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당 '혐오의 정치'를 보며 노무현을 생각한다 프레시안 2019.05.31.
‘공당 대표’ 황교안을 위한 기도 경향 2019.05.30.
두번째 ‘눈물의 대통령’ 한겨레 2019-05-29
역경 극복’ 귀중한 인적자본 경향 2019 5.29
막말, 거짓뉴스, 도덕 불감증 경향 2019.05.27
가장 쓸데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지만 경향 2019.05.27.
이기적인 2기 신도시 주민 한겨레 2019-05-26
사법연수원 동기 노무현, 그립다 경향 2019.05.26
믿는 것을 보는 세상 경향 2019.05.26
한빛 1호기’가 안전하다는 궤변들 2019.05.24
외교기밀 불법유출과 한국당의 견강부회 CBS 2019-05-24
조선일보의 황당한 ‘경찰 인사권’ 한겨레 2019 5.22
‘장자연 사건 특수협박’ 조선일보사 책임은 누가 지나 한겨레 2019-05-20
실종된 증세 논의 경향 2019.5.19.
일본 구라시키의 도시재생에서 배운다 경향 2019.05.19
디젤엔진을 줄여라 경향 2019.05.16
한국당 '혐오의 정치'를 보며 노무현을 생각한다
다시, 시민이 나서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가 주는 울림과 감동은 그가 추구한 정신에서 연유한다. 시대가 노무현을 끊임없이 소환하는 이유도 정치개혁, 검찰개혁, 남북화해, 균형발전 등 의제의 무게가 엄중하기 때문이다. 집권세력이 지지층을 결집하고 선거에 유리하게 활용하려 노무현을 이용한다는 생각은 협량하다. 정치공학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노무현이 추구했던 가치는 주류 기득권의 독점적 카르텔 체제의 해체와 소득 불평등·양극화 해소 및 공정·정의의 문제로 귀결된다.
지금의 정치체제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정당은 사회 조정과 갈등의 통합을 모색하기커녕 선거정치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수구세력은 여전히 해체되지 않고 있는 냉전구조와 분단체제를 방패삼아 호시탐탐 색깔론과 이념공세를 일삼는다. 박근혜 탄핵 때 광장을 달궜던 시민의 열기가 사라지고 그 공간은 증오와 혐오의 언어들로 넘친다.
정치는 과장된 말의 파편과 이를 둘러 싼 퇴행적 공방으로 날을 샌다. 극단적 혐오와 증오를 동원하여 지지층 결집을 노리며 당내 결속과 리더십 확보의 결과물을 챙기려는 제1야당 대표의 행보는 정치 부재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정당은 권력을 탐닉하는 이익집단으로 전락한다. 우리나라에도 꽤 알려진 영국의 정치사회학자인 톰 보토모어(920-1992)는 그의 저서 <정치사회학>에서 대의정부와 정당, 선거가 중요한 틀을 제공해 주고 있지만 민주주의를 확립하기에는 그 자체로 부적합하다고 한다. 국정농단의 주범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시민의 힘에 의하지 않고는 한국정치는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를 제공하는 말이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자유한국당은 소모적 정쟁을 유발하기 위한 냉전적 색깔론과 갈등 유발적 발언들을 쏟아 낼 가능성이 높다. 지난 주 한국당 황교안 대표의 전방 GP 방문에서의 '남북군사합의를 깨야 한다'는 주장, 강효상 의원의 한미정상 통화 내용 공개 등 국익에 해가 되고, 상식의 선을 넘는 유형의 행태들이 반복될수록 정치는 시민들로부터 외면 받고, 유권자는 민주당과 한국당의 양대 거대정당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금도를 넘는 비상식의 행위가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한국정치의 작동체계를 바꾸려면 깨어있는 시민이 주체로 나서는 수밖에 없다.
정치는 왜 존재하며 정당은 올바른 정치의 동력으로 기능하는가. 1월과 2월을 동면한 국회는 3월 임시국회에서 비쟁점법안 등을 통과시키고 4월 국회에서는 패스트트랙으로 물리적 충돌까지 겪었다. 한국당의 장외투쟁은 집권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공격과 비난으로 일관하며 정치적 증오를 극대화했다. 한국당 대표의 '민생투쟁 대장정'은 집권여당과 청와대 비난으로 정쟁의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적대'와 '혐오'를 넘는 '저주'와 '독설'의 정치의 지향점은 분명하다. 수구세력 결집을 통한 총선 승리다.
정치를 정상화시킬 능력과 의지를 한국정치는 상실했다. 주된 원인 제공자는 분명 한국당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무능한 정치영역 자체에 혐오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양비론의 함정은 어쩌면 한국당이 바라는 바일 수 있다.
시민은 1970년대의 유신과 1980년대의 군사정권의 암흑을 뚫고 비록 절차적 측면에 국한되었지만 민주주의를 이뤄냈다. 또한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집단을 탄핵하여 정권을 교체한 저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를 확장시키지 못하고 있다. 선거가 정치를 통해 입신을 달성하려는 요식행위로 전락한 지금이 사회운동이 부흥하고 확장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노무현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걸음은 한국사회의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선거제도와 정치제도의 개혁 등 제도화를 통한 정치의 정상화를 추구하는 데 상당한 장애가 발생하는 현실에서 다시 시민정신의 발현과 사회운동을 통한 변혁을 모색해야 할 때다. 개인과 집단은 정부정책에 있어 모든 수준에서 그들의 이익을 주장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알고 있다. 이러한 시민집단과 개인들이 대안을 찾는 방법들을 공공 토론의 영역으로 가져와야 한다. 다시 시민이 깨어나야 한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프레시안 2019.05.31
‘공당 대표’ 황교안을 위한 기도
한 사람의 내면은 치열한 싸움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 싸움은 어딘가를 엄숙하게 향하기도 하죠.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던 고상돈이나 모두가 꺼리던 소록도를 향하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의 싸움이 그랬습니다. 때로는 무엇인가를 반대하기 위한 싸움도 합니다. 하얼빈 역에서 방아쇠를 당기던 안중근의 손길, 1987년 종로 한 골목길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소녀의 눈물, 뻔히 질 것을 알며 부산으로 내려가던 한 정치인의 발길에는 아무 말 없어도 그 사람의 진심이 보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고개를 숙이게 되죠.
황교안도 진심을 솔직히 드러냈습니다.
5월17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개인적으로 동성애를 반대한다 … 정치적 입장에서도 동성애는 우리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동성애와 관련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하며 교육을 통해 동성애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죠. 정체성 이슈인 동성애를 선택의 문제로 본 그릇된 시각보다 그 배경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의 반대, 그의 싸움이 어디 있는가. 바로 성경입니다.
2017년 한 기독교 강연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놀랄 일은 아니죠. 황교안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50년 동안 주일 예배를 단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 독실한 기독교 전도사입니다. 검사 시절에도 부임하는 곳마다 예배 모임을 만들어 ‘검찰 복음화’를 외쳤죠. 가난하고 공부도 못했던 자기가 관직에 오른 것도, 총리 시절 가뭄을 극복한 것도, 법안 통과도 예수 덕이라며 자기 믿음을 자랑했다죠. 다른 종교를 어떻게 보는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오신날 한 절을 찾은 황교안은 합장도, 예법에 따른 반배도, 의식 참여도 거부했죠. 내 신만 정당하고 그의 가르침 그대로, 온전히 따르며 세상과의 타협을 반대한다는 시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각을 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하죠.
어떤 종교건 근본주의가 활개를 칠 때는 정치적 이유가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디 왕가처럼 권력을 유지하고 공고히 하는 데 쓰곤 하죠. 정부가 역할을 못하면 그 공백을 채우기도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가자지구의 하마스가 그런 경우죠. 정책으로 승부가 안되니 종교를 동원해 표를 모으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봅니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 인도 모디 총리가 그랬고 미국의 공화당도 그랬습니다. 미국 공화당은 기독교 세력을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낙태, 동성애 등 가치 이슈를 들고나와 보수 기독교 표를 쓸어 모았죠. 덕택에 공화당은 부자 배를 불리는 경제정책을 내면서도 가난한 다수의 표를 끌어모을 수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삶은 점점 힘들어지고 그럴수록 성서의 외침을 더 크게 틀어댔죠. 대립과 불신은 커갔습니다. 극단적 정파성은 최근 유례가 없을 정도로 깊어져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교활한 정치가 공화당 자기 발등마저 찍고 있습니다. 극우 정치에는 종교와 가치뿐 정책이 상관이 없죠. 그러다 보니 정책에 무지하고 목소리만 큰 사람이 활개를 칠 판을 깔아준 셈이 되었죠. 거기에 트럼프가 등장한 겁니다. 이제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어 공화당 주류를 다 삼켜버렸습니다. 하긴 공포정치와 전쟁도 벌어지는 마당에 이런 종교의 폐해는 얌전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문제는 심각합니다.
