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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0.1.18~31

by 이성근 2020. 2. 1.

2020 01 31

 

 

박종철이 원했던 세상

[ 미디어오늘 1234호 사설 ]

요즘 국회 출입기자들은 하루에도 몇 건씩 총선 출마 예비후보들의 출판기념회나 출사표를 문자나 메일로 받는다. 문자에 찍힌 그분들 이력을 훑어 보면 대부분 ‘386’ 세대다.

 

살아 있었으면 박종철도 그들과 비슷한 연배였을 거다.

영화 ‘1987’에서 그랬듯 서울대생 박종철은 1987114일 새벽 경찰청(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 끝에 타살됐다. 1987‘6월 항쟁은 박종철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 그의 죽음은 결국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 주말 박종철 33주기를 맞아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김세균 박종철 열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이 자리에서 그가 꿈꿨던 민주주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절차적·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사회적 민주주의로 이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박종철 열사의 33주기를 이틀 앞둔 112일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 조성 예정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 열사의 33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사진은 박 열사의 형 박종부 씨가 발언하고 있는 모습. 사진=민중의소리

 

그가 죽은 지 33년이 지난 지금 그가 어떤 세상을 꿈꿨는지 오롯이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많지 않다. 어떤 언론도 이 부분을 주목하지 않았다.

 

대학교 2학년이었던 박종철은 19855월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주민들과 함께 사당동 일대에서 거리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잡혀 구류 5일을 살았다.

그는 19856월 구로공단 민주노조들이 벌인 구로동맹파업에도 연대했다.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노조가 그해 624~29일까지 서울 외곽 구로공단에서 고립돼 힘겹게 싸웠다. 그는 고립된 노조의 싸움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공장 옆 거리시위에 나섰다. 당시 그는 가오리로 불렸던 가리봉동 오거리로 매일 출근했다. 그는 거리 시위 도중 경찰에 잡혀 또다시 구류 3일을 살았다.

 

그는 구로동맹파업이 끝나고 1985년 여름방학 땐 구로공단 옆 대림동의 한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 투신을 준비했다.

 

이듬해 1986411일에는 전태일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청계피복노조의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돼 1986715일 출소했다.

 

그는 1987113일 밤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들에게 연행돼 고문 끝에 숨졌다. 그는 철거되는 도시빈민과 살인적 노동강도에 시달리면서도 공돌이 공순이 소리를 들어야 했던 이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했던 동료들은 좀 달랐다. 경찰은 그에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추궁했지만 그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죽음으로 지켰던 박종운은 훗날 한나라당 부천·오정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이 돼 총선에도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민주당으로 옮겨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 했던 그의 염원을 오롯이 지켜낸 이는 드물다

 

1997610, 6월 민주항쟁 10주년을 맞아 서울대 IMC관앞 언덕에서 지난 1987년 경찰의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씨를 기리는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사진은 추모상을 보며 슬퍼하는 아버지 박정기씨. 연합뉴스

 

아들의 죽음 이후 아버지 박씨는 아들을 대신해 평생 거리에서 싸웠다. 김대중 정부 땐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회장을 맡아 민주화 운동으로 희생된 이들의 진상 규명을 위해 400일 넘게 거리에서 농성했다. 그 결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다. 이제 아버지 박씨도 2년전 숨졌다.

 

그의 희생 위에 세워진 민주화가 이 땅에 뿌리 내리려면 그가 손 잡았던 도시 빈민과 노동자가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사회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무임승차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디어오늘 2000118

 

삼성정준영 판사에게 묻는다

지난 19일 발표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출범에 대한 대다수 언론의 기사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노조·승계 문제까지 성역은 없다” “계열사 7외부자 눈으로 감시” “위원회 구성·운영 독립성 보장받았다등 긍정적 반응 일색이었다. 심지어 해외에서도 드문 기구라는 낯뜨거운 제목까지 등장했다. 이 기구가 내부 정보를 수집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판결을 앞두고 이 부회장의 실형을 면하기 위한 이벤트성 기구란 의혹이 있다는 등의 비판적 시각은 <한겨레> 등 극소수였다.

 

그런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출범에 의혹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잘못인 듯하다. 이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부 정준영 부장판사는 지난해 10월과 12월 열린 공판에서 이 부회장에게 위법 행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실효적 준법감시제도를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준법감시위 설치가 재판 결과와 무관하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양형에 고려하겠다는 뜻이 확연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 판사는 17일 열린 파기환송심 4차 공판에서 삼성의 준법감시제도는 실질적이고 실효적으로 운영돼야 양형 조건으로 고려될 수 있다. 양형 심리와 관련해 삼성이 제시한 준법감시제도의 점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애초의 발언을 번복하고 준법감시위원회를 양형에 반영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됐으면 준법감시위원회가 이 부회장의 형량 줄이기 의도와 연관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이제 부질없는 일로 보인다. 오히려 그런 방식을 통한 형의 감경이 우리의 사법체계에서 적절한지, 삼성은 그런 요건을 충분히 충족하고 있는지 등을 깊이 검토해봐야 할 시점이다.

 

먼저 삼성의 준법감시위원회가 진정성이 있느냐의 문제부터 따져보자. 삼성이 총수의 불법행위로 궁지에 몰릴 때마다 쇄신안을 내놓았으나 모두 용두사미가 됐다는 이야기는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 대신 다른 측면 하나를 살펴보자. 얼마 전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김지형 전 대법관과 저녁식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오래전에 해놓은 약속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삼성 준법감시위 출범 기자회견을 한 날 저녁이었다. 자연스럽게 준법감시위가 식탁의 주된 화제로 올랐다. 김 전 대법관은 준법감시위 위원장 제안을 받았을 때의 고민과 망설임, 수락 과정, 위원 인선에 얽힌 뒷이야기, 앞으로의 각오와 계획 등을 매우 솔직하고 소상히 설명했다.

 

그런데 필자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나 제가 몸담은 한겨레신문은 삼성 준법감시위의 진정성을 결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감시견기능입니다. 언론이야말로 기업의 준법감시 기능을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한겨레가 삼성의 불법행위를 밝혀내 보도했더니 앙갚음으로 광고 탄압을 하고 있습니다. 2007년 삼성 비자금 사건 뒤 한겨레에 대한 광고를 2년 동안이나 모두 중단하더니 이번에는 삼성 뇌물 사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 등을 보도했다고 광고를 4분의 1 수준으로 줄여놓았습니다. 불법·위법 사항을 지적한 준법감시 언론에는 광고로 보복하면서 따로 준법감시위를 만들어 법을 잘 지키겠다고 하니 그 말의 진정성을 어찌 믿겠습니까?” 이후 이어진 대화 내용이 궁금할 분도 있겠지만 생략한다. (사실 그날의 저녁식사는 극히 사적인 자리였기 때문에 필자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다만, 김 전 대법관은 삼성의 광고 보복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며 그런 사실에 놀라움과 충격을 표시했다는 것만 간략히 밝혀둔다.)

 

우리 형법 제15조는 양형의 조건을 밝히고 있다. 형사 사건에서 형량을 정하는 법률적 근거가 바로 형법 제51조다. 이 조항의 네 가지 양형 조건 안에는 범행 후의 정황이 있다. 예를 들어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을 깊이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피해를 보상하는 등의 행위를 하면 형을 줄이는 고려 사유가 되고, 그 반대 행위를 하면 형량을 높이는 사유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준법감시 언론에 대한 삼성의 보복 행위를 형법상 범행 후의 정황에 대입해보면 어떤 해석이 나올까. 그 답은 자명하다고 본다.

 

삼성 사건의 파기환송심을 맡은 정준영 부장판사는 형사재판에서 형벌보다는 재발 방지와 치료, 피고인과 피해자 간의 화해를 중시하는 이른바 치료적 사법’, ‘형사소송상 화해중재에 깊은 관심을 가진 판사로 유명하다. 실제 재판 과정에서 그런 치료적 사법, 형사 화해를 시도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132월에는 한국법학원이 발행하는 잡지 <저스티스>치유와 책임, 그리고 통합우리가 회복적 사법을 만날 때까지라는 논문도 발표했다. 이 논문을 찾아서 읽어봤다. 정 판사는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의 핵심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참여하는 범죄에 관한 대화(dialogue)를 통해 가해자의 반성·사과, 피해자의 용서, 상호 간 화해를 끌어내고 범죄에 의해 훼손된 관계나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다고 설명하면서 회복적 사법의 의미와 프로그램의 사례, 적용 모델 등을 상세히 짚고 있다. 정 판사는 결론 부분에서 형사사법제도가 공정하게 운영되어야 회복적 사법도 그 기능을 다할 수 있다는 등의 과제를 제시하면서 회복적 사법의 기법과 가치는 범죄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갈등 해결 과정에 적용될 수 있고, 우리 사회의 갈등 해결 문화를 더욱 성숙하게 할 수 있다고 썼다.

 

정 판사가 삼성 재판 과정에서 준법감시제도 문제를 꺼낸 것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 법조계의 해석이다. 대법관을 지낸 한 법률전문가는 회복적 사법의 출발점은 재범 방지에 있다. 범죄자에게 응보형 형벌을 내리면 결국 형기가 끝나도 치유가 되지 않고 다시 법원의 회전문을 열고 들어오는 회전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인식이 그 출발점이다. 정 판사가 준법감시제도 마련을 주문한 것도 그런 회전문 현상을 막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서가 아닐까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삼성이야말로 회전문 현상의 대명사다. 총수가 연루된 불법행위 발생-쇄신책 발표-또다시 총수의 불법행위-쇄신책 발표. 이렇게 회전문이 돌아간 것이 2000년대 들어 이번이 벌써 네 번째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동안 삼성에 부과된 형량도 응보형 형벌과는 거리가 먼 솜방망이 처벌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번에 삼성에 회복적 사법 개념을 원용해 또다시 솜방망이 처벌을 하면 회전문 현상이 멈출 것이라는 근거는 도대체 무엇일까.

 

정 판사의 논문을 읽으면서 줄곧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은 치유, 통합, 화해, 대화, 가해자의 반성, 피해자의 용서 등 회복적 사법의 핵심 개념들이 이재용 부회장 사건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였다. ‘가해자의 반성과 사과라는 말부터 그렇다. 기업범죄에서 가해자·피해자를 확연히 가르기는 사실 복잡하지만, 어쨌든 삼성은 자신이 가해자가 아니라 뇌물사건의 피해자였다고 주장해왔다. “권력으로부터 겁박을 당한 피해자라고 스스로를 여기는데 무슨 반성과 사과가 있을 수 있는가. 그래서 삼성은 자신의 위법 행위를 고발한 언론을 증오한다.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을 법정에 세운 촛불까지도 원망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삼성은 반성과 사과는커녕 용서를 해야 할 쪽도, 상처를 치유받아야 할 쪽도 오히려 자신이라고 여겨왔다. 회복적 사법에서 말하는 범죄로 훼손된 관계와 질서의 회복도 마찬가지다. 이 부회장의 형량을 대폭 줄여주면 재벌과 권력 간에 오간 뇌물청탁과 권력남용으로 훼손된 국가질서가 회복되는가.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일반 국민이 받은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회복적 사법의 목표인 화해와 치유, 통합은 애초부터 그른 듯하다.

