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법무장관? 그해 여름 ‘네’가 한 일 경향 2019.07.01.
1930년대가 돌아온다 한겨레 2019.7.2.
다시 돌아온 저주, 가난 한겨레 2019.6.4.
양현석과 YG 패밀리의 유산 한겨레 2019-07-02
트럼프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유
차별을 넘어선 평등한 ‘재현’ 경향 2019.7.7.
흔들리는 ‘장자연’ 진실, 주목되는 ‘윤석열 검찰’ 한겨레 2019 7.8
따옥따옥 그 슬픈 소리
다문화가족 가정폭력, 인권위의 엉터리 통계 경향 2019.07.11.
“니가 가라, 이민 한겨레 2019-07-10
공동체는 사회를 구원하는가 sisain 2019. 7.12
“내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마라” sisain 2019. 06 27
대윤 소윤 국민일보 2019.7.13.
휴강 통보하고 시위 독려하는 독일 대학 미디어오늘 2019.7.14.
탐욕의 경제학과 급진적 삶의 전환 경향 2019.07.14.
‘조용한 일본인’ 귀하 미디어오늘 2019.07.15
조국 법무장관? 그해 여름 ‘네’가 한 일
갑자기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의 법무장관행이 실제로 어른거린다. 그해 여름, 자기검열부터 했다. 벌써 ‘조국 법무장관’을 변호하려 동원되는 여권의 옹호논리가 기시감이 드는 데다, ‘내로남불’을 경계해야 하는 건 언론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8년 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최측근 권재진 민정수석을 법무장관에 내정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이 공정한 법 집행의 책임자이자 내년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관리해야 할 법무장관으로 곧바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내정설이 제기될 때부터 임명까지, 경향신문의 세 차례 사설은 이 기조하에서 “불통인사” “헌법 모독”을 비판하고 철회를 촉구했다. 다시 보니 일부 매체를 빼곤 비판의 기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민정수석에서 법무장관으로 직행, 최측근 임명에 따른 법집행의 공정성 논란, 최악의 회전문 인사, 총선관리의 중립성 등이 공유된 비판의 지점이다.
민정수석의 법무장관 직행, 대통령의 최측근, 9개월 앞으로 다가온 총선 등 조국 법무장관(설) 앞에 놓인 조건은 8년 전과 흡사하다. 서울중앙지검장에서 검찰총장으로 발탁된 윤석열 후보자와 당시 역시 서울중앙지검장에서 검찰총장으로 직진한 한상대의 평행까지 감안하면, ‘조국-윤석열’ 조합의 데자뷔는 어쩔 수 없다. 여권이 내세우는 ‘인물의 차이’와 ‘의도의 선의’로 돌파하기에는 “그해 여름 네가 한 말”이 너무 강렬하다. 더욱이 그것은 여전히 온당하다. 조국 법무장관 카드는 “어떤 정부에서도 지켜야 할 원칙과 좋은 관행”을 허물 만큼, 우위의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그해 여름’을 소환해보자.
2011년 7월 권재진 법무장관 내정에 당시 우윤근 국회 법사위원장과 민주당 소속 법사위원들은 긴급성명을 내고 “민정수석이 곧바로 법무장관에 임명된 적은 역대 정권에 한번도 없으며 측근인사 회전문 인사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인사”라며 “법치국가의 기본틀을 흔드는 일”이라고 규정했다. 김진표 당시 원내대표는 “선거중립을 내팽개치고 어떻게든 유리한 판을 짜보겠다는 불순한 의도”라고 규탄했다. 현 청와대 주역들의 어록도 선명하다. 노영민 당시 원내수석부대표(현 대통령비서실장)는 “청와대가 특유의 오기를 부리는 것 같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차마 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성토했다. 아무리 사정 변경을 내세운들 이 지당한 비판의 잣대를 조국 법무장관 카드가 벗기 쉽지 않다.
사실 그때 야당만이 아니었다. 여당인 한나라당에서도 반대론이 드셌다. 소장파는 집단 성명을 냈고, 지도부에서도 남경필·나경원 최고위원 등이 비토론을 폈다. “선거관리 주무장관으로서 공정성 시비를 불러일으킬 인사” “오기 인사”, 비판의 날도 퍼렜다. 소장파 정태근 의원은 ‘5년 전 한나라당이 한 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라는 글을 통해 “아전인수하지 말고 역지사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2006년 문재인 전 민정수석(3개월 전에 물러나 ‘전직’ 이었다)의 법무장관 기용에 반대했던 사실을 환기하며 “야당일 때와 지금의 말이 다른 것은 공당이길 포기하는 것”이라고 맞섰다. “자기편을 옹호하는 데도 지켜야 할 금칙”, 그나마 그들은 지켰다.
그해 여름의 귀결은 “군사독재 시절에도 차마 하지 못한 일”의 현실화로 끝났다. MB는 ‘권재진 법무장관’을 강행했다. 당시 청와대와 친이계 의원들의 비호논리가 있다. 대통령의 고유한 인사권, 능력이 우선, 장관도 대통령의 참모, 대통령의 신임은 장관 일을 하는데 장점 등등이다. 아마도 ‘조국 법무장관’ 카드가 실제화될 경우, 야당을 중심으로 거세질 반대에 대한 여권의 반박 또한 그 어간 어디쯤에 머물 터이다. 다른 건 ‘기승전-조국’으로 상징되는 검찰개혁의 연속성이라는 명분일 터이다. 하지만 사법기관 개혁은 국회 패스트트랙을 통해 법제화 단계로 넘어갔다. 이제 ‘국회의 시간’에서 조국 법무장관의 존재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그래서 묻게 된다. 계속될 정치적 논란을 감수하고, 여당 및 청와대 참모들의 도저한 ‘자기부정’을 강제할 만큼 ‘조국 법무장관’은 의의를 갖는 것일까. 민정수석의 법무장관 임명을 이번에도 실행하면 관행이 된다. “독재 시절에도 차마 하지 못했던 일”은 “개혁정부도 한 일”이라는 면죄부가 씌워진다. 김선수 현 대법관은 그해 여름 이렇게 갈파했다. “청와대 수석으로 대통령을 보좌했던 사람을 검찰 조직을 관할하는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은 검찰의 중립적인 기소권 행사라는 사법개혁 방향에도 어긋나고, 수사권 독립이라는 대전제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 당위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검찰개혁 등을 앞세워 조국 민정수석의 법무장관 직행을 밀어붙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또 다른 ‘오기 인사’로 비치기 십상이다. /양권모 논설실장 경향 2019.07.01.
1930년대가 돌아온다
요즘 뉴스 사이트에 들어가기가 무섭다. 미군의 이란 공격이 개시 10분 전에 극적으로 정지됐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하도 놀라서 심장이 뚝 떨어지는 듯했다. 이란 공격이 정말 개시됐다면 중동 지역에서 아마도 이미 수만명의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초대형 참극을 겨우겨우 모면한 셈인데 미국 사회는 이상하게 조용하다. 중동이라는 화약고에 불을 붙일 뻔한 전쟁광들의 불장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그다지 들리지 않는다. 군사 모험주의가 새로운 ‘상식’이 된 것일까?
최근 뉴스에서 가장 자주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제재’다. 각종 경제·무역 제재는 이제 만능의 외교 수단이 된 느낌이다. 지금 미국의 경제 제재나 무역 전쟁의 대상에 오른 나라만 해도 거의 20개국 정도 된다. 북한이나 이란, 러시아, 중국에 대한 제재 등은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미국 제재의 대상국들은 베네수엘라부터 수단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미국뿐인가? 유럽 국가들이 중국에 대한 ‘민감한’ 기술 수출을 자제하는가 하면, 중국은 한국에 대한 사드 보복에 나선다. 미국과 유럽의 제재 대상이 된 러시아는 북한에 대한 제재를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하고, 최근에는 조지아 등 주변의 ‘지나치게 친미적인’ 약소국에 꽤나 아픈 제재를 또다시 가했다. 제재를 가하고 제재를 받는 것은 이제 다반사다. 제재는 열전(熱戰)과 다르지만 그 목적은 동일하다. 상대방을 (돈의)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이다. 낮은 수준의 전쟁인 제재는 이제 지구촌의 일상이다.
이 지구촌에서 마이너리티로 사는 것은 늘 어렵다. 한데 그들에 대한 일상적인 차별이 최근에는 마녀사냥과 같은 광란으로 변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불법 이민자’들을 무조건 수용소에 집어넣으면서 부모와 영유아들을 떼어놓는 등의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서는 거의 100만명에 이르는 위구르족 등 이슬람 신자들이 각종 ‘재교육 캠프’에 강제 수용돼 반인도적 인권 유린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외신들은 보도한다. 미국의 공식 이념은 자유민주주의고 중국의 공식 이념은 사회주의지만, 양국의 마이너리티 정책에서는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의 흔적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타자를 강제로 쫓아내거나 ‘우리’와 동화시키려는 국가의 폭력만 눈에 띌 뿐이다. 미증유의 생존권 위협에 놓인 위구르족에 대한 정책들은 한민족이 일제강점기 말에 겪은 민족말살책을 방불케 한다. 우리는 정말 1930년대나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암흑기로 돌아가고 있는가? 역사는 그대로 돌아가는 법이야 없지만 1930년대의 ‘소프트’한 변종이 지금 다시 도래하고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소프트한 변종’이란 1930년대와 오늘날 사이의 ‘정도의 차이’를 뜻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축적·재생산 모델은 고장 났지만, 적어도 세계 체제 핵심부나 준핵심부에서 국가적 재분배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다수가 체감하는 절대적 박탈의 정도가 다르다. 예컨대 유럽 경제의 중심인 독일에서마저 이제 총인구의 거의 20%가 빈민으로 분류되지만, 대부분은 1930년대와 달리 영양실조의 위협까지는 받지 않는다. 절대적 빈곤이 1930년대에 비해 감소되면서 절망에 빠진 다수가 극우 궤변가 집단에 몰표를 던져 역사적 비극을 다시 낳을 확률도 어느 정도 적어졌다.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유럽의 핵심 국가들은, 여전히 중도 정객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단, 다수의 유럽 시민은 주류 정치에 대한 희망을 이미 잃었는데 이것이야말로 1930년대를 방불케 하는 점이다.
