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쉬었음' 청년 50만명, 뻔한 해법은 그만 2. 물 마른 산이 타고 정 마른 세상이 탄다 3. ‘한국판 러스트 벨트’ 위험 4. 극우의 도전과 그 공범자들, '회색 민주주의자'와 '위로부터의 극우화’ 5. 이제, 사회대개혁이다! 6. 이게 다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7.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 투입, 어쩔 수 없다? 한반도까지 전쟁터로 만들려 하나 8. 대한민국의 밑바닥 드러낸 넉 달 9. 명심해라. 윤석열과 화해를 주선하는 자, 그가 바로 배신자다" 10.윤석열 정권에 대한 한 지식인의 '저항 일기’
11. 어떤 대한민국이 돼야 하는가-윤석열 파면에 부쳐 12. 4월은 갈아엎는 달 13. 지브리풍 이미지가 던지는 질문 14. 세계가 놀란 ‘민주주의 열정’, 새로운 도약의 불꽃으로
쉬었음' 청년 50만명, 뻔한 해법은 그만
고졸 청년, 제조업, 일자리의 질을 고민해야
지난 12일, 정부는 <취업자 2달 연속 두자릿수 증가…서비스업 고용 증가폭 확대>라는 제목의 '정책브리핑'을 발표했다. 2월 취업자 수가 13만6000명이나 증가했고 고용률과 경활률이 2월 기준 역대 최고라는 것. 실제로 15세 이상 고용률은 61.7%로 전년 동월 대비 0.1%p 상승했고, OECD 비교 기준인 15~64세 고용률은 68.9%로 0.25%p 상승했다.
그러나 취업자 수 증가는 65세 이상에 치우쳐 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직접일자리 사업이 연초부터 신속 채용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일자리를 집중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지난달 65세 이상 취업자는 33만1000명 증가했다. 직접일자리 사업을 진행하면 주로 보건복지와 공공행정 일자리가 늘어나는데, 정부가 말한 '서비스업 고용 증가'가 바로 이 두 부문을 가리킨다.
노년층은 그래도 이렇게 취업자 수를 늘리기가 용이한 편이지만, 일자리를 구할 때 미래를 더 많이 생각하는 청년층은 다르다. 지난달 15~29세 청년층 인구는 전년 동월 대비 21만5000명 감소했는데, 청년층 취업자는 23만5000명 줄었다. 청년층 고용률은 44.3%로 전년 동월 대비 1.7%p나 하락했다. 청년층 '쉬었음' 인구는 50만4000명으로 2003년 관련 통계 작성을 시작한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다. 비경제활동인구를 제외하고 계산하는 청년층 실업률도 7.0%로 0.5%p 상승했다. 청년층이 많이 취업하는 제조업과 도소매업은 취업자가 감소하는 추세다. 어느 지표를 보나 좋지 못하다.
언론은 청년 고용지표 중에서도 청년 '쉬었음' 인구의 증가에 주목했다. 특히 <한국경제>, <서울경제>, <헤럴드경제>, <한국일보>, <세계일보> 등 5개 신문은 청년 ‘쉬었음’을 사설로 다뤘다.
[사설] '그냥 쉬었음' 청년 50만명…이대로는 한국號 미래 없다(25.03.12 한국경제)
[사설] 청년 고용 4년래 최악인데 '反기업' 정책 공약 내세운 巨野(25.03.13 서울경제)
[사설] '쉬었음' 청년 50만명, '불안하다'는데 정책은 느슨(25.03.17 헤럴드경제)
청년 50만 명이 '그냥 쉬는 사회' 지속 가능한가(25.03.13 한국일보)
[사설] '쉬었음' 청년 43만명, 이들의 희망은 '일자리 재교육'(25.03.13 세계일보)
<한국경제>는 청년 '쉬었음'의 증가가 "기업 투자가 갈수록 위축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교육 체계가 기업 친화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시장의 경직성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고 "획일적인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조항" 하나도 만들지 못하고 있어서 답답하다고 했다.
<서울경제> 사설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업들의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규제를 혁파하고 세제·재정 등 전방위 지원에 나서라고 했다. 또한 "정규직 보호 중심의 경직된 노동 시장을 유연화해야" 기업들이 청년 채용을 기피하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헤럴드경제> 사설은 정부의 적극적인 관리와 "실무 중심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이 사설도 뒷부분에서는 규제 완화와 노동시장 경직성 이야기를 똑같이 했다. 매번 나오는 주장들이다. 문제가 무엇이든 경제신문들의 해법은 규제 완화와 기업 지원이다.
<세계일보>는 '쉬었음 청년, 그들은 누구인가' 시리즈 연재를 통해 만난 청년들 이야기를 사설에 담았다. 청년들이 다시 일어서려면 일자리 재교육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한국일보>는 쉬었음 인구 증가의 원인을 '신성장 동력이 나오지 못한 것'과 '노동시장 이중구조'에서 찾았다. 두 신문의 사설은 경제신문들의 사설과 논조가 상당히 달랐다.
그렇다면 쉬었음 청년 증가에 대한 주무부처 장관의 인식은 어떨까?
지난해 11월 29일,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쉬었음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일자리 대책을 설명했다. "국세청에 소득 신고 한 번 해본 적 없는 졸업생들을 직접 찾아가서 어떻게 지내는지, 왜 쉬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맞춤형 컨설팅을 진행할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올해 1월 고용노동부가 '한국형 일자리 보장제'를 내놓았다. 한국형 일자리 보장제란 EU의 청년보장제(Youth Job Guarantee)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청년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 4개월 내에 정부가 개입해서 취업 준비 장기화를 예방하는 정책이다.
올해 2월 19일에는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의 긴급 기자회견이 있었다. 청년 고용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지금 엑소더스 코리아가 얼마나 급속하게 일어나는지 여러분 보시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투자 안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투자 안 하는데, 우리 젊은이들은 쉬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원하는 자리가 반도체, 고임금, 좋은 거 아닙니까. 고임금이고 연봉 1억 이상, 그다음에 R&D, 연구기술직, 이런 또 반도체 같은 특별한 분야에 대해서 하자는 이것도 안 하면서 먹사니즘을 말합니까?"
그러니까 김 장관의 견해는 '기업이 투자를 안 해서 젊은이들이 쉬었다'는 것으로, 경제신문 사설 내용과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그의 해법은 어떤 논리에 근거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젊은이들이 원하는 좋은 일자리가 반도체 업계의 고임금 일자리인데, 그 반도체 분야에 주52시간 예외 인정을 안 해서 문제라니…. 좋은 일자리를 장시간 노동하는 일자리로 만들면 '쉬었음'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일까?
몇 마디만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다. 3월 10일 김 장관이 세종청사 기자간담회에서 청년 고용에 대해 했던 이야기도 들어보자. "방법이 뭐냐 이거지. 우리가 고용노동부가 안을 내는 게 아니라 기업이 청년 채용해야 하는데 기업이 전체적으로 감원 추세. 삼성, 은행, 건설도 감원. 그럼 어디서 늘릴 거냐. 올해 졸업생도 쏟아져 나와요. (…) 취업 잘 되는 데 정원도 늘리고 해보자. 뭐 그런 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쉬었음 청년한테 가서 5만 명 데이터 가지고 계속 전화해서 취업 박람회 하는데 와보세요, 이런 일자리 있는데 한번 안 해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소프트웨어 트레이닝코스 1년짜리가 있는데 다 우리가 돈 주고 약간의 훈련비도 드릴 테니까 들어보시죠. 뭐 이렇게 유인을 하는 거죠. 안내, 유인해 드리고. 그런 거는 우리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게 너무나도 미미한 거예요."
기자 한 명이 '청년고용 관련해서 고용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없다는 거냐'는 취지로 질문하자 김 장관은 다시 이렇게 답변했다. "안내는 해주지만 일자리 만드는 건 정부 인턴, 그것도 임시거든요. 인턴도 막 늘릴 수가 없어. 더 늘릴 수가 없어. (…) 청년정책도 수십 개가 있는데 내가 들여다볼 때는 청년이 원하는 일자리 몇 개 늘어나냐, 굉장히 제한적이다. (…) 우리가 하는 것은 중소기업에서 청년 채용하면 지원금 줘요. (…) 10만 명한테 그거 몇 달 준다고 해서 청년들 체감하는 거 아니고 공장이나 이런 데 가는 사람만 주기 때문에 공장에 가기 싫어해서. 기재부에서도 그런 돈을 그렇게 많이 써야 하냐, 그런 여러 가지 한계가 많아요."
고용노동부의 청년고용 정책이 가짓수는 많은데 실효성에 한계가 있다는 장관의 설명. 솔직하긴 하다.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김 장관이 쉬었음 청년에 관한 데이터를 제대로 보긴 했는지 의문이 든다. 정부와 유관기관에서 발표한 자료라도 다시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김 장관을 위해 다음과 같이 요약도 제공하겠다.
<2023년 11월 기재부가 발표한 '쉬었음' 청년 실태조사>
· 2023년 1~10월에 쉬었음 청년은 41만 명에 달했다. 2016년에는 쉬었음 청년이 26만9000명이었고, 그 이후 급증하다 2020년 코로나 시기에 정점(44만8000명)을 찍고 다소 감소하다가 2023년에 다시 증가로 전환했다.
· 쉬었음 청년의 학력은 고졸 이하가 61.8%였고, 직장 경험이 있는 경우가 74.6%였다.
· 이 실태조사에서는 쉬었음 청년을 취준-적극형, 취준-소극형, 이직-적극형, 이직-소극형의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단계별 대응 방안을 제시했다. 2022년 통계에서 가장 많은 유형은 '이직-적극형'(57%)이었다.
· 이직-적극형 청년들은 "이전 직장보다 나은 조건·경력 등"을 위해 퇴직했고, 재취업 계획은 있지만 바로 진입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다.
· 쉬었음 청년 증가의 장기적·구조적 원인은 노동시장 미스매치, 기업들의 수시·경력 채용 경향, 전반적인 이직 증가 등이다. 단기적 원인으로는 코로나 시기 확대되었던 간호, 배달 일자리의 축소와 그리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던 청년들의 ‘쉬었음’ 유입이 있다.
▲2022년 청년 쉬었음 유형별 비중 – 기재부의 분류에 따르면 '이직-적극형'이 57%, '이직-소극형'이 21%를 차지했다.
<2024년 12월 2일 한국은행, 청년층 쉬었음 인구 증가의 배경과 평가>
· 최근 나타난 쉬었음 증가는 첫 일자리를 구하는 청년층이 아니라 취업 경험이 있는 청년층이 주도했다.
· 최근 1년간 증가한 청년층 '쉬었음' 인구 중 자발적 사유로 쉬게 된 노동자는 28%였고 비자발적 사유가 72%를 차지했다. 비자발적 사유의 청년 '쉬었음'이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
· 비자발적 쉬었음 청년은 주로 중소기업(300인 미만), 대면서비스업에 근무했다. 도소매, 숙박음식업 같은 대면서비스업뿐 아니라 정보통신, 전문과학기술 등 IT 관련 업종에서도 청년층의 비자발적 쉬었음이 늘어나고 있었다.
· 청년층 고용의 질은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있으며, 비자발적 이직에 의한 노동시장 이탈은 "고용의 질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일자리에서 주로 나타났"다.
· 또 비자발적 쉬었음으로 이동한 지 1년이 지나면 근로를 희망하는 비율이 50% 내외로 하락했다.
▲청년층 이직사유별 쉬었음 인구 – 2023년 4분기부터 최근까지 자발적 사유의 '쉬었음'도 증가했지만 비자발적 사유의 '쉬었음'이 더 가파르게 증가한 모습이 보인다. 출처: 한국은행 블로그
<2025년 3월 11일 발표, 한국고용정보원의 쉬었음 청년 실태조사+한국노동연구원의 수도권과 지역 간 청년 일자리 격차 조사>
· 1년 이상 쉬었음 상태를 경험한 청년들의 87.7%가 과거 근로소득 경험이 있었다. 이들의 마지막 일자리는 제조업(14.0%)과 숙박·음식업(12.1%) 등의 소기업(42.2%)에 집중되어 있었다.
· 장기 쉬었음 청년들의 마지막 일자리를 기업 규모별로 분류하면 '소기업/소상공인' 비중이 높았다. 평균 임금 수준은 200만 원 이상~300만 원 이하였고 근속기간 평균은 17.8개월이다(근속기간은 '6개월 미만'과 '1년~2년 미만'이 많음).
· 과거 일자리가 저임금·저숙련·불안정할수록, 일경험이 없을수록, 미취업 기간이 길어질수록 쉬었음에 머무는 비중이 높았다.
· 2018년 이후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청년 취업자 격차 비율은 2020년 31.7%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정보통신 전문가 및 기술직 취업자 수에서 지역 격차가 크다.
▲장기 '쉬었음' 청년의 마지막 일자리는 '소기업/소상공인' 비중이 높다(42.2%). 출처: 고용노동부 보도자료(2025.03.11)
이 자료들을 종합해서 그림을 그려보자. 현재 쉬었음 청년의 절반 이상은 고졸 이하 학력이고, 70% 이상은 직장 경험이 있는 상태에서 쉬었음으로 전환했다. 최근에는 자발적 쉬었음보다 비자발적 쉬었음이 더 많이 늘고 있는데, 비자발적 쉬었음 청년 중 다수는 대면서비스 업종의 소규모 사업체에 종사했다.
그런데 정부 정책은 직장 경험이 있는 청년보다는 대학교 졸업예정자(연 55만 명)와 직업계고 청년(8만명)의 노동시장 진입을 지원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인턴이든 뭐든 일단 청년들이 노동시장에 들어가게 만든다. 올해 '졸업생' 대상 예산 175억 원이 새로 배정되긴 했지만, 노동시장에 진입했다가 이탈한 청년들을 위한 정책은 기존의 도약장려금과 국민내일배움카드 외에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는다. 통계상 쉬었음 청년의 전형인 '제조업이나 숙박음식점업에서 평균 17.8개월 일하다가 쉬었음이 된 청년'은 정책의 우선순위가 아니다.
우리 사회와 언론이 만드는 쉬었음 청년의 이미지는 일정한 조건을 갖추고 대기업 입사를 준비 중인 청년들이다. 김문수 장관의 머릿속에도 "국세청에 소득 신고 한 번 해본 적 없는 졸업생들"이 있다. 제조업에 관해서는 청년들이 "공장에 가기 싫어해서"라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나 통계 수치는 고졸 청년들과 비수도권 제조업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아져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가 던지는 질문도 더 다양해져야 한다. 고졸 청년들이 소규모 제조업체에 갔다가 안착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도권 청년들이 대면서비스업 일자리를 구했다가 그만두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조업과 서비스업, 정보통신업 가리지 않고 비자발적 실직이 늘고 30대 경력직끼리도 구직 경쟁이 붙는 심각한 상황인데 과거와 똑같은 해법으로 대응이 가능할까?
