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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시사만평-주간 쟁점

24.10.7~

by 이성근 2024. 10. 6.

 

요즘 아이들의 '보수''진보' 구분법,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아이들은 나의 스승] 학교가 아닌, 유튜브로 정치를 배우는 현실

'보수'.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오독되는 단어다. 역사 수업 도중 좌파와 우파의 개념을 묻는 데엔 프랑스 혁명 당시를 소개하며 유래라도 설명할 수 있지만, 보수라는 단어만큼은 답변하기가 여간 녹록지 않다. 그냥 보수는 우파를 가리키는 말이라며 눙치고 넘어가기 일쑤다.

"지금 여당이 보수고, 야당이 진보인 거죠?"

아이들 다수의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규정이지만, 교사로서 선뜻 동의하긴 어렵다. 당시의 집권 세력을 무턱대고 보수라고 할 수 없을뿐더러 단어에 내포된 고유의 가치가 희화화할 우려가 커서다. 이는 보수의 대척점에 있는 진보라는 단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보수가 뭔지 질문이 나올 때마다 칠판에 한자를 적곤 한다. 지킬 보()에 지킬 수(). 물론, 두 한자 중 한 글자라도 아는 아이가 드물다. 요즘 아이들에게 한자는 차라리 '그림'이다. 그런데도 굳이 한자를 쓰는 이유는 '지킨다'는 의미가 중첩된 단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다.

'지킨다'는 타동사다. '무엇을'에 해당하는 목적어가 필요한 동사라는 뜻이다. 보수를 자임한다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부러 한자를 끌어온 거다. 이따금 '보수당'에 해당하는 'Conservative Party'라는 영어를 활용하기도 하지만, 경험상 한자에 견줘 임팩트가 떨어진다.

"당연히 권력을 지킨다는 뜻이겠죠."

"그럼 진보 세력이 집권하면, 그들도 권력을 유지하려 할 테니 보수로 규정될 수 있을까?"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사회 구조, 질서 등을 지킨다는 뜻이라고 어디선가 읽었어요."

"그렇다면 기존의 전통적 가치와 사회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조선시대? 아니면 대한민국? 그도 아니면 민주화 이후?"

"보수는 자본주의를 신봉하고, 진보는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대안적인 이념으로 사회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는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이 없었을까?"

아이들의 질문을 몽니 부리듯 반박하고 나면, 며칠 뒤 꼬리에 꼬리를 문 또 다른 질문을 가져와 자연스럽게 난상토론이 벌어진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구체적으로 배운 적도 없을뿐더러 친구들끼리 대화 소재로 삼는 경우도 거의 없어 토론이 겉돌 수밖에 없다. 그들의 머릿속 지식은 대부분 인터넷 포털이나 유튜브를 통해 얻은 '믿거나 말거나' 식 정보다.

그러다 보니, 정작 동서고금에 두루 적용되는 보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인식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시대와 국가, 정치, 경제적 입장에 따라 보수에 대한 개념이 조금씩 다를지언정, 우리가 간과해서 그렇지, 시공간을 넘어 관통하는 보수의 가치가 있다. 바로 '공동체를 위한 멸사봉공의 헌신'이 그것이다.

'보수'의 진짜 의미

반상의 구별이 엄격한 봉건사회에서도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보듬고 국난 때엔 기꺼이 맨 앞에서 불의에 맞서는 이들이 보수라는 이름으로 우러름을 받았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외침에 맞서 의연하게 무기를 들었던 양반 유생 의병장들이 대표적 예다. 그들을 향해 서세동점의 시기 국제 정세의 변화에 어두웠다고 손가락질할 수 없는 이유다.

비록 동학농민군을 신분 질서를 어지럽혔다며 '비도'로 매도했지만, 국권이 피탈되자 자결로써 항거한 황현이야말로 보수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을사늑약에 맞서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은 또 어떤가. 대대로 정승과 판서를 낸 경화세족 이회영의 여섯 형제가 가산을 모두 정리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실 또한 보수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게 한다.

단언컨대, 그들을 뭉뚱그려 '위정척사'라는 이름으로 범주화해 이해하는 건 현재를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역량을 키운다는 역사교육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본다. 보수의 보편적 가치를 떠올릴 때, 우리 역사에서 보수의 원류는 거기서 찾는 게 합당하다. 그저 '개화'의 반대말로만 여긴 채 맹목적으로 암기하고 마는 공부는 되레 역사의식의 성장을 저해한다.

