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 383호 15.1.15 술집 개가 무서우면 손님이 오지 않는다’
한겨레 15.1.20 ‘능력’이라는 이름의 허구
미디어오늘 15.2.4 이명박의 성공과 박근혜의 행복
경향 15,2,11 목수도 복지걱정 없는 나라
한겨레 15.2.17 한국형 인종주의의 특징
경향 15.3.4 기후변화, 과학과 미신 사이
시시인 390호 15.3.6 강남 집값 올라서 만족하십니까
미디어오늘 15.3.10 나라가 이렇게 미쳐 돌아가도 되나
경향/15.4.1 후쿠시마의 10가지 교훈
미디어오늘 15.4.8 박근혜보다 조중동이 더 나쁘다
한겨레 15.4.14 박정희 시대, ‘기적’은 없었다
경향 15.7.1 국가의 품격
미디어오늘 15.7.30 향기 넘친 저들의 밥과 ‘악마의 똥’
한겨레 15.8.4 탈식민을 위하여!
시사인 411호 15.8.5 미래 노인’의 배려
미디어오늘 15.8.18 당신들은 국민이 그렇게도 우스운가
시사인 417호 15.9.14 텔레비전도 ‘제목 장사’ 합니까
미디어오늘 15.9.18 돈 받아 기사 쓰며 용춤추는 언론사들
한겨레 15.9.29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시사인 419호 15.9.30 GDP 3만 달러의 ‘헬조선’… 이 수수께끼의 답은?
시사인 423호 15.10.26 연봉 2억여 원의 ‘문지기’
경향 15.10.28 ‘자학사관’ 독일은 지금
시사인 425호 15.11.9 박근혜이즘’의 끝이 두렵다
미디어오늘 15.11.17 짖어라 개야 : 민중과 개들의 전쟁
한겨레 15.11.24 박근혜 시대의 이데올로기
한겨레 15.12.22 양심수들의 나라, 대한민국
양심수들의 나라, 대한민국
정권의 반대자를 고문해 감옥에 보내고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전향 공작으로 자기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장애자로 만든 이들 중에서, 제대로 처벌받은 이는 거의 없다.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가 없는 게 ‘관례’다. 이거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과거 정리의 전형적 방식이다.
양심수 양산의 정치는 공포정치다. 헌법상 보장된다는 자유의 내용은 퇴색하고 ‘자유민주주의’는 형해화돼 껍데기만 남는다. 이러다가는 90년대까지 기승부렸던 고문도 돌아올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저항만이 대한민국을 인간이 그나마 살아 숨 쉴 수 있는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대한민국 사이의 인연에 애당초부터 ‘양심수’라는 핵심어가 있었다. 소련 공민으로서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 가입이 가능해진 1989년부터 내가 바로 가입을 하여, 그때부터는 빠짐없이 한국 양심수들에 대한 자료를 받고 석방요청서에 사인하기 시작했다. 가끔가다가 국제사면위원회의 한국 관련 자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얼핏 보면 ‘민주화’된 듯했지만, 그 자료대로라면 시인 박노해가 1991년 3월에 체포됐을 때에 3주간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민주화’된 사회에 고문이라니, 오랫동안 믿을 수 없었다. 박노해뿐만인가? ‘민주화’된 세상에 그와 같이 잡혀간 또다른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 관계자인 백태웅, 은수미에 대해서도 ‘고문’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국제사면위원회와 인연을 맺어 남한 ‘민주화’의 겉과 속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1990년대 초반에 처음으로 실감나게 확인했다.
그때부터 어언 20여년이 지났다. 한때에 사형이 구형됐던 박노해는 이미 명망가 대열에 올라 있다. 백태웅은 하와이대학에서 일하면서 유엔에서 자문역을 맡고 있고, 은수미는 국회의원이다. 이들이 몸담았던 사노맹은 민주화 운동 조직으로 공식 인정되었다. 한데 아무런 범죄도 저지른 적이 없었던 그들을 고문하고 거의 10년간 감옥에 썩힌 자들 중에서 처벌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거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과거 정리의 전형적 방식이다. 정권이 몇번 바뀌고 과거의 사법살인·고문수사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정설로 굳어지면, 억울한 피해자나 그 후손들이 어쩌면 명예복원과 함께 약간의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가 없는 게 ‘관례’다. 1970~80년대에 150여명의 재일 조선인들을 살인적 고문을 통해 관제 ‘간첩’으로 만들고, ‘사노맹 사건’과 같은 수많은 시국 사건들을 터뜨리면서 정권의 반대자를 고문해 감옥에 보내고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전향 공작으로 자기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장애자로 만든 이들 중에서, 제대로 처벌받은 이는 거의 없다. 고문 수사, 허위진술 강요 등이 체제의 ‘관습’이 돼버린 상황에서는, 인권유린 피해자가 명예복원돼도 인권유린 그 자체는 처벌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과거와 같은 인권유린이 언제든지 다시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매우 가시적인 양심수의 양산은 이미 돌아왔다. 아마도 미래의 사학자들이 박근혜 통치기를 명명할 적에 “정부가 노동과의 전쟁을 벌인 시대”나 “재벌 만능의 시대” 같은 명칭과 아울러 “양심수 양산의 시대”라고 부를 것이다. 물론 박근혜 집권 이전에 양심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비록 약간의 개선은 있었지만, 김대중·노무현 시기에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세계 최악에 가까운 병영사회·공안국가·노동억압사회였다. 그래서 과거의 양심수 출신이나 인권변호사 출신이 대통령으로 돼 있어도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노동운동가(‘업무방해’, ‘퇴거불응’, ‘집시법 위반’), 그리고 국가보안법 관련으로 구속기소된 좌파민족주의자 등 수백명이 매년 감옥을 메우곤 했다. 한데 박근혜 시대에는 양심수 양산은 새로운 수준에 도달했다.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고 감옥에 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수가 다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가시성이 높은 양심수 투옥의 공포 확산 효과도 매우 컸다.
기초적 사실부터 확인하자. 박근혜 정권 시기에 접어들어 국가보안법 기소율은 노무현 시절에 비해 약 2~3배 뛰었다. 2007년에 86건, 2008년에 56건의 기소가 각각 집계됐지만, 2013년에 165건의 국가보안법 기소라는 ‘신기록’이 세워졌다. 미국의 국무부마저도 악법으로 인정한 법의 내용이야 그대로지만, 그만큼 그 ‘활용의 범위’가 넓어졌다. 물론 기소된다 해도 구속률은 20~30% 범위 내에서 왔다 갔다 해서 모두가 무조건 감옥행이 되는 건 아니지만, 2000년대 중반에 비해 구속자 수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노동자 구속의 경우, 구속자의 수 자체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경향적으로 내려가긴 한다. 한데 이는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갑자기 인심이 후해져서가 아니고, 노동탄압의 방법들이 극도로 교묘해져서이다. 기업들이 광범위하게 용역을 쓰는 관계로 파업 노동자와 경찰의 직접 충돌이 드물어지고, 또 살인적 손해배상 요구와 노동운동가 재산 가압류 등은 애당초부터 노동운동을 짓눌러버린다. 현재 수감 중인 노동계 양심수 통계를 보면 대부분은 비정규직 투쟁 관련자(40여명)와 노점상 등 생존권 투쟁 관련자(10여명), 외국인 노동자(12명) 등 가장 취약한 계층들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다. 국가는 노동계급의 주변부, 즉 비정규직과 해고자, 영세민 등의 투쟁을 구속수감으로 공격하는 셈이다. 수감 중인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현재 약 600여명)는, 세계 평화 수감자의 90% 정도를 이룬다. 국가보안법 사범, 수감된 노동자, 병역거부자, 밀양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강정마을 주민과 평화운동가….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양심수들의 나라, 산업화되고 형식적 ‘자유민주주의’를 실행하는 나라들 중에서 양심수를 가장 많이 양산하는 전형적 인권유린국이다.
박근혜 정권 이전이라고 해서 인권유린국이 아닌 것도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권 아래서는 인권유린은 가시적으로, 보란 듯 자행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인권의 외형을 갖추려는 시도라도 했지만, 이번 정권은 인권탄압을 자랑하듯 한다. ‘인혁당 사건’ 등이 박정희 정권의 야만성을 상징했듯, ‘구미 유학생단 간첩 사건’ 등이 전두환 시대의 전형적 고문수사의 실체를 보여주었듯, 위에서 언급한 ‘사노맹 사건’이 노태우 시절 ‘민주화’의 부실함을 폭로했듯, 1993년의 ‘남매 간첩 사건’ 등 1990년대 초·중반의 각종 ‘간첩’ 조작들이 김영삼 시절 ‘민주화’의 한계를 확인했듯, 이번 정권의 반인권성을 ‘이석기 사건’은 길이길이 상징할 것이다. 그만큼 이 사건에서 보여진 정권의 ‘대담함’은 기가 막힐 수준이다. 단순히 그 진위 여부가 문제시됐던 녹취록 등의 매우 단편적이고 불확실한 ‘증거’에 의한 현직 의원의 체포나 거의 7~8%의 고정 지지율을 기록하는 의회정당의 사법적 해산과 같은 규모의 권력형 폭거들은, 건국 초기나 1950년대 이후로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정권이 법을 도구화시켜 정적 제거를 과감하게 할 의사를 과시한 듯했다. ‘이석기 사건’ 이후에는 정권 반대자의 체포는 박근혜 정권의 하나의 ‘관습’이 됐다. 이석기 등 통합진보당 인사들은 국내에서 오래전부터 심각한 탄압을 받아온 좌파민족주의 경향에 속했지만, 2013년 12월에 합법적 파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체포된 철도노조 지도부나 일제 강점기를 연상케 하는 ‘소요죄’로 기소될지도 모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세월호 유가족들의 원한을 풀려고 희생적으로 노력하다가 구속당한 박래군 같은 한국의 대표적 인권운동가 등은 좌파민족주의 등 한국 사회에서 불온시되는 그 어떤 이념과도 무관했다. 그들은 단지 약자들을 위해 뛰었다가 영어의 몸이 된 것이었다. 그들을 체포한 정권이,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약간이라도 불리한 그 어떤 활동도 체포로 끝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모두들에게 전하려 했던 모양이다.
결국 양심수 양산의 정치는 공포정치다. 현직 국회의원이나 전국 노조의 수반, 아니면 유명한 인권활동가마저도 언제든지 투옥될 수 있다면 그 누구도 안심하고 표현이나 결사, 집회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 헌법상 보장된다는 자유의 내용은 퇴색하고 ‘자유민주주의’는 형해화돼 무의미한 껍데기만 남는다. 이러다가는 90년대까지만 기승부렸던, 위에서 언급한 ‘사노맹 사건’ 피해자들에게 악몽이 됐던 고문도 돌아올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인권을 상습적으로 유린하는 정권에 대한 저항만이 우리 자손들이 살아가야 할 대한민국을 인간이 그나마 살아 숨 쉴 수 있는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5.12.22
박근혜 시대의 이데올로기
박근혜는 유엔까지 가서 새마을운동과 같은 유신 시절의 경제·이데올로기적 관제운동을 칭송한다. 하지만 ‘박근혜 시대’의 극우들이 키우고자 하는 인간상이나, 추진하고자 하는 이념은 유신 시절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들이 돋보이기도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지배층은 ‘민족’ 대신 ‘자본’을 위주로 사고하면서 오로지 자기만의 생존과 성공을 위해서만 자나 깨나 분투하고 자신의 시간까지도 어릴 때부터 투자가치 있는 일에만 쓸 줄 아는 경제동물형 인간을 새로운 모범인격으로 내세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변한다. 한국에서의 좌·우파 이데올로기의 함의를 포함해서 말이다. 예컨대 1980년대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통일’을 요구했는가 하면 계급주의자들의 주된 요구는 ‘재벌 해체’였다. 요즘 같으면 그런 요구들을 역사책 이외에 어디에서 볼 수 있는가? ‘통일’의 자리를 ‘통일지향적 대북정책’이 차지했으며, 재벌에 대해서는 고작해야 ‘노동자 경영 참여’를 요구하는 좌파 지식인들을 가끔 볼 수 있다. 부유해진 대한민국에서 그만큼 좌파가 순치되어 온건해졌다. 좌파만큼이나 극우파도 바뀌었다. 단, 극우파는 ‘온건해졌다’기보다는 개개인을 국가와 자본에 예속시키는 방식을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서 바꾼 것이다.
유신 시대는 주변부형 유사 파시즘 시대였다. 파시즘은 내면화돼 있는 적극적 동원논리인 만큼 유신시대가 요구했던 모범적 인간상도 ‘멸사봉공’이었다. 조국 근대화의 전사는 한쪽으로 ‘멸공’을 목적으로 해서 싸우며, 또 한쪽으로는 또 다른 수많은 순량한 국민들과 총화단결해서 ‘건설’에 매진해야 했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는 산업화 전사를 바쁘게 움직이게끔 해야 하는 에너지는, 꼭 “잘살아 보는” 세상에 대한 기대뿐만 아니라, 일본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계승한 강력한 종족적 민족주의이기도 했다:
“백두산의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의 높은 기상 이 겨레 지켜왔네/ 무궁화꽃 피고 져도 유구한 우리 역사/ 굳세게도 살아왔네 슬기로운 우리 겨레”(<나의 조국>)
이런 민족주의는 통합, 차등화, 그리고 배제의 논리를 동시에 포함했다. ‘빨갱이’는 ‘우리 겨레’에서 사실상 제외돼 홀로 고문실에서 죽어나가거나 연좌제의 적용 대상이 돼 평생 감시와 차별 속에서 반쪽 ‘비국민’ 삶을 살아야 했으며, 여성은 ‘국민’이긴 했지만 분명히 2등 국민에 불과했다. 한데 군에서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 같은 구호를 외쳐대면서 정신무장을 튼튼히 한, 그리고 어느 정도의 학력을 보유한 대한의 건전한 남아라면, 일단 한번 입사한 회사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계속 근로하는 게 ‘보통’이기도 했다. 민족주의나 군사주의와 함께 ‘회사 가족’ 이데올로기도 박정희 정권이 제국주의 시절 일본으로부터 그대로 계승한 셈이었다.
효심이 지극해서인지 아니면 보수층 결집을 위한 수사 전략의 일환인지, 박근혜는 유엔까지 가서 새마을운동과 같은 유신 시절의 경제·이데올로기적 관제운동을 칭송하기도 한다. 한데 박근혜 정권의 정책이나 기업인들의 발화, 보수 언론들의 논조 등을 종합해보면, ‘박근혜 시대’의 극우들이 키우고자 하는 인간상이나, 추진하고자 하는 이념은 유신 시절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들이 돋보이기도 한다. 우선 차이는 무엇인가?
첫째, 유신 시대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의 비공식적 국시는 사회진화론적 ‘경쟁’의 논리다. 한데, 그때는 ‘경쟁’의 단위가 국가나 기업이었다면 ‘박근혜 시대’ 경쟁의 단위는 원자화되고 고립된 개인이다. 국가야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에 대해 책임져주지 않는 건 마찬가지인데, 기업에는 인제 ‘회사 가족’이 아닌 쓰고 버릴 일회용 ‘인력’만이 필요한 시대에 개개인이 서로 경쟁하는 ‘작은 1인기업’처럼 살아야 한다. 유신 시대 한국인이 대한뉴스에서 나오는 국가 수출 실적에 다같이 환호성을 질러야 했던 집합적 주체였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아이는 학원에 가면 다음과 같은 권고 문구를 볼 수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넌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네가 계획한 공부는/ 하루하루 뒤로 밀리겠지/ 근데 어쩌지?/ 수능 날짜는 뒤로 밀리지 않아”
‘친구’마저도 다 경쟁자로 인식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국민’은 2차적이며, 경쟁적 벌이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1차적이다. 1970년대에 외화 반출이 범죄였지만, 오늘날 같으면 투자이민이라도 해서 ‘선진국’에서 노후를 보내는 게 극락왕생이나 천당행처럼 여겨진다. 정부는 (사실 노무현 시절부터 계속해서) 해외 주거용 부동산 구매 목적으로 300만달러까지 반출하는 것을 허용해주는 동시에 해외 취업 알선을 청년실업 대책이라고 홍보하고,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젊은이들도 이민 이외에 어떤 해결책도 발견하지 못한다. 정부와 ‘헬조선’에 절망한 젊은이들의 지향이야 각각 달라도, 이민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해결법을 권장하는 등 개인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당연시하는 차원에서는 양쪽이 묘하게 공명한다. 결국 ‘조국 근대화’로부터 출발한 한국의 극우이데올로기는 각자도생·적자생존 이념으로 변형돼가면서 젊은층 사이에서 기반의 획득을 도모한다.
둘째, 민족주의는 상당부분 용도폐기됐다. 대한민국이 신자유주의 모범국이 되는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외국 투자자가 국가를 상대로 제소를 할 수 있는 시대의 현실을 ‘백두산의 정기’를 가지고 제대로 합리화할 수 있겠는가? 민족주의 용도 폐기의 또 하나의 원인은, 현 지배층의 기원이 ‘민족’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대중들에게 정당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박정희 자신을 포함해서, 대한민국 관료기구 상부의 인적 구성은 대체로 총독부와 일군을 계승했다. 예컨대 초기 한국군 상황을 보면 1945년 이전 군사 경력자 중에서 한국군 장군까지 승진한 사람은 270명이 일군과 만주군 출신이었고 불과 32명이 광복군 출신이었다. 관료 기구뿐인가? 1938년에 세운 오늘날 삼성의 전신인 삼성상회는, 과연 태평양전쟁 때 일군의 군납업체 아니었던가? 박정희 시절에 정권이 원호처(현 국가보훈처)를 통해 빈곤층이 된 과거의 독립운동자 일부에게 지원을 하고, 좌파가 아닌 일부 민족주의 성향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훈장을 추서하는 등 표면상의 민족주의적 “색채”를 적절히 과시하면서 한국 지배층의 식민지적 기원에 대한 비판 여론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언론과 출판이 통제되는 상황에서 ‘친일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로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데 한국 ‘주류’의 살아 있는 아이콘인 백선엽 장군이 항일운동가들을 ‘토벌’했던 간도특설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토론할 수 있는 오늘날에 와서는, 대한민국 지배층으로서 역사를 보는 기본 시좌 자체를 본질적으로 바꿀 필요가 생겼다. 박근혜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바로 이 작업을 의미한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바탕으로 쓰여 조선인이 일군에 입대해 장교가 되고 일군과 거래해서 이윤을 추구했던 것이 “우리나라 발전을 위한 애국”이라는 식으로 서술되면 ‘친일파’는 바로 ‘애국자’가 돼 대한민국 지배층의 기원이 완벽하게 정당화될 것이다.