담당 공무원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정부가 시행 중인 청년 취업 관련된 정책을 다 모아놓으면 가짓수가 정말 많다. 빈 일자리 지원금 같은 정책은 당장 현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기재부가 이것도 아까워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매칭 서비스, 심리상담 같은 나열식 청년 정책은 한계가 있다. 기업의 경력직 채용에 대응해서 모든 청년에게 인턴 방식으로 '일 경험'을 시켜준다 해도 그 청년들 사이에 다시 경쟁이 붙는다.
정부는 '한국형 일자리 보장제'를 내놓으면서 EU의 '청년 일자리 보장제(Youth Job Guarantee)'를 참조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EU의 일자리 정책에는 일자리의 '질'이라는 개념도 포함된다. EU에서는 미래 사회 원칙으로 '더 많은, 더 나은 일자리(more and better jobs)'라는 고용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고용의 안정성, 임금 충분, 작업환경 안전, 안전망(4대보험 제도화)과 노동권의 4가지를 갖추면 어떤 일자리든 좋은 일자리가 된다는 개념이다. 일자리의 양을 늘리기 위해 EU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2030년까지 20~64세 인구의 80% 이상이 고용되도록 한다는 목표도 세워놓았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일자리의 질과 양을 모두 중시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ILO에서 정한 '괜찮은 일자리'의 요건도 비슷하다. 적정 소득, 고용 안정성, 일터의 안전. 한국 청년들에게도 이처럼 '좋은 일자리' 또는 '괜찮은 일자리'를 찾을 기회가 지금보다 많이 주어져야 한다. 청년들이 오래 다닐 수 있는 일자리라면 모두에게 좋은 일자리일 것이다.
한국은행은 "청년층 고용의 질이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비단 청년층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양질의 일자리 부족, 단시간 노동의 증가, 미스매치… 다 같은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현장 노동자들이 문제 제기하는 부분을 잘 들여다보면서 일자리의 질을 챙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직장 갑질과 임금체불, 최저임금법 위반, 하청노동자의 무권리 상태, 가짜 3.3 고용과 교육생 임금 착취 같은 문제들은 노동시장 전반을 짓누르는 동시에 청년들의 이탈에 일조한다. 김문수 장관이 정치적 발언은 줄이고 이런 현안들에 더 관심을 가지기를 권한다.
안진이 더삶 대표 | 프레시안 2025.03.31.
물 마른 산이 타고 정 마른 세상이 탄다
물 마른 산이 탔다. 정(情) 마른 세상도 함께 타오르고 있다. 놀랍게도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산불 피해 지역에 성금을 보내는 대신 저주를 퍼붓는 일도 있다. 지극히 일부의 돌출 행동이지만, 상대 진영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적대와 증오를 퍼붓는 정 마른 세상이 섬뜩하다.
기껏 정이라니. 지금도 정 때문에 아픈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사로운 정 때문에 공적인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합리적 판단을 그르치는 ‘한국인의 정이 너무 싫다’는 얘기도 있다. 정은 합리성을 해치고 냉철한 이성을 마비시키는 몹쓸 것으로 취급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왜 정인가. 인공지능 개발에 몰두해 디지털화된 세계야말로 인류가 필사적으로 정을 찾아야만 하는 존재 조건이기 때문이다. 파란 당과 빨간 당, 좌우,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 이대녀와 이대남,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관세를 때리고 보복하는 진영으로 극(極)화된 세계다. 이렇게 갈라진 세상에 합리적인 이성, 첨단의 기술, 안정적인 제도 등이 모두 필요하지만, 특히 정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10가지 이유 때문이다.
땅에 묻힌 가스와 석유와 우라늄, 바다의 조수와 물결, 하늘의 바람, 먼 우주에서 들어오는 태양열이 모두 에너지다. 운 좋게도 인류는 이 다양한 에너지를 하나의 에너지로 바꾸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전기 에너지다. 다양한 에너지를 바꾸는 기술과 도구를 가진 인류는 전기를 범용 에너지로 만들었다. 사이버 세상도 전기를 바탕으로 창조했다. 그렇지만 인간은 전기를 먹지 않는다. 인간은 물리적 에너지를 섭취해 심리적 에너지로 바꾼다. 그 심리적 에너지가 정이다.
첫째로 정은 범용 에너지다. 돈이나 권력은 희소성 때문에 가진 자에게 강력한 에너지가 되지만, 정은 대부분의 인간이 가지고 있다. 인지상정이다. 둘째로 관계를 타고 흐른다. 증오, 분노, 혐오, 적대는 서로를 밀어내지만, 정은 서로를 당기는 힘이다. 셋째로 강하다. 돈 때문에 정이 끊기고, 권력에 정이 눌리기도 하지만, 인간은 서로를 끌어당겨 집단을 이루며 진화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 넷째로 다양하다. 혈연적인 모정, 자매애, 형제애, 친구의 우정, 연인의 연정,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동료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동지애, 이웃과 시민 사이의 우정, 인류 서로를 향한 박애 등으로 정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다섯째로 복합물이다. 인간이 물질에서 양분을 얻어 생물로서 신체 에너지를 만들고 이를 정서적 에너지로 바꾸어 서로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적 에너지를 만든다. 복합적으로 구성된 에너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여섯째로 확장된다. 서로에 대한 끌림으로 뭉쳐 생존해온 진화적 차원, 크고 작은 다양한 집단을 만드는 에너지가 되는 사회적 차원, 시민 모두의 존엄과 권리를 위한 법제도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것이 정이다. 일곱째로 순환한다. 다정한 사람이 다정한 사회를 만들고, 다정한 사회가 다정한 시민을 만든다. 그래서 개인들 사이의 ‘사정’(私情)과 공적인 ‘공정’(公情)은 순환한다. 여덟째로 계급적이다. 대체로 교양, 품격,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권력과 돈을 비롯한 자원을 가진 사람들이다. 격정적이어서 투박하고 연민과 온정에 이끌리다가 가슴에 품은 정을 동료애와 동지애로 바꾸어 단결한 시민은 권리를 확장했다. 아홉째로 사랑과 친하다. 도파민이 솟는 뜨거운 사랑과 옥시토신이 작동하는 오래가는 사랑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 정이다. 특수 관계에 작동하는 정서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것이 사랑이라면, 그보다 더 넓게 작용하는 에너지가 정이다. 마지막으로 정이 억압되는 이유를 알 때, 다정한 사회로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다.
왜 정떨어질까. 불평등을 비롯한 ‘누적된 갈등’도 있지만, 왜 지금 세계는 유난히 ‘갈등의 극화’로 치달을까. 돈과 권력을 둘러싼 경쟁에 디지털화가 추가되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이끌린 대통령과 혐오를 유포시키는 극단주의 운동을 넘어서고 싶은 인류는 세계 곳곳에서 오감을 통한 상호작용을 통해 정이 솟고 흐르던 세계에 스마트폰이 들어오면서 어떻게 오감의 작용이 억압되는지 고민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인류가 품은 범용 에너지로서 정을 재발견하고 풍성하게 흐르게 하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인류에게 ‘그놈의 정’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
조건준 | 아무나유니온 대표 | 한겨레 2025.04.01.
‘한국판 러스트 벨트’ 위험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공장’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를 지나며 기업들이 중국 등 인건비가 싼 나라로 공장을 옮기기 시작했고, 제조업 부문의 일자리는 점차 사라졌다. ‘러스트 벨트’는 한때 제조업으로 번성했으나 산업이 쇠퇴하면서 경기 침체와 인구 감소로 공동화된 지역을 가리킨다. 오하이오·미시간·펜실베이니아·인디애나주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의 부통령 제이디 밴스는 오하이오주 미들타운이라는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 가정에서 자라며 겪은 일을 쓴 책 ‘힐빌리의 노래’로 명성을 얻으면서 정치인으로서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러스트 벨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 기반이기도 하다. 제조업 쇠락을 방치하던 미국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제조업 재활성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전쟁’을 벌이는 것도 미국의 제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는 다른 나라에 러스트 벨트를 ‘수출’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난달 25일 현대자동차그룹은 2028년까지 미국에 총 210억달러(약 31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 내 자동차 생산량을 현재 연간 70만대에서 120만대까지 확대하는 한편, 루이지애나주에 자동차 강판을 만드는 전기로 제철소를 건설할 계획이다. 미국이 자동차와 철강제품에 부과하는 25%의 관세를 피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미국 내 생산량이 늘어나는 만큼 국내 생산량과 관련 일자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관세 압박이 한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중국산 제품의 공세가 있다. 미국 투자 계획을 밝힌 바로 이틀 뒤인 지난달 27일 현대제철은 4월 한달간 인천공장의 철근 제품 생산라인을 운영 중단한다고 밝혔다. 중국발 공급과잉 등으로 수익성이 악화한 탓이다. 포스코도 지난해 7월 포항제철소 1제강공장 가동을 중단한 데 이어 11월에는 1선재공장의 문을 닫았다. 석유화학 기업들도 구조조정 위기에 몰려 있다. 이근 중앙대 석학교수(경제학)는 이를 두고 각각 ‘미국발 공동화’, ‘중국발 공동화’라고 표현한다.
제조업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그리고 “제조업처럼 평범한 수많은 사람을 균등한 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는 산업은 없다”(양승훈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 한국 경제에 닥친 이중의 공동화 위험을 극복하고 러스트 벨트를 ‘수입’하지 않기 위한 고민과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선희 논설위원 shan@hani.co.kr | 한겨레 2025.04.02.
극우의 도전과 그 공범자들, '회색 민주주의자'와 '위로부터의 극우화’
민주주의안의 극우와 마주하여 ③
1. 문제-민주주의의 위기와 붕괴의 주범은 극우 세력이다. 극우적 체제반대 세력이 출현하고 득세함으로써 민주주의는 위기에 빠지고 최악의 경우 붕괴한다. 하지만 우리는 극우세력 단독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보수 세력과 손잡고 동맹을 맺는지, 이를 통해 민주주의 체제의 위기와 붕괴에 치명적 역할을 하는지에 주목하고 있다(이병천 2025).
로버트 팩스턴(R. Paxton 2005)은 파시즘을 중심으로 파시스트와 보수세력의 동맹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보다 넓게 파시즘과 포스트파시즘 시기를 아울러 극우세력과 보수 세력의 동맹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는지를 탐구한 연구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스티브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2018, 2024)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이 글은 이들이 수행한 연구의 기여와 열려 있는 토론지점들, 새로운 공부 과제에 대해 살펴 보려 한다.
2. '회색의 절반 민주주의자' - 민주주의 붕괴의 공범자
스티븐 레비츠키는 루칸 웨이(Lucan A. Way)와 함께 [경쟁적 권위주의-냉전이후의 혼합체제](2010)라는 책을 쓴, 한참 떠오르는 학자다. 이후에는 지블랫과 함께 민주주의 붕괴 문제에 관한 후안 린츠의 연구를 비롯하여 기존 연구들을 이어 받아 그 성과를 우리에게 솜씨있게 전달해 준다. 그러면서 새로운 기여를 더하고 있다(레비츠키& 지블랫 2018, 2024). 여기서는 2024년 저작을 중심으로 이들의 논의를 살펴 보고자 한다.
일찍이 후안 린츠(Juan Linz 1978)는 민주주의 붕괴에 관한 선구적 연구에서 민주주의의 충성도 원칙 ('리트머스 테스트') 그리고 민주주의 암살자인 '반체제적 반대자'(disloyal oppositions)와 별도로 그 공범자에 해당하는 '절반충직 반대자'(semi-loyal oppositions) 범주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이들은 말하자면 양면적인 '회색 분자'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이 린츠의 혁신적 연구를 소환하면서 더욱 진전시킨다. 이들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잠재적 독재자를 감별하는 네가지 주요 신호를 개발한 데 이어,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 린츠가 민주주의 충성도 '리트머스 테스트라고 부른 원칙을 세가지로 명확히 재정식화하였다. 그 세가지란 다음과 같다(63).
첫째,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패배 결과를 받아들이며 다시 승리할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권력을 평화적으로 넘겨 주는 공적 규범을 지킨다. 둘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사쿠데타, 폭동의 조직화, 테러 등 각종 폭력을 사용하는 전략을 거부한다. 불충한 반체제 세력은 이 두 원칙을 무너뜨린다. 셋째,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반민주적 극단주의자와 단호하게 손을 끊는다. 다시 말해 그들과 명확하게 '거리두기'를 실행한다.
그러면 회색분자들의 경우는 어떤가.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린츠가 '절반충직 반대자'라고 명명한 세력을 '절반충직 민주주의자'(semi-loyal democrats)라고 바꾸어 부르고 있다. 회색 분자들에 대한 이름이 달라짐으로써 미묘한 의미변화가 일어난 듯한데 여하튼 이들은 민주주의 붕괴과정에서 노골적으로 존재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공범자로서 결정적 역할을 맡는다. 절반충직 민주주의자들의 본질적 속성은 양 다리 걸치기다. 한편으로 민주주의 질서안에 있으면서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경쟁을 벌린다. 하지만 다른 한편 여러가지 양다리 걸치기 행동으로 민주주의의 안정적 작동을 위한 세 원칙들을 무너뜨린다.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면서 동시에 폭력이나 반민주적 극단주의에 눈감고 나아가 그들과 협력한다. 이런 양면적 태도야말로 그들이 정말 위험한 이유다. 구체적으로 왜 그런가?
"뚜렷하게 독재적인 인물은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그들은 자신의 힘만으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한 여론의 지지나 정당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다. 그러나 절반충직 민주주의자가 그들과 협력할 때 노골적인 독재세력은 훨씬 더 위험해진다. 주류 정당이 전제적인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묵인하고 혹은 이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할 때 민주주의는 곤경에 빠진다. 그들은 독재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조력자가 된다. 실제로 역사에 걸쳐 독재주의자와 절반충직 민주주의자들 사이의 연합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비법으로 작용했다."(64. 원문에 따라 수정)
절반충직 민주주의자들은 극우 반민주 세력을 비호한다. 그럼으로써 극우세력들은 법적 처벌을 면하거나 공직에서 쫒겨날 위험에서 벗어난다. 나아가 절반의 민주주의자들은 극우세력들의 주장을 정당화한다. 이는 극우적 행동과 이념이 정상적인으로 것으로 인정받게 만든다. 주류 언론도 그들을 두둔하게 된다. 자신들과 관련된 세력이 폭력적이거나 반민주적 행동을 할 때 절반의 민주주의자들은 그것을 부인하거나 가볍게 여긴다.