수업 시간 아이들도 황현, 최익현, 이회영 등의 이름이 거론되면 가슴 뭉클해하며 옷깃을 여민다. 그들에게선 언뜻 고지식해 보일 정도의 올곧음과 대쪽 같은 기개가 느껴진다고 입을 모은다. 대의를 따르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하나뿐인 목숨마저 초개와 같이 버리는 그들의 절의는, 그들이 지닌 역사관과 세계관에 동의 여부를 떠나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그들의 행적을 보수의 가치와 연결 지어 이해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마치 보수가 최근 만들어진 개념 정도로 여긴다. 심지어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 체제인 영국의 정당사를 들먹이며 우리의 정치 현실과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아이도 적지 않다. 동서양의 보수 개념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다.

난상토론의 결말은 서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걸로 마무리됐다. 애초 칼로 두부 자르듯 명확하게 규정될 수 없는 개념이어서 토론 자체가 무척 조심스럽긴 했다. 교과서의 권위에 기대어 보수의 개념을 원용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진보는 '진보당 사건'을 비롯해 보통명사로도 종종 등장하지만, 보수라는 단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유튜브로 배우는 위험한 이분법

'인터넷을 통하여 정책에 대한 의견 제시가 가능해지면서 시민의 정치 참여가 활발해졌다. 이 과정에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도 커지게 되었다.' (해냄에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300쪽에서 발췌)

'시민의 정치 참여가 확대되다'는 주제 단원에서 이렇게 달랑 한 줄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TV나 인터넷에서는 흔하디흔한 일상 용어지만, 교과서에서 보수는 사실상 금기어처럼 여겨진다. 동아시아의 갈등과 평화 노력을 다룬 단원에서도 일본 정권을 '우파'로 통칭할 뿐 보수라는 용어는 일절 쓰이지 않는다.

결국 요즘 아이들은 보수에 대한 개념을 인터넷 포털과 유튜브 등을 통해 학습하고, 그게 정답인 줄로 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니 온갖 자극적인 콘텐츠가 난무하는 유튜브가 교과서 역할을 대신하는 꼴이다. 얼마 전 한 아이의 '명쾌한 보수와 진보 구분법'을 듣고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는데, 그를 나무랄 수 없었던 이유다.

'단순화하면'이라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그는 보수와 진보가 이렇게 나뉜다고 했다. 경상도 출신이고, 연령층은 60대 이상이며, 농어촌 지역에 거주하면 보수이고, 전라도 출신에 40~50대 중년층이고, 도시 지역에 거주하면 진보라고 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물으니, 부모님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보수와 진보를 온존한 지역주의와 뒤섞은 대단히 위험한 이분법이다. 지금의 여당이 보수고, 야당이 진보라는 아이들의 납작한 인식도 거기서 비롯된 걸로 보인다. 어려서부터 부모 세대와 유튜브를 통해 주입된 편견이 진실로 둔갑하며 온갖 가짜 뉴스의 온상이 되고 있다.

요컨대, 더 늦기 전에 아이들에게 보수와 진보에 관한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교실에서 아이들끼리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야 하고, 교사는 기꺼이 촉진자가 되어야 한다. '교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 운운하며 교사의 손발을 묶고 입을 닫도록 겁박해서는 곤란하다.

'공동체를 위한 멸사봉공의 헌신'이라는 보수의 가치가 존중받기는커녕 아이들의 입에서조차 '꼴통'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새는 두 날개로 난다'는 비유처럼, 보수가 본령에 충실할 때라야 진보도 건강해지는 법이다. '청년 보수'라고 쓰고, '극우 유튜버'로 읽는다는 한 아이의 일갈이 섬뜩하다.

서부원(ernesto) 오마이뉴스

불안정·불평등·파편화의 피로감그 절망을 넘어서게 하는 연결감

김미정 문학평론가-이서수 작가 대담

바야흐로 노동소설전성기다. 1970~1980년대 노동운동의 흐름과 맞물려, 운동의 지평에서 창작됐던 노동소설들의 전형을 떠올린다면 선뜻 수긍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노동의 주제를 환기시키는 작품은 빈번하게 등장했고, 서사의 스펙트럼도 넓어졌다”(김미정 문학평론가)라는 분석처럼 노동소설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1980년대 노동소설이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를 기본값으로 공동체(노조)를 통해 성장하고 단결하는 서사를 중심에 두었다면, 오늘날 소설에서는 비정규직·프리랜서·감정노동자·돌봄 노동자·플랫폼노동자 등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노동자들이 주체로 등장한다. 또 공동체 중심 서사보다는 노동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개인들, 일을 하면서 마주치는 심리적·정서적 균열 등 노동과 관련한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중심에 둔 서사”(이서수 소설가)가 주를 이룬다. 이처럼 다양한 노동소설의 등장은 오늘날의 노동의 문제에 많은 독자들이 공명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지속되는 혹은 더 강고해진 구조적 모순을 방증하기도 한다.

