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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울리기/외부 칼럼

14.1.22~12.23

by 이성근 2019. 2. 17.

한국에서 불가능한 것, 인간의 존엄성-박노자

텔레비전으로 간 의사-강혜란

농부들의 생활 인문학-전희식

변화를 이끌어내는 다수의 힘-정태인

에너지 살림 도시의 꿈-안병옥

우리 이데올로기, 경제 인종주의-박노자

국가의 안위가 걱정스럽다-문정인

가난한 그대 이름은 여자-강혜란

천안함 사건이 주는 반면교사-문정인

생태학의 두 얼굴-안병옥

폐쇄사회와 그 우군들-박상기

세월호와 JTBC-강혜란

나는 왜 사민주의자가 아닌가?-박노자 

학피아, 학살의 종범들-박노자 

침몰하는 발전국가의 신화- 문저인

물러설 수 없는 자동차 탄소전쟁-안병옥

기업국가를 해체하라!-박노자

폭력 사회-박노자

한국적 특색의 신자유주의-박노자

저주받으리라, 법률가여-조국

보수 언론의 세 모녀 자살 보도, 구토와 욕지기가 나온다 -손석춘

삼성의 세 얼굴-정태인

환경운동가의 비행기 여행-이필열


한국에서 불가능한 것, 인간의 존엄성

근대 철학에서 인간의 존엄을 칸트가 최초로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그가 발명한 것은 존엄성이 있는 자율적 개인이다. 자율성이란 자기 자신과 외부 세계에 늘 똑같은 보편적 도덕 기준을 적용하고 이 기준, 즉 본인 양심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이렇게 사는 것은 체제 부정의 길이 아닐 수 없다. 나의 개인적 양심상 미국의 패권과 계속 맞서고 있는 북한이 내가 생각하는 반패권의 보편적 원칙에 더 가깝다고 판단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순간, 나는 바로 국사범이 되고 만다.

 

대개 매체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사건·사고, 스캔들 등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정보다. 일상 그 자체는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뉴스로서 상품 가치가 없다. 예컨대 산업화된 세계에서 가장 빈번한 산재 사망 사고의 나라인 한국에서 하루에 평균적으로 5~6명의 노동자가 직장에서 사고사를 당하는 것은 그다지 뉴스로서 가치가 높지 않다. 공사장의 추락·사망 사고 같은 것은 보도된다 해도 보통 짧은 단신 보도일 뿐이다. 직장에서의 사고사는 이곳에서는 정상이다. 그러나 한꺼번에 304명이 사망, 실종되면 이는 언론에서 참사로 명칭돼 집단의식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영구적 트라우마가 된다. 있을 수 없는, ‘비정상의 극치를 달리는 일인 만큼 이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간과되면 안 되는 점은 이 비정상이 우리 일상 속의 정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본이 이윤 극대화 차원에서 매일 노동자들을 희생시키고 국가가 이를 거의 수수방관하는 사회라면, 같은 자본과 국가가 왜 수백명의 빈민 지역 출신들을 희생시키지 못하겠는가? 반인륜적 정상성이 사회적인 대량 타살, 즉 학살의 비정상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계속 반복되는 이런 이어짐은 바로 우리 삶의 일상이다.

 

이번의 조현아 땅콩 회항도 바로 이와 같은 현상의 일부분이다. “무릎 꿇어라고 부하에게 고함지르는 것은 대한민국 학교나 군대에서는 그저 정상’, 거의 상사/상관의 고유한 권리처럼 인식돼 왔다. 무릎 꿇린 뒤에 큰 폭행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매체 보도도 될 리가 없다. 기업도 크게 봐서 마찬가지다. 기업 같으면 무릎 꿇린 뒤에 큰 폭행이 이어진다 해도 보통 별다른 문제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4년 전에 에스케이(SK)그룹 창업주의 조카인 최철원(M&M 회장)이 부당해고에 항의하며 감히’(?) 일인시위를 벌이던 훨씬 연상의 운전기사를 야구방망이로 마구 때려 전치 2주의 부상을 입힌 뒤에 과연 어느 정도의 처벌을 받았는가? 징역 16개월에 집행유예 3, 봉사시간 120시간이었다. 재벌 2세는 노동자를 무릎 꿇려 마구 패도 실형 살 일은 당연히(?) 없다. 그리고 폭행이 보도되는 당시에 사회적 논란은 잠깐 일어나도, 몇달 사이에 해당 재벌의 이미지에 별다른 손상이 가지 않은 채 사건은 조용히 망각된다. 윗분이 아랫것을 무릎 꿇려 패는 것은 당연하고 정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조현아 전 부사장은 그저 때와 장소를 잘못 골랐을 뿐이다. 외국에서 회항까지 시켜 이 일이 비정상으로 처리돼 국내외 언론의 보도 대상에 올랐지만,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자기 사무실에서 관례대로 혼내는절차를 진행했다면 과연 세상은 알기라도 했을까? 조직생활 하면서 이런 종류의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우리 대한민국에 얼마나 있을까?

