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부채비율’인데, 왜 뉴스에는 ‘부채액’만 나올까
기업을 평가할 때 ‘부채액’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경영평가에서는 순자산 대비 부채의 양을 비율로 나타내는 ‘부채비율’이 쓰인다.
‘공공기관 부채’라는 검색어로 뉴스 검색을 했다. ‘부채비율’을 찾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뉴스는 부채 규모 절대금액을 전하고 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5년간 공공기관 부채는 84조원 늘어 지난해 말 사상 최대(583조원)였다”라고 한다.
부채가 84조원이 늘어서 사상 최대 액수인 583조원이 되었다는 뉴스를 보면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84조원이라는 부채 증가 액수와 583조원이라는 부채 총액은 그 자체로 아무런 정보를 담고 있지 않다. 공기업 순자산 액수 변화를 외우지 못하는 일반인들에게는 정보가 아니라 이미지만 줄 뿐이다. 공공기관 부채가 매우 크다는 이미지 말이다.
차분히 생각해보자. 한국의 GDP는 거의 매년 사상 최대 액수를 갈아치우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뉴스도 GDP를 전할 때 “올해 GDP 사상 최대 달성”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공공기관도 매출액, 순자산액, 부채액 모두 매년 사상 최댓값을 기록하는 것이 정상이다. 만약 사상 최댓값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뉴스거리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기관의 부채액은 중요하지 않다. 공공기관 순자산액으로 부채를 나눈 ‘부채비율’을 구해야 한다. 2012년 부채비율은 220%였다. 거의 매년 지속적으로 낮아져서 2021년에는 151%가 되었다. 박근혜 정부 마지막 해 167%보다 낮아진 수치다.
ⓒ시사IN 최예린
경영실적 ‘탁월’한데 ‘재무위험’?
좀 더 근본적인 얘기를 해보자. 공공기관 부채비율 증대 등 경영지표 악화는 어떤 의미일까? 둘 중 하나다. 방만 경영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공공정책이 요인일 수도 있다. 정부 시책에 따른 공공요금 인상 억제로 경영지표가 악화되었는데, 이 요인으로 페널티를 받는다면 억울할 수도 있겠다.
민간 전문가 109명으로 구성된 ‘공기업 준정부기관 감사평가단’은 지난 6월20일 발표한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에서 한국동서발전에 유일하게 ‘탁월(S)’ 등급을 주었다. 그리고 발전 자회사 4개와 지역 난방공사들은 ‘우수(A)’ 등급을 받은 바 있다. 방만 경영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데 기획재정부는 불과 열흘 뒤인 6월30일 한국동서발전을 포함한 14개 공공기관을 ‘재무위험 공공기관’으로 선정했다. 한국동서발전은 고작 열흘 만에 탁월 등급에서 ‘부채비율이 200% 미만이지만 향후 경영 상태가 나빠질 수 있다고 판단한 별도 관리 기관’으로 추락했다.
공공기관 개혁은 필요하다. 그러나 평가 기준은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저해하지 않도록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다시 언론 얘기를 해보자. 왜 언론은 일반 기업을 평가할 때는 ‘부채비율’을 쓰면서 공공기관 평가에서는 ‘부채액’을 쓸까? 최근 정부가 부채비율이 아닌 부채액을 담은 보도자료를 배포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관행대로 부채비율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에서 탁월 등급을 받은 공공기관이 열흘 만에 재무위험 기관으로 전락한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 언론까지 기대하면 욕심일까?
이상민(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시사인
조삼모사 한미훈련 ‘동맹재건’으로 포장 …‘바람보다 빨리 눕는’ 군
군 당국, 8월 한미훈련 과잉 홍보 논란
연중 분산 13개 훈련을 한꺼번에 몰아서
대규모 야외기동훈련 부활?…규모 비슷
지난 7월 강원 인제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KCTC)에서 진행된 ‘KCTC 여단급 쌍방훈련’에 참가한 한미 장병이 악수하고 있다. 육군 제공
한미는 후반기 양국 연합연습인 ‘을지 자유의 방패’(UFS·을지프리덤실드)를 22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실시한다. 군 당국은 지난 16일 보도 참고자료를 내어 “상당기간 축소·조정 시행되어온 한미 연합연습과 야외기동훈련을 정상화함으로써 한미동맹을 재건하고 연합방위태세를 공고히 확립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군 당국은 “이번 연습에서는 컴퓨터시뮬레이션에 기반한 지휘소연습에 국한하지 않고 제대·기능별로 전술적 수준의 실전적인 연합야외기동훈련도 병행한다”며 “이번 연습기간 중에 연합과학화전투훈련(여단급), 연합대량살상무기제거훈련(대대급) 등 모두 13개 연합야외기동훈련이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4년 만에 대규모 야외기동훈련이 부활한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하지만 훈련들을 살펴보면, ‘대규모 야외기동훈련 부활’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13개 훈련은 별도 훈련이 신설 추가된게 아니라 원래 하던 훈련들이다. 따로 하던 13개 훈련들을 이번 연합연습기간에 몰아 하는 것이라 ‘부활’은 아니다. 연중 분산 시행하나, 이번 연합연습에 한꺼번에 몰아서 하나 1년에 13번 훈련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일종의 조삼모사다.
13개 훈련들 가운데 대규모 야외기동훈련으로 볼 만큼 규모가 큰 훈련은 없다. 13개 가운데 12개는 대대급·소규모 훈련이다. 수천명이 참가하는 여단급 이상 훈련은 ‘연합과학화전투훈련’ 1개뿐인데, 한국군이 대부분이고 미군은 미 본토에서 추가로 오는 병력 없이 주한미군 소속 중대급 수백명이 참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 7월15~18일까지 강원 인제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KCTC)에서 한국군 2개 여단 4300여명이 여단 전투단을 구성해 서로 교전하는 쌍방훈련을 벌였고, 주한미군 2개 보병중대 300여명이 참가한 적이 있다.
2019년 10월,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가운데)과 최병혁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오른쪽), 남영신 육군 지상작전사령관(왼쪽) 등 한·미 군 지휘부가 한국군 제5포병여단의 사격 훈련을 참관하고 있다. 주한미군 페이스북 갈무리
한반도 전체를 전장 상황으로 하는 전구급 한미연합연습은 상반기(3월), 하반기(8월)로 나눠 연중 2차례 한다. 문재인 정부 휠씬 이전부터 3월에는 대규모 병력·장비가 참여하는 야외기동훈련(FTX)과 컴퓨터 워게임을 이용한 지휘소연습(CPX)을 함께 했고, 8월에는 야외기동훈련 없이 지휘소연습 위주로 해왔다. 합참 누리집은 연합연습에 대해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의해 조성된 전장상황 하에서 지휘관 및 참모가 작전수행절차 숙달에 중점을 두고 수행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번 연합연습도 지휘소 연습 위주로 하고, 방어(1부)·반격(2부) 같은 시나리오, 훈련 범위 등이 예년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 당국이 예전부터 하던 훈련들을 이참에 몰아서 하면서 ‘한미동맹 재건’이나 ‘한미연합연습과 야외기동훈련 정상화’ 같은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군 당국은 지휘소연습을 하는 자체만으로 한미연합태세를 점검하는 의미가 있고, 지휘·통제·통신·정보장비를 통합해 운용하면 실제 병력을 기동하지 않더라도 그에 준하는 훈련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5월 정권 교체 이후 확 바뀐 군 당국과 국방부 언행에서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김수영 ‘풀’)는 시 구절이 떠오른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국민대 교수회, ‘김건희 논문’ 검증 안 한다…“집단지성 결과”
투표 결과 검증 반대 61.5%
재조사위 회의록 공개도 반대 더 많아
교수회장 “결정 존중하길”
민대학교 교수회가 표절 논란이 불거진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자체 검증하지 않고, 재조사위원회 회의록 공개도 요청하지 않기로 했다. 교수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투표에서 반대 의견이 더 많자 내린 결정이다.
19일 국민대 교수회는 16∼19일 교수회 회원 77.3%(406명 중 314명)가 참여한 온라인 투표 결과를 공개했다. ‘교수회가 자체적으로 김건희 여사 박사학위 논문 검증위원회를 구성해 검증하자는 의견’에 대해서는 반대가 61.5%(193명)로 찬성 38.5%(121명)보다 많았다. ‘학교 본부의 김건희 여사 박사학위 논문 재조사위원회 판정 결과보고서와 회의록 공개(익명 전제)를 요청한다’는 안건에도 반대가 51.6%(162명)로 찬성 48.4%(152명)보다 많았다.
검증 대상에 대해서는 ‘박사학위 논문만 검증하자’는 응답이 33.4%(105명), ‘학교 본부가 검증한 4편의 논문 모두 검증하자’는 응답이 24.8%(78명)이었고 무응답이 41.7%(131명)였다. 해당 안건들을 중대 안건 또는 일반 안건으로 의결할지에 대한 질문에는 56.7%(178명)가 중대 안건에, 43.3%(136명)가 일반 안건에 응답했다. 중대 안건의 경우 과반수 참석에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되지만, 일반 안건은 과반수 참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된다.
윤석열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여사가 2007년 ‘한국디자인포럼’ 17호에 발표한 ‘온라인 운세 콘텐츠의 이용자들의 이용 만족과 불만족에 따른 회원 유지와 탈퇴에 대한 연구’ 표지
홍성걸 교수회장은 결과를 발표하기 전 교수회 회원들에게 “우리의 결정이 어느 방향이라도 그것은 교수의 집단 지성의 결과”라며 “찬성하신 분들이나 반대하신 분들이나 모두 우리 국민대의 명예를 존중하고 학문적 양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했다. 이어 “교수회원 모두 누구보다도 자존심도 강하고 스스로 프라이드를 가진 분들”이라며 “그런 분들의 집합적 결정을 우리 모두 존중하고 이번 일을 계기로 교수사회가 더욱 화목하고 서로 이해하는 마음을 갖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앞서 국민대 교수회는 12일 임시총회를 열어 김 여사 논문에 대해 교수회 검증위원회를 통한 자체 검증 실시 등을 의제로 찬반 투표를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총회 참석자 대다수는 교수회 자체 검증위를 구성해 논문 표절 여부를 재검증하자는 의견에 동의했으나 의사정족수에 미달해 전체 교수 회원을 대상으로 투표를 진행하게 됐다. 자체 검증이 결정되면 교수회는 각 단과대학 교수회 평의원회가 추천한 위원회로 검증위원회를 꾸릴 예정이었다.
국민대는 지난 1일 김 여사의 논문 4편과 관련한 부정 의혹 재조사 결과 박사학위 논문과 영문 제목에 ‘회원 유지’를 ‘member Yuji’라고 적은 논문 등 3편은 연구부정행위에 해당하지 않으며, 나머지 학술지 게재논문 1편은 검증이 불가하다고 판단했다./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국민대 졸업생들과 숙대 졸업생 등이 지난 8일 오후 서울 국민대학교 정문 앞에서 국민대가 이달 초 김건희 여사의 논문이 표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데 대해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국민대 외부에서는 이번 결정을 두고 당혹스럽다는 반응이다. 양성렬 한국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사교련) 이사장은 “참담한 결과가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김 여사 논문 표절 의혹은) 특히 지도 교수의 책임도 큰데 지도교수는 이 사태에서 실종돼버렸다”며 “앞으로 대학교수들이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동규 동명대 교수(광고PR학과)는 “대학이라는 학문 공동체에서 학위수여는 대학의 근간을 유지시키는 가장 핵심적인 제도다. 단순히 특정 개인의 논문 표절이나 학위수여를 넘어서서 그 정당성과 윤리성이 무너지면 후속 세대를 교육시키고 학문 공동체가 영속되는 기반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국민대 교수회 결정을 비판했다.
한편, 사교련 등 지난 5일 기자회견을 열어 김 여사의 논문 5편을 검증하겠다고 밝힌 교수‧연구자단체 13곳은 검증단 구성을 마무리하고 추석 전에 자체 검증결과를 밝힐 계획이다.
고병찬 기자 kick@hani.co.kr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하위 20% 가구, 소득 70% 이상 생계비로 지출
생계비 지출비중, 상위 20% 가구의 3배
물가 고공 행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내 소득 하위 20% 가구가 가처분소득의 70% 이상을 필수 생계비로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21일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를 보면 올해 2분기 기준 소득 하위 20% 가구의 월평균 가처분소득(세금·보험료 등을 빼고 실제로 쓸 수 있는 소득)은 94만원, 그중에서 식비·주거비·교통비 등 필수 생계비 지출액은 71만원이었다. 가처분소득에서 필수 생계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76%에 이른다.
항목별로는 집에서 소비하는 식료품·비주류 음료 지출이 25만원(26%), 식당 등에서 쓰는 식사비 지출이 14만원(15%)으로 조사됐다. 가처분소득의 약 40%를 식비로 지출했다는 의미다. 월세 등 주거·수도·광열 지출과 교통비 지출은 각각 22만원(24%), 10만원(11%)이었다.
반면 소득 상위 20% 가구의 월평균 가처분소득(833만원) 중 필수 생계비 지출액(216만원) 비중은 26%에 그쳤다. 소득 하위 20% 가구의 생계비 지출 비중이 상위 20%의 3배에 이르는 셈이다.
소득 하위 20∼40% 가구는 가처분소득 대비 생계비 지출 비중이 45%, 40∼60% 가구는 39%, 상위 20∼40% 가구는 35%로 각각 집계됐다. 저소득 가구일수록 벌어들이는 돈에서 필수 생계비로 나가는 금액 비중이 큰 것이다.
소득 하위 20% 가구 가운데 가처분소득보다 소비 지출액이 더 많은 적자 가구 비중은 올해 2분기 약 54%로 지난해 2분기에 견줘 1.6%포인트 감소했다. 그러나 적자 가구 비중은 여전히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일본 80·90년대 시티팝 감성과 불륜①
1980년대 일본에서 태동한 시티팝 장르는 도심 속 네온사인 같은 차갑고 가벼운 멜로디에 인간의 고독이 느껴지는 감성 가사가 특징이다.
다양한 나라에서 일본의 시티팝이 인기라고 한다. 시티팝은 1970~1980년대 일본에서 소울, 펑크, R&B, 디스코 등의 서양 음악이 일본의 가요곡과 만나, 독자적인 발전을 거친 음악 장르라고 정의된다. 명확하게 어디부터 어디까지라고 따지기는 매우 어렵다. 어두운 밤이 연상되는, 밤에 들으면 좀 울적해지는 스타일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도 있고,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고독을 느끼는 인간 군상을 느끼게 하는 음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의 시티팝하면 김현철, 김혜림, 유재하와 같은 음악이 아니었을까. ‘이치현과 벗님들’의 인기곡 ‘집시 여인’도 지금 생각하면 바로 이 장르였던 것 같다. 일본의 시티팝을 견인해온 두 여왕이 있으니 바로 ‘플라스틱 러브’란 곡으로 알려진 다케우치 마리야와 ‘마치부세(잠복)’으로 인기를 얻은 마츠토야 유미다. 두 사람 모두 J-POP의 거장이라 불리는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와 결혼했으며,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활동하고, 8090년대 수많은 드라마의 주제곡을 불렀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케우치 마리야는 맑고 높은 목소리로 주로 이룰 수 없는 사랑과 고독, 불륜을 노래했으며, 마츠토야 유미는 요염하고 당돌한 신세대 여성을 노래했으며 시티팝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장르에 도전해왔다.
다케우치 마리야 ‘플라스틱 러브’ 앨범 재킷 이미지.
1955년생인 다케우치 마리야는 고교 시절에 미국 일리노이주의 고등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 게이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밴드 동아리에서 활동하다가 코러스에 참가하기도 하며 노래 경력을 쌓아갔다. 1978년 앨범 ‘비기닝’으로 데뷔 후, 1979년에 ‘September’로 일본레코드대상 신인상을 수상했고, 신주쿠음악상 금상, 이탈리아 산모레음악제에도 참석했다. 1980년 시세이도의 CM송 ‘이상한 복숭아 파이’를 선보여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키가 크고 날씬한 다케우치 마리야는 잡지에도 종종 등장했으며, 아이돌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음악의 프로페셔널로 성공을 꿈꾸던 다케우치 마리야에게 대중들이 원한 것은 아이돌이었다.
아이돌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음악적 행보에 의문을 품은 그녀는 결국 병이 나 휴식을 취하게 되었고, 그 기간에 야마시타 타츠로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야마시타 타츠로는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국민 성탄절 송으로 유명한 작곡가로, 여전히 매년 이 한 곡으로 억 단위의 저작권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다케우치 마리야의 시티팝은 80년대 초반 야마시타 타츠로와의 결혼으로 전성기를 맞이했고 여전히 전성기에 있다. 결혼 후 아이를 낳은 그녀는 방송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다양한 드라마 주제곡을 도맡게 된다.
일본에서 트렌디 드라마가 인기가 있던 시절로, 시티팝과 트렌디 드라마는 그야말로 죽이 잘 맞는 궁합이었다. 1990년 ‘화요 서스펜스 극장’ 주제가 ‘고백’, 드라마 ‘처음 만났을 때의 너로 있어줘’의 주제가 ‘순애 랩소디’,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드라마 ‘잠자는 숲’의 ‘camouflage’ 등을 맡아 얼굴 없는 가수처럼 활동했다. 당시 발표한 베스트 앨범 ‘Impressions’는 300만장이 넘게 팔렸고, 최근 시티팝 인기로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남편이 작곡한 곡에 아내가 가사를 붙이는 스타일을 이 부부는 무려 40년 간 함께 해왔다.
시티팝의 여왕 다케우치 마리야는 주로 불륜을 연상케하는 가사를 노래했다. 드라마 ‘잠자는 숲’의 주제가도 마찬가지.
최근에는 ‘인생 찬가’가 다케우치 마리야의 주된 가사 내용이지만, 80~90년대의 가사들은 주로 불륜과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드라마 ‘잠자는 숲’ 주제가는 “애인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을 서로 가지고 있지만, 마음이 통하지 않아 고독에 떨었다/ 감추고 있는 상처를 왜 인지 당신만이 감싸 줄 수 있어/ 아주 먼 옛날에 만난 것 같은 기억이 자꾸만 떠오른다”고 노래한다. 영화 ‘맨하탄 키스’(아이돌 그룹 AKB의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가 감독·각본을 담당)의 동명 주제가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셔츠를 입는 당신의 등을 바라봐”라며 불륜을 노래한다. 애초에 드라마 ‘처음 만났을 때의 너로 있어줘’는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이며 주제곡 ‘순애 랩소디’에서 다케우치 마리야는 “당신을 빼앗는 것은 룰을 위반한 것일까요?”라고 묻는다.
다케우치 마리야의 가사는 스토리를 품고 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셔츠를 입는 당신의 등’, ‘나는 조연이다’, ‘손끝이 슬쩍 부딪친 밤, 마음에 담아둔 생각을 감출 수 없어졌다’가 그렇다. 한편으론 남자를 빼앗긴 여성의 마음도 노래한다. “당신을 데려가려는 그 여자의 그림자를 두려워 하며 살았다”고 말이다. 슬프다, 아프다라는 단어를 하나도 쓰지 않고 아주 구체적인 당시의 상황과 기분을 일기처럼 적는다. 한 편의 소설을 보는 것 같다.
‘불륜’이라고 쓰고, 다케우치 마리야는 ‘운명’이라고 읽었다. 1985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생긴 후 수많은 여성들이 일을 하기 위해 도쿄로 들이닥쳤다. 그녀들은 연애도 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어쩌면 불륜도 있었을 것이다. 결혼한 회사 상사와 운명적인 사랑을 하거나 우연히 첫사랑을 만났는데 이미 결혼을 했거나, 그래서 불륜이 되어버린 상황은 드라마에서 자주 다루는 소재였다. 주연은 아니더라도 불륜을 하는 조연들은 언제나 브라운관 속에 있었다.
이런 당시의 정황을 가장 재미있게 살린 사람이 바로 다케우치 마리야다. 불륜을 하는 여자들은 어찌 되었든 고독하다. 남자를 빼앗긴 여자들도 고독하다. 아니 인생 자체가 고독한 것이다. 도시의 여자들은 고독하다. 가족도 멀리 있고 가족들에게 연애사를 밝히고 같이 고민할 만한 용기도 없다. 도시에는 친구도 없다. 그런 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가수가 바로 다케우치 마리야였다. 그리하여 불륜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왜인지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공감이 가고 힐링이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김민정 재일작가
中 "한국산 안 써" 돌변하자, 韓 매달 1조 적자…'차이나 붐' 끝?
대중국 무역수지가 수교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4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할 것이 유력시된다. 일각에선 수출에 있어 '차이나 붐(호황)'이 끝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최근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중국이 중간재를 자국산으로 대체하는 데 따른 결과다. 전문가들은 중간재 중심의 대중 수출구조를 소비재·최종재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19일 산업통상자원부와 관세청 등에 따르면 한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지난 5월부터 7월까지 석달 동안 28억8800만달러(약 4조원)에 달했다. 월별로는 △5월 10억9900만달러 적자 △6월 12억1400만달러 적자 △7월 5억7500만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매달 1조원 가까이 적자를 본 셈이다.
8월 1~10일 대중 무역수지도 8억9000만달러 적자를 나타내며 이달까지도 적자 행진이 유력시된다. 8월까지 대중 무역수지가 적자라면 한국은 수교 이후 처음으로 4개월 연속 대중 무역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최근 대중 무역수지가 적자를 기록한 주된 이유는 중국의 코로나19(COVID-19) 봉쇄정책에 따른 수요 둔화다. 봉쇄가 집중됐던 지난 2분기 중국의 GDP(국내총생산)는 전기대비 0.4% 성장하는 데 그쳤다. 1분기 성장률이 전기대비 4.8%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에 그친 것이다.
중국산 원자재 가격이 크게 급등한 것도 영향을 줬다. 이차전지 생산을 위한 핵심 원자재인 리튬이 대표적이다. 한국광해광업공단의 한국자원정보서비스에 따르면 리튬 가격은 지난해 19일 1kg(킬로그램) 당 100위안에서 지난 18일 464.5위안으로 4배 넘게 올랐다. 게다가 한국의 전기차 수출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상반기 대중국 수산화리튬 수입물량은 전년동기대비 22.7% 증가했다. 해당기간 중국산 수산화리튬 수입단가는 311% 상승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쌍순환'으로 대표되는 중국 정부의 내수강화 정책이 수입에 의존하던 중간재를 자국산 제품으로 대체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 등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국산화를 추진하는 것도 한국 수출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우리가 중국에 중간재를 보내 미국에 수출하는 구조가 작동이 안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역협회가 지난 18일 발표한 '최근 대중국 무역수지 적자 진단'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반도체제조용장비 국산화율은 지난해말 21%에서 올해 상반기 32%로 상승했다. 이에 따라 상반기 대중국 반도체제조용장비 수출은 전년동기대비 51.9% 감소했다. 한국산 장비를 중국이 자국산 제품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은 지난 30년간 유지되던 '한국이 중간재를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이 완제품을 세계에 판다'는 양국간 무역구조가 깨질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미국 주도의 공급망 동맹 참여가 향후 대중국 수출에 악영향이 줄 우려도 있다. 미국은 IPEF(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 칩4(한국, 미국, 일본, 대만 4개국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 등 동맹국과의 협력 강화를 통해 글로벌 밸류체인(가치사슬)에서 중국의 비중을 줄이려는 정책을 펴고 있다.
정부는 중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요구하는 이들 협의체 참여를 적극 검토 중이다.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나 수출시장의 다변화가 필요하다는 게 정부의 인식이다.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은 지난 6월28일(현지시간) 윤석열 대통령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 현장에서 브리핑을 통해 "지난 20년간 우리가 누려왔던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며 "우리에게는 중국의 대안인 시장이 필요하고 다변화 또한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고 정부가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경시하는 건 아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9일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우리의 최대 무역 상대국인 중국과의 경제협력도 활성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추경호 부총리와 중국의 경제 사령탑 격인 허리펑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NDRC) 주임간 회담을 추진 중이다. 산업통상자원부도 양국 통상장관간 회담을 준비하고 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 9일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한중 외교장관회담 겸 만찬을 열고 사드, 공급망 협력,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이해 한중관계 강화 모색 등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한중수교 30주년을 계기로 중국에서도 (관계개선을) 하려고 할 것"이라며 "한한령 문제 등도 조심스럽게 얘기해 볼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부품 등 중간재 대신 최종 소비재 중심으로 대중 무역구조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중국이 경제성장 전략을 수출주도에서 내수주도로 전환한 상황인 만큼 앞으로 성장할 중국의 내수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자국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반도체, 장비 등 중간재를 생산하는 중국 기업에 혜택을 주고 있는 만큼 소비재로의 집중은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또 최종 소비재의 경우 첨단산업 육성을 놓고 진행되는 미중 패권경쟁의 중심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나 있다.
