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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19.6.2~6.13 ‘전광훈’, 그리고 개소리에 관하여

by 이성근 2019. 6. 16.

먼지 쌓인 환경·생태 공약 경향 2019.06.13.

한국 에너지 정책의 모순 경향 2019.06.13.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기 경향 2019.06.11.

1984’ 출간 70, 조지 오웰을 기억해야 할 이유 경향 2019.06.11.

6.12 북미 공동성명 1년에 부쳐 프레시안 2019.06.10.

반공에 포획된 언론인 [미디어오늘 1203호 사설] 2019.06.09.

임은정의 '검찰애가'···경찰청에 출석하며 경향 2019.06.09.

전광훈’, 그리고 개소리에 관하여 경향 2019.06.09.

 

인공 지능에게 배워야 할 미덕 한국 2019.6.8.

하이힐과 쿠투(KuToo)’ 2019.06.05.

현충원의 애국지사와 매국노, 야스쿠니 국민일보 2019 6.4

일본처럼 되지 않으려면? 한겨레 2019-06-03

게임 중독 한국 2019 6.3

이 시대 최고의 개혁은 무엇일까 한겨레 2019-06-03

두개의 세상 한겨레 2019-06-02

소외된 다수를 향한 저널리즘이 돼야 경향 2019-06-02

망조든 대학, 암울한 한국의 미래 경향 2019-06-02



먼지 쌓인 환경·생태 공약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동력은 다소 잃었으나 기득권 카르텔형 부패국가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는 계속되어 보입니다. 비록 가시적 성과는 흐릿해도 초심으로 제시했던 핵심공약 대부분이 시도되었고 지금도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약 이후 전혀 실천할 맘이 없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국토 환경개선의 근간인 생태계 보전을 위한 자연자원 총량관리제도환경영향평가제도개선이 그것입니다. 실천은커녕 논의조차도 없습니다. 이 제도는 지금도 맡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전문가를 바보로 만들어버립니다.

 

정부 논리로는 우리나라 환경영향평가법은 없어도 됩니다. 가방끈이 조금 긴 자가 개발예정지역을 잠시 둘러보고 상상으로 조사서류를 작성하면 가장 힘든 조사과정이 쉬이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전문가 1인이 단 3시간 만에 방대한 지역에 7개 분야 전문조사를 마쳤어도 정당하답니다. 그 전문가의 눈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늪지대에 널린 수달과 삵의 배설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혹여 누군가가 문제를 밝혀도 일부 부족했다고 간단히 인정하면 됩니다. 조사 당시 안 보였을 뿐이니까요. 문제를 만든 사람만 괜한 짓 한 게 됩니다. 심지어 계약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조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을 전문 조사자로 버젓이 내밀어도 문제되지 않는다는 궤변의 논리까지 정부가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성실한 전문가는 정말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앞으로 우리나라 멸종위기종 목록은 모두 없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개발로도 멸종되지 않고 알아서 잘 살기 때문입니다. 모든 멸종위기 동물은 다리가 달려 서식처가 파괴되면 알아서 제 살 곳을 찾아가고, 식물은 옆으로 옮기면 됩니다. 보존할 가치가 높은 지역은 한반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대단하다고 자랑했던 설악산 정상부 고산지대도 가치가 없답니다. 산양은 딴 데 가서 산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갈까요?

 

개발에 의한 환경영향을 줄이려는 법률은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한데 정작 이 법의 해석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지역에서의 환경영향평가는 말 그대로 요식행위가 되었습니다. 법률의 허우대는 멀쩡합니다만 이는 다만 의미 없는 검은색 글자일 뿐입니다. 법으로 환경의 가치가 강화됨에도 왜 그 중요한 야생생물을 연구하는 전문가와 대학교 전공은 대부분 사라졌을까요? 열심히 하면 일자리를 뺏기는 이상한 법 때문입니다. 국가가 나서서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하니 배움의 열정과 자긍심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그러니 대학에서 이런 전문가를 양성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성실하면 일할 수 없는 이상한 법 때문에 복붙의 비양심적 업체들과 무늬만 전문가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겠지요. 이제는 학문의 근간이 되는 생물분류군별 조사자조차 섭외하지 못하는 현실이 대한민국 환경의 현 주소가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더욱 열악해지는 오염국가 대한민국에서 왜 병에 걸렸는지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네들은 거짓과 진실도 다수결로 판정한답니다. 짐짓 점잔을 빼고, 권위를 내세우는 판정단에는 거짓말한 당사자가, 거짓을 묵인했던 사람이 들어와도 무방하답니다. 이렇게 거짓은 또 진실이 됩니다. 그리고 항변할 수 없는 생물들은 사라집니다.

 

최악의 환경오염 국가에 살지만 이들에게 표를 주는 우리가 정부를 욕하면 안됩니다. 우리 동네가 개발되면 잘살 것이라는 허상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요. 국정농단을 겪고 탄생한 정부조차 이 공약의 먼지를 털지 않아도 되는 이유겠지요. 정치가는 정권을 잡기만 하면 공익은 접어두고, 소위 통 큰 개발로 주민을 기망하여 표를 구걸해야 하니 자본과 권력의 지향점이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이명박표, 최순실표 막개발이 멈추지 않는 이유이겠지요.

 

눈앞의 욕심은 질병으로 돌아옵니다. ‘생태계 보전공약에 쌓인 먼지를 털어낼 시간입니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경향 2019.06.13

 

한국 에너지 정책의 모순

전 세계가 온실가스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한국도 그 몫을 해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한국이 최근에 내놓은 3차 에너지 기본계획은 석탄과 원자력 의존도를 낮추고 재생에너지와 천연가스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전체 에너지 중에서 재생에너지 비중이 2040년에는 최대 35%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중요하고도 현명한 전환 조처로서 세계적 추세에 발맞추는 것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태양열과 풍력을 활용하는 핵심 기술을 획득하고, 이동 수단에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데 필수적인 배터리 관련 기술을 촉진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위험이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깨끗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를 도입하기 위해 과감한 조처를 단행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필요성은 최근 유엔 사무총장이 내놓은 요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2020년부터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새로 석탄발전소를 건설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요청에 부응하도록 한국 내에서 불필요한 석탄 사용에 제동을 걸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관련 분야 투자를 중단해야 한다.

 

에너지 경제 분야의 싱크탱크인 카본 트래커 이니셔티브에 따르면, 한국은 석탄으로 인한 좌초자산 발생 가능성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좌초자산은 시장 환경 변화로 자산 가치가 떨어져 상각되거나 부채로 전환되는 자산을 뜻한다. 손실액은 106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됐다. 이는 석탄발전을 선호하는 현재 한국의 정책이 안고 있는 규제상 허점 때문이다. 기후 관련 조처들이 가속화되고 재생에너지 기술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미 쇠퇴한 석탄산업을 붙들고 있는 한국 정부의 정책은 이와 같은 잠재적 피해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의 전환을 추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논란을 빚고 있는 해외 석탄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찌레본 2호기 석탄발전소 프로젝트 등이 그것이다. 한국 정부가 소유한 한국전력은 베트남의 응이손 2호기 석탄화력발전소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또 한국수출입은행과 한국무역보험공사는 인도네시아의 자와 9·10호기 석탄발전 프로젝트 투자에 관여하고 있다. 한국수출입은행과 한국무역보험공사는 2010년 이후 주로 동남아 지역의 석탄발전소 프로젝트에 100억달러 이상을 투자해 왔다.

 

세계 2위와 3위 규모의 석탄발전소가 충청남도 당진과 태안에 있다. 한국의 석탄발전소 절반이 모인 이곳 충남은 2026년까지 14기의 석탄발전소를 퇴출시키기로 했으며, 재생에너지를 촉진하여 에너지의 절반가량을 충당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야심찬 석탄 퇴출 계획이다. 지난해 공무원연금공단과 사학연금도 석탄발전소에 대한 투자를 중단하고 대신 재생에너지 사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조처는 석탄으로부터 탈출하는 국제적 투자 추세를 따른 것이다. 이미 전 세계 100개 이상의 금융기관들이 석탄화력발전소에 대한 투자에서 이탈했다. 좌초자산으로 전락할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세계 최대 은행 중 하나인 미쓰비시 UFJ 금융그룹은 새로운 석탄발전소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중단했다. 또 세계 최대 연기금 펀드인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42억달러에 이르는 석탄 관련 투자와 80억달러에 이르는 석유 및 천연가스 관련 투자를 곧 중단한다. 재생에너지에 투자할 금액 200억달러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일본과 노르웨이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정부 연금 펀드인 한국의 국민연금공단도 이러한 추세에 주목해야 한다. 세계 석탄발전소의 40% 이상이 이미 수익 중단 상태일 뿐만 아니라 투자금을 잡아먹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약속한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 진정나아가려면, 한국은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를 통해 지속하고 있는 해외 석탄발전소 투자를 중단하고 석탄발전을 비호하는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 그래야만 공들여 조성한 정부 자금을 석탄 관련 좌초자산의 덫에 빠뜨려 날려버릴 위험을 피할 수 있다.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온실가스 탈출 여정을 선도하는 리더가 될 수 있다. 석탄에서 태양광과 풍력으로 투자를 빠르게 전환하고 그 이익을 취하여 경쟁력을 확보한다면, 일본과 중국을 압도하는 주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유엔총회의 기조연설에서 언급한 대로 기후변화 대응과 저탄소 경제로의 전환과제를 이행하는 기회가 되고, 아시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성화를 밝히는 주역이 될 것이다.

