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24.11.1~30 ‘윤석열’이 ‘이재명’을 살릴 것이다

by 이성근 2024. 12. 1.

1. 도둑맞은 가난, 도둑맞은 민주주의 2. 경제 망쳐놓고 이번엔 전쟁놀이라니 3. 클라우제비츠, 바보 이반, 전쟁 비즈니스 4. ‘K컬처라는 아이러니 5. 농단'이 부른 탄핵, 그 불길한 징후들 6. 무자격자가 언급한 대통령의 자격 7. 안보'마저 무능한 대통령이 '전쟁광' 참모들에 둘러싸여 있다면? 8“전쟁이 온다” 9. 북한군 포로 데려온다고? 김칫국 마시는 윤정부 10. 한은이 뒤흔든 능력주의신화

11. 하여튼'66번 대통령의 기자회견, '김건희 프로젝트' 3탄이었나 12. 조은산 님을 찾습니다 13. 일상의 노동 없는 자칭 '도사'들은 다 사기꾼 14. 정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싸우는 것이 정의다 15. 세금통계 앞 월급쟁이는 털 뽑히는느낌이 든다 16. 또다른 승자 머스크의 등장, '세계전쟁'보다 더 예의주시할 섬뜩한 변화다 17. 트럼피즘의 유령 18.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낸다고? 정말로? 19. 미 대선 투표장서 사라진 민주당 지지자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20. 문학이 하는 일, 슬픔에 귀를 여는 것

21.‘윤석열이재명을 살릴 것이다 22. 한동훈, 정신승리는 이제 그만 23. 이념에 절고 전략에 찌든 24. 양자역학과 마음의 혁명 25. 대통령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26. ‘인류 클럽에 속해 있다는 부끄러움 27. 이재명의 위기 28. 저성장 시대, 행복한 후퇴 전략이 필요하다 29. 연대인가, 외부세력 개입인가 30. 이재명 죽이기

31. 윤 정부의 '건설업체 살리기', 업자만 배불리고 노동자는 빚으로 버틴다 32. 지역에서 연결될 권리 33. 그늘에 가려진 정책, 평생교육 34. 트럼프의 재등장과 기후변화 서사 35. 나랏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 36. 금투세 좌절, 민주당이 책임져야 한다 37. 사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38. 포퓰리즘마저 포획된 사회 39. 종교와 초월성 40. 법이 타락하는 세 가지 방식

41. “옆방에 있어 줄래?” 42. 고작 20% 지지율에 취한 윤 대통령의 취생몽사 43. 콜로세움의 막시무스처럼진보정치, 보통사람 마음을 얻어라” 44. ‘도덕적 우월감은 독약이다 45. 무너진 언덕 위의 도시와 더러운 위기’ 46.나라 망하게 하는 '육사신' 포진한 용산, 윤 대통령이 문제다 47. 검찰 독재를 생각하며 48. 종이교과서로 회귀하는 북유럽 49. 시국선언을 다시 읽으며 50. 우크라이나 전쟁발 가짜뉴스에 돈 내야 할 한국

51.낡은' 무기로는 할 게 없다? 틈새를 열려는 노력은 여전하다 52.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53. 지역소멸의 위기탈출 넘버원’ 54.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사람들 55. 37년 전, 8년 전, 그리고 지금 거리의 정치’ 56. 다시 한번 민주주의의 승리를 기약할 순간 57. 청년들이 우울한 나라는 미래가 없다 58. 대통령 윤석열의 가벼움 59. 윤석열 대통령의 휴대전화가 무섭다

 

도둑맞은 가난, 도둑맞은 민주주의

박완서(1931~2011) 작가의 1975년 단편소설에 도둑맞은 가난이 있다. 가난을 도둑맞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가난이 사라졌다면 차라리 잘 된 일 아닌가

부자의 가난 체험 활동에 상처받은 박완서 소설의 여주인공

가난을 도둑맞은 주인공은 공장에서 일하는 앳된 여성이다. 원래 중산층이었는데 아버지의 실직과 허영심 많은 엄마 탓에 집안이 몰락했다. 차라리 죽기보다 빈민촌 가난의 냄새를 더 싫어한 어머니가 느닷없이 아버지와 오빠랑 동반자살 하는 바람에 고아가 됐다

여공이 되어 밑바닥 생활을 하는 주인공은 그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거부한 가난을 내가 지금 얼마나 친근하게 동반하고 있나에 나는 뭉클하니 뜨거운 쾌감을 느꼈다.” 이렇게 가난한 삶을 기꺼이 사랑하며 성실히 살던 주인공은 우연히 “5원짜리 풀빵 구루마 앞에서남성 상훈을 만나 동거를 시작한다. 연탄이나 월세 등 돈을 아낄 수 있어 좋지만, 실은 상훈에게도 끌렸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훈이 먼저 사랑을 고백하길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상훈이 아픈 동료를 돕는답시고 그간 둘이서 동거하며 함께 모은 저금을 다 써버렸다 하는 게 아닌가? 주인공이 버럭 화를 내자 상훈이 사라진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면서 속이 타고 분해서 눈물이 난다. 걱정과 울화가 범벅이다. 한참 뒤 상훈이 돌아왔는데, 멋진 옷을 입고 말끔해졌다.

무슨 일인가 물었다. 상훈은 자기가 원래 부잣집 아들이고 대학생인데, 아버지가 좀 별나 방학 때 고생 좀 하며 돈 귀한 줄 알고 오라 해서 공장에 취업한 것이라 했다. 이 고백은 주인공에게 멘붕을 주었다. 이 배신감!

절망과 치심으로 변한 가난 초월의 소명감

바로 그 때 주인공 여성의 심장엔 가난을 도둑맞았다!’는 느낌이 치밀었다. “가난을 정면으로 억척스럽게 사는 사람들의 이런 특이한 발랄함-가난의 냄새에 기꺼이 길들여지는 것-을 우리 어머니는 얼마나 치를 떨며 경멸했던가.” 그래서 주인공에겐, 가난하고 힘들지만 악착같이 살아내 마침내 가난을 초월하고야 말겠다던 소명감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부자들의 장난질 때문에 그 소명감이 갑자기 절망감과 수치심으로 변했다. “내 가난을, 내 가난의 의미를 무슨 수로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인가.”

설사 부잣집 상훈의 아버지가 깊은 뜻을 가졌다 해도, 부자의 가난 체험 활동에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건 절대 용서 불가였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곰곰 생각해보니 주인공이 맨 처음 상훈을 풀빵 구루마에서 봤을 때, 그가 풀빵을 손으로 잡지 않고 어디서 났는지 오톨도톨한 꽃무늬가 있는 하얀 종이 냅킨으로 싸서 집어먹던것부터 꼴사나웠다. “다 먹고 나서는 그 냅킨으로 입 언저리를 자못 점잖게 꾹꾹 눌러 닦는것도 꼴불견이었다. “같은 5원짜리 풀빵을 먹으면서 그까짓 종이 한 장으로 이곳에서 풀빵을 먹고 있는 배고프고 피곤한 저녁나절의 직공들 사이에서 우월감 같은 걸 누리고 있는 게 몹시 꼴사나워보일 때부터 주인공이 알아 봤어야 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상훈과 내가 근본부터 다르다는 걸! “얼마나 떳떳하고 용감하게 내 가난을 지켰는지 스스로 뽐내던주인공, “내 방에서 기적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 매일 방을 비워야 했던주인공, 그 주인공에게 도대체 부자가 가난을 체험 삼아 살아 본다는 게 말인가 방군가? 그래서 가난을 도둑맞았다!

 

자본-권력의 보수동맹, 여론조사 조작에 도둑맞은 민주주의

그런데 요즘 나는 그와 비슷하게 도둑맞은 민주주의란 느낌을 너무도 강렬하게, 그것도 거의 매일 반복 경험한다. 곰곰 따져 보니, 민주주의가 도둑맞아온 역사가 꽤 길다.

첫째, 1981년에 대학생이 된 뒤로 나는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자는 대의에 공감해 피라미지만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3학년 때는 단과대 학생 대표를 맡아 한편으로는 독재 세력들과, 다른 편으로는 깡보수 교수들과 싸웠다. 옥살이는 안 했지만 군경 테러에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매일 긴장감 속에 살았다. 군사독재 종식을 내세운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고 뒤를 이어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나마 민주주의가 쟁취됐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새 자본이 그 민주주의를 새로운 형태로 포섭했다. 우리가 민주주의라 믿은 것은 단지 자본주의의 권위주의적 형태자본주의의 자유주의적 형태로 바뀐 것에 불과했다.

둘째, 흔히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선 사람만 바꿀 일이 아니라 시스템을 제대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대통령 직선제 헌법도 고치고 노동법도 개정하고 헌법재판소나 방통위원회, 특별검사제, 상설특검, 국가인권위원회, 국민권익위(부패방지위), 공수처도 만들었다. 그런데 민주주의 고양을 위한 이 제도나 시스템을 교묘히 우회하거나 쓸모없게 만드는 반민주 세력들이 있다. 자본과 권력 주도의 보수동맹이 문제다. 우민호 감독의 영화 <내부자들>에도 나오듯, ‘재벌-금융-언론-정치-검찰-법원-조폭의 연합체가 카르텔을 만든다. 심지어 과거 박근혜-최순실 사태나 최근 김건희-명태균 사태에서 보듯, 비선 실세 내지 문고리 O인방 같은 어둠의 세력들이 농단을 한다. 이들이 민주주의 시스템을 마치 소리 없는 지뢰로 파괴하듯 허물고 있다.

셋째, 지자체 선거, 총선, 보선,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여태 나는 조직적 댓글부대나 개표 부정이 문제라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충격적으로 드러난 바, 선거 국면에서 유권자를 대상으로 여러 차례 실시된 여론조사자체가 멋대로 조작되었다!

엿장수 맘대로조작된 여론조사는 동요하는 표심에 영향을 줘 특정인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또 그 보상으로 특정인 공천이 된 것도 폭로됐다. ‘여사의 입김은 넓고도 세다.

 

쏟아지는 도둑맞은 대선의 증거들

10월 국정감사에서 양심적 검사 출신의 박은정 의원은 공천헌금-대가성 여론조사가 사실이면, 뇌물죄 중 가장 죄질 나쁜, 수뢰 후 부정 처사 죄가 성립한다고 역설했다. 박 의원은 명태균을 대선 경선 이후 만난 적 없다는 윤 대통령의 해명과 달리 명태균 박사발 국정개입 의혹들로, 지난 대선이 무효화 될 수도 있는 도둑맞은 대선의 증거들이 쏟아지고 있다며 개탄했다. 게다가 대선 당일에도 핵심 참모진들과 명태균 보고서가 공유됐고, 이를 토대로 전략회의도 했다는 내부고발(신용한 전 서원대 교수)까지 나왔다.

초등생 아이들도 익히 들었을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사건 뒤엔 이른바 선수들이 작전세력이 되어 열심히 뛰었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도 특정 회사의 주가를 풍선처럼 부풀게 하기 위해 나름 열심히 뛰었다. 실속이 거의 없는, 체코 원전 수출 계약이나 우크라이나 전후 재건 사업 약속 같은 걸 받아내려 한 것이 그 증거다. 대통령 취임 전부터 원전 부활을 외쳤는데, 원전 사업이 국내외에서 왕성하면 원전 부품 관련 기업인 우리기술()’ 주가가 급등할 것이고,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끝나면 복구 및 재건 사업에 삼부토건()’ 같은 회사의 주가가 급등할 것이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기업들의 주가 역시 치솟을 것이다. ‘도이치모터스주가조작과 관련된 선수들이나 작전세력, 그리고 여사를 포함한 쩐주들이 여기에도 다 걸쳐 있었다. 불법 투자자문사인 블랙펄인베스트먼트(BP) 대표 이종호로 상징되는 작전세력들은 도이치모터스, 삼부토건, 쌍방울 주가조작에 종횡으로 연결돼 있다. 그런 인연들이 채 상병 사망 사건의 진실도 교묘히 가렸다. (희토류 사업과 관련해) 북한과 접촉을 했던 쌍방울의 경우, 극히 고약하게도 자기들의 주가조작 사실을 숨기려고 오히려 이재명 민주당 대표(당시 경기도지사)에게 뇌물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공작을 강행하다가 오지게 들킨 상태다.

 

가족 위한 비즈니스에 열중하는 검사 출신 대통령

이렇게 대통령 부부는 작전세력들과 사실상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비즈니스를 위해 수 억, 수십 억 혈세를 쓰면서 지구촌을 여행한다.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는 검찰이 아닌, ‘비즈니스 맨이 된 검찰 출신 대통령! 그것도 대한민국 아닌, 가족을 위한 비즈니스! 이게 자본주의요, 현 한국 자본주의 정치의 실상이다.

50년 전 박완서 작가의 소설 속 여성이 도둑맞은 가난을 치욕적으로 느꼈듯, 오늘의 우리 역시 도둑맞은 민주를 뼈저리게 체험한다. 이 사태, 이 배신감을 어찌해야 할까?

그런데, 흥미롭게도 19751인당 국민소득이 약 600달러였고 2023년엔 3만 달러를 훌쩍 넘었으니 50년 만에 평균 50배 이상 잘 살게 되었다. 물론, 불평등과 양극화는 심각하다. 아직도 쪼들리게 어려운 이가 많지만 평균 수준은 많이 올랐다. 50년 전 시내버스비가 15원이었는데, 지금은 1500원 가까우니 단순 물가로 100배 뛰었다. 이제 예전의 그런 가난은 민속박물관에서나 볼까 좀체 찾기 어렵다. 어렵다고들 하지만,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가면 사람이 많다. 심지어 명품을 사려고 새벽부터 몰려들기도 한단다.

잘 생각해 보니, 오히려 당시 내가 자라던 가난한 달동네에서는 수돗물을 하루에 한두 시간씩만 받았고, 세숫물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이웃사촌 개념이 살아 있어서 부침개 하나를 부쳐도 이웃과 오순도순 나눠 먹었다. , 가을 농번기엔 학교에서 대대적으로 농촌 봉사활동을 나갔다. 옆집에 대소사, 경조사가 생기면 서로 나서서 일손을 거들었다. 당시만 해도 두레나 품앗이 문화가 살아 있었다. ‘똥물 튀는변소조차 그 똥오줌을 밭에 거름으로 씀으로써 수질오염은커녕 생태순환에 기여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다투고 와도 어른들이 변호사까지 붙여 소송을 제기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가난 조금만 되찾아도 우리 삶과 민주주의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후위기와 6차 대멸종이 경고되는 현 시점에서 불과 50년 전만 돌아봐도, 오히려 저 고단하고 가난했던 삶의 방식을 조금만 고치면 지구촌을 위해 지속 가능한 오래된 미래가 아닐까 싶다. 소설 속 주인공이 그들은 겉으론 가난을 경멸하는 척 했지만 실상은 두려워했다는 걸 나는 안다.”고 했을 때 어쩌면 그들이 바로 우리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는 도시화, 산업화, 세계화, 상업화의 과정, 즉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역설적이게도 가난도 도둑맞고 절약도 도둑맞고 마을도 도둑맞고 자연도 도둑맞았다. 그리고 이제는 대명천지에 선거도, 민주도, 혈세도, 행복도 도둑맞고 있다. 가난을 도둑맞게 된 그 흐름들(부자 중독증, 출세 중독증) 탓에 이제는 민주까지 도둑맞고 있는지 모른다. 역으로, ‘도둑맞은 가난을 우리가 얼마나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지에 따라 도둑맞은 민주역시 딱 그만큼 회복될 것 같다는 특별한 느낌도 든다.

그러기 위해선 민주주의를 두려워해선 안 되듯 가난을 두려워 않아야 한다. 궁핍은 면하되, 검소하게 살며 서로 나누고 보살피며 사는 게 기후위기 시대에 필요한 삶의 방식이 아닐까? 피터 모린(1877~1949)의 역설처럼, “아무도 부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면 모두 부자가 될 것이요, 모두 가난해지려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니!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 시민언론 민들레 2024.11.1.

 

경제 망쳐놓고 이번엔 전쟁놀이라니

윤석열 정권은 최근 낮은 지지율로 보수층에서조차 환영을 못 받고 있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고까지 불리며 국정의 동력을 상실한 상태가 이어지며 여당마저 윤석열 정권과 거리두기 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경제는 또 어떤가? 올해 2분기 역성장에 이어 3분기 경제 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0.1% 상승에 멈춰, 올해 경제 성장률은 잠재성장률을 밑돌 것으로 예측된다. 그리고 내수는 그야말로 풍비박산 수준에 세수는 작년에 56조 펑크가 나고 올해도 30조가 넘는 펑크가 나는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부자감세에만 몰두하느라 나라 곳간은 텅텅 비어 내수에 쓸 돈도 없는 상태다. 적자국채를 발행해 내수 진작을 해야 함에도 재정건전성이라는 주술에 사로잡혀 그저 손 놓고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인디언 기우제나 지내는 수준이다.

경제와 외교 그리고 김건희 의혹에 내치까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는 지금 윤석열 정권은 그 타개책으로 한반도의 긴장 고조와 전쟁놀이로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아직 확인되지도 않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북한군 파병을 보수 신문을 동원해 기정사실화하고 살상무기와 국정원 심문 요원 파견을 공공연하게 외치고 있으며 여당 국회의원과 청와대 안보실장은 우크라이나를 통해 북한군을 폭격하자는 문자를 버젓이 주고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대체 윤석열 정권은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일까?

아무리 비싼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 전쟁을 하게 되면 국민들의 삶은 완전히 파괴되고 파탄날 것이다. 좁은 한반도의 특성상 전쟁이 일어난다면 피난 갈 수조차 없는, 말 그대로 전 국토가 동시다발적 전쟁터로 변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비대칭 전력인 핵무기뿐 아니라 약 5500여 문의 방사포를 가지고 있다. 60Km 사거리를 가진 구형부터 약 400Km가 넘는 사거리를 가진 신형 방사포까지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고 휴전선 인근에 집중 배치하고 있다. 만일 전쟁이 시작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몇 시간 이내로 수만 발의 방사포탄이 비처럼 쏟아지는 결과를 맞이한다는 얘기다. 방사포의 평균 탄두 중량이 450~650Kg으로 탄두 하나당 살상 반경은 축구장 하나 이상의 크기다. 개전과 동시에 전 국토가 방사포탄의 사거리에 들어 피난 갈 시간조차 없게 된다.

 

미국의 안보 정책 연구기관인 노틸러스 연구소는 전쟁 발발 시 하루에만 서울에서 6만여 명의 사망자가 날 것으로 예측했다. 그리고 북한의 방사포 부대를 제압하는 데는 약 일주일 내외가 될 것으로 분석을 한 바 있다. 개전 후 약 일주일 동안 방사포탄 비를 전국이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비대칭 전력인 핵을 가지고 있는 북한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도대체 우리나라에 무엇이 이롭기에 이토록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것일까?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전쟁 위기가 아니라 먹고사는 것이다. 자영업자 폐업률은 사상 최고치를 연일 경신하고 배춧값이 무서워 올겨울 김장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윤석열 정권은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환율은 어느덧 1400원을 넘을 기세고 경제는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에 서민들은 더 졸라맬 허리띠조차 없는 상황에서 구중궁궐 용산에서 전쟁놀이를 하니 즐거우신가? 탈중국 선언으로 한국 경제를 미국에 종속된 경제로 만들어 움직일 여지조차 없게 만들더니 이제는 미국의 전쟁놀이에 앞장서서 용병이 되려는 것인가?

 

윤석열 정권은 국민의 생명을 가지고 더 이상 위험한 장난을 하지 말고 남은 기간 그 열정으로 경제에 힘쓰기를 바란다. 이 위태로운 장난을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국민들이 이를 멈추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

기훈 경제칼럼니스트| 시민언론 민들레 2024.11.1.

 

 

클라우제비츠, 바보 이반, 전쟁 비즈니스

흑백논리 내지 이분법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전쟁에 관한 두 유형의 인간을 상상해 본다. ‘클라우제비츠형 인간바보 이반이다. 이는 일본의 재야 언론인 히로세 다카시의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프로메테우스)에 나온다.

 

클라우제비츠형 인간은 이런저런 구실로 이간질을 일삼고 적대적 싸움을 선동하는 부류다. 원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는 프로이센(독일)의 영리한 군인이었다. 그의 유작인 전쟁론에 나오는,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 벌이는 정치의 연장선이란 명제는 지금도 널리 회자된다. 그래서 클라우제비츠형 인간은 결코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곧 비즈니스(돈벌이)이기 때문이다.

 

반면, 톨스토이의 소설의 주인공 바보 이반은 순진한 농부로, 우연히 왕이 돼서도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땅을 일구며 산다.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늘 사이좋게 지내려 한다. 이들에겐 처음부터 진영도, 국경도, 적군도 없다. 싸울 이유가 없으니! 흔히 우리가 시골 마을에서 만나는 대다수 노인들도 바보 이반처럼 순하다. 또 각박한 한국에서 살던 우리는 동남아 등 시골 마을에 가면 눈빛부터 선한 바보 이반들을 쉽게 본다.

 

문제는, ‘클라우제비츠형 인간바보 이반같은 사람들을 선동하고 은근히 강제해, 결국 전쟁터로 내몰아 서로 피 흘리게 하는 일! 정작 자기들은 안전한 곳에서 술과 음악을 즐기며 잔치를 벌이면서도, 온 세상을 적군과 아군으로 나눠 살육하게 한다.

 

여기서도 분명하듯, 전쟁은 결코 인간 본성탓에 생기는 필연적인 게 아니다. 사회 갈등의 최악 형태인 전쟁은 클라우제비츠형 인간바보 이반들을 선동한 결과다! 그런 선동의 이유는 결국, 돈과 권력, 즉 이해관계다. 히로세 다카시의 통찰 덕에 나는 전쟁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물론, 앞의 두 유형은 전쟁 지향과 평화 지향이라는 이상형을 설정한 것일 뿐, 현실에선 그 중간에 여러 인간형이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예컨대, 전쟁이건 평화건 세상일에 아무 관심 없는 이들도 많고, 또 목소리 큰 편에 쉽게 끌리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우리들 경험에 따르면, 처음부터 전쟁을 좋아하는 이는 거의 없다. , 전쟁은 인간 본성이 아니다!

 

히로세 다카시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동구 몰락까지 47년간의 분쟁사를 잘 정리한 결과, 분쟁사는 결국 선동사라 한다. , 대다수는 바보 이반처럼 살지만 극소수의 클라우제비츠형 인간들이 부단히 전쟁을 선동해 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고 보니, 지금 한국 사회에도 전쟁 의지에 충만한 클라우제비츠형 인간이 제법 보인다. 202411월 초 미국 대선을 앞두고 한반도 전쟁 위기와 계엄 음모가 감지됐다.

 

첫째,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과 신원식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 간 문자 대화를 보라. 둘 다 장성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 선후배 사이다. 한 의원이 우크라이나와 협조가 된다면 북괴군 부대를 폭격, 미사일 타격을 가해서 피해가 발생하도록 하고 이 피해를 북한에 심리전으로 써먹었으면 좋겠다는 문자를 신 안보실장에게 보냈다. 이에 신 실장은 주저 없이 , 잘 챙기겠다. 오늘 긴급 대책회의를 했다고 했다. ‘적극 검토란 얘기! 이에 대해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은 우크라이나의 불길을 서울로 옮기고자 획책한 외환 유치 및 계엄 예비음모라며 맹비판했다.

 

둘째, 윤석열 정부에선 충암파가 옛 하나회에 비견된다. 예로, 김용현 국방부 장관, 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 박종선 777사령관, 황세영 서울경찰청 101경비단장과 경찰 인사권자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충암고 출신이다. 특히, 202311월 방첩사령관이 된 여인형 중장은 윤 대통령의 충암고 후배로, 지난 8월 특전사령관, 수방사령관과 함께 당시 김용현 대통령경호처장 공관에서 비상시 계엄을 검토한 의혹이 있고, 그 뒤도 방첩사에 전두환 사진을 걸어 논란이 됐다. 방첩사 전신인 기무사령부는 박근혜 정부 때 계엄령 검토 문건을 작성한 전력이 있다.

 

셋째, 최근엔 홍장원 국정원 차장이 군 참관단과 함께 브뤼셀의 나토 본부를 방문해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을 브리핑했다. 참관단은 우크라이나로 가, 정보·국방 당국자들과 전황 공유 및 향후 협력(북한군 포로 심문·공작 등)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 전쟁 의지에 충만한 클라우제비츠형 인간들의 출현을 단지 고교 동문들에 의한 정치적 카르텔 정도로 봐선 안 된다. 히로세 다카시의 혜안처럼, 사실상 그 뒤엔 비즈니스 세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외에 최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배경엔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간의 이해관계 충돌이 있다. 또 당사국 주위엔 이해관계 동맹이 형성돼 있다. ··일이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우방이듯, 러시아 곁엔 중국, 이란, 북한이 있다.

 

무한한 자본축적을 원하는 자본은 1990년을 전후로 소련·동구 사회주의 붕괴와 더불어 새로운 시장과 공장을 창출했다. 세계시장과 세계공장이 거의 완성되자, 불행히도 2008년 세계금융위기와 더불어 세계자본주의도 사실상 파산했다. 지금은 국가 부채나 소비 촉진 등으로 억지 연명 중이다. 그 잘나가던 삼성전자조차 고전한다.

 

누군가에게 맹렬히 쫓기던 짐승도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 순간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자폭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은 무한이윤을 추구하며 본의 아니게 스스로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다. 해고, 부채, 소비, 독점, 투기 등 전통적 출구가 더 이상 약효가 없을 때 마지막 순간엔 생사를 걸고 전쟁을 벌인다. 군수산업과 재건산업이 돈 된다!

 

1929년 세계 대공황 국면에서 구조조정과 대량실업, 공장폐쇄와 소비위축이 이어지자 미국에선 뉴딜 정책(케인스주의)을 폈지만, 그 역시 약효가 다하자 마침내 2차 대전을 통해 최종 해법을 찾았다. 그 뒤의 자본축적은 대가속 시대였다. 어쩌면 지금이 그런 때인 듯하다. 전쟁은 자본엔 돌파구일지 몰라도, 인류나 지구엔 지옥문(!)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 벌이는 비즈니스의 연장이다. 그러니 바보 이반들이여, 생명·평화를 위해 모두 일어서자!

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 한겨레 2024.11.01.

 

‘K컬처라는 아이러니

대한민국이 드디어 노벨 문학상 보유국이 됐다. 직전까지 맨부커상, 아카데미 작품상,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1위 보유국이었다. 요 며칠은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식 술 게임에 빠져 아파트! 아파트!”를 외치고 있다. 지난달에는 강연을 갔다가 들른 순댓국집에 외국인 단체 관광객이 몰려와 옆자리에 앉았다. “이모, 다대기 좀 주세요하는데 딕션이 나보다 좋았다.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아니다) 저학년 때까지 교과서 맨 앞장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로부터 대략 40, 진짜 민족 중흥이 온 건가 싶다. 평소 국가 중심적 사고방식을 비판해왔지만 오늘만큼은 국가와 민족을 말해보기로 한다. ‘근데 이제 세대를 곁들인.’

 

상상된 공동체라는 책이 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상상된 공동체가 의미하는 건 민족(nation)이다. 제목만 보고 역시 민족이란 상상에 불과해!’, 즉 민족의 허구성에 대한 책이라 오해한 사람이 많았다. 나도 그랬는데 읽어보니 전혀 아니었다. 저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오히려 민족이 허구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상상을 통해 민족이 현실적 실체가 되었다 말한다. , 저 책은 상상된 공동체라 쓰고 실현된 공동체라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으므로 우리 중 누군가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솟아나는 게 당연한 것일까? 그럴 수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물론 같은 언어를 쓰는 동포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친밀감이 느껴지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이 잘됐다고 내 기분이 꼭 좋으란 법도 없다.(잊지 말자.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갑자기 배가 아파 오는 민족이다.)

 

케이컬처’(K-Culture)의 이 엄청난 성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지금이 한국 문화 최고의 화양연화 같다는 생각도 든다. 1990년대의 문화 대폭발을 청년기 한가운데서 만끽한 이른바 엑스 세대일부가 이 산업을 이끌고 있다. 젊은 시절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일본의 농구만화 슬램덩크가 실시간으로 연재되던 시절, 이름도 잊어버린 어느 평론가의 글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슬램덩크에 빠져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던 당시 청소년들, 훗날의 엑스 세대를 보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린 공포의 외인구단 세대지만 이들은 슬램덩크 세대. 외인구단의 야구는 가난과 멸시를 보상받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뼈가 부러지고 피가 흐르도록 처절했다. 슬램덩크 세대는 다르다. 이들에게 농구는 한풀이 수단이 아니라 순수한 열정이며 즐거운 목표다. 그래서 밝고 희망적이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건 나의 혁명이 아니다.” 68혁명의 구호가 된 에마 골드먼의 이 말을 엑스 세대일부는 진심으로 믿었다. 혁명의 최종 목표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점에서 엑스 세대‘386 세대는 같았다. 그러나 엑스 세대의 방점은 자유개인에 있었기에 ‘386 세대특유의 집단주의에 끝내 동화될 수 없었다. 작가 한강이 대학생일 때, 가장 지적이던 그의 또래는 페미니즘 이론을 누구보다 치열히 공부했다. 그리고 낙후된 운동권 선후배를 업데이트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이 바로 영 페미니스트라 불린 사람들이다. 6년 전 칼럼에서 썼듯이, 1990년대 그토록 명석했던 영 페미들이 없었다면 운동권 내 성폭력 공론화도, 호주제 폐지도, 성매매방지법과 성매매처벌법 제정도, 직장 내 성희롱 방지 교육도 불가능했거나 한참 늦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1990년대가 없었다면,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없었거나 지금과 전혀 다른 작품이 됐을지 모른다.

 

이것은 케이컬처가 단지 특정 세대의 산물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징어 게임’, ‘기생충’, ‘채식주의자등을 세계적 작품으로 만든 요인이 복합적이고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케이컬처는 국가폭력, 승자독식 능력주의, 유교적 가부장제, 살인적 노동착취 및 특유의 과로 문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동시에 케이컬처는 그 문제에 맞서 끈질기게 싸워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또한 가능했다. 그렇게 케이컬처는 모두 함께 만든 공동체 문화이자 아이러니가 되었다.

박권일 | 독립연구자·‘한국의 능력주의저자 | 한겨레 2024.11.01.

 

농단'이 부른 탄핵, 그 불길한 징후들

공천 개입 의혹, 대통령이 해명해야

권력정치의 관점에서 정치를 움직이는 힘은 권력을 향한 집념이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투쟁을 불러오고, 게임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현재 진행 중인 여권의 양태는 전형적인 권력암투의 성격을 띠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대표는 서로 일상의 여항(閭巷)에서도 보기 어려운 적대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상호 존중과 신뢰를 주문하는 것 자체가 남사스럽다. 사실상의 '적대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행위들을 교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 대표는 민의에 직진하지 않고 있다. 해병대원 제3자 추천 특검은 사라졌고, 생뚱맞게 특별감찰관 이슈를 꺼내들었다.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는 "민주주의는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시스템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국민의힘은 20대 대선에서 이겼다. 그리고 곧 이어 실시된 지방선거 역시 승리했다. 대선에서 근소한 차로 이겼지만 불과 석 달 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는 서울 구청장을 싹쓸이할 정도로 대승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윤석열 정권은 역대 어느 정부의 지지율 보다 낮은 지지율이 고착화됐고 20%대 초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6개월 후의 총선의 바로미터라고 의미가 부여된 지난 해 10월의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대패한 국민의힘이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 대표를 투입했다. 그러나 김건희 여사 문제를 둘러싸고 용산과 충돌했고, 대통령실은 노골적으로 당시 한 비대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당정이 각자 갈 길을 간다고 하지만 이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당에는 선출직이면서 친윤 핵심인 추경호 원내대표가 버티고 친윤의 철옹성은 견고하다. 한 대표는 당을 대표하지만 실질적으로 당내 세력기반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여당 투톱의 대립, 당정 수장의 대결 구도가 여권의 권력지형이다.

 

김 여사가 정국의 블랙홀이 되었고, 9월 중순 경부터 발화한 명태균 '사태'와 강혜경의 '폭로'는 정국을 저열한 진위공방의 늪으로 빠뜨려 정국은 수사와 정치가 혼재한 최악의 블랙 코미디로 전락했다. 급기야 어제 윤 대통령의 공천 개입 정황이 뚜렷이 보이는 통화 녹취가 생생한 목소리로 공개됐다. 이제 김 여사 뿐만이 아니라 대통령의 국정농단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럼에도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집단은 문제의 핵심을 모르는건지, 외면하는건지 마이동풍으로 일관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호시탐탐 대통령 탄핵의 방아쇠를 당길 기회를 엿본다. 당장 탄핵을 공식화할 '헌법과 법률 위반'이 없을지 모르지만 정치와 사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휘발성 강한 뇌관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 상태로 임기를 마치기 어렵다고 보는 게 상식이 되는 건 아닌가.

 

행여 11월의 이재명 대표의 재판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유죄 시 국면이 바뀌어 '이슈 체인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정무적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당장 민주당이 세 번째 발의한 '김건희 특검법'은 대통령의 재의요구로 국회에서 재표결 시 통과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까지의 행태로 볼 때 대통령실의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탄핵도 처음에 법 위반 차원이 아니었다. 연설문을 최서원에게 미리 보여주고 비선에게 정치건, 정무건, 국정이건 조력을 구한 게 드러나면서 국가권력을 위임받은 선출자에 대한 주권자의 분노와 징계가 구체화되어 나타난 게 현직 대통령의 파면이었다. 박근혜 탄핵의 시발점이 '국정농단'이었단 얘기다.

 

한국정치에서 '전향'은 분단의 구조적 비극에서 비롯됐지만, 이제 윤 대통령 부부는 진정한 전향(轉向)을 하지 않으면 역사의 데자뷔가 재연될 확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전향은 김 여사에 대한 특검 수용과 대통령의 육성에 대한 대통령 자신의 분명한 해명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해병대원 특검에 대해서도 제3자 추천 등의 조항을 보완해서 특검을 수용할 때 정권이 혈로를 뚫을 수 있다. 두 특검이 결국 정권의 말로를 재촉한다고 보는 게 여권 핵심의 시각이라면 이는 교정해야 마땅하다. 지지율이 오르지 않으면 만사휴의(萬事休矣).

 

민심은 두 특검에 대해 압도적 찬성 의견을 보이고 있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하고 타락했다고 해도 민심을 이길 수 있는 정권은 없다. 정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게 민주주의의 핵심이지만 정권을 장악한 측에서 이 원칙을 알지 못하고 민심과 역행한다면 정권은 더 큰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지난 달 중순 경부터 발화한 명태균 사태와 강혜경의 폭로는 정국을 저열한 진실공방과 수사가 뒤엉킨 '난장'의 도가니로 밀어넣었다. 여기에 법치와 정치가 뒤얽힌 소용돌이의 정국의 연속이다. 이제 대통령이 그의 육성에 대해서 해명해야 한다. 그리고 김 여사가 진실을 밝여야 한다. 또 다시 '농단'이 정치를 양대 진영의 거대한 쟁투로 인도하는가. 바야흐로 또 한 차례 '소용돌이의 정치'가 서서히 에너지를 모아가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최창렬 용인대 특임교수 | 프레시안 2024.11.01.

 

무자격자가 언급한 대통령의 자격

용산의 공천개입 의혹을 뒷받침할 대통령 육성이 공개되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렸다. 위기는 육성 공개 때문에 단박에 등장한게 아니다. 정권 초 이준석 대표 찍어내기와 이태원 참사에서 시작된 독단적인 리더십은 임기 내내 이어졌고, 명품백 수수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등 이른바 김건희 리스크를 덮으려는 과정에서 무수한 권력기관이 형해화되면서 민심의 불만은 마치 밀폐용기에 증기가 쌓이듯 압축게이지를 높여왔던 것이다.

 

급기야 대통령 지지율이 국정 동력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는 20%를 하향 돌파해 10%대로 추락했다. 1일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 지지율은 19%를 기록했고, TK(대구경북) 지지율은 18%로 전국 평균보다 낮은 기현상을 보였다. 같은 날 엠브레인퍼블릭 조사는 긍정평가 17%, 부정평가 78%, 무응답 5%로 같은 흐름을 뒷받침했다.

 

유례없이 일찍 찾아온 위기는 국민의 질책을 외면한 독선과 독주의 결과로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공천개입 의혹을 포함해 김건희 여사와 명태균씨를 둘러싼 국정 농단 의혹이 폭발하고 있는 만큼 비상한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가래로는 막지 못할 위중한 상황이다.

 

"대통령 자격이 있는거야?"

최근 공개된 녹음파일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 중 하나가 바로 '대통령의 자격' 부분이다. 명씨는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하던 상황을 지인에게 이렇게 묘사했다. "지 마누리(김건희 여사)가 옆에서 '아니 오빠 명 선생님 그거 처리 안했어? 명 선생님이 이래 아침에 놀라서 전화오게 만드는 오빠가 대통령으로 자격이 있는 거야?'"

 

김건희 여사가 생각하는 대통령은 과연 어떤 자리길래 닦달하며 자격 운운하는 걸까? 윤 대통령은 왜 배우자의 언행은 통제하지 못한 채 겉으로만 쎈 척하며 독선과 불통의 국정운영을 멈추지 않는걸까? 대선 전인 20211115일 서울의소리 기자와 통화했던 대목이 힌트가 될 수도 있겠다. "내가 권력을 잡으면 거긴 완전히 무사하지 못할 거야. 거기는 이제, 권력이라는 게 잡으면 우리가 안 시켜도 경찰들이 알아서 입건해요. 그래서 무서운 거지."

 

학력위조 등 논란과 관련해 비판적으로 보도해 온 언론에 보복할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 농담으로도 입에 담아선 안되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발언인데, 공개된 발언으로 볼 때 적어도 김 여사의 머리 속엔 '대통령=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이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이런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라며 윤 대통령을 수시로 다그쳤던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공공성이나 책임성이라는 개념은 찾기 힘들다.

 

보수 원로인 윤여준 전 장관은 저서 <대통령의 자격>에서 국가통치술의 첫번째 조건을 '헌법적 기본원리를 포함한 국가제도의 관리'에 뒀다. 국민 일체감 형성과 통합구현, 대내외 현안에 대응하는 올바른 정책수립과 실행, 다양한 정치세력과 인물의 관리도 국가를 통치하는 대통령의 중요한 자격으로 꼽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수많은 국가조직이 제기능을 못하고 있다. 현 검찰은 주요 사건 처리과정에서 선별수사와 기소권 오남용을 일삼아 대통령 친위대라는 비판을 받고 있고, 윤석열 대통령은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공수처 검사 연임재가를 임기만료 이틀 전까지 미뤄 사실상 수사외압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헌법적 기본원리을 포함한 국가제도의 관리'에서 낙제점 수준으로 평가를 받을 만하다. 예산안 시정연설의 총리대독과 이념편향 논란 등을 볼 때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과도 거리가 멀다.

 

대통령 취임식 하루 전날, 경선 때부터 여론조사로 도움을 줬던 명태균씨와 통화하면서 "김영선이를 좀 해줘라"라고 했다고 본인 입으로 밝힌 대목은 공천개입을 자인한 것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하다. 명태균씨가 "평생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감사의 뜻을 표시한 것은 앞뒤 호응이 맞다. 명씨가 다른 사람과의 통화에서 밝힌 "윤상현이한테 전화했습니다. 보안 유지하시고"라는 김건희 여사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이는 공천개입이 실행됐음을 부연하는 것이다.

 

게다가 명씨가 대선 기간 37천만원을 들여 윤 대통령을 위한 여론조사를 수 십차례 실시해 보고했고, "김건희 여사가 김영선 공천은 자기 선물이라고 했다"는 말을 한 것으로 볼 때 공천의 대가성까지 따져봐야 하는 상황이다. 명태균씨는 김영선 전 의원 회계책임자였던 강혜경씨와의 202252일 통화에서 "오늘 여사님 전화왔는데 내 고마움 때문에 김영선 (공천) 걱정말라고, 내보고 고맙다고, 자기 선물이래"라고 말했다.

 

더욱 심각한 건 배우자의 장단에 춤을 추는 듯한 대통령의 태도다. 명씨의 녹취록에 등장하는 '그 장관 앉혀 뭐 앉혀'라는 말에 '나는 했다. 분명히 했다'라는 김건희 여사와 윤 대통령의 대화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다. 사실이라면 국정농단에 다름아니다. '철없이 떠드는 우리 오빠', '무식하면 원래 그래요' 등등 김 여사의 거침없는 언행에서 국민들은 또다시 대통령의 자격에 의문부호를 달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도 대통령실의 잇단 거짓 해명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지 않을 정도로 국민의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권력 오남용은 국민에 대한 배신특검 수용해야

대통령에게 공권력을 포함해 막대한 권한이 주어진 것은 권한을 남용하거나 사적으로 행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다. 선출되지 않은 자가 권력을 나눠가져서도 안된다. 특혜나 반칙, 사적보복, 공권력의 선별적 행사 등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는 호기가 계속되면서 집권 2년 반 만에 국격이 크게 훼손됐다. 민생은 피폐해지고 국회관계는 단절되고 국정은 여기저기 찢어져 너덜너덜하다. 30조원에 달하는 세수결손을 메우기 위해 원화안정에 쓰일 외평채와 서민들의 청약통장에서 모아둔 주택도시기금까지 긁어모으려 한다. 안보불안도 새로운 걱정거리다. 공천개입을 시사하는 대통령의 육성통화가 공개됐는데도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날짜를 거론하며 법적 책임 면피 운운하니 법률회사인지 정당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려 하지 않듯 권력도 공백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허점이 많은 리더의 빈공간을 비선이 채울 공산이 크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어설픈 사과로 넘길 단계는 지났다. 의혹의 당사자인 윤 대통령은 제기된 의혹에 대해 직접 해명하고 특검수사를 수용하는 게 선거에서 권력을 위임한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흔들리는 나라를 바로세우는 길임을 새겨야 할 것이다.

CBS노컷뉴스 이재웅 논설위원 | 노컷 뉴스 2024.11.02.

 

안보'마저 무능한 대통령이 '전쟁광' 참모들에 둘러싸여 있다면?

대통령의 '물컵 노려보기'가 초래한 최악의 안보 위기

무능한 아마추어가 정권을 잡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우린 지금 최악의 상황들을 골라서 경험하고 있다.

 

외교 안보 문외한 윤석열 대통령은 '물컵 외교'를 발명했다. 실패한 미국의 대북 정책 '전략적 인내''윤석열 버전'이다. 상대가 물컵 절반을 채우길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외교. 북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북한을 비난하면 저절로 일이 해결될 것이라 믿는 사고.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다는 건 평범한 진리에 속한다. 아인슈타인은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는 걸 '미친 짓'이라 정의했다.

 

문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어떻게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지 윤석열 정부가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염소를 노려보는 것으로 염소를 죽이려던 미국의 초능력 부대원들처럼, 윤 대통령이 빈 물컵을 노려보고 있는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열거해 보자. 북한은 '적대적 두 국가론'으로 한국과 결별을 선언했고, 러시아와 동맹을 강화했다. 특수부대를 이역만리 전선에 파병하고 그 대가로 무기 기술을 전수받을 것이다. 풍계리 핵실험장에선 7차 핵실험 준비가 끝났다는 정보 당국의 보고가 이어지고, 대통령실 상공엔 오물 풍선이 날아다닌다.

 

바이든만 바라보고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내달려온 윤 대통령이 마주한 현실은 어떤가. '친구' 기시다 전 총리는 불명예퇴진했고, 자민당 정권은 총선에서 참패했다. 미국에선 '러우 전쟁을 끝내겠다', '김정은과 잘 지내겠다'는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돼 김정은과 만나겠다고 하면 윤 대통령은 달려가서 말릴 실력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뉴라이트와 호전광들에 둘러인 대통령의 외교 안보 철학이 '제로' 상태니, 외교 안보의 기본이 돼야 할 정보 기관들이 점점 망가지고 있다.

북한군 러시아 파병설은 우크라이나 정부와 현지 언론에서 먼저 나왔다. 북한 병사들이 러시아에 갔다는 사실을 일부 보수 언론에 간간 흘리던 우리 정보 당국은 지난 18일 국정원 명의로 북한이 러시아에 특수부대를 파병했다는 내용의 상세한 보도자료를 뿌렸다. 하지만 미국과 나토는 같은 날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미국의 공식 반응은 정작 닷새 후인 23일에야 나왔다.

 

닷새간의 온도차는 꽤 많은 걸 설명해 준다. 한국과 미국의 정보 평가 내지는 공개 시점에 대한 합치된 견해가 없었다는 걸 추정케 한다. 국방부에서조차 국정원의 발표 하루 전날인 17"우리는 (북한이) 병력이 아니라 인력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있다"(김선호 국방부 차관)고 말했다. 국방부와 국정원 사이에도 온도차가 있었다.

 

한미간 완전히 조율된 정보 평가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국정원이 팩트를 먼저 '지르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국정원이 보도자료를 내기 3일 전인 15일은 북한이 경의선과 동해선을 폭파 해체했다는 보도가 대대적으로 이뤄지면서 북한에 대한 비판 여론이 증가하고 있을 때였다. 국회 국정감사 진행되면서 온통 언론에선 명태균, 김건희 이름이 도배되고 있었다.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은 18일 갑자기 NSC가 긴급 회의가 열렸고, 이번 정보 공개를 국정원이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 대통령실과 국정원이 '북한군 러시아 파병설' 공개 결정의 중심에 있었다는 말이다.

 

어설프기 짝이 없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증거라고 공개한 위성 사진에는 정보를 제공한 민간 업체의 워터마크가 그대로 찍혀 있다. 김정은 몸무게가 140킬로그램을 넘었다느니, 김정은이 새로운 당뇨 치료제를 구하고 있는 중이라느니 하는 민감한 '휴민트' 정보들을 마구잡이로 공개한다. 북한 최고 통치자의 신변 상황 변화를 알 수 있는 사람이 '남한 요원'에 포섭돼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다. '러우 전쟁'에 공식적으로 심문조를 파견하겠다며 "절호의 기회" 운운한 건 어떤가. '기밀'이란 개념이 아예 없으니 이쯤되면 국가정보원이 아니라 국가전쟁홍보원인가 싶을 정도다. 획득된 정보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고 있으니, 1년 농사 지어 수확한 나락을 새 모이로 주는 셈이다. 과연 국방 안보 정책이란 게 있긴 한 건가.

 

과거엔 국정원이 본연의 임무를 팽개치고 내국인과 야당 정치인을 사찰해 문제를 일으켰다면, 윤석열 정부 들어 국정원은 본연의 임무에서조차 무능함을 사사건건 노출하고 있다. 검사 출신 국정원 기조실장이 돌연 사퇴한 데 이어 파벌 싸움이 외부로 적나라하게 중계된 건 서막에 불과했다. 지난 1월 조태용 국정원장 체제가 출범한 이후에도 국정원 요원이 미국의 북한 전문가(수미 테리)를 상대로 공작을 벌이다 미 수사 당국에 사진까지 찍히는 망신을 당했다. 최근엔 국정원 고위 간부가 공작비를 유용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군 정보사령부가 중국 정보 요원에 돈을 받고 기밀을 빼돌리는 일도 발생했다.

