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말 보고서
꽃들에게 아스피린을
살아 있었구나
약
물도 절을 한다
산타클로스, 소비의 신
고층 빌딩은 차라리 묘비다
밥집 앞에 쌓이는 눈
겨울 엽서
동짓달 종이이불
12월5일 우금치고개
설인雪人을 위하여
겨울비
다산 11월22일 율정점 삼거리
십일월은 작년에도 있었다
금이빨 삽니다
서울 벌초
임재해의 방
쌀의 기원
가장 긴 외설
KM-53.
떠나셨군요
김군자 할머니의 귀
천원
헌법에 내리는 비
귀향 여인숙 간판 아래서
고라니
나의 잠수부
어느 젊은 의사에게
우리에게도 하와이가 있었다
김의기, 5월30일
오월 일기예보
봄은 고아다
섣달 그믐밤에
시민 연서
문자모독
'12월혁명의 날
국회를 포위하라
77위령탑을 아시는지요
겨울 행진
만약에
하야는 없다
어느 인형 이야기
<비말 보고서> 서해성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 서정시
내 침방울이 날아가는 거기.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창백한 나라.
마스크는 너와 나의 국경.
희디흰 철조망 위에서 경계하는 그 눈빛.
재채기를 할 때마다 초조한 국가는 팽창하고
손을 한번 씻을 때 내 손은 내 얼굴을 한번 만질 수 있는 비자를 발급 받는다.
지독히도 서로 감염되고 싶었던 우리.
나는 KF80, 너는 KF94로
불안과 믿음을 촘촘히 걸러내고.
뉴스를 듣고 있노라면 우리가 가야 하는 세상은
표백된 무균의 영토.
거기에는 무엇 무엇이 사나.
입맞춤도 소독 당한 지 하루 이틀 사흘.
먼 데 시선을 둔 채
움직이는 전염병동 같은 대중교통으로 돌아와
바이러스 같은 오늘 하루를 조심히 털어내면서
비로소 변기에 안전하게 침을 뱉는다.
<꽃들에게 아스피린을>
통조림이 두통약을 먹는다.
랜턴 불빛이 감기약 껍질을 까고 있다.
생수병이 반창고를 붙인 채 중얼거린다.
모든 곳에서 열을 내려야 한다.
텅 빈 진열대를 습격하는 인간 바이러스들.
백색 공포가 화장지를 사재기한다.
선량한 혐오가 양심을 강탈한다.
텅 빈 불안을 쇼핑하는 인간 숙주들.
마스크를 쓴 채 길게 줄을 선 새벽이 약국 앞에서 서성거린다.
이제 곧 꽃들에게 해열제를 먹여야겠다.
먼저 해에게 이부프로펜을 투약하는 게 맞겠다.
타이네놀을 삼킨 창백한 달이 이마를 짚은 채 저편 하늘에 떠 있다.
<살아 있었구나>
-유행병 시대 인사법-
살아 있었구나.
살아는 있었구나.
그대 목소리 반가워
돌아서서 또 말하노니
살아 있어다오.
살아만 있어다오.
방금 세수한 풀잎처럼 싱싱한 안부로.
손 씻고 이 닦고 거울 보면서
혼자서도 타이르는 말.
살아 있었구나.
아버지, 잘 가이소
- 박정기 아버님 가시는 길에
▲ 2012년 故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에서 열사의 부친 박정기 옹이 눈물을 흘리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뉴시스>
아버지가 아들로 사는 일이
이제사 끝났군요.
아버지, 잘 가이소
서른한 해 동안 받던 긴 고문도
이제사 마무리되었군요.
아버지, 잘 가이소.
철이 없는 세상
아버지가 가장 오래 산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
그곳.
가막소보다 더 캄캄한 날들을
이제사 겨우 마치셨군요.
아버지, 잘 가이소.
우리 모두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준
아버지.
아버지, 잘 가이소.
철아, 잘 가그래이.
그날 종철이를 한 줌 재로 흩어 뿌리면서 하셨던 말씀 이제사 돌려드립니다.
아버지, 잘 가이소.
아버지, 잘 가이소.
<약>
-겨울밤을 건너는 법
귀에서 피가 흐르도록 차가운 날입니다.
만지면 종이가 부서져내리는 이용악 시집 끝장을 북방으로 머리 돌리고 다시 읽으렵니다.
그 밤 별빛만 몇 점
도망 치는 능선을 지키고 있었지요.
자리끼가 얼어붙는 날들에 약이었던 문자들을 사모합니다.
고뿔에는 고은이 좋다고 하셨지요.
가래 기침 해소 천식에는 백석이라고도 하고
인진쑥 같은 신동엽은
바람 찬 날 우금티 마루에서 암송으로 다려야 제 맛이더군요.
대숲에 눈 내리는 소리는 몸살 쫓는데 효험이라지만
김남주가 그리워 다 읽지는 않으렵니다.
또 베껴쓰던 밤들이 소월을 불러낼까 봐 차마 불을 켜기 염려스럽습니다.
화선지 밖에서 새 한 마리가 울어 까치밥 붉게 적시던 건
누구 누구 탓이던가요.
눈발 희끗희끗하면 아롱범 보고 싶어
우라지오 우라지오를 보약으로 외고
골목 들머리 낡은 약국 간판 밑에서 마주친 중씰한 사람이 김수영인가
혼자 중얼거렸더랬지요.
바람이 지붕 위에 쌓인 눈을 대패처럼 깎던 밤
황현의 문장으로 뜸을 뜨고 나면
먼 데 다복솔마다 서리가 내려
한없이 추워서 도리어 뜨겁던 게 십이월이던가요, 소한이던가요.
이건창에게는 옹이 박힌 손바닥을 내밀고 손금 환히 침을 맞으라던 말씀은
왜 잊히지 않는 건가요.
다 죽어도 아주 죽는 건 아니라서
생아편 같은 입술로 활활 읽어주던
머리 맡 어디선가는 로르카가 피의 결혼을 올리고 있겠지요.
올리브 나무 아래서 당신은 총에 맞았고
문자 사이로 달려가서 귀로 피 흘리고 있는 새벽을 안고 울면
창유리 언 골방에서는 아직 말이 눈물처럼 뜨거웠어요.
<물도 절을 한다>
-양평 묘골 여운형 생가를 지나며
남한강 물은
묘골 구비를 지나면서 강심까지 얼어붙어 있었다.
늦도록
언 강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물 건너 소나무들도 얼음에 제 모습 비춰보면서
휘적휘적 강을 넘어오고 있었다.
언 강은 얼어서 강과 강 사이를 잇는다.
기차가 얼음강을 천천히 달려가고
노을이 빠르게 끼쳐오자
물소리가 작년 가을 글 배우던 시절을 돌아보느라
묘골 무릎 밑까지
차츰 언 몸으로 밀고 올라왔다.
강물도 아는 것이다.
세한 밤이면 서로 손잡은 채 얼어붙으면서
제 가슴 두드려 부르는 소리.
어디 계신가요.
어디에 계신가요.
개 몇 마리
빈 집 앞 잔설 위에서 희끗희끗 짖어쌓고
겨울산은 언 강 밑에 집을 짓고 하나씩 등을 올리는
섣달 그믐 저녁
남한강 양평 팔십 리쯤 지나다보면
물도 물 끼리 안부를 묻느라
묘골 어름에서는 물도 절을 한다.
어디 가셨나요.
어디로 가셨는가요.
눈쌓인 비탈 비껴 날으면서
흰꼬리 물수리 한 마리 끼룩거려서
어둑신한 길이 문득 환하다.
<산타클로스, 소비의 신>
산타클로스는 백화점 삐끼.
대공황기에 지름신으로 주머니를 털면서 납시었다네.
주민번호 19311224.
올해로 여든여섯 살
태어날 때부터 흰 수염을 달고 강림한
마트 할아버지네 고향은 뉴-욕.
자본시장의 썰매를 타고 빌딩 사이를 내달리는
빠알간 소비의 신.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시카고 백화점 몽고메리 워드의 높은 벽에 매달려
순록 루돌프를 처음 불렀지.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던 그해 겨울
1939년 루돌프는 마침내 빨간 코를 얻었다네.
루돌프는 가난한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뿔 큰 순록.
굴뚝이 좁아서 산타클로스는
백화점 벽을 타고 납신다네.
스파이더 산타클로스.
고층 빌딩은 차라리 묘비다
- 타워크레인 노동자들을 위한 비가
또 타워크레인이 꺾였다.
의정부에서 남양주에서 용인에서, 평택에서.
목숨에도 하청이 있어
하청 크레인이 아래로 꼬꾸라졌다.