위에서 보여준 것처럼, 박근혜로 대표되는 오늘날 대한민국 지배층은 과거의 ‘민족’ 대신에 ‘자본’을 위주로 사고하면서 오로지 자기만의 생존과 성공을 위해서만 자나 깨나 분투하고 자신의 시간까지도 어릴 때부터 다 ‘돈’으로 환산하여 투자가치 있는 일에만 쓸 줄 아는 경제동물형 인간을 새로운 모범인격으로 내세운다. 유신 시절과의 차이도 돋보이지만, 이 “신형 한국인”에게 국가권력에의 복종이 최고의 덕목이 돼야 한다는 점부터 계승성도 확연히 느껴진다. ‘민족’은 폐기되지만, ‘대한민국의 번영’을 지킨다는 군에서의 복무를 “진짜 사나이”가 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통과의례로 여기는 군사주의적 사고는 여전하고, ‘빨갱이’들에 대한 유신 시절의 파시스트적 배제도 인제 점점 부활한다. 대한민국 지배자들이 경제 본위의 개인 생존 논리와 군사주의, 그리고 순종주의의 복합체가 저들의 부와 권력의 영원한 뒷받침이 되리라고 믿는 모양이다. 한데 이제 머지않아 곧 닥쳐올 경제위기의 폭풍이 다수에게 생존의 마지막 희망을 빼앗아 십만명이 아닌 백만명이 광장으로 나가게 되면, 저들의 오산이 얼마나 컸는지 저들이 알게 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5.11.24
짖어라 개야 : 민중과 개들의 전쟁
"물어뜯어라 개야, 부자들이 소뼈다귀를 하사할 것이다"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낡은 외투와 구멍 난 양말 신고
참석자들 조롱 받으며 모퉁이 앉았다면
나 그들에게 글 써서 건넬 수 있을까
한우안심 농어구이 전복구이 훈제연어들
넘치는 식탁을 두고
너희들 앞 번쩍이는 그릇에 담긴 그것은
이 나라 민중의 살점이라고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닳은 양복과 구멍 난 구두 신고
참석자들 조소 받으며 모서리 앉았다면
나 저들에게 글 적어 줄 수 있을까
한 병에 천만 원이 넘는다는 붉은 포도주들
즐비한 식탁을 두고
너희들 앞 반짝이는 술잔에 담긴 그것은
이 나라 비정규직의 피라고”
2015년 11월14일, ‘공권력’의 직사 물 대포에 스러지는 농민, 노동자, 청년들 앞에서 치민 울뚝밸을 적어보았다.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노동개악을 다짐하며 대통령이 재벌회장들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즐긴 밥상이 떠올랐고, 재벌회장 생일에 오른다는 최고급 포도주와 호화안주가 겹쳐졌다. 그리고 다시 참담했다. 왕정시대에도 당당하게 “금준미주 천인혈, 옥반가효 만성고”를 쓴 ‘이몽룡’ 앞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민주공화국 시대를 살아가는 언론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민중총궐기대회에 모인 사람들은 노동자를 우롱하는 노동개악, 진실을 내세워 진실을 가리려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농민 생존권을 무시하는 통상정책을 비판해왔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안면몰수는 물론, 독기까지 서슴없이 표출했다. 대통령 박근혜에게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은 ‘비정상’이고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고 ‘혼이 없는 사람’이다. 경제민주화 공약으로 당선된 그가 민생경제에 전념해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서 생뚱맞게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계 흐름과 거꾸로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진하고 있다며 각국 대통령과 총리들 앞에 자랑하는 한국 대통령 박근혜를 그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한국인들에게 혹 연민을 느끼진 않았을까.
민중의 요구를 권력이 모르쇠할 때, 그 매개가 되어야 할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가 바로 언론이다. 한국의 3대 신문과 방송이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가. 감시견 본분을 얼마나 이행하고 있는가. 기실 그들과 감시견을 연결 짓는 일조차 우스개가 될 판이다. 하지만 그들이 보도와 논평에서 언제나 준거로 삼는 미국의 언론관에 근거하면, 감시견은 언론의 본분이다. 권력을 감시하는 일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기본원칙이다.
권력이 모르쇠하고 3대신문과 방송이 외면할 때, 민중은 자신들의 요구를 어떻게 권력에 전달할 수 있는가. 집회와 시위다. 그런데 그 집회와 시위 앞에 차벽을 세우고 마침내 물대포로 가격해 칠순을 앞둔 농부의 생명이 위독하다. 그럼에도 보라, 공권력이 무기력했다고 통탄한다. 조선일보 사설은 “도심 테러성 시위”로 못 박고 “기획자부터 엄벌하라”고 부르댔다. 동아일보 사설은 “공권력은 무기력했다”면서 “경찰청장은 그동안 불법 폭력시위 주동자를 엄벌하고 주최 단체에 배상 책임을 끝까지 묻겠다고 다짐했지만 과연 제대로 이행했는지”를 추궁했다. 중앙일보도 “도심 폭력 시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사설을 내놓았다. 세 ‘감시견’의 사설 앞에서 나는 민중시인 김남주의 절창이 떠올랐다.
“짖어라 개야 밤낮없이
가장 잘 짖는 놈에게는 부자들이 너에게
동이빨에 생선 뼈다귀를 하사할 것이니
으르렁거려라 개야 우렁차게
가장 크게 으르렁거리는 놈에게는 부자들이 너에게
은이빨에 염소 뼈다귀를 하사할 것이니
물어뜯어라 개야 사정없이
가장 사납게 물어뜯는 놈에게는 부자들이 너에게
금이빨에 소 뼈다귀를 하사할 것이다”
김남주 시인은 1970년대 ‘제도언론’이 침묵하던 그 시기에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첫 ‘지하언론’으로 평가받는 ‘함성’을 편집하고 유포했다. 어떤가. 오늘의 조중동은 저 개들의 금은동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하지만 시인에게 개는 언론만이 아니다.
“개는
사람보다 충성스러운 개는
저 당당한 의사당 안에도 있다
의원석에도 있고 장관석에도 있다
법정의 판사석에도 검사석에도 있다
일언이 폐지하고 개는
쌓아올린 돈더미가 위협받고 있는 곳이면
부자들의 재산이 침해받고 있는 곳이면
어디에도 있다 청와대가 그 본산이다”
전경련과 경총의 숙원사업이던 ‘일반해고’를 가능케 하는 노동개악, 노동자와 농민을 짓밟은 독재정권을 미화하려는 교과서 국정화는 새삼 시인의 통찰을 깨닫게 해준다. 2015년 11월 조중동은 금은동 가운데 누구일까. 아무리 거품물어도 동이빨 아닐까. 민중의 생명을 위협하는 저 공권력이 은이빨이라면, 누구일까, 대한민국 ‘상류층’을 지키는 금이빨 개는. 시인이 노래했듯이 정말 국회의사당 안에, 청와대 안에 있을까. ‘소 뼈다귀’ 물고?
손석춘 언론인 /미디어오늘 15.11.17
박근혜이즘’의 끝이 두렵다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라는 사상전을 펼치고 있다. 국민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상전의 회오리는 황폐한 정치 풍토만 남길 것이다.
요즘 전개되고 있는 정치의 양상을 보면, 어떻게 하면 국민을 잘살게 할 것인가 하는 정책 경쟁을 떠나, 사상(이념) 싸움으로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다. 역사 교과서를 검인정에서 국정으로 바꾸려는 정권의 방침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것은 지난 역사의 자의적인 평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사상적 지표와도 관계되므로 대표적인 사상전이라 할 것이다.
또한 한 공안검사 출신 공직자가 야당 지도자들에 대한 사상몰이 발언을 한 것도 수상쩍다. 그 발언 자체도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큰 문제지만, 그러한 발언을 한 공직자에 대해 정권에서 아무런 인사 조처를 하지 않고 방치한다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다. 정권이 속으로 바라는 발언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정권이 거의 돈이 안 들고 손쉬운 방법인 사상전을 시작했다는 조짐은 전부터 볼 수 있었다. 노동운동에 대해 적의에 찬 탄압을 한 데서 시작해, 통합진보당의 해산 사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 사상전의 전개 양상이 뚜렷이 느껴졌다.
우리가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사상전이 전개되면 우파, 극우가 유리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분명하다. 그렇기에 우파는 이제까지 그 편리한 수단을 자주자주 사용해왔다. 이명박 정권 때는 좀 잠잠했다. 그러다가 박근혜 대통령 들어 바람몰이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박 대통령의 한 맺힌 과거 기억이 작용한 것일까. 박근혜이즘이라 할 만하다. 사상전에 대한 반격은 마치 언덕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다. 그러나 느리지만 줄기찰 것이다. 사상전이 회오리처럼 휩쓸고 간 뒤에 남는 것은 황폐한 정치풍토뿐일 것이다. 국민에게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독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들이 강요한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건들이 나치즘의 대두에 불을 질렀다.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중국 대륙의 적화가 매카시즘 등장의 배경이 되었다.
우리나라 극우 진영의 사상몰이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남북이 각각 별도의 자기 완결적인 법체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흡수통일이 아닌 다른 통일 방안을 꺼냈다가는 법망에 걸리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남북관계의 법리를 말할 때 합헌성을 내세우지 말고 합민족성(合民族性)이라는 틀을 적용하는 것이 어떨까 상상해보기도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미·중 간 외교에서 미묘하고도 어려운 단계에 처해 있다. 미국은 우선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해 우리에게 분명한 태도를 요구하고 있어서 참으로 난감하다. 또한 군사적 해외 진출이 가능하도록 법제를 갖춘 일본은 북한이 한국의 영토 밖이라 한국 동의 없이 군사 개입이 가능하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우리 민족에게 닥칠지 모를 큰 위험을 느끼게 한다. 구한말의 상황을 회상케 하기도 한다.
이럴 때 여와 야는 마음을 합쳐 그 컨센서스를 바탕으로 지혜롭게 대처해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대외 정책에서 여와 야가 어긋난다면 실패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러한 국제적 상황과 우리 국내 사상전의 전개 양상은 전혀 맞지 않는다.
어렵더라도 민생 문제에 힘을 쏟고 고심해야
박 대통령의 통치 방식이 바뀌어야 할 때이다. 유아독존식으로 경직되어가는 통치 스타일을 접을 때다. 물론 박 대통령의 통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금까지는 친인척 관리에 허술함이 드러난 게 없었다. 철저하다. 공직자의 기강도 추상같이 잡고 있다. 물론 KF-X 사업 같은 데서 슬슬 허점이 드러나고 있지만 말이다. 여당을 이끄는 고삐도 야무지게 잡고 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무리하게 주저앉혔고, 김무성 당 대표는 습복(慴服)하고 있다. 다만 당내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부분이다. 강하기만 하면 부러진다. 유연함이 함께 있어야 정말 강한 것이다. 이제 국민도 슬슬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여백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런 신축자재의 통치가 정말 강한 통치이다. 임기 5년제로 영구 집권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바라건대, 민생 문제에서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려는 것으로만 보이는 사상전을 펴지 말았으면 한다. 그것은 이기는 듯하지만 결국 불모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어렵더라도 민생문제에 힘을 쏟고 고심해야 한다.
여야는 국제적 어려움을 당하여 민족의 앞날을 현명하게 개척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박 대통령의 통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건전한 이의자(異意者)들을 포용해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너무 완벽하게 고삐를 쥐려 한 나머지 결국 좌절한 게 아닌가.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시사인 425호 15.11.9
‘자학사관’ 독일은 지금
구미시의 ‘사이버 박정희 대통령’ 웹사이트에는 그가 남긴 세 가지 업적이 소개돼 있다. 그중 하나가 자연보호운동이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산림녹화운동을 시작했고, 집권 중반에는 그린벨트를 만들었고, 말기에는 자연보호헌장을 제정해 “국민 모두가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회복 유지하는 데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산림녹화운동을 펼친 계기는 1964년의 독일 방문이었다고 한다. 이때 독일의 숲에 감동과 충격을 받은 그가 한국의 민둥산을 푸르게 만들기 전에는 다시 독일을 방문하지 않겠다는 결심까지 했다고 하니, 산림녹화에 정성을 쏟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독일은 오래전부터 검푸른 숲의 나라, 모범적인 자연보호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수탈과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의 대통령, 자기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대통령이라면 부러워하고 시샘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독일에서 자연보호법을 제정해서 본격적으로 자연보호를 시작하게 된 때는 히틀러 집권기부터이다. 다양한 이해의 충돌로 바이마르 공화국 때 실패한 것을 히틀러와 나치들이 단번에 정리했기에 가능해진 것이다. 이 법의 핵심내용 중 하나는 전체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에 앞선다는 것이다.
독일의 자연보호법은 여러 차례 개정됐지만, 히틀러 때 제정된 법의 모태가 청산된 것은 아니다. 과거청산에 열심인 독일에서도 이 법에 대해서는 2002년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문제제기가 이뤄졌다. 당시 환경부 장관이 역사학자들에게 이 법의 제정 시 나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연구 하도록 부탁했고, 결과는 심포지엄을 거쳐 책자로 출판됐다. 몇몇 학자들은 둘이 큰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했고, 다른 몇몇은 아직까지도 그 법 제정 시의 이데올로기가 자연보호와 조경계획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
우리나라의 산림녹화나 그린벨트는 ‘좌우’에서 모두 크게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우파들은 나무로 가득한 산들이 모두 박정희 덕이라며 칭송하기 바쁘고, 환경단체들은 그린벨트가 풀려나가고 산림이 훼손되는 것을 가슴아파한다. 그것이 히틀러의 자연보호법 제정과 비슷한 방식으로 시작되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좌파’에서도 개의치 않는다. 70년이 지난 시점에서 독일의 주무부처 장관이 그 법의 역사적 문제를 파고든 이유에도 관심이 없다.
우리 학교의 역사책이 ‘자학사관’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독일의 그런 작업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법이 독일을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자연보호의 선진국으로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면, 법 제정의 아버지를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성공’한 현재를 가능하게 해준 역사는 반드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들 눈에는 독일정부와 역사가들은 모두 독일 젊은이들을 절망시키고 자살로 내모는 짓을 하는 ‘좌파’로 보일 것이다.
독일의 현재를 보면 이들의 우려는 100% 틀린 것 같다. 얼마 전 한 세미나에서 독일의 30대 후반 청년이 자기 세대는 대부분 자기 나라가 부끄러운 역사로 얼룩져 있고, 이에 대해 그들 자신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도 그들은 ‘자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역사의식이 미래를 향한 행동 지침으로 작용한다. 독일이 태양에너지나 풍력 같은 재생가능에너지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역사의식을 지닌 젊은이들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려 하기 때문이다.
세미나에서 한국정부의 교과서 국정화 이야기가 나왔다. 독일 역사학자가 이유를 물었다. ‘자학사관’이 나라를 망칠 것이란 우려를 하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왔다. 그가 다시 독일이야말로 ‘자학사관’의 대표격인데 이에 대한 한국정부의 생각은 어떤지 물었다. 그는 ‘자학사관’이 나라를 망친다는 주장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필렬 | 방송대 문화교양학부 교수/ 경향 15.10.28
연봉 2억여 원의 ‘문지기’
KBS 사장 공모에 14명이 응모했다고 한다. 대부분 보수 정권에서 친정부 성향을 드러내온 인물들이다. 이번부터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친다지만 공영방송의 앞날이 암담하다. 대한민국에 KBS 사장으로 나설 사람이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더구나 이번 사장 후보자부터는 방송법 개정에 따라 국회 인사청문회 통과라는 새로운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곳에 내놓아도 공영방송 KBS를 대표하는 데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학식과 덕망, 철학과 전문성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사장 후보자를 공모한다. 땅땅땅!”
KBS 사장 공모가 끝났다. 모두 14명이 응모했다고 한다. 대부분 보수 정권하에서 친정부 성향을 드러내온 KBS 출신의 재수생, 삼수생들이다. 그런데도 KBS 이사회가 공영방송의 미래와 바람직한 사회적 역할을 위해 이런 결단을 내릴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국민의 기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분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된 박근혜 정부의 인사 스타일은 최근 공영방송 이사 선임에도 여지없이 적용되었다. 업무에 대한 이해나 전문성보다는 이견을 가진 그룹을 어떻게 제압할 수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고려되었다는 인상이다. 자신과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종북’과 ‘좌파’로 규정해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와 존중조차 외면해버리는 극단주의가 앞으로의 KBS를 어떤 위기로 몰아넣을 것인지 두려울 뿐이다.
이분들이 주도하는 이사회에서 어떤 사장이 선출될 것인가를 상상해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미션은 총선과 대선을 효과적으로 관리해줄 ‘믿음직한’ 사장을 뽑는 것이겠다. 물심양면으로 ‘박심’을 대변하기 위해 진력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사장 공모 이후의 일정과 관련해 무엇 하나 투명하게 드러나는 게 없다. 여당 추천 이사들 주도로 밀실 안에서 결정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공영방송 이사회의 회의 비공개 요건에 대한 법적 근거 따위는 관심 범위 밖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 사장 선임 때처럼 야당 추천 이사들의 지지를 받은 인물이 최종 후보자로 추천되는 난감한 상황이 재연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향후 5년을 가를 총선과 대선 관리용 사장이다. 문단속·입단속·표단속이 물샐틈없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사장 추천 과정에 대한 공개, 특별다수제나 사장추천위원회 등 형식적인 절차 따위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겠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우연이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속셈으로 보인다.
추정컨대 서류를 제출한 인물 중 차기 사장이 결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시간을 끌 이유도, 절차를 복잡하게 가져갈 이유도 없다. 이는 결국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걸쳐 180° 달라진 KBS 뉴스의 틀을 만들었던 보도본부장,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통해 정권의 의중을 대변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던 심의위원,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종합편성채널 도입을 적극적으로 주도해 공영방송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킨 방통위원, 자신의 연임을 위해 후배들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현 사장 중 연봉 2억여 원의 문지기가 있다는 얘기다.
국정교과서 논란을 주도한 교수가 EBS 사장 후보로 거론되다니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정치적 고려가 1순위가 된 공영방송 사장 선임은 오히려 공영방송의 사회적 역할을 무력화하고 국민의 불신을 가속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더 나은 서비스, 더 나은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 변화하는 매체 환경 속에서 중장기 비전에 대한 고민이 담길 수 있는 여건이 이번에도 마련되지 않을 것이다. 안정적인 공공서비스, 국민의 알 권리,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지역의 관심사를 의제화할 수 있는 시선, 고품질 다큐멘터리와 새로운 포맷 개발 등 공영방송의 선도적 구실 따위는 개밥에 도토리일 뿐이다. 이는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는 공영방송을 국민 앞에 붙들어두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인데도 말이다.
또 다른 흉흉한 소문도 들려온다. 국정교과서 논란을 주도해온 교수가 EBS 신임 사장 물망에 올랐다는 이야기다. 어쩐지 신임 이사회에 교육부 장관 출신의 이사장을 포함해 교육계 인사가 유난히도 많다 싶었다. 추천 단위나 이력으로 성향이 명확히 드러나는 경우만 9명 중 4명이니 과반에 가까운 수치다. 물론 EBS는 이사회가 사장을 선임하는 구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임 사장의 행보를 이사회가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면 그 파장은 상당할 것이다. 바라건대 이런 고약한 예측이 현실로 구현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공영방송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정책위원) 시사인 423호 15.10.26
GDP 3만 달러의 ‘헬조선’… 이 수수께끼의 답은?
