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를 생각한다 경향 2019 4.30
10% 사회, 1% 사회 한겨레 2019. 4.30
늙은 국회, 늙은 정부 경향 2019 4.29
‘조선일보 방 사장’ 일가의 패륜, 한국 언론의 수치② 한겨레 2019 4.29
기레기’보다 나쁜 기자들 경향 2019 4.28
대통령의 ‘밥값’ 경향 2019 4.28
세월호 보도를 사과하지 않은 언론들 미디어오늘 2019 4.27
봄 가뭄에 멍드는 하천생태계 2019.4.24.
상속세가 ‘기업가 정신’ 죽인다는 헛소리 한겨레19.4.23
‘차명진들’ 경향 19.4.23
부동산 소고 경향 19.4.22
패스트트랙이 모두를 살릴 것이다 한겨레 2019.4.22.
사악한 욕망 ‘빨갱이’ 사냥시대 경향 19.4.22
황교안의 '증오의 정치' 프레시안 19.4.20
조기 영어교육 마케팅…원어민·모국어란 무엇인가 19.4.19 경향
조계종과 노동조합 경향 19.4.18
한국 상층과 중산층의 유별난 '서민' 코스프레 프레시안 19.4.18
문 대통령 지지율이 추락한 3대 원인 미디어오늘 19.4.14
‘우리 시대를 생각한다
내가 공부하는 사회학은 ‘제3의 사회과학’이라 불린다. 근대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정치학, 경제학에 이어 세 번째로 체계화됐기 때문이다. 사회학은 정치·경제를 제외한 계급·조직·세대·문화 등을 연구 영역으로 삼는다. 동시에 사회학이 다른 사회과학들과 구별되는 특징은 정치, 경제, 문화를 포괄하는 전체사회를 분석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정치학, 경제학과 비교해 사회학이 때때로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사회학의 이런 태생적 특징에서 기인한다.
사회 전체의 변화를 조망하는 게 사회학의 과제라면, 사회학의 시각에서는 2010년대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몇 달 남아 있지 않은 이 2010년대를 후대의 역사가들은 예상하건대 대침체 이후 암중모색기였다고 부를 가능성이 높다. 대침체란 2008년 금융위기를 지칭한다. 금융위기가 1980년대 이후 공고화된 신자유주의 질서를 해체시키기 시작한 이래, 특히 서구사회에서 지난 10년은 새로운 질서로 가는 변화와 혁신, 그리고 그 이면을 이루는 불안과 분노가 혼돈스럽게 뒤엉켜 있는 시대였다.
이 두 흐름 가운데 먼저 사회학자들의 시선을 끈 것은 불안과 분노였다. 불안과 분노의 감정을 선구적으로 포착한 이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 이론가에서 예언가로 자신의 지적 역할을 바꾼 듯한 바우만은 2006년 내놓은 <유동하는 공포>에서 진단하기를, 전통적인 복지국가를 대신하여 이제 “소아성욕자, 이상행동자, 연쇄살인마, 강압적인 거지, 강도, 스토커, 부랑자, 유해 음식물 판매자, 테러리스트 등이 주는 위협 쪽으로 주된 관심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사회·문화적 불안과 공포는 이민자를 위시한 ‘내부의 적’에 대한 분노를 촉발시켰고, 이는 지난 10년 우파 포퓰리즘 발흥의 정치적 토양을 제공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불안감이 과학기술 및 경제의 변화와 혁신에서도 비롯된다는 점이다. 지난 10년간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그리고 디지털경제, 공유경제, 풀랫폼 비즈니스가 부상하면서 경제적 구조변동이 빠르게 진행돼 왔고, 특히 기성세대의 경우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데 작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정보경제학자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루 맥아피가 2014년 펴낸 <제2의 기계 시대>에서 강조하듯, 과학기술 변화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결과를 안겨주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이 미숙련 일자리를 대체하고, 자본이 노동보다 더 많은 몫을 차지하며,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 부를 독점하는 정보혁명시대의 도래에 우려와 불안과 두려움의 시선을 거두긴 어렵다.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 ‘정체성 정치’가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 정체성이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하는 사유·감정·이념을 뜻한다. 불안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불안을 벗어나려는 욕구를 갖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바로 이 불안에 맞서서 존재의 이유를 알려주고 존재의 당위성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곧 정체성이다. 국제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지난해 출간한 <정체성: 존엄성의 요구와 분노의 정치학>에서 이러한 정체성이 최근 정치변동을 독해할 ‘마스터 개념’이라고 파악한다. 종교, 인종, 민족, 그리고 젠더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들이 훼손되는 현실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정체성 정치가 기성 근대정치를 대체하고 있다.
요컨대, 위험사회에 맞선 안전사회에 대한 요구, 가속화하는 정보혁명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정체성 정치의 부상이 2010년대를 이뤄온 서구적 풍경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런 서구적 현실과 한국적 현실 사이의 거리다. 지난해 우리나라가 ‘2030클럽’에 가입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서구사회와 한국사회 간의 사회구조적 차이는 이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지구적 보편성 아래서 불안사회, 정보혁명, 정체성 정치의 한국적 특수성이 표출되고 있는 게 2019년 우리 사회의 현재일 것이다.
이제 머잖아 열릴 2020년대에는 우리 삶을 둘러싸고 규정하는 변화의 속도가 더욱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배가하는 속도 안에서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공존하는 가운데, 과거에 대해 애틋한 향수를 품는 레트로토피아도 펼치질 것이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공상과학(SF) 소설가 윌리엄 깁슨의 말이다. 불확실하고 질주하는 미래를 두려워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선 자리와 갈 길을 학습하고 그 지도를 그려보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마땅한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경향 2019 4.30
10% 사회, 1% 사회
“분당구 주민이 바로 옆의 중원구 주민보다 건강수명이 10년 깁니다. 폭염 시기 분당구의 기온이 중원구보다 3도 낮고요. 공원녹지가 많아서 그런 것이지요.” 지난 주말 열린 ‘KSPS-가천대 한국불평등연구랩’의 출범 기념 세미나에 참석한 은수미 성남시장이 털어놓은 이야기다.
얼마 전 홍민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공개한 불평등 실태가 떠올랐다. 우리 사회 소득 상위 10% 집단이 벌어들인 소득이 20살 이상 개인 소득의 50%를 넘는다는 내용이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이 비중은 치솟기만 했다. 지난 15년여 동안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 발전국가 중 상위 10%의 몫이 가장 큰 나라였다.
상위 10% 집단 중 상당수는 지난 20여년 동안 새롭게 등장한 고연봉 직장인, 즉 월급부자였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당시 대규모 구조조정 뒤 되살아나는 대기업에서 억대 연봉 직장인이 대거 나타나기 시작했고, 공기업과 공공기관의 보수가 눈에 띄게 높아졌으며, 노동조합이 강력한 대기업 제조업 대공장에서 고소득 노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기도 성남시 이웃 구 사이 삶의 격차는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결과다. 편중된 소득이 쌓이면서 삶의 질 전반으로 확장되며 고착된 것이다. 분당 신도시에 터를 잡은 중산층 중 상당수가 한국 사회 소득 상위 10%에 해당하는 고소득 직장인과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그들이 가져가는 소득은 십수년 동안 고공행진을 펼쳤다. 뒤따라가지 못하는 중소기업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과 서비스업 종사자들 다수는 뒤처져만 갔다.
소득이 쏠리면 힘도 쏠린다. 힘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공원도 생기고 좋은 병원과 학교도 들어선다. 당연히 그들의 부모들은 더 좋은 돌봄을 받고 그들의 자녀들은 더 나은 교육을 받게 된다.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살고 더 잘 살게 된다. 옆 동네 사회 인프라는 뒤처진다. 이렇게 소득편중이라는 경제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적 경로를 거쳐 거스를 수 없는 사회문화적 격차로 귀결된다.
그런데 2010년께부터 양상이 바뀌었다. 상위 10% 집단의 상승세는 꺾였다. 그러나 최상위 1% 집단이 가져가는 소득 비중은 쉼없이 높아지고 있다. 이제 소득은 최상위 1% 집단에 집중된다. 10%와 1%는 다르다. 2010년 이후 부상하고 있는 최상위 1%는 상당수가 사업가이거나 대주주 또는 자산가다. 이제 재산소득과 사업소득이 격차 확대의 핵심이다. 그중 금융소득만 봐도, 최상위 0.1%가 전체의 3분의 1을 가져간다. 버는 사람이 갖게 되던 10% 월급부자 시대가, 가진 사람이 더 갖게 되는 1% 자산가 시대로 바뀌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예언한 대로다.
우울하게도 이런 흐름은 겨우 시작일 뿐이다. 우리가 무서울 정도로 따라잡고 있는 미국의 불평등 양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은 최상위 1%가 전체 소득의 20%를 가져가는 사회다. 최고경영자와 보통 직장인 사이의 보수 차이는 300배에 이른다. 우리 사회는 바로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 같다. 우리는 미국이 40년 달려온 격차 확대의 길을 20년 달렸을 뿐인데, 이미 상위 10%의 소득집중도에서 미국을 추월했다. 곧 최상위 1%가 미국을 따라잡을 기세다.
점점 집중되는 재산소득을 봐도, 확대되는 경영자-직원 보수격차를 봐도, 불안정노동을 키우는 기술변화 양상을 봐도 그럴 가능성은 차고 넘친다. 로봇이 지배하는 사회가 문제가 아니고, 1%가 로봇 전부를 지배하는 사회가 문제다. 불로소득이 생기는 사회 자체가 문제가 아니며, 1%가 불로소득 대부분을 가져가는 사회가 문제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 1%의 사회로 다가가고 있다. 그 뒤는 0.1%로, 0.01%로 좁아지게 될지도 모른다. 정치권력도 사회문화적 주도권도 그런 소득 흐름을 따라갈 것이다.
10% 사회가 분당과 중원 사이에 10년만큼의 건강수명 차이와 3도만큼의 더위 차를 가져왔다면, 1% 사회가 어떤 격차를 가져올지는 떠올리기조차 두렵다. 주말 세미나에서 최정표 한국개발연구원장은 “기득권의 성이 너무나 단단하다. 불평등은 이미 구조적으로 고착화되었다”고 탄식했다. 문재인 정부 최고 싱크탱크 수장이 탄식하는 중에도, 그 성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심지어 좁아지기까지 하고 있다. 이 물길을 바꾸기 위해 근본적으로 다른 분배 방법을 생각하고 행동할 때다./ 이원재 LAB2050 대표 한겨레 2019. 4.30
늙은 국회, 늙은 정부
86세대의 세대교체론은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8·25 전당대회에서 끝을 봤다. 86그룹의 대표주자인 송영길 의원은 세대교체를 핵심 기치로 내세웠으나 실패했다. 경쟁 후보(이해찬·김진표)에 비해 ‘덜 꼰대’라는 걸 부각하는 것 이상의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미 정치의 중심을 차지했고, ‘686’ 진입을 앞둔 86세대가 세대교체 기수를 자처하는 것부터가 애초 성립되지 않는다.