 

국민의힘은 '북한이 저지른 일이니 북한을 비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사태가 이지경까지 온 데 대해 정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윤석열 대통령이 바이든 앞에서 아메리칸 파이를 열창하고 있을 때, 김정은이 "존경하는 푸틴 동지"를 외치며 술을 따라줄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면 무능한 것이다. '물컵 전략'은 한반도 주변 정세를 악화일로로 내몰고 있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어떻게 더 위험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이 외교 안보에 아무런 경험이 없으니, 극우 세력에 휘둘린다. 평생 '윗선'의 말만 들어온 관료 출신을 국정원장에 앉히고, 대통령실 외교 안보 컨트롤타워에는 '즉강끝'을 외치던 호전적 인사를 들였다. 뉴라이트 성향의 안보실 1차장은 미국 민주당의 해리스 부통령이 만약 대통령에 당선되면 "제가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극우세력의 가장 큰 문제는 국가 안보 정책에 '선악'의 잣대를 댄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고 침략자 러시아도 ''이라는 이런 인식은 20여년 전 미국의 대외 정책을 주도했던 종교적 네오콘들과 유사하다.

 

이런 인물들 틈에 껴 있는 대통령이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대책이라고 내놓은 게 "우크라이나 살상 무기 지원 검토". <조선일보>의 이데올로그 김대중 씨조차 살상 무기 지원에 반대하는 칼럼을 쓰고 있는 판이다. 살상무기 지원은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다. 우크라이나 편에 서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는 일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다. '비살상 무기 지원 원칙'은 한국이 북한에 대해 우위에 서 있는 '명분'이다. 우리 국민이 해외에서 위협에 처한 것도 아닌데, 이 원칙마저 버린다면 '러우 전쟁' 이후 외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경제 문제나 정치 문제에선 무능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교 안보 문제에서 무능하면 국민의 생명이 위험해진다. '북괴군을 폭격해 심리전에 써먹자'는 말에 맞장구 치는 국가안보실장, 이 장난같은 현실이 지금 대통령 참모들의 수준이다.

 

지금 호전적 참모들에 둘러싸여 폭주하고 있는 무능력한 대통령을 제어하는 일이 시급하다.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4.11.02.

 

 

전쟁이 온다

전 군이 비상대기 상태다. 병사들의 휴가도 제한되고 있다. 파주, 김포, 연천 지역은 위험구역으로 지정되어 안보 관광도 중단되었다. 미국 국방부는 러시아 파병 북한군을 공격 대상으로 간주할 것이라 밝혔다.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우리가 만든 총알에 북한 군인이 죽어갈 확률이 커졌다. 꼼꼼히 따져보면 그 북한군은 먼 친척의 조카일 것이다. 북한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또 한번 동족상잔의 비극이 재현될 기세다.

 

지난 70여년간 반복되는 남북 긴장 상태라 무감각해진 지 오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전문가들이 잇달아 높은 경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도 좋다는 사람들이 계속 전단을 북으로 보내고 이에 맞선 북의 오물풍선이 한반도 상공을 날아다니더니 1012, 북한 군 당국은 완전무장한 8개 포병여단에 완전 사격 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그리고 또다시 무인기가 발견될 경우, 선전포고로 간주하여 즉각적인 보복 공격을 가하겠다고 선언했다. 1030, 북한은 10개월 만에 다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동해상으로 발사했다.

 

미 국방부 차관보를 지낸 그레이엄 앨리슨은 역사적으로 대규모 전쟁은 도전국이 기존 패권국을 대체하려는 시기에 일어났으며, 현재 중국과 미국 관계가 수년 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그가 가능성 높은 곳으로 예고한 곳이 한반도이고, 그 시간이 바로 지금이다.

 

전쟁은 제노사이드(대량 학살)를 동반한다. 여러 나라 제노사이드를 연구한 엘리후 릭터 교수는 제노사이드에는 전조가 있는데, 그 사회에 바퀴벌레, 쥐새끼등과 같은 혐오의 말들이 난무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반도 안을 들여다보면 바퀴벌레같은 혐오의 말이 실제 바퀴벌레보다 더 가득하다. 여기에 더해 세계적으로 지정학적 위기가 부각되면서 국내 방위산업체들의 주가 상승세가 뜨겁다는 낯 뜨거운 기사들이 각종 방송 매체를 메우고 있다. 전쟁이 무기를 만들었지만, 이제 무기가 전쟁을 만들고 있다.

 

전쟁이 가시화된다는 것은 정치의 실패를 의미한다. 철학자 푸코의 말이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2018년 군사분계선 도보다리 위로 피어났던 한반도의 따뜻한 봄기운이 전쟁의 먹구름으로 바뀌었다. 북에도 책임이 있지만, 적어도 잘못의 절반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대적 공존이라는 낡은 무기를 꺼내든 남쪽 정권의 몫이다. 한 국회의원은 국가안보실장에게 문자로 미사일 타격을 주문했다.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언제나 깊고 안전한 방공호에 있는 이들이라 더 두렵다.

 

전쟁을 막아야 한다. 지난 20179월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에서 사용한 폭탄은 약 100~300 핵출력(kt)이다. 이것 하나만 용산에 떨어져도 약 37만명이 사망하고, 12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죽은 이에게 전쟁의 승리는 없다. 더욱이 이제 일어날 전쟁은 죽은 자에게만 끝나는 전쟁이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전쟁의 공포 속에서 자포자기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전쟁을 막는 일이다. 다행히 역사는 무엇이 전쟁을 막을 수 있는지 알려준다. 평화의 철학자이기도 했던 칸트는 비공화주의적 헌법하에서, 신민이 시민이 아닌 곳에서, 가장 쉬운 일이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다. 민의를 대변하는 정치 지도자와 엄정한 법 집행이 전쟁을 막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10%대의 낮은 지지율과 검찰의 사유화는 한국 사회가 중요한 두개의 전쟁 안전핀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부패하고,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정치권력의 교체만큼 지금 한반도에서 전쟁 예방을 위해 필요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함께 나누던 그 민주주의의 광장을 탈환해야 한다.

 

■■■ ■■■■ ■■하라많은 이들이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고통 속에서 읽었다지만, 나는 고통만으로 읽을 수 없었다. 도청에 아직 소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 소년이 총에 맞은 후 방수 모포에 쓸려 담겨 청소차로 실려 갔다지만, 나는 (도청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하자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났던 그 소년, 동호가, 그리고 영재와 이름 모르는 소년들이 여전히 도망치지 않고도청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들의 수가 많아야 함부로 못 들어올 텐데”,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 주십시오, 지금 ■■■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제발 불이라도 켜주세요, 여러분.” 한반도에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다. “전쟁이 온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 한겨레 2024.11.03.

 

 

. 북한군 포로 데려온다고? 김칫국 마시는 윤정부

러시아에 간 북한군이 우크라이나군과 전투를 벌이다 붙잡히면 한국이 북한군 포로를 신문하고 국내로 데려올 수 있을까. 따져볼 게 많은 복잡한 일인데도, 윤석열 정부는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한 태도다.

 

국가정보원은 지난달 29일 비공개로 진행한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우크라이나군에 투항하거나 포로로 잡힌 북한군이 귀순을 요청할 경우 우리 헌법상 영토에 있는 국민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당연히 귀순을 받아줘야 한다고 밝혔다. 헌법 3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영토 조항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인 북한군 포로가 귀순을 요청하면 받아주고 국내로 데려오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도 지난달 30일 기자들과 만나 우크라이나 모니터링단에 북한군 포로 신문 요원이나 심리전 요원이 포함되느냐는 질문을 받고 모니터링 내용이 북한군의 심리적 동요와 이탈에 관한 문제까지 우크라이나 정부와 함께 협의해서 처리할 필요가 있는지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북한군 포로들을 신문하고 귀순시켜 국내로 데려오는 상황까지 검토하겠다는 이야기다.

 

지난달까지 북한군과 우크라이나군의 교전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고위 관계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북한군 포로 신문, 귀순 수용 등을 언급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언행이었다.

 

먼저 한국의 북한군 포로 신문 참여부터 녹록지 않다. 우크라이나전에 참전하지 않는 한국은 북한군 포로 신문에 참여할 권한이 없다. 포로 신문은 교전 당사국인 우크라이나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전쟁포로에 관한 국제법규인 제네바 협약17조에는 “(포로를 신문할 때는) 그들이 이해하는 언어로 실시하여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를 근거로 한국이 북한군 포로 신문에 참여를 요청하고, 우크라이나가 허락하면 북한군 포로 신문 과정에 한국이 통역으로 참여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첩보를 얻기 위한 체계적인 직접 질문인 신문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 뜻이 통하도록 말을 옮겨주는 통역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

 

북한군 귀순 유도 작업은 신문보다 더 어렵다. 헌법 영토조항을 근거로 북한군도 한국 국민이니 귀순하면 받아줘야 한다는 주장은 국내에선 통하지만, 이 논리로 국제사회를 설득하긴 어렵다. 남북이 19919월 유엔에 동시 가입한 이후 국제사회는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실재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한국이 북한군 포로를 데려가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될까. 제네바 협약 제118조는 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한 후 지체 없이 석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북한은 이 조항을 근거로 즉각 송환을 요구하고 자국민 납치 공작이라고 반발할 경우 국제 논란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가 허용하거나 묵인하면 북한군 포로를 국내로 데려올 수 있다. 과거 중국이 자국 내 탈북민들의 제3국을 통한 한국행을 묵인해온 사례도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북한군 포로를 난민으로 인정하면, 이들을 국내로 데려올 길이 열릴 수 있다.

 

하지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이 가능성을 일찌감치 닫아버렸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달 30(현지시각) 한국방송(KBS)과 한 인터뷰에서 북한군 포로의 한국행 가능성에 대해 모든 국적 포로를 전쟁포로로 대우하겠다고 말했다. 북한군 포로를 난민이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러시아(에 붙잡힌 우크라이나군) 포로와 교환할 자원을 늘리는 것이라며 우리는 북한군 병력도 우크라이나인과 교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북한군 포로를 한국에 보내지 않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군 포로와 교환하겠다는 것이다. 북한군 포로 신문, 귀순 유도 작업은 떡 줄 우크라이나는 생각도 않는데 윤석열 정부가 김칫국부터 마신 격이다.

권혁철 | 통일외교팀장 | 한겨레 2024.11.03.

 

한은이 뒤흔든 능력주의신화

한국은행이 지난 8월 말 내놓은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와 대응방안보고서는 이후 공론장에서 꽤 파문을 일으켰다. 지난달 14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한은 대상 국정감사에서도 보고서를 둘러싼 질의와 응답이 이어져 마치 교육위원회 국감장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얼핏 보기에 한은의 업무 범위에서 벗어난 사회 이슈를 다룬 것과 관련해 이창용 한은 총재를 향해 출마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문제의 보고서는 입시경쟁이 사교육 부담, 저출생, 수도권 인구집중, 집값 상승 등 우리나라의 여러 사회문제를 유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이 보고서가 세간의 화제가 된 것은 대안으로 내놓은 대입 지역별 비례선발제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 중 하나인 입시제도를 건드린데다, 그 내용이 상위권대의 신입생을 지역별 학생 수에 비례해서 뽑아야 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은 예상한 대로 현실적으로 어렵다” “검토한 바 없다” “시기상조다같은 부정적인 반응을 일제히 내놓았다.

 

하지만 한은의 보고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대안만이 아니다. 보고서는 지역별 비례선발제를 주장하기 위해 여러 논거를 제시하는데, 특히 중요한 부분은 부모의 경제력과 학생 거주지역이 대학 진학률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대목이다. 보고서는 실증 분석 결과 2010년 소득 상위 20%와 하위 80% 간 상위권대 진학률 격차 중 75%는 학생 잠재력이 아닌 부모 경제력 효과의 결과라고 추정했다. 또한 2018년 서울과 비서울지역 간 서울대 진학률 격차 중 92%는 부모 경제력과 사교육 환경 등을 포괄하는 거주지역 효과에 기인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같은 잠재력을 가진 학생들 사이에서도 부모가 부유하고 사교육 환경이 좋은 지역에 사는 학생일수록 상위권대에 갈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수치로 보여준 것이다.

 

한은의 분석이 가지는 사회적 함의는 우리 교육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기본 이념 중 하나인 능력주의에 균열을 냈다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성공했다면 그에 따른 사회적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이념이다. 한은 보고서는 능력주의의 기본 전제인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다는 부분에 의문을 제기한다. 부모의 경제력과 사는 지역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교육에 차이가 있다면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회의 평등이라는 이 전제가 충족되지 못한다면 과연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부모의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되는 봉건사회보다 우월하다고 인정되는 것은 누구나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사다리를 타고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다고, 즉 능력주의가 작동하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다리의 대표적인 제도가 교육이다. 사회경제적 배경과 관계없이 모든 학생이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최대한 펼치고, 이를 통해 사회적 상승을 이룰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명제다. 하지만 한은의 보고서는 우리 교육이 사회적 이동성의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대물림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미국의 철학자인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 역시 미국의 대학 입시가 부유층에 유리하게 변해가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미국에서 상위 1% 가정 출신이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은 하위 20% 출신보다 77배 크다. “미국의 고등교육은 대부분의 사람이 최상층에서 올라타는 엘리베이터와 같다.”(‘공정하다는 착각’) 샌델이 제시하는 대안은 추첨제. 지원자들 가운데 학습 능력이 부족해 보이는 일부만 걸러낸 뒤 나머지 학생 중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신입생을 뽑자고 제안한다. 한은의 지역별 비례선발제는 이에 비하면 보수적인 아이디어다.

 

지역별 비례선발제가 입시제도의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하고 치밀한 검토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한은 보고서가 촉발시킨 과연 한국의 능력주의는 공정하게 작동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사회가 건강한 공동체로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대답되어야 한다.

안선희 | 논설위원 | 한겨레 2024.11.03.

하여튼'66번 대통령의 기자회견, '김건희 프로젝트' 3탄이었나

'하여튼 대통령', 이런 기자회견 왜 했나?

'바이든-날리면' 사태는 윤석열 정부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사건이자, 대한민국 언론 자유의 핵심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 국민이 보고 들은 영상과 육성이 존재하는데도 뻔뻔하게 '미국 국회가 아니라 한국 국회'라고,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윽박지르며 소송전까지 불사한다. 지록위마(指鹿爲馬)를 뻔뻔하게 구사한다.

 

대통령 부부가 김영선 공천을 받기 위해 발벗고 뛰었다는 의혹은 김영선, 이준석, 명태균, 강혜경 등등의 녹취와 증언을 짜맞추면 합리적인 스토리로 구성된다. 구체적인데다, 아귀가 딱딱 맞는다. 하지만 대통령은 수많은 증거와 정황, 증언들을 두고 특유의 '두루뭉술 화법''자기 모순' 화법으로 넘어간다. 기자회견을 요약하면 기억은 잘 안나지만 실제 '김영선이 해 줘라'는 말을 했더라도 '의견 제시' 수준이라는 거다.

 

검사 앞에 선 피의자가 일부러 바보 행세를 하면서 혐의를 부인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란 지적이 나온다. 검사 출신인 김용남 전 의원은 이를 '더듬수'라 표현했다. 쉽게 말해 '나는 바빠서 그런 일이 있는지 기억을 못하고, 설사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있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며,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설령 그런 행위를 했더라도 공모에 가담했다는 나의 혐의는 성립하지 않아요'라는 장황한 피의자식 화법이란 것이다.

 

202259일 윤석열 대통령은 명태균 씨에게 "공관위에서 나한테 들고 왔길래 내가 김영선이 경선 때부터 열심히 뛰었으니까 그거는 김영선이를 좀 해줘라 그랬는데 말이 많네 당에서"라고 말했다. 이 발언 자체는 부인하지 않고 있으니 사실로 간주할 수 있겠다. 검사들이 더 주목해야 하는 건 대통령의 발언보다 명태균 씨의 답변이다. "진짜 평생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명태균은 어떤 은혜를 입었을까?

 

수사의 프로토콜은 '이익을 본 자'를 족치는 데서 시작한다. 그가 어떤 이익(김영선 공천)을 봤는지 확정해야, 그 이익에 대한 대가(무상 여론조사)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더듬수'를 구사하는 용의자를 잡는 방법이다.

 

앞에서 이 얘기 하고, 뒤에서 저 얘기하는 대통령의 당당한 몰염치에 대해서는 수많은 언론이 이미 사설과 칼럼을 통해 지적하고 있으니, 이 글에서는 몇 가지 간과할 만한 사실들을 추가로 짚어보려 한다.

 

첫째, '바이든 날리면' 사건을 떠올린 이유는 이렇다. 윤 대통령은 미국의 특별검사 제도를 언급하며 묘하게도 미국 의회를 "미국 국회"라고 표현한다. 대통령은 "과거에 이란콘트라 케이스의 경우에 미국 국회에서 특별검사법이라고 하는 걸 (결의했다)", "(미국) 국회가 특별검사를 (통해) 수사해야 하지 않느냐는 결의를 하게 되면..."이라고 말한다.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시간을 거슬 20229월 있었던 '바이든-날리면' 사태 당시 김은혜 홍보수석은 "지금 다시 한번 들어봐 주십시오. '국회에서 승인 안 해 주고 '날리면'이라고 되어 있다""여기에서 미국 (국회) 얘기가 나올리가 없고, '바이든'이라는 말을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은 지금은 폐기한 '도어스테핑'에서 MBC 보도를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했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외교부는 MBC를 상대로 정정보도 소송을 제기한다.

 

재밌는 건 법원이 '바이든-날리면'을 판독 불가라고 하면서도, 윤 대통령이 '의회'라고 한 점을 주목했다는 것이다. 바이든 역시 글로벌 펀드 공여를 위해선 미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회는 미국 의회'이고 '날리면은 바이든'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이 성립한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외교부의 손을 들어주면서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윤 대통령이 일반적으로 미국 의회를 지칭하는 '의회' 대신 착오로 대한민국 국회를 지칭하는 '국회'를 사용하였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하는데, 미국 의회를 '국회'로 잘못 지칭하였다고 볼 만한 합리적인 사정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논파한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평소에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미국 의회' 대신 '미국 국회'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공식 기자회견에서 두 번이나. '미국은 의회라고 하지 국회라고 하지 않는다'라는 반박이 힘을 잃은 순간이었다. 윤 대통령이 '미국 국회'를 지칭했다는 가능성이 생겼다면, '날리면'의 자리에 '바이든'이 오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법원이 충분히 참고할만 한 일이다.

 

여전히 "이 새끼들"'미국 국회가 아니고 한국 국회'를 향한 "상욕"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그동안 없었던 염치가 생기는 건 아니다.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국회가 대통령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국회 시정연설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한국 국회에 '이새끼들'이라고 '상욕'을 하는 대통령의 국회관을 먼저 따져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본인의 국정 실패로 여당이 총선에 참패해 야당 의석 우위의 실상이 합법적이고 유일한 현실인데, 욕설을 하고 거부권을 남발하는 대통령이 국회를 존중한다고 볼 수 있겠나.

 

유체이탈과 뻔뻔함, 그리고 부인에 대한 사랑만이 나뒹구는 국가 최고통치자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건 대통령의 화법이었다. 둘째, 이른바 '하여튼 대통령'이다.

 

"하여튼 저하고 통화하신 분 아마 손 들으라고 그러면 무지하게 많을걸요. 또 텔레그램이나 문자로 서로 주고받은 분들 뭐 엄청나게 많습니다. 근데 저는 이게 리스크도 있지만 장점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했는데 하여튼 이 부분은 제가 더 하여튼 이런 리스크를 좀 줄여 나가고 국민들이 어찌 됐든 이런 거로 걱정하고 속상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튼 좀 조치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이런 변화와 또 쇄신과 또 더 유능한 모습 이런 것들을 국민들께 보여드리고 또 영남 일부에서 말씀을 하시니 뭐 또 대구 경북 지역에 계신 분들은 하여튼 좀 하여튼 전체적으로 국민들께서 속상해하지 않으시도록 하여튼 잘 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사적 통화 문제와 10%대 지지율 관련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 짧은 문장들 틈에 '하여튼'8번 나온다. 대통령의 기자회견에서 클로바노트 로 옮겼을 기준으로 '하여튼'이란 말은 총 66번 나왔다. 대통령이 선호한다는 "국어사전 정의"에 따르면 '하여튼(何如)'"의견이나 일의 성질, 형편, 상태 따위가 어떻게 되어 있든"을 의미하는 부사다. 대통령은 자신과 관련된 의혹 제기에 대해 답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하여튼'을 쓴다. 조금 박절하게 말하자면 '아 됐고'의 느낌으로 들린다. 이런 언어 습관은 뭔가 일을 급하게 마무리하려는 심리, 잘못된 걸 지적할 때 변명거리를 생각해내는 심리와 연관돼 있다. 뻔하게 드러난 사실들을 앞에 두고 '하여튼 잘 하겠다'를 남발하는 건 성의없음으로 보여진다.

 

무의식적 언어 습관까지 지적하는 게 박절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총평하기에 '하여튼'만한 단어가 없다는 점을 "양해" 바란다. '하여튼' 기자회견에 '하여튼' 대통령을 보고 있으니, 이런 수준의 기자회견을 대체 왜 했는지, 참모들은 왜 말리지 않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용산 김건희 라인' 쇄신도 없고, 국정 기조 전환도 없이 '하여튼 사과'했다는 것인가? 당황스럽도록 장황한 변명의 향연이 끝나고 남은 건 대통령의 부인 사랑과, 김건희 영부인의 국정 개입 공식화다. 이번 기자회견은 두 번의 검찰 수사 면죄부에 이은 대통령의 마지막 '김건희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하여튼 그렇다.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4.11.09

 

 

조은산 님을 찾습니다

윤석열 정권의 위기가 깊어졌다. 대통령의 117끝장 기자회견은 도움은 되지 않고 새로운 조롱거리만 제공했다. 위기의 징후는 사방에 널렸다. 제일 확실한 게 무얼까? 대통령의 언행과 정책을 내놓고 옹호하는 논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라고 나는 본다. 방송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보수 패널들은 대통령과 정부를 옹호하지 못한다.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를 비방하며 양비론을 펴는 게 그들의 유일한 전략이다.

 

윤석열을 비판하는 보수 논객이 하나둘이 아니다. 정규재 씨는 대선 전부터 그랬다. ‘보수의 거성전원책 변호사는 요즘 들어 비판을 시작했다. 지난 대선 때 그는 나와 함께 KBS <정치합시다>에 고정 출연했다.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고, 선거 기간 내내 윤석열의 넉넉한 승리를 장담했다. 개표 생방송 도중 윤석열 당선 확실뉴스가 뜨자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며 기뻐했다. 민주당의 분열과 윤석열 주도 정계개편을 예측했다. 그랬던 그가 더는 윤석열을 편들지 않는다. 이재명과 민주당을 비판할 뿐이다.

 

보수 논객들 떠나간 윤 주변엔 김건희 라인아부꾼들만 득실

대통령은 외롭다. 지근거리에는 용산 대통령실의 김건희 라인아부꾼들뿐이다. 그래서인지 밤에 술친구를 관저로 부른다는 소문이 돈다. 윤석열은 박수부대를 배치해둔 행사장만 다닌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곳은 가지 않는다. 야당 의원들이 야유한다고 해서 국회까지 외면했다. 예산안 시정연설을 총리가 대신하게 했다. 똑같은 이유로 신문 방송 뉴스도 직접 보지 않고 대충 보고만 받는 듯하다. 내놓고 편들어주는 데가 KBS 하나뿐이니 그럴 만도 하다. 신문도 <한국경제><매일신문> 빼고는 무조건 대통령을 옹호하는 데가 없는 것 같다. <조선> <중앙> <동아>조차 내놓고 대통령을 디스한다. 친윤 유튜브 채널은 위로가 되지만 영향력이 없다. <신의한수> <고성국TV> <배승희변호사> 등 대표적인 친윤 유튜브 방송은 최근 한동훈을 비난하는 데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구독자는 백만 명이 넘지만 생방송 실시간 구독자와 영상 조회 수는 빈약하다.

 

지난 주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가 17퍼센트까지 내려갔다. 민주당 지지층은 원래 부정적이라고 하자. 문제는 중도층 또는 무당층인데, 여기서도 긍정 평가는 10퍼센트 안팎에 지나지 않았다. 국힘당 지지층조차 절반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불만을 표시했다. 여기서 더 내려가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논객다운 논객이 필요하다. 유능한 논객들이 나서야 유리한 정보와 설득력 있는 논리로 지지층을 결집하고 중도층을 포섭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논객이 보이지 않는다. 친윤 유튜버들은 여전히 활발하지만 목적이 무엇인지 미심쩍다. 새로운 지지자를 확보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의 지지층을 선동해 수익을 창출하는 데 몰두하는 것 아닌지 의심할 만하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사회가 발전하려면 보수와 진보가 치열하게 논쟁하고 토론하고 경쟁하고 때로는 타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수 논객의 실종은 윤석열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윤석열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서, 보수 논객의 분발을 촉구한다. 특히 문재인 정부 때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스타 논객들의 전선 복귀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들은 윤석열 정권 탄생에 큰 기여를 했다. 대통령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봉착했는데 뭐하고 있는가. 몸을 아끼지 말고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윤석열 정부를 옹호하던 '논객'들은 지금 어디서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연합뉴스 사진.

 

사라진 보수 논객들 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진인조은산

누가 있냐고? 많다. 2019년 여름의 조국 전쟁을 이끌었던 보수 논객이 숱하게 많지 않은가. 제일 유명한 그룹이 진중권을 포함한 조국흑서 5인방이다. 한때 언론의 총아였던 그들이 왜 몸을 사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조국흑서 5인방의 뒤를 이어 보수의 구세주로 활약했던 스타 논객이 또 있다. 2020년 여름 혜성처럼 등장해 2022년 대선 때 초신성 폭발을 일으키고 홀연히 사라진 조은산이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기에 보이지 않는가?

 

조은산은 본명이 아니라 활동명일 것이다. 그는 202081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진인(塵人) 조은산이 시무7조를 주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니 굽어 살펴주시옵소서라는 긴 제목의 글을 올렸다. 언론이 시무7라는 줄임말로 널리 알린 그 청원은 고려 초기 최승로가 성종에게 긴급한 현안과제를 이야기한 시무28(時務二十八條)’를 오마주 또는 패러디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주일이 지난 819<일요신문>이 첫 보도를 냈고, <쿠키뉴스>는 청와대가 그 청원을 비공개 처리한 것을 게시판 조작이라고 비난했다.

 

826<문화일보><조선일보> 등이 문정부의 뼈를 때린 상소문을 숨겼다고 청와대를 때렸다. 청와대는 특정인에 대한 인신공격이 들어 있었던 그 청원을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심의한 뒤 827일 공개했다. 언론은 시무7와 조은산에 대한 보도를 하루 수백 건씩 쏟아냈다. 출근하는 대통령실 수석과 장관을 붙들고 시무7를 읽어봤는지 물었다. 반응하면 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않는 대로, 또 정부를 까는기사를 썼다. ‘조은산시무7는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 청원은 게시판에서 44만여 명의 동의를 받았고 규정에 따라 청와대 실무자가 답변했다. 언론이 하나마나 답변이라고 비난했다. 청원이 그런 답변밖에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했다.

.

역사극 대사 같은 7가지 시장주의 이데올로기의 횡설수설

시무7에서 조은산은 무슨 주장을 했는가? ‘민생 파탄’ ‘시장경제 퇴보’ ‘굴욕외교로 인해 여론조사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50퍼센트 아래로 내려갔다며 문재인 대통령을 꾸짖었다. ‘허황한 꿈’ ‘해괴한 말’ ‘미친 소리’ ‘배신자라는 말로 조국·이해찬·김현미·노영민 등 청와대와 정부 여당의 주요 인사를 비난했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다음 일곱 가지를 요구했다. 문장이 종잡기 어려울 정도로 어수선해서 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만 추렸다.

 

1)소득세·상속세·법인세·종부세 등 세금을 줄여라.

2)보편복지 정책과 최저임금 인상 등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버리고 기업 규제를 철폐하라.

3)한일관계를 개선하고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며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동참하라.

4)인간의 욕망 추구를 억압하는 부동산 규제를 철폐하라.

5)민주와 인권만 외치는 선동꾼·아첨꾼을 배격하고 자유를 함께 추구하는 인재를 등용하라.

6)토지거래 허가지역 지정 제도와 임대차 3법을 폐지하라.

7)적폐청산을 명분으로 한 정적 처단을 중단하고 낡은 이념과 복수심을 버려라.

 

어떤가? 대통령과 참모들이 일일이 대답할 필요가 있는 요구였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그때는 다른 이름표를 달고 있었던 국힘당, 동과 재벌 기관지인 경제신문들이 주장한 바로 그 정책이었다. 그래서 재벌언론족벌언론건설사언론은 시무7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명문인 양 추켜세웠다. 그러나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리 평가한다. 조은산의 글은 극단적인 시장주의 이데올로기를 역사극 대사 같은 문장으로 포장한 횡설수설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평가도 다를 수 있음은 인정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미워하고 민주당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은 조은산을 위대한 애국자로, ‘시무7를 역사의 명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보수언론이 명문장가로 떠받든 막말 범벅 파워 블로거

무슨 근거로? 책 판매 데이터가 있다. 조은산이 한 정치적 주장을 조은산 스타일의 문장으로 쓴 책으로는 시장에서 먹고 살기 어렵다. 20218월 조은산은 <시무7>(매일경제신문사)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이 대대적으로 소개하고 추천했다. 윤석열·윤희숙·서민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인사들이 추천사를 썼다. 그러나 그 책은 온라인서점 예스24에서 딱 한 주 국내도서 베스트셀러 ‘TOP100’에 들었을 뿐이다. 딱 한 주였고, ‘TOP10’이 아니라 ‘TOP100’이었다. 교보문고와 알라딘의 판매실적과 독자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은산의 책은 별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고 도서시장에서 사라졌다.

 

그렇지만 기자들의 판단은 달랐다. 얼굴도 신분도 밝히지 않은, 서른아홉 살 먹은 직장인이라고만 알려진 조은산을, 우국충정 넘치는 명문장가로 떠받들었다. 조은산이 블로그에 무언가 쓰기만 하면, 말이 되는 글이든 아니든, 최대한 선정적인 제목을 붙여 보도했다. 특정 언론만 그렇게 한 게 아니었다. 극소수 중도 성향 신문, 방송을 제외하고 모든 언론사가 똑같았다. 정말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면 시무7조 조은산을 키워드로 2020819일부터 2022315일까지, 포털 뉴스를 시간 순으로 검색해 보시라.

 

파워 블로거 조은산의 언어와 문장은 정확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극우 커뮤니티 댓글 수준이었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마다 막말을 섞어 썼다. 기자들은 정확하게 그 막말을 제목으로 뽑았다. 조은산이 누구를 어떤 막말로 비난했는지 몇몇 사례만 들겠다. ‘김현미 대신 붕어를 쓰고 추미애 대신 개를 써라’, ‘이낙연은 얼굴 하나 입 두 개인 기형생물’, ‘이재명은 뱀처럼 교활한 자’, ‘공수처라는 괴물’, ‘검찰개혁은 문재인 일가를 보호하려는 거대 사기극’, ‘김어준은 털 많고 탈 많은 음모론자’, ‘이재명의 입을 막을 헛소리 총량제 필요’, ‘OOO의 용모는 견적도 안 나오는 고생대 생물’.

 

이재명은 뱀”, 밥 같이 먹은 윤석열은 목줄 찬 이리떼 속 호랑이

그런데 조은산이 만인에게 막말을 한 건 아니다. 나름 품격 있는 언어를 쓴 경우도 있었다. 누구를 평할 때 그랬는지 몇몇 대표 사례를 보겠다. ‘진중권은 관우장비같은 인물’, ‘너무나 큰 자산 금태섭을 잃은 민주당’, ‘목줄 찬 이리들 사이의 유일한 호랑이 윤석열’, ‘가련한 경력 부풀리기에 불과한 김건희의 이력서’. 막말과 칭찬 모두 기자들이 따옴표를 쳐서 인용한 기사에서 가져왔다. 조은산이 자신의 블로그를 비공개 처리한 탓에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밝혀둔다.

 

조은산은 2021723일 윤석열을 만나 한 시간 반 정도 밥을 함께 먹으며 대화했다. 열흘 정도 뒤에 그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자 언론은 복붙기사를 쏟아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윤석열은 달변가였으나 모든 걸 안다는 듯 말하지 않고 모든 걸 받아들일 것처럼 말했다. 철학은 확고하고 말은 직설적이었다. 그의 발언을 둘러싼 논란을 조금은 이해했다고 썼다. 윤석열이 콩 국물을 마시다 흘렸는데, 그것도 소탈한 모습이라며 호평했다. 대선 기간 내내 문재인과 이재명과 민주당 인사들을 조롱하고 저주했던 조은산은 대선 직후인 2022314일 다음과 같이 작별 인사를 하고 블로그를 닫았다.

여러분과 함께 20223월을 맞이했음이 자랑스럽다. 다시 글을 쓴다면 신분을 밝히고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이후일 것이다. 당신이 글을 쓰지 않는 건 직무유기나 다름없다는 어느 분의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잠시 동안은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살아가고 싶다.”

 

2년 반이 지났다. ‘잠시 동안이라고 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가 절반 지났다. 조은산은 분명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나는 조은산의 본명이 무엇인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한 주장을 들었고 그가 쓴 글을 읽었다. 언론은 대선을 앞두고 1년 반 동안 조은산의 입에 막강한 확성기를 대주었다. 조은산뿐만 아니라 문재인과 이재명과 민주당을 비난하는 모든 사람을 그런 방식으로 써먹었다. 그렇게 해서 윤석열의 득표율 0.7퍼센트 포인트 차이 승리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조은산은 특별하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비평가 행세를 하는데도 언론이 스타 대우를 해준 사례는 그가 유일하다.

 

<시무7> 시킨대로 한 윤석열이 위기인데 조은산은 어디 있나

조은산에게 묻는다. 왜 윤석열의 위기를 방관하고 있는가? 그토록 조은산을 띄웠던 언론은 왜 그를 불러내지 않는가. 윤석열 정권은 조은산 같은 저질 이념 선동가와 기득권 언론과 국힘당이 손잡고 만든 흉물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윤석열은 조은산이 시무7에서 시킨 그대로 해왔다. 결과가 어떤가? 경제는 엉망이고 민생은 파탄이다. 경제성장률부터 무역수지, 기업투자를 포함한 국내수요, 재정수지, 환율, 물가, 주가지수, 실질소득과 분배지표까지 윤석열 취임 전보다 나아진 경제지표가 한 개도 없다. 윤석열은 국익과 민생을 돌보지 않고 권력의 단맛에 취해 아무 한 일 없이 임기 절반을 보냈다. 검찰과 여당을 사유화했다. 공무원의 기본인 출퇴근 시간 준수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대통령 노릇은 하지 않고 임금님 놀이만 했다.

 

윤석열 정권이 조속히 철거해야 마땅한 흉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조은산은 잠시 동안누렸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공론의 광장으로 나와 논객으로서 정권을 수호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흉물이라고 생각한다면 20208시무7를 쓴 때와 같은 자세로 윤석열 정권을 비판해야 마땅하다. 자신의 입에 확성기를 대주었던 언론과 함께 윤석열 정권이라는 흉물을 철거하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흉물은 만든 사람이 치우는 게 상식 아닌가.

 

대통령실 청원게시판이 있으면 우리 시대의 문장가 조은산 님을 찾아주세요라는 청원을 등록하고 싶다. 하지만 윤석열이 청원게시판을 없애버려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언론에 공개 청원을 한다. 글을 마무리하는데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혹시 조은산이 용산 대통령실에 근무하고 있는데 내가 몰라서 이러는 건 아닐까? 만약 그런 사실이 확인된다면 나는 이 칼럼을 삭제해 달라고 <시민언론 민들레>에 요청할 생각이다. 윤석열 정권의 심장부에서 몸 바쳐 일하는 사람더러 직무를 유기한다고 비판해서야 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조은산 님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주기를 요청한다

유시민 작가 | 민들레 2024.11.11.

 

 

일상의 노동 없는 자칭 '도사'들은 다 사기꾼

나는 평생 사회운동가로 살아왔지만 흘려보낸 시간의 대부분은 일상의 노동으로 채워져 있다. 사람들은 황대권이 무척 바쁜 사람으로 알고 연락하기를 주저한다. 바쁜 것은 맞다. 그러나 공적인 일로 바쁜 것이 아니라 일상의 노동으로 인해 바쁘다. 나는 40대 이후로 공동체나 공동체와 유사한 조건에서 살았기 때문에 살림과 관련된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터진 옷 꿰매고, 개밥 챙겨주고, 농사짓고, 집 고치고, 이것저것 만들고... 살림의 기본이라고 일컫는 의식주 가운데 식()과 주()는 어느 정도 해결했으나 의()만큼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 옷을 만들어 입으려고 재봉틀까지 구해 놓았으나 진척이 별로 없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이고 입을 만한 옷이 주위에 널려 있어 절박함이 없어서이다.

 

사람들이 황대권의 사는 모습을 아는 유일한 통로는 페이스북이다. 거기에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의 노동을 적을 수 없어 주로 사람 만난 일이나 공적인 행위를 적는다. 그러다 보니 아, 황대권은 사회활동으로 몹시 바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한다. 착각이다. 일상의 노동이 쉼 없이 이어지다 보니 틈이 생길 때 집중적으로 사회활동을 하는 것뿐이다. 하루종일 방바닥에 누워 TV를 보며 지내는 백수가 어쩌다가 볕이 좋은 날 테라스에 앉아 만화책을 읽곤 했는데 이웃집 아파트 주민이 우연히 그 장면만 몇 번 보고는 저 집 아저씨는 독서광이구나하고 생각한 거와 같다.

 

산업화 이후의 분업과 전문화 시대

산업사회가 들어서기 전 대부분의 민초들은 그렇게 살았을 것으로 본다. 다만 당시에는 남녀의 역할 구분이 명확하여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필요한 일은 자기 손으로 거의 다 해결하며 살았다. 산업사회의 엄청난 생산력은 분업에서 나왔다. 혼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보다 일의 과정을 나누어 전문화해서 통합하면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19세기 이래 세계는 분업과 전문화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를 게을리하는 사람이나 국가는 시대의 낙오자가 되었다. 단순한 낙오자가 아니라 앞선 사람이나 국가의 노예로 전락하였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제3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안타깝게도 그 과정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끊임없이 일을 쪼개고 전문화하고 기계화하고 디지털화한다. 이 일을 잘하면 선진국 소리를 듣고, 잘못하면 후진국 소리를 듣는다.

 

더 인간적인 후진국

이곳저곳 해외여행을 해본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것이 있다. 선진국보다 후진국 여행을 할 때 좀 더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 왜일까? 가난하면 인간적일까? 가난해서 인간이 망가지는 경우도 많던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요리할 때 재료를 한없이 작게 자르고 분쇄하면 재료 원래의 맛이 없어지거나 변한다. 그래서 재료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요리사는 손질을 되도록 적게 한다. 수채화를 그릴 때도 파레트의 물감을 붓에 묻혀 한두 번의 터치로 색을 입히는 것과 여러 번 덧칠한 것을 비교해 보면 전자가 훨씬 투명하고 생동감이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인간됨은 장구한 세월 자연과 소박한 공동체에서 형성된 것이다. AI가 지배하는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간됨은 이전과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직은 AI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므로 나는 인간적이란 말의 의미를 이전의 관습에 따라 사용할 것이다.

 

일이 곧 사람이다

일을 하면 그 안에 일하는 인간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일은 대충 해 놓고 돈만 탐하는 사람, 죽어라 일해 놓고 인정받는 것만으로 기뻐하는 사람 등등, 일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 일은 곧 사람이다. 그런데 일을 쪼개고 쪼개 미립자 단위까지 가면 사람이 없어지고 만다. 일의 결과는 어마어마한데 거기에 사람이 없다. 분업과 전문화가 발달한 선진국에 가서 인간미를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미가 밥 먹여 주냐,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 이런 얘기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미 찾다가 굶어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인간미가 살아 있는 세상에서는 절대 굶어 죽지 않는다. 세상이 이미 인간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양극단의 중간쯤 어디일 것이다. 조금 못 살아도 인간미가 있는 세상, 또는 인간미가 살짝 아쉽지만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한 세상.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계에 중간이란 없다. 굶어 죽기 아니면 배부른 돼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살아남는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잊혀진 일상의 노동

이런 극단적인 세상을 만든 주역은 누구일까? 자본가일까 정치인일까, 아니면 전문가일까? 아마도 그 모두일 것이다. 사실 주범은 자본의 논리이다. 이익을 내야 사업이 유지되고 동종 업계의 경쟁을 이겨내기 위해 상대보다 더 많은 재투자를 해야 한다. 더 큰 이익을 내기 위해 끝없이 재투자해야 하는 자본의 논리에 빠지면 헤어날 방도가 없다. 이익을 내지 못하면 시장에서 도태되므로 방법이 없다. 자본의 논리는 호랑이 등이다. 한번 올라타면 내 의지로 멈출 수가 없다.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지식인도 마찬가지다. 원래 분업과 전문화는 자본의 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인데 지식 사회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지식이 끝없이 세분화 전문화되어 기어코 AI까지 왔다. 지식을 생산하는 지식인조차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요즘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내용은 같은데 제목만 다른 동영상이 수없이 나돌아다닌다. 모두 AI로 만든 동영상이다. 구독자를 늘리려고 온갖 낚시성 제목이 난무한다. AI가 사람들을 사기꾼으로 만든다. 먹고살기 위해 인간미를 내팽개치는 대표적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자본의 논리에 사로잡혀 인간성을 상실하는 사이 사람들은 우리 조상들이 누렸던 일상의 노동이 사라진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 잊은 게 아니라 그런 일상은 옛날 사람이나 하던 일이지 지금은 치열하게 자본의 논리에 충실할 때라고 강변한다. 살림과 관련된 일상의 노동을 최소화하고 나는 전문가의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단순노동은 인생 낭비인가?

나는 외형적으로 사회운동가 또는 작가의 삶을 살아왔다. 넓은 의미로는 시골에 사는 지식인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다. 언젠가 미국의 공동체 운동에 관한 책을 읽다가 1970년대 초반 광풍처럼 일었던 귀농운동이 한 10년쯤 지나 대부분 도시로 돌아갔다는 구절을 본 적이 있다. 도시에서 전문가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한때 히피 사상에 빠져 자연과 공동체를 추구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게 아닌데...” 하며 도시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시골 농촌의 자급자족 살림은 끊임없는 단순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이 단순노동을 견뎌내지 못하면 시골살이가 공포로 느껴지고 무의미해진다.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나의 능력과 재주를 최대로 발휘해 승리자가 되는 느낌은 마약과도 같아서 쉽사리 벗어나기 힘들다. 그것이 마치 살아있는 이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와 달리 경쟁 상대가 없는 단순노동은 인생을 그저 소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 삶을 이런 단순 노동으로 채우는 것과 공장의 기계에 붙어 평생 저임금 노동자로 사는 것이 뭐가 다르지?”

매일 매일 지겹도록 반복하는 단순노동이 대안의 세상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이럴 시간에 도시에 나가 불의에 저항하는 데모대에 합류하거나 길거리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숨어 있다. 첫째가 단순노동은 의미 없다는 전제이고, 둘째가 누군가와 경쟁하여 승리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며, 셋째가 나에게 익숙하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경쟁은 사회발전의 첨가제이지 기본동력 아니다

먼저, 모든 단순노동은 위대하다. 아무리 복잡한 노동일지라도 그 기본은 단순노동이다. 단순노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잘하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단순노동의 위대함은 그것이 육체노동과 결부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세상을 망친 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육체노동을 경시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부류가 정치가와 지식인이다. 전문가로서 이들의 이력에 육체노동은 시간 낭비로 기억될 뿐이다. 이런 자들이 만든 세상은 근본이 없는 세상 또는 기초가 부실한 세상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경쟁은 사회발전의 첨가제이지 기본 동력이 아니다. 경쟁과 욕망이 결합하여 세상을 살기 힘든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끝내 지구 위 모든 생명의 터전을 위험에 빠트렸다. ‘적당히를 넘어선 경쟁은 사회발전의 독이 된다.

 

마지막은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가 긴장하면 심사위원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당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맞는 말이긴 하나 어떤 경우에도 맞는 말은 아니다. 오디션에서조차 내게 익숙한 것만 계속하면 탈락하고 만다. 나에게 익숙한 것, 내가 잘하는 것을 계속해서는 잘못된 문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19세기 말에 조선에 들어온 일본 제국주의는 이 땅에 새로운 질서를 강요했다. 조선의 백성들이 엄청난 진통을 겪으며 그 질서를 받아들이고 익숙해지려 할 때 갑자기 일본이 물러나고 미국과 소련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질서의 주인은 바뀌었어도 내용은 같았기에 조선의 백성들은 열심히 적응하여 지금은 선진국 소리를 들을 만큼 새로운 질서의 강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 질서를 계속 유지하면 지구 자체가 결딴나는 사태를 맞이한다.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아마도 이 결별은 19세기 말 새로운 질서가 들어설 때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견뎌내고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전에는 남이 강요했지만 이제는 우리 손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야 한다. 다가올 미래가 두렵기는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설렘과 기대도 있다.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본능적으로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인류문명의 모든 위대한 진전은 어려움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어려움을 돌파하는 일이 꼭 괴로운 일만은 아니다. 그 안에 창조의 기쁨과 미지의 세계를 알아가는 경이가 숨어 있다.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첫 단계가 바로 단순노동이다.

 

풀 뽑기 노동과 글 쓰기 일은 대립하지 않는다

이틀 후면 원고 마감일인데 도무지 글의 진척이 없다. 잡초가 극성인 고추밭에서는 제발 좀 살려 달라고 아우성이다. 이럴 때 나는 주저 없이 책상을 박차고 나와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간다. 그러고는 온종일 밭에 쭈그리고 앉아 풀을 뽑는다. 적어도 풀을 뽑는 동안만큼은 원고 마감은 안중에도 없다. 풀을 뽑느라 귀중한 하루를 보냈지만 이상하리만치 불안감은 없다. 오랜 경험으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책상에 앉아 자판에 손을 얹는다. 막힘 없이 글이 나온다. 원고 마감 직전에 전송 버튼을 클릭하고는 다시 일상의 노동으로 돌아간다. 지난 20여 년간 무수한 원고 마감 시간을 겪었지만 남이 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노동 일을 하면서 한 번도 마감 시간을 놓친 적이 없다. 심지어 어떤 때는 마감 몇 시간 전까지 일하다가 무서운 집중력으로 글을 완성하여 보내기도 한다. 특별한 재능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내게는 일과 노동이 하나의 흐름 속에서 맺고 풀기를 거듭할 뿐 글쓰기나 살림을 위한 노동이 별개의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은 있다. 밭에서 김을 매면서도 머릿속 어딘가에는 글의 주제가 ‘ON’ 상태로 켜져 있다.

 

일상의 노동 없는 자칭 도사들은 다 사기꾼

일상의 노동과 관련해 글쓰기를 예로 들었지만 정치사회 활동도 마찬가지다. 밭에서 일하다가도 내가 관련된 사회단체에서 연락이 오면 호미를 내던지고 달려 나간다. 어떤 때는 그 길로 며칠 있다 돌아오기도 한다. 많은 동호회나 친목 모임, 예컨대 다회(茶會)나 요리연구 모임, 명상 모임 등에 나가 보면 정치적 발언이 금기로 되어 있다. 회원 또는 참석자의 단합을 위해서이다. 이해가 간다. 나도 내가 속한 단체에서 극우적 발언을 일삼는 사람을 쫓아내거나 제 발로 나온 적이 있다. 이런 일을 자주 겪다 보니 쓸데없는 논쟁을 줄이기 위해 회원들이 스스로 정치적 발언을 삼가는 것이 모임의 예절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치사회 의식이 전혀 없는 모임도 많다. 이들은 세상이 어떻게 되든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계속되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것이 취미건 연구건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웃 나라가 침략해 들어와 주권을 유린해도 내 관심사가 지속되는 한 침묵으로 일관한다. 역사적 변화에 철저히 객체로 살아가는 군상이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내 관심사에 끌려다니는 일차원적 인간들이다.

