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한민국을 ‘약탈국가’로 추락시키려 하나 2. 청년에게 주는 ‘세습 자본주의’의 충고 3. ‘존엄사’ 찾아 떠난 한국인들 5. 빵과 장미의 유통기한은 영원 6. 묻기도 전에 퍼준다…윤석열식 '마음 외교'가 최악인 이유 7.참으로 ‘별난’ 대통령 8.김건희라는 비극 2 9.이제는 적정시민 10. 인류세 부결은 ‘궁정 쿠데타’였나
11. 대통령실이 군부 한복판에 있는 비정상 정권 12. 명예훼손죄 존폐를 묻는다 13. 언제나 '공급 확대'만 외치는 윤석열 정부, 투기 거품 조장 주인공? 14. 딱 하나에 ‘사람의 길’과 ‘개의 길’이 갈린다 15. 대통령이란 무엇인가 16. 기후재앙과 죽음의 행렬 17. 내년 여름엔 달라야 한다 18. 기후국회라는 새로운 기회 19. 남을 위한 것이 곧 나를 위한 일이다 20. 국가인권위, 왜 있어야 하나?
21.여순사건과 미완의 국가 22.한국 정치사에서 ‘진보정당’은 무엇이었나 23. 신고가를 꿈꾸는 패닉바잉의 나라 24.100세 시대, ‘생애주기’를 창안하라! 25.자동차의 속도에서 생명의 속도로 26. 귀족부인 앞에 무릎 꿇은 사법 27. 딥페이크, 깊은 속임수 28. 정당법과 군사쿠데타의 잔재 29. 사라진 여성들의 경제적 가치 30. 북한은 남쪽 문을 닫고 살 수 있나
31.긴 여름의 끝, 정치경제학의 부활을 기다린다 32.아직 ‘한국이 싫어서’. 33.국민연금 기금 운용의 과제 세 가지 34.지금 대한민국은 역사 공부 중 35.유구한 선당후곰의 정신 36. 독일 극우파 약진 부른 좌파 실정 37.이스라엘에 무기 쥐여주며 휴전하라고? 38.어떻게 기어갈 것인가 39.이스라엘 점령군은 21세기의 '나치'… 40.양방 물신주의
41.대한민국은 지금도 건국 중 42.민주복지국가의 출산율 43.뉴라이트 현상, 거대한 퇴행과 그 위험 44.‘2016년 광장’의 교훈 45.수단 내전과 글로벌 자본주의 46. 거리에 선 대통령, 다리 위의 영부인 47.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48. 건희는 증상일 뿐, 병의 뿌리는 윤석열
대한민국을 ‘약탈국가’로 추락시키려 하나
며칠 전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파행에 대해 통치 능력을 상실한 듯하다고 평하는 글을 썼다. 댓글 중에 “윤 대통령은 통치 능력을 상실한 적이 없다”는 반박도 있었다. 이유는 이랬다. “윤통님께서는 통치 능력이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반전 유머에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윤 대통령의 지난 27개월에 비춰보면, 틀린 데 없는 말 아닌가. 실로 지난 2년3개월은 대통령 잘못 뽑으면 나라의 운명과 국민의 삶에 어떤 위험이 초래되는지에 대해 고통스럽게 체감하는 시간이었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의 이 숙명에 대해 이제는 국민 대다수가 곱씹고 있을 것이다. 몇 장면만 일별해보자.
첫째, 윤 대통령이 취임 석달 만인 2022년 8월8일 빗줄기를 뚫고 정시 퇴근한 장면이다. 100여년 만의 폭우로 강남역이 물에 잠기고, 신림동 반지하에서 일가족이 숨진 날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다음날 “퇴근하면서 보니까 다른 아파트들이 벌써 침수가 시작되더라”라고 했다. 큰 재난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차를 집무실로 되돌리지 않고 퇴근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부끄러움이나 미안함 없이 신기한 구경이나 한 것처럼 툭 꺼냈다. 취임 100일도 안 된 대통령이 보여준 무신경과 안일함에 할 말을 잊었다는 사람들이 적잖았다. ‘#무정부상태’ 해시태그가 번져갔던 이유일 것이다.
둘째, 지난해 뜬금없이 “나눠먹기” 운운하며 연구개발 예산을 5조2천억원(16.6%)이나 삭감한 장면이다. 유수 대학과 연구소의 기초 연구가 중단되고, 수많은 대학원생과 석박사들이 생계를 걱정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대한민국을 중진국 함정에서 탈출시킨 핵심 동력을 윤 대통령 한마디로 싹둑 깎아먹었다. 뒤늦게 복원한다 어쩐다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미 연구 기반 자체가 허물어져 중장기적 국가경쟁력은 치명상을 입은 뒤다. 눈여겨볼 건, 윤 대통령이 별다른 근거도 대지 못한 채 연구개발 예산 감축을 고집했다는 사실이다. 부자감세로 세수가 줄자, 세출을 깎아도 저항이 크지 않을 것 같은 만만한 대상으로 연구개발 예산을 콕 집은 게 아니냐는 해석이 많다.
셋째, 의대 정원 2천명 증원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다 의료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다. 의료개혁과 의사 수 확대 필요성엔 많은 국민이 공감한다. 그러나 책임감 있고 능력을 갖춘 정부라면 특히 국민 생명과 직결된 이런 문제일수록 치밀한 준비와 소통을 통해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왜 2천명 증원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여당에서조차 그 근거를 모르겠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런데도 윤 대통령은 갈수록 커지는 국민의 고통과 걱정에 눈감은 채 이번에도 고집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 29일 국정브리핑에선 “비상진료 체제가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며 “의료 현장을 한번 가보시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달나라 대통령이냐”(김동연 경기도지사)는 물음을 자초하고 있다.
도대체 윤 대통령이 무신경과 게으름, 무능과 무책임, 오기와 옹고집이 아닌 무언가를 한번이라도 민생 국정에서 보여준 사례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나마 요란스레 발표했던 ‘동해 석유가스전’ 탐사와 ‘체코 원전 수주’ 등도 현실성 검증 없는 부풀리기 아니냐는 의구심이 크다.
이미 윤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 의혹 봐주기와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 등으로 정권의 도덕적 정당성을 무너뜨린 바 있다. 이제 민생마저 난맥과 파행으로 끌고 간다면 정권의 지반 자체가 무너진대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보수층에서도 이대로는 “정권 자체도 유지하기 힘들다”(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는 경고가 나온다.
지금 국민권익위원회 누리집엔 ‘추석명절 청탁금지법 바로 알기’란 카드뉴스가 올라와 있다. “친구, 친지 등 공직자가 아닌 사람에게 주는 명절 선물은 금액 제한 없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직무와 관련 없는 공직자에게는 100만원까지 선물도 가능하다”고 친절히 안내한다. 직무 관련성을 떠나 공직자와 그 가족에 대한 금품 제공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청탁금지법 취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내용이다. ‘제재 조항이 없다’며 김 여사 명품백 수수에 면죄부를 준 후유증이다. 김 여사는 봐주고 이제 와서 추상같은 원칙론을 강조하기가 면구했을 것이다.
정부가 국리민복이 아니라 한줌 집권세력의 사익과 특권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나라를 ‘약탈국가’라고 한다. 지금 이 정권 돌아가는 꼴은 대한민국이 후진적 약탈국가로 퇴행하는 게 아니냐는 두려움을 갖게 한다.
손원제 논설위원 한겨레 | 2024.09.01.
청년에게 주는 ‘세습 자본주의’의 충고
서울 대치동의 학원 모습. 백소아 기자
한국의 부·모처럼 자녀 교육에 진심인 사람들은 전세계에 없다. 자녀가 수능 점수(또는 내신 등급)가 높은 대학에 입학한다는 것은 자녀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중요한 기득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능 점수가 높은 대학에 입학한다고 모두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를 수능 점수가 높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한다. 이 점에서는 부자 부·모와 가난한 부·모 간에 차이가 크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는 저소득층 가구도 자녀 1인당 사교육비로 소득의 무려 27%를 지출한다고 한다. 가난한 가구가 이 정도면 거의 모든 부·모가 자녀의 대학입시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자녀의 대학입시에 모든 것을 거는 부·모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자녀가 수능 점수가 높은 대학에 진학하길 원하는가? 만약 자녀가 그런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면, 진학할 가능성이 적다면, 자녀가 공부하지 않았다고 탓하지 마라. 부·모 탓이요, 부·모 탓이요, 부·모의 큰 탓이다.
솔직해지자. 어려운 일이지만, 자녀가 그런 대학에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은 부·모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높이는 것이다. 자녀를 탓하지 마라
실제로 최근 한국은행은 “소득 상위 20%와 하위 80% 간 전국의 의대·치대·한의대·수의대와 서울 소재 8개 상위권 대학의 진학률 격차의 75%는 개별 학생의 능력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 차이에 의한 결과”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더욱이 서울과 비서울 간 서울대 진학률의 차이 중 무려 92%는 부모의 경제력과 거주지역의 사교육 환경 등에 따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의 보고서만이 아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학생 중 65.1%가 소득분위 9·10분위인 고소득 가구의 자녀였다.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학생들의 배경을 보면 더 놀랍다.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학생을 기준으로 서울대 의대에 재학 중인 학생의 80%가 소득 9·10분위 가구의 자녀였다.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학생 중의 비율이니, 전체 학생으로 확대하면 고소득 가구의 비율은 더 높을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이 생전에 내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결정은 제대로 된 부모를 고르는 것”이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한다고 한다. 하지만 2024년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겐, 스티글리츠의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어도, 본인만 열심히 노력하면 어떤 난관도 이겨낼 수 있고, 부·모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사회에서 저소득층이 평균소득으로 이동하는 데 150년이 걸린다고 했다. 2024년 가난한 집에 태어난 한국인이 평균소득에 도달하려면 2174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최근 소득 불평등과 상대 빈곤율 등 일부 사회지표들이 개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가 점점 더 불평등한 사회, 희망이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이다.이런 사회에서 우리, 기성세대는 청년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더 열심히 노력해 더 좋은 스펙을 쌓으라고? 그래도 100명 중에 한두명은 열심히 노력해서 계층 상승을 했다고 희망을 줘야 할까?세상에 모든 나라가 한국과 같다면, 체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나라가 한국과 같지는 않다.
핀란드에 살고 있는 청년 중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신의 성공에 중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6%에 그쳤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핀란드가 처음부터 그런 나라가 아니었고, 핀란드인의 유전자엔 특별히 ‘평등 유전자’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 결국 지금 우리가 직면한 참담한 현실은 우리, 기성세대가 만든 것이다.
부·모가 청년의 삶을 결정하는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고 혁신을 기대하겠나. 망국만이 남아 있다.부·모를 선택할 순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살고 싶은 나라로 만들 순 있다. 모두가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시대에,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세습되는 세습자본주의를 대신할 믿을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복지국가재구조화연구센터장 한겨레| 2024.09.02.
공정'에 정신팔린 사이 공고해지는 '불평등'
피케티가 역설하는 우리 시대의 과제 - 21세기 사회국가와 민주적, 생태적, 다원적 사회주의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공정'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한편에서는 '공정'을 비판하고 '평등'을 복권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런 반격은 '공정'론의 밑바탕에 흐르는 능력주의를 이모저모 따지며 비판하는 방향에서 전개되기도 했고, '공정'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한국 사회에서 더욱더 공고해지는 계급 불평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사회학자 조돈문 전 가톨릭대 교수가 <불평등 이데올로기: 수저 계급 사회에 던지는 20가지 질문>(한겨레출판, 2024)을 통해 '평등'이 '공정'보다 더 근본적인 가치이면서 더 시급한 과제임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또한 이 책은 최근에 겉으로 드러난 추세와는 달리 현대 한국인이 꼭 '평등'보다 '공정'을 중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논쟁적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한데 이에 더해, 이런 현재진행형 논쟁에 풍부한 지적 자원과 자극을 줄만한 번역서도 나왔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인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평등의 짧은 역사>(전미연 옮김, 그러나, 2024)다. 피케티라고 하면, 이미 우리말로 소개된 두 대표작 <21세기 자본>과 <자본과 이데올로기>가 떠오를 것이다. 앞의 책은 국역본 분량이 800쪽이나 되고, 뒤의 책은 아예 1000쪽이 훨씬 넘는다. 독서 의욕을 원천봉쇄할만한 두께다. 이 점에서 피케티의 새 책은 더욱 반갑다. 제목부터, 평등의 '짧은' 역사가 아닌가. 장벽 하나가 치워진 느낌이다.
짧지만 풍성한, (불)평등의 역사
한데 <평등의 짧은 역사>도 한국 출판계 추세로 보면 그다지 '짧은' 책은 아니다. 300쪽이 조금 넘으니, 사회과학 서적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여전히 적지 않은 분량이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깊이와 넓이에 비하면, 확실히 '짧다'. 이 정도 내용을 어떻게 단행본 한 권에 다 담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일만큼 이 책은 평등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참으로 풍부하게 전한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추천사'에서 그 미덕을 이렇게 정리한다. "저자가 저명한 경제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경제학'이라는 좁은 테두리에 갇혀 있지 않다는 점", "자본주의에서의 (불)평등 문제의 핵심이 바로 권력관계에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비껴가지 않고 또렷하게 직시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권력관계에 환원해버리는 또 하나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이 세 가지에 더해, 불평등에 맞서고 실질적 평등을 이룰 대안으로 "민주적, 생태적, 다원적 사회주의"를 명쾌하게 제시하는 것 역시 장점으로 다가온다(5-10쪽).
<평등의 짧은 역사>를 읽다 보니 과연 이런 특징들이 눈에 들어온다. 깊은 인상을 받은 특징으로 적어도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정말로 짧은지 아닌지를 논외로 한다면, 이 책은 제목에 아주 충실하다. 그야말로 평등의 '역사'다. 근대가 처음 동터오던 시기부터 현재까지 수백 년에 걸친 시간 속에서 (불)평등이 어떻게 장기 변동했는지 간단명료하게 보여준다. 피케티의 방대한 전작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요약정리다.
그리고 여기에서 '역사'란 결코, 알면 좋지만 몰라도 상관없는 상식의 더미가 아니다. 우리가 자신을 알기 위해 반드시 직시해야 할 수단, 하나의 거울이다. 국가나 시장 같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거대한 제도들을 둘러싼 사회 세력들의 집단적 결정에 따라 노도와 같은 장기 추세가 형성됐고, 보통사람들의 삶은 8, 9할이 그 흐름에 의해 결정됐다. 자기계발 소재들인 개인의 지능이나 성정, 의지보다는 납세 유권자 선거제와 결합한 초기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느냐, 보통선거제와 결합된 사회국가 시대를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색깔이 정해졌다. 이런 근본적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확실히, 주식 가격과 아파트 값 변동에만 골몰하며 살아갈 때와는 다른 눈으로 삶을 바라보게 만든다.
둘째, <평등의 짧은 역사>는 평등의 실로 다양한 얼굴을 아우른다. 물론 뼈대를 이루는 논의는 소득과 자산의 세계사적 변화다. 여기까지는 경제학자가 지은 책에서 누구나 기대할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피케티는 전작, 특히 <자본와 이데올로기>에서 그랬듯이, 이 수준을 넘어선다.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한 분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교육을 별도 주제로 다룰 뿐만 아니라, 성별, 인종 등에 따른 불평등 역시 생색내기 식으로 몇 마디 덧붙이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심도 깊게 짚는다. 흔히 '정체성 정치'와 연관되는 이 주제들이 실은 분배 문제와도 직결된 (불)평등의 또 다른 측면임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특히 의미심장하게 읽은 것은 "제4장. 배상의 문제"다. 이 장에서 피케티는 식민지 노예제의 과거가 현재 자본주의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에 나타나는 심대한 불평등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를 프랑스와 아이티의 관계를 사례 삼아 검증한다. 피케티의 논의는 주변부 사회의 여러 양상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식민주의 문제를 기껏해야 여러 요인 중 하나로 얼버무리는 주류 발전경제학과는 딴판이다.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식민주의라는 핵심으로 육박하고, 총배상액이라는 형태로 그간의 모순을 깔끔하게 집약한다. 제국주의를 반성하려면, 이쯤은 해야 한다.
셋째, 홍기빈 소장도 '추천사'에서 강조하듯이, <평등의 짧은 역사>는 단순한 '경제학자'의 저서가 아니다. 오늘날 보기 드문 인간 유형인 '사회과학자', '사회사상가'의 작품이다. 익숙한 초역사적 경제 모델을 만사에 들이밀기는커녕 역사라는 캔버스 안에 경제, 정치, 사회, 문화 같은 인간 삶의 필수적 측면들을 총출동시킨다. 이것은 단지 경제학자가 다른 분야에도 해박하다는 정도가 아니다. '경제학자'라는 강제적 규정을 넘어 삶과 사회,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본다는 본래의 '사회과학'을 실현한 결과다. 또한 이것이, 특히 <자본과 이데올로기>가 나온 이후에 주류 경제학자들이 피케티를 그토록 경원시하거나 무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제 바깥 영역에 접근하는 저자의 자세가 이러하기에 <평등의 짧은 역사>는 좁은 의미의 경제를 넘어선 주제에서도 이 책만의 독창적 통찰을 선사한다. 나는 무엇보다 사회국가(국역본은 '사회적 국가'라 옮겼다)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논의에서 이를 확인했다. 물론 사회국가의 주된 수단이자 기능인 누진적 조세제도는 <21세기 자본>부터 피케티가 깊이 파고들고 정열적으로 설파해온 주제다. 한데 평등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짚고 더 나아가 미래까지 전망하는 이런 '역사' 안에 사회국가와 조세제도 논의를 배치하니, 그 함의가 더욱 깊게 다가온다.
탈자본주의의 출발점 – 조세재정국가의 진화
피케티는 사회국가(복지국가)를 조세재정국가라는 보다 일반적인 국가 형태의 진화 속에 자리매김한다. 모든 국가는 고대부터 어떤 식으로든 조세제도에 의존했지만, 실제로 세수가 국민소득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국가는 비교적 최근에야 등장했다. 적어도 유럽의 경우는 그렇다. 동아시아에서는 훨씬 일찍부터 원시 조세재정국가라 할 만한 형태가 등장했지만, 유럽에서는 18세기나 되어서야 조세재정국가 체제가 완비됐다. 다만 유럽의 조세재정국가는 처음부터 발달한 화폐경제와 결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기계제 산업과 결합했기에 처음부터 그 현재적, 잠재력 역량이 막강했다.
18세기-19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조세재정국가의 1차 도약이 전개됐다. 국민소득의 1-2%에 불과하던 세수가 6-8%로 증가했다(173쪽). 다만 이때 증가한 재정은 관료제의 뒤늦은 확대와 전 세계를 들쑤시고 다닐 군사력 확충에 투입됐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신자유주의 등장 직전까지의 시기에 조세재정국가의 2차 도약이 나타났다. 유럽 주요국들의 경우, 세수가 국민소득의 40-50%로까지 급증했고, 대폭 늘어난 재정은 이제 교육과 의료, 교통과 공동체 인프라, 각종 복지제도에 주로 사용됐다(168쪽). 이렇게 2차 도약을 거친 조세재정국가가 바로 사회국가다.
말하자면 피케티는 조세재정국가의 좀 더 긴 진화 과정 안에서 사회국가의 출현과 발전을 바라본다. 유럽과 북미에서 조세재정국가가 등장해 발전하다가, 불평등, 특히 계급 불평등에 대한 격렬한 항의와 이에 따른 보통선거제 민주주의의 출현을 통해 조세재정국가의 더 진화된 형태인 사회국가가 대두했다는 것이다.
피케티의 이런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론은 사회주의운동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이 운동을 분열시킨 첨예한 논쟁 구도에서 개혁적 사회주의, 즉 '사회민주주의'에 속했던 이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해온 일이 무엇이었는지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이 부르주아계급의 역사적 산물인 현존 국가를 계승한다는 점을 호되게 비판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을 계승했고 심지어는 더 발전시켰는지 따져봐야 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이제 막 2차 도약에 나서려던 조세재정국가의 중앙권력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2차 도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로 등장한 사회국가는 그러니까 애초 혁명주의자들이 비판 대상으로 삼았던 역사적 부르주아 국가를 일정하게 초과하는 셈이다.
피케티가 제시하는 "민주적, 생태적, 다원적 사회주의"는 이런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의 역동적, 복합적 진화 과정에 바탕을 두며, 신자유주의와 벌일 대결의 결과에 따라 사회국가가 미래에 더욱 확대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렇다고 피케티가 20세기형 사회민주주의의 단순한 부활이면 충분하다는 순진한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결론을 이어받아 <평등의 짧은 역사>에서도 "소유의 재분배만으로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한다. 소유 구조를 변혁해야 하며, 그러려면 생산과 서비스가 이뤄지는 현장, 즉 기업에서 권력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평등의 짧은 역사>는 이를 위해 1970년대 스웨덴의 임노동자기금 구상을 새롭게 다시 추진하는 방안까지 제시한다(220-223쪽).
이 대목에서 탈자본주의 이념-운동의 오랜 난제인 개혁과 혁명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세재정국가의 2차 도약이 이뤄지기 전인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개혁 대 혁명 논쟁의 주된 내용은 의회민주주의의 수용 여부를 중심으로 기존 국가를 이어받을 것인가, 단절할 것인가로 나타났다. 하지만 사회국가의 등장과 발전, 후퇴까지 한 차례 경험한 역사적 상황에서 피케티가 제시한 도식에 따르면, 개혁과 혁명의 문제는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키는 과제와 이런 사회국가 확대만으로는 자동으로 실현될 수 없는 기존 권력관계의 역전이라는 과제를 어떻게 결합할 것이냐는 고민으로 재정리될 수 있다. 이 경우에 두 과제의 관계는 더 이상 대립이나 양자택일이 아니라 공존과 중첩, 시너지다.
물론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경로는 단 하나일 수 없다. 아니, 각 사회가 밟을 경로는 과거보다 훨씬 더 다양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머레이 북친의 지역자치적 코뮌주의(<착취 없는 세계를 위한 생태정치학>, 서유석 옮김, 동녘, 2024)에서 영감을 얻은 쿠르드 자치정부의 로자바 혁명처럼,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의 진화 과정을 반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경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의 역사적 경로가 열린 사회(한국 같은)에서는 피케티가 제시한 탈자본주의론의 기본 구도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지속적인 확대와 활성화를 통해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를 복구하거나 새로 구축하거나 확장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계급 세력 관계를 실질적으로 역전시키는 도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피케티도 지적하듯이, 21세기에 사회국가를 성장시키는 힘은 무엇보다 기후위기와 인구/돌봄위기 대응에서 나올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최대 과오 - 조세재정국가의 후퇴와 역량 훼손
하지만 생각을 이렇게 굴려가다 보면, 우리의 현재가 더 답답해진다. 윤석열 정부의 실정에 관해서는 이미 지겨울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느닷없는 '공산전체주의'에 대한 선전포고부터 핵발전소 복고주의, 정파적 목적에서 시작된 의료 파국, 모험적인 대북 강경 기조와 교조적인 한미일 군사동맹 맹신, 이를 위한 뉴라이트 역사관 맹종까지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한데 그 중에서 정말 심각한데도 그만큼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과오가 있다. 부자 감세를 통한 조세재정국가 역량의 심각한 훼손과 후퇴가 그것이다. 대한민국의 국가기구는 오랫동안 조세재정 역량이 국내 자본주의 발전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감세국가'(김미경, <감세국가의 함정>, 후마니타스, 2018) 기조를 이어왔지만, 그래도 윤석열 정부 전까지는, 심지어는 박근혜 정부도 기존 역량을 후퇴시키는 짓까지는 차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
<평등의 짧은 역사>를 읽으며 확인한 것처럼, 조세제도는 단지 현대 국가의 여러 정책 영역 중 하나가 아니다. 현대 국가의 요체인 조세재정국가의 존립과 재생산을 위한 기본 토대다. 그리고 피케티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사회 개혁(심지어는 혁명까지도)이 출발할 원점이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 이 싹을 짓밟고 있다.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가 수탈당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재정 실패에 대해 더 많이 주목하고 더 많이 공격하며 더 많이 투쟁해야 할 이유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4.09.04.
‘존엄사’ 찾아 떠난 한국인들
2022년 6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의 개정안으로 발의되었다가 기간 경과로 폐기된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조력존엄사법안)이 7월5일 다시 독립 법안으로 발의되자 그동안 잠잠하던 존엄사 논쟁이 다시 불붙는 듯하다. 안락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불치의 말기 환자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존엄사는 이미 서구 일부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시행 중이다. 네덜란드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의사가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하는 방식의 존엄사를 합법화했다.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페인 등에서도 네덜란드와 비슷한 수준의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다. 특히 스위스는 외국인의 존엄사를 허용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10여개 주에서 의사의 도움을 받는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다.
존엄사(death with dignity)는 환자 자신의 의사를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죽는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리는데, 생명을 단축하는 과정에서 널리 환자의 고통을 줄여준다는 의미로 쓰이는 안락사(euthanasia)와 대비된다. 연명의료결정법 3조 1항은 ‘호스피스와 연명의료 및 연명의료 중단 결정에 관한 모든 행위는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하여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명문화하고 있다. 2023년 3월 스위스의 한 조력 사망 단체의 가입자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 4명이 의사의 조력을 받아 사망하였고 117명이 대기 중이다. 이는 일본(48명), 대만(49명), 중국(58명)의 2배 수준으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많은 것으로 집계됐으며 전체 97개국 중에서도 11번째라고 한다.
이런 존엄사의 형태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기 환자가 의사에게 요청해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하는 등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환자의 요청으로 의사의 처방을 받아 환자 자신이 약물을 복용하여 사망하는 경우이다. 이번 발의안은 사망을 앞둔 환자가 참기 어려운 고통을 호소하면서 스스로 의사를 표명하는 전자의 경우에만 의사가 사망에 이를 약물을 처방하도록 명시하였다. 이 법안은 기존의 연명의료결정법에서 나아가 연명치료 중단 여부와 관계없이 환자의 의사만으로 의사의 조력을 받아 환자의 죽음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지금까지 있어온 연명치료 중단 요청서 대신 환자 자신의 의사가 중요하므로, 그것이 불분명하거나 그런 의사 능력이 의심되는 경우 등 죽음을 원하는 환자의 의사가 진정한지 여부가 초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여론조사기관인 한국리서치가 2022년 7월 조력존엄사 도입이 논의될 때 국내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시행한 바 있다. 당시 조력존엄사 입법에 찬성한다는 의견은 82%에 달했다. 이는 서울대병원 가정의학 교수팀이 2021년 3월부터 4월까지 19살 이상 대한민국 국민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안락사·의사조력자살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와 거의 비슷했다(찬성 76.3%).
이에 대하여 의료계와 종교계 등은 반대하는 입장이다. 의사협회는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부족한 상황에서 혼란만 초래할 수 있고, 합법적인 자살을 허용하는 결정을 내릴 위험도 높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종교계는 조력존엄사법안은 결국 자살을 돕는 입법으로서 생명 가치의 존중에 반하여 환자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생명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으므로, 신의 의사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생명을 처분할 수 없다는 취지이다.
미국의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저서 ‘생명의 지배영역’에서 사람은 자신과 관계된 사항에 관하여 ‘향유적 이익’과 ‘비판적 이익’을 가지고 있는데, 존엄사는 비판적 이익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영화 구경, 골프 등 개인적인 호불호가 향유적인 이익의 예라고 한다면,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생 등 삶을 의미의 관점에서 전인격적으로 보는 것이 비판적 이익의 예가 된다. 따라서 불치의 질환과 마주한 환자가 생을 단순히 유지하는 향유적 이익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가 지켜온 삶의 가치, 즉 비판적 이익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고통스러운 연명 대신 삶의 질을 중시하는 입장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드워킨은 주장한다. 그는 또 생명의 내재적 가치를 고려하는데, 이 입장에서는 신이 아닌 생명의 내재적 가치로부터 존엄사의 근거를 이끌어낸다.
헌법재판소는 2009년 11월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사건인 2008헌마385 결정에서 “연명치료는 의학적인 의미에서 치료의 목적을 상실한 신체 침해 행위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고 … 비록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결정 및 그 실행이 환자의 생명 단축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이를 생명에 대한 임의적 처분으로서 자살이라고 평가할 수 없고, 오히려 … 자신의 생명을 자연적인 상태에 맡기고자 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부합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지난 1월 헌법재판소는 존엄사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뤄보기로 했다. 존엄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적지 않음에도 국회가 존엄사 관련 법안을 마련하지 않아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입법 의무를 위반했는지를 보기 위한 것이다. 청구인 쪽은 현행법에는 존엄사를 허용하는 근거가 없어 존엄사를 돕거나 방치할 경우 살인이나 자살방조 혐의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커 행복추구권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2018년 5월 오스트레일리아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사망 당시 104살)은 사망 전날 기자회견을 한 뒤, 다음날 스위스로 건너가 스위스 법에 따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존엄사의 방법으로 삶을 마감했다. 가톨릭 신자인 드리스 판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 부부는 지난 2월 네덜란드의 법에 따라 함께 존엄사로 세상을 떴다. 이들이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 자신들의 의사로 연명치료보다는 그동안 쌓아온 명예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하여 존엄사를 택한 것은 명백하다. 이제 우리 사회도 죽음이 가까운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소극적 관점에서 나아가 삶의 질과 가치, 의미를 생각하는 적극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존엄사를 논의할 때가 되었다.
이석태 | 전 헌법재판관 한겨레| 2024.09.06.
빵과 장미의 유통기한은 영원
미래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미래가 있는 사람처럼 죽고 있습니다
오늘도 죽고 있습니다 매일 죽고 있습니다
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맞아 죽고 부딪혀 죽고 깔려 죽고 붕괴되어 죽고 있습니다
이 시각에도 땀 흘리다 죽고 피 흘리며 죽고 있습니다
미래?
죽음을 갈아 넣는 세계와 헛된 죽음의 죽음을 멈추지 않는 이곳에 미래가 있습니까
알버틴장미 사향장미 다마스크장미 백장미 캐비지로즈 아일랜드의불꽃 아도니스 레이딩리딩 스노우퀸 붉은 글자의 날 튜터장미 노수부 바스의 아내 토마스 베케트 에밀리 브론테 티 로즈 ……장미들은
오늘도 제 몫의 이름을 달고 피어오르는데
이름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이름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죽고 있습니다
오늘도 죽고 있습니다 매일 죽고 있습니다
-시 ‘노동의 미래’, 안현미 시집 <미래의 하양>
김장배추와 무와 갓배추를 심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저 하얗게 타버린 고추를 달고 있는 고춧대를 어찌할까. 가지가 처지도록 굵직한 고추를 달고 있어야 할 고춧대에 따야 할 고추보다 떼어내 버려야 할 고추가 더 많다. 빨갛게 익어가다 물컹해진 고추와 익지도 못한 채 하얗게 타버린 애들은 또 어쩌나. 제아무리 매운 고추라도 번갈아 들이닥치는 땡볕과 폭우를 고스란히 버텨야 했으니 온전하게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게 염치없는 짓 아닌가.
보름 전, 에어컨을 설치하던 20대 기사가 땡볕에서 죽었다. 토하고 헛소리하고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등 열사병 증상을 보이는데 제대로 된 응급조치도 받아보지 못한 채. “오늘도 죽고 있”다. “매일 죽고 있”다. 뭐 하다? 일하다. “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맞아 죽고 부딪혀 죽고 깔려 죽고 붕괴되어 죽고 있”다. 누가? “알버틴장미 사향장미 다마스크장미 백장미” 등 각자의 이름과 영혼을 지닌 존재들이. “제 몫의 이름을 달고 피어오르”던 장미들이 “땀 흘리다 죽고 피 흘리며 죽고 있”다. 죽어라 일하다 진짜로 죽어버리고 있다. 누가? 고장 난 신호등처럼 아무리 일해도 붉은 불만 켜진 경제를 떠안고 사는 자들이 “오늘도 죽고” “매일 죽고 있”다.
“우리에게 빵을 달라, 장미를 달라.” 이 구호는 생존권만이 아니라 장미로 비유되는 인간다운 삶을 요구한단 의미다. 1912년 미국 로런스 파업에서 외쳤던 빵과 장미는 100년도 더 지난 오늘도 유효하다. 유통기한이 무한한 소망이나 비원처럼 갈수록 더 신선하다. 죽자 사자 달리다 거리에서 죽고 알아서 기고 쥐어짜다 진짜로 죽어버리는 나라에서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이 ‘빵과 장미’에서 노래한 시구를 떠올린다. “아득한 옛날부터 그녀들이 부르던 빵의 노래”를. 허드렛일에 지쳐 “정신은 예술도 사랑도 아름다움도 거의 알지 못했”던 자들의 노래를. “맞다, 우리는 빵을 얻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우리는 장미를 얻기 위해 싸운다”.
“이름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이름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죽고 있”는 세계에는 비상구가 없다. 31명의 사상자를 낸 아리셀 공장처럼. 불이 나자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하고 현장에 갇힌 채 죽어간 노동자들처럼. 비상구가 있는지도 몰랐던 비정규직처럼. 출입카드를 받은 정규직만 열 수 있는 비상구와, 사는 길과 반대 방향으로 열리도록 설계된 문이 있는 한 노동에 미래가 있는가. 누군가 비상구로 나가자고 하지 않는다면. 손잡고 화급히 함께 달려가지 않는다면.
