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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3.11.1.~30 부산 엑스포 119 대 29’ 득표차가 불길하다

by 이성근 2023. 12. 2.

1. 생명의 무게 경향 : 2023.11.01   2. 이념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한겨레 : 2023.11.01.  3.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경향 : 2023.11.02. 4. 전쟁 보도로 전쟁치르는 언론들 한겨레 : 2023.11.02.   5. 윤 정부·여당의 기괴한 연금정치 3종세트 <맹탕, 막던지기, 그리고 물타기> 한겨레 : 2023.11.02.   6 도래한 전쟁의 시대, 왜 전쟁이 잦아지고, 길어질까? 프레시안 : 2023.11.02.   7. 윤석열 정권, ‘서울민국을 꿈꾸나 경향 : 2023.11.03   8. 씨앗을 손에 쥔 채로 경향 : 2023.11.03    9. 대통령 앞에 작아지는 '인요한 혁신위' 프레시안 2023.11.03.    10. 경제문명의 운명, 윤석열 경제의 운명 경향 : 2023.11.05.

11. ‘보이지 않는이재명 경향 2023.11.06    12. 윤석열과 신방복합체 총선 돌입미디어오늘 2023.11.06.  13. 30% 대통령의 무난한레임덕 한겨레 2023-11-07    14. 전쟁의 해’ 2023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한겨레 2023-11-07   15. 왜 대한민국엔 미래 담론이 없는가 zdnet.: 2023/11/07  16. 서울민국’, 그들만의 떴다방 정치 경향 2023/11/07   17. 유서 깊은 나라의 천박한 정치 경향 2023/11/07    18. 총선용 포퓰리즘 정책이 민생경제인가? 한겨레 2023/11/10   19. 전청조·남현희 사건을 쓰지 않은 이유 한겨레 2023/11/10    20.“강도를 보호하라민중의 소리 2023/11/12

21. 민의와 총선, 그리고 연금개혁 경향 2023/11/13  22. 이재명 대표, 지금 뭐하십니까 경향 2023/11/13   23. 아! 전태일 정신 매일노동뉴스 2023/11/13    24. 박노자가 만난 리영희 프레시안 2023/11/14   25. 공익과 거리 먼 공익의 대표자경향 2023/11/15   26. ‘비만 고양이에게 바란다 경향 2023/11/15    27. 예산편성 잣대도 모른 채 예산심의하는 국회 경향 2023/11/15    28. 한 사람이 늙으려면 팀이 필요하다 한겨레 2023/11/15   29. 150년 살 준비 되셨나요? 한겨레 2023/11/15  30. 전쟁에 중독된 미국과 힘 잃은 반전평화 운동 민들레 2023-11-23

31.익숙함은 옳은가 경향 : 2023.11.24.   32. 타깃층을 좁힙시다 미디어오늘 2023.11.25   33. 검찰의 더러운 손 감싸기한겨레 2023-11-26     34. 정권심판 표심 왜곡하는 이준석 신당경향 2023-11-26  35. 피케티의 계급투쟁 경향 2023-11-26  36. 시위로 정치 바꿀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한국 시민언론 민들레 2023-11-26  37. 검사 처남과 검찰정권의 민낯 시민언론 민들레 2023.11.27    38. 접경 지역 50미터? 경향 : 2023.11.28.   39. 국가연구개발비는 누가 나눠먹고, 갈라먹었나 경향 : 2023.11.28.       40. 돌아오지 않을 것들을 기다리는 사람들 한겨레 : 2023.11.28.

41.윤 정부 1년 반, 휘청대는 국운 바로세울 시간 한겨레 : 2023.11.28.   42. 늙어가는 대한민국 경향 : 2023.11.29   43. 총선, 국민 섬기겠다면 특권부터 내려놓으라 경향 : 2023.11.29   44. 현대판 고려장 부추길 민주당 공약 1호 경향 : 2023.11.29.   45. 119 29’ 득표차가 불길하다 한겨레 : 2023.11.30.   46. 윤석열도 '피해자'로 만든 언론의 부산 엑스포 낙관 시민언론 민들레 : 2023.11.30.

 

생명의 무게

가을걷이가 끝난 휑한 논, 격자 꼴 따옴표로 남은 벼 그루터기에 연한 새순이 돋았다. 이울어 가는 가을볕이 뿜어내는 빛 알갱이는 지난 푸르름을 되살리기에는 충분치 않지만 짝짓기에 바쁜 하루살이 날갯짓을 북돋우기엔 모자람이 없는지 양지바른 곳에선 날것들이 사뭇 분주하다. 하루살이의 한 생애라야 고작 며칠이고 일년생 벼도 두 계절을 넘기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삶의 무게가 30년이 한 세대인 인간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처럼 벼나 하루살이에게도 부모가 있고 그 부모의 부모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그렇다. 그 부모의 위쪽 끝은 대체 어디에 머물게 될까? 정확한 시기나 모습, 그 역사는 짐작하기 쉽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생명의 대물림은 그 어떤 생명체에서도 단 한 번의 끊김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슬슬 과거로 걸음을 떼보자.

인간을 포함한 포유동물은 과거 어느 날 지느러미에 뼈와 근육을 단장한 어류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미국 시카고 대학의 고생물학자 닐 슈빈은 북극 엘즈미어섬에서 물고기와 육상 사지동물의 중간 단계인 틱타알릭을 발견했다. 발이 있는 이 물고기는 땅 위로 배를 끌어올린 뒤 거침없이 육지로 올라왔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 조상은 한때 물고기 모습을 하고 있어야 옳다.

수족관이나 어항 속 물고기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자. 지느러미를 노처럼 써서 목이 찰싹 달라붙은 몸을 통째로 움직이는 물고기에게는 몸의 기둥인 척추와 주변을 살피고 근육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신경계가 포진한다. 몸 가운데를 소화기관이 가로지르고 감각기관이 운집한 머리 반대편 끝에 배설기관이 자리한다.

이런 물고기의 기본 몸 얼개는 인간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전에는 오징어나 지렁이처럼 무척추동물들과 공통 조상을 가진 적도 있었을 것이다. 상상하긴 어렵지만 세포 하나가 전부인 시절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고생물학자들은 공통 조상에서 식물과 동물 계통이 나뉜 때가 약 15억년 전이라고 생각한다. 그즈음이라면 벼나 하루살이, 인간 모두 하나의 조상을 가졌어야 옳다. 그 조상으로부터 15억년이 지난 지금 어떤 인간 하나가 마찬가지로 15억년을 어찌어찌 살아온 먼 친척인 벼의 그루터기와 하루살이 날개를 움직이는 근육세포 안의 미토콘드리아를 떠올리는 중이다. 그러니 지금 살아 있는 생명의 무게는 모두 동등하다. 벼의 15억년이나 그만큼의 세월이 새겨진 200여종류의 인간 세포, 하루살이 근육세포 간 다름은 없는 것이다.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했던 아득한 시절의 기억은 까마득하다. 대신 우리에게 가까운 동물의 조상 화석이 발견된 얘기로 화제를 돌려보자.

2020년 캘리포니아 대학 스콧 에번스는 가장 오래된 좌우대칭 동물의 화석을 발견했다는 연구 결과를 미 과학원 회보에 발표했다. 이들 연구팀은 동물의 화석이 대량으로 발견된 캄브리아기 이전의 생명체가 묻힌 호주 남부 플린더스산맥 사암층에서 연구를 진행했다. 그곳에선 해파리처럼 부드러운 몸통을 가진 다세포 동물의 화석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에디아카라 생물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선캄브리아기를 대표하는 생명체를 만날 수 있는 귀한 자원이다.

최초의 동물로 알려진 해면은 몸 얼개가 무정형이지만 해파리는 방사대칭이다. 하지만 몸통을 둘러싼 근육을 수축하여 해파리는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다. 에디아카라에서 좌우대칭인 몸통을 가진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좌우대칭형으로 설계한 몸통을 가진 생명체는 바다와 육상을 통틀어 전체 동물의 99% 이상이다. 좌우대칭은 빠른 움직임을 보장하는 진화적 참신성이었다. 러시아 동물학자 베클레미셰프는 일찍이 직선 운동이 갖는 진화적 이점이 좌우대칭 동물의 탄생을 이끌었다고 단정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물체는 물속에서 반대 방향의 저항을 받는다. 이때 무정형인 해면은 몸이 겪는 항력의 불균형 탓에 빙빙 돌면서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해면이 고착 생활을 선택한 이유다. 한 평면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인 생명체들은 직선 움직임뿐만 아니라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도 있다. 기동력을 얻은 생명체가 물에서 뭍으로 올라와서도 여전히 그 몸통 설계를 바꾸지 않은 이유다. 중요한 것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생명은 단절이 없고 식물은 태양을 향해 위로 동물은 먹이를 쫓아 앞으로 간다/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경향 : 2023.11.01

 

이념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조선왕조는 태조 이성계부터 마지막 순종까지 27518년 동안 이어졌다. 세계적으로 봐도 드물게 오래 지속된 왕조이다. 하지만 그 국왕 권력이 순조롭게만 이어지지는 않았다. 두 번의 반정(反正)이 있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1506)과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1623)이 그것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었고, 인조는 광해군의 조카였다. 조선 왕실의 연속성은 이어졌지만, 지금 관점에서 보면 두 반정이 정치 쿠데타인 것은 분명하다.

16세기 초반에 일어난 중종반정과 임진왜란 뒤 17세기 전반에 일어난 인조반정은 반정이라는 이름은 같아도 그 성격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는 100여년 동안 진행된 조선왕조 내부의 정치적, 사상적,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기에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종반정은 그 앞뒤로 나타난 양상이 매우 이념적이었던 반면에, 인조반정은 그렇지 않았다. 정치세력 간 갈등은 있었지만 그것이 이념적 차원으로 심하게 돌출되지는 않았다.

재위 중에 연산군은 능상의 풍조(凌上之風)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고 신하들에게 여러 번 말했다. ‘능상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긴다는 뜻이다. 신하들이 임금인 자신을 능멸한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연산군은 신하들을 힘으로 제압하려고 여러 조치를 취했다.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등을 없애버렸고 언관직 자체를 없애거나 감축했다. 이 기관과 관직들은 조선이 지향한 유교정치 운영의 핵심 구성요소였다. , 상소와 상언(上言) 등 여론 수렴과 관련되는 제도들도 축소하고 폐지했다. 연산군 9년에는 궁궐 후원을 확장하면서 성균관 시설을 축소하고, 결국 그 이전을 추진했다. 성균관 터는 임금의 사냥과 연회의 장소가 되었다. 연산군은 자신이 유교 이념 위에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연산군 111월에는 남대문 밖 전생서동(典牲暑洞: 현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을 새 성균관 터로 정했다. 성균관 이전 계획은 다음해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나 중단되었다. 연산군은 조선 건국 후 102년 만에 즉위했는데 그사이 조선은 꾸준히 유교화되었다. 연산군은 그 누적된 변화의 결과인 현실을 정면으로 부정했던 것이다.

중종 대에는 강력한 유교정치 이념을 추구하는 정치세력이 등장했다.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파이다. 그가 죽은 후, 조선왕조의 지식인과 관리들에게 조광조는 유교 가치를 수호하고 개혁을 추진했던 인물로 추앙되었다. 광해군 2(1610)에 그가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공자를 기리는 사당)에 배향된 이유이다. 하지만 그가 추진했던 개혁에는 백성들의 삶과 직접 연결된 것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유교 이념에 충실한 것들이다. 말하자면 조광조로 대표되는 집단은 유교 근본주의에 가까운 이념을 추구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중종 대 사림파의 등장은 연산군의 노골적인 반유교적 정치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양자는 양극단에 있었지만,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이념적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중종반정에 비하면 인조반정은 이념성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인조반정은 서인이 중심이 되고 남인 일부가 참여한 사건이다. 인조반정은 광해군 정치에 대한 이념적 반발에서 비롯되었던 것도 아니고, 반정 후에도 이념 추구적 양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같은 서인 안에서도 한양에 기반한 관료 색채가 짙은 사람들과 지방에 기반한 사림 색채가 짙은 사람들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다. 삶의 조건과 생활 환경이 다르기에 같은 가치를 지향해도 생각이 같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가 화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인조 재위 시기에는 많은 정책적 논의가 있었다. 서로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인조에 이어 효종이 즉위하자 조선왕조 최대의 민생, 재정 개혁인 대동법이 성립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 연구원 전임연구원 경향 : 2023.11.01

 

뜬금없는 김포 서울 편입론’, 노무현과 결정적 차이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공약을 내놓은 건 대선후보 시절이던 20029월 중앙선대위 출범식에서다. 그날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한계에 부닥친 수도권 집중을 억제하고 낙후된 지역 경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하고 청와대와 중앙부처를 옮기겠다고 밝혔다. 행정수도 이전은 그해 대선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한나라당은 서울이 공동화돼서 집값이 폭락하면 누가 책임지나라며 포퓰리즘의 극치라고 비난했다. 이 공약 덕분인지 노 후보는 충청권에서 이회창 후보를 25만표 차로 이겼다. 서울에서는 오히려 역풍이 불었다고 훗날 노 대통령은 회고했다. 집권 이후 노무현 정부는 특별법을 만들어 행정수도 이전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경국대전 이래 오랜 관습 헌법에 위배되기에 헌법 개정 없이는 수도를 옮길 수 없다는 기상천외한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끝내 청와대(대통령실)와 국회를 옮기지 못한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바다.

역사가 늘 그렇듯 내년 봄 총선을 앞두고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이번엔 그때와 정반대의 방향이다. 국민의힘은 경기 김포시의 서울시 편입을 검토하겠다더니, 구리·성남·하남·과천·고양 등 서울 주변 시·군을 모두 서울로 편입하겠다는 얘기까지 한다. ‘주민 의사를 존중한 결정이라지만, 총선을 겨냥한 졸속 공약의 냄새가 짙다. 벌써 김포 집값이 들썩인다는 보도가 나온다. 21년 전 한나라당 표현을 빌리면 이런 게 바로 포퓰리즘의 극치. 아무리 정치적 상황이 어려워도 국정을 책임진 세력이라면 공약의 현실성과 함께 그 방향이 대한민국이 나갈 방향과 부합하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집값 상승 욕망을 부추기는 공약에 지역 민심은 갈가리 찢길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후에 출간된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내건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나는 원외 정치인 시절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하면서 이 문제를 공부했다. 서울과 수도권이 돈과 자원과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상황이 계속되면 서울은 서울대로 인구 과밀화, 환경 악화, 부동산 가격 폭등 때문에 경쟁력을 가지기 어렵고, 지방은 지방대로 발전 동력을 상실하고 말라죽을 것이란 우려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대선 공약으로 발표하려 하자) 민주당 선대위 회의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서울과 수도권 표를 잃을 위험이 높아서 선거에 불리하다는 이유였다. 후보인 내가 고집을 부렸다. 대선은 승패도 중요하지만, 국가 발전에 꼭 필요한 의제를 국민에게 제출하는 기회라고 설득했다.”

지금 경기도 시·군들을 서울에 합치겠다는 발상은 어떤 고민과 문제의식, 국가 발전의 비전을 담고 있는 것일까. 여의도연구소장을 지낸 박수영 국민의힘 국회의원은 페이스북에 서울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만 팩트는 그게 아니다. 세계 도시와의 인구수 비교에서 서울은 38(940여만명), 면적은 29(605) 밖에 되질 않는다고 썼다. 하태경 국회의원은 메가시티는 세계의 트렌드다. 베이징·상하이 같은 곳은 (인구가) 2천만, 3천만명 간다고 말했다. 교묘한 왜곡이다. 베이징 인구가 서울의 두배를 넘는 21백여만명이고 면적은 16,411지만, 중국 전체 인구와 면적에 비하면 서울과 비교할 수 없다.

지난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0.78명까지 떨어졌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이 0.59명으로 가장 낮다. ‘메가시티 서울을 말하지만, 좋은 일자리와 보금자리를 구해서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기에 서울은 턱없이 힘든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해마다 10만명의 청년이 서울로, 수도권으로 몰린다. 서울은 불안하지만, 지방의 삶 역시 경제·문화 격차와 자산가치 상실로 불안하긴 매한가지인 탓이다. 이 문제에 근본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서울과 수도권을 키우기만 하면 저출산 문제는 더 악화할 수밖에 없다. 역대 정부에서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처음 눈을 돌린 게 노무현 정부다. 노 대통령 시절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 위원회가 성과를 거뒀는지는 충분히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먼 훗날의 일처럼 여겼던 저출산·고령화가 이젠 정말 발등의 불이 됐는데도 현 집권세력은 이를 해결하는 방향이 아닌, 당장 선거에 유리하다는 이유로(정말 유리한지도 알 수 없다) 역행하는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서울 확대는 국가안보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서울의 확장은 더 많은 인구와 자원을 빨아들이며 휴전선 부근 밀집도를 높일 것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대통령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겼다. 북한 공격만을 놓고 보면 위태로운 선택이다. 북악산을 바로 등진 청와대는 북한 전투기가 직접 공격하기 매우 어렵다. 한강 부근까지 남하했다가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서 타격해야 한다. 반면에 개활지인 용산은 공중 공격이 용이하다. 더구나 대통령실과 국방부가 한 곳에 모여 있으니 그만큼 위험은 커진다. 이 정부는 기회만 있으면 북한과 전쟁을 불사할 것처럼 말하면서, 막상 구체적인 정책은 안보에 취약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아무리 표가 중요해도 우리 사회가 나갈 방향과 엇갈리는 공약을 승부수란 이름으로 함부로 던지진 말아야 한다. 노무현의 행정수도 이전과 비슷한 듯 보여도 결정적 차이가 여기서 난다. 노 대통령은 국가적으로 절실하게 필요한 정책이라 난관을 무릅쓰고 추진했다고 밝혔다. 국민의힘도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스스로 되묻기를 바란다.

박찬수ㅣ대기자 한겨레 : 2023.11.01.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셋이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둘이 하자는 쪽을 따라가는 게 상식이다. 두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혼자서 옳다고 우기면 왕따내지 손절이다.

지난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33%에 머물렀다. 그 전주 조사보다 3%포인트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30%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부정적인 평가는 58%로 집계됐다. 집권 초반을 제외하면 지난 16개월 동안 지지율은 50%는커녕 40%도 넘지 못했다. 두 명은 잘 못했다고 손가락질하는데 한 사람만 박수치고 있는 모양새다.

정권이 바뀌면 잘될 것이란 막연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는 신뢰를 주지 못했고, 여론은 등을 돌렸다. 찬찬히 한번 돌아보자.

불통과 독선 이미지는 그의 임기를 관통해온 열쇳말이다. ‘이념이 가장 중요하다며 이를 국정철학의 바탕으로 깔았고 자유민주주의공산전체주의의 대결이란 갈라치기를 통해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켰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 또는 반대하는 목소리에는 카르텔이란 굴레를 씌워 공적(公敵)으로 돌렸다. 검찰과 법무부, 감사원, 경찰, 방송통신위원회 등은 이런 카르텔을 깨부수기 위한 전위부대로 동원됐다. 아마도 거기엔 집권 초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윤 대통령의 자신감이 한몫했을 터다. 당선 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친 공정과 상식 역시 실종된 지 오래다.

언론과의 소통은 여전히 요원하다. 스스로 청한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6개월 만에 없어졌고, 공식 기자회견은 단 한 차례도 연 적이 없다. 매주 화요일 국무회의에서 풀어놓는 장광설이 사실상 대통령 메시지의 전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여당에서는 비판적 언론에 가짜뉴스프레임을 씌워 사형에 처해야 할 만큼의 국가 반역죄” “폐간을 고민해야 한다는 등의 극언을 쏟아낸다. MB 정권 홍보수석이던 이동관을 방송통신위원장으로 앉혀 언론 장악에 시동을 건 것은 일찌감치 예고된 수순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정책 추진과 발언으로 엇박자를 낸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5세 초등학교 입학졸속 추진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해 박순애 당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입학연령을 단계적으로 만 5세로 하향하겠다고 보고하자 윤 대통령은 초중고 12학년제를 유지하되 취학연령을 1년 앞당기는 방안도 신속히 강구하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하지만 학부모, 교육단체 사이에서 반발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없었던 일이 됐고, 박 장관은 결국 사퇴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몇달 남기지 않은 지난 6월에는 킬러문항 배제를 지시해 수험생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뿐만 아니다. 고용노동부가 내놓은 주 최대 69시간 노동은 거센 논란 속에 윤 대통령이 보완을 지시하는 혼선을 빚었다. 이후 근로시간 개편안의 핵심은 나오지 않은 채 지지멸렬한 상태다. 국민의힘은 내년 총선을 겨냥해 경기 김포시를 서울로 편입시키는 방안을 제시하더니 며칠 후에는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에 초점을 맞춘 지방시대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서로 상충할 수밖에 없는 방안이 함께 나온 꼴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국민 10명 중 6명이 김포의 서울 편입에 대해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황에 따라 이 또한 유야무야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말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

지난달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여당 참패 이후 대통령이 바뀌고 있다는 평가들이 조금씩 나온다. 취임 후 처음으로 저와 내각에서 반성하겠다고 하더니 국민 소통, 현장 소통, 당정 소통을 더 강화해달라” “이념 논쟁을 멈추고 민생에만 집중해야 한다며 잔뜩 몸을 낮췄다. 이런 모습이 낯설지만 그래도 국민은 대통령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논어> ‘위정편을 보면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해 공격한다면 손해가 될 뿐이다(攻乎異端 斯害也已)”라는 말이 있다. 윤 대통령이 강조하는 것처럼 발로 현장을 뛰며 소통을 실천하려면 반대 의견을 품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세가 우선돼야 한다. 생각이 다르다고 배척하지 말고, 정부에 대한 비판을 정책 실현에 꼭 필요한 약이 되도록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모습이 얼마나 가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기 위해서라도 대통령 먼저 변해야 한다. 총선이 159일 앞으로 다가왔다. 국민은 지켜보고 있다조홍민 사회에디터 경향 : 2023.11.02.