 

또한, 천공처럼 분수를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는 도사나 동굴 속에 숨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도사도 문제이다. 이들에게는 일상의 노동도 없고 입만 열면 나오는 천지의 도라는 것도 지극히 자의적이다. 자기 입에 들어가는 밥알 하나 해결할 능력도 없는 도사는 다 사기꾼이다. 이런 자들의 감언이설에 빠져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지! 그런 사기꾼을 쫓아다닐 시간에 일상의 노동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내 삶과 세상을 평화롭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상의 노동이 주()고 다른 일들은 모두 부()

내 삶에서 일상의 노동은 주()이고 세상에 알려진 업종의 일들은 부()이다. 이런 패턴은 아주 오래전에 확립되었으며 남들이 내 이름자 앞에 무슨 수식어를 붙이든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는 방식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누구든 자기 방식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으니까. 다만, 과도한 욕망과 과도한 경쟁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모두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며 일상의 노동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의 탈출구가 아닌가 하여 이런 글을 쓴다. 일상의 노동을 모두 자본 시장에 맡겨 놓고 전문가의 삶을 사는 이들에겐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들리겠지만, 전문가적 삶의 종착지인 AI 시대가 눈앞에 너울대고 있는데도 여전히 익숙한 것을 붙들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보기를 바란다. 만약 인간이 AI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런 말을 무시해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하루빨리 대안을 찾아 나서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 혹자는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 멀리 왔다고 고백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멀리 왔건 아직 덜 왔건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이지 내가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이 아니다. 나의 삶이 천지자연의 도에 맞게 살고 있는지가 먼저이다. 결과는 천지가 결정하는 것이지 나의 의지가 아니다.

황대권 생명평화운동가 '야생초 편지' 작가 | 민들레 2024.11.11.

 

 

정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싸우는 것이 정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에 관하여라는 저작에서 고대 그리스판 대홍수 신화를 이야기한다. 세상이 사악한 인간으로 넘쳐나자 제우스가 홍수를 일으켜 인간 세상을 쓸어버리려 마음먹었다. 제우스의 뜻을 안 프로메테우스가 심성 바른 아들 데우칼리온에게 커다란 배를 만들라고 일렀다. 데우칼리온은 방주를 지어 아내 피라와 함께 탔다. 아흐레 밤낮을 홍수에 떠밀려 다니던 데우칼리온 부부는 파르나소스산에 다다랐고 이곳에 내려 살아남은 데 감사하는 제사를 지냈다.

 

거기서 두 사람은 어머니의 뼈를 어깨 너머로 던지라는 신탁을 받았다. 데우칼리온은 신탁을 옳게 해석해 어머니 대지의 돌을 집어 던졌다. 그 돌(laas)에서 사람들(laos)이 나왔다. 새 인류의 조상이 된 사람들은 먼저 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재발명하고 이어 나라(폴리스)를 이끄는 데 필요한 법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이 법의 창안을 지혜라고 불렀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일곱 현인이 시민에게 나누어준 지혜가 바로 그 지혜라고 말한다.

 

그 일곱 현인 중 한 사람이 그리스 최초의 자연철학자로 불리는 탈레스(기원전 624~546). 탈레스는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 밀레토스 사람이었다. 밀레토스는 그리스 본토 사람들이 기원전 10~8세기에 이주해 세운 자유도시의 하나였다. 탈레스가 나라의 법을 창안한 현인에 속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생각하면, 탈레스를 시조로 하는 자연철학이 자연에 관한 철학만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자연철학의 자연은 인간과 사회를 포함한 모든 것의 본성을 뜻한다. 그 탈레스 밑에서 밀레토스 학파가 나왔는데, 이 학파 사람들 중에 가장 주목받는 이가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기원전 610~546). 아낙시만드로스는 그리스인 가운데 처음으로 책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대중에게 알렸는데, ‘자연에 관하여라는 책도 그중 하나다.

 

탈레스는 우주의 바탕이 되는 시원 물질을 이라고 생각했고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 아낙시메네스는 시원 물질을 공기라고 생각했다. 스승과 제자의 생각에 반대해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기원이 되는 것을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주장했다. 아페이론이란 규정되지 않은 것, 한정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다. 시원 물질은 물이라든가 공기라든가 하는 특정하게 규정된 물질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되고 한정되기 이전의 어떤 무규정적인 것이다. 이 규정할 수 없는 물질이 소용돌이치면 거기서 축축한 것()과 메마른 것(),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공기)이 나온다. 이 네가지 원소가 얽히고설켜 우주 만상이 펼쳐진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렇게 펼쳐지는 만상을 다음과 같은 은유로 묘사했다.

 

사물은 자신이 생겨났던 곳으로 돌아가 소멸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물은 자신이 저지른 불의(adikia)에 대해 시간의 질서에 따라 처벌(정의, dike)을 받고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만물은 아페이론에서 태어난 원소들, 곧 물··공기·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원소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헤게모니를 장악해 다른 것을 제압할 때 사물이 생겨난다. 그렇게 생겨난 사물은 시간이 지나면 해체될 수밖에 없다. 이런 자연의 과정을 아낙시만드로스는 불의정의라는 윤리적 언어로 설명한다. 특정한 원소가 다른 원소들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기에 마침내 해체됨으로써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런 생각을 어디서 얻었을까? 이 독특한 발상의 출처를 보려면 밀레토스의 정치적 경험을 살펴야 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고향 밀레토스는 이주자들이 모여 세운 평등한 폴리스였다. 그곳의 정치체제는 왕과 같은 지배자가 민중 위에 군림하는 모나르키아’(monarchia, 군주체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등한 시민으로 나랏일에 참여하는 이소노미아’(isonomia, 평등체제)였다. 이소노미아는 모나르키아를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모나르키아가 들어선다면 그 체제는 조만간 해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윤리적·정치적 감각으로 아낙시만드로스는 자연의 질서를 해석한 것이다.

 

모나르키아에 대한 거부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탈레스는 땅(지구)이 드넓은 물 위에 떠 있다고 생각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스승의 생각을 거부하고, 지구를 떠받치는 데 물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에서 지구는 우주 한가운데 서 있고 그 주위를 태양과 달과 별이 돌고 있다. 커다란 동심원들의 중심에 지구가 놓여 있는 꼴이다. 이렇게 한가운데에 있기에 지구는 어디로도 쏠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킬 수 있다. 이 기하학적 균형을 가리키는 말이 또한 이소노미아.

 

여기에도 밀레토스의 정치적 경험이 배어 있다. 밀레토스의 이소노미아 체제는 구성원들의 평등성이 깨지지 않는 정치적 균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도시 한가운데 있는 광장 아고라와 아고라에 세워진 신성한 건물이다. 이 건물 안에는 공공의 화덕’(헤스티아 코이네, hestia koine)이 들어서 있었다. 집안의 중심에 화덕이 있어 가족의 평화와 번영을 상징했듯이, 도시의 중앙에 공공성의 불이 타오르는 화덕이 놓여 도시의 질서와 통합을 상징했던 것이다. 아고라의 화덕은 이소노미아라는 평등체제를 지탱하는 힘의 균형을 뜻했다.

 

헤겔은 철학사를 두고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야 날개를 편다고 말했다. 철학은 시대가 저문 뒤에야 일어난다. 자연철학이 탄생한 밀레토스야말로 이 말이 딱 들어맞는 곳이다. 아낙시만드로스를 비롯한 밀레토스 사람들이 우주를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한 시기는 이오니아가 이웃의 큰 나라에 먹혀 체제가 무너지던 때였다. 먼저는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이 기원전 561년 이오니아를 정복했고, 15년 뒤에는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리디아를 무너뜨리고 이오니아를 복속했다. 이렇게 정복된 폴리스에는 참주가 들어섰다.

 

철학자 피타고라스(기원전 570~495)도 고향 사모스섬에서 친구 폴리크라테스와 함께 정치개혁에 힘쓰다 친구가 참주가 되자 배신감을 안고 국외로 망명한 사람이었다. 피타고라스는 이탈리아 남부로 가 피타고라스 학파를 세웠다. 그러나 피타고라스 학파는 그곳에서도 지배자에 맞서 정치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 피타고라스 학파의 일원이었던 기원전 5세기 의학자 알크마이온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론을 인간이라는 소우주에 적용해 이렇게 말했다. “건강은 축축한 것과 메마른 것,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의 균형(이소노미아)에 있다.” 질병이란 이 균형이 무너져 어느 하나가 참주 노릇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컨대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은 자연철학인 동시에 사회철학이었다. 이오니아 철학자들은 사회를 보는 눈으로 우주를 보았다. 이런 사실을 또 다른 이오니아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480)의 사상에서도 볼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투쟁불화가 우주 만물을 형성시키는 힘이라고 말했다. 아낙시만드로스가 균형과 질서를 강조했기에 언뜻 보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실상 두 견해는 다르지 않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소노미아의 평등한 질서를 자연의 본성으로 제시함으로써 그 질서를 옹호했던 것이고, 페르시아의 지배가 굳어진 뒤에 태어난 헤라클레이토스는 투쟁만이 자유롭고 평등한 이소노미아 체제를 되찾는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같은 이야기를 다른 말로 했다. 정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정의를 되찾으려고 싸우는 것이 정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을 권력의 독점이라는 불균형에서 찾았다. 그러면서 혁명을 막으려면 첫째, 사소한 일에서도 법을 지킬 것, 둘째, 술수로 사람들을 속이지 말 것을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것이 공직을 이용해 재산을 불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 금기를 저버리면 혁명의 파도가 덮친다. 플라톤도 법률이라는 저작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을 불균형에서 찾았는데, 이때의 불균형은 통치자의 능력지위사이의 불균형이다. 작은 배가 큰 돛을 달면 뒤집히고 말듯이, 작은 인물이 큰 공직을 맡으면 모든 것이 뒤집히고 만다. 지금 이 나라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알크마이온식으로 말하면 무능한 참주가 멋대로 헤집고 다닌 탓에 몸에 큰 병이 든 꼴이다. 이대로 가면 나라 전체가 주저앉게 생겼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 한겨레 2024.11.12.

 

 

세금통계 앞 월급쟁이는 털 뽑히는느낌이 든다

과세의 기술은, 거위의 비명을 최소화하면서 가장 많은 깃털을 뽑는 것과 같다.”

프랑스 루이 14세 통치 초기에 재무장관을 지낸 장바티스트 콜베르(16191683)의 말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8, 세법 개정안에 대해 해명하면서 조원동 경제수석이 이 말을 입에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해 소득세 개편의 핵심은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꾸는 것이었는데, ‘총급여 3450만원 이상 중산층의 세 부담이 늘어나게 설계해, 불만을 샀다. 조 수석은 과세 대상을 늘리고 세 부담은 줄인다고 해명하려고 콜베르의 말을 인용했을 텐데, 납세자들은 실제 털을 뽑히는 느낌에 더 바르르 떨었다.

 

정부는 5일 뒤 수정안을 냈다. 총급여 5500만원 이하는 세 부담이 늘지 않고, 7천만원 이하는 평균 2~3만원 늘게 했다. 그렇게 넘어가나 했는데, 20151월 연말정산 때 난리가 났다. 연 급여 5500만원을 밑도는데도 세금이 늘어난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541만명에게 4227억원을 환급해주는 조처를 취했다.

 

근로소득세는 비명 안 나게 깃털 뽑기가 쉬운 세금이다. 세제를 가만 놔두기만 하면 된다. 물가가 오르고 명목임금이 오르면 높은 세율이 적용돼 세수가 절로 늘어난다. 박근혜 정부의 소득세제 개편 이후 과세표준 구간을 계속 손보지 않자 소득세수가 급증했다. 국세통계를 보면, 20102021년 법인세수가 1.9배로, 부가세수가 1.45배로 늘어나는 동안 소득세수는 3.05배로 늘었다. 근로소득세는 3.24배로 늘었다. 근로자 1인당 세액이 2013198만원에서 2020361만원으로, 거의 갑절로 늘어났다.

 

2022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소득세 과세표준 구간을 약간 조정했다. 지방소득세 포함 6.6% 세율 구간을 과표 1200만원까지에서 1400만원까지로, 26.4% 구간을 4600만원 이상에서 5천만원 이상으로 높여 세금을 깎아줬다. 일부에선 소득세도 부자 감세라는 비판이 나왔는데, 정치적 의미에서 보면 법인세 최고세율을 내리고, 종합부동산세를 큰 폭으로 깎고, 금융투자소득세도 유예하면서 소득세 납세자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개평성격이 짙었다.

 

이듬해인 2023년 우리나라 총 국세수입은 344조천억원으로 전년에 견줘 518천억원이나 줄었다. 하지만 근로소득세는 574천억원에서 591천억원으로 늘었다. 근로소득세의 세수 비중이 202214.5%에서 17.2%로 뛰었다.

 

올해는 어떨까? 기획재정부는 926일 올해 국세수입이 3377천억원으로 작년보다 6.4조원 더 줄 것이라고 세수 재추계 결과를 밝혔다. 기재부는 법인세 세수 감소폭이 당초 예상보다 큰 가운데, 양도소득세 등 자산시장 관련 세수가 부진한 것이 주요 원인이라며, 근로소득세는 취업자 수와 임금 증가에 따라늘고 있다고 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올해 근로소득세가 617천억원으로 작년보다 4% 늘어날 거라 본다. 세수 비중은 18.3%까지 치솟는다.

 

윤석열 정부는 올해 금투세를 폐지로 몰아붙이고, 최고세율 인하와 가업상속공제 확대를 통한 상속세 감세를 추진하고 있다. 그로 인한 세수 감소를 보전하기 위한 세금이 월급쟁이들한테 또 얹혀질 가능성이 높다. 부자 감세 남발이 그저 남 좋은 일에 그치지 않고, ‘일해서 벌어먹는 이의 부담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콜베르는 잔혹한 관리가 아니었다. 그의 묘비에는 멋진 세금으로 프랑스를 부유하게 한 영웅, 여기 잠들다라고 쓰여 있다. 그의 깃털 뽑기 비유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도록 세원을 넓히고 부담은 줄여 큰 저항 없이 세수를 늘리라는 것이었다. 권력과 부를 누리면서 면세 혜택까지 받던 성직자와 왕족·귀족에게도 세금을 물린 것이 그의 기술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거꾸로 간다. 재벌 기업과 주식·부동산 자산가의 세금은 뭉텅뭉텅 깎고, 근로소득자에게는 깃털 뽑는 기술을 쓴다. 2022년 근로소득세는 과세 대상 소득의 32.1%를 점유한 상위 10%가 전체의 72.4%를 냈다. 소득세도 면세자를 계속 줄여가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자산가들이 감세로 횡재를 하는 동안, 근로소득자들의 소득 대비 세금 비율만 가파르게 올리는 것은 몰빵 애국을 강요하는 일이다. 월급쟁이들이 세수 통계와 연말정산 결과 앞에서 털 뽑히는느낌이 든다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정남구 | 선임기자 | 한겨레 2024.11.12.

 

또다른 승자 머스크의 등장, '세계전쟁'보다 더 예의주시할 섬뜩한 변화다

머스크가 열어젖힌 반동적 미래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했다. 이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 금융위기를 비롯한 온갖 풍파에도 완강히 버티던 미국식 자유주의 질서가 마침내 막을 내렸다는 장엄한 진단이 나오는가 하면, 트럼프주의는 이미 파시즘 성격을 짙게 띠고 있으므로 이제부터는 일상적인 정치적 경쟁 따위가 아니라 파시즘에 맞서는 치열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격문도 나돈다.

하지만 이런 호들갑 속에서 정작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중요한 현상이 있다. 그것은 이번 미국 대선의 최대 승자가 트럼프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 다른 엄청난 승자가 있다. 바로 일론 머스크다.

머스크는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했다. 아니, 단순히 지지만 한 게 아니었다. 트럼프 후보에게 1천억 원이 넘는 엄청난 자금을 기부했을 뿐만 아니라, 트럼프 선거운동 캠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으며 사실상 캠프의 구심 역할을 했다. 유세장 연단 위에서 마가(MAGA) 모자를 쓴 채 트럼프 주위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세계 최대 부호의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물론 미국의 거대 자본가들은 늘 대선에 개입해왔다. 머스크만이 아니라 다른 빅테크 자본가들도 공화당, 민주당 후보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기부했고, 막전막후에서 각 당 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머스크는 이런 통상적인 정경유착을 넘어섰다. 머스크는 트럼프주의와 자신의 사업 전망, 이해관계를 일치시키는 위험천만한 도박을 벌였고, 배팅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이제 머스크는 트럼프주의 이념과 운동의 또 다른 한 기둥이라 해도 좋을 위상을 확보했다.

실제로 개표 전부터, 머스크가 차기 트럼프 정부에 각료급으로 기용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자본이 주도하는 '혁신'에 대한 정부의 시대착오적 규제를 철폐하는 역할을 맡으려고 벼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머스크 스스로 이것이 트럼프 선거운동에 뛰어든 주된 동기라고 밝히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는 과거 미국 정부들과는 달리, 정부가 단순히 빅테크 자본의 후견자 노릇을 하는 수준을 넘어 정부와 빅테크 자본이 아예 일체화하는 새로운 현실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어쩌면 이 강력한 가능성이야말로 21세기 파시즘에 대한 성급한 진단이나 세계 전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보다 더 예의주시해야 할 섬뜩한 변화일지 모른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왼쪽)이 지난달 5일 경합주 펜실베이니아에서 유세 도중 억만장자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등장해 트럼프 지원을 호소하며 펄쩍 뛰고있다. AFP/연합뉴스

 

21세기 봉건주의의 도래인가?

그런데 이러한 사태 전개를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이 선명히 내다본 책이 있다.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테크노퓨달리즘: 클라우드와 알고리즘을 앞세운 새로운 지배 계급의 탄생>(노정태 옮김, 21세기북스, 2024)이다.

 

바루파키스는 2010년대 유럽 재정위기나 좌파정치의 최근 양상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그리스 출신 경제학자 바루파키스는 2015년에 출범한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정부에서 재무부장관을 맡았었다. 하지만 시리자 정부가 결국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로존 금융 세력의 압력에 굴복하자 '유럽민주주의운동2025(DiEM25)'라는 유럽 차원의 급진좌파정당을 따로 만들어 이끌었다. 그러면서 지구자본주의의 위기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저작들을 끊임없이 발표해왔다.

 

언론의 이목을 끄는 발언과 행동으로 유명한 바루파키스인 만큼 <테크노퓨덜리즘> 역시 사뭇 충격적인 분석과 진단을 담고 있다. 우선 제목에 눈길이 간다. '퓨덜리즘'이라고 영어를 그대로 음사했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봉건주의[봉건제]'라는 익숙한 번역어가 있다. '테크노퓨덜리즘'이란 곧 플랫폼이니 AI니 하는 첨단 테크놀로지가 봉건제와 쌍을 이룬다는 뜻이다. 도끼나 철퇴 따위로 무장한 깡패들이 통행세나 걷고 농민들을 쥐어짜던 봉건제가 초인공지능을 향해 달려가며 화성 탐사를 목전에 둔 21세기 테크놀로지와 함께 한다니, 이게 무슨 어불성설인가.

 

그러나 바루파키스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빅테크 기업들이 지배하는 2024년의 지구정치경제는 이미 '자본주의'라고 할 수 없는 무엇이 됐다. 자본주의라면, 시장에서 다른 기업보다 더 많은 상품을 팔아 더 많은 이윤을 거두려는 기업들의 경쟁이 지배해야 한다. 경제학 교과서에 따르면, 이러한 경쟁은 각 기업이 더 많은 혁신을 감행하도록 만듦으로써 사회의 총생산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실제로는 노동자와 그 가족, 소비자, 지역사회, 남반구 민중과 자연을 누가 더 많이 쥐어짜는지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게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바루파키스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이제는 다 옛말이 돼버렸다.

 

바루파키스는 빅테크 기업들에 '클라우드 자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래도 '자본'이라는 말이 따라붙으니 그 뿌리는 엄연히 기존 자본주의 내부의 축적 과정에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미친 듯한 속도로 몰아붙이는 디지털 기술 개발을 통해 이 기업들은 '자본'이라는 규정을 벗어나는 특징을 가진 무엇으로 급속히 변질됐다.

 

핵심은 '클라우드 자본'이 더 이상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이윤을 획득해 덩치를 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더 효과적인 수단을 통해 더 어지러운 속도와 규모로 덩치를 불린다. AI로 강화된 알고리즘에 지배되면서 데이터 자원을 생산하는 네트워크를 통제함으로써 다른 모든 경제 주체에게 명령을 내리고 이들로부터 지대를 수탈한다. 가령 페이스북이나 X(구 트위터)는 온라인에서 교류하길 바라는 이용자들이 모여드는 SNS 플랫폼을 구축한 뒤에 그 가입자들이 자발적으로 업로드한 데이터를 팔아 막대한 수익을 얻거나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에 없던 일확천금의 사업 기회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농지 소유권을 선포하고 장원을 만든 뒤에 농민들을 장원에 몰아넣고 수확물의 상당 부분을 꼬박꼬박 챙겨간 중세 봉건 영주의 판박이다. 과거에는 농지에 금을 그었다면, 이제는 네트워크에 장원을 꾸린다. 과거에는 농업 생산물을 지대로 받아갔다면, 지금은 디지털 정보로 변환된 화폐를 지대로 거둬들인다. 그래서 바루파키스는 과감하게도, 클라우드 자본이 이제는 '자본가'라기보다는 일종의 '영주'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마땅히 농노도 있어야 한다. 바루파키스는 각종 플랫폼에 가입해 스스로 수많은 정보를 올리며 빅 데이터를 축적시켜주는 이용자들이 다름 아닌 '클라우드 농노'라 지적한다. 농노 덕분에 영주들이 권력을 누렸듯이, 수십억 명에 달하는 페이스북이나 X 이용자들이 있기에 저커버그나 머스크가 그토록 막강한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가와 노동자가 다 사라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기업들이 시장 경쟁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고 노동자가 임금을 받아 생활비용을 충당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다만 이 영역은 이제 전혀 다른 사회관계에 복속돼 그 명령을 따라야 한다. , 클라우드 자본이 지배하는 봉건주의가 자본주의를 에워싸며 완전히 포섭한다. 쉽게 말하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여전히 존재하고 심지어는 번창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AGI(범용 인공지능) 기업들의 손아귀 아래 있는 신세다.

 

그럴듯하다. 2010년대 후반부터 우리가 접하는 현실, 즉 미국은 빅테크 기업들을 내세우고 중국은 국가 통제 기업들을 동원해 벌이는 디지털 기술 개발 광풍과 맞아떨어지는 설명이다. 바루파키스가 이런 분석을 통해 결국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지금의 지구정치경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 예찬론 따위로 옹호될 수 있는 체제가 더 이상 아니라는 점이다. 인류의 과학기술 수준은 이미 소규모 공장주들의 경쟁 따위와는 어울릴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고, 현 체제의 최상위에 버티고 있는 국가-자본은 이런 과학기술 발전의 성과를 오히려 인간 사회를 자본주의 이전으로 회귀하게 만드는 데 써먹고 있다.

 

이 전망에 비춰본 머스크의 모습은 선량한 미국 유권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힙하거나 친숙하지 않다. 바루파키스의 논의에 따른다면, 머스크는 다른 빅테크 자본가들보다 더 솔직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봉건제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활로를 열어나가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영주들의 모든 권리가 군사적-정치적 폭력에 의존했듯이, 21세기 봉건주의에서도 클라우드 자본은 독점을 유지하고 지대를 뽑아내기 위해 강력한 국가 권력(더 정확히는 제국 권력)에 의지해야 한다. 트럼프와 머스크라는 한 쌍은 이러한 운명의 적나라한 구현이다.

6일 오후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11·5 미국 대통령 선거 승리 선언 방송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빅테크 자본 - 베블런적 '깽판 놓기'의 순수한 사례

그러나 아쉽게도 <테크노퓨덜리즘>은 완성도가 그리 높은 저작은 아니다. 지구자본주의가 미친 듯이 어느 방향으로 질주하는지 시원하게 지목하기는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주역들과 양상들을 꼼꼼히 분석한다고 할 수는 없다. 책 자체가 상당히 산만하다.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진 20세기 말부터 자본주의가 마침내 자본주의 아닌 무엇, 더 사악한 무엇으로 변질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과정을 훑는 전반부는 의미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너무 긴 서론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새로운 봉건사회의 등장을 알리는 후반부 논의가 그렇게 상세하거나 친절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테크노퓨덜리즘'이라는 규정도 다소 선언적으로 다가온다. 분명히 방향은 제대로 가리키지만, 현실보다 너무 앞서서 결론을 내리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2024년 현재는 아직, 봉건제화라 할 만한 변화가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새 봉건제가 완결됐다고는 할 수 없는 국면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머스크 같은 이가 새 시대의 전위가 되어 극우 정치에 몸소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이런 점에서 바루파키스의 책을 보완할만한 저작은 프랑스 경제학자 세드릭 뒤랑(Cédric Durand)<실리콘밸리가 테크노퓨덜리즘의 족쇄를 풀다: 디지털 경제의 형성(How Silicon Valley Unleashed Techno-feudalism: The Making of the Digital Economy)>(Verso, 2024)이다. 영역본보다 2년 전에 나온 프랑스어판 제목은 테크노퓨덜리즘: 디지털 경제 비판"이다.

 

뒤랑은 바루파키스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극복을 모색하는 좌파 경제학자이며, 최근에는 프랑스 좌파정당들과 사회운동들의 연합인 '신인민전선(NFP)'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뒤랑의 저서 역시 제목에 '테크노퓨덜리즘'을 담고 있는데, 바루파키스는 <테크노퓨덜리즘>에서 뒤랑의 논의를 상당히 참고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뒤랑이 빅테크 기업들의 구조와 행태를 좀 더 상세히 분석한다는 점, 그리고 이런 분석이 더욱 진전되어야만 '테크노퓨덜리즘'이라는 진단이 확정될 수 있다고 단서를 단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뒤랑은 바루파키스처럼 빅테크 부문이 주도하는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아닌 계급지배체제로 향하고 있다고 전망하지만, 바루파키스와는 달리 이미 우리가 그런 체제 안에 있다는 단정은 유보한다. 이 점에서 뒤랑의 입장은 '이윤 주도' 자본주의가 '불로소득(지대) 주도' 자본주의로 변화하고 있다는 브랫 크리스토퍼스의 신중한 진단(<불로소득 자본주의 시대>[이병천 외 옮김, 여문책, 2024]) 쪽에 더 가깝다.

 

뒤랑의 책에서 특히 이목을 끄는 것은 교과서 속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행위자와는 전혀 다른 빅테크 기업들의 행동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소스타인 베블런의 자본 이론을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뒤랑도 바루파키스처럼 봉건 영주의 사례를 끌어들여 빅테크 기업들을 설명하지만, 이 수준에 그치지는 않는다. 이 대목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에 독점자본주의가 자리 잡을 무렵에 베블런이 제시한 독점자본 이론이다.

 

벌써 이때부터 베블런이 보기에 거대 자본의 실상은 시장 경쟁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고 축적을 전개한다는 이론과 거리가 멀었다. 베블런에 따르면, 시장 지배력을 확보한 대자본은 혁신 경쟁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선에서 혁신을 제한한다. 혁신의 결과를 사회의 다른 부분이 활용하지 못하도록 막고, 혁신의 잠재력이 기업의 이해와 충돌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못하도록 제어한다. , 생산 역량의 증대를 통해 이윤을 얻는 게 아니라 그 철저한 통제를 통해 이윤을 챙긴다. 베블런은 이런 행태를 '사보타지'라 불렀고, 베블런 사상을 우리말로 소개해온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이를 '깽판 놓기'라 옮겼다(<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 책세상, 2009).

 

사실 100년 전 독점자본주의만 해도 과연 베블런이 제시한 '깽판 놓기'로 설명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할 구석이 많았다. 하지만 100년 뒤인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치 21세기 상황을 위해 준비됐던 이론인 것처럼, 빅테크 기업들의 행태는 베블런의 '깽판 놓기'론에 딱 들어맞는다. 뒤랑은 이 점을 강조한다. 빅테크 기업들은 인류의 커먼즈인 데이터를 사적으로 전유하고 네트워크에 영리형 플랫폼을 구축해 지대수익을 누림으로써 디지털 사회의 풍부한 가능성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통제한다. 머스크, 저커버그, 베이조스는 '기술 진보'가 아니라 '깽판 놓기'의 화신들이다.

 

이렇게 '깽판 놓기'를 통해 사회의 다른 부문을 '포식'하는 빅테크 자본은 이제까지 존재해온 어떤 독점자본보다 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현란한 전주곡을 지루하게 이어가며 등장을 예고하는 초인공지능은 이런 위세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장신구다. 그러나 마르크스나 베블런이 권고한 '뒤집어 보기' 접근법을 통해 다시 바라보면, 이들의 토대가 의외로 취약함이 드러난다. 디지털 경제의 토대에 자리한 모든 테크놀로지는 본래부터 강한 사회적 성격을 전제하며, 따라서 이런 '사회적' 기술을 '사적'으로 전유하려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강압적/설득적 권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머스크가 감행한 '성공한' 도박은 이런 역설적 진실을 민감하게 이해한 자의 선택이었다. 지난 십 수 년 동안 지구자본주의의 마지막 희망으로 급속히 성장한 빅테크 자본이 '자신의 형상대로' 세상을 재구축하기 위해 남겨둔 마지막 한 가지 숙제는 국가(제국) 권력과 완전히 한 몸이 되는 것임을 머스크는 명철히 이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될 것은 어쩌면 테크노퓨덜리즘이 아니라 현대의 예언자 루이스 멈퍼드가 '거대 기계'라 일컬은 것의 완성일지 모른다(<기계의 신화> 1, 2).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4.11.13.

 

 

트럼피즘의 유령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떠돌고 있다. 트럼피즘의 유령이다. 전세계의 정치인과 관료가 긴장하고, 온 세상의 억만장자와 투기꾼이 흥분하고 있다. 파시스트와 국수주의자도 덩달아 허황된 꿈을 꾼다.

 

트럼피즘의 유령은 참으로 불가해하고 신비롭다. “불과 4년 전 패배가 확정된 선거를 뒤집으려고 시도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가 어떻게 7200만 미국인의 표를 얻을 수 있었는가.”(니나 흐루셰바)

 

그러나 트럼프의 승리는 결코 우연도 이변도 아니다. 우리가 예전에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징후일 뿐이다. 독일 매체 슈피겔의 사설 서구의 종언은 트럼프의 귀환을 시대적 변곡점으로 본다.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두번째로 미국 대통령에 선출된 것만큼 이러한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서구는 지배력을 잃었고, 얼마 전부터 흔들리던 공동의 가치 기반이 무너졌다. 어디서나 긴장이 감돈다. 국가 사이에서나, 사회 안에서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에서는 극우가 전진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진영으로서의 서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트럼피즘의 유령은 시대 전환의 강력한 신호라는 말이다.

 

첫째, 트럼피즘의 승리는 미국 헤게모니의 종언을 뜻한다. 헤게모니란 동의에 의한 지배. 조지 더블유 부시의 이라크 전쟁 이후 급격히 붕괴하던 미국의 세계 패권이 이제 트럼프의 귀환으로 마침내 확실한 종착점에 이르렀다. 트럼프의 신고립주의는 미국이 세계 지배를 위해 동의를 구할 능력도 의지도 없음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가 처한 위기는 바로 미국 헤게모니의 붕괴와 새로운 헤게모니의 부재 사이에 생겨난 공위기의 위기다.

 

둘째, 트럼피즘의 승리는 근대 민주주의 체제가 수명을 다했음을 상징한다. 민주적 제도와 법치주의에 기반한 근대 민주주의는 목하 도처에서 위협받고 있다. 유럽 전역을 휩쓸며 기세를 올리던 극우 포퓰리즘이 미국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구가했다. 이미 1940년대에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경고했던 미국의 부드러운 파시즘이 마침내 거친 파시즘으로 야수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셋째, 트럼피즘의 승리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시대가 끝났음을 뜻한다. 인종주의, 성차별, 외국인 혐오, 생태 파괴를 거리낌 없이 떠벌리는 트럼프의 정치적 승리는 68혁명 이후 서구의 자유주의 좌파가 힘겹게 쌓아온 정치적 성취와 문화적 자산이 사회적으로 소진되었음을 보여준다.

 

넷째, 트럼피즘의 승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도 시효가 다했음을 알려준다. 트럼프의 극단적인 보호주의 정책은 국제주의, 유럽연합(EU), 세계시민 등의 기획을 아름다운 옛일로 기억하게 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애국주의를 바탕으로 한 신고립주의의 확산은 이제 질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렸음을 의미한다. 장기간 헤게모니적 세계 지배를 주도해온 네오콘을 대체하는 미국우선주의의 마가(MAGA) 세력이 트럼피즘의 핵을 구성할 것이다.

 

다섯째, 트럼피즘의 승리는 또한 진실 시대의 종언을 의미한다. 트럼프 1기에 이루어진 가장 치명적인 문화적 변화는 거짓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탈진실, 탈사실, 대안사실등의 말로 거짓을 호도하는 것이 공식적 정치 문화가 되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바이든-날리면의 우격다짐을 보라. 이들의 거짓말이 위험한 이유는 거짓을 사실로 믿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을 하나의 의견으로 강등시키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지금 트럼피즘의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다. 지구상에서 미국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지역이 한반도이다. 그렇기에 트럼피즘의 광풍에 더욱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우선 미국에 대한 유아적 의존성을 벗어던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근대국가의 기본권인 국민주권과 민족자결의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 트럼프의 신고립주의가 열어놓을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구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트럼프와 김정은의 특수 관계는 향후 한반도 정세에 근본적인 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위기이자 기회다. 미국의 기존 한반도 정책인 전략적 인내는 한반도에 평화도 안정도 가져오지 못한 채, 북한의 핵무장을 강화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제 트럼프 시대에 우리는 한반도를 세계 최악의 위험지대에서 영구적인 평화지대로 전환할 기회를 꼭 부여잡아야 한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 한겨레 2024.11.13.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낸다고? 정말로?

공약은 지킨다(promises made, promises kept)’ 트럼프가 선거에서 내세운 자신의 통치원칙이다. 그러면서 그는 불법 이민 근절, 인플레이션 종료,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등을 약속했다. 이중, 국내외적으로 초미의 관심사는 전쟁 종식이다. 트럼프는 자기가 대통령이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대통령이 되면 24시간 내로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여러 차례 공언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실제 전쟁을 끝낼 수 있을지, 불안한 변수 투성이다. 지원 중단 이외에, 그의 종식 방안은 아직 알려진 게 없다. 이건 취임 후로 미루더라도, 염려스러운 것은 그의 주변에 각료, 보좌관 등으로 임명됐거나 거론되는 인물들이 거의 강경 네오콘이라는 점이다. 이를 전쟁 종식이 물 건너간 신호라고 해석하는 사람까지 나오고 있다. 또 트럼프 2기의 대외정책을 특히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1기의 선례 때문이다. 기존의 워싱턴 방식과 다를 것이라고 했지만, 새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걸 빼면, 그가 벌인 군사적 대결과 도발의 내용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말과 달리 패권 노선이라는 미국의 거대전략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유는 첫째, 외교 안보 분야 기득권 집단의 위력과 이데올로기, 둘째,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가 근본에서 미국 패권의 논리와 같기 때문이다. 이들이 트럼프 2기에 달라질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외교안보 정책 결정의 주체 블롭?

블롭(Blob. 끈적한 액체 한 방울이라는 뜻)이라는 용어가 있다. 군산복합체, 나아가 군산정언학 복합체, 우리식으로 말하면 외교안보 마피아를 지칭하는 말이다. 블롭은 또 이들이 공유하는 미국 패권이라는 거대전략 이데올로기, 집단사고를 지칭하기도 한다. 조직이 분명치 않고, 전쟁 같은 사악한 일을 저지르는 괴물체(?)라는 점에서 매우 적절한 비유다.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 군 등의 정부기관 및 의회, 군수사업체, 싱크탱크, 이익단체 및 로비단체, 언론매체, 학계 등을 두루 망라하는 상호협조와 이념공유의 커넥션이다.

 

블롭은 2차대전 직후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전후 미국은 세계 최강국가로 올라선다. ·소 간에 경쟁체제, 곧 냉전이 시작된다. 전 세계에 걸친 체제 대결로 외교안보 분야의 전문지식과 인력 수요가 폭증한다. 무기산업도 수직 성장한다. 추천과 기용, 연구 용역, 포럼, 로비, 여론조성 작업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대외정책 분야 전문가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 이들은 정부의 대외전략과 실천 전술을 생산, 유통, 확산하고, 권력의 핵심에 접근하면서 정치적 힘을 쌓는다. 여기에 무기산업의 거대한 경제적 이권(?)이 함께 묶인다. 정치 권력과 자본 권력의 조언자, 매개자, 동반자로서 블롭은 거대한 마피아(?)로 성장한다.

 

이 같은 블롭의 발전 경과는 블롭의 생산물, 즉 정책의 방향과 내용도 결정한다. 출발부터 블롭의 핵심 과제는 전후 이룩한 미국의 헤게모니를미국 우위체제(American primacy)라고도 부르는유지·확대하는 논리의 개발, 관련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블롭의 커넥션이 커지면서 내부적으로 논리와 전략·전술의 차이가 발생하고, 그에 따라 블롭에는 네오콘, 자유주의 개입론자(liberal interventionist), 고립주의자 등, 결이 다른 집단들이 형성된다. 말 그대로 고립주의를 내세우는 그룹을 제외하면, 네오콘과 자유주의 개입론자는 사실상 동일집단이다. “네오콘은 강경 자유주의 개입론자, 자유주의 개입론자는 온건 네오콘”(S. 월트 하바드 교수의 표현), 네오콘은 주로 공화당, 자유주의 개입론자는 주로 민주당에 모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블롭 밖에서 활동하는 전문가, 블롭과 다른 논리와 대안은 자연스럽게 또는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워싱턴 아웃사이더인 트럼프가 이들을 배제하지만, 이들 역시 트럼프를 배제한다. 그가 외교안보 진용을 제대로 꾸릴 수 없었던 것, 그의 대외정책이 혼란스럽고, 경망스러웠던 것도 이같은 배경의 산물이다. 결국 트럼프 대외정책팀은 네오콘, 즉 블롭들로 짜였다.

 

미국 우선주의는 패권론의 다른 이름

2016, 트럼프는 자신을 미국 우선주의자로 차별화하며 출발했다. 해외가 아니라 국내를 더 중시하는 노선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는 대외문제를 국내의 필요와 이익이라는 기준에 맞춰 거래한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공화 양당의 군사개입 노선이 미국의 재앙을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는 평화주의자(?)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1기 재임 기간 트럼프는 새로운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새 전쟁은 없었으나 기존의 전쟁(: 사우디예멘 전쟁)은 더 키웠다. 아프간에서는 공중폭격과 드론 공격을 대폭 증강, 민간인 살상 규모는 오바마 정부 대비 3배 이상 늘어났다. 시리아에서의 미군 철수를 지시했지만, 실제로는 철수하지 않는 기이한 일도 벌어졌다. 202013, 이라크 공항에서, 이슬람 혁명수비대 술레이마니 장군을 드론 공격으로 암살, 이란은 물론 중동 전역의 공분을 샀다.

 

그 외에도 1. 핵 우위 확보를 위한 국방예산 증가 2. 2019년 러시아-미국 간 중거리 핵미사일 금지 조약 탈퇴 3. 중국과의 무역전쟁, 화웨이 제재 4. 핵 대치와 회담을 오가는 기이한 대북한 행보; 5. 베네수엘라 쿠데타 음모 6. 포괄적 이란 핵협정 탈퇴 7. 2017년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 공식 인정, 다음 해 미국 대사관 예루살렘 이전 8. 2020년 시리아 영토 골란고원,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 그의 위기 도발 목록은 길게 이어진다.

 

2016년 선거에서 그는 나토 무용론, 동맹의 균등한 안보 비용부담, 러시아 관계개선 등, 블롭과는 매우 다른 접근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백악관 입성 이후, 트럼프는 전임자들의 길을 따랐다. 오바마 정부의 유럽, 즉 나토 지원정책을 대폭 확대했고(: 미군 주둔 규모 증가, 군 시설 확충, 군사훈련 확대 등), 사우디와 걸프 아랍국가들과의 군사협력 관계를 강화했으며, 일본과 한국 등의 안보공약을 재확인했다. 러시아 크림반도 철수를 요구하면서 오바마가 취한 제재를 철회하지 않았고,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에는 대러시아 견제용 미제 무기를 팔았다.

 

요약하면 트럼프는 미국의 전통적 대외전략의 기조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언행과 커넥션의 차원에서는 다른 듯했지만, 1기 트럼프는 내용상 블롭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유는 그의 미국 우선주의가 자국의 이익에 기초한 자기 방식의 미국 패권론, 즉 블롭의 주장과 근본에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을 끝내? , 어떻게?

1기 트럼프를 염두에 두고 다시 봐야 할 것은, 그가 전쟁을 끝내려는 까닭이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다 망가졌다라고 말했다. 반전-평화주의자도 아닌 그가 전쟁을 끝낸다면 그것은 우크라이나가 이미 패배했다는 것, 거기에 돈과 자원을 쏟아붓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는 뜻이다. 이는 지난 2, 당시 상원의원 자격으로 2024 뮌헨 안보회의에 참가했던 부통령 당선자 JD 밴스가 한 말이기도 하다. 이같은 직접적 요인 외에도, 전쟁에서 드러난 미국의 무기부족 실태, 적정한 무기생산과 조달 시스템 부재의 문제를 인식한 국방부의 전쟁 지속 반대의견, 또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유권자들의 의지, 또 미국이 맞서야 할 상대는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라는 팀 트럼프의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 짚어야 할 것은 전쟁 종식 방안이다. 당선인은 아직 밝히지 않고 있는데, 몇몇 주류매체에서 이런저런 방안이 트럼프의 이름으로 거론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관련 기사가 대표적이다(관련 기사화면 캡처 참조)

 

월스트리트저널 기사 화면 캡처. 왼쪽 725일 자 칼럼. 필자는 D. 어반 M. 폼페오 / 오른쪽 116일 자 기사. A. 워드 기자.

 

화면 왼쪽은 지난 7, 전 국무장관 M. 폼페오 등이 평화 방안이라며 나토 강화, 우크라이나 5000억 달러 원조와 EU 가입 등을 내용으로 월스트리트저널에 실은 칼럼이다. 오른쪽은, 이번 선거 직후 트럼프 측근으로부터 취재한 방안이라며, ‘현재 상태에서 전선 동결, 비무장지대 설정, 향후 20년 우크라이나 NATO 가입 포기, 폴란드,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의 우크라이나 평화 유지군 운용, 미국의 우크라이나 방어무기 지원 등을 담은 기사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정통한 전문가 A. 머커리스는 이를, 트럼프를 끌어들여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상황을 계속 이어가려는 네오콘의 함정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트럼프의 방안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실제 이는 모두 트럼프와 무관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협상안을 만들고 협상을 하는 주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이지 미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 미국은 그들에게 따라오라 지시하는 주체가 아니라 양자 사이의 협상 중재자라는 것이다. 이런 원칙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전쟁 종식방안은 비현실적이며,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며,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트럼프 2새로운 긴장과 위기의 시작

이 글을 쓰는 동안, 트럼프 2기 국무장관으로 M. 루비오 상원의원, 국가안보보좌관에 M. 월츠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 외 각료들로 여러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대부분 강경 네오콘, ‘중국 주적론자(China hawk)’들이다. 트럼프 2기 정부의 대외 강경 기조를 짐작게 하는 인사다.

 

이미 말했듯, 트럼프는 반전-평화와 거리가 먼 인물이고 자기 방식대로의 패권론자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그 주변에 포진한 네오콘들은 이를 의심케 하지만은 긴장 완화, 위기 해소가 아니라 자원과 시간, 역량의 낭비를 중단하고, 더 큰 적트럼프와 그 일행에게 중국은 공공의 적 1과의 대결에 나서기 위한 준비작업이다. 서아시아 상황은 더욱 우려스럽다. 트럼프의 친 이스라엘 행보는 바이든을 훨씬 능가한다. 그를 보여주듯, 네타냐후 이스라엘의 무차별 살육행태는 미국 선거 이후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다. 이란에 당한 패배를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 복수하는 형국이다.

 

설령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한다 해도, 트럼프 2기를 위기 해소, 긴장 완화의 시간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그의 당선 이후 곳곳에 일종의 안도감이 퍼지는 듯하다. 금물이다. 희망을 말하기에 상황은 유동적이고 엄중하다. 이것이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김평호 저술가·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 민들레 2024.11.14.

 

 

미 대선 투표장서 사라진 민주당 지지자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당의 대선 패배 부른 경제정책 우경화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은 민주당 지지자들

 

여러 여론조사기관의 예상과 달리 이번 미국 대선은 도널드 트럼프의 압승, 해리스의 참패로 끝났다. AFP 통신은 99% 개표가 완료된 시점에서 전체 선거인단 538명 가운데 트럼프는 312, 카라 해리스는 226명을 얻을 것으로 전망했다. 전국적인 득표수에서는 트럼프가 7464만 표(50.5%), 해리스는 7091만 표(48.0%)를 얻을 것으로 이 통신사는 예상했다(AFP, 2024.11.10.). 이전 대선에 비해 트럼프는 42만 표를 더 얻었고 해리스는 바이든이 얻은 표에서 약 1,040만 표를 잃었다.

 

언론들은 대선의 투표 결과를 분석한 기사들을 바삐 내놓았는데, 투표장에 나온 유권자의 수가 이전 대선에 비해 줄어들었다는 점, 그리고 그 줄어든 유권자가 주로 민주당 성향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첫째, 4년 전 대선에 비해 이번 대선의 투표자 수가 줄어들었다. 2020년에 투표장을 찾은 유권자 수는 15800만 명이었는데 이번에는 거기에서 1250만 명쯤 모자란 14550만 명이었다. 미국 플로리다대학 조사에 따르면 투표율로는 2020년의 66.4%에서 이번에는 64.5%로 낮아졌다. 이와 달리 선거 등록을 아예 포기한 유권자 수는 크게 늘었다. 미국에서는 유권자들이 대선 투표를 하기 위해서 사전에 등록을 해야 하는데, 이를 포기한 숫자가 2020년에는 1200만 명이었고 이번에는 1900만 명이었다.

 

둘째, 주로 민주당 지지 성향의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나오지 않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대선 후보들의 득표수를 지역 특성, 인구사회학적 특성과 결합해 2020년 대선과 비교하여 분석한 결과를 내놓았다. 이 매체는 개표를 99% 이상 마친 2240개의 카운티(미국의 전체 카운티는 3244)를 분석했는데, 이에 따르면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의 우세가 강했던 지역일수록 투표자 수의 감소 폭이 컸다. 거꾸로 트럼프가 우세했던 지역에서는 투표자 수가 거의 감소하지 않거나 오히려 늘어났다. 정치 전문 언론매체인 폴리티코도 카운티 별 투표율을 이전 대선과 비교하는 방식을 통해 이와 유사한 결과를 제시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소득 수준이나 노동조합 가입 비율을 통해서도 선거 결과를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평균 소득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고 노동조합 가입 비율이 높은, 따라서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할 것으로 예상되는 카운티일수록 투표자 수의 감소 폭이 컸다. 거꾸로 소득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고 백인 비율이 높은, 따라서 공화당 지지 성향이 강할 것으로 예상되는 카운티에서는 오히려 투표자 수가 늘어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러한 분석 결과가 민주당 지지 성향 유권자들이 이번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해설했다.