86세대의 상징 인물인 이인영 의원이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에 나서면서 ‘세대혁신’을 주창하며 ‘미래세대와의 연대’를 그 길로 제시했다. 20년 넘게 정치적 주류 지위를 누리면서 이제는 세대교체의 대상으로까지 지목되는 86세대의 자기응시와 문제의식을 담고 있기에 그대로 옮긴다. “세대혁신을 촉진하겠다. 진보는 꼰대, 보수는 꼴통이라는 낡은 이미지에서 먼저 벗어나겠다. 아버지를 한국인으로 둔 프랑스의 새 디지털경제장관 세드리크 오의 나이는 38살이다. 그린 뉴딜을 주창한 미 연방 여성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의 나이는 30살이다. 평화정치, 복지정치를 넘어서 디지털 정치, 녹색정치에서 미래세대와 연대해야 한다. 산업화 민주화 세대를 넘어 더 늦기 전에 미래세대에게 더 많은 전략적 거점을 내어주고 우리당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심어야 한다.”
86세대가 “아랫세대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오랫동안 세대교체를 점유하면서 빚어낸 결과가 ‘늙은’ 국회다. 2020년 임기 마지막 해가 되면 20대 국회의원의 평균 연령은 59.5살에 달한다. 평균 연령보다 심각한 것은 세대 다양성이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국회의원 절반 이상이 86세대다. 국제의회연맹이 기준으로 삼는 45세 미만 ‘청년 의원’ 비율이 6.33%로 세계 150개국 중에서 143등이다(시민단체 ‘국회를 바꾸는 사람들’ 자료). 청년 대표성 측면에서 세계 최악의 국회다.
노무현 정부의 486이 그대로 586이 되어 중심으로 돌아온 까닭에 문재인 정부도 늙었다. 유신시대 인물을 중용한 박근혜 정부의 기저효과 때문에 상대적으로 젊게 포장될 뿐이다. 초대 내각의 평균 연령은 노무현 정부 52.2세, 박근혜 정부 59.1세, 문재인 정부 61.5세이다. 문재인 정부 2기 내각도 60살이 넘는다. 86세대가 나이먹은 만큼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내각 나이가 벌어진 셈이다. 생물학적 나이가 변화를 가름하는 건 아니지만, 세대적 다양성마저 없다는 게 정부를 ‘꼰대’로 보이게 만든다. 집권 3년차가 되도록 40대 장관을 볼 수가 없다. 52개 중앙행정기관으로 확대해도 40대 기관장은 없다.
세대 스펙트럼은 의사결정 시 다양성에 큰 차이를 보인다. 미래 도전에 대처하는 데도 달라진다. 노무현 정부 초대 내각에서 김두관(행정자치부), 강금실(법무부), 이창동(문화관광부) 등 40대 장관들은 변화를 대변했다. 1995년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고용보험제도를 도입하는 데는 40대 노동부 장관(이인제)이 있었다. 2006년 정권의 명운을 걸어도 어렵다는 ‘연금 개혁’을 이뤄낼 때도 40대 보건복지부 장관(유시민)이 있었다.
정치와 국정의 책임자들이 노령화되는 동시에 다수 유권자인 노령층의 이해관계가 정책 우위에 서면 ‘제론토크라시(고령자 지배체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19대 국회에서 65세 이상 노인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법안은 청년 법안보다 4배 이상 많았다. 2015년 ‘공무원연금 개혁’은 미래세대의 희생 속에서 이뤄졌다. 베이비붐 세대가 60대에 진입하면서 ‘제론토크라시’가 태동하리란 우울한 전망이 현실로 어른거리고 있다.
국회도, 정부도 젊어져야 한다. 내년 총선에서는 86세대를 포함한 혁명적 물갈이가 이뤄져야 하고, 정부 요직에도 미래세대의 참여가 늘어야 한다. ‘운동’의 단일 유전자를 깨는 길이기도 하다. OECD 36개국 중 15개국 정상의 연령이 30~40대다. 한국은 장관과 청와대 수석 중에 30대는커녕 40대도 없다.
더 이상 젊지 않아서가 아니라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는 세대적 한계가 있다. 86세대도 예외는 아니다. 평화·복지 등을 넘어 디지털과 녹색정치, 미래세대가 중요시하는 문제에는 둘레가 쳐질 수밖에 없다. 실업과 저출산 등 청년 문제를 그들 눈높이에서 접근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이인영 의원의 출사표를 빌리면, “더 늦기 전에 미래세대에게 더 많은 전략적 거점을 내어주어 미래를 심어야 한다”.
2015년 정권교체로 43세에 총리에 오른 캐나다 저스틴 트뤼도 총리는 30살의 최연소 장관 등이 포함된 남녀 동수의 파격적인 내각을 출범시킨 뒤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트뤼도 총리의 답변은 강렬했다. “지금은 2015년이기 때문에.” 그렇다. “지금은 2019년, 2020년이기 때문에” 늙은 정부, 늙은 국회를 바꿔야 한다.
양권모 논설위원 경향 2019 4.29
‘조선일보 방 사장’ 일가의 패륜, 한국 언론의 수치②
방 사장’ 일가 비호 의혹을 벗으려면 검경 스스로 수상쩍은 돈의 흐름을 추적하고 초기 부실수사 경위도 제대로 밝혀야 한다. 언론이 그 영향력을 권력처럼 휘두르면 ‘언론권력’이 된다. 사주 일가의 행적뿐 아니라 최근 <조선일보> 지면에서도 그런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
지난번 칼럼(4월9일치 ‘‘조선일보 방 사장’ 일가의 패륜, 한국 언론의 수치’)에 4천개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방 사장 일가를 비판하고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주문들 속에 ‘늦었네요 이런 기사…더욱 분발하시기 바랍니다’(ohje****) 등 몇몇 댓글이 눈길을 끌었다. <한겨레>를 포함한 언론들이 언론계 내부 문제에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 왔는지 따져 묻는 취지다. 최근 다시 불거진 두 여성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은 수사기관뿐 아니라 진실을 제때 파헤치지 못한 언론에도 똑같은 책임을 묻고 있다.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사장의 아내 고 이미란씨 친언니 집 앞에서 찍힌 2016년11월1일 시시티브이 영상. 뒷쪽이 방 사장. <PD수첩> 제공
‘조선일보 방용훈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이미란씨는 2016년 9월 차 안 블랙박스에 이 말을 남기고 한강에 몸을 던졌다. 조선일보사 대주주(지분 10.57%)인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사장의 부인이었다. 이씨의 형부 김영수씨는 지난달 방송에 나와 방용훈 사장 일가를 비호해온 경찰의 행태를 폭로했다. 등산용 도끼를 든 채 대문 앞 물건을 발로 걷어차는 모습이 시시티브이에 고스란히 담겼는데도 방 사장을 무혐의 처리한 게 경찰이다. 검찰 역시 이씨 친정 식구들의 이의신청으로 ‘다시 수사하라’는 고검의 명령을 받고서야 약식기소로 처벌하는 시늉을 했다. 김씨 주장 가운데 주목할 대목은 방 사장 스스로 캐나다에서 소송 중이라고 밝힌 ‘50억원’의 정체다. 김씨는 이 돈과 연관된 상당히 많은 캐나다와 미국 계좌들의 운영 상황과 자금 흐름에 대해 “수상한 게 많다”며 수사 필요성을 제기했다. 방 사장 일가 비호 의혹을 벗으려면 이제라도 검경 스스로 수상쩍은 돈의 흐름을 추적하고 초기 무혐의 처리 경위도 제대로 밝혀야 한다.
10년 전 장자연씨는 죽음으로써 성착취 가해자들을 고발했는데 검경은 ‘조선일보 방 사장’과 ‘아들’을 처벌하기는커녕 누군지조차 밝히지 않았다. 검찰은 엉뚱하게 진상규명을 요구한 국회의원 둘과 시민단체 인사 3명, 연예기획사 관계자 등 모두 7명을 줄줄이 법정에 세웠다. 조선일보사 앞에서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한 시민단체 간부들에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까지 적용했다. 집시법 위반자 1명에게 벌금 30만원 선고된 것 빼고는 모두 무죄 또는 면책을 받았다. 검찰과거사위원회가 다음달 재조사 결과를 공개한다. 경찰 수사책임자가 느꼈다는 ‘심각한 위협’이 검찰 단계에선 없었을까. ‘방 사장’ ‘아들’의 실체와 함께 본말이 뒤집힌 적반하장 수사의 전말도 이제는 밝혀져야 한다.
언론이 그 영향력을 권력처럼 휘두르면 ‘언론권력’이 된다. 사주 일가의 행적뿐 아니라 최근 <조선일보> 지면에서도 그런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
국회 패스트트랙 국면에 쓴 ‘…선거법 날치기, 군사정부도 이러진 않았다’(4월26일치)라는 사설과 관련 보도가 압권이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지명한 유정회나 정치 규제로 아예 출마를 봉쇄한 흑역사를 빼놓은 채 군사정권과 이번 사안을 단순 비교한 상상력이 우선 놀랍다. 폴리스라인 넘자마자 의원 체포하는 미국 경찰 사례까지 거론하며 국회에서의 가벼운 충돌에도 맹비난을 퍼붓더니 이번엔 태도를 180도 바꿨다. 회의 방해죄에 형사처벌까지 규정한 국회선진화법을 대놓고 위반하면서 폭력을 행사한 자유한국당은 제쳐놓고 다른 정당들만 비난하고 나섰다. 정당 지지율과 국회 의석 사이의 괴리를 줄이는 등 긍정효과는 외면한 채 한국당에만 불리한 것처럼 왜곡했다. <문화방송> ‘피디수첩’과 인터뷰에 나섰던 조현오 전 경찰청장의 전언처럼 조선일보가 ‘정권 창출에 나선 것’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다.
100년이 돼가는 이 언론사가 역사의 굽이마다 보여온 문제적 보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일제하 친일보도뿐 아니라 불과 30여년 전 사주는 신군부 반란세력의 꼭두각시 조직에 참여해 쿠데타를 정당화했다. 신문은 ‘나보다 국가’를 앞세운다며 ‘인간 전두환’을 미화했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조선일보가 ‘1980년 국민들의 민주화 기대가 커갈 때는 ‘3김’을 퇴진해야 할 세력, 신군부를 새 정치세력으로 의미부여하고 1987년 변화를 바라는 대중적 욕구가 폭발하던 시기엔 초점을 지역주의로 돌려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담론을 조직화했다’(<만들어진 현실>)고 평했다. 군사정권과는 권언유착을 하다 민주개혁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원색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현 정부 들어서도 주요 사안마다 언론으로서의 권력 감시와 비판 수준을 넘어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며 과도한 비판을 가해왔다.