크리스티나 피게레스 전 유엔 기후변화협약(UNFCCC) 사무총장 경향 2019.06.13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기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시민으로서 자기 견해를 가지고 당당하게 발언하는 여성·청년들은 너는 너무 정치적이라는 타박을 듣기도 한다. 때로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은 보통의 생활인뿐 아니라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민망하고 부담스러우며, 천박한(?) 것으로까지 간주된다. 요즘처럼 현실정치가 천박한 막말과 서민의 삶과 무관한 정쟁으로 점철되면 다시 탈정치·반정치의 힘은 커진다.

 

그런데 이 같은 정치에 대한 의도된(또는 강요된) 무관심은 한편 역사적으로 구성된 정치문화의 일부이다. 멀리 가면 태생부터 외세의 침탈과 극단적 이념대립 때문에 수많은 지사들과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된 현대 한국 정치가 배경이다. 예컨대 황순원 같은 대작가가 <소나기>(1953) 같은 초등학생들의 순수한우정(?) 이야기 같은 것을 쓰거나 평생 칼럼 같은 잡문을 멀리한 것도, 그가 겪은 참담한 이념 대립과 강요된 사상전향 때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군부독재 시절 부모들은 자녀들이 운동과 정치에 가까이 갈까 늘 전전긍긍했다. 박정희·전두환에게 저항한 사람들이 어떤 희생을 당했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명박근혜라 상징되는 퇴행의 시대에는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이 강하게 새로 구조화되었다. 그래서 학생은 학생운동으로부터, 교수는 학술운동으로부터, 시민들은 노동운동과 최대한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누가 조장하고 누구에게 유리한 것이었을까?

 

과도한 정치열과 정치혐오(냉소)가 동전의 양면으로 상존하는 한국에서 건전하고 성숙한정치적 시민으로 살고 처세하기란 쉽지 않다. 움베르토 에코의 표현을 빌리면 현실정치라는 바보에게 웃으면서 화내기도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2016~2017웃으면서 화내기의 높은 경지를 실행해보았다. 촛불항쟁은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온통 망쳐놓은 정치에 대한 고도의 웃으면서 화내기였다. “이게 나라냐?” 시민들은 실로 어이없고 화가 났지만, 마치 축제라도 벌어진 듯 매주 장수풍뎅이연구회, 민주묘총, 화분안죽이기실천시민연합, 고산병연구회 같은 깃발들을 들고나와서 창의력을 뽐내고 아이와 가족들 또 친구들과 함께 직접행동을 수행했다. 그것은 혹자들의 안타까운 바람처럼 혁명에는 못 미쳤지만, 분명 대단한 민주주의의 성취였고 세계 어느 나라에 견주어도 높은 반폭력시민성의 증거였다. 시민들이 너무 빨리(?) 정치를 정치인들과 새로 선출된 정부에 맡기고 일상으로 돌아갔던 것은 차라리 아쉬웠다.

 

그런 고도의 정치능력은 오랜 시간의 단련 덕분에 가능했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원점에는 1980년의 광주항쟁과 1987년의 6월항쟁이 있다. 32년 전의 오늘, ‘웃으며 화내기는 불가능했다. 쏟아지는 최루가스와 백골단 폭력 앞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학생과 노동자들은 전국의 민정당 사무실과 파출소를 공격했다. 항쟁을 겪었던 부산이나 광주에서만이 아니라, 대구나 대전처럼 얌전한(?) 동네에서도 그랬다. 시민들은 물론 이 반폭력을 찬성하고 격려해주었다.

 

‘87년체제는 지루하고 낡았지만, 시민들은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권리를 다하며 직접행동과 대의제 양쪽을 다 사용하여 일상과 헌정을 지켜내는 정치적 능력과 경험을 보유하게 되었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 선진정치문화가 아직은 대한민국 사람 모두의 것은 아니다. 지역주의, 극우 정치종교에 기댄 시대착오와 냉전 공안 세력이 실재한다. 자유한국당 인사들의 천박한 인식과 사세에 맞지 않는 좌파’ ‘독재따위의 어설픈 수사, 군복과 태극기를 두른 패션이나 군가와 새마을노래 등이 난무하는 태극기집회는 현실이다. 안타깝게도 그 수준은 한국 민주주의 문화의 일부이다.

 

태극기집회를 눈여겨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그 옆을 지나가는 보통의 시민들과 젊은이들이 거기에 어떤 눈길을 보내는지? 황당함, 불편함, 경멸, 연민 등일 것이다. 그럼에도 90%의 시민들은 그들에게 항의하거나 시비 걸지 않는다. 황당한 내용의 집회를 열고 쿠데타를 선동하거나 성조기를 몸에 두르고 활개 칠 자유조차 봐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두운 한국 정치사와 타락한 기득권을 반영하는 안쓰러운 행위임을 이해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소위 보수가 조장하는 수준 낮은 정치문화에 대한 시민들과 생활인들의 인내가 차츰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겠다. 이 시민들이 전두환의 포악과 박근혜의 암둔함을 내친 항쟁의 단호한 주체였다는 점을 6월항쟁 기념일에 새겨본다. 특히 여성·청년들에게 너는 너무 정치적이라 타박하지 마시라.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야말로 꼰대이거나 새로운 시민정치의 싹을 배제하려는 술수에 동참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 경향 2019.06.11

 

1984’ 출간 70, 조지 오웰을 기억해야 할 이유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긴밀히 연관돼 있다. 인문학 가운데 철학과 역사학은 정치학·경제학·사회학 등 사회과학의 기초를 이뤄왔다. 그러면 문학은 사회과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문학 가운데 사회과학에 영감과 통찰을 안겨준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1984>를 들고 싶다. 특히 <1984>는 사회학·정치학·신문방송학 등에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오웰은 이 소설에서 당대 현실을 해부한다. 그가 겨냥한 것은 파시즘과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 비판이다. 둘째, 오웰은 미래 사회를 전망한다. 그가 우려한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감시사회로서의 미래다. 오웰이 예견한 것은 디스토피아 세계다. 권력에 의한 감시와 통제라는 우울하고 섬뜩한 오웰의 경고는 정보사회에 대한 선구적인 통찰을 이뤄왔다. 널리 알려졌듯 <1984>는 초고가 쓰인 1948년의 ‘48’‘84’로 바꾼 것이다. 이 초고가 194968일 세상에 나왔으니 지난 토요일은 <1984> 출간 70년이 되는 날이었다.

 

서구 사회에서 오웰의 <1984>가 누린 명성은 앞선 세대의 고전들에 필적했다. 2009년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주요 언론사와 대형 도서관의 추천도서 목록 및 관련 기록을 토대로 뽑은 역대 세계 최고의 100대 명저에서 <1984>는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20세기 전반을 대표했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3위를 기록했다. <1984>2007년 일간지 가디언에 의해 ‘20세기를 가장 잘 정의한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4>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소설의 제목인 1984년에 치러진 지구적 이벤트였다. 198411,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미국과 유럽을 인공위성으로 연결한 텔레비전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선보였다. 백남준은 텔레비전이 빅브러더의 대중 통제와 조작의 수단이 될 것이라는 오웰의 전망에 이의를 제기했다. 백남준이 주목한 것은 소통을 위한 매체로서의 텔레비전의 기여였다. 텔레비전의 역할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나의 경우 소통의 자유라는 긍정적 측면보다 대중의 통제라는 부정적 측면이 더 크게 보이니 백남준보다는 오웰의 견해에 더 가까운 셈이다.

 

<1984>가 지난 70년 동안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아우르며 미쳤던 가장 중요한 영향은 감시사회로서의 현대사회의 그늘에 대한 성찰적 계몽에 있었다.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나라 오세아니아는 텔레스크린·사상경찰·마이크로폰 등을 이용해 개인의 생활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한다. 이 감시와 통제를 위해 오웰이 내세우는 허구적 존재가 빅브러더다. 빅브러더는 사회이론가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분석한 일망감시체제인 파놉티콘’(원형 감옥)과 닮아 있고, 오늘날 우리 일상이 속속들이 기록돼 있는 빅데이터를 떠올리게 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1984>의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당의 슬로건이다. 당은 과거의 기억을 통제하고 조작하며, 이를 바탕으로 미래 사회에 대한 항구적 감시 체제를 완성한다. 감시 체제는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분석하듯 자본주의·산업주의·군사적 힘과 함께 현대성을 이루는 한 요소이자, 정보사회의 도래와 진전으로 더욱 강화돼온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한 그늘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오웰의 비관적인 전망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금 이 칼럼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1984>의 텔레스크린·사상경찰·마이크로폰 등에 대응하는 오늘날의 신용카드·e메일·휴대전화·폐쇄회로(CC)TV·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은 인간의 자유를 확장시킨 것인가, 구속시킨 것인가. 둘 다 옳다는 절충적 관점에서 우리 인류는 정보사회의 진전이 가져온 자유의 확장과 함께 그 기술적 전체주의가 낳아온 자유의 구속이 공존하는 이중 사회의 그물망 속에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분명한 것은 오늘날 시민 다수의 사생활을 이제 국가와 기업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추적하고 감시하며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웰이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이러한 권력에 대한 일관된, 그리고 성찰적인 비판이었다. 빅데이터, 가짜뉴스, 포퓰리즘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는 우리 시대에 <1984>는 현재진행형이다. <1984> 출간 70년을 맞이하여 조지 오웰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싶은 이유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19.06.11

 

6.12 북미 공동성명 1년에 부쳐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 1년이 지났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작년 6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 이후 1년간을 복기하면서 드는 탄식어린 의문이다.

