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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3월2주 3.9~3.15

by 이성근 2025. 3. 16.

1.윤석열 구속 취소, 참을 수 없는 불쾌함 2. 탄핵 이후 3. 국가에 대한 공격 4. ‘빌런이 점령한 한국 사회 5. 윤석열 석방과 검찰의 미래 6. 체제 부수기와 체제 회복하기 7. 이재명이 압도적으로 이기려면 8. 행정통합이 아니라 읍면 자치를 9. 왜 진보는 대기업 정규직만 챙기는가 10. 중국은 부동산 잡고 첨단 AI로 가는데, 우리는?

11. ‘7세 고시의 나라 12. 민주당은 어쩌다 감세당이 되었나 13. 왜 부끄러움을 모를까? 14. 진화론적 '윤석열 탐구’ 15. 인구 1천명당 CCTV 439베이징의 번쩍이는 밤거리 16. 스위스행 티켓 없이도 낭만적 죽음가능할까 17. 뉴라이트의 메타정치 18. 아이들을 실험용 쥐로 만드는 교육당국의 무책임함 19. 윤석열은 지금 '반정치'의 질병을 잔뜩 퍼트리고 있다 20. 그날 밤 이후

21. 87년 합의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22. 암만큼 무서워진 항생제 내성 23. 윤석열 지지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24. 지금 전국 최초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25. 대한민국은 검찰 공화국이다. 26. 모든 권력은 검찰로부터...뭐라고?

 

 

윤석열 구속 취소, 참을 수 없는 불쾌함

대환장파티입니다. 12·3 이후 많은 시민들이 윤석열 구속을 위해 힘을 합쳐 싸웠습니다. 남태령에서, 한남동 대통령 공관 앞에서. 무자비하게 추웠던 밤에 내란범을 체포하라, 밤샘 집회를 이어가던 시민들을 보호해 준 것은 서로의 온기와 얇은 은박담요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담요 위로 곧 눈이 쌓였습니다.

윤석열 구속 취소에까지 이른 수사기관들의 대환장파티

수사기관들은 달랐습니다. 기관의 안위를 위해 행동했습니다. 공수처는 안일했던 공관 1차 진입에서 무기력하게 되돌아 나오며 불상사를 최소화하려 후퇴했다고 했습니다. 공문 한 장으로 체포 집행을 일임해 넘기려했고, 경찰은 법률적 논란이 있다고 반발하며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공조없이 공수처의 수사를 넘겨받은 검찰은 구속기간 연장이 당연히 될 것이라 생각하다 법원이 거절하자 아슬아슬한 늑장 기소를 했습니다. 법원은 논란을 그대로 두고 재판을 진행하는 경우 상급심에서 파기 사유가 될 수 있다며 구속을 취소해 버렸습니다. 대환장파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윤석열은 정치행위와 노동쟁의 금지, 언론출판 통제, 국회 해산, 선관위 서버 침탈 범죄를 계획해 착수했지만 3개월이 넘도록 제대로 된 조사 한 번 받지 않았고 마치 군림하는 존재처럼 유유히 공관으로 돌아가 경호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이 이룬 성취가 패스트리처럼 겹겹이 이어진 공무원들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대응으로 참담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특히 담당 재판부의 구속취소 이유를 담은 보도자료를 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불쾌함을 느낍니다. 인권을 껍데기 삼아, 사실은 공수처 수사권을 정조준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럴거면 재판부는 구속 취소 심리에서 자신들의 의도를 드러내고 공수처 수사권, 즉 영장 청구권에 대해 더 진지하게 심리하고 질문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예상치 못한 결정을 내는 재판부를 법원 공식용어로는 심리미진의 위법이 있다라고 하고, 변호사들은 벙커가 뒤통수 때린다고 합니다.

법원의 윤석열 2025초기619 사건 재판부 설명자료 보도자료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구속기간 계산법이고 다른 하나는 공수처의 수사권한입니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의 모습. 2024.5.12 연합뉴스

 

사상 처음 시간으로 구속실질심사 기간 계산한 법원

누군가를 구금하고 수사를 할 경우에는 수사한다는 핑계로 장시간 불법 구금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수사기관은 반드시 열흘 안에 증거수집을 마치고 법원에 기소를 해야 하고, 그 안에 수사를 다 못 끝내면 풀어주고 불구속 수사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때 만약 그 열흘 중간에 피의자가 자신의 구금을 풀어달라는 재판을 신청하게 되면, 그 기간은 열흘 기간에서 빼주게 됩니다. 수사기관 탓에 시간이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번 결정에서 구속실질심사 기간을 열흘에서 어떻게 빼나 계산을 할 때 검찰은 일수로 계산해서 2일을 뺏고, 법원은 33시간 7분 시간으로 계산했습니다. 그 결과 10시간의 차이가 생겼고, 열흘에서 10시간이 지나 기소했다고 보고 법원에서는 영장이 무효가 되었으니 풀어주라며 구속 취소를 했습니다. 그동안 법원 판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해석입니다.

법원은 보도자료에서 말합니다.

구속기간을 날로 계산하여 온 종래의 산정 방식이 타당한지 여부.

판단: 위 구속기간은 날이 아닌 실제 시간으로 계산하는 것이 타당함.

이유 :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정한 신체의 자유, 불구속 수사의 원칙 등에 비추어 볼 때, 문언대로 피의자에게 유리하도록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이 타당함

(서울중앙지법 제25형사부2025초기619 사건 재판부 설명자료 중)

 

피의자 인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권적 해석론으로서 백번 맞는 말입니다. 평소였으면 박수를 치며 환영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쾌한 것일까요.

내란 수괴 풀어 주고도 인권 챙겼다는 명분 얻을 수 있나

누군가는 말합니다. 그 유명한 미란다 원칙의 주인공 미란다도 사실은 악독한 사람이었다고요. 내란범에게는 인권 판결하지 말라는 소리냐고요.

1960년대 미국에서 변호인선임권과 묵비권을 고지받지 못하고 자백을 해 버린 미란다 덕분에 그런 자백 증거는 무효가 되는 미란다 원칙이 확립되었습니다. 실제로 어니스트 미란다(Ernesto Miranda)는 재심에서 그 자백 증거 없이도 납치와 성폭력 유죄 판결을 받은 악인이었고 징역형을 받았으며 출소 후에는 술집 싸움에서 칼에 찔려 사망하는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고 합니다. 절차적 권리의 발전은 때로 그냥 우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란다 사건과 윤석열 사건은 다르기에 이번 재판부의 해석론은 너무 쌩뚱맞습니다. 미란다 사건에서 미국경찰은 헌법에 하라고 되어 있는 고지 의무를 명백히 안 했습니다. 그러나 윤석열 사건에서 검찰은 오히려 확립된 법원의 관행대로 기소했습니다. 게으를 수는 있으나 위법이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혀 새로운 해석론으로 이걸 엎어버린 겁니다. 사법 소극주의를 펴온 법원에서 이런 과감한 해석론은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재판부는 하필 내란죄를 범하고 극우 세력을 급부상시켜 사회 대혼란을 가져온 권력자에게 이 파격적인 인권적 해석론의 1호 수혜를 주었습니다. 그 결과 이번 결정에 대해 반대하고 구속 처벌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말은 오히려 반인권적 주장이 되었습니다.

평생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을 사형과 무기징역형이 예정된 내란죄 범인을 구속 취소해서 풀어주는 대단한 일을 해버렸는데 욕도 별로 먹지 않았고 피고인 인권을 위했다는 명분도 챙겼습니다. 윤석열이 구속된 것은 증거인멸을 계속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구속 사유는 과연 모두 다 소멸되었는지에 대한 실질 판단도 쏙 빼놓았습니다. 이것이 불쾌감의 원인입니다

정작 더 중요한 공수처 수사범위 문제에는 냄새만 피운 법원

재판부 보도자료가 주는 더 큰 불쾌감은 사실 다른 데 있습니다. 공수처가 영장 청구권이 있었느냐라는, 지금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는 주요 쟁점에 대해서는 정작 냄새만 피우고 명확한 판단을 하지 않고 피해 갔기 때문입니다. 더 큰 혼란이 우리 앞에 있게 되었습니다.

재판부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보도자료 1번 인권적 구금기간 해석론은 판사 본인 재량권 내의 권한을 행사했다는 확실한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방패일 뿐이고, 내심의 의사는 보도자료 2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설령 위와 같이 구속기간이 만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소가 제기되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구속 취소의 사유가 인정된다고 판단됨으로 시작되어 공수처법상 수사처의 수사범위에 내란죄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윤측 변호인 주장을 들면서 이 점에 대해 법령에 명확한 규정이 없고 아직 대법원 판단도 없기에 수사과정의 적법성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부분입니다.

윤석열 내란죄 1심 재판을 담당하고 있는 재판부가 가진 공수처의 내란죄 수사권에 대한 해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수사권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공수처가 생긴 지 5, 지금처럼 여러 수사 주체가 다 나서야 하는 큰 규모 사건은 처음입니다. 수사권 규정 해석이 필요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라면 이렇게 흘리듯 지나갈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속취소 심리를 할 때, 그 쟁점에 대한 재판부의 명확한 의문을 제기하고 치열하게 검찰과 변호인을 토론시키고 판사의 판단 근거를 분명하게 결정문에 적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들이 납득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다가 이렇게 온 국민의 뒤통수를 칩니까.

절차적 적법성에 대한 재판은 중요합니다. 나라의 운명이 갈릴 뻔한 내란죄의 죄질을 밝혀 처벌하고,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누구도 그런 죄를 저지를 엄두를 낼 수 없게 단죄하는 실질에 대한 재판은 더욱 중요합니다.

판사는 정의를 위한 존재인가, 단순 법기술자인가

대통령이 내란죄를 일으켰기에 그 수하에 있는 수사기관들을 일괄 통제할 구심점이 부재합니다. 대혼란의 시기에 굴리고 밀어 겨우 법대에 세운 사건을 껍데기 좀 까졌다고 열어보지도 않고 공소기각 시키려는 것은 아닌가요? 재판부는 공수처 수사권에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앞으로의 재판에서 적극적으로 묻고 검찰에 추가 입증을 요구해야 합니다. 공소유지를 맡은 검찰은, 가진 증거들의 증거능력을 점검하고 재판부에서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모든 부분에 철저하게 방어를 준비해야 합니다.

법원이 그동안 우리 사회 약자들에게 내린 무자비하고 잔인한 법 해석은 셀 수 없습니다. 유독 권력자 윤석열에 대해, 재판부는 그동안 약자와 노동자에 대해서는 볼 수 없던 세심함을 첫 번째로 적용하면서 정작 꼭 해야 할 일은 안했습니다.

이번 구속취소 결정에서 보여준 모습이 앞으로의 내란죄 재판에서도 이어진다면 사회정의와 질서를 유지하는 판사가 아니라 단순 법기술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길 바랍니다. 조수진 변호사 | 시민언론 민들레 2025.03.09.

 

윤석열 석방과 법원·검찰 책임론

법원이 대형 사고를 치자 검찰이 수습은커녕 맞장구를 쳤다. 지난 8일 오후,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의 지휘에 따라 구속된 지 52일 만에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됐다. 검찰이 법원의 윤 대통령 구속 취소 결정에 대한 즉시항고를 포기한 결과다. 그에 따라 내란 우두머리라는 무시무시한 혐의로 기소된 윤 대통령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 특혜를 누리게 됐다. 법원의 느닷없는 구속 취소 결정도 기괴하지만, 검찰의 백기 투항도 그 못지않게 황당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법원 결정을 그토록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다니. 법원이 마땅히 받아야 할 비난을 가로채서 독차지하는 희생정신을 발휘한 셈이다.

형사소송법은 기본적으로 법원 우위이기는 하지만, 법원과 검찰이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예컨대 검찰권 행사에 법원이 제동을 걸면 검찰이 상급법원에 이의 제기를 하는 식이다. 구속 취소가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결정이라 검찰은 서울고등법원에 즉시항고를 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대법원에 재항고를 할 수도 있다. 형사재판에서 법원 판결에 불복할 때 항소와 상고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법적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석방 집행은 보류된다.

검찰이 법원 결정이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형사소송의 기본 절차로,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이례적이다. 그 점에서 검찰이 정당한 법적 대응 수단인 즉시항고를 포기한 것은 검찰사에 기록될 만한 특이한 처사다. 아무리 친윤 검사들이 지휘부와 주요 보직을 장악했다고 해도 이처럼 대놓고 호위무사를 자처하다니. 정치검찰임을 자인한 셈이다.

검찰 지휘부는 즉시항고를 포기하면서 법원 결정과 헌법재판소의 관련 판례를 존중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내란죄 수사팀이 강력히 반발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빈약한 논리다. 규정에도 관례에도 맞지 않는다. 법원의 구속 취소 결정에 대한 과거 검찰의 공식 입장과도 다르다. 헌재 판례는 구속집행정지에 관한 것이기에 참고할 내용이지 꼭 따라야 할 지침은 아니다. 상급법원에서 법리적으로 충분히 다퉈볼 만한 사안이다. 검찰 발표문에는 항고해 봐야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는 취지가 담겼지만, 정반대로 상급법원에서 다른 결정이 나올까 봐 아예 싹을 자른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 지경이다.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 정치검찰 자인한 셈

많은 사람이 검찰을 비난한다. 처음에는 검찰의 잘못 또는 실수에 분통을 터뜨렸다. 야당은 검찰의 산수실력을 조롱하기도 했다. 법원이 검찰의 구속기간 산정 착오를 구속 취소 결정의 주된 사유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약간의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검찰이 실수를 만회할 수도 있는 수단을 스스로 포기하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 내란 사건에 대한 신속하고도 비교적 정확한 수사로 땅에 떨어진 신뢰를 조금이나마 회복했던 검찰은 이로써 다시 민주시민의 공적이라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긴 해도 비난의 화살을 검찰에만 쏟아붓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이번 변고의 1차 책임은 분명히 법원에 있다. 검찰이 실수한 게 아니라 법원이 평소 안 하던 일, 이상한 일을 벌인 게 맞고, 그것이 발단이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팀 반발에는 일리가 있다.

알려진 대로, 최대 쟁점은 구속기간 산정 기준이다. 그간 검찰은 날짜, 즉 일수(日數)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번에 법원은 일수가 아닌 시간으로 산정했다. 이건 실무 관행을 완전히 뒤집는다는 점에서 거의 혁명적인 시도다. 경찰과 검찰의 구속수사 기간은 각 10일이다(형소법 202, 203). 그런데 검사는 필요시 법원의 허가를 받아 10일 더 늘릴 수 있다(형소법 205). 따라서 짧게는 10, 길게는 20일 이내에 기소해야 한다. 피의자는 기소되면 피고인으로 전환돼 구속기간이 2개월로 늘어나고 심급마다 최대 6개월까지 연장된다(형소법 92).

그런데 이는 원칙이고 실제로는 수사 기간 중 발생하는 변수로 구속기간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변수가 흔히 영장실질심사라고 부르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 따른 구속기간 연장이다. 형소법에 따르면, 법원이 피의자 심문을 하는 기간은 구속기간에서 제외한다(2012). 영장실질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수사기관이 조사를 못 하니 줄어든 기간을 보충한다는 뜻이다. 피의자 처지에서는 그만큼 구속기간이 늘어나는 셈이다.

이제 윤 대통령 사례를 살펴보자.

윤석열 대통령 구속기간 논란 관련 정리

아무런 변수가 없다면 윤 대통령 구속 만료 기간은 124일 자정이다. 법원이 검찰의 구속기간 연장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차 수사를 맡은 고위공직자수사처가 경찰과 달리 검찰과 대등한 독립적 수사기관이니 검찰이 추가 수사를 할 법적 권한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 기간 3일을 빼면 구속기간은 127일로 늘어난다. 검찰 셈법으로는 27일이 지나기 전에 기소하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법원은 심문 기간이 실제로는 33시간 7분이니 126일 오전 97분에 구속기간이 만료됐다고 계산했다. 법원 주장대로라면 검찰이 9시간 45분이나 지나서 기소한 셈이고, 그 시간 동안 윤 대통령은 불법 구금된 셈이다.

어떤 계산법이 맞느냐 틀리느냐를 떠나 법원의 이번 결정은 일단 피의자의 방어권이나 인권 보호 차원에서는 바람직해 보인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소법 취지에도 부합한다. 법원이 검찰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았다는 긍정적인 해석도 있다.

그런데 형소법을 살펴보면 검찰의 구속기간 산정이 잘못됐다고 볼 근거가 없다. 즉 법에 맞지 않지만 관행적으로 그렇게 해온 게 아니라 법적으로도 검찰이 틀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형소법 2012항을 꼼꼼히 살펴보자.

201조의2(구속영장 청구와 피의자 심문) 피의자 심문을 하는 경우 법원이 구속영장청구서ㆍ수사 관계 서류 및 증거물을 접수한 날부터 구속영장을 발부하여 검찰청에 반환한 날까지의 기간은 제202조 및 제203조의 적용에 있어서 그 구속기간에 산입하지 아니한다.

분명히 이라고 돼 있다. 형소법 어디에도 시간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규정이 없다. 내란죄 수사를 맡은 검찰 특별수사본부가 펄쩍 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검찰은 체포적부심 기간도 빼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체포와 구속은 다르다는 취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검찰 주장은 억지가 아니다. 법원이 피의자 심문을 위해 수사 관계 서류와 증거물을 접수해서 검찰에 반환할 때까지의 기간은 구속기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형소법 2142 13(체포와 구속의 적부심사)에 근거한 것이다.

시간을 언급한 조항이 있기는 있다. 나는 관련 형소법을 열심히 찾던 중 다음 조항에 눈이 번쩍 뜨였다.

기간의 계산에 관하여는 시()로 계산하는 것은 즉시(卽時)부터 기산하고 일(), () 또는 연()으로 계산하는 것은 초일을 산입하지 아니한다. 다만, 시효(時效)와 구속기간의 초일은 시간을 계산하지 아니하고 1일로 산정한다(형소법 66기간의 계산’).

비록 수사기관이 아닌 법원의 구속기간에 관한 조항이지만, 충분히 준용할 만한 내용 아닌가? 형소법에는 곳곳에 준용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준용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1. 표준으로 삼아 적용하다. 2. 어떤 사항에 관한 규정을 그와 유사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사항에 적용하다(네이버 국어사전).

