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에스동서의 이기대 아파트 난개발과 ESG 경영 2. 공항으로 문제해결하자? 그러면 청년들이 부산을 떠나지 않을까? 3. 제주 제2공항 백지화 향한 여정…프랑스 낭트, 자드(ZAD)에 가다 4. 기후 위기 지옥, 우리는 이미 한 발 들여놓았다5. 7주에서 4주로 단축된 닭의 시간, 상업화된 육류생산이 문제다 6. 페트병 생수 대신 수돗물을 마실 결심 7. 두세 시간 내린 비에 싹쓸이... 이게 실화일까
8. 거창 골짜기까지 싹싹 훑어 '토종씨앗' 모은 여성들 9. 경기도, 2033년까지 모든 시내버스 ‘친환경 차량’ 전환 10. 이기대 턱밑 고층 아파트, 공청회 필요 없다는 남구청 11. 부산 원자력산업 육성 조례안에 "시대착오적" 비판 12. 역대급 호우 대응, 재난문자만으로는 안 된다 13. “가덕신공항 적기 개항에 부산시·정치권 총력 다하라” 14. 전기를 잡아야 나라가 산다 15. 조류독감 팬데믹이 올까
16. 일본 오염수 방류금지 소송 기각에 "사법부, 주권포기 판결" 17. 여당 일부 '핵무장'주장에 미 국방부 "한국, 국제 왕따 될 것" 경고 18. 파리 시장 “센강 수질 좋아” 직접 풍덩… 시민들 “용변 보자” SNS 시위 19. 을숙도 피크닉광장에 유아숲체험장 생긴다 20. 용호부두 재개발, 이기대 난개발 좋은 일만 시키나?
21. 파주 24시간 만에 514mm의 물 폭탄 22. "아이는 기후위기 희생양 될 것" 아이 낳지 않겠다는 여성들 23. 멸종위기종인데 노량진에선 횟감…까치상어의 귀향 24. 전력 수요 70% 수도권 쏠려…정책 중심, 공급 증대보다 수요 관리로 전환해야 25. “조선 들판은 황금물결이 아니었어요”
아이에스동서의 이기대 아파트 난개발과 ESG 경영
부산 용호만에는 두 개의 극명한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첫째는 동생말로부터 시작해 오륙도로 이어지는 이기대 자연해안과 둘째는 용호만을 매립해 들어선 거대한 아파트 단지다. 그 경계부에 섶자리가 있다.
최근 섶자리 터에 (주)아이에스동서가 아파트를 짓겠다고 했고, 부산시와 남구청은 납득할 수 없는 절차를 도입하는 등 업자의 이해를 적극 도와주는 행태로 시민의 공분을 증폭시키고 있다. 아이에스동서 아파트 건설과 관련해 부산시와 남구청은 생경한 심의 방식을 동원, 철저히 업자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읽혀진다.
예컨대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하려면 주민 의견 청취나 심의 고시 등의 절차를 거치게 되어 있음에도 그 과정이 생략됐다. 더욱이 이곳은 민감한 지역이다. 최초 시점은 2023년 10월께였다. 당시 아이에스동서는 기존에 추진하려던 해상 케이블카 사업이 무산되자 매입 부지 활용 방법으로 아파트 건설을 고안했다.
문제는 이기대 갈맷길 들머리 코앞에 아파트를 짓게 됨으로서 야기될 시민적 저항과 생태경관적 가치에 대해 단 1%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기대는 부산시와 시민사회가 도시공원 일몰이라는 거대한 쓰나미 앞에 이곳만은 지켜야 한다는 공감이 관통했던 곳이다. 그래서 다른 어떤 곳보다 우선해 토지 매입을 했다. 심지어 지난해에는 삼성의 비업무용 토지까지 매입해 이기대를 온전히 살리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랬던 부산시와 남구청이 보인 후속 엇박자 행보는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음을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아이에스동서의 해상 케이블카 사업이 백지화 된 이유가 이기대라는 자연자산의 훼손을 반대하는 시민 저항과 반대 때문이었음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 더 유감스럽다. 현재 이기대 아파트 건설은 남구청의 최종 건축허가 승인 여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그래서인지 남구청은 지역과 시민의 눈치를 보면서 절차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방어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남구청은 오래된 미래 자산 이기대를 지키는 결정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건축 승인을 불허하라는 말이다. 그에 따른 불이익은 지역민과 시민이 방패가 될 것이다.
이참에 아이에스동서에도 정중히 권한다. 놀랍게도 아이에스동서는 ESG에 기초한 지속가능 경영 보고서를 2021년부터 발행하고 있었고, 핵심사항인 유엔글로벌 콤팩트 원칙과 ISO 2600의 주요 아젠다며 TCFD(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아이에스동서가 기후변화 리스크에 대응하는 한편, 정작 이기대의 명성과 생태적 가치에 반하는 아파트 개발을 강행한다는 것은 이른바 ‘그린워싱’(친환경 위장)이 되는 것이다.
이기대 아파트 건설 여부는 현재 평가등급 B+ 수준의 아이에스동서가 A+그룹으로 상향할지 아니면 그보다 더 낮은 등급으로 전락할지를 가늠하는 지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부탁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지역사회 공헌 차원에서 이기대 아파트 개발 계획을 없던 일로 했으면 한다.
끝으로 부산시의 처신을 당부한다. 이기대를 비롯해 시내 도처에서 개발과 보존 갈등이 불거지는 것은 부산시가 표방하고 있는 시책이 여전히 성장과 개발주의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 데다 노골적으로 건설업체의 활성화를 천명함에 있다. 먹고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지만, 이는 엑스포 참패 이후 부산시가 급히 갈아 탄 말인 글로벌 허브도시에도 역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성근 부산환경회의 공동대표/ 부산일보
공항으로 문제해결하자? 그러면 청년들이 부산을 떠나지 않을까?
[가덕도신공항 추진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 ⑧
경기도 화성 배터리 공장의 참화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다시 드러내고 있다. 경제적으로 한국은 무척 성공한 나라이지만 생명안전, 이주민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 문제를 살펴보면 선진국이라 하기 어렵다. 한국의 높은 자살률, 낮은 출산율, OECD국가 중 최고의 산재 사망률 등은 한국의 사회의 이면을 보여준다.
이번 사고가 난 이후 외신들은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낮는 출산율로 제조업의 일자리를 이주 노동자가 채우면서 이들에 대한 기본적 안전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은 전세계적으로 드물게 밤 늦게 여성이 혼자서 다닐 수 있는 나라이지만, 산재사망률을 보면 누구나 안전한 나라는 아니다.
한국의 청년들은 선진국의 아이들로 태어났지만 군대에 가거나 노동현장에 가면, 자신들이 알았던 선진국 대한민국에 대해 의심을 갖기 시작한다고 한다. 한국의 매력에 빠져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하고 생활을 한 유럽 청년들은, 이곳의 노동 환경을 알고 나서 여기서 취직을 하고 계속 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한다.
한국의 불평등은 단순히 소득격차의 문제만이 아니라 생명과 안전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노동의 이중구조, 시설화된 돌봄, 극단적 교육경쟁과 교육비용, 일하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 등 성공한 나라인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넘쳐난다. 한국은 외형적 성장에 비해 사회의 질적 성장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의 과제는 양적 성장과 외형적 성장을 어떻게 사회의 질, 사회의 성격을 바꿀 것인가에 대한 기로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문제는 필자가 살고 있는 부산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때로는 더 심화된다. 부산의 경우에도 사회적인 여러 통계들을 살펴보면 상당히 암울하다. 동과 서의 건강상의 격차는 상당하고, 일자리가 없기에 청년들은 부산을 떠나고자 한다. 부산에는 단순히 기업과 자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신뢰와 존중도 부족하다는 지역의 목소리도 있다.
ⓒ연합뉴스
부산의 행정역량, 공공 서비스의 문제는 서울과 비교해 상당히 낙후되어 있다. 교통체계나 안전 등의 문제가 후진적이고, 또한 도서관 등 도시의 공공기관과 문화기관 등 시민을 위한 공공 서비스가 상당히 부족하다. 서울에서는 도서관 공유공간 청년기본소득 등 공공적 서비스로 그리고 기본적으로 누리던 것들이 부산에 없는 것이 무척 많다. 마트, 백화점 등 시장을 통해 구매할 수 있는 것들은 부산에서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구매가능하지만, 공공서비스의 수준은 낙후되어 있다. 공공이 시민들에게 제대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니, 모든 걸 시민들은 상품으로 구매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부산은 서울에 비해 참 살기 좋은 점이 많다. 일단 부산은 바다의 고장이기도 하고 산의 고장이라서 참 좋고 서울에 비교해 미세먼지가 덜 심각하다. 타지에 와서 부산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은 부산을 떠나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 최근 청년들에게 미세먼지와 높은 지가의 수도권은 반드시 매력적인 삶의 터전은 아니다. 부산에서 학교를 다닌 한 청년은 부산은 바다도 있고 산도 있어서 너무 좋다고, 여기에서 계속 일하고 사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부산의 도시의 개발과 산업 지표를 보면 참 난감하다. 제조업이 중시되었던 부산의 공장들이 부산 외곽으로, 혹은 동남아로 이동해간 이후 부산은 새로운 도시의 활력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전세계적으로 제조업에서 노동비용으로 인해 공장이 옮겨가고 선진국이 된 이후, 어느 도시나 발전 이후의 문제를 갖고 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사회들은 창의산업, 문화경제 등을 활성화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디지털 인공지능 등 혁신 경제를 강조하기도 한다. 기술을 통한 혁신, 문화를 통한 삶의 질, 그리고 민주주의와 참여를 통해 함께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문화 형성 등이 중요한 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외형적 성장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를 만들고 사람의 자리와 역할, 신뢰를 만들어가는 것이 사회 혁신을 위한 기본이다. 콘텐츠나 첨단기술에 기반해 도시의 혁신은 가능하다. 부산과 비슷하게 항구도시이지만 지역 쇠퇴를 경험하고 있는 가오슝에는 최근 TSMC가 공장을 세우고 엔비디아도 이곳에 연구개발(R&D)센터를 짓는다고 한다. 현재 미국에서는 실리콘밸리의 혁신 기업들이 텍사스의 오스틴으로 이전도 많이 하고 새로운 혁신 클러스터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라는 축제가 있어서 테크 혁신, 문화축제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가 국제적으로 진행된다. 공항이 아니라, 콘텐츠가 있기에 사람이 모인다.
사람들은 교통이 불편해도 변변한 공항이 없어도, 콘텐츠가 있고 문화가 있고 기술이 있고, 좋은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그곳을 찾아간다. 공항을 짓는다고 없던 콘텐츠, 문화, 혁신기술이 생길까? 공항을 짓고자 하는 사람들은 공항이 생기면 부산이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만병통치약처럼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2030부산월드엑스포 유치에 기대를 했던 마음도 그런 것 같다.
정말로 공항이 생기면, 부산은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부산에 살고 싶은 마음의 청년들이 부산에 남아 멋진 바다와 산을 즐기며 살 수 있을까? 혁신 클러스터와 문화 콘텐츠의 창작 공간이 생겨날까? 나도 그랬으면 정말 그렇다. 하지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에서, 콘텐츠와 문화, 기술혁신은 공항이 생긴다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공항이 만들어진다고 공항 주변의 공단의 이주노동자의 처우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작업장의 안전이 확보되는 것도 아니다. 공항이 만들어진다고 자살률이 줄고, 출산율이 증가하고 산재가 감소하고, 부산의 동서 건강격차가 사라질까? 지역불균형 문제가 한방에 해결될까? 과연 그럴까? 공항을 짓기 위한 천문학적 예산, 우리에게 어떤 사회적 효용을 가져다 줄지, 사회적 편익을 면밀하게 계산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공항부터 짓고, 공항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는 주장 믿을 수 있을까?
주윤정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 | 프레시안
제주 제2공항 백지화 향한 여정…프랑스 낭트, 자드(ZAD)에 가다
9년째다. 나는 2015년 제주제2공항이 발표되고, 2017년 제주로 돌아온 이후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조만간 내가 나고 자란 조그마한 고향에 커다란 소행성이 충돌할 것이라는 사실이라도 들은 듯 불안했기 때문이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계획은 그러한 위협이고 그러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이미 개발로 인해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주변 환경의 모습들이 보였고, 매년 들려오던 생명의 소리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마을에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서로 멀어져갔다. 안타까움으로 시작한 작은 활동은 어느덧 나의 삶의 과제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물어왔다. "제주제2공항은 진짜 들어오는 거야?", "국가사업인데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
과연 그럴까?
작년 하반기에 이래저래 몸이 고장이 났고, 결국 번아웃이 찾아와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게 되었다. 휴식을 위해 독일에 있는 친구 J를 만나러 갔다. J는 내게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고 나는 자드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곳의 이야기를 들은 J는 나보다 더욱 신이 나서는 그동안 불어를 공부한 보람이 있겠다며 기꺼이 자드에 동행해주겠다고 했다. 자드(ZAD)는 '지켜야할 땅'이라는 뜻으로, 본래는 '개발 예정지(Zone d’amenagement differe)'인 것을 활동가들이 'Zone a defendere(지켜야할 땅)'으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한데서 유래되었다. 프랑스 낭트에 추진 중이던 신공항 예정지에도 자드와 사람들이 있었다.
2018년 겨울, 동료 활동가 강은 신공항 프로젝트 백지화를 이루어낸 프랑스 낭트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내가 자드에 대해 듣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강은 한 달을 자드에서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때부터 자드라는 공간은 언제나 나의 책상 서랍 안에 힌트 카드처럼 놓여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 가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자드 안에 있는 습지. 식물을 공부하는 활동에 참가했다. ⓒ사진: 김현지
낭트에 도착하자, F가 우리를 데리러 나왔다. F는 강의 오랜 친구로, 몇 년 전 성산에 방문했을 때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이후 F와 강을 통해 자드 사람들과 성산 사람들이 연대하는 줌미팅을 하기도 했었고, 연대의 선물로 연이나 한국의 먹거리를 보내기도 했었다. 오랜만에 만난 F는 우리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농담을 좋아하는 F는 이제는 선생을 그만두고 예술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행색을 한번 훑어보더니 "이러고 자드에 가겠다는 거야?" 하며 이마를 짚었다. 잠시 생각을 하더니, F는 무릎까지 오는 장화와 우비, 그리고 손전등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현금을 챙겨가라고 조언했다. 준비물을 챙겨주며 잘 살아 돌아오라는 F의 농담에 살짝 긴장이 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밤이 되자 F는 우리를 자드까지 데려다주었다. 어둠이 내린 꽤 넓은 도로 주변에는 차도 얼마 없었고, 빛도 보이질 않았다. 장난기 많은 그가 이번엔 내게 진지하게 물었다. "제2공항 프로젝트가 백지화 될 것이라고 얼마나 확신하지?" 나는 머릿속에서 마땅한 답을 찾기 시작했다.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내게 던진 질문이 실제로 공항이 들어올 확률이 얼마냐가 궁금했던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무언가 던지고 싶었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제주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나는 많이 지쳐있었으므로.
낭트의 신공항 프로젝트는 1970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주민들의 강경한 투쟁이 있었고, 한번 철회되었으나 50년 가까이 계획은 살아있었다. 2000년부터 2009년 사이에는 환경 연구자, 법조인, 조종사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이슈들을 공론화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신공항 예정지는 중요한 자연환경이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정부에서 주장하는 활주로의 문제 등은 조종사들의 의해 반박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열띤 토론은 저녁 시간에 200, 300명씩 모여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지주들에게 공시지가 보다 20%가 넘는 가격을 제안하여 사업 착수 전까지는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주민들을 회유했다. 또한 2011년 '방씨'라는 건설사가 결정이 되었는데, 본격적인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되자마자 80프로가 땅과 집을 팔고 떠났다. 2000년대에는 반대의 명확한 논리가 있어서 희망이 있었으나, 건설사가 결정된 2011년 이후에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자드 안에 있는 여러 개의 공동체 중 하나. 이 공동체에서는 목축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다. ⓒ 사진: 김현지
2012년 프랑스 정부가 남아있는 20%의 주민을 강제로 쫓아내는 철거작전이 들이닥치자 주민들은 단식 저항을 시작했다. 저항의 구호는 법적 절차가 마무리 될 때까지 쫓아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때의 행정대집행 이후 4만 명의 시민들이 연대하여 자드에 모이기 시작했다. 2016년에는 찬반을 둘러싼 주민 투표가 있었다. 주민투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긴 했으나 정부가 밀어붙여 추진하게 되었다. 주민투표의 대상은 낭트시보다는 큰 단위인 데파트멍 주민들 사이에서 진행이 되었는데, 찬성 53% 대 반대 47%로 투표에서 찬성이 높게 나왔다. 그럼에도 2년 뒤에 백지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환경적 이슈, 국가재정 악화 등의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정부의 공식 입장은 주민들의 갈등 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자드의 미래에 대한 여섯 가지 합의 사항이 도서관 벽에 걸려있다. ⓒ사진: 김현지
50년에 걸쳐 마침내 신공항 프로젝트 백지화가 이루어졌을 때 주민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당시 반대위원장을 맡았던 한 농민은 백지화 하루 전까지만 해도 승리할 것이라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난개발로부터 땅을 지켜내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늘 있었다고 한다. 자드 도서관에 한 쪽 벽면에는 자드의 미래에 대한 합의문이 걸려있다. 이 글은 총 여섯 가지 항목으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신공항 계획이 백지화 되고 난 후 그 땅의 미래를 고민하기 위해 일 년 동안 토론을 거쳐 작성됐다고 한다.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지역의 자연 경관, 주민들, 다양성, 식물, 동물, 그리고 공유되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거주자들의 거주에 대한 권리 회복, 농부들의 경작 권리 회복, 새로운 주민들의 생활 방식 수용, 토지 사용에 관한 사항, 갈등해결을 위한 다양 존중과 단합에 대한 결의에 대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자드 내에서 키워지고 있는 양들의 모습. ⓒ사진: 김현지
신공항프로젝트 백지화 이후 자드에는 환경운동가, 페미니스트, 예술가들, 목축업자, 농부들, 디자이너, 건축가, 캠페이너, 언론인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남아 다양한 삶의 형태로 대안적 사회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양을 키우고, 어떤 이들은 갈렛(밀가루 전)을 만들고, 어떤 이들은 농사를 짓고, 어떤 이들은 집을 짓는다. 공동체마다 순환 가능한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고, 각 공동체에서는 공동으로 활동을 하며 각자가 추구하는 일들을 한다. 삶의 방식과 가치가 다른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여 있지만,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인 토론을 거치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회의를 열며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나가고 있었다. 50년 투쟁의 끝, 백지화를 이루어낸 프랑스 낭트 자드의 모습이다.
2015년 국토부는 성산읍 일대에 제주제2공항 건설을 발표했다. 이후 사전타당성 검토, 기본계획안, 전략환경영향평가 등을 거치는 동안 제주제2공항 건설로 인해 제주가 처하게 될 문제와 공항건설에 대한 우려가 점차 커져가고 있다. 환경부는 자신들이 세 번이나 반려했던 국토부의 전략환경영향평가에 대해 결국 조건부 동의를 내렸다. 전략환경영향평가의 검토기관들이 보완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낸 것을 무시하고서 말이다. 숨골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숨골의 기준은 무엇인지, 법정보호종 서식지에 대한 보전방안은 무엇인지, 홍수나 지하수 고갈 등 주변 지역에 어떠한 피해를 주게 될지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다. 국토부는 작년 말까지 고시를 하겠다고 했으나 6월 중순인 현재, 기재부와의 협의에서 계속 지연되고 있다.
9년이 지났다. 2025년에 건설 예정이던 제주제2공항은 현재까지 고시도 못하고 있다. 2021년 찬반 여론조사에서는 제주도민은 반대로 결정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와 땀들이 모여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대수산봉 정상에서 제2공항 예정 후보지를 바라보며 상상 해본다. 성산 자드에 사람들이 모인다면, 백지화 이후의 미래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를 써내려가게 될까? 제주제2공항을 막아내어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성산, 제주의 미래는 무엇일까? 위기에 직면하고서야 발견한 소중한 가치들, 우리가 구하고 지켜내기 위해 애쓰던 존재들, 농민들이 마음껏 농사지을 수 있는 땅, 뭇 생명들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터전, 모두가 손을 잡아 다 함께 위기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연대 등등등. 모두가 머리를 맞대어 한줄 한줄 써내려갈 그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다.