 

북미 공동성명은 1항에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2항에 "한반도의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3항에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차례로 담았다. 이러한 합의 사항 배치는 1990년대 초반 북미 협상이 본격화된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서 북미 양국이 한반도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그 뿌리를 캐내겠다는 의미를 품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성공의 저주'를 잉태하고 말았다. 미국 주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속고 있다'는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약속한 종전선언도 깔아뭉갰고, CVID보다 훨씬 일방적인 FFVD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 이를 비핵화의 원칙으로 밀어붙였다. 대북 제재 완화와 해제는 북미 공동성명의 '예외'라는 입장도 관철시켰다.

 

트럼프도 뒷걸음쳤다. 북한이 핵실험과 장거리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중단을 약속하자 '급한 불'은 껐다고 여겼다. 또한 김정은이 경제건설에 의욕을 불태울수록 이를 약점으로 여기곤 제재에 더욱 집착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장삿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북 협상에는 느긋한 태도로 돌아서곤, 중국과의 무역전쟁, 한국과 일본을 상대로 한 방위비 분담금 인상 및 무기 판매 증대에 초점을 맞췄다.

 

북한도 1차 북미 정상회담 성공에 따른 도취감에 취한 나머지 시야는 흐려지고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은 최고 지도자의 결정이 곧 법처럼 간주되는 체제이다. 그래서 김정은은 트럼프와의 합의가 잘 지켜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과는 달리 다원주의 체제이자 견제와 균형을 국정 원리로 삼고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의회와 여론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한반도의 현상 변경을 향한 '작용'이 일어나면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세력의 '반작용'도 커진다는 점은 과거에도 수차례 확인된 바였다. 그런데 북한은 이러한 점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북한의 자아도취는 관성으로 이어졌다. 1차 북미정상회담을 전후해 '단계적·동시적 조처'를 숱하게 주장했는데, 이는 그 의도와 관계없이 미국의 회의론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말았다. 미국 주류는 "김정은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신념처럼 받들어왔다. 이런 그들에게 북한의 '단계적·동시적 조처' 주장은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는 시늉만 하고 영변 핵시설 폐기와 같은 일부 양보만 하고 결국 핵보유국 지위를 노리는 것"이라는 신념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이들에게 '단계적'이라는 표현은 북한의 시간끌기로 비춰졌고 그래서 1차 북미 정상회담 및 그 이후 과정에 대한 혹평으로 이어졌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6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 카펠라 호텔에서 첫 북미 정상회담을 가진 뒤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이를 교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물론 이러한 진단에 북한은 억울할 수 있다. 단번에 비핵화를 할 수 없고 미국의 상응조치도 마땅히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단계적·동시적 조처'는 상식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북한은 6.12 정상회담을 전후해 핵실험 중단 및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중단 및 엔진 시험장 해체, 미군 유해 송환 등과 같은 선제적인 양보조치들도 취했다.

 

하지만 지난 25년 동안 '북한의 도발북미 협상미국의 양보북한의 재도발'이라는 패턴에 당했다고 여겨온 미국의 주류는 북한의 주장과 초기 조치들을 또 하나의 속임수로 여겼다. 특히 북한이 핵 신고와 검증, 그리고 핵무기 및 핵물질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언약조차 하지 않은 것을 두고 집중적으로 문제를 삼았다.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한 문재인 정부의 선의와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2018년 대전환은 실력보다는 운이 많이 따랐다고 볼 수 있는데, 정부가 이를 실력으로 자만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트럼프가 한미군사훈련 '중단'을 약속했던 만큼 문재인 정부는 이를 기회로 삼았어야 했다. 하지만 중단이 아니라 '축소'를 선택하고 말았다. 4.27 판문점 선언에서 "단계적 군축 추진"에 합의했는데, 그 직후 역대급 군비증강 계획을 내놓은 것도 아쉽다. 대북 제재 문제와 관련해 미국에 끌려 다닌 것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비핵화를 둘러싼 북미간의 동상이몽이 커지고 있었는데, 문재인 정부는 '같다'고 우기면서 한국식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남북미 3자의 이러한 문제점들이 부정적인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2차 북미정상회담은 '하노이 노딜'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북미 협상은 기약 없이 표류하고 있고 남북관계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미중간의 무역전쟁이 점입가경으로 치달으면서 불확실성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졸저 <비핵화의 최후>에 담았던 것처럼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에 대한 나의 전망은 어둡다. 하지만 어둠을 뚫고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운명적 역할은 북한과 미국으로 하여금 역지사지의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다.

 

미국을 상대로는 '트럼프가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면서 제재를 계속 가하는 것은 데이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 깨지기 쉬운 비핵화 협상에 이것저것 섞으면 안 된다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한다. 북한을 상대로는 '비핵화의 핵심인 핵물질과 핵무기 폐기 방안을 밝히지 않으면 트럼프가 미국 주류의 저항을 이겨낼 수 없다'는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아우르면서 현실가능하고 미래지향적인 '한국식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 프레시안 2019.06.10

 

반공에 포획된 언론인

선우휘는 40년 가까이 언론인이자 불꽃’(1957) 등을 쓴 소설가다. 교사, 기자, 군인, 작가를 거치며 조선일보에서만 25년 일하다 1986년 은퇴했다. 선우휘는 취재 경험은 거의 없었다. 처음부터 논객으로 출발했다.

 

1960~1970년대 문학논쟁 땐 시종 참여주의에 반대하면서 일관되게 보수를 대변했다. 1970~1980년대엔 칼럼으로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을 강하게 비판했다. 동료 언론인조차 198211월 이래 4년 가까이 쓴 선우휘 칼럼이처럼 비방과 칭찬이 심한 글도 드물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선우휘는 192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1943년 경성사범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해방까지 2년간 교사였다. 19451123신의주학생사건을 겪은 뒤 소련군과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에 환멸을 느끼고 월남했다.

 

19462월 월남해 동향인 방응모가 운영하던 조선일보에 들어갔다. 얼마 뒤 기자를 그만두고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밀항하다 미군에 들켜 좌절됐다. 1948년 제주 4·3 1949년 정훈장교로 임관한다. ‘사상계1957불꽃을 쓴 선우휘에게 동인문학상을 준다.

 

1957년 대령 예편하고 1958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됐다. 1961년 다시 조선일보로 와 논설위원을 하고 1963년 편집국장이 됐다.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 때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다.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옥고를 치렀다.

 

선우휘는 적어도 60년대 중반까지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이었다. 리영희는 그가 동경대 연수 뒤 1966년부터 친미 친독재로 바뀌었다고 했다. 신동엽 시인이 쓴 김수영 조사를 비판한 선우휘 칼럼 현실과 지식인’(1969)은 보수 회귀 선언이었다. 문학평론가 한수영은 이후 전개되는 선우휘의 글은 모두 이런 사상적 선회의 잉여이자 분비물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도 197397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에서 김대중 납치를 다루었다. 대부분 입에 올리길 주저하던 때 그가 사설로 김대중 납치를 직접 거론했다. 중정이 나서 조선일보를 회수하고 선우휘는 지방으로 피신했다. 방우영 사장이 정부와 교섭 끝에 정중한 사과편지를 이후락에게 전달하고 마무리했다.

 

다시 선우휘는 1977519일 조선일보 해직기자들이 경영주를 상대로 한 부당해고무효확인소송항소심 공판에 사측 증인으로 나왔다. 선우휘는 단순히 동아일보와 한국일보가 하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고 말했을 뿐이라고 궁색하게 답했다. 서울대 안경환 교수는 조영래 평전에서 선우휘의 증언은 그를 존경했던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실로 충격이었다고 했다.

 

선우휘는 내가 욕 먹기 시작한 건 월남 패망 직후 1976년 명동사건 때 지식인 종교인들이 위기를 고조시켜서야 되겠느냐는 글을 썼던 때부터라고 밝혔다. 1979YH 사건 땐 이래선 안 될 텐데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여공들은 어쩌자고 신민당사로 들어간 것이며 신민당은 또 어쩌자고 그네들을 받아들였던가라고 썼다.

80년대 학생운동이 한창일 땐 해방 후 40년간 공산주의자들과 사투를 벌이며 살아남은 기성세대가 아직도 적지 않다. 만약의 경우 그들은 가만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며 학생들을 협박했다.(19851211)

 

이런 선우휘에게 같은 처지의 백기완과 지명관은 체제와 반체제, 좌와 우의 경계를 넘어섰다고 평가했다. 꽤 후한 헌사다. 겉으론 중용과 화해를 주장하지만 늘 사회적 약자에게 굴종을 강요했던 수많은 선우휘 기자가 오늘도 넘쳐난다. [미디어오늘 1203호 사설] 2019.06.09

 

임은정의 '검찰애가'···경찰청에 출석하며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가리라그리 마음먹고 가지만, 기실 바람이 아니다 보니, 그물에 걸리면 생채기가 생긴다. 이렇게 부딪쳐 가다 보면 결국 그물이 찢길 터. 그리 믿고 씩씩하게 걷자. 그리고내 뒷사람들이 아프지 않게 이 그물을 찢어버리고 말테다.”

 

20129, 민주화운동 거목이신 박형규 목사님 과거사 재심사건에서 무죄를 논고하며 검찰 과오를 반성하였다가 간부들에게 시달린 후 일기장에 남긴 다짐입니다. 검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저처럼 괴로움을 겪지 않아야, 후배들이 떳떳한 삶을 한결 쉽게 선택할 수 있고, 그래야 사법 정의가 바로 설 수 있겠지요. 검사이자 선배의 의무입니다.

