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사람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경향 2019.12.15
지연된 정의는 무엇을 남기는가 경향 2019.12.15.
오염된 미군기지, 트럼프가 치워라 경향 2019.12.15.
누구를 위한 부동산 정책인가 경향 2019.12.16.
18번째 부동산 대책 이번에는 효과 거두길 CBS노컷뉴스 2019-12-16
양심수는 왜 석방되지 않는가? 한겨레 2019-12-16
윤석열식 검찰 중립’ 유감 한겨레 2019-12-17
막장까지 간 검찰의 압수수색 한겨레 2019-12-18
종교와 자본주의 경향 2019.12.20
가짜뉴스 타령 경향 2019.12.22
올 한 해 고마웠던 보도들 mediatoday 2019.12.22
공공의 영역에 나서는 것이 자살행위가 되는 시대 경향 2019.12.23.
세상에 속지 않는 법 경향 2019.12.24.
장외 황교안’의 1년 경향 2019.12.26
‘미친 집값’ 시장 자율에 맡기라는 ‘미친 언론’ 한겨레 2019.12.26.
서울과 지방의 주택시장 역주행을 막으려면 경향 2019.12.26.
그들의 이름을 망각해온 그리스도교를 반성하며 경향 2019.12.27.
18세 선거권 경향 2019.12.27.
문재인 정부가 되돌려 놓아야 할 일 경향 2019.12.31.
혁신은 사람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앞으론 이게 은행 지점입니다.” 얼마 전 만난 한 시중은행장이 호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면서 한 얘기다. 이 은행장 말처럼 요즘은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으로 대부분의 은행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은행 지점 찾아가고, 번호표 뽑고 기다려야 하는 불편과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는 참 편리한 세상이 됐다. 눈부신 기술혁신 덕분이다. 하지만 그 기술혁신으로 은행원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은행권 취업자 수는 2015년 말 13만8000명에서 지난해 말 12만4000명으로 3년 새 1만4000명이나 줄었다. 지난 10월에는 국민은행이 서울에 무인점포까지 열었다.
은행원은 청년들이 선망하는 양질의 일자리다. 은행 취업에 성공한 학생을 배출하면 ‘경축’ 플래카드를 내거는 특성화고도 여전히 많다. 지금은 은행들이 막대한 이익을 내고 있어 기존 직원들에게 거액을 줘 가며 희망퇴직을 시키고, 그 자리에 매년 수천명씩 신규채용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 독일의 도이체방크가 지난 7월 1만8000명의 감원 계획을 발표하는 등 세계적인 은행들도 대규모 인력감축에 들어갔다. 한국의 은행들이라고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혁신은 일자리의 양뿐 아니라 질도 악화시킬 수 있다. 요즘 혁신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이들이 타다, 배달의민족(배민) 등 플랫폼기업들이다.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을 서비스에 연결해 번창 일로에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국민연금, 건강·고용·산재보험 등의 4대보험과 야간·휴일수당, 퇴직금 등 노동자로서의 권익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는 플랫폼 노동자들의 현실이 숨어 있다. 이들 플랫폼 노동자들은 당장 현금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기존 유사한 노동을 할 때보다 많을 순 있다. 하지만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해 생기는 유·무형의 손실을 감안하면 오히려 더 열악한 직업환경에 처해 있다.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혁신기업들은 소비자들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그래서 돈을 번다. 공짜 혁신은 없다.
혁신기업들은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 이들의 혁신이 오롯이 그들만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혁신산업이라는 것은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계기가 될 수는 있어도 앞선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축적된 기술과 산업의 기반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들이다. 많은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국가가 만든 도로와 통신망 등 사회간접자본도 완비돼 있어야 사업이 가능하다.
아무리 특출한 혁신기업도 서비스를 이용할 ‘사람’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타다나 배민의 매출이 늘어나려면 버스가 아니라 타다를 이용할 수 있고, 탕수육과 족발을 주문해 먹을 여유가 있는 은행원 같은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 디지털에, 핀테크에 혁신에 혁신을 한 은행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타다 기사나 배민 배달라이더 같은 이들이 저축을 하고, 대출도 받아야 한다. 은행원, 기사, 배달라이더들이 소비하는 제품들이 늘어야 이들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성장하고, 이 기업들과 거래하는 은행이 수익을 낼 기회가 생긴다. 이 기업들이 고용도 많이 하고 노동자들의 급여도 올려줘야 타다를 이용하고 배민으로 주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다. 은행원, 기사, 배달라이더들이 안정적으로 소득을 올려야 근로소득세를 내고, 이들이 충분히 소비해 부가가치세를 충당해야 혁신기업들이 사업하기 좋도록 사회간접자본이 정비되고 관리될 수 있다.
혁신이 ‘사람’을 중심에 두고 이뤄져야 지속 가능성이 있는 이유다. 혁신기업이 마음껏 사업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주고 제도를 만들어주고, 세금을 깎아주는 것만이 혁신을 위한 전부가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혁신을 칭송하는 것만큼 혁신의 그림자도 걱정하고 대책을 세워야 하는 이유다.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더 그럴까. 이어지는 송년 모임에서는 우울한 얘기들만 귀에 들어온다. 동년배들 모임의 화두는 어느새 노후 걱정이 돼 가고 있다. 회사 그만두게 되면 어떻게 먹고살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국민연금은 얼마나 되지, 그거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퇴직연금도 펑크 난다는데 중간정산 받을 방법은 없나 등등. 열정과 희망이 아닌 불안과 좌절 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는 청년들은 훨씬 더 힘들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은 지 오래됐다는데 주변에서 희망을 얘기하는 이들은 찾기 어렵다. 은행원이나 타다 기사나 배민 배달라이더나 성실하게 일하면 당장의 생계 걱정 없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사는 중산층이 될 수 있어야 나라의 경제는 물론 정치도 건강해진다. 혁신만으로 이런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 김준기 경제부장 경향 2019.12.15
지연된 정의는 무엇을 남기는가
문희상 국회의장님!
2015년 연말이었습니다. 그때도 박근혜 정권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에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한 ‘결단’을 내린다 했었지요. 연로하신 피해자 한 분이라도 살아계실 때 해결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일본 정부의 돈 10억엔으로 한국에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하고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불함으로써 ‘가장 어렵고 힘든 과거사’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한다고 주장했었지요. 그게 ‘2015 한·일 위안부 합의’(이하 2015 한·일합의)였습니다.
2019년 겨울, 문재인 정권하에서 국회의장님이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해 ‘구국의 결단’을 내리신다고 합니다. 한·일 양국 기업과 국민의 자발적 기부금으로 ‘기억·화해·미래재단’을 설립하고 운영비는 한국 정부가 대며, 일정 기간을 두어 신청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불하겠답니다. 연내에 관련 법안을 발의해 ‘한·일 간의 갈등’을 근원적·일괄적·포괄적으로 해결하겠다고 하십니다. 소위 ‘문희상안’입니다.
의장님, 특정 시기의 중요성을 명분 삼아 급박한 시한을 정해, 과거사를 ‘완전히’ 청산하고자 하는 모양새가 ‘2015 한·일합의’ 때와 너무 유사합니다. 가해자의 범죄사실 인정과 진정한 사죄, 법적 배상이라는 기본적인 전제가 없음은 물론 위자료 성격의 돈으로 가해 책임을 면제해 주겠다는 발상도 놀랍도록 같습니다. 한·일 갈등의 근본적 원인이 부인과 왜곡, 피해자 비난을 일삼아 온 일본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요청해온 피해자가 되어 버린 느낌도 유사하고요.
의장님은 아마도 양국 정부가 주도한 기습 선언으로 국민적 반발을 쓰나미처럼 맞았던 ‘2015 한·일합의’의 악몽을 기억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래서 의장님 단독 플레이를 자처하며 일본 의원들과의 물밑 접촉으로 방향을 잡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정부와 여당이 눈도 입도 귀도 없는 양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이, 의장님은 일방적 선언, 언론 흘리기, 여론 살피기와 내용 바꾸기를 지속하셨지요. 처음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섞고 ‘한·일 위안부 합의의 유효’함을 확인하자고 했다가 나중에는 빼시고, ‘기억인권재단’이라고 했다가 ‘화해’와 ‘미래’를 넣으시고, 기금 마련안도 ‘2+2+α’에서 ‘1+1+α’로 유동했습니다. 의장님 정도 되시는 ‘유능한’ 정치인이라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국민적 반발을, 언론플레이를 통해 미리 유도해 김 빼기를 하고 있다면 너무 나간 걸까요. 피해자를 배제하거나 선택적으로 접촉하시고 제한된 의견 수렴 채널을 가동해 법안을 추진하면서도, ‘피해자중심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점 또한 놀랍습니다.
의장님, 너무 참담합니다.
‘2015 한·일합의’가 일본 정부의 돈으로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려 했다면, 의장님은 아무런 책임도 없는 한국 기업과 한국 국민의 돈까지 섞겠다고 합니다. 직접 연관이 없는 일본 기업으로부터도 자발적으로 기부받겠다고 합니다.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 소재지를 불분명하게 함으로써 가해자의 위치를 소거하고, 법적 책임을 물을 피해자의 자리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2015 한·일합의’ 당시 그나마 있었던 마음의 위로라는 제스처조차 부재한 상태에서 대한민국 국회가 법률로 못 박아 일본에 면죄부를 주겠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요. 피해자의 대리인이 가해자에게 화해를 구걸하며 책임을 영구히 면탈시켜주고자 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로써 야기될 피해자들의 혼란과 고통은 자명하거니와, 식민지 불법성에 항거하며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한·일 시민운동의 정당성과 명분, 국제사회에 축적해온 신뢰는 안으로부터 와르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일본 내 극우 민족주의자들과 한국 내 극우 반민족주의자들이 성장할 자양분 또한 스스로 제공하는 꼴이 됩니다. 결국 우리가 자처한 일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갈등과 분열을 겪는 사이, 일본은 아무런 대가조차 치르지 않고 뒷짐 진 채 불구경만 하게 되겠지요.
의장님의 국가에 대한 충정 그 자체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국회가 나서 문제를 적극 해결하려는 자세 또한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일은 경시된 채, 무지와 오판, 소수의 담합으로 역사적 잘못이 추가되고, 다시 정치적 위기가 초래되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어선 안됩니다. ‘국익’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잘못, 이로 인해 또다시 지연된 정의는 결국 다음 세대에 계승되고 확장되어 더 무거운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용과 형식, 절차 모든 면에서 반헌법적·반역사적·반민주적인 ‘문희상안’을 당장 철회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19.12.15.
오염된 미군기지, 트럼프가 치워라
무상으로 땅을 빌려주면서 집을 지어주고 용돈과 차비도 줬는데, 묵은 기름때와 독극물, 소각장은 그대로 두고 떠난다. 주인은 남은 쓰레기와 시설을 자기 돈으로 직접 치운다. 심지어 원래 살던 식구들을 쫓아내면서 여의도 5.5배 면적의 집을 지어주고 이사비 16조원도 기꺼이 지불했다. 미국이 한국에 군대를 주둔한 지난 75년 동안, 한국 정부는 단 한 차례도 미국에 오염된 미군기지 정화 책임과 비용을 받아낸 적이 없다. 미국은 ‘한국 국민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환경정책의 기본원칙인 ‘오염자부담원칙’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와 마찬가지로, 국내 토양환경보전법은 “그 오염을 발생시킨 자는 그 피해를 배상하고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는 등의 조치를 하여야 한다”(제10조의3)고 규정하고 있다. 지난주 한국 정부는 고농도 토양오염이 발생했던 원주 캠프 이글과 캠프 롱, 부평 캠프 마켓, 동두천 캠프 호비 쉐아사격장 등 4개 폐쇄 미군기지를 즉시 반환받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미측과의 이견’으로 정화 주체와 비용은 ‘오염을 발생시킨 자’가 아니라 한국이 지겠다고 했다. 미국은 2006년 오염된 23개 미군기지 반환 때도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원상 복구 의무가 없다’(제4조 1항)는 규정을 근거로 버텼다. 이번 협상 때도 캠프 마켓에서 기준치 10배 이상의 다이옥신이 발견되었지만, 미국은 SOFA에서 유일한 환경기준인 ‘주한미군에 의해 야기된 인간 건강에 대한 공지의 급박하고 실질적인 위험(KISE)’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강경화 장관의 외교부는 이번에도 오염자부담원칙을 따지지 못했다.