1930년대는 세계대전으로 끝났지만, 핵무기의 존재가 전면적 대전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오늘날에는 열강 사이의 대리전과 유사 전쟁들이 판을 친다. 위에서 이야기한 무역 전쟁이나 제재전은 광의의 유사 전쟁에 속한다. 한데 그뿐인가? 주요 열강 사이의 서로에 대한 사이버 공격이나 여론 흔들기나 호도를 위한 여론 전쟁, 정보 전쟁들도 이제 일상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열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정학적 ‘지층’ 사이에 놓인 약소국에서는 계속해서 강대국의 침략이 들어오거나 대리전들이 터지곤 한다. 우크라이나 동부나 시리아는 이미 황폐해졌고 이란과 베네수엘라는 언제 미국의 직접 공격 내지 미국이 사주하는 내전의 무대가 될지 알 수 없다. 꼭 열전이 나지 않는다 해도 전쟁이 계속 날 것 같은 분위기는 군비 증액을 부추겨 군수기업의 이윤 창출로 이어진다. 사실 이거야말로 군사 모험주의 분위기를 부추기는 주된 목적이기도 하다.
1930년대나 지금이나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이윤율 저하의 위기에 봉착했다. 한데 시장 경기 하락과 무관하게 지속적인 이윤을 뽑을 수 있는 업종은 바로 관수 위주의 군수공업이다. 시장 상황이 나빠질 때 총자본은 늘 전쟁을 요청한다. 2000년의 소위 닷컴 위기, 즉 신생 정보기술(IT) 기업들의 과잉 투자·생산 위기가 바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 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자본의 위기가 깊어질수록 군비가 늘어나게 돼 있다. 세계의 군비 총액은 이미 냉전 말기보다 높은데다 계속 증액된다. 세계대전에 비할 만한 큰 전쟁이 날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크고 작은 전쟁들이 터지는 것은 필연이다.
세계적 자본의 위기, 빈곤화, 공격적인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의 광란과 마이너리티들의 비극, 그리고 무역·정보·가상세계의 전장화와 대리전들의 일상화…. 만성적 불안의 암흑기로 접어든 세계에서 한반도의 급선무는 무엇인가? 첫째도 평화, 둘째도 평화, 셋째도 평화다. 한반도야말로 지정학적 ‘지층’ 사이에 놓인 완충지대의 전형적 사례다. 한반도 전장화의 위험이 현실화되기 전에 남북한 사이의 신뢰 구축을 통해 그런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남북한이 가면 갈수록 대립이 장기화되고 공고해지는 두 열강과 각각 군사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는, 남북한 사이의 평화와 친선이 외부 국가들과의 그 어떤 동맹보다 더 우선하는 수준까지 남북관계를 끌어올려야 한다. 열강의 패권 구도는 늘 변하기 마련이지만, 그 패권 구도가 한반도의 현실을 지배하게 되는 순간 청일, 러일, 6·25 전쟁 시절 같은 한반도 전장화의 악몽은 다시 돌아온다.
평화와 함께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보다 훨씬 더 과감한 무역의존 모델로부터의 탈피가 필요하다. 상호 제재와 무역 전쟁들이 일상화되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의 국민총소득 대비 수출입 비율이 86.8%나 된다는 것은 치명적 약점이 된다. 물론 아무리 저소득층의 소득을 높이고 아무리 국가의 재분배 기능을 강화하고 아무리 내수를 키워도 세계 자본주의 전체가 깊은 위기에 빠진 오늘의 국내외적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당분간 불안과 상대적 빈곤화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단, 평화와 국가적 재분배는 적어도 우리에게 다시 닥쳐온 시련의 시대가 한반도 전체와 개개인에게 가하는 타격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는 있을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19.7.2.
다시 돌아온 저주, 가난
인간에게는 고질병이 하나 있다. 바로 소망적 사고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 세계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간다고 낙관한다. 한데 결국에 이 낙관이 바로 현실과 우리의 희망을 혼동한 판단 착오라는 것을 알게 된다. 1930년대의 공황과 파시즘의 횡행 같은 자본주의 위기의 후과들을 목격한 전후 호황기 지식인들은 1950~60년대에 앞을 다투어 고전적 자본주의에 사망선고를 내리곤 했다. 1960년대에 베스트셀러가 된 <풍요한 사회>(1958)의 저자 존 갤브레이스(1908~2006)는 전후 호황기 속에서 가난의 문제가 이미 해결됐다고 한때 장담하지 않았던가? 그뿐인가? 대니얼 벨(1919~2011) 등은 ‘탈산업사회’라는 관념을 대중화했고 1980년대 이후의 포스트모던 이념가들은 고전적 자본주의를 벗어나 욕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신세계’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적어도 세계체제의 핵심부에서 초과착취와 과로노동, 가난 등이 이미 영원히 사라졌다고 낙관했다. 하지만 그들의 진단은 완전히 틀렸다. 전후 호황기는 이미 1970년대에 끝나가고 있었고,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도입과 함께 1990년대 이후에 고전적 자본주의의 모든 증상이 다시 산업화된 고소득사회에 돌아왔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가난이다.
가난은 모종의 결핍을 의미한다. 일차적으로 기본적 욕구, 즉 의식주를 해결할 물질의 부족을 함의하지만, 굶주림이나 불충분한 영양섭취만이 가난은 아니다. 휴식도 1차적 욕구인데 쉴 여유가 별로 없는 사람은 ‘시간 빈곤’에 시달린다고 표현해도 좋다. 성도 마찬가지로 1차적 욕구에 속하는데 성관계를 맺을 여력조차 없는 상황을 ‘성 빈곤’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들은 성만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2차적 욕구, 즉 심적 욕구 중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친밀한 관계, 즉 애정 내지 우정 관계에 대한 욕구다. 그러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는 ‘관계 빈곤’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본능적, 심적 욕구들이 충족되면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실현을 희망할 여유를 갖게 된다. 돈이나 사회적 인정, 신분 상승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내가 좋아서’, 본인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을 하게 된다. 참고로 누구나 자유로이 자기실현을 할 수 있고, 그 자기실현이 공공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사회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라고 명명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는 일당통치체제나 국유경제 등으로 종종 오해되는데, 공산주의의 본래 의미는 더 이상 소외가 없는 사회에서 만인이 평등하게 자기실현을 도모할 자유다.
그런데 인류의 궁극적인 이상이자 희망인 이 공산주의로부터 우리가 지금도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1848년만큼이나 멀다. 신자유주의는 전후 호황이 그나마 해결해준 것 같았던 1차적 욕구의 충족마저도 다시 문제로 만들었다. 노년층의 절반이 빈곤층에 해당하고, 산업화된 사회 중에서 노인의 가난이 가장 심각한 수준에 이르는 한국에서 상당수의 노인은 과일이나 동물성 단백질을 충분히 먹지 못한다. 지난해 매일유업 사코페니아연구소가 진행한 조사에 의하면 65살 이상 노인의 30%는 단백질 섭취를, 66%는 과일 섭취를 각각 충분히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게 과연 3만달러 시대 대한민국의 모습이냐고 반신반의할 만하기도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거의 2배인 미국에서의 상황은 더 심각하면 심각했지 덜하지는 않다. 미국 총인구의 8분의 1, 즉 약 1200만명 아동을 포함한 약 4천만명은 ‘식량 접근이 불안정한 인구’, 쉽게 이야기하면 영양 부족에 노출되어 언제 굶을지 모르는 식량 빈곤 인구로 분류됐다. 그러니 ‘3만달러’ 따위의 숫자놀이는 사실 무의미하다. 신자유주의적 분배구조는 음식쓰레기가 넘쳐나는 사회에서도 기아 상태로 언제 떨어질는지 모를 식량 빈민들을 낳는다.
물론 빈곤층의 영양부족 규모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에 비해 그나마 나아진 편이다. 한데 시간 빈곤과 휴식 빈곤은 가히 한 세기 이전의 수준에 가까워져 간다고 하겠다. 한국이야 세계 최악의 초장기 근로사회 중의 하나라는 점을 한국인이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부 업종의 과로 수준은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평균 주당 실제 근무시간이 55시간 정도 되는 집배원의 과로사가 잇따르지 않는가? 그런데 실제로는 이 한국적인 만성 과로, 만성 스트레스 상황은 점차 세계의 새로운 ‘표준’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는 23%의 임금 근로자들이 만성적 피로증을 호소했다.(2018년 갤럽 조사) 해고불안에 비현실적인 생산성 요구, 거기에다가 길지 않은 휴식시간인 저녁에도 필수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직장으로부터의 문자나 전자우편…. 새로운 정보통신 수단들은 문명의 이기에서 노동자들의 건강을 치명적으로 해치는 흉기로 변한 것이다. 그런 변화의 가능성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늘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치솟는 부동산 가격과 육아 비용, 그리고 직장불안·스트레스에 찌들 대로 찌든 만성적으로 피곤한 사람들이다. 매일 파김치가 되고 이런저런 걱정을 덜어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관계를 맺을 여력을 찾기가 쉽겠는가?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이미 전세계가 알아주는 ‘섹스리스’(성관계 빈도가 매우 낮은) 사회가 됐다. 기혼·미혼의 구분을 떠나 보자면 38%의 한국 성인은 성관계를 맺지 않고 산다. 기혼자라 해도 36%가 성관계를 맺지 않는다. 미국은 그것보다 덜하긴 하지만 부부간 성관계 횟수는 30년 전에 비해 약 30%나 떨어졌다는 연구발표가 있었다. 제대로 된 음식이 혼자 먹는 패스트푸드로 대체되듯이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이루어지는 ‘자연적’ 성관계는 많은 경우에는 각종 ‘야동’이 뜨는 컴퓨터 화면 앞에서의 혼자만의 자위행위로 대체된다. 성관계를 맺을 시간조차 없다면 과연 지속가능한 애정관계를 이끌어나갈 여유는 있겠는가? 한국에서는 20~44살 미혼 남녀 가운데 실제 이성교제를 하는 사람은 10명 중 3~4명에 불과하다. 결혼이나 동거는커녕 연애도 사치로 통하는 시대, 이 시대야말로 관계 빈곤의 시대가 아닌가?