 

그 해 12, 또 다른 과거사 재심사건에서 무죄를 무죄라고 말하기 위해, 검찰청법 조문 사이에 잠자고 있던 이의제기권을 깨웠습니다. 이의제기권은 상급자의 위법한 지시에 저항할 수 있는 합법적인 무기라, 2004년 도입되었음에도 수뇌부가 절차규정을 만들지 않는 방법으로 사문화시켜 검사들이 그 존재조차 잘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법전을 뒤지다 우연히 이의제기권 조항을 발견하고, 누가 감히 행사할까 싶어 웃었는데, 문득 돌아보니 제가 꺼내들고 있었지요. 중징계 받았지만, 5년에 걸친 소송 끝에 징계는 취소되었고, 업무 특성상 절차규정을 만들 수 없다고 우기던 검찰은 201712월 절차규정을 결국 만들었습니다.

 

안도하고 감사하면서도, 무언가 미진하고 허전했습니다. 뭘까? 왜지? 금방 답을 찾았습니다. 항명을 용납하지 않는 조직 문화에서 누가 감히 행사할 수 있나라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이의제기권은 다시 잠들어버릴 것이란 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계속 저에게 묻고 또 물었습니다. 20183, 저는 검사들의 직무유기와 직권남용을 징계하고 수사해 달라고 내부 제보시스템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상급자의 위법한 지시에 복종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에 가담하면, 검사들도 처벌 받는다는 명확한 선례를 만들어보기로 마음먹었지요. 항명으로 인한 불이익도 두렵지만, 복종으로 인한 불이익이 더 크면, 검사들도 결국 이의제기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을테니까요.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 없이 상급자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사람은 검사일 수 없습니다. 그런 검사들을 처벌하여 상명하복을 최우선시하는 검찰의 조직 문화에 경종을 울려 검찰 기강을 바로 잡아야만, 검찰이 바로 설 수 있고, 검찰이 바로 서야만 사법 정의도 바로 섭니다. 그래서, 저는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동료들의 잘못을 조사해 달라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검찰에서 노골적으로 제 식구 감싸기를 하여 사표만 수리하고 사건을 덮었다가 외력에 떠밀려 뒤늦게 수사 중인 사건들이 마침 있었고, 검사들의 범죄를 눈감아준 검사들에 대한 징계시효와 공소시효가 다행히 남아있어, 선례를 만들 천재일우의 기회였지요. 그러나, 기소 독점권을 가진 검찰이 스스로에게 족쇄가 될 선례를 결코 만들려 하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정능력이 있는 검찰이었다면, 지금처럼 거센 개혁 요구에 직면하지 않았을테까요.

 

예상대로 대검은 2015년 부장검사와 귀족검사의 성폭력범죄를 은폐한 자들에 대한 징계와 수사 요청을 묵살했습니다. 부득이, 저는 중앙지검에 고발장을 냈으나 1년이 넘도록 진척이 없습니다. 대검에서 이미 직무유기가 아니라고 선언한 사건이라 중앙지검의 결론이 다를지그리 기대하지 않았습니다만, 고발인 조사를 받고 보니 더욱 기대를 접게 되었습니다. 검사동일체 원칙은 아직도 확고한 검찰 현실이고, 기소 독점권과 수사권으로 쌓아올린 검찰의 방어벽은 너무도 강고합니다. 재정신청을 염두에 두고 고발장을 제출한 것이라 실망할 것 없는데도, 서글픈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2016년 부산지검 귀족검사의 공문서위조 은폐 사건을 가지고 경찰청으로 갔습니다. 상명하복이 검사들에게 면죄부가 될 수 없고, 검찰의 조직적 일탈도 법에 따라 처벌 받는다는 선례를 만들 때까지 계속 두드려 볼 각오니까요. 531, 경찰청에 출석하여 포토라인에 서서 카메라와 마이크 너머 자욱이 날아오는 돌팔매들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아리지만, 어차피 가기로 작심한 길이니 비명 대신 노래 부르며 가려 합니다. 현재의 검찰에 대한 슬픈 노래(哀歌)이자 마땅히 있어야 할 그 검찰에 대한 제 사랑 노래(愛歌)가 지금은 너무도 미약하지만, 언젠가 동료들과 함께 어우러져 함께 부르는 합창이 되는 날, 검찰이 진정 국민들에게 신뢰받는 검찰로 우뚝 서겠지요. 그날이 언젠가 오리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임은정 청주지검 충주지청 부장검사 경향 2019.06.09

 

전광훈’, 그리고 개소리에 관하여

개소리에 대하여>(필로소피)개소리는 영어 ‘bullshit’의 번역어다. 번역자 이윤은 헛소리로 옮길까 하다 ‘non-sense’와 차별화가 어렵다는 점 때문에 개소리로 번역했다고 한다. 헛소리엔 무의미한 말이라는 뉘앙스가 있지만, bullshit에는 화자의 숨은 의도가 있다는 저자 논지를 따르려고 했다고도 한다.

 

개소리란 무엇일까? 소논문 분량의 이 철학책엔 비트겐슈타인이 1930년대 초 러시아어 개인 교사였던 파니아 파스칼을 문병 갔을 때 일화가 나온다. 편도선을 제거하고 요양 중이던 파스칼이 마치 차에 치인 개가 된 느낌이에요라고 죽는 소리를 하자 비트겐슈타인은 혐오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차에 치인 개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소.”

 

저자인 미국 프린스턴대 철학과 명예교수 해리 G 프랭크퍼트는 이 일화에서 개소리의 의미를 분석해나간다. ‘비트겐슈타인은 파스칼이 진실에 대한 관심 없이 말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라고 프랭크퍼트는 추정한다. “파스칼은 진술의 정확성이라는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고 진술을 만들어낸것이다. 프랭크퍼트는 진리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 개소리의 본질이라고 했다. “‘개소리쟁이에게 유일하게 없어서는 안될 독특한 특징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이다.”

 

거짓말과는 어떻게 구분할까. 거짓말쟁이는 자신의 발언이 거짓이라고 여기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고 프랭크퍼트는 말한다. 거짓말을 지어내려면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릿값에 관심을 가진다는 뜻이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큰 진리의 적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 같은 사람과 일상 대화를 해나가긴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내뱉는 엄살과 과장,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도 개소리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프랭크퍼트가 비판의 지점으로 삼는 건 공적 사안에서 자신의 이익과 속셈을 위해 내뱉는 개소리들이다.

 

개소리의 뜻과 범주를 확장하는 이 책은 한국 사회 막말과 망언을 분석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한국의 공적 영역엔 사실, 진실, 진리엔 전혀 관심 없이 내뱉는 개소리들로 그득하다. 최근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가장 부합하는 건 목사 전광훈의 말일 것이다.

 

“(문재인이) 그의 (주체)사상을 현실로 이루기 위하여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인 국정원, 검찰, 경찰, 기무사, 군대를 비롯하여 언론, 정부, 시민단체까지 주체사상을 통한 사회의 국가를 현실화하기 위하여 동원하고 있다.” 최근 수사조정권을 둘러싼 청와대와 검찰 간 갈등이나, 노동 문제를 두고 벌어진 정부와 민주노총의 대립에 관한 언론 보도를 한두 줄만 봐도 이런 말을 하긴 어렵다.

 

전광훈의 말들이 대개 이런 식이다. “세월호 사고가 난 거 좌파, 종북자들만 좋아하더라” “전교조에서 성을 공유하는 사람은 1만명이다.” 전광훈의 말은 혐오, 배제, 추방으로 점철된다. “동성애, 이슬람, 차별금지법은 사탄이라고도 했다. 전광훈을 포함한 한국형 기독교 우파북한’ ‘이슬람’ ‘동성애’ 3대 키워드로 극우 세력을 결집하려 한다.

 

전광훈류와 단절하고 싶은가? 극우 세력의 개소리에 대안과 대책은 차별금지법 제정이다. ‘진보개혁을 자처하는 이들이 차별금지법 문제를 두고 전광훈 앞에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고 밝힌 게 몇년 되지 않는다. 선거철 표계산을 두고 벌어진 어정쩡한 타협과 이상한 관용, 부끄러운 굴복은 오늘의 전광훈류를 강화·확산하는 데 일조했다.

 

노무현 정부 말기 법무부의 차별금지법안과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당시 야권 의원들이 낸 의원 입법안은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되거나 철회됐다. 현 대통령도, 현 총리도 당시 발의에 이름을 올렸다. 동성애와 양성애 등 성적지향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안은 2013220일 국회에서 마지막으로 발의됐다. 이낙연도 이름을 올린 이 법안은 제안이유를 이렇게 썼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대부분의 인권 선진국들이 채택하고 있음. 그러나 우리나라는 유엔 인권이사회, 유엔 경제문화사회적 권리위원회 등에서 차별금지법 채택 권고 및 촉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채택하지 못하고 있음. 이는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상에 맞지 않는 부끄러운 일임.” 6년이 지났다. 20대 국회에서 정부 발의건 의원 발의건 한 건도 발의되지 않았다/ 김종목 사회부장 경향 2019.06.09

 

인공 지능에게 배워야 할 미덕

이공계 대학 교수에게 들은 얘기.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면 전에는 한국어로 된 자료만 참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영문 자료들도 많이 찾아본다고 한다. 이전보다 영어 실력이 향상되어서가 아니라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번역 기능을 이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양질의 해외 자료들을 많이 접하게 되어 학생들의 전공 분야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시야도 넓어져서 만족스럽다고 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현상적인 기술이 많아서 비교적 번역이 용이한 이공계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계열의 학술 자료들도 점점 더 인공지능 번역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들, 비유나 상징, 암시와 문맥 등 인간의 철학과 글쓰기 역사에서 구사된 모든 레토릭들도 결국은 인공지능의 기본기가 될 날이 올 것이다. 활자매체로 존재하는 모든 텍스트들을 디지털 형태로 변환하고 그 빅데이터를 인공지능에게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시키는 이런 과정이 쌓이다 보면 인공지능이 교사나 멘토 역할을 맡게 될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이런 시나리오, 즉 인공지능의 압도적인 지적 연산 능력을 다루어왔던 SF들 상당수는 결국 인공지능이 인류를 초월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알파고처럼 특정 분야에서 인간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은 속속 등장할 것이다. 그렇다고 매트릭스터미네이터와 같이 인류를 말살할 것이라는 설정은 공포나 스릴을 파는 문화 콘텐츠로서는 흥미롭지만 현실적인 설득력은 약하다. 그보다는 댄 시먼스의 소설 히페리온처럼 인공지능이 그들만의 독자적인 지적 문명을 이루어 우주 안에서 인류와 대등한 존재로 교류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이건 아주 먼 미래의 가능성이지만.