생목숨이 부러졌다.
아파트공사현장에서
물류센터건설현장에서
85미터에서
75미터에서 아래로 추락했다.
2013년 이후 타워크레인 사고로 55명이
허공에서 목이 부러졌다.
엿가락처럼 휜 팔자 고치려면
수직으로 허공을 올라야 하는가.
긴 가로대 끝 트롤리가 무섭게 떨려온다.
아빠, 이제 크레인 타지 마세요.
딸이 보낸 문자 메시지 때문인가.
120미터 쇠기둥 허리가 부러지는 소리.
타워크레인이 또 동강이 났다.
항구에서 육지에서 산비탈에서.
가난한 세월이 꺾여 허공에서 외마디 비명으로 사라졌다.
올해만 17명.
아빠, 내려와서 꼭 함께 저녁 들어요.
아들의 문자 메시지 품고
이 아침에도 수직으로 하늘길로 향하는 하청 사내들.
가장 밑바닥 사람들만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른다.
돌아보라.
모든 고층 빌딩은 지상 100미터 허공에서 중심 잃은 사내들의 묘비다.
<밥집 앞에 쌓이는 눈>
수렛골에 눈이 내린다.
용금옥 추탕은 골골 끓겄다.
대파 써는 도마질에 맞춰 눈은 퍼붓고
흑갈색 초피 같은 저녁길
잼배옥 설렁탕 김발은 가게 문 밀고 나오면서 더 펄럭거리겄다.
사골 같이 우린 세월도
뜨끈한 뚝배기에 얼골 묻고
서소문에 눈이 내린다.
팔도 어디서나 옛 밥집 사이를 지나면서
눈은 더 펄펄 날린다.
무교동 북어국집 앞에 눈이 더 쌓이는 건
아까부터 골목길에 줄서서 엇춰 어쩌구 기다린 까닭이다.
옥호 희미한 미닫이문을 열면
눈은 빗금으로 사납게 달려들고
장호왕곱창집 김치찌개는
밤길 시큼하도록 시방 한정없이 칼칼하겄다.
<겨울 엽서>
-옛 교도소에서
노란 모과 몇 빈 뜨락에 구르고 있었어요.
교도소 높은 담장 햇볕이 좋아
겨울나무들이 긴 그림자로 찾아왔더군요.
수인囚人들이 두고 떠난 감나무에서는
직박구리 두어 마리 까치밥을 쪼다 날아갔고요.
손바닥만한 햇볕 책보만한 하늘을 사모한 사람들은
음지 깊은 시멘트 방벽에 낙서로만 남아 있었어요.
3사하 5방을 나와 석면 슬레이트를 덮은 굴곡진 통로를 따라 걷자니
면회소 접견실까지가 언젠가 일러준 대로 꼭 일천일백마흔다섯 걸음이더군요.
낡은 고무신에 슬쩍 발을 꿰자
당신은 문득 살아서 차가운 복도로 혼잣말 중얼거렸어요.
<동짓달 종이이불>
-서울역 쪽방을 지키는 여재훈 신부께
동짓밤이 긴 긴 것은
해가 짧아서만은 아니라네.
해마다 동짓달 밤이 기나 긴 것은
작년에 못 다한 사연을 이 밤에도 다 하지 못해서만도 아니라네.
해마다 350명 넘는 이들이 집이 없어
굶어죽고 얼어죽는 밤은 대체 얼마나 긴가.
이슬을 덮고 자는 그 밤은
봄에도 동지
그 시멘트 침대는 여름에도 동지
그 종이이불은 가을에도 동지라서
동짓밤이 기나 긴 것은
밤이 그저 길어서만은 아니라네.
해마다 동짓달 밤이 긴 긴 것은
팥죽을 먹지 못해서는 더욱 아니라네.
해마다 1300명씩 노숙인, 1인 가구로
아무런 연고도 없이 죽어 밤하늘 이름 없는 별은 또 얼마나 새로 돋는가.
동짓밤이 기나 긴 것은
동짓달 섣달이라서만은 아니라네.
해마다 세상에서 가장 긴 동짓달 밤은
내일 아침 가장 늦게 뜨는 해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몰라서 기나 길기만 하다네.
<12월5일 우금치고개>
12월5일,
동학 농민군이 넘지 못한 고개를 넘는다.
이날이 19세기 마지막 날.
1894년 12월5일.
19세기 말은 시간의 머리를 베어넘기면서 빠르게 닥쳐왔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1만 명이 개틀링 기관총에 쓰러지던 그날,
일본군은 발뒤꿈치에 화승총 유탄 한 발을 맞았을 뿐이다.
침략자는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인류 전쟁사에서 기계무기로 거대한 학살이 일어난 그 아침,
아시아 대륙에서 처음 집단학살이 자행되던 그 낮,
진눈개비가 이른 들녘을 덮고
정오에는 비가 내리고
그날 저녁 다시 눈이 쌓이는 충청도 벌판.
추격대는 삼남 끝까지 쫓아와서 총을 놓아
아비 옆에 아비가 눕고
죽은 아비 위에 죽은 아비를 포개던
1894년 12월5일.
눈에 피가 엉겨붙던
저 우금치에 피투성이 선 채로 20세기가 시작되었다.
그날 넘지 못한 고개를 오늘 또 넘지 못하면
아무리 넘어도 넘지 못한다.
<설인雪人을 위하여>
히말라야 설인이 유전자 분석 끝에 곰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닐 암스트롱이 무거운 쇠신발을 신고 달표면을 걸었다고 해서 토끼가 죽거나 계수나무가 다 망가진 건 아니다.
에밀레 종에서 작은 조각을 떼어서 분석한 뒤 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넣은 건 아니라는 발표 있었던 게 몇 해 전이다.
새의 노래가 아름답다고 가슴을 열어본 이도 있었다.
노래가 가슴에 사는 건 맞지만 새가 죽으면 들을 길이 없다.
다들 시를 과학으로 해부한 합리적 무지다.
과학은 시에 더 가까워져야 한다. 단, 칼과 시약은 필요없다.
히말라야 산정에서 별마저 얼어붙은 겨울밤
설인 예티는 눈보라를 뚫고 오늘도 설화說話의 능선을 오른다.
초모랑마, 저기 대지의 어머니가 기다리신다.
* 설인Yeti는 티베트어 야테(야:바위+테:곰)에서 왔다. 티베트 사람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겨울비>
내 영혼의 대폿집에 눈이 내린다. 스물일곱에 헤어진 마포 도화동 다락방 천장이 낮게 걸려 있고, 타다 만 서른셋 12월이 화덕에서 다시 설설 끓고 있다. 어디선가 등사기 잉크 퍼지는 냄새가 낮게 깔린다. 내 심야 영혼에는 늘 대폿집이 기웃거렸다. 모른다. 대폿집이 밤을 요구했는지도. 창 밖에는 눈이 퍼부어 발목까지 쌓이고, 발목을 마석 비탈 거기 두고 오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기상청 통계는 틀렸다. 장담컨대 경인지역에서 눈이 가장 깊게 내리는 곳이 마석 골짜기다.
술이나 한잔 드시구료. 금간 바람벽 틈새로 작년이 가다 말고 들여다보면서 낄낄거린다. 얼마나 많은 작년 오늘이 있었던가. 허공에다 빈 잔을 권할 때 친구 하나쯤 술상에 얼굴을 파전처럼 지지면서 잠들어 있다. 감옥에서 흰 수염이 처음 돋아나기 시작한 친구는 아직 시를 좋아한다면서 눈을 털면서 새 손님처럼 들어온다. 그는 죽은 자다. 얼굴은 모른다고 가난한 나의 대폿집에 쌀밥같은 눈이 내린다. 김치를 썰어넣은 양은 냄비가 고춧가루 덕지덕지 묻힌 뻘건 입술로 마른 김을 뽑아올리면서 간들간들 희롱하고 있다.
담배나 한 대 태우시구료.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학교를 그만 두고 내내 공순이로 살던 친구가 폐암에 걸려 병원 층계에서 마지막으로 조용히 내뱉은 말이 담배 한 대 피우고 가고 싶다는 말이었다는 것을. 한 생을 바친 혁명은 담배 한 대였다. 오늘은 이 대폿집에 눈쯤이야 내려야 한다. 저승도 대폿집만 있다면 가볼만하다고 누군가 중얼거리고. 거기 음식에는 소금기와 양념이 없으니 한국사람에게 가장 힘들다고 덧붙이면서 멧밥 같은 눈이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고봉으로 쌓인다. 쌓이는 건 다 죄를 알아서, 데모 삼십년! 술이나 한잔 들소. 죽은 친구에게 술 한잔을 더 권하라고 내 옛날 대폿집에 눈이 내린다.
