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주간경향-2.5 한국
2.5 한겨레-경향
2.4 한국-한겨레
2.4 국민-경향
2.3 한국-한겨레
2.3 민중의 소리-새전북
2.3 미디어오늘-내일신문
2.3 국민-경향
2.2 한겨레-민중의 소리
2.2 내일-경향
2.1 한겨레-민중의 소리
2.1 내일-경향
2.5 국민-1.31 민중의 소리
1.29 내일-1.28 시사저널
경향 장도리 2.1~2.5
기업에 주면 경제살리기, 서민에 주면 포퓰리즘? 2.6 프레시안
[비평] 그럴 거면 ‘국민’은 왜 언급하나…“철퇴를 내리라”는 조선, 누구한테?
총선을 앞두고 표심을 얻기 위한 각 당의 정책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보통 선거를 앞두면 선심성 공약, 때문에 실현 불가능한 공약이 쏟아지고 결국 당선 후에 이를 실현하지 못하고, 정치에 대한 신뢰는 떨어진다. 신뢰가 떨어지면 관심이 없어지고, 그럼 각 정당들이 더 자극적인 공약을 내놓는다. 악순환이다.
따라서 정치권의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인지 아닌지 검증하는 것은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다. 이 공약이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며 공공의 재화를 그쪽에 투입하는 것이 합당한지, 공약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하며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등을 확인하고 판단해 좋은 정책은 띄우고 나쁜 정책은 비판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선거 때만 되면 나오는 일부 언론들의 ‘포퓰리즘 타령’도 이해해 볼만 하다. 그들의 눈으로는 어떤 정책들이 무책임하고 실현 불가능하며 과도하게 일방의 이해관계만 대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재벌‧대기업에 특혜를 주는 정책들은 경제 살리기 정책이라 주장하고, 서민들을 위한 분배정책은 경제를 망친다며 물어뜯는 모습, 그리고 명백히 재벌을 대변하면서 서민 운운하는 모습은 그들의 주장이 진실이라거나, 국가운영에 관한 엄청난 철학적 성찰로 보이진 않는다.
2016년 2월6일자. 조선일보 사설.
5일 더불어민주당은 총선공약을 발표했다. 청년과 노인, 여성, 중‧장년층에 맞는 맞춤형 공약을 제시했는데, 청년공약으로 70만개의 일자리 창출, 취업활동비 지원, 청년주거 개선을 위한 쉐어하우스 임대주택 5만가구와 신혼부부용 소형주택 5만 가구를 공급하겠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노인들을 위해 소득하위 70%에 기초연급 20만원을 차등 없이 지급하겠다고도 했다.
그러자 6일,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포퓰리즘 딱지를 붙였다. 동아일보는 6면 ‘더민주, 재원대책 없이 “청년취업활동 월 60만원 지급”’ 기사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청년수당’, 이재명 성남시장의 ‘청년배당’ 정책을 중앙당 차원에서 총선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포퓰리즘 논란이 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도 비슷하다. 사설 ‘보육 대란 만든 여야 또 포퓰리즘 경쟁, 철퇴 내려야’에서 “더민주당이 발표한 공약에는 막대한 재원이 들어가거나 기업에 부담을 주는 내용이 적지 않다”며 “여야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5년 동안 각각 97조원과 192조원이 들어가는 복지 공약을 내세웠다가 지금 그걸 감당하느라 여기저기서 부작용이 터져나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앙일보 역시 사설에서 “항목마다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의 돈이 필요한 일들”이라며 “하지만 재원 마련 대책은 알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실효성도 의문”이라며 “나라 곳간은 아랑곳 않고 현실성 없는 약속을 홍수처럼 쏟아내니 표만 노린다는 지적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2016년 2월6일자. 중앙일보
이들 언론의 주장처럼 더불어민주당의 정책은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 물론 더불어민주당 나름의 재원마련 대책은 있다. 바로 법인세 등 이명박 정부 때 삭감된 부자들의 세금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언론은 왜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일까? 이유는 오히려 단순하다. 기업에 부담이 되니까, 그럼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그런데 사실, 법인세를 깎아도, 종부세를 없애도 재벌들은 고용을 늘리지 않는다. 물가는 오르는데 월급은 올리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 이후 나온 각종 통계는 법인세 축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대기업 고용이 감소했다고 보여준다. 기업들이 애걸하는 파견법이 통과되면 대기업들의 직접고용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기업이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아니다. 재벌들은 매년 천문학적인 배당금을 받아간다.
결국 언론은 재벌들을 위해 복지정책을 반대한다. 그러니 동아일보 주장처럼 복지공약을 확대하면 “청년에게 미래의 빚더미를 떠넘긴다”라거나, 중앙일보 주장처럼 “나라 거덜 낼 공약을 안한다는 약속부터 하는 게 유권자들의 마음”이라거나 조선일보 주장처럼 “유권자가 철퇴를 내리는 수밖에 없다”는 말들은 공허하다. 이들 언론 말대로 하면 오히려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좋은 정책에 철퇴를 내리라니.
대기업에게 초등학교 옆에 호텔을 짓게 해줘도, 법인세를 깎아줘도, 전 직원을 비정규직으로 채용하게 해줘도 재벌들은 부를 축적할 더 강한 법안들을 요구할 것이고, 지난 30년이 그랬듯 서민들의 등골은 더욱 휠 것이다. 청년은 이미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나라는 이미 거덜났다고 느낀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말들은 극단화된 한국이 개인의 ‘노오력’으로 해결 될 수 없다는 자각이다.
언론은 서민들에게 1원이라도 돌아갈 때마다 목에 핏대를 올리고 포퓰리즘이라며 반대할 것이다. 대신 재벌들에게 100조라도, 1000조라도 들어갈 때 마다 아직 부족하다고 소리높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언론은 본인들이 스스로 재벌을 대변한다고 말하면 된다. ‘국민들’ 운운하는 것은 민망하다.
'저유가' 지속되는 건 미국의 '음모'? 2.5 프레시안
[해외시각] '석유 시장의 종말' 앞에 체제 위기 직면
국제유가가 급락한 채 지속되는 현상이 글로벌 경제에 악재로 작용하는 것도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계속 지속될 것같던 고유가가 갑자기 끝나버린 이유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저유가가 지속되는 이유가 공급이 넘쳐나기 때문이라면, 산유국들이 생산량을 조절하면 될 텐데 좀처럼 합의를 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관련 기사:저유가를 호재로 반기지 못하는 이유)
지난 2008년 배럴당 150달러에 육박하던 국제유가는 현재 30달러 안팎으로 떨어졌다. 특히 국제유가는 2014년 6월 이후에 70%가 넘게 하락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국제유가가 떨어지고 게다가 지속되는 것은 많은 전문가들의 예측과 어긋난 것이다.
게다가 산유국들의 감산 합의 가능성을 비웃듯 모건스탠리는 4일(현지시간) 올해 국제유가 전망치를 대폭 하향 수정했다. 올해 1분기와 2분기 국제유가 전망치를 각각 31달러, 30달러(기존 전망치는 각각 42달러, 45달러), 3분기와 4분기 전망치도 30달러, 29달러(기존 전망치 48달러, 59달러)로 내린 것이다. <뉴욕타임스>도 "지난 10여 년동안 '정상가'로 여겨진 배럴당 90~100달러 수준으로 국제유가가 복귀하려면 몇 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국제유가에 대한 예측이 크게 어긋나고, 산유국들이 오일머니 수입이 급감하면서 큰 어려움에 봉착하자 '음모론'이 대두됐다.
미국이 오일머니로 목소리가 커진 산유국들을 죽이기 위해 셰일유 등 새로운 석유 채굴법을 동원해 원유 공급을 늘려 국제유가를 떨어뜨리는 '석유 패권전략'이 가동됐다는 것이 대표적인 '음모론'이다. 실제로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두 배나 증가했다. 원유 수입국이었던 미국은 올해부터 아예 원유 수출국으로 돌변했다.
▲이라크의 한 유전 시설.ⓒAP=연합뉴스
"산유국들, 죽기 직전의 고통을 느끼는 단계"
하지만 산유국들도 원유 생산량 감산에 합의하지 않고 있다. 특히 서방권의 경제제재로 원유 수출길이 막혔던 이란은 원유 수출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이란은 오히려 생산량 조절에는 동의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 등 걸프 연안 산유국들은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사우디가 감산을 거부하는 이유에는 시장점유율 유지도 있지만, 적대관계인 러시아와 이란에 타격을 주려는 의도 때문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하지만 미국과 사우디가'음모론'의 공범일 가능성에 대해 동의하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각종 음모론에도 불구하고 근거는 희박하다는 점에서 저유가 사태는 수요와 공급의 문제 이상으로 보기 어렵다"면서 "저유가로 채산성이 떨어져 추가적인 채굴 포기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에 2016년 말부터 공급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원유 시장 자체가 문을 닫을 날이 멀지 않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매장량이 넘쳐나는데 나중에는 채굴할 가치가 없는 원자재가 된다면, 시장이 문을 닫기 전에 최대한 많이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산유국들이 처한 딜레마가 바로 '석유 시장의 종말'이며, 산유국들이 '자원의 저주'로 존망의 위기에 몰리고 있다는 진단도 대두됐다. 프린스턴대학교 역사학과 해럴드 제임스 교수는 "산유국들이 지금 죽기 직전의 고통을 느끼는 단계에 처해 있다"고 표현했다.
제임스 교수는 "기술 발전에 따른 자원의 세대교체"가 국제유가 하락의 근본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석탄이 고갈되지도 않았는데 주에너지원으로서 석유에게 밀려난 것처럼 석유도 주에너지원으로서의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기후변화 문제로 화석연료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흐름에 따라, 석유 역시 이제 '에너지원의 세대 교체'에 직면한 연료라는 것이다.
"산유국들의 위기, 지정학적 위기 초래"
석유가 에너지 시장에서 축출되는 상황이 오면 산유국들은 존망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산유국들의 위기는 지정학적 위기도 초래한다. 산유국들은 석유라는 원자재에 의존한 체제여서, 자원의 가치가 떨어지면 지배체제 자체도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다.
제임스 교수는 산유국들의 지배체제가 허약한 독재체제라는 점을 '자원의 저주'라고 표현한다. 이미 남미의 대표적인 '반미국가' 베네수엘라는 오일머니가 고갈되면서 올해 내에 디폴트를 선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되고 있다. 브라질과 에쿠아도르도 경제와 정치가 파탄이 날 지경으로 몰리고 있는 산유국들이다. (관련 기사:베네수엘라, '오일 머니' 고갈로 파산?) 그는 "나이제리아, 베네수엘라,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이란, 그리고 이라크 같은 산유국들이 많은 차이점이 있겠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같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이들 나라들이 석유로 얻은 수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권력 다툼과 부패에 찌들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저유가가 지속되면 산유국의 '도적 같은' 권력자들 사이에서 더 큰 다툼이 벌어지고, 산유국들끼리도 싸우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제임스 교수는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주장한 "저유가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등 음모론에 대해, 산유국들의 권력자들이 내부에서 벌어지는 혼란에 대해 핑계를 대기 위해 지어낸 것이라고 꼬집었다.
분열된 야권…‘아름다운 패배’는 없다 2.5 한겨레
정치는 결과다.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결과가 나쁘면 결국 나쁜 것이다. ‘아름다운 패배’는 현실 정치에 존재하지 않는다. 선거는 산수다. 수학이 아니다. 공식이 간단하다. 덧셈과 뺄셈이다. 뭉치면 이긴다. 분열하면 진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도저히 질 수 없었다. 그런데 졌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인제 후보의 탈당과 출마였다. 이인제 후보는 무려 500만표(19.20%)를 득표했다. 여당표가 갈렸다.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표차는 겨우 39만표(1.53%포인트)였다. 2002년 대선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후보는 ‘제3후보’였던 정몽준 후보와의 극적 단일화로 이회창 후보를 꺾었다. 정권을 놓친 사람들은 두 차례 같은 실수를 반복한 뒤에야 교훈을 뼈에 새겼다. 그 뒤 선거에서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의 기본 전략은 언제나 ‘우리는 뭉치고 상대는 갈라친다’였다. 새누리당과 친여 성향 이데올로그들은 10여년 동안 ‘여권 단결-야권 분열’ 프레임을 만들어 확산시켰다. 특히 ‘호남’과 ‘친노’를 이간했다. 호남을 중도나 ‘합리적 진보’로 치켜세웠고, 친노에 종북과 운동권의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웠다. 4·13 국회의원 선거는 이런 ‘여권 단결-야권 분열’ 프레임의 효과가 최고조에 이른 상태에서 치러진다. 어떻게 될까.
여권 1997·2002대선 패배 뒤 ‘여권 단결-야권 분열’ 전략
결국 호남-친노 갈라치기 성공 종편·보수신문은 ‘여권 서포터’
야권 수도권서 연대 실패하면 ‘새누리 200석’ 저지 쉽지 않아
국회의원 선거는 대통령 선거와 달리 지역구마다 승부가 난다. 이론적으로는 49% 득표율의 정당이 지역구 의석을 단 한 석도 못 건질 가능성이 있다. 소선거구제의 마술이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끄는 더불어민주당과 안철수 대표가 만든 국민의당은 호남 민심을 놓고 각축하고 있다. 호남은 야당의 ‘영혼’이니 당연하다. 언론도 두 야당의 호남민심 쟁탈전을 중계하고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번 선거를 호남만 치르는 건가? 아니다.
지역구 의석이 현재의 246석에서 253석으로 늘 경우 예상 의석을 살펴보자. 수도권이 122석(서울 49, 인천 13, 경기 60)이다. 지금보다 서울과 인천이 각 1석씩, 경기는 8석이 늘어난다. 지역구 전체의 반에 가깝다. 이번 선거의 승부처는 수도권이라는 얘기다.
야권 수도권 연대 못하면 여권 ‘역대급 승리’ 못 막는다
지역구 전체 의석의 반이 수도권 비수도권 다 합쳐야 영남과 동일
그런데도 온통 관심은 호남 쏠려
새누리는 수도권 30%만 돼도 과반 일 자민당식 영구집권 진입할 수도
‘진박’ 공천 둘러싸고 잡음 있지만 ‘애국’ 앞에선 분열할 가능성 없어
어설픈 명분싸움 끝에 이별한 야권
다당제로 포장해 분열 책임 피하고 이해타산 묶여 연대 성사 어려울듯
호남은 얼마나 될까. 28석(광주 8, 전남 10, 전북 10)에 불과하다. 와각지쟁(蝸角之爭)이라는 말이 있다. 달팽이의 촉각(觸角) 위에서 싸운다는 것인데 작은 나라끼리의 싸움을 의미한다. 의석수로 보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지금 와각지쟁을 하고 있다.
눈을 다른 지역으로 돌려보자. 영남은 무려 65석(부산 18, 울산 6, 경남 16, 대구 12, 경북 13)이다. 호남 28석과 충청 26석(대전 7, 충남 11, 충북 8), 강원 8석, 제주 3석을 다 합치면 영남과 같은 65석이다. 현재의 지역대립 구도가 깨지지 않는 한 영남과 충청, 강원에서 강세인 새누리당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비례대표 47석을 여야가 절반씩 나눠 갖는다고 치고 19대 국회 권역별 정치지형(충청·강원 24석)을 반영해서 대략 계산하면 새누리당은 수도권에서 30%(37석)만 차지해도 과반 의석이 된다.
야권이 수도권 의석 70%를 확보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2004년 17대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수도권 76석(70%)을 획득한 적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이라는 특별한 상황 때문이었다. 이번 4·13 선거에서 야권은 새누리당의 과반 의석을 저지할 수 없다. 문재인 전 대표는 목표 설정을 잘못했다. 수도권은 오히려 여당이 압승할 가능성이 높다. 야권 분열은 새누리당의 기회다. 요즘 국회와 새누리당 당사에는 새누리당 예비후보들의 발길이 잦다. 당내 경쟁자에 대한 비난도 서슴지 않는다. 새누리당 공천을 받으면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2008년 18대 선거 때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당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 무려 81석(73%)을 차지했다.
새누리당이 수도권에서 70% 의석을 차지하면 어떻게 될까. 대충 계산해도 ‘200’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200석이면 국회에 일본 자민당처럼 보수 기득권 영구집권 체제가 들어서는 것이다. 국회선진화법이 무력화되는 것은 물론이다. 믿기 어려운가? 간단한 산수를 해보자. 1996년 15대 선거 결과는 신한국당 139, 새정치국민회의 79, 통합민주당 15, 자민련 50, 무소속 16이었다. 신한국당과 자민련을 더하면 189석이다. 2008년 18대 선거 결과는 통합민주당 81, 한나라당 153, 자유선진당 18, 민주노동당 5, 창조한국당 3, 친박연대 14, 무소속 25였다.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친박연대에 친박무소속연대(12)를 더하면 197이다.
여와 야는 선거에 임하는 전략과 태도에서도 차이가 난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는 ‘진박’ 공천을 둘러싸고 전쟁중이다. 하지만 새누리당 친박과 비박 세력이 분열할 가능성은 없다. 이유가 뭘까.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는 둘 다 이른바 ‘애국세력’이다. 애국세력은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고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 자칭 보수우파가 계속 집권해야 한다고 믿는다. 정권이 바뀌면 나라가 망한다고 정말로 믿는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보수가 분열하면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애국이라는 명분을 기득권 수호라는 이해타산과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야당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문재인과 안철수는 어설픈 명분 싸움 끝에 이별했다. 그 뒤 양당은 분열 프레임의 주술에 걸린 좀비처럼 행동하고 있다. 왜 그럴까. 유럽식 다당제가 분열 프레임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 유럽식 다당제는 우리 정치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론이다. 그런데 2017년 대선에 대비해 전국 조직을 구축해야 하는 안철수 의원의 이해타산, 이번에 낙선하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야권 경쟁자를 제거한 뒤 4년 뒤를 노려볼 수 있는 출마 희망자들의 이해타산이 절묘하게 일치한다. 따라서 야권은 앞으로 연대가 어려워 보인다.
‘여권 단결-야권 분열’ 프레임이 유통되는 통로는 언론이다. 친여 성향의 일부 신문과 종편(종합편성채널)이 중심이다. 요즘 종편 토론의 단골 소재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벌이는 야권 주도권 다툼이다. 여야 대치 구도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소설가 복거일은 최근 ‘민란의 추억’이라는 칼럼에서 “안철수 현상은 본질적으로 민란”이라며 “특히 안 의원은 ‘총선에서 야권 연대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해 자신이 실패에서 배우는 정치가임을 보여줬다”고 치켜세웠다.
“‘양당체제 극복’ 성공할까”
“20년 만에 국회 3당체제 도전…안철수 ‘이번이 마지막 기회’”
“안철수의 국민의당, 야권연대 끊어야 양당구도 깬다”
국민의당 창당 다음날 아침 어느 신문의 1면 머리기사, 3면 머리기사, 사설의 제목이다. 다당제로 포장된 야권 분열 프레임은 선거가 다가올수록 더 강렬해질 것이다. 결국 여권의 완벽한 단결과 야권의 분열, 그리고 여권의 승리를 염원하는 언론의 지원 속에 치러지는 4·13 선거는 여당에 ‘역대급 승리’를, 야당에 ‘역대급 패배’를 안길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어떻게 볼까? 새누리당과 국민의당 사정에 매우 밝은 전략통에게 조언을 구했다.
“김영삼 정부 이후 정치는 갈수록 국민들과 괴리되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다. 변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때마침 안철수 신당이 출현했다. 안철수 신당의 정치혁신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새누리당에서 영남의 중도보수 세력을 뜯어내야 한다. 그런데 충청의 중도 세력조차 끌어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호남을 석권할 가능성도 없다. 안철수 의원은 이런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갖춘 사람이 아니다. 4·13에서 교섭단체 구성에 성공하더라도 정치지형을 바꾸지 못할 것 같다. 안타깝다.” 그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수도권에서 연대하지 않으면 야당이 완패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선거 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폭주를 걱정했다
"슈퍼 젠트리피케이션 진행…마을 파괴 잔혹사" 2.3 프레시안
청년 예술가들 "동네 살리려다가 젠트리피케이션 역풍“
※ [gentrification] :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을 이르는 용어.
젠트리피케이션은 우선 임대료가 저렴한 도심에 독특한 분위기의 갤러리나 공방, 소규모 카페 등의 공간이 생기면서 시작된다. 이후 이들 상점이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지면서 유동인구가 늘어나고, 이에 대규모 프랜차이즈점들도 입점하기 시작하면서 임대료가 치솟게 된다. 그 결과 소규모 가게와 주민들이 치솟는 집값이나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동네를 떠나게 되고, 동네는 대규모 상업지구로 변화된다. 예컨대 2000년대 이후 서울의 경우 종로구 서촌을 비롯해 홍익대 인근, 망원동, 상수동, 경리단길, 삼청동, 신사동 가로수길 등에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2009년 1월 '용산 참사'가 발생했다. 재개발로 길거리에 나앉게 된 철거민들이 망루를 설치하고 생존권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들의 요구는 묵살됐다.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이 죽었다. 7년이 지났지만 아직 유가족들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이야기를 2016년 2월로 옮겨 보겠다.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카페 '테이크아웃드로잉'에도 '용산 참사'와 비슷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건물주 싸이 측은 벌써 3차례 강제집행을 시도했다. 카페 '드로잉' 운영자들은 언제 강제집행이 진행될 지 알 수 없어 카페에서 숙식을 해결한 지 오래다. 언제 강제집행을 당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용산이라는 지역은 특수하다. 과거에는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빈민촌이 형성됐다. 대표적인 곳이 해방촌.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용산국제업무지구, 뉴타운 지역 선정 등 광풍이 몰아치면서 '핫플레이스'가 됐다. 우사단길, 경리단길 등에 젊은 문화예술가들이 들어가 활동하면서 열풍은 가속화됐다. 자연히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조용하던 동네가 하루아침에 투기 열풍에 몸살을 앓게 됐다. 원주민들은 하나둘씩 생활터전에서 쫓겨나는 식이다. 용산참사와 카페 '드로잉'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용산 한남동 경리단길, 해방촌, 도깨비시장길 등이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2~3년 전에 비해 임대료가 2배 이상 오른 곳이 태반이다. 왜 이런 일은 반복되는 걸까. '테이크아웃드로잉을 지키기 위한 대책위원회' 주최로 2일 한남동 카페 '드로잉'에서는 용산에서 반복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의 원인과 대안을 모색하는 제6회 한남포럼이 열렸다.
▲ 카페 '테이크아웃드로잉' 내부 모습. ⓒ테이크아웃드로잉
"우리가 사는 동네가 유명해지지 않았음 한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한남동 우사단 10길에서 이태원 계단장이라는 벼룩시장을 여는 장재민 '우사단단' 활동가는 답답함을 호소했다. 장재민 씨는 "우리가 이 동네에 들어올 때만 해도 뉴타운 재개발로 묶여 슬럼화의 상징이 된 지역이었다"고 설명했다.
"슬럼화된 곳이었지만 나름 괜찮은 동네로 만들어보고자 했다. 이 동네는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한다. 그렇게 괜찮은 동네를 만들어보자고 활동했는데 어느 순간 동네가 유명해졌다. 그러면서 잠들어 있던 건물주들의 욕망이 깨어났다. 처음 우리가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건물주들은 이곳을 방치했다. 언제든 재개발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애들이 와서 동네가 유명해지니 재개발이 아니더라도 돈을 벌 수 있겠구나 하는 환상이 심어진 듯하다."
장 씨는 자신들의 그간 활동을 "철없는 짓"이었다며 "상황이 이러니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진다"고 말했다. 장 씨는 계단장이라는 벼룩시장 홍보나 공익활동, 주민네트워크 산업 등을 줄여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장 씨는 "우리가 사는 동네가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동네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활동했는데 그게 되레 동네를 파괴하는 일이 된 거 같아 허망하다"고 말했다.
장 씨와 함께 우사단단에서 활동하는 이영동 씨도 마찬가지였다. 이 씨는 다른 동네에서 온 방문객을 데리고 한남동 산동네를 도는 '동동투어'를 진행했다. 하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씨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하고 있는 '동동투어' 같은 사업 등이 젠트리피케이션을 강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용산의 한강진, 경리단, 우사단 등은 이제 이름만 남았다"고 말했다.
"주범은 부동산 업자"
김지윤 싱가포르 테크놀로지·디자인 대학교 연구원은 이러한 젠트리페케이션 현상의 주범으로 부동산 업자를 지목했다. 김 연구원은 이태원을 언급하면서 "시기마다 상업화를 주도하는 계층은 달랐다"고 설명했다.
"이태원이 처음 상업화 대상으로 된 것은 미군을 상대로 했던 나이트 라이프, 즉 성을 매개로 한 매매 등이었다. 그러다 1980년~1990년대에는 일명 '짝퉁' 명품을 파는 상인들이 상업화를 이끌었다. 상인들의 세대교체도 여러 번 일어났다. 이들은 초기 부흥기 때 상당한 돈을 벌고 이곳 건물주가 됐다. 상업 활동은 안 하지만 건물주로 존재하는 식이다. 1990년대 이후에는 상업화 대상이 음식으로 변화했다. 그러면서 부동산업자가 같이 이곳에 들어왔다. 동대문과 비슷하다. 두타 등 쇼핑몽이 생기면서 부동산이 들어왔다. 부동산이 들어오면 한순간에 휩쓸린다. 이태원도 음식점과 함께 부동산이 같이 들어온 게 가장 큰 문제다."
김 연구원은 현재 소위 뜨고 있는 경리단길과 우사단길을 언급하면서 "이들 지역은 낙후된 지역이었으나 청년사업가들이 2010년 전후로 들어가서 문화활동을 하면서 점차 활성화가 됐다"며 "그러자 지가가 오르면서 투자대상이 됐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원은 "여기에는 부동산업자가 주요한 역할을 한다"면서 "한남동 일대 골목길은 현재 부동산업자의 놀이터가 됐다"고 말했다.
▲ '테이크아웃드로잉을 지키기 위한 대책위원회' 주최로 2일 한남동 카페 '드로잉'에서는 용산에서 반복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의 원인과 대안을 모색하는 제6회 한남포럼이 열렸다. ⓒ프레시안(허환주)
"슈퍼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고 있다"
신현준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는 서울에서 일어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단계별로 정리해서 설명했다. 신 교수는 현재 한남동 카페 '드로잉'이 겪는 분쟁을 3라운드라고 정의했다. 신 교수는 "1라운드는 1990년대 신촌, 압구정동 등에서 진행됐다"라며 "그때는 세입자들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쫓겨나야 했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하지만 2라운드인 2000년대 홍대, 삼청동, 가로수길 등에서 진행된 젠트리피케이션에서는 마냥 당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 교수는 "2008년 이후 부동산 불황기가 찾아오면서 더는 아파트에서 시세 차익이 안 나자 돈 있는 이들 상당수가 건물에 투자하기 시작했다"라며 "그것이 3라운드의 시작"이라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3라운드는 용산 한남동에서 두드러진다"라며 "정치인들, 재벌, 여기에 스타 연예인들이 가세해서 슈퍼젠트리피케이션, 글로벌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이전 젠트리페케이션은 지역에서 나름 함께 동네라는 공간을 만들었다"라며 "하지만 지금의 슈페젠트리피케이션은 그렇지 않다. 자기네들의 네트워크가 다른 곳에 있기에 동네, 그리고 장소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라고 주장했다.