이런 언론이 ‘1등’을 내세우는 현실은 한국 언론의 수치다. 이씨에 이어 언론과 수사기관마저 ‘조선일보 방 사장 일가를 어떻게 이기겠냐’며 무릎 꿇는다면 국가적 수치가 되고 말 것이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한겨레 2019 4.29
기레기’보다 나쁜 기자들
꽤 오래전 이야기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신문 사설을 모아 분석한 적이 있었다. 큰 사건의 생일이 돌아오면 많은 신문들은 그 사건의 의의를 되새기는 사설을 싣곤 한다. 시간이 지나고 정치적 사회적 환경이 바뀜에 따라 같은 사건을 달리 보는 경우도 생길 것이라는 가정으로 분석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구 과정에서 놀랄 만한 일을 경험했다. 어떤 사건에 대한 1주년 기념 사설과 2주년 기념 사설이 80% 이상 똑같은 경우를 발견한 것이다. 자기네 신문 사설을 표절한 것이다. 이름 없는 온라인 매체도 아니었다. 역사도 오래되고 규모도 큰 메이저 신문사 중 하나였다. 사람들이 사설을 찾아 비교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하긴 이 사건은 일개 대학원생이던 나만 알고 그냥 넘어갔으니 그 신문사 사람들의 판단(기대)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던 셈이다.
얼마 전 중앙일보가 외신을 베낀 사내 칼럼을 실었다가 들켜서 사과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표절이었다. 문제는 들키지 않은 기자의 ‘부정행위’가 수도 없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취재 중 알게 된 중요하고 흥미로운 정보는 출처를 밝히지 않고, 길 가던 장삼이사에게 물어봐도 들을 수 있는 뻔한 정보는 굳이 모 대학 모 교수 이름을 걸어 기사화한다. 통신사 기사의 토씨 몇 개만 바꿔 자사 기자 이름을 붙이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타 매체의 단독보도를 인용부호 하나 없이 기사화하는 경우는 일일이 지적하기도 어려울 만큼 잦다. 뉴스타파의 특종을 베껴 쓰면서 “한 인터넷 매체에 의하면”이라며 슬그머니 넘어간 신문사도 하나둘이 아니다. 타 언론사의 이름을 쓰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능력 있는 다수의 기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은 적은 없다. 살아오는 동안, 늘 공부하고 늘 고민하는, 정말 존경스러운 ‘전문인’ 저널리스트를 무수히 많이 만났다. 크게 표나지 않을 뿐이다. 잘 쓴 기사는 오보나 표절 기사만큼 눈에 띄지도 인구에 회자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기레기’라는 말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특정 직업을 쓰레기에 비유하는 작법도 저질스럽거니와, 다수의 훌륭한 저널리스트까지 한데 묶어 단어 하나로 모욕하는 세태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다. 기자 중 쓰레기가 왜 없겠는가. 하지만 ‘기레기’라는 단어로 퉁치지는 말자. 그냥 자기 생각과 다른 내용이라고 멀쩡한 기사와 기자를 매도하지는 말자는 거다. 그렇게 조롱하면 잠시 기분이 우쭐해지는 것 말고 무슨 효용이 있겠는가? 대신 독자로서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집단으로서의 기자를 욕하는 대신 기자 개인을 분명하게 적시해서 칭찬하거나 비판하는 일이다. 관습에 젖어 실수하는 다수로부터 ‘악한’ 기자를 구분해 내는 일이다. 표절은 관습이 아니다. 이런 기레기들, 하면서 냉소하기보다는 해외 언론 베껴서 자신의 실명 칼럼을 쓴 기자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소설 같은 기사 때문에 심한 상처를 입은 한 학생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언론중재위원회로부터 오보를 정정하고 해당 학생에게 사과하는 내용의 기자칼럼을 내라는 조정안을 받았는데, 정작 그 신문사는 문화부장의 칼럼을 통해 그 학생을 더 심하게 모욕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신문사 사람들과는 말도 섞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내 소속 직장의 명예를 떨어트릴 수도 있는 기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연락해온 기자가 있었다. 어디에서인가 입수했다는 정보가 워낙 엉터리이길래 성실하게 정정 자료를 준비했지만, 그 언론사는 우리 자료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기사화하지 않을 테니 광고 지면을 사거나 협찬하라는 메시지만 반복했다. 이런 기자나 언론사가 ‘악’이다.
‘기레기’건 ‘검새’건, 특정 집단을 욕하고 조롱하면 진짜 ‘악’은 집단 안에 숨어든다. 성실하고 선한 기자들이 부당한 욕을 먹는 동안 진짜 ‘악’은 그들과 함께 짐짓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된다. ‘버닝썬’ 사건 관련자들을 희대의 패륜아 취급을 하며 기사를 쓰던 기자들이 정작 자신들도 불법 촬영물이나 성매매 업소 정보를 공유해왔다는 미디어 오늘의 보도가 나왔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해당 기자들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청원이 올라왔고, 참여 인원은 2만5000명을 넘어섰다. 또 기레기들이 어쩌고 하면서 냉소하고 말 것인가. 이들이 누구인지 밝혀내고 처벌해야 한다. 표절하고, 갑질하고, 성범죄를 저지르는 개별 ‘악’들을 기레기라는 이름으로 봐주지 말자. 다른 성실하고 능력 있는 기자들까지 힘 빠지는 일이 없도록./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경향 2019 4.28
대통령의 ‘밥값’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국가수반은 올해도 어김없이 싱가포르 총리다. 미국 일간 USA투데이의 조사(상위 20개국 공개)에 따르면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연봉은 161만달러(약 18억7000만원)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봉의 4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12배에 달했다. 리셴룽 총리 뒤는 홍콩 행정수반인 캐리 람 행정장관(56만8400달러), 스위스 윌리 마우러 대통령(48만3000달러), 트럼프 대통령(40만달러) 순으로 이었다. 2억2600만원의 연봉을 받는 문재인 대통령은 20위권 아래다. 국가수반의 연봉이 국력이나 경제규모와 비례하지는 않는 셈이다. 싱가포르 총리가 매년 연봉킹에 오르는 것은 리셴륭 총리의 아버지 리관유 전 총리가 마련한 독특한 급여체계 덕이다. 1994년 리관유 당시 총리는 각료의 연봉을 은행원·변호사·회계사 등 8개 전문직 평균 급여의 3분의 2가 되도록 정했다. 여기에다 연간 경제성장률이 8% 이상 오르면 연봉의 4개월치를 보너스로 받는 성과급도 도입했다. 일하는 정부, 부패 없는 정부를 추동하자는 취지였다. 싱가포르가 모범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아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정부로 평가받는 한, 국가수반의 ‘최고 연봉’은 시빗거리가 되지 않을 터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봉은 미국 주요 기업 CEO 평균 연봉의 3% 수준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연봉(36만9727달러)은 축구스타 리오넬 메시 연봉의 0.3%에 그친다. 모리타니의 압델 아지즈 대통령 연봉은 33만달러, GDP(국내총생산)가 모리타니의 2400배에 달하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 연봉은 그 10분의 1에도 못미친다. 이번 집계에서는 빠진 터키의 ‘술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연봉이 무려 646억원에 달한다.
국가수반이라는 최고 ‘권좌’의 명예와 책임의 무게를 연봉액수로만 견준다는 건 턱없다. ‘사람은 밥값을 하고 소는 꼴값을 해야 한다’를 차용한다면, 연봉의 다과가 아니라 ‘국가 지도자로서 모름지기 밥값’을 하는지가 관건이다. 밥값 못하는 지도자에 대한 주권자의 분노와 자괴가 ‘박근혜 탄핵’을 불렀다. 만고의 진리다. 실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 평안히 잘살게 해준다면 대통령 연봉이 아무리 많은들 문제되겠는가. /양권모 논설실장 / 경향 2019 4.28
세월호 보도를 사과하지 않은 언론들
지만원이란 인간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어느 시대나 극악한 인간은 있었다. 그런 인간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궁금해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비극을 겪은 힘든 사람들을 모욕하며 살아가는 지만원이란 인간이 어떻게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지게 됐는지를 질문하고 싶다.
5·18은 역사적·정치적 평가가 끝난 사안이다. 명칭서부터 그 평가가 드러난다. 사건 초반 5·18을 부르는 주된 명칭은 ‘광주사태’였으나, 이젠 정부 문서에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표기된다. 어느 사안이나 다양한 생각이 있을 수 있으나 확정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비극의 희생자와 피해자의 명예를 존중해야 한다. 이런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이 국회와 정치권에 불려 다니며 연사로 나서는 까닭은 아직은 우리 사회가 ‘그래도 되는 곳’이기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 사회를 ‘그래도 되는 곳’으로 만들었을까. 개인적으론 ‘5.18 보도를 사과하지 않은 언론’이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 5주기를 맞아 5·18 광주를 다시 떠올리는 이유가 있다. 언론에게 세월호란 그냥 재난이 아니었다. 보도도 ‘참사’ 수준이란 평가를 받았다. ‘기레기’라는 용어가 대중화되고, 언론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게 된 기점이기도 했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재난의 희생자, 유가족들을 모욕하는 시선도 상당했고, 그런 여론을 만드는 데 언론의 의도적인 보도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직 세월호 보도를 제대로 사과하는 언론이 드물다. 공영방송인 KBS, MBC가 지난해 드물게 ‘보도 참사’를 사과했고, 채널A 기자였던 이명선 셜록 기자가 최근 KBS 저널리즘토크쇼J에 출연해 육성으로 당시 보도를 사과했다. 하지만 여전히 참사 수준의 보도를 내놓았던 언론사들 대부분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언론이 사과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일단 언론의 취재 행태부터 사과해야 한다. 많은 언론인들이 정부나 공공기관의 발표를 기정사실인 것처럼 보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습관이 누적돼 ‘세월호 승객 전원구조’라는 대형 오보를 만들어냈다. 사고 해역에서는 거센 조류로 구조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는데도 ‘사상 최대의 구조 작전’이나 ‘구조 장비 총동원’ 등의 보도가 적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일 행적이나, 정부 조치 등도 그저 발표한 대로 보도하곤 했다. 이런 보도들 모두 사실을 확인하기 보단 받아쓰는 행태가 만들어 낸 부끄러운 결과물이다.
세월호 참사는 기자들이 습관적으로 묻던 “심경이 어떻습니까”란 질문을 다시 보는 계기도 마련했다. 재난으로 가족, 친구를 잃은 사람들을 향해 기자들은 ‘심경’을 묻고, ‘사연’을 구했다. 당사자 마음을 배려하지 않는 취재 방식이었다. JTBC가 세월호 보도 초기에 ‘심경’을 묻는 실수를 했으나 신속하게 사과한 유일한 언론사였다.