김해자 시인 경향 | 2024.09.05.
묻기도 전에 퍼준다…윤석열식 '마음 외교'가 최악인 이유
세금 들여 일본 돕는다? '마음 외교'의 순진함
윤석열 정부 외교 정책을 만든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의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란 말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 전략을 설명하려면 '마음 외교'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마음 외교'라는 개념을 학술적으로 발전시켜도 꽤 좋을만 하다.
'마음 외교'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상대가 요구하기도 전에 그 일을 실행에 옮겨주는 것이다. 염화미소 외교라고 할까. 말이 필요 없다. '마음'이 중요한 것이니까. 그리고 남은 물컵의 '절반'을 채워주길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면 된다. 물론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건 '외교 주체의 마음'이 아니라 '외교 상대의 마음'이다.
개념화가 필요한 이유는 '마음 외교'라는 말의 어감이, 마치 식민지 가해국이나 전범국이 피해국을 위해 배상과 보상을 행하는 외교 쯤의 의미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마음 외교'는 피식민 국가, 전쟁 피해국가가 가해국을 상대로 하는 경우로 한정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피해국가는 '마음 외교'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 시대 한일 관계는 '마음 외교'의 '전형'으로 그 학술적 가치가 높은 사례들의 총합이라 하겠다. 모든 상식을 뒤집는 독특한 '윤석열식 마음 외교'는 외교학 교과서에 '반면교사'로 기록해 반드시 후대에 길이 남겨야 한다. '마음 외교'의 개념 연구를 위해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 사례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일이 먼저 필요하다.
2023년 3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 전범기업을 대신해, 한국 기업이 낸 돈으로 만든 기금으로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금을 대납하는 '제 3자 변제안'을 제안해 일본을 감동시켰다. 일본이 요구한 것도 아니고 윤석열 정부가 자발적으로 내놓은 안이었다. 대통령은 일본 최대 일간지 <요미우리>와 인터뷰에서 해당 아이디어를 "내가 생각한 것"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일본 언론은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 3명이 반대할 것을 우려하는 보도를 내 놓았지만, 윤 대통령은 이런 '일본의 마음'까지도 선제적으로 이해해 주면서 "향후 (한국이 일본 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는다. 걱정할 필요 없다"고 안심시켰다.
일본의 사과도 필요 없다. 윤 대통령은 <로이터> 통신 등과 인터뷰를 통해 "(일본 정부는) 역대 정부의 입장을 통해 과거 식민 통치에 대해 깊은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를 표명했다"고 말했고,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100년 전 일을 가지고 (일본에) '무조건 무릎 꿇으라'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이 무릎 꿇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해석이 잠시 나왔지만, 기자가 원문을 공개한 걸 보니, '일본에 무조건 무릎 꿇으라는 것을 윤 대통령 본인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 명확했다. 이 모든 게 '일본의 마음'을 미리 헤아린 외교 전법에 따른 것으로 봐도 부족함이 없다.
'물잔 반컵 외교'는 '마음 외교'의 하위 개념으로 비중 있게 다룰만 하다. 박진 당시 외교부장관의 "앞으로 이어질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서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는 발언은 '마음 외교'의 정수에 가까운 문장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이후 3월 24일 일본이 먼저 취한 수출 규제(2019년 7월부터 시작한 포토레지스트·불화수소·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를 공식적으로 풀기도 전에, '일본의 마음'을 먼저 읽고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던 것을 먼저 철회한다.
이후에도 '마음 외교'는 다각적으로 펼쳐진다. 2023년 8월 24일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에 방류되기 전부터 윤석열 정부의 '마음 외교' 전략은 빛을 발했다. 윤 대통령이 일본 정치인들을 만나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재개 질의를 받고 '이해를 구해 나가겠다'고 말했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한국의 여당은 일본 오염수의 안전성을 홍보하기 위해 자비를 들여 '우리바다 지키기 검증 TF'를 만들었다. 조승환 당시 해양수산부장관(현 국민의힘 부산 중구영도구 국회의원)은 "알프스(ALPS)를 거친 오염수가 연간 최대량까지 방류돼도 우리 해역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일본의 '마음'을 배려한 자발적 홍보 노력은 눈물겨웠다. TF 위원장인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은 '오염수'라는 단어를 문제삼고 "오염처리수라고 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고, 정부는 공식 문서에 '오염수'를 '오염처리수'로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 파견 검증단 대신 '시찰단'이 꾸려졌고, 그 활동은 비밀리에 이뤄졌다. 정부 기관이 초청한 영국의 교수는 한국에서 "오염수 1리터(ℓ)도 당장 마실 수 있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7월 기시다 총리에게 "국제원자력기구의 발표 내용을 존중한다"며 방류를 기정사실화했다.
압권은 대통령실이 지난 8월 23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1주년을 맞아 "핵폐기물, 제2의 태평양전쟁 같은 야당의 황당한 괴담 선동이 아니었다면 쓰지 않았어도 될 예산 1조6000억 원이 이 과정서 투입됐다"고 브리핑하며 야당에게 사과를 요구한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한국은 일본이 방류한 오염수의 안전성 홍보를 위해 1조6000억 원을 쓴 셈이다. 결국 일본은 가만히 앉아서 남의 돈으로 '후쿠시마 오염수' 안전 홍보 성과를 거뒀는데, 이런 일은 모두 자발적 '마음 외교' 개념화를 위한 중요한 사례들로 인용될 수 있겠다.
최근 일본의 사도 광산 유네스코 등재 과정 역시 마음 외교'의 선제적 가동 사례로 손색이 없다. 한국은 일본 '근대 산업 유산'이 내재한 윤리적 논쟁을 과감히 생략하고 곧바로 인도 뉴델리로 달려가 일본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다 들어줬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등재는 관련국 한 국가라도 반대할 경우 이뤄지지 않는다.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은 한·일 정부가 사전에 '강제노동'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일본은 '사도 광산의 전체 역사' 반영 전시물을 변방의 향토박물관에 가둬놓고, '강제'라는 말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사도섬 주민들은 '축제'를 벌였고, 피해국 한국은 국론 분열과 내부 논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쓸려 들어갔다. 2015년 일본은 군함도 등재 당시 강제노역을 인정하고 조선인 피해자를 기리겠다고 한 약속을 어긴 적이 있는데, 똑같은 일이 더 나쁜 방식으로 재현된 셈이다.
가장 중요한 사도 광산 논란의 근원적 질문은 지워졌다. 아베 정부가 극우 표를 의식해 만든 일본의 '근대 산업 유산' 지정 프로젝트는 생존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인류의 불행한 역사의 흔적들에 '산업 유산'과 '근대화'란 이름의 싸구려 포장지를 둘러버린 기괴한 정치적 장난질이다. 과거를 지우려는 '일본인의 자긍심'을 돋우고, 역사 왜곡의 우회로를 뚫어 준 윤석열 정부의 '마음 외교'는, 돈이나 외교적 실익으로 따질 수 없는 인류 보편 윤리 가치의 훼손으로 이어진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는 유네스코 등재된 '관광지'이지만, 사도광산이나 군함도처럼 '근대 산업 유산'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만약 아우슈비츠 일부 시절에 '근대 바이오 산업 유산' 따위로 의미를 부여해 한쪽 구석에 전시실을 운영한다고 생각해보자.
'강제 동원'을 두고 해석을 달리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논리는 '당시 식민지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일본인이 일본인을 채용했는데 무슨 강제가 있느냐는 것이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김문수 고노동부 장관의 인식과 똑같다. 1910년 한일병합이 불법인데, 조선인이 일본국적이라는 해괴한 논리는 이렇게 '일본의 마음'을 이용하는데 요긴하게 쓰인다. 이렇게 따지면 프랑스인은 한때 나 독일 국적을 가졌던 적이 있고, 인도인은 한때 영국 국적을 가진 적이 있는 것이다.
영화 <파묘>를 두고 '반일 영화'라 거품을 문 사람들이 '민족 정기'나 '쇠말뚝'의 비이성적 해프닝을 진지하게 다뤘다고 비난하느라 시간을 쏟아 부었지만, 정작 간과된 부분은 현재 진행형인 으스스한 내선 일체의 기막힌 현실이다. 이 영화는 지금 한국 정부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추악한 과거의 무덤 위에 묘를 쓰고 피해당한 자국민의 정당한 요구에 '출입 통제' 철망을 둘러주고 있는 중이다.
사도광산과 군함도가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자격이 되는가에 대한 논쟁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수많은 '하층 노동자'와 '식민 노동자'들이 혀 죽어나간 으스스한 폐건물을 두고 벌이는 '축제'에 들러리 서는 한국 정부는 대체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가.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 운운하며 조연이 못 돼 안달이 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모든 걸 피해 국가가 '자발적'으로 세금을 들여 진행하고 있다. 가해국에 이익을 안겨주고, 국론 분열을 일으키며 인류 보편의 가치를 뭉개버리는 윤석열 정부의 '마음 외교'는 꼭 기록돼야 한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사도광산과 군함도는 기민(棄民, きみん, 버려진 국민)의 역사다. 메이지유신에서 시작해 '전쟁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의 동력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더 정확하게는 '쓰고 버려진' 일본의 하층 노동자, 식민지의 2등 국민들이 '근대화'와 '전쟁'을 위해 이름도 없이 죽어나가며 체제를 지탱했다. 국가는 증기 기관차의 뻘건 아궁이에 석탄을 집어 넣듯 '기민'들을 광산에 내던졌고, 그에 대한 윤리적 고찰도 없이 무명의 '산업 유산' 역군으로 서둘러 매장해 버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출신 불분명의 이름없는 일본 노동자의 죽음으로 버텨내고 있는 후쿠시마를, 언젠가 '일본 국난 극복의 모범 유산'으로 지정하자고 할까 두렵다. 거기에 한국이 '마음 외교'로 들러리 설까 더 두렵다.
대통령실이 최근 공식 브리핑에서 야당을 비판하며 '탄핵 빌드업'이라는 말을 사용한 걸 봤다. 대통령실의 언급 덕에 이제 사람들은 대통령과 '탄핵'을 연관지어 생각하게 됐다. 그 유명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속 프레임 전략 실패의 전형적인 사례다. 기왕 대통령실이 '탄핵'을 언급했으니 한마디 하겠다. 윤석열 정부의 비상식적, 비윤리적 '마음 외교'도 혹시 '탄핵 빌드업'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을까?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4.09.07.
참으로 ‘별난’ 대통령
분명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의 국회를 너무 싫어한다. “국회만 없으면 장관 할 만한 것 같다”(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는 말에서 ‘장관’ 대신 ‘대통령’을 넣으면 딱 윤 대통령의 요즘 심사일 게다. 얼마 전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살아오면서 처음 경험하는 (국회) 상황 ”이라며 지금 국회에 대한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국회를 전쟁터로 만든 책임의 절반 이상은 대통령에 있는데도 모른 체다.
윤 대통령의 국회에 대한 반감은 22대 국회 개원식 불참으로 적나라하게 표출됐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국회 개원식에 참석 안 한 첫 대통령이다. 역대 대통령은 지금 못지않거나 더 고약한 정치 상황에서도 국회 개원식에는 참석했다. 야당의 그 ‘조롱과 야유, 피켓 시위’ 속에서도 협치를 당부하는 연설을 했다.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를 존중했기 때문일 터이다. 윤 대통령은 국회, 국회 입법권을 존중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국회 개원식 불참을 통해 그걸 재확인시킨 것이다.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만이 “처음 경험하는” 게 아니다. 윤 대통령은 “이때까지 바라보던 국회하고 너무 다르다”고 했지만, 국민들이 보기엔 오히려 윤 대통령이 여태까지 보던 대통령들과 너무 다르다. 참으로 ‘별난’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만큼 국회 인사청문회를 무시한 대통령은 없었다. 인사청문회에서 심각한 도덕성 의혹이나 왜곡된 역사 인식, 망언 전력, 자질 부족 등이 드러나 적합성에 의문이 제기된 후보자들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임명을 강행했다. 그런 경우 역대 대통령은 지명을 철회하거나, 그래도 임명해야 할 불가피한 이유라도 설명했지만 윤 대통령은 막무가내다. 김문수 노동부 장관은 청문회에서 ‘일제시대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 ‘제주4·3은 공산 폭동’ 등 왜곡된 역사 인식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은 “공산 혁명에 악용될 수 있다”며 차별금지법에 반대했다. 그런 이유 등으로 인사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했는데, 윤 대통령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임명을 강행했다. 임기 절반이 지나지 않았는데 국회 인사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명된 장관급 인사가 29명에 달한다. 그새 지난 24년 동안 ‘공직윤리’의 파수 역할을 해온 국회 인사청문회의 허들은 무력화됐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재의요구권) 남발도 국회 입법권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21차례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1987년 민주화 이래 역대 대통령이 행사한 거부권을 전부 합한 것보다 많다. 특히나 본인과 가족의 방탄을 위해 거부권을 행사한 경우는 윤 대통령이 처음이다. 심각한 것은 야당과 싸움만 하려드는 윤 대통령이 앞으로도 무차별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란 점이다.
결국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사건은 검찰에 의해 무혐의 불기소로 결론났다. 검찰수사심의위라는 구색까지 맞춰 면죄부를 갖다 ‘바친’ 꼴이다. 검찰 수사 지휘부를 통째로 갈아치우고, ‘황제 출장 조사’를 벌였을 때부터 예견됐던 결과다. 윤 대통령은 조만간 국회에서 의결될 두 번째 ‘김건희 특검법’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배우자 보호’를 위해 이리 물불 안 가리고 휘두르는, 무도한 대통령은 예전에 없었다.
윤 대통령의 상궤를 벗어난 국정운영에 대해 민심은 이미 ‘심리적 탄핵’ 상태다. 지난주 갤럽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 지지율은 23%에 그쳤다. 총선 이후 5개월 동안 지지율은 20%대에 고착되어 있다. 직선제 도입 이래 집권 3년차 대통령 지지율로는 최저다. 역대 대통령은 지지율이 급락하면 반성하고 쇄신하는 척이라도 했다. 인사 쇄신도 하고, 영수회담도 하고, 잘못에 대해 사과도 하고, 민심의 요구에 부응하려 노력은 했다. 한데 윤 대통령은 바닥의 지지율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신 국회·야당 탓을 하고, 여당 대표 탓을 하고, ‘검은 세력’의 선동 때문이라고 한다.
대통령실의 “지지율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변화 없이 지금까지 해온 대로 독단·독선의 국정운영을 계속하겠다는 선언으로 들린다. 국회와 야당은 무시하고, 여당은 들러리 세우고, 오로지 ‘거부권’과 ‘검찰’에 기대어 남은 2년8개월을 버틸 요량인 것 같다. 갑작스레 검찰이 전임 대통령 수사에 가속페달을 밟는 것도 그 일환일 터이다. 머잖아 지지율 20% 선도 무너질 수 있다. 민심이 성나면 배를 뒤집는다는데 과연 그런 걸로 버틸 수 있을까?
양권모 칼럼니스트 경향 | 2024.09.09
김건희라는 비극 2
지난 7월 국민의힘 전당대회 때 불거진 문자 파문은 한국 보수 정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위임받지 않은 권력이 대통령 직무에 개입한, 비공식 권력이 공식 권력을 정신적·현실적으로 압도한 사건이었다. 당시 나는 ‘김건희라는 비극’의 글에서 윤석열 정권의 실정을 가리는 ‘김건희발’ 불의에 익숙해지지 말자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처음 불행을 만난 듯 ‘순진한’ 분노가 필요하다고 했다.
두 달 만에 ‘김건희라는 비극’이 다시 등장했다. 이번엔 총선 공천 개입 의혹이다. 김건희 여사가 22대 총선에서 김영선 전 의원에게 지역구를 옮겨 출마할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뉴스토마토 보도에 따르면 김 여사 요청대로 출마지를 옮긴 김 전 의원이 공천에서 배제되자 화가 나서 김 여사와 나눈 텔레그램 문자를 현역 의원 두 명에게 보여줬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여권은 “허구”라 했고, 김 전 의원도 “김 여사와 문자를 나눈 적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선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나왔고, 야당도 특검법 처리 때문에 갖고 있는 증거를 내놓지 않는단 말이 들린다. 대통령실과 한동훈 대표 측의 공천 불협화음, 정권 초부터 계속된 김 여사 의혹을 떠올리면 이번 사건을 미리부터 거짓이라고 단정할 이유가 없다. 이쯤만 해도 충분히 심각하고 위험하다.
사실이라면 김 여사는 공적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해 여권 권력지형 변화에 적극 힘을 행사한 셈이 된다. 전대 파문과 달리 실제 정치를 했다고 봐야 한다. 대통령의 조력자가 아닌 사실상 정치 동업자다. 시스템으로 제어되지 않는 내밀한 동업자. 이는 ‘육사 위에 미용사’로 불렸던 이순자 여사와 차원이 다르다. 이 여사는 부정부패 의혹에 연루된 정도였다. 흔히 견주는 최순실 국정농단과도 비교할 수 없다. 최순실은 비선이지만 김 여사는 권력의 원천에 있다. 장악력, 영향력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정당 책임정치의 근간인 공천에 사인이 개입했다면 ‘특별한’ 선거법(후보와 배우자의 동일한 책임) 규정상 명백한 위법이다. 이렇게 공천받은 사람의 문제는 없을까. 그렇지 않다. 오로지 대통령 부부의 눈치만 보면 되는데 정당·정치 발전 따위가 중요할 리 있겠는가. 보수의 정당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당장 “나도 이렇게 당한 건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낙천자들이 불만의 대오를 형성하면 국민의힘은 갈등과 분열이라는 현실적 위협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흉흉한 소문이길 바라지만 공천 개입 의혹에 정책책사로 포장된 역술인 이름도 떠돈다. 베갯머리 국정농단도 모자라 제사장의 영감으로 정치가 움직이는, 신정체제로 되돌아간 듯한 착시마저 든다.
한국 민주주의엔 오래된 결핍이 있다. 선출 권력에 대한 취약한 견제, 이로 인한 권력 남용이다. 공적 정당성이 없는 개인(집단)이 공적 의사 결정에 관여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이 차원을 넘어섰다. 후견 민주주의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학계는 “민주주의의 구조적 퇴행” “사실상 비민주주의”로 의견이 갈렸다. 하지만 공천 개입 의혹은 이 구분조차 머쓱하다. 민주적 선출, 공정 선거가 민주주의의 핵심인데 김 여사가 단지 선출된 대통령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공천에 개입했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무너뜨린 사건이라는 평가 말고는 빼고 덧붙일 게 없다.
공천 개입 의혹이 지금 올드라이트·뉴라이트 전성시대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윤석열 정권의 국가운영 방식은 이승만·박정희식 권위주의 국가 모델을 지향한다. 이념적으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내건 뉴라이트의 깃발을 좇는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과 김 여사는 올드라이트·뉴라이트일까. 여권에서조차 “뉴라이트가 뭔지 모른다” “좌파인 것 같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명확한 정체성은 없는 것 같다. 정권 초부터 “집권 비전·이념이 없다”는 비판을 받은 윤 대통령의 정체성 부재를 올드라이트·뉴라이트 세력이 메우고, 대신 이들은 기득권 위상을 지키는 걸로 관계를 유지하는 양상이다. 그들로선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오직 ‘권력’일 뿐이다.
정권과 시민(사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공천 개입 의혹은 험하고 깊은 심연이 될 게 분명하다. 김 여사가 지난 10일 서울 마포대교에서 현지 지도를 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더 이상 ‘순진한’ 분노로는 해결될 수 없을 것 같다. ‘충분한’ 분노가 필요하다. 곳곳에서 민주주의 감각을 되찾는 훈련부터 해야겠다. 히틀러 독재 시절, 저명한 학자인 하버드대 골드하겐 교수는 “한 시민이 자신의 책임을 권력에 떠넘길 때 역사는 과거로 화석화돼 그들의(권력의) 과오는 완벽히 소멸된다”고 일갈했다. 우리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구혜영 정치부문장 경향 | 2024.09.11.
이제는 적정시민
다만 하나의 몸짓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다가와 꽃이 된다. 시인의 얘기다. 다만 익명이던 존재는 호명되었을 때, 비로소 다가와 주체가 된다. 철학자의 얘기다. 이름을 알지 못하고 시선이 닿지 않았더라도 이미 거기 있지 않았던가. 자연계가 그렇다. 하지만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시선이 닿는 존재가 되는 것이 인간계다.
부모는 자식의 미래를 생각해 이름을 짓는다. 국가도 시민에게 이름을 붙인다. 통치에 적합한 인간 유형을 만들기 위해서다. 일제는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부르며 개조하려 했다. 국가를 세우다가 반쪽에 부딪친 이승만은 반공으로 무장한 우익국민을 원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국민교육 헌장을 만들어 충성하는 국민을 육성하려 했다.
시민은 권력이 부르는 대로 살지 않았다. 서로를 ‘민주시민’으로 부르며 권력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던 노태우는 ‘보통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했지만, 더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 이들은 민중과 계급의 이름을 원했다. 21세기에 들어서 각자도생하는 개별 시민이 늘었다. 대통령을 바꾼 촛불 시민이 시대를 담은 이름을 남겼을까. 요즘 언론의 여론조사는 빨간 시민과 파란 시민을 두드러지게 한다. 이제 우리는 서로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무한성장하는 인간은 없다. 어른이 되어서 살찌고 몸무게가 늘어나면 비만이라며 질병으로 여긴다. 성장이 끝나면 적절한 영양을 섭취하면서 신체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건강하세요” “건강이 최고”라는 얘기는 신체의 적정 상태를 바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생물학적 적정성이 필수적이다.
우울증, 조울증, 조증 등에서 우울증은 돌봄을 요청하는 신호라고 한다. 우울증도 생존을 위해 필요했다는 것. 하지만 우울 상태의 지속과 반복은 심리적 적정성의 상실이다. 비교 경쟁에 찌들면 우월감과 열등감, 특권과 무권리 너머 공생의 자존감을 키우기 어렵다. 깨지고 상처받은 영혼이 늘어난 현대사회에서 심리적 적정성이 절실해졌다.
화폐를 추앙하는 시장경제는 사회를 집어삼키며 확장되었다. 긴 인류사에 두 세기에 불과한 고도성장기에 생긴 일이다. 공황, 세계대전, 공산주의를 겪으며 인류는 시장의 위험을 느끼고 통제했다. 위협이 사라진 듯 보이자 다시 탄소를 뱉어내며 성장 중독을 드러냈다. 급기야 기후위기를 불러왔다. 무한성장과 탈성장 사이에서 적정경제를 찾아야 한다.
선거에서 떨어지더라도 다시 기회가 열려 있어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질 때 민주정치가 가능하다. 하지만 기본이 무너지고 있다. 양당정치는 서로를 범죄자로 만든다. 권력을 잃으면 죽거나 감옥 갈 테니 권력투쟁이 격하다. 기후위기나 불평등 해결에 진심일 수 없다. 일제를 둘러싼 퇴행적 논쟁은 미래에 대한 상상력 빈곤을 보여준다. 낡은 진영에 새로운 질적 발전은 없다. 지금 긴박한 문제에 맞는 적정정치가 필요하다.
시장을 맹신한 자본주의는 공황으로 망하고, 시장을 제거한 공산주의는 토대가 망한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었다. 시장이냐 국가냐 하는 논쟁은 사람들을 설득할 내용이 빈약해 ‘좌파’나 ‘극우’라는 이름의 적을 만들어 표를 얻으려는 식상한 선동이다. 기초연금, 최저임금, 4대 보험 등 사회주의적인 것, 주식과 코인과 부동산 영끌 투자 등 자본주의적인 것이 뒤섞인 세상이다. 시장이나 국가 중 하나에 대한 편향적 집착을 넘어 적절하게 배치하고 조합하는 식견과 역량이 적정사회로 인도할 것이다.
한반도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패권국가도 종속국가도 아닌 적정국가가 우리에게 맞다. 반중 반북에 열을 올리거나 반미 반일에 핏대를 세우면 도달할 수 없는 비전이기에 적정외교를 요구한다. 인간과 생물 모두를 다양한 존재로 인정하며 문명과 생태계를 조화시키는 지구적 적정성이 필수다. 너무 덥지 않고 너무 춥지 않은 지구는 생명 탄생의 우주적 적정성을 보여준다.
생태계와 인류의 파국을 보아야 잘못을 깨달을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환은 새로운 시민의 탄생에 달려 있다. 특권과 무권리 양극으로 사회를 해체하는 힘을 이겨내야 적정 상태에 이르듯 적정성은 대충 오지 않는다. 하지만 생물학적, 심리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외교적, 지구적, 우주적 차원에서 요구하는 적정성은 자연스러운 비전이다. 이를 실현할 주체로서 지금 필요한 시민의 이름은 ‘적정시민’ 아닐까.
조건준 | 아무나유니온 대표 한겨레 | 2024.09.11.
인류세 부결은 ‘궁정 쿠데타’였나
1946년 7월 태평양 미크로네시아 비키니섬에서 이뤄진 미군의 핵실험. 방사능 낙진은 전 세계 퇴적층에 기록을 남겼다. 1950년대를 인류세의 시발점으로 보는 과학자들은 플루토늄을 인류세의 주요 마커(표지)로 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에서 어쩔 수 없이 천동설을 인정하고 나오면서 읊조렸다는 말이다. 한 시대의 지배적인 과학 지식이 새로운 지식에 대해 얼마나 저항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난달 말 부산에서 과학계 최대 학술 행사인 세계지질과학총회가 열렸다. 원래 이 행사에서는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가 비준, 선포될 예정이었다.
인류세는 인류의 영향으로 지구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이 바뀌어 지구가 기존 지질시대인 홀로세의 평형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이다. 2000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파울 크뤼천이 인류세를 제기한 뒤, 지질학계는 2009년 인류세실무단을 꾸려 이를 공식 지질연대표에 넣을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인류세실무단은 10년 넘는 연구 끝에 캐나다 크로퍼드 호수를 인류세 국제표준층서구역(GSSP)으로 제시하며, 인류세는 1952년 시작됐으며 이때부터 급증한 인공방사성물질이 증거라고 밝혔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지난 3월 국제층서위원회 투표에 앞서 실시된 제4기층서소위원회 투표에서부터 12대4로 부결되고 말았다.
“인류세 부결 과정에 대해 아주 할 말이 많습니다.” 부산에서 만난 마틴 헤드 캐나다 브록대 교수의 말이다. 그는 인류세 공인 여부를 투표한 제4기층서소위원회의 부위원장이었다. 부결된 지 여섯달 가까이 흘렀는데도 과학자들은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 이틀 동안의 인류세 세션에서 한 과학자는 인류세 실무단이 제안한 안을 설명하며 주먹으로 연단을 꽝 치기도 했다. 다른 과학자는 아예 ‘인류세 회의론?’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과학계에서 사이비 취급을 받는 ‘기후변화 회의론’과 ‘부정론’을 빗대 인류세 반대론자를 맹공한 것이다. “과학을 오용해 기후변화 회의론을 지지한 활동을 파헤친 ‘애그노톨로지’(agnotology)를 통해 인류세 회의론을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애그노톨로지는 특정 주제에 대한 의심과 무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연구하는 학문이다.
헤드 교수는 자신이 인류세 실무단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얀 잘라시에비치 위원장과 함께 진행에서 배제됐고, 다른 부위원장이 진행을 맡으면서 투표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학계에서라면 진행자가 학술 문건에 대한 토론을 유도하고 제안자가 문건을 수정하는 절차를 밟는다. 인류세 투표는 그런 과정 없이 곧장 나아간 게 문제였다. 지난 4월에는 이를 ‘궁정 쿠데타’에 비유한 한 과학자의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부산에서 만난 인류세 연구자들은 “국제층서위원회가 투표 결과를 인정한다고 성명을 냈는데, 왜 부결이 됐는지 과학적인 문건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게 정상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런데, 왜 다수가 반대표를 던졌을까? 헤드 교수는 “충분한 과학적 토론이 없는 상황에서 이데올로기가 투표의 가장 큰 지배 요인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지질시대를 연구하는 전통적인 층서학자는 최소 수천년에서 수억년의 시간을 다룬다. 고작 72년 전에 새로운 지질시대가 시작됐다고 하는 인류세 주창론자들이 고요한 지질시대의 추상화를 그려온 이들에게는 침입자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박범순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장은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전환을 연상하게 한다”고 말했다. 당대의 과학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이 축적된다. 이를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이 떠오르지만, 기존의 과학 공동체는 이에 저항한다. 임계점에 이르고, 패러다임이 전환된다.
전통적인 과학자들은 ‘고정된 것으로서 자연’을 전제하고 멀리서 팔짱 끼고 관찰하는 방법론을 미덕으로 여겼다. 인류세에서는 이러한 패러다임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 인류가 자연을 쥐고 흔드는 압도적인 행위자가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세를 헤쳐 나가려면 과학은 자연을 움직이는 인간을 동시에 연구해야 하고 인문사회과학과도 협력해야 한다.
운석 충돌이나 핵전쟁이 나지 않는 한 인류는 지구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을 움직이는 행위자로 남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주는 개념은 인류세 말고는 없다. 새로운 과학적 관점은 언제나 오래된 관점을 흔들어 저항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세상은 변했다. 오래된 관점의 저항은 이어지겠지만 그래도 인류세는 계속된다.
남종영 |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한겨레 | 2024.09.11.
대통령실이 군부 한복판에 있는 비정상 정권
30년 전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 바로 옆 경복궁에 주둔하던 수방사 30경비단을 해체하려 하자, 군 장교가 한밤중에 청와대 상황실로 전화를 걸어 협박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30경비단은 영화 ‘서울의 봄’에서 반란군 수뇌부가 모여 군 병력을 운용했던 바로 그 부대다. 김 대통령은 경복궁의 군부대가 유사시 쿠데타에 동원될 수 있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항상 청와대를 지켜보며 압박하는 듯한 분위기를 누구보다 싫어했을 것이다.
지금 대통령실이 용산의 군 관할지역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쿠데타를 걱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직접적인 병력 동원의 위험은 없어도 대통령실과 군 수뇌부가 한 자리에 위치함으로써 발생하는 심리적인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군부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상황이 아닌데도 대통령과 군 수뇌부가 한 공간에 자리 잡은 건 분명 정상은 아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계엄령 논란을 비난하기만 할 뿐, 대통령실과 군부의 기이한 동거를 어떻게 해소할지에 대해선 아무런 고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전직 국방부 고위관리는 이런 얘기를 했다. “국방부 청사나 장관 공관에서의 의장 사열을 비롯한 군 공식 행사의 횟수가 대통령실 이전 이후 크게 줄었을 게 확실하다. 대통령과 한 공간에 있는데, 어느 국방부 장관이 활발한 대내·대외 활동을 하려 하겠나. 국방부 전체가 대통령실 눈치를 보면서 좀 더 충성스런 모습을 과시하려 애쓰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 반대로, 장기적으로는 군부가 대통령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도 있다.
대통령은 바로 옆의 군 지휘관들을 훨씬 믿을만한 사람들로 채워야 심리적 안정을 얻게 되고, 군부를 잘 통제하고 지휘하는 게 국정운영에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에 빠지기 쉽다. 과거 군사정부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대통령 경호처장의 국방부 장관 임명은 문민 대통령과 군부와의 적절한 경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징표로 읽힌다. 현 정부에서 특정 고등학교 출신이 군 정보기관을 장악했다는 얘기가 나도는 건, 검찰을 권력 기반으로 활용했던 것처럼 군 역시 그렇게 바라보고 싶어하는 대통령의 성향 때문일 수 있다.
최근 국방부의 비밀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것도 비슷한 단면이다. 7월28일 도쿄에서 한·미·일 국방부 장관은 3국 공동 군사훈련과 북한 미사일 정보공유 등을 담은 ‘안보협력 프레임워크(TSCF) 협력각서’에 서명했다. 당시 신원식 장관(현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안보협력을 되돌릴 수 없게 하기 위해’ 협력각서를 맺었다고 말했다. 국회 국방위에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되돌릴 수 없는 내용’이 뭔지, 왜 공개하지 않는지, 최소한 국회엔 보고해야 하는 것 아닌지 따졌지만, 신 장관은 “3국이 합의해야 공개할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되돌릴 수 없는 각서’에 서명하고도 국회에 설명하지 않는 건 삼권분립 원칙을 부정하는 것이며, 군의 비밀주의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상징적 사례다.
