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과 어울리기/시사만평-주간 쟁점

24.4.29~

by 이성근 2024. 4. 28.

 

대한민국 부자들 추가투자 1순위는 '부동산'

하나은행, 746명 대상 분석

중소형 아파트·꼬마빌딩 순

부산 해운대구 마린시티와 센텀시티의 초고층 빌딩. 부산일보DB

대한민국의 부자들은 올해 경기가 개선될 것으로 내다보는 이들이 지난해보다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추가 투자 의향이 있는 자산 1순위로는 부동산이 꼽혔다. 하나은행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대한민국 부자들의 금융행태를 분석한 ‘2024 대한민국 웰스 리포트를 발간했다고 25일 밝혔다. 보고서는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을 보유한 부자 746명을 대상으로 작성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부자들은 올해 실물 경기 상황이 녹록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실물경기가 악화할 것으로 평가한 응답은 전체의 63%에 달했으며, 유지는 26%, 개선될 것으로 평가한 응답은 11%에 불과했다.

경기 예측을 기반으로 한 올해 자산 포트폴리오 계획에 대해서는 부자 10명 중 7(70%)이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답변했다. 10명 중 5명이었던 지난 조사보다 관망세로 돌아선 부자가 더 많아졌다.

올해 추가 투자 의향이 높은 자산 1위는 부동산(24%)이었으며, 2위는 예금(22%)이었다. 매입 의향이 있는 부동산은 중소형 아파트가 가장 많았고 토지, 꼬마빌딩이 뒤를 이었다. 반면 올해 추가 투자 계획이 없다는 응답은 전체의 약 16%로 지난 조사(5%) 대비 크게 늘었다.또 고수익을 기대하는 부자들은 유동자산 비중을 높게 가져가며 주식, 펀드 등을 적극 투자하는 성향을 보였다. 아울러 금, 예술품 등 실물자산을 활용하려는 의지도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보고서는 올해 자산 재조정 계획이 없다는 응답이 높아진 것과도 맥을 같이하며 두드러지는 호재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하는 듯했다고 분석했다.

한편 하나은행 프라이빗 뱅커(PB)들은 올해 눈여겨봐야 할 자산으로 채권·상장지수펀드(ETF)·외화 등을 꼽았다.

김진호 기자 rplkim@busan.com

"경찰은 오지 마시오"... 42년만의 위령제에 '눈물바다'

1982년 의령 궁류면 '우순경 총기사건'... 4.26 위령탑 제막 후 위령제 진행

26일 경남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에서 열린 우순경 총기 난사사건위령탑 제막, 위령제.

"엄마. 사실 저 고향 궁류에 오는 게 무서웠어요. 엄마와의 추억이 많았던 이곳에 오게 되면 내가 무너질까봐, 살아갈 힘이 없어질까봐, 너무 무서워서 와 보지도 못했어요. 돌이켜 보면 부모 없는 세상에서 기댈 곳 없이 먹고 살기 바빠서 엄마를 마음껏 그리워하지도 못했던 것 같아요."

42년 전 벌어졌던 경남 의령군 궁류면 '우순경 총기 난사사건' 때 어머니를 잃었던 전도연(62)씨가 "보고 싶은 우리 엄마에게"라는 제목의 편지를 낭송하자 현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26일 오전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에 조성된 '426 추모공원'에서 위령탑 제막에 이어 열린 위령제에서 전도연씨가 편지를 읽었다. 김씨는 "엄마, 잘 지내시지요. 엄마의 작은 딸 도연이에요. 어느듯 엄마 없는 4월 봄날이 벌써 마흔 두 번째나 지나가네요.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엄마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정말 믿기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마흔 아홉 살이었고 자신은 스무살이었다고 한 김씨는 "갓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회생활 시작할 때였어요"라며 "그 일이 있기 며칠 전 엄마는 쑥떡을 해서 회사에 면회를 오셨지요. 환하게 웃으며 작은 딸 먹이려고 새벽부터 떡을 해오신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가슴에 새겨져 잊혀지질 않네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며 우리 엄마 얼굴 더 많이 봐둘 걸 그랬어요"라고 했다.

김씨는 "엄마. 우리 오남매는 다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어요. 하지만 늘 엄마의 빈 자리가 그리워요.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손주들 재롱도 보시고 이 따뜻한 봄날 엄마랑 같이 꽃구경도 실컷 했을 텐데요. 얼마나 좋아했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한없이 가슴이 아려옵니다"라고 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엄마를 보러 용기 내어 와 봤어요"라고 한 김씨는 사진 한 장을 들어 보이면서 "엄마 이 사진 기억하세요. 얼마 전 앨범에서 엄마랑 둘이 찍은 사진을 보고 하염없이 울었네요. 우리 집 앞 벚꽃나무 아래서 엄마랑 저랑 둘이 찍은 사진이에요. 사진 속 우리 엄마 여전히 예쁘고 그립고 보고 싶네요"라고 했다.

그동안 고향을 찾아오기가 힘들었다고 한 막내딸은 "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세월이 많이 흘러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가봐요. 엄마 오늘은 실컷 엄마 생각하고 울고 또 보고 싶어 할래요"라고 했다.

전도연씨는 "엄마 42년 동안 벚꽃 피는 4월은 저에게 슬픈 봄이었는데, 이제는 4월이 기다려질 것 같아요. 엄마 내년 4월에도 엄마 보러 올게요. 여기 따뜻한 곳에서 엄마 좋아 하시는 꽃 보며 편히 쉬고 계세요. 매일 보고 싶은 우리 엄마. 우리 또 만나요. 사랑합니다"라며 인사했다.

오태완 군수, 김부겸 당시 총리 만나 추모공원 조성 건의

'의령 우순경 총기난사사건'1982426, 경찰관 우범곤이 당시 근무하던 궁류지서의 무기고에서 총과 수류탄을 들고 나와 마을 주민을 향해 무차별 난사해 56명이 숨지고 34명이 부상을 입었던 비극을 말한다.

당시 우범곤은 동거인과 말다툼을 벌인 뒤 흥분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고, 궁류면 운계, 압곡, 토곡, 평촌리 4개 마을이 피해를 입었다.

의령 궁류 총기사건이 발생한 지 42년 만에 희생자와 유가족의 한을 달래줄 첫 추념 행사가 열린 것이다. 유가족과 주민, 오태완 군수와 경남도, 군청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위령탑 제막과 제례를 시작으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공연과 살풀이춤, 장사익씨의 추모공연이 이어졌다.

집집마다 희생자들이 나왔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42년이나 지났지만 유가족과 주민들에게 공권력은 여전히 두렵고 불편한 존재로 남아있다. 경찰에 의해 벌어진 범죄인데도 당시 경찰은 소극적인 수사대응 태도로 마을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이날 추모행사에도 유가족의 요청으로 경찰은 초대받지 못했다.

당시 전두환정권은 보도 통제로 철저하게 이 사건을 덮었고, 이후 민관 어디에서도 추모행사 한번 열지 못한 채 안타까운 42년이 흘렀다.

열아홉살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전병태씨와 유가족은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슴플을 나눌 수 있도록 추모비 건립을 요구해 왔다. 2018년에는 전병태씨가 직접 3000명의 동의를 받아 경남도에 민원을 넣고 2021년에는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위령비 건립을 바라는 국민청원이 잇따랐다.

그해 12월 오태완 군수가 김부겸 당시 국무총리를 직접 만나 추모공원 건립을 건의한 뒤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추모공원 건립 확정 단계에 이르렀다. 의령군은 2022년 행정안전부로부터 7억 원의 국비를 지원받고 도비 2억과 군비 21억 원을 합쳐 추모공원을 건립했다.

위령탑엔 추모(희생자의 넋을 추모), 위로(유가족 위로), 의지(비극적인 죽음을 되풀이 않겠다는 의지)의 세 가지 뜻을 품은 디자인이 담겼다. 위령탑 비문에는 희생자 이름과 사건의 경위, 건립취지문을 새겨 기록했다.

의령 '우순경 총기 사건' 42년만에 첫 위령제 ... "눈물 바다" 의령군은 26일 궁류면 평촌리 4.26추모공원에서 위령탑 제막식과 위령제를 열었다. 기획 : 윤성효, 촬영-편집 : 최은준

유족대표 전원배씨는 "오태완 군수께서 애를 많이 쓰셔서 고맙다. 오늘 행사로 한이 다 풀리겠느냐만은 그래도 42년만에 위령제를 열어서 한이 조금은 풀린다"라고 말했다.

 26일 경남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에서 열린 우순경 총기 난사사건위령탑 제막, 위령제.

위령제에 참석한 한 군민은 "당시 피해자가 너무 많아 장례를 궁류면 자체에서 다 해결 못해서 의령군 각 마을마다 3~4명씩 차출해서 장례를 치렀다. 그땐 마음이 너무 참담했지만 42년만에 오늘 위령제를 여니 마음이 조금은 나아진다"라고 했다.

오태완 의령군수는 "오랜 시간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통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디어 온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특히 이 사건은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이 저지른 만행으로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라고 말했다.오 군수는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줘야 한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도리이자 의무이다"라고 말했다.