1995년에 한국의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넘었다. 지금은 3만 달러에 육박하는데, 사람들은 사는 게 더 힘들어졌다고 한다. 음식을 나누듯 경제를 나눠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원래는 곧 밀어닥칠 경제위기에 관해 쓰려고 했습니다만, ‘한가위 특집호’라는 말을 듣고 오래 망설였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덕담이 오고 가는데, 가뜩이나 불확실한 미래에 공포까지 보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맑은 공기 덕에 눈에 잡힐 듯 선명한 차창 밖 풍경에서 옛 기억을 더듬어보는 건 어떨까요?
지금 한국 경제 상황은 무척 나쁩니다. 30년 가까이 현실 경제를 들여다본 제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렇습니다. 설마 외환위기 때보다도 나쁠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당시엔 원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수출이 두 자릿수로(1999년 8.6%, 2000년 19.9%) 증가하면서 위기를 빠져나왔죠.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릅니다. 미국-유럽-아시아 순서로 경제위기가 전염되면서 전 세계가 모두 침체에 빠진 상태입니다. 뼈를 깎는 고통으로 비용을 절감하면 할수록 더욱 깊숙한 위기로 빠져듭니다. 수출은 늘지 않은 채 내수만 축소될 테니까요. 고향으로 가는 차(또는 열차)를 타기 직전, 여러분이 보셨을 ‘노사정 대타협’은 과거와 달리 한국 경제에 독약이 될 겁니다.
ⓒ연합뉴스 최빈국이었던 한국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성장해 국내총상산(GDP) 기준 세계 13위의 경제 대국이 됐다. 광복 이후 70년간 한국 경제가 위기와 도전, 비상을 거듭한 결과다. 조선·반도체·철강·자동차가 수출을 주도한 한국은 원조를 받던 최빈국에서 공여국이 됐다. 사진은 평택ㆍ당진항 국제자동차부두에 수출 차량으로 가득 찬 모습. 2015.6.10.
40대 이상인 분들은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넘은 게 언제일까요? 딱 20년 전, 1995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1인당 GDP는 3만 달러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무려 3배나 늘어난 거죠. 그런데 20년 전과 지금, 어느 때가 더 살 만한가요?
백이면 백, 사는 게 더 힘들어졌다고 대답할 겁니다. 경제학을 30년 이상 공부한 저한테도 수수께끼입니다. 옛날보다 일을 덜하는 것도 아니고, 20년 전과 비교해보면 자동차·컴퓨터·자동화기기 등 생산설비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헬조선’을 외치는 걸까요?
이 수수께끼의 가장 유력한 답은 불평등입니다. 제가 태어난 1960년,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였습니다. 농지개혁과 6·25 전쟁으로 지주계급이 없어지고 월급도 고만고만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교육에 대한 투자는 곧 계층 상승으로 이어졌습니다. 힘들었지만 희망이 있었던 시절이죠. 하지만 어떤 지표로 계산하든 지금 한국은 2000년대 들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불평등해지고 있습니다.
별것도 아닌 고3 때의 성적으로 대학이 결정되고 학벌이 직업의 정신적·물질적 보상을 결정하는 사회, 더구나 그 격차가 급속하게 벌어지는 사회에선 모두가 경쟁 상대요, 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디어는 온통 상위 1%의 삶만 비춰주고 부동산과 주식 투자는 그 세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일로매진한 결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자신의 노동만으로는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습니다. 성장률 2%대에 머무르는 시대에 자산가들은 5%의 수익률을 확보하기 위해 임대료를 올리고 있으니 셋방살이마저 힘들어질 겁니다. 보통 아이들에겐 ‘헬조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딜레마를 푸는 방법은 협동이다
피를 말리는 경쟁은 오직 목표가 뚜렷할 때만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추격하는 상황에서 경제는 100m 달리기지만 선도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면 경제는 예술이 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 세상은 경쟁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딜레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사교육에 온 힘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부잣집 애들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괜찮은 집을 사기 위해 경쟁할수록 대다수 아이들이 집을 가질 수 없는 것도 그것이 ‘죄수의 딜레마’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딜레마를 푸는 비결은 협동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90%는 1인당 GDP 3만 달러라는 수치가 믿어지지 않으실 겁니다. 4인 가족이라면 1년 소득이 1억5000만원 가까이 된다는 얘기니까요. 우리 사회가 평등해져서 그 정도의 소득을 골고루 누린다면 우리는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을 겁니다. 특히 아이들은 1점에 목매달기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흠뻑 빠지게 되겠죠. 바로 여기에 미래 경제성장의 비결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할 때, 창조도 나오는 법이니까요.
차창 밖으로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는 게 보이실 겁니다. 분명히 아버지 때나 할아버지 때처럼 배를 곯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마음을 졸이고 있습니다. 금 모으기 운동 때는 물질을 모았지만 이젠 마음을 모을 때입니다. 한가위에 모두 모여서 음식을 나누듯 경제를 나눌 때 비로소 위기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정태인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시사인 419호 15.9.30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절망 코드야말로 한국 젊은층의 신조어를 관통한다. 이들 신조어 중에서도 압권은 헬조선이다. 영어인 ‘헬’(Hell=지옥)은 이 신조어의 현대성을 부각하지만 ‘한국’도 아닌 ‘조선’은 이미 신분의 대물림이 거의 제도화된 한국 사회의 퇴행성을 암시한다.
많은 젊은이들은 아직까지 경제성장과 각자의 노력이 결국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자기 탓’으로 돌린다. 성장이 둔화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아직도 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모양이다.
과거 중국이나 한국의 전통사회에서는 국가 관료들이 백성 사이에 불리는 노래들을 채집하러 다녔다. 민요를 곧 민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 민심을 읽으려고 했다. 요즘 같으면 가장 정확한 젊은층 민심의 독법은, 아마도 젊은이들이 지어낸 신조어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한 신조어들이 이 사회의 특징들을 하도 예리하게 짚어내는 바람에 한번 매체에 소개되면 전국민적 용어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한국형 “조직 문화”의 아주 부정적인 한 측면을 잘 표현해 이제는 성인들 사이에서도 보편적으로 쓰이는 ‘왕따’라는 말은 본래 1990년대 중반 중·고등학생들의 은어 아니었던가? 그런 용어들을 잘 봐야 우리 현주소가 그대로 보인다.
그렇다면 요즘 젊은층에서 유행하는 신조어들을 보고 바로 직감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3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젊은이), 5포세대(‘3포’에다가 취업, 주택 구입 등을 포기한 젊은이), 7포세대(‘5포’에다가 인간관계 및 희망을 포기한 젊은이), 영포자(영어를 포기한 청소년·청년), 그것보다 조금 더 오래된 이태백(‘이십대 태반은 백수’의 준말)이나 인구론(‘인문계 졸업자는 구십퍼센트가 논다’의 준말)…. 이와 같은 신조어의 뜻을 외국 대학생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실상을 이해하게끔 해주어야 하는 대학교원 입장인 나로서도, 이와 같은 단어들을 듣기만 해도 벌써 절망과 무기력의 무드에 빠질 정도다.
절망 코드야말로 한국 젊은층의 신조어를 관통한다. 이들 신조어 중에서도 압권은 헬조선, 즉 ‘지옥 같은 한국’이다. 영어인 ‘헬’(Hell=지옥)은 이 신조어의 현대성을 부각하지만 ‘한국’도 아닌 ‘조선’은 이미 신분의 대물림이 거의 제도화된 한국 사회의 퇴행성을 암시한다. 150년 전에 조선의 한양 북촌에서 태어난 권문세도가들의 자녀들이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듯, 오늘날 ‘강남족’은 거의 저들만의 세습적 카스트를 이루어 거주지, 통혼권, 학습·유학 루트, 언어(영어 상용 선호), ‘웰빙’ 등의 차원에서 배타적인 세습신분 계층을 형성한 게 아닌가?
‘헬조선론’이 한국의 2010년대 중반을 대변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한 세기 이전에 레닌이 제정러시아를 가리켜 “제국주의 세계의 가장 약한 고리”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약한 고리”라는 것은, 제정러시아는 비록 ‘열강’ 대열에 속하긴 했지만 ‘열강’치고 민중의 박탈감이 가장 강하고 온갖 모순들이 가장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사회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열강’의 위치에 있다 해도 실은 가장 내파되기 쉬운 나라라는 점을, 레닌이 간파한 것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외형상 (명목상의 국내총생산액으로 치면) 세계 13위 경제대국이며 세계 5위 수출대국, 그리고 세계 7위 군사력 보유국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준)열강이다. 한데 그 서민대중의 실질적 생활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
부자 나라 클럽이라고 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한국이 가입하긴 했지만, 문맹률이 70%이던 제정러시아가 문맹자가 극소수이던 프랑스나 독일과 달랐듯이, 한국의 사회적 지표들도 여타의 오이시디 국가들과 완전히 다르다. 예컨대 한국의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 예산 비율은 현재 10.4%로 오이시디 국가 중 최하위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 그래도 2년에 1%씩 오르긴 했지만,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프랑스(31.9%)나 핀란드(31%)와 비교하는 거야 무리지만, 경제력이 한국보다 훨씬 약한 에스토니아(16.3%)와도 격차가 하도 커서, 대한민국을 ‘복지 없는 경제대국’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국내총생산 대비 세금 부담률(24%)도 프랑스나 핀란드보다 두 배 정도 낮지만, 저과세는 세금 낼 소득원 자체가 없는 가난한 젊은이들보다는 현대판 경화벌족 격인 ‘강남특별시’ 시민들에게 훨씬 유리한 것이다. 저과세와 무복지는 결국 세계 최악에 가까운 자살률과 최저에 가까운 출산율로 이어지고, 오이시디 회원국 중 최저의 주관적 행복지수로 이어진다. 행복지수란 꼭 주관적 ‘감성’만이 아니고 각자의 신체적 체감까지 포함하는 지표이기도 한다. 예컨대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7시간49분)은 프랑스인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짧아 오이시디에서 최저인데, 잠부터 충분히, 편안히 잘 수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지옥에서 산다”고 말할 만하지 않은가?
제정러시아의 막대한 군사력과 그 민중의 처참한 삶이 전혀 다른 차원에 속했듯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휘황찬란함은 그 생산의 피라미드를 뒷받침해주는 다수의 불안노동자와 자영업자, 빈민들의 삶까지 윤기 나게 하지는 않는다. 보통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성인 당사자들만이 서로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계급 재생산이 학벌피라미드를 통해 이루어지는 한국의 경우에는 부모만 경쟁하는 것이 아니고 자녀들까지도 이미 유치원 때부터 ‘대입’을 염두에 둔 피 말리는 교육자본 축적 경쟁에 투신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대로 아동기를 빼앗기고, 어른들은 어른대로 초·중·고 학생 1인당 월평균 24만원의 사교육비, 즉 일종의 사설 교육세금을 빚을 져서라도, 병날 각오를 하고 두 직장을 다녀서라도 내는 것이다. 한국의 월평균 사교육비는, 상대적으로 더 부유한 국가인 일본의 월 사교육비(평균 15만원 정도)보다 훨씬 높다. 승자가 태생적으로 이미 거의 정해져 있으며, ‘패자 계층’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는 사람이 경쟁하면 경쟁할수록 질병과 채무만이 늘어나는 곳은 정말로 지옥이 아닌가?
그러나 제정러시아와 오늘날 대한민국의 유사성은 ‘국력’과 ‘민중 행복지수’의 믿지 못할 정도의 불균형으로 끝나고 만다. 제정러시아는 이미 1905년 혁명 이후로는 전세계 혁명 전위의 위치에 올랐지만, 대한민국은 가면 갈수록 더 짙은 보수성을 드러낸다.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는 사람들은 이민을 토론하거나 이런 데서 태어난 ‘팔자’를 한탄하지, 현대판 동학농민혁명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하나의 핵심어로 떠오른 ‘이민’은, 결국 더 부유하고 재분배 제도가 그나마 돌아가는 곳으로 가서 그곳의 시장경쟁-단 한국보다 덜 치열하고 더 공평한 경쟁!-에서 삶의 터를 잡으려는, 사실 극히 보수적인 꿈을 함의한다. 1917년 러시아에서 대공장 고숙련 남성 정규직들이 볼셰비키들을 열렬히 지지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공장의 조직화된 숙련공들이 자본주의를 문제 삼기는커녕 비정규직들과의 연대마저도 사양하는 사례들이 수두룩하다. ‘헬조선’에서 죽창의 그림자도 쉽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단순한 답은 없다. 너무나 많은 요인들이 한국 젊은이들을 투쟁이 아닌 절망으로 몰고 갔다. 예컨대 한국에서 자주 ‘좌파’로 오인되는 주류 개혁주의 정당에 대한 실망은 큰 몫을 했을 것이다. 2002년과 2012년 대선에서 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한 20·30대의 지지는 각각 59%와 64%였는데, 과연 ‘주류’ 야당이 젊은층 지지를 받는 만큼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일이 많은가? ‘88만원 세대’, 즉 불안노동시장으로 내몰린 대규모 젊은층의 출현은 사실 노무현 집권 때의 현상이 아닌가?
그러나 가장 큰 요인은 ‘성장 신화’의 지속이 아닌가 싶다. 여태까지의 성장 속에서 어느 정도의 생계안정을 이룩한 부모세대의 지원에 힘입어 실업자가 돼도 굶을 일은 없는 많은 젊은이들은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면서도, 아직까지 경제성장과 각자의 노력이 결국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자기 탓’으로 쉽게 돌린다. 성장이 둔화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아직도 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모양이다. 재벌경제가 아무리 수출을 잘해도 다수의 삶이 나빠지기만 한다는 사실을 앞으로 몇 년간 더 확인해야, 이 사회를 연대해서 바꾸지 않는 이상 살길이 없다는 점을 ‘헬조선’의 피해자들이 각오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5.9.29
돈 받아 기사 쓰며 용춤추는 언론사들
갑질의 종결자 권력과 말단 갑 언론의 거짓 프로파간다
갑질이 공분을 자아낸 지 오래다. ‘을들의 외침’이라든가 ‘슈퍼 갑’ 따위가 인터넷에 떠돈 지도 제법 됐다. 그럼에도 갑질이 잦아든다는 소리는 감감하다. 갑질은 더 잦을 뿐만 아니라 ‘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갑질의 ‘종결자’는 누구일까. 마치 자신은 갑이 아닌 듯, 더구나 을을 위한다고 온 국민에 선포하며 실상은 을 모두를 해코지하는 갑 아닐까. 그 갑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그 갑은 미소가 특기다. 추종자들은 그가 조신하다고 추어올린다. 때론 굵은 눈물도 보란 듯이 펑펑 흘린다. 온 국민이 보는데도 전혀 닦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눈물을 흘리게 한 사안에 얼음장처럼 차갑다.
새삼 그를 ‘갑질 종결자’로 민주주의 법정에 고발하는 이유는 ‘노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노동개악을 살천스레 강행해서다. ‘성과’가 낮거나 일하는 태도가 ‘불량’하다고 목을 자를 수 있는 ‘일반해고’ 도입을 버젓이 ‘노동개혁’이라 부르댄다. 태도 불량의 기준은 대체 어떻게 명문화할까 따위를 묻기란 이 시점에 사치스럽다. 대체 해고를 쉽게 하는 법안을 어떻게 비정규직 대책으로 감히 국민 앞에 내놓을 수 있는가. 정규직 해고가 ‘자유’롭게 되면, 대기업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뽑는다? 그게 참이라면, ‘고양이에게 아예 생선가게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해야 전체 생선에게 좋다’도 참이다.
말살에 쇠살이 현실로 성큼 다가서고, ‘노사정 합의’라는 외투까지 쓴 채 입법을 예고하는 오늘은 갑질의 ‘종결’이다. 문제는 국민의 대표가 무람없이 종결의 갑질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다. 무엇일까. 이 나라 언론이다.
무릇 언론의 생명은 진실이다. 권력이 자본의 이익을 모든 국민의 이익처럼 포장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이데올로기라 부른다. 권력 감시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언론의 기본이다. 권력과 자본이 말끝마다 ‘국민’이나 ‘국익’을 내세울 때, 허구성을 파헤치고 진실을 알려야 할 소임은 일차적으로 언론인에게 있다.
하지만 보라.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더 놀라운 일은 그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언론계 안팎 세태다. 미디어오늘 보도에 따르면, 매일경제가 2015년 3월 연재한 ‘노동시장 개혁’ 기획물은 “양보 안하는 강성노조가 일자리 막아” 따위의 기사를 내보냈는데, 이 보도에 박근혜 정부가 5500만원을 지원했다. 한국경제가 2014년 12월 내보낸 “노동양극화 풀려면 고용 유연성 높이고 대기업노조 과보호 깨야” 따위의 기사 7건은 2200만원이다. 경제지만일까? 아니다. 정부 돈 챙겨 기사를 생산한 언론사 목록에는 문화일보, 채널A, tvN은 물론이고 중앙일보, 동아일보, SBS, MBC도 등장한다. 돈을 받은 중앙일보 기사는 “정규직 일 못하면 해고 쉽게” 따위의 제목이 붙어 있다.
문제의 언론사들은 최근 정부여당의 노동개악에 쌍수 들어 환호하고 있다. “정부·여당 주도의 노동개혁 불가피하다”는 동아일보 사설은 정규직들을 거침없이 ‘노동 귀족’으로 몰아세웠다. 중앙일보는 “극적 타결한 노동개혁안… 신속한 법제화 나서야” 제하의 사설에서 민주노총을 비난하며 “어렵게 타결한 노사정 합의에 마냥 반대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면서 “민주노총의 강경세력은 마치 자신들이 전체 노동계를 대표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훈계했다. 어떤가. 민주노총이 전체 노동계를 대표하지 않는다면, 한국노총의 대표성은 더 부족하다. 두 노총의 조합원 숫자는 어금버금하다. 그럼에도 중앙일보 사설은 한국노총이 합의한 것은 ‘노사정합의’이고,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계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돈 받고 기사 생산한 언론사들이어서일까. 자가당착에 전혀 성찰이 없다.
권력이 부르대는 ‘노동개혁’을 그대로 옮겨 쓰지 말아야 옮음에도 ‘진보언론’조차 ‘노동개혁’이라 쓴다. ‘노사정합의’도 아니다. 주요 당사자인 민주노총은 참여도 않았다. ‘반쪽 노사정합의’가 옳다. 그런데 죄다 ‘노사정합의’라 쓴다.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과 손잡고 국회의원 지분을 챙겼던 한국노총의 행태는 노동운동의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심한 제1야당의 오늘과 더불어 새삼 깨우쳐준다.