이명박 대통령은 광화문 촛불시위 때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 노랫소리를 들으며 자책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군의 관할지역에 둘러싸인 윤 대통령은 시위와 집회로부터 안전함을 느낄지 모르나, 그런 무감각이 오히려 정권 위기를 심화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시사인’이 최근 공개한 국가기관 신뢰도 조사를 보면, 대통령실의 신뢰도(10점 만점에 2.75)가 국회 신뢰도(3.38)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신뢰도 역전은 처음 있는 일이다. ‘아무리 못난 대통령이라도 국회의원보다 낫다’는 세간의 통념이 깨진 건 의미심장하다. 이미 ‘심리적 탄핵 상태’라는 말이 회자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용산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21세기에 무슨 계엄령 선동이냐”고 말한다. 대통령실의 한 인사는 “계엄군이 출동하는 순간 인터넷으로 그 광경이 실시간 중계될 텐데 계엄령이 가능하겠나”라고 반문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져도 대통령제 아래서 대통령과 군부의 경계는 있어야 한다. 군이 물리적 힘을 기반으로 민간 정부를 압박해서도 안 되지만, 대통령이 사적 친분과 충성심만으로 군 인사를 좌우하는 것도 위험스럽긴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이런 의구심과 논란은 청와대에서 단 하루도 잠을 자지 않겠다는, 무속 외엔 달리 이유를 추측하기 힘든 졸속적인 대통령 집무실 이전 결정에서 비롯했다. “제왕적 대통령을 벗어나려고” 청와대를 나온 윤 대통령은 지금 군부대에 둘러싸여 전임 대통령들보다 훨씬 더 민심과 멀어진 군주처럼 행동하고 있다.
박찬수 | 대기자 한겨레 | 2024.09.11.
명예훼손죄 존폐를 묻는다
검찰이 윤석열 대통령 사건을 수사하며, 통신사로부터 고객 3176명의 개인정보를 제출받았다고 한다. 수사기관의 통신정보 수집을 통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수사를 가능하게 한 죄명이 다름 아닌 ‘명예훼손’이라는 것이다. 검사 10여명으로 구성된 특별수사팀이 수사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과연 명예훼손이 이렇게 방대한 국가 수사력을 투입하고 멀쩡한 시민 수천명의 개인정보를 수집해야만 하는 문제란 말인가?
10여년 전만 해도 명예훼손은 진보와 보수의 입장이 뚜렷하게 대립하는 이슈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 광우병 문제를 보도한 문화방송(MBC) 피디(PD)수첩이 공직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압수수색을 당했고 제작인은 기소되었다. 이명박 정부를 비판했다가 입건되었던 ‘쥐코’ 동영상 사건, 박지원 의원이 박근혜 당시 대통령 관련 로비 의혹을 폭로했다가 기소되었던 사건도 있었다.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생활 의혹을 제기했다가 재판을 받았던 사건도 잊을 수 없다. 이 모든 사건의 죄목은 바로 ‘명예훼손’이었다.
그때만 해도 보수는 명예훼손을 무기로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들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고, 진보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며 이에 저항했다. 2012년 인권·시민단체들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연대’를 결성하고 544쪽에 달하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정책 제안’ 보고서를 발표했다. 당대의 시민사회 역량이 총집결된 이 보고서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대표적인 악법으로 형법상 명예훼손죄를 지적했고, 명예훼손죄의 전면 폐지를 제안했다. 표현의 자유와 명예훼손죄 문제가 공론화되었고, 그 이후 민주당 의원들의 주도로 명예훼손죄의 남용을 막는 여러 입법안이 발의되는 성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명예훼손죄는 보수가 독점하는 무기가 아니다. 오늘날의 명예훼손죄는 문재인 전 대통령을 ‘간첩’ 또는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사람들을 법정에 세운다.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유죄를 받았지만,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 한동훈 대표는 딸의 허위 스펙 의혹을 보도한 기자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박홍근 민주당 의원은 한동훈 대표가 당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했다. 이것은 철저히 한국적 현상이다. 상당수 국가에서 명예훼손은 범죄가 아니며, 명예훼손죄가 있는 나라에서도 명예훼손죄가 이렇게 남용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피디수첩 사건 이래로 법원이 공적 사안과 관련된 명예훼손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에 매우 신중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위 사건들의 상당수는 무혐의와 기소유예로 처리되거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소·고발 공방전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수사가 시작되면 당사자는 조사를 받고 심지어 압수수색을 당하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은 충분히 위축되고 고초를 겪는다. 나중에 무혐의나 무죄로 나오더라도 고소·고발의 본래 목적은 이미 달성된 이후다. 고소·고발은 수사·재판 결과와 무관하게 ‘남는 장사’로 계산된다. 명예훼손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손쉽게 동원될 수 있는 수단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정치권이 스스로 명예훼손 고소·고발을 자제하고, 수사기관은 절제된 수사를 신속하게 마무리하는 것이지만, 그런 일은 벌어질 것 같지 않다. 결국 입법적 조치를 취하는 수밖에 없다. 가장 급진적으로는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면서 다른 대체 규제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고, 친고죄 전환, 명예훼손죄 성립 요건 강화, 위법성 조각 사유 강화 등으로 명예훼손죄의 적용 범위를 적절한 수준에서 제한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명예훼손을 도구화하는 상황에서 그 존폐에 대한 논의의 장이 열릴 수 있을지는 난망한 일이지만, 명예훼손의 존폐가 더 이상 특정 정치세력이 유리하고 불리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명예훼손죄 남용을 막자는 것은 상대를 부당하게 괴롭힐 수 있는 무기를 ‘함께’ 내려놓자는 제안이자, 수사기관과 법원에 떠넘기지 말고 우리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뜻이다. 현재의 우리 정치문화가 미성숙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정치가 해결해야 할 일을 사법에 위탁하는 것이 고착화되면 정치적 역량이 더욱 축소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홍성수 |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한겨레 | 2024.09.11.
언제나 '공급 확대'만 외치는 윤석열 정부, 투기 거품 조장 주인공?
정부가 만드는 세대간 부동산 투기 사다리
서울시내 한 재개발구역의 입주권을 감정평가하고 있다. 입주권이 소재한 지역은 바로 전광훈 목사의 사랑제일교회가 있는 장위10구역이다.
장위동 일대는 2006년도 이명박 서울시장 당시 뉴타운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1구역에서 15구역까지 구역에 따라 사업속도가 상이하다. 장위1, 2, 4, 5, 6, 7, 10구역은 사업이 완공되었거나 진행중이다. 이에 따라 장위동 일대에 1만 세대 이상의 신축아파트가 공급되었다.
장위동에 공급된 신축 아파트 가격은 59㎡기준 2021년에는 최고가가 10억 원을 웃돌았다. 2022년 하반기부터 2023년까지는 조정을 받아 7억 초반까지 하락했으나 올해 다시 반등해 최근에는 8억 초반대 수준에서 거래된다. 84㎡는 2021년 13억 중반대까지 올랐으나 2022년 하반기부터 지난해까지 조정을 받아 8억 중반까지 하락했다. 올해는 역시 반등해 10억 초반대를 회복했다.
재개발로 인해 주민들이 이주한 후, 철거 전의 장위동을 몇 차례 가본 적 있다. 전형적인 서민 거주 저층주거지였다. 주민들이 이주한 후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빈 골목길, 곧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동네를 걸으면서 불과 몇 달 전까지 멀쩡히 사람들이 살던 벽돌집과 골목길이 모두 사라진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장위10구역은 2017년 관리처분인가를 받아 주민 이주 후 2020년부터 철거가 시작됐다. 그러나 조합과 사랑제일교회의 충돌로 인하여 사업이 계속 지연되어 왔다. 사랑제일교회는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상 수용절차를 통한 감정평가액 82억 원에 불만을 품고 명도를 거부하였고, 법원 판결과 관계없이 조합과 보상금 500억 원을 합의하는 초유의 일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제일교회로부터 추가 요구가 이어지자 조합은 결국 사랑제일교회를 제척하고 사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오랜기간동안 재개발사업이 지연되다보니 원주민 조합원들의 피해가 얼마나 막심할까 싶었는데, 조합원들에 대한 뉴스가 별로 없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위10구역은 2008년 정비구역 지정, 2013년 사업시행인가를 받았는데, 사업시행인가일 이전의 공시지가가 기준이 되다보니 종전자산 평가금액이 매우 낮은 편이었다. 또한 2017년 관리처분일 기준으로 조합원 분양가도 낮았다. 당시만해도 부동산 투기열풍이 몰아치기 직전이라 소유자들 중에서 현금청산자들이 많았고, 거주인구 3천여명 중 조합원수는 400여명에 불과했다. 조합원분양가가 59㎡기준 3억4000만 원, 84㎡기준 4억5000만 원 정도였으니, 현재 시점 기준 상승한 시세를 고려하면 조합원 프리미엄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종전자산 권리가액 3억인 조합원이 84㎡ 아파트를 분양신청했을 때, 추가분담금 1억5000만 원만 부담하면 현재 시세 기준 10억 아파트를 갖게 된다. 조합원 입주권이 양도가능한 조건이라면 5~7억 정도의 프리미엄을 붙여 매도할 수 있는 선택지를 갖게된 것이니 조합원들은 대부분 부동산시장 급등기의 혜택을 고스란히 받게 되는 케이스였기 때문에 사업이 장기간 지연되더라도 큰 불만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오지 않았다.
사업은 실제로 늦춰졌다. 지난해 12월 사랑제일교회가 구역에서 제척되는 내용으로 정비구역 촉진계획이 변경되어야 했다. 이에 지난 7월에 정비사업통합심의을 거쳤으며, 이를 기초로 사업시행계획인가, 관리처분 등의 절차를 모두 다시 거쳐야한다.
지금까지 조합원들이 분양신청한 내용은 다시 모두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공사비가 상승한만큼 조합원분양가 또한 상승할 것이다. 물론 공사비 상승에 따라 일반분양가도 함께 상승할테지만 경제상황이 안갯속인 상황에서 높은 분양가로 인해 분양성이 낮아질 수도 있다. 조합원 분양가가 얼마나 높아질지 매우 불확실한 상황이다.
장위10구역 재개발사업이 도대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조합원의 권리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 시간을 들였음에도, 외부의 부동산 시장 상황이 불안정적이고 변동성이 큰데다 부동산 입주권과 관련된 거래정보가 깜깜이인 상태에서 종전의 조합원 입주권 거래사례를 기준으로 조합원이 보유한 입주권 가치를 판단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장위10구역의 경우 거주인구 3000여명 중 조합원수는 400여명이고, 공급예정 아파트는 2000여 세대이다. 2000세대의 새아파트가 공급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300여세대, 3000여명이 거주하던 주택이 사라진다. 이중에서 개발사업으로 인한 이익을 누리는 사람은 400여명의 조합원들 뿐이다. 조합원 세대수가 적다보니 아파트 2채의 입주권을 갖고 있는 조합원도 제법 있었는데, 이들은 운 좋게 더 많은 입주권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었다. 대부분은 아마 자녀에게 한 채 물려주기 위해 추가 입주권을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조합원들은 부동산 시장이 활황인 좋은 때를 만나서 큰 개발이익을 얻으리라 기대했으나, 이들마저도 불안정한 부동산 시장 상황으로 인하여 불안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곳을 터전으로 삼았던 3천여명 대부분의 거주자들이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 같은 현상이 장위동 일대 재개발 지역 전역에서 일어났다. 일대에 신축 아파트 1만여 세대가 공급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만 명이 거주하던 노후주택이 사라졌다. 저소득층, 서민, 청년들이 거주하던 서민주택지, 즉 대체로 주택가격 2~3억 원, 월세 50만 원 전후의 저렴한 주택 공급이 감소한 것이다.
도심지에서의 주택 공급은 순수한 공급이 아니다. 멸실을 동반한다. 고가의 새 아파트를 기준으로 보면 공급이지만, 저가의 낡은 주택을 기준으로 보면 공급 감소다. 10억짜리 아파트가 공급되는 대신, 월세 50만 원으로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은 사라진다. 10억짜리 새아파트의 공급은 반드시 가계빚을 동반한다. 심각한 가계부채 문제가 국가경제 위험 뇌관이 되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그래서 무조건적인 재개발, 재건축 규제 완화가 능사가 아니다.
기존의 원주민 조합원들 조차도 추가분담금 수억 원을 부담해야한다. 10억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필요한 수억 원의 추가분담금은 빚 없이 마련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수요자, 즉 국민의 부담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아파트 공급은 허상이다.
2억의 부담 능력을 갖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면 2억 수준의 주택 공급이 정책 목표가 되어야 한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 즉 가격을 고려하지 않은 공급, 소득과 괴리된 공급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2~3억 원의 부담능력을 갖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는 2~3억짜리 기존 주택을 잘 관리하고 유통되게 하는 것이 진정한 공급이다. 나라의 경제성장과 소득수준에 맞게, 가계부채를 적절히 관리해가면서 개발이익을 적절히 환수하고, 사업성 없는 취약 지역의 기반시설에 개발이익을 적절히 분배해가면서 순차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그저 작은 집을 허물어 고가 아파트를 공급한다는 정책은 부동산 매매 시장 과열을 노린 대책일 뿐이다.
불행히도 지금이 그렇다. 윤석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시종일관 공급 확대, 규제 완화, 부자 감세다. 윤석열 정부는 모든 부동산 문제의 원인이 새 아파트 공급 부족에 있다고 진단한다. 정부는 주택시장 침체로 인하여 공급 부족이 우려된다면서 올해초 발표한 1.10. 부동산 대책에 재건축·재개발 규제완화, 세제 금융지원, 대출지원정책을 포함했다.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은 2월 기자간담회에서 공급확대 정책을 할 수 있던 배경으로 '집값이 활활 불타오를 것 같은 위험한 시기였다면 이렇게 규제 완화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박상우 장관의 예상과는 달리 이후 부동산시장은 불안정하고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8월까지 서울아파트의 거래량과 거래액은 이미 작년 전체 규모를 넘어섰다. 5대 은행 8월 가계대출, 주택담보대출 증가폭 모두 역대최대 기록을 세우고 있다. 금융당국 압박에 은행들이 대출금리를 올리고 한도를 줄였지만 주담대 증가폭이 두달째 7조 원을 넘는 등 역대급 가계대출 증가세가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 부동산 거래량과 가계대출이 늘어나는 불안한 상황에서 국토교통부는 지난 8.8.부동산대책을 발표했는데 역시 획기적인 공급확대와 규제완화, 세제완화 정책이 주요 내용이었다. 부동산시장 상황과 관계없이, 국토교통부의 부동산대책은 정답이 정해져 있다. 시장 침체시기에도 공급확대, 주택시장 과열 시기에도 공급 확대다.
세대간 이어지는 견고한 투기 사다리
정부는 지난 7월 말까지 6개월간 신생아특례대출이란 정책대출상품을 만들어 7조2000억 원 규모를 시장에 공급한 바 있다. 2023년에는 특례보금자리론이라는 정책대출상품을 판매하였는데, 1년간 신청금액이 43조4000억 원에 달했다. 저리의 정책금융자금은 부동산에 대한 불안과 투기 심리를 자극해, 약간의 가격조정이 일어나자 2030청년세대를 통하여 부동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결국 저리의 대출이 높은 부동산 가격의 하방을 단단하게 지지하고 있는 게 지금의 모습이다.
특례보금자리론과 신생아특례대출은 주거안정을 위해 조성되는 주택기금의 지원을 받아 저금리일 뿐만 아니라, DSR과 같은 대출규제의 제한도 받지 않는다. 결국 신생아특례대출과 같은 저리의 정책대출로 2030젊은 세대가 '영끌'로 주택을 구입하고, 이들에게 주택을 매도한 3040세대가 기존 주택의 매도자금으로 다시 새로운 대출을 일으켜 서울의 주요 상급지역으로 이동하는 갈아타기 수요가 가세해 지금의 서울 집값 상승세를 이끈 것 아닐까.
실제 한국부동산원이 매입자 연령대별 서울아파트 매매거래를 분석한 결과 올해 상반기 40대의 매수비중은 31.2%, 30대의 매수비중은 32.5%로 현 주택 가격 폭등세를 3040이 주도하고 있음이 나타났다. 결국 저리의 정책자금대출을 기반으로 2030 청년 주택 수요층이 만들어졌고, 이들로부터 나온 아파트 매도 자금이 3040 수요로 가세하는 세대간 투기 사다리가 만들어졌다. 2030에서 3040으로 연결되는 매수행렬이 갭투기 증가, 가계대출 폭증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의 일관성 있는 부동산정책인 공급확대, 규제완화, 부자감세가 국민주거안정과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높은 부동산 가격을 떠받치고, 국민 모두에게 정부는 절대 부동산가격이 조정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주고 있다. 여기에는 정부여당 뿐만 아니라 야당인 민주당도 다를 바가 없다. 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야당 원내대표를 포함한 주요 인사들의 입에서 종합부동산세를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기성 정치권이 하나로 뭉쳐 부동산 기득권을 공고히하니, 이 정부와 정치세력 누구를 믿고 주거안정과 부동산 시장 안정을 바라겠는가,
최근 경제지면을 덮는 각종 통계와 지표는 하나같이 지금 내수 침체 수준이 금융위기 이후 최악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시장은 이와 괴리되어 과열되고만 있다. 자산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부동산 투기 뿐이라는 강한 믿음의 원천은 바로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고 있는 정부와 여야를 막론한 부동산기득권 세력이다. 이제 어디서 부동산 정상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조정흔 감정평가사 | 프레시안 2024.09.11.
딱 하나에 ‘사람의 길’과 ‘개의 길’이 갈린다
252년 후한 삼국시대, 위오 접경지역에서 양국이 격돌하는 동관의 동흥전투. 위나라 장수는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 오나라 장수는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이다. 오가 지형을 이용하여 대승을 거둔다. 위는 병사 수만을 잃고 패퇴했다. 사마소가 패잔병을 이끌고 가다가 어느 협곡에 이르러 묻는다. “이번 패전은 누가 그 잘못을 책임져야 하겠는가?” 부하 장수 왕의가 답한다. “책임은 원수에게 있습니다(責在元帥).”
희생양을 찾으려 했는데 그 손가락질이 대장인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소가 격노한다. “너는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는가”라면서 왕의를 끌어내 참수하고 회군한다. 왕의의 아들 왕부는 아비의 죽음을 원통해 하면서 은거했다. 조정에서 수차례 등용하려 해도 나아가지 않았다. 사마 일족이 위를 찬탈하고 진(晉)을 세우자, 왕부는 평생 궁이 있는 서쪽을 향해 앉지 않았으며, 그 나라 백성이기를 거부했다.
유학자 고당 김충호 선생은 ‘채상병 사건’ 관련, ‘소학’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은 벼슬을 뿌리친 왕부의 효를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 핵심은 ‘책재원수’라는 말입니다. 명령에 따라 격랑 속에 들어간 병졸이 죽어서, 그 책임도 져야 합니까? 책임은 우두머리가 지는 것입니다. 권한을 위임할 수는 있지만 책임을 위임할 수는 없는 법, 승리의 과실을 독차지하는 자가 패전의 책임도 져야 하는 법입니다. ‘이런 일로 사단장을 처벌하면 누가 사단장을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졸을 졸로 보는, 병졸(卒)의 죽음(卒)을 하찮게 여기는 생각이 깔려 있는 말입니다. 일국을 책임지고 있는 원수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권력자의 격노는 두렵다. 그 격노가 진짜 격노인지 가장된 격노인지 알 수 없되, 진짜 격노보다도 가장된 격노일 때, 격노의 대상자가 살아날 구멍은 더 작아 보인다. 진짜 격노는 오해가 풀리면 화해의 여지가 있지만 가짜 격노는 그 거짓을 감추기 위해 끝을 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채상병 사건’의 격노가 진짜인지, ‘물이 스미듯 서서히 젖어드는 살갗을 파고드는 참소’처럼 장수라는 자의 눈물겨운 구명운동에 의한 가장된 격노인지, 특검 전에는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진위를 떠나 격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위태롭다. 왕의는 참수되었고 대령 박정훈은 기소되었으니, 그 길은 목숨 걸고 가는 가시밭길이다.
고당은 왕씨 부자를 ‘견자’에 비유했다. 공자가 14년 열국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귀환할 즈음, ‘아아 돌아가야지, 돌아가야지, 고향에 가서 우리 젊은이들, ‘언행에 적실한 사람’(中行)을 얻어 함께하지 못한다면 ‘광견한 사람’을 얻으리라. 광자(狂者)는 진취하고, 견자(狷者)는 차마 하지 않는 바가 있기 때문이지’라고 하는 대목이 ‘논어’에 나오고, ‘맹자’에 자세히 나온다. 군자는 못 찾더라도 광자나 견자는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광자는 뜻은 크나 실천이 못 따르고, 견자는 ‘유소불위’, 끝내 하지 않음이 있는 자다.
고당은 견자의 예로 여말선초 문인 ‘조견’(趙狷)을 들었다.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여 고려 말 안렴사 벼슬을 지냈다. 조선이 개국하자 이름 ‘윤’(胤)을 ‘견’(狷)으로 바꾸고 산중에 은거했다. 새 나라가 벼슬을 내려도 나아가지 않았다.
“태조가 형 조준을 대동하고 직접 집에 찾아옵니다. 방에 드러누워 내다보지도 않아요. 태조가 ‘나와 옛 친분이 있으니 빈주(賓主)의 예로 만나볼 수는 없겠는가?’ 하니,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아요. 왕이 아닌 객으로 대하는 것이지요, 태조가 감탄하면서 ‘조견은 그 뜻이 금석 같아서 빼앗을 수 없다’하고 청계 한 구역의 땅을 봉해줍니다. 조견은 끝내 출사하지 않고 양주 수락산 기슭에 들어가 생을 마칩니다.”(이 대목, 조선 전후기 기록이 달라 논란이 있으나 ‘정조실록’에 따름)
견(狷)은 성급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변의 고집이 있다. 강물이 굽이굽이 물결 따라 흐르다가도 어느 폭포에 이르러 수직으로 긋는 직선 같은 것이랄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닌 사람이다. 그래서 유소불위(有所不爲), 끝내 하지 않음이 있는 자다. 그 반대가 무소불위(無所不爲), 결코 못 할 것이 없는 자다. 권력자가 시키면 무엇이든 다 하는 주구(走狗), 목줄을 풀어 명령을 내리면 정신없이 달려가는 개다.
고당은 “‘자왈, 비부(鄙夫)들과 정사를 함께할 수 있겠더냐. 이런 자들은 지위를 얻기 위해 못 할 짓이 없고, 또 얻은 뒤에는 잃지 않으려고 못 할 짓이 없는 자들이다.’ 비부는 비루하고 비열하고 비천한 자들입니다. 그 기준은 시킨다고 다 하느냐, 딱 하나라도 안 하는 것이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 안 하는 하나가 ‘불의’(不義)입니다”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채상병 사건’에 들이대면, 인물별로 어찌 그리 딱 들어맞는지, 신발이 발에 딱 맞을 때 신발 신은 것을 잊어버리듯이, 저것이 옛 이야기인지 지금 이야기인지, 시대를 망각하는 착각이 든다.
고당은 단국대 은퇴 후 전북 순창의 훈몽재(訓蒙齋)에 머물며 강학을 시작했다. 훈몽재는 인종의 스승인 하서 김인후가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문화유산이 대개 그렇듯 이끼와 잡풀이 무성하던 이곳에 2011년 고당이 ‘산장’으로 들어앉으면서 글 읽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방학이 되면 한림원과 서울대 상지대 등 경향의 학생들이 숙식하며 배우러 찾아왔다. 전국 유림들이 모여 옛 시회처럼 문장을 외기도 하고, 강회를 열기도 하면서 훈몽재는 연간 4천여 명이 찾는 이 시대의 학림(學林)이 되었다.
소문이 중국에 퍼져 2017년 장시성 남창대 학생 50여명이 찾아와 열흘간 ‘공자’를 공부했고, 그 후로 양국 교류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그해 고당은 남창대의 초청을 받아 여산의 백록동서원에서 강학했다. 당나라 때 이발이 흰 사슴을 키우며 은거하던 이곳에 남송 때 학교가 세워졌고, 북송 때 백록동서원으로 개칭되었다. 주희가 강학하면서 크게 흥성한 주자학의 산실이며, 조선 백운동서원의 이름이 여기서 따왔다.
고당은 이어 후난성 상남대의 초청으로 염계서원에서 강학했다. 염계는 북송의 학자 주돈이(1017~1073)로, 공맹 이후 1500년 잠들어 있던 유학을 일깨운 개산조(開山祖)다. 만물의 생성을 ‘태극도설’로 정리, 유교철학의 새 지평을 열었던 인물로, 그 바탕 위에서 100년 뒤 주희의 성리학이 개화한다.
2017년은 염계 탄생 1천년이 되는 해, 후난성은 그에 맞춰 염계서원을 복원했다. 그 규모가 궁궐 크기였다. 건물은 지었는데 그다음을 어찌하나? 1966년 공자묘가 파묘되었던 문화대혁명의 ‘반달리즘’ 이후로 4천년 전통은 멸실되었으니, 예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중국에서 훈몽재로 의뢰가 온다. 고당은 위패, 홀기, 축문, 제기, 예복 등을 준비하여 국내 유림 21명을 이끌고 그해 늦가을 염계서원에서 봉안식을 대행한다. 그런 인연이 깊어 고당은 백운동서원에서 4차례, 염계서원에서 3차례 중국 학생들을 모아놓고 강학했다.
무엇을 가르치셨냐고 물었더니, ‘학의 순서’라 한다.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시-서-역 순으로 해야지, 소학 건너뛰고 논어를 읽는 것은 하늘을 사다리로 올라가려는 격이라 지탱할 것이 없다, 하고는 13경에서 글을 뽑아 가르쳤지요.” 율곡의 ‘격몽요결’에 이런 내용이 다 나와 있다고 한다. 우리 유학자가 중국 주자학의 시원에서 경학을 강독하는 이 대목, 역설적이다. 남창대는 30권 ‘염계총서’ 출간을 준비 중인데 고당이 그동안 쓴 편지, 잡저, 기문, 시문 등 6권 분량의 글을 총서의 한 장으로 넣는다고 한다.
고당은 최애 한 구절로 ‘맹자’의 ‘독선기신’(獨善其身)을 꼽았다. “홀로 선을 닦는다는 이 말은 수기(修己)입니다. 공부를 왜 하고, 수양을 왜 합니까? 사람으로서 자존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자존은 직(直)입니다. 박 대령의 ‘항명’은 거적 깔고 도끼를 땅에 꽂아놓고, 궁궐 앞에 엎드려 나는 그 꼴은 못 보겠다고 항거하는 옛 선비의 모습과 닮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견이고, 직이라고 했다. 주석을 달자면, 끝내 하지 않는 바가 있는 그 길이 ‘사람의 길’이고, 먹이를 주는 자를 위해 못 할 짓이 없는 그 길은 ‘개의 길’이라는 뜻이다.
이광이 |한겨레 | 2024.09.12
대통령이란 무엇인가
발칙한 제목에 놀라지 않길 바란다. 여기서 대통령이란 특정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4장 1절에 나오는 그 직위로서의 ‘대통령’이다. 국가 원수이자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 정부의 수반이자 국군을 통수하는 대통령, 계엄을 선포할 수 있고 재직 중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는 대통령, 또한 국회의 탄핵 소추를 받을 수 있는 그 대통령이다.
헌법은 대통령 권한과 직무 범위를 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대통령이 하는 일은 법의 명시적 한계를 넘어선다. 종종 ‘고도의 통치행위’로 불리는 정치 그 자체가 대통령 일이다. 정치란 국가의 자원을 배분하고,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하며, 다양한 정책을 수립·집행하여 국민의 생명과 권리를 보호하는 일을 말한다.
이런 대통령의 책무는 헌법에 담겨 있고, 그 핵심은 1조에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통령은 대한민국과 민주공화정을 수호해야 하고, 주권자인 국민을 존중해야 한다. 이런 헌법정신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은 존재할 수 없다. 어딘가에 대통령이라는 명칭을 단 개인은 존재할지 몰라도 헌법이 요구하는 그 대통령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 곧 명칭은 중요하다. 공자는 정치의 원리가 ‘정명’이라고 했다. 이름을 바로잡는 것이다.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라와 은나라의 폭군 걸왕과 주왕을 탕왕과 무왕이 토벌한 것에 대해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신하가 왕을 죽인 일이 있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흉포한 필부를 죽인 일은 있어도, 왕을 죽인 일은 없다.’ 그 이름에 맞지 않는 왕은 이미 왕이 아니기 때문에, 폭군방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에서 있었던 폐위 사건은 모두 ‘돌이켜서 이름을 바로잡은 것’, 곧 반정으로 명명되었다.
현대 민주주의의 탄핵 원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헌법에 명시된 탄핵 대상은 대통령만이 아니다. ‘국무총리·국무위원·행정각부의 장·헌법재판소 재판관·법관·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감사원장·감사위원·기타 법률이 정한 공무원’까지 다양하다. 모두 그 직위의 명칭에 따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주권을 위임받은 국회 다수의 뜻에 따라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탄핵이란 현대적 의미의 정명이다.
물론 정명이 그 지위의 사람을 바꾸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지막 수단이다. 다른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갔을 때,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탄핵은 거부권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법에 정해진 절차라 하더라도 자주 거론할 만한 일은 아니다. 조선시대에 툭하면 양위를 입에 올린 왕들의 속내도 반대의견을 가진 신하들을 역모로 몰아버리겠다는 겁박이었다.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는 정치는 혼탁하고 불안정하다. 그래서 성숙한 민주주의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도달하기 전에 부단히 이름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이것이 민주주의에서 정치의 역할이다.
대통령의 일은 헌법에 따라 국민의 뜻을 받들고 삼권분립의 가치를 존중하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 기본을 지키지 못한다면 이름에 걸맞다고 할 수 없다. 대통령이 해야 하는 통치는 국가에서 벌어지는 온갖 복잡한 일들을 포괄한다. 이 세상에는 유죄와 무죄가 있고, 나쁜 놈을 때려잡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통치다. 국정지지율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은 반국가세력이 있어서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통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믿음직한 고등학교 동문들을 불러 모아 일을 맡기면 나라가 잘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갖은 의혹에 휩싸인 대통령 부인이 현지 지도를 흉내 내는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가끔 생각한다. 대통령이 김치찌개를 끓여서 대접하는 데 들이는 정성과 관심만큼만 통치를 진지하게 생각해 준다면, 지금의 의·정갈등이나, 광복절에 사이비 선동가를 언급하거나, 국회 개원식에 불참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일본의 사정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우리 국민을 생각한다면, 침수되는 걸 보면서 퇴근했다던 대통령이 참사가 난 반지하방을 가리키며 ‘어떻게 대피가 안 됐는가 모르겠다’는 말은 차마 못하지 않았을까.
이번 추석엔, 추석이란 무엇인가만 묻지 말자. 그 질문은 우리의 사적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족한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대통령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때다. 대통령은 무엇인가.
이관후 정치학자 경향 | 2024.09.12.
기후재앙과 죽음의 행렬
또, 노동자가 죽었다. 9월9일 늦은 밤, 한화오션(거제사업장) 사내하청 소속 노동자(41)가 32m 추락해 사망했다. 불과 3일 전, 노동부가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대표이사 등 3명에 대해 검찰에 ‘기소 의견’을 냈다. 중대재해처벌법, 산업안전보건법, 파견근로자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다. 아리셀은 6월24일 화재로 31명 사상자를 냈다. 자본의 사전엔 ‘타산지석’이 없는 모양이다.
한화오션은 이미 연초 1월12일 가스 폭발 사망, 1월24일 잠수 작업 중 사망에 이어, 9월의 추락 사망까지 기록했는데, 그 전인 8월19일, 온열질환 의심(허혈성 심장질환) 사망도 있었다. 사상 최악의 폭염 속에 온열질환(열사병) 사망자가 쌓이는데, 기존 산재 사망과 다른 양상이다.
그 온열질환 사망자는 생전 심장박동수가 분당 109회 정도로 추정됐다. 노동시간 내내 심장이 ‘달리기’를 한 셈이다. 최민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에 따르면, “고인의 일은 적정 노동시간이 6시간으로 중등도 이상의 작업이라, 고열 환경(체감온도 33도)에선 아예 쉬거나 시간당 15분가량 휴식을 취해야 한다”며 “사고 당일 고인은 높은 노동 강도와 작업복으로 인해 체감온도 이상의 열 스트레스에 노출됐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5개월간(4~8월) 한화오션의 온열질환자는 31명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비슷한 죽음이 또 있었다. 폭염이 맹위를 떨치던 8월13일, 전남 장성의 한 중학교 급식실에 삼성에어컨 설치 작업을 하던 양준혁(27)씨다. 안타깝게도 에어컨 설치업체에 채용된 지 이틀 만이었다. 당시 그는 작업 중 갑자기 구토를 하고 어지럽다며 주위를 빙빙 도는 등 열사병 증세를 보이다 화단에 쓰러졌다. 현장 관리자는 이에 보호 조치나 119 신고도 않은 채, 사진을 찍어 양씨 어머니에게 ‘정신질환 여부’를 물었다. 양씨는 뒤늦게 병원으로 갔으나 90분 만에 사망했다. 당시 고인 체온은 40도 이상. 그늘진 휴게 공간 부재, 탈수 방지용 음료 제공 결여, 보랭 장비 요구 거절, 채용 전 안전교육 미비 등이 문제로 드러났다.
그전에도 또 다른 죽음이 있었다. 7월30일 부산에서 상가 건설 작업을 하던 60대 건설노동자가 쓰러졌다. 병원으로 바로 갔지만 끝내 숨졌다. 사망 원인은 열사병. 폭염 특보가 열흘 넘게 지속되던 중이었다. 고인 체온은 40도에 육박했다. 현장 시공사는 이미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으로 처벌(징역형의 집행유예)을 받은 경력자였다. 최근 3년간 사망사고가 3차례나 있었지만, ‘우이독경’이었던 셈이다.
