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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0.1.1~16 평당 1억에 , 특권에 분노하며 특권을 좇는

by 이성근 2020. 1. 18.

AI 시대에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 한국 2020.01.01.

2020, 낡은 기득권 해체의 시작 경향 2020.01.02

올해는 송편이 먹고 싶다 경향 2020.01.02.

 

평당 1억원초래한 죄 경향 2020.01.02.

4월 총선이 기대되는 이유 프레시안 2020.01.05.

아이 캔 스피크 경향 2020.01.05.

묘수와 꼼수 경향 2020.01.05.

특권에 분노하며 특권을 좇는 한겨레 2020.01.05.

추미애 vs 윤석열, 그리고 공수처 경향 2020.01.06.

 

당신에게 밟히지 않을 권리 한겨레 2020.01.07.

.한국은 삼권분립을 해본 적이 없다 한겨레 2020.01.07.

교양기초교육의 제자리 찾기 경향 2020.01.07.

정치 판갈이, 이제부터 시작이다 경향 2020.01.07.

병든 이념의 탄핵 경향 2020.01.08.

불타는 지구, 무책임한 정치 한겨레 2020.01.09.

미국은 왜 중동에서 지는 전쟁을 계속하나 한겨레 2020.01.09.

13월의 월급불편한 진실 경향 2020.01.14

얼마나 일해야 충분할까 경향 2020.01.15.

김지형 뒤에 숨어버린 이재용 한겨레 2020.01.16


AI 시대에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

얼마 전 글로벌 투자업체 대표와 만났다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알만한 미국의 대표적 인공지능(AI) 관련 업체에 근무하는 여성이 결혼을 했지만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다. 그 이유가 AI 때문이었다.

 

무섭게 발달하는 AI가 앞으로 사람들의 일자리를 심각하게 줄이고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게 그 여성의 생각이다. 나중에 아이가 자라서 취직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아이를 낳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AI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4차 산업혁명시대의 핵심 기술이다. 기반 기술인 AI가 산업의 틀을 바꿀 것이고 사회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분명한 것은 AI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다.

 

2019년 화제가 된 국내 신생(스타트업) 기업 중 한 곳이 수아랩이다. 미국의 기계학습(머신러닝) 업체인 코그넥스가 2,300억원에 사들인 이 업체는 공장에서 품질 검사를 대신하는 AI 기술을 개발했다.

 

스마트폰이나 TV 등 전자제품을 만드는 공장에 가보면 대부분의 공정을 로봇이 담당한다. 유일하게 사람이 일하는 곳이 마지막 단계인 품질 검사다. 지난해 10월에 중국 선전(深圳)의 화웨이 스마트폰 공장을 가보니 자체 개발한 로봇 공정을 자랑하는 이 곳에서도 품질 검사만큼은 사람이 눈으로 한다. 수아랩은 스마트 공장에 남아 있는 마지막 미개척 영역을 AI로 바꿔 놓았다. 실제로 코그넥스에 매각되자마자 애플의 스마트폰 아이폰을 만드는 대만의 폭스콘이 수아랩의 AI를 적용한 품질 검사 로봇을 도입하겠다고 계약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대기업에서 개발자로 일한 모 스타트업 대표는 요즘 아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는 프로그래밍을 배우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조만간 AI가 프로그래밍까지 대신하는 시대에 접어들 것이라는 예측이다. 실제로 AI 전문가들은 AI의 궁극적 목표를 스스로 AI를 창조하는 초인공지능(ASIArtificial Super Intelligence)에 두고 있다. 이때가 되면 AI가 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하고 학습한 뒤 추론 및 예측하는 기본적 단계를 넘어 모든 것을 창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분석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미국 스타트업 커널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 업체는 1억달러를 투자해 AI로 사람의 뇌를 그대로 인터넷 공간인 클라우드에 복제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치매 등 뇌 관련 질환 치료와 창조적 생산활동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연구가 성공할 경우 육체가 소멸해도 뇌는 인터넷에 남아 있는 만화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물론 이런 우려 때문에 AI 육성을 뒤로 미룰 수는 없다. AI가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고 지금보다 산업을 발달시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AI가 일자리를 줄이고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측면도 분명 있다. 단순 노동일수록 빠르게 로봇이 대체할 것이며 프로그래밍처럼 배움을 통해 기술을 연마하는 분야도 AI가 잠식할 것이다. 더불어 AI 관련 기술을 쥐고 있는 기업들이 부를 독점하는 쏠림 현상도 심화될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AI 육성정책에 이 같은 우려를 줄일 수 있는 방안도 들어가야 한다. 정부는 AI 육성을 통해 455조원의 경제 효과를 거두는 AI 국가전략을 수립해 발표했고,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새해부터 AI국가위원회로 전환한다.

 

이와 더불어 AI와 로봇을 도입해 이득을 보는 기업에게 로봇세를 물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지원하고, 학교 교육도 기계어처럼 AI의 골격을 들여다보거나 개념 설계 학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AI 시대에 걸맞는 AI 훈련을 위한 AI 트레이너, AI 알고리즘 디자이너, AI 기능유지 전문가 등 신생 AI 관련 일자리 발굴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최연진 IT전문기자 한국 2020.01.01.

 

2020, 낡은 기득권 해체의 시작

2020년은 새로운 십년대가 시작되는 해이자, 100년 단위로 끊자면 대한민국 시즌 2’가 시작되는 첫해이다. 그만큼 새해에 큰 의미를 두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작년 내내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던 선거법 개정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 등이 해가 바뀌기 직전에 국회를 통과했다. 두 법안 모두 20, 30년을 넘긴 해묵은 개혁 과제였지만, 번번이 기득권의 저항 앞에 좌절되거나 왜곡되곤 했다. ‘촛불혁명으로 큰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그러므로 개정 선거법이 애초의 구상보다 후퇴했다고 실망할 이유가 없다. 또 공수처법에 우려할 점이 있더라도 군사정권 종식 이후 막강한 권력으로 변질된 정치검찰의 폐해에 비할 수는 없다. 새 제도를 운용하다가 발견되는 허점이나 미흡함은 사회적 논의를 거쳐 개선하면 된다. 낡디낡은 세력을 무너뜨릴 전략적 고지를 확보했다는 사실 앞에 잠시 마냥 기뻐해도 좋다.

 

4월에 있을 21대 총선 결과를 쉽게 예상할 수는 없지만, 정치지형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도 지난 2월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충격 탓에 2019년 내내 지지부진했지만, 총선 이후에는 안정적인 길을 찾으리라고 낙관할 수 있다. 그러나 기득권의 부단한 해체작업 없이 변화는 오지 않는다. 가령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정치적 기득권을 지키려 매달리는 행태는 주권자의 힘으로 가차없이 척결해야 한다.

 

어쩌면 기득권의 해체보다 자발적인 양보나 포기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정말 혁명적인변화는 개혁 대상인 동시에 개혁 주체이기도 한 모순적인 집단 내부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이 집단은 대개 전문직의 범주에 속하는데, 공무원, 법조인, 교사와 교수, 의사, 직업군인, 기성 정당과 정치인 등이 대표적이며 때로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도 포함될 것이다. 개혁은 적어도 이들의 일부가 적극적 동참세력이 되어야 가능하다.

 

공수처법은 검찰 내부의 유능하고 양심적인 인력을 살리는 효과를 낼 것이다. 검찰조직 자체는 개혁 대상이지만, 개혁 주체가 내부에 없으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최근 널리 알려진 임은정, 서지현, 안미현 검사 등을 떠올려도 좋다. 이들이 모두 여성인 점도 시대변화를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사실이니, 이명박 정부 시절 터진 추악한 벤츠 여검사사건과도 비교해볼 법하다. 사법부 개혁의 경우도 검찰과 다를 바 없다.

 

교육 분야도 개혁의 주체와 대상이 겹치는 현상은 어김없이 벌어지며, 그 양상도 다양하다. 투표할 권리 외에 거의 모든 정치적 권리를 제한받는 초·중등 교사의 처지는 한심할 지경이며, 그들이 대변하는 현장의 정당한 목소리는 손쉽게 무시된다. 하지만 개혁의 선봉이 되어야 할 그들 또한 모순투성이 현실 속에 대학교수와 마찬가지로 개혁의 대상인 면도 많다. 가장 큰 문제는 물론 현장과 유리된 교육 관료들이다. 비리사학과 유착된 썩은 자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훌륭한 공무원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낡은 구조가 걸림돌이다.

 

지난해 11월 칼럼에서 나는 교육부의 대학재정지원사업 공정성·투명성 제고를 위한 공동 운영·관리 매뉴얼의 모순을 짚었다. ‘매뉴얼은 대학 구성원이 경영진의 불법과 비리를 밝힌 경우라도 해당 대학을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거나 불이익을 준다. 학교를 위해 나선 교수, 학생, 직원이 극소수 비리행위자의 잘못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고 동료 교직원과 학생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다. 이처럼 부조리한 매뉴얼 탓에 학교비리 제보를 주저하게 마련이며, 제보행위 자체가 학교의 재정난을 악화시켜 동료들의 냉대와 공격을 피하기 어렵다.

 

매뉴얼은 대학 정상화를 가로막는다. 그래서 작년 1월 국민권익위원회는 대학의 재정·회계 부정 등 방지방안’(의안번호 제2019-17)에서 교육부가 작년 말까지 자체감사로 드러난 비리는 부정·비리대학 제한 완화라는 개선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1218일 교육부가 발표한 사학혁신 추진방안에서 이 핵심 과제는 쏙 빠져버렸다. 1225일자 모 일간신문의 보도는 국민권익위의 권고에 따라야 한다는 의견과 대학 전체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 내부 논의가 더 필요한 상황이라는 교육부 관계자의 발언을 전했다. 권고 이행을 훼방 놓는 이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교육 현장 위에 군림하는 이 오만한 자세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신분제의 공고화를 주장하며 민중 개·돼지론을 입에 올린 교육부 엘리트 관료가 불현듯 떠오른다. 교육부의 양심적 공무원들은 여전히 짓눌려 있다. 김명환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 경향 2020.01.02

 

올해는 송편이 먹고 싶다

움직일 수 없기에 식물의 경쟁은 동물보다 훨씬 치열하다. 영역싸움에서 밀리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동물과 달리 그 자체가 생사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함께 커가는 동종 간 싸움에서 이기면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종의 침입을 막아냄과 동시에 동종 간 영역싸움, 즉 공격과 방어를 함께하면서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게 식물이다. 대개 처음에 자라나는 식물은 상대적으로 방어능력이 뛰어나며, 방어를 뚫고 자란 후발주자는 공격능력을 발휘한다.

