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환의 실패, 2025년 연금개혁
우리 사회는 전환을 도모하지 않고도 이대로 괜찮을까? 지금의 경로에 갇혀 그대로 간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국민연금 개혁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는 노후불안과 빈곤이 만연한 우리 사회의 전환을 도모하는 데 실패한 개혁이다. 1988년에 국민연금이 만들어졌지만, 수십년 동안 우리 사회는 노후불안의 경로를 벗어나질 못했다. 국민연금은 낮은 수준의 보장으로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제공하지 못했고, 어떤 생애과정을 거치든 대다수에게 노후불안은 필연이 됐다. 노후의 경제적 불안정이 만연한 곳에서는 노후뿐 아니라 전 생애가 문제가 된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각자도생으로 내몰리고, 약간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몰두하게 된다.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혁신도, 모험도 심지어는 사랑도 어렵다.
2025년 연금개혁은 이러한 노후보장 경로의 지속과 전환의 갈림길에서 하나의 사회적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번 개혁에서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40%를 43%로 약간 올리지만, 내는 보험료율은 9%에서 13%로 크게 인상하기로 했다. 언뜻 보면 이 개혁은 1998년 이래 수십년 동안 이어져온 축소 일변도의 연금개혁 흐름을 멈춘 것이기는 하다. 70%에서 출발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은 60%로, 다시 40%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보면 이번 개혁은 노후보장 면에서는 절충과 방어에 불과하다. 연금액 인상 폭은 미미해 그 효과는 제한적이다. 이대로 가면 2040년, 2050년에 연금을 받을 이들이 받을 연금은 지금 국민연금을 받게 되는 사람보다 더 낮아질 예정이었으나, 약간의 급여 인상을 통해 국민연금 수준이 지금보다 더 떨어지는 것을 막게 된 정도이다. 미래 국민연금은 제대로 올라가기보다는 지금 정도의 낮은 수준에서 갇히게 됐다. 경로는 전환되지 않았다.
출산 크레디트와 군 복무 크레디트 확대 폭도 크지 않다. 특히 미래세대를 위한 연금개혁이라 말하면서도 협소한 재정 논리에 갇혀 군 복무 전체 기간을 국민연금 가입 기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국민이 경험하는 권리와 자유의 제한과 사회적 기여를 고려한다면 부당하기까지 하다. 크레디트를 확대하면 소득대체율을 덜 올려도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확대 폭도 충분하지는 않았다.
연금개혁 시민공론화에서 다수안이었던, 소득대체율 50%로 대표되는 국민연금 보장성 강화 주장은, 소득재분배 효과를 가진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해 오래된 노인빈곤사회 경로에서 벗어나 보자는 것이었다. 생애 후반기의 안정성을 높이면 생애 전체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가 열망해온 경로 파열과 전환의 바람은 무산됐다.
이런 미흡한 국민연금 인상마저 일부 정치인들은 미래세대 약탈이라 말한다. 이들은 국민연금을 깎을수록 미래 연금지출이 줄어드니 미래세대에게 좋다고 한다.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해서 향후 국민연금 수준이 자동으로 삭감되도록 하자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은 국민연금을 줄이고 사연금을 강화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 결과 미래세대의 노후보장은 더 위태로워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더욱이 이런 주장은 연금재정에 대한 왜곡된 견해에 기초한다. 사회보장제도인 국민연금 재정은 가입자들이 n분의 1로 부담하는 제도가 아니다. 보장 수준을 높이고 재정 규모가 커지면 ‘능력에 따른 부담 원칙’에 따라 가입자뿐만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재정 책임이 커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여러 나라에서 국민연금 재정에 대한 국고지원과 자본의 추가적인 기여가 이뤄지고 있다.
미래세대 노후보장에 대한 고민 없이 국민연금 축소만 주장하는 단견, 사회를 바꿔내려는 의지의 부재가 이런 연금개혁을 가져온 듯하다. 이런 개혁으로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경향 : 2025.03.24
계몽과 미몽
2024년 12월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령으로 시작된 정치적 혼란을 우선 매듭지을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 일정이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탄핵 기각 소식은 불길한 예감까지 더하고 있다. 그러나 유별나게 춥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간다는 소식은 들린다. 물론 봄의 화신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도 올 수 있지만 솟아오르는 봄기운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대자연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그동안 많은 시민이 한국 사회의 근간인 헌법의 정신과 이에 따른 법 해석에 관한 많은 정보와 지식도 습득할 수 있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헌재의 선고일과 결정을 둘러싼 온갖 예측만이 난무하게 만든 헌재를 향한 짜증과 비판의 소리도 점점 커진다고 한다.
1987년 체제의 산물인 한국의 헌재는 1951년에 설립된 독일의 연방 헌재를 모델로 해서 1988년에 설립되었다. 나치 독재와 군사독재를 각각 경험한 두 나라 사이에 생긴, 괴테가 묘사했던 일종의 ‘선택적 친화력’이라고 할 수 있다.
2022년 5월10일, 윤석열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정치가 민주주의 위기로 제 기능을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을 ‘반지성주의’를 꼽으면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이러한 거창한 철학적 언술에도 대화와 협치는 없었고 합리성을 뒷받침하는 과학이나 지성과는 거리가 먼, 그와 그의 처를 둘러싼 ‘천공’이니 ‘건진 법사’가 주관하는 주술세계와 연관된 물의는 끊이지 않았다.
이로부터 2년 반이 지난, 작년 12월3일 밤에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비상계엄령을 윤석열은 선포했다.국회가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입법 독재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반국가 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기 위해서 비상계엄령이라는 불가피한 조처를 한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 친위쿠데타 시도는 국회의원과 시민의 결연한 저항으로 결국 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났고 그는 탄핵과 내란죄로 헌재와 형사법정에 서게 되었다.
계몽될 대상은 윤과 하수인들
지난 2월26일 탄핵심판 최후 진술에서 그는 “12·3 비상계엄은 과거의 계엄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무력으로 국민을 억압하는 계엄이 아니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이다. 12·3 비상계엄 선포는 이 나라가 지금 망국적 위기 상황에 부닥쳐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고, 주권자인 시민이 상황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 함께 나서달라는 절박한 호소”라고 주장했다.
계엄령이 대국민 호소라는 이런 주장에 맞추어 계엄령은 ‘계몽령(啓蒙令)’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반지성주의에 이어 계몽이라는 철학적인 언술 체계를 빌려 계엄령을 변호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유럽의 중세 암흑시대를 지나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17세기 말에 들어서서 인간 이성을 통해 정치적 개혁, 교육과 학문의 고양과 경제와 사회개혁의 길을 열었던 계몽의 시대에 대해 배웠다.
이와 함께 계몽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많은 사상가의 설명이 있었지만 이의 고전적인 정의는 칸트에게서 발견된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자신의 지성을 이용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미성년 상태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은, 그 원인이 지성의 부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지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부족에 있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 계몽의 표어다.”
한자 문화권에서도 계몽이나 훈몽(訓蒙)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글자 그대로 ‘어리석음을 일깨운다’나 ‘가르치고 깨운다’는 뜻으로, 주로 스승이 제자에게 도덕이나 예절을 가르치는 것처럼 수직적이고 타율적인 의미를 띠었다. 그러나 칸트가 정의했던 계몽의 의미로 이해되고 사용된 시기는 동아시아가 서구 문물과 접촉하면서 전통적인 사회질서와 갈등을 빚기 시작한 19세기 중엽부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계몽령은 단어 그대로 계몽을 명령하는 법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선 지도 이미 오랜 사회에서, 그것도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모범이라는 한국에서 흡사 계몽군주가 몽매한 백성을 가르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막 내리길
그러나 무장한 군인이 국회의사당에 난입하는 장면부터 헌재의 심판과정을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스스로 이번 계엄 사태가 안고 있는 본질을 적확하게 꿰뚫어보는 깨어난 시민을 가르치려 든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계몽되어야 할 대상은 오히려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윤석열과 그의 하수인들 아닌가.