연이은 폭염과 노동자의 죽음에 뭘 해야 하나? 첫째, 다른 산재처럼 ‘기후 산재’ 역시 중대재해처벌법 대상이다. 폭염 대처를 하지 않은 경영책임자도 노동자 ‘생존권’ 차원에서 처벌받아 마땅하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사용자는 폭염에 대비해 휴식(작업 중지), 그늘진 장소, 소금·음료수 등을 제공해야 한다. 일례로, 대전지검은 7월1일 열사병 사망사고와 관련해 원청 대표를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둘째, 노동부의 강화된 역할이 절실하다. 특히 19세기 영국의 근로감독관들처럼 노동자 입장에서 느끼고 행위하는 공무원들이 많아져야 한다. 일례로, 마르크스의 1867년 ‘자본’은 “(영국의) 공장 감독관들(예, 레너드 호너)은 공장주들이 (아동의) 부모를 회유하고 협박하고 심지어 (아이들에게 10시간 이상 노동을 강요하는) 청원까지 위조했다는 증거들을 제시”하는 등 “영국 노동자계급을 위해 불멸의 공적을 세웠다”고 했다.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공동대표도 “노동부는 물·그늘·휴식 등 온열질환 예방 3대 기본수칙 가이드라인 배포만 반복하고, 장관은 전시성 행사로 가끔 현장만 나가는” 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기후재난에 맞서 노동자들을 보호할 법안을 만들라”고 요구한다. 기후재앙은 결코 공장 문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엄정한 감독이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한다.
셋째, 좀 더 깊은 논의도 필요한데, 그것은 지금의 폭염이나 기후위기가 결코 일시적이거나 법·제도적 대응으로 해소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솔직히, 갈수록 심해지는 폭염이나 기후재앙 문제는 인간적 필요나 삶의 질을 도외시한 채 오직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를 통해 이윤을 얻는 자본주의 원리에 토대한다. ‘선택의 자유’ 차원에서 근본 논의가 필요하다.
최근 서울 강남의 ‘907 기후정의행진’(전국에서 3만명 운집)에서도 많은 공감을 얻은, “기후가 아니라 체제를 바꾸자”란 구호 역시 자본주의 체제야말로 오늘날 인류에게 근원적인 위협임을 재확인했다.
그에 앞서 헌법재판소 역시 청소년기후행동 등 시민사회단체가 제기한 4건의 기후소송에 대해 일부 승소 결정(8월29일)했다. 정부가 2030년 이후의 탄소중립 대책을 세우지 않아 미래 세대의 기본권(환경권, 건강권, 행복권)을 침해한다는 취지다. 윤석열 정부의 ‘탄소중립녹색성장법’이 일부 위헌이라 보완해야 한다. 2013년 네덜란드의 ‘위르헨다(Urgenda) 판결’이나 2021년 독일 연방헌재 판결 역시 기후위기에 대한 정부 책임을 부각했다.
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한겨레 | 2024.09.12.
내년 여름엔 달라야 한다
한가위가 목전인데, 또 폭염 경보가 발령됐다. 지긋지긋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지속되는 더위 속, 올여름에도 안타까운 소식들이 기사로 전해졌다. 에어컨을 설치하던 20대의 젊은 노동자가 입사 이틀 만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고, 산재 신청조차 어려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감자 선별 작업 중 사망하기도 했다. 기사에도 나지 않은 많은 노동자들이 온열질환으로 사망했을 것이다.
올해 여름 서울의 한가운데에 있는 대학병원의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을 한달여간 매일 살펴보았다. 거의 매일 노동자들이 온열질환으로 응급실을 찾았다. 다행히 사망에 이르거나 장기간 치료가 필요할 정도가 아니고 응급실에서 조치를 받은 뒤 당일 퇴원이 가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자동차나 엘리베이터를 수리하다, 통신 중계 장비나 에어컨을 설치하다, 이삿짐이나 수산물을 나르다가, 식판을 씻거나 청소하다가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근육 경련이 생겨서 병원을 찾았다. 매일 응급실을 찾는 100명의 환자 중 1명씩은 일하다 생긴 온열질환이었다. 전국의 응급실에서 이런 환자 중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실제로 이 중 일부가 산재로 승인받았다. 2022년 23건(사망 5건), 지난해 31건(사망 4건)이 산재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질병관리청에서 500개 병원의 참여 속에 운영하는 온열질환 감시체계를 통해서는 2022년 1564명의 온열질환자를 확인하였으며, 이 중 9명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폭염 일수가 31일로 가장 길었던 2018년에는 4526명의 온열질환자를 확인할 수 있었고 이 중 48명이 사망했다. 80% 이상은 실외에서 발생했으나 20% 정도는 실내에서 발생했고, 45% 이상이 작업장에서 발생했다. 논이나 밭에서 발생한 예도 15% 정도였다. 즉, 온열질환은 실외에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작업장의 다양한 환경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건설노동자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나라 자료는 없지만, 미국의 경우 온열질환 사망자 4명 중 3명이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안 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강조한다. 미국 직업안전보건청에서 발간한 사업주 책임에 대한 가이드라인에서 제일 먼저 강조되는 것은 고온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주라는 것이다. 새로 입사한 경우, 고온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 처음인 경우, 휴가를 갔다가 복귀하는 경우처럼 지속해서 고온 환경에서 일한 것이 아니라면 근무 첫날은 동일 노동강도로 전체 근무시간의 20%를 넘지 않게 하고 그렇게 일했을 때 괜찮으면 매일 20%를 넘지 않게 근무시간을 증가시켜 5일째가 되는 금요일에 비로소 원래 근무시간의 100%를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 규칙으로 불리는 이 적응 과정을 물·그늘(실내인 경우 바람)·휴식보다 먼저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강조하는 물·그늘·휴식인데 이 역시 충분하지는 않다. 출장길에 마주한 도로변에 있던 건설근로자 쉼터는 위태로운 각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비닐로 천장과 벽을 만들어둔, 두세명이 서 있으면 꽉 찰 것 같은 곳이었다. 도심에서 떨어진 건설 현장에 휴식을 위한 공간은 있었지만, 그 안에 서 있으면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것처럼 더 뜨겁기만 할 것 같았다.
지금과 같다면, 우리는 내년 여름에 또 비슷한 뉴스를 마주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흩어져 있는, 응급의료체계가 충분히 작동하기 어려운 지역은 어찌해야 하나 싶은 걱정도 된다. 20% 규칙이 한국에 있었다면, 그 청년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미안했다. 작년에 카트 정리를 하다가 사망한 청년의 죽음을 봤으면서 또 이런 일을 마주하게 된 것이 미안했다. 특히 하청에 하청을 거쳐, 개별화된 노동을 하는 각종 수리·설치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을 우리는 10여년 전에 사망한 애프터서비스(AS) 노동자들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얼마나 여름에 일이 많고 힘든지 말이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국회도, 정부도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선제적으로 집중 예방이나 안내를 하기도 하고, 작업중지권을 비롯한 다양한 법적·정책적 방안과 관련 논의도 하고 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 뒤에도 모두가 노력을 계속해서, 정말 내년엔 이런 반복은 없어야 한다.
김인아 | 한양대 교수(직업환경의학) 한겨레 | 2024.09.12.
기후국회라는 새로운 기회
낮 기온이 30도가 넘고 열대야가 계속되는 특별한 추석 연휴를 경험했다. 이파리가 여려서 강한 햇볕에 녹아버린 시금치는 한 단에 만원이 된 지 이미 오래고 차례상에 올려야 하는 고사리와 도라지도 한 줌에 만원씩이다. 물가는 둘째치고 건강 문제가 심각하다. 오랜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올여름이 앞으로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말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이렇듯 불길한 더위 앞에서 우리 사회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지난달 29일 헌법재판소는 청소년기후소송, 시민기후소송, 아기기후소송, 탄소중립계획 헌법소원 등 네 건의 기후 헌법소원을 병합해 일부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국가의 기후위기 대응이 국민, 특히 미래세대의 안전한 삶을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취지이며 구체적으로는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법 제8조 제1항이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35% 이상(시행령에서는 40%)의 이산화탄소 감축 목표만을 명시했을 뿐 2031년부터 탄소중립 목표연도인 2050년까지의 감축 계획을 마련하지 않은 것이 위헌이라는 내용이다.
판결문은 길고 어려워서 법률전문가가 아니면 제대로 이해하거나 해석하기 어렵다. 처음 판결이 나왔을 때는 2030년까지 40%의 감축 경로가 잘못됐다는 내용 등이 기각되어 ‘절반의 승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으나 점차 판결의 의미와 앞으로의 과제가 또렷해지고 있다. 요약하면 이번 헌재 판결은 당장 빚어질 혼란을 막는 선에서 기후위기의 실체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시민사회가 국가의 대응의무 방기에 대해 압박할 수 있는 문을 열어놓았다.
전문가들은 헌재가 기후변화로 초래된 극단적 날씨, 물 부족, 식량 문제, 해안선 변화 등을 ‘생태붕괴 현상으로 인한 위험’으로 정의함으로써 기후위기 위험 상황의 존재를 인정하고 국가의 헌법적 보호 의무를 인정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헌재가 사실상 처음 국민의 환경권을 인정하고 감축 목표를 사법심사 대상으로 판단함에 따라 앞으로 새로운 감축 목표가 나왔을 때도 헌법소원을 제기할 권리가 생긴 것이다.
2050년까지의 감축 경로와 관련, “과학적 사실과 국제 기준에 근거해 검토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사실도 주목받는다. 감축 계획의 근거인 탄소예산은 1.5도 제한선까지 인류가 배출할 수 있는 탄소량으로, 지구 전체 탄소예산에서 각국의 인구비례, 누적배출량 등을 계산해 국가별 탄소예산을 내고 이에 따라 감축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우리 정부가 이를 마련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정부의 2030년까지 40% 감축 계획이 부실하다는 사실도 이번 판결에서 드러났다. 판결문에 따르면 기준연도인 2018년은 총배출량으로, 2030년은 순배출량으로 계산하는 바람에 실제 감축량은 29%, 많이 잡아도 36%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이런 계산방식의 위법성은 위헌 정족수 6명에 못 미치는 5명에 그쳐 기각되고 결과적으로 현재 시행 중인 탄소중립기본계획이 그대로 인정됐다는 사실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31년 이후의 감축 경로를 세우는 과정에서 현재 정책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헌재는 위헌으로 판결한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법 제8조 제1항에 대해 2026년 2월까지 국회에서 개정하도록 했으며 특히 현실을 고려해 늘 소극적 입장인 행정부가 아니라 국회가 나서서 국민여론 등을 근거로 향후 감축 목표를 세우도록 했다. 이는 국회에서 두루뭉술한 법을 만들고 정부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시행령으로 정책을 집행하는 시행령 정치를 막기 위한 법률유보(법률에 구체적 수치를 적시함) 원칙을 강조한 것이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지난 4·10 총선은 상당수 기후유권자가 등장한 기후총선이었으며 기후정치인들은 기후국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중에서도 기후문제를 전담할 국회 상설위원회를 만든다는 데는 국민의힘을 포함한 모든 정당이 동의했다. 거대양당의 정쟁으로 국회 개원마저 늦어진 마당이지만 이번 헌재 결정을 계기로 총선 당시의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2200여건의 기후소송이 벌어지는 가운데 아시아에서 처음 나온 기념비적 판결이다. 판결 직후 강남역 일대에서 열린 907 기후정의행진에는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3만명이 참여했다. 대만, 일본 등 아시아 환경운동가들이 일부러 찾아올 만큼 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집회가 되었다. 기후는 시민사회의 저력을 모아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지렛대가 될 수 있으며 국민의 신망을 잃은 정치권에는 기후국회라는 기회가 열렸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경향 | 2024.09.18.
남을 위한 것이 곧 나를 위한 일이다
퀴즈 하나, 인간의 몸에서 빨간색이고 통통하며 만지면 뜨겁고 아픈 데다 마음먹은 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염증(炎症, inflammation)이다. 충혈, 부종, 열감, 통증, 기능 저하는 염증의 5대 특성이다. 염증은 괴롭다. 라틴어 ‘flamma’는 불꽃이라는 뜻이며, 한자 염(炎) 역시도 불타다는 뜻이니, 염증은 이름 그 자체부터 뜨겁고 괴로운 것임을 내포하는 셈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상당수는 염증을 달고 산다. 스트레스성 위염이나 알레르기성 비염, 역류성 식도염, 방광염, 인후염, 중이염, 관절염, 치주염 등등에 시달려본 적이 없는 이들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관련 시장도 엄청나다. 2022년 기준 글로벌 항염증제 시장은 1091억달러(약 145조원)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매년 6.58%씩 커질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그만큼 각종 염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염증(炎症)이라면 염증(厭症)을 느낄 정도로 싫어하곤 한다.
염증의 입장에서는 이런 미움이 억울하기 짝이 없다. 원래 염증은 우리 몸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고도 가장 기본적인 면역 반응이기 때문이다. 염증 반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체는 심각한 면역 저하로 인해 더 큰 건강상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증이 미움받는 이유는, 염증 반응 그 자체가 아니라 정도를 넘는 과한 반응과 꺼지지 않는 스위치 오류 탓이다. 그다지 심각할 것 없는 침입에 과도하게 반응해 세포독성을 지닌 사이토카인을 대량으로 방출해 장기를 망가뜨리거나, 이미 염증의 원인이 제거되었음에도 만성적으로 염증이 지속되어 통증을 안겨주거나 해서 말이다.
특히 만성 염증은 가볍게는 일상의 가벼운 불편함부터 만성적인 통증으로 인한 삶의 질 저하, 신체 기관의 기능 저하를 거쳐 때로는 목숨을 위협하는 심각한 질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오죽하면 만성 염증은 만병의 근원이라 할 정도다. 그래서 현대의학에서는 만성 염증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 중인데, 의학과 생물학을 넘어 행동사회적인 연구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의 사회행동과학연구소는 특정 행동이 사람에게 심리적인 변화뿐 아니라, 신체 그 자체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여겼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체내에서 자극에 반응해 염증 반응을 일으키는 것에 관여하는 52개의 유전자 그룹(CTRA)이었다. 과연 특정 행동이 이들의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쳐서 염증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을까?
연구진은 지원자들을 무작위로 네 그룹으로 나누고 5주의 실험 기간에 각각의 그룹별 지침을 이수하게 했다. ‘타인에게 친절하기’(kindness-to-other) 그룹에 속한 이들은 적어도 주당 3회 이상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했고, ‘세상에 도움되기’(kindness-to-world) 그룹에 속한 이들은 같은 횟수로 불특정 다수를 위해 착한 일(공원의 쓰레기를 줍는 것 등)을 해야 했으며, ‘나 자신을 위하기’(kindness-to-self) 그룹에 속한 이들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일을 챙겨서 해야 했다. 마지막 그룹은 대조군으로 이러한 추가 지침 사항 없이 평소대로 행동하게 했다. 실험이 끝난 후, 어떤 그룹의 건강상 지표가 가장 많이 개선되었을까. 상식선에서 본다면, 자신을 위한 행동을 한 이들은 스트레스를 덜 받을 테니 염증 관련 유전자 발현 비율도 낮게 나타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뜻밖이었다. 대조군에 비해 염증 유전자들의 발현 수치가 유의미하게 감소한 것은 ‘타인에게 친절하기’ 그룹이 유일했다.
기존에도 사회에서 고립되거나 외면받는 행동이 개인의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신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여럿 있었다. 이 연구는 그 반대의 경우, 즉 친사회적인 행동의 증가가 신체의 건강 상태를 개선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남을 위한 것이 곧 나를 위한 일이라는 오래된 격언이 그저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지혜인 셈이다. 나를 위한 대접은 마음의 만족을 주고, 타인을 위한 친절은 내 건강에 도움이 됨을 기억한다면, 삶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 조금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이은희 과학저술가 경향 | 2024.09.18.
국가인권위, 왜 있어야 하나?
감옥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과밀수용 때문이다. 4.5평. 15㎡쯤 되는 감방에 15명을 가둔다. 좁은 감방에서 몸을 맞대고 자는데 폭염에 난로를 껴안고 사는 셈이다. 양계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에어컨은 없고 선풍기는 있지만, 숨 막히는 더운 바람만 보내줄 뿐이다.
하루 30분 짧은 운동시간을 빼고 23시간30분을 좁은 감방에서 다른 재소자와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 그나마 면회와 운동이 금지된 휴일엔 꼼짝 못한다. 추석 연휴 닷새 동안 감방에만 갇혀 있어야 했다. 지옥이 따로 없다. 윤석열 정권 들어 재소자 숫자가 부쩍 늘었다. 지옥을 견뎌야 하는 사람도 그만큼 늘었다.
감옥은 범죄자를 괴롭히려고 만든 곳이 아니다. 현대국가들은 예외 없이 ‘교정교화’ ‘재사회화’를 위해 감옥 시스템을 마련했다. 하지만 과밀수용 때문에 교정교화는 엄두도 못 낼 지경이다. 그저 사고 없기만 바라는 수준의 단순 구금행정만 있을 뿐이다.
재소자들은 갇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적 인권침해를 당하게 되었다. 과밀수용을 해결하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있었고, 과밀수용에 대한 소송이 줄을 잇고 있지만, 현실은 더 나빠지고 있다.
이럴 때, 호민관 역할을 하라고 만든 게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다. 인권위는 인권피해자들의 진정을 받아 처리하고 인권침해나 차별행위에 대한 조사와 구제 활동도 펼친다. 구금시설을 방문 조사할 권한도 있다. 인권위가 시설을 방문하면 시설장은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재소자를 면담하거나 문제를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인권위의 인권옹호 업무를 방해하면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강제 수사권은 없지만, 잘만 쓰면 꽤 쓸모 있는 맞춤형 권한을 갖고 있다.
인권위는 구금시설 수용자의 진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교도소마다 진정함을 설치해두었다. 진정함은 진정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게 투명 아크릴 재질로 만들었다. 1963년 문을 연 안양교도소 진정함을 살펴봤다. 바닥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어야 저 지경일까. 적어도 10년 넘어 보였다.
재소자들은 인권위에 기대할 게 없다고 했다. 진정을 넣어도 인권위 직원이 진정서를 챙기지 않는단다. 찾아오는 것은 물론, 연락조차 없는데 괜한 짓을 할 까닭이 없다는 거다. 가장 심각한 인권 현장에서 인권위는 차갑게 외면당하고 있다.
인권위는 관료화되었다. 내부 갈등은 제법 시끄럽지만, 인권침해에는 둔감하다. 진보를 자처하든 보수에 속해 있든 누구도 재소자들이 놓인 극단적인 상황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기념사진 한 장 남기는 게 전부인 의례적인 방문 말고, 구금시설을 찾아 감방의 면적과 온도 등 기본을 챙기는 일은 없었다.
심각한 인권문제로 꼽히는 기후위기도 그렇다. 그 폐해가 가난한 사람 등 약자, 소수자를 겨냥하기에 대응이 필요하지만, 인권위는 딴판이다. 인력과 예산을 배치하고 뭔가 할 일을 찾는 모습은 없고, 그저 입장 발표뿐이다.
얼마 전 그만둔 송두환 위원장. 헌법재판관을 마치고 로펌 대표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72세 고령에도 위원장이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였다는 것 말고 주목해서 봐야 할 대목이 뭔지 모를 인사였다. 아니나 다를까. 송 위원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재임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 ‘이태원 참사에 대한 의견 표명’을 꼽았다. 진상규명 등에 대해 의견을 냈다는 거다. 159명이 죽어간 참사를 두고 인권위가 한 일은 성명 발표뿐이었고, 위원장은 그걸 가장 보람 있는 일로 꼽았다.
이런 송 위원장의 안이함이 인권위의 직무유기를 낳았다. 성명이야 시민단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권위라면 본연의 일을 해야 했다. 이태원 참사가 경찰과 지방정부의 책임이 무거운 사안임을 감안해 진상을 밝히는 일부터 먼저 챙겨야 했다. 직원들을 대거 투입해 조사활동을 벌이고 그 결과를 국민과 국회에 보고하며, 이태원 참사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물꼬를 터야 했다. 그러나 송 위원장과 인권위는 그러지 않았다. 성명 발표를 가장 보람 있는 일로 꼽을 만큼 제대로 일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송 위원장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다. 교도소 진정함에 먼지가 두껍게 쌓였던 세월만큼 그의 전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권위에서 경력을 쌓고 고위직으로 출세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인권위는 인권으로부터 멀어져만 갔다. 이런 식이라면 아예 문을 닫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인권위는 심각한 위기를 넘어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려운, 세금만 낭비하는 조직이 되어 버렸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경향 | 2024.09.19.
여순사건과 미완의 국가
추석 명절을 경주에서 지내고 광주대구고속도로에서 익산으로 차를 몰며, 문득 이 산하가 무덤 아닌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자들이 묻힌 거대한 공동묘지다. 얼마 전 여순사건 희생자들의 영혼이 떠도는 여수 만성리 용골에서 느낀 감정은 이를 더욱 생생하게 했다.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있던 부역 혐의자 수백 명을 필두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학살되었다. 여수·순천만 해도 이런 곳이 50여 군데나 있다.
한 달 뒤인 10월19일이면 여순사건 76주기다. 과연 이 사건은 한반도 역사에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건의 여파는 지금도 미치고 있으며, 완성되지 못한 국가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는 점이다. 희생자 수가 1200명에서 1만명일 것이라는 불명확한 통계처럼 이 사건의 정체성 또한 정치동향에 따라 오락가락한다. 분명한 것은 이승만이 이 사건을 발판 삼아 잔혹한 독재정권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국가보안법과 계엄법 제정은 물론, ‘빨갱이’를 만들어 국민보도연맹원 포함, 학살된 민간인이 100만에 이르듯이 국가 권력은 힘없는 백성을 법적 보호도 없이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과연 누가 옳았던가. 여순사건은 당시 우발적이었다. 그것은 청산되지 못한 일제강점기 유산 위에 수립된 국가 권력을 쥔 자들의 욕망이 촉발시킨 것이다. 그 뒤에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힘이 작동했다. 14연대는 제주4·3 토벌작전 출동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봉기했다. 여수 주요 기관을 점령한 ‘제주토벌출동거부 병사위원회’는 10월24일자 여수인민보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에서 “조선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고 한다. 그 지역 노동자·농민으로 구성된 14연대는 적어도 군대는 외침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에 굴종하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인한 분단의 영속성과 한·미 협정을 통한 미국 식민지화에 반기를 들었다. 6·25의 동족상잔은 일어났고, 미군은 한반도 남쪽에 주둔한다. 이승만은 국군통수권을 미국에 이양했고, 한국은 완전한 자주 국가의 평등한 외교권을 여전히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극복을 위해 계약에 의한 절대국가의 필요성을 말했지만, 그 국가 권력이 인민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지 못할 때는 민중의 힘으로 폐기될 수도 있음을 14연대는 보여주었다. 대한민국은 반쪽짜리 정부다. 분단 고착으로 하나 된 통일의 희망을 무너뜨린 주범들은 누구였던가.
또 하나, 국가는 백성의 생각을 지배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해방정국은 이념의 해방구였다. 소련군과 미군 진주로 한반도는 갈라졌지만, 남쪽 대다수가 사회주의를 지지했다는 건 이미 알려져 있다. 많은 애국지사들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이념의 힘을 빌려 독립운동을 했다. 이 사건이 토착 공산당인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기획이 아님은 잘 밝혀져 있다. 물론 그들의 단순한 저항이 좌익세력의 참여로 확대된 건 사실이다. 진압작전 지휘관들은 대부분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으로서 친일경력을 세탁했다. 피아의 식별장치인 빨갱이를 통해 숙군을 이뤘다. 그리고 이는 ‘스네이크 박’(박정희)의 쿠데타, 전두환의 민주정부 탈취와 5·18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군대 투입 등의 반역행위로 이어졌다. 이념전쟁 수혜자는 결국 그들 군인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죄는 크다. 점령군인 미군은 3년 동안 남쪽 백성들을 일방적으로 반공전선에 서게 했으며, 이후 거의 모든 민간인 학살을 지휘하거나 방조했다. 서구에서 창안된 이념 간의 전쟁으로 300만명이 죽었다. 자기검열에 익숙한 백성을 상대로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반국가세력’이라는 말로 적을 판별하고자 한다. 이념에 증오의 색을 칠해 나라를 분열시킨 자들이 반국가세력임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하여 여순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원익선 교무 원광대 평화연구소 경향 | 2024.09.19.
한국 정치사에서 ‘진보정당’은 무엇이었나
2024년 총선에서 정의당은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2004년 총선에서 진보정당은 첫 원내 진입을 했다. 딱 20년이 지나 ‘원내 진보정당’의 시대가 저물었다. 현재 22대 국회에서도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정당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민주당이 주도해서 만든 ‘위성정당’을 통해 국회에 진입했다. 민주당 노선과 구분되는 ‘독자적’ 진보정당으로 볼 수 없다.
진보정당의 본격적인 출발은 2000년 1월30일 창당한 민주노동당이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초박빙 구도에서 약 100만표를 받았다. 이때 만들어진 유행어가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였다. 2004년 총선에서는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아주 근사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약 13.1%인 280만표를 얻었다. 8명의 비례대표 의원과 2명의 지역구 의원, 합계 10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이때 국회에 들어갔던 의원들 중에는 한국 진보를 상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강기갑, 권영길, 노회찬, 단병호, 심상정, 천영세, 최순영 의원이 모두 그랬다. 국회법에 의하면, 국회의원이 법안을 발의하려면 10명이 필요하다. 민주노동당 의원 숫자는 마침 법안 발의 요건을 충족했다. 이후 ‘진보적인’ 법안을 대거 발의하게 된다.
‘압축 복지국가’를 주도하다
지난 20년을 돌아볼 때, 한국 정치사에서 진보정당은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무엇을 해내고, 무엇을 해내지 못했던 것일까?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치사에 대한 시계(視界)를 더 길게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
1945년 해방 이후 지난 79년 동안 한국 사회는 수많은 이슈로 갈등과 대립의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4가지 업적을 달성했다. ①나라 만들기 ②압축 산업화 ③압축 민주화 ④압축 복지국가다.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는 자본주의를 할지 사회주의를 할지, 미국과 한편이 될지 소련과 한편이 될지, 농지개혁을 할지 말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는 세계사적으로 ‘냉전 질서’가 형성되는 초입기였다. 게다가 한반도는 지정학적 단층선에 위치했다. 한편으로 한반도는 분단, 전쟁, 학살의 공간이 됐다. 다른 한편으로 농지개혁을 실시해 지주·소작 관계를 청산하고, 미국식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나라가 됐다.
지구상에는 약 210개 국가가 존재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식민지 경험 있는 제3세계 국가’ 중에서 4가지 업적을 동시에 달성한 나라는 딱 두 곳에 불과하다. 한국과 대만이다.
①나라 만들기 ②압축 산업화 ③압축 민주화 ④압축 복지국가의 업적을 세 글자로 줄이면 그게 바로 ‘선진국’이다. 나라 만들기와 압축 산업화는 상대적으로 ‘보수’가 주도했다. 한국 보수의 역사적 업적이다. 압축 민주화와 압축 복지국가는 ‘진보’가 주도했다. 한국 진보의 역사적 업적이다. 과거 리영희 선생님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표현했는데, 한국 정치사가 딱 해당한다.
국민의힘으로 상징되는 한국 보수가 사회 변화에 뒤처지지 않고 ‘다수파 정치세력’이 되고자 한다면, 압축 민주화와 압축 복지국가의 성취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철 지난 빨갱이 타령은 스스로를 ‘시대착오적인’ 세력으로 고립시킬 뿐이다.
민주노동당 이후 진보정당 20년은 이 중에서 ‘압축 복지국가’를 선도했다. 정책의 관점에서 민주노동당 노선을 해석하면 복지정책, 노동정책, 재벌개혁 정책으로 집약된다. 대중적 호소력이 가장 큰 것은 역시 복지정책이었다.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의 대표 공약이었던 ‘부유세,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상징적이다. 이후 각종 ‘무상~ 정책들’이 탄생하게 된다. 민주노동당의 친복지, 친노동 정책은 참여정부의 좌절과 맞물려 ‘대안적 진보노선’으로 주목받게 된다.
1991년 소련 붕괴가 전 세계 좌파에게 충격이었다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전 세계 우파에게 충격이었다. 미국의 주류도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한 반성적 목소리가 증대된다. 참여정부의 좌절, 민주노동당 노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맞물려 친복지, 친노동 정책은 더욱 힘을 받게 된다.
2013년에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민주노동당 노선의 1기 정부’였고, 2017년에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민주노동당 노선의 2기 정부’였다. 이들 정부는 모두 기초연금 강화, 무상급식, 반값 등록금,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박근혜 정부는 담뱃값 인상 등 복지증세도 과감하게 추진했다.
민주노동당 노선의 점진적 수용사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 정치는 ‘민주노동당 노선의 점진적 수용사(史)’였다. 거꾸로 말하면, ‘복지정치의 주류화’가 실현됐다. 기존 정당이 정의당 정책을 수용했던 것이 정의당 몰락의 가장 큰 이유다. ‘정치적 차별화’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진보정당 몰락의 중요한 다른 축은 ‘지역주의 쇠퇴’다. 민주노동당 시절 ‘영남 진보벨트’라는 표현이 있었다. 동해안에서 남해안으로 이어지는 영남의 공업지대였던 포항, 울산, 부산, 거제, 마산, 창원 등 ‘동남권 제조업 벨트’를 영남 진보벨트라고 불렀다.
이들 지역은 노동조합이 활성화된 곳이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민주당 후보보다 진보정당 후보 득표력이 더 컸다. 영남에서 진보정당 후보는 왜 민주당 후보보다 많은 표를 얻었을까? 한 축은 노동운동의 힘이었지만, 다른 한 축은 ‘지역주의’의 힘이었다. 영남 유권자들은 ‘빨갱이당’ 후보는 뽑아줘도 ‘호남당’ 후보는 뽑지 않았다. 노동운동보다 호남이 더 싫었다. 20년 후 등장한 영남의 2030세대는 지역주의에서 자유로웠다. 이들에게 민주당은 호남당이 아닌 그냥 진보정당이었다. 민주노동당이 꿈꾸던 지역주의 정치는 쇠퇴하고 진보·보수 구도가 실현됐다.
한국 정치사에서 진보정당은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어 자기 자신은 사라지는 ‘거름 같은’ 존재였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었다면, 그보다 큰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경향 | 2024.09.19.
신고가를 꿈꾸는 패닉바잉의 나라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래미안원베일리는 최근 ‘국민평형(국평)’으로 통하는 전용면적 84㎡ 한 가구가 60억원에 팔렸다. 연 5300만원대(2022년 기준)인 중위소득 가구가 평생 모아도 살아생전에 사기 어려운 가격이다. 올해 서울에서 거래된 국평 아파트 거래가격 상위 10개 중 7개가 이 아파트 단지에서 나왔고, 2개는 이 아파트 옆의 아크로리버파크, 나머지 하나는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나왔다.
냉온탕을 오가는 정부의 대출 정책을 비웃기라도 하듯 서울 아파트 시장에선 초고가 거래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신고된 서울 아파트 매매계약 중 100억원이 넘는 거래는 14건에 달한다. 지난해 연간 100억원 이상 거래 건수(5건)의 3배가량이다.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구)와 마용성(마포·용산·성동구)의 신축 아파트 중심으로, 비쌀수록 가격이 치솟고 있다. 서울이라고 다 같은 서울이 아니다. 신고가가 나오는 지역과 안 나오는 지역으로 나뉜다.
지방의 부동산 경기는 딴판이다. 서울 아파트 매매가가 반년 넘게 쭉 오르는 동안 지방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악성 미분양’으로 불리는 준공 후 미분양 주택 1만6000여가구 중 80% 이상이 지방에 몰려 있다. 빈집이 남아돈다.
서울 쏠림, 서울 내에서도 소위 ‘똘똘한 한 채’로 몰리는 부동산 시장의 양극화는 인구 감소와 맞물려 더 심해질 것이다. 몇년 전만 해도 지방 대도시마다 자산가들이 몰리는 인기 동네가 하나씩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강남3구와 마용성으로 몰려 지방의 모든 곳이 공동화되고 있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정부도 손놓고 있는 건 아니다. 서울의 그린벨트를 풀고, 수도권 신규택지 발굴을 통해 8만가구 규모의 주택을 짓고, 1기 신도시 등 노후계획도시 정비를 앞당겨 공급을 늘리겠다는 게 8·8 부동산대책의 골자다.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대출도 조이고 있다. 국민의힘은 지방 부동산 경기를 살리겠다며 지방 미분양주택 취득자에 대한 취득세와 양도소득세 한시적 감면, 미분양주택 취득 시 주택 수 산정 제외, 다주택자 취득세 중과 폐지, 한시적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해제·완화 등을 정부에 건의했다. 어느 정도 필요한 일들이다. 다만 공급을 늘린다고 서울 집값이 안정될지, 금융·세제 지원을 많이 해주면 지방의 부동산 경기가 살아날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당장 분당·일산 등 1기 신도시는 재건축 기대감에 집값이 오히려 들썩이고 있다. 사람들이 왜 신고가 지역으로 몰리고 ‘똘똘한 한 채’를 선호하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단편적, 단기적 해법에 치우쳐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고속철도 타고 강남까지 한 번에 오갈 수 있다.” 지방에서 SRT 개통식이 열릴 때마다 등장하는 홍보 문구다. 서울 강남 수서로 향하는 고속철도 SRT 운행은 모든 지방의 숙원사업이다. 순천에서, 남원에서, 진주에서 SRT를 타고 강남에 도착한 사람들이 향하는 곳은 인근의 대형종합병원, 유명 입시학원, 문화시설들이다. 좋은 의료시설, 상위권 대학 진학률을 높여주는 학원, 양질의 일자리, 다양한 경험과 기회를 찾아 강남으로 몰려드는 수요를 분산시키지 않고선 서울 주변의 그린벨트를 다 풀어 아파트로 채우더라도 서울 집값 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긴 어렵다.