이처럼 레비츠키와 지블랫에서 절반충직 민주주의자는 널리 활용되는 핵심적 개념 역할을 한다. 그런데 나아가 이들은 '권위주의의 평범성'(banality of authoritarianism) (번역본에는 '독재의 평범성'이라고 잘못 번역됨)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 개념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악의 평범성' 개념을 응용한 것으로서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주류 정당이 반민주적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암묵적으로 지지할 때 이는 반민주적인 행동에 따른 비용이 낮아졌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다. 그들에 대한 억제 효과가 사라진다. 절반충직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 세력을 정당화하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더 급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권위주의의 평범성이 의미하는 바다. 민주주의 붕괴를 주도하는 많은 정치인은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거나 더 높은 자리로 올라서려는 야심찬 경력지상주의자다. 그들은 심오한 원칙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에 무관심할 뿐이다. 결국 그들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붕괴에 반드시 필요한 조력자 역할을 맡게 된다."(76.원문에 따라 수정)
그러니까 레비츠키와 지블랫에 따르면 절반충직 민주주의자들이 반민주 세력과 공모하여 그들을 정당화하고 격려하고 심지어 더 급진화시키는 이유, 그럼으로써 헌법과 법률을 짓밟고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데 필수적인 조력자 역할을 하게 되는 이유는 어떤 고상한 정치적, 사회적 가치나 이념 때문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사익추구 욕망, 즉 자신들의 안위, 권력과 경력을 적나라하게 수호하고 증식시킬 목적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위주의의 평범성이란 다름아닌 이러한 의미다.
3. 미국의 의회폭동(2021.1.6)이 말하는 것 - 공화당이 트럼프 쿠데타의 공범자가 되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다양한 역사적 경험들과 그 교훈을 풍부하게 보여 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트럼프 집권 1기 말 의회 폭동(2021.1.6)에 관한 분석에 주목하게 된다(제4장, 135-193). 1.6 의회 폭동의 분석에서 이들은 앞서 본 바 충직한 민주주의자 행동의 세가지 기본원칙, 절반 충직 민주주의자, 권위주의의 평범성 등을 핵심 개념도구로 적절히 활용한다.
의회 폭동의 중심 행위자는 트럼프, 트럼프를 지지하는 시위대 그리고 절반충직 민주주의로서 공화당이다. 이 세가지 축이 미국판 극우-보수 삼각동맹을 구성한다. 현직 대통령이었던 트럼프는 선거패배에 대한 인정을 거부하였다. 이는 미국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다. 그는 부정선거('선거는 새빨간 거짓말' Big Lie)라고 주장하며 결과를 뒤짚기위한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
애초에는 비상계엄을 선포해 군대를 동원하고 의회를 장악하는 안도 나왔다. 그러나 이 카드는 기각되고, 공화당소속으로 상하원 합동회의 의장인 부통령(마이크 펜스)를 포섭하여 선거인단 투표결과를 조작하는 계획을 도모했다(펜스의 거절로 실패). 다른 한편 트럼프는 합동회의의 대선결과 추인을 막기 위한 시위대의 국회의사당 난입 폭동을 앞장서서 선동하였다.
그런데 레비츠키와 지블랫의 시선은 주로 공화당이 트럼프와 손잡고 어떻게 미국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는지로 향한다. 일부 공화당 의원은 처음부터 트럼프가 주도한 친위쿠데타 기획회의에 참여했다. 공화당 정치인 대부분이 선거후 몇 주동안 바이든의 승리에 대한 공식적 인정을 거부했다. 상하원합동회의를 앞두고 공화당의원의 과반수이상이 선거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많은 공화당 간부들이 선거 결과를 뒤집기위한 트럼프의 여러 시도에 직접 가담했다. 2021년 1월 6일 현재 공화당 하원의원의 2/3가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표를 던졌다. 뿐만 아니라 공화당은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는 원칙도 어겼다. 공화당 간부들은 의회폭동을 비난했으나, 많은 의원들이 의회폭동을 묵인할 뿐더러 정당화했다.
마지막으로 트럼프 탄핵소추안은 어떻게 되었는가. 공화당 의원은 하원에서 반대 197명 찬성 10명, 상원에서 반대 43명 찬성 7명이었다. 공화당의원의 압도적 다수가 트럼프 탄핵안에 반대하였으며 찬성표를 던진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17명에 불과했다. 탄핵소추안은 하원에서 통과되었으나 상원에서 부결되었다. 상원의 전체 표결결과는 찬성 57표, 반대 43표였는데 파면에 필요한 67표에 10표가 부족했다. 즉, 공화당이 트럼프에 동조자가 되어 탄핵안을 부결시킨 것이다.
레비츠키와 지블렛은 이 과정에서 특히 공화당 지도자들이 절반충직 민주주의자로 행동하면서 '권위주의의 평범성' 개념의 완벽한 사례를 보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4. 결론 - 국가기관안의 동조자들 그리고 위로부터의 극우화
이상에서 살펴본 레비츠키와 지블렛의 연구는 12.3 계엄이후 극우주의의 도발과 민주주의 위기에 직면한 한국 상황을 분석할 때도 크게 유용하다. 이들이 개발한 민주주의 행동의 세가지 기본원칙, 절반충직 민주주의자, 권위주의의 평범성, 극우와 보수의 동맹 등의 개념 도구에 도움을 받아 우리는 한국판 극우주의, 극우와 보수의 동맹이 보여주는 일반성과 특수성을 찾아내는 작업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연구에 대한 비판적 보완이 꼭 필요하다. 여기서는 두가지 논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국가기관안 동조자들의 문제다. 이들의 연구에서는 극우세력과 손잡은 보수세력에 대해 논할 때 주로 정당과 의회, 국회의원의 역할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제도정치권에서 잠재적 독재자를 걸러내야 할 일차적 책임 즉 그들의 말대로 '정당의 문지기(gatekeeper) 역할'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충분히 의미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국가기관안의 동조자들에 대한 분석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중대한 공백으로 보인다. 예컨대 트럼프는 의회폭동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연방최고재판부는 면책 특권을 인정했는데, 레비츠키와 지블렛은 그것이 갖는 중대한 의미을 분석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다.
한국판 극우-보수 동맹의 경우를 보자면 정당으로서 국민의 힘만이 문제는 아니다.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렸음에도 진보적 재판관 후보(마은혁) 임명을 거부하고 명백히 재판에 개입해 사실상 윤석열 복귀의 길을 돕고 있는 대통령 권한대행(한덕수와 이전의 최상목), 내란범으로 구속기소되었던 윤석열을 구속취소시켜 풀어준 검찰총장(심우정)과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 재판장(지귀연), 그리고 윤석열 탄핵심판선고를 이유없이 지연시켰을 뿐더러 한덕수에 대해 '위헌은 했으나 파면에 이를 만큼 중대하지는 않다'고 선고한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등, 행정부와 사법부, 검찰과 경찰, 군대 그리고 헌재를 포함해 국가기관안에 넓고 깊게 포진하고 있는 명시적, 묵시적 동조자들의 존재가 윤석열의 '1차 내란'이후 '2차 내란' 국면을 조성하고 있다고 할만큼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한국의 국가기관안 동조자들중에는 레비츠키와 지블렛이 말한 양면적인 '절반충직 민주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이를 능가하는 친극우주의자, 내란동조자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한국 사례가 독특하게 보여주는 다양한 기득권 동조자들, 탄핵에 반대하는 이들, 나아가 비상계엄조차도 옹호하는 이들의 '2차 내란'을 염두에 둔다면 기존 연구에서 제시한 'semi-loyal 민주주의자나 'semi-loyal 반대자' 범주와 별도로 'semi-disloyal 친극우주의자' 라는 범주가 필요해 보인다. 이는 단지 양면적이 아니라 친극우 성향으로 기울어진 자들을 분별해 내기 위해서다.
둘째, 극우주의의 유형화와 '위로부터의 극우화'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우리가 볼 때 한국의 내란에서 국가기관안의 각종 동조자들의 갖는 각별한 중요성은 한국판 극우주의의 유형적 특질과 관련된 문제일 수 있다. 윤석열은 제도정치권 신인이지만 골수 검찰출신으로사상적으로 철저히 냉전적 반공⋅반북⋅혐중주의로 무장한 인물이다. 거기에 저돌적이고 전방위적인 신자유주의 사상이 중첩되어 있다. 그렇게 시대착오적인 인물이 최고권력자로 올라 국가기관안 요직에 충성스런 하수인들을 심어 놓고 정적과 다수 요인들의 대량 '수거'와 천인공노할 학살을 계획한 12.3 비상계엄을 단행하고 영구집권을 꿈꾼 것이다.
일찍이 일본의 저명한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97)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파시즘(독일처럼 새로운 민간 대중조직인 파쇼정당이 주체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는 형태)과 위로부터의 파시즘(일본처럼 기존의 지배기구 내부로부터의 파시즘화)을 구분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 파시즘은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파시즘 '혁명'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대중적 조직을 가진 파시즘운동이 외부로부터 국가기구를 점거한다는 것과 같은 형태는 끝까지 한번도 볼 수 없었다는 것, 오히려 군부, 관료, 정당 등 기존의 정치세력이 국가기구의 내부에서 점차 파쇼체제를 성숙시켜 갔다는 것, 그것이 일본 파시즘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커다란 특색입니다."(110)
마루야마는 파시즘유형의 이같은 분기가 해당 사회 '민주주의의 강도'에 규정된다고 보고 있다(121). 파시즘의 국가적 유형에 관한 이 통찰에 도움받아 우리는 윤석열이 주도한 한국판 극우반동을 본질적으로 '위로부터의 극우화' 성격을 지닌다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치적 반동은 대안 우파라기보다는 냉전반공 극우주의와 매우 강력한 연속성을 갖는 퇴폐적 반동이다. 그런 속성을 가지면서 아래로부터 전개되고 있는 극우적 사회운동과 손잡고서 한국판 극우주의 삼각 동맹을 연출해 낸 것이다(그림 참고). 극우 사회운동으로부터 제도권 극우권력이 튀어 나온 것은 전혀 아니다.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이후 헌재의 탄핵심판 선고 지연으로 국민들이 '헌재가 윤석열 복귀의 공범자가 되려는가'라고 묻게 된 오늘의 한국 상황과 관련하여 이 글에서 제기한 논점은 충분히 토론해 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헌재의 시간이다. 국민들의 인내와 헌재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시점에서야 마침내 4월 4일로 선고일이 결정되었다.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 111일만에, 헌재의 변론 절차 종료 38일 만에 진행되는 선고다.
희대의 범죄자일 뿐더러 자신의 죄악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둘러대는 새빨간 거짓말쟁이윤석열의 죄는 명명백백하다. 윤석열의 파면은 주권자가 내리는 명령이자 민주공화국 헌법의 명령이다. 헌재는 반드시 이 명령을 받들어야 하며 그렇게 할 것으로 기대한다. 만에 하나 헌재가 이 명령을 어긴다면 이후의 사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 | 프레시안 2025.04.03.
이제, 사회대개혁이다!
드디어 한국 민주공화제의 역사적 순간이 왔다. 야당 주도의 국회를 반국가세력으로 몰아세우며 정치적 중립을 존립 기반으로 하는 국군을 동원해 헌정 파괴를 시도한 대통령을 파면하는 신성한 의식이 남았다.
이 헌법적 의식의 성공이 민주공화국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의식의 주관자인 재판관들이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면 헌정 위기를 헌법재판을 통해 극복하는 한국 민주공화제의 회복력을 확인하는 소중한 역사가 이어질 것이다. 만일, 상상하기조차 힘든 가정이지만, 헌법적 소명을 저버린 일부 재판관들이 삿된 법기술을 부려 몽상적 권력자가 권력의 자리에 복귀한다면 주권자 국민의 직접행동으로 그를 단죄함으로써 민주공화제를 회복해야 하는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할 것이다.
세계가 주목하는 민주 선도국으로 발전해온 그동안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볼 때 시대착오적인 쿠데타 시도를 온몸으로 막아낸 국민과 그 대표기관인 국회와 더불어 헌재가 헌법 수호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낼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도, 너무도 뜬금없고 명명백백한 국헌문란을 국민 계몽용이라고 강변하는 부적격자를 파면하는 데 무려 122일이나 걸린 것이 아쉽기는 하다. ‘흠결민주국’으로 전락시켜 ‘완전민주국’의 국격과 사회적 자본을 상실한 피해를 어떻게 보전할지 걱정이다. 그러나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원칙과 상식을 거스르는 궤변과 선동으로 헌법적 정의를 지연시킨 탓에 민주화의 성취감에 젖어 놓치고 있었던 우리 사회의 여러 민낯을 확인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자.
무엇보다 모두가 공존·공생·공영하기 위한 기본 약속인 헌법을 막무가내로 무시하고 모독하는 정치 세력이나 공직자들이 우리 사회에 단단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그들이 소환하는 국민의 뜻이 민주공화국의 모든 국민이 아니라 내 편만을 모은 그들만의 뜻이고, 법치가 모두에게 평등한 법치가 아니라 그들의 권력 유지에만 복무하는 선별적 법치일 뿐임이 드러났다.
대통령의 위헌적 계엄 선포에 대해 공동책임을 져야 할 여당인 국민의힘은 반성은커녕 의회민주주의와 사법 정의를 부정하는 폭동을 옹호하는 반헌법적 세력의 눈치 보기에 바쁘다.
내란 방조 혐의에도 불구하고 친위쿠데타의 속성상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리를 맡은 한덕수 국무총리와 최상목 부총리가 보여준 위헌적 행태는 내란의 뿌리가 되는 구조적 배경을 생생히 증명한다. 최고위층 관료 출신들이 헌재의 위헌 결정마저 무시하고 국회 선출 재판관의 임명을 거부해 헌법재판에 구조적 장애를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상설특검의 임명을 거부하는 직무유기와 법률안 거부권의 무차별적 남발 등 헌법 부정을 다반사로 하는 나쁜 선례를 남기고 있다.
사법 정의를 부인하고 권력 오남용을 일삼은 내란죄 피고인의 구속취소를 수용한 검찰은 이전부터 헌법 무시를 서슴지 않는 대통령의 손발이 되어온 죄과만으로도 그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한 지 오래다. 내란 사태를 정쟁화하는 정치 세력과 공직자는 물론 헌법파괴자의 추종자들에게 민주화의 성취물인 표현의 자유를 역설적으로 남용해 공론장을 오염시킬 기회를 제공한 일부 언론 또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제 헌법파괴자 대통령에 대한 파면만으로 민주 헌정이 온전히 회복될 수 없고 그 너머 사회대개혁이 요청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헌법파괴자들이 명분으로 내세운 자유민주주의가 그들만의 자유와 독재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실체가 명백히 드러났으므로 주권자 국민이 주도하는 진정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한 대개혁의 필요성이 확인된 셈이다.