 

그러면 이제 의분을 가라앉혀 한번 분석해보자. 한국 사회의 주인님들에게 아랫것의 자존감을 일상적으로 깡그리 무너뜨려 부숴버리는 것은 왜 그렇게도 중요할까? -심각한 폭행 등의 비정상으로 치달을 경우- 사회적 지탄의 위험까지도 무릅쓰고 이렇게도 열심히들 면박 주고 폭언을 퍼붓고 무릎 꿇리고 때리는가? 물론 개개인의 심리를 따져보면 아동기의 애정결핍증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병리의 원인들은 다 있지만, 아랫것의 자존감을 깡그리 짓밟는 것은 한국에서 단순히 가해자 개개인의 심리적 문제만은 아니다. 한국 지배계급의 일종의 아비투스, 즉 관습의 차원이다. 그리고 개개인이 아랫것을 열심히 모욕하면서 이를 꼭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와 같은 아비투스는 꼭 그렇게까지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차원에서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 아비투스는 한국 지배계급의 하나의 전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전략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자존감 내지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풀어보자.

 

근대 철학에서 인간의 존엄을 본격적으로 칸트가 최초로 다루었다. 칸트가 본 인간의 존엄은, 인간이 그 자체로서 (도구가 아닌) 목적임을 뜻했다. 인간에게 존엄이 있자면 인간이 사회에 의해서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이용당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칸트 자신은 체제 부정의 길로 가려는 반골은 아니었지만, 자본주의적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인간 존엄의 정의는 가히 전복적이라 하겠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그 자체로서 목적인 인간이 존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인간은 잉여가치 수탈의 장본인이 되지 못하는 이상 대개는 잉여가치의 직접 생산자, 인력에 불과하다. 잉여가치 수탈의 극대화, 수익성 제고를 위해서라면 인력을 위험천만의 작업환경에 노출시켜도 되고 과로사하게끔 혹사해도 된다. 왜냐하면 이에 따르는 처벌은 어차피 수익성을 크게 훼손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장 극단적으로 실행되는 대한민국에서는 인력그 자체로서 목적이 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 한국형 자본주의와 인간존엄성은 양립이 거의 불가능하다.

 