갤브레이스나 벨의 진단과 달리 전후 호황기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그 호황기를 대체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사회는 분명 풍요롭지만, 그 풍요를 수반하는 것은 생활의 모든 부문에 걸친 상대적 빈곤화다. 명목상의 임금 액수는 올라도 어차피 특히 대도시의 치솟는 집값이나 기본 서비스의 가격 등을 따라잡지 못한다. 이윤율이 떨어진 제조업 대신에 엄청난 투자금이 이제는 부동산 내지 사회서비스 부문 등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자본이 원하는 이윤은, 노동자이자 소비자들에게는 상대적 빈곤화를 의미한다. 지갑 사정도 대다수가 늘 빠듯하지만 마음의 여유도 시간적 여유도 없고 대인관계에서도 행복감을 찾지 못한다. 자본이 우리에게 빼앗은 삶의 행복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진보투쟁의 궁극적 목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19.6.4.
양현석과 YG 패밀리의 유산
양현석은 나에게 오랫동안 ‘서태지와 아이들’의 양군이었다. 1992년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무너진 공교육 현실을 정통으로 비판했고 세 멤버 모두 대학에 가지 않았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기성세대의 문법에 따르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삶을 멋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검열에 반대해 ‘시대유감’을 불렀고 정직한 사람의 시대는 갔다고 포효했으며 발해를 꿈꾼다며 통일을 노래했다. 1996년 1월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를 선언했을 때, 한 시대가 저물었다고 다들 이야기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나라가 망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쳤다. 당시 직격탄을 맞은 건 여성들이었다. 대졸 여성들의 일자리 자체가 줄었고 여성 일용직은 급증했으며 여초 직종인 서비스직 노동 환경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불법파견이라는 삼중고를 견뎌야 하는 자리로 변했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여성의 위기라고 아무리 말해도 사회는 그 목소리를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책임마저 전가했다.
당시 지면과 화면에 등장한 남성 전문가들은 경제위기를 이겨내기 위한 비법으로 ‘남편 기살리기’를 제안했고 아내들은 실제로 단체를 만들어 남편 기살리기 운동을 했다. 아이들은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를 불렀다. 저항정신을 내세우던 로커와 래퍼도 고개 숙인 아버지의 쓸쓸함을 그리며 부모님 말씀을 거역한 불효자인 자신을 반성했다. 위기를 만나자마자 가장 먼저 되살아난 건 가부장을 살리고 그 아래 가족끼리 똘똘 뭉쳐 가족할인으로 묶이는 신가족주의였다.
‘아이들’이었던 양현석은 패밀리를 결성해서 돌아왔다. 1999년은 한국의 대중음악계에 본격적으로 패밀리라는 이름이 등장한 해였다. 와이지(YG) 소속 아티스트들은 양현석의 말투를 흉내 내고 그와 나눴던 대화를 전달하며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가 단순히 비즈니스를 넘어선 유사가족 공동체라는 점을 이야기하곤 한다. 양현석은 그렇게 아이들에서 아버지가 되어갔다. 버닝썬 사태 이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 기자에게 내사 종결될 것이라고 자신한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성접대 결백, 내 새끼 승리 믿었다”며 이 유사가족 공동체의 가장의 위치에서 대중들에게 읍소한다. 그는 가족의 명예를 위해 아들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고개 숙인 아버지처럼 굴었지만 그가 바로 성매매 알선 의혹의 당사자라는 점은 교묘히 감춰졌다. 승리는 “한명당 천만원” 등 구체적인 문자 증거가 나왔는데도 성매매 알선 혐의로 기소되지 않았다. 양현석은 성매매 알선 등이 이루어진 현장에 동석했다는 증언이 나왔고 싸이도 소환되어 조사받았지만 그 누구도 아직 구속은커녕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경찰은 명운을 걸고 전력을 다한다고 한다. 하지만 돈은 대부분 현금으로 지불되었을 것이고, 모두가 범죄자가 되는 현행 성매매특별법에서 증언을 해줄 여성을 찾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언제나 이런 방법으로 소위 ‘성접대’라고 불리는 성매매 알선 혐의는 증거 불충분으로 끝나버렸다. 클럽 버닝썬의 폭행 피해자 김상교씨는 도리어 가해자로 기소되었다. 가해자로 몰렸으면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적극 나서야 할 터인데 그는 돌연 입을 다물겠다고 선언했다. 상식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다행히 여론은 아직 잊지 않았다. 대학가에서는 와이지 소속 가수들을 초청하지 말라며 항의 성명이 나오고 팬들은 좋아하는 가수가 소속사를 나오길 바란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여론과 팬덤만이 희망이 되고 있다. 실제로 그들을 먹여 살려온 게 소녀 팬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모든 사태는 정말 엄청난 배신이 아닌가.
연예기획사들이 시스템을 갖추고 주식회사가 되면서 인신매매, 성매매, 마약 등 소위 어둠의 세계와는 단절된 줄 알았다. 하지만 버닝썬에서 드러난 범죄 의혹들은 약물강간과 미성년자 납치 감금 및 집단강간 및 폭행 등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해졌다. 양현석이 패밀리를 통해 남기고자 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이런 랩을 들려주고 싶다. “백색가루에 뻗친 끝이 없는 욕심, 너 모르게 죽어갔던 아비를 지켜본 어린아이 눈 속에 비친 너의 개만 못한 짓이여. 이제는 끝이여. 자, 다음 차례 여자들을 팔아넘겨 배 채운 돼지여. 남자란 힘을 잘못 쓴 그대여. 썩은 내 그 목구멍 속에 넘어간 인생….” 너무 심한가. 놀랍게도 이는 1999년 발표된 ‘우리는 Y.G. 패밀리’의 가사고, 작사가는 바로 양현석이다. /권김현영 여성학 연구자 한겨레 2019-07-02
트럼프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손을 맞잡고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 일주일이 지나도록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그가 한반도에 이런 극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힐러리가 집권해 북한을 향한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 사실상 무시전략이 계속됐더라면 현재 남북관계는 어떻게 됐을까. 내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재선을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지독한 ‘반환경주의’다. 트럼프는 2016년 대통령이 되자마자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했다. 최고의 경제대국이자 중국에 이은 두 번째 공해배출국으로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통 공업을 되살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공약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는 기후변화를 아예 “거짓말”이라고 했다. IPCC의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를 “좋지 않은 보고서”라고 했고, 국가기후평가보고서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빼라고 경고했다. 이런 대통령의 무지 때문일까. 미국의 환경정치와 환경정책은 약진하고 있다.
선라이즈 무브먼트와 정의민주당원(Justice Democrats),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약칭 AOC)가 등장해 팀을 이뤘다. 선라이즈는 2017년 기후변화에 대한 정치적 행동을 위해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만든 단체로, 작년 11월 중간선거에서 재생에너지 정책을 추진하는 민주당 후보를 도왔다. 역시 2017년 민주당 내 진보그룹으로 설립된 정의민주당원은 기업들의 자금 지원을 받는 민주당 의원을 모두 교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정의민주당원이 지지하는 후보 79명 가운데 26명이 경선을 통과했고 7명이 최종 당선됐다. AOC는 두 단체의 지지에 힘입어 뉴욕 제14선거구에서 최연소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지난해 선거 직후 캘리포니아에서 사상 최악의 산불이 나자 선라이즈와 정의민주당원 활동가들은 민주당의 기후변화 대응에 항의하기 위해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집무실을 점거했는데, AOC는 농성장을 방문하고 연대함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팀은 민주당 하원의 요청에 따라 지난해 12월부터 자신들의 주장을 ‘그린 뉴딜’ 정책으로 구체화했고, 올 2월 AOC는 ‘그린 뉴딜을 실행하기 위한 연방정부의 의무’를 정하는 결의안을 하원의원 64명과 상원의원 9명의 공동발의로 하원에 제출했다. 그린 뉴딜은 기후변화 대응을 중심으로 한 전방위적 사회개혁 프로그램으로 사회주의,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밀레니얼 세대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대책은 뉴욕시에서 나왔다. 민주당 소속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2014년~현재)은 도쿄에 이어 2위인 뉴욕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2030년까지 40%, 2050년까지 80% 줄이기 위해 지난 4월 에너지효율이 낮은 유리외벽의 고층건물 신축을 금지시켰다. 또 연면적 2323㎡(대개 6층) 이상인 건물 5만여동에 대해 온실가스 배출 상한선을 정하고 이를 어기면 벌금을 매기겠다고 했다. 뉴욕시는 이미 지난해 1월 석유화학 관련 기업에 투자했던 50억달러 규모의 공공기금을 회수하고 기후변화의 책임을 물어 5개 석유 관련 회사를 제소하기도 했다.
기후변화와 싸우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재임 2002~2013년)이다. 공화당, 무소속을 거쳐 현재 민주당원인 그는 지난달 MIT에 5억달러를 기부해 미국 최대 규모의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캠페인 ‘탄소 너머(Beyond Carbon)’를 출범시켰다. 그는 과거에도 시에라클럽과 함께 ‘석탄 너머(Beyond Coal)’ 캠페인을 펼쳐 2011년 이후 530개이던 석탄화력발전소를 절반으로 줄였는데, 이번에는 2030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를 완전히 없애는 게 목표다. 그는 트럼프에 맞서 내년 대선에 출마하려던 뜻을 접은 대신, 주와 도시들의 재생에너지 정책을 지원하고 있다.
트럼프가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했을 때 미국 10개주와 200여개 도시는 서로 기후동맹을 맺어 트럼프의 결정과 상관없이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했다.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등 다른 도시들의 노력도 뉴욕에 못지않다. 트럼프 당선이 희망적일지도 모른다는 예언을 한 사람은 미국의 종교철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존 B 캅 주니어이다. 그의 책 <지구를 구하는 열 가지 생각>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개구리를 찬물에 넣으면 그들은 안심한다. 그 물을 조금씩 데우면 개구리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죽을 때까지 끓여지는 걸 조용히 받아들인다. 우리는 오바마 정부 때 그의 유려하고 확신에 찬 언변 때문에 이것을 받아들였다. 트럼프의 당선은 갑자기 열을 올렸다. 수백만명이 깨어났다. 내가 옳다면 이것은 정말 축하할 일이다.”