얼마 전 국제결제은행(BIS)은 한국의 높은 가계부채 수준이 경제성장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부채를 통한 성장이 어느 정도까진 작동하지만, 부채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많아지면 역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과도한 가계부채로 원리금 상환 부담에 허덕이는 가계의 소비 여력이 떨어지고 이것이 자영업자 위기, 내수 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뼈아픈 지적이다. 시중 자금이 더 생산적인 투자로 흘러가지 않고 건설과 부동산에 집중된 상황을 정상이라 할 순 없을 것이다.
집값 급등과 양극화는 경제 성장을 좀먹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저 수준인 출생률과도 직결된다. 결혼을 하고도 자녀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이유가 한국 사회에선 너무나도 많겠지만, 세계 주요 도시들과 비교해도 너무나 높은 집값은 무시 못할 요인이다. 강남3구와 마용성에 쏠린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선 지방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고 노동의욕을 잃게 만드는 양극화, 모든 기회와 가능성이 한 곳에 몰려 있는 구조적 문제를 풀지 않는다면 영끌과 패닉바잉은 반복될 것이다.
이주영 경제부문장 경향 | 2024.09.22.
100세 시대, ‘생애주기’를 창안하라!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志于學), 서른에 자립하고(而立), 마흔에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不惑). 오십에는 천명을 알고(知天命), 육십에는 귀가 순해지며(耳順), 칠십이 되면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從心所欲不踰矩). 주지하듯, 공자가 구현한 생애주기다. 그런가 하면, 이런 생애주기도 있다. 학습기(스승을 찾아 베다의 진리를 배우는 시기), 가주기(결혼과 직업을 통해 사회적 다르마(의무)를 실행하는 시기), 임서기(숲으로 가서 명상과 성찰에 들어가는 시기), 유랑기(천하를 유행하며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시기). 이것은 아슈라마, 곧 인도의 힌두교가 제시하는 생애주기다. 공자와 힌두교 모두 BC 5세기 전후에 등장한 영적 비전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인간의 기본수명은 125세다. 오행(목화토금수)에 25를 곱해서 나온 숫자다. 생물학적으로 추산해도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과 자연재해, 역병 등으로 인간의 평균수명은 오랫동안 50세 안팎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100세 시대가 도래하였다. 평범한 보통사람의 기대수명이 100세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대단한 축복이자 행운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 사이에 생애주기에 대한 비전이 증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100세 시대와 관련한 담론들이 넘쳐나긴 한다. 고령화(및 그에 수반되는 저출산), 노인일자리 및 연금제도, 요양과 돌봄 등등. 이런 담론을 접하다 보면 노인이 된다는 건 그 자체로 ‘스트레스’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잘 관리되고 처리되어야 하는 “잉여인생”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참 허탈하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모든 기술적 혜택을 번뇌로 만드는 ‘문명의 아이러니’가 또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과 화폐라는 기준이 생애주기 전반을 다 관통하기 때문이다.
찬찬히 따져보자. 공자의 생애주기나 힌두교의 아슈라마가 보여주듯, 우리 시대 역시 청년기는 배움의 시기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인생의 기본기, 즉 생로병사 전체를 헤쳐나갈 수 있는 인식의 지도를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교육은 노동을 위한 예비기간이다. 아니, 학습 자체가 이미 노동이다. 그럼에도 ‘서른에 자립하기’란 요원하다. 사회적 다르마를 실행하기는커녕 경제적 자립조차 어렵다. 그러니 마흔에는 불혹은커녕 노동과 화폐에 완전히 미혹된 채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다 50 전후해서 퇴사하거나 명퇴를 한다. 이때부터는 생의 변곡점이다. ‘지천명’이나 ‘숲속의 명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생리적으로도 갱년기, 즉 리셋을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하지만 기준은 여전히 노동과 화폐다. 다가오는 노후에 대한 불안 때문에 더더욱 거기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니 환갑 이후 귀가 순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청력이 급격히 저하된다. 들리는 모든 것이 못마땅해진다. 혹은 아직 늙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청춘을 모방하는 데 골몰한다. 하여, 다시 돈이다! 그러니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천지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는 공자의 ‘일흔’이나 해탈을 향해 천하를 떠도는 ‘유행기’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결국 ‘요람에서 무덤’까지 ‘오직 노동! 오직 화폐!’의 깃발이 주도하는 일직선의 평면 위를 달리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공간은 직선도, 평면도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시간과 공간, 에너지와 물질’이 끊임없이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물질은 공간을 휘어지게 하고, 공간은 다시 물질을 운동하게 하는’ 식으로.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은 이것을 일러 ‘우주의 탱고’라 이름했다. 하여, 그 매트릭스에선 인생 또한 사계절과 더불어 리듬을 탄다. 봄여름에 발산하고 가을겨울에 수렴한다. 전자가 성장과 확충의 때라면, 후자는 교감과 성찰의 시간이다. 전자가 열정과 모험의 장이라면, 후자는 지혜와 유머로 충만해야 할 때다. 공자의 생애주기나 힌두교의 아슈라마도 이런 ‘우주적 리듬’의 표현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시대 역시 100세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생애주기를 창안해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이런 리듬 속에서만이 청년과 노년은 비로소 서로에게 좋은 벗이 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면서 인생이라는 길을 함께 걸어가는 길벗! ‘청년기의 고립’ 혹은 ‘노년기의 단절’이라는 시대적 난제를 극복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대안은 없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경향 | 2024.09.22.
자동차의 속도에서 생명의 속도로
고 김종철 선생의 ‘자동차 없는 세상을 꿈꾸며’(<간디의 물레>, 녹색평론사)는 지금 읽어도 진실을 가리키는 바늘이 살아 있는 글이다. 오래전 처음 이 글을 접했을 때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자동차가 없었지만 자동차산업의 성장이 사회와 경제의 진보라는 이데올로기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자동차 문화가 가져온 생태적 문제들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오늘날 우리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지 않은가?
지난 추석 연휴 때 평소에 끌지 않는 자동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나왔다.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지만,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자기 속도를 줄이지 않으려는 어떤 저돌성들이다. 예를 들면 차선을 바꾸겠다고 신호를 보내면 속도를 줄여주든가 ‘알았다’는 어떤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도리어 전조등을 켜면서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었고, 휴게소를 나와 진입하지 않으면 길이 끝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진 상대방에는 관심 없다는 듯 자기 속도만 유지하는 경우도 자주 경험했다. 이는 어쩌면 나도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자동차 없는 세상을 꿈꾸며’의 처음은 자동차를 버린 조셉 멀로운이라는 미국의 어느 대학 교수 이야기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렇지만 미국은 예전부터 자동차의 나라였다. 멀로운 교수가 어느 날 홀연히 자동차를 버린 이유는, “자동차가 사람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만들어놓는다는 것을 늘 실감”했기 때문이란다. 나 또한 자동차의 속도는 생명의 속도가 절대 아니라는 입장이다. 초등학생 시절에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다른 아이와 부딪친 적이 있는데, 그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 충돌의 순간과 땅바닥에 나뒹굴며 고통스러워했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 인간에게 생명의 속도는 걷는 속도임을 아마 그때 몸으로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제정신이 아니게 만드는 자동차
자동차가 사람을 제정신이 아니게 만든다는, 멀로운 교수가 자동차를 버린 이유에는 오늘날 여러모로 되새겨야 할 통찰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 진보주의자들의 가장 큰 맹점은 과학기술이 우리의 삶과 내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무시 혹은 무지에 있는 것 같다. 사실상 대부분은 과학기술에 항복했다고 보는 게 진실에 가까운데, 심지어는 충성을 바치는(?) 태도도 보인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신체적 편리가 이른바 이상 사회의 필요조건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사람은 신체적 불편을 통해 다른 것을 상상하거나 아니면 그 불편을 사유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가난이 시를 탄생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신체적 불편이 무찔러야 할 적으로만 간주되는 한, 인간이 달이나 화성에 가서 살 수 있다는 망상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우주산업이 군사산업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주산업은 단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거대한 비즈니스라는 것을 망각한 채로 말이다.
지금 달리고 있는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기 싫다는, 줄이면 나만 손해라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는 실제로 자동차를 흉기로 만든다.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의 존재 양식을 나타내는 은유이기도 하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제각각 소유 중인 자동차 자체가 우리에게 흉기 같은 마음을 만들어 준다. ‘자동차 없는 세상을 꿈꾸며’에서 지적한 자동차 문화의 폐단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자동차의 속도 자체가 작고 세밀한 것에 대한 관심을 불가능하게 하지만, 바로 그 속도는 또 자동차 운전자의 심리를 자기도 모르게 공격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선생의 따끔한 비판만 옮겨놓기로 한다. 그리고 이는 그동안 저지른 엄청난 일을 해결해야 할 당사자로서 인간이 가져야 할 일차적인 마음가짐과 관계가 있다.
‘속도’ 줄이고 함께 걸어야 할 때
이번 추석 연휴의 이상한 더위는 우리의 감성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보통 이맘때 가을 햇볕은 따갑기 마련이고 또 따가워야 한다. 풍성한 햇볕을 받아먹고 벼도 단단히 여물어야 하고 과일들도 영양분을 충분히 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마철 더위처럼 대기는 습했고 온도는 밤에도 내려가질 않았다. 나는 겪어보지 않았지만 동남아시아 지역의 아열대 기후 같다고들 한다. 이 모든 것들이 기후변화가 불러온 현상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어쩌면 올해 여름이 앞으로 겪을 여름에 비해 시원한 여름으로 기억될 거라는 오싹한 예측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여러 대책과 방책을 촉구하고, 바뀌어야 할 것은 정치와 자본주의 체제라는 급진적인 비판도 있지만, 자기가 운전하는 자동차의 속도는 줄이지 않겠다는 자본주의가 심어놓은 마음이 그 본질일 수도 있다.
자동차의 속도로는 자본주의를 추월하지 못한다. 오로지 생명의 속도로 ‘함께’ 걸을 때, 자본주의는 드디어 더 달리지 못하고 덜덜덜 멈춰 설 것이다.
황규관 시인 경향 | 2024.09.22.
귀족부인 앞에 무릎 꿇은 사법
연휴에 발자크의 소설 ‘골동품 진열실’을 읽었다. 대혁명을 거치며 검찰 제도를 포함한 현대적 사법체계의 기틀을 세운 프랑스, 그 태동기 사법제도의 실제 현실에 대한 궁금증에 이끌려 고른 책이었다. 법 이론과 실무에 해박했고 50명이 넘는 법률가를 작품에 등장시킨 이 ‘법의 소설가’가 포착한 200년 전 프랑스 사법 현실은, 엉망진창이었다.
방탕한 생활로 큰 빚을 지게 된 귀족 청년 빅튀르니앵이 어음 위조 행각을 벌이다 고소당하지만 귀족 권력의 뒷배와 비열한 술수를 통해 무죄 방면된다는 게 소설 속 사건의 얼개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인물이 빅튀르니앵의 연인인 드 모프리뇌즈 공작 부인이다. 국왕과도 친분이 있는 그는 예심판사(수사·기소를 담당하는 우리나라 검사와 유사한 사법관) 카뮈조에게 승진을 약속하며 사건을 덮게 한다. 공작 부인 한 사람의 사적 이해가 사법체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출세의 갈망에 눈먼 사법관이 그 꼭두각시로 전락할 수 있는 게 당대의 법 현실이라고 발자크는 기록하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놀랍도록 유사한 지금 이곳의 현실이 자꾸만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이 처리되는 과정의 비정상을 설명할 길은 김 여사가 ‘지체 높으신 대통령 부인’이라는 사실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시공간의 격차만큼 디테일은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드 모프리뇌즈 부인은 남장을 한 채 예심판사를 찾아가 회유·압박을 했고, 김 여사는 검사들을 불러 휴대전화를 내놓게 한 뒤 조사받았다. 하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신분’이 어떤 방식으로든 형사사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만으로 전근대의 악취는 풍겨나기 때문이다.
혁명을 통해 탄생한 새로운 법은 법 앞에 특권계급을 인정하지 않는 정의로운 법이었으나, 소설의 배경이 된 왕정복고라는 반동의 시대에는 사법관들이 다시 귀족들에게 빌붙어 법의 정신을 배신했다. 이러니 귀족 빅튀르니앵은 “법정을 자신에게는 전혀 영향력이 없는, 민중에게 겁을 주는 허수아비 정도로 여겼”고 “평민이라면 비난받을 일이 그에게는 허용될 수 있는 재밋거리”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발자크의 이 묘사는 마치 지금 이곳의 세태를 그리는 듯하지 않은가.
불문학자 송기정 교수의 논문 ‘발자크 소설에 나타난 민사·형사 사건’을 보면, 아직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또 다른 소설 ‘창녀들의 영광과 비참’에는 더욱 극단적인 장면이 나온다. 드 모프리뇌즈 부인의 도움으로 파리의 요직에 진출한 카뮈조 예심판사가 또 등장하는데, 그는 한 살인·절도 사건의 진상에 대한 자백을 받아낸 참이었다. 그런데 피의자를 보호하려는 세리지 백작 부인이 찾아와 그 조서를 빼앗아 불 속에 던져버린다. 이는 명백한 범죄 행위임에도 카뮈조와 검사장 그랑빌은 어이없게도 그냥 웃어넘기고 만다. 발자크는 “이렇듯 심각한 범죄는 예쁜 여인의 웃음거리로 변해버렸다”고 썼다.
또 연상되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주가조작에 연루된 숱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김건희 여사 기소를 하염없이 미루는 것은 조서를 불에 던져 넣는 것과 어떤 본질적 차이가 있을까. 말로는 ‘국민의 검찰’을 내세우면서 실상은 ‘김건희의 검찰’이 된 21세기 한국 검찰을 발자크가 관찰한다면, 법을 조롱하는 역사상 가장 신랄한 소설을 써내고도 남지 싶다.
왕정복고 당시에도 형식적 법치는 이뤄졌다. “왕이 그 왕국의 일개 예심판사에게도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을 “새로운 법의 위대함”이라고 발자크는 그랑빌 검사장의 입을 통해 말했다(물론 오지랖 넓은 귀족 부인들의 노골적인 사법방해를 막지는 못했지만). 이 점에서 우리는 두 세기 전 프랑스의 왕정보다 후진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대통령이 검찰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시대이며, 대통령이 자신과 부인이 관련된 특검법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부권을 휘두르는 시대가 아닌가. 이 정도의 사법적 개입은 발자크 시대의 왕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법적 관점에서 우리나라는 왕정국가, 혹은 그 이상으로 퇴행했다는 점, 권력에 빌붙는 검찰의 행태 또한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점, 민주공화국에서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법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을 발자크 덕에 더욱 선명히 각인할 수 있었다.
‘골동품 진열실’은 1830년 시점에서 이야기를 끝맺는데, 그해 7월혁명으로 복고왕정은 종말을 맞았다.
박용현|논설위원 한겨레| 2024.09.22.
딥페이크, 깊은 속임수
찍히는 사람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작고 성능이 좋은 캠코더나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이미지로 사람을 속이는 프로그램이 개발된 사실은 대체로 여성의 권리가 침해되는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법은 기술의 ‘악용’을 막으려 했지만 늘 한발 늦었다. 이제 누구나 손쉽게 성착취물을 만들 수 있게 된 현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것이 기술을 훌쩍 넘어선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동의했든 하지 않았든 스스로 찍었든 남이 찍었든, 여성의 이미지가 여성에 대한 폭력의 수단이 되는, 사회가 문제다.
성관계 장면이 촬영된 영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받은 여성방송인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고 사과하며 방송계를 떠나야 했던, 20여년 전의 사건을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사과까지 강요받는 일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이미지가 협박의 수단이 되는 일은 더 흔하고 악랄해졌다. ‘네가 이런 사진을 찍었다는 걸 가족에게 알리겠다’ ‘네가 찍힌 영상을 주위에 퍼뜨리겠다’는 말로 남성은 여성을 지배하고 유무형의 이득을 취한다. 피해 여성에게 수치심을 안기는 사회라 가능해진 일이다.
정작 여성의 수치심은 인정되지 않았다. ‘레깅스는 일상복으로 활용’되므로 하반신이 불법촬영됐더라도 무죄, 화장실에서 불법촬영당한 영상은 ‘화면이 제대로 찍히지 않아’ 선고유예. ‘속옷을 입은’ 것은 ‘성적 신체부위 노출’이 없어 범죄 영상 삭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부당하게 유포되더라도 자신이 촬영한 것이면 삭제해주지 않았다. 피해 경험에 수치심이 뒤따른다면 그것은 나의 몸과 인격에 대한 자기 통제감이 사라지고 온전성이 훼손되기 때문이지, 그것이 성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남성의 위치에서 만들어진 ‘성적 수치심 유발’이라는 범죄 기준은 여성의 피해를 성적인 것으로 제한했다. 여성의 경험은 온전히 해석되지 못한 채 조각나고 미끄러졌다.
물론 이것은 전부가 아니다. 여성의 성적 이미지나 성적 실천을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산업이 있다. 남성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 ‘정상’이고 ‘능력’인 사회에서 시장이 번창한다. 여성에게 강요된 성적 수치심은 이들의 밑천이라 이미지를 업로드하고 삭제하는 업체의 카르텔도 만들어질 수 있었다. 여성을 굴복시키는 것이 수익의 원천이 될수록 ‘남자-되기’를 위한 ‘놀이 문화’가 만들어지고 플랫폼은 성착취의 새로운 장으로 제공된다. 제작을 하든 유통을 하든 소비를 하든 폭력과 놀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남성들이 길러진다. 성착취에 가담하는 것은 명예가 되고 젠더폭력은 더욱 포악해진다.
제도의 뒷북치기는 기술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해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여성의 위치에서 문제를 정의하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격차다. 딥페이크로 드러난 ‘깊은 속임수’가 바로 이것이다.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것을 권력의 증거이자 남성성이라고 믿게 하는 사회, 여성을 지우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논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회, 성차별의 구조를 건드리지 않고 뒷북치는 시늉만으로 정치적 책임을 다했다고 속이는 사회. 그러나 여성은 속지 않는다.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향해, 더 강한 처벌뿐 아니라 더 정곡을 찌르는 처벌을, 더 많은 지원뿐만 아니라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는 싸움은 계속된다.
수치심은 규범을 어겼다는 자각에 따르는 사회적 감정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길들이는 규범이 견고한 사회는 그것을 위반하거나 일탈했다고 여기는 여성에게 수치심을 강요한다. 여성과 동등한 존재로 관계 맺는 규범을 확립하지 못한 사회는 가해자들이 수치심을 배우지 못하게 한다. 앞의 규범을 부수고 뒤의 규범을 세우는 일이, 수치심에 제자리를 찾아주는 길이자 속임수를 벗어날 길이다. 속임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평등은 지지 않는다는 진실은, 딥페이크로도 속일 수 없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경향 | 2024.09.23.
정당법과 군사쿠데타의 잔재
정치권에서 지구당 부활이 논의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거대 양당 간의 의견 차이가 크게 없는 듯하다. 지난 1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만났을 때도, 20년 전 폐지됐던 지구당을 부활하자는 것에 이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당법을 손보려면, 제대로 손봐야 한다. 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하고 정치다양성을 훼손하는 군사쿠데타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
해방 직후 미군정은 미군정령 제55호로 ‘정당에 관한 규칙’을 공포했다. 이 규칙에서는 정치적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3인 이상의 단체는 정당으로 등록하게 했다. 그런데 미군정은 이 규칙을 근거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일부 정당들의 등록을 취소하기도 하는 등 권한을 남용했다. 그런데도 이 규칙은 1950년대까지 존속했다. 1958년 조봉암의 진보당이 해산된 것도 이 규칙에 의한 것이었다.
4·19 혁명 이후에 ‘정당에 관한 규칙’은 폐지되었고, 국회는 ‘신문 등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다. 이 법률에서 정당의 설립은 자유에 맡겨져 있었으며, 조직이나 당원숫자에 관한 요건은 없었다. 단지 국무원 사무처에 등록만 하면 됐다.
그런데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 만들어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12월31일 정당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서는 5개 이상 시도에 조직이 있어야 하고 일정 숫자 이상의 당원이 있어야 정당을 창당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 등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독소조항들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정당의 조직이나 당원 숫자를 정당의 설립요건으로 정한 정당법은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정당법은 정당의 중앙당은 수도에만 둘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고, 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역주민들의 정치결사체(지역정당)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매우 중앙집권적인 정당법이 아닐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군사쿠데타 세력은 정치적 활동의 자유를 위축시키기 위해 다른 국가에서는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조항들을 정당법에 넣어 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복수당적 금지조항과 정당 유사명칭 사용금지 조항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만든 정당법에는 복수당적 금지조항이 들어가 있었고, 이 조항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누구든지 2 이상의 정당의 당원이 되지 못한다”라고 규정하고, 이를 위반하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만원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조항이다. 왜 국민이 2개 이상 정당에 당원으로 가입을 하면 안 되는지? 그리고 이런 경우에 형사처벌까지 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이다.
복수당적 금지조항은 국민의 정치적 기본권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정당연합(연합정당)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복수당적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연합정당을 만들려면 기존 정당의 당원들이 탈당해서 연합정당으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조항은 정치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억누르는 조항이기도 하다.
한편 ‘서울의 봄’을 짓밟은 군사쿠데타 세력은 국가보위입법회의를 구성하여 1980년 11월25일 정당법을 개정했다. 이때 만든 ‘유사명칭 등 사용금지’ 조항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것은 “이 법에 의하여 설립된 정당이 아니면 그 명칭에 정당임을 표시하는 문자를 사용하지 못한다”라는 조항이다. 이 조항 위반에 대해서도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지방선거에 후보를 내려고 지역 차원의 정치결사체를 만든 주민들이 ‘풀뿌리옥천당’ 같은 명칭을 사용했다가 기소된 사례도 있다. 이것 역시 국민의 정치적 기본권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합리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독소조항이다. 우스갯소리로 ‘당’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처벌한다면, ‘식당’이나 ‘경로당’도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이다. 그리고 ‘당’이 아니라 ‘파티’라는 표현을 쓰면 처벌받지 않는다고 하니, 그야말로 법을 희화화하는 조항이다.
의문인 것은 ‘민주화 세력’의 후신임을 표방하는 정당과 정치인조차도 이런 악법 조항들을 폐지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나 국민의 참정권 보장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이 더 좋다는 것인가?
지금 정당법을 손보려면, 지구당 부활만 논의해서는 안 된다. 군사쿠데타의 잔재라고 할 수 있는 독소조항들을 폐지하는 것도 함께해야 한다. 그리고 지방선거에 후보를 낼 수 있는 지역주민들의 정치결사체(지역정당)을 법제화하는 등 정치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입법도 같이 이뤄져야 한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경향 | 2024.09.23.
사라진 여성들의 경제적 가치
장면 하나. 요즘 식당에 가보면 바닥에 앉던 자리가 없어지고 식탁과 의자로 바뀐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유를 물으면 일할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서라 한다. 무릎을 자주 꿇고, 허리를 구부려가며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한때는 있었는데, 이제는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장면 둘. 가사 청소 노동자 매칭 플랫폼 기업에서 들은 얘기다. 이 시장은 서비스 이용 희망자는 넘치는데 일할 사람은 늘 모자라는 공급자 위주 시장이다. 이 때문에 비즈니스의 핵심은 50대 이하 여성 노동자들을 확보하는 것이다. 서비스 이용 조건에 ‘무릎 꿇는 손걸레질, 손빨래는 하지 않습니다’라고 명시하고, 분쟁이 생기면 회사가 적극 개입해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달리 말하면, 이 시장을 이미 떠난 고령 노동자들은 오랜 세월 어떤 보호도 없이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는 의미다.
장면 셋.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20여년 전만 해도 시골에서 올라와 손주를 돌봐주는 어머니 덕에 맘 놓고 회사 다니던 맞벌이 부부들이 많았다. 육아뿐 아니라 살림도 거의 해주고, 주말이면 집에 내려가 다른 식구들 건사하고 일주일치 반찬까지 해놓고 다시 부리나케 올라와주는 어머니들이었다. 언젠가부터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맞벌이 부부에게 육아란 재앙이라 할 만큼 어려운 일이 됐다. 출생률이 급전직하한 시기와 이 어머니들이 사라진 시기가 거의 맞물리는데, 이는 진작 떨어졌을 출생률을 이 어머니들이 한동안 떠받쳤다는 뜻이다.
이 장면들이 떠오른 것은, 필리핀 가사관리사에 대해 “임금이 너무 높다”는 여론과 함께 ‘생산성’ 운운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초 한국은행이 보고서에서 “돌봄 부문은 생산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은 여러 미디어에 반복 인용된다. 이는 얼핏 그럴 듯하지만 따져보면 틀린 내용이다. 노동생산성이란 노동의 부가가치를 노동시간으로 나눈 것일 뿐이다. 돌봄 등 서비스 노동의 생산성이 낮은 것은 시간당 임금이 너무 낮아서이지 정말 제조업 등 다른 노동보다 가치가 낮은지 측정해서 산출한 결과가 아니다. 관행적으로 임금이 낮아서 생산성 지표가 낮은 것을 두고 “생산성이 낮으니 임금을 낮춰 주자”고 하는 모순적 주장이 반복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렇게 주장할 수 있겠다. 임금이 낮아도 유지된 것 자체가 생산성이 낮다는 증거 아니냐고. 이런 주장 앞에 내밀고 싶은 것이 앞의 세 장면이다. 이 노동들은 유지될 만해서 유지된 게 아니다. 진작 사라질 것을 한 세대의 여성들이 지탱해준 것이다. 뼈마디가 아프다 못해 뒤틀리고 변형되어도 그저 참고, 가족을 위해 쥐꼬리만 한 돈에도 웃으며 일했던 그들이 떠받친 것이다. 그들이 거의 여든에 가까워서야 일을 놓았음에도, 이들을 대신할 사람도 제도도 준비하지 않고 그저 당연하게 여겨온 결과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이제는 그렇게 일할 사람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외국에서 데려와도 당연히 똑같을 수 없다. 세상은 바뀌었고, 그런 노동은 시켜서도 안 된다. 현실이 이렇게 명백한데도 부정하는 사람들, 여전히 ‘시골 우리 어머니’만 찾는 꼴인 당신들이야말로 어머니의 가치를 가장 무시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 경향 | 2024.09.23.
북한은 남쪽 문을 닫고 살 수 있나
북한은 남쪽 문을 닫고, 북방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북한은 10월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 수정을 예고했다. 통일을 부정하고, 두 국가를 법제화할 것이다. 두 국가론은 분단 이전에 강대국의 분할론이었다.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충돌하는 완충국가의 비극적 운명을 다시 겪어야 하는가? 그리고, 분단 이후에는 전쟁론이었다. 이제 끝을 알 수 없는 대결의 악순환이 기다리는가? 아직은 두 국가를 구조로 볼 수 없다. 그 이유 중의 하나를 북한 경제에서 찾을 수 있다.
북한은 중국·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생존을 추구하려 한다. 그러나 북한의 판단과는 다르게, 북방 삼각관계는 유동적이다. 물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북-러 관계가 달라졌다. 군사협력을 대가로 러시아의 에너지와 식량 지원이 이어지고, 북한 노동자의 파견도 늘었다. 그러나 북한이 누리는 전쟁특수가 장기화하기는 어렵다. 언젠가 전쟁은 끝난다. 남는 것은 북한과 러시아 극동의 제한적인 연계뿐이다. 두 나라의 국제 제재를 무시하는 연대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방식과 그 이후 러시아의 국제적 역할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북-러 관계가 북방 삼각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북-중 관계다. 북·중과 북·러는 협력의 구조가 다르고, 지리적 특성으로 영향력이 다르다. 북-중 관계는 ‘전략적 이익’이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중국은 북한을 미국과 경쟁하기 위한 중요한 완충공간으로 보고, 북한은 중국을 남방의 문을 닫아도 생존을 도와줄 후원자로 본다.
그러나 북·중 양국의 전략 차이도 있다. 중국은 미국과 전략경쟁을 하지만 속도를 조절하려 하고,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반도 정세의 급격한 악화를 원하지 않는다. 북핵 문제에 대한 중국의 기본 입장도 달라지지 않았다. 북-미 협상에서 미국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지역의 불안정을 가져올 북한의 핵 확산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북·중 경제협력에 대한 중국의 기본 입장도 분명하다. 제재라는 국제규범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코로나 봉쇄가 풀렸지만, 양국의 무역이 예상만큼 늘지 않는 핵심 이유다. 2024년 상반기 북-중 무역을 살펴보면, 북한의 대중 수입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가발과 속눈썹이 대중 수출에서 57.9%를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재 품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원자재를 들여와 북한에서 가공해 다시 수출하는 역외 가공 중, 제재 대상이 아닌 품목이 별로 없다. 북-중 관계는 이익의 일치와 차이를 동시에 봐야 한다. 최근 ‘차이’를 ‘관계 이상’으로 쉽게 해석하지만, 그것은 전체가 아니다. 앞으로도 북-중 관계는 한반도 주변 정세의 영향을 받으며, 이익의 일치와 차이 사이를 오갈 것이다.
북한 경제가 어려운 이유는 무역이 줄었기 때문이다. 제재 때문에 수출이 어렵고, 외화를 벌지 못하니 수입도 줄고, 그래서 다시 생산이 감소하는 악순환이다. 북-러 관계가 실물경제를 돌릴 정도의 외화 수입을 제공하기 어렵다. 북한은 ‘부족의 경제’에 대응하기 위해 ‘역개혁’을 선택했다. 시장을 억압하고, 분권화를 회수하고, 중앙의 통제를 강화했다. 북한이 지난 6월 말 당 8기 10차 전원회의에서 재정상을 경질한 이유는 급작스러운 환율 폭등 때문이다. 코로나가 끝나고 무역을 재개할 시점에, 부족한 외화 사정에도 공식 부문의 과도한 외화 확보 경쟁이 환율 폭등으로 나타났다. 무역이 늘지 않으면 외화가 부족하고, 그러면 북한 원화의 가치는 불안정해지고 경제 관리가 어려워진다.
북한의 식량 생산은 어려운 시기와 비교해서 늘어났지만, 분배 과정에서 과도한 정부의 개입은 유통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 아마르티아 센의 주장처럼, 기근은 공급 부족이 아니라, 분배의 왜곡 때문이다. 북한은 ‘부족의 경제’에 ‘관료적 조정’으로 대응하지만, 성공하기 어렵다. 제재가 강요한 ‘수입 대체 전략’도 지속하기 어렵다. 수입이 어려운 역청탄 대신 풍부한 무연탄으로 철을 만드는 ‘주체철’과 석유가 아니라 석탄에서 석유제품을 만드는 ‘탄소하나화학’ 역시 경제성이 없고 효율이 떨어진다.
‘북방경제’와 ‘역개혁’으로 북한 경제를 살리기는 어렵다. 북한은 남방과의 협상 과정에서 잠시나마 꿈꾸었던 번영의 미래를 잊어서는 안 된다. 당분간 어렵지만, 언젠가는 북한이 경제개혁을 선택할 수 있는 국제 환경의 때가 다시 온다. 정세가 달라져도 ‘관계의 철학’은 변하지 않는다. 접촉해야 변화하고, 문을 열어야 발전한다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한겨레 | 2024.09.23.
긴 여름의 끝, 정치경제학의 부활을 기다린다
갑자기 밀어닥친 가을이 감당이 되지 않는다. 그만큼 이번 여름은 길고 더웠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펄펄 끓었다. 지난 6일 유럽연합의 기후감시기구인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서비스(C3S)의 발표에 따르면, 올 8월의 세계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보다 1.51도가 상승했다. 게다가 2023년 9월부터 올해 8월까지의 평균기온 또한 산업화 이전보다 1.64도 높아졌다. 지구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노선으로 이야기되는 1.5도 상승의 한계가 이미 뚫린 것 아니냐는 암울한 가능성을 던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지난여름은 영원히 추억으로 남을 가장 시원하고 짧은 여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엉뚱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나는 이 긴 여름의 끝에서 정치경제학의 부활이 절실하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긴다. 먼저 정치경제학이라는 말뜻부터 설명해야겠다. 우리나라에서 이 말은 마르크스 경제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일 때가 많았고, 어떤 이들은 이를 정치학과 경제학을 결합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쓰고도 있지만, 내가 말하는 의미는 20세기 초까지 통용되던 고전적인 의미, ‘좋은 삶을 추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정치경제학이라는 뜻이다.