갑질의 종결자인 권력에 빌붙어 돈 받아 기사 쓰며 용춤추는 언론사들을 우리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기실 그들이야말로 ‘노동귀족’ 아닌가. 권력과 자본의 논리를 앵무새로 옮기는 그들이 지금 민주노동운동에 갑질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저 종결자 갑질에 견주어 그들은 한낱 말단 갑임을. 언론운동에 젊음을 보낸 나로선 참담할 따름이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말단의 갑질에 미친 오늘의 ‘언론’이./ 손석춘 언론인 /미디어오늘 15.9.18
텔레비전도 ‘제목 장사’ 합니까
방송통신위원회가 ‘제목 광고’를 예고했다. 이에 따르면 <SKT와 함께하는 히든싱어> 같은 프로그램 제목이 가능해진다. 협찬에 대한 관리체계 정비 없이 규제만 풀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다시 무리한 광고 규제 완화를 예고함으로써 빈축을 사고 있다. 이번에는 이른바 ‘제목 광고’로 불리는 협찬 고지 방식의 변경이다. 협찬은 ‘방송사업자가 방송 제작에 관여하지 않는 자로부터 방송 프로그램의 제작에 직간접으로 필요한 경비·물품·용역·인력 또는 장소 등을 제공받는 것’으로, 시청자들은 방송 프로그램 종료 시 나오는 작은 하단 배너로 협찬주 목록을 식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협찬 고지를 <SKT와 함께하는 히든싱어> 같은 방식으로 프로그램 시작부터 종료할 때까지 내내 제목과 함께 자막으로 띄우겠다는 것이다.
협찬에 대한 사전·사후 관리체계를 하나도 정비하지 않은 채 제시된 안이라는 점에서 방송의 공공성과 관련해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협찬은 간접광고와 달리 협찬주에게 광고효과를 줄 수 있는 물품의 노출을 금지한다. 대신 광고 직접 영업을 금지하는 주요 방송사들의 경우에도 직접 판매를 허용하는 영역이다. 광고는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전후 광고효과가 직접 나타나므로 광고주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코바코나 미디어렙 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판매되지만, 협찬은 협찬주 홍보를 프로그램에서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지 품목도 광고와는 달리 매우 제한적이다. 따라서 방송사가 이를 악용해 협찬주의 물품을 노출시키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이를 제재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둔다. 그런데 이러한 규제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 검토 없이 협찬주에 대한 직접 광고를 허용하겠다는 것이 제목 광고의 취지다.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제목 광고의 허용은 방송의 공공성을 위협한다. 이는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광고주의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가 가능해지는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협찬주 노출이 암암리에 되어온 것과 이를 전면으로 인정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간접광고와 협찬에 대한 규제체계를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 먼저 간접광고와 판매 단위를 일원화하고 그에 따른 광고 수익 배분체계, 군소 방송 지원체계, 사후 관리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둘째, 제목 광고의 대상 범위와 방송광고의 허용 범위를 일원화해야 한다. 이는 협찬이 광고효과를 발휘하게 되어 광고와 동일한 효과를 가지게 되는 만큼, 법령 또는 ‘방송광고 심의에 관한 규정’에서 금지된 품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광고 금지 품목들이 제목과 나란히 제공된다면 이는 그동안의 사회적 논의를 물거품으로 돌리며 심각한 후유증을 예고하는 일이다. 금지 품목의 동일한 적용이 사전적으로 확정되어야 한다.
셋째, 제목 광고가 지역 방송이나 군소 방송, 기타 매체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제목 광고는 광고시장의 불균형 가속화, 인기 프로그램에 대한 협찬의 쏠림, 프로그램 내에서 특정 협찬주의 영향력 확대 등이 불가피한 내용이다. 이는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 tvN 같은 CJ 계열 PP(프로그램 공급자)로, 그 수혜 대상이 너무나 분명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이러한 규제 완화가 미칠 파장에 대한 시뮬레이션 등 충분한 검토를 거쳐야 한다.
‘제목 광고’ 허용으로 종합편성채널 지원사격 하나
논란 속에서 허용된 지상파 광고총량제가 9월부터 시행 중이다. 그 결과가 미처 나오지도 않은 시점에 제목 광고가 예고되었다는 점에서 의아한 대목이 적지 않다. 애당초 광고 규제 완화를 한 묶음으로 검토했거나 기존 광고 규제 완화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좀 더 지켜보는 것이 상식적인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제목 광고 허용은 지상파보다는 종합편성채널에 대한 지원의 의미가 더욱 커 보인다. 총선이 임박한 상황에서 주요 방송 매체에 우호적 신호를 보내기 위한 추가 조치로 해석된다.
만약 방송통신위원회가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한다면 이번 기회에 시청자들의 피로감이 누적된 간접광고와 협찬의 이원화된 체계를 해소하고, 광고 판매와 사후 규제 시스템을 일원화하여 협찬의 투명성을 제고함과 동시에 지역 및 군소 방송사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하고 개선해야 한다. 또한 종합편성채널이 협찬주의 의사를 불법적으로 프로그램에 반영해온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의 공공성과 공익성의 최후 보루이며, 이를 위한 규제를 담당하는 곳이다. 기관의 역할은 외면한 채 방송사의 이익과 편의만을 앞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정말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정책위원)시사인 417호 15.9.14
당신들은 국민이 그렇게도 우스운가
'헬조선'의 시대, "역사인식 부족" 저들의 언행에 구토가 나온다
“대한민국 국민은 어쩌다 자기 나라가 언제,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국민이 되었는가.”
내가 읽어 온 신문 글 가운데 국민을 가장 어리보기 삼은 글이다. 저 문장을 쓰기란 쉽지 않다. 평소 ‘국민’을 어떻게 여기는지 뚝뚝 묻어난다. 곧 이은 문장은 놀랍다. “역사를 왜곡한다고 일본이나 중국을 지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자기 나라가 언제, 어떻게 자랑스러운 민주공화국으로 태어났는가를 스스로 상기하며 만국 앞에 기리는 일이다.”
글쓴이는 KBS 이사장을 지내고 이사 후보에 선임돼 이사장에 연임될 가능성이 큰 이인호 씨다. 그는 “광복절은 대한민국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다” 제하의 시론에서 KBS이사장 임명권자인 박근혜 대통령의 ‘대박’을 따와 다음과 같이 쓴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평화통일에 대한 열망이 국적 없는 통일지상주의의 유혹을 몰고 왔다. 우리가 이념적·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하는 순간 통일은 민족 전체의 해방과 복리의 증진을 의미하는 ‘대박’ 대신 노예의 길로 빠질 수 있는 길목이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를 망각하고 마치 대한민국이 없어져야 통일이 된다는 망상에 젖어드는 현상마저 일어난 게 사실이다.”
이인호는 칼럼 뒤에 자신을 “서울대 명예교수, 전 주러시아대사”의 직함으로 표기했다. 궁금하다. ‘대한민국이 없어져야 통일이 된다는 망상’에 젖은 사람은 누구일까. 이어진 글을 보면 그는 자신을 ‘러시아 대사’를 비롯한 ‘요직’에 임명한 과거 정권을 살천스레 겨누고 있다. 동시에 KBS 이사장으로 임명한 현 정권의 언어를 재임명 시기에 구사하고 있다. 권력이 바뀔 때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며 처신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과연 지나친 평일까.
도리 없이 그의 조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명색이 사학자인 그가 솔직히 인정만 했어도 넘어갈 일이지만, 친일 언행이 또렷해 그가 좋아하는 ‘국가기관’에서 친일파로 규정한 할아버지가 친일하지 않았다고 바득바득 우기고 있다.
▲ (왼쪽부터) 이인호 KBS 이사장, 박근혜 대통령,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 연합뉴스
그래서일까. 국민을 훈계하는 글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성찰마저 없다. 그는 해방보다 건국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펴며 “왜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일본군 위안부로 유린당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는지를 묻고 있다. 몰라서 묻는가. 독립운동에 애면글면 나선 사람들에게 자신의 처지에서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섟에 되레 친일에 나선 자신의 조부를 비롯한 친일파들 책임이 크다.
그럼에도 조부가 친일파 아니라고 우겨대는 그가 국민에게 오만한 훈계를 한다. “역사를 왜곡한다고 일본이나 중국을 지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시급하게 해야 할 일” 운운하는 대목에선, 그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 문창극의 ‘일본군 위안부를 더는 거론하지 말자’는 논리는 물론, 대통령 동생 박근령의 망언이 읽혀진다. 그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얼마나 한국을 도와주었는지) 국민들이 잘 모른다”며 “대통령께서 하실 수 없는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생각하시지 않을까 가늠하고 제가 얘기를 한다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뿐인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도 ‘국민 훈계’에 가담했다. 그는 “그 동안 이 전 대통령의 과를 너무 크게 생각했다. 이제는 공만 봐야 한다”고 부르댔다.
중앙일보는 이인호의 글과 함께 쿠데타 주모자인 김종필의 회고록을 빌려 서울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 박정희 동상은 물론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현대의 정주영 회장”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발언을 부각했다. “국민이 존경과 고마움을 가지고 동상을 올려다볼 날이 올 것”이라는 말도 물론 포함됐다.
어떤가. 저들이 대한민국 국민을 그렇게도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남들이 독립운동을 벌이는 시공간에서 제 나라를 식민지로 지배하는 침략자의 장교로 활동했던 사람의 딸이 대통령이 되고, 그 딸이 제 조부의 명백한 친일을 친일이 아니라고 눈 부라리는 ‘서양사학자’를 뜬금없이 한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 이사장 자리에 낙하산으로 거푸 앉히는 데도 비판 여론은 마치 트집 잡기처럼 치부되고 있잖은가.
해방 70년을 맞았는데도 대통령과 집권당 대표, 국가기간방송인 한국방송의 이사장 자리에 모두 일본 제국주의에 머리 조아렸던 사람들의 후손이 앉아 국민을 훈계하는 나라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그들이 앞 다퉈 찬양하는 대한민국을 ‘헬조선’으로 부르는 젊은이들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역사인식 부족’탓으로만 여기는 저들의 언행에 구토가 밀려온다. 각각 권력과 부가 따르는 자리들을 내내 누려오며 잘 먹고 살아서일까. 나라를 ‘지옥’으로 표현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현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정치경제 체제 때문이라는 책임의식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 참 쓸쓸한 해방 70년이다. 우리가 언제까지 탐욕스런 저들의 치하에서 살아야 하나. /손석춘 언론인 /미디어오늘 15.8.18
미래 노인’의 배려
한국 인구는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인구 구조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는 나라에서는 보험료가 급증하거나 연금이 삭감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 보면 “어린이의 참상은 어머니가 동정하고 젊은 남성의 참상은 젊은 여성이 동정하지만 늙은이의 참상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놀라운 관찰력이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젊은 남성의 참상 또한 젊은 여성이 돌보지 않는다(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좀 남루해도 상대방의 미래가 희망적이어서 적어도 자식을 낳고 교육시킬 보금자리와 생활 여건을 함께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모르겠지만, 그 전망이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젊은이들이 서로를 외면하는 것이리라.
물론 모든 노인과 청년이 비참한 처지에 놓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참상’의 규모는 이 사회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여러 문제를 파생시키고 있다. 청년들의 참상에서 유래하는 저출산은 인구 절벽을 야기하여 한국 사회와 한국 경제의 장기 존속 가능성을 위협할 지경이 되었다. 연금을 둘러싼 세대 간 반목과 갈등 역시 개인을 넘어 사회적·정치적 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두 세대의 문제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말하자면 청년 세대의 참상은 노인이 돌보고, 노인 세대의 참상은 청년이 돌보는 데 합의하면 문제를 풀 수 있다. 왜 그런지 보자. 노인 문제의 경우, 그동안 연금 등 노후보장제도가 미흡해서 은퇴 대비책이 주로 개인적 저축이었다. 그 저축 중 80% 정도가 부동산 부문에 축적되어 있다. 즉, 평생 모은 돈으로 산 부동산을 노후 생계비로 삼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계획이 실현되려면, 장차 그 집을 사거나 빌릴 사람이 충분히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사례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인구가 급감하고 젊은 세대의 소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주택 가격은 하염없이 떨어질 뿐이다. 부동산을 통한 노후 생계대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필자가 계산(지난 10년 동안 평균 합계출산율인 1.2보다 높은 1.42를 적용)해본바, 현재의 추세대로 가면 지금부터 90년 뒤인 2100년에는 2700만명 정도다. 1945년 광복 직후 남북한 인구를 모두 합친 수보다 적다. 장차 이런 식으로 국토 전역이, 몇 집 건너 한 집이 비어 있는 유령도시처럼 변할 것인데, 부동산 가격을 논해서 뭣하겠는가? 하긴 땅값 문제 훨씬 이전에 인구 격감에 따른 디플레이션으로 한국 경제는 거덜나고 말 것이다. 결론적으로 청년들이 살 만해야, 즉 결혼해서 입주할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고, 자녀 두 명 정도에 대해서는 양육과 교육을 감당할 만한 자신감을 가져야 노인들의 참상도 차단할 수 있다.
급격한 고령화와 관련해 국민이 가장 걱정하는 문제
노년층으로 진입할 시기가 머지않은 시민들은 청년을 돕는 것이 자신을 돕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어떻게 도울 것인가? 예컨대 ‘예비 노년층’들은 매년 쌓이는 국민연금 적립금의 10% 정도로 ‘사회투자기금’을 조성하는 방안에 동의하면 된다. 이 사회투자기금은 앞으로 약 20년 동안 젊은 세대가 일상적 생활을 영위하고 자녀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의 재원에 무이자로 사용될 수 있다. 젊은이들이 입주할 수 있는 안락하고 값싼 공공임대주택, 탁아소, 유아원, 학교 시설 등이다. 이런 방식으로 출산율을 높일 수 있다면, 국민연금 처지에서도 보험료를 낼 시민들이 증가하게 되므로 이자 손실보다 더 큰 이득을 확보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 청년 세대의 참상이 다 제거되지는 않겠지만 아름다운 사회적 연대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최근 KDI의 여론조사에서 급격한 고령화와 관련해 국민들이 가장 걱정하는 문제는 국민연금 기금 고갈로 나타났다. 기금이 고갈되고 장기적으로 보험료가 지금보다 두 배 이상 상승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출산율 하락에 따른 인구 급감이 원인이다. 인구 구조가 안정되고(인구가 감소해도 우리처럼 경착륙이 아니라 적어도 연착륙하고) 경제가 번영하는 나라에서는 보험료가 급증하거나 연금이 삭감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한편 노인 세대의 참상을 줄이려면 기초연금을 강화하는 길이 절실하다. 향후 10년 내에 하위 70%가 아니라 모든 노인에게 지금 화폐가치로 40만원까지 기초연금을 올리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동의해줄까? 필자는 희망적이다. 청년 세대의 참상에 대한 (미래) 노인 세대의 배려는 거꾸로 노인 세대에 대한 청년 세대의 배려를 이끌어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원희 (국민대 경제학과 교수)시사인 411호 15.8.5
탈식민을 위하여!
30년 전 고려대나 연세대 학생 사이에서 가장 유행했던 단어는, ‘신식민지’와 ‘종속이론’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 대학 학생들 중에서 이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아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격세지감이란 말밖에 다른 표현은 떠오르지 않는다.
중국을 겨냥한 미·일의 공격적 패권 전략에 말려 한반도의 전장화 위험까지 감수하는 게 평화와 통일로 향하는 길일까? 자국민의 생명을 장기적으로 위협할 패권 국가의 지역 전략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을 두고 신식민지적 상황이라고 이야기하면 크게 틀린 말인가?
얼핏 생각하면 30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다. 요즘같이 평균 기대수명이 80살 안팎이 된 시대에는, 한 개인이 사회화되고 나서도 그 기간의 2배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근현대가 압축된 방식으로 실현되고, 진보도 퇴보도 초고속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30년은 상전벽해가 가능한 시간이다. 30년 전의 고려대나 연세대 학생 사이에서 가장 유행했던 두 단어는, 아마도 ‘신식민지’와 ‘종속이론’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미국으로부터의 돈 흐름에 의존하는 한국 기업과 미국 관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웃고 우는 한국 정계, 그리고 한국 땅에 핵무기까지 비치한 미군의 존재가 확연히 ‘근본적 문제’로 보였다. 그들은 과거의 독립투사들처럼 이런 상황들을 투쟁으로 풀어 자주의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30년 뒤인 지금 그 대학의 학생들 중에서 ‘신식민지’나 ‘종속이론’의 뜻을 제대로 아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오늘날 거의 누구나 당연시하는 그 두 대학의 ‘백화점화’된 캠퍼스의 모습이나 영어강의 광풍을, 과연 30년 전의 학생들이 어떻게 봤을까? 격세지감이란 말밖에 다른 표현은 떠오르지 않는다.
한-미 관계가 동등해진 것도 아닌데, 이 비대칭적 관계에 대한 급진적 불만은 왜 이렇게도 빨리 증발됐을까? 이유들은 물론 여러 가지다. 동구권의 몰락과 북한의 빈국화도 한몫을 했으며, 또 통합진보당의 강제 해산을 그 결정판으로 한 역대 정권의 좌파민족주의에 대한 탄압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동시에 1980년대 말부터 한국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름의 내부 식민지가 생기고, 한국 자본이 국외 저임금 지대로 그 경제 영토를 넓히는 등 국제적 먹이사슬에서 한국의 상대적 위치가 격상한 것도 한국인의 대외관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미국에 종속돼 있지만 이제 우리에게 적어도 경제적으로 종속돼 있는 타자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식민지에 대한 비판을 잠재운 요인은, 아마도 지난 30여 년 동안 대미 종속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경제 모델이 “나름대로 성공했다”는 다수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신식민지라 해도 외환위기 때를 제외하고 계속 경제가 성장해왔으며, 대미 종속해왔다 해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대중(對中) 관계를 잘 풀어갈 수 있으면 되지 않는가, 현실적으로 지난한 종속성의 청산은 과연 급한가 하는 판단은 보수화돼가는 다수의 ‘상식’이 된 셈이다.
종속은 어느 시점에서 피상적으로 보면 장점으로 보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환상이 오래가느냐다. 예를 들어 지금 최악의 경제적 재앙을 겪고 있는 그리스를 보자. 재앙의 씨앗은 2000년의 유로존 가입과 통화로서의 유로 채택이었다. 사실상 독일 자본의 경제식민지로서 유로존에 가입한 것이다. 처음엔 경제적인 호황을 누렸다. 1980~90년대 계속 고전해온 그리스의 경제는 2000~2007년 연간 평균 4%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일시적인 호황을 보였다. 독일 등 유럽 핵심부 국가들에 경제적으로 종속된 만큼 차관 등의 형태로 집중 투자를 받을 수 있어서, 처음에는 유로존이라는 이름의 경제 종속이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만도 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빚이야말로 최악의 함정이란 사실이 다 밝혀진 지금에 와서, 2007년 이전 유로존에 대한 환상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그리스에서는 유럽 핵심부에 대한 경제적 종속이 재앙을 낳았지만, 한국의 대미 종속은 훨씬 더 다변화돼 있어 어떤 의미에서는 ‘신식민지’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봐야 한다. 일차적으로 한-미 군사 동맹이 남한 영토에 대한 미군의 일종의 군사보호령화를 가능하게 한다. 미국이 지역적 안정을 도모했다면 군사보호령화의 의미는 또 달랐겠지만, 현재로서 미국이 지향하는 것은 지역적 안정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지역적 리더로 부상하려는 중국에 대한 강경 견제·포위책, 즉 지역적 안정의 파괴 행위다. 최근 동아시아 전체에 커다란 우려와 반발을 불러일으킨 일본의 헌법9조 무력화, 즉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탈바꿈하는 재무장의 시도를, 중국 견제 차원에서 주도·지원해온 세력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중국을 잠재적 주적으로 삼는 미-일-한 삼각 군사 동맹의 공고화다. 박근혜 정권이 이런 미국의 전략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사실을, 작년 7월에 체결된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에 관한 (한-미-일 3자) 정보 공유 약정”이 잘 보여준다. 지금이야 명목상 북한을 대상으로 하지만, 본격적 한-일 군사 ‘교류’가 가동되면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에 대한 정보 교환을 과연 막을 수 있겠는가? 정부는 한-일 상호 군수 지원 협정 등 한층 더 높은 수준의 한-일 군사 블록화 계획은 없다고 애써 부인하지만, 이미 실무선에서 그런 교류 추진을 위한 접촉들이 진행 중이라는 보도들은 계속 나온다. 중국을 겨냥하는 미·일의 공격적인 패권 전략에 말려들어 한반도의 전장화 위험까지 감수하는 것이 평화와 통일로 향하는 길일까? 한국 정부가 한국민의 생명을 장기적으로 위협할 패권 국가의 지역 전략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은 신식민지적 상황이라고 이야기하면 과연 크게 틀린 말인가?