강남 고등학생 사교육비 한 달에 130만원 쓴다
대치동은 250만원 넘어…강남구민 절반 "가족간 대화 적다"
서울 강남에 거주하는 고등학생들은 월평균 약 130만원의 사교육비를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치동 일부 지역에선 250만원을 훌쩍 넘는 곳도 있다.
3일 강남구(구청장 신연희)가 발간한 '2015 강남구 사회조사 통계표'에 따르면 자녀 1인당 사교육비는 월 89만원으로 집계됐다. 이 조사는 지난해 9월 1일부터 15일까지 2천개 표본가구 만 15세 이상 모든 가구원 4천177명을 방문해 문답식으로 작성한 결과다.
교육과정별로는 초등학생은 1인당 월 57만 8천원, 중학생은 88만 8천원, 고등학생은 130만 5천원을 사교육에 쓰는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사교육 중심지'로 유명한 대치동 중 2동에선 49.7%가 고등학생 자녀 사교육에 200만원을 쓴다고 답했다. 대치동의 고등학생 사교육 평균 지출액은 257만 4천원으로 나타났다.
강남구민들의 거주 형태는 아파트 거주가 56.8%로 가장 많았고, 자가 소유는 36.1%, 1인 가구는 37.1%로 나타났다. 소득은 월평균 500만원 이상 1천만원 미만이 38.1%, 학력은 대졸이 65%로 집계됐다.
가구원 3명 중 2명은 가족과 함께 자주 식사를 하며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정작 52.2%는 가족 간 대화는 적고, 함께하는 여가 생활도 별로 없다고 답했다. 기혼 가구주 중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경우는 11.1%로 자녀의 교육과 주로 직장 생활 때문이라고 답했다.
주거환경 만족도는 84.5%로 높았으며, 특히 86%는 "야간에 혼자 걷기 두려운 곳이 없다"고 답해 눈길을 끌었다. 강남주민으로서의 자부심은 2013년 대비 2.66점 상승한 80.78점으로 나타났다.
호남, 성과 속의 경계 제1098호 2.5 한겨레21
차별’과 ‘신화화’라는 두 극단의 정념으로 요동해온 땅… 5·18부터 제1야당 분당 사태까지 책과 용어로 읽는 ‘호남’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민주당 후보가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한겨레
야권이 펄펄 끓는다. 안철수 의원의 탈당(2015년 12월13일)과 신당 추진(2016년 1월10일 국민의당 창당 발기인대회),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명 변경(2015년 12월28일 더불어민주당)과 잇단 탈당, 안철수-천정배(국민회의) 통합 선언(1월25일), 더민주-정의당 전략협의체 구성 합의(1월25일), 문재인 더민주 대표 사퇴(1월27일)…. 끓은 뒤 맛과 내용이 더 풍성해질지, 끓다 넘쳐 산산이 흩어질지는 시간이 설명할 것이다.
제1야당의 격동은 ‘분당’일 수도 있고 ‘창당’일 수도 있다. ‘분열’일 수도 있고 ‘분화’일 수도 있으며, ‘멸렬’일 수도 있고 ‘재건’일 수도 있다. 어느 쪽에서 보건 사태의 중핵엔 호남이 있다. 호남이란 단어는 한국 현대사에서 차별과 신화화라는 두 극단의 정념에 둘러싸여 요동해왔다. 호남을 희생양으로 만들거나 정치 동력으로 호명하는 용어들이 한국 정치사를 채우며 명멸했다.
오염된 언어와 권력의 ‘기획’
1980년 5월의 광주는 참혹했다.
“공수대원이… 정조준하여 앞에 보이는 학생을 쏘았다. 순간 그 어린 고교생은 픽 쓰러졌고… M16 총탄이 목을 관통했는데 머리가 덜렁거리며 간신히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 참혹의 경험과 기억은 곧바로 정치화됐다. 영남 정권은 그 참혹을 비틀어 호남을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고립시켰고, 호남인들은 그 참혹을 매개로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결속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1985)는 “재난의 폐허 속에서 눈물을 씻으며 살림도구를 찾아 챙기는 심정으로 각종 자료와 체험담, 목격자들의 증언들을 그러모아” 출간됐다. 광주의 참상을 수록한 최초의 공식 출판물은 학살 5년 뒤에야 나왔다. ‘광주’가 금기어였던 학살자의 집권 시기였다.
집필자들의 구속을 우려해 소설가 황석영이 저자로 이름을 올렸으나 출간 뒤 그는 연행됐고 출판사 사장은 구속됐다. 언론 통제를 뚫고 전파된 광주의 참상처럼 <넘어 넘어>도 비밀리에 유통돼 ‘지하 베스트셀러’가 됐다. 사람들이 몰래 구해 벌벌 떨며 읽은 책에선 선거 때마다 발휘돼온 호남의 ‘기록적 몰표’를 단순 지역주의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글자마다 피처럼 배어올랐다.
오염된 언어는 사태의 인과를 감춘다. 언어의 의도적 오염은 권력의 ‘기획’인 경우가 많다. 지역감정과 지역갈등이란 용어는 차별하는 가해자와 차별받는 피해자를 한 꾸러미로 엮는다. 권력에 종속된 언론들이 차이를 섞고 경계를 지워 전파했다.
<김대중 죽이기>(개마고원)와 <전라도 죽이기>(개마고원)는 1995년 2월과 11월에 나왔다. 강준만은 ‘호남 차별’을 지역감정이란 말로 뭉뚱그리는 정치적 효과를 분석했다. ‘폭도들의 도시’ 광주가 ‘체제 전복 세력의 선봉’ 김대중과 짝지어져 반호남 정서의 밑불로 활용되는 메커니즘도 살폈다. 김대중 개인이 아니라 ‘김대중 현상’에 주목하며 김대중을 담론의 단계로 끌어올렸다.
경기도 평택이 고향인 정부투자기관의 한 과장은 <김대중 죽이기>를 읽고 편지를 썼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면 호남인들은 한풀이를 할 것이며… 나의 형수는 전남 여자인데 우리 형제들의 우애를 온갖 이간질로 토막토막 다 끊어놓았다. …직장에서도 전라도 사람들은 도대체 마음을 터놓고 상대할 수 없게 하는, 억지로 표현하자면 반쯤 ‘공개된 간첩집단’ 같다고나 할까?”
<전라도 죽이기>는 <김대중 죽이기>를 읽은 독자들의 편지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집필됐다. 실체가 규명되지 않는 ‘악마적 편견들’이 오랜 세월 호남을 옥죄었다. 광주·전남 출신 대학생들의 저조한 취업률에 광주시장이 100대 기업에 공문(1989년)을 보내 ‘제발 편견을 거둬달라’고 호소한 일도 있었다. ‘만들어진 호남 차별’이 일반 시민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는 양태를 책은 익지 않은 날고기째 내어놓는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남쪽 반만 통치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 반쪽을 다시 동서로 나누어 통치했으며, 전두환 대통령은 그중 동쪽을 다시 경남북으로 나누어 경북만 통치했고, 노태우 대통령은 마침내 경북마저도 대구와 경북으로 갈라놓았다는 이야기가 있다.”(<전라도 죽이기>에 언급된 1992년 2월 정주영 발언)
‘호남을 적으로 만들어 혐오토록 하고→문제의 원인을 호남의 탓으로 돌리며→호남을 배제한 분할통치로 비호남을 통합하는 방식’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계승되는 통치 전략이다. 현 정권은 출범 이후 ‘국민-비국민’ 구도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정치적 위기를 타개해왔다.
분할통치의 전승
지역주의 폐해론은 선거 때마다 호출됐다. 1990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구국의 결단’이라며 3당 합당 합리화 논리로까지 활용했다. 야권도 1987년 전후 지역주의를 내세워 합치거나 쪼개졌다. 공격·수비와 통합·분열을 되풀이하며 호남을 둘러싼 지역주의 논의도 가지를 쳤다.
3당 합당의 충격으로 ‘지역 할거’를 비판하는 3김 청산론이 확산됐다. 호남 지식인들 중심으론 저항적 지역주의 담론이 제기됐다. ‘영남 출신들이 국가 운영을 장악하기 위해 배타적·독점적 권력을 유지·강화하는 정치 전략 혹은 이념’을 비판하며 영남패권주의란 말도 사용됐다. 호남지역주의나 3김 청산론이 영남지역주의와 피해자의 저항을 동일 잣대로 평가하는 양비론이란 견해도 생겨났다. 영남의 패권에 책임을 묻는 의견과 호남의 몰표가 원인이란 주장, 영·호남 지역주의 모두가 문제란 시각이 난마처럼 얽혀들었다.
1992년 대선 패배 뒤 정계 은퇴한 김대중이 복귀(1995년 7월)했다.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며 1997년 대선에 출마한 그는 지역등권론을 정치적 이론으로 삼았다. 10년 전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 후보로 나섰을 땐 4자 필승론을 앞세웠다. 그와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모두 출마해 각각 대구·경북과 부산·경남, 충청의 표를 가져가면 호남과 수도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자신이 당선된다는 논리였다.
10년 뒤 김대중은 ‘지역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재무장했다. 동국대 교수 황태연이 논리를 뒷받침했다. 그는 대선 7개월 전에 낸 <지역패권의 나라>(무당미디어·1997)에서 내부식민지론을 펼쳤다. 한국은 경상도 재벌자본주의가 전라·충청·경기·강원·제주를 내부식민지로 삼아 지배하는 나라란 뜻이었다. 그의 이론은 DJP연대에 ‘패권적 지역주의’에 맞서는 ‘저항적 지역연합’이란 의미를 부여했다.
지역을 불러들이는 김대중의 전략은 1987년에 실패했고 1997년엔 성공했다. ‘지역 호출’의 성패를 둘러싼 예측도 때론 맞고 때로 틀렸다.
유시민은 황태연보다 한 달 앞서 <97 대선 게임의 법칙>(돌베개·1997)을 냈다. 그는 책에서 지역등권론으로 호남표를 일으키는 김대중의 전략을 “만병통치약”이자 “극약”이라고 했다. 그는 DJP연대의 패배를 전했다. 정확히는 김대중 필패론이었다. “반김대중 정서는 정면 돌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김대중으로는 정권 교체가 불가능하다는 분석이었다. 김대중보다 ‘김대중을 대리한 제3후보(조순)’의 득표 효과가 높을 것으로 유시민은 봤다. 예측은 어긋났고 김대중은 대통령이 됐다.
‘망국적 지역주의’를 둘러싼 진단과 해법의 차이는 현재 야권 재편 사태를 둘러싼 논쟁에까지 투영되고 있다. 지역주의 타파를 필생의 업으로 삼아온 노무현이 2002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호남에 지지 기반을 둔 호남 정치인 김대중을 거쳐 호남에 지지 기반을 둔 영남 정치인 노무현과 연결되자 호남의 ‘호남 담론’은 다른 옷을 입게 된다. 노무현은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과 2005년 대연정 제안 등도 지역주의 극복이란 명분 아래 추진했다.
2005년 7월29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나라당에 제안한 대연정과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탁기형 기자
패권주의의 분화
새천년민주당이 쪼개지면서 노무현을 압도적 지지로 당선시켰던 호남의 민심도 분화했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영남패권주의자로 보는 해석이 등장했다. 이 해석을 따르면 영남 보수정권이 동원했던 패권주의가 영남 개혁세력에게까지 스펙트럼을 넓힌다. 분당→대연정→‘부산 정권’ 발언(2006년 5월16일 문재인) 등을 호남의 몰표를 바탕으로 창출된 정권이 영남 표를 얻기 위해 추진한 투항적 영남패권주의 행태라고 규정한다. 최근 야권의 분당·탈당 과정에서 등장하는 ‘패권’이란 용어도 이 쓰임새와 닿아 있다.
이 주장의 맨 앞에 서남대 교수 김욱의 책 <아주 낯선 상식>(개마고원·2015)이 있다. 그는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사태가 노무현 이데올로기에 지배된 결과라고 말한다. “노무현 이데올로기란 새정치민주연합이 대통령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영남에서 득표력이 있는 영남 후보를 내세워 호남 몰표를 뒷받침해야 하고, 그렇게 당선된 영남 대통령은 ‘민주 성지’ 호남의 정신적 양해 속에서 세속적인 영남을 물질적으로 유혹해 지역주의를 구조적으로 타파해야 한다는 ‘은폐된 투항적 영남패권주의’에 입각한 위선적 정치공학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지배받는 사람이 바로 친노다.”
찬반이 극명하게 나뉘는 주장이면서 현재 호남 민심(‘선거 때만 우리를 이용한다’)의 일단이기도 하다. 열린우리당의 산파였으나 현재 친노와 거리를 두고 있는 천정배의 호남정치론도 그 민심을 호명하며 나왔다.
2012년부터 호남 담론엔 안철수가 들어왔다. 2015~2016년 그는 ‘친노 패권’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호남의 정치 지형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정책과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세력들이 이합집산해 ‘반문·비노’ 구호를 공유한다.
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갈린다. 2012년 강준만은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안철수의 힘>(인물과사상사·2010))했다. 유시민은 안철수의 창당을 평민당 프로젝트(1987~88년의 김대중처럼 대선엔 실패해도 호남과 수도권에서 제1야당 지위 획득)라고 불렀다(2015년 12월22일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낡은 진보와의 결별’을 외치며 또 다른 낡은 세력과 뭉쳤다는 비판도 많다. 반영남패권주의 관점에선 비난할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정치세력들이 호남에 표를 호소하며 경쟁하는 일은 호남의 이익을 실현하는 상식적인 길이다.
‘세속 호남’이 되라?
“선주 누나와 은숙 누나는 베니어합판이나 스티로폼 판에 미리 비닐을 깔아놓고 그 위에 죽은 몸들을 눕혔다. …그 사이 너는 그들의 성별과 어림잡은 나이, 입은 옷과 신발의 종류를 장부에 기록하고 번호를 매겼다. …네가 장부에 기록한 인적사항들을 벽보에 써서 도청 정문에 붙이기 위해서였다. 그걸 직접 보거나 전해듣고 나타난 가족들에게 너는 흰 천을 열어 죽은 몸들을 보여주었다. 신원이 확인되면 멀찍이 물러서서 오열의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소년이 온다>(한강·창비·2014))
겹쳐졌다. 1980년 5월 광주의 주검들을 묘사한 문장에서 34년 뒤 가라앉은 배를 빠져나오지 못한 죽음들이 어른거렸다. 낡고 무거운 배가 맹골의 바다에 침몰한 첫날도 그랬다. 진도실내체육관(전남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에 도착한 가족들은 입구에 붙은 구조자 명단부터 확인했다. 명단에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들은 ‘실종자 가족’으로 명명되며 통곡하고 실신했다.
어떤 이들에게 세계는 2014년 4월16일 전과 후로 나뉜다. 호남엔 1980년 5월18일 이전의 호남과 이후의 호남이 있다. 학살이 결속한 호남 땅에서 학문적 개념 하나가 싹텄다. 한국사에서 다시 없을 도시 차원의 학살이 구성원들을 전에 없던 공동체적 경험으로 묶어냈다. <오월의 사회과학>(최정운·오월의봄·개정판 2012)은 1980년 5월의 광주를 절대공동체란 말로 정의(초판 1999년)했다.
“시민들은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어깨를 끼어 스크럼을 짜고 같이 죽기로 하고 싸웠다. 시민들은 몸과 몸으로 하나가 되었다. …생명의 나눔은 헌혈을 통해 피를 나눔으로써 구체화되었다. 이곳에는 사유재산도 없고, 생명도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었다. 물론 이곳에는 계급도 없었다.”
절대공동체론은 5·18 연구의 독보적 연구 성과로 평가받는다. 항쟁 참가자들의 증언과 언어를 연구 전면에 끌어들여 울림을 키웠다. 절대공동체론을 토대로 조지 카치아피카스(미국 웬트워스공대 교수)는 광주 5·18이 파리코뮨보다 세계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이 더 크다(<한국의 민중봉기>(오월의봄·2015))고 썼다. 광주에 부여된 절대적 가치는 ‘광주 정신’을 드높이는 깃발이지만 한편 굴레가 되기도 했다. 절대공동체가 호남 정치의 세속적 선택을 제한하는 ‘반정치의 신화’란 지적(<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김정환·소명출판·2013))도 따랐다.
김욱은 절대공동체의 무게가 광주의 욕망을 거세했다(<아주 낯선 상식>)고 본다. 그는 광주가 성스러운 책임감에서 놓여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호남의 욕망을 배신하는 정치인들을 “철저하고 가혹하게 응징”하는 것에서부터 호남의 민주정치는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유시민은 김욱의 호남세속화론을 “지역등권론의 21세기 버전”이라고 평했다.
‘단일대오’ 호남은 더 이상 없다
<만들어진 현실>(후마니타스·2009)은 한국 현대 ‘지역주의 망국론’의 시원을 1971년 대선 직후로 잡는다. 선거 부정을 통해 집권을 연장해야 할 만큼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김대중을 박정희 정권은 지역감정을 끌어들여 견제했다. 민중당 출신의 이재오·김문수가 이념적 거리를 훌쩍 뛰어넘어 신한국당에 입당하면서 내건 알리바이도 ‘3김 청산’이었다. 저자 박상훈은 한국 정치에서 지역주의는 필요에 따라 이용되고 동원되는 이데올로기가 됐다고 했다. 노무현의 대연정 제안도 그 틀로 바라봤다.
“누구든 국면 전환 내지 인위적 정계 개편의 욕구를 강하게 가질수록 지역주의 망국론을 동원하고자 하는 정치적 유혹은 앞으로도 강하게 작용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지역주의는 차별의 마르지 않는 샘이었고 차별의 주체는 영남 정권의 패권주의였다. 누군가에겐 망국적 지역주의가 영남 세력에 정치권력을 떼어줘서라도 극복해야 하는 숙제였고 호남지역주의도 예외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저항해야 할 지역주의는 모든 지역주의가 아니라 영남패권주의이며 영남 개혁세력도 패권주의자다. 김대중 정부의 탄생 역정과 노무현 정부의 명과 암, 제20대 총선을 앞두고 펼쳐지는 야권의 소용돌이는 모두 ‘호남’과 ‘지역주의’라는 두 단어의 자장 속에 있다. 그 자력의 밀고 당김 속에서 더 이상 호남에 ‘단일대오’는 없다.
영남패권주의와 민주주의의 퇴행 2.4 한겨레
정치, 경제, 법조, 언론, 국방 등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영남패권주의가 관철되고, 그것이 민주주의 퇴행의 핵심 요인임에도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이 금기시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민주주의의 퇴행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그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수 있게 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뭐 딴거 있습니까? ‘우리 박근혜 대통령을 위하겠다’, 이런 결심에 따라 온 거 아니겠습니까?”, “표 찍어 주면 입 싹 닦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유승민 의원 등 현역 의원들을 ‘저격’하려고 ‘배신의 정치’ 심판관으로 활약 중인 최경환 의원 주변에서 나온 말이다. 누구 눈에는 누구만 보인다고 했던가. 그들의 눈에 대구에 시민은 없고 오로지 신민(臣民)만이 존재한다. 표를 얻기 위해 사무실을 여는 자리에서도 유권자들은 보이지 않고 주군인 박 대통령만 보인다. 그들이 진짜 ‘진박’이라면 당선된다고 하더라도 박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2018년 2월25일 국회의원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선 게 오로지 박 대통령을 위해서니까!
“정부의 수준은 곧 국민의 수준”이라는 토크빌의 말을 다시금 인용하지 않더라도, 민주주의의 성숙은 민(民)의 성숙, 민주의식의 성숙 없이 가능하지 않다. 국민이 시민이 되지 못하고 신민으로 남아 있을 때, 성숙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광주 학살 책임자인 전두환의 호를 따서 공원 이름을 붙이거나 단체로 큰절을 올리는 사람들은 시민이 아니라 신민이다. 박정희 신격화를 비롯하여, 주로 영남 지역에서 보여주는 신민들의 이런 행태들은 지식인들에게조차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는 대신 쓴웃음을 자아내는 가십거리로 분리수거되는 것으로 마감된다. 오늘날 김천, 문경, 영주에서 읍면동 사무소는 물론 통반장까지 동원하여 관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다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런 행태들에 대해 영남인들 대부분은 쪽수 많고 힘센 패권세력의 일탈적 권능에 속하는 양 넘어가고 비영남인들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져 있는 게 아니라면 과연 무엇 때문일까?
신민에게서 논리의 정합성이나 합리성을 추구하는 시민의식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들이 신민이되, 프로파간다에 갇힌 허위의식으로든 실제로든 패권을 누리는 신민이기 때문에 자기성찰의 가능성이 닫혀 있다는 점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패권의 실제적인 수혜자는 많지 않으며 대부분은 다른 지역(호남)에 비해 평균적으로 조금 나은 삶의 조건을 누릴 뿐이다. 밀양 할매들에게 송전탑 문제가 일어나기 전까지 어느 정당에 표를 주어왔느냐고 묻는 것은 그분들이 시민으로 거듭나기까지 어떤 고통과 투쟁의 과정을 경험했어야 하는지를 알 때 잔인한 일이 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처지를 그분들과 일치시켜 시민이 될 줄 아는 사회 구성원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영남 내부에서도 패권을 실제로 누리는 세력과 이해관계로 부딪히면 가차없이 짓밟히는 게 대부분의 처지지만, 그런 일이 발생해도 찻잔 속 태풍일 뿐, 영남패권주의는 흔들리지 않는다. 가령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한 40%에 육박하는 지지자들은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때 지지를 철회할까?”라고 질문을 던져 보자. 답이 없다! 철회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설령 일시적으로 지지를 철회했다가도 ‘초원복집 사건’ 때 경험했듯이 영남 패권에 위협을 느끼는 순간 “우리가 남이가!”가 강력하게 작동한다. “정치의 종교화”라고 규정하는 것으로 부족한, ‘신민들에 의한 영남패권주의의 관철’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수도권에 머물고 좁은 인간관계라는 한계가 있겠지만 박근혜 정권 3년이 지나면서 한국 정치와 관련하여 만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민주주의의 끝없는 퇴행’이다. 국가기관인 국가정보원의 불법적인 댓글 공작, 통합진보당에 대한 반헌법적인 해산 획책과 관철, 세월호 참사를 겪은 가족들의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조사 요청에 대한 끈질긴 방해 공작, 누리과정 예산과 관련된 적반하장의 주장, 한때 복지를 주장했던 입으로 청년배당에 대해 “악마의 속삭임이자 달콤한 독약”이라고 말하는 그 뻔뻔스러움, 경제민주화를 ‘경제활성화’로 슬쩍 바꾼 뒤 노동개악 입법 추구, 물대포를 맞아 식물인간이 된 백남기 농민에게 사과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 한국의 집회 결사의 자유가 침해당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전교조 법외노조화를 국제법 위반이라고 규정한 유엔 인권특별보고관에 대한 거친 반발, 문화방송(MBC) 등 언론에 대한 전방위적 공작, 곳곳에서 드러나는 현대판 음서제…. 민주주의의 퇴행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그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수 있게 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영남패권주의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아니라면?
진보적 담론들을 주로 외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일 것이다. 계급모순이나 민족모순에 관해서는 엄청난 분량의 책들이 나오지만, 외국에서 한국 사회와 같은 예를 찾기 어려운 학벌 문제와 마찬가지로 지역모순에 관한 책이나 담론들은 찾기 어렵다. 기껏해야 영남과 호남의 지역주의를 동렬에 놓은 양비론적 비판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우리가 ‘팽창적 민족주의(제국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를 동렬에 놓을 수 없듯이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와 호남의 저항적 지역주의를 동렬에 놓을 수 없음에도 이를 싸잡아 한꺼번에 비판하는 것은 영남패권주의를 온존시키는 기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영남패권주의의 실상은 18년 독재의 박정희 시기를 제외하더라도 그 이후 대통령인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의 출신을 보더라도 금세 알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만 제외하고, 스스로 ‘부산 정권’이라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포함하여 모두 영남 출신이다. 이 점만으로도 ‘이게 정상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출신지가 영남패권주의의 ‘성골’에 속한다는 이른바 ‘티케이’에서 멀수록 민주정권에 가깝다고 덧붙일 수 있겠다. 정치, 경제, 법조, 언론, 국방 등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영남패권주의가 관철되고, 그것이 민주주의 퇴행의 핵심 요인임에도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이 금기시되고 있는 것은 왜일까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외면해온 시민에게 김욱 서남대 교수가 쓴 <아주 낯선 상식>(2015·개마고원)의 일독을 권한다. 나는 이 지면에 쓴 칼럼 내용으로 이 책의 저자에게서 준열하게 비판을 받았는데, 좀 더 섬세한 글쓰기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게 그 때문은 아니다. 책을 통해 “영남 출신 후보자가 나와야 한나라당(새누리당)을 이길 수 있다”는 주장에 부지불식간에 동조했던 나 자신이 ‘투항적 영남패권주의’에 속한다는 점을 알아야 했다. 그렇다면, 사죄도 하지 않은 전두환 무리를 먼저 용서한 김대중 전 대통령도 투항적 영남패권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만큼 영남패권주의는 강력하다. 30%대의 콘크리트 지지층에, 종합편성채널 등 언론의 융단공세로 부동층에서 10% 정도를 보태 40%대의 지지율을 확보하면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에 힘입어 국회의원 과반 차지가 떼놓은 당상이다. 그들에게 꽃놀이패인 선거제도를 바꾸라고 말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내놓으라는 격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분명해 보인다. 영남패권주의가 민주주의 성숙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는 인식이 그 출발점이라면 그다음에는 줄탁동시(啐啄同時)! 영남 내부에서는 민주적 역량을 강화하고 외부에서는 영남패권주의의 정치적 구현체인 새누리당을 고립시키는 것이 바로 그 길이다.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장발장은행장
추락하는 중산층, 더는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 2.16 주간경향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하나는 중산층 70% 재건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중산층의 비중은 줄고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비중이 늘고 있다. 노동과 복지, 사회안전망을 외면한 정부정책으로 위기의 중산층은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남편은 물류센터에서 일한다. 배달차에 물품을 싣고 내리는 일이다. 한 달에 90만원 남짓 번다. 급여는 매일 조금씩 현금으로 받아온다. 빚 때문에 통장이 압류되기 때문이다. 윤미정씨(56·가명)는 주말마다 교회에서 일한다. 한 달에 30만원 정도 번다. 손목이 아파 다른 일은 할 수 없다. 120만원 남짓한 돈으로 취업 준비 중인 아들과 윤씨 부부 세 식구가 산다. 보증금 50만원, 월세 35만원의 원룸이다. 윤씨와 남편은 얼마 전 파산·면책을 신청했다. 더 이상 갚을 수 없는, 10년이 더 된 빚 때문이다.