▲김현지 활동가 /프레시안
기후 위기 지옥, 우리는 이미 한 발 들여놓았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은 지구 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1.5도를 넘기지 않도록 전 세계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고 목표치를 제시했다. 섭씨 2도를 넘어가면 지구는 이른바 '티핑 포인트'를 지난다. 이때부터는 인간이 아무리 온실가스를 감축하려 한들 소용이 없다. 이미 뜨거워진 지구가 스스로 온도를 더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지구는 마치 금성처럼, 결국 온실가스로 인해 섭씨 수백도에 달하는 지옥별이 될 것이다. 일각에는 기후 위기가 지구에 저지른 사람에게 내려진 벌이라고 한다. 아니다. 모든 생명의 위기다.
이마저도 보수적인 추정치다. 현대 과학은 아직 지구 온난화 과정의 함수를 완벽히 풀어내지는 못했다. 현재 과학자들이 추정한 모델에 넣지 못한 변수가 많다.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녹아 표면적이 커지면, 현재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머지 빙하가 녹아내릴 가능성이 있다. 동토지대가 녹아 분출되는 수십만 년간 응축된 메테인(메탄)의 양이 정확히 얼마나 될지, 이 초강력 온실가스인 메테인이 대기에 퍼지면 지금보다 온실 효과가 얼마나 더 빠른 속도로 일어날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런 불확실성을 전제로 과학자들이 지난 1년여 간 연구한 결론을 모아, 가장 보수적인 추정치로 '합의'한 결과물이 바로 1.5도 목표치다. 앞으로 과학 기술이 더 발달한다면, 실제로는 1.5도가 아니라 1.4도 목표치를 지켜야만 인류가 생존할 수 있다는 결과값이 나올지도 모른다. 티핑 포인트는 2도가 아니라 1.8도일지도 모른다.
이미 한번 무너졌다. 지난 7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 기후 변화 감시기구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서비스(C3S)'는 작년 7월 이후 지난 1년간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64도 올랐다고 밝혔다. 현재 인류가 마지노선으로 여긴 1.5도가 이미 무너졌다.
물론 '한번' 넘어선 결과다. 1.5도 목표치는 10년 평균값이다. 앞으로 9년 더 지금과 같은 기온 수준이 유지돼야 1.5도 목표치가 무너진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그렇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암울하다. 지난해 기준 최근 10년의 지구 연평균 온도는 산업화 이전 대비 1.48도 올라갔다. 우리에게는 0.02도가 남았다. 파리협정의 1.5도 목표가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
C3S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지구 평균 기온은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높다. 아울러 작년 6월부터 올 7월까지 지구 월평균 기온은 매월 사상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즉 최근 13개월 간 매월이 '인류 역사상 가장 더운 달'이었다. 지난달은 인류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6월이다. 이번 달도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인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 우리에게 과연 시간이 얼마나 더 있을까?
아마게돈은 가장 먼저 폭염과 함께 온다. 지난 20여년 간 기후 위기를 전문적으로 취재해 온 저널리스트 제프 구델의 <폭염 살인>(왕수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은 멸종을 향해 질주하는 우리에게 가장 먼저 오는, 아니, 이미 도래한 지옥은 폭염이라고 지적한다. '폭염 르포르타주'라 할 만한 이 책은 지금도 펄펄 끓어오르고 있는 지구 곳곳을 저자가 발로 뛰어 관측한 기록이다. 지난해 지구의 폭염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다룬 책이니, 오늘날 이 책은 '앞으로는 역사상 가장 시원했을 2023년의 기록'일 수도 있다.
폭염으로 인한 피해가 그렇게 심각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폭염, 즉 갑자기 훅 뜨거워진 살인적 더위가 며칠에 걸쳐 지속되는 초고온 현상이 일어날 확률은 산업화 초기 대비 150배 높아졌다. 매해 바다 온도는 역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2019년 전 세계의 48만9000여 명이 폭염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는 허리케인, 태풍, 수해 등 폭염을 제외한 다른 모든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자 합계를 웃도는 수치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질병관리청은 지난해 한국에서 온열질환으로 인한 사망자는 32명이라고 밝혔다. 이는 전년(2022년) 사망자 9명 대비 3.5배 수치다. 직접 기록만 이 정도이니 간접적인 사인을 고려하면 이보다 더 많은 이가 폭염으로 인해 사망했을 것이다.
▲<폭염 살인>(제프 구델 지음, 왕수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저자는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거주한다. 지난해 기온이 40.5도를 넘은 날이 40일을 넘었다. "다른 텍사스인들처럼 나도 더운 날에는 뱀파이어처럼 살아야 했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 그러니까 죽일 듯한 기세로 내리쬐던 햇빛이 비로소 자취를 감추었을 때나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이미 우리는 폭염 지옥에 한 발을 걸쳐놓았다. 폭염과 가뭄으로 인해 바짝 마른 나무는 불쏘시개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호주의 산불이 6개월에 걸쳐 생지옥을 만드는 초현실적인 상황을 경험했다.
인간의 몸은 한계치인 습구온도 35도를 넘으면 고체온증을 겪는다. 이후 순식간에 열 경련과 열사병이 다가온다. 2022년 미국에서 살기 좋기로 유명한 태평양 북서부 연안에 거주하던 일가족은 하이킹을 나선지 단 4시간 만에 전원 사망했다. 오전만 해도 선선하던 날씨가 갑자기 폭염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지난해 북반구 전역에 대기파가 생성되더니, 열돔(heat dome)이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포틀랜드 시내 기온이 24.4도에서 45.5도까지 치솟았다.
폭염이 시작이다. 직접적인 피해자를 낳는데 그치지 않고 추가적인 피해를 생성하는 원인이 된다. 식량 위기는 이미 시작됐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한여름에 열악한 혹은 매우 열악한 상태에 처한 텍사스의 옥수수 경작지가 전체의 42퍼센트에 달했다. 상태가 매우 좋은 경작지는 단 3퍼센트였다. 2022년 프랑스의 옥수수 수확량은 30년 만에 최저치였다. 코넬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 농업생산량은 기후위기 이전보다 21퍼센트 줄어들었다. 지구 평균기온이 1도 오를 때마다 옥수수는 7퍼센트, 밀은 6퍼센트, 쌀은 3퍼센트씩 수확량이 줄어든다.
우리는 이미 인도 정부가 밀 수확량이 예상치를 크게 밑돌자 밀 수출을 금지한 사례를 최근 겪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밀 생산이 줄어든 가운데, 인도마저 밀 수출을 금지하자 우리 밥상에 직접적인 타격이 왔다. 지난달 28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발표를 보면 한국의 최근 3년(2021~2023년) 곡물 자급률은 평균 19.5퍼센트에 불과했다. 식량 안보 위기가 이미 현실이 됐다.
바다의 사막화도 이미 치명적 수준으로 진행 중이다. 전 세계의 산호가 떼죽음을 맞고 있다. 산호는 거친 바다로부터 해양생물을 보호하고 치명적 육식 어종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한다. 대부분의 해양 생물이 산호의 보호 아래에서 생활한다. 직접적인 보호장치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극지방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차가운 민물이 세계의 바다에 대량 유입된다. 그 결과 바다의 순환 체계가 망가진다. 열대 지역과 남극을 오가는 대서양해류는 점차 약해지고 있다. 대서양해류의 순환이 멈춘다면 미국 동부 연안 해수면은 기존 예측치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상승할 것이다. 전 세계에서 태풍과 허리케인이 급증할 것이다. 북쪽에 자리했음에도 따뜻한 바다 덕택에 따뜻한 계절을 누린 유럽에는 기존보다 훨씬 추운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이는 유럽 곡창 지대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미칠 것이다. 유럽의 농업은 끝날 것이다.
경제도 망가진다. 평균기온이 1도 오를 때마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1퍼센트 수준인 3000억 달러가 증발한다. 폭염 아래서 야외 노동이 불가능해지고 기계류의 고장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노동생산성은 극도로 떨어질 것이다. 2020년 극단적 더위로 인해 노동자의 생산성 저하가 1000억 달러의 손실을 불러왔고 이 손실액은 지금 추세가 이어진다면 2050년 5000억 달러까지 늘어날 것이다. 이는 가계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모든 소비품의 가격이 치솟을 것이다.
비극적인 사실은 지금도 전 세계가 더 많은 화석연료를 태우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미국의 석유와 가스 생산량은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2022년 4조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 거대 석유 기업과 가스 회사는 생산량을 2배 늘렸다. 영국의 석유회사 BP는 당초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35퍼센트 줄이겠다던 약속을 슬그머니 취소했다. 엑손모빌은 바이오연료 생산 투자 지원에서 한 발 물러났다. 쉘은 지난해 이미 재생가능에너지 투자를 늘리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앞으로가 더 무섭다.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될지 모른다. 트럼프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다시금 미국이 파리협정에서 탈퇴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미국이 이렇게 나간다면 중국이 가만 있을까? 유럽을 휩쓰는 극우 세력은 기후 대응에 피로를 느끼는 대중을 겨냥해 재생에너지 전환의 시계를 되돌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금 세상은 마치 영화 <돈 룩 업!>의 현실판인 듯하다. 인류에게 희망이 있을까.
저자는 놀랍게도 "이 책을 쓰기 시작한 4년 전보다 덜 비관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저자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이상하게도 기후위기를 똑똑히 인식하고 나니 내 삶이 더 생동감 있게,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세상이 그렇게 쉽게 부서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여러분 눈에도 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 급박하게 변화하는 세상은 달리 말하면 잠시뿐인 세상이다. 오늘은 여기 있지만, 내일은 없어지는 세상이다. (...) 2023년이 내게 가르쳐준 게 바로 이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아름답고 감탄스러운 것을 발견하든, 지금 이 순간 그 모습을 실컷 봐두라는 것. 어쩌면 그 풍경은 오래지 않아 사라질지 모르니까."
돌이켜보면 인류에게는 긴 시간과 기회가 있었다. 그저 행동하지 않아 이제 우리는 바야흐로 종말을 이야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질지 모른다. 이산화탄소는 대기 중 100년 이상 잔류한다. 지금 지구를 데우는 이산화탄소 중 상당량은 20세기에 배출됐다. 당장 전 지구가 모든 탄소 배출을 중단하더라도 당분간 지구 대기는 가열될 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이라면 인공지능 개발은 강력히 규제해야 한다. 챗GPT-3는 질문 10개에 답하는 데 물 500밀리리터를 필요로 한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지난해 탄소배출량은 30퍼센트 증가했다. 인공지능이 엄청난 전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류 생존을 위해 규제해야 한다. 더 창의적인 규제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엄청난 탄소를 배출하는 항공기 이용을 줄여야 한다. 전 인류에게 해외여행 총량 규제를 적용해야 할 지 모른다. 지금도 각국의 수도를 뒤덮은 승용차가 엄청난 온실가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승용차를 함부로 타지 못하도록 당장 전 세계가 규제에 나서야 한다. 지금도 폭주 중인 러시아와 이스라엘의 미친 전쟁 놀음을 당장 막아야 한다. 전쟁은 탄소를 내뿜는 하마다. 자본주의는 잉여 생산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를 대대적으로 규제할 방안을 지금 당장 전 세계가 머리를 맞대 고민해야 한다. 국경은 국가간 경쟁을 낳는다. 기후위기 대응 노력이 국경이 있는 지금 얼마나 유효할지 의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더는 손 놓고 있을 시간이 부족할지 모른다.
저자가 이 책을 출간할 당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우리는 이대로 끝장인가요?' 였다. 저자의 답은 항상 같았다. "지구가 살 만한 별이기를 바라는가? 그러면 팔을 걷어붙이고 싸워라.“
이대희 기자 |
7주에서 4주로 단축된 닭의 시간, 상업화된 육류생산이 문제다
'탄소로운' 먹거리 생산·유통·소비의 극복을 위한 방안
여의도 직장생활 중 가졌던 식생활 문화 중 하나는 "한우 소고기는 회식 때나 먹는 음식이다"라는 것이었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많은 직장인들이 1인분에 4~5만원 하는 한우를 식당에서 내 돈 내고 먹기란 쉽지 않다는 현실을 반영한 문화였다. 그만큼 소고기는 비싼 대중음식이다. 그런데 소값 하락을 견디다 못한 축산 농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농민들은 도매가격이 하락하고 사료 값은 올라 축산경영이 너무 힘든 반면 소비자들은 유통마진이 너무 커 도매가격 하락을 체감할 수 없다는 언론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축산농민들은 21대 국회에서 의결된 '지속가능한 한우산업 지원법' 을 제정해 정부가 '한우 적정 사육두수 관리', '탄소중립 실현과 기후변화에 대응한 환경개선 지원', '한우가격의 안정화', '한우 유통·수출 진흥 및 소비촉진', '한우분야 자원 재순환 및 경축순환 활성화', '가축분뇨 에너지화 등 한우분야 재생에너지 확대' 방안 등 한우산업육성 종합계획을 수립·시행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시장원리주의자들은 축산 농민들의 이러한 요구가 말도 안 되는 정부의 시장개입이라고 반대하겠지만, 사실 각종 산업에 대한 이런 식의 정부 정책개입은 비일비재하고 그런 관점에서 한우산업 발전을 위한 정부개입 자체는 타당하다. 문제는 정부의 시장 개입 자체가 아니라 어떤 내용의 시장 개입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21대 국회가 의결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위의 '지속가능한 한우산업 지원법'을 계기로 기후위기 시대에 대응하고 정부의 탄소중립 비전을 실천하는 한우산업 발전정책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좀 더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
<탄소로운 식탁>의 윤지로 저자는 "북미 성우를 기준으로 1996년에 소 한 마리가 1년에 47kg의 메탄을 배출했는데 2006년에는 53kg, 2019년 64kg을 배출했다"며 "생산성 향상 목적으로 소의 체중이 늘어났고, 소의 무게와 베탄 배출량의 상관관계는 대륙별 온실가스 배출계수로도 확인된다"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업화된 한우 생산이 단순히 '시장에서 수급조절' 되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우 생산과 소비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도록 정부의 정책방안이 수립·운용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정부는 한우 생산·유통·소비 방식이 정부의 탄소중립 비전과 조응하도록 하는 정책방안을 수립하고 그것을 시행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축산 농민, 소비자 등과 함께 정부는 사회적 논의를 촉발해야 한다.
지난 6월 26일(수)에 열린 노회찬재단의 <함께맞는비 포럼>은 그러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고자 하는 취지로 열렸다. 기후위기 시대에 대응하는 먹거리의 생산과 소비 문제를 소비자와 생산자가 함께 논의하자는 것이다. 농업·농촌·농민이 처한 전통적 위기뿐만이 아니라 '기후위기 유발자이자 피해자로서의 농업'을 탈피해야 하는 과제 또한 농민들에게만 부담지울 일이 아니며 적극적인 사회적 공론화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날 발표를 한 <탄소로운 식탁>의 저자인 윤지로 (사)넥스트 미디어 총괄 수석은 먼저 산업화된 농업이 기후위기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했다. 일례로 "전 세계의 질소비료 생산과정에 연간 전 세계 에너지 소비량의 2%가 사용되고 연간 3억 1000만톤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우리나라의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6억 톤이고 프랑스가 연간 3억 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질소비료 나라'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며 그런데 "우리나라의 질소비료 소비량이 195개국 중 14위"라고 질소비료 의존형 농업생산 구조를 지적했다.
또한, "병아리가 성계가 되는데 1968년 당시에는 7주 걸렸는데 오늘날은 4주 정도 만에 성계가 된다"며 효율성을 추구하는 상업화된 육류생산으로 이렇게 가축들의 사육시간이 단축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소 방목지 확대와 사료작물 재배로 브라질의 숲이 지난 40년 사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소개한 뒤 "한국사료협회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사료용 작물중 대두박의 88%, 옥수수의 36%가 브라질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 윤지로, <함께맞는비 포럼> 발표자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농업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일까? 윤지로 수석은 "국내 농업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국내 전체 배출량의 3%라고 되어 있다. 장내발표, 가축분뇨처리, 벼 재배, 농경지토양이 배출원이다. 그러나 이 수치에는 사료 등의 수입 수송발자국, 비료 제조, 하우스내 전력소비, 농기계 사용, 조리, 농작물/음식물 폐기에 따른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국내 총 온실가스 배출량인 6억 9921만톤 중 17%인 1억 2063만 톤이 국내 푸드시스템에서 발생하며, 국내 푸드시스템의 이산화탄소 배출량 중 37%인 4513만 톤이 식당에서 배출된다"고도 설명했다. 먹거리의 생산과 유통, 소비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제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정부의 농업분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훨씬 초과한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 윤지로, <함께맞는비 포럼> 발표자료
이어서 윤지로 수석은 '탄소로운' 먹거리의 생산·유통·소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생산자, 소비자가 모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생산자들은 경제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친환경농산물 생산이 일반농산물 생산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진다. 그렇다보니 친환경농업 인증농가수가 해마다 감소하고 있는 현실이다"라며 "연도별, 지역별 농산물 가격 등락폭이 너무 크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윤지로 수석은 "소비가 먹거리 분야에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변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며 "육식을 줄이고 유기농산물과 제철 과일, 국산농산물을 소비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소비를 통해 적은 정책비용으로 큰 감축효과를 볼 수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2018년 기준 2050년까지 농업 분야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 목표인 930만 톤에 더해 소비자 행동으로 675만 톤을 더 감축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윤지로, <함께맞는비 포럼> 발표자료
이날 첫 번째 토론자인 한살림의 '모심과살림 연구소' 임채도 소장은 윤석열 대통령이 기자회견으로 "농수산식품 장바구니 물가는 큰돈을 쓰지 않더라도 몇 백 억 원 정도만 투입해 할인 지원하고 수입품에 대한 할당 관세를 잘 운영하면 잡을 수 있다"고 한 발언을 지적하며 "이 발언 어디에 농업·농민에 대한 고려가 있느냐?"고 비판한 뒤 "농민들은 기후위기로 인해 과수 수확량이 줄고 병해충 피해가 심각하다고 하소연 한다. 친환경농업 예산을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예산을 삭감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임채도 소장은 "생산주의 농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화학비료와 농약에 의존하는 고투입 농법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탄소의존형 농업의 원인이다. 근본적 농정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소비자 시민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제발 국가 차원에서 재해, 기후위기 등과 관련한 기초조사와 연구를 강화해 관련 통계를 더 자세히 산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토론자인 박웅두 농어민기본소득전국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은 먼저 “1년에 2만ha 이상씩 농지가 감소하고 있다. 농지 규모가 식량자급을 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이다.”라며 “지속가능한 생산기반 확보를 통한 '식량자급률 향상'과 '식품안전성 강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식량가격의 안정'을 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박웅두, <함께맞는비 포럼> 토론자료
이어서 박웅두 공동운영위원장은 "저투입, 저탄소 기후위기 대응 농업으로 전환을 위해서 화학비료 사용량 50% 감축 등 환경친화적인 생산체계를 구축하고, 논 농업의 친환경농업 전면 전환, 자원순환형 경축순환농업 및 동물복지 축산으로 전환, 탄소배출권 거래세 수입으로 참여소득을 지급해 환경친화적인 지역공동체 및 먹거리 안전성 유지 등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박웅두 공동운영위원장은 "곡성군에서 무경운 논 농업을 3년째 실천하고 있는데 관행농업에 비해 소득이 감소하는 어려움을 실감하고 있다"며 "농업기본소득이 지급된다면 이러한 저탄소 논농사가 더욱 확대될 수 있고 청년들이 이 농법을 더 많이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끝으로 "가까운 지역의 유기농 먹거리, 탄소 생태농 먹거리를 선택하는 등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포럼에 현장 및 온라인을 통해 참여한 시민들은 "노동조합의 기후위기 대응 단체협약을 통해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먹거리 생산과 소비 운동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농민-시민운동이 함께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농업 전환 프로그램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정부 예산 확보를 통해 연평균 500만원의 농업소득 지원을 시작으로 기후위기 대응 농업을 실천해야 한다", "노동운동이 사회개혁 운동으로 나아가는 차원에서 공장 밖의 지역 농민 등과 연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먹거리 교육, 단협 대응 등 기후위기 대응 농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노동운동이 실천하면서 '노-농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등의 토론의견이 제기되었다.