닥쳐올 용산기지 반환 협상은 태풍의 핵이 될 것이다. 주한 미군기지 중 환경오염 사고가 가장 빈번하고 폭넓고 고농도로 발생한 곳이 바로 용산기지다. 지난 25년 동안 밝혀진 오염사고만 90건이 넘고, ‘주한미군 환경관리기준’으로 ‘최악의’ 유출량 3.38t 이상 7건, ‘심각한’ 유출량 400ℓ 이상 32건이 포함되었다. 오염 사실을 한국 정부와 서울시, 용산구에 알리지도 않았다. 2018년 서울시 ‘용산미군기지 주변 유류오염 지하수 정화현황’을 보면 녹사평역 지점은 1급 발암물질인 벤질의 농도가 지하수 정화기준의 1170.5배에 달했다. 삼각지역 인근 지역은 석유계총탄화수소가 기준치의 292.8배나 됐다. 서울시는 지금까지 매년 이곳의 오염된 지하수를 국민 세금으로 치우고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반대로 용산기지 내부 오염원을 근본적으로 정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정컨대 용산기지 오염정화 비용은 1조원을 넘을 것이다.
미군기지 반환 협상의 ‘선(先) 조건’은 미국에 오염정화의 책임과 비용을 분명히 따지는 일이다. 주한미군이 일으킨 오염사고 기록 전체에 대한 전모를 상세히 밝혀야 한다.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오염자부담원칙을 관철시켜야 한다. 한국 정부는 국민의 자주적 권리, 건강권과 알 권리를 마땅히 주장하며 반환 협상을 준비해야 한다. 국무총리실 ‘용산공원조성추진위원회’를 반환 협상의 컨트롤타워로 세우고 행정부처, SOFA 관련 법률 및 환경오염 전문가, 시민단체를 모아 명실상부한 한국의 협상팀을 구성해야 한다. 환경부와 서울시는 오염기지 대응반을 구성해 협상을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제는, 직접 나서야 한다. 서울시민이 용산기지의 토양, 지하수 오염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국내법에 근거해 주한미군에게 지금 당장, 오염정화 명령을 내려야 한다. 윤상훈 녹색연합 사무처장 경향 2019.12.15.
누구를 위한 부동산 정책인가
어떤 경우든 이 정부는 부동산 가격 문제에 물러서지 않겠다.”(2017년 ‘8·2 대책’ 발표 후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 회사원 구보씨는 후회막급이다. 정부를 믿고 결혼 20년 만에 서울에 내집을 장만하려던 계획을 미룬 바보 같은 자신이 원망스럽다. 구보씨의 친구는 당시 은행 대출을 받아 6억원에 구입한 강남 아파트가 2년 만에 10억원 이상 올랐다. 구보씨와 그 친구는 문재인 정부 2년을 거치면서 계층의 울타리가 달라졌다. 구보씨는 서울에서 영영 내집을 마련하지 못하는 ‘루저’가 될 거란 불안에 오늘도 시달린다.
문재인 정부는 단기간 내에 최고로 서울 집값을 올린 정부로 기록될 판이다. 2년 반 동안 서울 아파트 실거래 가격은 평균 40.8% 올랐고 거래금액은 2억3852만원 상승했다(부동산114 자료). 강남 4구는 5억원가량 폭등했다. 서울 아파트 중간값이 ‘고가주택’ 기준인 9억원에 이르렀다. 문재인 정부 2년 동안에 서울은 ‘다른’ 도시가 됐다.
“집값을 반드시 잡겠다”는 약속을 믿은 순진한 사람들은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치솟은 집값은 부동산 양극화, 자산 불평등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지방 소도시 집 한 채 값의 불로소득을 거둔 10%와 내집 마련과 서울살이 꿈이 멀어진 90%의 간극은 메울 수 없을 만큼 파였다. 구보씨처럼 정부 말을 믿고 집 구매를 미룬 무주택자, 내집 마련이 멀어진 저소득층과 청년층, 소외된 지방 거주자는 손가락을 자르고 싶은 심정이다.
“부동산 문제는 우리 정부에서 자신 있다고 장담한다. 전국적으로는 집값이 하락할 정도로 안정화되고 있다.”(문재인 대통령 11월19일 국민과의대화) 구보씨는 대통령의 부동산 발언을 들으면서 아연해졌다. “자신 있다”는 건 각오로 새길 수 있지만, ‘안정화되고 있다’는 진단은 도통 딴 나라 얘기로 들렸다. 자고나면 ‘억, 억’ 하는 소리가 들리고, 800만명에 달하는 무주택자들은 심각한 박탈감을 토로하는 상황이다.
“전국적 안정화”는 서울·수도권 집값은 폭등하고 지방은 폭락하면서 ‘평균’의 허상이 가져온 통계의 장난이다. 서울 중위아파트 가격은 역대 최대인 8억7525만원을 기록했다. 2년 반 새 70%가 급등했다. 6대 광역시의 중위가격은 평균 2억4000만원, 나머지 지방은 1억6000만원이다. 서울의 가장 비싼 구와 싼 구의 주택가격 격차는 2016년 3.4배에서 3.9배로 커졌다. 부동산 광풍으로 자산 불평등이 극심해졌는데, ‘평균’을 앞세워 안정화를 얘기하니 여론이 사나울 수밖에 없다.
“청와대 전·현직 참모들의 부동산 가격이 2년 반 동안에 평균 40%(3억2000만원) 올랐고, 상위 10명은 10억원가량 급등했다. 참모 3명 중 1명꼴로 다주택자다.”(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12월11일) 구보씨는 또다시 절망한다. “집값은 반드시 잡겠다”고 호언하던 청와대의 참모들이 부동산 불로소득으로 배를 불렸다. ‘부동산 정책 설계자’로 불리는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과천 아파트는 12억원이 올랐다. “모든 국민이 강남에 가서 살 필요는 없다”던 장하성 전 정책실장의 잠실 아파트는 7억원 이상 불어났다. 정부 1급 이상 고위공직자의 30%가량이 강남 3구에 ‘똘똘한 한 채’를 보유하고, 47%가 다주택자이니 이들 역시 비슷한 재산 증식을 누렸을 게다.
청와대 참모들의 불로소득 잔치를 보면서, 구보씨는 묻고 싶어진다. 대체 누구를 위한 부동산 대책인가. 배신감에 억장이 무너지는 건 구보씨만은 아닐 터이다.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소리 높여/ 자유여 해방이여 통일이여 외치면서/ 속으론 워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네/ 속으론 워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네.”(안치환 ‘자유’)
정부는 16일 새 부동산 대책을 내놨다. 벌써 노무현 정부의 17번을 넘는 18번째 대책이다. 문제는 대책이 적어서가 아닐 것이다. 여태 정부 대책이 나올 때마다 집값은 잡히기는커녕 되레 상승하기 일쑤였다. 정부 정책이 신뢰를 잃으면 집값은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은 제3자가 없다. 부동산을 잡지 못하면 부동산이 정권을 잡는다. “참여정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초심의 절실함으로 벼릴 때다.
구보씨는 이제 기대를 걸지 않는다. 믿어서 치른 대가가 너무 컸다. 다만 청와대 참모와 고위공직자들이 다주택을 처분하고 ‘똘똘한 한 채’ 투자를 유보하는지 지켜볼 생각이다. 최소한 그 정도 시그널은 나타나야 정부 대책의 실효성을 믿을 구석이 싹트기 때문이다. 흑석동 상가건물 투자로 1년 만에 9억원의 시세 차익을 실현한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성공하면 그때 다시 집을 사겠다”고 했다. 구보씨는 김 전 대변인이 꼭 집을 다시 사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양권모 논설위원 경향 2019.12.16.
18번째 부동산 대책 이번에는 효과 거두길
지난달 10일 열린 문재인대통령과 국민과의 대화에서 부동산 문제가 거론됐을 때, 시청자들은 대통령의 인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 대통령은 "부동산문제에 있어서는 자신 있다"며 "전국의 집값이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뿐 아니라 다른 지방까지 아파트 폭등세가 확산되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대통령의 '안정세' 발언은, 정부가 부동산 시장에 대해 안이한 판단을 하고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문재인 대통령의 문제인식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대책을 내놓기 위한 연막작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발언 이후 한 달 만인 16일 고강도 부동산대책이 발표됐다.
언론에 발표 시기도 알리지 않은 전격적인 발표다. 부정적인 여론을 읽은 정부의 다급함과 위기의식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만큼 주택시장이 이상 과열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책의 범위와 강도도 이전보다 훨씬 강력하다. 세금, 대출, 청약, 공급대책이 망라돼 있다.
고가주택을 가진 사람들은 앞으로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기 어렵게 만들었다. 9억원 이상 주택보유자는 대출비율을 20%로 낮췄고, 15억원이 넘는 집을 가진 사람은 아예 대출을 받을 수 없다.
종합부동산세도 대폭 올렸다.
양도소득세도 보유기간에 따라 크게 올랐는데, 10년이상 집을 갖고 있던 사람이 집을 팔 경우 내년 6월까지 한시적으로 완화된 조건을 적용하기로 했다.
공시가격도 최대한 현실에 맞게 조정해서, 고가의 주택을 갖고 있으면 세 부담이 가중되도록 했다.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되는 지역도 크게 늘렸다.정부의 대책은 고가의 주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세 부담을 크게 늘려 주택을 팔도록 하고, 고가의 집을 가진 사람이 대출을 받아 주택을 늘려가는 투기를 방지하겠다는데 주안점이 있다.
대신 공급을 늘려 집값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고강도의 대책이 갑작스럽게 발표되면서, 시장에는 상당한 파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충격요법으로 과열양상을 보이는 시장을 안정시키고, 세금이 부담스러운 보유자들이 주택을 내놓을 경우, 안정세를 유지할 가능성도 있다. 정부는 이번 대책도 효과가 없다면 내년 상반기쯤 새로운 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라며, 부동산 시장에 대해 '경고'를 하기도 했다.
정부의 대책과 경고가 국민의 기본권인 안정적인 주거권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 되기를 기대한다. /문영기 논설실장 CBS노컷뉴스 2019-12-16
양심수는 왜 석방되지 않는가?
대한민국이 세운 부끄러운 세계 신기록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한국은 자살률도 노인빈곤율도 모두 최악이고, 출산율은 최저 수준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통계 차원의 사회적 참극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아도, 인권 방면에서 한국이 세운 또 하나의 세계 신기록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오히려 국외 인권운동가들이 더 잘 아는 경우가 많다. 한국은 세계 최장기수의 나라이며, 제도적 민주화가 된 국가 중에서는 양심수들이 가장 많은 나라다.