 

전쟁 보도로 전쟁치르는 언론들

지난해 2월 말부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보도를 담당하면서 외신 기사에서 가장 많이 접한 문장이다. 전쟁 당사자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전달하되, 그 주장이 객관적으로 확인된 건 아니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킬 때 관례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이 문장을 접할 때마다 두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우선 확인되지 않은 걸 전하면서 이런 문장으로 책임을 덜어 보자는 꼼수가 아닌가싶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처럼, 일방적인 주장이 난무하는 특수 상황에서도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고심의 산물이지싶다. 마음이 더 기우는 쪽은 아무래도 후자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부터 확인하면서 오늘은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할까고민한, 개인적 경험 때문이다.

지난달 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이후 전쟁 상황을 전하는 외신 기사들에도 이 문장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보도와 달리, 이 정도의 객관화 장치만으로는 논란을 피하지 못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립이 워낙 뿌리 깊고 미국이나 영국 등 서양 여러 나라에는 이 대립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이 많은 까닭이다. 게다가 지배층의 친이스라엘 성향도 아주 강해서, 언론이 반이스라엘 또는 반유대인 성향을 조금만 보여도 심하게 공격받는다.

요즘 서양 언론들이 받는 압박 중에는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로 표현하라는 압박이 있다. 영국 정치인들은 전쟁 초기부터 공영방송 비비시(BBC)가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로 표현하지 않는 걸 문제 삼았다. 지난달 16일 총리실 대변인은 많은 언론 기관이 하마스를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모든 상황에서 정확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비비시를 압박했다. 이에 비비시는 자신들의 임무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설명해 대중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맞섰다. 사실 비비시는 친이스라엘이라는 비판도 종종 받아왔다.

프랑스의 대표 통신사 아에프페(AFP)도 같은 압박을 받고 있다. 프랑스 정치권에서 이 문제가 논란이 되자, 이 통신사는 지난달 28일 이에 대한 견해를 보도자료 형태로 배포했다. 아에프페는 이 글에서 편견 없이 사실을 보도한다는 사명에 따라, 아에프페는 직접적인 인용이나 출처가 있는 경우를 빼고는 운동이나 집단, 개인을 테러리스트로 표현하지 않는다이런 정책은 다른 국제 언론들의 편집 정책과도 일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테러리스트라는 용어는 고도로 정치적이고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라며 많은 정부가 자국 내 저항·반대 운동을 테러리스트로 낙인찍는다. 이렇게 낙인찍힌 저항 운동이나 개인들이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자국 내 주류 정치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인종차별에 맞서 싸운 인권운동가 출신의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을 대표 사례로 거론했다.

언론이 아무리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써도 독자들에게는 한쪽으로 치우쳐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만큼은 보호해줘야 한다. 이 노력은 결국 독자들의 알 권리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신기섭 |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한겨레 : 2023.11.02.

 

전쟁은 전염병처럼 퍼진다

10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 뒤, 가자지구에서 1만명 넘는 팔레스타인인을 숨지게 한 이스라엘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하마스의 정치-군사적 지도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이스라엘의 지난 3주간 공습 기간에도 알카셈(알깟삼), 사라야 알쿠드스, 아부 알리 무스타파 등으로 알려진 여단급 무장 조직들은 이스라엘 영토를 향해 매일 로켓 포탄을 쏘고 있다. 1027일부터 가자시티 인근에 진입한 이스라엘 전차와 장갑차를 표적으로 이들 여단은 합동작전도 진행하고 있다. 최고사령관이 사망했어도 여전히 제병합동 지휘통제 체계가 유지된다는 뜻이다.

하마스는 자신들이 억류한 이스라엘 인질들 동영상을 공개하는 심리전도 수행하고 있고, 러시아에서 이란과 헤즈볼라 지도자들을 만나 공조하는 외교전도 병행한다. 하마스는 단순한 무장단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이며 국제적 네트워크이고 저항의 문화다. 레바논에는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군사적 행동을 조정하는 합동군사기구도 운영되고 있다.

하마스의 저항은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불길한 전망을 드리운다. 가자지구에서 하마스의 지도부를 참수하고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주민을 분리하려는 이스라엘의 전략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거다. 설령 이스라엘군이 가자시티에 진입하여 하마스 전사들을 소탕했다 하더라도 하마스는 궤멸되지 않는다. 게다가 가자시티의 미로와 같은 좁다란 골목길에서는 이스라엘군의 최첨단 무기도 소용이 없다. 2016년 미군이 이슬람국가(ISIS)가 점령한 이라크 모술을 탈환하는 데도 9개월이 소요되었다. 이스라엘이 가자시티에서 그 당시와 비슷한 전쟁을 하려면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요구될 것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전략적 딜레마에 봉착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에게 전쟁이 길어질수록 비용이 커지고 인질이 위험해진다며 지금 바로 가자시티에 진입하여 전쟁을 끝장내자고 압박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마스가 바라는 바다. 전쟁이 시작되던 지난달 7, 하마스는 날개 4개 달린 상업용 드론인 쿼드콥터에 위성내비게이션 시스템에 의해 유도되는 직접 공격 탄약과 비디오카메라와 무선 링크가 장착된 배회 탄약을 결합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공개된 영상에는 쿼드콥터가 투하한 탄약이 이스라엘 주력 전차인 메르카바 탱크를 파괴하고 가자 국경을 따라 있는 장벽의 보초 탑 꼭대기에 설치된 원격조종 무기를 파괴하고 통신 기지국을 타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드론이 이스라엘군의 신경망을 파괴하는 동안 지상과 바다, 하늘로부터 하마스 전사들이 이스라엘 영토로 진입했다.

이런 기발함은 하마스가 지난해 우크라이나 민병대가 키이우 북부에서 러시아 기갑전력을 제압했던 전술을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발전시켰다는 증거다. 앞으로 가자시티에서 전개될 비대칭 전쟁, 즉 민간 자산을 활용한 하마스의 조직적 저항을 과소평가하면 이스라엘은 큰 낭패를 겪게 된다.

나쁜 건 빨리 배운다고 살인의 기술은 빠르게 학습되고 전파된다. 이스라엘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이 보인 잔혹성을 그대로 답습한다. 비인도적 살상 무기인 백린탄까지 투하하는 등 러시아군은 댐과 병원, 발전소, 주거지를 무차별로 폭격했다. 이스라엘은 전쟁 발발 사흘 뒤부터 155포에 백린탄을 발사하는 등 지난해 러시아군이 보인 모습을 압축적으로 재현했다. 극한의 공포로 저항 의지를 말살하려는 의도다. 가자지구에서 화재로 아동과 노약자가 사망하는 현상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2배속으로 재현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유럽과 중동에서의 두 전쟁은 상대방의 굴복이나 항복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 비극성도 닮았다. 어쩌면 전쟁은 전염병과 비슷한 양상으로 퍼질 것이다.

앞으로 집단의 원초적 적대감 고조, 적은 비용으로 큰 충격 강요, 위기를 관리하고 통제할 거버넌스 마비라는 세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곳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통치력이 약화하는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예멘, 무장단체가 난립하는 시리아나 이라크, 유럽의 발트 삼국 등이 그 후보지다. 세계를 배회하는 전쟁의 신은 적개심으로 지혜가 녹슬어 버린 인간 본성의 나약함을 파고들 것이다. 남북 간 합의된 9·19 군사합의를 무력화하고 굳이 이스라엘을 닮아가겠다는 윤석열 정부가 북한에 대한 적개심으로 눈이 멀지 않기를 바란다.

김종대 |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한겨레 : 2023.11.02.

 

윤 정부·여당의 기괴한 연금정치 3종 세트 <맹탕, 막던지기, 그리고 물타기>

연금개혁을 둘러싸고 윤석열 정부와 여당이 지금껏 보여준 행태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기괴함이다. 윤 대통령이 지난 5월 말 사회보장전략회의에서 보여준 발언의 기괴함이 연금개혁 과정에서 정부·여당까지 전이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1988년 국민연금 제도 도입 이래 한국 연금정치사에서 이런 적은 있었던가? 말로는 여전히 개혁 완수를 운운하지만, ‘개혁 회피, 비난 회피의 연금 정치의 끝판왕이 아닐까 싶다.

최근 잇따라 전개된 좌충우돌식 행태는 악성의 연금정치 3종 세트. 첫째는 맹탕이다. “구체안을 내겠다고 공언해온 보건복지부가 윤 대통령의 승인을 거쳐 국회에 제출한 연금개혁안(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은 재정계산이란 취지의 기본 요건조차 갖추지 못했다. 국민연금법에 의무화한 재정계산은 본디 장래의 수지를 전망해 그 결과에 기초해 재정 확보 및 제도 개편 계획을 세우라는 게 핵심이다. 이번처럼 구체적 숫자 없이 방향성만을 제시하라는 게 아니다. 법적 책임을 방기하고 결정을 국회로 떠넘겼다는 비판이 나오는 근거이며, 윤 정부 친화 성향을 보여온 뭇 언론과 전문가들조차 맹비난을 쏟아낸 이유다. 정부로부터 바람 빠진 공을 넘겨받은 국회는 스스로 개혁의 바람을 채울 자신이 없다면, 이참에 정부안을 반려해, 정부가 최소한의 법적 책임을 지키도록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3종 세트의 두번째 양태는 막던지기. 어처구니없게도 누구보다 냉정해야 할 행정부가 앞장서 불붙였다. 맹탕 안을 낸 데 따른 비난을 의식해 급발진한 모양새다. ‘세대별 보험료율 인상 속도 차등화, 자동안정화장치 도입, 확정기여 방식으로의 전환등 하나하나 많은 검토와 숙의가 필요한 제도개편 방안을 너무나 가볍게 정부안에 담았다. 더욱이 연금개혁의 구체안 마련을 위해 꾸려진 정부 자문기구인 재정계산위원회에서도, 여야가 참여해 구조개혁을 논의해온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에서도 단 한차례도 논의를 한 적 없는 방안이다. 이들 안은 정부가 그토록 강조한 세대 상생의 연금개혁 논의가 아니라 오히려 세대 갈등을 불러일으키거나 개혁 방향의 혼돈을 가져올 조짐이다. 여당은 한술 더 떴다. 내내 잠자코 있다가 느닷없이 연금제도의 틀을 통째로 바꾸는 초급진적 구조개혁안을 제시했다. 지난 31일 열린 여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유의동 정책위의장은 부과식에서 적립식으로 운용 방식을 단계적으로 전환하자”,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해 점진적으로 통합하자는 어마어마한 연금개혁 방향을 제안한 것이다. 유 의장의 발언은 전문가들조차 내용 파악이 다를 정도로 모호했다. 이 때문에 한 경제신문이 적립식에서 부과식으로 전환을 추진한다라며 발언을 거꾸로 보도하기도 했다. 이들 방안 역시 앞에서 언급한 정부와 국회의 두 기구에서 단 한차례도 논의한 적이 없었다. 물론 국민의힘 내부에서조차 논의해온 흔적 또한 찾을 수 없다.

발언 시점도 공교롭다. 그의 발언은 윤 대통령이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한 그날 아침 회의에서 나왔다. 이 때문에 연금 전문가들은 유 의장의 발언을 두고서 모호함과 시점 등 다분히 의도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감추지 않는다. 맹탕 연금개혁안을 두고 대통령에게 쏟아질 비난을 회피하기 위한 발언이 아니냐는 것이다. 정부·여당의 세번째 연금정치의 코드는 바로 개혁 회피란 비난을 피하기 위한 물타기.

전문가들은 3대 사회개혁 중 하나로 연금개혁의 깃발을 드높이던 윤석열 정부와 여당이 보이는 이런 개혁 회피, 비난 회피적 행태는 다가오는 총선을 의식한 표 계산 때문으로 추론한다. 표를 의식해 찬반양론이 뜨거운 구체안 제시를 회피하거나 청년 세대의 정서에 맞추고자 한 데 따른 결과란 분석이다. 하긴 문재인 정부도 표를 의식한 끝에 연금개혁에 끝내 실패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윤 정부와 여당의 연금정치 행태는 어느 정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연금정치 비난 회피 전략이란 일반 해석에 그칠 수 없는 중대한 악성이 내장돼 있다. 정부와 여당이 내던진 급발진 방안들은 현실화 여부를 떠나 그 가리키는 방향이 대체로 세대 간 집단부양이란 연금의 공적 성격을 더욱 위축시키고, 민간보험이나 저축 같은 사적 성격을 강화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정부·여당은 이들 안이 장차 청년 세대를 위한 구조개혁 방안이라고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그렇지 않거나 오히려 더 불리한 대목도 적잖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무엇보다 이들 방안은 가뜩이나 빈약한 연금 급여를 더 낮추게 하는 방향이란 점에서 우려가 크다.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한겨레 : 2023.11.02.

 

도래한 전쟁의 시대, 왜 전쟁이 잦아지고, 길어질까?

러시아-우크라이나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까지

세계적으로 전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비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동의 다른 지역과 중북부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그리고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전쟁 등 구소련 지역 일부에서도 전쟁이 확산되고 있다. 전쟁의 확산은 일반적인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스웨덴 웁살라 대학의 분쟁 데이터 프로그램과 노르웨이 오슬로 평화연구소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 무력 분쟁은 그 횟수와 강도, 그리고 지속에 있어서 냉전 종식 이후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유엔은 올해 1월에 전 세계 분쟁 수준이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최고치에 도달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실제로 2022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55개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전쟁의 평균 지속 기간도 이전보다 약 3분의 1이 길어진 8~11년을 기록했다. 이로 인해 올해 초 기준으로 분쟁에 노출된 인구수가 20억 명에 달하고 1800만 명이 난민으로 내몰렸다고 한다. 그만큼 휴전이나 종전이 일시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고, 전쟁이 재발하거나 발발하면 휴전이나 종전을 달성하기가 매우 어려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최근 들어 전 세계 도처에서 전쟁이 잦아지고 길어지고 있는 것일까? 코로나19 펜데믹과 기후위기 등 환경적 요인도 크게 작용했지만, 주체적인 관점에서도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엠마 빌스 유럽평화연구소 선임고문과 피터 솔즈베리 미국 콜럼비아대 교수는 1030일자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두 가지 문제를 강조했다. 유엔과 강대국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우선 유엔이 개입한 여러 평화프로세스가 좌초된 데에서 원인을 찾는다. 리비아, 수단, 예멘, 에티오피아, 미얀마 등이 대표적이다. 또 러-우 전쟁은 물론이고 이-팔 전쟁에서도 유엔은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유엔의 무기력은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 및 상임이사국들의 동상이몽으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냉전 종식 이후 갈등 '해결'에 초점을 맞췄던 유럽연합, 미국, 영국 등은 최근에는 갈등 '관리'로 이동해왔는데, 최근 분쟁의 양상은 위기관리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미국이 추진했던 아브라함 협정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중동의 위기관리 차원에서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를 추구했었다. 2020년에 이스라엘이 바레인·아랍에미리트(UAE)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올해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정상화 논의도 급물살을 타면서 이러한 구상은 성과를 거두는 듯 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929"중동은 지난 20년간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다"며 바이든 행정부의 중동 정책이 큰 성과를 내고 있다고 자랑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불과 8일 만에 전쟁이 터졌다. 아랍-이스라엘 갈등 관계의 근본 원인인 팔레스타인 문제를 도외시하는 중동 평화구상은 '모래성 쌓기'라는 것을 거듭 보여준 것이다.

앞으로의 상황은 더욱 암울하다. -우 전쟁과 이-팔 전쟁은 출구 자체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이들 전쟁에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린 나머지 다른 지역에서의 분쟁과 전쟁에는 갈수록 무관심해지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미국과 러시아, 유럽연합 등은 전시 국제법에 대해 아전인수와 '내로남불'로 일관하면서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는 전쟁의 확산과 함께 무너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국제 평화와 안정을 강대국들의 선의와 역량에 의존해온 기존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성찰과 개혁을 요하고 있다. 유엔의 실질적인 권한 역시 5대 핵보유국들이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인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주어져 있기 더욱 그러하다.

때마침 강대국들의 이기주의와 진영 논리를 비판하면서 대안적인 국제질서를 모색해야 한다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주로 남반구나 북반구 저위도에 위치한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의 목소리와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또 지구촌 곳곳이 분쟁과 전쟁으로 점철되고 있는 사이에 지구촌 전체를 위협하는 기후위기도 성큼 다가오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를 비롯한 제3지대가 커지고 기후위기야말로 인류 전체가 맞서야 할 '공동의 적'이라는 인식이 강해질수록, 전쟁의 시대에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새로운 힘과 지혜가 생길 수 있다. 이는 여전히 강대국 중심주의에 갇혀 있는 한국 외교에도 중대한 시사점을 준다.

70년을 넘긴 정전체제와 한반도식 상호확증파괴(MAD) 시대로의 진입, 그리고 동북아 신냉전의 최전선에 놓인 지정학적 위치와 '기후 악당'이라는 오명은 한국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 출발점은 '세상에는 미국말고도 많은 나라가 있고 한국도 기후위기 취약 지역 가운데 하나'라는 자각에 있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프레시안 : 2023.11.02.

 

윤석열 정권, ‘서울민국을 꿈꾸나

서울민국헌법

1서울민국은 도시공화국이다. 서울민국의 주권은 서울시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서울시민으로부터 나온다.”

2서울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로 정한다.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서울시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3조 서울민국의 영토는 서울과 그 부속도서로 한다.”

집권세력이 꿈꾸는 메가시티 서울의 미래는 이런 건가. 김포를 시작으로 구리·고양·부천·광명·하남까지 다 서울로 밀어넣을 텐가. 일일이 편입시키려면 절차가 복잡할 터다. 차라리 헌법을 개정해 전국을 서울 단일지역으로 묶고 도시국가를 선포하면 어떤가. 이참에 국호와 영토 조항도 개정하고.

더 나은 삶을 바라는 김포(를 비롯한 모든 지역) 시민의 요구는 정당하다. 지금 김포 시민의 가장 큰 고통은 열악한 교통이다. ‘지옥철김포골드라인 문제 해결이 급선무다. 현재로선 서울지하철 5호선 연장이 가장 현실적 해법이라고 한다. 김포시, 경기도, 서울시, 중앙정부, 국회가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노선 연장이 하루아침에 뚝딱 이뤄질 순 없다. 버스도 계속 늘려야 한다. 교통망 확충을 준비하는 기간엔, 서울로 통근하는 김포 시민을 대상으로 재택근무나 시차출퇴근제를 시행해보자. 사기업에 강제하긴 어려울 것이다.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직원 중 대민 업무를 맡지 않은 사람부터 해보면 어떨까. 코로나19 사태도 끝났는데 뜬금없이 웬 재택근무냐고? 코로나19 때 해봤으니 다시 해볼 수 있는 거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뭔가.

국민의힘은 왜 이런 이야기는 안 하는 걸까. 무조건 서울로 드루와 드루와만 외치는 걸까. 김포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 인격체라기보다 한 표로 봐서 그럴 거다. ‘집값 올려준다면 싫어할 사람 없지하는 속내가 읽힌다. 너무 투명해서 보기 민망하다.

시대 흐름과 인구·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은 필요하다. 그러나 A시를 B시에 편입시키는 수준으로는 안 된다. 전 지역을 대상으로 여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하고, 국가의 미래상에 부합하는 그랜드 디자인을 해야 한다. 총선을 5개월 앞두고 번갯불에 콩 볶듯 할 일이 아니다.

한국은행이 2일 발표한 지역 간 인구이동과 지역경제보고서는 시사점을 준다. 한국 인구의 과반(50.6%)이 국토 면적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에 몰려 산다. 한국의 수도권 비중은 2020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6개국 중 가장 크다. 수도권·비수도권의 월평균 실질임금 격차는 53만원, 고용률 격차는 6.7%포인트에 이른다.

한은은 현재의 일극체제는 많은 청년들로 하여금 무한경쟁 부담을 감수하고 수도권으로 이동하게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저출생 문제의 주원인도 청년층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데 있다는 게 한은의 진단이다.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출산을 늦추기 때문이다. 한은이 제시한 해법은 서울 확장이 아니다. ‘비수도권 거점도시육성이다.

국민의힘은 서울 확장을 메가 서울이란 표현으로 분식하려 한다. 하지만 서울은 이미 슈퍼 울트라 메가급이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이 블랙홀처럼 사람과 돈을 빨아들이는 사이, 비수도권 지역은 소멸 위기에서 신음하고 있다. 전국 시군구의 40%가 인구감소 지역으로 지정된 터다. 서울을 더 메가하게 만들겠다면, 그건 서울과 인접지역을 제외한 나머지를 버리겠다는 신호나 매한가지다.

국민의힘은 2일 김포시를 서울에 편입하는 방안을 당론으로 추진키로 하고 특위까지 구성했다. 그런데 같은 날 윤석열 대통령은 대전에서 열린 지방시대 엑스포지방자치·균형발전의 날기념식에 참석해 우리 다 함께 잘살아 보자고 외쳤다. 전날엔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회가 4대 특구 지정 등 지역발전계획을 담은 1차 지방시대 종합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집권세력의 생각은 도대체 뭔가. 국민은 어지럽다.

윤 대통령이 지난 1일 타운홀 미팅 형식의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정치 과잉” “정치 과잉 시대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윤 대통령이 언급한 정치정쟁을 지칭한 것이리라 짐작한다. 대안 없는 정쟁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주권자를 가 아닌 사람으로 존중하고 대우하는 진짜 정치는 차고 흘러 넘쳐야 한다. 수도권 시민이 통근길에 목숨 걸지않도록 하는 정치, 비수도권 시민도 고용·교육·의료 서비스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정치에 과잉이란 없다.