‘이코노미’라는 말의 어원인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는 본래 ‘집안 살림’을 뜻하는 말이었다. 가족과 가족 성원 모두의 ‘좋은 삶’을 추구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조달하고 운영해야 하느냐의 기술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16세기부터 이것이 비단 가정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나라 살림’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질문이라는 깨달음이 있었고, 이에 나라에 적용되는 살림살이의 연구라는 의미에서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라는 말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말까지도 정치경제학은 (국가) 윤리학의 일부였다. 애덤 스미스가 도덕철학을 담당하는 교수였다는 것은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정치철학의 거장이 또한 19세기 경제학의 금자탑이라 할 <정치경제학 원리>를 집필한 것 또한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회 전체의 좋은 삶’이라는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생산과 분배와 소비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를 해명하는 것이 정치경제학의 본연의 목표라는 것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경제학은 20세기 들어오면서 정치철학과 경제학으로 갈라져 버렸고, 여기에서 비극이 시작됐다. 경제학에서는 이제 ‘사회 전체의 좋은 삶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경제성장과 자본축적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들어서 버렸고, 경제학 전체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 버렸다. 경제성장과 자본축적이 과연 우리들의 ‘좋은 삶’을 위한 충분조건인지, 그 과정에서 오히려 ‘좋은 삶’이 파괴되는 것은 아닌지의 질문은 묵살되어 버렸다.
경제·정치철학으로 쪼개지며 비극
정치철학의 운명도 이보다 낫지 않았다. 사람들의 실제 생활을 지배하는 질문인 생산과 분배와 소비가 어떻게 조직되고 있는가는 오롯이 경제학에 떠넘겨 버린 상태에서, ‘공동체의 좋은 삶’에 대한 논의가 무슨 알맹이 있는 내용을 담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기계제 생산에 기초한 산업사회에서의 경제 생활은 끊임없이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건만, 이에 대한 실시간에 가까운 파악 없이 고전적 저작들만 파고드는 방법으로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오늘날의 정치철학은 경전에 나오는 개념과 언어들을 황소처럼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지성사 연구든가 아니면 ‘시장’이니 ‘능력’이니 하는 현실과 유리된 개념들로 공허한 주장을 지루하게 반복하는 선전의 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오죽하면 피터 라즐렛 같은 이가 1956년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당분간 정치철학은 죽었다’라고 선언하기까지 했겠는가?
인류의 지성이 정치경제학을 경제학과 정치철학으로 찢어놓은 대가는 크고도 참담하다. 경제 시스템은 그 방향을 인도해 줄 ‘좋은 삶’의 내용 없이 물질적인 부와 수치상의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로 돌진하는 눈먼 기차가 되었다. 시장경제의 방향을 잡고 인도하여 ‘공동체의 좋은 삶’을 달성할 수 있는 정치철학의 지적·도덕적 혁신이 멈춘 상태에서, 정치 시스템은 ‘경제의 시녀’로 전락했고, 오히려 그러한 경제 시스템의 폭주에 편승하여 이를 팔아 권력을 잡으려는 정치가들의 게임만 난무하게 되었다. 특히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1980년대 이후의 지난 40년간 이는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치러야 하는 대가를 적어놓은 계산서는 하지만 너무나 빨리 날아들었다. 기후위기는 그 계산서에 적힌 목록의 윗자리를 차지한 한 항목에 불과하다. 극심한 불평등, 사회적 갈등, 민주주의의 파괴, 인구학적 위기 등의 문제들이 줄줄이 그 아래에 적혀 있다.
그 대가는 크고도 참담
애덤 스미스나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20세기 이전의 ‘정치경제학자들’이 이 상황을 보면 무어라고 할까? 그들도 사회에서 비생산적인 요소들을 제거해 효율성을 제고하는 것과 이를 통해 물질적 부의 증대를 이루는 것을 최고의 관심사로 삼았던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2024년에 되살아나 우리와 함께 이번의 길고 더운 여름을 겪었다면, 분명히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것이 ‘좋은 삶’인가? 지구와 사회와 개인을 모두 황폐하게 만들면서 더 많은 소비와 더 큰 경제성장률에 집착하는 것이 생산과 분배와 소비를 조직하는 올바른 방법인가? 밀과 같은 정치경제학자는 분명히 당장 성장을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는 물질적 결핍을 벗어나기 위해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것을 분명히 강조했지만, 영원한 경제성장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경제성장은 필연적으로 사회 전체에 불안정과 불평등과 같은 달갑지 않은 상태를 불러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류가 일정한 물질적 풍요에 이르면 경제성장이 정지하는 이른바 ‘정상 상태(stationary state)’에 도달하는 것이 ‘좋은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21세기의 학문은 경제학과 정치철학을 다시 하나로 결합시킨 ‘정치경제학’이다. 막연한 정치 이념이 아니라, 맹목적인 물질적 부의 팽창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좋은 삶’을 위해서는 생산과 분배와 소비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를 명시적으로 중심적인 질문으로 삼아 현실과 이상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역동적인 학문이다. 한걸음 나아가, 이제는 그 고민해야 할 ‘좋은 삶’의 규모가 19세기 이전처럼 한 나라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80억의 인류가 전 지구의 자연을 공유하며 삶을 영위하고 있는 현대의 산업사회에서는 굳이 말을 만들자면 ‘지구정치경제학(global political economy)’이 생겨나야만 한다. 진정한 의미의 ‘부’란 무엇인지, 그것이 ‘좋은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수단은 어떤 것이 있는지 등 근원적인 철학적 문제에서 구체적인 현실의 정책까지를 연결시킬 수 있는 (지구)정치경제학의 부활이 필요하다.
책 두 권을 권하고 싶다. 먼저 여성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가 저술하고 내가 번역한 <도넛 경제학>이다. 경제성장과 자본축적이라는 20세기 경제학의 우상을 벗어나 자연의 한계를 존중하면서 모든 이들이 최소한의 사회적 부에 동참할 수 있는 ‘좋은 삶’의 경제학을 모색하는 명저이다. 또한 경제학자인 동시에 정치철학자인 프레드 챈들러의 <자유와 평등>(가제) 또한 내가 번역을 마무리하여 출간을 준비 중이다. 이 책은 존 롤즈의 정의론에 기반하여 자유, 평등, 연대라는 3대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새로운 정책과 제도들로 이루어진 경제 시스템의 밑그림을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각종 위기만 닥쳐오는 것이 아니다. 한쪽에서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적인 혁신과 모색이 경제학에서도, 정치철학에서도 바쁘게 이루어지고 있다. 2024년, 이 길고 더운 여름의 끝에서 정치경제학의 부활을 기다린다.
홍기빈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경향 | 2024.09.23.
아직 ‘한국이 싫어서’
2015년 12월,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가는 비행기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났다는 청년들의 ‘탈조선’ 사연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수소문 끝에 ‘워홀러’(워킹 홀리데이 메이커)로 머무르는 한국 청년 15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그해 ‘탈조선’은 대한민국을 지옥이라 이르는 ‘헬조선’과 함께 청년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담론으로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선 청년들을 혹자는 ‘심정적 난민’ 혹은 ‘희망 난민’이라 했다.
마침 그해 출간된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청년들의 답답한 현실을 드러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주인공 계나는 ‘인서울 대학’을 나온 뒤 금융회사에서 3년째 정규직으로 일하는 20대 후반의 여성으로, 예의 바르고 목표 의식 뚜렷한 남자친구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한국이 싫어서, 여기서는 못 살겠다며 호주로 떠난다. ‘이 정도 여건이면 한국에서 버티고 살 만할’ 것 같은 주인공의 일탈에 독자들은 크게 공감했다. 계나는 재력을 갖춘 부모를 가졌거나 명문대를 나왔거나 김태희처럼 예쁘거나, 하는 식의 ‘경쟁력’ 없이는 한국에서 딱히 비전이 없다고 읊조린다.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전근대적 문화는 “호주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게 한국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것보다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줬다.
최근 원작 출간 뒤 9년 만에 ‘한국이 싫어서’가 영화로 찾아왔다. 그때 호주에서 만난 청년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휴대전화도 울리지 않는 숲속 오두막에서 지내며 농장 일을 하던 청년들, 서툰 영어로 의사소통에 진땀을 흘리며 음식점·쇼핑몰에서 일하던 청년들, 영주권을 따려고 장기 플랜을 세우던 이들까지. 각자의 사연을 안고 온 이들이 말하는 ‘한국’은 한마디로 “떠나고 싶은 곳”이었다. 닥치고 일만 해야 하는 곳, 친구와도 비교당하고 경쟁해야 하는 곳, 갈수록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곳, 직업에 따른 소득 차이가 매우 큰 곳, 노력한 만큼 성과와 보상이 없는 곳일 뿐이다.
모두가 알고 있거나 짐작하듯이, 호주행이 곧 낙원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 세컨드 비자(기간 연장)를 얻으려면 호주인들이 꺼리는 고된 일을 필수로 거쳐야 하고, 규제가 강화된 이민법으로 현지 정착의 문턱은 높아졌다. 그래도 이들은 한국에선 겪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방식을 깨쳐가는 중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프면 쉴 수 있고, 최저임금으로도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었다. 실력이나 노력 대신 학벌로 차별받지 않아도 된다는 데 안도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직, 한국에 돌아오지 않은 몇몇과 연락이 닿았다. 그해 시드니에서 빌딩 클리너로 일하던 선웅씨는 두달 전 영주권을 취득했다. “호주에 온 지 9년7개월3일 만”이라는 말에 그간의 고단함이 묻어났다. ‘끊임없이 누군가와 비교당하는 것’이 싫어서 호주로 떠났던 선웅씨는 시드니 요양병원의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귀국하지 않은 데 미련은 없냐는 질문에, 그는 “좋은 배경 없인 잘되기 어려운 곳인 건 여전하지 않으냐”고 되묻는다. 호주에 이어 뉴질랜드·아일랜드에서도 워홀러로 지냈다는 영희씨는 두바이에서 승무원의 꿈을 이뤘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그는 “한국이 삶의 다양한 방식을 존중하는 사회였으면 한다”고 했다. 연락이 닿지 않은 더 많은 이들은, 한국이 여전히 싫어도 다른 길을 찾지 못해 돌아왔을 것이다. 누군가는 호주에서 번 돈으로 가게를 차렸을 것이고, 또다른 이는 계나처럼 출근길 지옥철을 겪으며 점심 메뉴조차 마음대로 못 고르는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을 게다.
영화는 9년 전 원작만큼 화제를 모으진 못했다. ‘헬조선’과 같은 신조어도 더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 사회가 괜찮아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난달 말 한국은행은 상위권 대학 진학이 학생의 잠재력보다는 부모의 경제력에 따른 거주 지역에 따라 좌우된다는 분석 보고서를 냈다. 출발선이 공정하지 않은 현실은 변함이 없다. 미국 인구학자 다월 마이어스는 “출산율은 절망의 바로미터”라고 했다(‘엄마가 아닌 여자들’). 세계에서 유례없는 한국의 초저출생 지표는 그때 ‘탈조선’을 품고 살던 청년들이 겪은 절망에 기인한다.
‘헬조선’ 담론이 확산된 2016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며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광복절 기념사)을 가지라고 했다. 정부의 성찰은 간데없고 ‘노오력’만 강조한 것이다. 시대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대통령은 지금이라고 다를 게 없다. 청년들의 국민연금 보험료 인상 속도를 늦춰준다지만 안정적으로 보험료를 낼 수 있는 일자리 자체가 턱없이 부족하다. 저출생 대책으로 육아휴직 급여만 높이면 뭐 하나. 육아휴직 자체가 그림의 떡인 청년들에 대해선 무대책이다. 노동시간은 줄이지 않으면서 아이를 저녁까지 봐준다는 모순적 발상은 또 어떤가. 그러는 사이, 우리 안의 희망 난민들만 늘어가고 있다.
황보연 논설위원 한겨레 | 2024.09.24.
국민연금 기금 운용의 과제 세 가지
올해 6월 말 기준 국민연금 기금은 1147조원이다. 1988년 이후 연금보험료 등 826조원과 운용수익금 680조원으로 1500조원 넘게 조성했고 연금급여 등으로 약 360조원을 지출한 결과다. 이 정도 규모면 GDP 대비로는 세계 최대다. 하지만 국민연금연구원의 전망에 따르면 불과 3년 뒤인 2027년부터는 보험료 수입이 급여 지출을 밑돈다고 한다. 그러니 연금급여 재원을 어떻게든 보험료 기금으로 마련하려는 입장에서는 더 내거나 덜 받는 ‘개혁’을 미룰 수 없다. 그럴 때면 으레 매우 높은 기금운용 수익률에 대한 요구도 함께 등장하곤 한다. 운용수익금을 최대로 늘려 기금 고갈 시점을 늦추자는 계산이다. 그러나 더 많은 재무적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 시점을 몇해 더 미룬다고 될 일이겠는가.
물론 사적기금이고 위험 수준이 동일하다면 높은 재무적 수익률은 가입자에게 최선의 목표다. 그러나 공동체 전체가 고령인구를 함께 부양한다는 내용의 사회적 계약이 포함된 공적기금의 경우라도 과연 똑같이 그럴까. 지금까지 국민연금은 보험료 수입이 급여 지출을 초과하는 기금 성장기를 배경으로 위험자산과 해외자산의 비중을 지속적으로 늘려왔다. 자산 배분에 있어 재무적 수익률의 극대화를 절대 목표로 추구해왔다. 그 결과 2000년 이래 작년까지 달성한 연평균 수익률 6.05%는 캐나다 연금투자(6.57%)나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6.43%)에는 못 미쳐도 노르웨이 국부펀드(5.63%), 네덜란드 공적연금(5.31%), 일본 후생연금펀드(3.87%)에 비하면 나쁘지만은 않은 실적이었다.
문제는 미래 기금운용 여건에 큰 변화가 닥쳐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향후 보험료 수입이 급여 지출에 미치지 못하는 시기가 도래하면 순차적으로 자산을 매각해야 하고 유동성 관리의 중요성이 커진다. 수익률 극대화를 제약하는 요인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기금 사이클을 감안한 운용 방향 재설정은 먼 훗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당장 내년부터 대체투자 분야에 우선 도입되어 5년 동안 위험자산 비중 상한을 65%로 고정시킬 기준포트폴리오 접근법이 기금 감소기에 대한 충분한 고민을 담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한쪽에서는 기금이 바닥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도 다른 쪽에서는 마치 기금 성장기가 지속될 것처럼 전제하는 운용 방침을 고수하는 셈이다. 기금 감소기에 대비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연금 기금운용의 첫 번째 과제다.
단기적인 재무적 수익률 극대화가 이미 절대 목표처럼 굳어진 상황에서 국민연금 기금운용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물음은 그간 사실상 봉쇄되어왔다. 그러나 국민 다수의 노후를 책임지기에 그 제도적 지속 가능성이 곧 해당 사회의 지속 가능성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공적연금의 운용 원칙은 궁극적으로는 공공선의 실현으로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을 지향해야 마땅하다. 대규모 공적기금이라면 좀 더 장기적인 견지에서 우리 사회가 직면한 사회 지속성 위기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국민연금 의무가입자의 다수를 대표하는 노동조합의 인식이자 요구이다.
예를 들어 사회서비스 공공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통해 국채 수익률만큼의 재무적 수익률을 실현하면서도 사회적 안전 확충과 일자리 창출로 후세대의 부담 능력을 지원할 수 있다면 국민연금이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왜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사회 재생산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국민연금의 장기 재정불안정도 해소될 리 없다. 공적연금이라면 재무적 수익률뿐만 아니라 사회적 수익률까지 고려해야 옳은 것이다. 그것이 국민연금 기금운용의 두 번째 과제다. 이제라도 기금 포트폴리오에 적정 수준의 사회적 투자 몫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한편 국민연금 기금운용에 있어서는 지배구조상의 가입자 대표성에 대한 실질적 존중이 핵심 가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연금 기금운용의 세 번째 과제다. 국민연금은 강제 가입이다. 그럼에도 기금의 제도나 운용 방침상의 변경에 있어 가입자 대표의 의견 표명이 차단되고 의사결정 참여가 침해된다면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해진 절차에도 부합하지 않고 특히 비민주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기금운용위원회 구성을 보면 민주노총 위원의 경우 작년 3월에 해촉된 이후 아직까지도 공석인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민주노총이 대표하는 국민연금 가입자들의 기금운용에 대한 의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원천 배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사안은 중요성이 결코 작지 않다. 오늘 기금운용 지배구조의 이 왜곡된 현실은 반드시 조속히 바로잡혀야 한다.
나원준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경향 | 2024.09.24
지금 대한민국은 역사 공부 중
며칠 전 박은식의 <한국통사>를 읽었다. 여기에서 통사란 아플 통(痛), 곧 ‘한국의 아픈 역사’라는 뜻이다. 출간된 지 꽤 된 책이지만 오랫동안 손대지 않고 있다가 최근 뉴라이트 논쟁을 계기로 다시 집어들었다. 따지고 보면 선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현 정부가 나에게 역사 공부를 시켜주고 있다.
박은식은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이기도 했으며, 일찍이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낸 분이다. 그가 쓴 <한국통사>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책이며, 그 안에 살아있는 표현이 가득하다.
이 책에 갑신정변과 관련, 이런 부분이 나온다. 일본에 의지하여 개혁을 꾀하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의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말한다. “가히 아까운 일이다. 그러한 일류 재사(才士)가 일본인에게 팔려 그러한 큰일을 저질렀다”며, “저들 일본인이 어찌 다른 나라의 백성을 위하여 남의 아름다운 덕을 진실로 도와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겠는가. 우리의 진보는 저들에게는 불리한 것이므로 우리에게 진보하려는 기세가 있을 것 같으면 저들은 반드시 온갖 방법으로 해치려 들 것이요, 도와주려고 하겠는가. 우리의 젊고 영민한 선비들은 이것을 살피지 않고 저들에 의지해서 일을 이루려 하다가 그 꾐에 무너져 함정에 빠지게 되니 또한 애석하지 아니한가.”
사실 갑신정변 내용을 읽다 보면, 조선의 왕이 외국인들의 손에 의해 이리 보내지고 저리 쫓기는 모습이 실로 가관이다. 그렇게 하도록 옆에서 부추기던 젊은 개혁파들도 볼썽사납다. 박은식이 살아나서 <한국통사> 속편을 쓴다면 최근 윤석열 정부의 친일 성향 정책들과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 어떻게 기술했을까?
정치권에서 일제강점기를 둘러싼 역사 논쟁이 한창이다. 원래 역사 논쟁은 학자들 사이에서 시작되었고, 혹은 강단과 재야에서나 벌어질 법한 것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한국에서는 교과서 논쟁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정치권에서의 여야 공방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뉴라이트를 통해 무리수를 둔 현 정권 탓에 수면 아래 감추어져 있던 논쟁들이 부활해서 생명을 얻고 있다. 매일같이 주요 방송매체와 유튜브를 뒤덮는 정치권의 역사 공방을 보면서 일반 대중들도 이 문제에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홍범도 장군 동상을 치우지 않았다면 그가 누군지 관심이나 있었겠는가? 그동안 생계에 바쁜 일반 대중들에게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정통성, 건국절 등이 뭐 그리 큰 관심사였겠는가? 그런데 최근의 정치권 활약 덕분에 대중들도 이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잘되었다. 이 판에 감추어져 있던 우리의 과거를 드러내고 따져보고 판단하는 일을 모두 함께해보자. 누구 얘기가 맞는지. 그러면 그럴수록 무덤 속에 가둬두었던 목소리들이 부활할 것이고, 시민들은 책에서 나와 살아있는 역사를 공부하게 될 것이다.
이참에 역사 시험 문제가 하나 등장했다. 최근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나라가 다 뺏겨서 일본으로 강제로 편입되었으니 당시 국적은 일본이었다”라는 주장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주류 학계에서는 이 주장을 명백한 오답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매력적 오답’이다. 역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일종의 형식론적 사고에만 매몰되어 있다면 아마도 이 주장에 혹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 주장을 해석하는 역사 문해력이다.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막돼먹은 여러 주장들을 가감없이 털어놓고 논쟁해보는 것은 일종의 살아있는 역사 공부이며 역사 문해력 향상의 지름길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학교교육은 어떤 사건을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판단한다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지금까지 역사는 역사가들의 전유물이었고, 학교는 그 결과물을 일방적으로 암기시키는 공간이었다. 역사교육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지식으로서 고정된 역사 연대기가 아니라 과거의 어떤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현재의 관점에서 추론하고 판단하며 필요한 증거를 찾는 사고 연습이지만, 그런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역사 공부는 학교 교과서에서 끝나지 않는다. 살아서 우리 삶 곁으로 다가온다. 역사는 생동하는 자기조직적 생명체이며, 살아있는 역사는 살아 숨 쉬는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새 둥지를 튼다. 우둔한 권력자들은 과거를 직시하기는커녕 그 기억을 가공해서 국민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지만, 역사 문해력을 가진 국민은 그런 식으로 조종되지 않는다. 이제 역사 공부가 교실을 걸어나와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역사 공부 중이다. 대한민국 전체가 교실이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경향 | 2024.09.25.
유구한 선당후곰의 정신
얼마 전 지인이 ‘청담 르엘’ 아파트 청약을 넣었느냐고 물었다. 그만한 돈도 없지만 위치가 고민된다고 답했다. 지인은 단칼에 말을 잘랐다. “선당후곰.” 먼저 당첨이나 되고 나중에 고민하라는 말이었다.
요새 아파트 청약은 ‘로또 청약’이다. 청약 당첨은 원래 어렵다. 최근에는 억 단위 시세차익까지 거론된다. ‘진짜’ 로또가 세금 떼면 실수령액이 3억원인 경우도 있으니 청약은 ‘로또’보다 더한 ‘로또’다. ‘선당후곰’이란 단어가 생겨날 법도 하다.
‘선당후곰’은 숫자로 증명된다. 지난 7월 동탄역 롯데캐슬 무순위 청약에는 1가구 모집에 294만4780명이 신청했다. 부동산원 청약 홈페이지가 마비됐다. 지난 2월 서울 강남구 개포동 ‘디에이치 퍼스티어 아이파크’가 세운 역대 최다 기록(101만명)도 갈아치웠다. 올해 서울에서 가장 높은 청약 경쟁률을 기록한 곳은 서울 서초동의 래미안 원베일리였다. 두 달 안에 잔금 17억원을 내야 하는데 3만명이 넘게 몰렸다. 시중에 돈이 풍부하다지만 일단 당첨되고 보자는 식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수치다.
알고 보면 ‘선당후곰’의 역사는 유구하다. ‘선당후곰’ 단어 자체는 서울의 ‘마·용·성’ ‘노·도·강’이 달아오른 2020년 처음 등장했다. ‘선당후곰’ 정신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박완서가 1984년 연재한 소설 <서울 사람들>에서 주인공 혜진은 연탄을 때는 동네에서 변두리 미분양 아파트로 이사하고, 강남 아파트 분양 신청을 한다. 접수받는 주택은행 창구는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혜진은 100 대 1 경쟁률을 뚫고 당첨된다. 아파트 입찰액은 3000만원이었고, 통장에는 300만원뿐이었다. 계약은 날렸다. ‘아파트 청약 당첨=황금알’이었던 1970~1980년대 이미 ‘선당후곰’이 시작된 것이다. ‘선당후곰’은 부동산 불패 신화의 다른 이름이다.
‘선당후곰’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저 클릭 두어 번 하는 데 시간이 들 뿐이다. 문제는 클릭 한 번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를 자극한다는 데 있다. 한 번에 10억원의 시세차익을 누릴 수 있다고 하니 너도나도 지원한다. 떨어진다고 손해보는 건 없지만 상대적 박탈감은 진하게 남는다. 불로소득만이 살길이라는 의식이 더 강해진다. 최근 아파트들은 실거주 의무조차 없었다. 갭투자의 길을 열어준 셈이다. 결국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포모(FOMO·fearing of missing out)’ 심리를 키운다.
‘선당후곰’을 키운 청약 제도는 1977년 시작됐다. 땅은 한정되어 있는데 아파트를 사려는 사람이 많다 보니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공공주택에만 적용됐다. 이후 민영주택에도 도입했다.
사회적 흐름에 따라 가입 자격, 청약 순위, 납입금액 등 기준이 여러 번 바뀌었다. 공공주택의 가점·추첨제 비율이 다르고, 민영주택의 가점·추첨제 비율이 또 다르다. 지역에 따라 납입금액 등도 제각각이다. 1순위·2순위는 말만 들어도 복잡하다. 조금씩 땜질 처방을 해온 탓이다. 최근 ‘실거주 의무’가 없는 아파트 청약도 ‘예외’가 낳은 함정이다. 너무 복잡해서 책 한 권으로 설명이 될 정도다. 얼마 전 한국부동산원은 <주택 청약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펴냈다.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장은 “그 책을 다 공부하고 나면 제도가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최근 청약에는 신혼부부·다자녀·노부모 봉양 등 특별공급도 많다. 그렇다 보니 모든 세대에서 불만이 나온다. 20~30대는 결혼이 필수가 아닌 시대인데 결혼해야, 자녀를 낳아야 청약점수가 높아진다고 불만이다. 요새 커플들은 청약에 당첨되고 나서 혼인신고를 한다고 한다. 40~50대는 젊은 세대에 유리한 특별공급만 늘어 점수를 10년 모아봐야 소용없다며 억울해한다. 역차별이라는 주장이다. 청약통장 해지가 늘어난다는 소식은 당연지사다.
국토교통부는 최근 로또 청약을 불러온 무순위 청약제도 개편을 검토한다고 했다. 늦었지만 문제의식은 환영한다. 이번엔 ‘누더기’ 처방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기적으로도 타당하다. 미국이 금리를 인하했다. 한국은행도 연내에 금리를 내릴 가능성이 크다. 부동산의 방향성을 두고 관심이 커지는 시기다.
곧 ‘50살’이 되는 청약제도, 근본적으로 들여다볼 때가 됐다.
임지선 경제부 차장 경향 | 2024.09.25.
독일 극우파 약진 부른 좌파 실정
9월22일 독일 브란덴부르크 주의회 선거가 있었다. 눈길은 온통 극우파 ‘독일을 위한 대안’에 쏠렸다. 9월1일에 실시된 튀링겐과 작센 주의회 선거 결과 때문이었다. 튀링겐에서는 이 당이 32.8%를 얻어 기독교민주연합(23.6%)을 멀찍이 따돌리며 1위를 했고, 작센에서는 1위인 기독교민주연합(31.9%)을 불과 1% 차이로 뒤쫓으며(30.6%) 2위를 했다.
개표 결과, 브란덴부르크에서는 1위가 사회민주당(30.9%)에 돌아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2위를 기록한 ‘독일을 위한 대안’(29.2%)과 사회민주당의 표차는 얼마 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20% 가까운 지지율을 보이는 ‘독일을 위한 대안’이 옛 동독지역에서는 30% 넘는 지지를 받는 강력한 수권정당임을 확인한 것이다. 히틀러 집권 두 달 전이었던 1932년 11월 총선에서 나치당이 기록한 득표율이 33.1%였다. 극우파가 약진한 옛 동독지역 주의회 선거 결과는 이런 나치당 집권 전야를 연상시킨다.
독일 정치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사회민주당이 주도하고 녹색당이 참여하는 연방정부는 지난 3년간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이번에 ‘독일을 위한 대안’만큼이나 주목받은 또 다른 정치세력을 통해 이 물음의 답을 우회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정치세력은 신생정당 ‘자라 바겐크네히트 연합’이다. 사회민주당, 녹색당보다 왼쪽에 있는 좌파당의 명망가 자라 바겐크네히트 등이 탈당해 올해 1월에 출범시킨 정당이다. ‘자라 바겐크네히트 연합’은 튀링겐과 작센 선거에서는 각각 15.8%, 11.8%를 얻어 3위를 기록했는데, 범좌파정당 중에는 최다 득표였다. 이들은 브란덴부르크에서도 3위를 차지했다(13.5%).
그럼 이 당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경제정책에서는 사회국가(복지국가)의 강력한 부활이라는 좌파당 시절 입장을 고수한다. 급진좌파 성격이 있다. 그러나 ‘독일을 위한 대안’ 돌풍의 발판인 이민, 난민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을 내놓는다. 일단 이미 정착한 이주민의 권리는 최대한 보장하되 더 이상의 이민은 강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민 문제 탓에 극우파에 기우는 유권자들을 ‘우파스러운’ 이민 정책으로 견인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복안이다. 좌와 우가 섞인 이런 기묘한 정책조합 때문에 많은 논평가들이 당혹스러워한다.
그런데 ‘자라 바겐크네히트 연합’이 다른 모든 정파와 선을 그으면서 홀로 일관되게 주창하는 정책이 하나 있다. 바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즉각적인 휴전 협상 촉구다. 이는 전쟁을 빌미 삼아 국방예산을 대폭 확대하는 사회민주당-녹색당 연립정부의 입장과 선명히 대비된다. 이번 선거에 따른 각 주정부 구성 협상에서도 ‘자라 바겐크네히트 연합’은 연방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중단하는 것을 자당의 연정 참여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또한 이 당은 독일 사회에서 이스라엘을 무조건 옹호하지 않고 팔레스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유일한 정치세력이기도 하다.
사회민주당, 녹색당은 극우파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회국가 강화에 나서야 할 때 호전적 대외 정책과 군비 확장에 매진했다. 이들이 남긴 거대한 공백을 바탕으로 극우파는 더욱 득세 중이고, ‘자라 바겐크네히트 연합’ 같은 전에 없던 세력까지 출현하고 있다. 이들이 대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독일 좌파 전체가 크게 잘못된 것만은 분명하다.
장석준 |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한겨레 | 2024.09.25.
이스라엘에 무기 쥐여주며 휴전하라고?
이스라엘은 23일 레바논의 1600곳을 목표로 공습해 사망자 492명에 부상자 1645명을 발생시키며, ‘북방 화살 작전’을 개시했다. 가자 전쟁을 확전하는 3차 레바논 전쟁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이날 뉴욕타임스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가자 전쟁 휴전 중재 노력이 시효가 다하고, 확전을 도발하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절망한다는 분석기사를 내보냈다. 헛웃음이 나왔다. 미국이나 바이든 행정부의 행태에 어이가 없었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무기를 쥐여주면서, 휴전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언론에 보도된 것만 보자. 미 국무부는 지난 8월14일 이스라엘에 200억달러 규모의 무기 공급을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F-15 전투기 50대, 첨단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 대탱크 포탄 등의 무기 판매를 의회에 승인 요청했다. “현재와 미래에 적의 위협에 대응하는 이스라엘의 역량을 강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6월26일 워싱턴포스트 보도를 보면, 미국은 가자 전쟁 발발 이후 이스라엘에 총 65억달러의 안보 지원을 제공했다. 신문은 “거대하고, 거대한 규모의 사업”이라는 당국자의 말을 전했다. 특히 그중 30억달러는 5월에 승인됐는데, 당시는 미국이 가자 남부 라파흐에서 전면전을 벌이려는 이스라엘에 반대하며 일부 폭탄 선적을 중단하던 때이다.
그럼 미국은 이스라엘에 어느 정도로 무기 지원 중단 압박을 했는가? 당시 하원 내부 메모에 따르면, 공급이 보류된 폭탄은 2천파운드(약 900㎏)짜리 1800개와 500파운드(약 225㎏)짜리 1700개였다. “전쟁 이후 미국이 제공한 전체 군사 지원의 1% 미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당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미국이 무기와 탄약 공급을 지연한다고 공개 비난했다. 백악관은 부정확한 지적이라고 해명했다. 이스라엘이 미국에 빚 갚으라고 호통치고, 미국은 절절매는 모습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이 이끄는 대표단을 미국에 보내, 미국의 무기 수송 전문가들과 함께 “수백 가지 개별 항목”을 검토했다고 보도됐다. 미국이 지원 보류했던 폭탄들은 그 뒤 당연히 다시 제공됐다.
그럼, 이스라엘은 이 무기들을 자기들 돈으로 사는 것일까? 거의 공짜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인 2016년 이스라엘과 매년 38억달러를 10년 동안 지원하는 안보협정을 체결했다. 이스라엘이 주변 국가에 이른바 “질적인 군사력 우위”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더해, 미국은 지난 4월 이스라엘에 대한 260억달러 규모의 안보지원 법안도 통과시켰다.
오바마 때 체결된 안보협정에 따라 매년 제공되는 38억달러 중 무기 구입에 33억달러, 미사일 방어망에 5억달러를 썼다. 이스라엘은 이 돈으로 역사상 최강·최신 전투기라는 미국의 F-35 스텔스 전투기를 무려 75대나 주문해, 30여대를 넘겨받았다. 미국을 제외한 나라 중 F-35를 실전에 사용한 나라는 이스라엘이 처음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가자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을 하는 데 안달이 났다. 2500만달러 이상의 무기 판매는 의회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금액을 그 이하로 쪼개서 이스라엘에 무기를 팔았다. 이렇게 100건 이상 판매했다. 탱크, 탄약과 포탄을 지원하는 총 2억5300만달러 규모의 지원 2건은 대통령의 긴급권한을 발동해, 아예 의회 심사도 피했다.