 

투표장에 나간 민주당 지지자들의 지지 열의도 떨어졌음이 여러 조사에서 확인된다. 소수 민족, 여성, 젊은이, 도시 거주자, 노동조합 가입자 등은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으로 꼽힌다. 이번 대선에서 흑인 남성의 민주당 지지율은 77%였는데, 이는 이전 대선의 92%에 비해 크게 줄어든 수치다. 여성 지지율은 지난 대선의 57%에서 이번에는 54%로 낮아졌다. 민주당 성향의 언론매체인 뉴리퍼블릭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전체 유권자의 57%가 노동계급인데, 그 가운데 44% 만이 해리스에게, 54%는 트럼프에게 표를 주었다. 2020년에는 노동계급의 47%가 민주당에, 51%가 트럼프에 투표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노동계급 득표율 차이가 4%p에서 10%p로 늘어난 셈이다. 물론 노동조합에 가입한 조직 노동자들은 공화당보다 민주당에 더 많은 표를 주었지만, 그 정도는 이전에 비해 약해졌다. 30세 미만 젊은이들의 민주당 투표율도 크게 떨어졌다. 이 연령대에서 해리스는 트럼프보다 6%p를 더 얻었는데, 2020년에는 바이든이 트럼프보다 25%p를 더 얻었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은 왜 민주당에 심드렁한 모습을 보였을까?

 

6(현지시각) 플로리다주 팜비치 컨벤션 센터에서 승리연설을 가진 도널드 트럼프(왼쪽) 전 대통령이 부인인 멜라니아 트럼프와 손을 잡고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경제 지표는 좋다는데 시민의 삶은 팍팍하다.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이 꼽은 이번 선거의 핵심 이슈는 경제와 고용이었다. 대선 직전 AP 통신이 유권자 11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유권자들은 현재 미국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열 명 가운데 네 명이 경제와 고용을, 두 명은 이민을, 그리고 한 명은 낙태권을 들었다. 이민 문제도 넓은 의미에서 고용 문제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미국인 열 명 가운데 여섯 명이 경제와 고용을 당면한 중요 문제로 든 것이다. 다른 조사기관들의 조사 결과도 대체로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이러한 조사 결과에 비추어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것이라고 점치는 분위기도 있었다. 왜냐하면 드러난 수치만으로는 미국 경제가 그 어느 때보다 건실하고 활기찬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의 다우지수는 2021년 초 3만에서 대선 무렵에는 43000으로 사상 최고 수준에 올라섰다. 나스닥도 같은 기간에 13000에서 19000 수준까지 올라갔다. 틀림없이 미국 주식시장은 주요 나라들에 비해 더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IMF에 따르면 미국의 2023GDP 실질 성장률(잠정)2.1%, 일본 1.5%, 유로 0.1%, 우리나라 1.4%에 비해 좋은 편이었다. 미국의 실업률은 4% 수준으로 완전고용에 가까웠고 물가도 점차 안정세를 보였다. 민주당은 미국 경제의 실적을 자랑하던 터였고, 수치로만 본다면 그럴만한 근거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유권자들은 드러난 수치와는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AP통신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열 명 가운데 여섯 명은 현재의 경제가 좋지 않다고 답변했다. 역시 대선 직전에 실시한 로이터 통신의 조사도 비슷한 결과를 보였다. 로이터 통신의 조사에서 미국 경제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답변한 유권자 비율은 미국인 열 명 가운데 여섯 명 꼴이었다. 생활비가 너무 높다고 답변한 유권자 비율도 열 명 가운데 일곱 명이나 되었다. 공표 지표와 유권자의 체감 경제는 전혀 달랐다.

 

공표 지표와 체감 경제에서 차이가 생기는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GDP 성장률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다. 미국 경제가 유로권이나 일본 등 주요 나라들에 비해 더 나은 성적을 기록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GDP 계산 방식이 성장률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정부가 무기 제조를 위해 지출하는 비용의 처리 방식은 이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비용은 GDP 계산에 포함된다. , 전쟁 비용이 늘어날수록 GDP도 커진다. 그렇지만 이렇게 늘어난 GDP가 일반 시민의 생활 수준 개선을 나타낼 리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전쟁 비용 지출이 증가하면서 GDP 성장률은 지표상으로는 높게 나타나고 있지만, 다수 시민의 삶은 오히려 나빠졌을 수 있다.

 

둘째, 자산가격의 상승은 다수 시민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현 재무부 장관인 옐런(Jarnet L. Yellen)2014, 연준 의장일 당시 연준의 연구원을 동원하여 미국의 불평등 정도를 조사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2013년을 기준으로 전체 부 가운데 상위 1%35%, 상위 5%63%를 차지했다. 이에 비해 하위 50%1%만을 차지했고 최하위 20%는 자산을 전혀 보유하지 못했다. 주식, 채권, 뮤추얼펀드, 개인연금과 같은 금융자산을 분리해서 봐도 전체 자산의 분포와 별로 차이가 없었다. 전체 금융자산 가운데 상위 5%3분의 2, 그다음 45%3분의 1, 그리고 하위 50%2%만을 차지했다. 이러한 자산 보유 구조에서 예를 들어 주가가 상승한들, 그것이 소수 부유층을 제외한 다수 시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셋째, 실질 물가 상승률도 공표 수치보다 더 높을 수 있다. 지난 4년 동안 상품과 서비스의 평균 가격은 공식적으로는 대략 20% 정도 올랐다. 그런데 공식 물가 상승률을 계산할 때 들어가지 않는 의료 보험료나 모기지 이자 지급액 등이 크게 증가했다. 지난 4년 동안 가계의 실질 소득은 지표상으로는 11% 정도 늘어났지만 세금, 의료 보험료, 주택 담보대출 지급이자 증가액을 빼면 별로 늘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특히 소득이 낮은 계층의 실질 소득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거기에다 주택 가격은 지난 4년 동안 45% 상승했는데, 이 때문에 임차인들이 지급해야 하는 임대료 부담까지 덩달아 커다.

 

넷째, 낮은 실업률도 안을 들여다보면 그다지 실속이 없다. 지난 4년 동안의 일자리 증가 대부분은 파트타임 고용이나 공공부문 서비스 부문에서 생겨났다. 임금이 높고 안정성이 있는 생산 부문의 정규직 일자리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표상의 낮은 실업률과 달리 노동자들이 실제로 느끼는 고용 불안감은 여전히 크다. 많은 노동자들은 이민의 증가가 자기들의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러한 믿음에 객관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느끼는 비이성적인 두려움은 트럼프 쪽의 반이민 캠페인이 먹히는 토대를 제공했다.

 

다섯째, 기업들의 실적도 신통치 않다. 경제가 좋다는 얘기는 기업들이 충분하게 돈을 벌면서 투자와 고용도 늘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 기업들 가운데 매그니피슨트 7’, 무기 제조회사, 곡물과 에너지 대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비금융 기업들의 수익성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주식시장에서도 매그니피슨트 7’ 기업을 제외하면 2021년 이후 주가가 전혀 오르지 않았다. ‘매그니피슨트 7’이란 미국의 빅테크 기업 일곱 개를 말하는 신조어인데, 우리나라에서 황야의 7(THE MAGNIFICENT SEVEN)’으로 개봉된 영화 제목에서 따왔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알파벳, 아마존, 메타, 테슬라를 포함하는 매그니피슨트 7’은 전체 주식시장 시가 총액의 30%를 차지한다. 현재 이 종목들이 주가 상승을 이끌고 있다.

 

결국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좋은 경제 지표는 월스리트, 거대 하이테크 기업, 전쟁 기업, 곡물 대기업, 기리고 이들 기업의 주식을 가진 소수 부유층의 얘기인 셈이다. 다수 시민은 그러한 경제 지표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지표와 체감 경제의 괴리는 당연히 대선 투표 결과에도 반영되었다. 이번 대선의 한 출구조사에 따르면 경제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유권자 69%는 트럼프에 투표했다. 그런데 경제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유권자의 다수는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 쪽일 가능성이 크다.

 

다수 시민의 삶을 힘들게 한 민주당의 경제정책 보수화

지표로 나타나는 현실과 시민들의 체감 경제가 다른 이유는 민주당이 겉으로 표방하는 정책과 달리 실질적으로는 보수적인 정책을 펴왔던 데서 찾을 수 있다. 유권자들은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펼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민주당도 스스로 노동조합 강화, 기업과 부유층에 대한 세금 상향, 사회 서비스 확대, 불평등 축소와 같은 좀 더 진보적인 이슈를 지속적으로 던져왔다. 바이든은 노동조합 친화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자동차 노동자들이 파업 행진을 할 때 거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노동조합 조직화를 장려했고, 무역 정책을 수립할 때는 노동조합의 요구 사항을 적극적으로 들었으며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인물을 연방 노동 위원에 임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바이든 정부 시기에 실질임금은 증가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민주당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민주당의 실제 경제 정책은 당이 내건 슬로건과 달리 보수적이었다. 민주당의 많은 경제정책들은 사회의 소수자, 약자, 빈곤층, 노동자보다 대기업, 자산가, 특히 금융자본에 혜택이 가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민주당은 시대 과제인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별로 성공하지 못했고, 실효성 있는 정책을 편 것도 아니었다. 민주당의 경제정책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측면은 아마 물가를 다루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가 문제는 최근의 경제 문제 가운데서도 핵심을 이룰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삶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기도 하다. 당연하겠지만 이번 대선에서도 물가 문제는 시민들의 관심사였고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바이든 정부에서 물가 문제가 떠오른 이유는 상품과 서비스 가격이 전례 없이 높은 상승률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물가 상승은 어쩔 수 없이 생긴 현상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정책적인 노력을 통해 통제할 수 있는 변수였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는 2023년 초에 열린 전미경제학회(AEA)에서 바이든 정부에서 물가가 상승한 이유를 분석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바이든 정부에서 나타난 물가 상승이 수요가 아니라 공급 때문에 생겼다고 주장했다. 물가가 수요 때문에 오른다는 주장에는 노동자들의 씀씀이가 크다는, 따라서 노동자들의 과소비를 탓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스티글리츠는 수요가 아니라 공급망의 붕괴 때문에 식품과 에너지 가격이 상승해서 평균적인 물가가 올랐다고 주장했다.

 

당시 공급망이 붕괴한 데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놓여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추진과 나토의 전진 배치라는 배경 속에서 일어났다. 미국은 전쟁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속시켰고, 이 전쟁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전쟁 과정에서 미국의 곡물회사나 에너지 기업은 가격 상승에 따른 큰 이익을 얻었다. 셰일 가스 과잉 투자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어려움을 겪고 있던 미국의 에너지 기업들은 전쟁으로 단숨에 반전을 이뤘다. 이들 기업이 얻는 이익이 너무 커서 횡재세가 얘기될 정도였다. 기업의 이익 증가는 주가 상승으로 이어져 주주들도 큰 이익을 얻었다. 물론 무기 제조회사들과 그 주주들도 전쟁이 길어지면서 큰 이익을 얻었다.

 

무기회사 인수를 늘려나간 사모펀드(PEF)들도 전쟁에 따른 이익 배당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금융시장에 좋은 뉴스였다. 과거에는 전쟁이 금융시장에서 악재로 받아들여졌는데, 전쟁이 불확실성을 높인다는 이유에서였다. 월스트리트는 전쟁을 싫어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사모펀드 등을 통해 무기회사들마저 금융시장에 편입되면서 이제 전쟁은 오히려 금융투자자들에게 호재로 받아들여졌다. 우크라나 전쟁이 끝난 뒤에는 1000조 원가량의 재건 시장이 건설회사나 사모펀드에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젤렌스키는 지난해 9, 뉴욕을 찾아가서 블랙록 등 사모펀드들에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미국에서 계층별 분배에 미치는 효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정리할 수 있다. , 우크라이나 전쟁은 곡물과 에너지 기업, 무기 제조 기업, 재건 기업 등과 그 주주들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 나아가 사모펀드 등을 통해 금융시장 전체에도 좋은 소식을 전달한다. 그러나 다수 시민들은 물가 상승에 따른 고통을 겪어야 한다. 거기에다 전쟁 비용에 따른 재정 지출의 증가는 교육, 교통, 사회 복지 등 공공 지출에 대한 양보 요구로 이어진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은 다수 시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월스트리트와 극소수의 부유층을 살찌우는 분배정책이라 할 수 있다. 바이든은 그런 보수 정책을 지금까지 이어 왔고, 역설적이지만 트럼프는 전쟁 중단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미국 연준은 물가 상승에 대해 금리 인상으로 대응했다. 앞서 스티글리츠가 얘기한 바와 같이 물가 상승의 원인이 공급 쪽에 있다면 그 해법은 금리 인상이나 신용 축소가 아니라 상품 공급을 확대하는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스티글리츠도 물가 상승 대책으로 재정 확대를 통해 공급 제약을 완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물론 물가 문제의 궁극적인 해법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연준은 물가 문제의 해법을 물가 목표제를 내세우면서 금융시장을 옥죄는 방향에서 으려 했다. 그러한 방향의 정책은 고용을 축소시키고 불안정하게 한다는 점에서 노동자들의 희생을 부른다. 연준은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금융시장 옥죄기를 통해 자본에 유리한 고용 환경을 만들려고 했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나 칩스법(Chips Act)도 노동자보다는 자본의 이익에 치우쳐 있었다. 이 법의 목표는 기반시설 복구, 핵심산업 재건, 기후투자 확대, 기술 인력 양성 등을 통해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삶을 개선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법으로 기후 투자, 핵심 산업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는 등 어느 정도의 목표하는 성과가 생겼다. 그러나 대규모로 투입된 자금이 기업에 대한 보조금 형태로 들어갔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는 별로 혜택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나 칩스법(Chips Act)의 혜택을 많이 받은 주에서 오히려 민주당이 표를 덜 받는 현상이 나타났다.

 

해리스의 경제 공약이 보수 쪽으로 기울었다는 점도 유의해서 짚어봐야 한다. 해리스는 공공의료보험 확대를 위한 금융거래세 도입, 법인세 인상, 식료품 가격 통제, 사회보장과 저소득층 지원 확대, 기회균등의 확대와 같은 다소 진보적인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해리스 공약의 진보적인 색채가 엷어졌다, 해리스 캠프는 암호화폐를 규제하지 않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암호화폐 업계에서 후원금이 몰려들었다. 세금을 높이겠다는 약속이나 기업 규제 약속도 후퇴했다. 해리스 캠프 쪽은 진보적으로 보이는 의제에 대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뉴욕 타임스는 해리스 캠프가 월스트리트 친구들에게서 캠페인 전략과 정책 조언을 구한다고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해리스가 노동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정책의 강조점을 미묘하게 옮겼다고 분석했다. 이는 해리스의 경제정책 공약이 보수 쪽으로 흐르는 것을 지적한 내용이다. 민주당은 온건하고 부유한 유권자에게 호소하여 얻는 표가 노동 계층에서 이탈하는 표보다 더 많을 것으로 계산했다. 이러한 전략은 사실 위험한 도박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도박은 실패로 끝났다.

 

6(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 위치한 하워드대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대선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했다. AFP=연합뉴스

 

미국 민주당의 대선 패배가 한국 민주당에 주는 교훈

2024년 미국 민주당의 대선 패배는 2022년 한국 민주당의 대선 패배와 닮은 점이 있다. 두 정당 모두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내건 정책도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내용의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집행하는 정책은 내건 정책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고 보수 쪽으로 많이 기운 상태였다. 구호로 내건 정책과 실행 정책 사이의 괴리는 전통적인 지지자들의 심드렁한 태도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대선 패배를 불렀다.

 

예컨대 바이든 정부의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 정책, 물가 안정 목표에 기반한 연준의 금융정책 등은 보수적인 성격의 것이었고 기업 보조금을 중심으로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나 칩스 법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정책들로 자산가, 금융자본가, 기업은 큰 이익을 얻었지만 다수 시민들의 삶은 힘들어졌다. 우리나라 민주당 집권 시기의 부동산 정책은 구호와 실질 내용이 다른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정부여당은 집값 안정 구호를 열심히 외쳤지만 실제 집행한 정책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 예컨대 집값이 크게 오르던 무렵 당국은 부동산 담보대출 규제를 시행한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담보대출 규모가 계속 증가했고 집값도 오름세를 지속했다. 낮은 금리는 산업 투자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산가격 상승만을 불러왔지만 중앙은행은 이를 바꾸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미국 민주당이든 한국 민주당이든 보수적인 정책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은 민주당 지지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보수적인 정책이 펼쳐지면서 이들은 민주당에서 멀어져갔다. 미국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이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처럼 한국 대선에서도 집값 상승에 실망한 민주당 지지자들이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언젠가 황운하 의원은 저학력, 저소득층이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불평한 바 있다. 황 의원은 아마도 민주당이 열심히 저소득층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있는데, 왜 그걸 몰라주느냐고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황 의원이 간과한 점은 집값 상승에서 보듯, 민주당의 정책이 저소득층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박지원 의원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경제 정책 면에서는 보수당과 민주당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고 말했는데, 이게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민주당의 경제정책이 보수로 흐르면 대선 승리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미국 민주당이 이번 대선에서 편 캠페인 전략도 한국 민주당에 시사점을 준다. 이번 대선에서 해리스는 처음에는 진보적인 정책을 내놓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중도 지향적인 캠페인을 벌이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미국판 중도층 확대 전략을 통해 해리스는 자기를 모든 계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후보로 내세우고자 했다. 해리스는 유대인 세력의 눈치를 보면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에 입을 다물었지만 소수 민족 표를 의식해서 전쟁에 시달리는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얘기했다. 자본가, 자산가 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자기의 공약인 기업 규제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사회 보장의 확대를 주장했다. 모든 계층의 지지를 받겠다는 전략은 중도로 흐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전략은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이번 대선은 보여주었다.

 

한국 민주당 내에도 '중도 견인론' 주장이 있다. 거대한 두 당의 지지자는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중도적인 캠페인을 벌여서 중도층을 끌어와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이 주장은 사실 과학적인 근거가 아니라 주먹구구에 기반한 것이다. 정말 중도 확장 전략이 유리한지 근거를 가지고 좀 더 찬찬히 따져봐야 한다. 미국 대선에 비춰보자면 중도 견인론은 현명한 전략이 아니다. 민주당으로서는 오히려 자기 지지자들의 이익을 확실히 보장하면서 그들의 지지를 튼튼하게 묶어 세우는 전략이 더 나을 수 있다.

임수강 금융평론가 | 프레시안 2024.11.14.

 

문학이 하는 일, 슬픔에 귀를 여는 것

한강의 노벨상 수상과 관련한 많은 후일담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단연 흥미로운 것은 애국심과 혐오감정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극우파들의 반응이었다. 일부 우익단체 구성원들은 제주 4·3폭동 미화와 광주사태 미화 작가에게 상을 주는 게 말이 되냐고 주장하며 스웨덴대사관 앞까지 찾아가 시위를 벌였고 각종 소셜미디어에서도 축하는 하지만 작가의 5·184·3에 대한 인식은 문제라는 식의 논평들이 적지 않았다. 어떤 소설가는 오십팔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무장반란을 우리 젊은 군인들이 목숨 바쳐 진압, 국가와 국민을 지킨 사건이며 제주사삼 역시 대한민국의 탄생을 막으려고 남로당 잔당세력이 일으킨 무장반란이고 우리 경찰이 진압한 사건이며 두 사건 모두, 진압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도 없었다고 하며 한강의 작품들이 5·184·3의 진실을 왜곡한 것이기 때문에 이번 노벨상 수상이 유감스럽다는 글을 써서 화제를 일으켰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5·184·3의 진실에 대해 논변할 생각은 없다. 친분이 있는 사이라면 함께 광주의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나 제주의 4·3평화공원 같은 곳을 관람하면서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지만, 그런 소통의 기회가 없다면 확증편향의 시대에 서로 다른 미디어를 통해 무너진 바벨탑 아래 선 사람들처럼 각기 다른 말만 할 테니 그것도 피곤한 일이다. 다만 한강의 두 작품이 과연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광주사태제주 4·3폭동을 미화한 작품인가, 그리고 자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작품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작가 한강과 개인적 친분도 없어서 그의 현대사 인식과 이른바 국가관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다만 나는 그의 작품들을 읽었을 뿐이고, 그 작품들을 읽는 데에 작가의 현대사 인식이나 국가관 여하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에서의 한강의 글쓰기는 애도의 글쓰기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인간을 넘어 뭇 생명들 모두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죽음이 천수를 다한 것이라 해도 애도의 발생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만일 그것이 어떤 불의의 폭력에 의해 발생한 생명의 갑작스러운 단절이라면 그에 따르는 애도는 더욱 간절하고 애통한 것이 된다. 애도에는 여러가지 정동이 뒤섞여 있다. 슬픔이 있고 죽음을 불러온 폭력에 대한 분노가 있고, 그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데에 대한 자책과 죄책감들이 그것이다. 그것이 외적으로 발산되면 폭력에 대한 진상 규명과 정의 실현에 대한 희구와 행동이 뒤따를 것이고, 그것이 내적으로 집중되면 개인적 트라우마로 축적될 것이다. 한강의 두 작품은 후자, 즉 애도가 트라우마로 응축된 경우이며, 그것을 외적으로 발산시키는 쪽에 더 무게를 둔 5·18이나 4·3 관련한 다른 문학작품들과 각별히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는 구절이야말로 트라우마의 기록으로서의 이 두 작품의 핵심을 응축한 구절이다.

 

나도 이 구절을 읽으면서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새롭다. ‘소년이 온다가 나올 무렵은 세월호 참사의 충격이 온 나라를 휩쓸 때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장례식을 치르건 아니하건 남은 사람들의 삶을 오래도록 장례식으로 만든다. 굳이 5·184·3만이 아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용산 철거민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수많은 크고 작은 참사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장례식 같은 삶의 고통을 한강은 이 두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것이며, 한강의 소설들은 아직도 더 많은 애도가 필요한 이 세상을 위한 기도서로서 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한강만의 세계가 아니라 식민지와 분단과 군사독재와 양극화 속에서 두터운 고통의 자양을 얻어온 한국 문학이 가진 기본값이며 동시에 비슷한 크고 작은 비극들에서 탄생한 세계 문학의 기본값이기도 하다. 문학은 대체로 행복과 안정의 산물이 아니라 불행과 불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강과 노벨상과 5·184·3에 두루 시비를 건 김아무개 작가는 또 현재의 한국 문학이 분노와 불안으로 장악되었으며 이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포용, 사회적 규범의 중요성을 상실한 것이라고도 말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문학이 있다. ‘문학은 이런 것이라거나 이래야 한다는 말은 이제 시효를 잃었다. 나는 쾌감과 행복, 위로와 위안, 안정과 조화를 추구하는 문학도 얼마든지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역사 사회적 문제의식이나 분노와 불안에 대한 자극(?) 없는 수많은 장르문학과 웹소설들도 넘치듯 독자층을 사로잡고 있다. 다만 그 문학들 중에 분노와 불안뿐만이 아니라 여전히 슬픔과 고통이라는 문제를 놓지 못하고 있는 문학들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노벨문학상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수많은 문학상들은 그 많은 문학들 중에서 김아무개 작가 말대로 하필 이런 부정적 감성들로 가득하며 사회 불평불만 세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문학들을 주목하고 그들에게 상까지 주는 것일까. 예술가들의 조상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치유해주는 주술사나 영매들이다. ‘부정적 감성들을 다룬 문학들이 여전히 번성(?)하는 이유는 독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그만큼 제가끔의 슬픔과 고통과 불안과 분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 하고 최소한 누군가가 자기를 대신해서 그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포용이나 사회적 규범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일은 기득권층과 독재자들이나 하는 말이다. 그 지겨운 말들을 왜 문학을 통해 다시 들어야 하는가. 만 사람이 즐겁다고 해도 단 한 사람이 슬퍼한다면 누군가는 그의 슬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원래 문학이, 작가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한강은 그런 여러 작가 중에 한명일 뿐, 지금이라도 서점에 가서 우리 소설 한권을 들고 읽어보기 바란다. 거기서 당신은 또 다른 목소리의 한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명인 | 문학평론가·인하대 명예교수 | 한겨레 2024.11.14.

 

윤석열이재명을 살릴 것이다

사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덕지덕지 붙여진 사법 리스크는 여권의 방패였다. 정부·여당은 불리한 사안에 직면할 때마다 이재명 사법 리스크를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었다. ‘채 상병 특검법김건희 특검법이재명 방탄용이라며 거부했다. ‘피의자 이재명은 대화 정치 부재의 알리바이로 활용했다. 4·10 총선에서 거센 정권심판론에 맞서 내세웠던 게 그 ·조 심판론이었다. 오로지 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기대어 변화와 쇄신 요구를 방기했다. 부풀어 오르는 탄핵 여론에 대해서도 이재명으로 방어했다. ‘탄핵으로 윤석열 정권이 무너지면 11개 혐의로 4개 재판이 진행 중인 이재명 정권이 곧바로 들어설 것이다.’ 보수층의 탄핵 트라우마반이재명 정서에 기대 비틀거리는 정권이 버티고 있는 양상이다.

 

정부·여당이 잘해서 득점을 낼 실력이 없으니 위기마다 야당 대표 사법 리스크를 우려먹었을 터이다. ‘이재명 유죄라는 심판의 날이 오면 만사형통’, 허황한 기대가 여권을 지배했다.

 

그리 고대하던 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윤 대통령이 가장 궁벽한 시점에 현실화됐다. 이재명 대표가 공직선거법 위반 1심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대로 3심까지 확정될 경우 이 대표는 국회의원직을 잃게 되고 2027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게 된다. 오는 25일 위증교사 사건 1심 선고에서도 유죄가 나온다면 이 대표는 더 벼랑 끝에 내몰릴 수 있다.

 

앞서 민심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여겨진 윤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그야말로 자폭에 가까웠다. ‘어찌 됐든사과에는 진정성이 실리지 않았고, ‘명태균 게이트김건희 문제에 대해서는 궤변과 무책임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제대로 된 국정 쇄신책은 나오지 않았다. 난맥을 시정하고 문제를 해결할 어떤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만 확인시켰다. ‘대통령다움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결국 윤 대통령에게 이대로 국정을 맡겨놓아도 되는지 국민적 의구심만 키웠다.

 

중도하차 여론이 비등한 상황에서 이재명 유죄판결이 나왔다. 환호작약하는 여권의 모습을 보면 이를 구명줄로 여기는 듯하다. ‘김건희 리스크를 물타기하고, 수세 국면을 탈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다. 야권의 정권 규탄장외집회 동력도 소진될 것으로 기대한다. 헛물을 켜는 것이다. 만약에 선제적으로 과오(過誤)에 통절하게 사과하고, 김건희 문제 해결과 국정 쇄신 의지를 밝혔다면 이재명 유죄판결은 지지율을 회복하는 전기가 됐을 터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거꾸로 갔다.

 

민심은 공적 권한 없는 대통령 부인이 비선 라인을 거느리고 대통령 놀이를 했다는 데 분노하고 있다. 현실화된 야당 대표 사법 리스크에 기대 김건희 문제를 뭉개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실로 이재명은 이재명이고, 김건희는 김건희다’. 이 대표 부부는 수사와 재판을 다 받았는데, 김건희 여사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라는 요구가 광장의 민심이다. ‘김건희 특검법을 수용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거대 야당의 힘으로 방탄의 둑을 겹겹이 쌓아도 정의의 강물을 막을 수 없다”(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 ‘거대 야당제왕적 대통령으로 바꿔보면 된다.

 

이 대표는 1심 선고 다음날 열린 광화문 장외집회에 참석해 이재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만일에 윤 대통령이 대오각성해 변화하고 쇄신하고, ‘김건희 리스크를 해소할 파격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면 이재명은 정치적으로 죽을 수 있다. 하나 윤 대통령은 절대 그러지 못할 것이다. ‘자폭기자회견에서 변화와 쇄신 의지가 일도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 스스로 정치선동으로 규정한 김건희 특검법을 수용할 리 만무하다. ‘나라인가, 아내인가질문에 주저 없이 아내를 택할 것 같은 윤 대통령이다.

 

여기서 환기해볼 게 있다. ‘박근혜 탄핵을 인용하면서 헌법재판소가 내린 단죄사유다.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인 공무원이 최순실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해 헌법을 위배했기에 파면한다.”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해온 윤 대통령에게도 해당하는 경고다.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며 끝내 민심에 엇가면 광장의 폭발은 시간문제다. 거대한 민심에 맞서 싸우려는 윤 대통령이 있는 한, ‘이재명은 정치적으로 죽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적대적 공생관계다.

양권모 칼럼니스트 | 경향 2024.11.15.

 

한동훈, 정신승리는 이제 그만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또 꼬리를 내렸다. 이런 표현이 너무 상투적이어서 대안을 찾아보려 했으나, 더 적확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사실 새로운 일도 아니다. 한 대표는 늘 그랬다. 당장이라도 윤석열 대통령을 들이받을 듯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 순간뿐이다.

 

올해 초 윤·한 갈등이 고조됐을 때, 충남 서천 화재 현장에서 윤 대통령을 만난 한 대표는 폴더 인사를 했다. 지난달엔 대통령 독대를 줄기차게 요구하더니, 정작 멍석이 깔리자 교장 선생님 앞에서 야단맞는 고3 반장 같은 표정으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배석한 정진석 비서실장은 학생주임 같았다). 그것이 한동훈이다.

 

지난 7일 윤 대통령 기자회견은 친윤계가 봐도 쉴드(방어막) 치기어려운 망작(亡作)이었다. 내용, 태도, 언어모든 요소가 낙제점이었다. 놀랍게도 한 대표는 합격점을 줬다. “대통령께서 현 상황에 대해 사과하고, 인적 쇄신, 김 여사 활동 중단, 특별감찰관의 조건 없는 임명에 대해 국민들께 약속하셨다”(8일 페이스북).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따져보자.

첫째 사과. 현장에서 경청하던 기자조차 두루뭉술하고 포괄적으로 사과했다. 국민들이 과연 무엇에 대해 사과했는지 어리둥절 할 것 같다며 다시 질문할 정도였다. 윤 대통령은 추가 질문에도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둘째, 인적 쇄신. “검증에 들어갔다면서도 내년도 예산 처리미국 새 정부 출범등을 이유로 시기는 조금 유연하게라고 토를 달았다. 미국 새 정부 출범은 120일이다. 올해 안에는 아무 것도 않겠다는 얘기다.

 

셋째, 김건희 여사 활동 중단. “외교 관례상, 국익 활동상 반드시 해야 한다고 저와 제 참모가 판단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중단해왔다. 앞으로도 이 기조를 이어갈 것이다.” 한 대표는 14일 시작된 윤 대통령의 남미 순방에 김 여사가 동행하지 않은 걸 성과로 내세울 듯하다. 이번에는 안 갔지만, 다음엔 또 모른다. 한동안 침잠하던 김 여사는 지난 9월 검찰 수사심의위원회가 디올백 수수 사건과 관련해 불기소를 권고하자 나흘 후 서울 마포대교 순시에 나섰다. 순방 동행 역시 그런 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

 

넷째, 특별감찰관(특감). “국회에서 두 명 추천하면 대통령이 한 명 임명하게 돼 있고, 국회에서 추천이 오면 대통령이 임명 안 할 수 없다.” 조건을 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흔쾌하게 들리지도 않는다.

 

사실과 무관하게 정신승리를 선언한 한 대표는 이제 특감에 올인할 태세다. 14일 의원총회를 연 국민의힘은 앞서 국회를 통과한 세 번째 김건희 특검법에 대해 대통령의 재의요구(거부권 행사)를 건의키로 했다. 대신 특감 추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자못 비장해 보이지만, 특감 추진은 무의미한 이야기다. 일단 민주당이 추천 절차에 응할 가능성이 낮다. 설령 야당이 협조해서 임명에 이른다 해도 큰 의미는 없다.

 

국민은 김 여사가 대선후보·대통령 당선인·대통령의 배우자로서 이미한 일에 과오나 위법이 없는지 따져보길 원한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15~17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김건희 특검을 도입해야 한다는 응답이 63%로 나왔다. 윤 대통령 기자회견 후인 지난 9~11일 한길리서치가 실시한 조사에서는 69.7%가 특검에 찬성했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한 대표가 특검 대신 특감을 외치는 건, 이미 한 일은 눈감아주고 앞으로할 일만 지켜보자는 거다. 그가 입버릇처럼 되풀이해온 국민 눈높이에 맞을 리 없다.

 

참으로 투명한정치인이다. ‘배신자프레임에 갇힐까 두려워하는 속내가 그대로 읽힌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전직 우등생, 상명하복 마인드를 버리지 못한 전직 검사의 한계다. 당장은 김건희 특검을 회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분노는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누구에게나 정신승리할 자유는 있다. 그러나 사인(私人)들도 안다. 그게 가짜 승리임을, 고통을 회피하려 잠시 거는 자기최면에 불과함을. 집권여당 대표이자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정치인이 정신승리에 빠져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한 대표는 윤 대통령, 김 여사, 친윤, 대구·경북(TK)의 사랑을 잃을까봐 겁이 나는가. 4월 총선 이후 자연인 한동훈이 동네 도서관에서 책 읽는 모습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참에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도 읽어보면 어떨까.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 경향 2024.11.15.

 

 

이념에 절고 전략에 찌든

선거 만사인 민주정에서 살다보면 이런 일을 당한다. 이념이니 정체성이니 앞세우고, 전략이니 정책이니 떠들던 자들도 일제히 입 다물고 국민 선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한국의 민주화세력은 2012년 대선에서 단일후보가 나서고도 패하면서 씁쓸하게 결과를 수용해야만 했다. 멀게는 야권 단일화 없이도 이길 수 있다며 분열하여 참패한 1987년 대선 때도 그랬다.

 

미국 민주당은 2000년 고어와 2016년 힐러리가 대선에서 각각 속절없이 패배하면서 현실을 점검할 기회를 가졌다. 그래도 이번 해리스의 패배는 몹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고어와 힐러리는 투표자로부터 더 많은 표를 얻고도 선거인단 확보에 실패했지만, 해리스는 박빙으로 붙어 싸웠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완벽히 진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선거가 만사라면 패배를 통해 배워야 한다. 모두 이념에 절고 전략에 찌든 각자 생각을 내려놓고 유권자의 선택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번 해리스의 패배가 심란한 이유는 유권자의 표심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어서다.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이 원인이 아니라느니, ‘정치적 올바름은 선거 사안도 아니었다느니, 결국 후보 자체가 문제라느니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대패한 결과를 두고서 설명은커녕 현실인식 자체가 안 되는 형국이다.

 

그나마 출구조사 결과가 도움을 준다. 에디슨 조사대행사의 결과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지난 10월 말과 11월 초 미국 언론과 여론조사 전문가, 그리고 캠페인 전략가들이 떠든 말들 중에 그나마 어떤 게 민심을 반영한 것이었는지 평가해 볼 수 있다.

 

첫째, 진보 대 보수의 양극화 심화 가운데 중도성향 투표자의 향배가 선거결과를 결정했다. 2024년 투표자의 42%가 중도 유권자였는데, 이들 중 57%가 민주당을 선택했다. 이는 2020년 중도성향 유권자 중 바이든이 벌렸던 격차에서 무려 13%포인트 감소한 결과다. 민주당은 이념적 자유주의자들을 더 많이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중도파를 잃고 있다.

 

둘째, 경제가 나쁘다는 인식이 투표를 갈랐다. 투표자 중 미국 경제가 나쁘다는 응답이 68%에 달했는데, 이 중 70%가 트럼프를 선택했다. 마찬가지로 물가상승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응답한 이들이 전체 투표자의 75%에 달했는데, 이들 중 60%가 트럼프를 선택했다. 객관적 경제지표나 민주당 정책이 나쁘지 않았다는 해석과 별도로 유권자들의 현실인식은 냉엄했던 것이다.

 

셋째, 인종과 종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투표자 중 기독교인이 42%인데, 이들 중 63%가 트럼프를 선택했고,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투표자들 중 71%는 해리스를 선택했다. 기독교인의 트럼프 선호 경향은 백인일 경우 더욱 뚜렷했다.

 

넷째, 출구조사는 유권자의 불만과 정서도 물었는데, 현실에 불만을 갖고 분노하는 다수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선택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간절히 변화를 원하는 유권자는 해리스 지지자라기보다 트럼프 지지자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시절이란 미래가 아닌 과거의 미국이라는 데 있다.

 

실로 냉정하게 민주당이 이번에 왜 졌는지 알기 원한다면,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을 찍은 8100만 미국 유권자 중 어째서 무려 700만명 이상이 해리스를 저버렸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2020년 민주당을 택했지만 이번에 공화당으로 돌아섰거나, 정반대로 행동했던 교차투표자들을 상계하고서도 그렇다. 불행히도 이들은 출구조사로도 잡을 수 없다. 따라서 향후 현명한 방법으로 자료를 수집해 타당하게 추론해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념에 절고 전략에 찌든 머리들마저 설득할 수 있으려면 역시 결정적 자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경향 2024.11.17.

 

 

양자역학과 마음의 혁명

직업이 고전평론가다 보니 하는 일이 주로 강의와 세미나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 이후 줌이 일상화하면서 시공간의 지평이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 영국 등과도 연결되었다. 시간의 폭도 넓어져서 이른 새벽, 늦은 저녁에도 부담 없이 세미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긴 스마트폰이 등장할 때 이미 예견된 세상이기도 하다. 손바닥 안에 세계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고, 세상 모든 곳과 동시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히 원더풀 월드다!

 

이런 마법의 원천은 양자역학이다. 1905년 아인슈타인에 의해 특수 상대성 원리가 발견되었고, 그와 동시에 양자역학의 세계가 열렸다. 하여, 과학계에선 1905년을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17세기 이래 서구문명을 지배해온 뉴턴역학의 패러다임이 전복된 것이다. 하지만 이 경이로운 원리들이 일상을 온통 장악하게 된 것은 SNS, 그리고 줌을 통해서다. 코로나가 결정타였다. 대체 양자역학이 뭐길래?

 

줌 강의가 일상화하면서부터 양자역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유튜브에는 이미 다양한 강의와 해설, 예능까지 넘쳐나고 있었다. 물론 이런 대중성이 무색할 만큼 양자역학은 지독하게 난해하다. 오죽하면 누군가 양자역학을 이해했다면 그건 양자역학을 모른다는 뜻이라는 조크까지 나왔을까. 그럼에도 거기에는 묘한 긴장과 끌림이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행렬역학’ ‘양자도약등의 용어들이 마치 현대판 고사성어처럼 회자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과연 그랬다. 양자역학의 방정식들은 나같은 문외한의 접근을 원초적으로 차단한다. 한데, 그 해설을 근근이 따라가다 보면 아주 오묘한 원리들과 마주친다. 가장 유명한 이중슬릿실험에 따르면,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분리되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전자가 입자인지 파동인지는 오직 관찰의 순간에만 결정된다. 그럼 관찰 이전에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모른다. 오직 확률로만 존재한다! 와우~ 말하자면 이 우주엔 불변의 고유한 실체가 따로 없다는 것. 주체도 객체도 없는, 그야말로 무아(無我)’ ‘무상(無常)’의 세계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조금 더 따라가 보면 마침내 시간도, 공간도 다 사라지는실로 희한한 세계가 펼쳐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견고한세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양자들의 무상한 요동 속에서 탄생한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일 뿐이다. 주체에서 상호작용으로! 물질에서 사건으로!

 

이처럼 양자역학은 우리 인식의 문법을 완전히 전복한다. 물론 동양고전에서는 아주 익숙한 메시지들이다. 오래된 지혜를 양자역학은 방정식과 숫자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현대물리학과 동양고전의 눈부신 마주침! 게다가 그 지혜는 신의 계시나 명상가의 황홀경 체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마트폰과 줌, 오픈 AI 등을 통하여 신체와 일상에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과연 놀라운 세상이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이치들과는 전혀 다르게 살고 있을까? 양자역학은 주체와 대상을 나눌 수 없다고 하는데, 현대인들은 오직 나뿐인 세상을 고수한다. 주체와 대상을 날카롭게 구획하는 낡은 이원론에 빠져 있는 것이다. 지동설 이후에도 천동설을 신봉하고, 진화론 이후에도 창조론을 놓지 못하는 형국과 닮아 있다.

 

그 결과 도처에서 대립과 갈등이 그치지 않는다. 이 시간에도 전쟁은 멈출 줄 모르고, 국내 정치의 수준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 중이다. 더 끔찍한 것은 일상에 드리운 전운이다. 투자와 게임은 물론이고 먹방도 요리도, 심지어 교실까지 다 전쟁이다. 가히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 할 만하다.

 

하여, 또 궁금해졌다. 과학의 발전은 왜 늘 인간을 이렇게 욕망의 늪으로 인도하는 것일까? 그 찬란한 기술들은 인간을 전쟁과 노동에서 해방시켜주기는커녕 더 한층 그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것일까?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기술 그 자체는 결코 인간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마음의 배치와 방향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 마음은 양자보다 훨씬 더 현묘하다. 그 잠재력을 계발하여 질적 도약을 감행하는 것이다. 어떻게? 증식에서 순환으로! 대결에서 교감으로!

 

그게 가능하겠냐고? 모르겠다. 확실한 건 마음의 혁명은 인류가 지금까지 시도해보지 못한 유일한 비전이라는 사실이다. 양자역학이 인류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이기도 하고.

고미숙 고전평론가 | 경향 2024.11.17.

 

여자대학, 공학 전환은 답이 아니다

지난 11일 동덕여자대학교 학생 1천여명은 대학본부가 일방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공학 전환 논의를 규탄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과잠시위, 점거 농성, 연대 트럭, 근조 화환, 릴레이 대자보까지 최근 들어 보기 드문 학원 총투쟁의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학교 쪽은 공학 전환에 대해 내부적으로 논의된 바는 있지만 공식 안건은 아니었다며, 학생들의 항의를 폭력 시위로 규정했다. 하지만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았을 때 공식 안건이 되는 순간 공학 전환이라는 방향키를 돌리기는 어려워진다. 학생들은 속지 않았다. 동덕여대뿐만 아니라 다른 여대에서도 일부 단과대학의 공학 전환을 검토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여대의 공학 전환을 반대하는 움직임은 여자대학 학생들과 졸업생들의 연대 시위로 확산하고 있다.

 

공학 전환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반대다. 공학 전환은 오히려 시대의 흐름을 잘못 읽은 결과다. 일례로 1990년대 여자대학의 공학 전환은 시대의 흐름이었다기보다는 잘못된 고등교육 정책의 여파였다. 1990년대 졸업정원제 폐지와 대학설립준칙의 도입으로 4년제 종합대학이 1990년에서 2005년 사이 107개에서 173개로 급증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지자 비수도권 여자대학은 생존을 위해 공학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공학으로 전환했다고 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수도권 집중과 대학 서열화라는 신자유주의적 대학 정책 그 자체에 있었다. 공학 전환 여부와 관계없이 비수도권 대학은 모두 위기에 내몰렸다.

 

현재는 어떨까? 남녀공학으로의 전환이 시대적 흐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향후 15년 안에 대학 정원의 숫자가 급감하는 상황을 주요 근거로 든다. 물론 대학이 처한 구조적 조건의 변화와 생존경쟁은 여자대학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공학 전환이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이라는 보장 역시 없다. 아무도 이 위기를 돌파할 만한 정확한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2000년 이후 대학 취학률이 50%를 넘기면서 고등교육이 보편화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학은 줄곧 위기였다. 보편화 이후의 방향키를 제안하는 이들은 대체로 학생들과의 민주적 소통과 지역사회와 협력을 기반으로 한 특성화를 제안한다. 여자대학은 이미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이라는 특성화 요소를 갖추고 있는 상황이다. 공학 전환은 오히려 그동안의 여자대학이 쌓아 올린 유산을 스스로 내던지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최근 몇년간 언론에서는 여대 기피론여대 무용론을 번갈아가며 공론장에 띄웠다. 이들이 주장하는 근거를 종합하면 대략 세가지이다. 첫째, 여자들에게도 고등교육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진 상황이므로 여대는 시대적 사명을 다했다. 둘째, 현재 수도권에 집중된 여대로 인해 역차별을 당하는 것은 오히려 남학생들이다. 셋째, 기업과 사회도 여대 출신을 기피한다. 하지만 이 전제는 부분을 전체로 호도하고 각각의 명제가 서로의 전제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비논리적 혐오 담론이다. 기업과 사회가 정말 여대를 기피한다면 그것은 여대에 대한 차별이 현존한다는 얘기이므로 여대 자체가 남학생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얘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공학 대학은 교수자의 성비부터 리더십의 성비, 졸업생 진로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여대의 사명은 소멸하지 않았다. 지난 세기 동안 여자대학은 여성에게 닫힌 문호를 개방하는 선구자의 길에서 시작해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기여를 통합하고 촉진하는 장소로 기능을 수행해왔다. 현재 여대 무용론이나 기피론과 같은 비논리적인 여자대학 혐오에 맞서는 안전한 여성 공간에 대한 강조가 대항 담론으로 등장한 상황이다. 하지만 대학교육의 보편화 시대에 여자대학의 사명은 여자대학에서만이라도 안전할 최소한의 권리에 멈출 수 없다. 여성의 생존과 안전은 여자대학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고,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자산으로서 여자대학의 가치는 생존 그 이상을 꿈꿀 수 있는 해방의 장소였을 때 미래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여자대학은 대학 서열화로 줄 세우지 않는 다른 리그의 가능성과 가치를 만들어내왔다. 공학 전환은 답이 아니다.

권김현영 | 여성현실연구소장 | 한겨레 2024.11.17.

 

 

대통령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나의 대통령 퇴진 구호는 김영삼에서 시작됐다.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정리해고 반대 투쟁 폭력 진압, 이라크전쟁 파병과 비정규악법 통과,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와 백남기 농민 사망이유도 방향도 분명했다. 대통령을 바꾸자는 구호이기보다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였으므로 그것은 급진적 민주주의의 요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익숙했던 퇴진 구호에 이물감이 들기 시작했다.

 

대통령 퇴진이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요구는 아니다. ‘문재인 퇴진에 앞장선 이들이 최저임금 인상이나 난민 반대 목소리를 높였던 것처럼, 방향은 제각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탄핵소추를 당했으나 그것을 민주주의의 역사로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박근혜 퇴진 촛불의 경험은 대통령 파면을 민주주의의 증거로 기억하게 한다. 그러나 국민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서야 하는 상황은 민주주의가 실패한 증거이기도 하다.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정치 시스템의 붕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수십 년 작동하던 정치 시스템이 무너지는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확인된다. 시스템을 통해 선출된 권력이 안에서부터 시스템을 망가뜨린다. 선거제도나 결과를 존중하는 선이 관례로 유지되었다면 선거제도를 악용하거나 결과에 시비 거는 것이 정치가 된다. 상대 정당이나 정치인을 정치 무대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목표가 되고, 사법과 언론의 동원과 통제가 민주주의로 둔갑한다. 기득권을 가진 정치세력이 노동자나 여성, 소수자를 제대로 대표한 적 있었겠냐마는, 최소한 말로는 내가 당신의 편임을 설득하는 것이 정치였다. 이제 정치인들은 당신이 나의 적임을 고지한다.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상이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과 이재명에게 판돈을 모두 걸어버린 탓에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정당 내부에서 이견을 제거하며 정치가 시작되니 민주주의가 숨 쉴 수 없다. 대통령은 거부권을 남발하고 국회는 강행처리를 반복하면서 정치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 사법과 언론도 정치 때문에 너덜너덜해지고 있다. 대통령 퇴진 요구는 민주주의의 전선이 아니라 진영의 구분선이 되어가고 있다.