월 1500만원씩 돈을 벌 때가 있었다. 윤씨가 사진관을 할 때였다. 사진관을 시작하기 전에는 어려웠다. 어린 자녀들과 지하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결혼 전 사진을 배웠던 윤씨는 가끔 아르바이트로 사진을 찍었다. 1995년 돈을 빌려 사진관을 열었다. 가게를 얻고 작은 공간을 내 살림도 거기서 꾸렸다. 1년쯤 지나 사진관은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 남편도 직장을 구했다. 증명사진을 찍으러 오는 단골도 생겼고, 야외촬영을 부탁하는 신랑신부도 많았다. 살림이 폈다. 아파트도 분양받았다. 성실히 살면 사는 만큼 재산이 늘었다.
광화문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 / 김영민 기자
좋은 시절 지나가고 파산·면책 신청
돌이켜보면 어떻게 이렇게 바닥까지 내려왔는지 까마득하다. “남편도 나도 너무 바빠서 대화가 부족했었기 때문인지….” 윤씨의 말이다. 사소한 선택으로 불행은 시작됐다. 사진관을 시작한 지 4년쯤 지났을 때였다. 가게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만큼 좋은 기계를 들여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8000만원 가까이 되는 고가의 기계였다. 아파트를 담보로 기계를 샀다. 기계를 사는 것에 대해서 남편과 상의하지 못했다. 벌이가 안정적이니 기곗값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직장동료에게 보증을 서 주었고, 그게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 후의 일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기계를 사지 않았을 것이다. 윤씨는 일단 남편의 빚보증부터 수습하려고 돈을 빌렸다. 수입이 있으니 갚아나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오는지….” 설치한 고가의 기계가 윤씨의 실수로 고장이 났다. 고장은 잦았고 고장이 나는 날에는 영업을 하지 못했다. 손님이 줄기 시작했고, 그즈음 상가 주인은 보증금을 올려주든지 아니면 가게를 비우라고 통보했다. 기곗값도 빚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윤씨는 보증금을 올려줄 수 없어 가게를 이전했다.
가게를 옮기면서 손님의 발길은 뚝 끊겼다. 그 사이 아파트는 압류됐고, 원금은커녕 이자에 이자가 물리며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채, 카드깡, 일수…. 윤씨는 어떻게든 빚을 막아보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빚만 늘어날 뿐이었다. 사진관 문을 닫았고, 윤씨는 화장품 영업을 하며 빚을 갚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급여통장은 그대로 압류가 됐고, 생활은 불가능했다. “뭐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압류가 들어오고 판매할 물건을 아들 신용카드로 미리 구입하게 되니 빚만 더 늘어나면서 좌절감도 커졌다. 어떻게든 빚을 내 힘으로 갚아보겠다고 새로 시작한 일인데, 이마저도 잘 안 됐을 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 윤씨는 얼마 전 지역의 금융상담복지위원회를 찾아가 파산·면책을 신청했다. 윤씨는 자신의 빚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몰랐다. 늘 여기저기에서 독촉장, 추심서류, 압류 예고장이 날아와 알 수가 없었다. 상담사와 함께 자산관리, 대부업체, 보증보험 등으로 넘어간 윤씨의 빚을 찾아냈다. 원금이 4700만원 남짓, 이자를 합치면 8800만원이었다.
윤씨의 파산·면책 신청을 도운 장선희 금융상담복지위원회 상담사는 “윤씨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었다가 그 후로 경제적으로 죽은 상태로 지냈다”고 말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윤씨의 삶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책 <빚 권하는 사회, 빚 못 갚을 권리>(제윤경)는 한국의 금융제도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채무자를 끊임없이 궁지에 모는 구조라고 말한다. “법률적으로 급여 압류는 소득이 150만원이 넘을 때만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장 압류는 미리 통장 압류 금지조치를 해놓지 않은 이상 얼마든지 가능하다. 급여 압류가 되지 않으니 급여가 입금되는 통장을 압류해버림으로써 급여가 입금돼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채권이 여기저기로 팔려나가면서 이자가 급속히 불어나거나 채권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윤씨처럼 채무의 규모를 확인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장선희 상담사는 “채권이 대부업체에 넘어가면서 그간 누적이자에 대부업체 고금리가 붙고 대부업체가 채권의 소멸시효 연장을 위해 지급명령 신청서를 법원에 요구하면 그 비용까지 채권에 더해져서 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윤씨의 경우도 현재 자산관리공사가 보유하고 있는 윤씨의 채권 원금은 500만원인데, 이자에 이자지연손해금 등이 붙어서 1900만원이 됐다”고 말했다.
중산층 70% 재건. 박근혜 대통령의 18대 대선 공약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무너진 중산층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중산층을 뒷받침해주는 사회안전망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선희 상담사의 말이다. “중산층은 IMF 사태 때 이미 무너졌다. 채무 때문에 중산층이던 많은 사람들이 빈곤층으로 떨어졌다. 경기 전반이 안 좋은 시기에 신용불량자로 낙인이 찍히면서 해결할 수 없는 상태로 이어졌다. 지금 상담하시는 분들 중 중장년층은 대부분 IMF 때 채무 덫에 묶인 분들인데, 국가가 이를 방관하고 시스템은 허점이 많아 이들을 회생할 수 없게 만든다.”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것은 중산층이다. 고용불안과 실업 문제로 양극화가 더 가속했다는 지적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실업에 내몰린 한 노동자가 최저생계비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사회안전망 없어 중산층 몰락 부채질
중산층은 명확한 개념이 정의되어 있지는 않지만, 보통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중위소득의 50~150% 집단을 중산층으로 본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중산층 비중은 1997년 이전까지 75% 전후의 비중을 유지하다가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 69.6%로 줄어들었다. 2000년대 들어 70%대로 다소 회복됐으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계기로 다시 악화돼 65%대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마저도 현실과 동떨어지게 부풀려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윤씨처럼 살다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또 살면서 예기치 않은 불행과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불행이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려지고, 나아가 시스템이 그 불행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그 사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공동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을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지만, 갈수록 중산층의 비중이 줄고 빈곤층으로 이탈하는 비중이 많아지는 것은 한국 사회가 ‘공동체’의 기능을 상실한 ‘각자도생’의 사회가 됐다는 것을 방증한다.
“병원비가 많이 부담되니 다인실에 입원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되도록이면 건강의료보험이 적용되는 검사나 치료를 우선적으로 적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급여 치료는 대체할 수 있는 급여 치료가 없을 때 해 주세요. 병원비 부담이 너무 큽니다.” 우지은씨(41·가명)는 병원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메모를 남긴다. 2014년 12월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딸이 학교에서 갑자기 쓰러졌다고 연락이 왔다. 진단 결과 난치성 뇌전증이었다. 보통의 뇌전증은 약물을 투입하면 경련이 일어나지 않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지만, 난치성 뇌전증은 약을 먹어도 경련이 계속 일어난다. 약이 듣지 않아 갑작스럽게 병원을 갈 때도 잦고, 지속적으로 병원비가 들 수밖에 없다. 우씨는 지난 1년 동안 입원비와 진료비, 약값 등을 합쳐 1500만원의 병원비가 들었다. 주사 한 대에 150만원, 비디오 뇌파검사 한 번에 100만원 하는 식이다. “그래도 안 받을 수 없으니까….”
우씨는 난치성 뇌전증이 산정특례 대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희망을 가졌다. 산정특례가 되면 본인부담률이 20%에서 10%로 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급여’ 항목에만 해당됐다. 병원비에서 ‘급여’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지원하는 부분이고, ‘비급여’는 교수특진비처럼 개인이 전액부담하는 비용이다. 중증질환은 타 질환에 비해 비급여에 해당하는 고액 진료가 많고, 치료 기간 역시 길어 피부로 느끼는 병원비 부담이 매우 크다. 선택진료료, 상급병실료, 간병료는 ‘3대 비급여’로 불리며, 중증질환을 앓는 환자들이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비용이다. 하지만 진료를 안 받을 수는 없으니 우씨는 최대한 다인실에 입원해 있으려고 한다. “딸아이가 갑자기 경련이 일어나 급하게 응급실을 갔다. 입원을 하려고 입원약정서를 쓰는데, 다인실만 하겠다고 체크했다. 하루에 19만원 하는 2인실밖에 없었다. 다인실에 자리가 날 때까지 이틀을 꼬박 딸아이와 응급실 의자에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서울시내 한 저축은행에 붙어 있는 대출 광고. / 연합뉴스
딸아이는 2월 16일 수술을 앞두고 있다. 수술비만 2000만원이다. 수술을 하기 위한 검사 비용만 해도 300만원이 들었다. “난치성 뇌전증은 호전이 돼 완치될 확률은 낮다. 수술이 두 번 잡혀 있다. 이 수술은 완치가 아니고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수술이다. 그렇게만 돼도 성공이다.” 우씨는 아이의 수술 결과를 걱정하면서 동시에 비용에 대한 대책을 고심 중이다. 뇌수술인 만큼 성공 확률이 절반인 어려운 수술이다. “아이가 수술할 부분 바로 옆에 운동신경이 있다. 만에 하나 수술할 때 잘못 건드리게 되면 팔다리를 못 쓰게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재활을 6개월에 걸쳐 받아야 한다. 재활치료비도 상당하다. 그게 얼마인지 모르겠다. 어떤 일이 닥쳐올지 몰라서 지금 마이너스 5000만원 통장을 없애지 못하고 있다.”
우씨 부부는 공무원이다. 급여는 적지만, 안정적인 직업이라 빚을 내 얼마 전에 처음으로 집을 갖게 됐다. “부모님한테 전세금 한 번 받은 적 없다”는 우씨 부부는 결혼 10년 만에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 그러나 미래는 불확실해졌다. “처음 생기는 우리 집이라 아이들 방도 예쁘게 꾸며 주려고 리모델링도 하고 좀 무리를 했다. 빚이 1억3000만원 있다. 이번에 적금이 만기가 되는 게 있는데, 적금 탄 돈으로 빚을 갚고 나면 빚이 얼마 남지 않는다. 대출상환 계획을 세우면서 우리는 더 이상 하우스푸어가 아니라며 좋아했는데, 아이가 갑자기 아프고 병원비가 예측할 수 없게 들면서 기존 계획들은 생각할 수 없게 됐다.” 주변 친척들의 도움이 유일한 힘이다. “친정어머니나 언니, 시어머니 등 친척들이 조금씩 도움을 주시려고 해서 그래도 다른 환자분들에 비하면 감사할 일이다.”
생애주기 변화가 중산층 빈곤화로
우씨의 경우처럼 병원비 부담은 여전히 사회적 해결이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고 있다. 예기치 않게 맞닥뜨리는 불행에서 개인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고꾸라진다.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가족이 해체되고 부부가 이혼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이 집을 나가는 경우도 많아 내가 남편에게 도망가지 않아서 고맙다고 농담을 했다.” 우씨는 씁쓸하게 웃었다. 김종명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의료팀장은 <어린이 병원비 현황과 해결방안>에서 “우리 사회는 병원비 문제의 경우 여전히 공적인 재원 조달을 통해 해결하지 못한 채, 국민과 환자 개개인에게 그 부담이 전가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병원비 문제를 사적인 해결방식이 아니라 공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대폭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씨와 우씨의 사례는 살면서 예기치 않은 불행을 만났고, 이를 지탱해줄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중산층의 위기가 온 경우다. 그러나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은 더 이상 돌발적인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예측가능했던 생애주기의 변화가 곧 중산층의 빈곤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중산층의 빈곤화, 중산층의 위기는 예외적이지 않고 상시적이다. 대표적으로 임신-출산-육아라는 생애주기의 변화는 빈곤화로 연결된다. 임신-출산-육아를 장려하는 제도와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사회에서 임신-출산-육아의 생애주기에 진입하는 순간 삶은 예측불가능해진다. 우석훈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의 말이다. “육아가 시작되면 미래가 불투명해진다. 육아 때문에 맞벌이에서 외벌이를 하게 될 경우 더욱 그렇다. 지표상으로는 중산층이라도 이들은 심리적 빈곤층이 된다. 그러다 보니 소비패턴도 빈곤층과 같이 움직이다. 최악의 상황을 예측하면서 최대한 긴축을 한다.”
14살, 9살, 7살 자녀를 두고 있는 양성아씨(40·가명)는 방과후학교 강사다. 4개의 학교에 방과후 강사일을 하면서 평균 200만원이 조금 못 미치는 돈을 번다. 교재 구입, 오고가는 데 드는 차량유지비를 빼면 순수입은 150만원 정도. 양씨는 150만원은 고스란히 아이들 교육비로 지출된다고 한다. “막내 아이 유치원비가 30만원 조금 넘고 거기에 해마다 옷이나 유치원 방과후 프로그램에 보내면 월 평균 50만원이 든다. 초등학생인 둘째는 그보다 조금 덜 들고, 중학생 아이가 50만원 조금 더 들어 내가 번 순수입 150만원은 고스란히 아이들 교육비에 들어간다.” 자영업을 하는 남편의 한 달 수입은 200만원. 200만원으로 다섯 식구가 생활하는 것은 늘 빠듯하다. 최대한 긴축을 한다. “지금 자가주택이 있고 수입이 중산층에 해당한다고 해도 중산층은 아닌 것 같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해외여행도 한 번 안 가고 차도 10년 넘은 차를 계속 타고 다닌다. 노후대비는 전혀 못하고 있다. 기대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셋이니 우리 부부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명한테 너무 부담이 가지는 않겠구나라는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딱 필요한 데만 쓰고 살고 있다.”
중산층의 ‘여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 노동자들의 노동소득 중 문화·오락비 지출 비중이다. 우석훈 부원장은 그의 책 <연봉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에서 지난 10년간 문화·오락비 지출 비중을 분석했다. 2003년 1인당 국민소득은 1만4000 달러, 2014년에는 2만4000 달러로 10년 사이에 1만 달러 정도가 상승했다. 그러나 이 10년 동안, 노동자들의 소득에서 차지하는 문화·오락비 지출 비중은 줄었다. 2003년에는 37%였던 문화·오락비 지출 비중이 2014년에는 33%였다. “국민소득 전체의 외형으로는 무언가 나아진 것 같은데, 실제 안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여유가 없다고 할 수 있다.”
2015 서민금융&취업박람회를 찾은 장년층 구직자들이 채용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사회임금 12.9%, 프랑스의 4분의 1
만약 양씨가 일을 지속했다면 지금보다 3배 가까운 연봉을 받았을 것이다. 결혼 전 양씨는 기계정비 관련 전문직으로 일했다. 양씨는 결혼하고도 4년은 일을 계속했다. 아이는 시어머니가 돌봤다. 낮에 시댁에 아이를 맡기고 늦은 밤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당시 너무 힘들고 정신이 없었다.” 시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지면서 양씨는 바로 일을 그만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일을 계속했다면, 지금쯤 연봉 7000만~8000만원은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밖에 나가서 일을 해도 문제고, 집에 있어도 문제였다.”
2012년 LG경제연구소는 ‘한국 맞벌이 가사노동 시간이 부족하다’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맞벌이 가구와 외벌이 가구의 ‘실질소득’ 차이가 15% 정도밖에 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맞벌이 가구와 외벌이 가구의 소득 차는 106만원이지만, 부족한 가사노동 시간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소득차는 36만원에 그친다.” 최정은 새로운사회를위한연구원 연구원의 분석이다. “맞벌이는 그만큼 아이돌보미 등으로 돈이 많이 들어간다. 돌봄서비스에 더 많은 돈이 들어가고 사교육비 지출 비용도 더 된다. 늦은 시간까지 ‘학원 뺑뺑이’를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영아들의 경우 아이돌보미를 종일 고용하면 150만~200만원 정도 든다. 한마디로 웬만한 한 달 월급이 다 그리로 들어가게 된다. 시간을 다 돈으로 환산해야 하고 추가 비용이 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맞벌이를 해도 외벌이를 해도 부족한 보육시스템에서 쪼들리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가처분소득 대비 사회임금 비중이 낮다.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서비스를 ‘사회임금’이라고 한다. 공공임대주택, 육아지원, 공공시설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가처분소득 대비 OECD 평균 사회임금은 49.7%다. 프랑스가 49.8%로 가장 높고, 그 다음이 독일(47.5%)이다. 반면 한국은 12.9%로 프랑스와 독일의 4분의 1 수준이다.
임금도 낮고 사회임금도 낮은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에게 역설적인 가치를 갖는 건 다름 아닌 부동산이다. 부동산은 가장 큰 경제적인 부담이지만 동시에 가장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자산이다. 우석훈 부원장의 말이다. “연봉 1억을 받는 사람도 자신이 중산층은 아니라고 한다. 집 사느라 빚이 3억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본인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집으로 부채가 2억~3억 잡혀 있어도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데, 절대 중산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양성아씨는 거주주택 외에 몇 년 전, 사고 파는 투자로 이익을 내 따로 아파트를 한 채 갖고 있다. 생활비는 빠듯하고 지금의 소득으로 좀 더 풍족한 미래를 계획할 수 없지만, 아파트 하나만큼은 든든하다. “운이 좋아 집을 사고 팔면서 3000만원, 5000만원씩 남겼다. 그 부를 축적하려면 사실 10년 동안 모아도 모을 수가 없다. 빠듯한 살림에 긴 시간 동안 크게 노력하지 않고, 노동을 하지 않고 벌어서 그나마 자산을 갖게 된 거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노동소득은 점점 더 중산층의 심리적 지지대가 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1월 22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일반해고 지침으로 고용은 더 불안정해지고 중산층의 위기는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저성과자 해고 문제로 논란이 된 HMC투자증권의 노명래 지부장의 말이다. “회사는 일방적으로 취업규칙을 변경해 저성과자의 월급의 3분의 1 정도를 삭감하고, 복지혜택을 없앴다. 40~50대에 자녀가 있고 한창 돈 들어갈 데가 많은 장년층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일반해고 지침을 강행하면서 ‘저성과자 해고’는 노동현실의 상수가 됐다. 2년 전 저성과자로 분류돼 월급이 2분의 1로 줄어든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중산층이 소비를 해야 되는데, 그런 사람들의 소비를 완전히 막아버리는 결과가 초래된다. 우리나라는 내수가 살아나야 하지 않나. 저성과자로 몰아 급여를 줄이고 고용을 불안하게 하면 누가 돈을 쓰겠나”라고 말했다. 중산층 70% 복원은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그러나 노동과 복지, 사회안전망을 외면한 정부 정책으로 위기의 중산층은 더욱 벼랑 끝에 내몰릴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아이들을 미워하지 마라 2.2 주간경향
ㆍ경제위기에 따른 곤란 겪는 저소득가정 스트레스 아동학대로 이어지는 경우 빈번
빚이 늘면서 생활은 어려워졌다. 주거마저 불안해지면서 아버지는 스트레스를 11살 딸아이에게 풀었다. 부천에서 가평으로, 가평에서 강북구 수유동으로, 다시 인천으로 빚독촉을 피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학대는 갈수록 심해졌다. 아이는 지난 12월 가스배관을 타고 집에서 탈출했다. 슈퍼마켓으로 탈출한 11세 아이의 몸무게는 4살 아이의 몸무게인 16㎏이었다.
11살 아이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아이를 학대하지 않았다. 200만원이 안 되는 적은 월급이었지만 직장을 다닐 때만 해도 아버지는 아이를 때리지 않았다. 그러나 재혼하면서 아내의 소비벽으로 카드빚이 쌓였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졌다. 직장을 그만둔 아버지는 재혼한 아내가 아이를 학대할 때 처음에는 이를 말렸다. 그러나 경제적 궁핍이 더욱 심해지고 빚독촉에 시달리다 주거마저 불안정해지자 어느 순간 아버지도 아이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초등생 아들의 시신을 훼손하고 냉동보관한 혐의를 받는 아버지가 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아동학대 가구가 가족소득 변화 커
아동학대는 부모의 병리적 현상이기도 하지만, 사회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경제위기가 닥치고 생활이 변화하게 되면 이것이 아동학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IMF 외환위기 직후 아동학대가 증가했다는 진단에 따라 1999년 아동학대가 발생한 가구들을 조사한 논문 <경제위기가 저소득가구의 아동학대에 미치는 영향 분석>에 따르면, 경제위기에 따른 경제적 상황 변화가 가족의 생활 변화로 이어지게 되고, 이러한 가족의 생활 변화가 아동학대로 이어지게 된다.
보고서는 IMF 사태 직후인 1999년 7~11월까지 아동학대 가구와 비학대 가구를 구분해 조사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저소득층 보건복지욕구 기초자료 분석>의 보고서를 분석했다. 분석 결과 경제위기에 따른 가족 생활의 변화 폭이 아동학대 가구에서 보다 더 큰 것으로 분석됐다. 이에 따르면 경제적 상황 변화가 가족생활 변화를 매개로 아동학대 발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가족생활 변화를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은 가족 소득 변화였다. 실업, 고용불안, 가계부채, 주거불안 등 2016년의 경제상황도 IMF 이후처럼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인천시의 아동학대 현황을 분석한 인천발 전연구원의 배은주 연구원은 오늘날에도 경제적 불안이 심화되면서 경제적 스트레스가 아동학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경제적 불안이 심해지고 경쟁이 과열된 지금의 사회문화 풍토가 아동학대에 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없으니 약자인 아동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아동학대의 가해자로 20대 부모의 비율이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 힘든 세상, 각박한 세상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경제적 능력이 없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아동학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훈육과 체벌을 당연시하는 교육을 받은 세대가 아님에도 20대 부모의 학대 비율이 높다는 것은 더 이상 아동학대가 왜곡된 유교적 문화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인천발전연구원이 2014년에 발표한 <인천광역시 아동학대 현황 분석>을 보면 20대 부모의 학대행위 비율은 갈수록 늘고 있다. 전국적으로 2011년에는 539건(8.9%)이었던 20대 부모 학대행위자가 2013년에는 701건(10.3%)으로 증가했다. 인천의 경우는 두 배 가까이 늘었다. 2011년에는 25건(10.4%)의 학대행위자가 20대였는데, 2013년에는 68건(20.0%)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지난 12월 인천에서 가스배관을 타고 탈출한 11살 아이의 아버지 또한 32세로 비교적 젊은 연령에 속했다.
힘든 세상, 20대 부모의 학대 비율 높아
아동학대가 빈곤이나 경제적 상황과 상관관계가 높다는 것은 사실 오래전부터 지적돼 왔다. 2005년 서울대 이봉주 교수는 <아동학대와 방임의 사회구조적 요인: 빈곤과 상관관계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2002년 1월부터 2004년 3월까지 7개 광역시 1233개 동 아동학대 사례 발생률과 지역사회의 경제적 특성, 가구 특성, 교육수준, 그리고 주거 특성들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논문은 빈곤과 아동학대 및 방임 간의 상관관계를 네 가지 측면에서 짚었다.
첫째, 빈곤한 부모는 자원이 많지 않아 빈곤아동은 빈곤하지 않은 아동들보다 학대와 방임의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둘째, 빈곤한 상태는 부모의 스트레스를 높이게 되고, 높은 스트레스에 처한 부모는 보다 엄격한 자녀 양육방법을 사용하게 될 소지가 크다.
셋째, 빈곤한 부모일수록 그들 자녀에 대한 투자로부터 받게 될 미래의 보상이 낮으므로 자녀에 대한 투자가 적다. 빈곤한 부모일수록 자녀에 대한 투자의 미래 수익률에 대한 기대가 낮아 아동학대와 방임이 빈곤한 가정에서 발생할 확률이 높아질 수 있다. 넷째, 빈곤한 부모일수록 자녀에 대한 투자의 기회비용이 높아 제한된 자원을 자녀들에게보다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게 된다. 자녀 양육에 대한 불충분한 투자 과정에서 아동학대와 방임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질 수 있다. 이봉주 교수는 10년 전의 분석이지만,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며 부모의 경제적 상황과 아동학대의 상관관계가 높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아동학대는 빈곤과 실업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와 복합적으로 연계돼 있다. 아동 양육 자체도 스트레스인데 경제적 문제도 거기에 더해진 스트레스다. 이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면 이것이 아동에게 폭력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2015년 한국 복지패널 기초분석 보고서>는 오늘날에도 빈곤아동이 학대에 더 노출돼 있는 것은 마찬가지임을 증명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적 문제를 겪고 있는 저소득층 가정에서 학대가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학대의 유형을 신체적 학대, 정서적 학대, 방임의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눠서 초등학교 4~6학년 458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저소득층 기준은 총소득이 중위소득의 60% 이하인 가구다. 신체적 학대는 부모로부터 심하게 맞은 적이 있는지에 대해 0~4점(전혀 없었다: 0점, 1년에 1~2번: 1점, 2~3개월에 1~2번: 2점, 한 달에 1~2번: 3점, 일주일에 1~2번: 4점)의 점수를 부여했다. 저소득가구의 아동은 0.5점, 일반가구의 아동은 0.3점으로 저소득가구 아동이 신체적 학대에 더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비율로 따지면 40%가 더 높다.
지난해 1월 한 어린이가 인천 송도센트럴파크 공원에서 아동학대를 반대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예방이 중요, 부모 대상 교육 실시해야
정서적 학대도 신체적 학대와 동일한 배점으로 조사했다. 저소득가구의 아동이 1.1점, 일반가구의 아동은 0.7점으로 정서적 학대 빈도 또한 저소득층 아이들이 더 높았다. 부모의 방임에 대해서도 저소득가구의 아동은 0.6점, 일반가구 아동은 0.2점으로 저소득층 아동들에 대한 부모의 방임이 더 높았다.
전문가들은 아동학대는 무엇보다 예방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저소득층 밀집지역 등 아동학대 위험이 높은 지역의 부모를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배은주 연구원은 “아동학대 사건이 난 가정을 보면 저소득층도 있지만 전혀 아닌 고학력 계층의 부모들도 있다. 경제상황과 아동학대가 정비례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저소득층에서 더 많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부모의 직업이 불안정하고 경제적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경우 부모가 아주 건전한 정신 건강상태가 아닌 경우에 아동학대는 꽤 많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무엇보다 모니터링이 중요한데, 이를 바탕으로 부모 교육을 의무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하고, 부모 교육을 복지 혜택과 연계시키는 등 다양한 방안들을 강구해야 한다”면서 “이런 것들이 제도화된다면 아동학대에 노출된 가정이 조금 더 빨리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의 지적대로 아동학대 가정일수록 부모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아동학대 부모일수록 아동학대의 원인을 아동에게 돌리며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높기 때문이다. <경제위기가 저소득가구의 아동학대에 미치는 영향 분석>에 따르면 아동학대를 하는 부모일수록 아동학대의 원인을 아동에게 돌렸다. 아동학대 방지를 위해 필요한 서비스가 무엇인지 생각하는지를 질문한 결과 ‘모르겠다’와 ‘필요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47%, 자녀 대상 교정서비스 및 상담이 22.1%, 부모와 자녀가 함께 받는 상담이 18.2%로 나타났다. 반면, 부모 대상 상담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7.8%에 불과했다. 사법처리를 포함해 경찰의 개입은 전혀 원하지 않았다. 이들의 응답은 비학대가구의 인식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부모 교육’과 ‘처벌 강화’ 등이 사후적인 대책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방법이 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아동학대 방지를 위한 특례법이 2014년 9월 시행됐지만 학대받는 아이들은 여전했고, 처벌규정을 강화했지만 아동학대 근절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봉주 교수는 개인의 책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회구조의 문제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아동학대와 빈곤의 상관관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번 부천의 자녀 살해 및 시신 훼손 사건도 그렇고, 인천의 아동학대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런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면 대부분 부모의 문제로 돌리고 이들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개인의 책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부모의 알코올 중독이나 정신건강 문제는 구조적인 것과도 관련돼 있다. 지금 한국 사회의 아동학대 문제를 개인의 병리현상으로만 보기보다는 빈부격차 문제, 소득지원 문제, 저소득층의 정신건강 문제 등과 함께 통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개인의 특성 문제로만 치부되면 해결되기 어렵다.”