또 극우 보수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일부 개신교도들은 연일 탄핵 반대를 외치는 집회에 참가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면서 부정선거에 대한 확신과 성소수자나 중국에 대한 혐오성 발언에 ‘할렐루야’나 ‘아멘’으로 답하기도 한다.
이들에 대한 뉴스를 보니 문뜩 공화주의자 상징이자 동시에 이의 파괴자였던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온 복고와 반동의 시대에 그의 중심에 선 프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망명한 혁명 시인 하이네의 풍자적인 운문시집 <독일, 겨울동화>가 떠오른다.
중세 암흑시대에 건조하기 시작한, 라인강변에 있는 쾰른 대성당은 신성 로마제국(962~1806)의 정치적 상징물의 하나였고 1871년에 성립된 독일제국의 상징이기도 했다. 1856년 하이네가 파리에서 사망한 후인 1880년에야 완성된 쾰른 대성당에 대한 그의 시는 당시 보수적 가톨릭 교회와 정치의 결탁을 비판하면서 이 대성당이 오히려 미완성 상태로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보아라/ 달빛을 받으며 저기 우뚝 솟은 녀석을/ 시커멓게 솟아있는 저것이 쾰른 대성당이다/ 그건 정신의 바스티유감옥이어야만 했다/ 간교한 교황 숭배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거대한 감옥 안에서 독일의 이성이 사그라질 거라고/ 그때 루터가 나타나 큰소리로 ‘멈추라’고 외쳤다/ 그때로부터 대성당 건축은 중단된 채로 있었다/ 대성당이 완성되지 않은 건 잘된 일이다/ 바로 미완성된 사실이 대성당을 독일의 힘과 신교적 사명의 기념비로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하이네가 살아있다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보이는 극우 보수 개신교의 행태를 보고 어떤 시를 남겼을까. 이들이 세운 교회라는 거대한 미몽의 감옥 속에 갇혀 이성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그는 특유의 풍자를 담아 묘사했을 것 같다.
“하나님 꼼짝 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겁박하는 한 목사는 “앞으로 우리 광화문 세력이 윤석열 대통령 남은 2년 임기 안에 적극 협조하여 국회도 해산시켜버리고. 이건 헌법 위의 권위인 국민저항권만이 할 수 있는 거야”라고 공언한다. 또 다른 목사는 “이재명이 죽어야 대한민국이 산다”고 설교하면서 “대한민국 파이팅”을 외친다.
이런 모습을 보고 예언자의 외침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설교를 빙자한 정치적 선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부패하고 타락한 당시의 가톨릭 교회를 향해 큰소리로 멈추라고 외친 그러한 루터를 지금의 한국 교회는 절실히 필요로 한다고 느낀다.
하이네는 겨울동화의 마지막 장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미래로 향한 메시지를 남겼다: “위선의 늙은이는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들은 점차 무덤에 들어갈 거다. 이들은 거짓말 병으로 죽어간다. 새로운 인간은 자라고 있다. 가식과 죄라곤 없는, 자유로운 생각과 얽매이지 않는 즐거움, 이들에게 나는 모든 것을 건다.”
만약 탄핵이 인용되지 않는다면 이미 시작된 정신적인 내전은 한국 사회를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 뻔하다. 따라서 막강한 헌재가 지닌 시대적 사명은 그만큼 무겁다. 어둡고 추운 한국의 2024~2025년의 겨울동화가 하루빨리 안정과 평화로 끝나는 ‘한여름밤의 꿈’처럼 막을 내리기를 유라시아 대륙의 끝자락에서도 기원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경향 : 2025.03.25
오만하고 무책임한 엘리트들
202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론 아제모을루·사이먼 존슨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최근 몇년간 칼럼과 책을 통해 과두 정치(oligarchy)에 대한 경고를 지속해왔다. 과두 정치는 소수의 사람들이 권력을 독점해 통치하는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 얼핏 보면 그들의 비판은 중국이나 북한의 일당 중심 체제나, 부패한 엘리트에게 휘둘리는 중남미의 ‘바나나 공화국’을 겨냥한 듯 보인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의 비판 대상은 바로 미국이다. 그들은 오늘날 미국의 과두들이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으며, 미국 경제를 바나나 공화국 수준으로 후퇴시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이러한 미국의 과두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일론 머스크다. 그의 기행은 끝이 없다. 생방송 중 대마초를 피우고, 거의 모든 코로나 검사 결과는 가짜라고 주장하며, 가상통화 투기를 조장하고, 트위터 여론조사로 트럼프의 계정 복구 여부를 결정한 바 있다. 그런데 현재 그는 미국 정부의 ‘효율성부’(DOGE)를 이끄는 인물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단지 그의 돌출행동이 아니라, 어떻게 이런 인물이 미국 사회에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의 권력은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르다. 독재자가 군대를 동원해 사람을 억압하는 방식도 아니고, 초국적 기업이 시장을 독점하며 생태계를 조작하는 방식도 아니다.
그의 영향력 기반은 파괴적 혁신 기업 테슬라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라는 상징성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기술과 산업에 더 큰 기여를 한 인물은 많다. 3차 산업혁명을 이끈 컴퓨터 혁명의 주역인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운영체제를 대중화한 빌 게이츠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경제 생산성에 대한 실질적 기여로 따지면, 전기차가 컴퓨터나 인터넷 기술과 비교 대상이 되기도 어려울 거다. 그런데도 정치적 영향력만 놓고 보면 머스크는 그 누구보다 압도적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그는 단순한 괴짜가 아니다. 잡스와 워즈니악 역시 괴짜였지만 머스크와는 결이 다르다. 머스크는 ‘발언은 자유롭되 책임은 지지 않는’ SNS 구조 위에서, 전문가들을 조롱하고, 근거 없는 주장을 퍼뜨리며 자신의 정치 자산을 확장해온 무책임한 엘리트다. 자신에게 비판적인 인물에게는 ‘소아성애자(pedo guy)’라는 모욕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작은 능력 차이를 가진 사람이 인터넷·유튜브로 전 세계를 커버하며 막대한 보상을 얻는’ 시대, 이른바 슈퍼스타의 경제학을 넘어, ‘철없는 엘리트’가 무책임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슈퍼빌런(최악의 악당)의 경제학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머스크는 딜레탕트(dilettantes)의 독재, 즉 철없는 엘리트 독재의 전형이다. 자기 팬 이외는 다 개돼지로 여기는 이가 권력을 쥐고 사회를 이끌며, 실질적 책임은 회피한다. 그는 성공한 경영자일 수는 있겠지만 코로나도, 가상통화도, 행정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영향력만 행사하려는 인물이다. 그는 결국 똑똑한 머리를 개인의 이익과 명성 확장에만 활용하는 ‘오만한 엘리트’일 뿐이다.
미국은 오랫동안 강력한 민간 부문을 기반으로 성장해왔다. 부유한 개인에 대한 존경과 선망도 컸다. 그러다 보니 머스크 같은 인물이 미국식 과두 정치의 아이콘이 됐다. 최근 트럼프는 “위대한 미국인 일론 머스크에 대한 지지의 표시로 내일 테슬라 차를 사겠다”며 공개적으로 친분을 과시했고, 그사이 미국 경제는 최고 수준의 불확실성에 빠져들고 있다. 한편 한국은 오랫동안 공공 부문을 중심으로 운영돼왔고, 법조인과 관료는 권위와 신뢰의 상징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이제 윤석열 구속을 취소하고, 파면을 지연하고, 시민에게 정신적 외상을 안기고, 시장을 흔드는 존재가 바로 그들이다. 권력을 감시받지 않는 특권으로 여기고, 책임을 회피하는 오만한 법조·관료 엘리트의 과두 정치를 방치한 결과다.
