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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시사만평-주간 쟁점

22.8.1~8.6 사법 살인당해 침몰한 한국의 진보정치

by 이성근 2022. 8. 1.

흠뻑쇼노동자 사망에 박노자 대한민국 현주소”···싸이 측 애통

해수부, ‘피살 공무원재직 중 사망 인정

미국은 만능'이라는 환상의 종말

국보법 폐지 주장에 제동 건 헌재와 대법원-민변·시민 등 강력 반발

거품 시대의 한국 대중문화

이경 지금까지 이런 영부인은 없었다. 격 떨어지게 이래도 될까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

데이터가 증언하는 자영업자·소상공인의 코로나 빚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경찰국인가

남성 청소년을 둘러싼 잘못된 메시지, 어떻게 할까

이승만·박정희·박근혜 체제에서 사법 살인당해 침몰한 한국의 진보정치

신종 감염병 시대, 희생양 만들면 문제 해결되나 감염병과 그림

흑인이라서, 여성이라서강탈당한 약자의 몸

경찰국장 김순호 과거노동운동대공분실 경찰’ 180도 변신

스위스 노인들이 요양원 대신 선택한 것

 

흠뻑쇼노동자 사망에 박노자 대한민국 현주소”···싸이 측 애통

가수 싸이의 흠뻑쇼포스터.

 

가수 싸이의 흠뻑쇼콘서트장 무대 철거 과정 중 외국인 노동자 사망 사고가 발생한 데 대해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가 이게 대한민국의 현주소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지난 31일 페이스북을 통해 싸이 같은 ‘K-가수들은 전세계에 명성을 떨칠 수 있지만, 국내에서 그 공연의 물질적 인프라를 담당하는 노동자들은 그냥 과거처럼 목숨을 내놓고 위험천만한 환경에서 일해야 한다. 안전 사고로 유명을 달리해도 책임자 처벌 등등은 없다고 적었다.

 

박 교수는 또 연예계의 심각한 소득 격차를 지적하면서 공정의 자도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불의와 격차의 사회이며 그 격차는 심화만 돼 간다고 말했다.

 

앞서 이날 오후 350분쯤 강원 강릉종합운동장에서 무대 철골 구조물 철거 작업을 하던 몽골 국적의 20대 남성이 15아래로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찰은 남성이 작업 도중 미끄러져 숨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남성은 무대 구조물을 제작하는 외주업체에 고용된 직원이었다. 전날 이 자리에서는 싸이의 흠뻑쇼공연이 열렸다.

 

싸이 소속사 피네이션(P NATION)은 같은 날 입장문을 내고 애도를 표했다. 소속사는 애통한 소식을 전하게 되어 마음이 무겁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유족 분들에게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고 밝혔다. 이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시는 스태프의 노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이번 사고가 더욱 비통할 따름이라고도 했다.

 

향후 대책을 마련하고 재발 방지에 힘을 쏟겠다고도 약속했다. 소속사는 고인의 마지막 길을 최선을 다해 돌보겠다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책 마련 및 재발 방지에 책임감있는 자세로 임하겠다고 말했다.

 

2018년 경북 김천에서는 오페라 공연을 준비하던 보조 스태프가 추락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22일에는 뮤지컬 <마타하리> 공연 중 무대 장치가 쓰러져 그 위에 있던 배우가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공연 관련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한국산업기술시험원 산하 공연장안전지원센터 김동균 센터장은 한국은 공연 전 준비와 공연 후 철수 시간이 선진국에 비해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 시간에 쫓긴다는 현장 의견이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 작업 안전과 관련한 공연계 인식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난달부터 공연 안전 강화를 내용으로 하는 공연법 개정안이 시행됐다. 공연장 운영자 등이 공연 관련 중대 사고 발생시 이를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한겨레 최민지 기자

 

해수부, ‘피살 공무원재직 중 사망 인정

해양수산부가 서해에서 북한군에게 피살된 소속 공무원 고() 이대준씨의 재직 중 사망을 공식 인정했습니다.

해수부는 오늘(1) 지난달 28일 이 씨에 대한 직권면직을 취소하고 '사망으로 인한 면직'으로 인사발령을 냈다고 밝혔습니다.

 

직권면직은 공무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임용권자의 일방적인 의사와 직권으로 공무원 신분을 박탈하는 처분입니다.

2020921일 서해 북단 소연평도 해상에서 근무하던 이 씨는 다음날인 22일 북한군의 총격으로 사망했지만, 실종자로 분류된 뒤 20201221일 직권면직 처리된 바 있습니다.

 

이번 조치로 유족들은 조위금을 받을 수 있게 될 전망입니다. 조위금은 사망으로 인해 당연퇴직 처리된 공무원 유족에게 지급됩니다. 이 씨의 조위금을 받기 위해서는 유족들이 서해어업관리단에 순직 신청을 접수하고 사망경위조사서를 작성한 뒤 서해어업관리단이 이를 공무원연금공단에 제출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유족 측은 지난달 공무원연금공단에 조위금 수령 여부를 문의했지만, 직권 면직 처리가 됐기 때문에 지급 대상이 아니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최은진 기자 ejch@kbs.co.kr

 

미국은 만능'이라는 환상의 종말

미국의 "막강함"이라는 신화, 그 운명은?

20세기 들어 미국은언제나세계사의중심이었다.최소한세계2차대전이후부터미국은아예다른'국가'추격을불가능하게만들었다고믿었고,실제그렇다고믿어의심치않았다.'팍스아메리카나'영원하지않을지언정지식인들은미국의'쇠락', 만약시작점이있다면바로알아차릴있을것이라고대체로 믿었다.그러나그런믿음들은지금 흔들리고있다.

 

미국의위기는어쩌면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미중대결' 구도나, 잠자고있던'늙은불곰'러시아의저항과 같은'외부 요인'으로부터비롯된아닐있다.세계가변해가고있는상황에서과거와같은'헤게모니'유지할없다는사실을깨닫지못하고 있다는 것, 그것 자체에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21세기 들어 '9.11테러'와 중국의 WTO 가입(세계 무역 체계로의 편입) 등 분명한 신호들이 있었다.미국은 지금 누가 보아도 힘겨워 보인다. 미국 내부 민주주의의 위기도 이런 미국 주도 '단극 체제'수명을재촉하는것처럼보인다.

 

미국이 처한 상황에 대한 세계 지식인들의 객관적 분석을 엿보기 위해 <프레시안>은 마닐로 그라지아노 프랑스 시엥스 포(Sciences Po, 파리정치대학) 지정학 교수가 <아시아타임스> 721자에 "'미국은 만능'이라는 환상의 종말(United States : end of an illusion of omnipotence)"이라는제목으로실은글을소개한다.

 

"나는 미국이 2위로 추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20101,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첫 연두교서에서 위의 한 마디로 미국의 세계 전략을 드러냈다.

 

지난 수십년간 미국의 상대적 쇠락은 계속돼 왔고, 이제 경쟁 국가에 추월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의 핵심 문제는 상대적 쇠락 그 자체가 아니다. 상대적 쇠락은 기업이나 국가들이 불균등하게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쇠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존심 때문이든, 또는 국내 정치적 이유 때문이든, 아니면 그저 단순히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든 간에.

 

1986년 역사가 폴 케네디는 대작 <강대국의 흥망>을 통해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는 그들 간의 성장이 불균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즉 강대국들 간의 성장률 격차가 "장기적으로" 그들 간의 우열을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것이다.

 

완만했던 미국의 상대적 쇠락

몇 번의 짧은 침체기를 제외하고 미국은 성장을 멈춘 적이 없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미국은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성장률이 둔화됐다. 즉 상대적 쇠락에 접어든 것이다.

 

1960년에서 2020년 사이 미국의 실질 GDP5.5배 증가한 반면 세계의 다른 지역은 8.5배로 늘었다. 미국 경제가 절대적으로는 성장했으나 다른 경쟁 국가들은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주요 라이벌 중국과 비교하면 성장의 격차는 더욱 어마어마하다. 미국 경제가 5.5배 성장하는 동안 중국은 무려 92배나 성장했다.

 

다시 말해 1960년 미국 경제가 중국의 22배였던 반면 2020년이 되면 겨우 1.3배밖에 되지 않는다. 지구 전체의 케이크는 커졌지만 미국 몫은 크게 줄어든 것이다.

 

경제와 생산성에서의 상대적 쇠락은 정치적 행동에서의 격차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과대 팽창(overstretching)"에 의한 것으로 (로마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역대 제국들의 멸망을 불러온 원인이 된다. 폴 케네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은 골치 아프고 해결되지 않는 사실에 직면한다. 세계에 대한 미국의 이익과 의무의 합이 이것들을 동시에 지켜낼 수 있는 미국을 국력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현실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1960년에는 3.46조 달러의 GDP로 세계에 대한 미국의 이익과 의무를 동시에 지켜낼 수 있었지만, 1986년에는 8.6조 달러로도 지켜내기 어려워졌고, 20조 달러인 현재에는 더욱 힘들어졌다는 얘기다. 이러한 곤경은 1960년 미국의 GDP가 세계 나머지 국가들의 거의 절반(46.7%)이었던 반면 2020년에는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는(30.8%) 사실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케네디의 선견지명은 때를 잘못 만났다. <강대국의 흥망>이 출판된 지 3년 후 동유럽 공산주의가 무너졌고, 4년 후에는 일본의 거품이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5년 후 (역사상 최대의 군사동맹으로 이라크를 무찌름으로써 베트남의 악몽을 극복하고 미 군사력의 위용을 과시한) 걸프전쟁이 발발했고, 1991년 말 드디어 러시아제국(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것이다. (즉 탈냉전 전후의 상황은 미국의 상대적 쇠락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막강함"이라는 신화

세계의 2위의 경제대국(일본)이 급격한 침체를 겪고, (냉전 최대의 숙적) 소련이 사라지면서 미국 GDP의 상대적 쇠락은, 비록 미미하고 짧긴 했지만, 반등의 기미를 보였다. 이처럼 미국의 경쟁 국가들이 무너지거나 급격하게 약화되면서 케네디의 책은 조롱당하거나, 아니면 잊혀졌다.

 

그리고 도취의 시기가 시작됐다. "단극 세계""유일한 초강대국", 또는 "천하무적"이라는 자기도취 속에 미국은 세계를 자신의 이미지대로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더 이상 그럴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새로운 경쟁자가 그 힘을 뿜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국의 상대적 쇠락은 일본의 부상 때문만이 아니며, 소련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각국의) 불균등 발전에 따른 피할 수 없는 추세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리면 일본의 침체와 소련의 붕괴가 "사건(accident)"이었다면 (미국의) 상대적 쇠락은 "본질(substance)"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일부 지도자들은 "사건"의 힘을 빌려 "본질"의 진행을 막으려 했다. 걸프전쟁, 보스니아 등 유고 내전 개입, 나토의 동진 등이 그 사례들이다. (톈안먼 학살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경제 교류를 확대한 미국 지도자들의 결정을 거론하지는 말자. 미국의 정치, 경제 지도자들은 중국 정부의 민주주의 말살을 응징하거나 시정하기보다는 중국과 경제 교류에 따른 거대한 경제적 이익에 훨씬 더 주목했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1990년대 나토의 동진이 국제적 논쟁의 중심이 됐다. 러시아와 그 우방국들에게 나토의 동진은 그 이후 일어난 모든 문제들을 야기한 "원죄"에 해당된다. 이들에 따르면 푸틴의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침공)"은 전적으로 워싱턴 책임이다.

 

미국-러시아의 (영원한) 대결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그 이데올로기를 그럴 듯하게 만들어주는) 일말의 진실이 포함돼 있기 마련이다. 이데올로기는 크게 단순화되고 맥락이 제거된 상태에서 대중들에게 프로파갠다로서 전달된다. (나토의 동진과 관련된) 일말의 진실은 나토를 앞세워, 냉전 종식 이후 소련의 압제에서 벗어난 중부 및 동부 유럽을 미국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미국의 일방적 결정에서 정확히 비롯된다.

 

그러나 그 맥락을 파악하려면 우리는 나토의 동진과 유럽연합의 확대를 동시에 바라보아야 한다. 유럽연합의 확대는 언제나 나토의 확대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첫 번째 나토 가입 국가들인 폴란드, 체크, 헝가리의 유럽연합 가입은 5년 후 이뤄졌고, 2004년 나토 가입 국가 중 슬로베니아와 슬로바키아, 그리고 발트 3국은 수개월 후,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는 3년 후 유럽연합에 가입한 것이다.

 

러시아와 유럽 중앙 사이의 완충 국가들은 두 차례 세계 대전 이후는 물론 냉전 종식 이후에도 미국의 최대 관심 지역이었다. 미국 입장에서 이 국가들은 유럽의 독자적이며 배타적인 통제 하에 두어서는 절대 안 되는 지역이다. 그렇게 되면 이 국가들은 더 이상 완충 지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에게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전략적 목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유럽이(보다 정확하게는 독일 또는 독일을 중심으로 뭉친 국가들이) 러시아와 어떤 형태로든 협력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세계의 "중심지역(heartland)"을 통제하기

영국으로부터 패권국가의 지위를 계승한 이래 미국은 (20세기 초 영국 지리학자) 핼포드 매킨더가 작성한 "중심지역" 이론도 함께 물려받았다. 이 이론의 핵심은 동유럽(독일)이 중심지역(러시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한다면 세계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이론은 유라시아 대륙이 통합된다면, 영국의 세계 패권에 도전해 결국은 패권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영국의 지속적 우려를 반영한다. 바로 이러한 우려 때문에 영국은 역사상 세 차례나 유럽 대륙의 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한번은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을 막기 위해, 두 번은 독일을 꺾기 위한 세계 대전으로.

 

매킨더의 이론은 2차 대전 기간 동안, 네덜란드 출신의 예일대 정치학자 니컬러스 스파이크만에 의해 부활한다. 이른바 "연안지대(rimland)" 이론으로 중심지역을 둘러싼 연안지역 국가들의 통제가 세계 지배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은 나중에 봉쇄(containment) 정책으로 발전되는데, 러시아 주변에 완충지역(cordon sanitaire)"을 설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실 봉쇄정책이란 2차 대전 직후 동아시아에 만들어진 완충국가(일본과 남한, 대만, 남베트남 등) 시스템을 유럽 등 세계로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냉전 기간 동안 봉쇄정책의 목표는 소련의 위협을 "봉쇄한다는 식으로, 고의적으로 실제와는 다르게 제시됐다. (봉쇄 정책의 창시자인 조지 케난 자신이 인정했듯이 소련은 서방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1947년 그는 이렇게 썼다. "러시아는 앞으로 경제적으로 취약한 국가, 어떤 의미에서는 무능한 국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봉쇄정책의 실제 목표는 독일과 일본이었다. 두 국가의 친러시아 분파를 무력화시키는 한편, 연안지역의 통제(소련과의 교류를 봉쇄)는 소련의 무력에 맡겨두었던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이 하나로 통합돼 자신의 세계 패권에 도전하고 결국은 빼앗아 갈 것이라는 우려는 영국에서 미국까지 계속 이어졌다. 키신저도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20세기 전반 미국은 잠재적 적국에 의한 유럽 지배를 저지하기 위해 두 차례 전쟁을 벌였다...20세기 후반(실상은 1941년부터) 미국은 아시아에서 같은 목적을 위해 일본과의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세 차례 전쟁을 벌였다."

 

"문명화의 사명"이라든가 "자유 수호" "민주주의를 위한 병기고", 또는 군국주의, 파시즘, 공산주의와의 투쟁 등 고상한 수사는 이제 잊어버리자. 이데올로기라는 껍질을 벗겨내면 힘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강대국 정치의 현실이 드러난다. 최고의 강자가 규칙을 정하고, 역사를 새롭게 쓰며 모두가 믿을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2011년 푸틴은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대유럽을 형성하기 위한 핵심적 요소"로서 유라시아동맹을 제창했다(러시아제국을 부활시키기 위한 여러 시도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당시 미 국무장관 힐라리 클린턴은 즉각적이고도 노골적으로 대응했다.

 

"유럽을 다시 소비에트화 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관세동맹이란 이름을 달고 나온 움직임이다. 분명히 말해 둔다. 우리는 유라시아동맹을 방해하고 저지하기 위한 모든 방안을 추구할 것이다."

 

(독일 등) 산업국가와 러시아 중심지역의 결합이 불러올 위험에 대한 매킨더와 스파이크만, 케난, 키신저, 브레진스키, 클린턴의 우려가 사실이라면 현재 미국에 대한 최대 위협은 유럽이나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쐐기 박기

중국과 러시아를 분리시키는 것은 분명 미국 대외전략의 핵심 목표 중 하나다. 224일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는 미국에 두 가지 이득을 안겨 주었다.