이시욱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미국이나 EU(유럽연합)는 중국 내수시장에서 소비되는 최종재에서 경쟁력을 유지했으나 우리는 그게 약한 고리였다"며 "정부가 최종 소비재 수출을 지원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미국이 추진하는 중국과의 디커플링의 핵심은 반도체, 이차전지, 의약품 등 하이테크이고 일반 제품은 오히려 (미국과 중국간) 무역량이 늘어났다"며 "미국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IPEF나 칩4에는 참여를 하되 (한국이) 중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는 것은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는 대중국 무역수지 개선 등을 위해 이달 말 종합수출대책을 마련해 발표할 계획이다. 한중 FTA(자유무역협정) 활용 강화, 무역금융 지원 확대 등의 내용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산업부 관계자는 "한중 FTA를 어떤 식으로 발전시킬 것이냐, 중간재 생산 차원에서의 협력구조에서 최종 소비재 쪽으로 어떻게 무역협력 구조를 확대 발전시켜 나갈것이냐 등이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더 이상 기회의 땅 아냐"...中서 발 빼는 韓 기업들
#지난해 말 기준 삼성전자 중국 현지법인에 고용된 임직원은 총 1만7820명이다. 2016년말 3만7070명과 비교하면 5년새 반토막(51.9%) 감소했다. 중국에 남아있는 삼성전자 생산기지는 쑤저우 가전 공장과 반도체 후공정 공장, 시안 메모리 반도체 공장이 전부다. 이마저도 미국과 중국간 패권다툼이 한층 가열되면서 우리기업들이 추가적인 대중국투자에 나서기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연간 대중 수출 비중이 전체수출액의 25%(1629억 달러)에 달하는 만큼 무턱대고 중국시장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1992년 우리나라가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한 이후 양국은 서로에게 최고의 경제협력 파트너였지만, 최근 국제정세와 양국관계는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2017년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 조치 이후로 국내기업에 대한 차별이 거세졌고, 중국 자체적으로도 높은 경제성장을 거듭하면서 중국을 저임금 생산기지로 활용하던 우리기업들의 대중 진출 전략은 이미 효용을 다한 만큼 새로운 국제질서 흐름에 맞춰 정부와 기업의 대중국 전략도 재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8일 재계에 따르면 최근 중국의 예측 불가능한 방역 정책과 자국 우선주의 등으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현지에 진출한 우리기업 가운데 다수의 기업들이 사업중단이나 철수 등 '탈중국'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렴한 인건비, 구매력 높은 시장 등 세계의 제조공장으로 여겨질 만큼 경쟁력이 높았지만 지금은 미중 무역갈등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재편 움직임, 인건비를 비롯한 비용 증가 등으로 우리기업이 투자를 늘려가거나 사업을 유지할 이유가 줄어들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 6월 한국무역협회 상하이지부가 중국에 진출해 있는 177개 우리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절반이 넘는 55.3(98개사)%의 기업들이 사업 축소·중단·철수·이전 등을 고려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기존 사업계획 유지는 35.9%(63개사), 사업 확대는 7.3%(13개사) 였다.
이미 롯데, 신세계 등 유통기업의 경우 중국의 사드보복 사태로 큰 피해를 보면서 중국시장에서 철수했다. 한때 중국시장에서 새로운 성장동을 찾던 아모레퍼시픽 등 패션뷰티 기업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제조업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삼성전자는 2018년 5월에는 중국 선전 통신장비 공장, 12월에는 톈진 스마트폰 공장의 문을 닫았고 2019년 후이저우 스마트폰 공장의 가동을 중단했다. 이듬해 7월엔 쑤저우 PC(개인용컴퓨터) 생산 설비도 철수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2020년 중국 업체에 LCD 공장을 넘겼고 삼성SDI도 지난해 중국내 배터리 팩 공장 2곳의 문을 닫았다. 현대차는 지난해 베이징 1공장을 중국 전기차 제조사 리샹에 매각했고, 삼성중공업 역시 중국 저장성 닝보시 현지법인을 폐쇄했다. SK그룹의 중국 지주사인 SK차이나는 지난해 8월 중국 SK렌터카 지분 100%를 중국 도요타에 500억원에 매각하면서 중국사업에서 발을 뺐다. LG전자는 2020년 중국 톈진, 쿤산, 선양 3곳의 사업장을 철수했다.
최근엔 미국 정부가 중국을 노골적으로 경제적인 압박에 나서면서 우리 기업들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미국은 대놓고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IPEF(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 칩4(주요 4개국 반도체 공급망 협력체) 등을 추진하며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나섰다. 최근엔 '반도체칩과 과학법(일명 반도체지원법)'의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 인플레이션 감축법(IPA) 등까지 제정하면서 글로벌 기업들의 대중국 신규투자를 사실상 막았다.
당장 우리기업도 피해를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중국 반도체 공장은 미국의 기술이 들어간 신규 반도체 장비의 도입이 불가능해졌다. 중국산 소재부품 의존도가 높은 배터리, 자동차 업계의 타격도 불가피하다. LG에너지솔루션 등 배터리업계의 경우 현재 중국의 의존도가 높은 망간, 코발트 등 중국산 원재료 비중을 낮추지 못하면 미국시장에서 보조금을 받지 못해 가격경쟁력을 갖출 수 없게 된 상황이다. 이는 결국 현대기아차의 미국 내 전기차 시장 점유율 확대에도 악재가 될 수밖에 없다.
여전히 중국은 우리나라 수출의 25%를 차지하는 최대 교역국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수출액의 25%, 수입액의 23%가 중국과 이뤄졌다. 한국의 대중 수출품에서 중간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80%를 넘는다. 무조건적인 '탈중국'이 해답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정부차원에서 적정수준의 외교적 교류와 협력을 통해 중국에 진출해 있는 기업들이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정책방안이 필요하다는 게 재계의 요구다.
유환익 전경련 상무는 "굳이 미국의 압박이 아니더라도 중국도 경제적 수준이 상당히 올라갔고 첨단제품의 경쟁력도 갖추는 등 더이상 저렴한 생산기지로만 바라보고 진출할 시기는 지난게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기업입장에선 이미 상당한 규모의 투자가 이뤄진데다, 여전히 한중 교역비중이 높고 공급망 생태계도 가동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국제환경 변화에 맞춰 국익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정부와 기업의 대중전략을 세밀하게 수정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종=머니투데이 안재용 기자
중국 딜레마에 빠진 기업들
2013년 중국 CCTV는 삼성전자 스마트폰 사후관리(AS)를 비판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당시 삼성전자는 중국 내에서 20%가량 점유율을 기록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다. 그해를 기점으로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점유율은 수직으로 하락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0%대까지 추락했다. 중국 정부가 삼성전자에 비우호적인 여론 조성에 나섰고,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면서 삼성전자의 자리를 잠식해갔다.
반등할 가능성도 여의찮다. 중국은 앱스토어 등 구글의 주요 서비스를 쓸 수 없다. 대신 중국 업체들이 제공하는 별도의 앱스토어를 쓴다. 저작권을 무시하는 불법 복제 콘텐츠도 버젓이 올라와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켜야 하는 삼성전자가 중국 시장을 공략하자고 동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폴더블폰이 새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샤오미 등이 잇달아 아류작을 내놓으면서 이마저도 쉽지 않아졌다. 완성도는 삼성전자에 비하지 못하지만 완전히 대체 불가능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지난 10일 새로운 폴더블폰을 발표하자 샤오미는 다음 날 바로 폴더블폰 신제품으로 응수했다.
중국에 진출한 다른 한국 기업들도 비슷한 상황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이후 ‘한한령’ 등 한국 제품 보이콧이 노골화하면서 한국산의 인기는 급락했다. 현대차는 올해 상반기 중국 시장 점유율이 1%로 지난해(2%)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LG전자, SK하이닉스 등 주요 기업의 중국 사업 비중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마지막 중국 매장인 청두점 지분을 매각하고 철수하기로 했다. 한류와 함께 인기를 끌었던 화장품·패션 업체들도 하나둘 발을 빼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중 무역수지도 악화하고 있다. 올해 5월부터 대중 무역수지는 적자로 전환했고, 이달 들어서도 1~10일까지 8억7000만 달러 적자를 기록 중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30년간 유지된 대중 무역수지 흑자도 더는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미국은 중국과 선을 그으라고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칩4’ 동맹 참여 요구가 대표적이다. 미국 없이 반도체 사업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중국을 포기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그동안 유지해 온 ‘전략적 모호성’을 앞으로도 유지하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첨단 소재나 중간재에 대한 중국 의존도가 여전히 높다는 것도 어려운 요소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총수입액 중 중간재 비중이 50.2%로 절반을 넘었고, 중간재 수입국 중 중국 비중이 28.3%로 가장 높았다. 중국에서 중간재를 들여와 이를 제품으로 만들어 수출하는 게 현재 우리 기업의 보편적 방식이다. 최근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과시키면서 중국산 배제를 사실상 명시했다. 배터리 완성품뿐만 아니라 배터리 소재도 중국산을 쓰지 말라는 의미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배터리 핵심 소재인 전구체 91.8%, 양극활물질 96.7%, 인조흑연 91% 등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만큼 충분한 양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할 수 있는 새로운 공급망을 찾아야 하는 과제가 생긴 것이다.
해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반도체처럼 대체 불가능한 경쟁력을 갖춘 ‘무기’를 가지면 된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전 세계가 소재부터 첨단 기술까지 자기가 가진 모든 걸 무기로 내세운다. 내재화된 기술이나 천연자원 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정부와 민간 모두 머리를 맞대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힘을 합해야 할 때다.
김준엽 산업부 차장 snoopy@kmib.co.kr
착한 중국인은 1989년 다 죽었다”…한국 MZ ‘반중 정서’ 확대
한국인이 보는 중국
지난 2월4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한복을 입은 한 공연자가 손을 흔들고 있다. 베이징 | 연합뉴스
한국인 80% ‘중국에 부정적’
역사·한복·김치공정 논란 등
전통문화 빼앗는 위협으로 봐
경제 중심 관계 ‘한계’ 드러나
수교 후 한 세대가 지난 한·중관계의 미래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한국 내 반중 정서가 커지면서 지난 30년 동안 ‘경제적 기회’를 앞세웠던 한·중관계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전 세계 19개국 국민 2만4525명을 상대로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 한국은 80%가 중국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이 조사에서 일본의 반중여론이 87%로 19개국 중 가장 높았고, 오스트레일리아(86%)와 스웨덴(83%), 미국(82%)이 뒤를 이었다.
한국의 반중여론은 ‘이념’보다는 ‘이익’ 또는 ‘구체적 피해’와 연관돼 있다는 특징이다. 퓨리서치 조사에서 ‘대중관계에서 경제적 이익보다 인권이 더 중요하느냐’는 물음에 미국은 진보의 78%, 보수의 63%가 ‘그렇다’고 답했다. 스웨덴은 진보 91%, 보수 83%가 동의했다. 반면 한국은 보수의 40%, 진보의 28%만 동의했다.
서울시립대 하남석 교수와 석사과정 김명준·김준호씨가 지난해 11월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한국 20대들은 중국을 싫어하는 이유로 ‘교양 없는 중국인’(48.2%), ‘독재와 인권탄압’(21.9%),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를 둘러싼 외교문제’(13.4%), ‘동북공정 등 역사문제’(3%)를 꼽았다.
지난 30년간 한·중 양국이 ‘경제적 기회’ 이상의 가치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강준영 한국외대 교수는 지난 6월 말 고려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경제와 인적 교류에선 ‘최대주의적’ 성과가 있었지만, 안보 분야에선 ‘최소주의적’ 관계만 유지했다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과 북핵 문제에 대한 양국 입장이 달랐던 것도 공통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이유로 꼽았다.
‘경제적 교류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우호적 감정은 2000년대 중반부터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 2006년 중국 정부는 경제정책의 패러다임을 ‘양에서 질’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하며 외국 기업에 대한 혜택을 대폭 줄이고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민간에서도 배타적이고 국수주의적인 모습이 나타났다. 장세길 전북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를 계기로 당시 중국에 진출한 중소기업인들에게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레드 콤플렉스’가 되살아났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기업인들은 여전히 중국을 경제적 기회를 주는 곳으로 인식하고 민족적, 경제적 우월감을 느꼈다. 하지만 2016년 사드 갈등과 한한령, 미·중 갈등과 반도체 무역분쟁 등이 얽히면서 중국은 경제적으로도 불확실한 상황이 됐다.
중국식 소품과 중국식 의상 논란으로 방영이 중단된 드라마 <조선구마사> 사태, ‘한복공정’과 ‘김치공정’ 논란 등에서 나타났듯, 중국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빼앗아 가는 나라라는 인식이 한국 젊은층에게 확고하게 박혀 있다. 한국 인터넷에서는 “착한 중국인은 1989년(톈안먼 사태가 발생한 해) 다 죽었다”는 말이 돌아다닌다.
언론보도가 갈등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 광저우에 거주하는 인류학자 김유익씨는 “김치, 한복 논쟁에 관심을 기울이는 중국인은 매우 소수”라면서 언론의 과장된 보도가 논란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 2월 중국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화제가 된 사건은 한복 논란이나 올림픽 편파판정 논란이 아닌 장쑤성 쉬저우시 펑현의 여성 감금 사건이었다. 저우샤오레이 중국 베이징외대 교수는 “중국에서는 훨씬 더 화제가 된 사건이지만 한국에서는 잘 보도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경향 박은하 기자
경제적 풍요 속 자란 주링허우, 한국 향해 ‘배타적 민족주의’
중국인이 보는 한국
미국 육군이 개발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포대에서 미사일이 발사되고 있다. 미 국방부 자료사진
폭발적 경제 발전으로 G2로 성장한 중국, ‘힘의 외교’ 표면화
달라진 위상·외교 전략은 중국인 정서에 자긍심·우월감 키워
“중·한관계 발전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 장사를 할 수 있어 경제에 좋을 것이고, 대만과의 관계도 단절시킬 수 있다.”
1992년 ‘한·중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의 서명 당사자였던 첸치천(錢其琛) 전 중국 외교부장은 2003년 출간한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에서 한·중 수교에 관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생각을 이렇게 전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중국 내 반대파들을 설득하기 위해 한·중 수교는 ‘유익무해(有益無害)’한 것이란 논리를 내세웠다.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대만을 고립시켜 통일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에 손해날 게 없다는 논리였다.
한·중 수교는 탈냉전 시대에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물이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정치·경제·외교적 측면에서 모두 한국과의 수교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는 압축 성장을 경험한 한국의 경제발전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992년 수교 당시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20달러로 한국(8126달러)의 19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전체 GDP도 4920억달러로 한국(3560억달러)의 1.4배 수준이었다.
지난 30년 동안 중국의 경제 규모는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명실상부한 주요 2개국(G2) 반열에 올라서며 국제적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이는 외교적 태도에도 반영됐다. 한·중 수교 당시 중국은 덩샤오핑이 내세웠던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힘을 기름)’를 외교정책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다. 이후 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 시대 20년을 거치며 G2로 성장한 중국은 유소작위(有所作爲·필요한 일에 적극 나섬)와 화평굴기(和平屈起·평화롭게 부상함)를 내세워 더욱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2012년 이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집권기는 ‘대국굴기’를 표면화한 시기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과 ‘분발유위(奮發有爲·떨쳐 일어나 할 일을 함)’를 앞세운 공격적인 외교 전략이 본격화됐다. 미·중 갈등이 표면화됐고 중국은 ‘전랑(戰狼·늑대전사)외교’를 구사하며 더는 발톱을 숨기지 않았다. 막강해진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힘의 외교’가 시작된 것이다. 2016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결정 이후 중국이 가한 경제 보복을 통해 한국도 쓴맛을 경험했다.
중국의 달라진 위상과 외교 전략은 중국인들의 정서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중 수교 이후에 태어난 중국의 ‘주링허우(九零後·1990년대생)’와 ‘링링허우(零零後·2000년대생)’는 톈안먼 사태 이후 강화된 애국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다. 성장 과정에서 중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을 목격했고, 이전 세대와는 다른 풍족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국가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고 때로는 배타적 민족주의 성향도 나타낸다. ‘샤오펀훙(小粉紅)’으로 불리며 온라인상에서 맹목적인 애국주의를 분출하는 누리꾼 집단을 주도하는 것도 이들이다. 외국기업에 대한 불매운동과 애국소비 열풍의 중심에도 이들이 있다.
중국의 젊은 세대는 한류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2020년 방탄소년단(BTS)의 ‘밴 플리트상’ 수상 소감 논란이나 지금도 때때로 불거지는 김치·한복 논란에서 보이듯 이들은 한국 문화나 연예인을 막연히 동경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적·민족적·문화적 우월감이 강하다.
베이징의 한 한국 교민은 “20여년 전 처음 중국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인을 대하는 중국인들의 태도는 지금보다 훨씬 우호적이었고, 일부러 한국 문화나 언어를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며 “사드 사태 때 같은 반한 감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와는 다른 분명한 인식의 격차가 존재하고 때로는 한국을 그저 변방의 작은 나라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 경향 베이징 | 이종섭 특파원
흔들린 ‘균형외교’…시험대 선 윤 정부
① 지난 30년, 향후 30년
[한·중 수교 30년] 흔들린 ‘균형외교’…시험대 선 윤 정부
“새로운 관리는 옛 장부를 외면할 수 없다.”(중국 외교부 대변인)
“새 정부가 챙겨야 할 옛날 장부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주중 한국대사관 고위 관계자)
최근 한·중 간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문제를 두고 ‘옛 장부’ 논란이 벌어졌다. 중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이른바 ‘사드 3불’ 정책의 유지를 요구하며 옛 장부라는 표현을 들고나왔다. 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 미사일방어(MD) 체계에 참여하지 않으며 한·미·일 군사동맹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문재인 정부의 입장 표명이 중국에 대한 약속 내지는 양국 간 합의인 만큼 새 정부도 이를 이행해야 한다는 취지다.
반면 한국 정부는 사드 3불은 약속이나 합의가 아니라 단순한 입장 표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갚아야 할 장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사드는 한·중관계의 복잡성이 응축된 문제다. 양국 관계뿐 아니라 미·중 전략경쟁과 북한 문제 등이 모두 얽혀 있기 때문이다. 사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자위적 방어 수단이며 제3국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게 한국 정부 입장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미국이 한국에 사드를 배치함으로써 중국의 전략적 안보를 해치려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5년 전 봉합됐던 사드 갈등이 다시 한번 양국 관계의 잠재적 뇌관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한·중관계는 수교 30주년(24일)을 맞아 새로운 시험대에 서 있다. 양국 사이에 놓여 있는 난제는 비단 사드 문제만이 아니다. 격화된 미·중 갈등 속에서 한·미 동맹 강화를 표방한 윤석열 정부의 출범으로 한·중관계는 또 한번 변곡점을 맞고 있다.
‘안미경중’ 지탱해온 한·중관계…윤 정부 ‘안미경세’로 균열
1992년 수교 이후 경제 협력·인적 교류 늘었지만 경색 국면도
중국, 2016년 사드 결정 뒤 경제 보복 가하며 ‘3불+1한’ 요구
한국, 균형 외교 포기한 윤석열 정부 정책으로 불확실성 확대
“안정적 관리 절실…경제와 외교·북핵 문제 분리 대응해야”
윤석열 정부는 미·중 간 전략경쟁하에서 ‘전략적 모호성’과 ‘균형외교’를 포기하고 한·미 동맹을 경제안보와 글로벌 현안까지 아우르는 가치 기반의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확장해 나가기로 했다. 이는 곧 한·중관계의 불확실성 증대로 이어진다. 수교 3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한·중관계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방향 설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 굴곡진 30년, 질적 발전 못 이뤄
돌이켜보면 한·중관계는 수교 이후 지난 30년 동안에도 순탄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1992년 8월 전격적으로 이뤄진 한·중 수교는 냉전 종식 이후 북방정책을 추진하던 한국과 톈안먼(天安門) 사태에서 비롯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개혁·개방 흐름을 가속화하고자 했던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물이었다. 이후 30년 동안 양국 관계는 협력 동반자 관계(1998년)에서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2003년), 그리고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2008년)로 발전했다. 수교 30년의 가장 큰 성과는 경제협력과 인적 교류의 확대였다. 1992년 63억8000만달러 수준이던 양국 간 연간 교역액은 지난해 3015억달러로 47배 넘게 증가했다. 수교 당시 한 해 13만명에 불과했던 양국 간 상호 방문자 수도 코로나19 이전에는 1000만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한·중관계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에 걸맞은 질적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만큼 양국 관계에는 굴곡이 적지 않았다. 2000년 한국이 국내 농가의 피해를 막기 위해 실시한 긴급수입제한 조치로 불거진 ‘마늘분쟁’, 2002년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한 역사왜곡 갈등,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 문제 등은 양국 관계를 경색기로 이끌었다.
북한 문제로 인한 갈등도 많았다.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대북 제재와 규탄성명 채택을 무산시켰고, 최근 북한의 잇단 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경제 문제에서는 양국이 동반성장을 꾀했지만 외교·안보 현안에서는 끊임없이 갈등과 이견을 노출해온 것이 지난 30년의 한·중관계였다.
최근 10년은 한·중관계가 ‘롤러코스터’를 탄 시기로 볼 수 있다. 2013년 취임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이듬해 7월 북한에 앞서 한국을 먼저 방문하며 양국 관계에 훈풍을 몰고 왔다. 2015년 9월에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서방 지도자들이 보이콧한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해 시 주석과 나란히 톈안먼 망루에 오르며 양국 관계는 절정으로 치닫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2016년 한국 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으로 양국 관계는 급전직하했다. 중국은 ‘한한령’(한류 제한령) 등 경제보복으로 응수했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인 2017년 10월 양국이 ‘한·중관계 개선 관련 협의 결과’를 발표하며 갈등을 봉합했지만 여전히 그 불씨가 남아 있는 상태다.
1996년 7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방중을 맞아 베이징 톈안먼광장에 태극기와 중국 국기가 꽂혀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안미경중’에서 ‘안미경세’로
지난 30년 순탄치 않은 여건에서도 그나마 양국 관계를 지탱해온 것은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한국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였다. 30년 동안 한국 정부는 진보와 보수 정권을 막론하고 안미경중이라는 대외정책의 기본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미·중 전략경쟁의 심화는 한국 정부에 쉽지 않은 선택의 고민을 안겼다. 문재인 정부가 추구했던 ‘균형외교’는 지속하기 힘든 ‘줄타기 외교’라는 비판을 받았고, 지난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한·미 동맹 강화를 선택하며 사실상 ‘안미경세’(안보는 미국, 경제는 세계)로 대외정책 기조를 전환했다.
한국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 변화는 곧 한·중관계의 재설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은 지난 5월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경제가 안보고 또 안보가 경제인 경제안보 시대를 살고 있다”며 “한·미 동맹도 경제안보 시대에 맞춰 발전하고 진화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양국 정상은 한·미 동맹을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격상하는 데 합의했다. 한국 정부는 곧이어 대중국 견제 성격의 경제협의체로 평가되는 미국 주도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출범에 참여했고,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한국 정상으로는 처음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도 참석했다. 최근 한국 정부는 중국이 자국에 대한 공급망 배제 시도로 인식하는 미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 ‘칩4’ 예비회의에도 참여하기로 했다.
윤석열 정부가 보여온 일련의 행보는 중국 입장에서 보자면 자국을 겨냥한 미국의 디커플링(탈동조화)과 공급망 배제 시도에 한국이 동참하려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중국은 실제 “디커플링에 반대하고 글로벌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면서 한국의 IPEF나 칩4 참여를 우회적으로 견제해왔다. 한국 정부는 중국을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며 중국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겠다는 입장이다. 윤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지난달 외교부 업무보고에서 “중국이 오해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외교를 하라”고 직접 주문하기도 했다.
사드 문제는 IPEF나 칩4 가입과는 또 다른 성격의 양국 현안이다. 한국은 이를 안보 주권에 관한 문제로 보고 있고 중국도 자국의 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경북 성주 사드기지의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은 최근 사드 3불에 더해 운용 제한을 의미하는 ‘1한(限)’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상호 간에 양보나 타협 불가 사안으로 인식하는 사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는 향후 한·중관계의 중요한 시금석이 될 수 있다.
■ 장기적 관계·안정적 관리 절실
장기적으로는 미·중 간 전략경쟁 심화와 가시화되는 ‘신냉전’ 구도 속에서 양국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기현 한국외대 LD학부 교수는 지난 20일 열린 ‘인차이나포럼’에서 “한·중관계는 양자 차원의 노력과 달리 글로벌 차원의 미·중 경쟁 심화와 경제, 안보, 가치·이념의 디커플링 현상으로 의도치 않은 오해와 반목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미·중 전략경쟁 심화와 블록화는 한국의 의도와 관계없이 중국이 한국을 안보위협으로 인식하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고 진단했다. 이어 “중국은 한국이 미국의 블록에 동참해 자국을 위협한다고 인식하면 경제적 카드를 통해 한국을 고통스럽게 할 것”이라며 “미·중 전략경쟁은 군사안보, 과학기술, 경제무역 등 전방위에 걸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대미 편승은 제2의 사드 사태로 비화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고, 한국은 미·중 블록화 대응 과정에서 양자 선택의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이달 초 발간한 ‘이슈와 논점’에서 “미·중 전략경쟁의 격화와 불안정한 국제정세로 한·중관계의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고, 윤석열 정부 출범으로 인한 양국 관계 약화 가능성도 제기된다”며 “한·중관계의 쟁점이 주로 안보·외교적 현안에 집중돼 있는 만큼 경제와 외교, 북핵 문제 등의 현안을 분리 대응하는 ‘투트랙 접근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경향
딱 한번 임금 인상 요구했는데 날아든 소장···헌법 위의 손배소
①파업에 손배소로 맞서는 기업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에 대형 현수막을 설치하고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현수막에 적힌 ‘노조 탄압 분쇄, 손배 가압류 철회’ 문구가 보인다. 권도현 기자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살고 싶습니다.” 지난 6월 대우조선해양 조선소의 배 안에 ‘감옥’을 만들어 스스로를 가둔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42)의 절박한 외침은 하청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새삼 드러냈다. 51일간의 파업은 임금 인상 타결로 끝났다. 하지만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끝나지 않았다. 대우조선해양은 파업으로 8000억원의 손해를 입었다며 노조를 상대로 손배 소송을 내겠다고 했다.
헌법 제33조1항은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규정한다. 노동자의 생존을 위해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이지만 고용도 불안하고 임금도 낮은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은 임금 좀 더 올려달라고 파업했다는 이유로 거액의 ‘손배 폭탄’을 맞고 있다.
