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묻은 신발’로 돌아보라 시사인 634호 2019.11.15
포용사회를 향한 페미니즘경향 2019.11.15
선거제 개혁을 위한 플랜 A, B, C경향 2019.11.17.
진술거부인가, 진술거부권 행사인가경향 2019.11.18.
적폐와 중간태경향 2019.11.19.
갑질 장군’ 박찬주와 채명신경향 2019.11.19.
장학썬 사건 결말에 대한 불길한 예감한겨레 2019.11.19.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한겨레 2019.11.19. 한겨레 2019.11.19.
또 속는 거겠지? 경향 2019.11.19.
"홍콩의 오늘은 세계의 내일" 프레시안 2019.11.20.
부동산 문제, 대통령의 안이한 인식 한겨레 2019.11.20.
다시 ‘시일야방성대곡’을 떠올린다 경향 2019.11.21 21
‘1 대 99’ vs ‘20 대 80’ 한겨레 2019.11.22.
공원에서 군자를 만나다 시사인 2019.11.22
대통령이 절대군주인가 한겨레 2019.11.24
‘친일 부역’ 이어 ‘반개혁’…그들과의 백년전쟁 한겨레 2019-11-25
한국, 인간이 ‘벌레’가 된 나라 한겨레 2019-11-25
강남 부동산에 대처하는 방법 경향 2019.11.26
미래학이 직면한 위협 한국 2019.11.27.
‘멸문지화’의 법과 원칙한겨레 2019.11.27
강성·귀족 노조가 문제라고요? 시사인 2019.11.27.
‘우리가 황교안이다’ 구호가 당혹스러운 이유 한겨레 2019.11.29
‘흙 묻은 신발’로 돌아보라
올해 노벨경제학상은 현장에서 실험을 통해 빈곤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낸 학자들에게 돌아갔다. 한국의 정책 담당자와 경제학자들도 흙 묻은 신발로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1979년 이란혁명 이후 영국 외무부는 왜 혁명을 예측하지 못했는지에 관해 내부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에 따르면 테헤란의 영국 외교관들이 엘리트 말고 보통 사람을 별로 만나지 않은 게 하나의 이유였다. 그 후 영국 외교관들은 현장에서 보통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관한 조사를 강조했다. 영국의 이란 주재 대사는 언제나 부하의 신발에 흙이 묻었는지 살펴보았다고 한다.
외교관만이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책을 실행하는 관료들과 사회를 연구하는 학자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은 바로 그런 경제학자들에게 돌아갔다. MIT의 바네르지와 뒤플로, 하버드 대학의 크레이머 교수가 그들이다. 이들은 빈곤에 맞서서 무작위 대조실험이라는 방법론을 들고 가난한 나라로 달려갔다. 실험집단과 통제집단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정책 개입 효과의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밝혀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이러한 실험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빈곤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하나씩 찾아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수업일수나 교과서에 대한 지출을 늘리기보다 뒤처진 학생들의 수준에 맞춘 적절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교육성과에 중요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또한 그들에 따르면 케냐의 학교에서 구충제를 보급했을 때 학생들의 건강이 개선되고 등교율이 높아졌으며, 이동진료소에서 콩 한 주머니를 나눠줄 때 예방접종 참여율이 크게 높아졌다. 그들은 가난한 농민들이 현재를 너무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비료를 구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마이크로크레디트 프로그램의 효과도 인도에서는 별로 크지 않다고 보고했다.
물론 개발경제학계 내부에서도 이들의 연구에 관해 비판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케냐의 구충제 프로그램이나 인도의 마이크로크레디트 실험은 결과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무엇보다 실험 연구의 결론을 일반화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다. 실험이 다른 환경에서 수행되어도 그리고 대규모 정책이 되는 경우에도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실험의 결과를 낳는 메커니즘에 대한 더욱 깊은 분석에 기초하여 증거뿐 아니라 이해를 발전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거시경제의 성장과 불평등 그리고 정치와 부패가 빈곤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에서 이들이 강조하는, 현장에서의 작은 정책 개입은 한계도 뚜렷하다. 지난해 8월, 디턴 등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3인을 포함한 경제학자 15명은 이러한 문제를 지적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교사에게 유인을 주어 교육성과를 높이는 것보다 대외 부채를 갚기 위해 교육예산 자체를 줄이고 있는 게 더 문제라는 얘기다. 빈곤이 개인의 행동 문제만은 아니며, 경제와 정치 시스템이라는 큰 그림이 여전히 빈곤에 중요하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현실 바꾸기 위한 경제학자들의 실천
과거에는 빈곤 문제를 두고 국제사회와 경제학계가 원조 대 시장의 발전이라는 구도하에서 이념적으로 대립했다. 이들의 연구는 빈곤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에 기초하여 어떻게 빈곤에 맞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논의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현실을 조금씩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경제학의 실천적 역할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바네르지 등은 이제 실험의 규모와 장소를 확대하며 연구 결과를 정책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들이 설립한 J-PAL이라는 연구기관은 전 세계로 네트워크를 확장했고, 인도에서 학생 수백만 명이 수준에 맞는 학습 보조를 받는 등 그들의 연구에 기초한 프로그램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발경제학에서는 실증적이고 미시적인 접근이 주류가 되었고, 이들의 접근법은 증거에 기반한 경제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의 효과를 포함하여 한국에서도 경제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역시 현장에서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의 정책 담당자들과 경제학자들도 신발에 흙을 더 묻혀야 하지 않을까.
이강국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 교수) 시사인 634호 2019.11.15
포용사회를 향한 페미니즘
반백년 역사를 가진 페미니즘 운동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는 얼마나 무르익은 것일까. 무턱대고 페미니즘에 대해 묻는다면, 젠더 정체성에 의거한 자동적인 성 대결구도가 떠오른다. 맨 먼저 가부장제도에 저항하는 과격한 여성상을 떠올릴지 모른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지영의 언니 은영의 모습이 이런 여성상에 가깝다. 지영이 가려는 미국보다 여성인권이 높은 덴마크로 여행가고 싶어 하던 은영은 결국 지영과는 달리 독신으로 씩씩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이 정도 이해만 갖고 있다면 페미니즘 이론의 목차도 제대로 읽지 못한 꼴이다. 자칫 우리는 페미니즘을 남성위주 사회에 대항하는 여성만을 위한 학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찍이 미국의 흑인 여성 문화비평가 글로리아 왓킨스는 페미니즘을 성적 차별과 억압을 종식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격한 정치운동으로 이해하는 일반론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녀에게 페미니즘의 최종 목표는 결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우리 사회를 살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의 삶을 의미 있게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뉴욕시립대학 영문과 교수였던 왓킨스는 벨 훅스(bell hooks)라는 소문자 필명으로 활동했다. 변변한 이름도 없이 노예로 살아야 했던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별칭이었다. 노예제가 폐지된 현대 사회에서 굳이 아픈 가족사의 수치스러운 이름을 내세운 이유는 뭘까. 그녀는 중산층 백인 여성들이 단순히 자신의 평등권을 주장하기 위해 페미니즘 이론으로 무장하는 것을 경계하고자 했다. 최소한의 능력이 전제돼야 한다면 배움의 기회마저 박탈된 저소득층 흑인 여성의 경우엔 어쩌랴. 같은 여성이어도 유색인종이 미국 사회에서 겪는 아픔의 현실은 자연스레 묻히고 만다. 어쩌면 그녀가 소망하는 페미니즘 운동은 남녀평등과 고용평등, 그리고 여성들을 위한 평등한 기회부여 차원 이상의 것일지 모른다. 인간을 성적 차이나 계급, 인종, 그리고 나이 등의 이유로 차별하는 사회구조나 이데올로기 전반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과 분석이 페미니즘 운동의 근본적인 목적이다.
시카고대학 정치학과 교수 아이리스 영도 유사한 주장을 폈다. 그녀는 페미니즘 운동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 운동은 ‘자유주의(liberal)’ 페미니즘이라 불렀다. 평등한 사회참여를 민주주의 이상으로 삼는 미국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여성인권 신장 운동을 예로 들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면 여전히 한국 사회는 중산층 여성들의 기본적인 평등권도 희생되는 사회다. 일을 아무리 잘해도 곧 아이를 가질 직장여성은 중요한 일감에서 제외된다. 남편이 아내와 육아를 분담하기 위해 육아휴직을 신청하려 해도 부모의 눈총, 직장에서의 압박감은 결국 여성의 평등권을 희생하도록 만든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보면 최소한의 학력과 능력을 겸비한 중산층 여성이어야 그나마 평등권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리스 영은 수많은 유색인종 여성, 노동자 계층의 여성, 사회참여 능력이 결여된 주부들은 오히려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의해 소외됐다고 지적한다. 그는 두 번째 페미니즘 운동을 ‘여성중심(gynocentric)’ 페미니즘이라 불렀다. 적절한 능력이나 계급이라는 조건을 갖춘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기를 거부한다는 의미다. 저학력과 비정규직으로, 그리고 이주가정에서 인종적으로도 차별받는 열악한 조건에서 사회적 약자로 사는 여성들이 수없이 많다. 아이리스 영은 어느 사회든 여성중심 페미니즘으로 진보되어야만 젠더를 초월하여 사회 전반의 갖가지 차별을 경험하는 이들을 이해하고 연대하면서 포용하는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진정한 포용사회를 원한다면, 진보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향해 많은 젊은 남성들이 혹평하고, 심지어 배우들에게까지 악플 세례를 퍼부었다. 남성이 가진 모든 권리를 빼앗길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초기 반응이다. 여성중심 페미니즘은 우리가 응당 당연하다고 여겼던 인식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아프게 했는지 숨겨진 사회의 차별구조를 면밀히 성찰하게 만든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마음 여린 지영은 그 구조적 차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다중인격 장애를 겪는다. 엄마의 희생적인 생을 아파했던 딸은 결국 자신의 연민을 무의식 깊이 내면화시켰을지 모른다. 영화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희생된 주변 가족과 소외시켰던 약자들을 떠올려 미안해하며 눈물짓는 관객들이 많다. 그런 페미니스트로 인해 포용사회를 향한 한국 사회는 여전히 작은 희망이 있다.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교수 경향 2019.11.15
선거제 개혁을 위한 플랜 A, B, C
지난주 수요일부터 국회 정문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에 올려진 선거제도 개혁 협상이 지지부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난생처음 1인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매일매일 녹색당 차원의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누리는 각종 특권을 지적하고, 예산낭비 사례들을 폭로하며, 그간 저질러온 비리와 잘못들에 대해 고발도 하고 있다. 이런 활동이 정치 불신을 더 부추기지 않느냐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지만, 솔직히 대한민국의 정치 불신, 정치 혐오는 이미 극에 달한 지 오래다.
이런 정치 혐오, 정치 불신을 누가 만들었는가? 거대정당들이 장악한 국회가 스스로 만든 것이다. 자기들끼리 연봉을 정하고, 온갖 특혜를 누리면서, 국민들에게는 그것을 감춰왔다. 그래서 지금은 문제를 햇빛에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특권 폐지는 선거제도 개혁과 함께 국회다운 국회를 만드는 방법이다.
국회 앞에 자리를 잡으니, 이런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지난주 목요일에는 공무원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해고된 분들이 집회를 했다. 해고된 지 벌써 15년이다. 해고자들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복직특별법안이 심의되기를 하루 종일 기다렸다. 그러나 소위원회는 논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장애인단체들이 예산 확보를 요구하러 왔다. 가난한 노인들에게 기초연금을 줬다 뺏는 문제 때문에 1인 시위도 벌어진다. 토건사업에 쓸 돈은 넘쳐나도, 사람에게 쓸 돈은 부족하다고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정치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온갖 특권을 누린다. 어떻게 정치를 불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특권 폐지·선거제도 개혁이 답이다. 문제는 의석수이다. 특권을 폐지하면 국회의원 숫자를 10% 늘리는 것은 현재의 국회 예산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올해 6400억원인 국회 예산의 10%에 해당하는 640억원을 삭감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부당한 특권과 예산낭비를 없애고, 1억5000만원이 넘는 국회의원 연봉을 삭감하고, 9명의 개인보좌진을 7명 수준으로만 줄이면 될 일이다. 이렇게 한 다음에 국회의원 30명을 늘려도, 들어가는 돈은 200억원이 채 안된다. 440억원 정도는 순삭감도 가능한 것이다.
국민세금 440억원을 절약하면서 국회의원 30명을 늘릴 수 있다고 하면, 국민들이 반대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렇게 하면 얼마나 감동적인 정치개혁이겠는가? 그런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렇게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사실 의원 숫자를 안 늘리더라도 특권 폐지는 필요한 것이다. 국민들의 압도적 다수가 국회의원들의 특권 폐지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권 폐지가 중요한 이유는, 진짜 국가공동체를 위해 일할 사람만 국회의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되어서 할 정책활동보다 국회의원이 되어 누릴 특권과 위세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안된다.
스웨덴 같은 나라의 국회의원들이 우리보다 적은 연봉에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의정활동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특권 폐지를 하면서 의원수를 늘리는 것이 정치개혁을 위해 필요한 방향이지만, 설사 의원수를 늘리지 않더라도 특권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선거제도 개혁의 플랜 A, B, C도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국회의원 특권을 없애고 의석수를 330석으로 늘리는 것이 플랜 A이다. 현재 국회 예산의 10%를 줄이고, 국회의원 숫자를 30석 늘려도 국회 예산은 오히려 440억원 정도 줄어든다. 그리고 330석을 지역구 250석, 비례대표 80석으로 배분하면 된다. 그러면 농어촌 지역의 지역구를 줄이지 않고도 선거제도 개혁을 할 수 있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의석수를 300석으로 유지하면서 선거제도 개혁을 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플랜 B라고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지역구 의석을 몇 석으로 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지역구 240석 대 비례 60석 얘기도 나오고, 지역구 250석 대 비례 50석 얘기도 나온다.
사실 ‘지역구 대 비례’ 비율보다도 중요한 것이 ‘연동형’이냐 아니냐이다. 선거제도의 비례성은 여기에서 결판이 난다.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한다’는 비례성의 원칙을 최대한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만약 지역구 250석 대 비례 50석으로 하더라도, 온전한 연동형 방식을 적용하면 비례성은 더 개선될 수 있다. 따라서 지역구 250석 대 비례 50석으로 하고 싶으면 ‘준연동형’이 아니라 ‘연동형’을 채택하면 된다. 그것이 개혁을 위한 올바른 선택이다.
플랜 C도 있다. 그것은 현행 300석을 지역구 250석 대 비례 50석으로 나누고 ‘준연동형’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 방식에서도 비례성은 개선된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국민들에게 개혁으로 전달될 수 있을까? “여권의 입법부 장악 시도”라는 자유한국당의 가짜뉴스가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래서 플랜 B, 플랜 C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나 국회의원 특권 폐지다. 그래야 국민들에게 개혁의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다. 민심을 더 공정하게 반영하는 선거제도로 바꾸면서 특권까지 폐지하겠다고 하면, 아무리 가짜뉴스가 판쳐도 국민 여론은 우호적으로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여당의 결단에 달려 있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경향 2019.11.17.