 

- 나토를 다시 단결시키고, 확대시키고, 군비 강화를 촉진시킨 반면, 유럽과 러시아의 협력 가능성은 사라졌다.

- 러시아에 대한 중국의 불신을 증폭시켰다.

미국이 뜻밖의 이득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상대방의 실수로 전략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객관적 전략이 있다고 해서(오바마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이 2등이 되는 것을 막는 것") 이것이 곧바로 지배 계층의 의식적 노력에 의해 조직되고, 계획되며, 이행되는 주관적 전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고대 로마의 세네카가 현명하게 지적했듯이 "목적지를 모르는 항해사에게는 순풍이란 없는 법이다." 그런데 현재의 미국이 바로 목적지를 모르는 항해사와 같다. 자신의 상대적 쇠락이 제대로 파악되고 있지 않으며, 극심한 정치적 분열로 인해 (대통령이 바뀌는) 4년마다 전략 목표가 수정되거나 반대로 뒤집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미국의 대다수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취해서 20여년 전 조지 W. 부시의 책략가 칼 로브의 호언장담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다. "우리가 행동을 하면 미국이 원하는 현실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은 물론, 전문가들이 이 현실을 연구하고 해독하느라 애쓰는 동안 "미국은 다시 행동을 해서 또 한 번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꿈같은 자신감을 말이다.

 

이데올로기에 취한 푸틴의 보좌관들이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어리석은 실책을 저지른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정치무대에서 활동하는 수 천명의 "칼 로브들"은 미국을 막다른 골목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들의 선의와, 완강하고도 자신감 넘치는 지정학적 제약에 대한 무지가 인류를 지옥으로 가는 길로 인도하고 있다.

박인규 편집인(=정리·번역) /프레시안

 

국보법 폐지 주장에 제동 건 헌재와 대법원-민변·시민 등 강력 반발

국보법 연재 (14)] 인권위 국보법 제정 후 사상·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 지속

 

2004년 초 진보적 시민사회단체 등을 중심으로 국가보안법 개정 또는 폐지를 지지하는 주장과 운동이 거세지자 당시 여당 등 진보적 정당이 그에 호응했다. 또한 그 해 8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법무부 등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공식 권고했다. 그러자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잇따라 국보법 합헌 결정을 하거나 그 폐지를 반박하는 판결을 내놓으면서 맞불을 놓았다.

 

두 헌법 기관의 결정, 판결은 당시 법체계에서 국보법이 위헌이 아니라는 점 등을 강조한 것으로 국회의 입법권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3권 분립 차원에서 국회가 국보법을 개폐하는 것에 대해 헌재 등이 왈가왈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헌법 기관의 국보법에 대한 완강한 입장은 당시 노무현 정권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사법부에 속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사법부에 속하지 않는 독립된 기관이다. 대법원의 재판이 주로 개인과 개인과의 재판이라서 개개인에게 영향을 준다면 헌법재판소의 재판은 국가나 법을 상대로 하는 재판이기에 사회나 제도에 영향을 주게 된다. 두 헌법 기관의 국보법 옹호 태도는 수구보수층은 물론 일반 시민사회에도 미치는 영향이 컸다.

 

인권위의 국보법 폐지 권고에 헌재와 대법원 합헌 결정 등으로 맞물

노무현 정부 당시 3개 국가기관이 앞 다퉈 국보법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은 이 사회가 국보법에 대해 지니고 있는 부정적 태도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국보법 개폐 논란은 성과가 없었지만 국가기관이 폐지를 공식 주장하는 견해를 표명해 주목을 받았다. 1948년 정부 수립이후 국가기관이 국보법 폐지를 건의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그 이후에 유사한 사례는 없었다. 이런 점에서 이들 국가기관의 국보법에 대한 견해나 결정 등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당시 위원장 김창국)2004824일 전원위원회를 열고,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국가보안법 관련 사범 문제를 해결할 것을 국회의장과 법무부장관에 권고했다. 국보법은 1948년 제정 이래 50여 년간 끊임없이 인권과 사상·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을 일으켜왔고 이로 인해 인권·시민단체와 진보적 지식인 등은 이 법을 비판하고 그 폐지를 요구해왔다. 유엔 등 국제기구도 이 법의 폐기를 촉구한 바 있지만 국가 기관이 이 법안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는 당시가 처음이었다.

 

한편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국보법에 대한 결정, 판결 내용은 국가인권위의 권고 결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헌법재판소는 국가인권위가 국보법 폐지 권고문을 발표한지 이틀 뒤인 2004826일 최악의 독소조항인 보안법 제7(찬양·고무)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는 제7조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로 합헌 결정을 내리면서 보도자료를 통해 입법부가 이런 판결내용을 반영할 것을 요구했다.

헌법재판소. 연합뉴스

 

이어 대법원도 그로부터 수일이 지난 830일 한총련 간부에 대한 판결문을 통해 국가보안법 개폐에 반대한다는 적극적인 정치적 주장을 밝혔다. 대법원의 위와 같은 판결에 대해 당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대법원의 판결문 중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이 늘어가고, 통일전선의 형성이 우려되는 상황임을 직시할 때 체제 수호를 위해 관용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부분은 지나친 표현이라며 대법원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국보법 폐지 논리를 반박한 것은 사법부가 입법부의 입법 활동에 개입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민변은 대법원이 입법정책에 대한 호·불호를 표현한 것은 정치적 영역을 침범, 3권 분립의 원칙을 스스로 어긴 것이라고 질타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판결은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서 국보법의 필요성이 인정된다는 최고 법률기구의 입장을 확인한 것으로, ‘국보법 폐지를 권고한 국가인권위의 결정과 당시 정치권의 국보법 개폐 논의에 제동을 거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헌법에 규정된 최고의 법적기구로 이들 기구가 국보법 폐지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면서 노무현 정부의 국보법 폐지 움직임이 둔화된다.

 

당시 여대야소 국면으로 국보법 개폐가 가능할 수도 있는 정치 상황이었고 진보적 시민사회운동 진영도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장기 농성을 하는 등 국보법 폐지를 강하게 주장했었다. 그러나 헌재와 대법원의 잇단 반대 의견 발표 후 노무현 정권의 국보법 개폐 추진력이 약해지게 된다.

 

국보법에 대해 국가인권위가 발표한 국보법 폐지 권고 발표문 전문 가운데 결론 부분은 국보법의 문제점이 압축되어 있어서 소개한다. 이어 헌재와 대법원의 국보법 옹호 판결문 내용도 소개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국보법 폐지 권고 주요 내용

-- 첫째, 국가보안법은 그 제정과정에서부터 태생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기본법인 형법이 제정된 이후에 이루어진 수차례의 개정도 국민적 합의 없이 절차적 정당성을 결한 채 이루어졌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은 법률의 규범력이 부족한 법으로서 그 존재 근거가 빈약한 반인권적 법이라고 본다.

 

둘째, 국가보안법은 행위형법 원칙에 저촉되며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되며, 사상과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인간의 존엄성을 해할 소지가 많은 점이 지적되고 있다.

 

셋째, ‘국가안보관련 사안은 형법 등 다른 형벌 법규로 의율이 가능하여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더라도 처벌 공백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단 필요시, 미흡한 부분에 대하여는 형법의 관련 조문을 개정·보완하는 방안을 강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국제사회의 여론과 결정을 수용할 필요가 있으며, 시대적 환경 변화에 부응하는 자세로 북한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몇 개 조문의 개정으로는 이상에서 지적한 문제점들이 치유될 수 없고, 그 법률의 자의적 적용으로 인한 인권 침해 역사, 법 규정 자체의 인권 침해 소지로 인해 끊임없는 논란을 일으켜온 현행 국가보안법은 전면 폐지하는 것이 시대적 요구라고 판단된다. --

 

한편 이명박 정권 시절인 2012120일 국가인권위원회(당시 위원장 현병철)국가보안법의 폐지의견을 삭제하고 대신 국보법 남용을 방지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 동일한 국가기구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에 따라 인권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을 드러낸 사례다. 어느 것이 과연 인권 보호, 신장에 기여하면서 정의와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역사가 언젠가 밝힐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헌법재판소, 국보법 제7조 제1항 합헌 결정으로 국보법 폐지 주장 반대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이상경 재판관)2004826일 국보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그간 독소 조항으로 꼽혀온 제7조 제1(찬양·고무죄)과 제5(이적표현물 소지 등)에 대해 소수 의견조차 없이 재판관 9명의 전원일치로 합헌 결정을 내린 것이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1991년 이전 국보법과 달리 개정된 국보법은 법규 개념의 다의성과 적용범위의 광범성이 제거됐고 기존 결정이나 학설, 법원의 판례에 의해 개념이 정립돼 있다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된다는 주장은 이유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국보법 7조를 형법상 내란죄 등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형법상 내란죄 등 규정의 존재와는 별도로 독자적 존재 의의가 있다고 언급, ‘분명히 평화시대를 기조로 한 형법상 내란죄나 외환죄는 고전적이어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국가의 자기안전-방어에는 다소 미흡하다고 판시한 1990년 판례를 유지했다.

 

재판부는 이적표현물 소지죄 조항과 관련, '단순한 학문연구나 순수 예술활동을 목적으로 이적표현물을 소지-보관한 경우 처벌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대법원 판례로 확립돼 있다''그러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목적으로 소지한 경우 처벌토록 한 현 조항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법원, 판결문 통해 국보법 폐지는 일방적 무장해제라며 반대

대법원 1(주심 이용우 대법관)2004830일 국가보안법 상 찬양·고무 혐의로 구속기소돼 2심에서 징역 26월을 선고받은 한총련 간부인 이모씨(대학생) 2명의 상고를 기각하는 판결문을 통해 일방적 무장해제’ ‘체제수호등의 표현을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밝혔다(동아일보 200492).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북한은 1950년 불의의 무력남침을 감행함으로써 민족적 재앙을 일으켰고 수많은 도발과 위협을 계속해오고 있다는 경험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역사적으로 우월함이 증명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헌법체제를 양보할 수 없는 이상 일방적 무장해제를 가져오는 조치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나라의 체제는 한번 무너지면 다시 회복할 수 없으므로 국가의 안보에는 한치의 허술함을 허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이어 아무리 자유민주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자유까지 허용함으로써 스스로를 붕괴시켜 자유와 인권을 모두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며, 더욱이 오늘날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이 늘어가고 통일전선의 형성이 우려되는 상황임을 직시할 때 체제수호를 위해 허용과 관용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또 북한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인지 여부에 대해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공동선언이 발표됐지만 북한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자 하는 적화통일노선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명백한 징후를 보이지 않고 있고, 뚜렷한 민주적 변화가 없는 만큼 북한의 반국가단체성이 소멸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51일 조선인민혁명군 창설 90주년 (425) 기념 열병식을 성과적으로 보장하는 데 기여한 평양시 안의 대학생, 근로청년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조선중앙TV52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이 열병식 참가 청년들을 향해 왼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다. 사진=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민변 헌재와 대법원 국보법 폐지반대 태도는 사법부 한계 드러낸 것

 

헌재와 대법원이 국보법 폐기에 대해 반대 견해를 밝힌 뒤인 2004126일 민변(당시 회장 이석태 변호사)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의실에서 ‘2004년 한국인권보고대회 및 토론회를 열고 두 헌법기관과 여당을 강력 비판했다(오마이뉴스 2004126).

 

이석태 전 민변 회장은 당시 인권보고대회에서 인사말을 통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안보 불안 등의 이유로 국보법 폐지 반대의 의견을 피력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개혁 요구에 대한 사법부의 한계를 드러냈다얼마 전 헌재의 신행정수도 관련 헌법소원 사건에서 뜻밖에 생소한 관습헌법이론을 내세워 위헌 결정을 선고하는 등 일련의 시대착오적 사태는 사법부의 민주적 구성과 운영을 위한 시민참여와 감시가 법치주의 실현에 절실한 과제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줬다고 강조했다.

 

이 전 회장은 이어 올 한해 정부와 집권여당은 시민단체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개혁입법에 대한 강력한 요구와 국회의 다수를 차지한 여세를 몰아 개혁입법 추진의 기세를 올리는 듯 했다면서 하지만 야당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의 완강한 반대와 집권여당 내의 난맥상으로 인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보고대회 제3세션에서 송호창 변호사(민변 국가보안법 TFT)“2004 불타는 국가보안법이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90년대 후반에서부터 시작된 국보법 폐지운동이 2004년에 총화를 이뤄 시민사회단체와 법률가단체가 법이론적·실천적으로 결합했다는 점은 주목할 점이다. 국보법 폐지에 대해 한나라당은 독자적인 입장이 없는 가운데 보수언론의 원색적인 색깔논쟁을 앵무새처럼 따라할 따름으로, 그 주장은 법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보수세력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개혁세력임을 자임하는 열린우리당에 있다며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 국보법 폐지운동의 경과를 살펴보더라도 열린우리당의 존립근거는 과거청산이고, 개혁의 완성이다. 그 시금석이 국가보안법의 폐지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은 자중지란에 빠져있고, 적시에 적절한 행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총선을 통해 열린우리당이 과반수의 다수당이 되었음에도 머뭇거리기만 하여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마지막 숨통이 넘어가지 직전에 있음이 분명하다. 완전히 재로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 불꽃을 일으키듯이 국가보안법은 최후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 대미를 장식할 강력한 의지와 열정, 그리고 투쟁이 절실한 때이다. 그들(한나라당)의 목적은 국보법 폐지주장을 빨갱이로 덧칠하는데 있으므로 그들의 주장에 논리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국보법 폐지론은 칼날같은 법률적 근거 위에 있어야 한다. --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대회여야당의 태도 질타-문동만 시인 사법부 태도 비판 시 발표

한편 노무현 대통령이 MBC ‘시사매거진2580’과의 인터뷰에서 냉전시대의 유물인 국보법을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고 밝혔다고 알려진 200495일 서울 여의도 국회앞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 제1차 국민대회에서 대회 참가자들은 투쟁결의문을 통해 최근 헌재와 대법원 1부가 내놓은 국보법에 대한 결정과 판결을 통해, 또한 이에 적극 동조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행태를 통해, 수구보수세력들의 국보법 사수의지를 재확인한다이는 분단과 냉전을 이유로 전 국민을 국가안보의 볼모로 취급하며 인권과 민주주의를 철저히 희생시켜온 구시대적 사고의 전형이라고 지적했다(오마이뉴스 200496).

국가보안법 갈무리. 사진=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홈페이지

 

이들은 심지어 민주개혁을 지향한다는 열린우리당의 일부 의원들조차 한나라당의 개정도 아닌 개정안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말도 안되는 개정안을 내놓고는 국민여론을 모아야 한다느니, 한나라당의 반대를 최소화해야 한다느니 운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국민적 배신감과 함께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며 열린우리당을 질타했다.

 

이들은 사법부와 여야 국보법 개정론자들을 향해 각각 수구정치집단과 같은 구시대 이념과 질서를 선동하는 행태를 당장 멈추라”, “16대 국회에 제출된 개정안에도 못 미치는 사실상의 존속론임을 인정하고 국보법의 전면적인 폐지 대열에 동참하라고 경고했다.

 

이날 국가보안법 폐지 제1차 국민대회에서 문동만 민족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간사(시인)나는 고백한다는 제목의 장문의 시에서 최근 국보법을 옹호한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을 신랄하게 아래와 같이 질타했다.