취재 행태에서 비롯한 잘못보다 중한 것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영합해 세월호의 진실을 찾는 조사를 방해하고, 유가족들을 ‘이상한 사람’들로 딱지를 붙이는 보도였다. 5년 전 이맘때부터 두 달여간 보수언론과 종편 등은 구원파, 청해진해운을 향한 토끼몰이식 수사를 보도하는 데 골몰했다. 이명선 기자가 반성한대로 유병언 아들이 모텔에서 무엇을 먹었는지를 왜 보도해야 했는가. 돌이켜보면 청해진해운은 세월호 참사를 만든 수많은 적폐의 일부에 불과했고, 당시 그곳을 향한 수사는 대중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는 데만 성공했을 뿐이다. 언론은 무엇을 좇아야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고 신중했어야 했다.
유가족이 받게 될 보상금을 부각하는 보도, 세월호 특별법 통과를 주장하며 단식하던 ‘유민아빠’ 김영오씨를 향한 왜곡 보도도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이런 보도들은 유가족들을 모욕하는 가짜뉴스와 찌라시의 재료 노릇을 톡톡히 했다. 가장 악질적인 보도가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세월호 참사가 있고 보름 뒤 2003년에 발생한 대구지하철화재 유가족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유가족이 한 말이 기억난다.
“지금이야 모두가 세월호를 추모하며 가족들을 위로한다고 하죠. 그런데 조금만 지나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세요. 우리처럼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되기 쉬워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자리에서 “설마 그럴리가요”라고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고, 믿지도 않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분 예언은 정확했다. 세월호 이후에도 피해자를 모욕하는 세상을 벗어나는 건 언론의 진정한 반성, 사과에 달렸다./ 윤형중 LAB2050 연구원 미디어오늘 2019 4.27
봄 가뭄에 멍드는 하천생태계
유난히 많았던 올봄 산불은 지난 겨울 비가 안온 탓이 크다. 올 들어 강수량은 평년 대비 73.2%에 불과하다. 지금쯤 봄 가뭄으로 전국이 떠들썩해야 한다. 백년 주기의 한반도 대가뭄이 시작되었다는 경고가 나올 법도 하다. 관계 부처 합동으로 비상 가뭄대책이 발표되어야 할 때 쯤이 되었다. 그런데 너무 조용하다. 왜 그럴까?
기상현상만 보면 가뭄이 분명하지만, 댐과 농업용 저수지엔 예년 이상의 넉넉한 물이 확보되어 있다. 다목적댐 저수율은 60%에 달해 예년에 비해 141%의 물을 확보하고 있다. 농업용 저수지 저수율도 83%로 예년보다 12%나 높다. 겨울 가뭄이 극심했는데도 포항, 곡성, 영동과 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농번기 물 공급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
물 공급을 담당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물 관리 일원화로 댐과 농업용 저수지를 통합 관리한 효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4대강 사업의 성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우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이번 봄은 가뭄 소동 없이 넘어갈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다.
그렇다면 올 봄 가뭄에도 물 걱정을 안하게 된 이유는 뭘까?
기후변화로 강우 패턴이 변화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작년에 평균강수량은 줄었지만, 올해 물 공급을 위해 댐과 저수지를 채워야 할 시기에 적절하게 비가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비가 오더라도 이를 담아 둘 물그릇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댐과 저수지의 저수용량만 따지면 50년에 한번 오는 큰 가뭄에도 아무 문제 없이 공급할 정도로 넉넉하다. 최근 몇 년 동안의 우리나라 강우 패턴은 뚜렷한 특징이 있다. 먼저 장마가 사라지고, 여름철 호우가 줄었다. 큰 태풍도 몇 년째 우리나라를 피해가고 있다. 다음으로는 가을과 겨울의 강수량이 늘었다. 통상 가을과 겨울은 비가 덜 오던 시기였다.
홍수와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줄었고, 갈수기에 비가 늘었으니 최근에 우리가 기후변화의 혜택을 보고 있다고 해야 할까? 생공용수와 관개용수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하천 상태를 보면 그렇지 않다. 4대 강의 생태환경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 특히 하천 습지생태계가 위태롭다. 습지가 육지로 변해버리는 육화현상이 4대강 전체에서 뚜렷하다. 하천 습지 생태계는 비가 많이 오는 시기에 물에 잠겼다가 갈수기에는 다시 드러나야 정상이다. 알을 낳을 때와 성장할 때에 맞추어서 동식물들에게 적절한 서식처를 제공해야 한다. 수천년 동안 자연적으로 반복되던 풍수기와 갈수기의 하천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하천의 생태환경과 동식물들이 적응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하천 흐름의 다양한 변화가 사라지고 있다.
하천유황이 사라진 것은 비단 기후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댐과 저수지를 너무 많이 건설해서 하천을 호소화시킨 탓도 크다. 비가 적게 내렸는데, 물그릇을 대부분 채워버리면, 하천 하류에 문제가 생긴다. 하천 하류는 상류에서 흘러오는 물보다 하수처리장에서 내보내는 방류수가 대부분 흐르게 된다. 최근 들어 4대강 하류에서 기형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하천 생태계를 살리기 위해 댐과 저수지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 댐이 하천의 자연 흐름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기별로 댐의 방류량을 조정하여 인공홍수도 일으키고, 수위를 낮추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사람들의 양보가 필요하다. 수면을 이용해서 레크리에이션을 하거나 수력발전을 하는 경우에 불편함을 겪거나 손실을 보기도 한다. 인간의 이용과 하천 생태계의 보존 사이에서 일정한 타협이 필요하다. 인간의 이용과 자연환경의 보전 사이에 어느 정도의 선을 그을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천 생태환경을 살리는 것이 장기적으로 인간에게도 유리하다는 것이다.
최동진 국토환경연구원 대표 gksrnr2019.4.24
상속세가 ‘기업가 정신’ 죽인다는 헛소리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자녀들의 상속세 문제를 계기로 보수언론, 경총과 전경련 등 일부 경제단체, 자유한국당이 상속세를 폐지하거나 세율을 대폭 낮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상속세가 ‘기업가 정신’을 죽여 기업주들이 기업을 팔거나 외국으로 떠나 일자리가 없어지고 국가경제가 망가진다는 것이다. 쓰는 말도 ‘약탈적 상속세’니 ‘징벌적 상속세’니 매우 선동적이다. 한마디로 견강부회고 침소봉대다.
기업가 정신은 새로운 사업이나 시장을 개척하고 기술 개발과 조직 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도전 정신이다.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 그중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하면 더없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상속세를 내지 않고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게 기업가 정신이라니, 어처구니없다.
보수언론은 대부분 익명의 기업인 사례를 전하고 있고, 몇몇 실명으로 거론한 기업의 경우도 복합적인 이유에서 매각됐는데 상속세 탓으로만 몰아간다. 사실 왜곡이다. 또 기업이 팔리면 최대주주가 바뀌는 것일 뿐 일자리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얘기가 안 된다.
부모가 기업을 경영하면서 법인세와 소득세를 냈는데 자녀에게 상속세를 물리는 것은 ‘이중과세’라는 주장도 궤변이다. 부모가 낸 세금은 회사를 창업하고 키우는 과정에서 납부한 것이다. 자녀가 상속을 받아 새 재산이 생겼으면 세금을 내는 건 당연하다.
우리나라의 상속세율이 높은 건 사실이다. 최고세율이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가운데 벨기에(80%), 프랑스(60%), 일본(55%) 다음으로 높다. 최대주주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반영해 최대 30%의 할증이 붙어 최고세율이 65%로 높아진다. 또 35개 회원국 중 11개 국가가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상속세를 폐지했다. 이 중 스웨덴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자본소득세로 대체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기초공제와 인적공제 등 각종 공제가 많아 상속세 실효세율이 뚝 떨어진다. 통계청과 국세청 자료를 보면, 2017년 사망자는 28만6천명이고 배우자와 자녀 등이 상속세를 낸 피상속인은 6986명이다. 2.4%에 불과하다. 이들이 물려준 상속 재산은 총 14조1천억원, 상속세는 2조4천억원이다. 실효세율이 17%다. 상속 재산이 100억원을 넘는 155명으로 좁혀 봐도, 총 상속 재산이 4조3천억원, 상속세는 1조4천억원으로 실효세율이 32.6%다. 각종 공제로 과표가 상속 재산에 비해 대폭 줄어들어 실효세율도 크게 낮아지는 것이다.
재벌 그룹은 더하다.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의 조양호 회장 지분(17.5%)을 자녀들이 물려받으면 상속세가 2천억원 정도 될 것으로 추산된다. 2천억원을 한꺼번에 다 내야 하는 건 아니다. 상속세가 2천만원을 넘으면 5년에 걸쳐 나눠 내는 ‘연부연납’이 가능하다. 조 회장 자녀들은 5년 동안 매년 400억원의 상속세를 내고 30개 계열사를 둔 연매출 16조5천억원의 한진그룹을 물려받는다. 총수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거대 그룹을 장악하는 한국 재벌의 순환출자 구조 때문이다. 만약 상속세를 내기 위해 조 회장 자녀들이 지분을 매각하면 국민연금이 행동주의 펀드인 ‘강성부 펀드’와 손을 잡고 경영권을 뺏을 수 있다는 보수언론의 억측은 상속세 폐지 주장을 확산시키려는 ‘공포 마케팅’으로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
상속세 폐지 주장의 본질은 세금 없이 부를 대물림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세금을 많이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상속세를 내기 싫으니 폐지하라’고 요구하는 게 솔직하다. 기업가 정신이니 일자리 창출이니 거창한 말을 억지로 갖다 붙이면 실없는 얘기로 들릴 뿐이다.
상속세가 어느 수준이면 적정한가는 정답이 없다. 나라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자산 불평등이 심각하다. 특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의 격차가 불평등의 출발선이 된다. 기업성과 평가 사이트인 시이오(CEO)스코어 자료를 보면, 한·미·중·일 4개국의 2017년 기준 부자 상위 200명 중 ‘자수성가형 부자’의 비중이 평균 67%로 상속형(33%)의 2배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만 상속형이 62%로 자수성가형(38%)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세계 최고 수준의 ‘부의 대물림’을 놔둔 채 상속세를 건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 요즘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혁신 경제’는 요원한 일이 돼버린다.
정말 딱한 것은 민주당이다. 태스크포스(TF)까지 만들어 “가업상속공제 대상 기업을 연매출 3천억원 미만에서 1조원으로 확대하고 공제 한도도 최대 500억원에서 1천억원으로 늘리자”고 주장한다. 자유한국당은 원래 그렇다손 치더라도 중산·서민층을 대변한다는 정당이 ‘조세 정의’를 강화하기는커녕 ‘부자 감세’를 주장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jsahn@hani.co.kr / 안재승 논설위원 한겨레19.4.23
‘차명진들’
세월호 참사는 전 국민적 트라우마다. 아니, 그랬었다. 아픈 기억을 떠올리기 싫은 게 인간의 본능이다. 더구나 참사가 발생한 지 5년, 시간이 기억과 다짐을 부식시켜왔다. 그날의 충격과 분노는 갈수록 희미해지고 생업의 무거움은 핑계가 된다. 그 틈을 타고 가해자들이 날뛴다. 진실을 왜곡하고 유가족을 비방·조롱한다. 시민의 공감을 희석시키고 피해자 집단을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이 시도를 막아야 한다. 안 그러면 또 다른 국가 권력의 피해자들이 진영 논리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될 것이다.