헌법 무시와 모독을 근간으로 하는 내란 사태를 통해 그동안 1987년 헌법의 문제점만 내세우고 그 성취는 소홀히 하는 근시안적 개헌론의 실체 또한 드러났다. 내란 시도를 실패한 쿠데타로 만든 것이 현행 헌법의 저력임을 잊지 말자. 내란의 뿌리가 민주화의 일상을 체화한 일반 시민들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른바 ‘상층엘리트’들의 문화적 지체에 있음 또한 기억하자. 사회대개혁의 시대적 과제가 백가쟁명의 원심력으로 휘발되지 않고 질서 있는 선택과 집중의 구심력으로 작동될 수 있도록 지혜를 발휘하자. 탄핵을 넘어, 대의민주제의 한계를 딛고, 주권자 국민이 주도하는 사회대개혁의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경향 2025.04.03.
이게 다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지난 3월 말 경북 산불로 의성군 고운사의 주변 숲이 잿더미로 변했다. 새카맣게 탄 소나무들 사이로 간혹 누런 몸통을 지킨 활엽수도 보였다. 사진 남종영
애초 ‘높이 뜬 구름’(高雲)이라는 뜻이던 경북 의성 고운사는 신라 말 ‘외로운 구름’(孤雲)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산속에 고고하게 파묻힌 예쁜 절은 지난 3월 말 경북 북부를 덮친 산불에 무너졌다.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머물며 지었다는 가우루와 우화루는 소실되어 깨진 범종만 잿더미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불이 난 지 나흘이 넘었는데, 잔불에서 연기가 솟아올랐다. 소방대원이 다가가 물을 뿌렸다.
모두가 기후변화 때문이다. 고장 난 아마존 열대우림, 해수면 상승과 식량 위기, 내전으로 나라를 떠나는 난민들 그리고 이번 경북·경남 산불로 세상을 떠난 30명과 불에 탄 예쁜 절…. 그런데, 이게 다 기후변화 때문인가?
2010년대 시리아 내전을 두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기후변화와 관련한 가뭄이 시리아 내전의 초기 불안을 부채질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아랍의 봄과 기후변화를 직접 연결하는 분석이 퍼지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의 밀 흉작으로 세계 곡물 가격이 상승했고, 이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튀니지, 이집트, 시리아 등지의 시위 촉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별 사건과 기후변화를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연결 짓는 것은 위험하다. 지도자의 폭정, 잘못된 정책 등 당사자의 책임을 가리기 때문이다. 기후변화가 사회·경제를 좌우한다는 환경결정론은 ‘빅히스토리’의 장에서만 가능하다. 기원전 200년부터 400년 사이 온난한 기후로 로마제국이 번영을 구가했다는 것이나 중세 온난기(약 950~1250년)에 바이킹이 그린란드에 정착했다는 분석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백년 단위의 빅히스토리의 세상에서 살지 않는다. 각각의 정치·경제·환경의 장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산다.
‘이게 다 기후변화 때문이야’ 하는 관습적 생각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는 경우도 있다. 이번 정부 들어 ‘기후대응 댐’ 9개를 만들겠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기존 국가물관리계획에서는 인구와 농업 수요 감소, 산업계 수요량을 고려하면 물 부족 가능성이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돼, 대형 댐 건설 정책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하지만 기후변화를 명분 삼아 정부·여당은 이전 정부의 ‘4대강 재자연화’ 정책에 관한 논란을 불 지펴 정치적 이득을 챙기고, ‘토건 세력’이라 불리는 관료와 건설업체는 놓았던 삽을 다시 들 기회가 생겼다.
기후변화와 이번 산불을 직선적인 인과관계로만 바라봐서도 안 된다. ‘기후변화로 산불이 늘어난다’는 명제는 산불을 진압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 헬기와 소방대원 그리고 임도를 늘리는 통제 중심의 대책이다. 작은 불씨도 제압하라, 물량을 동원해 산불을 진압하라 같은.
현장에서는 조금 다른 모습이 보였다. 고운사 숲의 소나무는 죄다 새카맣게 탔지만, 그나마 온전한 건 활엽수였다. 의성군 안평면의 산과 산 사이에는 어림잡아 폭이 2㎞ 되는 너른 들판과 강이 있었는데, 마주 보는 두 산의 정상부는 페인트를 칠한 듯 검게 탔지만, 그 사이의 들판과 강은 온전했다. 소나무 숲의 상단 불씨가 바람을 타고 산과 산을 건너다니며 산불을 퍼뜨린 게 틀림없었다.
기후환원적 사고는 과학적 복잡성을 축소하고 다른 사회적 요인을 간과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단순한 시각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신을 통해 구원받는 종교적 해법이 아닌 이상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단 하나의 해법은 없다. 기후변화로 환원되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소나무를 마녀로 삼아서도 안 된다. 역사학자 줄리아 토머스는 “현 상황은 하나의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 다면적인 곤경(multidimensional predicament)”이라고 말한다. 곤경은 문제와 달리 해결할 수 없다. 다양한 종류의 자원과 아이디어로 헤쳐 나갈 뿐이다.
고운사 우화루에는 150년 된 호랑이 벽화가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뒷걸음질 쳐도 내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는 신기한 호랑이였다. 호랑이 벽화를 보지 못해 나는 안타까웠다. 우리에게 그렇게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구적 기후변화를 보는 광각렌즈와 그것이 작동하는 사회·경제적 맥락을 보는 망원렌즈, 그 둘이 장착된 카메라처럼 말이다.
남종영 |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 한겨레 2025.04.03.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 투입, 어쩔 수 없다? 한반도까지 전쟁터로 만들려 하나
미국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당연하다는 <조선일보>의 위험천만한 주장
"미국이 자국군을 원하는 대로 운용하겠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세계 모든 나라가 그렇게 할 것이다. 트럼프 아닌 다른 대통령이라도 마찬가지다. 미·중 충돌 같은 중대한 군사적 실제 상황이 벌어지면, 미국은 한국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체 전략적 필요에 따라 해외 미군을 운용한다. 이것이 우리가 마주할 '엄연한 현실'이다."
4월 2일 자 <조선일보>가 '주한미군 역할 변경, 기정사실로 대비해야'라는 제하의 사설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미국이 대만 유사시 등 중국과의 분쟁에 주한미군을 투입하려고 해도 이를 현실로 받아들여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이 대목을 접하면서 20년 전 미국 국방부에서 만난 고위 관계자의 말이 떠올랐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둘러싸고 한미 간에 이견이 커지고 있던 때였다. 이 관계자는 "주한미군을 포함한 미국 군사력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는 미국 정부의 권한"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나는 "대만 분쟁에 주한미군을 투입하면 중국이 미국에 기지를 제공한 한국을 공격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이 관계자는 "당신의 우려를 알고 있다"며 말끝을 흐렸다.이처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은 '주권 사항'이라는 미국의 입장과 '원하지 않는 전쟁에 연루될 수 있다'는 한국의 우려가 팽팽하게 맞서 있는 문제이다. 그래서 2006년 1월에 나온 한미 간의 합의도 "한국은 (중략)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한다"와 "미국은 (중략)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병기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한국이 미국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자는 식이다. 그러면서 중국이 주한미군 기지를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며, "우리 정부와 군은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하지만 "자국군을 원하는 대로 운용하겠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가 결코 아니다. 제3자가 교전국에 자국의 영토·영해·영공을 제공하는 것은 국제법상 '중립 의무' 위반에 해당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03년 미영연합군이 개시한 이라크 전쟁 당시에 터키가 미군의 영토·영공 사용을 거부한 것도 국제법적 논란을 피하고 불필요한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또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그 하위법인 주한미군 주둔협정(SOFA)에 따라 한국이 무상으로 미국에 기지를 제공하고, 각종 편의와 더불어 막대한 방위비 부담금을 부담하고 있는 이유는 주한미군의 역할이 한국 방어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이 자국의 필요에 따라 주한미군을 해외 분쟁, 특히 한국 안보에 사활적인 영향을 미칠 대만 분쟁에 투입하는 문제는 최소한 한국 정부의 동의나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이런 방향으로 한국의 힘과 지혜를 모아도 부족할 판에, <조선일보>는 미국의 입장을 전적으로 두둔하고 있다. 이 매체는 미국의 확장억제를 믿을 수 없다며 핵무장이나 잠재적 핵능력 확보를 주장할 때에는 '핵 주권'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논할 때에는 '영토 주권'마저 도외시한다.
이처럼 <조선일보>가 무리한 주장을 펴는 데에는 조기 대선이 실시될 경우 유력한 후보인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를 겨냥한 측면도 있다. 앞서 인용한 사설에서도 "유력 대선 후보가 "대만해협이 어떻게 되든, 중국과 대만 국내 문제가 어떻게 되든 우리가 뭔 상관 있나"라고 말할 만큼 정치인들이 국제 정치에 무지한 탓도 있다"고 비난한 것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해준다.
물론 이 대표의 발언은 대만 유사시를 '바다 건너 불 구경'하듯이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받을 소지가 크다. 동시에 이 발언은 '우리가 양안 분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앞뒤 맥락을 싹둑 자르고 자신이 원하는 발언만 부각시켰다. 하지만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의 투입을 허용할 것인가의 질문은 정파를 초월하는 '실존적 문제'에 해당한다. 윤석열 대통령조차도 우회적으로 난색을 표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 지난해 3월 20일 경기도 연천군에서 실시된 한미연합 제병협동 도하훈련에서 육군 K1E1 전차가 한미 장병이 설치한 부교를 건너고 있다. 이번 훈련에는 육군 5공병여단과 5기갑여단, 미2사단/한미연합사단 장병이 참가했다. ⓒ연합뉴스
<달라진 김정은, 돌아온 트럼프>에서 한국이 주한미군 감축을 두려워해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는 것이 '가능한 최악'에 해당된다며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쓴 바 있다.
"악화 일로인 한중 관계는 파탄을 면치 못하고, 북중·북중러의 결속을 야기할 것이며, 한국이 동아시아 신냉전의 최전선으로 내몰릴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도 대만해협 등에서 미중 무력 충돌 시 한국이 원하지 않는 전쟁에 휘말릴 위험이 매우 높아진다. 미국이 주한미군이나 역외 군사력을 한국에 전개해 대만 전쟁에 투입하면 중국도 보복에 나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이 주한미군 기지에 보복 공격을 가하면 우리 영토를 공격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한중 간의 무력 충돌로 비화될 위험도 크다. 한국만 충돌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다. 조선은 대만 문제와 관련해 중국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고,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에는 자동 개입 조항까지 있다. 또한 핵과 미사일 능력을 강화해왔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도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대만 전쟁 시 조선의 선택도 전쟁 양상에 중대 변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북중 조약을 고려할 때, 사태 전개에 따라서는 러시아의 개입까지도 배제할 수 없다. 자칫 '동맹의 체인'에 엮여 몽유병자처럼 전쟁으로 빠져들어간 1차 세계대전과 유사한 상황이 동아시아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 프레시안 2025.04.03.
대한민국의 밑바닥 드러낸 넉 달
마침내 끝이다. 화석화한 개념인 계엄이 현실의 괴물로 실체화한 지 무려 넉 달 만이다. 코앞에 탄핵심판 선고를 두고 논쟁이나 예상은 더는 의미 없다. 차라리 복기(復棋)의 시간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국가시스템 전반에 이 정도로 구멍이 많을 줄 몰랐다. 우리가 디디고 선 바닥은 단단한 땅이 아니라 싱크홀을 가린 한 겹 종잇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선진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은 착각에 바탕한 허세였다.
우리의 민주공화국 정체는 대통령의 잘못된 판단 하나로 뒤집힐 수 있을 만큼 취약한 것이었다. 판단과 집행이 워낙 어수룩했기 망정이지 꼼짝없이 계엄하의 질식 상태에 놓일 뻔했다. 대통령의 자의적 권력행사를 제어할 인적 제도적 장치도 없었다. 군에는 부당명령에 대응하는 매뉴얼이 없었고, 정상 지휘체계를 벗어난 비선(秘線)문화도 방치돼 있었다. 국가안보에 이보다 치명적인 해악요소는 없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국가위기에서도 정치는 늘 그랬듯 문제의 해결자가 아니라 갈등의 증폭자 역할만 했다. 여야 할 것 없는 정상배들은 주군의 의중만 살피며 레밍 떼처럼 몰려다녔다. 한쪽은 위헌행위에 대한 무조건적 옹호, 다른 쪽은 대선 일정 단축과 사법 리스크 털기가 유일한 정치행위였다. 국가와 국민, 법과 정의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공천제를 포함한 선거제도 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한 바뀌지 않을 풍경이다.
이 틈을 유튜브가 비집고 들었다. 훈련받은 대규모 취재인력을 보유한 전통 미디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보의 신뢰성과 책임감이 떨어지는 유튜버들이 대중을 자극하고 정국을 파국으로 몰았다. 전통 언론은 이념진영으로 갈린들 정보의 취사선택, 가중치 판단이나 해석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없는 사실을 창조해내거나 A를 B로 바꾸는 짓은 못한다. 유튜브 세계엔 그런 제약이 없다. 적절한 규제방안 없이는 줄곧 국가갈등의 진원으로 작동할 것이다.
더 충격적인 건 국가가 최종판단의 신성한 책임을 맡긴 사법기관마저 일부 구성원들의 자질과 인식이 때론 시정의 필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깨달음이다. 논리적으로 불가해인 이재명 판결 뒤집기가 그랬고, 일관되게 오직 법리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헌법재판소도 그랬다. 법원 헌재 모두 사법적 정치기관으로 인상 지워지면서 법 절차 때마다 정파성을 의심할 만한 독단적 해석이 사실과 상식을 덮었다.
헌재로 좁혀 부연하자면 재판관들이 정치와 여론에서 독립적이었으면 이 단순한 법리심리를 변론종결 후 한 달 넘게 끌 이유가 없었다. 마냥 지체되면서 위헌판단이 진영 간 힘겨루기 게임으로 변질됐다. 유튜버들의 발호, 광적인 진영 간 대립을 이 지경으로 증폭시킨 책임은 상당부분 그들에게 있다. 지체된 정의는 과연 불의만큼이나 위험한 것이었다. 권위를 잃은 재판관 구성과 선임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충 짚어도 문제가 이 정도다. 절망적인 건 이런 구멍들을 메울 중재·양보·타협 같은 충전재가 우리 사회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탄핵사태로 인해 이런 환부들을 새삼 환기하게 된 걸 도리어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몇 시간 뒤 어디에선 “정의의 승리” 따위 환호가 터질 것이다. 하지만 이 난장판 탄핵게임에선 정의도 승자도 없다. 엉망인 국가시스템의 공동 운영자, 혹은 방관자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패자들만 남았다.
