1833년에 전면 금지되었다고 하지만, 반인륜적 범죄에 시효란 없다. 그런데 영국이 이(E)를 맞아도 일본은 아예 에프(F)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번 무역 보복 사태에서도 명확히 보이듯이 일본은 식민지 과거 청산에도 옛 식민지 주민들과의 관계 회복에도 완전히 실패했다. 이 역사적 실패는 옛 식민지 피해자들도 분노하게 만들지만 사실 일본 본국의 국운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일본같이 자민족 중심의 폐쇄적 사회가 인구 감소의 시대에 불가피하게 들어오게 될 새로운 이민자들을 통합할 수 있을는지 나로서는 극히 의문이다.
탈식민화 이후에 대부분의 옛 제국들은 몇 년 동안이라도 옛 식민지로부터의 이민을 허용했다. 사디크 칸의 부모들은 이렇게 해서 런던에 와서 정착한 것이었다. 일본은 그 반대로 한국이나 대만으로부터의 새로운 이민을 막은 것도 모자라, 이미 일본에 와 있던 옛 식민지 출신들의 국적을 박탈해 피차별 난민으로 만들고 말았다. 옛 식민지 출신들의 정계 진출은 아주 예외적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늘 각종 ‘이지메’가 따라붙는다. 이민자 출신이 예컨대 도쿄 도지사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이야기다. 일본에 귀화한 재일 조선인 아라이 쇼케이(원래 이름은 박경재)가 30여년 전에 선구적으로 일본 국회의원이 됐을 때 차후 도쿄 도지사가 된 이시하라 신타로와 같은 극우파들은 “이 사람이 한국의 국익을 선택할지 일본의 국익을 선택할지 알 수 없다”는 식의 인종주의적 차별 발언을 쏟아내며 괴롭혔다. 결국 아라이는 자살로 내몰리게 되고 일본 정계에서 소수자의 대표들은 지금도 극히 예외적이다.
유럽에서는 잘 알려진 개별적인 제국주의 범죄들을 부정하는 망언들을 우파 진영에서도 쉽게 하지 않지만, 일본에서 일본군 성 노예제 등과 관련된 망언들은 보수정계의 ‘일상사’다. 두 세기 전의 노예무역도 아니고, 70여년 전의, 지금도 생존자들이 살아 있는 강제징용과 노예노동마저도 일본은 사과하고 배상하지 않는다. 독일의 폴크스바겐과 지멘스 등은 이미 20여년 전에 전시 강제징용, 노예노동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배상을 했는데, 일본 업체들은 그 전례를 애써 무시하고 있다. 독일 정부와 기업들은 구체적 피해자들을 개인으로서 배상해 왔지만, 일본은 1965년에 한국 시민들을 어디까지 대표했을지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군사독재 정권에 배상도 아닌 경협 자금과 차관을 건넨 것을 ‘청구권 말소’로 본다. 개개인의 존엄회복권과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배상권, 총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개인의 인권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이런 태도가 피해자와 그 후손들에게 공분을 사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이다. 영국이나 독일의 식민주의, 전쟁 범죄와 관련한 사후 처리도 전혀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본만큼 피해 지역과의 관계 회복에 실패한 경우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실은 일본의 바람직한 지역적 미래를 막고 있는 이 문제는, 일본 시민 사회야말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풀어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국익을 ‘시민 다수의 이해관계’로 해석한다면 아시아 대륙으로부터의 정서적인 고립은 일본의 국익에 정면으로 위반되기 때문이다.
사실 아베 신조 총리나 일본의 극우들과 무관한 일본 기업 종사자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여지가 있는 불매운동보다, 아베에게 저항할 수 있는 일본 사회의 운동 단체들과 연대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야말로 아베의 망동을 극복하기 위한 최적의 전략일지도 모른다. 불매운동에 나서는 사람들의 정서를 십분 이해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아베 정권의 폭주를 막을 주역은 어디까지나 한국 사회가 아닌 일본 사회가 돼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로서 제일 중요한 과제라면 한국이라도 아베의 일본을 따라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베의 일본이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배상에 실패했다면, 대한민국이라도 예컨대 베트남에서 저지른 한국군의 학살과 성범죄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배상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일본이 소수자들의 통합에 실패했다면, 한국이라도 이주민의 절반 이상이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고 응답할 정도로 열악한 오늘날 상황을 제대로 개선해 나가면 하나의 큰 쾌거가 되지 않을까? 아베의 일본처럼 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아베의 일본에 대한 진정한 승리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 한겨레 2019 7.31
한일 갈등은 세계사적 쟁투
아베의 반도체 수출규제와 과거사 문제 제기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단호한 대처는 역대 어느 정부의 대일 정책과 비교해보더라도 진일보한 것이다. 한국인들의 자발적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반일감정 역시 당연한 것이다. 아베는 커져가는 한국의 힘을 제압하려는 의도를 확실히 갖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국은 21세기 방식 항일투쟁에 나서야 하나?