네이티브 광고에 대한 3가지 오해 2.6 미디어오늘
[미디어 현장] 허완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뉴스 에디터
언론과 광고는 꽤 모순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언론은 독립성과 자율성, 그리고 공공성을 핵심 가치로 삼는다. 광고는 조금 다르다. 광고주가 주입하려는 일방적 메시지는 언론의 가치와는 대개 별다른 연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종종 그것들과 충돌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거의 모든 언론사는 그런 광고로 대부분의 생계를 해결한다.
네이티브 광고는 이 모순적 관계에서 한 발 더 나간다. 언론과 광고주가 만나 광고를 함께 기획하고, 기사 형태의 광고를 기사처럼 유통시킨다. 독자를 속이는 행위라는 비판, 또 하나의 ‘돈 받고 쓴 기사’일 뿐이라는 냉소, 언론의 독립성을 해칠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네이티브 광고에 대한 언론계 안팎의 이런 거부감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네이티브 광고는 언론사와 광고주, 독자를 모두 만족시키는 새로운 광고형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허포코)는 국내 네이티브 광고 시장을 성공적으로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리 밝혀두자면 허포코의 에디터들은 네이티브 광고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일종의 외부 관찰기이자 내부 목격담이다.
오해 1. 독자를 속이는 행위다
광고주의 존재를 명시하는 건 네이티브 광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별도의 표식이나 문구는 이 ‘기사형 광고’가 광고주와의 협업에 따라 작성 됐음을 투명하게 밝힌다. 일방적인 홍보로 가득한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낀 기사, 기업의 광고예산으로 집행됐음을 언급하지 않는 기획성 기사나 애드버토리얼과는 확연히 다르다. 물론 절반 가까운 독자들은 네이티브 광고를 기사로 인식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네이티브 광고가 유익하다는 응답은 70%에 달했다.
오해 2. 또 하나의 ‘돈 받고 쓴 기사’일 뿐이다
네이티브 광고는 ‘공유하고 싶은 콘텐츠’ 제작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광고효과 극대화를 위해서라도 흥미롭고 유익한 정보를 담아야 한다. 일방적·주입식 홍보 방식은 여기에서 통하지 않는다. 돈 받고 대충 때우는 식의 광고성 기사와도 다르다. 성공적인 네이티브 광고의 핵심은 고품질 콘텐츠다. 더 이상 독자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수많은 지면광고나 배너광고들을 떠올려 보자. 네이티브 광고가 유일한 대안은 아니겠지만,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명백하다.
오해 3. 언론의 독립성을 침해한다
네이티브 광고가 먼저 유행한 미국에서는 편집국과 분리된 별도의 내부조직을 두는 게 거의 정석처럼 굳어지는 분위기다. 허포코도 그런 원칙을 지켜가고 있다. 편집국 내에서는 어느 누구도 네이티브 광고에 손대지 않고, 이와 관련된 청탁이나 협찬도 받지 않는다. 언론사와 광고주 사이의 투명한 계약이 있을 뿐이다. 물론 별도 조직을 두지 않는 곳도 있다. 이건 원칙을 세워서 해결할 문제이지, 네이티브 광고의 어떤 고유한 특성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는 아니다.
네이티브 광고는 이제 겨우 첫 발을 뗀 단계다. 오해도 많고, 그만큼 채워나가야 할 것도 많다. 아직 그런 사례는 없지만 사회적 논란이 제기되는 내용이나 언론이 지향하는 가치와 배치되는 내용을 네이티브 광고로 제작하고 싶어 하는 광고주가 등장할 수도 있다. 광고주의 주장을 검증 없이 그저 보기 좋게 포장해 전달하는 사례가 나올 가능성도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어느 경우든 핵심은 투명성과 신뢰성, 그리고 차별성이다. 광고임을 명백히 밝히고 기사 편집과 광고 작성 주체를 명확히 분리하는 것, 데이터에 기반한 정확한 타켓팅 분석과 효과 검증, 다양한 멀티미디어 소스 활용, 독자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깊이 있는 스토리텔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네이티브 광고의 미래는 밝다. 지저분한 배너 광고를 차단해주는 애드 블로커가 인기를 모으고, 재미도 감동도 없는 애드버토리얼이 억지로 지면을 채우는 상황에서 광고효과나 효용성 면에서 이보다 더 나은 대안은 그리 많지 않다. 광고와 완전히 거리를 둘 수 없다면, 이런 식의 '동거'를 마다할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기막힌 대통령, 기막힌 정책 2.1 시사인
대통령에 따르면 지금 한국은 ‘이중의 위기’를 겪고 있다. 문제 설정이 잘못되니 나오는 대책도 이상하다. 자신이 언제나 옳다고 믿는 대통령이 세상을 질식시키고 있다.
글쓰기가 싫다. 말과 글 빼곤 호구지책이 없는 자에겐 치명적인 일이다. 1월13일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문이 계기였다. 기가 막히면 차라리 굶는 게 낫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말 귀에, 쇠 귀에 백번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이랴.
대통령의 신년 담화는 ‘이중의 위기’로 시작했다. “안보와 경제는 국가를 지탱하는 두 축인데 지금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위기를 맞는 비상 상황에 직면해 있다”라는 것이다. 안보는 4차 북한 핵실험 때문에, 경제는 국회 때문에 위기를 맞았다. 따라서 전자는 중국이 북한에 압박을 가해야 풀리고, 후자는 당연히 국회가 경제활성화 2법과 노동 5법을 통과시켜야 해결된다는 것이 박 대통령의 논리다.
이런 ‘인지 부조화’에 어찌 기가 막히지 않으랴. 한·미·일 삼각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이 위안부 협상 타결을 강하게 요구했다는 건 동북아 정세에 관심 있는 사람에겐 상식이다. 이래 놓고 북핵 문제에 관해선 중국이 앞장서달라는 건 “전 세계 모든 국가가 박 대통령에게 봉사한다고 생각해야 나올 수 있는 발언”(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다.
서비스 시장 규제 완화와 기업 인수·합병을 간편화하기 위한 ‘경제활성화 2법’, 그리고 일반해고의 자유와 비정규직 확대를 목표로 하는 ‘노동개혁 5법’이 통과되면 한국 경제가 위기를 피할 수 있을까? 한국의 수출이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한 지 이미 오랜 상태에서 박 대통령이 오매불망 원하는 ‘선제적 구조조정’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규모 해고 사태가 벌어지고 임금은 떨어질 것이다. 수출에 이어 내수마저 급격히 위축되면 당연히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떨어질 것이다.
지난해 12월16일 발표된 ‘경제정책 방향’, 그리고 1월14일과 18일, 20일의 ‘2016년 대통령 업무보고’로 이런 인지 부조화가 정책이 되었다. 경제부처들의 업무 보고는 “수출 총력지원” “내수 회복세 유지” “주거 안정 강화와 민간투자 활성화” “가계·기업부채 등 리스크 철저 관리”로 요약된다.
정부는 내년에 수출을 2.1% 증가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생각이다. 하지만 “한·중 FTA의 적극적 활용” “신시장 개척과 무역금융 지원”이 과연 그리 효과적일지 의문이다. 이미 발효된 지 각각 5년과 3년이 지난 한국·유럽연합 FTA와 한·미 FTA는 수출 증가에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민간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 정부는 2월에 또 한번의 ‘코리아 그랜드 세일’을 하고 대규모 할인 행사를 정례화하는 한편(11월),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겠다고 한다. 부자들의 미래 소비를 조금 앞당기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계부채 증가율(10.4%)이 소득증가율의 두 배를 훌쩍 넘었는데 보통 사람들이 소비를 늘릴 수 있을까?
서민들 푼돈까지 모두 모아 또다시 주택 건설에 사용하겠다고?
결국 수출과 민간 소비, 어느 쪽에서도 경제의 활로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에도 정부는 재정지출 확대, 그리고 건설투자에 매달리고 있다. 수서발 KTX 개통, 서울-세종 고속도로 연내 착공, 인천공항 3단계 확충은 토목 건설이요, 뉴스테이 사업의 본격 추진은 주택 건설이다. 이들 투자를 부추기기 위해 정부는 1분기에 지난해 대비 8조원을 늘려서 재정을 집행하고, 공공기관 투자와 연기금 대체투자를 18조원 늘릴 계획이다.
심지어 가계부채 대책도 건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올해 정책에서 가장 참신한 것은 ‘내집 연금 3종 세트’다. 빚을 갚기 위해 주택을 내다 팔아서 집값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한 정책이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라 월세 전환으로 반환받은 전세금을 투자풀로 모아서 다시 임대형 주택 공급에 사용하는 방법까지 고안됐다. 부자들의 돈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푼돈까지 모두 모아서 또다시 주택 건설에 사용하겠다니 가히 천재적이다.
지금 우리 경제를 살리려면 어떻게든 국민의 소득을 늘려야 한다. 정부가 증세를 통해 생태 투자 등 미래의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선도해야 한다. 복지를 증가시켜 소비를 늘려야 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이런 정책은 없고, 오히려 대통령은 자신의 약속인 보육료(누리과정 예산)마저 못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상시, 선제적 구조조정”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자신의 생각은 언제나 옳다고 믿는 대통령이 세상을 질식시키고 있다.정태인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
갈곳 없는 청년…9급 공무원시험 사상 최다 22만명 몰려 2.1 서울
4120명 모집에 22만2650명 원서접수…작년比 16% 증가·평균 경쟁률 54대1
올해 9급 국가공무원 공채시험에 사상 최다 인원인 22만2650명이 응시했다. 인사혁신처는 지난달 25일부터 29일까지 2016년도 국가공무원 9급 공채시험 응시원서를 접수한 결과 4120명 모집에 총 22만2650명이 응시해 54.0대의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고 1일 밝혔다.
이는 지난해(19만987명)보다 16.6% 증가한 역대 최다 응시인원으로, 최근의 심각한 청년 실업난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인사혁신처는 다만 정부가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 올해 선발예정인원을 지난해(3700명)보다 크게(11.4%) 늘린 것이 응시인원 증가에 영항을 준 것으로 분석했다.
경쟁률은 지난해 51.6대 1에 비해 다소 높아졌지만 2014년(64.6대 1)이나 2013년(74.8대 1)에 비해선 낮은 수치다. 선발인원이 늘어난 탓이다. 모집직군별 경쟁률은 행정직군이 3756명 모집에 19만7656명이 지원해 52.6대 1을, 기술직군이 364명 모집에 1만7092명이 지원해 68.7대 1을 기록했다.
세부 모집 단위별로는 행정직 중 일반행정(전국)이 89명 모집에 3만6186명이 지원해 경쟁률 406.6대 1을 기록했고, 기술직에서는 시설직 중 일반토목(일반)이 27명 모집에 4258명이 원서를 접수해 157.7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평균 연령은 지난해(28.6세)와 비슷한 28.5세, 여성 비율은 지난해(52.7%)보다 다소 높은 53.6%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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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자치부 등에 따르면 9급 공무원의 기본급(봉급)은 1호봉이 134만6400원이고, 3호봉이 147만6500원이다. 여성 신입은 대체로 9급 1호봉, 병역을 마친 남성 신입은 9급 3호봉이다.
그러나 신입 9급 공무원의 실제 월급은 급식비, 정근수당, 가족수당 등 각종 수당이 붙어 130만∼140만원보다 많다. 각종 수당을 합치면 9급 1~3호봉의 세전 월급은, 작년 공무원연금 납부액을 근거로 평균 199~210만원 정도로 추정된다. 연봉으로 따지면 2400만~2500만원 선이다. 이는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최근 조사한 중소기업 기간제 초임 연봉 2189만원보다 많다.
유엔 “시위로 한국 위대해졌다”…정부 ‘시위 억압’과 상반 131 한겨레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지적한 내용은) 그동안 여러차례 권고를 통해서 이미 알려진 내용이다. 이제는 정부에서 이런 권고사항을 이행해야 할 때다.”
마이나 키아이 유엔 집회와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지난 29일 한국의 집회 관련 실태를 조사한 뒤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의 권고를 이행할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비판으로 해석되는 말이다. 키아이 특별보고관의 기자회견 내용을 구체적으로 뜯어보면, 정부·여당 주요 인사들의 인권의식이 국제 기준에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키아이 특별보고관은 이번 회견에서 “(집회)시위는 한국이 위대한 국가로 변모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노조 쇠파이프가 없었으면 국민소득 3만불이 넘었을 것”이라는 지난해 9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말과 상반되는 얘기다. 키아이 특별보고관은 “현재 국민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시위가 국가에 이롭다”며 “국회의원들이 언론을 통해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거리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은 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사소한 불법 행위(자)도 적극적으로 검거해 준법 집회·시위 문화를 정착시키겠다.” 강신명 경찰청장이 키아이 특별보고관 기자회견 이틀 뒤인 31일 충남 아산 경찰교육원에서 열린 경찰지휘부 워크숍에서 한 이러한 발언은 경찰이 국제사회의 지적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키아이 특별보고관은 기자회견에서 “국제법은 합법 집회가 아니라 평화적 집회를 보장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유엔 차원에서 수차례 명확한 정의가 내려져 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합법·적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순간 허가제가 되고, 누구나 향유해야 할 권리가 하나의 특권이 된다. 인권의 본질은 정부나 그 누구의 허가 없이도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 직후 박근혜 대통령은 긴급 국무회의를 주재해 “복면 시위는 못하게 해야 한다. 이슬람국가(IS)도 얼굴을 감추고서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했고, 이튿날 새누리당은 ‘복면금지법’을 발의했다. 이에 대해 키아이 특별보고관은 “집회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기 때문에 복면을 착용하는 것”이라며 정부의 주장은 앞뒤가 바뀐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만약 정부가 단순 참가자를 일관되게 처벌하는 관행이 있다면 복면을 착용할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라며 “관건은 정부가 단지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는 처벌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전교조를 ‘법외 노조화’한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 키아이 특별보고관은 ‘인권을 제약하는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그동안 “교사도 공무원이다. 현행법에 따라 현직 교원만 노조 가입 대상”이라며 전교조가 현행법에 따라 규약을 수정해야 한다고 말해왔지만, 키아이 특별보고관은 이런 식의 법 해석은 국제규범에 위배된다고 말한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에 관한 일반 논평 31호는 법원이나 행정부처는 최대한 포괄적으로 법 조항을 해석해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방향으로 판결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엔 특보 “한국 집회의 자유가 무너지고 있다”
“준법·합법집회가 아니라 ‘평화집회’가 보장돼야 합니다. 그것이 국제인권법의 원칙입니다.”
마이나 키아이 ‘유엔(UN) 평화적 집회 및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특보)은 ‘보장받아야 할 집회’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했다. 집회관리 기조를 ‘준법보호·불법예방’에 맞춘 채 “폭력을 수반하지 않아도 시민 불편을 야기하는 불법행위에 엄정 대응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경찰의 방침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또 그는 집회를 사실상 ‘허가제’로 만들고 있는 경찰의 잦은 집회금지 통고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마이나 키아이 특보는 2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방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의 집회 자유가)점진적으로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한국을 찾은 마이나 키아이 특보는 일주일 넘게 진보·보수 시민단체, 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당한 피해자들, 그리고 경찰과 법무부 등 정부부처 공무원들을 만나 한국의 집회·결사의 자유 상황을 조사해왔다. 유엔 인권이사회에 집회·결사 관련 특보가 생긴 2011년 이후, 특보가 조사를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마이나 키아이 특보는 면담 과정에서 확인한 사례들을 언급하며 경찰의 과도한 집회관리 방식을 지적했다. 특히 그는 불법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한상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과 박래군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상임운영위원장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일부 폭력적인 참가자가 있었다는 이유로 집회 전체를 폭력으로 매도해선 안 된다. 이를 이유로 집회 전체를 해산시키거나 주최자를 처벌하는 것은 집회의 자유 침해다”고 말했다. 집회 현장에서 물대포와 경찰 버스 등을 이용한 차벽으로 시위대를 막는 경찰의 집회관리 방식을 두고는 “물대포는 백남기씨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매우 위험한 무기이고, 시위대와 경찰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킬 뿐이다. 차벽 역시 시위대의 목소리를 대상으로부터 차단함으로써 시위대의 폭력성을 자극한다”고 지적했다.
결사의 자유를 언급하며 마이나 키아이 특보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법외노조 판결’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해직교사가 있다는 이유로 법외노조가 된 전교조의 사례는 국제적으로 처음일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만 노조 해산이 가능하다는 국제법적 기준에 어긋났다”고 말했다. 방한 과정에서 고용노동부 관계자들을 만난 소감을 전하면서 “노조에 대해 중립적이라는 고용노동부의 입장을 들었지만 중립성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국가가 나서서 노동권 보장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참여연대 등 인권·시민·사회·노동 단체는 이날 마이나 키아이 특보의 의견에 대한 입장문을 내고 “유엔 인권이사회 의장국인 한국 정부는 그 지위에 걸맞게 오늘 발표된 유엔특보의 우려와 권고사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한국 내 집회와 결사의 자유 개선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번 조사를 바탕으로 마이나 키아이 특보는 올해 6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최종보고서 내용을 발표한다. 그는 “제가 드리는 말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여러차례 유엔 권고를 통해서 알려진 내용이다. 이제는 한국 정부가 이런 권고사항을 이행해야 할 때다”며 보고서 발표 이후 정부의 태도를 강조했다. 그가 언급한 집회·결사의 자유를 위한 권고사항은 2011년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의 한국방문보고서, 2014년 유엔 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의 한국방문보고서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 여러 차례 공개된 바 있다.
일본 “위안부 강제연행 증거 없다” ‘국가범죄’ 뒤집기 국제사회 여론전 131한겨레
“위안부 합의 무효”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38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 회원들과 시민들이 지난 30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한-일 합의 무효선언 국민행동의 날’ 집회를 마치고 청계천 주변을 행진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뉴욕타임스, 힐러리 지지 공개 선언 131 한겨레
미국의 유력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지지한다고 공개 선언했다. 미국 민주·공화 두 당은 2월1일 아이오와주 코커스(당원대회)를 시작으로 대선후보 결정을 위한 본격 레이스에 들어간다.
이 신문은 1월30일(현지시각) 온라인판에 ‘힐러리 클린턴을 민주당 지명 주자로(Hillary Clinton for the Democratic Nomination)’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했다. 사설은 “클린턴은 주요 정당의 첫 여성 (대선후보) 지명자가 될 것”이라며 “민주당 경선 선거인단은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넓고 깊은 자질을 갖춘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 한 명을 지명하는 기회를 갖게 됐다”고 밝혔다. 사설은 또 “클린턴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는 노동하는 미국인들의 권리와 복리를 지지한다는 공약”이라며 “일생 동안 여성 권리를 위해 싸워온 것이 이 분야에 있어서 신뢰도를 더해 준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국무장관직 수행과 관련해 “국익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했고 중요한 성과도 거뒀다. 미국은 전임 정권들이 내팽개친 외교 관계를 개선할 수 있었다”고 긍정 평가했다. 이 사설은 뉴욕타임스 논설위원단 명의로 게재됐다. 이 신문은 “지금까지 연방 상원의원 도전과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클런턴 후보를 지지했다. 이번에도 자신과 열정을 갖고 또다시 그렇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대선 때는 아이오와 코커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네바다 코커스가 끝난 뒤에 힐러리 지지를 선언했는데, 이번에는 아이오와 코커스를 앞두고 지지를 선언해 시기를 앞당겼다.
사설은 클린턴의 경쟁자인 버니 샌더스 후보의 장점을 평가하면서도 “정책 면에서 클린턴 후보만큼 폭넓은 경험을 갖고 있지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샌더스의 은행개혁안과 건강보험 개혁안에 대해 “소외된 중산층과 젊은층의 지지를 끌어냈지만 실현 계획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지갑 속 평균 현금 7만4천원…현금보다 카드 많이 쓴다 2.2 한겨레
현금보유액 1년 새 3천원↓…신용카드 결제 40% 돌파
저소득층일수록 현금 사용 비중 상대적으로 커
우리나라 사람은 평소 지갑 속에 현금으로 평균 7만4천원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신용카드는 1인당 평균 1.91장을 보유하고 있다.지급수단으로는 이용 비중에서 40%에 달한 신용카드가 현금을 추월했다. 한국은행은 2일 작년 8∼9월 전국의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2천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런 내용을 담은 ‘2015년 지급수단 이용행태 조사결과 및 시사점’ 보고서를 발표했다.
◇ 지갑 속 현금 7만4천원…1년 전보다 3천원 줄어
1인당 현금보유 금액은 2014년 조사 때(7만7천원)보다 3천원이 줄었다. 현금보유액은 남성이 7만6천원으로 여성(7만1천원)보다 많았고, 연령별로는 50대가 8만5천원으로 가장 많았다. 20대가 5만원으로 가장 적었다. 신용카드 및 체크·직불카드 보유 비율은 각각 90.2%, 96.1%에 달했다. 반면에 선불카드·전자카드는 12.2%, 모바일카드는 6.4%에 그쳤다. 1인당 카드 보유장수는 신용카드가 1.91장이었다. 모바일카드는 2.03장, 체크·직불카드는 1.26장, 선불카드·전자화폐는 1.01장 수준이었다. 지급수단에 대한 만족도는 현금이 80.5점으로 가장 높아 국민이 현금을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신용카드에 대한 만족도도 80.0점에 달해 현금과 큰 차이가 없었다.
◇ 예금계좌 월평균 잔액은 33%가 ‘300만원 이상’
조사대상의 99.9%가 금융회사에 결제성 예금계좌를 갖고 있었다. 1인당 결제성 예금계좌 수는 은행이 평균 1.87개로 가장 많았고 우체국은 0.2개, 증권회사0.1개로 조사됐다. 결제성예금의 월평균 잔액은 ‘300만원 이상’이 33.1%로 가장 많았다. ‘100만원 이상∼300만원 미만’이 31.0%, ‘100만원 미만’이 29.6% 순이었다. 전년 조사와 비교하면 ‘300만원 이상’ 응답자 비중이 22.3%에서 33.1%로 크게 상승했고 ‘100만원 이상∼300만원 미만’은 40.5%에서 31.0%로 하락했다. 월평균 예금잔액이 마이너스(-)라는 응답자는 6.3%에 달해 전년의 5.4%보다 소폭 늘었다.
◇ 현금보다 카드 많이 쓴다…카드사용 40% 넘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지급수단은 신용카드로 전체(건수 기준)의 39.7%를 차지했다.
그다음이 현금 36.0%, 체크·직불카드 14.1% 순이었다. 현금 사용 비중은 2014년 조사 때 38.9%로 신용카드(31.4%)보다 높았으나 1년 새 신용카드가 현금을 추월하며 1위로 올라섰다.
연령대별로는 나이가 많을 수록 현금 사용 비중이 높았다. 신용카드는 30대, 체크·직불카드 및 선물카드·전자화폐는 20대의 이용 비중이 가장 높았다. 고소득층일수록 신용카드나 체크·직불카드를 많이 사용한 반면에 저소득층은 현금 사용이 많았다.사용 금액 기준으로는 신용카드가 40.7%에 달해 전년의 37.2%보다 상승하면서 40%를 돌파했다.현금도 26.6%에서 29.0%로 높아졌다.
지급수단별·건별 평균 이용금액은 계좌이체가 6만9천원, 모바일카드 2만1천원,체크·직불카드 1만8천원, 신용카드 1만7천원, 휴대폰 소액결제 1만5천원 순이었다. 현금은 전년 1만2천원에서 1만4천원으로 지급금액이 커졌지만 신용카드는 2만1천원에서 4천원 줄어드는 등 소액화 현상이 나타났다
한국 경제는 중국에 얼마나 저당잡혀 있을까? 1.27 뉴스타파
한국은 중국과 가장 많이 무역을 합니다.
수출의 26.1%,수입의 16.1%가 중국 시장에 달려 있습니다.
중국 다음으로는 미국, EU, 일본 등과 무역을 많이 하지요.
그런데 중국도 미국, EU, 일본과 무역을 많이 합니다.
게다가 지금 저유가로 경제가 휘청이는 브라질, 러시아도 중국과 무역을 많이 하지요.
그래서 중국 경제가 흔들리면 전세계가 불안합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시장이 중국 경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뭘까요? 먼저 우리 수출입이 중국에 매우 의존적인데다가 GDP대비 무역의존도가 상대적으로 가장 높기 때문이죠.
보세요. 한국만 GDP대비 무역의존도가 100%가 넘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은 무역이 안 되면 내수로 버티는데…우리는 그게 쉽지 않습니다.
중국 경제에 저당잡힌 세계 경제.
국내 소비라도 반등하면 좋겠습니다만, 1200조 원 가계빚이 또 내수를 짓누릅니다.
우리 경제, 정말 자가당착에 빠진 걸까요?<자료 : WTO 2014년 기준>
리서치/구성 : 최경영 인포그래픽 : 최미정
허울뿐인 창조경제, 제조업은 죽어간다 15.12. 24
제조업 생산 2년 연속 감소
몇 가지 통계가 제조업의 위기를 드러낸다. 1998년 IMF 외환위기 이후 꾸준히 증가했던 광업 제조업 출하액은 최근 2년 연속 감소해 2014년 기준 1490조3910억 원을 기록했다. 대표적인 제조업종 중 자동차 산업의 출하액은 4.7% 증가했으나 전자(-4.6%), 철강(-4.1%), 화학(-2.2%) 등이 감소 추세를 이끌었다.
제조업 이익률 역시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다. 제조업 분야 매출액 영업이익률은 2010년 6.7%를 기록한 이후 2013년 소폭 반등한 뒤 꾸준히 하락해 작년 4.2%까지 떨어졌다.
수출 실적도 신통치 않다. 올해 들어 매달 마이너스를 기록한 수출액(전년 동기 대비, 산업통상자원부 집계)은 지난 10월 -15.8%를 기록해, 낙폭만 따지면 최근 6년 사이 가장 큰 규모로 감소했다. 수출입이 실제 국민소득 수준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실질무역손익을 보면 보다 확연하게 교역 조건의 악화를 확인할 수 있다. 실질무역손익은 최근 4년 연속 적자를 기록(기준년 2010년)하고 있다. 처음 통계를 작성한 1953년 이후 55년 간 흑자를 유지하다가 처음 적자로 돌아선 뒤 마이너스 추세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역을 통해 국부가 쌓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빠져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기업 하청업체의 일자리 감소는 지역의 노동자들에게 먹고 사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현실의 문제다. PCB업체에서 파견직으로 일하는 이윤서(가명, 23) 씨는 “3개 조에 한 조마다 30명씩 있었는데, 지금은 한 조에 12명,13명 이렇게 줄었다”면서, 취재진을 만난 당일에도 같은 조였던 노동자 한 명이 해고됐다고 말했다.