김선명(1925~2011) 선생. 그가 2000년에 북송된 뒤로는 국내에서 거의 잊힌 이름이 되었지만, 세계 인권 연구자들에게는 여전히 기억되는 이름이다. 그는 해방 전후 시대의 좌익 운동가였고, 6·25가 터진 뒤로는 북한군 편에 서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군사 재판부는 그가 속한 정찰대를 ‘간첩 부대’로 간주했고, 그는 ‘간첩’으로 분류되어 기한도 없이 감옥에 갇혔다. 그는 거의 45년을 0.75평 크기의 독방에서 보내게 된다. 구금 기간 동안 그가 가졌던 면회는 7회에 그쳤다. 가족 중에 ‘빨갱이’가 있다고 해서 아버지와 누이는 보복 살해 당했고, 연좌제로 고통받는 일가친척들은 감옥 근처에도 가지 못해 면회 갈 사람도 없었다. 좌우파의 신념 등을 다 떠나서 한 국가가 한 사람을 이토록 오랫동안, 이토록 철저하게 괴롭히면서 그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은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아니 김선명뿐이었나? 김선명, 우용각, 최선묵처럼 고문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말까지 살아남아 결국 석방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절대로 ‘다수’가 아니었다. 상당수는 고문과 질환에 시달리다가 옥중에서 홀로 죽어나갔다.
살아남은 초(超)장기수들은 김대중 집권기에 대부분 풀려나왔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인권 상황이 나아졌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아픈 몸으로 세계 신기록들을 세운 초장기수들은 풀려났어도 양심수들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 양심수의 대다수는 병역거부자다. 또 하나의 부끄러운 세계 신기록이지만, 징병제가 존재해온 지난 70년 동안 한국에서 수감된 병역거부자의 합계는 약 1만9천명에 이른다. 이렇게 많은 평화주의자를 감옥에 보낸 국가를 세계사에서 다시 찾기는 힘들 것이다. 앞으로는 머지않아 대체복무제가 신설되어 평화주의자들이 수감되는 일은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주의자들의 문제는 그나마 해결의 전망이 조금은 보이지만, 촛불 항쟁 이후에도 여전히 수감되어 있는 또 한명의 양심수가 있다. 바로 2013년 ‘내란 음모’ 사건의 피해자인 이석기 전 국회의원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적폐 정권 시절 보안기관들의 각종 ‘사건’ 조작에 대해서도, 양승태 시절의 ‘재판 거래’와 같은 사법 정의 왜곡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석기 전 의원에게 징역 9년을 선고했을 때, ‘내란 선동’의 거의 유일한 증거물은 그의 연설을 비밀리에 녹음한 테이프에 기반한다는 녹취록인데, 녹취록 작성의 토대가 된 파일의 일부가 원본이 아님이 밝혀져 법률가 사이에서는 그 증거 능력을 두고 논쟁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가 설령 문제가 된 연설에서 일부 과격한 표현을 썼다 하더라도 내란을 위한 어떠한 실질적인 준비도 하지 않았음은 법원도 인정했다. 그렇다면 일부 과격한 표현의 사용에 대해서 징역 9년형을 받은 셈이 되는데, 이런 판결이 과연 정상적 법치국가에서 가능한가?
한번 생각해보자. 징역 10년 정도면 살인범이 받을 수 있는 형량이다. 참작할 만한 정상, 예컨대 격분한 상태에서 저질러진 살인이라는 점 등이 드러나면 형량이 4~5년으로 줄어든 판례들도 있다. 강간죄의 형량은 3년 이상이다. 한국 재벌의 ‘갑질’을 세계인들에게 알린 ‘땅콩회항’의 조현아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아예 실형을 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한 연설에서 신중하지 못한 몇가지 표현을 사용한 이석기는, ‘갑질’로 세계적 악명을 떨친 재벌가와 비교할 수도 없고 강간범보다 3배 이상이나 되는 거의 살인범 정도의 중벌을 정말로 받아야 마땅한 것이었는가? 이석기 전 의원의 정치적 신념에 동감할 일이 없는 미국 국무부와 <뉴욕 타임스>까지 그 유죄판결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 사례로 거론할 정도였다는 사실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평소 같으면 ‘미국의 시각’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여기는 국내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이석기 전 의원을 감옥에 있어야 마땅한 ‘비국민’으로 여긴다. 한 사람에게 국가가 가하는 고통에 대한 이 무감각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역사학으로 밥을 먹고 산다. 어떤 일을 봐도 거의 습관적으로 이 일을 역사 속에서 맥락화하곤 한다. ‘내란 음모’ 조작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도 결국 한국 안보기관과 사법부의 강경 보수주의자들이 저지른 정치적 ‘이단’ 사냥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 이 사냥은, 대한민국이 분단 과정에서 냉전 최전선의 반공·안보 국가로 태어남과 동시에 개시되었다. 이 사냥의 과정에서 벌어진 초기의 유명한 사건이 바로 1949년의 소위 ‘국회 프락치 사건’인데, 그 사건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인정한다. 그 뒤로는 병영화된 나라 대한민국의 반공주의적 규율에 약간이라도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진보 인사들이 계속해서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희생되었다. 1959년에 이승만 독재 정권으로부터 법살당한 조봉암은 2007년에 명예회복되었고 그의 평화통일론은 이미 이 사회의 통념이 되었다. 통일혁명당 사건(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1969년), 인민혁명당 사건(1975년), 남민전 사건(1979년) 등으로 억울하게 죽거나 옥살이를 해야 했던 이들은 이미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되었다. 사노맹 사건(1991년) 피해자 출신 중에는 단명한 법무부 장관부터 현역 시장, 그리고 재미 교수 등이 있다. 그들이 ‘국가 전복’이 아닌 민주화의 완성과 좀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원했을 뿐이라는 것은 이제 자타가 인정한다. 적폐 정권 ‘내란 음모’ 사건의 피해자는 이승만 정권 시절의 조봉암, 박정희 정권 시절의 통일혁명당이나 인민혁명당, 노태우 정권 시절의 사노맹 사건의 피해자들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크게 봐서 계속 이어져온 정치적 ‘이단’ 사냥에 엮여 희생된 것은 마찬가지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은 안보·경찰 국가의 반공 규율을 다수에게 강요하기 위해 이런저런 ‘사건’들을 조작해왔다. 그러나 인권 본위의 관용 사회 건설, 그리고 남북의 평화공존체제 구축이 시대적 과제가 된 오늘날 적폐 정권이 감옥에 보낸 조작된 ‘사건’의 피해자를 계속 감옥에 가두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석기 같은 이 나라의 대표적 양심수를 석방해야 우리가 드디어 인권이 제대로 실현되는 사회에서 산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19-12-16
윤석열식 검찰 중립’ 유감
윤석열 검찰총장 취임 5개월여 만에 대한민국 이슈의 주도권은 검찰이 완전히 틀어쥐었다. ‘조국 수사’가 4개월째 진행 중인 가운데 ‘유재수’ 수사, ‘하명수사 의혹’ 수사가 한창이다. 세월호특별수사단 구성에 이어 ‘이춘재 수사’에 뛰어들더니 최근에는 ‘청와대 행정관 가방분실 사건’까지 끄집어내 수사에 나섰다는 보도가 나왔다.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공소장에서 드러나는 범죄사실은 국민들을 분노하게 한다. 그를 봐줬다는 현 정권 실세들을 겨냥한 수사에도 상당한 명분을 제공해준다. 범죄 혐의가 있으면 수사해야 하는 건 형사소송법에도 나오는 검사의 당연한 의무다
최근의 검찰 수사에는 특징이 있다. 검찰 개혁 입법 처리를 코앞에 두고, 동시다발적으로, 이를 밀어붙이는 ‘살아 있는 권력’을 겨냥해서, 전례없이 강도 높게 이뤄지고 있다. 윤 총장은 취임사 이래 여러차례 ‘정치적 사건에서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윤석열 검찰’의 칼날이 또 다른 의회권력인 제1야당은 철저히 비켜가고 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이 2014년 국가정보원 댓글공작 사건 수사에 압력을 행사했다고 <한겨레>에 폭로했다(2017년 12월23일치). 세월호 참사의 정부 책임이 드러날까봐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를 구속영장에서 빼도록 압력을 넣고, 선거를 의식해 세월호 수사를 지연시켰다는 검사들의 증언도 공개됐다. 유재수 사건의 ‘감찰 무마’가 직권남용이라면 이런 ‘수사 방해’는 더 죄질 나쁜 범죄다. ‘이규진 수첩’을 근거로 대법원장까지 구속한 검찰에 ‘김영한 업무일지’는 여전히 직권남용의 유력한 물증이 돼줄 것이다.
대법원은 ‘신승남 검찰총장 사건’에서 서둘러 내사 종결하라는 지시만으로도 직권남용에 해당한다는 판례를 남겼다. 그런데 이를 모를 리 없는 검찰이 세월호특별수사단까지 꾸려놓고도 시효(7년)가 남아 있는 ‘수사 방해’ 범죄엔 손을 놓고 있다. 수사의뢰 않고 사표를 받은 건 ‘정무적 판단’에 따른 정당한 권한 행사라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감찰 무마’라며 청와대에 두차례나 압수수색 영장을 들이민 검찰이라면 ‘수사 방해’는 최소한 조사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중립’ 아닌가.
‘조국 수사’에서 딸의 자기소개서 등장인물들까지 불러 탈탈 털던 검찰이 그보다 심각하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 나경원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딸의 입시 비리와 채용 특혜 의혹 고발 사건은 걸음마 수사를 거듭하고 있다. 패스트트랙 회의 방해로 소환장을 받은 한국당 의원들이 국회 휴회기에,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대포폰 들고 잠적하는 소동까지 벌였다는데 검찰은 강제수사는커녕 해를 넘길 조짐이다. 국회 청문회에서 밝힌 ‘사회적 약자’ 배려 약속을 제1야당에 적용하는 것도 아닐 테고, 납득하기 힘든 ‘윤석열식 중립’이다.
이런 검찰 행보는 ‘검찰 개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조국 수사’에 이은 ‘유재수 수사’나 ‘가방분실 행정관 수사’가 청와대를 겨눈다면 ‘하명수사 의혹’ 수사는 청와대와 경찰을 동시에 노린다. ‘이춘재 수사’도 검경의 수사권 조정 갈등을 감안했을 것이다. 검찰 힘 빼고 조직 줄이는 검찰 개혁 입법이 닥치자 일선 검사들이 “버팀목 돼주겠다”고 약속한 윤 총장을 앞세워 사실상 ‘반란’에 나섰다고 볼 수밖에 없다. 황교안 대표를 내세운 한국당은 다른 법안과 함께 검찰 개혁 입법을 국회 안팎에서 온몸으로 저지하고 있다. 검찰로선 같은 편에 선 ‘황교안’ ‘나경원’에게 굳이 칼날을 들이댈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정권 교체 때마다 변신하며 여론의 환호를 받아 검찰권을 사수하는 데 성공해온’ 검찰의 ‘화려한 분장술’에 속지 말라고 한 임은정 검사의 글이 그 어느 때보다 와닿는 요즘이다.