파지직 파지직. 허벅지 살을 떼어서 석쇠에 올려놓고 한 점 구워버릴까. 나는 살아서 술을 마시고, 그대는 족장처럼 살다갔지만 술 한잔뿐이구나. 함께 들어간 공장에서 형처럼 의젓하게 굴었던 건 울 애비가 기공소 출신이기 때문이라면서 턱수염을 쓸던 밤이 눈으로 부서져 내린다. 밤새 긁어댄 가리방 유인물이 가리봉동 오거리에 흩날릴 때가 가장 멋진 눈발이었다고 수염 희끗희끗한 혁명이 대폿집에서 술을 마신다. 살아있노라니 호기롭던 우리 시대의 사회과학 책들 사이로 여적지도 눈이 퍼부을 수 있고 동서남북 대폿집 창유리 밖을 얼쩡거리는 눈발은 늙지 않는구나.
기차가 달려가면 철뚝 양쪽 낮은 지붕들 안쪽 골목 내 영혼의 대폿집에서 마석까지 눈이 내린다. 망월동이 얼마나 멀기는 하던가. 죽은 자들의 이름을 손등으로 쓸어서 눈이 내린다. 등사기가 타자기로 바뀔 때 옷깃 푸른 혁명은 이곳에 처음 왔고, 워드 프로세스로 유인물을 찍어낼 무렵 아는 친구 몇이 언 땅 밑에 묻혔다. 혁명이 컴퓨터로 바뀌었을 때 반쯤은 여기 저기서 익은 얼굴들이 마석 비탈 묘비로 서 있었다. 눈이 내리는 밤은 마치 제삿날 같아서 눈이 내린다. 눈이 내려서 묘비가 운다.
* 가리방: 등사기의 일본말. 그 시대에는 등사기를 사용했다는 말보다 '가리방을 긁었다'는 말이 일상적이었다.
<다산 11월22일 율정점 삼거리>
-박석무 선생께
율정점 삼거리 진눈깨비가 내린다.
나주 서문 밖 주막
바람에 휜 싸리나무가 창을 쓸어 달빛은 더 빨리 기울고
익은 술은 이별을 재촉한다.
끌려가는 언니 발에서 짚신 한 짝이 벗겨지는 걸 보고
아우 또한 한 짝을 따라 벗으니
아침 해가 강진 쪽에서 떠왔다.
팔도에서 뜬 해가 지는 곳이 흑산도라서
언니는 그리로 가시는가.
쑥대는 허리 꺾어 울고
두 형제는 밤송이에서 비어져 나온 밤톨인 양 흩어졌다.
형제가 갈라서 가는 남도길은
한 짝씩 맨발인 짚신이라서
가도 가도 기우는 길.
오른쪽은 흑산, 왼쪽은 강진
돌아볼 수도 없는 갈래길.
함께 묶여 내려오던 길이 차라리 따뜻했어라.
밤나무정 밤톨 쪼개진 사이로 진눈개비 더 굵다.
<십일월은 작년에도 있었다>
-1백만 청년실업자 시대의 가을
십일월은 이교도의 기도보다도 그림자가 길다.
저기 저무는 시월을 차마 부르지는 못해
붉은 석양을 길러서
지평선 끝에 풀어놓고는
이도 닦지 않은 채
능선을 따라 차디차게 눕는다.
처마 끝마다 바람이 불고
이슬은 서리가 되어
옥수수밭 몸을 움츠리는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십일월의 밤은
고향 아버지보다도 길게 침묵한다.
세상은 변해도 세상은 변한 적이 없다.
밀린 사글세 같은 기침소리.
옥탑방 위로 온 계절은
옥인동 밑에 마른 낙엽 몇 줌 뿌려놓고는
알은 체를 한다.
십일월은 작년에도 있었다.
가난뱅이는 쉬 늙지만
가난은 늙지 않아서
폐지 줍던 죽은 노파가
다시 리어커를 끌고 올라오는 절룩거리는 비탈.
라면 한 개 삶아놓고 뿌옇게 밖을 내다보면
아무런 기도 없이도 십일월은 그림자가 길다.
슬픔은 어디로 저무는 것일까.
팔을 뻗으면 닿는 좁은 골목에는 쫓겨가는 발자국 소리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 귀를 묻으면
불어터진 라면발처럼 십일월 새벽은 구불구불 길고
서리 내린 언 능선이 녹아 해가 뜰 때까지
자기 소개서를 쓰는 가난한 바람소리는 방언처럼 중얼거린다.
십일월은 작년에도 있었다.
<금이빨 삽니다>
가난한 시대는 금니를 좋아한다.
입 안에 든 마지막 전당포.
앞니보다는 어금니 골드 크라운
왕관 모양이라야 진짜 금니다.
길거리 구둣방 뒤편에 붙어 있는 쓰디쓴 유혹
금이빨 삽니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씹었는지는 몰라도
당신이 야수처럼 산 세월을 기려 금이빨이다.
인생 막장 마지막 목돈.
금이빨 삽니다.
턱에서 캐내는 쓸쓸한 금광.
매혈 뒤 장기 적출하기 전에 시도해보는
단백질 틈새를 헤치는 발치 채금.
금이빨 뽑힌 발음으로 천천히 따라 읽는다.
금이빨 삽니다.
금이빨 하나씩을 모아 녹이는
가난한 시대는 금괴를 좋아한다.
<서울 벌초>
민둥산 너머 키 작은 묏등에서 삘기꽃 뽑던 날들이
낫을 들고 남도에서 온 햇살을 벤다.
서울에서 먼 망향으로 벌초를 한다.
들판 가로질러 비석 희미한 둔덕에 절을 올리던 날들이
풀망태를 들고 남산에 흩어진 달빛을 쓸어담는다.
객지살이 긴 탈향으로 또 숨어서 벌초를 한다.
진작부터 달만 높아도 까마득한 실향이었다.
낮은 능선에 서리만 쌓여도 희게 군색하여서
스쳐가는 산도 들도 비산비야 허리 굽힌 사투리로 슬펐다.
빈 손으로 낫질을 아무리 재게 놀려도
깊은 한숨으로 달빛을 들이켜도
가슴에 돋는 풀은 웃자라 베어낼 수 없는 게 서울 벌초.
빌딩과 빌딩 사이라도
가을 달은 늘 묵은 달이라서 이번에도 또 고향쪽에서 뜨고
다만 풀벌레 소리가 아파트 구석에서 밤을 갉아 긴 벌초를 한다.
<임재해의 방>
-임재해 선생의 정년퇴임에
나는 안다.
그가 떠난 연구실 구석 먼지들이 중씰한 한 사내를 그리워하면서
가을 햇살 아래 떠다니고 있다는 걸.
작년 또 작년
부러진 연필심 하나가
책장 밑에서 숨어서
눈썹 검게 칠한 채 중얼거리고 있다는 걸.
그날 나는 금관 밑에 줄을 쳤고
까마득한 삼십 몇 년 전 겨울밤에는
구비구비 입말로 쓴 옛 이야기를 세로로 타고 오르내렸지.
안동 사과밭 바람이
닳고 닳아서
귀처럼 내놓은 한 사람.
잊힌 백성들의 삶과 일에 관솔불을 비춰
모국어를 입힌 사람.
한 뼘만 비어도
안동 한 자락이 바다처럼 비고 마는
林在海가 비어서
오늘 천등산은 높고 갈라산 골은 물소리 깊다는 것을.
나는 안다.
삼껍질 벗겨내듯이
후배들이 지혜를 빌려가고
빌려가고
거기 ㅁ자만 남은 방.
그 방은 호랑이를 피해 온 송아지 두 마리는 들여놓고 살 수 있게끔 넓었다는 것을.
까치구멍집 사내
임재해.
빈,
그 방에게 안부를 묻는다.
<쌀의 기원>
-고려인 인종청소 기차 출발 80주년 되는 날에
우스리스크 라즈돌노예Razdolnoye역.
9월9일, 1937년.
기차가 떠났다. 돌아오는 기차는 없었다.
먼저 학살이 있었다.
소설가 조명희를 포함해서 2천5백여명이 충성심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는다는 죄로 처형되었다. 죽음은 한낱 숫자였다.
11월 1일 캄차카에서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과 여행자들을 마지막으로 실어날랐다.
3만6천, 혹은 4만여 가구들이
단풍 드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을 지나 사막을 달려갔다.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인종 청소 기차에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홈범도도 들어 있었다.
박헌영의 동지이자 아내 주세숙도 기차를 타야 했다.