비상계엄에 놀란 국민 가슴에 법의 총부리를 들이대다

앞서 살펴본 대로 검찰이 법원의 심문 탓에 피의자 조사를 못한 기간은 실제로는 하루 반도 안 되는데 3일로 계산해 구속기간이 그만큼 늘어나는 건 피의자 처지에서는 부당하다. 그 점에서 지귀연 판사의 이번 결정은 진보적이다. 형소법 규정을 새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창의적이다. 관행을 격파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아마도 전국 피의자들의 줄소송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의 결정이 위법 소지가 있는 데다 그 첫 수혜 대상이 내란 우두머리라는 점에서 선의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한 망상가의 초현실적인 비상계엄 선포에 놀라 밤잠을 설쳤던 국민의 가슴에 법의 총부리를 들이댄 셈이다.

법원은 절차의 명확성을 기하고 수사 과정의 적법성에 관한 의문의 여지를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해 구속 취소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런 논란을 그대로 두고 재판을 진행하면 상급심에서 파기 사유는 물론, 재심 사유가 될 수도 있다고도 했다.

뜻은 좋다. 일리도 있다. 그렇긴 해도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이 중차대한 국면에서 법과 관행을 뒤집으면서까지 그런 파격적 결정을 한 것은 상식과 합리의 틀에서 벗어나고 국민 법감정에도 맞지 않는다.

물론 구속 취소와 내란죄 재판, 탄핵 심판은 별개다. 탄핵 인용을 전제로 말하면, 극우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윤 대통령이 풀려나는 것은 보수우파 진영에 독이 될 수도 있다. 내란 우두머리가 구심점이 된다면 중도층 민심이 급격히 반대쪽으로 쏠릴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낮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 헌재에서 탄핵이 기각된다면 윤 대통령 구속 취소 결정은 역사적 심판에 직면할 것이다. 내란을 일으킨 현직 대통령이 갇혀 있는 것과 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다.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약 제2 계엄이 선포되더라도 석방에 공을 세운 판·검사들은 무사하려나.

조성식 언론인 | 뉴스타파 2025.03.09.

 

탄핵 이후

얼마 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결혼에 관한 글을 읽었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가져왔다는데 실제인지 꾸며낸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그 밑에 달린 댓글들로 짐작건대 한국 사회 어딘가 있음직한 일은 분명해 보였다.

글쓴이는 우리집은 가난과 서민 그 어딘가쯤이라 소개하며 글을 시작했다. 글쓴이의 누나는 서른한 살로 지난해 괜찮은 공기업에 취업했다. 부모님은 공기업에도 들어갔으니 좋은 남자 만나서 빨리 결혼을 하라 했고, 글쓴이도 누나가 좋은 외모까지 가졌기에 금방 결혼을 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누나는 부모님 앞에서 결혼을 안 하겠다고 선언한다. “부모님이 지원도 못 해줘서 대출 아직도 갚고 있고, 서른 넘었는데 모아놓은 돈도 없고, 부모님 노후준비도 안 되어 있고 물려받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글쓴이의 누나는 비슷한 남자 만나서 결혼하기 싫고 더 잘난 남자 만나서 결혼하기도 싫다결혼은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에 가깝다고 차분하게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부모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글쓴이가 왜 그러냐(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냐)”고 묻자 누나는 언젠가 해야 했던 말이라고 답한다. 글쓴이는 나도 스물 끝자락인데 해외여행 한 번도 못 가봤다. 집에 생활비 50만원씩 드리고 있다나도 결혼을 포기해야 하냐고 묻는다.

댓글 중에 이 글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저런 환경에서 결혼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또는 결혼을 하는 게 맞느냐 틀리느냐를 이야기했다. 그중에 이런 댓글이 또 눈에 띄었다. “가난이 무서운 게 밥 못 먹어서 배고픈 것도 큰데 사고의 폭이 배고파지는 거 같음.” 이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는데 친절하게 바로 밑에 댓글이 또 달렸다. “모든 걸 돈으로 치환해서 생각하니까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던 댓글이 충격적이라 아직도 잊히지 않음.”

지난해 123일 밤 이후 한국 사회에는 마치 블랙홀이 생긴 듯했다. 뉴스를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석 달이 넘도록 비상계엄과 그로 인한 윤석열 대통령 탄핵 과정이 모든 의제를 다 빨아들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에 저 글을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불의한 권력자를 끌어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세상을 바꾸는 일은 아니겠구나.’

석 달 전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 발생해서 잠시 잊었을 뿐 한국 사회는 지금 아주 빠른 속도로 소멸의 길을 달리고 있다. 지난달 26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인구동향조사 출생·사망통계(잠정)’를 보면,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5명이다. 2023년의 0.72명보다 0.03명이 늘어났지만 반등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다. 합계출산율은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다. 2.1명은 되어야 현 인구 수준이 유지되고 이보다 낮으면 줄어든다. 그런데 한국은 1명도 되지 않는다. 20180.98명으로 처음 1명 선이 무너진 이후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수직 낙하 중이다. 이 정도면 한국인들이 출산 파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이렇게 사람이 귀한 사회에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는다. 지난해 한국에서 자살한 사람은 2011년 이후 13년 만에 가장 많았다. 연합뉴스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과 통계청 자료를 종합해 계산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112고의적 자해로 인한 사망자 수는 14439명으로 잠정 집계됐다. 하루 40명 가까운 사람(39.5)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24년 자살 사망자 수 잠정치는 2023년 확정치(13978)보다 많다. 2년 연속 전년보다 늘었다, 자살자 수가 역대 최고로 치솟았던 2011(15906) 이후 13년 만에 가장 많다.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를 뜻하는 자살률도 28.3명으로 추정돼 2013년 이후 최고치다. 정부는 2023년 정신건강정책 혁신방안을 발표해 10년 안에 자살률을 2022년의 절반으로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되레 더 멀어졌다.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 결정 선고일이 임박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는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하리라 전망한다. 그러면 두 달 뒤에는 조기 대선이 열리고, 아마도 정권이 바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끌어내린다고 세상이 단숨에 바뀌지는 않는다. 새로운 권력자를 뽑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제는 차분히 사회를 바꾸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홍진수 사회부장 | 경향 2025.03.09.

 

국가에 대한 공격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 불러일으킨 혼란의 작은 이점은 미국인들이 민주주의 통치의 아주 기본적인 문제를 재고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행정부에 행사하는 권한을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권한을 가져야 할까? 경제 생활에서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미국과 다른 선진 산업 민주주의 국가들은 항상 정부의 역할과 규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왔다. 보수주의자들은 세금을 낮추고 규제를 완화하는 것을 선호하며 이것이 더 빠른 성장을 촉진한다고 믿는다. 자유주의자들은 정부가 재분배 및 복지 기능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연구 및 개발 지원이나 디지털 인프라와 같은 정부의 공공재 제공도 경제적 웰빙을 증진시킨다고 믿는다.

트럼프와 미국 내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연방 관료제에 반대하는 완전히 다른 주장을 펼쳤다. 그들은 일론 머스크가 주장해온 것처럼 공공 지출이 낭비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공무원들 또한 보수적인 개혁 노력을 약화할 수 있는 이기적인 비선출직 정부 구성원이라고 생각한다.

강력한 자유주의적 전통에 기반한 미국 정치에서 국가에 대한 공격은 새로운 특징이 아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정부에 대해 적대적인 언어를 자주 사용했다. 그러나 트럼프와 보수 법률 이론가로 구성된 핵심 그룹은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는 단일 행정부라는 이론에 따라 대통령 권한을 극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어느 정도 헌법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은 행정부 내 인사 결정에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는데, 사실상 대통령이 인사를 마음대로 고용·해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단순히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트럼프의 목적은 고용이 행정부의 변덕에 달려있기에 정치적으로 충성스러울 수밖에 없는 연방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강력한 행정부와 상대적으로 약한 입법부 및 정당의 문제와 씨름해왔다. 그러나 한국은 유능한 국가가 빠른 성장뿐만 아니라 형평성을 어떻게 촉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널리 연구된 사례를 제시한다.

수년 동안 일부 보수 경제학자들은 한강의 기적이 한국의 시장 지향적인 정책, 규제 완화, 비교적 자유로운 노동 시장(또는 노동자 억압) 덕분에 가능했다고 봤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한국의 강력한 국가 권력이 자국 기업의 성장과 건전성에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물론 그 기업이 대부분 거대 재벌이긴 했다.

분명히 하향식 산업 정책의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친환경 에너지 전환, 코로나19 관리와 관련된 정부 이니셔티브가 과거 유산의 강력한 흔적을 어떻게 보여주는지를 추적하기도 했다.

트럼프의 국가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에 반대하는 주장은 간단하다. 훌륭한 행정 장치 없이는 위대한 나라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약 정책 결정이 전문성이 아닌 충성심으로 발탁된 정치인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결과가 좋을 리 없다.

트럼프가 끼치는 피해는 아직 더 지켜봐야 한다. 그는 쇼맨(showman)이며 실질적인 정책적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행정 명령에 서명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법원이나 대중의 반발, 어쩌면 의회의 반발에 따라 트럼프는 자신의 이니셔티브 중 일부를 철회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통치에 대한 트럼프의 개인주의적 접근 방식의 불확실성 그 자체는 이미 분명하다. 공공복지의 중심 기관인 질병통제예방센터 및 연방재난관리청, 또는 심지어 짧은 기간 핵무기 안전을 다루는 중요 기관에서 일했던 공무원들이 해고되고 있으며 그들의 삶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공공 부문에서 떠날 확률이 높은 노동자들은 바로 오랜 경험과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우리가 잃어서는 안 되는 이들이다.

한국은 심각한 계엄령 선포 사태를 겪었지만 지금은 그 일이 마치 만화 속 이야기 같고 아마추어적으로 보인다. 대학 등 공공 기관에 대한 트럼프의 공격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 중요한 시점에서 우리는 유능한 국가들이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도록 해준다는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정치 제도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줄어들고 최근 몇년간 한국과 미국이 겪고 있는 독재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스테판 해거드 UC 샌디에이고 석좌특별명예교수 | 경향 2025.03.09.

 

빌런이 점령한 한국 사회

2024123일의 계엄령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은 서울서부지법에서 일어난 극우들의 폭동이었다. 이 폭동만큼이나 또 충격적인 것은 극우들이 공관도 아닌 문형배 헌법재판관의 자택앞으로 몰려가 이웃들을 방해하며 시위를 벌인 일이었다. 그곳은 개인의 사적 영역인데 그 공간에서 소란을 일으키며 의도적으로 그의 사적 이웃들을 방해하고 있다. 더구나 이웃을 방해하러 왔다며 이 행위를 공공연하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헌법재판소 근처에서 근무하는 한 친구는 출퇴근길에 심각한 위협감을 느낀다고 호소했다. 지나가면 붙잡고 이재명, 시진핑, 김정은 ×××라고 해봐라고 요구하고, 안 하면 너 빨갱이지라고 위협한다는 것이다. 문형배 재판관의 자택에서 시위하는 사람들로 인해 차를 타고 집으로 들어오려다 방해를 받은 이웃이 그들을 향해 경적을 울리자 시위대 중 한 명이 이 차를 향해 빨갱이 ××”라고 외치며 돌진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웃 괴롭히려고헌법재판관 자택 앞 난동

이런 행동들이 충격적인 것은 이들이 추구하는 이념 때문만이 아니다. 이들이 보이는 행태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매우 기이하고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평판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사회적 평판에 신경 쓰지 않으니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또한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질리게 해서 공적 영역에서 사라지게 하고 자기들이 그 자리를 점령하면 그만이다. 정치가 사회적 평판을 둘러싼 경쟁이라면 이들은 완전히 반정치적인 정치를 하고 있는 셈이다.

미시사회학의 상호작용론으로 보면 이들의 행태를 상당히 그럴듯하게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의 행동은 상대에게 내가 당신을 의식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몸짓과 같은 의례적 행동을 통해 이런 존중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기대가 충족됐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한다. 대표적인 상호작용론 학자인 어빙 고프먼에 따르면 이것을 처신이라고 한다. 그렇게 상대의 존중에 맞춰 처신을 바르게 해야 자기 체면이 선다. 상대가 존중을 통해 자기 체면을 살려주면 자신 또한 처신을 바르게 하여 상대와 자기 자신 모두의 체면을 살린다. 체면을 세워주며 자신의 평판을 관리하는 처신이 상호작용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들은 매우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규범에 따라 처신을 올바르게 하여 평판을 얻는 것이 실익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평판에 아랑곳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자신들을 제재할 법적인 장치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원래 이 영역은 법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 압력으로 사람의 행동을 규율하는 규범의 영역인데 사회적 압력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니 통제할 방법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면 권리라는 이름으로 명시적인 이익을 위해 돌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더구나 이렇게 할 경우 아무도 그를 통제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에서 그들의 정치적 효능감은 극대화된다. 반사회적 캐릭터인 빌런이라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도처에 이런 빌런들이 나타나 사회의 공공 영역을 점령하고 있다. 얼마 전 수도권에 있는 공공도서관에 가기 위해 광역버스를 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다들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다. 두 명이 앉는 광역버스 좌석은 롱패딩을 입고 앉기에는 매우 좁아서 서로 몸이 부딪히기 마련이다. 다행히 오후 시간대라 버스가 널널했다. 탑승해서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3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타더니 내 옆자리에 앉았다. ‘뒤에도 자리가 많은데, 앞자리여서 그런가보다하며 몸을 창 쪽으로 움츠렸다. 그렇게 몸을 움츠린다고 얼마나 공간이 나오겠느냐마는 옆 사람이 앉는 것을 의식해 자리를 내주겠다는 상징적인 신호다.

처신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물론 이 과정은 상대의 자아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상대가 자신의 자아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개인이 개인인 이유는 그에게 다른 그 누구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라면 영혼이라고 불렀을 그 영역은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영역을 의미한다. 집이나 자기 방과 같은 영역이다. 이 영역은 부모라고 해도 함부로 침범하면 자아가 침해된 느낌을 준다. 흔히 사생활이라고도 부르는 이 영역은 절대적으로 존중돼야 하는 개인의 자아를 상징한다.

안타깝게도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몸을 움츠렸음에도 불구하고 옆에 앉자마자 거칠게 내 쪽으로 몸을 밀었다.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비켜달라는 신호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상징적 상호작용론의 입장에서) 내가 충분히 신호를 보내지 못했나 싶어 몸을 좀더 창 쪽으로 붙였다. 그러자 그는 팔꿈치로 나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놀라서 쳐다보니 왜 쳐다보느냐는 눈으로 보더니 그 좁은 좌석에서 아예 다리를 꼬았다. 다리가 내 자리 쪽으로 넘어온 것은 물론이다. 이것은 이 두 자리를 내가 차지하고 갈 테니 너는 뒤로 가라는 신호다.(오후 시간대라 뒤의 자리는 많이 남아 있었다.)

그날 강의 내용이 마침 고프먼의 상호작용에서 존중과 처신에 대한 부분이었다. 도서관에 도착한 다음 강의를 듣는 분들에게 이런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어봤다. 몸으로 싸울지, 말로 항의할지, 아니면 그냥 뒤로 가버릴지. 놀랍게도 강의를 듣는 분 전원이 그냥 뒤로 간다고 대답했다. 잠시 몸으로 실랑이를 시도하거나 노려본다고 한 분들이 있긴 했지만, 그분들 역시 결국은 그냥 뒤로 갈 것 같다고 말씀했다. 그 이후 다른 강의에서 같은 질문을 해도 사람들 대부분은 뒤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합니까. 더러워서 피하지.”

그러나 그냥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세상이 무서워져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였다. 그 정도로 대놓고 무례한 인간이면 몸짓은 고사하고 당연히 말이 안 통할 것이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상대에 대한 공포와 함께 또 하나 문제가 되는 점은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정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상대는 처신에 신경을 안 쓰는데 여전히 사회적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은 처신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신이 작동하려면 존중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하고, 내가 체면을 세우기 위해 택한 노선에 대한 승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상대가 나를 존중할 의사 자체가 없고, 내가 택한 노선을 전혀 승인할 생각이 없다면 내가 처신할 방법이 사라진다. 처신을 통해 한편에서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정당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자신의 체면을 세우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자아를 보호하려는 사람에게는 몹시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처신이 통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기도 제대로 처신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같이 개싸움을 해야 하나?” 그러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빌런들만 보이는 황폐화된 공공장소

그래서 처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점점 더 공공장소에서 사라지고 있다. 처신을 잘못하는 사람을 만나는 봉변을 당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상황에 부닥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고프먼에 따르면 (미국의 기준이긴 하지만) ‘당황함이야말로 그 사람의 사회적 역량 미숙을 보여주는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사람의 성숙도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유려하게 대처하는지를 통해서 드러난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야말로 타인이 내가 나 자신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 평가하기 가장 좋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신에 신경을 쓰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을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 당연히 공공장소에 저런 빌런들이 많아질수록 처신을 제대로 하려는 사람들은 사라진다. 최대한 대중교통이 아니라 자차로 움직이려 하고, 공공장소보다는 사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공간에 머무르려고 하며, 타인과의 거리를 이전보다 훨씬 더 떨어뜨리고 서로의 노선에 대해 공유하고 상호 승인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려고 한다. 사회의 최상층뿐만 아니라 중산층, 그리고 그 아래로까지 빗장 건 공동체(Gated Community)가 퍼지기 시작한다.

그 결과 공공장소는 점점 더 처신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처신 훈련을 받지 못한사람들이 점령하면서 슬럼화된다. 전세계에서 가장 깨끗하고 처신이 잘되는 곳으로 알려진 한국의 대중교통이나 공공장소가 슬럼화되는 현상은 피부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다. 대민 업무를 맡는 경찰서와 주민자치센터나 학교에서 담임을 맡는 교사 등은 점점 이런 빌런을 더 많이 만나게 되고 해당 업무는 기피 업무가 된다. 사회의 공공 영역이 점차 슬럼화될수록 국가와 시장은 이 영역을 보살필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방치하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공적(공공) 영역의 슬럼화가 진행될수록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빌런들이 가지는 효능감은 극대화된다는 점이다. 아마도 버스에서 내 옆에 앉았던 사람은 자기가 앉기도 전에 내가 몸을 움츠리는 것이 저 자식을 쫓아내고 내가 두 자리를 모두 차지할 기회의 신호로 여겼을 것이다. 여기에 몸을 한 번 더 움츠리자 그 정도로는 쫓아낼 수 없음을 감지하고 노골적으로 팔꿈치로 밀고 다리를 꼬았을 것이다. 결국 내가 일어나서 자리를 뒤로 옮기자 쾌재를 부르며 쩍벌하고 앉았다. 뒤에 타는 그 누구도 자기 옆자리에 앉지 말라는 신호를 준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최고의 효능을 준 것이다. 그에게 가장 즐거운 일은 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한 자기 행동의 효능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빌런 효능감법적·정치적·사회적 무력화 해야

지금 한국의 극우들에게서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효능감이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점령(?)해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내란 행위를 대통령 개인의 인권 문제로 둔갑시켰다. 평소에는 인권이 나라를 범죄 소굴로 만든다인권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다. 광화문 점령을 넘어 이제 자기들이 모이면 어디든 점령하지 못할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공간에서 자신들이 난리를 치면 일반 국민은 대거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효능감에 거침이 없다. 서울대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고 광주 금남로로도 진출했다. ‘자신을 다스리는 법에 대한 타인의 해석이라는 의미에서의 처신은 안중에도 없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핵심인 처신보다 이익을 극대화하는 효능감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지금 시급한 것은 이런 빌런들의 효능감을 무력화하기다. 법적으로 무력화되어야 하고, 정치적으로 무력화되어야 하고, 사회적으로 무력화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법과 정치에서 저들을 무력화하지 못하고 반대로 시민들이 무력함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사회의 미래는 없다. 지금이야말로 법과 정치가 사회를 보호해야 할 때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 한겨레21 2025.03.10.