경향신문이 취재한 노동자들은 손배 소송을 두려워했다. 손배 소송 때문에 노조를 탈퇴하고, 협상에서 위축되고, 농성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 한다고 했다. 오랜 시간 이어지는 재판에서 정신적 고통을 받고 가정이 파탄나기도 한다.
2003년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가 손배 소송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목숨을 끊은 지 20년이 지났지만 문제는 오히려 만성화됐다. 간접고용 구조는 확산했다. 하청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원청에 교섭을 요구한다. 원청은 자신들이 하청노동자의 고용주가 아니라며 거부한다. 하청업체와 교섭하라는 것이다. 이 때쯤 ‘불법 파업’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꿈쩍도 하지 않는 원청에 맞서 하청노동자들은 ‘옥쇄투쟁’ ‘점거농성’ ‘고농농성’을 벌인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이 사회적으로 환기돼 ‘실질적 교섭’이 이뤄진다. 교섭 끝에 노동자들은 겨우 임금 인상을 따낸다. 그리고 파업이 끝나면 수십억원, 수백억원, 수천억원의 손배 소송을 당한다. ‘실질적 교섭’의 대가, 임금을 몇 푼 올린 대가가 손배 폭탄인 본말전도식 구조는 일종의 법칙으로 자리잡았다.
노조에 대한 손배 소송을 규제하는 내용의 ‘노란봉투법’은 2015년 19대 국회 때 처음 발의됐지만 20대·21대 국회에서도 진전이 없다. ‘법과 원칙’을 내세우는 윤석열 정부는 노조의 불법행위를 엄단하겠다는 말을 반복하며 손배 소송의 노동권 침해를 방치한다. 손배 소송의 주체는 국가와 기업에서 이제 ‘제3자’로 확대되고 있다. 연세대 학생들은 청소노동자들 집회가 학습권 침해라며 손배 소송을 냈다.
노동자들은 왜 점거와 농성을 파업 수단으로 쓰는가. 지난 5일 화물기사들이 운임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는 하이트진로 강원공장으로 갔다. 하이트진로는 노동자들을 상대로 27억8000만원의 손배 소송을 냈다.
손배 소송을 당한 한 하이트진로 노동자는 손배 소송이 헌법 위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헌법에서 인정하는 농성을 했어요. 힘도, 돈도, 권력도 없다보니까 몸뚱아리로 저항을 하는 수밖에요. 그런데 저들(회사와 경찰)은 못하게 막죠. 화물노동자는 헌법에 나와있는 노동3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거예요.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법과 원칙’은 약자를 보호하는 법인가요, 강자를 보호하는 법인가요?”
지난 4일 강원 홍천군 하이트진로 강원공장 입구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다리 난간 위에 몸을 묶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화물연대 제공
하이트진로 화물기사가 운전대를 놓기까지
지난 5일. 홍천강을 따라 지나온 한적한 도로 끝. 늘어선 화물차들이 나타났다. 2차선 도로의 차선 하나를 가득 메웠다. 푹푹 찌는 아스팔트 위 화물차엔 거대한 맥주 광고가 붙었다. ‘리얼탄산 100% TERRA’. 화물차 주변으론 경찰차가 뒤섞였다. 더운 바람이 불었다. 화물차에 붙은 ‘하이트진로는 운송료를 인상하라’ 현수막이 펄럭였다. 하이트진로 화물기사들이 파업을 시작한지 65일째 되는 날이었다.
하이트진로 이천·청주공장 앞에서 파업을 시작한 이들은 이날 홍천 ‘하이트교’에서 앞에서 경찰과 맞섰다. 하이트교는 하이트진로 강원공장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다. 전날(4일)엔 하이트교에서 맥주 출하 차량을 저지하던 화물기사 5명이 경찰 해산조치에 퇴로가 막혀 다리 아래 강물로 떨어졌다.
“이제는 갈 곳이 없다”며 홍천을 ‘마지막 투쟁지’로 삼겠다던 화물기사들은 열흘 뒤 서울 강남구 하이트진로 사옥 옥상 광고판 위에 올라갔다. ‘노조 탄압 분쇄’ ‘손배 가압류 철회’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 파업 100일째가 다가오지만 운송료 인상 등에 대한 합의는 아직도 요원하다. 다른 구호들만 늘어났다. 이 파업에는 ‘합법의 틀’ 안에서는 어디에도 호소할 데 없는 노동자들의 현실이 놓여있다.
하이트진로 화물기사들이 처음부터 파업을 계획한 건 아니였다. 파업에 나선 이들은 하이트진로 물류 위탁 운송사인 ‘수양물류’ 소속으로, 이천·청주공장 소주를 운반하는 화물기사 130여 명이다. ‘참이슬’ ‘진로이즈백’을 싣고 밤낮 고속도로를 달리던 이들은 “일할수록 마이너스”인 삶을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 파업에 나섰다고 했다.
11년째 하이트진로 화물기사로 일한 박수동씨는 일을 할수록 손해인 날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새벽 6시쯤 공장에 출근해 하루 12시간, 많게는 14시간씩 주 5일 일해도 한 달 수입은 50~100만원 남짓이었다. 월 800만원을 벌어도 화물차 할부금 340만원, 기름값과 도로 이용료 380만원을 제하면 손에 쥐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기름값 폭등으로 상황은 더 나빠졌다. 100~200만원씩 기름값이 추가로 나가는 데도 운송료는 15년째 제자리 걸음이다. 올해 들어 6월까지 내내 ‘번 돈’보다 ‘쓴 돈’이 더 많았다.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돈을 생활비로 썼다.
일을 하는 데도 빚 내기를 반복하는 사정은 화물기사들 사이에서 흔했다. 박준영씨(36)도 5년 동안 하이트진로 화물차를 몰면서 ‘할부를 긁어가며’ ‘돈을 쓰며’ 일했다. 감당할 수 없게 오르는 기름값이 “사람답게 좀 살아보자”란 마음을 들쑤셨다. “화물기사들 대부분 마이너스 통장 하나쯤 끼고 살 걸요” 박씨가 말했다. 반면 하이트진로는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이 작년 동기보다 641% 증가했다.
지난해 12월, 화물기사들은 수양물류에 ‘거리당 운송료 30% 인상’ 등을 요구하며 대화를 시도했다. 수양물류는 2009년 유가 하락을 이유로 운송료를 8.8% 낮췄고, 이후 10년 넘게 운송료를 7.7% 인상하는 데 그쳤다고 화물기사들은 말한다. 같은 일을 하고도 맥주공장보다 소주공장 소속 화물기사들이 30% 정도 낮은 운송료를 받는 점도 문제였다.
화물기사들은 공병 운송까지 거부하며 협상을 요구했지만 수양물류는 응하지 않았다. ‘하이트진로 허락없인 결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화물기사들은 지난 3월 화물연대에 가입했다. 박준영씨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다”며 “화물연대에 가입하면 그래도 하이트진로가 화물기사들 이야기를 어느정도 들어주지 않을까 싶었다”고 했다. 기대는 빗나갔다. 급기야 6월2일 파업에 돌입하며 운전대를 놓았다.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하이트진로 본사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손해배상 소송·업무방해 가처분신청 철회, 해고 조합원 복직, 운송료 현실화 등을 요구하며 점거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파업을 하자 ‘소장’이 날아왔다
화물기사들은 4월5일 교섭 요구안을 담은 공문을 하이트진로에 보냈다. 노조는 “하이트진로가 실질적 사용자로서 교섭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양물류는 하이트진로가 100% 지분을 가진 하이트진로 계열사인 데다, 하이트진로 임원이 수양물류 대표이사·감사 등을 겸하고 있다. 사실상 ‘원청’인 하이트진로가 임금 등 화물기사들 처우의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게 노조의 판단이다. 화물차에 도색한 회사명도 ‘하이트진로’이고, 장기간 일한 화물기사가 다수여서 근무 전속성도 높다고 했다.
하이트진로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교섭을 거부해 갈등 수위가 높아졌다. 화물기사와 수양물류가 풀 문제라는 게 하이트진로 측 입장이다. 하이트진로는 교섭 대신 손배 소송으로 맞섰다. 화물기사들이 “교섭에 나서라”며 이천·청주공장을 점거하자 하이트진로는 6월17일 수양물류 소속 화물기사 등 11명을 상대로 5억7800여만원에 달하는 손배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을 당한 이진수씨(53)는 우편으로 소장을 받아든 당시를 참담했던 날로 기억했다. 협상 테이블에 한 번 앉아보기도 전에 소장부터 받아들었다고 했다. 소장을 가족들이 볼까 걱정도 됐다. 이씨는 “수십년 동안 일해도 평생 보지 못할 돈을 청구했다”며 “최저임금에 가까운 운임을 받아오다가 딱 한번 개선해달라고 요구한 일이 이렇게 큰 죄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소장을 보면 하이트진로는 “화물기사들과 아무런 계약관계가 없다”는 표현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파업을 “불법행위”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파업에 따른 차량 추가 수배 비용, 야근 및 휴일 출고로 인한 물류센터·공장 인력지원 비용 등을 계사해 손해금액을 산정했다. “향후 손해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므로, 손해액이 확정되면 추가로 증액하겠다”고도 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화물기사가 노동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라는 데 있다. 화물기사는 운송사와 위탁계약을 맺고, 운송사가 ‘화주’인 원청과 계약을 맺는 구조이다. 하이트진로가 자신들은 화물기사들과 직접 계약을 맺은 당사자가 아니며 교섭을 거부하는 근거이다.
하청노동자들의 ‘교섭 대상찾기’ 문제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지난달 22일 임금협상 타결로 끝난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 파업과 구조가 비슷하다. 대우조선해양 원청도 파업이 한 달 넘어갈 때까지 하청노조의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하이트진로 화물기사의 경우 법적으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로 분류된다. ‘실질적 교섭’을 제약하는 이중 장치에 막힌 셈이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조합원들의 하이트진로 본사 점거 사흘째인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하이트진로 본사 앞에서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고공농성 승리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노조 파괴, 손배 중단’은 노조의 핵심 요구사항이 됐다. 권도현 기자
소주공장→맥주공장→본사옥상…갈등 격화하는 ‘손배’
손배 소송이 제기된 후 하이트진로 파업 현장은 강대강으로 치달았다. 화물기사들이 충북 청주·경기 이천 소주공장에서 출고를 막으며 파업을 이어가자 하이트진로는 노조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액을 27억8000여만원으로 높였다. 부동산과 화물차에 대해 가압류 신청도 냈다. 수양물류는 파업에 참여한 화물기사 130여명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화물기사들은 파업을 이유로 한 ‘해고’라고 반발하며 복직을 요구했다. 운송료 인상 등을 둘러싼 갈등이 ‘손배 소송 취하’ ‘전면 복직’ 문제로 번졌다. 화물기사들이 양보할 수 없는 요구조건이 늘어나면서 교섭은 더욱 지지부진해졌다. 박수동씨는 “고용승계와 더불어 손배소 취하, 전면 복직이 현재로서 가장 주된 요구사항”이라며 “이런 문제가 해결되어야 운송료 인상 등 논의도 가능할 텐데, 교섭을 하는 중에도 하이트진로가 민형사상 고소·고발을 하는 걸 보면 사태를 완만히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하이트진로와 수양물류 측은 손배 소송을 교섭에서 유리한 ‘카드’로 사용했다. 수양물류는 8월4일 10차 교섭 직후 조합원들에게 “불법행위를 기획·주도한 최소 인원에 대해선 민형사상 책임이 불가피하다”며 “1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8일까지 복귀하면 민형사 절차를 전면 취하하겠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복귀 시한을 넘기면 추가손실에 대한 법적 대응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손배 소송 전면 취하 요구를 포기하면 대다수에 대해선 계약해지를 철회하겠다는 취지이다. 그러면서 수양물류 측이 처음부터 제시했던 ‘운송료 5% 인상안’을 내세웠다. 손배 소송을 회유와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는 셈이다. 화물연대는 이를 두고 “전형적인 노조탄압 시나리오”라고 주장한다. 교섭 해태, 파업에 나선 조합원 해고,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 복귀자에 대한 면책 회유로 이어지는 과정은 곧 파업을 무력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하이트진로는 “화물연대가 공장 진·출입로 차단, 도로점거, 비화물연대 화물차에 대한 물리력 행사 등 불법적 수단을 동원해 당사 운송 업무를 방해하고 있다”며 “불법행위에 대한 손배 청구는 법이 보장하는 정당한 권리행사”라고 밝혔다.
상황은 더 악화됐다. 화물기사들은 교섭안을 거절하고 강경 투쟁에 나섰다. 수양물류 측은 11차 교섭에서 오히려 더 후퇴한 안을 내놓았다. 갈등 수위는 갈수록 치솟았다. 급기야 지난 16일 화물기사들이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 점거를 택하기에 이르렀다.
파업은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 하이트진로는 “분기별로 유가를 반영하는 유류비를 제외하면, 운송료는 소비자물가인상률보다 올랐다”며 하도급법상 하이트진로가 고용 문제에 직접 관여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도 사실상 손을 놓은 상태다. 화물기사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어서 노조법상 쟁의행위로 보기 어렵고, 그래서 개입할 수 없다는 게 고용노동부 입장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하이트진로 사태 등을 묻는 질문에 “법과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정부 입장이 중요하다”고 했다.
파업현장의 노동자들은 ‘법과 원칙’이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느냐고 되묻는다. 박수동씨는 “하이트진로는 ‘하도급법 위반’을 내세우면서 쟁의행위에 개입할 수 없다면서도, 손해배상 책임은 수양물류를 건너뛰고 화물기사들에게 직접 묻고 있다”며 “헌법에 노동3권이 보장돼 있고 국제노동기구(ILO)는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노동권 보장을 권고하는 기준을 제시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선 노동자들이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입법으로 제도가 보완되지 않으면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하이트진로 화물기사 파업 등 유사한 사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임상옥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22일 “특수고용, 원·하청, 플랫폼 노동이 늘어나는데 사용자와 노동자에 대한 노동법의 정의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사용자와 노동자에 대한 정의를 시대에 맞게 보강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경향 김희진 기자 이혜리 기자
이준석과 박지현이 밀려난 진짜 이유
젠더 갈등에 기반한 정치는 확장성·응집성·충성도 한계, 이준석의 보수발 젠더정치는 계속될 가능성 커
대통령선거, 지방선거 등 선거 국면이 끝난 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에서 각각 간판 구실을 했던 이준석 전 당대표와 박지현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힘을 잃고 변방으로 밀려났다. 두 사람이 추락한 구조적 요인은 이대남(20대 남성)·이대녀(20대 여성)를 내세워서 유의미한 정치세력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특정 유권자 집단을 기반으로 지지연합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먼저 확장성이다. 다른 유권자 집단과 공통의 이해관계나 정체성을 구축해야 한다. 둘째는 광범위한 이슈에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응집성이다. 마지막 조건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향한 높은 충성도다. 젠더 갈등에 기반한 정치에서는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옛 동독과 유사한 이대남
이대남 정치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2010년 이후 등장한 유럽의 극우정당들은 반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다. 대표 사례가 ‘독일을 위한 대안’(AfD·대안당)이다. 대안당은 ‘젠더 이데올로기’가 전통적 가족의 붕괴를 일으키고 사회 혼란을 야기했다고 주장한다. 스페인의 극우정당 ‘복스’(VOX)는 2019년 두 차례 총선 캠페인 시기에 인스타그램 게시물 237건을 올렸는데 이 가운데 35건(14.8%)이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독일 대안당의 지지 기반은 옛 동독 지역 남성들이다. 이들은 낙후된 경제 상황에다 자신이 ‘이등 시민’이란 불만이 높다. 여기에 젊은 여성들의 대규모 이주로 극단적인 성비 불균형이 더해졌다. 2015년 기준 옛 동독 지역 작센안할트주는 20~44살 성비가 여자 100명당 남자 117.9명이다. 페트라 쾨핑 상원의원(사회민주당)은 극우정치 연구 과정에서 만난 한 남성이 “만약 당신이 나에게 배우자를 찾아준다면, (반이슬람 이민자 운동인) 페기다 시위에 나서는 걸 그만둘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뉴욕타임스>에 소개했다.
한국의 20대 남성이 처한 상황은 옛 동독 지역과 유사하다. 2020년 기준 출생연도별 성비를 보면 1984년생까지만 해도 여자 100명당 남자 104.7명이지만, 1989년생은 남자 111.4명, 1994년생은 116.2명으로 뛴다. 2000~2005년생의 평균 성비는 여자 100명당 남자 108.1명이다.(표1 참조) 경제구조 변화에다 여성의 교육 기회 확대로 젊은 남성이 질 좋은 일자리를 얻을 기회는 상대적으로 줄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남성성을 거부한다. 정확히는 아버지 세대처럼 살 수 없기 때문에 ‘의무’도 지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마경희 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의 2019년 보고서(‘변화하는 남성성과 성차별’)에 따르면 ‘가족의 생계 책임은 남자가 진다’는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한 비율은 40대와 30대 남성은 각각 16.3%와 25.0%인데 20대 남성은 41.3%였다.(표2 참조) 2020년 경제·인문사회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청년 관점의 젠더갈등 진단과 포용국가를 위한 정책적 대응방안 연구’)에 따르면 청년은 △강한 남성성 요구 △생계 부양 압력 △남성 비난·비하 등의 항목에서 기성세대보다 사회적 압력을 더 심하게 느낀다고
이대남과 이대녀의 공통점
결국 낡은 ‘의무’를 강요하는 사회를 겨냥한 분노 표출이 이대남 정치의 핵심이다. 군복무나 여성가족부에 민감한 것은 부당한 차별을 받는다는 인식에서다. 따라서 실리적이고, 가치지향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내적 응집력도 약하다. 반면 다른 유권자 집단과의 확장성은 떨어진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제도나 예산을 없애는 데 에너지를 쏟기 때문이다. 보수 입장에서 계륵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청년여성들은 기성세대에 견줘 젠더 의식이 강하고,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민감하다.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핵심 경력이 사이버 조직 성범죄인 ‘텔레그램 엔(n)번방 사건’을 추적했던 점이라는 것이 대표적이다. 앞서 소개한 경제·인문사회연구원 보고서는 19~34살과 35~59살 여성에게 각각 범죄 유형별로 불안감을 얼마나 느끼는지 물었다. ‘불법촬영’은 청년세대(60.4%)가 기성세대(33.5%)와 비교해 1.8배, ‘살인·폭력·강간’은 1.76배(청년세대 53.4%, 기성세대 30.3%) 더 불안하다고 답했다.
박선경 인천대 교수의 연구(‘젠더 내 세대격차인가, 세대 내 젠더격차인가?’, 2020년)에 따르면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여성들은 전통적인 성역할과 가부장 문화에 반대했으며, 그 강도는 1990년대생이 더 강했다. 하지만 국가의 개입이나 복지 확대 등 사회·경제적 영역으로 넘어가면 20~30대 여성과 나머지 여성 또는 남성 집단과 차이가 없었다.
여러 연구는 부모 자산이 많고 계층 지위가 높은 청년들은 남녀 불문하고 세금에 부정적이고, 경제적 지위가 각자의 능력에 따른 것이라는 생각이 강함을 보여준다. 한국리서치가 2021년 7월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페미니즘 성향의 20대 여성 비율은 고소득·고학력일수록 높았다. 월소득별로 보면 평균 200만원 미만에선 스스로 페미니즘 성향이라고 답한 비중이 22%, 200만~399만원 27%, 400만~599만원 38%, 600만원 이상은 47%였다.
젊은 여성들의 젠더정치 요구는 범죄·안전 문제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복지, 세금 등 먹고사는 문제가 젠더 이슈와 결합될 가능성은 작다. 박지현 전 위원장이 대체재를 찾기 용이한 ‘젠더 원툴(한 가지만 할 수 있는 선수)’로 갇히게 된 구조적 원인인 셈이다.
젊은 여성의 젠더정치는 범죄·안전 문제
젠더 대립 구도에서 손해를 보는 쪽은 국민의힘이다. 갤럽의 정당 지지율 추이를 보면 20대 남성의 보수정당 지지율은 2013년 상반기 평균 33.5%였다가 2021년 하반기 38.2%로 4.7%포인트 높아졌다. 거꾸로 20대 여성 지지율은 같은 기간 23.2%에서 10.3%로 12.9%포인트 떨어졌다. 이준석 전 대표의 입지가 좁아진 데는 이 20대 여성들의 ‘보수 극혐’ 정서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대남 없이 당내 정치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준석 전 대표 이후에도 보수발 젠더정치가 지속될 가능성이 커 보이는 이유다.
조귀동 <전라디언의 굴레> 저자·<조선비즈> 기자/ 한겨레21
우크라 전쟁 6개월, 세계경제를 수렁에 빠뜨리다
식량난+전력난+인플레이션…커지는 경기침체 우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6개월이 지나면서 세계경제에 드리워진 먹구름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지난 2년간 세계경제를 괴롭혀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에 전쟁이라는 변수까지 더해지면서 전 세계가 침체에 빠질 것이란 우울한 전망에 휩싸였다.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던 중국은 '제로 코로나 정책'을 추구하면서 강력한 봉쇄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세계는 '공급망 위기'에 시달렸다. 여기에 러시아가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서방은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경제제재로 대응했다. 이 두가지 모두 식량과 에너지 무역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는 세계 3위의 석유 생산국이자 유럽의 주요한 천연가스 수입국이다. 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 수백만명을 먹여 살리는 밀 수출국이기도 하다. 에너지 가격과 식량 가격이 급등하면서 전 세계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렸다. 이로 인해 부채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악순환에 빠졌다.
국제통화기금(IMF)는 지난 7월 1년 만에 4번째로 세계 경제에 대한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 올해 1월 4.4%에서 3.6% 다시 3.2%로 하향 조정했다.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 피에르 올리비에 그린차스는 <AP통신>과 인터뷰에서 "세계경제가 곧 경기침체의 가장자리에 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엔식량기구 "올해 41개국 1억8100만 명이 기아 위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식량위기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이전에는 세계 밀 수출량의 10%가량을 공급했다. 특히 식량 위기가 심각한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국가들에 핵심적인 밀 수출국이었다. 가까스로 러시아의 흑해 봉쇄를 풀어 이달 들어 우크라이나 항구를 통한 곡물 수출이 재개돼 급한 불은 끌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수출물량은 전쟁 전 수준에 한참 못 미칠 전망이며 전쟁의 진행 양상에 따라 다시 끊길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에 크게 의존하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유엔식량기구는 올해 41개국 1억8100만 명이 기아 위기를 겪을 것으로 전망했다.
가스관 틀어잠근 러시아, 겨울이 두려운 유럽
러시아 석유와 천연가스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유럽은 직격탄을 맞았다. 유럽연합(EU)은 전체 천연가스의 40%를 러시아에서 수입해왔고, 독일은 55%로 그중에서도 러시아 가스 의존도가 높았다.
서방의 경제제재에 대한 일종의 보복으로 러시아는 유럽으로 보내는 천연가스 공급량을 전년 대비 20%로 줄였다. 또 러시아는 독일로 공급하는 천연가스를 이달말부터 3일간 끊겠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이와 같은 '에너지 무기화'에 천연가스 가격은 작년에 비해 10배 이상 올랐다.
이런 에너지 가격 급등은 독일에서는 제조업 쇠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기업들은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늘어난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하거나 아예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주요국가들이 '에너지 배급제'를 시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 짙어지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가 보도하기도 했다.
연준, 두달 연달아 '자이언트 스텝', 금리인상에 허리 휘는 대출자들
식량과 에너지 가격의 상승은 인플레이션을 가중시키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경기불황 속에 물가상승이 동시에 진행되는 현상) 우려가 커진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지난 5월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린 데 이어 6월과 7월에 연이어 '자이언트 스텝'인 0.75%포인트 인상을 단행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지난달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렸다. 2011년 7월 이후 11년 만의 첫 인상이고, '빅스텝'은 22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가파른 금리인상으로 집세, 학자금 등을 은행에서 대출 받은 이들의 부담은 급등하고 있다. 한국은 높은 주택 가격으로 가계 대출 비중이 높기 때문에 곧바로 경기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금융권에 따르면, 주택담보대출을 비롯한 변동 금리의 기준으로 쓰이는 코픽스(자금조달비용지수)가 1년새 2% 가까이 올랐다. 주택담보대출 금리의 상단은 6%대로 올라섰다.
여기에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환율 문제도 큰 골칫거리다. 파키스탄의 루피화는 달러 대비 가치가 30%가 떨어졌다. 한국도 1100원대이던 환율이 1330원에 육박하면서 13년만에 최고치를 찍고 있다.
러시아도 올해 -6% 경제성장률 전망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도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다. '에너지 무기화'로 유럽 경제가 나락에 떨어지면서 서방의 경제제재의 효과를 둘러싼 논란이 있지만 러시아도 피해를 보는 것은 분명하다.
러시아 경제개발부에 따르면, 지난해인 2021년 러시아의 경제성장률은 4.7%로 코로나19 영향에서 벗어나 회복기의 모습을 보였지만, 올해 2월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시작하면서 다시 역성장세로 돌아섰다. IMF는 러시아의 올해 경제성장률을 -6%로 전망했다.
프레시안 전홍기혜 기자
창문 막고 나무 심고...
22일 한남동 대통령 관저(옛 외교부 장관 공관)에 소나무 등 조경수가 들어서 주거동과 업무동 건물을 가리고 있다(위). 20일 전인 2일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사진에서는 조경수가 없어 창문과 테라스 등이 훤히 보인다. 홍인기 기자·뉴시스
리모델링 공사를 통해 이미 창문 상당수가 폐쇄된 한남동 대통령 관저(옛 외교부 장관 공관)에 이번엔 키 큰 조경수 십여 그루가 들어서 건물을 가리고 있다. 대통령 관저가 남산 산책로 등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는 만큼, 외부 노출을 차단하기 위한 경호 또는 보안상 조치로 보인다.