가는 동안 그들은 굶었고, 또 굶었다.
또 굶었다.
굶으면서도 고려인 카레이스키들은
무릎 사이에 씨오쟁이를 품고
어떤 이는 베개로 삼고
누군가는 옷 사이에 넣어두었다가
이듬해 봄 사막에 물을 끌어들여 볍씨를 뿌렸다.
죽은 자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심은 씨앗은
산 자들의 얼굴로 돌아와 첫 추석상이 되었다.
가장 메마른 대지에서 지은 물 농사는
사막을 고향으로 만들어주었다.
가을 쌀알은 고향이었다.
달이 떴으므로 더 고향이었다.
우스리스크 라즈돌노예역에서
그날 줄을 서서 기차에 오르던 볍씨들이
달을 기다린다.
아직 다 울지 못했으므로.
아직 아무도 소리내어 울지 못했으므로.
<가장 긴 외설>
마광수가 어제 자살했다.
1992년부터 자살했다.
마광수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
2013년 어느 낮 사라를 데리고 가서 죽었다.
마광수는 일찍이 자살을 했다.
자신을 타살한 것들과 헤어지기 위하여 오래 전에 쓴 유서의 효력을 현재화했다.
마광수가 마침내 멸종되었다.
그는 죽어서야 겨우 용서 받았다.
마광수가 없다.
없는 마광수만 사람 취급을 했다.
마광수가 방금 편의점 앞을 지나갔다.
가장 긴 외설 사이로 그는 쓸쓸히도 걸어갔다.
* 1992년 <즐거운 사라> 출간
2013년 <2013 즐거운 사라> 출간.
KM-53.
자주포 이름이 아니다.
여의도 국회 건물 지붕을 뚫고 나온다는
로보트 이름도 아니다.
가슴에 어엿한 줄무늬 반달을 품은
곰 KM-53.
미련한 곰은 끝내 지리산을 넘어버렸다.
원래 너의 여행지는 김천 수도산이 아니라
백두산이었는지도 모른다.
정확하게는 백두산 밑
단군이 강림했다는 천리천평쯤이었다고 봐야 한다.
쑥을 따라가면
길이 나오고
쓸쓸하면 마늘도 뿌리째 뽑아 먹었겠지.
KM-53,
나의 반달곰아,
적어도 설악산 마등령까지는 갔어야 했다.
네가 거기 도착하면 그때가 겨우 1983년이 된다.
야생으로 살던 너의 마지막 아비는 거기서 총에 맞았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나의 미련한 곰아,
지리산을 떠나 민주지산에 오른 뒤
오른쪽으로 돌아보았을 때
쑥마늘 냄새가 바람에 풍겨왔던 게로구나.
너를 회수해서 또 가두었다는 소식을 듣는 밤,
내 방에는 온통 곰냄새.
마늘쫑 장아찌에서도 너를 이끌고 간 냄새를 맡는다.
KM-53.
한국형 최신식 전차 이름이 아니다.
사드 미사일 발사대 이름도 아니다.
가슴에 초승달을 기르는
반달곰 KM-53
미련한 곰아,
내려오지 마라, 내려오지 마라.
빨치산보다 위험한
미련퉁이 반달곰아,
지리산 벽소령 반달이 돋아도
내려오지 마라, 내려오지 마라.
나의 반달곰아.
<떠나셨군요>
박석률 선배가 떠나갔다. 한낱 대폿집 구석에서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심야에 소식을 접했다. 격발되는 에망총(M1 소총)보다 뜨거운 격정으로 살던 그의 심장이 멎었다. 유신독재에 맞서 ‘넥타이공장’ 따위 두려워 않던 늙은 청년 혁명가가 생을 내려놓았다. 그가 활동하던 남민전 깃발은 인혁당 사형수 8명 속옷을 모아 만든 것이었다. 오늘 박석률의 관은 무엇으로 덮을 수 있을까.
살아, 한시도 영광이 없던 선배여,
잘 가시라.
거기가 독재도, 고문도 없는 세상이라면
기꺼이 가시라.
분단도, 보안법도 없는 곳이라면
꽃이 볼품없이 시들어도 좋고
막걸리 맛이 조금 슴슴한들 어떻겠소.
선배네 식구들이 운영하던 형제인쇄소에 몰래 유인물을 찍으러 간 후배에게
짜장면을 사먹여서 보내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면
괘념치 말고 가시라.
고작 독재자를 욕할 수 있는
한 뼘 자유를 위해
에망총처럼 울부짖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면
눈비 아무리 뿌린들 어떻겠소.
눈 부라리고 쫓던 순사 나부랭이들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할 테니
구두끈 풀고 가시라.
어리석은 혁명이여,
무엇을 더 바라는가.
매정한 혁명이여,
날마다 해방을 꿈꿔온 해방이여,
이제 저 뜨거운 해방 사내를 해방하시라.
살아, 한시도 광영이 없던 저 이에게
한 자 누울 땅을 내어주시라.
먼저 간 남짜 식구들 백골로 뒹굴면서 기다리는
다만 붉은 황토로,
다만 비에 젖은 붉은 황토로.
* ‘남짜 식구’는 박석률이 남민전 동지들을 부르던 말.
<김군자 할머니의 귀>
평생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남은 오른쪽 귀로 꼭 한 가지만은 듣고자 했다.
일본 정부는 공식으로 사과한다.
열일곱 살 적 훈춘에서 일본군에 얻어 맞아 한쪽 귀를 잃었다.
남은 한쪽 귀로 반드시 듣고 싶어 아흔한 살까지 기다렸다.
사과를 듣지 못하고 떠난 몫들까지 듣고자 더 오래 기다렸다.
평생 한쪽 귀로 듣지 못했다.
사과를 듣는 데는 두 귀가 다 필요한 건 아니었다.
한쪽 귀로 모은 기부금 2억6천만 원을 두고 떠나는 날까지 듣지 못했다.
장맛비 퍼붓는 밤
이 세상에 귀 한쪽 남겨놓고 간 할머니가
저기 돌아보신다.
들려드려야 한다.
들려들려야 한다.
저 귀에 들려드려야 한다.
▲ 故 김군자 할머니 생전 모습 <사진출처=나눔의집>
<천원>
-시급 7530원에 대하여
시급 천원이 올라가면 나라가 망하나요.
회장님 사모님이 가난해지나요.
503번 할머니 황금 변기에서 물이 안 나오나요.
품삯 천원을 내리면 우리네는 사람 꼴이 아닌데
사장님 사모님은 부자가 된다니요.
언 겨울 촛불 들 때는 한 식구인줄 알았던 게 오해인가요.
돈 천원 올리면 호프집이 망하나요.
탄핵하던 날 함께 모여 맥주 축배 들었는데
회장님 사장님은 어디 있었나요.
고압선에 올라가 밀린 노임 달라 할 땐 못 본 척하고
부동산 주식값 끝까지 뛸 때는 좋다고만 하더니
시급 천원 오른다고 야단인 신문 텔레비는 누구인가요.
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신세는 개돼지라서
돈 천 원 더 받으면 싸가지가 없어지나요.
우리네는 눈물도 사글세인가요.
있는 분들 통장은 깊고 깊지만
없는 놈들 주머니는 잘도 열리는데
시급 천원 올라가면 누가 돈버나요.
재벌이 어려울 땐 나랏돈 170조원을 제 돈인 양 쓰더니
품삯 천원 올린다고 이러긴가요.
시급 천원 올린다고 정말 이러긴가요.
<헌법에 내리는 비>
-현행 헌법 30년을 맞는 제헌절에
제헌헌법 표지 같은 낡은 기와지붕 아래서
대포를 마시는 동안
소낙비 낙숫물 소리를 안주 삼아
일그러진 주전자 뒤에서
어느 폐가처럼 비스듬히 앉아 졸고 있을 때
쥐오줌 빛 누르스름한 육법전서 같은 얼굴로
밤은 찾아오고
좌소주 우탁주 후래자 삼배.
대폿집의 율법대로 늦게 취한 폭우가
거리에 쏟아져 집시법을 위반한다.
자정 무렵 빗줄기는, 단언컨대 위헌이다.
그리고 슬픔은 아직 헌법에 나오질 않는다.
필시 헌법을 바삐 써갈기느라 법률학자들이 가난한 빗소리를 미처 듣지 못한 까닭이리라.
아무리 태풍이 불어와도 법률 행간에서는 보슬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여태 눈도 퍼부은 적이 없다.
다만 한자 투성이 조문 사이에는 늘 침침한 안개가 끼어 있다.