26일 경남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에서 열린 우순경 총기 난사사건위령탑 제막, 위령제. 전도연씨.

오마이뉴스 글·사진: 최은준(reporter4you): 윤성효(cjnews)

지방 소멸, 술자리서도 드러났다”... ‘전국구 소주가 평정 기세

소주 시장 11중다약으로

진로·롯데 점유율 80% 육박

지역 소주 줄줄이 적자 전환

전국구 소주가 지방에서도 인기를 끌면서 소주 시장이 ‘11중다약체제로 고착화되고 있다. 고물가에 따른 내수경기 침체로 소주시장 전체가 정체된 가운데 참이슬·처음처럼 등 대형 주류 업체의 매출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반면 지방을 기반으로 충성 고객을 확보하던 지역소주는 지난해 줄줄이 적자 전환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28일 주류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하이트진로가 내수시장에서 거둔 소주 매출은 12254억원에 달했다. 전년 대비 소폭 감소한 수치지만 2021년과 비교해서는 11.9% 늘었다. 롯데칠성음료 또한 매출이 최근 들어 빠르게 늘고 있다. 지난해 국내 소주시장 매출은 전년 대비 무려 22.4% 급증해 3387억원을 기록했다. 주류업계에 따르면 최근 들어 와인·위스키가 잇따라 인기를 끌면서 소주시장 전체는 2~3조원(소매점 기준) 안팎에서 횡보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전국구 소주의 매출이 급등하는 것은 그만큼 지역소주의 매출이 급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최근 들어 지방에 거주하는 젊은층은 지역 소주 못지 않게 전국구 소주를 선호한다라면서 지역 소주가 수도권 진출을 꾸준히 타진하고 있지만 유통망 구축에 어려움이 있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해 지역소주 업체들은 줄줄이 악화된 실적을 보이고 있다. ‘좋은데이로 그나마 선방하고 있는 무학을 제외하고는 영업이익이 급감하면서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호남지역 지역소주의 대명사 잎새주를 제조하는 보해양조는 지난해 매출이 931억원으로 전년 대비 2.5% 늘었지만 28억원 영업손실을 기록하며 적자전환했다. 대구·경북지역 지역소주사인 금복주는 지난해 매출이 5.7% 감소한 가운데 영업이익은 95.7% 급감했다. 대선주조 또한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43.7% 급감했고, 선양소주와 한라산은 적자전환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대형 주류회사의 경우 제로칼로리소주를 선보이거나 다양한 과일향을 섞은 소주를 선보이면서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라면서 지역소주는 투자 여력이 제한적이다 보니 신제품 개발 보다는 대형 모델을 기용하는 마케팅에 집중하면서 수익성이 악화됐다라고 해석했다.

주류업계는 전국구 소주가 지방에서 열풍을 보이면서 지역소주가 유탄을 맞았다고 분석한다. 참이슬·처음처럼 등은 카스·테라·켈리 등 맥주와 소맥콜라보 마케팅을 통해 지방으로 판매 영역을 꾸준히 넓힌 반면 지역소주 주요 소비자 층은 점차 고령화되고 있어 점유율 하락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소주 소매시장에서 하이트진로의 점유율은 59.7%, 롯데칠성음료는 18.0%에 달한다. 양사가 전체 소매시장의 80% 가량을 차지하면서 가정용 뿐만 아니라 식당 및 주점 등으로도 시장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최근 대형 주류사들의 영업력이 지방에서도 강화되면서 지역소주는 영업점 매출 또한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식품업계는 지역소주가 최근 젊은층을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로코노미열풍에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로코노미는 지역을 의미하는 로컬(Local)’과 경제를 의미하는 이코노미(Economy)’를 합친 신조어다. 최근 들어 고물가화 고환율로 국내 여행이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지역의 음식 문화를 즐기려는 젊은층이 늘고 있는 만큼 지역 음식문화와 다양한 협업을 통해 점유율 확대를 노릴 수 있다. 실제로 선양소주는 지난해 서울 성수동에서 팝업스토어 플롭선양을 개설했는데 불과 3주만에 누적 방문객이 17800명에 달할 만큼 주목을 끌었다.

김규식 기자(dorabono@mk.co.kr)

돈 많은 것도 부러운데부자들 40% 이상 매일 이것한다

10명중 4, 매일 가족과 식사

행복 바로미터는 가족관계

부자(금융자산 10억원 이상)들은 일반 대중보다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0명 중 4명 이상은 매일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29일 하나금융그룹 하나금융경영연구소의 ‘2024 대한민국 웰스 리포트에 따르면 부자의 70%는 가족관계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은 50% 정도만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특히, 일주일 동안 가족과 함께 식사한 횟수를 물었을 때 부자는 거의 매일41%, ‘3~427%로 부자 10명 중 7명이 주 3회 이상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

반면 일반 대중은 가족과 식사를 거의 안한다는 비율이 20%에 육박했는데, 이는 부자(9%)보다 2배 정도 높은 수치다.

하나금융 관계자는 올해는 부자의 자산관리 방식뿐 아니라 돈과 행복이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 진정한 돈의 가치를 되새겨보고자 했다면서 바빠서, 공통 관심사가 없어서 등 가족과 함께하기 어려운 이유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핑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피하다 보면 정말 어색해지는 사이가 가족이기도 하다고 짚었다.이어 부자의 경우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긴 것을 확인했다이는 가족관계를 소중히 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과 행복, 사회생활의 원동력을 얻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부자 가구에서 가사일을 분담하는 비중은 본인과 배우자 각각 반반에 가까웠다. 일반 가구의 가사 분담 비중이 본인 70%, 배우자 30%로 응답한 것에 비해 더 공평하게 분담된다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공평한 가사분담의 경우 외부요인이 작용했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보고서는 자산이 많을수록 가사에 직접 참여하기보다 외부 도움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아져, 본인이나 배우자의 참여가 공평하게 해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삶의 요소를 구분해 만족도를 질문했을 때 각 요인에 대한 만족은 경제력에 따라 일관되게 높아졌다.

실제 부자들이 꼽은 삶의 요인별 만족도는 전 분야에서 일반 대중보다 높게 나타났다. 심지어 외모 만족도의 경우도 부자 50.6%로 일반 대중(29.9%)과 비교해 높은 수치를 보였다.다만, 경제력 상승에 따른 삶의 만족도에도 한계는 존재했다.

총자산 10억원 미만인 경우 만족률은 42%로 절반을 밑돌지만 총자산 30억원 정도가 되면 응답자의 66%가 만족한다고 응답해 1.6배 크게 증가했다. 50억원에 가까워지며 만족(71%)의 증가폭은 둔화되다가 그 이상에서는 만족하는 사람(67%)이 오히려 감소했다.

삶의 만족에 경제력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돈의 규모만큼 행복이 무한정 커지는 것은 아님을 여실히 보여줬다. 아울러 부자와 일반 대중 모두에게 돈의 의미를 물었을 때 가장 많은 응답은 편안함이었다.

부자는 생활의 불편을 줄이고 대를 이어 편안할 수 있는 수단이 곧 돈이라며, 90% 이상에서 긍정적으로 인식했다. 이에 반해 일반 대중은 돈을 더 절실하게 여기며 삶의 목표로 인식하거나 돈을 고통, 구속 등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높은 편이었다.

황선경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웰스 리포트를 통해 부자들의 자산관리 실천과 변화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 또한 큰 의미가 있다타인의 평가를 의식하기보다 이성적으로 상황을 직시하고 스스로를 신뢰하며 목표를 추구하는 부자들의 삶의 태도가 부를 일구고 더 나아가 삶 전반의 만족을 높일 수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한편 해당 보고서는 지난해 12월 금융자산 10억원 이상 보유자 746, 일반 대중 712명 등 총 259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매일경제 /류영상

·베 가정해체 그 후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의 눈물

엄마들의 눈물

한 베트남 귀환 결혼이주여성이 지난달 17일 베트남 남부 껀터의 한베함께돌봄센터(코쿤센터)에서 기자와 인터뷰하던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며느리의 나라, 사돈 국가.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결혼으로 구성되는 한·베 가족이 늘어나며 함께 자리 잡은 표현이다.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결혼은 2000년대 초반 이후 급증했다. 2022년 다문화 혼인의 국적별 비중을 보면 외국인 아내의 국적은 베트남이 27.6%1위를 차지했다. ·베 결혼은 중매업체를 통하는 비중이 여전히 높지만, 최근에는 한국이나 베트남 현지에서 만나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결혼 그 이후는 어떨까. 여기 돌아간 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경향신문은 지난달 베트남 북부 하이퐁과 남부 껀터에 있는 사단법인 유엔인권정책센터의 한베함께돌봄센터(코쿤센터·KOCUN)에서 이혼, 사실상 이혼에 가까운 별거, 사별 등의 이유로 한국 남성과의 혼인 관계가 끝나 베트남으로 돌아온 여성과 그 자녀들을 만났다.