차별을 넘어선 평등한 ‘재현’
최근 미디어 재현 방식을 둘러싼 논쟁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한 아이스크림 광고는 여자 어린이 모델을 기용하면서 성적 소구 방식을 사용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실사화되면서 성차별, 인종차별 양상이 개선되거나 새로운 범주의 인물이 등장한다고 알려지면서 논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영화 <알라딘>에서 서사의 중심이 여성으로 옮겨졌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고, <인어공주> 애니메이션 실사화 캐스팅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배우가 흑인 여성으로 알려지자 과도한 PC(political correctness)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온라인상에서 오가는 이러한 논쟁들을 보면 흔히 문제의식을 느끼는 측에 대해 ‘불편해한다’는 표현을 써가며, 대부분 문제가 없다고 느끼는데 소수의 예민한 사람들만이 꼬투리를 잡는다는 식으로 의미화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어린이 모델 아이스크림 광고주가 해당 광고를 철회하면서 낸 사과문에서도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논쟁은 ‘소수의 불편’ 문제로 폄하할 사안이 결코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미디어의 재현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이상에 대한 것이며, 재현의 다양성과 성평등 가치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인식되어야 하는가와 관련된 사회적 담론의 장을 여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이스크림 광고 이미지의 경우 우리가 오로지 노출 문제로만 성적 대상화 문제를 이해해온 경향 때문에, ‘입을 클로즈업한 이미지가 어떻게 아동의 성적 대상화라는 것이냐’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이상한 사람들이다’라고 하거나 심지어 ‘아동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질투해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등의 반응까지 나왔다. 과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2015년 영국 광고심의위원회(The Advertising Standards Authority)는 성인 모델이 찍은 광고이지만 미성년자처럼 여겨지기 쉬운 여성이, 비록 노출이 심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맥락에서 성적 함의를 보이는 자세를 하고 있다면 문제적이라고 판단한 바 있다. 또한 2014년 아메리칸 어패럴의 ‘Back to school’ 교복 웹 광고 이미지에 대해서도 역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고 있으며 성차별적이고 심각한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와 같은 판단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기준이 노출이나 음란성 기준이 아니라 성차별성의 문제, 특히 아동·청소년이 대상인 경우 당대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성적 함의를 가질 수 있다면 그 자체가 문제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미디어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 여성을 동등한 시민으로 대하지 않는 성차별 관행이라는 것과 미성년자는 어떤 경우에도 성적 함의를 갖는 이미지나 문구로 표현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한국의 경우 최근 웹 광고 등에서 여아를 성인 여성처럼 보이게 하거나 성적 함의를 갖는 이미지로 재현하는 경향이 등장했지만 관련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번 논란은 이러한 이미지 재현 양식이 왜 성차별적인지, 그리고 미성년자를 재현할 때 어떤 기준이 필요한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의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최근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재현 방식 변화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러한 재현 방식이 이상적이라거나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다. 재현 다양성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디즈니가 인종, 성별, 장애 등에 대한 차별적 재현 양상을 보여온 것에 대한 비판은 오래된 일이다. 비판의 역사를 생각하면 디즈니는 이제야 흉내라도 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다양한 인종을 등장시키고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최소한의 요건일 뿐이다. 특히 아시안의 묘사에서 여전히 고정관념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상황은 과도한 PC는커녕 출발선에서 백인남성중심성을 ‘약간’ 벗어난 작품들이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디어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틀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나는 괜찮은데?’가 이러한 미디어 재현의 기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만약 자연스럽게 여겨졌다면 왜 그런지가 질문이 되어야 할 일이다. 최근의 재현에 대한 논쟁을 평등한 재현이라는 이상을 합의하고 논의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김수아 |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경향 2019.7.7.
흔들리는 ‘장자연’ 진실, 주목되는 ‘윤석열 검찰’
과거사위 발표를 ‘명백한 허위’라던 <조선일보>는 다른 언론을 비난하며 <한겨레>에도 민형사 소송을 걸었다.
진실이 왜곡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지 않도록 위증·무고 수사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
‘윤석열 검찰’이 출범한다면 언론권력에도 당당하길 기대한다.
또 이 얘길 써야 하나,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다 진실이 왜곡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뀔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장자연 사건 조사 결과에 “‘조선일보의 수사외압’ 발표는 명백한 허위”라던 <조선일보>는 이후에도 증인 윤지오씨의 행적을 시비하며 다른 언론을 비난하는 기사·칼럼을 여러차례 실었다. 방상훈 사장의 차남 방정오 전 <티브이조선> 대표는 <문화방송>과 <한국방송>에 이어 <한겨레>를 상대로도 민형사 소송을 걸어 수사가 진행 중이다. 시민단체·여성단체들이 ‘윤석열 청문회’를 앞두고 장자연 사건 재수사를 요구한 것도 조선일보의 이런 태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허위’라며 내세운 근거는 방상훈 사장이 사건과 무관한데 왜 외압을 행사하겠느냐는 논리다. 이 대목에서 동생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사장, 차남 방정오 전 대표의 존재는 슬쩍 감춘다.
그러나 과거사위는 수사 책임자인 조현오 당시 경기경찰청장이 ‘협박’받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는데다 강희락 당시 경찰청장도 조선일보의 조사방해 사실을 진술한 걸 근거로 ‘외압’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이들이 굳이 없는 얘기를 지어낼 이유가 있을까. 과거사위 판단이 더 설득력이 있다.
장자연 문건에 대해서도 조선일보는 장씨가 왜 자살했는지가 사건의 본질이라며 문건 유출을 우려하다 우울증이 심해진 때문이라는 취지로 보도했다. 소속사 분쟁을 부각한 것도 문건의 신빙성을 흔들려는 뜻으로 읽힌다.
반면 과거사위는 폭행과 협박 피해, 술접대 등 대부분 내용이 사실에 부합하기 때문에 문건이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주변의 증언 등을 토대로 장씨가 방용훈 사장을 ‘조선일보 방 사장’으로 인식하고 문건에 그렇게 적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조선일보는 이미 ‘부실’ 판정을 받은 10년 전 검경 수사기록을 다시 끌어와 반박했다. 과거사위가 ‘본지의 명예를 먹칠하기 위해 일방적 진술을 사실인 듯 인용했다’고 했다.
그러나 2007년 10월 방용훈 사장과 여럿이 만나는 자리에 장씨를 동석시켰던 소속사 김종승 대표의 2008년 7월17일 일정표에는 ‘조선일보 사장 오찬’ 약속이 적혀 있었다. 문건에서 ‘조선일보 방 사장’이 잠자리를 요구했다는 2008년 9월로부터 2개월 전이다. 김 대표는 ‘사장’이 계열사 사장 ㅎ씨라고 주장했으나 그는 당일 다른 약속에 참석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자 ‘약속했다 취소했다’고 말을 바꿨다. 주변 사람들에게 경찰에서 거짓진술을 하도록 부탁하는 등 문건의 ‘방 사장’이 ㅎ씨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려고도 했다는 게 과거사위 발표다.
장씨가 우울증을 앓았다고 해서 없는 일을 지어낼 이유는 없다. 다른 건 다 사실대로 쓰면서 ‘방 사장’ 일가 대목만 사실과 다르게 썼을 리도 없다. 이런 상식적인 의문들이 풀리지 않는 한 ‘방 사장’ 일가에게 섣불리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문제는 검찰·경찰이다. 과거사위도 인정했듯이 엉터리 수사를 했다. 김 대표 진술에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데도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 검찰은 불기소장에 장씨가 ㅎ씨를 만난 것처럼 오해될 수 있게 적고, 2007년 10월 모임 대목에선 방용훈 사장 관련 내용은 쏙 빼놓았다. 당시 확보된 통화내역과 디지털포렌식 자료, 수첩 복사본 등이 모두 수사기록에서 사라졌다. 수사경찰과 검찰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정도로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여러모로 은폐 조작의 냄새가 진동한다.
8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는 “강자 앞에 엎드리지 않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 정치권력·자본권력 수사에서 빛나는 성과를 올린 건 온 국민이 기억한다. 다만 사법농단 사건에서 언론권력 수사엔 아쉬움이 남는다.
엉터리 수사의 ‘주홍글씨’가 이마에 선명한 검경이 납득할 만한 조처나 해명도 없이 장자연 사건 후속 수사까지 하고 있으니 영 미덥지가 않다. 김종승 대표의 위증은 검찰, 방정오 전 대표의 고소 사건은 경찰이 수사 중이다. 위증의 동기·배후와 무고의 경위라도 적극 수사한다면 진실의 일부나마 드러낼 수 있겠지만 의지가 안 보인다. ‘윤석열 검찰’이 출범한다면 억울한 죽음의 진실부터 제대로 파헤쳐 언론권력에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한겨레 2019 7.8
따옥따옥 그 슬픈 소리
습지, 늪은 지구상에서 단일 생태계 유형 중 영양물질이 가장 풍부한 곳이다. 당연히 생산성과 생물종다양성이 높다. 이곳을 논으로 만들면 상대적으로 힘들이지 않고 풍부한 수확을 올릴 수 있다. 대략 한 말의 볍씨를 심어 벼 4가마를 수확할 수 있는 면적인 ‘마지기’는 약 150~300평까지 지역마다 다른데, 한 마지기 면적이 150평으로 가장 작은 동네는 오랜 세월 동안 하천이 범람하던 늪지대를 낀 지역이다. 땅에 양분이 풍부하면 벼를 촘촘히 심어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배고프고 가난하던 시절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수확하기 위해 늪지를 메워 논경작지로 만드는 일은 국가와 개인 모두 절대적으로 해결해야 할 우선과제였다. 범람을 거듭하며 수만 년의 에너지가 응축된 늪지에 제방을 쌓아 풍부한 수확을 올려 배고픔을 탈출한 경험은 당시를 산 어르신들이라면 온몸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토건장비들이 여의치 않을 때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말 그대로 순수 노동으로 제방을 쌓아 왔던 어르신들의 헌신으로 그 많던 범람원 늪지대는 빠르게 사라졌다. 어르신들에게 늪지대란 훌륭한 논이 되어야 할 곳이 버려진 안타까운 곳이며, 이곳에 터를 잡은 수많은 새들과 동물들은 곡식을 훔쳐가는 유해조수일 뿐이다. 늪지를 그대로 둔다는 것은 배고픔을 기억하는 새마을운동세대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경제적 행위인 것이다. 이미 쌀이 넘쳐나 논에 다른 작물을 재배하면 지원금을 주고, 심지어 논농사를 짓지 않고 방치만 해도 돈을 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늪지대를 없애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들여 제방을 쌓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렇게 늪지대를 없애는 사업은 4대강사업을 통해 분명 실이 훨씬 큼을 확인했음에도 지금도 멈추지 않고 모든 지천으로 확장되어 늪지대를 없애고 있다.