서른 해가 넘어도 우리들의 헌법에는 술이 없어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로 비가 퍼부을 수 있도록
석 잔에 한 번
삼일절투로 우레가 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 이래로
귀로 먹는 안주 중 아직 빗소리만한 건 없다.
<귀향 여인숙 간판 아래서>
-늙은 노동자를 위한 노래
퀴퀴한 카시미론 이불 냄새 밑
나는 누구의 첫 여인숙이었고
연탄불 식어가는 목소리로
누구에게 마지막 방이고자 했던가.
부러진 칫솔 같은 관절로
낡은 간판은 거기 전봇대에 기대어 비를 긋고 있고
골목 끝 여인숙에서는
그해 도망쳐온 밤이 하루를 머문다.
여인숙에 깃드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골목 좁은 들머리에서 먼저 여인숙이 된다.
길 잃은 자들에게 하루 짜리 고향
귀향 여인숙.
담벼락 방범등이 파지직거리면서 파수를 보고 있는 건
일그러진 양은 재떨이에서 타들어가는 모기향처럼 휘어지던
가난한 나날들.
병쓰매 내기 삼봉과 육백이 아직 살아 있던
사투리 같은 시대가
비 내리는 간판 언저리를 부유하고 있다.
시시하도록 뻔하게 불행한 불행과
화투점을 아무리 떼어봤자 날품 팔짜들.
쏘주에 쉽게 취해 군용 담요 위에 엎어져 꺼이꺼이 울던 사내들은
아무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차가 끊어져서 여인숙에 들었다고들 하지만
밤이 짧아 아침이 빨리 와도
제 청춘이 막차인 사람에게는 새벽 첫 차도 뒷차일 따름.
내일이 없어서 내일이 오질 않았겠는가.
귀향 여인숙에서 모로 잠든 자는
아무도 귀향하지 못했고
깨진 간판 홀로 빗속에서 하룻밤 싸구려 귀향을 아직 호객하고 있다.
나는 어느 여름밤 첫 여인숙이었고
어느 겨울밤 마지막 방이고자 했던가.
삼십년 전 옛 여인숙 앞에서 빗물을 씻어내면서 사내가 웃는다.
골목 깊은 여인숙에서는 아무도 귀향하지 못한다.
다시 기어이 막차가 떠나자
낡은 공장 지붕과 지붕 사이 구멍난 함석판을 두드리면서
공구가방 속 젖은 삼각김밥 같은 어둠을 타고
고개 숙인 빗줄기가 거꾸로 내린다.
* 병쓰매: 두 홉 들이 소주를 이렇게들 불렀다. 일본말 빙즈메 瓶詰(め)의 잔재.
삼봉과 육백 : 고스톱이 세상을 평정하기 전에 유행했던 화투놀이.
<고라니>
이름이 누렇구나.
고라니.
뿔 대신 송곳니 한 쌍 길구나.
뒷발로 겅중거리고 앞발로 헤치는
삼천리의 들짐승.
울 엄니 시집 올 때
해지도록 능선 타고 따라왔다는
흰 이빨 비스듬히 길러도
하냥 순한 울음.
산으로 간 오라비 기다리실 적에
누가 오는가.
죽은 듯 옆으로 누웠다가 다시 풀숲 사이로 달리는
숨어사는 작은 짐승.
등어리에 꽃점 콕콕 박힌
반가운 점박이 누룩털.
어디에도 이방 말 한 점 섞이지 않은
순우리말 즘생, 토종 씨앗.
산비탈 밭고랑 사이에 새끼를 낳고
졸래 쫄래 내려와서 목 메이게 부르는.
이름만 들어도 알겠구나.
고라니.
뿔이 아니면 어떠냐.
긴 송곳니 한 쌍 돋아나는 밤
턱 밑이 간지러워
서늘한 강물 마시다가 돌아보는
들판 사람들 얼굴 빛을 닮아
조심조심
이름이 누릿하구나.
고라니.
<나의 잠수부>
-김관홍 잠수사 1주기에
▲ <이미지출처=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캡처>
나의 잠수부여,
거기 심해에서 무엇을 보았던가요.
당신이, 또 당신들이 292명의 죽음들에게 말을 걸 때
죽음은 비로소 살아서 팔에 안겨오고
‘어서, 올라가자. 엄마한테 가자.’
엉킨 채 서로를 위로하면서 캄캄한 뱃속을 떠돌고 있는
주검 하나하나를 달래어서 안아 올릴 때
‘삼촌 하고 가자. 아빠 기다리신다.’
밧줄 하나에 목숨을 걸고
국가도 대통령도 없는 저 바다 밑을 헤매다가 숨막히는 어둠을 헤치고 올라올 때
‘가방도 가지고 가야지. 신발을 벗어놓고 가면 쓰겄냐.’
물건 하나씩 옆구리에 챙겨서 매달고 겨우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권력은 중얼거렸어요.
‘너는 돈을 벌려고 이러는 것이다.’
‘너는 민간잠수부가 아니다.’
나의 잠수부여,
거기 깊은 바다에서 오늘은 무엇을 보고 있는지요.
아직 다 찾지 못한 어린 친구들에게 미안해서 나오질 못하는 것인가요.
맹골수도 빠른 물길에 쓸려간 마지막 신발 한 짝을 찾고 있는지요.
물 밑으로 내려간 잠수부여,
우리들을 절망의 바다에서 끄집어 올리던 잠수부여,
오늘 한번 올라오시라.
무심한 맹골수도여, 오늘은 한번 그를 놓아주시라.
우리가 잠수부가 되어 나머지 진실을 찾아낼 터이니
검은 물길이여,
광화문까지는 아니라도 좋으니
꼭 한번만 아내의 꽃집에서 꽃향기로 그를 돌려주시라.
산 자들의 절망이여,
죽은 자들의 목숨이여,
우리는 모두 그대에게 빚졌나니.
나의 잠수부여,
오늘은 물 밖으로 나오시라.
<어느 젊은 의사에게>
그 의사에게 수술 받고 싶다.
사망을 사망이라고, 264일 전 필사적으로 흔적을 남긴 그 전공의에게.
죽음을 죽음이라고 고쳐 기록한 그 양심에게.
그 사람에게 흰 가운 한 벌을 입혀주고 싶다.
백남기 농민이 쓰러져 있을 때 삼각산을 덮던 눈을 잘라내.
보성만 파도에서 흰 물줄기만 골라 엮어.
그 청년에게 부탁하고 싶다.
외인사든 내인사든
그날 마지막 내 사망 진단서도 끊어달라고.
당신이 의사요.
타살을 타살이라고 한!
죽음을 죽음이라고 한!
그대가 의사 맞소.
<우리에게도 하와이가 있었다>
- 38년 만에 문을 닫은 부곡 하와이를 위한 만가
우리에게도 하와이가 있었다.
이승만이 내쫓겨간 거기 하와이 말고
미아리에 텍사스가 있듯
창녕 부곡에도 하와이가 있었다.
미국에만 하와이가 있는 건 아니었다.
우리들의 하와이에는 바다도 섬도 없어
깊고 깊은 심심산골 하와이
재일동포가 만든 하와이가 있었다.
48개 구멍에서 뜨거운 물이 솟는
비행기 타지 않고도 갈 수 있던
메이드인코리아 하와이.
계모임 관광버스 춤추는 손가락이 천장을 찌르고 있노라면 가닿는
하와이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가는 하와이
미국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 미국 따위쯤 한국땅에 만든
그곳 깊은 솥골 부곡 온천.
야자나무 대신 공단과 난초가 돋고 쓰러지는
화투장 몇 바퀴 돌리고
무학소주야 울어라.
들일하던 사람들 손놓고 일생에 한번쯤은 가보던
신세계,
산 속에서 수영복 입고 원없이 물을 맞던 워터파크
디스코 팡팡 별천지,
쇼쇼쇼.
취한 밴드소리가 가난한 솔숲 사이에서 끈적거리던
우리에게도 하와이가 있었다.
미아리에 텍사스가 있듯
부곡에는 하와이가 있었다.
하와이 사람들커녕
양놈들은 절대 모르는 진짜 짜가 하와이가 있었다.
짜가 시대에 짜가 하와이
우리들의 부곡 하와이가 그날 있었다.
<김의기, 5월30일>
-오월걸상을 위하여
스물두 살 청년 김의기는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아래로 몸을 날렸다.
동포여, 일어나자!
이 대지의 가장 먼 곳까지 뜻을 전하고자 했지만 그의 몸뚱어리가 떨어진 곳은 고작 계엄군 장갑차 위였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맨 먼저 받아 읽은 것도 총칼을 든 계엄군이었다.
김의기가 처음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공포의 어둠, 침묵의 어둠을 찢고 일어섰다. 그는 80년대라는 진실의 척후였다.