언젠가부터 정부에서 조차 '기후위기 시대'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 맥락에서 농업분야의 기후위기 예측과 대응, 적응, 감축 논의는 정부, 농민, 소비자의 역할이 함께 결합되어야 한다. 식량주권 등 '농업·농촌·농민의 다원적 기능' 인정이 불확실한 국내 현실에서 농업이 축소되고, 농촌이 빈 공간이 되고, 농민들이 빈곤해지는 상황을 극복하는 동시에 '기후위기 유발자이자 피해자로서의 농업'을 탈피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농업은 안전하고 안정적인 국민 먹거리 생산을 담당하는 동시에 기후위기 극복에도 기여하는 분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반도체 팔아서 번 돈으로 수입 농산물 사먹으면 된다.'는 식의 사고를 가진 정책당국이나 일부 시민들을 견인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후위기 시대에 조응하는 '농업·농촌·농민의 다원적 기능'을 재구성할 필요가 제기된다. 기후위기 시대에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고 먹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실천은 '농업·농촌·농민의 다원적 기능'을 재구성하고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을 시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박창규 노회찬재단 노회찬비전포럼 운영위원장 |
페트병 생수 대신 수돗물을 마실 결심
위기는 과거가 순간적으로 부정되고, 정지되고, 혹은 폐기되는 순간이자 미래가 아직 시작하지 않은 순수한 잠재력의 순간이다. 위기는 관습적으로 이어져온 그동안의 정상 상태에 대한 의문을 허용하기 때문에,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실험뿐 아니라 정치적 변혁이 생겨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위기가 항상 바람직한 변화만을 낳지는 않았다. 금융위기 사태를 맞은 한국에서는 민영화와 시장개방이 날치기로 이루어졌고, 2019년 코로나19 팬데믹은 ‘비대면’을 핑계로 정부가 그동안 해온 여러 종류의 대면 서비스를 소리 소문 없이 종료시켰다.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방향을 가진 저 공식은 이탈리아의 사회학자이자 생태여성주의자인 앨리스 달 고보에게 재미난 숙제를 안겼다. 위기가 기회라면, 개인에게 일어나는 실직이나 수입 감소 또는 한 지역이나 국가의 경제불황은 사람들에게 생태주의에 대한 관심을 더욱 민감하게 만들었을까, 아닐까. 2007~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는 전 세계의 생태주의를 더욱 촉진했을까, 아닐까. 생태주의 담론이나 실천을 주제로 한 책은 많지만 앨리스 달 고보의 〈나의 행동이 대양의 작은 물방울에 불과할지라도〉(이상북스, 2024)는 접근 방법이 기발하고 흥미롭다.
지은이가 현장 연구를 위해 선택한 지역은 자신의 고향인 이탈리아 북동부의 소도시 비토리오 베네토다. 르네상스 시대의 흔적을 갖고 있는 이 도시는 1960년대부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발발 전까지는 경제적으로 꽤 풍족했다. 세계의 어느 도시나 그랬듯이, 이 도시 역시 급격한 경제발전으로 소비주의가 넓고 깊게 침투되고, 그만큼 생태계는 파괴되어 있었다. 그랬던 도시는 2008년부터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타격을 받으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이 갑자기 끝났다”라는 위기의식이 그곳 시민들을 사로잡았다. 지은이는 2015년부터 1년8개월간, 18~76세의 주민 열한 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일상에서 생태주의가 어떤 식으로 실천되고, 선별되고, 배격되는지 관찰했다.
사례 연구의 첫 번째 인물은 스키 부츠 디자이너였던 오누르비오. 그는 경제침체와 기후변화가 함께 들이닥친 2008년, 회사에서 해고됐다. 안정된 중산층으로 살아온 그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주식투자, 스키·골프·탱고 강사 등 다양한 비공식 활동을 통해 새 삶을 시작했다. 이 활동 중 일부는 그에게 약간의 수입을 가져다주었으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유급 노동에 의해 상품화되었던 자신의 자유와 자긍심을 되찾은 것이다. 수입이 줄었다는 위기감은 그에게 반소비적 생활습관을 갖게 했다. 그 때문에 생겨난 의미 있는 생태주의적 변화는 페트병에 든 생수 대신에 시의회가 설치한 공공 급수기의 물을 길어 먹게 된 것이다.
다시 수입이 늘면 어떻게 될까
생태주의자라고 하면 마땅히 ‘자연’이나 ‘환경’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생태사회주의(정치생태학)를 최초로 제시했으며 앨리스 달 고보에게도 커다란 이론적 자원을 제공한 앙드레 고르스는 〈에콜로지카〉(갈라파고스, 2015)에서 한 번도 자연이나 환경을 생태주의와 연결 지은 바 없다(‘기후재앙’ 같은 말이 나오기는 한다). 생태주의자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소비에 저항하는 것이다. 고르스는 말한다. “‘생태주의자’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바로 이 주제에 의해, 즉 펑펑 쓰는 소비 모델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생태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오누르비오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례 제공자들은 실업이나 은퇴, 이혼 등의 생애 전환을 맞이하여 절약과 재사용·재활용을 습관화하게 되었다. 그런 끝에 절약이라는 자체의 목적을 넘어, 소비가 가져오는 자원 낭비와 폐기물 생산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터득하게 되었다. 소득 감소가 습관적 행동의 반복에 단절을 만들었고, 그러면서 그 반복된 행동을 의심할 여지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수입이 늘어나더라도 이들이 여전히 소비에 저항하게 될까.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그렇듯, 이들의 회복탄력성도 어디로 튈지 모른다.
사실 오누르비오는 실직 상태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유로운 백인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누렸다. 그가 공공 급수기의 물을 길어 먹게 된 행위를 지속 가능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환경 윤리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에서 비롯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은이는 그런 번지르르한 해석을 물리친다. 오누르비오가 공공 급수대를 이용하게 된 것은, 먼저 그에게 자전거를 타고 느긋하게 물을 뜨러 갈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인프라’가 마련되어 있어서였다. 이 두 조건 가운데 하나라도 없었다면, 그의 생태주의적 실천도 없었다.
국가나 사회의 주도권이 시장으로 재편된 신자유주의 시대에, 생태주의적 실천의 신자유주의적 해결은 생태주의를 초자아와 같은 것으로 승격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태주의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처럼 개인의 윤리로 고립시키는 것이다.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은 원래 생태주의자들이 자본과 산업에 저항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었으나, 현재는 자본주의 경제를 존속시키는 데 활용되고 있다. 지속가능성 개념에서 삶을 구성하는 존재 양식 자체에 대한 의문과 맥락이 제거되면서 중산층의 생태운동은 그린워싱(Greenwashing·기업의 이미지나 상품 홍보를 위해 환경친화적인 위장술을 쓰는 것)된 상품을 골라 쓰는 소비로 변질되었다. ‘지구를 구하자!’라는 막중한 임무는 ‘시민-소비자’의 책임이 되었다.
정치생태학과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을 신물질주의(신유물론) 이론과 접합하고 있는 이 책에는 들뢰즈-가타리가 고안한 개념이 수시로 출몰한다. 그렇더라도 원제(‘일상의 생태학’)와 동떨어진 한국어판 제목만큼 난해하지는 않다. 이 책이 생태주의 운동에서 일상이 가진 변혁의 힘을 매우 강조하고 또 ‘좋은 삶’을 향한 개인의 욕망을 매우 중시하기는 하지만, 한국어판 제목은 지은이가 경계했던 핵심과 어긋난다. “개인의 창의성과 역할이 실천에 중요한 것은 맞지만, 변화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변화는 필수 자원을 공급하는 물질문화에서부터 사회의 규범과 표준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사회 기술 체제 수준에서 일어나야 한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하면, 개인의 국지적 행동뿐 아니라 시스템 역학을 고려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연 자원을 끝없이 착취하는’ 현대 소비문화의 확장은 환경파괴의 주원인이다. 따라서 일상의 실천을 바꾸려면 이러한 시스템 수준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장정일 (소설가)/ 시사인
두세 시간 내린 비에 싹쓸이... 이게 실화일까
3년 연속 극한 호우의 피해를 입은 부여
▲ 산에서 토사와 함께 밀려온 컨테이너 기록적인 폭우에 휩쓸려버린 컨테이너가 논으로 떠내려왔다. 인가가 가까이에 없어서 덮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정운수
부여에서 살아온 지난 20여 년의 시간 속에는 5백원 동전 크기의 눈이 내려 순식간에 양계장을 붕괴시키는 장면도 있었고, 태풍 볼라벤에 작업장 한쪽이 날아가 막대한 손해를 본 적도 있었지만 절망보다는 극복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여기며 살고 있다.
지난 7월 8일에서 9일 밤사이 내린 비는 지옥을 경험하게 할 만큼 잔혹했다. 천둥 번개 속에 하늘 문이 열리고 지상으로 마구 빗물이 쏟아지는 빗물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하늘의 거대한 둑이 터져서 물이 마을을 집어삼키는 장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두려움 이전에 이게 실화일까 하는 마음부터 생겼다.
집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곧 집을 덮칠 것 같더니, 순식간에 흙탕물 강이 현관 앞에 생겼다. 배수구는 이미 기능을 잃어버렸고 한밤중이라 피난 갈 데도 생각이 나지 않고 호우를 뚫고 나갈 용기도 나질 않았다. 진퇴양난, 속수무책으로 발만 동동 구르는 밤이 지나고 세상이 조용해졌다. 마당에 나가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뉴스를 보기도 겁이 났다. 다행히 현관 쪽에 약간 물이 차오르다가 비가 그치고 물이 빠져나갔다. 천만다행으로 수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 메론을 심은지 이틀만에 닥친 극한 호우 피해 내리 3년째 폭우의 피해를 입은 하우스. 백마강 펄이었던 곳을 막아 농토를 만들었으나 배수 용량의 한계로 매년 호우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기후 위기로 극한의 호우가 계속되는 한 하우스 농업도 위기가 될 수 있다.ⓒ 박윤근
멜론을 심은 지 이틀이 지난 지인의 하우스가 생각났다. 농작물을 심은 농민들의 피해가 더 걱정되었다.
"물어보들(물어보지도) 말어. 성한 디(곳)가 한 동도 읎어. 올해도 소용 읎어. 다 물 담었지 뭐여.(물에 잠겼지)"
내리 3년째 폭우 피해를 당한 규암면의 지인이었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피해를 확인하기도 민망해서 SNS를 열어보았다. 피해 상황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단체 대화방들에서는 비명 소리가 들려오듯 피해 사진들이 속속 올라왔다.
사진들 속에는 양계장에 물이 차서 병아리들이 쓰러져 있고, 왕대추나무가 크고 있는 하우스마다 흙탕물이 흥건하다. 토사가 밀려와 땅이 되어버린 논에는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가 끊어져 엎어져 있는 장면 등 셀 수 없는 비 폭탄의 피해 사진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부여의 오랜 세월이 함축된 문화재들의 피해도 심각했다.
▲ 양계장 수해 현장 너무 많은 양의 비가 쏟아져 배수가 되지 않아 양계장으로 물이 넘쳤다.ⓒ 신수철
시끄럽던 4대강 사업의 효과는 어디에 있는지
문제는 이런 피해가 3년 연속 지속되는데 근본적인 대책 부재가 문제다. 재난에 대한 해결책을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 기후 변화는 어쩔 수 없지만 배수로 정비와 지반이 약한 곳은 미리 점검했어야 한다. 하긴 200년 만이라는 역대급 이번 폭우는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폭우였다. 인명 피해가 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
부여는 오랜 세월 백마강 중심으로 발달한 곳이다. 서해로 흐르는 백마강은 백제를 해상왕국으로 발돋움하게 했고 강변의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작물은 백제인들을 먹여 살리고 찬란한 문명을 발달시켰다.
근대에 와서 백마강을 의지해 살았던 부여 사람들은 강변에 제방을 쌓고 강 갯벌에 농토를 조성했다. 경지정리를 하고 벼농사를 짓던 시대를 지나 대단위 비닐하우스 단지가 생겼다. 4대강 사업으로 부여의 르네상스를 만들겠다던 정부에서는 백마강에 거대 자본을 들여 강변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을 이주시켰다. 그 대가로 어릴 적 백마강 변 수박밭에서 수박 서리를 해서 강 건너 모래톱까지 헤엄쳐서 수박을 깨 먹곤 했다는 추억의 백마강은 사라져 버렸다. 시끄럽던 4대강 사업의 효과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군청 앞으로 곡괭이 데모라도 하러 가야 한다니께."
"공무원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정부예산이 부족하다쟎아요."
"이제 정말 농사짓기 싫어지네유. 울화통만 터지네유."
백마강 둑에 제방을 쌓아 생긴 농토에서 시설 하우스를 재배하는 농민들의 대화엔 분노와 자포자기 등 복잡한 심경이 난무했다.
70년대 경지정리로 농토를 조성하면서 만든 도랑이 배수 용량의 한계를 넘어서 농토로 범람하는 피해가 3년째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서야 배수로가 설계부터 잘못됐다고 비난하지만 당시 기술적 한계를 어쩌겠는가. 그것을 현재 바로잡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예산과 시간이 투입되어야 한다고 한다. 부여처럼 재정 자립도가 낮은 지자체의 예산으로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배수로 정비 예산을 감당할 수가 없다.
작년 수해 피해로 재난 지역이 선포되면서 부여군에서는 국비 80%, 지방비 20% 비율로 예산이 투입되어 작년의 피해를 복구하는 중에 다시 수해를 입었다. 도로가 유실된 곳과 산 절개지 피해 현장 등 시급하게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는 곳부터 국가 예산이 쓰인다.
부여군에서도 피해 복구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연이은 폭우와 예측 불가의 기후 재난에는 대책이 없다. 예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쏟아지는 비에 대응하는 농업 정책도 미흡하다.
"영양제도 새로 주고 살균제도 새로 줘야혀. 물 먹은 나무에서 계속 대추가 떨어지고 있으니 영양을 보충해 줘야 살지 않겄어. 하우스 안만 쳐다보고 있으면 속에서 더 천불이 나니께 오늘은 들여다 보지도 않았어."
손 시린 이른 봄부터 한증막 열기를 방불하게 하는 최근까지 하우스를 드나들며 농사를 지은 농민의 정성이 무색하게 두세 시간 내린 비에 싹쓸이 당한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 주차된 화물차가 도로 유실로 떠내려 갔다. 도로 유실과 지반 침하, 제방 붕괴 등의 피해가 가장 심각하다.ⓒ 정운수
3년 연속 비피해... 대책은?
지난 8일부터 10까지 3일간 내린 집중호우로 부여 지역 공공 시설물과 사유 시설물의 피해는 이날 오후 기준 152억으로 추정됐다. 이번 집중호우 피해는 지역을 특정하지 않고 부여 전지역에서 일어났다.
물 폭탄의 집중 공격으로 지반이 약해져 길이 유실되고 토사 유출 피해가 유독 심한 상태이다. 통행량이 많은 지방도부터 산에서 흘러내린 토사를 치우고 있지만 인가와 먼 곳과 인적이 드문 곳은 언제 복구의 손길이 닿을지 모른다. 부여는 가구마다 크고 작은 수해를 당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집중호우가 지나간 흔적이 너무 크다.
천재지변이든 인재든 재난 현장마다 쫓아다니며 죄인처럼 조아리며 비난을 감수하는 지자체장과 공무원들도 안되어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3년 연속 특별 재난 지원금을 요청하는 지자체장의 표정도 유난히 어둡다.
대책이 없다. 원인을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작년 은산면에 집중된 피해는 밤나무를 심느라 무분별하게 산을 개발했던 것이 원인이었지만 부여 사람들은 그 주장에 겉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 알고 있다. 지금의 기후 재난은 난개발, 환경 오염, 자연 훼손 등의 총체적인 결과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인간이 조금 더 나은 여건에서 살기 위해 자연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인간 위주로 개발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 안다.
▲ 서동용 둘렛길 데크 아래 지반이 유실되었다. 데크 아래 지반의 유실로 데크를 지지하는 시멘트 구조물이 공중에 떠 있다.ⓒ 오창경
'빗낱 던지고 있슈' 라는 말은 부여 사람들이 비가 오는 모습을 표현할 때 쓴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표현인데 3년 연속 비 피해 속에 쓰기에는 부끄럽고 민망한 말이 되고 말았다. 오마이뉴스 오창경(och0290)
거창 골짜기까지 싹싹 훑어 '토종씨앗' 모은 여성들
함양 농업에 토종종자 생태계 마련하기
토종종자는 오랫동안 농민들의 손에 의해 최소 30년 이상 이 땅에 심겨진 종자를 말한다. 매년 심겨지며 조금씩 그 땅의 생태계에 맞춰서 적응해 온 토종종자는 우리 삶의 터전과 유기적으로 공명하는 존재이자 농민들이 세대를 거듭하며 만들어낸 하나의 문화유산이다. 최근 유전자변형 농수산물(GMO)과 종자주권 등의 이유로 이미 많이 주목받은 토종종자가 이상기후로 인한 기후위기 속에서 다시 한 번 그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지역 풍토에 맞는 다양성 확보를 통해 병해충 및 환경변화에서 생존율이 뛰어난 토종농작물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농업 문화유산인 토종종자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 거창군여성농민회 신은정씨ⓒ 주간함양
"토종씨앗의 소득창출은 소득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지속가능성에 목적이 있다."
거창은 토종종자 생태계가 갖춰진 지역으로 평가받는다. 생태계라고 하면 순환과 지속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토종종자 생태계는 앞서 살펴본 다양한 지역의 우수사례들이 모두 한 지역에 나타나야만 가능하다. 토종씨앗의 중요성을 알고서 토종씨앗을 수집해야 하고, 토종씨앗 보존을 위해 작물에 따른 농사법도 파악해야 하고 주변으로 나누며 확산시키는 역할도 해야 한다. 씨앗의 가치는 작물로 나오기 때문에 토종씨앗을 요리로 이어주는 것 역시 중요하다. 안정적인 생태계를 위해서는 토종작물을 통한 소득 역시 창출되어야 하고 교육과 행사를 통해 문화적으로 토종씨앗의 가치를 퍼뜨리는 활동도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이 원활하게 진행될 때 토종종자 생태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거창군의 사례는 거창군여성농민회(아래 거창여농)와 아날협동조합의 신은정씨를 중심으로 2015년부터 시작됐다. 대한민국에서 토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첫 발자국 2008년 토종씨드림이 시작될 때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아래 전여농)이다. 전여농에서도 자체적으로 2011년 3월에 1회원 1토종씨앗 지킴이 발대식을 진행하는 등 네트워크를 구성해서 토종씨앗을 나눔하고 증식하는 노력을 이어왔다.
신은정씨는 2016년 고향인 거창으로 돌아와서 여농 활동을 이어가게 됐다. 그중에서도 식량주권 활동에 집중했는데 그런 관심이 토종씨앗으로 이어지게 됐다. 그렇게 신은정씨 중심으로 2017년 거창토종살림 동아리가 만들어지면서 토종씨앗 활동 발판이 마련됐다.
"그래서 2018년부터 토종씨앗 공부를 본격적으로 이어갔어요. 전여농을 통해 토종씨앗을 교류하는 수준이었는데 거창에도 토종씨앗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지역에 있는 것들을 보존하고 발굴해 내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수집 활동을 계획하게 됐어요."
그 시기 거창읍 중심지 활성화 사업을 기회 삼아 거창군 신원면을 중심으로 수집 활동을 시작했다. 토종씨앗 수집 활동을 위해 토종씨드림 변현단 대표를 통해 수집 매뉴얼을 전수받는 등 철저한 준비를 마쳤다.
씨앗이 많이 나올 것에 확신이 없었던 것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많은 자원이 쏟아졌다. 신원면 조사에서만 총 83점이 모였다.수집번호를 매기고 원예작물과 식량작물을 구분했다. 분류와 작물명을 나눈 뒤 품종명을 기록했다. 보유년과 누구에게서 수집했는지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다. 메주콩, 늦마늘, 나물콩, 흰옥수수 등 모두 오랫동안 전승되며 용도나 모습, 색 등에 따라 부르던 이름이다. 그렇게 첫 번째 활동집이 만들어졌다. 수집한 작물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수집한 토종작물을 활용한 토종밥상과 요리법, 씨앗을 나눠준 할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활동집에서는 '갖가지 사연이 담긴 신원면에서 만난 씨앗들은 그 자체로 지역의 역사였습니다'라고 씨앗 수집 활동을 설명한다."씨앗 수집을 하면서 보유자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이야기를 듣는데 흘려듣고 말 이야기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씨앗을 수집할 때마다 들은 이야기를 전부 기록했어요. 수집을 나갈 때도 사진 담당, 인터뷰 담당 등 분업을 해서 수집 활동을 나갔죠."
할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작물에 대한 이야기였겠지만 삶의 이야기였다. 신원면 번득마을 지분조 할머니는 90대의 고령에 "농사지어 심어봐야 누가 먹냐"면서도 봉투마다 고이고이 토종씨앗을 나눠서 고장난 냉장고에 넣어뒀다. 지분조 할머니께서 60여년 전 산청 친정에 다녀오며 받아온 호박씨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이야기. 모두 활동지에 생생하게 담겨있다.
거창군 토종씨앗 전수조사
거창군은 12개 읍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원면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거창토종살림은 거창 전체로 이 움직임을 확장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거창군 전수조사를 실시했어요. 그냥 대표마을만 대충 간 게 아니라 정말 구석구석 자연 마을과 가구수 몇 없는 골짜기까지 전부 들어가서 싹싹 훑었어요. 없으면 없는대로 살펴보고 사람이 있으면 꼭 이야기 나눠보고 그랬어요. 원래 2019년 마무리 예정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일정이 자꾸 늦춰지다 결국 2020년도에 전수조사를 마무리 했어요."거창국여성농민회 박정숙 회장은 "1, 2년 만 일찍 조사했으면 조금 더 많은 씨앗을 찾을 수 있었는데 몇 년 사이 손을 놓아버린 씨앗들이 있어 아쉬웠다"고 밝혔다.