경향신문은 창간기획으로 과거와는 다른 오늘날의 노동소설의 현황과 특징을 조명하고, 불안정 노동과 불평등이 강화되고 노동소득의 가치가 추락하는 오늘날, 문학이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모색해보는 대담을 마련했다.

김미정 문학평론가는 <움직이는 별자리들>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공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 등을 펴냈고, 최근 질문을 바꾸면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동-자본의 뫼비우스 띠와 2010년대 후반 한국소설의 일 노동등의 저술을 통해 오늘날의 노동 현실과 이를 반영하는 한국소설을 심도 있게 조명해 왔다. 이서수 작가는 2014년 단편소설 구제, 빈티지 혹은 구원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젊은 근희의 행진> <헬프 미 시스터> 등의 작품에서 한국 사회 노동 현실을 세밀하게 그려왔다. 동시대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을 다루는 월급 사실주의 동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대담은 지난 달 4일 경향신문사에서 진행됐다.

 

-1980년대에는 노동소설이 하나의 장르처럼 인식됐는데요. 오늘날에는 이 명칭을 낯설게 여기는 독자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과거의 노동소설과 오늘날의 노동소설을 같다고 볼 수 있을까요.

김미정=“과거 노동소설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와 연결돼 있었죠. 한국 근현대 시기 노동은 희생과 억압의 대상이었고, 노동운동은 이에 맞서 저항과 투쟁을 이어왔습니다. 한국에서의 노동 문학, 노동소설은 그 과정과 느슨하게 연대하면서 같이 갔습니다. 그때의 노동자는 정치, 사회적인 변혁의 주체로 기대받았고, 작가 역시 그와 행보를 함께 했지요.”

이서수=“그런 측면에서 저는 노동소설명칭이 시대와 불화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노동소설을 쓰는 작가로도 알려졌지만, 과연 내가 쓴 소설이 노동소설의 전형에 맞는지 검열할 때가 있습니다. ‘노동소설이라고 하면 기업과 노조의 대립같은 공동체 중심 서사나 반신자유주의 담론을 다룬 작품들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반면 지금 나오는 소설들은 그보다는 노동과 관련한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중심에 둔 서사가 많아요. 과거에는 노동자의 이미지가 집단으로 그려졌다면, 이제는 거대한 기업 앞에 왜소해진 개인으로 노동자가 먼저 떠오릅니다. 과거에는 작가가 앞장서서 이야기하는 존재였다면 지금은 작가도 수많은 개인 중 한 명으로 자리가 바뀌었다고 느끼고요. 또 과거에는 특정 집단이 주로 노동소설을 향유했다면 지금은 독자 폭이 훨씬 넓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노동소설하면 과거의 전형을 떠올리게 돼 이 명칭이 시대와 안 맞는 측면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미정=“말씀하셨듯, 과거의 노동소설과 달라진 점들 때문에 저는 노동을 서사화한 소설이라고 느슨하게 표현하는 편이에요. 지금 노동을 다룬 소설은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특이성과 주체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과거 노동의 표상은 정규직, 대공장, 남성이 기본값이었고 노동소설도 이 같은 사회상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러나 2010년대 중반 이후 나온 소설들을 훑어보면 정말 다양해요. 서비스 감정노동자의 굴욕적 일상(황정은 복경’), 사무직 비정규직의 삶(김금희 조중균의 세계’), 알바생과 중간관리자의 갈등(장강명, ‘알바생 자르기’), 바이럴 마케팅 종사자의 죄책감(김세희, ‘가만한 나날’), IT스타트업 사무실의 풍경(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신뢰해온 회사에 배신당한 노동자(김혜진, <9번의 일>), 시스템이 만든 노동의 분할과 적대들(조해진, ‘경계선 사이로’), 교육 현장 고학력 여성들의 생존기(서수진, <코리안 티처>) 등 나열하기도 벅찰 정도의 다양한 소설들이 등장했죠. 다만 저는 그렇다고 노동소설이라는 말을 버리거나 과거와 단절적으로 논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노동소설이 특정 노동에 집중된 측면이 있었지만, 인간과 노동이 맺는 의미와 가치를 그처럼 고민했던 시대도 또 없었던 것 같아요. 여전히 신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로 인한 노동의 문제는 변함없이 혹은 강고하게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당대의 고민을 이어받아 지금 관점에서 재구성해 봐도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노동소설이 변화하고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변한 시점이나 계기가 있을까요.