 

-- 미안하지만 법의 집행관들이여 / 법의 최대 모독자는 법 자체이다 / 당신들이다 / 백주대낮 일간지 광고란에 군대 궐기를 선동하는 / 수구의 격문이 나돌아도 당신들이 금지옥엽으로 아끼는 국가보안법은 / 수면제 먹은 개처럼 누워 있었다 /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가 탱크를 밀어 청와대로 들이 닥쳤어도 당신들은, / 예리한 법문들은, 눈알 한번 부라리지 않았다 인혁당을 아는가 / 여덟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의 목을 매었다 사형선고 후 불과 20시간 만에, / 눈먼 국가보안법으로 아주 정략적인 국가보안법으로 / 당신들 만의 국가-보안법으로 / 그때 당신들은 법관이었는가 아주 젊고 유능한 유신의 5공의 법관이었는가 사회적 위기를 염려하는가 당신들 / 악법 수호를 권고하고 선동하는가 당신들 / 56년 세월 눈먼 칼에 쓰러진 저 많은 영혼들을 꺼내 / 다시 부관참시하고 있는가 / 젊은 청춘들의 이마에 꽝! ! 꽝 붉은 도장을 찍어대고 있는가 당신들이야말로 수구의 통일전선을 획책하고 있다 / 악법을 울타리로 갖은 신문 사설로 대로 곳곳에 내걸린 플래카드로 / 나는 구별하지 못하겠다 당신들 일이 박정희의 것인지 전두환의 것인지 / 새로 선임된 계엄사령관의 것인지 나는 고백한다 사법의 권한을 넘어 사회변화의 운명을 쥐락펴락 하고자 / 하는 당신들께 고백한다 / 나는 예비 반국가사범이다 / 나는 특정사상을 추종하지 않지만 사상의 힘을 신뢰한다 사상은 맹종의 대상이 아니라 상상력의 우물임을 믿는다 나는 이 땅 천민자본주의가 천년 만년 유구하리라 절대 믿지 않는다 어떤 측면에선 저주한다 자본의 폐악을 경고했던 / 사상가들의 진정성과 예지력을 신뢰한다 / 폭력이 아니라 머리로 말로 가슴으로 / 어쩔 텐가 다 붙잡아 족칠 텐가 처넣어 주리를 틀 텐가 56년 낡은 칼 이슬 같은 사람들 적잖이 베었으면 이제 알아서 칼을 놓아라 의심을 제도화한 죄과를 안다면 이제 칼을 녹이라 /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진실을 인정하라 그 자유의지는 어떤 폭력구조로도 봉쇄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 미안하지만 법의 집행관들이여 당신들의 의식구조부터 세계화하라 / 시대는 질풍노도로 달려오는 자유와 화해의 시대 / 내 머릿속을 염탐하지 마라 내 자유의지는 충분한 균형감과 상상력으로 충만하다 국가보안법 너 없어도 이 세계는 굳건하다 평온하다 이제 안녕이다. --

미디어오늘/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거품 시대의 한국 대중문화

할 일 없이 OTT 서비스에 들어가 갈피를 못 잡고 예전에 봤던 영상을 틀고 끄기를 반복하는 일이 잦은데, 그렇게 소환하는 콘텐츠 중 하나가 MBC 드라마 <애인>(이창순 연출, 최연지 극본, 1996)이다. 거기에는 마치 1980년대 일본 거품 경제 시대의 현란한 아날로그 아니메를 보는듯한 최면효과가 있다.

 

배경으로 등장한 개장 7년차 롯데월드 어드벤쳐는 새것처럼 반짝이고 30대 초반의 황신혜와 막 40대에 들어선 유동근의 매력은 대단하다. 테마파크에서 황신혜와 우연한 만남 이후 집으로 돌아온 유동근은 넓은 욕실의 월풀 욕조에서 아이들과 함께 목욕하다가 그녀를 떠올린다. 짐작컨대 90년대 초반 조성된 일산 1기 신도시의 전원주택이었을 테다. 해외 팝송을 적극 차용한 세련된 음악, 탐미적인 영상, 핫 플레이스였던 압구정동의 멋진 카페와 음식점도 몽환적이다.

MBC 드라마 애인

MBC 드라마 애인스틸컷.

 

그리고 이 황홀경은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로 박살날 것들이기에 더욱 아련하다. 건축 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는 유동근은 외환위기를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벤트 회사 기획 담당 차장인 황신혜도 마찬가지다. 일산의 전원주택도 오랜 기간 강남에 밀려 수십 년 간 집값은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드라마 말미에 각자의 가정을 지킨 이들의 선택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 듯싶다. 수많은 가정이 외환위기 앞에서 붕괴되었다.

 

현실화된 파국 직전의 태평성대가 시간이 지난 뒤 제공하는 즐거움은 한 편으로 이제는 돌아가지 못할 좋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상승·추락의 아득한 격차, 다른 한 편으로는 다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이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 그리고 마침내, (저들은 인식 못했을) 파국이 찾아왔다는 것을 잘 아는 전지적 효능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과거지사가 제공하는 안전한 거리감은 비교적 편안하게 예전의 영광을 추억하게 만드는 기제이다.

 

그러나 진짜로 눈앞에 종말이 도래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모든 것은 현재화되며 나를 지켜줄 간격은 사라진다. 비록 최근 한국영화가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거듭 상을 섭렵하고 K-pop은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글로벌 OTT 서비스는 따로 한국 드라마 카테고리를 꾸릴 정도로 우리 대중문화는 건국 이래 최고의 전성기에 올라와 있지만 지금 눈앞의 화려한 대중문화는 위기를 감추는 당의정이 아닐까라는 불신이 엄습한다. 전지구적 전염병의 창궐과 고환율·고유가·고물가의 삼중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요동치는 국제정세 및 해마다 강도를 더해가는 기후위기는 대중문화 바깥의 현실에 심각한 위기의 경고음을 울리는 중이다. 그럴진대, 골프장을 찾는 예능, 수십 인분의 고기를 폭식 수준으로 해치우는 먹방, 투자와 투기의 경계가 모호한 재태크 솔루션, 변호사·의사·검사 등의 고소득 전문직이 수놓는 드라마를 안심하고 불 수 없을 노릇이다. 도래할 위기의 모든 원인을 대중문화에 돌릴 수 없지만 위기를 위기로서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는 측면에서 대중문화의 흠결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애인 : TV드라마 문화 그리고 사회표지. 사진=알라딘

 

1997년 겨울, 일군의 소장 학자들이 주도해 <애인: TV 드라마, 문화 그리고 사회>를 출판했다. 지금은 모두 한국 대중문화 학계의 원로이자 거목이 된 이들이다. 그들은 불륜을 비난하는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당시 30대 고학력 서울 거주 중산층의 삶을 긍정하며, 텔레비전 드라마가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자신하였다. 책의 첫 장을 열은 전규찬은 엄밀히 말해서 드라마 <애인>에 쏟아진 비난의 담론은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텔레비전, 특히 연예 오락 부문에 대한 보수 진영의 불만이 결정적 계기를 맞아 표출된 것에 다름 아니다고 비장하게 말한다. 하지만 이들 논의에서 곧 닥칠 외환위기에 대한 징후는 찾아 볼 수 없다. 당시 국가부도를 예측한 이는 극소수였기에 외환위기의 징후를 읽어내지 못했다는 비난은 가혹하다. 그러나 과거의 교훈을 통해 현재를 아는 지금, 오늘의 대중문화가 다가올 위기를 은폐한다는 이야기를 이제는 늦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우리 대중문화는 거품 속에서, 거품을 키우며, 거품 위를 위태로이 떠다니는 중이다.

미디어오늘/ 홍성일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이경 지금까지 이런 영부인은 없었다. 격 떨어지게 이래도 될까

이경 전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이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에 대해 지금까지 이런 영부인은 없었다라며 영부인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격 떨어지게 이래도 될까라고 맹비판했다.

이경 전 더불어민주당 대변인. 페이스북© 제공: 세계일보

 

이는 김 여사가 운영했던 코바나컨텐츠와 관련된 업체가 대통령 관저 공사에 참여했다는 의혹에서 나온 비판이다.

 

이 전 대변인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건희씨 회사에 후원사로 등록된 업체가 대통령실 관저 공사를 수의계약으로 따냈다. 불과 3시간 만에 122400만원 공사하게 된 것이라고 적었다. 이 전 대변인은 대부분의 계약은 경쟁 입찰이기에, 입찰 공고부터 개찰까지 5~15일 가량의 기간을 둔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의계약 입찰공고부터 낙찰자 결정까지 3시간 만에 이뤄졌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또 이상한 점이 있다. 지금까지 사업수행능력 평가가 생략되거나 실적심사 신청서를 받지 않은 경우도 없었다. 오직 김건희씨 관련 회사만 예외였다고 주장했다.

 

이 전 대변인은 , 또 있다. 설계·감리용역은 담당했던 회사는 법인등기가 존재하지 않는 업체다. 이 업체 배우자가 과거에 근무했던 건축사무소가 김건희씨 전시회에 후원했던 기록이 있는 것이라며 “2015, 2016, 2018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김 여사를 겨냥해 영부인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격 떨어지게 이래도 될까라며 과거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관심 없으나, 영부인 자리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국민 세금으로 이러는 건 아니지 않을까라고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한편, 우상호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관련 보도를 언급하며 대통령실 공적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 된 건 아닌지 우려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 위원장은 국민 혈세가 투입된 관저 공사에 영부인의 사적 인연에 의해 (공사) 업체가 선정됐다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라며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렇게 후진적인 국가로 전락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세계일보 현화영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

여야 국회의원 11명으로 구성된 한일의원연맹 대표단이 일본을 방문해 4일 일본 쪽 파트너인 일한의원연맹 의원들을 만났다. 윤덕민 신임 주일본 한국대사는 부임 17일 만인 2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을 예방했다. 지난달 18~20일엔 박진 외교부 장관이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 하야시 외무상 등을 만나 한-일 관계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꽉 막혀 있던 한-일 대화가 윤석열 정부 출범 뒤 물꼬를 튼 것은 굉장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활발한 움직임에 견줘, 실제 논의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답답한 마음이 앞선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 문제는 한-일 관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일 관계 최대 쟁점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에 따른 현금화는 한국에서 민관협의회를 구성해 논의하고 있지만, 해법 찾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피해자들을 대변해온 소송지원단도 더 이상 협의회에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문제도 돌파구를 마련하기 난감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두 현안에 대한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싸늘하다. 일부 양심적인 학자나 시민단체를 제외하고는 일본 정부의 주장대로 한국이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20151228일 한-일 위안부 합의가 큰 영향을 줬다.

 

일본에서 위안부얘기가 나오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비판이다. 기시다 총리부터 최소한 국가 간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논의를 해도 의미가 없다며 여러 차례 불쾌감을 표시했다. 기시다 총리는 위안부 합의 때 일본 외무상으로 윤병세 당시 한국 외교부 장관과 함께 서울에서 합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 정상회담이 어려울 것이라는 엄포도 일본 안에서 나온다.

 

-일 정부가 위안부문제에 합의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 합의는 가벼운 사안은 아니다.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과 충분히 조율하지 않은 채 일본과 합의를 하면서 합의안은 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곤란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합의안에 대한 평가를 떠나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무엇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 답을 두고 대체로 화해·치유재단 문제가 꼽힌다. 일본 정부가 10억엔(당시 환율로 108억원)을 출연해 20167월 출범한 재단은 201811월 해산됐다. ‘평화의 소녀상철거 노력과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상호 비난을 자제하는 것도 한국이 이행해야 할 약속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합의안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일본이 약속한 내용 중 이런 대목도 눈에 띈다. “·한 양국 정부가 협력해 모든 전 위안부분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행한다.”

 

올해부터 모든 일본 고등학생이 배워야 할 역사 교과서 12종 중 일본군 위안부동원의 강제성을 조금이라도 서술한 곳은 단 한곳뿐이다. 내년부터 일본 고교 2학년 이상 학생이 사용하는 교과서에서 가해자를 명확히 한 일본군 위안부라는 표현은 사라진다. 일본 정부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역사 교육을 통해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1993고노 담화를 지키지 않고 있는 단적인 사례다. ‘위안부합의에서 약속한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마음의 상처 치유와도 거리가 먼 조치다. 일본 정부가 한국을 향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고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모습에 공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야 국회의원 11명으로 구성된 한일의원연맹 대표단이 일본을 방문해 4일 일본 쪽 파트너인 일한의원연맹 의원들을 만났다. 윤덕민 신임 주일본 한국대사는 부임 17일 만인 2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을 예방했다. 지난달 18~20일엔 박진 외교부 장관이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 하야시 외무상 등을 만나 한-일 관계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꽉 막혀 있던 한-일 대화가 윤석열 정부 출범 뒤 물꼬를 튼 것은 굉장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활발한 움직임에 견줘, 실제 논의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답답한 마음이 앞선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 문제는 한-일 관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일 관계 최대 쟁점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에 따른 현금화는 한국에서 민관협의회를 구성해 논의하고 있지만, 해법 찾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피해자들을 대변해온 소송지원단도 더 이상 협의회에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문제도 돌파구를 마련하기 난감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두 현안에 대한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싸늘하다. 일부 양심적인 학자나 시민단체를 제외하고는 일본 정부의 주장대로 한국이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20151228일 한-일 위안부 합의가 큰 영향을 줬다.

 

일본에서 위안부얘기가 나오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한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비판이다. 기시다 총리부터 최소한 국가 간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논의를 해도 의미가 없다며 여러 차례 불쾌감을 표시했다. 기시다 총리는 위안부 합의 때 일본 외무상으로 윤병세 당시 한국 외교부 장관과 함께 서울에서 합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 정상회담이 어려울 것이라는 엄포도 일본 안에서 나온다.

 

-일 정부가 위안부문제에 합의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 합의는 가벼운 사안은 아니다.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과 충분히 조율하지 않은 채 일본과 합의를 하면서 합의안은 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곤란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합의안에 대한 평가를 떠나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무엇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 답을 두고 대체로 화해·치유재단 문제가 꼽힌다. 일본 정부가 10억엔(당시 환율로 108억원)을 출연해 20167월 출범한 재단은 201811월 해산됐다. ‘평화의 소녀상철거 노력과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상호 비난을 자제하는 것도 한국이 이행해야 할 약속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합의안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일본이 약속한 내용 중 이런 대목도 눈에 띈다. “·한 양국 정부가 협력해 모든 전 위안부분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행한다.”

 

올해부터 모든 일본 고등학생이 배워야 할 역사 교과서 12종 중 일본군 위안부동원의 강제성을 조금이라도 서술한 곳은 단 한곳뿐이다. 내년부터 일본 고교 2학년 이상 학생이 사용하는 교과서에서 가해자를 명확히 한 일본군 위안부라는 표현은 사라진다. 일본 정부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역사 교육을 통해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1993고노 담화를 지키지 않고 있는 단적인 사례다. ‘위안부합의에서 약속한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마음의 상처 치유와도 거리가 먼 조치다. 일본 정부가 한국을 향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고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모습에 공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겨레 김소연 | 도쿄특파원

 

데이터가 증언하는 자영업자·소상공인의 코로나 빚

사람들의 일상은 팬데믹 이전으로 조금씩 회복 중이지만, 자영업자·소상공인은 이라는 상흔에 시달리고 있다. 시사IN은 참여연대, 장혜영 의원실과 함께 이들의 부채 규모를 파악했다.

서진영씨 부부는 코로나19 팬데믹 직전 전북 부안에서 카페(사진)를 열었고, ‘조건부정부 지원이 만든 사각지대로 어려움을 겪었다.김흥구

 

서진영씨(가명·41) 부부는 초중고 동창이다. 전북 부안군에서 함께 나고 자랐다. 부안에서 맞벌이 직장 생활을 하던 서씨 부부는 2019년 아이를 갖기로 결심했다. 시험관 아기 시술을 받기 위해 시간 활용이 보다 자유로운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20191224, 서씨 부부는 부안군 중심가인 부안읍 한편에 카페를 오픈했다. 대출과 양가 가족의 지원을 더해 1억원가량이 들었다.

 

몇 달 후 코로나19 팬데믹이 본격화됐다. 전북 지역은 비교적 뒤늦게 영향을 받았지만, 3차 대유행 때부터는 서씨 부부도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파를 피해 갈 수 없었다. 202011월부터 전국 커피 전문점의 홀 영업이 금지되었다. 영업금지는 20212월까지 계속됐고, 이후에는 인원(5인 이상 집합 금지) 제한, 영업시간(오후 9) 제한이 1년 가까이 이어졌다. 영업 제한이 시작되자 부채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2금융권에서 담보로 잡힌 승용차를 가져갔고, 이자를 연체하다 보니 신용점수가 깎여 나갔다.

 

조건부정부 지원은 수많은 사각지대를 만들었다. 서씨 부부 역시 정부 지원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다. 서씨 가게는 2019년 연말에 오픈해 그해 일주일가량(1224~31) 영업을 했다. 오픈 직후라 손님이 없던 시기였다. 이 일주일 영업 매출보다 2020년 평균 영업 매출이 근소하게 더 많았다. 서씨 부부와 달리 2020년 초에 문을 연 인근 다른 가게는 정부 지원을 받았다. 서씨는 일주일만 늦게 오픈할 걸 그랬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빚은 늘었다. 월세 140만원, 각종 공과금·재료비, 인건비를 합치면 숨만 쉬어도 월 300만원이 새나갔다. 신용점수가 계속 떨어지다 보니 정부의 유동성 지원도 신청하기 어려웠다. 월세는 내야 했다. 지인과 가족들에게 손을 내밀다 결국 대부업까지 이용했다. ‘주부대출이라고 이름 붙은 대부 자금의 연 이자율은 19% 수준이었다. 일수도 썼다. 연이율로 따지면 30%가 넘는 불법 금융이었다. 그러나 서씨는 그분들(대부업체)이 밉진 않다. 오히려 너무 고마웠다. 당시에는 정말 절박한 돈이었다라고 말한다. 지난 2년간 국가가 서씨에게 지원해준 것은 코로나 여파 초기에 받은 긴급자금 2000만원 대출과 올해 지급된 손실보상금 600만원이 전부다. 임신 7개월 차인 서씨는 현재 빚을 갚기 위해 부업을 하고 있다. 서씨의 남편은 개인회생을 시작했다.