당장 대선 판이 열리는 마당에 별로 귀 기울일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흥분과 분노가 가라앉으면 이런 문제들을 중요한 대선공약으로 고심하기 바란다. 그래야 지난 넉 달의 고통이 그나마도 값할 것 아니겠나.
이준희 고문 junlee@hankookilbo.com 0403
명심해라. 윤석열과 화해를 주선하는 자, 그가 바로 배신자다"
용서도 구하지 않는 자에게 용서라니
윤석열이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당연한 일이지만, 중공군이 일어나 대한민국을 침공하거나 간첩떼가 나타나 국가기관을 공격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윤석열은 아마 곧 내란 수괴 혐의로 다시 구속될 것이고 무기징역 이상의 형을 받게 될 것이다.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했는데, 실패한 쿠데타를 처벌하지 못하면 이 나라의 시스템은 존재할 의미가 없다.
영화 <대부>의 명대사가 있다. "명심해라. 누구든 화해를 주선하는 자, 그가 바로 배신자다.(원래 'Listen, whoever comes to you with this Barzini meeting, he's the traitor'라는 대사인데, 패밀리의 적인 바지니와의 '미팅'을 피하라는 의미다. 스토리의 맥락을 제거하고 보편적 표현으로 윤색하면 이렇다.)"
슬슬 '화해'니, '용서'니 하는 소리들이 나온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성낙인의 <한국일보> 2일자 칼럼 제목은 "국민들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하자" 였다. 성낙인은 윤석열의 불법 위헌적 내란 사태와 야당의 "30번의 탄핵소추 발의, 10번의 탄핵심판 기각, 국무총리 해임 건의"와 같은 적법적 의정활동을 등치시키며 "국가를 나락으로 내몬 정치인들은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고 일갈한다. 그리고 "더 이상 국론분열은 안 된다. 국민들도 갈라치기를 일삼는 SNS에 현혹되지 말고, 이제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하고 아량을 베풀자. 대통합의 신기원이 전개될 수 있도록 위대한 대한민국을 위해 다 같이 기도하자"고 말한다.
하해는 강과 바다를 말한다. 하지만 "백성은 물, 임금은 배니,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 있다."(군주민수, 君舟民水) 성낙인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지금 '백성'은 용서와 화해의 '하해'가 아니라, 시커먼 심연으로 배를 집어 삼키는 '하해'다. 윤석열은 대한민국을 공격하고 유린했다. 법의 단죄도 받기 전인데 베풀 아량이 어디에 있겠는가.
독립기구 국가인권위원장 직책을 맡고 있는 안창호는 뜬금없이 성명을 내고 "이번 선고를 계기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의 구조적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며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를 화해와 통합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안창호는 내란 수괴 혐의자와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자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해 온 사람이다. 그는 과거에 이런 주장도 했다.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 없다고 생각한다. 진화론과 창조론은 과학적 근거보다는 믿음의 문제다. 학교에서 둘을 같이 가르치면 좋겠다", "동성애는 공산주의 혁명의 중요한, 핵심적 수단이다'라는 말도 있다." 지구의 나이를 6000살로 추정할 수 있고, 레즈비언과 게이들이 국가 전복을 기도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존중한다는 사람의 주장을 우리가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있는지부터 의문이다.
'액팅 프레지던트' 한덕수는 "제주 4.3 정신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화합과 상생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며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다시 일어선 4.3의 숨결로 대한민국을 하나로 모으자"고 말했다. 현재 진행형인 내란에 대한 단죄의 '단'자도 이뤄지지 않았는데 '용서'를 말하는 것이 4.3정신이라고 한다면 그건 정신 나간 일이다. 대통령 놀이에 지나치게 몰입한 것 같아 걱정이다.
전두환의 내란도 아직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나라가 이 나라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그를 사면했지만 그는 자신이 저지른 내란과 살인에 대해 단 한번도 반성하지 않은 채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내란 수괴 전두환 아들 전재국은 '윤석열 탄핵을 반대하는 교수 모임' 토론회에서 탄핵 반대 집회 참석자들을 '의병'에 빗대고 "피를 흘릴 각오가 우리는 과연 돼 있을까"라고 말했다. 전두환이 급조한 6개월 짜리 군복무를 마친 전재국이 '피를 흘릴 각오' 운운하는 것도 가소로운 일이지만, 내란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결과가 이런 식이란 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어 준다. 고맙다고 해야 할까.
화해가 가능하려면 가해자의 처절한 자기 반성과 진정어린 사죄, 그리고 피해자의 회복이 전제돼야 한다. 윤석열은 탄핵 결정이 난 후 입장문에서 '개사과' 조차도 하지 않았다. 윤석열은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너무나 안타깝고 죄송하다"고 했는데, 이건 김용현이 내란 실패 후에 했다는 말, '중과부적'(衆寡不敵, 수가 적으니 맞설 수 없다)의 의미에 가까워 보인다. 내란 성공의 '기대'를 저버린 데 대한 반성인가? 사회, 경제, 외교를 망치고 시민을 충격에 몰아넣은 것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다.
용서와 화해의 첫째 요건은 윤석열과 그 공범들에 대한 단죄다. 둘째 요건은 그들이 진정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셋째 요건은 윤석열과 그 공범들의 쿠데타로 인해 물적,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의 시급한 일상 회복이다. 어느 것도 전제된 게 없다. 이런 상황에서 화해와 용서를 강요하는 건 선량한 사람들의 양심 속 모종의 죄책감을 자극해보려는 고약한 심보다. '용서 안하면 나쁜놈' 프레임을 작동시키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나치 정권의 범죄와 법적 책임에 대해 다룬 책 <과거의 죄>에서 "범죄자가 용서를 구하는 데 다른 사람이 중재하고 간청할 수는 있지만 대신 용서를 구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한다면, 성낙인이나 안창호, 한덕수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용서받기 위한 태도를 먼저 보여야 한다고 일갈해야 맞다. 윤석열이라는 범죄자는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헌법 기관을 무시하고 국가 기관을 비난하며 지지자들의 폭력을 선동하고 부추겨 왔다. 내란 수괴가 용서를 구하고 있지 않은데 무슨 화해와 용서가 가능할 것인가. 저들은 이제 '화해'와 '용서'라는 아름다운 언어마저 도둑질 해가고 있다. 제발, 스탑 더 스틸!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5.04.05.
윤석열 정권에 대한 한 지식인의 '저항 일기'
칠순 은퇴교수는 왜 책을 덮고 거리로 나와야 했는가
1. 지식인의 시대적 책무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탄 때 ‘절명시(絶命詩)’를 쓰고 순국한 황현 선생은 나라가 망해가던 당시에 지식인 노릇하기가 어렵다고 자탄하였다. 평소에 독서를 하며 진리를 찾고 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사도(師道)의 길은 보람 있는 일이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는 강단을 지켜야 하는가 민주광장으로 나가야 하는가 고민을 하게 된다. 근래만 하더라도 1987년 박종철 이한열 두 열사의 희생으로 촉발된 6.10민주화운동과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촛불항쟁 때에도 지식인·종교인들이 학생 시민들과 함께 거리로 나서지 않았던가.
윤석열은 대통령 자리에 있으면서 탄핵 소추를 당하고, 구속 기소되어 구치소에 수감됐다. 그가 검찰독재로 폭정을 저지르고 나라의 평화와 국민 생명을 돌보지 않고 몰상식한 정치행태를 보이자, 민심은 이반하고 집권한 지 반 년도 안되어 ‘윤석열 퇴진, 김건희 구속’이라는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다.
2018년 대학 강단에서 은퇴한 나는 그동안 읽지 못한 동서양 고전을 읽고 손녀들을 돌보며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윤 정권의 무도한 정치행태와 민주주의의 후퇴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다시 책을 덮고 ‘자락서실(自樂書室)’을 나와 시민들과 함께 거리에 섰다.
이 글은 윤석열이 당선된 2022년 3월 9일부터 헌법재판소가 전원일치의 파면을 선고를 한 2025년 4월 4일까지 나의 윤 정권에 대한 대응과 개인적 저항의 기록이다.
2. 시민언론과 시민교육 활동
깨인 시민의 조직된 힘이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는 말은 옳다. 작년 말 12.3 비상계엄을 저지하고 탄핵을 이끌어낸 결정적 요인은 촛불시민들의 끈질긴 투쟁과 응원봉 세대들을 비롯한 범민주세력의 적극적이고 용기있는 비상행동이었다.
2022년 3월 9일 20대 대통령선거에서 윤석열이 0.73%p 간발의 차로 이기는 선거개표방송을 보고 나는 절망했다. 나라를 이끌 만한 능력이나 준비도 없이 보수세력과 편파 언론의 일방적인 지원으로 당선된 윤석열은 민의와 국민통합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검찰 충견을 동원해 국가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조짐을 보였다. 이러한 현실을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개표가 끝나 윤석열의 당선이 확정된 3월 10일 오전 사전 예약도 하지 않고 무조건 김포공항에 가서 가장 빨리 출발하는 제주행 비행기표를 사서 서울 집을 떠났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제주의 서귀포 시내에 숙소를 정하고 섶섬이 보이는 바닷가로 가서 파도 소리를 듣고 올레길과 숲길을 걸으며 3박 4일을 지내고 귀경했다.
집에 돌아오는 날부터 그자가 나오는 뉴스를 볼 수 없어 TV를 끄고 지내며, 진실을 알리는 시민언론운동과 정의로운 시민을 일깨우는 시민교육활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3월 15일에 국악방송의 ‘문화시대 김경란입니다’ 프로에 나가 졸저 《시민을 위한 한문강의》을 가지고 대담을 하고, 다음날인 3월 16일에는 여의샛강 생태교실에서 한 강의를 바탕으로 집필한 《생태위기 시대에 노자읽기》를 가지고는 원불교의 원음방송에 나가 오경석 PD와 인터뷰를 했다. 3월 21일에는 한겨레 신문의 조현 기자와 《생태위기 시대에 노자읽기》와 《논어》에 대해 5시간의 걸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 내용은 한겨레신문 ‘휴심정’(2022.3.24.일자)에 실렸고, 유튜브 조현TV에도 보도되었다.
이런 언론활동 외에 여의샛강 생태공원 샛숲학교 교장을 맡아 ‘노자생태교실’ ‘장자의 소요유와 제물론 읽기’를 지속적으로 진행하면서, 4월 17일에는 청주 길동무도서관 초청으로 ‘인문학’ 강의를 하였다.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20대 대통령 취임날에는 박노해 시인의 <역사의 무대에서>라는 시구처럼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말자’고 다짐을 하면서, 뜻있는 분들과 만남을 확대해나갔다. 성공회 최자웅 신부, 감리교신학대 박충구 교수, 정종훈 연세대 교수, 김근수 소장을 비롯한 민주진보진영의 뜻있는 지식인 종교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 이러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만남이 윤석열 퇴진을 위해 결성된 ‘민주사회를 위한 지식인 종교인 네트워크’ 결성의 밑거름이 되었다.
3. 파리의 여름휴가 뒤 본격적인 퇴진집회 참가
윤석열 취임 후 TV를 보지 않고 시민교육과 사회활동을 하면서 지내면서도 그 자와 함께 이 좁은 한반도 남쪽에서 함께 지낸다는 게 참으로 답답해서 여름방학이 빨리 와 파리에 가기만을 기다렸다. 두 딸이 살고 있는 프랑스에 가서 손녀들과 지내며 이 남루한 윤건희 정권의 난정(亂政)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2022년 6월 2일 파리에 가서 9월 1일에 귀국했으니 거의 세 달을 프랑스에서 지낸 셈이다. 파리에 있는 동안 손녀들의 등하교를 도와주고 돌아오면서 보주광장과 빅토르 위고 박물관을 비롯한 박물관과 미술관을 수시로 들르며 프랑스의 문화를 향유했다. 손녀들의 방학이 시작되었을 때는 동계올림픽이 열린 알프스 알베르빌 산맥에서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 프랑스 휴가 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좀 잘 나가는 큰 딸이 아빠의 70세 고희 선물로 런던 토트넘 구장에서 열린 손흥민 게임 직관 티켓 선물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2008~2009년 1년 동안 런던대학 SOAS 객원교수로 지내던 런던에 가서 며칠 지낼 수 있었다. 그때 레셀 스퀘어가든 부근의 SOAS 캠퍼스를 오랜만에 들렀는데 대학 건물은 그대로였으나 여름방학 중이라 도서관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3박 4일의 런던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와 귀국선물을 준비하러 파리시청 옆 베아슈베 백화점에 들렀더니 프랑스 국기색인 파랑 빨강 하양 색깔의 스카프를 50%에 세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를 사려다가 몇 개를 더 샀다. 9월 1일 귀국하면 반드시 윤석열 퇴진 집회가 열릴 터인데, 그때 ‘네 게바라’가 이 스카프를 함께 매고 피켓을 들면 폼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네 개를 산 것이다. ‘네 게바라’는 평소에 페이스북을 통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명하던 박충구 감신대 명예교수, 정종훈 연세대 교수,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 소장,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사람을 장난삼아 부르던 명칭인데, 자주 쓰다 보니 형식이 내용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9월 1일에 귀국했더니 윤석열의 몰상식한 국정운영은 점점 파행으로 치달아, 민주시민들이 또다시 거리에서 피켓과 촛불을 들고 있었다. 귀국한 뒤에 파리에서 사 온 머플러와 체 게바라가 파이프를 물고 머리에 썼던 것과 비슷한 검은 베레모를 동지들에게 나누어 드렸다. 우리 ‘네 게바라’가 촛불행동 집회에 참가한 것은 추석을 지난 뒤 열린 2022년 9월 17일(토) 오후 5시 청계천 광장에서 열린 제6차 촛불행동 집회에서부터였고, 피켓구호는 ‘윤석열 퇴진, 김건희 특검’이었다.
4. 주말 촛불집회 참석과 시국논평, 월례포럼 운영
매 주말 시청 앞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태평로에서 윤정권 퇴진 집회를 하고 페이스북과 카톡에 우리의 주장과 시위 사진을 올리자 뜻있는 은퇴 교수들과 목사님, 신부님들이 호응해왔다. 이명재 원로출판인, 조성민 교수 내외분, 김창규 유정현 두 분 목사님이 합류해주셨고, 12월 26일 연말모임에서 이 모임을 정례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면서 나는 지난 대선패배 원인의 하나가 기울어진 언론지형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새로운 시민언론인 뉴탐사와 민들레 창간과 운영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뉴탐사의 강진구, 최영민 기자의 ‘나깨좋’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나중에는(2023.2.26.) 시민의 올바른 역사의식과 교양함양을 위해 뉴탐사 시민학당을 개설하여 교장을 맡아 10개의 강좌를 운영했다. 뉴탐사와 자매관계인 인터넷 시민언론 ‘민들레’ 창간에도 강기석 고문, 이명재 대표와 함께 발기위원으로 참여하여 <명령의 과잉과 압수 수색 전성시대>(2022.12.16.)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하는 이유>(2023.1.6.> 등의 칼럼을 민들레 광장에 기고했다.