하이퐁과 껀터는 베트남 내에서 한국 남성과의 국제결혼 건수가 많은 편에 속하는 지역이다. 코쿤센터에서 인터뷰한 귀환 결혼이주여성(귀환여성)들은 베트남으로 돌아온 이유와 돌아오고 나서 겪은 고충, 홀로 자녀를 양육하는 일의 어려움을 들려줬다.

그동안 한국의 다문화 정책은 한국 내 한·베 가족에 집중됐고, 결혼이주여성뿐만 아니라 그 자녀를 주목하게 된 것 역시 비교적 최근이다. 한국이 아닌 베트남에서, 귀환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아동들은 ·베 가정 해체 1세대로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처지다. 이들은 한국과 베트남에 모두 걸친, 혹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로 자라나고 있다.

한국과 가족의 연을 맺었다 돌아간 이들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결혼이 종료된 이후 베트남에서 사는 귀환 여성과 그 자녀들의 여정은 머지않아 한국 사회가 마주해야 할 가족의 삶이다.

지역사회 등 주변 시선 부정적 부모에게도 이혼 언급 힘들어

귀환 여성 87% 이상 아이 동반  양육·돌봄 다 베트남 친정

한국 국적 자녀, 의료보험 불가  양육비 받는 경우는 극히 소수

귀환자 43% 월 소득 20만원대  일 끊겨 학업 지원 어렵다니

2시간 동안 무릎 꿇고 우는 딸  그냥 같이 울 수밖에 없었다

(40·가명)은 중매업체를 통해 2008년 한국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 갔다. 남편과의 나이 차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는 딸을 임신한 걸 알게 된 후부터 부부 사이가 나빠졌다고 했다. 남편은 전처와의 사이에 자녀가 이미 둘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남편은 계속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출산 후 그가 이혼을 요구하며 날 협박하기 위해 아기를 숨기기도 했다고 떠올렸다. 그는 교회의 도움으로 이혼을 마무리하고 친권과 양육권을 받았고, 2014년 딸과 함께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46·가명)은 스물다섯 살 많은 한국 남성과 2006년 베트남에서 결혼한 후 이듬해 한국으로 갔으나 2008년 갈라섰다. 가자마자 중병에 걸린 시부의 병간호를 도맡은 데다, 남편 쪽 가족들의 구박이 그를 힘들게 했다.

그는 시모는 집안일을 깐깐하게 지적했다. 그 가족들이 날 두고 나중에 머리 굴려서 집안 재산을 탐낼 것이라며 공부도 시키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남편과 전처 사이 자식들이 가져온 서류에 서명했는데 그것이 이혼서류였고, 이혼한 후에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천주교 신자인 한은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했다. 그러고나니 친정의 도움을 받는 것외엔 방법이 없었다.

남편·시부모와 갈등 겪다 갈라서

통계청 외국인 아내의 국적별 이혼을 보면, 지난해 한국인 남편과 베트남 아내의 결혼은 4923, 이혼은 1122건이었다. 법적 이혼 절차를 완료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부부 사이가 단절된 사례를 감안하면 한·베트남 가정의 해체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식 이혼 전 베트남으로 떠난 사례도 드물지 않다.

결혼 생활이 끝난 후 일부 베트남 여성은 베트남으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고향의 환대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외국인 남성과 결혼했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두고 낙인이 따라붙었다. 연구에 따르면, 경제적 목적으로 딸을 한국으로 시집보낸 부모들이 이혼·귀환한 딸을 다시 받아주지 않는 사례도 종종 발생한다.

아인(34·가명)2009년 한국으로 갔다가 2018년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2014년쯤부터 남편과 따로 살았다. 법적 이혼을 완료하진 않았으나 사실상 결혼 생활이 끝난 상태로 왔다. 그는 막 돌아왔을 땐 내 이혼에 대한 주변 사람의 시선 때문에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없었다. 지역사회에서 일하던 아버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아이와 둘이 살면서 부모를 종종 만나러 가는 생활을 오래 해왔고 3년 전에야 부모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한 역시 가족들에게 이혼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면서 그냥 그 집안이 요즘 어려워져서 왔다고만 했다고 말했다.

번은 인터뷰 중 자녀의 이야기가 나오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중학생 무렵부터 아이가 아빠 없는 애라고 놀림을 받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초등학생 때까진 공부를 잘했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수학과 과학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는 아이 이름이 한국식인 데다 얼굴이 한국 사람과 닮았으니 주변에 알려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베트남 북부 하이퐁 한베함께돌봄센터(코쿤센터). 귀환 결혼이주여성과 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 한국 문화 체험, ·창업 교육 등을 제공한다.

국경을 넘어 전가된 양육·돌봄

기자가 베트남 현지에서 만난 귀환 여성들은 전부 자녀를 데리고 베트남으로 왔다. 결혼 생활이 끝난 이후에도 아이를 직접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베트남 자녀를 둔 귀환 여성 87.38%가 자녀와 함께 베트남으로 돌아갔다는 2017년 베트남 남부 귀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와도 별로 다르지 않다.

경제·생활·교육 여건을 놓고 보면 한국이 더 나은데도 아이를 베트남에 데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여성들은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 이미 자녀가 있고, 남편이 출산을 원치 않았고, 한국에서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고, 경제력이나 성격 등을 감안하면 남편에게 차마 아이를 맡길 수가 없었다는 것 등을 이유로 꼽았다.

그 결과 양육·돌봄 부담은 귀환이주여성과 그 친정의 부담이 됐다. 베트남은 가족애가 강한 편이며 조부모나 이모, 삼촌 등 가까운 가족이 아이 돌봄을 도와주는 문화가 아직 남아 있다.

마이(35·가명)는 한국 남성과 결혼했던 언니가 2017년 사망하자 이듬해 조카 진수(10·가명)를 데려왔다. 이후 자신이 낳은 아이 두 명과 함께 아이 셋을 키우고 있다. 마이나 한베함께돌봄센터(코쿤센터·KOCUN)입양이란 용어를 쓰고 있지만, 엄밀히 보면 법적 입양은 아니다. 진수는 한국 국적이어서 베트남에 가정방문 비자로 들어왔고, 비자를 매번 연장한다. 한 번 연장할 때마다 300만동(16만원)이 필요하다. 생부는 달마다 30만원 정도를 보내주고 있다.

마이는 진수 아버지와 전처 사이에 아이가 하나 더 있어서 진수까지 신경쓸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았다. 키울 수 없으면 보육시설에 보내겠다고 해서, 아이가 불쌍해 내가 키우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아이들과 진수가 잘 지내기도 했고 언니가 사망 전 진수를 잘 챙겨달라고 하기도 했다고 했다.

(45·가명)도 조카 민지(16·가명)2010년부터 친자식처럼 키우고 있다. 민지의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도시에서 일한다. 민은 민지가 처음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서류상 자식으로 만들어 베트남 국적을 줬다. 그러다 2019년 공안에 적발돼 한국 국적을 살렸다고 전했다. 그는 민지의 조부모가 매달 보내주는 240만동(13만원)은 생활비로 쓰지 않고 아이 앞으로 모으는 중이다. 그런데 내 아이도 셋인 데다, 민지가 점점 크면서 돈이 부족해지는 상황이라고 했다.

베트남 북부 하이퐁의 코쿤센터에 지난달 8일 귀환 결혼이주여성과 자녀들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꿈같은 이야기, 양육비

진수와 민지의 사례처럼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코쿤센터 등을 통해 정기적·비정기적으로 양육비를 보내주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흔치 않다. 양육비는커녕 친부와 연락이 닿지 않아 생사조차 확인하기 힘든 사례가 오히려 더 많다.

번은 최근 한국에 가서 전남편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지난해 아이 교육 문제로 잠깐 한국에 들어가 전에 살던 주소로 가봤는데 개발이 되느라 바뀐 것 같았다. 전남편의 현 주소를 찾으려면 소송을 해야 하는데 절차와 비용이 부담돼 포기했다고 했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없는 그의 월수입은 500만동(27만원) 정도다.

그는 이혼할 당시에는 한국 법도 몰랐던 데다 (임신 중지를 종용하는 전남편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빨리 이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남편에게도 양육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양육비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젠 연락이 아예 안 돼 양육비를 받으려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국가가 나서 친부를 찾아 주거나 정책적으로 양육비 지급을 강제하는 것은 이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다. 원래도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귀환이주여성들은 베트남으로 돌아온 후 한부모 가정이 되면서 한층 더 취약해졌다. 유엔인권정책센터가 지난해 귀환결혼이민자 16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이들의 월평균 수입은 200~500만동(11~27만원)43.5%로 가장 많았다. 소득이 없다는 응답도 22.4%였다. 지역별로 보면 남부가 북부보다 소득이 더 낮았다.

특히 자녀가 한국 국적이면 베트남의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탓에 경제적 부담이 가중된다. 베트남의 의료보험은 베트남 국적 아동에게만 적용되고, 취학 연령이 되면 초등학교에서 가입하는 단체의료보험으로 변경된다. 그 결과 한국 국적으로 베트남에 사는 아동은 취학 연령 이전엔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더라도 외국인 학생을 처리해본 경험이 드문 일선 학교가 의료보험 가입에 추가 서류를 요구하기도 한다.