생산량이 많은 토지는 적은 노력으로 풍부한 먹이를 사냥할 수 있으니 동물 입장에서도 훌륭한 서식처가 된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살던 늪지를 사람이 차지했으니 당연히 야생동물은 급감할 수밖에 없다. 특히 늪지가 주된 서식지인 동물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기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새마을운동이 활발해질 즈음 한반도에서 사라진,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담긴 처량한 목소리의 주인공 ‘따오기’도 사람과의 경쟁에서 도태된 종 중 하나이다.
늪지를 메우던 새마을운동과 함께 사라진 따오기 40마리가 10년의 노력 끝에 지난 5월 우포늪 사육장에서 야생으로 날았다. 따오기 서식처인 늪지를 꾸준히 확장하겠다는 창녕군의 의지와 함께 말이다. 야생에서 발견된 지 40년이 넘은 멸종종의 복원이니 창녕군의 노력에 너무 감사하며 이 아이들이 잘 적응하길 바라 본다. 그런데 이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이율배반적 늪지훼손을 다른 이도 아닌, 10년간 따오기를 증식, 방사한 경남 창녕군이 진행하고 있다. 따오기가 새장에서 나오면 곧바로 찾을 것이라 예상한, 우포늪에서 불과 10㎞ 남짓 떨어진 대봉늪 한가운데를 막는, 자연습지를 훼손하는 제방공사가 따오기 방사와 함께 진행 중인 것이다. 제방공사를 위해 축구장 22개 크기의, 나라에서 인정한 몇 안되는 1등급 습지를 단 3시간 만에 조사한 후 환경적 가치가 없다고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예상대로 방사한 따오기 중 한 마리는 공사로 인해 훼손돼가는 열악한 여건에도 대봉늪을 찾았고 그곳에는 지금도 다양한 멸종위기종의 서식 흔적이 널려 있다. 발 달린 동물은 그 어떤 개발에도 다른 곳에 가서 잘 산다는 환경영향평가는 대체 왜 하는지? 거짓으로 포장한 늪지대 훼손공사를 멈춰야 하는 이유로 무엇이 더 필요할까?
홍수와 재난을 막기 위해 이미 70년대부터 하천 제방을 제거해 온 독일과는 반대로 지금도 전국 지천의 제방은 높아져만 가고 홍수를 막는, 따오기의 서식처 늪지대는 사라지고 있다. 새장 밖을 나온 따오기를 맞이하는 곳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죽음의 함정이 아니길 바란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다문화가족 가정폭력, 인권위의 엉터리 통계
전남 영암에서 남편이 베트남 출신 아내를 폭행해 다치게 한, 참담한 사건이 발생했다. 국내 언론은 그 사실을 보도하면서 “국가인권위원회가 2017년 결혼이주 여성 92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절반에 가까운 387명(42.1%)이 가정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한 언론은 여성 결혼이민자의 가정폭력 피해율이 국내 여성의 ‘지난 1년간 가정폭력 피해율’ 12.1%(‘2016년 가정폭력 실태조사’)보다 약 3.5배 높은 수준인 것으로 분석했다.
과연 그럴까? 국가인권위원회의 연구용역보고서 ‘결혼이주민의 안정적 체류 보장을 위한 실태조사’(2017)는 “이주민 관련 기관들의 협조를 통한 눈덩이 표집 방법을 활용하여” 표본을 수집했다고 적었다. ‘눈덩이 표집’은 작은 눈뭉치를 굴려 점점 더 큰 눈덩이를 만들어 가듯이, 처음 단계에는 표집 대상이 되는 소수의 응답자들을 찾아내 조사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그 응답자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해 비슷한 속성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소개하도록 하여 그들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방식으로, 비확률표집의 하나다. 그것도 “이주민 관련 기관들”을 통해 조사했다는 것이다. 마치 교회·사찰 등에서 사람들의 종교를 조사한 것과 마찬가지다.
여성가족부의 ‘2010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와 ‘2013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에서도 여성 결혼이민자의 가정폭력 피해 실태를 부가적으로 조사한 바 있다. 이 두 부가조사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이용한 결혼이민자’를 모집단으로 하고, 각각 307명과 301명의 표본을 ‘유의추출’했다. ‘유의표집’은 모집단에 대한 연구자의 사전지식을 바탕으로 표본을 추출하는 것으로, 비확률표집의 일종이다.
‘눈덩이 표집’이든 ‘유의표집’이든 비확률표본은 모집단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므로, 응답자의 특성을 기술하는 것만 가능할 뿐, 어떤 형태의 일반화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에선 2018년 ‘결혼이주 여성 체류실태’라는 인포그래픽을 배포하면서, 비확률표본이라는 점도 밝히지 않았고, 연구용역 수행기관의 결과물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적시하지 않았다. 이 조사결과는 국내 언론 대다수가 인용했다.
그래서 다문화가족을 대상으로 확률표집을 한 조사결과를 찾아보았다. ‘가정폭력 피해율’은 ‘신체적·정서적·경제적·성적 폭력 중 하나라도 경험한 피해자의 비율’로 정의되는데, ‘비교의 등가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성의 ‘신체적 폭력’ 피해율만 비교했다. ‘2016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에서 국내 여성의 ‘신체적 폭력’ 피해율은 3.3%였고, ‘중한 신체적 폭력’ 피해자 비율은 0.5%였다. ‘2015년 전국 다문화가족 실태조사’에서 ‘지난 1년 동안 배우자와 다툼 이유’ 중 ‘폭언, 욕설, 신체적인 폭력문제’를 꼽은 사람은 여성 결혼이민자의 1.9%였다. 또 ‘2017년 국제결혼중개업 실태조사 연구’에 응답한,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해 결혼한 지 5년 이내인 여성 결혼이민자가 ‘지난 1년 동안 배우자와 갈등’ 사유로 ‘폭언, 욕설, 신체적인 폭력’을 고른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2.3%였다.
그런데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나타난 ‘신체적 학대’ 유형 중 하나인 ‘폭력 위협’ 피해율은 무려 38.0%였다. 이 조사결과만 유독 튀지 않는가. 두 가지 가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한 언론에서 머리기사로 뽑았듯이 “이주여성 40%는 맞고 살아요”가 사실이라면 한국 사회는 지옥일 것이다. 혹자는 실제 가정폭력 피해율은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가정폭력 피해자를 상담하고 지원하는 활동가들 중 일부가 이런 주장을 편다. 자신의 경험이 보편적이라 판단한 탓이다. 여성 결혼이민자의 신체적 폭력 피해율이 38.0%라면, 별로 드물지 않은 일인데 이번 일처럼 ‘충격적 뉴스거리’가 될 수 있을까? 따라서 이 가설은 확실히 기각할 수 있다.
둘째, 그 조사가 엉터리라면, 조사결과가 ‘피해자 이미지’를 확대·재생산해 다문화가족 구성원들을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불쌍한 사람들’로 여기는 고정관념을 키웠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해명해야 한다. 언론이 정정 기사를 써야 하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19.07.11
“니가 가라, 이민
<조선일보>가 지난 6일치 신문 1면에 ‘한국 떠나는 국민, 금융위기 후 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외교부에 따르면 해외이주 신고자 수가 2016년 455명, 2017년 825명, 2018년 2200명으로 2년 새 약 5배가 됐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그 이유로 “자산가는 국내 정치·경제적 상황을, 중산층은 환경·교육 문제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고 전한 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정치·경제적 불안이 자산가는 물론 중산층까지 해외로 내몰고 있다”고 말했다”며 ‘전문가 발언’을 곁들였다. 문재인 정부가 싫어서 이민을 가는 국민이 급증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튿날인 7일 오전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페이스북에 “한국을 떠나는 국민이 급증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며 “문재인 정권 포퓰리즘 시작, 그 후 1년, 2년….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이웃이, 이웃의 삶이, 우리의 꿈이 멀어져가고 있는 것 같다”는 글을 올렸다. 황 대표는 “떠나고 싶은 나라에서 살고 싶은 나라로 다시 대전환시켜 나갈 것”이라고도 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오후 이 글을 ‘황교안 “文정권 들어 해외이주 5배…우리 뭉쳐 바꿔보자”’라는 제목의 기사로 내보냈다.
그래픽 / 김지야
이미 몇몇 언론이 ‘팩트체크’ 형식으로 조선일보 기사의 문제점을 짚었는데, 한마디로 이 기사는 통계를 가지고 장난을 쳤다. 해외이주 신고자 수가 증가한 것은 맞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원인은 다른 데 있다. 해외이주 신고 사유는 크게 4가지다. 외국에 사는 친족을 따라 이주하는 ‘연고이주’, 외국 기업에 취업해 이주하는 ‘취업이주’, 투자이민처럼 이주국의 허가를 받아 진행하는 ‘사업이주’, 그리고 앞의 세 경우에 속하지 않는 ‘기타이주’다. 2018년에 연고·취업·사업이주는 거의 변동이 없었는데 기타이주만 79명에서 1461명으로 급증했다. 2017년 12월 해외이주법이 개정되면서 이미 외국에 사는 이주자들이 국민연금 수령 등을 위해 뒤늦게 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전체 기타이주자 중 1395명이 이런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서류상 이주자’인 이들을 빼면 2018년 실제 해외이주자는 805명으로 2017년의 825명보다 되레 20명 줄어들었다. 조선일보 기사는 해외이주 신고자 통계에서 구체적 사유는 무시한 채 전체 숫자만 가지고 사실을 왜곡했다.