 

윤석열 석방과 검찰의 미래

탄핵 피청구인과 형사 피고인이라는 이중 지위

헌법은 봉건주의를 혁파한 근대 시민혁명을 계기로 서구에서 발명한 새로운 규범이다. 그래서 이 헌법은 두 부분으로 이뤄진다. 국민의 인권을 국가가 보장하는 내용(권리장전), 그리고 개인의 인권을 짓밟는 국가를 통제하는 내용(정부구성)이다.

위헌적 비상계엄을 통해 내란을 벌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 윤석열은 이중 지위에 있다. 대통령으로서는 국민의 인권을 위협했기에 대통령직을 박탈할지를 정하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을 받고, 개인으로서는 국가를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 했으므로 중형에 처할지 정하는 형사법원의 형사재판을 받는다.

이와 관련해 헌법은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국민을 배신한 대통령을 파면하는 탄핵심판 제도를 두고 있고, 다른 한편 피고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엄격한 형사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피고인 보호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가운데도 핵심이다. 그래서 피고인 보호를 정한 제12조가 제7항까지 있는, 가장 길고 자세한 기본권 조항이다.

지금 우리 앞에는 두 사람의 윤석열이 있다. 탄핵소추 피청구인 윤석열이 있고, 내란죄 피고인 윤석열이 있다. 헌법은 두 사람을 구분하라고 정해놓았다. 헌법 조항 가운데 탄핵 결정은 공직으로부터 파면함에 그친다. 그러나, 이에 의하여 민사상이나 형사상의 책임이 면제되지는 아니한다라는 제65조 제4항도 이를 보여준다.

 

강간범 미란다 판결과 내란범 윤석열 석방

헌법의 핵심인 피고인의 권리는 이른바 나쁜 사람들이 전진시켜 왔다. 이들 덕분에 죄 없는 사람이 잡혀가거나 고문받거나 사형당하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2조 제5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의 이유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고지받지 아니하고는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하지 아니한다라는 내용은 1987년 개정 헌법에 처음 등장했는데, 이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미란다 판결(Miranda v. Arizona)에서 온 것이다.

에르네스토 미란다는 196318세 여성 납치 및 강간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1966년 연방대법원이 변호인 선임권과 묵비권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파기했다. 미란다는 다시 재판을 받아 유죄가 확정됐고 복역 중이던 1972년 가석방됐다. 하지만 미란다는 1976년 술집에서 싸움을 벌이다 칼에 찔려 숨졌다. 이것이 현대 세계인의 인권을 확장한 에르네스토 미란다의 삶이다.

한국에서 헌법에 걸맞은 형사절차를 주장해서 확인한 사람은 재벌과 권력자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직권남용 재판에서 피고인의 권리를 거듭해서 주장했고, 이는 재판 절차로 자리 잡았다. 제약회사 종근당은 검찰과 싸워 불법적인 전자정보 압수수색을 금지하는 기념비적 판례를 받아냈다. 이와 달리 보통 시민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쥔 무소불위 검사가 무서워 싸우지 못하기에 선처를 호소할 뿐이었다.

이번에 피고인 윤석열이 얻어낸 구속 취소도 마찬가지다. 검사 출신 윤석열은 검찰에 유리하게 해석되어 온 형사소송법에 정확하게 문제를 제기했고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두고 하필 내란범이냐고 주장하는 이들은 미란다가 납치강간범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른바 국사범(國事犯)은 예외라고 주장하는 이들 역시, 윤석열이 하는 통치행위는 예외라는 주장과 뭐가 다른지 생각해야 한다.

 

윤석열 석방은 검찰 조직 보호 위한 극약 처방

윤석열 구속 취소라는 서울중앙지법 결정에 검찰이 즉시항고를 할 것이라고 많은 이가 예상했다. 이유는 검찰이 긴 세월 흔들림 없이 보여온 최우선의 논리, 즉 조직 보호 논리 때문이다. 조직을 위해서라면 검찰은 전직 검사장이든 누구든 살려두지 않았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검사가 기소돼 유죄를 받았고, 지난주에는 탄핵 파면도 면한 이정섭이 기소됐다. 따라서 파면을 눈앞에 두고 있는 전직 검찰총장에게 석방을 선물할 이유가 없었다.

심우정 검찰총장은 충청권 정치인 심대평의 자제로 그 자신도 정무 감각이 뛰어나다고 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그가 더는 조직을 보호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일 수 있다. 윤석열이 파면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검찰은 수사권 없는 기소청이 되는 것이 정해진 미래였다. 그렇다면 순리대로 즉시항고를 하는 것은 아무런 선택이 되지 못한다. 그 대신 윤석열을 풀어주고 새로운 정치적 상황을 기대하는 극약을 삼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심우정 검찰총장이 윤석열은 윤석열대로 풀어주면서, 조만간 즉시항고나 보통항고를 하면서 판례를 받아보겠다고 할 수도 있다(대법원 9726 결정 참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가진 최강의 권력 집단을 유지하는 고도의 정치적 방법이기에 하는 것이다. 앞으로 윤석열 이후에도 검찰청이 살아남는다면 제2의 윤석열에 이어, 3의 윤석열까지 등장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함께 보고 깨달았듯이 윤석열 이후의 헌법에 검찰청은 없어야만 한다.

이범준 | 뉴스타파 2025.03.10

 

체제 부수기와 체제 회복하기

부수는 건 쉽지만 다시 세우는 건 어렵다.” 최근에 자꾸 곱씹는 말이다. 미국에선 21세기 내내 제조업 일자리가 화두였다. 민주당 바이든 정권 4년간 국내 제조업 투자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나 반도체법 등에 의해 촉진돼 2024년에는 분기당 1500억달러까지 올라갔다. 오바마 정권 1기에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국내 제조업 투자가 주춤했지만, 2기에는 4년간 투자가 늘어났다. 고용 관점에서도 오바마 정권 8년간 100만명, 바이든 정권 4년간 70만명이 늘어났다. 투자와 고용 실적이 나쁘지 않았지만, ‘러스트 벨트로 대표되는 산업도시의 주민들은 정권심판론을 지지했고 도널드 트럼프를 뽑았다. 고용의 질은 인플레이션이나 산업전환이 주는 충격을 흡수하지 못했다.

 

신뢰부쉈다 복원하는 일 쉽지 않아

최근 공화당 트럼프 대통령 역시 1기부터 꾸준히 관세를 무기로 해외의 기업들에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 압박하지만, 공장을 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공급망 기업들은 대다수 해외에 있고, 미국에 공장을 짓더라도 원천기술은 본국에 귀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자동화와 로봇, 인공지능(AI) 생산방식을 채택한 공장에서 생산직 일자리의 질이 높기는 어렵다. 게다가 제조업을 경시하면서 보내온 20년 넘는 세월 동안 생산직에 필요한 기술교육부터 작업장 문화가 사라졌다. 다양한 플랫폼·서비스 노동을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는 시절에 지루하고 힘든공장일에 몰입하며 숙련을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DOGE(정부효율부)의 작업도 예시가 되리라. 20대 초반 해커들이 100년 넘게 쌓인 정부의 공공 데이터를 파괴하고, DOGE는 핵무기를 관리하는 담당자든, 공공보건 담당자든 손쉽게 아무 부서의 공무원 수만명을 해고하고 있다. 머스크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고, 이를 발견하면 컴퓨터 버그처럼 고치면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굴러갈 수 있는 정당성은 정책 방향과 국가 행정에 대한 신뢰일 텐데, 이를 부쉈다 복원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아차싶어서 복원하려면 데이터를 축적하고 인력을 양성했던 시간만큼의 투자는 물론이고 복원 불가능한 요소들도 끝없이 쏟아질 것이다.

트럼프는 관세전쟁을 시작하면서 관세를 질렀다가 유보하기를 반복한다. 미국 증시는 처음에는 관세 선포에 하락했다가 유보에 회복하는 국면을 2월 중에 보여줬는데, 이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불확실성때문에 본격적인 조정을 시작했다. 유럽, 중국, 아시아로 자금들이 차근차근 이전하고 있다. 정책의 불확실성이 임계치를 넘겨버리니 시장이 제어되지 않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윤의 3논란 정책 복원도 미지수

윤석열 정부 3년간 충분한 이해당사자 참여와 숙의 없이 대통령의 격노와 부처의 모르쇠로 진행된 정책들도 비슷한 양상이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2026년 의대 모집 인원을 기존 증원분을 백지화하고 원상복귀하겠다고 밝혔다. 1년 내내 의대생들이 휴학하고 전공의들이 사직했으나 정부는 입장의 일점일획도 바꾸지 않았다. 응급실부터 중환자실까지 힘에 부치는 대학병원과 공공의료체계는 망가지고 있다. 의대생과 전공의들은 필수의료정책 패키지 폐지 등을 제안하며 쉽게 돌아오지 않을 기세다. 내란 사태로 처단할 대상이었던 의료진과 감정적 간극을 좁히는 일도 쉽지 않다. 풀어야 했던 의대증원, 수가조정, 필수의료와 지방의료 논의를 앞으로 누가 꺼낼 수 있을까.

2024년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여파도 쉽게 복원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수많은 기초 연구가 중단되면서 기존 연구인력이 계약 해지되고, 대학원생이 입학을 포기하고, 남아 있는 연구자와 대학원생들은 연구비를 삭감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기술창업 역시 쪼그라들었다. 과학기술자들에게는 ‘R&D 카르텔이라는 오명도 씌웠다. 중국의 담대한 R&D 투자는 딥시크 쇼크를 안겼는데, 몇년의 실기로 한국은 ‘IT 강국이라는 칭호도 내려놓아야 할 지경이다. 다시 투자를 늘린다고 바로 복원될 수 있을까.

그런데 지금 한국인들은 어떻게 망가진 체제를 회복할지 고민을 시작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불확실성을 초래한 내란 사태부터 끝내야 경제와 보건의료체제를 복원할 생산적 논의를 시작이라도 할 수 있다. 다음 글부턴 회복을 위한 이야기를 더 심도 있게 토론할 수 있길 기원한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 경향 2025.03.10.

 

이재명이 압도적으로 이기려면

석방된 윤석열이 분분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지만, 어차피 강력한 이재명의 시간이 온다. 형사재판 절차상의 구속 취소와 위헌 여부를 다투는 탄핵심판은 완전 별개다. 비상계엄이 헌법상 실체적, 절차적 요건을 모두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윤석열은 복귀하지 못할 것이다. 그날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를 침탈하는 현장을 온 국민이 지켜봤다.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파면이외의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윤석열 탄핵으로 치러질 조기 대선의 절대 상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다. ‘이재명 대통령을 승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대선이 될 거란 얘기다. ‘자유의 몸이 된 윤석열은 이재명의 시간을 더욱 두텁게 해줄 존재다. 파면되어 옥중의 윤석열이 사라졌다면 온전히 이재명의 정치가 절대평가를 받게 됐을 것이다. ‘이재명이 집권하면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초반부터 검증받게 될 터였다. 그런데 감옥에서 풀려난 윤석열이 정치무대로 돌아오면서 이재명 저울이 희석될 판이다. 다시 혼군(昏君) 윤석열의 대척점으로 상대평가가 이뤄지면 이재명의 존재감은 커진다. 끝까지 두 사람은 적대적 공생이다.

석방된 윤석열은 외려 국민의힘과 보수에 계륵 같은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당장 탄핵심판 선고기일을 앞두고 임계점에 달한 진영 대결을 끓어넘치게 하는 뇌관이 될 수 있다.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이 나오면 불복을 선동해 광기 어린 혼란을 부추길 공산이 크다. 헌법재판소 최종변론에서도 승복의 자도 꺼내지 않았던 윤석열이다. 국민의힘도 탄핵 반대 때처럼 승복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있다. 탄핵심판 결정에도 불복할 경우 국민의힘은 반민주, 헌정 파괴 세력으로 각인될 것이다.

그끄제 마치 개선장군처럼 서울구치소를 나선 윤석열은 계엄 사태로 말 못할 고통을 겪는 국민은 안중에 없이 그의 애국시민만을 살뜰히 챙겼다. 이제 극우 세력, 아스팔트 보수의 우두머리를 자임하는 모양이다. 임박한 탄핵심판 선고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전략적 침묵을 하고 있지만, 윤석열은 자중하고 성찰할 사람이 아니다.

대선 국면이 열리면 윤석열은 파괴적으로 등장할 것이다. 극우와 강성 보수층의 분노 에너지를 무기 삼아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 적극 개입할 게 뻔하다. 탄핵 반대파 친윤주자를 국민의힘 후보로 밀어 올려 조기 대선을 그의 복수혈전 무대로 삼을 것이다. 그러면 민주주의 회복과 경제위기 극복의 경쟁이 되어야 할 대선이 분풀이난장판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탄핵의 강을 건너지 못하는 국민의힘이 윤석열 블랙홀에 빠질 건 필연이다. ‘윤석열과 거리가 먼 순으로, 중도 확장성이 큰 주자 순으로 경선에서 배척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렇게 윤석열과 국민의힘이 열심히 도와주고 있지만, 민주당과 이재명은 확실한 대세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계엄 사태와 탄핵 국면에서도 민주당은 국민의힘과 키재기 지지율을 보이고 있고, 이재명 지지율은 30% 초중반에 정체되어 있다. 격해진 정치 양극화, 첨예한 진영 대결 구도 속에서 양쪽의 지지층이 최대로 결집한 탓이기도 하지만 탄핵 찬성자 중에서 비이재명이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재명의 중도 보수선언과 일련의 감세 드라이브는 우선 ‘0.73%포인트를 보강하기 위한 전략일 터이다. 하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51 49의 피 흘리는 민주주의’(이광재)를 넘어설 수 없다.

지금의 극한 양극화의 구도에서 박빙으로 정권을 잡으면 반대 진영의 불복과 저항으로 상시적 내전 상태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정치적 내전 상태를 종식하고, 극우 세력의 준동을 꺾으려면 압도적 정권교체가 필요하다. 압도적 정권교체를 해야 안정적인 나라 운영을 기약할 수 있고, 제대로 된 사회대개혁을 추진할 동력이 생긴다.

압도적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이재명이 말하는 헌정수호연대를 압도적 다수로 만들어야 한다. 계엄에 반대하고 탄핵에 찬성한 연합세력의 폭을 최대로 넓혀야 가능하다. 넓은 연대를 위해서는 이재명의 자기 결단이 수반되어야 한다. 연합세력의 폭을 넓히면 거대 정당+이재명 대통령의 절대권력에 대한 중도층의 두려움도 불식할 수 있다.

지금 헌정수호연대의 반대편에서 가장 큰 동력은 윤석열과 결합한 극우 세력이다. ‘이재명의 실패는 극우 세력한테 정권을 넘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극우가 집권하는 상황,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양권모 칼럼니스트 | 경향 2025.03.10.

 

 

행정통합이 아니라 읍면 자치를

작년 123일 이후 워낙 충격적인 일들이 많다 보니 국가적인 뉴스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추진되고 있다. 김태흠 충남도지사와 이장우 대전시장이 충남과 대전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20266월까지 통합을 완료하겠다는데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고 추진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구와 경북도 통합을 추진한다고 한다. 그러나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통합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크다. 통합이 되면 경북 북부지역은 더욱 소외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 것이다. 전북에서는 전주시와 완주군의 통합 문제로 논란이 크다. 완주군의회가 반대하는 등 완주 쪽에서는 반대 의견이 강한데 전북도와 전주시가 밀어붙이는 모양새이다.

이렇게 행정통합을 밀어붙이는 명분은 수도권 일극 집중 대응이다. 수도권 일극 집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몸집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구·경북이 통합한다고 해서 수도권 일극 집중이 완화될까? 대구·경북으로 수도권 인구가 유입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입증되었다. 2010년 마산·창원·진해를 통합했지만, 통합 당시 108만명을 넘었던 인구는 202412100만명 이하로 떨어졌다. 이는 통합이 인구 감소에 대한 대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통합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 중소도시에서 지방 대도시로의 인구 이동만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지금 수도권 일극 집중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적극적인 분산정책이다. 수도권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면서 비수도권에서 전기를 끌어갈 게 아니라, 사람과 기업이 전기가 있는 비수도권 지역으로 오게 해야 한다. 시도지사들이 정말 수도권 일극 집중 체제에 문제 제기를 하겠다면 그런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획기적인 지방분권이다. 권력이 서울에 있으니 돈도 쏠리고 사람도 쏠리는 것이다. 중앙집권적인 국가 시스템은 지역 간 서열을 만들었다. 모든 것은 수도권에 편리하도록 배치됐다. 전기는 수도권으로 보내고 폐기물은 농촌으로 보내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구조를 그대로 두고 행정통합만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 지금은 행정통합을 논의할 때가 아니라, 중앙집권적인 국가구조를 지방분권적인 구조로 전면 개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방분권 개헌도 필요하고 지방분권과 지방자치 관련 법률들을 다시 손보는 것도 필요하다. 지역의 자치입법권, 재정자율권, 자주조직권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또한 중앙정부의 권한을 시도로 분산시키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시도의 권한을 시군구로 분산시키고, 읍면으로 분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역주민들이 생활상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장이 마음대로 권한과 재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의사결정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특히 농촌 지역의 경우에는 읍면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것이 절실한 과제이다. 국토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읍면은 군청·시청의 하부행정조직으로 되어 있다. 19615·16 쿠데타 이후 읍면의 자치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는 읍면이 기초지방자치단체였고, 읍면장과 읍면의회도 주민들이 직접 뽑았다. 그런데 5·16 쿠데타 이후 지금까지 읍장·면장은 기초지방자치단체장이 임명하는 임명직으로 되어 있다. 읍면사무소에는 자율적으로 쓸 수 있는 예산도 거의 없고 권한도 미약하다.