양심과 시대의 첫 마디였다.
광주에서 학살이 끝난 뒤 누구나가 지독한 암전의 일부였을 때, 비겁의 형제였을 때 그가 몸을 던져 맨 처음 학살을 알렸다.
광주는 오월에 끝난 게 아니었다. 오월은 광주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김의기가 있어 오월 광주는 6월로 내달려갈 수 있었다. 김의기의 5월 30일을 딛고 오월은 일곱 해를 달려 6월시민항쟁으로 타올랐다.
독재와 싸운 거대한 단일 시간인 ‘장기 오월’을 연 이름, 옳을 ‘의’ 기운 ‘기’ 김의기義氣. 이름 자체가 정의감에서 우러나오는 기개라는 뜻이었다.
그날 스물두 살 김의기의 몸이 떨어져내리고, 옥상에서 그가 뿌린 동포에게 드리는 글은 허공에서 펄럭거리면서 오후 5시 5월 하늘을 천천히 내려왔다.
먼저 땅에 닿은 것은 육신이요, 허공에 머문 건 의기였다.
그는 타자로 친 한 장 짜리 글을 마무리하면서 왼쪽에 한 번 ‘1980’이라고 쳐넣었다가 다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1980년 5월 30일 김의기 드림’이라고 써넣었다.
아무 것도 빚진 게 없는 청년은 한없이 빚진 듯이 썼다.
내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몸 바쳐 싸우자, 동포여!
내일 정오가 언제인가.
오늘인가, 내일인가.
그가 몸을 던진 날로 꼽자면 5월 31일 오늘이다.
기억하는 자에게는 날마다가 5월 31일이다.
오월 일기예보
- 김철원에게
그 5월은 더웠다.
평년보다 얼마나 더 기온이 상승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타살된 시간이 썩기에는 더 없이 알맞은 날씨들이었다.
그리고 벙어리가 죽었다.
5월 16일 낮 최고 기온은 18.8℃였고 밤에는 10℃를 밑 도는 쌀쌀한 날씨였지만 그 도시는 덥기보다는 뜨거웠다.
도청 분수대에서 저녁부터 횃불성회가 있었다.
계엄령을 해제하라!
분수대에서는 물기둥 대신 인간 함성이 뿜어 올랐다.
기온이 오르지 않아서였을까.
그날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5월 17일은 맑은 토요일이었다. 20.9°C. 손목을 채운 수갑의 차가운 느낌을 느끼기에 딱 좋은 온도였다.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예비검속으로 사람들은 끌려갔다.
벙어리는 양화점 가게에서 가죽을 잘라내고 구두를 기웠다.
헬리콥터가 도시 밤하늘을 오래 비행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튿날 도시는 기온이 급상승했다.
그날은 구름이 짙었는데도 기온은 섭씨 25.1°C였다.
일요일이었고, 5월 18일이었다. 광주 1980년이었다.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을 막고 있는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이던 학생들은 교문을 밀치고 시내로 밀려나가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면서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이 조심스럽게 섞여 들었다. 그 과정에서 4백명 넘게 체포되어 끌려갔다.
오후 4시 공수부대원은 벙어리를 낚아챘다. 구두를 만드는 스물여덟 살 먹은 제화공. 김경철은 말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는 농아신분증을 꺼내보이면서 손짓 발짓으로 살려달라고 했지만 그걸 희롱하는 걸로 알아 들은 공수부대원은 군화발로 얼굴을 짓이기고 몽둥이를 입에 쑤셔 넣고 말을 하라고 했다.
구호 한 마디 외칠 수 없었던 벙어리는 맞아 죽었다.
그는 그해 5월 첫 타살자였다.
그는 침묵의 비명으로 타살되었다.
밤 9시 광장에 모인 6천 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은 벙어리 대신 꺼이꺼이 외쳤다.
이튿날 새벽 3시
월요일, 5월 19일 벙어리는 광주적십자병원에서 죽음을 확인했다.
가랑비 5.6MM가 뿌린 낮 최고 기온은 섭씨 22℃였다.
벙어리가 죽기 좋은 온도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36.5℃였던 그의 몸은 22℃로 썩어가기 시작했다.
죽은 그는 국군통합병원으로 실려 갔다.
화요일 5월 20일에는 낮비가 제법 내렸다. 12MM였고 비 때문에 온도가 내려가 17.5°C였다. 그래도 더웠다. 알 수 없었다.
해가 질 무렵 저녁 7시에 2백여대 택시와 버스가 경적 시위를 했다. 한 시간 뒤 3공수부대에게, 11공수부대에게 실탄이 분배되었다. 밤 10시 궁동에 있는 두 방송국이 불타올랐다. 밤 11시 공수부대가 광주역에서 총기를 난사했다. 구경 5.56MM짜리 소총 탄환은 날아가면서 보았다.
도청 앞에서는 10만 명이 밤을 새워 집회를 벌였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다.
그 밤, 그들이 사랑해야 할 조국은 그들에게 총알을 퍼부었고, 그들은 더 오래 노래 불렀다.
어머니는 통합병원에서 죽은 아들을 보았다.
처치 받은 것은 포도당, 삐콤, 타치온이 전부였다.
벙어리의 몸은 통합병원 영안실에서 이따금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맞아죽었다.
5월 21일 수요일은 휴일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라서 부처님도 쉬었다.
틀림없이 쉬었다.
그날 낮 12시 55분경 도청 앞에서 탄환은 애국가 후렴 ’대한 사람 대한으’와 ‘로’ 사이에서 발사되었다.
계엄군의 총알은 ‘애국가’를 꿰뚫고 갔다.
찢어진 애국가 사이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개새끼들아, 왜 조준사격 안 하는 거야!
탄약을 나눠주면서 외치는 중대장의 질책은 죽음을 재촉하는 저승사자의 기도소리였다.
모른다.
부처님이 방금 발사된 뜨거운 탄피 사이에서 수도중이었는지도.
부처님이 쉬고 있던
그 오후에 사람들은 대신 무기고로 달려갔다.
도시 밖으로 연결된 전화를 포함한 모든 통신이 차단되었다.
저녁 7시 반쯤에 도로가 끊겼다. 계엄군은 그 경계선까지 물러나 있었다.
바깥 세상과 절연된 도시의 밤은 피 흘린 채 고요했다.
종일 맑은 그날 온도는 26.1°C였다.
얼마나 고요한 온도인가.
밤새 남도의 도시에서는 더 많은 감꽃이 흰 옷을 입고 떨어져 내렸다.
그 중에는 벙어리 몫인 감꽃도 들어 있었다.
계엄군이 시내에서 철수한 걸 안 건 다음날이었다. 구름이 많이 끼었고 5월 22일 목요일 최고 온도는 28°C였다.
사람들은 몰려나와 밥을 나누고 살아있음을 서로 확인했다.
일상이 너무도 평온해서 난리가 나고 학살이 일어났다는 게 도리어 기이할 지경이었다.
벙어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기 몸이 썩어가고 있는 걸 믿을 수 없었다.
5월 23일은 날이 흐렸다.
미니버스를 탄 사람들이 주남마을을 지나고 있을 때 총소리가 들려왔다. 18명 중 15명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생존자 3명 중 2명을 뒷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즉결처분했다. 손목에 총상을 입고 혼자 살아남은 여고생은 군인들 무전기로 주고받는 말을 들었다.
왜 귀찮게 데리고 오냔 말이야!
저승 사자들은 한국말을 사용했고 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너무 일상적인 어투였다. 그들의 이름은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다. 소녀가 그 말을 듣고 있을 때 기온은 섭씨 25.8°C였다.
25.8°C는 너무 뜨거운 온도였다.
토요일날에 군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총질을 해서 쏴죽였다. 탄환은 구경 5.56MM이거나 7.62MM였다.
탄환은 12.6MM 비가 내린 5월 24일 섭씨 26.8°C의 허공을 갈랐다.
죽은 벙어리는 더웠다.
그가 말없이 썩어가고 있었으므로 남도는 더웠다.
두 번째 일요일인 5월 25일 이틀째 낮비가 뿌렸다.
누군가 도청 벽에 미국 항공모함 2척이 한반도를 향해 오고 있다는 대자보를 붙였다. 아직까지 항공모함에 민주주의가 실려온 적은 없었다. 강수량 26.1MM 비가 내린 이 도시만 예외일 리 없었다.
낮 온도는 23.3°C였다. 벙어리의 몸이 마저 문드러지기에 알맞은 온도였다.
5월 26일 월요일은 비 끝에 온도가 떨어져 19.1°C였다. 여전히 죽은 자들의 몸은 썩고 있었고, 썩고 있었으므로, 한없이 더웠다.