가장 무서운 것은, 신식민지적 상황이 미군의 총검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친미 지배엘리트와 미국 사이의 이해관계의 일치와 밀접한 유착으로 유지·심화된다는 점이다. 대중국 갈등의 씨앗을 내포한다 해도, 오랫동안 미군에 의존해온 한국 군부로서는 미군의 새 지역전략을 무조건 따르는 게 자연스러울 뿐이다. 또한 예컨대 병원의 영리자회사 설립 허가 등을 통해서 사실상의 의료민영화 쪽으로 점차 정책 방향을 잡고 있는 박근혜 정권의 경제정책도, 의료부문 진출로 제조업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려 하는 국내 대기업의 이해를 대변해주는 동시에 미국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미국을 비롯한 핵심부 국가들에 대한 종속성이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 선언(1995년) 이후 지난 20년 동안 엄청나게 심화되면서 국내외 자본에 두루 이익을 가져왔다. 단적인 예로 외국계 은행들의 한국 시장 점유율은 1997년만 해도 약 4%에 불과했다. 현재 외국계 은행 및 해외은행 국내 지점들의 시장점유율은 무려 20%에 이른다. 한국의 국내 은행이라 해도 대부분의 경우 외국(주로 미국과 유럽) 자본은 50% 안팎의 주식을 보유한다. 단기 수익·배당금의 최대화를 노리는 외국 자본이 한국의 금융시장에서 선호하는 것은 수익성이 좋은 소비자 대출이고, 사회적 의미가 커도 단기적으로 수익성이 좋지 않을 수도 있는 영세상인 지원 등을 힘써 꺼리기에 서민들 처지에서 외국 자본의 금융시장 장악은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 한데 국내 자본의 처지에서는 금융부문의 수익성 증가가 본인들의 이윤 추구에도 보탬이 되기에 ‘금융 식민화’에 대해 별다른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다.
한국 증시에서 외국인 보유 주식의 비중이 2014년 35% 가까이 됐다. 이는 일본(30%)보다 높은 숫자다. 한국 주식의 외국인 보유액은 1998년에 비해 무려 8배나 늘어 2014년 160조원에 달했다. 이는 인도나 인도네시아와 같은 나라들 주식에 대한 외국인 투자액보다 더 높은 금액이다. 단기수익을 노리는 핵심부 자본들의 국내 진출이 궁극적으로 국내 노동에 대한 착취 강도의 제고를 가져오는 등 민중의 입장에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주식값이 오르기를 바라는 국내 투자자들의 입장은 정반대일 수밖에 없다.
신식민지란 국내 지배자와 국외 지배자들의 일종의 이해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 결국 신식민지 상황으로 피해를 보는 쪽은 평시에 각종 민영화, 시장화, 외국자본 침윤 속에서 착취당하고, 동북아 국제 상황이 심각해지면 총알받이로 징집당해야 할 한국 민중뿐일 것이다. 피해자인 민중이야말로 탈식민화를 위한 투쟁에 앞장서야 하지 않겠는가? 군사·정치·경제적 종속이 심화돼가는 상황에서는 민중을 위한 좀더 나은 세상이 오지 않을 것만은 확실하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5.8.4
향기 넘친 저들의 밥과 ‘악마의 똥’
권력의 언어 베껴쓰고 직무유기 하는 언론을 돌아보다
사대주의는 이 땅에 뿌리를 깊숙이 내렸다. 말글살이부터 나타난다. 같은 대상에 순우리말은 쌍스럽고 한자어나 영어가 점잖다는 보기는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 사대적 체면으로 정작 살아있는 현실을 놓치기 일쑤다. 가령 얼마 전 큰 충격을 준 ‘인분교수’만 보아도 그렇다. 교수가 제자에게 ‘벌’로 똥을 먹인 엽기적 사건은 대학에서 교수의 갑질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언론은 그를 ‘인분교수’로 명명했지만, ‘똥질교수’가 진실을 더 담아내는 민중적 표현 아닐까.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말도 그렇다. 신문과 방송은 교황이 ‘물신숭배’를 ‘악마의 배설물’이라 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물신숭배’도, ‘배설물’도 교황의 뜻을 온새미로 옮긴 말은 아니다. 교황은 “돈을 자유롭게 좇는 일”은 “악마의 똥”이라고 말했다. 자유롭게, 속박 없이 돈을 좇는 전형은 ‘신자유주의’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는 교황의 소신과 이어진다.
똥을 인분이나 배설물로 써야 ‘저널리즘’은 아니다. 똥과 인분, 배설물의 차이는 순우리말 여부일 뿐, 저널리즘의 질은 내용에 있다. 황금만능주의나 신자유주의, 새로운 독재를 줄기차게 비판하는 교황의 공언을 묵살하는 저널리즘은 아무리 똥을 배설물이나 인분, 그 이상으로 써도 ‘악마의 똥’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한국 언론은 악마의 똥을 좇는 신자유주의자들을 감시해야 마땅함에도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 당장 권력자들이 ‘노동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으름장 놓는 행태를 보라. 정보기관의 대선개입으로 정당성이 흔들리는 박근혜 정권이 ‘노동개혁’을 선포하고 나서자 여론시장을 독과점한 신문권력과 권력방송은 용춤 추고 나섰다. 대체 무엇이 ‘노동개혁’인가를 묻는 언론은 드물다. 쿠데타 원흉이 자신을 ‘혁명가’로 버젓이 주장하는 행태와 어금버금하게 언론은 권력의 언어를 그대로 베껴 쓴다.
박근혜가 북을 치고 김무성이 장구 치며 집권세력이 다걸기에 나선 ‘노동개혁’은 과연 ‘개혁’이라는 이름에 값하는가? 한 사안들 두고 집권당은 개혁, 야당은 개악이라 주장할 때, 언론은 개혁과 개악의 논리를 공평히 보도해야 옳다. 하지만 과연 그 상식을 실천하는 신문사와 방송사는 얼마나 되는가.
‘개혁’과 ‘개악’ 양자의 공평 보도에서 더 나아가 시시비비도 가려야 옳다. 집권세력은 비정규직 확산이 ‘정규직 과보호’ 탓이라며 임금 및 고용에 양보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저들의 논리에 자본의 탐욕은 전혀 ‘변수’가 아니다. 자본이야말로 사내유보금 따위로 곳간이 넘쳐 썩어가는 데도 그렇다. 만일 저들의 주장대로 ‘개혁’될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자명하다. 보편적 노동조건이 악화됨으로써 노동자 해고가 더 ‘자유’롭게 되고 의도와 달리, 또는 의도대로 비정규직 고용이 되레 늘어나며 자본은 무장 살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치공세’가 아니다. 과학이다. 여북하면 한국노총조차 대화 자리를 박차고 나왔겠는가.
비정규직과 국민을 홀리며 정규직 노동자에 ‘선전포고’를 한 대통령의 살천스런 얼굴은 재벌 회장들 앞에선 사뭇 달랐다. 청와대로 불러 대접한 식탁에 한우 안심, 농어구이, 전복구이, 훈제연어들이 줄을 이었다. 호사스런 밥을 먹기 전에는 개그맨 공연까지 곁들였다. 대통령과 재벌회장들은 화기애애하게 ‘오찬’을 즐겼다는 보도에선 하릴없이 분노가 치민다. 박근혜가 낸 향기 넘친 밥값은 어디서 나왔을까. 다름 아닌 국민, 그 대다수인 노동자들이 낸 세금이다. 혈세로 재벌들 불러 한우에 농어, 연어, 전복을 먹이는 대통령은 노동자들에겐 쌍심지를 켜고 있다.
명백히 재벌을 대변하는 정권임에도 입만 열면 ‘국민’을 들먹이는 저 위선을 드러내야 할 직무가 언론에 있다. “우리 아들과 딸들을 위해”, “비정규직을 위해”, “절망에 잠기 청년세대”를 위해 “반드시 노동개혁”을 하겠다는 사기극의 진실을 보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완장을 차고 덤벼대는 ‘언론인’의 죄악은 두고두고 기록으로 남을 게 틀림없다. 그 기자의 이름이 남을 것도 분명하다. 비단 신문권력의 사주나 권력방송의 하수인들만 역사의 문책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밥 먹는 향기 나는 식탁에 가득한 ‘악마의 똥’들을 제발 그만 받아먹길 권한다. 똥질의 결과는 부메랑이다. 최근 조중동의 한 신문사에서 평생을 바쳤지만 돌연 대기발령 난 50대 현직 언론인이 자살한 사건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더 개악하겠다는 저 ‘악마의 똥’들을 향기로 포장하지 말고 썩은 구린내 그대로 독자와 시청자에게 알려가야 옳다. 그것은 무슨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명색이 언론인으로 밥 먹고 살아갈 최소한의 의무요, 권리다./ 손석춘 언론인 /미디어오늘 15.7.30
국가의 품격
당신 생각에 가장 좋은 국가는 어디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부를 축적한 나라, 풍광이 아름다운 나라, 첨단기술을 가진 나라, 그 어느 것도 좋은 국가로 부르기에는 마뜩지 않게 느껴진다. 중동의 산유국들은 부자 나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을 좋은 국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처럼 아름다운 자연을 갖고 있다 해서 자동적으로 좋은 국가가 되는 건 아니다. 미국은 첨단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나라지만 좋은 국가로 부르는 데는 주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국가 브랜드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사이먼 앤홀트는 ‘좋은 국가’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것을 제안한다. 그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기후변화, 인권, 테러리즘 등 세계화가 수반하는 엄청난 도전들에 대한 국가들의 반응속도는 왜 이토록 느릴까. 그는 70억명이 살고 있는 세계의 조직 방식, 다시 말해 국가와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그 답을 찾아냈다. 개별 국가를 지배하는 법률과 정치인들의 시야가 영토라는 협소한 울타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국가는 마치 외딴섬이라도 되는 것처럼 국경 바깥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이 국내 문제에 매몰되어 지구적인 문제의 해결에 무관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앤홀트는, 첫째 그들을 뽑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것을 원하고, 둘째 정치인들의 상당수가 공감 능력이 부족한 문화적 정신질환자들이며, 셋째 국내 문제와 국제 문제가 양립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바보 같은 생각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따라서 정치인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은 국내 문제를 국제적인 시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좋은 국가’의 기준은 한 나라가 자국민이 아닌 나머지 인류에게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이다. 이 기준은 수억개의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세계 시민들이 어떤 국가에 호감을 가지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추적한 결과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부자 나라라고 해서, 군사력이 강해서, 첨단기술을 갖췄다 해서 동경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좋은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나라가 실제로 ‘좋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상을 안전하고 풍요로우며 공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앤홀트가 만든 ‘좋은 국가 지수’는 과학기술, 문화, 국제평화와 안보, 국제질서, 기후변화와 환경, 번영과 평등, 건강과 웰빙이라는 7개의 항목별로 각각 5개의 지표를 적용하고 있다. 최근의 평가 결과를 보면 한국은 47위이다. 과학기술과 문화는 30위권에 들었지만, 국제평화와 안보는 119위, 기후변화와 환경은 71위로 성적이 아주 나쁜 편에 속한다. 케냐, 과테말라, 가나 등이 한국보다 좋은 국가로 평가되었다는 사실은 좋은 국가란 돈이 아니라 품격의 문제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제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목표 확정안 발표를 들으며 새삼 국가의 품격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린 기후불량국가라는 오명이 두려워서만은 아니다. ‘법의 지배’를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정부가 거리낌없이 법을 어기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자각 때문도 아니다. 국가의 품격을 가장 심각하게 훼손한 것은 정부의 정직하지 못한 태도였다. 대통령이 했던 말을 ‘헛소리’로 만드는 안을 확정하면서 국무총리는 “의욕적인 감축목표 제출로 정부의 저탄소 경제 지향을 국제사회에 천명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한다. 이건 한국에서나 가능한 코미디다.
기후변화라는 위기 앞에서 모든 국가는 자국의 영토, 국민, 산업만을 고려하는 편협한 사고에서 탈피해야 한다. 모두가 ‘좋은 국가’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오는 물건, 사람들, 문화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세계 시민들의 공통적인 인식이다./ 안병옥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경향 15.7.1
박정희 시대, ‘기적’은 없었다
진보 일각에선 박정희 시대의 국가자본주의적 요소(경제계획, 국가 주도의 금융, 사실상의 보호무역 등)를 칭찬한다. 그런데 과연 같은 시대의 다른 동, 남아시아 국가들은 국가 주도의 개발 전략을 쓰지 않았던가? 박정희의 국가 주도 개발은 예외라기보다는 자본주의 황금기의 보편에 가까웠다
박정희는 복지를 통한 포섭이 아니라 일제 말기나 만주국과 같은 방식의 무력동원과 폭압, 그리고 국가주의적 규율화를 선호했다. ‘한강 기적’은 없었다. 박정희라는 기회주의자가 세계적 경제흐름을 잘 타서, 태평양전쟁 총동원기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종신집권을 꾀했다가 실패했을 뿐이다
“역사란 과거로 투영된 현재의 정치다.” 소련시대 마르크스주의 사학자 미하일 포크롭스키의 이 말은, 특히 전통적으로 역사인식이 강한 동아시아에서 실감난다. 이웃나라 사례부터 보자면, 유럽 극우들은 유럽 바깥으로부터의 이민 등 현실적 문제들을 의제화하곤 하지만, 일본 극우들은 일본의 현실적 재무장의 명분을 얻어내기 위해 역사 속의 위안부들의 강제연행을 부정함으로써 일본 군대의 ‘실추된 명예’를 되찾으려 하지 않는가?
한국은 어떤가. 현실 속의 불황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찬란한 산업화 시대’에 대한 복고주의적 열기가 뜨거워진다. 지금 집권 세력인 강경우파들부터 박정희 신드롬을 대통령 만들기에 활용했다. 국정 경험도 업적도 거의 없는 사람이 ‘박정희 딸’이란 이유로 상당한 득표력을 보였으니 이 신드롬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지속적 불안과 새로운 가난의 시대에 이제는 강경우파 이외의 정치세력마저도 박정희 신드롬 활용에 가세한다. 유신 시절에 구속을 당한 적이 있는 주류 야당의 대표까지 박정희 묘역에 참배했다는 거야 예상할 수 있었다. 중도보수 야당인 만큼 보수층의 보편적인 정서인 박정희 숭배를 거역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한데 급진좌파인 노동당 안에서까지도 박정희 시절의 계획경제 요소(5개년계획) 등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박정희 신드롬은 생각 이상으로 광범위하고 복잡다기하다. 따라서 박정희 시대의 의미에 대한 본격적 고찰을 한번 해야 할 것이다.
역사가 정치적 명분의 모색을 넘어 과학이 되자면 일단 공과 과를 기계적으로 계산하는 따위의 방법을 뛰어넘어야 한다. ‘독재는 잘못이지만 경제발전만큼 잘했다’는 식의 평가는 과학적 방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과학으로서의 역사는, 일국사 안팎의 여러 맥락들을 고려해서 한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지, 인물에 대한 포폄을 위한 공과의 계산에 있지 않다. 인물의 공과 평가는 한 시대의 근본적 성격에 대한 이해에 따를 뿐이다.
박정희 시대의 근본적 성격이란, 병영국가와 자본의 본격적 성장기였다. 이런 성장을 박정희의 공로로 돌리면 안 된다. 세계자본주의 황금기(50~70년대) 시대인 박정희 시절에는 동아시아 전체가 세계 시장과 연동돼 미증유의 성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1960~89년간의 한국과 대만의 평균 연간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보면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각각 6.82%와 6.17%) 한국의 고속성장은 당시 자본주의적 동아시아 국가로서 전형적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세계 자본주의 황금기에 동아시아만 성장했는가? 그렇지 않다. 예컨대 같은 시기의 핀란드의 평균 총국민생산 성장률은 약 5%에 이르렀다. 초고속성장까지 아니더라도 공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은 거기에서도 - 그러나 보다 느린 템포로 - 이루어진 셈이다.
진보의 일각에서 박정희 시대의 국가자본주의적 요소(경제계획, 국가 주도의 금융, 사실상의 보호무역 등)를 칭찬한다. 그런 요소가 없었다면 개발이 불가능했으리라는 가정까지는 맞다. 그런데 과연 같은 시대의 다른 동아시아·남아시아 자본주의 국가들은 국가 주도의 개발 전략을 쓰지 않았던가? 국제자본의 흐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싱가포르도 지금까지 인구의 85%가 국유지에 국가가 지은 저가 주택에서 살고 있다. 국가의 경제개입이 상당히 광범위했던 것이다. 그리고 과연 아시아만 그랬는가? 신자유주의 시대 도래 이전에는 유럽을 포함한 자본주의 세계 곳곳에서 국가의 보호관세 활용이나 관제금융, 국가의 대기업 소유 등은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예컨대 노르웨이의 경우, 신자유주의가 한창 진행된 2001년에 와서도 전체 공업자산 중 국가 지분의 가치는 약 45%에 가까웠다. 1960~70년대에 노르웨이 공업화는 국가 투자가 주도했다. 박정희의 국가 주도 개발은 예외라기보다는 자본주의 황금기의 보편에 가까웠다.
박정희가 기적을 일으켰다기보다는 냉전기에 미국이 주는 각종 특혜(특히 유리한 조건으로 제공되는 차관과 보호무역에 대한 미국의 묵인)를 이용해가면서, 그 당시로서 정상적이었던 방식(국가 개입)으로 그 당시로서 예사로웠던 경제성장의 효과를 봤다. 물론 한국의 명목상 성장률은, 비록 동아시아에서는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았지만 세계적 잣대로 봐서는 상당히 높았다. 공업화가 거의 되지 않은 지점에서 출발했고, 국제은행들의 차관 등 외부로부터의 투자도 많이 받은 점이 영향을 미쳤다. 특히 내수가 아닌 수출이 주도한 성장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수출 주도의 성장은 비록 빠르긴 하지만 그런 모델이 경제구조에서 일으키는 심각한 불균형(수출 대기업과 그 하도급 기업으로 이루어진 이중 경제구도, 구조적인 저임금 강요 등)은 나중에 거의 치유되지 않는 만큼 차후적으로 지급하는 ‘대가’는 크다. 한국은 지금도 이 ‘대가’를 꾸준히 지급하고 있는 중이다.