 

매출액이라는 사각지대에 빠진 서씨 부부의 사례처럼, 코로나19로 인한 자영업자·소상공인의 피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사람들의 일상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으로 조금씩 회복하고 있지만 이라는 과거는 깊은 상흔을 남겼다.

 

시사IN은 참여연대, 장혜영 정의당 의원실과 함께 코로나19 기간에 확대된 자영업자·소상공인의 부채 규모를 파악했다. 데이터가 보여주는 핵심은 간명했다. ‘은 매출액이 적고, 소득수준이 낮은 소상공인·자영업자일수록 더 늘었다. 빚을 진 당사자들, 정부의 지원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은 되묻는다. “정부 방역에 동참한 대가, 폐업하지 않은 대가가 빚이었다라고.

 

한국은행은 20223월 기준, 자영업자의 전체 부채를 약 960조원으로 파악한다. 참여연대와 장혜영 의원실이 한국은행을 통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이들 자영업자의 부채는 2017549조원, 2018624조원, 2019684조원 수준이었다. 매년 10% 안팎으로 증가하던 전체 부채 규모는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한 2020년 약 803조원으로 급격하게 늘어난다. 전년 대비 17.3% 증가다. 2021년에도 전체 부채 규모는 약 909조원으로 전년 대비 13.2% 늘었다(그림 1참조).

저소득 자영업자, 생활고에 따른 빚 많아

같은 자영업자라고 모두 빚을 늘린 건 아니다. 소득이 적을수록 빚을 많이 냈다. 자영업자를 저소득(하위 30%), 중소득(30~70%), 고소득(상위 30%)으로 나누어보면 차이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2020년 저소득 자영업자는 전년 대비 22.32%, 중소득 자영업자는 25.51% 부채가 늘었다. 반면 같은 시기 고소득 자영업자는 14.76% 증가에 그쳤다. 2021년도 마찬가지다. 저소득 자영업자는 전년 대비 17.32%, 중소득 자영업자는 14.4%, 고소득 자영업자는 12.22% 빚이 늘었다.

 

빚의 질도 문제다. 전체 자영업자 부채 가운데 비은행권(상호저축·상호금융·보험사·여신전문금융·대부업 등) 대출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19년에는 전체 자영업자 부채 가운데 비은행권 대출 비중이 32.2%(220조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2020년에는 33.5%(269조원), 2021년에는 35.5%(322조원)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저소득 자영업자일수록 생활고에 따른 빚이 많다. 한국은행이 지난 6월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20213월 저소득 자영업자의 전체 부채 가운데 11%생활비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같은 시기 중소득 자영업자의 생활비 부채3%, 고소득 자영업자는 1%에 불과하다.

 

자영업자의 부채 과잉 정도를 판단하는 지표로 연소득 대비 대출잔액 비율(LTI)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LTI가 높다는 것은 버는 소득에 비해 대출잔액이 많음을 의미한다. 저소득 자영업자일수록 LTI는 팬데믹 국면에서 계속 늘었다. 반면 중·고소득 자영업자는 LTI의 비율이 답보 상태이거나, 더 하락했다(그림 2참조).

2018년 저소득 자영업자의 LTI418.1% 수준이었다. 그러나 2019494.6%, 2020508.3%, 2021524.3%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LTI가 늘어난다는 것은 분모인 소득이 줄었거나, 분자인 대출잔액이 늘었음을 의미한다. 저소득 자영업자의 경우 소득 감소와 대출 증가 모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 고소득 자영업자는 2018383.1%에서 2021356.9%LTI가 점차 감소하는 추세다. 소득에 따라 빚의 무게는 양극화를 보이고 있다.

 

영업제한 조치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지난 2년간 특정 업종 자영업자들에게 오롯이 전가되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은 대개 이자가 저렴한 대출을 제공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IMF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20201월부터 20219월까지 코로나19에 대응하는 데 들인 재정·유동성 지원 규모는 2020GDP의 약 16.5%. 재정 지원은 GDP 대비 6.4%, 유동성 지원은 GDP 대비 10.1% 수준이다. 한국은 그나마 돈을 아낀 나라다. 전 세계 평균(재정 GDP 대비 18%, 유동성 GDP 대비 12%)에도 못 미치는 규모다. 같은 시기 일본은 GDP의 약 45%, 독일은 43.1%를 투입했다.

 

물론 전체 집행 규모를 다른 나라들과 단순 비교하긴 어렵다. 한국은 유럽이나 미국에서 시행한 셧다운을 경험하지 않았다. 확진자 동선을 추적하고, 격리하며, 일상생활을 멈추지 않는 선에서 방역을 강화하는 ‘K방역으로 국가경제 전체 피해를 최소화했다.

 

나랏돈을 아낀덕분에 경제적 피해는 자영업자·소상공인에게 집중적으로 전가되었다. 순리대로라면, ‘아껴둔 나랏돈은 이들에게 적극 활용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2차 추경으로 편성된 손실보상금 이전까지는 자영업자들에게 이렇다 할 재정 지원이 미비했고, 대신 소상공인 금융지원으로 대표되는 저금리 대출(최대 고정금리 3%)이 주를 이뤘다. 문제는 이 금융지원이 6개월 단위로 계속 연장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영업자들이 빚으로 버틸수록 금융시장의 불안은 커진다. 한국은행은 자영업자의 을 냉혹하게 평가한다.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에는 자영업자에 대한 금융지원정책 방향을 유동성 지원에서 채무이행 지원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쉽게 말해 업종에 따라 단계적으로 빚을 빨리 회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매출 부진 장기화 등으로 채무 상환능력이 크게 떨어졌거나 회생 가능성이 없는 자영업자에 대해서는사업을 정리하거나 다른 사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한국은행은 자영업자 대출의 부실, 특히 비은행 금융기관에서 생겨난 부실이 다른 금융업권으로 전염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자영업자의 빚은 전체 금융시장에 폭탄이다. 국가경제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한도 끝도 없이 유동성 회수를 연기해주기 어렵다는 관점이다.

 

폐업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현실

금융위기까지 걱정하게 만드는 부실 대출의 책임을 과연 채무자인 소상공인·자영업자에게 물을 수 있을까? 폐업하고 싶어도 폐업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자영업자 가운데에는 사업 시작 당시 지불한 권리금을 회수하기 위해 대출로 버티는 이들도 있으며, 폐업 시 모든 부채를 즉시 상환해야 한다는 대출 조건 때문에 문 닫고 싶어도 닫을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영업손실을 부채로 치환하며 버틴 자영업자들은 여전히 20217월까지의 영업손실을 소급해 보전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712사각지대에 놓인 소상공인연합은 집회를 열고 코로나19로 인해 정부의 집합·영업제한 조치를 받은 사업장은 폐업 여부와 상관없이 그 피해를 정부가 보상해야 한다. 소급 적용은 대통령이 약속했던 사안인 만큼 신속히 실행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유동성 회수에 속도조절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714일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금융부문 민생안정 과제 추진현황 및 계획에 따르면, 자영업자 부채 가운데 부실 우려 채권을 매입하는 새출발기금을 30조원 규모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이 밖에 저금리 대환대출, 사업구조 변환을 위한 자금 지원책도 밝혔다. 그러나 이들 사업에서 정부 예산의 비중은 극히 낮다. 정부는 소상공인·자영업자 지원 사업에 79조원이 넘는 지원을 할 것이라 밝혔으나, 실제 정부출연금은 448000억원 선에 그친다.

 

정부는 자영업자들이 천천히 회복해 부채 문제가 금융위기로 확산되지 않길 바란다. 그러나 자영업자들은 애초에 빚을 내 버티라고 했던 주체가 정부라고 지적한다. 지금이라도 자영업자·소상공인 부채 문제에 대해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 과한 바람일까.

시사인 김동인 기자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경찰국인가

권만호 경기남부청 직장협의회 대표가 지난 713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경찰국 신설 추진을 반대하며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 / 성동훈 기자

 

20181217일 국가경찰위원회 회의에 김부겸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이 제시한 안건이 올라왔다. 경찰위원회는 경찰의 주요정책과 경찰 업무 발전 등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는 기구다.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조직 및 운영에 관한 법률(경찰법)’에 근거한다.

 

김 전 장관은 법질서 및 경찰 공권력 확립 대책’, ‘경찰의 공직기강과 인사제도 개선 방안을 회의 안건으로 부쳤다. 행안부 장관이 경찰청장 임명제청 동의안을 제외하고 별도 안건을 경찰위원회에 부의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당시 대법원장 차량을 대상으로 한 인화물질 투척 사건, 유성기업 구금·폭행 사건 등이 잇따라 발생한 데 따른 조치였다.

 

행안부 장관의 안건 부의는 경찰법에 명시된 권한이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법 취지상 행안부 장관이 치안 현장의 업무와 관련해 직접 지시할 수 없기 때문에 경찰위원회에 관련 안건을 부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위원회는 두 안건을 수정 가결했다. 행안부는 당시 경찰위원회의 성격을 두고 행안부 소속 합의제 행정기관이라고 규정했다. “주요 치안정책에 대한 심의·의결을 통해 경찰의 정치적 중립과 민주성·공정성을 확보하고,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됐다라며 이같이 밝혔다.

 

경찰 사무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경찰위원회의 위상을 보여준 대표적인 장면이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경찰위원회를 행안부 장관의 자문기구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이런 인식 아래 행안부는 지난 82일 경찰국을 정식 출범시켰다. 행안부 장관이 경찰청장을 지휘하는 내용이 담긴 지휘규칙도 새로 만들었다. 근거는 대통령령과 행안부령이다. 행안부는 장관의 법률상의 책임과 권한을 수행하기 위한 조치라며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경찰을 장악하려는 의도라는 비판이 거세다. 대통령령에 근거한 경찰국 신설 등은 정부조직법 등의 법률에 위배된다는 주장이다. ‘졸속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행안부의 경찰제도 개선 자문위원회가 지난 6월 권고안을 발표한 뒤 한 달 반 만에 조치가 완료됐고, 입법예고 기간도 나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행안부 장관이 경찰위원회를 패싱·무력화하고, 광범위한 인사권 행사를 통해 경찰을 통제하겠다는 목적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높다. 치안은 물론 수사 업무에도 장관의 영향력이 미칠 것이란 우려가 따라붙는다.

 

행정지원인가, 통제인가

경찰국 신설은 그간 역대 정부에서 비공식적으로 운영하던 경찰 통제 방식에서 벗어나 법치 시스템을 갖춤으로써 경찰 관련 국정운영을 정상화한다는 의미가 있다.” 행안부가 경찰국 출범 보도자료에서 밝힌 내용이다.

 

경찰국의 관장 업무 중 눈에 띄는 부분은 두가지다. 행안부 장관이 경찰의 중요 정책 수립과 관련해 경찰청장을 지휘·감독하는 사항, 총경 이상 경찰관 임용에 관한 행안부 장관의 인사제청권 행사 사항 등이다. 지휘규칙의 핵심은 법령 제·개정이 필요한 기본계획을 수립할 때 경찰청장은 행안부 장관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하는 내용이다. 대통령·총리·장관의 지시사항에 대한 추진계획과 이행실적도 보고토록 했다.

 

이에 따라 경찰국 내에 총괄지원과, 인사지원과, 자치경찰지원과 등 3개 과를 뒀다. 16명으로 구성되며 현직 경찰 12명을 배치했다. 초대 경찰국장에는 김순호 치안감을 임명했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출범 당일 사무실을 찾아 경찰국 파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행안부는 장관이 치안 사무를 관장할 수 있다는 게 기본 입장이다. 다만 이 장관은 경찰국은 치안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조직이라고 주장한다. “치안 사무를 직접 수행하지 않더라도 경찰청의 업무가 적절히 수행되고 있는지를 지휘·감독할 책임과 권한이 장관한테 있다고 말한다.

 

말장난이라는 반박이 나온다. 우선 절차적으로 행안부의 경찰국과 지휘규칙은 정부조직법 위반이라는 지적이다. 정부조직법에는 행안부 장관의 사무에 치안이나 경찰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 경찰이 내무부 소속 치안본부로 존재할 당시 인권 유린 사건 등이 빈번하자, 1991년 경찰법을 제정하면서 내무부 장관의 소관 업무에서 치안을 삭제했다. 대신 외부 인사로 구성된 경찰위원회가 경찰의 주요 정책 등을 심의·의결토록 하면서 견제·통제하게 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조치라는 비판이다.

 

내용 면에서도 경찰국과 지휘규칙은 행안부 장관이 치안 사무에 관여하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중요 정책 수립을 두고 경찰청장을 지휘·감독하겠다는 점, 기본계획 수립 과정에서 행안부 장관의 승인을 받게 한 점 등이 그렇다.

 

행안부 장관이 그간 형식적 절차에 그쳤던 인사제청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겠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행안부 장관은 법에 따라 총경 이상의 인사에서 제청권을 갖는다. 총경 승진 대상자인 중간관리자급 경정부터 대상이 된다. 최종 결정은 대통령이 한다.

 

경찰국에서 인사제청 업무를 담당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경찰청장의 추천권을 무력화하고 장관의 입맛에 맞는 인사를 하려는 의심을 사고 있다. 행안부 장관이 제청권을 빙자해 경찰 고위직의 실질적인 인사권을 주무르면, 경찰 조직 운용을 통제·장악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앞서 이 장관은 치안정감 승진 대상자, 경찰청장 후보자들을 만나 사전 면접논란이 일었다. 추천권과 제청권은 차원이 다르다. 추천과 다르게 제청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의 말이다. “행안부에 경찰국을 만들어서 업무를 보는 것 자체가 치안 업무가 되는 것이다. 핵심은 인사다. 중간간부급 경찰들이 현장을 보고 일하기보다 행안부의 눈치만 보게 될 것이다. 경찰국은 지원부서가 아니라 지휘·감독·통제 부서로 봐야 한다. 경찰의 중요정책의 수립과 기본계획 등은 경찰국이 아니라 경찰위원회의 업무다.”

 

행안부 내 경찰국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경찰을 행안부에 예속시키는 효과를 낸다는 평가도 나온다. 권력의 지근거리에 있는 경찰국이 경찰 내 핵심 요직으로 자리 잡을 것이고, 경찰국은 승진이 보장되는 자리가 될 것이란 얘기다. 행안부에 줄을 대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펼쳐질 수 있다. 자연스럽게 경찰청장 등 경찰 지휘부의 조직 장악력도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허수아비 청장’, ‘식물 청장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찰위원회 패싱?

행안부와 경찰위원회 사이 관계, 권한을 두고 혼선과 갈등도 예상된다. 행안부 장관이 경찰 업무의 기본계획을 사전 승인토록 했기 때문에 경찰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한 내용을 행안부가 뒤집을 여지가 있다. 이상민 장관이 경찰위원회를 자문기구로 인식하는 점도 이런 관측에 무게를 더한다.

 

경찰위원회는 경찰국이 출범한 당일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유감을 표명했다. 경찰위원회는 경찰국 등의 제도가 시행되는 과정에서 치안 사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닌지, 장관의 법령상 권한을 필요·최소한의 범위에서만 행사하는지, 경찰청장의 인사 추천권을 형해화하지 않는지 등을 촘촘히 살피겠다고 밝혔다.

 

경찰위원회는 아울러 경찰위는 심의·의결의 기속력을 가진 합의제 의결기관’”이라고 강조했다. 행안부가 장관의 권한을 내세워 경찰위의 의결 내용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2019년 법제처의 유권해석을 근거로 들었다.

 

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의 자료와 경찰위원회 말을 종합하면, 20192월 당시 자치분권위원회는 법제처에 경찰위원회가 합의제 행정기관인지 여부를 비공식적으로 문의했다. 당시 회의에는 행안부, 경찰위원회 등에서도 참석했다. 법제처는 경찰위원회가 합의제 행정기관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현재 행안부가 경찰위원회는 자문기구라고 평가하는 데는 이런 법제처의 해석을 근거로 한다.

 

법제처는 경찰위원회를 자문기구라고 판단하지도 않았다. 대신 기속력 있는 합의제 의결기관에 해당한다고 봤다. “행안부 장관이 경찰위의 심의·의결 내용을 두고 재의 요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속력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이유였다.