 

이와 관련해서 유념할 만한 관점이 있다. 인공지능과 인류가 서로 상대방을 닮아간다는 이론이다. 인공지능이 벤치마킹 대상인 인간에 가까워지는 만큼 인간도 인공지능과 비슷한 존재로 변해간다. 이것이야말로 현생 인류의 생물학적 미래, 즉 트랜스휴먼을 거쳐 포스트휴먼의 단계로 나아가는 전망을 암시하고 있다. 이 전망은 인간과 기계가 결합하여 사이보그가 된다는 물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치관이나 철학이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공지능처럼 변해간다는 건 어떤 면일까?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는 수학이다.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결과를 추구한다. 반면 인간은 근사치가 허용되며 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나 정서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이걸 두고 흔히 인간적이다라고 표현하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그릇된 부조리일 뿐이다. 인류의 역사는 부조리에 대항하여 정의를 구현하려는 다수 대중의 투쟁이기도 했으며,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정의와 합리성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사회 체제가 변화해 왔다. 이런 노력의 화룡점정은 바로 인공지능적 사고방식, 즉 다양성에 대한 공평함이라는 입장 그 자체를 수용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이상적인 미덕으로 꼽는 불편부당한 자세야말로 인공지능의 수학적 객관성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아직 불완전하다. 여성이나 성소수자, 인종 등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인간의 시선을 그대로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으로 연산 능력이 더 발전하고 인문적 빅데이터의 학습이 쌓일수록 인공지능은 스스로 인간보다 더 순수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 즈음이면 인간은 청소년 세대의 교육을 인공지능에게 맡기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영화 블레이드러너에 등장하는 모토처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인공지능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실존적 동반자이자 이상적인 멘토의 면모를 갖출 것이기 때문이다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한국 2019.6.8.

 

하이힐과 쿠투(KuToo)’

독일 풍속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에는 복장, 패션, 연애, 사교생활, 매춘제도 등이 흥미롭게 담겨 있다. 하이힐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푹스는 하이힐이 만들어진 배경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실용적인 요구다. 중세 이후 절대왕정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등 유럽인들은 집에 변소가 없어 요강 등을 이용해 창밖으로 대소변을 투척했다. 포장이 안된 도로는 비만 오면 오물이 뒤섞인 진흙탕이 됐다. 당시 하이힐은 발을 더럽히지 않고 길을 가는 유용한 도구였다. 다른 하나는 여성의 자기 과시욕이다. 하이힐을 신으면 넘어지지 않기 위해 몸을 뒤로 젖히는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이때 자연히 엉덩이는 튀어나오고 가슴을 내밀게 된다. 신체 특정 부위를 강조하기 위해 하이힐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근대 들어 도시 하수도가 발달하면서 오물 진창길은 사라졌다. 그런데도 하이힐을 신는 풍속은 이어지고 있다. 푹스는 높은 하이힐을 신음으로써 자기의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를 장악하려는 계급과 개인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유행했다며 하이힐 유행 전파자로 사교계 여자들과 매춘부를 꼽았다. 푹스의 얘기대로라면 하이힐이 지속된 원인으로 여성의 자기 과시나 성의 상품화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게다가 하이힐은 보행에 불편할 뿐 아니라 건강에도 해롭다. 최근 국내 연구진은 하이힐이 발목관절의 퇴행을 촉진하고 관절염과 통증을 유발한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일본에서 하이힐을 벗어던지자는 운동이 일고 있다. 한 배우가 기업의 하이힐 착용 강제는 성 차별로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트위터에 올린 게 계기가 되어 인터넷상의 쿠투(KuToo)’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 3일에는 일본인 18856명의 지지 서명이 담긴 건의서가 후생노동성에 제출됐다. 쿠투는 구두의 일본어 구쓰()’와 고통을 뜻하는 구쓰(苦痛)’에 성폭력 고발 운동인 미투(Me too)’를 합친 조어다. 서양에서 유래해 전 세계로 퍼진 하이힐은 오래전에 사라진 중국의 전족(纏足) 못지않은 봉건적인 인습이다. 2015년 영국에서도 직장 내 하이힐 거부운동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이 봉건 왕정시대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조운찬 논설위원 경향 2019.06.05

 

현충원의 애국지사와 매국노, 야스쿠니

지난달 27일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현충원에는 정국교(靖國橋)라는 다리가 있다. 정국은 일본식으로 읽으면 야스쿠니다.” 기억활동가 임지현이 <기억전쟁>에 쓴 글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 등 246만여명의 혼령을 한곳에 모아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장소다. 애국지사와 호국영령들이 묻혀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에 하필 야스쿠니 다리라니. 확인하고 싶었다. 비가 내려서인지 묘역은 한산했다. 오른쪽으로 길을 잡았다. 한국전쟁 등에 참전했다 숨진 사병·장교들의 무덤이 위아래로 넓게 이어져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1955년 국군묘지로 조성됐다. 1965년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애국지사들의 안장이 시작됐고, 추모의 성지로 탈바꿈했다.

 

조금 더 오르니 무후선열제단(無後先烈祭壇)이 있다. 후손이 없거나 유해를 찾지 못한 애국지사 등 131명의 위패가 봉안된 곳이다. 유관순 열사와 조선 말 고종의 국권회복을 위한 친서를 가지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이상설·이위종 열사 등을 모신 곳이다. ()을 모시고 기리는 것은 동아시아의 독특한 추모 문화다. 현충원 현충탑 아래에 위패봉안관이 있는데, 이곳은 시신을 찾지 못해 위패만을 모신 104000여명의 호국용사와, 시신은 찾았으나 이름을 알 수 없는 6400여명의 무명용사들이 잠든 곳이다.

 

무후선열제단 위로 임시정부요인, 장군묘역이 있다. 그곳엔 한평생 나라를 위해 애쓴 이들만 있지 않았다. 독립군과 조선인을 탄압·살해한 간도특설대간부 출신 김백일과 김홍준(장교·위패), 일본군 장교 출신의 이응준·신태영·이종찬·신응균 등이 장군묘역에 묻혀 있다. 태평양전쟁을 성전이라고 주장한 백낙준도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돼 있다. 이들과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힌 김석범·송석하·신현준·백홍석 등 11명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사들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로 확대하면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힌 친일파는 37명에 달한다. 국립대전현충원에도 26명이 더 묻혀 있다.

 

정작 이곳에 모셔야 할 백범 김구 선생과 윤봉길·이봉창 의사 등은 효창공원에 잠들어 있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홍범도 장군은 76년째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묻혀 있다. 이준 열사, 손병희·이시영·신익희 선생은 북한산 자락에 안장돼 있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은 현충원의 양지바른 곳에 잠들어 있고,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은 여기저기 흩어진 채 제대로 된 대접조차 못 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여년간 서훈이 취소된 친일인사의 묘를 국립현충원에서 이장할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안만 7차례나 발의됐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나 몇몇 국회의원들의 반대로 처리가 무산되거나,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월남전 참전 사병묘역에는 장성으로는 유일하게 채명신 장군이 묻혀 있다. 채 장군은 6·25 및 월남 전쟁 등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전쟁 영웅이다. 월남전 당시 “100명의 적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할 정도로 생명권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장기독재의 위험성을 경고한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내가 죽거든 파월장병이 묻힌 사병묘역에 안장해달라는 생전 유언에 따라 사병묘역에 잠들어 있다고 했다. 절로 가슴이 뭉클해졌다. 현충원의 묘는 전사자의 신분에 따라 면적, 형태, 묘비의 크기가 다르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은 왕릉을 연상케 한다. 장군묘역도 사병묘역보다 8배 크다. 미국·영국·캐나다·호주 등은 신분에 관계없이 동일한 국립묘지 면적을 제공하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는 마찬가지인데 죽어서도 신분에 따라 차별받아야 한다니, 불편했다.

 

현충원 동문 입구에 이르니 그곳에 정국교가 있다. 현충원 중앙에서 동편묘역을 잇는 다리다. 야스쿠니 신사의 야스쿠니(靖國)는 춘추좌씨전 오이정국야(吾以靖國也)에서 따온 말이다. ‘전쟁에 공이 있는 자를 포상, 나라를 평온케 한다는 뜻이다. 정국교의 정국은 야스쿠니와 한자·뜻이 일치했다. 어원은 달랐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부식의 공신호에서 연유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이 묻힌 곳에 굳이 야스쿠니라 불릴 수 있는 다리가 놓여 있는 것은 선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

 

현충원은 아픈 현대사를 오롯이 볼 수 있는 현장이다. 애국지사와 친일파의 불편한 동거가 진행중인 곳이다. 불편함은 느껴야 고칠 수 있다. 2시간이면 넉넉히 돌아보고, 확인할 수 있다. 오늘은 64주년 현충일이다/ 김종훈 논설위원 경향 2019.06.05.