극심한 저임금 노동의 착취로 ‘기적’의 성장률이 달성됐지만, 경제가 커가는 동안 병영국가의 폭압 아래 놓인 사회는 진화되지 못했다. 일제 말기와 한국전쟁 전후 시절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국가폭력’이었는데, 이 폭력은 다소 제도화된 모습을 띠면서 그 폭압성의 정도를 오히려 더하게 됐다. 50년대의 한국 군대에서도 이미 일제시대 군대를 방불케 하는 잔혹 행위들이 버젓이 자행됐지만, ‘병영 기피 박멸’을 자랑했던 유신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런 잔혹 행위를 뼈대로 하는 반인간적인 병영‘문화’가 거의 고착되고 말았다. 베트남에서 각종 민간인 학살을 벌이곤 했던 군 장교들이 나중에 1980년의 광주에서 그 ‘솜씨’를 과시하는 등 병영국가를 뒷받침해온 것은 군사주의적 광기였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사회의 시계추는 거꾸로 가는 것만 같았다.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에는 거기에서 일제시절의 고문기술이 그대로 부활, ‘발전’됐으며, ‘오작교 작전’과 같은 해외 체류 중의 정권 비판자에 대한 납치공작은 거의 일제 경찰들의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가 납치 작전을 연상시켰다. 사이렌이 울리고 모든 행인들이 일제히 멈추어서 국기하강식에 강제로 참여해야 했던 것은, 비록 일제시대의 궁성요배를 그 모태로 하지만, 이와 같은 규모와 빈도는 일제시대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커져가는 경제는, 일제 말기 이상으로 치밀하고 철저한 전체주의 국가를 뒷받침했다. 박정희의 ‘케인스주의’를 찬양하는 자칭 진보인사들은 이 부분까지 과연 고려에 넣는가?
과학으로서의 역사의 중요한 방법론은 비교론이다. 자본주의 황금기의 국가 주도 성장의 보편적 특징은 복지제도의 정비였다. 경제를 주도하고 성장을 이끌어내는 국가가 성장으로 생기는 잉여를 활용하여 복지라는 재분배 메커니즘을 통해 다수의 피지배 인구를 경제적으로 포섭하는 셈이었다.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게 농업경제에서 공업경제로 이동하고 있었던 핀란드야 이미 1950년대 후반에 보편적 국민연금을 창설하고 1970년에 무상의료를 도입했지만, 굳이 북구는 아니더라도 1960~70년대는 복지주의의 중요한 도약기였다. 한국과 여러모로 비교가 가능한 대만에서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보험의 도입은 이미 1958년에 이루어졌다.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로 갔던 북한에서는 이미 1960년에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이 도입됐다. 한데 박정희의 한국은, 이미 이승만 시절 막바지에 도입된 공무원연금 이외에는 거의 복지의 황무지였다. 박정희는 복지를 통한 포섭이 아니라 일제 말기나 만주국과 같은 방식의 무력동원과 폭압, 그리고 국가주의적 규율화를 선호했다. 한국 정도의 병영화를, 대만이나 싱가포르에서 과연 볼 수 있었는가?
‘한강 기적’은 없었다. 박정희라는 희대의 기회주의자가 당대의 세계적 경제흐름을 잘 타서, 태평양전쟁 총동원기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종신집권을 꾀했다가 실패했을 뿐이다. 수출 의존과 군사주의적 국가, 재분배의 부족과 같은 박정희의 유산들은 우리 발목을 오랫동안 잡을 것이다. 박정희의 영웅화보다는, 광기가 난무했던 국가폭력 시대의 국내외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배려가 시급하지 않을까 싶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5.4.14
박근혜보다 조중동이 더 나쁘다
세월호 어머니의 절규, "당신, 사람인가? 짐승인가?"
생때같은 10대 아들 성호를 세월호 참사로 잃은 어머니 정혜숙 씨가 던진 물음이다. 삭발한 어머니는 “사람이라면 눈물을 닦아 달라, 숨을 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절규했다. 그 물음에 가장 먼저 답할 사람은 누구인가. 특별법을 마치 선심 쓰듯 만들어놓고, 그 누더기 법조차 시행령을 통해 무력화에 나선 세 사람, 대통령 박근혜와 국무총리 이완구,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이다. 진상 조사 주도권을 정부가 쥐고 조사범위도 정부 발표자료 분석에 한정하는 시행령에 유족의 반발은 당연한 권리다.
최근 흐름을 톺아보면 저들 또한 반발을 예상한 듯싶다. 시행령 발표 뒤 정부는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수억 원의 배·보상금을 지급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대체 무슨 깜냥인가? 돈으로 여론전을 펼 셈인가? 유족들 삭발에 대통령이 ‘세월호 인양 뜻’만 밝혀 어물쩍 넘어가겠다면 그 또한 여론전의 연장이다. 문제의 핵심은 고약한 시행령 아닌가.
3인에 이어 ‘사람인가 짐승인가’에 답해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기자들이다. 권력과 국민 사이엔 언론이 있다. 가상해보자. 정부 발표를 언론이 무시하면, 권력은 그것을 국민 다수에게 홍보할 길이 없다. 그 구실을 언론이 한다. 바로 그렇기에 언론은 정부 발표를 전하되 비판적 시각을 지녀야 옳다. 기자의 ㄱㄴㄷ이다.
그런데 어떤가. 조선일보는 발표 다음날 1면에 “세월호 배‧보상 학생 1인당 8억2000만원” 제하의 기사에서 “학생 250명에게 1인당 평균 8억2000만원, 교사 11명에게 평균 11억4000만원이 지급된다”고 보도했다. 시행령의 문제점에 소극적인 보도와 사뭇 대조적이다. 1면에 이어 3면 전면에 걸쳐 ‘돈’을 편집했다. 반면, 경향신문은 ‘세월호를 ‘돈’으로 덮으려는 정부’라는 표제로 1면 머리를 편집했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저널리즘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증언한다. 경향은 진보적이고 조선은 보수적이어서 그런가? 전혀 아니다. 저널리즘 기본의 문제, 아니 그 이전에 사람으로서 품격의 문제다.
오해라면 답하기 바란다. 정부의 느닷없는 배·보상금 발표를 그동안의 관련보도와 달리 크게 부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시행령에 세월호 유족의 반발을 잠재우려는 의도 아닌 무엇이 있는가? 하여, 조선일보를 비롯해 정부가 발표한 ‘돈’을 아무런 비판 없이 용춤추며 부각한 신문과 방송의 기자들에게 성호 어머니의 질문을 던진다. “사람인가, 짐승인가.”
돈이면 다 된다는 ‘돈 생각’ 하는 자들이 한국 사회에 무장 늘어나는 살풍경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앞서 지목한 3인과 기자들에게 솔직히 묻고 싶다. 혹 유족들이 그 정도 돈을 받았으면 그만 됐다고 판단하는가. 먼저 3인에게 정중히 묻는다. 당신에게 10억 줄 테니 아들이나 딸, 또는 동생이 죽어도 ‘가만히 있어라’ 한다면 어쩔 셈인가? 물론, 당신들은 어림없을 터다. 당신들의 재산은 이미 곳간을 채우고 넘치지 않은가. 대통령은 해마다 수억 원을 불리고 있지 않은가. 혹 안산 사람들은 재산이 없기에 그 정도면 숙지근해지리라 생각했는가?
권력 추구가 아니라 권력 비판이 생명인 기자들에게 묻고 싶다. 자신의 기사가 그렇게 편집되어 보도되어도 괜찮은가? 3개 신문과 3개 방송에서 주는 연봉 때문에 할 말을 못하는가? 그렇다면 어떤가,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이 지난해 주주배당금으로 38억 원을 받은 사실은. 당신이 현장에서 ‘기레기’ 욕을 먹어가며 뛰고 있던 2014년 내내 그는 무엇을 했을까. 어떤 일을 했기에 배당금만으로 월 3억 이상을 챙겼을까. 세월호 유족을 돈으로 능욕한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정말이지 묻고 싶다.
기실 적잖은 국민이 세월호를 ‘단순 교통사고’로 보고 있다. 그만큼 받으면 이제 됐다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짜장 소수일까? 아니다. 조중동이 가장 많이 팔리는 곳, 종편방송을 즐겨보는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 바로 그래서다. 어쩌면 3인보다 더 나쁜 ‘사람’은 나팔수들이다.
‘희생자들의 형제자매’가 연 기자회견에서 동생을 잃은 언니 남서현은 “그동안 우리 형제자매들은 부모님께 걱정을 끼칠 것 같아 묵묵히 있었지만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 지금 이런 식이라면 이 나라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울먹였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신문의 날’ 새벽이다. 한국 언론이 그 창간일을 신문의 날로 기념하는 독립신문은 의병을 ‘비도’로 쓴 원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의 범죄가 모면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세월호 유족을 더는 능욕하지 말라. 잘못을 깨달았다면, 저 오만한 3인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말라. 그것은 더도 덜도 아닌 기자의 기본책무다. 물론, 짐승이 아니라면 그렇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15.4.8
후쿠시마의 10가지 교훈
후쿠시마대학 부근에서 살던 준코는 아이 둘과 함께 거처를 도쿄로 옮겼다. 집에는 후쿠시마대학 조교수인 남편 지로만 홀로 남아 자취생활을 하고 있다. 지로에겐 가족과 헤어져 살게 된 것 자체가 큰 스트레스다. 하지만 훨씬 더 괴로운 일이 있다. 입시 홍보를 맡았기 때문에 고등학생들을 후쿠시마대학으로 유치해야 하는 현실이다. 아이들을 도쿄로 피난시킨 처지에서 비슷한 또래인 남의 아이들은 후쿠시마로 오도록 권유해야 하는 그는 매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 얘기는 얼마 전 일본 시민사회가 발간한 <후쿠시마의 10가지 교훈>이라는 소책자에 담긴 내용의 일부다. 책은 몇 가지 측면에서 눈길을 끈다. 먼저 후쿠시마 사고의 실체를 철저하게 지역주민들의 관점에서 기록했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간 나오토 전 총리의 탈핵강연과도 울림이 다르다. 저자들은 일본 사회가 체르노빌의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후쿠시마 사고 발생 후 극심한 혼란과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음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정리한 것이 10가지 교훈이다. 자신들이 겪은 쓰라린 경험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는 세계 시민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 교훈을 공유하려는 목적이다. ‘원전은 안전하다는 선전에 속아서는 안된다’는 것에서 ‘사고 피해보상 부담은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까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내용은 많다. 떠난 자와 남은 자들의 고통만이 아니라 ‘동원된 자들’, 다시 말해서 사고 수습에 투입된 하청노동자들의 삶을 인권 시각에서 조명한 것도 이 책의 특별한 점이다.
10가지 교훈 중에서 허투루 볼 만한 내용은 단 하나도 없다. 그래서 빠짐없이 언급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두 가지만은 꼭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제기되고 있는 “국가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의 중요성 때문이다.
첫 번째는 ‘긴급 시에는 먼저 피난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교훈이다. 후쿠시마의 경험은 원전 중대사고가 발생하면 정부의 피난 권고나 지시를 기다리지 말고 무조건 빨리 원전에서 멀리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일본 정부는 당초 사고지점에서 반경 30㎞ 이상 떨어진 지역에 대해서는 피난 권고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 비, 눈 등 기상 상황은 방사성물질이 동심원 형태로 확산될 것이라는 가정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30㎞ 바깥 지역 중 특히 풍향 때문에 큰 영향을 받은 곳은 후쿠시마 원전 북서쪽 지방들이었다. 비와 눈에 섞여 대량의 방사성물질이 녹아내린 것이다. 이들 지역은 나중에야 피난 지시 대상이 되었다.
두 번째는 주민들은 스스로 정보를 입수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는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정보를 통제하고 불리한 기록은 남기지 않는다. 후쿠시마 주민들은 원전사고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피난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텔레비전 방송은 ‘현시점에서 위험은 없지만, 피난 지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것이다’라는 정부당국자의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 후안무치함은 선장과 선원들이 탈출하던 순간에도 “선내에서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던 세월호에서 그대로 재연되었다.
후쿠시마에서는 아직도 12만명 이상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사고가 발생하면 국민 대부분이 나라 밖으로 피난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정부는 월성 1호기 수명연장을 밀어붙이고 한수원도 곧 고리 1호기 수명재연장을 신청할 태세다. 후쿠시마와 세월호의 비극에서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증거다. 아직도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은 정부와 기술자들이 잘 알아서 지켜주겠지”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후쿠시마의 10가지 교훈’을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안병옥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경향/15.4.1
나라가 이렇게 미쳐 돌아가도 되나
언론은 왜 침묵하나… 명백한 조직적 범죄, 원세훈 유죄로 끝날 일인가
“나라가 이렇게 미쳐 돌아가도 되나?”
공안검사 출신 새누리당 국회의원 김진태의 개탄이다. 그는 국회 법사위에서 “과연 하나에 1억씩 하는 명품 시계를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그거를 누구한테 흘렸고 누가 그걸 과장했느냐가 더 중요한가”라고 야당 의원들을 훌닦았다. 같은 날 MBC와의 인터뷰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는 곳에서 한 발짝만 나가면 전부 논이고 밭이다”며 “그러면 밖에다 버렸다고 하는 것하고 논두렁에 버렸다고 하는 게 그게 무슨 그렇게 차이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어떤가. 나는 ‘공안 검사’출신이 그 차이를 정말 모를까 궁금하다. “집사람이 밖에 버렸다고 하더라”라는 진술과 “논두렁에 버렸다”의 차이는 크다. 굳이 소통이론을 들이댈 필요도 없다. 당시 국정원이 ‘심리전’을 강화한 사실만 주목해도 충분하다. 논두렁에 버렸다는 SBS의 ‘단독보도’ 이후 그 진술이 얼마나 ‘노무현 조롱’을 불러왔고 파국으로 몰아갔는가를 톺아볼 일이다.
하지만 ‘공안검사 의원’과 시국 인식을 전적으로 같이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법사위에서 문제의 발언을 하며 “국정원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부르댔다. 그렇다. 나는 국정원을 우습게보지 말라는 저 집권여당 ‘공안의원’ 말에 십분 공감한다. 어찌 우습게 볼 수 있단 말인가. 공안의원이 국회에서 그렇게 주장한 날, 나는 경향신문에 국가정보원이 ‘국가전복원’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칼럼을 썼다.[관련기사 : 경향신문 / 누가 내 생각을 조종한다면]
공통점은 더 있다. “나라가 이렇게 미쳐 돌아가도 되나?”가 그것이다. 정말이지 길 지나가는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논두렁 시계’가 상징하듯이 심리전은 고도의 세련된 ‘언어 마술’이다. 만일 전직 대통령의 인격을 파탄 내는 여론을 조성하려고 국정원이 수사검사들의 반대를 묵살한 채 언론에 흘린 게 사실이라면, 국정원의 심리전은 국민의 생각을 조종할 단계에 이미 와 있었다고 보아도 결코 과장된 진단이 아니다. 더구나 국정원의 대선개입은 아직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진실을 밝히려는 올곧은 검사들은 곰비임비 옷을 벗거나 좌천당했다. 하지만 그 부실한 자료만으로도 고법은 당시 국정원장 원세훈을 법정 구속했다.
그럼에도 마치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나라가 사뭇 조용하다. 민주공화국이 이렇게 미쳐 돌아가도 정말 괜찮을까? 명토박아둔다. 나는 국정원이 대한민국 정보기관으로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본분에 성실한 요원도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원세훈과 그 일당이 저지른 대선개입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다. 작게는 국정원을, 크게는 대한민국을 근본부터 뒤흔든 반국가사범들이다. 기실 그들이야말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야 마땅한 대상이다.
그런데 보라. 신문과 방송 대다수는 짐짓 모르쇠다. 야당의 ‘분노’또한 어쩐지 시늉뿐이다. 왜 그럴까? 저널리즘 이론에 밑절미 두고 설명할 수 있다. 무릇 어떤 사안이든 초기에 어떤 정보가 제공되느냐에 따라 공중의 태도가 완고하게 형성된다. 20세기 후반,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인권에 민감했던 지미 카터 정권에서 언론 쪽 책임자의 말은 시사적이다.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를 역임한 호딩 카터는 “만약 심각한 도전 없이 3일 정도의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면, 정부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안의 맥락을 규정하고 그 사안에 대한 공중의 인식도 통제할 수 있다”고 호언했다. 카터 정권이 그 수준이라면, 다른 나라, 다른 정권들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했을지 짐작해볼 일이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은 당시 서울경찰청장의 수사 결과 중간발표로 초기에 ‘사실 무근’이 되었고, 공중의 태도 또한 그렇게 형성되었다. 선거가 끝나고 대통령 취임식 이후에 뒤늦게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공중의 태도가 바뀔 수도 있었다. 하지만 권력과 손잡은 대다수 언론이 진실을 은폐하는 범죄에 가담했다. 야당은 ‘대선 불복’의 틀에 갇혀 정당하게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에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그렇다. 대다수 국민은 지금 그 문제를 원점에서 바라보는 데 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정말이지 언론인이나 학자들마저 침묵해도 좋을까.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한 선거에서 당선된 후보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통령 자리를 만끽하고 있어도 괜찮을까. 사실심 아닌 법률심을 하는 대법원에 지금 어떤 ‘로비’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지 감시는 누가하고 있는가?
한 사람의 학자로서 나는 진실을 공부하는 대학생들 앞에 이 엄청난 거짓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다. 이 땅은 지금 학문의 자유조차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실감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다. 우국충정으로 쓴다.
“나라가 이렇게 미쳐 돌아가도 되나?”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15.3.10
강남 집값 올라서 만족하십니까
정부의 정책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위기에 처한 자영업의 회생은 어렵다. 국회에 계류 중인 자영업자 보호법은 ‘썩어 문드러진 국수’ 신세다. 보통 사람의 삶이 절벽 끝에 서 있다. 덕스러운 게 봄 날씨라더니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제법 세차다.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 토론회로 향했다. 토론회 사회를 맡았다. “서민경제의 뿌리, 자영업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전순옥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마련한 소상공인정책연구소 창립 1주년 기념 토론회의 주제다. 농업과 중소기업 정책은 참 다종다양하고 결코 적지 않은 예산이 배정되었는데도 지난 30년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중소기업 중에서도 열악한 자영업은 더 말해 무엇하랴.
전인우 박사(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의 발표 역시 자영업 부문의 위기로부터 시작했다. 소상공인 실사지수(Business Survey Index)가 2014년 7월 45.4를 기록했고 지금은 53 정도로 2008년 금융위기 때와 비슷하다. 실사지수란 100을 기준으로 하는 지표인데, 100 이하로 전망이 어둡다 하더라도 70이나 80 정도가 아니라 50이라는 건 절망적이라는 뜻이다.