한국과 일본 간의 과거사는 식민지 책임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고, 이 점에서 한-일 관계는 과거 독일과 주변 유럽국가 간의 관계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세계 어떤 제국주의 국가도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하거나 배상하지 않았다는 일본의 주장은 대체로 사실이다. 그래서 한-일 분쟁이 국제 법정에 가면 일본한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미국은 언제나 일본 편이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는 일본의 모든 식민지 침략 과거사를 덮어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틀 안에 있었다. 이 강화조약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후질서 재편 전략의 일환이고, 일본을 미국 주도의 새 국제질서에 복귀시키는 선언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한-일 관계는 한-미-일 관계였다. 개항 뒤 150년 동안 한국이 겪은 비극의 배후에는 언제나 미국과 영국 등의 묵인과 지원이 있었다. 그래서 식민지 책임을 ‘배상’으로 인정받자는 2018년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세계사적 중요성을 가진다. 강제노동을 당한 유대인들이 독일 기업을 상대로 이긴 판결과는 성격이 다르고, 정치적인 이유로 리비아에 배상을 한 이탈리아와도 다르다.
한편 한국인 모두는 피해자이고, 일본과 옛 제국주의 국가는 모두가 가해자인가? 오늘 이 갈등은 아베의 새로운 대일본 제국 건설 기도, 일본의 보수 집권세력이 식민지 강점을 인정하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이나, 그들의 지배를 받아들인 과거 조선 지배층과 친일세력, 그리고 반공과 성장의 이름으로 일본의 과거를 눈감아준 역대 정권,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려 한 박근혜 정부와 외교부, 양승태 사법부의 잘못도 있다.
한편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담에서 한국은 일본과 영국의 로비 때문에 배제된 것은 틀림없으나, 이 회담이 서둘러 추진된 중요한 계기는 6·25 전쟁이었다. 한반도의 전쟁은 한국을 전후 국제사회의 종속변수로 만들었고,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회담의 틀 내에서 과거사를 접고, 성장 전략을 추구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일본의 식민지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한-미 동맹 때문이었고, 경제성장이 다급한 시대적 과제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1965년 당시 일본이 ‘경제협력자금’ ‘독립 축하금’으로 준 5억달러를 ‘보상금’이라고 말해왔다. 사실을 호도한 셈이었다. 일본이 국민들에게 침략의 과거사를 가르치지 않은 것처럼, 한국도 항일독립운동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즉 100년의 한·일 과거사의 굴절은 미·일 동아시아 질서의 하위 주체인 한국의 보수 세력의 협력에 의해 지탱되었다. 그들의 명분은 과거나 현재나 ‘경제’, 즉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필요하다면 ‘피’를 버리고 ‘돈’을 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오늘 1965년 한-일 체제, 1951년 미-일 체제, 더 거슬러 올라가 1910년 미·일·영 등 열강 주도 지배체제를 뒤흔든 것은 한국의 민주화였다. 문재인 정부의 힘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아베와 일본의 보수 세력, 그리고 한국 내 친일/친미 세력은 민주화로 인해 변화된 한국의 위상을 보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한다. 아베의 반도체 수출규제는 일본이 마음먹으면 한국한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나 일본의 한국의 급소 공격은 그 피해가 한국에 그치지 않고 국제무역체제를 흔들 수 있다는 사실도 드러냈다.
그래서 오늘의 한-일 관계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간의 풀기 어려운 숙제를 들추어냈고, 한국은 그 최전선에 있다. 한국 단독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나? 없다. 부품 소재 국산화하겠다고 규제 완화하고 특별연장근로 실시해서 기업 경쟁력 키워주면 일본을 이길 수 있나? 없다.