윤 총장은 좌천돼 지방을 전전하고 있을 때 현 정권 실세로부터 20대 총선 출마를 권유받고 진지하게 검토한 적이 있다. 그때의 인연이 총장에 오르는 데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촛불 시민의 뜻을 받들어 ‘박근혜·이명박’을 잡아넣은 ‘검찰주의자 윤석열’의 칼이 이제는 현 정권을 겨누고 있다. 그는 사석에서 “(2017년 대선 빼놓고는) 줄곧 1번만 찍었다”고 밝힐 정도로 보수 성향의 검사다. 그렇다고 ‘보수 야당’에 코드 맞추려는 건 아닐 것이다. 현 정부 성공을 위해 ‘악역’을 자처한다는데, 그런 ‘충정’은 놓아두더라도 ‘중립’ 약속만은 지켰으면 한다. / 김이택 논설위원 한겨레 2019-12-17
막장까지 간 검찰의 압수수색
오래전 사회부에서 현장 취재 기자로 일하던 시절, 자살 사건을 다룰 기회가 적지 않았다. 그 사건들을 취재하면서 얻은 결론은 ‘한 인간이 세상을 등진 진정한 이유를 알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비눗방울이 꺼지듯 홀연히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워버린 이유가 겉으로 보이는 단순한 몇가지 원인 때문일까. 기사를 쓸 때마다 그런 생각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 인간이 삶의 절벽 끝에서 겪은 외로움과 절망, 슬픔과 상심의 어두운 심연 속으로 제3자가 들어갈 길은 없다. 유서를 남겼다고 해도, 종이쪽지 한두장에 남겨진 글이 극단적 선택의 원인을 온전히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결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른바 ‘청와대 하명 수사 사건’의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 출두를 앞두고 있다가 갑자기 세상을 등진 전 청와대 특감반원 사건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런데 뒤이어 검찰이 고인의 휴대폰을 압수수색했다는 소식에 경악과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고인의 휴대폰을 뒤지면 죽음의 원인을 소상히 규명할 수 있다는 사고의 오만함도 놀라웠지만, 세상을 떠난 이의 휴대폰을 강탈하듯이 압수해 간 무도함에 더욱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숱한 개인정보가 집적돼 있는 휴대폰은 ‘그 인간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아 있는 참고인의 휴대폰도 함부로 압수수색할 수 없는데 어찌 저세상 사람의 휴대폰을 뒤지겠다는 것인가. 휴대폰에 들어 있는 어떤 내용에 대해서도 고인은 설명이나 항변을 할 수 없는 상태다. 하늘나라 사람의 휴대폰을 뒤질 권한은 애초부터 땅 위의 검찰한테는 없다. 세간의 의혹처럼, 검찰이 자신들의 별건수사 압박을 숨기기 위해 휴대폰을 압수해 갔다면 더욱 천인공노할 일이다. 고인은 저세상에서도 자신의 휴대폰 압수수색에 치욕감과 원통함으로 통곡할 것이다.
숨진 특감반원 휴대폰 압수 사건은 갈 데까지 간 검찰의 압수수색 현주소를 웅변한다. 검찰의 무차별적인 압수수색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에서 최근의 하명 수사 사건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압수수색을 전방위적으로 실시하면 수사는 자꾸만 가지에 가지를 치게 된다. 그러면서 어느 틈엔가 애초의 본가지는 사라지고 곁가지가 본가지가 돼버린다. 그것이 지금 검찰 수사의 모습이다.
검찰은 “정확한 혐의 입증을 위해 압수수색은 불가피하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문제의 ‘김기현 전 울산시장 측근 비리 의혹 사건’에서 검찰은 경찰이 관련자들의 수상한 돈 흐름을 포착해 신청한 압수수색 영장을 모두 기각했다. 무차별적 압수수색이 주특기인 검찰이 유독 그 사건 혐의자들에게만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관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친자유한국당 정치성향을 가진 검찰이 김기현 시장의 당선을 위해 경찰 수사를 훼방 놓았을 가능성이다. 둘째, 경찰의 선거개입 문제가 이미 정치쟁점화한 상태에서 훗날 경찰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수사를 무력화시키기로 작정했을 수 있다. 검찰의 해명이 궁금한데, 어찌 됐든 당시 경찰 수사가 직권남용과 선거개입이라면 검찰의 행위는 더 심각한 직권남용에 ‘역선거개입’이 아닐 수 없다.
또 있다. 고래고기 환부 사건에서 경찰이 불법 고래고기 유통업자 쪽 변호사의 사무실과 계좌 등을 압수수색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담당 검사의 선임자였던 해당 변호사와 검찰 간의 은밀한 거래, 전관예우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그런데 검찰은 경찰이 신청한 압수수색 영장을 모두 기각했다. 이 모든 것이 ‘검찰의 영장 청구권 독점’이라는 잘못된 제도 속에서 합리화되고 있다.
견제와 균형은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런 점에서 청와대마저 압수수색 대상이 된 작금의 상황을 한걸음 진전이라고 평가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검찰만은 견제와 균형의 사각지대에서 브레이크 없는 폭주를 계속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무차별적인 압수수색을 당하고 나서 온전히 살아남을 개인과 조직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검찰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다. 만약 지금 검찰 수사 주역들의 사무실과 휴대폰을 압수수색해 들여다보면 어떤 결과가 튀어나올까. 세상을 뒤흔드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것이다. 검찰은 예전에 유행했던 ‘약 좋다고 남용 말고 약 모르고 오용 말자’는 말을 기억했으면 한다. 압수수색의 오남용은 언젠가 검찰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돼 있다./ 김종구 편집인 한겨레 2019-12-18
종교와 자본주의
중학생 때, 내가 다니던 교회는 담쟁이넝쿨이 본당의 벽을 뒤덮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설레는 마음에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갔다. 어느 날부턴가 노동이 전부였던 어머니가 새벽녘 자고 있는 내 머리맡에 던져놓던 백원짜리 동전이 보이지 않았다. 일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헌금시간이 돌아오자 손을 헌금 자루에 집어넣고 돈을 내는 척했다. 장부에도 거짓말로 금액을 적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번이지 몇 주가 지나자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아니, 나갈 수가 없었다. 거짓말은 하느님이 잘 아실 테니까.
그 교회는 우람하게 성장해 있다. 근처를 지날 땐 옛날 친구들 생각에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나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릴 적 소박했던 교회 모습이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교의 세계에 깊이 들어와 있는 나는 늘 자신에게 묻는다. 종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는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오늘날 종교는 사회가 짊어질 짐으로 전락했으며, 그것은 종교전문가들이 자신의 교의를 팔아 연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성소 안에서는 그럴듯한 위안을 주지만, 성소 밖의 일은 남일처럼 보고 있다고 비판한다.
원인은 자본주의다. 오늘날 종교는 자본의 논리를 답습한다. 자본주의 방식 그대로 독점과 경쟁이 이루어진다. 머지않아 종교도 인수·합병이 봇물처럼 이루어질 것을 예감한다. 하늘과 인간 간 중재의 대가는 돈으로 환원된다. 돈 많은 신도는 맨발로 뛰어나가 맞이한다. 절망에 휩싸인 이웃은 종교 울타리 밖에서 배회한다. 돈이 있어야 종교를 믿을 수 있다는 말은 보편적인 언사가 되었다. 돈 많이 낸 신자는 당연히 종교의 핵심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역으로 직업적 종교인들에게 훈계한다. 물신을 섬긴 결과다.
생각해보라. 불타든 예수든 교조들의 어느 어록에 ‘돈을 내라’는 말씀이 있는가. 큰 절과 큰 교회를 지어야 종교의 면목이 선다고 한 대목이 어디에 있는가. 가르침대로 한다면, 고결한 우리 마음이 모인 곳이 절이자 교회며, 성당이자 교당이 아닌가. 교조들은 돈 한 푼 없이 개업했다. 종교적 희열에 가득 찬 신자들은 감격에 겨워 자신이 가진 것을 내밀었다. 돈은 주가 아니라 종이다. 자비와 사랑과 깨달음이 주이지 종이 아니다. 오늘날 종교 성소의 존재 의미가 사라져 가는 까닭은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사회 모든 영역에 불안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자력과 같다. 종교는 원자로 주변을 서성이며 일말의 온기를 먹으며 생존한다. 부조리한 기존 질서의 파괴를 외치며 나타난 교조들은 종교전문가들에 의해 숭배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들의 행위, 그들의 진정한 뜻을 재현해야 함에도 그저 말로만 외치고 있다. 나아가 자본으로 공고해져 가는 사회계층을 긍정하며, 가르침의 혁명적 요소들을 애써 외면한다. 자신의 표와 정당성 확보를 위해 찾아오는 정치가에게 고개를 숙이며 친분을 과시한다.
우리 또한 돈이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 같은 자본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다. 간수의 말을 듣고, 질서를 지키며, 교육을 받아도 이곳을 빠져나올 수는 없다. 돈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때 비로소 출소할 수 있다. 돈으로 박탈당한 영혼의 자유를 회복시키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그러나 종교는 영혼 구제의 처방전인 진리마저 독점한다. 그리고 처방의 효능을 경쟁한다. 어떻게 진리가 독점될 수 있는가. <도덕경>의 비유를 들자면, 진리를 진리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는 체험과 실천의 영역이지 언어의 영역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말의 난무는 종교가 이미 길을 잃었음을 보여준다. 자본의 논리처럼 소유의식의 적나라함만을 드러낸다.
종교가 비판받는 이유는 위기에 처한 민중의 고통을 해소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의 의미를 무화시키는 전쟁을 생각해보라. 종교는 대량살육인 1·2차 세계대전도 못 막았다. 힘센 자들이 한반도를 놓고 전쟁 운운하는데도 종교는 그 무도한 언설을 비판하지 않는다. 하물며 고통으로 절규하는 노동자와 이주민들의 아픔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는가. 종교는 희망고문만을 가하고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나를 따르라>에서 외치듯이, 예수 자신이 신학이 되고, 교회가 되고, 종교가 된 그 원천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종교의 미래는 없다. 자본은 곧 종교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욕망과의 대결에서 패배했음을 의미한다. 공회당의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가. /원익선 원광대 정역원 교무 경향 2019.12.20
가짜뉴스 타령
곳곳에서 ‘가짜뉴스’ 타령이다. 자신의 비행을 폭로하거나 비판한 언론 보도를 가짜뉴스로 ‘퉁치는’ 행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런데 가짜뉴스 논쟁은 지금 전 세계로 번지고 있다. ‘남미의 트럼프’라는 브라질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도 ‘아마존 대형산불’에 대한 책임을 묻는 보도를 가짜뉴스라고 했다. 보수반동 지도자들만이 가짜뉴스 운운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끝난 영국 총선이 가짜뉴스 홍수에 뒤덮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가짜뉴스 풍년이다.
그동안 거짓 뉴스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해도 적지 않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투쟁 무대인 정치의 영역에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거짓뉴스를 언론에 흘리거나, 잘못된 사실을 퍼뜨리는 경우가 빈발하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 항쟁은 오랜 시간 ‘폭도’ ‘북한군 개입설’에 시달렸고, 얼토당토않은 이 가짜뉴스를 지금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있다. 그동안 가짜뉴스 검증에 게을렀거나 회피했던 언론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 기레기 논란은 과거 잘못에 대한 업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가짜뉴스를 쟁점화하는 쪽의 의도가 대개 불순하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은 가짜뉴스를 진짜 걸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안이든 가짜뉴스 프레임을 덧씌워 논점을 흐리려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군사 원조를 매개로 민주당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비리 조사를 압박했다는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마녀사냥’ ‘가짜뉴스’라는 말로 덮으려 한다. 18일 탄핵소추안이 하원을 통과했지만, 트럼프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보우소나루는 무분별한 개발정책이 아마존 산불을 초래했다는 국제사회 비판을 “브라질의 주권을 침해하려는 가짜뉴스 캠페인”이라고 했다.
치부를 덮는 데도 동원됐다. 홍콩 정부는 경찰의 홍콩 시위 강경진압에 대한 외신들의 비판보도를 ‘가짜뉴스’로 규정한 뒤 일부 언론이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홍콩 경찰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비판했다. 경찰의 실탄 발사로 부상자가 발생하고, 시위 와중에 실명하고 사망한 사람까지 나왔음에도 가짜뉴스라고 우긴 꼴이다. 중국 외교부는 신장(新疆) 위구르 소수민족 박해 의혹을 지난 16일 트위터로 비판한 아스널 축구스타 메수트 외질을 향해 “가짜뉴스에 속은 것 같다”고 했다.