어떤 종교를 따르고 그 믿음이 근본주의적일지 아닐지 선택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교회가 아닌 공당의 대표라면 좀 생각해봐야겠죠. 황교안이, 자유한국당의 정책과 주장이 공익을 해치면서 자기 믿음만 따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당대표직을 맡은 지 두세달 만에 근본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듯한 황교안의 행보가 걱정스럽습니다. 다른 종교를 무시하는 것과 다른 정치세력을 무시하는 것. 자기 신만 신이라는 환상과 좌파독재를 물리쳐야 한다는 환상. 과연 무관한 것일까요?
그냥 정치적 레토릭일 뿐 그의 종교적 신념과 아무 상관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주 고약한 길로 황교안은 향하고 있으니까요. 사상과 지역 갈등으로 찢긴 나라를 종교로 또 나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런 일 없게 정화수 떠 놓고 간절히 기도라도 해야겠습니다./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경향 2019.05.30
두번째 ‘눈물의 대통령’
벌써 노무현 대통령 10주기를 보냈다. 그는 ‘눈물의 대통령’이었다. 당시 국민들은 유세장에서 흘린 그의 ‘눈물’이 국민적 염원에 대한 대답이라 믿고 그를 대통령으로 세웠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 매력과 일부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잃었기에 그는 정치적으로 실패했다. 그 후 10년 가까운 긴 퇴행의 터널을 지나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아 죽는 국민이 있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다”라고 공언했던 노무현처럼, 문재인 정부는 “병원비 걱정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의료 사각지대에서 하루하루를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400만명에 이르는 한국 사회에서 보장성 강화는 그때도 지금도 절체절명의 과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국민건강보험 보장성 80% 확대와 공공의료 30% 확충은 시작도 못 해보고 정권을 끝냈고, 오히려 영리병원 허용 등 이른바 의료영리화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젖혔다. 문재인 정부는 잘하고 있을까? 얼마 전 한 국책연구기관이 지난 2년간 보건복지정책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고 하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지난 4월 정부는 국민건강보험 종합계획에서 공약대로 국민건강보험의 보장률 70%를 임기 중에 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 국민을 기만하는 계획서다.
더불어민주당은 야당 시절 규제프리존법으로 대변되는 의료민영화를 저지하기 위해 시민사회와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여당이 된 지금, ‘시범 혹은 연구사업’이라는 명분 아래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하지 못했던 규제샌드박스법, 원격의료, 영리 유전자검사, 건강관리서비스 사업 등 핵심적인 의료영리화 조처를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내고 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함께 싸웠던 국회의원들도 요즘은 공천권만 바라보느라 의리를 저버린 지 오래다. 최근 ‘바이오헬스’ 출정식을 바라본 어떤 이들은 ‘제2의 황우석 사태’나 ‘제2의 인보사 사태’가 조만간 터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 보장성 70%’라는 약속을 지키려면 보험료 인상, 대규모 정부 예산 확대, 공공 의료기관의 양적 질적 확대, 주치의 등록제를 포함한 1차 의료의 파격적 강화, 지불방식 개편 등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 동의와 지지가 필요하다. 이는 ‘정치기술’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충분히 안전성도 확보하지 못한 신약을 허가부터 하는 규제완화는 그 자체가 국민건강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의료비를 급격히 높인다. 더욱이 국민건강보험의 곳간 열쇠를 영리기업에 넘겨주어 비급여 의료비를 대폭 늘리면서 보장성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지금대로라면 ‘보장성 70%’ 약속을 못 지킬 것이 뻔해 보이는데, 정권 말기로 가면 “아직 통계치가 안 나왔다. 그래도 우리를 지지해달라”며 은근슬쩍 넘어갈 공산이 크다. 이는 ‘훌륭한’ 정치기술일지 모르지만, 국민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노무현을 싫어하지 않았지만 실패한 정책에 실망한 국민들은 투표장에 가지 않았다. 2007년 대선에서 당시 이명박 후보가 가장 많은 표(30.5%)를 얻어 대통령이 됐지만, 사실 더 많은 표는 37%의 기권층이었다.
특정 정권에 대한 개인의 호불호는 있을 수 있으나 어떤 면에서 모든 정권은 성공해야 한다. 정권 연장의 실패는 정치가에게 그저 잠시 권력을 잃는 것이겠지만 서민들에겐 삶을 송두리째 잃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정부도 성공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기술’로 슬쩍 넘어가려는 것은 실패로 가는 길이다.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문재인의 힘은 기술이 아니라 진정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해마다 제대로 된 건강보험 보장률을 발표하라. 그리고 의료영리화를 막지 못하고 정치기술로 슬쩍 넘어가려는 보건복지정책의 방향과 인사, 조직을 전면 개편하라. ‘똑똑한 정치기술자들’의 자리에 겨우 촛불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고 추운 겨울 광장을 지켰던 ‘우둔한 국민들’을 앉게 하라. 그것이 다는 아니겠지만, 그런 시작 없이는 백약이 무효다.
얼마 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울먹였다. 노무현의 눈물처럼 그 눈물 역시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본인을 위해서도, 무엇보다 국민을 위해서도 문재인 대통령은 두번째 ‘눈물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 한겨레 2019-05-29
역경 극복’ 귀중한 인적자본
모진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에 이르는 드라마는 항상 감동을 준다. 인류의 진보에 지대한 기여를 했던 많은 위인들의 인생 속에서 이런 드라마를 자주 발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역경을 극복했던 귀중한 경험이 바로 그들이 이룩한 성취의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역경을 극복한 경험은 발전을 이끄는 귀중한 인적자본이다.
미국의 공익미디어 WGBH의 2018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86%에 이르는 대다수가 대학 입학생의 인종·민족 다양성을 대학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목표라고 인식했고, 미국인 58%가 사회경제적 혹은 건강상 역경을 대학 입학결정에서 고려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역경을 입학결정에서 반영하게 되면 입학생들의 다양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고 입학기회는 소수자들을 포함하여 열악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에게 더 평등하게 보장될 것이다.
같은 입학시험 성적을 획득한 두 학생이 있다. 한 학생은 곤란한 가정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리고 다른 학생은 유복한 가정의 정서적·물질적 지원과 쾌적한 환경 속에서 얻은 성과라고 하자.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어느 학생이 더 높은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판단하겠는가? 당연히 역경을 극복한 학생일 것이다. 성적이 조금 낮은 학생이라 하더라도 어려운 역경을 극복한 경우에는 더 높은 성적을 획득한 학생과 동일하게 평가될 수 있다. 이렇게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대학입학생 심사에 도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미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SAT) 주관기관이 얼마 전 발표했고 지금 미국 사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역경을 존중했고 가난을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좋은 전통을 갖고 있었고 역경을 극복한 사람들의 경험이 동력이 되어 국가발전을 이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역경이 실패와 좌절로 버려지는 그런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화분에 심은 고운 화초처럼 좋은 환경 속에서 잘 길들여지고 잘 치장된 사람들이 명문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승진하고 영전하며 승승장구하는 그런 사회. 불우한 환경과 열악한 여건을 극복한 귀중한 경험이 버려지는 사회. 이런 기회불평등한 사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통찰력이 조금만 있다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세계 각국의 자료를 분석한 경제학계 논문들은 이런 통찰이 사실임을 확인해준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 2005년 자료를 분석한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부친 학력이 전문대졸 이상인 학생들과 중졸 이하인 학생들 간에 자기주도 학습 시간의 중위 값 격차가 크게는 두 배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 두 집단의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율 격차도 두 배에 가까웠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가족으로부터의 심적, 물적 지원이 부족하고 학업 환경이 열악하여 스스로 학습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대학 입학을 포기할 확률도 높다는 것이다. 이런 격차는 수능 성적의 기회불평등도로 나타난다. 가구환경이 가장 열악한 학생들이 능력은 있어도 기회불평등 때문에 고득점 획득에 실패할 확률을 나타내는 개천용불평등도가 국어와 영어에서 각각 약 50%와 70%로 높게 나타났다.