한남동 대통령 관저 주거동의 4월 25일(위)과 6월 20일 촬영된 모습. 총 10개의 창문 중 4개가 폐쇄돼 있다. 뉴스1·고영권 기자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尹 멘토' 신평 "진보진영, 김건희 논문을 대규모 촛불시위에 활용하려 한단 소문"
"촛불시위로 정권 교체 희망, 적어도 무력화"
윤석열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진 신평 변호사가 21일 "지금 진보진영에서는 김건희 여사의 박사학위논문을 문제삼으며, 이를 9월에 예정된 대규모 촛불시위의 주요 소재로 활용하려고 한다는 소문"이라고 주장했다.
신 변호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그들은 100만인 서명운동 등을 통해 여기에 역량을 서서히 집중시키고 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신 변호사는 "한상혁 방통위원장이나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 같이 지난 정부가 임명한 수많은 공공기관장들이 사표를 제출하지 않고 있는 것도, 상부에서 내려오는 지령에 따라 그때까지는 어떻든 버티려 한다고 한다"며 "촛불시위로 정권을 교체시키기를 희망하고 아니면 적어도 무력화될 테니, 감사원 감사 등이 괴롭고 무서워도 꾹 참고 견디는 것이리라"라고 주장했다.
신 변호사는 "그런데 그들은 자기 측 진영 그 교수의 논문은 이미 서울대 논문검증위원회의 검증을 받았으니 이를 더 이상 문제삼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면 이상하다. 김 여사의 경우 역시 해당대학 논문검증위원회의 인증을 새로이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교수들이 논문을 재검증할 것을 요구하는 주장이 타당하지 않음을 의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욕망의 수레바퀴를 계속 굴리며 김 여사를 공격한다"고 주장했다.
신 변호사는 이어 "진보 진영의 이같은 태도가 또다른 '내로남불'의 보기이고, 또 그들-진보의 일부이기는 하겠지만-의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함을 간단없이 내보이는 좋은 예이다"라고 했다.
신 변호사는 "제발 이제 갓 100일을 넘은 정부를 무력화 또는 전복할 수 있다는 백일몽에서 깨어나라. 그리고 세상을 그처럼 각박하고 거친 눈으로만 바라보지 마라. 그보다는 5년간 열심히 자기정화의 과정을 거치고, 국민의 신뢰를 얻기에 집중하라. 그러면 국민은 당연히 다음 정부를 진보 쪽으로 택할 것이 아닌가? 그 5년을 못 참고 당장 판을 뒤집어엎겠다는 일부 진보 모험주의자들의 만행이 참으로 역겹다"고 주장했다.
프레시안 이명선 기자
8년 전 비극처럼…"미안하다" 남기고 떠난 수원 세 모녀
생활고에 건보료 16개월 밀렸는데 아무도 몰랐다
빚독촉·병마 시달리다 세상 등져
수원에서 일어난 세 모녀의 비극으로 뉴스룸을 시작합니다. 보증금 300만원, 월세 40만 원짜리 방에 살며 빚독촉에 시달리던 세 모녀가 세상과 등졌습니다. 이들은 모두 병마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미안하다' 였습니다. 8년 전 정말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생을 포기한 송파 세 모녀와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빈곤층을 찾아내고 도와주는 게 우리 사회가 할 일인데, 그때도 지금도 세 모녀는 마지막 순간에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기자]좁은 골목길 사이로 구급차 한대가 들어서고 잠시 뒤, 경찰의 감식 차량도 뒤를 따릅니다. 어제(21일) 오후 경기도 수원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60대 여성과 40대 두 딸이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이들이 살던 곳은 방 한칸과 거실 겸 부엌이 딸린 집이었습니다.
집 안은 옷가지와 잡동사니가 뒤섞여 있었고, 음식을 해 먹은 흔적은 없었습니다.
숨진 세 모녀는 숨지기 전까지 생활고를 겪은 걸로 알려졌습니다. 60대 엄마는 암 투병중이었고, 두 딸도 난치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병원비를 감당하기도 어려웠는데, 빚 독촉에도 시달렸던 걸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도움 청할 곳도, 이웃과의 접촉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웃 주민 : 다 어렵죠. 이쪽에 사는 사람들. 저도 다 여기 다 원룸 사는 사람들인데. 깜짝 놀랐어. 같이 옆방에 이렇게 살아도 몰라.]
숨진 세 모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미안하다'였습니다.
[건물주 딸 : 6월 11일 날 내야 되는 월세를 이제 7월 4일 날 저한테 전화를 주셨어요. 병원비 정산하느라고 여력이 없어서 좀 늦어졌다. (건물주에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8년 전,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진 '송파 세 모녀'가 남긴 마지막 말도 '죄송하다'였습니다./ jtbc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여러 차례 엿보인 ‘비극의 전조’를 그냥 지나쳤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망 사건’, 2020년 ‘방배동 모자 사망 사건’ 등 잊을 만하면 복지 사각지대의 아픔이 반복되고 있지만 위기 가정을 발굴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미흡해 보인다.
지자체도 손을 놓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권선동 주민센터 관계자는 “숨진 가족이 기초생활수급 등 복지서비스를 신청하거나 상담한 적이 없다”면서 “전입신고라도 했다면 확인 방문을 통해 어려움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류마저 단절... '찾아가는 복지' 무색
오랜 생활고 탓에 외부와의 교류를 단절하는 전형적 특징도 보였다. 사건 전까지 이 가족을 아는 주변 이웃은 거의 없었다. 같은 골목에 사는 60대 남성은 “어제 경찰이 와서야 사람이 죽은 줄 알았다”고 했다. B씨도 “집주인인 어머니조차 A씨 가족 얼굴을 본 게 지난 2년간 한 번밖에 없다고 하더라”며 안타까워했다.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는 가족 비극이 되풀이될 때마다 정부와 지자체는 ‘찾아가는 복지’를 다짐하지만, 복지망은 여전히 성글다는 게 다시 한번 드러난 셈이다./박지영 기자 jypark@hankookilbo.com
경찰, '박정희 독재' 끌어들여 '대통령실 앞 집회 금지' 주장
경찰이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세력의 반헌법적 행태를 끌어 들여 '용산 대통령실 앞 집회 금지'를 주장하고 나섰다. '용산 대통령실 앞 집회 금지' 문제를 두고 참여연대와 소송 중인 경찰은 최근 법정에서 박정희가 군사쿠데타 직후 만든 독재 기구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만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의 입법 취지에 따라 대통령 집무실 앞 집회를 막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들고 나왔다.
뉴스타파는 지난달 경찰이 대통령 집무실을 집회와 시위로부터 지키기 위해 시민단체들과 각종 소송을 벌이는 과정에서 얼마나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는지 보도한 바 있다.
경찰과 참여연대, '대통령실 집회금지처분 취소 소송' 재판 시작
지난 18일 서울행정법원에서 참여연대와 경찰의 '대통령실 앞 집회금지처분 취소 소송' 1심 첫 변론기일이 진행됐다. 참여연대가 경찰의 집회금지처분에 반발해 소송을 제기한 지 3개월 만이다. 참여연대는 지난 5월 용산 대통령 집무실 근처에 집회신고를 했다가 금지당했다. 경찰은 '대통령 집무실도 관저에 포함된다'는 논리를 들어 용산 대통령 집무실 100m 이내 집회를 막았다. 경찰은 참여연대 외에도 여러 시민단체가 낸 대통령실 주변 집회 20여 건을 모두 불허한 바 있다.
본안 소송에 앞서 진행된 집행정지 가처분 사건에서 법원은 일관되게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은 다르기 때문에 집회를 불허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있다. 참여연대와 경찰이 벌이고 있는 소송은 앞으로 비슷한 내용의 여러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찰은 참여연대를 포함 총 6개 시민·노동단체와 소송을 진행 중이다.
'대통령실 앞 집회금지처분 취소 소송'의 핵심 쟁점은 '대통령 집무실이 대통령 관저에 속하는 개념으로 봐야 하는가'이다. 집시법은 "대통령 관저 100m 이내에서는 집회와 시위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집무실이 관저에 포함된다고 법원이 판단하면, 앞으로 용산 대통령 집무실 100m 이내 집회·시위는 완전히 금지된다. 반대로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서로 다른 공간이라는 판단이 나오면, 대통령실 주변 집회는 법적으로 가능해진다.
지난 18일 첫 변론기일에서도 경찰과 참여연대는 기존 주장을 반복하며 다퉜다. 경찰은 "집시법상 관저를 '대통령의 주거 공간'으로만 사전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관저는 대통령 집무실도 포함하는 개념이다"라고 주장했고, 참여연대는 "집시법에는 '대통령 집무실이 집회금지구역'이라는 조항이 없다. 대통령 관저가 집무실도 포함한다고 보는 건 과도한 법 해석"이라며 맞섰다.
이렇듯 쟁점이 비교적 단순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재판이 빨리 끝날 것으로 기대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양측이 각자의 주장을 하는 변론기일은 한 번으로 족해 보인다. 새로운 내용이 나올 게 별로 없어 보인다. 일반적이라면 바로 선고기일이 잡힐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경찰, "집시법 제정 취지 살펴야 한다"며 기일 추가 요청
그런데 경찰은 법정에서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집시법에 있는 대통령 관저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면, 집시법을 처음 만들 때의 입법 취지를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는 이유였다. 지난 17일 법원에 제출한 준비서면에서도 경찰은 집시법의 제정 목적을 언급하며 이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시법은 처음 만들 때부터 대통령 관저와 주요 공관을 집회금지구역으로 규정했는데, 가장 중요한 대통령 집무실을 집회금지구역에서 뺐을 리 없다는 논리였다. 아래는 경찰이 법원에 낸 준비서면 내용 중 일부다.
제정 집시법이 일반적인 중앙관서까지 보호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대통령의 집무실은 더더욱 보호 대상에 해당하였음에 의문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제정 집시법의 구조, 문언 및 입법 목적을 정리하면.. (중략).. '대통령 관저'는 당연히 대통령의 집무실과 거주지를 포괄하는 용어로 해석돼야 합니다.
'대통령실 집회금지처분 취소 소송' 경찰 측 준비서면 (2022.8.17.)
이런 주장을 하면서 경찰은 재판부에 "집시법 제정 당시의 입법 취지와 대통령 관저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자료를 찾을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재판부는 경찰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10월 6일 추가 변론을 진행하기로 했다. 참여연대의 소송 대리인인 김선휴 변호사는 "증거 조사보다는 법리 판단이 쟁점인 사건이고, 이미 양측 모두 집시법의 법률 해석에 대한 주장을 제시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첫 기일에서 변론이 종결될 것으로 봤다. 지금처럼 법률상 근거 없이 기본권인 집회의 자유 침해가 장기화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경찰이 주장한 '집시법의 입법 취지'... 확인 결과 핵심은 '친-독재와 억압'
그럼 경찰이 법정에서 주장한 '집시법의 입법 취지'는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선 먼저 집시법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집시법은 지난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등 군부세력이 국회를 해산하고 만든 초헌법적인 독재 기구다. 입법·행정·사법 3권을 모두 장악했고, 헌법마저 뛰어넘는 조치와 정책을 일삼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8월 '집회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만들어 자신들이 정한 11가지 경우를 제외한 모든 집회를 금지했다. 그리고 1962년 12월 31일, 이 임시조치법을 폐기하고 지금의 집시법을 처음 만들었다.
1962년 당시에도 우리 헌법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를 규정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함부로 집회·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해선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집시법을 제정하며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폐지될 때까지는 시위를 주최하고자 하는 자는 48시간 전에 관할경찰서장 또는 경찰국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을 만들어 넣었고, 이를 어기면 5년 이하 징역에 처하게 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반헌법적인 집회 허가제'가 법률에 명문화된 것이다.
박정희 군부세력은 또 집시법에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집회·시위는 금지"라는 조항을 넣어 사실상 국가가 마음대로 집회·시위를 금지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후 이 조항은 수많은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데 사용됐다. 대통령 관저와 중앙관서, 서울시청과 부산시청 같은 지방관청, 기차역 주변 200m 이내 등이 집회·시위 불가 지역이 됐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의 박정희. 박정희는 1961년 7월부터 대통령 취임 전날인 1963년 12월 16일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지냈고, 그사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집시법의 입법 취지는 국가최고재건회의 회의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새 헌법의 발효시까지는 원칙적으로 시위는 하지 못하게 하고, 단 평화적인 시위에 한하여 허가제로 함으로써 점차 훈련을 시키는 방향으로 함이 좋겠음.
국가최고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 회의록 중 박정희 발언 (1962.12.31.)
1962년 집시법 제정 취지에 '2022년 경찰 주장'은 없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경찰은 대통령실 앞 집회를 막기 위해 반헌법적으로 만들어진 집시법의 입법 취지까지 끌어들였다. 하지만 경찰이 원하는 바를 이루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뉴스타파가 집시법이 만들어진 1962년 당시 각종 기록을 확인했지만 '대통령 관저가 집무실을 포함하는 개념',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이 모두 집회금지 구역에 해당한다'는 등의 내용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확인한 기록은 국가재건최고회의 회의록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업무 일지다.
뉴스타파가 대통령기록관을 통해 확보한 1962년 12월 31일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업무일지. 여기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는 내용만 있을 뿐, 경찰이 찾겠다고 주장한 '대통령 관저의 의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1963년 내무부 치안국(현 경찰청)에서 낸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해설'도 찾아봤다. 하지만 집시법에 있는 주요 조항의 의의와 내용을 상세히 해설한 35쪽 분량의 이 자료에서도 '대통령 집무실과 대통령 관저의 범위는 어떻게 되는지', '대통령 집무실이 관저와 하나의 공간이기 때문에 집회나 시위를 불허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시사타파 홍주환
다주택자 8만명, 공시가 3억원 이하 지방 저가주택 34조원어치 ‘싹쓸이’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아파트 전경. 강윤중 기자
지난 3년 반 동안 다주택자 8만여 명이 공시가격 3억 원 이하 지방 저가주택 34조 원어치를 ‘싹쓸이’한 것으로 나타났다. 윤석열 정부는 그러나 공시지가 3억원 이하 지방주택은 양도소득세와 종합부동산세 산정시 포함시키지 않는 세제 혜택을 내놓으면서 사실상 투기를 독려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3일 김회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19년 1월부터 올해 6월 말까지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 공시가 3억 원 이하 주택을 2건 이상 구입한 매수자 수는 7만8459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들이 매입한 공시가 3억 원 이하 지방 저가주택은 21만1389건으로, 액수로는 33조6194억 원에 달한다. 주택을 2건 이상 구매한 사실상의 다주택자들이 공시가 3억 원 이하 지방 저가주택을 쓸어 담은 셈이다.
지방 저가주택 구매건수가 2건 이상인 다주택자들의 연령대별 매수건수는 40대가 6만3931건(10조 6645억 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50대 5만5601건(8조1393억 원), 60대 이상 4만4598건(6조 3330억 원)으로 나타났다. 자기자본이 부족한 20대 이하의 지방 저가주택 구매 건수도 8882건(1조 3531억 원)에 달했다.
김 의원은 “해당 인원들의 대다수는 가족찬스나 갭투자를 통해 자금을 조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공시가 3억 원 이하 지방주택을 양도소득세와 종합부동산세 산정 때 주택 수로 치지 않고, 다주택자 중과세율을 폐지하는 윤석열 정부의 세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이 같은 ‘다주택자의 지방 저가주택 쓸어담기 경향’은 더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김 의원은 “윤석열 정부식 다주택자 세금 감면은 결국 지역 저가주택을 투기세력의 먹잇감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외지인이 지역에 들어와 집을 쓸어 담고, 집값을 올린 다음 ‘개미털기’에 나서면 결국 피해를 받게 되는 것은 삶의 터전을 지역에 두고 있는 실수요자”고 주장했다. 이어 “부자감세 일변도의 세제 정책을 철회하고, 국민들의 주거안정을 확보할 수 있는 정책을 세심하게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경향 류인하 기자
저소득층이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진짜 이유
계급배반 투표에 대한 이재명 의원의 해법은 놀라웠다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는 분이 우리 사회에 일정 포션으로 있는데, '서민과 중산층?', '부자는 적인가?' 이런 게 있는데, 제가 아는 바로는 고학력·고소득자, 소위 부자라고 하는 분이 우리 지지자가 더 많습니다. 저학력·저소득층이 국민의힘 지지가 많아요.
안타까운 현실인데, 언론 때문에 그렇죠. 언론 환경 때문이에요. 전 부자를 배제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요새 '민주주의를 넘어 공화주의로 가야 한다' 이런 얘기도 많아요. '함께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세금 많이 내는 부자들을 존중하는 사회가 돼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난 7월 2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유튜브 라이브에서 한 이 말은 많은 논란을 불렀다. '편 가르기', '선민의식', '이분법적 인식'이라는 비판이 비등했다. 그러나 한국의 선거에서 대체로 저학력·저소득층이 보수정당을, 고학력·고소득층이 민주당을 더 많이 지지해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이재명 의원의 발언에 담긴 이 이른바 '계급배반' 투표 현상에 대한 지적이 아니었다. 이 현상에 대한 그의 진단과 해법, 그리고 이 중차대한 문제제기에 대한 민주당의 미지근한 반응이 놀라웠다.
이재명 "부자 존중하는 사회 돼야"
그의 지적처럼 분명 보수 쪽으로 경사된 우리 언론지형도 이 현상의 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진단은 그간 정치학계에서 꾸준히 지적해왔던 계급배반 투표의 중요한 원인 두 가지를 도외시하고 있다.
하나는 저소득층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고연령층이 사회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안보문제를 중시해 지지정당을 결정하며 이는 보수정당에 대한 압도적 지지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젊은 저소득층에서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며 계급투표 성향이 강화되어 왔다. 이는 민주당이 이들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만들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원인은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란 표방과 달리 민주당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해서 이들에게 자신들의 정당이란 일체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보수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청·중년 저소득층의 상당수가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에 불참하거나 혹은 무당파가 되는 데에는 이런 원인이 크게 작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이 의원의 진단과 달리 나는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더 놀랐던 것은 계급배반 투표 현상에 대한 이 의원의 진단이 아니라 그 해법이었다. 언론이 문제라고 진단했으니 논리적으로는 언론개혁을 얘기할 법도 했다. 그런데 이 의원이 제시한 해법은 놀랍게도 부자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니, 부자들로 지지기반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피케티에 따르면 고학력자이면서 고자산가인 사람들(상인 우파)은 여전히 대표적 우파정당에 투표하지만 고학력자들(브라만 좌파)은 대표적 좌파정당에 투표한다. 그 결과 주요 정당들은 모두 엘리트들만을 대표하게 되었다. ⓒ 셔터스톡
이 의원의 이런 대답에서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저소득층의 좌파 정당 이탈과 극우화에 대한 토마스 피케티의 분석이 떠올랐다. 피케티는 1980년대 이후 불평등 심화가 왜 계급정치의 강화가 아닌 외국인 혐오 포퓰리즘과 정체성의 정치(젠더, 종교, 장애, 민족, 성적지향, 문화 등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배타적인 정치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 또는 사상), 그리고 계급정당 체계의 동요로 귀결되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세 나라를 사례로 대표적인 좌파정당의 지지자 변화를 그 이유로 지목했다. 이 좌파정당들은 60년대까지는 저학력자=저소득자가 투표하는 정당이었으나 점차 고학력자=중간 이상 소득자가 투표하는 정당으로 변해왔으며, 이에 따라 이들 정당의 정책 역시 지지자들의 이익과 정서에 맞게 변해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고학력자이면서 고자산가인 사람들(상인 우파)은 여전히 대표적 우파정당에 투표하지만 고학력자들(브라만 좌파)은 대표적 좌파정당에 투표한다. 그 결과 주요 정당들은 모두 엘리트들만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것이 좌파정당이 심화되는 불평등에 대한 민주적 대응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이유이자, 극우 포퓰리즘이 창궐하는 원인이다.
브라만 좌파화가 대안인가?
따라서 피케티에 의하면 좌파정당들의 지지기반 변화(그리고 두 지지기반을 조화시키지 못하고 점차 브라만 좌파의 정당이 되어간 것)는 이 정당들의 위기의 해법이 아니라 원인이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위기의 해법은 강력한 재분배 정책이다. 좌파정당이 강력한 재분배 정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민주적 통제를 달성할 때 저소득층의 분노가 극우정당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지 않을 것이며, 민주주의가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어느 때보다도 양극화되었던 지난 대선에서 이른바 '강남좌파'와 '수도권 지지층'의 지지상실 때문에 민주당은 '대중정당화', 즉 포괄정당적 성격의 강화를 모색하게 됐을까? 그러나 이미 민주당은 충분히 포괄정당적 면모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자를 배제하지 않는, 부자도 대변하는 정당으로 향한 한 걸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브라만 좌파화가 민주당의 대안인가? 한 정당이 부자와 사회경제적 약자를 모두 대변하는 것이 가능한가? 민주당은 누구를 대변하는 정당인가?
연달아 큰 선거에서 패배하고 전당대회를 코앞에 둔 지금 민주당에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을까 싶은데 막상 당 내부에서는 당헌 80조 개정이 훨씬 더 중요한 현안인 것 같다. 민주당은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김영순(soko)/ 오마이뉴스
입양아동이 죽을 것 같다고요? 다른 아이를 보내드릴게요"
덴마크 입양인들, 한국 정부에 국제입양에 대한 전면 조사를 요청하다
입양아동이 죽을 것 같다고요? 다른 아이를 보내드릴게요"
1974년 한국에서 덴마크로 입양된 A씨는 자신의 사연을 통해 한국의 국제 입양이 얼마나 많은 불법, 부정으로 점철돼 있는지 얘기한다.
▲ 1950년대 홀트씨양자회가 마련한 전세기를 타고 미국으로 이동하는 입양 대상 아동들. 100여명의 아동을 한꺼번에 수송하기 위해 특별기를 마련해 띄웠고, 종이 상자로 임시 아기 침대를 만들어 태워보냈다. ⓒ홀트아동복지회 50년사
그의 입양부모는 건강과 영양상태가 양호한 6개월 아이를 입양하기로 하고 이를 확인해주는 사진과 입양 서류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덴마크 공항에서 받은 아기는 온몸에 종기가 나있고, 또래의 아이들과 달리 전혀 눈도 맞추지 않았고, 주변 자극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영양실조에 걸린 6개월 아기였다.
뇌수막염 걸린 아기를 비행기에 태워 덴마크로…같이 보낸 아동은 비행기에서 사망
간호사였던 양어머니는 아이의 건강 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고, 즉시 병원으로 데려갔다. 아기는 덴마크에 도착한지 사흘째 되는 날 중환자실에 긴급 입원했다. 종합병원의 정밀 검사를 통해 아기는 일본 뇌수막염에 걸렸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일본 뇌수막염은 아시아에서만 널리 퍼져있어 덴마크에선 드문 질병이라 정확한 병명을 확인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양어머니는 입양기관에 연락해 이 상황을 알렸다. "어머니는 덴마크의 입양기관에 전화해 아기가 죽을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그러자 입양기관의 담당자는 '부인 걱정 마세요. 당신의 아기가 죽으면 다른 아기를 입양하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그의 양부모들과 함께 한국에서 오는 입양아를 기다리던 다른 덴마크 부부는 아이를 받지 못했다. 그 부부가 입양한 아이는 한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긴 비행 도중 사망했고, 경유지인 파리에서 한국으로 다시 돌려보내졌다.
"저는 영양실조나 병에 걸렸거나 죽은 한국 입양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권위주의 시대 입양아동은 이들이 장시간 비행을 할 수 있는지 여부와 상관 없이 포장해서 운송돼야 하는 '상품'이었습니다."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그룹(Danish Korean Right Group, 이하 DKRG) 공동대표이자 변호사인 피터 뭴러(Peter Møller, 한국명 홍민)씨의 주장이다.
175명의 한국 출신 덴마크 입양인들로 구성된 DKRG는 23일 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국제입양으로 인한 인권 침해와 관련된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DKRG는 이날 175명 중 53명의 개인별 조사 신청서를 취합해 제출했다.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해외입양인들이 진상 조사 요청서를 제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들은 진실화해위를 상대로 "해외입양 과정에서 강압, 뇌물, 문서 위조, 부실 행정, 문서 및 기록 미비, 가짜 고아 호적 등을 통한 불법 입양의 양상이 나타났다"면서 "해외입양은 결코 입양기관 단독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정부의 허용, 승인, 허가가 전제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 정부가 적극적 작위(作爲)이거나 소극적 부작위(不作爲)를 통해 불법 입양에 개입되고 해외입양인 인권침해를 초래하였는지 여부를 밝혀주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175명 덴마크 입양인들이 한국 정부에 진상 규명을 요청하다
뭴러 씨는 <프레시안>과 서면 인터뷰에서 지난 5월부터 DKRG 모임에서 진실화해위에 진상 규명을 요청하기 위한 작업을 해왔다고 밝혔다.
그는 "입양기관들이 입양서류를 위조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입양기관들이 입양인들의 신분을 조작했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입양기관들이 국제입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우리 대다수를 서류상 고아로 만들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라면서 한국 정부 차원의 조사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덴마크 뿐아니라 미국, 네덜란드, 스웨덴, 핀란드 등 다른 나라로 보내진 경우도 유사하다고 강조했다.
2012년 입양특례법 개정으로 가정법원의 입양재판을 거치도록 하기 이전까지 한국에서 국제입양은 입양기관을 통한 '대리입양'의 형태였다. 외국의 입양부모가 한국을 직접 방문할 필요 없이 입양기관을 통해 아동의 사진과 서류를 보고 결정했다. 입양아동이 비행기에서 사망하는 일은 1950-60년대 미국으로 100명 이상의 아동을 전세기에 태워 한꺼번에 입양 보내는 과정에서도 발생한 적이 있다고 <홀트아동복지위원회 50년사>에도 기록돼 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 지금까지 국제입양된 한국 출신 아동은 약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동을 가장 오랫동안 국제입양 보낸 나라다. 덴마크에 입양된 이들은 약 9000명이다. 이들 중 절대 다수인 7790명(88.4%)이 권위주의 정권시대인 1963년부터 1993년 사이에 보내졌다. 덴마크로 온 입양인들은 홀트아동복지회와 한국사회봉사회(KSS) 두 입양기관을 통해 보내졌다.