대한민국헌법은 전문에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1232항에선 국가는 지역간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하여 지역경제를 육성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했다. 윤 대통령과 집권여당이 헌법상 책무를 잊지 않기 바란다.

김민아 칼럼니스트 경향 : 2023.11.03

 

씨앗을 손에 쥔 채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우리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세운다. 서방 언론은 이 전쟁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라 칭하고, 아랍계 언론은 이스라엘-가자 전쟁이라 칭한다. 한쪽은 암암리에 전쟁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상기시키고 있고, 다른 쪽은 주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주목하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어떻게 칭하든 지붕이 없는 거대한 감옥 같았던 그 땅은 황폐하게 변하고 있다. 가자 땅에서 들려오는 폭발음과 애곡하는 소리가 무딘 귀에도 아프게 들려온다.

벌써 양측을 합쳐 1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고, 그중에는 전쟁과 무관한 어린이와 여성들이 많다. 사회 기반 시설도 다 파괴되고 있다. 난민촌도 공격을 받아 많은 이들이 죽었고, 성 포르피리우스 교회도 파괴되었다. 주민 대부분이 연료, , 식량, 의약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피란길에 오를 기회조차 잡지 못한 이들은 절망의 심연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지상군이 투입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전쟁은 맹목적이다. 전쟁터의 빛깔이 검은색인 것은 그 때문이다. 예외가 있다면 붉은색 피뿐이다. 상대를 제거하고야 말겠다는 절멸에의 의지가 작동하는 순간 인간의 존엄은 유보된다. 적은 괴물이고 악마이기에 파괴되는 것이 마땅하다. 전쟁은 가장 큰 낭비이다. 물자를 낭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장 소중한 생명조차 아끼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작가 팀 오브라이언은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이라는 책에서 진실한 전쟁 이야기는 결코 교훈적이지 않다. 그것은 가르침을 주지도, 선을 고양하지도, 인간 행동의 모범을 제시하지도, 인간이 지금껏 해오던 일들을 하지 않도록 말리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다.

상대를 철저히 궤멸시키면 평화가 올까? 전쟁과 혼란의 시기를 살았던 노자는 군대가 주둔하던 곳엔 가시엉겅퀴가 자라나고, 큰 군사를 일으킨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뒤따르게 된다고 했다. 전쟁은 누군가의 가슴에 증오의 씨를 뿌리는 일이다. 그 후과는 또 다른 분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증오의 씨를 심어 평화를 거둘 수 없다. 바람을 심는 이는 광풍을 거두게 마련이다.

유럽에선 이미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 푸른색 페인트로 그려진 다윗의 별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 별은 나치 시대의 공포를 떠올리게 하기에 섬뜩하다. 불확실성이 커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탓할 대상을 찾는다. 무질서가 심화되어 혼돈 상태에 이를 때 폭력의 충동은 증대되고, 나쁜 정치인들은 그 충동의 희생양을 대중들 앞에 던져준다. 가난한 사람들, 난민, 소수자, 외부자들이 그 대상이 되기 쉽다.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한다.

평화의 꿈은 그저 헛된 꿈일 뿐일까? 히브리의 예언자들은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고,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는 세상을 꿈꿨다. 평화로운 시기에 나온 비전이 아니다.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이 중근동 세계를 공포로 휩쓸고 있을 때 예언자들은 그런 꿈을 들고 나왔다. 망상처럼 들리는 그런 꿈조차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빈곤해질까?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하마스의 로켓 공격으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친 현장을 목격한 한 유대인 소녀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소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냥 평화롭게 함께 지내고 싶어요.” 평화의 꿈은 어떤 경우에도 스러지지 않는다.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는 이들이 많지만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 또한 많다.

2015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독일과 싸웠던 러시아 여성들을 인터뷰한 후에 쓴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지금도 기억 나. 어느 마을에 갔다가 한 노인의 장례식을 봤어. 노인은 밤에 목숨을 잃었어. 밭에 씨를 뿌리다가 죽임을 당한 거야. 그런데 별짓을 다해도 노인의 손가락이 펴지질 않는 거야. 씨앗을 어찌나 꼭 쥐고 있던지 할 수 없이 씨앗을 손에 쥔 채로 땅에 묻었지.” 씨앗을 손에 쥔 채로 땅에 묻힌 그 노인은 어쩌면 길을 잃은 채 방황하는 우리에게 평화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ㅠ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경향 : 2023.11.03

 

대통령 앞에 작아지는 '인요한 혁신위'

모든 걸 바꿔도 대통령이 안 바뀌면

한국정치의 공식 중 하나가 정당이 선거에 패하거나 지지율의 하락 등 위기에 처하면 비상대책위원회나 혁신위원회를 구성하여 쇄신을 모색하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의 수장이 물러나는 것이 책임정치에 부합하지만 이번에 국민의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지율의 반등과 집권세력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려면 우선 강서구청장 선거 패인에 대한 올바른 분석과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연계되는 문제지만 더 근원적인 문제는 왜 윤석열 정부의 지지율이 같은 시기 역대 정권들에 비해 더 낮은가에 대한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원인 분석이다. 정당 내부의 공천 시스템과 물갈이 비율 등 선거이론적인 원론적 문제들도 유권자의 지지를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요소이지만 중앙정치 전반을 관통하는 정권의 인식의 문제들이 보다 중요하다.

국민의힘이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에 참패한 이후에 혁신위원회를 구성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익히 보아왔던 낯익은 광경이다. 혁신위에 국한해서 볼 때 역대 여야의 혁신위는 성과를 낸 경우도 있었지만 무위에 머무른 예도 많았다. 경험칙으로 미루어 볼 때 혁신위가 성공하려면 전권 위임 여부, 민의의 보편성에 부합하는지의 여부, 지도부의 관용 정신 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당의 혁신위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는 대통령의 현실적 권력의 벽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의 혁신위가 성과를 내서 지지율의 반등을 꾀하려면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 현 정권에 대해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것이 첫째, 정권의 불통이다. 임기 초에 도어 스테핑으로 언론과 소통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정권의 약점을 노출시키는 현상을 초래해서 중단됐다. 방식을 개선해 보겠다고 했으나 이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 보다 더 중요한 소통의 문제는 야당을 정권의 파트너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야당 대표의 사법리스크는 분명 여권으로서 문제 삼을 수 있는 부분이고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과도하게 이재명 대표의 사법 문제를 비호하는 모양새를 보인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야당의 친명계 의원들과 강성 지지층을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 정치세력으로서 존재하는 입법권력의 담지자인 야당 대표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은 집권세력의 지지율 상승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과도한 '우클릭'이다. 굳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과거의 반공이데올로기로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을 억압했던 사실이 연상될 정도로 야당을 대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건 현 집권세력엔 큰 약점이다. 이념적 잣대로 야당을 평가하는 듯한 태도는 중도층이 보기에 정권에 매력을 느끼기 어려운 중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극우적 성향을 보인 인사들을 내각에 기용한 것은 이의 연장이다. 이는 인사 문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셋째, 국제정치에서의 한미일 협력 강화를 통한 안보 정책 자체를 비난할 일은 아니지만, 북한과 중국, 러시아에 대한 전략적 태도의 결여가 국민 일반에게 안보 불안을 안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 단계에서 북한과 대화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아예 북한과의 단절을 상수로 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과하게 경도되어 있는 것 역시 보수층을 제외하고 크게 득점할 일도 아니다.

넷째, 고물가와 잠재성장률의 하락 등 경제문제다. 이는 정권 자체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는 없지만 집권하고 있는 세력으로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지지율 상승을 견인할 요소는 뭐가 있을까. 별로 내세울 게 없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강서구청장 선거 패배 이후 민생과 경제, 소통을 강조하는 정도다. 정쟁을 부추기는 현수막을 철거하는 행태는 잘한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야당과의 소통은 빠져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야당 대표와의 회동을 제안한 정도지만 파괴력을 갖기 어렵다.

위에 열거한 문제들에 대해 진정성 있는 성찰이 있고 대통령실이 변화를 주도한다면 이는 곧바로 국정기조의 전환으로 해석될 것이며 지지율은 저절로 상승한다. 제도의 변화와 인적 쇄신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대통령의 인식의 변화다. 이 부분이 제외된다면 어떠한 혁신위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여권은 충분히 인식해야 하며 아마도 여권의 핵심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제 권력구조에서 결정적인 것은 역시 대통령의 인식이다.

이러한 요소들과 연계된 문제로 수직적 당정 관계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역대 정권에서 익히 보아왔던 집권당이 '청와대의 여의도 출장소'란 오명을 벗지 않으면 내년 총선에서 여당은 승리하기 어렵다. 김포시 서울 편입 등의 이슈가 의제 선점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로 치러지는 내년 총선의 성격상 대통령의 여당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중도층이 정권을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여당 지도부가 대통령 권력과 수평적 관계로 변화할 수 있는 단초가 열린다면 여당은 중도층의 지지를 견인할 변곡점을 마련할 수 있다. 이 역시 대통령의 인식의 변화와 밀접하다. 내년 선거는 윤 대통령이 치르는 선거라는 인식이 여권을 관통해야 한다. 이러한 근본적 인식이 배제된 여타의 조치들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 | 프레시안 2023.11.03.

 

경제문명의 운명, 윤석열 경제의 운명

허드슨이 쓴 책 <문명의 운명>이 흥미롭다. 금융과 부동산 부문이 손잡고 지배하는 현대 불로소득자본주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아가 미·중 갈등의 경제적 본질이 뭔지 알고 싶은 이들에게 나름 명쾌한 답을 준다. 쉽지 않은 내용을 이처럼 쉽게 풀어 놓은 책도 흔치 않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꽉 막힌 한국경제 생각도 많이 했을 법하다.

허드슨판 불로소득경제론의 첫번째 기둥은 자산소유권에 기반한 지대개념이다. 경제적 지대는 근로소득(임금, 이윤)과 대비되는 불로소득이며 가치를 초과하는 비생산적 가격부분이다. 이 지대는 자산의 소유·통제권에 기반을 둔다. 자산의 소유·통제란 곧 소득과 산출에 대한 특권적 지대청구권을 의미하며 국가가 이 특권을 보장한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생산적 실질경제는 불로소득청구권을 행사하는 소유권과 비생산적 자산경제의 그물망에 둘러싸인 채 지대지불부담 압박(지대압박)을 받고 쪼들린다.

둘째, 허드슨은 불로소득경제의 거시 축적메커니즘을 불로소득동학(rentier dynamics)이라 부르는데 그 중심에 자산인플레이션과 부채디플레이션이 놓여 있다. 빚내서 집 사기와 은행 담보대출 등으로 자산시장이 팽창하는 반면 부가가치생산과 민간소비가 중심인 실질경제 순환은 위축된다. 불로소득경제는 부채기반경제, 즉 빚으로 쌓아올린 집이다. 경제의 생산능력 및 부채상환 능력과 무관하게, 그보다 더 빠르게 부채규모와 이자가 증가하는 것이 거시동학의 기본공식이다. 허드슨이 말하는 이 동학은 피케티가 제시한 r(자본수익률)>g(경제성장률) 부등식보다 더 현실감이 있다.

셋째, 빚으로 쌓아올린 불로소득경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실질가치 창출과 유리된 채 허구적으로 팽창한 거품은 꺼지기 마련이다. 또한 이 불로소득 거품경제는 양극화 불평등을 조장한다. 자산계급이 지대놀이 잔치판을 벌이는 한편 자산약자와 노동약자들은 자산가격 상승과 이자부담 압박에 시달리며 내핍과 희생을 강요당한다. 은행도 긴축과 고금리 기조로 돌아선다. 부채디플레이션과 소비감소의 누적효과로 경제는 침체에 빠진다. 여기에 공공서비스 민영화와 시장독점화, 물가상승이 가세한다. 이는 가계생활비와 기업사업비를 더 높이고 실물경제 지출능력을 갉아먹으면서 거시경제 악순환을 심화시킨다. 지금 우리는 이 침체국면에 빠져 고통받고 있다.

<문명의 운명>은 주로 미국경제를 정조준해 비판한다. 하지만 미국이야기만은 아니다. 부동산과 화폐금융의 판도라상자가 열렸을 때 인간경제가 어떤 운명에 놓이는지, 재앙을 맞는지 논하고 있으므로 윤석열 경제의 운명에 대해서도 설명력이 높다. 윤석열 경제는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으나 허울 좋은 자유의 깃발 아래 자산계급이 자유를 향유하는 불로소득경제 띄우기에 몰두하는 것이 1번이다. 그런데 허드슨의 이야기를 한국경제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몇 가지 대목들이 있다.

첫째, 불로소득경제 거시동학에서 자산가격상승은 자산약자에 지대압박으로 작용하는 한편 소비확대로 이어지는 순환고리도 존재하는데 이를 부()의 효과라 한다. 그런데 미국과 달리 한국 자산시장 특성상 이 효과가 희미하다. 한국의 자산투자는 실질경제와 단절되어 미국보다 훨씬 더 돈 놓고 돈 먹기 성격을 띠고 있다. 둘째, 한국 실물경제는 고도로 수출의존적이며 내수가 부진할수록 수출증대에 목을 맨다. 그런데 중국수출이 30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윤 정부의 외교참사가 큰 요인이다. 또한 국내투자는 부진한데 대기업의 미국투자는 요란하다. 셋째, 윤 정부는 고물가 고금리의 경기침체기에 시대착오적 긴축재정에 집착한다. 정부소비증감률이 3분기까지 -1.6%로 역성장이다. 그럼에도 감세와 세수부족으로 역대 최대 재정적자를 기록한다. 재정참사가 침체를 심화시킨다. 미국이 고금리 긴축을 확장재정으로 만회해 정책반전을 도모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다. 넷째, 약자 대중은 지대압박과 저임금압박을 함께 받고 있다. 2022년 실질임금 인상률이 4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임금감소가 소비침체를 심화시킨다. 미국이 호황 속에 고용시장이 탄탄한 것과 대조된다. 더구나 한국은 미국이 고금리 강달러로 타국에 전가하는 인플레압박을 그대로 받는다.

윤석열 경제에 희망이 있을까. 선거철이 되니 포퓰리즘적 지원보따리를 푼다. 유산자특혜 특례보금자리론으로 정책실패를 저질러놓고 태연히 은행갑질과 종노릇 이야기까지 한다. 국민이 바보인가. 강서구청장 선거결과가 현재 민심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 경향 : 2023.11.05.

 

보이지 않는이재명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보이지 않는다. 구속영장 기각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압승으로 그의 화려한 컴백이 예상됐다. 정부·여당과 검찰의 공세는 기가 꺾였고, 당내 비주류의 반발은 주춤했다. 민주당이 이재명 체제로 총선을 치르는 것은 기정사실화됐다. 지금부터는 이재명의 시간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슈의 중심에서 이 대표는 조금 멀어져 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뉴스를 독식하는 쪽은 여권이다. 윤석열 정부의 대척점에는 제1야당 지도자인 이 대표가 아니라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데이터가 그렇다. 네이버 데이터랩에서 검색량을 살폈다. 이 대표가 35일 만에 당무에 복귀한 1023일부터 115일까지 이재명’ ‘이준석’ ‘윤석열이라는 단어 중 이 대표가 1위를 차지한 날은 1023일 한 차례뿐이었다. 같은 기간 이준석 전 대표는 네 차례 1위였다. 이 대표는 총선을 5개월 앞두고 소용돌이치는 정국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는 셈이다.

왜 그럴까. 이 대표 복귀 후 보름간 행보를 살펴보자. 먼저 그의 통합 행보가 기대만큼 강하지 않았다. 복귀 당일 체포동의안 가결파 징계 논란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곧바로 친명계 최고위원들은 잠시 미뤄둔 것이라며 여지를 남겼다. 당장 칼을 쓰지는 않겠지만 칼집엔 넣어두고 있다는 경고로 당내에선 받아들여졌다.

나흘 후인 1027일 이 대표는 비명계 송갑석 의원이 물러난 지명직 최고위원 자리에 친명계인 박정현 전 대전 대덕구청장을 임명했다. 당 내외에서 비판이 일자 이 대표는 기자들에게 그분이 친명입니까? 저는 잘 모르겠는데라고 했다. 박정현 최고위원은 113일 최고위원회의에 처음 참석해 이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당이 똘똘 뭉쳐 총선 승리라고 말했다. ‘명비어천가를 불렀단 평가가 당 내외에서 쏟아졌다.

이 대표는 의제도 주도하지 못했다. 복귀 당일 일성이 내각 총사퇴였다. 너무 나갔다고 생각했는지 권칠승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전면적인 국정쇄신을 하는 각오로 민생을 챙기라는 강조의 의미였다고 톤 조절에 나섰다. 이 대표가 112일 기자회견을 열고 밝힌 성장률 3% 회복을 위한 제안도 재정 확대 외에는 구체적인 성장 전략이 없었다. 재원 마련에 대해서는 낭비성 예산 삭감조정정부·여당과의 협의라는 말만 남겼다.

민주당이 주춤한 사이 정부·여당은 메가 서울’, 한시적 공매도 금지 등 포퓰리즘 정책을 추진하며 총선판을 흔들고 있다. 이 대표와 민주당은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지 못하고 여론의 눈치를 보고 있다. 이런 와중에 민주당은 최고위원회의에서 김포의 서울 편입 논란과 관련해 역술인 천공 영상을 틀어놓고 함께 관람했다. 틈만 나면 김대중·노무현 정신 계승을 이야기하는 정당의 모습이라기에는 민망한 현실이다.

사석에서 만난 정부·여당 관계자들은 총선 결과를 비관하지 않는다. 그 첫 번째 이유로 여전히 이재명 리스크를 꼽는다. 일단 수면 아래로 내려간 사법 리스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친명계 의원들조차 이 대표와 민주당은 안 보일수록 좋다는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를 한다. 농담만은 아닐 것이다강병한 정치부 차장 경향 2023.11.06

 

윤석열과 신방복합체 총선 돌입

일찌감치 총선 강풍이 불고 있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에서 위기를 느낀 윤석열 정권의 색다른 승부수다. 갑자기 세브란스 의사가 나타나 전라도 사람이라며 집권당 혁신에 나섰다. 더 색다른 모습은 윤석열의 표변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1주기를 맞은 그는 지난해 오늘은 제가 살면서 가장 큰 슬픔을 가진 날이라고 언죽번죽 말했다.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과 함께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 깊은 위로를 한 곳은 유족들 앞이 아니다. 뜬금없이 성북구의 교회를 찾아 추도예배를 한다며 내놓은 말이다. 유족들은 정작 다른 곳에서 1주기를 열었다. 사전에 대통령을 초청했지만 유족들의 추모대회가 정치적이라나. 대통령과 여야 정당이 함께 추모하면 전혀 정치적일 수 없음에도 그렇게 매도한 언행이야말로 정략적이다. 더구나 살면서 가장 큰 슬픔이다? 유족들을 만나 한을 풀어줄 섟에 되레 측근인 행안부 장관만 감싸온 그의 수상쩍은 슬픔에 희생자 가족들은 능욕감이 들지 않았을까.

그의 가장 기쁜 날도 괴상하다. 국회 상임위원장단과 만난 자리에서 많은 얘기를 하게 돼서 취임 이후로 가장 기쁜 날이라고 말했다. 대다수 언론이 보도했듯이 그 기쁨이 취임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야당과 소통이 시작”(채널A)되었기에 그렇다면 참으로 궁금하지 않은가. 왜 그 기쁨을 여태 마다해왔을까. 야당이 소통을 거부했던가. 대선에서 0.7% 차이의 경쟁자이자 제1야당 대표를 검찰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내내 소환하며 수사해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수구적인 신방복합체들은 권력의 수상한 슬픔과 괴상한 기쁨에 맞장구친다. 아니, 단순한 찬양이 아니다. 중앙일보는 1면에 여의도 간 대통령, 먼저 숙였다는 큼직한 제목과 사진을 편집했다. 윤석열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데 이재명은 뻣뻣하다. 하지만 그 사진은 윤석열이 본회의장을 떠나기 전에 국회의원들에게 인사한 모습이다. 그럼에도 마치 옆에 서있는 이재명에게 고개 숙인 듯 각도가 잡혔다. 조선일보 뺨치는 왜곡이다. 물론 조선도 1면에 부탁드립니다, 먼저 손 내민 윤을 요란스레 부각했다. 저들의 보도에서 윤석열에 줄기차게 소통을 촉구하고 만남을 요청해온 야당은 없다.

윤석열과 신방복합체들을 새삼 수구세력으로 단언하는 까닭은 저들이 전임 대통령과 민주당에 공산주의자와 좌파 딱지를 붙인 색깔몰이에 아무런 자성이 없어서다. 색다른 표변을 꾀한 윤석열의 실체가 되레 속속 드러나고 있다. 검찰총장 시절에 대검 부장검사들에게 “(내가) 만일 육사에 갔으면 쿠데타를 했을 것이다. 쿠데타는 검찰로 치자면 부장검사인 당시 김종필 중령이 한 것이다고 말했단다. 당시 대검 감찰부장의 증언이다. 조선일보 사주를 만났는데 반공정신이 아주 투철하다고 찬양하며 검찰의 역사는 빨갱이 색출의 역사라고도 했다나.

수구언론이 전폭 지지해주어서일까. 그 대변자 윤석열은 민생을 내걸고 중대재해처벌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완화를 버젓이 들먹인다. 수구언론도 그것을 민생정책의 하나로 받아쓴다.