 

예전에 무협지를 읽은 사람들은 ()을 보고 나서야 눈물을 흘린다는 말이 곧잘 등장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요즘 삼성이 준법감시위원회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다. 삼성은 20182월 항소심 재판부가 이재용 부회장을 사실상 피해자로 보고 집행유예를 선고했을 때 재판부의 용기와 현명함에 경의를 표한다며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였다. 그랬다가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판결이 나오자 허둥지둥하고 있다. 관을 보고서야 눈물을 흘리는 셈이다. 그런데 그 눈물도 진짜 눈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실효적 준법감시 프로그램은 미국 연방 양형기준 제8조가 모델이다. 실제로 정 부장판사는 공판 과정에서 이 부회장에게 준법감시제도 마련을 주문하면서 미국 연방 양형기준을 참고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 있다. 우선, 미국의 형 감경 제도는 징벌적 손해배상(penalty damage) 제도와 맞물려 있는 제도라는 점이다. 1991년에 제정된 연방 양형 지침 매뉴얼(Federal Sentencing Guidelines Manual)은 기업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종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액의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양형을 결정할 때 기업 쪽이 구축·운영하는 법 준수 및 윤리 프로그램을 벌금액의 감경 사유로 고려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즉 연방 양형기준은 채찍과 당근의 양 날개를 가진 규정이다. 2011년 우리나라 상법이 개정되면서 도입된 준법지원인(Compliance Officer) 제도를 다각도로 분석한 김재윤 전남대 교수의 논문 준법지원인 제도의 도입에 따른 형사법적 인센티브를 읽다 보니 이런 날카로운 지적이 눈에 띈다. “기업범죄에 대한 징벌적 고액 배상금 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양형기준에 형 감경 사유를 인정하는 것은 기업범죄의 억제를 위해 채찍은 외면하고 당근만을 취하겠다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삼성이 준법감시위원회를 구성했다는 이유로 감경해주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지적이다.

 

또 하나 유의할 점은 우리나라는 아직 준법감시제도 프로그램과 관련한 세밀한 양형 지침 매뉴얼이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국 법원은 기업의 범죄행위로 인한 벌금 부과 시 위반 등급에 따라 기준 벌금액을 산정하는데, 이때 연방 양형 지침 매뉴얼에 따라 유책성 지수’(culpability score)를 고려한다. 기업이 효과적인 법 준수 및 윤리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면 유책성 지수에서 3점을 차감하도록 하는 등의 방식이다. 우리 법원은 그런 구체적인 매뉴얼이 없다. 세밀한 양형기준이 없이 법관의 자의적 판단이나 선입관이 좌우하는 감형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한번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근본적으로는 미국과 한국의 사법문화의 차이도 간과할 수 없다. 법 준수 프로그램을 감경 사유로 인정하는 미국의 양형 규정은 플리바겐 제도 등이 광범위하게 정착된 사법문화와 깊이 연관돼 있다. 한국의 사법문화는 미국과는 많이 다르다. 김재윤 교수는 앞서 언급한 논문에서 미국과 달리 법원이 준법지원인과 법 준수 프로그램을 효과적으로 운영했다고 하여 기업범죄를 저지른 (최고) 경영진에 대해 형벌을 감경하는 온정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기업범죄의 억지와 예방이라는 형사정책적 관점에서 필요한지도 의문이다라고 지적했는데 매우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준법감시 프로그램 도입을 통해 기업 체질을 혁신한 가장 모범적 사례로 꼽히는 기업은 독일의 지멘스다. 지멘스는 2006년 대규모 뇌물·부패 혐의가 드러나 큰 위기에 부닥쳤으나 뼈를 깎는 준법 노력으로 신뢰할만한 기업으로 거듭났다. 삼성 준법감시위가 모델로 깊이 연구하고 있는 것도 지멘스 사례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지멘스와 삼성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너무나 차이가 난다. 지멘스는 부정부패 사건이 드러난 뒤 당시 경영진의 책임을 물어 모두 물러나게 하고 회사 설립 이후 160년 만에 처음으로 외부 출신 최고경영자(CEO)를 임명했다. 사업 행동강령에 양심과 준법 문화는 위로부터 시작된다는 선언도 명시했다. 또 부정부패 예방·척결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비영리 단체들에 1억달러 규모의 지원사업도 펼쳤다. 그런데 삼성은 거꾸로다. 총수의 책임이 아니라 구명에 사활을 걸고 있다. 삼성은 사실 아랫사람들이 문제라기보다는 비양심과 탈법 문화가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삼성은 또 부정부패 예방·척결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은커녕 오히려 시민사회단체·언론 등의 반부패 활동에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뇌물사건이 불거진 뒤 실제로 사회공헌기금 집행 규모도 대폭 줄였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이 부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 재판이 모두 끝난 뒤에도 초심에 변함이 없을까.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조직이 출범했으니 앞으로 제대로 된 준법감시 활동을 펼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지형 전 대법관도 일단 위원장을 맡았으니 열정과 소신을 맘껏 펼치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당장 눈앞의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감경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정준영 부장판사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쓴 논문을 읽으면서 그동안 잘 몰랐던 회복적 사법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깊이 공감하게 됐다. 회복적 사법이 형사처벌의 보완이나 대안 차원을 넘어 사회 각 분야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갈등을 다루거나 심각한 정치적 폭력으로 인한 후유증의 국민적 치유를 촉진하기 위해서도 활용될 수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번 삼성 판결에 훨씬 신중해야 한다. 가해자의 변화, 사과, 용서, 화해 등의 핵심 단어가 실종된 상태의 감경이 어찌 회복적 사법인가. 어설픈 삼성 봐주기가 자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회복적 사법의 발전에도 해가 될 수 있음을 정 판사는 깊이 숙고했으면 한다.

김종구 편집인 한겨레 2000. 01.19

 

치매가족책임제의 비극

새해 시작과 함께 안타까운 소식이 하나 전해졌었다. 용인시에 사는 한 치매 노인이 자신을 돌봐주던 아들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시신과 함께 약 두달 동안 생활해온 것이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정황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인은 지병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두 모자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치매 환자를 부양하는 일의 고됨이다. 질환이 비교적 가벼울 때는 부분적으로나마 자립된 생활을 할 수 있지만 말기에 이르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활동까지 누군가가 해결해주어야 한다. 이때부터 돌봄은 고된 육체노동을 수반한다. 체중을 지탱하며 들었다 놓는 일을 매일 하다 보면 관절이 상하고, 하루도 쉬지를 못하니 각종 만성질환이 발병하거나 악화될 수 있다. 운 나쁘게도 치매에 행동 문제가 심하게 동반되는 경우 돌보는 사람은 심리적 스트레스도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환자는 치매로, 보호자는 우울증으로 함께 치료받는 경우가 많다.

 

치매를 진단받은 분들이 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평균 유병 기간은 대략 10년으로 알려져 있다. 긴 시간의 돌봄을 환자의 가족 한두명이 도맡는 경우가 많다. 가족구성원 중 가사를 전담하거나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은 사람이 주로 나서게 된다. 결국 가족 내 여성 내지 다른 노인의 몫일 확률이 높다. 돌봄을 누가 감당하느냐를 두고 가족 간의 갈등이 불거지기도 한다. 치매라는 질환이 가져오는 딱 그만큼의 슬픔을 넘어선 좀더 심각한 우울감이 가족을 덮치는 것은 치매가족책임제가 가져오는 불행이다.

 

가족구성원 중 한두 사람이라도 더 손을 보태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나라엔 그런 선택지가 없다. 간병휴직이라는 제도가 유명무실하기 때문이다. 고령화에 대한 대책 마련에 고심하는 일본도 가족의 간병을 위해 일정 기간을 유급 휴직으로 보장하는 간병휴직을 확대하고자 노력 중이라고 한다. 자신의 몸이 아파도 진통제를 먹어가며 출근을 해야 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상위권 노동시간을 감당하는 우리는 가족이 심각한 질병에 걸리면 직장과 병원을 오가며 공중곡예를 하거나 결국 생계를 포기하는 간병퇴직을 고민해야 한다.

 

치매로 인한 부담을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 져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는 이미 존재한다. 정부는 치매 진단과 치료를 위한 의료비용을 경감하고 전국 256개의 치매안심센터를 개소하는 등 변화의 첫걸음을 이제 간신히 시작했다. 하지만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은 여전히 가족 중심이며 국가의 빈자리는 크다.

 

주간보호센터나 요양원 등 가족을 대신해 치매환자나 노인을 돌보는 시설들은 대부분 민간에 의해 건립되고 있다. 이런 시설들이 수익사업으로 운영되니 기관마다 질적 편차가 클 수밖에 없다. 일부 시설들은 인력이나 돌봄의 전문성에 한계가 있어 행동 문제가 동반된 치매 환자들이 도리어 퇴소되기도 한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공립 요양원의 경우 시설과 서비스 면에서 월등한 만족도를 보이지만 민간 요양원 2만여곳이 설립되는 동안 국립 요양원은 240여곳 수준으로 입소를 위해 3~9년을 대기해야 한다. 정부의 계획은 2022년까지 130곳을 더 개설한다는 수준이다.

 

약물치료의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까닭에 치매 환자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돌봄의 질이다. ‘내가 먼저 죽으면 환자는 어떻게 될지 걱정이라고 한숨짓는 노인 보호자가 참 많다. 가족들의 짐을 덜어주는 것을 넘어, 가족에게 기대고 싶지 않거나 혹은 가족이 없어도 치매를 겪는 개인이 존엄한 망각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때 치매국가책임제는 비로소 성립될 것이다./ 이승홍 녹색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 한겨레 2000. 01.19

 

가짜뉴스의 시대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 “말이 말을 낳는다는 속담이 있다. 교통수단과 정보매체가 제한되었던 때에도 어떤 특정한 정보나 뉴스가 빨리 전달되고 확산하는 모습을 잘 묘사했다. 특히 격변과 혼란의 시기에 백성들은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담은 메시지를 비밀리에 주고받았다. 집권자들은 이를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트리는 행위라며 추적하고 탄압했지만 정상적인 언로(言路)가 막힌 상황에서 정보나 소문은 빠르게 여러 샛길을 만들며 제 갈 길을 찾기 마련이었다.