미국과 유럽은 이 오만한 경영자 엘리트에 맞서 테슬라 반대운동(Tesla Takedown)을 전개하고 있다. 테슬라 불매, 주식 매각, 혐오 중단을 촉구하며 자유와 증오 사이의 경계를 무시한 자에 대한 사회적 경고를 던지고 있다. 우리 역시 오만한 법조·관료 엘리트에게 경고부터 날려야 한다. 그들은 온갖 혼란을 야기해놓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법리에 충실했습니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우리는 당신의 은밀한 법기술조차 순식간에 포착하고 폭로할 준비가 돼 있다. 굳이 당신이 ‘최악의 악당’이 되고자 한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당신의 몫이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경향 : 2025.03.25
또다시 87년 6월 항쟁의 재현인가
얼마 전 스웨덴 예테보리대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가 발표한 ‘세계 민주주의 보고서’는 한국 민주주의 수준을 자유민주주의에서 선거민주주의로 낮췄다. 지난 2년간 가파른 하락세이며, 물론 불법 계엄의 여파가 크다.
민주주의 추락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보고서는 지난 25년 동안 세계가 독재화되어가는 생생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세계민주주의 수준은 벨 곡선을 그리며 후퇴하고 있고, 민주주의로 분류된 국가들 숫자는 1996년 이전으로 퇴화했다. 선거의 질이 나빠지고 있는 국가는 지난 20년간 2배 이상 늘었고, 언론의 자유가 뒷걸음치고 있는 국가도 무려 6배 이상 늘어났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나치와 무솔리니의 파시즘, 소련과 중국의 대두 등 일련의 독재화 영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계는 다시 유럽의 극우화, 트럼프주의의 등장, 그리고 한국과 인도 등에서의 우려할 만한 독재화 시도 등을 목격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추락은 ‘87체제’의 근본적 한계 때문이라는 주장들이 최근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87년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해 시민사회의 힘과 지식이 급성장하던 시기였으며, 당시 직선제를 쟁취하기 위해 여러 가지 헌법적 흠결을 제대로 고치지 못한 채 급하게 개헌을 단행했다. 말하자면 지금의 헌정질서는 독재로부터 선거민주주의로 넘어가기 위한 ‘임시체제’였던 셈이다. 이렇게 보면, 앞에서 말한 세계 민주주의 보고서의 평가가 박하다고 하기 전에 우리가 가진 헌법과 제도적 장치의 수준이 기껏해야 선거민주주의 정도에 머물 위험성을 내장하고 있음을 시인해야 할지 모른다.
물론 민주주의의 발전이 법적 제도적 장치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여론과 장외투쟁은 또 다른 축이 된다.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는 시민지식과 운동에 의한 민주주의 수호라는 또 다른 축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 현대사는 끊임없는 민주주의 학습의 역사였고, 국민들은 교육과 학습을 통해 시민성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어찌 보면, 87체제는 그 당시를 가로지르던 민주주의 학습의 열기 속에 획득됐다고 할 수 있다. 1987년 6월 당시 시민들은 점심시간을 쪼개 진보정치의 강의를 들으러 다녔고, 반독재와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쟁론들이 시민들의 일상 토론거리가 됐다. 이렇게 학습한 넥타이 부대들이 거리로 나와 독재와 맞섰고, 87체제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렇게 보면 87체제로 일컬어지는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후진적 제도의 한계를 선진적 시민성이 학습을 통해 보완해가는 방식의 민주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는 시민담론의 중심이 흔들리는 순간 곧바로 쉽게 추락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특히 젊은층이 정치에 무관심한 요즈음의 상황과 맞물려 등장하는 극우세력의 음모론, 색깔론, 폭력, 아무말 대잔치 등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구축해놓은 민주주의의 품격과 수준을 시험대에 오르게 하고 있다. 감추어져 있던 정치 문해력의 민낯이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실, 우리 정치사에서 성숙한 시민성이 제도정치 내부로 편입될 수 있는 참여정치의 공간은 늘 부족했고,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불만을 장외투쟁과 사회운동의 흐름으로 밀어내버렸다. 선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선거에 이기면 모든 것을 휩쓸어 가져가버리는 방식 속에서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는 자랄 수 없다. 세계 민주주의 보고서가 말하듯이, 선거민주주의 단계를 넘어 완전한 자유민주주의로 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제도적 조건이 필요하다. 즉 법 앞의 만인 평등과 정치적 자유, 사법부 독립 및 행정부의 헌법 준수 여부, 그리고 국회의 행정부 감시와 견제 기능 등이 선거민주주의 위에 덧대어져야 한다.
불행히도 최근 사태 속에서 우리가 보는 모습은 참으로 실망스럽다. 개인이 법 앞에 평등하지 않고, 대통령 권한대행은 헌재의 결정도 가볍게 무시하며, 국회의 입법은 줄줄이 정부의 거부권 대상이 되고 있다. ‘불법이기는 하나 탄핵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라는 말은 난센스다. 그 틈새를 통해 행정부의 권한남용은 계속 이어지며, 민주주의는 상처받는다.
아직 대통령 탄핵에 대한 헌재 판결은 나오지 않고 있다. 만일 이번 헌재 탄핵이 인용되지 않는 불상사가 발생한다면 1987년 끓어올랐던 그 시민운동의 힘이 다시 불붙게 될 것이며, 이러한 힘은 보수 논객 김진이 말한 것처럼 “극우들이 벌이는 시위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제도권 정치가 선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제도권 밖의 운동 에너지에 의존하는 헌법 체계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경향 : 2025.03.26.
‘계엄 양비론’을 허용해선 안되는 이유
헌재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겨울도 봄도 아닌 3월의 시간처럼 한국 사회는 예상치 못한 ‘가치 전도’의 음울한 계절을 견디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선과 악의 판단 경계도 흐릿해진다. 공동체가 최소한으로 공유한다 믿었던 가치들의 앞날은 황사 낀 봄날처럼 뿌옇다.
보수의 일각일지언정 ‘비상계엄은 쌍방 과실’ 같은 주장이 횡행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 18일 유튜브 방송에서 “뜬금없는 (비상계엄) 결정도 잘못이고 야당도 그런 결정을 하게끔 얼마나 정부를 못살게 굴었나”고 했다. 그래서 결론은 “둘 다 잘못”이란다. 어느 보수 신문 칼럼은 계엄이 대통령 윤석열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연대해서 책임져야 할 사안”이라고 한다. 대통령 탄핵을 폭행 사건의 시비를 가리고, 교통사고 보험 책임을 다투는 일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윤석열이 사고친 김에 눈엣가시 같은 이 대표까지 쓸어내고 싶은 속마음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뻔뻔함에도 지킬 선은 있다. 그나마 법원이 26일 선거법 위반 2심에서 이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 되게 생겼다.