 

법제처는 천 의원이 요구한 당시 유권해석 자료를 제출하면서 총 12쪽 가운데 4쪽만 냈다. 4쪽에는 합의제 행정기관이 아닌 근거가 담겼다. 기속력 있는 합의제 의결기관이라는 판단이 담긴 부분은 제출하지 않은 것이다. 천 의원이 원본 전체를 재차 요구했으나 법제처는 거절했다. 이 때문에 법제처가 행안부의 논리에 힘을 싣기 위해 선별적으로 유리한 자료만 공개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천 의원은 이 장관의 발언을 엄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위가 바로 중대한 국기문란’”이라며 법제처가 권력의 입맛에 따라 해석을 바꾸는 기관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 파업 대책회의 주재

이와 별도로 행안부는 경찰위원회에 대한 재의 요구권도 적극 행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행안부 장관은 경찰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한 내용이 적정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 경찰법에 명시된 권한이다. 다만 지금까지 한 번도 행사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국의 업무에도 재의 요구에 관한 사항이 포함됐다. 특정 안건이 행안부와 경찰위원회를 오가며 표류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이 장관이 대우조선해양 파업 당시 보여준 행보에 비춰봐도 치안 업무에 관여할 것이란 우려가 높다. 이 장관은 지난 720일 대우조선해양 파업과 관련한 대책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윤희근 경찰청장 후보자(경찰청장 직무대행) 등이 참석했다.

 

경찰위원회는 이를 문제 삼았다. “치안 사무를 관장하지 않는 장관으로서 그런 회의를 주재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고 직격했다. 앞서 201812월 김부겸 당시 행안부 장관이 법질서 확립 대책등의 안건을 경찰위원회에 회부한 것과는 대비된다.

 

이 장관이 주재한 회의에 서울경찰청 소속 경찰특공대장이 참석한 점도 특이하다. 경찰특공대의 본래 임무는 본래 임무는 대테러다. 특공대장이 특공대 투입과 관련한 제반 사항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이 장관이 경찰특공대 투입을 검토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장관은 폭발이나 화상이 굉장히 걱정됐기 때문에 제가 알기로는 경찰청과 소방청이 함께 모여서 브레인스토밍 (차원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부인했다.

 

경찰청은 2019년 관련 규정을 개정해 집회·시위나 노사 갈등 현장에 경찰특공대를 원칙적으로 투입하지 않기로 했다. 2009년 용산참사 당시 경찰특공대를 투입했고, 철거민 5명과 특공대원 1명이 사망했다. 이 장관 주재 회의에서도 실무진이 용산참사를 언급하면서 특공대를 파업 현장에 보내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국? 세제실?

여권에서는 법무부 검찰국과 기획재정부 세제실을 거론하면서 행안부에도 경찰국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검찰 업무를 담당하는 검찰국과 국세청 업무를 보는 세제실은 정부조직법에 근거가 있어 절차상 문제가 없다. 또 경찰청이 1991년 내무부 소속에서 외청으로 독립한 것은 정권의 하수인역할을 하면서 중립성 요구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경찰은 공식적으로 시민을 향해 물리력을 쓸 수 있는 기관이다. 정권에 의한 통제가 아니라 경찰위원회라는 장치를 둔 것은 이 때문이다. 검찰과 국세청과는 결이 다르다는 얘기다.

경향 정희완 기자

 

남성 청소년을 둘러싼 잘못된 메시지, 어떻게 할까

한국다양성연구소는 모두를 위한 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괄적 성교육이 무엇인지, 어떤 내용을 다루어야 하는지 그리고 일방적인 강연의 형태가 아닌 활동과 대화 중심의 경험학습으로 성교육을 만들고 진행하는 방법을 전하고 있다.

 

인권 활동가들과 성교육 활동가들이 모여 함께 만드는 콜로키움을 통해 포괄적 성교육의 개념, 가치, 내용을 전하기도 하고 직접 교육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 채널에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일방향적인 전달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통해 질문과 피드백을 받고 그에 대한 답변을 콘텐츠로 만들어서 공유하고 있다. 지금도 이메일과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질문을 보낼 수 있다.

 

남성 청소년들의 뇌절임 현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근, 지난 몇 년간 급격하게 변한 10-20대 남성들의 성교육, 성평등교육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걱정하며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문의를 하시는 분들이 많다. 나는 20대 남성을 하나로 묶어서 이대남이라고 부르며 20대 남성이 모두 동일할 것이라는 가정하는 태도는 절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큰 변화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수업 중에 선생님은 왜 여자 편만 드세요? 요즘은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더 살기 힘들어 진 시대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당당히 이야기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 학생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신경쓰지 마세요. 얘 남초 사이트 해서 그래요라고 말하며 그 학생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요즘은 그런 일이 있으면 학급 전체가 그 학생의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순식간에 만들어 진다.

 

얼마 전 연구소로 남성 청소년들의 뇌절임 현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이 들어왔다. 질문을 보내주신 분께서 뇌절임 현상이라고 표현하신 현상은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메시지가 머리에 가득 차 있어서 사실관계 파악을 어려워하며(혹은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메시지들을 사실이라고 믿고 말하고 다니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예전에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메시지를 접할 수 있는 곳이 남초 사이트 정도 밖에 없었다면 이제는 남초 사이트에서 글로 접한 이야기를 유튜브와 같은 영상 공유 플랫폼에서 수많은 스트리머들이 만든 영상으로 또 다시 접하게 됐다. 결정적인 계기는 이준석류의 정치인이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만들기 위해 차별과 혐오를 적극 활용하면서 부터였다. 정치인에 의해 공적인 영역으로 진출한 차별과 혐오는 언론에서 마치 동등한 힘을 가진 두 그룹의 갈등처럼 보도됐다. 남초 사이트 이용자들과 스트리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이야기가 정치와 언론의 영역에서도 들리니 자신들의 말과 생각이 맞다고 확신하며(또는 누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지 확인을 한 후) 의기양양하게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확증편향은 보고싶은 것만 보는 현상으로 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 등에 부합하는 정보만 수집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지금 남성 청소년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애써 찾지 않아도 주변 친구들(또래그룹), 남초 사이트, 유튜브, 정치인, 언론 등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상황이다. 가만히 있으면 차별주의자로 만들어진다. 과연 우리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까?

사진=gettyimagesbank

 

쉽지는 않겠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먼저 공교육에서 인권교육, 성평등교육, 시민교육, 노동교육, 정치교육을 통해서 사회를 구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사회문제를 구조적으로 볼 수 있는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사회구조 속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 구조적인 관점을 기반으로 정확한 정보를 찾고 찾아낸 정보를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면 부적절한 메시지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을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이라고 한다. 공교육이 우리가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교사들도 그런 역량을 가지고 성장해야 한다고 배운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교사들도 그렇지 못하다. 게다가 교사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직접적인 정치 이슈는 물론이고 성평등, 인권 등에 대한 이야기 조차 편히 하지 못하기도 한다. 교사들이 사회구조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어린이 청소년들이 공교육을 통해서 사회구조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이런 현실은 당장 고쳐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대와 사대 그리고 교육 대학원에서 교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을 때 성평등, 인권, 다양성, 노동 등에 대해서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인권과 성평등에 기반한 사회구조적인 관점을 가진 교사가 되어 현장에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이미 교사가 된 사람들에게는 교사 연수를 통해 제공돼야 한다. 교사를 평가하는 방식 또한 바뀌어야 한다. 교감 자격 연수라든지 교사들을 평가할 수 있는 시기마다 성평등, 인권, 노동, 정치 같은 이슈들에 대해서 대화를 진행할 수 있고 다양한 목소리를 모아 낼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이 있는 사람인지 또 미디어를 읽어낼 수 있는 관점, 지식,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길러 줄 수 있는지 등이 평가요소에 포함될 수 있다. 이런 역량들이 평가 요소에 들어간다면 교사들이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온전히 교사와 공교육에만 맡겨야 할까? 그렇지 않다. 양육자(부모 등)가 피양육자(자녀 등)에게도 할 수 있다. 어린이집, 유치원을 다니는 시기부터 그림책과 애니메이션을 함께 보며 대화할 수 있다. 어린이, 청소년 시기가 돼서는 드라마나 영화를 같이 보면서 질문하며 대화할 수 있다. ‘저 사람은 왜 저런 행동을 했을까?’, ‘무엇을 원했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저런 선택을 하게 만든 배경과 역사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등을 질문하며 함께 볼 수 있다. 미디어 제작자가 보여주는 대로만 보는게 아니라 능동적인 자세로 비판적인 관점에 의한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볼 수 있다. 일상적으로 보던 장면도 새롭게 볼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기르는 시작이다.

사진=gettyimagesbank

 

좋은 질문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한다

작년에 인천의 한 마을의 작은도서관에서 포괄적 성교육을 진행했다. 4시간씩 4회기였는데 첫번째 두 번은 그 도서관을 이용하는 남성청소년들이 대상이었고 나머지 두 번은 그들의 양육자들이었다. 남성청소년들은 자위와 섹스에 대해서 배우고 콘돔 그리고 다양한 월경용품 사용법에 대해서도 배웠다. 또한 그동안 가장 궁금해 했던 역차별사례들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정체성은 오로지 성별 밖에 없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경험하는(경험할 수 있는) 억압, 차별, 착취, 폭력이 어떤 정체성에 기인하는지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청소년들은 일방적인 강의가 아닌 직접 몸을 움직이며 게임, 활동, 상황극 등에 참여하며 자신이 문제라고 여기고 있는 문제들의 원인을 찾고 해결방안을 강구해 본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군대문제는 국가에게, 노동문제(장시간 노동,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률 등)은 고용주 그리고 국가에게 해결하라고 요구해야 할 문제라는 점을 스스로 찾아낸다.

 

청소년들과의 시간을 마치고 3주차가 됐을 때 그들의 양육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친 후 자녀들에게 변화가 있었는지 여쭤봤다. 지난 몇 년 간 엄마는 여자라서 몰라서 그래. 요새 남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알아? 엄마는 군대를 안갔다 와서 몰라등의 말로 엄마를 많이 괴롭히던 아들이었는데 수업을 마친 후 엄마 미안해. 군대 문제를 여자에게 말한다고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들의 변화가 너무너무 기쁘고 감사하면서도, 이렇게 몇 시간이면 될 걸 학교에선 왜 안해주는지 너무 궁금하고 원망스러워졌어요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금새 변화를 경험한 사례도 있을 수 있지만, 사람의 생각을 한 번에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지금 이 사람의 생각을 당장 바꾸겠다는 목표는 이루어지기 힘든 목표다. 늘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목표를 세우면 지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사람이 단 한 번에 바뀌길 기대하기 보다는 여기저기서 사회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좋은 질문을 계속 들을 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어린이 청소년들 주변에서 양육자가, 교사가, 친구들이, 다양한 활동가들(청소년 지도사, 사회복지사, 마을활동가, 성교육활동가, 인권활동가 등)이 그리고 미디어와 언론이 크고 작은 좋은 질문들을 계속 던져야 한다.

 

나는 사람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답을 정확히 볼 수 없도록 만드는 여러 농간들을 피해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질문과 고민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하다, 어쩔 수 없다, 원래 그렇다고 믿어왔던 것들에 균열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그 역할을 하자

미디어오늘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

이승만·박정희·박근혜 체제에서 사법 살인당해 침몰한 한국의 진보정치

한국 거대 양당체제, 사상의 자유 불허하는 국보법 영향 커

 

서구의 보수·진보는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정치권력의 쟁취를 위해 대중을 상대로 경쟁해왔다. 두 사상의 공통점은 유권자에 대한 서비스다. 그 서비스는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경쟁 속에 진화하기도 한다. 서구의 보수와 진보는 노동운동과 복지 등의 분야에서 큰 차이를 나타냈다. 보수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발상에 대해 가혹하고 복지나 소수자 보호 등에 인색했다. 그러나 유권자에 대한 서비스 경쟁이 집권의 관권이 되면서 서구의 보수와 진보 차이가 미세해지고 있는 추세다.

 

서구의 보수·진보와 한국의 보수·진보는 여러 가지로 차이가 있다. 우선 그 역사적 형성과정이 다르다. 한국에서 진보 보수의 뿌리는 한반도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진보, 보수는 특히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매우 기형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사상의 자유를 제한받는 한국사회에서 막힘없는 진보와 보수의 힘겨루기나 갈등은 존재하기 어려운 풍토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런 한계 속에서 한국적 진보 보수는 서구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는 체질을 지니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보수는 조선의 지배층, 친일세력, 친미세력의 연장이거나 그 우호세력이다. 이념을 민족보다 우선하며 북한에 대해 적대적이 미국을 혈맹으로 여긴다. 하지만 분단 상황을 악용해 안보 우선주의를 앞세워 정략적, 정파적 이해관계를 챙겨왔다.

 

한국의 진보, 보수 서구와 달라친일과 친미세력에 대한 대항적 세력

대한민국의 진보는 보수 세력에 대한 비판 또는 대항적 의미를 지닌 세력으로 출발했다. 진보세력은 보수세력이 지닌 속성과 반대되는 방향을 지향하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하고 한국 사회의 비주류로 인식되고 있다. 진보는 보수의 친미 등 외세 의존적 성향에 비판적이고 북한과의 평화공존, 협력을 추구한다.

 

사상의 자유는 다양한 정치 집단이 등장할 수 있는 공간의 허용을 의미하기 때문에 유럽 국가에서는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한 정당이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선거에서 정당 연합이 흔하다. 한국에서는 합당 형식이 흔할 뿐 정당 연합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에서 흔히 양당 중심 제를 강조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 보면 사상의 자유가 억제된 현실을 더욱 고착화시킬 그런 독소를 지니고 있다. 국보법은 다양한 정당의 존재를 불허하기 때문에 정치이념이 비슷한 정당만이 살아남게 되고 그 결과는 부정적이다. 즉 정당들이 정책과 비전 대결이 아닌 혈연, 지연, 학연에 좌우되면서 후진적 정치만이 판을 친다. 유럽 국가들처럼 유권자들의 다양한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는 정당이 존재하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다. 한국에서 시급히 국보법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서구와 같은 다당제 정치는 불가능해지고 민주주의 발전도 지체될 것이다.

 

한국에서 진보 정치세력에 대한 탄압은 국보법이 만들어진 1948년부터 본격화되었다. 특히 이승만, 박정희 독재 시절 진보세력에 대한 탄압이 자심했다.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 전후 수년 동안 한국에서의 혁신 정치, 진보 정치 세력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이승만의 조봉암 사법 살인과 박정희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불법 살인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조현연은 이승만의 조봉암 처형이 진보정치를 죽인 것이었다면,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진보정치를 꿈꿀 능력마저 죽여 버린 악마의 시대였다.”라고 썼다(한국 진보 정당 운동사조현연, 20101).

 

이승만, 조봉암 법살할 때 야당인 민주당 선거 의식해 침묵

멸공 대통령이승만은 죽산 조봉암을 최정점으로 한 혁신 세력을 두려워했고 그것은 조봉암 사법 살인으로 이어졌다. 조봉암(1899년생)1925년 조선공산당 중앙 검사 위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3년 일제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39년까지 복역한 후 석방되었다. 그는 1945년 해방이 되자 인천 건국준비위원회의 책임자,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 책임자 등으로 활동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위키백과

 

그는 1946623노동계급 독재·자본계급 독재·공산당 반대를 내용으로 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반공노선을 천명하며 전향했다. 그는 1948510일의 남한 단독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제헌 국회의원이 되었고, 헌법 기초 위원·농림부장관을 지낸 후 1950년 제 2대 국회의원에 재선된 뒤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어 연임하였다(김한성 연세대 교수의 죽산 서거 50주년 토론회발제문 중에서).

 

조봉암은 19522대 대통령 선거에서 혈혈단신 출마해 11%대의 지지를 얻어 2위를 차지했다. 당시 보수야당의 조병옥 등은 조봉암을 거부하고 이승만을 지지했다. 그는 1956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진보 인사들을 사민주의라는 기치아래 규합해 진보당을 만들었지만 소련의 세계 침략을 규탄하면서 자유 진영의 보루 미국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그리고 대규모 기간시설의 국유화를 주장해고 중소기업의 육성을 요구했다.

 

조봉암은 1956년의 3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건 결과 23.8%의 표를 얻어 정계를 당황케 했다. 그는 냉전적 사민주의라는 비판 속에서도, 관료집단과 독점자본 위주의 한국 정치 패러다임 전체를 바꿀 공약을 제시해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실제 선거에서는 조봉암이 이승만을 눌렀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엄청난 부정개표 때문에 선거결과가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당시 보수 야당 민주당은 부통령 선거의 개표를 공정하게 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고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참관인을 모두 철수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조봉암은 투표에는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한겨레21 2004428).