이 싸움에서 한·일 어느 한쪽이 완벽하게 승리할 수는 없다. 한국으로서는 남북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는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전제다. 대기업의 시장 약탈이 시정되어야 독자적인 기술 축적이 가능하고, 서민대중의 ‘애국심’이 발휘될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가 1965, 1951, 더 나아가 1910년 체제를 뒤흔들고 있듯이, 한-일 관계에서도 민주주의와 복지 선진국이 ‘조용한’ 승리자가 될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장/ 한겨레 2019 7.31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다고?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라는 고약한 제목의 책 초판이 발행된 것은 1997년 8월이었다. 한국 사정에 밝은 일본 종합상사맨 모모세 다다시가 쓴 이 책은 일본어판으로도 출간돼 두 나라에서 70만권 정도 팔려나갈 정도의 베스트셀러였다. 책 출간 직후의 외환위기 속에서 쌓인 한국인들의 울분과 자괴감이 책 판매에 한몫했을 성싶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3대 핵심 품목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배제 방침으로 불거진 격렬한 파장이 소재·부품을 중심으로 일본에 기대고 있는 한국 경제의 약한 구조를 아프게 일깨웠다. 1965년 국교정상화 뒤 계속 적자였다, 소재·부품업을 키우지 못했다, 대기업이 일본 업체와 거래하며 편하게만 장사한 탓이라는 식의 한탄이 여기에 덧붙는다.
한국의 제조업이 ‘조립 가공형’ 중심으로 커오면서 핵심 소재와 부품을 일본에 크게 기댄 것은 사실이나, 소재·부품업 육성을 버려뒀다는 식의 통설은 실상과 다르다. 유엔 무역통계 기준으로 소재·부품 수출시장에서 한국은 6위(2017년 기준)다. 국내총생산(GDP)으로 따진 한국 경제의 순위(2018년 11위)보다 높다. 한국과 일본의 격차도 줄었다. 한국의 소재·부품 수출은 2001년 564억달러로 일본의 32.2%에서 2010년 59.7%(2340억달러), 2017년 82.9%(2817억달러)로 높아졌다. 2010~2017년 일본이 뒷걸음질(-2.0%) 치는 동안 한국은 2.7% 늘린 결과였다. 부품보다 소재, 특히 반도체용 핵심 소재 쪽에서 약하다는 문제는 여전히 안고 있지만, 경제 전반의 성장과 더불어 소재·부품 분야도 커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재·부품업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으레 등장하는 원·하청 관계의 문제도 다른 각도에서 볼 여지가 있다. 우선, 일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의 반도체 전문 기자 이즈미야 와타루가 2008년에 쓴 <전자재료 왕국 일본의 역습>에 이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등장한다. 하청인 소재·부품 쪽은 단가 후려치기와 접대 문화에 시달렸고, 미국의 반도체 업체들과 한국의 삼성전자가 그 틈을 치고 들어갔음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삼성전자 같은 원청과 소재·부품 업체들의 관계 맺음이 국내에서도 일본에서처럼 형성될 수는 없었을까? 결론부터 말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재·부품업의 특성 탓이다.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영역이라 대기업이 직접 하기에 알맞지 않고, 오랜 기간에 걸친 연구·개발(R&D)을 필요로 하는 분야라 어지간한 중소기업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고품질의 소재·부품을 이미 개발해놓은 일본 업체들과 손을 잡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글로벌 공급망으로 얽힌 분업과 협업의 세계경제 체제에서 에이(A)부터 제트(Z)까지 모든 걸 아우르는 자기완결형 경제의 나라는 없다.
일본 아베 정부의 조처는 전세계에 걸친 이런 공급망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는 파괴 행위다. 이제 국내 대기업들로선 예전과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한국과 일본 정부가 어느 시점에 타협해 사태를 봉합하더라도 기업들로선 언제든 다시 비슷한 사달이 날 수 있다는 전제로 대비를 해야 할 처지다. 국내 중소기업을 키우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의 생태계 조성이란 과제가 정부 차원의 추상적 구호에 머물지 않고 기업의 리스크 관리, 나아가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여길 수밖에 없도록 등을 떠미는 요인이다. 정부의 역할과 산학연 협업의 절실함도 덩달아 강해졌다.
모모세는 <…죽어도…>를 펴낸 이듬해엔 <한국이 ‘그래도’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18가지 이유>라는 정반대 제목의 책을 펴냈다. 모모세는 여기서 여러 문제점을 꼽으면서도 ‘한국은 희망이 있다’며 그 근거로 특유의 역동성과 잠재력을 들었다. 사실 앞서 낸 책도 자극적인 제목과 달리 한국을 깎아내리기보다는 ‘한국은 한국적인 제품을 내야 한다, 한국 기업들이 기술 투자에 인색하다, 제품의 질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식의 애정 어린 충고 위주였다. 예기치 못한 악재가 ‘죽어도’를 넘어 ‘그래도’로 나아가는 실마리일 수 있다.