진술거부인가, 진술거부권 행사인가
그 말이 그 말일 수 있다. 피의자가 ‘진술을 거부’하거나 ‘진술거부권을 행사’했거나 검찰의 신문에 답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표현이 주는 뉘앙스는 차이가 있다. 진술을 거부했다는 표현은 ‘거부’를 부각시켜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거나 수사태도가 불성실했다는 부정적 의미를 떠올리게 만든다. 진술거부권을 행사했다고 말하면 보장된 권리를 행사한 것이어서 당연한 일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여 8시간 내내 진술을 거부하고 묵비권을 행사했다는 언론의 보도태도가 이처럼 양 갈래다. 부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춰 여론을 형성해 보려는 입장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입장이 대조적이다. ‘권력자의 갑질’이라는 표현을 제목으로 뽑거나 ‘검찰 수사에 성실히 응하기 바란다’는 야당 정치인의 멘트를 기사화한 언론은 수사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쪽이다. 이에 반해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는 데에는 전직 장관이든, 일반 시민이든 차이가 있을 수 없고 검찰에 대항할 수 있는 피의자의 유일한 무기라는 기사는 헌법과 원칙을 지켰다는 입장이다.
일반인은 진술을 거부하면 검찰이 바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영장발부사유가 된다는 법조인의 시각을 그대로 전달할 게 아니다. 그런 검찰과 법원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방점을 두어 보도해야 한다. 진술을 거부한다고 불이익이 가해지면 헌법상 보장된 권리는 유명무실해진다. 진술거부 자체로 영장청구하고 그것만으로 영장이 발부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술거부에 대한 사실상의 불이익이다. 기본권보장의 하향평준화를 요구할 게 아니다. 일반인이 감히 진술 거부할 엄두를 못 낸다고 일반인을 기준으로 권력자의 진술거부권 행사가 문제 있다고 본다면 헌법은 장식장의 장식품에 그치게 된다. 진술거부권은 피의자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헌법상 기본권이다. 검찰 앞에서 진술을 거부한다는 것은 일반인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밝혀야 한다. 검찰이 진술을 거부하는 일반 피의자에게 영장을 청구할 것이라든지, 재판에 가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든지 겁을 줬다면 검찰을 엄히 꾸짖어야 한다. 법원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면 기본권 행사에 불이익을 가해선 안된다고 법원을 비판해야 한다. 기본권 행사에 공인을 들먹이거나 권력자의 특권이자 갑질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될 일이다.
헌법 제12조 2항에는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고 적혀 있다. 검찰에 대항할 수 있도록 헌법이 피의자에게 쥐여준 무기가 바로 진술거부권이다. 권력자든, 일반 시민이든 피의자는 검찰이라는 거대한 국가권력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 존재다. 그 무기마저 없다면 검찰의 권력 앞에 힘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법정에 가서 다투어보겠다며 검사 앞에서 순순히 진술하면 엎지른 물이 된다. 검사의 신문에 진술해서 신문조서로 작성되면 법정에서 그 내용을 부인해도 증거능력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법정에 가서 판사 앞에서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해도 소용없다. 진술의 신빙성을 스스로 깨버리는 결과가 된다. 검사 출신 국회의원이 변호사 시절 언론에 기고했던 ‘수사 잘 받는 법’을 보면 첫 번째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다. 적극적으로 진술해서 해명하는 것이 소송 전략적으로 나은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아무 얘기도 하지 않으면서 묵비하는 것이 좋은 전략일 수 있다. 그래서 진술을 거부했다고 부정적으로 볼 것은 아닌 것이다.
피의자가 진술거부권을 행사한다고 하면 검사는 더 이상 신문을 포기해야 한다. 무의미하게 8시간을 잡아 놓고 질문공세를 펼 것은 아니다. 물론 검사는 이렇게 질문했는데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해 영장 청구하면서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헌법상 보장된 권리행사가 구속영장을 발부할 사유로 사용된다면 이것이야말로 헌법상 기본권 행사에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서 법원이 해선 안될 일이다. 진술을 거부했다고 불성실한 수사태도로 볼 것도 아니고, 진지한 반성이 없다고 양형에서 불이익한 사유로 고려돼서도 안된다. 형사소송법에도 진술거부권을 행사해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 진술거부권을 행사한 조 전 장관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 피의자로서 감히 진술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수사 환경과 관행을 문제 삼아야 한다. 진술거부권이 특권층이나 막강한 변호인단을 구성할 수 있는 피의자에게만 인정되는 현실이 비정상이고 반헌법적이라는 지적을 통해 진술거부권이 피의자 모두가 차별 없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경향 2019.11.18.
적폐와 중간태
전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지난달 30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오바마재단 모임에서 19세 배우 야라 샤히디와 대담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순수에 대한 관념, 당신은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이고 정치적으로 항상 각성해 있다는 인식. 여러분은 이런 인식을 빨리 극복해야 합니다. 전 젊은이들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셜미디어는 이런 인식을 증폭시킵니다. 세상은 혼란스럽습니다. 모호함으로 가득합니다. 좋은 사람들에게도 결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적들도 자기 아이들을 사랑할 겁니다. 타인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면 할수록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액티비즘이 아닙니다. 변화를 가져오지도 않습니다. 타인에게 돌 던지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면, 여러분은 그리 멀리 가지 못할 겁니다.”
오바마는 퇴임 후 날카로운 사회비평가로서의 면모를 종종 보였다. 오바마는 영국 해리 왕자와의 인터뷰에서는 “사람들을 완전히 각자 다른 현실 속에 머물게 하는 건 인터넷의 단점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현재의 편견을 강화하는 정보 속에 고치처럼 갇힐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지난 몇 달간 한국 사회는 서초동과 광화문의 인파로 쪼개졌다. 각자 수십만명, 수백만명을 동원했다고 주장하면서 세력을 과시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의견 표출과 행동은 자연스럽다는 의견과 국론분열이 우려스럽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어느 광장에도 나가지 않은 채 침묵하는 다수가 있었겠지만, 광장의 구호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소음에 묻혀 그들의 속마음은 전해지지 않았다.
간혹 광화문광장을 지나면 혼란스럽다. ‘박근혜 무죄 석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주한다. 간혹 ‘문재인 탄핵’을 주장하는 이도 있고, 북한의 적화야욕을 우려하는 이도 있다. 이들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결백과 북한의 흑심 같은 것은 사실을 넘어선 믿음의 문제로 보인다. 법원이 사실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더라도,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이들도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이기에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똑같은 한 표를 행사할 것이다.
정치인들은 종종 ‘국민’을 소환한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국민’을 72회 언급했다. 그의 연설문 속 ‘국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거짓말과 범죄 의혹에 분노하고, 일자리와 소득을 모두 잃고, 문재인 정부의 능력에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다. 반면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언급한 ‘국민’은 검찰 특권에 분노하고, 선거제도 개편을 갈망하며, 문재인케어를 환영한다. 똑같이 ‘국민’이라 호명됐는데, 그 국민은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국민은 어디에나 있다. ‘조국 구속’을 요구하는 사람도 국민이고 ‘검찰개혁’을 말하는 이도 국민이다. 하지만 국민은 어디에도 없다. 적어도 정치인이 호명하는 단일한 정체성의 국민은 없다.
‘적폐’는 아이러니한 용법의 단어다.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뜻하는 이 단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 국무회의에서 “오랜 세월 사회 곳곳에 누적된 적폐를 개혁하겠다”고 하면서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은 사전에서 끄집어낸 이 단어로 개혁 고삐를 죄고 싶었겠지만, 3년도 안돼 본인이 적폐로 몰려 탄핵되고 수감되는 처지가 됐다. 뒤이은 문재인 정부는 전 정권의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고, 이 과정에서 특수부 검사들의 활약이 컸다. 이제 특수부 검사들이 적폐로 몰려 세월의 뒷길로 물러나는 처지가 되고 있다.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일소하고 좀 더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일에 시비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청산하고 또 청산해도 적폐가 남는다면, 완전한 적폐 청산이란 영원히 불가능한 게 아닌지 의구심도 든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박근혜 무죄’를 주장하는 이들을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들 역시 이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 한동일은 라틴어 문법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라틴어에는 능동태와 수동태 외에 중간태가 있다. “무엇무엇 같아요” “무엇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나는 무엇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상태”라고 한다. 한동일은 “우리 사회에서 ‘~같아요’라고 말하면 자기 주관이 없다고 비판했었죠.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날 우리 시대에 필요한 건 라틴어의 중간태라고 생각해요. ‘내가 무엇일 수도 있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그게 꼭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왜 꼭 어느 한쪽 진영에 속해야 합니까?”라고 말한다.
존 F 케네디는 단테의 말이라면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돼 있다”고 했지만, 정작 단테의 <신곡>엔 저런 구절이 없다. 케네디의 과감한 윤색은 세상을 적폐와 정의의 이분법으로 보며, 자신은 언제나 정의이고 상대는 늘 적폐라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 활용되고 있다. 백승찬 사회부 데스크 경향 2019.11.19.
갑질 장군’ 박찬주와 채명신
국립서울현충원의 장군 묘역 대신 병사 묘역을 선택한 ‘유일한 장군’이 있다. “전우들과 함께 묻히는 게 소원”이라는 그를 위해 정부는 기꺼이 규정을 바꿨다. 갓 임관한 소위부터 위세를 뽐내며 귀족처럼 행세하던 시절 장교 숙소 대신 사병 내무반에서 기거하며 함께 식사하고 화장실 청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바로 채명신 장군(2013년 작고)이다. 5·16 쿠데타 동참, 유신반대, 강제전역 등 굴곡 많은 군생활이었지만 골육지정, 솔선수범의 리더십으로 명장 반열에 오르기 충분하다.
다른 장군은 공관에 미니 골프장을 만들어 즐기면서 공관병들에게 공을 줍게 했다. 사령관 공관의 감은 “공관병이 따야 한다”는 철학을 어김없이 실천했다. 곶감을 만드는 것도 공관병이 할 일이었다. 자신의 빨래 역시 공관병에게 맡겼다. 그의 부인은 ‘사령관 계급=사모 계급’이라는 군대 속설을 충실히 이행하다가 갑질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바로 ‘자유한국당 인재 영입 1호’ 박찬주 전 육군대장이다. 공사 구분을 못하고 사병을 머슴처럼 부려먹은 장군답지 않은 장군이다.
‘장군 갑질’은 유서가 깊다. 별판 단 헬리콥터를 타고 가다 아래서 행군하던 보병이 경례 안 한다고 곧바로 착륙해 ‘쪼인트’를 깐 장군이 있는가 하면, 6·25 때 운전병이 차 시동을 꺼뜨렸다고 즉결처분했다는 ‘살인장군’ 전설도 구전된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온갖 악행과 기행을 일삼은 별들을 증오와 경멸을 담아 축약해 표현한 경구가 돈다. 바로 ‘우리 주적은 ×별’이다.
군에서는 카리스마와 영감적 동기 부여를 제시하는 ‘변혁적 리더십’,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달성하면 인정하고 보상하는 ‘거래적 리더십’을 많이 활용한다. 최근에는 인간 존중과 섬김, 솔선수범을 위주로 하는 ‘서번트 리더십’이 대세다. 채 장군은 서번트 리더십과 변혁적 리더십을 겸비했다. 박 전 대장은 어떤가. 공관 갑질 외에 그의 부대 운영 리더십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난 4일 기자회견 발언을 보면 그가 어떤 리더인지 짐작하게 한다. “군대에 평화와 인권을 주입하다보니 2년 전 세계 최강의 군대가 민병대로 전락했다”, “군대 리더십의 요체는 불합리한 것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소대 일과가 끝나면 사병들은 들어가고 소대장이 남아 뒷정리를 한다”. 일본군의 강압적 리더십과 권위주의의 냄새가 진동한다. ‘삼청교육대=극기훈련’ 발언에서는 심각한 인권 불감증도 드러난다. 탈권위주의적이고 합리적이며 인권친화적 군생활을 추구하는 신세대 장병과는 크기가 다른 볼트와 너트 같다. 둘 중 하나를 갈지 않으면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신세대 장병의 군유입은 막을 수 없으니 누가 변해야 할지는 명약관화하다.
채 장군은 군생활 동안 20여 차례 전투에서 연승한 불멸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전투의 승리는 지휘관의 책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병사들에 의해 완성된다. 하지만 병사들에게 전투 승리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 역시 지휘관의 몫이다. 채 장군은 뛰어난 지략과 섬김의 리더십으로 이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박 전 대장은 과연 병사들에게 임전무퇴의 동기를 제공할 수 있을까. 최소한 갑질을 당한 공관병만큼은 그 같은 동기 부여가 대단히 약할 터이다.
사람들은 갑질을 당하면 굴욕과 자존감의 손상을 경험한다. 이를 보상받기 위해 자신보다 취약한 또 다른 ‘을’에게 갑질을 하는 일도 잦다. ‘갑질의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구성원 간의 신뢰는 잠식된다. 이는 군대라고 다르지 않다. 장군의 갑질은 병사들의 자존감을 손상시키고 군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킨다. 지휘관을 불신하고 전투의욕을 상실한 병사들이 전쟁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갑질이야말로 최대 안보 위협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군대에 평화와 인권을 주입하는 것’은 오히려 안보 강화 요인이 된다. 군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때문이다. 박 전 대장은 군인권센터가 자신을 모욕하고 인권을 유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과 부인의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한다. 부인의 가혹행위 혐의에 대해 “부모의 심정으로 나무랐을 뿐”이라는 해명이 그런 인식을 잘 보여준다. 박 전 대장은 모르는 것 같다. 군인은 군인이기에 앞서 제복을 입은 시민이라는 것을. 군인도 시민으로서 보편적인 인권을 누릴 권리를 지니고 있다.
박 전 대장은 결국 옷을 벗었다. 그러나 군에는 여전히 ‘박찬주의 후예’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를 강압적 리더로 길러내고, 4성장군으로 승진시킨 엇나간 군문화도 온존한다. 박 전 대장의 정치 입문 좌절과 전역으로 ‘갑질 장군’ 사태는 마감됐다. 하지만 ‘장군 갑질’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모른다. 조호연 논설주간 경향 2019.11.19.
장학썬 사건 결말에 대한 불길한 예감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와 같은 문구는 너무 큰 범주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선동만 남을 뿐 구체성과 적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되도록 이런 문구를 쓰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쓴다. 그러나 이 표현이 더없이 들어맞아서 피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지난 1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부장판사 손동환)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연루된 이른바 ‘별장 성접대 사건’의 핵심 인물 건설업자 윤중천의 성범죄 혐의에 대해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공소기각 및 면소했다. 결과적으로 성범죄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한 셈이다. 재판부는 이를 검찰 탓으로 돌렸다. 검찰이 적절히 공소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는 점에선 나 역시 재판부와 같은 생각이다. 검찰은 해당 사건에 대해 ‘피해자 진술 신빙성’을 이유로 2013~2014년 두 차례에 걸쳐 불기소 처분을 한 바 있다. 김학의를 별장으로 ‘모셔 간’ 윤중천은 특수강간(성범죄) 혐의에 대해 증거 불충분 판결을 받았고, 그 결과 김학의의 성범죄 역시 함께 묻혔다.
이 사건을 다시 살펴본 이들은 입을 모아 조직 비호에 여념이 없던 검찰이 당시 사건을 다 “뭉개버렸다”고 표현한다. 주요 피의자였던 김학의는 별장에 간 적도 없고, 윤중천을 알지도 못한다며 거짓말을 했고, 윤중천은 천명이 넘는 유력인사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수시로 진술을 변경했다. 하지만 재판부가 신빙성을 따진 건 피해자의 진술뿐이었다. 얼마 전 윤중천이 현 검찰총장 윤석열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도 다시 윤중천의 입에 관심이 쏠렸고 그가 해당 언급 자체를 부인하자 그것이 곧 사실이 됐다.