차명진 전 자유한국당 의원의 ‘세월호 망언’을 ‘인간이기를 포기한 일개인의 만행’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그의 뒤에는 공감 세력이 상당히 존재한다. 공개 지지 입장을 밝힌 홍준표 전 한국당 대표는 이런 ‘차명진들’ 중 한 명이다. 이 끝없는 질곡을 끊으려면 먼저 차명진의 논리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된다. 1. ‘(유가족들이) 자식 시체 팔아 생계 챙긴다.’ 어디서 들어본 듯하지 않은가. 맞다. 참사 직후 ‘김지하 시인의 세월호 비판’이란 이름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돌아다닌 글에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다. 물론 이게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하늘이 안다. 문제는 패륜적 발상이다. 홀아비, 미망인은 있어도 자식 잃은 부모는 호칭이 없다고 한다. 어떤 언어로도 그 고통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성을 내놓지 않고서야 이같이 모욕할 수 없을 터이다. “그들과 함께해야 하는 이 세상이 싫다.” 한 유가족의 소회가 가슴을 파고든다.
2. ‘세월호 사건과 아무 연관 없는 박근혜, 황교안에게 자식들 죽음에 대한 자기들 책임과 죄의식을 전가하려 하고 있다.’ 역시 왜곡과 모욕이 뒤섞인 언어폭력이다. 희생자들의 죽음이 유가족 책임이라니 언어도단이다. 더구나 박근혜, 황교안 두 사람은 세월호와 관련해 사과했다. 본인들도 인정하는 연관성을 차명진은 부정한다. 황교안의 방패 역할을 자청함으로써 내년 총선 공천과 관련해 눈도장을 받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러나 발언 파문이 증폭되면서 그는 다른 의미의 눈도장을 받게 됐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세월호 참사는 국가 범죄다.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박민규 시인)이다. 그럼에도 ‘교통사고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여객선이 침몰해 승객이 사망한 교통사고 맞지 않나’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이는 세월호가 기울기 이전까지 유효할 수 있다. 이후 박근혜 정권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국가의 의무를 단 1%도 이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재난을 재앙으로 끌고갔다. 만약 당시 정부가 제대로 대처했더라면 늦어도 8분 안에 다수를 구조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세월호는 100분 동안이나 물 위에 떠 있었으니 시간은 차고 넘쳤다. 이것만 해도 국가 범죄인데, 비난이 일자 박근혜 정권은 무능과 실패를 은폐하고자 사건을 정치적으로 분탕질했다. 정권의 친위세력과 특정 매체들은 거짓말과 선동을 통해 유가족과 희생자들을 모욕했다.
‘차명진들’이 다수 포진한 한국당은 재앙과 관련이 깊다. 포항 지진을 보자. 이명박 정권이 학계 반대에도 지열발전소를 짓고, 박근혜 정권은 학계 경고에도 뜨거운 물을 과다 주입해 재앙을 초래했다.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한국당은 의례적인 유감표명조차 내놓지 않았다. 그런 세력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모욕하고 있으니 이런 적반하장이 또 없다. “문재인 정부를 북적북적(북한과 적폐밖에 모른다는 뜻) 정부로 부르는 등 배배 꼬아 말짓기를 잘하는 ‘나경원 어법’대로라면 한국당은 ‘재앙 정당’쯤 되겠다.” 한 누리꾼의 비유가 통렬하다.
정신과 의사 주디스 허먼에 따르면 가해자는 은폐와 침묵을 시도한다. 은폐에 성공하지 못하면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 때에 따라 아무도 피해자의 말을 들을 수 없도록 언론을 통제하려 든다.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차명진들’의 행태와 놀랍도록 닮지 않았는가.
허먼이 말하는 가해자의 마지막 수법은 망각이다. 과거는 잊고 미래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주문인 셈이다.
하지만 가슴이 아파도 세월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안타까운 희생자들을 진정으로 추모하고, 유가족과 슬픔을 나누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책을 만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레테의 강(망각의 강)을 건너면 안된다. 적어도 가해자들이 조롱을 멈추고 진지하게 사과할 때까지는. 그리고 모든 시민이 안전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한국 사회가 쇄신될 때까지는. /조호연 논설주간 경향 19.4.23
부동산 소고
동베를린의 중심을 길게 지르는 카를 마르크스 거리가 있다. 전쟁으로 페허가 된 시가지가 복구되면서 시원스럽게 트인 거리의 양쪽에는 스탈린시대의 사회주의적 고전주의 건축양식을 따른 주상복합형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나도 이 거리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노동자의 궁전’이라고 불렸던, 중후한 감을 주는 이 아파트들은 동독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건축물의 하나였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바로 이 건물에 사는 주민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뛰는 월세에 항의해 창밖으로 ‘우리와 함께 항의하자! 투기에 반대하는 세입자행동’이라고 쓰여 있는 큰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이를 계기로 베를린은 물론 전국적으로 ‘지불할 수 있는 주거’를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3000가구 이상의 아파트를 소유한 대형 부동산업체의 아파트를 베를린시가 공용수용(公用收用)해 집세 상승을 멈추게 해야 한다는 요구조건을 내건 국민청원운동이 시작되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현재 54.8%의 베를린 시민이 이에 찬성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요구조건을 일각에서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지만 “재산권은 의무를 수반한다. 그의 행사는 동시에 공공복리에 이바지하여야 한다”는 독일의 ‘기본법’ 14조 2항을 들어 찬성하는 쪽에서는 위헌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2018년 초에 제안되었으나 무산된 문재인 정부의 헌법개정안에 등장했던 ‘토지의 공공성’을 둘러싼 논쟁도 비슷한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반대했던 쪽은 토지의 공개념을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과 연결시켜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또 토지공개념으로는 부동산 투기를 잡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위에 언급된 내용을 담고 있는 기본법 위에 서있는 독일은 사회주의국가인가? 철학자 하이데거는 ‘짓고, 살고, 생각하기’라는 강연에서 집을 짓는 것(Bauen)과 거주하는 것(Wohnen)은 본래 같은 어원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했다. 토지 위에 집을 짓고 그 속에 살기 마련인데 어떻게 이를 구별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조건 중 하나인 주거 문제는 농경사회 때와는 달리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무척 복잡해졌다. 또 각 나라의 역사적인 배경에 따라 사회성원 간에도 특이한 갈등을 낳는다. 이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전세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만 있기 때문에 외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임대 제도다. 영국에서는 주(週) 단위로 집세를 지불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밖의 나라에서는 한 달 단위의 월세가 보통이다. 물론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전세 들어 사는 사람은 목돈이 어느 정도 있기에 상대적인 안도감을 얻을 수 있고, 전세를 놓는 사람은 이를 재투자의 밑천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 투기 문제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갈등구조 속에는 분명히 이 전세 제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부동산시장의 장기적인 안정을 위해서라도 이 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과도한 인구집중과 전통적인 학력중심의 사고가 결합되어 낳은 학군(學群)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떠나서 주거 문제를 논의하기 힘들다. 학군이 집값을 올리고, 장관을 비롯한 정부 고위직에 지명되었으나 청문회에서 위장전입 문제로 낙마한 경우가 지금까지 한둘이 아니다. 해외로 이민 와서도 학군 문제는 여전히 초미의 관심사로 남는다. 10여년 전 뉴욕에 들렀을 때 한국 교포들이 이른바 학군이 좋다는 지역의 공립학교에 자녀들의 입학신청을 하기 위해 교문 앞에서 밤샘하는 모습도 보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나라든지 교육환경은 주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주거조건이 학교의 서열화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따라서 학교교육의 평준화를 어렵게 만드는 주거와 소득의 불평등을 장기적으로 해소하는 사회정책은 필수적인 선결과제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주택정책은 높은 복지수준을 달성한 독일에서조차 사회정책의 어려운 과제 중 하나로 남아있다. 가령 저렴한 공공주택을 더 많이 공급하고, 투기성 부동산자금의 흐름을 차단하고, 1가구 1주택의 원칙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 자기가 살고 있던 집을 10년 안에 팔 경우에는 투기세도 부과하지만 여전히 역부족이다.
2017년 서울의 자택소유율은 49.2%였는데 베를린의 비율은 겨우 15%였다. 서울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내 집을 장만해야 하는 강박감에 쫓기지만 베를린에서는 그렇지 않다. 경제적 여유는 있지만 일생을 월세 들어 사는 사람을 주위에서 자주 보게 된다. ‘부동산자본주의’라고까지 불릴 정도인 한국 사회에서 세입자를 위한 법적인 보호막이 허술한 까닭에 생긴 집 없는 서러움, 노년복지구조의 취약성, 주택이 갖는 과시적 소비효과 등이 부동산의 기형적인 소유구조를 만들었다.
얼마 전에는 국토부 장관 후보자가 자진사퇴했다. 다주택 보유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정서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동산자산의 비중이 금융자산의 그것에 비해 턱없이 큰 한국적 상황 때문에 부동산 문제는 사회적으로 극히 민감한 반응을 일으킨다. 과도한 주식 보유로 문제가 된 한 여성 헌법재판관의 임명을 두고 또다시 여론이 분분하다. 그러나 불법적인 방법에 의한 주식 취득이 아니라면 다주택 보유와는 성격이 다르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지멜은 <공간의 사회학>에서 공간의 배타성을 지적하면서 부동산을 그 예로 들었다. 같은 공간 속에 똑같은 주택 둘이 함께 있을 수 없고, 서울이라는 공간 속에 들어 설 수 있는 부동산의 공급량은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또 학군 문제에서 보았듯이 부동산은 사회적 관계에서도 배타적으로 작용한다. 부동산이 지니는 이러한 배타성에 비하면 주식의 그것은 크지 않다. 주식은 보유할 수도, 또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은 누구에게나 필수불가결한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 한 세기 전에 밑바탕 인생의 애환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던 민중화가이자 사진작가인 칠레는 ‘도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똑같이 집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라는 말로 당시의 비참한 주거상황을 비판했다. 서울의 쪽방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가 남겼던 이 말을 떠올리게 된다.
주소나 주택에 쓰이는 한자 ‘머무를’ 주(住)는 본래 촛불을 밝히고 있는 사람을 형상했다. 계몽철학자 헤르더도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생활하는 데 따라서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살기 마련이다’라고 지적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이 주인처럼 살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주거의 본성임을 강조한다.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던 2008년의 재정위기도 실은 부동산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런 위기가 다시 올 수 있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으며 부동산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경향 19.4.22
패스트트랙이 모두를 살릴 것이다
체제와 정권을 수호하던 공안검사가 정책과 대안을 고민하는 대선주자로 진화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김정은 대변인 역할만 하고 있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김정은 수석대변인’ 국회 연설 한방으로 이른바 보수의 캡틴 마블로 등극한 나경원 원내대표에게 질투심을 느낀 것일까? 문재인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는 데 혈안이 된 것일까?