윤석열과 수구언론의 행태는 총선에서 무조건 이기고 보자는 깜냥이다. 대선 때 국민의 상머슴을 약속한 그가 친일 행보를 비롯해 여론을 무시하더니 돌연 국민은 무조건 옳다고 부르대는 풍경은 총선이 다가왔음을 실감케 한다. 문제는 그 수상과 괴상의 밑절미다. 국민을 무엇으로 여기면 그런 언행이 나오겠는가. ‘윤석열이 먼저 고개 숙이며 달라졌다는 신방복합체들의 작심한 보도들이 영향을 끼쳤을까. 그의 지지율이 높아졌다는 일부 여론조사는 스산하다. 정말이지 저들이 대선에 이어 국회마저 장악할 때, 대한민국은 어디로 갈까. 수구적 신방복합체와 검찰이 총선에 어떻게 나설지 불을 보듯 환하기에 우려는 더욱 커진다.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이 자기혁신에 소홀하면 더더욱 그렇다.

손석춘 철학자·우주철학서설저자 미디어오늘 2023.11.06.

 

30% 대통령의 무난한레임덕

스승의 오만과 독선을 더는 좌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떠받들며 동조하는 자는 친하게 대하고, 가부를 따져 의견을 개진하는 자는 소원하게 대하며,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자에겐 후환이 따르지만 고분고분 순종하는 자에겐 재앙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세상을 압도하는 큰 명성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덕성이 병든 이유입니다.”

당대의 권신 송시열을 겨냥한 논고가 꼭 오늘의 얘기 같다. 신유의서’(1681)는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경북 안동에서 자랑스럽게 언급한 10대 종조부 윤증이 우암의 편협한 인사와 독단, 불통을 준열히 비판한 글이다.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부정 평가 상단에 항상 들어 있는 이유들과 정확히 겹친다.

‘30% 대통령윤석열을 만든 제1요인은 인사, 즉 용인이다. 조사(갤럽)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지난해 510일 취임 직후 52%였던 지지도는 두 달도 못 돼 28%(74)로 폭락했다. 앞의 숫자가 4, 3, 2로 차례차례 내려앉은 세번의 큰 변곡점에서 부정 평가 1위는 예외 없이 인사였다. 다른 모든 요인을 압도했다. ‘잘하고 있다는 평가는 그 뒤로 지금껏 40%대를 회복한 적이 없다. 지난 3일 나온 정부 출범 16개월 분야별 정책 평가에서도 공직자 인사7개 분야 중 꼴찌(긍정 17, 부정 61)를 기록했다.

분명한 사전 경고가 있었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취임 직후 인사청문회에서 가장 용납할 수 없는 문제를 묻는 질문에 사람들은 탈세·재산증식을 첫손(52%)에 꼽았다. 부동산(35%), 입시·취업 부정(32%), 전관예우(21%), 표절 등 연구부정(20%), 병역(15%)이 뒤를 이었다. ‘정답이 만천하에 공개된 셈인데, 윤 대통령은 오답만 골라 썼다. 버티다 하는 수 없이 낙마로 정리한 장관(후보자 포함)들 가운데 하나 이상 저촉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입법부의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한 18명에도 해당자가 여럿 있다. 전임 문재인 대통령도 34명이나 임명을 강행했지만, 5년 임기를 통튼 숫자다. 지금 속도면 신기록이 틀림없다.

심지어 사법부 수장마저 오답후보자를 골라 부결을 당했다. 그러고도 또 대학 동기동창을 헌법재판소장에 지명했다. 법무부의 인사검증은 대통령의 옹고집을 합리화하는 알리바이가 되고 말았다.

고위 공직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준석을 몰아내고 체급미달인 김기현을 국민의힘 대표로 앉힌 것도, 여당을 사당으로 만든 것도, ‘보궐선거 유발자김태우를 초고속 사면해 같은 자리에 공천하도록 한 것도, 10·11 보선에 참패한 김기현을 굳이 유임시킨 것도 다 윤 대통령이 한 인사다. 그때마다 지지율은 속절없이 뚝뚝 떨어졌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사람들로 평가받는다는데, 인사가 그만 망사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낯설어하는 지인 집착형용인술이, 대통령 몸엔 배어 있다. 검찰총장이 청와대, 법무부와 협의·확정해 내려보낸 청내 인사안을 뒤엎은 게 서울중앙지검장 때 일이다. 자기 사람들로 채운 인사안을 새로 짰다. 문재인 청와대와 잘 통하는 검찰 후배를 메신저로 내세워 대통령 재가도 받아냈다. 일개 지검장이 인사 명단을 자기 마음대로 바꾼 건 검찰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2년 뒤 검찰총장이 되자 문제의 윤석열 사단을 더 높은 자리들에 포진시켰다. 검찰 울타리를 넘어 법무부 요직에까지 자기 사람을 심었다. 이윽고 대통령이 돼서는 같은 인사 패턴을 온 나라 고위직에 확대 적용하고 있다.

보선 참패 뒤 윤 대통령은 여러 차례 반성을 입에 올렸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며칠 못 가 인책 사퇴한 윤핵관을 도로 여당 인재영입위원장에 앉혔다. ‘총선 직할+인사 불변선언이다. ‘인간 윤석열을 오래, 가까이서 봐온 검찰 출신들은 그것 보라고 했다. “그래도 변화 가능성을 물으면 웃고 만다. 30% 대통령의 하던 대로는 총선 패배-무난한 레임덕으로 이어지는 탄탄대로다.

어리석고 미혹한 나로서는 끝내 이해할 수 없네.” 송시열이 윤증에게 보낸 답글엔 성찰 대신 조롱이 가득하다. 현실에서도 변화는 없었다. 이른바 예송논쟁때부터의 정적(윤휴)이 역신으로 몰려 사사를 당할 때 사문난적’(이단)의 낙인을 찍고, 노론의 영수가 되어서는 사나운 당파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정적과 같은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강희철ㅣ논설위원 한겨레 2023-11-07

전쟁의 해’ 2023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2023년이 이제 저물어간다. 2023년은 깊어져 가는 경기침체의 해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전쟁의 해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더해 아제르바이잔에 의한 나고르노카라바흐 지구 점령과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사실상의 인종청소, 그리고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과 그에 뒤따른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침탈과 그 속에서 며칠 동안 죽어간 만명 이상의 민간인. 여기에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니제르 쿠데타나 수단 내전 등까지 염두에 두면 정말 전쟁의 해이외에 다른 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도대체 인류는 왜 이렇게 살육의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국가들은 왜 전쟁을 하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가시적인 답변은 당연히 경제일 것이다. 특히 공황이나 경제위기, 경기침체 국면에서 전쟁에 의한 특수는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한다. 지금 미국 뉴욕 월가에서는 하마스 특수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할 정도로, 미국의 군수업체나 그 업체에 투자하는 금융업계에 이스라엘이 벌이는 전쟁은 반가운 소식이다. 그런가 하면, 전세계적인 침체와 대조적으로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엄청난 규모의 특수를 창출해낸 러시아에서는 올해 2.8% 정도의 경제성장률이 예상된단다. 그러나 과연 미국과 러시아만이 살육을 이용해 돈을 벌까? 202172억달러 정도였던 한국의 방위산업 수출 규모 역시 올해에는 무려 2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의 일부 자본도 전쟁의 해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자본의 이윤율을 높여주는 역할과 함께, 전쟁은 국가들 사이의 비공식적 서열을 매겨주는 계기로 작동하기도 한다. 세계 근현대사를 전체로 놓고 보면, 기존의 패권체계가 쇠락하는 국면에서 대개 약 30~50년에 한번꼴로 주요 열강이 관여하는 전쟁 등 대규모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그 결과에 따라 열강 사이 질서가 새롭게 짜여왔다. 예컨대 나폴레옹전쟁(1803~15)은 영국과 러시아 중심의 양강 구도를 낳았으나 크림전쟁(1853~56) 결과로 러시아의 위상이 격하되어 영국의 독무대가 펼쳐졌다. 이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71)에서 승리한 통일 독일이 패권국가 영국의 대항마로 부상했다가 제1차 세계대전(1914~18)에서 완패를 당했고, 영국의 패권은 그 우방인 미국으로 승계됐다.

2차 세계대전(1939~45) 결과로 미·소 양강 구도가 형성되었지만, 냉전 종식(1989~91)은 크림전쟁에서의 패배처럼 러시아의 격하와 미국의 독주를 의미했다. 2022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새로운 전쟁들은 결국 미국 독무대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 이란 등 여러 주요 비서구 열강의 도전을 의미한다. 이 도전의 궁극적 결과에 따라 2020년대 중·후반쯤에는 앞으로 또 30~50년 동안 지속될 주요 강대국 사이의 새로운 질서가 다시 만들어지고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지금 세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국제질서 재편 과정은 한반도의 안위와 직결된다. 한반도의 지경학·지정학적 상황은, 전세계의 경향들을 압축해 보여준다. 소련이 냉전에서 미국에 패배를 당했듯이, 북한도 남한과의 경제경쟁에서 완패를 당했다. , 그 패배의 폭이 훨씬 더 컸다. 현재 미국의 명목 기준 경제규모는 러시아보다 14배 더 크지만, 남한의 경제규모는 북한보다 55배나 더 크다. 한데 푸틴 시대에 군수공업 발달에 다걸기(올인) 해온 러시아처럼 1990년대 이후 북한 역시 경제적 취약성을 군사부문의 우선적 발달로 상쇄하려고 노력해왔다.

북한의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1700달러)은 예컨대 짐바브웨나 토고, 말리 등보다 더 적지만, 북한은 미국이나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인도나 이스라엘처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하는 나라가 됐다. 최근 선보인 화성-18형 미사일로 이론상으로는 미국 뉴욕이나 워싱턴까지 타격할 수 있는 무력을 갖추게 됐다. 결국 오늘의 한반도는 극도로 불균형한 지경학·지정학적 지형에 놓이게 됐다. 미국의 지배적인 영향 아래에서 그 주권을 온전하게 행사할 수 없는 남한이라는 불완전한 주권의 부국,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가난하지만 완전한 주권과 세계 최고급 전략무기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군사대국북한과 대치하고 있다.

본질에서 매우 불안정한 이 구조는, 외부적 충격으로 인해서 언제든지 더 불안해질 수 있다. 외부 충격을 가할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은, 바로 한반도 주변에 포진된 소위 ‘4들이다. ‘4중에서 미··러는 국제질서 재편과 관련된 직간접적 전쟁·대립에 연루되어 있어, 잘못하면 그 영향을 한반도가 크게 받을 수 있다. 가령 대만을 둘러싼 미-중 대립이 무장 대치 내지 무력 갈등의 성격을 띠게 되고 미국의 압력으로 그 상황에 남한까지 관여하게 되면, 남한에 대한 북한의 행동과 관련해 중국이 더는 그 어떤 견제도 하지 않겠다고 나설 수 있다. 반대로 지금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이 미국의 관심을 분산시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수행을 훨씬 더 수월하게 해준 것처럼, 대만을 둘러싼 미-중 대립의 경우 남한에 대한 북한의 적극적 행동은 미국의 역량을 분산시킴으로써 중국 쪽에 이롭게 작용할 수 있다. 한데 남한에는 한반도에서의 그 어떤 군사적 행동도 최악의 시나리오에 속한다.

이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는 일을 막기 위해 우리는 최대한 평화지향적 균형외교에 나서서 방지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 사이 교류와 경제협력을 재개하는 것이다. 무력 갈등으로 잃을 경제적 이익이 있다면 그 갈등이 일어날 확률은 줄어든다. 그리고 한-, -러 관계에서 미국의 의향을 그대로 따르는 대미 맹종의 태도도 버려야 한다. 어느 때보다도 오늘과 같은 전쟁과 국제질서 재편의 시대에 무조건적 대미 맹종은 바로 파멸의 길이다.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23-11-07

 

왜 대한민국엔 미래 담론이 없는가

테크가 세상을 바꾼다'는 인식 부재가 문제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잘 알거나 잘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잘 모르는 것은 일단 꺼립니다. 실수할 가능성을 줄이려는 인간 특유의 방어기제 때문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분석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인간사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방어기제 때문에 우리나라가 미래로 한 발짝도 못나간다면 문제가 좀 달라집니다.

국회로 잠깐 눈을 돌려볼까요.

의원 한명 한명이 입법 기관이라는데, 과연 그들이 잘 알거나 잘하는 일은 뭘까요? 현재까지 그들이 보여준 것만 보면 진영논리에 함몰된 이념논쟁, 과거사 후벼파기, 협치 대상 악마화 하기 등으로 파악됩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한 고민과는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미래에 대한 제대로 된 비전이 없어서 입니다. 비전은 왜 없을까요? ‘기술(테크)이 세상을 바꾼다는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100% 완벽한 해답은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진단하는 최소한의 단초는 될 거라 생각합니다.

미래는 늘 기술의 진보로 창조돼 왔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테크는 미래를 바꾸는 공식이 돼버렸습니다. 2000년대 들어 가속화된 인터넷혁명, 모바일 혁명, 그리고 지금 목도하는 AI혁명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기술혁명이 무서운 건 그 사회의 비즈니스 인프라는 물론 더 나아가선 국민의 생활 인프라를 송두리째 바꿔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기억이겠지만, 우리는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컴퓨터 키보드로 많은 것을 해결했습니다 서류작성은 물론 검색이나 쇼핑 주문 등 웬만한 일상은 키보드로 다 가능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몇 년전 부터는 스마트폰에서 손가락 터치 하나만으로도 전혀 불편함 없이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는 마블영화의 '자비스'처럼 음성명령 하나로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에 살 것 같습니다.

단순히 기술의 진보로 삶의 양태가 이렇게 편해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이러한 변화가 미래 먹거리 독점을 가능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부의 권력지도를 바꾼다는 데 큰 시사점이 있습니다.

단적인 예가 미국 시가총액 10대 기업의 변화입니다. 2000년대 이전만 해도 시총 10위 내에는 금융, 석유, 방산, 유통 제조 기업들이 차지했습니다. 2020년 이후 이 자리에는 애플, 구글, 페이스북(메타),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등 IT업체 일색입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미래는 테크가 열고, 미래를 여는 자들이 부의 권력을 차지한다는 상식을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다시 우리나라 얘기로 돌아와 봅시다.

여의도 국회에는 법이 정한 300명의 의사결정권자들이 있습니다. 나름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 테크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무엇이 세상을 그렇게 변하게 하고, 우리가 어떻게 이 변화에 대응해야하는 지 한번이라도 고민한 의원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보면 그건 그들만의 잘못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잘해 왔던 일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저 공천과 지역구 생각만 가득한 그들에게 우리나라 미래를 위해 테크 공부를 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치일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사람을 뽑은 우리의 잘못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상황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 혁명을 넘어 AI가 세상을 집어 삼키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처럼 여야가 극단적인 대립만 계속하고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AI 혁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2, 3류 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선 최소한 국회에 미래지향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여야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래 운명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진영에 관계없이 10% 정도(진영별로 15명씩 총 30)IT를 아는 분들로 채우자는 겁니다. 그들이 국민의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할 미래담론을 펼치면서 정책대결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자는 겁니다.

생각 같아선 지역이기주의의 산물인 지역구까지 없애자는 제안을 하고 싶지만, 차마 그런 말까지는 못하겠습니다.

이런 제안을 하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대의정치의 기반인 국회는 민의와 나라 상황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나라에서 IT가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10%가 적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둘째, IT는 국회가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인 대의기관으로 도약하는 기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여야가 어느 날 갑자기 협치를 할 것으로 기대하긴 힘들어 보입니다. 서로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영역인 IT는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여야 어느 쪽도 그 가치를 부정하기 힘듭니다. 지금 같은 극한 대결 양상에서 서로 진정성 있는 대화를 시작할 실마리를 찾기 가장 좋은 분야란 겁니다. 게다가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영역인 만큼, 여야 어느 쪽도 외면해선 안 되는 분야가 바로 IT입니다. 그러니 가치중립적인 IT를 통해 여야가 통 큰 정치를 하는 출발점으로 삼자는 겁니다.

하나 더 바라는 게 있다면, 소득수준 3천 달러 시대에 성공하신 분들이 그들의 성공방식으로 소득수준 3만 달러 시대 젊은이들의 미래를 강요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분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우리는 미래로 한 발 짝도 못나갑니다.

또 지금처럼 입법독재와 정치과잉으로 미래담론의 기회조차 앗아가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든 분야에서 정치적 수사로만 얘기하는 나쁜 버릇을 이제 멈추셨으면 합니다.

경제는 경제의 언어로, 문화는 문화의 언어로, 교육은 교육의 언어로 소통해야지 지금같이 모든 걸 정치적 언어로 유불리만 따지는 한 우리나라의 미래는 요원합니다.

내년 4월 총선에서 이길 궁리만 하는 양당 정치인들에게는 제 얘기가 한가하게 들리실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겐 한가하게 들리는 이 얘기가 국회가 국회다워지고 나라가 나라다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열한 정치과잉에서 벗어나 미래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런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습니다.3

김경묵 대표 zdnet.: 2023/11/07

 

서울민국’, 그들만의 떴다방 정치

빛의 속도로, 대한민국과 한류는 압축성장했다. 반대로, 그 속도로 무너지는 게 있다. 46개월째 주는 인구’, 브레이크 풀린 기후위기’, 감사원이 100년 뒤 8개 시군구만 살아남는다고 경고한 지역소멸이다. 이 세 가지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고, 서울공화국과 맞닿아 있다. 그 수도 서울을 집권당이 다시 넓히자고 해 시끄럽다.

이호철(2016년 작고)이 장편소설 <서울은 만원이다>를 쓴 게 1966년이다. 서울이 강남··서로 2.3배 확장된 지 3년 지나고, 9개 구에 370만명이 살 때다. 그 서울도 이호철은 꽉꽉 차 있다고 썼다. 주택청약이 시작된 1977, 박정희 정부는 서울의 근본 문제가 인구 집중이라며 행정수도 구상을 내놨다. 그 꿈은 노무현 정부가 세종시에서 펼치다 관습헌법 위배라는 헌재 판결에 막혔다. 19921093만명을 찍은 서울엔 지금 25개 구에 940만명이 살고 있다. 해도, 서울은 과집적이고 계속 블랙홀이다.

크고 이름 있는 병원·대학·기업 본사·금융·언론사·문화시설의 50~90%, 일자리 54%가 서울에 있다. 집값·생활비는 비싸다. 그래서일 테다. 서울에서 전입자가 전출자보다 많은 건 20대뿐이다. ‘순전출30대가 1위다. 모여들어도 정주는 힘들고, 결혼·출산 많은 30대부터 탈서울이 커진다는 뜻이다. 전국 꼴찌인 서울 합계출산율 0.53명이 그걸 가리킨다. 그런데도 이건희 박물관을 서울에 짓고, 300년 된 경북 영주의 반송(盤松)까지 수억원에 서울로 뽑혀 온다. 서울 옆에선 신도시 재건축과 광역급행철도(GTX)·대형 환승센터 건설이 한창이다. 그렇게 국토 12%에 인구 절반이 몰려 수도권은 대만원(大滿員)이 됐다.

여권에서 서울 편입을 거론한 김포·고양·구리·광명·하남·과천에 250만명이 산다. 더불어 거론된 안양·부천·성남·의정부를 더하면 500만명이 넘는다. 편입하면 행복해질까. ‘서울시민희망자는 좋고, 곳에 따라 집값이 오를 수 있다. 반대로, 난제도 많다. ‘서울 자치구는 시보다 세수와 국비 지원이 준다. 한강 일대는 규제가 늘고, 농어촌 입시전형은 못하고, 서울을 두른 그린벨트는 더 뚫릴 게다. 서울 지도에 김포가 길쭉이 붙여지면, 국방 업무만 없던 종합행정도시 서울도 서해 접경지가 된다. 서울 경계지엔 병목’, 수도권엔갈라치기후유증이 일 것이다. 짚을 건 더 있다. 먹이 많고 안전한 데 둥지 트는 새와 일자리와 삶의 질을 좇는 사람이 다를 건 없다. 여당이 빗댄, 오사카·맨체스터 메가시티는 과팽창한 수도 밖에 새 거점을 찾는 착상이다. 행정권역을 지키며 동일한 경제·교통·생활권을 지향한다. ‘메가 서울은 방향·순서가 틀렸다. 균형발전이면 세종 행정수도를 살리고, 좌초된 부울경이 먼저여야 한다.

그 속은 다 읽혔다. 김포 지옥철 보러 가서, 불쑥 여당 대표가 서울 편입얘길 꺼냈다. 보궐선거 참패 책임론과 정권심판론을 덮고, 총선판을 흔들 반전·히든 카드로 삼고팠을 게다. 묻는다. 2015수도권 과밀화를 비판한 울산시장 김기현과 지금 김기현은 다른 사람인가. 여권 인천시장까지 정치쇼라 반기 든 걸 특별법 하나로 뭉개보려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리고 가능한가. 이 정권 축이 2008년 뉴타운 총선을 치른 ‘MB들인 것도 다시 본다. 여기저기 찔러만 보고 총선 치를 심사도 닮은꼴이다. 며칠 주창한 지방시대인지 여당이 하자는 서울 확장인지, 대통령도 간 보는 침묵을 끝내야 한다.

이기수 편집인·논설주간 경향 2023/11/07

 

유서 깊은 나라의 천박한 정치

사주에 역마살이 들었나 싶었다. 어린 시절엔 군인 아버지 따라 전국을 떠돌더니, 직장에 들어가서도 대도시는 물론 웬만한 군단위 지역까지 출장을 다니며 잦은 여관살이를 했다. 서울과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지역발전 격차를 체감한 시간이었다. 다양한 나라의 사회와 역사, 문화에 관심이 많다보니 배낭여행도 이른 나이에 시작했다. 바쁜 생활 중에도 꽤 많은 나라와 도시를 다녔고, 해외출장이나 파견연수도 세상 보는 눈을 넓혀주었다.

야간열차나 밤버스로 장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광활한 국가들은 도착하는 곳마다 전혀 다른 기후와 풍광으로 피로를 잊게 만들었다. 문명과 종교의 교류, 왕조의 흥망성쇠가 활발했던 곳들은 수도만이 아니라 지방 도시들도 이국적인 매력의 거리와 유적, 예술품들이 넘쳐났다. 마을도 사람과 같아서,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은 자신만의 개성과 스토리가 풍부하고 자부심도 강하다.