전략시장에서 추락하는 삼성 스마트폰
안산 반월공단의 PCB 업체 상당수는 삼성전자의 하청사들이다. 올 3분기에만 8100만대의 스마트폰을 출고한 삼성전자는 여전히 세계 시장점유율 24.5%로(출처 : Canaccord Genuity), 애플(출고량 4800만대)을 큰 폭으로 따돌리고 있다. 출고량으로만 보면 삼성은 스마트폰 시장의 압도적인 1위 사업자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따져보면 삼성의 사업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삼성 스마트폰 판매량 중 갤럭시S, 갤럭시 노트 등 고가의 프리미엄 스마트폰이 차지하는 비중은 31% 정도로 낮다. 나머지는 갤럭시A, 갤럭시J, 갤럭시Z 등 국내에서는 잘 팔리지 않는 중저가형 스마트폰들이다. 삼성은 세계시장에서 점점 큰 규모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 인도 등 신흥시장을 전략적으로 공략해왔고, 이들 시장을 위해 수익성이 낮더라도 중저가 제품을 개발해 왔다.
▲ 중국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그렇다면 신흥시장에서 삼성의 최근 실적은 어떨까. 중국과 인도를 놓고 보면, 불과 3년여 전까지 삼성은 이들 시장에서 스마트폰 판매량 기준으로 압도적인 1위 사업자였다. 하지만 한때 20%를 넘었던 중국시장 점유율은 최근 한 자릿수까지 떨어졌고, 인도시장에서도 지속적으로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어 1위 자리를 곧 내주게 될 전망이다. 삼성의 점유율은 대부분 화웨이, 샤오미 등 중국업체들이 가져가고 있다.
거제 : 죽어가는 지역경제, 사라지는 일자리
경상남도 거제시는 세계 3대 조선사 중 두 곳(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이 위치한 조선의 도시다. 조선소 노동자들이 유입되면서 인구가 늘고 경제규모가 커졌으며, 현재 거주하는 경제활동인구 대다수가 조선소나 관련 업체에 근무하고 있다. 그 덕에 평균연령도 36.1세(출처 : 2014년 주민등록 인구통계보고서)로 전국 평균보다 3.7세가 낮다. 지역 상권도 대부분 조선소 노동자와 가족을 주 소비자로 해서 형성돼 있다.
그 중에서도 거제시 아주동은 대우조선해양 정문과 남문 인근에 최근 몇 년 사이 새롭게 형성된 상권이다. 2010년 이후 대규모 해양플랜트 수주가 늘어남에 따라 ‘물량팀’으로 불리는 임시 노동자들의 유입이 늘었고, 그들이 먹고 지낼 곳을 제공하기 위해 거주지와 상권이 확장된 결과다.
아주동 거리에는 신축 원룸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지금도 공사가 여러 곳에서 진행중이다. 하지만 비어있는 가게나 방들이 많이 눈에 띈다. 아주동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한 주민은 “2년 전까지만 해도 집은 없는데 인원이 너무 많이 들어와 포화상태였다”면서, 당시에는 방(원룸)을 짓는 즉시 나가기 바빴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안 들어오다보니 비어있는 점포나 방들이 많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지역 경기의 침체는 조선사들이 크게 악화된 실적을 발표한 2014년부터 시작됐다. 매출액 기준 세계 1~3위 조선사인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이 모두 수조 원 대의 적자를 기록한 것이다. 향후 전망도 어둡다. 2014년 이후 국제유가가 50% 이상 폭락하면서 우리 조선사들의 주 수익원으로 떠올랐던 해양 플랜트 수주량도 급감하고 있다.
해양 플랜트 구조물은 바다에 매장돼 있는 석유나 가스 등과 같은 해양자원을 발굴, 시추, 생산하는 장비와 설비를 뜻한다. 그런데 원유값이 폭락하면서 고가의 시설 비용이 드는 해양플랜트에서 생산되는 석유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게 되자 글로벌 석유 시추사들이 해양플랜트 사업을 접거나 줄이게 됐다. 이에 따라 우리 조선사들이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조현우 대우조선해양 노동조합 정책기획실장은 “지금 저희 대우조선도 현재로서는 수주가 전무하다”면서 “2016년 상반기만 지나면 한두 개 프로젝트를 제외하고는 작업할 물량이 없다”고 말했다. 2015년 한국 조선업의 해양플랜트 신규 수주는 삼성중공업의 한 척(부유식 가스저장재기화 설비)이 유일하다.
유가 폭락과 경영진의 과욕… 조선업 위기로 이어져
조선업은 세계 경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경기가 좋아지면 물동량이 늘면서 해운업이 활성화 되고, 이에 해운업체들이 선박 건조 발주량을 늘리면 조선업체들의 실적도 좋아진다. 하지만 2008년 세계적인 경기 침체기에 해운업 업황이 대폭 악화되었고, 이에 따라 국내외 중소 조선소들은 큰 위기를 겪게 됐다. 이 때 중국은 산업 보조금 등 정책적 지원과 저렴한 인건비에 힘입어 가격경쟁력을 통해 위기를 돌파했고 오히려 세계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한국 중소 조선업체들은 이 시기에 대부분 사업을 접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국내 대형 조선사들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심해 석유시추시설(해양플랜트) 쪽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성공적으로 위기를 넘겼다. 2008년 7월 유가가 사상최고치(140.70달러, 두바이유 기준)를 기록한 뒤 2011년까지 100달러 이상을 유지하는 고유가 행진에 힘입어 해양플랜트 사업은 활황을 구가했다. 대형 상선 한 척의 가격은 1억달러 정도에 불과하지만 해양플랜트는 시설 하나당 평균적으로 5~6억 달러에 이른다. 이에 힘입어 조선 3사는 유례 없는 높은 실적을 기록했다.
문제는 유가 하락과 함께 찾아왔다. 조선업의 산업 구조를 연구해 온 박종식 박사(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는 “해양플랜트가 수지타산이 맞으려면 유가가 80달러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2014년 여름 이후 고유가가 끝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면서, “이 시기 이후 발주자들이 의뢰했던 플랜트를 안 가져가거나 인수 시기를 미루는 일들이 발생하면서 국내 조선사들의 손해가 커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조선사들이 손 쓸 수 없는 외적 요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계 수위를 다투던 국내 조선 3사는 서로 실적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협상력을 잃어, 발주자인 세계 오일 메이저들과 불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설계와 관련해 계약서에 까다로운 조항이 삽입되거나, 지나친 저가 수주를 했던 것들이 업황이 안 좋아지면서 큰 손해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장범선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해양 프로젝트는 워낙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리스크 덩어리라고 볼 수 있는데, 경쟁하는 과정에서 (조선사들이)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물량을 받아놓고 경험 없는 조선 인력이나 신규 인력을 해양 프로젝트에 투입하는 식의 무리수를 두면서 리스크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경영진들은 수주 실적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저가로라도 수주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여전히 ‘창조경제’ 동어반복
제조업 침체는 단순히 통계 수치 상의 마이너스를 의미하지 않는다. 제조업은 곧 일자리다. 취재진이 안산과 거제에서 목격한 것은 소득이 줄고 일자리가 사라져 당장 어려움을 겪게 된 사람들의 팍팍한 생활이었다. 그렇다면 정부는 제조업 침체와 장기적 저성장 국면이 교차하는 이 시기에 국민 경제를 위해 어떤 정책을 준비하고 있을까. 최근 정부가 내놓은 경제 정책들을 보면 창조경제 외에 다른 대안들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정부의 창조경제혁신센터와 문화창조융합센터에서 일어나고 있는 창업열기를 각 기업들의 특성에 맞게 새로운 신 산업으로 연결해 창조경제의 틀을 완성시켜 국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10월 27일 국회에서 있었던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창조경제를 통해 국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 공언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제조업에서 시작된 실물경기 악화를 창조경제로 돌파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성장동력을 새로 일으키키 위해서 새로운 기업들이 커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 부분이 본질적으로 우리 경제를 운영해 나가는데 굉장히 중요한 문제거든요.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라는 미사여구를 가지고 재벌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요. 그럼으로써 우리 기업들이 재벌은 재벌대로 성장동력을 잃고, 중소기업이나 신생기업은 새로 커나가지 못하는 그 후유증 생기는데, 꽤 오래 갈 거라고 봐요.– 이동걸 전 한국금융연구원장, 동국대 초빙교수
창조경제, 말은 좋은데 발상의 전환이 없다는 거죠. 가장 핵심은 저는 지역이라고 봐요. 지역의 산업정책이라면 정부 지원의 효과들이 지역에 어떻게 하면 잘 머무를 수 있도록 하느냐, 이런 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런데 지역의 모든 경제 잉여들이 수도권으로 빨려들어가는, 마치 블랙홀 같은 구조를 가만히 놔두고서는 그게 될 리가 없잖아요.– 송원근 경남과학기술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내용적으로 보면 창조경제란 중요하긴 합니다. 왜냐하면 한국 경제의 기본적인 경쟁력의 질이라고 하는 것이 비용 경쟁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든요. 결국은 임금도 깎고 해고도 쉽게 하고, 이명박 정부 때 같으면 환율을 올린다든가 하는 식이죠. 하지만 그건 혁신의 경쟁력이 아닙니다. 그렇게 때문에 창조라는 말은 의미는 있는 말인데 내용이 없는 거죠.–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지지율 급락 안철수, 문국현의 전철을 밟고 있다 2.2 미디어오늘
지지율 거품 무너지면서 중도주의 제3노선 존재감 실종… 당내 계파 공천 갈등도 관건
국민의당 지지율이 빠지고 있다.
신당 창당 컨벤션 효과로 인해 주목을 받고 지지율이 상승했지만 정체성 논란을 겪으면서 호남 지지층이 대거 이탈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공식 창당(2일)을 하루 앞두고 있지만 교섭단체를 꾸릴 수 있는 현역의원 20석을 채우지 못하면서 지지율 하락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도 많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 주중 집계결과를 보면 국민의당 하락세가 뚜렷하다. 지난해 12월 3주차에서 안철수 신당은 16.5%를 기록했다. 당시 안철수 의원이 탈당한 직후였고 언론은 안철수 의원과 신당의 파급력에 주목했다. 관심이 쏠리면서 안철수 의원 지지율도 진보층에서 7.5%, 중도층에서 2.9%, 보수층에서 2.3% 올라 14.2%를 기록해 박원순 서울시장을 앞섰다.
12월 4주차 집계에서도 새누리당 38.2%, 새정치연합 25.7%에 이어 안철수 신당은 16.3%를 기록해 신당 창당에 대한 기대감으로 컨벤션 효과가 이어졌다. 특히 호남 전라 지역에서 30.7%로 1위를 차지했고 40대와 무직, 중도층에서 20% 이상 지지율을 보여 강세를 나타냈다.
1월 1주차에서도 안철수 신당은 18.2%를 기록했다. 당시 김한길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면서 현역 의원들이 대거 합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았다. 그리고 1월 2주차에서 21.4%를 기록해 정점을 찍었다. 더불어민주당과과의 지지율 격차는 불과 0.5%p로 나타났다.
안철수 신당의 지지율은 1월 3주차로 접어들면서 하락세로 돌아섰다. 한상진 창준위원장의 이승만 '국부' 발언이 논란이 되면서 17.0%를 기록했다. 더불어민주당과의 격차는 8.0%p로 벌어졌다. 그리고 지난주 1월 4주차 지지율 조사 결과에서는 3.9%p 하락폭을 보이면서 13.2%로 주저앉았다.
지지율 하락 요인 정체성 논란 그리고 당내 계파 문제
리얼미터는 국민의당이 천정배, 박주선 의원과 통합하면서 외연 확대에 주력했지만 오히려 안철수 의원의 거명효과가 사라지면서 지지율 하락의 요인이 됐다고 분석했다. 또한 부산시 창당 과정에서 당위원장 선임을 놓고 갈등하는 모습이 SNS를 중심으로 퍼지면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됐고, '한상진 꺾고 안철수계 조용히 있으라 하고' 등 내용의 문자를 주고 받아 당내 계파 갈등을 드러낸 김관영 의원의 문자 파동이 터지면서 지지율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상진 위원장이 4.19 단체를 찾아 사과하고, 김관영 의원이 인재영입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사퇴했지만 두 가지 문제가 안철수 신당의 약점인 정체성 문제와 당내 계파 문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지지율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국민의당 지지율 하락 추이는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비슷했다.
1월 1주차 ‘올해 총선에서 어느 당을 지지할 것인가’를 묻는 정당 지지도에서 안철수 신당은 21%를 기록했다. 더불어민주당보다 2%p 앞섰다. 안철수 신당이 국민의당 당명을 발표하고 권노갑 의원이 탈당한 둘째주 들어서는 2%p 빠져 19%를 기록했다. 그런데 3주차에서는 6%p가 빠져나가 13%를 기록했다. 4주차에서는 1%p가 추가로 빠지면서 12%를 기록했다.
국민의당의 하락세는 호남지지층의 이탈에 따른 부정여론의 확산에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난 12월 17일~18일 이틀 동안 미디어오늘이 여론조사기관 에스티아이와 정기여론조사를 벌인 결과 새누리당 35.7%, 새정치민주연합 25.2%, 정의당 4.8%, 안철수 신당 20.1%를 기록한 것으로 나왔다. 안철수 신당이 새정치보다 5.1% 뒤진 결과였지만 호남 지역만 떼놓고 봤을 때 새정치는 17.5%, 안철수 신당은 36.2%를 기록했다. 반문재인 정서를 감안하더라도 2배 가량 호남에서 안철수 신당이 높은 것은 컨벤션 효과에 더해 호남 지역에서 기대치가 남다름을 보여준 것이다. 야권지지층만으로 대상으로 했을 때 격차는 더 벌어졌다. 새정치는 호남에서 19.5%를 기록했고 안철수 신당은 무려 41.6%를 기록했다. 하지만 한 달 후(1월14일~15일)에 조사한 결과에서 호남 지역 지지율은 더불어민주당이 23.1%, 국민의당이 33.6%로 격차가 줄어들었다.
지지율 반등 기회 공천권 갈등 해결이 핵심
문제는 당내 갈등 양상이 커져 지지율이 추가로 떨어지거나 고착화될 요인이 많은 반면, 반등할 기회는 적다는 점이다. 호남 지지층이 급속히 이탈하자 국민의당이 천정배 의원의 국민회의와 통합에 합의했지만 향후 ‘분열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남아있다. 천 의원이 국민의당과 통합하기 전 지난해 12월 "혁신의 대상이 어느 날 갑자기 혁신의 주체로 둔갑하는 마술쇼로 호남 정치가 희화화되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을 두고봤을 때 호남 현역의원 물갈이 문제가 현역 의원 공천권 문제와 정면 충돌하면서 갈등이 확산될 수 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문재인 대표의 백의종군 선언 이후 김종인 비대위 체제로 전환되면서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다. 국보위 참여 전력에 대해 김종인 위원장이 5.18 묘역을 찾아 무릎을 꿇고 사과하면서 진정국면에 들어갔고 특히 영입한 인재를 내세워 적절히 활용하는 모습도 지지율 상승에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창조한국당 문국현 지지율 살펴보니
과거에도 비슷한 전례가 있었다.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의 경우다. 유한킴벌리 대표이사이면서 20년 동안 경실련 등 시만사회단체 대표로 활약했던 문 대표는 지난 2007년 대선을 불과 수개월 앞두고 정치권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당시 여권의 상황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 대항할 유력한 후보를 내놓지 못해 지리멸렬한 상황을 보이고 있었고 문국현 대표는 시민사회진영과 정치권을 아우를 수 있는 후보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낮은 인지도가 문제였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정책을 '시멘트' 경제로 비난하며 자신이 미래의 경제를 살리는 유일한 후보임을 강조했지만 좀처럼 지지율은 한 자릿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문 대표는 지난 2007년 8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난 뒤 이명박 후보와 여권을 싸그리 비난하면서 독자 출마를 예고했다. 그해 9월 대선 주자 강연회에서 문 대표는 이명박 후보를 향해 "경부 운하를 밀어붙이는 사람들은 사회적, 문화적 파괴행위에 대한 계산을 전혀 하지 못하고 물질만능적이고 경제적인 것 밖에 안 보이는 사람들로 나치나 비슷한 수준"이라고 혹독히 비난했다. 여권에 대해서는 "(나는) 민심을 보고 출마했으며 민심을 잃어버린 양당(여야)은 부패당이거나 염치가 없는당으로 국민이 좋아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9월 독자 창당 선언 뒤 10월 실제 창당해 단독 후보로 출마를 결정했고 출마 초기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지만 결국 유권자는 그를 대안세력으로 보지 않았다.
지지율(리얼미터 정례조사)로 보면 문 대표는 9월 첫째주 여권 후보 지지도 조사에 포함돼 2.8%를 기록했다. 여권 후보 순위로 보면 7위였다. 9월 둘째주 조사에선 3.1%를 기록해 6위로 올라섰고, 셋째주 조사에선 4.5%로 지지도가 올라갔다. 그리고 10월 첫째주 문 대표는 8.1%를 기록하면서 정동영 후보에 이어 2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10월 둘째주 조사에서도 8.7%, 셋째 조사에 11.8%로 올라서면서 상승세를 이어갔다. 정동영 후보가 경선에서 여권 후보로 뽑히고 난 뒤 문국현 대표가 단일화 협상 대상자로 되면서 주목을 받은 탓이다.
하지만 11월 첫째주 문국현 후보는 4.7%로 내려앉았다. 10월 말 문 대표는 창조한국당을 창당했지만 정당지지율에서도 한나라당 47.7%, 대통합민주신당 11.7%, 민주노동당 5.7%, 민주당 4.9%에 이어 창조한국당 1.2% 지지율을 보였다.
지지층·지지기반 안정화시키지 못하면 지지율 거품
문 대표는 대선에서 5.8%를 득표했다. 지지기반이 전무하고 인지도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을 고려하면 문 대표의 득표율은 성공적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새로운 정치의 실험과 대안세력으로 인정을 받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문 대표는 2008년 총선에서 이재오 의원과 맞서 12%p 득표차로 당선되면서 파란을 일으켰고 비례의원 2석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후 18석의 자유선진당과 연대해 공동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로 합의했지만 실패해 해산에 이르게 됐고 문 대표는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이 상실돼 정치권에서 문 대표의 정치 실험은 끝을 맺었다.
문 대표의 경우 조직과 지지 기반이 확실히 자리매김하지 않을 경우 정당 조직으로서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민의당도 안철수 의원이 구심점이 될수록 지지율은 올라갈 수 있지만 지지층을 안정화시키고 지지기반의 벽을 세우지 못할 경우 장기적으로 문국현 대표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국민의당이 더불어민주당보다 '우클릭' 하면서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지지층 이탈로 이어질 위험성도 안고 있다. 국민의당은 여야 쟁점 법안 중 파견근로자보호법에 대해서는 더불어민주당과 함께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지만 테러방지법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국민의당은 테러컨트롤 타워를 국무총리실 등에 두자면서도 국정원 직원의 파견을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이 ‘재벌특혜법’으로 반대하고 있는 기업활력제고를 위한 특별법, 일명 원샷법에 대해서는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중도주의 제3노선이 선거를 멀찌감치 앞두고 여야 양당 구도 속에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면 소구력을 가질 수 있지만 당장 유권자의 표로 결정되는 선거 국면 앞에선 중도의 틈새가 확장될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도 있다. 문국현 대표 역시 대선을 불과 수개월 앞두고 자신의 가치를 유권자의 머릿속에 심기 위해 노력했지만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국민의당도 '새정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영입 인물 면면에서도 큰 감동을 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소한 호남지역에서 현역 의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백의종군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새정치를 내건 국민의당의 차별성이 부각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리서치뷰 안일원 대표는 "새누리당을 지지했던 약한 강도의 보수층이 국민의당을 기대했다 복원돼 돌아가고 지지층 중 가장 큰 축인 호남이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준 더민주당에 주목하면서 국민의당이 설자리가 없어진 모양새"라며 "안철수 의원이 중간 틈새를 공략하는 포지셔닝 전략을 취하고 있지만 이도 저도 아닌 입장에 따라 존재감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총선까지 반전의 카드를 보이기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뒤끝', 유통기한이 없다 2.3 오마이뉴스 [取중眞담]
고인이 된 유수호 전 국회의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악연으로 유명하다. 1973년 운동권 학생을 석방했다는 이유로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헌법을 비판하며 법복을 벗어 던졌다. 악연은 대를 잇는 것일까? 그의 차남인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국회법 파동으로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의 정치'로 낙인 찍혔다.
아버지와의 악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과의 악연 때문인지 알 수는 없다. 어쨌든 박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유 전 의원의 장례식에 그 흔한 조화하나 보내지 않았다. 누리꾼들은 '뒤끝 작렬'이라며 박 대통령의 옹졸함을 성토했다.
"왜 그때 그년, 이년 그러신거예요?"
▲ 박근혜 대통령과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 연합뉴스
박 대통령의 '뒤끝' 유통기한은 꽤 길어 보인다. 쉽게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둔다는 의미다. 지난해 10월 청와대 5자 회동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박 대통령은 회동이 끝난 후 청와대를 나서는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붙잡고 "왜 그때 (저보고) 그년, 이년 그러신 거예요?"라고 뼈있는 농을 던졌다. 이 원내대표는 무척 당혹스러워 하며 "아이고, 뭐 그땐 죄송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라고 얼버무렸다.
2012년 8월 당시 이종걸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새누리당 돈 공천 파문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면서 도가 지나친 표현을 썼다. "그들의 주인은 박근혜 의원인데 그년 서슬이 파래서 사과도 하지 않고 얼렁뚱땅…"이라고 적은 것.
3년 전 대선 때 얘기를 끄집어내 갑작스러운 '일격'을 가한 박 대통령의 뒤끝에는 '한'이 서려 있다. 후에 이 뒷얘기를 전해준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나도 당황스러운데 이종걸 대표는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나"라고 혀를 내둘렀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7월 3일 광주광역시 서구 금화로 광주 유니버시아드 주경기장(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 주경기장(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개회식에 참석, 정의화 국회의장,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등 참석자들과 함께 앉아 있다. ⓒ 연합뉴스
뒤끝 형태도 다양하다. 가장 많은 사례가 '무시하기'와 '거리두기'다. 지난해 7월 박 대통령이 광주유니버시아드 개막식에서 정의화 국회의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에게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 대표적이다. 행정부의 시행령이 법률의 취지에 어긋나는 경우 수정·변경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한 국회법 개정안 처리가 문제였다. 박 대통령은 여야가 합의한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박 대통령은 행사장에 입장했다가 나갈 때까지 김 대표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게 인사는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에 김 대표는 "우리는 쳐다보지도 않네…"라고 주변에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통령은 자신에게 먼저 다가선 정 의장과 간단히 악수를 하긴 했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한번 뵀으면 좋겠다"라는 요청에는 끝내 답을 하지 않았다.
앞서 청와대는 '5개 중견국가협의체'(믹타·MIKTA) 국회의장 접견 자리에 정작 주최자인 정의화 의장을 부르지 않았다. 외교적 결례가 분명했지만, 박 대통령의 '국회법 뒤끝'은 계속됐다.
지난해 3월 청와대가 박 대통령과 문재인 대표와의 회동 다음날 문 대표의 '경제실패론'을 정면 반박한 것도 '뒤끝 작렬'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회동 자리에서 문 대표의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지 않고, 회동이 끝난 다음날 청와대 경제수석이 낸 자료를 통해 비판을 가한 것은 회동에 대해 찬물을 끼얹겠다는 의도로 해석됐다.
▲ 지난 2012년 12월 10일 열린 제18대 대통령선거 2차 TV토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가 악수하고 있는 모습. ⓒ 사진공동취재단
박 대통령 뒤끝 정치의 최대 희생자는 통합진보당과 이정희 전 대표가 아닐까? 2013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리는 순간 많은 이들은 2012년 12월 4일 대선 후보 TV토론회를 떠올렸다. 당시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려 나왔다"는 이정희 진보당 대선후보의 거침없는 발언에 박 대통령은 토론회 내내 곤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토론회 직후 SNS에는 이정희 전 대표의 안위를 걱정하는 반응이 줄을 이었고, 실제 2년 만에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았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앞둔 2013년 11월 당시 문희상 민주당 상임고문은 박 대통령을 겨냥해, "(일련의 사태가) 1년도 채 안 된 시점에서 나온 박 대통령의 뒤끝 행사라면 이제 그만해야 한다"라고 일갈했다.
국민의당 창당대회에 놓인 박근혜 축하 화환
▲ '생일 축하난' 7시간만에 청와대로 더불어민주당 비서실장 박수현 의원이 2일 오후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달 할 난화분을 들고 있다. 이 난은 오전에 박 대통령의 생일 축하를 위해 전달하려고 했으나 청와대로 부터 거절 당했다. ⓒ 이희훈
박근혜 대통령이 2일 더불어민주당에서 보낸 자신의 생일축하 난을 거부했다.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원장이 보낸 축하 난은 국회로 되돌아왔다가 7시간 만에 다시 청와대로 가는 '수난'을 겪었다.
김 위원장은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경제민주화추진단장을 맡는 등 대선 승리를 도왔다. 하지만 박 대통령 취임 후 경제민주화 후퇴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고, 최근 더민주에 '입성'까지 했다. 김 위원장에 대한 박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는 충분히 미뤄 짐작이 가능하다.
▲ 박근혜 대통령이 보낸 국민의당 창당 축하 화환 2일 오후 대전 중구 한밭체육관에서 열린 국민의당 창당대회 행사장 앞에 박근혜 대통령이 보낸 화환이 놓여 있다. ⓒ 유성호
재미있는 것은 이날 대전 중구 한밭체육관에서 열린 국민의당 창당대회에 박 대통령의 축하 화환이 놓였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과 함께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선거를 도왔던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가 이날 국민의당 합류를 결정했는데도 말이다. 간혹 박근혜 대통령의 뒤끝도 오락가락 하는 모양이다.
문제는 뒤끝 자체가 아니다. 박 대통령의 머릿속에 있는 사사로움과 원한이 국정 현안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박 대통령이 주력해야 할 것은 국민에게 약속한 국민대통합, 경제민주화, 복지 그리고 한반도평화 실현 등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뒤끝 작렬'을 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월세 청년’-‘자택 청년’ 소득 격차 더 커졌다 2.2 경향
ㆍ월 소득 2000년 1.07배, 2012년엔 1.36배…매년 벌어져
ㆍ‘임차’ 12년 보내도 자가 가구 2000년 순자산액 못 미쳐
자기 집을 보유한 청년 가구와 세들어 사는 청년 가구 간의 소득·자산 격차가 매년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격차는 비청년층보다 청년층에서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집 없는 청년들의 ‘내집 마련’이 더 어려워지는 실정이다.