피해자가 그토록 얻기 어려운 신뢰를 그가 이렇게 쉽게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모두 그에게 빚이라도 진 것일까. 합리적 의심이 든다. 재판부는 자유롭게 성을 향유한 것일 뿐 접대는 아니었다는 그의 주장이 다수의 피해자 진술과 배치되는데도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양형 이유를 밝히는 과정에서 윤중천이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 복무를 마친 뒤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구옥을 개축해 빌라로 분양하면서 사업적으로 성과를 냈으며, 이 과정에서 개발사업의 진입장벽을 넘으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장벽을 친분·인맥·압력으로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그의 범행 동기를 자세히 설명했다. 재판부의 설명을 들으면, 이 사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고 믿고 열심히 사업을 하던 무산계급 출신의 건설업자가 무리하게 신분 상승을 하려는 마음에 현직 최고 권력자들과 호형호제하다가, 자신도 특권층이라 믿고 선을 넘어버린 풍운아의 스토리 말이다.
재판을 방청한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재판부가 가해자에게 ‘빙의’라도 한 줄 알았다고 전했다. 피해자 쪽에서 공소시효가 남았다고 주장한 근거는 상해 발생 시점에 대한 해석 차이다. 피해 여성은 지속적 성폭행의 후유증으로 우울증, 불면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을 진단받고 치료받고 있는 상태로서, 피해자 쪽 변호인단은 이런 후유증 자체를 상해가 발현된 시점으로 보아 공소시효 15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윤중천은 사실 전반을 부인하다가 성관계 촬영 사진이 나오자 사실관계를 일부 인정했다. 다수의 피해자가 유사한 증언을 하고 있다. 윤중천과 김학의 등이 피해자(들)에게 요구한 행위들은 서로 신뢰하고 친밀감을 나누는 관계에서도 좀처럼 수용되기 어려운 일들이었으며 피해자들이 이전에 비슷한 일에 노출된 적이 없다는 점 등을 종합해, 지난 6월4일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수사권고 관련 수사단은 피해자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재판부가 피해자에게 요구한 합리성은 결국 피해 여성의 삶 전반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자백’과 다름없다. 반면 재판부는 가해자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그의 범행동기의 빈틈을 채워가며 장벽을 넘는 불굴의 인간상마저 부여할 정도다.
장자연, 김학의, 버닝썬을 합쳐 ‘장학썬’ 사건으로 불린 한국의 지배남성문화의 성 적폐 문제는 경찰, 검찰, 재판부가 서로를 탓하며 초라하게 마무리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라는 문구를 대체할 문장을 찾지 못한 이유다.
권김현영 ㅣ 여성학 연구자 한겨레 2019.11.19.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북한이 외부에 핵개발 의사를 처음 내비친 건 1990년 9월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교부 장관이 방북했을 때였다고 한다. 돈 오버도퍼의 책 <더 투 코리아스>(한국 번역본 ‘두 개의 한국’)를 보면, 당시 김영남 북한 외교부장은 셰바르드나제 장관이 한-소 수교 계획을 알리자 “소련이 남한을 승인하면 1961년 북-소 안보조약의 근간이 무너질 것이다. 동맹이 사문화하면 북한은 ‘원하는 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더는 얽매이지 않을 것”이라고 쏴붙였다. 북한이 말한 ‘원하는 무기’가 핵무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놀란 셰바르드나제 장관이 핵개발을 만류했으나, 북한은 3년도 채 안 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결행했다. 제1차 북핵위기의 시작이었다.
이 이야기가 생각난 건, 얼마 전 마크 밀리 미군 합참의장이 “보통의 미국인은 주한·주일미군을 보면서 몇몇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 그들이 왜 거기에 필요한가. 이들은 아주 부자나라인데 왜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가”라고 말한 것 때문이다. 미군 고위 인사가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내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도 있다’고 넌지시 압박하는 발언으로 읽히면서, 문득 주한미군이 정말 철수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도 북한의 선례를 따라 핵개발에 나서게 되진 않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남북 간 군사력은 재래식 무기만 놓고 보면 남한이 북한에 뒤질 게 없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남한의 군사력이 북한군의 88%라는 평가가 공개돼 논란이 된 적이 있지만,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엔 남한의 전력이 북한을 10% 남짓 앞선 것으로 분석된 바 있다. 미국의 군사력 평가 기관인 ‘글로벌파이어파워’(GFP)의 2019년 평가도 남한이 세계 7위로 북한(18위)을 앞질렀으며, 남한의 한 해 국방비는 북한의 40배를 넘는다.
문제는 북한의 핵무기다. 핵무기는 엄청난 파괴력 때문에 재래식 무기만으로 대처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북한이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등을 할 때마다 국내에서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핵무장이나 미군의 전술핵 재배치 주장이 거듭 제기되곤 했던 배경이다. 그럼에도 이들 핵무장론이 한때 무성했다가 잦아들곤 했던 건 미국의 핵우산 제공 약속과 이를 뒷받침하는 주한미군의 존재 때문이다.
그러나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국내 안보불안 심리가 증폭되고 이는 독자적인 핵무장론이 먹혀들 좋은 환경이 될 것이다. 남북 간 핵균형을 위해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적 대안으로 큰 반향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만약 사태가 이렇게 전개된다면, 미국은 한국의 핵무장을 그냥 두고 볼까. 아마 유엔 제재 등 강력한 징계 조처를 동원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또 한국의 핵무장은 일본을 자극해 동북아 핵도미노로 이어질 수 있다. 어떤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더라도 결말은 파국에 가깝다. 미국도 이런 상황을 결코 바라진 않을 것이다.
어떤 협상이든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상대를 어르고 달래는 건 으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시는 얼굴 볼 일 없는 뜨내기 야바위꾼의 사기 행각이 아니라면, 아무리 협상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법이다. 몇 푼 더 받아내려고 주한미군 철수까지 내비치는 건 오랜 동맹국이 차마 입에 담을 일은 아닌 것 같다. 주한미군은 논란이 일자 뒤늦게 트위터로 “미군이 무력충돌 예방과 억지를 위해 동북아에서 수행하는 안정화 구실을 충분히 설명할 의무가 우리에 있다”는 밀리 합참의장의 추가 발언을 강조했지만, 그다지 말끔하진 않다. 미국이 정식 방위비 분담금 협상장에선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끄집어낸 적이 없다고 하지만, 밀리 합참의장이 ‘외곽 때리기’로 역할분담을 한 건 아닐까 의구심도 든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 압박은 한국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우리뿐 아니라 일본에도 4배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는 미국 언론의 보도도 있었다. 미국 내에서도 과도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그렇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뜻을 굽힐 것 같진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추구하는 동맹의 ‘뉴 노멀’은 어떤 모습일까. 우려가 앞선다. 박병수 ㅣ 논설위원 한겨레 2019.11.19.
또 속는 거겠지?
내년 예산안을 정하는 정기국회가 보름도 남지 않았다. 올해도 국회 마지막 날까지 우리 사회 가난한 어르신들이 애를 태우실 듯하다. 내년에 기초생활수급 노인에게 월 10만원씩 기초연금을 별도로 지급하는 보건복지위원회 예산소위 합의가 본회의까지 무사히 통과할지 걱정돼서이다.
왜 부가급여 형태로라도 10만원을 지급한다는 걸까? 기초연금은 하위 70% 노인에게 제공된다. 당연히 최하위에 속하는 기초생활수급 노인들도 기초연금을 받는다. 그런데 다음달 생계급여에서 기초연금만큼 금액이 삭감된다. 기초연금으로 30만원 받고 생계급여에서 30만원 깎이는 방식이다. 이러면 일반 노인은 기초연금 인상분만큼 소득이 늘지만, 기초생활수급 노인은 기초연금이 아무리 올라도 최종 가처분소득은 늘 그대로이니, 오히려 노인 사이에 역진적 격차가 커진다. 이에 지난주 보건복지위원회 예산소위가 기초생활수급 노인 40만명이 사실상 기초연금 혜택에서 배제되고 있으니 10만원이라도 따로 지원하자고 합의한 거다.
지금까지 ‘줬다 뺏는 기초연금’이 계속된 근거는 공공부조의 ‘보충성 원리’이다. 생계급여는 정부가 정한 기준선(중위소득 30%)과 가구소득의 차이를 보충해 주는 현금복지이기에 기초연금 수입이 생겼으니 생계급여에서 그 금액을 공제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물론 보충성은 공공부조 복지의 기본원리이다. 그렇다고 이를 경직적으로 운용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이 발생한다. 우리나라처럼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자리 잡은 후 사회수당형 복지가 도입되는 경우이다. 일반 계층은 신규 현금복지를 온전히 누리는데 기초생활수급자들은 보충성 원리에 의해 가처분소득이 제자리에 머물러 형평성 문제가 초래된다.
이는 근래 청년 현금복지에서도 발생한다. 구직청년에게 제공하는 청년수당도 생계급여에서 그 금액이 깎여버리니 기초생활수급 가구의 청년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서울시가 올해부터 기초생활수급자를 아예 청년수당 신청 자격에서 빼버린 이유이다. 경기도의 청년 역시 청년기본소득을 받아도 같은 금액을 생계급여에서 삭감당한다. “저 친구들은 받을 수 있고 왜 나는 못 받을까. ‘가난한 건 죄일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뉴스에서 들은 어느 청년의 말이 가슴을 누른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수당형 복지가 발전하고 있다. 이 제도에 보충성 원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계층 간 가처분소득의 격차가 커진다. 우리가 무심히 방치했으나 당사자 빈곤 노인들의 외침으로 세상에 알려진 일이다. 복지가 빠르게 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꼭 풀어야 할 숙제이다. 그나마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예산소위가 전액은 아니지만 10만원을 지급하자고 의견을 모으며 부족하나마 응답한 셈이다.
애초 누려야 할 금액의 3분의 1에 불과한데도 빈곤 노인들이 본회의 통과를 걱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약속을 어기는 일이. 박근혜 정부는 기초연금을 20만원으로 올리면서 국민연금과 연계한 기초연금 감액 방식을 도입했는데, 기초생활수급 노인에겐 감액을 적용하지 않고 전액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빈곤 노인들은 이를 자신에게 기초연금 혜택이 제공된다는 의미로 이해했으나 결과는 전액 지급, 전액 삭감이었다. 어르신들이 한탄한다. 아니 그럴 거면 왜 우리에게 전액 지급한다고 말하는가?
정치권이 움직였다. 2016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기초연금을 생계급여와 별도로 지급해 최빈곤층 어르신에게 기초연금을 보장하는 공약을 발표했다. 총선 결과 민주당은 제1당이 되었고, 같은 공약을 내건 국민의당, 정의당까지 합치면 의석수가 과반을 넘었으며, 이어 대통령선거 승리로 행정권력까지 얻었다. 그래도 정부와 여당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대통령령 개정으로 해결되는 사안인데도 말이다.
포용국가 정부가 이럴 수 있나요? 올봄에는 어르신들이 청와대 앞까지 폐지 리어카를 끌고 행진하였고 언론도 절박한 노인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마침내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3월 ‘올해 업무계획’에서 ‘전액은 아니더라도 일부 금액을 지급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역시 여기까지다. 후속 조치는 없었고 내년 정부 예산안에도 관련 항목은 찾아볼 수 없다.
이제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국회.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작년에도 보건복지위원회가 10만원 지급을 의결했지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삭감해버렸던 기억 때문이다. 지난해 일이 반복되는 건 아닐까? 내년은 총선이라 선심성 지역예산 쪽지가 더 많을 텐데, 우리 10만원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르신이 자꾸만 물으신다. 또 속는 거겠지?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경향 2019.11.19.
"홍콩의 오늘은 세계의 내일"
[인권으로 읽는 세상] 홍콩의 민주주의, 우리 앞에 당도한 질문
홍콩 이공대를 완전 봉쇄한 경찰, 물러서지 않겠다는 시위대. 실탄, 최루탄, 물대포가 시민을 겨눌 때마다 한국에서는 어떤 기억이 소환되고, 사람들은 화염병과 벽돌에 어떤 간절함이 담겼던가 기억해낸다. 홍콩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졸이는 요즘 대학가를 중심으로 대자보가 붙고 훼손되는 사건도 반복되고 있다. 홍콩 민주화 시위는 이미 한국에 당도했다.
그러나 홍콩 시민과 우리는 어디에서 연결될 수 있을까? 경찰의 폭력을 비판하며 집회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하면 충분할까? 홍콩인과 중국인 사이의 대립으로 보면서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면 되는 문제일까? 한국이 '이미' 이룬 민주주의를 뒤늦게 쫓아오려는 것이 홍콩 시위의 전부일까? 연대를 위해 우리 앞에 당도한 질문을 더욱 깊이 살펴야 할 때다.
굴절되기 쉬운 목소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4일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홍콩 시위를 "폭력 범죄 행위"로 규정했다. 중국 정부는 홍콩 시위를 외부 세력의 간섭으로 간주한다. 시 주석은 "혼란을 제압해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홍콩의 가장 긴박한 임무"라며 홍콩 정부의 폭력 진압을 지지했다. 시위 진압이 주권과 안보를 수호하는 행위로 둔갑한다. 이를 국가폭력을 국가안보로 정당화하려는 정부들의 반인권적 수사로만 본다면 홍콩 시위에 반대하는 중국인의 입장을 다 이해하기 어렵다.
영국의 침략전쟁인 아편전쟁 결과, 1841년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그래서 영국에서 중국으로 홍콩이 '반환'될 때 중국은 그것을 식민지 역사의 종식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홍콩 시민들에게 '반환'은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는 다른 사건이었다. 영국은 홍콩인의 참정권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전과 빈곤의 혼란을 겪는 '조국' 중국보다 홍콩을 더 나은 사회로 여기도록 식민 통치전략은 작동했다. '하나의 민족'으로 정체화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다른 사회를 살았던 것이다.
홍콩인들이 중국으로 편입되는 과정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약속된 것이 '일국양제' 원칙이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지만 50년간 홍콩특별행정구는 자본주의 제도를 유지할 것이라는 약속. 그러나 이것은 홍콩 시민의 목소리를 굴절시키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얼마 전 방한한 홍콩 민간인권전선 라이 부의장도 말하듯 홍콩 시위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홍콩 시위를 사회주의 체제로부터의 이탈로 보는 의심과 기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많은 중국인들이 홍콩 시위를 '지체된 탈식민'과 '서양식 민주주의에 대한 맹신'에 사로잡힌 독립 요구로 간주하고, 중국 정부는 일국양제 원칙의 훼손을 경고한다. 미국은 홍콩의 운명을 쥐고 싶어 한다. 미국 하원은 이번 시위가 시작되자마자 '홍콩 인권 및 민주주의 법안'을 발의했다. 10월 하원을 통과한 홍콩인권법은 미국 정부가 매년 홍콩의 자치 수준을 평가하고 미국 대통령이 입장을 취할 권한을 부여한다. 일국 내 도시로서는 상당 수준의 자치를 보장받는 홍콩에서의 시위는 더욱 의심 당한다. 누구도 홍콩 시민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하게 하는 식민과 냉전의 역사에 홍콩 시위가 갇혀 있다.
직선제를 요구하는 홍콩 시민들
1997년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되었지만 '하나의 민족'이나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쉽게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은 홍콩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려 했고 홍콩 시민들은 강하게 저항했다. 2003년 "반역, 국가분열, 반란 선동, 중앙인민정부의 전복"을 금지하고 "외국 정치 조직 및 단체와의 접촉을 금지"하는 '국가안전법' 입법이 시도되자 대규모 반대 시위를 벌여 철회시켰다. 2007년 '민족의식 배양'과 '애국심 고양'을 의도한 '국민교육과정' 도입이 추진되자 이 또한 철회시켰다.