 

여야가 상대를 비난하는 수사에 경제와 안보는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갖고 있는 구상이 별반 다르지 않다. 여야 간 대화와 타협이 사라지는 것을 두고 정치가 실종됐다고들 한다. 그러나 대화가 단절되는 자리만큼 타협이 빠른 자리가 있다. 우리 삶과 세계가 어디로 향해야 할지 토의하는 자리가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정치 실종이다. 우리에게 닥친 위기, 물가와 부채와 과로와 차별과 죽음에 응답하며 변화를 만드는 일이 정치에서 사라지고 있다.

 

박근혜 퇴진의 의미는 임기 단축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는 촛불을 들며 다른 세상을 꿈꿨고 나의 일터와 우리 동네에서 민주주의를 키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안녕들 하십니까묻고 네 잘못이 아니야말해주는 관계들로부터, 노동의 존엄과 권리가 실현되는 세상,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지 않는 세상, 세월호 참사와 같은 아픔을 다시 겪지 않을 세상의 꿈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응답하지 않는 정치 대신 우리 스스로 움직였기에 민주주의의 증거가 됐다. 퇴진을 요구해서 가능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민주주의의 장소들이 이미 만들어져왔기에 가능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받는 지지율 성적표에는 윤 정부에 대한 분노만큼이나 정치에 대한 냉소와 혐오가 섞여 있다. 삶이 달라질 리 없다는, 세상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체념. ‘윤석열 퇴진으로 모이는 일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디딤돌이 아니라 걸려 넘어질 돌부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집권 세력을 비판하는 만큼 정치를 회생시켜야 할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장소에서 더 모이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 대통령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 경향 2024.11.18.

 

트럼프와 정상회담 전에 문재인부터 만나라

문재인 대통령 시절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의 일이다. 20186월 싱가포르에서 북한 김정은을 만난 도널드 트럼프에게 노벨 평화상이 갈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올 때였다. 문 대통령이 오바마 전 대통령도 못 한 일을 하셨다. 노벨 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취지로 덕담하자, 트럼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문 대통령도 국내 인기가 좋던데 다음 대선에 출마하시라. 틀림없이 당선될 거다라고 화답했다. 노벨 평화상 발언에 트럼프가 한껏 고조됐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2018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직후에 문 대통령은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했다. 판문점 도보다리에서의 남북 정상 만남을 생방송으로 지켜본 트럼프가 풍경이 좋던데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문 대통령은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 역사와 지금은 비무장지대로 오히려 자연이 잘 보존돼 있다는 점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방송 화면에 내가 어떻게 비칠까를 항상 생각하는 트럼프였다. “첫 북-미 정상회담을 판문점에서 하면 세계의 큰 주목을 받을 겁니다라는 말에 트럼프의 마음은 확 움직였다. 백악관 참모들의 반대로 결국 회담 장소는 싱가포르로 정해졌지만, 트럼프는 잊지 않고 2019년 판문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다시 만났다.

 

결실을 보진 못했지만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전쟁 위기를 평화로 바꾼 데엔, 트럼프의 자기애적 확신을 적절히 자극한 문 대통령 노력이 한몫했다. 문재인은 트럼프가 최초이자 최고가 되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런 욕망이 종종 그의 의사 결정을 이끈다는 점을 잘 활용했다고 미국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평했다.

 

요즘 윤석열 대통령은 하루빨리 트럼프 당선자를 만나려 애를 쓰고 있다. 트럼프 당선 이후 대미 수출이 줄 것이란 우려에 경제는 가라앉은 상태다. 또 대북 강경책에만 의존해온 현 정부로선 북한에 실리적 접근을 할지 모를 트럼프와 빨리 정책 조율을 하고 싶은 마음이 클 터이다. 남미에서 열리는 다자회의 직후 미국에 들러 트럼프와 회담을 추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윤 대통령만큼이나 나르시시즘에 빠진 세계 최강국 지도자를 상대하려면, 서두르지 말고 면밀한 준비를 하는 게 긴요하다. 200212월 대선 직후 김대중 대통령이 노무현 당선자와의 국정 인수인계 회동에서 했던 얘기가 그것이었다. ‘너무 급하게 방미하려 하지 말고 철저하게 사전 준비를 하시라. 조지 부시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13월에 나는 서둘러 워싱턴을 방문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디제이(DJ)는 국정 노트에 적었다.

 

지금 한국에서 트럼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트럼프와 친해지려 골프를 다시 배운다는 거짓말보다 필요한 건, 트럼프를 움직인 경험이 있는 전직 대통령의 노하우를 듣는 일이다. 막무가내인 트럼프에게 정확하게 반론하고 우리 주장이 그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란 점을 부각해야 한다. 트럼프 1기 때 연 50억달러(당시 환율로 약 55천억원)까지 올리겠다는 한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1조원 조금 넘는 선에서 막은 건 단적인 예다.

 

트럼프는 정상 간 통화에서 실수인지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주한미군 숫자를 ‘4만명이라고 거듭해서 언급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문 전 대통령은 ‘4만명이 아니고 28500이라고 꼬박꼬박 정정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평소 성격으로 보면 이런 치밀한 반박이 쉬울 거 같지는 않다. 그런 부분에서 현직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의 경험을 배우고 활용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윤 대통령의 열린 자세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주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해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도래할 수 있는 대화 국면에서 한국이 뒷전으로 밀려나 소외될 수 있다. 더 늦기 전에 대북정책의 기조를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대북 강경 제재와 흡수통일에 몰두해온 현 정부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제언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대통령은 유연해야 한다. 집권 초부터 야당과 대화하지 않고 거부권을 남발하며 예스맨들의 잘못된 보고만 받은 결과가 지지율 17%라는 참담한 성적표 아닌가.

 

정권의 존재 이유를 오직 전임 정부와 차별화, 야당과의 싸움에만 두어선 국민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 책상 위에 놓인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문구는 먼저 귀를 열어 많은 조언을 듣고 최종 결정을 내리라는 뜻이다.

박찬수 | 대기자 | 한겨레 2024.11.18.

 

인류 클럽에 속해 있다는 부끄러움

요새 많은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인류세’(Anthropocene)라는 말에는 어째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이 말은 인류가 지구의 지질·생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 결과 시작된 새로운 지질시대를 가리킨다. 기본적으론 과학 용어지만, 인류가 그동안 밟아온 장구한 발자취를 총체적으로 톺아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이 때문에 다양한 비판과 논쟁도 일으켰는데, ‘화석 자본이란 책을 쓴 안드레아스 말름 같은 논자들이 주장하는 자본세’(Capitalocene) 논의를 그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인류가 화석연료를 태우게 된 결정적 계기는 자본이 노동을 온전히 지배하려 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이므로, 인류 전체의 종적 책임을 묻는 인류세 개념보다 인류 종 내부의 모순에 주목하는 자본세 개념이 더 적절하다는 주장이다.

 

이 인류세-자본세 논쟁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인류세 논의에서 문제가 되는 핵심은 사실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인류라는 집단은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어떤 동일성을 바탕으로 삼는 개념이다. 또 그들 전체가 공유하는 무언가가 새로운 지질시대를 만드는 배경이어야, 인류세라는 개념 역시 가능해질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하나의 인류일까?

 

우리는 너무나 쉽게, 또 아무런 의심 없이 스스로 인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의 테이프를 조금만 앞으로 감아봐도 인류는 그다지 자명한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 종(sapiens)에 대한 인식이야 그전에도 있었겠지만, 오늘날 뜻하는 바로서 인류란 개념은 서구출신의 인간들이 비서구세계의 인간들을 보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야만인과의 비교가 문명인이라는 자의식을 키웠고, 그렇게 태어난 문명인이 멋대로 인류라는 거대한 클럽을 만들고 여기에 야만인들까지 초대했다. 어쩌면 그 초대, 그러니까 야생에 남겨진 야만에 문명의 빛을 비춰준다는 행위 자체가 인류의 본질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브라질의 원주민 운동가 아이우통 크레나키의 말을 빌리자면, “대지 위에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은 오로지 이것 하나뿐이라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인류다. 인류는 지구 위의 모든 것을 자원으로 만들어 추출하는 존재이며, 늘 더 많은 회원들을 가입시켜 추출할 수 있는 자원을 끝없이 늘려가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클럽을 운영한다.

 

그렇게 지구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끔찍한 폭력들을 휘두르며 회원들을 늘려온 결과, 급기야 임금노동, 화석에너지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만이 지구 위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존재 양식이 됐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직 야생의 삶을 살고 있는 저 한줌의 원주민들도 언젠가는 우리처럼 문명적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테라포밍을 하든 뭘 하든 언젠가 저 화성 역시 인류의 영토가 되고 말 것이라고.

 

지금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논의하기 위한 전 지구적 규모의 기후총회가 열리고 있다. 이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물론 인류다. 인류는 과연 세계의 종말을 막을 수 있을까? 겉모습과 이름만 바꾼 또 다른 기술과 개발, 또 다른 지배와 폭력은 인류 클럽이 이 지구를 넘어 온 우주에서까지 영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까?

 

인류세 논의가 꼭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인류세를 만든 인류로서 계속 살아가는 한, 가장 부정적인 형태의 파국과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크레나키 같은 이들은 인류로서 살아가지 않는 수많은 삶들이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문명인의 방문을 받고 그로 인해 죽었던 인간 집단들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16세기에 이미 종말을 맞이했다.” 그들에겐 인류가 곧 종말이었다. 그리고 종말 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억명의 사람들, 문명인들의 춤·기술·행성에 대한 통제의 외부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 이들은 하위 인류가 되어, ‘낯선 안무에 따라 춤춘다는 이유로 전염병, 가난, 배고픔, 조직적 폭력의 위협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들이 추는 춤은 다양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인류가 추는 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한가지를 공유한다. 이 대지에 묶인 모든 존재자들을 추출해야 할 자원이 아니라 소통해야 할 상대로 여긴다는 것이다.

최원형 | 지구환경부장 | 한겨레 2024.11.18.

 

이재명의 위기

대통령의 조기퇴진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진보 진영을 넘어 여권 내의 비판과 대구·경북의 민심 이반은 현 상황이 심각함을 말해준다. 현 정권에 대한 실망이 절망으로 변할수록 사람들은 대안을 찾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안 중 가장 앞서 있다. 혹자의 표현과 같이 그는 불사조와 같다. 한번으로도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검찰 조사를 끊임없이 받으면서 야당 대표직을 굳건하게 수행해왔다. 이에 더하여 김건희 여사에 대한 검찰 조사와의 형평성이 부각되면서 그에 대한 수사는 이미 정치적인 성격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럼에도 지난 금요일과 같이 앞으로의 재판들은 그의 길이 험난함을 암시한다.

 

그의 정치적 위기가 현실화하고 있다. 그의 위기는 비단 재판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강점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잠재적 국가 지도자로 주목되었던 것은 사이다발언이나 검찰에 대한 저항이 핵심은 아니었다. 정치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그를 이동시킨 것은 놀라운 경제성장에 비해 한없이 취약하고 힘겨운 시민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새로운 정책 아이디어와 실행력이었다.

 

그는 족보와 라인이 중요한 한국 정치계와 거리가 멀었고, ‘그 나물에 그 밥같던 정책 이야기를 반복해오던 이들과도 달랐다. 마치 스타트업을 시작한 창업가처럼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정책기업가이자 정치기업가였다.

 

성남시장에서 경기도지사로, 경기도지사에서 당의 대표와 대선 후보까지 그의 진격은 놀라웠다. 청년에게, 나아가 전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주겠다는 그의 정책은 무모하게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고, 기본사회라는 비전은 낯설었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선진국 중 최악의 출산율, 자살률, 노인 빈곤율을 기록한 대한민국에서 기존의 정책들은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제안은 한국 사회에 논쟁적이지만 반가운 바람이었다.

 

그의 진격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불편하고 비합리적인 것이었다. 모두에게 똑같은 소득을 준다고? 그냥 빈곤층에게 더 많이 주는 게 낫지 않아? 만일 재원의 규모가 더 커지지 않고 현재와 같이 한정되어 있다면 보편적 지급은 역진적이다. 그의 아이디어가 더 나은 대안이 되기 위한 조건은 보편적 지급의 재원을 마련하는 데에서 온다. 빈곤층에게만 주는 제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제도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원이 필요하게 되고, 이를 위한 증세를 통해 불평등은 줄어들게 된다.

 

권력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아이디어는 더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래서 아마도 대선 때에는 이 아이디어를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증세라는 불편한 이면의 이슈에도 불구하고, 경제 효과라는 논리를 장착하고 선거에 임했다. 아쉬운 선거 패배 이후에는 야당 대표로서 다시 유사한 민생회복지원금이라는 어젠다를 제안하였다. 끈질겼고, 진심이 느껴졌다.

 

그런 그와 민주당이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라는 결정을 내렸다. 금투세의 예상 세수 규모는 더 나은 복지국가와 기후 전환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하지만 수입이 있는 곳에 조세가 있다는 상식을 세우고, 보편적 증세를 이끌어내기 전 조세정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첫 단추였다.

 

이 결정은 이재명 대표를 성장시키고, 차별된 정치인으로 만들었던 기반을 위협한다. 이 작은 증세도 설득하지 못하는데 기본사회와 이를 위해 필요한 보편적 증세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만일 그의 계획에 증세가 없다면, 그가 지금까지 말했던 보편적 소득이나 서비스의 역진성과 효율성에 대한 비판은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가? 만일 그가 지금까지 주장한 정책들을 포기한다면, 한국 사회를 전환할 그의 대안은 무엇일까? 그가 정치적 이해를 위해 택했을지 모를 이 결정은 그를 무색무취한 정치인으로 만들 뿐 아니라 그의 과거 주장들을 복잡하게 합리화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로 밀어 넣고 있다.

 

그는 내내 포퓰리스트라는 비판을 받았다. 대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엘리트와 대립하며,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는 포퓰리스트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문제일 수 없다. 다만 정치의 이해에 따라 그의 정책들이 쉽게 변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재판의 높은 파고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공정한 판결만이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 위기뿐 아니라 그의 다른 위기도 시작되었다. 외적 위기와 달리 이 위기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본인에게 있다.

최영준 |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 한겨레 2024.11.18.

 

저성장 시대, 행복한 후퇴 전략이 필요하다

내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예상보다 낮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당초보다 0.1%포인트 낮춘 2%로 제시했다. 금융연구원의 2025년 성장률 예측치도 2%였다. 신영증권은 한발 더 나아가 미국 정책 리스크로 인해 내년 성장률이 1.8%에 그친다는 비관론을 내놨다.

 

한국 경제는 197314.8% 1970년대 다섯 해 성장률이 10%를 웃돌았다. 1980년대에도 10% 이상이 네 차례였고, 마지막 두 자릿수 성장률은 1999년이었다. 1971년부터 20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9%대였다. 이후 한국은 1990년대 6%, 2000년대 4%, 2010년대 2%대로 성장률이 계속 떨어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 성장률은 2%대에 고착화할 가능성이 크다. 5분의 1 수준이니 공부 잘하던 학생이 바닥권 성적표를 받았다고 누군가 꾸지람할지도 모른다. 가장 큰 걱정은 성장률 하락으로 취약계층이 받게 될 타격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후반기에는 소득·교육 불균형 등 양극화를 타개하기 위한 전향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말인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감세와 재정긴축에 매달리는 정부가 양극화 타개에 나설 수 있을까.

 

지금도 성장률 고공행진을 하는 나라들이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의 배경국가인 수리남과 이웃한 중남미 가이아나는 지난해 성장률이 43.8%였다. 2019년 원유 생산을 시작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가 됐다. 지난해 아시아 마카오(10.6%), 아프리카 니제르(9.9%), 남태평양 사모아(9.7%) 등도 1980~1990년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원래 농업국가였던 가이아나와 니제르는 갑자기 유전이 발견돼 원유를 생산하면서 고성장 가도에 올랐다. 원유 생산 전 성장률은 3% 안팎이었다. 마카오와 사모아는 해외 관광객 유치로 경제가 굴러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2020년부터 극심한 마이너스 성장을 겪은 뒤 지난해 관광객이 몰려들어 성장률이 급등했다. 마카오의 2020년 성장률은 -54%였고, 사모아는 2021-7.1%였다.

 

성장률이 높아졌다는 것은 전년보다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는 뜻이다. 일자리와 소득도 더불어 증가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고성장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고성장하면 시민 전체가 행복해진다는 전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의 1970~1980년대 고성장의 배경에는 노동 탄압과 인권 유린, 양극화 심화 등의 그림자가 있다.

 

유엔 산하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는 해마다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한다. 2024년 한국의 순위는 143개국 중 52위였다. 반면 지난해 성장률이 높았던 10개국 중 가이아나, 마카오, 사모아 등 절반은 아예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그나마 조사 대상이었던 고성장 국가의 성장률 및 행복지수 순위를 보면 니제르 3-109, 조지아 6(7.6%)-91, 인도 7(7.0%)-126, 타지키스탄 9(6.8%)-88, 베냉 10(6.5%)-119위 등이었다.

 

한국 경제가 2%대 또는 그보다 아래의 저성장이 예상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1970100만명이 넘었던 출생아 수는 지난해 23만명으로, 합계출산율은 4.53명에서 0.72명으로 급감했다. 생산에 투입할 노동력이 갈수록 줄어든다. 수십년째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과 산업구조 개편을 외쳤음에도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국내 시장이 좁은 한국은 수출을 늘려야 하는데 보호무역 기조가 강해져 그마저도 쉽지 않다.

저출생과 저성장은 확실한 미래지만, 고성장은 불확실하다. 대량으로 생산·유통·소비·폐기하는 성장 시스템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현실을 외면한 채 집단 최면에 걸린 듯 성장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여기지 말자. 코로나 팬데믹 때 경제활동을 일시 중단하자 벌어졌던 일들을 기억한다. 지구는 잠깐이나마 맑은 하늘과 깨끗한 바다를 선사했다.

 

저성장을 지나 제로, 후퇴의 단계로 갈 수도 있다. 후퇴한다고 해서 나라와 기업이 망하는 건 아니다. 과잉이 사라지는 상태이다. 보다 적은 생산량으로 다수가 만족하면서 살 수 있다면 지구와 인류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오래된 관행인 성장 위주 전략을 재검토할 시기가 됐다. 성장률을 높이지 않고도 시민 모두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플랜B, 플랜C가 필요하다.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 경향 2024.11.19.

 

연대인가, 외부세력 개입인가

프랑스에서 10살 아동을 대상으로 노동조합에 대해 가르치는 교육용 동영상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노동조합은 기업주와 교섭해서 합의를 이끌어냅니다. 예컨대 장애인 고용에 대한 합의일 수도 있겠죠. 일반적으로는 노동조합 대표가 직원들을 대표해서 노동조합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노동조합은 노동 관련 법을 놓고 정부와 협상하기도 합니다.”

 

정부와 협상하는 것이 노동조합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어릴 때부터 가르치고 배운다. 반면 우리 사회에서는 노조가 정부를 상대로 활동하면 왜 불순하게 정치에 개입하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적 요구나 행동을 하면 마치 순수함을 잃은 것처럼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정치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삶에 매우 구체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문제이다.

 

한국이 배출한 경제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는 그의 책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세계화의 주된 추진력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주장하듯 기술이 아니라 정치, 즉 인간의 의지와 결정이다라고 주장했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그의 책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에서 중산층이 중심이 되는 사회는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동을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기술이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똑같이 기술이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해도 행복한 사회가 있고, 불행한 사회도 있다. 그 중요한 차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적 선택에서 비롯된다.

 

정치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오히려 매우 강력한 정치적 입장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평창겨울올림픽 당시 우리나라의 한 선수가 경기용 헬멧에 작은 노란색 세월호 리본을 붙이고 출전하자 죽은 아이들 이용해서 정치 선동하는 게 노란 리본 세력이다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상파 공영방송사 출신의 한 보수 언론인은 세월호 리본의 의미가 오로지 4년 전 세월호 침몰에 대한 추모뿐인가? 아니면 박근혜 정부의 책임도 함께 묻기 위함인가? 박근혜 정부 책임을 묻기 위함이 전혀 없는 게 맞나?”고 따져 묻기도 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정치적인가? “정치적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정치 성향은 대개 극우보수인 경우가 많다.

 

민주노총이 정치적이어서 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피고용자 직장인, 노동자중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 노동운동이 그동안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여전히 교사노조와 공무원노조가 불법으로 금지된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미개한 나라로 남았을 것이다. 교사노조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2천여명의 교사가 해직당했고, 공무원노조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3천여명의 공무원이 징계를 당했다. 교사와 공무원이 노조를 설립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대량 징계를 한 나라는 거의 없다. 한국 사회에서만 발생하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동물 보호 단체 동물권행동 카라2023년 노조가 설립됐다. 언론이 3노조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세개나 설립됐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두개의 노조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설립된 노조는 회사 쪽 교섭위원이었던 사람이 노조 임원을 맡는 바람에 어용노조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단체의 사유화와 독단적 경영, 활동가에 대한 징계 등을 둘러싸고 진실 공방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이한 점은 나중에 설립된 노조가 언론과의 기자회견 등에서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등 상급단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활동가들이 스스로 모여서”, “외부 세력 없이등의 표현을 거듭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마치 상급단체가 없는 것이 노조의 순수함을 유지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짐작된다. 자신들이 근무하고 있는 직장에 소속되지 않은 상급단체의 활동가들이나 다른 단체 또는 사업장의 활동가들이 와서 연대하는 모습을 부당한 개입이라고 느끼거나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노조 활동에 대해 올바르게 배우고 깨달을 기회가 없었던 사회에서 나타나는, 노조에 대한 몰이해 현상 중 하나이다. 노조가 상급단체를 통해 외연을 확대하고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연대하는 것은 오랜 역사 속에서 다져온 매우 효율적이고 당연한 활동 방식이다. 시민단체 노조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 한겨레 2024.11.19.

 

이재명 죽이기

얼마 전 한 모임에서 팔순에 가까운 학교 선배를 만났다. 같은 동아리 출신이기는 하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처음 보는 분이었다. 내 직업을 확인하고는 대뜸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했는데, 이유가 뜻밖이었다. “왜 이재명이를 못처넣는 거야? 그거 하라고 뽑아놨더만.”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재명 처넣을 사람은) 한동훈이밖에 없어. 한동훈은 할 거야.”

 

국민의힘 지지자가 다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상당수 존재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분이 검찰과 사법부가 자기편이라고 확신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확신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님을 지난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공표 혐의) 1심 판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판결은 윤석열 정부의 정적을 사법적으로 제거하려는 정치검찰의 억지 기소를 무책임하게 추인한 자판기 재판이자 정치 재판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판결문은 과도한 유추와 짜깁기, 편파적 법리 해석으로 점철돼 있다. 논란의 핵심이었던 이른바 김문기 몰랐다발언에 대해서는 무죄라고 판단하면서도, 해외출장 중 찍은 사진에 관한 발언을 행위에 관한 발언으로 치환시켜 공소장을 변경한(선거법은 모른다는 인식을 처벌하지 않는다) 검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대표가 방송 인터뷰에서 국민의힘에서 4명 사진을 찍어가지고 마치 제가 골프를 친 것처럼 사진을 공개했던데, 제가 확인을 해보니까 전체 우리 일행, 단체 사진 중의 일부를 떼 내 가지고 이렇게 보여줬더군요. 조작한 거죠라고 말한 것을, 재판부는 김문기와 골프를 치지 않았다는 발언으로 해석했다. 이 대표는 국민의힘이 공개한 사진이 골프를 친 날 찍은 것이 아니고, 10명이 단체로 찍은 사진 가운데 고 김문기씨가 포함된 4명만 나오게 잘라서 공개한 것이어서 조작이라고 비판했는데, 이 대표가 하지도 않은 말(골프를 치지 않았다)을 허위사실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사후적 추론에 따라 발언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을 금지한 대법원 판례에 위배된다.

 

백현동 한국식품연구원 부지 용도변경의 경우, 검찰은 ‘(공공기관이전특별법의) 의무조항 때문에 용도변경 해줬다는 발언이 허위사실이라고 기소했고,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이 대표의 당시 국감 답변을 자세히 보면, 문제의 의무조항에 대한 언급은 식품연구원(백현동)이 아니라 도로공사와 토지주택공사(LH) 5개 공공기관에 관한 발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토부의 압박(협박)에도 불구하고 성남시가 버텨서 몇 년간 매각이 불발됐다는 내용이다. 이어서 식품연구원에 대해서는 별도의 공문을 언급하면서 법률에 의한 요구에 따라 용도변경을 해줬다고 말했다. 의무조항에 관한 발언은 용도변경을 해주지 않았다는 말을 하면서 나온 것이고, 식품연구원 용도변경과는 상관이 없는데도 검찰과 재판부는 중간을 생략하고 앞뒤를 이어붙여 의무조항 때문에 용도변경해줬다고 짜깁기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법에 따라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해당 공공기관 기존 부지를 매각하려고 했는데, 자연녹지 등으로 용도가 묶여 있어서 성남시의 협조가 필요했다. 아파트 등으로 난개발이 될 것을 우려한 성남시가 공공기관 5곳의 용도변경을 해주지 않고 몇 년간 버틴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백현동의 경우 알앤디(R&D) 부지를 확보하는 조건으로 준주거지역으로 절충했다는 게 이 대표의 주장이다. 실제로 도로공사 부지에는 성남판교 제2테크노밸리가 들어섰고, 토지주택공사 부지에는 서울대 의생명단지가 들어섰다. 시장으로서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노력한 행위가 이렇게 범죄로 취급받아야 할 일인가.

 

국토부로부터 협박을 당했다는 발언도 유죄를 선고했는데, 당시 박근혜 정부가 대통령 주재회의와 안전행정부의 이행실적 점검 등을 통해 직무유기로 문책한다는 방침을 하달하는 등 압박 정황이 있었던 사실을 무시한 판결이다. 더구나 협박이란 단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인 감정인데, 이를 어떻게 허위로 판단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당선자도 아닌 낙선자가, 상대방 비방도 아니고 자신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설령 일부 거짓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당선 무효형에 해당할 만큼 중대한 범죄인가.

 

100쪽이 훨씬 넘는 판결문은 너무나 깨알 같은 사실과 법리를 파고들고 있어서 끝까지 읽어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사소한 말실수를 법정에 세운 트집 기소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온 나라가 홍역을 치르고 있는 현대판 예송논쟁이다. 이런 논쟁이 대체 나라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나.

 

검찰이 19일 이재명 대표의 경기도 법인카드 사적 유용 의혹에 대해 업무상 배임 혐의로 기소했다. 이제 이 대표는 8개 사건에서 12개 혐의로 5개의 재판을 받게 된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가혹한 사법 공격이 가해진 것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것이다. 이 중에 하나만 피선거권 박탈형이 나와도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못한다. ‘이재명 죽이기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선출되지 않은 사법 엘리트들의 국민 선택권 탈취 시도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이번 재판이 우리에게 남긴 역사적 질문들이다.

이재성 | 논설위원 | 한겨레 2024.11.19.

 

 

윤 정부의 '건설업체 살리기', 업자만 배불리고 노동자는 빚으로 버틴다

]건설 부양책의 방향을 생각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43분기 민간소비는 전기 대비 0.1퍼센트 증가, 전년 대비 1.3퍼센트 증가를 기록했다. 내수 부진 때문에 정부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인 2.6퍼센트 달성은 어려워 보인다. 내수의 한 부분인 건설투자는 전기 대비 2.8퍼센트 감소했다. 건설경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언론 보도에도 자주 등장한다.

 

건설업 침체에 10월 실업급여 신청 '역대 최다'...올해도 실업급여 예산 동 났다(24.11.11 헤럴드경제)

10CBSI전월 대비 4.7p 하락..."건설경기 침체 장기화"(24.11.08 뉴시스)

"시멘트 생산마저 외환위기 수준"...얼어붙은 건설 경기, 대한민국 성장엔진 삐걱(24.10.25 매일경제)

작년 건설업 공사장 19197'임금 4363억원' 떼먹었다(24.10.28 한겨레)

 

<뉴시스>는 지난달 건설기업 경기실사지수(CBSI)가 전월 대비 4.7p 하락했다면서 "건설기업이 체감하는 건설경기 부진이 계속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매일경제>"내수경기의 '불쏘시개'격인 건설경기 악화로 당초 한국은행이 예상했던 올해 경제성장률 2.4% 달성도 불투명해졌다"고 지적했다. <헤럴드경제>"건설업 고용보험 가입자 수가 10월에도 15000명 감소"했으며 건설업 일용직과 상용직 근로자 중 각각 2400명과 960명이 구직급여를 신청했다고 전했다.

 

<한겨레>는 임금 체불에 고통받는 건설노동자의 입장을 생생하게 전했다. 경영난에 봉착한 건설업체들이 불법 하도급을 통해 고통을 아래로 전가하고 있다는 것. 지난해 건설업 임금체불액은 4363억원에 달하고, 올 상반기만 해도 2478억원이라고 한다. 하도급이 다단계로 이뤄진 경우 노동자가 체불임금을 돌려받기는 더 힘들어진다.

 

건설노동자의 어려움은 고용 관련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10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건설업 취업자 수는 93000명 감소했다. 전년동월대비 6개월 연속으로 감소를 기록했다. 건설업 고용보험 가입자 수도 14개월 연속 감소했다. 고용보험 가입자 수의 감소는 건설 상용직 노동자의 감소를 의미하며, 취업자 수의 감소에는 마감공사에 투입되는 일용직 노동자의 감소가 포함된다. 수많은 건설 노동자가 생계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이미 현장을 떠난 것으로 짐작된다.

 

건설업 고용보험 가입자 수(20231~202410) 고용노동부

 

역대 정부는 건설경기 침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건설 부양책을 발표했다. 경기를 부양하는 방법이 건설밖에 없는 건 아니지만, SOC 투자는 경기 활성화를 위해 전통적으로 활용하던 수단이다. 정책 담당자들은 건설 부문에 돈을 투입하면 파급효과가 높다고 여기는 반면, 사회복지 지출 확대를 통한 경기 부양에는 소극적이다. 복지 지출을 늘릴 경우 나중에 다시 줄이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설업은 고용유발계수가 높은 편이라서 재정 투입으로 고용률도 방어할 수 있다. 건설노동자는 매년 전체 취업자 중 7퍼센트 이상(2023년 기준으로 7.4%)을 차지한다.

 

침체에 빠진 건설경기를 살리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총선을 앞두고 성장률을 방어하기 위해서였을까? 올해 1분기에 정부는 건설업 지원에 예산을 집중 투입했다. 2024년 국토부 예산의 30%가량인 18조원 이상을 1분기에 조기 집행하고, 유동성 위기에 빠진 사업장을 지원하기 위해 프로젝트파이낸싱(PF) 보증도 확대했다. 공공부문의 주택 사업은 물론이고 공항, 철도, 도로 등 각종 SOC 사업에도 돈을 풀었다. 그 결과 20241분기에 건설업은 5.5퍼센트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높게 올라갔던 그래프가 2분기와 3분기에는 다시 내려왔지만.

 

경제활동별 성장률(계절조정계열) 한국은행

 

예산 조기투입 외에도, 올해 정부는 건설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을 자주 발표했다. 110일에 '주택공급 확대 및 건설경기 보완방안'을 발표한 데 이어, 328일에는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건설경기 회복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5월에는 부동산PF 연착륙 대책을 내놓았고, 8월에는 노동부와 기재부가 일자리TF 회의를 열고 '건설업 일자리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10월에는 경제장관회의에서 건설경기 부양책을 제시했으며, 얼마 전에는 대통령실이 그린벨트 주택공급계획을 발표했다.

 

2024년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건설업 지원 대책

 

정부가 발표한 대책 중에 유일하게 건설노동자를 언급한 대책은 814'건설업 일자리 지원 방안'이다. 그런데 이 방안의 절반가량은 공공이 발주하는 공사를 늘리겠다는 내용으로, 8.8대책으로 불리는 '주택공급 확대방안'과 겹친다. 3기 신도시에 주택 2만호를 추가 공급하고, 빌라 등 비아파트 11만호 이상을 신축매입임대 형식으로 사들여 공급하고, 재건축·재개발 기간을 단축하겠다는 것이다. 건설업체와 부동산 업자를 부양하는 정책이 건설업 고용훈련 지원 등과 함께 묶여 '일자리 대책'으로 포장되어 있다. 사실 그동안 발표된 주택공급 방안들도 명목은 '주거 안정'이었지만 실제로는 건설업체 살리기 대책에 가까웠다.

 

102일 경제장관회의에서 내수 살리기 명목으로 발표된 대책도 건설업과 관련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정부는 하반기 공공투자를 1조원 늘리고(8조원), 신축 매입임대 11만호를 조기 공급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확대하고, 민간투자 30조원을 추가 확대하고, 재건축재개발 절차를 단축하고, 건설용 토지 출자취득 부담을 경감하고, 미분양 주택 매입주체에게 우대 조치를 제공하고, CR리츠를 통해 지방 미분양을 매입하겠다고 했다. SOC보다는 주택건설 부문에 지원이 집중되는 양상이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 미분양 주택을 정부가 사들이는 정책은 타당한가? 돌이켜보면 윤석열 정부는 출범 직후 분양가 상한제를 거의 폐지 수준으로 완화했다. 분양가 규제가 없으니 건설업체들은 돈벌이를 위해 소형 평형을 늘리고 분양가를 높게 책정했다. 그렇게 비싸게 책정된 비수도권의 소형 평형 주택들이 지금 미분양 상태로 남아 PF문제를 일으키고 건설경기 침체를 유발한다. 짓기만 하면 다 분양되던 시기는 지나갔다. 금리는 올라갔고, 그간의 무리한 사업 확장은 지속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건설업체들이 수요 따지지 않고 비싸게 분양한 주택을 세금으로 매입한다. 나아가 건설업체들이 미분양 물량을 털어낼 수 있도록 건설사업자와 주택 구입자 양쪽에 세제 혜택을 주겠다고 한다. 고용이나 내수를 살리는 정책이 아니라 건설업체를 배불리는 정책이다. 신축 빌라 또는 오피스텔을 짓기만 하면 정부가 매입하고 인센티브까지 준다는 정책도 마찬가지다.

 

건설업체에 주는 혜택에 비해 실제 건설 노동자에게 도움을 주는 정책은 너무나 빈약하다. '건설업 일자리 지원방안'에서 건설노동자와 직접 연관된 대책을 찾아보면 건설현장 밀집지역에 찾아가서 고용서비스 제공 건설인력 수요가 존재하는 숙련 일자리로 이동 타 업종으로 전직 지원 강화 상용직은 고용유지지원금, 일용직은 300만원까지 생계비 대출 등이 눈에 띈다.

 

정부의 지원책이 건설노동자에게 안전망이 될 수 있을까? 건설업의 특성을 먼저 짚어보자. 건설업은 수주산업이다. 수주를 받지 못하고 착공이 이뤄지지 못하면 이윤이 나올 곳이 없다. 그래서 건설업체들은 장기 고용으로 숙련된 노동력을 확보하기보다 하도급 형식의 외부 계약으로 일감이 있을 때만 인력과 장비를 동원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 구조가 건설업체 입장에서는 이윤 추구의 메커니즘이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특수고용직 또는 일용직으로서 고용 불안정과 무권리 상태에 놓인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의 현장이 마무리되는데 다음 현장이 약속되지 못한 건설노동자의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들다.

 

특수고용직 또는 일용직으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 수주가 없을 때 아무도 이들을 책임져주지 않기 때문에 노동조합에서는 고용안정을 최우선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노동조합을 '건폭'으로 몰면서, 어렵게 확보한 조합원의 고용안정마저 무너지고 있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이제와서 '찾아가는 고용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다. 타 업종으로 전직을 지원하겠다는 것은 지원책이 아니라 아예 건설현장을 떠나라는 소리로 들린다.

 

또한 건설업은 사이클이 길고 복잡한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산업이다. 현재와 같은 구조에서는 돈을 풀어도 현장으로 내려가지 않고 중간에서 '배달사고'가 발생하거나 몇몇 사람만 배불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더구나 최근에는 건설사들이 금융비용 및 자재비 인상을 감당하기 위해 불법 하도급을 늘려 인건비를 줄이고 있다. 지난 8월 건설근로자공제회 '2024년 건설근로자 종합생활 실태조사'에 따르면 건설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소득은 2022년 대비 875098원 하락했다. 그런데 정부는 일용직 노동자에게 300만원까지 생계비 대출을 해주겠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일용직 노동자 보험료 징수를 발표했다.

 

지금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까. 건설노조의 보도자료(24.09.25~24.11.04)에서 실제 증언들을 찾아봤다.

 

"회사를 소유한 대주주와 최고경영책임자들은 무리한 경영으로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그들은 회사가 돈을 벌면 자기 주머니에 넣기 급급했고, 위기에 처해지니 가장 먼저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을 감행하며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두 달 동안 보름 일했다."

"인건비가 너무 비싸 분양가가 올랐다고 하는데... 건폭몰이 이후로 건설노동자 임금은 오른 적이 없기 때문에 화가 났다."

"(2024년 임금협상에서) 사측은 최대 일당 2만원 삭감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해 임금동결에 이어 올해는 대폭 삭감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4년 전 수준의 임금이다."

"350~400명이 출근하는 현장에서 30명 말고는 전부 불법적인 고용이다."

"최근에는 도급으로 일해야 하는데, 물량이 잘 나오는 구간을 배정받으려면 상납금까지 바쳐야 한다."

조 단위 예산이 투입되는데 현장의 건설노동자에게는 온기가 전해지지 않는다면 부양책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역대 정부가 건설업을 경기부양의 도구로 사용하며 건설업체들에게 충분한 이윤을 보장했을 때도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혜택은 거의 없었다. 반대로 건설 경기가 나빠질 때면 리스크는 하도급 업체를 거쳐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지금 건설현장에서는 원청 시공사와 전문건설업체가 이중삼중으로 노동자 쥐어짜기를 하고 있다. 건설업계가 어렵다는 이유로 현장 노동자의 임금(일당)1~2만원씩 삭감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건설산업이 진정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면 현장 노동자들이 심각하게 느끼는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 불법 하도급은 당연히 근절해야 한다. 숙련공 양성을 정부가 더 많이 책임지고, 안전한 건설현장을 만들어 청년층이 유입되게 해야 한다. 지금처럼 외부 요인으로 일감이 없어져서 고통받는 노동자에게는 빚으로 버티라고 할 게 아니라 일시적으로라도 생계비를 지급해야 한다. 이렇게 건설노동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집중한다면 오히려 실질임금이 올라가면서 소매판매 등 내수 회복도 기대할 수 있다. 지금처럼 건설업체에만 돈을 쏟아 붓는 방식의 경기 부양은 점점 한계에 부딪칠 것이다.

안진이 더불어삶 대표 | 프레시안 2024.11.19

 

 

지역에서 연결될 권리

수년 전부터 동네지식인을 자처했지만, 요즘 정작 동네를 비우는 경우가 잦다. 동네 술벗들로부터 동네를 너무 자주 비우는 것 아니냐며 힐난을 받곤 한다. 그럴 때마다 15년 전쯤 자발적 백수가 된 이래 직장인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잘 지켜온 것에 만족해하는 편이다.

 

올해 유독 자주 찾은 지역은 전남이었다. 전남문화재단 자율기획형 사업 책임심의위원을 맡아 해남, 담양, 곡성, 고흥 등지를 찾았다. 시인보다는 전사이고자 했던 김남주 시인(1945~1994) 30주기를 맞아 김남주기념사업회가 극단 토박이와 손잡고 상연한 시극 <은박지에 새긴 사랑> 관극차 해남을 처음 방문했다. 곡성 한국실험예술정신이라는 단체가 옥과면 신흥마을에서 국내외 예술가들과 함께 옛 신흥상회를 꾸며 마을 갤러리를 만든 멋진 프로젝트를 만날 수 있었다. 따뜻한 10월의 가을 한낮에 이루어진 오프닝 행사는 조촐한 마을 잔치가 되었다. 하지만 아츠뷰라는 단체가 신안군 매화도 옛 매화분교에서 추진한 프로젝트 잊혀지는 섬, 사라지지 않는 기억에는 태풍 때문에 방문하지 못했다.

 

지역에 갈 때마다 우리나라 지역은 대중교통 체계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실감한다. 곡성역에서 옥과면 신흥마을까지 20남짓 거리이지만 군내버스는 어쩌다 한 대씩 오는 꼴이었다. 그렇게 시골살이는 자동차를 권장하는 삶이다. 서울 한동네에서 30년 동안 살아온 생활을 정리하고 소도시 귀촌을 생각하는 나로서도 지역 대중교통 정비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지역활동가 양미는 <너무나 정치적인 시골살이>(동녘)에서 우리는 연결될 권리가 있으며, “연결되지 못하는 시골살이는 사람들을 각자도생으로 몰아간다고 말한다. 수년째 시골살이를 하는 그가 여전히자동차를 운전하지 않으며, 자립하는 삶을 고민하는 분투기가 적혀 있다. “불편하다고 각자 개인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면 결국 악순환이 되지 않을까요?”라는 그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지역 대중교통 체계 정비는 노답인가. 양미가 제시한 해법은 버스공영제. 20135월 전국 최초로 버스공영제를 실시한 전남 신안군, 20207월 버스공영제를 도입한 강원 정선군은 공영제 이후 이용객이 급증했다. 2021년 기준 신안군은 20만명에서 67만명으로 늘었고, 정선군은 약 54% 증가했다. 2023모든 승객 공짜를 표방한 경북 청송군의 농어촌버스 무료 운영 또한 주민과 관광객들의 호평을 받는다. 혈세 먹는 하마로 전락한 시내버스를 완전공영제 또는 준공영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곳곳에서 드높다. 문제는 정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정책 의지와 대책 마련이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제학자 앨프리드 칸은 소소한 결정들의 폭거라는 소논문에서 자가용 이용자가 급증함으로써 철도 노선이 사라진 미국 사례를 언급한다. 우리는 합리적인 선택(자동차)을 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래서, 시골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라는 양미의 질문에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자동차 중심의 교통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 경향 2024.11.20.

 

 

그늘에 가려진 정책, 평생교육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불렀던 사계가사다. 낭만적으로 들려도 실은 1970년대 당시 자신의 몸을 갈아넣고 노동하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과 땀을 노래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한 시대 전체가 그랬다. 경공업으로 시작한 한국경제는 대량의 나이 어린 저숙련 저임금 노동자를 집단적으로 요구했고,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청소년들의 희생에 의해 지지되었다. 국가와 기업은 이들을 산업 역군이라고 추켜세웠지만, 사실 이들은 기본적인 삶의 권리도 포기한 채 기계 앞에 붙들려 있어야 했던 어린 노동자일 뿐이었다.

 

사계의 가사는 이렇게 끝난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청춘만이 아니었다. 학교 다닐 기회도 잃어버렸다. 젊은 전태일이 일하던 1970년 동대문 일대만 해도 봉제 노동자 숫자가 3만명에 달했고, 이 중 80% 이상이 10~20대의 여공이었다. <열세살 여공의 삶>을 쓴 저자는 아버지가 학교에 보내준다는 말에 순순히 서울로 따라나섰지만 결국 열세살에 평화시장 시다로 인생을 시작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여공들의 절반은 아마도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장에 부설된 산업체부설 중·고등학교를 가진 기업이 인기였다. 비록 이들의 몸은 공장에 묶여 있었지만, 그 마음속에는 언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도 가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어려서 일터로 갔던 사람들은 이제 시간이 흘러 어느새 고령자가 되었다. 이들의 잃어버린 교육기회를 늦게나마 보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바로 평생교육법이다. 평생교육이 표면적으로는 미래세대의 계속교육을 지원하는 법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그 출발은 산업화 세대·베이비붐 세대처럼 교육적 결핍을 경험한 고령자에 대한 교육적 보상의 개념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참 늦었다. 한국사회에 사회복지 개념이 법제화되기 시작했던 것이 1980년대였던 반면, 교육복지로서의 평생교육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국가사업이 되었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된 지 25년이 된 시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의 평생교육은 또 하나의 새로운 학습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있다. 산업화시대에 벌어졌던 학습격차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을 기준으로 볼 때, 25~29세 청년층의 평생학습 참여율(44.8%)은 산업화 세대인 70~79세 고령층 참여율(23%)의 두 배에 가깝다. 학력별로도 대졸 이상 참여율(39.9%)이 중졸 이하(22.1%)보다 훨씬 높다. 월 가구소득별로 볼 때 월 500만원 이상 소득 가구 참여율(36.1%)150만원 이하(21.2%)에 비할 바 아니다. 비취약계층의 참여율(32.8%)은 취약계층(22%)을 능가하며, 상용근로자 참여율(40.0%)은 임시 및 일용직(25.2%)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또한 그 차이가 참으로 구조적이며 체계적이기까지 하다. 사회 평등화라는 차원에서 학습을 더욱 필요로 하는 집단이 고령층, 저학력층, 저소득층, 취약계층, 임시직 등일 테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한국의 평생교육 정책은 그 초기의 취지를 실현하고 있지 못하며, 오히려 사회적 약자층이 겪는 학습격차를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학습격차만큼이나 큰 문제는 바로 사회 전체의 평생학습참여율이 놀라울 만큼 낮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평생학습참여율은 겨우 32%에 불과하다. 형식교육과 비형식교육을 통틀어서 1년 동안 단 한 번도 교육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의 비율이 성인 전체의 68%나 된다. 그만큼 일반 시민들의 삶이 교육에서 멀어져 있다.

 

돌아보면, 한국의 평생교육이 그동안 쌓아온 성과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하지만 문제점도 적지 않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평생교육이 사회 전반의 학습격차를 줄이지 못할 만큼 전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그 첫번째 문제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사회의 구조적 왜곡을 변혁해나가는 과정에서 평생교육에 대한 사회적 존재감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인류가 당면한 궁극적인 문제들, 예컨대 기후변화, 민주주의 후퇴, 노동 양극화 등에 대해서 크게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학습소비주의적인 현재의 평생학습의 틀을 넘어서, 공존과 혁신을 향한 사회변혁의 촉진자로 평생교육의 의미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활동을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 경향 2024.11.20.

 

 

트럼프의 재등장과 기후변화 서사

20년 가까이 기후변화 문제를 보도하면서 고민하는 게 있다. 기후변화는 정교함을 요구하는 기사의 서사로 보여주기 어렵다는 점이다. 세계의 기후변화 대응이 미진한 이유는 서사의 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거나, 서사의 방향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점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을 포함해 세계 언론이 기후변화의 실상을 적극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때는 2000년대 들어서다. 초기의 보도 경향은 기후변화의 최전선에 가서 실상을 보여주고 경고했다. 나는 북극과 투발루 그리고 남극을 다녀왔는데, 기자들이 현상을 거두절미하고 단순화하면서, 주민들 삶의 복잡성을 놓친다는 게 께름칙했다.