2일 국토연구원이 한국노동연구원의 ‘한국노동패널조사’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00년 25~39세 청년 가구 중 자가 보유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218만6310원이었다. 전·월셋집에 사는 청년 임차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203만8690원으로, 자가 가구의 월소득이 임차 가구의 1.07배다. 이 격차는 해가 갈수록 벌어졌다. 2006년에는 자가 가구의 월평균 소득이 임차 가구의 1.28배, 2012년에는 1.36배에 달했다.
자가 가구와 임차 가구 간 소득뿐 아니라 순자산의 격차도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다. 2000년 자가 가구의 순자산은 9640만원, 임차 가구의 순자산은 4060만원으로 격차는 2.37배였다. 2012년에는 자가 가구의 자산이 2억원을 넘긴(2억220만원) 반면, 임차 가구의 자산은 1억원을 넘지 못해(7850만원) 둘 간의 격차는 2.58배가 됐다.
청년층이 아닌 가구에서도 자가·임차 가구 간 소득 격차는 존재했으나 청년 가구만큼 격차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2000년 비청년 자가 가구의 소득은 임차 가구의 1.34배였다. 그러나 2012년에는 이 격차가 1.26으로 줄어들었다.
소득과 자산은 내집 마련 여부를 결정하는 주된 수단이다. 청년·비청년층을 가리지 않고 순자산이 1000만원 증가했을 때, 항상소득(월급 등 정기적인 소득)이 10% 증가했을 때 자가 거주 선택자의 비율은 0.5~2%포인트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차 주택에 살면 자기 집에 사는 사람들보다 소득과 자산이 상대적으로 천천히 늘고, 그 결과 내집 마련에 대한 선택의 폭도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특히 청년 임차 가구는 주거비용이 늘어남에 따라 주거면적을 더 많이 줄이려고 했다. 자가 가구는 주거비용에 대한 주거면적의 탄력성(주거비용이 1 늘었을 때 주거면적의 변동비율)이 2000년 마이너스 0.076에서 2012년 마이너스 0.022로 줄었다. 반면 임차 가구의 경우 2000년 마이너스 0.004에서 2012년 마이너스 0.063으로 오히려 늘어났다.
김무성 대표, 남대문 시장서 상인에 굴욕 “그만 찍고 가요” 2.3 코리아헤럴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남대문시장 상인에게 쓴소리를 들었다.김 대표는 2일 남대문시장을 찾아 설 연휴 전 ‘민생 행보’를 이어갔다. 김 대표는 이날 오후 당 정책위원회 소속 의원들과 함께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을 방문해 직접 장을 보며 설 차례상물가 등을 점검했다.
이 과정에서 호떡가게를 방문한 김 대표와 당 정책위 의원들을 향해 한 시민은 “몇 장 찍었으면 됐지. 계속 붙어서 이렇게 하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윽고 “좀 나가죠”라는 말과 함께 반말도 섞었다.
[출처=채널A 방송]
이 장면은 노컷뉴스TV와 채널A 등 방송 카메라에 포착됐다. 앞서 새누리당과 정부는 설 연휴를 앞두고 전통시장 활성화 차원에서 온누리상품권판매와 할인율을 대폭 확대하기로 한 바 있다.
청렴해야 경제도 산다 함께사는 길 16.1.8
부패 척결하기-박창재 환경운동연합 운영국 처장
현 정부의 개혁안이 과연 미래세대를 위한 것일까?
모든 국민이 소득세 내역을 매년 공개하는 나라, 소득 수준에 비례해서 범칙금을 부과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나라, 핀란드. 2002년 노키아 부회장 안시 반요키가 시속 50킬로미터 제한구역에서 75km/h로 달렸다가 11만6000유로(한화 1억6700만 원)의 범칙금을 물었다. 20km/h 이상 초과하면 가중부과대상자로 범칙금이 2주일간의 소득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부자들에게 징수하는 일종의 특별세라고 해야 할까. 지도층의 범죄일수록 더 무거운 징벌을 가하고, 기초질서위반 범칙금도 부유층일수록 더 무겁게 부과해야 사회가 정화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동일한 사건도 소득 수준에 따라 범칙금을 달리 부과하는 '차등범칙금제'를 운영한다. 최근에는 모든 사람들이 빈곤선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는 만큼의 소득을 보장하는 '보편 기본소득제'를 도입해서 매월 모든 국민에게 800유로를 지급하기로 해 우리나라는 물론 세상의 관심이 크기도 하다.
얼마 전 핀란드를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어린이를 최우선하는 나라, 임산부와 여성을 우대하는 나라, 자연환경이 빼어난 나라, 교육수준이 세계 최고인 나라 등. 그중에서 단연 핀란드는 반부패의 교과서이자 청렴한 나라라는 것이다. 청렴한 대한민국으로 나가기 위해 핀란드의 경험과 성과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는 필시 우리에게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 핀란드 헬싱키 공원. ⓒ박창재
부끄러운 청렴도 최하위 국가 대한민국
미국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유럽 나라들에서 이색적인 실험을 했다. 50달러를 지갑에 넣은 후, 유럽의 200여 장소에 고의로 떨어트리고 회수되는 비율을 조사했다. 그 결과 전체 회수율은 58%. 전체 200개 중 116개의 지갑이 돌아왔다. 덴마크, 노르웨이는 회수율 100%로 지갑을 잃어버려도 안심할 수 있는 나라로 평가되었다. 다음은 핀란드로 회수율이 80%였다. 이어 스웨덴(70%)이었으며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는 60%의 회수율을 보였고, 포르투갈과 벨기에의 회수율은 50%였다. 의외로 스위스는 2개만이 회수되었고,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로 50%를 넘지 않았다. 국민들이 얼마나 정직한지를 알아보는 실생활에서의 '청렴도' 평가라고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몇 개의 지갑이 돌아올까?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청렴도는 필수 조건이다. 하지만 한국의 청렴도는 부끄러울 정도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 TI)가 발표하는 각국 공공부문 청렴도 평가에서 우리나라는 100점 만점에 55점으로 43위를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에서는 한국은 27위로 최하위권이다. 공직사회와 정치권 등 공공부문의 부패 정도가 대단히 심함을 말해 준다. 공공부문에 대한 신뢰도 또한 낮다. 우리 국민이 생각하는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34%로 OECD 41개국 가운데 26위로 나타났다. 정부뿐만이 아니다. 올해 OECD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법부 신뢰도는 41개국 가운데 39위로 최하위다. 지난해 미국 갤럽조사에서 경찰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신뢰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두 번째(59%)로 낮았다.
반면, 핀란드는 90% 이상의 신뢰도를 보였다. "따뜻한 맥주와 찬 샌드위치가 적당하고, 그 반대가 되면 위험하다(A warm beer and a cold sandwich are suitable for a civil servant but vice versa they are risky)." 핀란드에서 신참 공무원들에게 주입되는 윤리 강령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오면서 핀란드는 국가 투명도에 있어서 최고 수준이다. 1995년부터 발표되고 있는 국가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 Index)에서 핀란드는 줄곧 최상위권이다. 3년 연속 1위를 한 적도 있다. 핀란드는 세계적으로 부패지수가 가장 낮고 청렴한 국가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 맑은 핀란드 호수. ⓒ박창재
하락하는 한국의 부패인식지수
우리나라는 1995년부터 시작된 국가별 부패인식지수 조사에서 10점 만점에 4점대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2005년 처음으로 5점대로 진입한 후 2008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5.6점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는 지속적인 하락 추세로 돌아섰으며 이것이 현 정부 들어서도 반전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청렴도가 2008년 이후 6년 연속 하락과 정체를 지속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999년부터 2008년까지 보인 상승과 개선 추세가 계속됐다면 우리나라는 올해 65점을 받아 세계 30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부의 정책 실패와 부패문제 해결 의지의 부재에 기인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6년 전 우리나라(5.6점, 40위)와 같은 수준이었던 대만(5.7점, 39위)은 지속적인 개선을 보여 2014년 61점, 35위를 기록한 점이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기업의 윤리경영, 반부패 노력은 어떠한가? 연일 신문이나 매스컴에 도배되듯 정경 유착이나 입찰 비리 등 경제 유인을 위한 비리와 부패 사건이 만연되어 있다. 핀란드의 기업들은 윤리경영을 선언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구성원들이 실천하도록 하고 있다.
핀란드의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인 노키아(NOKIA)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신뢰가 곧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인식 속에서 윤리적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핀란드에서 5대 기업에 속하는 다국적 기업(유통/무역분야) 케스코(KESKO)는 투명성은 물론 신뢰와 책임을 기업 경영의 철학으로 삼고 있다. KESKO는 신뢰 및 반부패 행동 강령을 마련하여 구성원들이 실천하도록 하고 있다.
▲ 이홍원 작가의 '문신-그 이야기의 신작'.
부패 잡고, 경제와 환경 살려야…
지난 9.11테러 이후, <이코노미스트>가 전 세계 유력 투자자 300명에게 '해외 투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부패'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테러'는 두 번째였으며, '노동'과 '환경'은 각각 3위와 4위를 차지했다. 주식투자와 주가 등에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 역시 부패다.
핀란드는 유리와 같은 투명하고 열린 사회 그리고 자율과 자립성, 강력한 지방정부의 전통이 결합하면서 부패 없는 청렴한 국가와 사회가 되었다. 핀란드 의회 사무국의 행정학 박사인 파울라 틸호넨(Paula Tilhonen)은 국가 부패지수는 국제화지수, 소득분배의 불균형 여부, 행정의 투명성, 환경지수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즉, 국가 부패지수가 낮을수록 행정이 투명하고 균등한 소득분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부패지수가 낮을수록 환경지수가 높다. 부패지수가 낮은 핀란드의 환경지수는 세계적으로 손꼽힌다.
한 경제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한국이 부패방지 노력을 통해 국가청렴도를 OECD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만 해도 경제성장률을 명목기준으로 연 0.65%p 높일 수 있다고 한다. 부패척결 없이는 지속적인 경제발전도 어렵다. 부정부패와 이것의 해결 또한 우리 모두의 몫이다. 건강한 사회, 경쟁력 있는 국가가 되기 위해 지속적인 걸음이 필요하다. 핀란드가 가장 깨끗한 나라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던 것은 투명한 시스템과 더불어 높은 시민의식에 있다.
일명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법)'이 2016년 9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한국도 유럽의 나라들 수준으로 국가의 청렴도가 높아질 수 있을까? 언제까지 핀란드를 부러워만 할 것인가. 부패를 잡지 못하면 환경은커녕 경제 발전도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엄마가 조각 났다…이를 주워야 했다" 15.4.30 프레시안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월남 패망인가, 베트남 해방인가
베트남 수도 하노이다. 거리에 나가면 1975-2015이라 쓰인 네온사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정확히 40년 전 자본주의자가 이끈 베트남 공화국은 무너져 사라졌다. 공산주의자가 이끈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승리해 오늘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됐다. 40년 전 오늘, 민족 해방은 달성됐고, 계급 해방이 멀지 않은 듯 했다.
미국과 한국은 '자유'를 위해 파병했다고 우겼다. 그러나 역사는 냉전 체제의 국제 정치에서 자유(freedom)라는 수식어가 반공·독재·부패·억압에 다름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제3세계에서 '자유'는 제국주의 외세의 지원과 강압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식민주의의 연장이었다.
그런 체제는 끝나야 했고,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체제의 명줄을 잇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것은 국가의 자랑이 아니라 수치였다. 베트남 전쟁은 범죄였다. 베트남 해방 40년. 그 동안 베트남은 계급 해방을 달성하고 평등과 민주의 나라가 되었는가. 오늘 베트남이 갖고 있는 고민과 과제는 무엇인가.
▲정확히 40년 전 베트남공화국은 무너졌다. ⓒ윤효원
1968년 2월 이른 아침 베트남 중부 전투가 광기 수준에 이르렀다. 한국군이 하미(Ha My) 마을을 쓸어버린 것이다. 다낭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대나무집과 논이 오밀조밀하던 마을이었다. 한국군은 공산주의자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미군과 함께 싸우던 청룡부대 소속이었다. 몇 주 동안 한국군은 농민과 그 가족들을 미군이 "전략촌"이라 부른 비좁은 구역으로 몰아넣었다. 공산 게릴라를 위한 거점과 식량을 없앨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감금 상태를 혐오한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려 전략촌을 탈출해 하미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에 들이닥친 한국군은 한 시간도 안 돼 잠에서 막 깬 촌민들을 몰아붙여 작은 집단으로 나누었다. 조직적으로 발포해 135명을 살해했다. 한국군은 집과 시체를 불태웠고,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진실 역시 여러 해 동안 묻혔다.
승리자가 아닌 패배자가 만든 이야기
지금은 학살 증언비가 있다. 30년이 지나 진정한 반성을 위해 찾아온 청룡부대원들이 세운 것이다. 그런데 뭔가 잘못됐다. 기념비는 집처럼 크고 화려한 지붕으로 장식돼 있다. 공동묘지 두 개와 살해당한 어른과 아이의 이름을 새긴 큰 묘비는 있는데, 왜 죽었는지 설명이 없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증언비가 처음 세워졌을 땐 묘비 뒷면에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새겨져 있었다. 발포와 피, 불타는 살, 모래 위의 시체들을 기억하는 글귀도 있었다. "아비와 어미의 몸이 산산조각 잘라져 불태워지는 걸 보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아이와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며 기어가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걸 보는 건 얼마나 참혹스러운가…"
하지만, 공식 행사가 열리기 전 한국 외교관들이 마을을 방문해 증언비 글귀에 불만을 제기했다. 베트남 관리들은 한국 외교관들에 맞서는 대신, 연꽃이 새겨진 판으로 비 뒷면을 덮으라 명령했다. 당시 하미 마을을 연구하고 있던 한국인 인류학자 권헌익은 마을사람이 하는 말을 기록했다. 진실을 부정하는 건 "학살의 기억을 학살하는" 두 번째 학살이다.
더 강력한 무기를 들고 돌아온 미국과 그 동맹국들
왜 베트남은 이러한 타협을 하였을까? 왜 전쟁의 승리자가 패배자가 만든 전쟁 이야기를 허용하는 걸까? 마을사람들의 답은 간단하다. 한국은 베트남 경제에서 가장 큰 투자국의 하나다. 학살 글귀를 감추는 대가로 지역 병원 설립 지원을 약속했다. 베트남 당국은 동의했다. 저항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십년 전, 1975년 4월 30일 전쟁이 끝난 이래 지금까지 베트남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올해 초부터 베트남을 한 달 여행하면서 양쪽의 농민, 지식인, 학술 연구자, 참전군인들을 만나 이윤을 좇는 권력자들이 베트남 인민에게 강요해온 수많은 거짓과 타협을 알아봤다. 미국은 전쟁의 원인과 수행을 거짓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군사적 대립에서는 졌지만,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더욱 강력한 무기, 즉 돈을 갖고 돌아와 베트남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강요하고 있다. 지금 가장 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베트남 지도자들이다.
"진심으로 나는 공산주의자다"
아흔 살인 응우옌 하오 뚜는 하노이의 밝고 아름다운 아파트에 산다. 그녀는 유창한 불어와 엉성한 영어로 젊은 처녀 시절 강력한 적 둘을 어떻게 쳐부쉈는지 새처럼 재잘거린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식민지에서 손 떼기를 거부한 건 프랑스였다.
1946년 스물한 살 때 뚜는 정글로 가 게릴라 투쟁에 동참했다. 산(酸)과 초석(硝石), 알콜을 섞어 화약을 만드는 것이 주특기였다. "밀림에서 정말 행복했다. 폭탄에 넣을 가루로 뻥하고 우리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꿈은 단순히 외국 침략자를 몰아내는 민족주의적인 게 아니었다. 꿈은 구체적으로 공산주의적이고 혁명적이었다. 뚜는 유치원 교사였던 아버지를 프랑스인에게 빼앗겼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일곱 살이었던 뚜는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곤 했다.
"나는 베트남을 차지하려는 모든 사람을 증오했다. 마음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뚜의 가족은 안락한 생활을 하던 중간 계급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그녀의 집은 지하 베트남 공산당을 위한 회합 장소로 쓰였다. 그녀는 맑스와 레닌을 읽은 것과 열여섯 살 때 프랑스인들이 친구 하나를 어떻게 처형했는지를 기억했다. "진심으로 나는 공산주의자다."
레 남 퐁은 뚜와 나이가 거의 같다. 열일곱 살이었던 1945년 프랑스와 싸우려 사병이 되었다. 전쟁에서 삼십 년을 보냈고, 북베트남 육군 중장까지 올라 미국군의 무기를 파괴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어느 포근한 저녁 그의 안락한 집 밖에 앉아 망고를 깎으면서 자기의 혁명 동기를 말했다.
"사회주의? 물론이지. 모든 싸움의 목적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자유와 독립과 행복을 얻는 거였어. 프랑스와 미국에 대항해 싸우던 첫날부터 우리는 이미 우리가 만들고 싶은 사회를 가슴에 품었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는, 공정하고 독립되고 평등한 사회."
▲<가디언>의 인터넷판 기사 화면. ⓒ가디언
뇌물과 폭력으로 세워진 남베트남
이 지점에서 미국의 자기 설명에 대한 설명과 갈라지기 시작한다. 미국판 설명은 1954년 프랑스가 패배했고, 미국군이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탈취 위협으로부터 남베트남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프랑스가 베트남 전역에서 인민을 소외시켰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갈라진 두 개의 국민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1954년 베트남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서방 동맹국들은 남부 거점에 대한 권력을 고집했다. 제네바 국제조약에서 합의된 바는 1956년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새 정부를 수립하는 선거까지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이 임시로 나눠져 있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만약 선거가 이뤄졌더라면 베트남인 80%가 호찌민과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에 표를 던졌을 것이라고 후일 인정했다. 이는 우리가 만난 베트남인들의 말과 일치하는 바다. 미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악명 높은 CIA 간부 에드워드 랜스데일을 통해 뇌물과 폭력을 능란하게 써가며 사이공에 가톨릭 정치인 응오 딘 디엠을 수반으로 하는 새 정부를 설치했다. 그는 독재자에다 족벌주의자였고, 반공에 친미주의자였다. 1955년 10월 랜스데일은 남베트남에서 선거를 조작해 디엠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전국 선거는 취소됐다. 이제 "임시" 분단은 두 개의 나라로 나뉜 베트남에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 침략의 수동적 희생자라는 가식의 외피로 전락했다.
2차 대전 때보다 더 쏟아 부은 폭탄
프랑스 전쟁에 돈을 댔던 미국은 남베트남 육군에 기꺼이 돈을 퍼부었고, "자문관"이라는 외피를 씌운 1만6300명을 파병했다. 1965년 3월엔 전투병을 보냈다. 1969년 전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미국은 55만 명을 파병했다. 여기에 남베트남군 89만7000명, 한국과 동맹국에서 파병된 수천 명을 더해야 한다. 하버드 의대와 워싱턴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망자 수는 380만 명에 달했다.
영국 특파원 제임스 캐머런은 미국의 행위를 "국제적 품위에 대한 공격으로 구역질나고 터무니없다"고 묘사했다. 1965년 쓴 글에서 전쟁으로 흘러간 경로를 돌아봤다. "신중을 기하지 않았고 서툴고 잔인하고 경솔했다. 서방은 점점 더 실수를 저질렀고 허둥댔다. 자신들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처음부터 그들의 주장은 상투적이고, 결코 사실을 좇은 적이 없었다."
폭력의 기억은 엄청난 공격을 당한 사람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은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호찌민이라 부르는 사이공의 작은 집에서 공산당 게릴라였던 이는 자신의 밀림 캠프에 떨어지던 미군의 폭격과 자신과 동료들이 어떻게 비좁은 여우 굴로 숨었는지를 기억했다. "우린 쌀로 만든 도수 높은 술이 있었다. 그걸 마시면 독해 눈물이 나올 정도다. 우린 '어머니 땅의 눈물'이라 불렀다. 술을 마시면 두려움이 없어졌다."
미국은 2차 대전 중 연합국이 독일과 일본에 사용한 것보다 많은 폭탄을 베트남에 떨어뜨렸다. 네이팜탄도 떨어뜨렸다. 희생자들의 피부에 달라붙어 살을 태웠다. 백린(白燐)은 뼈를 녹였다. 파편 폭탄에서 나온 쇠 구슬과 철 조각은 사방으로 날아갔다. 에이전트오렌지 4300만 톤을 포함해 독성 화학물질 7300만 톤이 뿌려져 식물을 죽였고 노출된 사람들에게 질병을 안겼다.
잘린 다리만 남은 아들
미국의 하노이 폭격은 역사적 오명을 남겼다. 민간인으로 가득 찼던 하노이는 자체 방어 공군력이 없었다. 당시 여덟 살이었던 한 여인은 음속의 두 배로 날던 F-111 폭격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등에 나뭇가지를 덮어 어설프게 위장했던 걸 기억했다. 대공 포대에 근무했던 한 남자는 성과 없던 밤샘 방어 작전을 마치고 집으로 가니 폭격으로 마을이 통째 사라진 걸 보았다. 그의 아들이 남긴 건 흉터로 확인한 잘린 다리뿐이었다.
미국의 지상 공격도 강력했다. 메콩 삼각주의 한 마을에서 예순 후반의 농부는 황토로 지은 집에 평화롭게 앉아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의 엄마는 미군 헬리콥터가 굉음을 내며 다가오는 걸 보고 도망가는 실수를 범했다. 미사일을 맞은 엄마의 몸은 야자수 나무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엄마를 모아야 했다. 이를 주워야 했다." 남자 형제 셋은 헬리콥터 기관총에 맞아 죽었다. 지금도 그녀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헬리콥터 소리 같은 것을 들으면 공포에 떤다.
▲겁에 질린 아이들. ⓒAP
"움직이는 건 뭐든 죽여라"
미국인 다수는 미 라이(My Lai) 마을 주민에 대한 악명 높은 학살이 특별하고 드문 사건이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2001년 6월 언론인 닉 터스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다른 그림을 찾아냈다. 비밀에 붙여진 대책팀이었던 베트남전쟁범죄위원회(Vietnam War Crimes Working Group) 관련 자료를 발견한 것이다. 미국 육군은 미군이 저지른 학살과 살인, 강간이 300건이 넘었음을 입증했다.
당시 터스는 베트남을 방문했다. 그가 쓴 책 <움직이는 건 뭐든 죽여라>에는 중부 고산지대 촌마을에서 여자와 어린이 스무 명이 살해된 사건의 현장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현지인을 따라 나선 길에 동일한 좁은 지역에서 학살을 기록한 증언비를 다섯 개나 추가 로 발견했다.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찾은 것은 바늘더미였다." 그는 "끈적이들"(gooks, 동남아시아인을 비하하는 모욕적인 표현)의 목숨에 대한 인종적 무관심, "사살" 숫자를 올리라는 상부의 압박, 농촌 지역이 "무차별 포격 지대"로 갖는 성격이 결합되어 "민간인에 대한 살해가 광범위하고 일상적으로 이뤄졌으며, 이는 미군 지휘부의 정책 때문"라고 결론지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투옥되어 학대를 받았다. 1970년 미국 의원단이 악명 높은 꼰 다오 감옥을 방문했다. 거기엔 남녀 무리가 "호랑이 우리"에 족쇄를 찬 채 갇혀 있었다. 굶주리고, 두드려 맞고, 고문당하면서 곤충을 먹어 연명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져 소동이 벌어졌지만, 감옥은 끝내 폐쇄되지 않았다.
배신당한 혁명…부패로 살찌는 "붉은 자본가들"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해방 40년 베트남, "붉은 자본주의"로 가는가?
베트남 노동조합 간부가 말했다. "나는 공산당원이지만, 우리 아들은 공산당을 싫어하고, 다당제를 주장한다. 아마 내 아들이 기성세대가 될 쯤엔 다당제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예순 정년이 일 년 남은 그는 하노이의 보통 시민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부패는 모든 곳에 퍼져 있다. 내가 몸담은 노동조합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사는 한국에는 부패가 없는가. 베트남에서 부패 문제가 심각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해방이나 혁명의 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다. 우리를 부패했다고 비판하는 서방은 부패가 없나."
베트남은 유럽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마무리 중이다. 미국이 추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에도 열심이다. 미국의 요구에 따라 경제 활성화를 위한 TPP 참여의 대가로 공산당 권력 독점을 뒤흔들지도 모를 결사의 자유를 법제화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대한민국도 비준하지 않은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제87호(결사의 자유) 비준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부패와 불평등이 가장 심각한 문제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베트남에 아무도 없다. 문제는 부패와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다. 베트남은 갈림길에 서 있다. 사회주의 유산을 깡그리 버리고 자유방임 자본주의로 치달을 것인가. 노동자의 권리와 이익을 보존하면서 사회주의의 성과를 유지하는 조절 자본주의로 나아갈 것인가. 베트남의 오늘은 향후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갈 것이 확실한 북한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도 시사점이 크다.
"붉은 자본가들"의 정치적 계산과 경제적 욕망에 좌우될 것처럼 보이는 베트남의 미래는 도시와 공단에서 넘쳐나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의지와 계급적 행동에 의해서도 그 경로가 영향을 받을 것이다. 몇 해 전까지 사이공의 대형 신문사 앞에는 상냥한 여인이 언론인들에게 커피를 팔았다. 그녀의 이름을 아는 이는 없었고, 그냥 커피 레이디로 불렀다. 그녀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갖고 있지만, 대개는 평화가 온 다음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 이게 베트남 공산당이 지금 거짓말을 하는 맥락이다.
그녀는 해방의 날을 기억한다. 전쟁이 끝났다는 환호. 세계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군대를 쳐부순 공산주의의 힘에 대한 순수한 자부심.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 두려움도 있었다. 폭력적인 보복과 약탈의 소문이 돌았다. 커피 레이디는 총을 들고 거리에 드러누운 미친 사람들이 겁났다. 개인적인 이유로 그녀는 슬펐다.
"보통 사람들의 삶은 힘들었다"
몇 해 전, 그녀는 사이공 근처 해변 도시인 붕 타우의 미군 기지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거기서 로널드라 불린 한 군인을 만났다. 뉴욕 출신인 그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상공으로 정찰기를 조종했다. 둘은 사랑에 빠졌다. 로널드는 짧은 통보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잠시 동안 편지가 왔다. 미국에 오도록 후원할 거라 했다. 곧 편지는 끊겼다. 여자는 남자가 돌아오지 않을 걸 알았다. 새로운 체제가 알면 화를 입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로널드의 편지를 태워버렸고, 그의 소식을 다신 듣지 못했다. 해는 흘러 이제 예순넷 백발이 된 지금, 절 옆에 조용히 앉은 채 여전히 슬픔을 느낀다.