가치 전도의 가장 심각한 병증은 ‘악’의 정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양비론’이라 하는데, 악의 경중을 흔들어 심하면 역전시키고, 원인과 결과를 뒤섞어버린다. 종국에는 그 악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화(無化)하는 것을 노린다. 이때 양비론을 균형처럼 착각하도록 포장할 수 있다면 기술적으론 최고봉이다. 균형은 정치적으로 공정하려는 것이다. 성립 요건은 선악의 무게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이다. 이것이 균형에 원칙과 권위를 부여한다. 양비론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양비론이라고 다 같지 않다. 소위 ‘기계적 균형’이 악의 무게를 제대로 달지 못한 ‘순진한 바보’들의 양비론이라면,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부터 작정한 ‘설계된 양비론’이다. 이 사악한 양비론은 ‘공정’은 관심 밖이고, 어떤 정치적 입장을 공격하고 방어하려 ‘악의 차원’을 흐리는 게 목적이다. 악은 모두 악일 뿐 다름이 없다고 한다. 같은 악이니 구분 없이 성찰을 강요한다. 그러다보면 양비론 위선자들이 노리는 바대로 악에 무감각하게 된다. ‘쌍방 과실 계엄’은 이런 구조에서 나온다.
양비론 판을 깔고 점점 내면화하다보니, 계엄 망동은 애국적 행위로 돌변한다. 탄핵 초기만 해도 “비상계엄은 잘못”이라던 국민의힘은 이제 “나라를 살리는 계엄”에서 “(계엄은) 미래를 향한 개혁”으로까지 표변했다. 권력에 아부하는 황당무계한 ‘용비어천가’는 역사를 통해 수없이 들었지만, 이처럼 악행을 180도 역변시켜 미화하는 악의 찬가는 듣도 보도 못했다. 60여년 전 총칼로 권력을 점령하고 시민을 억압하던 독재의 언어와 ‘악’의 부활을 목도하게 된다.
악에도 차원이 있다. 약자를 등치는 고리대금업자 노파의 죄와 그 노파를 살해한 라스콜니코프의 죄가 동일하다 할 수 있는가. 노파의 악이 불평등한 사회에 만연한 악이라면, 살인 행위는 인간성 자체를 파괴하는 악이다. 정치를 황폐하게 만드는 데 영향을 준 ‘절반의 잘못’과 3권 분립을 파괴하고 국민 기본권을 강탈하려던 악이 같을 수는 없다.
악을 더 큰 악으로 징치한다는 일 자체가 애당초 스스로마저 속이는 거짓이다. 살인을 초인의 행위로 합리화했지만, 결국 노파의 재산이 필요했던 라스콜니코프처럼 악행의 심연 속엔 사적인 탐욕이 있기 마련이다. 온 천하가 야당의 줄탄핵과 예산 삭감에 대한 “경고성 계엄”이라는 새빨간 거짓말을 비웃으며, 윤석열이 자신의 치부가 탄로날까봐 부린 망동으로 짐작하는 이유다.
가치 전도는 공동체의 윤리 기반을 허무는 중병이다. 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을 암종으로 뒤덮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악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을 때 나치의 홀로코스트처럼 죄의식 없이 명령에 따르는 ‘평범한 악’들도 가능하게 된다. 양비론은 이처럼 인간 양심마저 파괴한다. 마음들이 뚝뚝 피 흘리던 계엄의 그날 밤 절규하며 일어섰던 시민과 군인들의 그 양심이 지금 피를 토하고 있을 것이다.
‘계엄 양비론’을 절대 허용해선 안 되는 것은, 그 악에 결국 우리 모두가 희생될 것이기 때문이다. 양비론의 당사자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 괴물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나치를 세상에 꺼낸 것은 바이마르의 혼돈이 아니라, 악의 차원을 구분하지 않은 교활함이다. 우리 본성이 ‘악’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양비론은 용납되어선 안 된다. 존엄한 인간의 자존심이다.
김광호 논설위원 경향 : 2025.03.26.
인성교육 부재가 만든 내란사태
내란의 우두머리와 관련자들이 대부분 명문 대학 또는 군경 엘리트 양성 교육기관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얻을 수 있는 교육적 시사점은 무엇일까.
오늘날 학교 교육은 학생들의 체·덕·지 함양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바탕으로 품성·인성을 함양하고, 전문성 신장(재능 계발과 학력 증진)에 힘쓰고 있다. 전문성은 진학·진로와 연계되기 때문에 관심이 집중된다. 하지만 사회 진출 후에는 협력적인 의사소통이나 원만한 인간관계, 공동체 역량과 민주시민 의식 등 품성이 더욱 중요하다. 특히 능력은 있으나 품성은 결여된 사람이 사회 지도층이 됐을 때 공동체에 끼치는 악영향은 심각하다. 최근 내란 사태의 주범 또는 동조범의 면면을 보면 잘 드러난다. 대통령 주도의 불법 계엄 모의나 시행 단계에서 국무위원이나 군 장성 중 그 누구도 불법성에 대해 직위를 걸고 반대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 교육의 슬픈 자화상이다.
탄핵 정국에서 난무하고 있는 비상식과 비정상적인 언어의 배설 행태를 보면서 철학의 빈곤과 사유의 결핍을 읽는다. 그들의 집단 도착 증상은 심각하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 있다는 점이다. 나는 현 상황을 진보·보수 진영 간의 갈등이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 사유와 무사유의 대립으로 본다. 합리적인 보수는 사회의 안정적 발전을 위해서나 진보 진영에 대한 건전한 견제 세력으로서 필요하다.
그렇다면 상식과 사유 회복의 실마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학교 교육이다. 학교 현장에서 민주시민 교육을 강화하고, 비판적 사유를 내면화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한다. 지난해 서울시·경기도 교육감은 역지사지형 토론 수업의 도입·시행을 약속했고, 공동 수업의 첫 주제로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다루기로 합의했다. 진보·보수 양 교육감 모두 우리 사회에 팽배한 적대적인 양극화 현상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 해결 방안으로 학교 교육과정에 정치토론 수업의 도입을 약속한 것이다.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무지는 용서할 수 있어도 무사유는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악의 평범성’은 타인의 현실에 대한 무감각 및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에서 비롯된다.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의 집행자가 된 것은 비판적 사유의 결핍과 철학의 빈곤, 즉 무사유 때문이다. 한국에서 ‘아이히만’이 출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역지사지형 토론 교육과 민주시민 교육을 통해 학생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 협력적 의사소통과 공동의 문제 해결력, 정치 현실에 대한 균형감각 등을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공교육에서, 최근 학생 참여형 수업과 과정 중심 평가의 통합 시스템으로 평가받는 국제 바칼로레아(IB)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확산해 5지선다형 평가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도 한 방안이다. 우리 학생들이 마음껏 책을 읽으면서 친구들과 생각을 나눌 수 있고, 학교 안팎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성장할 수 있는 교육 과정과 교육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학생들의 비판적 사유와 창의적 사고력의 함양을 위해서나, 현행 고3 교실의 파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5지선다형 수능은 조속히 퇴출되어야 할 것이다.
비상계엄 국면에서 국회 진입을 시도하던 장갑차와 특전사 군인들의 총부리에 맨손으로 맞선 민주시민들, 이에 대한 군인들의 소극적인 대응과 망설임의 몸짓, 겨울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응원봉을 흔들며 흥겹게 탄핵 촉구를 외친 청년·시민들의 모습 등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밝은 미래와 희망을 본다. 정치 토론 교육과 민주시민 교육을 ‘제대로’ 받으면서 성장한 제2, 제3의 응원봉 세대가 만들 우리나라의 미래가 기대된다. 튼실한 시민 의식과 예리한 비판적 사유로 무장한 그들이 이끌어 갈 우리 사회는 상식과 사유의 풍성함이 가득할 것이다.
이욱희 전 서울사대부중 교장 경향 : 2025.03.26.