황교안 대표의 구상은 아마 이럴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발을 꽁꽁 묶으면 내년 총선에서 자유한국당이 이긴다. 자유한국당이 이기면 자신이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가 된다. 대선 후보가 되면 2022년 3월9일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참 쉽다. 그런데 황교안 대표가 대통령이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황교안 대표는 경제를 살리고 양극화를 해소하고 실업난을 극복할 수 있을까?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 잘해 봐야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걱정은 내년 총선까지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는 포용국가로 가기 위한 정책 묶음이다. 그런데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소득주도성장은 비틀거리고 공정경제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능한 정권’ 프레임에 갇혔다.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통째로 망가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정치 자체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책임을 황교안 대표에게 물을 수는 없다. 근본 원인은 따로 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도입한 5년 단임 대통령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다. 5년 단임 대통령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는 원리가 같다. 승자독식이다.
승자독식 권력구조에서 여야는 극한 대치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역대 정부에서 야당은 맹목적으로 정부여당의 발목을 잡았다. 여당은 밥 먹듯이 법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지역 갈등, 계층 갈등, 세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절대 권력을 놓고 벌이는 정치적 갈등이 결국 경제 갈등과 사회 갈등으로 치닫는 것을 정치인들도 모르지는 않았다. 1990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 내각제 합의 각서, 1997년 디제이피 내각책임제 합의는 이런 갈등을 막으려 했던 흔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도 마찬가지다.
승자독식 폐해를 줄이고 국회 몸싸움을 막아보려는 정치인들의 노력은 2012년 국회선진화법을 낳았다. 2012년 국회법 개정 이유는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고 소수 의견이 개진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심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효율’을 위한 제도가 바로 신속처리 대상 안건 지정(패스트트랙)이다.
국회의장의 본회의 부의 요건을 매우 엄격하게 규정한 85조(심사 기간)와 달리, 85조의2(안건의 신속처리)에는 별다른 요건이 없다. 지극히 정상적인 입법 절차라는 의미다.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이 22일 원내대표 합의문을 내놓았다. 23일 의원총회 추인, 25일 정개특위와 사개특위 신속처리 대상 안건 지정에 성공하면 앞으로 정국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당분간은 자유한국당 반발로 국회가 마비될 것이다. 하지만 기간은 오래갈 것 같지 않다. 자유한국당 의원들도 살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선거제도는 여러 가지 타협이 가능하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유지하면서 국회의원 정수를 330명으로 늘려 지역구 의원들의 출마 기회를 현행 수준으로 유지하는 방법이 있다. 자유한국당이 제시하는 협상안을 포함해서 선거구제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는 방법도 물론 가능하다.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도 결국 재가동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입법과 자유한국당이 요구하는 규제개혁을 일괄타결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개헌 논의를 재개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경원 원내대표도 서명한 지난해 12월15일 5당 원내대표 합의문에는 “선거제도 개혁 관련 법안 개정과 동시에 곧바로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원포인트 개헌 논의를 시작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정치 선진화로 가는 길에 선거법 개정과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승자독식의 정치를 끝내고, 연대와 공존,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 정치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양극화를 해소하고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를 살릴 수 있다
성한용 정치팀 선임기자 한겨레 2019.4.22
사악한 욕망 ‘빨갱이’ 사냥시대
우리말 밝다와 붉다는 모두 ‘불’에서 파생한 말이다. 불은 자체로 빛이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핵심 물질이었다. 붉은색은 태양의 색이자 피의 색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붉은색에 광명, 희망, 생명, 권위 등의 의미를 부여했다. 아시아에서든 유럽에서든 붉은색 옷은 왕과 귀족들만 입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붉은색 관복은 정3품 당상관 이상에게만 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붉은색에는 고귀함이라는 의미도 따라붙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파리의 군중은 청·백·적 삼색의 표지를 모자에 붙이고 자유·평등·박애를 외쳤다. 이 혁명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 현재 프랑스의 국기로서, 청색은 자유, 백색은 평등, 적색은 박애를 의미한다. 이후 민주공화정으로 체제를 바꾸는 데 성공한 많은 나라가 삼색을 국기에 채용했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삼색기의 붉은색은 대체로 박애·정열·애국 등을 표상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직후, 김두봉은 상해 청년들에게 태극기의 색깔에 대해 “청색은 자유와 힘을 상징하며, 적색은 평등과 사랑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적색에 평등의 의미가 있다고 본 이유는, 1917년 혁명으로 수립된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기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터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붉은색의 또 다른 의미는 계엄이었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유혈사태’를 경고하는 의미에서 붉은 기를 썼다. 그러나 시민들은 정부의 논리를 전복하여 붉은 기를 혁명의 깃발로 바꿨다. 그들은 반역자는 부르봉 왕조이며, 계엄의 주체는 시민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국기가 삼색기로 바뀐 뒤인 1848년 2월, 다시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파는 삼색기에 대항하여 붉은 기=적기(赤旗)를 자기들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이후 1871년 파리 코뮌, 1917년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적기는 혁명파의 보편적 상징이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혁명이란 본래 ‘천명(天命)이 바뀌는 것’, 즉 왕조 교체를 의미했다. 민중 스스로 국가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싹튼 것은 19세기 최말기였고, 1919년 3·1운동 전후에야 민국(民國)에 대한 지향이 지식인들의 의식 안에 뿌리내렸다. 왕조 권력이나 제국주의 권력을 타도하고 민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혁명이라는 생각도 이 무렵부터 확산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 혁명파의 상징은 적색, 왕당파의 상징은 백색이었다. 러시아인뿐 아니라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들도 백계와 적계로 나뉘었다. 한국인들도 이때부터 적색에 혁명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러나 변화에는 언제나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1921년, 혁명을 지향하는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흑풍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단체의 상징색은 흑색이었다. 2년 뒤 이 단체는 공산주의자들의 북성회와 무정부주의자들의 흑풍회로 분열했다. 북성회는 적색을, 흑풍회는 흑색을 각각 상징색으로 삼았다.
1926년,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근대법의 대원칙을 묵살한 법령이었다. 이로써 행위 없이 생각만으로,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 처벌받는 ‘사상범’이라는 범죄(자)가 생겼다. 총독부 관계자는 이 법령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회주의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다. 폭력혁명론과 의회주의를 구분하겠다는 취지였으나 탄압은 무차별이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을 겪으면서 한반도에서도 사회주의운동과 노동운동, 농민운동이 결합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만주 일대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반만항일운동(反滿抗日運動)이 고조되었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생겨 사상범과 동의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34년 무렵이었다. 인색한 사람을 뜻하는 ‘노랭이’에 이어 사람의 성향을 색깔로 표현한 두 번째 단어였다. 둘의 공통점은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불리는 이름이라는 점뿐이었다. 노랭이는 처벌 대상이 아니었으나, 빨갱이는 중세의 ‘대역죄인’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중세의 대역죄가 의심받는 것만으로 죄였듯이, 근대의 빨갱이도 의심받는 것만으로 죄였다.
일제는 1936년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제정하고 19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조직하여 ‘빨갱이’들을 늘 감시하고 강제 전향시키는 체제를 갖췄다. 해방 후 극심한 이념대립과 전쟁, 분단을 거치면서 이 체제는 법과 제도의 차원을 넘어 관행과 문화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공산주의자, 그들의 가족·친척·친구는 물론 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빨갱이’로 지목되어 목숨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빨갱이는 죽여도 돼”는 시대 정신이 되었고, 빨갱이로 지목된다는 것은 곧 ‘생의 종말’을 의미했다. 한국전쟁 후 발급된 도민증 중에는 사상 기재란을 둔 것도 있었다. 여기에 ‘좌(左)’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람은 사실상 산 사람이 아니었다. 빨갱이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일상적으로, 공공연히 표출하는 것은 빨갱이로 지목되지 않는 데 유효한 수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을 희생양 삼아 사익을 챙기려는 사악한 욕망이 분출했다. 남을 빨갱이로 지목하는 데에는 작은 트집거리 하나만 있으면 되었으나, 지목된 사람은 ‘빨갱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이 불공평한 관계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빨갱이를 식별하는 방법이 단순했기 때문이다. 불의에 대한 항의를 잠재우는 마법의 언어가 ‘말 많으면 빨갱이’였다.
세계사적 차원에서 ‘혁명의 시대’는 반세기 전에 끝났다. 하지만 한국에는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이 많다. 문제는 불의한 권력이 빨갱이의 범주를 필요에 따라 확장해 온 역사 때문에, 그들 스스로 ‘빨갱이’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묻지마 살인’의 충동은, 아무에게나 빨갱이 낙인을 찍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도 도사리고 있다./ 전우용 역사학자 경향 19.4.22
황교안의 '증오의 정치'
"문재인 대통령에게 속았다"는 황교안의 "국민"은 누구인가?
4·19혁명 59주년 기념일인 19일 오후 자유한국당 대표 황교안이 자못 '비장한' 선전포고를 했다. 그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문재인 대통령과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대통령이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 실은 불공정한 주식거래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미선 후보자'를 '이 땅의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정의를 지켜야 하는 헌법재판관에 결국 임명'하는 '인사 대참사'와 '인사 독재'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황교안의 비분강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속았습니다. 저도 속았고 우리당도 속았습니다. 우리 국민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속았습니다. 국민을 마치 조롱하듯 깔보듯 무시했고, 민생의 엄중한 경고도 묵살했습니다.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라는 그 말,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라는 그 말, '사람이 먼저다'라는 그 말, 모두가 거짓말이었습니다."
황교안은 '국민 여러분!'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말로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행동으로 하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무능과 오만, 문재인 세력 그들만의 국정 독점, 그 가시꽃들의 향연을 뿌리 뽑겠습니다. 오직 국민만을 바라보며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황교안의 '국민'은 누구인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시민 모두인가, 아니면 자유한국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인가? 황교안이 건강한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적어도 4월 19일에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영령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말로 글을 시작했어야 옳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머리에는 그런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고, 문재인에 대한 증오와 저주의 마음이 가득 차 있음이 분명하다. 야당이 '부당한 주식거래 의혹'을 제기한 이미선을 대통령이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한 데 관해서는 그 나름으로 반론을 펼치면 될 텐데, 그 한 사건을 소재로 "우리 국민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속았습니다"라고 부르짖는 것은 다양한 견해를 가진 국민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 아닌가?
황교안은 지난 17일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중진위원 연석회의가 끝난 뒤 기자들을 만나 다시 '국민'의 이름을 팔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여성의 몸으로 오랫동안 구금생활을 하고 계시고, 몸도 아프신 것으로 안다. 여성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계신 점을 감안해서 국민들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박근혜는 촛불혁명의 열풍에 밀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탄핵당한 사람이다. 작은 죄를 짓고도 옥살이를 하는 '국민'이 허다한데 왜 여성이라는 이유로 박근혜 만이 석방되어야 하는가? 박근혜는 현재 2년 실형이 확정된 기결수인 데다 다른 범죄 혐의들에 대해 대법원이 유죄 확정 판결을 내리면 25년 이상 감옥에 갇혀 살아야 하는 '국민'이다.