이처럼 높은 계층 간 교육격차는 당연히 경제활동에서의 소득기회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가구주의 출신 배경(부친의 직업 혹은 학력)이 열악할수록 높은 가구소득을 획득할 기회는 줄어든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최근까지 노동패널자료를 이용한 연구들에서 소득기회불평등도가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분석 대상을 가구주 본인의 학력이 전문대졸 이상인 가구로 제한하면 소득기회불평등도가 절반 가까이 큰 폭으로 하락한다. 그만큼 교육과 입시제도가 소득기회불평등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성별 소득기회불평등은 더 심각하다. 2016년과 2017년 자료에서 능력이 있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최상위 노동소득획득에 실패할 확률(개천용불평등도)이 66%에 달했다. 전문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여성들에게서도 큰 차이가 없게 분석되어 성별 소득기회불평등은 교육을 통해서도 극복되기 어렵고, 여성이 결혼, 출산, 그리고 양육으로 겪는 차별과 경력 단절을 근절하는 제도적 방안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부딪혀야만 하는 역경을 높은 의지력과 노력으로 극복한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역경 극복의 귀중한 경험이 사회발전을 위해 활용될 수 있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분배정의연구센터장 경향 2019 5.29
막말, 거짓뉴스, 도덕 불감증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에 출마 선언할 무렵만 하더라도 미국은 물론 국내 정치평론가들은 그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심지어 잠시 스쳐가는 거품 인기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슈퍼 화요일이라 불리는 경선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자 트럼프 대세론이 공고해졌다. 뒤늦게 언론과 방송은 트럼프 돌풍의 주요 원인으로 실업률, 무역 적자, 테러 사건 이후 무슬림을 비롯한 해외 이민자에 대한 혐오 등 ‘러스트 벨트(rust belt)’로 상징되는 보수 백인 계층의 불만과 위기의식을 트럼프가 막말을 통해 대리만족시켜준 결과라고 분석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막말이 널리 유포될 수 있는 미디어 환경과 사회구조의 변화이다.
1960년 케네디와 닉슨의 TV 토론 이후 60년이 흐르는 동안 미디어 환경은 놀라울 정도로 변화했다. 트럼프의 성공은 변화한 미디어 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눈부신(?) 성공은 한국의 정치인들에게도 학습효과와 자극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정치인과 막말이 갑작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정치를 넘어 일상화되어간다는 것이다. 신문, 라디오 그리고 TV 같은 전통적인 대중매체에 케이블방송과 인터넷이 추가되면서 미디어의 영역이 놀랍게 확장되었고,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본격적인 1인 미디어의 시대가 열렸다. 이 같은 변화는 그간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담화들이 실수든, 의도적인 것이든 곧장 공적담론의 장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뜻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개인의 신상정보가 유리벽처럼 투명해지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 사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말과 글, 행위 역시 여과 없이 전파되는 시대란 의미이다. 위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트럼프의 성공에 자극받은 정치권과 신규 미디어는 이것을 기회로 여긴다. 미디어 시장에 후발주자로 진입한 종편, 인터넷 방송이 시청률에 연연하여 극단적인 막말을 묵인하거나 갈등상황을 의도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지율에 목을 매는 정당과 정치인이 정치적 이유로 이런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미디어 연구자들에 따르면 케이블방송 뉴스나 인터넷 뉴스를 즐겨 소비하는 사람일수록 뉴스 보도의 객관성이나 중립성보다는 정파성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는데, 종편의 보도 강도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은 스스로 망언과 페이크뉴스를 만들어내는 미디어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막말과 페이크뉴스에 몰두하는 시청자일수록 대화와 타협보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된다는 도덕 불감증 증세를 보인다. 문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견의 차이가 합리적인 토론과 설득, 타협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막말을 통해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청취자들을 향해서만 발언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막말을 중요한 정치수단으로 삼는 ‘부족주의(tribalism)’ 정치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혐오의 정치이며 사회의 신뢰를 파괴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막말과 거짓뉴스가 혐오를 유포하며 제2의 성공을 꿈꾼다. 어떤 이들은 이를 받아 다시 유포하며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J K 롤링의 판타지 소설 <해리 포터>에는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비춰주는 마법의 거울 이야기가 나온다. 그 거울에는 “에리스드 스트라 에루 오이트 우베 카푸루 오이트 온 워시(erised stra ehru oyt ube cafru oyt on woshI)”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이 문구를 거울에 비춰보면 “나는 당신의 얼굴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속 소망을 보여준다(I show not your face but your hearts desire)”라는 뜻이다.
막말과 거짓뉴스가 발호할 수 있는 배경은 자신의 확증 편향에 따라 거짓과 혐오발언을 별생각 없이 소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다. 누군가 당신에게 거짓뉴스를 전달하거나 혐오를 조장하는 막말을 하거나 성범죄 동영상을 공유하려 할 때, 항의하라! 낮고 작은 목소리라도 단호하게 거부하라! 그것만이 우리 자신을, 사회를 지키는 방법이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경향 2019.05.27
가장 쓸데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지만
MBC에서 일요일 밤에 방송하는 <복면가왕>은 연예인에게 컴백 무대로 각광받는 곳이기도 하다. 인기가 많아 출연 시 주목도가 높은 건 물론이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온 관심이 쏠릴 때 가장 드라마틱하게 모습을 공개하는 포맷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복귀하는 양상은 다양하다. 스스로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도 있고 인기가 시들어 사라졌다가 어렵게 돌아온 사람도 있다. 한편으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떠돌다가 복귀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에게도 <복면가왕> 출연은 가장 원하는 그림이 아닐까 싶다.
이 프로그램은 출연자의 지금 모습에 집중하게 만든다. 나이, 성별, 직업 등 모든 것이 가면 속에 감춰지는데 도박, 폭행, 음주운전 등 그들이 저지른 잘못 역시 일종의 선입견으로 간주된다.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시청자들을 일단 매료시킨다면 연착륙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향수>의 주인공 그루누이가 뿌린 지상 최고의 향수처럼 마법이 시작되면 뜻밖의 결과도 기대해볼 만하다.
복귀 방송에 앞서 ‘요란’을 떨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복귀 기사는 화제성 부양에 필요하지만 히스토리를 되짚는 과정도 동반한다. 출연도 하기 전 부정적인 요소가 다시 도마에 오르면 복귀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복면가왕>은 출연을 비밀보장하기 때문에 앞서 치러야 하는 절차가 자연스럽게 생략된다. 반면 그런 절차의 부재에서 오는 손해를 만회하고 남을 만큼 방송은 극적으로 진행된다. 방송 후에도 가면 속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보다는 ‘누구’인지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도 장점이다. <복면가왕>이 복귀 무대로 주목받는 건 그만큼 돌아오는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바비킴이 이달 초 <복면가왕>을 통해 돌아왔다. 기내 난동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4년6개월이 흐른 뒤 찾아왔다. 다른 연예인의 복귀 기간과 비교해도 길었던 건 연예인 중년 남성이 일반인 젊은 여성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맥락과 더불어 당시 ‘땅콩회항’ 직후 터지며 갑질 패키지로 묶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긴 유배를 거친 만큼 시청자들의 마음도 많이 녹은 듯하다. 그의 노래가 꽤 그리웠던 모양이다. 많은 시청자들이 따뜻하게 그를 안아주었다. 그럼에도 차가운 시선이 여전한 것을 보며 좀 놀랐다. 가면을 벗고 인사하며 울컥 눈물을 쏟으려는 바비킴을 떠올리니 용서란 게 무엇인가 곱씹게 된다.
애당초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화면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시청자도 여전히 많다. ‘미성년도 보는 TV에 굳이 그런 사람들을 나오게 할 필요 있을까’ 싶은 게 엄격한 기준을 대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하지만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형벌을 이렇게 쉽게 주장할 대상이 연예인 말고 또 있나 싶다. 방송출연도 직업의 세계라면 영구 퇴출은 그만큼 높은 기준이 제시되어야 한다.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의 자숙기간은 죄질과 더불어 인기, 평소 보여주었던 인성, 안티 팬의 규모, 대체 가능성, 복귀 플랫폼 등에 따라 불규칙적으로 정해진다. 명시적으로 확인할 룰도 없어 연예인 입장에선 자숙 기간을 가늠하기 어렵다. 좀 안 보였는데 다시 나온 것을 보고 ‘벌써 몇 년이나 지났구나. 세월 참 빠르네…’라고 말하기에 당사자는 매일의 생계를 견디며 일 년을 하루같이 기다려야 한다. 한편으로 어느 연예인이 음주운전처럼 큰 죄를 짓고도 슬쩍 복귀를 해버리면 속수무책 TV에서 봐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도 현실이다. 기준이 자의적일수록 여론은 쉽게 누군가를 가혹하게 대하고 또 누군가를 쉽게 용서한다. 규칙이 명확한 경우가 하나 있는데 군 입대 문제다. 어길 경우 가장 가혹한 징벌이 기다리고 있지만 갔다 오면 과거를 묻지 않는다. 예측 가능하다는 점에서 특이한 경우이다.