자정까지 도청을 떠나라는 최후 통첩 때문에 시신은 더 빨리 부패하고 있었다.
오후 5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항쟁 지도부가 외신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벙어리의 몸은 잠시 썩는 걸 멈추고 대변인 윤상원의 목소리에 들리지 않는 귀를 기울였다.
헬리콥터가 하늘에서 투항 권고 삐라를 뿌렸다.
가두방송 차량이 광주를 지켜달라고 애원하면서 밤길을 내달려갔다.
아무도 잠들지 못하는 침묵의 새벽이 골방마다
벙어리처럼 울었다.
5월 27일 새벽 8°C 기온 속에 계엄군 20,317명이 도청을 향해 1만여발의 사격을 가했다. 남아 있던 시민군은 157명이었다. 그 아침에 26명이 사살되었다. 핼리콥터는 도청 일대를 비행하면서 탄환을 쏟아 놓았다. 5.56MM와 3inch 탄환이었다.
태양은 스물여섯 명의 피를 머금고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랐다. 안개도 끼질 않았다.
진압이 끝난 낮 온도는 22°C였다.
물청소를 마친 금남로 도로는 오가는 차 한 대 없이
말끔했다.
날도 맑았다. 화요일이었다.
너덜거리는 벙어리의 시신이 트럭에 실려갔다.
가슴을 대검으로 찔려 죽은 여성도 트럭에 실려갔다.
트럭에 실려가지 못한 채
살아있던 사람들의 살이 어디선가 썩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5월은 더웠다.
실제로는 평년 기온과 그닥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더럽게 더웠다.
이것이 인간이 5월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벙어리의 몸이 썩고 있는 도시는 덥다.
산 자가 썩어가는 모든 대지는
덥다.
* 당시 기온과 날씨는 기상청 자료.
[봄은 고아다]
봄이 좋은 건 애비 없는 탓이다.
눈이 퍼붓고 나서야
꽃이 피노라니
봄은 하루도 어제를 답습하지 않는다.
칸칸이 언 새벽을 찢고
묵은 삭정이 사이에서 죽음을 깨워
기어이 싱싱하게 돋아나는
봄은 따로 에미를 두지 않았다.
해마다 새로 태어나는
봄은 고아다.
쟁기질에 흙냄새 뒤집으면서 비명으로 들고 일어나는
대지에 맨발로 서서
에미 애비 없이 울어야 더 찬란한 봄이다.
4월처럼.
저 혁명처럼.
어떤 혁명도 에미 애비 따위가 없다.
봄도, 혁명도 고아다.
[섣달 그믐밤에]
- 어머님께
팔순 노모가 캄캄한 눈으로
막내아들 저고리 단추를 달면서 졸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옛 이야기 듣느라 밤비 내린다.
처마 끝마다 그믐밤은 와서
징용 갔던 외할아버지가 청년 차림으로 문득 사립문을 열고
정구장 근처에서 총 맞아 죽은 서씨 문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았다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제종인가 팔촌도
그날 끌려가면서 떨어진 옷고름 달아달라고 비바람에 펄럭 펄럭 기웃거리고
어느 신작로에선가 벌써 사잣밥을 얻어먹은 작년이
서캐 오를라
눈썹 하나하나 뽑아 바치면서 옛 이야기 듣겠노라고
섣달 그믐 겨울비 내린다.
섣달 그믐 밤은 해마다 짧아서 해마다 길구나.
아무리 바빠도 팔순 노모 얼굴 주름골 하나하나 다 다녀가려면
섣달 그믐 밤이 새로 열두 번 스무 번은 와야
진짜 섣달 그믐 밤.
옛 이야기 좋아하는 섣달 그믐 밤이
가다 말다 가다 말다 뒤돌아보느라
처마 끝마다 불빛 멀리 밝다.
[시민 연서]
- 시민헌장을 위하여(2017년 첫 날)
오늘은 첫 줄 같은 날,
세상 첫 소절로 써봐야겠다.
연필 끝에 침 묻혀
또박또박
명토 박아야겠다.
내가 나에게 쓰는 연서.
내가 쓰는 시민헌장.
나의 존엄으로.
너의 존엄으로.
뽑는 민주주의 말고 내가 하는 민주주의!
독창 민주주의 말고 합창 민주주의!
오늘은 내 첫 입술로 말해야겠다.
첫 줄로 똑 이렇게 써야겠다.
남이 써주는 헌장 말고!
누군가 하사하는 민주주의 말고!
내가 민주주의다!
내가 헌장이다!
나를 그만 가르쳐다오!
오늘은 첫 사랑 연서로 써야겠다.
첫 줄로 설레이게 살아야겠다.
비바람에도 지워지지 않는 첫 줄,
눈을 뚫고 나와 가장 먼저 봄을 부르는
새싹 같은 첫 줄,
싱싱한 노랫가락 첫 줄로
시민헌장 첫 줄을 써야겠다.
내가 공화국의 첫 음성이도록
이 세상 첫 줄로 살아가야겠다.
[문자모독]
- 국정역사교과서 집필료 1쪽당 최고 243만 원 소식을 접하고
문자를 삽니다.
한 쪽당 243만 원입니다.
단, 박정희라는 독특한 고유명사가 두 번 이상 연속 사용되어야 합니다. 5.16 쿠데타를 우주적 필연이자 혁명이라고 쓸 때 값은 더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건 경매보다 쉬운 방식입니다.
역사를 매수합니다.
한 쪽당 243만 원입니다.
단, 주의해야 할 점은 건국절이란 신종 특수단어를 세 번 이상 반복 사용해야 합니다. 삼백 번이라도 무방합니다. 자주 반복하다보면 이를 신념이라고 부르면 되니까요. 친일이라는 반현실적 용어를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생계형 전략이라고 쓰거나, 식민지근대화라고 집필할 때는 값을 측정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혀를 매수합니다.
한 근당 243만 원입니다.
갈라진 혀일수록 환영합니다.
단, 그 혀로 독립운동이라고 부르는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인, 오늘날 애국세력의 선배들을 노린 불만세력의 앞뒤 안 가리는 활동이 결코 해방을 앞당기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놀리면 예상 밖으로 값을 거듭 쳐줄 수 있습니다.
입술을 삽니다.
한 접시에 243만 원입니다.
핏기 없을수록 좋습니다.
단, 그 입술로 임시정부를 전문용어로 임의의 가假정부라거나 떠돌이 해외시민단체였다고 쓰는 경우에는 비밀훈장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극히 노골적으로 은밀히 살짝 알려드립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쪽당 243만 원입니다. 생각보다 쉽습니다.
손가락을 매수합니다.
한 개당 243만 원입니다.
구부러져 있을수록 후하게 쳐드리겠습니다.
단, 인권 따위 읊조려 온 민주화운동가들을 국가와 겨레를 구하는 대사업인 산업화 방해세력 또는 끈질긴 종북세력이라고 쓸 수 있는 가상한 용기를 품은 손가락을 지닌 분이라면 따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그 손가락은 개인소유보다는 국립공원에 심어놓고 관상용이자 국민 교육용으로 관리하고 자라게 해야 하니까요.
문자와 역사를 무게로 삽니다.
예로부터 두꺼운 책일수록 좋은 책이니까요.
한 쪽당 243만 원입니다.
혀, 입술, 손가락 등 여러분의 신체 일부분이 곧 애국의 상징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고기를 무게로 사고 팔 듯
이곳은 역사의 푸줏간이니까요.
문자의 정육점이니까요.
그 서체로 건국절이라고 한번 더 써보세요.
그 손가락으로 이승만, 아니 박정희라고 한번 더 써보세요.
한 쪽당 243만 원입니다.
29만 3천 원이 아닙니다.
243만 원입니다.
참고로 이 푸줏간은 일단 한번 들어오시면 나가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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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당 243만 원입니다.
근당 243만 원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12월혁명의 날]
오늘은 12월혁명의 날.
권력은 끝났다.
촛불은 암전된 세상을 밝힌 역사의 등불이다.
한번 더 깃발을 들어올려
남은 파시즘의 숨통을 끊어내야 한다.
사유물인 국가를 공물로 되돌려야 한다.
구체제는 끝났다.
이제 미래가 시작되려고 한다.
오늘은 어제가 아니다.
우리는 어제 그 국민이 아니다.
우리는 복종하던 그 국민이 아니다.
한번 더 촛불을 들어올려라.
한번 더 깃발을 들어올려라.
오늘은 겨울혁명의 날.
가슴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마지막 밤을 밝히는 촛불을 올려라.