김미정=“아시다시피 1997IMF를 기점으로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로 전환하고 노동의 형태 또한 달라졌죠. 저는 신자유주의라는 큰 이야기를 사람들이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시점을 2000년대 중후반으로 봅니다. 예컨대 200611월 비정규직보호법이 통과됐는데, 이로써 비정규직이라는 유동적 노동이 오늘날 일반적인 노동 형태로 공식화된 셈이죠. 그래서 우선 저는 2000년대 초중반 나온 소설들에 주목하고 싶은데요. 제가 느낀 당시 소설들의 공통된 특징은 부당하거나 모순된 상황에서도 인물들이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그 대신 유머로 승화하거나 속으로 삼키는 불안하고 기묘한 낙관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요. 즐겁게 읽으면서도, 그 사이에 뭔가 지워지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는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아직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시대적 상황과 세기 초, IMF를 극복했다는 착각 등이 맞물려 사회적으로 그런 낙관적 정서가 있었고, 소설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반영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다가 2006년 중후반 화내는 소설도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것들이 불안정 노동을 상시화하고 불평등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의 정체나 기원을 사람들이 피부로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과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노동에 대해서도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환기하기 시작했고요.”

이서수=“말씀하신 대로 신자유주의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하고 10년이 지난 후인 2010년대 중후반 즈음에 다양한 노동소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습니다. 그 배경에는 짙은 피로감이라는 공통의 감각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해?’ ‘노동이 정말 이런 걸까라는 물음을 다수가 하고 있어요. 다만 과거에는 이 같은 물음이 노동자의 권리 향상을 향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그저 안으로 꾹꾹 눌러 담으며 사는 거 같아요. 과거 노동소설이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장르처럼 여겨졌다면 지금의 노동소설은 해결책이나 전망을 제시하기보다는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노동을, 핍진하게 드러내는 서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죠. 저는 김 선생님이 과거 노동 문학과 단절되지 않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동의하는데요. 작가 또한 이 시대, 이 체제를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왜소해진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의 이미지를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거와의 연결성을 통해서 작가의 시선을 지금으로부터 옮겨보면 또 다른 모색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미정=“기존의 노동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은 무수한 정념과 문제의식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이면에 작동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핵심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죠. 노동의 문제가 늘 자본의 구조와 연동됐지만, 지금은 이에 관한 이야기를 시대착오적인 거대담론으로 생각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제가 단절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저는 이 작가님의 미조의 시대를 그런 맥락으로 읽었어요. 등장인물 수영이 구로디지털단지의 한 웹툰 회사에서 가학적인 성인용 웹툰을 그리는 노동을 하면서 고통스러워하잖아요. 그러다가 과거 1970~1980년대 구로공단에서 가발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의 사진을 보게 되죠. 세련되게 외피는 변해 눈속임하고 있지만, 그 근간에서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는 부분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이서수=“다른 직종에서도 수영같은 괴로움을 느끼는 노동자들이 매우 많을 거 같아요. 저는 노동자 하면 거대한 기업 앞의 개인이 항상 떠오르는데, 그 상태로 삶을 이끌고 가는 게 너무 고통스러운 것 같아요. 여기서 좀 벗어나기 위해서 연결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고, 제가 가져온 게 과거의 노동자와 연결돼 있다는 거였어요. ‘수영이 과거 속에 연결성을 찾으면서 더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게 됐다고 이야기해요. 과거부터 지금까지 고통스러운 노동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너무 슬프지만, 그러면서도 수영이 왜소해진 개인이 아니라 어떤 일원으로 연결성을 느끼면서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 거죠.”