토종은 소득작물로 이어지기 어렵다. 생산성을 중심으로 개량된 개량종보다 모양, 크기, 양에서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종에는 다양한 맛과 모습이 있다. 소득을 중심으로 농사를 짓는 대농들은 진작 토종을 포기했지만 우리 가족 먹을 토종을 계속해서 이어온 것은 소농 중심의 농사였다. "장맛이 달라서 안된다"며 콩깍지가 터져 콩이 튀는데도 토종콩을 고집해 온 할머니들은 이제 물리적으로도 씨앗 받는 농사를 이어가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그 소멸의 순간에 거창군은 지역 전체 전수조사를 했다.
거창군의 전체를 전부 훑고 나서는 마음이 편안했다는 신은정씨. '일단 수집했다'는 안도감이 있었다."보람 있었어요. 거창의 씨앗을 전부 수집했다는 것도 있지만 거창 지역만의 특징을 가진 씨앗도 있고, 거창에서만 나온 씨앗도 있어서 전국적으로도 다양한 품종을 확보했다는 것에 가치가 있어요."
수집된 콩 중 물레콩이 있다. 주목적은 콩나물을 길러 먹는 용도다. 나물콩이라 부르기도, 질금콩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드물게 나오지만 거창에서는 오래전부터 많이 재배해오던 콩이다. 수집번호 190번, 180번 분홍하지감자도 특별하다. 분홍하지감자는 국내 유입된 감자 종류 중 굉장히 오래된 감자다. 이런 토종씨앗들은 검토를 통해 추려서 토종씨드림을 통해 유전자원센터로 일부, 토종씨드림 중간 보관 일부, 그리고 거창여농에서 현지 내 보존을 실시한다.
"저희가 수집한 게 총 295점이 돼요. 그런데 이걸 매년 농사할 수 없으니 일단 냉장, 냉동보관을 통해 씨앗 장기 보관을 해요. 일부는 해마다 품종을 선정해서 계속 살려내는 거죠. 씨앗의 활력이 살아있도록 연도별로 선정하는데요. 씨앗이 얼마 남지 않은 것, 할머니 연세가 많은 것 위주로 증식을 먼저 해요. 그다음으로는 지역에 나눌 수 있는 것들 위주로 해요. 보존도 중요하지만 나눔도 중요해요."
작물 증식은 거창여농이 운영하는 채종포(씨앗을 받는 밭)가 담당한다. 이때 작물의 특성 기록을 위한 사진촬영이 진행된다."저희는 도감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작물 사진까지 다 기록으로 남겼어요. 다른 지역을 보면 씨앗만 사진을 찍어서 도감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씨앗만 봐서는 일반인들이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저희는 직접 재배하는 과정을 가지면서 어떤 작물인지 기록을 남긴 거죠. 웬만큼은 다 담은 것 같아요."그렇게 만들어진 책은 <거창 토종씨앗 도감>으로 거창군과 거창여농이 중심이 되어 책을 만들었다. 씨앗의 크기와 작물의 모습, 특징이 되는 모습까지 전부 정리해서 품종별로 정리되어있다.
거창 토종씨앗 운동은 우수사례가 되어 함양, 거창, 남해, 고성 등 다양한 지역으로 가서 활동 내용을 공유하는 등 타 지역의 토종씨앗 운동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거창은 여농 조직도 있고 동아리도 있다보니 체계적으로 움직이기에 여건이 좋았어요. 하지만 다른 시골은 젊은 분도 잘 없고 활동하기가 쉽지 않은 면이 분명히 있어요. 농사 짓는 분들은 농사에 전념하기도 바쁘니까요. 거창의 사례는 회원분들이 다들 열정적으로 참여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마지막 단추 소득창출
토종씨앗 농사가 진행된다고 해도 소득으로 이어지기까지는 굉장히 어렵다.한살림 거창 매장 맞은 편에 위치한 카페 아날. 아날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카페다. 여기서는 토종팥으로 만든 팥라떼를 판매하고 있다.
"저희가 수집한 자원 중 '재팥'이 뛰어난 자원이더라고요. 그래서 재팥을 이용한 음료를 개발하는 등 소득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겨울엔 찐빵도 해요. 지금은 아직 시범 단계지만 다양한 제품 개발을 통해 토종작물이 소득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토종씨앗의 소득창출은 소득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지속가능성에 목적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경상남도에서 진행하는 '토종농산물 소득보전 직불제'에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게 신은정씨의 의견이다.
"현 제도는 형식적인 거죠. 농민들이 10년 전, 혹은 50년 전부터 대물림해서 받은 씨앗이고 토종인데 증명할 길이 없죠. 경상남도 농업기술원에서 주는 씨앗을 받아야만 되는 거예요. 딱 선정된 품목만. 토종작물은 농협이 수매도 안 해줘요."
수입이 적은 것도 문제지만 아예 안 되는 건 더 큰 문제다. 토종씨앗을 경작하면서 큰 소득을 바라진 않지만 땀 흘려 경작한 토종작물이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 때 농민들은 허탈함을 느낀다. 농민들은 "농사지을 재미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저희가 토종씨앗 관련해서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고 실적도 있고 하니까 군에서도 많이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번엔 직불금 관련해서 이 제도를 개선해 보려고 해요. 토종 인증에 대해서도 이 지역에서 수집이 돼서 유전자원센터에 등록이 된 토종인데 허가가 안된다고 하면 문제가 있는 거죠. 어쨌든 최소한 유전자원센터에 등록이 되어서 고유번호를 부여받은 작물에 한해서는 직불금에 포함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예요." 함양뉴스 (최학수PD)/오마이뉴스
토종씨드림 변현단 대표
토종씨앗운동의 본산, 토종씨드림
현대 농업과 전통적 식문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농업 환경은 피폐해졌고, 박정희 정부의 녹색혁명 시기에는 화학 비료와 개량종자가 도입되었다. 당시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상업용 종자와 화학 농업이 장려되었고, 이는 토종씨앗의 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낳았다. 토종종자는 상업 종자에 비해 균일성과 수확량 모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상업용 농가들에서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토종씨앗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변현단 대표는 토종종자는 상업 종자로서 지위를 회복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지금도 한살림 등에서 친환경 농업하는 사람들 중에서 토종을 다루는 사람을 극소수입니다. 두 가지 측면이 있죠. 토종종자를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는 교육과 인식이 모자라서가 아니에요. 안정적인 소득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는 토종씨앗의 장점으로 소개되는 ‘맛’은 농업 구조 시스템 속에서는 부가적인 요소에 들어가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종자에서 맛을 찾지 않는 것도 한몫하죠. 된장을 맛있게 만들기 위해 황태 다시마 등을 사용해서 된장을 만들지 맛이 뛰어난 콩을 쓸 생각은 안 하죠”
할머니들이 “맛있다”며 나눠주는 토종종자는 현대 요리법에서 느끼기 힘들 거라고 변현단 대표는 말한다.
“과거 우리 식문화는 약식동원의 원칙으로 형성이 됐거든요. 돼지고기를 왜 새우젓과 먹는지, 회 밑에는 무를 왜 까는지 등 식문화를 약으로 먹어왔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원칙이나 음식의 궁합이 없어요. 우리는 가정 속에서 교육 받은 적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 식전통적인 식문화 복원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 핵심에 토종씨앗이 있는 거죠”
요즘 젊은 세대를 전통적인 식문화와 가장 멀어진 세대라고 평가한다. 식문화와 단절된 채 단순히 토종종자만을 보존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결국 농산물은 음식으로 그 가치를 다하기 때문이다.
개량종자 무는 그냥 먹어도 정말 시원하고 달다. 토종무는 개량 무에 비해 매운 맛이 강하다. 그냥 먹기 어렵고 누군가는 맛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토종무로 동치미를 담그면 2~3개월 뒤에 발효가 되며 매운 맛이 없어진다. 토종무로 담근 동치미의 맛은 먹어 본 사람만 그 맛을 이해한다.
“어떤 방식으로 요리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요. 토종종자 연구를 하면서 요리법도 조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토종씨앗운동의 본질
변현단 대표가 말하는 토종씨앗 운동의 본질은 공유와 나눔의 철학이다. 씨앗은 자연에서 시작을 했고 인간의 노력으로 계속 이어져왔다. 토종씨앗은 세대를 거듭하며 우수한 형질의 종자를 심는 걸 수 없이 반복하며 만들어온 결과다. 계속 되물림되면서 자식들에게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독점적 배타권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변현단 대표의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종씨앗 운동이 단순히 나눔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씨앗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왔는지를 고민하는 마음 없이 단순히 씨앗을 물질적으로 나누기만 한다면 토종씨앗이 유지되기 어렵다.
“토종씨앗이 사라지게 된 배경에는 공동체성이라던가 나눔과 공존. 그러한 많은 정신들이 버려진 현대 사회가 있어요. 그래서 저희들의 토종씨앗 운동이라는 거는요. 그러한 나눔과, 공존 등의 정신들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토종씨앗을 보존한다는 건 토종씨앗이라는 하나의 물질적인 매개를 통해서 앞으로 삶의 문화나 정신 이런 모든 것들이 함께 복원되어 합일되는 과정이라고 보고 있어요”
WVS에서 실시한 2022년 세계 가치관 조사(world values survey) 에 따르면 ‘자녀에게 가르칠 자질 5가지’를 선택하라는 조사에서 관용, 종교, 순종, 이타심 항목은 세계 평균보다 낮은 상태로 집계 되었는데 특히 이타심은 전체 4%였다. 비슷한 문화권인 중국(28.7%)과 일본(33%)에 비교해도 상당히 낮은 수치다. 현대 대한민국은 이처럼 물질주의에 따른 공동체정신이 결여되어있다. 많은 연구에서 지적하는 대한민국의 물질주의 심화 현상이 공동체에도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농촌과 도시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고 농촌의 대가 끊기고 일손이 부족한 현상이 발생했을 때 국가의 대안은 기계화 농업이었다. 정신은 아예 배제하고 물질과 기술로 공백을 채웠다. 기후위기 상황 속에서 대안으로 스마트팜을 제안하는 요즘의 모습과 닮아있다.
토종씨드림은 대한민국 토종씨앗 운동의 대모다. 역사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펼쳐지는 여러 토종씨앗 운동의 산파 역할을 해왔다. 그렇게 퍼진 토종운동의 씨앗은 지역에서는 지역에 맞게 도서관 등 다양한 형태로 싹을 틔웠다. 그렇게 토종씨앗 운동은 연결고리를 만들며 퍼지고 있다.
“제가 하는 말을 요약하자면 ‘씨앗 너는 나다’예요. 처음에는 51명이었어요. 지금 토종씨드림 회원을 보면 만 명이 넘을 거예요. 토종 심는 사람들은 더 많을 거고 토종씨앗 활동한다는 사람도 굉장히 많아요. 이런 활동가들이 많은 씨앗이 되고 그 씨앗이 품고있는 공감, 배려, 공동체 그 모든 가치는 단순히 씨앗과 농사가 아니라 삶과 마음에 자리잡게 되는 거죠. 씨앗을 나눠주신 할머니들이 먹지 않고 이익이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씨앗을 이어가고 나눠주던 배려하던 그런 정신이 반복되는 거죠”
씨앗도서관협의회 박영재 대표
“유전자원 보존 원칙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현지 외 보존과 현지 내 보존. 농진청이나 백두대간 수목원에 있는 시드볼트가 현지 외 보존을 하고 있으니 현지 내 보존을 고민해야 해요. 그렇게 보존하는 게 작물의 특성도 해치지 않으면서 지역의 자산을 보존하는 의미도 갖고요”
현재 전국에 홍성씨앗도서관을 비롯해 15군데 토종씨앗도서관이 있고 대기하고 있는 지역도 35군데나 있다. 전국씨앗도서관협의회의 목표는 전국 255개 기초지방자치단체 모두에 씨앗도서관을 만드는 것.전국씨앗도서관협의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춰 밭의 유형과 심는 작물을 컨설팅하고 종자 역시 지원한다.
토종씨앗 저변확대가 중요한 이유, 기후위기
유전자변형 농수산물(GMO)과 종자주권 등 이미 필요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됐던 토종씨앗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은 이유는 바로 기후위기다. 이상기후 앞에서는 오랜 기간 축적된 농업지식 역시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 토종씨앗의 다양성이 하나의 해법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매년 새로 심는 F1 종자와 달리 토종씨앗은 수확한 씨앗을 이듬해 새로 심는 농사를 반복해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적응한다는 특징도 가진다. 토종씨앗으로 기후위기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자, 그리고 적응을 해낸 종자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씨앗을 유지하기 위해서 짓는 농사에서는 씨앗이 점점 안 좋아질 수 밖에 없어요. 넓은 땅에서 농사를 지으면 씨앗이 좋아지겠죠. 재배해서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량한 개체들을 계속 선발하는 효과를 만들어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유지라고 하는 것은 대단위 면적에서 이뤄지는 재배인 거죠”
석과불식(碩果不食). 큰 과실은 먹지 않고 내년을 위해 남겨둔다는 뜻이다. 최초의 농경이라고 말하는 신석기 시대. 기원전 8,000년 전부터 약 일만년 동안 대부분 농부의 손을 거쳐 우량한 종자를 분별해내던 그런 전통이 끊어졌다. 미묘하게 변하는 환경과 기후에 적응해내던 종자들은 이제 몇몇 사람들을 통해 간신히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고유한 유전정보를 보유한 야생콩 7천점 연구자, 정규화 교수
토종콩과는 다른 유전자원, 야생콩
우리가 키우는 작물은 재배종. 재배종 안에 토종이 포함된다.
“토종이라고 하는 건 그냥 키우고 있으면 토종이야. 오랫동안 키우면 토종이라고 해. 토종 토마토도 있어. 야생은 본래 근본적으로 자생하는 걸 야생종이라고 부르지”
야생종 중 작물이 된 건 야생근연종이라고 부른다. 야생근연종은 개량종이 아닌 원종이기 때문에 육종의 소재로 쓰인다. 따라서 정규화 교수의 야생콩 정보는 콩 육종에 있어 필수적인 자산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유전자원을 교수 개인이 지켜나가게 된 이유는 정부 정책에 있다. 정부 정책은 콩을 수입하는 것으로 맞춰져 있다는 게 정규화 교수의 설명이다.
“콩 수입에 집중하니까 우리나라 콩 자급률이 높아질 수 없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로 좋은 콩을 개발하겠다고 하면 내 돈만 소모하게 되는 거야”
70세 고령의 나이에 접어든 정규화 교수는 이제 다른 나라 종자회사들하고 일을 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리고 적합한 회사를 찾는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많은 수십억을 들여서 할 수가 없어, 할 사람도 없고. 지금 진주로 옮겨서 그렇지 학교에서 종자를 유지할 땐 매년 1억에서 1억 5천이 들어가. 내 월급보다 더 들어가는 돈이지. 그걸 수십년 했는데 남아 있을 게 있나? 아무 것도 없지”
정규화 교수의 콩은 한반도에서 자생한 야생콩이기에 가급적 외국의 간섭 없는 육종 개발이면 좋겠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콩을 제일 많이 생산하는 북미와 남미의 학회에 가서야 대우를 받는다. 국내에서는 그런 대우를 못 받지”라고 웃으며 말하는 정규화 교수의 말은 블랙코미디다.
유전자원의 중요성은 청양고추를 통해서 쉽게 볼 수 있다. 한국인의 매운맛으로 표현되는 청양고추도 실은 외국계 회사 품종으로 일부 로열티를 지불하며 재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미래 농업에 대한 내용은 우리나라에서 잘 안 통해. 아주 가까운 것만 보기 때문이지”
농업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정규화 교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농업은 그냥 암담하다고 보면 되지. 거의 큰 변화가 없을 거야, 앞으로도”
부정적인 견해로 운을 띄운 정규화 교수는 우리나라 농업 정책과 식량 자급률 문제를 꼬집었다.
“지금 정부가 스마트팜을 권장하고 있지만 그렇게 돈이 많이 들어가는 농업은 일반적인 농업이 아니야. 스마트팜 시설에 지원을 하는 것보다는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수매해주고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주는 정책이 필요하지. 그게 뭘 의미하느냐면 국민들이 먹고 사는 식량을 안정적으로 책임져주는 사람들을 돕는 거야”
농산물 수매는 식량 자급률과 직결된다. 1970년 79.5%이던 식량자급률은 지난해 32%로 해마다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 농산물 수매로 표현되는 농민 주권 혹은 농민 처우 개선은 식량 자급과 맞닿아있다. 미래를 대비해 농민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방법을 고민해야한다는 것이 정규화 교수의 주장이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이상기후 등 급변하는 상황 속 식량 인플레이션을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우리나라 식량안보지수(GFSI)는 OECD 가입국 중 최하위권에 해당한다. 국제 식량 가격이 요동치면 물가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른 거 없어. 국민 생활 필수품. 먹고, 입고, 자는 거. 그게 저렴한 나라가 선진국이지. 정세가 급변해서 관세 장벽이 높아지면 어떡할 거야. 그런 면에서 우리 농업은 미래를 생각해야해”
콩을 종자 상태로 보관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5년이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밭에 심어 증식을 해야 한다. 물론 야생종의 특성을 고려해 농약과 비료 없이 자연 그대로 키운다.
야생콩과 육종된 재배콩을 비교하면 천지차이다. 야생콩은 제대로 먹기도 힘든데 비해 재배콩은 낱알도 크고 빨리 성장하고 단백질도 많다. 하지만 재배콩은 그런 특성을 얻게 되면서 잃은 정보들이 많다. 유전적인 다양성이 낮아진 셈이다. 유전적 다양성이 높은 야생콩은 어떤 성질을 갖고 있을까?
“한 개만 이야기 하자면, 우리가 노인이 되면 다리에 힘이 빠져버리잖아. 근육이 약해져서 그런 거야. 야생콩에는 근육의 퇴화를 막아주는 물질인 플라보노이드 성분이 있는 거야. 분명 재배콩은 야생콩에서 발달된 건데 이런 성분은 발견되지 않지. 참 재밌더라고”
현재 연세대학교의 도움을 받아 유전자원 분석을 마친 콩은 약 500점 정도다. 500점 분석을 위해 사용된 연구비용은 대략 10억원이다.
우보농장 이근이 대표
책 <조선도품종일람>은 일제 통감부가 1906년 농축산 기술 발달 및 종자개량을 목적으로 설치한 권업모범장에서 1911년에서 1913년에 걸쳐 조선의 모든 벼 품종을 수집 조사한 내용을 엮은 자료집이다. 책에서 논 메벼 876종, 논 찰벼 383종, 밭 메벼 117종, 밭 찰벼 75종 등 우리나라 토종벼 총 1,451종을 소개했다. 농촌진흥청 조사에 따르면 토종벼 재배면적은 1912년 전체 벼 생산 면적의 97%였으나, 10년 조금 지난 1923년에는 33%, 1928년에는 22%로 급감했다. 생산량이 높은 개량종이 빠르게 도입되면서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무렵에는 실질적으로 소멸했다. 지금 현재 나오는 모든 개량벼는 전부 일본벼를 원종으로 계보를 만들어가는 쌀들이다. 고시히카리, 참드림, 밀크퀸 등 전부 일본벼를 뿌리로 둔다.
“지금 우리 식탁의 쌀은 전부 일본 식민 상태 그대로예요. 왜냐면 원종 자체를 일본 원종으로 다 개량했기 때문에 지금도 고양의 가와지쌀도 그렇고 전부 일본 원종이에요.”
가와지볍씨는 1992년 고양시 가와지마을 유적에서 발굴된 5,020년 된 볍씨로 이 유물을 중심으로 한반도 농경문화의 시작을 알 수 있기에 가치가 높다. 이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야기의 스토리텔링으로 만들어진 고양 가와지쌀이 사실 일본쌀 품종을 원종으로 한다는 건 꽤나 큰 충격이다.