급기야 근대적 민주 정치가 제일 먼저 싹텄다는 영국 총선도 가짜뉴스로 뒤덮였다. 집권당인 보수당은 제1야당인 노동당에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정책을 담당하는 의원이 관련 질문을 받고, 답변을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이도록 조작한 영상을 퍼뜨렸다가 사과했다. 야당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영국 런던 브리지에서 발생한 무슬림 흉기난동 사건을 두고 ‘보수당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한 공작이었다’는 가짜뉴스가 노동당 지지자들의 페이스북에 떠돌기도 했다.
한국이라고 예외겠는가. 탄핵 이후 기반이 허물어진 보수강경 세력은 한풀이하듯 ‘가짜뉴스 타령’을 해왔다. 우리공화당은 “거짓 촛불이 조작한 가짜뉴스로 죄없는 박근혜 대통령을 불법적으로 탄핵했다”고 몇 년째 주장한다. 지난 대선을 부정선거라고 하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태극기 세력도 볼 수 있다. 이들은 최근 민의의 전당 국회에까지 난입해 가짜뉴스 타령을 하며 행패를 부렸다. 자신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되거나 추종하는 세력이 국정농단으로 몰락했다는 불명예스러운 사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외면하기 위해 가짜뉴스를 꺼냈을 것이다.
문제는 여권에서도 ‘가짜뉴스를 잡겠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가짜뉴스나 허위 정보는 저널리즘의 신뢰성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언론의 공정성과 자유를 해친다”고 했다. 여당은 가짜뉴스를 방치하는 유튜브에 과징금을 물리는 법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물론 여권 말처럼 극우 유튜버 등이 퍼뜨리고 있는 가짜뉴스들의 폐해가 적지 않다. 근거가 약하거나, 근거가 아예 없는 가짜 뉴스들이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동원된 사례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짜뉴스를 쟁점화하는 측 의도가 불순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비판여론을 옥죄려 한다는 야당 주장에 빌미를 줄 수 있다. 가짜뉴스 판정은 누가 할 것인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들이 지천에 깔렸다. 정부가 가짜뉴스 판정을 내리면, “사실은 XXX한 이유 때문에 가짜뉴스로 몰고 간다더라”는 식의 또 다른 가짜뉴스가 퍼질 것이다. 무엇보다 트럼프나 보우소나루의 단골메뉴인 가짜뉴스라는 말을 촛불 대통령이 언급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자체가 개운치 않다. 이용욱 국제부장 경향 2019.12.22
올 한 해 고마웠던 보도들
연말에야 한 해를 돌아보는 게으름을 반성하면서도, 그나마 이 시기에 돌아보는 기회를 얻는 걸 보면 인위적인 시간의 구분이 고맙다. 이번 연말에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하면 지금이 2010년대의 끝자락이다. 십년간 세상도 많이 변했지만, 언론을 둘러싼 환경은 더 극적으로 바뀌었다. 뉴스가 종이와 방송에서 인터넷이란 생소한 공간으로 가게 된 것도 2000년대 전후부터 십여 년간의 격변이었는데 지난 10년간 다시 또 변해 뉴스가 주로 스마트폰으로 소비되고, 소셜미디어에서 공유된다.
이 기간 기성 매체와 언론인 권위가 추락했다.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뉴스 생산, 발행, 유통 모두를 매체 이외의 기관, 개인이 담당하기에 어렵지 않은 환경이다. 권위만 잃은 것이 아니라 불신의 상징이 되었다. 기자라는 명칭보다 ‘멸칭’이 더 자주 불린다. 문제는 언론계에 문제를 개선할 만한 ‘기반’이 있느냐다. 온라인과 모바일로 인해 뉴스 소비가 늘었는데 언론사는 여전히 먹고 살 길을 못 찾고 있다. 그나마 살 만한 언론사들은 기형화한 수익 모델에 의존한다. 광고 효과 없는 광고를 팔기 위해 기업과 유착하거나 포털에서 클릭수를 늘려보려고 선정적 제목을 단다.
암울한 상황들을 먼저 나열한 이유는 그래도 희망적인 얘기를 해보고 싶어서다. 언론계가 처한 상황은 암담하지만 여전히 기사를 통해 세상에 필요한 것들이 알려지는 언론의 역할은 여전하다. 그 역할을 잘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발품을 팔며 묻고 듣는 기자들이 있다. 필자는 특히 구조적 문제에 천착하며 사회 문제 개선에 기여하려는 보도들을 눈여겨봤다. 그 기준으로 올 한 해 고맙게 읽은 기사들을 정리해봤다.
올 3월 한겨레신문의 기획기사 ‘자영업의 약탈자들’(장나래·김완 기자)은 500만명이 넘게 종사하고, 한 해에 100만명이 진입하는 자영업 분야의 고질적 착취 구조를 드러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정보 비대칭이 발생하기 쉬운 시장에서 어떻게 사기가 판을 치는지를 보여주는 보도였다. 이 기사들을 다시 읽다보면 지금은 어떤지 궁금하다. 자영업은 여전히 트렌드가 빨리 변하고 정보 얻기가 쉽지 않을 텐데 창업 컨설팅 업계는 정화됐을까. 정부는 제대로 감독을 하고 있을까.
필자가 거주하는 제주도와 관련한 기사로는 한겨레 애니멀피플팀이 올 4월 말에 연재한 ‘동물 노예의 섬, 제주’라는 기획기사(김지숙·신소윤 기자, 박선하 PD)들이 돋보였다. 제주의 여러 관광지에서 접하는 ‘열악한 전시용 동물의 상황’을 눈여겨보긴 했지만 기사에서 보여주는 현실은 더 참혹했다. 쇼를 위해 동원되는 코끼리, 돌고래, 바다사자, 흑돼지와 거위 등이 어떻게 무대에 올랐는지, 무대 뒤편에서 동물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가 담긴 기사들을 찬찬히 읽으며 지금은 이 지역의 주된 현안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제주에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주된 의제가 됐으면 하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 관련기사 : 한겨레) [영상] 코끼리쇼·돌고래쇼·흑돼지쇼… 노예 동물들의 섬, 제주 ]
지난 11월 종이신문과 인터넷 인터랙티브 웹페이지 양쪽 모두 충격적인 시각물을 보여준 경향신문의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는 기획(황경상·김지환·최민지 기자, 이아름 기획자, 김유진 디자이너)은 새롭지 않은 구조 문제를 어떻게 공론장에 제기할 것인지를 과제로 품는 언론인들에게 해답을 제시했다. 노동자들이 어떻게 사망했는지 꼼꼼히 취재해 새롭지 않은 문제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건져냈고, 안전이 아닌 위험이 비용인 사회로의 전환이 요구된다는 ‘대안’도 내세웠다. 이제는 정치가 답을 해야 하는 문제고 그때까지 언론은 계속 다뤘으면 한다
[ 참고 : 경향신문 인터랙티브)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 인터랙티브 홈페이지 ]
지난 5월 ‘지옥고 아래 쪽방’에 이어 11월 ‘대학가 신쪽방촌’ 기획을 이어간 한국일보 기획기사(이혜미·김혜영·박상준·박소영·이진희 기자와 미디어플랫폼팀의 안경모·박인혜·한규민·백종호·김정영·오준식)는 가장 가난한 주거 공간이 가장 괜찮은 돈벌이라는 역설을 데이터로 입증했다. 특히 5만원 비싼 창문 방을 얻느냐가 생사의 갈림길이었던 국일고시원 화재 현장에서 기자가 문제의식을 심화시켰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 관련 기사 : 한국일보) 대학가 新쪽방촌 ]
가독성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SBS의 ‘국회 예산회의록 전수분석’은 매년 이어졌으면 하는 보도다. 특히 엉터리 예산 심의나 특혜성 예산 편성에 대해선 해당 정치인에게 끝까지 묻고 따지는 보도가 지속됐으면 한다.
[ 참고 : SBS) 2019 예산 회의록 전수 분석 ]
한 지역을 치밀하게 탐구해 혐오와 편견에 대항한 시사인의 ‘대림’ 기획(김동인 기자)과 한국판 제인스빌 이야기인 한겨레21의 ‘공장이 떠난 도시, 군산과 울산’(조윤영·방준호 기자) 기획은 지역 탐사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보도다. 기초생활보장법 제정 20주년인 2019년에 유독 많았던 복지 사각지대의 비극적 사건들을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기사들도 적지 않았다. 필자가 이 사안에 가진 문제의식들은 대부분 서울신문(이현정 기자)과 한겨레신문(박현정 기자)의 보도들에 기반했다. 이 외에도 미처 언급하지 못한 고마운 보도들이 많았다.
[ 관련 기사 : 시사인) 대림동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 ]
[ 관련 기사 : 한겨레) 공장이 떠난 도시 이야기 ]
아무 비용도 내지 않으면서 읽은 이 기사들에, 또 취재한 기자들에게 뒤늦게나마 표현하고 싶다. 그 기사들을 써줘서 고맙다고 말이다.
•윤형중 LAB2050 정책팀장 mediatoday 2019.12.22
공공의 영역에 나서는 것이 자살행위가 되는 시대
1990년대 젊은 변호사 시절에는 ‘표현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옹호할 일이 자주 있었다. 권위주의 국가의 잔재가 짙게 남아 있었고, ‘정치적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악법과 관행이 넘쳐났다. 리버럴한 성향의 변호사라면 정부에 의해 탄압당하는 ‘표현의 자유’를 방어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였다. 많은 진보성향의 서적이 정체 모를 적을 이롭게 하는 표현물로 처벌받았으며, 정부를 비판하는 예술가들도 자주 탄압을 받았다. 그 와중에 성적 표현 수위가 높은 표현물도 그 예술적 가치와 무관하게 법정에 서야 했다. 오랜 기간 계속된 그러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은 여러 차례의 헌법재판, 정부의 민주화 그리고 사회의식의 변화와 함께 시들해졌다. 그 시기는 인터넷이 세상에 등장해 소통의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던 시기와 겹친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둘러싸고 ‘표현의 자유’ 논쟁이 뜨거워졌을 때, ‘인터넷실명제’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의 비범죄화’ 등이 논란이 되었다. ‘표현의 자유’가 ‘정치적 자유’의 초석이고, ‘자유주의’의 핵심적 가치라고 공부했던 리버럴한 변호사들은 ‘인터넷실명제’에 반대하고, ‘명예훼손죄의 비범죄화’에 찬성하는 경향을 보였다. 나 또한 그러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 시대 온라인 공간에서는 어떤 무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민주주의의 ‘절대반지’로 기대되던 온라인이 아이러니하게도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터’로 전락했다. 악플러가 문제된 것은 오래전 일이나,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없다. 익명에 숨은 악플러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도 명예훼손의 경계를 넘나들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가로 경제적 이익을 챙긴다. 도저히 정상적인 언론으로 보기 어려운 유사 언론이 ‘언론의 자유’ 아래 기생하며 음습한 돈벌이를 한다.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숱한 모욕과 명예훼손 그리고 프라이버시의 침해가 대중의 표피적 관심과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광속으로 전파되는데, 막상 피해자들은 유효한 방어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반인에게도 명예와 프라이버시는 소중하지만, 직업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대중에게 노출되어 사는 게 운명인 사람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그들이 공공연히 비판받아 마땅한 경우가 있고, 그 비판이 사회규범을 확립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인정된다. 대중의 지지와 환호를 자신의 자산으로 삼아 살아가기 때문에 스스로 감수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근거 없는 명예훼손을 당하는 것이나 개인적 프라이버시가 침해되는 것이 언제까지 방치되어야 하는가.