 

다양한 정보매체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과거처럼 언로가 막혀서 생긴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많은 언로로 인한 혼란이 문제다.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누구나 자신의 정보나 의견을 전달할 수 있지만 집단이 만들어 내는 정보에 개인이 쉽게 휩쓸리는 위험도 그에 따라 커졌다. 디지털 문명의 비판자인 제란 러니어는 이런 현상을 중국 문화혁명기의 홍위병에 빗대 디지털 모택동주의라고 불렀다. ‘조국사태를 둘러싼 소셜미디어 내 갑론을박의 모습도 이에 거의 가까운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는 의도적으로 퍼트리는 가짜뉴스도 양산되기 마련이다. 유언비어와의 전쟁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정보화시대에는 더욱 어려운 싸움이 됐다. 이른바 댓글부대가 몰려다니며 근거 없는 거짓 소식을 퍼뜨리는 행위를 법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은 그래서 비등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뉴스가 거짓인지 아니면 과장된 표현의 결과인지를 법적으로 가르기도 힘들며, 표현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법적 처벌을 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가짜뉴스가 민주사회의 불가결한 요소인 의사 표현의 자유를 악용, 언론매체 일반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켜 건전한 공론장의 성립을 위협한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문제는 또 기존의 정치, 법과 언론이 과연 그러한 가짜뉴스를 규제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느냐는 물음과도 직결되어 있다. ‘정통한 소식통에 의거한 북한과 관련된 많은 정보나 뉴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가짜뉴스로 판명되어 북한에는 예수처럼 부활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이럴 때 나오는 변명의 소리는 기껏해야 오보였다는 수준이다. 의도적으로 흘린 가짜뉴스는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선거 때가 되면 으레 기승을 부리는 온갖 가짜뉴스가 사회적 미디어에 넘쳐난다. 금년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중상과 모략, 또는 허위사실 유포로 인해 후에 당선이 무효가 되기도 하지만 과열된 선거 분위기는 진실과 주장 그리고 허위의 경계를 무너뜨리도록 만든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가장 많이 읽혔던 프란치스코 교황, 도널드 트럼프의 지지를 선언하여 충격이라는 제목으로 페이스북에 실린 가짜뉴스는 96만번의 공유, 반응 및 댓글이 실렸다. 게다가 당시 많이 읽혔던 10개의 뉴스 가운데 5개가 가짜뉴스로 판명되었다. 이런 정황을 고려, 201710월에 발효된 독일의 네트워크실시법은 이의가 제기된 사회적 미디어의 내용을 운영자가 24시간 이내에 삭제하거나 차단토록 하고 최고 500만유로(64억원)의 벌금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싱가포르는 작년 5월 최고 100만 싱가포르달러(86000만원)의 벌금과 10년의 징역에 처할 수 있는 반가짜뉴스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법이 도리어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우려의 소리도 높다. 사회적 미디어의 운영자, 이용자 그리고 이의 운영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국가 사이에 균형 있는 상호견제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내용들이다.

 

진실은 너무 교활해서 붙잡기 힘들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어떤 뉴스의 내용이 아예 날조인지, 가능성의 범주에 속하는지, 아니면 진실에 가까운지를 구별하는 문제는 오늘에 이르러 특별히 문제거리가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청난 양의 정보와 이의 속도와 함께 움직이는 정보화시대에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과제는 쉽지 않다. 진리의 원칙을 확실성과 명증성에서 찾았고 단순히 가능하다고만 여겨지는 모든 것조차도 허위라고 주장했던 근대 합리주의의 원조 데카르트가 들으면 놀라 자빠질, ‘()진실의 시대라는 말까지 나돈다.

 

진실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뿌리를 내린 이런 상황이 바로 가짜뉴스의 양산과 유통도 가능한 세상으로 만들었다. 회의주의와 상대주의, 나아가 냉소주의까지 가세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짜뉴스가 과연 법에 따라 규제될 수 있을지에 대해 낙관만 할 수 없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사회적 신뢰의 결핍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주위의 사건을 보다 단순화해서 보려는 욕구도 동시에 강해진다. 기존의 정치나 법, 또는 언론이나 전문가 집단이 이러한 욕구들을 제대로 충족시켜주고 신뢰를 쌓았다면 가짜뉴스가 들어설 공간도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가짜뉴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와 언론매체, 가짜뉴스와 관련된 법적 책임 문제에 대해 계속 미적거리는 소셜미디어 기업도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해결의 열쇠는 결국 깨어 있는 시민이 쥐고 있다. 정보매체에 실렸다고 이 모든 것이 진실일 수는 없다는 확신이 이를 향한 첫걸음이다. 위에서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말도 실은 독일의 풍자작가이자 화가였던 빌헬름 부슈(1832~1908)가 남긴 말이었다. ‘가짜인용도 이런 식으로 정보매체 안에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경향 2000. 01.20

 

이게 정말 독재인가

독재라는 표현이 눈에 띌 때마다 조금 불편했다. ‘독재라니, 여태껏 그것 하지 말자는 거였는데.’ 자조 섞인 한숨이 나왔다. 정부를 비판하는 은유적 표현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독재, 전체주의, 사회주의, 동물농장 등 험한 말들이 보수 언론에 넘쳐난다.

 

정말 독재인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전통에 서 있는 현 집권세력이 독재라면 그 뿌리가 뽑히는 꼴이다. 합법적 독재, 히틀러식 전체주의, 베네수엘라식 좌파 독재라는데 정말 그런가? 국민이 정말 개돼지 취급을 받고 있나?

 

얼마 전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교수모임은 성명에서 현 정권이 유사 전체주의를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공직자범죄수사처, 연동형 선거법, 검찰 수사 무력화, 사법부 장악 등은 이를 위한 거짓과 술책이라는 것이다.

 

정권의 주요 행위를 독재로 몰아가는 독재 프레임이다. 국정의 잘못을 꾸짖는 것과, 독재로 공격하는 건 전혀 다르다. 허황된 음모론에 가깝다. 언론 자유가 이렇게 보장된 나라가 독재일 순 없다. 공중파를 장악해 독재를 한다는데, 공중파의 변화는 오랜 내재적 요인에서 비롯됐다. 권력에 따라 공중파의 풍향이 왔다갔다하는 방송 구조가 문제라면 문제다.

 

법원 요직을 입에 맞는 사람들로 갈아치운다는데, 정권 잡고서 뜻이 다른 이들로만 인사 할 순 없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사법부 장악 흑역사는 모두가 아는 일이다. 트럼프는 연방법원 판사 수백명을 보수 성향으로 갈아치웠다. 물론 인사는 균형이 중요하다. 하지만 대통령제 아래에선 대통령이 사법권력 배분에서 일정 부분 주도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공수처와 연동형 비례제는 민주당 정권의 숙원이었다. 독재 하자는 게 아니라 검찰개혁·정치개혁 하자고 오래전부터 공약했던 것이다. 제도 차원의 문제제기면 몰라도 독재로 가는 징검다리라고 하는 건 과하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 자꾸 비교하는데 빈민 지지에 기반한 반미 포퓰리즘 정권과 현 정권을 동일 선상에 놓는 건 스스로를 비하하는 꼴이다. ‘30-50 클럽에 든 나라, -미 동맹으로 안보·경제 동맹의 안전판을 갖춘 나라, 민주주의 전통이 확고한 나라를 베네수엘라와 비교할 일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에겐 우파 독재가 있었을 뿐이다. 해방 이후 수십년 동안 독재를 휘두른 건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의 극우였다. 수구 보수의 뿌리는 여전히 강고하다. 진보 집권은 이제 갓 13년에 불과하다. 이렇게 가면 독재라고 호들갑떠는 건 좌파 집권이 계속될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다.

 

전체주의 문제는 좀더 살펴봐야 한다. 법원·검찰·의회 등이 빅브러더에 의해 통제되는 전체주의로 가고 있다는 논리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얕잡아보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정의이고 우리만이 선한 세력이라는 독선은 경계해야 한다. 의견이 다르다고 마구 공격하고 배제해선 곤란하다. 언론과 지식인이 댓글 비판이 두려워 자기검열하고 움츠러든다면 문제다. 진중권 유의 독설은 그런 폐해에 대한 과도한 반작용이다.

 

조국으로 대표되는 내로남불은 아픈 대목이다. 먼지털기식 검찰 수사의 문제점이 심각하지만, 조국 역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진보의 독선내로남불을 비판할 순 있지만 전체주의로 연결할 일은 아니다.

 

진영논리를 극복하자면서 버젓이 이를 반복하는 사례도 많다. ‘팩트로 승부하자고 해놓고 한쪽 진영의 문제점만 잔뜩 늘어놓는 건 교묘한 진영논리다. 어렵지만 내 편, 네 편의 잘못을 두루 살펴야 한다.

 

문재인은 독재고, 윤석열은 정의라는 식, 또는 그 반대는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조국도, 윤석열도, 문재인도 완전하지 않다. 조국이 촛불에 헌신했지만 행적은 미흡했다. 윤석열은 산 권력에 대들어 성과를 냈다지만, 조국 수사하듯 표적수사·별건수사로 일관했던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든다. 윤석열·조국을 임명한 문재인 대통령의 판단 미스역시 아프다.

 

대체로 한쪽이 다 옳고, 다른 쪽은 다 틀린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고 언제나 회색지대에 머물 순 없다. 옳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하되, 항상 뒤를 돌아보며 자성하고 평가해야 한다. 지금 정권이 명실상부한 촛불 정부라고 할 순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독재나 전체주의는 아니다. 백기철 논설위원 한겨레 2000. 01.21

 

전환도시의 고뇌

이제 정부는 확장재정의 기조를 천명하고 있다. 2019년은 9.5%, 2020년은 9.1% 확대된 예산이 편성되었다. 일부에서는 사회주의 정책을 쓴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는 논점을 잘못 짚은 것이다. 오히려 2017~18년 경기상황을 낙관한 것이 문제였다. 성장률을 지키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알았다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구조를 바꿀 것인가도 중요하다. 성장과 전환의 균형경로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의 세계경제는 종래의 거시정책 수단이 잘 먹히지 않는다. 1980년대 이후 저축이 투자수요를 초과하는 추세가 계속되었다. 주요 선진국의 실질 이자율은 지난 40년간 꾸준히 하락했고 현재는 마이너스 수준에 진입 중이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의 마이너스 이자율 실험은 투자 증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자율이 낮은데 민간투자는 일어나지 않는 조건에서, 재정지출이 늘어나면 부동산 버블이 유발될 수 있다.