 

소나무도 별반 다르지 않은 운명을 타고났다. 다양한 연유로 척박한 흙이 드러나게 되면 소나무는 빠르게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종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데, 솔잎에 다량 함유된 항생물질이 이 역할을 한다. 다른 종의 침입을 막는 데 힘을 쏟지만 종내경쟁도 녹록지 않다. 10년 전후의 어린 소나무숲이 20년 정도의 젊은 숲으로 바뀌는 동안 절반이 죽게 된다. 그리고 50년 정도의 중년 숲으로 변하면서 또 살아남은 개체의 절반이 죽는다. 그나마 소나무숲으로 유지될 경우에 그렇다는 거다. 바닥에 떨군 솔잎은 해가 가면서 썩게 되고 방어능력이 서서히 사라지는데 이 틈을 타 다른 종이 싹을 틔운다. 이들은 크게 자란 소나무 사이에서 보호받으며 빠르게 성장하는데, 더 이상 소나무의 보호가 필요 없다고 판단하면 소나무를 공격한다. 스스로는 공격할 수 없기에 자신에게는 해가 없으면서 소나무를 죽일 수 있는 곤충을 유인한다. 소나무를 죽이는 곤충이 곰팡이와 공생관계를 이루는 이유이다. 이렇게 숲은 성숙해간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비해 참 정 없는 것이 자연이다.

 

피톤치드. 식물이 병원균이나 곤충, 곰팡이에 저항하려 분비하는 물질이다. 핵심은 다른 식물이 싹을 틔우지 못하게 하는 방어기작에 있다. 숲속에 들어가면 이 물질이 우리 몸에 흡수되어 인체의 방어능력까지 키워준다. 그리고 우리 조상은 이 특성을 활용해 식품을 오래 저장하는 데 쓰기도 했다. 대표적인 음식이 송편(-)이다. 솔잎을 떡시루에 깔고 그 위에 쌀떡을 올리고 다시 솔잎을, 떡을 차곡차곡 쌓아 쪄낸 이 떡은 찌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솔 향이 배어 송편이라는 이름의 참맛을 내게 된다. 송편의 솔잎은 단순히 떡의 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솔잎의 강한 항균작용으로 쉬이 상하는 떡을 오래 보관하고 이 항균물질을 체내로 받아들이기 위한 조상의 지혜이다. 지금은 추석의 대표음식으로 알려졌지만 옛날 조상들은 정월대보름부터 봄까지 주로 먹던 떡이다. 질병에 가장 취약한 때가 계절이 바뀌는 봄이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그런데 이제 이 향긋한 송편을 맛보기 어렵다. 꽤 오래전부터 꿀벌을 죽이는 농약으로 알려진 네오니코티노이드계열 살충제를 산림에 뿌려왔기 때문이다. 산속 어느 소나무에 농약을 뿌렸거나 주입했는지 모르기에 아예 먹으려 하지 않는 게 속 편하다. 산림청이 안전하다고 사용하던 바이엘사의 이 농약을 유럽연합에서는 올봄부터 경작지에서조차 사용을 금지시켰다. 정부가 이제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멀쩡한 산에 농약을 뿌리는 일을 멈추지는 않을 것 같다. 왜 숲의 성숙을 막으면서 깨끗한 숲을 오염시키는지, 경쟁에서 도태된 나무의 무덤을 만들어야 하는지 이유는 군색하다.

 

오랫동안 우리 주변에서 소나무가 잘 자랐던 것은 솔숲의 마른 솔가지와 자연스레 죽은, 경쟁에서 도태된 소나무를 겨울마다 거두어갔기 때문임을 외면하지는 말길 바란다. 에너지 전환에 따른 멀쩡한 변화를 재앙으로 몰아가는 상황을 이제 멈출 때가 되었다. 30년이면 이미 오래 해보지 않았는가? 2020년에는 자연의 섭리인 숲의 성장을 더 이상 재선충이라는 재난프레임으로 가두어 전국을 농약숲으로, 보기 흉한 플라스틱묘지로 만들지 말길 바란다.

올봄에는 농약냄새 대신 뒷산의 솔잎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향긋한 송편 한 점을 먹고 싶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경향 2020.01.02.

 

평당 1억원초래한 죄

시중은행 재테크팀장의 개인적인 재테크 요령을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대부분 40대 초반이었던 그들은 또래에 비해 자산이 많은 편이었다. 공통적으로 자산의 상당 부분은 집이었다. 사고팔기를 반복하며 많게는 세 채까지 보유한 이도 있었다. 한국인에게 집은 사는 곳이라기보다 자산으로서의 가치가 더 크다. 하지만 그들은 개인의 구체적인 주테크는 소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서울 강남 아파트는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다. 네이버 부동산 통계를 보면, 2012년 말 72000만원이었던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전용면적 76.79)는 지난달 20억원 안팎으로 올랐다. 7년 새 178% 뛰었는데, 지난해에만 5억원 폭등해 미쳤다는 소리가 나왔다. 누군가는 노후준비 잘했다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월평균 가구 근로소득은 2012(3938267)에 비해 25% 늘어난 4936859원이었다. 7년간 한 푼도 쓰지 않고 월급을 모아도 4억원이 채 안된다. 일하지 않고도 아파트를 보유한 데 따른 차익은 근로소득의 세 배가 넘는 128000만원이다. 명백한 불로소득이다. 재테크 팀장들이 집으로 자산을 늘린 사실을 감추고 싶어한 것은 주테크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불로소득을 노리고 뛰어드는 주테크 광풍에는 고위공직자도 예외가 없다. 경제정의실천연합이 문재인 정부 청와대 1급 이상 전·현직 고위공직자 65명의 집값을 조사했더니 210개월 만에 평균 32000만원 올랐다는 조사결과를 내놨다. “불로소득주도 성장만 나타나고 있다는 비아냥을 들을 만하다. 뒤늦게 주테크에 편승하려다 물의를 빚자 하차한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사례도 있다. 그는 집값 차익을 기부하겠다고 했는데, 올해 4월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한다. 출마하지 않고 불로소득만 기부하는 건 불가능했을까.

 

부동산정책을 총괄하는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로 지명됐던 고위공직자마저 주택 세 채를 보유한 사실이 드러나 낙마했다. 집으로 재산을 불릴 꾀만 짜낸 공직자가 수두룩하다. 오히려 정보나 권력을 자신의 주테크에 동원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경향신문의 지난해 창간기획 시리즈 임대주택의 배신취재과정에서 주택 관련 통계는 고사하고, 개념조차 정리하지 못한 사례를 다수 확인했다. 정책 당국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분석이 나올 리 없었다. 대책도 땜질처방에 그쳤다.

 

그 결과는 자고 나면 1억원 껑충’ ‘평당 1억원 시대를 초래했다. 극소수 부자의 다른 세상 이야기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보통사람을 허탈감과 상대적 박탈감 속에 밀어넣었다. 집값과 관련해 정부를 믿을 수 없게 됐다. 집을 투기대상으로 여기고 집값을 끌어올린 이들의 책임이 크지만, 이를 방치하고 편승까지 한 정책 담당자들의 죄 역시 중하다.

 

새해가 밝았으니 일단 그들의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하자. 지난 연말에 대대적인 사면이 이뤄졌으니 부동산 정책 책임자들도 사면하자는 것이다. 역대 최고 강도라고 평가받은 ‘12·16 부동산대책도 시행 중이다. 이제부터 정부가 집값 안정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눈 부릅뜨고 지켜보자. 청와대 고위공직자 중 다주택자는 한 채만 남기고 다 팔 것을 권유받았다. 공직사회 전반으로 확산할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두고 볼 일이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부동산 전문가 사이에서도 올해 집값 상승과 하락을 두고 의견이 엇갈린다. 12·16 대책 약효가 몇 개월 후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저금리 기조가 지속돼 부동자금이 집으로 흘러들 여지도 크다. 게다가 투기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정부 대책을 뛰어넘는 꼼수를 찾아내 집값을 끌어올려왔다. 이는 그동안 집값 상승 과정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18.2.23 매일경제

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집값 상승을 막아야 한다. “필요시 언제든지 추가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공시가격을 현실화하고, 보유세율을 추가로 올리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소득층 불로소득에는 과세를 강화하는 게 경제정의에 부합한다. 그래도 집값을 잡지 못한다면 박원순 서울시장이 제안한 부동산 국민공유제도 고려해보자. 보유세 강화와 임대료 규제 등 불로소득을 환수해 토지와 집을 싼값에 공급하고, 공공임대주택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반환점을 돌아 4년차에 접어든 문재인 정부의 집값 잡기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동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내년 이후는 강력하게 추진하기가 쉽지 않다. 정부를 믿은 서민에게 집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집값 잡지 못하고 변죽만 울린 정부로 남을 텐가.

안호기 경제에디터 경향 2020.01.02.

 

4월 총선이 기대되는 이유

의회지형을 바꿔야 정치가 살아난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일까. All's well, that ends well. 독일어 표현도 있다. Ende gut, alles gut. 끝이 긍정적이면 이전에 벌어졌던 부정적인 것들이 묻혀버려 별 것 아닌 것처럼 기억된다. 아무리 고통과 실망의 연속이었어도 마지막 순간이 좋았다면 이전의 나쁜 경험은 기억에서 사라진다. 결말이 그동안의 과정에서 겪었던 온갖 시련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하고 기억의 저 편으로 밀어내기 때문에 끝이 좋으면 다 좋았던 것처럼 느낀다. 아직 임기는 남아있지만 20대 국회가 그랬다. 식물국회라는 말도 모자라 동물국회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국회였다. 폭력과 고함으로 서로 충돌하는 국회, 극기야 '노루발못뽑이''장도리'까지 등장한 국회였다. 민의의 전당이 아니라 사각의 링 같았다.

 

그런 '막장 국회'가 마지막에 뭔가 해냈다. 최악의 국회로 마무리될 것 같은 절박한 순간에 한두 건 했다. 2019년 연말 임기 만료를 몇 달 앞두고, 실망한 국민을 위로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없는 것보다 나은 개혁입법을 이뤄냈다. 무소불위 검찰의 기소독점을 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과 준연동형 비례제 도입과 만 18세 투표권 부여 등을 주요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늦기는 했어도 기다리다 목마른 촛불시민의 개혁 갈증에 한줄기 소낙비 같았다.