조선일보가 가짜뉴스를 생산하고 황교안 대표가 확산시키고 조선일보가 다시 기사화한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11일 ‘정부의 현란한 팩트 흐리기’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친여 매체가 총반격에 나선다”고 억지를 부렸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다.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해 11월24일 <뉴스1>은 주광덕 자유한국당 의원이 법무부에서 받은 자료를 인용해 ‘“한국을 탈출한다” 국적 포기자 3만명 돌파…10년 만에 최고’라고 보도했다. 이튿날인 25일 송희경 자유한국당 원내대변인이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이 소득불평등 심화와 살기 위한 탈한국을 하고 있다’는 제목의 논평을 냈다. 다음날인 26일 조선일보는 ‘국적 포기자 올들어 3만명 넘었다’는 기사에서 “한국당 송희경 원내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소득주도성장의 여파로 인한 저성장과 일자리 부족, 각박한 사회 현실 등 부정적 요인 때문에 외국에서 새로운 삶과 가능성을 찾으려는 국민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이 또한 가짜뉴스였다. 2018년 ‘국적 상실자’가 증가한 것은 법무부가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인명부 작성을 위해 그동안 국적을 옮긴 사람들의 행정 처리를 집중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서류상 국적 상실자’가 늘어난 것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4·13 총선이 있었던 2016년엔 국적 상실자가 2018년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민을 많이 가는 미국과 캐나다는 국적 상실의 기준이 되는 시민권을 얻으려면 영주권 취득 이후 5년 이상 걸린다. 2018년에 시민권을 얻었다면 최소 5년 전인 2013년에 이민을 결정했다는 얘기다. 박근혜 정부 때로 소득주도성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실 이런 기사들은 일일이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정부의 잘못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은 언론과 야당의 중요한 사명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사실에 근거한 비판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 선동일 뿐이다. 특히 언론은 ‘사실 보도’가 생명이다. 입맛에 맞춰 사실을 비트는 건 언론의 기본 윤리를 저버리는 짓이다. 또 그 부작용이 크다는 점에서 백해무익하다. 정부에 대한 맹목적 불신을 부추기고 국가 경제와 국민 생활에 악영향을 끼친다. 아무리 문재인 정부가 싫어도 그래선 안 된다.
자유한국당과 조선일보에 말해주고 싶다. “니가 가라, 이민.”
안재승 논설위원 한겨레 2019-07-10
공동체는 사회를 구원하는가
<단속사회>를 내고 나서 사람들은 종종 나를 ‘곁의 인문학자·사회학자’라고 소개한다. 상찬 같아서 감사하지만 그 자리에서 늘 우려를 전하곤 했다. 곁은 곁일 뿐 사회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곁으로 사회의 문제를 대체하거나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시도를 위험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인스빌 이야기>는 공장이 문을 닫고 난 다음 지역사회가 서로의 곁을 지키고 만들며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제인스빌은 자동차 기업 제너럴모터스(GM)의 미국 최대 공장이 있던 곳이다. 금융위기 이후에 GM은 미국 내 많은 공장의 문을 닫았다. 제인스빌도 그중 하나였다. 삶의 기반이 사라진 이후 그 여파를 지역 사람들이 어떻게 겪고 있는지,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그 노력은 어떻게 또 서서히 부식되어 가는지 치밀하면서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제인스빌 이야기>는 한 번에 정리하고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여러 번 다른 각도에서 다양한 이론의 지원을 받으며 다층적으로 읽어야 한다. 친밀한 공간이 구조조정 이후 어떻게 변하는지에서부터 지역 정치와 중앙 정치, 지구적 자본과 정치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층적으로 읽어야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교육의 의미를 짚어보자. 공장이 사라지고 난 다음 국가가 가장 많이 도입하는 정책 중 하나가 ‘직업 재교육 프로그램’이다. 대학이나 전문대, 혹은 다른 교육기관이 그 틈을 파고 들어간다. 교육은 넘쳐나는데 구직자들의 취업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교육을 받고 난 다음 임금 상승 효과도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중앙정부와 지역정부 모두 ‘뭐라도 해야 하는’ 처지인지라 가장 생색내기 좋은 분야인 교육에 열을 올린다. 한국에도 넘쳐나는 직업 재교육, 창업 교육 등을 생각해보면 저성장·고실업 사회에서 교육의 의미를 재개념화할 필요를 느낀다.
책이 다루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이 글에서는 내가 곁이라고 부르는 공동체와 사회의 관계에 집중하고 싶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회를 구름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멀리서 보면 형체가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면 그 경계는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자칫하면 구름처럼 흩어지기 쉬운 게 사회다.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사회가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바우만은 코뮤니타스, 즉 공동체라고 부른다. 그는 코뮤니타스(공동체)가 양복의 안감과 같은 구실을 해 소시에타스(사회)의 형체를 유지시킨다고 말한다.
제인스빌에는 많은 코뮤니타스가 있다. 노조가 근간을 이루고 있고, 지역 방송국과 신문사가 있다. 여러 자선단체가 있고, 학교와 같은 교육기관도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모이고 교류하고 관계를 맺고 결속한다. 또한 코뮤니타스는 실업이나 가족 해체와 같은 사고를 당했을 때 개인적 불운으로 치부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서로를 구조하는 안전망 구실을 한다. 금융위기 이후, 제인스빌의 많은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자 전통적인 코뮤니타스들이 작동했다. 대표적으로 한 교사가 시작한 학교의 ‘벽장 프로젝트(파커의 벽장)’가 있다. 지역사회에서 생필품을 기부받아 벽장 안에 두면 삶의 위기를 겪는 학생들이 아무도 모르게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도움을 받은 학생들이 존재감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전통적 코뮤니타스가 붕괴하는 이유
제인스빌에는 새로운 코뮤니타스도 만들어진다. 코뮤니타스라기보다 네트워크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할 수 있다. 정파와 계층, 계급을 가리지 않고 제인스빌 자체를 살려보겠다고 모인 시민들의 자발적인 도시재생·재건 네트워크다. 예를 들면 ‘록 카운티 5.0’이라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 도시를 살리기 위해 뭐든 해보려는 정치인에서부터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개인들이 모여 의기투합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네트워크는 ‘경계’를 넘기가 쉽지 않다. 누구는 공장을 다시 살리고 싶어 한다. 또 다른 누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다른 기업을 유치하자고 한다. 이를 위해서 누가 무엇을 희생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르다.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경계를 넘어 만나지만 이들 사이에 그어진 전통적인 경계는 그리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주도권은 대체로 ‘혁신’을 주장하는 사람들 손에 넘어간다.
제인스빌도 다르지 않다. ‘혁신’이나 ‘신산업’을 내건 자본이 유혹하고 협박한다. 자기들에게 숱한 혜택을 주면 도시를 다시 살릴 수 있다며 청사진을 내보인다. 동시에 그 혜택이 충분하지 않으면 다른 도시로 떠나겠다고 협박한다. 그들이 약속하는 일자리와 미래는 모호하다. 도시가 그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혜택은 엄청난 규모다. 그 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도시의 다른 재정이 삭감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교육이나 의료 복지와 같은 재정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현금 주고 어음 받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코뮤니타스는 서서히 붕괴해간다. 자선단체 자금이나 활동도 점점 고갈된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제인스빌의 전통적인 의례 행위였던 노동절 행진이 상징적이다. 언제나 노조와 노동자들이 중심이었던 노동절 행사에 노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공장이 없는데 노동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신 홈리스 아이들이 행진한다. 문제는 이들의 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채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코뮤니타스는 소시에타스를 유지하는 안감이다. 코뮤니타스가 활성화된다고 해서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제인스빌 이야기>는 냉정하게 알려주고 있다. 전통적인 코뮤니타스가 탄탄하게 조직되어 활동하고 새로운 네트워크와 코뮤니타스들이 만들어져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전통적 코뮤니타스는 부식되고, 새로운 코뮤니타스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들러리가 되고 농락당하기기 쉽다.
왜 그럴까. 이 역시 바우만의 이야기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바우만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가장 큰 특징을 권력과 정치가 ‘이혼’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권력을 가진 자본은 비(非)장소성을 향유하며 자유롭게 떠돌아다닌다. 반면 여전히 장소에 얽매여 있는 권력은 자본을 통제하지 못한다. 통제는커녕 애걸해야 할 판이다. 그 결과 정치에 아무리 참여하더라도 삶의 근본이 흔들리는 것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 사람들은 점점 더 무력해져간다. 저 수많은 코뮤니타스가 노력하는데도 말이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에는 지역마다 코뮤니타스가 있는가? 울산 동구에는 코뮤니타스가 몇 개 있을까? 그 코뮤니타스들은 어떻게 얽혀 있고 어떤 일을 할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어떻게 부식되고 있는가? 우리는 이런 것을 알고 있는가? 알고자 하는가? 혹 하룻밤 이야기를 듣고 돌아와서 적당히 아는 이야기로 지어내는 식의 취재와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닌가? 글을 통해 사람의 삶을 다루는 자를 매우 부끄럽게 만드는 책이다.
엄기호 (문화연구자) sisain 2019. 7.12
“내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마라”
영화 <기생충>이 개봉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계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반지하의 끔찍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바퀴벌레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여름이면 벽지에 눅눅하게 피어오르던 곰팡이 냄새를 다시 맡는 듯 끔찍해한다. 어떤 이는 영화를 보는 내내, 또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자기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지 킁킁거리며 맡는다.
가난이 어떻게 삶을 파괴하고, 존엄이 파괴된 사람들이 어떤 정치적 복수를 하는지는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 지구적 이야기다. 미국이 대표적이다. 경제적 양극화와 가난한 이들의 삶이 파국에 처하게 되었을 때 민주주의가 어떻게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지를 경고한 퍼트넘의 <우리 아이들>에서부터 최근에 나온 <제인스빌 이야기>까지 많은 책이 있다.
그중에서 주목을 많이 받은 책이 <힐빌리의 노래>다. 저자 자신이 미국 중남부 애팔래치아산맥 지방의 백인 하층 계급을 지칭하는 힐빌리였다. 저자는 자신의 가족사를 통해 힐빌리들의 삶이 어떻게 처참하게 무너졌는지 세밀하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가난의 비참함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이 책이 다른 책과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이들의 삶에서 파괴되고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된 게 무엇인지, 그 내부자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이다. 가난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파괴한 것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몰랐던 그들의 정치적 삶과, 그것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에 대한 책이다.
힐빌리들의 삶이 그저 전근대적인 게 아니라 정치적 삶이라는 것은 책에 나오는 이들의 언어 행위가 주로 ‘맹세’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에서 알 수 있다. 정치적 삶의 요체에는 맹세라는 언어 행위가 있다(이것은 아감벤의 <언어의 성사>를 참조하면 좋다. 나는 <힐빌리의 노래>를 대학원 강의 등에서 소개할 때마다 이 책과 함께 읽으라고 권한다).