엘리트의 자격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사대부(士大夫)였다. ‘사’는 독서인이자 지식인이고, ‘대부’는 정부 관리나 정치인이다. 사제와 기사가 지배층을 형성했던 대부분의 서구 전근대 사회와 다른 점이다. 이들 사대부 중에 일종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이들이 있다. 정치인·관리 중에 종묘에 배향된 이들과, 지식인 중에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수도 훨씬 적고 사회적으로 더 명예스럽게 여겨졌다. 문묘는 유교를 창시한 공자의 사당이다. 성균관과 향교에 있는 문묘에 조선시대를 통틀어 모두 14인이 선정됐다.
기묘사화(1519) 이후 명종 대까지 거의 50년 동안 사림은 탄압받았다. 하지만 사화가 이어지는 중에도 사림은 사회적으로 성장해 여론 주도층이 됐다. 결국 선조 즉위(1567)와 함께 정치적 힘을 회복해 조정에 다시 나왔다. 그즈음 성균관 유생들이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 네 사람의 문묘 종사(從祀)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성균관 유생은 문과 급제 전의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이들의 목소리는 존중됐다. 아직 당파적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공정한 의견으로 인식됐다. 이들은 위 네 사람을 새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로 조정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가 몇 차례 계속되자 막 즉위한 17세의 어린 선조는 72세의 영의정 이준경에게 의견을 물었다. 위의 4인 중에서 이준경이 특히 김굉필에 대해 언급했던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시대 전환기에 놓였던 당시 조선 조정과 사림 집단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신라로부터 고려까지 문장에 능한 선비는 많이 나왔으나 의리의 학문은 실로 김굉필이 열었습니다. 김굉필은 제일 먼저 성현의 학문을 흠모하여 구습은 모두 버리고 <소학>에 마음을 다했습니다. 명예와 (벼슬과 녹봉의) 이끗을 구하지 않고 모든 행동을 반드시 예법에 따르며,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오래도록 힘을 쌓아 도덕을 이루었습니다. 불행히 난세에 화를 당하자 조용히 죽음에 임했습니다. 비록 세상에는 포부를 펴지 못했지만 그 마음속에 바른 신념이 있었음을 그가 죽음을 대했던 자세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또 제자들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우리나라 선비들이 성현의 학문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실로 이 사람의 공입니다.”
살아 있을 때, 김굉필(1454~1504)은 세상 기준에서 실패자였다. 양반집에서 태어났지만 늦은 나이에 문과도 아닌 생원시에 합격했을 뿐이다. 41세에 추천으로 낮은 관직에 임명되지만 4년 뒤 일어난 무오사화로 평안도에 유배됐다. 유배 상태에서 6년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극형에 처해진 것이 그의 전 생애였다. 글이 뛰어났던 것도, 벼슬이 높았던 것도 아니다.
이준경은 사림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그 원칙에 공감했던 공직자였다. 글재주를 익혀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모든 행동을 바르고 성실하게 하여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김굉필을 그는 높이 평가했다. 흔히 기리는 행위는 기리는 대상만큼이나 기리는 주체를 드러내는 법이다. 사림이 김굉필을 기렸던 것은 이제 막 시작된 사림의 시대에, 사회적 정치적 대안 세력으로서 사림의 정치적 윤리적 지향과 개인적 삶의 태도를 비춰준다.
작년 12월3일 이후 진행된 상황은, 대한민국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층위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엘리트’ 집단 구성원 일부의 행위는 충격적이다. 공적 영역의 최정점에 있는 이들이 보인 전혀 공적이지 않은 반공동체적 행위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그들은 한국의 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입증하는 근거이다. 그럼에도 문제의 원인을 그들 개인에게만 묻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공동체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엘리트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경향 : 2025.03.26.
탱자가 된 사모펀드
국내 대형마트 2위인 홈플러스가 지난 4일 전격적으로 법원에 기업회생절차 개시를 신청해 11시간 만에 승인을 받았다. 기업회생절차는 더 이상 금융시장에서 자본 조달이 불가능해질 때 기업이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그런 면에서 홈플러스의 기업회생절차 돌입은 이례적이다. 지난달 28일 기업어음(CP) 신용등급이 하락하자 홈플러스는 신용등급이 자본 조달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하락하기 이전에 선제 대응한다면서 절차에 돌입했다.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가면 채무가 동결되고, 이후 법원의 중재하에 채무조정 협의를 거치게 된다. 따라서 회생절차에 돌입한 기업은 사실상 금융시장에서 더 이상 자금을 조달할 수 없게 되고, 사업 정상화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정상적인 상거래도 막히기 시작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십상이다. 홈플러스 역시 기업회생절차 돌입 이후에 납품 중단, 카드사들의 홈플러스 상품권 결제 중단, 홈플러스가 발행한 어음의 부도 처리 등이 이어졌다. 회생법원이 납품대금 변제를 허가하고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발생한 정산대금 집행을 승인한 이후에 납품이 재개됐고 입점사들도 정산금을 순차적으로 지급받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장의 불안감과 홈플러스를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모펀드 MBK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됐고, 급기야 조주연 홈플러스 사장은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어 상거래채권 지급에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또 국회 청문회 직전에 김병주 MBK 회장은 개인투자자 피해 등을 언급하면서 사재 출연을 밝히는 이례적 상황이 연출됐다.
기업 정상화를 위한 회생절차라는 홈플러스의 주장에 의문표가 붙는 이유 중 하나는 홈플러스를 사모펀드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사모펀드인 MBK는 7조2000억원을 들여 홈플러스를 인수했는데, 이 중 4조3000억원은 금융 차입으로 충당했다. 인수 당시 142개였던 홈플러스 점포 수는 현재 126개로 줄었는데, 알짜배기 점포 매각을 통해 MBK가 4조원 정도 인수자금을 회수했을 거라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이후에 추진했던 기업형 슈퍼마켓(SSM) 사업부인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의 분할매각은 실패했다. 통상적으로 사모펀드는 기업을 인수한 후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5년 정도 지나 재매각하는 출구전략을 추구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MBK의 홈플러스 인수는 투자 실패 사례라고 할 만하다.
더욱이 코로나19 이후 쿠팡 등 비대면 배송업이 급성장하면서 홈플러스는 2021년부터 영업손실을 기록 중인데, 2022년과 2023년에 각각 2602억원, 1994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현재 홈플러스의 금융부채는 2조원 수준이나 부동산 자산도 4조7000억원 정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여전히 대형마트 영업 전망이 밝지 않은 상황에서 MBK가 기업회생절차를 출구전략으로 사용하는 것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수 있다.
홈플러스는 전국에 126개 대형마트뿐만 아니라 슈퍼마켓 체인인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도 309개 지점을 운영 중이다. 또한 홈플러스에 물건을 납품하는 업체는 1800여개, 입점 업체는 8000곳이고, 홈플러스가 직고용한 임직원 수는 1만9000명 이상이다. 만약 홈플러스가 청산절차에 돌입하게 되면 소상공인과 지역경제 그리고 소비자에 미치는 피해가 매우 클 수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법원과 정부가 이런 파국적인 결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회생절차와 정책을 통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홈플러스 사태로 인해 사모펀드를 악마시하는 편견을 가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사모펀드 하면 ‘먹튀’를 연상하는 국민이 많다. 과거 자격이 없는 론스타가 외환은행 인수와 매각을 통해 수조원의 이익을 챙긴 사건이나, 최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서 기회주의적 행동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긴 엘리엇 등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엘리엇은 미국에서 행동주의 펀드로 평판이 좋은 사모펀드이다. 또한 일본의 기업 밸류업 과정에서 외국계 행동주의 사모펀드들이 일본 기업들의 수익과 기업가치를 향상시키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말이 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뜻이다. 같은 사모펀드라도 제도적 환경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미만인 상장사가 절반이 넘고 경영 참호화가 매우 심각하고 향후 대규모 기업 구조조정이 예상되는 우리 현실에서, 행동주의 사모펀드가 기업 구조조정과 밸류업에 긍정적 역할을 하느냐 약탈적 기회주의자로 남느냐는 우리의 기업지배구조 개혁에 달렸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경향 : 2025.03.27.