 

그렇다고 끝이 좋으니 다 좋은 것일까. 사람은 '경험 따로, 기억 따로'인 불합리한 존재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전체적이 아니라 단편적이고 분절적이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경험했어도 마지막 결말이 좋았다면 그동안 겪었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조금은 걱정이다. 국민들이 20대 국회의 긍정적 끝만 기억할까봐 그렇다. 국회는 임기 내내 무기력했고 무능력했다. 한국정치의 후진성과 정치의 실종을 그대로 드러냈다. 의회정치가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고 양 갈래도 모자라 국민을 사분오열시켰다. 그래서 정치혐오와 국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극에 달했다. 그러다가 끝이 조금 좋았던 것이다. 그 순간의 긍정이 부정적 전체를 뒤집어 놓을까 두렵다. 절망을 안기고 기대를 저버린 국회의원들을 다 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끝이 조금 좋았다고 바뀌어 버릴까, 국회 문 닫으라던 아우성이 잊힐까 조바심이 난다. 20대 국회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21대 총선에 그들을 다시 소환할까봐 불안하다. 거대 양당은 대선전초전 격인 4월 총선에서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며 사생결단으로 싸울 것이다. 총선을 차기 대선의 바로미터로 여기기 때문이다. 다수당이 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와 비난으로 자기 진영의 지지자들을 동원하고 결집하려 할 것이다. 총선에 출마하는 대선주자들은 정치생명이 달려 있으므로 더욱 그럴 거다. 기득권 정치의 구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지도자의 새해인사에 흔히 등장하는 말이'나라의 명운이 걸린 해'. 2020년이 나라의 명운 운운할 정도는 아니지만 중요한 해임은 틀림없다. 어쩌면 한국 정치의 전환점이 될 21대 총선이 치러지는 해이기 때문이다. 선거법 개정으로 30년 넘은 낡은 기득권정치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새로운 선거제도로 정치에 지각변동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여야 정치권은 긴장하고 있다. 그 변화의 열쇠는 국민의 손이다. 최악이라는 오명을 얻은 20대 국회 4년을 온전히 기억하고 평가하는 선거여야 한다. 임기 마지막 몇 개 개혁입법 통과의 기뻤던 순간만 단편적으로 기억해서는 안 된다. 대결과 갈등으로 진영정치를 고착화시킨 책임을 물어야 한다. 변화된 선거제도로 20대 국회 내내 이어져 온 거대 양당 중심의 극단의 정치를 허물어야 한다. 정당집단주의가 지배하는 정치판을 깨야 한다. 아주 미흡하지만 그 도구가 유권자의 손에 쥐어졌다. 대표성을 왜곡하는 승자독식의 불합리한 선거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균열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연동률 50%에 연동률 적용 의석을 30석으로 제한했지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소수 정당의 의회진출이 가능해졌다. 물론 유권자의 선택에 달려 있지만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지역주의에 양당제에서 세대성별계층의 다변화를 담은 다당제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다당제 민주주의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이다. 기존 정치체제에서 소외되고 차별받아온 소수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도 담아내고 다수 국민을 제대로 대변하는 민의의 전당을 만들 수 있는 디딤돌이 놓인 것이다. 민심 그대로의 국회, 여성청년노동자농민 등 다양한 국민 구성의 축소판이어야 할 국회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승자독식의 폐해인 과소대표나 과잉대표가 점차 사라지고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가 국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선거연령도 18세로 낮아졌다. 청년세대가 스스로 자신들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의 적극적 정치참여로 민주주의가 성숙해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령화 사회에서 젊은 유권자의 유입으로 국민의 의사가 폭넓게 반영될 수 있게 되었다.

 

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정치개혁의 시금석이다. 변화의 초석을 놓는 선거여야 한다. 어렵사리 개정된 선거법의 취지를 살리는 선거여야 한다. 시작은 미미하더라도 민의를 반영하는 다당제 의회지형을 만들어내야 포용과 연대, 협치의 정치가 살아난다. 지역주의에 기댄 거대 양당이 좌지우지하는 국회를 재현시킨다면 희망은 사라진다. 깨어있는 유권자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민심 그대로의 국회는 촛불시민의 요청이다. 적대정치가 아니라 공생정치 속에서 선거제도 개혁, 정치개혁도 완성될 수 있다. 21대 국회가 그 시작이다. 그래서 2020년 총선이 중요하다. 유권자의 힘으로 싹 다 갈아엎고 재개발해야 한다. 4월 총선이 기대되는 이유다.

하태훈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프레시안 2020.01.05.

 

아이 캔 스피크

20182서울북부지검 근무 시절, 검찰간부의 호출로 인사동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한 적이 있습니다. 전년도 인사에서 부장 승진에 탈락한 사법연수원 31기 검사들이 2018년 상반기 인사에서 추가 승진했는데, 30기 부부장인 제가 신경 쓰였나 봅니다. 검찰총장 특사를 자처한 그는 서지현 검사의 미투사건 참고인이라 부득이 승진을 못 시켰다고 양해를 구하고, 해외연수를 느닷없이 권했습니다. 검찰개혁은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개인의 행복을 찾으라던가. 웃음을 참느라 혼났지요. 서 검사는 인사 발표 후 미투를 한 건데, 준비한 변명이 너무 성의 없었으니까요.

 

하반기 인사에 부산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장을 시켜줄 테니 승진 걱정하지 말고 어학공부에 매진해 12월에 해외로 나가라, 한참을 설득했지요. 진지하게 듣는 체했습니다만, 어학시험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개혁 시늉만 하려는 검찰을 감시하고 비판할 내부자가 필요한 때잖아요.

 

7월 하반기 인사 발표 날 아침, 검찰국장이 된 그 간부의 전화가 왔습니다. 해외연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자신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라고. 많은 간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검찰총장이 충주지청 부장으로 승진시키기로 했다는 공치사까지 하더군요. 31기 후배 후임으로 보내면서 하는 궁색한 변명과 생색이 어이없었지만, 해외 발령을 강제할 수 없는 인사시스템에 감사하며, 충주로 전입했습니다. 이후, 검찰 내부망과 SNS에 더하여 정동칼럼으로 내부고발자의 활동반경을 더욱 넓혔지요.

 

20199,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취임하던 날 오전, 법무부 간부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감찰담당관실 인사 발령을 검토 중인데 반대가 극렬하다며, 검찰의 요구조건을 수락해야 인사 발령을 낼 수 있다더군요. 그들이 내건 조건은 3가지였습니다. SNS 중단. ‘정동칼럼연재 중단. 서울중앙지검과 서울지방경찰청에 고발장 제출한 전직 검찰총장 등 전·현직 검찰간부들에 대한 직무유기 등 사건 고발 취하.

 

법무부 고위 검찰간부들의 요구였던 모양인데, 참담했지요. 내부고발자를 인사로 유혹해 침묵의 밀실에 가두고 이름만 빌리려는 의도가 명백히 보였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이 법무장관을 보좌해 시대적 요구인 검찰개혁을 추진할 주체라는 현실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 표현의 자유와 내부비판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검사라는 현실은 검찰권을 위임한 주권자이자 검찰권 행사 객체인 국민들에게 참혹한 비극입니다. 저는 그런 검찰의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검찰 구성원이기도 하지요. 역사의 심판에서 피고인석에 앉을 검찰은 검사동일체 원칙에 따라 모든 검사들일 테고, 저도 검사이니 심판을 피할 길이 없네요. 부끄러워 하늘을 우러를 염치가 없습니다.

 

개혁 시늉만 하려는 검찰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내부자가 더욱 필요할 때라, 수락할 수 없었지요. 거래조건을 조율하려는 시도가 없지 않았지만, 모두 거절한 그날 오후, 조 전 법무부 장관은 취임 일성으로 감찰관실에 임은정 검사를 비롯하여 자정과 개혁을 요구하는 검사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감찰제도 개선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유혹을 뿌리쳐 독사과를 먹지 않은 덕에, 서울중앙지검은 2015년 검찰 수뇌부의 성폭력 은폐 직무유기 고발사건을 18개월째 전전긍긍하며 들고 있고, 서울지방경찰청은 서울중앙지검에 3차례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하며 검찰공화국 민낯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공수처법안 등 검찰개혁법안 통과를 위해 미력하나마 힘을 여전히 보태고 있지요. 제 목소리가 지금은 제 동료들에게, 적지 않은 분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불협화음으로 들리겠지만, 훗날 역사에서 검찰을 깨우는 죽비소리로 평가되리란 확신은 변함없고, 주어진 소명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2012년 상반기 서울중앙지검 근무 시절, 내부게시판에 수뇌부에 비판적인 글을 올렸다가 간부에게 불려가 이러면 검사장이 될 수 없다는 꾸중을 들었지요.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는 성경구절이 떠오르더군요.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다면 돌만도 못한 건데, 돌만도 못해야 검사장이 된다면, 검사장이 왜 되고 싶을까요. 그 간부에게 차마 그리 묻지는 못했지만, 다짐했지요. 돌멩이만도 못한 그런 검사장이 아니라 할 말 하는 검사가 되겠노라고.

 

작년 1, 칼럼 아이 캔 스피크로 첫인사를 드렸는데, 어느새 1년이 지났습니다. 신발끈 고쳐 매고 2012년 그때의 다짐을 떠올리며 굳은 각오로 다시 시작합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진심과 간절함을 담아 시대의 화두인 검찰개혁을 위해 더욱 목소리를 높여 볼게요. 다시 한번, “아이 캔 스피크!” / 임은정 울산지방검찰청 부장검사 경향 2020.01.05.

 

묘수와 꼼수

지난 10여년간 한국인들의 삶을 가장 크게 바꾼 제도는 주 40시간제일 것이다. 이 법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여가다운 여가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허용되었다. 그런데 이 법은 그 취지가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에 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 노동시간 단축을 이유로 기존 임금을 삭감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법에 포함되었다. 실무 단계에서는 법 개정의 취지가 명백한데 굳이 이 조항이 필요한가라는 논쟁도 있었다. 하지만 노동계의 우려가 컸기 때문에 아예 해석의 여지를 두지 말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법이라는 것은 그 법의 시행을 통해 벌어질 상황을 일일이 조문에 담을 수 없다. 구체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결국 판례를 통해 법의 의미가 확립된다. 그래서 구체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법에 명시적으로 들어 있지 않아도 명민한 판사들은 법의 취지를 살핀다. 실제로 법률 개정안의 첫머리에 나오는 것은 제안 이유. 바뀐 법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취지를 살피는 것이야말로 법률 적용의 근본이다.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었다. 패스트트랙에 진입할 때의 원안과는 상당히 달라진, 준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고 할 수 있다. 컵에 물이 반도 안 찼다고 볼 수도 있고, 그래도 새로운 제도가 도입된 것 자체에 의미를 두자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와중에 가장 해괴망측한 것은 이른바 위성정당논란이다. 지역구에서 우세한 거대정당이 비례의석을 많이 차지하지 못하니, 비례대표만을 노린 별도의 위성정당을 만든 뒤 나중에 합당을 하겠다는 식의 발상이다. 법의 취지와는 전혀 반대되는 적용 방식이다.

 

법의 취지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후 정치를 농단한 사건으로 사사오입 개헌이 있다. 1954년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을 위한 개헌안을 표결에 부쳤는데, 가결에 필요한 수는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135.333...명이었다. 135명은 3분의 2가 되지 않으므로 136명이 가결에 필요했다. 공교롭게도 찬성은 딱 135명이었고 사회자였던 국회부의장은 부결을 선포했다. 그런데 자유당은 사사오입이라는 황당무계한 논리를 들어 가결에 필요한 숫자가 135라고 주장하고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결정했다. 소위 자유당 때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이승만이 3선을 하기는 했지만, 4·19라는 역사의 필연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법률적으로 사사오입 개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위헌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이 행위의 본질은 법의 취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꼼수를 동원해 법을 무력화한 데 있다. 그 점에서 사사오입 개헌은 최근의 위성정당 논란과 맥을 같이한다.

 

위성정당이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은 많이 나왔으니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선관위와 경찰, 검찰이 모두 놀라울 정도로 너그러이 봐주어 그 모든 위험을 용케 피했다고 해보자. 유권자들은 어떻게 판단할까?

 

지난 총선에서 많은 언론과 정치평론가들이 지금은 사라진 새누리당의 압승을 점쳤다. 무얼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청와대는 친박당을 만들기 위해 오만한 공천개입에 들어갔다. 새누리당은 보수 유권자를 우리가 뭘 하든 찍어줄 사람들이라고 봤고, 유권자들은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다. 결과는 분명했다.