그러던 중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 사고예방임무를 소홀히 하여 159분이 숨지는 비극이 일어난 뒤 희생자를 애도하고 촛불행동 시 ‘유가족 대기 천막’에서 집회에 참석하는 이지한 군 어머님을 비롯한 유가족을 위로하는 일을 하면서 그 원인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이태원, 용산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다가 2023년 2월 18일 윤석열 타도를 위한 촛불전국집회 전 할리스카페에 모여서 시국담을 나누면서 ‘민주사회를 위한 지식인 종교인 네트워크’(약칭 ‘민사네’)를 결성하자고 합의를 하였다. 박충구 교수와 내가 공동대표를 맡고, 3월 1일 탑골공원 앞에서 열린 ‘검찰독재와 민생파탄, 전쟁위기를 막기 위한 비상시국회의’에 참석한 이만열 교수님(전 국사편찬위원장)을 뵙고 우리 민사네의 원로 고문으로 모셨다.
이후 민사네는 윤석열 정권의 횡포가 점점 심해지는 것을 논리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우리 지식인 그룹이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해 시국 논평을 발표하고, 우리 사회의 중요 이슈를 심층적으로 논의하는 월례포럼을 개최하여 공론을 모으는 작업을 했다. 2023년 9월부터 박충구 공동대표의 <시대착오적인 윤석열 정권,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와 나의 졸고 <홍범도 장군에 대한 역사 쿠데타를 멈추라>를 시작으로 매주 시국논평이 발표되어 총 31번을 이어갔고, 같은 달 9월 16일 시작한 월례포럼은 조성민 교수의 <인권이 존중받는 정의로운 사회를 향하여>라는 발제를 시작으로 올해 3월 한동수 변호사의 <검찰개혁>에 이르기까지 17차례나 진행되었다.
5. 지속적 퇴진운동과 12.3 비상계엄, 내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이라고 하지만 대통령제 하에서의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하고,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의 3권이 독자적으로 분립되도록 되어 있지만 사실상의 국정운영은 대통령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윤 정권의 폭정을 보고 절실하게 깨달았다. 검찰총장 재직 시에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수사와 기소를 하면서 정적과 밉보인 사람을 탄압하고 제거하는 데 익숙한 검찰독재자 윤석열은 국민의 여론이나 야당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하고 무속인과 처의 말을 따르며 과대망상에 가까운 언행을 계속해와 국회의원 총선에서 국민들의 호된 심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않고 모든 문제를 힘으로 밀어붙이는 독재자 스타일을 고집하여,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들을 수십 차례 거부하며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철저히 무시하더니 지난해 말 어처구니없는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셀프쿠데타를 일으켜 자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2년 반 동안 매 주말 윤석열 퇴진과 김건희 특검을 외치며 거리에 나선 촛불시민들도 사실 이렇게 끈질기게 싸우는데도 오불관언의 태도로 폭주하는 윤석열에 대해 좀 지치기도 하고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신부님이 표현한 대로 ‘지랄발광’답게 21세기 문명국가 대한민국에서 모든 정치활동과 언론 출판 집회를 금지하고,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장악한 뒤 국회의원을 끌어내어 정치적 반대자들과 함께 구금하여 영구독재를 획책한 비상계엄/내란을 일으켰다.
1972년 박정희의 유신독재체제를 겪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광주민주시민을 무차별 학살한 전두환 살인마의 반생명적 반인륜적 파렴치한 행태를 쓰라리게 경험한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나는 평생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하면서도 마음속 깊이 늘 부끄러움이 남아 있었다. 1980년 전두환 독재자에 대해 항거하다 숨진 광주 민중들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역사의 고비 때마다 나를 일깨웠다. 나는 1972년 군 복무중 감시하에 실시된 유신헌법 찬반투표에서 부끄럽게도 내 양심에 반하여 찬성표를 던졌고, 1980년 광주민중들이 전두환 계엄군에 저항하다가 피를 흘렸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으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항상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 1987년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친 6.10민주화운동 당시에 내가 35살 조교수의 신분으로 시국성명서에 서명을 하고, 7년 전 박근혜 국정농단세력 축출을 위한 탄핵 촛불집회에 참여한 뒤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령 선포 소식을 듣고 국회 앞으로 달려간 것은 다 이런 부끄러움 때문이 아닌가 한다.
6. 12월 3일 밤 국회 앞 상황과 남태령, 한남동 대첩
지난해 12월 3일 저녁 ‘지랄발광’ 윤석열이 전쟁이나 국가 혼란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반대하는 여야당 지도자와 국회의장, 국회의원을 종북 좌파세력으로 몰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느닷없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실제로 무장한 공수특전단 부대원을 국회 본관과 선관위에 투입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계엄이 선포된 그 날 오후 나는 광화문의 안병무도서관에서 ‘난세에 맹자 읽기’ 강의를 하고 좀 지쳐서 10시쯤 침대에 누워 페이스북을 하다가 잠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거실에서 뜨개질을 하며 강진구 기자의 뉴탐사 유튜브 방송을 시청하던 아내가 뛰어 들어와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유튜브 생중계로 시민들에게 빨리 국회로 와달라고 호소하는 방송을 한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생각하고, 해병대 출전태세완비 5분 대기조 출신답게 후다닥 점퍼를 입고 집회용 등산화를 신고 장갑을 끼고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국회 앞으로 갔다. 국회 정문 앞에는 국회경비대와 국회의원, 시민들과 경찰들이 엉켜있었고 계엄군을 실은 육군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국회 정문을 향해 서 있었다. 나는 목동 집에서 국회로 가는 택시 안에서 아내에게 “나는 올해 73세로 이제 살 만큼 살았고, 1980년에 숨진 광주 민중들에게 빚이 있다.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있다, 이번에는 죽음을 각오한다, 당신은 남아서 뒷일을 수습하고 아이들을 잘 돌보시오”라는 말을 하였다.
나는 그때 계엄군을 태운 육군차량의 국회진입을 막기 위해 민주 시민들과 함께 차량 앞에 주저앉자고 하면서 ‘계엄을 해제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연좌시위를 하였다. 시민들이 점차 늘어나 국회 앞 도로를 메웠고,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굉음을 내며 국회 뒤쪽으로 날아갔다. 성난 시민들은 국회 정문 왼쪽 문 앞에서 국회에 들어가려는 국회의원과 직원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밀치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승강이를 하면서 연신 ‘계엄 해제! 윤석열 탄핵!’을 외쳤다. 그러던 중에 유튜브 생방송으로 국회 본회의장에서 우원식 의장이 계엄 해제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만세를 불렀다. 긴장되어 있어서 시간이 몇 시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고, 연신 구호와 노래를 불렀다. 시민들이 점차 늘어나 국회 앞 도로를 거의 메우고 있었다. 그 뒤 탄핵 가결을 촉구하기 위한 국회 앞 집회부터 어처구니없는 계엄선포와 계엄군 난입사태를 본 응원봉 세대들이 여의도 광장에서, 남태령, 한남동, 헌법재판소 부근도로,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해 거대한 민주화의 물결을 이루어 ‘빛의 혁명’을 시작했다.
7. 헌재의 심판 연기와 만장일치 파면 선고
그런데 온 국민과 전 세계가 TV와 유튜브 생중계로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아무런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계엄군을 입법기관인 국회와 헌법기관인 선거관리위원회에 투입하고, 정치적 반대세력을 수거해 제거하려는 국가내란과 헌정질서 파괴 행위에 대한 파면인용 선고는 명약관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윤석열을 옹호하는 파시즘 세력의 준동과 법비(法匪)들의 교활한 법적용으로 내란수괴범 윤가가 어처구니없게도 ‘법적 탈옥’을 하게 되자, 금방 이루어질 줄 알았던 헌법재판소의 파면 인용은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서울서부지법에 극우 유튜버와 폭도들이 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우리나라 헌정질서가 무너질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당연한 헌재 파면선고가 하루 하루 늦어지자 민주시민들은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가 점차 분노가 한덕수,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과 헌법재판소를 향했다.
낙관하던 민주당 지도부도 긴장하며 대응책을 마련했고 분노한 시민들은 2년 반 동안 윤석열 정권 퇴진을 주도해온 촛불행동뿐만 아니라 이번 내란을 사회대개혁의 계기로 삼으려는 민주노총, 참여연대, 환경 여성운동 등의 여러 단체들이 특색 있는 깃발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긴장은 고조되고 윤석열의 신속 파면을 요구하는 시위대는 점점 대규모로 늘어났다. 주말에만 하던 시위가 매일 벌어지고, 국내외에서 파면촉구 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응원하기 위해 선결제를 한 제주귤, 오뎅, 커피, 꽈배기 등을 나눠주는 부스와 푸드트럭이 곳곳에 설치되는 훈훈한 민주공동체 분위를 조성했다. 촛불행동은 헌법재판소 부근도로와 열린송현광장에서 집회를 하고 사회대개혁을 위한 비상행동은 광화문에서 집회를 한 뒤, 깃발을 휘날리며 시가행진을 하였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집회에는 스타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각계 각층의 시민들과 청년,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러한 긴장된 국면은 윤정권의 사냥개 역할을 하던 정치검찰로부터 수 백가지의 기소를 당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선거법 위반에 대한 항소심 무죄가 나온 뒤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고, 이제 시민들뿐만 아니라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한 각 시민종교 단체도 다시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우리 민사네 회원들도 나이가 들었지만 젊은이들과 끝까지 연대하여 남태령, 한남동에서부터 안국동 광화문에 이르는 조속한 파면촉구 시위에 참여해서 드디어 2025년 4월 4일 헌재의 전원일치 파면을 이끌어냈다. 어제 헌법재판소 문형배 재판관의 ‘피청구인 윤석열을 파면한다!’라는 선고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다시 되살리고 헌법질서를 재확인한 역사적인 판결이 될 것이다.
1970년 대학에 입학하여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경험한 나에게는 헌재의 파면선고가 있은 2025년 4월 4일이 1987년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빼앗긴 국민주권을 6.10 민주화운동으로 되찾고, 7년 전 박근혜 국정농단 세력을 몰아낸 이후, 시민들, 젊은 여성을 주축으로 한 청년들과 함께 검찰독재 및 내란 세력 윤석열을 쫓아낸 결코 잊을 수 없는 날로 기억될 것 같다. 이번 윤석열 검찰독재정권에 함께한 모든 시민, 동지들께 감사드린다.
김영 인하대 명예교수, 민사네 공동대표 | 시민언론 민들레 2025.04.05.
어떤 대한민국이 돼야 하는가-윤석열 파면에 부쳐
4월 1일의 단상
2025년 4월 1일 오전이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윤석열) 탄핵 사건’ 선고기일이 4월 4일 오전 11시로 통지되었다. 이 소식은 SNS를 타고 쏜살처럼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팽팽한 긴장감을 느낀다. 이 결정이 이후 대한민국 수십 년의 미래를 크게 가를 것임을 국민 대부분이 직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용이냐 기각이냐. 어떤 쪽이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흑과 백처럼 너무나 다를 것이다. 어떤 대한민국인가.
돌아보면 12.3 비상계엄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뒤이은 내란 선동과 폭력과 증오의 광기 역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 사회 어디에 이렇듯 어둡고 맹목적이며 폭력적인 힘이 또아리 틀고 있었던 것일까. 그 힘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떤 선고가 나오든 희비가 격렬하게 교차할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한없는 늑장에 짜증도 났지만 한편 동정도 간다. 부담이 과중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결정은 헌재 재판관들의 심리적 압박 문제를 훨씬 넘어선 대한민국의 미래 몇십 년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차대한 문제다. 과연 어떤 결정일까. 차분해지고 싶다. 이럴 때의 명상법은 시뮬레이션이다.
먼저 헌재가 기각이나 각하 결정을 한다고 생각해 본다. 지난 3월 27~28일의 갤럽 여론조사는 탄핵 찬성 60% 탄핵 반대 35%였다. 12.3 직후의 탄핵 찬성 70%, 반대 30%에 다시 근접하고 있다. 지금껏 탄핵 반대 여론은 다수는커녕 그 가까이 간 적도 없다. 헌재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기각 결정을 내린다면, 소위 ‘소수의 독재’에 공공연히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소수의 독재(tyranny of minority)’는 최근 하버드대의 정치학자 레비츠키와 지블렛이 쓴 책 제목이다(한글 번역,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국제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에서 특히 많이 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 책은 주로 미국 이야기인데, 한국과 아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의 ‘소수의 독재’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번 탄핵 심판 과정에서 흑을 백으로, 때린 놈이 맞은 놈으로, 내란수괴가 내란 피해자로 180도 뒤집혀지는 놀라운 ‘법 기술’ ‘정치 기술’을 질리도록 감상했다. 그 대단한 기술자들은 대통령 자신을 비롯한 법조 엘리트, 언론 엘리트, 행정 엘리트, 정치 엘리트들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소수의 독재’란 이렇듯 철면피하고 비열한 기술이 항상 완승을 거두는, 극도로 타락한(corrupt) 정치체제를 말한다. 궤변이 그렇게까지 황당할 수 있을까.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 공부 제일 잘 한다는 학생들에게 한국 교육이 가르쳤던 것이 고작 이 수준이었던가.
그리하여 국민과 국회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댔던 윤석열이 다시 대통령 자리로 돌아온다. 여기에 대한 분노는 과연 어떤 것일까. 어느 만큼일까. 예측하고 계량하기 어렵다. 힘과 돈과 이익에 종속되지 않는, 계산을 넘어선 어떤 근원에서 솟아나는 힘이기 때문이다. 두렵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고통스럽고 깊은 역사에서 우러나오는 이 나라 온 산의 소나무 등걸, 풀뿌리와 같은 힘이다. 어느 보수 인사가 이야기했다지만, 그 분노의 힘은 전광훈 손현보 극우 집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87년 6월과 같은 전국 항쟁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보다 더 크고 두텁고 깊을 것이다. 당시엔 학생들이 이끌었지만, 이젠 원숙한 세대가 분노한다. 그 힘은 가늠하기 어렵다. 2016~2017년의 촛불혁명은 서울 중심이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이번 항쟁은 더욱 전국적이고 격렬할 것이다. 21세기 들어 한국에서 들어 올렸던 지난 모든 촛불들이 모두 싱크로 하여 짐작하기 어려운 무엇이 솟아오를 것이다.