한국의 자영업 비율은 사업체 수든 종사자 수든 어떤 기준으로 보나 선진국보다 높다. 예컨대 취업자 대비 자영업자 비율을 보면 2013년 한국은 22.5%로, 미국의 6.5%, 일본의 8.8%보다 훨씬 높다. 인구 1000명당 사업체 수로 보면 숙박·음식업의 경우 한국은 13.5개인 데 비해 미국은 2.1개, 일본은 5.6개이다. 따라서 자영업의 과잉 경쟁 및 수익률 하락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주현 박사(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의 진단이다. 인위적 구조조정은 심각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므로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경향을 역전시키거나 저지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토론회의 모든 참석자는 자영업자를 사회보험(산재보험, 공공부조 형식의 고용보험)에 포함시켜 보호하고 이를 위해 일정한 조건하에서 자영업자의 사회보험료 부담을 지원하자는 이병희 박사(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의 제안에 찬성했다. 또한 자영업 정책 하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데도 모두 동의했다. 예컨대 저임금 노동자의 상황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능력 있고 젊은 자영업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업체가 아무리 어려워도 이를 그만두고 노동자로 전환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협동조합과 같은 사회적 경제 기업들의 생존 전략인 네트워크화와 지역공동체와의 결합이 자영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는 이은애 서울사회적경제센터 소장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에서는 협동조합과 영세 기업들이 신뢰의 네트워크를 이뤄 위험과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세계적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넘어야 할 장애물은 수도 없이 많다. 당장 기획재정부는 사회보험 지원에 들어가는 예산에 난색을 표할 것이고(이 부처는 자영업의 획기적 구조조정을 지지한다), 스스로를 모래알이라고 표현하는 상인들이 협동조합 네트워크를 운영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테다. 더 결정적인 장애물은 이동주 전국유통상인연합회 정책실장의 입에서 나왔다. 대형 유통업체에 대한 규제는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하면서 대기업의 유통사업 진출을 지원하는 ‘유통산업 발전 5개년 계획’은 군사작전 식으로 밀어붙인다면 이런 토론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GDP가 아닌 사람들의 생활수준과 행복이 정책 목표여야
결국 정부의 정책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자영업의 회생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한다)라는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연말 통과한 부동산 3법을 ‘불어터진 국수’에 비유했다. 하지만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인 대리점보호법, 상가임대차보호법, 중소상인적합업종특별법은 말하자면 ‘썩어 문드러진 국수’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더구나 정부가 지금 빨리 통과시키라고 채근하는 서비스발전 기본법은 자영업자들을 다시 한번 강타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부동산 3법’과 서비스 민영화 정책은 혹여 단기적인 성장률을 높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통 사람의 삶을 절벽 끝으로 밀어붙일 것이다. 최근 강남의 집값이 뛰는 걸 보며 희희낙락하는 대통령이라니, 설령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하더라도 서민들의 경제는 3년 내내 한겨울일 것이다.
설 연휴 기간에 읽은 논문 몇 편이 떠오른다. ‘사람이 우선하는 거시정책’에서 GDP와 같은 거시지표는 정책 수단일 뿐이며 사람들의 생활수준, 행복이 정책 목표여야 한다는 애트킨슨 교수의 말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아무리 쇠귀에 경 읽기라 해도.
정태인 (칼 폴라니 연구소 창립 준비위원)시시인 390호 15.3.6
기후변화, 과학과 미신 사이
장면 1. 2010년 2월 미국 국가과학아카데미 소속 과학자 250여명은 성명을 통해 기후과학자들이 1950년대 매카시에 의해 저질러진 공산주의자 마녀사냥과 비슷한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일부 정치인들이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발언을 일삼으면서 시민들이 행동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여기에서 일부 정치인들이란 오바마 대통령이 시도했던 기후변화법 제정을 번번이 무산시켰던 공화당 의원들을 말한다.
장면 2. 같은 해 3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미국의 석유회사 코흐 인더스트리의 공동 소유주인 찰스·데이비드 코흐 형제가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회의론자들에게 수백만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제공해왔다고 보도했다.
국제 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지구온난화가 거짓이라는 주장은 코흐 형제가 돈을 댄 정치단체와 싱크탱크들을 통해 재생산되어 친기업 성향의 언론을 통해 유포되고 있다”고 폭로했다. ‘번영을 위한 미국인들’, 헤리티지 재단, 케이토 연구소 등이 보고서를 내면 폭스 뉴스가 이를 받아서 보도하는 방식이다.
장면 3. 2013년 9월 “북극 빙하 1년 새 오히려 60% 늘어…지구 온난화 맞아?”란 제목의 기사가 국내 주요 포털사이트의 첫 화면을 장식했다. 이 기사의 들머리에는 2012년과 2013년 8월의 북극지방 위성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기사는 지구가 1997년부터 빙하기에 접어들었다는 일부 과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며 끝을 맺는다. 기사 출처는 영국의 일요판 타블로이드 신문 ‘메일 온 선데이’, 작성자는 데이터를 입맛에 맞게 골라내고 자극적인 제목을 붙여 독자를 호도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데이비드 로즈였다.
장면 4. 올해 1월 전경련이 지원하는 한국경제연구원은 ‘지구온난화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라는 홍보 영상을 제작해 공개했다. 이 영상은 1998년 이후 기온이 증가하지 않고 있어 지구온난화가 온실가스 배출과 관계가 없다는 가능성에 점차 무게가 실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영상의 후반부에는 제작 동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지구온난화는 주기적인 자연현상일 뿐이므로 배출권거래제 등 정부의 탄소배출 규제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장면 5. 지난 2월 한국일보는 ‘지구온난화는 거짓이다’라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인터뷰에 응한 존 시온 박사는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행정직으로 일하다 은퇴한 후 미국 하틀랜드 연구소에 자문을 제공해왔던 인물이다. 하틀랜드 연구소는 담배회사와 석유회사가 돈을 대는 연구를 수행하는 극우 성향의 연구소로 알려져 있다. 이 기사에는 1994년 은퇴 후 20년 이상 학술활동이 거의 없었던 무명 인사를 왜 인터뷰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장면 몇 개를 한꺼번에 열거하는 것은 과학과 미신의 경계를 다시금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지구온난화가 실재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활동에 의해 초래된 것인지는 더 이상 논란거리가 아니다. 과학계나 세계 정치무대에서 사이비 과학과 음모론이 들어설 여지는 별로 없다. 전경련이나 한국경제연구원이 지구온난화를 부정하는 영상 수백개를 만들어 뿌린다 해도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다른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에는 과학은 정치와 돈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과학은 정치투쟁의 총칼이 되기도 하고 기업 이익을 사수하기 위한 방패가 되기도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려야 할 경우 과학은 누군가에겐 면죄부, 다른 누군가에겐 피눈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참과 거짓을 가리려면 먼저 누구의 이익을 위한 주장인지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이 중립지대에 있다고 믿는 순간, 과학과 미신 사이의 거리는 매우 짧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안병옥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경향 15.3.4
한국형 인종주의의 특징
한국 대학이 ‘오로지 백인’에게 집착하는 데는 깊은 문화·세계관적 원인이 있다. 한국서 비공식적으로 거의 제도화된 차별적 대외관이 그것이다. 세계를 하나의 큰 위계질서로 파악하는 이 대외관은 서구발 인종주의의 단순한 ‘번역’에 국한하지 않는다.
언어(즉, 영어 구사력)나 종교 등 타자의 상징자본과 특히 타자의 경제력에 대한 서열적 평가가 늘 결합해 매우 복잡한 피라미드 구조를 이룬다. 타자들에 적용되는 서열은 내부 서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한다.
며칠 전에 우연히 한 일본 대학의 영문 소개 책자를 봤다. 그 대학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의 대부분은 한국인과 중국인 등 이웃 나라에서 온 아시아인들이다. 한데 책자의 사진에서는 일본인 학생들 이외에는 “아시아적으로” 생긴 얼굴들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책자 모델로 호출된 외국인 유학생들은 전원 백인들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이런 관행은 일본 대학가에서 흔하다. 실제 일본에서 공부하는 약 13만명의 외국인 중에서 아시아 출신들은 92%로 절대적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중국(62%)이나 한국(12%)에서 온다. ‘하얀 나라’에서 온 학생들 비율은 약 4%에 불과하며 그들 중에서도 상당 부분은 아시아계 학생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본 대학마다 ‘백인 학생들 모시기’에 안간힘을 써가면서 안내 책자에서 아시아 학생들을 ‘노출’시키는 것을 꺼린다. ‘중국인이 몰려오는 학교’라는 인상이 강해지면 그 학교의 ‘위상’을 상징해야 하는 ‘백인’들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공포감 때문이란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역시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서 유럽 열강처럼 되자)를 비공식적 국시로 삼아온 일본다운 치사함이라고 치부하고 저들의 인종주의의 피해자로 살아온 우리와는 과연 무슨 관계인가 싶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이 식민지 시대 친일관료군을 계승한 엘리트에 의해서 지배돼온 국가인 만큼, 일본이 지니는 병리들의 상당 부분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실은, 그 일본 대학의 책자를 보는 순간, 나의 머리에 뜬 용어는 ‘백인 프로젝트’였다. 내가 방문한 국내의 한 대학에서 대외교류 책임자들이 사석에서 써온 용어였는데, 그 뜻은 ‘학교 위상 제고 차원에서 파격적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해서 백인 유학생 유치에 힘쓰자’는 것이었다. 외부자인 나에게 이런 ‘프로젝트’의 대강을 아무 거리낌없이 설명하는 태도로 봐서는, 그들은 이와 같은 용어의 사용이 국제적으로 범죄로 인식되는 인종주의에 해당된다는 사실 자체를 거의 인식하지 않았다. 실은, 한국의 외국인 유학생 현황은 일본과 대략 비슷하다.
전체 약 8만6000명의 외국인 대학생 중에서 아시아 출신들은 7만6000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하며, 유럽 출신들은 약 4000명에 불과한데다가 그 다수는 단기 (주로 어학) 연수생들이다. 여러 가지 역사·문화적 이유로 일본·한국에서 생산되는 지식을 가장 잘 수입할 나라들은 바로 중국과 베트남 등의 한자문화권 국가들이나 그 인접 나라들이다. 그렇다면 대학 행정가들이 ‘학교 위신 제고’를 운운하면서 엄청난 돈을 써가면서 ‘백인 모시기’에 올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근인과 원인을 구별해서 말해야 하겠다. 근인을 이야기하자면 김대중 정권 이후로 역대 정권들의 변함없는 대외 예속적 학술·교육 정책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기조로 하는 그 정책은 학술·교육을 상품으로 규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대학 학위도 학술 논문도 휴대폰과 다를 게 없는 상품이라면, 그 상품들을 구매력이 가장 센 잠재적 구매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의 언어 등의 기준에 맞추어서 만들어 팔아야 한다. 중국 대학마저도 영어논문의 게재에 포상금을 주는 만큼 영미권 학술 시장이 가장 큰 것으로 인식되기에 한국 대학들에서도 불도저식으로 영어 강의를 강행하고 학교와 연구소를 영어논문제작소로 만드는 게 신자유주의자로서는 당연한 결정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면, 교육과 특히 인문사회학 같은 학문을 상품이 아닌 인간의 계발, 자기실현의 도구로 생각할 것이고, 그 나라의 교육과 인문사회학은 그 나라 주민 다수를 위해서 존재하고 다수의 언어로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겠지만, 대부분이 미국에서 받은 학위를 주된 상징자본으로 내세우는 한국의 교육·학술정책 담당자들은 이런 비판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학술언어로서의 한국어가 말살되고 학술·교육의 영어화가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영어 구사력이 좋다는 구미권 유학생들에게 우선순위를 두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결국 한국의 지배자인 강남족들이 원하는 풍경은,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대학의 강의실에서 구미권 출신이나 미국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한국계 교수가 구미권 출신과 한국 지배층 출신이 반반인 학생들에게 ‘네이티브’(원어민 같은) 발음으로 영어 강의하며, 그 과정에서 한국 지배계급의 다음 세대가 굳이 유학 가지 않아도 충분히 미국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대부분의 고등교육이 ‘내지어’(일본어)로 이루어진 것까지 염두에 두면, 식민지 지배계층과 불가분의 역사적 관계를 지니는 오늘날 한국 지배층의 이런 구상의 계보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저들에게 단순히 새로운 ‘내지어’(즉, 영어)를 잘하는 많은 외국인들만이 필요하다면, 유학생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국인 등을 차별할 이유도 없다. 그들의 영어 구사력은 많은 경우 한국인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이외에는 인도나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여러 아시아 국가 출신의 유학생들은 영어를 평균적 한국인에 비해 잘한다. 그들을 차별하면서 ‘오로지 백인’에게 집착하는 데에는 보다 더 깊은 문화·세계관적 원인이 있다. 이 원인은 바로 한국에서 비공식적으로 거의 제도화된 차별적 대외관에 있다. 전세계를 하나의 커다란 위계질서로 파악하는 이 대외관은 <서유견문>(1895) 등 구미권과 일본의 ‘문명의 서열’ 개념을 국내로 도입한 개화기의 서적부터 그 계보를 추적할 수 있지만, 결코 서구발 인종주의의 단순한 ‘번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언어(즉, 영어 구사력)나 종교 등 타자의 상징자본과 특히 타자의 경제력에 대한 서열적 평가도 늘 결합해 매우 복잡한 피라미드 구조를 이룬다. 이와 같은 서열적 대외관 형성에 당연하게도 작용한 것은 한국의 국시 격인 성장제일주의나 국내에서 팽배한 황금만능주의, 그리고 영어 구사력이 매개가 돼 매겨지는 국내에서의 상징자본의 서열 등이다. 결국 타자들에게 적용되는 서열은 내부 서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식민지 엘리트에 의해서 건국되고 통치돼온 나라인 만큼 한국의 인종주의는 자민족 위주도 아니다. 철저하게 백인 숭배식이다. 이 현상을 가장 통감하는 사람들은, 고국에 돌아와도 같은 미국이나 캐나다 국적의 백인에 비해 늘 홀대당하고 우선순위에서 밀려야 하는 북미 거주의 한인 교민들이다.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백인 숭배와 제도화된 혈통주의가 얼마든지 공존공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 관련의 법률상 ‘해외동포’와 일반 외국인들은 차별적 대우를 받으며, 전자의 경우에는 체류연장이나 영주권 신청 등이 비교적 더 쉽다. 대중의 의식에서도 보통 혈연적 관련성이 없는 외국인에 비해서는 ‘동포’에 대한 친밀감은 훨씬 더 짙은 것으로 나타난다. 아직까지도 ‘동포’는 ‘한민족 대가족’의 일원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비공식적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서열에서는 이 ‘가족’들보다 백인이 더 높은 지위를 점한다는 것은 대부분 한국인 대외관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단순한 백인 숭배와 비백인 천시로 한국형 인종주의가 끝나지도 않는다. 피부색과 무관하게 동유럽 ‘못사는 나라’ 출신들은 수모를 겪어야 하는가 하면 예컨대 영국 시민권을 가진 부유한 인도 출신의 2세 이민자는 그 경제력이나 영어 구사력만큼의 ‘대우’를 받게 된다. 종교의 비공식적 서열도 한몫을 해서 예컨대 같은 ‘비백인이지만 부자 나라’인 싱가포르 출신이라 해도 기독교인인 화교 출신은 이슬람교도인 말레이족 출신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게 된다. 천차만별의 다면적 차별구도다.
차별이 일상화·체질화돼 있는 사회는 행복할 리가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다문화를 지향하자면 우리 마음 안에서의 ‘백인병(病)’이나 ‘못사는 나라’를 우리 밑으로 보려는 성장제일주의부터 치료·극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국내인들을 획일적으로 줄세우는 경제력·상징자본의 위계질서부터 먼저 타파돼야 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5.2.17
목수도 복지걱정 없는 나라
한국에서 집 짓는 일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독일 목수를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일행 한 사람이 독일 목수의 하루 임금이 얼마인지 물었다. 우리가 만난 목수가 30년가량 목수일을 했다는데 꽤 잘사는 것처럼 보여 얼마나 버는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대답은 뜻밖이었다. 숙련된 기술을 가진 마이스터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 돈으로 15만원쯤 받고, 마이스터가 되어야 25만원 정도 받는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이구동성으로 그것밖에 못 받느냐는 반응을 보이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납득이 잘 안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다시 세금이나 보험을 공제한 후의 임금이 얼마인지 물었다. 연금보험, 의료보험, 세금, 실업보험, 통일연대기금을 제하면 약 10만원 또는 15만원가량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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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목수와 헤어져서 돌아오는 길에 한국 목수에게 하루 10만원 받고 일할 수 있겠는지 물었다. 자기는 물론 아무도 하려 들지 않을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공제되는 5만원이 나중에 이런저런 혜택으로 되돌아온다고 해도 지금 주머니 속으로 10만원밖에 안 들어오는 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목수의 하루 임금은 15만원에서 25만원이다. 독일 목수와 같은 수준이다. 당장 호주머니에 들어오는 돈만 따지면 40%가량 더 많다. 그런데도 한국 목수의 생활수준은 독일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역설적이지만 그 이유는 독일 목수는 세금이나 보험으로 내는 돈이 많고, 한국 목수는 그런 돈을 거의 내지 않는다는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30년 전 독일에서 조교로 일할 때 월급은 명목가치로 140만원가량 되었다. 그중에서 22만원이 세금, 15만원이 연금, 12만원이 의료보험, 4만원이 실업보험으로 공제되었으니,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은 90만원이 채 안되었다. 수입이 당시 독일 임금 생활자의 중간에 못 미쳤는데도 월급의 40%에 가까운 돈이 세금과 보험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래도 큰 불만은 없었다. 그 덕에 그곳에서 대학 다니던 6년 동안 등록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은 실질가치로 따져서도 그때보다 수입이 두 배 이상 되지만 세금 등으로 공제되는 돈은 20%밖에 안된다.
우리가 만난 목수는 나이가 40대 중반이지만 자기 작업장을 가지고 있고, 번듯한 집에서 산다. 아이도 둘이나 있다.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여자아이는 우선 목수일을 배우려 한다. 대학에 진학할지는 일을 다 배우고 나서 결정한다고 한다. 목수가 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들인 돈은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데 들어간 것이 대부분이다. 수업료나 사교육비로 들어간 돈은 전혀 없었다. 아이가 목수일을 배운 후 대학에 간다고 해도 교육비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두 월급의 40%를 공제당한 덕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증세와 복지 논쟁이 한창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증세 없는 복지’ ‘보편복지’ ‘선별복지’ 같은 추상적인 말들과 무슨무슨 복지 관련 법안들로 가득 차 있다. 모두 피부에 와닿지 않는 구체성 없는 말이다. 그러니 복지가 과도하면 국민이 나태해져서 나라가 거덜날 수 있다는 국민 모욕적인 말도 튀어나오고, 대통령이 증세 없는 복지를 말한 적이 있네 없네 하는 게 뉴스거리가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한국 목수에게 다시 의료비 걱정 없고, 아이들 대학 졸업 때까지 교육비 않고, 늙어서도 적지만 최저생계비 이상의 정기 수입이 생긴다면 하루 임금 10만원을 받아도 괜찮겠느냐고 구체적으로 물었다. 그게 정말 신뢰할 수 있는 거라면 받아들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지금 복지논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의 성찬이 아니다. 하루 10만원 버는 목수도 그런대로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구체적인 방법이고, 그에게 5만원을 내면 훨씬 더 큰 혜택이 돌아온다는 것을 약속하고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필렬 | 방송대 문화교양학부 교수 경향 15,2,11
이명박의 성공과 박근혜의 행복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주는 산 교훈
성공과 행복. 좋은 말이다. 둘 다에 초연할 사람도 있겠지만, 힘없고 돈 없는 국민 대다수에게 성공과 행복을 아예 마다하기란 쉽지 않다.