김영배 논설위원 한겨레 2019 7.31
2.94% 그리고 2.87%
몇해 전 서울역 근처 쪽방촌의 마을 공동체 ‘동자동 사랑방’에서 만난 중년 남성에게 들은 이 말이 오래 잊히지 않는다. 당뇨가 심해 일을 하기 어려운 그는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주는 지원으로 살아가는데, “그걸로 겨우 먹고는 살지만, 어디를 가지도 못하고 누구를 만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이동의 자유를 제약당하는 이들은 이동할 때 최대한 돈을 아껴야 한다. 쪽방촌의 가난한 이들이 굳이 서울역 근처 같은 중심지에 모여 사는 이유다.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는 지난 30일 중앙생활보장위원회(중생보위)가 열리는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앞에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이 모여서 기자회견을 했다고 전한다. 이날 발언에 나선 수급자들은 기본적인 생활을 하기도 어렵고, 타인과 만나는 일도 차단하는 급여 수준에 대해 토로했다고 한다.
중생보위는 해마다 이듬해의 최저 보장수준을 정한다. 생계급여 인상의 기준이 되는 ‘기준 중위소득’을 정하는데, 이날 열린 회의에서 내년 4인 가구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생계급여가 월 최대 142만4752원으로 정해졌다. 기준 중위소득을 정하는 통계를 무엇으로 하느냐 논란을 벌이다 결국 4인 가구 기준 올해 월 461만3536원에서 474만9174원으로 2.94% 인상을 결정한 데 따른 것이다. 4인 가구 생계급여 기준선은 올해에 견줘 내년에 4만원가량 오른다. 중생보위가 열리는 회의장 앞에 모인 이들이 외친 대폭 인상 요구는 그렇게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
해마다 조용히 결정된 기준 중위소득 인상률은 생각보다 낮다. 기초생활보장을 생계·의료·주거·교육급여 등으로 나눈 2015년 이후 인상률을 보면, 2016년 4.00%, 2017년 1.73%, 2018년 1.16%, 2019년 2.09%였다. 2020년 인상률까지 더하면 5년간 평균 인상률은 2.38%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낮다. 기초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은 2017년부터 2019년 사이 기준 중위소득 인상률이 1999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 이후 가장 낮다고 분석한다.
기초수급자 당사자의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 중생보위에서 결정된 이 금액은 많은 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동자동 사랑방에서 만났던 그 남성 같은 1인 가구의 내년 생계급여 상한은 52만7158원, 주거급여를 따로 받는다 쳐도 한달을 버티기 버거운 돈이다. 한달 최대치가 142만4752원인 4인 가구는 1인당 30만원이 안 되는 돈으로 한달을 살아야 한다. 숫자를 곰곰이 곱씹어도 도저히 이 숫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잘 그려지지 않을 때가 있다.
지난 12일 새벽에 결정된 내년 최저임금은 8590원, 전년 대비 인상률은 2.87%였다. 고용노동부 장관이 최종 시한으로 말한 15일까지 최소한 2~3일은 더 논의를 하고 결정될 것이란 전망을 뒤집고 최저임금위원회는 예년보다 빠른 속도로 2020년 최저임금을 결정했다. 이미 최저임금 속도조절론이 대통령, 부총리 등의 발언을 통해 대세로 굳어진 상황에서 이따금 사람들이 ‘올해 최저임금 인상폭은 어떻게 될까?’ 물으면 답하기 어려웠다. 되었으면 하는 숫자와 될 것 같은 숫자 사이의 간극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지곤 했다. 이날 새벽 6시 밤새 최저임금위원회가 열리는 세종청사를 지키던 노동 담당 기자의 전화가 울리고, 2.87%라는 숫자를 들었지만 그냥 그렇구나 싶었다. 내년 물가인상률과 경제성장률 추정치를 더한 것보다 낮은 숫자라는 분석을 보고 그 의미가 조금 와닿았지만, 최저임금 인상률이 곧 내년 임금 인상률인 사람들에게 2.87%가 어떤 의미일지 충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노동, 교육, 복지, 여성 분야를 담당하는 기자들과 함께 사회정책팀을 하면서 정부가 결정하는 숫자들을 전할 때가 자주 있다. 지난 1년 담당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에 흐뭇한 숫자가 적혀 있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이 숫자들에서 이 사회가 변하고 좋아지고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단 것이다. 포용국가, 노동존중 정부의 여러 위원회가 최저선의 사람들에게 제시한 숫자의 의미를 오래 곱씹게 될 것 같다. /신윤동욱 사회정책팀장 한겨레 2019 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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