그러나 여전히 농촌에서는 읍면 정도의 규모가 생활권이다. 농촌이 활력을 되찾으려면 읍면 주민들이 자치권을 갖고 지역의 의료·교육·경제·돌봄·교통·문화 등을 개선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읍면이 활력을 찾아야 그 지역의 중소도시와 지방 대도시도 활력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읍면이 살아야 대한민국도 산다. 지금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극심한 출산율 저하는 수도권 일극 집중 체제가 낳은 결과물이기도 하다. 전국 17개 시도 중에서 합계출산율이 가장 낮은 곳은 서울이다. 수도권이 비수도권 인구를 빨아들였으나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삶이 팍팍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과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읍면의 자치권부터 보장하는 것이고, 효과도 의심스러운 행정통합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수도권 지역이 중앙정부와 정치권에 대해 획기적인 지역 분산 정책과 지방분권을 공동으로 요구해 나가는 것이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 경향 2025.03.10.

 

왜 진보는 대기업 정규직만 챙기는가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 2년 전에 나온 어느 최고급 아파트의 분양 광고 문구다. 이 광고엔 천민자본주의’ ‘물질 만능주의라는 비판이 쏟아졌다지만, 그런 비판을 한 사람들은 언제나 평등한 세상을 원한다는 것인지 그게 궁금하다.

미국의 진보적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에릭 호퍼는 우리는 주로 자신이 우위에 설 희망이 없는 문제에서 평등을 주장한다고 했다. “누군가가 절대적 평등을 내세우는 분야는 자신이 절실히 원하지만 가질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공산주의자란 좌절한 자본주의자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사회학자 라우라 비스뵈크는 <내 안의 차별주의자: 보통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이란 책에서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등을 원하지 않는다스스로의 개방성관용점수를 엄청나게 높게 주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렇다고 믿기에 더욱 상대와 나를 구분하고 경계 지으려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평등을 강조하지 말자거나 불평등에 대해 너그러워지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평등을 지향하는 정책이 시작 단계에서부터 환영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종국엔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되는 현실에 대해 냉정한 이해를 해보자는 뜻이다. 그래야 입으로만 지지하는 평등에 대한 위선과 기만을 걷어내고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평등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10년 전에 출간한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갑질공화국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개천에서 용 나는모델은 개천(특히 지방)의 모든 자원, 특히 심리적 자원을 탕진할 뿐만 아니라 전 국민으로 하여금 개인과 가족 차원에서 용이 되기 위한 각자도생에 몰두하게 만든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이 모델을 깨지 않는 한 지금의 과도한 지역 간 격차, 학력·학벌 임금격차, 정규직·비정규직 격차와 그에 따른 갑질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정도의 주장엔 대부분 공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의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는 말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책은 심지어 불온서적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미 6년 전에 낸 책에 소개한 에피소드를 재활용하는 걸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내가 매주 하던 글쓰기 특강수업을 듣던 학생이 쓴 글인데 읽다가 웃음을 빵 터뜨릴 정도로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 다시 소개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여야, 민생은 없고 부자 감세 협치

나는 택시 아저씨의 좋은 이야기 동무다. 아마도 다른 사람 말을 들을 때,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버릇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택시 아저씨는 학교를 가는 길에 저기 풀밭에 핀 꽃의 이름을 아느냐부터, ‘우리는 저것을 먹고 자랐다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택시 아저씨는 피곤함이 가득한 젊은 친구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힘을 내라고 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이 화근이 되었다.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라는 책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이를 응원하던 아저씨는 책 표지를 보시고는 불온서적을 보듯 화를 내셨다. 아니, ‘젊은 사람이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아저씨는 자신의 성공한 친구들부터, 친척의 친척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지, 자네 학생인가?’ ‘아니요. 졸업했어요.’ ‘그럼 학교를 왜 가차마 이 책의 저자가 하는 강의를 듣는다고 말은 못했다. 강의실까지 쫓아오실까 봐.”

이 에피소드가 시사하듯이,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는 말을 계층 이동에 반대하는 주장 비슷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왜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모두 다 개천에서 용 나는 세상을 예찬하면서 그걸 정치적 슬로건으로까지 이용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개혁 대상의 범주를 정하는 일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011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의 슬로건은 “1% 99% 사회” “우리는 99%” “탐욕스러운 기업과 부자에게 세금을!” 등이었다. 이 시위는 전 세계로 번져 나갔고, 한국에서도 “1%에 맞서는 99% 분노” “1%에게 세금을, 99%에게 복지를등과 같은 슬로건을 내세운 시위가 벌어졌다.

 

그런데 과연 ‘1% 99% 사회라는 프레임은 옳은가?

‘1% 99% 사회프레임의 폐해

영국 출신 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리브스의 <20 80의 사회>는 이 프레임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다. 리브스는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에 참여한 사람 중 3분의 1 이상이 연 소득 10만달러가 넘었다는 점, 그리고 20151월 말 오바마 행정부의 세제 개혁안이 당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였던 낸시 펠로시 등의 강력한 반대로 죽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 세제 개혁안은 상위 20%에 속하는 중상류층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민주당 내에서 강경한 진보 노선을 걸어온 펠로시가 그랬다는 게 흥미롭다. 그런데 상위 20%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최상위 1%만 문제 삼는 것으로 극심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미국보다는 오히려 한국에 더 절박하다. <불평등의 세대>의 저자인 서강대 교수 이철승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 우리 사회는 정규직 노조와 자본이 연대해서 하청과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여야는 늘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싸우지만, 한겨레의 이틀 전 사설 제목처럼 민생은 온데간데없고 고소득층 감세 협치하는 여야가 아닌가.

더 평등지향적이어야 할 민주당은 미국 민주당의 “1% 99% 사회노선을 흉내 내고 있다. 1%만 문제 삼으면서 20%에 속하는 대기업 정규직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일에 여념이 없다. 민주당이 진보적 정책인 것처럼 추진했거나 추진하려 하는 최저임금제, 52시간제, 4일제 등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미 4년 전 진보적 정치경제학자인 홍기빈은 경향신문에 기고한 4일제와 정규직 중심주의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52시간 노동도, 최저임금도, 심지어 작업장 안전조차 일률적으로 감시와 규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작업장이 허다한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그 혜택이 제대로 갈 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각종 불안정 노동자,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 등에게는 완전히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삶의 불편과 상대적 박탈감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결국 은행, 관공서, 공기업, 대기업, 대학과 학교 등 정규적 작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이 돌아가겠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돌아가는 혜택이 극히 불균등하거나 전혀 없거나 오히려 벼락거지가 되는 허탈함만 나타날 것이다.”

홍기빈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주로 상위 20%를 더욱 윤택하게 해주는 것들과연 진보적인 사회 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며 “‘4일제제안은 우리의 현실을 도외시한 채 유럽이나 서구의 진보정책을 그대로 가져와 쿨하게보이는 데에 집착하는 우리 진보 진영의 버릇이 나타난 예라고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최저임금도 못 받는 노동자가 300만명을 돌파했다는 통계가 나왔으면, 그 통계를 검증해보면서 최저임금제의 최대 수혜자가 과연 누구인지 그걸 따져보는 열띤 논의가 있어야 했건만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영업자들이 평균 19000만원대의 빚을 지고 있다는데, 이들도 자본가라는 이유로 외면하는가? 하긴 자영업자는 죽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게 한국형 진보의 특성이긴 하다.

대기업 정규직만 챙기는 진보도 진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묘한 건 진보 진영은 이런 문제 제기를 하면 과거 보수 세력이 써먹었던 색깔론으로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노동귀족이란 말은 마르크스의 친구 엥겔스가 노동자 계급 내부의 특권층을 지적하기 위해 쓴 말이건만, 한국에선 이 말을 쓰면 반노조의식에 찌든 수구꼴통이나 극우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상위 20%의 기득권은 사실상 진보적 소통 채널마저 장악하고 있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걸 어렵게 만든다. 이게 바로 ‘1 99의 사회프레임의 산물이기도 하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 경향 2025.03.11.

 

중국은 부동산 잡고 첨단 AI로 가는데, 우리는?

첨단 기술로 성장동력 옮기는 중국

최근 중국이 강력한 내수 진작책을 발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 정부가 올해 재정적자 목표를 국내총생산(GDP)4%까지 잡고 돈을 풀어 내수를 활성화하겠다고 한다. 인공지능(AI) 등 과학기술 연구개발(R&D)에 투입하는 예산은 작년보다 10% 늘렸다. 이것을 미국의 관세 압박으로 수세에 몰린 중국이 어쩔 수 없이 내놓은 대응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장기적 국가 발전 전략에 의거한 산업 고도화의 방향 제시로 볼 것인가? 한국 언론은 대부분 전자를 강조한다.

 

, 역대급 돈풀기가 수출 조이자 "내수로 버틸 것"(25.03.05 한국경제)

"뒷배 봐줄 테니 무조건 따라잡아라", 기업에 성장 맡기고 부채줄이기 총력(25.03.03 매일경제)

, 올해도 5% 성장 향해 달린다돈 풀어 내수 진작 총력전(25.03.05 조선일보)

"제재 폭격 맞을라" 외국인 투자, 3년 만에 77분의1 토막(25.02.23 조선일보)

부동산 기업은 없었다6년 전과 다른 시진핑 민간기업 좌담회(25.02.18 경향신문)

 

<한국경제>는 중국의 내수 진작책을 트럼프의 '관세 폭격'에 맞서기 위한 위기 타개책으로 바라봤다. <매일경제>도 중국 정부가 위기관리에 나섰다고 해석했다. "유효 수요 부족과 부동산 시장 침체에 따른 내수 부진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무역분쟁까지 고조"되어 중국 경제에 대한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달 <조선일보>는 지난해 중국으로 들어온 외국인직접투자(FDI)45억 달러에 불과해 1992년 이래 가장 적은 액수였고, 외자 기업들이 중국에서 줄줄이 철수했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그리고 35일에는 올해 중국이 경제성장률 목표를 '5% 안팎'으로 설정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시장 예상치와 일치한다"고 담담하게 보도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민영기업 좌담회에 관한 <경향신문> 보도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다. 2018년 좌담회에 부동산 개발 기업 대표들이 참석했던 반면 올해 좌담회에는 첨단 제조업과 플랫폼 기업, 지방 농식품 기업들이 초청됐다는 점을 짚었다. 그러면서 "중국 당국은 지난해 부동산 시장 침체가 경기 침체의 결정적 원인이었지만 부동산 부양을 끝까지 피했는데, 향후에도 정책 기조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에는 미국 주류 언론의 보도를 예로 들어보자.

Why It’s So Hard for China to Fix its Ailing Economy(24.09.03 New York Times)

China’s Economy Is Burdened by Years of Excess. Here’s How Bad It Really Is(25.01.01 Wall Street Journal)

China's home prices to drop further, recovery not expected until 2026: Reuters poll(25.02.25 Reuter)

China’s Tech Sector May Rival Property as Growth Driver, BE Says(24.03.25 Bloomberg)

 

지난해 9<뉴욕타임스>는 중국이 부동산 붕괴로 소비자 심리가 위축되고 기업도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중국은 경제개방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한 올해 초 <월스트리트저널>은 중국 경제가 '과잉'이라는 부담을 안고 있다고 진단했다. 여기서 '과잉'이란 과도한 부채, 제조업 과잉생산. 주택 과잉 공급을 가리킨다. 사상 최대의 부동산 거품이 꺼지는 바람에 중국의 가계 자산 18조 달러가 날아갔고, 세계 경제 규모 2위인 중국의 고성장은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 <월스트리트저널>의 분석이다.

<로이터>10명의 애널리스트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를 보도했다. 중국의 주택가격은 2025년에 2.5% 하락이 예상되고, 2026년에는 상승으로 돌아서지만 성장 속도는 느릴 것이라는 내용이다. 로이터가 설문한 애널리스트들에 따르면 중국의 부동산 시장은 여전히 수요가 약하고 회복이 더디다.

이 모든 보도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중국의 부동산 침체에 따른 내수 부진은 현실이고, 미국과의 관세 전쟁에 대비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보도만으로는 중국 부동산시장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중국 경제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가 어렵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체적인 그림은 중국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부동산 거품을 뺐다는 것이다. 나아가 경제의 주된 성장동력을 부동산에서 첨단기술 산업으로 전환하려 한다는 것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부동산 투자는 중국 경제 성장의 엔진 중 하나였다. 후진타오 시기(2003~2012)에 토지의 소유권과 사용권을 분리해 개인들이 주택을 소유할 수 있게 했고, 지방정부 소유의 땅은 사용권을 판매해서 지방정부 예산을 충당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주택 수요가 증가하자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은 고속 성장했지만 땅값은 올라가고 부동산 가격에는 거품이 잔뜩 끼면서 부동산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간의 격차가 심해졌다. 자동차와 전자 분야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들도 본업보다 부동산 투자로 많은 수익을 올렸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시나리오다.

2016년 말 시진핑 주석은 "집은 투기 대상이 아니라 거주하는 곳"이라고 선언했다. 2020년부터는 무분별한 레버리지 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3조홍선(三条红线)이라 불리는 엄격한 금융 규제 지침을 도입했다. 나중에는 지방정부로도 정책을 확대 시행했다.

그러자 중국의 부동산 시장은 빠른 속도로 냉각되었다. 2021년 말 중국 최대의 부동산 개발업체 헝다가 디폴트 사태를 맞이했고, 그 이후로도 중국 부동산 기업들이 속속 파산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해 말까지 개별 개발업체들을 구제하지 않았다. 기업, 지방정부, 개인이 강제로 충격을 분담하게 했다.

단순히 부동산 투기만 잡자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저임금 노동력을 대규모로 활용해 저가 상품을 만들어 팔던 전략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는 판단이 있었다.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전환하자는 목표가 세워지고, 첨단산업 주도의 '신질생산력(新质生产力)'이라는 키워드가 나왔다. 중국의 금융시스템도 방향을 전환했다. 부동산과 지방정부에 제공하던 대출을 줄이고 고부가가치 제조업과 신재생에너지 산업에 제공하는 대출을 늘렸다.

 

10년간 중국의 신축주택 가격 상승률(~20251월까지). 출처: 트레이딩 이코노믹스(Trading Economics)

지금도 일부 개발업체들은 현금 흐름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주택가격은 반등의 징조가 없다. 트레이딩 이코노믹스(Trading Economics) 웹사이트에 따르면 중국의 신축주택 가격은 20225월부터 전년 대비 마이너스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2024년 말과 2025년 초에도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전체 주거용 부동산 가격도 비슷한 흐름을 보인다. 말로만 듣던 '부동산 거품 빼기'가 실행된 모습이다.

거품 빼기에는 고통이 따랐다. 코로나 팬데믹 전 중국의 건설과 부동산 부문은 연관 투자와 서비스를 다 합쳐 중국 GDP25% 이상을 차지했으며, 가계 자산의 70~80퍼센트가 부동산으로 이뤄져 있었다. 부동산 시장 구조조정이 시작되자 중국 경제는 소비 침체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대내외적 요인으로 외국인직접투자가 감소했다. 여기에 코로나 봉쇄까지 겹치면서 중국의 양적 성장은 주춤해졌다. 2021년 중국의 GDP는 미국 GDP77%였지만 2024년에는 미국 GDP64%로 바뀌었다. 영미권의 학계와 언론은 중국의 국력이 정점에 달했다는 뜻의 '피크 차이나(Peak China)'라는 말을 자주 썼다. 미국의 바이든 전 대통령은 중국 경제를 가리켜 '시한폭탄(time bomb)'이라 부르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부동산 규제를 도입한 이후의 상황을 얼마나 정밀하게 예측했는지, 얼마나 대응을 잘 했는지를 외부에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GDP 성장률은? 부동산 침체 때문에 5% 성장에 머물렀다고 볼 수도 있지만, 부동산 부문이 침체된 가운데서도 최근 2년간 5%씩 성장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제조업 생산이 증가했으며, 신산업으로 분류되는 부문이 2017년부터 2023년까지 매년 10.2% 성장했다.

 

2017년에는 중국의 부동산 부문이 GDP25% 정도 기여했지만, 그 기여도가 점점 낮아져서 2023년에는 20% 아래로 내려왔다. 반면 첨단기술(High-tech) 산업의 기여도는 높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Bloomberg Economics

지난해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중국의 첨단산업 부문이 훨씬 중요한 성장동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6년에는 첨단 기술 산업이 중국 GDP19%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중국 경제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피크'가 아니라 '전환'이어야 할 것 같다.

부동산 경착륙 조짐이 보이자 중국 당국은 몇 차례 대책을 내놓고 규제도 해제했다. 지방정부와 국영 부동산 개발사를 통해 미분양 주택과 유휴용지를 매입하는 등 시장 개입도 하고 있다. 하지만 서방 언론과 부동산 업계가 기대하던 '부동산 부양책'은 아니다. 다시 부동산 거품을 일으킬 생각은 없는 것이다. 지난해 7, 중국 당국은 "새로운 부동산 정책"을 시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과거 '고부채·고회전·고레버리지' 모델의 폐단을 없애고 인민의 기대를 충족할 수 있는 좋은 집을 제공"하겠다고도 했다. '고부채'는 곧 영끌이고 '고레버리지'는 고위험 투자가 아니겠는가? 중국 정부는 부동산 시장에서 과도한 대출과 투기가 재발하지 않도록 시스템 자체를 개혁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하겠다는 내수 진작도 한국처럼 특례대출로 돈을 푸는 방식이 아니라 "저소득층의 소득을 늘리고 중산층 규모를 확대"함으로써 소비자 수요를 늘린다는 것이다. 우리도 참고할 지점이 있지 않을까.