 

투발루 사람들은 해수면 수위가 빠르게 높아져서, ‘~’ 하는 사이렌을 듣고, 국토를 허겁지겁 떠나는 걸까? 선진국 시민들은 대개 그런 이미지를 상상하지만, 가서 보면 그렇지 않다. 투발루 사람들은 과거부터 이민을 선호했다. 변변한 공장은 물론 시장도 없을 정도로 이 나라에는 경제적 전망이 없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뉴질랜드에서 미등록 노동자가 되어 돈을 보내 가족을 먹여 살린다. 기후변화로 인해 벼락처럼 투발루에 이런 변화가 내리친 게 아니다. 기저에는 사회경제적-심리적 요인들(송금 경제로 지탱되는 국가경제, 글로벌 소비주의 문화의 침범, 재난에 대한 심리적 공포)이 자리 잡고 있다.

 

2017년 캐나다 북극권 서머싯섬에서 삐쩍 마른 곰이 내일이라도 죽을 것처럼 걸어가는 영상이 세계를 사로잡았다. 놓칠세라 내셔널지오그래픽은 기후변화를 경고하는 콘텐츠로 활용했다. 며칠 뒤, 과학자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기후변화 때문에 굶주렸다기보다는 암 질환 같은 병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을 거라는 얘기였다. 이 매체는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기후변화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대개 사람들은 기후변화가 절벽처럼 다가올 거로 생각한다. 반면, 내 생각에 기후변화는 싸구려 장비를 찬 대원들부터 낙오하는 죽음의 산길과 비슷하다.

 

기후변화=절벽을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콘텐츠로 할리우드 영화 투모로우’(2004)를 꼽는다. 북극의 바다얼음이 녹아 해류가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고 미국 동부에 빙하기가 도래한다는 이야기다. 과학적 원리는 맞는다. 그런데, 중요한 게 잘못됐다. 어떻게 빙하기가 한 달 만에 오는가?

 

기후변화의 절박성에 대해 대중을 계몽하려는 언론인은 이런 스토리텔링을 숭고한 과장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차기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주변의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은 이런 약점을 거짓말이라며 파고든다. “거 봐! 기후변화는 과장이라고라면서 과학자와 언론인과 환경운동가의 주장을 되치기한다.

 

기후변화는 곧잘 재난이 휩쓸고 간 폐허, 찰나의 폭발적 이미지, 단 하나의 사건으로 형상화되지만, 이런 이미지는 전체 그림의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기후변화는 느린 재난’(slow disaster)에 가깝다. 느린 재난은 오랜 시간 동안 켜켜이 쌓여, 이산과 빈곤, 붕괴로 나타난다. 사건은 기후변화라는 단일 원인으로 소급되지 않는다. 대신 기후변화는 사회경제적 환경을 투과해 고통을 배가하고 절망에 빠지게 한다. 순수하게 자연적인 재난은 없다. 산업화의 누적된 부작용이자, 개도국에 대한 착취의 결과이고, 부자와 가난한 자, 젠더, 종에 따라 불균등하게 증폭되는 고통이다.

 

언론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기술적 해법에 기대어 기후위기에서 벗어날 거란 근거 없는 낙관주의, ‘인류 멸종같은 종말론적인 비관주의에서 모두 벗어나야 한다. 포스트 휴머니즘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사변적 우화를 만들자고 말한다. 전형적인 기후변화 서사에서 비가시화되거나 수동적인 대상에 머무는 사람들, 주변인, 비인간 동물들에게 이야기를 돌려주면 새로운 가능성이 움틀 거라고 한다. 홍수와 가뭄이 일상적인 높은 문맹률 나라의 시민과 투발루 주민과 북극곰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든다면? 이들을 피동적인 존재로 그려왔던 언론인들에게 낯선 제안이다. 그러나 낯선 시대에는 낯선 해법이 필요하다. 우리만큼 낯선 시대를 사는 존재가 지구 역사에 있었는가?

남종영 |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 한겨레 2024.11.20.

 

나랏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19051130일 자결 순국한 민영환.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지난 11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었다. 이날은 원래 190511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로서 한국인에게는 치욕의 날이었다. 그런데 1939112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은 지청천·차리석 의원 등의 제안으로 1117일을 순국선열기념일로 제정하였고,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194021일 이를 공포하였다. 치욕의 날에 순국선열의 뜻을 계승하여 더욱 분발하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해마다 1117일에 광복회, 순국선열유족회 등 여러 독립운동 관련 단체, 혹은 정부 주관으로 광복선열추모식이 열렸다. 1997년 이들 단체의 요청에 따라 정부는 순국선열의 날1117일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여 이때부터 정부 주관으로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정부 수립 49년 만의 일이었다.

 

순국선열이란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국권 회복과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가 절사(자결 순국), 전사(전투 중 사망), 형사(사형을 받아 죽음), 피살(죽임을 당함), 옥사(감옥에서 사망), 옥병사(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사망)한 분들을 일컫는다. 순국선열유족회에서는 순국한 이들의 수가 약 15만명이며, 이 가운데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이는 3500여명이라고 한다.

 

이 글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이들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10년 강제병합 직후까지 자결 순국한 분들이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에 14, 1907년 정미조약 직후에 4, 1910년 강제병합 직후에 44명으로 모두 62명이 자결 순국했다. 자결 순국한 이들은 전현직 관료, 양반 유생, 군인들이 대부분이지만, 일반 평민도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이는 을사늑약 직후에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이다. 그는 여흥 민씨 민겸호의 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인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다. 민태호는 고종의 외삼촌이었다. 민영환은 민씨 가문의 배경을 등에 업고, 젊어서부터 정계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던 젊은 세도가 민영익이 청국으로 망명한 뒤, 민영환은 민씨 가문의 중심인물이 되어,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고종의 측근으로서, 1896년 아관파천 이후에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축하사절로 가게 된다. 당시 그는 일본-미국-유럽을 거쳐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갔다. 1897년에는 영국 여왕 즉위 60주년 축하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러시아와 영국을 다녀온 뒤, 그는 점차 개화와 개혁의 사고를 갖게 되었고, 재야의 개혁파인 이준 등과도 연결을 가졌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학부대신, 의정부 참정대신, 시종무관장 등을 차례로 맡았다.

 

190511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의 보호국 신세로 전락했다. 당시 시종무관장이던 민영환은 1126일 전 의정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70명이 고종에게 올린 조약에 찬성한 5대신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촉구하는 상소에 동참하였다. 조병세가 대궐 밖으로 추방당하고 감금되자, 민영환은 1128일 이번에는 자신이 대표가 되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는 아직 고종과 참정대신 한규설의 인준이 없으니 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하고, 다시 일본과 담판하여 조약을 파기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물러가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같은 날 다시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을사오적은 당연히 베어야 한다. 당연히 베어야 할 것을 베고, 주무대신을 새로 임명하여 문제의 조약을 폐기하는 방법을 도모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고종은 민영환과 상소를 같이 올린 이들을 법부에서 모두 잡아다가 다스리라고 명령했다. 민영환은 평리원에 끌려갔으나 고종의 명으로 곧 석방되었다

 

이후 민영환은 사세가 틀렸다고 보고,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민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1129일 그는 집으로 돌아와 유서를 작성하고, 30일 새벽 자신의 방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칼로써 자결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5살이었다. 민영환의 순국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조문을 왔고, 고종도 특별히 애도하는 조서를 내렸다.

 

민영환은 유서에 이렇게 썼다. “아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에서 소멸할 것이다. 대저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을 것을 기약하면 살게 되는 것이니, 제공은 어찌 이를 모르는 것인가? 영환은 그저 한번 죽는 것으로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또 우리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는 주요 관직에 있었던 자로서, 국권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국민에게 사죄하고자 한 것이다.

 

민영환이 자결한 다음날인 121, 그와 함께 첫 상소를 올렸던 조병세는 민영환의 자결 순국 소식을 듣고 경운궁에 나아가 다시 상소문을 올렸다. 그리고 군인들에 의해 강제로 가마에 실려 조카인 조민희의 집으로 가던 길에, 가마 안에서 음독 자결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78살이었다. 조병세도 미리 남긴 유서에서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대세가 이미 글렀으니, 오직 죽음으로써 위로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 여러 사람에게 사죄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 또한 전직 관리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해 사죄하고자 한 것이다.

 

이후에 많은 전직 관료, 양반 유생들이 자결 순국한 이유도 대체로 비슷하였다. 그들은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결 순국한 것이다.

 

2024년 오늘, 정부의 신뢰 상실과 국정 혼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는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여러 사고가 있었고,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민생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장관 중에 누구 하나 내 잘못, 내 책임이라고 말하는 이가 없다.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모두 변명과 책임 회피로 일관하고 있으니, 순국선열들에게 부끄럽기 짝이 없다.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 한겨레 2024.11.21.

 

 

금투세 좌절, 민주당이 책임져야 한다

현시점 우리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이른바 정서적 양극화라는 용어로 정리된다. 이념적, 정책적 차이에 기반한 양극화와 달리 정서적 양극화는 우리그들이라는 이분법적인 집단논리로 정치적 대상을 구분하고 상대방을 타자화함으로써 극단적인 정파적 갈등이 유발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정당 간 갈등은 이념이나 정책적인 내용의 차이에 기반하기보다는 내집단에 대한 무비판적 호의와 외집단에 대한 맹목적 반감에 따라 형성된다. 작금에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 논란은 양극화로 정당 간 갈등이 극대화되어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상황 속에서도 이에 줄곧 비판적이었던 국민의힘에 더불어민주당이 동조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극심한 당파적 갈등의 시대 속에서 실로 아이러니해 보이는 현상이다.

 

초당적으로 급물살을 타고 있는 금투세 폐지 주장은 우리의 정파적 양극화가 더 이상 이념과 정책적 차이에 기반한 것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애초에 금투세 도입은 문재인 정부 시기 자본시장 선진화 방안의 하나로 추진되었다. 과세 형평성과 세원 확대를 위해 5천만원 이상의 금융투자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골자로 한 금투세는 20206월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하여 20231월 시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시행을 앞둔 금투세의 도입을 금융시장 위축을 이유로 2년간 유예하였고, 유예기간 종료가 임박한 2024114일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금투세 폐지에 공개적으로 동의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금투세를 둘러싼 세부적인 논란을 차치하고 이러한 상황 전개는 민주당, 특히 이재명 대표의 입장 선회에 따른 것이다

 

.금투세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은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현실에서 이의 완화를 위한 방편으로 그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근로소득과 달리 비과세 대상이던 금융투자소득은 일부 극도의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투기성 투자를 제외하면 투자자금의 보유 여부가 중요한 전제이며, 특히 5천만원 이상의 투자소득을 거두기 위해서는 일반인들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투자자금의 투입이 불가피하다. 결국 금투세 부과는 일부 고소득층과 고액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며, 이의 도입을 주저하는 정당의 입장은 과세 형평성보다는 고소득, 고액 자산가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염두에 둔 정책적 판단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욱이 금투세 도입 폐지는 경제적인 불황 속에서 누구나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생활 유지를 위해 그 중요성이 더해가고 있는 정부의 복지 지출을 위한 세원 확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이런 맥락에서 금투세 도입 폐지는 경제적 불평등 완화와 복지를 위한 세원 확보를 지체시킴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하는 정부의 공적 책임을 방기하는 결정이다.

 

만일 지금의 예상과 같이 금투세 도입이 좌절된다면 이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이재명 대표를 위시한 민주당이 져야 한다. 정당의 정책적 입장은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금투세 도입의 배경인 경제적 불평등 심화와 세원 확보 필요성이 국회에서 법이 통과되었던 시기에 비해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악화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의 도입 폐지에 동조하는 민주당의 정책 입장 선회는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오히려 민주당의 선회는 그간 국민의힘을 기득권 정당으로 비판하고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당으로 내세웠던 것이 외적인 포장에 불과한 것임을 자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선거를 기제로 한 현재의 대의민주주의에서 정당은 지지 유권자들에 대한 약속을 책임감 있게 이행함으로써 신뢰를 얻는다. 정당의 정책 입장은 유권자들에 대한 약속이며 약속을 어길 때에는 명확한 이유를 제시하고 이해를 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금투세 도입을 둘러싼 민주당의 입장 선회는 그러한 과정이 미비한 채 충분한 설명 없이 그간 기득권 정당으로 비판하던 국민의힘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신뢰를 저버리는 결정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신뢰를 잃은 정당은 대의민주주의에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마련이며, 선거의 장에서 유권자들에게 책임감 있는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민주당이 애초에 금투세 도입을 주장했던 원칙을 되새기고 폐지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유성진 | 이화여대 교수·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소장 | 한겨레 2024.11.21.

 

 

사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미국 사법부의 보수화를 이끈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의 주특기는 공익소송의 무력화. 그는 판사 임용 전 변호사로 활동할 때 시민단체가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낸 환경·인권 소송에서 피고 쪽을 대리해 대부분 승소했다. 그가 소송 전략에 활용한 것은 절차주의였다. 소송의 본질적 문제를 다투지 않고 원고의 적격성이나 법원의 관할권, 소송 기한 등 절차적 문제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그가 1990년 조지 부시(아버지) 정권의 법무부에서 일할 때 환경단체가 낸 소송(Lujan v. National Wildlife Federation)에서 구사한 전략이 대표적이다. 연방정부가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광산 채굴을 허가한 것이 주민의 환경권을 침해했는지가 소송의 본질이었다. 그는 원고가 이 소송을 낼 자격이 있는지를 물고 늘어졌다. 광산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사는 환경단체 회원이 원고로 참여했는데, 로버츠는 원고 자격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전국에 있는 환경에 관심이 많은일반 시민들도 모두 원고가 될 수 있는 모순에 빠진다는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5 4의 표결로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로버츠는 곧바로 대형 로펌에 스카우트됐다. 기업들은 앞다퉈 그에게 공익소송을 맡겼다.

 

절차주의는 판사에게도 좋은 핑곗거리를 제공한다. 정부나 기업이 시민의 기본권을 명백하게 침해한 사건에서 판사는 절차적 하자를 핑계로 정부와 기업의 손을 쉽게 들어줄 수 있다. 변호사가 차려준 밥상을 못 이기는 척 받아먹으면 된다. 반면, 시민들은 절차주의가 강조될수록 불이익을 받기 쉽다. 절차적 장벽이 높으면 공익소송을 통한 시민의 기본권 구제가 힘들어진다. 공익소송을 통해 힘을 키워온 시민운동의 영향력도 그만큼 쇠퇴한다. 결국 절차주의는 미국 정치에서 진보 진영, 즉 민주당 쪽에 불리한 영향을 미친다. 미국 법조 전문기자 제프리 투빈은 자신의 책 더 오스에서 로버츠 대법원장처럼 보수 성향이 강한 법조인들이 절차주의를 활용해 자신의 정치색을 들키지 않고 공화당을 은밀하게 지원한다고 비판했다.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공화당 편들기라는 것이다.

 

20231219일 서울고법은 윤석열 징계 소송에서 면직 이상의 징계가 가능하다1심 판결을 뒤집고 윤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소송의 본질인 징계 사유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고 징계 절차의 하자를 이유로 징계 처분을 취소했다. 윤 대통령의 변호인들이 주장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만약 징계 사유를 따졌다면 1심을 뒤집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1심 때 승소 판결을 받아낸 변호인을 교체해 윤 대통령 쪽에 일부러 패소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새로 선임된 변호인은 마치 패소할 결심이라도 한 듯 소송 대응에 소극적이었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이처럼 한동훈 법무부가 차려준 밥상을 그대로 받아먹은 것이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선거법 위반 사건 1심 재판은 사법부의 역할을 새삼 묻게 만든다. 보수 진영은 피고인이 누구인지 눈을 가린 채 재판을 했을 때 나올 법한 형이 선고됐다’(법률신문 1116정의의 여신은 왜 눈을 가렸나’)고 호평한다. 거대 야당 대표라는 정치적 사안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법리에 따라 판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숱한 허위사실을 유포한 윤 대통령과의 형평성은 어떻게 되나. “유권자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도록 민의를 왜곡해낙선한 이 대표보다 당선된 윤 대통령이 더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옳지 않나. 이런 모순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게 사법부가 해야 할 일 아닌가. 검찰의 선택적 기소에 눈을 가린 채, 검찰이 차려준 밥상을 그냥 받아먹기만 하는 것은 국민이 기대하는 사법부의 역할이 아니다.

판사들의 보수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윤석열 정권 들어 더욱 심해졌다는 말이 나온다. 그 원인을 문재인 정권 때 있었던 사법농단수사에서 찾는 시각이 많다. 진보 정권에서 사법부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시도를 많이 했다는 피해의식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법농단 수사의 지휘자는 윤 대통령이었고, ‘넘버2’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였다. 판사 100명을 피의자처럼 조사했던 검찰은 지금 대통령 부부의 비위 의혹은 철저히 덮는다. ‘명태균 게이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법부는 선택적 정의를 방관할 것인가. 그게 사법정의인가.

이춘재논설위원 | 한겨레 2024.11.21.

 

포퓰리즘마저 포획된 사회

미국 대통령선거가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로 끝나고 나서 선거 결과에 관한 분석이 어지러이 쏟아지고 있다. 여러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대체로 인정하는 것은 이제 극우 포퓰리즘 시대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백인 남성 블루칼라는 다수가 트럼프에 표를 던졌다. 민주당 표밭이라 여겨지던 흑인과 히스패닉 공동체에서도 트럼프 지지가 크게 늘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학력 수준에 따라 지지 후보가 확연히 갈렸다는 사실이다. 대졸 이상 학력을 지닌 인구는 민주당에 몰표를 던진 반면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은 인구에서는 트럼프가 압승을 거뒀다.

 

말하자면 계급 정치가 작동했다.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이 명확히 갈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노동계급 가운데 상대적으로 더 불안정한 계층과 고학력 중간계급이 각각 두 진영의 구심 역할을 하는 정치 지형이 대두했다. 한 세기 전이었다면 전자는 사회주의의 대중적 기반이 됐겠지만, 지금은 구도가 전혀 다르다. 후자가 오히려 리버럴 혹은 중도좌파를 지지하고, 전자는 극우 포퓰리즘에서 자기 언어를 찾으려 한다. 트럼프주의가 불만에 찬 노동 대중의 언어가 되고 있다.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방향으로 역사가 펼쳐지려는 순간이다.

 

미국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의 시계는 과연 어디쯤 와 있는지가 뜨거운 관심사로 떠오른다. 유럽과 남북미를 강타한 포퓰리즘 물결이 결국 이 땅에도 상륙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계급 정치가 혐오 정치와 만나 충격적 변종을 낳을 가능성을 미리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꼭 필요한 진지한 고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도 있다. 한국의 계급 지형은 미국, 유럽과 크게 다르다는, 단순하면서도 중대한 사실이 그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계급은 여전히 무정형의 대중에 가깝다. 좌파 전통을 통해 노동계급이 뚜렷한 가시적 세력으로 존재해온 유럽과는 다르다. 미국은 좌파 전통은 약해도 어쨌든 오랫동안 노동조합이 뉴딜연합의 일원으로 대접받은 사회다. 또한 특정 지역사회나 비백인 공동체들과 계급 균열선의 교차를 통해 노동계급 정체성이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 이런 유럽, 미국 사회이기에 노동계급을 주된 지지 기반으로 삼는 신흥 포퓰리즘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중간계급, 특히 고학력 중간계급의 목소리다. 노동계급은 숫자에 비해 목소리가 약한 반면 공론장은 압도적으로 중간계급에 의해 좌우된다. 교육 경쟁이나 부동산 투자가 사회 전체의 관심사가 될수록 중간계급의 헤게모니는 더욱 강해지고, 대졸자 비중이 급증한 젊은 세대로 갈수록 이 양상은 더 심해진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포퓰리즘의 전조라 할 현상조차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출현한다. 최근 정계를 뒤흔든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운동이 그 사례다. 한국은 포퓰리즘마저 노동계급 배제 질서에 포획된 사회다.

 

그래서 미국이든 한국이든 지금 시급한 과제는 다시 계급 정치로 눈을 돌리는 것이더라도 그 내용은 다를 수밖에 없다. 분노한 노동계급이 극우 포퓰리즘과는 다른 언어를 찾도록 하는 것이 저들의 과제라면, 이곳에서는 여전히 노동계급이 투명인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급선무다. 노동계급 대 중간계급의 지형이 저들의 걱정거리라면, 이곳에서는 다른 모든 집단의 목소리를 덮어버리는 중간계급 과잉 대표의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 당면과제다.

장석준 |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한겨레 2024.11.21.

 

종교와 초월성

지난 1027일 광화문광장 일대와 여의도에서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 조직위원회가 주최하는 대규모의 개신교 집회가 있었다. 거창한 이름을 내건 조직위원회의 공동대표·공동대회장은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대형교회 목사다.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와 오정현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회장은 장종현 한국교회총연합회장이 맡았고 고문은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이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의 주류 세력인 개신교의 대표적인 집단이 주최했다. 교회에 연합예배참여 동원령이 내려진 건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주최 측은 110만명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렇지 않아도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미얀마를 비롯하여 전쟁과 학살이 끊이지 않는 참혹한 지구.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개신교라면 마땅히 연합하고 또 연합해서평화의 기도를 드려야 할 때다. 이날 설교를 맡은 한 목사는 지금 내리는 비가 하나님의 눈물처럼 느껴진다면서 울부짖었다. 처참한 지구의 현실을 생각하면 내리는 비가 하나님의 눈물처럼 느껴질 법하다. 그런데 웬걸,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괴이하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것 같고 동성혼이 허용될 것 같아서다. 직접적인 발단은 올해 718일 사실혼 관계인 동성 배우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인정한 대법원 판결. 이를 계기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동성혼이 허용될 것이라고 난리다.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동성혼에 대해서는 여러 찬반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누구나 마땅히 의견을 자유롭게 밝힐 수 있다. 개신교 집단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기 위한 1000만 기독교인 1027 선언문에서 밝힌 반대 이유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부정하는 성 오염과 생명 경시로 가정과 다음 세대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남자와 여자 이외 제3의 성 젠더를 인정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지럽힐 것이다.

 

이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건 절대무오’(inerrancy)한 진리로 떠받드는 성경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했다. 생육은 오로지 생물학적으로 수컷(male)과 암컷(female)의 짝짓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남자를 먼저 창조하고 이후 여자를 남자의 보필로 만들었다. 성 역할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한 성에 대한 영원불변한 진리다.

 

개신교 근본주의 집단은 성경을 상징이 아닌 사물로 본다. 상징은 주어진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힘이다. 상징은 자기 이외의 다른 것을 지칭하는 힘, 다시 말해 초월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을 초월한 상징의 세계에 산다. 반면 다른 동물은 주어진 그대로의 사물에 둘러싸여 있다. 성경을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영원한 진리 그 자체로 맹신하는 것은 성경을 사물화하는 것이다. 사물화된 성경을 절대 진리로 믿으면 다른 세상을 상상조차 못하는 짐승으로 추락한다. 사물화된 진리에 도전하는 다른 존재를 사탄으로 규정하여 척결하려고 덤빈다.

종교사회학자들은 기원전 800년을 전후하여 지구상 곳곳의 문명에서 굴대 시대’(Axial Age)가 열렸다고 지적한다. 굴대 시대를 여는 가장 큰 특징은 초월성, 즉 자율적인 초월적 상징체계의 등장이다. 주어진 이 세상보다 더 참된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고 가르치는 종교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자율적인 초월적 상징체계다. 역사를 통해 종교는 좋은 삶에 대한 초월적인 이상을 제시함으로써 사물화된 이 세상에 긴장을 불어넣었다. 개신교도 한때 복된 소리를 전파함으로써 사물화된 한국 사회를 일깨우는 초월적 종교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세상의 사물에 취하면서 악한 소리나 퍼트리고 있다.

 

종교가 초월성을 잃으면 굴대 시대 이전으로 후퇴하여 인민의 아편이 된다.

최종렬|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 경향 2024.11.21.

 

법이 타락하는 세 가지 방식

<법의 정신>(1748)을 쓴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몽테스키외(1689~1755)에 따르면, 법이 타락하는 데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국민이 법을 지키지 않는 경우, 다른 하나는 법 때문에 국민이 타락하는 경우다. 그런데 두 번째 타락은 치료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치료약인 법 자체 안에 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법을 지키지 않는 첫째 경우는 가장 흔하고 우리 자신도 잘 아는 바다. 경중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법 위반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 나 역시 과속으로 과태료를 낸 적이 있다. 이 경우, 다시는 과태료나 벌금을 내지 않고자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렇게 하면 준법 사회가 된다. 이 경우, 법적 처벌은 치료약이 된다.

 

경찰이 가난한 여인 때리는 법이 준법사회 만들 수 있을까?

문제는 두 번째다. 과연 법 때문에 국민이 타락하는 경우란 어떤 경우일까? <청년 마르크스>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약간 혼란스럽다. 누구나 가는 산, 평화롭게 땔감(죽은 나뭇가지)을 줍던 여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법에 따라) 기마경찰에 쫓기고 폭력과 죽임까지 당한다. 전통적 공유지인 산과 숲조차 토지 사유화로 인해 더 이상 접근이 불가하게 된 것! 이제는 서민들이 숲속의 나뭇가지(땔감)조차 함부로줍지 못한다.

 

몽테스키외가 보기에 이 유형은 치료 불가능케이스다. “왜냐하면 치료약인 법 자체 안에 독이 들어 있기 때문”! 그렇다면 이 법은 대체 무슨 법인가?

 

맨 앞 인용문은 청년 마르크스(1818~1883)가 약 180년 전 청년 헤겔파 친구들과 함께 독일 쾰른에서 <라인신문(Die Rheinische Zeitung)>을 낼 때 쓴 땔감 절도법비판 글(1842. 10.)에 나온다. 그는 기존 공유지에서 땔감을 줍던 가난한 여인들이 경찰 폭력에 쓰러지는 현실을 맹렬히 비판했다. 이 글로 당국의 탄압을 받아 <라인신문>까지 폐간됐다. 토지 사유화란 이토록 무섭고 폭력적이다.

 

법 자체가 소유권을 절대적으로보호하기 시작한 탓에, 마을사람들이 야산에서 죽은 나뭇가지를 모아 땔감으로 써오던 관습적 행위가 느닷없이 법 위반으로 간주된 것이다. 300년 전, 몽테스키외는 이 경우는 치료가 안 된다 했다. 치료약이어야 할 법 자체가 독소를 갖고 있기 때문! 여기서 독소는 토지 사유화 법률’(민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천, 수만 년 전부터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공유지(커먼스) 내지 야산에 가서 죽은 나뭇가지 같은 걸 땔감으로 주웠다. 그걸로 요리도 하고 난방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가장 자연스럽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토지 사유화를 위한 땔감 절도법으로 인해 불법 내지 범죄로 내몰린 사태, 이는 오래 전 몽테스키외의 눈에 치료 불가로 판단됐다. 크게 보면, 15~18세기 잉글랜드의 악명 높은 인클로저운동이 독일에도 닥친 것!

 

악법은 따를 것이 아니라 바꾸거나 없애는 것이 치료약

여기서 나는, 한때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한 걸로 알려졌던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B.C. 470~399)를 떠올린다. 소크라테스가 글자 그대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악법이라도 따라야 한다는 말의 메시지가 무슨 의미인가 하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이건 지배자 내지 권력자의 관점이지 피지배자 내지 평민의 관점은 아니다. 피지배자인 평민의 입장에서는, 만약 어떤 법이 악법이라면 그 악법에 순종하는 것보다 악법 자체를 없애거나 바꾸는 것이 민주주의를 고양하는 일이다.

 

, 몽테스키외가 치료 불가라고 느낀 그 두 번째 케이스의 치료약은 악법 차제를 없애거나 바꾸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도 그런 악법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참된 통일·평화운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운동을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이다. 최근의 삐라-오물전쟁을 보라!

 

어떤 면에서 국가(國家)는 북유럽에서 말하듯, ‘국민의 집이다. , 국가는 공유지(커먼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지배층 내지 기득권 세력이 공유지를 사유화하는 법 아닌가?

 

그러나 내가 여기서 정작 말하고 싶은 건, 몽테스키외가 말한 두 가지 법의 타락을 넘어 그 세 번째 유형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민들이 법을 충실히 지킴에도 불구하고법이 타락하고 부패하는 경우다. 과연 그런 경우가 있을까? 있다! 어디에? 바로 대한민국에!

 

몽테스키외가 탄식해 마지않을 대한민국 판·검사들의 법의 정신

그것은 평민들이 법을 충실히 지키지만, 법률가, 특히 판·검사들이 법을 정치적,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멋대로 해석·적용하는 경우다. 몽테스키외가 살아 있다면, ‘내가 이러려고 <법의 정신> 같은 책을 썼나, 하는 자괴감을 느낄지 모른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라! 그 사례들이야 이미 차고도 넘치지만 최근 사례 중 중요한 세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과 관련해 김건희 여사는 검찰로부터 불기소처분을 받았다(2024.10.17.). 사실상 무죄 취지다. 그런데 단순 쩐주로서 1억 원 정도 손해를 보고 끝난 손건희 행복디자인 대표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 권오수 대표이사, 이종호·민태균 블랙펄인베스트먼트 대표 및 이사, 1차 조작 선수 이정필, 2차 조작 선수 김기현 등은 모두 구속되고 재판까지 받아 (비록 솜방망이 처벌이지만) 유죄 판명됐다. 반면, 도이치모터스 관련, 수 억대 쩐주역할을 하며 2010~2011년에만도 약 14억 원 시세차익을 본 김건희는 대표이사 권오수와는 물론, 주가 조작의 선수들과 긴밀한 소통과 협의를 했다. 그럼에도 무혐의-무죄-불기소라니? 무덤에 누운 몽테스키외가 놀라 벌떡 일어날 일이다!

 

둘째,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관련해 판·검사들이 법을 농락하고 있는 사태다. 이재명 대표와 관련해 진행 중인 재판도 5건 내외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공표죄) 1심 재판(2024.11.15.)이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4(부장판사 한성진)는 이 대표의 “(대장동 관련 김문기 씨 등과 찍은) 사진이 조작되었다란 발언이나 “(성남 백현동) 토지 용도 변경이 국토부 압력으로 이뤄졌다란 발언이 허위사실 공표라며 징역 1, 집행유예 2형을 선고했다. 이 판결에 일반 시민조차 그 판사가 서울대 출신이 맞나?” 할 정도다. 심지어 한국경제신문 주필 출신의 대표적 보수 논객인 정규재 씨조차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며 개탄했다. 몽테스키외가 그 판사의 멱살을 잡고 흔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불법 선거사무소 등 의혹 범벅 윤 정권 탄생의 비밀은 어쩔건가

셋째, 최근 뉴스타파등 여러 매체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이 (각종 불법 공천 개입 건은 별도로 하더라도) 2022년 대선을 앞두고 (강남 소재 예화랑) ‘가로수팀이라는 불법 선거사무소를 운영했고 그 증거를 인멸한 의혹이 나왔다. 당시 윤 캠프 정책총괄지원실장으로 활약한 신용한 교수도 이게 사실이라 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서영교 진상조사단장)원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한 후보 선거사무소, 중앙당과 시·도당을 제외한 다른 선거사무소는 불법이라며 “(그런데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 때) ‘예화랑이라는 강남 소재 불법 선거사무소에서 정책과 선거조직을 이야기하고, 사람을 만나고, 선거 계획을 짰다며 개탄했다.

 

윤 대통령의 절친인 연세대 로스쿨 이철호 교수 역시 양재동에도 (불법 선거사무소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흥미롭게도 일주일 전엔 예화랑간판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간판이 없어지고 펜스가 쳐졌다. 증거 인멸 혐의! 특히 <주간조선>에 따르면 이 예화랑건물을 둘러싸고 이상한 부동산 거래 정황도 포착됐다. , 한미약품그룹 모 계열사가 재건축이 예정된 예화랑 건물 소유주와 20년 장기로 보증금 48억 원, 월 임대료 4억 원의 부동산임대차계약을 맺었다.

 

상황이 이 정도면 수많은 언론이 달라붙어 진상을 밝히고, 그보다 먼저 검찰과 경찰이 특별 수사나 압수수색에 착수해야 마땅하다. 만일 야당이 그랬다면 벌써 쥐 잡듯이 뒤졌을 터! 이미 2017년 말 당시 20대 국회 시절, 진보당 윤종오 의원(울산 북구)이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하지 않은 유사 선거사무실 운영 등 혐의로 벌금 300만 원,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한 바 있다. 이런 중차대한 의혹에 대통령실조차 아무 반응도 않는다. 검찰이나 경찰 역시 복지부동이다. 만일 몽테스키외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법의 타락을 뭐라 했을지 궁금하다.

 

연면한 혁명 통해 역사 전면에 나선 민초들

돌아보면, 몽테스키외가 죽고 한 세대 지난 뒤, 1789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프랑스 인권선언’(자유, 소유, 안전, 저항)에 토대해 약 10년 넘게 세상을 뒤집었다. 세금과 폭정에 시달리던 농민과 평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게 도화선이 되어,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하지만 결국 혁명은 (공화정, 제정, 군주정 등)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신흥 상공인, 즉 부르주아-자본 계급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럼에도 민초들이 더 이상 구체제에 굴종하지 않고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은 대단한 변화라 봐야 한다.

 

그런 대혁명의 기억이 나치 하 레지스탕스’(저항 운동)를 거쳐 약 170년 뒤(1968) ‘68 혁명에서 되살아났다. 당시 샤를 드 골 정부의 실정과 여러 사회 모순에 대해 시민의 저항과 노동자 총파업 투쟁이 거세게 일어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정면 도전했다. 처음엔 파리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에 의한 학생 봉기가 불을 지폈다. 드 골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 강경 대응했지만 오히려 시민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결국 프랑스 전역의 학생들과 파리 전 노동자의 2/3에 해당하는 노동자 총파업이 일어났다. 위기의식을 느낀 드 골 정부는 군사력을 동원하고 의회를 해산, 재총선을 실시했다. 드 골이 더 힘을 얻는 듯 했으나 이듬해 물러나고 말았다.

 

비록 19685월 혁명은 정치적으로 성공한 건 아니나 사회적으로는 크게 성공했다. , 종교, 애국주의, 권위에 대한 복종과 차별 등 보수적 가치 대신, 평등, 성해방, 인권, 공동체주의, 생태주의 등 진보적 가치들이 사회의 주요 가치로 부상했다. 오늘날 프랑스 사회를 주도하는 건 결국 이런 가치들이다. 사회(민주)주의 지향의 프랑수와 미테랑이 1981년부터 1995년까지 프랑스 대통령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런 사회 변화 덕이었다.

 

삼권분립이 수장된 나라, ‘프랑스 대혁명같은 혁명만이 치료약일까?

다시 위기의 대한민국으로 가보자. 지금 한국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상황은 한마디로 대략 난감이다. 배로 비유하자면, 선장은 물론 1등 항해사조차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다. 무속인이나 정치 브로커들이 득실댄다. 국내는 물론 대외 정책도 갈팡질팡한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말한 삼권분립은 이미 깊은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다. 그나마 야당들 덕에 쿠데타도, 전쟁도 아슬아슬 막아내고 있는 형편이다.

 

따지고 보면, 5천만 민초들이 사는 중차대한 나라 경영에 철학도, 개념도, 역량도 없다! 이러다 언제 이 배가 좌초할지 모르겠다. 방향을 잃고도 그런 줄도 모른 채, 좌초나 난파 위기에 처한 이 대한민국호를 어떻게 구해야 하나? 몽테스키외 선생이시여, 당신이 상상 못할 정도로 기괴한, 세 번째 법의 타락을 하루가 멀다며 반복하는 이 대한민국을 과연 어떤 법의 정신으로 구할 수 있겠나이까? 설마, 1789프랑스 대혁명같은 거대한 물결이 치료약이라 권하는 건 아니옵겠지요?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 시민언론 민들레 2024.11.22.

 

옆방에 있어 줄래?”

난 주말 문상을 다녀왔다. 오늘도 부고 문자를 받았다. 나는 마침 영화 룸 넥스트 도어를 보고 나오던 참이었다. 영화는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죽음에 대해 자기 결정을 하는 이야기였다. 잡지사에서 일하며 젊음을 함께 했던 마사와 잉그리드는 연락이 끊긴 채 종군 여기자와 여성작가로 각자의 삶을 달려왔다. 우연히 암 투병 중이라는 마사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잉그리드가 병문안을 가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암이 날 죽이게 두고 싶지 않아. 나는 존엄을 지키며 잘 죽을 권리가 있어.” 마사는 항암치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존엄사를 결정한다. “옆방에 있어 줄래?” 죽음이 두렵지는 않으나 혼자 죽기는 싫다며 잉그리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마사가 꿈꾸는 존엄한 죽음에는 옆방으로 상징되는 공감과 배려, 돌봄과 믿음이 함께한다.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 죽음의 방식, 사후 처리는 정교하면서도 간결하다. 좋아하는 책과 영화와 그림과 자연과 추억을 공유하며 곁을 지키는 잉그리드 덕분에 마사는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통제하는 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지난해 나도 92살의 죽어가는 엄마 옆방에 있었다. 엄마도 죽음 자체보다는 자신의 죽음이 방치되거나 외면되는 것을, 그러니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어떤 때는 10분 간격으로 옆방에 있는 나를 부르시곤 했다. “엄마 혼자 있게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안심시키고 돌아오면, 금세 또 부르셨다. 온갖 용무 아닌 용무와 핑계 아닌 핑계를 대시다가 궁해지시면 그때서야, “네가 있나 보려고혹은 나 죽는 시간을 네가 알아야 하니까”, 그러셨다.

 

85살의 아버지가 죽어갈 때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옆방을 지키지 못했다. 입원 치료가 길어지면서 아버지는 링거 바늘을 뽑아 던지며 치료를 거부했다. 나는 아버지를 달랬다. 아버지 죽음은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토록 애면글면했던 자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잘 견디셔야 한다고. 아버지는 수긍하셨고 그렇게 몇달을 더 버티시다가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혼자서 죽음을 맞는다는 건 먹먹한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8년 전쯤 디그니타스라는 스위스의 조력 존엄사 기관을 알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기관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낯설었다. 조건, 가입, 절차, 비용 등을 폭풍 검색했다. 스위스는 존엄사가 외국인에게도 허용되는 나라였고 마지막으로 스위스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시를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들며 20대를 함께했던 독일로 이민 간 친구가 떠올랐다. 스위스는 독일과 가까우니 달려와 줄 테고, 여행을 하며 각자의 삶을 달리느라 비어있던 긴 공백과 그 공백을 넘어서 여전히 공유하는 것들을 나눌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디그니타스라는 시를 썼다. “디그니타스, 선택과 결단이 묻어나는 소리다/ 사랑의 아모에니타스와 자유의 리베르타스가 이웃한/ 디그니타스 디그니타스, 디스토피아 과거완료형만 같고 디즈니랜드 미래완료형만 같다.” 여전히 존엄한 죽음이란 내게 선택과 결단, 사랑과 자유에 이웃한 것이자 디스토피아의 끝이나 디즈니랜드 시작과 동의어일 것만 같다.

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한겨레 2024.11.24.

 

고작 20% 지지율에 취한 윤 대통령의 취생몽사

윤석열 대통령은 지금을 위기라고 느낄까. 경제적 불만 고조와 정치적 분노의 공공연한 표출, 집권 엘리트의 분열 등 정치 위기를 가늠하는 객관적 지표들은 틀림없이 정권의 치명적 위기를 가리키고 있다. 셋 다 위험수위를 넘은 지 꽤 됐다.

 

지난해 소매업·음식점 5곳 중 1곳이 문을 닫으며 자영업자 폐업률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멀쩡하던 단골 식당이 어느 날 갑자기 셔터를 내려 당혹했던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소매판매액은 10분기 연속 감소했다. 생활물가는 치솟는데 실질임금은 감소하니 가계는 허리띠를 죄고, 내수 경기의 최전선에 선 자영업자들은 벼랑 끝으로 점점 내몰릴 수밖에 없다. 지금 민심이 등을 돌린 배경엔 최악의 민생 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먹고사는 문제에 뚜렷한 진전이 없이는 민심이 단기에 돌아서기 어렵다는 뜻이다.

 

끝이 안 보이는 김건희 의혹과 변명·발뺌으로 일관하는 윤 대통령의 처신이 촉발한 정치적 분노는 임계점을 오르내리고 있다. ‘명태균 게이트관련 폭로가 날마다 몇건씩 터져나오며 국민 의혹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윤 대통령의 기자회견 뒤 교수 시국선언은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여권에선 장외 집회 참여 인원이 폭발적으로 늘지 않는 걸 보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양이다. 그러나 저변의 분노가 휘발돼 날아가지 않고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상황임을 직시해야 한다. 제때 제대로 김을 빼지 못하면 폭발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또 느닷없이 허리를 굽히면서 집권 엘리트 분열은 내연 상태다. 당장 특검법 표결로 표출될 가능성은 줄었다. 그러나 당원게시판 논란이 가열되면서 계파 갈등 양상은 더 적나라해졌다.

객관적 지표 악화에도 불구하고 윤 대통령이 이를 비상한 위기 징후로 인식하는지는 의심스럽다. 오히려 부부 휴대폰을 바꾸고 김건희 여사 대외활동을 연말까지 중단한 것으로 충분히 김을 뺐다고 자신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대통령이 뭘 사과했는지 국민들이 어리둥절할 것 같다는 부산일보 기자의 질문에 대해 뒤늦게 무례하다고 공격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리 없다. 다음날 여론 반발에 밀려 사과했지만, 애초 잘못된 질문이라는 내부 컨센서스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당연히 윤 대통령과 김 여사의 불편한 심기를 전면 반영한 컨센서스였을 것이다.

 

아마 윤 대통령은 어찌 됐든 사과기자회견 뒤 대구·경북 지역 여론이 일부 호전되고 국정지지율이 20%대로 반등한 데 고무됐을 가능성이 크다. 더 이상의 민심 이반을 틀어막고 탄핵 동력을 떨어뜨렸다고 보는 것일 터다.

 

이재명 유죄선고의 반사 이익에 대한 기대도 깔렸을 것이다. 25위증 교사혐의마저 유죄가 나올 경우 야당 위기가 가속화하고 자연스레 정권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공직선거법 유죄 판결 나흘 만에 경기도지사 시절 법인카드 유용 혐의로 이 대표를 6번째로 기소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심산이다.

 

한동훈 대표를 향한 가족 게시글공세도 이 기회에 경찰 수사를 활용해 내부 비판을 원천적으로 입틀막하겠다는 것으로 비친다. 그동안은 대통령의 권위로 당대표를 내치고 찍어눌렀지만, 더 이상 말발이 안 먹히자 윤 대통령의 특기인 수사 정치의 총구를 여권 내부로 돌리는 것이다. ‘수사 정치의 하위 파트너였던 한 대표가 첫 내부 타깃이 된 건 아이러니다. 민심 대신 용산 눈높이를 맹종하기로 한 순간 국민이 쳐준 방탄막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 자명한 인과조차 예견하지 못한 것은 검사 출신 정치 초보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검경을 동원하고 과녘을 바꾼다고 특검과 국정 쇄신에 쏠린 국민 관심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고 착각이다. 국민 대다수는 이미 이대로 가면 삶이 무너지고 나라가 결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다. 영화 동사서독에는 취생몽사라는 술이 등장한다. 마시면 모든 기억이 지워진다는 전설의 술이다. 고작 20% 지지율이 지금 윤 대통령의 취생몽사인가. 민심의 경고조차 기억에서 삭제한 듯 다시 윤석열차가 역주행 가속 페달을 밟는 형국이다. 국민의 심판만이 이 위험천만한 폭주를 멈춰 세울 수 있다.

손원제 | 논설위원 |한겨레 2024.11.24.

 

콜로세움의 막시무스처럼진보정치, 보통사람 마음을 얻어라

미국 민주당 패배의 교훈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검투사 막시무스가 콜로세움의 관중, 즉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황제에 맞서 승자가 되는 과정이다. 과거 검투사였던 노예상 프락시모가 검투를 앞두고 그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내가 최고였던 건 상대를 재빠르게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관중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관중의 마음을 얻어라. 그러면 자유를 얻을 것이다.” 목표를 이루려면 경기를 지켜보는 보통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라는 얘기다.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것이 선거다. 늘 지는 정당은 있어도 늘 이기는 정당은 없다. 정당에는 승리나 패배 모두 일상이다. 사실 성패가 뒤바뀌는 게 민주주의다. 그럼에도 어떻게 졌는지는 가혹하게 따져봐야 한다. 초점은 패배 그 자체보다 패배의 질이다. 미국 민주당은 유권자, 특히 자신이 대표하고 대변하겠다고 한 노동자 등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졌다. 미국 민주당의 패배는 남 얘기가 아니다. 진보를 표방한, 약자나 보통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하는 정당이라면 깊이 성찰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미국 민주당은 져도 빈틈없이 알차게 졌다. 4년 만에 백악관을 내줬을 뿐만 아니라 상원과 하원도 모두 잃었다. 대통령 선거인단에서는 226 312로 완패했다. 지도로 보면 대서양과 태평양 연안의 파란색을 빼면 온통 빨간색이다. 1120일까지의 개표를 기준으로, 상원은 52 46, 하원은 218 212로 공화당이 승리했다. 이른바 트라이펙타’ ‘레드 스윕을 달성했다.

 

민주당에 가장 뼈아픈 대목은 일반 투표에서의 패배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게 생겼다. 근래 대선에서 패배했을 때마다 민주당은 중 염불하듯제도 탓을 했다. 일반 투표에서 이기고도 선거인단 득표에서 졌기 때문이다. 2016, 힐러리 클린턴은 일반 투표에서 280만표를 더 얻었다. 2020, 조 바이든은 일반 투표 700만표 우위에도 불구하고 경합주에서 근소하게 앞서 승리했다. 그랬던 민주당이 이번에는 일반 투표에서도 500만표 뒤졌다. 전통적 지지층이 먹고 사는 건 나 몰라라 하면서 성마른 ‘B사감처럼 훈계만 하는 민주당에 실망해 떠난 탓이다. 그 결과 2020년에 비해 대졸 미만 저학력층, 연 소득 5만달러 이하 저소득층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지지율이 각각 4%포인트, 5%포인트 늘어났다.

 

미국 민주주의가 퇴행한 이유를 반 다수결 제도에서 찾았던 학자들도 머쓱하게 됐다.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선거인단 제도가 다수결에 반한다며 미국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제안한다. 그들은 꼭 필요한 개혁의 하나로 선거인단 제도의 폐지를 꼽는다.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고 이를 전국적인 보통 선거로 대체해야 한다.”(‘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다수가 권력을 차지하고, 그들이 강력하게 통치할 수 있게 하자는 구상이 그들의 개혁 비전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당선되자마자 다수파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상원의 장관 인준 권한과 예산 편성권을 손보겠다고 한다. 일반 투표에서도 크게 승리한 트럼프가 다수결의 논리로 자신의 어젠다와 프로그램을 밀어붙인다니 그간 공화당이 소수임에도 전횡을 일삼아온 걸 비판하며 다수 지배를 강조한 이들로선 난감하게 됐다.

 

민주당의 패배에 대한 원인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그중에서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일갈이 가장 통렬하다. “민주당의 선거 참패는 놀라울 게 전혀 없다. 민주당은 투표장에서 자신이 먼저 버린 노동계급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지난 선거에서는 백인 노동자들의 표를 잃더니, 이번에는 라틴계, 흑인 노동자들의 표까지 잃었다. 미국인들은 지금의 부조리에 분노하고 변화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 지도부는 현상 유지를 우악스럽게 고집했다. 유권자들의 선택은 옳았다.” 얘기 끝!