베트남 남부 껀터의 한베함께돌봄센터(코쿤센터·KOCUN)에서 지난달 17일 한 아동이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흐엉(34·가명)2010년 베트남으로 돌아왔으나 아직 법적 이혼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부터 남편과 연락이 끊어졌고, 월수입 1000만동가량(54만원)으로 두 아이를 건사하는 중이다. 그는 비자 연장 비용과 학비, 식비뿐만 아니라 병원비와 약값도 부담이다. 아이들을 혼자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하이(43·가명)는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을 홀로 돌본다. 아이가 7세 때쯤 병원에 데리고 가 “2세 정도의 지능으로 추정된다는 진단을 받고 2년 동안 약을 먹였으나, 더 이상 치료는 받지 못하고 있다. 일반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아 특수학교를 다니게 됐다.

그는 전남편 쪽에서 매달 약 200달러(28만원)를 받고, 640만동(35만원) 정도 드는 특수학교 학비는 재외동포청의 지원을 받는다. 그러나 하이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비용보다는 돌봄 그 자체다. 아이가 다니는 특수학교는 오토바이로 두 시간 걸리는 곳에 있다. 가게를 운영하는 하이는 아들의 등하교에 동생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동생이 출산을 앞두고 있어 다음달부터는 등하교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이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면 학비 지원은 끊긴다. 하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생의 출산 후 시간이 좀 더 지나면 학교를 다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한은 이혼 후 3년 정도 우유값을 받았던 것을 제외하면 양육비를 받은 적이 없다. 전남편과는 연락이 되지 않아 생사도 모른다. 성적이 우수한 딸 리엔(15·가명)은 법조인을 꿈꾼다. 하지만 한은 최근 몸도 아프고 일도 끊어져 딸에게 학업을 지원해주기 힘들다. “사정을 말했더니 아이가 한국에 가서 아빠를 찾겠다’ ‘ 더 공부하고 싶다면서 두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울더군요.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그냥 나도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송혜원 껀터 코쿤센터 소장은 “(결혼이주여성이 한국에 올 때는) 환영하면서 그들이 돌아간 이후에 대한 준비는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짚었다. 그는 “(센터를) 귀환여성이 직접 알아보고 찾아오거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다행인데, 창피해서 숨어버리면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도움이 필요한 귀환여성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 소장은 이어 “(귀환여성 일부와 그 자녀들은) 한국 국적인 만큼 재외국민 등록 등 한국인으로 해외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절차를 안내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이퐁·껀터 | ·사진 경향 김서영 기자

 

아빠의 나라가고 싶지만절차도 방법도 모르겠어요

아이들의 눈물

어머니와 함께 한국을 떠나 베트남으로 돌아온 박진희양(가명)이 지난달 17일 껀터의 한베함께돌봄센터(코쿤센터) 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다. 그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

비자 문제·가정 형편 등 이유로  학교 못 다니는 아이들 적잖아

베트남·한국 사이 정체성 혼란

아빠에 대해 궁금한 것 많지만 제대로 묻지도 듣지도 못했다

교육·일자리 등 기회 더 많기에 귀환여성·자녀 모두 한국행 희망

역귀환정책·정보 턱없이 부족

원래대로라면 한국에서 중학교 1학년을 다니고 있어야 하죠. 그런데 베트남에 와서는 학교를 한 일주일 정도 가다가 더는 다니지 못했어요. 마지막으로 간 건 여덟 살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지난달 베트남 남부 껀터의 한베함께돌봄센터(코쿤센터·KOCUN)에서 만난 박진희(13·가명)8년째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 진희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던 중 베트남 출신 어머니가 한국인 아버지와 갈라서면서 베트남으로 오게 됐다. 이후 내리 학교에 가지 못하며 초등학교 과정은 전부 건너뛰었고 중학교에 다닐 기회도 놓쳤다.

진희에게는 도서관과 놀이 공간이면서 문화 프로그램 등을 제공하는 코쿤센터가 학교의 역할을 작게나마 대신하고 있다. 진희는 평일 빈 시간에는 1시간 정도 떨어진 외할머니 댁에 가서 논다. 거기서 지내다가 다시 주말에는 껀터에 와서 코쿤센터에 나온다. 집에 박혀 누워 있을 수만은 없고, 친구들도 만나러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이 아닌 한국에 있는 학교에 다시 가고 싶다는 진희는 한국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검정고시로 초등학교 학력을 인정받고, 한국에서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홀로 동영상을 보며 공부를 하다 보니 진도가 빠르지는 않다. 진희는 일단은 떨어져도 다시 보겠다는 생각으로 도전해보려고 한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두 나라 사이의 아이들

진희는 자신이 왜 학교에서 거절당했는지를 명확히 전해 듣진 못했다. 코쿤센터 활동가들도 현지 학교가 한국 국적의 외국인 학생을 받아본 경험이 별로 없었고, 어머니가 진희의 비자 문제를 제때 처리하지 않아 입학 시기를 놓친 채 공백이 길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베트남 법의 초등학생 연령규정에 따르면 1학년 입학 연령은 기본적으로 6세다. 장애아동, 소수민족 아동, 해외에서 귀국한 아동 등의 경우엔 6세를 넘길 수 있지만 세 살 이상 많아선 안 된다. 입학 기준 연령과 세 살 이상 차이 난다면 입학을 위해 별도 결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단법인 유엔인권정책센터가 지난해 귀환결혼이민자의 학령기 자녀 106명을 상대로 한 조사를 보면, 과거에는 학교를 다녔지만 현재는 다니지 않는 아동은 12명이었으며 전혀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아동은 2명이었다. 한국 국적이기 때문에 체류 신분이 문제가 됐다는 답변이 많았다.

하이퐁 코쿤센터에도 초등·중학교는 학교장의 배려를 받아 마칠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는 못한 사례, 고등학교부터는 정규 학생이 아닌 청강생 신분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는 사례가 있다. 모두 보호자가 자녀의 여권을 연장하지 못해 체류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황귀자 하이퐁 코쿤센터 소장은 베트남 국적 어머니가 법을 몰라서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지 못했거나, 연장 시기를 놓쳐 범칙금이나 추방을 우려하거나, 여권·비자 연장 비용도 부담스러워하는 등의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안정적 체류를 보장하고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선 다문화가정 미성년 자녀의 여권 발급 기한(1)을 확대하고, 재외등록 신고에 관한 홍보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단계에서 어려운 집안 형편이 학업 포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송혜원 껀터 코쿤센터 소장은 고등학교에 가면서 학교가 집에서 멀어진 탓에 오토바이나 전기자전거를 지원받지 않고는 통학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둔 아이가 있다. 학비뿐만 아니라 통학비, 체험학습비 등 여러 부대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아이로선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런 아이들은 베트남 학적이 없다 보니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검정고시를 봐야 한다. 학교 적응 문제도 있다고 우려했다.

나는 베트남에 사는 한국인?

이처럼 한·베 가족의 해체 후 베트남에서 사는 아동들은 때로는 어른들의 무지로 인해, 또는 한국과 베트남 정부가 찾아내지 못한 탓에 사각지대에 놓인다.

무엇보다도 베트남 내에 귀환여성의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지 정확히 파악된 바가 없다. 재외동포재단이 2021년 실시한 베트남 북부지역 거주(체류) 귀환여성 한·베 자녀 실태조사에서, 2000년 이후 한국에서 출생한 한·베 자녀 중 초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아동의 수가 17700명인 것에 기반해 이들 대다수가 어머니와 함께 베트남으로 귀환했으리라고 간접 추정했을 뿐이다.

귀환여성 수가 한·베 결혼의 역사만큼 누적되며, 이들과 함께 귀환한 자녀들도 어느덧 청소년기에 접어들었다. 정체성 고민을 맞닥뜨릴 시점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이들의 고민은 한국 국적, 베트남 국적, ·베 이중국적 등 단순히 어느 국적인지를 넘어 자신이 누구인지, 한국인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지,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 살고 싶은지로 뻗어나갔다.

귀환여성의 자녀 중 드물게 대학까지 진학해 2학년에 재학 중인 최유리(20·가명)는 한국식 이름을 쓰고 한국 국적이지만 한국어를 잘 못한다. 친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한국에 가본 적도 없다.

최유리는 내가 다문화가정 출신이고 아빠가 한국인인 혼혈아라는 사실을 스스로 찾아서 알게 됐다. 엄마가 슬퍼할 것 같아 지금까지도 엄마에게 아빠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아빠와 같이 살지 못하는 것이 슬프기도 했다. ‘왜 우리 아빠는 날 기르지 못했을까화가 난 적도 있다면서도 커가면서 점점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초등·중학교는 베트남인 신분으로 다녔으나 이후 한국 국적을 살렸다. 한국 국적이 더 많은 기회를 열어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베트남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최유리는 어릴 때부터 베트남에서 살았고 모국어는 베트남어다. 한국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물론 있지만 많지는 않고 (국적이) 한국이라는 걸 잊고 살 때가 많다고 했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엄마는 내가 한국에 가서 일을 해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기를 원하지만 나는 전공(연기)을 살리고 싶어 그러지 않겠다고 싸웠다고 했다.