현재 마련된 구제절차는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각종 기사나 온라인 글들을 처리하기에는 너무 느리고 충분하지 못해 피해자들을 다시 절망하게 만든다. 언론중재위원회에 조정신청을 할 수도 있고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할 수도 있지만 피해자의 마음같이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포털사이트에 임시의 게시중단조치를 신청할 수 있으나, 상대방이 이의를 제기하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다시 지루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영향력 높은 유튜브는 피해구제에 대해 소극적이고 게으른 절차만을 제공하고 있다. 형사상 고소를 하면 동종의 사건이 너무 많아 수사기관도 인간인지라 귀찮아한다. 가해자의 실명을 모르는 때에는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신원을 확인해야 하는데, 그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나마 사회적 경험이 풍부하거나 전문가를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있는 사람은 나은 편인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피해의 구제가 요원하다.
직업상 그런 모습을 자주 보다 보니, 이제는 인터넷실명제나 그에 준하는 제도에 점점 우호적이 된다. 명예훼손죄의 비형사화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된다. 고소를 하면 그나마 벌금형이라도 받게 해서 이른바 전과자로 만들 수 있는데, 겨우 몇 백 만원을 받는 것에 그칠 민사소송을 피해자에게 권유하기는 난처하다.
‘표현의 자유’는 소중하다. 언제 이 사회의 ‘정치적 자유’가 뒷걸음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인쇄매체 시대의 고전적 ‘표현의 자유’론으로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넘어 인공지능(AI)이 현실화되는 혁명적 변화의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없다. 근거 없는 명예훼손과 프라이버시 침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사회생활을 포기했는가. 더러는 그에게 일부 잘못이 있더라도, 잘못에 비해 매우 비대칭적인 불이익을 받음으로써 세상을 버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모두가 그 문제점을 아는데, 왜 시스템은 이토록 느리게 진화되는가.
이제는 정치인이든, 유명인이든, 세상에 자신을 다소라도 드러내고 싶은 개인이든, 악의적인 명예훼손과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한 대응 전략과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순식간에 퇴장을 당하거나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각오해야 한다. 이 말은 제도가 이들을 충분히 보호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위기관리체계와 법률적 중무장이라는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러한 시스템을 스스로 갖출 역량과 자원이 없는 사람이 공적인 영역에 나선다는 것은 심한 경우 자살행위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유능한 인물들이 알게 모르게 공적인 활동을 기피하고 개인적 삶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은 이 사회의 큰 손실이다.
우리 사회가 올해 보여준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는가. 새로운 미디어와 신기술에 맞는 법률이론을 정비하고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며, 그것을 신속하고 강력하게 입법과 행정에 반영해야 한다. 그것을 정치와 행정이 아니면 누가 할 것인가. 이미 많이 늦었다. 이 순간에도 익명에 숨어 추악한 욕망을 채우는 사람들과 악명을 떨치며 돈벌이에 나서는 사람들의 저열한 공격에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다./조광희 변호사 경향 2019.12.23.
세상에 속지 않는 법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세상이 불의하고, 알 수 없는 음모로 가득 찬 곳으로 보였다. 그런 세상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세상에 속지 않는데 도움이 되리란 판단으로 전공도 정치학으로 선택했다. 기자를 한 이유의 하나도 속지 않을 직업이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다. 세상의 한가운데 뛰어들어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속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기대는 정당을 처음 취재하기 시작하자마자 난관에 부닥쳤다. 세상 전부에 대한 의심과 부정의 정신으로 충만했던 그 시절 정당의 주장은 모두 당리당략에 따른 거짓말 같았다. 거짓말을 모아서 어떻게 기사를 쓰지? 진실은 어디에 꼭꼭 숨어 있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찾을 방법도 몰랐다.
그래도 그때는 준거가 될 만한 이념이 있었고, 모두가 동의하는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거대한 사상이 떠난 자리에는 당면 현안과 쟁점, 고만고만한 사건의 조각만이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진실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던 인물·집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보는 넘쳐나고 현안은 복잡하지만, 일일이 따져볼 능력과 시간이 없는 시민에게 정당, 언론, 시민단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시민을 대신해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신뢰를 잃어갔다.
특히 시민과 여론을 대변한다는 정당과 언론은 정치적 양극화와 분열을 확대 재생산하는 기계가 되었다. 그 결과, 세상은 당파와 진영으로 쪼개지고, 서로는 서로에게 다른 세상 사람이 됐다. 진실은 제한된 공간과 시간에만 통용되는 한시성을 띠었다. 이런 세계에서 ‘사실’은 존중받지 못한다. ‘그 말이 사실인가?’가 아니라, ‘그는 어느 편인가?’라고 묻는 게 문제 해결에 더 효과적이다. 남의 생각을 바꾸고 싶으면 논리적 설득을 할 게 아니라, 같은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부족의 시대로 돌아갔다.
그건 인간의 본성 같기도 하다. 진화론은 무리 짓기를 선호한다. 오랜 수렵채집기 동안 인간은 홀로 살기보다 집단을 이루며 생존 가능성을 높였다. 그래서인지 어떤 경우는 진실이 너무 많다. 진실 찾기가 어려운 것은 진실이 너무 희귀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일지 모른다.
1989년 5월 수배중인 조선대생이 숨진 채로 발견됐다. 실족에 의한 익사라는 경찰 발표에 의혹이 제기되자 국회는 조사특위를 구성, 현지 조사를 했다. 특위를 취재하던 그때 진실의 부재, 혹은 모호성에 꽤 놀랐다. 당시 특위에 출석한 목격자들의 증언은 제각각이었다. 그들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면을 보았으면서도 다리 위에 있던 자동차와 사람의 수를 다 달리 말했다. 그럼에도 모두 자신이 본 것만이 사실이라고 했다. 하나의 사건에 4개의 진실이 경쟁하는 영화 <라쇼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 수업 때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각자 자기 전화번호 뒤의 두 자리 번호를 적은 다음 유엔 회원국 중 아프리카 국가가 몇 개인지 추정해 써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전화번호 숫자가 큰 학생이 추정한 국가 수도 컸다. 사람은 자기에게도 속는다. “법과 소시지 만드는 과정은 모르는 게 좋다”고 한 비스마르크 말처럼 내 생각도 해쳐 보면 외부에서 주입된 것, 남의 생각을 짜깁기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세상 한가운데 던져진 ‘나’라는 존재도 믿을 게 못된다.
세상에 속지 않겠다는 젊은 날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나이 들어서야 깨닫는다. 세상에 속지 않는 법은 없다. 속기 쉬운 존재라는 인간의 운명을 이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내가 틀리고 남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다. 세계사는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으로 바뀌어온 역사다. 그것도 모르고 세상을 다 아는 양 얼마나 잘난 체하며 섣부르게 심판하고 따졌는가?
세상은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구성된 대립물이 아니라 조금씩 맞고 틀린 것들이 어지럽게 뒤섞인 덩어리다. 하나의 진실이 있다고 믿는 건 맹목이며, 그걸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인간은 진리에 꽁꽁 묶인 존재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세상을 향해 한발 한발 흔들리며 나아가는 불안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민영규의 ‘떨리는 지남철’) 이대근 논설고문 경향 2019.12.24.
장외 황교안’의 1년
끝은 입원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몸져누웠다. 새해 예산안 충돌 후 정기국회는 험악하게 폐장되고 14일째 국회 농성을 이끌던 날이다. 태극기부대의 국회 난장집회도 그날로 멈췄다. 28일로 잡은 광화문집회는 1월3일로 늦췄다. 한국당 장외정치가 황교안에 의한, 황교안을 위한, 황교안의 길이었음을 새삼 보여주는 것이리라.
4월20일, 그는 광화문집회 연단에 처음 섰다. 입당(1월15일), 당 대표 선출(2월27일) 뒤로 세 번째 정치 변곡점이 찍힌 날이다. 패스트트랙이 예열되던 당시 태극기는 우리공화당에 모여 있었다. 황 대표의 거리집회는 5월 전국을 돌고 여름 ‘조국대전’으로, 12월 국회로 이어졌다. 삭발한 머리가 다 자라기 전 단식했고, 지금은 콧수염이 첫인상이 됐다. 입이 거칠어질수록 태극기·성조기·이스라엘기는 열광했다. 2019년 황교안은 ‘투사’였다.
왜 그랬을까. 해 넘기 전 두어가지 묻게 된다. 10월25~26일, 황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 하야를 요구한 광화문집회를 새벽 5시30분까지 함께했다. 대통령을 ‘빨갱이’라 부르고, ‘멸문(滅文)하자’는 막말과 기도가 덮인 무박2일이었다. 제1야당 리더가 있을 곳인지 도마에 오를 집회에서 왜 날밤까지 새웠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또 뭐지?”한 게 있다. 11월5일이다. 황 대표는 ‘공관갑질’ 시비에 “귀한 분”이라고 두둔하다 ‘삼청교육대 망언’이 더해진 박찬주 전 대장을 인재영입 1호에서 접었다. 그는 “국민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국민의 관점? 그럼 황 대표의 관점은 뭐지? 처음부터 총선 출마를 꿈꾼 박 전 대장은 보름 전 입당이 허용됐다. 기독교 집회의 눈도장을 찍고 ‘친황’ 영입을 고집하던 삽화를 보며 스쳐간 게 있다. 본색인가, 전략인가. 황교안의 총선 밑엔 대선이 흐르고 있다.
“졸고 계신 분이 있다.” 황 대표가 지난 17일 의원총회에서 일침을 놨다. 군기잡기엔 급한 마음도 읽힌다. 민생법안에 초유의 필리버스터를 걸었지만, 욕만 먹고 속도만 늦췄을 뿐, 패스트트랙은 종착역이 눈에 들어온다. 의회정치와 담 쌓은 독박은 시민 67%의 ‘비호감’으로 돌아왔다. 황교안의 한국당 지지율이 24.03%를 넘은 것은 4주뿐이다. 10월의 조국사태 3주와 북한이 미사일을 쏜 5월 둘째 주뿐이다. 24.03%는 2017년 대선(홍준표) 득표율이다. 상징적 비교이지만, 넘지 못한 벽이 보인다. 정치 여론조사에서 ‘보수 1당’이 ‘민주 1당’에 밀린 것은 근래 박근혜 탄핵부터다. 보수가 20·30·40대 모두 우위를 넘겨준 것은 2010년 지방선거부터다. 2016년부터 총선·대선·지방선거를 연거푸 진 보수 비세(非勢)의 전조가 꽤 일찍 보였던 셈이다. 반대로 조국을 불쏘시개 삼고픈 보수는 총선 약진을 꿈꾸고 있다. 보수가 총선에서 ‘위기 속 1당’이 된 것은 세 차례 있었다. ‘YS의 발탁’이 수도권 승부수가 된 1996년, ‘이회창의 학살’이 먹혀든 2000년, ‘박근혜의 신장개업’이 반전을 만든 2012년이다.
태극기부터 껴안은 황교안의 다음 착점은 뭘까. 정치공학대로면 밖으로 ‘중도 복토’, 안으로 ‘친황 헤게모니’일 게다. 총선 치르며 박근혜를 넘고, 황교안당을 뿌리박고픈 생각도 굴뚝같을 게다. 꿈대로 될까. 사방팔방 험로뿐이다. 황 대표가 “대한민국이 망한다”는 목사와 동행하는 사이 그 왼쪽엔 ‘유승민당’ ‘안철수복귀당’ ‘보수 OB들’이 똬리를 틀었다. 연동형 선거제 총선과 대선을 재는 보수 내 셈법도 복잡해진 것이다. 근본적 물음은 한국당 조직팀장이 던졌다. “장외정치 1년 시대정신에 맞습니까” “당이 검사동일체 조직입니까”. 리더십도, 메신저도 위기란 뜻이다. 황 대표는 26일 병상에서 다시 ‘통합’ 화두를 던졌다. 303일 전 취임식에서 중도대통합을 외쳤고, 달포 전 ‘박찬주 역풍’ 때도 불쑥 꺼낸 통합론이었다. 힘 받을까. 아무도 모르나 회의적이다. 늘 생물이지만, 바둑격언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가 관통하는 정치판이다.