 

전조 없는 사고는 없다. 민주당이 백인 노동자들의 마음을 잃고 있기 때문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라는 지적은 선거 오래 전부터 끊이지 않았다. “중국과의 자유무역으로 인해 발생한 계급·문화적 분노는 이제 백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내재화되고, 자생력을 갖게 됐다. 여기에는 기술·문화·정치적 요인도 있었다. 산불처럼 지금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와 불만은 계속해서 스스로 바람을 일으켜 불씨를 날라 사방으로 퍼뜨리고 있다.”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경제학 교수인 데이비드 오터의 대선 2년 전 진단이다.

 

하버드대 도시정책학 교수인 고든 핸슨도 그 즈음 비슷한 지적을 했다. “민주당은 지금 자유무역과 동의어나 다름없는 정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밀어붙였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성사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모두 제조업 일자리를 앗아간 주범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들이다.”자신들이 지지한 정당이 그 일자리를 빼앗은 꼴이니 그들로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가슴 속 응어리를 트럼프가 콕 집어 자극했다. “여러분에겐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형편에도 바이든 정부는 많이 부족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해 노동자의 편에 서겠다는 공약을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나도 바이든 대통령을 지지해 왔다. 그러나 민주당이 당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걸 다 했냐고 묻는다면 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문제나 의료보험 부담을 줄여주는 문제는 계속해서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샌더스의 평가다. 그래서 그는 유권자들이 트럼프에게 기대하게 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카멀라 해리스 선거 캠프 역시 안이했다. 배고파 우는데 클래식 음악 틀어주는 공제’(공감능력 제로)도 기가 차는데, 클래식 음악을 모른다고 또 힐난하는 식이었다. 대선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지난 10월 오바마 전 대통령이, 해리스에게 유보적인 흑인 남성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혹시 여성을 대통령으로 뽑는 게 불편한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미국은 인종 갈등으로 내전까지 치른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사상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그조차도 불씨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을지도.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던지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스가 이렇게 비꼬았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흑인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트럼프 재임 중에 가파르게 오르다가 바이든 행정부 아래서는 거의 정체됐다.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설명을 놔두고 굳이 누군가를 꾸짖고 모욕 주는 논리를 찾는 이유는 뭘까?”

 

소셜 애니멀의 저자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이렇게 직격했다. “민주당에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 불평등과 싸우는 것이다. 바로 눈앞에 이토록 극심한 불평등이 보란 듯이 존재하는데, 많은 민주당 사람들은 이를 보지 않았다. 많은 좌파가 인종 불평등, 젠더 불평등, 성소수자 불평등에 집중했다. 좌파가 정체성 행위예술로 방향을 트는 사이 트럼프는 두 발 벗고 계급전쟁에 뛰어들었다. 퀸즈 출신 트럼프의 맨해튼 엘리트에 대한 분노는 미국 전역의 시골 사람들이 느끼는 계급적 적개심과 마법처럼 맞아 떨어졌다. 트럼프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이 사람들은 당신을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무식한 얼간이로 여긴다.”

 

민주당의 패배가 진보정치에 주는 교훈은 간단명료하다. 관중의 마음을 얻어라

이철희 |한겨레 2024.11.24.

 

도덕적 우월감은 독약이다

20년 전 미국에서 출간된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책을 다시 읽어본다.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로 끝난 미국 대선 결과를 음미해보고 싶어서다. 저자인 언론인 토머스 프랭크는 한때 미국 진보세력의 산실이었던 캔자스가 이젠 극우 지역으로 변했다며 이렇게 말한다. “캔자스는 모든 것이 평균인 땅이지만 그 평균의 특성은 일탈과 호전성, 분노다. 오늘날 캔자스는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반동의 선전으로 점철된 보수주의의 성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프랭크의 책에선 민주당의 위선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낙태 문제 등 사회문화적 가치와 종교적인 원인이 언급되었지만, 이 책이 보수에 대해 워낙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바람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 캔자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탐구한 이 책 자체가 그런 변화의 원인이라고 할 특성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키스 스타노비치는 이 책에 대해 이런 주장을 펼치는 교육받은 자유주의자는 아마도 이런 입장인 것 같다다른 유권자들은 절대 그들의 금전적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해선 안 되지만,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지 않다. 왜냐? 나는 깨어 있는 시민이니까라고 꼬집었다. 프랭크의 입장을 그렇게까지 보는 것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깨어 있지만 너는 어리석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유권자들이 많으며, 이들이 오만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데엔 흔쾌히 동의할 수 있다.

 

2003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전에 참가했던 존 에드워즈는 지난 수십년 동안 민주당이 끊임없이 저지른 죄악은 (남에게 과시하는 걸 좋아하는) 속물근성이었다고 했는데, 민주당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그런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럼에도 달라질 기색이 전혀 보이질 않으니, 그게 민주당의 속성이거나 본질인가 하는 생각마저 갖게 된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와 맞붙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극히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를 지지하는 절반을 개탄할 만한(deplorable) 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다”, “트럼프의 뒤에 선 절반의 사람들은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등과 같은 최악의 실언을 하고 말았다. 그런 오만의 악몽2024년 대선에서도 되살아났다. 트럼프의 뉴욕 유세에 찬조 연설자로 나선 한 코미디언이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를 쓰레기 섬이라고 부르자, 대통령 조 바이든은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를 돕겠다며 유일한 쓰레기는 그(트럼프)의 지지자들뿐이라고 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할 것인가.

 

중요한 건 그런 실언 자체라기보다는 실언의 모태가 된 도덕적 우월감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해리스의 패인으로 트럼프가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에 초점을 맞춘 선거운동을 벌였다고 지적했다. 사실 도덕적 우월감에 충만하다 보면 먹고사는 문제보다는 도덕적 비교우위를 발휘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이슈에 치중하기 마련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는 그런 우월감은 정치적 독약일 수 있다는 걸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기득권 정치세력은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트럼프의 당선을 정치적 피해망상, 외국인 혐오증, 백인 기독교 우파, 인종주의, 여성혐오 탓으로 돌리고 있다. 틀렸다. 2016년에 이어 2024년에도 트럼프는 공장이 문을 닫고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져버린 지역에 사는 수백만 노동자의 표심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한겨레21, 20241115일치)

 

앞서 언급한 프랭크의 책은 국내에선 2012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는데, 이 제목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한 것 같지 않다. 이번 대선을 거치면서 이제 민주당은 고소득층의 정당, 공화당은 저소득층의 정당이 됐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이를 다룬 미국 정치학자 박홍민의 한국일보 칼럼 제목이 흥미롭다. “허풍 떤 트럼프보다, 훈계질과 잘난 척하는 해리스가 더 미웠다.”

 

민주당의 정치 분석가인 크리스 코피니스는 민주당은 죽었다이 나라 엘리트들은 트럼프를 파괴하려는 의제보다 우리 문제에 집중해달라는 노동자와 중산층 유권자들의 4년간 외침을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한국계로는 첫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민주당 하원의원 앤디 김은 우리 안의 오만함을 내려놓자우리가 모든 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가서 시민들의 얘기를 듣자고 했다. 한국의 정당들도 당장 실천해야 할 말이다.

강준만 | 전북대 명예교수 |한겨레 2024.11.25

 

무너진 언덕 위의 도시와 더러운 위기

돌이켜 보면 다 부질없는 사후 객담이겠지만, 20211204년간의 임기를 시작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사로잡은 감정의 정체는 초조함이 아니었나 싶다. 취임식이 열리기 불과 보름 전 미국과 전세계를 경악과 공포에 빠뜨렸던 1·6 의회 습격 사건이 있었고, ·러라는 두 권위주의 국가는 미국이 전후 70여년간 만들고 지켜온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에 대한 위협이 되려 하고 있었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단합’(unity)이었다. 바이든은 취임 연설에서 정치적 극단주의, 백인 우월주의, 국내적 테러리즘에 맞서려면 민주주의에서 가장 얻기 힘든 것인 단합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이는 동맹을 향한 간절한 호소이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4년 동안 내세웠던 미국 우선주의로 인해 미국의 동맹 관계는 크게 훼손돼 있었다. 바이든은 동맹 관계를 수복하고 다시 한번 세계에 관여해 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미국의 분열은 확대됐고, 어렵게 강화한 동맹 네트워크역시 동유럽과 중동에서 터진 두 개의 전쟁을 효과적으로 틀어막을 만큼 강력하진 못했다. 그리고 지난 5일 치러진 미 대선에서 트럼프는 이론의 여지 없는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냉정하게 살펴볼 때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내린 듯 보인다. 미국은 앞으로 로널드 레이건이 자랑스레 외쳤던 빛나는 언덕 위의 도시’(the shining city on a hill)가 아니게 됐다. 트럼프의 미국은 예외주의의 화려한 깃발을 높이 쳐든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국가에서 눈앞의 경제적 이익에 매몰된 짐스러운 국가로 변할 것임이 확실해졌다. 미국이 제공해온 경제·안보 질서 속에서 적당히 무임승차해온 한국은 건국 이후 가장 엄중하고 구조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된 셈이다.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할까. 두 갈래 길이 열려 있다. ‘가치를 공유하는 주요 우방인 일본(4.0%)·유럽연합(EU·17.5%)·영국(3.2%)·캐나다(2.0%)·오스트레일리아(1.7%)와 힘을 합쳐 버티는 길이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4월 세계경제전망 자료에 따르면, 이들 국가에 한국(1.6%)을 합쳐도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법의 지배, 자유무역 등을 내세우며 한목소리를 낼 순 있겠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가장 우려되는 문제는 안보이고, 그중에서도 대만이다. 트럼프는 지난달 18일치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만약 대만 유사사태가 발생하면 중국에 150~20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답했다. 대만은 중국이 핵심적 이익 가운데서도 핵심으로 여기는 문제다. 200%의 관세로 중국을 억제할 수 있을까. 시진핑 국가주석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이를 자신의 현상변경 시도에 대한 고 사인으로 여길 수 있다. 대만이 뚫리면 서태평양에서 미 패권은 타격을 입게 된다. 한반도 문제는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미국이 자신을 겨냥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문제만 해결하며 북한과 타협하면, ·일은 장기적으로 자체 핵보유의 길로 나아가게 될지 모른다.

 

두번째는 중·러와 관계를 강화하는 헤징 외교에 나서는 길이다. 이를 통해 외교적 선택지를 넓힐 순 있겠지만, 오랜 동맹인 미국을 제치는 진정한 의미의 중립 외교를 할 순 없다. 한국은 거대한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단층선 위에 있다. 듣기 괴로운 소리지만, 고노에 아쓰마로 일본 귀족원 의장은 1900109일 조선 중립화 교섭을 위해 도쿄에 온 조병식 주일 공사에게 국방의 엄혹함으로 보자면, (귀국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해 있다. 국방에는 다수의 병력·무기가 필요하고, 연안 방비에는 포대와 군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천하에 이(중립화)보다 어리석은(迂闊) ()은 없다고 나무란 것이다. 오랜 중립국인 스웨덴·핀란드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했고, 핵을 쥔 북한마저 러시아와 동맹 관계를 복원했다. 동맹과 우방의 도움 없이 우리 혼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갈 순 없다.

 

결국, 묘수는 없다. 괴팍하게 변해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버틸 것은 버텨가며 상당 기간 지금 이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나라가 많이 힘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해 있는 이 더러운 위기의 실체이다.

길윤형 | 논설위원 |한겨레 2024.11.26.

 

나라 망하게 하는 '육사신' 포진한 용산, 윤 대통령이 문제다

간신, 주술사, 아사리판 국정쿼바디스 대한민국

간신(奸臣)이 있었다. 기원전인 중국 전한 말기 유향(劉向)2000년간 나라를 이끈 군주들을 보좌한 신하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 <설원(說苑)>에서 여섯 종류의 해로운 신하, 육사신(六邪臣)을 제시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간사한 신하, 간신이다. 마음이 바르지 않고, 원칙보다는 사리사욕을 좇아 나쁜 꾀를 부리는 신하다.

 

그런데 지금은 잊혀진 다른 '해로운 신하' 유형도 유념해야 한다. 무능하면서도 자리만 지키며 녹봉만 챙기려는 구신(具臣), 왕에게 아첨하는 '예스맨' 유신(諛臣), 악한 술수와 중상모략에 능한 참신(讒臣), 군주에게 불충하거나 반역하는 적신(賊臣),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망국신(亡國臣) 등이 그것이다. 이 육사신의 반대편 저 끝에 충신(忠臣)이 있을 것이다.

 

라스푸틴이 있었다. 러시아제국 말기 떠돌이 요승이었던 그는 화려한 언변과 예지력으로 귀족, 특히 귀부인들의 관심을 얻는다. 니콜라이 2세 황제 부부의 신임을 얻은 그가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자 황족과 신하들은 "그를 멀리하라"고 충고했지만 특히 황후의 절대적 신뢰 속에 폭정을 휘두르며 사리사욕을 챙겼다. 결국 러시아제국은 멸망했고 황제 가족은 물론 시녀들까지 총살된다. 이후 내전에 빠진 러시아에서는 5년간 1000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대통령실의 품격이 곧 나라의 격인데...

대통령실(과거 청와대)에서 일하려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전문성, 균형감각, 충성심이다. 이론과 현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물론 문제 해결 능력을 겸비한 전문성은 필수다. 정권의 지지 세력이나 특정 이해관계에 치우치지 않고 국정을 우선시하는 균형감은 당연하다. 대통령은 물론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심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 대통령실 구성원들의 면모는 매우 이례적이다. 이렇다 할 전문성이 보이지 않는 사람부터 여사를 '작은 엄마'라 부르는 행정관, 펀드매니저였다가 코바나콘텐츠에서 도슨트를 했던 비서관, '김건희 황제 관람'을 기획한 비서관을 위시해 언론 경력이 전부인 자들이다. '7상시,' '8상시'로 불리는 이들이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을 제치고 여사에 직보하며 국정을 주무른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심지어 비서실장의 공식적 발언조차 가볍게 뒤집어 언론에 흘린다. 한마디로 아사리판이다.

 

이들이 간신이면서 구신이고, 유신이자, 참신이다. 비서관이라는 자가 '따까리,' '맛탱이' 등 공직자가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현란하게 구사하며 자신이 섬기는 대통령을 두고 '지가,' '저게,' '꼴통'이라는 막말로 능멸하니 이게 바로 적신이고, 이들이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망국신이 될 터이다. 지금 대통령실의 풍경이다.

 

육사신의 나라

특히 문제는 간신들의 득세가 대통령실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사의 주가조작 사건을 무혐의 처리한 검찰, 방송장악 외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방송통신위원회, 여사 명품백 수수 사건을 종결처리한 권익위원회, 그 명품백을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조만한 백"으로 호명한 덕에 KBS 사장 자리에 오른 앵커, 자신의 병사들을 지키기보다 자리 챙기기에 급급한 해병대 똥별들. 육사신들의 전횡에 권익위 간부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했다.

 

보다 근본적 문제가 있다. 바로 윤석열 대통령이다. 현명한 군주는 충신과 간신을 쉬 구별한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군주는 직언에 언짢아하고 충신을 멀리하는 반면 아첨에 기뻐하고 간신을 가까이하는 법이다. 그런데 국민의힘 소속 김근식 교수는 "간신은 끝까지 충신인 척" 한다고 지적한다. 윤 대통령은 충신과 간신을 구분할 수 있을까?

 

첩첩산중, 정작 미치고 팔짝 뛸 문제는 김건희 여사다. <한겨레21>"여사가 공적인 결정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는 명리학자나 무속인이 분야별로 7~8명 더 있는 것으로 안다"는 한 명리학자의 증언을 전했다. "김 여사가 중요한 자리(인사)를 고려할 때 사주를 즐겨 본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대통령실 비서관 출신의 증언도 덧붙였다. "여사가 대통령실 직원을 뽑을 때 이력서를 봤는데, 이력서에는 사진과 생년월일이 적혀 있어서 무당을 통한 사주를 본다는 말도 있었다"는 것이다.

 

'주술 국가'의 등장

일설에 의하면 여사가 조언을 구하는 무속인이 분야별로 7~8명이 더 있다는데 풍수, 관상, 사주, 미래 예측 등 '주술의 분야별'이라고 한다. 궁금하다. 설마 교육, 노동, 연금, 의료 등 '국정의 분야별'은 아니겠지? 아니, 그런데 대통령실 인사를 무당 통한 사주로 결정한다지 않나. 그렇다면 혹시 장관도 그렇게 뽑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지난 대선 당시 그 역술인에게 "이준석(당시 당대표)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한다. 대선도 주술에 의존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혹시 대통령 취임 이후 여당 문제도? 그거 다 국정 아닌가? 육사신만으로도 나라가 어지러운데 이젠 무속인들까지? 대한민국이 언제 주술 국가가 되었나. , 아닌가? 그게 차라리 '김건희 라인'보다는 나을 수도 있는 건가?

 

'쿼바디스 도미네.' 베드로가 예수에게 한 말이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지금 이 나라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정희준 문화연대 집행위원 | 프레시안 2024.11.26.

 

검찰 독재를 생각하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과 위증교사에 대한 1심 판결의 결과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흡사 두 동강이 난 것 같은 느낌을 멀리서도 받는다. 정적을 완전히 제거하는 사법살인이라는 비판부터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날카롭게 맞서고 있다. 정치의 하수인이 된 사법부를 질타하고, 정치로부터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사법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지만, 판결의 결과에 따라 희비가 갈리기도 한다.

 

법과 정치의 긴장관계를 보여주는 이런 모습은 사실 어느 사회건 존재한다. 법은 시민의 행위를 규정하는 규범으로서 이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서술되어야 하고, 정의와 효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몽테스키외는 법은 판결로 말한다고 해서 판결은 법의 입’(la bouche des lois)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내린 판결이 법의 본성에 어긋났다고 인정하는 판사는 거의 없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정치인들도 그들의 정치행위의 자유를 제한하는 판결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떻든 법과 정치의 상호관계가 한국 사회에서 현재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이번 두 판결은 보여주었다. 물론 1959년 진보당 당수 조봉암 사형사건이나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처럼 극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차기 대권 경쟁에서 가장 강력한 야당 후보가 피선거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는 판결이 일단 나왔기 때문에 많은 파문을 낳았다.

 

무엇보다 검찰의 기소에 이르는 과정과 판결의 내용 그리고 양형의 기준이 우선 논란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법적 판단이 나올 수 있는 정치사회적 환경에 대한 반성과 함께 애송이 판검사에 의해 막중한 국사가 어이없이 휘둘리고 있다는 비난이나 한탄보다는 법조인의 양성 과정이 안고 있는 문제에 관해서도 관심을 돌려야 한다.

 

근대 행정법의 창시자인 프리츠 플라이너(1867~1937)민주주의에서 헌법과 법의 마지막 보루는 재판관이다. 그들에 대한 믿음 위에 법적 안정성에 대한 감정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이번 판결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논거로 곧 이해되어선 안 된다. 신이 아닌 인간인 판사가 오판을 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민주적인 법치국가의 테두리 안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와 법 그리고 민주·법치주의

그렇다면 군부 독재라는 그동안 익숙해진 단어 대신에 왜 검찰 독재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 나돌고 있는가. 미국에서 사회적 소수자 보호를 위한 적극적 판결을 내렸던 연방대법원을 향해 보수적 두뇌집단인 헤리티지 재단의 이사장이었던 에드윈 퓰러는 사법 독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칠레의 피노체, 스페인의 프랑코, 포르투갈의 살라자르 독재체제 아래서 절대적 권력의 하수인으로 정치적 반대자들을 고문하고 불법 처형을 정당화했던 검찰을 겨냥해서 1970년대에는 검찰 독재’(prosecutorial dictatorship)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이와 달리 1990년대 말 이탈리아에서는 검찰공화국’(Repubblica dei magistrati)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는데 당시 부패한 정치권을 대상으로 해서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를 비롯한 검사팀 깨끗한 손’(Mani Pulite)이 사정의 칼날을 들이대어 부패한 정치인들을 구속했다. 이를 계기로 정치의 중심축이 사법기관 쪽으로 기울이자 이를 비판하는 쪽에서 검찰공화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지금 한국 상황을 검찰공화국이라고 부를 때는 이런 맥락의 차이에 주의해야 한다. 또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야기되는 검찰 독재의 의미도 위에서 지적한 칠레, 스페인, 포르투갈의 경우와 다르다.

 

어떻든 사법 독재와 검찰 독재는 학술 용어로서 아직 정착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법, 검찰 그리고 독재라는 개념이 조합되었기에 이를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다. 검찰 독재는 검찰이 특정 정치세력이나 인물에 대하여 과도한 수사와 기소를 통해 정치에 개입해서 법의 공정과 중립을 훼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협하는 상태라고 우선 간단히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의에는 정치와 법이 어떠한 관계체계를 맺을 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지켜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 함께 들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사실 간단치 않다. 이와 관련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 나치 독재와 냉전체제를 거쳐 통일을 이루었던 독일에 있었던 이 문제와 관련된 많은 논의를 한국 사회의 맥락 안에서 한번 검토해보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치독일의 최고 공법학자 카를 슈미트(1888~1985)<정치적인 것의 개념>(1927)에서 정치적 행위와 동기가 시작하는 특별한 구분은 동지와 적의 구별이다. () 정치적인 사고와 정치적 본능은 이론적으로나 실제로 동지와 적을 구별하는 능력으로 입증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근대 국가가 지닌 기능의 비밀을 어떤 당위적인 요구에서가 아니라 국가형태와 관련 없이 근본적인 권력유지를 위해서는 - 반드시 소멸시켜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 적이 누군가를 확인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마디로 정치는 법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법치주의와 의회주의를 파괴한 나치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던 한스 켈젠(1881~1973)은 법과 정치의 영역은 서로 엄격히 구별되어야 하며, 기본 규범으로 시작해서 위계질서를 지닌 법의 자율성이 정치나 도덕에 의해 제약될 수 없다고 <법의 순수이론>(1934)에서 주장했다. 나치독일의 패망 후에 독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의 법이론은 1949년에 제정된 서독의 기본법이 강조하는 의회주의에 스며들었다.

 

검찰 독재 청산이 그리 힘든 일인가

그러나 그의 이론은 민주 국가에서 당연히 작동하게 마련인 법과 정치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약점을 지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정치는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법을 이용하고 법은 동시에 이 변화의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호 견제와 균형이 깨지면서 이 둘 사이에 주종관계가 생겨 결국 법이 정치의 시녀가 되고, 반대로 정치가 법의 테두리 안에 갇혀서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정치가 갖는 역동성을 잃게 된다.

 

1966년 기민당과 사민당이 전후 처음으로 대연정을 수립, 사실상 비판적인 야당은 사라졌다. 이 비판의 역할은 ‘68혁명을 주도했던 원외 반대세력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위기는 당연히 정치와 법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했으며 기존의 법학적 접근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사회 현실 속에서 이 관계를 해명하려는 철학과 사회학의 시도가 있었다. ‘비판이론체계이론이 이런 흐름의 대표적인 예였다.

 

비판이론의 대표적 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1929~)는 기본적으로 법은 민주적 절차의 안정성과 구속력을 보증해야 하고, 정치는 법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정당화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법과 정치의 상호 연결성을 소통적인 합리성과 접목한 그는 법과 정치에서 나온 결정은 자유스럽고 합리적이며 포용적인 담론의 결과물인 경우에만 정당하다고 본다.

 

하버마스가 심의(審議) 민주주의의 시각에서 주장하는 규범적인 법과 정치의 이해와 다르게 체계이론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1928~1998)은 법과 도덕은 사회 체계 안에서 부분 체계로서, 법은 합법인가 불법인가, 정치는 권력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양가(兩價)의 코드에 따라 각각 달리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입법과 이의 시행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 둘은 구조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었다고 보는 루만의 기능주의적 시각은 위에서 언급한 법으로부터 정치를 완전히 분리한 켈젠의 법실증주의적인 입장과 구별된다. 또 분석적이고 서술적인 그의 접근 방식은 규범적이고 비판적인 하버마스의 그것과 달라서 두 학자 사이에 많은 논쟁도 있었다.

 

법과 정치의 관계에 관한 독일학계의 이러저러한 논쟁을 나름대로 정리하는데 슈미트의 결정주의적 법과 정치의 이해가 깊이 스며들어 있는 1972년 유신헌법의 기초 작업에 참여했던, 독일에서 유학했던 법학도들이 문뜩 떠올랐다. 그때로부터 반세기가 지났는데 여전히 검찰 독재라는 말이 나도는 한국의 현실을 뒤돌아보게 된다. 20년 전 나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법과 정치의 관계에서 있을 수 있는 극히 나쁜 형태의 조합의 하나인 검찰 독재의 청산이 그렇게도 힘든 일인가. 다시 묻게 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 경향 2024.11.26.

 

 

종이교과서로 회귀하는 북유럽

20253월 우리나라에서 인공지능(AI) 디지털교과서가 초등 3·4학년과 중·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도입될 예정이라 한다. AI 기반 교과서가 개별 학생의 학습 데이터를 수집해 학생의 수준과 이해도를 측정한 뒤, 그에 맞는 학습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교육부는 AI 디지털교과서를 통해 맞춤형 교육을 제공해 학생들의 학습능률을 높일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다수는 디지털기기 사용 증가로 이미 약화된 학생들의 집중력과 통제력, 문해력이 더 저하될 거라 염려한다.

 

한편 교실의 디지털화에 적극적이던 북유럽 국가들은 종이교과서로 회귀하고 있다.

스웨덴의 학교장관(Minister of School) 로타 에드홀름은 2023년 교육환경의 과도한 디지털화가 교육현장을 망치고 있다며 태블릿, 디지털 학습 등에 의존해오던 교육을 인쇄된 책, 독서, 손글씨 연습 등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방식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같은 해 8월 유치원 커리큘럼에서 디지털기기 활용을 의무화한 교육청의 계획을 철회하고, 6세 미만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학습을 완전히 중단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밖에도 2024년 초등학교 3학년 국가시험을 아날로그화하고, 학교 도서관 접근성 강화를 위한 투자를 늘려 종이책 사용을 권장할 것이라 발표했다. 또한 종이교과서로의 완전 전환을 위해 내년까지 총 75500만크로나(740억원)를 교과서 보급에 투입한다. 스웨덴 교육부는 디지털교과서가 도입된 2016~2021년 스웨덴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의 읽기능력이 크게 낮아진 것을 우려하며, 이런 결과가 전반적 학습능력 저하로 이어졌을 것이라 본다. 스웨덴 교육부의 새로운 정책을 뒷받침하는 연구들도 이어졌는데 스웨덴의 의학 연구기관인 카롤린스카연구소는 디지털 도구가 학습을 방해한다는 명확한 과학적 증거가 있다학생들이 종이교과서와 교사의 전문성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0여년간 교실 내 디지털기기 사용을 장려해온 핀란드 역시 종이책으로의 회귀를 시도하고 있다. 지금껏 핀란드의 많은 학교에선 11세부터 모든 학생들에게 무료로 노트북을 제공하는 등 교육의 디지털화에 적극적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디지털기기 과사용으로 인한 산만함·시력 저하·불안 증가·학업성과 저하가 눈에 띄게 늘자 최근 리히마키 등 몇몇 지자체를 중심으로 2024년 학기 초부터 종이책과 펜으로 돌아가는 실험을 시작했다. 리히마키 지자체와 협력해 학생들의 디지털기기 학습 영향을 연구 중인 임상신경심리학자 민나 펠토푸로는 과도한 디지털기기 사용이 신체적·정신적 위험을 동반하고, 뇌에 과부하를 안기는 멀티태스킹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학생들에게 끼칠 장기적 악영향을 우려했다.

 

우리나라 교육부는 AI 디지털교과서 도입이 교육계의 혁명적 전환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교육현장의 디지털화, AI 도입의 영역에서 낙관과 비관을 주장하는 실증연구가 나오고 있고, 종이책으로 회귀하는 국가들도 나오는 상황에서 교육부가 AI 디지털교과서의 효과성을 검증하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변수를 고려했는지 의문이 든다.

송지원 영국 에든버러대 교수 | 경향 2024.11.26.

 

시국선언을 다시 읽으며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겨우 절반 남짓 지났을 뿐인데, 전국의 대학에서 시국선언이 쏟아지고 있다. “요즘은 더 이상 캠퍼스에 대자보가 붙지 않는다며 한탄하던 때가 엊그제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학생들이 실명으로 대자보를 쓰고, 이어서 다른 학생들이 포스트잇으로 답글을 남긴다. 한겨레 집계로 지난 21일 기준 전국 30개 대학·지역의 3400여명 교수·연구자가 시국선언에 참여했다. 이후로도 시국선언과 학생들의 대자보는 계속 번져가고 있다.

 

물론 대학가의 시국선언이 대단히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교수들의 발언이라고 해서 더 무게감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누구나 사회 정의를 위해 자기의 몫을 수행해야 할 책무가 있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그 부름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다른 경로로 부패와 부정의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생존을 걸고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이 항상 사회 변혁의 최일선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한때는 상징적 역할을 넘어 실질적 기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 변혁을 추동하는 담론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되짚어보면, 요즘의 한국에서는 대학의 역할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남아 있기를 선택했다면, 양심 있는 지식인들은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해야한다. 단순히 교수들은 특권층이므로 다른 이들보다 더욱 커다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해묵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제도권 학계에 남아 있기를 선택했다면, 즉 지식-권력 생산의 심장부에 남아 있다면, 바로 그 자리야말로 가려진 진실을 폭로하고 설명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도권 학계라는 지식-권력 생산 체계에 들어찬 모순과 부조리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 그리고 압력을 가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내부에서 끊임없이 싸우는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학이 어떻게 다른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따라 운영되는지, 어떻게 한 사회의 지배적·억압적 사유와 규범을 재생산하는지, 그리고 교육의 장 속에 어떻게 폭력과 차별이 개입하는지 외면하지 말아야 할 책무는 바로 대학에 속한 지식인들에게 있다. 다른 모든 조직이 그렇듯이 대학은 차별과 불공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때로는 학문의 이름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확산시키기도 한다. 고통받는 동료와 학생을 위한 증인이 되는 일, 비정규직 강사들과 연대하는 일, 시장 논리에 병들어가는 대학을 구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는 일, 학문적 발견이 전쟁과 폭력에 도용되지 않도록 힘쓰는 일. 이렇게 지식-권력 생산 체계의 모순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일도 교수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권력 앞에서 진실 말하기권력의 심장부에서 진실 말하기로 고쳐 써야 할 것이다. 심장부에서 솟구치는 비판은 그만큼 강력한 물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은 이런 글을 쓰고 있지만, 실은 이를 진정으로 깨닫고 실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지식 생산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능력주의 논리를 당연하게 여겼고, ‘조직 연구자라는 직업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발견을 존속시키는지 직시하지 못했다. 이는 결국 일종의 정상성을 만들어내는 폭력과 배제의 시스템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선구자들을 따라 권력의 심장부를 향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지식인의 일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이듯이, 내가 속한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도 나의 책무가 아닐까.

 

그러므로 시국선언은 지식인으로서 낼 수 있는 최소한의 목소리다.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지 않으려는 지식인들이 나라의 위기와 퇴행을 걱정하며 목소리를 냈다면, 마찬가지로 이들은 학계의 위기와 퇴행을 근심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특권에 굴복한 이들이 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미처 몰랐다고 발뺌할 수 없도록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더 낫게 만드는 길의 출발점이다. 아마도 그런 변화의 길을 내는 사람들은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고 먼저 고백한 양심적인 지식인들 중에서 나타나지 않을까?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한겨레 2024.11.27.

 

 

우크라이나 전쟁발 가짜뉴스에 돈 내야 할 한국

지난 21일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언론 브리핑 도중 휴대전화를 받았다. “탄도미사일 공격 보도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마라라는 상대의 말이 마이크로 흘러나와 공개됐다. 앞서, 이날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공격했다고 발표했다. 전세계 언론들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실전에 사용된 것은 처음이라며, 러시아가 미국이나 유럽을 위협한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자하로바의 통화 내용은 러시아가 이를 확인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다음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가 쏜 것은 신형 중거리 미사일이라고 직접 밝혀, 전세계 언론을 머쓱하게 했다. 우크라이나의 대통령까지 나선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주장 직후에 서방의 한 당국자는 과장된 주장이라고 확인했다. 일부 언론 보도에서 이 당국자 확인은 취급되기는 했으나, 비중은 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전세계 언론은 우크라이나발 가짜뉴스에 자진해서 낚인 꼴이 됐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놀아나는 언론에 뒤통수를 친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가짜뉴스가 홍수다. 특히, 북한군 파병 논란 이후 더욱 자심하다.

지난 24아르비시(RBC) 우크라이나라는 언론 매체는 군사 전문 매체라는 글로벌 디펜스 코퍼레이션을 인용해, 우크라이나가 지난 20일 영국의 스톰 섀도 미사일로 쿠르스크 지역을 공격해 북한군 500명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미사일 개발 이후 아마 최대 전과가 분명할 것이다.

 

군사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보도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알 것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그 미사일이 러시아 방공망을 뚫고, 북한군 500명이 한데 몰린 곳을 타격해야 한다. 혹은 수백발의 미사일이 방공망을 뚫고 가서는 북한군 병사들이 있는 곳들을 족집게처럼 찾아서 타격해야 한다. 한국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말미에 근거나 정보 출처는 없다고 덧붙이기는 했다.

 

북한군이 러시아 영토인 쿠르스크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지역인 하르키우와 마리우폴까지 모습을 드러냈다는 시엔엔(CNN) 보도를 한국 언론들은 더 크게 받아 적었다.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당국이 나서 이 보도를 부인했다.

 

사브리나 싱 미국 국방부 부대변인은 25일 북한군 500명 사망이나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영토 파병을 모두 확인할 수 없다고 사실상 부인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군에 대해 우리가 앞서 그들이 그 지역(쿠르스크)에 있고 확실히 우크라이나군과 교전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고만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북한군은 교전할 준비상태일 뿐이고, 아직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도 23그들(쿠르스크에 주둔 중인 것으로 믿어지는 약 1만명의 북한 병사)이 훈련받고, 러시아 편제로 통합되는 방식을 근거로 하여, 그들이 곧 전투에 관여할 것으로 완전히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군이 현재까지 전투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는 뚜렷한 보고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럼 도대체, 북한군이 쿠르스크 전투에 참여했다는 지난 한달 동안의 보도는 뭐란 말인가? 북한군은 유령 군대인가? 한국 국가정보원은 지난 20일에도 국회에서 북한군 11천명이 쿠르스크에서 러시아 공수여단과 해병대에 배속됐고, 일부는 전투에 참여했다고 보고했다. 국정원은 24일에도 북한군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구체적 첩보가 있어 면밀히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국정원과 서방 당국자들에 따르면, 북한군은 지난 10월 초에 파병됐고, 11월 들어서 쿠르스크에 배치됐다. 그동안 온갖 가짜뉴스가 난무했다. 전투에서 부상당한 북한 병사가 푸틴을 욕하는 동영상, 쿠르스크 전선에서 펄럭이는 북한 인공기, 도주하는 러시아 탱크를 따라가는 북한 병사의 동영상, 북한군이 먹는 개고기 통조림과 컵라면 등.

 

러시아와 북한은 파병을 구체적으로 확인 않고, 양국이 최근 비준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조약에 따라 필요한 협력을 할 것이라며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다. 마치 그 가짜뉴스들을 즐기는 듯하다. 하지만, 그 가짜뉴스에 대한 비용은 다른 곳이 치른다. 한국이다.

 

루스템 우메로우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의 특사단이 27일 한국을 찾았다. 한국에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방한이다. 한국이 그동안 우크라이나발 온갖 북한군 파병 가짜뉴스를 즐긴 비용 청구라 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차기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고 하는데,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해야 하는 호구가 되고 있다.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한겨레 2024.11.27.

 

낡은' 무기로는 할 게 없다? 틈새를 열려는 노력은 여전하다

"최근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한 노동자 투쟁"

기후변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인공지능 개발 역시 가속도가 붙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기후변화든 인공지능이든 모두 일자리 축소로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이미 곳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고, 적지 않은 이들이 벌써부터 암울한 미래를 기정사실화하며 패배의 분위기에 젖어든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 겪는 변화 앞에서 노동조합 같은 '낡은' 무기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선고에 감히 맞서는 목소리를 듣기 힘든 형편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의 전부는 아니다. 이 그림에서 벗어나는 현실은 없다고 철석같이 믿게 하려는 체제 측의 온갖 전략에도 불구하고 틈들은 있다. 아니, 지금도 곳곳에서 틈새를 열려는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노력들은 '틈이 있음'을 알아봐주는 눈길이 쏠리는 것만으로도 전에 없던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틈을 벌리려고 분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같은 시도에 나선 동시대인의 모든 움직임을 빠뜨리지 않고 주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지금 이탈리아에 바로 그런 이들이 있다. 벌써 2년 전에 네오파시즘을 계승한 극우 포퓰리스트 정부가 들어선 나라에서, 드라마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며 새로운 길을 찾아 과감히 발을 뗀 이들이 있다. 대규모 감원에 맞서 장기 투쟁을 이어가면서 노동자가 주도하는 생태 전환의 생생한 사례를 만들어내려 하는 GKN 노동자들이다.

 

노동 탄압용 대량해고에 맞서 공장을 점거하다

무대는 피렌체 시에서 20km 떨어진 소도시 캄피 비센조(Campi Bisenzio). 이탈리아 중부의 다른 많은 소도시처럼 이곳에서도 대다수 일터는 종업원이 5인을 넘지 않는 작은 사업장이다. 하지만 저 유명한 자동차회사 피아트(FIAT)가 오래 전에 설립한 'GKN 드라이브라인' 공장은 예외다. 이 공장에서는 수백 명의 노동자가 액슬 샤프트[차축] 같은 자동차 부품을 생산해왔다.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피아트가 1994년에 공장을 영국 업체 GKN에 매각하고 2018년에는 다시 GKN이 기업구조조정 전문 투자기업 멜로즈(Melrose)에 인수되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묵묵히 차량 부품을 제작했다.

 

그러나 202179, 이 일상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됐다. 이날 GKN의 캄피 비센조 공장 노동자들은 이메일로 대규모 감원 계획을 통보 받았다. 구조조정 대상에는 422명의 직접고용 노동자만이 아니라 80명의 하청 노동자(청소, 경비, 식당 등)도 포함되었다. 구조조정 사유는 전기차 생산으로 전환하고 공정을 디지털화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생산성 문제"가 확인됐고 이에 따라 유휴인력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였다. 더구나 구조조정 계획 발표 시점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2020년대의 첫 두 해에 이탈리아 역시 팬데믹의 격랑에 휩쓸렸다. 당시 연립정부를 이끌던 '오성운동(M5S)' 소속 주세페 콘테 총리는 비상조치 중 하나로 해고 중지령을 내렸다. 팬데믹이 끝날 때까지 정리해고를 일체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오성운동'은 이념, 정책이 모호한 포퓰리즘 정당이었지만 콘테는 중도좌파 성향이 뚜렷한 인물이었고, 이후 콘테가 주도하는 '오성운동'은 점차 좌파로 기울었다.

 

한데 비상시기에 단행한 이 제한적인 조치마저 자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레로 다가왔다. 해고 중지령은 재계와 주류 언론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됐다. 그리고 마침내 2021년 벽두에 연립정부가 무너지고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 마리오 드라기를 총리로 내세운 테크노크라트 정부가 들어섰다. 드라기 정부는 해고 중지령을 연장하길 거부했고, 이에 따라 다시 정리해고를 할 수 있게 되는 시점이 202171일이었다. GKN 사측은 해고 중지령이 시효를 마감하기만 기다리다 전광석화처럼 감원 계획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GKN 노동자들은 대량 해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만 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 노동법에 따르면, 기업은 감원 계획을 발표하고 75일이 지난 뒤에 이를 실행할 수 있다. 50일 뒤에 정리해고를 실행할 수 있게 되어 있는 한국에 비해서는 조금이나마 더 여유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GKN 노동자들은 단 하루도 기다리지 않았다. 회사로부터 이메일을 받은 그날, 400여 명의 노동자가 20여 명의 경비업체 용역들을 뿌리치고 공장을 점거했다.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은 '영구 총회'를 선포했다. 이것은 한국의 1987년 노동자대투쟁만큼이나 거대한 대중파업운동이었던 1969'뜨거운 가을' 이후 이탈리아 노동운동에 자리 잡은 투쟁 전술이다. 사업장 안에서 노동자 총회를 개최할 수 있다는 노동법(전 세계에서 가장 친노동적이라는 이 노사관계법 자체가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노동자투쟁의 성과다) 조항에 따라 '무기한 총회'라는 이름으로 점거파업을 이어가는 것이다. 동시에 GKN 노동자들은 사측의 감원 계획을 '부당 해고'로 법원에 제소했다.

 

GKN 노동자들이 이렇게 발 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공장별 단결모임(Factory Collective, 이하 '단결모임')'이라는 조직을 이미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에 사측이 주말 근무 방침을 제시하자 GKN 노동자들은 치열한 내부 논쟁을 거친 뒤에 강경반대파를 중심으로 교섭대표를 교체하고 별도로 단결모임을 결성했다. 이탈리아 제1노총(CGIL) 산하 금속노조(FIOM)를 통해 사측과 교섭하되 기업 내 조직인 단결모임을 따로 만들어 사측에 맞서는 현장 내 대항력을 확보한 것이다.

 

이후 GKN 노동자들은 단결모임을 통해 투쟁의 기풍을 다졌다. 주말 근무 방침을 철회시킨 것은 물론이고 일부 하청 직무를 직접고용으로 전환시키기도 했다. 또한 공장 담벼락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연대에도 앞장섰다. 특히 노동법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으며 대개 이주민으로 이뤄진 영세 섬유업체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어쩌면 GKN 경영진을 좌우하는 멜로즈 자본이 굳이 캄피 비센조 공장에 해고 공세를 퍼부은 진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적자를 내기는커녕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지원금까지 받아 값비싼 새 기계들을 들여놓은 공장을 놀려둘 만큼 소중한 그 이유란 십중팔구, 지난 한 세대 동안 후퇴를 거듭해온 이탈리아 노동계급에게 '안 좋은' 선례가 되고 있는 GKN 노동자들을 무릎 꿇리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GKN의 감원 계획이 "노동조합을 공격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부당 해고'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이를 확인해준다.

 

"아래로부터의 재산업화"를 위한 녹색 전환 계획

그날 이후, 캄피 비센조의 GKN 공장에서는 더 이상 액슬 샤프트 제품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법원 판결로 시간을 번 노동자들은 차가운 기계 옆에서 다른 일들로 분주해졌다. 우선 이들은 '노동자 맥주'라는 이름으로 수제 맥주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지극히 전통적인 생산물이었고, 여러 모로 액슬 샤프트보다는 지구에 덜 해로운 제품이었다. 또한 이는 점거파업 중에 공장을 춤과 음악, 빵과 포도주로 가득 채웠던 1936년 여름 프랑스 노동자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장면이기도 했다.

 

공장 문은 닫히기는커녕 오히려 전보다 더 활짝 열렸다. 단결모임은 자신들의 투쟁에 '인소르자모(Insorgiamo, "봉기하자!")'라는 이름을 붙였고, '인소르자모' 운동에 공장 담벼락 바깥의 수많은 민중을 초대했다. 피렌체 인근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곳곳에서 투쟁의 대의에 공감하는 이들이 GKN 공장을 방문했다. '순례' 행렬이 이어졌고, 대규모 연대 시위도 수시로 개최됐다. 피렌체 시가 나치 독일 점령군에게서 해방된 811일에는 파업 지지 시위대가 1944년 당시 봉기의 시작을 알렸던 베키오궁의 종을 다시금 울렸다.

 

그러고 나서 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에 GKN은 캄피 비센조 공장을 멜로즈의 기업 인수 자문역이었던 인물이 이끄는 업체에 매각했고, 새 소유주는 공장 재가동을 위한 노사협상에 진지한 경영 계획이라고 하나도 내놓지 못하면서 정부 지원금만 챙기려 들었다. 노동자들은 법원으로부터 한 번 더 해고 집행 유예 판결을 받아내 어찌어찌 이 긴 시간을 버텨냈다. 100명이 훨씬 넘는 동지들이 생계 문제 탓에 대열에서 이탈해야 했지만 말이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장면들도 있다. 이탈리아 특유의 노동법 덕분에 점거파업이 지금까지 3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또 다른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3년의 시간 동안 단결모임은 원직 복직에만 모든 것을 걸지는 않았다. 애초에 GKN 사측이 내세운 정리해고 사유는 "전기차 생산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유휴인력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생산의 '전환'이 근거였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 그 결론을 뒤집길 바랐다. "대량해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다른' 전환은 있을 수 없는가? 있다면, 그 구체적인 방향은 무엇인가?"

 

실은 40여 년 전에도 같은 고민을 한 노동자들이 있었다. GKN과 마찬가지로 영국 업체이고 생산품도 역시 자동차, 항공기 부품이었던 '루카스 에어로스페이스'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도 1970년대 중반에 회사로부터 대량해고 계획을 통보 받았고, 이에 맞서려 했다. 루카스 노동자들은 판로가 막힌 기존 제품 대신 대안적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고용을 지키려 했다. 그래서 현장 노동자들의 지혜를 짜 모아 '루카스 플랜'이라는 대안생산계획을 수립했다. 이들이 제안한 대안 제품은 오늘날 누구나 필수품이라 인정하는 태양광 패널, 풍력 발전 터빈 같은 것들이었다.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 정부에 의해 이 계획은 결국 묵살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루카스 노동자들의 꿈이 헛되이 사라져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한 세대 뒤에 GKN 캄피 비센조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 꿈은 되살아나고 있다. 점거파업이 시작되고 반 년 정도 지난 202112월에 단결모임은 대학의 연구자들과 함께 과학기술위원회를 설립해 생산품목 전환 계획을 짰다. 초기에 타진한 것은 개인 승용차가 아닌 대중교통용 전기차와 그린 수소 생산용 기계를 제작하는 방안이었다. 로봇 생산 연구기관이나 직업훈련기관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검토됐다. 이런 방안들은 GKN 공장을 국유화하거나 최소한 공공이 상당한 지분을 소유하는 기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전제했다.

 

하지만 정치 상황이 너무 나빠졌다. 20229월 총선으로 조르자 멜로니 총리의 극우 연립정부가 들어섰다. 국유화나 공공 투자의 꿈은 이제 접어야 했다. 그렇다고 대안 기업으로 나아가려는 희망 자체를 접을 수는 없었다. 단결모임은 "아래로부터의 재산업화"라는 표어 아래 과학기술위원회를 재편하고 좀 더 실현 가능성이 높은 품목에 주목했다.

 

그 첫 번째는 화물 운송용 자전거(cargo bike). 일찍이 이반 일리치가 공생공락(conviviality)을 실현할 교통수단으로 주목한 자전거에 개인 사업자나 일반 가정을 위한 물품 운송 기능을 더한 것이다. GKN 노동자들은 기존 설비로만으로도 곧바로 생산에 돌입할 수 있는 화물 운송용 자전거의 시제품을 두 대 선보였고, 이 모델은 자전거 전문 저널에 소개돼 호평을 받았다. 이 자전거의 생산에 착수할 경우에 고용될 수 있는 초기 인원은 110-120명으로 평가된다.