김미정=“그 연결감이 굉장히 힘을 주는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발밑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느냐는 생각을 하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하나 더 꼽자면 조해진 작가의 하나의 숨도 그런 연결성을 이야기한 작품인데요. ‘하나의 숨은 청소년 취업과 산업재해를 다룬 소설이에요. 계약서에 명기된 노동의 기한이 곧 관계의 유통 기한이 되는 시대인데, 이 작품은 이를 잘 포착하고 있죠. 그러면서도 계약서와 무관하게 이 존재들끼리 연결되는 또 다른 명백한 조건들이 소설에서는 기어이 발견됩니다. 공기를 구획하여 가를 수 없듯, 우리가 서로 내쉬는 숨도, 사람 사이의 정서·정동적 관계도 자르거나 가둘 수 없다는 거죠.”

 

-2010년 후반에 들어 두드러진 것 중 하나는 노동소득의 가치가 추락하고 주식·코인·부동산 등 금융소득에 대한 기대가 커진 건데요. 여러 소설에서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돼 있고, 불안정하고 차별적인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로 금융소득이 그려진 소설(<달까지 가자>, 장류진)도 나와 화제가 됐었죠.

이서수=“시대 감각에 예민한 작가분들이 있죠. 시대를 포착해서 소설로 남기는 것은 기록으로서도 굉장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분열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해요. 근면성실하게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세계관이 무너진 건 맞는 것 같아요. 그러나 여전히 그게 유일한 진리 같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고대의 건축물이 붕괴되는 소리는 들리는데, 먼지구름에 휩싸여 정말로 무너졌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상황 같은 거죠. 그러다 보니 계속 노동에 대해 분열적이고 양가적인 의미를 오가게 되는 거예요.”

김미정=“평생 고용의 신화가 좌절되고 삶 자체가 불안정해지면서 분열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데 공감해요. 오늘날의 소설들을 보면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려는 인물, 일과 자아를 능수능란하게 분리하는 인물도 나오죠. 최근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페어의 <피투자자의 시간>을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오늘날 자신을 노동하는 주체로 생각하지 않고 투자하는 주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저자는 이를 만들어지는 투자자, ‘피투자자라고 말하는데, 이를 비관만 하지 말고 그 피투자자라는 주체성을 활용해서 세계를 바꿀 계기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금융소득에 대한 열망은 사실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탈노동의 감각과도 연결됩니다. 탈노동의 감각을 조금 비틀면 다른 것을 상상하고 이야기하는 소설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탈노동기본소득’ ‘커먼즈(공동의 자원)’노동거부와도 연결될 수 있거든요. 노동의 가치가 추락하고, 부당한 노동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 노동 거부, 일종의 자본주의 파업 선언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거죠. 실제 1960~1970년대 서구에서의 가사노동 임금투쟁도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가사, 간병, 돌봄 등 재생산 영역의 가치를 확인시킨 거고요. 그런 사회학적인 상상력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더라도 문학이고 또 픽션이니까 상상력을 밀어붙여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전에 없던 노동의 형태가 빠르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노동을 다룬 소설들도 많이 등장하는데요. 이서수 작가님의 장편 <헬프 미 시스터>도 플랫폼 노동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어떻게 쓰시게 됐는지요.

이서수=“실제로 배송일을 하면서 이 일을 장편으로 써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당시만 해도 플랫폼 노동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단어를 찾지 못해 화가 났던 순간들이 많았어요. 나를 개인사업자라고 하지만, 지시는 기업에서 다 내려왔고,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개인사업자라고 하니 화가 나더라고요. ‘플랫폼 노동이라는 용어를 찾고 너무 기뻐서 쓴 책이에요. 노동의 형태는 빨리 변하는데 이를 규정하는 명칭조차도 너무 늦게 도착하는 것 같아요.”

김미정=“<헬프 미 시스터>는 단연 2022년의 삶과 노동의 최전선이 서사화된 작품이죠. 소설 속 인물들은 다양한 플랫폼 앞에서 상시 대기하다가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일의 현장에 투입됩니다. 서로 늘 연결돼 있지만, 실상은 지극히 파편화돼 있어서 같은 일을 한다는 동질감조차 느끼지 못하죠. 여기에서 노동자, 자본가, 소비자 식의 구획된 정체성은 쉽게 무화되고요. 말씀하신 대로 플랫폼 노동자는 법적으로는 자기사업자이지만 실제로는 고된 작업 현장의 노동자라는 분열적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사람들끼리의 연결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당사자 자신마저 분열시키죠. 그런 시대의 조건이 고도로 세련되게 집약된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서수=“소설에는 자동차로 택배 배달을 하는 카플렉스 부부가 나와요. 얼마 전 여름에 비가 많이 왔을 때, 카플렉스 하시던 분이 물건을 배송하시다가 돌아가셨잖아요. 비가 그렇게 쏟아지고 물이 범람하는데도 배송하러 가셨던 마음을 저는 알겠더라고요. 댓글에서는 그 정도로 비가 오면 돌아와야 하지 않냐고도 하는데, 저는 막상 그 노동 조건에 처해 있으면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자신을 위한 선택을 내리기가 어려운 구조적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죠.”