 

냄새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는 냄새라는 단어가 열다섯 번쯤 나온다. 1970년대 도시개발에서 소외된 빈곤층의 현실을 작가는 여러 가지 냄새로 묘사했다. 난장이 김불이씨 가족이 사는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은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무허가 판자촌인데, 부유한 이들의 주택가와 개천을 사이에 두고 있다. 김씨의 아들 영호는 두 동네를 냄새로 구별한다. 주택가 골목에선 고기 굽는 냄새가 나고, 판자촌 풀밭에서 곧잘 울음보가 터지는 여동생에게선 풀냄새가 났다. 여동생은 엄마에게 오빠의 행실을 고자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오빠가 또 옆 동네에 고기 냄새 맡으러 갔었대.”

 

재개발 붐을 타고 이 판자촌에도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자 김씨를 비롯한 주민들에게 철거계고장이 날아들었다. 아파트 입주권을 준다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돈을 더 내야 해서 다들 헐값에 외지인에게 팔아넘기고 만다.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거간꾼 앞에 몰려든 동네사람들에게서 영호는 눈물 냄새를 맡았고, 그렇게 팔린 입주권을 되찾겠다고 집을 나갔다가 험한 꼴을 당한 여동생은 자기 몸에서 외지 남성의 정액 냄새를 맡는다.

 

영화 기생충에도 냄새를 말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부잣집 가장 박 사장은 자신의 운전기사가 된 가난한 가장 김씨에게서 무슨 냄새인지 잘 설명할 순 없지만 지하철 타는 사람들한테 나는 그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박 사장의 아들은 이 집을 드나들게 된 김씨 가족에게 다 똑같은 냄새가 난다며 코를 킁킁거리고, 이를 전해들은 김씨의 딸은 그 냄새의 정체를 반지하 냄새라고 규정한다. 경력을 꾸며내 부잣집의 과외선생과 운전기사와 가정부가 될 만큼 거짓말에 능통한 김씨 가족도 몸에 밴 이 냄새는 어쩔 수 없었다.

 

1976년에 발표된 난쏘공2019년의 기생충은 나란히 냄새를 활용해 빈부격차를 표현했다. 냄새를 맡는 주체가 가난한 이에서 부유한 이로 바뀌어 냄새의 정체도 고기 굽는 냄새에서 반지하 냄새로 달라졌을 뿐, 넘어설 수 없는 계층의 벽을 상징한다는 본질은 같다. 어쩌면 냄새의 성격은 더 고약해진 것일지 모른다. 고기 냄새와 달리 반지하 냄새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무슨 냄새인지 정확히 말하기 어려운 탓에 지우기도 쉽지 않을 테다. 4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 사회의 격차가 그만큼 치밀하게 뿌리를 내린 건 아닌지.태원준 논설위원 국민일보 2019 6.4

 

일본처럼 되지 않으려면?

연구년으로 봄부터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의 연구자들과 토론하고 강의를 하는 것도 좋지만,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일본과 한국의 경제에 관해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도 큰 기쁨이다.

몇몇 친구는 이미 회사를 옮겼고 자영업을 시작한 녀석도 있었다. 사실 전세계의 맥도날드 매장 수만큼 한국의 치킨집이 많다고 하면 일본과 다른 외국의 연구자들은 깜짝 놀란다. 한국의 취업자 중 임금노동자 비중은 약 75%로 선진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며, 일본은 약 90%.

한국에 자영업자가 이렇게 많은 이유는 노동자들이 회사에서 오래 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이라도 우리 나이쯤 되면 많이들 그만둔다고 하면 외국인들은 다시 놀란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한 회사에서 더욱 짧게 일해서 한국 노동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약 6년에 불과하다. 일본이나 서구의 노동자들은 정년까지 일하는 경우가 우리보다 많고 근속연수도 거의 두 배로 길다.

 

이는 여러 요인과 관련이 있겠지만, 임금체계에서 연공급이 강한 것도 한 배경일 것이다. 10년 넘게 근속한 한국 회사원의 연봉을 신입과 비교하면 유럽보다 훨씬 높고 일본보다도 높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저절로 올라가니 기업들은 비정규직과 외주화를 늘렸고 노동자를 오래 고용하기 꺼릴 것이다. 친구들은 연공제를 낮추더라도 회사에서 더 오래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은다. 연공제의 원조 일본이 바뀌었듯이 우리도 역할과 능력을 더 고려하는 임금제도를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친구들과 만나면 빠지지 않는 것이 자녀들 이야기다. 최근에는 아이를 일본 대학으로 유학 보내겠다는 친구들도 더러 있어서 일본의 대학과 졸업 후 전망을 물어보곤 한다. 잘 알려져 있듯 취직을 희망하는 일본의 대학 졸업생들은 전공과 무관하게 백 프로 가깝게 취직을 한다. 흥미로운 점은 대학 졸업생들이 선뜻 지방의 중소기업에 취직한다는 것이다. 중소기업 연봉이 대기업의 약 80%일 정도로 기업 규모에 따른 임금격차나 노동환경의 차이가 작기 때문이다.

일본의 중소기업은 한국보다 생산성과 기술력이 높을 뿐 아니라, 대기업들도 하청기업들과 장기적이고 신뢰에 기초한 계약을 하고 그 관계도 협조적이다. 일본도 오래전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이중구조 문제가 심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가 1950년대부터 자금지원과 조직화 그리고 기술향상 등으로 중소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물론 일본에 청년실업 문제가 없는 것은 청년층 인구가 줄어들어 일손이 부족해진 현실과도 관계가 크다. 하지만 아베노믹스 이후의 경기회복으로 실업률이 역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아진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일본은 중앙은행이 국채의 절반 이상을 매입할 정도로 경기부양을 위해 확장적 거시경제정책을 펴고 있다. 매년 재정적자가 심각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정부 부채비율이 230%가 넘을 정도의 재정상황이지만 재정지출에도 소극적이지 않았다.

 

특히 이미 인구감소 쇼크를 맞이한 일본은 이제 일억 총활약 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청년들의 삶을 개선하고 보육과 교육 무상화로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격차를 줄이고 생산성과 출산율을 높이는 것이 궁극의 성장전략이라 이야기한다.

그런데 일본보다 출산율이 낮은 한국에서 국가채무를 이야기하며 재정 확장에 반대하고, 경기가 악화되는데 추가경정예산안 통과도 가로막고 있는 이들을 보면 답답한 심정이다. 한 친구는 우리도 2060년이 되면 일본보다 빠른 고령화 때문에 저절로 복지지출이 세계 최고가 된다고 들었다며, 40%를 넘긴다는 국가채무가 걱정된다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노년층의 가난과 사회의 불평등이 이렇게 심각한 한국에서 수십년 후를 이야기하며 복지지출을 늘리지 말라는 이들은 과연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물론 대외순자산이 세계 1위인 일본 경제와 엔화의 지위는 한국과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한국도 일본과 비슷하게 정부부채의 외국인 보유 비중이 약 11%에 불과하며, 경상수지를 고려하면 대외적 불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최근 한국에서는 우울한 일본 경제가 한국의 미래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친구들도 우리가 일본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곤 한다. 나는 오히려 현재의 일본 경제가 한국에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이강국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 한겨레 2019-06-03

 

게임 중독

 

국내 최대 게임전시회 지스타(G-STAR)에서 관람객들이 PC게임을 즐기고 있다. 연합뉴스

 

얼마 전 세계보건기구에서 국제 질병 분류표(ICD) 최신 개정판에 게임 중독항목을 만장일치로 추가했다. 상당한 당위성이 있다고 판단한 셈이다. 직접 개정판을 사용할 의사로서, 이 결정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논란으로 번지고 있으며 요점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국제 질병 분류표는 의사가 진료실에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모든 의사는 환자를 진료하면 이 목록에서 찾아 진단을 붙인다. 현재 사용되는 ICD-101994년부터 사용해 많은 개정을 거쳐 작금에 이르렀다. 개정판인 ICD-11은 오랜 준비를 거쳐 2022년부터 사용된다. 개정에 약 30년이 소요되는, 시대상과 의료의 흐름을 반영하는 분류표다.

 

ICD의 기본 목적은 전 세계 환자의 진단과 분류이며, 의학적으로 통계를 내고 연구로 이어지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방대한 목록에는 비단 질병만 들어있지 않다. 현재 ICD-10에는 저소득’, ‘실직의 두려움’, ‘시험 낙방같은 다양한 상황과, ‘악어에게 물림같은 구체적인 손상과, ‘빈 둥지 증후군처럼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까지 들어있다.

 

ICD-11은 이전 14,400개의 목록을 55,000개로 확대한다. ‘우주선과 충돌’, ‘성별 불일치등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전통약 복용이나 침술로 인한 손상같은 진단명도 새로 생겼다. 전통 의학을 부정한다기보다 세계 각지의 무허가 의료 행위로 인한 부작용을 대비하는 진단명이다. 이 분류표에 포함된다는 것은 인간이 다양한 이유로 고통받고, 그에 따른 치료가 필요하다는 함의다. ‘게임 중독은 이 목록에 포함되었다.