중국 경제에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채 문제, 부동산 침체, 청년 실업, 고령화, 무역 전쟁 등의 구조적 어려움은 당연히 존재한다. 또 첨단산업의 성장이 빠르긴 하지만 첨단산업이 중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크지 않다. 그래서 5% 성장률 목표를 안정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재정정책으로 돈을 푸는 카드를 꺼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 경제를 이야기할 때는 장기적 성장 모델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과도한 비관론은 과거에도 여러 번 틀렸고, 현재의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부동산에 올인하는 나라에서 첨단기술 혁신이 활발하게 일어나기는 어렵다. 반대로 부동산 거품을 잡고 나면 생산적인 산업이 발달하기 좋은 조건이 만들어진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의 딥시크 충격과 중국의 부동산 거품빼기는 서로 별개의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중국 정부가 부동산을 잡은 방법을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국이 첨단산업 경쟁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이는 사이에, 한국은 정부의 주요 정책이나 개인들의 역량이 여전히 건설과 부동산에 많이 투입되고 있어서 안타깝다. 지금처럼 '내수'가 건설과 부동산에 의존하고 자산경제가 생산 경제를 압도하는 구조가 유지된다면 한국 경제의 앞날은 밝을 수가 없다.

안진이 더삶 대표 | 프레시안 2025.03.11.

 

‘7세 고시의 나라

말이 죽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관계자들은 의논한다.

안장을 바꾸자. 채찍을 더 휘둘러야 한다. 사료에 문제가 있던 것 같다. 기수를 교체하자. 달리는 속도를 더 내도록 연구하는 회의를 열자. 전담반을 편성해서 그간의 문제점을 끌어모아 분석하자. 새 훈련 프로그램을 설계하자. 과연 그게 통할까? 이름이 문제다. 앞으로 이 말을 전략적 유니콘이라 부르기로 하고 다시 시작하자.

죽은 말 이론’. 미국 다코타 인디언들 사이에 세대를 거쳐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비롯했다. 말이 죽은 것을 확인했으면 기수는 내려서야 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맞다. 매몰비용이 두렵고, 아무도 어려운 선택을 하지 않으려 할 때 위처럼 그럴듯한 회피 행동이 나타난다. 개인이나 조직 모두 그렇다. 풍자가 현실로 드러날 때 우리네 삶은 괴이하게 변하고 만다.

꼭 한달 전. 한국방송(KBS) ‘추적 60이 방영한 ‘7세 고시를 시청했다. 아직 그 충격파가 가시지 않는다. 영어와 수학에서 가장 실력 있는 유아를 선발하는 학원, 그곳에 입원시키고자 애쓰는 부모들의 모습이 영상에 담겨 있다.

한 수학학원의 7세 어린이 선발 시험문제를 서울대 재학생들에게 풀어보도록 하니 아주 까다롭다. 어느 특목고 시험문제냐?”고 반문했다. 프로그램 끝자락에 이런 연구 결과도 소개됐다. 월평균 사교육비 지출 1% 증가 시 합계출산율 최대 0.3% 감소. 사교육 시장의 돈벌이 수법과 부모의 불안이 결합하여 영유아, 어린이들의 정신을 학대하고 있다. 취학아동 감소 탓에 공교육 교실은 비어가는데, 도를 넘어선 경쟁으로 소아·청소년 정신의학과 대기자 명단은 길어만 간다.

교육에서의 공정한 선발 제도는 이미 죽었다. 1994년 수학능력시험 도입 이후 지금까지 16차례나 큰 폭으로 제도를 개편했다. 수능 전 영역 등급제, 수시 모집 횟수 제한, 선택형 수능, 영어 절대평가 시행 등 그 용어조차 아득하다. 죽은 말 등에서 이젠 내려서야 한다.

일부에서는 나라 밖의 시험제도 도입에 관심이 많다. 최근에는 국제 바칼로레아’(IB) 방식을 들여와서 시행하는 공교육 학교들이 늘고 있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대입 시험은 논술형이다. ‘역사는 인간에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 오는 것인가?’ ‘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이런 질문을 받고 자기 생각을 서술해야 한다. 70만명의 응시생 답안지를 놓고 채점관 17만명이 평가한다. 비용만 해도 15억유로, 23700억원 넘게 든다. 국제 바칼로레아는 이 같은 평가 방식을 여러 나라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응용하여 조정한 시험 체제다. 본래는 글로벌 기업의 근무자나 외교관 부모를 따라 여러 나라를 이동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에게 안정적 교육과정을 제공해주기 위해 탄생했다.

우리나라에 국제 바칼로레아 교육과정을 들여오는 행동이 죽은 말을 살리려는 헛된 전략이 될지, 아니면 진짜 새로운 말을 사 온 정책이 될지 아직 판가름하기는 이르다. 발 빠른 사교육 시장은 이미 새로운 말로 바꿔타기 위한 대처 능력을 키우고 있다. ‘바칼로레아 초등 논술혁명 중급’ ‘프랑스 바칼로레아 출신 선생님들이 새롭게 론칭한 교재!’ 같은 광고를 쉽게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1996~1999년 런던국제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할 때 국제 바칼로레아 과정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다.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고 시험 그 자체만 볼 때 상당히 좋은 평가 체제라 여긴다. 다만 이 제도를 그대로 특정한 나라의 공교육에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자신들의 입시제도와 국제 바칼로레아 체제 사이의 차이점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독일 아비투어, 프랑스 바칼로레아, 영국 에이(A)레벨 시험 모두 주관식으로 치러지므로 몇가지 시험제도 가운데 자기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면 되기 때문이다.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케이(K)-대입시험디자인을 시도해보자. 국제 바칼로레아 교육과정과 시험 체제 역시 그 같은 작업에 필요한 참조 자료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미래 세대를 위해 살아 있는 튼튼한 말을 전해주려면 조금 긴밀한 논의와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병곤 | 건신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 한겨레 2025.03.12.

 

민주당은 어쩌다 감세당이 되었나

10년 전인 2015년 초, 연말정산 파동이 일어났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근로소득세의 여러 소득공제를 손보아 역진성을 개선하는 세제개혁을 단행했다. 다자녀 또는 1인 가구에 세금이 늘어나는 일부 틈새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근로소득세의 오래된 문제였던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전환해 주로 상위계층이 누진적으로 세금을 더 내는 증세 개혁이었다. 그런데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이 틈새를 부풀리며 증세 개편을 ‘13월의 세금폭탄으로 몰아갔다. 상대편의 정책은 부정적으로만 보려는 진영논리가 낳은 대립 구도였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정당이 세금폭탄단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했고, ‘한겨레21’고소득층이 세금폭탄 논란주도했다며 세금폭탄론이 지닌 계층적 성격을 꼬집었다.

연말정산 개혁처럼, 박근혜 정부는 보수정당이지만 증세를 추진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부자감세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고 세수 부족에도 대응해야 했기에, 소득세 최고세율도 올리고 담뱃세도 대폭 인상했으며 과세행정 역시 강화했다. 사회적 압력이 작동한 결과이지만 박근혜 정부에서도 증세가 이루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보통 민주당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증세정당으로 인식됐다. 2008년 이후 이명박 정부의 부자감세를 규탄하며 줄곧 부자증세를 강조해왔다. 특히 촛불혁명의 성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서 담대한 조세개혁이 기대되었다. 문재인 정부 역시 나라를 나라답게를 공약집 제목으로 내걸었고, 앞으로 “100년을 이어갈 재정정책 개혁의 로드맵을 수립하겠다며 재정개혁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증세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포용적 복지국가를 이루기 위한 증세 종합전략이 추진되리라는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무엇보다 자산불평등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종합부동산세를 노무현 정부 수준으로 원상회복해야 했지만 변화는 미약했다. 법인세도 최고세율은 인상했지만 적용 대상을 더 넓혔어야 했고, 소득세도 극소수에 적용되는 최고세율 구간은 신설했지만 수많은 소득공제들은 그대로 놔두었다. 결국 임기 말 부동산 가격 폭등 사태를 맞아 뒤늦게 종합부동산세를 올렸으나 사후약방문이었다. 시민들이 기대했던 담대한 조세개혁 없이 촛불정부 5년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지난 대선이 시작할 때까지,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역대 민주당 정치인 중에 가장 강력한 증세론자로 불릴 만했다. 대선 운동 초반, 이재명 후보는 전 국민 기본소득을 주창했고, 이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은 탄소세와 국토보유세를 도입해 마련하겠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대선일이 다가오고 국토보유세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이 후보는 국민이 반대하면 하지 않는다며 물러났다. 대선 공약집에도 100만원 전 국민 기본소득은 남았지만 국토보유세 단어는 사라지고 토지이익배당이라는 애매한 용어가 재원 자리를 차지했다. 공시가격 현실화에 따른 과세부담 완화, 일시적 2주택자 종합부동산세 구제, 취득세 인하 등 부동산 세제를 약화하는 공약도 담겼다.

대선 패배 이후 이 대표는 증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제 기본소득에 대한 언급은 듣기 어려워졌고, 거꾸로 감세를 강조하는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부동산 폭등 사태를 맞아 자산가격 상승에 적극 세금을 부과해야 하건만, 오히려 종합부동산세 인하 대열에 합류했다. 주식투자 이익이 5000만원을 넘어야만 적용되는 금융투자소득세도 폐지했다. 최근에는 상속세 완화, 근로소득세 공제 확대 등 감세 행보가 더욱 거침없다. 이 대표가 ‘K엔비디아논란에서 세금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를 제시한 것도 감세론의 연장으로 이해된다. 현재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로또같은 사례를 들며 세금의 뿌리까지 흔들었다는 점에서 감세론자의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10년 전인 2015년 초, 연말정산 파동이 일어났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근로소득세의 여러 소득공제를 손보아 역진성을 개선하는 세제개혁을 단행했다. 다자녀 또는 1인 가구에 세금이 늘어나는 일부 틈새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근로소득세의 오래된 문제였던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전환해 주로 상위계층이 누진적으로 세금을 더 내는 증세 개혁이었다. 그런데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이 틈새를 부풀리며 증세 개편을 ‘13월의 세금폭탄으로 몰아갔다. 상대편의 정책은 부정적으로만 보려는 진영논리가 낳은 대립 구도였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정당이 세금폭탄단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했고, ‘한겨레21’고소득층이 세금폭탄 논란주도했다며 세금폭탄론이 지닌 계층적 성격을 꼬집었다.

연말정산 개혁처럼, 박근혜 정부는 보수정당이지만 증세를 추진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부자감세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고 세수 부족에도 대응해야 했기에, 소득세 최고세율도 올리고 담뱃세도 대폭 인상했으며 과세행정 역시 강화했다. 사회적 압력이 작동한 결과이지만 박근혜 정부에서도 증세가 이루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보통 민주당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증세정당으로 인식됐다. 2008년 이후 이명박 정부의 부자감세를 규탄하며 줄곧 부자증세를 강조해왔다. 특히 촛불혁명의 성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서 담대한 조세개혁이 기대되었다. 문재인 정부 역시 나라를 나라답게를 공약집 제목으로 내걸었고, 앞으로 “100년을 이어갈 재정정책 개혁의 로드맵을 수립하겠다며 재정개혁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증세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포용적 복지국가를 이루기 위한 증세 종합전략이 추진되리라는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무엇보다 자산불평등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종합부동산세를 노무현 정부 수준으로 원상회복해야 했지만 변화는 미약했다. 법인세도 최고세율은 인상했지만 적용 대상을 더 넓혔어야 했고, 소득세도 극소수에 적용되는 최고세율 구간은 신설했지만 수많은 소득공제들은 그대로 놔두었다. 결국 임기 말 부동산 가격 폭등 사태를 맞아 뒤늦게 종합부동산세를 올렸으나 사후약방문이었다. 시민들이 기대했던 담대한 조세개혁 없이 촛불정부 5년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지난 대선이 시작할 때까지,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역대 민주당 정치인 중에 가장 강력한 증세론자로 불릴 만했다. 대선 운동 초반, 이재명 후보는 전 국민 기본소득을 주창했고, 이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은 탄소세와 국토보유세를 도입해 마련하겠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대선일이 다가오고 국토보유세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이 후보는 국민이 반대하면 하지 않는다며 물러났다. 대선 공약집에도 100만원 전 국민 기본소득은 남았지만 국토보유세 단어는 사라지고 토지이익배당이라는 애매한 용어가 재원 자리를 차지했다. 공시가격 현실화에 따른 과세부담 완화, 일시적 2주택자 종합부동산세 구제, 취득세 인하 등 부동산 세제를 약화하는 공약도 담겼다.

대선 패배 이후 이 대표는 증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제 기본소득에 대한 언급은 듣기 어려워졌고, 거꾸로 감세를 강조하는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부동산 폭등 사태를 맞아 자산가격 상승에 적극 세금을 부과해야 하건만, 오히려 종합부동산세 인하 대열에 합류했다. 주식투자 이익이 5000만원을 넘어야만 적용되는 금융투자소득세도 폐지했다. 최근에는 상속세 완화, 근로소득세 공제 확대 등 감세 행보가 더욱 거침없다. 이 대표가 ‘K엔비디아논란에서 세금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를 제시한 것도 감세론의 연장으로 이해된다. 현재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로또같은 사례를 들며 세금의 뿌리까지 흔들었다는 점에서 감세론자의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국가가 지분을 가진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우리나라에 있다면 이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그러한 기업은 없고 그리 쉽게 생길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불평등이 고착화되고 부의 세습까지 공공연한 한국 사회에서 진정 민생을 챙기려면 강한 재정이 요구되고 조세부담률이 낮은 한국에선 힘들지만 꾸준한 증세가 이어져야 한다. 지금 집부자, 금융부자 챙기며 세금을 깎아주고 엔비디아 언급하며 면세를 합리화할 때가 아니다.

민주당이 어쩌다 감세정당이 되었을까? 왜 세금을 적게 내고 싶은 상위계층의 이해를 옹호하려 나설까? 무언가 변한 것이다. 피케티가 지적하듯이, 불평등 체제에 편승해 자신의 입지를 지키려는 기득권층의 정당으로 변신, 아니 전락하고 있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대표 | 경향 2025.03.12.

 

왜 부끄러움을 모를까? 진화론적 '윤석열 탐구

자기가 여전히 으뜸인 줄 아는 우두머리 수컷 침팬지 같았다. 석방된 윤석열 대통령은 구치소 앞을 당당히 걸으며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입을 앙다문 채 미소 짓는 특유의 꾸러기 표정이었다. 그는 간간이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환호를 끌어냈다. 비상계엄으로 나라를 대혼란에 몰아넣고, 국격을 추락시킨 내란 수괴치고는 너무나 태연하고 뻔뻔했다. 윤 대통령은 왜 전혀 부끄러움이 없을까? 온 국민이 내란 사태로 엄청난 정신적, 신체적, 경제적 손실을 입었음을 그는 정녕 알지 못하는 걸까?

우리말에서 부끄러움은 적어도 두 가지 정서를 아우른다. 먼저 이들을 구별하자. 첫째, ‘쑥스러움(embarrassment)’이다. 내가 던진 아재 개그에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으면 나는 어색하고 쑥스럽다. 둘째, ‘수치심(shame)’이다. 내가 공개석상에서 무심코 내뱉은 욕설을 수많은 청중이 들었다면 나는 괴롭고 수치스럽다. 그러니 이 글은 부끄러움의 두 번째 용법, 수치심에 대한 글이다. 왜 윤 대통령은 낯가죽이 두꺼워 수치심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수치심이 어떤 진화적 기능을 수행하게끔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정서인지 새겨서 이 의문에 답해보자.

인류가 진화한 먼 과거의 소규모 수렵·채집 사회에서 남들로부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수백만 년 전에는 의료보험도, 소액 생계비 대출도, 실직 수당도 없었다. 살다가 어느 때인가 크게 다치거나 중병을 앓거나 음식이 바닥나면 가족, 친구, 지인들로부터 긴급 구호를 받을 수 있는지가 생사를 판가름했다. , 내 가치를 떨어뜨리는 부정적 정보가 주변 사람들에게 퍼져나감을 잘 차단했던 진화적 조상이 다음 세대에 자손을 더 많이 남길 수 있었다.

진화심리학자 다니엘 스니저를 따르면, 수치심은 나에 대한 나쁜 정보가 남들에게 새어나가 그들의 마음속에서 내 평판이 떨어지는 사태를 막아주게끔 설계된 정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워왔음을 직장 동료들 앞에서 고백해야 한다고 하자. 당신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어깨가 축 늘어지고, 동료들의 시선을 피하게 된다. 수치심이 만드는 이러한 행동은 다른 동물에서 우위 개체에 혼난 열위 개체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때 취하는 행동이다. 말 그대로 몸을 작고 약하게 만들어 나는 네 밑이야. 이제 안 기어오를 테니 용서해줘라는 신호이다. 최근의 한 연구는 누군가의 부적절한 처신을 알게 된 청중은 그가 청중을 향해 눈을 마주칠 때보다 눈을 내리깔았을 때 분노가 한층 더 누그러지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주의 사항이 있다. 수치심은 내가 실제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가 아니라, 나에 대한 부정적 정보를 들은 집단 내 구성원들이 속으로 내 평판을 낮추었거나 낮추려고 할 때 생긴다. 내가 정말로 잘못을 했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결백할지언정, 소중한 지인들의 속마음에서 내 이름 위에 엑스 표가 크게 쳐졌다면 진화적 의미의 대참사는 이미 일어난 셈이다. 예컨대, 마약을 전혀 하지 않은 연예인도 마약 투약 혐의가 공개적으로 보도되면 심한 모멸과 수치심에 시달린다.

이제 윤 대통령이 별로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까닭을 추측해보자. 수치심은 당사자에 대한 부정적 정보가 새어나가 남들 사이에 그 사람의 평판이 하락하는 상황을 방지하게끔 진화한 정서라는 이론이 맞는다면, 당사자의 부적절한 행동을 보거나 듣는 청중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중요하다.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당사자와 청중의 관계에 따라 당사자의 평판이 떨어질 수도, 그대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청중에 오직 내 편만 있다면, 내가 부적절한 행동을 해도 그들의 마음에서 내 평판이 떨어질 가능성은 작다. 이를테면, 가족은 언제나 내 편이기에 집에선 잠깐 벌거벗어도 별로 수치심이 들지 않는다.

윤 대통령의 청중은 누구일까? 만약 윤 대통령이 부적절하게 처신하면 그에게 낮은 평점을 매길까 염려되어 살뜰히 챙겨야 하는 청중은 누구일까? 물론 계엄에 찬성하는 소위 애국 시민이다. 뭘 모르는 전체 국민은 계몽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화적 시각에서 우리는 윤 대통령이 언제 수치심을 느낄지 예측할 수 있다. 만약 재수감이 두려워서 계엄을 참회하고 반성하는 성명을 발표한다면, 그는 성난 애국 시민들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시선을 회피하는 행동을 할 것이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경향 2025.03.12.