 

-김미정 선생님은 한 평론에서 과거에는 직접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하는 자본의 성격이 두드러졌다면 오늘날의 자본은 교묘하고 부드러운 전제를 행한다고 분석하신 바 있는데요.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처럼 여겨지고, 노동이 능력주의로 환원되는 오늘날, 문학에서 이 같은 모순에 대항하고 희망을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오늘날 소설이 이를 어떻게 그려내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이서수=“쓰면서 늘 고민하는 지점인데 여전히 개인적 단위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실제 노동 현장에서 그러하듯, 저도 그렇고 다수의 소설이 구조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촉구하기보다 개인의 일탈이라든지 그와 비슷한 결심, 서로에 대한 돌봄, 연결성 같은 것으로 자본에 대응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죠. 어떤 희망이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지만, 저 또한 이 체제 안에 갇혀 예술을 하기 때문에 이를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렇다고 현실의 핍진한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는 건 파편화된 리얼(real), 이즘(-ism)이 붙을 수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고요. 이즘이 붙으려면 거기서 좀 더 나아가는 어떤 지점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편에서는 소설을 쓸 때 또 다른 심리적 걸림돌이 있기도 해요. 작가로서 나는 이런 고민을 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는거죠. 능력주의 담론 같은 건데, 마치 노동을 어떤 자세로 대할 것인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실제로 그런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잖아요. 예컨대 투자자정체성은 내 삶에 직접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단어가 아님에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솔깃하면서, ‘내 마음가짐만 투자자로 바꾸면 괜찮지 않을까하는 함정 같은 것에 빠지는 거죠. 그런 의견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작가로서 이 같은 사회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해요.”

김미정=“노동을 둘러싼 불평등 구조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여기에 대한 감각을 표출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이 압도적이다 보니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시스템대로 어쩔 수 없이 살아가게 되고, 소설도 관점을 제시하기보다 객관적으로 이런 현실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또 어떤 소설들에서는 판단하지 않으려는 서술 위치도 강하게 느껴지는데 이 또한 재현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을 의식하며 소설 속 세계보다 더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이 세계의 회로가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하는 게 작가들의 고충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러나 의도치 않게 이런 독자에게 맡긴 해석의 몫이 결과적으로 소설 바깥의 많은 혐오와 교착해버리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가 믿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힌트, 약간의 실마리를 주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읽고 나면, 독자들과 함께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느낌으로 고무되는 소설들이 있거든요. 그런 소설을 읽으면 힘이 나고 내가 사람들과 이렇게 연결이 되어서 같이 간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작가님이 쓰시고 싶은 노동소설이 있다면, 또 평론가님이 나오길 기대하는 노동소설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이서수=“저는 아직 제가 본격적으로 노동소설을 쓰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진짜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산재에 관한 소설을 항상 쓰고 싶었어요.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있고 한 권이 아닌 시리즈로 쓰고 싶어요. 그런데 이게 독자들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무겁고 회피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료조사도 많이 하고 기사도 늘 보지만, 마음속에 걸리는 건 그 노동을 제가 경험해보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언젠가 그 현장으로 가야 하는데 지금은 잠시 정류장 같은 데 앉아 있는 느낌이죠. 독자가 읽고 싶게 만들고 이를 경험한 것처럼 느끼게 하려면 제가 그 노동을 경험해봐야 할 거 같아요.”