 

혁신 세력과 지지 수위를 알아챈 이승만 정권은 용공 조작이라는 상투적 수법으로 195859년에 진보당을 해체시키고 조봉암을 법살’(法殺)했다. 당시 조봉암에게 적용된 법규는 형법상 간첩죄와 국가보안법이었다. 민주당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강력한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큰 조봉암을 이승만이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제거할 때 침묵했다.

1958년 진보당 사건 재판 당시 조봉암 선생. 사진=위키백과

 

조봉암의 복권과 관련해서는 학계 및 정치권에서 여러차례 시도가 있었다. 199210월 여야 국회의원 86명의 서명한 사면 복권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되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927일 조봉암이 연루된 진보당 사건이 이승만 정권의 반인권적 정치탄압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국가의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독립유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2011120일 조봉암에 대해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전원 일치로 무죄를 선고해 복권시켰다.

 

박정희의 진보정당의 필요성 주장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불법 살인

한편 민족일보 사건으로 5·16 군사정권에 의해 32세 때 사형당한 조용수는 1930년 경남 진양 태생이다. 6·25전쟁 시기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메이지대 정경학부에 편입한 조용수는 민단에서 일했으며 1956년에는 재일동포 북송반대운동, 1959년에는 조봉암 석방운동에 앞장섰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조용수는 국내로 들어와 사회대중당 후보로 경북 청송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조용수는 진보정당의 필요성과 평화통일론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신문 발행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하고 19612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 세력은 통일과 혁신을 기치로 내걸고 언론활동을 하던 민족일보를 강제폐간하고, 이 신문사 사장인 조용수를 구금했다.

 

이어 쿠데타 세력은 1961518일 조 사장을 간첩혐의자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신문을 창간하고 북한의 활동을 고무 동조한 혐의로 체포한 뒤 같은 해 6월 제정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을 소급 적용, 1221일 처형하고 민족일보를 폐간 조치했다.

 

쿠데타 세력은 반공이 국시임을 내세워 급조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특별법을 소급적용해, 조 사장 등에게 "조총련계의 자금을 끌어들여 창간해 이북괴뢰집단의 주장에 동조하는 논조를 폈다"는 혐의를 씌워 재판에 회부했다. 조 사장은 5·16쿠데타가 발생한지 5개월만인 그 해 12월 만 31세의 나이에 사형을 당했다. 간첩 이 영근으로 부터 조총련계 자금을 받아 신문을 만들면서 북한 괴뢰집단이 주창하는 평화통일을 선전했다는 것이 당시 혁명재판소가 내걸었던 조 사장의 죄목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 씨에게 공작금을 건넨 것으로 알려진 이 영근은 1990년 정부에 의해 국민훈장을 받는 등 간첩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쿠데타 세력에 의해 조작된 사법살인으로 드러난 것이다(한겨레 2001216/ 경향신문 20011212). 조 사장의 유족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 사건 발생 47년만인 20081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사진=위키백과

 

박근혜 정권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민변 정당 사법 살인이라고 비판

이승만 정권 말기와 박정희에 의해 혹독한 탄압을 받은 한국의 진보세력은 80년대 이후 겨우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박근혜 정권이 통합진보당을 강제 해산하는 탄압을 자행했다. 박근혜 정권은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정치공작 실상이 드러나 시민사회의 비판과 퇴진 요구가 거셌던 20139월 이른바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을 터뜨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 다수의 통진당 당원 등을 구속했다.

 

이 사건은 국정원이 불법적으로 피의사실을 유포하고 언론이 받아쓰는 일이 반복되면서 반역집단으로 매도되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재판 진행 과정에서 내란음모’, ‘지하혁명조직(RO)’ 등이 실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유일한 증거인 국정원 협조자가 불법 녹취한 녹취록 또한 변조된 것이 드러나는 등 논란이 자심했다.

 

2014611일 서울고등법원 형사9(재판장 이민걸)는 이 사건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적용했던 원심의 내란음모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고 국정원과 검찰이 공소 제기한 이른바 지혁명조직(RO)’에 대해서도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해 대법원(법원장 양승태)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2015122일 선고 공판에서 지하혁명조직(RO)의 실체를 인정치 않고 내란음모혐의에는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이석기 전 의원과 김홍렬 전 경기도 당위원장에게는 내란선동혐의를 인정했으며, 관련자 전원에게 국가보안법 관련혐의를 인정, 유죄로 판단하고 이석기 전의원에게는 징역 9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하는 등 관련자 전원에게 고법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의 이런 판결은 지하혁명조직이 존재하지 않고 내란음모도 없는데 내란선동을 했다는 기이한 논리를 제시한 것으로 웃음꺼리가 되었다.

 

그런데 내란선동혐의에 대해서 이인복, 이상훈, 김신 대법관은 소수의견을 통해 내란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내란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주요한 부분, 즉 시기, 대상, 수단 및 방법, 실행 또는 준비에 관한 역할 분담 등의 윤곽이 어느 정도 특정되어야 하는데 이 사건에서 피고인 이석기, 김홍렬이 선동한 내용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내란 행위의 주요한 부분의 윤곽이 개략적으로나마 특정한 폭동이라고 볼 수 없다. 검사가 제출한 모든 증거를 종합하여 보더라도 피고인 이석기, 김홍렬이 내란을 선통했다는 공소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증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20141219일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판결후 이정희 대표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통합진보당 사건 놓고 헌재, 대법원 서로 다른 판단과 결정 내놔

한편 헌법재판소는 20141219일 통합진보당에 대한 이른바 위헌정당심판청구사건 선고 공판을 열고 박한철 헌재소장이 지혁명조직(RO)’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통합진보당을 해산하고 소속 국회의원들의 의원직이 상실된다는 선고문을 낭독했다. 박 소장은 통진당은 강령에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담고 있고 종북세력인 경기동부연합 등이 주도하는 정당으로 정당의 목적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이석기 의원의 내란음사건과 비례대포 부정경선사건, 중앙위원회 폭력사태 등의 활동을 감안하면 정당의 활동도 위헌적이다. 또한 정당이 해산되었는데 소속 국회의원을 남겨두는 것은 정당이 계속 존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문규정이 없지만 의원직도 상실된다고 봐야 한다고 선고문을 낭독했다.

 

반면 반대의견을 낸 김이수 재판관은 이석기 의원 등의 세력이 정당 전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이들을 제외하면 통진당은 다른 정당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정당 활동을 영위한 만큼 민주주의의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치는 구체적 위협을 가지지 않았다면서 정당 정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당 활동에 대한 제약은 극히 제한적으로 최후에 이루어져야 한다.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심판청구는 기각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헌재의 선고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날로부터 2년이 되는 날, 헌법재판소가 해산한 것은 통합진보당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그 자체라며 대한민국 정당민주주의에 대한 사법살인이라고 규탄했다. 한편 박 전 대통령은 헌재의 통보당 해산 결정에 대해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박 전 대통령은 법무부가 진보당 해산 청구를 헌재에 재기할 때 해외에서 결재하면서 진보당 해산에 대한 적극적 태도를 보인 바 있다.

 

이석기 전 의원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판결에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지혁명조직(RO)’에 대해 엇갈린 결론을 제시하면서 국민적 혼란과 함께 법체계의 미비점이 드러났다(미디어라이솔 2015123). 대법원은 이석기 전 의원 사건 판결에서 지혁명조직(RO)’은 실체가 없다고 판단한 반면,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하면서 지혁명조직(RO)’을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이 사건의 핵심적 쟁점을 놓고 두 최고 사법 기관이 다른 판단과 결정을 한 것은 박 정권이 통진당 해산 등의 결정이 얼마나 문제가 심각한 것인가를 드러낸 수많은 논란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 사법 살인 사건은 민주주의와 헌법이 회복되면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명박근혜 정권하에서 국보법 위반 사건이 속출하면서 이른바 진보는 더욱 위축되었다. 특히 박근혜 정권은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사실상 한국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작성된 좌파 척결 블랙리스트를 통해 좌편향 인사 8천여명, 3천여개 문제 단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이 취임한 20138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국정지표가 문화융성인데 좌편향 문화예술계에 문제가 많다좌파 배제를 지시했고, 비서실장 김기춘은 자신이 주재한 회의 등을 통해 종북세력이 문화계를 15년간 장악했다. 정권 초기에 사정을 서둘러야 한다. 뿌리 깊은 좌파 척결에 불퇴전 각오로 싸워라고 독려한 것으로 밝혀졌다(한겨레 2017131).

 

박근혜 전정권의 전방위적인 민주주의와 헌법 파괴, 공안통치성 공작 정치가 벌어진 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파면되고 구속되었다. 그러나 국보법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박 전 대통령의 퇴진으로 실시된 19대 대선 유세장에서 국보법은 종복 몰이의 뿌리로 여전히 독기를 뿜어냈다. 당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선후보의 다음과 같은 종북 몰이 발언이 나오고 언론에 보도되었다-“오늘 북한의 우리민족끼리라는 선전 매체에서 사실상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도대체 이 나라 대통령선거에서 북한이 선택하는 후보를 우리가 밀어서야 되겠나. 문 후보는 당선되면 김정은한테 제일 먼저 간다고 하고 북한에서는 문 후보를 지지한다고 한다. 이게 한국 대통령선거냐, 북한 대통령선거냐”(연합뉴스2017418).

19대 대선 당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였던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가 201751일 오후 대전시 서대전역 인근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홍 후보가 위와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은 국보법에 세뇌된 한국 사회 유권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 자신에게 유리한 것인가를 계산한 결과라 하겠다. 국보법이 보장하는 정치적 부당 이익에 눈이 먼 작태다. 북한 핵과 미사일, 사드 등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에게 북한을 연계시킨 종북 몰이 발언을 하는 것은 국보법에 의한 기울어진 선거 운동장이 여전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유권자의 최대의 정치 잔치인 대선 유세 과정에서 매카시즘이 난무하는 현실은 국보법에 마비된 한국 사회의 후진성, 야만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반증하고 있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상상력 가로막는 국보법 철폐 시급

한국 사회에는 상한선 없는 논쟁이 진보, 보수 간에 존재하지 않았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국보법이 그것을 막고 있다. 국보법은 북한을 반드시 괴멸시켜야 할 불구대천의 원수로 규정하고 경계하기 때문에 북한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분석, 평가하는 것은 금물이다. ‘북한이 잘했다거나 긍정적이다 또는 합리적이다라는 표현은 한국 사회에서 금기 사항이고 북한은 무조건 잘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 한반도 사태에 대해 언론 보도도 그런 식이다. 즉 남북관련 보도는 한결같이 미국의 대북 조치가 100% 타당하고 한국이 미국을 추종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며 한반도 위기 사태의 모든 책임은 북한에 있다는 기사만을 쏟아낸다. 이런 보도를 일상적으로 보고 들은 남한 주민들은 일반 사회생활에서도 문제가 생길 경우 다 네 책임이야라면서 몰아붙이는 배타적, 적대적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오늘날 인간의 지적 능력이 공상과학 시대의 그것과 같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면서 그에 따른 지구촌의 경쟁도 상상을 초월할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국보법이라는 틀에 갇힌 채 냉전시대의 정치논리를 강요받으면서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려 한다. 4차 산업혁명은 3차 산업혁명 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과학, 기술적 상황이 전개된다. 3D 프린터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사라지거나 인공지능, 집단지성에 의한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 과거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사고방식과 가치 판단이 필요한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새로운 문명 세계에 살아남아 지구촌의 평화, 행복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사상과 상상의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국보법을 철폐해야 한다. 국보법에 갇혀 있는 가두리 고기의 신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사상의 자유가 있어야 무한경쟁의 살벌한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고 선진문명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후진국의 위치를 면치 못한다. 이는 한반도 미래 세대에게 지구촌의 낙오자, 패배자라는 참혹한 유산을 물려주는 것과 같다. 이는 역사와 민족, 그리고 지구촌 인류에게 엄청난 누를 끼치는 것이다.

 

7·4공동선언, 6·15공동선언, 10·4선언, 평양선언 등을 살필 때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을 열면 남북 경제 공동체 추진을 통한 활로 모색의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창조적, 생산적인 미래에 등을 돌리는 어리석은 짓은 이제 멈춰야 한다. 중국이 정치는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라는 인류 사상 최초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남북한도 한반도만의 독창적인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린 상상력이 보장되어야 하고 국보법이 사라져야 한다.

미디어오늘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신종 감염병 시대, 희생양 만들면 문제 해결되나

감염병과 그림

 

흑사병 휩쓴 유럽서 학살된 유대인

역병의 원인으로 추방된 오이디푸스

일상화된 신종 감염병 위협 속에서

감정 쓰레기통만 찾을 것인가

에밀 슈베제르, 1349년 스트라스부르의 학살 1894, 종이에 채색,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국립대학도서관.

 

사방에 폭력이 가득하다. 그림 오른쪽을 보면 남자들이 노인에게서 빼앗은 금은보화를 궤짝에 담고 있는데, 이를 저지하려는 노인을 한 병사가 모질게 채찍질한다. 가운데엔 기독교 성직자들이 아기에게 강제 세례를 주고 있으며 옆에는 다음 아기가 세례를 위해 대기 중이다. 방금 아기를 빼앗긴 엄마는 되돌려받기 위해 저항하고 있지만, 초록색 옷을 입은 남자가 휘두르는 팔에 곧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뒤에서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사람들이 집단 화형을 당하고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화가 에밀 슈베제르(1837~1903)가 그린 <1349년 스트라스부르의 학살>이다. 1349214일 당시 독일 땅이었던 스트라스부르에서 주민들이 유대인 2천명을 집단으로 학살하고 재산을 빼앗은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다. 비단 스트라스부르뿐만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스위스의 바젤, 독일의 쾰른에서도 유대인들은 목숨과 재산을 잃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왜 유대인을 콕 집어서 살육했을까.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유럽이 흑사병으로 초토화 중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조반니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아침에 거리를 지나가면 죽어간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볼 수 있었다. 관이 부족해서 널빤지에 얹어서 들고 가는 일도 흔했다고 적었을 정도였는데, 사람들은 병이 일어난 이유를 알 수 없어 더욱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때 흑사병은 분노한 신이 내린 벌이며, 이 모든 것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악한 유대인의 죄 때문이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급기야는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거짓 소문도 퍼졌다. 유대인들이 진짜 우물에 독을 탔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이 모든 게 유대인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

평범한 사람들이 광기에 사로잡힌 채 약자에게 마음 놓고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프랑스의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그리스의 시인 소포클레스가 기원전 430~420년 사이에 지은 비극 <오이디푸스왕>을 통해 이들의 심리를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의 화가 샤를 잘라베르(1818~1901)가 그린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를 보자.

샤를 잘라베르,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1842,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마르세유 미술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테베에 역병이 번진 가운데 오이디푸스가 딸인 안티고네의 손을 잡고 테베 밖으로 나가는 중이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마치 더러운 것을 대하듯 몸을 움츠리고, 원망과 경멸을 담은 눈길로 흘낏 쳐다볼 뿐이다. 오른쪽의 여성은 방금 아이가 역병으로 희생된 것이 오이디푸스 때문이라는 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본다. 사실 그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오이디푸스의 죄 때문에 역병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죄인이었던 것. 오이디푸스 옆에 있는 딸 안티고네는 동시에 그의 동생이기도 한 셈이다.

 

물론 오이디푸스가 의도적으로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장차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다는 신탁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테베의 왕과 왕비인 부모에게 버림받고,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성장했다. 운명은 오이디푸스를 곱게 놔두지 않았다. 장성한 뒤 어느 날 우연히 친아버지를 거리에서 마주치고, 그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비가 붙어 아버지를 죽이게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그 뒤 우여곡절 끝에 테베의 왕이 되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결국은 신탁의 내용이 실현된 것이다. 때마침 테베에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퍼진다. 오이디푸스는 테베를 구하기 위해 아폴론의 신탁을 구하는데, ‘이 땅으로부터 오염을 내쫓아라. 그것을 더 이상 품지 말라는 답이 나온다. 이윽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신탁이 말한 오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그는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르고, 테베 사람들의 저주를 받으며 추방당한다.