오늘은 시민혁명의 날.
[국회를 포위하라]
국회를 포위하라.
우리가 권력이다.
우리가 결정한다.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자
여기 왔노라.
귀족의회를 포위하라.
내가 주인이다.
내가 국가다.
여의도를 포위하라.
정의를 정의롭게 하겠노라.
오직 이것만이 우리의 슬로건.
의회를 포위하라.
승리하기 위해 왔노라.
오직 이것만이 우리의 깃발.
협잡과 타협을 포위하라.
독재를 포위하라.
배신을 포위하라.
국회를 포위하라.
[77위령탑을 아시는지요]
- 국정역사교과서가 나온 날 금강휴게소를 지나며
아시는지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죽은 사람은 77명 뿐이라는 걸.
1970년 7월7일에 개통했으니 77명이 죽은 것이지요.
몇 명이나 죽었느냐고 되묻지 마세요.
770명이 죽었을 수도 있고
890명이 사망했을 수도 있지만
하여튼 77명이 전사한 것이니까요.
산업전사는 죽어서도 77명 뿐.
죽을 때도 숫자를 맞춰서 죽는
조국번영에 충실한 전사야 원래 이름이 없으니까요.
900만 명이 군인들 지휘 아래 전투하듯
쉬지 않고 언 땅을 파고 삽질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는 아무도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77명이 사망했다고 숨어 있는 위령탑이 희미하게 말해주고 있을 뿐.
금강휴게소에 들르실 일이 있거든
입 속으로라도 77이라고 불러봐 주시길.
혹 눈비라도 내리거든.
770이라고 되뇌어도 좋은.
혹 안개 짙거든
운전대 놓고 가까스로 찾아보면
죽을 때도 숫자 맞춰서 죽어야 하는
충성어린 산업전사야 무명씨들이니까요.
위대한 영도 아래 77명이 숨졌달 뿐이니까요.
아시는지요.
국토의 동맥을 건설할 때는 아무리 죽어도 77명 뿐이라는 걸.
한강의 기적은 우리네 같은 것들이야 아무렇게나 죽어도 77명이라고 부른다는 걸.
아시는지요.
날짜에 맞춰 엄선해서 국정으로 죽어야 한다는 걸.
* 경부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은 충북 옥천군 동이면 조령리 금강휴게소 안쪽에 서 있음
[겨울 행진]
눈이여,
이 광장으로 내려다오.
모든 걸 새로 쓰기 좋게
더 희게 퍼부어다오.
숨은 패배 위에도 서슴없이 쏟아져
쓰러진 꿈들이 다시 일어서게끔
눈이여,
더 사납게 창을 두드려 깨워다오.
광화문 금남로 서면로타리에서
겨울 행진 발자국 낱낱이 기억할 수 있게끔
더 굵게 폭설로 새 역사의 증언이 되어다오.
눈이여,
두려운 건 겨울 따위가 아니라고
싱싱한 아우성으로
흰 얼굴 그대로
펄펄 대지를 노래해다오.
[만약에]
-어느 유신소년의 고백
대통령이 하라는 대로 살아왔다면,
나는 자유당 혹은 공화당 또는 필시 민정당 체제에서 아직 살고 있을 거다.
체육관선거를 동네 티브이로 공동시청하면서 박수를 권하던 선동꾼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도지사, 군수, 면장 권력이 하라는 대로 살아왔다면,
나는 새마을운동을 하다 농가부채를 못 이겨 농약을 마시고 실려갔을 거다.
통일벼를 심으라면서 일반벼 못자리를 밟아버리던 농촌지도소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교련교사, 체육교사가 하라는 대로 살아왔다면,
나는 시범케이스 체벌, 한 사람이 잘못하면 모두가 얻어터지는 연대책임을 최고의 윤리로 알고 실천했을 거다.
강철 지휘봉과 몽둥이를 휘두르던 한국적 민주주의의 말초신경들은 어떤 근육이 되었을까.
법전에 나와 있는 대로 살아왔다면,
유신헌법과 국민교육헌장을 암송으로 경전 삼은 나는 유신소년인 채로 단 한 번 집회도, 시위도 나가지 못했을 거다.
393글자를 통째로 암송 못하는 학생들 손등을 세로로 세운 잣대로 피멍 들도록 때리던 담임교사 이름은 왜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
만약에, 만약에 하라는 대로 살아왔다면,
나는 박정희대통령각하영애근혜양이 대통령 딸은 원래 이름이 긴가 보다 하고 처음 생각했던 대로 살았을 거다.
왜 아직도 그가 자꾸만 박정희대통령각하영애근혜양으로 먼저 떠오르는 것일까.
나는 왜 하라는 대로 살아오지 못했을까.
나는 왜 시키는 대로 살지 못했을까.
만약에, 만약에 하라는 대로 살아왔다면 나는 누가 되었을까.
[하야는 없다]
아무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아무도 순순히 하야하지 않았다.
아무도 순순히 권좌에서 내려온 이는 없었다.
이승만은 4.19 당일 경무대 앞 발포로 현장에서 21명을 사살하는 등 모두 186명을 거꾸러뜨리고도 엿새 뒤에 아량을 베풀 듯 가까스로 하야했다. 무슨 영문인지 그는 끝내 징벌받지 않았다.
박정희는 부산에 계엄령을 내리고 마산 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공수부대로 시민을 진압한 일곱 날 뒤에 최고권력자 개인전용 술집에서 부하 손에 숨졌다. 필시 세계 역사상 처음이었다. 대통령으로 사망했으므로 어쨌든 그는 하야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6월시민항쟁에도 자리를 지킨 채 여덟 해 동안 권력을 누린 뒤 마침내 제 발로 돌아갔다. 2십9만3천 원이 있는, 자기 집으로.
이승만은 철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자행하고 나서야 쫓겨났다.
박정희는 술잔을 든 채 캄보디아에서 3백만 명을 죽였는데 1,2백만 명 쯤 못 죽이겠느냐는 부하의 마지막 보고를 받았다.
전두환은 친구인 후임 대통령의 등을 따뜻하게 두드려주고 흰 목도리를 두른 차림으로 손을 흔들면서 귀가했다.
끌어내리지 않은 권력이 해체된 역사는 없다.
무릎 꿇리지 않은 권력이 자유를 내어준 적은 없다.
자유의 제단에는 권력을 최종적으로 패퇴시킨 자와 그 친구만이 올라설 수 있다.
아무도 순순히 육법전서 따위가 되지 말아야 한다.
아무도 순순히 국민 나부랭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
아무도 순순히 집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
아무도 순치된 저항에게 자유를 하사하지는 않는다.
아무도 순치된 자유에게 민주주의를 선사하지는 않는다.
아무도 순치된 분노에게 하야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가을비가 광장 처마 끝에서 중얼거린다.
아무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아무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어느 인형 이야기]2016.11.01
공주 노릇, 왕비 노릇 말고도 얼마든지 쓸 만한 놀이가 있다는 걸 모른 채로
늙어버린 소녀가 있었다.
호통치고 남탓하는 것 말고도 얼마든지 사람살이가 재미있다는 걸 모른 채로
노파가 된 여자 아이가 있었다.
날마다 옷을 바꿔 입고
저녁마다 파티 주인공이 되는 것 말고도 인생이 생기 있다는 걸 모른 채로
두꺼운 화장 뒤로 얼굴 주름진 낭자가 있었다.
자기 아버지 성미를 닮는 일 말고도
자기 어머니 헤어스타일을 닮는 일 말고도
얼마든지 닮을 만한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른 채로
아버지가 다녔던 곳 말고도
얼마든지 좋은 여행지가 있다는 걸 또 모른 채로
전쟁놀음으로 겁주는 일 말고도
사람을 진짜 감동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걸 모른 채로
내시 말고도 친구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부하 말고도, 복종 말고도 우정이나 인간애가 있다는 걸 까마득히 모른 채로
망구가 다 된 어떤 핏기 없는 소녀가 있었다.
304명 아이들이 죽어도 이상하게 눈물 흘릴 줄 모르는
인형에게 인생을 배우던 그런 소녀가 있었다.
군인 계급장 말고도 하늘에 별이 돋는다는 걸 모른 채로
이미 초로의 노파가 된 드레스 나풀거리는 인형이 있었다.
쭈글쭈글한 걸 죽도록 못 견뎌하는
당신도 아는
공주놀이, 왕비놀이 말고는
자기가 누구인지 끝내 모른 채 자기 안으로 퇴화해버린 모종의 자기 복제품이 있었다.
놀이가 끝나도
놀이터에 혼자 남아 놀이가 끝난 줄 모른 채로
늙은 인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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