미국이 이스라엘 입장을 옹호하고 지원하고, 가자 전쟁에서 무기 지원도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베냐민 네타냐후가 미국의 휴전 중재 노력에 응하는 척하다가는 결국 번번이 걷어차고, 삐삐 테러 등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확전을 도발하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은 빚 독촉을 하는 빚쟁이에게 빚을 갚는 식으로 무기를 계속 지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초식인지 이해가 안 된다.
미국 내 유대인 파워가 커서, 대선을 앞두고 이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사정도 이해한다. 그것도 어느 정도이다. 중동 확전이 미국의 안보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하는데도, 미국은 이스라엘에 무기를 쥐여주며 자해하고 있다.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전에도 매해 이스라엘에 30억달러를 직접 지원했다. 이스라엘 국민 1인당 500달러이다. 이스라엘이 무슨 짓을 해도, 미국을 엿 먹여도 묵묵히 지원했다. 분탕질 치는 자식에게 유흥비를 주는 어리석은 부모이다.
이스라엘은 1년 가까이 전쟁을 끌면서 확전하고 있다. 미국의 무기 지원 없이는 그럴 수 없다. 가자 휴전을 원하고, 중동에서 확전을 막고 싶다고? 당장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을 당분간 중단하면 된다. 미 의회가 무기 지원을 의결해도, 대통령이 거부할 수 있다. 미국이나 바이든이 그럴 수 있을까?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한겨레 | 2024.09.25.
어떻게 기어갈 것인가
기는 사람 위에 뛰는 사람 있고,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있다고 한다. 어디 가서 자기 자랑 함부로 말라고 충고할 때 흔히 쓰는 격언이다. 이 문장에는 기는 사람보다는 뛰는 사람이 낫고 뛰는 사람보다는 나는 사람이 낫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한상봉이 쓴 ‘장일순 평전’을 읽다가 ‘바닥으로 기어라’라는 대목에 오래 머물렀다. 장일순은 하심(下心)을 놓쳐서는 안 된다면서, 할 수만 있다면 아래로 자꾸 내려가야 한다고 권했다. 말년에 사용한 ‘장서각’(張鼠角)이란 호에는, 쥐뿔도 없는 사람이며 거지와도 같다는 뜻이 담겼다.
역사에서 만난 두 사람이 떠올랐다. 먼저 조선 후기 최고의 춤꾼인 거지 광대 달문이다. 영조 시절, 뛰어난 기예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모두 나눠주고 평생 거지로 떠돌며 살다 갔다. 당대에 얼마나 인기가 높았으면, 민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사람과 재물을 끌어모으기 위해 달문의 아들이나 친척이라는 거짓 주장을 폈을까. 달문은 금고에 돈을 많이 쌓아둔 사람 대신,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 돈을 많이 쓴 사람을 부자로 여겼다.
또 한 사람은 정조 시절 ‘백화보’라는 책을 낸 화가 김덕형이다. 박제가는 이 책의 서(序)에서, 김덕형이 일과를 마치자마자 재빨리 화원(花園)으로 달려가며, 꽃 아래 자리를 마련하여 누운 채 꼼짝하지 않았노라고 적었다. 꽃 미치광이로 불릴 만큼 면밀히 관찰했기에 그처럼 뛰어난 책을 그려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제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새로운 상상을 덧붙였다. 땅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오래 꽃을 살핀 것은 분명히 기이한 일이지만, 박제가가 언급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김덕형은 그 꽃이 피기까지 화원을 기어다니면서 흙을 파고 꽃씨를 심고 거름을 주며 가꾸느라 무척 많은 시간을 썼다. 꽃 핀 화사함에는 말들이 많지만, 꽃이 피기 전이나 진 후 그 화원을 일군 이의 정성엔 눈을 두는 이가 적다.
뛰거나 나는 사람 앞에서 기어보라고 한다면, 누구나 굴욕스러울 것이다. 기지 않고 뛰며 더 나아가 나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으려 들 것이다. 팔다리를 땅에 대고 기더라도 패배의식에 젖지 않고 치욕을 느끼지 않을 때가 있다. 농사를 지을 때다.
4년 동안 밭농사를 배우며 기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허리만 굽힌다거나 쭈그리고 앉아 들일을 하려 했지만, 서툰 솜씨에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곧 밭을 기어다니며 풀을 뽑고 흙을 파고 씨와 모종을 심었다. 어슴새벽부터 성당의 아침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무릎과 팔꿈치와 콧등에 흙이 잔뜩 묻을 만큼 이랑과 고랑과 밭두렁을 기었지만, 참담하지도 않았고 부끄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작물에 싹이 트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고맙고 뿌듯했다.
장일순은 밥을 하늘이라 높인 해월 최시형의 가르침을 평생 품고 살았다. 바닥을 기어서 천리를 가리라는 마음도 농사를 근본으로 여긴 최시형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다. 밑으로 기어 참된 삶을 만나고자 노력한 장일순의 삶을, 시인 김지하는 ‘말씀’이란 시에서 난초에 비겼다.
“비록 사람 자취 끊어진 헐벗은 산등성이/ 사철 그늘진 골짝에 엎드려 기며 살더라도/ 바위틈 산란 한 포기 품은 은은한 향기는/ 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그려 하냥 설레노니/ 바람이 와 살랑거리거든 인색지 말고/ 먼 곳에라도 바람 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
섬진강처럼 고요하던 곡성군이 군수 재선거로 뜻밖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정치인들이 여럿 내려와서 예비후보자들과 함께 읍은 물론이고 면의 마을들까지 다니고 있다. 군수라는 자리는 매우 막강하다. 도지사나 대통령도 부럽지 않다는 이야기가 농담만은 아니다. 군의 행정을 맡아보는 으뜸 직위인 군수는, 군림하려 들면 얼마든지 높아질 수 있고 스미려 하면 한없이 낮아질 수 있다. 이번에 나온 후보자들 모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군수가 되겠다고 주장한다. 2만7천명 군민들을 더 잘살게 만들겠다며 다양한 공약들도 제시한다. 다른 시군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누구는 이렇게 뛰어다니겠다고 하고 누구는 저렇게 날아다니겠다고 한다.
후보자들에게 묻고 싶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얼마나 어떻게 길 것인가. 섬진강과 대황강 맑은 물로 자란 농작물들이 여무는 가을이다. 새로 뽑힐 군수는 논밭의 흙을 보듬은 채 평생 들녘에서 일한 농부들의 마음을 소중하게 여겨야만 한다. 곡성의 낮고 그늘진 구석구석을 부지런히 기면서, 마을과 들판과 강산과 동식물을 아끼는 이가 군수로 일할 때가 무르익었다.
김탁환 | 소설가 한겨레 | 2024.09.25.
이스라엘 점령군은 21세기의 '나치'… 학살 앞에 중립은 있을 수 없다
팔레스타인 학살의 역사, 우리가 멈추자
중립 기어'는 언제나 옳은가?
경제 유튜브 채널 중 구독자가 가장 많다고 알려져 있는 '삼프로TV'는 국제 정세의 변동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 주식시장 성격 때문인지 큰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발 빠르게 전문가를 섭외해 콘텐츠를 제작한다. 사회자들은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에서 2시간에 이르는 시간동안 대화 형식의 강연을 듣고, 이를 통해 시청자들이 해당 사안들에 궁금해 할 것 같은 쟁점들을 추려낸다. 나 역시 몇몇 영상들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고, 책이나 논문을 더 찾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이슈에 있어 '삼프로TV'와 그 서브 채널인 '언더스탠딩'에 자주 출연하는 전문가는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의 박현도 교수와 성일광 교수(이하 호칭 생략)다. 두 전문가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다소 다른 견해를 갖는다. 이스라엘 정치에 대해 연구하는 성일광은 이 시오니즘 국가를 어느 정도 긍정하고, 다만 종종 이스라엘의 현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극우 파트너들의 극단주의에 대해서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정도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다. 이슬람학을 연구해온 박현도는 이보다는 더 비판하면서, 이러한 식민주의 모순이 주요하게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만행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어느 정도 강조한다.
두 사람이 가장 현실적 대안이라고 여기는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은 정도에 따라 다양한 버전이 있다. 1947년 9월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SCOP)의 분할안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견해에서부터 1993년 오슬로협정에 근거한 평화 프로세스를 재추진해야 한다는 견해, 2020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제시한 중동평화구상(Middle East peace plan)이라도 받았어야 했다는 입장까지. 하지만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 두 교수의 입장은 아마 자유주의적 현실주의의 편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데 '이프로'로 불리는 진행자 이진우의 견해는 일련의 팔레스타인 문제 관련 콘텐츠들에서 가장 문제적이다. 지난 11개월 동안 누적된 두 전문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네타냐후 현 정부를 "극우"라고 부르고 싶어하지 않는 듯하다. 그는 "왜 우파만 극우주의자로 부르냐"의 문제에 버튼이 눌려 있다. 하지만 저 두 현실주의적 연구자들의 해설대로, 지금 현재 이스라엘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은 명백하게 인종 학살을 긍정하고 자행하고 있는 지구상 최악의 인종주의자들이다.
지난해 10월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은 "우리는 '인간 동물들'과 싸우고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원색적인 표현을 쓴 바 있다. 이런 과감한 논조는 이 정권이 어떤 색채를 띠고 있는지 명백하게 보여준다. 2018년 네타냐후는 '이스라엘 국가법'을 제정해 이스라엘을 "유대인 민족국가"로 선언했다. 아랍어의 공식어 지위를 강등시켰으며, 20세기 초에만 해도 거의 사라지고 있던 히브리어를 유일한 공식언어로 지정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점령지역 인구 중 21퍼센트는 아랍인이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점령당국은 21세기 최악의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이를 달리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학살의 역사
우리는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가 결코 '종교적인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19세기 후반, 정치적 견해로서 '시오니즘'이 등장하고나서도 오랫동안 많은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정통성을 근거로, 혹은 억압받는 이들의 국제주의를 근거로, 특정 지역으로 이주해 근대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스트들의 아이디어에 반대했다.
1948년 한나 아렌트와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 유대인 지식인들이 데이르 야신(Deir Yassin) 학살사건 직후 뉴욕 타임즈에 헤루트당(네타냐후의 리쿠드당의 전신)이 "나치와 파시스트들의 정당들과 조직, 방법, 정치철학, 그리고 사회적 호소력의 측면에서 유사하다"는 규탄 성명을 발표했던 것을 상기하면, 이들 유대인들이 시오니즘을 얼마나 문제적이라 봤는지 알 수 있다.
초기 시오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유대인 정체성의 근거로 삼지 않았다. 일찌감치 그들은 세속화됐고, 시오니즘은 유럽으로의 동화나 문화적 변용에 대한 세속적 대안이었다. 문학연구자 베냐민 발타자르(Benjamin Balthaser)에 따르면, 시오니즘은 "노동자계급 국제주의에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우익 민족주의이자 제국주의의 한 형태"에 가까웠다.
1970년대 이래 시오니스트들은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지 않는 유대인은 일종의 비유대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온화' 프로젝트(이스라엘과 홀로코스트 문제를 미국 유대인 교육의 핵심으로 만드는 교육)를 심화시켜왔다. 오늘날 이와 같은 시온화 프로젝트는 멈추지 않고 재생산되고 있으며, 시오니즘 국가 건설을 정당해왔다. 실제 조 바이든은 하마스의 공격이 있기 보름여 전, 네타냐후를 만났을 때 "이스라엘이 없었다면 안전할 유대인은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그를 비롯한 미국의 통치 엘리트들이 시오니즘에 동기화돼 있음을 방증한다.
어떠한 '내러티브'에 기대더라도, 시오니스트들에 의한 팔레스타인 주민 강제 추방과 학살의 역사는 2023년 10월 7일에 시작되지 않았다. 현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식민지배와 점령, 학살의 역사였다.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나누는 유엔 분할안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시했고, 1948년 일방적으로 건국을 선포했으며, 이들을 추방하고 죽이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땅을 점령했다. 그리고 1967년 중동전쟁 이후 지금까지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 가자지구로 쪼개진 나머지 팔레스타인 땅조차 군사점령을 이어오고 있다.
시오니스트들의 최종 목적지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완전한 절멸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땅 전역을 거대한 분리장벽으로 둘러싸고, 서안지구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살아온 마을을 파괴하면서 국제법상 완전히 불법으로 규정된 '정착촌'을 확장해왔다.
서안지구에서는 매일 이스라엘 정착민과 군인들이 올리브 나무를 불태우거나 뿌리 뽑는다. 올리브 나무가 사라진다는 건 팔레스타인 농부들에겐 삶이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 정부가 "일정 기간 경작하지 않으면 그 땅은 이스라엘에 귀속된다"고 토지법을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안지구의 올리브 나무를 불태우고 뿌리 뽑아 '경작되지 않는 땅'이라 우기고 군대와 민방위 병력을 동원하여 땅을 빼앗는다. 1967년 이래 이스라엘 점령군과 정착민들은 80만 그루의 올리브 나무를 닥치는 대로 뽑아냈는데, 이로 인해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생계를 잃었다.
2007년부터 거대한 장벽으로 봉쇄한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군의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게 됐다. 이후 내내 식수와 식량난에 시달렸고, 실업률과 빈곤률은 계속 최악으로 치달아왔다. 이스라엘은 조금이라도 반발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폭탄으로, 눈앞에서 마주친 이스라엘 군인과 불법 정착민의 총격으로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비상사태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 등 무장단체들의 이스라엘 공격은 이런 누적된 억압이 낳은 비극이다.
레바논 확전 꾀한 이스라엘 속내
그런데 시오니스트 점령자들은 가자지구 민중을 학살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지난 7월 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의 정치 리더들을 암살함으로써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다. 중동 확전을 우려한 서방 국가들은 자국민들에게 신속히 레바논을 떠나라고 촉구할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성일광 등은 생략해버리지만, 여기에는 이스라엘-레바논-시리아 국경 지대의 오랜 갈등이 내재해 있다. 시오니스트들은 1967년 침략을 통해 '골란고원'(또는 셰바라농장)이라 불리는 지금의 이스라엘 북부를 불법적으로 점령했고, 1982년부터 2000년까지는 레바논 남부를 무단 점령한 바 있다. 1981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안 497호에서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병합을 "명백히 불법"이라 규정하고, 이 점령이 "국제법상 아무 효력을 가지지 않으며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레바논 헤즈볼라는 지도자들과 자국민을 겨눈 테러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지만, 이들의 반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8월 7일 헤즈볼라의 하산 나스랄라 사무총장은 베이루트 남부 지역에 가해진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한 대응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과거 암살에 대한 대응보다 더 가혹할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우리는 용기를 갖고 행동하겠지만 충동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헤즈볼라는 자신들의 섣부른 대응이 이스라엘에 전쟁 확대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에 대응할 수 있는 이란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지난 4월 이란 정부는 이스라엘이 자국 영토나 이익에 대한 새로운 침략을 감행하면 직접적이고 폭력적이며 신속한 대응을 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실제 이란은 전혀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았다.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하며 확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을 따름이다. 최근 몇몇 이란 관리들은 '가자지구의 휴전 협정만이 이슬람 공화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대응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군사적 수준으로 볼 때 헤즈볼라나 이란이 곧바로 확전을 불사하는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만약 그렇게 했을 때 여전히 이스라엘 편에 서 있는 미국은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누구보다도 이스라엘 식민자들이 원하는 바일 것이다. 중동에서 극우 시오니스트들은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절멸을 기도하고 있고, 이를 방해하는 세력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작정하고 있다.
비판자든 방관자든 일관된 견해가 하나 있다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전쟁을 멈추는 그 순간 그의 정치적 생명은 끝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네타냐후가 자신의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수만 명을 학살하는 전쟁도 불사할 자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휴전 협상에 대한 국제 사회의 압박과 요구를 모두 거부해왔고, 어떤 빌미를 세워서든 전쟁을 지속하려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고위관료들은 각종 외교채널을 통해 이란과 헤즈볼라가 매우 신중하게 대응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미국은 명목상으로는 사태를 완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에 면죄부를 부여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허용해 온 당사자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천문학적인 수준의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의 집단학살을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9월 24일 레바논 보건부 장관 피라스 아비아드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이번 주 초부터 최소 558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사망자 중에는 어린이 50명과 여성 94명이 포함되었으며, 부상자는 1,835명에 다다른다.
전쟁 멈출 힘은 오직 국제적 반대 여론
이스라엘은 하루도 쉬지 않고 집단학살을 자행 중이다. 2023년 10월 7일부터 2024년 9월 22일 사이에 최소 4만1431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하고 9만5818명이 부상을 입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자지구에서는 연일 민간인에 대한 이스라엘 점령군의 폭격이 이어지고 있다. 9월 19일 가자시티 아드 다라즈 지역의 앳 타우바 모스크 인근에서는 주거용 건물이 피격되어 7명이 사망했다. 이튿날에서도 최소 네 군데에서 피격이 이뤄져 어린이 9명을 포함해 민간인 수십명이 사망했다.
지난 9월 16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보건당국은 8월 말까지 이스라엘에 집단학살당한 주민 중 신원이 파악된 3만4344명의 이름과 생년월일, 주민번호를 공개했다. 총 649페이지에 달하는 이 문서의 첫 14장에는 1살 미만의 아기 710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이 중 집단학살 시작 후 태어나고 살해된 아기는 115명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인종 학살 범죄를 보면,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최초의 흑인 대주교가 된 노벨평화상 수상자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였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같은 잔혹함을 가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홀로코스트 역사학자 다니엘 블라트만(Daniel Blatman) 역시 가자지구 집단학살이 개시되기 한참 전 현 이스라엘 정부를 나치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홀로코스트와 나치즘이 전문분야인 역사학자로서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오늘날 (이스라엘) 정부에는 네오나치 장관들이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한 인종주의자들인 장관들은 어디서도 - 헝가리에서도, 폴란드에서도 -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학살 전쟁을 중단하기 위한 전면 휴전,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점령군의 철수, 레바논을 포함한 주변 국가에 대한 이스라엘의 침략 중단,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 전역에 대한 인도적 지원의 대규모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이 시급한 조치가 역사적으로 누적된 갈등과 모순을 해결할 순 없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팔레스타인의 평화다. 이스라엘 점령군에 의한 식민지화, 점령, 아파르트헤이트(분리 정책)이 종식되어야만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다. 지금 그것을 앞당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제적인 팔레스타인 연대 행동을 확대하는 것 뿐이다.
학살 앞에 중립은 있을 수 없다. 208개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시민사회 긴급행동'은 지난 1년 집회와 행진, 1인시위, 기자회견, 다양한 온라인 캠페인, 강연회와 토론회 등 여러 행동들을 펼쳐왔다. 지속되는 학살에 지치고 무력감을 느낄 때도 있지만, 다시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오는 10월 5일 토요일 오후 2시, 서울 보신각 앞에서는 '우리는 팔레스타인 해방의 연대자'라는 제목의 집중 집회가 열린다. 이날 집회에는 재한 팔레스타인 이주민들이 함께 할 예정이며,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에 연대해온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할 예정이다.
이날 집회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길 소망한다. 세계와 우리의 일상을 폭풍우로 밀어넣는 시대 앞에서 나 하나의 힘은 보잘 것 없지만, 우리의 행동이 모이고 그것이 국제적인 연대 행동으로 확대될 때, 우리는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넓힐 수 있다. 학살은 멈춰질 수 있다. 우리가 함께 한다면.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프레시안 | 2024.09.26
양방 물신주의
얼마 전 정부가 발주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 사업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11% 갓 넘은 터무니없는 선정률에 어쩔 수 없다고 위안 삼으면서도 탈락 이유를 보면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프로그램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을 질적 접근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은 정책제안서의 부합 측면에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라고 사료됩니다.”
기존 연구는 양적 실태조사에만 기대고 있어 질적 실태조사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제안서에서 이 점을 강조했더니, 오히려 양적 연구를 무시하고 질적 연구만 수행한다는 억측으로 탈락시켰다. ‘사료됩니다’라는 책임을 회피하는 관료제 문장에 기분이 상하는 건 덤. 이쯤 되면 학술활동을 지원하는 국가기관이 양적 방법론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닌가 깊은 의구심이 생긴다.
사회적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방법에는 크게 보아 양적 방법론(양방)과 질적 방법론(질방)이 있다. 양방이 사회적 삶의 ‘통계적 의미’를 탐구한다면, 질방은 사회적 삶의 ‘문화적 의미’를 파고든다. 양방과 질방 모두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적 삶을 포착할 수 있는 개념을 만든다.
문제는 그 이후다. 양방은 개념을 측정 가능한 변수로 축소한다. 변수들 사이의 관계는 확률 형식의 방정식으로 표시된다. 방정식을 만드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특정 사건의 발생을 통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함이다. 방정식이 일반법칙의 지위에 오른다. 양적 실태조사를 통해 방정식을 검증한다. 측정된 변수 간의 상관관계를 선형적, 시간적 순서로 나열해서 설명한다. 이 설명을 통해 특정 사건의 발생을 예측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반면 질방은 개념을 정량화된 변수로 축소하지 않는다. 사회적 삶이 모두 숫자로 정량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대신 개념을 사회적 삶을 포착하는 ‘은유’로 여긴다. 은유는 어떤 것(피설명항)을 다른 유사한 어떤 것(설명항)으로 대체하여 의미를 확장한다. 양방에서 종속변수를 독립변수를 통해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하나의 은유다. 하지만 종속변수와 독립변수의 유사성이 너무나 커서 연계하면 변수들의 행로를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의미는 창출되지 않는다. 양방은 이를 지시나 예측이라고 보기에 상관하지 않는다. 이미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가설을 통계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질방은 다르다. 의도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현실을 뛰어넘을 정도로 유사성의 차이를 극대화한다. 피설명항과 설명항 사이에 의미의 긴장이 높아진다. 이 긴장에서 언어의 지시적 기능이 포착하지 못하는 사회적 삶의 문화적 의미가 솟구친다.
양방과 질방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다. 사회적 삶의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기술, 해석, 분석, 설명한다. 연구의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양방과 질방을 섞은 혼합방법론을 활용한다. 문제는 양방을 물신화하는 경우다. 양방 물신주의에서 숫자는 객관성의 아우라에 둘러싸여 초자연적 권위를 얻는다. 숫자를 정확성, 공평성, 효율성의 화신으로 떠받든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숫자에 대한 강박은 일종의 물신주의가 된다.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 2024.09.26.
대한민국은 지금도 건국 중
대한민국 대통령실 국가안보 분야 실질적 책임자라는 사람이 대통령 해외 순방 중 공식 행사에서 애국가가 연주되는데 가슴에 손을 얹지 않고 있는 동영상을 보았다. 그는 현 정권의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의 설계자라고도 하고 최근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는 말로 파문을 일으킨 바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단순한 실수였을까? 편견인지 모르나 내게는 분명히 의식적인 거부행위로 보였다. 나도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지금은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박정희 군사정권 말기에는 저녁 무렵 국기하강식이라는 것을 시행했고, 그때 온 거리에 애국가와 함께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로 시작되는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것이 낭송되기 시작하면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가까운 국기게양대를 향해 멈춰 서서 가슴에 손을 얹는 ‘애국적 실천’을 해야 했다. 그 무렵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던 길을 걸어감으로써 그런 강요된 집단적 애국 행위를 거부했다. 나의 거부행위는 그 강제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당시 ‘대한민국’ 자체가 싫었다. 1948년, 미군정의 지배 아래서 정통성이 희박한 이승만 일파에 의해 한반도의 반쪽에서만 수립된, 그리고 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외세 의존적 장기독재 체제로 일관해온 그 나라가 내 나라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단순한 억측일 수도 있지만, 그 고위층 인사의 내면에도 비슷한 심리적 메커니즘이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부에서 말하듯 그가 마음의 조국이 일본인, 뼛속까지 친일파이거나 심지어 대한민국 권력 핵심부에서 암약하는 ‘밀정’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그는 어쩌면 여전히 ‘반일 종족주의’와 좌파적 역사 인식의 헤게모니에 강력히 사로잡혀 있는, 그리하여 1948년이 아니라 1919년을 건국 원년으로 고집하고 있는 현재의 한심한 ‘대한민국’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 같은 목적의식적인 의례 거부를 실천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는 혹시 무정부주의자일까?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철두철미 자신의 사상적 원칙을 실천하고 있는 확신형 지식인이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단순한 실수로는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현 권력 핵심층 인사들의 돌출적 언행이 이제는 더 이상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우리는 최근 노동부 장관, 방송통신위원장, 독립기념관장 등 대소의 국가 요직에 임명된 고위 인사들이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자신들의 비정통적 역사의식을 노골적으로, 또 당당하게 피력하는 것을 수차례 목도하고 있다. 바야흐로 ‘관종형 극우파’들의 세상이다.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동안 비주류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세칭 뉴라이트 역사관이 목하 하나의 경쟁력 있는 관점으로 슬며시 공론장의 한 자리를 점유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간 한국 현대사 해석을 둘러싼 ‘역사전쟁’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뉴라이트 세력이 드디어 진지전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까. 이것은 역으로 이제까지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주류적 해석 역시 하나의 유동적 가설로 표류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과연 역대 최악의 부실 정권하에서 일어나는 비주류들의 일시적인 호가호위 현상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뉴라이트 역사 해석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인 ‘1948년 건국설’ 하나만 보더라도 그렇다. 나 역시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1910~1948년의 한반도의 역사 현실을 나라 없는 미정형 상태로 규정하여 식민지 사회 성격이나 친일 문제 등을 중립화하고 해방 후 진행되었던 다양한 스펙트럼의 건국 담론들을 한꺼번에 일축해 버리고자 하는 뉴라이트들의 1948년 건국론의 숨은 속내를 몰라서가 아니다. 실제로 1919년 건국론에 내재한 문제점을 모른 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망명지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것은 영토도 주민도 통치행위도 없이 상징적 국체만 존재하는 임시국가였으며, 해방 직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정통성과 정당성을 충분히 부여받지 못한 채 하나의 ‘정파’로 인식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대한민국 헌법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이 1919년이 대한민국 건국의 원년이라는 것을 자동으로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1919년 대 1948년의 건국 기점 논쟁은 잘못된 문제 설정이다. 진짜 핵심은 1948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 있는 1919년 임시정부 법통 계승 조항의 실효성을 둘러싼 충돌이다. 1919년 법통설의 인정 여부는 곧 식민지 시대 일제의 총독부 통치를 비정상 상태로 보는가 아니면 정상 상태로 보는가 하는 판단의 기준이 된다. 뉴라이트들이 이 법통 계승설을 부인한다는 것은 곧 식민지 상태의 무정부성을 부각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상화, 합리화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 때문에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은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하나의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다. 비록 친일 냉전 반공 친자본주의적 태생성을 가졌고 그 때문에 나와 같은 좌파들에게는 두고두고 못마땅한 것이지만 그 내부에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와 해방 직후의 다양한 나라 만들기의 염원들이 체화되어 있으며, 4·19와 5·18과 6월항쟁이라는 민주 항쟁과 놀라운 경제성장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성취에 의해 역동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열린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내가 이러한 역동적인 역사 과정의 한 주체로서 참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자부심 때문이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일본 제국주의와 반공·냉전 세력, 군부독재 세력, 외세 의존 세력, 자본가 세력 등 지배자들의 역사만으로 다시 쓰려는 뉴라이트들의, 역설적으로 노예적인 역사 인식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다. 물론 나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로 범벅된 역사 인식들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역사 인식들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역동성을 구성하는 일부로서 긍정할 수는 있다. 역사전쟁이 더 필요한가, 좋다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여전히 미완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명인 | 문학평론가·인하대 명예교수 한겨레 | 2024.09.26.
민주복지국가의 출산율
한국의 작년 합계출산율 0.72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화제이다. 원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는 비판적이기 그지없다. 가장 근본적인 견해는 체제 비판에 맞닿아 있다. 이에 따르면 저출산은 높은 자살률과 같은 원인을 갖고 있다. 둘 다 임금, 일자리, 자산을 둘러싼 경제적 양극화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이 같은 불평등을 불러일으키는 사회, 경제 체제를 바꾸지 않는 한 어떤 대책도 무효할 것이다.
또 다른 비판으로 여성주의적 관점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사회·경제적 양극화 문제에 동의하면서 출산에 대한 여성의 결정 권한에 국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함께 문제 삼는다. 공동체가 하나의 정책에 합의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 전에 여성의 의사를 먼저 물어야 하고, 여성 인권을 침해해온 역사에 대해 먼저 사과해야 한다.
6월19일 대통령은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인구전략기획부 신설 계획을 발표했다. 그 전 단계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8월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 대책은 일·가정 양립, 양육 부담 완화, 주거 부담 완화의 세가지 핵심 분야에 총 108개 세부 과제로 구성돼 있다. 관련 정부 예산은 2024년 2600억원에서 2025년 5200억원으로 두배 증액하기로 했다. 예산 규모의 적절성을 차치하고라도, 이 정책적 노력이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해결하는 데 충분한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방식인지의 기준에서 본다면 비판자들을 설득하고 호응을 얻기에 한참 모자라 보인다.
그러나 저출산 데이터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넓혀 보면, 우리 사회의 비판적 진단과 그에 부응하려는 정책 모두에서 진실과 동떨어진 점들이 발견된다. 우선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2.1 이하의 출산율을 강제한다는 인과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한국이 예외적으로 높은 저출산율을 갖고 있지만, 국제적으로 이와 비슷한 정도로 낮은 국가들은 대개 선진국, 그중에서도 유럽의 복지국가들이다.
나는 교육, 소득, 수명을 합쳐 만든 인간개발지수와 민주주의 점수가 합계출산율과 어떤 통계적 관계를 갖는지, 155개국을 대상으로 측정해보았다. 인간개발지수와 민주주의 점수가 높은 국가일수록 합계출산율이 낮았으며, 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했다.
민주주의, 인간개발지수, 합계출산율 사이의 관계
이 분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미 많은 국제 비교 연구에서 검증되어, 전문가들 사이에서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혹자는 유럽 복지국가의 경우 1.0을 크게 상회하지 않냐고 되묻지만 이는 이민 효과에 가려진 것이다. 비이민 내국인들의 출산율은 현재 한국의 출산율과 큰 차이가 없으며 유럽 각국이 정치적 이유로 이를 발표하지 않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출산율이 높은 국가로부터의 이민자들조차 한 세대가 지나면 출산율이 감소한다는 것이다. 한국도 이 국제적 추세의 연장선에 있다. 통계개발원이 수행한 2023년 가계동향조사 분석에 따르면 아빠의 소득은 자녀 수와 무관한 반면, 엄마의 소득이 높으면 자녀 수가 줄었다. 현재의 출산율을 감안하면 최근 우리 사회 여성 소득이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
이 결과는 저출산의 원인을 양육 바깥에서 찾는 시각들과 연결돼 있다. 출산율이 낮은 민주복지국가의 또 다른 특징은 핵가족이 보편화돼 있다는 점이다. 핵가족이란 가부장적인 확대가족의 해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핵가족 측면에서 본다면, 비슷한 수준의 민주복지국가들보다도 낮은 한국 출산율의 원인 하나를 지적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핵가족은 완전하지 않다. 과거 확대가족은 여성의 시가 봉양과 시가 재산 상속 사이의 교환 관계에 기반했다. 그런데 시가 봉양 의무는 대부분 해체된 반면, 결혼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가로부터의 자산 이전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은 더 이상 매력적인 성이 아니게 됐고, 한국은 국제적으로 신생아 성비가 인위적인 성비에서 자연균형으로 되돌아온 유일한 나라가 됐다. 한편 결혼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지연된 남자 쪽 부모 봉양 의무에 대한 불확실성이 발생한다. 이는 여러 위험회피적 선택을 유발하는데, 그중 하나가 자녀 수를 줄이는 것이다. 이제 고령 인구 증가 때문에라도 남자 쪽 부모로부터의 자산 이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집값 등 결혼 비용을 부모의 자산 이전에 상당 부분 기대는 문제가 사라진다면, 이 유독 낮은 출산율을 둘러싼 복잡한 원인들 중 하나가 해소될지 모를 일이다.
이원재 |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한겨레 | 2024.09.26.
뉴라이트 현상, 거대한 퇴행과 그 위험
바다 건너 트럼프가 두 차례 암살 위기에도 살아남았으니 명줄이 참 길다. 전환시대 복잡다기한 이중운동(폴라니)의 전개 속에서 선거의 여신이 그를 돕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윤석열은 누가 돕고 있나? 퇴진운동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국정 긍정 평가가 20%로 추락했으니 이미 심리적 탄핵 사태다.
넓은 의미로는 트럼프도, 윤석열도 극우 뉴라이트에 속하지만 다른 점도 많다. 둘 다 중도 기득권 정치의 실패가 낳은 위험한 반동적 역류다. 감세와 규제 완화, 민영화가 주된 경제정책 기조다. 약자를 혐오하며 ‘자유사회주의 대 공산전체주의’의 진영논리를 마구 구사한다. 호전적이고 철부지 아이처럼 전쟁을 불장난같이 여긴다. 세계 수위의 기후악당국가에 살면서도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거대 양당을 견제할 유력한 제3 정당의 부재 속에서 극우 지도자가 큰소리치는 모양새도 비슷하다.