김미정=“이서수 작가님의 소설이 너무 기대됩니다. 저는 우선 사라지는 직업들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건 일할 수 없는 몸자체를 긍정하고 상상하는 장이 좀 더 펼쳐지면 좋겠어요. 우리가 노동을 삶의 중심으로 여기게 된 게 특히 근대 이후잖아요. 이탈리아의 이론가 실비아 페데리치는 생산적인 노동자가 되는 것은 일말의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통쾌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10년 넘게 투병하고 계신 분의 소망에 대해 전해 들은 일이 있는데요. 아프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는 거예요. 일해야만 쓸모 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감각 같은 게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있죠. 아프면 아픈 대로 일 안 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긍정할 수 없는 세계는 불행하지 않나요. ‘일할 수 없는 몸은 단지 아픈 몸만이 아니에요. 다양한 이유에서 일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는데, 당사자가 자기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상상 자체가 지금 막혀 있다고 봅니다. 앞서 말한 노동 거부의 상상도 이런 맥락에 있을 거고요. 늙음, 소멸, 죽음, 장애, 약함 이런 것 자체가 긍정될 수 있고, ‘일할 수 없는 상태자체를 긍정하는 방식의 이야기들이 좀 더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서민은 집 한 채 장만이 꿈인데늘어나는 집 부자들

상위 1천명 5년간 4만채 이상 매수 소득 높을수록 내집 장만 비율 높아

상위 1% 주택자산 평균 30억 육박

주택 공급은 꾸준히 늘고 있으나 소득이 낮은 서민의 자가 보유율은 40%대 후반에서 제자리걸음 중이다. 소득 상위층의 자가 보유율이 높아지고 있는 점과 대조적이다. 집값은 계속 오르는 데 비해 고물가와 고금리로 대다수 서민의 실질 소득은 줄어든 탓이 크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정책 자금을 대거 풀면서 부동산과 건설 부양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그 결과 자산 불평등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22대 국회 국정감사를 앞두고 나오는 주택 관련 자료들도 자산 양극화 정도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상위 1000, 5년간 6조 원어치 주택 매수

연합뉴스에 따르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민홍철 의원은 6일 국토교통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인용해 지난 5년간(2019~2023) 주택 매수자 상위 1000명이 사들인 주택 수가 41721채에 달한다고 밝혔다. 아파트와 연립, 다세대, 단독 다가구를 가리지 않고 1인당 평균 42채씩 사들인 셈이다. 금액으로는 약 61500억 원이다.

가장 많이 주택을 매수한 사람은 5년간 11579000만 원을 들여 793채를 사들였다. 2위 매수자도 710(11508000만 원), 3위 매수자는 693(1803000만원)를 사들인 것으로 집계됐다. 100채 이상 매수자는 45, 50채 이상 매수한 인원은 158명이었다. 상위 100명이 매수한 주택은 13859건으로 총 매수액은 총 23349000만 원에 달했다. 자료를 공개한 민홍철 의원은 윤석열 정부 부동산 정책 실패로 인한 부동산 가격 상승이 부동산 투기 세력에게 축제의 장을 열어준 격이라고 질타했다.

소득 높아야 빚으로 집을 살 기회도 늘어

소득이 높을수록 빚을 내 집을 사는 사례가 많다는 한국은행 설문조사 결과도 자산 불평등이 커지고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6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조국혁신당 차규근 의원이 한국은행에서 받은 한국노동패널 설문조사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주택 취득 목적 신규 가계부채의 71.5%가 소득 상위계층인 4분위와 5분위 가구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비율은 매년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차규근 의원은 집을 사기 위한 가계부채가 고소득층에 몰려 있다는 건 결과적으로 소득 계층 간 자산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는다정부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정책을 펼쳐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은행이 2004~2021년 한국노동패널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분석한 보고서에도 가계부채 증가가 불평등 확대와 관련이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주택 취득 용도의 가계부채 증가가 고소득 가계 위주로 쏠리면 월세 등의 소득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어 불평등을 심화한다는 것이다.

소득분위별 주택취득 목적의 가계부채 추이. 연합뉴스

상위 1%와 하위 10% 주택자산 격차 100

자가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 중에서도 고가 주택이 더 큰 폭으로 오르며 자산 양극화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6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임광현 의원이 통계청에서 받은 주택소유통계를 보면 2022년 유주택 가구 중 자산 가액(지난해 11일 공시가격) 기준 상위 1%에 해당하는 가구의 주택자산 가액은 평균 294500만 원이었다. 2017213000만 원에 비하면 5년 만에 8억 원 넘게 늘어난 셈이다. 반면 하위 10%의 주택자산 가액은 평균 3000만 원에 불과했다.

상위 1% 유주택자들은 1인당 평균 4채가 넘는 주택을 소유했으며 10명 중 약 7명은 서울에 거주했다. 2022년은 금리가 오르며 주택 가격이 하락했던 시기라 상위 1% 주택자산 가액도 전년 대비 줄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서울과 수도권은 하락 폭이 크지 않았고 올해 들어 집값이 많이 올랐기 때문에 이들의 평균 주택자산 가액은 30억 원을 돌파했을 확률이 높다.