“아끼바리와 고시히카리를 몰아내자고 경기도권에서 가져온 게 참드림인데 참드림도 전형적인 일본 품종을 원종으로 하는 쌀이거든요. 그러니까 토종 원종을 이용해서 한 품종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야. 토종쌀이 450종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에서 1945년 사이에 완벽하게 소멸돼 없어져버린 거예요. 키우지 않은 거죠. 70살, 80살 되신 분도 잘 몰라요. 알더라도 다마금 품종이지. 다마금도 일본 품종이에요. 그걸 토종으로 알고 있어요. 이거 보면 여전히 우리 식탁의 쌀은 일본 식민 상태로 있구나 하는 거죠”
그런 가운데 이근이 대표의 우보농장에서는 100여 품종의 토종벼가 자라고 있다. 토종벼는 한반도 전역에서 수천, 수백 년을 함께하며 각 지역과 토양, 기후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그만큼 종류도 다양하다. 지역 이름을 딴 것도 있고 동물 이름을 딴 것도 있다. 생김새나 쓰임새에 따라 이름을 붙인다. 족제비의 털처럼 생긴 족제비찰. 낟알이 까투리의 깃털하고 똑같이 생긴 까투리찰. 한가위 때 먹었던 가위찰.
이렇게 쓰임새와 스토리, 그리고 지역성이 있기 때문에 토종벼 재배를 위해 찾아오는 농부들에게는 지역에 따라 품종을 권장한다.
전국토종벼농부들
전국토종벼농부들은 이근이 대표가 씨앗을 받아간 사람들과의 네트워킹을 위해 조직한 단체다. 매년 토종벼와 관련한 다양한 행사를 한 제8회 전국토종벼농부대회의 주제는 ‘토종쌀과 막걸리’였다. 심포지엄도 열고 다양한 분야의 발표도 진행된다. 유료로 진행하지만 매번 평균 200명이 모일 정도로 핫하다. 전국에서 모이는 다양한 품종의 토종쌀 만남의 기회는 덤이다.
“저는 항상 토종쌀로 술을 빚는 걸 되게 중요하게 여겨요. 우리 전통주는 토종쌀로 했을 거 아니에요? 과거에는 자기 지역에 쌀이 달랐잖아. 그럼 쌀이 다르면 술맛이 다른 거죠. 발효의 핵심인 누룩균도 지역마다 다 달라요. 거기에 물 다르죠, 손맛 다르죠. 그러니 토종벼가 1451종 있을 때 1910년 당시 주막이 37만 5,700개였어요. 그렇게 많은 주막에서 빚었던 게 전통주고 막걸리였죠. 우리나라는 어마어마한 술의 나라였던 거예요. 그런데 그게 토종쌀과 함께 다 사라져버린 거지. 쌀이 사라지고 우리 토종쌀도 사라지고 누룩이라고 하는 방식에서 입국이라고 하는 일본식 술이 되면서 모든 게 다 사라져버린 거죠”
제8회 전국토종벼농부대회 포스터 초대의 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사라져서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잊혀져 간 두 가지가 있다면 마을마다 빚었던 가양주 문화와 지역마다 다른 벼를 심었던 토종벼다”며 “지역마다 다른 품종의 쌀로 빚은 다양한 막걸리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 우리나라는 단연코 쌀의 나라이자 술의 나라였다는 사실을 한 번쯤 기억해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일본 원종의 개량벼는 긴보즈(은방주)와 아끼바리(추청)를 이어 고시히카리(월광)로 넘어가 최근 가장 각광을 받는 품종인 밀크퀸에 도착했다. 밀크퀸은 일본 품종이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에 로열티를 주면서 우리나라에서 재배하고 있다. 우보농장이 있는 고양 덕양구 벽제동에는 벽제농협이 있다. 벽제농협에서도 밀크퀸을 고민하고 있었고 그 시기에 이근이 대표는 벽제농협에 토종쌀 경작을 추천하며 농협에서는 블라인드 테스트 장이 열렸다. 가와지쌀, 밀크퀸, 아끼바리, 참드림 그리고 토종쌀 귀도까지 총 다섯가지 쌀을 평가했는데 압도적인 차이로 토종쌀 귀도가 1등을 차지했다.
원종이 개량종을 품질로 이긴 사례이자 토종이 일본종을 이긴 사례다. 이후 벽제농협은 2024년 초 귀도를 대량으로 심었다. 농부 개인 단위나 토종 모임 단위로만 이어지던 토종쌀 농사가 처음으로 농협 규모로 이뤄졌다.
쌀 수매로 팔면 kg당 천5백원에서 2천원의 가격을 받는다. 2천평에서 나온 쌀 2톤을 팔면 3백만원에서 4백만원이 나온다.
“이거 팔아서 무슨 생태유기농업을 하고 내 종자권을 가지고 토종벼를 키우면서 싸우겠어. 말이 안 되는 거지.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난 못해도 kg당 4천원은 돼야 된다고 주장했어요. 그래서 저는 양평의 농부들에게 4천원을 지불한 거예요. 지금 다니는 여주 농부들한테도 4천원을 지불하겠다고 얘기 한 거예요. 그렇게 도정을 하고 유통을 하고 판매를 담당해주는 중간 매개인 내가 있는 거예요. 내가 셰프나 양조장 등 거래를 해왔으니 그런 관계를 통해 판매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렇게 제가 도정을 하고 유통, 저온창고 비용, 인건비 다 포함하면 토종쌀 kg당 1만 2천원. 이건 얄짤 없어. 그래서 내 가격이 1만 2천원이에요. 양조장에서 대량으로 가져간다고 하면 최저 마지노선을 8천원으로 계산했어요. 그러니까 적어도 이 가격은 받아야 농부로서 농업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가격을 정하는 기준마저 ‘어떻게 하면 농부들이 자기 종자를 가지고 생태적으로 키울 수 있을까?’를 고민한 이근이 대표. 토종쌀이 전국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자신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아산제터먹이사회적협동조합 장명진 이사장
아산제터먹이사회적협동조합(이하 제터먹이협동조합)의 홈페이지에 있는 설명에 따르면 ‘제터’는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말하고 ‘먹이’는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생명의 원리를 의미한다. 단순한 공간과 음식을 넘어서 우리네 삶의 터전에서 함께 환경을 공유하는 농작물, 그리고 그런 농작물을 음식으로 먹으면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관계. 제터먹이협동조합은 이런 가치를 핵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제터먹이협동조합이 단순히 지역에서 경작된 농산물을 먹자는 개념을 넘어서 이 지역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토종씨앗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이유다.
제터먹이협동조합의 대표적인 정책 중 하나는 책임수매다. 이 지역에서 토종종자로 농사를 짓는다면 시장의 시세나 매해 달라지는 가격 변동과 상관없이 농부들이 토종종자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수준의 수매가를 정한다. 농부친화적 적정 가격 보장제도인 셈이다.
“농부가 수지타산을 못 맞추면 관행농에서 하고 있는 일반 종자를 쓸 수 밖에 없고 그러면 종자들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계속 노동하지만 바뀌는 건 없는 거죠. 토종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자고 했어요. 농부에게 보람은 소득이죠. 영농 계획에서 자연스럽게 토종종자를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이 돼야죠”
농부친화적인 운영을 고집하다보면 협동조합의 유지가 어려울 수 있다. 협동조합이 흔들리지 않고 튼튼하게 지속할 수 있어야만 더 높은 가치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높은 가격으로 수매한 농산물을 가공, 판매, 유통을 통해 수지타산을 맞추는 일은 협동조합의 일이죠. 많은 사람들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자신 있었죠”
장명진 이사장은 기존 농업의 유통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단계의 유통 비용을 줄였다. 직접 수매, 직접 가공, 직접 유통을 하면서 방법을 찾았고 그만큼 농가소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제터먹이협동조합의 주 무기
제터먹이협동조합은 출범 초기 연매출 3억원에서 현재 11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며 꾸준히 성장해왔다. 중심이 되는 건 토종콩으로 만드는 콩나물과 앉은뱅이밀로 만드는 밀가루 및 국수다. 콩과 밀은 이모작이 가능한 전통 농업으로 토종 농업 모델을 농부들에게 제안하고 두 가지 모두 수매하는 방식이다. 콩을 기준으로 생산자조합원 30여 세대, 수매량 5.4만kg, 총 재배면적만 7만7천평이다. 규모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토종농부학교에서는 다양한 주제의 수업을 진행한다. 논 농사로 바라보는 수중 생태의 순환, 토종소, 재래닭, 강아지에 대한 역사, 한의사가 말하는 건강 강좌, 지역 김장 교육 등 농업 기술 뿐만 아니라 지역의 농부가 가져야 하는 생활상을 익히면서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다.
토종콩으로 만드는 콩나물. 토종콩나물, 촉진제를 이용해 3일이면 다 자라는 다른 콩나물과는 다르게 5일에서 7일 정도 걸린다
스마트팜 정책에는 농부가 없어요. 농기업만 있는 거지. 시설 투자비가 그렇게 많이 드는 농업을 미래라고 하기에는 어렵죠. 스마트팜으로 주곡 생산할 수 있어요? 공간도 한정적이고 수지타산도 안 맞아요. 주곡 생산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농업의 미래가 될 수 있겠어요”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있는 건 아니다. 기후위기는 점점 심각해지고 이를 통해 농업이 점점 불리해지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장명진 이사장은 “기후위기마저도 작물과 농부가 같이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며 “모든 생물에게 축복인 태양을 중심에 두고 농업이 있어야 한다. 가공된 빛으로 갇혀 있는 공간에서 대량 생산 된 채소들은 건강한 먹거리가 될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스마트팜을 통해 생산된 농산물이 건강한 먹거리가 될 수 없다면 스마트팜을 농업의 미래라고 보기 어려우며 이는 같은 작물을 건강하게 재배하는 농민들에게 타격을 입힐 수 밖에 없다.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몇 사람이 이익을 보겠지만 대부분의 보편적인 농민은 희생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스마트팜은 사회적으로는 공동체 파괴와 소멸을 가속화하고 개인에게는 큰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는 농민 없는 농업 정책이에요. 결국 농업 정책에는 농민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에요. 국가의 식량자급을 책임지는 농민이 없고서 어떻게 국가가 있을 수 있겠어요”
홍성풀무학교 오도 교사
홍성에서 시작된 토종씨앗 움직임
전국 최초의 지역신문, 홍성신문 창간을 이끌어낸 홍성군. 홍동면은 해방 후 우리나라 최초로 협동조합과 유기농업을 시작하고 이기도 하다. 활동가들의 성지라고 불리는 홍성군 홍동면에는 움직임의 원동력으로 불리는 1958년 개교한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이하 풀무학교)가 있다.
“여기는 소농을 키우는 학교고요. 철 따라 농사짓는 농부를 목표로 해요. 더 나아가서는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을 가르쳐요. 농업을 매개로 삶의 태도를 배우는 그런 학교예요”
씨앗 받는 농사
“저는 처음에 토종씨앗이 중요하다고 해서 시작을 했는데 농사를 짓다보니 토종만 중요한 건 아니더라고요. 토종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먹는 채소들도 토종이 되기도 해요”
토종 토마토가 있다. ‘토종’과 ‘토마토’는 같이 ‘토’로 시작하는 것 말고는 잘 어울리는 구석이 없다. 토마토를 보면 원 이름인 ‘tomato’가 너무 쉽게 연상이 되어버려서 ‘토종’과는 다른 결처럼 느껴지기 때문일까?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먹는 작물 대부분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지역에서 유입됐다. ‘양(洋)’으로 시작하는 작물인 ‘양파’와 ‘양배추’를 포함해 고추, 마늘도 유입 작물이다. 문익점 선생의 목화씨 이야기만 하더라도 외부의 씨앗을 들여온 사례다.
오도 선생님은 “풀무학교 내 텃밭에서도 브로콜리, 콜라비 등 프랑스 유기 종자를 구입해 채종하고 있다”며 “토종 이외의 채소더라도 많이 먹고 학생들이 좋아하는 거를 중심으로 재배한다”고 말했다.
토종의 개념은 새롭게 농업에 나타난 GMO, 터미네이터 씨앗(Terminator seed), F1종자 등 유전자변형 농수산물과 전통적으로 전승되는 우리 씨앗을 구분하기 위해 제시됐다. 때문에 토종의 기준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어떤 곳은 최소 30년은 이 땅에서 지낸 씨앗을 기준으로 삼기도 하고 학자들의 정의에 따라 20년을 말하기도, 50년을 말하기도 한다.
토종을 정의하고 그 특성을 보존하는 것과 씨앗 받는 농사를 하는 건 미묘하게 다르다. 전자는 토종을 발굴하고 그 고유한 특성이 훼손(교잡)되지 않게 노력해야 하지만 후자는 매년 작물의 미묘한 변화를 만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오랫동안 이 땅에서 나고자란 토종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대인의 식생활에 맞춰 소비되는 작물을 심고 매년 씨앗을 받는 농사 역시 이 땅과 환경에 적응한 새로운 토종을 만들어가는 활동인 만큼 매우 중요하다. 농업을 농부와 땅이 계속해서 관계를 맺어가는 것으로 본다면, 토종 기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씨앗을 받고 내년에 다시 심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하다.
“풀무학교 농사는 자급이 우선이에요. 인원이 1년 동안 먹을 양을 먼저 정하고요. 나머지는 팔아서 소득으로 이어지는 계획을 세워서 밭을 분배하는 등 영농계획을 세우다보면 토종도 심고 다른 유기 씨앗도 심는 거죠”
토종 종자를 수집해 채종 목적으로 온실에서 재배하는 광주무
프랑스 유기 종자를 구입해 채종 목적으로 재배하는 브로콜리
종자은행은 매년 새로 씨앗을 받지 않고 영하 18도 이하 냉동고에 보관하는 형태다. 필요한 것을 선별해서 채종을 거치지만 일부다. 그에 비해 씨앗도서관은 일반 농민의 접근도 쉽고 매년 채종이 기본이다.
“씨앗은 그 시대에 그 기후에 맞게 적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 어렸을 때는 눈이 무릎 높이까지 왔어요. 지금은 발목까지도 잘 안 와요. 무릎까지 눈 오던 시기의 씨앗을 갑자기 꺼내서 지금 심으면 이 기후에 적응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거죠. 어쨌든 씨앗도 수명이라는 게 있는데 보관 중심의 운영은 어렵겠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대기업이나 연구소는 조직배양 등의 방법으로 어떻게든 살려내겠지만 그게 일반 농부의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농부들한테 진짜 필요한 거는 계속 받아온 씨앗이에요”
원주 국지성 호우
경기도, 2033년까지 모든 시내버스 ‘친환경 차량’ 전환
경기도가 2033년까지 경기지역을 다니는 모든 시내버스를 친환경 차량으로 바꾼다.
경기도는 15일 ‘경기 RE100’ 정책의 하나로 이런 내용의 ‘친환경 버스전환을 통한 탄소중립 실천계획’을 발표했다.
경기도 전역에 시내버스는 현재 총 1만900대가 운행 중이다. 이중 76%인 8131대가 경유, CNG(천연가스) 버스로 온실가스 배출 요인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이에 경기도는 앞으로 9년간 순차적으로 차량 내구연한이 지나는 대로 모두 친환경 버스로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환경부의 탄소 감축 규제를 받지 않는 3548대까지도 별도 재정을 투입해 바꿀 계획이다.
계획에 따라 1만900대가 모두 전기버스 등 친환경 버스로 전환된다면 연간 43.6만t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경기도는 기대하고 있다. 이는 매년 소나무 312만 그루를 심는 것과 동일한 효과다.
경기도는 공공버스 전기버스 전환 정책에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탄소배출권 거래제는 정부가 기업별로 탄소 배출량을 미리 나눠준 뒤 할당량보다 배출량이 적으면 배출권을 거래소에서 팔 수 있는 정책이다. 그동안 버스업체나 공공기관에서는 활용도가 낮았다.
경기도는 버스업체가 전기버스 전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탄소배출권 신청·인증·판매 절차를 적극 이행할 수 있도록 행정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다.
환경부 규제를 받지 않는 3548대의 경우 친환경 버스로 전환하면 탄소배출권을 취득할 수 있다. 경기도는 이를 판매해 총 71억원의 수익을 얻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버스업체들이 탄소배출권을 판매하면 경기도의 재원도 아낄 수 있다. 현재 대부분 버스업체들은 수익 구조가 열악해 공공버스 재정지원금(운송 수입을 제외한 적자액을 보전해 주는 것)으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기도는 업체들이 탄소배출권 판매를 통해 수익을 보면 재정지원금 지출도 그만큼 감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상수 경기도 교통국장은 “이번 친환경 버스 전환계획에서 나아가 수소 버스 확대, 공공버스의 경제적 운행 등 다양한 방식으로 탄소중립 정책을 펼칠 것이며, 또한 탄소배출권 판매 수익 창출을 계기로 단순히 요금 수입만이 아니라 공공 재정을 아낄 수 있는 여러 방안을 적극 모색하겠다”고 말했다./경향
이기대 턱밑 고층 아파트, 공청회 필요 없다는 남구청
부산시민운동단체연대 등 최근 오은택 남구청장 면담
사업 계획 전면 재검토 요구 “주민 의견 수렴 절차 거쳐야”
부산시민운동단체연대와 부산환경회의가 지난 12일 오은택 남구청장을 면담했다. 연대 제공
부산을 대표하는 절경이자 시민 휴식 공간인 이기대 턱밑에 아이에스동서(주)가 고층 아파트 신축을 추진하는 것(부산일보 6월 7일 자 1면 등 보도)과 관련해 시민 단체가 오은택 남구청장을 직접 만나 반대 의견을 전달했다. 오 청장은 법적 절차를 따랐으므로 문제 없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다만, 250% 가까이 용적률을 높여주는 일을 가능하게 한 지구단위계획 의제 처리와 관련해서는 상급 부서 등에 질의를 하겠다고 답했다.
부산시민운동단체연대·부산환경회의는 지난 12일 남구청에서 오은택 남구청장을 직접 만나 면담을 가졌다고 15일 밝혔다. 이들 단체는 이기대 경관을 사유화하는 아이에스동서 고층 아파트 건설에 대해 반대 의견과 입장문을 전달했다. 시민단체 측은 △지구단위계획 의제 처리 △경관심의 생략 △용적률 인센티브 △종합계획 부재 △경관 사유화 문제 등 크게 다섯 가지를 지적했다.
이들 단체는 사업계획승인권자인 오 구청장에게 사업계획 승인을 보류하고, 사업계획 전면에 대해 재검토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이기대 일대에 대해 마스터플랜 수립과 더불어 보존 계획을 수립할 것을 촉구했다.
특히 이기대 사유화를 시도하는 고층 아파트 건설에 대해 반드시 주민 공청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 단체는 “지구단위계획 의제 처리는 강제 사항이 아니기에 남구청장 판단 하에 안 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기대가 갖는 중요성을 고려하면 공청회가 생략되는 의제 처리 방식이 아닌 충분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질타했다.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하려면 주민 의견 청취, 도시계획위원회·건축위원회 심의, 고시, 일반 열람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의제 처리는 이를 생략하고 사업계획이 승인·고시된 경우 지구단위계획도 결정·고시된 것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남구청이 아이에스동서 이기대 아파트 부지에 대해 지구단위계획 의제 처리를 추진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지구단위계획 의제 처리 조항을 악용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지구단위계획은 공익 차원의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계획이고, 그 지침을 잘 따랐을 때 인센티브를 주도록 하고 있지만 이번 사안에서는 건설사에게 특혜를 주기 위한 방식으로 악용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구청 측은 아이에스동서가 추진하는 고층 아파트 사업계획과 관련해 법적 기준에 맞춰 검토 중이라고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다만 지구단위계획을 의제 처리한 것에 대해서는 법이 명시한 것과 별개로 의제 처리를 하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급 부서에 질의를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날 면담에 참석한 남구청 공무원은 “법적인 절차대로 지구단위계획 의제 처리를 했다”며 “지구단위 의제 처리가 아닌 방식을 택하더라도 주민 공청회 개최는 명시된 바가 없다”고 반박했다. 지구단위계획 절차에는 공청회 개최라고 명시된 바는 없지만, 주민 의견 수렴 절차는 반드시 거쳐야 한다.
부산시민운동단체연대 관계자는 “부산 시민의 자긍심인 이기대 특수성을 고려해 달라는 요청인데, 엉뚱한 대답만 들었다”며 “공익을 위해 존재하는 행정기관이 제 역할을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김준현 기자(joon@busan.com)
부산 원자력산업 육성 조례안에 "시대착오적" 비판
입법예고 이어 상임위 통과하나... 환경단체, 야당 시의원 반대 의견
▲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 있는 고리원자력발전소(고리원전). 영구정지된 1호기는 해체작업에 들어갔고, 사용 연한이 다한 2호기는 수명연장 논란에 휩싸여 있다.ⓒ 김보성
부산시의회 시의원들이 323회 임시회에 제출한 '원자력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아래 원자력산업 육성 조례안)'을 둘러싸고 반발이 터져 나온다. 10여 기에 달하는 원전이 있는 지역인만큼 관련 산업을 키우고 지원을 위한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자는 취지인데, 환경단체와 야당 시의원이 잇달아 반대 의견을 표출했다.