황교안은 박근혜가 임명한 국무총리로서 탄핵 이후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다. 그는 촛불 민심은 못 본 체하고 그 자리를 지키다가 물러난 뒤 죽은 듯이 지냈다. 그러다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50% 아래로 떨어지자 지난 2월 말, '금의환향' 하듯이 자유한국당에 들어가 대표 자리에 올랐다. 박근혜에 대한 부역행위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 사죄도 하지 않고 수구세력의 '수장'이 되어 유력한 '대권 후보'로 불리게 된 것이다.
황교안이 주도하는 자유한국당 중앙윤리위원회는 4월 19일에 '국민'을 무시하는 결정을 내렸다. 지난 달 8일 열린 한 공청회에서 '5·18 망언'을 한 최고위원 김순례와 국회의원 김진태에게 각각 '당원권 정지 3개월'과 경고라는 경징계를 내린 일이 바로 그것이다. 김진태의 망언은 드문 일이 아니지만, 특히 김순례의 발언은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폭언이자 저주였다. "우리가 방심한 사이 정권을 놓쳤더니 종북 좌파가 판치면서 5·18 유공자라는 괴물집단이 만들어져 우리의 세금을 축내고 있다."
자유한국당 관계자는 19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내달 18일 광주에서 열리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황교안 대표가 참석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만약 황교안이 광주 현장에 가서 연단 앞자리에 앉는다면 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김종철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 프레시안 19.4.20
조기 영어교육 마케팅…원어민·모국어란 무엇인가
봄이 왔고 올해에도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학습지를 비롯한 사교육 업체들이 아파트 단지 곳곳, 파라솔과 함께 임시 매대 같은 것을 세우고 공세적인 판촉행사에 돌입한 것이다. 며칠 전, 유치원에서 큰아이를 데리고 나와 둘째가 있는 어린이집으로 향하던 차였다. 아이를 재촉하며 종종걸음을 치는 필자에게 중년 아주머니로 보이는 영업직원이 말을 걸었다.
“엄마! 이제 파닉스 시켜야지. 강남 엄마들은 세 살짜리부터 다들 시켜.”
일단 어느 쪽이 나이가 많고 적건 간에 초면에는 서로 존댓말을 썼으면 한다. 다짜고짜 ‘엄마’라 부르는 것도 거슬린다. 당신의 엄마가 아니다.
그런데, 강남이 뭐길래. 강남에 살고 있지도 않은데 왜 강남 엄마들을 따라해야 하나. ‘강남 엄마’들이 자녀 교육에 열 올리는 사람들의 대명사가 된 양 설명하는 것도 딱히 설득력 있지 않다. 아이를 소신껏 키우고 있는 강남 엄마들은 억울할 일이다.
어떤 업체에서는 판촉행사를 하며 태블릿PC로 수업이나 교재 샘플을 보여주기도 한다. “원어민이 가르쳐서 원어민 수준을 만들어준다”는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미세하게 틀린, 솔직히 원어민은 아닌 것 같은 표현이나 발음에 갸우뚱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필자는 교육 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영어로 국제회의 통역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교재로 공부하기만 하면 아이가 원어민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원어민, 모국어란 말이 ‘영어에 능통한 내 아이’라는 환상을 부추기기 위해 남용되고 있다. 원어민은 또 뭐길래.
한 번은 끈질긴 구독 권유를 받고 “아이가 알파벳의 기본적인 발음을 이미 알고 있고 영어는 천천히 가르쳐보려 한다”고 한껏 좋게 거절하는데 말을 뚝 자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들 생각엔 아이가 아는 것 같겠죠.”
이어서 메타인지(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인지하는 것) 운운하는데 그만 폭발, ‘내가 통역사라서’ ‘내가 영어 좀 해봐서 아는데’ 식으로 또박또박 맞서놓고는 나 자신의 유치함, 졸렬함에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영어 쓰는 일을 하고 있고 아이 영어 교육에 대해서는 나름의 소신이 있다는 얘기를 해 봐야 얻을 게 없었다. 예전의 누군가는 또 혀를 쯧쯧 차며 ‘엄마가 한국어를 잘 못해서’ 아이가 언어발달이 더딜 거라며 짐짓 전문가인 양 진단을 내렸다. 아이가 말하는 걸 들어본 적도, 심지어 아이를 본 적도 없으면서.
통역사니까 한국어를 잘 못할 거라는 추측 또한 어설프기 짝이 없다. 어눌한 국어실력 가지고는 암만 영어를 잘해도 살아남을 수 없는 직업이다.
그런데 이 역시 한글 교육 상품을 팔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영어 상품을 영업하다 안될 것 같으니 방향을 튼 것이다. 아무리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해도 돈벌이 때문에 엄마들의 불안감 키우는 마케팅이 도를 한참 넘어선 건 분명하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 늘어선 파라솔마다 자칭 영어교육, 조기교육 전문가들이 포진해 집요한 영업활동을 펼치는 흔한 봄의 풍경. 끝끝내 거절하면 또 다른 카드를 꺼내든다. 형편상 비용이 부담되어 그러시냐는 이른바 ‘골지르기’ 카드다. 교묘하게 얕잡아보듯 얘기하는 모습을 보며 대체 영업 압박이 얼마나 심했기에 이럴까 싶어 안타깝기도 하다.
미안하지만 이런 식의 지르고 부추기는 마케팅에 현혹되지 않는다. 뿌듯함과 자괴감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죽도록 영어공부를 해봤기 때문에 영어를 모국어로,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강남 엄마들은 이러지 않아요’ ‘돈이 있으면 이러지 않아요’ 하는 말에 흔들리기엔 말의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
우리나라 교육열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유독 영어 교육과 관련해서는 불안감과 열등의식, 그리고 환상에 기댄 상술이 활개 치는 것 같다. 통역 일을 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어실력을 원한다기보다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갈망하는 거라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엄마로서 경험하게 되는 영어 교육의 인상도 별반 다르지 않아 안타깝다./박소운 국제회의 한영통역사 19.4.19 경향
조계종과 노동조합
성(聖)과 속(俗)을 둘로 구분하고자 하는 관념은 오래됐다. 삼한시대 속세에서 쫓기는 자들은 소도(蘇塗)로 도피했다. 그곳은 구원받을 수 있는 성소였다. 성과 속의 이분법에서 종교가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지난해 9월 ‘전국민주연합노조 산하 대한불교조계종지부’(조계종 노조)가 출범하자 많은 매체들이 앞다퉈 보도했다. 불교 종단의 첫 노조 탄생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성과 속의 이분법’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조계종 노조는 특별하지 않다. 스님들의 노조가 아니다. 조계종단 산하의 사찰, 기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만든 평범한 노조다. 이 노조가 지난 4일 자승 스님을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조계종이 자승 총무원장 재임 시절 승려노후기금 마련을 위해 생수 판매 사업을 하면서 5억원 이상을 특정인에게 빼돌려 종단과 사찰에 손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노조는 법적 고발과 함께 자승 스님에게 사실을 밝히고 참회하라고 요구했다.
보름이 지났지만 자승 스님 측은 반응이 없다. 대신 조계종 총무원이 나서 노조 간부 3명을 보직 해임하고 ‘산불피해 복구 지원’ 명목을 붙여 양양 낙산사로 대기발령 조치했다. 노조 간부들은 졸지에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납득하기 어려운 건 총무원의 움직임이다. 자승 스님을 조사해야 할 총무원이 대변인이 되어 비호에 앞장서고 있다. 자승 스님이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조계종 총무부장 스님은 17일 기자간담회에서 노조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낙산사 대기발령도 철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산사 수행승은 노조를 몰라도 된다. 그러나 불교 최대 종단의 고위급 승려가 할 말은 아니다. 통념과 달리 성과 속은 둘이 아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성과 속>에서 “성과 속은 세계 안에 있는 두 가지 존재양식”이라고 말했다. ‘성(聖)’ 자는 누군가의 말(口)에 귀(耳) 기울이는 모습에서 나왔다고 한다. 성직자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유마거사)까지 바라지 않지만, 노조 활동을 빌미로 천애 바닷가로 내몰아서야 되겠는가. 부처님오신날이 코앞인데, 조계종단의 자비는 요원하기만 하다./조운찬 논설위원 경향 19.4.18
한국 상층과 중산층의 유별난 '서민' 코스프레
사회연대·임금연대에 나서자
한국에서는 재벌이나 수백억 부자 등 극소수 최상층이 아니면, 자신들을 모두 '서민'이라고 인식한다. 언론도 고소득층이나 중상층에 대해 '서민'이니, '푸어'(poor, 빈민)라는 엉뚱한 말을 갖다 붙인다.
김명수(가명, 55) 씨는 서울 강남에 아파트 두 채가 있고, 연봉 1억 5000만 원이상이 되는 근로소득자이며, 아내 연봉까지 합하면 가구 소득이 연 2억 원이 넘는다. 그는 골프도 치고, 호텔도 수시로 가며, 고급 차도 타고, 해외여행도 자주 가는 등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도 스스로를 부유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민'이나 중산층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객관적 지표로 보면 김 씨는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상위 1%에 속하는 고소득층이다. 이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월급쟁이이자, 부르주아다.
이명준(가명, 55) 씨는 지방 6급 공무원이다. 아내는 중학교 교사인데, 두 사람은 안정된 직장과 높은 보수를 향유하며 풍족하게 살고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무원-교사 부부인 셈이다. 지방의 고급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 씨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해외여행도 자주 간다. 부부는 자동차도 각각 소유하고 있다. 가구 소득 상위 10%에 속하는 부부의 연봉은 1억5000만 원이며, 이들의 퇴직 연금은 월 500만 원이 넘는다. 이 씨와 그의 아내는 노후를 걱정하지 않는다. 저축도 별로 할 필요가 없어 가구 가처분 소득이 높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을 '서민'으로 생각한다. 공무원으로 높은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박철수 씨(가명, 40대) 부부는 의사다. 지방 대도시에 거주하는 부부의 연소득은 2억 원이 넘는다. 이들의 가구 소득은 상위 1%에 속하지만, 재산이 많지 않아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1% 대 99%'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재벌을 비롯한 극소수 최상층에게 소득이 집중되어 있어, 갈수록 소득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재벌을 비롯한 극소수 최상층 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서민'이며,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라고 인식한다. 이른바 진보의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김 씨, 이 씨, 박 씨 세 사람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상층과 고소득 중산층의 서민 코스프레가 유별나다. '강남 서민'이라는 말도 유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0억 원 내외 주택이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고, 가구 연 소득이 1억 원이 넘어도 강남 상류층 및 중산층을 비롯한 고소득 중산층은 자신의 객관적 처지와 다르게 '서민'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연봉 1억 원의 고소득 근로소득자도 살기 어렵다고 엄살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한국의 상층과 고소득 중산층은 눈높이가 너무 높고, 물질적 탐욕이 너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위만 쳐다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상위 10%와 소득 하위계층 사이의 격차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현실에 눈을 감고 있다. 이들은 무산계급도 아니고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도 아니다. 하층 노동자와 진짜 서민이 보기에는 그렇다. 한국의 상층과 고소득 중산층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기 때문에 소득불평등 심화의 가장 큰 피해자인 하층 노동자와 서민층의 고단하고 궁핍한 삶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상층과 고소득 중상층은 하층 노동자와 서민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누리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그들에게 피부로 다가오는 건 상위 0.1% 또는 1%와 상위 10% 사이 격차일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상상 속 '서민'이 되는 것 아닐까?