이번 6월 홍콩 시위는 '범죄인 인도 조례' 개정안 발의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홍콩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중국 본토로 강제 송환될 수 있다는 우려가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경찰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시민의 힘으로 9월에 법안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시위는 끝나지 않았다. 홍콩 시민들의 요구는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시위대 '폭도' 규정을 철회하라. 체포된 시위대를 조건 없이 석방하라. 경찰의 폭력 진압에 대한 독립 조사를 진행하라. 그리고 행정장관 직선제를 실시하라!
직선제 요구는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 400명의 선거인단이 행정장관을 뽑던 제도가 1200명까지 인원을 늘렸지만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지속되었다. 2014년 8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 보통선거 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후보추천위원회의 절반 이상 지지를 얻은 사람만 입후보할 수 있도록 했고 그 후보추천위원회는 기존의 선거인단과 다를 바 없었다. 홍콩 시민들에게 새로운 선거제도는 민주적 선거제도일 수 없었고 79일간 도심 점거 시위를 이어간 우산운동이 시작되었다.
'직선제 요구'는 한국의 87년 민주화항쟁과 비교되는 연결고리가 된다. 라이 부의장 역시 홍콩 시위가 한국의 80년대 운동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이 이미 이룬 직선제를, 중국 때문에 아직 못 이룬 홍콩이라는 시선으로만 봐서는 홍콩 시민들의 저항을 온전히 읽기 어렵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있고 정부가 국정교과서 단일화를 추진했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이고 심지어 그 정부는 직선제 보통선거로 선출됐다는 걸 기억하자. 민주주의를 향한 홍콩인의 열망은 한국과 동시대의 것이다.
불평등에 맞서는 자치의 요구
홍콩 시위의 배경에도 심각한 경제 불평등이 있다. 영국 식민지 시기 홍콩은 유럽과 아시아, 중국과 그 밖의 세계에서 돈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며 부를 축적해왔고, 2차 대전 직후 경공업 중심 수출가공기지를 형성하며 70년대 '동아시아 기적'의 주역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의 부는 아니었다. 1967년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며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으나 영국은 이를 테러로 규정하며 진압했다. 1986년에서 1996년 사이 홍콩의 지니계수는 급증하며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와 맞물리며 중국에 '반환'된 홍콩에서 불만은 중국을 향하곤 했다. 중국인은 홍콩에 돈 벌러 오는 '가난한 동포'에서 점차 홍콩의 부를 빼앗아가는 사람들로 여겨지게 됐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룬 중국은 홍콩의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했다. 홍콩을 시장 개방의 부작용을 줄일 적응지대로 삼는 대신 중국의 관문으로서 독점적 위치를 보장하는 정책으로 홍콩의 재계 엘리트에게 기득권 유지를 약속했을 뿐이다. 홍콩의 특수한 지위로부터 미국 역시 경제적 이득을 취해 왔음은 물론이다.
2016년 홍콩의 지니계수는 0.539로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가운데, 중국 본토에 대한 경제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홍콩의 대중국 수출 비중은 전체 상품 수출액의 57.2%를 차지하고, 2018년 11월까지 홍콩 방문 관광객 수 1위는 중국인으로 78.4%를 차지한다. 2001년 본토에서 홍콩으로 원정 출산이 시작되자 복지 자원까지 빼앗아간다는 불만과 중국인들이 와서 홍콩 물가를 올려놨다는 불만이 쌓여갔다. 사회 변화에 대한 도전이 '친중파'가 장악한 홍콩 정부와 의회에 의해 번번이 제한당해 온 상황에서 시민의 대표를 직접 뽑겠다는 요구가 자연스럽게 시위의 한가운데 자리하게 됐다.
존엄을 되찾으려는, 동시대의 목소리들
홍콩 시민들의 자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선거제도 개선에 대한 요구를 넘어선다. 그것은 인민의 존엄을 지키고 미래를 결정할 권한이 인민 자신에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바탕으로 다른 세계를 만들겠다는 열망이다. 홍콩 시위에 참여하는 대다수가 20~30대 청년들이라는 점 역시 더욱 눈여겨봐야 한다. 일자리 찾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대학 졸업도 더 이상 안정된 삶을 약속하지 않는 시대는 한국에도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삶의 위기를 맨몸으로 맞부닥뜨려야 하는 청년 세대의 저항은 세계 곳곳에서 폭발하고 있는 시위와 닿아 있다.
홍콩 반환에 관한 1984년의 중영공동성명은 "지역 내 선거 결과에 근거해" 행정장관을 임명하도록 했고, 1997년 반환과 함께 시행된 홍콩기본법은 "실제 상황과 순서점진의 원칙에 근거하여" "보통선거의 방식으로 선출하는 목표를 실현"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 규정을 들며 충분한 자치를 보장하고 있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홍콩 시민의 자치 요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일국'이 우선이라는 입장만 반복하는 중국 정부야말로 일국양제를 무너뜨리고 있다.
홍콩 중문대학교가 수행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홍콩에서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1997년 32.1%에서 2014년 8.8%로 더욱 줄어들었다. 불안정한 삶에 대한 불만과 불안은 '홍콩인'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중국과 홍콩의 상층 계급이 부를 전유한 결과 심화되는 불평등에 대한 분노는 '내지인은 천박하고 야만적이며 개화되지 않았다'는 인종화된 반중 정서로도 표출된다. 홍콩인에 대한 백색테러나 중국인의 적대도 위험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기회가 봉쇄된 채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서로를 타자화하는 인종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되고 만다면, 그 책임은 무엇보다도 홍콩과 중국 정부가 져야 할 것이다.
"홍콩의 오늘은 세계의 내일"
홍콩 시위는 "홍콩의 오늘은 세계의 내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이 말은 한국에도 고스란히 새겨져야 한다. 불평등에 맞서는 민주주의의 요구는 어떻게 스스로를 갱신할 수 있는가. 탈분단을 사유할 때 '하나의 민족'에 기댄 '일국양제'의 현재는 어떤 참조점을 주는가. 주체화의 새로운 양식을 상상하지 못하고 홍콩인이거나 중국인이거나 한국인에 머물 때 우리는 어떤 정치공동체에 이르게 되는가. 홍콩 시민이 살아내는 현재는 한국의 미래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권은 언제나 국경을 넘나들었으나 그것은 정부가 협력하거나 제도를 참조한 결과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시민의 저항을 통해 형성되는 감각을 서로 다른 나라의 시민들이 배워온 덕분이다. 홍콩을 넘어 더 많은 저항에 우리를 연결하는 만큼 우리는 우리의 내일을 얻을 것이다. 유서를 쓰며 저항을 이어가는 홍콩의 시민들은 80년 광주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내일이 홍콩 시민의 저항에 기대고 있음을 기억할 때 연대가 시작되고 우리의 오늘로 홍콩의 내일을 함께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프레시안 2019.11.20.
부동산 문제, 대통령의 안이한 인식
대통령님 안녕하십니까? 대내외의 악조건 속에서도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대통령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화요일 ‘국민과의 대화’에서는 진솔한 마음으로 국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동산 문제와 관련해서는 대통령님의 인식이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져 보여 고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혹여라도 대통령님의 인식이 옆에서 조언하는 청와대 참모들이나 고위 관료들의 상황인식을 반영한 것이라면 그들에게 다시 한번 현장을 꼼꼼히 점검하도록 엄하게 지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과 수도권의 상황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울과 수도권은 ‘일부 지역’으로 치부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2018년 9·13대책 이후 내려가던 서울의 집값이 올 6월경부터 반등을 시작하더니 11월6일 정부가 분양가상한제 실시를 발표했음에도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서울의 집값은 2018년 말의 고점을 이미 회복하였고 무주택 실수요자들은 현재 좌불안석입니다. 김의겸과 조국으로 인해 실망한 많은 촛불시민들이 ‘이 정부에서 더 이상 집값 희망고문을 당하기 싫다’며 격한 분노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가격상승은 서울의 ‘일부’ 고가 아파트에 국한된 문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동안의 가격상승으로 서울지역 아파트의 50% 이상이 이미 고가 아파트가 되어 버렸습니다. KB국민은행의 집계에 의하면 지난 9월 현재 서울아파트의 중위가격 평균은 이미 8억7000만원을 넘었고 아마도 현재는 9억원을 넘었으리라 추측됩니다. 2017년 4월 6억원이던 중위가격이 2년 반 만에 3억원 인상된 것인데 이는 매달 1000만원을 저축해야 마련할 수 있는 돈입니다. 상위 5%의 소득자도 할 수 없는 저축입니다. 반면 4억5000만원에 강북의 한 아파트를 분양받은 사람은 입주 후 1년 만에 7억원의 시세차익을 올린 경우도 있습니다.
정부 출범 초기 장하성 정책실장이 “모두가 다 강남에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실언을 하여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대다수 서민들은 강남을 ‘감히’ 넘보지 않습니다. 서민들에게 강남은 이미 ‘그들만의 캐슬’이 된 지 오래입니다. 서민들은 강북과 경기도의 적당한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싶은데 이미 이곳의 많은 지역도 서민들에게는 점점 ‘넘사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서울과 수도권은 영화 <설국열차>에서처럼 점점 ‘거주지 계급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책담당자들이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지역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강남이 아니라 서민들의 보금자리인 강북과 경기도입니다. 지금 많은 지역에서 매도자들이 추가적인 가격 인상과 계약파기를 수시로 요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인터넷에 공개된 가격을 보고 집을 계약하러 갈 때마다 추가적인 가격 인상을 요구하는 매도자들 때문에 발길을 6차례나 돌려야 했던 신혼부부의 모습이 연상되십니까? 지금 서민들은 ‘집을 처음 공고한 대로 팔아주면 고마운 매도자’라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보수언론과 시장주의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규제 때문에 역설적으로 집값이 계속 오른다고 주장하지만 모두가 사실인 것은 아닙니다. 2014년 말 이후 계속 상승 중인 아파트값은 보수정부의 지속적인 부동산 규제완화와 대출규제 완화, 그리고 계속되는 저금리로 갈 곳 없는 시중의 유동자금에 의한 갭투자 등이 주원인입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안일하면서 일관적이지 않은 대응은 타고 있는 장작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2018년의 9·13대책 이후에 8개월 정도 집값이 약간 내려갔을 뿐 대부분의 정책들은 효과가 전혀 없었습니다.
보유세와 관련하여 문재인 정부는 세율인상에도 소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공시가격 현실화에도 소극적이었습니다. 가격 안정화가 우선임에도 불구하고 임대주택등록을 늘려야 한다는 한 청와대 참모의 ‘소신’ 때문에 다주택자들이 보유한 물량도 시장에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주택 실수요자에게까지 대출을 제한함으로써 정부는 거래절벽을 만들었고 일부 현금동원력이 뛰어난 사람들만 알짜배기를 ‘줍줍’하도록 해 버렸습니다. ‘거래절벽’이 발생하면 거래량이 없기 때문에 가격이 급등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착시일 뿐입니다. 분양가상한제는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포괄적으로 시행할 때에만 집값을 안정화시키는데 몇몇 지역에 대해서만 핀셋지정하다 보니 지정지역뿐 아니라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가격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부동산정책은 타이밍도 매우 중요합니다. 일정기간 사태를 관망하는 잠재적 매수자들도 가격 상승이나 하락이 일정한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면 급속히 한쪽으로 쏠리게 됩니다. 그래서 연말이나 늦어도 내년 1월까지 가격 하락이 대세라는 신호를 시장에 강력히 보내지 않으면 이후에는 백약이 무효일 수도 있습니다.
정부가 일관되고 단호한 정책을 적시에 펴면 부동산시장은 결코 정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시장이 정부를 이기는 경우는 정부가 일관성도 없고 단호하지도 않은 정책을 펼 때입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이우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경향 2019.11.20.
조선일보는 아베의 수석대변인인가
아베 정부가 7월1일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발표한 이후 지소미아 종료일을 사흘 앞둔 지금까지 <조선일보> 보도는 한마디로 ‘목불인견’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일보는 수출규제를 “폭력적이고 야비한 수단”이라고 비판도 했지만, 일관된 주장은 우리 정부가 경제 보복을 자초했으니 무릎을 꿇으라는 것이다. “이 사태를 만든 것은 법원과 정부다. 법원은 한-일 청구권협정과 달리 일본 기업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해 일본의 반발을 불렀다. 현 정부는 이 외교 갈등을 풀기 위해 고심한 전 정부와 법원을 사법 농단이라고 수사해 감옥에 넣었다.”(7월11일 사설) 당시 미국과 유럽 언론은 물론 일본 언론조차 아베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질타했는데, 조선일보는 딴소리를 했다. 조선일보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국가나 개인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강변한다. 아베 정부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조선일보 일본어판은 한술 더 떴다. 7월4일 ‘일본의 한국 투자 1년 새 -40%…“요즘 한국 기업과 접촉도 꺼려”’를 일본어로 옮기면서 ‘한국은 무슨 낯짝으로 일본에 투자를 기대하나?’로 제목을 바꿔 달았다. 비판 여론이 일고 청와대도 문제 제기를 하자 조선일보는 이 기사를 슬그머니 삭제했다. 일본의 극우 언론 <산케이신문>은 “문재인 정권이 사실상 언론 통제를 한다”고 맞장구를 쳐줬다. 조선일보는 7월9일 사설 ‘수학여행에도 친일 딱지, 시대착오 행진 끝이 없다’ 내용 중 “일제 강점기”를 일본어판에선 “일본 통치시대”라고 썼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조선일보는 수출규제로 한국 경제가 치명타를 맞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베 정부가 8월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2차 보복에 나서자 시점까지 못박아 자동차 배터리는 1개월, 반도체는 2개월을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겁을 줬다. “한국 10대 그룹, 일 보복 한달 새 시가총액 17조 증발했다”며 주가 하락 원인이 모두 경제 보복 때문인 양 공포감을 부추겼다. 반면 우리 국민들의 자발적 불매운동은 ‘관제 민족주의’,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은 ‘관제 국산화론’으로 비하했다. “모든 일을 사전에 계획하고 준비하는 나라” “한번 각오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나라”라며 일본을 추켜세우면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일으키려는 것은 득이 되지 못한다. 일본은 한국 정부와 한국민이 어떻게 나올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다”고 ‘훈계’를 했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조선일보의 ‘희망’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 국민의 지속적인 불매운동에 아베 정부는 당황하고 있고, 수출규제로 일본 경제가 오히려 역풍을 맞고 있으며, 우리 기업들의 소재·부품 국산화 노력은 부분적으로 성과를 내고 있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조선일보가 지소미아 종료일이 다가오자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을 접견한 자리에서 “안보상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출규제를 한 일본과 군사정보를 공유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전했다. 다음날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 제목이 ‘문 대통령, 미국 면전에서 지소미아 거부’였다. 감히 큰형님 미국 앞에서 무례하게도 작은형님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얘기로 들린다.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 외교적 해법을 찾으려는 우리 정부의 노력을 조롱한다. 문 대통령이 지난 4일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아베 총리에게 대화를 제안한 것을 “구걸하는 모습”이라고 막말을 했다. 산케이신문의 악의적 보도를 근거로 “일본에서는 한국이 양해 없이 사진을 촬영해 공개했다고 한다. 국민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라고 비아냥거렸다.(11월16일 사설) 또 구체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지소미아가 종료되면 “미국이 자동차나 철강 관세 인상으로 무역 보복을 할 것이란 우려도 있다”고 주장했다.(18일 사설) 미국한테 일본처럼 한국에 보복하라는 얘기로 들린다. 비애감마저 든다.