ⓒ이우일 그림
가족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다짐이나,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저주나, 없이 사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말이나, 이 모든 말은 맹세의 성격을 지닌다. 이 맹세를 지키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다. 자신의 이름과, 이름의 존엄은 명예를 통해 보존된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점을 힘주어 강조한다. “신의 보살핌 아래 그저 명예를 지키고자 살아가는, 오합지졸에 불과한 힐빌리”들에 대한 책이라고 말이다.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엇을 맹세했고, 그 맹세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명예로운 일인지, 그 명예로운 삶이 어떻게 불가능해졌는지 말한다. 책에는 명예라는 말이 두드러질 정도로 많이 나온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은 ‘신의 이름’과 ‘명예’가 아닌 ‘오합지졸’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 책을 읽지만 말이다.
힐빌리들은 가족의 명예를 지키고 돌보겠다고 맹세한다. 이들이 맹세하는 게 가족의 명예라는 점에서 힐빌리들이 추구하는 명예는 공적인 게 아니라 전근대적이거나 사사로운 것으로 보인다. 아니다. 이들의 세계에서 ‘가족’은 근대 자본주의에 와서 신성화된 사적 영역으로서의 그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들에게 가족은 경제 공동체이며, 지역사회를 이루는 지역 공동체이자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정치의 시작점이다. 사적 영역이 전혀 아니다. 때로 힐빌리들에게 가족은 혈연을 빙자해 서로 도와줘야만 하는 이유를 기어이 발견하게 하는 공동체다. 도와줘야 할 상황이 되면 ‘사돈의 팔촌의 구촌까지 뒤져서’라도 연줄을 발견하고 만다. 종종 가족이라서 도와주기보다 도와줘야 할 이유를 가족으로 정당화한다.
정치는 ‘이름이라는 존재’를 건 쟁투 행위
이런 측면에서 명예는 나보다 열악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용기를 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이익을 위해 배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리를 지키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이것은 명예가 아닌 이익만을 추구했을 때 가난한 이에게 초래하는 파국적인 결말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책에서 할머니는 명료하게 말한다. “없이 살면서 없는 사람 물건을 빼앗는 놈보다 더 천한 놈은 없단다. 안 그래도 모두가 먹고살기 힘든데, 없는 사람끼리 서로의 처지를 더 힘들게 만들 필요는 없단 얘기다.”
물론 명예는 그 자체로 선과 악이 되지 않는다. 어떤 맹세는 선한 결과를 낳고 어떤 맹세는 사람을 파괴하는 악한 결과를 만든다. 악명 높은 ‘명예살인’과 같은 것 말이다. 이 또한 가족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지키는 일이다. 맹세가 있는 삶을 그 자체로 선한 삶이라고 낭만화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점에서 맹세는 신중함을 요한다. 신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맹세와 명예는 다시 한번 정치적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맹세인가. 나의 이름을 걸고 할 만한 명예로운 맹세인가. 아니면 맹세를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명예로운 일인가. 이를 두고 ‘목숨을 건’ 토론과 투쟁이 벌어지는 게 바로 정치 아닌가? 정치는 그저 존재하는 명예를 추구하고 감시하는 ‘치안’ 행위가 아니다. 이름이라는 존재를 건 살아 있는 쟁투 행위다.
정치적 삶에 맹세는 필수다.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 삶의 파괴란 맹세를 부질없게 만든다. 맹세할 것도 없고, 맹세를 지킬 수도 없고, 맹세를 지킬 필요도 없는 삶이다. 당연히 목숨을 걸 만한 명예로운 맹세인가를 토론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거짓말과 허언만 남는다. 아니 거짓말만 하더라도 거짓 맹세이기에 여전히 정치적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말을 그저 읊조리는 것이 그보다 더 심각하다.
이 책에서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 바로 여기다. 저자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폭주’한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날 이해해준 사람은 아빠밖에 없었어!”라고 소리친다. 이에 저자와 다른 가족은 수긍한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서로를 지켜주는 특별한 유대가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때 어머니의 말은 관계를 의미화하는 말이며, 그런 의미에서 ‘맹세’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 말이 의미 없는 헛말이었음은 그 뒤에 이어지는 할머니의 죽음에서 드러난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어머니는 다시 폭주한다. 그리고 외친다. “너희 엄마가 아니라 내 엄마니까!” 이 말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어머니의 삶에서 이미 파악한 저자와 다른 가족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대응한다. “아녜요, 엄마. 할모는 우리 엄마이기도 했어요.” 저자에게 ‘할모’가 어머니라는 말은 의미로 꽉 찬 말이지만 어머니가 부른 엄마는 텅 빈 말이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이름을 그저 헛되이 부른 죄인이다. “내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마라.”
정치적 삶에서는 이름이야말로 존엄하다.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인간의 존엄에 가하는 돌이킬 수 없는 모욕이다. 우리 시대에 가난한 이들이 처한 파국이 바로 이것이다. 여전히 맹세할 것이 있던 청동기 시대나 봉건 시대와도 다르다. 가난의 결과 남는 것은 헛되이 부를 이름뿐이며 이름을 헛되이 불러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뿐이다. 가난한 이들을 독신(瀆神)의 죄인으로 만드는 일, 그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죄가 될 터이다.
엄기호 (문화연구자) sisain 2019. 06 27
대윤 소윤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은 조선 중기 중종의 외척이다. 1545년 소윤으로 불리는 윤원형 일파가 대윤으로 불리는 윤임 일파를 숙청했다. 중종의 둘째 왕비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을 지지했던 세력이 대윤, 셋째 왕비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명종)을 지지했던 세력이 소윤이다. 대윤 윤임은 인종의 외숙부, 소윤 윤원형은 명종의 외숙부다. 둘 다 훈구파였지만 대윤은 인종 때 득세했고, 소윤은 경원대군이 인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됐을 때 대윤을 제거한다. 이것이 을사사화다.
대윤과 소윤으로 불리는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와 윤대진 법무부 검찰국장 관계가 화제다. 윤 후보자는 사법연수원 23기, 윤 국장은 25기다. 두 사람 모두 특수통 검사로서 2006년 현대자동차 비자금 사건, 2007년 변양균·신정아 사건 등을 함께 수사했다. 두 사람은 현대차 비자금 수사 당시 윗선의 반대에 맞서 정몽구 현대차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주장하며 동반 사직서를 내기도 했다. 박근혜정부 시절 둘 다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윤 후보자는 국정원 댓글 수사에 대한 외압 폭로로, 윤 국장은 세월호 수사와 관련해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의 마찰로 지방을 떠돌았다. 문재인정부 들어 파격적으로 서울중앙지검장에 발탁된 윤 후보자는 서울중앙지검 1차장 자리를 윤 국장에게 맡겼다.
두 사람이 친한 사이인 것은 사실이다. 다만 최근에는 미묘한 관계이기도 했다는 것이 검찰 내부의 전언이다. 윤 후보자의 경우 컨트롤이 잘 안 되는 성향이다. 이 때문에 검찰총장 후보자로 지명되는 과정에서 여권 내부에서 반대가 많을 정도였다.
반면, 윤 국장은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과 소통이 잘 되는 편이다. 지난해 검사장으로 승진해 검찰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법무부 검찰국장이 된 이후 힘이 실리면서 행동반경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검찰총장 인사청문회를 계기로 두 사람 사이는 더욱 단단해졌다. 윤 후보자는 윤 국장 친형 변호사 소개 문제와 관련해 윤 국장을 보호하기 위해 언론 인터뷰에서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에는 윤 국장이 윤 후보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변호사를 소개했던 사실을 털어놨다. 검찰도 조폭 못지않게 의리를 중시하나 보다. 신종수 논설위원 국민일보 2019.7.13.
휴강 통보하고 시위 독려하는 독일 대학
독일의 파업은 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독일 청소년들은 지금 금요일마다 거리로 뛰쳐나온다. 물론 학교는 빼먹는다. 환경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정책을 요구하는 학생운동 ‘프라이데이 포 퓨처(Friday For Future)’는 유럽을 넘어 세계적인 학생운동으로 퍼지고 있다.
‘미래가 없는데 공부가 무슨 소용인가요?’라며 학교 파업을 자행(!)하는 학생들. 분명 ‘수업 안 가니 좋다’며 시위대 속에 있는 친구들도 있을 터. 독일에서도 지난해 12월부터 지금까지 도시 곳곳에서 학교 파업 시위가 열리고 있다. 독일은 이 파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처음엔 이 시위대를 학생들의 귀여운 행동 정도로 여겼다. 그러다 이들의 시위를 좀 더 진중하게 바라보게 된 의외의 계기가 있는데, 바로 독일의 기본법(헌법) 70주년 기념 방송이었다. ‘독일은 국뽕 행사를 어떻게 다루는지 어디 한 번 볼까’라는 마음으로 보기 시작한 독일 공영방송 ZDF. 자축하며 독일 국기를 흔들기도 부족한 시간일 텐데 시위대의 모습이 영상을 채운다.
▲ Friday For Future 운동. 사진=flickr © Jörg Farys / Fridays for Future
1960년대 시위대를 곤봉으로 후려치는 경찰들의 모습, 이어서 환경정책을 외치는 학생 파업 시위대가 나온다. 공영방송은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이야기하며 이들을 조명한다. 학교를 ‘땡땡이친다’는 표현도 덧붙인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야 할 의무가 있다. ‘학교의 의무’와 ‘집회의 자유’ 중 무엇이 우선할까.
여기서 공영방송은 독일 기본법의 또 다른 조항을 소개한다. 독일은 미래세대를 위해 자연적인 삶의 기반과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기본법 20조a항. 학생들은 이 기본법을 지키기 위해, 기본법에 보장된 방법으로 시위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독일 헤센주 문화부장관은 이날 방송에서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생동감”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본법이 있어 가능한 행동”이라며 학생들의 파업을 지지했다.