반면 리엔(15·가명)은 베트남 국적이지만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며 한국에 가 공부를 하고 싶어 한다. 리엔은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2~3년 전쯤부터 했다. 아빠가 한국인이고 나도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난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리엔은 아빠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있다. 건강은 어떻고, 삶은 어떤지 같은 것들을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리엔이 한국인이 될 수 있는 길은 법적으로는 열려 있다. 한국의 국적법 제3조에 따라, 리엔과 같은 미성년 한·베 자녀는 한국의 아버지를 찾아 인지신고하면 즉시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그러나 생부와 연락이 되지 않아 몇년 전부터 현실적으로 포기한 상황이라고 리엔의 어머니 한(46·가명)은 말했다. 리엔이 18세가 되면 절차가 훨씬 까다로워진다.

한국 국적이지만 한국을 모르는 아이들

귀환여성을 비롯한 한·베 자녀의 보호자들은 대체로 자녀를 나중에라도 한국에 보내고 싶어 했다. 아이의 뿌리인 아버지의 나라에 가지 못할 이유가 없는 데다, 교육·일자리 여건도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귀환여성의 자녀들 역시 유사한 이유로 한국행을 그렸다. 아버지를 직접 만난 적이 없는 민지(16·가명)중학교에 올라오면서부터는 한국에 가 공부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주변 환경도 나아질 것이고, 친가 가족들과 항상 옆에서 같이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고등학교까지 다 마치고 대학부터 한국에서 다니고 싶다고 했다.

동시에 한국을 잘 모르는 상태로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도 컸다. 민지를 양육 중인 삼촌 민(45·가명)은 민지가 한국행이 늦어질수록 한국과의 접점이 더 줄어들지 않을까 우려했다. 민지의 어머니가 자신이 겪었던 한국 생활에 대해 말한 적이 거의 없는 데다, 민지가 국적만 한국일 뿐 가본 적이 없어 미디어로 접한 한국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민은 일단은 베트남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한국에 가는 쪽으로 민지의 조부모와 이야기 중인데, 그때 민지가 한국어 구사와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도 민지는 한국에 가면 조부모의 지원을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다. 조부모는 지금도 양육비를 보조해주고 있으며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는다. 이처럼 친부나 그 가족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운이 좋은 편이다. 진희는 한국에 가면 부모가 이혼 전 살았던 지역이 아닌 아예 다른 곳에서 어머니와 살려고 하고 있다.

진희는 아빠를 마지막으로 본 건 2021년인데, 찾고 싶다는 생각은 딱히 하지 않는다. 양육비도 주지 않고, 엄마도 아빠와 연락이 끊긴 지 1년 반 정도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희는 다시 한국에 가더라도 그쪽 집안과는 연락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귀환여성들은 한국에 돌아가고자 하는 의욕에 비하면 정보는 부족한 편이다. 자녀와 한국에 가고자 하는 마음은 급한데 체계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길이 많지 않은 탓이다. 한국인 남편과 사별한 이후 베트남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온 이수진(42·가명)은 본인과 자녀 모두 한국 국적이며 한국어가 유창하다. 그는 아이들의 교육·생활 환경을 위해서 하루빨리 한국으로 가고 싶다. 한국에서 군대도 보내고 대학도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첫째아들이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를 한국에 가는 목표 시점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살다 온 아이의 한국 고등학교 진학, 치열한 입시 문화와 같은 것들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한국 대학에 진학하고 무난히 적응하기 위해선 베트남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재외국민 12년 특례 입학을 노리는 것이 전략적으로 나을 수 있다는 점 역시 몰랐다.

이들의 역귀환을 보조하는 정책은 현재로선 찾기 힘들다. 유엔인권정책센터의 지난해 조사에서 귀환여성들은 자녀가 한국에서 취업할 경우 희망하는 지원(복수응답)으로 한국어 교육(37.3%)을 가장 많이 꼽았으며 기숙사(34.2%), 특별 취업비자(32.9%), 사전정보 교육 프로그램(27.3%) 등이 뒤따랐다.

위성은 껀터 코쿤센터 상담팀장은 귀환여성의 자녀들이 한국에 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례가 아직 드물다 보니 이들이 실질적으로 조언을 구할 공동체가 없다. 대부분 한국어와 한국 사회 시스템을 모르는데도 국적은 한국이기 때문에 외국인 지원 센터에도 가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완전한 독립 전 중간 단계에서 도와줄 센터나 쉼터, 지원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이퐁·껀터 | ·사진 경향 김서영 기자

민희진, 4000억짜리 노예계약···천상계 얘기

어도어 민희진 대표. 경향 DB

하이브와 자회사 어도어 민희진 대표가 내홍을 드러내고 법적 공방으로까지 치달은 이 사태의 본질은 결국 이었다.

29일 엔터테인먼트와 법조계에 따르면 하이브와 민 대표는 지난달까지 대리인을 통해 주주 간 재계약 협상을 진행해온 것으로 파악됐다. 하이브는 김앤장, 민 대표는 세종을 선임해 협상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양 측이 어도어의 지분 가치 산정을 두고 팽팽한 대립을 펼쳤다.

약 측의 갈등은 지난해 12월 민 대표가 어도어 지분 처분과 관련한 주주간 계약 개정을 요구하며 시작됐다. 민대표는 자신이 보유한 지분 13.5%를 하이브에 풋옵션 행사할 수 있는데, 어도어 기업 가치 책정 기준을 13배에서 30배로 상향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민 대표는 또 남은 4.5% 지분을 제3자에게 매각할 때 반드시 하이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도 수정을 요청했다. 어도어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경쟁사로 이직하거나 창업할 수 없는 경업(競業) 금지조항을 근거로 노예계약과 다름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이브 측은 4.5% 지분 처분 관련해선 풋옵션 행사가 가능하도록 개정하겠다는 뜻을 전했지만 기업 가치 책정 기준 상향 요구는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 대표는 하이브 산하 레이블 어도어 지분 18%를 보유하고 있다. 이 중 13.5%에 대해 하이브에 풋옵션을 행사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어도어가 100억원의 이익을 내면 하이브가 13배인 1300억원의 이익을 낸 것으로 가정해 1300억원X 0.18%의 가격을 기준으로 민 대표의 지분을 되사주겠다는 의미다. 민 대표가 하이브에 풋옵션 권리 행사를 할 수 있는 것은 내년부터로, 금액으로 따지면 1000억 원여에 달한다. 민 대표가 지난 25일 기자회견에서 가만히 있어도 1000억 원을 벌 수 있다고 발언한 것은 여기서 비롯됐다.

지난 29일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한 경제평론가 박시동은 “(민 대표가) 영업이익의 13배가 아닌 30배를 요구했다는 게 하이브 측의 주장이다. 그렇게 되면 (민 대표가 하이브에서 받을 보상이) 1000억이 아닌 3000~4000억이 된다고 설명했다.

김어준은 아직 회사가 그만큼 벌지 못했는데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라며 박진영 씨가 JYP에서 가진 지분이 4000억 정도 된다. 평생 쌓아서 올린 회사의 가치 중 자기 지분이 4000억이다. 민 대표는 뉴진스를 만들고 그 4000억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말이 안 되는 게 아닌가라고 평했다.

김 씨는 또 민대표와 하이브 간 갈등에 대해 이번 사태는 돈이 엄청나게 중요하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민 대표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회사에 있는 한 불만일 이유가 없는데 회사를 관두고 자기 회사를 갖고 싶을 때 불만이 되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민 대표가 4000억짜리 노예계약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계약조건은 회사에 있는 한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대우다. 4000억 주면 불만이 없어야지. 노예계약이라는 용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일반인들이 입 댈 게 아니다, 천상계 얘기라고 덧붙였다.

민 대표는 지난 기자회견에서 갈등원인에 대해 돈 문제는 전혀 아니다. 하이브에서 나를 이용하고 찍어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내막엔 역시 이 자리하고 있었다.

민 대표는 지난해 하이브가 자신에게 준 인센티브 20억 원이 적다고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하이브는 본사 박지원 CEO에겐 10억 원의 인센티브를, 민 대표에겐 그 두 배인 20억원을 줬다. 지난해 뉴진스의 활약히 상당했다는 점을 차치하고, 객관적인 지표로 하이브의 매출이 어도어 매출의 8배라는 점을 볼 때 하이브가 민 대표를 금전적으로 홀대했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다.

수많은 K-직장인들은 민 대표의 개저씨” “X과 같은 욕설이 섞인 긴급 기자회견을 라이브로 감상 한 뒤 자신의 처한 상황과 동질시하며 공감했고 심지어 그를 남성중심 조직에 맞서 싸우는 능력있는 여성 투사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여론은 빠르게 민 대표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한 누리꾼은 블라인트앱에 가스라이팅 진짜 잘하는 듯. 민 대표는 약자도 아니고 대단히 정의로운 사람도 아닌데, 이미 월급 300만원 받는 일잘러노예인 나와 동일시 하고 있지 않나. 조금만 생각해도 전혀 맞지 않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감정적이냐는 글을 남겼다.