닷새 뒤면 2020년이다. 베이비부머 첫해 1955년생은 노인(65세)이, 86세대 꼭지 1960년생은 정년(60세)이, 21세기 출생자도 성년(20세)이 된다. 한국전쟁 70년, 전태일 분신 50년, 5·18민주화운동 40년도 내년이다. 삶의 변화가 많고, 매듭지을 현대사도 첩첩인 해다. 장외의 황교안은 달라질까. 해를 넘어도 세상은 그대로일 때가 많다. 여의도 격랑이 높을 1월까지, 멀리 주류·길 싸움의 정초(定礎)를 놓을 총선까지 정치는 아마도 그쪽일 게다. 63번째 생일과 겹치는 4·15 총선에 황 대표는 스스로를 묶었다. “과반수 넘지 않으면 책임지겠다”고. 총선 패장은 대선도 없다는 걸 직시했을 테다. 표는 좋아서, 필요해서, 상대가 싫어서 갈린다고 한다. 정권 4년차에 치르는 총선에 ‘문재인 심판, 4+1 심판, 한국당 심판, 황교안 심판’의 애드벌룬이 오를 판이다. 어느 게 앞설지 넉달 더 가볼 일이다. / 이기수 논설위원 경향 2019.12.26
‘미친 집값’ 시장 자율에 맡기라는 ‘미친 언론’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일부 지역의 초고가 아파트라는 특정 대상을 핀셋으로 잡아서, 쓸 수 있는 카드를 한꺼번에 전격적으로 실시할 것이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11월 말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집값 대책에 관한 질문에 답한 말이다. ‘초고가 아파트’ ‘카드를 한꺼번에’ ‘전격적으로’에 방점이 찍혔다. ‘12·16 집값안정 대책’의 큰 방향인 초고가주택·다주택에 대한 대출 규제 강화와 보유세 인상은 이미 20일 전 예고됐던 셈이다. 하지만 보수언론들은 “사전예고 없이 군사작전하듯 했다”며 비난했다.
거친 공격은 이어졌다. “돈키호테 따로 없는 …”(중앙일보), “정부가 집값 불지르고 …”(조선일보). 정부의 정책 실패에 대한 건전한 비판은 언론의 역할이다. 문재인 정부는 ‘서민들이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약속했다. 하지만 정권 초기 안이한 대응으로 투기심리에 불을 댕겼다. 그렇다고 상식에 어긋난 비판, 비판을 위한 맹목적 비판까지 용인돼서는 안 된다. 여론을 호도하고, 자칫 집값 불안을 조장할 위험마저 크다.
‘12·16 대책’은 ‘미친 집값’을 잡기 위한 고육책이다. 11월 초 분양가상한제 지역 지정 뒤에도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 집값을 잡으려면 신규 수요 차단을 위한 대출 규제가 불가피했다. 하지만 보수언론은 “자유시장경제 파괴하는 위헌적 정책”이라고 공격했다. 헌법을 제대로 읽었는지 의문이다. “국가가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헌법 35조 3항)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 적정한 소득 분배 등을 위해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헌법 119조 2항) 이낙연 총리도 쓴소리를 했다. “돈 있는 사람이 특별한 노동을 하지 않고 돈을 많이 벌고, 그로 인해 절대다수의 국민이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데, 금융기관이 돈까지 빌려주는 것이 과연 옳은가.”
정부 규제가 반시장적이고 오히려 집값 불안을 자극한다는 비난도 쏟아진다. “시장과 싸우지 말라는 교훈, 정부는 외면하나”(한국경제) “반시장적 집값 통제”(문화일보) 경기부양을 위해 2014년부터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펴온 유럽도 집값 폭등으로 몸살 중이다. 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 등의 집값은 40~50% 폭등했다. 임대료도 덩달아 천정부지다. 급기야 베를린시는 향후 5년간 임대료를 동결하기로 했다. 12·16 대책을 뛰어넘는 파격 조처다. 한국 보수언론이 “반시장적”이라고 한다면 유럽인들은 뭐라고 할까?
‘공급 확대론’과 ‘시장 자율론’은 보수언론의 단골 메뉴다. “강남 아파트값 잡는 특효처방은 공급확대…부동산을 시장 흐름대로 가게 놔둬야”(중앙일보) 일반 재화는 장기적으로 수요-공급이 일치하는 선에서 가격이 결정된다. 하지만 주택은 수요가 있다고 해서 무한정 공급을 늘릴 수 없다. 부동산 불패 신화까지 가세해 주택을 쇼핑하듯 사 모으는 다주택자도 활개 친다. 11채 이상 ‘집부자’만 4만명에 육박한다.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투기세력을 차단하지 않으면 공급을 늘려도 다주택자의 보유만 늘린다”고 말했다. 공급만 늘리고 나머지는 시장 자율에 맡기라는 것은 ‘미친 주장’이다.
‘세금폭탄론’도 빠지지 않는다. “왜 국민에게 세금폭탄 안기나”(조선일보) 국민의 60~80%는 투기 근절을 위한 보유세 인상에 찬성한다. 하지만 솔직히 자기 세금이 늘어나는 것은 부담이다. 보수언론은 그 틈을 교묘히 파고든다. 집값이 오르면 세금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집값이 아무리 올라도 한해 재산세 증가율은 30%를 못 넘는데도 세금폭탄이라고 과장한다. 우리의 부동산 실효세율(부동산 가격 대비 보유세 비율)은 2015년 기준 0.16%에 불과하다. 미국은 6배, 일본은 3배를 넘는다. 이준구 서울대 명예교수는 “종부세는 우리나라 인구의 97.5%와는 관계가 없다”며 “종부세가 중산층에 세금폭탄이라는 것은 보수언론의 조작”이라고 꼬집었다.
집값 안정에는 보수-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세계적으로도 과잉 유동성에 따른 거품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우리는 가계 자산의 80% 이상이 부동산에 몰려 있다. 집값 급등·급락이 모두 재앙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도 거품 붕괴에서 시작됐다. 개인 및 집단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목적으로 집값 불안을 부추기거나 정책을 흔드는 것은 ‘악마의 선택’이다./ 곽정수 ㅣ 논설위원 한겨레 2019.12.26
서울과 지방의 주택시장 역주행을 막으려면
서울, 특히 강남에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들은 지난 2년여 동안 웬만한 월급쟁이들이 평생 모아야 하는 액수의 불로소득을 얻었다. 반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떨어지는 집값을 보면서 절대적인 박탈감에 절망하고 있다.
주택 가격도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 서울, 강남 지역의 아파트값이 급등하는 것은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서이고, 지방 중소도시의 집값이 하락하는 것은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서이다. 근본적으로 지방보다 서울에 돈과 일자리가 모여 있고, 질 좋은 교육과 의료서비스 등 각종 인프라가 모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울 주택에 대해서는 수요는 억제하고 공급은 늘리고, 지방은 수요를 촉진하고 공급은 제한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동안 이 정부는 정반대의 정책들을 내놓았다. 제일 먼저 내놓은 1가구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 정책은 강남의 ‘똘똘한 한 채’에 대한 수요만 더욱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두 채 이상이면 가격과 상관없이 무조건 중과세하는 상황에서 서울과 지방에 집이 있는 경우 어느 것을 팔겠는가.
이번 ‘12·16 주택시장 안정화 방안’ 발표 이후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10명 중 6명은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이번에도 서울 주택 가격은 몇 개월 동안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오를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정부는 집값을 안정시키겠다면서 땜질식 처방을 해왔다. 한 곳을 막으면 다른 곳이 터지고,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국민은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12·16 대책도 정부는 “맞춤형 대책”이라고 하고 있지만 “땜질식 대책”의 다른 이름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근본적인 정책전환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훨씬 낮은 부동산 보유세율을 가격에 비례해 과감히 높여야 한다. 아울러 빠른 시일 안에 공시지가 실거래 반영률을 현재 65% 수준(경실련 주장 43%)에서 최소 80%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동시에 주택 공급을 늘려야 한다. 부동산은 다른 상품과 달라서 신제품뿐만 아니라 중고품(이미 분양된 아파트)도 공급이 훨씬 용이하다. 따라서 OECD 평균보다 훨씬 높은 거래세를 대폭 내림으로써 보유세 증가에 부담을 가진 서울 아파트 보유자들이 자연스럽게 중고품을 시장에 내놓도록 해야 한다. 이번 12·16 대책에서는 다주택자에 대해 양도소득세 부담을 향후 6개월간 한시적으로 완화해 주기로 했는데, 이를 확대하고 상시화해야 한다. 반면에 서울 지역에 대한 신규 주택 공급은 억제해야 한다. 서울에 초고층 재건축 아파트를 건설하고, 서울 주변에 신도시를 추가로 개발하면, 지방에 주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로 또 몰려들 것이고, 투기판이 될 것이다. 결국 서울 주택시장은 혼탁해지고, 지방 주택 가격의 하락을 부채질할 것이다.
또 1가구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 정책에서 지방과 농촌 지역의 주택은 제외시키고, 서울 등 수도권에 밀집된 다주택자들이 지방과 농촌 지역에 ‘세컨드 하우스’를 보유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이를 통해 서울 등 수도권에 몰려 있는 인구와 돈이 지방으로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이 같은 대책을 통해 저출산·고령화 때문에 늘어나고 있는 지방과 농촌 지역의 빈집과 미분양 주택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도 대한민국이다.
이현훈 | 강원대 국제무역학과 교수·한국경제연구학회 회장/ 경향 2019.12.26.
그들의 이름을 망각해온 그리스도교를 반성하며
예수가 체포되고 심문과 재판을 거쳐 형장으로 가서 십자가에 매달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하루가 안 되었다. 하루 전만 해도 열렬한 추종자였던 그의 측근들은 그 하루 만에 마음이 무너졌다. 해서 대부분의 복음서들은 그 십자가 형장에 그의 제자 중 아무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 살벌한 하루 동안 어떤 이들은 누군가의 추격을 당하면서 숨기에 바빴겠고, 다른 이들은 신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절망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한데 아무도 없었던 건 아니다. 그곳엔 예수의 측근이었던 몇 명의 여성들이 있었다. 그들도 실상은 제자단의 일원이었지만 어느 복음서들도 그들을 제자라고 부르는 것을 꺼려했다. 해서 그들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어느 복음서들도 제자는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곳에 있었던 여성들의 명단엔 유독 ‘마리아’들이 많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등. 그밖에도 예수의 주위엔 마리아들이 많다. 예수의 모친도 마리아, 예수와 너무나 절친했던 마르다와 라자로의 자매이자 누이의 이름도 마리아다. 이 마리아는 많은 이들의 상상 속에서 예수가 사랑했던 이가 아닐까 추정되었던 여인이다. 이들 여러 마리아 중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예수의 어머니는 동일인일 가능성도 있다.
왜 마리아들이 그토록 많을까. 이스라엘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너무 많아서일까. 참고로 마리아는 그리스식 이름이고, 그것의 히브리식 이름은 미리암이다. 하지만 성서에 나오는 이름 중 마리아 혹은 미리암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예수 주위의 여성들처럼 그 이름을 가진 이들이 그렇게 많은 경우는 성서 어디에도 없다.