 

선거법 개정의 취지는 촛불 이후 주권이 대표되는 방식을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지역의 대표뿐 아니라 정책과 가치, 사회적 약자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국회로 보내자는 취지다. 그 취지에 맞는 공천을 하는 정당이 당연히 유리하다. 그것이 국민의 뜻이기 때문이다.

바둑 해설을 듣다보면 이런 경우가 있다. “예상치 못한 수인데요? 묘수인가요?” “아니요. 꼼수입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유한국당은 지난해 12월에도 여러 묘수를 뒀다. 민식이법 앞에 필리버스터라든가. 결과는 어땠는가?

이관후 |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향 2020.01.05.

 

특권에 분노하며 특권을 좇는

같은 나라가 아니에요. 아이들도 학부모도 너무 다릅니다.”

분당에서만 십수년 있다 경기도 외곽 학교로 발령받은 교사가 건넨 말이다. 현저히 부족한 학습능력, 욕설을 달고 사는 아이들, 팍팍한 살림살이에 자녀 교육은 뒷전인 학부모에 이르기까지 극명하게 학교 모습을 대비시킨다. 출신과 지역에 따른 온갖 격차가 그 어느 때보다 역대급이라고 교사들은 입을 모은다.

 

더 좋은 학군을 찾아 이삿짐을 싸는 교육 난민의 대장정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때다. 학구와 학교가 이미 특권을 예비한다. 학령인구가 급감하지만 인기 좋은 학군의 교실은 과밀로 몸살을 앓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특권의 자리는 이미 정해진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더 높다.

 

학생 1인당 책정된 예산 8만달러에 연간 학비가 4만달러인 부유층 자녀들만의 사립학교인 미국의 세인트폴 고등학교 이야기를 담은 <특권>(셰이머스 라만 칸 씀)은 의미심장한 사회학적 통찰이다. 이 학교 학생들은 폐쇄적인 특권 자원을 활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스스로 사다리에 오르도록 교육받는다. 학습능력뿐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획득한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자질을 갖춘 이들 대다수는 최상위 대학에 진학하고 공정한 과정을 거쳐 높은 신분과 지위를 확보한다.

 

특권의 대물림은 우리도 다를 바 없지만, 과정이 더 원시적이고 결과로 인한 상처는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는다. 서울대 입학본부가 펴낸 연구보고서에서 어느 교수는 특목고 출신 서울대 학부생들의 특징을 구별소속에 집착하는 경향성에서 찾는다. 우월감이 강한 이들은 고학년이 될수록 일반고 출신과 차별성이 줄어드는 것을 불안해하면서 그 해결책을 로스쿨이나 외국유학 등 이들과 구별되는 소속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과잠바에 출신 특목고 교명을 새겨 넣는 형태로 우월감을 과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일반고 출신 학생들의 심리적 위축감도 들춰낸다. 실제로는 특목고 학생들에 비해 실력과 소양이 부족한 경우는 거의 없음에도 열등감으로 인한 소극성 때문에 계속해서 기회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상류층의 문화자본을 장착하고 성장해온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지만 매번 필생의 노력으로 소속을 쟁취해온 이들에게는 많은 것이 넘사벽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구별짓기와 그 안에서의 따라잡기를 거듭하며 확보한 이들 엘리트의 성취는 당당히 얻은 자기 것이며, 그 결과로 다른 계층에 대한 차별의 시선은 날카로워진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새로운 불평등 구조는 토크빌이 말한 것처럼 장벽을 없앴다기보다 그 모양을 바꾸었다.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평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철학자와 거리의 평범한 짐꾼 간의 차이는 천성이 아니라 습관과 풍속과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말이 더욱 의미심장해졌다.

 

특권과 반칙은 다른 개념이다. 국회의원 면책특권처럼 신분과 지위에 따라 부여하는 특별한 권리도 필요하다. 지위를 얻는 과정의 정의, 특권을 사용하는 목적의 공공성, 그리고 이들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관건이다. 불평등은 그 자체보다 분노가 더 무섭다. 그 분노는 모멸과 불신을 먹고 괴물이 되어, 신학기 교육 난민과 같은 배타적 특권세계로의 진입을 위한 대장정을 부추긴다. 불평등을 양산하는 제도의 개혁 못지않게 엘리트가 갖춰야 할 자질을 요구하고 가르쳐야 할 때다. 차별을 배격하고 통합의 정의를 실현하는 유능한 엘리트도 대거 등장해야 한다. 언제까지 모든 특권에 분노하면서 공정에 대한 이 지루한 논쟁만을 반복할 것인가?

안순억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겨레 2020.01.05.

 

 

추미애 vs 윤석열, 그리고 공수처

공룡’ ‘괴물은 애칭 수준, ‘정권의 방패’ ‘대통령 직속 사냥개라더니 게슈타포중국 공산당 감찰위란 비유까지 등장했다. 한때 70~80%, 최근까지도 국민의 60% 이상이 찬성한다는데도 보수 언론·야당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원색적으로 헐뜯었다.

 

두 가지가 떠오른다. 우선 윤석열 검찰의 작전, 절반의 성공이다. 청와대를 겨냥한 집중 수사가 결국 검찰개혁=청와대수사 방해란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보수 언론·야당의 지원도 얻었다. “윤 총장이 격노했다며 조··동에 독소조항이란 보도자료를 뿌려 1면 머리기사도 끌어냈다.

 

그러나 공수처법의 사전 통보조항은 애초 격노할 사안이 아니다. 원안에도 공수처의 우선 수사조항이 있었다. 공수처가 아무 때나 검찰·경찰이 수사 중인 사건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을, 사전에 통보받고 수사 여부를 회신하도록 의무화했다. 교통정리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국회가 정해주는 대로 따르겠다던 약속을 깨고 국회 표결 직전에 보수 언론과 합동작전을 폈다.

 

다른 하나. 국민을 우습게 아는 보수 언론·야당의 오만함이다. 국민을 바보로 알지 않으면 불가능한 요설들이 지금도 넘쳐난다.

 

정권이 장악해서 살아 있는 권력 수사가 불가능해진다? 공수처장 추천위가 위원 7명 중 6명 찬성으로 의결하도록 해 야당 위원 2명의 비토권을 보장했다. 설사 친여 야당이라도 청와대 코드에 맞춰 추천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정권의 장악이 어려운 구조다. 살아 있는 권력 수사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궤변이다. 공수처 검사가 현 권력을 봐줬다가는 검찰 수사를 피할 길이 없다. 그렇게 하라고 공수처-검찰-경찰 사이의 견제·경쟁 구도를 만든 것이다. 다 알려진 사실이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보수 언론·야당의 공수처 반대 이유는 현 정권 반대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면 쉽다. 그런데 검찰의 속사정은 이들보다 심각하다. 잃는 게 많기 때문이다. 공수처가 생기면 그간 검찰이 누렸던 독점적 권한들이 다 무너진다. 무엇보다 영장청구 독점권이 무너지는 게 크다. 공수처 검사가 영장 들고 검찰총장실·서울중앙지검장실도 털 수 있다. 권력교체기에 대비해 쌓아놓은 은밀한 첩보자료나 법원 요구에도 내놓지 않던 기록들도 이제는 성역이 아니다.

 

더 무서운 건 내부의 치부가 들춰지는 일이다. 공수처는 판검사와 고위 경찰의 직무 관련 범죄는 독자적으로 수사해 기소까지 할 수 있다. 횡령·배임, 알선수재 등 뇌물 범죄는 물론 직권남용·직무유기·비밀누설·피의사실공표죄도 모두 해당된다. 공수처 검사는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검찰 범죄를 손보려 할 것이다. 임은정 검사가 제기해온 검찰 수뇌부의 감찰 무마사건은 물론 박근혜 청와대시절 정권 하명에 따라 은폐·왜곡한 검찰 농단사건들도 다 포함된다. 애초 법무검찰개혁위 초안엔 ‘2년 전 사건까지만 수사하도록 시한을 뒀으나 통과된 법안엔 그런 조항이 없다. 최근 청와대 수사 과정에서 불거진 피의사실공표 의혹은 물론 정윤회 문건이나 세월호 참사 왜곡수사까지 시효(직권남용은 7) 남은 사건들은 다 수사할 수 있다.

 

외부 감시자가 생기면 그동안 검찰 가족들끼리 대놓고 봐줬던 전관예우도 어려워진다. ‘불멸의 신성가족을 끈끈하게 연결해준 경제적 이해관계의 카르텔이 깨지는 것이다. 전화 한 통화로 억대, 1~2년 만에 백억원 이상 챙겼다는 검찰 출신 변호사들의 신화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1차 수사권까지 경찰에 넘어가면 피해는 더 크다. 여야 가리지 않고 검찰 출신 선후배들이 검찰개혁 입법에 반대했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공수처는 판검사와 고위 경찰 빼놓고는 기소권이 없다. 청와대 등 다른 권력기관 수사엔 여전히 수사권·기소권 모두 가진 검찰의 힘이 세다. 공수처 출범한다고 검찰 수사가 위축될 필요도 없다. 청와대 수사도 그냥 하면 된다. 다만 이제는 먼지털기 수사피의사실공표도 어렵다. 검찰에 공수처 출범 이전과 이후는 다른 세상이 전개된다. 공수처--경 사이 상시적인 견제·경쟁 구도다.

 

수사권은 윤석열 검찰이 가졌으나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민주적 통제를 공언했다. 법에 정해진 수사지휘권과 인사권을 충분히 활용하겠다는 뜻이다. 검찰의 미래도, 공수처의 성패도 두 사람의 행보에 달려 있다. /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경향 2020.01.06.

 

 

당신에게 밟히지 않을 권리

<청년 75% “한국 떠나고 싶다”> 지난 1216일치 <한겨레>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그런데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제119차 양성평등정책포럼 발표 자료 청년 관점의 젠더 갈등 진단과 포용국가를 위한 정책 대응방안 연구: 공정 인식에 대한 젠더 분석을 다룬 이 기사는 영어로 번역된 뒤 뜻밖에도 러시아 미디어를 강타했다. 복수의 러시아 매체들이 이 소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전했다. 한국의 평균 연봉이 약 3만달러라면, 러시아는 1만달러 미만이다. 게다가 한국인들이 누리는 표현·집회의 자유를 많은 러시아 젊은이들은 부러워한다.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는 매체에서 이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도 75%나 되는 청년들이 이민을 가고 싶다고 한다니,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참고로, 최근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민을 희망하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비율은 41% 정도다. 사실 젊은이들의 약 3~5할이 보다 부유한 서구나 북유럽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은, 비교적 더 가난한 남·동유럽 나라에서는 보통이다. 이를 염두에 두면 상대적인 고임금 국가 대한민국 청년들의 헬조선 탈출 붐이야말로 다소 파격적이다.