“한국은 안보상 믿을 수 없는 나라”라며 수출규제를 한 아베 정부가 우리 정부에 “안보상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먼저 수출규제를 풀고 지소미아 연장을 요구하는 게 순리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조선일보 사설에서 아베 정부의 태도 변화 요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쯤 되면 조선일보는 도대체 어느 나라 신문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안재승ㅣ논설위원 한겨레 2019.11.20.
다시 ‘시일야방성대곡’을 떠올린다
지난 17일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강탈당한 지 114년이 되는 날이다. 1905년 11월20일 <황성신문>은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5조약 ‘체결’의 전말과 함께 발표했다. 며칠 뒤에는 <대한매일신보>도 영문(英文)과 함께 그 내용을 전재했다. 국한문 500여자로 된 이 논설은 내한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기대와 실망으로 시작한다. 황제의 강경한 거절과는 달리 ‘개돼지’만도 못한 대신들은 2천만을 노예로 만들었고, 4천년 강토와 500년 사직을 넘겼다고 하면서, 김상헌(金尙憲)이나 정온(鄭蘊)처럼 행동하지 않았다고 질타했다. 뒤이어 2천만 동포를 향해 통분을 호소한다.
‘시일야 방성대곡’을 떠올리는 것은 1905년 11월 일제가 미·영 등의 도움을 받아 ‘을사늑약’을 강요했던 때처럼 최근에도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등으로 비슷한 압박을 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소미아 문제는 일본의 수출제재가 원인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일본과 한통속이 된 듯 한국 쪽 주장을 무시한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국의 횡포에 맞서는 당국과는 달리 국내 언론은 정치인 지식인의 동맹 걱정이나 전하며 호들갑을 떨고 비아냥거린다.
당시 ‘늑약 체결’은 영·미를 제쳐놓고 말할 수 없다. 삼국간섭으로 등장한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 문제로 일본과 부딪쳤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승기를 잡았다. 영·미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도왔다. 발트함대가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한 것도 1902년 체결한 영일동맹 덕분이다. 미국 또한 일본에 우호적이어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이 극동에서 자기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두둔했다. 1905년 7월 교환된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한국을 장악하려는 일본의 시도에 미국이 자기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러일전쟁 중 1905년 4월 일본은 ‘한국에 대한 자유행동권’ 등을 조건으로 루스벨트에게 러시아와의 중재를 요청했다. 그해 5월 말, 발트함대가 붕괴되자 러시아도 루스벨트의 휴전 중재제안을 받아들였다.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진행되는 8월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공수동맹을 체결해 입지를 강화했다. 9월5일 조인된 포츠머스 조약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군사·경제적 권익을 인정했다. 일본은 이렇게 영·미·러로부터 한국에 대한 제반 권리를 인정받은 뒤 ‘을사늑약’을 밀어붙였다.
일제는 1905년 10월27일 각료회의에서 한국 보호권 확립을 위한 8개 항을 만들어 11월에 이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11월 초순 일왕의 친서를 가지고 내한한 이토는 10일과 15일에 고종을 알현해, 조약안을 제시하면서 수락을 요구했다. 16일 아침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외부대신 박제순을 공사관으로 초치해 조약 원안을 제시하고 강요했다. 이토도 이날 오후 각 대신을 그의 숙소로 ‘납치’하여 밤늦게까지 조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17일 수옥헌(漱玉軒: 지금 重明殿)에서 열린 군신회의는 수락 불가를 결정했다. 이토는 이날 저녁 한국 대신들을 다시 불러모아 체결을 강박했다.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거느린 군대가 회담장을 몇겹으로 둘러싸고 서울의 각 요소에는 야포 기관총까지 배치한 공포 분위기였다. 이토는 8대신들에게 일일이 물어 자기 뜻대로 가부를 해석해, 다섯 대신(이완용·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의 동의를 얻었다는 핑계로 외교권을 강탈했다. 신뢰를 문제 삼아 경제제재를 가하는 일본은 네번이나 수상을 지낸 이토가 한국 황실에서 행한 이 만행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거기에다 그 10년 전에는 조선왕실을 침범하여 민비를 시해하고 불태우기까지 한 만행을 기억이나 하는지.
‘시일야방성대곡’은 통분하는 백성에게 궐기를 호소하고 있다. 이를 게재한 <황성신문>은 무기정간 당했고,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그 이듬해 1월에 안병찬 등과 함께 석방됐다. 원로대신 조병세 민영환 심상훈 등의 반대상소에 이어 각계의 상소가 줄을 이었으나, 조병세 민영환 홍만식 송병선 이상철 김봉학 등은 곧 자결했다. 상가는 철시했고, 학교는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대한문 앞에서는 이준이 소두(疏頭)가 되어 상소를 올렸고, 전덕기 등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으며,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만 해도 언론은 제구실을 했다.
을사늑약’은 한 나라의 외교권을 이양하는 조약으로서는 허점이 많아 최근에는 그 조약의 성립 자체를 의심한다. 조약 원본에 조약명이 없어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차치하고, 외교권 이양의 조약치고는 그 위격(位格)도 찾아보기 어렵다. 체결을 위임받은 한국 쪽 전권대표가 없는데다 하야시 공사나 이토가 소집한 회의는 정당성이 없다. 일제는 처음부터 이 ‘조약’의 비준을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고종 또한 끝까지 비준을 거부했다. 강압에 의해 이뤄진 이 조약은 1935년 국제법학회가 ‘강박 아래 체결된 어떤 조약도 무효’라고 했을 때, 또 유엔 국제법위원회가 1963년 ‘국가대표에 가한 개인적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 무효에 해당한다’고 규정했을 때, 두 경우 모두 ‘을사늑약’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다.
‘시일야방성대곡’을 떠올리면서, ‘그때 나라가 왜 그 지경까지 되었는가’ 하고 자문해 본다. 그 이유를 일제의 침략과는 별도로 고종의 통치 역량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이토가 ‘을사늑약’ 초안을 내밀었을 때, 고종은 ‘일반 인민의 의향도 살펴야 한다’고 했다. 고종은 이때 동학농민혁명 때 표출된 인민의 힘이라면 이를 거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전에 민력을 국가동력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동학농민혁명이나 독립협회가 민권 신장을 통해 국권을 강화하려고 했을 때 고종은 의회 설립 대신 황제권 강화와 대한제국으로 답했다. 이는 인민의 역량 강화를 통해 국권을 강화하겠다는 노선과는 상반됐다. 그가 선택한 길은 지배자 하나를 흔들면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그런 구조였다. 이런 구조를 선호한 것이 제국주의 침략세력이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표출되고 독립협회 운동이 제시한, 민권을 토대로 의회를 설립하는 등 민주역량을 강화했더라면 그렇게 쉽게 나라가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상기하면서 새겨야 할 교훈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이 지금도 망국의 역사의식을 불러일으켜 주듯이, 동북아가 꿈틀대는 오늘날 우리의 처신도 어느 땐가 역사적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래서 백범도 애송했던 이양연(李亮淵)의 시를 가슴에 품는다. “눈 내린 들판을 밟아 갈 적에는,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 걸어가는 나의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만열 ┃ 상지학원 이사장·전 국사편찬위원장 한겨레 2019-11-21
기후변화에 맞서는 길
여성복업계 상품기획자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고 한다. 기후변화로 과거 데이터가 안 통하기 때문이란다. 최근 2년간 기존 틀과 전년 인기상품 데이터에 의지하는 기획이 시장에서 더 이상 안 먹혀 난리란다. 연간 사업계획대로 움직이기엔 변수도 많고 시즌 구분도 불분명해져서 지금 당장 필요한 아이템을 발굴하느라 매월 분주하다고 한다. 비단 여성복 업계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2006년도 겨울 무렵 공영방송 9시 뉴스 기자와 인터뷰를 했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지구가 더워져 물에 잠기고 태풍 같은 재난도 많아진다는데, 과연 사실인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지난 20세기 동안 4배 증가한 인구가 20세기 100년 동안 사용한 에너지의 총량은 그 이전 1000년 동안 사용했던 에너지의 10배나 증가했다. 문명은 에너지 소비와 동의어다. 소비의 와중에 20세기에 환경은 집중적으로 파괴됐다고 J R 맥닐의 <20세기 환경의 역사>를 인용해 답했다. 기자의 얼굴엔 짜증이 묻어났다. “석유석탄 에너지의 부산물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가 지구를 더 덥게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소나무가 한반도에서 사라지고, 바닷속은 아열대 어종으로 바뀌어서 밥상이…”라고 열을 내며 이야기하는데 기자가 마이크를 껐다. 기자는 “그만합시다. 아니 환경운동이 중요하긴 한데 그렇게까지 과장해가지고 현실성이 있겠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날 뉴스엔 온난화로 재난이 많아진다는 짧은 멘트만 방송되고 말았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가 지난 11월15일 1966년 이래 최악의 홍수로 수위가 1.54m에 달하면서 도시의 70%가 물에 잠겼다. 공교롭게도 마침 그때 베네치아 지방 시의원들은 페로 피니 궁에서 기후 비상사태에 대해 토론을 마치고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안을 부결시켰다. 가디안의 보도에 따르면 재생에너지에 정부 예산을 지원하고, 디젤 버스를 오염이 적은 차량으로 교체하며, 난로를 폐기하고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기 위한 조치들을 포함하는 기후변화 대처안이 부결된 지 몇 분 후의 물난리라니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이제 기후 재난이 더 이상 영화가 아니라는 게 으스스할 뿐이다.
2018년 세인트 마크 바실리카성당이 물에 잠겼을 때 수리비가 약 220만유로로 추산됐다. 이번엔 오페라 하우스인 테아트로 라 페니스도 파손됐고 무라노 섬의 성당도 심하게 훼손됐다 하니 천문학적 액수가 들 것이다. 여기뿐일까. 지난 11월13일은 캘리포니아 산불 1주기가 되는 날이다. 85명 사망으로 청구된 보험금만 약 13조원에 달한다. 한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 연방준비제도에서는 기후변화로 지난 5년간 미국 경제에 580조원의 손실이 있었고 방치하다간 금융위기를 초래할 것이라 경고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산하 연구기관인 EIU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경제성장률이 기후변화로 향후 30년간 3% 하락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제 기후변화는 세계 경제를 위협하는 강력한 요인으로 자리잡았다. 이 위협적 현실에 과학자들이 지난 11월6일 행동에 나섰다. 153개국 1만1000여명의 과학자들은 즉시 기후위기에 대응할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인류가 막대한 고통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이미 닥친 기후위기가 과학자들의 예상보다 가속화하고 있다”며 “환경과 인류의 운명에 대한 위협이 예상보다 더 심각하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EU에서는 2020년 기후변화 문제 대응에 21%의 예산을 책정했고, 이낙연 총리도 제5차 국토종합계획안에서 기후변화 문제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새로운 상품이 시장의 지지를 받으면 기업은 돈을 번다. 이 세금으로 정부는 많은 활동을 펼친다. 세상에 유익한 화두를 던지고, 위협을 미리 알리고, 인식을 바꿔온 환경단체는 어떤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경제성장과 상관없이 여전히 광야에서 허덕이고 있다. 이제 후원의밤 시즌이다. 기후변화에 맞서는 길, 멀지 않다.
이미경 환경재단 상임이사 경향 2019.11.21 21
‘1 대 99’ vs ‘20 대 80’
기억하기 좋은 11월11일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한겨레 칼럼에서 꽂힌 ‘숫자 20’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강 교수는 “불평등의 담론을 1 대 99에서 20 대 80으로 옮겨야 한다”며 진보의 사고·행동 틀을 혁명적으로, 정교한 정책으로 바꿀 때가 됐다고 했다. 진보를 향해 “거대담론에 능하고 민생과 각론에 약하다”고 되짚고, 불평등 문제의 핵심은 “내 몫을 줄일 뜻 없는 상위 20%”라고 지목했다. 대기업 정규직도 상당수가 그 속에 들어간다. ‘자본 대 노동’으로 가르는 1980년대식 이분법이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민생에 맞지 않고, 99% 내부에 파여가는 불평등에도 눈을 돌리자고 한 것이다. 다시 꺼내든 담론은 타이밍이 절묘했다. 이른 송년모임에서 대학 친구가 ‘20’을 불러내고, 회사를 떠난 동기도 주고받던 술잔에 이 숫자를 부었다. 누가 시작하면 또 한 순배 돌고 마는 ‘조국 대화’ 끝에 나온 말이다.
대한민국 부(富)의 선을 그어본다. 최신 통계의 기준연도가 갈리지만, 상위 1%는 근로·사업·금융·임대 소득을 다 합쳐 한 해 평균 3억9051만원(2017년)을 벌었다. 근로소득 상위 1%(18만55명) 평균선은 2억6417만원이다. 지난해 종부세를 부과받은 공시지가 9억원 이상 주택 보유자는 46만6000명(0.9%). 종부세 주택의 82.5%는 서울에, 서울에선 70.2%가 강남3구에 몰려 있다. 배당·이자 소득에 물려 연 2000만원의 금융소득종합과세를 내는 9만명의 금융자산은 평균 9억7600만원이다. 어림하면, 상위 1%는 종부세를 내고 금융자산 10억원에 4억원의 연수입을 올릴 정도일까. 정부가 21일 발표한 상위 20%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980만원이다. 지난해 임금근로자 상위 20%의 연봉 하한선은 5062만원이다. 8000만원 이상 연봉자도 105만명이 잡힌 임금 피라미드 위쪽엔 여러 사(事, 士, 使, 師)자 전문직과 교수, 대기업·금융사 임원이 자리한다. 언론인과 평균연봉 6487만원인 대기업 정규직도 꽤 많은 수가 20% 그룹에 속할 것으로 추산된다. SKY 대학생 넷 중 셋이 학종·정시를 선호하는 상위 20%에서 나온다. 이자·배당 소득의 97%, 주식 양도차익은 96%, 부동산 양도차익의 78%는 상위 20%에서 불로소득의 낙수(落水)가 끝난다. 이 땅에서 불평등과 계층 이동의 경계선이 20 위아래로 가장 깊게 파이고 있는 셈이다.
20도 억울해할 수 있다. 업(業)을 이루고, 힘들게 경쟁하고, 집에서 아이들 숙제·진로까지 챙기는 막후의 버거움을 모른다고! 왜 공부하냐고? 왜 출세하냐고? ‘개천의 용’이 된 1세대·창업자일수록 누릴 자격이 있다는 목소리는 커진다. 하늘과 헌법이 부여한 그 기본권을 가타부타할 것은 없다. 문제는 그 뒤다. 잘나가는 사람들도 말이 끊기고, 인지부조화를 호소하고, 곧잘 숙연해지는 세 글자가 있다. ‘대물림’이다. 입시귀족학교를 향해 ‘비상수로’가 뚫려 있는 개천에서, 3루에서 태어난 아이가 스스로 3루타를 친 줄 아는 세상에서 용이 나올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80’의 다른 이름은 청년, 비정규직, 자영업, 중소기업, ‘82년생 김지영’이다. 꿈과 기회를 사재기할 수 있는 세상은 바로잡아야 한다.