 

사실 의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오이디푸스는 아무에게도 병을 옮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중요하진 않았다. 테베 사람들에게는 그저 병에 대한 공포와 분노를 쏟아부을 감정의 쓰레기통이 필요했을 뿐이다. 르네 지라르는 저서 <폭력과 성스러움><희생양>에서 이를 희생양 구조로 설명했다. 지라르에 따르면 인간들은 사회에 재난 같은 큰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의 원인을 특정 대상에게 뒤집어씌운다. 사회 전체는 이 대상을 희생시킴으로써 불안정한 사회 상태를 안정화하고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이때 제물이 되기 제일 쉬운 자는 누구였을까. 바로 보복할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이다. 흑사병이 번졌을 때 일사불란하게 학살당한 유대인처럼 말이다.

 

악순환에 빠지지 않으려면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역시나 이번에도 약속이나 한 듯이 분노와 불안을 쏟아낼 희생양을 찾는 이들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중국의 우한 지역에서 첫 환자가 발생하자, 중국인과 동양인들은 서구에서 네 나라로 가라고 욕을 먹고 신체적 폭력까지 당하곤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우한 폐렴’, ‘중국 바이러스라고 고집스레 부르며 국내 중국인 동포를 향해 증오심을 내뿜는 이들도 적지 않다. 마치 오이디푸스를 추방한 테베 시민처럼, 중국인만 내쫓으면 우리 사회가 정화될 거라는 듯 말이다. 이런 혐오와 배제의 감정은 코로나19 유행 초반, 확진자에게까지 옮겨붙었다. 감염의 책임을 개인에게로 돌리며 비난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 코로나19 유행 기간 중 사람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물을 올리며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촬영’, ‘사진 찍을 때만 마스크 내림이라는 말을 굳이 덧붙였던 것도, 자신이 비난의 대상이 될까 봐 선제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험이 아니었을까.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신종 감염병은 앞으로도 인류를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감염병과 사회>의 저자 프랭크 스노든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 오히려 감염병이 인류 문명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감염병은 늘 (희생양 찾기 등) 사회의 취약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기표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사회의 취약성을 해결하도록 강한 압박을 주는 메신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신종 감염병이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순간, 또다시 희생양을 찾는 악순환에 빠질 것인가. 아니면 인간 사회의 약점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사명을 기꺼이 짊어질 것인가.

 

흑인이라서, 여성이라서강탈당한 약자의 몸

내 몸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이들

백인이 받은 은총 강조하기 위해

다리 잘린 흑인 조각했던 비욜도

친자식 희생 젖어미슬픔 눈감고

부잣집 아기와 유대 그린 그림도

이시드로 데 비욜도, <검은 다리의 기적>, 1547년께, 다색목조각, 스페인 바야돌리드 국립조각박물관.

 

13세기 이탈리아 제네바의 주교였던 야코부스 데 보라지네가 편찬한 그리스도교 성인전 <황금 전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의사들의 수호성인인 코스마와 다미아노가 어느 날 암 때문에 왼쪽 다리가 완전히 썩어버린 백인 남자의 꿈에 나타나 그를 치료해주는 기적을 행한다. 연고와 외과용 수술 도구를 가지고 나타난 성인들은 백인의 다리를 잘라내고 최근에 죽은 에티오피아 사람의 다리를 붙여주고 홀연히 사라진다. 의식을 회복한 백인 병자는 침대에서 뛰쳐나와 사람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병이 나았다고 외쳤다.

 

에스파냐의 조각가 이시드로 데 비욜도(1500?~1556)1547년께 완성한 <검은 다리의 기적>에서 이 극적인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암을 앓고 있는 백인 곁에 나타난 성인들은 이미 그의 다리를 잘라내고 에티오피아 사람의 검은 다리를 조심스럽게 접합하는 중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침대 밑바닥에는 흑인이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비욜도는 죽은흑인의 다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흑인의 다리를 백인의 삶을 위해 붙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에게는 흑인이 살아 있든 죽은 상태이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백인 환자가 성인들의 은총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에티오피아인의 다리는 백인에게 일어난 기적을 알려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의 몸은 강탈당했던 셈이다.

 

토실토실한 부잣집 아기의 비밀

오랜 시간 동안 약자들은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몸은 강자를 위해 손쉽게 이용당하곤 했다. 비단 인종적 약자뿐만이 아니다. 여성의 몸도 가부장제 존속을 위해 지속적으로 강탈당했다. 분유가 발명되기 전, 만약 산모가 산후에 사망하거나 혹은 모유가 나오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했을까? 신생아에게 젖을 줄 유모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모가 충분히 수유할 수 있을 때도 귀족, 부르주아 상층계급은 유모에게 아기를 위탁하곤 했다. 1780년 파리에서 21천명의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중 17천명의 영아가 시골에 사는 유모에게 맡겨졌으며 2년이 지난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골로 보내지 않은 아기 중 약 700명은 집에 고용된 유모의 젖을 먹었다. 그렇다면 유모가 대신 젖을 먹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유하면 여성의 출산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성 가부장 입장에서는 유모를 두면 아내가 더 빨리 다시 임신을 할 수 있고, 자신은 더 많은 아이를 가질 수 있었기에 손해 볼 게 없었다.

에티엔 오브리, ;유모에게 고하는 작별;, 1776~77, 캔버스에 유채, 미국 클라크 미술관.

 

태어나자마자 생모와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아이, 그 아이를 거둬 젖을 주고 키운 유모. 이 둘의 관계가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프랑스의 화가 에티엔 오브리(1745~1781)<유모에게 고하는 작별>에서도 이들 사이의 끈끈함을 엿볼 수 있다. 우아하게 차려입은 생모가 시골에 왔다. 낳자마자 시골 유모 집에 맡긴 아이를 건네받기 위해서다. 이제 당나귀를 타고 도시로 돌아가려는데 아기는 생모의 품에서 벗어나 유모에게 다시 돌아가려고 버둥거린다. 양쪽에는 이 모든 광경을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생부와 아기와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유모 남편이 서 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따로 있다. 그림 속에 유모 친자식의 존재가 소거됐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사람의 젖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 유모가 부잣집 도시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전에 아기를 낳아야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자 빅토르 브로샤르는 1872년 아동보호회 연례회의 강연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유모의 아기는 어찌 될지, 여러분의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다른 아기에게 젖을 떼게 한 것은 아닌지 여러분은 몇번이나 자문해보셨습니까? 어떤 지방에서는 유모의 아기가 현장에서 사망하는 비율이 64%에 달하고, 87%에 달하는 지방도 있습니다.” 여러명의 토실토실한 아이들이 사는 부잣집 대가족은 시골의 가난한 아기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더 노골화된 여성 몸 착취

분유가 발명된 후, ‘젖어미같은 모성착취 사례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여성의 몸은 해방되었을까? 아니, 요즘 여성의 몸은 성차별에 더해 인종차별과 계급차별이 교차하는, 더 노골적인 전쟁터가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리모. 대리모 사업은 난임 커플이 다른 여성의 자궁을 계약·대여·매매해 수정란을 이식하고, 임신 및 분만을 위탁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도 대리모 출산의 청정구역은 아니다. 2017년 한국 커플이 네팔에서 대리모를 통해 출산한 사례가 있음을 외교부가 직접 확인해주는 일도 있었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대리모 사업의 특징은 미국, 캐나다 등 아이를 원하는 부유한 나라의 커플이 인도, 네팔 등 가난한 나라 여성의 자궁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대리모는 거의 예외 없이 의뢰인보다 더 낮은 사회경제적 계층에 위치하고 또한 대체로 더 낮은인종적 위계상에 위치한다. 부유한 백인 여성이 대리모가 되어 가난한 흑인 커플의 아이를 낳아주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특기할 사실은 대리모 사업을 옹호하는 쪽이 그 이유로 자신의 유전자(남성의 정자)를 가진 아이를 갖고자 하는 열망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즉 대리모 출산은 부계 혈통을 지키기 위해 모성을 착취하는 가부장제의 폭력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대리모 같은 소리>의 저자 레나트 클라인의 말처럼 말이다. “불임인 이들이 다른 제3자 여성의 포궁(자궁)과 난자를 빌려서까지 자기아이를 낳고자 하는 욕망은 근본적으로 남성의 것이며 이 절차가 보장하는 것은 대리모를 의뢰한 남성의 유전자인 것이다.” 이때 가난하고 어두운 피부의 여성은 걸어 다니는 자궁으로 환원될 뿐이다.

 

2015년에 개봉한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문명 세계가 멸망한 이후의 세계를 그린 에스에프(SF)영화다. 우리는 팝콘을 먹으며 이 영화를 관람했다. 그런데 영화가 그려내는 약자들의 상황은 되짚어볼수록 그리 가볍지 않다. 독재자 임모탄에게 사로잡힌 맥스는 임모탄에게 충성하는 다른 인간 워보이를 살리기 위한 피주머니가 되어 천장에 매달린다. 아내들은 건강한 아기를 낳기 위한 인큐베이터가 되며, 여성들은 식량자원이 된 모유 생산을 위해 감금된 채 유축기를 몸에 달고 강제 착유당하는 신세다. 다리를 빼앗긴 에티오피아인, 모유를 내어준 가난한 유모, 자궁을 판 대리모가 겹쳐 보이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매드맥스>는 미래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잘 보여준 영화로 꼽히지만, 사실은 약자의 몸을 강탈하는 현실 세계를 핍진하게 그려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https://www.hani.co.kr/arti/SERIES/1521/

 

경찰국장 김순호 과거노동운동대공분실 경찰’ 180도 변신

성균관대 동문들 노동운동 하다 1989년 사라져

그 뒤 인노회 활동가들 구속경찰 특채과정 의문

인노회 활동 하다 1989년 대공특채로 경찰 첫발

운동권에 회의동료들 수사엔 영향 안 끼쳐

김순호 행정안전부 경찰국장. 경찰청 제공

 

행정안전부 경찰국 초대 국장으로 임명된 김순호 치안감의 대학 동문들이 1989년 후반 노동운동을 같이하던 김 치안감이 대공 특채로 경찰이 된 것에 대해 채용과정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동문들은 조만간 김 치안감의 행적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경찰국장 사퇴를 촉구하는 입장을 밝힐 계획이다.

 

김 치안감의 성균관대 81학번 동문들은 “19894월 김순호가 돌연 사라졌는데 그 뒤로 인노회 활동을 하던 이들이 구속됐고 그는 경찰이 돼 있었다5일 주장했다.

<한겨레>는 지난달 29일 김순호 치안감이 경찰국장으로 임명된 뒤 그와 1988~1989년 인천·부천노회민주노동자회(인노회) 활동을 같이했던 성대 동문들과 당시 사정을 아는 전·현직 경찰관 등을 접촉했다.

 

동문들은 김 치안감을 인노회의 핵심 활동가로 기억했다. 김 치안감은 인노회 활동을 하면서 가명으로 김봉진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당시 노동현장에 취업해서 노조를 결성하는 대학생들 가운데 하나였다.

인노회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의 또 다른 갈래로 19882월에 만들어졌다. 그러다 이듬해 19891월부터 관련자들이 경찰의 수사를 받아 구속되기 시작했고, 주요 활동자들이 같은 해 6월에 재판에 넘겨지면서 조직이 사실상 해체됐다. 안제환 인노회 회장은 6월에 구속됐다.

 

김 치안감은 19898월 보안특채로 경찰관이 됐는데 당시엔 노조 활동을 하다가 대공분실에 끌려온 이들을 관리하는 대공특채로 불렸다. 1990년에 경찰 생활을 시작한 서울의 한 간부급 경찰관은 “89~90년대에 특채로 들어온 이들은 대공분실업무를 담당했다. (김 국장은) 총경이 되기 전까지 안보 관련 업무만 담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김 국장은 지난 19898월 경찰공무원임용령에 따라 대공공작업무와 관련 있는 자로 분류돼 대공특채로 치안본부 대공 3과 소속으로 경찰에 첫발을 들인 것으로 나타난다.

 

동문들은 김 치안감이 같이 활동을 하다 돌연 사라지고 경찰이 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인노회 활동가들이 경찰에 잡혀갔다며 김 치안감의 행적에 의혹을 보내고 있다.

 

김 치안감과 인노회 활동을 같이했던 박경식(59)씨는 김순호는 19894월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때부터 인노회 활동하던 사람들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가 경찰 특채였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이 당시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인노회 소속이자 같은 학교 선배인 ㄱ씨는 구속되기 전에 김순호의 지인이 김순호가 사라졌고,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시점이 19896월 전이었다고 밝혔다.

 

인노회 활동을 하며 김 치안감과 가장 친했던 사이였다고 주장한 ㄴ씨(59)인노회 관련해 경찰의 조사를 받았을 때 지회장이었던 순호와 개인적으로 나눴던 얘기까지 경찰이 알고 있었다. 경찰의 수사력이 엄청나다고만 생각했다. 당시 순호가 잠적했지만, (행적에 대해서) 의심하지는 않았다면서 그런데 그해 8월에 경찰 특채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선 수상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퇴직 경찰관(경찰대1)대공 수사를 담당하던 이들이 김순호를 전향시켜서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김 치안감의 동문들은 행정안전부가 경찰국장에 김 치안감을 앉힌 것이 역설적이라고 씁쓸해했다. 행안부 경찰국이 ‘31년 전 내무부 치안본부의 부활이라는 비판이 나왔는데 하필이면 자신들을 저버린 이가 그 자리를 맡은 것에 대해 분노했다. 김 치안감과 노동운동 시절 월세방을 같이 살았다던 김현동(60)씨는 지금 시기 경찰국 쓰임새가 1980년대의 부활이라고 비판하지 않나. 순호가 처음 경찰이 됐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도 배신감이 들었지만, 경찰국장 자리까지 수락했다는 건 절망적인 심정이 느껴진다고 했다. 박경식씨는 순호는 보안과 경력으로 승진한 뒤 지금 국장 자리까지 도달했다경찰국 신설 성격과 배경이 김순호 자체로 드러난다고 했다.

 

김 치안감의 설명을 듣기 위해 연락했지만 그는 <한겨레>에 문자메시지로 차차 말씀드리겠다. 골수주사파로 더이상 빠지지 않고 완전한 단절, 이게 팩트다고 답했다. 김 치안감은 <와이티엔>(YTN)인노회 사건이 터진 지난 1989년 초쯤 북한의 주체사상에 물들어가는 운동권 흐름에 회의를 느껴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후 고시 공부를 하다가 내적 갈등이 심해져 같은해 7월쯤 직접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대공분실을 찾아가 인노회 사건 책임자에게 그동안의 활동을 자백했다. 당시 경찰 책임자가 대공 특채를 제안하면서 곧바로 경찰의 길을 걷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인노회 동료들이 구속되거나 수사에 영향을 끼칠 진술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곽진산 기자 kjs@hani.co.kr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스위스 노인들이 요양원 대신 선택한 것

[김진경의 평범한 이웃, 유럽] 스위스 노인들은 삶의 마지막을 돌봄 시설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변화가 생겼다. 방문 돌봄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었다. 노령 사회의 돌봄 과제를 해결하는 중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정부가 운영하는 슈피텍스(방문 돌봄)’ 서비스를 받고 있는 스위스의 노인.

빈터투어시 웹페이지

 

스페인에 사는 시어머니가 몇 달 전 스위스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가족이 다 함께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내 팔을 붙들고 걷던 시어머니가 일부러 속도를 늦추는 게 느껴졌다. 당신 아들과 손주들은 저만치 앞서가고 옆에 나만 남게 되자 시어머니가 말을 꺼냈다. “내가 너한테 꼭 당부하고 싶은 게 있었어. 네 남편한테 말해두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해서 너한테도 약속을 받아내려고 한다.” 심각한 분위기였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나는 절대 요양원은 안 간다. 죽더라도 내 집에서 죽고 싶어. ()송장들이 온종일 무표정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곳에 들어가기는 죽어도 싫다.” 시어머니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며느리에게 본인 뜻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 반송장흉내까지 냈다.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입을 살짝 벌리며.

 

어머니가 싫다는데 누가 요양원에 강제로 집어넣을 일 없으니 걱정 마세요.” 내 말에도 시어머니의 불안한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집을 방문해 시어머니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사회복지사가 곧 요양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이미 여러 번 말했다고(시어머니 표현에 따르면 강요했다고) 한다. 남편은 외아들이다. 시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혼자 사는 고령의 여성에게 사회복지사의 말이 압박으로 느껴질 법도 하다. 시어머니가 몸 이곳저곳이 성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알츠하이머 초기라는 진단도 받았다. 한 달에 두세 번씩은 병원 갈 일이 생긴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요양원에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는 못 된다. 시어머니는 버거워하면서도 여전히 혼자 요리와 청소를 하고, 주말이면 노인학교에 간다. 키우는 강아지와 산책도 한다. 요양원에 가면 노인학교와 강아지를 포기해야 한다. 입 짧은 시어머니에게 남이 해주는 음식은 달가운 게 못 된다. 무엇보다 자신만의 사적인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다. 내가 그 나이가 되었을 때 나만의 시공간을 지배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떨까 생각하니 끔찍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 그의 뜻을 지지해주고 싶었다. 나는 시어머니 손을 잡고 말했다. 설령 당신 아들이 당신을 요양원에 보내려고 해도 내가 막을 테니 걱정 말라고. 다른 돌봄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고.