여기에 윤석열은 어떻게 대응할까? 12.3 계엄만 아니라 임기 전체의 행태를 통해 우리는 윤석열이 전두환보다 더욱 무모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대통령으로 복귀한 그는 어떤 반발이 있더라도 결코 스스로 하야하지 않을 것이다. 87년 6월 전두환처럼 한발 물러서지도 않을 것이다. 반드시 제2의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이다. 헌재 결정을 거부하는 ‘반국가세력’ ‘반헌법세력’의 내란 사태 때문에 제2의 비상계엄 선포가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떠들어 댈 것이다. 1차 계엄령의 허술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더욱 치밀한 작전을 펼칠 것이다. 국회 봉쇄, 정적 체포와 제거를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려고 할 것이다. 불복종을 선언하는 군경이 속출할 것이다. 극우세력이 민간 백골단을 자처하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이 격렬한 유혈의 내전 상태로 빠져든다. ‘보수원로’ 조갑제 씨가 우려했다는, ‘시리아(Syria) 10년 내전’에 빠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주 심각한 파국이 될 것임은 정확히 짚었다. 조옹의 ‘10년 내전’론은 아마 의도적 과장일 것이다. 시리아와 한국은 내외의 상황이 퍽 다르다. 길어도 한두달 안에 판이 갈릴 것이다. 피가 더 많이 흐른 4.19가 될 것이다.
인용 결정이 나오면 어떻게 될까. 순리(順理)인 만큼 예상이 쉽다. 며칠 일부의 반발이 있겠지만 축하와 안도의 국민적 무드에 묻히고 만다. 박근혜 탄핵 인용 이후 친박 세력의 반발보다 크고 길겠지만 결정 수용의 큰 흐름 속에 묻히고 마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민의힘은 재빠르게 대선 국면으로 이동하려 할 것이다. 그토록 요란했던 탄핵 반대 내란 선동 에너지의 8할은 결국 국민의힘을 따라 대선용으로 전환될 것이다. 그 8할이 원래가 그런 성격의 여론이었다. 힘과 돈과 이익에 종속된, 당구공처럼 치는 대로 움직이는, 피동적 숫자, 양(量), 동원 대상일 뿐이다. 일부 골수 냉전 극우행동대의 저항은 조금 더 길게 이어지겠지만 폭력 행동은 그들을 더욱 고립시킬 뿐이다. 대선 일정이 확정되고 정치 일정이 대선에 맞춰짐에 따라 이들 세력의 힘은 현저히 약화된다. 그 역시 대선의 흐름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렇다고 상황이 종료되는 것은 아니다. 남은 과제가 오히려 크다. 여기서부터가 진정한 문제 풀이의 시작이다. 먼저 지난 몇 달 격렬한 내란 소동이 만들어낸 파시즘적 야만을 반드시 정화시켜야 한다. 엉망이 된 나라를 반드시 다시 나라답게 만들어야 한다. 큰 숙제다. 더하여 그 파시즘적 야만의 뿌리와 성격을 밝혀보아야 한다. 그래야 대선 국면, 그 이후의 정국 전개, 그리고 최소한 10년을 잘 볼 수 있다. 이 나라가 다시 높게 오를 수 있다.
2. 어떤 대한민국인가
4월 4일 11시 22분. 헌재에서 윤석열 파면 선고가 났다. 순리다. 안도한다. 이로써 대한민국을 이끌 주도권이 과거의 힘에서 미래의 힘으로 넘어갔다는 느낌이다. 큰 판이 갈렸다.
지금껏 박정희(공화당), 전두환(민정당)에서부터 그를 이은 한나라당 그리고 현재 국민의힘까지 온 세력의 존재 근거, 집권 근거는 경제와 안보는 그래도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었다. 이쪽을 ‘보수’고 ‘주류’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제 윤석열 정권에 이르러서는 경제도 안보도 도저히 이쪽에 맡길 수가 없다는 깨달음이 왔다. 누가 봐도 명백했다. 중도층의 중심이 크게 이동했다. 주류라고 하면 국민 전체를 이끌고 통합할 수 있는 넓은 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박정희에서부터 박근혜까지 보수세력이라 했을 때 나름대로 국민통합의 메시지와 레퍼토리가 있었다. 윤석열 정권은 그게 없었다. 시종일관 통합이 아닌 독선과 배제로 일관했다.
그 배제의 끝판이 12.3 비상계엄이었다. 원내 근 2/3를 차지하는 야당과 그 지지세력을 싸잡아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요 ‘자유민주주의 체제전복 세력’, ‘종북 반국가세력’이라고 막말로 치고 나왔다(비상계엄 선포문). 야당만 우습게 본 게 아니었다.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세워준 여당도 평소 아주 우습게 보았음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억지스럽게 당대표를 번번히 갈아치우고 당을 개인 입맛대로 군기 잡고 줄 세우려 했다. 검찰에서 그렇게 배웠나? 계엄군의 엉뚱했던 선관위 출동은 그가 선거까지도 제 맘대로 하고 싶어 했음을 보여줬다.
결국 그에게는 정당도 선거도 우스웠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정말 우습게 보고 있었던 것은 바로 윤석열이었다. 과거 군사통치 시대의 군부 엘리트들의 멘탈이 그랬던 것처럼, 검찰 엘리트 윤석열도 그 멘탈을 그대로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12.3이야말로 움직일 수 없는 ‘스모킹 건’이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스톱시키고 싶었다. 이 게임으로는 안 된다,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난 일종의 항복선언으로 읽었다.
그러면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그가 12.3으로 현실화시키려 했던 비상계엄 체제, 군사통치 체제, 언론통제 체제는 그가 또한 늘 입에 달고 살았던 (언어 자체부터가 이상했지만) ‘공산 전체주의 체제’의 이미지와 아주 꼭 닮아 있다. 그렇다면 누가 정말 ‘종북(從北)’을 했던 것일까? 임기 초부터 그의 언어가 늘 흥미로웠던 것은, 정적을 매장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그 극렬했던 저주와 낙인찍기 언어들이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면 대부분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이 바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려 했던 자기 자신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불행했던 것은 윤석열의 특이한 인식 지체 현상이다. 정적을 반체제세력, 빨갱이, 친북, 좌파로 낙인찍어 매장시키는 수법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의 악취 나는 구시대 수법일 뿐이다. 그때는 냉전의 극성기였다. 그래서 심한 독재를 하더라도 안보와 경제만 잘 지켜준다면, 이를 눈감아주겠다는 국민층이 상당히 존재했다. 독재가 예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북한 독재나 남한 독재나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은 당시 누구나 다 했다. 북한 독재에 안 먹히려면 남한도 독재할 수 있다, 아니 더 심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독버섯처럼 자라던 어두운 시절이다. 그런 부끄러운 시절의 옛날 수법을 2020년대에 들어와서도 꼭 같이 또 써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놀랍다.
게다가 안보와 경제까지 아주 엉망으로 말아먹었다. 중국과 러시아의 넓고 활발한 시장들을 섯부른 신냉전론의 하인 노릇이나 해보겠다고 닫아버리는 경제란 애초에 경제 논리와 전혀 무관한 것이었고, 세계시장에서 스스로 손발을 묶는 우둔함이었을 뿐이다. 안보는 비상계엄의 꺼리를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군사적 도발을 반복했다. 남북간의 군사적 충돌을 정략과 음모의 수단으로 써먹으려 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했다. 금도를 넘어도 너무나 심하게 넘었다. 그런 반복적인 도발에 넘어가 주지 않은 김정은이 고마울 정도다.
윤석열의 인식세계는 2020년대의 한국과 세계의 상황에 맞추어나가기에는 너무나 뒤처진 것이었다. 한국은 북이 독재이기 때문에 우리도 독재로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수준을 이미 한참 넘어서 있는 선진 국가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한국민은 최대로 잡아 30%다. 12.3 직후의 계엄 찬성 여론 비율이다. 그 주력은 박정희 세대 노령층이다. 이후 윤석열의 농성전과 극우 유튜브, 전광훈 등의 내란선동으로 윤에 대한 탄핵 반대 여론은 한때 35%~40%에까지 이르렀지만, 그 증가는 차기 대선을 생각하는 보수 결집 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이 증가 추세는 일시 요란해 보였지만 지속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다. 여러 선거에서 보면 극우의 집표력은 최대 5%를 넘지 못한다. 거기에 올인한 국민의힘이 참 한심하다. 대책이 없는 곳이 되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의 위기를 민주주의의 확장으로 넘어서려고 하고, 그럴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되는 몇 안 되는 나라에 속한다. 비상계엄 극복도 그 증거로 기록되고 있다. 이번 극우 세력의 내란 선동에서 우려되었던 것은 청년 남성층 일부의 파시즘 폭력 동조 현상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세대 극우 기독교 목사들과 극우 유튜버들이 무책임한 내란 선동의 불길로 이들을 부추겼다. 아직 살아있던 권력인 윤석열은 기름을 퍼부었다. 그들은 그렇게 나라를 찢어 놓았지만, 그렇듯 찢긴 나라를 다시 하나로 통합할 힘 역시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힘에서 나올 것이다.
한국의 파시즘은 미국 극우 ‘프로보커터’로부터도 들어오고 있었다. 한국 극우 인터넷 갤러리와 유튜버들이 주 수입 통로다. 이 역시 한국의 청년 남성층을 오염시키고 있다. 외국 생활 경험이 있거나 해외 거주 중인,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는 한국에 체류 중인, 그렇지 않더라도 여러 경로로 해외 극우 주장에 이끌려 들어간 젊은층들 역시 수입과 확산에 매개체가 된다. 미국 극우 프로보커터들의 반동사상은 ‘어둠의 계몽주의(Dark Enlighenment)’와 ‘신반동주의(Neo-reactionism)’라는 이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핵심은 반민주주의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강자의 자유’로 왜곡 흡수하고, ‘강자의 자유’를 비판하는 민주주의는 그 전체를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여 내치고 밟는다. 민주주의란 비루하고 천한 무능력자 기생충들의 정치체제라 극렬하게 비난한다. 새 세상은 대자본가들이 정부를 인수 매입하여 CEO적으로 통치하는 체제라고 주장한다. 신진 CEO에 대한 선망을 신독재 사상으로 옮겨 심으려는 시도다.
이 세력은 트럼프 포퓨리즘과 결합하여 현재의 트럼프 정부 내에 상당한 발판을 구축했다. 이들의 주장은 ‘강자의 자유’를 신봉한다는 점에서 윤석열과 맥이 같다. 다만 윤석열은 속과 겉이 다르게 민주주의를 싫어하면서도 입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읊조린 반면, 미국 극우는 안팎이 분명한 반민주주의와 자본독재의 깃발을 올렸다. 윤석열은 째째하게 검사독재 따위를 하려 했지만, 미국 극우는 훨씬 통 크게 명실상부한 자본독재를 주창한다. 신반동주의란 신 자본독재 사상이다.
이번 탄핵 반대와 내란 선동 소동 속에서 그들 언어의 폭력성과 주장의 허위성이 두드러졌다. 익명 속에 숨은 인터넷 언어, 지독한 독설과 욕설, 조롱과 저주, 황당한 논리 비약, 터무니없는 단언. 소위 ‘프로보커터’ 언어의 특징이다. 증오, 배제, 폭력, 거짓 선동과 가짜뉴스의 결합이 현실정치의 힘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대한 대응은 세계 전체가 고민 중인 사항이다.
그중 눈에 띄는 해법이 있다. 한국에서도 이미 상당히 경험해 본 방식이다. 한국에서는 ‘공론화위원회’라고 했고, 세계에서는 ‘시민의회’라고 한다. 잘 준비된 시민의회에서는 전광훈 식의 거짓 선동과 가짜뉴스가 통할 수 없다. 익명 속에 숨을 수 없다. 입보다 귀가 더 중요해진다. 다른 참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한다. 자신의 발언 역시 다른 참여자가 어떻게 들을지 생각하며 말하게 된다. 막말, 증오, 배제, 차별, 왕따, 거짓은 통하지 않는다. 한국에는 이미 이러한 선진적인 시도가 아주 많았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민주주의의 확장으로 대응하려는 시도들이었다.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러한 힘들이 두텁게 쌓여, 오늘 윤석열 파면 결정도 나올 수 있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에는 두 개의 길이 엄연히 존재한다. 한 길은 민주주의를 지우고 어두운 독재의 과거로 가자고 한다. 배제와 차별과 증오의 언어를 구사한다. 다른 길은 확장된 민주주의의 미래로 가자고 한다. 경청과 대화와 통합의 언어를 구사한다. 이제 대한민국이 어떤 길로 나가야 할까. 너무나 명백해졌다.
김상준 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 | 시민언론 민들레 2025.04.05.
4월은 갈아엎는 달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2025년 4월4일 오전 11시22분, 안국역 인근 도로에 모인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고, 부둥켜안고,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난해 12월3일에 일어난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122일 만에 헌법이 윤석열의 대통령직을 파면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전 국민이 목격자가 된 현행범은 자신의 범죄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나라를 극도의 내분 상태로 처박기까지 했다. 심지어 1987년 체제의 한계를 들먹이며 자신의 쿠데타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파렴치도 보여줬다. 박정희도 자신의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불렀으니 그렇게 새로울 것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아니, 민주주의는 안심하고 나태해지는 순간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윤석열‘들’의 쿠데타가 새삼 보여주었다. 사실 윤석열의 등장과 대통령 당선 자체가 우리의 민주주의에 결함이 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검사 윤석열에게 대부분 속았으며, 그것을 알고도 그의 당선을 거든 이도 적잖았다. 내 주위에서는 윤석열이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로 나오면 무조건 낙선한다고 호언장담하는 이들이 있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들은 우리의 민주주의 상태나 주권자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딱 한 가지를 그들에게 되물었다. 이명박이 만든 언론 지형이 말할 수 없이 타락하지 않았는가?
‘다른 윤석열’ 또 등장할 수 있어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 윤석열의 “위헌, 위법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반 행위에 해당”한다고 명확히 했다. 어쨌든 현행 헌법은 분명하게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과 뜻을 먼저 헤아린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늦어지자 사회는 크게 동요하고 온갖 이야기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과연 이 현상이 그렇게 이상하고 건강하지 못한 증표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성적인 접근을 주문한 매체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기에는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이 작용한 것뿐이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건대, 저들은 믿기 어려운 이들이라는 기억의 환기가 감정을 크게 흔들었던 게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헌법재판소의 사후 판결이나 윤석열의 탄핵과 파면을 요구하며 벌였던 시위만을 가지고 한국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자신할 수 있을지 조심스러워진다.