파견근무로 한동안 머물렀던 일본이나 영국도 그랬다. 도쿄, 런던만이 아니라 작은 도시도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았다. 올 상반기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만 300만명이 넘는데 한국을 찾는 일본인의 4배에 가깝다고 한다. 환율 문제도 있지만, 일본은 새로운 역사·문화 체험을 할 만한 중·소도시의 재방문율도 높은 반면 한국 관광은 서울에만 80% 가까이 몰리고 말아서라고 한다. 서울 외의 지역은 잘 알지도 못하고 교통·체험문화 등의 관광 인프라가 취약해서다.

최근 몇년. 해외보다는 통영, 목포, 신안, 여수, 구례, 하동 같은 유서 깊은 도시들을 종종 돌아봤다. 배낭여행하듯 여유롭게 묵으며 공부도 하며 살펴보니,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답게 곳곳에 숱한 이야깃거리가 있다. 아쉬운 것은 오래전 출장을 다닐 때보다 큰 발전도 없고, 외국 관광객들의 말대로 가벼운 인스타 감성만 있지, ‘깊이와 향기가 전달되지 않는 곳이 많다는 점이다. 보석 같은 문화 유산 콘텐츠들이 진부하고 획일화된 방식으로 운영·관리되는 모습도, 이를 발전시킬 젊은 인재들을 유치할 환경도 못 되는 상황이 안타깝다.

지난주 한국은행 보고서는 저출생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이 지나친 지역 간 격차로 인한 청년층의 수도권 유입과 경쟁과잉, 이로 인한 심리적 불안과 위축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했다. 이 추세라면 지속적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는 줄어드는 반면 수도권 인구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이므로, 지역 거점도시를 만들어 사회간접자본시설을 확충해야 수도권 인구 비율 및 우리나라 전체 인구 감소폭을 줄일 수 있다는 의견이다. 한국은 인구의 50%가 국토면적 11%에 밀집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도 가장 기형적인 수도권 중심 국가다. 서울 말고는 다 시골이고, 대전은 빵집, 부산은 바다만 떠올린다는 농담이 농담이 아닌 것이다.

국토 대부분이 사막이나 황무지여서 특정 입지 좋은 곳에 메가시티가 들어서야 하는 척박한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전국 어디든 반나절이면 갈 수 있고 아름다운 산과 바다, 강과 들녘이 넘쳐나는 환경이다. 또한 젊은 세대들은 여건만 갖춰진다면 어디에서건 일과 여가를 동시에 즐기는 워케이션족으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한 바람 속에 떠오른 해변 도시가 서핑 명소인 강원도 양양이다.

비정상적인 서울 편애와 심각한 저출생, 입국자보다 출국자만 넘쳐나는 K관광의 시대에 참으로 뜬금없는 김포 편입설로 온 나라가 술렁인다. 서로 다른 개성과 자유로운 노마드의 삶을 추구하는 지구촌의 흐름을 역주행하는 선거용 떴다방 졸부정치쇼의 표본이자, 이 모든 사태들의 근본 원인이다. 서울 주변이라 서울에 편입되고 서울이어야 개발되는 논리라면 통영도 목포도 언젠가 서울이 될 것인데, 이럴 거면 하루라도 빨리 싱가포르나 바티칸처럼 도시국가 서울민국을 만드는 것이 요즘 말로 개이득아닐까 싶다박선화 한신대 교수 경향 2023/11/07

 

총선용 포퓰리즘 정책이 민생경제인가?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대통령은 민생경제로 정책을 전환하라고 지시했다. 모든 부처는 절규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정책을 마련하라고 했다. ‘민생경제가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궁금했다. 맨 먼저 각 부처는 품목별 물가관리에 나섰다. 재고를 방출하고 수입관세를 인하하고 현장지도를 강화한단다. 주세 인하를 검토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1년간 준비해오던 일회용품 사용 제한은 시행을 코앞에 두고 없던 일이 되었다. 이런 흐름의 화룡점정은 김포시의 서울시 편입 검토와 공매도 금지였다. ‘민생경제는 결국 다름 아닌 총선용 포퓰리즘 정책의 집합이었다.

거의 모든 부처는 품목별 물가 잡기에 나섰다. 차관별로 책임 품목을 지정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엠비(MB) 시대,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박정희 시대부터 사용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고 판명 난 방법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사용하는 금리 인상이란 정공법을 쓰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금리는 일찍 동결하고 대출 규제를 풀자 가계와 자영업자 부채는 빠르게 늘었다. 또 원-달러 환율은 1400원대에 이를 정도로 상승해 수입물가 부담은 더 커졌다. 환율 상승을 방어하느라 외환보유고가 크게 줄어들었다. 원가가 오르면 시간이 지나면서 부품 가격과 최종재 가격이 오르고, 다시 농산물 가격, 인건비, 서비스 가격이 올라간다. 국제유가 인상이 끝났다고 금리 인상을 끝낼 일이 아니었다. 고금리로 가계와 기업의 부담이 증가한다고? 부담을 줘서 부채를 줄이도록 하는 것이 금리 인상의 목적이다.

느닷없는 공매도 금지는 더 놀랍다. 금융위기로 시장이 공포에 질렸을 때는 공매도 일시 중지로 시장 급락을 막는다지만, 이번에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정책당국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들먹이지만, 금융시장 충격은 거의 없었다. 지지도 하락과 총선을 앞두고 개미 투자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경제 전문가들 절대다수가 같은 생각일 것이다. 공매도를 금지하면 잠시 주가가 오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가격 변동이 커지고 일부 종목의 비정상적 상승이 훨씬 더 자주 나타난다. 공매도는 이런 가격 급등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식 매도를 늘릴 수 있도록 해서 가격을 안정시키는 기능을 한다. 공매도가 중지되면 주가 등락이 심해져 주식시장이 투기판에 가까워진다. 수많은 학술논문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결국 대부분의 개미 투자자는 손해 볼 가능성이 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공매도를 전면 금지한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뿐이라고 한다. 튀르키예가 어떤 나라인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코로나 방역 해제 뒤 세계적으로 물가가 급등할 때, 고금리는 죄악이며 고금리가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부추긴다는 엉뚱한 논리로 다른 나라와 정반대로 금리를 내려서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고 대통령 선거가 끝난 다음에는 금리를 큰 폭으로 올렸다. 절정의 포퓰리즘이었다.

공매도 금지로 한국 경제 수준이 에르도안이 집권하는 튀르키예 수준으로 떨어진 느낌이다. 공매도의 가격 안정 효과, 그리고 금리 인상의 물가 안정 효과는 오랜 시간에 걸쳐 확인된 공리와 같은 것이다. 상황에 따라 정책을 미세 조정할 수 있겠지만 정부가 이런 공리를 부정하고 반대로 움직이는 것은 파괴적이다. 시장은 불안해지고 국제사회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쌓은 신뢰를 잃는다. 이제 투자자들은 우리 자본시장은 언제든지 공매도가 금지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후진국 금융시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난 1년간 금융위원회는 자본시장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여러 바람직한 정책들을 도입했다. 그런데 이 한방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지지율 하락과 총선 대응이라는 정치적 요구 앞에 합리성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여의도는 총선을 앞두고 이런 요구를 쏟아낼 것이다. 서울 주변 도시의 서울 편입 문제는 계속 검토될 것이고, 1기 신도시 재건축 문제도 또 도마에 오를 것이다. 부동산 가격을 들썩이게 해서 알량한 표를 얻을지 모르지만, 가계부채는 더 쌓이고 자산 불평등과 저출생은 더 심화할 것이다. 이런 여의도발 득표용 압력은 누가 막아야 하는가? 대통령뿐이다. 정치와 행정에 모두 발을 담그고 있는 대통령은 이 포퓰리즘적 요구를 진두지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막아야 하는 사람이다. 박복영ㅣ경희대 교수·전 청와대 경제보좌관 한겨레 2023/11/10

 

전청조·남현희 사건을 쓰지 않은 이유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다. 광고 기사인가 싶었다. 이제는 사기극으로 판명 난 자칭 재벌 3세 전청조와 전 펜싱 국가대표 남현희의 결혼 발표를 전한 여성조선의 단독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재벌가 3세로 태어나 유명글로벌 아이티(IT)기업 임원 활동을 하며 경영을 도왔다든가, ‘뉴욕에서 승마를 전공하고 다수 대회에서 우승했다든가 하는 기사 내용은 앞뒤가 맞질 않았다. 지금까지 기사 한줄 나온 적 없는 재벌 3세 글로벌 아이티기업 임원이라니. 냄새가 났다.

게다가 팩트 확인에 필요한 디테일은 교묘하게 빼놓고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한 수식어만 잔뜩 동원한 게 기자가 쓸 법한 문장 같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인터뷰이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 쓴 모양이구나하고 넘겼다. 돈을 받고 광고성 기사를 실어주는 매체도 있으니 그런 기사인가 싶었다. 돈 받고 쓴 기사라면 인터뷰이 얘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따로 취재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여성조선의 이 기사를 중앙일보, 서울신문 등 주요 매체들이 보도 당일(1023) 온라인기사로 받아썼다. 별도 사실 검증 없이 여성조선 기사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식이었다. 대부분 온라인기사를 생산하는 디지털뉴스팀 소속 기자들이 쓴 기사였다.

종합지·경제지·스포츠지 등은 지면에 싣는 기사와 별개로 온라인뉴스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별도 팀을 꾸려 운영한다. 한겨레에도 오픈데스크라는 이름의 디지털뉴스팀이 있다. 오픈데스크팀으로 파견 와 일한 지 2주쯤 지났을 때 전청조·남현희 사건이 터졌다.

전청조·남현희 기사는 쓰기만 하면 조회수가 보장되는 기사였다. 유명인이 주인공인데다 돈과 성이라는 관심도 높고 자극적인 키워드가 위험하게 얽혀 있었다. 온라인뉴스 생태계에는 올라타기만 하면 높은 조회수가 보장되는 굵직한 조류가 흐른다. 그 조류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국뽕이라 불리는 애국심이라든가, 반일·반중 정서, 잘나가는 연예인, , 성 등이 스테디셀러, 그때그때 반짝 뜨고 지는 따뜻한 가을’ ‘공매도’ ‘마약같은 단발성 용오름도 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이런 흐름에 올라타는 기사는 우리 사회 각종 혐오를 확대·재생산하거나, 확증편향을 강화할 위험이 있다.

온라인뉴스 생산자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조회수와 함께 저울에 올려지는 것은 저널리즘의 원칙과 가치다. 다행히 한겨레구성원들 사이에는 후자가 더 중요하다는 데 이견이 없다. 사실보도 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재벌 3세인지 아닌지 확인도 안 된 사람의 인터뷰 기사를 받아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청조씨 판결문이 공개됐을 때는 써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퀴어 혐오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는 얘기에 아차싶었다. 전청조가 성소수자이건 아니건, 그가 여자냐 남자냐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과정이나 그 과정에서 나오는 혐오 표현들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온라인 기사를 써야 할까. 혐오를 재생산하지 않으면서도 재미있고, 가급적이면 공익적이기까지 한 기사를 쓰는 일. 오늘도 온라인뉴스 생산자의 고민은 깊어간다.

남지현정책금융팀 기자(오픈데스크팀 파견) 한겨레 2023/11/10

 

강도를 보호하라

지난 815,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체주의 세력은 자유사회가 보장하는 법적 권리를 충분히 활용하여 자유사회를 교란시키고, 공격해 왔습니다. 이것이 전체주의 세력의 생존 방식입니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 추종 세력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원고지 21매 안팎의 광복절 경축사에는 자유민주주의란 단어가 7차례 나온다. ‘자유민주를 합성한 이 단어는 영어 ‘Liberal-democracy’의 번역어처럼 보이지만, 정작 영미 정치학 사전이나 인문사회과학 서적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의 발명품인 이 단어의 용례는 시대에 따라 의미가 변했고 즐겨 쓰는 진영도 달랐다. 1950년대부터 간간이 쓰이기 시작한 이 단어는 북한이 스스로를 진보적 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라고 자칭했기 때문에,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남한에서 만든 말이다. 이 용어 속의 자유는 다당제나 사상의 자유 등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공산주의가 지향하는 경제적 균등이나 계획경제와는 다른 시장경제에 대한 옹호가 표명되어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의 다른 표현이지만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를 의미했다.”(임대식,자유민주주의,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엮음,역사용어 바로쓰기,2006,역사비평사,144)

그러나 이승만이 통치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이 용어의 본색인 자본주의지향은 살짝 가려지고 이 용어의 표면인 반공·반북만 부각되었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도 저 용어의 거죽으로 자신의 군사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가 경제부흥을 위해 도입한 계획 경제는 전혀 자유민주주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삼선개헌과 유신체제 구축을 통해 독재체제가 강화되면서 정치적·시민적 자유민주주의 회복은 반독재민주화 진영의 강령이 되었고,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사대주의적이고 서구적인 것으로 몰아붙이면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이 시기에 이 용어를 독점한 것은 반독재민주화 진영이었다. 이 용어가 다시 보수·우파의 전유물이 된 것은 김대중(1998)·노무현(2003)이 연이어 집권하고 남북 화해가 진전되면서다.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우파는 이 용어를 반공·반북의 동의어로 되살려냈다.

윤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를 반국가세력공산전체주의 세력으로 비방했으니, 그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에는 정치적·시민적 자유도 민주주의도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저 경축사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반공·반북의 동의어로 사용했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자유시장경제시장경제의 동의어라는 것도 숨기지 않았다(각기 1회씩 나온다).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한 차례 막말을 쏟아낸 윤 대통령은 열흘 후인 825,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1주년 성과보고회 및 2기 출범식 인사말에서 또다시 무개념 발언을 더했다. 그는 시대착오적인 그런 투쟁과 혁명과 그런 사기적 이념에 우리가 굴복하거나 거기에 휩쓸리는 것은 결코 진보가 아니고, 한쪽의 날개가 될 수 없다면서 오른쪽 날개는 앞으로 가려고 그러고 왼쪽 날개는 뒤로 가려고 그런다면 그 새는 날 수 없고 떨어지게 돼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자유민주주의 즉, ‘자유시장경제시장경제오른쪽날개만으로 날고 있는 것일까.

‘Liberal-democracy’의 번역어처럼 보이지만 한국의 발명품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로 포장된 강도의 이념

2008년 미국에서 금융붕괴가 일어났을 때, 미국 정부는 대공황 이후 최대 규모의 구제금을 부실 경영으로 금융붕괴의 원인을 제공한 금융사에 퍼부었다. 개인의 파산을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한 공적 자원으로 막는 것은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이 아니다. 그것은 정부의 정책에 반발한 공화당 상원의원 짐 버닝이 말한 것처럼 사회주의 방식이다. 이와 같은 반시장적 조처는 윤 대통령의 말씀처럼 사기적이며, 왼쪽 날갯짓으로 뒤로 간 것이다. 그러나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거대 기업에 공적 기금을 출연하거나 특혜(정책)를 베푸는 것은 특별나지 않다. 코로나 사태로 항공업계가 위태롭던 20204월부터 202245일까지 2년간, 정부는 국내 항공사에 특별고용유지지원금 총 5195억원을 직·간접으로 지원했다(대한항공은 이 가운데 55% 수준인 2832억원을 받았다). 이상하게도 자본주의는 위기 때마다 사회주의적 조처로 위기를 모면하고는 한다.

자본주의자들은 공적 자금을 대기업에 안겨주는 사회주의적 조처는 비상시에만 일어나는 예외인 것처럼 말하지만, 자본주의 국가는 항상 개인보다 기업을 편든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노력과 창의가 시장경제를 발전시킨다고 하지만, 실제로 믿고 실행하는 것은 낙수효과(trickle-down). 슬라보예 지젝이 간파한 것처럼 낙수효과란 재분배가 빈자를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대신 부자를 빈곤하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반개입주의적이기는커녕 실제로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에 관하여 아주 정확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빈자가 부유해지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그들을 직접 돕는 것은 역효과를 내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의 역동적이며 생산적인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요구되는 종류의 개입은 부자가 더 부유하게 되도록 돕는 그런 것이며, “다른 방식을 취한다면 그저 국가가 진정한 부와 창조자를 희생시키면서 궁핍한 자에게 자금을 분배하는 경우가 될 뿐이다.”(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2010,32~33)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 위기를 가져왔던 금융사의 최고경영자들은 천문학적인 퇴직금과 상여금을 받았다. 공적 자금을 지원받았던 한국의 회장님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사재를 내놓았다는 사람은 전무하거나 드물다.

누군가가 강도를 보호하라!’고 외치고 다닌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안다. 정신병자이거나,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그도 강도의 일원이다. 한국식 조어인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로 포장된 강도의 이념이다. 장정일 작가 민중의 소리 2023/11/12

 

민의와 총선, 그리고 연금개혁

민심은 천심이다. 오래된 말이지만 노동개혁, 연금개혁과 같은 주요 사회개혁 논의가 안개에 싸인 채 총선을 몇달 앞둔 상황에서는 이 말은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정부가 반드시 임기 안에 해내겠다고 천명한 연금개혁은 미래 한국사회의 질,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의 일상의 모습을 크게 바꿔놓을 수 있다. 개혁 향배에 따라 보통의 시민이 어떻게 일하고 은퇴 후에는 어떤 노후를 보낼 것인가가 달라진다. 나아가 이 개혁은 세대 간, 계층 간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상상하는 대로의 민주주의라면 주요 정치세력은 책임 있는 개혁안을 내놓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확장되며, 수많은 토론과 의견수렴 등을 통해 정책 방안에 대한 국민의 선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개혁을 해내겠다고 천명한 대통령은 물론 어느 정치세력도 연금개혁에 대한 입장을 제시하지 않는다.

며칠 전 정부는 ‘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국회에 제출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장수준을 높일 것인가 재정을 강화할 것인가, 연금개혁의 향배를 둘러싼 뉴스가 쏟아졌지만 이제는 조용하다. 역시 뉴스는 휘발성이 강하다. 연금개혁에 대한 인내심 강한 침묵은 정권 초기 69시간 노동안을 둘러싼 논란을 겪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선거 전에 다시 그런 논란에 휩싸이고 싶지 않을 수 있겠다.

연금개혁에 대한 이런 태도는 정치적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한 전략적 모호성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공복으로서 민의를 충실히 수렴하여 이를 사회개혁에 잘 반영하겠다는 낮은 자세라면 환영해야 할 일일 수도 있다. 정부의 연금개혁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주요 자료인 종합운영계획은 90페이지가 넘는데 이 중 유일하게 계획으로 밝힌 것은 국회와 협업을 통해 공론화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내내 국민의견 수렴과 사회적 합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민의 수렴을 안 한 것이 아니다. 종합운영계획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부가 실시한 국민연금개혁 방향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더 내고 더 받는 개혁에 대한 선호가 전체 응답자의 38%로 가장 많다. ‘덜 내고 덜 받는 개혁을 선호한다는 비율은 23.4%, ‘더 내고 그대로 받는 개혁에 대한 지지는 21%이다. 보장성 강화와 재정안정에 대한 고른 접근에 대한 국민 요구가 큰 것이다. 이는 국민 대다수의 핵심 노후소득보장 수단이 국민연금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각종 사회조사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흥미로운 것은 정부는 국민연금 인식 및 선호의 세대 간 차이를 강조하고 있지만 50대는 물론 20대에서도 더 내고 더 받는 개혁안에 대한 지지도가 가장 높다는 것이다. 물론 더 내고 더 받는 개혁에 대한 선호도의 연령대별 차이는 존재한다.

또한 직업집단별 인터뷰 결과는 보험료 인상 시 보험료 부담을 완화시킬 수 있는 조치에 대한 시민의 요구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나라에서 연금보험료를 올릴 때 보험료 상향분에 대한 과감한 조세혜택이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직장인들의 목소리 중 하나인 근로소득 외 금융소득 등 다양한 소득으로 연금보험료 수입원을 넓히자는 주장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국민연금 보험료를 부과하는 소득기반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장기적으로 GDP30% 미만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국민연금 재원에 대한 다른 접근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국민연금 재정에서 정부의 역할을 재설계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뉴스는 휘발되지만, 밥벌이를 하는 보통의 시민들의 삶은 이어진다. 민의를 강조하는 정부의 겸손함은 선거를 앞둔 몇달간의 것인가. 선거 후에도 이어질까? 민의는 국민연금 개혁에 어떻게 반영될까?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경향 2023/11/13

 

이재명 대표, 지금 뭐하십니까

부자 몸조심이란 속담이 있다. “유리한 처지에서 모험을 피하고 안전을 꾀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이다. 22대 총선을 5개월 앞두고 부자 몸조심 하는 당이 있다. 더불어민주당이다. 총선 낙관론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현재의 여론조사는 현재의 여론 흐름을 보여줄 뿐이다. 다섯 달 후 여론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총선 전망과 관련해 참고할 지표는 존재한다. 정권 심판·지원론과 대통령 지지율이다.

지난 10일 공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다. 총선에서 현 정부 견제를 위해 야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답이 46%였다. ‘현 정부 지원을 위해 여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40%에 그쳤다.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수행 평가는 잘못하고 있다’(55%)잘하고 있다’(36%)를 앞질렀다.

그러나 정당 지지율은 국민의힘(37%)이 더불어민주당(34%)을 오차범위 내에서 앞섰다(이상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윤석열 정권에 부정적인 유권자층을 민주당이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민주당은 부자가 아니다.