 

이로써 의사는 진료실에서 그 진단명을 쓸 수 있으며, 진단 기준을 정하고 통계를 내며 연구를 할 수 있게 된다. 사실상 그뿐이다. 세계보건기구가 제시한 게임 중독의 정의는 이렇다.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우선시해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게임에 몰두하는 생활 패턴이 일 년 이상 지속됨.’ 실제 이 정의에 부합한다면, 대상자의 인생이 순탄할 것이라고 보기 어렵고, 도움을 받아야 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게임과 관련된 모든 차별과 부정적인 시선에 반대한다. 과도한 규제 또한 반대하며, 모두가 게임을 충분히 즐길 인간적 권리를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의료인으로서, 게임의 과몰입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치료를 원하는 사람이 향후 30년간 세계적으로 일정 수가 발생할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현재 이 사람들은 '비특이적 기타 중독'으로 분류되지만, 이제부터는 게임 중독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같은 원인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분류한다면, 어느 정도가 인간에게 불편감을 주고, 어떤 치료가 효과적인지 연구를 진행할 수 있으며, 동반한 사회환경적 문제도 밝혀낼 수 있다. 이는 게임만악의 근원으로 인정되었다는 논리와는 다르다. 이 결정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방과 치료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방법적으로 최선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한다. 의료계에겐 그 의무가 있다. 하지만 게임 과몰입으로 일상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 대비한다는 사실로,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낙인을 찍는 집단은, 이미 게임이라는 문화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고통받지만 적절한 기준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의 실례는 오히려 부정적인 인식만을 가져올 것이다. 차라리 일정선을 정하고 나머지를 정상으로 분류한다면 긍정적일 수 있다. 게임은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창조된 존재이며, 즐거움에는 워낙 중독성이 따른다. 과몰입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적당한 치료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자. 그리고 어떤 존재도 혐오하지 않는 것은 모두의 몫이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한국 2019 6.3

 

 

이 시대 최고의 개혁은 무엇일까

 

19891월 서울 마포가든호텔에서 만난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연합뉴스

 

1996411일 국회의원 선거의 승자는 139석을 확보한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이었다.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총재가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에 그쳤다. 정가에서는 디제이는 이제 끝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야권의 199712월 대통령 선거 전망도 비관적이었다.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은 당대의 논객이었다. 그는 이 시대 최고의 개혁은 정권교체라는 화두로 반전을 시도했다. 대한민국 모든 부조리는 정권교체가 안 됐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악마와 손을 잡더라도 반드시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디제이피(김대중-김종필) 연합이 추진됐고,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했다. -미 관계, -일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언론 개혁을 추진했다. 조세형 대행의 화두가 옳았던 것이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 총재직에서 물러나면서 총재의 시대가 저물기 시작했다. 정당의 권력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정치는 제도 변화의 동력을 상실했다. 개헌은 물론이고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바꿀 길도 없어졌다.

 

17년이 지나서야 선거제도 개편안이 가까스로 신속처리 대상 안건으로 지정됐다. 패스트트랙은 일시적인 소동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정치가 변화의 동력을 찾아가는 경로에 들어선 것일 수 있다. 되돌려서는 안 된다.

 

‘13의 주도로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법안의 운명은 여전히 위태롭다. 자유한국당은 선거제도 개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 검경 수사권 조정 등을 어떻게든 백지화하려고 한다. 법안을 둘러싼 대립과 긴장에는 두 가지 큰 정치적 함의가 있다.

첫째, 과거와 미래의 대결이다. 대통령제와 승자독식 소선거구제는 필연적으로 극한 대립을 불러온다. 이대로 두면 언젠가 분노와 적대감을 조직하는 선동가와 극단 세력이 집권할 위험이 있다. 반면에 패스트트랙에 올라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여야 공존, 그리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출발선이 될 수 있다.

 

둘째, 촛불이 요청한 검찰 개혁의 성패가 걸려 있다. 공수처 신설과 검경 수사권 조정이 안 되면 검찰 개혁은 이번에도 물 건너간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옷을 벗어서 흔들며 외인론을 주장했다. 거짓이다. 검찰은 옷이 아니라 칼이다. 칼은 피를 그리워한다. ‘내인론을 인정하고 검찰을 개혁하지 않으면 정권은 물론이고 검찰 자신도 망가진다.

 

경계해야 할 것은 회귀 본능이다. 자유한국당 의원들뿐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도 여차하면 패스트트랙에 올라간 법안을 포기하려고 들 수 있다. 거대 양당이 당 지지도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차지할 수 있는 현행 선거제도가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단견이다.

 

자유한국당이 문재인 정부 심판론으로 내년 4·15 선거에서 1당이 되면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는 회고 투표, 대통령 선거는 전망 투표다.

더불어민주당이 1당을 유지하거나 과반 의석을 차지한다면, 아니 180석을 차지한다면 문재인 정부 개혁 법안을 모두 다 통과시킬 수 있을까? 없다.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법안을 실제로 통과시킬 수 있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말이다. 반면교사가 있다. 미국의 대통령제와 지역구 중심 승자독식 선거제도는 지난 40~50년 동안 미국 정치의 양극화를 가속했다. 이제 공화당은 민주당을, 민주당은 공화당을 경쟁자가 아니라 적이라고 생각한다.

 

연방정부 셧다운과 대법관 임명 거부가 일상화하고 있다. 인종과 종교가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를 가르고 있다. 양당 지지자 간의 적대감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끔찍한 사고가 언제 어떻게 터질지 알 수가 없다. 불안하기만 하다.

 

미국의 실패를 따라가지 않으려면 우리도 발상을 바꿔야 한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서로를 대화와 타협의 상대로 인정해야 한다.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에도 당 지지도에 걸맞은 의석을 나눠줘야 한다. 그래서다. 지금 이 시대 최고의 개혁은 바로 선거제도 개편이다./ 성한용 정치팀 선임기자 한겨레 2019-06-03

 

두개의 세상

이상은 결핍에서 온다. 허전한 마음에 찬바람이 불면 가슴이 시리다. 다시 따뜻하게 데우고 싶어진다. 그 욕구를 올바른 가치와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소속감’ ‘강화’ ‘만족지연’ ‘승화와 같은 행동주의 심리학 용어들이 다 그런 뜻이다.

 

올해 초 법관을 사직하고 한동안 국외여행을 했다. 도중에 마주친 분이 있었다. 사직 이유를 물어왔다. 해오던 대로 설명했다. “그러면 판사직을 잃은 건가요, 버린 건가요?” 훅 들어온 질문에 나도 모르게 반응했다. “자발적으로 잃었죠.” 형용모순이다. 그동안 쓰린 순간이 왜 없었겠는가.

 

나는 아직도 그 표정을 기억한다. 20172월의 어느 날, 나는 양형실장 사무실의 탁자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 대각선 책상에 놓인 업무수첩이 눈에 띄었다. 그와 나는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내가 설명을 주로 듣는 쪽에 가까웠다. 한참 설명을 이어가던 그는 결국 기획조정실이 판사들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순간 내 표정이 굳었다. 기획조정실은 그럴 법적 권한이 없다. 양형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이제는 내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그는 눈을 찡그리며 문장을 맺었다. 진심으로 부탁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말투도 기억한다. 법원행정처 근무를 거부하고 사직서를 제출하자 행정처 차장이 전화를 해왔다. 나는 업무의 불법·부당성을 설명했다. 돌아온 것은 하소연이었다. ‘하소연은 그와 나의 관계에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다. 차장은 대법관 0순위였고, 나는 3000명의 판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태도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과장되게 애처로운 말투였다. 다른 심의관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도 가끔 그 말투가 귓가를 맴돈다. 마음이 불편하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설명에 따르면 조직생활은 집단적인 역할극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대면한 상대의 태도에 맞춰 자아를 연출한다. 상대가 바뀌면 태도도 바뀐다. 양형실장과 차장도 한때는 재판의 이상을 좇았던 젊은이였다. 사법관료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위해 자기 안의 좋은 판사의 자아를 죽여 없앴을 뿐이다. 내가 내 명예를 지키겠다고 나서자 일시나마 그들도 죽은 자아를 소환해냈다. 나는 그날 이들이 꾹꾹 숨겨온 수치심을 보았다.

 

자아는 무대의 영향도 받는다. 무대가 바뀌면 규칙도 바뀐다. 한쪽의 은밀한 관행이 더 큰 무대에서는 천인공노할 일이 되기도 한다. 나는 행정처 발령이 철회되어 일선 법원으로 돌아왔다. 그곳엔 업무수첩 대신 법정이 있다. 법정은 재판이 이뤄지는 곳이다. 판사에게 부여된 헌법적 사명이 피부로 느껴지는 곳이다. 공적인 가치를 함부로 뭉개지 못하는 곳이다. 비밀주의가 무너지고, 책략보다는 규범이 중시되는 곳이다. 그곳으로 복귀하고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소집될 때까지 100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세상 자체가 그냥 하나의 큰 무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법대에서 내려다본 세상과 평지에서 올려다본 세상은 다르다. 지난 주말, 변호사로서 동자동 쪽방촌에 갈 일이 있었다. 재판하면서 열악한 주택을 한두번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는 누구도 내게 속살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평지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있다. 이들의 이익이 공적 가치의 뿌리다. 주권재민사상을 표방하는 나라에선 그렇다. 공직사회는 그 가치에 자신을 끼워 맞춰야 한다. 반대로 가치를 자신의 이익에 끼워 맞춰서는 안 된다. 분노를 사는 길이다.

 

보르도지방법원 판사였던 몽테스키외는 10년의 법관 생활을 정리하고 20여년간 유럽을 떠돌았다. 그리고 <법의 정신>을 저술했다. ‘법률과 판결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억압이 가장 큰 문제라고 썼다. 프랑스에서 바스티유 감옥이 불타기 얼마 전, 그의 사상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 필라델피아에 모인 55명의 대표들에게 전해졌다. 사법권 독립을 처음 성문화한 미국헌법이 탄생한 배경이다.