우리 사회는 용서받는 공식이 명확하게 제시되는 사회는 아닌 것 같다. 워낙 죗값을 치르지 않는 자들이 많으니 제대로 용서해주고 또 용서받는 경험이 축적되지 않았다. 그래서 법적 처벌 이외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경계심이 있고 또 인색하기도 하다. 그 정서적인 맥락 속에 연대 의식 없고 소수인 연예인이 유독 호되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가장 쓸데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는데 이 정도는 좀 걱정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김신완 | MBC PD·<아빠가 되는 시간> 저자 경향 2019.05.27.
이기적인 2기 신도시 주민
이기적인몇년 전 ‘유가계급’이 되었다. 평생 집을 가지겠다는 꿈 따위는 없이 살았다. 고상한 윤리의식의 발로는 아니고 그냥 가진 게 무척 적었다. 덜컥 집을 산 것은 두 가지 우연이, 어쩌면 필연적으로 겹친 까닭이다.
우선 서울의 전셋값이 미친 듯이 올랐다. 변두리 산동네 우리 아파트 전세가 4년 새 9천만원 올랐고, 다시 1년 만에 7천만원 더 올랐다. 맞벌이로 모은 돈을 전세금 인상분에 몽땅 쏟아붓고도 빚이 늘었다. 우리는 탈진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서울 퇴출을 결심하고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눈이 번쩍 뜨이는 뉴스를 접한다. 신도시 아파트 대폭 할인분양!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감당할 수 있는 빚으로 집을 살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었다. “가즈아”를 외치며 이사했다. 그렇게 2기 신도시 주민이 되었다.
평생 산동네, 비좁은 골목길 사이에서만 살다 신도시로 오니 참 쾌적했다. 산책길 코스는 아름답다. 차 막힐 일도, 주차로 얼굴 붉힐 일도 없다. 소원이던 자전거도 장만했다. 전용도로를 따라 조금만 달리면 자연이 열린다. 내 집까지 생겼으니 이제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된다, 고 생각했다.
물론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는 않다. 최초분양자와 할인분양자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최초분양자들은 어떻게든 시세 폭락을 막으려 했다. 처음에는 할인분양자의 이사를 막았다. 법이 용납하지 않으니 미구에 문을 열었지만 사사건건 부딪혔다. 그나마 시간이 흐르자 시세가 좀 회복됐고, 갈등도 잦아들었다. 나는 졸지에 미실현이지만 시세차익을 얻었다.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격이다.
얼마 전 정부가 서울 아주 가까운 곳들에 3기 신도시를 발표했다. 아직 4만가구가 더 들어서야 완성될 이곳 신도시 유가계급 주민들은 핵폭탄이라도 맞은 분위기다. 이웃한 1기 신도시 주민들과 함께 계획을 취소하라며 항의시위도 벌이는 모양이다. 몇천명이 모였다니 격앙된 것이 분명하다.
시위나 주무장관의 대책 발표 기사 댓글에 1, 2기 신도시 주민들을 비난하는 의견들이 많다. ‘이기적인 2기 신도시 주민’이라는 제목도 거기서 빌렸다. 결국 자기들 집값 올리자는 거 아니냐는 비판이다. 자기들은 신도시 살면서 왜 신도시를 더 못 짓게 하느냐는 비판도 있다. 보수야당 지지자들이라 시위한다는 비난도 있다. 그 외진 곳에 살면서 집값 오르기를 바라느냐는 비아냥은 그냥 패스.
해당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집값 때문인 건 맞고, 그 당 지지자라서는 아니다. 이 동네와 이웃 1기 신도시는 수도권에서도 가장 강력한 민주·진보정당 지지 지역 중 하나다. 집값 때문인 건 맞는데 그래 봐야 이 동네 소원이 분양가 회복이다. 주민들은 신도시 건설 때 정부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홍보한 대책 상당수가 공수표가 된 데 분노한다. “속았다”는 게 이 동네 정서다. 약속은 부도낸 채 서울 집값 잡겠다며 입지 좋은 그린벨트에 또 신도시를 짓겠다니 분노한다는 것이다. 옆 동네 1기 신도시도 사정은 비슷하다
신도시의 유가계급이 된 뒤 인간의 이기심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많아졌다. 이웃에 임대단지, 행복주택 따위나 들어온다며 불평하는 게시물을 볼 때면 절망하게 된다. 벌써 올챙이 적 잊었느냐며 꾸짖는 댓글도 있어서 희망을 얻는다. 그중 나 자신의 이기적 변화가 제일 흥미롭다. 집값에 관심이 생기고, 개발 소문에 귀가 팔랑거린다. 내 내면의 눅눅한 저 아래에 집값에 대한 욕망이, 강인한 이기심이 있다.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진부한 결론을 내리려는 건 아니다. 살기 위해 이기적이지만, 살기 위해 협력해온 것도 진화의 역사다. 이기심이 강하다 해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수그러들기도 한다. 그게 정책의 힘이다. 안타까운 건 서울 집값 안정을 위해, 서울 더 가까운 곳에 더 많은 아파트를 공급해서 소유자를 늘리겠다는 서울·소유자·공급 중심 프레임이다. 서울의 주택 보급률이 97%다. 집이 모자라지는 않는다. 물론 자가보유율은 43% 남짓이다. 여기서 아파트를 더 공급해서 자가 소유를 늘리는 정책은 결국 나 같은 이들의 이기심을 자극한다. 틈새를 찾고야 마는 투기세력도 자극한다. 서울의 웬만한 전셋값도 못 되지만 저 프레임 덕에 집 한채를 소유해 보니 알겠다, 가지면 더 가지고 싶어진다는 걸. 이제 가졌다고 그리 말한다며 꾸짖는다면 부끄럽게 감수할 수밖에. 세상이 어렵다.
조형근 사회학자·한림대 일본학연구소 HK교수 한겨레 2019-05-26
사법연수원 동기 노무현, 그립다
내가 고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가을 사법연수원에서였다. 7기생 전원 58명이 교실 하나에 모여 앉아 2년을 보냈으니, 나도 그를 조금은 안다고 할 만하다. 동기생 중 유일한 고졸 학력이고, 늘 웃는 얼굴의 촌사람풍이었다.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거셌다.
맨 처음 기억나는 일은 연수원에서 소풍을 갔을 때였다. 연수생들이 나와서 각종 장사치 흉내를 내는데, 뱀장수, 속옷장수 다음에 그가 나와서 면도날장수 흉내를 냈다. “그럼 이 돈을 다 받느냐?”라며 물건값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사람들이 예상한 다음 대사는 “아니에요. 절반 뚝 잘라서 단돈 천 원 한 장!”이었다. 그런데 그가 한 말은 “네, 다 받습니다. 받고요”였다. 모두들 포복절도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자랑 사회를 봤다. ‘무너진 사랑탑’이라는 노래를 한 곡조 하더니만, 돌아가며 노래를 시키는데 그는 “심리미진의 위법이 없어야 한다”고 법률용어를 써 가며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았다.
연수원 수료 후 들은 그의 소식 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시위사건으로 구속될 뻔한 사건이었다. 당직판사가 영장 청구를 기각했더니, 당일에 재청구가 들어와 판사 세 명이 차례로 사건 처리를 회피했다는 것이었다. 몇 달 후 그는 다른 시위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어려운 길 가는구나. 가슴이 저려 왔다.