0.73. 민주당의 착시는 근본적으로 이 숫자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민주당은 지난해 3월 대선에서 0.73%포인트라는 깻잎 한장차이로 패했다. 그러곤 (지만)잘싸(웠다)’를 외쳤다. 결선투표 없는 단순다수제 선거에서 졌잘싸란 없다. 0.73 차이든 0.073 차이든 진 건 진 거고, 이긴 건 이긴 거다. 민주당은 0.73%포인트 차이를 극복 못했는지 자성하고 혁신하는 작업을 외면했다. 대신 0.73%포인트 차이로 아깝게졌다며 정신승리만 했다. 20개월은 그렇게 흘렀다.

국민의힘이 메가시티 서울, 주식 공매도 금지 등의 정책 이슈를 띄우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들 정책에 반대하지만, 민주당 대응은 납득하기 어렵다.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도 않고, 다른 정책을 내놓지도 않는다. 그사이 윤석열 정권과 경합하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자리마저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에게 내주는 형국이다.

조정식 민주당 사무총장은 지난 12“(국민의힘이) 민생 현안이라고 내놓는 게 아이들 공깃돌 놀이 수준이라고 말했다. 비유 자체가 게으르고 오만하다. 박근혜씨가 대통령이던 2016박 대통령은 무위(無爲)’를 지향하는 지도자라고 칼럼에 쓴 적이 있다. 민주당도 무위를 지향하는 정당이 돼가는 것 같다. 성남시장·경기지사 시절 기본소득·기본주택·기본금융 등 기본 시리즈정책상품으로 승부하던 정치인 이재명은 어디로 갔나.

이재명 대표는 당 인재위원장을 직접 맡았다. 총선기획단장(조정식)과 공직선거후보자 검증위원장(김병기) 모두 친이재명(친명)계다. 총선기획단장은 사무총장이 맡는 게 관례라니 넘어가자. 당대표가 굳이 인재위원장을 겸하고, 검증위원장까지 친명계에 맡겼어야 했나. 총선기획단 면면에서도 통합이나 혁신 의지를 감지하기 어렵다. 4년 전 이맘때, 집권당이던 민주당은 조국 사태에 대해 소신발언을 하던 금태섭 의원을 총선기획단에 포함시켰다. 야당이 된 민주당이 여당 시절 민주당보다 수세적이라니.

무차별적 험지 출마론엔 공감하지 않는다. 자칫하면 주권자를 소외시키는, 그들만의 선거공학이 될 수 있어서다. 다만, 당대표나 대선주자급 정치인이라면 험지 출마든 다른 무엇이든 희생이나 헌신을 요구받을 수 있다. 정치인이 눈앞의 이익 대신 대의와 명분을 좇을 때, 그 정치인 앞에 길이 열린다. ‘종로 버리고 부산 간 노무현이 여전히 회자되는 배경이다.

이 대표는 지난 316일 의원총회에서 총선에서 패하면 당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내 정치도 끝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지금도 이 생각이 유효한가. 만약 배지를 희생하고 민주당을 제1당으로 만드는 것, 배지를 지키고 민주당이 제1당을 놓치는 것 중 택일하라면? 솔직한 답이 궁금하다.

민주당은 지난해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패한 뒤 새로고침위원회를 구성하고 연패 원인을 분석했다. 위원회 간사를 맡았던 이관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와 전화 통화를 했다. 이 교수는 민주당이 세 가지 착오에 빠져 있다고 했다.

첫 번째, 시대착오. “민주당이 싸우는 상대는 박정희나 전두환이 아니고 친일파도 아닙니다. 매국노니 쿠데타니 하는 표현이 나오는 건 문제입니다.”

두 번째, 자기착오. “민주당은 자신이 보수정당보다 도덕적이거나 유능하다고 간주합니다. 시민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는 조사가 많은데도 말이죠.”

세 번째, 유권자에 대한 착오. “한번 민주당을 지지했으면, 실망한다 해도 저쪽은 못 찍을 거라고 여깁니다. 그건 맞아요. 하지만 실망한 분들이 투표장까지 나오기는 할까요?”/ 김민아 칼럼니스트 경향 2023/11/13

 

! 전태일 정신

지난 주말 서울 서대문 네거리와 여의도 광장에서 두 개의 노동자대회가 있었다. 하나는 민주노총이 주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노총이 주최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왜 날씨도 쌀쌀한 이 때에 노동자대회를 갖는가? 53년 전 1113일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길에서 분신 항거한 전태일 동지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필자는 전태일 정신이 지금 노동운동 속에서 올곧게 계승되고 있다고 자신하지 못한다. 53년 전 전태일 동지의 죽음을 접하고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투쟁했던, 투쟁해 온 한 사람으로서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다. 그리고 곰곰이 그 원인을 생각한다.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전태일 정신에 대한 협소한 이해가 큰 요인의 하나라고 본다.

첫째, 노동운동은 전태일 정신을 풀빵정신으로 협소하게 가둬 왔다. 차비를 아껴서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 주고 자신은 동대문에서 도봉산까지 걸어 간 그의 정신은 참으로 훌륭한 인도주의 정신이다. 그러나 전태일이 그런 따뜻한가슴으로 어린 시다들에게 따뜻한손길을 내미는 데 그쳤다면 그는 노동운동의 횃불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정신은 거기에서 나아가 뜨거운가슴으로 분노하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육신을 불사른 가열찬 투쟁정신이다. 이 가열찬 투쟁정신은 밑바닥 인생들의 삶과 고통에 대한 뜨거운공감을 바탕으로, 고통을 강요하는 사회체제에 대해 뼈저린각성을 했을 때 만들어진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다른 나라 노동운동에 비하면 투쟁을 곧잘 한다. 그러나 밑바닥 인생들의 고통에 뜨겁게 공감하지도, 그런 고통을 강요하는 체제에 대해 뼈저린각성을 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 결과가 온건합리적 투쟁이다.

둘째, 전태일이 추구한 것은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넘어선 인간적 해방이다.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과 낮은 임금을 문제 삼았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협소하게 경제적 상황만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는 그런 경제적 상황의 근본원인인 동시에 그 결과인 노동자의 인간적 상황을 더욱 문제 삼았다. 그는 첫 번째 수기의 끝에 이렇게 썼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우리 노동운동은 너무나 협소하게 노동자의 경제적 문제에 매달려 왔다. 노동해방을 기치로 하는 조류에서도 그러하다. 칼 마르크스도 제1인터내셔널 규약에서 경제적 해방이 노동운동의 목적이고 정치적 해방은 그 수단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글 안에서도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경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위의 전태일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인간인 노동자의 비인간화와 물질화, 즉 노예화다.

셋째, 전태일 정신은 체제유지가 아니라 체제를 변혁하고 혁명하는 정신이다. 전태일은 체제가 제공하는 알량한 기득권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그 기득권 자체를 없애기를 원했다.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조건을 개선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자신의 활동과 더불어 사회현실을 곰곰이 되돌아봤다. 그러면서 악의 근원은 사회의 지배체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회체제 안에서 기득권자가 되려고 발버둥 칠 것이 아니라 그 사회체제를 변혁해야 한다는 통찰에 도달했다. 그는 친구 원섭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그 속에 뭉치지를 않고 그 뭉친 덩어리를 전부 분해해 버리겠네. 오늘 나는 여기서 내일 하루를 구하고, 내일 하루는 그 분해하는 방법을 연구할 것일세. 그렇게 되면 사회는 덩어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부스러기란 말이 존재하지 않을 걸세.”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는 노동운동의 목표는 기득권으로의 상승이나 기득권 유지가 아니라 기득권 타파가 돼야 한다.

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매일노동뉴스 2023/11/13

 

박노자가 만난 리영희

양심과 지성의 빛: 내가 기억하는 리영희 선생님

나는 '리영희'라는 성함 석자를, 아마도 1995년쯤 처음으로 들어보게 된 것 같다. 그해 여름에 내 처형의 광명시 소재 아파트에서 몇 주를 보내게 되었는데, 처형과 그 남편은 한때 학생운동권의 전력이 있었다. <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 나는 그 집의 서가에서 처음으로 발견했다. 사상 탄압이 대단히 심했던 1970년대에 이와 같은 내용의 책이 저술되어 나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책 때문에 구속도 되고 해임도 당했다"는 이야기도, 내가 그때 들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야기와 함께 "이 책들이 우리 세대의 필독서였다"는 말도 들었다. 반공주의적 광기의 시대에 현대 중국이나 통일 문제를 이 정도로 차분하고 객관적인 어조로 다룰 수 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그때 나에게는 매우 신기하고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리영희'라는 성함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은 1990년대에 한국 현대 사상사를 공부했을 때였다. ()베트남 구수정 <한겨레21> 통신원이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파헤쳐 국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형성된 것은 1999년인데, 내가 '베트남 전쟁과 현대 한국'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6-7년쯤의 일이다.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에 가서 "두 나라 사이의 불행한 과거"에 대한 "유감" 발언을 하기 전의 일이었다. '베트남 특수', 즉 미국 침략에의 편승과 전쟁 폭리로 1960-70년대의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개발이 가속화되었다는 것은 역사 자료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던 일인데, 과연 국가 주도의 '개발'과 기업의 치부(致富), 그리고 반공주의적 이념의 이름으로 행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 한국 지식인 중에서 파병 반대를 한 양심가(良心家)들이 있었는가라는 게 내가 궁금했던 일이었다.

자료를 확인해보니 다소 우울한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준하 선생이나 강원용 목사의 파병 반대 의견은 있었지만, 신앙처럼 된 반공주의와 경제적인 이익 타산까지의 여러 이유로 지식인 포함, 그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 파병은 당연시됐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리영희 선생님은 파병 반대의 입장을 고수하여, 1969년에 조선일보사에서 해직되고 책 외판원 같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됐다. 이 일을 알고 나서, 냉전 극복의 일관된 논리에 기반한 이와 같은 파병 반대가 한국에서의 '평화사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리영희'라는 역사적 인물이자 당대인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커졌다. 그의 마지막 투옥이 1989, 즉 전두환 독재가 종식되고 나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더 궁금하게 됐다. 도대체 어떤 '위험 사상'의 소유자이고, 어떤 '위험한' 행동을 벌인 분이기에, 이미 형식적 민주화가 진행됐던 가운데에서도 투옥을 당하게 된 것인가?

직접 만나 뵐 기회는 1999년에 드디어 왔다. 2000년대에 안타깝게도 폐간된 <당대비평> 창간 2주년 기념 모임에 나도 가게 되고 리영희 선생님도 오셨다. 그때 나에게 다소 의외였던 사고(?)가 발생했다. 내가 리영희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다지 깊이 절하지 않았는데, 어떤 출판사 사장인 남성이아마도 술에 취한 상태에서"우리나라의 위대한 지성인 앞에서 이렇게 제대로 인사를 안 하는 건 건방진 일!"이라고 고함을 지르고는 "제대로 인사하라"면서 내 등을 손으로 눌렀다. 물론 그 자리에서 주최측인 <당대비평> 편집진이 그를 말렸고, 그가 "폭력 사용에 대해서 사과한다"는 말을 곧 했다. 23년 전의 일이라 그의 이름도 기억할 수가 없는데, 1990년대까지만 해도 비록 모임의 '이념'은 진보적이라 해도 특히 만취한 상태에서는 이런 크고 작은 마초적인 폭력이나 폭언이 꽤나 흔했던 걸로 기억한다. 특정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군사적 마초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그 '이념'의 진보성 여부와 무관하게 개개인 '인권'에 대한 존중의 '습관' 자체가 잘 안돼 있는 것이었다.

한데 이 자리에 계셨던 리영희 선생님은 이 해프닝에 대해 다소 미안하게 생각하신 모양이다. 그는 나를 자신의 자리로 불렀고,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최초로 본격적으로 나눌 수 있었다. "선생님의 책이 제 윗세대의 운동가들에게 필독서였다"고 말하자 그는 "난 그래서 미안하다. 내 책을 읽어서 감옥에 간 사람들이 하도 많기 때문에 나로서는 너무 미안한 일이다"라고 했다. 사실, 독자로 하여금 독재정권 하에서 감옥에 갈 만큼의 비판적 사고를 키운 그 또한, '위험한 책'을 쓰고 출판한 죄(?)로 몇 번이나 투옥을 당해 건강을 크게 해치신 바 있다. 그런데도 우선적으로 독자들의 고생부터 생각한 그의 태도는 대단히 이상적으로 보였다.

단명한 잡지인 <당대비평> 덕택에 나와 리영희 선생님 사이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다. 나는 경희대에서 비정규직으로 교편을 잡고 있다가 20003월에 오슬로대에서 정규직 발령을 받아 거기로 가게 됐는데 이후에도 리영희 선생님과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이미 주로 전자우편을 쓰게 된 컴퓨터 본위의 세상이었지만, 리영희 선생님은 종이 편지나 팩스를 아름답게도 고집하셨다. 그의 편지도 몇 차례 받았지만, <당대비평>에 발표한 그의 글, 남북한 군사력을 정밀히 비교해 사실상남한 국방부의 주장과 달리남한이 재래식 무기 차원에서 우위에 있다는 점을 입증한 글을 보고는 그의 분석력과 객관성에 감동받았다. 2006년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했을 때 결국 이 '북핵'이란, 재래식 무기 차원의 남한 우위를 상쇄시킬 북의 무리수라는 생각이 들었고, 리영희 선생님의 예전 글이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계속 리영희 선생님의 글을 읽고 서신 왕래까지 하고 있던 2003, <한겨레21>로부터 "국내 지식인 중에서 누구와 대담을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고 나는 스스럼없이 "리영희 선생님"이라고 바로 답했다. 다행히 리영희 선생님도 관심과 여유가 있으셨기에, 그해 여름 내가 방학을 맞아 한국에 왔을 때 선생님과의 대담이 성사됐다.(대담과 인터뷰 보러가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당시에 중추신경에 문제가 있어서 몸이 불편했는데 병인(病因)을 여쭈어보니 난방이 안되는 서대문 형무소 감방 생활 이후에 건강이 악화됐다면서, 일제 시절보다 한국 군사독재 시절에 오히려 감옥의 생활 여건이 나빠졌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말이 그 뒤에 자꾸 생각나곤 했다. 한국의 독재정권이 식민지 시대의 감옥 등을 포함한 폭압 기구, 시설 등을 인수받았다는 점이야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여건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알 길이 없었다.

이외의 흥미로운 대화는 '문자(文字)'와 관련된다. 알고 보니 리영희 선생님은 여전히 한국어보다 일본어 읽기가 다소 편하셨던 것이다. 단어나 개념의 의미를 축약시키고, 잘 보는 사람에게는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한자들이 섞인 일문(日文) 읽기가, 순수 한글만의 국문 읽기보다 빠르다는 말씀이었다. 아마도 일제 시절에 교육을 받은 많은 한국인들이 이와 같은 문자 생활에 대한 감상을 공유할 터인데, 한글 민족주의 당위 때문인지 그런 발언을 다수가 쉽게 하지 못해왔다. 한데 생각해보면 한자란 동아시아 지역 공통의 문자 체제이며, 전통시대에는 물론 근대에 접어들어서도 한국어의 조어(造語) 과정에서 계속 활용돼온, 의미의 압축이 가능한 매우 유용한 글자이다. 요즘은 한글 민족주의라는 이유보다는 주로 영어 공부에 밀려 차세대가 잘 배우지 않고 있지만, 사실 한자와의 결별은 득보다 실이 더 크다고 볼 여지도 있다. 나는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지만, 리영희 선생님과의 대화는 내 확신을 더욱 더 굳히게 만들었다.

대담과 그 전후 이야기에서도 나왔지만, 리영희 선생님은 한글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자체에 대해서도 매우 회의적이었고, 본인의 인생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이성(理性)에 기반한 사고, 그리고 평화라고 몇 차례 강조하셨다. 그는 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희망했고, 남북한이 스스로 신뢰를 쌓아서 점차 평화 공존에 익숙해지고 통일을 향해 같이 가기를 기대하셨다. 실향민으로서의 본인의 인생 경험이 녹아 있는, 평생의 고민과 사회적 활동의 결론인 단계적, 평화 위주의 통일론이었다. 남북관계는 거의 복원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주한미군의 지속적 주둔에 대한 한국인의 지지는 이미 90%를 넘었고, 한국의 핵무장을 60%나 지지하고 있다는 이 불행한 시대에, 나는 리영희 선생님의 평화를 향한 노력을 자주 회상하곤 한다. 전세계적인 열강 각축과 침공, -중 대립과 미-러 대리전의 시기일수록, 우리는 반대로 이웃인 북한과의 "공통의 이해(利害)"를 추구하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하지 않을까? -중 충돌이 한반도의 전장화(戰場化)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남북관계부터 정상화하고 신뢰가 구축돼야 하지 않을까? 대립과 갈등이 심할수록, 이성에 기반한 평화를 늘 호소하셨던 리영희 선생님의 목소리가 더 그리워진다.

2006년에 리영희 선생님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세계한민족포럼에 참여하신 김에 내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도 방문하셨다. 그 기회에 노르웨이로도 모시려 했는데, 매우 아쉽게도 여의치 않았다. 그 뒤에 이미 몸이 많이 불편해지신 리영희 선생님이 이명박 정권의 권위주의적 추태를 비판하신 것을 듣고, 이 분의 목소리야말로 어려운 시대일수록 더 절실히 필요한 양심과 지성의 목소리라는 내 평소의 생각을 더욱더 굳혔다. 그러다 2010년에 리영희 선생님께서 서거하셨다. 그때의 내 슬픔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가 가신 뒤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그가 한때에 맡았던 사회적 '목탁(木鐸)'의 역할을, 지금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사회의 원로가 없다. 그래서 한국의 앞날이 가면 갈수록 더 걱정되는 것이다.

박노자(블라디미르 티코노프) 오슬로대 교수 | 프레시안 2023/11/14

 

공익과 거리 먼 공익의 대표자

이선경의 <21세기에 새로 쓴 인간불평등사>를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일반적인 처벌의 형태는 ‘2인칭이다. 피해를 입었거나 입었다고 생각하는 당사자가 가해자에게 직접 보복을 가하는 방식이다. 2인칭 처벌은 단점이 있다. 강자에게 유리하고, 불평등과 착취를 초래한다. 개인 차원을 넘어 친·인척이나 집단이 가세하면 공동체 전체가 갈등에 휩싸이고 불행에 빠져들 수 있다. 과잉 대응과 피의 보복이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문명사회일수록 ‘3인칭처벌이 발달한다. 당사자 아닌 제3자가 처벌하는 시스템이다. 분노 등 감정의 영향을 당사자보다 덜 받으므로 절제되고 객관적인 처벌이 가능하다.

3인칭 처벌은 인간이 대규모 협력사회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3인칭 처벌을 제도화한 것이 한국에선 검찰이다. 검사를 공익의 대표자라 칭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 들어 검찰의 칼날은 권력자의 정적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만 맞춰져 있다. 대장동 개발 의혹으로 시작해 성남FC, 백현동,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으로 이 대표에 대한 수사가 1년 반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 특수부 검사 수십명이 동원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압수수색이 이뤄졌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를 중심으로 지난 9월에 꾸려진 대선개입 여론조작 특별수사팀의 타깃도 결국은 이 대표와,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이다. 검찰은 김만배·신학림 인터뷰보도와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를 검증한 부산저축은행 부실 수사 의혹보도 배후에 이 대표와 민주당이 있다고 의심하는 듯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사 시절 검사가 수사권 갖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이지 검사냐고 말했다. 그러나 수사를 지켜보고 당해본 사람은 안다. 검찰이 공정한 수사라고 강변하고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한다고 천명해도, 정치적 의도와 속셈이 뻔히 보이는 수사가 있다. 수사는 내용도 정당해야 하지만 절차적으로도 흠결이 없어야 한다. 수사 대상에게 사적 보복이라는 인상이나 오해를 일으키게 해서는 곤란하다. 2인칭 처벌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순간 검찰 수사는 여론의 심판을 받고 동력을 상실한다. 반발과 보복, 더 큰 보복이라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야당과 검찰의 충돌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최근 양상은 가히 역대급이라 할 만하다. 민주당이 비리와 부패 연루 의혹이 있는 검사 개인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자, 이원석 검찰총장도 민주당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쓴 민주당의 대응도 문제지만, 스스로 정치의 사각 링에 뛰어든 검찰 수장의 언행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이 총장에 대한 탄핵설까지 나오면서 사태가 확전일로를 걷고 있다.

검찰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검찰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는 바닥이다. 최근 시사인이 성인 1000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검사는 법에 따라 공정하게 수사하고 있다라는 진술에 그렇다는 응답이 37.4%,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58.2%였다. “검사가 권력자의 부패와 기업의 비리를 단호하게 수사하고 있다라는 진술에는 67.9%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검찰 이미지를 묻는 항목에서는 권력지향적이다라는 응답이 84.6%인 반면 정의롭다는 응답은 33.2%에 불과했다

3인칭 처벌의 획기적인 부산물은 구성원들에게 사회적으로 옳은 행동이 무엇이고, 그른 행동을 했을 때 어떤 시정 조치를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식을 공유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도덕과 법, 정의라는 개념의 원형질이다. 이를 바탕으로 예측 가능하고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진다. 검찰의 신뢰 추락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검찰을 정권의 전리품으로 격하시키고, 사회에 약육강식 풍조를 퍼뜨린다. 약자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지고, 공동체를 지탱해온 구성원들의 준법의식도 후퇴한다. 앞으로는 사기범이나 마약사범도 편파·표적 수사의 희생자라고 떠벌릴 것이다.