 

물론 이 파격은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아무리 고임금 사회라 해도, 임금보다는 특히 서울의 아파트값이나 사교육 비용들이 훨씬 빨리 오른다. 하위 20% 저소득자라면, 소득 전부를 다 저축한다 해도 서민 아파트를 마련하기까지 무려 21년이나 소요되는 사회에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청년들이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겠는가? 여기저기서 아르바이트하고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어 결혼과 육아는커녕 연애마저도 사치로 보이는 젊은이들한테 이 삼포’(연애, 결혼, 육아 포기) 사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이 사회에서 그나마 노후나 직장 안정성이 보장된 공무원과 대기업 직원들은 전체 피고용자의 2할도 안 된다. ‘미래가 보장된이들조차도 종종 과로사를 당할 정도로 격무에 시달리곤 한다. 그러니 중소기업을 다니거나 자영업으로 내몰린 나머지 한국인의 삶은 어떨까? 그야말로 불안의 지옥이다. 말은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회사 자체가 언제 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러다가는 자연히 탈출을 꿈꾸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런데도 뭔가 여전히 석연치 않다. 한국이 지옥이라 하더라도 신자유주의로 똑같이 몸살을 겪는 나머지 세계라고 해서 과연 무풍지대일까? 지난번에 프랑스의 길거리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펼친 노란 조끼들의 상당수는 한달에 약 1천유로로 간신히 몸에 필요한 영양을 섭취하면서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기약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신흥 빈곤층이었다. 한국 관광객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낭만의 도시 파리는, 만약 그 위성 도시들까지 포함해서 계산한다면 빈곤율이 무려 40%나 된다. 런던의 빈곤율은 27%. 이민 간다고 해서 헬미국이나 헬독일에서 경제적으로 고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거기에다가 인종차별 등의 위험요소를 가산해야 한다. 한국 매체들은 이민 실패담이나 이민 실패를 다루는 경고성 기사들을 꽤 자주 내보낸다. 그런데도 청년들의 75%가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한다면, 또 다른 요인이 있으리라고 봐야 한다. 반이민 정서가 갈수록 더 극성을 부리는, 신자유주의의 위기 속에서 요동을 치는 외국으로 한국 젊은이들을 내모는 그 힘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는 존엄성에 대한 욕구다.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추울 때 옷을 입고 외로울 때 누군가와 함께 지내고 위험이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어 하는 마음만큼, 자존감을 지키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것이다. 사실, 조선 독립에 대한 정치적 열망 못지않게 식민지 현실 속에서 피식민 백성으로서 당해야 했던 일상 속의 수모야말로 독립운동의 아주 중요한 동기였다. ‘조선의용대의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1916~2001) 선생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은가? 문학소년이었던 그는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황금정(오늘날의 명동)의 일본 서점에서 일본 소설책을 사가지고 나왔다가 길거리에서 일본 순사에게 책 도둑으로 몰린 적이 있었다. 조선 청년이 일본 소설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순사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서점 직원이 책을 정식으로 구입했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김학철은 풀려날 수 있었지만, 일본인 순사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이 수모를 도저히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던 김학철은, 머지않아 상하이로 건너가서 무장독립운동의 길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나름 재력가 집안의 아들로 명문인 보성고보를 다녔던 그는 일제하에서도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겠지만, 수모를 참고 사는 것을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인간은 먹고살기를 위해서도 가끔 목숨 걸고 위험한 일을 하지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도 생명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런데 임금 수준도 꽤 높고 표현이나 집회의 자유도 다행히 쟁취된 이 대한민국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 격으로 각종 불쾌감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고, 피고용자의 자존심을 제대로 살려주는 직장은 과연 얼마나 될까? 통계를 믿는다면, 그다지 많지 않다. 201971일 보도된 인크루트의 조사에 의하면 직장인들의 64.3%나 각종 일터 갑질에 시달렸으며, 그 유형은 폭언이나 모욕부터 사적인 용무 지시, 따돌림까지 대단히 다양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고 나서도 직장인 응답자의 60.8%갑질이 여전하다고 느낀다는 보도가 나왔다. 여기서 갑질이란 상당한 정신적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심각한 인격권 침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갑질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사가 권위주의적 태도로 부하 직원들을 심리적으로 억누르고 있다고 느껴지는 직장까지 포함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8~9할이 피해자라고 봐야 할 셈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젊은이들의 탈출욕망을 가장 강하게 부추기는 게 아닐까?

 

젊은이들이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연장자, 권력자들에게 일상적으로 밟히면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이 두려울 수 있지만, 국적이 같은 권력자에게 자존심을 짓밟히는 아픔은 그 두려움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사람이 사람을 밟고 다니는 일터의 분위기를 바꾸자면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등 직장의 민주화부터 절실히 필요하다. 직장이 민주화되지 않는 이상 젊은이들의 한국 탈출 행렬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0.01.07.

 

.한국은 삼권분립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중국의 전제국가 체제의 흔적을 느낄 때가 많다. 요즘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논란 역시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곁에 있었던 과거 체제의 일부가 새로운 체제로 전환해가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삼권분립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으로 나누어 상호 견제와 균형을 꾀하는 제도다. 그러나 한국은 서구적인 삼권분립이 한 번도 제대로 작동된 적이 없는 사회였다. 제도는 있지만 말과 실제가 따로 돌아간다.

 

삼권분립을 하려면 우선 삼권을 분리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따로 각각 세워야 한다. 그러나 역사상 한국은 국가 권력이 실제로 이렇게 분리되어 본 적이 없다. 행정부 수장에게 통치권이 집중되어 있다. 입법부가 법을 만드는 기능이 대단히 약하여 입법 활동의 대부분이 행정부가 만든 법안을 일부 심사하고 통과시키는 역할에 머문다. 그 법도 세부사항을 지나치게 행정부의 재량에 맡긴 형태로 통과되기 일쑤다. 이런 것들은 그동안에도 시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지만 사법부에서 대법원장이 사법행정권을 독점하여 법원을 관료조직처럼 운영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최근에야 생겼다.

 

삼권이 분리가 안 되어 있으니 분립이 안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 공천에 행정부 수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게 아니면 요새처럼 청와대 직원들이 우르르 공천을 받겠다고 나오는 현상을 달리 설명할 수 없다.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지명하고 법관 인사권을 독점한다. 판사들은 자신을 젊은 시절 공채시험을 봐 들어온 뒤 승진에 매달리는 국가 공무원으로 인식한다. 최근 판사 류영재씨는 최근 어느 강연에서 아주 적절한 지적을 했다. 사법농단 사건은 법원이 삼권분립이 아니라 삼권분업을 하려고 한 사건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에 대한 소송을 일부러 7년을 끌고, 통상임금,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등을 자기가 마치 행정부 일원인 것처럼 행동하고 판결했다. 행정부의 통치나 국정이 헌법을 위반했을 때 법원이 이를 지적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삼권의 일원으로서 통치에 참여하려고 한 것이라는 젊은 판사의 말에서 미래 세대의 희망을 본다.

 

나는 한국에서 삼권분립이 실제로 운영되는 모습에서 역대 중국 왕조와 조선시대 전제정치의 삼권분할을 느낀다. 중국 문명 하에서 전제군주가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자기 하나에게 집중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들이 이 권력을 제도적으로 어떻게 나누어 통치했는가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은 어떻게 권력을 나누었을까? 한나라 시절부터 중국의 황제는 자기의 권력을 군사권, 행정권, 감찰권으로 나누고, 과거를 통해 뽑은 관원에게 이 권력을 위임해 통치했다. 군사권은 행정권과 분리하여 관료에게 위임하지 않고 대부분 황제가 직접 관장했다. 사법권을 별도의 권한으로 인식하지 않고 행정권의 일부로 간주해서 행정부 관료가 법관 노릇을 했다. 그리고 감찰권은 군사권과 행정권 못지않게 중요한 권력으로 간주하여 행정 관료를 황제의 별도 직할 조직인 감찰관을 통해 감시했다. 이게 중국 중앙집권체제의 삼권분할 방식이다.

나만의 제멋대로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은 권력을 군사권, 행정권, 감찰권으로 나누어 운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방식은 1987년 군부독재가 종식된 뒤에도 여전히 우리들 곁에 남아 있다. 김영삼씨가 취임 이후 가장 먼저 손을 본 것이 하나회 숙청을 통한 군사권 확보였지만 그 뒤에도 국방부는 여전히 군인들 세상이다. 민간인 출신 국방부 장관은 아직도 있어 본 적이 없다. 감찰이 기세등등한 것도 여전하다. 정권을 잡은 사람은 국정원, 검찰, 경찰, 그리고 감사원을 자신의 감찰 도구로 사용해왔다. 그래서 최근까지도 경찰과 검찰 사이에서 수사와 기소를 분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1987년 헌법은 법원을 과거와 마찬가지로 대법원장 휘하의 관료조직으로 남겼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짓이었지만 당시엔 별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다.

 

독재자가 사라져도 독재체제를 뒷받침하던 세력이 저절로 없어지지는 않는다. 한국은 근래까지 독재자가 국가 권력을 군사권, 행정권, 감찰권으로 나누어 동아시아식 삼권분할 체제를 운영하던 나라였다. 이것이 우리 정치문화의 원형이라는 것을 인식할수록 서구식 삼권분립 체제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부터 손을 봐야 하는지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다.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 한겨레 2020.01.07.

 

교양기초교육의 제자리 찾기

2020년은 대학의 위기가 전 방위적으로 가속화되는 해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학의 양적 팽창이 남긴 후유증은 결국 대학의 종말이라 할 만한 단계로까지 진행되어 버렸다. 국내 대학들이 국공립, 사립, 수도권, 지방 할 것 없이 정부의 재정지원 사업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대학 등록금은 동결되었고 인구절벽으로 2021년부터 대학 입학자원 역시 25%가 모자란다는 현실도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한계 대학들은 당장 다음 달 교직원 월급을 걱정해야 하는 암담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런 가운데 대학의 기초학문인 교양교육도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실용 학문에 가려 정체성마저 잃어가고 있다. 그동안 대학들은 학술성이나 보편성이 없는 교과목들, 일회성 프로그램, 심지어 정부 각 부서가 요구하는 혼전순결교육, 통일교육 등이 교양교육과정을 잠식해 왔다. 학생들 역시 교양과목은 쉽게 학점을 따는 수업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근본적인 문제는 대학에서 교양이란 용어가 착하게 살자는 식의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교육부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던지 뒤늦게나마 처방전을 내놓았다. 교육부는 훼손된 교양교육의 재정립 카드로 교양기초교육의 정상화를 꺼내 들었다. 대학의 각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교육당국의 의지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고등교육을 제자리로 돌리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말 발표된 교육당국의 제3주기 대학기본역량 진단 편람은 교양교육과정의 정의를 명료하게 설정하고 특히 기초학문 능력 제고를 위한 교양교육 체계와 운영여부를 진단요소로 채택하였다. 비록 이 내용들이 최종본은 아니지만 편람에 수록된 것만으로도 현장 대학에서는 큰 파급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교양교육은 고등교육에서 전공과 양대 축으로 성장해 왔다. 원래부터 대학의 학부교육은 교양교육과 기초학문교육, 즉 교양기초교육으로 구성되었다. 교양기초교육은 대학교육 전반에 요구되는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폭넓은 이해, 즉 전통적인 자유학예(liberal arts)를 바탕으로 올바른 세계관과 건전한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다.