법이 살인하라 말한다
법이 차별하라 말한다. 반도체 산업에 한해 주당 52시간으로 제한돼 있는 근로시간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노동자의 건강이야 어찌 되든 처벌하지 않을 테니 더 본격적으로 착취하라 말한다. 법은 입 다물고 있을 테니 눈치 볼 것 없이 내키는 대로 하라 말한다. 노동자들은 아파도 모른 척하라고, 죽어도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한다. 반도체면 된다고, 대놓고 봐줄 테니 염려 말고 차별하라고 말한다. 이 법의 이름은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반도체특별법)이다.
이제 법이 말한다. 아직 스무 살이 되지 않은 고등학생이 실습 중 독성 간 질환으로 실려 가도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더 성장하라고, 경쟁하라 말한다.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가 시력을 잃고 장기를 잃고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질릴 만큼 들어 이미 알고 있다고, 이제 더 놀랄 것도 없다 말한다.
법이 말한다. 반도체 노동자들은 특별하다고 말한다. 특별하고 특별해서 고통받고 아프고 죽는다고 해도, 구제할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근무시간을 연장하고 잠도 자지 말고 일만 하라 말한다. 이제 법이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실은 사람의 죽음 따위엔 아무 관심이 없다고.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계속해서 돈을 벌고 경제를 살리라 말한다.
법이 말한다. 자연을 죽이라 명령한다. 땅과 물과 하늘이 오염돼도 돈만 더 벌 수 있으면 그만이라 큰소리친다. 소비자를 중독시키라 지시한다.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떠민다. 법이 시킨다. 욕망을 자극해서 업그레이드된 신제품을 끊임없이 내놓으라고 부추긴다. 이제 법이 까놓고 말한다. 사람의 관심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을 향해 있지 않다고 추동한다. 사람들은 이미 사람보다 제품을 더 사랑하지 않느냐고 유혹한다. 디지털 기기를 사고 버리기를 반복하는 삶을 살라 가르친다. 소비자 대신, 기업가 대신, 이제 법이 말한다.
법이 말한다. 스스로가 디지털 기기에 중독돼 있다는 사실만 잊으면 아무 문제 될 게 없다고, 이번 기회에 법적으로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넘어가자며 꼬신다. 미래세대에게 디지털 중독을 유산으로 물려주라고 꼬드긴다. 법이 말한다. 자연도 죽고 사람도 죽는 시대의 현실 따위 잊으라 말한다. 그게 제일 속 편하다고 충동질한다. 너 하나 살아남기도, 네 가족 챙기기도 바쁜 세상.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 따위 죽음 따위 쳐다볼 것 없다 강변한다.
법이 대든다. 뻔뻔스레 소리친다. 사람 하나 죽는 게 대수냐고 일할 사람은 충분히 많다 말한다. 더 쓸 수 있어도 버리고 신제품을 사라고, 계속해서 낭비하고 오염시키라고 법이 명령한다. 네가 조금 더 편해진다면 자식들의 미래 따위 잡아먹을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법이 변호한다. 우리 땅이 부족하니 타국의 땅에 바다에 버리자고, 오늘 버릴 쓰레기가 넘치면 자녀의 내일과 모레를 가져다 쓰자고 설득한다. 법이 말한다. 사람 하나, 강 하나, 소 한 마리 병들어 죽으면 어떠냐고 둘러댄다. 이것저것 더 생각할 필요 없다고, 신제품을 하나 더 사는 걸로 위안 삼고 잠들라 말한다. 법이 말한다. 법이 쇼핑하라 말한다. 계속 만들고 버려서 자연도 사람도 죽이라고 말한다. 법이 말한다. 법이 살인하라 말한다.
최정화 소설가 경향 : 2025.03.27.
야만의 시대
우리는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가? 야만의 시대란 질서와 규범의 부재 상태를 의미하고, 상시적인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를 의미한다. 모든 행위자들은 도덕적·규범적 제약보다는 자신들의 안위와 이익이 최우선이며, 이를 정당화하는 세상이다.
인류의 역사는 국내정치는 물론이고, 국제정치 역시 예측 가능하고 안정성 있는 질서를 추구해왔다. 이를 진보라 명명한다. 역사의 기록마저 거의 없는 중국 주나라가, 공자마저 자주 인용하고, 오늘날 중국의 형성에 막대한 역할을 한 것은 종법 질서를 통해 자연과 인간, 통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를 정리한 덕분이었다. 소위 말하는 오늘날 소프트 파워를 주도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법가가 융성한 것은 법과 규범의 설정을 통해 당시 무질서한 국내사회에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서양은 중세 시대를 지나 신의 권위가 세속 권력에 주권을 양도한 이후 민족국가 체제 형성 과정에서 강대국들이 각축했다. 무질서한 혼돈과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현실주의는 강대국 간의 안정적인 힘의 균형이라는 기제를 통해, 자유주의는 합법적인 규범과 제도적 장치들을 통해 국가 행위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국제사회의 안정성을 가져다주려 했다. 냉전 시기에 수립한 유엔 체제, 탈냉전 이후 형성된 미국의 자유주의 패권 질서는 이런 인류 노력의 집약체이기도 했다.
외교 유연성·회복 탄력성 동시 고려
트럼프 1기 이후 국제사회는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트럼프의 정책적 목표가 단순한 대중 무역역조를 시정하거나 중국과의 전략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지고 있다. 기존 체제의 근본적인 전환이다. 이는 진보의 방향이라기보다는 혼돈과 야만의 시대라는 과거 강대국 정치의 유형에 가깝다. 이성은 마비되고, 궤변과 완력이 우선한다. 우크라이나에 굴욕 강요, 가자 문제 처리, 파나마나 그린란드의 합병과 같은 트럼프의 주장들이 그 예이다. 자유주의 패권 질서의 상징과도 같았던 세계무역기구, 국제형사재판소, 파리기후협정 등도 내팽개쳤다. 전통적인 동맹이나, 규범과 도덕성의 제약들은 무시해버린다. 미국의 국익과 국가 역량의 재건이 최우선이다. 트럼프가 주도하고 있는 기존 국제체제에 대한 도전은 최근 유행하는 “우아한 위선의 시대는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로 잘 요약된다. 혼돈과 야만의 시대가 왔다!
강대국이 아닌 대부분의 국가는 18~19세기 혼돈과 야만의 시대에 희생자가 됐다. 강대국들도 1·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입었다. 그 결과 인류는 적어도 강대국이 무력과 자의로 약소국의 영토와 주권을 침탈해서는 안 된다는 유엔 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다. 이 체제 안에서 약소국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자결에 대한 원칙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제 이러한 보호막들이 사라지고 있다. 향후 러시아, 중국, 일본이 트럼프가 열어젖히는 새로운 강대국 권력정치 체제를 수용해 한국을 압박해 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엔 체제와 새로운 문명 질서의 최대 수혜자가 된 중국은 기존 체제의 고수를 주장하고 있다. 중국의 핵심적인 대외정책 원칙은 유엔 체제와 그 규범들을 준수한다는 것이다. 인류운명공동체론을 주장하고 세계 무역의 개방성과 다자주의적 기제의 수립을 지지하고 있다. 중국은 전략적·국가이익의 견지에서는 러시아 편이면서도, 일반 인식과는 달리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 러시아의 영토적 팽창주의는 지지하지 않았다. 기존 체제의 도전자가 돌연 수호자가 되고, 수호자가 파괴자로 돌변하는 현 세계는 혼란스럽다.