 

두 번째는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다. 이를 위해 단결모임은 202212월부터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스타트업 기업 한 곳과 협의에 들어갔다. 이 스타트업 기업은 콩고 등 남반구 국가들에서 노예노동으로 채굴되는 리튬, 실리콘, 코발트 없이도 작동되는 태양광 패널을 연구, 개발하고 있다. 단결모임은 이 기업이 개발한 기술을 바탕으로 캄피 비센조 공장에서 대안적인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를 생산하려 한다. 또한 이들은 공장 전체를 태양광 발전소로 만들어 생산에 필요한 모든 전력을 자체 생산하고 남는 전력을 지역사회에 제공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 모든 계획을 실현하려면, 결국 돈이 필요하다. 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된 GKN 노동자들은 파업 동지의 생계 지원을 위해 시작한 상호부조사업에서 힌트를 얻었다. 단결모임은 수많은 시민의 성금과 출자를 바탕으로 공장을 인수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재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이탈리아에는 노동자의 기업 인수를 지원하는 법률이 이미 존재한다(1985년에 제정된 Marcora law). 단결모임은 이를 근거로 20233월에 공장 인수를 위한 크라우드펀딩 캠페인을 개시했고, 2주만에 1억 원 가량을 모았다. 모금 사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기후위기 대응을 중심으로 대안생산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GKN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뿐만 아니라 기후운동의 열렬한 투사가 됐다. 지난 2년 동안 피렌체의 기후운동 시위는 항상 젊은이들과 GKN 파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역으로, 국제적인 청년 기후운동 단체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GKN 공장 인수를 위한 크라우드펀딩 캠페인의 주된 협력자다.

 

"최근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한 노동자 투쟁"

GKN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파업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300여 명의 노동자가 이탈리아 역사상 최장기라 할 투쟁을 이어가는 중이다. 달리 말하면, 투쟁의 결말이 여전히 열려 있다. 단결모임이 공장 인수에 성공해 대안 품목을 생산하는 노동자 협동조합이 출범할 수도 있고, 끝내 실패해 어디에서나 으레 그렇듯 공장 부지가 부동산 투기용으로 팔려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펼친 투쟁만으로도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 단결모임의 지도자 다리오 살베티(Darioi Salvetti)가 자평한 것처럼, "최근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한 노동자 투쟁"이다.

 

무엇보다 지난 두 세기 동안 노동자 투쟁이 도달한 가장 높은 수준의 이상과 실천이 이 투쟁을 통해 한꺼번에 부활하는 광경은 놀랍기만 하다. 캄피 비센조 노동자들의 오랜 선조인 토리노의 피아트 노동자들이 100년 전인 1919-1920년에 감행한 선구적 공장점거, 마치 축제와도 같았던 1936년 프랑스의 점거파업 물결, 루카스 에어로스페이스 노동자들의 대안생산계획 수립, 가장 최근에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전개된 아르헨티나와 그리스의 노동자 자주관리기업 실험 등등, 이 모든 기억이 기후위기와 기술 변화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현재순간으로 되살아난다.

 

여기에서 우리는 문명의 붕괴를 재촉하는 자본주의의 시간이 우리에게 허용된 유일한 시간이라는 숨 막히는 현실이 어쩌면 파열될 수도 있음을 감지한다. 200만 당원을 자랑하던 공산당도, 20세기 후반에 가장 전위적인 좌파였던 아우토노미아 그룹도 더는 그대로 이어지지 않는 이탈리아이지만, 이들의 시간들은 결코 헛되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숱한 위기들에 감히 맞서기로 한 이들 사이에서, 그런 노동자들의 결단과 역량 속에서 그 시간들은 동시에 돌연 부활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때에, '유일한' 시간으로 강요되던 자본주의의 지배와 위기의 시간은 비로소 무너지기 시작한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 프레시안 2024.11.27.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트럼프가 돌아왔다. 더 극적이고, 더 강력하게. 트럼프 2기의 막무가내를 어떻게 견제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경험하지 못한 제왕적 대통령의 출현에 대한 우려가 팽배하다. 이런 우려를 우리나라의 정치문화에 대입해 보면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였다면, 틀림없이 개헌론이 먼저 등장하지 않았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받아들이기 힘든 선거 결과를 두고 대통령제 자체를 탓하지 않았을까? 세상에 완전무결한 제도는 없다는 명백한 진실은 200년이 넘는 낡은 제도를 탓하는 선동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에선 시대에 뒤처진 선거제도나 정부형태의 개혁을 요구하는 주장은 일부 현학적 지식인들의 손끝에 머물 뿐이다. ‘제도는 제도일 뿐, 헌정은 제도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실이 아직은 경험론에 기초한 실용적 가치관이 살아 있는 미국을 지배한다. 제도로만 본다면, 사실 미국의 헌정만큼 치밀한 철학적 숙고와 치열한 논쟁 끝에 만들어진 사례도 드물다. 공화적 민주주의를 향한 헌법제정자들의 올곧은 집념의 결실이 미국 헌정의 현재다. 트럼프의 귀환이 제왕적 대통령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은 신의 짓궂은 장난처럼 예외적 현상이다. 헌법제정자들이 가장 경계한 것이 바로 독재였고,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식민모국의 입헌군주정이 채택한 의회제 정부형태의 한계를 벗어나려 했기 때문이다. 숙고와 논쟁의 결과가 로마 공화정 모델에 기반한 미국식 공화정이다. 로마 공화정에서 원로원-민회-집정관으로 구성된 혼합정부는 상원-하원-대통령의 구도로 변형되었다.

 

미국식 공화정은 민주적 법치를 위해 의회제를 유지하고, 효율적 행정권을 위해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그러면서도, 의회든 대통령이든 독주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견제장치를 마련했다. 핵심은 권력의 다차원적 분할과 분권된 국가권력의 임기교차제였다.

 

분권은 연방과 개별 주의 권한 배분, 의회구성상 양원제, 의회와 대통령에 대한 별도선거, 사법권의 독립 등을 통해 관철되었다. 분권체제는 개별 권력의 임기교차제를 통해 견제와 균형을 모색하도록 했다. 하원의원은 인구비례에 따라 선출하되 2년이라는 짧은 임기를 부여했다. 상원의원은 인구비례를 무시하고 주별로 2명을 균등하게 배정하면서 안정성을 위해 임기를 6년으로 하되 민심도 수용할 수 있도록 2년마다 3분의 1씩 교체하게 했다. 대통령은 4년 중임으로 의회와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의회선거에 의한 중간평가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결정적으로 헌정의 안정성을 담보해줄 최후 보루로 연방대법관의 종신제를 채택하였다. 또한 이런 분권적 헌정체계를 허물 수 있는 정당의 월권을 경계하여 매우 느슨한 정당 기율과 정당 간 교차투표를 독려하는 정당제도를 기획하였다.

 

그러나 민주성, 효율성, 안정성을 모두 고려하는 정밀한 권력구조를 통해 독재만은 막으려는 헌법제정자들의 지혜가 무색하게 트럼프 2기는 1인 독재의 호기를 맞았다. 정치 양극화로 정당들의 당파성이 강화되면서 정당 기율이 강해지는 한편 의원들의 독자성이 트럼프주의에 압도되면서 공화당의 1인지배체제가 강화되었다. 버팀목이어야 할 상하 양원이 모두 공화당에 장악됐다. 더욱 우려스럽게도 연방대법원마저 트럼프의 영향권 안에 있다. 그가 직접 임명한 대법관 3명을 포함하여 보수성향 대법관이 절대다수다. 50년이나 지켜온 낙태권 인정 판결을 번복할 정도로 대법원 또한 공화적 헌정질서의 토대를 허무는 데 동조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미국 헌정의 위기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헌정은 단순히 제도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역량과 품성을 가졌는지도 중요하다. 더 중요하게는 제도와 사람을 규정하는 문화의 영향력이다. 모두가 공존·공생·공영하는 민주공화국의 토대는 서로를 평등하게 대우하고 스스로 정당한 사익을 추구하면서도 공적 현안에 대하여는 합리적으로 공공복리를 우선하는 절제력인데, 이런 문화적 토대 없이는 그 어떤 제도, 그 어떤 지도자라도 무망할 것이다.

 

산적한 국내외 현안에도 불구하고 사법과정에 볼모로 내던져진 정치, 혁신이나 사회적 책임은 고사하고 제로섬게임에 매몰된 경제, 남의 아픔은 아랑곳없이 각자도생에만 급급한 사회, 휘황찬란한 무대에 도취되어 정작 사회의 소금이기보다는 자기만족의 족쇄에 갇혀버린 문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다시 자문해야 할 엄중한 상황이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경향 2024.11.28.

 

지역소멸의 위기탈출 넘버원

아이들을 기를 때는 예쁜 줄 모르고 키우는 일에만 급급하여 내내 아쉽다. 그런데 귀여운 아기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며칠 전 국민영양관리계획 우수기관으로 상도 탄 춘천시 보건소에서 영양플러스사업의 일환으로 여는 조리 수업을 참관할 기회가 생겼다. 영양플러스 사업은 임신부와 영유아의 취약한 영양 문제를 해소하고 식생활을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지역단위 영양프로그램이다. 보충 식품 꾸러미를 제공하고, 영양교육·상담 등이 이루어지는 사업 효능이 매우 좋은 보건복지 프로그램이다. 비수도권에서는 임신부와 영유아 부모는 다문화가족인 경우가 많다. 이날 춘천시 보건소에서 영유아 음식을 만들어보는 특강 대상도 다문화가족이었다. 농촌지역인 읍면 단위 참가자들은 드물고 주로 시내권에 거주하는 주민들 참여가 많았다. 이날의 메뉴는 강원도 특산물인 옥수수를 활용한 옥수수치즈전과 제철인 파래를 활용한 파래새우전, 서리태 콩조림, 아기들 먹기에 좋은 동부묵볶음이었다. 보충식품으로 콩을 받으면 겨우 밥에만 넣어 먹었다던 캄보디아 출신의 젊은 엄마에겐 콩밥 탈출의 날이었다.

 

나는 아기 엄마들에겐 열심히 요리수업 들으라 하고 꼬물꼬물한 아기들을 안아주는 절호의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대체로 부부가 함께 참석하여 아빠가 아기들을 돌보고 엄마들이 열심히 동영상 촬영을 하며 요리 수업에 참여했다. 예쁜 아기들을 안아보려던 꿈은 깨졌지만 흐뭇한 장면이다. 다문화가족 연구에서는 한국인 아버지의 육아 참여, 외부 활동에 대한 지지와 관심을 결혼이주여성의 정착과 자녀들의 안정적 성장의 핵심 요건으로 꼽아왔다. 아버지가 참여하는 현장을 눈으로 마주하니 마음이 놓였다.

 

면 단위 농촌마을의 출산 소식은 지역 언론에 실릴 정도로 귀하고 드문 일이다. 작년 강원도의 한 농촌마을의 다문화가정에서 28년 만에 아기가 태어났다. 지역 전체가 축하를 전하며 갓난 아기에게 대학 장학금을 약속할 정도로 큰 경사였다. 그 면사무소 공무원 중에서 출생신고를 해본 경험이 있는 공무원이 부면장 정도였다는 후문이다. 사망신고는 익숙해도 출생신고가 낯선 면사무소가 어디 한두 곳인가. 국제결혼이라 칭했던 다문화 혼인의 역사는 30여년 전, 농촌에서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주로 도시권에서 이루어진다. ‘농촌 노총각들은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기 시작했고 농촌에는 혼인적령기 사람 자체가 드물다.

 

7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3 다문화 인구동태 통계를 보면 다문화 혼인은 2431건으로, 전체 혼인의 10.6%를 차지했다. 국내에서 10쌍 중 1쌍이 다문화 혼인이었고, 1년 전보다 다문화 혼인은 3003(17.2%) 늘었다. 전체 혼인이 1.0% 증가할 때 다문화 혼인 건수는 17.2% 늘었다는 의미다. 45세 이상 남성의 혼인은 다문화 혼인 건수가 더 많았고, 다문화 출생아는 12150명으로 전체의 5.3%를 점했다. 딱딱한 숫자의 의미를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국제결혼커플의 청첩장을 받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혼이주만이 아니라 한국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은 9월 기준으로 2689317. 그중 이나인이라 부르는 비전문취업비자(E-9)로 들어온 외국인(316000여명)의 비중이 가장 높다. 농업지대와 산업단지가 뒤섞인 수도권 인근 농촌에는 하청업 형태의 자잘한 제조업체들이 많아 이주노동자 비율이 훨씬 높다. 고향인 음성군은 인구 9만여명에 등록 외국인이 13000여명으로 네팔인들이 많이 산다. 무거운 맹동수박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는 젊은이도 이주민이요, 뜨거운 철과 플라스틱을 다루는 이들도 이주민이다. 지역에서 고만고만한 원룸과 빌라를 세 줄 수 있는 이들도 이주민들이다. 이주민과 함께 보통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지역소멸 위기탈출 넘버원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 경향 2024.11.28.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사람들

속도에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왜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냐는 질문에 30대 초반의 한 젊은이가 한 대답이다. “그 속도에 맞춰 살려다 보니 스트레스는 심해지고 자존감은 날로 줄어들더군요. 이렇게 살다가는 삶의 지향을 잃은 채 부유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늦기 전에 내가 잘할 수 있고 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해보자 싶었어요.” 그는 고심 끝에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고향에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조금도 후회가 없었다. 경쟁에서 밀려나 억지 춘향으로 낙향한 것이 아니기에 비애감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생텍쥐페리는 삶에는 해결책이 없고 밀고 나가는 힘만 있다고 말했다. 그 힘을 만들어낼 때 해결책이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삶의 속도를 늦추자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지역사회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띄었다. 고향은 그를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서울에서 만난 벗들의 소비 수준을 따라갈 수 없어 자괴감을 느끼곤 하던 다른 친구들도 새로운 삶을 모색하기 위해 하나둘씩 고향으로 돌아왔다. 젊은이들이 부족한 작은 도시였기에 그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제법 많았다. 자신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에서,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어서인지 그들은 유쾌하고 명랑했다. 소비사회의 신민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삶의 문법을 따라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참 대견했다. 그들은 세상에 희망이 있냐고 묻기보다는 스스로 작은 희망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미국의 빼어난 에세이스트인 리베카 솔닛은 인생 학교에서 배운 바를 이렇게 요약한다. “주변부가 오히려 가장 풍요로운 장소일 수 있으며 다른 영역들을 드나들기에 유리한 위치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중심에서 밀려날까 봐 노심초사하는 이들은 변화와 불확실성을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다양하게 반응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주변부는 사방으로 열려 있다. 주변부야말로 새로움의 촉수이다. 역사의 새로움이 늘 변방에서 시작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심으로부터 유쾌한 탈주를 감행한 이들이 곳곳에서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고 그들의 비전이 연결될 때 세상은 건강해질 것이다.

 

여러 해 전, 교회 청년 둘이 분쟁지역에 평화를 심는 일을 하기 위해 반다아체와 동티모르로 떠났다. 그들로 하여금 다니던 좋은 직장을 버리고 고난의 현장에 가도록 한 힘은 무엇일까? 세상에 더 이상 속지 않겠다는 결의였을 것이다. 수돗물도 나오지 않기에 우물물을 길어다 취사와 세면을 해야 하는 곳, 휴지조차 구비되지 않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외등 하나 없는 건물 건너편으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곳, 도마뱀·거미·바퀴벌레·개미, 그리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벌레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곳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들의 꿈은 소박하다. 담배와 대마초에 찌들어버린 젊은이들의 몽롱한 눈에 열정의 빛이 돌아오도록 하는 것, 현지인들과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는 순간,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광활한 삶의 지평이 열린 것이다.

 

돈이 주인 노릇 하는 세상은 욕망을 확대재생산함으로써 유지된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욕망의 본모습은 폐허다. 과도한 욕망은 초조감을 낳고, 초조감은 이웃에 대한 적대감을 낳고, 적대감은 폭력을 낳는다. 폭력은 자기 파괴와 외로움으로 귀착된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데 감이 빠른 사람들, 두 길 보기에 익숙한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희망의 공간을 넓혀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열대우림이나 식물성 플랑크톤처럼 생태계에 희망의 산소를 공급한다. 다시 한 번 생텍쥐페리의 말을 떠올린다. “오직 방향만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향해 가는 것이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 늦가을, 우리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 경향 2024.11.28.

 

37년 전, 8년 전, 그리고 지금 거리의 정치

대통령은 국민의 신임을 배신하고, 비선 실세에게 국정을 넘겨 국정을 담당할 자격을 상실하였다. 대통령은 현재의 국기 문란 사태와 앞으로 밝혀질 진상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하며, 대한민국 국민이 그 자격을 인정할 수 없다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20161026, 이화여대 시국선언문)

 

8년 전 11, 대학교 새내기이던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서울 광화문 거리로 향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 대신, 그의 친밀한 지인 하나가 나랏일에 손을 대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진 때였다.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풍물패와 함께 거리를 행진하고, 촛불을 들고 걷다 청와대 바로 앞에서 경찰에 가로막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을 결정한 순간, 등굣길 버스 안에서 휴대전화로 생중계를 지켜보다 주먹을 불끈 쥐면서도, 알 수 없는 슬픔에 휩싸였던 순간을 기억한다.

 

우리 국민은 대통령의 공약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 국민적 의사를 전적으로 묵살한 4·13 폭거는 시대적 대세인 민주화를 거스르려는 음모요, 국가 권력의 주인인 국민을 향한 도전장이 아닐 수 없다. 국내외의 조롱과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사태를 스스로 잉태하는 것임을 경고해둔다.”(1987610, 6·10 국민대회 선언문)

 

37년 전 6, 서울 명동 거리에는 나의 아버지가 있었다. 직선제 개헌을 향한 열망을 단칼에 무시한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는 대학생들의 피를 들끓게 했다. 최루탄과 지랄탄에 눈물 콧물을 쏟고, 숱한 경찰 연행을 거쳐 마침내 ‘6·29 선언이 발표되던 날을 아버지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나는 이태원 참사 이후 첫 강의에서 출석을 부르다가, 대답 없는 이름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폐허 속에 부끄럽게 머물지 않고, 인간다움을 삶에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무관심하며,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고, 무지와 무책임으로 제멋대로 돌진하는 윤석열은 즉각 퇴진하라!”(20241113, 경희대·경희사이버대 교수·연구자 시국선언문)

 

그리고 올해 11, 막 기자 생활 2년차에 접어든 나는 훗날 어떤 이름이 붙을지 모를 대통령 부부의 각종 의혹 취재에 뛰어들었다. 취재 결과 대통령 부인이 국정에 개입한 정황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민간인 1명이 대통령 부부를 등에 업고 국회의원 후보 공천과 각종 국가사업에 개입했다는 의혹도 점점 커지는 모양새다.

 

심상치 않다. 8년 전, 그리고 37년 전과 비슷한 분위기다. 대학교수·학생들의 시국선언문이 속속 발표되고, 다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국민의 문제 제기에도 꿈쩍 않고 동문서답하며, 심지어 이를 거부해 버리는 정권의 모습마저 판박이다.

 

언제까지 국민이 직접 거리로 나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하는가. ‘거리의 정치로 세상을 바꿔온 역사는 분명 자랑스럽지만, 이것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2024, 이 의혹의 끝이 어디일지 알 수 없으나, 부디 또다시 거리에 나선 국민에 의해 끌려 나오는 불운한 대통령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김채운 | 이슈팀 기자 | 한겨레 2024.11.28.

 

 

다시 한번 민주주의의 승리를 기약할 순간

대학교수들이 윤석열 정권 비판 성명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116일에는 인천대 김철홍 교수 등 44명이 노벨 문학상 수상도 제대로 축하해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안타깝다 못해 서글프다. 상생과 균형의 정치는 실종되고 마치 전쟁 같은 정쟁만이 판치는 품격 없는 사회가 되었다고 하면서 윤석열 정권은 국정농단을 넘어 수준 또한 치졸하고 저급하기 이를 데 없다고 했다. 나아가 그런데 왜 부끄러움과 자괴감은 항상 국민의 몫인가라고 개탄하면서 윤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했다.

 

교수들은 윤 대통령이 무지와 무능 그리고 불의와 불법, 불통의 상징처럼 돼버렸다고 했다. “편 가르기와 파행적 인사,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정치로 인해 연대의식은 사라지고 공동체는 무너지고 있다. 이것이 불과 2년 반 동안 우리가 겪은 윤석열 정부 치하 한국 사회의 처참한 모습이라고 했다(연세대 교수 성명). 윤 대통령이 지도자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자질과 능력도 갖추지 못한 주제에 대통령 부인과 정치 브로커의 국정 농단 의혹까지 점입가경으로 펼쳐진 상태에서 임기를 고수하는 것은 국가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결국 나라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에 중도 사퇴해야 한다고 했다(강원도 교수·연구자 성명).

 

지난 역사에서도 1960425250여명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앞서 그들은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여 이번 4·19 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계기라고 천명하고 그 위기를 철저히 규정(糾正: 잘못을 밝혀 바로잡음)하지 않고는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만회할 길이 없다면서 14개 조항의 시국선언을 채택했다. 선언문에서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원,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촉구했고 또 총탄과 폭력으로 대량의 유혈 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위한 국립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집단의 사병이라고 규탄했다.

 

시국선언에 이어 교수들은 펼침막을 들고 거리로 나섰고 그 행렬을 수만명 시민이 뒤따르면서 밤새 시위를 벌였다. 마침내 이승만은 다음날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했다. 이 시위의 의의는 교수들이 들었던 펼침막의 각대학교수단’(各大學敎授團)이라는 글자를 학생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의 글자보다 훨씬 큰 글씨로 돋보이게 했던 데에서 살펴볼 수 있다. 교수들은 불과 엿새 전 경찰 발포로 19명 초중등학생을 비롯해 200여명이 희생됐고 6300명이 부상당한 그 거리로 나가 다시 시민들을 불러내 끝내 독재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문을 열어 역사를 바꾸었다.

 

전두환 군부 치하에서 19852·12 총선 이후 군사정부 헌법을 민주헌법으로 바꾸기 위한 개헌운동이 전개됐다. 이 개헌운동에 1986년 고려대 교수들을 시작으로 전국 29개 대학에서 783명이 시국선언 방식으로 가세했다. 1987년에도 교수들은 전두환의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잇달아 발표했다. 6월 항쟁 승리로 직선제 개헌을 성취할 때까지 2년에 걸친 싸움이었다. 이 시국선언에 전국 48개 대학, 29개 사회단체, 초중고 교사 등이 동참했다. 교수들은 정부가 개헌 요구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펼치는 기만적 행태와 사이비 논리를 깨부쉈다. 당시 개헌운동의 본질은 살인 군대를 앞세워 정권을 찬탈한 정치군부에 대한 거부였다.

 

그러나 한국 민주화 역사에서 4·19 의거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고, 6월 항쟁으로 민주헌법을 제정하는 승리를 거뒀지만 부푼 기대와 달리 곧 실망스럽게 좌절을 맛봐야 했다. 4·19 교수단 시위에서 펼침막을 들고 앞장서 대열을 이끌었던 권오돈 교수(당시 연세대)3년 뒤인 19634월 동아일보 좌담회에서 지금 생각하면 헛일한 셈이지요. 참다운 민주주의의 구현을 바랐었는데 민주주의는 아주 먼 곳에 있으니라고 허탈한 심정을 토로했다(동아일보 1963425일 기사). 4·19 승리에도 불구하고 국가폭력의 주체는 경찰에서 군대로 교체되었을 뿐이며, 19876월 항쟁 또한 선거 패배를 자초해 군부 집권의 공작을 막아내지 못했다. 2017년 연인원 1500만명이 이룬 촛불혁명이었지만 그 결말은 낭패스럽게도 국가폭력의 주체가 경찰에서 군대를 거쳐 이제 검찰로 승계되는 꼴이었다. 그렇게 정치검찰이 헌법 정신을 짓밟고 권력의 시녀이자 국정농단의 공동정범이 됐다. 다만 양태가 고문 학살 투옥 등 야만적 물리력에서 법조문을 교묘하게 꼬아 만든 그물로 들씌우는 투망질로 바뀌었다.

 

한겨레 성한용 기자는, 검찰의 정치권력화 배경에 보수언론이 1980년 전두환 신군부 등장을 역사의 필연으로 평가하고 찬양했던 똑같은 논리로 다시 윤석열 한동훈을 한국 정치를 교정할 수 있는 적임자이자 한국 정치의 시대적 당위성이 있는 신주류라고 부추기고 교사한 문제를 짚었다(한겨레 202418일 성한용 칼럼). 그렇게 보수언론의 비호를 업은 정치검찰이 역사를 거스르는 전횡에 몰입하고 있다. 이를 두고 교수들은 한줌도 안 되는 정치검찰 패거리가 국격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고 했다(인천대 교수 선언문).

 

민주주의의 길엔 수많은 난관과 장애물이 놓여 있다. 민주주의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 역사는 성공의 역사만큼이나 실패의 역사라고 했다. “기존 한계를 초월하는 데 실패한 역사이며, 일시적 돌파에 뒤이은 참담한 패배의 역사라는 것이다(로버트 달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로 민주화 과정에서 패배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맞닥뜨린 위기와 난관을 극복하고 괄목할 민주주의 발전을 이뤘다. 지금 교수들의 시국선언도 로버트 달이 말한 일시적 돌파의 민주주의 성공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작가회의는 1118일 발표한 성명에서 민주주의는 늘 위기 상태에 있지만, 그때마다 위기를 극복하고 더욱 단단한 민주주의로 회생한다고 했다. 검찰을 앞세워 자행하는 윤석열 정권 국정농단을 역사의 경고와 교훈으로 새기면서 또 한차례 민주주의 승리를 기약할 순간이다.

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 한겨레 2024.11.29.

 

청년들이 우울한 나라는 미래가 없다

거리에 청년들이 보이지 않는다

 

80~90년대에 학생운동에 참여했거나 목격했던 이들은 이 시대에는 왜 거리에 청년들이 보이지 않느냐?”고 개탄하기도 한다. 원래 청년들은 가장 진보적이고 열정적인 세대여서 역사적으로 사회개혁 운동의 선봉대 심지어는 주력부대 역할을 해왔다. 최근의 역사적 시기만 보더라도 일제 강점기 시절의 민족운동에서부터 80~90년대의 민주화운동까지 청년학생들은 시대의 선각자, 투쟁의 선봉장 역할을 유감없이 수행하면서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특히 80년대의 6월 민중항쟁은 청년학생들의 선도적이고 치열하며 헌신적인 투쟁에 의해 그 돌파구가 열렸고, 그들의 투쟁에 고무된 기성세대가 대거 합류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를 거치면서부터 청년학생들은 사회개혁 운동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고 그 결과 박근혜 탄핵을 위한 촛불항쟁에서는 청년들이 아닌 중장년 세대가 선봉대와 주력부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가장 활기차고 낙천적이어야 할 청년들이 우울에 빠져있다

청년들이 더이상 거리로 나오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를 거론할 수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그들이 우울하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우울증 환자는 활발한 사회활동은 물론이고 가벼운 운동 심지어는 집 밖으로의 외출조차 버거워한다. 따라서 청년세대가 전반적으로 우울하다면 그들이 투쟁에 참여하거나 거리에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언감생심일 것이다.

 

보건복지부의 ‘2022년 청년 삶 실태조사에 의하면 청년들 중에서 32.1%가 우울 위험군에 속한다. 쉽게 말해 청년 10명 중 3명이 우울증 위험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2024년인 현재에는 이보다 상태가 더 나빠졌을 것이다. 아무튼 청년들의 32.1%가 우울증 위험상태라는 것은 청년세대 전반이 우울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집단의 정신질환 비율은 그 집단 전체의 심리상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청년세대가 전반적으로 낙천적이고 명랑하다면 우울증 비율은 2~3% 정도로 매우 낮을 것이지만, 청년세대의 상당수가 우울하다면 그 비율은 10% 이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청년들이 우울해야만 청년세대의 우울증 비율이 30%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청년기는 전 인생에 있어서 가장 활기차고 열정적이며 낙천적인 시기이다. 청년들은 우울해서는 안 되며 우울할 수도 없는, 우울증과는 가장 거리가 먼 세대라는 것이다. 그러나 2천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청년들 속에서는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정신질환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왔다.

 

우울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청년들

청년들은 자신이 우울한 원인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부분이 자기 자신, 개인에게서 찾고 있다. 우울증은 분노가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청년들의 분노가 자기 자신을 향하고 공격한다는 것은 그들이 삶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이나 고통에 대해 자기 탓, 개인 탓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년들이 우울을 사회 문제가 아닌 개인 문제로 보면서 스스로를 탓하게 된 것은 오늘날의 청년세대가 한국 사회의 진정한 첫 개인주의 세대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화가 시작된 90년대부터 공동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중장년층의 경우 그들이 공동체를 상실한 것은 청년기 이후다. 역으로 말하자면 중장년층은 어려서는 놀이공동체, 청소년기에는 학교공동체, 청년기와 성인기에는 직장공동체나 마을공동체 등을 경험한 세대이다. 물론 중장년층도 90년대 이후부터는 공동체를 상실하고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왔지만 그들에게는 공동체 경험이 있기에 여전히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있으며 사회개혁의 중요성도 알고 있다.

 

공동체를 경험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는 첫 개인주의 세대

반면에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어려서는 놀이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했고, 청소년기부터는 개인 간 입시경쟁으로 인해 학교공동체도 경험하지 못했다. 청년기 이후부터는 더더욱 공동체 경험이 없다. 결론적으로 청년세대는 어려서부터 계속 개인 단위로 성장했고 청소년기 이후부터는 치열한 개인 간 승자독식 경쟁, 개인 간 서열경쟁이 벌어지는 무서운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살아왔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청년들은 중장년들과는 달리 모든 문제를 공동체적 관점이 아닌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동시에 공동체가 중요하다거나 좋은 것이라는 말에 대해 정서적으로 공감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청년세대야말로 최초로 한국 사회에 등장한 진정한 개인주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개인으로 고립되어 홀로 세상에 맞서면서 자신의 생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고 서열 경쟁에서 승리해야만 하는 오늘날의 청년들은 공동체는커녕 친구조차 사귀기 힘들다. 중장년 세대는 중고등학교 시절 나아가 대학 시절에도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반면에 오늘날의 청년들은 초등학교 시기에 친구를 사귀지 못하면 평생을 친구 없이 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대학교는 물론이고 중고등학교까지도 개인 간 경쟁으로 인해 공동체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청년들이 친구가 거의 없거나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나만 빼고는 다들 행복해 보여

친구가 없다면 우울해지더라도 자기 마음을 털어놓거나 하소연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낯선 사람 혹은 그다지 친밀하지 않은 사람에게 힘든 마음을 보여줄 수도 없다. 잔혹한 개인 간 경쟁사회에서 살아가기에 청년들은 타인들을 경쟁자 혹은 적으로 간주하며 서로를 포용하기보다는 깎아내리거나 공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을 인터뷰한 한 기사는 우울한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그들의 심리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대학생 취재원들은 모두 주변 사람에게 우울한 감정을 털어놓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는 같았다. 자신의 상황이 약점으로 작용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 취재원은 다른 사람에게 우울함을 말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두운 면을 외부에 공개해서 약점 잡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나만 우울한가요?”정신건강 빨간불켜진 청년들, 국민일보, 20241123)

 

청년들은 우울하면서도 남들한테 우울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친구가 없는 청년들은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SNS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온라인 관계에서 대안을 찾으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SNS에는 자신의 우울함을 감추기 위해 행복을 전시하는 청년들 현실에서는 이를 가면우울증이라고 한다 - 이 많기 때문에 더 우울해질 뿐이다. 그 결과 청년들은 오직 나만이 우울하고 남들은 다 잘 산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거대한 사회 앞에서 개혁의 꿈도 못꾸는 무력한 개인

청년들은 개인주의 세대여서 세상을 개인(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바라보며 매사에 자기 탓을 하는 편이다. 반면에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적으며 사회개혁 의지도 박약하다. 여기에 더해 개인으로 고립되어 살아가기에 청년세대는 무력감이 심하다.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존재이지만 개인은 무력한 존재이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룰 수 있고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고 투쟁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기존 사회에 잘 적응하여 최대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뿐이다. 아무리 사회가 병들어 있더라도 개인은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한다. 한 개인은 거대한 사회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개인으로 파편화되고 고립되어 살아가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과 불행이 병든 사회에서 비롯되었다는 자각을 갖기 힘들다. 설사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나 혼자서 뭘 어쩌라고?”라고 읊조리며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청년들의 합리성에 주목해 기본직업 등 공동의 목표 제시해야

오늘날, 청년들이 거리에 나오지 않는 것은 그들이 너무나 우울하고 무력해서다. 청년들을 이렇게 만든 책임은 신자유주의의 파도를 막아내지 못하고 그것에 굴복한 기성세대에게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년들이 과거에 비해 더 우울하고 무력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대단히 합리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년들은 공포형 보수 극우세력에 대한 공포로 인해 자기한테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극우보수를 비합리적으로 지지한다 인 노인 세대와는 달리 자기한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보수를 지지하지 않는다. 이것은 청년들의 합리성(손익계산)이 공동체가 아니라 주로 개인을 중심으로 작동한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노인 세대와 같은 묻지마 보수가 되지는 않을 것이란 것을 의미한다.

 

청년들을 다시 청년답게 살게 해주고, 그들이 거리로 나오게 만들려면 무엇보다 모든 청년들에게 해당되는 공동의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 기본소득과 기본직업 국가가 청년들의 직업이나 일자리를 책임지고 보장하는 제도 을 예로 들 수 있다. 공동의 목표는 내 문제가 곧 모두의 문제라는 공동체적 자각을 불러일으키고 각자도생이 아닌 다른 길, 즉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청년들을 다시 일어서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청년은 곧 미래이다. 청년세대의 우울과 무력감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윤석열 정권을 시급히 끝장내고 근본적인 사회대개혁에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의 미래인 청년들이 죽어가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소장 | 시민언론민들레 2024.11.29.

 

 

대통령 윤석열의 가벼움

정치인의 기질은 흔한 미디어 상품이다. 정당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 언론은 그의 말투, 성격, 첫인상 따위를 분석하기에 바쁘다. 물론 이런 분석은 한계가 명확하다. 정치인의 행동에 개입하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고, 그의 사람됨보다 해당 시기의 정치적 상황, 주변의 권력 구조, 시민의 의지와 요구 등이 더 결정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일종의 예외로 보인다. 지난 117일에 열린 기자회견을 본 후, 적지 않은 시민이 비슷한 질문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금 대통령실 주변에서 벌어지는 기가 막힌 상황은 무엇보다 윤석열이라는 사람 개인의 성격과 기질에서 비롯하는 것 아닌가? 벼랑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면서도, 자기 발밑만 바라보며 신소리를 해대는 예외적인 인물이 이런 난장판의 첫 번째 원인 아닐까?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국식 위계 구조의 특징을 살펴보자.

 

위계적 공간 배치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미장센이 있는데, 바로 (디귿)’ 모양의 소파 배치다. 이른바 상석이 정면을 바라보고, 나머지 소파들이 좌우에 배열되는 식이다. 한국의 일반화된 위계 구조를 이만큼 분명하게 재현하는 것이 또 없다. 상석은 보스의 자리이고, 그 좌우에 조직의 넘버 23가 앉는다. 조직 내 서열이 낮을수록 상석에서 먼 곳에 자리한다. 이런 공간 구성은 조폭 영화뿐 아니라 조직 내 관계를 묘사하는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한다. 앉는 사람이 검사, 판사, 정치인, 관료, 기업인, 종교인, 교사 등으로 달라질 뿐이다. 이를 과장된 묘사라고 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한국사회 어디를 가나 비슷한 공간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귿 모양의 소파 배치는 인간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규율한다. 상석의 보스는 몸을 움직일 필요 없이 고개만 조금씩 까딱거리면 모두를 볼 수 있다. 양쪽에 앉은 부하들은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가, 보스와 대화할 때는 애써 몸을 비틀어야 한다. 이때는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공손한 자세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는 태도가 만들어진다. 이런 공간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각자의 성격과 의도를 표현할 수 있다. 예컨대 보스의 권위에 반항하고 싶은 사람은 몸을 그대로 둔 채 고개만 삐딱하게 돌려서 상석을 흘겨보면 된다.

 

이런 공간 배치가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일본의 사무라이, 야쿠자 영화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사례가 없다. 서구와는 분명히 다른 것 같다. 미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마피아 보스나 미국 대통령의 공간을 보자. 이들의 권위는 무엇보다 커다란 책상으로 드러나는데, 책상의 세로 폭이 보스와 나머지 인물의 거리를 만들고, 이 거리가 힘의 차이를 시각화한다. 여기에도 분명한 위계 관계가 존재하지만, 형태와 작동 방식은 한국과 전혀 다르다. 현실의 공간 배치에서도 차이는 쉽게 발견된다. 인터넷에서 한국과 영어권 나라의 교장실 이미지를 검색해 보라. 디귿 모양으로 배열된 소파들은 한국 교장실의 상징 같은 것이다. 다른 나라의 교사 사무실 공간은 상담실의 형태와 유사하다.

 

껄렁한 권위주의

한국식 위계 구조의 핵심은 시선의 비대칭에 있다. 보스는 위계 구조의 정점에서 모두를 내려다보지만, 부하들은 보스를 마주 대하지 못한다. 그 정점은 모두의 시선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위계 구조의 내부이면서 동시에 외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근엄하고 진지한 보스뿐 아니라 껄렁하고 가벼운 보스도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인물의 가벼움은 솔직함이나 반권위주의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만이 위계 구조를 무시할 수 있음을 과시하는 수단이다. 엄숙한 곳에서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 공식적 자리에서 아무 말이나 늘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권위를 증명한다. 조폭이나 검사를 다룬 영화에는 이런 유형의 인물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윤석열은 가벼운 보스의 전형 같은 사람이다. 그가 보여주는 표정, 동작, 듣고 말하는 방식에는 특유의 껄렁함이 묻어난다. 20229월 미국 순방 도중에 발생한 비속어 논란을 보자. 대통령의 정확한 발언이 무엇인지를 두고 황당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가 특정 비속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히 언어의 품격이 낮은 문제가 아니다. 당시 영상에서 그의 표정과 말투, 주변 환경을 다시 보자. 누가 봐도 그 공간을 지배하는 보스는 윤석열이다. 오로지 그만이 특유의 껄렁함으로 막말을 내뱉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거워야 하는 공간에서 가벼울 수 있는 인물, 그런 가벼움으로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 습관화된 인물이다. 그가 검사 출신이라는 사실과 이런 습관이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말한 위계적 공간 배치에 가장 잘 어울리는 조직이 검찰 아니던가.

 

지난 기자회견을 보고 윤석열의 솔직한화법을 언급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공적 언어의 규칙을 무시하는 그의 말하기 습관 때문이다. 공식적 자리에서 일상어를 적절히 사용하면, 듣는 사람이 편안해지고 언어 공간의 위계 구조가 완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말하기는 이런 친절한 일상어가 아니라 상석에 앉은 보스가 내뱉는 흰소리에 가깝다. 정제된 공식 언어를 써야 하는 공간에서 품위 없는 표현과 말투를 쓰고, 이를 통해 자신이 위계 구조의 외부에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다. 보스와 부하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는 이런 식의 껄렁한 권위주의가 통하겠지만, 기자회견장에서는 무례한 대통령으로 보일 뿐이다.

 

이런 식의 권위주의가 드러나는 또 다른 태도가 귀찮음이다. 권위주의적 인물 대부분이 소통을 싫어하지만, 윤석열의 태도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박근혜가 질문 자체를 회피하거나 틀어막는 식이었다면, 그의 답변에는 항상 뭐 대강 이런 거니까, 대충 알아들어라라는 분위기가 묻어 있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흰소리나 비아냥으로 들릴 만한 말이 자주 튀어나온다. 이는 의도적 전략이 아니라 신체적 습관에 가깝다.

 

윤석열은 한국식 위계 구조에서 등장할 수 있는 전형적 인물이지만, 자신의 본래 영역을 벗어나면 기괴한 예외적 인물이 돼버린다. 그가 권위를 행사하는 방식은 보스와 부하로 구성된 폐쇄적 위계 조직 내에서만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이런 인물이 정당 정치로 진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지난 수년의 과정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지금 그를 끌어내린다고 해도 그 코미디가 끝날지는 알 수 없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 주간경향 2024.11.29.

 

 

윤석열 대통령의 휴대전화가 무섭다

클린턴의 이메일, 대통령의 휴대전화

윤석열 대통령이 7일 검사 시절부터 써 온 개인 휴대전화를 여태 사용하고 있다고 전 세계에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후 17일동안 아무 말 없다가 24일이 돼서야 기존 휴대전화 사용을 중지하고 새 휴대전화를 마련했다는 공지를 띄웠다. 실제 일부 인사들은 텔레그램에 등록된 윤 대통령 아이디가 24일 전후로 사라졌다고 한다.

 

문제는 17일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17일 동안 북한은 물론 미국, 중국, 러시아의 해커들은 대통령이 검사 시절부터 쓰던, 국민의힘 입당 원서에 써 냈다가 노출된 바로 그 전화번호를 해킹하려 혈안이 됐을 지 모른다. 누군가 대통령의 휴대 전화를 원격 조정해 은밀한 회의를 엿들었다면? 대통령의 허술한 안보 의식은 국가를 불안하게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기존에 쓰던 휴대전화를 아예 끄고 생활했다고 한다. 물론 전혀 사용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최소한 문재인 정부 참모들은 문 전 대통령이 원래 쓰던 개인 휴대전화를 사용한 걸 본 적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이명박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한 인사도 대통령이 장관에게 개인 휴대전화로 전화를 건 적은 물론이고, 비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전화를 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 부부는 취임 2년 반, 임기 절반까지 기존 휴대전화를 활발하게 사용해 왔다. 대통령 본인이 직접 기자회견에서 인정한 말이다. 휴대전화로 "상 욕"이 들어오든, 응원이 들어오든 조언이 들어오든 대통령은 비화폰이 아닌 오래된 휴대전화에 애착을 갖고 붙들고 대통령직을 수행해 왔던 것이다. 명태균 논란이 있기 전부터 대통령의 개인 휴대전화는 항상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채상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에서 그랬다.

 

작년 82일 오후 127, 1243, 1257, 윤 대통령은 우즈베키스탄에 있던 이종섭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개인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검찰 시절부터 써 왔던 옛 전화로 명태균과 통화한 그 번호다. 그 통화 이후 박정훈 해병대수사단장은 보직해임 당하고 '항명수괴죄'로 입건된다.

 

우즈베키스탄을 방문 중인 국방부장관에게 개인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 이유는 대체 뭘까.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감청이라든가 이런 것 때문에 국가 안보 문제가 있을 땐 보안폰을 딱 쓰지만, 통상적으로 공무원이나 장·차관과 (통화하거나) 국가 안보나 이런 것이 아닐 땐 제 휴대폰을 쓴다"고 했다. , 개인 휴대전화를 썼다는 건 국가 안보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라는 방증이다. 하지만 개인 휴대전화를 썼다는 사실 자체가 국가 안보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란 걸 대통령은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현재 한국과 긴장 상태에 있는 러시아와 '형제 국가'를 표방한다. 최근 러시아는 우즈베키스탄에 전략물자인 드론 부품 생산 시설을 구축하는 걸 검토 중이다. 지난 9월 양국은 교역량을 현재보다 세 배 수준으로 늘릴 것을 합의했다. 국정원장 출신 박지원 의원은 "우즈베키스탄에 국방장관이 계신다면 거긴 구 소련연방 지역이다. 대통령의 통화가 다른나라에 도청될 수 있는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20223월 한국은 우즈베키스탄 교민 6000명을 귀국시켰다. 그런 나라다.

 

"국가 안보 문제가 있을 땐 보안폰을 딱 쓰"는 대통령이 이종섭 장관에게 개인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던 이유가 '국가 안보 문제'가 아닌 국내 현안과 관련된 문제라는 게 사실이라면, 대통령은 국가에 위협이 될 도감청의 위험보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 된다. 공적 의식, 안보 의식은 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당혹스럽다.

 

대통령이나 대통령 주변 도감청에 대한 우려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 4월 미군 기밀 문건 온라인 대량 유출 사태가 있었을 때 공개된 CIA의 일일 정보 업데이트 도감청 문건엔 김성한 안보실장과 이문희 외교비서관의 우크라이나 전쟁 무기 지원 관련한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충격을 줬다.

 

과거 문재인 정부나 노무현 정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조선, 중앙, 동아 등 보수 언론을 비롯해 국민의힘이 아마 정권을 무너뜨릴 기세로 비난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윤 대통령이 초래한 아찔한 안보 위기에 대해 다들 점잔을 빼고 있다.

 

2016년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은 국무장관 재직 시절 뉴욕 자택에 개인 이메일 서버를 만들어놓고 공적인 문서를 주고 받았다가 큰 곤욕을 치렀다. 이 스캔들은 미국 대선 판을 뒤흔들었고, 클린턴은 3년 넘게 조사를 받았다. 개인 이메일은 6만 개 정도, 문제가 의심되는 조사 대상 이메일만 33000개였다. 불기소 권고가 내려진 후에도 문제의 이메일이 발견돼 다시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공적 지휘가 없던 클린턴의 '친구'이자 측근인 시드니 블루멘탈이 전직 CIA 간부를 통해 수집한 리비아 내부 첩보를 개인 이메일로 보고받아 논란이 커졌다. 궁지에 몰린 클린턴은 "내겐 많은 오래된 친구들이 있다. 정치권에 들어가면 그전에 알던 친구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듣는 게 중요하다"면서 "그도 오래된 친구들 중의 한 명인데 그는 내가 요청하지 않은 이메일을 보내주곤 했다"고 해명했다.

 

이 쯤에서 '명태균'이라는 이름 석자가 생각난다. 윤 대통령은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명태균과 연락을 하고 끊게 된 과정을 얘기하며 비슷한 설명을 내놓았다. 하여튼 명태균에게 (선거철 여러 사람의 통상의 도움 수준이라곤 했지만) 도움을 받은 사실을 인정했고, "누구한테 도움을 받으면 말 한마디로라도 인연 딱 못 끊고,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그런 걸 갖고 있다 보니 이런 문제가 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클린턴의 경우 공적 지위가 없던 블루멘탈이 보고한 첩보가 외교 정책에 반영됐을 지 모른다는 논란과 함께 블루멘탈 본인이 리비아에서 개인 사업을 추진 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논란은 더 커졌다. 특히 해킹에 취약한 개인 메일로 업무를 진행한 사실은 클린턴의 발목을 두고두고 잡았다. 실제 러시아 측이 클린턴의 개인 이메일을 해킹하려 시도했다는 정황도 발견된 바 있다.

 

대통령의 개인 휴대전화는 범죄 의혹과 도감청 의혹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물건이다. 그런데 기껏 내놓은 대책이 개인 휴대전화 교체다. 새로 바뀐 개인 휴대 전화는 안전할까? 휴대전화를 바꾼다고 대통령이 갖고 있던 전화번호가 날아가는 것도 아니다. 기존에 연락하던 사적 라인과 연락을 끊는다는 얘기도 아니다. 사적 안위를 위해 보안 따위는 팽개친 채 무시로 개인 휴대전화를 사용해 국제전화든 국내전화든 걸 수도 있다. 윤석열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전 코바나컨텐츠 대표가 대통령 휴대전화를 다시 안 열어본다는 보장이라도 있나. 대체 뭐가 달라졌다는 건가.

 

야당은 대통령의 기존 개인 휴대전화에 명태균 게이트나 채상병 게이트의 증거가 담겨 있을 것이라며 '증거 인멸'을 의심한다. 보태자면, 새로 바꾼 휴대전화로 대통령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것이 공포심을 불러 일으킨다.

박세열 기자 | 프레시안 2024.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