 

글쓰기와 양적 추론을 비롯한 리터러시 능력 연마를 필수로 하고, 인문·사회·자연·예술에 기반을 둔 기초학문 교과목 배분이수와,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는 영역의 교과목들로 구성되는 것이 원칙이다. 2016년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이 제정한 대학 교양기초교육의 표준 모델역시 이러한 배경을 가진다.

 

지금까지 대학에서는 실용과 전공과목 등에 밀려 교양교육은 늘 뒷전으로 밀려난 채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교양교육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뒤늦게나마 교육계 안팎에서 제기되는 건 다행이다.

이런 점에서 교양교육 관련 학회, 기관들의 책임과 역할도 어느 해보다 무거워졌다. 올해부터는 교양교육이 제 모습을 되찾아 고등교육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상아탑 풍경을 그려 본다.

박일우 | 한국교양교육학회장·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경향 2020.01.07.

 

정치 판갈이, 이제부터 시작이다

2020년대가 시작되었다. 한국민주화 32년을 돌아보면 민주주의 정착이 얼마나 더디고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경제발전과 달리 지정된 방향타가 없는 혼돈과 갈등 속에서도 한국민주주의는 긍정적 방향으로 흘러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장 큰 변화는 보수와 진보 모두 막다른 골목이라 새로운 변신이 불가피해졌다는 것이다. 경제발전이라는 것 이외에 이렇다하게 내세울 것 없이 지역주의에 기반했던 소위 한국 보수는 밖으로는 세계화, 안으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막장에 이르렀다.

 

진보세력 역시 독재투쟁 과정에서 반민주주의적 이론과 개념으로 무장되었다가 민주화 이행기에는 지역주의와 타협했다. 이후 한국 상황에 맞는 이렇다할 진보적 이념과 정책 개발보다는 정권 쟁취에 여념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실질적인 지역주의가 형식적 진보라는 허울로 합리화되었다. ‘조국사태는 진보의 일상이 보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제도적 변화 차원에서도 한국민주주의는 많은 불균형을 보여왔다. 각종 권력집단의 변화, 교육, 언론 등 기능적 영역의 변화가 만족스럽지 못하게 진행돼왔다. 최근의 공수처 법안과 선거법은 많은 문제를 안고 통과되었다.

 

얼핏 보면 이런 혼란과 갈등이 한국 정치의 후퇴처럼 보일지 모른다. 후퇴적 사고의 이면엔 아마도 교과서에서 배운 민주주의의 기준에 비추어 갈 길이 멀다는 인식과 변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판단이 있을지 모른다. 초고속 경제개발의 경험을 감안한다면 이런 인식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혁명을 거치지 않은 민주주의의 정착은 오래 걸리기 마련이다. 영국의 경우 명예혁명 이후 여성투표권이 인정되기까지 거의 300년이 소요되었다. 한국의 경우 투쟁을 하지 않고 주어진 민주주의 제도가 많이 있다. 우리 헌법은 바로 이의 상징이다. 상징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권위주의가 오랫동안 공존해왔고 이는 이념적 민주주의와 생활적 권위주의라는 이중구조를 낳았다

 

한국 사회는 지난 30여년간 이 간격을 메꾸기 위해 많은 갈등과 혼돈을 감내해야 했다. 득표를 위한 단기적 경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지역주의의 이용에서 보듯이 이중구조를 강화시킨 측면이 없지 않다. 동시에 갑질문화에 대한 도전 등에서 잘 나타나듯 사회영역에서는 자발적인 민주화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제 정치권도 피할 수 없는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민주주의는 부조화와 불균형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발전해왔다.

 

더구나 한국 사회의 이런 변화를 비춰줄 역사적 길잡이가 마땅치 않은 상황도 내부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다. 탈식민지 국가 중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함께 이룬 나라는 한국이 유일무이하다. 한국은 단순히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이뤄낸 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제3세계에서 유일하게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새로운 사례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혼란과 갈등이 없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다고 혼란과 갈등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혼란과 갈등을 무작정 반복할 수도 없다.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정치권에서 보수와 진보 모두 형해화 단계에 들어 근본적 자기 변신과 변혁이 불가피하고 이에 따른 총체적 정치판의 개편과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검찰 개혁이든, 선거법 개혁이든 모든 제도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너무 단기적·정략적 이익에 몰두하여 제도 숙명론에 빠지는 것은 불필요한 갈등과 비관론을 야기할 뿐이다. 새로 채택된 선거법은 권한이 집중된 대통령중심제를 그대로 두고 한국 사회의 다양성을 어떻게 반영해야 할 것인가의 몸부림이 아닌가 한다. 동시에 검찰 개혁은 정치권과 검찰, 경찰 모두를 신뢰하지 못하는 제도 불신 속에서 변화를 꾀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이런 모순과 갈등 속에 제도가 의식을 끌어주고 의식이 다시 제도를 바꾸는 동적 변화 과정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이제 곳곳에 만연한 부조화와 불균형을 다시 점검하고 이를 반영한 신보수, 신진보를 창출할 때다. ‘골수 지역주의’ ‘유사 지역주의속에서 가식적으로 서로를 반대했던 정치그룹들이 재편되어야 한다. 새롭게 재편된 보수와 진보가 당면한 한국 사회의 경제, 사회 및 국제적 도전을 위한 문제를 제기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 수 있게 되어야 한다.

 

변화는 쉽게 오지 않고 빨리 오지도 않는다. 많은 혼선과 갈등을 수반한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보면 변화는 조금씩 나타난다. 다가오는 총선은 이런 한국적 의제를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하용출 미국 워싱턴대 석좌교수 경향 2020.01.07.

 

병든 이념의 탄핵

세상은 과학과 경험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태들로 가득하다. 과학과 첨단 기술의 발전에도 자연은 여전히 무지와 혼돈 투성이고 경제와 사회의 향방 역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이런 몽매를 헤치고 방향을 잡아 나아가게 하는 것이 이념(理念)이다. 이념은 과학과 경험칙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조직화된 신념 체계다. 혼돈과 불확실성에 대처하여 개개인과 사회가 행동을 결정하고 미래상을 찾아 협력하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을 갖는다.

 

이념은 다른 이념, 과학, 경험칙에 의해 견제되고 진화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선과 아집으로 병든다. 이렇게 병든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는 쇠락하고 멸망한다. 그래서 다양한 이념이 각축하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낡고 부패한 이념은 도태하고 혁신적이고 건강한 이념은 번성하는 이념 생태계.

 

우리의 이념 생태계는 다양성을 상실하고 한쪽에 치우쳐 있다. 낡고 병들고 부패한 이념의 퇴행적 정치가 개혁과 국가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 지형에서 보수는 지배적 질서, 정상(定常)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을 지향하고 진보는 정상의 한계를 극복하여 새로운 정상으로 나아갈 것을 지향한다. 보수는 정상의 안정적 유지가 갖는 가치를 팔고 진보는 새로운 정상의 필요성을 판다. 서로 상대방이 파는 가치를 깎아내리는 합리적 공방 끝에 득세하는 이념이 선별된다.

 

4·19의거와 6·10항쟁에서 진보가 제시한 새로운 정상은 정치적 자유와 민주화였다. 독재의 패악을 낳은 정상의 한계와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상의 필요에 대다수가 공감했다. 보수는 진보를 용공집단” “빨갱이” “좌파사회주의로 모는 반공 파시즘으로 대응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결국 독재자는 물러났다. 후진국 한국의 이념 생태계에서 보수는 파시즘이었고 진보는 민주주의였다.

 

역설적으로 1987년 민주화 이후 치러진 첫 선거에서 보수는 전쟁의 트라우마와 반공 파시즘의 그늘을 못 벗어난 국민 36.6%의 지지로 재집권했다. 12·12쿠데타의 주역, 독재의 핵심 인사들이 주축이었다. 민주화된 한국의 새로운 정상은 이렇게 시작됐다. 독재자와 그 일당의 부정부패에 대한 사법적 심판은 뒤늦었고 불완전했다. 보수와 진보의 합종연횡 그리고 지역갈등에 편승하여 파시즘은 여전히 보수의 주축으로 남았고 후진국 한국의 퇴행적 이념 생태계를 존속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외환위기 이후 정권교체를 이룬 진보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에 충실하게 국가 경제를 재정립했다. 보수가 잃어버린 10이라 일컫는 이 기간 동안 한국 경제는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고 이전과 질적으로 차별화된 기술선도 경제로 탈바꿈했다. 이처럼 진보정권 10년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 보수개혁이었고 없는 자들의 무한경쟁과 극심한 사회·경제 양극화를 낳았다. 진보는 경쟁, 혁신, 그리고 정상적 시장경제를 추구했고, 그래서 진보의 탈을 쓴 운동권 보수라고 보아 마땅했다. 그리고 다시 퇴행적 종북몰이로 점철된 보수 파시즘, 10년의 반동(反動)은 운동권 보수보다 보수의 가치를 대변하지 못했고 후진국형 개발독재의 퇴행과 적폐를 양산하다 마침내 그 지도자의 탄핵으로 끝났다.

 

이렇게 한국 정치의 이념 생태계는 병들었다. 소수가 배제되고 거대 양당이 독점하는 이념 생태계에서 진보의 이념은 빈약하고 보수의 이념은 시대착오적 극우에 치우쳤다. 거대 양당의 공방이 보이는 극단의 언어와 허황된 비판 그리고 극한의 폭력 대치가 이를 증명한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노쇠한 인맥, 시대착오적 반공 극우파시즘, 분단과 군사적 대치를 악용하는 정치, 거대 정당이 독점하는 의회정치, 이런 것들이 이념 생태계를 오염시켰다.

현 집권세력은 진보가 아니라 중도 보수의 이념에 가깝다. 공정경제와 혁신성장이란 정책기조는 현 보수야당이 추구했던 경제민주화 및 창조경제와 같은 맥락이다. 시장경제의 경쟁과 혁신을 가로막는 불공정과 재벌의 시장지배력 남용을 근절하자는 것, 시장경제의 기본원리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세제개혁과 복지정책도 중도개혁에 가깝다. 더 진보적 이념들로 이념 생태계가 균형 잡혀야 한다. 노동자, 여성, 이민자, 외국인 등 차별받는 구성원들을 대변하는 진보, 환경의 가치와 미래세대를 대변하는 진보, 급격한 기술변화의 부작용에 선제적으로 대처하는 진보의 이념 다양성이 필요하다. 속임수, 거짓, 협잡과 꼼수에만 능한 병든 이념의 폐족들을 탄핵하고 합리적 보수와 다양한 진보의 이념들이 진검승부를 벌이는 건강한 이념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발전할 수 있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분배정의연구센터장 경향 2020.01.08.