그 해 그가 서울로 올라와 동기생 예닐곱 명이 모였는데 그 자리에 내가 끼었다. 그가 생각하는 운동이란 뭔지 물어 보았다. 어느 시골 할머니가 급환이 생겨 할아버지가 소달구지에 싣고 가다 마침 자가용 승용차가 지나가기에 세웠다. 동승자는 없고 개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읍내 병원까지 데려다 달라고 간청했더니 승용차 운전자가 할머니를 힐끗 보곤 그대로 가 버렸다. 이야기 끝에 그가 한 말은 이랬다. 사람이 개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려는 소망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그가 인권변호사 노릇을 하던 시절, 법정에서 하도 집요하게 변론을 하여 판사들이 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편 미안하고 한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서 자주 떨어지기에 딱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뿐이었다. 누가 그를 욕하면 듣기 싫었지만, 칭찬해도 그저 그런가 싶었다. 그러다가 그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하루는 동기생 변호사가 판사실에 들어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야, 노무현이 빨갱이 아니냐? 그 사람 대통령 돼도 괜찮을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빨갱이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도와줄 생각이나 하세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어느 법조계 인사가 내게 이렇게 평했다. “진주민란, 동학농민운동, 3·1운동, 4·19혁명, 6·10민주항쟁, 광주항쟁이 모두 쌓여서 이제야 그 원이 이루어진 거다.” 대통령 취임식의 초청장이 왔는데, 하필 딸 졸업식 날과 겹쳤다. “아빠는 딸이 좋아, 대통령이 좋아?”라는 물음에, 영광의 날 그를 한번 볼 기회를 놓쳤다.
대통령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텔레비전에 나와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의 앞날이 험난할 것임을 알았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소망이 그의 정치에서 과연 얼마나 구현될 것인가. 마음이 어두워졌다. 나와 가까운 이로 노무현 정부의 첫 내각에서 장관이 된 사람이 있어, 노 대통령이 어떻더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사람 참 선질(善質)이더구먼”이었다. 본래 보수적 성향인 사람을 장관으로 데려가기에 좀 의아했고, 그도 노 대통령을 썩 긍정적으로 평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의외였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몇 해 지나 동기생 부부들을 청와대에 초대했다. 이 다정한 남자는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가, 판사 재직 중 작고한 동기생의 부인 앞에 서더니 “아…”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만찬 자리에서 몇몇이 마이크를 쥐고 덕담을 하는데 과거 부산에서 공안검사를 했던 이가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하루는 노 변호사가 나를 찾아와서는, 운동권 학생 하나가 잡혀간 것 같으니 행방을 좀 알아봐 달라고 합디다. 그 학생의 어머니가 찾다 찾다 못 찾아 마지막으로 내게 와서 우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 어머니가 아들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라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학생이 어디 붙들려 있는지 알아내 노 변호사에게 일러주며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 사람, 참 따듯하구나.
그가 검찰에 소환되었다. 검찰청사 앞에 닿은 버스에서 내려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뉴스 화면에서 보는 순간 섬뜩했다. 더 깊어진 눈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맑은 눈빛에서 왠지 불길한 느낌이 닥쳐왔다. 괜찮으려나.
마침내 운명의 날이 왔다. 무슨 멍울이 지는 것 같은 서러움에 잠겨, 나는 울었다. 그러다가 몇날 며칠 그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난 모든 신문을 모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느덧 10주기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이 글을 쓰는 것, 그리하여 이제껏 가슴에 담아두기만 했던 이 말을 전하는 것뿐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다시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립다.
정인진 |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경향 2019.05.26
믿는 것을 보는 세상
신문, 잡지, TV, 라디오의 세칭 4대 매체라 불리는 전통적 미디어의 힘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지면과 전파로 전달되는 이 매체들의 특징은 같은 내용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매스미디어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최근 50대의 사용량이 2배 넘게 증가했다는 유튜브 역시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관심을 가져갑니다. 전 국민이 사적인 대화를 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카카오톡의 단톡방 리스트 사이에 드디어 광고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 역시 관심 시장(attention economy)의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Seeing is believing”, 우리가 보는 것들이 우리의 생각을 형성합니다.
최근 길거리의 거대한 전광판이 다시 힘을 얻습니다. 서울 코엑스 앞의 거대한 LED는 화려한 사인보드로서의 역할을 가져옵니다. 그에 반해 지하철의 광고는 예전의 영광을 잃고 말았습니다. 예전 지하철역마다 가득 쌓이던 스포츠 신문이 무가지로, 다시 그마저도 사라져 버린 것은 승객들 모두 손바닥 위의 작은 기계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 이유입니다. OOH(out of home) 매체라 불리는 길거리에 세워놓은 입간판을 이야기하는 빌보드가 다시 의미 있는 매체가 된 것은, 어쨌든 밖에서는 걷거나 운전을 위해서라도 핸드폰에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뉴욕5번가의 화려한 모습이 우리나라에서도 재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핸드폰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앞에 있는 무언가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은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걷거나, 타거나, 공연을 보거나 수업을 받거나 하는 방법밖에는 없지요. 이런 이유로 최근 극장의 광고가 더 힘을 받습니다. 어두운 곳의 거대한 스크린을 보아야만 하고, 핸드폰의 작은 빛도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선 이런 상황이 귀해집니다. 식탁에서도 핸드폰을 옆에 놓거나 눈앞에 두고 먹는 장면이 일상적입니다. 심지어 “포케몬고” 같은 AR게임에 이르기까지 이제 우리는 마치 눈앞에 필터를 끼운 것처럼 세상을 핸드폰을 통해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볼거리에도 본격적으로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되고 있습니다. 실내에서 거대한 사인보드를 중심으로 무대가 만들어지는 e스포츠의 격전장인 “롤파크”가 시내에 자리를 잡습니다. 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를 극장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클래식 라이브 상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저 멀리 유명한 뮤지션의 콘서트 표를 어렵게 구해 가보는 것처럼 5G와 고품질의 영상 음향 전송 기술이 전 지구적인 콘서트를 동시간대에 볼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때 보아야 하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전 국민에게 공통의 관심사가 되는 국가적인 큰 사건이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스포츠 중계, 훌륭한 예술 공연의 실황이 아니라면 반드시 그 시간에 보아야 할 이유는 좀처럼 찾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함께’ 보아야 할 것들은 꽤 있습니다. 이미 방영된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동호회의 모임, 충실히 공부한 명사의 강연 후의 청중의 질의와 응답 같은 것들은 뜻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 모든 작은 모임들이 다시 전 세계적인 동호인에게 전파되며 다시 큰 관심으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렇듯 예전 소수의 콘텐츠를 불특정 다수에게 동시에 보여주던 방식은 다양한 콘텐츠를 취향 저격하여 소수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때 하나하나 팬들의 마음에 꽂히는 메시지는 명확한 ROI로 다가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 시청률과 광고 메시지의 인지도와 같은 도달률이 아닙니다. 그보다 팬이 정말 좋아하는 콘텐츠와 딱 맞춰진 메시지의 결합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우리가 주는 메시지가 상대의 주의를 흩트리고 그를 귀찮게 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자기반성이 필요해지는 시점입니다.
이제 “보는 것을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보는 세상(believing is seeing)”이 오고 있습니다
송길영 | 마인드 마이너 (Mind Miner) 경향 2019.05.26
한빛 1호기’가 안전하다는 궤변들
한빛원전 1호기의 제어봉 과다 인출에 따른 ‘출력 급상승(반응도사고) 사건’을 둘러싸고, 원전의 안전성 및 한수원의 안전불감증에 대한 시민들의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한편 보수언론은 문제사실의 분석·검증이라는 기본자세조차 버린 채, 이미 붕괴된 ‘안전신화’를 앞세우는 핵마피아의 홍보기관지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특히 핵공학 전공교수들이 안전문화 결여에 대한 반성과 대책수립을 논의하기는커녕, 전문가라는 권위(?)를 앞세워 불안감을 가지는 시민들을 무지몽매한 집단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조선일보 인터넷 기사(5월23일자)의 경우 핵공학 전공자들이 총출동하여, 체르노빌 원전과 국내 경수로는 구조가 다르며, 또 여러 안전장치가 구비되어 있으므로 중대사고가 일어날 수 없다는 궤변을 펼치고 있다. 심지어 한국경제의 인터넷 기사(5월22일자)에 따르면, 사건 당사자인 한수원 정재훈 사장이 “체르노빌 운운하며 이번 1호기 사태의 위험을 부풀린 환경단체 등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 또 원자로를 “정지하는 지침을 어긴 점이 있어도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처럼 원전의 안전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하는 당사자들의 적반하장인 대응자세에서, 국내 원전의 안전문화 결여(안전불감증)라는 참담한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공포심을 떠나 분노조차 떠오른다. 궤변의 몇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원전의 중대사고(노심용융 또는 핵폭주)는 단일 원인이 아니라, 천연재해·조작 실수·설계 오류·안전장치 고장 등의 복수 원인이 겹쳐 발생한다. 원전에는 자동정지 장치가 있어 25% 이상의 출력 상승에도 안전하다는, 한수원을 비롯한 핵마피아의 설명은 맹목적 안전신화론, 즉 자의적 및 단락적인 설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5%의 열출력 상승이라도 안전하다는 프로파간다는, 마치 주행속도 60㎞의 도로를 100㎞로 달려도 에어백이 있으니 안전하다는 식의 논리이다. 이는 현행 원자력안전법의 존재조차 필요없다는 논리로 이어지며, 이해관계에 따라 현행 사회규범 및 법제도까지 모두 부정해도 상관없다는 꼴이 된다.