한편, 하이브는 민 대표 측에 30일 이사회 소집을 요구했지만, 민 대표는 거절했다.

경향 강주일 기자

비정규직 임금, 정규직 70% 수준상위 20%, 하위 20%4.5배 벌어

여성 비정규직 임금, 남성 정규직 임금의 54% 수준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이 정규직의 70% 수준이며, 여성 비정규직 임금은 남성 정규직 임금의 54% 수준이었다. 또 상위 20%가 하위 20%4.5배를 버는 것으로 조사돼 상위 20%와 하위 20% 임금 격차가 2년 연속 벌어졌다.

고용노동부가 30일 발표한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 노동자 1인 이상 사업체의 전체 노동자 1인당 시간당 임금총액은 22878원으로 전년동월(22651)대비 1.0% 증가했다.

정규직의 시간당 임금 총액은 24799원으로 전년대비 1.6% 증가했으며, 비정규직은 17586원으로 2.0% 증가했다.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은 정규직의 70.9% 수준으로, 지난해 70.6%보다 소폭(0.3%p) 개선됐지만 2020(72.4%)2021(72.9%)와 비교하면 격차는 더 벌어졌다.

300인 이상 기업 정규직의 시간당 임금(38214)100으로 봤을 때 300인 미만 기업 비정규직의 임금(16843)44.1% 수준이다. 또한, 여성 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총액이 남성의 71% 수준으로 지난해엔 70%와 비교하면 성별 임금 격차는 소폭(1%p) 개선됐다.

그러나 남성 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총액 27695원을 100으로 놓으면,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14944)54% 수준에 불과했다.뿐만 아니라 상위 20%와 하위 20% 임금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지난해 6월 기준 상위 20%의 월 평균 임금은 8564000, 하위 20%1902000원이었다. 상위 20%가 하위 20%4.5배를 버는 것으로, '5분위 배율'은 대체로 감소 추세였다가 20214.35, 20224.45배 등 2년 연속 소폭 늘었다. 최근 2년 연속 상위 20%의 월급 상승률이 하위 20%보다 높았던 탓이다.

중위임금의 3분의 2 미만을 버는 저임금 노동자의 비율은 작년 6월 기준 16.2%, 2022(16.9%)보다 소폭 개선됐다.

고용노동부

한편, 사회보험 가입 대상이 늘어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사회보험 가입률 차이는 줄어들었다.

정규직의 고용보험(94.5%), 건강보험(98.8%), 국민연금(98.6%) 가입률은 대체로 전년과 비슷한 수준인 가운데 비정규직의 가입률은 고용보험(80.7%81.4%), 건강보험(70.3%71.7%), 국민연금(67.5%68.5%) 모두 증가했다. 산재보험의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 가입률이 모두 98% 수준이다.

다만 비정규직 가운데 일일 노동자의 국민연금 가입률은 27.6%에 그쳐 일일·단시간 노동자의 사회보험 가입률은 여전히 낮았다. 아울러 노동자 1인 이상 사업체의 노동조합 가입률은 9.9%로 전년 대비 0.4%p 낮아졌다.

이명선 기자 | 노컷뉴스

민희진과 뉴진스내 새끼들프레임이 말하는 것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하이브와 어도어의 갈등 사태를 통해 더욱 또렷해진 사실이 있다. 케이(K)팝의 진짜 주역은 아티스트가 아니라 제작자와 프로듀서라는 점이다. 케이팝의 토대를 다진 3대 기획사 이름부터 이수만(SM)·양현석(YG)·박진영(JYP) 프로듀서에서 따온 것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번 사태에선 프로듀서 사이에도 상하관계로 나뉘었다는 점이 특징적으로 드러났다. 어도어 지분 80%를 가진 하이브의 방시혁 의장은 자본을 댄 제작자, 어도어의 민희진 대표는 그룹 뉴진스를 기획한 크리에이터에 해당한다. 민희진은 한 레이블의 대표인데도 제작자보다 아티스트에 가까워 보인다. 실제 아티스트인 뉴진스보다 더 아티스트다운 면모가 이번 사태를 통해 더욱 도드라졌다.

케이팝 아티스트의 위상은 어떤가. 흔히 케이팝의 시초로 일컬어지는 서태지와 아이들은 스스로 팀을 꾸리고 곡을 만들고 활동을 주도했다. 반면 본격적인 케이팝의 시작을 알린 에이치오티(H.O.T.)는 에스엠의 철저한 기획에서 출발했다. 초창기 아이돌은 기획된 상품에 불과하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받았다. 하지만 실력파 아이돌이 잇따라 등장하고, 빅뱅·방탄소년단(BTS)·(여자)아이들 등 곡을 직접 만드는 그룹이 보편화되면서 아티스트로서의 위상이 탄탄해졌다.

뉴진스는 새로운 케이팝 아티스트 유형이라 할 만하다. 듣기 편한 음악과 뉴트로 콘셉트로 기존 케이팝 그룹과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성공 요인으로는 늘 민 대표의 탁월한 기획력이 거론된다. 멤버들의 매력 또한 그들을 뽑은 민 대표의 능력으로 수렴된다. 민 대표는 뉴진스 맘으로 불린다.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tvN)에 뉴진스가 출연했을 때 민 대표는 엄마처럼 옆에 붙었다. 민 대표는 지난 25일 기자회견에서 뉴진스를 내 새끼들이라고 했다. “내가 만들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남다른 애착의 표현이라고는 해도, 뉴진스에 수동적 소유물이란 프레임을 씌운 것도 사실이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왼쪽)와 김민기 학전 대표. 연합뉴스, 학전 제공

민 대표의 기자회견을 보고 며칠 뒤 3부작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SBS)1·2부를 몰아봤다. 재정난으로 지난 3월 폐관한 소극장 학전의 김민기 대표에 관한 다큐다. 김민기는 아침 이슬’ ‘상록수등을 만들고 부른 빼어난 아티스트다. 자신의 음반 수익을 털어 1991년 학전을 세운 뒤로는 아티스트가 아닌 기획자로 살아왔다. 그는 스스로를 뒷것이라 칭했다. ‘앞것인 배우들과 가수들 뒤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그들을 밝게 비추는 일을 했다. 배고픈 무명 배우들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고 자신의 월급보다 더 많은 출연료를 줬다.

배울 학()에 밭 전() 자를 쓰는 학전은 못자리를 뜻한다. 배우 이황의는 김민기 선생님은 (배우가) 다 크면 내보내고 모를 새로 심고 농사짓는 마음으로 하셨다. ‘잘되면 얼른 나가. 뒤돌아보지 마하셨다고 전했다. 그렇게 해서 큰 배우가 된 이들은 스스로 김 대표를 스승님이자 아버지라 부른다. 김 대표가 먼저 내가 그들을 키웠다거나 내가 아버지라고 말한 적은 결코 없었다.

앞것민희진과 뒷것김민기를 보며 아티스트를 만드는 기획자의 덕목에 대해 곱씹어본다. 이번 사태에서 진정 뉴진스를 위하는 길은 무엇인가.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택시 운전하다 만난, 강남에서만 보이는 장면들

[나는 택시 운전사] '강남바리'는 택시 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욕망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에서 시민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연합뉴스

업계 용어로 '강남바리'라는 단어가 있다. 택시 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은어다. 운행이 강남권 안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택시 기사들이 선호하는 코스다. 강남은 길이 넓고 평평한 데다 직선이라 (정체 시간만 아니라면) 운전이 까다롭지 않다. 게다가 손님이 끊김 없이 이어진다.

생활권이 너무 다른 이물감 때문에 강남을 일부러 피하는 택시 기사도 더러 있지만 대체로는 돈이 되기 때문에 몇 시간씩의 강남바리를 기대하며 운행한다. 그러다 강북이나 강서나 강동으로 가자는 손님이 탑승하면 강남바리가 끝나는데, 이어서 강북바리나 강서 혹은 강동바리를 했다는 말을 들을 일은 별로 없다.

이유는 손님이 강남처럼 계속 이어지지 않고 드문드문한 데다, 길이 좁고 복잡할 뿐만 아니라 골목과 언덕길도 많아 택시 기사 입장에서는 운전은 힘들고 돈도 안 되기 때문이다. 해서 강남바리는 자연스럽게 입에 붙지만 강북이나 강서 혹은 강동바리란 단어는 왠지 어색하고 적절치 못한 용어라는 느낌마저 든다. 부인할 수 없이 택시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길은 강남을 향한다.

택시 운전을 하다 보면 강남에서만 보이는 장면들이 또 있다. 강남 신사 논현역을 중심으로는 얼굴이 비슷해 보이는 성형미인들이 흔하다. 늦은 밤 신사에서 청담 방향 대로변 빌딩 앞에 빨갛거나 파랗게 불을 밝힌 작은 천막은 대리주차를 하거나 입구를 지키는 룸살롱 직원들의 대기 장소다.