칸트가 발명한 것은 존엄성이 있는 자율적 개인이다. 자율성이란 자기 자신에게도 외부적 세계에도 늘 똑같은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고 가급적 이 기준, 즉 본인 양심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아예 체제 부정의 길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한반도 정치의 차원에서 나의 개인적 양심상 미국의 패권과 계속 맞서고 있는 북한이 내가 생각하는 ()패권의 보편적 원칙에 더 가깝다고 내가 판단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바로 남한의 국사범이 되고 만다. 굳이 우리 모두의 적대적 타자인 북한을 남과 다르게 생각하지 않아도, 내가 남북한 지배자 사이의 갈등에 나의 양심상 동원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나 개인의 중립을 선언하고 이에 따라 남한 군대의 징병 명령을 거부하는 순간 이미 범죄자, 평생의 전과자, 죽을 때까지 이등 시민이 된다. 정치적 문제는 아니더라도 나의 양심대로, 존엄 있게 행동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늘 사회에의 도전에 가깝다. 예를 들어 생활 수준을 고려할 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축에 속하는 등록금을 학생들로부터 갈취하고, 동시에 사회적 차별의 도구로 전락한 대학에 진학하지 않겠다, 대신 스스로 공부하겠다고 선언하는 양심적 대입 거부자라면 고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이 학력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수해야 할 것인가? 군부대와 착취공장을 그 기본 모델로 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적 양심도 자율성도 존엄성도 폭발물과 같은, 불순한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부터 사회화 과정에서 커가는 인간에게 각종의 모욕, 모멸감을 주어가면서 인간적 존엄성을 서서히 박탈하는 구조적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병영형 착취공장에서 평생 열심히 일할 노동자가 순치돼가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피훈육자나 부하를 머슴처럼 대하는 현대판 마름이나 악질 지주들의 못된 버릇 그 자체는 나로서 가장 한심한 것도 아니다. 나는 준주변부형 신자유주의 사회의 관리자들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투쟁으로 우리 존엄성을 쟁취하지 않는 이상 저들의 버릇들은 절로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가장 한심한 것은, 현대판 양민이라고 할 한국의 소비대중들이 현대판 천민인 저임금·하급·서비스직 (대부분은 비정규직이자 여성) 노동자들에게 관리자들과 같은 갑질을 해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사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당한 직장인이 마트에 가서 더 약한 노동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원풀이한다는 셈이다. ‘조현아 땅콩 회항과 함께 한국적 갑질의 상징으로 뽑힐 만한 장면은, 영화 <카트>에서 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진상 고객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명장면일 것이다. 사회화 과정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고민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소비대중들은 억압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그들이 조현아의 모습에서 자신들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을 발견하기를, 진심으로 빌 뿐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4.12.23

 

텔레비전으로 간 의사

방송에서 의료 광고는 불법이다. 그러나 방송 협찬이라는 모호한 규정이 악용되고 있다. 문제 전력으로 의사회의 징계를 받은 의사 역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출연 중이었다가수 신해철씨의 죽음을 계기로 의료 안전 문제가 다시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그가 받은 수술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 만큼 심각한 질병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도대체 ’ ‘누가’ ‘어떻게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하는 문제는 그와 그의 가족들 문제를 넘어선 사안이 되었다. 더구나 그를 수술한 의사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해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던져준다. 미디어가 부여한 권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실히 점검되지 않은 노출이 논란거리다.

 

이러한 시점에 ‘TV 속 일그러진 아름다움 파헤치기라는 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는 방송이 성형 관련 프로그램이나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를 조장하고 성형을 권유하는 적극적인 주체로 기능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내용이다.

 

패널로 참석한 성형외과 의사는 말 그대로 무시무시한 현장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수술실에는 오로지 환자와 의사 둘뿐이다. 환자는 마취가 시작되는 순간 수술실 안에 누가 있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의사 개인의 책임성과 도덕성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사회적 관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문제가 발생해도 환자가 이를 입증하기 어렵다. 실제로 약속된 의사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수술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빈번하다. 한 수술실에서 마취된 두 환자가 동시에 교대로 집도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존재한다. 이는 모두 의료 행위가 좀 더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한 영리적 행위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욱 심각한 상황도 전했다. 현재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의사가 대한성형외과의사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징계를 받은 문제 인물이며, 그러한 사실을 해당 방송사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에 알렸는데도 아무런 조치 없이 방송에 계속 출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이와 같은 위험 요인들을 널리 알리고자 다각적인 활동을 한다고 했다. 문제 전력으로 인해 관련 의사회의 징계를 받은 인물이 텔레비전에 출연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이를 방송사에 여러 차례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치가 없었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구조적인 문제는 이렇다. 병원은 의사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비를 협찬한다. 방송사는 제작비 부담이 가벼워진 프로그램에 홍보용 장치들을 교묘하고 극적으로 배치해 협찬의 효과를 공고히 해준다. 이들의 공조는 흡사 몇 년 전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트루맛 쇼>를 떠올리게 한다. 현재 의료법은 의료 광고를 엄격히 규제한다. 의료 행위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인 만큼 사전 심의를 통해서 관련 내용이 점검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치료 효과를 보장하는 등 소비자를 현혹할 우려가 있는 내용, 수술 장면 등 직접적인 시술 행위를 노출하는 내용, 신문이나 방송·잡지 등을 이용해 전문가의 의견 형태로 표현되는 내용, 사전 심의를 받지 않거나 심의받은 내용과 다른 내용, 거짓이나 과장된 내용 등의 의료 광고를 하지 못하도록 규율하고 있다.