둘째, 경수로의 자기제어기능이 작동하여 안전하다는 주장의 경우, 원자로 내의 냉각수가 없다면 무용지물의 논리이다. 만약 이번 사건에서 지진발생이 겹쳐 제어봉 재삽입 및 보조급수펌프 작동의 불능 등과 같은 복수원인이 겹쳤다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가? 2012년 고리 1호기 원전 교류전원 상실사태에서 실패사례를 직접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벌써 망각한 것 같다. 이런 복수원인 발생에 대비하여, 국내 핵마피아도 확률적 리스크평가(PRA) 연구 및 안전대책설비의 증설을 추진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박한 안전의식 수준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셋째, 여전히 격납용기의 유무 및 크기를 내세워 국내 원전의 우위성을 강변하려는 케케묵은 논리가 또다시 나왔다. 체르노빌사고의 폭발력에는 국내 원전의 격납용기도 견딜 수 없으며, 후쿠시마에 비해 약 7배 큰 국내 원전(경수로)의 격납용기도 폭발시간이 조금 늦추어진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기본상식조차 외면하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아직 드러난 피해(예, 핵연료 손상)는 없지만, 국내의 역대 원자력 사고원인 가운데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것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중대사고의 하나인 핵폭주사고(반응도 사고)는 순식간에 발생하는 탓에 미처 대처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체르노빌사고는 40초간의 터빈 관성력 시험에서 출력 상승이 나타나 제어봉을 긴급히 삽입한 후 겨우 8초 만에 폭발했다.
안전성의 확인과 향상은 이렇다 할 성과도 나타나지 않지만, 미완성 기술인 원자력을 이용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작업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 및 당사자들은 대오각성과 함께 철저한 대책수립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민들의 우려를 그저 불안감 조성으로만 몰아붙이는, 안전신화 맹신자를 국가존망을 좌우할 원전사고의 방지 책임자(사장)로 맡긴 현 정권의 인사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장정욱 일본 마쓰야마대 교수 경제학부 2019.05.24
외교기밀 불법유출과 한국당의 견강부회
세계 2차대전에서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독일군을 상대로 영국군은 비밀리에 암호해독반을 운영했다. 수학천재인 '앨런 매티슨 튜링'을 중심으로 구성된 암호해독반은 세계에서 가장 어렵다는 독일군의 암호체계인 '에니그마'를 빠르게 풀어내는 시스템, 즉 튜링 머신을 만들어냈다.
이후 독일군의 군사작전은 영국군의 손안에 놓이게 됐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이야기다.
전쟁이나 외교에서 '비밀 정보'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각 나라마다 국기기밀로 엄격히 관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미 한국대사관 직원이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에게 불법적으로 유출한 사실이 적발되면서 논란이 뜨겁다.
사실 정상간 통화 내용은 '3급 비밀'로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 열람권이 없는 외교관이 본 것도 문제인데다 의도적으로 야당 국회의원에게 넘겼다니 외교부의 기강해이에 어처구니가 없다. 더구나 지난 3월에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대미 관계자 접촉 움직임이 그대로 강 의원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조직기강을 뿌리부터 흔드는 국기문란행위이다. 철저한 조사와 일벌백계가 필요하다.
(사진=연합뉴스)
이번 외교기밀 유출사건은 외교적 관례를 깨뜨린 명백한 결례이다. 정상간 대화 내용이 외교관에 의해 빼돌려지고 정쟁의 대상이 된다면 대체 어느 나라 정상이 대화에 진지하게 나설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한반도 정세가 매우 복잡하고 민감하게 전개되는 시점에서 한미간 신뢰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나 않을지 크게 우려된다
CBS노컷뉴스 지영한 논설위원 2019-05-24
조선일보의 황당한 ‘경찰 인사권’
‘고문 기술자’ 이근안 경감,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축소·조작’ 유정방 경정, ‘부림사건 고문 가담’ 송성부 경위, ‘부산 불법오락실 비호’ 조아무개 경위 등등. 이들의 공통점은? 조선일보와 경찰청이 공동으로 주는 ‘청룡봉사상’ 수상자들이다. 이들의 불법·비리가 상을 받은 뒤 저질러졌거나, 아니면 수상자 선정 당시엔 주최 쪽이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도 수상이 취소된 일은 없다.
청룡봉사상은 조선일보와 경찰청이 1967년 제정했고 올해로 53회를 맞는다. 청룡봉사상 누리집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관과 의로운 시민의 모습을 널리 알려 우리 사회를 더 건강하고 희망찬 곳으로 만들어 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경찰관이 수상자로 선정되면 1계급 특별승진과 1천만원(조선일보 700만원, 경찰청 300만원)의 상금을 받는다. 심사는 조선일보와 경찰청이 공동으로 하는데, 조선일보에선 편집국장과 사회부장이 참여한다. 매년 평균 4명의 경찰관이 상을 받았고 지금까지 200명이 넘게 특진을 했다.
청룡봉사상에 대한 문제 제기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무엇보다 특정 언론사가 무슨 권한으로 경찰관을 특진시키느냐는 비판이 많았다. 특정 언론사의 경찰 인사 개입이며 언론과 경찰의 유착 고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심사를 이유로 수상 후보자들에 관한 감찰 내용과 세평까지 기재돼 있는 경찰 내부자료를 특정 언론사에 제공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런 이유에서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경찰청이 공동주최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시 경찰청은 “정부의 고유 권한인 인사평가를 특정 언론사의 행사와 연결하는 것은 부작용의 소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공무원 인사 원칙의 문제에 있어서도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경찰청이 빠지자 조선일보는 2007~2008년 시상을 중단했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슬그머니 되살아났다.
지난해 7월 민갑룡 경찰청장 인사청문회에서 청룡봉사상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의원들은 “조선일보가 주는 상을 받았다고 특진을 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고 따져물었다. 이달 초엔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 재판에서 2009년 ‘장자연씨 사건’ 수사 때 “조선일보 사회부장한테 협박을 받았다”고 폭로해 논란이 증폭됐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조선일보 주관 청룡봉사상 수상자 특진 제도 폐지’ 글에는 4만5천여명이 동의했다.
하지만 경찰청은 “역사가 오래된 상이고 언론사 의견도 고려해야 한다”며 유지 결정을 내렸다. 대신 예비심사에선 조선일보 간부를 빼고 최종 심사에만 참여시키는 개선안(?)을 내놨다. 민 청장은 다음달 열리는 53회 시상식에서 특진 경찰관들에게 새 계급장을 달아줄 예정이다.
언론소비자주권행동과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18개 시민단체들이 22일 경찰청 앞에서 ‘조선일보·경찰청 청룡봉사상 공동주관 및 수상자 특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민단체들은 “대한민국 경찰은 조선일보가 협박하고, 상 주며 마음대로 어르고 달래 희롱해도 되는 그런 조직이 아니다”며 “경찰청은 조선일보에 내준 경찰 특진 인사권을 환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안재승 논설위원 jsahn@hani.co.kr 한겨레 2019 5.22
‘장자연 사건 특수협박’ 조선일보사 책임은 누가 지나
언론이 수사기관을 ‘협박’해 결국 부실·왜곡 수사로 이어졌다면 앵커의 접촉사고 논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사안 아닌가.
남들 잘못엔 가차없이 비수를 꽂아대면서 자기 잘못은 감추려 한다면 당당하지 못하다. 장씨 죽음의 진실을 은폐하고 남의 명예를 치명적으로 훼손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현직 대통령 건드리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그런다고 해서 처벌이 되겠어요?” 고 장자연씨의 지인 김아무개씨가 <문화방송> 피디에게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방 사장 아들’의 행적을 알면서도 그동안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의 우려처럼 법무부 검찰과거사위는 20일 장씨에게 술접대를 강요한 가해자들과 부실수사에 대한 책임은 묻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후속 조처는 장씨 소속사 대표의 위증 혐의를 재수사 권고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나마 장씨가 남긴 문건의 신빙성을 확인하고 ‘조선일보 방 사장’ 일가의 행적을 밝힌 게 성과라면 성과다.