입양대상 아동의 신분에 대한 조작 내지 은폐는 입양인이 사후에 자신의 친생가족을 찾기 어렵게 한다. DKRG의 태 양 씨(49세)는 27살이던 해에 한국을 방문해 홀트아동복지회를 방문했다. 자신의 친생가족에 대한 기록을 얻고 싶었지만 입양기관은 그에 대한 자료가 없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한국의 방송사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입양기관이 자신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방송사가 문의하자 입양기관은 두툼한 입양서류 파일을 가져왔고, 결국 이 정보를 바탕으로 방영된 TV 프로그램을 통해 그는 친아버지 쪽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얼마 뒤 친어머니까지 만나게 됐는데, 이를 통해 양 씨는 입양서류에 기록된 자신의 출생연도와 출생지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됐다. 그는 "결국 입양기관은 내게 거짓말을 했다"며 자신이 방송에 출연하지 않았더라면 친생가족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터 뭴러 씨도 10년 넘게 친생가족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의 양부모는 자신 이외에도 덴마크, 필리핀에서 아동을 입양했는데, 이들 중 한국 출신인 자신만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친생가족을 찾지 못했다.
"나는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입양됐습니다. 10년 전부터 친생가족을 찾으려고 노력을 해왔는데, 이번에 한국에 들어와 일주일 전에 홀트를 방문했습니다. 직원들에게 입양 서류 원본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여기 있는 제 입양 폴더에는 지난 10년 동안 홀트가 내게 보낸 서류보다 더 적은 수의 서류가 보관돼 있었어요. 그래서 입양기관을 직접 방문해서 얻은 정보가 과거 이메일을 통해 받은 정보보다 더 적습니다. 홀트가 내게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한국 정부도 입양 서류 '세탁'을 도와…이제 진실을 밝혀내 입양인들과 화해할 때"
이들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인 자신의 '정체성'을 알권리 전혀 담보하지 못하는 한국의 입양제도와 관련해, 입양기관의 전횡을 방조해온 한국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다.
"입양인들의 입양 서류는 한국 중앙정부 부처와 지자체의 우표와 서명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는 한국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입양기관이 입양 서류를 '세탁'하는 것을 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제 입양 관련 업무를 감독하고, 입양 대상 아동에게 비자를 발급하고, 이주 후 대한민국 국적을 박탈하는 일은 각각 보건복지부, 외교부, 법무부 소관이다.
지난 2021년 네덜란드 정부가 국제입양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꾸려 발표한 보고서에도 한국 문제가 거론됐다. 이 보고서에는 한국 국제입양 사례에서 △개인정보 누락/문서 누락 △문서위조 △행정착오 △사기와 부패 등의 문제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DKRG는 "네덜란드 위원회가 더이상 조사를 하지 못한 것은 한국 (정부와 입양기관을 조사하는 것이) 위원회의 권한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한국 정부의 조사가 필요한 또 다른 이유로 꼽았다.
이처럼 '공동 책임자'인 한국 정부가 과연 조사 요청을 받아들이겠냐고 묻자 뭴러 씨는 "오늘날의 한국 정부는 독재 시대와는 다르기를 바란다"며 "저를 포함해 세계의 수만명의 입양인들은 한국 정부가 요청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큰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는 한국을 사랑합니다. 한국 정부가 스스로 설치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을 밝혀내서 우리가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 위원회가 우리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입양인들의 인생을 바꾸는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정근식 진실화해위 위원장은 국제입양 문제에 대한 조사 가능성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7월 <뉴시스>와 인터뷰에서 "해외로 입양된 사람 중 본인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분들이 많다. 가을쯤에 직권조사할 수 있는 부분을 특정하는 등 윤곽이 잡힐 것"이라고 말했다. 2기 위원회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개정됨에 따라 2020년 12월 활동을 시작했다. 위원회 조사 기간은 3년이고, 1년 더 연장할 수 있다.
프레시안 전홍기혜 기자
"윤 대통령이 반지하 안에..." '중앙' 부사장의 역대급 '윤비어천가'
일가족 3명 사망 신림동 주택 찾은 일화 소개하며 상찬... 타 언론과 비교돼
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써야 하나. 취임 100일 만에 이처럼 많은 지지율 여론조사가 쏟아진 게 윤 대통령이 처음이지만, 이토록 많은 대통령 비판 칼럼이 나온 것도 내 기억엔 처음이다." - 22일자 <동아일보> '[박제균 칼럼]대통령 권력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또 대통령 비판을 해야 하나'라는 보수신문 논설주간의 한탄이 이채롭다. 취임 100일 이전 지지율이 20%대로 폭락하면서 소위 보수언론들도 이러한 비판 대열에 동참한 바 있다.
<동아일보> 박제균 논설주간은 이를 두고 "과거에는 있었던 '허니문' 기간이 사라진 것, 문재인 정권 이후 어느 때보다 진영으로 갈라진 언론 풍토가 큰 이유일 것"이라며 "여기에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필자들도 비판 글을 양산(量産)한 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고 풀이했다.
이어 박 주간은 "무엇보다 윤 대통령은 권력의 속성, 최고 권력자의 처신에 대한 숙고의 시간이 부족해 보인다"며 "100일간 '대통령 신고식'을 호되게 치른 윤석열은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깊이 고민했으면 한다. 대통령 권력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며 글을 맺었다. 해당 칼럼의 비판 수위는 보수언론을 대표하는 논설주간의 칼럼 치고는 무척이나 셌다.
지난 한 주 윤석열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사에 이어 취임 100일 기자회견 모두 발언을 통해 나름의 국정 철학과 향후 과제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북한을 향한 '담대한 제안'에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어리석음의 극치" "윤석열 그 인간 자체가 싫다"라고 격하게 응수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 모두 발언은 자화자찬이란 평가가 우세했다.
<동아일보>가 "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써야 하나"라고 한탄한 날, <조선일보> 역시 사설과 외부 칼럼으로 대통령 비판에 가세했다. '대통령실 개편, 대통령 주변 관리 대책도 시급하다'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대통령 배우자와 친인척, 측근 감시 기능이 완전히 공백 상태"라고 꼬집은 뒤 "참모 조직과 면면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통령 주변이 국민 앞에 한 점 의혹 없이 당당하도록 관리하는 체제를 갖추는 것도 시급한 과제"라고 주문했다.
외부 칼럼은 수위가 더 셌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대통령 취임 100일 회견에 빠진 것들'이라는 칼럼을 통해 "회견을 지켜본 뒤 대통령이 지지율 하락의 근본 원인을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그 무엇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려는 윤 대통령의 겸허한 태도가 우선 중요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동아> <조선>과 다른 <중앙>의 '윤비어천가'
▲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호우 피해 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 지난 22일 중앙일보에 실린 이하경 칼럼 "어둠 속 반지하 계단에서 미끄러진 대통령".ⓒ 중앙일보PDF
윤 대통령 당선 직후과 취임 초기, 종편을 중심으로 쏟아졌던 이른바 '윤비어천가'가 취임 100일 만의 역대급 지지율 폭락으로 자취를 감춘 것이 사실이다. 마침 <조선>과 <동아>가 일제히 비판 대열에 동참한 날, 나홀로 '윤비어천가'를 부르 짖으며 눈길을 끈 보수 언론이 있었다. <중앙일보>였다.
<중앙일보> 이하경 주필·부사장은 22일자 '어둠 속 반지하 계단에서 미끄러진 대통령'이란 기명 칼럼에서 지난 9일 윤 대통령이 수해로 인해 일가족 3명이 사망한 신림동 주택을 찾았던 장면을 환기시키고 "하지만 비극의 실체를 온몸으로 끌어안는 전면적 공감의 태도는 아니었다"고 전제한 뒤 반전과 같은 다음 문장들을 쏟아냈다.
현장에 동행했던 인사에게 "대통령은 왜 안에 들어가지 않았는가"라고 물어봤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대통령이 만류를 뿌리치고 출입금지선인 폴리스 라인을 넘어 어둠 속 계단을 걸어 내려가 경호원들이 당황했다는 것이다. 도중에 미끄러져서 넘어질 뻔했고, 구두와 바지를 흙탕물에 적신 것도 알게 됐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빈자(貧者)의 천국이었고, 지옥이었다. 대통령이 저 먹먹한 슬픔의 공간으로 몸을 밀어넣은 것은 국민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라는 무한책임과 연대의 증거다. 스스로 대통령다움을 입증한 것이다. 이로써 가진 자의 편에 선 오만한 선민(選民)이라는 부당한 편견에서 벗어났다.
"만류를 뿌리치고", "먹먹한 슬픔의 공간", "무한책임과 연대의 증거", "대통령다움을 입증"과 같은 문장이 꽤나 낯뜨겁다. 상상과 애정이 버무려진 이런 찬양조와 달리 이하경 부사장은 신림동 주택의 열악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고는 "지옥"이라 명명해 버렸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이 부사장은 이어 톨스토이의 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를 소개했다. 주인공인 구두수선공 마르틴의 반지하방이 "신(神)을 만난 기적의 성소(聖所)"라는 것이다. 소설 속 장면을 설명한 이 부사장은 "신은 어느 시대에나 가장 약하고 슬픈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온다"며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윤 대통령은 한겨울에 어머니가 사준 외투를 입고 나선 첫날 노점상에게 벗어준 대학생이었다. 그는 지금도 연민의 눈물이 어리지 않은 눈으로는 천국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할까. 그렇다면 외롭고 상처받은 지상의 신(神)을 만나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기괴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 대한 평가도 남달랐다. 이 부사장은 "국민의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윤 대통령의 표현을 "제1 공복(公僕)의 겸손한 언어"로 추켜올렸다.
이어 이 부사장은 "인사 실패와 국정 혼선에 대한 반성", "사전 각본이 없이 12개의 질문에 즉답", "투박한 소신과 철학이 확인"이라고 상찬한 뒤, "대통령의 일정에 밝은 관계자"라는 모호한 익명 관계자를 내세워 "늦은 저녁시간까지 보고를 받고 치열하게 토론한다"며 "장관 한 사람이 매주 한두 번씩 대통령과 독대하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대통령의 동정을 전하기도 했다. 뒤이은 평가도 <동아>나 <조선>의 논조와는 확연히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청와대 홀로 독주하던 박근혜·문재인 대통령 시절과는 딴판으로 내각에 힘이 실리고 있다. 대통령의 정책 이해도 빠른 속도로 깊어지고 있다. 여의도 정치에 어두운 대통령은 오직 일로만 승부하려는 담백한 심정이다. 지금은 비록 도를 넘는 공격을 받아 악마화돼 있지만 그가 사익(私益)을 멀리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대통령은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김대기 비서실장의 불편한 직언도 주저없이 수용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파업사태의 경찰 투입 없는 해결, 김건희 여사의 절제 있는 행보는 그 결과였다."
취임 100일 이후 변화된 기조
취임 100일 기자회견 직후, 적지 않은 언론들이 "분골쇄신 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을 받아쓰며 '쇄신론'에 무게를 실었다. <중앙일보>도 그중 한 곳이었다. 지지율 폭락과 함께 대통령 비판을 주저하지 않던 보수 경제지들은 재해 및 취임 100일 기점으로 각기 톤 조절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 미디어비평가이자 언론학자인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는 이런 분석을 내놨다.
"언론의 기조 변화는 수해가 기점이었다. 큰일 난 거다. 인사문제는 바꾸면 된다. 언론은 인사 문제를 제일 문제 삼는다. 자꾸 자리가 비어야 자기도 갈 자리가 생긴다(...). 수해 문제는 다르다. 집권 초기에 너무 큰 심각한 문제에 빠지는 거다.
수해 책임론까지 나온다? 대통령 무능론, 7시간 동안 뭐했나, 이것 까지 가면 안 되는 거다. 언론이 원하는 건 보수적인 관점에서 (대통령이) 버티고, 내 말을 들어야 하는데 수해 책임론으로 흔들리면 큰일 나는 거다. 적당한 선에서 위기 관리를 하고 싶은 거다." - 19일 tbs <정준희의 해시태그> 중에서
그 와중에 나온 이 부사장의 칼럼은 눈길을 잡아 끌 수밖에 없었다. 이 '윤비어천가' 칼럼은 앞서 소개한 여타 보수언론과 비교해도 꽤나 돌출된다.
하성태(woodyh)/ 오마이뉴스
故박원순 부인 "역사는 내 남편 무죄 기록할 것“
故박원순 부인 강난희씨, 국가인권위 결정 취소 소송 제기
"그분의 명예를 법의 이름으로 지켜주시고 억울함을 밝혀달라“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배우자 강난희씨가 "역사는 내 남편 박원순의 무죄를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23일 서울행정법원 행정8부(이정희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행정소송 변론기일에 발언 기회를 얻어 "그분의 명예를 법의 이름으로 지켜주시고 그의 억울함을 밝혀주실 것을 간절히 호소드린다"고 밝혔다.
앞서 강씨는 박 전 시장의 성희롱을 인정한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강씨는 발언 중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기도 했다.
그는 "인권위가 조사개시 절차를 위반했고 증거를 왜곡했으며 상대방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내 남편을 범죄자로 낙인찍어 인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인권위 조사가 진행 중인데도 최영애 (당시) 위원장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박 전 시장에게) 성 비위가 있는 것처럼 예단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며 "인권위가 편견과 예단을 가진 채 진실을 왜곡하고 짜맞추기식으로 조사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인권위 측 대리인은 직권조사 개시 절차가 부당했다는 주장에 대해 "(다른 사건도) 당사자의 직권조사 개시 요청 없이도 직권조사를 개시했다"며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재판부가 판단해달라"고 말했다.
앞서 박 전 시장은 2020년 7월 전 비서에게 성추행한 혐의 등으로 피소됐다. 경찰은 성추행 의혹을 풀지 못한 채 같은 해 12월 수사를 종결했지만, 인권위는 지난해 1월 직권조사 결과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성희롱에 해당하는 언동을 했다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날 이 사건 변론을 종결하고 오는 10월 18일 판결을 선고할 예정이다.
CBS노컷뉴스 박희원 기자
OTO-그 누구보다도 박시장님을 좋아했던 사람으로써 박시장님 너무 원망스러운건 그래도 살아서 해명을 하든 처벌을 받든 반성을 하던 다시 봉사를 하든 했어야 했다는 겁니다 왜 죽어 바보같이
찢컷뉴스-여성의 일방적인 주장에 성범죄자로 낙인이 찍히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자유대한오직예수-박원순이 변호사나 사회활동가, 서울특별시장으로써 많은 긍정적인 흔적을 남긴점은 인정해야 되겠지만
성추행이라는 큰 오점을 남긴건 아쉽습니다. 서울대 조교사건을 사회로 끌어낸 인물 중 한명이었던 사람이 정작 수십년 후 성추행범이 되었다는게 아이러니 하지만..
없는 걸 있다고 한건 아니니까
gkdmsch-일생을 국가와 사회를위해 일한박우너수 목슴으로 값을수 없는 잘못이 뭐냐 일방적 가해라는 증거를 아무도 모른다
higgs-결국 또다시 피해자에게 2차, 3차 가해하는거네. 진짜 나쁜 인간들
잘생긴멋짱이-여론 몰이가 큰 산을 흔드는 나라.....
"월 1000만원 버는 부부 수두룩"…일자리 성지 된 평택
반도체의 선물…'일자리 엘도라도' 평택
삼성 평택공장 투자 낙수효과
대규모 투자 → 고용 증가 → 인구유입 → 지역경제 활성화
일용직 근로자만 6만여명…상인·가족 합치면 10만명
노점상 하루 매출 500만원…함바집 1000만원 올리기도
경기 평택 삼성전자 평택사업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23일 점심을 먹기 위해 공사장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반도체 제3공장 공사가 한창인 이곳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6만여 명이 일하고 있다. /평택=허문찬 기자
23일 오전 11시 경기 평택 삼성전자 평택사업장. 점심시간에 맞춰 쏟아져 나온 수천 명의 인부로 출입구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컵라면 김밥 등을 파는 노점은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웠고, 줄지어 선 수백 대의 버스가 함바집(간이식당)으로 인부들을 태워 날랐다. 한 노점 상인은 “3000원짜리 김밥 1000줄을 두 시간 만에 다 팔았다”며 활짝 웃었다.
삼성전자 평택공장은 전국 건설 근로자들의 ‘성지’로 통한다. 일당이 ‘쎄고’, 오래 일할 수 있으며, 안전하다는 평판이 입소문을 탔다.
10여 년을 이어온 반도체 공장 건설은 수도권 변두리 평택을 천지개벽하게 했다. 무엇보다 인구 증가 폭이 가파르다. 일용직 근로자와 가족, 자영업자 등으로 이어진 인구 유입 효과가 최대 10만 명에 달한다는 게 평택시의 설명이다. 인구 소멸을 걱정하는 대다수 지방 도시의 부러움을 사는 이유다.
상권 역시 권리금과 월세가 1년 새 두 배 이상 오르는 등 초호황기를 맞고 있다. 함바집으로 쓸 수 있는 1층 상가(330㎡ 기준)는 보증금 1억원에 월세가 1000만원까지 올랐지만 이마저도 구하기 힘들다.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노점은 하루 500만원, 함바집은 하루 1000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곳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장기 침체를 겪고 있는 조선업 등 국내 대표 산업이 품지 못한 일자리를 반도체가 끌어안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평택공장의 일용직 근로자는 약 6만 명이다. 지난 6월 전국 일용직 건설 노동자의 하루평균 신규 채용 건수(1만2000건)의 다섯 배에 달한다. 시설 보안을 이유로 외국인 노동자는 고용하지 않는 점도 내수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평가다. 경남 거제 조선소에서 일하다 온 주명언 씨(50)는 “거제 울산 등에서 일하던 건설현장 인부 상당수가 평택으로 모였다”며 “지나가는 개도 1만원짜리를 물고 있다던 조선업 호황기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규모 투자가 일자리 증가로 이어지고, 인구 유입이 지역경제 활성화로 연결되는 낙수효과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전국 최고수준 일당, 사람 몰려…신혼부부들도 주말 알바하러 와
삼성전자 4~6공장 착공 이어져…안전 제일주의에 근무환경 천국
< 붐비는 함바집 > 삼성전자 경기 평택 반도체 공장 현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23일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도로변에 늘어선 노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사업장 인근엔 수백 개의 함바집(간이식당)과 노점 등이 성업 중이다. /평택=허문찬 기자
김명환 씨(26)는 작년 11월부터 삼성전자 경기 평택 제3공장(P3) 공사장에서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고 있다. 원래는 경남 거제의 한 조선소에서 첫 일을 시작했지만 고된 업무와 낮은 일당에 1주일 만에 그만뒀다. 아내와 함께 출근한 지 꽤 됐다는 김씨는 “이곳에선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야근을 하면 하루 28만원 정도 일당을 받을 수 있다”며 “와이프와 합치면 월 1000만원은 넘게 번다”고 했다.
경기 평택의 삼성전자 평택사업장이 일용직 노동자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전국 최고 수준의 일당에 5년 이상 출퇴근이 가능한 ‘장기 일용직’이 보장된 데다 안전관리가 잘된다는 점 등이 부각된 결과다. 삼성전자는 평택시 고덕면 일대 총 289만㎡(약 87만 평) 크기의 터에 세 번째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으며, 앞으로 5년 안에 3곳을 추가로 착공할 계획이다.
○“하루 40만원”…전국 일용직 총집결
"월 1000만원 버는 부부 수두룩"…일자리 성지 된 평택이곳 인부들은 대개 숙련공과 일반공, 안전을 관리하는 ‘이모님’ 등으로 나뉜다. 숙련도에 따라 기공, 중기공, 중공, 조공 등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이들의 일당은 하루 8시간 근무 기준 14만~20만원이다. 오후 5시에 퇴근하지 않고 4시간을 추가 근무하면 하루 일당을 더 받는다. 하루 최대 40만원을 벌 수 있는 셈이다. 일당이 10만원 안팎에 불과한 조선소보다 최소 40% 이상 높다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김씨처럼 신혼부부가 아예 평택에 터를 잡고 맞벌이에 나선 사례도 드물지 않다.
일자리를 찾아 떠돌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역시 큰 장점이다. 평택사업장은 올해 말 3공장을 완공한 뒤 이후 4~6공장 착공을 시작할 예정이다. 공장 한 기에 30조원이 투입되는 단군 이래 최대 공사다. 노조와 사측 간 갈등으로 종종 사업장이 폐쇄되는 조선소나 아파트 현장보다 안정적이다. 배관 기술자 정민규 씨(44)는 “조선소는 배 한 대를 만드는 기간인 6개월마다 일자리 공백이 수시로 생겼다”며 “평택공장은 10년치 일감이 꽉 차 있다는 얘기가 인부들 사이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투자→인구 유입→호황→재투자
일감이 넘치자 경기 남부의 한 시골 동네였던 평택시 분위기가 달라졌다. ‘블랙홀처럼 인구를 빨아들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삼성전자 평택사업장이 첫 삽을 뜬 2015년 45만532명이던 평택시 인구는 올해 57만3987명이 됐다. 7년 만에 인구가 27.5%(12만3455명) 늘어난 것이다. 평택사업장 바로 옆 고덕면 인구 변화는 더욱 극적이다. 같은 기간 1만2124명에서 3만8754명으로 세 배 이상으로 늘었다. 인구 유입 속도보다 일자리 증가 속도가 더 빠르다 보니 고용률도 고공행진이다. 평택시 고용률은 63.3%로 경기 지역 7위를 기록 중이다. 전체 근로자 중 13.1%가 건설업 관련 종사자인데,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이다.
투자·인구 증가는 낙수효과로 이어지고 있다. 기업과 상인 등이 내는 세금이 늘었다. 평택시의 지방세 징수액은 2015년 7582억원에서 2020년 1조2247억원으로 61.5%(4665억원) 증가했다. 이 자금은 신도시 개발과 산업단지 조성 등에 쓰이고 있다. 현재 평택시에서 조성 중인 산업단지만 다섯 개에 달한다.
평택 경제는 ‘코로나발(發) 경기 침체를 완전히 비켜갔다’는 말이 나올 만큼 ‘초호황’을 누리고 있다. 지제동과 고덕신도시, 여염리 등의 상가엔 공실을 찾아보기 힘들다. 지제동 1층 상가 월세는 330㎡ 기준으로 권리금 4억원 안팎, 보증금 1억원, 월세 1000만원 정도까지 올랐다. 작년 이맘때보다 두세 배 뛰었지만, 이마저도 자리가 없다. 지제동 P 공인중개사 관계자는 “작년 하반기부터 평택사업장 3공장의 인력 수요가 늘고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서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며 “장사가 워낙 잘되기 때문에 가게를 누구에게 넘기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20㎡ 규모 원룸 역시 보증금 500만원에 월 80만~100만원으로 일 년 새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전문가들은 “본격적인 낙수효과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평가를 내놓는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삼성전자와 거래하는 부품 업체들이 산업단지 등에 추가로 입주하면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더 커질 것”이라며 “인구 유입 외에도 다양한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평택=김우섭/이광식/구민기/김대훈 기자 duter@hankyung.com
美, 중국 때리는 법안 줄줄이 대기… 中 경제영향력 그물망 봉쇄
●국가경제 경영 강화법안 상원에 계류
미국 의회가 ‘중국의 경제적 강압 대응 법안’을 추진하는 데는 우호국과 함께 중국의 경제영향력 확대를 봉쇄하는 그물망을 짜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한국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처럼 중국의 경제적 강압 행위를 방치하면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미국 중심의 우군 규합에도 장애가 된다.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 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 대응 법안 등 경제안보 분야에서 중국을 억제하는 반중(反中) 법안이 이미 미 의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23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워싱턴무역관에 따르면 미 상원 외교위에 계류 중인 ‘21세기 국가경제 경영강화를 위한 법안’은 일대일로 대응 법안으로 통한다. 로버트 메넨데스 상원 외교위원장(민주당)이 지난 5월 발의했고, 중국의 반경쟁·약탈적 대외 경제정책에 대응하는 종합 전략 수립이 목표다. 일례로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일본, 네덜란드 등과 반도체 제조장비의 중국 수출을 통제하는 ‘외교전략부’를 제안하고 있다.
●바이든, 법제화로 中 옥죄는 방식 선택
현지 업계 관계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5G(5세대) 통신기술과 관련해 2019년 화웨이를, 2020년 반도체 기업인 SMIC와 슈퍼컴퓨터 기업 파이티움을 수출규제 명단에 올려 중국과 직접 충돌했다면, 조 바이든 정권은 의회를 통한 법제화를 토대로 우호국과 협력해 중국을 옥죄는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타국에 美경제 영향력 높여 중국 견제
외교위에는 동남아·태평양 지역의 신흥경제권 국가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경제·상업 기회 및 네트워크 확대 법안’, 개도국에 경제개발지원을 하려 국제기구의 지원을 확대하는 ‘국제금융기구 활성화 법안’ 등이 준비돼 있다. 타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높여 중국을 견제하려는 취지다. 금융위에 계류 중인 ‘미국 일자리 보호를 위한 국제 시장 교란 방지 법안’은 반덤핑, 상계관세 등 기존의 미국 무역 구제 제도를 강화해 중국의 불공정 관행에 대응하는 게 목적이다.