조국·나경원·김성태…. 진입 장벽이 높은 교육·채용의 특권과 불평등이 거론될 때 소환되는 이름들이다. 1과 20의 대물림 보호막부터 하나씩 걷어야 한다. 답은 법과 돈과 소통이다. 시소 타는 학종과 정시보다 지역(기회)균형선발이 넓어지고, 평당 1억원을 돌파한 주택시장에 보유세를 처방하고, 건강보험 최고상한액을 높이고, 공정하게 경험할 공공인턴을 늘리면 기울어진 세상이 조금 더 평평해지지 않을까.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깔때기’인 돌봄의 질을 높이고, 정규직 노조 대표가 비정규직 지회장을 친국하듯 무릎 꿇리는 노동 내부의 갑질도 없어져야 한다. 진정한 변화는 20%가 문제를 인정할 때 일어날 수 있다. 아니면, 위험해진 공동체가 나서야 한다.
80이 볼 땐 서로 도긴개긴 닮아가는데, 20%가 1%를 공격하며 피난처 삼는 세상은 위선이다. 조국사태가 댕긴 불쏘시개는 검찰을 넘어 교육·노동·조세 판의 불평등까지 겨눠야 한다. 답을 줘야 할 정치는 오늘도 혼미하다. 20대 국회는 ‘불명예 폐장’ 목전이고, 대통령은 반환점을 돌며 만난 국민과 소통의 갈증을 풀지 못했다. 제1야당 대표의 국회 단식은 파국의 먹구름만 키운다. 뜬금없고 가볍고 “지금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란 말이 맴돌 뿐이다. 바둑에서 한 수가 갖는 집의 가치는 둘수록 작아진다. 모두들 지금도 늦었다는 뜻이다. 시장골목, 먹자골목, 인력시장을 가보라. 찬 바람이 스산한 민생고는 거기에 있다. 급한 것은 민생이고 1에서 20으로 불평등의 시선을 옮기자는 글에 ‘좋아요’ 하나를 누른다. 계층 이동과 꿈이 살아있는 사회를 위해서. 80의 아우성을 1도 20도 묻어버리는 세상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기수 논설위원 경향 2019.11.21
전쟁산업을 대변하는 미국 정부
철들 무렵 의문이 생겼다. 이 땅의 백성은 미국과 적대관계도 아닌데 왜 1945년 8월 미군은 남한에 점령군처럼 진주해서 정통성 있는 상해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이 땅을 통치한 것일까.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지사들은 왜 개인자격으로 중국에서 돌아와야만 했을까. 의문을 풀기도 전에 관제교육을 통해 ‘빨갱이’를 양산하는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비인간적 체제이므로 지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북한은 악의 축이다!라고 뇌에 각인되었다. 나이를 먹은 이제야 그 부조리의 전모를 파악하게 되었다.
당시 한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에 있었다. 미국의 개입으로 점점 선명해져 가는 좌우의 이념은 애국지사들에게는 단지 독립의 방식에 불과했다.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립운동의 부차적 요소였던 이념은 미·소에 의해 남북분단의 주요인이 되고 말았다. 미국은 공산주의의 원조인 소련을 봉쇄할 목적으로 남쪽에 군대를 투입했다. 자신에게 대든 일본을 분할 통치하기보다는 병참기지로 만든 미국은 한반도를 자본주의 이념수호의 최전선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정전 후 북쪽에는 소련군과 중국군이 차례로 물러갔음에도 미국과 동맹이 된 남쪽에는 왜 미군이 여전히 주둔하고 있을까.
나는 그 해답을 자크 파월이 쓴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박영록 옮김)에서 확인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본의 세력이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최근 미국의 6조원 미군주둔비 인상 주장이다. 이에 대해 김홍균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한·미 간 가치와 신뢰에 기반한 동맹은 점점 사라지고 돈과 거래만 남은 관계로 가는 분위기”라고 한 것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아니 원래부터 남북분단의 진정한 수혜자는 기업자본,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의 군수산업이다. 애초에 한반도는 미국이 역사·문화적으로 존중하는 지역이 아니었다. 오직 자본의 이익을 지키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니 갈등과 대립이 길수록 좋은 것이다.
전 세계 800여곳의 미군 주둔지를 보라. 주요 석유산지나 수송로에는 반드시 미군이 있다.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지역이나 분쟁 속에는 언제나 미국의 존재가 있다. 기축통화 달러를 맘대로 찍어내는 미연방준비은행은 정부기관이 아닌 사기업이다. 돈으로 돈을 버는 기업이 움직이는 나라가 미국이다. 자크 파월은 질문을 던진다. “미국은 어째서 파시스트 정권과 기타 독재정권에 놀라울 정도로 관대함을 보이는가”, “미국은 왜 끊임없이 전쟁에 관여하고, 그토록 자주 전쟁을 일으키는가”. 전자는 자신의 책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후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행보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세계대전 동안 IBM, ITT, 포드, 제너럴모터스 등 미국기업은 나치스의 보호 아래 독일에 자회사를 세워 전쟁물자를 생산했으며, 미국의 은행들은 자금을 지원했다. 전쟁터에서 스러져간 양 진영의 힘없는 병사들은 이들 기업의 이윤기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의 유대인이나 전쟁포로들로부터는 노동력을 착취했다. 피 묻은 전쟁범죄의 수익으로 미국의 대공황은 완전 회복되었으며, 축적된 자본은 세계 경제의 패권을 차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일본의 전범기업에 한 것처럼 이들 대부분은 면죄부를 받고, 지금도 굴지의 다국적기업으로 활개를 치고 있다. 미국의 석유회사들 또한 전쟁을 통해 특수를 누렸으며, 그 독점적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동서냉전 동안 누가 돈을 벌었는지 생각해 보라. 수많은 미사일과 핵무기를 누가 제조했겠는가.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전쟁물자 생산으로 이익을 얻는 집단이다. 그러니 차라리 트럼프는 ‘순수’하다. 부동산재벌인 그가 거리를 두고 있었던 미국의 기간산업, 즉 수많은 유권자를 먹여 살리는 군수산업의 손을 들어 재선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 산업의 두 기둥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다. 미국은 유럽과는 달리 짧은 역사에서 사회경제적 평등을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다. 평등 없는 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를 말한다. 기업자본의 수익시스템이다. 나치 독일이 제공했던 값싼 노동력, 노조탄압, 노동이익의 무력화는 지금도 행해지는 자본주의의 옵션이다. 지옥 같은 전쟁을 부추기며 죽음을 매개로 얻는 이익은 이 모든 불편함마저 넘어선 알짜배기 산업이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의 옷을 입었지만, 속으로는 이처럼 자본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 미국의 정치다. 그러니 백성의 울부짖음을 짓밟고 성주 소성리에 불법 배치된 사드를 만든 록히드 마틴은 그동안 이 땅에 납품한 전쟁물자로 얼마나 많은 돈을 챙겼겠는가.
원익선 원광대 정역원 교무 2019.11.22.
공원에서 군자를 만나다
한 버스킹 공연에서 공연 분위기를 망치는 이들을 온화하게 대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분노하는 사람들보다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에 주목해야 함을 일깨워주었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큰일”에는 분개하지 못하면서 “작은 일”에는 법석을 떠는 소시민성에 대한 풍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시를 달리 해석하려 한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그럴 만하니까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일에서 “공정하지 못함” “합리적이지 못함” “인간답지 못함”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작은 일들의 연쇄와 누적을 통해 자신이 이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함을 학습한다. 그 결과 작은 일에 대한 짜증은 “공분”이 된다.
영화 <조커>에서 가장 수긍이 간 대사는 “왜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무례한 겁니까?”였다. 모욕을 당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조커는 인간성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조커의 범죄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분개에는 동의한다. 나 또한 같은 질문을 던져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그러는 걸까?
무례함을 공격하는 무례함의 악순환
흥미로운 것은 내게 무례한 사람들 또한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다. 내가 실수로 깜박이를 급하게 켜며 차선을 바꾸자 뒤차의 운전자가 다가와 창문을 내리고선 눈을 부릅뜨며 “운전 똑바로 해!”라고 소리친다. 나는 ‘좋게 말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례한 걸까?’라며 분개한다. 하지만 나한테 소리를 지른 사람도 생각한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저렇게 배려심 없이 운전을 하는 걸까?’ 결국 모두들 작은 일에서 인간성 타락의 증거를 발견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짜증을 내지만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 ‘저런 인간들 때문에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지!’ 작은 일에서 큰 의미를 발견하는, 짜증이 순식간에 공분으로 발전하는 이러한 사태 속에 무례함이 증폭되는 악순환이 이루어진다. 상대방은 인간성 타락의 증거이다. 과장하자면 그는 도덕적 범죄자이기에 존중받을 자격을 갖지 못한 자이다.
이렇듯 무례함의 증가는 공분의 증가와 비례한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도덕적 엄격함과 도덕적 타락이 같은 동전의 다른 면이라니.
더구나 사람들은 이제 작은 일, 큰일 가리지 않고 모든 일에 분노한다. 최근 조국 전 장관을 둘러싼 논쟁에서 일부 논자들은 “도덕주의 정치”를 비판했다. 이때 도덕주의란 상대방을 악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도덕에 집착하는 몰도덕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비판 자체가 “정신 좀 차려!” 식의 도덕적 훈계였다.
사실 모든 비판은 도덕적 비판이다. 비판 속에는 공정하지 못함, 합리적이지 못함, 인간답지 못함,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함에 대한 분노가 포함돼 있기 마련이다.
무례함을 공격하는 무례함, 도덕을 비판하는 도덕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불신의 세계에서 그 같은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군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최근 군자 한 명을 만났다.
공원에서 통기타 동호회 멤버로 보이는 중년 여성 세 명이 버스킹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던 나는 자리를 잡았다. 준비 때문에 공연은 지체되었다. 내 곁에는 주최 측인 동호회 회원이 앉아 있었고 우리는 기다리는 동안 한담을 나누었다. 그때 일군의 중년 남성들이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 “에이, 귀만 버렸네. 명 짧은 사람 기다리다 죽겠네”라고 투덜대며 자리를 떴다. 나는 그 소리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들이 애써 준비한 자리에 저렇게 재를 뿌리다니! 그런데 내 곁에 있던 동호회 회원이 웃는 얼굴로 답했다. “저는 명은 짧아도 좋은 음악은 끝까지 듣겠습니다.”
나는 생각했다. 참으로 군자가 아닌가. 그분은 어찌 저리 온화할 수 있을까? 한 줌의 관객들과 책임감 때문에 화를 자제한 것인가? 나는 앞으로 분노하는 사람들보다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에 주목해야겠다. 그들은 판을 깨는 사람이 아니라 판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나는 묻고 싶다. 그 작은 판이 왜 그렇게도 중요한가요?
심보선 (시인·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시사인 201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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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절대군주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9일에 한 ‘국민과의 대화’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자면?
국민 패널 300명 가운데 한명으로 이날 행사에 직접 참석했던 ㄱ씨에게 물었다. 그는 휠체어에 탄 채 자신이 지목되길 기다리며 120분 내내 손을 들었던 한 남성이 생각난다고 했다. 방송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지만 몸이 불편한 그 남성은 동행자의 손을 맞잡고 계속 손을 들었다. 하지만 끝내 질문 기회는 그에게까지 오지 않았다. ㄱ씨는 “진행자들이 다양한 이들에게 질문 기회를 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덩치가 크고 소리를 크게 지르는 남자들이 주목을 더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옆에서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보조진행자 허일후 <문화방송> 아나운서가 공식 행사가 끝난 뒤 ㄴ씨가 가져온 초록색 쪽지를 받아, 나중에 대통령에게 전달할 국민 질문지 맨 위에 올려놓았다.
생방송으로 진행된 ‘국민과의 대화’는 간절함을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 많았다. 대통령에게 한마디라도 하고 싶어서 시민 300명은 다른 사람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들었다. 질문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그만하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ㄱ씨는 “다른 사람이 말할 때 이를 경청하기보다, 시간이 흘러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할까 조바심을 내는 마음들이 많이 느껴졌다”고 했다.
방송을 지켜본 한 청와대 관계자는 이렇게 평했다. “한국 사회가 수평적 조정 능력은 부재하고, 수직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위계적 사고가 강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검찰개혁이나 남북관계 등에 대해 대통령에게 따져 묻는 질문도 있었지만, 각자 해결 못 한 민원들을 하소연한 경우가 꽤 보였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 자리까지 왔겠냐마는, 저마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지역사회나 그 문제를 두고 머리를 맞대야 할 곳에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왔다는 얘기였다. 이 점은 광화문에서 집회하고 청와대까지 행진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문재인 정부의 인기 상품인 청와대 국민청원의 구조도 비슷하다. 국회에서 입법을 통해 해결하거나, 사법부의 올바른 판단을 기다려야 할 사안들이 국민청원으로 올라온다. 때때로 행정부 권한을 넘어서는 청원에 청와대가 답하기도 한다. 대통령을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왕조시대 군주처럼 보는 시각이 여전하다는 얘기다.
4차 산업혁명이 거론되는 21세기 산업선진국에서 왜 이런 상황이 펼쳐지는 것일가? 한 미디어 전문가는 “국민과의 대화가 팬클럽 행사처럼 될 수밖에 없었던 건 신청을 받아 참석자를 정하면서부터 예고된 일이다. 뭔가 기대를 가진 사람들이 신청할 수밖에 없고 이들의 절박함이 전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정치 부재’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거 때가 아니면 내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어줄 국회의원, 지방의원을 찾기도 쉽지 않다. 민원을 넣고 지난한 조정과 협상 과정을 지켜보는 것보다, 힘센 권력에 줄을 대는 게 더 쉬운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국민과의 대화가 있기 하루 전날, 한 할머니가 찾아왔다. 할머니는 전화를 걸어, 기자를 꼭 만나야겠다고 했다. 춘추관 앞 카페에서 만난 할머니는 자신이 너무 억울하다면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내더니 엄지손가락을 들어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엄지손가락이 누구냐’고 물으니, 할머니는 이름을 말하는 대신 자신의 손바닥에 ‘문재인’이라고 썼다. 자신에게 남은 것은 대통령을 만나는 방법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문 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에 온 이들을 보고 “작은 대한민국”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진짜 작은 대한민국을 보았다면, 사연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고, 상처받은 국민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풀뿌리 정치, 건강한 정치를 뿌리내리게 하는 노력이다. 이제 2년 반도 남지 않았다. 핵심은 지속가능성이다.
이완 정치부 기자 wani@hani.co.kr 한겨레 2019.11.24
‘친일 부역’ 이어 ‘반개혁’…그들과의 백년전쟁
판결은 때로 한 사건을 통해 시대의 진면목을 들춰낸다. 최근 대법원이 ‘문제 없다’고 판단한 <백년전쟁>은 2012년 11월 유튜브로 처음 공개된 이래 400만뷰 이상 기록한 화제작이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미 중앙정보국(CIA) 기밀문서 등 국내외 자료까지 찾아내 이승만·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조명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저항세력’과 부역했던 ‘협력세력’ 사이엔 아직도 전쟁이 진행 중이라며 ‘백년전쟁’이라 이름 붙였다. 좀 거칠긴 해도 굴곡진 100년사를 쉽게 이해하는 데는 그런대로 유용한 잣대를 제공한다.
‘백년전쟁’이 법적 심판대에 오르는 과정 자체가 ‘전쟁’이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준다. 방송 4개월 만에 친일 협력세력 후손인 한국방송 이사장(이인호)이 사회 원로 자격으로 역시 협력세력의 딸인 대통령(박근혜)과 만난 자리에서 “역사 왜곡”이라며 “국가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한다”고 부추겼다. 이틀 뒤부터는 또 다른 친일 협력세력 후손들이 소유한 언론들이 달려들었다. 미국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처럼 패러디 기법을 활용했다는 작품에 현미경을 들이대며 지엽적인 표현 하나하나를 따지고 들었다.