과거사위는 문건에 룸살롱에서 술접대를 받은 걸로 나오는 ‘방 사장 아들’은 방정오 <티브이조선> 전 대표로 판단했다. 지인 김씨는 4장짜리 문건을 쓴 날에도 장씨와 ‘방정오’ 얘기를 나눴고, 영화 관람 등 ‘방정오’와 만난 일정이 기록된 장씨의 다이어리도 봤다고 했다. 문건이 처음 공개된 뒤 조선일보사가 ‘조선일보 방 사장’과 ‘방 사장 아들’이 누군지 내부적으로 알아봤다면 일찍이 그 실체를 눈치챘을 가능성이 크다. 톱스타를 꿈꾸던 여배우가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글을 남기면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콕 짚어 거론할 리는 없을 테니까.
당시 조선일보사는 ‘방상훈 사장은 무관하다’며 언론계·정계 등에 ‘피해자 프레임’을 강력하게 펼쳤다. 그것이 그의 동생과 아들까지 뒤로 감추고 부실·왜곡 수사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장씨의 1년치 통신기록 원본파일은 검경 어디에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경찰 수사책임자는 ‘수사기밀’까지 조선일보사 쪽에 넘겨줬다고 법정에서 고백했다. ‘방 사장 아들’에게도 코리아나호텔 스위트룸까지 찾아가는 ‘출장 서비스’ 조사의 특혜를 제공했다.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사장 역시 해외에 있다는 이유로 경찰이 소환조차 않더니 검찰은 국내에 있는데도 아예 부르지 않았다. 지인 김씨가 장씨와 방 전 대표의 관계를 ‘광분해서 진술’했는데도 검찰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고 한다.
‘현직 대통령’에 맞먹는다는 언론권력 앞에서 수사기관들이 알아서 비켜간 것일까.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과거사위 발표문에 등장하는 ‘특수협박’이란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이 “조선일보는 정권을 창출할 수도 있고, 퇴출시킬 수도 있다”며 수사책임자를 ‘협박’한 사실을 과거사위는 공식 인정했다. 다만 ‘특수협박죄’(형법 284조)의 공소시효는 지났다고 했다. 사내에 대책반까지 꾸려 ‘단체’ 또는 ‘다중’의 위력으로 억지로 어떤 일을 하도록 ‘협박’한 것은 맞다는 취지다.
언론이 수사기관을 ‘협박’해 결국 부실·왜곡 수사로 이어졌다면 별일 아닌 듯이 넘길 일인가. 최소한 조선일보가 대서특필해온 유력 앵커의 접촉사고·폭행 논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사안임은 분명하다. ‘특수협박’ 와중에 결국 장씨가 문건에서 고발한 성착취의 진실까지 덮였다면 책임은 더 크다.
이 사건에는 장씨 이외에 또다른 피해자가 있다. 조선일보 2011년 3월9일치는 문건 속 ‘조선일보 방 사장’으로 ‘확인됐다’며 사실상 조선일보 전직 고위간부를 지목했다. 과거사위는 사주 일가를 보호하기 위해 이 간부를 겨냥한 ‘맞춤 진술’을 또다른 조선일보 간부가 청탁한 게 아닌지 의심했다. 사실이라면 ‘인격 살인’에 가깝다.
‘미투’ 이후 과거 비위가 드러난 정치인·공직자·연예인들이 줄줄이 구속·퇴출되고 있다. 물컵 던지고 갑질한 기업인들도 예외없이 자리에서 쫓겨나는 시대다. 방정오 전 티브이조선 대표 역시 딸의 말 때문에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대통령에 맞먹는 언론권력이라면 공적 책임도 그만큼 더 크다.
조선일보사는 그간 사실상 입을 틀어막으려는 봉쇄소송으로 이 사건에 대응해왔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의원들과 시민단체 인사들을 고소한 데 이어 최근에는 문화방송과 <한겨레> 등에도 소송을 걸었다(무고죄를 의식했는지 한겨레엔 형사고소는 하지 않았다). 남들의 잘못에는 가차없이 비수를 꽂아대면서 자신의 잘못은 감추거나 회피하려 한다면 당당하지 못하다.
‘협박’과 ‘인격 살인’의 전말은 알 수 없으나 과연 이 모든 일이 최대주주이자 오너인 방상훈 사장 모르게 진행됐을까. ‘특수협박’으로 장씨 죽음의 진실을 은폐하고 남의 명예와 인격을 치명적으로 훼손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언론 자유’의 방패 뒤에 숨어 책임을 모면하려 한다면 비겁한 일이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한겨레 2019-05-20
실종된 증세 논의
깎아주긴 쉬워도 올리긴 어려운 게 세금이다. 얼마 전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신용카드 소득공제 축소를 검토한다 했다가 여론의 반발 조짐이 보이자 곧바로 없던 일이 돼 버린 적이 있다. 당초 이 제도는 근로소득자들의 세금을 깎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업주들의 탈세를 막기 위해 1999년 한시적으로 도입됐다. 카드 사용이 보편화돼 목적이 달성되면 제도를 환원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는 증세로 인식돼 버렸다. 어느 정부도 근로소득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 제도를 중단할 만한 ‘배짱’이 없었고, 촛불정부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8차례나 일몰(제도 종료)이 연장돼 온 이 제도는 결국 9번째 시한 연장을 앞두고 있다.
세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사실 부자들이 만들어낸다. ‘부자 아빠’에게 세금 걷는 정부는 로빈 후드 같은 도둑이다. 부자 아빠는 로빈 후드가 ‘낭만적 영웅’이 아니라 부자들에게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나쁜 놈’이라고 말한다(부자 아빠가 로빈 후드 이야기를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여전히 로빈 후드의 추종자들이 남아 있다며 세금 얘기를 꺼낸다. 골자는 정부가 내라는 대로 세금을 내지 말아야 부자가 된다는 거다. 그래서 부자들은 세금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똑똑한 변호사와 회계사를 고용하거나 정치가들을 설득해 법을 바꾼다. 부자 아빠는 변호사와 회계사들에게 많은 돈을 지불한다. 그 편이 정부에 돈을 주는 것보다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1997년 출간돼 재테크 분야의 고전 반열에 오른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나오는 부자 아빠의 말씀이다. 시리즈가 세계적으로 수천만권(한국에서만도 수백만권) 팔렸다고 하니 이 부자 아빠의 교훈을 따라 해 부자가 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부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미국의 부자들 모임이라는 ‘애국적 백만장자 그룹(Patriotic Millionaires)’은 지난 2월 뉴욕 주지사와 주의회에 연간 500만달러 이상 소득을 올리는 부자들의 세금을 인상해 달라는 제안을 했다. 미국 최대 투자은행인 JP모건 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최고경영자도 지난 4월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부자증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뿐이 아니다. 세계 금융시장의 큰손인 워런 버핏과 조지 소로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등 많은 미국의 갑부들이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부자들 스스로가 현재 무섭게 진행되고 있는 부의 양극화가 초래할 암울한 미래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세금은 정부의 조세수입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의 거래를 줄여 경제적 순손실을 발생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세금은 필요하다. 요즘은 국방이나 치안, 인프라 건설 등 전통적인 쓰임새보다 부의 재분배를 통해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목적이 중요해졌다. 정부가 로빈 후드가 돼야 한다는 거다. 최근 경기가 어려워지는 한국에서 이 같은 정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민간에서 일자리 창출이 제대로 안될 때는 정부라도 나서야 한다. 여기에는 세금이 들 수밖에 없다. ‘혈세’로 일자리 만든다고 폄훼하려만 드는 부자 아빠 같은 이들도 있지만, 이런 데 쓰라고 걷는 것이 혈세 아닌가.
문재인 정부도 세금 앞에선 작아지고 있다. 지난 16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는 ‘저성장과 양극화, 저출산·고령화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재정 확대’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여기에 소요되는 재정을 뒷받침할 조세 정책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전이 제시되지 않았다. 현 정부 들어 처음 열린 2017년 국가재정전략회의 때만 해도 보편증세까지는 아니지만 부자증세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이후 정부의 조세개혁은 종합부동산세의 찔끔 인상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러다 지난해 같은 회의에서는 증세 문제가 논의에서 완전히 제외됐고, 박능후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만 “세수 확보 문제의 본격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을 뿐이다. 올해 회의에서는 이 외마디 외침조차 사라진 것 같다. 보편증세는커녕 부자증세마저 실종됐다.