인간에게 특별히 발달한 처벌은 ‘1인칭이라고 한다. 윤동주의 시구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일이다. 검찰의 자숙과 반성이 필요하다. ‘시사인조사를 보면 시민의 77.8%대다수 검사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지만, 일부 검사들이 정치적인 수사를 하고 있다고 여긴다. 검찰은 지금이라도 정치검사들을 손절해야 한다. 이것이 더 이상의 신뢰 하락을 막고, 검찰이 사정기관으로서 최소한의 권위와 중립성을 지키는 길이다. 오창민 논설위원 경향 2023/11/15

비만 고양이에게 바란다

국민의힘 대구 국회의원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자기 당대표를 지낸 이준석에게 비만 고양이라 조롱을 당하고 있다. 그 말이 참 아픈 모양이다. ‘비만 고양이란 주는 밥이나 먹고 햇볕 따신 창가에 앉아서 졸기나 하는 게으른 고양이라는 뜻이 아닌가? 주인의 눈치나 살피는 무능한 고양이 꼴이라는 비유다. 이보다 더한 능멸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준석이 쏴붙인 이 모욕에 한마디 대꾸하는 국회의원이 없다는 것이다. 이곳 국회의원들은 정말 어리바리한 살찐 고양이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딱 한 사람 볼멘소리를 낸 국회의원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우스웠다. 그의 항변인즉, 이준석이 버릇없다라는 말이었다. 기껏 예절론으로 이준석의 입을 봉해 볼 요량이었다니 턱도 없는얘기였다. 시대착오였다. 옛날에는 젊은 사람과 다투다 밀리면 너 나이가 몇이냐?’라고 입막음했는데 지금 그런 억지에 주눅이 들 젊은이가 누가 있겠는가?

나이를 앞세워 기를 죽이려는 것은 전통사회에서나 있었던 사회적 폭력이다. 그때는 너거 아부지 누고?”라는 말이 억압의 기제로서 힘이 있었다. 그 말이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인사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불러내 젊은이의 입을 닫게 하려는, 실로 몽매한 구조적 억압이었다. 그러하니 이준석은 더 기세등등하게 받아친다. “힘 있는 사람 하수인 노릇하던 국회의원이 누구였는지 하나하나 짚어보겠다.” 그러자 더 이상 토를 다는 비만 고양이는 없었다.

가만히 보면, 비만 고양이가 측은하기도 하다. 비만 고양이의 초라한 행색이 가엽고, 사실상 고양이의 비만은 그들 자신의 탓이 아니기에 연민이 생기기도 한다. 대구 국회의원들이 비만 고양이가 된 것은 그들의 유전인자나 심성이 나태해서가 아니라, 지역주의,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재생하는 선거제도가 만들어 낸 것이다. 말하자면 구조적 요인의 산물이다. 난다 긴다 하는 정치인도 이런 조건에 가져다 놓으면 비만 고양이가 될 수밖에 없다. 공천만 받으면 막대기를 꽂아도 당선이 된다는 이곳에서 국회의원들은 권력자에게 잘 보여서 공천만 받으면 그것으로 정치활동은 끝이다. 유권자는 안중에 없다. 이런 상황이 게으른 고양이를 만들어왔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비만 고양이들은 고민해야 한다. 살찐 고양이라는 모멸을 받으며 살 것인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스스로 혁신에 나서야 한다. 건강한 보수정당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강경 보수의 감정선이나 자극하며 보수의 안방 따뜻한 아랫목에서 편하게 살아온 것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변화하는 세상에 미치지 못하는 상상력, 절박한 민생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지 못하는 게으름을 반성해야 한다. 미리 혁신하지 않으면 혁신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고양이들의 비만을 막을 열쇠는 단연코 선거제도 개혁이다. 선거제도를 개혁하게 되면 이곳에도 정치적 다양성을 실현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적 개방성과 경제적 역동성을 이룰 수 있다.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선거제도를 만들면 이곳에도 여러 정치세력이 등장하여 경쟁할 것이고 고양이들은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주인만 바라보며 살 수가 없게 된다. 유권자들은 더 이상 잡아놓은 물고기가 아닐 테니 그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렇게 되면 고양이들은 살찔 시간도 없을 것이며 나태하고 무능하다는 조롱을 받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비만 고양이가 선거제도 개혁에 앞장서야 하는 이유다.

지금 선거제도 개혁은 지지부진하다. 나라를 두 쪽으로 가르고, 증오와 혐오의 정치를 조장하는 진영정치의 주범이 승자독식 선거제도라는 건 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여의도의 거대 양당은 또 딴청을 피우고 있다. 어떤 것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유리한가라는 수읽기에나 골몰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선거제도 개혁이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우리나라 정치는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 것이 분명하다. 현행 선거제도를 숙주로 몸을 기대고 있는 비만 고양이가 그 그늘에서 나와 정치개혁, 정당개혁의 실마리를 찾아보기 바란다. 비만 고양이가 살고 있는 보수의 안방에서 변화를 시작하면 우리나라 정치 전체가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장 살이 많이 찐 고양이를 골라 혼을 내 줄 것이라는 이준석에 의해 어떤 변화를 당할지 모른다. 이준석 바람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 하는 말이다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 경향 2023/11/15

 

예산편성 잣대도 모른 채 예산심의하는 국회

2024 회계연도 예산안 심의가 진행 중이다. 정부는 국가재정운용계획에 근거하여 분야별, 부처별 지출한도를 설정한 후 예산안을 편성한다. 따라서 국회가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심의·확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야별, 부처별 지출 한도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기획재정부는 지출 한도를 비밀문서로 분류하여 관리하는 자료라며 제출이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이는 기재부의 권한 남용이다.

흔히 정기국회를 예산 국회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예산 심의권을 부여한 것은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검토, 분석, 조사하여 불필요한 국민 부담을 줄이고 국민이 낸 세금을 최적 배분했는지를 견제, 감시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는 정부 예산안에 대해 엄격한 잣대로 심사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국회는 정부 예산안을 제대로 심의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아니다이다. 왜냐하면 소위 예산편성 잣대를 모르고 정부 예산안을 심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4년 예산은 657조원에 달한다. 그런데 예산안 편성의 근간이 되는 분야별, 부처별 지출 한도를 모르고 국회가 예산심의를 진행한다면 졸속으로 심의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지출 한도는 각 부처의 자율·책임행정을 뒷받침하고 국가 차원의 중장기 재원관리와 전략적 재원 배분을 위해 도입된 것으로 각 부처의 과다 요구 개선, 부처의 자율성과 책임성 강화, 사업구조조정의 촉진, 전략적 재원 배분 가능 등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분야별 지출 한도는 보건·복지·고용, 교육, 문화·체육·관광, 환경, R&D, 산업·중기·에너지, SOC, 농림·수산·식품, 국방, 외교·통일, 공공질서·안전, 일반·지방행정 등 국가재정운용계획의 12개 분야별 재원 배분 계획을 설정한다. 따라서 대통령, 국무총리 및 각 부처 장관들이 참여하는 국무위원 재정전략회의에서 미리 설정한 분야별, 부처별 지출 한도를 잣대로 각 부처가 사업별 예산편성 과정에서 지출 한도를 잘 준수했는지, 또 예산 사정기관인 기획재정부는 예산사정 과정에서 각 부처가 제출한 예산안을 얼마만큼 존중해 주고 있는지 등 꼼꼼하게 심의해야 한다.

기획재정부는 중앙관서별 지출 한도를 포함하여 보고해 달라는 국회의 요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제출하지 않고 있다.

첫째, 정부는 중앙관서별 지출 한도가 사전에 공개될 경우 이익집단이나 언론의 압력으로 인해 예산편성의 어려움과 행정비용이 가중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오히려 지출 한도가 공개되지 않음으로써 예산 사정기관인 기재부에 예산편성 권한이 집중되어 불신과 불만 요인이 되고 있다. 둘째, 네덜란드 등의 국가의 경우에도 지출 한도를 비공개로 운용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국가의 경우 정부가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하기 이전에 재정정책 및 거시지표 등에 대한 전망을 의회에 제출하여 심사하는 사전예산보고(pre-budget report)제도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셋째, 국가재정법 제29조 제2항은 중앙관서별 지출 한도를 포함하여 통보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동 조항은 재량(임의)조항이지 의무조항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동 조항은 기획재정부 장관은 제7조의 규정에 따른 국가재정운용계획과 예산편성을 연계하기 위하여 제1항의 규정에 따른이라고 전제하고 있어 국회 보고는 당연하다.

국가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고, 국회가 국가 예산을 심의하는 데 필수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예산편성 관련 재정전략회의에서 미리 설정한 분야별·부처별 지출 한도가 비밀문서가 될 수는 없다. 국회가 예산심의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분야별, 부처별 지출 한도 공개를 의무화하는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 국회가 위원회 의결 등을 통해 제출하도록 강제하는 방향으로 관련 법 개정이 시급하다./ 류근식 ()입법정책연구회 상임부회장 경향 2023/11/15

 

한 사람이 늙으려면 팀이 필요하다

6개월 전부터 필라테스를 하고 있다. 비뚤어진 어깨를 바로잡고 꺾이지 않는 허리를 갖자는 연초의 다짐을 실행한 것. 어제는 단체 강습에서 상체운동을 하다가 어깨가 아파 포기했더니 끝나고 강사가 와서 말했다. “어깨가 안 좋으시면 병원 가서 치료받고 운동을 하시는 건 어떨까요?”

맞는 말인데 마음이 쫄렸다. 나오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유연한 몸으로 난이도 높은 동작을 잘도 소화하는 젊은 수강자들 속에 내가 눈엣가시처럼 보였나? 요새 나 빼고 다 하는 것 같은 달리기를 시작해 볼까 생각하면서 당근마켓의 동네 달리기 모임을 수시로 체크하는데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늙은 아줌마가 왜 껴라는 눈길을 받을까 봐. 달리기는 혼자 하는 운동 아니야? 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처럼 혼자 하는 모든 일은 영원히 내일 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에 가깝다.

넷플릭스 화제작 나이애드의 다섯번째 파도64살에 쿠바 아바나에서 미국 플로리다까지 180를 헤엄쳐 건넌 다이애나 나이애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20~60대까지 탈진으로, 해파리의 공격으로, 태풍으로 4번 실패 끝에 성공한 나이애드는 이렇게 말한다. “첫째, 절대 포기하지 마라. 둘째, 꿈을 좇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 셋째, 수영은 고독한 스포츠 같지만 팀이 필요하다.”

톱스타였던 아네트 베닝과 조디 포스터가 주름 가득한 얼굴을 꾸미지 않고 나와 늙지 않는 열정을 보여준 영화라는 평가를 받지만, 나는 이 영화의 핵심은 나이애드의 세번째 말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 들어가는 건 고독한 일이지만 팀이 필요하다.

사실 영화 속 나이애드는 진상에 가깝다. 실력 있는 수영선수도 한때 이야기지 환갑 넘어 마라톤 수영에 도전하겠다고, 그것도 네번이나(!) 실패를 반복하며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걸 보노라니 내가 (나이애드의 코치 겸 파트너인) 보니라면 국물도 없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뉴욕 타임스평대로 나이애드는 자기 연민이 없었고, 영화도 그에게 연민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나이애드와 싸우고 실망하고 지쳤지만 끝까지 그의 도전에 힘을 실어준 항해사 존과 보니에 더 공감을 싣는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늙어가는 데도 온 마을이, 아니 온 마을까지는 아니어도 팀이 필요하다. 대가족 시절에는 가족이, 종종 가까이 사는 친척까지 한팀이 됐지만 지금의 1인 가족이나 3~4인 가족은 팀을 꾸리기에 부족하다.

다큐멘터리 감독의 엄마 치매 간병기(또는 관찰기)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고집스럽게 홀로 엄마의 수발을 들던 아버지가 마침내 두손을 들고 난 다음 열린 대책회의다. 지역포괄지원센터 담당자와 케어 매니저, 요양보호사, 데이케어센터 책임자 등 우리로서는 어떻게 다른지 모를 업무 담당자들과 아버지, 필자에 엄마까지 7명이 집에 모여 왁자지껄하고 활기찬 분위기에서각자의 역할을 면밀하게 분담한다. 비슷한 한국 책들에서 흘러나오는 비극성이나 암울함이 이 책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늙음과 돌봄이 팀 작업이기 때문이다.

돌봄이 아니라도 나이 들수록 팀의 필요성은 더 커진다. 떨어져 가는 신체기능을 북돋고 고갈되는 에너지를 끌어올리려면 혼자 하는 달리기보다는 함께하는 달리기가 훨씬 덜 지루하고 힘도 날 거 같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동네 달리기 모임을 여전히 주저하고 있는가. 평생 인기녀였던 적이 단 한번도 없으면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냐며 고민하고 있는가 말이다.

나이애드의 미덕은 불굴의 도전정신이 아니라 자기연민이 없었다는 것이다. 늙은 여자라고 무시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 대신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또 찾았다.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나이 들어 불굴의 도전정신을 갖기 전에 장착해야 할 건 늙고 불쌍한 나라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팀을 꾸리는 것. 나의 달리기는, 중년 이후 도전의 스타트라인은 여기가 되지 않을까./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3/11/15

 

150년 살 준비 되셨나요?

2023,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6살이다. 1970년과 비교해 보면, 불과 50년 만에 기대수명이 20년 정도 늘어났다. 그럼 더 먼 과거인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 조선시대 왕의 평균수명은 47살이었다. 평민들의 경우는 평균수명을 30대 정도로 추정한다. 우리의 기대수명은 현대로 다가올수록 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대수명은 몇살까지 증가할 수 있을까? 인간 유전자를 분석해 보면, 과학기술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자연수명은 38살 정도에 불과하다. 이미 인류는 과학기술을 통해 스스로 인공진화의 시대를 연 셈이다. 올해 3월 국제학술지 플로스원에 발표한 논문에서 미국 조지아대 연구팀은 일본인을 기준으로 1950년대 출생한 사람의 기대수명이 118살에 달하리라 예측했다. 일부 학자들은 인간의 기대수명이 150살까지는 큰 무리 없이 증가하리라 얘기한다. 구글 자회사인 캘리코가 인간 기대수명을 최소 200, 최대 500살까지 늘리겠다고 도전하고 나선 상황을 놓고 보면, 150이라는 숫자는 오히려 적게도 보인다.

필자는 이 상황을 놓고 대중 강연 때 청중들에게 묻는다. 몇살까지 살고 싶은지. 보통 90에서 100살 정도를 얘기한다. 100살 이상을 얘기하는 이는 드물다. 이쯤에서 한번 더 묻는다. 그렇다면 당신의 부모님이 만약 150살까지 살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은지. 청중들 표정에서 당황, 불안이 느껴진다.

수명은 현재진행형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50대에 은퇴하고 80살이 되면 떠나던 시대의 관점으로 국가정책, 사회시스템, 기업경영, 개인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 업무차 만났던 모 지자체의 고위 관료는 해당 지역에 요양원, 실버타운을 지금의 두배 규모로 늘리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현재 기준으로 그런 시설의 규모가 부족하기에 세운 계획이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요양원에서 치료받을 대상, 실버타운에서 분리된 듯 살아가는 이들이 점점 더 증가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150년을 산다면, 인생의 절반을 실버타운에서 보내는 게 좋을까? 그런 사회, 삶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필자의 머릿속에는 디스토피아 에스에프(SF) 창작물에서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인 거대한 장벽이 떠오른다. 장벽의 안팎으로 집단을 갈라서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 말이다.

늘어나는 삶의 여정을 보호, 분리의 대상으로만 지낼 수는 없다. 혹여 경제적 여력이 충분하다고 해서 인생의 절반을 한가로운 여가로만 채우기도 어렵다. 은퇴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살펴보면, 은퇴 뒤 여가활동을 통해 삶의 만족도가 유지되는 기간은 1년 남짓이다. 젊음의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지금의 젊은 시절이 그렇듯, 그때의 젊은 시절도 한없이 꿈꾸고, 세상과 사람을 탐험하며 살아가야 한다. 꿈꾸지 못하고, 탐험하지 못하는 이에게 늘어난 젊음의 시간은 이제껏 마주하지 못한 재앙, 공포로 다가올 것이다.

국가, 사회, 기업, 그리고 개인의 차원에서 늘어난 젊음의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 어쩌면, 환경오염, 인공지능의 역습이 아닌 늘어난 젊음의 시간이 인류사회를 위협하는 가장 근거리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150년을 살아갈 준비가 되었는가? 독자가 아닌 필자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김상균인지과학자·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한겨레 2023/11/15

 

 전쟁에 중독된 미국과 힘 잃은 반전평화 운동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085

김평호 저술가·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시민언론 민들레 2023-11-23

 

익숙함은 옳은가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11242032005

한민 문화심리학자 경향 : 2023.11.24.

 

타깃층을 좁힙시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4082

김연수 경남도민일보 기자 미디어오늘 2023.11.25

 

검찰의 더러운 손 감싸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17868.html?_fr=mt2

박용현 | 논설위원 한겨레 2023-11-26

 

정권심판 표심 왜곡하는 이준석 신당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11261644001

박영환 정치부장 경향 2023-11-26

 

피케티의 계급투쟁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11262034005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경향 2023-11-26

 

시위로 정치 바꿀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한국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111

벨랴코프 일리야 수원대 인문사회대 교수 시민언론 민들레 2023-11-26

 

검사 처남과 검찰정권의 민낯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126

유시민 작가 시민언론 민들레 2023.11.27

 

접경 지역 50미터?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11282020015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경향 : 2023.11.28.

 

국가연구개발비는 누가 나눠먹고, 갈라먹었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11282026015

엄치용 미국 코넬대 연구원 경향 : 2023.11.28.

 

돌아오지 않을 것들을 기다리는 사람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18237.html?_fr=mt5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한겨레 : 2023.11.28.

 

윤 정부 1년 반, 휘청대는 국운 바로세울 시간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18200.html

손원제 | 논설위원 한겨레 : 2023.11.28.

 

늙어가는 대한민국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44세이고, 대한민국 사람들을 나이 순서로 세워 정중앙에 있는 사람의 연령을 의미하는 중위 연령은 이보다 한 살 많은 45세이다. 그런데 2002년 한국인의 중위 연령은 31.8세였다. 20년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의 중위 연령이 13년 정도 높아진 것이다. 아마도 출산율은 낮아지고 평균수명은 증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 전체 수준에서 나타난 변화라는 면에서 대단히 급격하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대체로 주변의 환경변화를 수용하는 정도가 떨어진다. 사람들은 10, 20대에 얻은 경험, 가치관, 문화 속에서 이후 생애를 살아간다. 30세 이후에 생활방식이나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일본이 한국보다 사회의 디지털화 수용 정도가 전반적으로 늦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 이유를 일본이 한국보다 사회 고령화 상황을 일찍 맞은 것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일리가 있다.

사회의 노화가 사회 구성원의 노령화만 뜻하지는 않는다. 사회가 지속되면서 나타나게 마련인 기득권 집단의 형성이야말로 사회적 노화의 핵심이다. 사회의 기득권 형성은 사회의 건전성 유지에 필요한 공정한 경쟁의 질을 떨어뜨린다. 노화가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의 정상적 소멸과 건강한 재생이 어려워지는 것을 뜻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가장 극적인 개혁이 세금 개혁 대동법(1651)이다. 세금과 복지 분야 개혁은 지금도 어느 나라나 정권을 걸어야 가능하다. 개혁을 성공시키고도 그 대가로 권력을 잃기도 한다. 대동법 정도는 아니었지만 또 하나의 세금개혁이 균역법(1750)이다. 흥미롭게도 100년 간격으로 이루어진 두 개혁의 양상은 늙어가는 조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동법 실시가 결정되었을 때 좌의정은 조익, 우의정은 김육이고, 균역법 성립 당시 영의정은 조현명, 좌의정은 김약로였다. 조익과 김육은 자신의 역량과 소신으로 대동법을 추진했고, 결국 개혁에 성공했다. 대동법 성립 시 재위했던 효종(孝宗)이 개혁을 추진했던 것은 아니다. 반면에 조현명과 김약로가 조정에서 개혁을 이끌었던 것은 아니다. 균역법을 추진했던 사람은 당시 임금 영조(英祖)였다. 흥미롭게도 개혁이 이루어지던 당시 조현명과 김약로는 조익, 김육보다 나이가 10여세나 적었다. 풍양조씨 조현명과 청풍김씨 김약로의 집안은 조익이나 김육의 집안보다 훨씬 힘이 있었다. 김약로의 형과 동생 역시 정승과 판서를 지냈다. 정도는 달라도 조정에서 이들 집안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세도가문들의 카르텔인 세도정권은 갑자기 등장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 집안으로는 영광이었겠으나 그것은 조선이 늙어간다는 신호였다.

입시철이다. 내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던 1980년대에는 지방 출신 대학 입학생 수가 서울 출신보다 많았다. 자기 가족 중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온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취직하고 출세해야 한다는 마음도 적지 않았지만, 사회개혁에 대한 열망도 마찬가지로 높았다. 자연히 대학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개혁적이었다. 한국장학재단 조사에 따르면 이미 2014~2016년에 상위권 대학들의 저소득층 학생이 10% 정도인 데 반해, 소득 최상층 출신 학생은 70%가 넘었다. 소득과 학력 사이의 밀접하고 강력한 관계를 보여준다. 대학이 이미 사회 기득권 집단의 재생산 기지로 작동하고 있음을 뜻한다.

노화의 최후가 죽음이듯 기득권의 지나친 강화는 사회 붕괴를 가져온다. 하지만 노화가 자연스러운 것이고 누구의 잘못이 아니듯, 어떤 면에서 사회 기득권 형성도 비슷하다. 다만 노화는 되돌릴 수 없지만, 사회적 기득권 수준의 추이는 꼭 그렇지는 않다. 다만, 대단히 어려울 뿐이다. 역사에 나타났던 수많은 국가의 흥망성쇠가 이를 증명한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경향 : 2023.11.29

 

총선, 국민 섬기겠다면 특권부터 내려놓으라

국회의원을 한번 해보면요, ‘정말 이렇게 좋은 자리가 세상에 어딨어라는 게 느껴집니다. 정말로 의지가 강하고 지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도 국회 들어가는 순간 아 이게 아니구나, 이 특권이 너무 많고 너무 좋은 자리구나.” (진행자) “중독이 돼요?” “.”