15일 <오마이뉴스> 취재를 정리하면, 원자력산업 육성 조례안이 사흘 뒤 시의회 소관 상임위인 해양도시안전위원회에서 주요 안건으로 다뤄진다. 성현달(국민의힘) 시의원의 대표발의에 박종철·김재운·김태효·서지연 등 10명 의원이 힘을 보탰고, 지난 3일 입법예고가 됐다.
이번 조례안은 세계 최대의 원전 밀집 지역인데도 부산이 단순히 원자력발전소 가동에만 머물러 있단 시각에서 출발했다. 해당 산업의 발전 기반을 다지고 고도화를 통한 기업 경쟁력 강화 등이 필요하단 것. 정부·여당의 '친원전' 기조, 소형모듈원전(SMR) 산업에 눈을 돌리는 부산시의 정책이 조례안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부칙을 제외한 14개 항을 통해선 시장이 5년마다 육성계획 수립과 실태조사, 전문인력 양성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심의·자문 기구인 부산시 원자력산업육성위원회 구성, 기술개발 촉진을 위한 지원센터 설치를 규정했다. 조례안 앞머리에서 성 의원은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려는 의도"라며 제안 이유를 설명했다.
여야 시의원이 찬성에 이름을 올렸지만, 부정적 여론이 만만치 않다. 부산환경운동연합은 지난주 "생명사랑 도시와 핵토피아는 공존할 수 없다"라며 공개적 폐기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부산환경운동연합은 최근 부산이 국내 최초로 세계적 도시연합인 '생명사랑 도시(바이오필릭 시티) 네트워크' 회원 도시로 인증을 받은 점을 열거하며 "이와 거꾸로 가고 있다"라고 맹비난했다.
노후원전 수명연장 문제가 쟁점인 상황에서 부산이 처한 현실과 맞지 않는단 지적도 있다. 지역의 수십 개 단체로 꾸려진 탈핵부산시민연대의 강언주 공동집행위원장은 "시민 안전·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데다 신재생에너지 추세에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16일 규탄 기자회견까지 예고한 그는 "지역소멸을 걱정하는데, 낡은 핵발전소들이 즐비하고 핵폐기물이 쌓여 가는 도시에 누가 살고 싶겠느냐"고 직격했다.
다른 더불어민주당 시의원은 상임위 심사에서 반대토론을 하겠다고 밝혔다. 해양도시안전위원 중 한 명인 전원석 시의원은 의회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보를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전 의원은 "지난해 원전해체산업 육성조례 개정안을 통과시켜놓고 이런 조례를 만든다는 건 문제가 있다"라며 "더구나 고리2·3·4호기의 사용 연한이 다 돼 불안감이 큰 상황에서 시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오마이뉴스
역대급 호우 대응, 재난문자만으로는 안 된다
기후위기 시대, 무엇이 '선제적 사전 대피'인가
오지 마라. 죽는다…."
지난주 충청, 전북, 경북 지역의 집중호우 때, 폭우로 둑이 터지면서 대전 정뱅이마을 전체가 침수되었다. 처마끝 기둥만 겨우 붙잡고 있던 노모는 물길 건너편 아들에게 이 말을 건넸다고 한다. 어쩌면 이 절규는 기후재난까지 덮친, 쇠락해가는 작은 농촌마을이 보내는 오래된 긴급구조 신호일지 모른다.
'극강의 집중호우', '200년 빈도의 폭우' 그 무엇이라고 하건 최근 몇 년 사이 이 파괴적 장맛비의 위력을 우리는 실감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극단적 폭염, 폭우, 산불 등 이상기후들은 해마다 강도가 세지고 있다. 기후위기의 원인인 지구평균기온 상승을 억제하기 위하여 탄소 배출 억제 및 탄소중립을 위한 국제협력과 각국의 탈탄소 에너지정책의 자구노력들이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탄소중심주의, 지구공학이나 탄소제거의 기술적 접근의 한계, 무엇보다 환경과 인간에 대한 착취를 동력으로 삼는 자본주의적 성장에서 벗어나는 데까지 아직 나가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최근 1년 간 평균기온은 임계점 1.5℃를 넘어 1.64℃가 상승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호우 피해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위험 요인이 있을 때는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선제적으로 사전 대피를 유도하라"고 당부했다. 우리는 이 '선제적 사전 대피'가 위험지역을 빨리 벗어나라고 알리는 수준의 호우긴급재난문자를 의미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기후위기의 근본 원인으로부터 대피하지 않는 한, 이 같은 피해는 또 다른 어느 곳에서든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기후위기대응의 핵심인 에너지문제에서 윤석열 정부의 화석연료와 원전 확대 정책을 멈춰 세우고, 그들이 환경과 인간의 삶을 비정상적으로 파괴하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지역개발담론을 백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선제적 사전 대피라는 점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현재 대표적 지역개발사업으로 부산, 군산, 제주 지역에서 신공항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낙후된 지역경제를 발전시킨다는 장밋빛 선거공약으로 등장했지만, 지역시민사회와 환경단체의 주장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선전과 달리 인구 감소와 공항 이용률 저하 등 항공 수요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이 변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공항 부지와 그 주변 환경에 미칠 치명적인 피해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새만금신공항 역시 애초의 건설목적이던 새만금잼버리는 작년 여름 '폭망'으로 끝났다. 게다가 기존의 군산공항도 이용객이 적어 적자를 면치 못하는 실정에 그보다 더 짧은 활주로를 가진 국제공항을 추가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대신 군산공항이 위치한 수라갯벌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와 대체불가능한 탁월성을 지니는 세계자연유산'으로 동아시아 철새이동의 중요한 기착지이자, 해양생태 탄소흡수원(블루 카본)으로 주목받고 있다. 가덕도신공항은 해수면 상승에 따른 침수 위험성과 신공항부지의 43%를 바다를 메워서 조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환경 재앙'의 우려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토교통부와 기획재정부는 제주 제2공항 기본계획 고시를 강행하려 하고, 새만금SOC사업의 적정성 검토용역 최종보고가 완료되지도 않은 시점에 신공항건설사업을 재개하고도 시민사회에는 '용역이 완료되지 않아 보고서를 공개하지 못한다'는 납득할 수 없는 답변을 내놓고 있다.
2029년이 완공연도로 정해진 가덕도신공항과 새만금신공항사업은 각각 특별법에 따라 막대한 사업비가 투입됨에도 예비타당성조사가 면제되었고, 기후변화영향평가제도에서도 예외적으로 유예되었다. 또한 전략환경영향평가 같은 보완적 조치들이 부실하게 수행되거나 생략되고, 달라지는 인구사회적 조건과 환경생태적 위기에 대한 재평가도 없으며, 무엇보다 지역주민들의 공론화 결정도 무시된 채 일방적으로 강행되고 있다.
한국에서 2019년 처음 대중적인 기후시민운동이 시작된 이후,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기후생태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개인적 삶과 체제적 변화를 견인하는 자발적인 주체로 변모하고 있다. 인간종만이 아닌 더 넓은 비인간생명체의 생존에 대해서까지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기며, 인류 생존의 토대가 작은 풀 한포기, 작은 새 한 마리의 그것을 지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방정부의 독단적 개발사업에 제동을 걸고, 합리적인 비판을 제시하는 시민들의 공동행동이 곳곳에서 결성되고 있으며, 이들은 '자본이 아니라 생명을 염원한다'고 외치며 정치권에 '기만과 호도의 포퓰리즘 정치를 멈추라'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권력과 자본은 스스로 기후정치의 주체로 거듭나려는 노력보다, 환경파괴적 개발의 위험을 경고하고 삶에 미치는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정당한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오히려 행정권력은 합의된 의견수렴 절차를 이행하라는 시민들에게 고발과 벌금 처분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최소한의 법적 절차도 파기하며 자가당착으로 졸속 추진하는 모양새는 너무도 한심한 수준이다. 이 초대형 토건개발의 삽질이 시민의 고통과 피해로 돌아오는 동안, 누가 수익과 혜택을 얻는 것인지 너무도 자명하지 않은가.
지금 전국 곳곳에서는 공항뿐만 아니라, 케이블카/댐/보 건설, 원전/석탄 발전소 건설 및 재가동이 추진되고 있다. 우리가 매해 여름에 만나는 폭우와 폭염이 점점 파괴적이고 더욱 두렵다고 느낄수록, 우리 시민들은 이런 기후·환경·개발 정책에 대한 더욱 강력한 사회적 통제에 나서야 한다.
자본과 권력의 기득권과 그린워싱에 맞서 과거의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대결에 상응하는 기후시민계급과 반기후계급 간의 투쟁을 전면화하자. 건강과 생명을 파괴하고, 구태의연한 지역경제발전이란 외피로 반생태환경적 토건사업을 강행하려는 정치와 자본의 부조리와 부끄러운 실체를 폭로하고, 그 결정을 저지하기 위한 시민들의 연대를 더욱 강고하게 키워가자. 올해 9월 7일에도 기후정의를 기치로 모두가 함께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살아갈 것을 외치는 기후정의행진이 열릴 예정이다. 반기후, 반생태적 폭주를 멈추게 할 거대한 기후시민들의 혁명만이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내 삶과 세상을 바꾸게 할 계기가 될 것이다.
시민건강연구소 | 프레시안
“가덕신공항 적기 개항에 부산시·정치권 총력 다하라”
부산 최대 현안인 가덕신공항 부지 조성 공사가 두 차례 유찰로 차질이 빚어지면서 부산 시민사회가 조속한 공항 사업 추진을 위해 지역 정치권과 부산시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촉구했다.
부산 지역 시민단체로 이뤄진 가덕도허브공항시민추진단은 15일 오전 11시 부산시의회 브리핑룸에서 “10조가 넘는 사상 초유의 국책사업인 가덕신공항 부지 조성공사가 두 번이나 유찰되면서 개항 시기가 위협받고 있다”며 “국토부가 지역을 홀대하고 있지만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은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산 시민사회는 계속된 가덕신공항 부지 조성 공사 유찰과 지역 기업 참여 소외로 지역이 홀대받고 있지만,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했다. 앞서 가덕신공항 부지 조성 공사는 지난달 1차 입찰에서 무응찰로 유찰됐고, 2차 입찰에서는 현대건설 컨소시엄만 입찰하면서 또다시 유찰됐다. 이 경우 국토부는 재입찰 공고를 내거나 수의계약으로 전환할 수 있는데, 국토부는 입찰 조건을 변경해 3차 입찰을 진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국토부가 재공모를 낼 계획인 만큼 정부와 부산시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번 현대건설 컨소시엄에는 부산과 경남 지역 업체는 11% 정도로 확인됐는데, 대형 국책사업에 지역 업체 지분이 예상보다 너무 낮다는 평가가 나온다. 단체는 “국토부는 가덕신공항 부지 조성 공사 입찰을 조속히 결단해 적기 개항을 추진해야 한다”며 “가덕신공항 부지 조성의 대형 국책사업에서 지역 기업들이 홀대를 겪고 있는데 신공항 건설은 대부분 대기업이 주도하지만, 침체된 지역 기업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밝혔다.
단체는 이밖에 △지역의 가덕신공항 건설 참여를 확대하는 내용을 컨소시엄에 명기 △가덕신공항 연내 착공과 2029년 적기 개항을 위해 패스트트랙으로 신속 추진 △ 대구경북통합공항을 가덕신공항과 저울질 말고 명확히 선 긋고 적기 개항 추진 등을 촉구했다.나웅기 기자 wonggy@busan.com
전기를 잡아야 나라가 산다
세계 각국이 앞다투어 저렴한 전기 생산과 전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는 “미국을 가장 저렴한 전기요금을 갖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공약하고 나섰고, 중국은 재생에너지 설비 확충에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중동 산유국들도 태양광과 수소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빅테크 기업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재생에너지 사용을 자랑하며 탄소중립을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달성하겠다고 4년 전 호언장담했던 구글의 탄소배출량은 전기 생산으로 인해 오히려 지난해 50% 가까이 폭증했으며, 아마존은 원자력 발전소 옆 데이터센터를 사들이며 부족한 전기를 해결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전 세계가 갑자기 전기 확보에 혈안이 된 상황은 불과 1년 전 챗지피티(GPT)가 세상에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인공지능을 훈련시키고 데이터를 처리하는데 쓰는 전력량이 폭증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는 시대가 열렸다. 문제는 전기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기술인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전기차 등 미래 산업의 성패가 모두 전기에 달려 있다. 값싼 전기를 확보한 국가만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가까운 미래에 인류는 극심한 전기 부족에 시달릴 것”이라고 예견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상황이다. 에너지 자원이 전무한 우리나라는 그동안 값비싼 수입 에너지로 제조업 경쟁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에너지 부국들이 저렴한 전기를 무기로 제조업에 뛰어들면서 우리의 입지는 크게 좁아지고 있어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을 수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 전기차 등 우리의 주력 산업이 모두 전기 다소비 업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값비싼 전기로는 이들 산업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값싸고 안정적인 전기를 확보해야 한다. 원자력이냐 재생에너지냐를 놓고 이념 논쟁을 벌일 때가 아니다. 원전은 최대한 안전하게 값싼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가장 선결해야 할 문제는 역시 곧 포화 상태가 될 방사성 폐기물 처분시설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원전에 대한민국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맡기기에는 너무나 위험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 수준의 재생에너지 보급량을 빠르게 늘려나가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늘리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분산에너지 특별법에 근거하여 지역의 많은 재생에너지 거점들을 확보하고,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기업들의 지역 이전을 세제 혜택 등을 통해 정부가 장려해야 한다. 이를 통해 분산에너지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을 촉진해 나가야 한다. 수소연료전지 등 신기술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 아울러 송전망 등 전력 인프라 확충은 기본이다.
전기는 21세기 국가 존립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값싼 전기를 확보하지 못하면 우리 경제의 미래는 없다. 정부와 기업, 국민 모두가 전기 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탈원전이냐 원전 확대냐를 두고 갈등할 게 아니라 모든 에너지원을 총동원해 값싸고 질 좋은 전기 생산을 늘려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경제와 산업의 활로를 열 수 있는 길이다. 전기를 제대로 잡지 못하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없다. 지금 당장 범국가적 역량을 모아 값싸고 풍부한 전기 확보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경제를 살리고 지역을 살리고 젊은 세대들에게 희망을 주는 길이다.
김백민 |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교수/ 한겨레
조류독감 팬데믹이 올까
지난 6월14일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전 국장인 로버트 레드필드가 텔레비전에서 조류독감 팬데믹이 임박했다고 경고했다. 몇몇 언론에서 다루었지만, 그런 경고가 나온 것이 한두번이 아니고 2009년 돼지독감도 팬데믹 선언까지 했지만 심각하지 않았다며 가벼이 넘기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역사를 보자. ‘조류독감’이란 말 그대로 야생조류와 가금류의 독감이다. 1959년 스코틀랜드의 닭에서 H5N1 균주가 처음 발견됐다. 가금류의 가벼운 질병을 일으키던 이 균주는 1990년대 중반 돌연변이가 일어나 감염된 닭이 48시간 내 모두 폐사할 정도로 독성이 강해졌다. 현대의 집약형 축산에 적응한 것이다. 1997년에는 최초로 인간 감염이 확인됐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03년부터 현재까지 23개국에서 889명이 감염돼 463명이 사망했다. 사망률이 50%를 넘는다. 2013년 상하이에서 발견된 두번째 균주 H7N9는 아직 중국에 국한되지만 2018년까지 1532명을 감염시켜 581명이 사망했다. H5N2와 H5N8도 있다. 모두 닭이나 칠면조 등 가금류에서는 폐사율이 100%에 이른다.
지구가 펄펄 끓어도 화석연료와 무분별한 소비를 포기하지 못하는 인류가 사람 몇 죽고 닭이나 오리가 폐사한다고 해서 집약형 축산을 포기할 리 없다. 우리는 우리만 알지만, H5N1은 2000년대 초 야생조류에서 최악의 독감 팬데믹을 일으켰다. 헤아릴 수 없는 새들이 몰살했다. 2005년 티베트 칭하이 호수에서는 며칠 만에 지구상 남은 인도기러기 개체 수의 10분의 1이 폐사하기도 했다. 이 동물 팬데믹은 야생조류와 가금류를 오가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급기야 바이러스는 종간 전파를 시작했다. 2005년만 해도 H5N1이 흰담비를 감염시킬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화제가 됐지만, 올해 들어 미국에서는 H5N1에 감염된 젖소가 계속 늘어 현재 129마리에 달한다. 더 놀라운 것은 H5N1에 감염된 고양이, 집쥐, 너구리, 스컹크, 여우가 계속 발견된다는 점이다. 멕시코에서는 그간 인간을 감염시키지 않던 H5N2에 의한 사망자도 나왔다. 학자들은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포유류에 완전 적응해 인간을 침범할 준비를 끝냈다고 본다. 조류독감 인간 팬데믹은 시점이 문제일 뿐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독감에 대한 대응은 두 가지, 백신과 치료제다. 항인플루엔자 항체나 모든 균주를 막는 범용 인플루엔자 백신도 개발 중이지만 아직 쓸 수 없다. 타미플루 등의 치료제는 거대 제약 자본의 마케팅과 협잡에 관한 논쟁에 휩싸여 있다. 조기 투여하면 도움이 된다지만, 전반적으로 질병 경과를 ‘딱 하루’ 줄이는 데 그친다고 보는 전문가도 많다. 치명적인 팬데믹이 닥친다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 미지수다.
결국 최대한 빨리 안전하고 효과적인 백신을 만들어야 한다. 팬데믹 대응 원칙은 새로운 유행을 감시하고, 빨리 발견하고, 확산을 막기 위한 공중보건 조처를 실행하면서, 백신을 개발할 시간을 버는 것이다. 이미 미국은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백신 개발에 착수했다. 임박한 유행을 발견한 단계로 보는 것이다. 우리도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을 텐데, 이번 정부의 실력을 보면 영 미덥지 못하다. 끝없이 계속되는 의료 대란이나 빨리 수습하기를 바랄 뿐이다.
시민사회는 뭘 해야 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지 얼마 안 되었다. 그 경험을 소중하게 쓸 수 있다. 시민의식을 발휘해 아플 때 집에서 쉬고, 기침이나 재채기할 때 입과 코를 가리고, 손을 자주 씻는 등 공중보건 조처를 실천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백신을 배격하는 음모론을 거부하며, 선정적인 언론과 비과학적인 정치권을 견제해야 한다. 국제적으로는 팬데믹이 한 나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의료 자원을 나누며 연대해야 한다. 다가올 팬데믹의 시대에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공감 능력과 나누는 마음을 시험받을 것이다.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출판인 한겨레
일본 오염수 방류금지 소송 기각에 "사법부, 주권포기 판결"
원고 항소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상 도쿄전력 손 든 부산고법 민사5부... 1심 각하 판결 유지
▲ 17일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해양 방류금지’ 소송 항소심에서 기각 판결이 내려지자, 안하원(새날교회 목사) 부산환경운동연합 대표가 부산법원청사 입구에서 규탄 손피켓을 들고 있다.ⓒ 김보성
"원고들의 항소를 모두 기각하고 항소 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
일본 도쿄전력은 웃고, 원고들은 고개를 숙였다. 기각 판결까지 걸린 시간은 10여 초. 1심 이후 1년 가까이 계속된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 해양 방류금지' 소송에서 항소심의 결론이 내려지자 안하원 부산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법정을 빠져나온 안 대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고 반응했다. 그는 이번 소송에서 원고들의 맨 앞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심경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오염수 문제가 다른 나라 문제란 건데, 말이 되느냐"라며 따져 물은 안 대표는 "시간 차가 있을 뿐 해류를 따라 우리 바다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 동해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일본 정부와 법원이 가만히 있었겠느냐"라고 반발했다.
한일관계 개선을 내세워 윤석열 정부가 외면한 소송을 대신하고 있다고 본 안 대표는 1심에 이어 2심 역시 불복 의사를 명확히 했다. 자세한 기각의 이유를 듣지 못한 탓에 그는 판결문을 검토해 조만간 상고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상고장은 판결문을 받은 후 14일 이내에 접수해야 한다.
부산지법 각하 이어 부산고법도 기각... "국제재판관할권 없어"
부산고법 민사5부(김주호 부장판사)는 이날 오후 2시 457호 법정에서 열린 선고에서 안 대표 등 16명이 제기한 항소를 기각했다. 지난해 8월 1심 법원이 이 사안은 우리 법원의 판단 대상이 아니라며 각하 판결을 하자 안 대표 등은 바로 상급심의 문을 두드렸다.
이번 소송에서 원고 측은 해양법 협약과 우리 민법에 따라 국제재판 관할권, 해양투기 금지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다시 문제를 제기했다. 반면 도쿄전력 측은 법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며 1심 결론 유지로 맞대응했다. 오염수(일본 정부 측 표현은 처리수)가 다핵종제거설비(ALPS)를 거쳐 자국 영해로 방류된 만큼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주장이었다.