 

자산가격 상승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성장실적이 좋은 미국도 자산가격 성장률이 더 높다. 2013~18년 연평균 국내총생산 성장이 4.07%였는데, 자산총액 성장은 6.32%였다. 한국도 지역에 풀린 재정이 서울 부동산시장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이제 성장과 구조전환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거시정책만으로 이루기는 어렵다. 도시와 산업의 재구성에 관한 나름의 모델을 만들어내야 할 시점이다.

 

전환도시로 유명한 사례가 미국의 포틀랜드이다. 포틀랜드는 1850년대 서부 오리건주 북서쪽 태평양 연안에 형성되었다. 1930년대 세워진 제철소와 조선소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번성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제조업의 쇠퇴와 함께 도심공동화와 슬럼화가 진행되었다.

 

포틀랜드가 전환도시로 나아간 계기는 1970년대의 교통과 토지이용의 시스템 전환이었다. 포틀랜드는 윌래밋 강변의 고속도로를 폐쇄하고 그에 지원되던 연방정부 자금을 도심 대중교통망 건설에 투입했다. 그렇게 버스, 경전철, 통근전철로 구성된 교통체계를 수립하고 트라이멧이 이를 운영하게 했다. 도심공동화에 대응하기 위해 도시의 모든 건물과 부지의 용도를 정하는 계획적 조닝의 원칙을 철저히 집행했다. 도시개발에 환경원칙을 적용하고 도심의 16% 면적을 공원으로 조성하는 공원계획을 추진했다.

 

포틀랜드엔 주민에 의한 공화국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개인과 연방국가 사이에서 주민에 의한 집단책임주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포틀랜드는 1명의 시장과 4명의 커미셔너가 행정과 입법을 함께 관장하고 있다. 정부 조직엔 지역을 관할하는 디스트릭트 외에도, 보건·안전·복지·경찰·세무 등 기능별 디스트릭트가 있다. 그리고 지역주민들과의 협력조직으로 50개의 어소시에이션이 활동하고 있다. 어소시에이션은 큰 정부조직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 다양성 사업을 수행한다.

 

그러나 포틀랜드도 주민의 공화국방식으로는 대응이 어려운 문제를 맞고 있다. 성장에 의한 인구팽창이 그것이다. 당초 포틀랜드는 도심인구 40만 규모를 기준으로 전환도시를 계획했다. 현재 인구는 60만을 넘었다. 반도체 기업 인텔이 들어온 게 포틀랜드에 강한 충격을 가했다. 2010년대에만 인텔 관련 추가고용이 수만여명에 이르렀고, 대규모 부동산 개발과 집값 상승이 뒤따르고 있다. 기존의 시스템에서 떨어져 나온 노숙자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포틀랜드는 이제 도심을 넘어 광역권 차원에서 새롭게 도시계획을 짜고 있다. 며칠 전 만난 포틀랜드 시 정부의 노련한 도시계획전문가 트로이 도스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그간 잘해왔던 일은 도심 발전을 제한하는 계획이었다. 이제 도심 바깥은 환경적 요구가 크지는 않다. 빈곤, 불평등, 노숙자 등 너무 어려운 문제들이 벌어지고 있다. 성장과 전환의 새로운 균형이 필요하다.” 이일영 한신대 경제학 교수 경향 2000. 01.21

 

아직은 조국을 놓아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민들께서 이제 조국 장관을 좀 놓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되기는 힘들 것 같다. 우선 검찰의 조국 수사는 계속되고 있다. 재판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한 대중의 관심은 식지 않을 터이다. 둘째로 시민사회의 갈등과 혼란 역시 약화될 기색이 없다. 오히려 4월 총선이 다가올수록 격화될 것이다. 문 대통령의 소망은 소망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검찰 수사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다. 4개월간 탈탈 털었지만 지위를 이용한 권력형 비리는 적발하지 못했다. 초라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물론 조 전 장관의 중도 사퇴를 끌어낸 것은 성과일 수 있다. 하지만 더 센추미애 장관을 만나게 됐고, 윤석열 총장의 측근들이 무더기로 잘려나갔다. 검찰개혁에 반대해온 검찰이 개혁 입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점도 아이러니다. 수사 과정에서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수사한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은 검찰 신뢰에 감점 요인이다. 세상이 검사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검사가 다 맞다는 이른바 검동설을 신봉한다는 구설에 오른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조국 사태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조국과 검찰, 그리고 양측에 공감하는 두 개 시민사회의 거대한 감정이입이 작용하면서 거대한 등장인물군이 형성됐다. 갈등 구도도 선명했다. 예컨대 조국에게 검찰은 개혁 대상이었지만 검찰에 조국은 수사 대상이자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이는 검찰 수사를 사활적 게임으로 몰고 갔다. ‘탄핵 보수에 조국 수사는 천만뜻밖의 선물이었다. ‘상처 입은조국을 공격함으로써 적폐의 치부를 가리고 바닥에 떨어진 존재감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반대로 진보에 조국 사태는 치명적 약점이 되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줄곧 공세를 펴온 진보는 수세에 몰렸다.

 

한국 사회는 조국 드라마와 관련해 공명하거나 반발하면서 집단적 확증편향이 작동하는 거대한 두 개의 사일로를 형성했다. 이런 관계 틀은 쉽게 붕괴되지 않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 모두 조국 사건에 커다란 정치적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는 선악의 문제를 다루는 데 서툴다. 흑백논리 탓에 대화와 타협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조 전 장관은 어느 정치인보다 더 정치적 인사로 자리매김했다.

 

조국 드라마에 동력을 제공한 분노를 빼놓을 수 없다. 분노의 대상은 바른말 하는 진보의 위선회복 불가 수준의 계층화 사회’, ‘같은 사안에 정반대의 해석을 하는 상대 진영등 다양했다. 공동체 구성원이 둘로 갈려 서로에게 분노하는 상황에서 연대와 공감, 신뢰는 자라날 수 없다. 더구나 한국은 아무나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민주국가’(자크 랑시에르). 이런 척박한 토양 속에서 통합이나 소통은 기대하기 어렵다. 시민사회의 의견이 갈라지고, 상대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려는 행태만 반복될 뿐이다. 그 결과는 분노의 확대와 심화다.

 

혹자는 조국 사태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묻고 싶다. 사회 전체가 이분법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합의하는 진실이 가능한가. 가뜩이나 진실은 누군가의 주장 속에서만 존재하고, 한쪽 진영에서만 통용되는 사회 아닌가. 한쪽의 진실은 반대쪽에는 비수가 되는 구조이다. 그러니 누군가 진실을 주장하면 그것이 진실인지 여부를 가리기보다 그 사람의 허점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 도덕적 하자나 행실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드물고, 그런 점이 드러나면 그가 주장한 진실은 설득력을 상실한다. 진실이 정치적 의도로 살해당하는 셈이다. 결국 사회 전체가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미치코 가쿠타니) 상황으로 몰려간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검찰은 조 전 장관을 가족비리감찰무마 의혹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종착역이 가까워진 것이다. 재판이 끝나면 조국 사태는 파장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조국 사태에 내장된 정치·사회적 폭발력은 여기서 끝날 정도로 간단치 않다. 사실 조 전 장관의 유무죄는 사태 전반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볼 때 빙산의 일각이다. 몸통에 해당하는 불공정과 불평등, 계급과 세습 문제는 해결을 위한 초보적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검찰개혁도 완성되려면 멀었다. 앞으로도 조 전 장관은 끊임없이 소환될 터이다. 희생양으로서든(진보) 위선자로서든(보수) 한국 사회는 아직 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조호연 논설주간 경향 2000. 01.21

 

 

누구를 위한 검찰개혁인가

검찰개혁을 둘러싼 문재인정권과 검찰의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기필코 검찰개혁을 완성하겠다” vs “검찰을 망치는 정권의 폭주”. 보수 진영은 서부극을, 진보 진영에선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진영에 따라 시각차가 극명하다. ‘살아있는 권력수사 성패, 검찰총장 거취, 총선에 미치는 영향, 공수처 논란 등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안갯속이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부와 공공수사부 등 13개 직접수사 부서들을 형사·공판부로 전환하는 검찰 직제개편안이 그제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정권 수사를 지휘하던 대검 간부와 일선 지검장을 잘라낸 ‘1·8 대학살 인사에 이어 차장·부장검사 등 수사 실무진까지 교체할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대검 중간간부들을 모두 유임시켜 달라는 의견을 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저돌적 스타일로 보면 수용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장관 허락 없이 특별수사팀을 만들지 못하게 한 것만 봐도 그렇다.

 

무리한 인사, 직제개편 강행이 정권 수사 방패막이용이란 우려가 높다. 현 정권이 중용해온 심재철 신임 대검 반부패부장이 공식회의에서 조국 무혐의” “백원우 기소 미루자는 주장을 해 검찰이 발칵 뒤집혔다. 법원 영장판사가 법치를 훼손했고 죄질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무혐의는 뜬금없다. 신임 서울중앙지검장과 동부지검장은 최강욱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의 기소를 미뤄 수사팀의 반발을 사고 있다. 이런 걸 노리고 친정부 검사를 요직에 기용한 것 아닌가. ‘검찰 사유화우려마저 나온다.

 

대검 반부패부장은 예전의 중수부장이다. 거악 척결의 선봉에 선 명예로운 자리다. 상갓집에서 직속 후배 검사가 그에게 당신이 검사냐. 조국 변호인이냐고 따졌다. 추 장관은 즉각 추태라며 공직기강을 바로잡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수 검사들이 왜 항의했는지 특별감찰본부를 꾸려 규명하자고 대든다. ‘항명정당한 반론이란 인식 차가 너무 크다. 일방적이고 거친 추 장관 방식은 검찰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추 장관은 직제개편으로 형사부가 강화돼 인권·민생 중심 검찰이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검경 수사권 조정안이 통과돼 경찰은 검찰 수사지휘를 받지 않고 수사종결권도 갖게 됐다. 형사부 일이 되레 줄어든 것이다. 더구나 여의도 저승사자라고 불리던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수단을 폐지해 국민이 피해를 볼 것이란 우려가 크다. 포항지진 피해자들은 정부 책임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과학기술범죄수사부를 폐지하지 말라며 상경 시위를 벌였다. 민생 강화는 포장용이란 비판이 나온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직제개편안이 부적절하다는 응답이 51%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정권의 적폐 수사를 잘한 공로로 윤석열을 서울중앙지검장에 전격 발탁했다. 검찰총장에 임명할 땐 우리 총장님이라고 치켜세웠다. 여당 일각에서 우리에게도 칼을 겨눌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왔지만 무시했다. 얼마나 믿었으면 살아있는 권력도 엄중히 수사해 달라고 했겠나. 그런 윤 총장의 칼날이 청와대를 겨누자 문 대통령은 돌변했다. 인사 협의 장소 문제로 추 장관과 마찰을 빚자 초법적이라며 윤 총장을 힐난했다. 전임 법무장관과 검찰총장들이 제3의 장소에서 인사 협의를 한 것은 사실이다.