결국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징계하고 검찰이 기소까지 했지만 소송전은 협력세력의 참패로 끝났다. 서울중앙지법은 검찰이 유일하게 허위라며 기소한 사자 명예훼손 혐의조차 인정하지 않고 지난해 8월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역시 방송통신심의위 제재에 대해 “외국 정부의 공식 문서와 신문기사 등 자료에 근거해 중요 부분이 객관적 사실과 합치된다”며 취소하는 게 맞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이 정권 정치기구가 됐다’는 등 억지 주장에도 작은 전쟁은 ‘사필귀정’으로 막을 내렸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역시 의도치 않게 친일 협력세력의 민낯을 까발렸다. 아무 근거 없이 ‘전략물자가 북한 등으로 흘러갔다’고 보도해 한-일 갈등 초기 일본에 수출규제의 핑곗거리를 제공한 것도 이들이었다. 그래놓고 아베 정부 대신 우리 정부를 겨냥해 ‘경제 보복을 자초했다’고 비난했다. 지소미아 종료의 조건부 유예로 두 나라가 파국을 피한 뒤에도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일본의 유력 언론(아사히)마저 일본 정부에 ‘이성적 사고로 돌아가 수출규제를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판에 우리 정부의 ‘외교적 완패’ 운운하며 사실상 아베 편을 들었다.
따지고 보면 80년 전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강제징용·징병에 동참하라고 꼬드겨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 ‘부역’한 것도 이들이다. 민족 앞에 석고대죄해도 모자랄 판에 거꾸로 ‘배상’하라고 판결한 대법원과 뒤늦게나마 우리 국민 지키겠다는 정부를 헐뜯었다. ‘일본은 한번 각오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나라’라며 ‘힘이 부족하면 굴욕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라도 있어야 한다’고 조롱했다. 숨어 있던 ‘친일 부역’ 유전자가 되살아난 게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망동, 망언이다.
최근에 나온 ‘장자연 사건’ 수사 외압 관련 판결은 이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우울한 증거다. ‘조선일보를 대표해서 말한다’는 사회부장 한마디에 경찰의 수사 책임자는 수사기밀도 다 건네줬다. 판결문은 ‘(사회부장의) 협박은 허위가 아니’라며 사실로 인정했다. 한 젊은 여배우를 죽음으로 몰아간 성착취 사건이 왜 묻힐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적반하장으로 진실을 파헤치는 언론들을 고발했다. 판결에 따르면 알면서도 거짓 고소를 한 것이니 똑떨어지는 무고죄에 해당한다. 피고소인 조사까지 마쳤다니 사건이 곧 검찰로 넘어갈 것이다. 사법농단 사건에서 보듯이 전직 대통령 둘과 직전 대법원장까지 줄줄이 구속한 ‘윤석열 검찰’도 언론 권력 앞에선 꼬리를 감췄다. 이번에야말로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친일 협력 언론은 민족과 국민 앞에 한번도 제대로 과오를 인정하거나 사죄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정치·경제·사법 분야까지 아우르는 기득권 동맹을 이끄는 ‘숨은 권력’으로 군림하며 이제는 ‘반개혁’에 앞장서고 있다. 내년이면 100년을 맞는 이들의 반민족·반민주 과거사를 국민들에게 다시 알리고 청산하기 위해 지난 9월 ‘조선 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이 출범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한겨레 2019-11-25
한국, 인간이 ‘벌레’가 된 나라
가끔 격차가 최근에 생긴 문제인 양 논해지기도 하지만, 사실 사유재산 본위의 사회인 만큼 애당초부터 있었다. 6·25 직후의 사회에서 극소수의 부호나 고위직 관료와 절대 빈곤 상태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한국인 다수 사이의 격차 폭은 오늘보다 더 컸다. 1964년에 개봉된 김기덕 감독의 유명한 영화 <맨발의 청춘>을 기억하는가? 이 영화가 그린 것은 저잣거리 폭력배 서두수와 고위 외교관의 딸 요안나 사이의 꿈같고 동화 같은 사랑이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은 신분과 문화 차이라는 벽을 넘어 극적으로 한 몸이 되지만, 끝내 현실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임을 깨닫고 동반자살하고 만다. 그러니 반백년 전 한국인의 집단의식 속에서는 부호와 빈민 사이의 벽이란 저승으로 가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을 처음 찾은 1991년에는, 격차의 존재는 뚜렷했다. 값이 계속 오르기만 하는 내 집을 갖고 있는 중산층과 전세, 월세방 신세인 노동자가 각각 체험하는 현실은 천양지차였다. 1980년대 말은 민주화 투쟁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땅값 급등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국제결제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1988년과 1991년 사이만 해도 한국의 실질 부동산 가격은 약 40%나 깡충 뛰었다. 특정 지역에 땅·집을 가진 사람은 1980년대 말부터 자율화된 외국 관광도 즐길 수 있는 상대적 부자가 됐지만, 가진 게 없는 무주택자들의 억울함은 커지기만 했다. 내가 그때 만난 서울 성북구 서민들 사이에서는 ‘강남 복부인’이나 ‘압구정동 오렌지족’들은 이질감과 묘한 질투가 섞인 원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도 1990년대 초반의 한국은 오늘날과 여러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달랐다. 격차는 뚜렷했지만 그 누구도 그 격차가 영구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고속성장 중인 한국에서 그 당시에는, ‘열심히만 하면’ 적어도 중산층으로의 편입은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실제로 그때만 해도 내가 다녔던 고려대학교에서 만난 상당수의 학생은 농어촌이나 중하층 출신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길 생각도 없었다. 내가 고려대에 온, 거의 첫날에 이 학교는 농민들이 소를 판 돈으로 자식 교육을 시킨 ‘우골탑’(牛骨塔)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자기비하가 아닌 긍정과 자랑으로 들렸다.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대놓고 돈을 인생의 목표나 최고 가치로 내세울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의식이 있는’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노동야학에서 가르쳤던 그런 시절이었다. 분명 이미 격차 사회였지만, 격차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요소들이 아직 존재했던 것이다.
1997년 이후의 신자유주의 도입은 이 요소들을 제거하고 말았다. 통계상의 성장은 한동안 지속되긴 했지만, 비정규직이 된 저임금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잘 오르지 않아 신분 상승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 ‘질 나쁜 성장’이었다. 20년 전에 약 54%였던 주택의 자가점유율은, 오늘날에 접어들어도 57%밖에 되지 못한다. 즉, 무주택자 대부분에게 ‘내 집 마련’이 이미 비현실적 꿈이 됐단 이야기다. 늘 있어온 격차는, 이제 고정되고 말았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가난은, 경제·사회적 신분이 거의 세습되기에 이른 오늘날 사회에서는 그저 하나의 태생적인 조건으로 인지되는 셈이다. 가난이 전통사회의 양반이나 천민 신분처럼 태생적인 조건이 됨과 동시에 돈에 대한 욕망은 노골화됐다. 2000년대 초반에 흔해진 “부자 되세요!”와 같은 인사말은, 1990년대 초반에는 거의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기 돈 내고 노동야학에서 가르쳤던 이야기는 이제 그야말로 ‘먼 과거의 전설’이 되고, 오늘날 많은 대학 ‘교수님’들은 특강 요청을 수락하기 전에 강의료 액수를 꼼꼼히 확인하고, ‘싼’ 강의를 사양하기도 한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도 되는, 돈 욕심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사회가 된 것이다.
부끄러워해야 하는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돈 욕심뿐만이 아니다. 돈 없는 사람에 대한 노골적 멸시도 이제는 더 이상 패륜이 아니고 그저 일상일 뿐이다. 한국에 갈 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신조어들을 듣게 되면 아연실색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휴거’(휴먼시아, 즉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지은 임대주택에서 사는 거지), ‘빌거’(빌라에서 사는 거지), ‘임거’(임대아파트에서 사는 거지) ‘월거지’(월셋집에서 사는 거지), ‘전거지’(전셋집에서 사는 거지), ‘엘사’(LH, 즉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지은 주택에서 사는 사람), ‘이백충’(한달에 200만원 이하의 소득으로 사는 벌레 같은 사람) 등등. 이와 같은 끔찍한 차별주의적인 표현들이 초·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최근에 몇 번이나 한국에서 직접 보고 들었다. 자가 주택이 없고 소득이 적은 사람을 ‘거지’나 아예 ‘벌레’에 비유하면서 습관적으로 멸시하는 것을, 아이들이 이제 어린 시절부터 자신도 모르게 배우고 익히며 내면화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한국에서 더 이상 단순히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부와 빈곤을 세습하
게 만드는 제도만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오늘날 한국인이 마시는 ‘공기’와도 같은 것이다. 조선시대 사회에서 양반 도련님이 나이 많은 노비한테까지 반말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듯이, 오늘날 한국에서 동류와 경쟁을 벌이면서 윗사람만 보고 사는 것, 경쟁에서 패배했거나 패배할 것 같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 등등은 이미 거의 당연지사다.
최근 몇년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한국 영화인 <기생충>은 이 상황을 영화의 언어로 핍진감 있게 잘 그려냈다. 기택의 가족도 문광과 근세 부부도 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약자·서민들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협력이나 연대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불가능하기만 한 ‘신분 상승’을 목표로 두고,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혈투 같은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위에 군림하는 주인 가정의 가장이나 그의 어린 아들에게는 가난한 기택의 가족 전원은 다름이 아닌 ‘몸 냄새’로 식별된다. 거의 태생적인, 아무리 씻어도 씻겨지지 않는 ‘빈곤의 냄새’는 새로운 ‘열등 인종’으로서 빈민의 징표가 된다.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빈부 차별이 과거의 반상 차별을 넘어 이미 거의 인종주의적 차별만큼 철저해졌다는 이야기다.
돈을 덜 버는 사람이 인간도 아닌 벌레, ‘이백충’으로 불리고 돈이 전지전능한 신이 된 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다. 이 시점에서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 서로 조금씩 정견을 달리한다 해도 ― 만인 평등, 만인 존엄, 빈민을 불가촉천민으로 만든 사회·경제적 인종주의에 대한 반대로 같이 뭉쳐 함께 싸울 필요가 있다. 돈이 없으면 인간이 아닌 벌레로 취급받고, 돈이 많으면 ‘우월한 인종’으로 대접받고, 같은 약자끼리 연대 아닌 상호 경쟁으로만 일관하는 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2019-11-25
강남 부동산에 대처하는 방법
여러 차례의 정부 대책에도 부동산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원래 자본주의 경제에는 자산시장의 극단적 혼란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부동산이 특히 중요한 자산이고 민생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정부는 부동산 문제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 전체가 힘을 합쳐 종합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우선 강조할 것은 서울 강남권의 시장 안정화 방안이다. 노무현 정부 시기만 하더라도 강남권은 ‘버블 세븐’으로 묶여있던 국지적 시장이었다. 그러나 2008년 세계경제 위기를 지나면서 강남권은 부동산시장의 중핵으로 우뚝 성장했다. 부동산의 투자상품화는 더욱 진전되었고, 강남권 부동산이 뚜렷이 부각되었다. 강남권 시장의 파급력이 커지면서 서울권 시장 전체의 금융화가 진전되고 있다. 금융시장이 갑자기 붕괴하는 시기가 있듯이, 부동산시장도 붕괴할 수 있다. 강남권 시장에 위기가 오면 국민경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정부가 강남권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내놓은 카드는 분양가상한제와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이다. 그런데 이는 재건축 주택 공급을 감소·중단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벌써 시장 주변에서는 내년 4월 이후 강남권의 신축주택 공급이 제로상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공급을 확보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정부가 검토하고 있으리라고 보지만, 신축·구축 주택 모두를 포함한 한시적 양도소득세 감면 특례, 누진적 보유세 인상 시나리오를 세밀하게 준비해두어야 한다.
직접 규제, 금융·세제 조치를 결합해 수요를 조절하는 한편으로, 재건축 공급량을 늘리는 방안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부동산의 핵심 가치는 입지이다. 신도시 건설로 강남권 수요를 충족하는 공급량을 맞추기는 어렵다. 강남권은 국내에서의 챔피언 시장이면서, 세계도시 네트워크의 일환으로서 경쟁력을 지닌 도시권이기도 하다. 강남권에 필적하는 권역에서 공급량을 늘려야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다. 입지가 좋은 곳에 초고층 재건축을 추진해야 한다.
물론 용적률 증가의 이익이 기존 소유자에게 독점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재건축 아파트 수요를 폭증시킬 수 있다. 초고층화 재건축을 추진하되 늘어나는 용적률의 일정 부분을 국유자산으로 흡수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더 큰 이익을 노려 버텨 보자는 곳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험에 나서는 곳에는 사회적 성격을 혼합한 초고층화 재건축의 길을 터주는 것이 필요하다. 목동, 분당 등 지역에서는 제2의 강남모델 실험이 가능할 수도 있다.
강남과는 차별화된 주거모델을 만들어가는 노력도 필요하다. 서울 안에서도 강남권과 강북권은 여건이 매우 다르다. 일례로 강남구와 강북구를 비교해보자. 2016년 기준으로, 인구는 강남구가 강북구의 1.7배인데, 지역총생산은 21.2배, 1인당 지역총생산은 12.2배였다. 2018년의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은 강남구 14.9%, 강북구 21.9%였다. 강북권은 노후주택 개량을 위한 자금을 주민들 스스로 동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강북권에선 보다 공공적이고 사회적인 방식의 재개발 모델이 필요하다.
주택 개발·재개발은 토지라는 한정된 자원에 주택이라는 필수재를 공급하는 사업이므로 본질적으로 공공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대부분 민간주도 방식에 의존한다. 재개발의 경우 사업 특성상 기존 소유자들이 조합을 결성하여 추진하게 된다. 현재로서는 재개발 이익이 기대되는 경우 조합이 결성되고 업무대행사가 개입하는 방식으로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강북권은 재개발 이익의 전망도 불투명하고 조합을 운영할 주민 능력도 부족한 편이다. 정부가 조합에 자금과 인력을 투입하여 재개발 과정을 돕되 조합 지분을 확보하여 재개발 이익을 사회화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강북권은 고령인구가 많고 청년 일자리는 부족하다. 강남이나 판교와 같은 첨단기술 중심의 산업모델을 복제하기는 어렵다. 반면 상대적으로 낮은 지가와 우수한 생태환경이 청년창업, 환경산업, 사회서비스산업에 우호적인 조건이 될 수 있다. 주민, 정부, 지역사회가 협력하는 재개발의 강북모델을 통해 지역재생과 연관된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
단번에 부동산값을 잡는 묘책은 없다. 그러나 부동산시장을, 강남 부동산을 방치할 수도 없다. 부동산시장의 금융화에 따라 투기가 시장심리를 활용하는 정상적 활동이 되고 있다. 이제 사회화된 부동산 자산의 비중을 늘려가는 재건축·재개발 모델을 적극 실험해야 할 시점이다.