 

불타는 지구, 무책임한 정치

새해가 되었다지만 세상은 여전히, 아니 갈수록 흉흉해지고 있다. 암담한 장래 때문에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젊은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는 여론조사는 우리의 마음을 몹시 쓰리게 만든다. 그 젊은이들을 너그럽게 받아줄 외국은 있는가. 지금은 난민의 시대, 떠돌이 유민들이 창궐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오늘날의 난민은 기본적으로 환경난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유럽과 미국에서 가장 골치 아픈 현안이 되어 있는 이슬람 난민들이나 중남미 난민들은 무엇보다 극심한 가뭄과 기근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유랑민들이다. 좀 더 극적인 경우는 차오르는 바닷물 때문에 거주가 불가능하게 된 남태평양 섬들의 주민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국제원조 기관과 이웃 나라들의 도움으로 큰 육지로 이주하는 게 지금까지는 가능했으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심히 불투명하다. 지금은 곤경에 처해 있지 않은 나라가 없기 때문인데, 대표적인 예는 오스트레일리아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남태평양 섬나라 사람들의 이주를 도와준 그 오스트레일리아가 지금 걷잡을 수 없는 삼림화재로 아비규환이다. 지금까지 남한 면적의 절반이 불에 타버린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는 문자 그대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사진으로만 봐도 이 지역 최대 도시 시드니의 하늘은 온통 핏빛인데다가 자욱한 연기가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다. 그 짙은 연기 속으로 집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미친 듯이 헬리콥터 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은 지구 종말의 날을 그린 영화 장면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보도에 따르면, 벌써 스무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많은 집과 공동체가 붕괴하고 숱한 생명체가 불에 타 죽었다. 군대까지 동원되었지만 이 재앙이 언제 끝날지, 끝나는 날이 오기는 할 것인지, 지금은 누구도 모를 가공할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일부 지역에는 얼마간의 비가 내려 산불 확산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고 하지만 불길은 이미 너무도 널리 그리고 깊게 번져버렸다. 더욱이 예년의 경우를 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산불이 본격화되는 것은 이제부터라고 한다. 도시민들의 삶도 삶이지만 숲속의 원주민, 동식물들, 그리고 아까운 생태계가 얼마나 더 파괴될 것인가.

 

오랫동안 오스트레일리아는 우리의 뇌리 속에 아름답고 청정한 자연의 나라, 원시적 고요가 훼손 없이 보존되어 있는 나라였다. 또한 그 해변은 상쾌한 바람을 쐬며, 끝없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넓고 긴 모래밭을 맨발로 걷는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장소였다. 물론 옛날에는 어디서든 존재했던 그런 장소는 지구 전체가 개발 광풍에 휩싸이면서 어느새 특권적인 장소로 변해버린 탓에, 오스트레일리아는 많은 관광객을 유혹하는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지금 유례없이 처참한 재앙을 겪고 있다. 이 사태가 잘 수습되지 않는다면 오스트레일리아는 3류 국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의 불행에 대해 잔인한 말을 하는 감이 있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비극은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 이번의 산불은 자연적이되 동시에 비자연적인 재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과학자들도 지적했지만, 특히 현지의 소방전문가들은 이번 산불이 제어 불능 상태가 된 결정적인 요인이 기후변화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27년간의 산불 진화 경력을 가진 어떤 지역 소방책임자는 자신이 평생 겪은 것 중에서 이번처럼 강도가 세고 속도가 빠른 산불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오스트레일리아의 이번 산불은 건조하고 더운 계절마다 반복되는 단순한 산불재해가 아닌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동쪽에 있는 세계 최장의 산호초(그레이트배리어리프)가 대규모로 사멸되어 가고 있는 현상도 같은 원인, 즉 지구온난화에 의한 해수 온도 상승 때문이라고 과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좋은 환경을 가진 나라에 왜 환경론자들이 많은지 궁금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은, 뜻밖에도 오스트레일리아가 생태적으로 매우 취약한 나라라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그곳 도시의 평균 기온은 연일 40도를 훨씬 웃돌고, 곡창지대에도 가뭄이 몇 해째나 계속되고 있다. 물 부족 사태도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조만간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비가 거의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있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강우 전선이 대륙 아래로 내려간 지점에서만 형성될 것이라는데, 이 예측대로라면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이 사막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게 기후변화 탓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기후변화와 화석연료의 연관성을 인정하지 않고,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해왔다. 이 점에서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구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가들은 왜 이렇게 어리석고 무책임할까? 필시 그 주된 원인은 화석연료 산업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제 구조에 있음이 분명하다. 현재 세계 전체의 이산화탄소 배출 중 오스트레일리아가 점하는 비중은 3.1%. 오스트레일리아 인구(2700)가 세계 전체의 0.3%라는 점을 고려하면 큰 도덕적 책임을 느껴야 할 비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세계 최대의 석탄 및 천연가스 수출국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이를 수입하여 쓰는 나라들(중국, 인도,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대체로 환경규제가 느슨하고, 개발욕망이 매우 강한 나라들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화석연료 소비량과 관계없이 오스트레일리아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에 속하는 나라임이 틀림없고, 그런 점에서 이번의 산불 재앙에는 인과응보라는 측면이 명백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재앙은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화석연료 의존도가 오스트레일리아 못지않은 한국 경제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오늘날 무역의존도가 특히 심한 한국의 주요 수출·수입품은 석유 관련 제품 일색이다. 산유국도 아니면서 이토록 기이한 한국 경제의 틀은, 언제 어떤 파국이 닥칠지 모르는 기후변화 시대에, 극히 위태로운 자멸적 구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온갖 정황으로 보건대 지금 우리에게 가장 긴급한 것은 탄소 경제를 청산하고 생태 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한 치열한 모색과 사회적 토론과 정치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지금 한국의 미디어와 지식인들은 (따져보면 화석연료 시대의 기득권 구조를 유지·강화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한) 선거 이야기만 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한겨레 2020.01.09.

 

미국은 왜 중동에서 지는 전쟁을 계속하나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중동정책은 가장 해명이 안 된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명백히 지는 전쟁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 전까지 미국은 중동에서 역내 국가들의 세력균형을 맞추는 역외 균형자정책을 추구하며, 군사력 개입을 하지 않았다. 소련 봉쇄를 위해 터키에서만 미군이 주둔했고, 이란에서 군사시설을 운용한 정도였다. 이슬람이 엄격한 다른 중동 국가에서 미군 주둔이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이는 인구, 자원, 기술, 군사력, 영토에서 중동 최대 국가인 이란이 미국의 굳건한 동맹국이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란은 페르시아만을 통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미국은 이란에 기대 페르시아만의 안보를 확보했다.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중동에서 미국의 전략 입지를 무너뜨렸다. 이란이 최대 반미 국가로 변한데다, 이슬람혁명은 중동 전역에 전파될 심각한 안보 위기였다. 실제로 이슬람주의가 그때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 위기가 터지자,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80년 연두교서에서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에 필요하면 직접적인 군사력 개입을 하겠다는 카터 독트린을 천명했다. 지금까지 미국 중동정책의 핵심이다. 카터 독트린은 이란 봉쇄와 동의어이다.

 

미국의 이란 봉쇄는 그 이후 중동에서 벌어진 모든 분쟁의 시발이었다. 중동 분쟁은 팔레스타인 분쟁에서 이란발 분쟁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배후로 하여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이란을 침공해 8년간 벌인 이란-이라크 전쟁, 반혁명의 총대를 메고 이란과 전쟁했으나 빚더미에만 오른 후세인 정권의 쿠웨이트 점령, 이를 격퇴한 미국의 걸프전, 걸프전 때 미군의 개입에 격분한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와 9·11 테러, 그 보복에 나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및 이라크 전쟁,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이슬람국가(IS)의 부상과 그 격퇴전, 이슬람국가 격퇴전에서 주역으로 떠오른 쿠르드족, 터키의 쿠르드족 침공 등이 이어졌다.

 

이라크 전쟁 이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 철군 등 중동 수렁에서 탈출해 아시아로 미국의 국력 전개를 옮기는 리밸런싱정책을 추구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동전쟁 종식과 미 군사력 철수를 공언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시리아 내전과 이슬람국가, 아프간 전쟁 때문에 중동에 더 빠졌다. 트럼프는 이란과의 대결을 강화하는 모순된 조처를 취해 이란과 전쟁 문턱까지 갔다.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암살로 촉발된 미-이란 분쟁은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과의 핵협정인 포괄적 공동행동계획에서 2018년 일방적으로 탈퇴했기 때문이다. 중동전쟁 종식을 공언한 트럼프가 이란과의 대결은 강화하는 모순된 조처를 취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란의 경쟁국인 이스라엘과 사우디가 첫 원인이다. 두 나라는 이란이 국제사회에 복귀하면, 중동에서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우려한다. 둘째, 미국 내 친이스라엘 세력 및 네오콘 등 강경 매파들도 이란의 이슬람공화국을 중동 지도에서 지워버려야만 한다는 신념을 갖고, 이란과의 핵협정을 반대해왔다. 트럼프는 이들의 표가 필요하고, 사우디에 무기를 파는 이익을 택했다.

 

트럼프의 미국한테 이스라엘과 사우디 주축의 반이란 동맹은 이란에 대한 세력균형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세력균형 시도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이란핵협정 탈퇴 이후 이란 관련 분쟁은 더욱 격화되며, 이란의 영향력은 커졌다.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들의 미국을 향한 저강도 전쟁, 예멘 내전에서 친이란 후티반군의 득세와 사우디에 대한위협, 이란이 직접 나선 페르시아만에서 유조선 통행 방해와 미국 드론 격추, 사우디의 최대 석유시설 압카이크 정유시설에 대한 공격 등은 중동의 불안정성을 더욱 높였다. 사우디에는 현실적 안보위협으로 다가왔다. 솔레이마니 암살 사건 전에 <뉴욕 타임스>는 사우디의 빈 살만 왕세자가 미국에 올인하는 반이란 노선을 접고, 이란과의 대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솔레이마니 암살로 전쟁 직전까지 치닫던 미국과 이란은 일단 자제했다. 미국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이란에 제재를 강화하고, 굴복하라는 기존의 봉쇄 정책만 반복되고 있다. 이란은 미국이 원하는 방식의 굴복은 하지 않을 것이다. 솔레이마니 암살에 대한 보복은 시간이 지나면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다.

미국은 중동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미국의 중동정책이라는 것은 과연 있는 것인가?

정의길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한겨레 2020.01.09.

 

13월의 월급불편한 진실

바야흐로 유리지갑봉급생활자들의 ‘13월의 월급연말정산의 시간이다. 오늘부터는 국세청까지 나서 의료비, 기부금 등 공제자료를 일괄 수집한 연말정산 간소화 서비스를 제공한다.

 

연말정산은 매달 봉급을 받을 때 뗐던 세금을 고용주가 최종 확정해 정산하는 작업이다. 작년엔 1250만명이 1인당 평균 58만원씩 약 72000억원을 돌려받았고 351만명은 1인당 평균 84만원씩 약 3조원을 더 냈다. 엄청난 규모다. 하지만 사실은 돌려받는 환급금은 추가로 받는 보너스가 아니라 최장 13개월간 잘못 낸 무이자세금에 불과하다.

 

정부에 연말정산은, 1850만명이나 되는 봉급생활자를 일일이 대하지 않고도 고용주에게 의무만 지워서 38조원의 세금을 손쉽게 징수하는 신통방통한 제도다. 이런 제도 덕에 세계 최저 수준의 징세비, 최고 수준의 가성비를 자랑한다.