 

검찰은 정권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다. 대통령이 검사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상 검찰과 정권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게 검찰의 숙명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검찰의 정치 도구화라는 혹독한 역사를 경험한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독립기구인 사법평의회를 신설했다. 중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검찰개혁은 가짜다. 국회는 검사 인사권 독립 방안을 찾아야 한다.

윤 총장은 수족이 다 잘려 나갔다. 그렇지만 검찰주의자에서 헌법주의자로 진화한 윤 총장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고 했다. 정권 수사를 직접 챙겨 수사결과로 말할 것이다. 정권과 검찰, 누가 승자가 될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 세계일보 2000. 01.22

 

설 대화의 7대 금기 인물

# 넉달 전 끔찍한 추석이었다. 저녁상을 일찍 물리고서다. “그 놈아 참 못쓰겠더만.” 공기업 다니는 큰형(59)TV를 가리켰다. 사흘 전 대통령이 임명한 조국 법무부장관이 보였다. “아따 못쓰긴 뭐가 못써요. 형도 저런 종편이나 유튜브만 보지 말라니까.” 구보씨(54) 목소리가 커졌다. 막 데친 김치전에 두세 잔 돌던 술상이 얼어붙었다. 서울·대전의 집값 얘기를 주고받다 TV 틀자마자 조국 얘기로 불똥이 튄 것이다. 만두를 빚던 형수와 아내도 놀라 부엌에서 나왔다. 조국 퇴진(큰형)-중립(형수)-검찰개혁(구보씨 부부). 112로 시작된 말싸움은 아주버님도 개독페친들 끊으세요란 아내 말에 교회 다니는 형수가 왜 동서 그런 말까지라고 발끈하며 22가 됐다. 늦게 도착한 둘째형이 말리지 않았으면 험한 말이 더 날아다녔을 터다. “여까지 하자.” 큰형이 방으로 들어가도 집안 공기는 풀리지 않았다. 늘 추석날 오전 11시 즈음,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이 밀리기 전 형집을 나섰던 구보씨는 아침 차례상만 마치고 바로 귀경길에 올랐다. 추석 뒤 시작된 광화문-서초동의 조국 대전50대 형제가 먼저 치른 격이다. 그 뒤 둘째형 중재로 언성 높인 걸 풀었지만, 설 귀향을 앞둔 구보씨는 아직도 추석 전날의 악몽이 생생하다.

 

# 나무씨(22)는 열흘 전 다툰 남친과 서먹서먹하다. 남친은 진보정당, 나무씨는 잘하는 정책도, 못하는 정책도 있다고 보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다. 평소 술잔을 기울여도 정치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날의 말다툼은 공무원시험에 1% 군가산점을 주겠다는 보수정당의 총선 공약을 두고 벌어졌다. “그게 될 수 있을까.” 남친은 긴가민가했고 나무씨는 그건 성차별이라고 받아쳤다. 불씨는 또 페미니즘으로 옮겨붙었다. 나무씨는 그날 밤 오빠와 얘기하다 알았다. 남친과 둘이서 여초·남초 커뮤니티의 대리전을 치렀다는 것을. 평소 정치·사회 뉴스도 커뮤니티에서 접하고 댓글까지 다 읽어보며 판단하던 두 청년의 관성이 맞부딪친 날이었다.

 

두 토막 모두 근래 들은 얘기다. 그 말을 주고받은 사람들이 모두 끄덕인 게 있다. 심해져가는 확증편향(Confirmatory Bias)’이다. 이 심리학 용어는 자신의 신념에 맞고 유리한 정보·증거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반대는 무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체리 피킹’(Cherry Picking)이라고도 한다. 케이크 위에서 달콤하고 비싼 체리만 빼먹는다고 해서. 어느 쪽이든, 한국 사회는 이미 걱정 수위를 넘어섰다. 이리저리 갈려 얼굴 붉히는 이슈는 줄잇고, 페이스북·트위터·커뮤니티의 끼리끼리 친구도 벽으로 굳어져 가는 까닭이다. 유튜브·포털의 알고리즘도 즐겨 찾는 콘텐츠만 계속 모아주면서 사람들의 확증편향을 키우고 있다. 동서양의 실험·조사에서 확증편향의 포로가 되기 쉬운 1순위로는 전문가들이 지목된다. 자기확신이 강하고 오피니언 리더 위치에 곧잘 서는 논객·법관·정치인·종교인·학자·교사 부류다. 소셜미디어와 1인미디어가 팽창하면서 멘토(조력자멘티(피조력자)의 전통적 경계선과 주도권도 무의미해졌다. 멘토 머리 끝에 올라가 있는 멘티가 많고, 정치인·지식인 인기도 멘티의 입맛 따라 조변석개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명절에 가족·친지가 충돌하는 건 우리만의 일도 아니다. 작년 11월 말, 트럼프 대통령 탄핵 이슈가 불거진 미국 추수감사절 앞에 언론들은 가족 간 다툼을 피하는 방법을 앞다퉈 내놓았다. 미국 심리학회는 까다로운 가족 간 대화지침까지 발표했다. 트럼프시대에 미국인 39%가 정치 문제로 가족과 다퉜고, 그중 3분의 1은 절연했으며, 정치적 견해가 같거나 다른 가족의 저녁식사 시간이 1시간이나 차이 난다는 통계도 나온 터였다. 미국 전문가들이 말한 명절 다툼 예방법은 한국에도 유효하다. 입에 올리지 않을 정치인을 함께 정하라 민감한 정치 얘기를 꺼내면 화제를 돌려라 이른 아침이나 행사 직전엔 설전을 자제하라 내가 타인의 견해를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라 인신공격은 하지 마라.

23일 대전 귀향길에 오른 구보씨와 통화했다. 그는 과거의 명절 금기어가 청년들의 취업·결혼·출산이라면, 지금은 정치와 페미니즘이 더해졌다고 했다. 총선 목전의 설이다. 그는 큰형과는 다투지 않기로 했고, 선 넘을 조짐만 보이면 아내에게 팔을 잡으라고 했다. 그가 가족 간 호불호가 크게 갈려 피하겠다고 꼽은 이름은 7명이다. 문재인·황교안·조국·윤석열·추미애·유시민·진중권. 그러면서도 TV 뉴스를 켜면 맘먹은 대로 될진 모르겠다고 했다. 구보씨만이 아닐 게다. 모두를 위해, 가족의 설 평화를 위해 굿 럭!

이기수 논설위원 경향 2000. 01.23

 

난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했다

나는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최소 3년은 그럴 작정이다. ‘공항 패션이 뜨는 연예인도 아니고 내 항공 마일리지에 별 관심 없겠지만, 동네방네 새해 다짐을 소문내는 중이다. 어디 남사스러워서 비행기 타겠어, 라는 스스로를 위한 밑밥이랄까.

 

나는 전치 3개월의 몸으로도 기어이 출근해 꼬불쳐 둔 연차를 이용해 해외여행을 떠나는 중독자였다. 숨 쉬기 위해 물 위로 올라온 범고래처럼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라도의 공기를 마셔야 살 것 같았다.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력이란 기억이다라고 했는데, 여행은 기억을 쌓는 생생한 삶의 순간을 선사한다. 그 기억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 결과 20년 전부터 브래지어를 벗어던졌고 미백 화장품 대신 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며 즐겁게 피부를 태운다. 내게 여행의 이유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갈 깜냥을 얻는 것이니까.

 

작년에 쓰레기 없는 마을을 보러 유럽의 제로 웨이스트 도시 카판노리에 다녀왔다. 서울에서 이탈리아까지 왕복 비행기의 1인당 탄소 배출량은 800= 서울시 에코마일리지에 나온 우리 집의 1년간 탄소 배출량 역시 800. 그러니까 목욕하고 밥해먹고 인터넷에 연결하거나 난방·에어컨 등을 틀며 여자 두 명의 삶을 떠받친, 전기 수도 도시가스의 모든 에너지가 항공여행 한 방에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제야 기후위기 행동을 촉구하며 결석 시위를 이끈 그레타 툰베리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는 화장실이 없는 배 갑판에서 대변만 담아요라고 써진 양동이를 들고는 개인의 행동이 무슨 소용이냐는 질문에 의견을 형성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답했다.

 

이후 유럽에서는 플라이트셰임운동이 저가 비행기처럼 늘고 있다. 항공여행은 역사상 최초로 자부심에서 자괴감으로 환승하는 중이다. 툰베리의 나라인 스웨덴 국민의 23%가 기후위기를 걱정해 항공 여행을 줄였다고 답변했다. 그리하여 그의 말은 시속 900의 비행기보다 더 빠르게, 초속 900의 에너지로 와 닿았다. 나는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 최초로 태국의 방콕 말고 방에 콕 머무는 방콕에서 겨울을 맞는다. 2018년 한국인의 1인당 탄소 배출량은 전 세계 4위로 세계 평균보다 2.5배 많다. 또한 2017년 전 세계에서 비행거리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가장 높은 항공사가 바로 대한항공이었다.

 

이제 화상회의를 열거나 카우치서핑(couchsurfing)’이나 웜샤워(warm shower)’ 등의 숙박공유를 통해 해외여행자를 만나 일상을 여행하듯 보내야지. 비행기 이착륙 때 최대 25%의 연료를 소비하므로 단거리 비행은 되도록 피할 거다. 중국과 일본 여행은 줄이고 국내의 경우 기차 버스 등의 육상교통을 이용한다. 항공여행에서 나온 탄소를 흡수하기 위해 나무 심는 프로젝트에 기부할 수도 있다. 이탈리아에 다녀온 나는 62그루의 나무를 심어야 한다. 제도적으로는 프랑스처럼 항공여행에 3~10%의 환경세를 부과하는 방안이 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이라는 프루스트의 말을 새기기로 한다. 결국 우리가 살아갈 곳은 지금 여기의 일상이니까.