커피 레이디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미국 남자와 사랑에 빠져 괜찮은 삶을 꿈꾸던 평범한 베트남 여인이었다. 해방의 날은 더 편안한 시절을 가져오지 못했다. 우선 새로 생긴 협동 공장에서 일거리를 찾았다. 하루 11시간 등을 구부린 채 재봉틀을 돌려 소량의 쌀과 더 작은 량의 고기를 얻을 수 있는 배급증을 얻었다. 여러 해 동안 남자 형제와 작은 집을 나눠 써야 했다. 그는 섬유 공장에 다녔다. 경제는 십년 동안 침체했다. "보통 사람의 삶은 힘들었다."
미국은 베트남을 폐허 상태로 만들었다. 폭격으로 도로와 철도, 교량과 운하를 파괴했다. 불발탄과 지뢰가 시골 곳곳에 널렸다. 심지어 농부들이 일하는 논에서도 발견됐다. 고성능 폭약과 에이전트오렌지로 오백만 헥타르의 숲이 불모지가 됐다. 새 정부는 남베트남 촌락 3분의 2가 파괴됐다고 추정했다. 사이공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고아들과 넘쳐나던 마약은 미국이 남긴 유산의 일부였다. 새 정부 추산 전국적으로 피난민 1000만 명, 전쟁미망인 100만 명, 고아 88만 명, 불구자 36만2000명, 그리고 실업자가 300만 명에 달했다.
▲1965년 미군 헬기가 남베트남의 베트공 기지를 공격하고 있다.ⓒAP
서방의 잔인한 경제 봉쇄
경제는 혼돈 상태였다. 해방의 날이 왔을 때, 인플레이션은 900%로 치솟았다. 논의 나라인 베트남은 쌀을 수입해야 했다. 파리 평화 회의에서 미국은 박살난 인프라 재건에 35억 달러를 제공키로 합의했지만, 단 1센트도 지불하지 않았다. 미국은 공산당 정부의 적인 사이공 정권에게 빌려주었던 수백만 달러를 갚으라고 요구함으로써 빈궁한 나라를 모욕했다. 베트남 경제는 세계와의 무역과 원조를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전쟁에서 지자마자, 미국은 전쟁으로 파산한 나라와의 수출입을 금지함으로써 무역 봉쇄를 강요했다. 또한 다른 나라에 압력을 가해 미국의 정책을 따르도록 했다. 같은 방식으로 미국은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유네스코 같은 국제기구들이 베트남에 원조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미국은 에이전트오렌지가 심각한 질병과 선천적 기형을 유발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보상금으로 자국 참전군인들에게 20억 달러를 지불했다. 하지만, 200만이 넘는 베트남 희생자들은 아무 보상도 받지 못했다.
이런 적대적 경제 봉쇄 속에서 어느 경제 모델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베트남의 사회주의 프로젝트가 붕괴하는 건 불가피했다. 베트남은 조야한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했고 농민들에게 배급증을 주면서 곡물을 넘기도록 강요했다. 생산 인센티브가 없으니, 소출도 엉망이었다. 인플레이션이 전시 수준으로 폭등했고, 다시 쌀을 수입해야 했다. 1980년대 초 공산당은 "사회주의 지향의 시장 경제"라는 노선을 공식 채택했다.
미국이 강요한 굴욕적 타협
이 전환으로 커피 레이디는 1988년 봉제 공장을 떠나 노점상이 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네 시에 일어나 시내로 나가 커피를 준비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다섯 시면 신문사 앞에 작은 의자를 놓고 일을 시작했다. 90년대 내내 모든 게 변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허용됐다. 사기업이 장려됐다. 자유로운 상거래, 자유로운 시장, 이윤, 임금이 돌아온 것이다.
정부는 비밀리에 워싱턴에 타협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재건 원조금 35억 달러, 에이전트오렌지와 전쟁범죄에 대한 보상 요구를 중단했다. 심지어 구(舊) 사이공 정권의 전쟁 부채 1억4600만 달러 상환에도 동의했다. 양보를 받은 미국은 1994년 거의 20년 동안 베트남을 질식시켰던 무역 봉쇄를 해제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기금 공여 기관들이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경제는 한 해 8.4% 성장했고, 곧 베트남은 세계에서 가장 큰 쌀 수출국의 하나가 됐다.
90년대 내내 공산당 안에는 새 조류인 자본주의에 대항해 사회주의를 지키려던 당파들이 강력하게 존재했다. 혼돈에 빠진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들 분파는 극적으로 빈곤을 감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베트남 인구의 70%가 공식적인 빈곤선 아래에서 살았다. 1992년엔 그 비율이 58%, 2002년엔 32%까지 떨어졌다.
동시에, 정부는 모든 마을에 초등학교를, 거의 모든 마을에 중고등학교를 지었다. 또한 무상의료의 기본 토대를 세웠다. 사회주의 당파들은 새로운 자본주의 수단을 지령하는데 충분한 정치적 힘을 갖고 있었다. 90년대 세계은행은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조건으로 수억 달러에 달하는 추가 대부금을 공여하겠다고 세 번이나 제안했다. 베트남 정부는 거절했다.
하지만 2000년부터 변화 속도는 빨라졌고 정치적 균형은 변했다. 국제 공여 기구와 외국 투자자들의 지속적인 압력을 받아들여 베트남 정부는 결국 국영기업의 매각을 승인했다. 또한 미국과의 무역 협상을 성사시켜, 마침내 2006년 세계무역기구 회원국 자격을 얻었다. 이는 외국 투자와 원조의 급증을 뜻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에서 승리자로 등장한 이후 30년 만에 베트남은 세계화된 자본주의 경제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결국 서방이 승리한 것이다.
배신당한 혁명
이 모든 변화를 사이공 거리의 커피 레이디는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변한 게 없었다. "벌이는 같고, 같은 집에서 산다"고 그녀는 말한다. "가게엔 물건이 많아졌지만, 값도 계속 올랐다. 나라는 변했지만,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건 아니다. 연줄을 가진 사람은 부자가 됐다." 요 몇 해 동안 그녀는 베트남 브랜드인 쭝 응우옌(Trung Nguyen) 커피만 팔았다. 그녀는 여전히 가난하지만, 쭝 응우옌 커피 회사를 소유한 남자는 자유로운 기업 활동의 새로운 조류에 올라탔고, 지금은 1억 달러 자산가가 되었다.
신문사 사무실엔 응우옌 꽁 케가 앉아 있었다. 그는 커피 레이디의 노점상 옆 건물에서 <딴 니엔(Thanh Nien)>을 편집했다. 케는 편집장 시절 사이공의 조직폭력배와 고위관료들 사이의 연줄을 폭로하고 공적 자금 절도에 연줄 좋은 가문들이 연루됐다는 추문을 다룬 기사로 권력자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베트남 정부는 공식적인 검열 제도를 어설프게 운영하고 있는데, 매주 편집장들을 소집해 뭘 다루고 뭘 숨길 지를 통보한다. 하노이는 화요일에 사이공은 목요일에 소집한다. 케는 2008년 해고됐다.
작년 11월 케는 위험을 또 무릅썼다. <뉴욕타임스>를 이용해 정부에 언론 자유 허용을 요구했다. 지금은 뉴스 웹 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무실에 앉아 일을 저지른 것이다.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자기 대의의 배신자가 됐다고.
"처음엔 혁명을 성공시킨 사람들이 정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가장 공정한 방식으로 나라를 발전시키고 번영케 하겠다는 좋은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잘못되기 시작했다. 혁명에 참가했던 이들이, 투명하겠다고 선언했던 이들이 결국 자신들의 약속과 사상을 배신해 버렸다."
부패와 불평등
케 자신도 혁명의 일부였다. 1970년대 초 학생으로 반미 선동을 했고, 삼년 동안 철창신세를 졌다. 여러 해 동안 당원이었다. 그는 당 지도부가 경제에 시동을 걸기 위해 자본주의라는 수단에 의지했던 이유를 이해한다. 하지만, 그는 신자유주의 동전의 어두운 면, 즉 부패와 불평등을 목도해 왔다.
거리 곳곳에서 부패와 불평등을 볼 수 있다. 어두웠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사이공은 상업 활동으로 북적거린다. 하지만 사이공은 모든 면에서 빈곤의 흔적이 역력한 개발도상국의 도시다. 동 커이 거리가 있다. 신흥 엘리트가 500달러짜리 헤르메스 티셔츠, 1만5000달러짜리 베르사체 손목시계, 6만5000달러짜리 금박 송아지 가죽으로 된 4인용 의자가 딸린 오리털로 채워진 식탁을 살 수 있는 방종한 부의 섬이다.
거리 모퉁이에는 있는 콘티넨털 호텔에선 한 끼 가격이 노동자의 주급인 식사를 판다. 레스토랑 이름은 호찌민 얼굴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르 부르주아.
케는 공공 프로젝트에 10달러가 배정됐다면, 7달러는 누군가의 주머니로 흘러간다고 말했다. 정말? 베트남 국가 예산의 70%가 도둑질당하고 있다? 믿기 어려운 비율의 절도다. 통역을 통해 말하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공중에 휘젓는다. "50에서 70% 사이."
작년 국제투명성기구는 베트남을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했다. 100점 만점에 31점으로 118개국보다 나빴다.
"붉은 자본가들"
부패가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베트남에선 관리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팔아 가족의 편의를 봐주는 게 하나의 전통이다. 하지만, 현 지도부 하에서 그 수준이 새로운 단계에 달했다는 주장이 있다. 사람들은 특히 베트남의 거대한 국영기업들을 민영화하는데서 문제가 커졌다고 말한다. 일부 정치인과 관료들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이나 자기 가족을 고위직에 앉힌 것이다. 베트남에서 2년간 동남아의 개발 문제를 연구한 영국 학자 마르틴 게인즈버러의 말이다. "관리들은 개혁주의 이상에 고무되기보다 부패한 욕망에서 동기 부여를 받아왔다. (...) 우리가 종종 '개혁'이라 부르는 것은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금융 및 기타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얻으려는 경쟁자의 시도에 다름 아니다."
최근 세 달 동안 한 웹 사이트가 베트남 파워 엘리트들의 비행에 관한 주장을 상세히 실었다. <쩐 중 꾸엔 륵('권력의 초상화'라는 뜻)>이란 이름의 사이트는 서류와 녹음자료, 동영상으로 주장을 뒷받침했다. 사실이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지만, 관찰자들은 이 사이트가 경쟁 상대에 손상을 가하는 데 내부 정보를 이용할 만큼 힘을 가진 정치인의 작품으로 추측했다. 사이트는 비밀스런 도둑질의 세계에 대한 짧은 경험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사이트는 한 지방 관리가 100만 달러가 든 가방을 집으로 배달했고, 그 덕택으로 "대개발"에 참여한 부동산 회사가 1억5000만 달러의 세금을 내지 않게 됐다고 주장하면서 최상층 인사를 공격했다. 그 회사는 지방 관리와 최상층 인사에게 빌라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사이트는 지도급 정치인 두 명을 지목하면서 이들이 부패 은행가에 대한 기소를 막았으며, 대가로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국영기업에서 1억 달러가 누이의 은행계좌로 흘러들었으며, 그 인척은 지금 사업을 스무 개나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사이트는 고위 군부 인사가 자기 아들의 회사를 이용해 군대 땅을 팔아 사적 이익을 남겼다고 비판했다. 그 사람이 "거대 부패 네트워크"의 일부라는 주장을 담은 은행 직원의 편지를 수백만 달러가 표시된 은행계좌와 함께 사이트에 올려놓기도 했다.
국가는 때때로 부패를 인정하고 부패를 척결하기도 한다. 작년 말 세간의 이목을 끈 재판이 열렸다. 전직 국영기업 임원 네 명이 뇌물과 사기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두 명은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케는 이 재판들이 전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노동법 물 타기
"우리는 수백만의 목숨을 독립과 평등과 바꿨다. 감옥에서 나는 전쟁이 끝나면 부패 없는 나라가 될 것이라 상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라의 발전은 이뤄져야 하지만, 적법하게 돈을 버는 사람들을 해하는 쪽으로 가선 안 된다.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불법적인 방식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을 허용해선 안 된다."
그는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다. 초기 보여준 공정한 경제 발전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은행 2012년 보고서는 "불평등이 다시 의제가 되고 있다"고 했다. 2014년과 2010년 사이 하위 10%의 소득이 5분의 1이나 떨어진 반면, 상위 5%의 소득은 전체 소득의 4분의 1을 차지했다.
가장 심각한 불평등은 농촌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수백만의 농부가 공장이나 도로 건설 때문에 토지를 잃어야 했다. 90년대 초, 거의 모든 농촌 가구(91.8%)가 땅을 갖고 있었다. 2010년에 되자 농촌 가구의 22.5%가 땅이 없게 됐다. 빈농층은 도시로 대거 유입되어 민영화된 기업에서 해고당한 수십만의 노동자들과 합류하고 있다. 이 거대한 인간 파도는 개인집이나 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비공식 부문"이나 새로운 산업 단지와 수출 가공 지역으로 빨려들고 있다.
비공식 부문에선 어떠한 보호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산업 지역에서조차 실질적인 보호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베트남의 노동문제 전문가 안지 응옥 쩐 교수는 자신의 책 <결박(結縛) Ties That Bind>에서 한때는 진보적으로 유명했던 이 나라의 노동법이, 부분적으로는 미국상공회의소 같은 단체들의 로비로 물 타기 된 지 오래라고 설명한다. 국가가 후원하는 노조들은 약화됐고, 이 노조들은 파업을 조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외국인 투자와 국영기업 민영화의 방식으로 베트남에 들어온 투자가 급증함에 따라, 국가는 인민의 편에서 행동하는 정부의 모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국가 조직과 기관 일부는 자본가들과 연합하고 있다."
모든 노동자가 최저 임금을 보장받고 있다. 1990년 첫 도입 당시 최저 임금은 "생활 임금"에 맞는 수준에서 정해졌다. 생활필수품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 해가 흘러 외국 자본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정부는 최저 임금을 동결했고, 인플레이션은 최저 임금의 실질 가치를 떨어뜨렸다.
고삐 풀린 신자유주의로 가나
그 결과 2013년 4월에는 정부의 통제를 받는 노조가 최저 임금이 생활 필수 비용의 50%는 되어야 한다며 항의에 나서기도 했다. 노조연맹에 따르면, "도시 노동자 대부분은 극빈하고 육체적으로 쇠약한 상태다. 노동자들은 싸고 허름한 셋방에 살며, 생활비를 최저 수준으로 줄였다. 영양실조와 건강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이제 의료와 교육은 더 이상 무상이 아니다. 세계은행 보고서는 "소득이 기본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을 더 많이 결정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정부는 빈곤층을 위한 마을 보건소보다 부유층을 위한 병원에 훨씬 더 많은 재정을 지출했다.
베트남은 경제가 마비된 국가가 절대 아니다. 전쟁 복구는 거의 기적에 가깝다. 특히 영국같이 발전한 나라들에서 빈곤이 느는 동안 빈곤을 줄인 나라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두 체제에서 가장 나쁜 것인 권위주의 사회주의 국가와 고삐 풀린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마감되고 있다.
이 둘의 결합은 베트남 인민으로부터 돈과 권리를 박탈하면서 혁명의 수사 뒤에 숨은 극소수 엘리트의 주머니를 채우고 있다. 전쟁에선 승리했지만 평화에선 패배한 베트남의 지도자들이 사회주의자라는 주장은 속빈 선전에 불과해 보인다. 한 때 목숨을 걸었던 전직 게릴라가 한 말처럼 "그들은 붉은 자본가들이다."
영국 언론 <가디언>인터넷판 4월 22일자 닉 데이비스 기자가 쓴 인터넷판 기사, '베트남 40년: 공산주의의 승리는 어떻게 자본주의 부패에 굴복했나를 프레시안에서 소개함.
보수의 맨얼굴 "부패엔 의리가 없다15.4.23
창비 주간 논평] 보수의 의리에 대해 -김종엽 한신대학교 교수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진보는 분열로 망해도 보수는 부패로 망하지 않는다. 분열엔 의리가 없지만 부패엔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작가 박민규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쓴 글 '눈먼 자들의 국가'의 한 구절이다. 통찰력 깊은 말이다. 그는 익숙한 격언 뒤에 비대칭성이 숨어 있다는 것, 그래서 진보와 보수 사이의 천칭은 보수 쪽으로 기울어 있음을 명료하게 표현했다. 아마도 자신을 진보 편에 위치시키는 사람이라면 박민규의 말을 뼈아프게 받아들이지 않기 어려울 것이다. 나 또한 그랬고, 그래서 그의 말이 오래 머리에 남았다.
부패와 의리를 동일시한 이의 비극
그러다가 지난 9일 자살한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경향신문>과 한 마지막 인터뷰의 몇몇 구절에 눈길이 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거는 어느 나라나 정치 집단이라는 게 의리와 신뢰 속에서 서로, 어떨 때는 참 목숨까지 걸고서 정권 창출하잖아요. 신뢰를 지키는 게 정도 아닙니까. 우리나라도 앞으로 그렇게 돼야 되잖아요. 나는 내가 희생됨으로 해서 앞으로 의리와 신뢰를 지키는, 이거는 시장이 되고 정치권이 돼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의 이런 말과 그의 운명에 박민규의 말이 겹쳐 보였다.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듯이, 고(故) 성완종 회장은 초등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도급 순위 20위권 건설 회사의 회장이 되었을 뿐 아니라 비록 선거법 위반으로 직을 잃긴 했어도 국회의원까지 지냈던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고향인 충청을 기반으로 장학재단과 충청포럼을 운영했고 자민련에서 자유선진당을 거쳐 한나라당 그리고 지금의 새누리당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보수 세력의 중심에 이르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숱한 정치 자금을 보수 정치인들에게 뿌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보수의 의리 없음을 통탄하며 분노를 토로했고 마침내 목숨을 던져 의리 없는 이들의 이름을 알렸다. 부패엔 의리가 있는 거라면, 어째서 그의 운명이 그렇게 흘러갔는가?
성완종 회장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패엔 의리가 있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성회장의 인터뷰 전문을 읽다보면 그가 부패와 의리를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는 정치인에게 불법 정치 자금을 건낼 때, 돈으로 의리를 사고 있다고 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워낙 비자금과 부패의 온상이었던 건설업에서 잔뼈가 굵은 탓일 수 있다.
이유야 어쨌든 그에게는 불법 정치 자금, 비자금, 부패, 의리가 구별 없이 뒤섞여 있다. 도착적이지만 기이한 순진성, 부패를 의리와 연결할 수는 있지만 그 둘이 같은 것은 아니라는 인식의 결핍이야말로 그가 겪은 비극의 한 원인으로 보인다. 그는 죽기 전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집 주변을 배회했다고 한다. 그 배회는 아마도 돈을 주며 서로 좋은 말을 주고받는 것, 직통 전화로 통화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외양의 번듯함이 내면의 인간적 유대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라는 믿음의 쓸쓸한 서성거림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보수의 실체가 드러나다
부패와 의리 사이에 학벌과 혼맥과 지연과 문화적 습속과 가문의 유래를 매개로 매우 촘촘하고 복잡한 교직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 성 회장이 겪은 비극의 주관적 조건이라면, 다른 한쪽에 객관적 조건이 있다. 그것은 이런 복잡성으로 인해 보수 내부에 분절성이 생기고 그로 인해 경쟁과 갈등이 형성된다는 점이다.
성 회장은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친이계가 아니라 친박계임을 주장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두 가지를 시사한다. 하나는 보수 내부의 복잡성과 그로 인한 정보의 분절성 때문에 그의 불법 정치 자금이 어디로 얼마나 흘러들었는지 검찰도 정확히 모니터하지 못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보수 내부 갈등의 희생양이라는 점이다.
후자의 측면은 보수 내부의 경쟁과 갈등이 부패와 비리 네트워크의 가장자리에서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체제라는 점을 말해준다. 성 회장은 "현대중공업도 3조 이상 떨어냈고 GS건설도 한 1조 떨어내고, 현대엔지니어링도 1조 떨어내고, SK건설, 대림산업 다 그렇게 떨어냈거든요. 떨어냈는데, 그거를 다른 놈은 괜찮고 어째 우리만 그중에 제일 적은 우리만 왜 이렇게 하느냐 이거야" 하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그 이유는 자신이 말했듯이 "제일 적은" 탓이다.
그러니 보수의 의리란 영화 <타짜>에서 곽철용(김응수 분)이 고니(조승우 분)에게 자신이 잘나가는 비결에 대해 말했듯이 "잘난 놈 재끼고 못난 놈 보내"며 구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완구 총리가 사의를 표명했다. 필요하면 하나 더 재끼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패엔 의리가 있다. 하지만 부패와 의리의 네트워크는 분절적이고 위계적이며 갈등적이고 가장자리를 거리낌 없이 희생시키는 체제이다. 그러니 보수와 진보의 천칭은 박민규가 생각한 만큼 기울어져 있다고 할 수 없다. 저울이 진보의 방향으로 기울지는 진보 자신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진보주의자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자란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자원을 하나로 응집하는 것이 결정적 중요성을 가지며,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노선'의 경쟁이 생겨난다. 하지만 옳음을 향한 열정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자기 확신에 대한 겸손한 성찰을 초과하게 되면 분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아마도 가장 가련한 보수주의자가 부패와 의리를 동일시하는 자라면, 가장 가련한 진보주의자는 자신의 옳음 자체를 탐닉하는 자일 것이다.
귀신섬’ 청년들이 만들어낸 총통 2.1 시사인
차이잉원의 압승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관심은 입법원 선거에 쏠렸다. 민진당이 창당 30년 만에 처음으로 단독 과반 의석을 확보했고, 해바라기 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이 만든 ‘시대역량’도 제3당으로 도약했다.
2016년 1월14일, 총통·입법원 동시선거를 이틀 앞둔 타이베이 분위기는 차분했다. 선거 전 발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가 한몫했다. 조사기관마다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후보의 압승이 예상됐다. 선거 1주일 전, 9개 기관의 마지막 여론조사 평균치는 차이잉원 지지도가 44.09%로 나타나, 19.98%에 그친 국민당 주리룬(朱立倫) 후보를 24.11%포인트 차로 멀찌감치 따돌렸다. 친민당 쑹추위(宋楚瑜) 후보가 완주 의사를 밝혀, 선거 판도를 흔들 마지막 변수인 국민·친민 후보 단일화 가능성도 사라졌다. 돌발 변수가 있다면 ‘쯔위 사건’ 정도였다.
따라서 총통 선거와 동시에 치러지는 입법원(立法院) 선거에 모든 관심이 쏠렸다. ‘견제할 수 있는 힘을 달라’며 지지를 호소하는 국민당과 ‘과반 의석을 주어 제대로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민진당의 선거 구호가 맞붙었다. 친민당, 신당, 타이완 단결연맹 등 군소 정당과 더불어 시대역량, 민국당 등 신생 정당도 가세해 지지를 호소했다. 어느 정당이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어느 정당이 원내에 진입할지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개표 결과 차이잉원은 689만4767표(56.12%)를 얻어 381만3365표(31.04%)에 그친 주리룬을 더블스코어에 가깝게 이기며 타이완의 첫 여성 총통이 되었다.
중앙선거위원회의 당선 공식 발표와 동시에 타이완 <빈과일보(蘋果日報·핑궈르바오)>는 ‘첫 화인(華人) 여총통 차이잉원 광승(狂勝)’ ‘민진당 완전 집정(執政)’이라는 표제의 호외판을 배포했다. 당선 직후 ‘총통 당선자’ 신분으로 내·외신 기자회견장에 선 차이잉원은 ‘국가 단결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하며, ‘분열된 국론 통합’을 주문했다. 같은 시각 국민당 중앙당사에서는 주리룬이 “선거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당 주석직에서 사퇴한다”라고 밝혔다. 그가 거듭 고개 숙이며 반복한 말은 ‘두이부치(對不起:죄송합니다)’와 ‘책임’이었다.
ⓒAP Photo1월16일 타이베이에서 차이잉원 타이완 총통 당선자가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상대 진영 분열 속에 단독 과반 의석 확보
‘이변은 없었다’로 요약되는 총통 선거 결과였지만, 민진당은 예상보다 많이 얻었고 국민당은 많이 잃은 것으로 평가된다. 국민당은 22개 광역지방자치단체 가운데 동부 화롄(花蓮)·타이둥(臺東)현, 중국 접경 지역인 진먼(金門)·롄장(連江)현 등 4개 현을 제외한 6개 직할시, 9개 현, 3개 시에서 모두 패했다. 입법원 선거에서도 국민당은 64석에서 35석으로 줄어든 반면, 민진당은 40석에서 68석으로 늘어나, 창당 30년 만에 첫 단독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현직 신베이(新北) 시장 주리룬은 신베이 시에서도 차이잉원에게 20.79% 차이로 패했고, 입법원 선거에서도 져서 국민당 의석이 종전 10석에서 2석으로 줄어들었다. 그가 ‘두이부치’와 ‘책임’을 거듭 말하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다.
익명을 요구한 타이완 중앙부처의 한 공무원은 선거 결과를 두고 “국민당은 단결해서 선거를 치르지 않았다. 선거운동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주리룬은 시장직 사퇴라도 하는 결기를 보였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민진당이 잘해서라기보다 국민당이 너무 못해서 진 선거다”라고 평했다.
사실 국민당이 옐로카드를 받은 것은 2014년 지방선거부터다. 국민당은 22개 광역지방자치단체장 중 6석을 얻는 데 그친 반면, 민진당은 13석을 얻었고, 3석은 무소속 후보에게 돌아갔다. 그중 수도 타이베이 시장을 무소속 커원저(柯文哲)에게 내준 것은 이번 선거 패배를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당시 6대 직할시장 중 주리룬만이 힘겹게 승리해 체면치레를 했을 뿐이다.
ⓒAFP 주리룬을 비롯한 국민당 관계자들이 선거 참패와 관련해 지지자들에게 허리 굽혀 사과하고 있다.
유례없는 지방선거 대패 후 국민당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마잉주 주석을 비롯해 당 지도부가 일괄 사퇴했다. 차기 총통·입법원 선거를 지휘해야 할 집권당 주석직은 아무도 원치 않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결국 국민당 참패 속에서 유일하게 광역단체장 연임에 성공한 ‘선거의 왕자’ 주리룬이 ‘등 떠밀려’ 주석이 되었다.
그런데 패배의 먹구름이 짙게 깔린 국민당에서 아무도 총통 선거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주리룬은 ‘신베이 시민들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며 몸을 사렸다. 우둔이(吳敦義) 부총통, 왕진핑(王金平) 입법원장도 손사래를 쳤다. 하오룽빈(郝龍斌)은 타이베이 시장 선거 대패로 정치 생명에 치명상을 입고 차기 대권주자 대열에서 멀어졌다.