바로 그렇기에 두 말을 대통령 후보로서 공약해 ‘뜻’을 챙긴 정치인이 있다. ‘국민 성공시대’를 내건 대한민국 17대 대통령 이명박과 ‘국민행복시대’를 내건 18대 대통령 박근혜다. 박근혜의 대통령직은 진행 중이지만, 마침표를 찍은 이명박에 대한 평가는 이미 뭇 조사에서 나타났다. 그의 역대 대통령 순위는 흔들림 없다. 꼴찌다.
하지만 당사자 생각은 다르다. 그가 800쪽 가까운 회고록을 출간했다. 스스로 회고록 말미에 자화자찬을 경계했다고 썼음에도 내용은 자찬 일색이다. 일흔이 한참 넘은 사람에게 ‘성숙’이란 말을 꺼내들기란 민망한 일이지만, 주관적 환상에 매몰되어 객관적 현실을 모르는 인간을 우리는 ‘미숙하다’고 말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숙으로 접어든다. 선인들이 ‘철들었다’고 할 때가 바로 그 순간 아니던가.
이명박 회고록은 주관적 환상의 대표적 보기다. 그는 자신이 ‘국민 성공시대’를 약속하며 당선된 사실조차 잊은 듯하다. 케케묵은 낙수효과를 내세우며 747(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을 부르댄 사실에 회한이나 성찰이 있을 리 없다. 그러기에 ‘부자감세’를 여태 부르댄다. 감세는 ‘투자와 소비를 촉진시켜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살리기 위한 세계적인 추세’였다고 언죽번죽 주장한다.
무지의 극치다. 과연 그의 주장처럼 감세로 투자와 소비를 촉진시켜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살렸는가? 2008년에서 2013년까지 ‘대통령의 시간’을 보낸 우리 국민에게 그 물음은 한낱 우문일 뿐이다. 회고록이 살천스레 외면한 것은 그 뿐이 아니다. 서울 용산의 철거민 참사와 쌍용차 노동자들에 대한 살인적 탄압에 대해서도 성찰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자살로 몰아간 검찰 수사도 모르쇠다. 오히려 고 노무현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 전에 ‘미국산 쇠고기 전면개방’을 해결하지 않았다며, 비난하는 투의 ‘회고’를 늘어놓았다.
대통령직 평가 이전에 인간 이명박의 민낯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더 있다. 두루 알다시피 세월호 침몰은 해운자본의 요구를 덜컥 수용해 선박연령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서 비롯됐다. 바로 그 규제 완화를 이명박 정권이 단행했다. 수학여행 길에 부푼 청소년들의 생때같은 죽음, 부모들의 저 피눈물 앞에서 대체 인간 이명박은 아무런 책임도 못 느낀 걸까.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명박 임기는 끝났지만 ‘규제 완화’와 ‘기업 친화’ 따위는 고스란히 국정 지표이기 때문이다. 후임자는 외려 한 술 더 뜨는 언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 명토박아 두거니와 나는 대통령 박근혜가 전임자의 후안무치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박근혜는 후보시절 ‘국민 행복시대’를 내걸었다. 국민 성공시대를 내건 이명박 치하 5년 동안 성공은커녕 불행한 사람이 양산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표를 얻으려면 그 언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터다. ‘국민 행복’은 ‘국민 성공’이 그렇듯이 먹혀들어갔다. 물론,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주요기관들의 선거개입도 대통령 당선에 큰 몫을 했을 터다.
하지만 이명박과 선을 그은 차별성은 선거와 함께 시나브로 사라졌다. 규제완화를 부르대거나 대기업을 중심에 놓고 경제 살리기를 추진하는 언행도 어금버금하다. 심지어 747 논리와 같은 474까지 주장했다. 잠재성장률을 4%, 고용률 70%를 달성해,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제시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 그것이다.
개탄할 일이다. 대통령이 대선에서 국민에 약속한 것은 747 아류 474가 아니었다. 그가 후보 시절 내내 외친 말은 ‘경제민주화’ 아니던가. 국민 행복시대와 경제 민주화를 내걸었던 박근혜 집권 2년 동안 과연 행복해진 국민은 얼마나 될까. 경제는 얼마나 민주화 되었을까.
이명박에게 성찰이 전혀 없듯 현직 대통령도 그렇다면 국민적 비극이다. 이명박이 자신은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착각하듯이, 현직 대통령도 자신은 행복한 대통령이라 생각하는 걸까. 딴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통령의 표정은 자못 행복해 보인다.
하여, 정색하고 경고한다. 이명박이 자신의 성공을 약속한 게 아니라 ‘국민 성공’을 공약했듯이, 박근혜 또한 자신의 행복을 약속한 게 아니다. ‘국민 행복’을 공약했다. 국민 성공시대를 내걸고 자신만 ‘성공’한 대통령에 이어, ‘국민 행복시대’를 내걸고 자신만 ‘행복’한 대통령을 보기란 국민의 한사람으로 참을 수 없는 고역이다. 아직도 3년이나 남은 임기, 국민 행복에 조금이라도 눈 돌리기를 촉구하는 까닭이다. 이명박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이 박근혜에게 주는 산 교훈이다./ 손석춘 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미디어오늘 15.2.4
‘능력’이라는 이름의 허구
우열반을 편성해 어려운 환경 아이들의 자존심을 짓밟으면서 미래의 승자들을 따로 키우는 것은, 외부자 시선으로 볼 때 반교육적 아동학대다. 우리가 이런 잔혹 행위를 당연시하는 이유는? ‘능력·능률’이라는 이름의 체질화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모든 지배이데올로기들처럼 능력주의는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스트레스, 열등감, 자책을 안고 불안 속에서 떨어야 하는 사회는 단기수익을 더 올릴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침몰로 간다. 인간의 진정한 능력은 남들과의 비교가 아닌 남들과의 연대, 그리고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 독창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이색 사회로 가면 우리는 늘 그 이데올로기적 표현에 놀라곤 한다. 왜 북한에 가면 무조건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동상에 머리 굽혀 인사해야 하는가? 왜 이란에 가면 여성이 머리를 덮어야 하는가? 왜 러시아에서는 소·독전쟁에서의 승리일(5월9일)이 최고의 명절로 인식되며 소·독전쟁에서의 소련 군대에 대한 과도한 비판적 발언은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남들의 이데올로기적 표현들은 우리 의식과 심하게 다를 경우 늘 비합리적으로 보일 뿐이다. 이슬람 사회라고 해서 왜 여자는 머리를 덮어야 하는가?
맞는 질문이다. 사회의 내부결속 및 지배구조 안정화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늘 억압성을 띠고 있으며 외부자 입장에서 꼭 합리적으로 보일 리도 없다. 문제는, 내부자들에게는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당연한 ‘상식’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북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민족이란 대가족을 위해 싸운 김일성이나 민족을 지켜왔다는 그 후계자들에게 존경심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실은 이런 정서는 예배를 드리는 기독교인의 심정이나 조상의 묘 앞에 제사상을 벌이고 제사를 드리는 효자·효녀의 마음가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연 무신론자나 유교문화권 바깥에서 온 사람에게는 기독교 예배나 제사의례가 북한의 국가의례와 그렇게까지 다르게 보일까? 이데올로기도 문화의 전반도 사실 상대적일 뿐이지만, 특정의 삶의 패턴이나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내부자의 눈에는 그런 상대성이 들어올 리 만무하다.
한국인들은 집 안에서 불이 나도 아이보다 먼저 현대판 신주인 지도자의 사진을 건지게끔 하는 북한 이데올로기가 잔혹하다고 평하곤 한다. 꼭 틀린 말도 아니다. 한데 과연 대한민국의 통상적 이데올로기는 덜 잔혹한가?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부터 학교에서 우반, 열반으로 편성해 대개는 어려운 집안 환경에 문화자본이 부족한 아이들의 자존심을 어릴 때부터 짓밟으면서 미래의 승자들을 따로 키우는 것은, 외부자의 시선으로 볼 때 무엇에 해당하는가? 맞다. 교육 파행이며 반교육적인 심적 아동학대다. 그렇다면 북한인들이 지도자 사진을 극진히 모시는 것을 당연시하듯 우리가 이런 잔혹 행위를 당연시하는 이유는? ‘능력·능률’이라는 이름의 우리들의 체질화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능력·능률’ 이데올로기를 관통하는 심성적 코드는 크게 봐서는 세가지다. 첫째, 부단한 타자들과의 비교를 통한 자율적 자아 발전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능력·능률’ 근본주의 사회에 순응하면 할수록 진정한 의미의 능력인 창조력은 죽어간다. 둘째, 무한경쟁인 만큼 무한공포를 느끼면서 산다는 것이다. ‘무능력자’로 지목돼 낙오될까 봐서 유아기부터 눈칫밥 먹으면서 내심 부들부들 떠는 것은 능력주의 사회의 일상이다. 셋째, 외부 권력자가 하급자에게 심어준 열등감의 내면화, 즉 권력이 지정한 ‘나’의 위치에 대한 수치심이 섞인 순응이다. 투쟁하는 비정규직들의 소식은 매체에서 자주 나오지만 사실 대다수의 비정규직들이 투쟁 대신에 비정규직으로 전락된 자신의 ‘무능’을 자탄하면서 지내야 하는 것은 맹목적 능력주의 사회의 현주소다.
첫째, 대타적 비교를 통한 우열 정하기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개개인이 매일 행하는 자신만의 의례다. 전통사회에서 첫 대면에 세습적 신분과 나이 등을 확인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상대방에 대한 태도를 정했지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세습적 신분 대신에 상대방의 ‘능력’부터 궁금해한다. 어린이부터 서로 부모의 아파트 평수로 표현되는 ‘경제 능력’부터 확인하고 친구로 사귈 것인지 결정하는 게 오늘날 우리 실정이다. 대학생들은 서로의 스펙을 비교하기도 하고, 예컨대 편입생이라든지 지방캠퍼스 학생 등 ‘능력이 모자란다’고 판단되는 상대를 노골적으로 따돌린다.
반대로 화려한 스펙의 소유자 앞에서는 그를 ‘벤치마킹’하여 따르고 싶은 열망을 키운다. 고학력 직장인들은 한국 사회의 주된 문화자본인 ‘영어 실력’이 비교 대상자들에 견줘 떨어지지는 않는지 늘 초조해한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늘 대타적 비교와 내면적 우열 가리기로 보내는 하루하루가 결국 “인력자원 자질 향상”에 기여한다고, 이 현상을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호평한다. 사람이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태어나고 살고 죽어야 한다는 것부터, 잉여가치의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라는 제도의 고유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나’는 ‘나’의 자아를 늘 남들에게 맞추고, 남이 하는 것을 남 이상으로 잘함으로써 남들의 칭찬을 들으려고 발버둥치고, ‘나만의 길’을 생각할 여유라고 갖지 못하는 사회에서 문학이나 예술은 어떤 처지에 있을까? 오늘날 한국 사회라면 김수영이나 김남주와 같은 반(反)주류의 괴짜 시인들이 과연 숨이라도 쉴 수 있을까? 인간이란 상대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태어난다면, 나는 차라리 인간으로 아예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둘째, 부단한 비교에 부단한 낙오의 공포가 따른다. 문제는 항시적인 공포감이라는 게 개인의 정신건강에 치명적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불안과 공포만큼의 보편적 심성도 없지만, 이 부문에서는 대한민국 역시 독보적 세계 1위다. 국내의 직장인 직무 스트레스 피해 비율은 87%로, ‘경제 동물’ 운운하는 일본(72%)에 견줘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불안이 늘어나는 만큼 신자유주의 대한민국에서 계속 증폭되는 게 우울증 유병률이다. 지난 10년 동안 60%나 늘어 이제는 여성 인구의 9% 이상이 평생 동안 한번이라도 우울증에 걸리는 것으로 돼 있다. 우울증에 가장 노출돼 있는 세대는 취직 불안이 심각한 20대와 노후 불안에 편히 잠자기 어려운 50대다. 또 문제는 우울증에 걸리더라도 대다수의 환자들이 병원에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신과에 가면 ‘미친 사람’, 즉 ‘무능력자’로 취급받아 낙오될까 봐서, 혼자 투병해야 하는 사회는 과연 건강한가?
셋째, 대타적 비교에서 늘 자신에게 ‘나쁜 점수’를 준 사람은 결국 ‘모든 게 내 무능력 탓이오’로 일관하며 자신에 대한 배제와 억압, 착취에 맞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개인의 저항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주된 기능이기도 한다. 즉, ‘무한경쟁 시대를 떠들면서 개인 경쟁력 갖추라’고 설교하는 어용 ‘지식인’들은, 바로 이와 같은 효과를 노린다는 말이다. 문제는 항의해야 할 때에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는 사람의 궁극적 탈출구가 바로 자살이라는 점이다. ‘무능력자 도태’를 외치는 이데올로기의 궁극은, 바로 ‘무능력자’로 지목된 개개인 각자가 알아서 본인의 생명을 거둔다는 것이다. 저성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남유럽 수준의 경제 파탄에 아직 이르지 않은 한국의 자살률이 이미 세계 최악의 경제 참사를 기록하고 있는 그리스의 자살률보다 10배나 높은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스인은 거의 굶는 처지가 돼도 이 참상이 잘못된 경제·사회 구조로 인한 것이라고 알고, 언제든지 남들과 함께 투쟁대오에 참여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내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한탄으로 세월을 보내야 하는 곳에서는 자살만이 저항 아닌 저항의 마지막 형태가 된다.
모든 지배이데올로기들처럼 능력주의는 사실상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스트레스, 열등감, 자책을 안고 불안 속에서 떨어야 하는 사회는 단기수익을 더 올릴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침몰로 간다. 인간의 진정한 능력은 남들과의 경쟁적 비교가 아닌 남들과의 연대, 그리고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 독창성으로부터 비롯된다. 획일적 ‘성적순’으로 재단되는 ‘실력’의 저주에서 벗어나 남들과 연대하면서 자기만의 길로 가는 것만이 인간이 살길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5.1.20
술집 개가 무서우면 손님이 오지 않는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오래전 중국 역사에 비견되는 현실은 비정상의 총화나 다름없다. 정상 국가에서 발생하기 어려운 사건들의 저변에는 일방적 명령 체계와 일사불란함이 있다.
고사성어가 유행이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지록위마(指鹿爲馬)’가 대표적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는 진나라 말 환관 조고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대신들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어리석은 황제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한 데에서 비롯된다. 이때 사슴을 사슴이라고 말한 대신들은 죽였고, 조고를 따라 말이라고 한 대신들은 살았다.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작성된 정윤회 관련 문건에 ‘십상시’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 역시 기가 막힌다. 21세기 대한민국 사회가 오래전 중국 역사에 비견되는 현실은 비정상의 총화나 다름없다. 후한 말 조정을 농락했던 10명의 환관을 일컫는 ‘십상시’라는 말이 등장한 것을 보면 권력층 내부에서도 속칭 문고리 권력의 문제점이 심각하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2000여 년 전 중국의 고사는 대부분이 국가 존망과 연결되어 있다. 2014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들 역시 정상 국가에서는 발생하기 어려운 사건들이었다. 세월호 참사와 정윤회 관련 폭로가 대표적이다. 2012년 대선과 관련해서도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 개입이 재판을 통해 확인되었다. 이것은 정보기관과 군의 국기문란 행위에 해당한다. 그런데 국정원의 대선 개입 관련 재판에서 “정치 개입은 인정되지만 선거 개입은 아니다”라는 역사에 남을 판결이 나왔다. 보통군사법원 역시 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 개입 활동을 인정하면서도 두 전직 사령관에 대해 선고유예 등 이해하기 힘든 가벼운 선고를 내렸다.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 등을 내세워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준 공권력이, 전단을 빼앗아 찢어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손괴죄를 적용해 재빨리 입건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복직을 요구하며 합법적인 시위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경찰이 기자를 사칭하며 사진촬영을 하다 발각되기도 했다. 정부 정책은 물론이고 특정 기업의 노사 문제에 대해서까지도 ‘순응하는’ 국민과 ‘비판적인’ 국민으로 양분하는 정부의 야누스적인 법 적용은 법치주의에 대한 냉소를 낳을 뿐이다.
헌법재판소 역시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자기 둥지에서 뻐꾸기 알을 골라내는 뱁새처럼 “대역(大逆) 행위에 대해서는 불사(不赦)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라면서 김이수 재판관을 제외한 전원의 찬성으로 통합진보당에 대해 해산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민주주의 발전에 나름 기여를 해왔다고 평가받았던 헌법재판소는 이번 결정으로 공안적 판단의 틀에 맞추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앞으로 헌법적 가치조차 제한될 수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일부 개인 당원의 행위를 일반화해 불법 정당으로 판단한 후 해산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려 공중분해시켜 버리는 것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위협으로 비친다.
듣고 싶은 말 해주는 사람만 곁에 두고는 권력 유지 불가능
일련의 사태에는 공통점이 있다. 일방적 명령 체계와 일사불란함이 그것이다. 대통령이 청와대 문건 내용을 ‘찌라시’라고 하자, 검찰 수사 결과도 ‘찌라시’가 되었다. 외견상 이러한 상황이 논란을 잠재우고 기강을 바로잡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정반대로 권력 기반이 무너진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수첩에 열심히 말씀을 받아 적는 자(우스갯소리로 ‘적자생존’이라 불린다), 건성건성 하다가는 실직할지 모르니까 진지하게 표정 관리를 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게 아닌데요’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사슴을 말이라고 해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 비선 실세는 없으며 진돗개가 실세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한비자>에 ‘구맹주산(狗猛酒酸)’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술집 개가 무서우면 사람들이 오지 않으므로 술이 시어 못 팔게 되듯 사나운 개와 같은 신하들이 군주 곁을 지키고 있으면 제대로 된 신하는 발붙일 데가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개를 없앤다고 술이 저절로 잘 팔릴까. 술을 잘 빚을 줄 알아야 잘 팔릴 것이다. 심리적 동기와 능력이 관건이다. 과거 중국의 왕들은 인재를 모아야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만 곁에 두고는 권력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보고서만 읽을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야 한다. 국회의장이 대통령과 통화하기도 힘들다고 밝힌 것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정상화가 필요한 부분이다. 형사재판에서도 서류 증거는 원칙적으로 증거 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왜곡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015년 새해, 우리 사회가 2014년과 달라지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다. / 박상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시사인 383호 15.1.15
It Never Rains In Southern California
(1972) - Albert Hammo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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