다만 미중 간 무역 관계가 이미 밀접해 미국의 대중 압박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지 않을 것으로 우려된다. 당장 지난 16일 발효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라 내년부터 북미에서 조립되지 않았거나 중국 배터리 부품이나 희귀광물을 일정비율 이상 사용한 전기차를 사는 소비자는 약 1000만원(7500달러)에 이르는 세액공제를 받지 못한다. 현대차와 기아의 전기차도 전량 국내에서 생산돼 수혜 대상에서 제외되는 등 직격탄을 맞았다. 중국산 수입품 배척으로 인플레이션이 더 심화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서울신문
젊은’ 기자들은 왜 기업으로 떠나는 것일까
열악한 처우, 기자정신 느낄 기회 줄어” 한목소리
기자 직군을 커리어 위한 관문으로 여기기도
“거리두기 않고 취업 수단 여기는 것 문제” 지적
“오늘 언론사 이직자 종합 정리하는 날인가 보네요!!” “2022 기자→홍보 이직 사례” 지난 3월부터 지난달까지 돌았던 지라시의 제목이다. 언론 매체에 몸담고 주로 기업 관련 기사를 썼던 기자들이 기업 홍보 담당자로 이직한 명단이 계속해서 업데이트돼 돌았다.
SK텔레콤의 티맵으로 이직한 전직 기자의 소식으로 시작해 SK케미칼, 중외제약, DL이앤씨(대림산업), 마켓컬리, 교보생명, 현대백화점, SK이노베이션, 탤런트뱅크, 오늘의집, 국민연금기금, 신세계, 카카오페이, SK하이닉스, LX하우시스, LG생활건강, 드래곤플라이, 두나무, 현대자동차, 신세계 프라퍼티, 삼성SDI, 한샘, LS전선, 카카오뱅크, 스마일게이트, 케이뱅크, 직방, IHQ 등 알려진 사례만 33곳이 넘는다. 알려지지 않은 사례까지 더하면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기자가 기업으로 이직하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올해 이직한 사례를 보면 연차가 낮은 ‘주니어’급이 주로 옮겨갔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 기자를 만나 상대하는 홍보맨의 업무뿐 아니라, 기업 관련 콘텐츠를 만드는 직군으로 옮겨간 사례도 있다.
2022년 언론계를 떠난 기자들은 기사를 써서 사회를 바꾸겠다는 사명감을 실현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처우 문제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언론의 낡은 문화도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5년 차에 이직한 A 전 기자는 “산업부에 오래 있었는데, 현상을 따라가는 기사를 많이 쓰게 됐다. 현실은 기업들의 요구를 많이 들어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며 “그러다 보니 의미 있는 기사를 점점 못 쓰게 됐다. 기자에게 중요한 건 (기사를 통해 세상을 바꾼다는 등의) ‘자부심’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실현할 수 없으니 처우 문제가 보이더라”고 말했다.
A 전 기자는 “(산업부) 기자는 점심 저녁으로 술을 마신다. 기사 욕심이 있으니 주말에도 취재원을 만나는 일이 잦았다. 무엇보다 발제(기사를 쓰기 위한 계획안) 스트레스도 컸다. 계속해서 뭔가를 찾아야 하고, 술을 먹는 순간에도 취재원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들어야 했다”고 토로한 뒤 “5년 정도 했으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언론계에 있을 때보다 정신적·급여 부분 등에서 여유로워졌다. 만족스럽다”고 했다.
10년 차에 이직한 B 전 기자 역시 “발제 스트레스는 엄청 난데, 공들여 쓴 기사는 잘 읽히지 않는다. 반면 인터넷 커뮤니티를 베껴 쓴 기사는 포털 랭킹 뉴스에 올라간다. 점점 의미를 찾기 어려워지더라. 많이 힘들었다”고 말한 뒤 “기자라는 직업을 오래 하긴 힘들다고 봤다. 부장까지 달면 끝일 텐데, 그 이상으로 뭘 할 수 있는 게 있나. 디지털퍼스트를 외치는 데 관심 많은 국장은 변화하는 척이라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국장은 다시 신문으로 회귀한다. 신문을 요즘 읽지도 않는데 답답했다. 구심점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10년 차에 이직한 C 전 기자는 “기자의 사회적 지위와 기사가 갖는 파워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며 “산업별로 전반적으로 이직이 활발한데 유독 기자 사회에서는 ‘평생 직장’의 신화를 강요해왔다. 이런 것들이 당연하게 깨져나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13년 차에 이직한 D 전 기자는 “산업부는 매출부서라 취재의 목적이 대부분 광고협찬비를 얼마나 받아내느냐에 있다. 감시보다는 홍보에 가깝다. 이럴 거면 돈을 더 주는 기업의 홍보 담당자로 가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기업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는 산업부 기자들이 많다”며 “무엇보다 기자보다 기업은 연봉을 훨씬 더 많이 주는 점도 장점”이라고 했다.
기자라는 직업을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혹은 ‘콘텐츠 전문가’가 되기 위한 ‘인생 커리어’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는 측면도 있다. 특히 IT분야에서는 스타트업 등 기업의 동향을 전하고 분석하는 기사를 쓰면서 기업의 ‘커뮤니케이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다. 이와 맞물려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기업들이 직접 뉴스와 유사한 콘텐츠를 만들어 소통에 나서면서 기업의 에디터, 마케터 등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C 전 기자는 “미디어 밖에서 직접 산업 현장을 경험하는 게 더 재밌고 그간의 경험을 잘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와 산업은 빠르게 변하는데 언론계에서 취재와 기사 패턴으로 지켜보는 입장으로만 남는다는 것에 불안감이 있었다”면서 “사회 초년생이 업무 주체성, 커뮤니케이션 등 기자 직군이 가질 수 있는 강점을 경험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1년 차에 콘텐츠를 제작하는 홍보 담당자로 이직한 E 전 기자 역시 “기자를 몇 년간 경험해보고 그 다음에 나의 적성과 가치관과 맞는 방향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하는 기자들이 많아졌다”며 “스타트업 등을 포함해 홍보의 방식이 다변화됐다. 저만해도 기자분들을 만나는 업무는 하지 않는다. 토스와 같은 기업에 콘텐츠만 생산하는 커뮤니케이션팀으로 간 기자도 있다. 홍보 영역이 다양해졌다. 기업의 이미지에 관한 콘텐츠를 만들고 뉴스룸을 구축해 이너 보이스를 전할 수 있는 미디어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D 전 기자는 “기자 커리어를 살려서 갈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다. 홍보, 정치, 교수 정도 떠오르는데, 가장 흔한 곳이 기업 홍보라고 생각한다. 기업을 취재하는 기자들도 어차피 광고협찬비를 받으면서 홍보기사를 써주는 경우가 많으니, 비슷한 콘텐츠를 만드는 거면 기업으로 옮기는 것 같다”고 했다.
기업 입장에서 저연차 기자를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 15년 이상 기업 홍보 업무를 해온 F 부장은 “홍보 직군 자체가 힘든 업종이다. 신입사원에게 언론과 기업의 관계를 이해시키면 대부분 도망을 가더라. 차라리 언론과 기업에 대해 아는 사람을 뽑으면 이해가 쉽다. 저연차 기자들을 스카웃하면 신입처럼 교육할 게 없다. 너무 연차가 높은 기자들은 조금 부담스럽다”고 설명했다. F 부장은 이어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잘 유지할 수 있는지도 고려한다”고 말했다.
기자 출신으로 7년 이상 기업의 홍보 업무를 해온 E 부장은 “기자는 현상에 대한 머리 회전이 빠르고 기민하다. 정무적 판단도 굉장히 좋다. 특히 저연차 기자들은 나이가 어리다 보니 기업에 와도 쉽게 융화될 수 있다. 특수한 임무에 있어서는 연차가 높고 네트워킹이 많은 기자를 선호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연차 기자들이 매력적”이라며 “(기자는) 외부의 네트워킹이 중요하다는 걸 기본적으로 알고 있고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이해도가 높다. 또 언론사보다 최소 10~30% 급여도 오르니 매력적일 수 있다”고 했다.
기업이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관련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하는 경우 ‘취재’ 및 ‘기사 작성 능력’과 ‘팩트체크 역량’ 등을 고려해 기자 출신을 뽑는 경우도 있다.
최근 실시된 여론조사는 기자들이 기업 홍보 이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기자협회보가 창립 58주년을 맞아 실시한 기자 여론조사에서 ‘기자의 정·관계 직행’에 대해 67.2%(매우 우려 22.7%, 대체로 우려 44.5%)가 부정적 인식을 보인 반면, ‘현직 기자의 기업체 직행에 대한 생각’에 응답자 50.7%가 부정적 인식(매우 우려 13.8%, 대체로 우려 36.96%)을 보였다. 부정적 인식이 과반을 넘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기업행을 용인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 같은 경향이 심화되면서 기자의 취재 대상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특정 기업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해 기사를 써온 기자가 그 기업으로 이직할 경우 해당 언론사가 ‘이해상충’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같은 이직 사례가 늘면 기업 대상 비판적 취재가 무뎌질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기자라는 직업의 특수성에 비춰보면 취재원과 객관적 거리두기를 유지하고 이해관계를 갖지 말아야 한다. 취업수단이나 이직수단으로 삼으면 문제다. 기본적으로 기자가 (자신이 기사로 다뤘던 기업의) 홍보 담당자로 가는 것 자체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정연우 세명대학교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누구나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다. 기자가 열심히 취재하고 기사 쓰다가 전직하는 것까지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면서도 “특정 기업이나 특정 분야로 옮겨갈 목적으로 생각해 기사를 쓰거나 아이템을 골랐다면 기자라는 직업을 다른 직업으로 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 비판할만하다. 하지만 기업 홍보도 우리 사회에 필요하기 때문에 기업 홍보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기자의 직업윤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심석태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기자는 기자로서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기업인은 기업인으로서 직업윤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은 업무 전문성 내지는 직업윤리를 명확하게 따지는 게 잘 안 돼 있다. 그래놓고 직업을 옮길 때만 문제 삼는다. 그러니 근절이 잘 되겠느냐”고 지적했다.
권순택 언론연대 사무처장도 “1차로 기자윤리에 대한 교육, 저널리즘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돼야 한다”고 말한 뒤 “언론계는 기자로서 정체성, 자긍심을 높일 방안을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 그 부분이 기자윤리와 맞닿을 수 있다. 기자들의 역할이 축소됐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자들이 떠나가는 상황일수록 내부 점검을 하고 보다 정론지로서의 위치를 더 고민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더 뿌듯하고 공적인 역할이라는 걸 느끼게 해줘야 하는데 지금 그런 시스템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권 사무처장은 이어 “또한 전직한 기자들은 본인이 저널리스트로서 얼마나 정체성을 갖고 있었는지 반문해봐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미디어오늘 박서연 기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취임 100일을 맞은 24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내 법무부로 출근하며 지지자들이 보낸 축하 화환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법원은 어떻게 국가폭력에 가담했나
대법원 서랍 속 국가폭력의 기록 224건 추적
①사과 위해 만든 국가폭력 기록 224건, 16년 동안 묵혀둔 대법원
②법원은 어떻게 국가폭력에 가담했나…과거사 사건 분석
③재심 생각 못하고 살아온 수십 년…재심 청구해도 ‘기다리라’는 법원
김양기씨가 여수 자택에서 그동안 모아놓은 사건 자료와 보도 내용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18세기 영국의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은 “유죄의 증거는 신중하게 인정해야 한다”며 “죄 없는 한 사람이 고통받는 것보다 열 명의 죄인이 도망치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재판의 목표는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보다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하지만 과거 각종 시국·공안 사건과 간첩 조작 사건에 유죄 판결을 내린 사법부는 1930년대 소련의 대숙청을 이끈 니콜라이 예조프의 말을 더욱 따랐던 듯하다. 그는 “한 명의 스파이를 놓치는 것보다 수십 명의 무고한 사람이 고초를 겪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유태흥 전 대법원장이 1981년 4월 취임하면서 “법을 해석 적용함에 있어서도 항상 국가의 존망을 의식하면서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읽힌다
김양기씨(72)는 출소 이후 심해진 당뇨병을 오래 앓았다. 지금은 하루에 약을 12알씩 먹는다. 간첩으로 처벌 받기까지 5번의 재판을 받았다. “법원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고 하소연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2005~2006년 대법원이 잘못된 사법부의 과거를 반성하기 위해 1970~1980년대 나온 6000여건의 과거사 판결문을 검토해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건 224건을 선별한 사건번호 목록을 정보공개 청구로 입수했다. 1970~1980년대 벌어진 이 사건 속 당사자들은 판결을 통해 인생이 뿌리부터 뒤흔들렸다. 김양기씨 사건은 224건 중 213번째다.
■“정상적인 공문서라 할 수 없는” 유력 증거
김양기씨는 1975년 일본에 있는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돼 김포공항 검문검색과 예비군 훈련 관련 사항 등을 탐지해 보고하라는 지령을 받아 간첩활동을 한 혐의 등으로 1986년 5월 재판에 넘겨졌다. 1심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이 선고됐다. 항소심에서 이 결과는 그대로 유지됐다가 1987년 5월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됐다.
김포공항 검문검색과 경비 상황에 대한 국가기밀을 수집했다는 혐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취지였다. 김양기씨가 수집해 보고한 국가기밀이라는 게 “김포공항에 제일 먼저 도착하면 입국 신고를 한다” “소지품은 금속탐지 엑스레이 검사를 한다” “휴대품을 가지고 세관으로 가면 세관원이 검색한다”와 같은 누구에게나 공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이 내용이 고도의 중요성을 가진 국가기밀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파기환송했다. 하급심에서는 그의 간첩죄를 구성하는 범죄사실 중 하나로 인정됐던 내용이다. 그러나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 형이 그대로 유지됐다. 1987년 12월 형이 확정됐다.
유죄 선고의 유력한 증거는 ‘영사증명서’였다. 김양기씨 사건 1심에서 일본국 대한민국대사관 1등 서기관 겸 영사가 작성한 영사증명서가 증거로 제출됐다. 김양기씨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를 포섭한 공작지도원으로부터 지령을 받았다는 자백을 보강하는 증거다. 영사증명서에는 ‘공작지도원 김철주가 1944년생으로 1952년 12월 조총련 산하 기관의 선전부장을 지낸 반국가단체의 핵심인물’이라고 기재돼 있다.
증명서대로라면 1944년생인 김철주는 8살인 1952년에 반국가 단체의 핵심인물로 활동했다는 얘기가 된다. 2009년 김양기씨의 재심 사건을 맡은 광주고법 형사1부는 이 영사증명서를 두고 “정상적인 경로로 수집한 진실한 내용을 기재한 공문서라면 도저히 기재될 수 없는 경험칙에 반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영사증명서에는 1987년 2월4일 파기환송 전 2심의 선고 이후 ‘타자과장의 단순한 오기’라는 취지의 정정확인서가 붙었지만 재심 재판부는 “(정정확인서가) 증거로 채택된 바 없을 뿐 아니라, 작성 경위 역시 분명히 밝혀지지 않아 신빙성에 관한 합리적 의심이 배제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김양기씨는 파기환송 전 상고심에서 영사증명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대법원은 “자백에 대한 보강증거는 자백이 진실할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증거이면 정황증거 내지 간접증거라도 족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사증명서는 비단 김양기씨 사건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정체 불명의 공작원에 포섭됐다는 증거로 영사증명서가 자주 사용됐다. 영사증명서는 진위 확인도 제대로 되지 않고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과거사 사건을 오래 살핀 한 관계자는 영사증명서와 법원의 관계를 자판기에 비유했다.
영사증명서는 간첩사건의 만능열쇠라고도 불렸다.
김양기씨는 1999년 사면·복권됐지만, 재심을 통한 명예회복은 그로부터 10년 더 지난 2009년이 돼서야 가능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불법감금·고문에 의한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는 법원
가장 강력한 증거는 자백이었다. 주로 따지게 되는 것은 임의성이다. 고문, 폭행, 협박, 속임수 등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제 뜻에 따라 한 자백인지를 가리는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임의성이 없는 것으로 ‘의심’만 돼도 그 자백은 증거로 쓸 수 없다. 1970~1980년대에는 이런 원칙이 없어서 고문이 횡행했을까. 수사기관은 유죄 판결을 받기 위해 고문을 했다. 범죄를 입증할 증거가 없이 자백에 의존했다. 고문을 통한 자백이 법정에서 증거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김양기씨는 재판에서 장기 구금과 고문으로 한 거짓자백은 임의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김양기씨의 이런 주장에 대해 2심 재판부는 “원심이 적법하게 조사 채택한 증거 등을 살펴보면 피고인의 각 범죄사실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대법원은 “임의성이나 신빙성이 없는 진술이라고 의심할 만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할 자료는 기록상 보이지 아니하”다고 했다.
자백의 임의성은 과거사 사건에서 매번 논란이 됐다. ‘송씨 일가 사건’은 이 자백의 임의성이 쟁점이 돼 3번의 상고심을 포함해 재판을 7차례나 치렀다. 북한 공작원에 포섭된 일가 친척들이 1957년부터 25년 동안 간첩 활동을 했다며 1982년에 재판에 넘겨진 사건이었다.
상고심 판결은 “피고인들은 적게는 75일, 많게는 116일의 장기 불법구속을 당하였다고 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또 “불법구속되고 있는 동안 인간으로서는 감내할 수 없는 신체상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피고인들의 주장과 이들이 안기부 수사관들의 협박과 회유를 받는 과정도 판결문에 기록됐다. 피고인들의 자백이 담긴 검찰의 피의자신문조서는 임의성이 없어 증거로 쓸 수 없으므로 무죄 취지의 판결을 해야한다며 파기환송한 것이다.
이후 안기부는 대책회의를 벌였다. 주심 대법관을 내사하거나, 대법원장 비서실장을 통해 협조를 구하며 압박했다. 이런 재판 개입 속에서 대법원은 파기환송심 때 담당수사관 등을 증인으로 신청해 자백의 임의성을 입증하라고 조언한 뒤 사건 배당 등 대책을 내놨다. 2007년 나온 국정원과거사위원회 보고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에 담긴 내용이다.
실제 재판도 그렇게 흘러갔다. 23명의 관계자를 검사 측 증인으로 신문해 자백의 임의성을 인정하고 형량만 일부 감경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재상고심에서 또 다시 파기환송됐다. 상고심의 기속력을 따르지 않았다는 형식적인 이유 때문인데, 이때 ‘자백과 임의성이 없다고 의심하게 된 사유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이 적극적으로 인정되면 유죄의 증거로 쓸 수 있다’는 추가 법리를 제시한다. 1984년 8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2차 파기환송심에서 다시 유죄가 선고됐고, 재재상고심에서 확정된다. 이 사건은 2009년 재심에서 전원 무죄가 선고됐다.
1983년 12월24일 경향신문에 보도된 ‘송씨 일가 사건’.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고등법원이 유죄로 맞섰다는 기사 제목에서 당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불법구금 상태에서의 자백을 인정하지 않은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이를 뒤집기 위해 안기부와 대법원이 함께 논의한 끝에 유죄 논리를 사실상 창조해 선고한 것이다. 사법부 60주년을 기념해 2008년 대법원 산하 사법발전재단이 펴낸 <역사 속의 사법부>에 송씨 일가 사건이 짧게 거론된다. 대법원은 과거사 사건 재검토를 위해 224건을 분류한 뒤 추가 조치가 없다는 비판이 나오자, 이 책을 통해 과거사 정리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안기부와 대법원의 논의는 <역사 속의 사법부>에 서술되지 않았다.
만약 첫 파기환송 때의 판결이 유지됐다면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수사방식은 이후에 줄어들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 불법체포와 고문에 의해 억지로 쓰여진 자백은 계속 증거로 활용됐고 납북된 뒤 귀환한 어부들이나 조국이 그리워 온 재일교포 유학생들을 간첩으로 만드는 데 쓰였다.
■“공무원의 범죄행위가 재심 사유”
과거사 사건들 상당수가 비슷한 형태를 띈다. 갑작스런 체포에 이어지는 혹독한 고문, 장기간 구금 동안 수사관이 원하는 대로 따라 하는 거짓 자백,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짓 증거들. 검사와 판사는 이런 사실을 외면한다. 그래서 재심 개시 사유도 유사하다. 장경욱 변호사(법무법인 상록)는 “대부분의 재심 사유는 수사 상황에서 공무원들의 범죄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양기씨의 경우는, 군인인 광주보안대 소속 수사관들이 수사권 없이 민간인을 불법 연행한 뒤 감금하고 안기부 수사관의 명의를 빌려 수사했다. 형법 제124조(불법체포, 불법감금) 위반이다. 판결에 영향을 미친 이런 불법행위들이 재심 사유가 된다.
이런 행위는 형법이 제정된 1958년부터 불법이었다. 당시 판사는 왜 이런 사실은 따져 묻지 않았을까. 장경욱 변호사는 “사법체계를 당시의 시대 상황과 떨어져 볼 수는 없다”고 했다. 간첩을 처벌해야 한다는 국가와 여론의 목소리에 억울한 이들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재판의 목표는 흐릿해진 것이다.
재심에선 자백과 영사증명서 등이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그리고 “범죄의 증명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다. 재심 사건에서 무죄 선고 이유 역시 늘 비슷하다. 재심 재판부는 증거를 기초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따져보는 원심의 사실인정에 대해 “도저히 수긍할 수 없고 그 위법성이 중대하다”고 했다. 애초에 재일공작원에게 포섭됐다는 사실을 증명할 객관적인 증거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사건에 제출된 증거들은 공허하고 허무하다…무엇보다도 최후의 인권 수호기관인 법원은 최고법원에 이르기까지 5번에 걸친 재판을 거쳤음에도, 결과적으로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는 피고인과 그 변호인들의 주장에 관하여 눈과 귀를 막은 채 공허한 증거들이 그려낸 허상만 바라보았다.” 김양기씨 재심 재판부의 지적이다.
김양기씨는 아직도 체포된 2월이 되면 불안에 떤다. 자다가도 잠에서 깨고 몸이 떨린다. 자신을 고문하거나 재판에 넘기고 유죄 판결을 내린 가해자들은 훈장을 받고 승승장구해 국가유공자가 되는 등 혜택을 받지만,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은 생계와 당장의 병원비 걱정을 한다. “대법원이 결정했기 때문에 간첩이 된 것이 아닙니까. 1심이고 2심이고 재판을 잘못했으면 대법원에서 딱 판단을 해줬어야죠. 얼마나 많은 무지랭이 일반인들이 인생을 망치고 살았겠습니까.” 김양기씨는 “국가가 인생을 망쳐버렸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몸과 마음의 상처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경향
언론이 김혜경 법카사건 ‘7만8천원’ 액수 일부러 누락?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배우자 김혜경씨가 경기도 법인카드 불법사용 의혹으로 경찰 조사를 받고 내용을 보도한 언론을 향해 김어준씨가 이 사건의 ‘7만8000원’을 의도적으로 누락했다고 비난했다.
김혜경씨가 조사를 받은 사건을 이른바 ‘7만8000원 사건’이라고 규정한 것은 이재명 의원이다. 이 의원 측은 당 인사들과 식사비 7만8000원을 법인카드로 결제한 것이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액수와 상관없이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은 철저히 수사해야 하며, 그 밖에도 김혜경씨의 법인카드 유용 묵인 방조 의혹 사례가 많은데, 이를 규명하는 것을 외면하는 주장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몇몇 언론이 실제 7만8000원이라는 표현을 반영하지 않았으나 과연 잘못 보도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김혜경씨는 지난 23일 오후 경기남부경찰청에 출석해 5시간 가량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받으러 갈 때와 나올 때 모두 ‘혐의를 인정했느냐’ ‘배씨에 법인카드 사적 유용 지시했느냐’ 등 취재진 질문에 일절 응답하지 않았다.
이재명 의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후보 배우자측에서 알린다’며 김혜경씨 입장을 소개했다. 김씨측은 이 글에서 “김씨가 지난해 8월2일 서울 모 음식점에서 당 관련 인사 3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고, 수행책임자 B변호사를 통해 자신의 식사비 2만6000원을 캠프의 정치자금카드로 적법 지불했다”며 “나머지 ‘3인분 식사비(7만8000원)’가 법인카드 의혹 제보자 A씨에 의해 경기도 업무추진비 카드로 결제됐다는 사실을 김혜경씨는 전혀 알지 못했고, 현장에서 A씨를 보지도 못했다”고 썼다. 김씨측은 “이 사건은 물론 그동안 김씨는 법인카드 사용을 지시한 적 없고, 법인카드의 부당사용사실도 알지 못했다”고 수많은 법인카드 유용의혹을 모두 부인했다.
특히 김씨 측은 “언론이 입수해 보도한 제보자 A씨와 배아무개 사무관의 ‘7만8000원 사건’ 대화녹음을 보면 김씨나 수행책임자 모르게 경기도 법인카드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며 대화녹음 내용을 소개했다. 대화녹음에서 A씨는 배 전 사무관에게 “(법인)카드 결제는 B변호사(수행책임자) 보고 하라고 해요? 아니면 제가 받아서 제가 할까요?”라고 물으니 배 전 사무관이 “너가. B는 잘 몰라, 그거(법인카드로 계산하는 거)”라고 말한다고 나온다.
김혜경씨가 조사를 마치고 나오자 이재명 의원도 직접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제가 부하직원을 제대로 관리 못하고, 제 아내가 공무원에게 사적 도움을 받은 점은 국민께 다시 한번 깊이 사죄드린다”면서도 “조사에서 아내가 카드를 쓴 적이 없고, 카드는 배아무개 사무관이 쓴 사실도 확인되었다. 아내는 배씨가 사비를 쓴 것으로 알았고, 음식값을 주었다는 점도 밝혔다”고 썼다. 특히 제보자 A씨가 김씨와 B변호사에 숨기며 법인카드로 결제한 정황이라는 대화녹음을 지적했으나 경찰이 이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다고 이 의원은 적었다.