하지만 트럼프가 떠오르는 포퓰리스트 뉴라이트라면 윤석열은 추락하는 수구적 뉴라이트다. 트럼프는 미국우선주의와 보호주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자국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챙기려고 혈안이다. 또 러스트벨트 흙수저 출신으로 ‘개천 용’이 된 밴스를 동반자로 선택할 만큼 제법 실용주의적 융통성도 보일 줄 안다. 심지어 통 크게 북한의 김정은과도 만나 대화·소통하고 거래할 만큼 대단한 ‘상인적 현실감각’(김대중)도 보인 바 있다. 한반도 평화의 입장에서는 해리스보다 트럼프가 낫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대중이 호응할 어떤 무엇을 트럼프는 가졌다.
트럼프가 신자유주의 퇴조기를 타고 나름 대중의 호응을 얻는 신종 포퓰리즘 극우라면, 윤석열은 거꾸로 가는 구닥다리 극우다. 방종적 특권 시장, 부자 감세, 불로소득, 반노동, 검찰독재, 언론공작, 수사 외압, 권력 사유화, 불법비리, 선택적 공정, 친일매국, 명품백 수수, 주가조작, 공천개입 등 현란하게 퇴행적인 것들, 구린 냄새 물씬 풍기는 구태들을 쓸어 담은 타락한 극우다.
나라를 망치는 윤석열에게서 흙수저 친화적 포퓰리즘 요소는 흔적도 찾기가 어렵다. 노조를 때려잡고 노란봉투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며 영세 자영업자와 서민을 부채의 늪에서 허우적대게 한다. 반면 부자 감세로 불로소득을 향유할 특권적 자유와 안전을 보장한다. 실질임금의 감소, 긴축재정, 불평등 심화로 민생 고통과 내수 침체의 악순환이 지속되고 세수결손이 30조원이나 된다고 한다. 대응책이라곤 집값 상승에 목을 매는 것뿐이다.
한국의 올드한 뉴라이트가 최우선으로 중시하는 것은 주권국가로서 한국의 자존과 한국 국민의 아픈 상처가 전혀 아니고 교활한 일본의 요구다.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고 일본의 ‘피로감이 쌓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친일매국이 따로 없다. 게다가 줏대 없이 미·중 패권 다툼에 말려든 반중국 기조로 한국 경제 국익에 대타격을 자초한다. 나아가 평화가 위험하다. 지금껏 북한과 한번도 대화하지 못하고 시대착오적 흡수통일론으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대북전단 살포와 쓰레기 풍선 맞대응도 격화하고 있다.
윤석열은 3대 역사기관장, 심지어 독립기념관장에 뉴라이트 인사를 앉혔을뿐더러 정부 주요 공직에도 그들을 심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에 <반일 종족주의> 공저자 김낙년이 들어선 것은 주목거리다. 그는 쌀 수출이 있을 뿐 쌀 수탈은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윤석열과 궁합이 잘 맞는 셈이다. 이처럼 뉴라이트 전성시대를 열어놓고도 “뉴라이트가 뭔지 잘 모른다”고 한다. 기만전술 또는 부끄러움의 표현일 수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윤석열 정부를 통해 국가권력이 반동적 극우세력 수중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 정치 전반은 물론 합리적 보수에도 중대한 적신호다. 가장 위험하고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 경향 | 2024.09.29.
‘2016년 광장’의 교훈
대통령이 몹시 수상하니 2016년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친박의 농단, 옥새 파동으로 4·13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참패한다. 조선일보는 “여당이 연정·합당 등을 통해 정치판을 통째로 흔들거나 모든 것을 내주겠다는 각오라도 하지 않으면 현재 국면을 풀어내기 어렵다는 점은 자명하다”(4월21일자 사설)며 위기의 신호를 울린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고 친박계와 비박계 간 갈등은 더 첨예해진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세력은 친박을 도려내어 진영 재편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표적은 청와대(우병우 민정수석)로 확장된다. 이후 흐름은 우리가 잘 알듯, 국정농단과 측근 비리가 연이어 폭로되었고 분노한 수많은 시민은 광장으로 향했다.
보수언론만큼이나 여야 정치권 모두 이 국면을 관리하고자 했다. 당시 문재인은 ‘명예로운 퇴진’을 주장했고, 우상호는 원내대표로서 ‘질서 있는 퇴진’(권한이양과 거국내각 후 대선)을 내놓는다. 11월12일 광장에 처음으로 100만명의 시민들이 모인다. 다음날 비박계 의원들은 비상시국회를 열고 “헌법적 틀 내에서 질서 있는 사태 수습의 길을 찾아야 한다”며 사태를 받아들인다.
모든 경로를 시민들이 만들어낸 듯 보이지만 정국은 여러 이해의 경합장이었다. 당시 가장 유력하게 언급된 대안은 ‘질서 있는 퇴진’이었다. ‘탄핵’은 절차적으로 까다롭기에 차선이었고, ‘즉각 하야’는 꺼려졌다. 마지막 선택지였던 대통령의 ‘현상 유지’는 100만명 넘는 촛불광장을 염두에 두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런 가운데 정당들은 관리에 용이했던 탄핵으로 선회했고, 해를 넘기며 광장의 분노나 열망은 대통령을 다시 뽑는 일로 축소대체되었다. 시민이 만들어낸 주권자의 시간이 정치권이 점유한 순간이 됐다.
광장의 시간은 다시 투표장의 시간이 되었고, 광장의 해방감은 안전한 대의제 내로 들어왔다. 인민의 의지는 헌법재판소의 손안에 놓였다. 가장 능동적이고 자율적이던 힘이 가장 수동적이고 타율적으로 전환된 것이다. 모든 문제와 관심이 탄핵 여부, 즉 박근혜·최순실의 위헌적 행위로 모였다. 삶과 일터를 짓누르던 체제 문제는 개인 문제로 협애해졌다.
탄핵은 광장에 100만명이 모였던 때로부터 4개월 뒤 인용된다. 직후 모든 정치는 대통령 선거운동이 되었다. 2016년 가을부터 시작된 주권자의 시간은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의 모습으로 종료된 것이다.
불평등과 빈익빈 부익부, 재벌체제, 삶의 존엄과 죽음의 문제들은 ‘개혁과제’로 포장되어 체제 수호자들의 몫으로 넘겨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과를 잘 알고 있다. 2016년의 교훈은 명확하다. 오늘날 우리가 광장에서 소환하고 싸워야 할 대상은 대통령 부부를 아득히 넘어선다는 것.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를 반복한다면 그것이 가장 큰 비극일 것이다.
김건우 참여연대 정책기획국 선임간사 경향 | 2024.09.29.
수단 내전과 글로벌 자본주의
지난 8월1일(현지시각) 수단 옴두르만 인근의 난민들이 무료 아침식사를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유엔 대변인은 수단 인구의 절반 이상이 굶주림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옴두르만/로이터 연합뉴스
이 시대의 가장 끔찍한 추세를 잘 보여주는 인물을 찾는다면 야흐야 신와르, 베냐민 네타냐후, 김정은, 블라디미르 푸틴 등의 이름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주류 언론이 무시하는 참상들로 시야를 넓혀 본다면 우리는 수단 내전을 일으키고 있는 수단 군부의 만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단의 상황은 다른 경우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글로벌 경제 논리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2019년 오랜 독재자 오마르 바시르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의해 축출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수단 정부군(SAF)을 이끄는 군부 최고지도자 압델 파타흐 부르한과 신속지원군(RSF)의 사령관 모하메드 함단 다갈로가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주의를 향한 희망을 짓밟는다. 이후 두 군부 지도자가 견해차를 보이며 갈등을 빚기 시작했고, 2023년 4월 수단 내전이 발발했다. 여기에는 인종 문제도 엮여 있는데, 신속지원군은 대부분 흑인 무슬림인 반면, 수단 정부군은 주로 백인 아랍인이다.
수단 내전에서 외세는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중국 등은 수단 정부군을 지원하고 러시아 바그너그룹, 리비아군, 아랍에미리트는 신속지원군에 군사 물자, 헬리콥터, 무기를 제공한다. 특히 금 매장량이 풍부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신속지원군은 다른 나라에 금광 이권을 넘겨준 대가로 국민을 위한 식량이 아니라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무기를 구매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천연자원이 폭력과 빈곤의 자원이 되는 제3세계의 슬픈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콩고민주공화국도 다이아몬드와 금 매장량이 풍부한 까닭에 오랜 시간 고통을 겪어왔다. 콩고는 서구가 어떻게 아프리카 대량 난민 사태의 조건을 형성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프리카 내 갈등은 흔히 부족 간 전쟁으로 단순하게 설명되곤 하지만 실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영향과 긴밀하게 엮여 있다.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의 몰락 이후 콩고의 한 지역씩을 차지한 군벌들은 콩고의 광물 매장량을 착취하려는 외국 기업들과 거래를 하고 있다. 이렇게 채굴된 광물은 주로 노트북이나 휴대폰과 같은 첨단 제품에 사용된다.
콩고가 특별한 예외 상황은 아니다. 리비아 역시 프랑스와 영국의 개입과 무아마르 카다피의 몰락 이후 사실상 국가가 해체되는, 말하자면 ‘콩고화’를 겪었다. 그 이후 리비아 영토는 대부분 외국 고객에게 석유를 직접 판매하는 무장 갱단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풍부한 광물이나 석유의 저주에 걸린 아프리카 국가의 분열을 유지하는 경향은 국가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값싼 원자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전략이다.
비극적이게도 이들 갈등의 당사자 중 결백하거나 정의로운 이들은 없다. 수단만 보아도 신속지원군만 문제인 것이 아니라 두 군부 모두 똑같은 잔인한 게임을 벌이고 있다. 이 상황을 두고 아프리카인들이 ‘원시적’이어서 아직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진짜 문제는 서구, 중국, 러시아, 부유한 아랍 국가들이 아프리카를 지속적으로 경제적으로 식민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가 주장했듯이 현재 자본주의는 신봉건주의로 이행하고 있다. 자신들이 나눠 차지하고 있는 디지털 영지(도서, 메시지, 디지털 소프트웨어)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아마존, 엑스,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그 예다. 하지만 동시에 수단이나 콩고와 같은 국가에서는 중세 시대와 유사한 형태의 봉건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점점 더 테크노봉건주의와 원시적 봉건주의가 결합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끔찍한 경향을 오히려 일론 머스크보다 더 잘 보여주는 이는 다갈로가 아닐까.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한겨레 | 2024.09.29.
거리에 선 대통령, 다리 위의 영부인
요란한 쇼타임이 임박했다. 전투기와 탱크의 굉음이 다시 서울 도심을 뒤덮는다. 내일 국군의날 시가행진을 또 하겠단다. 역대 정권 임기 중에 한 번이면 족하던 행사다. 광화문 일대 아스팔트에서 2년 연거푸 병력과 장비를 뽐내는 건 과거 30년간 없던 일이다.
지난해 건군 75주년과 한미동맹 70주년이 겹쳤다. 자긍심을 북돋는 이벤트로 제격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그 중심에 섰다. 군 통수권자가 거리에서 처음으로 군복 입은 행렬과 함께 걸었다. “대통령이 흡족해하더라. 그런데 안 할 수가 있나.” 정부 관계자가 전한 뒷얘기다.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올해 시가행진은 지나치다. 대규모 퍼레이드로 불통의 간극을 메운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윤 대통령이 전국 각지를 돌며 주재한 민생토론이 이미 차고 넘친다. 그간 꺼리던 기자회견도 뒤늦게 재개해 소통의 형식을 갖췄다. 반면 지지율은 전례 없이 민망한 수치로 추락하고 있다. 임기가 절반이나 남았는데 국정 운영을 걱정할 정도다.
궁금한 건 최신 무기나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다. 북한의 위협 때문이라면 바뀐 상황에 맞는 비핵화 해법이 먼저다. 김정은 정권은 고농축 우라늄 제조시설을 버젓이 공개하며 핵을 틀어쥐고는 윤 대통령을 거들떠보지 않고 있다. 대화하면 지원한다는 담대한 구상은 빛이 바랬다. 국제사회와 압박 수위를 높이고 흡수통일로 자극해도 저들의 핵 야욕을 꺾기엔 역부족이다.
죽기 살기로 버티는 북한을 상대하긴 버겁다. 김정은을 움직이긴 더 어렵다. 그에 비하면 민심에 다가서는 건 훨씬 쉽다. 윤 대통령의 답을 듣고 싶은 현안이 수두룩하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그만이다. 벽창호 같은 북한과 달리 언제든 대통령의 말에 호응할 준비가 돼 있다. 거창하게 보여주려 수십억 원을 쏟아붓고 공휴일을 늘린다고 엄지를 치켜들던 시절은 지났다.
김건희 여사가 10일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을 맞아 서울 마포대교를 방문해 난간을 살펴보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고집했는지 아직 정확한 근거를 알지 못한다. 야당을 비난하고 국회 개원식조차 외면하면서 이해관계가 난마처럼 얽힌 연금개혁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의료공백 사태로 마음 졸이는데 뭐라도 해보겠다고 나선 한동훈 대표와의 독대를 팽개치며 배짱 부릴 만큼 한가한지 의문이다. 개혁에 반대하면 카르텔로 낙인찍고 잊을 만하면 반국가세력으로 몰아가면서 법안에 번번이 거부권으로 맞서는 악순환이 기약 없이 반복되고 있다.
꽤 많은 메시지를 내놓지만 대부분 성과 잔치다. 분주히 다니지만 정작 있어야 할 곳에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반대로 김건희 여사는 난데없이 존재감이 부각됐다. 마포대교 위에 올라가 경찰관에게 지시하는 듯한 장면이나 "미흡한 점이 많다"는 지적은 생경한 오지랖으로 비친다. 명품백, 주가조작, 공천개입으로 각종 의혹이 번져 떠들썩한데도 해명은커녕 월권 논란을 자초하며 공개행보에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앞서 여론이 싸늘할 때와는 사안의 엄중함이 다르다. 여당과 지지층에서도 불만이 노골적으로 터져 나온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면 무능한 정권이다. 알고도 그랬다면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다. 윤 대통령 특유의 장광설로 어물쩍 뭉갤 수준을 넘어섰다. 대통령과 영부인이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대를 저버리다 이 지경이 됐다. 이만하면 비용은 충분히 치렀다. 지켜보는 인내심마저 바닥 나야 직성이 풀릴 건가.
김광수 정치부장 한국 | 2024.09.30.
대통령 지지율은 왜 중요한가
정치인들은 지지율에 민감하다. “늘 바뀌는 것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같은 소리는 대부분 그냥 하는 소리다. “지지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기가 없더라도 꼭 필요한 일을 하며 역사의 평가를 받겠다” 같은 말도 비슷하다. 지지율이 괜찮을 때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지지율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는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제 무덤 파는 행위나 다름없다.
지지율보다 가치, 역사의 평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통령 지지율이 뭐가 중요한가? 현직 대통령이 또 선거에 나갈 것도 아니고 대통령의 권한과 의무는 헌법과 법률에 나와 있으니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말고 딱딱 할 일을 하고 나중에 역사의 평가를 받으며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개발연대의 성취를 그리워하는 노년층에서 주로 나오는 소리다. 윤 대통령도 ‘지지율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역사의 평가’ ‘흔들리지 말고 뚜벅뚜벅’ 같은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지율은 중요하다.
물론 성숙한 민주국가에서 다양한 성향을 지닌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세계적으로 봐도 지도자들이 아주 잘나갈 때 50%대를 찍고 40%대면 나쁘지 않은 편이다. 미국의 경우 조지 W 부시,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의 임기 중 평균 지지율은 모두 40%대다.
실은 이보다 더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다. 대통령이든 내각제의 총리든 한 진영, 큰 정당의 지도자라서 일종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업고 있는 데다가 뭔가를 잘못해 국민에게 회초리를 맞으면 정책 방향을 바꾸거나 낮은 자세를 취해서 교정하기 때문에 지지율의 하방이 지켜진다. 그래서 통상 30%대는 그리 좋지는 않은 숫자고 앞자리가 2나 1로 찍히는 것은 비정상적 상황이다. 고정 지지층도 돌아섰고, 지지율 하락 원인에 대한 대책도 시행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니까.
지지율 앞자리 숫자가 2나 1이라고 해서 법적 권한이 줄어들진 않는다. 하지만 권위가 훼손된다. 권위가 훼손되면 영(令)이 서지 않는다. 대통령의 가장 큰 권력 중 하나인 의제 설정 능력, 즉 말의 힘이 사라진다. 말의 힘이 사라지면 메신저 거부 현상이 나타난다. 옳은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지지하지 않는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꼽으며 버티거나 조롱하고 저항한다. 권위와 영을 세우기 위한 조치를 취하면 반감을 자극해 지지율이 더 떨어지고, 홍보를 강화해도 메신저 거부 현상으로 역효과가 나타난다. 당근을 써도, 채찍을 써도 더 나빠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단단해진다. 역사의 평가를 기다릴 무슨 일 자체를 할 수 없게 된다.
상당히 낮은 지지율이 지속될 때 나타나는 다른 효과도 있다. 따지고 보면 현 정부가 지금까지 이만큼이나 버틸 수 있었던 데는 반사이익의 몫이 컸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나 김의겸 전 의원의 청담동 술자리 허위 주장, 김건희 여사에 대한 날조된 추문과 악의적 공격들이 도를 넘을 때 보수 지지층은 마음을 다잡았고 중도층도 “그래도 지난 대선 결과가 그렇게 나와서 다행”이라고 되새겼다. 하지만 그 야당 복도 사라지고 있다. 반면 야당 입장에선 대통령 인기가 낮으니 뭘 해도 역풍 걱정할 일이 없다. 삼진 걱정 없이 홈런스윙 하는 식이다. 예컨대 “충암파 장군들이 계엄령을 준비한다” “윤석열 정권이 독도를 일본에 넘기려 한다”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괴담은 빈축을 샀고 대통령과 여당에 타격을 입히지도 못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별 역공을 받지 않았고 여권의 반사이익도 없었다.
계엄령 저작권자 김민석 의원의 형인 김민웅 ‘촛불행동’ 상임대표는 국회의원회관에서 ‘탄핵의 밤’ 행사를 주도하며 “탄핵 정국이 만들어진 것은 중요한 성과”라며 “오늘 국회에서 우리는 탄핵을 외칠 수 있게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탄핵론에 대한 일반 대중의 반응은 극히 미약하다. 현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도 남미식으로 탄핵이 일상화되는 것에 대한 반감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회 앞 대로변에도 동네 지하철역 앞에도 걸려 있는 탄핵 어쩌고 하는 현수막은 익숙한 풍경이 됐고 동네 호프집에 앉아 있어도 탄핵이라는 단어가 귀에 걸린다. 이재명 대표 사법 리스크 뉴스는 ‘오늘도 여전히 열대야’를 읊어대는 일기예보처럼 짜증 나지만 익숙한 소식이다.
이 모든 것이 지지율 때문이다.
윤태곤 정치칼럼니스트 조선 | 2024.09.30.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준비도 안 된 큰 규모의 의대 정원 증원을 갑작스레 발표한 윤석열 대통령의 결정이 의사단체 말대로 충분한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해도, 또한 국민 건강보다는 대형 병원, 민간 보험회사, 의료 산업계의 귓가 송사에 호응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불법이 아닌 한, 정권과 싸워 이기긴 쉽지 않은 것이었다. 더욱이 의료 현장에선 이미 ‘소아과 오픈런’, ‘응급실 뺑뺑이’라는 의사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의사단체조차 이 ‘의사 부족 현상’을 해결할 대안을 내놓지 못했기에 국민 다수는 의대 정원 증원에 찬성했다. 국민까지 이렇게 생각하면 이 싸움에서 이기기란 불가능하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 아리셀 화재 참사 등으로 억울한 수많은 이들이 몇 개월, 몇 년째 폭염과 혹한 속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농성해도 정부의 한 줄 답변이나 신문사의 일단 기사도 얻지 못하는 데 비하면, 의료대란이 이렇게 오래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의사 집단의 힘이 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설령 갑작스레 정부가 결정을 번복해도 마찬가지다.
이 패배에는 몇 가지 결정적인 순간과 이유가 있다. 첫째, 전공의들의 사직 공백이 너무 길어져 비극이 발생한 순간이다. 받아주는 응급실이 없어 죽은 어린 환자와 청천벽력 같은 암 진단을 받고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환자의 고통을 생각해 보라. 제도 탓, 선배 탓이 있고, 전공의 나름대로 할 말이 있겠지만, 죽어가는 환자 곁을 떠난 의사를 죄 없다고 할 수 없다.
둘째, 소수의 극단적 의사가 만들어낸 잘못된 서사다. 이들은 한국 의료의 문제들이 ‘전적으로’ 정부 책임이며 의사는 피해자일 뿐이라는 ‘피해자 의식’, 자료의 ‘자기 편의적 왜곡’,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완결이 어려운 부분을 ‘특정 정권’, ‘노동조합’, ‘좌파’ 탓으로 돌리는 자기 완결적 서사를 만들었다. 이 중 ‘피해자 의식’은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행위조차 정당화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문제는 이 서사가 폐쇄적인 의료계 내에서는 마치 진실인 양 확대 재생산되어 의료계 다수의 신념으로 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잘못된 서사는 의사들을 추동하기에는 요긴했지만, 정부와의 타협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이번처럼 정책 결정에서 배제되거나 싸움에서 질 빌미를 제공했다.
셋째, 환자나 시민들을 “견민”, “개돼지”, “조센징” 등으로 부르며 조롱하거나, “(환자들이) 응급실을 돌다 죽어도 아무 감흥이 없다”, “더 죽어서 뉴스에 나왔으면 하는 마음뿐”이라는 등 패륜적 글을 올리고, 다수의 동료 선후배 의사들이 이 같은 발언을 제지 못 한 것이다. 의협 회장이 판사에게 “이 여자 제정신인가”라고 막말하고, 부회장이 “장기 말 주제에, 건방진 것들” 같은 저질 발언을 하는 순간, 의사들은 졌다.
며칠 전, 진료 의사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공개한 의사가 윗옷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채 구속 심사를 받으러 들어가는 모습이 신문에 실렸다. 의대 교수로 그 모습을 보는 심사는 복잡하지만,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싫다면, 환자를 돌보는 의사들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 이름을 공개하는 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번엔 의사가 졌지만, 의료 분야 대혼란은 이제 시작이다. 초고속 고령화와 함께 3~4년 후부터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적자로 돌아서면, 의사 증원보다 더 큰 파도인 지불방식 개편, 병의원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 등 더 강력한 정책이 줄을 이을 것이다. 더욱이 지금 추세로 민간 보험의 힘이 계속 커지면, 의사들은 정부보다 훨씬 혹독한 대자본과 시장에 의해 더 심하게 갈가리 나뉘고 시달리는 혼란을 겪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싸우면 백전백패다.
의사가 이겨야 할 때도 있다. 가난하고 오지에 산다는 것이 의사를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의사들, 이번 추석 연휴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환자를 돌보느라 딱딱한 침대에서 쪼그리고 쪽잠을 청하거나 왕진가방을 들고 길을 나선 의사들은 이겨야 한다. 이 의사들이 이기기 위해선 이번 사태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방법은 극단 세력에 휘둘리지 말고, 합리적인 대안을 가지고, 국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다. 이 방법밖에 없다.
나는 30년 의료정책을 전공한 의사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환자의 행복과 의사의 행복은 하나만 있으면 틀리고, 둘이 함께할 때만 정답이라고 믿는다. 얼마 전 올림픽이 끝났다. 살아생전에 의사들이 시상대에 오르고, 국민이 환호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을까? 여하튼 이번엔 “의사들이 졌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한겨레 | 2024.09.30.
건희는 증상일 뿐, 병의 뿌리는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씨는 국힘당 공직선거 후보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했는가? <뉴스토마토>를 비롯한 여러 언론의 보도를 보면 아무래도 그랬던 듯하다. 여당의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좌지우지했다면 대통령실이나 정부 운영에도 개입하지 않았겠는가? 그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게 사실이라면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 자체가 중대한 문제다. 우리는 김건희 씨를 공직자로 선출한 적이 없다. 헌법과 법률은 대통령 배우자에게 여당과 정부의 인사 또는 행정에 관여할 그 어떤 권한도 주지 않았다. 대통령 부인이 남편의 권력을 등에 업고 국가 운영에 부당하게 개입하면 법률적으로는 범죄, 정치적으로는 국정농단이 된다. 국정농단을 방치하면 나라가 엉망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겪어보아서 안다.
디올 백 수수와 국정농단, 어느 것이 더 중대 범죄인가
김건희 씨의 과거 범죄 의혹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윤석열 검사와 혼인하기 전과 후에 도이치모터스 등 기업의 주가 조작에 가담해 큰 이익을 챙겼다는 의혹이다. 그 밖에도 여러 범죄 혐의가 있지만 이것 하나만 이야기해도 충분하다. 관련자들의 재판에서 법원이 인정한 증거들과 최근 검찰 내부자가 언론에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여러 사실에 비추어보면 김건희 씨는 마땅히 주가조작 공범으로 법정에 서야 했는데도 검찰 수사를 피했고 기소되지도 않았다. 남편이 검사,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 대통령이 아니라 평범한 공무원이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검찰은 김건희 씨의 주가조작 범죄 혐의를 무혐의 종결하지도 않고 기소하지도 않은 채 여러 해 시간을 보냈다. 조만간 디올 백 받은 일과 함께 불기소 처분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돈다. 주가조작에 가담한 것은 김건희 씨의 잘못이지만 범죄를 덮는 것은 대통령과 검찰의 잘못이다. 윤석열과 정치검사들은 모든 국민이 법 앞에서 평등하며 사회적 특수계급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헌법 제11조를 공공연하게 짓밟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여당 공직선거 후보 공천 개입을 포함한 김건희 씨의 ‘국정농단’ 의혹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사소하다. 주가조작과 디올 백 수수는 지난날의 개인적 범죄인 반면 대통령 부인의 국정농단은 헌정질서 파괴 범죄다. 어느 것이 더 중대한지는 따질 것도 없다.
김건희 씨의 국정농단 의혹 세부 내용을 열거하지는 않겠다. <뉴스토마토>를 비롯한 여러 언론과 유튜브 저널리즘 채널의 보도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나는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일이 생긴 이유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 질문해 대답해 보겠다. 첫째, 김건희 씨는 왜 정치와 국정에 개입할까? 둘째, 왜 하필 지금 시점에서 증거가 드러나는가? 대답을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권력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도 목표도 없는 대통령과 늘 긴장해야 하는 권력 간 공백
권력이란 무엇인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서라도 나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힘’이다. 권력은 강제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권력자가 반드시 강제력을 행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동의를 얻고 협력을 받을 수 있으면 강제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강제력은 꼭 필요할 때 제한적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하는 권력자를 우리는 민주적이고 유능한 리더라고 한다.
윤석열은 어떤가? 민주적이지도 유능하지도 않다. 타인의 공감을 얻어 협력을 끌어내는 방법을 모른다. 그럴 의지도 없다. 그렇게 해본 경험도 없다. 권력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목표의식이 뚜렷하지 않다. 열심히 일하지도 않는다. 술을 많이 마신다는 소문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공무원인데도 출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그저 권력 자체를 탐하며, 권력자로서 군림하기를 즐길 따름이다.
우리나라는 대통령 중심제 국가이다. 3권 분립이 이루어져 있지만 대통령은 국회나 법원보다 훨씬 강하고 폭넓은 권한을 보유한다. 이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려면 대통령은 집권세력 내부에 고도의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 5년 간 추구할 국정 목표 설정부터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단기 과제 결정, 과제 수행에 투입할 정책수단 선택, 정책 수행 능력을 가진 인재 확보, 정부와 여당의 협력 체제 구축, 야당과의 대화와 타협 분위기 조성,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얻는 소통과 홍보 방안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조직적 체계적으로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통령은 일관성 있는 태도로 목표를 추구하면서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의 공백’이 생기지 않는다.
고도의 질서는커녕 진공상태 방불한 집권세력의 무질서
그런데 윤석열 정부와 집권세력 내부에는 고도의 질서라고 말할 만한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윤석열은 단지 대통령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권력 행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저런 행사와 기념식에서 앞뒤가 맞지 않고 현실적 의미도 없는 말을 쏟아낸다. 목적이 불분명한 외국 방문 일정에 돈을 물 쓰듯 한다. 국가재정 관리부터 의료대란 대처까지 무엇 하나도 맵시 있게 완수하지 못한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거대한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다는 말이다.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니다. 윤석열은 8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뉴라이트가 뭔지 모른다면서 보훈부 장관이 제정한 대로 독립기념관장을 임명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대통령 직무를 전혀 수행하고 있지 않다는 자백이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독립기념관장 인사만 그렇게 했겠는가. 국정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인사와 정책 결정을 다 그런 식으로 해 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박근혜 대통령도 그랬다. 대통령이 업무를 수행할 의지와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권력의 공백을 누가 차지했는가? 김기춘, 우병우, 최순실, 문고리 3인방 등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 수준은 그런 사람들이 결정했다. 2014년 말 소위 ‘십상시(十常侍) 문건’ 파문이 터졌을 때 권력서열 1위가 최순실, 2위가 최 씨의 남편 정 아무개, 3위가 박근혜라는 말이 떠돌자 사람들은 설마 그렇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2년 후 국정농단 사태 때 우리는 소문이 사실에 가까웠음을 확인했다.
박근혜 때 권력서열 1위 최순실, 지금 윤석열 때는 어떤가
지금은 어떤가? 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 수준은 정진석, 김태효, 김건희, 천공 같은 사람들이 결정하는 듯하다. 김건희 씨의 국정농단 의혹은 아직은 의혹이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부터 대통령 외교 일정 조정, 정부와 공공기관 인사, 여당의 공직선거 후보 공천 개입까지 세간에 떠도는 모든 국정농단 의혹 가운데 무엇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다. 만약 그 모두가 사실이라면 전적으로 김건희 씨의 책임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김건희 씨는 윤석열이 만든 권력의 공백을 차지한 여러 주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대통령 개인이 국정의 모든 과제를 직접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직접 결정하지 않을 뿐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 하려는 일을 자신보다 더 잘 할 사람에게 권한을 위임한다. 믿을만한 사람을 총리, 비서실장, 장관 등으로 발탁해 대신 일하게 하고 자신은 대통령실 참모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그들을 관리 감독한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윤석열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그저 권력의 맛을 즐길 뿐이다. 그래서 친한 사람, 잘 아는 사람, 충신으로 위장한 아부꾼들에게 권력을 맡겼다.
윤석열이 조장한 권력의 공백을 누구보다 먼저 김건희가 차지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 당연한 일 아닌가. 공백의 다른 일부는 ‘모피아’가 점령했다. 그들은 법인세 세율을 내리고 과세표준을 축소함으로써 2년간 90조 원에 육박하는 세수결손을 내면서 재벌 대기업에 막대한 이익을 안겼다. 재정 적자를 핑계로 해마다 1천억 원 안팎의 국유재산을 눈 밝은 업자들한테 팔아넘겼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려고 국가와 국민을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김태효를 비롯한 뉴라이트 세력도 권력의 공백 한 모퉁이를 차지했다. 그들은 각급 인사라인을 장악해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의 요직을 극우 유튜버와 뉴라이트 추종자들로 채우고 있으며 시대착오적 이념을 내세워 외교와 남북관계를 냉전시대로 되돌렸다. 윤석열은 충성스러운 부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은 대통령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과 이념을 위해서 일한다
김건희 등이 쌓은 적폐, 절에 간다고 해결되지 않아
왜 지금 시점에서 김건희 씨의 국정농단 증거가 드러나고 있는가? 그것도 권력의 공백 현상 때문이다. 2014년의 ‘십상시 문건’도 그랬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박근혜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이 하락하고 정부여당의 무능에 대한 국민의 비판의식이 높아진 시점에서 국정농단에 관한 소문과 증거가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의 정부여당에 대한 정치적 불신은 진정한 의미의 권력 공백 현상을 빚어낸다. 대통령과 국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야당의 활동 폭은 넓어지고 위세는 강해진다. 권력의 정치적 무게중심이 야당으로 이동해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윤석열 정권의 불법과 비리가 드러날 확률도 상승하며, 그런 일이 실제 벌어지면 정권 교체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우리는 지금 그런 현상을 목격하는 중이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같은 형태의 비리 폭로와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 하락 현상이 서로를 부추기며 이어질 것이다. 김건희 씨는 법률적 책임을 질 수 있을 뿐 정치적 책임은 떠맡지 못한다. 정치적 책임은 대통령 권력을 공백으로 만든 윤석열한테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윤석열 부부를 맹종하는 척했던 이른바 ‘윤핵관’과 여전히 윤석열 부부 방탄에 몸을 던지는 국힘당 정치인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누구 말대로 김건희 씨를 절에 보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다. 김건희가 절에 가도 문제의 원인은 그대로 용산에 있다. 검찰이 수사를 해서, 또는 특검이 출범해서 김건희 씨를 구속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국민경제의 침체와 국가재정의 파탄, 정부의 무능과 정치 실종 등 오늘 대한민국이 직면한 위기는 김건희가 아니라 윤석열이 만들었다. 김건희 때문에 윤석열이 망하는 게 아니다. 윤석열 때문에 김건희도 같이 망하는 것이다. 김건희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일 뿐이다. 윤석열이 대통령 자리에 있는 한 대한민국은 경제적 침체와 정치적 문화적 퇴행의 수렁을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유시민 작가 시민언론 민들레 | 202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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