 

인구 1천명당 CCTV 439베이징의 번쩍이는 밤거리

2005, 베이징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중국 곳곳을 1년간 쏘다녔더랬다.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니 기억 속 장소들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심지어 서우두국제공항에 내려 맡은 공기 속 독특한 향도 어딘가 익숙했다.

2025, 몇배는 커진 공항을 두리번거리니 곧 어지러웠다. 공항터미널 사이를 잇는 무인 열차의 창으로 쏟아진 햇빛은 얼굴을 달궜다. 어지러움과 열감에 혼미한 정신을 부여잡고, 출국장을 나와 곧장 스마트폰을 열었다. 미리 내려받아 둔 차량 호출 앱을 열어 주소를 찍고 차를 불러 숙소로 향했다. 도로엔 비야디, 지커 등 중국 전기차들이 씽씽 달리고 있었다.

지난달 중순 입국해 3주가 지나는 사이 쉼 없이 내뱉는 한마디가 생겼다. ‘20년 전에는’. 과거와 오늘의 중국을 자꾸 비교하는 나를 마주했다. 20년 전엔 있던 꼬깃꼬깃한 현금도, 헤이처(黑車·불법 영업 택시), 매연 뿜는 오래된 오토바이도 없는 베이징. 20년 지나 고급 쇼핑몰이 빼곡히 들어선 업무지구가, 온갖 물건을 단숨에 가져다주는 배달 앱이, 운전해보고 싶은 전기차가 즐비한 베이징. ‘라떼는을 내내 중얼거리는, 한때는 눈을 흘기고 봤던 그런 사람이 여기 있다.

중국의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지난 4~11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내수·부동산 경기 침체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뒤 이어진 관세 전쟁으로 안팎의 어려움에 부닥친 중국은 어떤 타개책을 내놓을 것인가, 내내 주시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입국 뒤 채 수습하지 못한 정신으로 양회 기간을 보내던 중,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타고 있던 공유 차량 바깥에 불빛이 깜박였다. 주기적이었다. 중국의 폐회로텔레비전(CCTV) 망이 촘촘하다는 소식은 익히 들었지만, 플래시까지 번쩍일 줄이야. 감시카메라가 많기로는 어디 밀리지 않는 나라에서 왔는데, 불빛은 깊이 각인됐다. 영국 기술 전문 매체 컴패리텍은 2023년 중국 관련 수치는 추정치인 점을 전제하며, 인구수 세계 상위 150위에 드는 중국 39개 도시의 인구 1000명당 공공 폐회로텔레비전 수는 439.07대라고 했다. 서울은 14.47대로 8위였다.

이번 양회에선 경제성장률 목표치(5%대로 제시)를 제외하곤 중국의 인공지능(AI) 관련 정책에 관심이 쏠렸다. 딥시크의 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중국은 국가 차원의 전폭적인 투자로 창의적인 인재와 기술을 키워 인공지능 굴기(우뚝 일어섬)를 이뤄내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중국 인공지능 기업이 수집하는 개인정보에 쏟아지는 세계의 의구심에도 답했다. 러우친젠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43차 회의 대변인은 중국은 법에 따라 데이터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고 말했다. 사회안전을 이유로 든 감시와 법에 따른 데이터 프라이버시 보호의 공존은 중국에서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까. 중국 경제에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인사들의 소셜미디어 계정이 차단됐다는 소식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거의 모든 게 스마트폰으로 가능한 편리한 일상과 거리 곳곳의 반짝이는 불편한 감시가 중국에 있다. 그게 중국의 전부는 아닐 터다. 편리와 불편에 갇히지 않고 중국과 그 안의 사람들을 향해 한발 더 깊이 내딛기로 한다. 20년 전처럼 쏘다닐 채비를 다시 해 본다.

이정연 | 베이징 특파원 | 한겨레 2025.03.13

 

스위스행 티켓 없이도 낭만적 죽음가능할까

늙고 병들면 구질구질하게 연명하지 않고 스위스로 갈 거야.”

최근 안락사·존엄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부쩍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실제로 늙고 병들면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할 거라는데 내 손가락을 건다고 맞받아친다. 물론 속으로만.

존엄사의 의미나 필요성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늙고’ ‘병들고’ ‘구질구질하고’ ‘연명하는 것에 대해 단 한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이 버튼 하나로 삶이 깔끔하게 마무리될 수 있다는 환상이 느껴져서다. 이미 수십년 동안 삶은 명쾌하지 않고 인생은 구질구질하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고 실천해 왔는데 어떻게 죽음만 깔끔할 수 있겠는가.

2018년 초 104살 오스트레일리아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전한 스위스에서의 죽음은 안락사, 즉 조력 사망에 대해 어느 정도 낭만적인 환상을 심어줬다. ‘제멋대로 늙어가기’(Ageing Disgracefully)라고 찍힌 티셔츠를 입고 이제 삶을 마감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하며 가족과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들으면서 맞이하는 죽음. 누군들 하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그 장면에 도달하기까지의 긴 고뇌는 짧은 기사에 담겨 있을 턱이 없으니 짐작하기 쉽지 않다.

말기 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와 함께 스위스로 간 남유하 작가의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에서는 조력 사망에 대한 훨씬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자살을 준비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의 시간, 조력 사망 단체에 신청서를 내고 반려되고 다시 내고 오십번 넘게 반복하면서 겨우 받을 수 있었던 그린 라이트’(조력사망 허가문서). 고민 끝에 결정한 디데이가 계속 뒤바뀔 수밖에 없었던 급박함. 서류 제출부터 비행기 표, 호텔 예약까지 엄마의 죽음에 조력해야 하는 딸의 슬픔과 그때 비가 안 왔더라면, 그때 걷지 말고 택시를 탔더라면, 다른 호텔을 잡았더라면, 마디마디 맺히는 후회. 엄마의 선택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가족과 친척들의 외면. 어디에서도 쾌적하고 깔끔한 죽음은 찾을 수 없다. 다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맞이했던 엄마의 의지에 대한 지지만이 있을 뿐이다.

여전히 많은 나라에서 의료적인 조력 사망이 여전히 불법인지라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의 한 방식으로 곡기를 스스로 끊는 단식 존엄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멀게는 헬렌 니어링의 자서전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나온 스콧 니어링의 마지막이 그랬고, 십여년 전 세상을 떠난 존경받던 재야의 인사도 암 투병을 하다 마지막에는 스스로 곡기를 끊는 것으로 삶을 마무리한 사실이 알려졌다. 두 인물의 면면을 보면 단식 존엄사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놀라운 결단과 의지라고 생각되지만 의외로 이런 경우가 아주 드물지는 않다고 한다. 대만의 의사가 쓴 단식 존엄사는 이를 결정한 팔순 노모의 삶과 마지막 순간까지를 딸로서, 의사로서 꼼꼼하게 기록한 책이다.

물론 맞이하는 죽음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단식 존엄사에서 눈길을 끄는 건 어떻게 곡기를 끊고 어떻게 육체가 죽음으로 들어가는지의 과정보다 훨씬 더 길고 포괄적인,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이다. 고통을 끝내기로 한 노모와 여기에 수긍한 저자는 가족들을 설득했고 노모는 유산을 비롯해 자신이 남긴 것들을 천천히 정리해 갔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마지막 정신이 흐려지기 전 온 가족이 모여 치른 생전 장례식, 즉 이별식이다. 무한한 날들이 있을 거라 믿고 오랫동안 묻지 않았으나 노모의 결정 뒤 남은 날을 헤아리며 구술 기록한 엄마(할머니)의 인생사가 펼쳐지고 당사자는 평생 침묵했던 감정을 털어놓기도 하며 함께 웃고 울면서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나눈다. 고인이 돼서 입관한 뒤에 장례식장에서 못다 한 말이 사무쳐 유족들이 통곡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이별이 아닌가.

어떻게 죽을까의 문제는 스위스냐 요양원이냐의 선택이 전부가 아니다. 긴 시간과 많은 고민이 필요하며 가족의 조력은 필수고 스스로의 실천이 필요한 과정이다. 아무런 준비가 없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 수 없고 우리는 결국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던 것처럼 울고불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당할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스위스 갈 돈을 모으기 전에 가족과 친구들과 죽음에 대해 더 자주 수다를 떨어보자. 죽음을 연습해 볼 수는 없으니 타인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책 읽기는 필수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 2025.03.13.

 

뉴라이트의 메타정치

지난 6일 독일 공영방송이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려다 취소했다. <인사이드 코리아: 중국과 북한 그늘 아래의 국가 위기>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는 지난달 25일 방송사 홈페이지에 미리 공개된 바 있다. 계엄을 옹호하는 극우 유튜버의 주장을 과도하게 담고 있다. 한국의 국가 위기에 미국·중국·북한 간의 권력 투쟁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보수 언론의 여론조사를 근거로 윤석열 지지가 51%, 반대가 47%라고 알렸다. 외교부가 손 놓고 있는 사이 일방적 주장에 대한 교민과 시민단체의 항의가 잇따랐다. 결국 방영을 취소하고 홈페이지에 올린 다큐멘터리도 삭제했다. 우발적 에피소드로 보기엔 찜찜하다. 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가 뉴라이트 세력의 초국적 연결망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엄혹한 현실을 노출했기 때문이다.

뉴라이트가 유럽에서 발흥한 역사는 꽤 길다. 시작은 1960년대 후반에 출현한 프랑스의 뉴라이트(Nouvelle Droite). 1970년대에 진지전을 우익화한 그람시 우파가 뉴라이트 운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의회 밖 사회운동과 같은 기동전이 아니라 상식에 공명하는 대항 헤게모니 형성을 통해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상과 문화적 가치 차원에서 장기적이고 심원한 변화를 추구하는 메타정치를 표방했다. 20세기 말까지 이탈리아(Nueva Destra)와 독일(Neue Rechte)을 비롯해 스페인·벨기에·이스라엘·러시아 등 여러 지역으로 확산한 뉴라이트는 모두 유사한 메타정치 전략을 채택했다. 출판물, 연구 집단, 콘퍼런스, 전선 조직, 온라인 플랫폼 네트워크를 망라한 초국적 연결망을 구축했다. 이러한 연결망은 1980년대 미국 우파에게로 확장돼 오늘날 트럼프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초국적 뉴라이트 연결망은 한결같이 보편적 정의, 평등, 인권이라는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에 반대한다. 뉴라이트가 볼 때 자유주의 엘리트는 세계화의 기치 아래 민족, 계급, 부족, 인종, 종교, 친족 등과 같은 전통적 정체성을 인간’ ‘인류’ ‘하나의 세계와 같은 보편적, 범세계적 정체성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뉴라이트는 이러한 정체성이 자유주의 제도를 장악한 엘리트의 이해관계를 고상하게 꾸민 허위의식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뉴라이트는 세계화가 야기한 경제적 뿌리뽑힘을 문화적 분노로 전환시키는 데 힘을 쏟는다. 다문화주의, 페미니즘, 국경 개방, 경제적 세계화를 만든 자유주의 가치와 제도가 서구 문명을 파멸의 길로 내몰았다고 비판한다. 개인의 도덕적 온전성의 뿌리가 되는 전통 가치와 제도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태곳적부터 존재해온 원형적 정체성을 되살려 자유주의 가치와 제도를 대체해야 한다.

한국도 뉴라이트의 초국적 연결망 안에 포섭된 지 꽤 오래됐다. 북한과 중국을 1948년에 건국된 신생국대한민국의 원형적 정체성을 훼손한 주적으로 간주한다. 대한민국을 미국·일본·이스라엘과 하나로 묶어 원형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전쟁을 벌인다. 학계에 뉴라이트 연결망을 구축하는 것을 넘어 역사 관련 중요 기관장에 뉴라이트 인물을 배치해 역사관을 바꾸기 위한 메타정치를 펼친다. 방송통신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를 장악해 여론을 조작하고 인권을 무력화하는 연결망을 구축한다. 진지 구축에 성공했다고 여기고 아예 국회를 점령하는 기동전을 펼친다. 이에 발맞춰 법원을 습격하고 헌법재판소를 위협한다. 메타정치에 물든 각료와 검찰은 물론 국민의힘까지 내란 동조에 나선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내란은 대한민국만의 일이 아니다. 초국적 뉴라이트 연결망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전 세계적 차원의 문제다. 대한민국이 꺾이면 세계의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진다. 헌법재판소는 어서 민주주의 문명의 준거인 헌법에 의지해 윤석열 내란 수괴를 파면하여 전 세계에 희망을 전파해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 경향 2025.03.13.

 

아이들을 실험용 쥐로 만드는 교육당국의 무책임함

3월 한 초등학교 교실. 교사는 각자 지급된 태블릿 PC로 학생들에게 영어 학습을 시켰다. 아이들은 각자 아는 만큼 자기 속도에 맞게 답을 누르고 기기가 알려주는 점수에 기뻐하거나 실망했다. 한 아이는 스마트폰 게임하듯 수업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다음 수업은 자신의 수준에 맞게 난이도가 조절된 질문에 답을 하는 식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AI 디지털교과서가 도입된 학급의 풍경이다.

올해 초중고등학교 일부 학년에 AI 디지털교과서가 처음 도입됐다. AI교과서는 종이 교과서를 디지털 기기에 옮겨놓은 기존 디지털교과서에 생성형 AI를 탑재한 것이다. 교육부는 이 도구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을 결합해 학생 맞춤형교육을 제공함으로써 학습 격차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교실에 학생 수만큼 보조교사가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학생과 학부모, 교사에게 실물을 보여주거나 의사를 확인한 적이 없지만 교육당국의 강력한 추진으로 전국 학교 가운데 3분의 1이나 채택했다.

AI교과서에 대한 반대론은, 그 길로 가는 게 불가피하지만 준비가 충분치 않다는 게 주류인 것 같다. 최신 기술이 신중하고 책임있게 쓰일 때 교육 현장을 돕는 유용한 자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향후 4년간 초중고 AI교과서 구독료로 수조원(국회 입법조사처)을 쓸 것으로 예상되는 이 사업은 그런 차원이 아닌 것 같다. 교육부가 학교 현장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의도로 추진하는 것이다.

기기나 시설·인건비, 전력 비용을 포함하면 재정 소요는 더 클 것이다. 고교 무상교육 예산이 삭감되느냐 마느냐 하는 현실에서 비용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건 그것이 바꿀 교육의 성격이다. 디지털 기기의 보급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기계를 통해 타인과 관계 맺거나 아예 관계를 맺지 않는 현실에서 교육마저 그렇게 이뤄진다면 심각하다.

 

문제는 학생들에게 생각할 시간, 여백을 갖게 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즉각 답을 얻어내는 데 교육의 주안점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교실로 돌아가면, 이 아이들은 더 이상 외국어 수업 특유의 텐션높은 선생님의 선창에 따라 읽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학생과 선생님이 눈을 맞추고 대화를 주고받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짝꿍과 시험지를 바꿔 채점해주며 때론 장난도 치는 즐거움도 사라질 것이다. 아이들은 각자 태블릿 속 교사와 대화하는 데 익숙해질 것이다. ‘맞춤형이란 명분하에 아이들은 점점 더 기계가 인도하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오윤주 교사는 녹색평론’ 2025년 봄호에 쓴 디지털교육이라는 신화에서 지금까지 학교 현장에서 도입된 기술들을 돌아보며 유용한 도구들이 있다 해도 그것은 수업을 일부 도울 뿐 배움의 총체적 맥락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교육은 학생과 교사, 학생과 학생의 전면적인 만남이다. 개인 맞춤형 질문과 답처럼 효율적이진 않아도, 교실에서 떠들고 노는 것처럼 보여도, 사회를 배우고 협력을 경험하며 때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이로움도 느끼는 것이 교육이다.

한국 사례는 너무도 큰 변화여서 세계 교육계도 놀라고 있다. 유네스코 글로벌교육모니터링(GEM) 보고서 작성팀은 지난 13일 한국의 AI교과서 도입 경과와 논란을 소개한 뒤 아무도 교육에서 실험용 쥐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 현실에서 다른 나라는 한국의 대담한 변화가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흥미롭게 지켜보면 된다고 했다.

졸지에 학생들을 실험용 쥐로 만든 이 무책임함은 어디서 왔을까. 입시 경쟁으로 왜곡된 교육 여건에서 팬데믹을 거치며 에듀테크기업들이 급성장한 것과 관계 있을 것이다. 공공성보다 효율성을 신봉하는 시장주의자 교육수장의 철학이 날개를 달아줬을 것이다. AI교과서 도입은 교육적 요구에서만 출발한 게 아니라 이로 인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될 사업적 맥락과 연관돼 있을 수 있다.

근저에는 AI 기술의 미래를 낙관만 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 무슨 일에든 “AI로 대체하면 어떻겠느냐는 반응이 쉽게 나오는 이 사회의 기술지배적 패러다임은 매우 강력하다. 이것은 모든 일에 경제적 효율성을 최우선시하는 논리다. 기술 도입의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이 필요하다고 한 적 없는 기술을 개발해 일방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민주적이지도 않다. 무엇보다 사회 불평등, 지역 격차 등과 복잡하게 얽힌 교육의 난제를 직시하기보다 기술이 만능열쇠처럼 일거에 해결해주리라는 믿음은 기술에 대한 신화일 뿐이다.

손제민 사회에디터 | 경향 2025.03.13.

 

윤석열은 지금 '반정치'의 질병을 잔뜩 퍼트리고 있다

정치'도 죽고 '법치'도 죽은 나라

지난주부터 이번 칼럼 주제로 써야지 하고 마음먹은 내용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7일 법원의 윤석열 구속취소 판결이 나오고 8일 실제로 내란 우두머리가 구치소에서 나오는 광경을 보고 나니 글을 쓸 의욕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당분간은, 이런 진창에서 동포와 함께 뒹구는 처지이면서도 마치 진창 밖에서 태연히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글은 쓸 수 없을 것 같다.

 

이렇게까지 심란해 할 일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재판과 법원의 형사 재판은 별개이고, 형사 재판만 하더라도 주범의 구속 여부는 최종 판결 방향과 별 관계가 없다. 내란 세력의 기세를 올려주려는 고도의 심리전에 이토록 쉽게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아도, 도무지 용납이 안 된다. 헌법을 짓밟으며 친위쿠데타를 저지른 반역자가 어떻게 자유로이 시민 곁을 활보할 수 있는가? 대통령이 광기를 내뿜으며 을러대니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하수인들은 여전히 감옥에 있는데 막상 이들을 범죄로 내몬 자는 풀려나다니,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이게 나라인가?

 

나라라고 할 수 없다. 나라라면, '정치'가 살아있고 '법치'가 통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도 죽고, '법치'도 죽었다. 우리는 지금 망국민 일보직전이다.