언론들은 대부분 경찰 수사를 받고 온 김혜경씨가 답변하지 않은 것과 경찰 수사상황, 경찰이 조사했을 내용, 이재명 의원이 페이스북에 쓴 김혜경씨 반박 입장 등을 보도했다.
▲KBS가 지난 23일 뉴스9에서 김혜경씨 경찰 조사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사진=KBS 영상 갈무리
그러나 방송인 김어준씨는 언론이 ‘7만800원’을 의도적으로 누락했다고 비난했다. 김씨는 24일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김씨의 경찰 조사 소식을 전한 류밀희 TBS 기자의 소개에 “이 기사가 수백개가 떴던데, 언론들이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법인카드 유용혐의의 액수 … 7만8000원이다. 법인카드 7만8000원을 유용했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김어준 진행자는 지난해 8월 문제의 식사비 지급 내역을 이재명 의원 측 주장을 옮긴 뒤 “당시 녹취를 보면, 김혜경씨가 식대를 그 카드로 결제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정황이 나온다. 일일이 본인이 다 결제하지 않았겠죠. 김혜경씨가 식대 결제여부를 지시했느냐 여부를 따지는 것”이라며 “액수가 7만8000원”이라고 강조했다.
김 진행자는 “(윤 대통령 부인) 김건희씨는 수십억대 주가조작인데 서면조사한다, 부인 김혜경씨는 7만8000원인데 소환조사하는 거다. 그게 차이”라고 비유했다. 그러면서 김 진행자는 “7만8000원을 빼먹고 보도하고 있다”며 “이게 김혜경 법인카드 유용의 실체다. 그 액수를 빼먹고 보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7만8000원 반영 안한 매체, 경향 국민 세계 조선 KBS SBS…대신 “다른 김씨 의혹 규명 사안 함께 보도”
김 진행자의 말처럼 주요 언론이 정말 이른바 7만8000원을 누락했을까. 제목 뿐 아니라 기사(뉴스) 본문에도 7만8000원을 누락한 매체는 24일자 아침신문 기준 경향신문, 국민일보, 세계일보, 조선일보였고, 23일 저녁 메인뉴스 기준 KBS SBS 등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핵심을 의도적으로 빼먹은 것이 잘못 보도한 것처럼 평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조선일보는 24일자 6면 ‘‘법카’ 김혜경 측근 배씨 이르면 오늘 구속영장’에서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검경은 이르면 24일 배씨에 대해 국고 손실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할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해 측근 배씨의 신병 여부에 주목했다. 이 신문은 지난 4월 경찰이 경기도청 총무과, 감사관실 등과 배씨 자택을 압수 수색해 압수수색 영장에는 이들 3명이 피의자로 기재된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특히 “경찰은 이들에게 5억5000만원의 국고 손실 혐의를 둔 것으로 전해졌다”며 “경찰은 지난 3일 배씨를 불러 조사했고 지난달 26일에는 배씨의 지인 김모씨가 참고인 조사를 받은 뒤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도 있었다”고 썼다.
▲조선일보 2022년 8월24일자 10면
세계일보는 12면 ‘‘법카 의혹’ 김혜경 첫 경찰 출석… 李 “아내, 공무원에 사적 도움 사죄”’에서 “경찰이 20대 대통령선거 관련 공소시효가 임박하자 사건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며 “20대 대선 선거범죄의 공소시효가 20일도 남지 않은 상황인 탓”이라고 썼다.
경향신문은 1면 기사 ‘김혜경씨, 경찰 출석…이재명 “국민께 사죄”’에서 “경찰은 이날 조사에서 김씨를 상대로 전 경기도청 총무과 별정직 5급 배모씨 등을 통해 개인 음식값을 경기도 법인카드로 결제하거나 타인 명의로 불법 처방전을 발급받았는지 등 의혹 전반에 관해 사실관계를 파악한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 2022년 8월24일자 1면
KBS도 23일자 ‘뉴스9’ 톱뉴스 ‘‘법인카드 의혹’ 김혜경 씨 경찰 조사’에서 7만8000원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그러나 KBS는 민주당 의원 부인 3명의 점심 식사 비용을 경기도 법인 카드로 결제한 것이 선거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대목 외에도 “법인카드를 사적 용도로 여러 차례 썼다는 혐의, 의약품을 대리 처방받았다는 혐의도 주요 쟁점이었다”고 보도했다.
SBS도 같은 날짜 8뉴스 ‘막바지 치닫는 수사…법카 ‘부정 사용’ 알았나’에서 의혹이 처음 제기된 이후 지금까지 경과와 수사를 통해서 밝혀져야 할 쟁점들을 보도했다. 이 방송은 김씨가 배씨 등 경기도 공무원들을 사적 용무에 동원했다는 의혹이 전직 경기도 공무원 A씨 폭로로 처음 제기된 이후 △음식 포장 배달 △타인 명의로 대리처방 받은 약 집 앞 배달 △김씨 집에 가져갈 음식값 경기도 법인카드로 결제 의혹 등을 제시했다. SBS는 김씨측이 줄곧 ‘법인카드 사용을 지시한 적 없고, 법인카드의 부당사용 사실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해왔고, 이재명 의원도 이런 김씨 측 해명을 소셜미디어에 게재했다고 보도했다.
특히 SBS는 “경찰 수사는 김씨가 공무원들의 법인카드 결제와 불법 처방전 발급 등을 지시했는지, 지시하지 않았다면 알고도 묵인했는지 파악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법인카드로 결제를 지시하지 않았다면 배씨가 음식을 보내올 때마다 음식값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배씨가 자비로 사 보낸 걸로 알았던 것인지 명확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방송했다.
김혜경씨와 이재명 의원의 ‘7만8000원’ 주장을 보도한 곳 역시 이런 언론들의 보도 방향이나 의미가 다르지 않다. 동아일보의 경우 12면 기사 ‘김혜경, ‘법카 유용’ 혐의 부인…이재명 “아내가 카드 쓴 적 없어”’에서 김씨가 식사 비용 7만8000원을 전 경기도청 총무과 별정직 5급 배씨 등을 통해 경기도 법인카드로 결제했다는 의혹을 받는다며 김씨측의 “이른바 ‘7만8000원 사건’ 조사를 위해 출석한다”고 한 주장도 썼다. 동아일보는 그러나 경찰 관계자가 “(선거법 위반 의혹뿐 아니라) 법인카드 유용 의혹 전반에 관해 조사했다”고 설명했다면서 실제로 경찰은 김씨를 상대로 법인카드 사적 유용 및 의약품 대리처방 의혹 등 기존에 보도된 내용에 대한 사실관계를 폭넓게 조사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MBC, 7만8000원 주장에 반박하기도
MBC도 뉴스데스크에서 7만8000원 언급을 했으나 진행자가 기자에게 “그런데 경기도 법인카드가 부정 사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건 더 많지 않느냐”고 질의하고 기자가 “김혜경씨 측이 강조하는 7만8000원은 김씨가 직접적으로 관련됐다는 정황이 드러난 대목이고, 배씨가 주도한 법인카드 부정사용은 경기도 감사 결과 수백만원 상당으로 드러난 바 있다”고 답변하는 내용을 보도했다. 김씨 측 주장에 되레 의문을 제기하는 내용을 보도한 것이다.
▲MBC가 23일 뉴스데스크에서 김혜경씨의 경찰 조사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사진=MBC 영상 갈무리
한편, 유창선 시사평론가는 ‘7만8000원 사건’이라고 네이밍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유 평론가는 23일 밤 페이스북에 쓴 글에서 “김혜경씨가 경찰에 출두하면서 ‘7만8천원 사건’이라는 조어를 사용했고, 이재명 의원이 자신의 SNS에 올린다. 지지자들은 당장 ‘고작 7만8000원 갖고 수사를 하느냐’고 정치보복이라 주장한다”며 “정직하지 못한 사술(詐術)”이라고 비판했다.
유 평론가는 “‘7만8000원’의 3인 식대를 결제한 건은 선거법 위반 혐의이기 때문에 액수에 상관없이 엄정하게 수사해야 하는 사안”이라며 “(이밖에도) 김씨와 관련된 법인카드 유용 의혹들은 소고기 구매 의혹, 30인분 샌드위치 구입 의혹, 카드 바꿔치기 결제 의혹, 법인카드 쪼개기 의혹, ‘한우 카드깡’ 의혹, 사적 음식값 결제에 경기도청 5개 부서 예산을 동원했다는 의혹, 이재명 후보 자택 앞 복집 318만원 결제 의혹 등 부지기수”라고 지적했다. 유 평론가는 “많은 의혹들의 진실은 조사를 통해서 가려져야 할 일”이라면서도 “‘7만8000원 사건’이라는 네이밍이 좀 기가 막혀서 한마디 남긴다”고 주장했다.
미디어오늘 조현호 기자
“가결된 조례 맘에 안드네” 서울·부산시 꼼수로 폐기?
20일안 재의결 요청 가능’ 규정 활용
시의회 교체기에 요구해 폐기 노려
‘재활용 선별’‘임원 보수 제한’ 등
재의결 회의 못 열려 5건 자동 폐기
지난 6월 민선 8대 부산시의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리고 있다. 김광수 기자
#1. 지난 5월27일 김삼수 부산시의원은 플라스틱 등 재활용품을 선별하는 시설을 부산시가 직접 운영하게 하는 ‘부산시 재활용품 선별장 관리 및 운영 조례안’을 시의회에 제출했다. 6월14일 도시환경위원회는 수정 가결했고 같은 달 21일 본회의에서 의결됐다. 부산시는 지난달 5일 재의결을 요구했고 다음날인 6일 부산시의회의 재의결 없이 조례안은 폐기됐다.
#2. 이태성 의원 등 서울시의원 10명은 5월25일 서울시가 출자·출연한 기관의 이사가 이사회에 부의된 안건을 심의·의결하고, 출자·출연기관의 업무 집행에 대한 감시를 위해 자료 요구와 감사 요청 등을 할 수 있게 하는 ‘서울시 출자·출연기관의 운영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을 제출했다. 6월14일 기획경제위원회를 통과한 조례안은 같은 달 21일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같은 달 24일 서울시는 재의결을 요구했으나 시의회는 열리지 않았고 지난달 1일 조례안은 폐기됐다.
<한겨레>가 2018년 7월1일부터 지난 6월30일까지 전국 17개 시·도의회에서 제정한 조례들 가운데 광역자치단체가 재의결을 요구했으나 시·도의회에서 재심의가 이뤄지지 않아 자동 폐기된 조례를 조사해 보니, 부산시가 2건, 서울시가 3건이었다. 이 5건은 새 의회 임기가 시작되면서 폐기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산시 재활용품 선별장 관리 및 운영 조례안’과 폐기물 처리시설 주변 주민들에게 지원하는 기금을 부산시가 주민에게 직접 지급하는 것을 의무화한 ‘부산시 폐기물관리 등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은 지난달 6일 폐기됐다. ‘서울시 출자·출연기관의 운영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과 서울시가 출자·출연한 기관의 임원 보수를 서울시 생활임금의 6배 이내로 제한하는 ‘서울시 공공기관 임원 최고임금에 관한 조례안’, 국제영화제 예산을 지원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서울시 국제영화제 지원 조례안’은 지난달 1일 폐기됐다.
조례 폐기가 가능했던 것은 현행 지방자치법 규정 때문이다. 지방자치법은 지방의회가 통과시킨 조례에 대해 집행부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조례안을 통보받은 날로부터 20일 이내에 재의결을 요구할 수 있는데, 그사이 지방의원들의 임기가 끝나면 조례는 자동 폐기된다.
부산시는 법의 이런 빈틈을 활용했다. 부산시는 ‘재활용품 선별장 관리 및 운영 조례안’과 ‘폐기물관리 등에 관한 조례 개정안’이 6월21일 부산시의회 본회의에서 의결되자 시의회 임기(6월30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지난달 5일 재의결 요구서를 부산시의회에 보냈다. 조례안이 통과된 지 14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재의결 요구시한(지난달 11일)을 지켰으나 8대 부산시의원들의 임기가 끝난 뒤여서 조례안은 지난달 6일 자동 폐기됐다.
서울시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6월21일 ‘출자·출연기관의 운영에 관한 조례 개정안’ 등 조례 3건이 서울시의회 본의회를 통과하자 사흘 뒤인 24일 재의결을 요구했다. 하지만 10대 서울시의원들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본회의는 다시 열리지 못했다. 서울시의 재의결 요구 뒤 엿새 만에 본회의를 다시 소집하기엔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다. 결국 11대 서울시의회가 지난달 1일 개원하면서 조례 3건은 자동 폐기됐다.
시민단체들은 서울시와 부산시의 이런 사례를 다른 시·도가 따라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의회 임기 종료 시점이 임박해 제정한 조례가 집행부 입맛에 맞지 않을 경우, 다음 의회 개원 직전이나 직후에 재의결을 요구해 얼마든지 자동폐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양미숙 부산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집행부가 임기 말 시도의회가 제정한 조례의 재의결을 요구해 자동폐기시키는 것은 시민 대의기관의 권능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며 “지방자치법을 고쳐 제도적 빈틈을 메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 시민 권익 증진과 지방권력 감시를 위해 필요한 조례라면, 의회가 집행부의 재의결 요구시한(조례 통보일로부터 20일)을 고려해 입법 일정을 잡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집행부의 반대가 예상되는 조례 제정을 굳이 임기 말까지 미룰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김광수 김선식 기자 kskim@hani.co.kr
한국의 빈곤율, IMF 시절을 훌쩍 뛰어넘었다
'미신'이 된 신자유주의 정책 세트
지난 8월 4일, 강원도 홍천의 하이트진로 공장 앞에서는 하청 화물기사 130여 명이 농성을 벌였다. 이 화물기사들은 하이트진로의 자회사(수양물류)가 다시 위탁계약을 맺은 2차 하청업체들 소속이었다. 이들은 15년째 그대로인 운송료 인상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고, 노조를 결성해 집단행동에 나서자 사측은 (개인소유 차량을 등록하고 일감에 따라 보수를 받는) 지입 계약을 해지함으로써 이들 모두를 집단 해고했다.
아홉 살과 다섯 살의 두 자녀를 둔 11년차의 한 화물기사는 기름값과 도로통행료 등을 제하고 나면 한 달에 100~150만 원, 많이 버는 달은 200만 원쯤 가져간다고 했다. 올해, 4인 빈곤 가구가 정부로부터 생계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준선은 월 소득 154만 원 이하다. 하지만 일을 하고 있는 이 화물기사들이 생계급여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1990년대 말, 혹독한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나라 언론 매체들에 '신빈곤(新貧困)'이란 단어가 잠깐 등장한 적이 있다. 산업화에 성공해서 웬만큼 살게 된 나라에 갑작스레 찾아온 가난이란 의미였다. 한편으로는 과거의 가난이 굶주림과 남루한 행색으로 나타났던 데 비해, 오늘날의 가난은 겉으로 쉽게 판별할 수 없는 새로운 모습을 띤다는 뜻이기도 했다. 빈곤의 덫을 진작 벗어났다고 모두가 믿고 있던 시절이니, 대량실업 사태와 함께 찾아온 사회적 궁핍을 뭔가 비상한 현상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을 터이다.
그런데 뜬금없다던 이 빈곤은 지난 20여 년 동안 물러가기는커녕 점점 더 깊이 똬리를 틀고 확산돼 왔다. 전체 인구 중 가난한 사람의 비율을 나타내는 빈곤율은 외환위기가 터지자 12%대까지 치솟았다가 그 후 잠시 내려오는 듯하더니 2016년부터는 아예 15%대에서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다. 100집 중 15집 이상이 빈곤 가구라는 뜻이지만 최소한의 통계일 뿐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다. 앞에서 말한 화물기사들은 빈곤율 통계치에 제대로 포함되지도 않는다.
한국의 빈곤율은 OECD 국가 중에서 네 번째로 높다. 가장 살기 힘들었다는 'IMF 시절'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는 심각한 상태가 일상으로 고착되었다. 이제 빈곤이란 단어 앞에 굳이 '새롭다(新)'는 관형어를 붙일 필요가 없어졌다.
빈곤이 극도의 결핍이 주는 고통을 의미한다면, 불평등은 정반대 쪽의 과도한 풍요와 빈곤 사이의 격차가 빚어낸 불공정함이다. 그래서 빈곤과 불평등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짝을 이룬다. 빈곤이 만연한 사회일수록 빈부격차, 불평등의 정도가 심한 경향이 있다.
반면, 한 나라 경제 수준의 지표라고 믿는 1인당 국민소득은 불평등 문제에 관한 한 전혀 무의미한 정보다.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가 넘는 OECD 회원국 가운데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가장 평등한 국가군에, 그리고 영국, 미국, 일본 등은 가장 불평등한 그룹에 속한다. 1인당 평균소득과 빈부격차가 동시에 세계 최고를 달릴 수 있다는 얘기다. 오히려 3만 달러가 넘는다는 허울 좋은 수치는 우리에게 '이만하면 괜찮다'는 식의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작년 연말에 프랑스 파리에 있는 세계불평등연구소(World Inequality Lab)가 '2022 세계불평등보고서'를 냈다. 이 연구소는 8년 전 <21세기 자본>을 써서 유명해진 토마 피케티도 참여하고 있는, 불평등문제 연구자들의 국제 네트워크이다. 우선 한국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대략 서유럽 국가들의 수준이지만 불평등도는 서유럽보다 높아서 미국 수준에 가깝다. 최상위 10%의 소득층이 전체 소득의 46.5%를, 하위 50%의 소득층이 전체 소득의 16%를 갖는다. 그러나 재산(富)으로 따지면 불평등도는 이보다 더 심하다. 재산을 가장 많이 가진 최상위 10%의 보유분이 전체 재산의 59%인 반면, 하위 50%의 보유분은 6%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적 추세처럼 우리나라도 지난 30년 동안 개인 간의 불평등 정도가 계속 증가해왔다. 이 보고서는 그 원인을 '1990년까지 경제성장을 이룩한 후에, 사회보장제도가 빈약한 가운데 자유화(liberalization)와 규제 완화(deregulation)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 빈곤과 불평등 문제는 시대적 화두다. 국가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여 긴급히 방역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적 질병이다. 행여 '예로부터 가난은 나라님도 어쩌지 못했다'느니, '개인이 근면 성실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라는 식의 시대착오적 둘러대기는 입에 올리지 말자. 이를 개인의 문제로 몰고 가면 '외환위기 직후 빈곤율과 실업률이 급상승한 건 불성실하고 나태한 사람들이 갑자기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해괴한 논리에 빠질 뿐이다.
위의 불평등보고서 역시, 전 지구적 경향성에도 불구하고 나라 간의 정책 결과가 다르다는 점을 생각하면 불평등은 언제나 정치적 선택(political choice)의 문제라고 명토 박고 있다. 그러면서 21세기에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은 불평등을 완화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임을 강조하면서, 정부가 누진적 조세제도(소득세 및 재산세)를 실시해서 재분배 정책의 재원으로 사용할 것을 강력히 조언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8월 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침수 피해 현장을 방문했다. 이 반지하 주택에서는 발달장애 가족이 전날 밤 폭우에 따른 침수로 고립돼 사망했다. ⓒ연합뉴스
지난 대선에서 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를 잘살게 하겠다고 공언했고, 당선된 현 대통령 역시 취임 후 국정 비전으로 "함께 잘사는 국민의 나라"를 제시했다. 표현이 다소 흐릿하고 벙벙하긴 하지만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갓 태어난 정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구호의 내용인즉, 기왕의 부자를 더욱 잘살게 하겠다는 뜻은 아닐 테니, 못사는 서민들의 삶을 끌어올려 빈부격차를 줄이겠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아, 마침내 불평등의 완화를 제일의 정책 목표로 삼는 따뜻한 정부가 탄생한 것인가?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후로 발표된 구체적 정책들은 예의 불평등보고서의 조언과는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누진세제의 강화가 아니라 오히려 감세와 규제 완화를 골간으로 하는 정책들이다. 여기에는 정부 소유의 토지와 건물 16조 원 이상을 매각하는 국유재산 민영화 조치도 포함돼 있었다.
국민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 정책은 무릇 경험 과학에 근거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실증 자료의 논리적 분석 결과에 입각해야 하고, 그로 인해 효과에 대한 과학적 예측력이 높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과거에 시행했던 정책의 결과,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의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이제까지 부자 감세와 규제 완화, 민영화 등으로 요약되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대부분 공허한 약속으로 끝이 났다. 부자(기업)들의 세금을 깎아주면 그만큼 투자가 확대되고 생산력이 높아져서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겨나고 성장률이 높아질 거라는 예측은 역사상 번번이 틀렸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줄기차게 실험해 왔지만 일자리가 늘어나기는커녕 빈곤이 확산되고 불평등이 심해질 뿐이었다. 그러니 이번 법인세 인하가 투자의 증가를 가져올 거라는 윤석열 정부의 주장에 대해서도 경제학의 기본도 모르는 허무맹랑한 주장이란 비판이 빗발친다.
이쯤 되면 신자유주의 정책 세트는 과학이라기보다 미신, 혹은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과거 정책의 발자취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하고, 오직 '시장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고색창연한 주문(呪文)만을 되뇐다. 세계불평등연구소의 보고서가 재분배 정책을 강조하는 것은, 1945년부터 약 30년간 서구의 자본주의가 비교적 평등했고 또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이 누진세제를 통한 보건과 교육, 그리고 만인을 위한 기회의 신장에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외신들은 지난번 폭우로 인한 반지하 셋방에서의 죽음을 전하면서 '이번 폭우가 서울의 심각한 불평등을 드러냈다'고 꼬집었다.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온갖 문제들은 이처럼 불평등과 연결되고 불평등을 통해서 증폭된다. 이를 비껴갈 도리가 없다. 그리고 불평등 문제의 정공법은 국가가 거둬들이고 다시 나누는 재분배 정책이다. 근거 없는 장밋빛 허언(虛言)들은 우리의 상처를 더 깊게 할 뿐이다.
여기서 사족 하나를 덧붙이자면, 이른바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사회적 경제를 육성하는 정책 역시 불평등 문제에 대한 정공법이 아님을 명확히 하자. 사회적 경제 지원 정책이 잘못됐다거나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사회적 경제 조직은 그 나름의 가치와 효용이 있고 따라서 번성,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재분배 효과가 미미한 사회적 경제 조직을 빈곤과 실업, 불평등의 해결 대안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것만큼 위험하고 해롭다. 재분배 정책의 강화 필요성을 한사코 부인하려는 자들이 자칫 온갖 짐을 애꿎은 사회적 경제에게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신명호 사회투자지원재단 사회적경제연구소장/ 프레시안
통신·케이블노동자 45% “작년 산재 당해”… 문제는 고용불안
설문조사 결과…30%는 “작년 1번 이상 교통사고”
고용불안으로 위험·열악조건 내몰려, 근로감독 촉구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딜라이브 등 인터넷·케이블 설치수리 노동자들이 지난해에만 2명 중 1명 꼴로 업무상 재해를 겪은 것으로 조사됐다. 전체 산업재해율의 최소 20배에 달하는 수치다. 간접고용 구조에 놓인 이들은 저임금과 과도한 업무량, 위험 작업과 고객 갑질에 내몰리고 있었다.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는 고용노동부에 통신케이블 업종에 대한 근로감독을 요구했다.
▲사진=희망연대본부 제공
희망연대본부와 노동환경연구소 ‘일과건강’은 지난 4~5월 약 한 달 간 희망연대 소속 LG유플러스, SK브로드밴드, LG헬로비전, 현대HCN, 딜라이브 케이블·통신 노동자 103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산업안전 실태조사를 결과를 25일 발표했다. 발표는 정의당 이은주·배진교·강은미·류호정 의원과 희망연대본부가 공동으로 연 토론회에서 이뤄졌다.
조사를 진행한 한인임 일과건강 사무처장은 “2021년 중 업무 때문에 생긴 사고나 질병으로 4일 이상 병원·한의원·약국 치료를 받았던 경험이 몇 번 있느냐는 질문에 1번 이상 경험자의 비율이 무려 45%에 이르렀다”고 결과를 밝혔다. 지난해 한국 전체 노동자의 산업재해 발생률은 0.63%다.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와 정의당 이은주·배진교·강은미·류호정 의원은 25일 국회의원회관 2세미나실에서 케이블통신 노동자 산업안전 보건 실태와 제도개선 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사진=희망연대본부 제공
한 처장은 심각한 재해율의 원인으로 통신·케이블 노동자들이 겪는 고용불안을 지목했다. 대다수 노동자가 원청과 직접 계약하지 못하고 1~3년마다 계약서를 ‘갈아야’ 하는 불안한 처지에 놓였다. 한 처장은 “(이번 조사에 참여한 6개 지부 가운데) 딜라이브와 LG유플러스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간접고용 비정규직으로 상시 고용불안을 겪고 있다. 이는 노동조건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케이블·통신 노동자들은 위험 작업을 하면서 과도한 물량에 쫓긴다.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하루 평균 7.9건의 설치·수리 업무를 수행했고, 하루 평균 9~10시간 일했으며 토요일에도 근무했다. 김유정 노동건강연대 노무사는 “고소(높은 곳), 전봇대작업 등 항상 위험한 옥외 노동에 노출돼 있고 무거운 장비, 무리한 업무량, 이동거리, 온전히 보장되지 않는 휴게시간 등 말 그대로 ‘빠른 대한민국’을 위해 자신을 갈아 넣고 있다”며 노동 현실을 요약했다.