연말정산은 경제. 지출액의 소득공제나 세액공제 여부에 따라 시장과 경제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20년 전 김대중 정부가 신용카드 사용액 소득공제를 도입하면서 자영업자 과표 양성화와 함께 내수 확대까지 이뤘다. 연말정산은 오늘날 신용카드 경제를 정착시킨 일등공신이다. 그만큼 경제정책과도 밀접하다.

 

연말정산은 정치. 박근혜 정부가 2013년 출범하자마자 세수부족 속에 봉급생활자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꾸는 세법개정안을 내놓았다. 기업 감세 속에 유리지갑 증세로 촉발된 연말정산 사태는 몇 년간 정국을 뒤흔들었다. 대통령이 유감을 표명하고 두 번의 연말정산까지 허용하며 세금을 줄여주었지만, 민심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처럼 중차대한 연말정산에 얼마 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초일류 기업인 삼성이 그룹사 임직원들의 연말정산 자료를 뒤져 진보 단체와 정당에 후원 기부한 사람들을 특별관리해온 사실이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다.

 

삼성의 연말정산 자료 사적 전용은 사생활 보호와 행복추구권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범죄행위이며, 궁극적으로는 국가운영의 근간이자 국민의 의무인 납세를 방해하는 일이다. 그동안 국세청은 세법상 비밀유지규정에 따라 대의기관인 국회가 요구해도 개별 납세정보는 끝까지 비공개해왔다. 그런데 세법절차에 따라 정부와 고용주를 믿고 넘긴 개인정보와 납세정보를 이같이 잘못 사용된다면, 납세자는 불안해 어떻게 살고 누굴 믿고 납세할까?

 

미국 등 외국에서는 봉급생활자의 소득세는 고용주를 통해 원천징수하기는 하지만 정부도 아닌 개별 기업에 사생활 정보를 넘기면서 연말정산을 하라고 하진 않는다. 다른 납세자가 그렇듯 세금 신고는 자기 책임과 계산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기에 정부는 비용과 시간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납세자를 지원한다.

 

우리는 정부가 조세입법을 대부분 주도하다 보니 민간에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국민에게 손해를 주는 것은 물론 민주질서마저 흐트러뜨리는 세금제도가 버젓이 운영된다. 삼성의 연말정산 스캔들은 후진적인 연말정산 시스템의 조종을 울리고 있다. 우선 연말정산을 위한 사생활 정보나 납세정보는 사적 전용을 금지하는 등 세법상 비밀유지의무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고용주에게 일방적으로 맡길 게 아니라 납세자가 직접 자기 소득과 공제 내용, 환급 규모를 확인하고 원클릭으로 소득세를 신고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금 국세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원천납세 전산정보와 연말정산 간소화 서비스 자료 등 과세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시스템 구축과 시행에 무리가 없다.

‘13월의 월급이라는 미명 아래 봉급생활자의 기본권을 훼손하고 우민화해온 연말정산, 이제 봉급생활자가 정보와 납세의 자기결정권에 따른 정당한 소득세 납세자로 거듭나게 바꿔야 한다. ‘13월의 월급에 취하면 유리지갑은 결코 세금주권자가 될 수 없다.

구재이 한국납세자권리 연구소장·세무사 경향 2020.01.14

 

얼마나 일해야 충분할까

정부가 주 52시간 근로제(40시간의 법정근로+12시간의 연장근로)를 도입하면서 우리 사회에서는 첨예한 대립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이 정책이 경제를 파탄 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은 보수언론이 이 문제를 다루며 쓴 기사들의 표제들이다. “저녁 있는 삶보다 저녁거리 살 돈이 중요 ~ 일 더하게 해주세요” “1년 뒤에 공장 문 닫을 판” “52시간 포비아에 떠는 2.4만개 기업” “지킬 수 없고 지켜도 행복하지 않은 주 52시간”. 52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것은 과도하고 대한민국은 좀 더 일해야 하는 나라라고 이야기하는 보수 정치인들도 있었다. 2019년에는 50인 이상~299인 이하의 중소기업에는 아직 시행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벌써 중소기업이 망했다는 허위에 가까운 과장된 기사들까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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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도 정부의 노동시간 단축 정책이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1998년 프랑스에서 문제가 된 것이 35시간이었다. 물론 당시 프랑스에서도 노동시간 단축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노사 간의 협의와 법안의 수정 보완으로 주 35시간은 안정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보수언론들은 프랑스의 주 35시간 노동제가 무모한 개혁 중 하나였고 가장 어리석은 조치였다고 주장하는 일부 해외 보수언론들을 인용하면서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것은 경제를 망치는 정책이라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일해야 충분할까? 16세기 영국인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이상적인 노동시간을 제시했다. <유토피아>에서는 하루에 여섯 시간만 노동에 할애한다. 오전에 세 시간 일하고 점심 식사 후에는 두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세 시간 노동한다. 이는 주당 30시간 일하는 것이다. 하루에 단지 여섯 시간밖에 일하지 않으면 필수품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대해 토머스 모어는 그 노동시간만으로도 생활필수품뿐 아니라 편의품까지 충분히 생산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 방법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16세기 토머스 모어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19세기 산업혁명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은 연간 3588시간이라는 살인적 노동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장시간의 노동과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려는 움직임들이 19세기 유럽 국가들에서 일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 영국은 처음으로 8~12세는 하루 10시간의 노동을, 13~16세는 12시간의 노동을 법으로 규정했다. 1919년에는 프랑스가 주 40시간 근로제도를 도입했다.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노동시간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1930년에 쓴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이라는 글에서 100년 후 경제가 8배로 성장하고, 생활수준은 4~8배로 개선되고 노동시간은 15시간으로 단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즉 하루에 3시간만 일하게 되는 것이다. 케인스가 예상했던 만큼 노동시간은 단축되지 않았지만 유럽 국가들은 노동시간을 점진적으로 줄여왔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현재 우리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길다(2017OECD 국가 연평균 노동시간 멕시코 2258시간, 대한민국 2024시간, 프랑스 1526시간, 독일 1356시간). 이 자료가 보여주듯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과로사의 의미를 알 정도로 우리는 이미 과도하게 일하고 있다.

2019년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60% 이상이 주 52시간 제도를 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언론들은 52시간제 도입과 최저임금 인상이 대한민국 경제를 위기에 빠뜨렸고 이를 폐기하지 않으면 대한민국 경제가 영원히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이들 언론이 목표하는 것이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승부하는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의 모델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면 주 52시간 노동에 대한 과도한 공격과 왜곡은 멈춰야 할 것이다. 긴 역사의 흐름을 기준으로 보면 노동시간 단축과 최저임금 인상은 도덕적 진보이고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당위적인 길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남종국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경향 2020.01.15.

 

김지형 뒤에 숨어버린 이재용

저는 오늘 삼성 회장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특검 문제로 국민에게 많은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면서 법적 도의적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2008422일 이건희 회장은 삼성 특검의 기소를 앞두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국민 사과문을 읽었다. 자신의 경영 퇴진과 정도·투명경영 강화를 포함한 10개 항의 쇄신안이 뒤따랐다

 

하지만 이어진 특검 재판에서 그의 태도는 돌변했다. 경영권 불법 승계 혐의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타이밍과 운이 좋았을 뿐 경영권 승계를 지시한 적이 없다.” 이재용 부회장은 부친인 이 회장으로부터 61억원을 증여받은 뒤 에버랜드 주식 등을 헐값에 인수해 1조원이 넘는 삼성 주식을 확보했다. 그런데도 이를 모두 이라고 우겼으니, 국민을 바보로 여긴 것 같다. 이 회장은 1년 반 뒤인 2009년 말 엠비(MB) 정부에 의해 사면복권됐고, 석달 뒤에는 경영에 복귀했다. 삼성 쇄신안은 그렇게 깜짝쇼로 끝났다.

 

삼성이 준법경영을 위해 준법감시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이유는 이런 흑역사 때문이다. 삼성은 대형 불법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쇄신안을 내놓았지만, 모두 위기 모면용이벤트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엑스파일 사건 직후인 2006년에 그랬고, 2017년 이재용 부회장 뇌물공여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잊혔지만, 20053월 윤리·투명경영을 담은 삼성 경영원칙발표는 한편의 코미디였다. 삼성은 노무현 정부와 체결한 투명사회 협약을 실천한다고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이 1987년 취임 때부터 역설한 윤리경영 철학을 구체화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불과 넉달 뒤 엑스파일 사건이 터지면서, 정치권·검찰과의 오랜 검은 유착관계가 드러났다. 삼성이 국민을 바보 취급한 건 한번이 아니다.

 

준법감시위원장을 맡은 김지형 전 대법관도 부담이 컸던 것 같다. 처음에는 삼성의 진정성을 믿기 어려워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부회장이 준법감시위의 완전한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해 마음을 바꿨다고 밝혔다.

 

정말 이번에는 삼성을 믿어도 될까? 객관적으로 보면 비관적이다. 무엇보다 준법감시위는 삼성의 자발성에 기초한 게 아니다. 뇌물사건 파기 환송심 재판부가 실효적 준법감시제도를 만들라고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발표도 117일 파기 환송심 재판을 1주일 앞두고 이뤄졌다. 벌써부터 이재용 집행유예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재벌 총수에게는 죄가 무거워도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의 이른바 ‘3·5법칙이 적용되는 재벌 봐주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유령처럼 어른거린다.

 

더 큰 문제는 이 부회장의 태도다. 지난 3년간 삼성에 범죄기업이라는 오명을 씌운 사건들은 모두 경영권 승계에서 비롯됐다.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의혹은 그가 주식을 보유한 제일모직에 유리한 합병 비율이 쟁점이다. 이후 무리한 합병에 대한 국민연금의 찬성을 얻으려고 국정농단 세력에 87억원의 뇌물을 줬다. 또 합병을 합리화하기 위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를 저지른 혐의를 받는다. 이어 공장 바닥을 뜯고 분식회계의 증거를 숨겼다. 이 부회장의 욕심만 아니라면 모두 없었을 일들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책임감이 있었다면, 진작에 국민에게 직접 사과하고 경영 퇴진 등을 포함한 쇄신안을 내놨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 잘못은 내가 다 지고 갈 테니 삼성의 변화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20172월 기소 이후 3년 동안 침묵만 지키더니 결국 김 전 대법관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숨어버렸다. 김 전 대법관이 삼성전자 백혈병 조정위원장 등을 맡은 전력으로 사회적 신망이 높지만, 이 부회장의 책임을 대신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의 태도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총수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재벌의 황제경영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에 치명적 타격을 줄 위험을 감수하고 뇌물을 제공했다. 경영권 승계만 성공하면 수조원의 막대한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총수부터 이런 검은 유혹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준법경영은 공염불이다.

 

삼성은 준법감시위 출범 직전 정부에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해법을 물었다고 한다. 경영학의 구루인 피터 드러커는 최고경영자의 핵심 덕목으로 기꺼이 책임을 떠맡고 결정을 내리는 것을 꼽았다. 이 부회장은 더 이상 뒤로 숨지 말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곽정수 논설위원 한겨레 2020.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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