경실련 국책부동산사업팀 관계자들이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실련 강당에서 열린 '8.8대책'에 대한 공개 질의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졸속 추진되고 있는 '8.8대책'의 전면 재검토를 촉구하고 있다.

소득 계층간 주택자산 격차 줄일 정책 시급

2022년 주택자산 가액의 상위 1%와 하위 10%의 격차는 98.2배였는데 올해는 100배 이상으로 더 벌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주택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했던 2021년 상위 1%와 하위 10%의 주택자산 가격 격차는 115배에 달했다. 전체 유주택 가구의 자산 가액은 평균 31500만 원이었다.

2022년 기준 상위 1%와의 격차는 9.3배였다. 상위 1%가 소유한 주택 수는 평균 4.68채로 전년(4.56)보다 늘었다. 유주택 가구가 소유한 평균 주택 수(1.34)에 비해 3.5배 많은 수준이다. 상위 1% 가구를 거주 지역별로 보면 72.3%가 서울에 살아 가장 많았고 경기(16.9%)와 부산(2.9%)이 뒤를 이었다. 자료를 분석한 임광현 의원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난 뒤 가구 간 주택자산 가액의 격차가 다소 줄어드는 흐름이나 소유 주택 수와 수도권 집중도 격차가 완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를 해소할 정부 정책이 시급하다고 짚었다./시민언론 민들레

한화는 왜 매년 100억짜리 불꽃을 쏠까

방산 비중 큰 비투비 제조업 포트폴리오 가진 한화

원년 주력 상품인 산업용 화약 활용 사회환원 겸 마케팅

5일 저녁 서울 여의도 일대에서 열린 서울세계불꽃축제 2024’100만여명의 관람객이 운집하는 등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이 축제를 기획한 한화는 왜 매해 국내 최대 규모의 불꽃놀이를 할까.

한화가 불꽃축제를 개최한 건 햇수로 올해가 20년째다. 코로나19 대유행 등으로 몇차례 취소된 걸 제외하면 2000년부터 매해 9월 또는 10월께 열었다. 한국 대표로 축제에 참여해 직접 불꽃을 쏘아올리기도 하는 등 한화 글로벌사업부문 콘텐츠사업팀 직원 16명은 1년 내내 이 축제의 기획·준비만 전담한다. 축제를 온전히 치르는 데만 매해 약 100억원의 비용이 든다.

한화는 이 모든 게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올해 축제를 앞두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시민이 아름다운 불꽃을 통해 위로받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더 크고 넓게 불꽃을 쏘아올리자고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한화가 산업용 화약 제조에 뿌리를 둔 기업이라는 것을 비춰보면 왜 불꽃축제인지설명된다. 야구팀 한화이글스나 방산 대장주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최근 더 알려져있지만, 한화의 본업은 산업용 화약 제조다. 산업·건설 현장에서 쓰이는 다이너마이트를 최초로 국산화한 게 한화의 모태인 한국화약이다.

1964년부터는 산업용 화약 뿐 아니라 불꽃놀이에 쓰이는 화약까지 생산하며 본격적으로 불꽃 사업에 발을 들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의 성화나 불꽃쇼도 한화가 연출을 맡았다. 다만 2000년대 들어서는 불꽃용 화약 생산을 중단하고, 불꽃축제에 사용하는 화약은 국내외 전문업체에서 사서 쓰고 있다. 산업용 화약 판매가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현재는 2% 안팎으로 줄어, 그룹의 뿌리를 기리는 상징적 의미가 더 커진 셈이다.

축제를 통한 그룹 이미지 제고라는 마케팅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방산과 태양광 등 비투비(B2B) 위주 제조업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긴 하지만, 한화그룹의 매출 절반 가량은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비투시(B2C) 업종인 한화생명·한화손해보험 등 금융 계열사에서 발생한다. 무기와 폭약 제조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꽃축제를 통해 긍정적 이미지로 전환할 필요도 있는 셈이다. 화약 제조업 부문 영업이익(지난해 말 기준 7816억원) 대비 불꽃축제 비용이 1.3% 수준으로 부담스러운 수준도 아니다.

남지현 기자 southjh@hani.co.kr

 

국힘 소속 경남권 정치인들, 정치컨설팅·여론조사에 정치자금 지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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