 

두개의 자아, 두개의 무대, 두개의 세상. 이것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문제는 선택이다. 좋은 선택만이 우리의 결핍을 채워줄 것이다. 지난주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선택을 잘하려면 일단 둘을 구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세포가 분열하듯이, 모든 새로운 세상은 개념의 분화에서 시작된다. 천지창조의 시작은 어둠과 빛을 가른 일이다. 재판을 지켜보며 우리가 할 일이다.

이탄희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전 판사 한겨레 2019-06-02

 

소외된 다수를 향한 저널리즘이 돼야

19세기 말 20세기 초 신문(언론)의 팽창 시기 언론의 영향력은 커졌지만 그만큼 언론의 폐해 또한 증대했다. 소위 대중 신문 시대에 언론은 이윤추구를 위해 선전·선동적이었고 기득권층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자성의 움직임으로 미국에서는 시사주간지 타임의 발행인 헨리 루스가 20만달러라는 거금을 지원하여 허친스위원회가 꾸려졌고, 이 위원회가 1947년 발행한 보고서에서 소위 사회적 책임이론(‘자유롭고도 책임 있는 언론주장)이 탄생했다. 이 보고서의 중요한 대목 중 하나는 언론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대표적인 의견과 관점을 반영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속내는 언론이 소외된 약자, 소수 집단의 의견도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언론에서 소외된 약자의 대변은 마치 소수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행위 정도로 치부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사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제반 분야에서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고 다수는 권력(권리) 행사에서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소외된 약자는 소수가 아니라 다수이다. 물론 소외된 약자가 소수 집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든 특정분야에서 다수에 속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영역에서는 소수의 소외된 약자일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들은 소수가 아니다. 따라서 정의의 관점에서 소외된 약자의 현실을 대변하고 보도하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다수를 대변하는 것이다.

 

강자들은 언론 이외에도 그들의 목소리를 관철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론이 아니면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방법이 없는 이 사회 다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언론의 본질이다. 그래서 소수에게 편향적일 정도로 우호적인 것이 사회 전체로 보면 오히려 공정하다는 역설적 논리도 가능하다. 이것이 언론이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저널리즘의 원칙이다. 허친스위원회의 권고가 나온 지 70년이 지난 한국 언론은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

 

민주언론시민연합이 517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이 내놓은 보도 자료 중 60%가량이 경제지에 실렸다. 혹자는 우리 사회의 경제 권력인 삼성의 보도 자료니 60%쯤 반영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사화된 내용에는 8K 고해상도 수상기를 이용한 디지털 광고, 갤럭시 팬 파티 등의 기사도 있다. 이게 보도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다. 게다가 많은 기사들이 보도 자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고 한다. 취재가 사라진 언론의 보도 행태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지만, 결국 언론은 삼성의 확성기 구실만 한 것이다. 그런데 531일 보고서는 더욱 놀라운 결과를 전했다. 연합뉴스는 삼성의 보도자료를 사진기사에 반영한 비율이 83.9%, 일반기사 88.2%, 그리고 하나라도 반영한 것을 고려하면 98.9%에 이르렀다고 한다. 뉴스 도매상으로서 훨씬 많은 뉴스를 생산하고 일반 언론사의 기사 재료를 제공하는 뉴스통신사의 기능을 감안해도 보도 자료의 98.9%가 기사에 반영됐다는 것은 놀라운 수치다. 연합뉴스에서는 기사 가치 판단 기준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연합뉴스의 기사도 보도 자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즉 취재가 없는 기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반면 오랜 투쟁 끝에 조금이나마 세상의 관심을 끌고, 지루한 협상 끝에 타결한 삼성 백혈병 관련 사건들이 초기부터 얼마나 기사화가 됐을지 의문이다. 삼성 AS 기사들의 오랜 투쟁이 얼마나 기사로 실렸는지 의문이다. 이게 삼성만의 문제일까? 경제권력인 많은 대기업들, 정치권력인 주요 정당들, 문화권력들 등 기사의 편중 문제는 심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선전·선동 언사들은 걸러지지 않은 채 우리에게 전달되지만 중소기업, 노동자, 소수 정당, 인디 문화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전달되고 있을까? 이들은 가뭄에 콩 나듯, 시혜나 베풀 듯 간혹 기사화되고 있다. 이용자 시민이 중심에 서는 지금의 매체 환경에서 소수 권력을 지향하고, 다수의 독자들을 멀리하는 지금의 행태를 바꾸지 않고 언론이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서중 |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 경향 2019-06-02

 

]‘망조든 대학, 암울한 한국의 미래

한국 대학은 올해 8, ‘강사법(고등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 시행을 앞두고 전쟁터가 되고 있다. 일방적인 싸움이기에 현장은 더 처참하다. 20105월 한 시간강사의 자살 이후, 시간강사의 지위 보장과 처우 개선을 위해 시작된 사회적 논의가 가져온 아이러니한 결과다. 대학마다 전임교수 강의시수 늘리기와 대형 강의 권고, 2년치 강의 개설안 제출, 학문별 특수성을 무시한 채 대학본부가 직접 강사를 임용하거나 4대 보험 가입자로 겸임 혹은 객원교수 채용을 종용하면서, 젊은 강사들이 대량 해고된 것이다. 실제 대학교육연구소가 4년제 사립대학 152개교를 대상으로 전체 교원 대비 전임교원 비율을 분석한 결과, 강사법 유예 기간인 지난 7년 동안 시간강사 수가 37.2% 줄어들었다고 한다. 반면 비전임교원, 기타 교원과 초빙교원 수는 76.8%가 증가했다.

 

이런 상황이 가져올 부정적 파급력은 심각하다. 첫째, 학문후속세대 죽이기다. 어느 교수나 강사시절을 경험했고 절망이 지배하는 시기에도 미래를 상상하고 버텼을 것이다.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을 전수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며 버팀목 삼았을 것이다. 강의는 좋은 교육자가 되기 위한 필수적 교수법 훈련이자 경력 쌓기 과정이다. 그러므로 강사 대량 해고 사태는 개인의 생존권 위협이자 교육자 양성 과정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학문후속세대의 싹은 트기도 전에 말라 죽을 것이다.

 

둘째, 교육의 질을 떨어뜨린다. 패기 있고 연구역량에 막 물이 오른 젊은 연구자가 강의도 잘한다. 학위 논문을 쓰면서, 혹은 한창 진행 중인 연구에 자극받아 새로운 이론과 세상의 변화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학습자와 세대차이가 상대적으로 적어 상호이해의 폭도 넓다. 이런 분들이 대거 해고되고, 은퇴교수, 외부 기업이나 기관에 소속되어 연구나 강의를 취미로 하는 분들로 대체되면 교육 전반의 질적 하락과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가 심각해질 것이다. 인식 차이가 크고, 역동적·사회적 현상에도 무지한 비전공자들에 의해 진행될 대형 강의실의 강의를 상상해 보라.

 

셋째, 학문 죽이기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연구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가. 똑똑하고 영리한 학생일수록 대학원 진학을 꺼리게 될 것이다. 돈벌이도 안되고 장래도 보장되지 않는데 직업으로 공부를 선택하겠다는 건 망상에 가까운 일이 될 것이다. 기왕에 박사학위 소지자들도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학기별로 강의 개설이 보장되지 않는 소수 학문 분야, 간학제적 성격을 가지거나 탄탄한 학제 구조를 가지지 않은 연구 분야들은 더욱 축소되어 자취를 감추게 될지 모른다. ·복합 학문 육성이라는 허구적 울림에 가려 지금은 보이지 않겠지만 강좌도 열리지 않는 학문 분야에 매진하는 연구자는 앞으로 더욱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한국 대학의 미래가 불투명해진다.

 

넷째, 차별의 공고화와 대학경쟁력의 하락이다. 한국 대학이 신자유주의체제에 함락되었다는 진단은 일면적이다. 누적된 봉건가부장의 적폐가 뿌리 뽑히지 않은 채 성과주의가 착목된 기이한 생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서열화된 학벌구조, 학연과 연고주의, 남성중심적 위계질서가 내적 공정성과 민주성을 근본부터 흔드는 곳이다. 남성이란 성별이 가진 특권과 공고화된 학연주의가 연결되어 있는 곳에서 강사법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과 소수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한 언론사의 보도에 의하면(시사저널, 2019123일자), 한국 대학의 여성 교원 중 71.32%는 비전임교원이며, 시간강사가 50%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반대로 남성의 경우, 전임교원이 46.41%이고 시간강사 비율은 25.26%라고 한다. 실제 주변의 많은 여자 박사들은 이 같은 불안정하고 불공평한 학문생태계에 절망하고 있다. 비정규직 연구원, 강사로 갖은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고 결혼과 임신, 육아와 가사노동 등으로 인한 보이지 않는 경력단절을 겪다가 마침내 강사법 시행으로 해고되고 있는 현상에 분노하고 있다. 대학진학률 면에서 이미 앞서고 있고 탁월한 학력을 보이고 있는 대한민국의 여성들이 학문 현장에서 사라지고 학문하기자체를 포기할 때 한국 대학 전반의 연구역량 하락은 불 보듯 뻔한 것 아닌가.

 

한국 대학은 더 이상 예리한 문제의식을 키워나가며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 아니다. 보다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다양한 가치를 습득하고 민주주의를 실습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곳이 아니다. 그저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거쳐가는 학원 수준으로 몰락했다. 강사법 시행을 대비하는 한국 대학의 자세는 이런 절망적 상황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대학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 사회의 성장은 불가능하기에 미래는 더 암울하다는 점이다./ 이나영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1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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