고금숙 플라스틱프리 활동가 경향 2000. 01.23

 

민주당만 빼고

신임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의 수족을 자르고 야당은 그런 장관을 직권남용으로 고발했다. 대검 선임연구관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기소를 막은 직속상관에게 당신이 검사냐고 항의하고 서울중앙지검장은 검찰총장의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기소 지시를 수차례 거부했다. 여당은 공수처법에 이어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개정안을 마저 통과시켰고 야당은 다가오는 총선 공약으로 공수처법 폐지를 걸었다. 서초동 촛불집회는 올해도 열렸고 3·1절에는 보수교회를 중심으로 광화문집회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정권 내부 갈등과 여야 정쟁에 국민들의 정치 혐오가 깊어지고 있다. 총선이 코앞이지만 가까운 사이라도 정치 얘기는 금물이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고 공복이어야 할 국회의원이 상전 노릇한 지 오래다. 그래도 선거 때가 되면 없던 관심도 생기고 배신당할 기대도 또다시 하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른 것 같다. 깊어진 정치 혐오가 선거 열기도 식히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도 행정부가 균열을 보이고 국회가 운영 중인데도 여야를 대신한 군중이 거리에서 맞붙고 있다. 이쯤 되면 선거는 무용하고 정치는 해악이다. 자유한국당에 책임이 없지는 않으나 더 큰 책임은 더불어민주당에 있다. 촛불정권을 자임하면서도 국민의 열망보다 정권의 이해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사유화에 대한 분노로 집권했으면서도 대통령이 진 마음의 빚은 국민보다 퇴임한 장관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이 같은 처신은 처음부터 예견돼 있었는지 모른다. 지난 촛불집회의 성과를 국민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누적인원 1700만명이 거둔 결실을 고스란히 대통령선거에 갖다 바쳤다. 20161029일 시작된 집회는 2017429일의 23차까지 이어졌다. 59일 치러진 19대 대통령선거를 열흘 앞둔 날이었다. 주최 측은 우리가 대통령선거 날짜 앞당기자고 촛불 들었냐?”장미대선 No! 촛불대선 YES!’를 외쳤다. 하지만 촛불의 여망을 선거에 담는 순간 모든 것은 문재인 후보를 위해 깔아놓은 주단 길에 다름없었다.

 

지금 여당은 4·15 총선 승리가 촛불혁명의 완성이라고 외치지만 민주당은 촛불의 주역이 아니었다. 19876월항쟁에서 야당인 통일민주당은 항쟁지도부인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해 대정부협상을 주도했다. 그러나 2016년 말 민주당의 역할은 다른 야당들과 함께 촛불시민들의 요구를 사후적으로 수용해 탄핵안을 가결시키는 데 그쳤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청와대에 단독 영수회담을 제의해 논란이 됐고, 우상호 원내대표는 탄핵 사유에서 세월호 7시간을 빼자는 새누리당의 제안에 응하면서 공분을 샀다.

 

2016년 겨울, 국민들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정치권력에 대해 상전 노릇을 할 수 있었다. 19604월혁명과 19876월항쟁 때도 국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물러나게는 했다. 그러나 야당까지 포함한 정치권력 전체가 국민의 요구에 굴복한 일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촛불시민들은 정당을 포함해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의 행동과 스스로의 힘만을 믿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역전됐다. 정당과 정치권력이 다시 상전이 됐다. 많은 사람들의 열정이 정권 유지에 동원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한줌의 권력과 맞바꿔지고 있다.

 

우려는 촛불집회 당시에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 쒀서 개 줄까염려했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됐다. 선거 외에는, 야당을 여당으로 바꾸는 것 말고는 기대와 희망을 담을 다른 그릇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변화에 대한 기대가 ‘2017 촛불권리선언으로 이어졌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재벌개혁은 물 건너갔고 노동여건은 더 악화될 조짐이다.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 ‘노동존중구호가 재벌존중으로 바뀌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보다 더 싸우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끊어버려야 한다. 이제는 선거에만 매달리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더 이상 정당과 정치인이 국민을 농락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선거 과정의 달콤한 공약이 선거 뒤에 배신으로 돌아오는 일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 배신에는 국민도 책임이 있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최악을 피하고자 계속해서 차악에 표를 줬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그렇게 정당에 길들여져 갔다. 이번에는 거꾸로 해보자. 국민이 정당을 길들여보자.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알려주자. 국민이 볼모가 아니라는 것을, 유권자도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자. 선거가 끝난 뒤에도 국민의 눈치를 살피는 정당을 만들자. 그래서 제안한다. ‘민주당만 빼고투표하자.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경향 2000. 01.28

 

코로나바이러스와 위험의 세계화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의 이론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위험사회란 위험이 사회의 중심 현상이 되는 사회를 말한다. 벡은 위험사회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위험은 전염성이 강하다. 둘째, 위험은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 셋째, 과학의 발전에 비례해 위험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다. 넷째, ‘안전의 가치가 평등의 가치보다 중요해진다. 다섯째, 시민들의 불안이 증가함에 따라 안전은 물이나 전기처럼 공적으로 생산되는 소비재가 된다.

 

위험사회론이 이전 시대보다 현대사회가 더 위험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벡이 전하려는 것은 우리 인류가 직면한 위험의 현재적 성격이 과거와 다르다는 점이다. 현대사회 이전의 오래된 위험은 자연재해와 전쟁 등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새로운 위험은 과학기술에 기반한 사회발전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지구적 기후 위기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이 위험사회의 구체적 사례들이다. 벡이 강조하려는 건 현대화가 가져온 우리 삶의 사회적 조건 변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적극적 대응이다.

 

문제작 <위험사회>가 발표된 것은 1986년이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후반 벡은 <글로벌 위험사회> 영어본과 독어본을 내놓았다. 이제 위험은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벡이 주목하는 세 가지 글로벌 위험은 기후 변화와 같은 생태적 위험, 금융위기와 같은 경제적 위험, 자살폭탄과 같은 테러의 위험이다. 21세기에 들어와 우리 인류가 직면했던 9·11테러, 금융위기, 기후 위기를 지켜볼 때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론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독자들은 내가 왜 위험사회론을 꺼냈는지를 눈치챘을 것이다. 글로벌 위험사회란 위험이 세계화된 사회다. 올해 들어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 공포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질병 또한 빠른 속도로 세계화되고 있다.

 

전염병이 원전이나 기후위기처럼 새로운 위험은 아니다. 중세 시대의 가장 큰 재앙 중 하나였던 페스트는 오래된 위험이다. 그러나 도시화, 교통수단 혁신, 과학기술 발전, 그리고 이런 변동으로 인한 사회적 밀도’, 즉 사회적 관계의 양과 질의 증가는 오래된 위험 또한 세계화시켜 왔다. 세계를 공포로 몬 지난 20세기 초반의 스페인독감이나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는 질병의 세계화가 갖는 위험과 위력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이제 위험은 지구 도처에 널려 있다. 그리고 지구촌이란 말이 있듯, 우리 인류에게 위험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실이 위험의 세계화에 따른 공포의 세계화를 강화시킨다. 특히 전염병의 세계화는 우리 건강과 생명에 직결돼 있는 만큼 그 으스스한 공포가 예고 없이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다. 더하여 주목할 것은, 오래된 위험이든 새로운 위험이든 이 위험이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점이다. 노인, 아동과 같은 사회적 약자는 위험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 위험사회가 가져오는 위험의 불평등현상이다.

 

위험의 세계화에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위험이 일어나자마자 즉각 그 사실을 국민과 다른 국가들에 알려야 한다. 체르노빌 원전 사태에서 볼 수 있듯,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정보의 전달이 늦어질수록 그 위험은 증폭된다. 위험이 발생했을 때 정부가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일은 국민과 다른 국가들에 정확한 정보를 신속히 제공하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한 중국 정부의 소극적 초기 대처는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둘째, 위험의 세계화에 적극 대응할 수 있는 국제적 거버넌스를 강화해야 한다. 위험사회의 대응에서는 사전 예방과 사후 대처가 모두 중요하다. 위험이 세계화된 만큼 지구적 차원의 사전 예방 및 사후 대처를 위해 각종 국제기구들과 개별 국가 간 협력을 통한 거버넌스 강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벡이 지적하듯, 글로벌 위험사회에 공동으로 맞서는 세계시민주의의 상상력과 실천은 21세기 미래에서 더없이 중대한 과제다.

문명의 21세기에 예기치 않은 전염병의 발생과 잇단 도시 봉쇄,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위험의 세계화는 우리 인류가 안고 가야 할 묵시론적 미래 풍경의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이 묵시론적 공포에 맞설 수 있는 최고의 힘은 역시 이성이다. 정직하고 신속한, 그리고 체계적이고 협력적인 대응이라는 이성의 힘을 나는 여전히 신뢰하고 싶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00. 01.28

 

原電의 정치학

영국과 터키의 원전 건설 재개 뉴스를 접하면서, 설 연휴에 읽은 한국형 원전 후쿠시마는 없다를 떠올려 본다. 저자 이병령 원자핵공학 박사는 한국형 원전 개발과 상업화의 책임자다. 청와대와 반()원전론자들도 읽어 보기를 권한다.

 

일본 후쿠시마(福島)와 미국 스리마일섬 원전(原電)은 각각 2011311일과 1979328일에 사고가 발생했다. 두 원전은 사고 원인도 다르고, 원자로도 비등수형(BWR)과 가압수형(PWR)으로 전혀 다르다. 반면, 1986426일 폭발 사고가 발생한 러시아의 체르노빌 원전은 후쿠시마와 같은 비등수형 원자로이다. 비등수형은, 핵분열 때 발생하는 고열을 식히느라 방사능 범벅이 된 물이 기화한 수증기로 발전기를 돌린다. 그에 비해 가압수형은 핵분열 때 발생한 열을 열교환기로 식힌다. 그 열교환기로 뜨거워진 물이 수증기가 돼 터빈을 돌린다. 그러니 가압수형의 물과 수증기는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는다. 국내 원전 24기 중에 비등수형은 없다. 그리고 가압수형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에 300여 기가 있는데, 60여 년 동안 인명 사고나 환경 파괴 사고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난해 12월 초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는 플로리다 터키포인트 원전 3, 4호기의 수명을 80년으로 연장해 줬다. 이 원전은 수명이 40년으로 1972년 완공됐는데, 60년으로 연장됐었다. 펜실베이니아의 피치보텀과 버지니아주 서리 원전 등도 수명 연장을 신청할 계획이란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한 달 뒤이던 2017619일 탈원전을 선언, 강행하고 있다. 문 대통령처럼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도 평소엔 반핵을 주장했지만, 재임 중에는 원전 건설을 4기씩이나 확정, 승인했다. 후보 시절의 개인 생각이나 공약에 집착해 국가 에너지 대계를 그르치진 않았다는 말이다.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문제로 인해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호주 중국 인도 터키는 물론 동유럽 국가와 아프리카 국가들도 원전 유치에 뛰어든다. 미국 NRC로부터 외국 원전 최초로 설계인증을 따낸 한국형 원전 ‘APR-1400’이라면 기술 경쟁력은 충분하다. APR-1400은 미국·프랑스의 3분의 1 또는 절반이라는 신형 원전 건설 비용 경쟁력까지 갖춘 만큼 세계 원전 건설 시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출발점은 국내 탈원전 정책의 즉각 폐기다.