며칠 전 퇴근길 라디오에서 들은 이 말이 가슴에 팍 꽂혔다. 전 국회의원 김홍신 작가의 인터뷰였다. 마침 지난 주말 한 일간지의 힘들어서 국회의원 못하겠단 말 나오면 정치개혁 된다는 이원재 전 시대전환 공동대표의 인터뷰도 같은 맥락이었다.

대부분의 시민이 동의할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국회의원들의 특권은 국민 공분을 사는 주제다. 한국행정연구원의 주요 공공기관 신뢰도 조사에서 국회는 최근 10년간 압도적으로 낮은 신뢰도로 꼴찌를 면치 못했다.

국회의원 특권에 대한 여론의 비판 속 촛불혁명 직전 출범한 20대 국회에선 국회 차원의 특권 폐지 움직임도 활발했다. 2016년 출범 직후 의장(정세균)실 주도로 국회의원특권내려놓기추진위원회를 가동해 그해 가을 결과보고서를 내놨고, 2018년엔 국회 운영제도개선소위에서 의장이 제시한 안건을 상정하기도 했다. 2019년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위원장 심상정) 주최로 진보정당과 시민단체들이 함께 국회 특권 폐지와 혁신을 위한 방안들을 강구하고 국회 개혁 방안 토론회도 열었다. 뭐라도 바뀔 줄 알았다. 그러나 변죽만 울렸을 뿐,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한 성과로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특권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23년 기준 국회의원 연봉은 15426만원으로 1인당 국민총소득(GNI)3.65배다. 소득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입법활동비, 특수활동비가 비과세인 점을 감안하면 세후 연봉 차는 4~5배에 이를 수도 있다. 주요 국가들의 국회의원 연봉은 1인당 GNI1~2배 정도로 국민 평균 소득과 비슷하다. 자동차 유류비, 차량유지비, 문자발송비 등 의정활동 지원경비 11279만원, 개인 보좌진 9명의 급여 54000만원, 2회 해외시찰 비용 등도 해마다 지원된다. 공항 귀빈실과 비즈니스석을 이용하는 특권, 배우자의 직계존비속, 형제들도 이용할 수 있는 국회수련원 등 깨알 같은 특혜들도 넘친다. 주요 선진국들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특권들이다. 19872명이던 국회 보좌진 수를 9명으로 늘리는 등 입법권을 가진 국회는 야금야금 각종 특권을 늘려왔다.

국회가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을 생각은 없는 듯하다. 세비 중 입법활동비와 특수활동비는 국회의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직무 관련 항목인 만큼 삭제하라는 권고도 받은 데다, 비과세여서 일반 국민과의 과세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비난과 분노가 높았지만, 보수체계는 고쳐지지 않고 있다. 임기 도중 구속돼도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는 이상 각종 수당이 지급되는 등 무노동 유임금또한 요지부동이다. 여야의 극한 대치 속에 사실상 마비 상태였던 21대 국회도 기득권 지키기에는 합심했다. 20대 국회 정의당이 주력했던 이른바 셀프금지 3’(세비와 국회운영비, 해외출장 심사, 징계 등을 셀프로 정하지 않겠다는 법) 추진은 21대에선 어디로 실종됐나.

고물가, 고금리, 경기부진의 한파 속, 국민들의 삶은 얼어붙고 있다. 가계빚은 계속 사상 최대를 경신 중이다. 특혜 속에 살아가는 국회의원들에게 편의점 식사도 버거운 청년들, 대중교통비 인상, 점심값 부담으로 도시락을 싸는 직장인들, 기름값, 난방비, 각종 세금 인상의 주름과 복지 서비스 축소가 관심일 리 없다. 도대체 국회의원을 왜 하겠다는 건가. 잿밥에만 눈이 어두운 공복, 머슴들이라면 하루빨리 해고하는 것이 맞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좋은 선례가 있다. 영국은 독립기구인 의회윤리청(IPSA)에서 의원들의 급여를 결정하고, 하원의원들의 비용 사용 내역을 두 달에 한 번씩 공개한다. 언제든 IPSA 홈페이지(www.theipsa.org.uk)를 통해 그 내역을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2009년 영국 하원의원들의 대규모 공금 유용 사실이 드러나면서 생긴 변화다. 당시 의원들은 250파운드 이하의 비용 청구에는 영수증 발급이 필요 없다는 규정을 악용해 각종 개인 비용을 신청했다. 장관 6, 의원 46명이 사퇴했고, 현역 의원 142명이 2010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불과 10여년 전 영국에서 있었던 개혁이다. 우리도 내년 총선을 거치며 해보자. 국회를, 정치를 바꾸려면 구름 위에 살고 있는 국민 대표들을 국민 일상 속 땅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 급선무다.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경향 : 2023.11.29

 

현대판 고려장 부추길 민주당 공약 1

더불어민주당이 요양병원 간병비 급여화를 총선 1호 공약으로 발표했다. 반가운 일이다. 간병인을 혼자 쓰면 한 달 간병비가 450만원, 간병인을 여럿이 나눠 써도 100만원을 훌쩍 넘는다. ‘간병파산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이니 간병비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면 국민 부담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병원이 책임지는 게 당연한 간병을 환자가 개인적으로 간병인을 고용해서 해결하다보니 다른 나라에선 볼 수 없는 기이한 일도 적지 않다. 간병인이 제대로 환자를 돌봐주지 않아도 병원에 항변할 수 없고, 간병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게 아니라 환자가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드물게는 환자를 학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간병비를 급여화해 병원이 간병을 책임지면 이런 일들은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 공약대로 요양병원 간병비만급여화하면 어떨 일이 벌어질까? 우리나라 요양병원에 입원한 노인 10명 중 7명은 의학적으로 입원이 필요하지 않은, 건강상태가 나쁘지 않은 노인이다. 2022년 요양병원에 입원한 노인이 약 300만명이니 이 중 210만명은 집에서 살 수 있는 노인이었던 셈이다. 심지어 10명 중 5, 150만명은 장기요양등급도 받지 못할 정도로 건강상태가 좋은 노인이었다.

그러면 왜 집에서 살 수 있는 노인들이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것일까. 첫째, 장기요양보험의 재가 서비스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재 장기요양보험 등급을 받은 노인이 집에서 살겠다고 하면 재가급여로 100만원 정도의 서비스를 받는 데 반해, 요양병원에 입원하면 건강보험에서 250만원을 진료비로 지급한다. 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의 재가급여를 250만원까지 늘리면 요양보호사의 방문시간을 2배로 늘리고, 의사와 간호사가 한 달에 한두 번 왕진을 와서 건강을 관리해주고, 병원에 가야 하면 동행해주고, 도시락도 배달해주고, 집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집도 고쳐주는 것까지 할 수 있다. 지금 쓰는 돈으로도 노인들이 집에서 존엄한 노후를 보낼 수 있는데, 정부가 집에서 살고 싶은 노인들의 등을 떠밀어 요양병원에 입원시키는 격이다.

둘째, 노인 돌봄 재정이 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으로 이원화되어 있어 장기요양보험 등급을 받지 않은 노인도 요양병원에 입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요양보험은 건강상태가 나쁜 1~2등급 노인만 요양원에 입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학적으로 불필요한 장기입원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그런데 요양병원에는 장기요양등급이 없어도 입원할 수 있다. 요양병원이 장기요양보험에서 진료비를 받는 것이 아니라 건강보험에서 진료비를 받기 때문이다. 요양병원이 등급을 바탕으로 돌봄서비스 이용을 관리하는 국가의 노인돌봄 재정체계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으로 재정이 이원화된 체계를 그대로 둔 채 간병비만급여화하면 국민들의 간병비 부담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덩달아 현대판 고려장도 크게 늘어날 것이다. 장기요양보험 재가 돌봄 급여가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요양병원을 선택하는 노인과 가족들이 지금보다 더 증가할 것이다. 이제까지 요양병원 간병비 부담 때문에 주저주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판 고려장을 늘리지 않으려면 우선 노인들이 거동이 좀 불편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도 집에서 살기를 원하면 집에서 살 수 있도록 장기요양보험의 재가급여를 크게 늘리고 질도 높여야 한다.

우리 국민 대부분은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노후를 보내고 싶어 한다. 올해 9월 내일신문에서 40세 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어디에서 노후 돌봄을 받고 싶어 하는지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노인 10명 중 7명은 집에서 노후를 보내기를 원한 반면,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원하기를 원하는 노인은 10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지금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노인도 10명 중 1명만 요양병원에서 계속 돌봄을 받고 싶어 했다.

민주당은 간병비만급여화하면 현대판 고려장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잘 몰라서 장기요양보험의 재가급여를 확대하는 공약은 쏙 빼고 요양병원 간병비의 급여화만 내세웠을까?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국민들의 간병비 부담이 9조원에 달하는데 달랑 시범사업 예산 80억원을 가지고 1호 공약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전형적인 생색내기이다. 장기요양보험 재가급여를 확대하자고 하면 요양병원이 반대할 수 있지만, 어려운 정책이라도 국민들을 설득해서 정책을 만들어야 할 정당이 생색내기 포퓰리즘 정책을 공약 1호로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의료관리학 경향 : 2023.11.29.

119 29’ 득표차가 불길하다

당직 순번이어서 2030 엑스포(EXPO·세계박람회) 개최지 선정 생중계 방송을 뉴스룸국 사무실에서 쭉 지켜봤다. 29일 새벽 130분이 거의 다 돼 화면에 뜬 ‘119(리야드) 29(부산)’란 결과는 믿기지 않았다. 부산 승리 가능성은 작다고 봤지만 ‘29’라는 숫자는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사실을 취재해 진실을 보도하도록 훈련받는 직업을 가진 나 역시 스스로를 희망고문 중이었구나 싶었다.

주요 재벌그룹이 유치전에 뛰어든 터라 그간 판세는 어느 정도 읽고 있다고 자만하던 터였다. 각 그룹 최고위층(C레벨) 임원들 입에선 온도 차는 있었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전망이 제법 나왔다. “시작할 땐 2등도 힘들다 봤는데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해볼 만합니다.” “결선에 가면 판이 뒤집힐 수도 있대요.” 물론 말 그대로 마지막까지 열심히 할 뿐이죠라며 말을 아끼는 이들도 있긴 했다.

상대적으로 엑스포와 한발 떨어져 있는 경제산업담당 데스크는 그럴 수 있지만 윤석열 대통령도 희망고문을 당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부의 외교력·정보력·분석력이 형편없는 수준이거나, ‘제대로 된 정보가 올라가지 않는 정보 불통 상황에 놓여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윤 대통령은 29일 기자회견을 열어 저희가 느낀 (상대국의) 입장에 대한 예측이 많이 빗나간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한겨레는 내년 국내외 경제의 키워드로 폴리코노미를 제시했다. 정치가 경제를 뒤흔드는 상황들이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주요국들이 내년 큰 선거를 치르기 때문만이 아니다. 멀게는 2008년 금융위기, 가깝게는 2016년 영국 브렉시트 국민투표 가결과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세계 경제질서는 급변했다. 자유무역의 자리를 보호무역이 꿰차고, 시장 자율보다 정부 산업정책의 중요도가 어느 때보다 커졌다. 기업과 정부는 서로 뒤엉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상호의존적 관계로 변모했다.

이러한 질서 전개는 한발 떨어져 냉정하게 살펴볼 대상이면서도, 그런 자세를 취하기엔 상황 전개가 급박하다. 당장 미국의 산업정책 구심력에 따라 북미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4대 그룹의 한 최고위급 임원은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다시 당선되면 무척 난감한 상황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엑스포 유치전은 이렇게 변모한 세계 질서의 한복판에서 진행됐다. 과거 올림픽·아시안게임·월드컵 유치전과는 성격과 파장이 다르다는 얘기다. 누군가는 승리하고 누군가는 고배를 마시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정부 전략·예측·분석의 정밀성과 신뢰도는 다른 이야기다. 그래서 ‘29’라는 숫자는 단지 승패의 결과만을 담고 있지 않다. 국제 질서 재편 흐름에 민감한 신용평가기관이라면 국가신용등급에 이번 개표 결과를 어느 정도 반영해야 할지 고민에 빠질 법하다.

유치 실패에 따른 아쉬움을 달래거나 유치 과정에서 얻은 유·무형의 과실을 침소봉대하는 데 급급하기보다 우리 정부가 실패한 원인을 차분히 되돌아봤으면 한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윤 대통령은 각 부처 보도자료들부터 살펴보시라. 언제부턴가 주요 사건, 핵심 정책과 관련한 부처 보도자료가 장관 동정 자료처럼 작성되고 있다. 국민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즉 국민과 소통하는 가장 기초적인 도구인데도 그렇다. 예를 하나 들어본다. 최근 행정망 장애 사태의 원인과 재발 방지 대책을 발표하는 보도자료 들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1124() 오후 한-영 디지털정부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 체결을 위한 영국 출장에서 귀국하자마자 지방행정전산서비스 개편 TF’ 2차 회의를 주재하였다.”

5공화국 시절 땡전 뉴스와 같은 작법이다. 보도자료에서도 듬뿍 묻어나는 장관 중심성국민 무신경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런 퇴행적 문화 아래에서 해당 분야 공무원들과 민간 전문가들이 사태의 진실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그 결과를 제대로 보고할 수 있을까. 윗선 심기를 살피거나 눈치를 보는 데 에너지를 더 쏟지나 않을까 하는 건 기자의 괜한 우려일까.

엑스포 유치전에 뛰어든 공무원, 기업인들도 비슷한 심정일 수 있다. 이런 정부를 경제인들도 불안하게 보고 있다.김경락 | 경제산업부장 한겨레 : 2023.11.30.

 

윤석열도 '피해자'로 만든 언론의 부산 엑스포 낙관

명백한 열세 전망에도 '대역전' 환상 심어줘

대통령과 언론들이 함께 연출한 '대국민 오도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공식 사과했다. “이 모든 것은 전부 저의 부족이라고 생각해달라고 말했다. 그가 예측이 빗나갔다며 머리를 숙이는 장면은 그로서는 매우 희귀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30일 이를 전하는 언론의 보도는 정부의 오판에 대한 분석과 비판들이 많았다. 조선일보는 정보 수집과 판단 역량에서 문제를 드러냈고, 대통령이 앞장선 엑스포 올인분위기 속에서 객관적 보고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질타했다.마치 이제서야 새로 알게 된 사실을 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개최 무산 결과가 확정된 뒤에야 언론들이 가하는 문제점 지적과 비판은 그러나 대통령 이전에 먼저 그 자신을 향했어야 할 것이었다. '객관적 인식''판단 역량'의 미흡함은 언론 자신이 스스로 자기비판해야 할 점들이었다. 언론은 대통령과 함께 상대의 판단 능력을 흐리면서 객관적인 상황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을 서로 주고받으며 이번의 '엑스포 희극'을 연출한 것이었다.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국제행사의 개최지 선정은 뚜껑을 열 때까지는 물론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번 엑스포 개최지 선정은 사실상 '이미 그 뚜껑이 반쯤 열린 상태'에서 투표가 이뤄진 것이었다. 한국 정부와 언론만이 다른 나라와 언론들이 모두 볼 수 있었던 그 반쯤 열린 뚜껑 속에 캄캄했다. 혹은 그 명백한 사실을 일부러 외면한 것이었다.

자사 보도에 대한 반성은 찾아볼 수 없어

엑스포 개최지 투표일을 불과 5일 앞둔 지난 24일자 조선 중앙 동아일보의 관련 기사 제목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4951까지 쫓아 왔다...2차 투표서 역전" (1123일자 조선일보)

"후반전 시작, 역전골 가능하다" (1123일자 중앙일보)

"2030엑스포 부산으로...오늘밤 뒤집는다" (1127일자 동아일보)

그러나 윤 대통령의 사과를 전하는 언론의 지면에서 이같은 자사 지면의 보도들에 대한 자기반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언론 자신이야말로 지금의 사태를 있게 한 것에 역시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자기객관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선일보의 920일자 <뉴욕서 38과 만나 엑스포 홍보’>라는 기사는 78차 유엔총회 참석을 위해 미국 뉴욕을 방문한 대통령이 첫날부터 9개 국 정상과 차례로 만나 엑스포 부산 유치 지지를 요청했다고 쓰고 있다. 이 유엔총회를 엑스포 총력전을 펼칠 마당으로 예고했다면서 "역대 정부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강행군에 참모들이 '일정이 너무 많다'고 만류하자 윤 대통령은 '나를 회담 기계라고 생각하고 필요하다면 회담을 다 잡으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윤 대통령이 3주 만에 60여 국 정상을 만나는 셈이 된다면서 “‘한 달 안에 가장 많은 정상회담을 연 대통령으로 기네스북 신청”(대통령실 고위 관계자) 얘기가 나오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기네스북 도전까지 들먹이며 대통령의 '온몸을 던지는' 엑스포 외교에 대한 칭송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엑스포 외교를 이유로 유엔총회에 참석했던 9월 이후 판세는 오히려 사우디 우세가 확고해졌다. 사우디에 대한 지지 선언 국가들이 대거 늘어감에도 언론은 한국 정부의 발표를 받아다가 "부산 쪽으로 유리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서방 언론들, 특히 사우디의 엑스포 개최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밀착취재하던 아랍지역 언론들에서 한국이나 이탈리아의 중도 포기 가능성을 노려 지지 국가들의 명단을 공개할 때도 한국 언론들에서는 정부의 입을 빌거나 뚜렷한 근거 없이 '박빙' '뒤집기' '턱밑까지 추격' 등의 말을 써 가며 결선 투표에서 대역전극을 펼칠 것이라는 예상을 쏟아냈다. 한두 번의 짧은 만남, 식사를 하면서 부탁하는 정도로 그 나라의 심사숙고에 의한 결정의 변심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판단한 얕은 인식을 정부와 언론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헛된 기대와 오판을 낳았다. 하루 전인 28일자 조선일보의 1<부산은 온힘을 다했다>에서는 패배를 예상하기로 한 듯한 표정이 엿보인다. 그러나 너무 늦기도 했거니와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는 얄팍한 의도가 엿보이는 보도라는 점에서 독자들을 기망하는 것이었다.

언론 보도의 일부는 한국이 '총력전'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에 어김없이 '전 정부 책임론'까지 꺼내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대통령이 해외 출장 예산을 당초 249억 원에서 두 배인 578억 원으로 두 배나 늘리면서 1년 반 사이에 엑스포를 유치하겠다며 96개 국 정상을 150차례 만난 것이나 거의 모든 장관들을 세계 여러 나라에 보낸 것이 총력전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민간기업들이 막대한 비용을 써 가며 엑스포 유치에 동원되고 외교 자원을 총투입한 것이 총력전이 아니면 무엇인가.

엑스포에 대한 착시가 아닌 국정 무능 덮을 묘수로 본 것

윤석열 정부의 엑스포 유치 외교의 진짜 문제는 총력전을 펼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총력전을 펼친 것에 있다. 엑스포 유치가 국가 수반이 총력을 쏟을 일인지부터가, 외교의 거의 모든 것을 그에 맞춰야 할 일인지부터가 의문이다. 엑스포라는 행사에 대한 과도한 환상에서 비롯된 총력전이야말로 실은 문제인 것이다. 대통령은 엑스포 한 번 개최하면 "비약적인 성장"이 이뤄질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야말로 인식의 '비약'이다. 엑스포는 한 나라의 산업과 경제와 국력 비약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결과다. 비약하고 도약하는 과정에서의 이벤트다.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대통령의 인식의 비약을 언론은 뒷받침한 것은 물론 부채질하고 앞에서 이끌었다. 예컨대 언론들은 경제효과 61조 원이라는 추산을 들뜬 어조로 내놓았는데, 그 근거는 예의 국제행사들의 막대한 경제효과 예상들에서 드러났듯 빈약한 근거의 계산에 불과한 것이었다.

윤 대통령이 사과했어야 할 '부족한 점'은 사실 엑스포 유치 실패가 아니라 엑스포를 요술 방망이로 여긴 듯한 착시였다. 자신의 국정 파탄과 무능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를 일거에 잠재울 수 있는 묘수로 생각한 듯한 그 착시였다. 그렇다면 이는 의도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단지 착시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파탄과 무능을 보여준 것이었다고 해야 할 듯하다. 그리고 그 착시를 확신으로 굳혀준 것이 언론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엑스포 실패는 윤석열 정부와 언론의 동반 실패라고 해야 할 듯하다.

언론의 엑스포 보도는 결국 그 보도를 믿은 많은 한국 국민들을 피해자로 만든 셈이 됐다. 그리고 윤 대통령 또한 그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윤 대통령은 국민들에 대해 허황된 기대를 갖게 한 '가해자'이면서 언론의 턱없이 부풀린 낙관론에 의한 피해자라는 이중적인 처지가 된 셈이다. 다만 그가 입은 '피해'는 그 근원이 결국 그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언론과 윤 대통령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와 피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유력 매체들은 최고권력자에 대한 애정과 옹호를 노골적으로 보여왔다. 엑스포 유치에 대한 지난 1년 반의 언론 보도도 그같은 관계를 뚜렷히 보여준 것이었다. 윤 대통령은 이들 유력 언론에 의한 최대의 수혜자가 돼 왔다. 그러나 그런 애정과 비호가 낳는 역설이 있다. 때로는 뭔가를 보호하려는 것이 오히려 그 대상을 피해자로 만든다는 역설이다. 대통령에 대한 이들 매체의 보도가 지금까지 그랬듯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대통령의 착시와 오판을 낳고 곤경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동아일보는 대통령실 관계자의 말을 빌어 엑스포 표결 결과가 기존에 보고받은 표결 정세 판단과 다르게 나오자 (윤 대통령이) 격앙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고 쓰고 있는데, 윤 대통령이 무엇보다 격앙해야 할 것은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와 같은 매체들의 시각 속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의 '판단'에 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명재 에디터 시민언론 민들레 : 2023.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