한편 그들 대부분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와 함께한 이들이었지만 갈릴래아에서의 예수 이야기를 다루는 복음서 텍스트에는 그이들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필시 그들이 여자들이기 때문이겠다. 후대에 그리스도교가 나름의 권력의 장을 만들어냈으니, 예수에 대한 기록 속에서 이름을 둘러싼 정치학이 작동했음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그토록 망각되었던 이름들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기록에 등장한다. 그리고 거의 같은 이름이 부활의 목격자로도 나온다. 다른 제자들이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 몇 명의 마리아들을 포함한 여성들이 어떤 활동을 했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거의 유일한 활동가였음을 시사한다. 그렇게 너무나 확고하게 알려진 탓에 이 대목에선 그녀들의 이름을 삭제할 수 없었던 것이겠다.
예수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예수가 이끌었던 하느님나라 운동이 실패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이를 안장한 무덤엔 그이가 없다, 그리고 그이는 갈릴래아에 먼저 갔다, 그러니 그리로 오라.’ 이것이 이들 여성들이 부르짖고 다녔던 예수부활설의 요체였다. 그런 뒤에 일부 남성 제자들이, 아마도 별도로 예수부활운동에 나섰고, 그중에는 예루살렘 부활설도 등장했다.
모두가 무너졌을 때 무너지지 않고 무언가를 했던 여성들 덕에 예수운동은 되살아났다. 그게 오늘의 그리스도교의 출발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 몇 명의 마리아들이 있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마리아들이다.
우선 ‘마리아’라는 이름은 이름 없는 여인들을 예수와 그의 집단 내에서 부르는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력 있는 이나 부유한 이들은 여성이어도 이름이 있었지만 무지렁이 여성 대중들에게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예수운동 집단 사이에서는 그들을 이름으로 불렀다. 마리아가 그것이다. 물론 다른 남자들처럼 부친이나 가족의 이름과 연결해 ‘아무개의 엄마 혹은 아무개의 자매 마리아’ 등으로 불리거나 지명과 연결해 ‘어느 마을 출신 마리아’ 등으로 불렸다. 한데 이름을 갖게 된 그 여성들은 예수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가 되었다. 성서는 이렇게 이름 없는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줬고, 이름과 함께 존재감이 형성된 그이들이 새로운 사건의 중심 행위자가 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과연 그 전통에 있는가? 신은 인간을 창조했을 때 그들의 이름을 지어줬고, 최초의 인간은 주변의 동물과 식물과 나무와 땅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짓기는 관계맺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름을 부르면서 상호적 존재가 된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는 많은 이들의 이름을 지우고 있고, 그렇게 이름이 사라진 이들을 아무렇게나 무시하고 배제한다. 한데 오늘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런 세계의 질서에 공모자가 되고 있다. 최초의 전통은 그렇게 유실되었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경향 2019.12.27.
18세 선거권
운전면허 취득, 군 입대, 결혼, (8급 이하) 공무원 시험 응시…. 만 18세부터 가능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근로기준법에서 도덕상 또는 보건상 유해한 사업에서 일할 수 있는 연령도 18세 이상이다.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27일 통과되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유일의 만 19세 선거권 국가’라는 꼬리표를 드디어 뗐다. 전 세계 232개국 중 215개국이 18세 이하에 선거권을 주고 있는 세상이다. 선거권 18세 하향 찬반 논란 중 대표적인 반대 이유는 교실의 정치화·이념화라는 점이다. 찬성 이유는 선거연령 하향이라는 국제적 추세와 고령화 사회에서 청년 유권자 영향력을 높이는 정치적 형평성 등이다.
이젠 찬반 논란은 뒤로하고, 좋은 결과만 가져와야 한다. 여러모로 한국과 비슷하면서 OECD 국가 중 최근(2015년) 선거권 연령을 낮춘 일본의 경험을 참고하자. ‘일본의 18세 선거권 도입에 따른 선거교육과 시사점’ 논문을 보면, 1969년 이래 고교생의 정치활동을 금지해 온 일본 정부는 18세 선거권 도입을 계기로, 2015년 10월 새로운 정치교육 가이드라인을 각 학교에 보냈다. 개인적인 주장·주의 대신 공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지도한다는 큰 원칙 아래 체계적인 정치지도계획을 수립하고, 선거관리위원회와 협력하는 모의선거·모의의회 등 실천적 교육활동 지침을 만들었다. 각계 공동으로 정치교육 부교재를 만들고 연간 15시간 수업하도록 했으며, 선거관리 주무부처의 출강 형식 수업과 학교별로 실제 선거를 체험하는 하루 일정의 모의선거 등도 활발히 진행했다.
이제 내년 4월 총선부터는 생일이 지난 2002년생 고3 학생 일부가 선거권을 행사하게 된다. 준비시간 부족으로 현장의 소란함은 잠깐 있겠지만, 대세를 거스를 순 없다. 10대가 글로벌 주역으로 등장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만 청소년의 무한한 가능성을 대학교 입학 이후로 묶어둘 순 없다. 정치를 더러운 것, 위험한 것이라고 피하기보다 스스로의 관심사를 의제화하며 역량을 키워야 사회가 전진한다. 생각해 보면 4·19혁명 등 민주화 운동의 중심축은 중·고교생이었고, 3·1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의 나이는 만 16세였다. 우려 대신 격려가 필요하다 /송현숙 논설위원 경향 2019.12.27.
문재인 정부가 되돌려 놓아야 할 일
나이 마흔일곱에 유학을 간 데다 세 자녀가 여섯·다섯 살 터울이어서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영국의 모든 교육과정을 체험했다. 아들이 케임브리지대 생물학과 면접시험을 볼 때였다. 교수가 난데없이 동물 머리뼈를 내놓으며 물었다.
“이게 초식동물의 머리뼈라고 생각해? 아니면 육식동물의 것이라고 생각해?” 아들이 머뭇거리자 교수가 힌트를 줬다. “두 눈이 머리 양쪽에 붙어 있네.” “아하! 초식동물이군요. 사방의 육식동물을 경계하기 위하여….” “그러면 육식동물은 왜 두 눈이 얼굴 앞쪽에 모이도록 진화했을까?” “모르겠는데요.” “한쪽 눈을 가리고 밖을 한번 내다봐. 잘 보여?” “보이기는 하는데 거리 측정이 안되네요. 아! 두 눈이 앞쪽에 있어야 정확하게 거리를 측정하여 피식자를 덮칠 수 있게 진화했군요.”
심층면접이 더 이어졌는데 아들은 낙방했다. 영국에 간 지 얼마 안돼 암기 위주 학습 습관을 버리지 못한 탓일까? 케임브리지대 주요 평가항목은, 얼핏 눈치챘겠지만, ① 평소 책을 많이 읽어 상식이 풍부한지 ② 전공하고자 하는 분야에 대한 기초지식과 흥미가 있는지 ③ 관찰력과 추리력 같은 학문할 자질이 있는지 등이다. 정답을 맞히는 것보다, 모르더라도 어떻게 답을 찾아가는지를 중시한다.
한국은 어떤가? 특히 정시는 수능 1점 차이로 당락이 갈라지니 점수에 맞춰 대학을 선택한다. 선진국 중 우리만큼 대학 전공과 직업이 다른 나라는 없다. 대학 간 우수학생 유치경쟁은 국가 전체로 보면 ‘제로섬 게임’이다. 케임브리지 출신 뉴턴과 케인스가 수능시험을 보고 ‘인서울’ 대학에 지원하더라도 떨어질 게 뻔하다. 교육부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 방안’은 우리 입시제도를 더 암기 위주로 되돌려 놓았다. 고교 블라인드 평가 등 긍정적인 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정시 확대’를 밀어붙여 교육정책은 문재인 정부 최악의 실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보수정권조차 건드리지 않던 ‘정시 축소’ 기조를 뒤집었기 때문이다. 공정성을 강화하면 될 학종은 경원시했다. 교육현장에서는 비교과가 다시 축소되고, 독서와 토론교육, 진로모색과 동아리 활동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개성과 인성, 주체성과 창의성을 죽이는 방향이다.
‘공정성 강화 방안’이라지만 넓은 의미의 공정성은 오히려 약화했다. 수능 위주 정시가 사교육 여력이 큰 상위 소득계층에게 훨씬 유리하다는 점은 수많은 연구조사가 입증한다. SKY 캐슬, 숙명여고 사건, 조국 사태로 입시 공정성에 금이 간 틈을 비집고 정시 확대를 꾀해온 상위층의 주장이 먹혀든 것이다. 당장 강남에서는 학원들 대입설명회가 호황이고 전셋값이 급등하고 있다. 미래형 학교 모델을 정립하고 대안학교를 추진하고 있는 충북도교육청의 정책세미나에 토론자로 두 번 참석했는데, 교육현장의 우려가 크다. 수능·학종·내신이라는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학생들이 더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김성천 교원대학 교수팀이 연구한 미래형 학교의 핵심은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넘겨주는 것이다. 영국의 주관식 시험인 A-level은 좋아하는 과목 셋만 선택해도 된다.
전 과목 시험으로 60만 또래 학생의 서열을 매겨 입학한 대학의 졸업장이 평생을 좌우하는 ‘신분증’이 되는 극단적 학벌사회는 우리밖에 없다. 절대다수가 불행해질 뿐 아니라 극소수 승자도 행복하지 않다. 서울대생 절반도 우울증을 앓고 있다. 아동·청소년 셋에 하나는 ‘죽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생각해봤다고 한다. 학벌사회를 타파하려면 고등학교, 전문대, 지방대를 나와도 괜찮은 직업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영국에서는 오후 3시반이면 초등학교에 가서 자녀를 데려가게 돼 있는데 케임브리지에 살 때 나에겐 낯선 장면이 눈에 띄었다. 화장실이 막히면 출동하는 배관공이 늘 노란색 작업복을 입은 채 나타났다. 그는 케임브리지대 교수 등과 함께 자녀를 기다리며 “우리 애는 내 직업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자랑했다. 영국의 기능공들은 대개 대학교수보다 소득이 높다. 영국의 대학진학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학력과잉 국가’ 한국의 절반이 안된다.
입시지옥을 초열지옥으로 만들려는 정책은 청와대와 교육부의 교육철학 빈곤에서 비롯됐다. 미국 교육체계에도 ‘뛰어난 자에게 영광’이라는 제퍼슨주의와 ‘기회 평등’이라는 잭슨주의가 융합돼 있다. 교육행정 난맥상은 학교교육 주체인 교사와 학생을 무시한 탓이다. 교사 무시는 교육부 장관이 59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교수·정치인 출신이고 교사 출신은 한 명도 없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정치인은 기득권층에 의해 ‘만들어진 여론’을 따라가기 십상이고, 교수는 심각한 초·중·고 교육현장을 모른다. 교수는 교사자격증도 없는 자들이다. 교사 출신 교육부 장관이 절실한 이유다.
우리는 상급 관청이 정책을 만들고 하급 관청은 집행하는 하향식 행정을 당연시하지만 진정한 교육자치는 현장 목소리를 위로 전달해 정책을 형성하는 것이다. 교육감들이 연합해서라도 의견을 내고, 공론화 과정을 거쳐 ‘정시 확대’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경향 2019.12.31.
Figlia Del Cielo III - Roberto Cacciapaglia
'세상과 어울리기 > 외부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8~31 (0) | 2020.02.01 |
---|---|
20.1.1~16 평당 1억에 , 특권에 분노하며 특권을 좇는 (0) | 2020.01.18 |
12.2~12.12 독한 시민’이 되자 (0) | 2019.12.15 |
11.15~29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0) | 2019.12.01 |
11.2~11.14 한국 사회에는 없는 것, 통합능력 (0) | 2019.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