야만의 시대에 비강대국들의 대외정책이 가치외교니,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의 대결이니 하는 규범적 사고에 갇힌다면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과거 전통적인 현실주의에서는 최강대국과의 동맹이 가장 효과적인 생존책이었다. 미국과의 동맹을 무조건 추종하고, 미국 주류가 주장하는 대중국 정책을 답습하면 합당한 중국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안보와 경제의 이분법적인 분리 속에서, 안보를 우선한다는 사고가 동맹에 부합했다. 사드 시기 정책 결정이 그러했고, 윤석열 시기에도 이러한 논법으로 버젓이 전문가연했다.
내부 문명성 수호가 약소국 생존법
이제는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점(點)적인 사고나 이를 시간과 행위자들에 적용해 연장시키는 선(線)적인 사고를 넘어,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이면서 시차를 고려하는 면(面)적이고 입체적인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외교의 유연성과 회복 탄력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한국 대외정책 역시 소수의 믿음과 확신이 주도하는 무속의 영역에서 벗어나 과학과 공감의 영역으로 전환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실패한 계엄 시도 이후 지속되는 국내정치의 혼돈과 무기력은 현 국제정치 상황을 보는 듯하다.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에 난입한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법과 정치권은 이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체제와 리더십에 대한 깊은 불신과 혼돈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암울하게 하고 있다. 국내정치 역시 더 이상 규범과 문명의 상식이 아니라 이익·권력 연합을 형성해 강자가 생살여탈권을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장으로 전락하고 있다. 국내정치, 무속, 국제정치 세계의 구분이 없어졌다.
야만의 시대에 약소국의 생존법은 외부의 야만에 대해 내부 문명성의 수호로 대처하는 것이다. 공존을 위한 상식과 합리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 다음으로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국민 내부의 다양한 파당들이 공존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윤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이 야만과 문명을 가를 것이다. 중기적으로는 갈라진 나라를 어떻게 통합하는가, 장기적으로는 무기력해진 나라의 체질을 어떻게 개선하는가에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려 있다. 무기력한 대한민국의 법체제와 제도, 지도자들의 행태를 보면서 ‘시일야방성대곡’이 다시 울려 퍼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대한민국이 과거 아르헨티나나 필리핀보다 심각한 레바논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소장 경향 : 2025.03.27
헌재 “피청구인 윤석열 파면” 선언할 때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윤석열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평의를 이어가는 가운데 28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헌재 깃발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연합뉴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윤석열 탄핵심판’ 선고가 사실상 4월로 넘어가게 됐다. 국회 탄핵소추로부터 105일, 변론 종결로부터는 32일(3월 29일 기준)이 흘렀다.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때와 비교해봐도 너무 늦어지고 있다.
시민은 초인적 인내심으로 기다려왔다. 과거 대통령 탄핵심판 때와 달리 관련 탄핵 사건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리라 애써 이해했다. 박근혜 때보다 국론분열이 심각한 만큼 더 신중을 기하는 것이리라 또 이해했다.
그러나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심판 결정이 선고된 지 닷새가 지났다. 심지어 전혀 무관한 형사재판임에도, 윤석열 지지자들이 ‘먼저 선고돼야 한다’고 주장해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선거법 항소심’ 선고도 마무리됐다. 더 이상은 헌재가 선고를 미룰 어떠한 명분도, 현실적 이유도 없다.
법관들은 재판에서 “넉넉히 인정된다”는 말을 즐겨 쓴다. 과거 탄핵심판 사례를 보면, 헌재는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헌법·법률 위반 여부, 그 위반의 중대성, 헌법수호 의지 등을 따졌다.
이번에 헌재가 정리한 핵심 쟁점은 비상계엄 선포 과정, 포고령 1호 공포, 군경 동원 국회 봉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압수수색, 정치인 등 체포조 운용 지시이다. 피청구인 윤석열이 5대 쟁점에서 헌법·법률 위반을 저질렀음은 변론 과정에서 “넉넉히 인정”됐다.
헌법·법률 위반의 중대성은 온 나라와 전 세계를 경악케 한 ‘군인의 국회 난입’ 하나만으로도 “넉넉히 인정”된다. 또한 윤석열은 탄핵소추 이후에도 반성은커녕 ‘계엄령이 아니라 계몽령’이라는 식으로 시민을 기만하고, 거짓 주장으로 지지층을 선동해 헌정질서를 위협하고 있다. 헌법수호 의지가 없음도 “넉넉히 인정”할 만하다.
헌재는 무엇을 망설이는가. 물론 헌법재판관 8인도 고유한 인격을 지닌 개인인 만큼, 고민이 깊을 수는 있다. 평소 견지해온 이념적 성향, 피청구인과의 인연, 자신을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의 압력…. 그러나 재판관들은 지금 개별 사건 한 건의 결정문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역사의 기록을 집필하고 있음을 새겨야 마땅하다.
한국의 미래, 5100만 한국인의 삶이 재판관들의 펜에 의해 달라진다. 아니, 한국을 민주주의 모델로 삼아온 수많은 세계 시민의 삶도 바뀔 수 있다. 개인적 고민을 앞세울 때가 아니다. 만에 하나, 심판을 고의로 지연시키는 재판관이 있다면 이는 헌정질서 수호의 사명을 저버리는 행태다. 시민과 역사가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해 둔다.
주권자는 지쳐가고 있다. 경제는 지표도 엉망이지만, 실물은 최악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외교안보 환경은 미증유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위헌·위법을 저지른 통치자를 하루라도 빨리 단죄하고,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를 극복해야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
마지노선은 문형배 헌재소장 권한대행과 이미선 재판관이 퇴임하는 4월 18일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일이 아니다. 4월 2일 재보궐선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3일 이후로 선고를 미룬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지금 윤석열 탄핵심판보다 더 중대한 과제가 있나.
헌재는 31일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자마자 선고일을 확정, 발표해야 한다. 문형배 소장 대행이 용기를 갖고 리더십을 발휘하기 바란다. 주권자 10명 중 6명이 윤석열 탄핵에 찬성하고 있다(한국갤럽 3월25~27일 조사).
2017년 3월 10일. 이정미 당시 헌재소장 권한대행의 또렷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25년 4월. 8인의 현자(賢者)들, 문형배·이미선·김형두·정정미·정형식·김복형·조한창·정계선 재판관이 단호히, 엄중히 선언할 때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경향 : 2025.03.29
최상목에게 국민을 위한 나라는 있는가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해 약 2억원의 미국 30년 만기 국채를 매입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외환정책을 총괄하는 경제수장이 원화 가치가 하락할 때 개인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해외 자산에 투자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최근 공개된 공직자 재산 내역을 살펴보면서, 그동안 우리 경제정책이 왜 이렇게 형편없었는지에 대한 국민적 의문이 일부 풀리는 듯하다.
공직자 재산공개에 따르면, 최 부총리는 2024년에 미국의 30년 만기 국채를 매수해 연말 재산신고 시점에 1억9712만원 상당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국채는 미국 재무부가 2020년에 발행한 것으로, 2050년에 만기가 도래하는 장기 채권이다. 과거 최 부총리는 경제수석으로 있을 당시 미국 국채 보유가 논란이 돼 처분하기로 약속했었지만, 이번 재산공개를 통해 그 약속을 깨고 다시 미국 국채를 매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비판 여론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개인의 재산을 늘리기 위한 투자를 반복한 셈이다. 게다가 공직자 재산공개가 연말 기준이라는 점에서 실제로는 더 많은 금액을 투자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 부총리가 정확히 언제 미국 국채를 매입했는지는 알 수 없다.