황성규 논설위원 문화 2020 01 29

 

마블 슈퍼히어로 vs 환경영향평가

망자가 살아와 사업동의서에 서명하고 저승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솔스톤과 등산로 5.7를 단 3분 만에 이동할 수 있는 스페이스스톤을 소유한 전문가(AWP양양 풍력사업). 설악산 초입부터 정상까지, 연인원 80명이 투입된 조사를 단 2명이서, GPS보다 수십배 정확한 공간분석능력을 발휘하며 한나절씩 단 이틀 만에 완료하는, 아이언맨 슈트를 착용한 괴력의 전문가(설악산 오색케이블카). 토양미생물 관련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자마자 어류와 저서무척추동물을 혼자 조사하는, 위대한 학습능력의 닥터스트레인지급 천재전문가(낙동강 대저대교). 양서류와 파충류, 어류, 포유류의 모든 조사를 동시에 진행하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브루스 배너급 천재 필드생태학자(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참으로 불가사의한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모셔야 할 이들 히어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처우는 너무나도 열악하다. 이런 능력의 소유자는 대한민국에는 너무 흔하니까?

 

하루 종일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지구 자전을 거부하는 현상(낙동강 대저대교). 서로 다른 지역의 식물개체가 완벽히 일치하는, 컴퓨터의 복붙 능력을 비웃는 자연의 위대한 복제력(제주 비자림로). 일반인한테는 정체를 쉽게 노출하지만, 유독 슈퍼히어로급 전문가에게만은 흔적까지도 전혀 보여주지 않는, 전문가를 차별하는 멸종위기 동식물의 완벽한 은신술(제주 비자림로, 거제 남부관광단지, 창녕 대봉늪, 제주2공항 등). 울창한 왕버들군락이 유명한 습지에서, 전문가에게만은 자신을 보여줄 수 없다는 왕버들의 완벽한 은폐술(창녕 대봉늪). 지금까지의 자연과학을 비웃는, 인피니티스톤이 펼치는 우주의 대신비가 한반도에서는 일상처럼 일어난다. 그런데 이 기이한 현상들은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 해가 동쪽으로 지게 만드는 인피니티스톤 하나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으니까?

 

야외조사 중 카메라 소프트웨어를 구버전으로, 다시 신버전으로 바꾸는 아이언맨 슈트에 있을 원격 AI 제어기술(낙동강 대저대교). 1대로 같은 시간, 서로 다른 3곳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로키의 분신술을 구현한 오염측정기계(낙동강 대저대교). 80곳이 넘는 양식장 운영에도, 단 두 곳만 전문가들 눈에 노출시키는 닥터스트레인지의 슬링링 기술을 구현한 양식장(제주2공항). 5, 6차 산업혁명시대에서 온 미래인류도 울고 갈 이런 과학혁명이 이미 대한민국에서는 일상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혁신기술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더 혁신적 기술이 대한민국에는 넘쳐나니까?

 

소설이나 영화로는 폭망할 황당무계 히어로와 최첨단 과학기술 이야기는 법률에 의해 작성된 환경영향평가의 결과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서명·공포한 것에 따른 것이니 공신력이야 두말할 나위 없다. 당연히 이 서류의 분석과 평가를 담당하는 공무원과 전문가는 한결같이 내용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 문외한의 문제제기가 크게 이슈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러한 사업들은 공통점이 있다. 정부가 시행하는 사업이거나 정부의 중점추진사업이다.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 이렇게 정부가 솔선수범하니 힘없는 국민이 어찌 안 따를 수 있겠는가?‘/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경향 2020 01 30

 

연애

연애-결혼-출산-육아의 자연적 연계를 당연하게 여기는 낭만적 사랑이 파탄나고 있다. 젊은 여성이 벌이고 있는 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라는 4B 운동이 대표적인 징후다. 이에 대해 국가는 저출산이라는 인구 문제로 접근하고,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 혐오로 대응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젠더 분리주의가 빠른 속도로 번져가고 있다.

 

낭만적 사랑이란 두 남녀가 서로 자아를 탐색하고 존중하고 숭배하면서 각자 분리된 자아를 합쳐 공통된 자아로 확충하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에서는 나의 자아를 확충시켜줄 상대방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상대방의 자아를 엄청나게 탐색하는데, 그게 바로 연애다.

 

연애하는 동안 두 자아는 자유롭고 평등하다. 경제적 부, 정치적 권력, 사회적 지위, 몸과 나이와 종교, 인종과 국적 등 어떤 사회적 힘도 연인 사이에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연인은 자유롭고 평등하면서도 서로에게는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처럼 밀고 당기는 에로틱한 게임을 한다. 사회학 창건자의 한 명인 게오르크 지멜이 연애를 근대 사회성의 원형으로 본 이유다.

 

낭만적 사랑은 근대 사회성의 씨앗을 품고 있다. 연애하기 위해 각자 부모의 집으로부터 나와 따로 둘만의 집을 차린다. 이 집이 근대 초기의 가부장적 핵가족제도다. 남성의 경제적 지원능력과 여성의 정서적 지원능력이 결합한다. 노동시장이 남성에게만 열려 있기에 여성은 먹고살기 위해 남성의 경제적 능력에 의존한다. 남성은 노동시장에서 가족 임금을 벌기 위해 과잉 노동에 시달리다가 정서적 에너지가 고갈된다. 이를 채워줄 여성의 정서적 지원에 기댄다. 상대방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며 낭만적 사랑은 평생 애착 관계로 이상화된다. 실제로는 연애가 지녔던 근대 사회성의 씨앗이 젠더 불평등한 결혼생활로 인해 채 발아되지 못한다.

 

할머니세대는 연애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부장에 이끌려 결혼했다.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독특하게 존중받고 살아갈 문화 역량을 키울 기회조차 없이 운명처럼 주어진 가부장제에 평생 귀속되어 살았다. 어머니세대는 낭만적 사랑을 통해 근대 사회성을 잠깐 체험하기는 했지만, 가부장적 핵가족으로 귀결되는 젠더 불평등한 결혼생활로 이를 잃어버렸다. 소통하지 못하는 남편 대신 평생 온갖 돌봄노동을 하느라 할머니의 삶과 비슷해졌다. 딸세대는 노동시장에 나가게 됨으로써 젠더 불평등한 낭만적 사랑에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마땅한 현실적 대안이 없어 일과 사랑 모두에서 돌봄을 전담하다 좌절을 맛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할머니-어머니-딸로 반근대적인 삶이 이어지고 있다. 전혀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고 독자적인 존재로 존중받지도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 사회는 이러한 여성의 삶을 숭고하다고 찬양하고 있다. 그럴수록 여성은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 이야기처럼 치매에 걸려 집 밖을 떠돌거나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처럼 병원에 유폐되어 말라 죽어간다.

 

어떻게 해야 하나?

현재 연애할 수 있는 사회구조적 환경을 만들려는 여러 정책이 고안되고 있다.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문화 역량은 중요하다. 낭만적 사랑에서 싹이 튼 근대 사회성을 급진화하고 전면화해야 한다. 연애는 자신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점을 연인끼리 서로 입증하는 친밀성 공연이다. 이 공연을 제대로 해서 친밀성 너머의 다른 세계에 가서도 타자와 함께 공동의 사회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문화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 역량을 발휘해서 사회 전체를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악한 젠더 습속을 바꾸어야 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경향 2020 01 30

 

생각하지 않는 교육과 확증편향

애초 나에게 조국 가족이 벌인 기회의 사재기가 기소 요건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물음이 아니었다. 이를 계기로 교육계를 비롯한 시민사회가 불평등의 세습을 주제로 치열하게 토론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교육은 한 사회의 생산력을 확장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한다고 믿을 근거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장클로드 파스롱이 교육은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던 게 반세기 전의 일이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설령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해도 그는 이미 개천 사람들을 대변하지 않지만 말이다.

 

최근 <세습 중산층 사회>를 펴낸 조귀동은 ‘90년대생이 경험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부제가 달린 책(독자의 일독을 권한다)에서 “90년대생의 세계에서 부모 세대가 대졸 사무직으로 중산층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 자녀 세대인 그들이 명문대 졸업장을 받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수준으로 어려워졌다고 썼다. 한번 대기업 정규직, 전문직, 공무원이라는 내부자가 되면 웬만한 일이 있지 않은 한 내부자로 남는다. 반면, 중소기업 정규직, 대기업 비정규직, 기타 비정규직-일용직 등이 되면 끝까지 외부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진다고 썼다. 오늘의 20대는 그들의 부모 세대인 86세대와 전혀 다른 교육과 사회 환경에 처해 있다.

 

그렇다손 쳐도 조국 부부의 행태는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혹자는 정유라와 견주기도 한다. 하지만 최서원은 교육자가 아니었다. 또 혹자는 인디언 기우제태산명동서일필을 운운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하고 있을 만큼 대수롭지 않다는 얘긴가? 놀라운 일은 그런 주장에 대학교수 등 교육자나 시인들까지 거들고 나선다는 점이다.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조국 부부가 교육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과거 신민 교육의 대상이었던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들은 신자유주의 기조 아래 점차 고객이 되었다. 최근에 교육계에서 민주시민교육을 말하기 시작했을 만큼 우리 학교에서는 오랫동안 시민교육을 하지 않았다. 교육은 존재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소유를 위한 수단이 되었고, 학생들은 시민이 되기 전에 고객이 되었다. 교육의 세 주체 중 학부모회만 법제화된 일이나 교사들이 각종 잡무 외에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리는 일, 또 학생들이 교실에서 태연하게 잠을 자거나 학원 강사가 학교에 초빙되는 일 등은 모두 학생들이 시민이 되지 않은 채 고객이 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시민은 자신이 누리는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에 대한 의식을 갖지만, 고객은 구매력을 행사할 뿐 의무와 책임의식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이 고객들에겐 신민의 습성이 아직 남아 있다. 자율적이지 못하고 타율적이며 집단 귀속성이 강하다.

시민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채 구매력을 가진 집단의 팬덤화, 특히 미디어의 장에서 이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무엇보다 구매력에서 비롯된다. 유시민씨의 힘으로 제압해야라는, 민주주의자라면 꺼내기 어려운 발언에 담긴 힘도 구매력을 가진 팬덤의 힘이다. 시민단체들은 회원 떨어져나갈까 봐 전전긍긍하고, 진보 매체들은 독자 떨어져나가지 않을까 압박을 느낀다. <한겨레>는 창간 때부터 대통령 부인을 이희호씨’ ‘권양숙씨등으로 표기하는 원칙을 세웠다. 경어체를 비롯하여 한국어의 복잡한 호칭이 민주주의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인식 아래 세웠던 원칙이었는데, 2년여 전부터 김정숙 여사로 물러서야 했던 것은 구매력을 가진 팬덤의 압력이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한겨레>권양숙씨에서 김정숙 여사라고 쓰는 만큼 민주주의 성숙을 지향하는 진보 매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의 훼손을 감수한 것이다.