수년 전 내가 공부하던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은 학생들에게 전체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그날 오후 수업을 모두 휴강할 예정이니, 반(反)극우파 시위에 나가라고 독려하는 내용이었다. 반(反)난민, 반(反)외국인을 외치는 극우파 세력이 막 몸집을 불리던 시기였다. 도시는 이에 맞서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대학의 ‘용인’ 따위 없어도 학생들은 이미 시위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메일 한 통으로 시위대의 어깨는 더욱 넓게 펴지고,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독일은 이렇게 파업을 배우고 시위를 배운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니 여기저기 파업이고 시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뮌헨에서는 지하철 노동자들이, 구동독 지역인 작센주와 작센안할트주, 튀링엔주에서는 대형마트와 의류판매점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있다. 임금을 올리고, 동서독 간 임금 차별을 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각각 다른 마트에서 일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 시위를 한다.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기본권에 보장된 방법으로.
‘프라이데이 포 퓨처’의 학생들도 빠지지 않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번엔 일주일 시위다. 이들은 ‘금요일로 부족하면 일주일 내내!’라는 글귀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학교에서부터 착실히(!) 파업과 시위와 연대를 배워온 이들에게 파업은 자랑스러운, 아니 너무나도 당연한 전통이다. 이유진 프리랜서 기자 heyday1127@gmail.com 미디어오늘 2019.7.14.
탐욕의 경제학과 급진적 삶의 전환
김종철은 28년 전 산속으로 들어가 칩거하며 명상생활로 들어갈지, 뜻있는 사회적 프로젝트를 시작할지 고민하다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1991년 창간호를 낸 그 잡지가 격월간 ‘녹색평론’이다. “이대로 가면 이 세상이 망할 게 눈에 명확히 보이는데, 연구실에서 책이나 읽고 학생들 가르치며 지낼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는 줄곧 화석연료에 의존한 경제성장(담론)의 폐해를 비판했다.
김종철의 신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녹색평론사)는 비판의식의 고갱이를 담았다. “선진화를 향한 사회적,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오늘날 우리의 삶은 갈수록 수렁에 빠지고 있다. 출생, 양육, 교육, 취직, 주택, 의료, 노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단계, 모든 국면에서 우리의 삶은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끊임없이 유린되거나 뒤틀리고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그가 한국 사회를 진단한 이 문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촛불집회와 정권교체 이후 ‘유린되고 뒤틀린’ 것들에 대한 부분적 개선이나 시도가 이뤄졌지만, 자본과 권력의 논리는 본질의 측면에서 크게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면을 채우는 건 여전히 ‘출생, 양육, 교육, 취직, 주택, 의료, 노년, 사망’ 문제다. 잇단 노동자의 죽음 같은 여러 사건·사고 원인을 돌이켜보면, 부와 경제성장, 효율과 비용절감이라는 이름의 탐욕이 드러난다. 이 탐욕은 경제학의 이름을 달고, 집약적으로, 대규모로 나타난다. 두드러지는 게 토건이다.
최근 제2경춘국도 건설 논란이 불거졌다. 자라섬과 남이섬 사이를 가로지르는 대형 교량이 문제가 됐다. 자연경관을 훼손하고, 선박 안전을 위협한다고 이 지역 주민들은 말한다. 청량리에서 춘천까지 1시간 만에 주파하는 열차가 이미 운행 중이다. ‘주말 상습 정체 해소’용 도로라는데, 주말 차량을 유입하려 산을 깎고 강바닥에 교각을 박아 도로를 늘리려는 까닭을 납득하지 못한다.
강원연구원은 경제효과를 강조한다. 이 연구원이 지난 2월 내놓은 ‘춘천 광역교통망의 완성-제2경춘국도와 외곽 도로망 정비’ 정책 자료를 보면, 생산 유발효과는 1조4250억원, 부가가치 유발효과는 6384억원, 고용 유발효과는 1만3883명이다. 사회 간접적 편익도 1조6664억원으로 추산했다. 9000억원짜리 사업이 3조300억원의 경제효과를 낼 것이라고 계산했다. 제2경춘국도는 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사업이다.
정부는 ‘지역산업을 뒷받침할 도로·철도 등 인프라 확충’ 7개 사업도 예타 면제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 중 4개 사업의 경제효과가 언론 등에 나왔다. 석문산단은 ‘생산 유발효과’가 3조5000억원, 대구산업선은 2조2017억원, 울산외곽순환도로는 2조5906억원이다. 부산신항~김해 간 고속도로는 ‘경제 유발효과’ 1조4000억원, 새만금국제공항은 ‘생산·부가가치 유발효과’가 2조7046억원이다. 부가가치 유발효과는 뺀 추정치다.
4개 사업비는 4조6000억원. 토건에다 ‘신성장동력’이니 ‘한류’니 이름 붙은 사업이 투자 대비 서너 배의 ‘경제효과’를 불러온다면 한국은 돈이 발에 차이는 사회가 될 것이다.
40조원. 이명박 정부 초기 나온 4대강 사업 경제효과다. 어느 언론은 ‘강물 따라 돈이 흐른다’는 제목을 붙였다. 감사원은 지난해 7월 이명박 정부에서 31조원을 들인 4대강 사업의 경제효과가 6조6000억원이라고 밝혔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맹렬하게 성장 논리에 매달린다. 거짓 경제효과로 점철된 탐욕의 경제학을 알면서도 속는다. 와중에 생태·노동·인간 존중은 밀려난다. ‘공정 채용법’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때문에 기업들 경영 리스크가 커질 것이라는 보도가 버젓이 나온다. ‘경제성장’과 ‘기업발전’에 경도된 사회를 성찰하지 못하면 ‘아동 노동’을 정당화하는 시대로 역행하지 말란 법도 없다.
김종철과 ‘녹색평론’이 주장하는 바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세상이 그닥 나아지지 않거나 퇴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농사 같은 순환적 삶의 질서와 시민의회나 추첨 민주주의제 같은 급진적 민주주의, ‘공생공락의 가난’을 주장하는 김종철의 사상은 물질의 풍요와 성장 담론, 대의민주주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사회에서 무력해 보인다. 그 자신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파국보다 당장의 현실이 급하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가 더 좋은 삶을 보장해준다는 시스템의 처방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지금 김종철이 강조하는 건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해보겠다는 각오다.
‘급진적 삶의 전환’ 사상을 비현실적 이상론이라 폄훼할 일은 아니다. 핵폐기부터 화폐주권을 거쳐 자연권 헌법까지 김종철이 앞서 소개·주장한 대안들은 지구상 어느 곳에서 이미 시도 중이거나 실현된 것들이다/김종목 사회부장 경향 2019.07.14.
‘조용한 일본인’ 귀하
자신에게 다가오는 제국의 쓰나미 성찰할때
안녕하세요. 어느새 10년이 더 흘렀습니다. 한일 관계는 안타깝게도 무장 악화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우려도 크리라 짐작됩니다. 우리가 만난 곳은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였지요.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제 소설을 일어로 옮긴 분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날 뒤풀이 자리에서 일본의 힘을 느꼈습니다. 스무 명 남짓이 큰 상에 둘러앉아 각자 소설을 읽고 강연들은 소감을 이야기 했지요. 가장 연로하신 분이 흘린 눈물, 기억하시나요. 일제 말기 서울에서 교사였다던 그 분은 청초한 여학생 제자들을 전장에 보낸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모두 숙연했고 저는 착잡했지요.
요즘 저는 당신처럼 조용하고 깔끔한 일본인을 서울에서 봅니다. 중년이 아닌 젊은이들인데요. 대학 강의실에 일본 유학생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몇 학기 경험한 일본 유학생들은 두루 조용하고 단정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남에게 폐 끼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무시로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언론의 역사를 다루는 과목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인들을 어떻게 학살했는가를 함께 공부하다보면 일본 학생들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역사와 너무 다르답니다. 죽창을 들고 혁명에 나선 조선 민중을 일본 군대가 미국에서 수입한 기관총으로 대량 학살한 사실도,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죽인 사실도 처음 듣는다고 토로했습니다. 일제가 독립운동에 나선 조선 여성들에게 얼마나 야만적인 고문을 저질렀는가도 깜깜히 모르더군요.
남에게 폐 끼치면 안 된다며 조용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일본인들이 정작 자신들의 국가가 이웃나라를 침략해 한국인들에게 자행한 대량학살을 모르는 까닭은 간명합니다. 일본 스스로 제국주의 청산을 못했기 때문이지요. 총리 아베만 하더라도 일본제국의 ‘A급 전범’이던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잖습니까. 미국의 정치적 판단으로 재판에서 살아남은 기시가 총리가 되어 추구한 정책이 ‘평화헌법’ 개정과 미일 동맹 강화, 군사력 증강이었지요. 현 총리 아베는 공공연히 외조부를 계승한다고 밝혀왔습니다.
아베는 ‘경제 압박의 칼’을 빼어들곤 한국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거적눈 부라립니다. 딱히 아베만이 아니지요. 일본 정계에선 언제까지 한국에 사과하느냐는 분노까지 일었다고 들었습니다.
기실 이 또한 간명한 이치입니다. 사과에 진정성이 있고 없는 것은 피해자가 가장 잘 느낍니다. 아베에게 진정성이 없다는 것은 ‘한국 경제를 망가트리겠다’고 나선 지금의 모습이 증명해줍니다. 1965년 협정과 2015년 합의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국 당사자가 박정희와 그 딸이라는 사실만은 아닙니다. 한일협정은 주권자인 국민의 뜻과 어긋난 밀실 합의였고, ‘위안부 합의’도 당사자 뜻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부마항쟁을 계기로 죽음을 맞았고 박근혜는 촛불혁명으로 대통령에서 쫓겨났습니다. 둘 다 주권자인 민중의 심판을 받았지요. 권력을 아래로부터 바꾼 경험이 없는 일본 정치에선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협량한 아베의 칼은 비단 한국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른바 ‘대일본제국’이 당대의 일본인들에게 어떤 참화를 불러왔는지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한국도 일본제국의 잔재를 다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제국의 조선 강점이 없었다면 남북 분단의 고통도 없었을 터입니다. 다만, 한국인의 촛불은 멈추지 않고 벅벅이 나아갈 것입니다.
지금은 ‘조용한 일본인’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제국의 쓰나미’를 성찰할 때입니다. 한국 민중이 애면글면 촛불을 들었듯이 ‘조용한 일본인’도 권력의 어둠에 촛불 밝히기를 기원합니다. 한국 민중과 일본 민중이 손잡고 진정한 평화 시대를 열 그날을 소망하며 총총 줄입니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2019.07.15
(Marie Osmond)) In My Little Corner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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