세 차례의 변론을 거쳐 사건을 살펴본 항소심 재판부는 도쿄전력에 사실상 손을 들어줬다. 런던의정서·국제협약 등이 원고들에게 금지 청구의 권리를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우리 법원에 국제재판 관할권이 있지 않아 1심의 각하 판단이 틀리지 않다고 봤다. 한마디로 재판 요건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를 놓고 원고 측은 '주권 포기'라고 이날 판결을 규정했다. 안 대표 등의 법률대리인인 변영철(법무법인 민심) 변호사는 <오마이뉴스>에 "오염수가 해류를 타고 도달해 우리나라 앞바다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재판을 해달라는 것이다. 또 이런 판결이라니 답답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주권을 포기한 게 결국 핵심"이라고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항소심 직후 여러 환경단체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법부의 결정을 규탄했다. 부산법원청사 앞에 모인 부산환경운동연합, 탈핵부산시민연대는 "법원이 이번에도 핵오염수 해양투기 우려 국민여론을 무시하고 무책임한 판결을 했다"라며 공동 입장을 발표했다.
박상현 부산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직무대행은 소송 결과로 의문점만 더 가득해졌단 점도 짚었다. 그는 "후쿠시마 핵오염수 해양투기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인류의 공동의 자산이자 생물다양성의 보고인 바다에 핵쓰레기를 투기하는 행위는 옳은가 등의 질문이 계속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위험천만한 행위에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목청을 키웠다.
김보성(kimbsv1)오마이뉴스
여당 일부 '핵무장'주장에 미 국방부 "한국, 국제 왕따 될 것" 경고
한미 공동지침에 따른 핵전략잠수함 상시 배치? 미 국방부 "아니다" 선 그어
여당 일부에서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이 나오는 가운데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정부가 핵무장을 하겠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미국 국방부 당국자는 한국이 핵을 독자적으로 개발할 경우 국제적 '왕따'가 될 것이라는 직접적 경고 메시지를 내놓기도 했다.
17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한 조태열 장관은 핵 무장에 대해 정부가 반대하냐는 김형배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의 질문에 대해 "확장억제를 강화하는 것이 현실적 방안"이라며 "정부는 핵무장 입장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날 국민의힘 김기현, 인요한 의원은 자체적인 핵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핵 개발에 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자적 핵 개발이 필요하다는 응다이 73%로 나타났다"고 말했고 인 의원은 "북한이 핵을 보유했기 때문에 우리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 장관은 자체 핵무장에 대해 "NPT(핵확산금지조약) 체제와 충돌 문제, 경제비용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며 "현 상황에서는 핵 억제력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정책 옵션"이라고 말했다.
여당 일각에서 자체 핵무장론이 나오고 있는 데 대해 미국은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경우 국제적인 '왕따 국가'가 될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했다.
17일 <미국의소리>와 인터뷰를 가진 비핀 나랑 미 국방부 우주정책차관보는 통일연구원 조사 결과 한국 국민의 70%가 핵무기를 원하며, 한국 여당의 중진 의원들도 핵개발을 주장하고 이는데 이러한 핵무장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계획이냐는 질문에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에게 정확한 질문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제대로 된 질문은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다. '핵무기 추구가 NPT위반이고 아마도 제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나오는 모든 놀라운 수출품들, 자동차, 삼성 휴대폰, 전 세계가 감탄하는 그런 것들이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인데도 핵개발을 지지하겠느냐'고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랑 차관보는 "핵무기 추구의 결과를 알게 되면 이에 대한 지지도는 급격히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비확산 의무를 이행하고 미국으로부터 확장억제를 보장받는 것이 한국의 안보에 최선이라는 것이 미국 정부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의 핵개발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동안 한국은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일 것이며 본질적으로 NPT를 위반하는 국제적 '왕따 국가'(pariah)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랑 차관보는 "한국의 안보와 미한 공동 안보는 한국의 독자적인 핵무기 추구가 아니라 우리의 확장억제 관계를 통해 가장 잘 달성될 수 있다고 미국 정부와 미국 국방부는 판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11일(현지시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정상회의 계기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한미 한반도 핵억제 핵작전 지침에 관한 공동성명'과 관련,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국무회의에서 "전시와 평시를 막론하고 미국의 핵 자산에 한반도 임무를 특별 배정한다"고 밝혔는데, 특정 핵전략잠수함(SSBN)이 한반도만 감시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나랑 차관보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핵 공격이나 전략적 공격이 있을 경우 모든 우발상황에서 핵전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약속하겠다는 것"이라며 "우리 체계에서는 특정 임무나 목표에 특정 무기를 배정하지 않는다"라고 말해 윤 대통령과 다른 인식을 보여줬다.
나랑 차관보는 "핵 공격 또는 한국에 대한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전략적 공격이 발생할 경우 한국을 방어할 수 있는 전력을 항상 확보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라며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유연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며, 이것이 실제로 최선의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이재호 기자 | 프레시안
파리 시장 “센강 수질 좋아” 직접 풍덩… 시민들 “용변 보자” SNS 시위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9일 앞둔 17일 오전 10시 (한국 시간 오후 5시)경 프랑스 파리 생루이섬 근처 센 강변. 바람이 쌀쌀한 오전부터 안 이달고 파리 시장(65)이 잠수복을 입고 물안경을 낀 채 강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약 5분간 수영하고 나온 그는 “물이 정말 정말 좋다”며 “우린 수년간 이 순간을 꿈꿨다”고 말했다. 파리 올림픽의 일부 수영 경기가 센강에서 열리는 데 대해 ‘오염수 수영’ 우려가 커지자 최근 수질이 개선됐다며 직접 시범 수영에 나섰다.
반면 이를 비판하는 시민들은 온라인에서 ‘센강에서 용변을 보자’는 문구를 해시태그(#)를 달아 공유하며 항의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엔 센강을 따라 변기가 줄줄이 설치된 장면이나 사람들이 화장실 휴지를 들고 센강에 모인 모습이 합성된 ‘가짜 사진’이 번지고 있다.
센강은 산업화에 따른 수질 오염으로 1923년부터 수영이 금지됐다. 와인병과 음식물 쓰레기는 물론이고 녹슨 자전거까지 강에서 건져 올려질 정도로 오염이 심각했다. 그런데 파리올림픽조직위원회는 이런 센강의 알렉상드르 3세 다리와 알마 다리 구간에서 올림픽·패럴림픽의 철인3종 수영 종목과 ‘수영 마라톤’으로 불리는 오픈 워터 스위밍을 열기로 했다.
‘오염수’ ‘똥물’ 논란 속에서도 조직위가 수영 경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101년 만에 파리의 ‘젖줄’인 센강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준다는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파리시는 내년부터 파리 내에 해수욕장 3곳을 개장하려는 야심 찬 계획도 세웠다. 센강 수영은 최근 TV 시청률 하락과 팬데믹 기간 ‘무관중 올림픽’으로 시들해진 올림픽 열기를 되살리려는 전략이기도 하다. ‘센강 수영’ ‘센강 개막식’ 등 이색적 이벤트를 신스틸러 삼아 주목도를 높이고 경제적 효과를 키우겠다는 취지다.
이를 위해 조직위와 프랑스 정부는 14억 유로(약 2조1000억 원)를 투입해 수질 개선에 나섰다. 대표적으로 파리 센 강변 지하에 올림픽 수영경기장 20개가 합쳐진 규모인 5만 ㎥의 물을 채울 탱크를 설치했다. 탱크의 터널을 통해 센강 폐수가 흘러들면 탱크를 차단해 외부 강물의 추가 오염을 막는다. 폭우로 강물이 넘칠 땐 터널을 통해 물을 탱크로 보내 강물이 공중화장실 오수와 섞이는 사태를 막는다.
당국의 수질 개선 노력에도 폭우 땐 파리시 하수의 오물이 넘쳐 폐수와 박테리아가 센강으로 유입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부 수영 선수들은 센강 수영을 꺼리고 있다. 도쿄 올림픽 수영 여자 마라톤 10km에서 금메달을 딴 브라질의 아나 마르셀라 쿠냐 선수는 3월 AFP통신 인터뷰에서 “센강은 수영을 위해 만들어진 강이 아니다. ‘플랜B’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을숙도 피크닉광장에 유아숲체험장 생긴다
부산 사하구 을숙도 피크닉광장(사진)에 ‘을숙도 유아숲체험원’이 생긴다. 부산시 제공
세계적인 철새도래지 을숙도에 유아숲체험장이 들어선다. 유아와 어린이가 을숙도의 자연과 생태를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부산시는 사하구 을숙도 피크닉광장에 3만㎡ 규모의 유아숲체험원을 연말까지 조성한다고 17일 밝혔다. 예산은 2억 원이다. 이곳에 체험장, 대피소, 오감체험원, 휴게시설 등이 들어선다. 유아숲체험원은 산림교육 전문가가 어린이에게 유아숲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시설이다.
부산시는 현재 유아숲체험원 9곳, 유아숲터 36곳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 산림교육전문가 71명이 배치돼 어린이를 대상으로 다양한 숲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는 40만 명이 부산의 숲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정도로 호응도가 높다.
시는 별도로 2026년 준공을 목표로 사상공원에 거점숲체험교육관을 조성하고 있다. 부산시 안철수 푸른도시국장은 “을숙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다양한 생태 자원을 즐길 수 있는 양질의 숲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할 계획이다”며 “미래세대인 어린이들이 자연의 소중함을 배우고 체험하며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조영미 기자 mia3@busan.com
용호부두 재개발, 이기대 난개발 좋은 일만 시키나?
부산항만공사가 부산 남구 용호부두 재개발 사업을 위한 용역에 착수했다. 17일 용호부두 일대 전경. 정종회 기자 jjh@
최근 이기대 경관을 독점한다는 비난에 휩싸인 고층 아파트(부산일보 6월 7일 자 1면 등 보도) 건축 부지 옆에 용호부두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해 논란이 인다. 사실상 재개발 사업이 고층 아파트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부산항만공사(BPA)는 최근 ‘부산항 용호부두 수정 사업계획 수립 용역’ 입찰 공고를 냈다고 17일 밝혔다. 오는 22일까지 시행자를 모집한 뒤 다음 달 용역 계약과 발주에 나설 방침이다. 총 용역 금액은 3억 6700만 원이다. BPA는 사업 계획과 사업 타당성 분석 등 용역 결과를 토대로 인근 주민 의견도 수렴해 내년도 정부의 항만 재개발 기본(수정) 계획에 반영할 방침이다.
이번 용역 목표는 용호부두 3만 9858㎡(수역 6613㎡) 부지를 주변 경관, 관광 자원과 연계한 친수 공간으로 재개발해 지역 환경을 개선하고 해양 관광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1990년 조성된 부산 남구 용호부두는 2만t급 일반 부두 1개 선석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2005년부터 용호부두 옆 공유수면이 매립되고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이후 용호부두에서 발생하는 분진과 소음에 대한 주민 민원이 끊이질 않았다. 하역 능력 대비 물동량도 낮아 부두 기능이 떨어지던 중 2019년 광안대교 선박 충돌사고를 계기로 운영이 아예 중단됐다. 이에 해양수산부는 2020년 제3차 항만 재개발 기본계획(2021~2030년)에 용호부두 재개발 사업을 포함했다.
하지만 용호부두 재개발 사업 대상지 바로 옆에 건설사 아이에스동서(주)가 고층 아파트를 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항만 재개발로 조성된 공공을 위한 친수·관광 공간이 결국 특정 아파트의 호재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에스동서는 이기대공원 턱밑이자 재개발 예정인 용호부두와 맞닿은 2만 3857㎡ 부지에 아파트 31층 등 3개 동을 추진 중이다.
관할 기초지자체인 부산 남구청은 이미 2020년 정부 항만 재개발 기본계획에 용호부두 재개발이 포함돼 있었지만, 시의 건축위원회 심의를 이미 받았다며 별도 경관 심의를 진행하지 않았다. 부산시 주택사업공동위원회는 지난 2월 아이에스동서(주)의 자회사 (주)엠엘씨의 남구 용호동 973 일원 개발 계획을 조건부 통과시켰다.
한 부산 건설업 관계자는 “용호부두 재개발에 대한 밑그림을 빨리 그렸다면 경관 심의 요구가 더 거세게 일었을 텐데 아쉽다”면서 “BPA와 해양수산부도 용호부두 재개발지를 공공이 누리도록 고층 아파트에 대한 경관 심의를 촉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BPA는 용호부두 재개발 사업은 아파트와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BPA 관계자는 “해수부가 내년 말 고시할 항만 재개발 기본(수정)계획에 반영하기 위한 용호부두 재개발 용역을 요구함에 따라 시행하게 된 것”이라며 “항만 재개발은 공공의 이익과 다수 이해를 고려하는 국가 계획의 성격이 강한 만큼 공공성을 충분히 고려하겠다”고 말했다.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파주 24시간 만에 514mm의 물 폭탄
기상청은 3시간에 90mm만 와도 극한 호우라고 하는데, 극한 호우 기준을 2.5배나 웃도는 '초 극한 호우'였습니다.극한 호우를 퍼붓는 극한 장마의 원인은 우선 북태평양 고기압이 크게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년의 북태평양 고기압 영역인데요, 올해는 북태평양 고기압이 이렇게 커지고 강해졌습니다.수증기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가장자리를 따라 흐르는데요.우리나라가 물길이 됐습니다.
아열대 수증기가 흐르는 통로인 대기의 강이 어제와 오늘 우리나라 상공으로 밀려와 범람하는 모습입니다.이처럼 북태평양 고기압이 확장한 이유를 전문가들은 뜨겁게 달아오른 바다에서 찾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바닷물 온도를 보여주는 그림인데요.인도양과 서태평양, 북대서양의 수온이 모두 높습니다.이중 인도양과 서태평양의 고온 현상이 북태평양 고기압을 강화한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국종성/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인도양 해수면 온도가 올라가면서 바닷물 온도가 뜨거워지니까 대류 활동이 활발해지고 그 결과로 북태평양 고기압이 서쪽으로 확장돼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수증기만 많다고 극단적 폭우가 쏟아지는 건 아닙니다.오늘 아침 3km 상공의 기류인데요.북쪽에서는 상층 저기압이 만든 차고 건조한 북풍이, 남쪽에서는 아열대 남서풍이 한반도에서 충돌하는 모습입니다.이 충돌로 폭이 좁고 강력한 폭우 구름이 계속해서 발달했습니다.
6월 이후 동아시아 상공을 보면 우리나라 북쪽에 상층 저기압이 버티면서 북풍을 만들고 있습니다.이 저기압이 강해진 원인은 앞서 보여드린 북대서양의 고온현상, 그리고 한반도 북쪽 동시베리아 해역의 고온현상에 따른 연쇄 반응으로 분석됐습니다.
[예상욱/한양대 해양융합공학과 교수]"동시베리아 고위도 지역의 해수면 온도가 굉장히 높아요. 극 지역의 건조하고 상대적으로 차가운 공기가 우리나라 쪽으로 유입되기에 굉장히 좋은 패턴이에요."
전문가들은 폭우를 부르는 위험한 상황이 이달 하순과 다음 달까지 이어질 수 있다며 철저한 대비를 당부했습니다.MBC뉴스 현인아입니다.
"아이는 기후위기 희생양 될 것" 아이 낳지 않겠다는 여성들
[기후위기와 출산파업①] 결혼했지만 '비출산' 선택한 5인의 고민과 이유
▲ 송도영씨는 남편과 결혼을 하기 전부터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을 논의했다고 말했다. 지난 6월 부산역 인근 카페에서 송씨와 그의 남편을 만났다. 얼굴 공개를 원하지 않아 뒷모습을 취재했다.ⓒ 유지영
"막상 내가 내 자식을 가진다면 정말 좋아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아이가 태어났는데 내 몸에서 내가 낳았고 남편이랑 나를 닮았다면 어떨까?"
송도영(30)씨는 2022년 12월 결혼하고 부산에서 살고 있다. 10년 전 남편을 대학 내 메탈밴드 동아리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남편과 메탈 음악을 즐겨듣는다. '아이가 있으면 어떨 것 같은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웃으면서 "사실 가끔 태교음악으로 메탈을 들려줘서 메탈 영재 어린이로 키우는 상상도 해본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감성적으로는, 낳고 싶다. 그런데 이성적으로 따지면 그건 불행해지는 길이라고 본다. 나는 애를 낳으면 안 되는 이유를 100가지도 더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남편과 결혼하기 전부터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남편에게도 확인을 받은 상태로 결혼했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기후위기 또한 그에게 중요한 화두다. 송씨는 "기후위기가 심화되면서 사람이 살지 못할 정도로 지구가 망가지는 건 시간 문제라 낳고 싶어도 낳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참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친구들 역시 아이를 낳지 않았거나 결혼을 하지 않은 이들이 많다. 그는 "애를 낳으면 애한테 죄를 짓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식이 내가 자랐을 때보다 더 힘든 환경에서 산다면 낳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올해 1분기 합계출산율(여성이 가임 기간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0.76명으로, 통계가 나올 때마다 '역대 최저'를 갱신하고 있다. 합계출산율과 동시에 기후위기 또한 5년 내에 과학자들이 우려한 1.5도라는 임계점을 돌파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점점 해법을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6월 송씨를 비롯해 기후위기로 인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정한 여성 5명을 만났다. 이들 중 3명은 남편과 함께 인터뷰에 참여했다. 오늘날 한국 여성들의 다양한 욕구 속에는 여전히 '출산'도 포함돼있다. 이들 역시 아이를 낳고 싶어 고민한 적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기후위기를 민감하게 감각하고 있는 시민이기도 했다. 이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낳을 수 없다"고 말했다.
미래가 기대되는 사회여야 아이를 낳지 않겠나
▲ 김유리씨는 7월 아일랜드인 남성 필립씨와 결혼했다. 이들은 부산에서 개를 키우면서 살고 있다.ⓒ 김유리 제공
올해 7월 아일랜드인 남성과 결혼한 김유리(37)씨 또한 송도영씨처럼 결혼 전부터 남편과 논의해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물을 좋아해 동물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자랐는데, "늘 인간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중심이 아닌 전 지구의 생태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했다. 김씨는 "늘 인간 때문에 동물의 서식지가 파괴되고 멸종 위기에 처하고 환경 오염이 일어난다. 나는 절대로 인간을 하나 더 만들진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했다.
김씨는 "밝은 미래가 기대되는 사회여야 애를 낳지 않을까. 인류 문명이 기후위기 앞에서 현재의 풍요로움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본다"라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아포칼립스 소설에 나오는 프롤로그 같은 수십 년이 될 것이다.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김보연씨는 어렸을 때부터 환경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코로나19를 지나면서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했다.ⓒ 유지영
기후위기가 초래하는 질병에 대한 위협도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출산에 대한 전망을 더욱 어둡게 만든다. 2015년에 결혼한 김보연(47)씨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출산을 포기하기로 확실하게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19는 근본적으로 기후변화 등에 의해 인간이 만든 병인데, 이런 세상에서 그래도 나까지는 살 수 있지만 미래 세대인 아이들이 살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조카들이 코로나19 시기에 유치원생이었는데 마스크를 벗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해 집에서도 손으로 입을 막고 있기도 하고 비둘기를 보고 '마스크를 안 써서 좋겠다'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다는 이야길 남편과 했다"라고 전했다. 그는 자신이 낳을 아이를 떠올리면 "지구 환경에서 자유롭지 않은 희생양이 될 거란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 이혜인씨는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스토리에 출산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담은 연재 '낳을까, 말까'를 쓰고 있다. 그정도로 출산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유지영
기후위기가 날이 갈수록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면서 아이의 생존 자체를 우려하는 건 이혜인(32)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후위기에 내 생존조차 불확실한데 아이 생존까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기후위기를 두고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생각해 불안해지고 공포스러워지기 때문에 최근에는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스토리에 출산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고 있다. 이씨는 "기후위기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출산 고민에서는) 후순위가 된다. 기후위기를 떠올리면 (고민이 아닌) 그저 아이를 낳을 수 없겠다 싶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연재글에서도 "채식과 텀블러 따위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느껴진다. 한 가지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한 명의 피해자라도 덜 만들 수 있다. 비출산은 나의 가장 적극적인 기후 실천 행동이다"라고 적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더이상 미래에 대해 그 어떤 낙관도 기대하기 힘들고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윤고은(31)씨 또한 "기후위기는 내가 막을 수 없는 굉장히 큰 해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 기후위기를 만드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만들어내는 플라스틱 쓰레기나 도축되는 소나 돼지를 떠올린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고기를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우유 또한 냉장고에 매일 구비해놨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필요할 때만 찾아 먹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유제품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나?"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여러 통계로 확인된 '기후위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흐름
이것이 그저 기후위기에 관심이 많은 몇몇 여성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지난 2021년 주간지 <시사인>은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대규모 여론조사를 진행했다. 이 설문조사에서 '기후위기 때문에 자녀를 출산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다'에 응답자 15.8%가 동의한다고 밝혔다. 시사인은 이 조사 결과를 공개하면서 "이들의 응답을 보면 기후위기가, 전 세계 꼴찌인 한국의 출산율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라고 전망했다. 특히 출산을 결정하는 데 가장 직접적인 연령대인 20대와 30대 여성의 경우 해당 응답에 각각 33.5%, 24.3%로 상당히 높은 비율로 동의를 보냈다.