미국이나 캐나다 대학이 방학하는 시즌이면 압구정 로데오 밤거리를 유학생들이 활보한다. 어떻게 아냐면 공부보다는 유학이 더 중요해 보이는 이 부잣집 젊은이들의 대화는 한국말이 섞인 영어다. 영어가 섞인 한국말이 아니다.

낮에 청담동에서 대치동 학원으로 가는 아이 손을 잡고 택시를 타는 사람은 보모인 조선족 이모들이고, 저녁 10시 무렵 대치동 학원가 인도는 금요일 퇴근 시간 지하철 환승역처럼 이동하는 학생들 머리로 빽빽한 진풍경이 펼쳐진다.

한 평짜리 좁은 차 안이지만 길을 누비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몰랐던 세상이 보여진다. 30년 전에도 그랬다. 그땐 좁은 차가 아니고 우람한 건물이었다.

식은땀 나는 광경

재벌 가족 조찬 며칠 전부터 양복 입은 회사원들이 테이블 위치와 호텔 내 동선까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을 보고 재벌은 아침 식사법도 다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사진. 픽사베이

1993년부터 호텔리어로 2년을 살았다. 군 제대 후 일 년이 지나 스물여덟이었다. 운동권의 원심력 안에 있었고 복학을 미루고 있을 때였다. 1987년 민주화의 열기가 식지 않은,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한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었다.

커피숍, 연회장, 룸서비스 등을 몇 개월 단위로 순환근무 하는 식음료부 소속이었다. 지역에서 유일한 오성급 호텔이었고 지하에는 나이트클럽이 있었다. 지역의 지하 세계는 몇 개의 폭력조직이 분할하여 서로 견제하며 지배하고 있었고 호텔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목은 감옥에 있다 했고 부두목이 커피숍에 자주 나타났다. 그가 앉아 있으면 가끔 한눈에 봐도 '깡패'처럼 보이는 '어깨'들이 입구에서 달려와 허리를 90도로 꺾는 형님인사를 했다. 그가 있으면 작은 조폭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들리는 말로는 호텔에서 보호비로 당시 돈으로 매달 500만 원을 준다고 했다.

어느 날은 밑에 지방 폭력조직과 연합 엠티를 한다고 호텔 객실 한층을 모두 전세내어 하룻밤을 놀다 가기도 했다. 하필이면 나는 그때 야간 룸서비스였다. 한숨도 못 자고 날을 꼬박 새우면서 한 일이 팬티만 입고 문신 가득한 몸을 드러낸 채 카드 도박을 하는 그들 방에 오므라이스를 배달하는 일이었다.

왜 오므라이스였냐 하면 마침 배가 출출했던 조폭 한 명이 오므라이스 하나를 시켜서 가져갔더니 옆에 조폭이 보니까 먹고 싶다고 주문하고, 주문하는 걸 보던 다른 조폭들도 그럼 나도 먹겠다며 연달아 시켰고, 기어이 그게 방에서 방으로 연기처럼 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현금이 주로 오가던 시절이라 부가세 포함 7700원짜리 보통 사람은 억 소리 나는 호텔 밥값으로 만 원을 주면서 처음 주문을 시작했던 스무 살 갓 넘어 보이는 어린 '깡패'의 고생했다 잔돈은 팁이다, 라는 '가오 넘치던' 격려의 말도 연기처럼 퍼져나갔다. 덕분에 오므라이스 한 개당 2300원이던 팁이 밤을 새우고 나니 10만 원이 넘어 우악스러운 분위기에 반말 찌꺼기로 무너졌던 자존심이 겨우 돈이나 세면서 치유되던 나를 지금도 기억한다.

연회장에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 손가락에 꼽는 재벌 가족 조찬을 서빙한 적이 있었다. 며칠 전부터 양복 입은 영락없는 회사원들이 조명부터 테이블 위치와 호텔 내 동선까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을 보고 재벌은 아침 식사법도 다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 한 끼 먹는데 그렇게까지 긴장되고 진지한 표정을 짓는 아랫사람들 모습을 보면서 겨우 서빙이나 하는 내가 측은지심이 들 정도였다. 식은땀을 안 흘렸을 뿐 내겐 식은땀 나는 광경이었다.

호텔에서 목격한 부조리한 세상

30년 전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가 호텔에서 목격한 세상은 부조리했다. 자료사진. 픽사베이

호텔에서 본 세상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지역에서 유일한 오성급 호텔이다 보니 사업하는 사람들과 고위공무원과 선출직 권력자들이 부지런히 오갔다. 그 작은 지방에 조찬모임을 포함한 각종 모임이 그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검찰이나 경찰 혹은 시군구 등에 적을 둔 각종 민간위원회뿐만 아니다.

성공한 시니어들이 사회에 봉사한다는 굵직한 클럽 두 개가 주 단위 혹은 월 단위로 호텔에서 정기모임을 했다. 그의 아들딸들은 주니어 모임을 호텔에서 열었고 국제 교류를 위해 외국 회원들을 초대해 호텔에서 환영했다.

대를 잇고 국적을 초월하는 네트워크였다. 경찰 검찰 이름을 단 민간위원회 조찬모임 때 서빙하면서 봤던 사람들이 낮에 커피숍에서 사업 미팅을 하고 저녁 클럽 모임에도 얼굴을 보였다.

어느 날 낮에는 룸서비스로 불려 올라간 객실에서 건설사 사장과 고위 공무원 등 이미 호텔에서 익숙해진 얼굴들이 옆에 벽돌처럼 현금을 쌓아 두고 화투장을 돌리고 있었다. 명예와 권위와 품격으로 치장됐던 그들의 민낯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들이 돌리고 있는 것이 화투장만이 아니라는 것쯤 짐작하고도 남았다.

어떤 날은 머리가 허연 일본 노인들이 호텔에서 가장 큰 연회장을 빌려 행사를 했다. 몇 사람이 나와 마이크를 잡고 회상 어린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을 하고 마지막에는 다 함께 눈물 젖은 합창곡을 부르는 거였다.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이 지역 초등학교를 다녔던 일본인들이 바다 건너와서 하는 동창 모임이었고 그들이 부른 합창곡은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니면서 불렀던 교가였다.

우리에게 아픈 역사의 현장이 그들에게는 그저 유년 시절 추억이 깊이 배인 향수 어린 고장이었다. 그때 연회장 한 구석에서 나비넥타이 차림의 (아직은 원동권이었던) 나는 한때 제국주의 국가의 신민이었고 어린 학동이었던 그들의 동창회를 만감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각종 경비 목록이 적힌 문서에 병에 남은 술의 찰랑거리는 지점까지를 기록하는 노인의 침착함이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남은 술은 응당 버리는 게 자연스러운데 노인의 기록을 보면서 그래서 우리에게서 버려지는 것들이 과연 남은 술 뿐일까라는 반성 어린 의문이 들었었다.

30년 전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가 호텔에서 목격한 세상은 부조리했다. 당시 지역을 주름잡던 지방 토호와 세력가들은 보통 사람들은 쉽게 드나들 수 없는 호텔 안에서 조찬을 즐기고 도박을 하고 이익을 나누었다. 지하 세계를 주름잡던 조폭들도 호텔 안에서 온갖 야사를 만들어냈다. 한때 침략국의 어린이였던 노인들은 식민지 호텔에서 동창회를 열었다.

먹고 사는 것도 힘에 겨운 보통 사람들이 발 들일 일 없는 호텔에서는 그들이 전혀 알 수 없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절대로 그럴 일 없는 장면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 또 하나의 모습이 있다.

탐욕은 변하지 않았다

신학기가 되면 연회장에는 사립 중고등학교 학부모회에서 주최하는 사은회가 열렸다. 자료사진. 픽사베이

신학기가 되면 연회장에는 사립 중고등학교 학부모회에서 주최하는 사은회가 열렸다. 대기업 초봉이 60만 원이던 당시 돈으로 인당 몇만 원짜리 뷔페를 차려 놓은 한 편에 노래방 기기가 놓이거나 밴드가 불려 오기도 했다.

학부모회 임원과 선생님들은 한데 어울려 먹고 마시고 노래하면서 새로운 학기를 축하하고 선생님들의 노고를 미리 치하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선생님들 손에 귀한 선물과 하얀 봉투가 든 커다란 쇼핑백을 들려 보냈다.

학부모회 임원들이 학기 초에 미리 감사하며 베풀었던 사은회에 대해 선생님들은 학기 말에 어떻게 보답했을지 역시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았다. 학기 때마다 돈봉투가 예사였던 당시 학교문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학부모들에게 사은을 받은 선생님들은 다시 제자들에게 사은했다. 그때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그랬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20239월 연합뉴스가 전한 소식은 다음과 같다. "입시학원-수능출제 교사 '검은 카르텔'최고 5억 받았다". 사교육 업체가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 교사들에게 접근해 돈을 주고 모의고사 문항을 산 사실이 드러났다.

다음은 2024311<매일경제> 사회면 기사 제목이다. "학원에 문제 넘긴 현직교사 8, 7억 챙겨말로만 듣던 '입시카르텔' 진짜였네".