‘집권당 총통 후보 부재’의 혼란 속에서 차이잉원에 맞설 후보로 나선 인물은 8선 관록의 훙슈주(洪秀柱) 입법원 부원장이었다. 그녀는 ‘국민당 남자들’이 뒤로 나앉을 때, 당을 구하기 위해 출사표를 던졌다. 홍슈주는 당 부주석 자리에 있었지만, 당내 비주류였다. 집안 배경과 ‘가방끈’을 중요시하는 타이완의 정치 풍토도 입지를 좁혔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간급 사립대학인 중국문화대학과 미국 트루먼 주립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후 학교 ‘훈도(訓導)’로 일하다 정계에 입문한 그녀는 국민당 주류와 주 지지층의 외면을 받았다. 더욱이 상대 후보는 이른바 ‘엄친딸’.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국립 타이완 대학과 미국 코넬 대학을 거쳐 런던 정치경제대학(LSE)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차이잉원과 그녀는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홍슈주는 질 게 뻔히 보이는 선거에서 ‘버리는 카드’로 치부되었다. 실제 후보 선출 뒤 지지율 답보 상태가 지속되었고, 차이잉원의 압승은 시간문제로 비쳐졌다. 초조해진 국민당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선거를 3개월 앞둔 2015년 10월17일 주리룬으로 ‘선수 교체’를 단행한 것이다. 국민당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내우 속에서 외환도 생겼다. 친민당 주석 쑹추위가 선거전에 뛰어든 것이다. 친민당 창당 전 국민당의 비서장 등을 역임한 그의 출마는 국민당 지지표 분산을 불렀다. 차이잉원의 당선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AP Photo 1월14일 차이잉원의 선거 구호 ‘Light Up Taiwan’이 적힌 카드를 들고 환호하는 지지자들.
상대 진영의 분열 속에서 손쉽게 당선되고, 보너스로 첫 입법원 과반 의석까지 얻은 차이잉원은 4년 전 현 마잉주(馬英九) 총통에게 6%포인트 차이로, 6년 전 주리룬에게 5%포인트 차이로 패배한 것을 설욕했고, 5월 총통부 입성을 앞두고 있다. 이런 그녀에게서 8년 전 마잉주의 모습이 묘하게 겹친다. 천수이볜(陳水扁)의 민진당 8년 집권 기간에 경제성장률은 추락했고, 양안관계를 비롯한 대외 관계 악화 속에서 타이완의 처지는 더욱 외로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천수이볜과 일가족, 측근들의 부정부패까지 더해져 민진당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이 심각했다. 2008년 3월 국민당의 마잉주는 ‘타이완판 잃어버린 8년 심판’을 외치며 58.45% 득표를 얻어 압승했다. 같은 해 1월 총선에서 국민당은 원내 과반을 훨씬 넘긴 81석(친민당, 신당 연합공천 포함)을 얻어 입법부를 장악한 상태였다. 국민들은 타이완을 구해줄 ‘히어로’를 원하고 있었고, 준수한 외모에 하버드 로스쿨 박사, 법무부장, 타이베이 시장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커리어에 소탈한 매력까지 더한 마잉주가 적임자로 비쳐졌다.
그러나 마잉주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집권 1년여 뒤인 2009년 여름 타이완을 강타한 태풍 모라꼿에 소극 대응했다는 이유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내세운 경제회생은 쉽지 않았고,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으로 대표되는 양안관계 개선 문제도 ‘지나치게 친중국적’이라는 질타를 받았다. 2012년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남은 4년은 더욱 힘들었다. 급기야 2014년 양안 간 서비스·무역개방협정 체결에 항의하는 학생시위대가 입법원을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다 ‘마잉주와 국민당 심판’을 원하는 여론이 압도적인 지지로 차이잉원을 선택한 것이다.
차이잉원의 압도적 승리 배경에 대해 한인희 건국대 KU중국연구원 원장은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국민당은 집권 기간 부동산 가격 상승을 방치했고, 이는 20~30대의 민심 이반을 낳았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도 문제다. 그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고 중국도 조급함을 드러내었기에, 자칫 타이완이 중국에 흡수되는 것 아니냐는 타이완 국민들의 우려를 낳았다.”
실제로 오늘날의 타이완 국민, 그중에서도 ‘딸기족(草莓族)’이라 불리는 젊은 세대가 처한 현실은 암담하다. 수년 전 타이완판 ‘88만원 세대’인 ‘2만2000원 세대’라 불리던 이들은 이제는 ‘헬조선’에 비견되는 ‘귀도(鬼島:귀신섬) 타이완’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현실에 분노하고 있다. ‘중국인’이 아닌 ‘타이완인’으로서 의식이 강한 이들은 마잉주 정부의 대중국 정책에도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이번 선거에서 차이잉원과 민진당 그리고 2014년 ‘해바라기 운동’을 주도한 학생운동 리더들이 만든 신생 정당 ‘시대역량’에 표를 던졌다. 그 결과 민진당은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했고, 시대역량은 5석을 얻으며 원내 제3당으로 도약했다. ‘귀도 타이완’을 구해줄 새로운 주인공으로 차이잉원을 택한 것이다. 다만 4개월 뒤 ‘당선자’ 꼬리표를 뗄 그녀가 마주할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대중국 무역 의존도 40%, 양안관계 난제
우선 경제 문제다. 글로벌 경기 침체 속에서 대외무역 의존도가 높은 타이완 경제의 회생은 누가 총통이 되든 쉽지 않은 문제다. 마잉주 정부의 몰락을 불러온 경제 문제는 차이잉원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겨준 주요인이 되었지만, 언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타이완의 생존과 직결된 양안관계도 변수다. 이른바 ‘천수이볜 학습효과’로 후보 시절 양안관계 ‘현상 유지’를 표방하며 모호한 태도를 취해온 차이잉원은 총통으로 취임하는 순간부터 명확한 입장 표명과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대중국 무역 의존도가 40%에 달하는 현실에서 어떤 선택도 쉽지 않다.
민진당 당내 문제도 만만치 않다. 파벌은 민진당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어왔다. 차이잉원은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당 주석과 총통이 되었지만, 당내 입지는 취약한 편이다. 벌써부터 라이칭더(賴慶德) 타이난(臺南) 시장 등은 ‘행정수도 이전’을 요구하며, 당선자를 머리 아프게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차이잉원 당선자가 해결해야 할 난제는 산적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타이완 국민들이 지나치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점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첫 여성 총통 차이잉원은 ‘귀도 타이완’을 구원할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사라진 아이들 어디로 갔나 1.28 시사저널
장기결석·실종 아동 실태, ‘장기 밀매 조직이 납치했다’ 흉흉한 소문도
경기도 부천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아들 시신 훼손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아버지 A씨는 2012년 11월7일 저녁 안방에서 아들 B군(사망 당시 7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엎드리게 한 뒤 얼굴을 발로 차는 등 2시간여 동안 폭행하고, 다음 날 아들이 죽자 집 부엌에 있던 흉기로 시신을 훼손해 집과 외부에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B군을 구출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는 점이다. B군은 3년 넘게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연락도 없이 무단으로 장기 결석을 한 것인데, 이에 대해 적극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관련 기관들이 책임 떠넘기기를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1월18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실종아동찾기협회 사무실에 실종 아동을 찾는 전단지가 붙어 있다. ⓒ 연합뉴스
지난해 실종 아동 3만7522명 중 348명 못 찾아
이번 사건으로 논란이 일자 장기 결석 아동이 얼마나 되고 이들 중 실종 상태인 아동은 얼마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찰청 내부 행정 자료에 따르면, 2014년 실종 아동 수는 3만7522명으로 이들 중 3만7174명이 보호자에게 인계됐고 나머지 348명은 발견하지 못했다.
실종 아동 수만 놓고 보면 2011년 4만3080명, 2012년 4만2169명, 2013년 3만8695명으로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2012년 2월 실종아동법 개정으로 도입된 ‘지문 등 사전등록제’와 ‘위치추적제’를 실시하면서 실종 아동 발생률이 하락세로 전환됐다는 게 경찰청의 분석이다.
반면 발견되지 않은 아동 수는 2011년 75명, 2012년 158명, 2013년 227명으로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경찰청은 2013년 6월 실종아동법 개정 때 보호 대상을 기존의 14세 미만에서 18세 미만으로 확대하면서 발생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단순 가출 건수가 실종 아동 사건으로 편입됐다는 것이다.
경찰의 이 같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사라진 아이가 적지 않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며 학교에도 가지 못한 B군 역시 사라진 아이들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에서 아버지와 동거녀의 학대에 시달리다 가까스로 집을 빠져나온 C양(11세)도 마찬가지다. C양 역시 장기간 무단결석 상태였다. 그대로 방치됐으면 생명이 위태로웠을 수도 있다.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시민의모임(전미찾모)에 따르면, 자신의 아이를 유기해놓고 주변 시선을 의식해 허위 신고를 하는 경우는 예전에도 가끔 있어왔다. 부모가 별거 중이라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던 D군(당시 4세) 사례가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D군이 사라진 건 2006년 10월이다. 명절에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아이 고모부가 “D를 왜 안 데려왔느냐”고 묻자 아버지는 “어디서 잘 크겠죠”라고 엉뚱한 말을 했다. 친지들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따져들자 아버지는 “얼마 전에 잃어버렸는데 보호시설에서 잘 크겠죠”라며 마치 남의 일 말하듯 했다.
D군 아버지는 인근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했다. 아이가 피자를 사달라고 해서 차에 잠시 두고 내렸는데 갔다 와보니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찰 수사 결과 이는 허위인 것으로 드러났다. 사실은 이랬다. D군 어머니가 아파서 입원해 있다는 연락을 받은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일이 터졌다.
바깥 날씨가 한창 쌀쌀해질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아이가 칭얼대니까 버릇을 고친다며 한 공항 정문에 아이를 내려놓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15분쯤 후에 찾으러 돌아갔는데 아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는 것이다. 경찰이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고 어머니가 몇 년을 돌아다니며 찾았지만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들 버린 아버지 경찰에 허위 신고
나주봉 전미찾모 회장은 당시 아이가 사라진 공항 인근은 물론 성남과 횡성 일대를 뒤지고 다녔다고 회상했다. 왜 그랬을까. 그가 들려준 사연은 이렇다. D군의 할아버지는 재산이 수백억 원에 이르는 지역 유지였다. 특히 성남에 30여 만평, 횡성에 12여 만평의 부동산을 보유한 땅 부자였다. 만약 아버지가 아이를 죽여서 묻었다면 언제 파헤쳐질지 모르는 남의 땅이 아닌 자신이 물려받을 땅에 묻지 않았겠느냐는 판단을 한 것이다.
아버지가 평소 폭력적이었다는 증언도 나와 관할 소방서의 도움까지 받으며 수색 작업을 펼쳤다. 사고가 있기 전 가족이 차를 타고 이동할 때였다. 아버지가 운전을 난폭하게 하자 어머니가 “아이도 타고 있으니까 운전 좀 천천히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앞선 차를 고의로 들이박고는 차문을 열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뿐만이 아니다. 평소 어머니가 전화를 두세 번 안 받으면 욕설에 주먹질까지 했다고 한다. D군 실종과 관련해 아동유기죄로 기소된 아버지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00년대 초 5월5일 어린이날에 어린이대공원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인근 하수도 맨홀까지 들춰내며 다 뒤졌지만 결국 아이를 찾지 못했다. 몇 년 후 경찰이 DNA 조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실종 아동 부모의 DNA와 시설에 있는 아이의 DNA를 대조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DNA 채취를 거부했다. 설득 끝에 DNA를 채취해 조사한 결과, 아이가 한 시설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위로 언니가 두 명인 이 아이는 선천적으로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한 종교시설 앞에 아이를 몰래 버려두고 왔던 것이다. 미아 찾기 전단에는 언니 사진을 등록해 올려놓기도 했다. 아버지는 경찰의 계속된 추궁에 범행을 자백했지만 아동유기죄의 공소시효인 3년이 이미 지난 상태여서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친부모가 아이를 유기시키는 일은 아주 가끔 있는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때문에 슬픔을 채 떨치지 못한 대다수 실종 아동의 부모들이 남모르게 눈물을 또 흘려야 한다.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늘 따뜻하지만은 않다. 적게는 몇 달, 많게는 몇 십 년 동안 하던 일까지 내팽개친 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아이를 찾고 있는 이들 부모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도 적지 않다.
실종 아동 부모들은 10년이 되든 20년이 되든 아이를 한 번 만나게만 해달라고 기도한다. 생사라도 확인할 수 있다면 이처럼 애타게 찾지는 않을 것이다. 관련법이 개정되고 경찰 수사 기법이 향상되면서 실종 아동 대다수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동 실종 신고가 되면 두 시간 안에 80%, 이틀 안에 90%가 발견된다고 한다. 신고가 들어온 지 48시간이 지나면 장기 실종자로 구분되는데 전체 실종 아동과 비교하면 극소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부모에게로 돌아오지 않은 아이들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실종자를 찾아내기 점점 더 힘들어진다. 아이들의 경우 성인보다 납치 등 강력범죄에 더 많이 노출돼 있다. 장애인의 경우 그 위험이 더 크다. 단순 가출로 보기도 어렵다. 2014년 미발견 실종 아동 348명 중 장애인은 74명으로 21%를 차지하고 있다.
예전부터 실종 아동 찾기에 나선 사람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 하나가 나돌았다. 장기 밀매 조직이 아이들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E군(당시 11세)의 어머니가 1997년 1월 아들을 잃어버렸다고 신고했다. E군은 자폐증을 앓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사회성을 기르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아이를 봐주던 아르바이트생이 잠시 물을 뜨러 간 사이 신발까지 벗어놓은 채 감쪽같이 사라졌다.
1월21일 나주봉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시민의모임 회장이 실종 아동 발생 현황과 관련 대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장기 밀매 조직 암거래 있을 것으로 확신”
어머니는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E군을 찾았다. 지방의 한 장애인시설에 전단지를 돌리려고 갔을 때다. 한 아주머니가 “애를 잃어버렸느냐”고 묻기에 “예”라고 대답하자 “우리 애도 잃어버렸다가 겨우 찾았다”고 말했다. 이후 아주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아주머니의 아이도 자폐증이 있었다. 19세이기는 했지만 가족 이외에는 의사소통이 잘 안 됐다. 아이를 잃은 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자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포기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무렵 거지꼴을 한 아이가 집 앞에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잃어버렸던 아들이었다. 집으로 들어가 몸부터 씻겼는데 배에 전에 없던 수술 자국이 있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한쪽 신장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에 돌아온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고 더 이상 문제 삼지 말자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경찰에 신고할 경우 또 다른 해코지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야기를 들은 E군 어머니는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E군은 아직까지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주봉 회장은 “장기 밀매 조직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장기 이식을 바라는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늘 부족하다. 아이 한 명을 데려가면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장애아들의 장기가 더 건강하다는 말까지 있다. 현재 실종됐다가 발견되지 않은 아이들 상당수가 장애아들이다. 시설에서 보호하고 있다면 찾지 못할 이유가 없다. 분명 장기 밀매 조직의 암거래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경찰청과 보건복지부 등으로 분리돼 있는 실종 아동 관련 업무를 한 곳으로 집중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하자는 것이다. 특히 장기 실종자를 찾기 위해서는 고도의 수사 기법과 축적된 노하우가 중요하다. 실종 아동은 반드시 찾아낸다는 신뢰를 주는 게 범죄 예방에도 큰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더 이상 반복돼서는 안 된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는 노후 전략 2.3 머니워크
안정적인 노후준비의 첫걸음은 수입과 지출의 흐름을 관리하는 것이다. 은퇴 전 소득과 지출의 차이를 적절히 조절하면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현금흐름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생애별 자산관리 전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20~30대: 눈덩이 효과 극대화 전략 세우기
눈덩이효과는 작은 눈덩이가 굴러 커지듯 종잣돈이 쌓여 커지는 것을 말한다. 20~30대는 종잣돈 마련이 중요하다. 굴러가는 눈덩이를 만들어두면 오랜기간 투자 시 복리효과로 인해 큰 자산을 형성할 수 있다. 복리효과를 얻기 위해선 기간, 금액, 수익률 등 3가지 조건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 눈덩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굴러가는 눈덩이, 종잣돈을 만들고 눈덩이가 잘 굴러갈 수 있는 적당한 기울기, 즉 투자수익률과 장애물을 피할 수 있는 분산투자가 중요하다.
◆40대: 보장자산 준비할 것
40대는 자녀 교육자금이나 주택 마련 등의 재무목표와 균형을 고려한 노후준비를 계획해야 한다. 또한 보장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 연금관리와 보장자산 관리가 중요하다. 연금분석을 통해 자산이 부족하면 가입액을 늘리고 은퇴 생활비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의료비와 간병비용의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40대는 투자할 기간이 남아있는 시기이므로 투자위험이 다소 높더라도 주식형·채권형펀드 등에 투자하고 투자지역도 글로벌 차원으로 넓히는 것을 고려할 만하다.
◆50대: 은퇴 크레바스 대비해야
은퇴 크레바스는 은퇴 후 연금수급 개시시점까지의 소득 공백기를 말한다. 최근 국민연금 수령 개시 연령이 늦어지는 반면 은퇴연령은 앞당겨지면서 은퇴 후 소득 공백기간이 더 길어지고 있다. 50대는 자녀학자금, 결혼자금 등 지출이 가장 많은 시기다. 퇴직시기가 얼마나 남았는지에 따라 투자전략을 달리해야 한다. 퇴직이 5년 이상 남았다면 세액공제, 과세이연, 저율 과세 등 절세효과와 분산투자 효과가 뛰어나고 5년 이상 납입하면 55세부터 연금으로 수령할 수 있는 연금저축펀드와 적립 IRP에 가입하는 것이 좋다.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퇴직금을 활용한 퇴직IRP 연금 수령이나 즉시연금을 고려할 수 있다.
◆60대: 고정수입 인출할 수 있는 전략 필요
60대는 은퇴 후 생활할 수 있는 고정수입이 필요하다. 따라서 축적한 자금이 은퇴기간 동안 고갈되지 않도록 효율적인 인출전략을 세워야 한다. 대표적으로 정기적 현금흐름이 이어질 수 있는 연금화 전략과 부동산 유동화 전략이다. 연금화 전략은 연금소득 대체율을 높이는 것이다. 이는 은퇴 전 소득 대비 은퇴 후 받는 연금수령액의 대체수준을 파악하는 지표로 주요 국제기구가 권장하는 연금소득 대체율은 70~80% 수준이다. 은퇴시점에 연금소득이 부족하다면 예금이나 펀드자산을 즉시연금이나 월지급식 펀드로 옮겨 연금소득 대체율을 높이는 전략이 필요하다. 또 주택의 규모를 줄이거나 지역을 이전하는 등의 방법으로 가계자산에서 부동산 비중을 줄이고 금융자산을 늘리거나 주택연금으로 유동성을 확보하고 노후소득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박근혜-아베 대화록 공개하면 국익 침해? 2.5 미디어오늘
"위안부 문제 1965년에 이미 해결" 발언에 뭐라 답변했나… 정보공개 청구에 거부, 이의신청에도 묵묵부답
청와대가 한일 정상회담 발언록을 공개하라는 요구에 정보공개법까지 위반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아베 일본 총리가 위안부 문제는 지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며 이를 회담에서 분명히 했다고 밝혔지만 정부는 이에 대한 진실을 밝혀줄 발언록을 꽁꽁 숨기는 모습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은 지난 18일 청와대에 한일 정상회담 발언록 공개를 청구한 바 있다.
일본 외무성이 누리집을 통해 한일 정상 발언을 공개하면서 이에 대해 대응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누리집에 공개된 발언록에는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해결됐다는 일본의 입장은 변함이 없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 같은 내용을 발언했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와의 전화 회담 내용이 담긴 보도자료에서는 이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지 않다.
민변은 아베 총리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박 대통령이 어떤 답변을 했는지에 따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응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해 정보공개를 청구했다.하지만 청와대는 지난 27일 국익을 침해할 현저히 우려가 있다는 사유를 들어 비공개 결정을 해버렸다.
민변은 이에 곧바로 이의 신청을 청와대에 접수했다. 정보공개법 13조 3항에 따르면 이의신청을 받은 날로부터 7일 이내에 결정 여부를 재통지하도록 규정돼 있다. 일주일 기간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도 일주일 범위 안에 기간을 연장하는 통지가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의신청을 한 날로부터 일주일 뒤인 지난 4일까지도 어떤 통보를 해오지 않았다고 민변은 전했다. 청와대가 앞장서 법률을 위반한 것이다.
민변은 "정상회담 발언록을 모두 공개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베의 문제의 발언에 대한 박 대통령의 답변만을 공개할 것을 청구한 것"이라며 "더 이상 위안부 전시 성노예 문제 법적 책임과 강제성 논란의 소지가 없도록 신속한 공개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 지난 11월2일 정상회담 당시 방명록에 서명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진=청와대
민변은 아베 총리의 발언은 일본의 법적 책임을 부인하는 내용이고 이를 일방적으로 공개한 이상 한국 역시 진실을 가리기 위해 상호적으로 공개하는 것이 국익을 지킬 수 있다는 입장이다.
아베 총리의 발언이 공개된 이후 위안부 합의가 폐기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아베 총리는 지난 18일 의회에서도 "위안부를 강제연행한 증거가 없다"고 말하는 등 위안부 문제 합의 파기에 가까운 발언을 연달아 내놨다. 하지만 정부는 "지금 중요한 것은 합의 사항을 이행할 수 이는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에 저해되는 언행을 삼가는 것이 중요하다"(조준혁 외교부 대변인)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혀 소극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지금이라도 합의 파기와 가까운 언행을 막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한일 정상의 발언록을 공개해 진실공방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지적이 높은 이유다.
나라 팔아 먹었을 때도 이상한 엄마들이 나섰지 1.26 시사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국민 정서를 거스르는 수구 시민단체가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단체들이 생긴 건 아니다. 일제시대 친일 단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의 원조 격이라 할 만하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여성에게 어머니·노동자·창부의 역할을 요구했다.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는 조선 어머니는 전쟁의 큰 장애물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여성들에게 ‘군국의 어머니가 되자’는 선전전을 전개했다. 자식을 나라에 바치는 것이 영광이라는 작품이 쏟아졌다. <원술의 출정>(이광수), <군국의 어머니>(박태원), <일본의 어머니>(김상덕), <여인전기>(채만식) 등.
당대 여성 문인이나 교육자들의 홍보도 활발했다. 모윤숙·노천명 등 여성 문인들이 강연에 나섰고, 언론에 기고했다. 소설가 최정희는 전시 동원을 미화하는 소설 <환상의 병사> <여명> 등을 냈다.
무엇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시각을 대변하는 여성 관변 단체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일제 때 관이 못하는 일을 주로 ‘애국’ ‘부인’ 등이 붙은 친일 단체가 대신하게 했다. 일본을 이해하자거나 여성을 정신대에 보내자는 일에 친일 여성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라고 말했다.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려 일본 총독에게 바친 ‘애국금차봉납도’(왼쪽). 위는 1940년 경성가정의숙(현 중앙여고) 교직원 사진. 제자를 정신대에 보낸 교장 황신덕(앞줄 오른쪽 두 번째)은 광복 후 이승만 정부의 관선 대변인을 맡았다.
1906년 설립된 ‘애국부인회’는 조선의 최대 여성 단체로, 1942년에는 가입 회원만 46만명에 이르렀다. 주로 군인 영접, 위문금 모집, 발모 헌납, 폐품 회수, 저금 장려 등에 앞장섰다. 정신 개조 운동 격인 정신동원운동에 주력하기도 했다. 애국부인회는 만주사변 이후 박차를 가해 소녀들까지도 전쟁에 동원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애국자녀단’이 탄생했다.
1937년에는 일제에 부역한 친일 귀족의 부인들과 중견 여류 인사들이 중심이 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가 발족했다. 금차는 금비녀를 뜻한다. 서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열린 발족식에서 “우리가 애용하는 금비녀야말로 이 초비상시의 국가를 위해서 바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연설이 나왔다. 즉석에서 금비녀 11개, 금반지 3개, 금귀이개 2개, 은비녀 1개와 현금 889원90전이 모였다. 이 장면을 본 대표적인 친일 화가 김은호가 애국금차봉납도를 그려 일본 총독에게 바쳤다고 한다.
애국금차회는 군인 환·송영, 군인 가정의 위문·조문 격려, 국방비 헌납 등을 목적으로 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대변하고 옹호하는 것이 그들의 몫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가 애국금차회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고, 김활란·송금선(덕성여대 설립자) 등이 중추적으로 활동했다. 이화여대 총장과 이사장을 지낸 김활란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친일 여성이었다. 각종 친일 단체의 간부로서 강연·방송 등에서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선전했다. 특히 여성들에게 전쟁에 적극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여러 친일 단체를 이끌었던 김활란(왼쪽)이 1961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만났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 놓고! 뒷일의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질 것이다.”(‘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 “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 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
1938년 김활란은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학생 400명을 ‘전쟁을 내조한다’는 명분으로 애국자녀단에 가입시켰다. 그뿐 아니라 김활란은 조선부인연구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조선언론보국회 등 다양한 친일 단체를 이끌었다. 김활란의 막강한 위세는 광복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친미파로 거듭난 김활란은 정치권력과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광복 후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했고, 1961년까지 재임했다. 1948년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제1공화국 공보처장을 지냈다.
1942년 전쟁에 따른 일본의 인적·물적 손실을 조선에서 보충하자는 부인 단체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했다.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에는 김활란·모윤숙·박인덕 등이 여성 평의원으로 참가했다. 이 단체에서는 황신덕이 중추적 역할을 했다. 황신덕은 중앙여고 교장 시절 눈물로 호소해 제자를 정신대에 보낸 인물이다. 스승의 눈물에 감동한 제자 김금진은 교장실을 찾아갔고, 곧바로 정신대에 끌려갔다고 한다. 일장기를 머리에 두른 김금진이 황신덕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과 찍은 기념사진이 남아 있다. 황신덕은 여러 친일 단체에서 중책을 맡았고, 시국강연 연사로 활약했다. 광복 후, 황신덕은 이승만 과도 임시정부 입법위원으로 인연을 맺어 정부의 관선 대변인을 맡았다. 1983년 죽을 때까지 추계학원 이사장으로서 교육계와 여성계의 원로로 활동했다.
ⓒ길바닥저널리스트 박훈규 1월4일 엄마부대 등이 정대협 사무실 앞에서 ‘12·28 위안부 합의’ 수용을 요구하고 있다.
“자리 얻으려고 친일 행위 하는 사람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일제 식민지 시절의 여성 단체들이 조선 여성들에게 가장 악한 일을 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정신대 합의 문제에서 보듯이 친일의 그림자는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드리워져 있다”라고 말했다.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주로 친일 귀족들이 고관대작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친일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고, 현재는 자리를 얻으려고 친일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일본과의 위안부 협상이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는 가운데 피해 할머니들과 국민 정서를 거스르는 수구 시민단체가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탈북어버이연합 등은 1월13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해체를 주장하는 집회를 열었다. ‘어버이연합’은 “정대협 지도부는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고, 북한을 찬양하는 세력이 철저히 장악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엄마부대봉사단은 “일본을 이해하고 용서하자” “내 딸이 위안부였어도 일본을 용서할 것이다” 따위 주장을 폈다. 엄마부대봉사단 주옥순 대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회에서 불러준다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갈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agles -Lyin`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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