편의상 공정하게 2024년 6월을 기준으로 삼아 계산해보자. 당시 원·달러 환율은 1300원 수준이었다. 현재(2025년 3월)는 약 1460원으로 상승한 상태다. 이를 토대로 최 부총리의 투자 수익을 분석해보면, 환율 차이로 인해 약 2461만원의 환차익과 함께 약 210만원의 이자 수익을 포함해 총 2671만원의 이익을 얻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채권 가격 상승으로 인한 자본차익은 반영하지도 않았다. 이 수익은 투자 원금 대비 약 13.36%에 해당하며, 연율로 환산하면 무려 18.2%의 높은 수익률이다. 같은 기간 국내 시중금리가 2~3% 수준임을 고려하면 투자 성과만으로도 놀라운 수준이다.
최 부총리 측은 이러한 투자가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듯하다. 미국이 금리 인하로 전환하면 국채 가격이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고 합리적 투자를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최 부총리의 투자 수익 구조에 있다. 그의 수익 대부분은 원화 가치 하락, 즉 환율 상승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국민 경제가 어려워지고 원화 가치가 떨어질수록 그의 개인적인 수익은 늘어난다. 개인 최상목의 투자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부총리 최상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책임자로서 이해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공직자로서의 윤리적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지난 1년 동안 최 부총리의 경제정책은 일관성이 없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수출 호조로 경기가 좋았던 지난해 1분기에는 총선을 앞두고 무리한 재정 지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2분기 이후 경기 침체가 시작되자 그는 갑자기 건전재정을 앞세워 소극적인 재정 운용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2분기 경제성장률은 -0.2%, 3분기와 4분기에는 겨우 0.1%로 매우 저조했다. 대규모 세수 결손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막대한 예산 불용액을 발생시키며 소극적인 재정 운용을 지속했다. 가계부채가 심각하게 높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책금융을 늘려 부채 문제를 악화시켰다. 한국은행에 다양한 채널로 금리 인하를 압박해 한국은행이 결국 기준금리를 낮추게 만들었다. 이는 결국 경제를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고, 원화 가치는 계속 하락하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최 부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에도 헌법재판소 결정을 무시하고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아 헌정 질서를 위협한 바 있다. 불법 계엄으로 인해 경제가 큰 타격을 입고 자영업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긴박한 시기였음에도, 시급히 편성해야 할 추가경정예산을 ‘신속한 집행이 먼저’라는 명분으로 좌절시켰다.
헌정 위기 상황을 빠르게 수습해야 할 책임자가 오히려 불확실성을 장기화한 이유가 이제야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결국 그의 정책과 선택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계엄의 새벽에도 일신의 안녕을 위해 계엄 해제 국무회의를 하지 않고 집으로 퇴근했던 최상목 부총리에게 국민을 위한 책임과 의무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은 인간 최상목에게 묻고 싶다. “국민을 위한 나라는 정말 존재하는가?”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경향 : 2025.03.30.
주목 경제’ 시대의 언론, 정치, 교회
눈길 끌기가 경제적 성패를 좌우하는 현상을 ‘주목 경제’(economy of attention)라고 한다. 온라인에서 흘러넘치는 정보와 미디어가, 제한된 인간의 주목을 놓고 경쟁하는 세상이다. 시장 상인이 손뼉 치며 외치듯, 언론은 자기 기사를 클릭해달라며 ‘속보’ ‘알고 보니’ ‘충격!’ 등의 어구로 시선을 끌려 한다. 유튜브 알고리즘도 이용자의 성향을 분석해, 클릭할 수밖에 없는 영상을 무한 공급한다. 그 결과는 기존 신념에 맞는 정보만 지속·증폭·강화되는 ‘메아리 방(echo chamber) 효과’이며, 그 끝은 우리가 지금 생생히 경험하는 정치적 극단화다.
과거에는 몇 안 되는 언론에 의해 정책이 채택되는 게 중요했다면, 지금의 초경쟁 미디어 상황에선 ‘얼마나 주목받느냐’가 정치인의 최대 관심사가 됐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관없이 언론에 나면 좋다는 게 정치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 강한 발언과 더 극단적인 행동으로 관심받으려 한다. 과거에 어떤 행보를 했는지는 의미 없다. 지금 당장 그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더 눈에 띄게 비판하고 찬양하고 행동하는지가 중요하다. 과거에 내 편이었든, 네 편이었든, 다선 의원이든, 한때 반대당이었든 상관없다. 유튜브 정치 채널에 불려가 함께 북 치고 장구 치며 시선을 끌면 그만큼 공천 가능성이 올라간다. 기성 언론 내용이 극단적 성향의 이용자들에 의해 끌려가듯, 정치인도 지지자들에 의해 끌려간다.
탄핵 정국에서 일부 개신교 집단도 틈을 파고들어 동원력을 과시하며 거리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주목을 끌어내는 힘이 이곳에 있는 한 제도권 정치인들도, 기성 언론도, 유튜브도 이들에 기댄다. 한 사회의 구성 주체로서 특정 종교인이나 종교단체가 정치적 태도를 밝히는 것 자체는 나쁠 것 없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바가 반민주적이고 폭력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문제다. 전광훈 목사는 최근 집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당한다면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라고 하며, 반대로 기각되면 “국민저항권을 발동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국회를 해산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손현보 목사 또한 “나라 살리려면 계엄 말고는 답이 없었다” “헌재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교회도 주목 경제에 잡혔다. 개신교 교단과 목회자 대부분은 극우 집단이 교회를 대표하는 듯한 일에 침묵하고 있다. 이는 동의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과학적 진보와 사실에서 동떨어진 한국의 많은 개신교회는 주목받기 쉬운 차별금지법 반대 기치로, 줄어가는 교인을 움켜쥐려는 중이다. 거리에 나와 혐오와 차별을 외치는 극우 신도들과 공유하는 가치다.
어느 주류 교단은 성소수자를 위해 기도해줬다는 이유로 목사 여럿을 출교했다. 다른 주류 교단은 목사 후보자들에게 “인간에겐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가지 성별만 존재한다”는 반과학적 내용의 서약서를 버젓이 강요한다. 어느 유명 신학대학교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이 과학적 사실임을 주장하는 사이비 과학, 이른바 ‘창조과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한 교수를 해임했다가 국가기구의 제동을 받았다. 나는 개신교 신자로서 이런 경향이 사랑과 포용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일부 목사는 이를 알고도 신도들의 반발과 외부의 공격을 의식해 비판을 자제하고 있다. 주목 경제 시대에 언론과 정치인이 따르는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론인과 정치인, 그리고 종교인에게 직업적 전문성과 윤리의식을 기대한다. 이 기대는 현실에 끌려가지 않는 것, 즉 이용자의 필요에 민감해야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만 맞춰가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 제도적 변화로는 주목 경제를 해결할 수 없다. 폐해를 헤쳐나가 새로운 길을 제시해야 할 주체들이 도리어 이에 편승한다면 이 직업과 조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경향 : 2025.03.30.
'세상과 어울리기 > 외부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년4월 3주 (7~13) (0) | 2025.04.14 |
---|---|
4월 첫주 (3.31~4.6) 4월은 갈아엎는 달 (0) | 2025.04.07 |
25.3.17~22 다시는 대통령이 총칼을 들지 못하게 (0) | 2025.03.24 |
3월2주 3.9~3.15 (0) | 2025.03.16 |
25.3.1~3.8 3월 1주 (0) | 2025.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