한국의 조세부담률은 선진국보다 낮고, 그러다 보니 정부의 재정이 부족하고, 복지와 사회안전망은 열악하다. 정부가 주창하는 ‘혁신적 포용국가’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세수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현 정부에서도 증세는 금기어가 되고 있다. 부자 아빠들의 요구에 밀려 가업상속공제제도 완화, 증권거래세 인하 등의 얘기들만 나온다. 국민들에게 우리 모두 세금 조금씩 더 내서 사회를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어보자고 설득하는 정부를 만나고 싶은 건 과한 욕심일까./ 김준기 경제부장 경향 2019.5.19.
일본 구라시키의 도시재생에서 배운다
도시재생이 정부정책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속도가 붙고 있다. 그런데 도시재생은 속도전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섬세하고 다양한 접근과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지역·장소적 특징과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서울로7017과 뉴욕의 하이라인, 그리고 이런 사업의 원형이 된 프랑스 파리의 프롬나드 파사주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파리의 경우는 폐철도를 활용해서 부족한 도심 공원 개념을 도입했다. 철도 주변의 중층 주거들은 도심지역의 특성 때문에 공원 같은 시설들이 부족한데, 이를 해결해준 것이다.
뉴욕 하이라인 역시 지역적 특성과 결합해서 갤러리 중심의 미술유통 산업군이 형성되었고, 패션산업의 유통과 소비공간이 확보되었다. 동시에 공간적·도시적 특징은 뉴욕에서 가장 모험 가득한 지리적 특징으로 나타나 구글 같은 IT산업들이 들어서는 장소가 되었다. 반면에 서울로7017은 이런 장소적 산업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도시 공원이라는 측면만 강조되었고, 남대문 패션시장에 공급하던 다양한 의류산업 생태계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만리동 일대는 남대문 패션시장의 제조 공급원이었는데, 서울로7017은 이에 대한 접근이 없었다.
도시재생이 이벤트가 아닌 지속 가능한 정책 과제인 이유는 산업 생태계나 인문 생태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며, 일자리와 경제적 파급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장점은 톱다운(Top-Down)의 효율성이다. 그런데 도시재생은 복잡해서 톱다운과 지역기반의 다양한 연구와 관찰, 그리고 대안이 요구되는 정책 프로세스의 테마다.
대안은 뭘까? 최근 일본 구라시키를 방문하고, 담당 공무원의 설명을 들었다. 1968년 도시미관이라는 도시계획으로 출발해 약 50년간 진행한 구라시키는 실패를 거듭하고, 개선해 나가면서 진화해왔다. 전형적 지방개발 사업인 티볼리 공원이라는 테마파크는 잠깐 반짝하고 나서 디즈니랜드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들어서면서 망해버렸다. 테마파크는 우리나라의 지자체도 얼마나 많이 발표하는가? 일시적 투자 사업일 뿐이고 지속하기 정말 어려운 사업이다. 대부분 망한다.
구라시키 역시 망하고 나니 자신들의 지역 자산으로 눈을 돌리고, 도시 계획의 일환이었던 구도심 역사지역을 가공하기 시작했다. 자기의 장점을 찾은 것이다. 중요한 점은 한번에 큰 사업으로 성공하기보다는 지속적 정착을 위한 장기적 시각에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정착 지원도 얼마 안되지만, 2년에 걸쳐서 상담하고 검토함으로써 작은 이익으로 정착할 진짜 주민과 상인을 찾아낸다. 경관을 위해서는 8층짜리 건물용지를 사들여 건물을 높게 짓지 않는다. 이는 장소의 완성도를 위한 일이다. 구라시키 미관지구 내 소상점이나 기업들에는 온라인 판매보다는 지역 판매를 장려하고, 특화 상품화를 지자체가 지원한다.
무엇보다 사업의 성공을 위해 2년마다 보직 이동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험을 계속 공유하고 노력하는 담당 공무원들의 노력이 돋보였고, 이들과 함께하는 지역 건축사들의 애정과 성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아직 완벽한 성공이라 보기 어렵지만 50년에 걸쳐서 끝없이 노력하는 구라시키의 태도에서 지역기반의 학습과 관찰, 지속적인 개선이 도시재생의 필수조건임을 강조할 수 있었다
홍성용 | 건축사·건축공학박사 2019.05.19
디젤엔진을 줄여라
2014년 한 설문조사에서 미세먼지가 예전보다 나빠졌다고 응답한 국민이 80%를 넘었다. 지금 동일한 설문조사를 한다면 90%는 족히 넘을 것 같다. 미세먼지가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단순 팩트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1995년 서울의 PM10 농도는 80㎍/㎥에 근접했다. 다른 대도시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높던 미세먼지 농도는 2010년에 50㎍/㎥ 아래로 내려갔고 이후에도 이 수치를 유지했다. 20년이 채 안 걸려 대기 중 미세먼지 농도를 30% 이상 줄인 것이다. 그런데 미세먼지가 줄었다는 사실을 얘기하면 비난받는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 대다수 시민들은 단순 측정자료까지 믿지 않고 언론은 연일 미세먼지 공포를 조장한다. 왜 그럴까? 마스크가 잘 팔리는 것 외에 공포마케팅을 통한 이익도 별로 없어 보이는 데 말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미세먼지와 밀접한 질병은 폐질환과 심혈관질환이다. 대도시 미세먼지 농도가 30% 이상 개선되었으니 관련 질환도 많이 줄었을까? 결론은 반대다. 미세먼지와 관련이 높다는 허혈성심장질환은 이 기간 동안 유병률이 약 250%나 증가했고 폐렴사망률은 무려 700%가 넘게 증가했다. 폐암환자 또한 두 배 이상 폭증했다. 미세먼지가 줄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가장 큰 요인이다. 주변에 호흡기, 심혈관질환자 및 사망자가 몇 배나 증가했는데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질병, 사망과 관련한 기억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미세먼지 관련 질병 자료만을 분석하면 관련된 질병을 줄이려면 미세먼지를 대폭 늘려야 한다는 괴상한 결과를 얻게 된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상관관계이니 아이러니다. 통계의 한계쯤 되려나? 좀 돌려 생각해보면 이 자료가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 비록 미세먼지가 관련 질병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는 하나, 미세먼지를 압도하는, 해당 질병을 유발하는 다른 오염물질이 증가했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압도적 질병유발물질은 미국의 조사결과에서 찾을 수 있다. 대형차량 외 디젤차량이 극소수인 미국에서 디젤이 차지하는 미세먼지 발생량은 15% 정도이다. 반면 암의 조기발병 영향은 모든 대기오염물질 중 무려 80%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 디젤차는 2000년 360만대에 불과하던 것이 작년 말 1000만대에 근접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수도권에서 디젤차가 발생시키는 미세먼지량은 전체 오염원의 23%나 된다. 왜 미세먼지가 줄었음에도 관련 질병이 이렇게 폭증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두말할 것 없이 대기 중 발암물질량의 80%를 훌쩍 넘게 발생시키는 디젤엔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왜 사람들이 오염물질의 과다배출을 앎에도 불구하고 디젤차를 선호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최근 출시된 고가의 SUV는 판매량의 약 80%가 디젤엔진이니 말 다했다.
디젤은 서민을 위한 연료라는 이유로 세금을 낮춰 휘발유보다 10% 정도 저렴하다. 그런데 경차는 모두 휘발유차인 반면, 디젤승용차는 대부분 비싸다. 자동차시장은 가난한 사람들이 세금을 더 내야만 하는 이상한 구조로 개편된 지 오래다. 더 이상 디젤의 저가정책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함이 아니다. 그런데도 국민의 고충을 뒤로하고 경유세를 인상하기는 어려우니 참 난감하다. 역으로 생각하자. 소득주도성장의 상징인 최저임금 인상이 계획보다 늦어지고 서민의 삶이 더욱 팍팍해져가는 지금 국민의 건강과 실질소득 증대를 모두 꾀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휘발유세를 경유세와 같게 낮추는 것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국민을 위해, 침체된 경제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정책이다. 휘발유를 남용한다고? 더 이상 움직일 여력도 없다.
조기폐차지원금? 수소차지원금? 걷어서 특정인에 주려하지 말고 걷지 말자. 미세먼지? 대기오염정책 완전히 헛짚었다/ 홍석환 부산대 교수·조경학 2019.05.16
노들강변(그룹 알마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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