업무상 교통사고도 두드러졌다. 지난 한 해 동안 업무상 운전 중 교통사고를 겪었는지 묻는 질문에 28%가 ‘있다’고 답했다. 2회 이상 경험한 노동자는 이 중 30%에 이르렀다. 한 처장은 그 배경으로 “노동자 97%가 운전 중 고객이나 고객센터와 통화를 했다고 답했고, ‘수시로 한다’는 응답도 50%에 달했다”고 했다. 운전하며 통화해야 하는 탓에 교통사고도 잦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와 정의당 이은주·배진교·강은미·류호정 의원은 25일 국회의원회관 2세미나실에서 케이블통신 노동자 산업안전 보건 실태와 제도개선 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사진=희망연대본부 제공
이들은 고객을 대면하면서도 위험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현장 증언에 나선 SK브로드밴드 케이블 전송망 노동자 김태엽씨는 “옥상 선 정리해달라는 민원 접수를 받고 갔더니 술에 취한 고객이 부엌 칼을 들고 30분 간 위협하며 욕설을 했다. 그러나 일을 중단할 수 없었다”며 “그 뒤 과호흡, 우울증, 무력감으로 정신과 3주 진단을 받았고 6개월가량 상담치료를 했다. 원청도, 하청도 이를 책임지지 않았다”고 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규정했지만 통신 노동자들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이를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씨는 “얼마 전 동료를 대신해 고객 민원을 받아 근무하는데 갑작스럽게 감당하기 어려운 폭우가 쏟아졌다. 전화로 (하청업체에) ‘진행이 어렵다’고 작업중지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건 ‘VOC콜이 많이 들어오니 여건에 맞춰 작업하라’는 말이었다. 업체 관리자는 ‘빨리 처리하라’며 독촉했다”고 했다. 그는 “이런 일들은 너무나 많다. 폭염 대책이다, 코로나19다 말은 많지만 현장에 적용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희망연대본부는 토론회에 출석한 노동부 관계자에게 케이블통신 업종에 대한 근로감독을 요구했다. 이만재 희망연대본부장은 “산업안전에 대해 특별감독 등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케이블통신 업종에 대해 검토된 게 있나”라고 물었다. 양현수 안전보건감독기획과장은 “케이블방송통신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을 안 해 봤다”며 “케이블통신 노동자도 관리업종 중 하나로 보고 있다. 효율적 관리(방법)를 검토한 뒤 국회에 보고하겠다”고 답했다. 미디어오늘 김예리 기자
전파력 높이는 코로나19 변이…끝은 어디일까
오미크론 배출량, 델타의 최대 1000배
갈수록 복제 활발한 변이 출현하지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배출량보단 적어
전파력 더 높은 변이 출현 가능성 시사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변이를 거듭할수록 전파력이 높아지고 있다. 픽사베이
코로나19 바이러스(사스코로나바이러스2)는 변이를 거듭하면서 전파력이 더 높은 3개의 변이체(알파, 델타, 오미크론)가 우세종을 점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원조 바이러스보다 알파(B.1.1.7) 변이가, 알파보다 델타(B.1.617.2)가, 델타보다 오미크론(BA1=B.1.1.529)의 전파력이 더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오미크론 BA1은 델타보다 전파력이 3배 높다. 또 오미크론의 하위 변위인 BA2는 이전에 나타난 원조 오미크론(BA1)보다 전파력이 30~40% 높다. 이는 에어로졸 배출량이 더 많은 변이체가 살아남는다는 자연선택 가설과도 일치한다.
미국 메릴랜드대 연구진이 이들 세 가지 변이의 전파력을 다른 변이 감염자들과 비교한 결과 일부 감염자에서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양이 알파나 델타보다 최대 1000배 더 검출됐다고 사전출판 논문집 ‘메드아카이브’(medRxiv)에 발표했다. 그러나 인플루엔자 감염자의 바이러스 배출량에는 크게 못 미쳤다.
연구진은 이는 지금보다 바이러스 복제가 더 활발한 쪽으로 코로나19 변이가 더 진행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사전출판 논문은 아직 동료 과학자들의 검토를 거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한 실험 참가자가 확성기 모양의 에어로졸 수집 기구에 입을 대고 말하고 있다. 네이처 제공
실제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표본 수집
연구진은 2020년 6월~2022년 4월에 코로나19 감염자 93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숨을 내쉴 때 배출하는 에어로졸을 모아 분석했다. 에어로졸 수집 시기는 감염 후 1~13일 사이였으며, 감염자의 증상은 경미(97%)하거나 무증상(3%)였다.
이들이 감염된 바이러스는 알파, 델타, 오미크론에 걸쳐 있었다. 특히 델타와 오미크론 감염자는 모두 백신 접종을 완료한 상태였다.
연구진은 이들에게 확성기 모양의 기구에 입을 대고 30분 동안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를 지르도록 했다. 일부 사람들은 기침과 재채기도 했다. 게준트하이트2(Gesundheit-II)라는 이름의 이 수집 기구는 지름 5마이크로미터 이하의 미세한 에어로졸까지 잡아낸다.
연구진이 이 입자들을 분석한 결과 알파, 델타, 오미크론 변이에 감염된 사람들이 내뿜은 에어로졸에는 변이 전 바이러스나 감마 변이를 비롯한 다른 변이 감염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바이러스 입자가 들어 있었다. 특히 델타와 오미크론 변이 감염자들의 경우 미세한 에어로졸에 포함된 바이러스가 큰 에어로졸에 포함된 것보다 5배가 더 많았다. 스웨덴 룬드대의 에어로졸 전문가 멀린 알스베드 교수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이는 호흡, 대화, 외침, 기침, 재채기 등 실제 에어로졸을 내뿜는 모든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표본을 수집해 나온 결과라는 점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이어 실험실에서 세포에 감염자들의 에어로졸을 뿌리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델타와 오미크론 감염자의 에어로졸 표본 중 4개가 세포를 감염시킨 것을 확인했다.
국제인플루엔자정보공유기구(GISAID)에 등록된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 현황.
사람마다 배출량 편차가 큰 이유는?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의 비말에 포함된 바이러스 양은 검출할 수 없는 정도에서 ‘슈퍼전파자’에 버금가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개인 편차가 매우 컸다고 밝혔다. 예컨대 오미크론에 감염된 한 사람은 알파나 델타 감염자의 최대치보다 1000배 많은 바이러스 입자를 방출했다.
연구진은 이런 편차가 왜 생기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나이를 비롯한 생물학적 요인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과 다른 행동 패턴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예컨대 슈퍼전파자 수준의 바이러스를 배출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주 기침을 했다. 그러나 세 가지 변이의 평균 바이러스 배출량은 통계상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다.
연구진은 특히 코로나19 감염자가 내뿜는 바이러스 양이 인플루엔자 감염자가 내뿜는 바이러스보다 적다는 데 주목했다. 이전의 검출 데이터와 비교한 결과 오미크론 감염자의 바이러스 최대치는 인플루엔자 감염자의 최대치 바이러스 양보다 2.4배 적었다. 코로나19 감염자의 평균 바이러스 배출량은 인플루엔자 감염자와 비교하면 100분의 1 수준이었다. 연구진은 이는 장차 더 많은 바이러스를 배출하는 코로나19 변이가 나타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멀린 알스베드 교수는 “이 점이 우려해야 할 사항”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따라서 이번 연구 결과는 환기 및 여과 시스템을 고쳐 실내 공기 질을 개선하는 데 투자하도록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는 걸 뜻한다”고 강조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한번 유튜브 방송하면 수백만원 버는데 벌금 50만원 무섭겠나"
[맹신과 후원, 폭주하는 유튜버]
갈수록 자극적 중계… 경찰도 안중 없어
"돈 들어왔으니 더 크게" 소음민원 급증
한국일보는 7월 16일부터 8월 14일까지 한달 간 주말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양산 평산마을 사저 앞을 찾았다. 문 전 대통령 퇴임 후 보수단체와 1인 시위자, 유튜버들은 매일 사저 앞에서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유튜버 '우파삼촌' 김모씨가 진보단체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 양산=조소진 기자
“딱지 끊어 XX놈아! 100개 끊어!”(‘깡통아재’ 최모씨)
“아, 구독자님이 벌금 내라고 돈 보내주셨어요. 형님 소리 더 지르세요! 스피커도 더 크게! 우리 시끄럽게 합시다!”(‘우파삼촌’ 김모씨)
6일 오후 2시 문재인 전 대통령 자택이 자리 잡은 경남 양산시 평산마을 앞. 경찰이 1인 시위 중인 유튜버들에게 기준 소음을 넘었다며 범칙금을 통고하려 하자, 격분한 듯 돌아온 반응이다. 스피커 소리는 더욱 커졌고 휴대폰 앱의 소음 측정기 수치는 100데시벨(㏈)을 훌쩍 넘었다. 열차가 바로 옆에서 지나갈 정도의 굉음에 가까웠다.
평산마을만의 문제는 아니다. 단골 집회장소인 서울 종로와 영등포 일대 경찰들은 유튜버들의 막무가내 행태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1인 시위자 대부분은 유튜브로 집회 현장을 생중계하기 때문에 ‘소음 폭력’을 자주 연출한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방패막이 삼아 돈벌이에 몰두하는 유튜버들에게 경찰은 안중에도 없다.
늘어난 집회 유튜브 중계... 소음 민원도 급증
그래픽=송정근 기자
24일 한국일보가 임호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경찰청 소음 민원 통계에 따르면, 집회 소음과 관련한 112 신고와 이에 따른 경찰 조치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집회 신고가 가장 많은 5월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지난해에는 소음 신고가 2,760건이었지만, 올해는 4,074건으로 급증했다. 소음 유지·중지 명령(240건→297건)과 수사의뢰 건수(11건→53건)도 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며 집회가 늘어난 영향도 있지만, 집회를 자극적으로 중계하는 유튜버들이 늘어나면서 소음 민원이 급증했다는 게 경찰 설명이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집시법 제14조는 집회·시위 주최자가 확성기 등을 사용해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소음'을 발생시켜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위반하면 6개월 이하 징역 또는 50만 원 이하 벌금·구류 또는 과료 등에 처하지만, 실제로 징역형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음은 10분 평균치로 계산하는 등가소음과 최고소음 기준으로 측정된다. 등가소음 기준으론 주거지역·학교·종합병원 주변은 주간에 65㏈ 이하, 야간에는 60㏈ 이하, 심야시간에는 55㏈ 이하여야 한다.
꼼수 부리는 유튜버들...“벌금? 내고 말지”
한국일보는 7월 16일부터 8월 14일까지 한달 간 주말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양산 평산마을 사저 앞을 찾았다. 문 전 대통령 퇴임 후 보수단체와 1인 시위자, 유튜버들은 매일 사저 앞에서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한 유튜버가 문 전 대통령 사저를 향해 자신이 작곡한 '쩝쩝이송'을 부르고 있다. 양산=조소진 기자
양산 평산마을에서 만난 유튜버들은 "벌금 내면 그만"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현행법의 허점을 파고들며 방송에 열을 올렸다.
한 유튜버는 성능 좋다는 외제 스피커를 보여주며 "이게 1,000만 원짜리"라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집회 방송 한번 하면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들어오는데, 그까짓 벌금을 무서워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실제로 소음 규정을 위반해도 최대 벌금 50만 원, 1인 집회의 경우엔 경범죄처벌법상 범칙금(최대 10만 원) 부과가 전부다.
한국일보는 7월 16일부터 8월 14일까지 한달 간 주말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양산 평산마을 사저 앞을 찾았다. 문 전 대통령 퇴임 후 보수단체와 1인 시위자, 유튜버들은 매일 사저 앞에서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깡통아재' 최모씨가 사용했던 스피커 모습. 노래만 틀었을 뿐인데 79데시벨을 기록했다. 양산=조소진 기자
법을 조롱하듯 소음 기준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유튜버도 있었다. 7분간 고성을 지르다가 3분간 휴식을 취하며 '10분 소음 평균치'를 낮추는 식이다. 맞불 집회 참여자나 다른 유튜버와 일부러 마찰을 빚어 '중복 소음'을 유발해 측정 자체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찰이 노동조합과 시민단체 중심의 대형 집회 관리에서 탈피해 유튜버가 중심이 된 최근 집회 행태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며 "시골이나 도심, 주거지와 학교 주변 등 지역 특성에 맞게 소음 기준을 달리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맹신과 후원, 폭주하는 유튜버
1. 평산마을의 여름 한 달간의 기록
2. 팬덤이 쌓아올린 그들만의 세계
3. 불순한 후원금, 선의와 공갈 사이
4. 정치권, 필요할 땐 이용하고 뒷짐
조소진 기자 sojin@hankookilbo.com
진보정당 전체 공멸 위기, 다음 총선은 더 참혹할 것”
진보원로 권영길·천영세의 호소
권영길 “진보정당은 포괄·총체적 평등 추구…민중을 주체로 세워야”
천영세 “‘노동이 당당한 나라’ 외쳤는데 노동자가 ‘내 당’ 인정 안해”
권영길(오른쪽), 천영세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19일 서울 청계천로 전태일기념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두 진보 원로는 “이런 자리를 정말 피하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 민주노동당의 경험을 근거로 철 지난 꼰대 짓을 하는 게 아닌지, 그렇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권영길·천영세 두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어렵사리 자리에 앉았다. 정의당의 한계와 활로에 대해 2시간 가까이, 걱정스럽게 발언을 이어갔다. 방담은 19일 오후 서울 청계천로 전태일기념관 6층 세미나실에서 진행했다.
―정의당 10년 평가위원회가 ‘정의당 10년은 거의 망가졌다’고 평가하는 것 같아요. 왜 이렇게 폭망했다고 보세요?
“정의당 안에서도 존립의 위기라고 말하잖아요. 단지 지난 3월 대선과 6월 지방선거의 결과만 놓고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정의당 창당 이후 지난 10년 동안 진보정당으로서의 위상, 정치 노선, 조직 노선, 이런 부분에서 정말 진보정당으로서 손색이 없는 역할을 해왔느냐? 그렇지 않았죠. 핵심은 정의당의 주체는 누구냐, 누구를 위한 정당이냐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 여러 한계와 문제를 안고 있었죠.”(천영세)
―구체적으로 뭘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진보정당이 뭡니까? 진보정당은 첫째, 노동자의,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정당이 되었어야 하는데 정의당은 그런 모습을 갖추지 못했어요. 정의당도 노동자를 위해서 일한다고 이야기는 해왔지만 실질적인 행보를 보면 그러지 못했어요.”(권영길)
“우리 사회에서 진보정당은 뭐냐? 누가 그 정당을 하고, 누구를 위한 것이냐? 그 부분은 역시 민주노동당 창당 때 우리가 일컫던 주체, 기반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민중입니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런 사회적인 약자 부분을 포괄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진보정당의 주체는 그들이고 진보정당의 모든 사업을 거기에 맞춰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다고 봐요.”(천영세)
―정의당도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를 대변한다고 말합니다.
“용어는 바뀌었지만 한마디로 다 노동자 아닙니까. 노회찬 의원이 얘기한 6411번 버스의 투명인간들도 다 그거란 말이에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정의당이 그 부분을 확고하게 주체로 세우고, 작은 사업이든 큰 사업이든, 당의 목표가 그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되는데 여러 사람들이 인정하듯 지금까지 정의당은 그렇지 못했어요. 청년, 여성, 물론 그들이 대부분 노동자일 수 있지만 그 부분이 너무 부각되고 그들 중심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비쳐 있는 것은 어쨌거나 정의당이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천영세)
“진보정당의 생명은 포괄적·총체적인 평등 추구 아닙니까. 그럼 여성 차별적 문제, 이건 당연히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걸 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민주노동당이 여성할당제를 처음 주장했어요.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죠. 여성이 없는데 누가,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고까지 말했어요. 그러나 제도가 있으면 사람이 만들어진다며 그걸 밀어붙였어요. 진보정당이라고 다 동의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토론 끝에 여성할당제를 강제적으로, 비례만이 아니라 지역에도 적용했어요. 국회에 들어와서도 이 문제를 당의 중점 간판 사업으로 내걸었어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에 중점을 둔 가운데 여성의 문제를 이렇게 제도로 접근했거든요. 정의당은 왜 페미정당 논란에 휩싸였을까요? 이런 부분에 관해 정의당의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권영길)
―여성, 약자,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자는 얘기를 한 것인데, 정의당에선 억울할 것 같은데요?
“그게 더 문제라는 거예요. 지향하지는 않는데, 몇몇이 그렇게 하는 게 정의당의 전체처럼 비치는 게.”(권영길)
“상대적인 거예요. 예를 들면 최근 정의당 비대위가 구성되면서 전에 없이 거제 (조선소) 노동 현장에 나타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정의당이 평상시에 좀 더 그렇게, 적극적으로 노동을 중심 사업으로 깔고 그러면서 페미든, 그 어떤 운동을 병행했으면 정의당이 이렇게 페미니즘 정당 논란에 휩싸이고, 그쪽으로 치우쳤다고 비판받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노동 현장에서 멀어지고, 원내든 원외든 민중들의 삶, 가장 어려움에 처해 있는 현장에서 정의당의 깃발을 볼 수가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프레임이 씌워진 것이든 어쨌든 그런 논란이 생겨난 거란 말이에요.”(천영세)
“페미당 소리를 들어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정의당을 만들었어야 하는데, 너무 좁은 의미의 ‘미투’에만 머문 게 아니냐는 것이죠. 정의당이 여성의 차별에 대해서 강령이라든지 정책이라든지 실천의 문제에서 그런 당을 만들고 실현하려 해왔나요? 특히 여성의 차별에서 제일 중요한 게 남성·여성의 노동 문제 아닙니까? 가장 저임금에 고통받는 여성 노동자들이 얼마나 수없이 문제가 됐는데, 정의당이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제기하고 해결하려 해왔느냐는 거예요. 그런 걸 안 하는 상태에서 돌출적인 몇몇 사건, 그런 걸 가지고 그냥 페미당이라 불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권영길)
―좀 과한 비판 아닌가요?
“이런 거예요, 이번 3월9일 치른 대선, 5년 전 대선에도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어요. 그럼에도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 대다수는 왜 ‘정의당이 내 당이다. 우리 당이다’라고 인정을 안 하는가? 이를테면 민주노동당은 부유세 신설해라, 무상교육 해라, 또 상가임대차보호법, 이자제한법 같은 부분을 평상시에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한나라당과 조중동 보수 언론은 ‘야! 민노당, 저 날강도 같은 것들’이라고 비난하고 공격했어요. 하지만 선거 때든 평상시든 이런 주장과 노력을 펼치니 ‘아, 저게 진짜 진보정당이구나’ 이렇게 된 거란 말이에요. 슬로건, 캐치프레이즈로 내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최근 정의당 비대위가 노동 현장, 투쟁의 현장에 나오니까 ‘그래, 얼마나 가나 보자’라는 비아냥도 나오잖아요. 이게 지금까지 노동 쪽에서 정의당이 취해온 어떤 것에 대한 불신 아니겠어요?”(천영세)
―비아냥이 있어도 지속해 가야 하는 방향 아닌가요?
“그게 맞는 방향이죠. 정의당이 진작 그렇게 했어야 하는 거죠. 자기 위상을 진보정당으로 설정했다면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했어야 되는 거죠.”(천영세)
―정의당은 진보정당을 자임했고, 노회찬, 심상정, 이정미 등이 그 책임을 지고 당을 이끌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왜 민주노동당 시절 했던 것을 지금 정의당은 못 하는 상황이 온 것이죠?
“정의당이 문제지요. 당연히 해야 하는데, 안 한 문제라고요. 누가, 왜 안 했는지? 그게 당의 정책 집행 문제였는지, 아니면 그 이전에 강령적 문제인지, 이런 것을 현재 정의당 비대위가 성찰하고 짚어야 할 문제입니다. 정의당이 더불어민주당 2중대라는 얘기를 듣는 게 문제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정의당 스스로 물어야 된다고요. 민주당이 진보정당이냐, 아니냐? 민주당과 정의당이 말하는 진보의 차이를 정의당이 스스로 말하고 국민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의당은 그걸 안 하고, 못 하고 있는 겁니다. 당장 정의당의 강령 문제도, 반대가 있겠지만 토론해야 합니다. 정의당 강령에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박든지, 최소한 민주노동당의 경우처럼 ‘자본주의 질곡을 넘어서고 사회주의를 지향하고’라고 하든지, 뭔가 해야 합니다. 정의당도 민주당도 차별금지법 한다 하는데 그런 걸 가지고 어떻게 민주당과 정의당이 차별되겠냐 이겁니다.”(권영길)
“국민의힘은 극우정당이고, 민주당은 보수적 리버럴 정당인데, 지금 정의당이든 진보당이든, 진보정당은 이 부분을 명확히 달리하고 있다는 것으로 진보적인 걸 갖고 있고, 보여주고, 주장해야죠. 민주당 2중대라는 용어, 프레임 때문에 정의당이 쭈뼛쭈뼛하고 민감해할 일이 없어요. 문제는 누가 뭐라 하든, 정의당의 자기 정체성과 이념을 분명히 하면서 내걸 수 있는 정책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 뿌리가 확실하면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되는데, 정의당은 그 뿌리가 약하니까 문제인 것이죠. 사회운동, 민중운동, 거기서 가장 중심 되는 것이 이 땅의 노동운동, 그 가운데서도 그 주체가 가장 확고하고 강한 세력이 민주노총 아닙니까? 옛날 민주노동당처럼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여하튼 민주노총이 지금 조합원이 100만명인데 정의당이 같이 가야지요.”(천영세)
―민주노총이 기득권화돼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지금 민주노총의 주류가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대기업, 소위 고임금 노동자로 돼 있는 거 아니냐며, 정의당은 그들보다 더 어렵고 소외돼 있는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들을 최우선에 둬야 한다고 말해요. 맞는 말이에요. 수많은 노동대중을 다 당원으로 포괄하고, 진보정당 후원자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그게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럼 현재 조직돼 있는, 대기업 고임금 노동자들이 여전히 중심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소외된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의 중심을 이루고 있단 말이에요.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창당 때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우리 정당을 한번 만들어보고자 시도했던 경험이 있는 주체예요. 그러니까 정의당이 밀착해서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천영세)
―정의당이 지금 민주노총을 포기하고 있다는 얘기인가요?
“포기되었다기보다 관계가 옛날처럼 밀착되지 않았다는 것은 정의당과 민주노총이 서로 인정하는 바란 말이에요. 대선 때든 총선 때든 권(영길) 대표님하고 나하고 정의당, 진보당 어느 당 할 것 없이 진보정당 후보를 지원하러 창원과 울산, 이른바 진보 1번지인 영남 벨트에 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간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게 “하나가 돼서 오세요, 진보정당 후보를 하나만 내달라. 두개, 세개 진보정당이 후보가 갈라져 있고 당이 갈라져 있는데 우리들더러 어떻게 하라는 얘기냐?”고 해요. 그런데 지금 통합진보당이 분당되고 10년인데 진보대통합을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민중정치, 노동정치를 복원해달라는 거예요.”(천영세)
―진보대통합을 어떻게 할 수 있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정의당을 포함해서 다른 진보정당도 당면한 과제가 뭔가요? 2024년 총선 대책입니다. 진보정당이 국회에서 정책 입안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의석을 가지고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노동자, 민중은 ‘너희끼리는 갈라져 있는데 우리는 그 차이점을 구분 못 하겠다.’ 이걸 제일 문제 삼고 있어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데 활발하게 토론이 안 일어나요. 분열된 상태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느냐? 적어도 다음 총선, 2024년에 이대로 가면 정의당 후보, 진보당 후보, 또 이 뭐 저기 노동당 후보, 또 녹색당 후보, 이렇게까지 출마할 수 있는데, 내가 볼 때 정의당이 착각하고 있어요. 원내 정당으로, 진보정당 중에서 일정 지지가 나오고, 선거 때 가면 아무리 못해도 현재와 같은 수준은 유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말은 안 하지만 정의당 머릿속에 들어 있어요.”(권영길)
“정말 이 해묵은 갈등, 분열, 분당 세력들 간에 갈등과 반목이 있지만 그 부분을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공멸이에요. 지금 정의당 사람으로 (다음 총선에) 명맥은 유지할지 모르지만, 그건 연명이지요. 진보당도 정의당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지방 의석) 몇석 좀 얻었다고 도토리 키재기로, 뒷골목 대장 노릇 하다 끝내려면 모르겠는데 그것에 자족한다면 큰일 납니다. 더 큰 보수 거대 정당이 앞에 있는데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바득바득, 어떻게 정의당 한번 이겨서 뭐 이걸 극복해보자는 건 한계에 부딪힐 거예요.”(천영세)
“지금처럼 이렇게 가면 지역구·비례 누구도 지지를 못 받아요. 다 참혹한 상황이 닥쳐요. 지금 정의당의 위기는 대선·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촉발된 거 아닙니까? 그런데 2024년 총선에선 진보정당 전체가 소멸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고 있어요. 진보정당의 중심, 당원이 되어야 할 노동자와 농민, 민중 속에서 이제는 완전히 진보정당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리고, 사이비 유사 진보정당으로 옮겨간다는 거예요. 보수 양당 체제가 더 공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권영길)
“어렵지 않으면 진보정당이 아닙니다. 꽃길만 가겠다? 그러면 보수정당, 적당히 하면 되는 거예요. 지금 진보정당이 분열되고 분당된 와중에 거대 보수정당이 야금야금 그 기반을 잠식하고 있는데, 진보정당이 존재할 저수지의 물이 말라버리면 통합 문제, 후보 단일화는 몇년 지나면, 그때는 이미 늦어요. 정의당뿐만 아니라 진보당도 진보정당의 지도부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총체적인 이 위기 속에서의 역사적인 책무를 다해주기를 바라는 거죠.”(천영세)
권영길
-서울신문 기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초대 위원장
-민주노동당 대표/대선 후보
-제17·18대 국회의원
-20대 총선 정의당 선대위 고문
천영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공동의장
-민주노동당 사무총장/당대표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제20·21대 정의당 총선 선대위 고문
-민주노총 지도위원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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