이일영 한신대 경제학 교수 경향 2019.11.26
미래학이 직면한 위협
미래학자’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고 말하는 사람 중 일부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가중치를 두고 객관성과는 거리가 있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아닌지 걸러 볼 필요가 있다. 미래학에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미래 예측 방법론인 것도 이런 상황과 밀접하다. 확증 편향에 쏠리지 않는 냉철하고 거시적인 시야가 중요하다. ©게티이미지뱅크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고교생 시절 미래를 예측하는 학문이 등장하는 SF소설을 읽고 매료되어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장편 ‘파운데이션’에 나오는 ‘심리역사학(Psychohistory)’이 그것이다. 역사학, 사회학, 수리통계학 등을 결합시켜 거시사회의 트렌드를 정확히 내다본다는 학문이다. 크루그먼은 심리역사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학문이란 사실을 알고는 차선책으로 그와 가장 비슷해 보이는 경제학을 택했다.
‘파운데이션’의 작가 아시모프는 훗날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고 술회한 바 있다. 변수가 너무 많아서 계산이 어렵다는 것이다. ‘파운데이션’에도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엄청나게 행사하여 심리역사학자의 예측을 빗나가게 만드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실제 인류 역사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다. 인물뿐만 아니라 사소한 사건이나 우연 등이 나중에 일파만파의 역사적 후폭풍을 불러오기도 한다. 돌연한 천재지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인 시야로 보면 사회는 일정한 방향성을 나타낸다는 전제 아래 그 흐름을 예측하려는 것이 미래학이다. 몇 가지 고정된 상수들은 계속 돌발하는 변수들에 휘둘리지만, 세월이 흐르면 결국 ‘평균 회귀’로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정한 방향성’, ‘고정된 상수’란 다름 아닌 인간과 인간의 욕망을 의미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집단으로서 생존의 지속을 추구하는 존재다. 그리고 개개인은 기본적인 욕망, 즉 의식주의 확보와 개인적 이익 추구를 우선시한다. 개인적 이익 추구란 단순히 이기적인 성격만은 아니며, 때로는 이타적이고 박애적인 태도를 자신의 욕망 충족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과학기술이 계속 발전하면서 이러한 기본 전제들이 흔들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인간과 기계(컴퓨터)가 결합하는 사이보그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물학적 존재의 욕망이 무의미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지는 욕망이나 가치관이 뿌리부터 흔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미래에는 신인류의 욕망이 구인류에게 가혹한 운명을 지울 수도 있다.
아직 학문으로서 탄탄한 기반을 다지지 못한 미래학은 이런 배경에서 험난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인류가 사이버 스페이스로 옮겨간다는 ‘특이점(Singularity)’을 주장하는 레이 커즈와일 같은 공학자, 우주개발 및 자율주행 전기자동차 등의 인프라 구축에 열성인 일론 머스크 같은 기업가, 유전공학 등 새로운 의학 기술이 인류의 의료 복지를 혁신시킬 것이라는 바이오 과학자 등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저마다 자기 분야의 중요성을 강변한다. 종교나 철학, 사회심리학, 사회철학 등의 분야에서도 변화하는 시대상에 따른 여러 불안 요소들을 지적하고, 이런 변수들을 종합한 경제학자나 사회과학자들도 미래의 위기 시나리오들을 수시로 내놓는다.
문제는 이 모든 주장이며 이론들이 과연 얼마나 객관적이고 합리적인가 하는 것이다. ‘미래학자’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고 말하는 사람 중 일부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가중치를 두고 객관성과는 거리가 있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아닌지 걸러 볼 필요가 있다. 미래학에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미래 예측 방법론인 것도 이런 상황과 밀접하다. 확증 편향에 쏠리지 않는 냉철하고 거시적인 시야가 중요하다. 세간에는 미래 전망과 관련된 온갖 구호며 수식어들이 난무하지만, 거품을 걷어내고 보면 기업이나 단체 등등 특정 이익집단에만 유리한 잡음에 불과한 경우가 적지 않다. 미래학이 이런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스스로 독립적인 학문의 정체성을 세우고 존중받기가 험난한 이유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한국 2019.11.27
‘멸문지화’의 법과 원칙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10월 <한겨레>는 참여정부 첫해 노무현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에 참여했던 검사들을 다시 찾아가 인터뷰를 시도한 적이 있다. 당시는 문화방송 ‘피디수첩’ 수사를 비롯해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과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에 대한 수사 등 정권의 입맛에 맞춘 표적수사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5년 전 현직 대통령과 ‘맞짱’을 뜰 정도로 기개를 과시한 검사들이었으니 검찰의 이런 비루한 모습에 뭔가 의미 있는 코멘트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착각이었다. 극도로 말을 아끼고 조심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만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참여정부에 비해 적어도 검찰에 적대적이지는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참여정부 시절 위축된 검찰의 권한을 되찾아야 한다”는 따위의 말을 접하면서 아득한 절망감이 몰려왔다. “엠비 정부 때가 가장 쿨했다”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말을 듣고 맨 먼저 떠오른 것도 그 검사들의 인터뷰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검찰의 핏속에 흐르는 유전자는 똑같은 셈이다.
참여정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에서 다시금 확인되는 바는 첫째, 검찰은 태생적으로 진보정권과는 유전적 코드가 맞지 않는 집단이라는 점이다. 살아온 삶의 이력이나 추구하는 가치 등 검사들의 전반적인 ‘정체성’ 자체가 진보정권과는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둘째, 검찰은 권력의 충견으로 기꺼이 용맹을 떨칠 수는 있어도, 자신들의 이빨을 약화하려는 시도는 절대 용인하지 않는다. “마음이 놓이는” 보수정권과, “마음이 놓이지 않는” 진보정권을 대하는 검찰의 태도에 본질적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선출된 권력에 대항하는 가장 좋은 무기는 검찰 수사의 독립,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등의 아름다운 단어다. 이런 지고지순한 명제 앞에 아무도 쉽게 이의를 달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말에는 함정이 있다. 독립은 곧잘 ‘독단’의 동의어가 된다. 수사를 할지 말지, 언제부터 시작해서 언제까지 매듭지을지, 어떤 강도와 범위로 수사를 진행할지, 어떤 결론을 내릴지, 이 모든 것이 검찰 마음대로다, 독립이라는 미명 아래 검찰은 수시로 독단을 행사한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권에 핵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검찰은 그 자체가 거대한 정치권력이며, 행보 하나하나가 정치적 함의를 띤다. 검찰 수사의 형식적 외관은 ‘정치적 중립’이지만 실체적 내용은 ‘고도의 정치행위’인 경우도 숱하게 많다.
울산지검은 지난해 3월 자유한국당이 당시 울산경찰청장이던 황운하 대전경찰청장을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고발한 사건을 1년8개월이나 그대로 묵히고 있다가 엊그제 서울중앙지검으로 이송했다. 검찰은 “신속한 처리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이에 앞서 왜 1년8개월은 가만히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수사하고 싶을 때 하고 말고 싶을 때 마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독단이다. 검찰은 이번 기회에 ‘검찰 저격수’라는 별명이 붙은 황 청장을 어떻게든 법률적으로 엮으려 할 것이다. ‘청와대 하명수사’라는 프레임을 통해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홍보하는 기회로도 활용하려 할 것이다.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정치적 의도의 지뢰는 이처럼 곳곳에 숨어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수사 결과는 가히 ‘멸문지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모질고도 혹독하다. 예전에 멸문지화는 대역죄를 저지른 죄인에 대한 형벌이었는데, ‘검찰 개혁의 아이콘’이라는 것만으로도 검찰에는 대역죄였을까. 그런데 정경심 교수의 기소내용을 보며 개인적으로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으로 치면 0.5단짜리 기사 10개를 모아 5단짜리 1면 머리기사를 만들었군.” 검찰은 이런 상황에서 늘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검찰은 진정 자신들이 형평, 공정, 인권 보호, 과잉 금지, 비례와 균형 등의 원칙을 잘 지키고 있다고 믿는 걸까.
“아이에게 망치를 쥐여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한국 검찰이 손에 쥔 망치는 계속 커졌지만 성숙한 어른으로의 성장은 지체됐다. 근원적으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는 길은 과도하게 커진 망치의 크기와 무게를 줄이고 수사 기관 상호 간의 견제가 가능하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제 망치를 조정하려 하니 검찰은 정치적 중립의 무기를 앞세워 여기저기 못질에 나섰다. 참으로 갈 길이 멀고도 험난하다.
김종구 편집인 한겨레 2019.11.27
강성·귀족 노조가 문제라고요?
요즘은 개선되었다고 하나 한때 경찰 수배 전단에 ‘노동자풍’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인 적이 있었다. 양복 차림의 깔끔한 인상은 ‘회사원·사업가풍’이며, 뭔가 깔끔하지 않으면 ‘노동자풍’이라는 설명과 함께. 회사원은 노동자가 아니고 노동자는 왠지 모르게 남루한, 40~50대 남성일 거라는 관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 있지 않은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동질적이라고 생각한다. 외집단 동질성 편향이라나. 대부분 노동자가 되지만, 정작 스스로가 노동자에 속한다고 인식하기 어려운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라고 하면 빨간 띠를 두른 장년의 남성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양극화가 심화된 2010년대에는 ‘정규직’이 추가되었다. 민주노총은 40대·정규직·남성 중심의 조직이라는 관념. 많은 사람들은 노동조합이 일반 노동자들(특히 비정규직)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실제는 어떨까. 올해 4월 기준 집계를 보면,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 101만명 중 비정규직은 33%이고, 여성은 29%이다. 3명 중 1명이 비정규직, 여성인 셈이다. 최근 3년간 만들어진 노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반반이었고, 비정규직·청년·여성 비중은 계속 느는 추세다. ‘비정규직 없는 민주노총’이란 ‘노동자 아닌 회사원’처럼 우리 머릿속 어딘가에만 있는 존재는 아닐까.
대한민국 노조 조직률 겨우 10%
물론 조합원으로 있는 것과 그들을 잘 대변하는 것은 다르다. 그렇지만 양극화 해소라는 사회적 염원이 ‘강성 노조’ ‘귀족 노조’ 때려잡기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힘이 세서 문제라는 우리나라의 노조 조직률은 10%에 불과하다. 우리가 선망해 마지않는 북유럽 사회복지국가는 모두 강성 노조의 힘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지적처럼, 우리나라는 ‘강한’ 노조가 모자라서 문제지, 많아서 문제가 아니다.
‘귀족 노조’는 어떨까. 노조에 왜 너희가 제대로 하지 못했느냐고 책임을 묻는 지적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양극화의 주원인이 마치 노조인 양 말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노조는 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미흡하나마 노력을 기울여왔다. 비정규직을 조직하고, 차별 개선을 위해 싸웠다. 기업별 교섭 구조에서는 개별 단위 기업의 임금 극대화 전략을 넘기 어려우니 산별교섭을 법제화하자고 해왔다. 기업별 교섭이면 기업 내 조합원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주로 활동하게 되지만, 고용 형태와 관계없이 동종 산업 내 전체 노동조건을 논의하는 산별교섭 틀 안에서는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로 대기업인 원청도 사회적 책임을 함께 지고, 정규직의 양보가 기업의 배만 불리는 게 아니라 비정규직에게 순환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노조는 또한 단체협약 적용률,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적극 확대하자고 제안해왔다. 단체협약 적용률이 높을수록 임금 불평등이 낮아진다. 유럽 상당수 국가들이 단체협약 효력 확장 제도를 두고 있는데, 한 예로 프랑스의 경우 노동조합 조직률이 9%에 불과하지만 산별교섭 결정을 적용받는 노동자는 98%에 달한다. 한국은 단체협약 효력 확장 제도가 사업장 내지 지역 단위에 국한되어 있고 조건도 까다롭다. 사용자 단체도 잘 조직되어 있지 않다.
많은 학자들은, 서로 다른 집단들이 ‘편견’을 뛰어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접촉’이지만 단순 접촉만으로 편견이 감소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상호의존성, 공동의 목표, 동등한 지위, 평등규범 등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공동의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같이 이야기하는 것에서 출발해보면 어떨까.
우지연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 시사인 2019.11.27.
‘우리가 황교안이다’ 구호가 당혹스러운 이유
“우리가 황교안이다.”
주어와 술어만으로 이뤄진 이 단순명료한 진술 형식(우리가 ○○○이다)에 매료된 건 스무살 무렵이다. ‘민중’을 들먹이며 후배들의 나약함을 질타하던 1년 선배에게 동기 하나가 작심하고 반기를 들었다. “그만 좀 해. 우리가 민중이야. 형이 말하는 그 민중이 바로 우리라니까.” 그 말이 호네커 정권에 맞서던 동독 반체제 시위대의 구호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에서 고스란히 가져온 것임을 알게 된 뒤 살짝 감동이 반감되긴 했어도, 어쨌든 만사에 진지한 잔소리꾼에게 멋지게 한 방 먹인 그 친구가 당시로선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 없었다.
“우리가 인민이다”는 그 뒤 여러 형태의 구호로 변주되며 내 마음을 흔들었다. 이주민·난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우리도 난민이(었)다”가 그랬고, 위험에 노출된 산업현장 약자들에게 연대 의지를 드러내는 “우리가 김용균이다” 역시 그랬다. 이 구호들을 낳은 것은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의 차이를 가로지르는, 어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처지(운명)의 동일성(보편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아무리 탁월한 선동가라도 불특정 다수의 집합행동을 조직하기란 쉽지 않다. “노동조건을 개선하라” “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라” 같은 요구성 구호로는 부족하다. 핵심은 타인에 대한 공감이다. 공감을 해야 편을 들고, 이 ‘한편 의식’이 일정 수위에 이르러야 사람은 비로소 행동에 나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의 아픔에 공감하는지, 그 처지와 자신의 운명을 얼마나 동일시하는지에 따라 정치적 행동의 양상과 강도 또한 달라진다.
그러니 이 구호의 역사성을 알고 있는 이라면 “우리가 황교안이다”라는 구호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감정은 두어달 전 서초동 거리를 메운 “우리가 조국이다”라는 손팻말 구호에서 느낀 그것과도 다르다. 서초동의 구호가 공유하고 싶었던 것은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조국처럼 탈탈 털릴 수 있다’는 위기감과 분노였을 테지만, 한편으로는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내가 조국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라는 고학력 리버럴 중산층의 계면쩍은 자기고백이기도 했다.
“우리가 황교안이다”는 어떤가? 확실한 건 권력을 비판하는 언어 유희(우리가 인민이다)도, 중산층의 자기풍자적 고백(우리가 조국이다)도, 약자에 대한 공감과 보편성에 대한 자각(우리가 김용균이다)도 “우리가 황교안이다”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29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황교안 대표의 단식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황교안이다. 오늘부터 우리 한국당에서 이 단식을 이어간다. 또다른 황교안이 나타날 것이다.” 나 원내대표의 이 말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워서 그 어떤 설명이나 해석의 틈입도 허용하지 않는다.
대중에게 주는 감동이 있든 없든, 자진해 고행하는 당대표의 행동에 용기를 불어넣는 구호로 “우리가 황교안이다”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용퇴론’을 제기하며 당 쇄신을 압박하던 이들도 “우리가 황교안”이라는 슬로건의 비장함에 압도되어 입을 닫았고, 정신을 잃고 병원에 실려간 그의 단식은 들끓던 리더십 논란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혔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당이 또하나의 초강수를 두었다는 점이다. 한국당은 29일 본회의 개의 직전, 상정된 안건 모두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정기국회가 마무리되는 12월10일까지 필리버스터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한다. ‘결사저지’를 공언해온 패스트트랙 선거법안과 검찰개혁법안뿐 아니라 예산안과 비쟁점 민생법안까지 볼모로 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황교안이다”라는 구호에 고개를 끄덕일 유권자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나는 황교안인가? 당신은 황교안인가? 대체 누가 황교안인가 이세영 정치팀 데스크 한겨레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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