우리에게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나 진전시키는 문제를 부지불식간에 현실 정치에,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권의 문제로 국한해서 사고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되면 ‘다른 윤석열’이 또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민주당 정권이 실패할 때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의 실패가 이명박과 박근혜를, 문재인 정권의 실패가 윤석열을 집권시켰다는 진부한 공식에 갇히게 된다. 무엇보다 이런 상투적인 사고의 맹점은 민주주의의 진전과 퇴보의 기준이 민주당이 된다는 것이다. 현실 정당으로서 민주당이나 다른 야당들, 또 국민의힘의 환골탈태도 중요한 문제인 건 맞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특정 정당의 성패 여부, 특정 정당의 집권 여부로 판가름 난다는 것은 일단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현행 헌법 제1조 2항을 무력화 내지 희화화한다.
도리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왜 민주당 정권은 ‘실패’를 반복하는가? 어쨌든 국내총생산(GDP)은 증가하고 주가는 경향적으로 오르는데 말이다. 왜 국민의힘 정권은 ‘몰락’을 반복하는가? 안보와 미국과의 혈맹을 든든하게 한다는데 말이다. 그리고 왜 대안 정당들은 ‘분열과 자기 배신’을 반복하는가? 민중의 삶은 갈수록 나날이 고단해지고, 기후위기는 이미 들이닥쳤고, 소수자의 권리와 목소리는 여전히 배제되고 있는데 말이다.
달라진 상상력과 언어가 절실하다
만일 우리의 역사적 조건과 민주주의의 결함에 현실 정당들이 오염되어 있다면, ‘더 좋은’ 민주주의와 역사적 조건의 변화를 향한 도정에 있는 어떤 걸림돌을 먼저 제거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합리성은 이럴 때 쓰는 것이지 계산하고, 고소하고, 안 들키게 뒷거래하는 데 동원하는 게 아니다. 사실 이런 합리성의 발현은 경제적 효율성의 필연적 결과이고 경제적 효율성은 사회제도나 문화 자체를 상품 생산과 판매에 적합하게 찍어내며 주권자는 소비자로 타락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진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대체 무엇인 걸까? 절제를 모르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 때문일까? 아니면 역사적으로 너무 깊게 박힌 분단 때문일까? 무엇이 원인이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지금 서 있는 자리와 걸어가는 길에 대한 정직한 시선, 그리고 달라진 상상력과 언어일 것이다. 썩은 것들을 갈아엎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황규관 시인 | 경향 2025.04.06.
지브리풍 이미지가 던지는 질문
최근 카카오톡에서 업데이트된 친구 프로필을 보면 십중팔구는 챗GPT를 이용한 ‘지브리풍’ 이미지다. 대세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지브리풍 프로필 사진 하나 정도 업데이트하는 편이 나을까 고민하다 어쩐지 내키지 않아서 멈췄다. 챗GPT가 생성하는 지브리풍 이미지는 따뜻한 분위기의 배경에 부드러운 선으로 귀엽게 인물을 묘사해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과 비슷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지난달 말 오픈AI가 ‘챗GPT-4o’에 이미지 생성 기능을 추가하면서 가능해졌는데, 사용자들이 지브리풍 이미지에 열광하기 시작하며 유행이 됐다.
2022년 11월 챗GPT가 출시된 이후 산업과 연구, 생활 전반에서 AI를 이용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 됐다. 개인도 필요한 정보를 찾아 분석하거나, 양식에 맞게 문서를 변형하는 등의 업무에 AI의 도움을 받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여기에 지브리풍 이미지의 열풍은 ‘AI 대중화’의 새로운 변곡점으로 기록될 만하다. 챗GPT가 이미지 생성 기능을 갖춘 새 버전을 출시한 뒤 1주일 만에 ‘지브리풍’으로 제작된 이미지가 7억장을 넘고, 챗GPT의 유료 구독자는 약 450만명 증가한 것으로 파악됐다.
챗GPT에 ‘네가 만드는 지브리풍 이미지의 인기가 대단하던데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챗GPT는 ‘혹시 너도 한번 만들어보면 어때’라고 권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따뜻하고 몽환적인 감성을 느낄 수 있어서 나도 만드는 게 참 즐거워. 사람들이 그런 이미지에서 위로를 받고,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면 그걸 도울 수 있다는 게 참 뿌듯해’라고 답했다.
수년간의 수작업을 거쳐서야 세상에 나오는 것이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이다. 그 스타일을 모방해 만들어지는 지브리풍 이미지에서 인간은 어떤 위로를 얻고 만족감을 누려야 하는 것일까. 마치 문서에서 명조체와 고딕체를 고르듯 손쉽게 지브리풍, 디즈니풍 이미지를 찍어내는 것을 창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브리풍 이미지의 대중화가 지브리 스튜디오 고유의 정체성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일까. AI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인간다움이나 고유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는 영역으로 꼽혔던 것이 예술 분야다. 이 같은 측면에서 지브리풍 이미지의 열풍은 다양한 논란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가장 표면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저작권 문제다. 지브리 스타일을 모방한 것이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는지 여부다.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베끼지 않고, 스타일만 모방한다면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아직 챗GPT의 지브리풍 이미지 생성에 대해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이용자들이 입력하는 사진의 개인정보 문제도 배제할 수 없다. 사용자가 향후 모델 개선에 기여할지 여부를 설정할 수 있으나, AI가 지브리풍 이미지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이미지 데이터를 축적해 학습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또 AI의 학습량이 증가할수록 AI가 소모하는 에너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점도 외면할 수 없는 문제다. 방대한 양의 이미지 데이터를 처리하면서 데이터센터 등 인프라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 AI 기업들의 데이터센터는 개별 국가의 사용량에 육박하는 막대한 전력을 쓰고 있어 탄소중립에도 배치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헨리 키신저와 에릭 슈밋 등은 공저 <AI 이후의 세계>에서 “AI 시대가 제기하는 역사적·철학적 과제는 15세기 유럽에서 인쇄술의 발달이 불러온 변화에 견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AI 혁명은 대부분의 예상보다 빠르게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그에 따르는 변화를 설명하고, 해석하고, 체계화하는 개념들을 확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만다. 도덕적·철학적·심리적·실용적 차원에서, 즉 모든 차원에서 우리는 새 시대의 벼랑에 서 있다”고 했다.
AI는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성취를 따라잡고 있다. 인류는 AI와의 동반자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첨단 산업으로서 AI의 육성 못지않게, AI의 개발과 사용에 대한 윤리와 규제 마련이 시급한 것도 이 때문이다. AI의 성취를 인정하되 그 속에서 인간다움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지브리풍 이미지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윤주 정책사회부장 | 경향 2025.04.06.
세계가 놀란 ‘민주주의 열정’, 새로운 도약의 불꽃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됐다. 2022년 5월10일 취임했으니, 2년11개월 만이다. 지난해 12월3일 내란 실패 이후 사실상 국정이 마비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5년 임기의 절반만 마치고 쫓겨난 셈이다. 8년 전 탄핵된 박근혜 대통령(임기 11개월 남기고 퇴임)과 비교해도 너무 빠른 퇴장이다. 모두의 상상을 뛰어넘은 비상계엄이 직접 계기가 됐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국정 운영의 참담한 실패다.
윤 전 대통령이 집권한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대한민국은 멈춰 섰다. 제자리에 멈춘 게 아니라 오히려 추락했다. 경제는 침체하고, 국민 생활은 곤궁해졌으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은 벼랑 끝 상황으로 몰렸다. 진보·보수를 떠나 역대 모든 정부는 사회복지를 확대하고 성장을 위한 연구개발 투자에 힘을 쏟았다. 윤 전 대통령은 이런 기본 임무에 손쉽게 눈을 감았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0%대로 떨어질지 모른다고 어느 글로벌 투자은행은 전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외적 변수가 작용했지만,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정부 책임이 더 크다.
대통령은 국민에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좌파 척결’만 외쳤다.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말했다.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가 이념 전쟁에 몰두하니 정부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새만금 세계잼버리대회 참사와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는 단적인 사례다. ‘눈 떠보니 후진국’이란 한겨레 칼럼의 제목은 과장이 아니다.
대통령제 아래서 대통령 한 사람을 잘못 뽑은 결과가 얼마나 무거운가를 우리는 윤 전 대통령을 통해서 실감했다. 법 집행에 저항하며 ‘끝까지 싸우자’고 지지자들을 선동하는 모습은 국민이 가슴에 담아온 ‘대통령의 바람직한 상’과는 너무 멀었다.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은, 그래서 다행이다. 계엄과 탄핵이라는 끔찍한 과정을 겪었지만, 무능할뿐더러 사악하기까지 한 통치자에게 2년을 더 맡기지 않고 새 정부 출범 기회를 갖게 된 건 역설적으로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제 탄핵을 넘어 새로운 도약을 시작해야 할 때다. 헌재의 윤 대통령 탄핵이 의미 있는 것은, 한국의 놀라운 민주주의 회복력을 전세계에 보여줬다는 점뿐 아니라 유혈 사태 없이 평화적으로 민주주의를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3일 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서구에선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나라 중 하나’인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보여준 민주주의 열정과 복원의 과정은 전세계에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윤석열 체포’를 촉구하며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폭설을 맞고 밤을 지낸 시위대의 사진은 상징적이다. 헌재 결정이 늦어지면서 걱정과 분노가 치솟았지만, 끝까지 기존 제도를 믿고 평화적으로 기다린 점도 평가할 만하다. 헌재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게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써 국민의 오랜 기다림에 답했다.
세계적으로 반동의 시대다. 1990년대 동유럽 민주화 이후 오렌지 혁명, 재스민 혁명, 아랍의 봄으로 이어지며 민주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은 언제나 선봉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독재 정권을 끝냈고, 10년 뒤 헌정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했다. 2017년엔 수백만명이 광장에서 촛불을 밝혀, 권위주의 통치를 되살린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최근 아시아·남미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에서도 선거로 집권한 뒤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권위주의 지도자들은 갈수록 늘고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나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그렇다.
윤석열도 마찬가지다. 선거에서 간신히 승리했음에도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하고, 국회와 타협을 거부했으며, 검찰권을 남용했다. 끝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믿은 비상계엄을 꺼내 들고 군을 동원해 국회를 제압하려 했다. 아시아나 남미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졌을 때 어떤 유혈 사태도 없이 평화적으로 다시 완벽하게 복원한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다. 오랜 군부독재 시절을 거치며 누구보다 권력의 퇴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국 국민의 감수성과 열정이 지금 시기 ‘살아 있는 민주주의 표본’으로서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이유다.
민주주의를 되살리는 과정에서 어떤 제도나 절차의 훼손이 없었던 점도 의미가 있다. 2017년 박근혜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집회는 홍콩 민주화 운동을 거쳐 미얀마의 군사쿠데타 반대 시위로 이어졌다. 2025년 한국의 무도한 권력자 축출이 미국과 유럽에서 가시화하는 민주주의 후퇴 흐름에 하나의 경종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지켜낸 것으로는 부족하다. 윤 전 대통령의 내란 시도와 그 이후 나타난 보수 진영의 ‘윤석열 지키기’ 움직임은 더 이상 극우 정치세력을 그대로 방치해선 안 되고 극우 세력을 고립시키는 게 우리 정치의 당면 과제로 떠올랐음을 보여준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은 군 지휘관과 장병의 호응을 거의 받지 못할 정도로 명분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의 거짓 주장을 지지하는 극우 집단은 오히려 세력을 확장했다.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아스팔트 극우’가 주축이 된 자유통일당은 지난해 4월 총선에선 2.26%의 지지율을 얻는 데 그쳤지만, 며칠 전 열린 서울 구로구청장 보궐선거에선 32%의 지지를 획득했다. 물론 국민의힘 후보가 출마하지 않아 ‘보수 유일 후보’란 반사이익을 얻은 게 컸다. 하지만 윤상현 의원이 공개적인 지원 유세에 나서는 등 국민의힘 내부 지지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건강한 정당이라면 극단주의를 제어할 수 있는 균형 감각과 역량을 가져야 한다. 지금 국민의힘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공화국을 파괴하려 한 윤석열을 옹호하면서 아스팔트 극우 세력에게 끌려가고 있다. 국민의힘 당원들 분위기론 ‘윤석열 지지, 탄핵 반대’를 강하게 외치는 이가 차기 대선 후보로 뽑힐 가능성이 매우 높은 걸로 보인다. 걱정스러운 건, 국민의힘의 극우화 경향이 단시일 안에 사라질 거 같지 않다는 점이다. 시위대 구호가 단순한 ‘탄핵 반대’가 아닌, 중국 등 외국인 혐오와 가짜뉴스인 부정선거 반대로 변질되는 건 유럽 극우 정당의 성장 배경과 일정 정도 맥을 같이한다.
2017년 박근혜 탄핵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교훈은 이것이다. 훨씬 광범위했던 광장의 촛불들, 그리고 진보와 합리적 보수까지 망라한 ‘탄핵 연대’는 새 정부 출범 이후 사회적 대타협의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탄핵 연대는 너무 쉽게 무너졌고, 새 정부와 시민사회의 협력도 지속되지를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평화 증진과 코로나19 대응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둔 점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촛불 연대를 개혁 추진의 에너지로 삼지 못한 건 임기 내내 발목을 잡았고,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이라는 아무런 준비가 안 된 검사 출신 포퓰리스트에게 국정을 넘기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다. 앞으로 두달 뒤 헌정사상 두번째 탄핵으로 탄생할 새 정부는 이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세심하게 대응해 나가야 한다.
탄핵 재판은 끝났지만, 계엄에 반대하고 탄핵에 찬성했던 정치권과 시민사회 단체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일은 숙제로 남아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새 정부는 계엄 사태로 심해진 갈등과 대립의 세찬 강물을 건너야 한다. 일시적인 연대를 좀 더 견고하고 지속력 있는 ‘다수파 정치 연합’으로 묶어내는 게 필요하리라 본다. 그래야 저출생 고령화나 지방 소멸 등 복합 위기에 대처하고 경제 재도약을 이룰 국민적 에너지를 성공적으로 끌어모을 수 있다.
아이엠에프(IMF) 못지않은 총체적 위기다. 2025년 4월4일 헌법재판소는 전원 일치로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선고했지만, 위기의 순간에 나라를 구한 건 재판관들이 아니다. 바로 국민이다. 12월3일 밤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듣고 여의도로 달려가 계엄군을 막아선 평범한 시민들이다. 내란 시도 이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광화문에서 여의도에서 한남동에서 남태령에서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지켰다. 이들과 함께 가지 않고서는 앞으로 닥칠 무수한 어려움을 넘어설 수 없다.
박찬수 | 대기자 | 한겨레 202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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