이는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국제 의학학술지 <랜싯>에 따르면 지난 2021년 전세계 16세부터 25세 젊은이 1만 명을 대상으로 한 '기후 불안증(climate anxiety)' 설문조사에서도 무려 40%가 기후위기로 자녀를 갖는 일을 두려워한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청년들은 기후위기로 슬픔, 절망, 불안, 분노, 무력감 등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답했다. 세계 3대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 또한 2021년 한 분석 보고서에서 "기후위기에 대한 두려움으로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그저 개인의 불안이 응축된 결과일까. 국제아동구호기구 세이브더칠드런(2023년)은 "2020년생 아동은 1960년생의 조부모 세대보다 평생 6.8배 이상의 폭염을 경험하고, 산불과 가뭄은 각각 2배, 3배 많이 노출된다"(브뤼셀 자유대학 국제기후연구팀 공동 연구)고 예상했다. 이혜인씨는 "기후위기는 조금만 찾아봐도 이미 예견된 미래"라며 "미래에 내 생사조차 확실하지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될까. 이는 내가 마음가짐을 달리 먹는다고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영국의 해리 왕자 또한 2019년 한 인터뷰에서 "큰 가족을 원하지 않는 건 환경 문제와 연관이 있다"며 자녀를 최대 2명 계획하고 있다고 밝혀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책 <엄마 아닌 여자들>(북다)에서 저자인 페기 오도널 헤핑턴은 기후위기를 비롯해 환경 오염으로 자녀를 낳지 않은 여성들을 비중 있게 조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흐름은 세기를 거듭돼 반복돼왔다.
그는 "영장류는 식량이 부족하거나 환경이 어려울 때 태어난 아이를 버리는 모습이 관찰되어왔다. 자녀가 무사하리라는 생각, 그들을 기다리는 미래에 맡기는 능력은 현대 세계에서 생겨난 것이며 이것 역시 특권층만의 영역"이라고 분석한다. 이런 현상이 오늘날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지영(alreadyblues) 오마이뉴스
멸종위기종인데 노량진에선 횟감…까치상어의 귀향
지난 14일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의 한 수조에 까치상어 여러 마리가 전시되어 있다. 김지숙 기자
“죽상어잖아? 상어를 어디로 가지고 가요?”
지난 14일 오전 서울 동작구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은 커다란 보랭 상자에 담긴 상어를 보더니 호기심을 보였다. “살을 쪄서 먹고, 간이나 지느러미만 먹기도 한다”는 죽상어는 까치상어의 다른 이름이다. 까치상어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정한 멸종위기종으로 아시아코끼리, 갈라파고스펭귄과 같은 적색목록 ‘위기’(EN) 등급이다. 국제적 멸종위기종이지만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까치상어를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14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구조한 까치상어 6마리가 충남 서산 가로림만 해양생물보호구역에 방류됐다. 사진은 벌천포해수욕장 앞바다에 풀려난 까치상어. 환경운동연합 제공
이날 불과 몇 분 전까지 민어, 참돔과 함께 ‘잡어 수조’에서 횟감이 될 운명이었던 까치상어 6마리가 제2의 삶을 찾았다. 환경단체 ‘환경운동연합’과 시민들은 이날 ‘상어 인식 증진의 날’을 맞아 수조 속 까치상어를 구조해 바다로 돌려보냈다. 이들은 지난달 말 ‘까치상어 구조대’(구조대)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까치상어 구조·방류에 앞서 해양환경 교육, 물살이 비질(도살장, 수산시장 등을 찾아 동물의 죽음, 고통을 목격하고 기록하는 활동)을 진행했다. 이들은 어류를 식용의 의미로 축소한 ‘물고기’ 대신 물에서 사는 생물이란 뜻의 ‘물살이’란 표현을 쓴다.
이날 아침 8시 노량진 수산시장에 도착한 이들은 앞서 예약해둔 상점에서 까치상어 6마리를 샀다. 가격은 마리당 5만원으로, 예상보다 저렴한 편이었다. 상인이 수조 바닥에 가라앉아있던 상어를 맨손으로 잡아 올리자, 몸길이 70~80㎝의 상어가 몸부림쳤다. “찾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수조에 갖다 놓으면 일주일 안에는 팔린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까치상어가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된 것을 아는지 묻자 “들어본 것도 같다”며 말을 흐렸다.
까치상어가 어째서 국내 수산시장 수조에서 팔리고 있는 걸까. 까치상어는 국제적 멸종위기종이지만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49종의 상어 가운데서는 유독 연안에서 쉽게 목격되는 종이라고 한다.
이번 활동을 기획한 김솔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현재 해양보호생물로 지정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어업 중에 부수적으로 그물에 걸린 까치상어를 판매해도 불법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활동가는 “쉽게 관찰된다고 해서 보호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라며 “지난 40년 동안 까치상어 개체 수가 50~79%가량이 감소했다는 연구도 있다”고 강조했다.
최윤 군산대 교수(해양생물자원학과)는 “까치상어는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 러시아 등 동북아시아 일부 나라에만 서식한다. 서식지가 협소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개체 수가 줄면 멸종 위험이 더 높아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까지 까치상어를 해양보호생물로 지정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서식 개체 수 조사나 혼획(어업 중 의도치 않게 그물에 걸림)의 피해도 얼마나 되는지 연구된 바가 없다는 것이 최윤 교수 설명이다.
‘까치상어 구조대’는 어류를 식용의 의미로 축소한 ‘물고기’ 대신 물에서 사는 생물이란 뜻의 ‘물살이’란 표현을 썼다. 김지숙 기자
정오께 까치상어와 구조대원들을 실은 차량이 140여㎞를 달려 충남 서산시 가로림만 해양생물보호구역에 도착했다. 다행히 6마리 모두 무사했다. 구조대는 재포획과 어업의 위협이 적은 곳을 방류지로 정했다.
“한 마리는 입 주변에 낚싯바늘 자국이 남아있었거든요. 옆구리에 상처도 보였고요. 상어들이 우리 생각보다 강한 것 같아요.” 구조대원으로 참여한 이채환 ‘한바랄’ 바다환경전문출판사 대표는 앞서 6일 비질에서 봤던 까치상어가 이날 방류 대상에 포함됐다며 “일주일 넘게 수조에서 굶은 상어가 이동 중 사망할까 걱정했다”고 말했다.
14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구조한 까치상어 6마리가 충남 서산 가로림막 해양생물보호구역에 방류됐다. 사진은 까치상어 방류 작업을 하고 있는 환경운동연합 활동가와 시민들. 김지숙 기자
방류는 천천히 진행됐다. 구조대원들은 수조에서 까치상어와 함께 담아온 해수와 방류지의 물이 자연히 섞이도록 5~10여 분간 ‘물 맞대기’를 진행했다. 1차로 4마리, 2차에서 2마리가 차례로 가로림만 해양생물보호구역 내 벌천포 해수욕장 앞바다로 나갔다. 바로 헤엄쳐 달아날 만한데 상어들은 비닐을 빠져나와서도 한동안 가만히 한곳에 머물렀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순간 한 마리, 두 마리씩 먼바다로 사라져 버렸다.
“어서 가, 횟집이든 수족관이든 어디서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마지막까지 사람 주변에 머물던 까치상어를 지켜보던 장주은씨가 “깨물려도 좋을 만큼 귀여운” 상어를 떠나보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전력 수요 70% 수도권 쏠려…정책 중심, 공급 증대보다 수요 관리로 전환해야
송·배전망 등 전력 계통 포화 상태
공급 많은 곳 상시 출력 제어 우려
정부, 센터 집중 완화 대책 마련 중
전력 수요 70% 수도권 쏠려…정책 중심, 공급 증대보다 수요 관리로 전환해야
‘전기 먹는 하마.’ 에너지업계에서 데이터센터를 일컫는 별칭이다. 데이터센터 하나당 계약 전력은 적게는 40㎿(메가와트), 많게는 100㎿에 달한다. 일반 가정 1만3000~3만3000가구에 공급할 수 있는 양이다. 계약 전력은 전력 사용자가 한국전력공사에 신청하는 용량으로, 보유한 전기설비의 최대 용량을 모두 합한 것을 말한다. 초대량의 데이터를 학습하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는 일반 데이터센터보다 더 많은 전력이 필요하다. 일반 데이터센터가 ‘하마’라면 AI 데이터센터는 ‘공룡’인 셈이다.
데이터센터 수요 증가로 전력 수요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데이터센터의 분포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해 3월 발표한 ‘데이터센터 수도권 집중 완화 방안’ 자료를 보면, 2022년 말 기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의 70%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설립 신청을 고려하면 이 비율은 2029년 80%대로 확대돼 수도권 지역 신규 데이터센터 601곳 중 40곳(6.7%)만 적기에 전력 공급이 가능하다고 산업부는 밝혔다.
데이터센터가 유발하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역의 전력 수급 비대칭은 전력 계통에 더 큰 부담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송·배전망 등 전력 계통은 현재도 포화 상태다. 안전성 우려 등으로 사실상 송전망 등 보급 확대가 쉽지 않은 가운데, 지역은 신규 발전원이 늘고 수도권은 1극 체제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은 호남과 영동 지역은 계통 포화 문제가 심각하다. 한전은 오는 9월부터 호남 지역 신규 재생에너지 발전 사업 허가를 중단하기로 했다. 호남의 경우 총 발전력은 26GW(기가와트)지만 전력 수요는 최대 9GW라 상시 출력 제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산업부는 지난달 14일 시행한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이 해결책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전력계통영향평가를 통해 데이터센터의 수도권 신설을 제한하고, 지역별 한계 요금제와 직접전력구매(PPA) 등을 활용해 저렴한 전기요금으로 지역에 건설할 유인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터센터 업계의 반응은 냉랭하다. 데이터센터를 소유한 사업자 중 전산실 면적을 임대하는 사업자도 있는데, 접근성이 떨어지면 사업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인력 조달도 쉽지 않다고 반발하고 있다.
에너지 관련 전문가들은 공급 증대에 맞춰진 전력 정책을 수요 관리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데이터센터 전력 효율을 높이도록 규제를 강화하고,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도 안정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조달책 등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 같은 의견을 종합해 올해 안으로 데이터센터 관련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지난해 3월 ‘데이터센터 수도권 집중 완화 방안’ 발표 이후 여러 차례 간담회를 통해 의견을 들었다”며 “보다 강화된 후속 대책이 필요하다는 데 관계부처가 의견을 같이하고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경향
“조선 들판은 황금물결이 아니었어요”
“앗! 조다, 토종 차조다, 주인 할머니를 찾아라!”
가을 아침볕이 드는 전북 순창의 어느 시골길. 골목 한 모퉁이를 돌아가니 반쯤 열린 비닐하우스 한 동이 나온다. 그 안에 가을걷이해놓은 조가 멍석 위에 가득하다. 옆으로 홍고추와 들깨, 메주콩도 널어놓았다. 개 꼬리 같이 생긴 조 이삭들, 이삭마다 날치알 박히듯이 차조가 박혀있다. 처음 보는 귀한 토종 차조다. 집으로 들어가니 사람은 없고, 처마에 강냉이와 마늘 종자들이 걸려 있다. 마당에도 곡식을 까불리는 키 위에 한 홉씩이나 될까 싶은 콩이며 팥이며 녹두 종자들이 가지런하게 널려 있다. 딱 이녁 식구 먹고, 오는 사람 좀 나눠줄 만큼, 이것저것 씨앗을 간수하는 중이다. 욕심은 한 톨도 없다. 평생을 땅에서 살아온 여인의 정갈한 솜씨다. 할매는 어디 가셨을까, ‘조바심’이 난다. 조바심의 ‘조’는 조고, ‘바심’은 우리말 타작이다. 조는 꼬투리가 질겨 세게 털면 알곡이 튀고, 약하게 털면 안 빠진다. 그래서 조심조심, 조마조마, 마음 졸이며 좁쌀을 터는 데서 ‘조바심’이 왔다.
점심 지나서야 마실 나갔던 김춘상 할매, 귀가하신다. 이만저만 얘기를 하자, 선반 위에서 소쿠리를 하나 꺼낸다. 조선무 조선오이 메주콩 강낭콩, 여러 종자들이 물병 소주병에 담겨 예닐곱 개 들어있다. 전부 토종씨앗이다. 친정물림인지, 시댁물림인지 물으니 시집 올 때 친정 할머니로부터 받은 것이라 한다. ‘굶어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더니, 이 귀한 종자들이 할매로부터, 할매의 할매로부터, 이렇게 누대로 대물림하고 있는 것이다. “씨가 없으면 또 뭣을 구해 숭글랑가는 몰라도, 우리들이 안 죽고 사는 동안에는 이 종자들이 없어지지든 안혀” 그러면서 한 줌, 한 홉 종이봉투에 덜어준다.
2021년 10월 전후로 40여일, 순창 마을 마을을 돌아 수집한 것이 41작물에 275점. 일부는 종자저장소(시드볼트)로 보내고, 순창 보관소에 조금 남기고, 나머지는 ‘은은가’로 가져온다.
날은 성하(盛夏), 복중에 들었다. 음력 유월, ‘유월 장마에 돌도 큰다’더니, 이 물과 볕에 안 크는 것이 없다. 산야는 넘실대는 진초록의 물결, 밭작물이 한껏 여물고, 과일에 단맛이 드는 때다. 반면에 금방 무르고 썩는다. 그래서 유월을 썩은 달, ‘액(厄)달’이라고도 한다. 한편에서 크고 한편에서 썩는 것이 상반돼 보이지만 음양 길흉이 그렇듯이, 세상사 좋은 일만 계속되는 법은 없다. 여름 소출은 나누거나 썩거나 둘 중 하나라, 썩기 전에 얼른 나누는 것이 액달을 넘는 지혜다.
전남 곡성군 석곡면, ‘은은가’ 가는 길. 무등산과 지리산의 중간쯤, 보성강과 섬진강을 가르는 통명산 자락이다. 계곡 따라 한참 올라가니 비탈을 개간하여 툭 트인 개활지가 나온다. 아담한 집 한 채, 종자 보관창고, 싹을 틔우고 갈무리하는 작은 하우스 두 동, 사무실로 쓰는 별채 하나 있다. 마당에 종자들이 널려 있고, 개 한 마리 평상 밑에서 졸고 있다. 동편으로 작은 물줄기를 따라 상현달 모양의 다랑논이 층층이 여섯 층을 이루며 내려온다. 그리고 여기저기 수많은 토종작물들이 자라는 밭뙈기들이 흩어져 있다. ‘㈔토종씨드림’의 본산, 변현단 대표(60)가 사는 4천여 평 ‘은은가(隱誾家)’, 숲 속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리는 집이다.
“여기서 증식을 합니다. 할머니로부터 받아온 귀한 씨앗을 비료도 없고 농약도 없던 옛날 방식 그대로 키우면서 특성을 관찰하는 채종포(採種圃)입니다. 한 줌이 한 말이 되고, 한 홉이 한 가마니가 되지요. 토종농가에 그것을 나눠 줍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일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 물으니, “그것은 옛날 얘기”라면서 2005년 경기도 시흥에서 ‘연두농장’ 할 때 일을 들려준다. “어디서 옥수수 종자를 얻었어요. 때깔 좋고 씨알 굵은 그것을 한 해 농사지어 거둬 먹고, 채종해서 이듬해 또 심었지요. 그런데 옥수수가 병든 것처럼 비실비실 하더니 몇 개 달리지도 않고, 노인처럼 이빨이 다 빠지고, 전에 심었던 것 절반도 안 나와요.”
이른바 ‘F1’종자였다. F는 ‘자식의’(Filial)라는 뜻이다. F1, 1대 자식은 우수형질을 받아 잘 크고 수확량도 많았다. 그러나 F2로 가면 쉬 병들고 수확량이 형편없다. F1 이후로는 씨가 마르고 대가 끊기게 되어 있어, ‘터미네이터 종자’라 한다. 농사를 망칠 수 없으니 올해 F1종자를 사서 심고, 이듬해 또 그것을 사야 한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은 딱 한번이다. 다국적 종자회사들은 씨앗 값을 계속 올리고 있다. 어떤 것은 금보다 비싸다. 최근 10년간 우리가 해외에 지불한 종자 수입액은 1조6천억원(2022 국감자료)에 이른다.
농부가 씨앗을 빼앗긴 이 문제의식이 ‘토종씨드림’의 결성을 낳았다. 2008년 봄 전국의 ‘농’(農)자 들어간 연합 본부 단체들이 ‘토종씨앗을 지키자’는 뜻을 모아 비영리단체를 창립했다. ‘씨드림’은 ‘씨앗의 꿈(dream)’이면서 ‘씨앗을 드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하는 일은 크게 4가지, 수집 증식 나눔 보전이다. 순창의 경우처럼 가가호호 방문하여 얻은 종자를 잘 키워 일부는 보전하고, 나머지는 회원농가에 무료로 나눠 뿌리내리도록 하는 일이다. 17년 동안 전국 40여개 시군을 찾아 1만1천여 점을 수집했다. 10명으로 출발한 ‘토종씨드림’은 후원회원이 850여명, 이 씨앗으로 농사짓는 카페회원이 1만명 넘는 규모로 성장했다.
‘토종’이란 무엇인가? 토종은 배타적 의미가 아니다. 원래 있던 것이나, 새로 들어온 것이나, 이 땅에 잘 적응하여 독특한 자기 성질을 간직한 채 살아남은 것이라고 변 대표는 설명했다. “흔한 메주콩도 지역마다 다 다릅니다. 토종은 다양성입니다. 자연의 순리가 다양성이고, 획일화는 인위적 역행이죠. 19세기 최악의 재앙인 아일랜드 대기근 사태는 작물의 획일화가 원인입니다. 주식인 감자 한 종을 심었는데 마름병이 퍼지면서 수확이 거의 없을 정도로 피폐했어요.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다양한 작물과 종을 심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가을들판을 황금물결이라 하잖아요? 그것은 일본 품종으로 획일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오색물결이었어요. 붉은빛의 대추벼, 흑색의 북흑조, 연노랑의 버들벼 같은 다양한 토종씨앗들로 조선의 가을들녘은 천연색 물결이었어요.”
일제강점기 보고서 ‘조선 벼품종일람’에 따르면 1913년 팔도에서 수집한 벼 품종이 1451종에 이른다. 국립종자원은 정부보급종을 포함, 현재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벼 품종을 50종 미만으로 추산한다. 1세기 동안 95% 이상의 벼 종자가 사라졌고, 매년 약 200여 점의 씨앗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어느 촌구석, 예대가리밭에서 살아남은 것들이 있었으니, 오직 할매의 손길 위에서였다. 그 종자를 찾아 변 대표 일행이 방방곡곡을 쏘다니고 있는 것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한눈에 알지요. 반듯한 곳에는 십중팔구 없고, 옛 모습 그대로인 동네에 남아 있습니다. 씨앗은 소박하고 정갈하게 살아온 할머니의 손에서 나옵니다.”
변 대표는 젊은 날 진보정치운동을 하다가 가난한 이들의 자립공동체 ‘연두농장’을 이끌었고, 귀농하여 토종씨앗의 삶을 살아 온 지 20여년. 머리는 허옇게 세고, 낯빛은 그을렸어도 푸릇한 청춘이 얼굴에 살아있다. 낮에 농사짓고 밤에 글을 쓴다. ‘숲과 들을 접시에 담다’ ‘소박한 미래’ ‘씨앗철학’ ‘자립인간’ 등 책 10여권을 펴냈다.
할머니는 왜 씨앗을 간직하고 있었을까?
“맛이 달라, 장 담가보면 알아. 새 종자가 돈은 좋은데 맛이 없어. 눈은 속여도 입은 못 속여. 제사 때 귀신이 간장냄새 맡고 온다 하거든. 아무리 돈이 좋아도 저것은 토종 못 따라와.” 그 말 속에서 어릴 때 먹던 청국장 냄새가 난다. 할매는 “씨는 본시 나누는 것”이라면서 한주먹 내어주고, “나 죽으면 더 농사지을 사람도 없어”하면서 한 줌 더 내어준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 늘 할머니의 손에서 그것을 되찾곤 했듯이, 토종씨앗도 그러했다.
이광이/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