 

윤석열이 거부하고 파괴하려 한 것, 정치

지난 123일 이후 지금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 정국의 진실이 있다. 그것은 지금 주도권이 윤석열을 중심으로 한 내란 세력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내란 세력은 가장 넓은 의미의 윤석열 지지층까지 포함하더라도 결코 상대적 다수가 아니다.

 

그럼에도 주도권은 아직 저들의 손아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만큼 12. 3 친위쿠데타는 시간을 그 전과 후로 나누는 일대 '사건'이었다. 우선 형세부터가 그렇다. 사건을 일으킨 쪽은 내란 세력이고, 이를 진압한 다수 시민은 일단 저질러진 이 사건을 수습하는 쪽이다. 슬픈 진실이지만, 난동 상황에서는 난동꾼이 무대의 주인공이다. 난동꾼이 더는 어떤 짓도 못하게 제압되고 나서야 스포트라이트의 방향은 바뀌는 법이다.

 

게다가 친위쿠데타의 직접적 목표는 그날 밤 좌절됐지만, 그로 인한 효과는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 효과란 '정치'의 폭력적 중단이다. 윤석열은 위헌-위법적 비상계엄을 통해 정치의 주된 제도적 무대인 국회, 지방의회, 정당을 모두 활동 정지시키려 했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기관들인 언론과 노동조합, 시민단체까지 손보려 했다. 윤석열은 '정치 없는 세계', 즉 정치는 사라지고 통치만 있는 세계를 만들려 했다.

 

여기에서 '정치'의 의미가 무엇인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심오하게 들어가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주제다. 그러나 그저 생활인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정치가 집단을 만들고 유지하며 변화시켜가는 일이라는 정의(定義) 정도는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정치가 이런 일이라 짐작한다면, 집단 안의 다양한 사람들, 서로 사뭇 다를 수밖에 없는 그 사람들을 조율하고 그때그때 합의를 만들며 극한 충돌을 최대한 막는 게 정치의 주된 숙제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만하다.

 

그러나 윤석열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내내, 바로 이 '정치'를 하지 않으려 했다. 한사코 거부하고 심지어는 혐오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제6공화국 대통령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렇게 제1야당 대표를 범죄자로만 몰며 야당과 대화를 일체 끊은 전례는 없다. 3년 동안 거부권 행사로만 국회에 대꾸한 윤석열의 행태가 드러낸 것은 야당의 전횡이 아니라 오히려 대통령의 무지와 무능일 뿐이다. 스스로 주위에 울타리를 두르고는 국회가 자기를 감금했다고 외치는 격이었다. 이것이 '부정선거' 음모론을 비롯한 온갖 망상의 시작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아예 정치가 박멸된 세상을 만들려고 12. 3 친위쿠데타를 감행했다. 다행히 군대를 동원한 작전 자체는 실패로 끝났지만, 정치는 실제로 중단되고 말았다. 제도적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한 헌법재판소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비상사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헌법이 규정한 정상적 정치 과정이 진행될 수 없다. 가뜩이나 윤석열 정부 내내 정치가 실종된 사회였는데, 이제는 내란 진압 절차 때문에 이 상황이 계속 연장되고 있다.

 

게다가 윤석열은 12. 3 이후 한국 사회에 '-정치'라는 질병을 잔뜩 퍼뜨려 놓았다. 지금 '극우파'라 불리는 윤석열 적극 지지층의 근저에 자리한 여러 요소들 가운데 하나는 윤석열처럼 정치 자체를 부정하거나 폐지해도 좋다는 태도다. 현 제1야당 대표의 대통령 선출을 통한 정권 교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를 막기 위해서라면 12. 3 사태에 준하는 어떤 '비상'한 행동도 감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정서가 내란 우두머리 1인의 망상을 넘어 상당수 대중에게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기존 정치의 두 축 중 하나였던 국민의힘은 이런 '-정치' 물결에 편승함으로써 자기 지반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참담한 상황이다. 지금 우리는, 아무리 부패하고 저질스러운 정치라도 정치가 없는 쪽보다는 그래도 있는 게 백 번, 천 번 더 낫다는 진실을 새삼 절감하고 있다. 동서양의 적지 않은 이상주의자들이 정치가 사라진 세상을 꿈꿨지만, 현실에서 그런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 정반대에 가깝다. 인류의 정신 수준이 크게 바뀌지 않는 한, 정치가 사라진 세상이란 일상적 내전일 뿐이다.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무제한적, 무차별적 폭력의 가능성에 노출된 위급 상황 말이다.

 

그래서 당장에 반드시 필요한 단 한 가지 과업은 123일의 사건으로 시작된 국면에 확실한 매듭을 짓는 일이다. 정치가 존재하며 작동하는 사회로 하루빨리 돌아가는 일이다. 많은 시민들은 윤석열이 사회로부터 확실히 격리되고 내란에 대한 형사 재판이 빠르게 진행되는 광경을 통해 이를 확인하고 싶어 했지만, 이제 우리가 정치의 귀환을 알리는 신호로 여길만한 제도적 계기는 단 하나만 남았다. 헌법재판소 판결이다.

 

정치가 죽은 곳에 법치마저 죽다

정치가 잠시 잠 들었더라도 사회의 다른 장치가 제 몫을 다한다면, 시민들이 이처럼 불안과 불만에 휩싸이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 이 다른 방파제를 믿고 차분히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장치란 '법치'.

 

법치 역시 논란을 한 가득 몰고 다니는 말이다. 법률이 정치 뉴스보다 더 딱딱하게 느껴지는 만큼이나 '법치'라는 개념 또한 '정치'보다 더 현학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도 일단 생활인의 감각에 맞게 간결하게 정리한다면, 매뉴얼에 따른 국가 운영이라 할 것이다. 매뉴얼이란 물론 헌법과 법률 그리고 각종 규칙을 가리키며, 이런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라고 배치된 사람들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걸쳐 포진한 넓은 의미의 관료다.

 

물론 우리는 매뉴얼이 그다지 공정하거나 공평하지 못함을 잘 안다. 이미 많이 가진 자들의 권리는 매뉴얼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자들의 권리는 돋보기를 들고 찾아봐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리 질 낮은 정치라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 이런 매뉴얼이라도 철저히 지켜지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돋보기로 봐야 할 매뉴얼 속 희귀한 내용들이 현실에서는 아예 자취도 찾을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정치가 잠 든 곳에서 매뉴얼마저 지켜지지 않는다면, 권력과 폭력을 제한할 다른 어떤 문명적 수단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지난 석 달 동안 대한민국 국가기구는 매뉴얼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내란 수사와 윤석열 체포 과정에서도 신물 나게 목격했지만, 지난 며칠 동안 법원과 검찰 사이에서 오간 미심쩍은 판결과 납득하기 힘든 결정은 그 절정이었다. 헌정을 전복하려는 친위쿠데타로 야기된 비상사태라면, 어떤 국가기구든 법률이라는 매뉴얼에 쓰인 내용을 가장 깔끔하고 담백하게 집행해야 한다. 그러나 느닷없는 판례와 행간 읽기를 통해 매뉴얼의 문장이 가리키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시민들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난해한 수학 법칙을 동원해 황당한 '부정선거' 음모론을 뒷받침하려는 것과 유사한 지적 곡예가 판친다.

 

사실 어려운 법률 용어가 난무하는 이야기들 속에 헤맬 이유조차 없다. 상황을 이렇게 고약하게 만든 원인을 찾다보면, 거의 모든 가닥이 한 꼭짓점에서 만난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다. 최상목 권한대행은 국회가 추천한 헌법재판관 1인에 대한 임명은 헌법이 하라고 한 일인데도 지금껏 하지 않고 있다. 반면 국회가 의결한 내란특검법에 대해서는, 헌법이 내란 상황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할 수 있는 일로 허용했다고는 도무지 해석하기 힘든 거부권을 행사했다. 만약 지금 박근혜 탄핵 때처럼 내란 특검이 활동하고 있었다면, 주말에 벌어진 황당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행정부 관료체계의 맨 꼭대기에 있는 자부터 이렇게 매뉴얼을 하나도 안 지키고 있다. 정치가 잠시 멈춘 상황에서 법치로 공백을 메꿔야 할 공직자가 법치 아닌 다른 행위를 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어에는 이미 이런 행위를 칭하는 단어가 준비돼 있는데, 그것은 '정치질'이다.

 

정치질은 앞에서 말한 '정치'와는 전혀 다른 행위이고 또한 '통치'와도 다르다. 정치질은 공익이 아니라 사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거나 지위를 활용해 모략을 일삼는 것을 말한다. 대한민국의 많은 시민들은 이 사회의 엘리트들이 각 조직 안에서 주로 어떤 행위에 능한지 질리도록 경험해왔고, 이를 칭하기 위해 '정치질'이란 말을 고안해냈다. 하지만 국가와 모든 시민의 운명이 바람 앞 등불 신세가 된 이 비상 상황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이란 자가 정치질을 할지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저런 정치질로 지키려는 사익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미스터리다. 다만 정치뿐만 아니라 법치마저 작동하지 않는 이 상황보다 어쩌면 더 충격적이고 추악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겠다. 의지박약해 보이면서도 한없이 의뭉스러운 저 얼굴이 대한민국 고위 엘리트들의 민낯이다. 이런 진상이 드러난 이상, 이를 바꿔야 할 우리의 숙제도 더욱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지 상식의 확인

정치도 중단되고 법치조차 작동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간다면,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국가를 다시 세우는 것뿐이다.

 

다만 더 두고 봐야 할 것은 모든 등불이 꺼져가는 중에도 아직 꺼지지 않은, 단 하나 남은 등불이다. 헌법재판소 말이다. 6공화국 헌법의 상징 중 하나인 이 국가기관만은 자신에게 기대되는 법치의 충직한 수행 여부를 아직 증명하지 않은 상태다. 이 마지막 보루가 제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그래도 제6공화국이라는 지반에 발 딛은 채 좀 더 안정적으로 새 민주공화국을 건설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실은 이 경우에조차 윤석열이 풀어놓은 난동의 씨앗이 우리를 힘들게 하겠지만 말이다.

 

제발 이런 역사의 연속적(단절적이 아닌) 전개의 연장선에서 미래를 열어갈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서로 만나면 싸울 거리만 찾는 못난 놈들끼리 만나더라도, 주책없이 잔칫상을 뒤엎거나 그럴 궁리만 하는 구제불능의 사고뭉치만큼은 반드시 솎아 내야 하는 법이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은 대단한 진리나 윤리의 실현이 아니다. 이 상식의 확인이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5.03.14.

 

그날 밤 이후 ‘87년 합의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대통령 윤석열이 12·3 내란을 일으켰던 그날 밤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엄청난 현실이 그저 우습게 느껴질 뿐이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호소한다는 윤석열의 비분강개를 듣는데 다소 하품이 나기까지 했다. 19876월 항쟁으로 이 땅에 민주주의가 정착한 지 어느덧 37년이 흘렀다. 이를 거역하는 시대착오적인 만행이 성공할 리 없었다.

 

예상대로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는 실패했고, 사후 처리가 남았다. 12월 차가운 겨울밤에 그 많은 군인이 헬기를 타고 국회로 몰려온 이유는 너무 비릿하고 노골적이어서, ‘왜 그랬냐고 따져 묻는 게 진부할 정도였다. 형법 87조에 따라 내란 우두머리인 윤석열이 받아야 할 형량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임이 너무나 분명해 보였다.

 

진심으로 당황하며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게 된 것은 이후 사태 전개를 보면서였다. 국회 절대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의 독주에도 문제가 많았다는 사실을 100% 인정한다 해도, 군을 동원해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려는 수법이 2025년 대한민국에서 통할 순 없는 법이었다. 적어도 3월 중순께면 85~90%에 이르는 압도적인 여론의 지지로 윤석열은 탄핵·파면되고, 내란죄 처벌을 위한 재판이 성큼성큼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게 40대 후반 엑스세대의 현실 인식이었다. 돌이켜 보면 너무 순진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윤석열의 명백한 내란 행위에도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왜 이렇게 강고할까. 대한민국을 둘로 쪼개고 있는 처참한 좌우 대립을 보며, 지난 30여년간 대한민국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해온 ‘87년 합의가 붕괴됐다는 개인적 결론에 도달했다. 우린 쉽게 수습하기 힘든 장기 내전에 돌입하고 만 것이다.

 

일본 내 한반도 연구의 권위자인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학 명예교수는 지난 6일치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12·3 내란 이후 한국 내 좌우 대립이 너무 격렬하다는 질문에 흥미로운 답변을 내놨다. “비상계엄 선포는 한국의 보수 내셔널리즘과 진보 내셔널리즘이 결국 정면충돌했음을 보여준다. (중략) 한반도 전체의 근대 내셔널리즘은 서양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하자는 개화사상 동학사상 위정척사사상 등 세가지로 나뉜다.”

 

그에 따르면, 개화사상은 이승만을 거쳐 보수, 동학사상은 민족주의자인 김구를 거쳐 진보, 위정척사사상은 김일성을 통해 지금의 북한으로 이어졌다.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이들을 하나의 국가 틀 안에 묶어내려면, “혁명·내전·독립전쟁 등의 격렬한 과정을 거쳐 근대적 통일국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하지만 식민·해방·전쟁·분단으로 이어진 아픈 현대사를 거쳐야 했던 우린 사회를 하나로 통합할 만한 위대한 성공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서로 다른 국가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무질서하게 섞인 거대한 모순 덩어리였다. 일제강점기 우리 국적은 일본인가 한국인가,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은 1919년인가 1948년인가, 해방은 쟁취한 것인가 미국이 거저 준 것인가.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 사회는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관한 본질적 질문에 대해 이승만의 후예들과 김구의 후예들은 여태껏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한 사회 내에서 서로 양립하기 힘든 국가 정체성을 가진 두 집단이 대립하는 것을 내전이라 한다. 대한민국은 줄곧 보이지 않는 내전 사회였던 것이다.

 

이 위태로운 갈등을 곤봉을 휘둘러가며 억눌러온 군사 독재가 끝난 뒤 가까스로 도달한 균형이 이른바 ‘87년 체제였다. 이 체제를 이루는 두 기둥은 우리가 각고의 노력 끝에 일궈낸 경제성장과 그보다 더 절실하고 소중한 민주주의였다. 이 새로운 국가 정체성아래서 지난 30여년간 우리는 좋든 싫든 서로를 견디며 살아왔다.

 

대통령 윤석열이 지난해 123일 밤 김구의 후예들을 사회의 반국가 세력으로 몰며 제거하려 했을 때, ‘이승만의 후예들은 좀 꺼림직하지만 이에 동의하기로 결정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함께 이룬 민주주의를 버리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선택한 것이다. 이 배신행위로 ‘87년 합의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제 무엇을 근거로 나와 당신이 같은 대한민국 사람임을 증명해야 할까. 우린 대체 누구이며, 윤석열이 남긴 이 폐허 위에서 앞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길윤형ㅣ논설위원 | 한겨레 2025.03.14

 

 

암만큼 무서워진 항생제 내성

얼마 전 목이 따끔거리고 귀 안쪽이 욱신거려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의사는 목과 귀를 들여다보더니, 감기 초기인 모양이라고 염증을 완화하는 소염제만 처방할까 아니면 항생제를 같이 줄까 물었다. 머뭇거리는 내게, 항생제 처방도 같이 할 테니 약국에서 받아가되, 굳이 필요 없으면 먹지 말라고 했다. 친절한 의사의 당부대로 나는 소염제만 먹고 항생제는 약봉지에 남겨두었다. 다행히 소염제만으로도 감기 증상은 제어되었고 며칠 뒤 불편한 증상이 사라졌다. 항생제를 쓰지 않음으로써 내 몸에 함께 사는 건강한 마이크로비옴 세균들을 지킬 수 있었고 소화불량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거기에 더해, 내 몸속의 세균들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장착할 기회를 차단했으니 더욱 좋은 일이었다.

 

항생제는 인류의 삶을 향상한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으로 꼽히는 의약품이다. 항생제 덕분에 인간의 기대수명이 30년은 더 길어졌다는 추산도 있다. 대부분의 항생제는 세균과 곰팡이들이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내는 천연 물질로부터 유래한다. 1928년 영국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륨이란 곰팡이가 근처의 세균을 죽이는 물질을 분비한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페니실린으로 명명한 것이 인류 역사에서 처음 발견한 항생제이다. 1940년 화학자인 하워드 플로리와 언스트 체인이 페니실린을 정제하고 대량생산의 길을 열어, 2차 대전 중 수많은 부상자의 목숨을 살렸다. 1943년 미국의 미생물학자 셀먼 왁스먼은 스트렙토미세스라는 세균에서 결핵균을 죽이는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하여 결핵을 치료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길을 열었다. 이후 약 30년에 걸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항생제가 발견되었고, 이를 화학적으로 변형한 차세대 항생제들이 개발되었다.

 

결핵이나 폐렴, 패혈증같이 세균이 인체에 감염하여 일으키는 질병뿐 아니라, 가축과 작물의 감염병을 치료하고 예방하기 위하여 항생제들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자, 항생제에 저항성을 가진 내성 세균들이 곳곳에서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내성 세균들은 저항성 유전자를 장착하여 항생제를 분해하거나 변형시키는 효소를 만들기도 하고, 항생제를 세포 밖으로 퍼내거나, 아니면 항생제의 공격을 받는 타깃 분자를 변형시켜 항생제를 무력화하는 각종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항생제에 민감한 정상적인 세균들은 항생제에 의해 제거되지만, 저항성을 장착한 내성균들은 살아남아 증식을 계속하며 수를 불린다. 거기에 더해, 항생제는 저항성 유전자를 다른 세균에 전파하는 수평적 유전자 전달 방식을 활성화해, 새로운 내성 세균을 만들어낸다.

 

이미 3년을 넘어선 전쟁으로 부상자들이 넘쳐나는 우크라이나의 병원에서는 그동안 세균 감염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엄청난 양의 항생제를 투여해왔다. 그 결과 여러가지 항생제에 대해서, 특히 마지막까지 아껴 두는 항생제에까지 내성을 보이는 다제내성 병원균들이 창궐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온다. 슈퍼 박테리아로 불리기도 하는 극심한 다제내성 세균들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면, 세계의 보건 의료에 미치는 악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가자지구나 전혀 통계가 잡히지 않고 있는 러시아의 의료 현실까지 고려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세계보건기구(WHO)의 통계에 따르면, 2019년 전세계에서 약 55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이 중 약 500만명 정도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항생제 내성과 관련된 죽음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패혈증이나 결핵과 같은 감염병 자체가 사망의 주된 원인인 경우(130만명)에 더해, 다른 질병으로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가 감염병에 걸렸을 때 내성균을 치료하지 못함으로써 사망하는 간접적 경우를 모두 포함한 수치이다. 매년 급증하는 내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2050년에는 약 1000만명이 항생제 내성으로 인해 사망하게 될 것이라 한다. 이는 암으로 사망하게 될 숫자와 거의 비슷하다.