한국의 상위 10%와 이른바 진보 및 노동운동은 불평등과 격차 문제를 재벌을 비롯한 극소수 최상층 대 나머지 모든 서민사이의 불평등과 격차로만 인식하고, 상위 10%의 이해를 집중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이런 인식으로는 한국 사회의 극심한 소득불평등과 격차를 해소하기 어렵다.
한국은 소득 상위 10%와 저소득층의 격차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기득권을 누리는 최상층뿐만 아니라, 상위 10%도 이 사회에서 작은 기득권과 고소득을 향유하는 계층이다. 따라서 상위 10%도 상위 1%와 함께 기득권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소득불평등과 양극화의 해소를 위해 기득권을 내려놓고 사회연대·임금연대에 나서야 할 것이다./마창훈 사회평론가 프레시안 19.4.18
문 대통령 지지율이 추락한 3대 원인
점심을 먹으러 갈 때도 셋 중 둘이 가자는 쪽으로 따라 가는 게 세상 이치다. 다른 두 명의 의견을 무시하고 김치찌개를 박박 우긴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고 왕따되기 십상이다. 지지율 30%대란 셋 중 두 명은 험한 말을 쏟아낸다는 뜻이다. 남은 한 사람의 변호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방어가 무너졌다는 의미다. 지지율 40%는 국정동력의 마지노선이다. 그 이하로 떨어지면 야당의 저항이 본격화되고, 여당조차 청와대와 거리를 두려 한다.
집권 초 80%를 웃돌던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여러 사람의 얘기를 들어봤다. 종합하면 원인은 세 가지다.
첫째, 민심은 이제 전 정부 청산에서 현 정부 평가로 옮겨가고 있다. 박근혜 청산, 보수야당 심판은 끝났다는 정서가 커지고 있다. 선거에서도 전 정권 청산과 야당 심판 프레임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시민들은 문재인 정부가 빨리 시대적 과제를 한 단계 정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를 바라고 있다.
둘째, 문재인 정부가 두 번의 기회를 놓쳤다는 실망이 크다. 촛불혁명 때 탄핵을 추진했던 세력을 묶어 강력한 개혁연대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 2018년 지방선거 압승 이후 개혁을 열망하는 시민의 에너지를 정치에 결집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청와대와 여당은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지지율 80%대에 편입했던 중도보수를 새로운 지지층으로 만들지도 못했다. 금쪽같은 시간과 에너지를 강물처럼 흘려보냈다. 그 결과 국면은 거짓말처럼 탄핵 전으로 되돌아갔다. 4·19혁명과 6·10항쟁처럼 시민의 뜨거운 열망이 아스팔트 위에서 멈추는 일이 반복되는 건 아닌지 시민들은 생각하고 있다.
셋째, 청와대와 여당은 유능하고 겸손하게 비치지 않았다. 여당 대표의 20년 집권, 50년 집권론은 혀는 짧은데 침만 멀리 뱉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청와대 소통수석은 “뭐가 문제냐”고 해 시민들의 부아만 돋았다. 대통령비서실장은 “창원성산 지역구는 지난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이 41% (득표율을) 얻은 곳인데 이번에는 45%를 얻어 4%포인트 지지도가 높아졌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역시 핀트가 어긋난 얘기였다.
선거는 누가 더 잘하느냐 싸움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이 누구를 더 싫어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트리플 크라운’을 이뤄낸 것은 민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시민들이 박근혜 정부, 자유한국당, 홍준표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지금 시민들은 문재인 정부, 민주당, 그 주변 인사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정치에서 오류나 실수는 언제나 있을 수 있다. 이런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고 극복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청와대는 지금 무슨 전략을 갖고 있을까.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에게 물어봤다.
- 인사 비판이 커지고 있다.
“최선은 다하는데 한계가 있다. 국민들이 생각하는 기준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그만한 나이에 그 정도 기준을 맞춘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좋은 사람 10명을 접촉하면 6~7명은 처음부터 안 한다고 한다. 핑계라 하면 할 말 없다. 결국 국민 눈높이에 맞출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 개혁 기회를 놓쳤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대통령에게 개혁 의지나 철학이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고 이를 제도적으로 완수하는 데 우리 정치 환경에 근본적 한계가 있지 않나. 그럼에도 압축적으로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하라는 건 여당에 주어진 운명이고 책임이다. 때로는 여론이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게 나라를 이끌어가는 동력이라 생각한다.”
- 진보정권의 도덕성도 비판받고 있다.
“어떻게 이쪽이라고 완벽하겠는가. 나는 아직도 이쪽이 상식적·개혁적·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집권을 하면 상대비교하는 것 같지 않다.”
- 다음 단계는 무엇을 해야 하나.
“언제나 어려울 때는 상황을 진솔하게 설명하는 게 필요하다. 청와대와 여당이 지금 당면한 상황이 이렇고, 우리 사회 숙제가 무엇이라고 솔직히 제시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다른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 내년 총선은 어떻게 전망하나.
“정부·여당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실망감은 당분간 더 쌓일 것 같다. 그러나 선거가 다가오면 그렇다고 야당이 대안이 될 수 있는지 한번 더 비교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답답하고 어려운 상황’이란 말을 여러 번 했다. 답답한 마음은 시민들이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을 것이다. 청와대와 여당은 더 일신하고, 맹성해야 한다
박래용 논설위원 경향 19.4.15
언론의 자본주의는 괜찮은가
열 명이서 똑같이 1억원씩 돈을 내서 빵 공장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공장에서 만든 빵이 인기를 얻어 공장을 확장하고, 건물 사고 가게도 새로 냈다. 이런 의사결정은 기업 경영진이 한다. 이 기업에선 누가 경영진을 맡았을까. 출자자 열 명 중에 셋이 가족이었다. 이들은 지분 30%로 최대주주 자격을 얻었고, 그 자격으로 이사회와 경영진을 장악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셋은 빵의 원재료를 공급하는 업체를 따로 만들었고, 빵 제조기술의 노하우를 활용해 최고급 빵 브랜드를 담당하는 업체도 따로 설립했다. 사업 확장 때마다 본사 경영권 행사를 통해 이익 내기 쉬운 업체를 직접 출자했고, 심지어 회사가 새로 산 건물에서 가장 목이 좋은 곳의 가게 점주를 직접 맡았다. 자신들 지분율이 높은 회사는 유난히 배당성향이 높았다. 이 셋은 새로 생긴 계열사 임원도 겸직하며 모든 곳에서 따박따박 급여를 받고 퇴직금을 충당했다. 이 빵 공장 사례가 상당히 익숙하다면 한국 재벌들이 보여온 모습을 나름 눈여겨 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 세계 최대 가전·IT 박람회인 ‘CES (Consumer Electronics Show) 2018’가 개막한 지난해 1월9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왼쪽)이 삼성전자 부스를 둘러보고 있다. 이날 조 회장은 아들 조원태 대한항공 대표이사(오른쪽)와 딸 조현민 전 한진관광 대표이사(가운데)와 함께 행사장을 찾았다. ⓒ 연합뉴스
자본주의는 자본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제도와 체계를 지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 주주가 다른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성숙한 나라일수록 기업 범죄에 관용이 없고, 이사회와 주주총회가 투명하고도 합리적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한국은 거꾸로다. 한국에선 최대주주가 아닌 주주의 이익은 공정하게 분배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재벌 총수들은 잦은 사면의 대상이며 징역보다 긴 집행유예나 법전에도 없는 ‘사회봉사명령’을 받곤 한다. 주주총회는 소통의 수준을 언급하기 민망할 정도로 어른들 학예회에 가깝다. 형사처벌 대상이 된 재벌들 죄목은 주로 그들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기 보단 ‘주주들에게 피해를 줬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벌을 비판하는 이념은 ‘사회주의’라기 보단 ‘자본주의’에 가깝다.
하지만 이런 자본주의 원칙, 시장경제 기본 원리는 한국 언론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논란인 ‘연금 사회주의’만 봐도 그렇다. 국민연금이 올해 288사의 주주총회에 참가해 185개사, 254개의 안건에 반대 의견을 냈다. 특히 국민연금의 의견 행사 중에서 대한항공의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 반대가 부결에 영향을 주며 논란이 거세졌다. ‘연금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만든 피터 드러커는 노동자가 조성한 연기금이 기업의 지배권을 장악할 것이란 맥락에서 언급했다. 하지만 국민연금에겐 기금의 안정성과 수익성이 최우선 가치다. 노동자도 기업의 윤리적 행동 보다는 노후에 연금을 돌려받길 원한다. 따라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도 ‘연금 사회주의’보단 자본주의 원리에 충실한 주주권 행사에 가깝다. 유독 한국에선 재벌의 의사결정에 반하는 것이 ‘반시장주의’란 ‘반지성주의’가 난무한다.
한국의 많은 언론이 재벌 이익에 복무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광고비를 받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업으로서 언론이 보이는 모습과 관련이 있다. 이를 테면 이런 사례다. 경제매체인 머니투데이와 자본시장의 전문매체인 더벨은 최대주주가 동일인이란 공통점이 있다. 차이는 이 최대주주의 지분율은 머니투데이에선 15.1%이고, 더벨에선 39%다. 시장에선 두 업체가 관계가 있는 회사로 인식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더벨은 머니투데이가 9%의 지분을 보유해 지분법 적용이 되는 ‘관계회사’가 아니다.
▲ 머니투데이 로고
기사를 볼 아이디 하나를 월 150만원에 파는 것을 핵심 수익모델로 삼는 더벨은 2018년 매출 242억원, 영업이익 94억원을 기록했다. 눈에 띄는 것은 배당이다. 더벨은 2017년 12억원, 2018년에 30억원 배당액으로 주주들에게 지급했다. 지난해 배당성향이 38.5%에 달한다. 배당액 중에 39%는 최대주주 몫이었다. 최대주주는 두 회사의 관계를 엄정하게 설정하고, 머니투데이 다른 주주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까. 어쩌면 한국 자본주의와 관련된 담론을 제대로 보려면 기업으로서 언론의 지배구조와 경영행태를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 윤형중 LAB2050 연구원 미디어오늘 19.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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