 

시민단체 회원이나 진보 매체의 구독자는 회원이나 구독자가 될 만큼 구매력이 있는, 그래서 20 80의 사회에서 ‘20’의 하층이나 ‘80’의 상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주이므로 ‘80’ 중 하층이나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과 불행에는 관심이 옅은 편이다. 구매력을 행사할 뿐 시민으로서 의무와 책임의식이 부족한 팬덤은 민주주의의 성숙과 진보에 걸림돌이 될 수 오히려 그들이 민주주의와 진보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역설이 관철되고 있다. 권력 실세의 스핀 닥터들과 미디어 장사꾼들의 이해관계가 연결돼 있다고 귀띔을 해줘도 소용없다. 나는 이와 관련하여 정치의 종교화, 팬덤화와 함께 코기토(Cogito, 나는 생각한다)가 없는 한국의 죽은 교육이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회의할 줄 모르게 만듦으로써 그 어느 사회보다 확증편향의 함정을 깊고 공고하게 팠다는 점에서 그 연유를 찾는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회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글쓰기와 토론을 거의 하지 않는 학교와 교실에서 생각하는 대신 암기한다. 그것도 정답이라는 고정된 형태로다. 생각하는(=회의하는) 과정 없이 고정된 정답을 의식세계에 주입한 우리가 고집불통이 되는 만큼 확증편향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자주 꺼내는 말인데, 한국 사회는 설득이란 말은 있어도 설득이 되지 않는 사회다. 가령 부부 사이는 어떨까? 애정으로 맺어졌고 계급적 처지도 동일한 사이지만, 생각이 다르고 삶의 가치관이 다른 채로 일생 동안 한 집안에서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 이것이 한국의 대부분의 부부가 보여주는 서글픈 자화상 아닌가. 이렇게 부부 사이에도 설득이 되지 않는데 누구를 설득하겠는가.

 

실상 우리는 아무도 남을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뒤집어 말하면, 나 또한 아무한테도 설득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양 살아간다. 이런 사회 구성원들에게 확증편향이 한번 빠지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함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로서 생각한 적이 없으므로 남의 자리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지혜도 갖기 어렵다. 나의 자리에서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남의 자리에서 생각하겠는가. 한국인의 확증편향을 강고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다.

 

확증편향에서 벗어나기. 그것은 나부터 회의하는 자아가 되는 길 말고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런 전제 아래 어렵더라도 이웃을 설득하는 수밖에. 학교와 교실에서 생각하는 교육이 펼쳐지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대표 한겨레 2020 01 30

 

때로 질병보다 더 치명적인 공포담론

초등학교 땐 영화 단체관람이 꽤 많았다. 단 하나가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제목도 주인공도 관람시기도 기억나지 않지만, 북한이 세균전을 위해 만든 배양시설을 남한 특공대 혹은 첩보원이 파괴하는 줄거리의 영화다.

 

왜 그것만이 기억되었을까? 첫 번째 단서는, 영화 속 세균을 콜레라균으로 특정해서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콜레라에 걸린 이를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전염병 중 제일 무서운 병으로 기억되었다. 한데 자료를 찾아보니, 콜레라가 1969년에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되었다고 한다. 요즘 중국 우한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그때 한국도 그랬다. 최종 발표에 의하면 1400명이 감염되었고 이 중 사망자가 125명이나 되었다. 그러니 그 영화가 콜레라를 소재로 한 것이든, 그냥 세균이든 내가 콜레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1969년의 콜레라에 대한 사회적 공포증의 여파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둘째 단서, 북한이 세균전을 도모했다는 줄거리는 1969년 콜레라 사태를 연상케 한다. 처음 발병했을 때 급파된 전문가는 콜레라를 가정한 비상방역조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지만, 보건당국은 식중독에 지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후에 그것은 콜레라 발병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예상되어 은폐한 것임이 밝혀졌다.

 

질병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당국은 공식사과했다. 하지만 괴담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여론은 악화되었다. 그때 일부 과학자들의 입을 통해 콜레라균의 외부 유입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한이 세균을, 일본을 거쳐 남한으로 유입시켰다는 정부의 의혹제기가 있었다. 얼마 후 세계보건기구(WHO) 전문가들은 외부유입설을 입증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가짜뉴스였다.

 

아무튼 그래서 그 영화를 관람한 해는 1969년 이후였겠다. 실제로 나는 그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한글을 터득한 것이 2학년 때였으니 필경 3학년 이후, 그러니까 영화관람 시기는 1971년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그렇다면, WHO입증불가발표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북한의 세균전 괴담을 통해 국민을 규율하여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이겠다.

1972,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포고하면서 정국을 긴급조치 국면으로 몰아갔다. 국민의 기본권조차 보장하지 않는 강권통치체제는 그렇게 시작했다.

 

이때 정부는 유신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을 규율하는 다양한 장치들을 활용했다. 초등학교 소년에게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들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다. 그밖에 만화책이나 어린이용 라디오 드라마, 그리고 단체관람용 반공영화 등도 중요한 도구였다. 내 기억 속에 남은 그 영화도 그런 맥락에서 단체관람이 기획된 것이겠다.

 

치명적인 전염병만큼 사회를 공포에 휩싸이게 하는 것은 많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유럽의 흑사병 괴담이다. 실제로 유태인, 집시, 매춘여성, 한센병환자 등이 많은 곳에서 대대적으로 학살당했다. 치명적 질병은 사회를 극단의 공포심에 빠뜨리고, 그 공포심은 재앙을 낳은 혐의자로 낙인찍힌대상을 향한 집단적 분노로 이어지곤 한다. 그리고 그런 희생양 메커니즘을, 자신의 욕구를 위해 도구화하는 이들이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일으킨 질병에 대한 공포로 전 세계가 휘몰아치고 있다. 한국도, 아직 발병자가 매우 적지만, 공포담론의 확산은 예사롭지 않다. 이 공포담론 속에는 순혈주의가 팽배하고 오염자를 색출하고 배제하여야 한다는 욕구가 활개치고 다닌다.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는 불온한 정치세력이 있다.

과거의 잘못에서 부끄러움을 배우지 못한 탓인가. 질병에 대한 공포담론이 종종 질병보다 더 파괴적이라는 것을. 해서 잘못된 과거는 좀 더 아프게 청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경향 2020 01 31

 

신종 바이러스와 삶의 기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진원지인 중국 우한에 사는 지인이 있다. 중국공안 2급 경감으로 우한경찰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그는 태극권으로 다져진 건강한 몸매와 해박한 중의학 지식을 갖춘 데다 치파오를 즐겨 입는 60대의 쾌활한 여성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무섭게 전파된다는 뉴스를 보고 그에게 안부를 묻는 e메일을 보냈다. 한 시간도 안돼 답장이 왔다. “나와 가족들이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우한을 떠날 수 없는 건 사실이지만, 다행히 우리는 안전하고 건강해. 그리고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까 우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는 평상심을 유지하며 어려운 시간을 잘 견뎌내고 있었다. 봉쇄된 도시의 아수라장을 상상하던 머릿속의 구름이 조금 걷히는 기분이었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의 바이러스가 삽시간에 우리 일상을 장악했다. 공기를 통한 전염은 없다는 의학계의 발표가 있었음에도 신종 코로나 확진자들의 동선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메신저로 오가고 있다. 현지에서 이송되는 교민과 여행자의 집단 수용에 항의하는 시위현장은 님비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남의 일 같지 않으면서도 과장된 공포와 정치적 알력, 지역감정 등 복잡한 속내가 느껴진다.

 

신종 바이러스의 등장과 대응이라는 스펙터클은 우리가 얼마나 모순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리는 광속의 세계에 사는 원시인들이다.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위험은 날개를 달았다. 모든 국가의 대도시를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한 항공망은 중국의 깊은 내륙 우한에서 출현한 바이러스를 빛의 속도로 지구 전체에 실어 날랐다. 보균자들의 동선을 보면 평소 의식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동굴에 살던 원시인들처럼 박쥐를 먹으며(비록 종류와 양은 적을지라도 한국이 혐오식품 섭취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미처 장악하지 못한 야생의 침입으로부터 생명을 위협받는다.

 

우리는 여전히 편을 가르지만 협력할 수밖에 없다. 시련이 닥치면 혐오와 배제의 기제가 작동하는데 이번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인은 엊그제까지 환대하던 중국 관광객과 유학생을 무시하고 거부한다.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유럽에서도 아시안을 깔보는 인종주의가 고개를 든다. ‘골칫거리 중국인이라는 고질적 이미지가 차이나포비아를 부추기며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기대는 보수정당들은 이런 기회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든다. 그러나 이런 선정·선동의 한편에서는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과학계의 분투가 이어진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바이러스의 염기서열을 해독하고 홍콩에서 백신을 임상실험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세계가 공동의 문제를 위해 노력하고 협력한다는 사실은 지속 가능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준다.

 

우리는 현대과학의 보편성을 맹신하지만 정작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은 삶의 기술이다. 치료제 없는 전염병은 공포의 대상이며 이를 설명하는 과학의 언어는 냉철하다. 그러나 전파속도와 치사율이라는 통계의 배경에는 많은 변수들이 숨어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바이러스를 이기는 면역체계를 가졌으며 이는 평소 건강관리나 정신력과도 관련이 있다. 한방에서는 기침, 가래, 천식 등 폐 건강에 유익한 약재를 예방차원에서 권한다. 동양의 전통적인 양생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백신이라는 유일한 방법에 기대는 것보다 다양한 해결책이 있다.

 

신종 바이러스의 등장은 우리가 어떤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기회를 준다.

 

우리의 삶은 좀 더 소박해지고, 좀 더 문명화돼야 한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좀 더 정신적인 삶에 치중하는 세계가 되면 좋겠다. 불필요하게 다른 생명을 먹는 식습관도 반성하게 된다. 박쥐를 먹는 식도락과 지나친 육식의 거리는 상식만큼 멀지 않다.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도 필요하다. 중국에서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한 이유는 중국인의 야만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넓은 국토에서 각종 문제가 양산되기 때문이다. 글로벌화를 지향하면서 필요할 때만 민족, 국민의 특수성에 집착하는 것은 모순이다. 글로벌화에 맞는 세계시민으로서의 사고가 필요하다.

삶의 기술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문명사회에서 우리의 몸은 전문가의 손에 맡겨져 있다. 보건의료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내 몸을 지키는 건 나 자신이다. 우한에 사는 나의 지인이 평상심을 유지하는 이유는 이런 삶의 기술을 체득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경향 2020 01 31

 

Blues Company - Crippled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