 

항생제 내성은 현대의 의료 체계를 위기에 빠뜨린다. 감염병은 치료하기 더 어려워지고, 제왕절개나 장기이식을 포함한 모든 외과 수술,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항암 치료 등 수많은 과정과 치료를 훨씬 더 위험하게 만들 것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새로운 항생제가 계속 개발되어야 할 터인데, 만성질환을 치료하는 약이나 항암제에 견줘 저렴하고 단기적으로만 사용하는 항생제는 경제성이 낮다는 이유로 제약회사들이 개발을 기피한다. 1970년대 이후에 새롭게 시장에 나온 항생제 신약이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더 이상 쓸 만한 항생제의 선택지가 없는 암흑기를 피하려면, 정부와 기업이 새로운 항생제를 위한 연구개발에 힘을 합쳐야 한다. 감염을 예방하는 백신과 조기에 찾아내는 진단제들도 적극적으로 개발되어야 한다. 세계은행은 현재의 추세라면, 항생제 내성으로 인한 추가 의료 부담이 2050년까지 1조달러, 145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우리나라는 2019년 기준, 인체 항생제 사용량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세번째로 높다고 한다. 전체 의사의 3분의 1 정도가 감기와 같이 항생제 처방이 필요 없는 경우에도 환자가 원해서 또는 예방 차원으로 항생제를 처방한다고 한다. 동물용 항생제도 일본보다 2, 덴마크보다 7배나 많이 쓴다. 그 결과로 항생제 내성 세균의 발견 빈도도 매우 높다. 병원 중에서는 특히 요양병원에서 내성 세균의 발견율이 두드러지게 높다고 한다. 축산 분야에서는 돼지와 닭에서 내성 세균의 검출률이 높은데, 닭의 경우 일본의 5, 덴마크의 40배 수준에 이른다고 한다.

 

정부는 여러 부처 합동으로 국가 항생제 내성 대책을 수립하여 2016년부터 시행하고 있지만, 항생제 사용은 크게 줄지 않고 있고 내성 세균의 발견율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올해 새로 수립하게 될 35개년 대책이 실효성 있는 결과를 내려면, 병원과 축·수산 분야 그리고 일반 가정에서도 불필요한 항생제 사용을 최소화하여 내성이 유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이미 발생한 내성균과 내성 유전자가 확산되지 않도록 보건당국은 내성 세균 검사와 감염 예방을 더 촘촘히 실행해야 한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새로운 항생제를 찾아내고 개발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한 혁신적인 연구 결과들이 요즘 발표되고 있다. 세균들이 아직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항생물질을 찾아내는 기초연구와 이를 약으로 개발하여 시장에 내놓는 과정이 내성 세균의 출현 속도를 뛰어넘어야 한다.

노정혜 |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 한겨레 2025.03.14

 

 

윤석열 지지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윤석열 지지자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건 내란범과 친구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보여준 행태만으로도 윤석열 일당에게 개전의 정은 없으며 법정 최고형으로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하지만 그들을 지지한 사람은 수백만이고 우리는 그들과 같은 나라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여기서 친구 되기는 무슨 절친이 되라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신뢰를 공유한 대화 상대를 의미한다.

 

윤석열 지지자는 일종의 은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 타자. 타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추상적 타자구체적 타자’. 추상적 타자는 환대의 대상이지만 구체적 타자는 혐오스러운 존재다. 나는 지금 구체적 타자와 친구가 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20253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유사 내전은 구체적 타자를 배제하고 우리만의 정의, 부족적 진리만 동어 반복해온 결과다. 따라서 이 질문은 우리만이 아니라 저들윤석열 지지자에게도 적용된다. “당신은 윤석열을 반대하는 자와 친구가 될 수 있는가?”

 

타자라는 말에는 환대라는 말이 거의 자동적으로 따라붙곤 한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자크 데리다가 일찍이 문제화한 절대적 환대’, 곧 사적 공간의 무조건적 개방이 실현 불가능함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자리’, 즉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사람, 장소, 환대’)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요컨대 환대란, 타자의 공적 자리를 온전히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 지지자라는 타자는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 예를 들어 난민, 이주민, 성소수자 등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약자·소수자에 대한 환대를 반대하는 주류 시민에 가깝다. 한편, 약자·소수자로 한정하더라도 존재를 부인당한 타자의 공적 자리를 절대적으로보장하는 일은 단지 법·제도적 조건을 마련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주류 시민의 일상에 낯선 형상·소리·냄새가 침범해오는 신체 경험이다. 환대라는 개념만으로는 이런 타자의 문제를 적절히 다루기 어렵다. 이때 타자는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이 말한 현존’(presence)의 문제가 된다. 현존이란 쉽게 말해 여기 함께 있음’, 즉 다른 이와 물리적으로 인접한 상태다. 현존은 수렵채집사회에서부터 존재해온 분배 원리이다. 그것은 숭고한 윤리적 책무 같은 것이 아니라 출근길 만원 버스나 밤늦게 술 취해 내 집에 들이닥친 동생 놈이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그러나 불편하고 짜증 나는 공존에 대한 현실적 의무다.

 

현존의 원리가 가진 장점은 고결한 도덕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공간을 양보하거나 가볍게 목례를 하는 이유는 그냥 그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환대가 윤리적 결단이라면, 현존은 일상에서 소소한 불편과 짜증을 견디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그 일상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일,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야말로 공존의 지름길이다. 바로 그런 일상 속에서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친구가 되는 일이 일어난다. 미국의 흑인 음악가 대릴 데이비스는 30년 동안 백인우월주의 테러조직 케이케이케이(KKK) 단원을 만나 친구가 되었고 그와 친구가 된 200여명은 이후 조직을 탈퇴했다. 독일 저널리스트 바스티안 베르브너의 책 혐오 없는 삶에는 네오나치와 좌파 펑크족이 절친이 되고, 난민 혐오자와 난민이 후천적 가족이 된 사연이 나온다. 그들의 우정은 대부분 엄청난 환대가 아니라 위화감과 거북함을 참으며 상대의 말을 듣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사람도 세계도 그리 쉽게 바뀌지 않으며 친구 되기의 효과를 지나치게 기대하면 곤란하다. 분명한 건 깊은 접촉(deep contact), 풍부한 감정적 교류가 인간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찢긴 공동체는 치유될 수 있고 더 나은 사회는 가능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권력자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잔혹해져야 하고, 동료 시민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관대해져야 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적대적 집단의 충돌은 때로 몸서리치도록 끔찍한 학살(제노사이드)로 이어졌다. 부족주의가 극단화될 때, 인간이라는 종은 바닥을 드러내 가장 추악한 존재가 된다. 적대의 압력을 낮추는 일이 시급한 이유다.

박권일 | 미디어사회학자 | 한겨레 2025.03.14

 

 

지금 전국 최초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20241218일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충청광역연합출범식이 열렸다. 연합뉴스

 

이른 아침, 옥천읍의 병의원으로 혹은 대전의 큰 병원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주민들의 모습이 적막을 가른다. 그나마 하나 있던 슈퍼마켓도 문을 닫은 지 오래. 배차 시간이 1시간을 훌쩍 넘는 버스는 주민들을 마을 밖으로 내모는 또 다른 장벽이 된다. 이 풍경을 두고 누군가는 지역 소멸의 전형이라며 고개를 저을지 모른다.

 

이곳에서 충청광역연합이라는 대규모 행정 실험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균형 발전이라는 거창한 구호가 진짜 실현될 수 있을까. 아니면 중핵도시니, 메가시티니 하던 기왕의 논란이 그저 새로운 허울을 쓰고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을까.

 

202412, 국내 최초로 특별지방자치단체인 충청광역연합이 출범했다. 대전·세종·충남·충북 4개 시도가 손을 맞잡고, 수도권 일극 체제에 맞서 초광역 경제권을 구축하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내세웠다. 겉보기엔 그럴싸하다. 초광역 도로·철도망, 첨단 산업 육성, 관광 체계 구축, 국제 교류까지 각 시도로부터 20개 사무를 이관받았다. 국가로부터는 광역 간선급행버스체계 구축을 위임받았다. 여기에 의회(충청광역연합의회)까지 세우며 새로운 지방정부의 틀을 갖췄다.

 

그러나 그 실체는 거대한 행정권력의 재편에 불과하다. 애초에 초광역 경제권이니 산업 전략이니 하는 것이 결국 광역도시 몫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메가시티를 운운하던 관 주도 움직임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인 데다, 논의 과정에서 옥천과 같은 농촌 지자체 주민들의 의견 수렴이 되지도 않았다. 옥천군과 옥천군의회 역시 별도의 협력 방안이나 사업 계획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는 입장이다. 연합의회 구성도 문제다. 시도별로 4명씩 총정원이 16명인 충청광역연합의회에 옥천·보은·영동군 도의원은 찾아볼 수 없다. 지역사회는 이 연합의 실체를 논하기는커녕,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에 따라 중심 도시로 자원이 몰리고 주변 지역은 소외되는 전형적인 블랙홀 현상이 벌어질 공산이 크다. 광역도시 중심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 구상은 결국 지역 소멸을 가속화하는 또 하나의 실패 사례로 남을 뿐이다.

 

읍면 단위 주민이 정치적 주체가 되려면

이런 가운데 최근 농촌 읍면 자치권 확보를 위한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지난 29일 충청 지역을 구심점으로 삼아 전국 단위 네트워크로 출범한 읍면자치공동행동이다. 독재정권 이전에는 읍면에 의회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여전히 낯설지만, 읍면 단위 주민이 정치적 주체가 되어야 지역에 필요한 정책과 변화를 만들 수 있음은 자명하다. 읍면자치공동행동은 이처럼 농촌 주민들이 지역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자치권을 행사할 법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주민자치회 전환, ·면장 주민추천제 확대, 읍면 발전계획 수립 의무화 등의 정책 추진이 가능할 테다. 읍면자치공동행동은 313~14일 충남 홍성에서 일본 농촌의 정촌자치 경험을 배우는 집중 학습회를 열며 다음 스텝을 이어간다.

 

실제로 농촌활동가와 주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은 이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슈퍼 하나 없는 마을에서 주민들을 위해 이동식 점방을 마련한 전남 영광의 여민동락공동체, 제대로 된 버스노선 하나 없는 면 지역에 무료 순환버스를 만든 충북 옥천 안남면지역발전위원회, 농촌 의료서비스를 고민하며 동네 의원을 만든 충남 홍성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등 보석 같은 사례가 전국에 숨어 있다. 진정한 지역 균형발전이 단순한 행정 통합이나 도시 중심 개발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메가시티니 광역연합이니 하는 거대 구상이 아니다. 누구를 위한 발전인지에 대한 질문도, 그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도 더는 미룰 수 없다. 주민들이 내디딘 한 걸음에 주목할 때다.

박누리 (<월간 옥이네> 편집장) 시사인 2025.03.15.

 

대한민국은 검찰 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검찰로부터...뭐라고?

네스호의 괴물 머리, 검찰의 윤석열 석방

법원의 윤석열 석방 결정과 검찰의 항고 포기는 어딘가 고장난 대한민국의 상황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우화다.

 

우리 시스템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부터 강한 제동을 받고 있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표면 위로 드러나는 것을 우린 '증상'이라 부른다. 항상 피의자의 구속 기간을 ''로 계산해 왔던 검찰이 갑자기 윤석열 앞에서 ''로 계산한 다음에 다시 ''로 계산하는 방식으로 복귀한 것은 마치 시공간을 왜곡하는 어떤 착란적 섬망 증세처럼 우리의 감각을 교란하며 지나갔다. 대한민국 법치의 수면 위에 뭔가 빼꼼 하고 머리를 내비친 것이 수면 아래로 고개를 처박았는데, 그러면 우리는 네스호 속에 살고 있는 거대한 괴물의 몸통을 상상하게 된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 취소를 결정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재판장 지귀연)"이제 막 공소가 제기되어 형사재판 절차가 진행되는 사건에 있어서 절차의 명확성을 기하고 수사과정의 적법성에 관한 의문의 여지를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구속취소 결정을 함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이 결정 덕에 70년 이어온 형법 절차는 더 많이 꼬였고, 극우 세력은 수사 과정의 적법성에 관한 의문을 더 크게 키웠다. 지귀연 판사의 의도와는 정 반대 상황이 벌어진 것 같다. 사회 공동체가 의문의 여지를 해소해주라며 법복을 드렸는데, 아무런 판단도 내려주지 않는다면 '판사'는 왜 존재하는 걸까. 오죽하면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검찰에 즉시항고를 제기해 상급심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을까.

 

판사는 겁을 먹었고, 검사는 사욕을 채웠다. 서부지법 폭동 사태는 어떤 교훈도 주지 못한 것 같고, 검사들의 팔은 '조직 보위'를 위해 다시 안으로 굽고 있다. 법원과 검찰의 '윤석열 석방' 합작품이 또다시 각종 '음모론'의 재료가 되고 있는데, 그 와중에 가장 놀란 사람은 아마도 윤석열일 것이다. '? 이게 된다고?'

 

사람을 구속하는 일에 종사했던 윤석열은 반평생 피의자 구속 기간을 ''가 아니라 ''로 산정해 왔던 사람이다. 그래서 이 음모론은 합리적 의심으로 진화한다. 윤석열과 검사 출신들로 채워진 그의 변호인단은 어떻게 ''이 아닌 ''로 구속 기간을 계산해야 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냈을까? 그리고 그것을 법원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게 됐을까? 누군가 귀뜸해주지 않았을까? 이건 이를테면 평생 진화론을 신봉해 온 사람이 어느날 창조론을 근거로 지구의 나이는 6000살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런 광범위한 '사법 카르텔'의 딥 스테이트론에 빠지는 어리석은 일을 범하진 않겠다. 법원과 검찰과 윤석열의 짬짜미를 믿는다는 건 수백만명을 속여야 가능한 부정선거론을 믿는 윤석열과 그 일당들의 수준으로 전락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법 카르텔의 음모론을 말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설명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의 별칭은 '검찰 공화국'이었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검사 동일체가 대한민국의 실핏줄을 타고 세계관을 확장했다. 서초동 권력이 여의도 권력과 용산 권력을 장악했고, 대통령에게 불리한 수사는 검찰 수사 단계에서 따박따박 막혔다. 검사 탄핵에 분노해 계엄을 선포했다는 윤석열의 황당한 변명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로만 비쳐지지 않았다. 그는 검찰 공화국을 넘어 '검찰 왕국'을 꿈꿨을 것이다.

 

검찰 그들 자신도 내란 연루 의혹 당사자다. 경찰은 지난해 복수의 방첩사 관계자들로부터 "비상계엄이 선포된 뒤 선관위에 곧 검찰과 국정원이 갈 것이다. 이를 지원하라"는 취지의 명령을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방첩사 측은 실무자들의 '착오'라고 반박했고, 대검은 "어느 기관으로부터도 계엄과 관련한 파견 요청을 받거나 파견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지만, 비상계엄이 내려진 지난해 124037분경 대검 과학수사부 소속 부장검사가 국군방첩사령부 대령과 통화한 사실이 드러났다. 민주당은 "124일 새벽 대검 과학수사부 고위급 검사 2명이 과천 선관위로 출동했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한다.

 

경찰 수사가 검찰을 향해 뻗어오려 하자 검찰은 경찰 국가수사본부장이 계엄 사태에 동원됐다는 혐의를 잡고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를 압수수색한다.

 

윤석열의 '계엄 명분'으로 의심받고 있는 명태균 스캔들 수사는 어떠한가. 창원지검은 대통령의 부인과 관련된 어떤 수사도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서울중앙지검으로 사건을 넘겼다. 그 서울중앙지검장 자리엔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으로 이창수 검사장이 복귀했다. 이창수는 김건희 주가 조작 연루 사건, 명품백 수수 사건을 무혐의 처분한 장본인이다. 김건희 황제 조사로 검찰 조사의 '예외 상황'을 창조했던 인물이다. 네스호의 머리같은 이창수의 존재로, 검찰이 명태균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됐다.

 

내란 수사 과정에서 법원이 발부한 정당한 영장 집행을 방해했던 김성훈 대통령경호처 차장에 대한 검찰의 특별대우도 그렇다. 경호처 공직자들을 윤석열의 '사병'으로 전락시키고, 공직도 아닌 영부인에게 비화폰을 지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무엇보다 윤석열의 '증거 인멸'을 돕고 있을 거라 의심받는 그는 여전히 윤석열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다.

 

당장 내란죄 혐의로 기소된 내란 우두머리는 풀려나서 재판을 받고, 그의 명령을 따랐던 '중요 임무 종사자'들은 죄다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희한하고 불합리한 상황을 보면서 검찰은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간과하고 있었다. 윤석열이 지난 3년 간 이 사회를 '검찰 공화국'으로 만들어왔던 사실을. 온갖 위헌적, 불법적 조치들로 헌정을 유린한 윤석열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혐의를 부인하고 지지자들을 선동해 극우 세력의 '탄핵 반대' 여론이 고조하자 검찰은 예의 그 정치 감각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탄핵 여론이 높을 땐 공수처와 경찰을 압도하는 수사 근육을 자랑하며 윤석열을 추상처럼 수사하는 것 같았는데, 다시 바람 앞 풀처럼 먼저 친절하게 몸을 뉘이고 있다. 사실 내란 특검을 도입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최상목의 책임도 크다. 그는 내란죄 범죄자를 비호한 자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시간은 갈 것이다. 친윤 검사들의 시간도 갈 것이다. 윤석열 석방은 윤석열이 구축하려한 검찰 공화국의 심연을 살짝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귀한 사건이다. 그토록 뻔뻔해질만큼 검찰이 당혹스러운 처지에 몰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네스호의 괴물을 처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호수의 물을 말려 버리면 된다. 애초에 네스호의 괴물이 존재하지 않았든, 존재했는데 발견되지 않았든 상관없다. 검찰이라는 거대한 호수가 바닥을 드러낼 때, 우리가 의심하는 '검찰 카르텔'이니, '검찰 공화국'이니 하는 것들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윤석열과 심우정은 검찰청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할 유력 후보들이다.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5.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