기사 내용을 보면 감사원이 수사 의뢰한 관계자는 총 56명이다. 현직 교사 27, 사교육 종사자 23, 대학교수 1, 평가원 직원 4, 전직 입학사정관 1명 등이 포함됐다. 감사원 관계자는 "이런 분들이 문제를 만들어 (사교육 시장에) 공급하면 수능 경향이 반영된 문제들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사교육시장은 킬러문항을 사들여 일타강사를 만들었고 부자 학부모는 억 소리 나는 돈을 주고 그들에게 자식들 수능시험을 맡겼다. 30년 전에는 그래도 사은회라는 그럴싸한 명분이라도 내세웠는데, 이제는 아예 노골적이고 조직적으로 시험문제를 사고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 자식을 위한 그릇된 부자들의 탐욕은 변하지 않았다. "서울대·전국 의대 정시 신입생 5명 중 1명은 강남 출신". 202359일 자 연합뉴스 소식이다. 오늘도 모든 길은 강남을 향한다. '강남바리'는 택시만이 아닌 지금 세상을 사는 모두의 욕망이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는 자신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 서문에 이렇게 썼다.

"세계화에서 비롯된 승패와 정치 분열 등의 문제는 더 이상 '좌냐 우냐'의 구분으로 따질 수 없게 되었다. 그보다는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로 따져야 할 것이다. 열린 세계에서의 성공은 교육에, 즉 세계 경제 환경에서 경쟁하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데 달려 있다. 그것은 각국 정부가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교육 기회를 반드시 균등하게 관리해야 함을 뜻한다."

오마이뉴스 김지영(redoox)

2023년 최저임금은 주 40시간 기준 201만 원이다.

4남매가 직접 쓴 엄마의 구순 기념 책, 눈물 나서 혼났습니다

<우리 엄마 최영순> 구순 가족문집을 출간하며

마침내, 엄마 구순 기념문집 <우리 엄마 최영순>을 출간했다.

"엄마 이야기라면 한 권도 쓸 수 있어."

일찌감치 엄마 구순 기념문집에 걸었던 기대는 남동생의 이 한 마디에서 비롯됐다. 2년 전 아버지 구순 기념 가족 문집(관련 기사: 아버지의 구순, 온 가족이 총출동해 책을 썼습니다, https://omn.kr/1yhbr)을 낸 직후에 나온 말이니, 이번 엄마 문집에는 우리들의 일취월장으로 제법 묵직한 글들을 써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버지 구순 기념 문집은 아버지 세대부터 손주 세대까지 3세대 17명의 글을 모으는 것이어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번 엄마 문집은 우리 형제들 세대로만 하자'고 정하고 지난 여름부터 매달 15일을 마감일로 하는 형제 원고 카톡방을 만들었다. 책 출간 경험도 있고 시간도 넉넉하니 '이번 원고모집과 편집은 수월하겠다' 싶었다.

"엄마 고생한 것만 자꾸 떠올라서..."

첫 달 15, 원고방은 조용했다. 두 번째 달 15일에도 원고방은 잠잠했다. 의문은 영국에 사는 여동생과의 통화에서 풀렸다.

"언니, 엄마 이야기는 제목도 에피소드도 다 정리해 놨는데 막상 글을 쓰려니 슬픈 감정이 자꾸 밀려와서 글 쓰기가 힘드네. 좋은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엄마 고생한 것만 자꾸 떠올라서.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엄마가 좋아하실까?"

언니의 마음도 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여러 가지이고, 존경의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엄마에 대한 것은 고생하신 것만 떠오르네. 이런 걸 쓰는 게 맞나 싶다."

한 권도 쓸 수 있겠다던 남동생에게서도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지난 작년 겨울, 친구의 친정어머니와 시아버지가 일주일 사이를 두고 연달아 하늘나라로 가셨다. 계속 상을 치르는 친구를 보며 '엄마를 회상하는 작업을 더는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맞춰 남동생의 글이 올라왔고 우리들은 용기를 내서 엄마와의 시간들을 불러왔다.

4남매가 기억하는 엄마와의 시간

이 책에는 우리들이 기억하는 엄마와의 시간이 들어있다. 각자의 이야기를 통해 엄마의 시간들이 릴레이 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리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나는 형제들의 글을 보면서 엄마는 엄마의 시간을 반짝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엄마는 끓임 없는 노동도, 치매 시어머니와의 시간도, 아버지 퇴직 후 생업을 맡으셨던 그 모든 시간들도 엄마는 당신의 자존을 높이는 시간으로 만들어 가셨다. 그렇게 사남매를 키우며 당신의 화양연화 시절을 이루셨고 가족들 옆에 굳건히 서 계셨다.

엄마는 이야기꾼이기도 하셨다. "엄마 그때는 어땠어요?"라고 물으면 엄마는 그 시간이 눈에 잡히기라도 하듯 이야기를 이어 가셨다. 형제들의 글을 통해 색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 엄마의 이야기를 보며 '엄마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며 당신의 시간을 견디어 내셨구나' 싶어진다.

하나뿐인 며느리에게 다정하게 풀어내신 이야기 앞에서 우리들은 빙그레 미소 짓게 된다. 육 남매 맏며느리 시집살이, 눈앞이 캄캄했던 큰 사위의 사고, 가물치를 달여 산달 며느리가 있는 태국으로 한걸음에 달려가신 그 발걸음에서 우리는 엄마가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을 배운다.

그것은 사람을 대하는 엄마의 따뜻함이다. 상황을 대하는 엄마의 묵묵함이다. 우리는 엄마의 따뜻함과 묵묵함의 양분을 먹고 자라 지금의 우리들이 됐다.

그래서 한 가지 희망을 품게 된다. 언젠가 우리에게서도 따뜻함이라는 엄마의 유전자가 비집고 나올 것이라는 희망이다.

노동과 희생을 통해 당신의 자존을 지켜오신 엄마에게 존경과 사랑을 드린다.한 권도 쓸 수 있다는 동생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 엄마 최영순>이라는 책을 향해 힘과 생각을 모은 형제들과의 시간이 즐거웠다.

우리들의 글이 엄마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되면 좋겠다.

오안라(anrao) 오마이뉴스

고 양회동 1주기...국가와 조선일보의 거짓말

202351. 그날은 노동절이었다. 한 건설노동자가 법원의 구속 영장 실질 심사를 받는 날이기도 했다. 그 노동자는 영장 심사를 앞두고 법원 앞에서 몸을 불살랐다. “떳떳하게, 바르게 노동조합 활동을 했는데 구속영장 청구라니 정말 억울하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노조 탄압에 대한 답답함과 억울함으로 꽉 채워진 자필 유서는 무려 다섯 장에 달했다.

건설노동자의 이름은 고 양회동(사망 당시 나이 50). 그는 강릉, 속초 지역의 노동 여건을 위해 힘쓰던 전국 건설노조 강원 건설지부 제3지대장이었다. 그는, 그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던 노조 활동이 건폭(건설 현장 폭력 행위)’으로 둔갑한 것을 끝내 참지 못해 온몸을 불태웠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노조탄압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뉴스타파가 고 양회동 씨 1주기를 앞두고 지난 426일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을 찾았다. 그가 분신했던 자리에는 새 풀이 돋아 있었다. 양회동 씨가 숨진 후 많은 언론과 노동자들이 이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1년이 다 되도록 이 장소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고 양회동 씨의 배우자 김선희 씨 그리고 양 씨와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부지부장 홍성헌 씨다.

선희 씨와 성헌 씨는 아직도 양회동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 자리에 가면 남편의, 동료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 같아 아직은 갈 수 없다. 선희 씨는 이날 강릉지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도 200m 떨어진 남편의 사망 장소에는 가보지 않았다. 차마 갈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들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양회동의 죽음에 씌워진 거짓을 벗겨내는 일, 그리고 누명을 씌운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다.

이들이 책임을 묻는 대상은 국가와 언론이다. 무리한 수사로 양회동을 죽음으로 내몬 경찰, 유족 동의 없이 고인의 분신 장면이 담긴 CCTV를 유출한 검찰, CCTV 장면을 유족 동의 없이 활용해 분신 방조를 암시하는 기사를 낸 조선일보,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해 기획 분신의혹을 확산한 원희룡 전 국토부 장관 등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 안장된 건설노동자 고 양회동 씨. 고 양회동 씨는 1년 전 윤석열 정부의 노조 탄압을 비판하며 분신한 뒤 사망했다.

고 양회동 씨 유족은 1년 전 경찰과 조선일보, 원희룡 장관 등을 CCTV 유출에 따른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하지만 아직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유족은 수사 진행 상황도 듣지 못했다. 속전속결로 진행됐던 건폭 수사와는 너무도 상반된 경찰의 행태. 이들이 그토록 불신했던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유다.

뉴스타파 홍여진

의령 10남매, 대통령 만난다

'세상과 어울리기 > 시사만평-주간 쟁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5.13~  (0) 2024.05.13
24.5.5~  (0) 2024.05.05
24.4.22~  (0) 2024.04.22
24.4.15~  (0) 2024.04.14
24.4.8~  (0) 2024.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