 

예전보다 덜하다고는 하나 여전히 한국은 자녀가 부모의 노년을 책임지는 문화가 강하다. 그에 비해 유럽 노인들은 삶의 마지막 시기를 돌봄 시설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다. 시어머니가 사는 스페인이나 내가 사는 스위스나 마찬가지다. 요양원에서의 삶에 만족하는 노인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요양원행을 택한다.

 

아무리 서비스가 좋은 곳이라 해도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것을 즐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양원 비용이 저렴한 것도 아니다. 가진 재산을 요양원 비용으로 다 쓰고 떠나는 경우가 흔하다. 스위스에서는 요양원 입소자가 사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26개월 정도다. 평생 일군 재산을 생의 마지막 몇 해에 돌봄 비용으로 지불하는 셈이다.

 

팬데믹으로 바뀐 노인 돌봄 형태

그런데 이런 문화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스위스 연방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스위스 요양원 거주자 수는 158433명으로, 2019년에 비해 4%가 줄었다.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2006년 이후로 요양원 거주자가 전년도보다 감소한 건 처음이다. 노년 인구가 계속 증가 중임을 감안하면 더 놀라운 일이다. 일간 타게스 안차이거의 보도에 따르면, 취리히 시내의 한 요양원은 이용자 감소로 결국 폐업하고 현재 예술가들이 사용 중이라고 한다. 돌봄이 필요한 노인들이 요양원을 선호하지 않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닐 텐데 왜 2020년에 처음 이용자가 줄었을까.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이 컸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2020년 요양원 거주자 수가 줄어든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신규 입소자 수가 전년도보다 10% 이상 줄었다. 팬데믹 와중에 요양원에 입소하는 게 더 꺼려졌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팬데믹 중 요양원 방문이 엄격히 제한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팬데믹의 주요 희생자가 노년층이었다. 2020년 스위스 전역의 요양원에서 사망한 사람은 총 34572명으로, 이는 전년도보다 16% 증가한 수치다. 입소자는 줄었는데 사망자는 늘어났으니 결과적으로 총 거주자가 감소하고 문 닫는 요양원까지 생겨난 것이다.

그러면 혼자 힘으로 생활하기 어려운 노인들이 요양원 입소 대신 택하는 건 무엇일까. 방문 돌봄 서비스다. 스위스에서는 이 서비스를 슈피텍스(Spitex)라는 비영리기구가 담당하고 있다. 슈피텍스 서비스에는 투약 등 간호 업무(72%), 요리나 청소 등 가사 업무(24%), 교통수단 이용 등 기타 업무(4%) 등이 포함된다. 팬데믹 때 이용자가 줄어든 요양원과는 반대로 슈피텍스는 2019년에 비해 2020년 이용자가 6.7% 증가했다. 2022년 현재 약 42만명이 슈피텍스를 이용한다. 서비스는 일시적 돌봄과 장기 돌봄으로 나뉘는데, 장기 돌봄의 경우 10년 전보다 이용자가 두 배로 늘어났다. 스위스의 80세 이상 인구 중 30% 이상이 슈피텍스를 이용한다.

 

요양원은 24시간 밀착형, 슈피텍스는 특정 시간 선택형으로 돌봄 방식이 다른데, 그 때문에 비용도 차이가 난다. 스위스는 전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나라 중 하나인 만큼 요양원 비용도 만만찮다. 장기 이용자 1인당 한 달 거주비용은 평균 9122스위스프랑(1236만원)인데, 개인이 이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 건강보험에서 43%가 지불되므로 개인 부담은 절반 정도다. 요양원의 유형에 따라 비용이 달라지기도 한다. 2020년 기준 스위스 전역의 요양원은 약 1550곳으로, 이 중 25%는 국립, 30%는 일부 정부 보조를 받는 사립, 그리고 나머지 45%는 보조금 없는 사립이다. 재산이나 연금 액수에 따라 요양원 선택지가 달라지고, 국립이냐 사립이냐에 따라 서비스의 질도 차이가 난다.

 

슈피텍스는 이용자가 필요한 부분에 필요한 만큼만 제공받는 서비스라 더 효율적이다. 이는 스위스 건강보험제도 개혁과도 관련이 있다. 누구나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건강보험법이 1994년 도입됐고, 그 직후인 1995년에 슈피텍스가 설립됐다. 그리고 슈피텍스 서비스 비용의 약 39%를 건강보험이 부담하도록 했다. 나머지 비용 중 42%는 정부가 지원하기 때문에 이용자는 19%만 내면 된다. 스위스 연방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슈피텍스 이용자들이 실제로 지불하는 금액은 월평균 600스위스프랑(81만원)이다. 요양원 개인 부담액과 비교하면 훨씬 저렴하다.

청년을 배신하고 노인을 처벌한다라고 쓰인 스위스의 연금개혁안 반대 포스터. 이 안은 2017년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Swissvotes.ch

 

방문 돌봄 이후 복지 예산도 절약

개인 지불 비용이 아니라 사회적 비용을 따져보자. 스위스 북서부응용과학대학(FHNW)이 바젤 지역의 실제 데이터를 이용해 연구를 했는데, 슈피텍스 이용자가 늘면 정부도 복지 예산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게 결론이었다. 예를 들어 하루 두 시간 반 정도의 돌봄이 필요한 노인이 있다고 하자. 이 노인은 여러 종류의 약을 챙겨 먹어야 할 때와 목욕을 할 때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스스로 요리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런데 이 노인이 요양원에 가면 서비스에 식사가 기본적으로 포함된다. 필요하지도 않은 돌봄을 받고 돈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 이 비용의 일부는 정부가 부담하게 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바젤 정부가 특정 기간 요양원 거주자들에게 지원한 금액은 37000스위스프랑(5000만원)이었고 집에 머물며 슈피텍스 돌봄 서비스를 받은 사람들에게 지원한 금액은 5000스위스프랑(677만원)이었다. 슈피텍스 서비스 확대는 일자리 창출과도 연결된다. 슈피텍스 근무자의 자격요건은 병원이나 요양원 근무자에 비해 덜 까다로워서 단기간 직업교육만 이수해도 가능하다. 그런 직원들이 현재 총 56000명에 이른다. 슈피텍스 일자리와 관련해 최근 나오는 주장은 더 흥미롭다. 집에서 배우자나 부모의 병간호를 하는 것이 슈피텍스 근무로 인정되도록 제도를 개선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가족을 돌보는 게 정식 직업이 되고 급여도 받을 수 있다. 아직은 논의 초기 단계이지만, 급격히 노령화가 진행 중인 사회의 돌봄 과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노인 돌봄 과제를 말하면서 시설과 인력에 대해 짚었지만, 사실 핵심은 돈이다. 요양원에 가든 슈피텍스 서비스를 이용하든 돈이 필요하다. 빈곤한 노인은 서비스의 효율성을 따질 선택권조차 없다. 노년기 재정 상황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자리(은퇴 연령), 다른 하나는 연금이다. 스위스에서도 이 둘을 현실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여러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스위스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평균수명이 가장 긴 나라 중 하나다. 2020년 출생자의 기대수명은 83.1세로, 세계 최장인 일본(84.6)이나 한국(83.4)과도 큰 차이가 없다. 공식 은퇴 연령은 남성이 65, 여성이 64세다. 이것을 남녀 모두 65세로 통일한 뒤 나아가 67세로 상향 조정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으나, 스위스의 국민투표제도가 걸림돌이 됐다. 지난 30년간 연금제도 개혁안이 국민투표 안건에 총 세 번 올랐으나 모두 부결됐다.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당장 더 일하고 더 적게 받자는 내용에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연금제도 개혁안은 오는 9월 다시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노년층 빈곤율은 기대여명, 공식 은퇴 연령, 실질 은퇴 시기, 연금제도, 돌봄 서비스 비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타나는 결과다. 스위스처럼 잘사는 나라도 전체 빈곤율(9.2%)에 비해 65세 이상 노년층 빈곤율(16.5%)이 훨씬 높다(OECD, 2021). 노년층에서도 남성 빈곤율(14.7%)보다 여성 빈곤율(18.0%)이 높다. 노동시장이 여성에게 불리한 구조이고 배우자 연금에 의지하는 여성들이 많은 점이 한 가지 이유다. 한국은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노년층 빈곤율(43.4%)이 전체 빈곤율(16.7%)의 세 배에 육박한다. 특히 65세 이상 여성 중 약 절반(48.3%)이 빈곤층에 속한다. OECD 국가들 중 최악의 수치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는 부양 의무와 돌봄받을 권리를 동시에 고민한다. 한국에 있는 내 부모와 스페인에 있는 내 시어머니는 어떤 노년을 보내게 될까. 스위스에 사는 나는 내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노년을 즐길 수 있을까. 노년 인구 비중이 늘어나는 추세는 비슷해도 대응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어디에서 사느냐보다 어디에서 죽을 것인가가 더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시사인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윤석열 정부가 앞장서는 전경련 숙원사업, 근로시간 유연화

바쁠 때 많이 일하고 한가할 때 휴가 쓰자?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에서 지난 84선진국(G5)은 바쁠 때 집중근무하고 오래 쉴 수 있는데, 한국은?’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놓았습니다.

한국의 경우 근로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하기 어렵고 G5 국가들보다 연장근로 수당도 많고, 위반 시 처벌도 과하니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경련이 내놓은 근로시간 제도 국제비교

새로운 내용은 아닙니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해 12월에 내놓은 바쁠 때 집중근무, 원할 때 자유롭게 쉬는 근로시간계좌제 도입해야라는 보도자료와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많은 언론들이 전경련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 수십 건의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전경련 보도자료를 인용한 기사들

이 기사들만 보면 일이 많을 때 몰아서 하고, 추가로 일한 시간만큼 나중에 몰아서 쉬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선진국에 비해 휴가가 많지 않고 그나마 길게 이어서 쓰기 힘든 우리나라 직장인의 입장에선 꽤나 달콤하게 들리는 제도입니다.

전경련이 말하지 않은 몇 가지

그런데 전경련이 G5 국가와 비교하면서 빠뜨린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총 노동시간입니다.

한국 노동자는 1년에 미국보다 126시간, 독일보다는 무려 622시간 더 일한다. 자료 : OECD, https://stats.oecd.org, Average annual hours actually worked per worker(2022.6)

많은 분들이 예상했다시피,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G5 국가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가장 적은 독일과는 622시간 차이가 납니다. 한국 노동자는 독일 노동자보다 1년에 26일을 더 일하고 있는 셈입니다.

범위를 OECD 국가 38개국으로 넓혀도 한국보다 노동시간이 많은 곳은 멕시코(2,328시간), 코스타리카(2,187시간), 칠레(1,990시간) 3곳뿐입니다. OECD 평균 노동시간은 1,706시간으로 한국과 222시간(9.5) 차이가 납니다.

전경련이 언급하지 않은 게 또 있습니다. 바로 노동자들의 수입 즉, 임금입니다.

G5 국가 노동자들이 1년에 받는 임금.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보다 높다. 자료 :OECD https://data.oecd.org/earnwage/average-wages.htm Average annual wages, US dollars, 2021 or latest available

노동자들은 G5 국가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일하면서도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만큼 저임금 노동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조혁진 연구위원은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할 때 압도적으로 긴 노동시간이나 성별 임금격차 같은 것들은 쏙 빼놓은 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데이터만 가져다 비교해 왜곡하는 것은 연구자의 입장에서 볼 때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다"라면서 "해외에서 그런 제도를 도입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국내 기업들이 G5 국가들의 제도를 부러워하는 이유

이런 제도를 도입하게 되면 기업들은 필요할 때 노동자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면서 비용은 절감할 수 있습니다. 비정기적으로 발생하는 단기적인 수요나 계절적인 수요, 또는 경기 사이클에 따라 발생하는 수요에 노동력을 집중 투입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반면 이로 인해 발생하는 연장근로에 대한 수당은 휴가로 대체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제도 자체만 놓고서 노동자에게 무조건 불리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일이 많을 때 조금 더 일하고 그만큼 휴가를 쓸 수 있기를 바라는 노동자도 있을 테니까요. 독일에서도 근로시간 저축제도를 도입한 곳이 2018년 기준 500인 이상 사업장에서 85%나 된다고 합니다.

 

문제는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와 한국의 노동환경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나친 노동시간으로 인한 과로사나 산업재해가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데 특정 기간에 노동시간이 지금보다 더 집중될 경우,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에 더 큰 위험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2020년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OECD 국가 가운데 한국의 근로자 10만 명당 사고 사망자 수는 2017년 기준 3.61명으로 독일 1.03, 영국 0.88, 프랑스 2.18, 일본 1.50명보다 훨씬 높았고 3.36명인 미국보다도 높았습니다.

 

상대적으로 낮은 기본급 구조로 인해 연장근로를 해야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이 보전되는 우리나라의 임금구조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박용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기본급으로 일정 정도 수입이 보장되는 유럽 노동자들에 비해 연장근로 임금이 전체 수입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우리나라 노동자의 경우 근로시간 저축 제도가 도입되면 유럽 노동자에 비해 임금 감소에 있어서 더 큰 타격이 있을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단순히 제도 자체만 놓고 G5 국가와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민주노총의 한상진 대변인도 "우리나라처럼 원청에서 하청 다시 재하청으로 수직계열화되어 있는 산업구조 속에서 밑으로 내려갈수록 노동자들이 근로 시간 조건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에 사측과 동등하게 교섭하기 힘든 조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체 노동자의 노조 조직률이 14%에 불과하고 비정규직이 절반이 넘기 때문에 근로시간 유연화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 1호가 근로시간 유연화

문제는 윤석열 정부의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노동정책이 이런 전경련의 숙원사업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지난 6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발표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을 보면 전경련의 보도자료와 똑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장관은 7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도 같은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습니다.

 

지난 715,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대통령 업무보고.

 

'' 단위로 돼 있는 연장근로시간 기준을 '' 단위로 바꾸고 근로시간 저축 계좌제를 도입하고 1개월로 돼 있는 선택적 근로시간을 확대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고용노동부는 이를 위해 교수들로 구성된 전문가 논의기구인 '미래노동시장 연구회'를 발족시켰습니다. 노동시간과 임금체계 개편 방향을 논의해 오는 10월에 최종 권고안을 낼 예정인데 고용노동부는 권고안을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올려 논의를 이어갈 계획입니다.

 

하지만 현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민주노총은 탈퇴한 상태이고 한국노총도 민주노총과 마찬가지로 정부안에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노동계의 타협을 이끌어내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게다가 ''단위로 돼 있는 연장근로시간 기준을 ''단위로 바꾸기 위해서는 근로기준법 개정이 필요한데 지금 같은 여야 의석 수로는 개정안이 통과되기도 힘듭니다.

박용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이에 대해 "대우조선 사태에서 확인된 원하청 간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문제 같은 중요한 현안이 노동계에 수두룩하게 많은데 어떻게 보면 노사 간에 부차적인 이런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제1의 노동개혁 과제로 내세워 노사 간에 소모적인 대립을 부추긴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한심스럽다"라고 지적했습니다.

"현재 연장근로 수당 체불은 말할 것도 없고 기본적인 임금 체불도 너무 많아서 근로감독관 업무의 80%가 체불임금 관련된 것일 정도로 기본적인 노동자의 권리도 지켜지고 있지 않은데 근로시간 저축 계좌제도가 지켜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해관계자들의 참여 없이 논의가 이뤄지는 데 대한 지적도 많습니다. 조혁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근로시간의 제도를 바꾼다는 것은 일터의 규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이해 당사자들이 참여하지 않고 정부가 밀어붙이기 식으로 하게 되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라고 우려했습니다.

20109월 당시 노사정 대표들은 대타협을 이뤄내면서 2020년까지 연간 노동시간을 1,800시간 이내로 줄이기로 합의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2018년 근로기준법에서 주 52시간을 법제화하면서 조금씩 감소하긴 했지만 여전히 2021년 노동시간은 1,928시간이나 됩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앞장서고 대기업 대표단체인 전경련이 수시로 여론몰이를 펼치는 이런 움직임이, 현재의 이 지독한 '과로 사회'를 또 어떤 방향으로 이끌게 될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뉴스타파 최기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