 

더구나 방송에서의 의료 광고는 명백한 불법이다. 이 때문에 프로그램 속 광고인 간접광고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그런데 방송 협찬이라는 모호한 규정을 악용해서 이러한 광고 효과를 누리며 시민의 건강을 위협한다면 이는 정말 문제가 아닌가. 더구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같은 규제 기구가 이를 제보받고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책임 방기나 마찬가지다.

 

기사인 척하는 교묘한 의료 광고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그 며칠 뒤에 또 일어났다. 관련 병원에서 제공한 보도자료로 추정되는 내용이 마치 기사인 양 인터넷 언론사 두 곳을 통해 제공되고 있는 게 발견된 것이다. 두 기사는 해당 프로그램 1회 출연자의 수술 전과 후 사진, 관련 병원 홈페이지에서 조사한 설문 결과 등을 근거로 메이크오버(makeover)’ 프로그램의 존재 의미를 두둔하고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두 기사는 이었다’ ‘이었다고 합니다같은 서술어의 형식 등의 차이를 제외하면 사진·글자 등 모든 내용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 기사는 각자 소속사 기자 이름을 달고 마치 해당 언론사가 취재한 내용인 양 제공되고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광고인지 프로그램인지를 구분하기 어렵고, 기사로 둔갑된 광고로 인해 시선이 왜곡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를 제도적 장치로 강도 높게 걸러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이러한 미디어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인식하는 것이 더 우선해야 한다.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정책위원)시사인 37814.12.16

 

농부들의 생활 인문학

며칠 전에 송년회가 있었다. 겨누고 겨눠서 날짜를 잡고 밤늦도록 잔치를 벌였다. 밥도 있고 과일도 있고 술도 있었다. 여기까지는 다른 송년회와 같다. 선물을 하나씩 가져와서 선물주기 놀이를 벌인 것도 그렇다. 색다른 점은 회원들이 강연 잔치를 벌인 것이라 하겠다. 거참, 잔치 중에 별난 잔치도 다 있다.

 

회원 여섯 사람이 나서서 자신의 생활을 소재로 15분씩 강의를 한 것이다. 주제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아이들과 바느질하기, 책 만들기, 생활 속 행복 에너지, 좌선과 명상, 언론 협동조합, 치자 넣어 만드는 백김치 등이었다. 처음에는 못한다고 빼고 서로 미루더니 정작 앞에 나와서는 15분을 넘기지 않은 회원이 없을 정도로 열강을 했다.

 

농촌마을 면 단위에 주소지를 둔 이 단체는 닦음과 행함이라는 이름을 쓴다. 올 한 해 동안 21개 강좌를 진행했고 4차례 답사기행을 다녀왔다. ‘농민생활인문학이라는 단체 성격에 비춰보면 농민들이 자신의 생활을 인문학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재조직하는 것이라 하겠는데 한 해 강좌 횟수가 상당히 많다. 농민들이라 그런지 동학농민혁명 2갑자라고 그 강좌가 5회나 되었다. 두 번은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중심의 현장기행이었다.

 

이 인문학 단체의 특징은 강의 횟수에 있지 않고 모든 강좌가 공동강사제로 진행된 점이라 하겠다. 한 강좌에 주 강사와 보조 강사가 있는데 보조 강사는 강의 핵심을 쟁점화하고 생활 속 실천 주제로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또한 강좌가 있기 전에 강사의 원고를 자료집으로 만들어 회원들에게 배포한 뒤 미리 읽고 오도록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강사와 청중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으로 구분하지 않고 통합된 주체로 보는 것이라 하겠다. 회원(청중)이 주인이지 절대 강사가 주인이 아님은 분명하다. 둘 관계가 역전되는 것을 매우 경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임에서는 대개 그 지역 친환경영농조합 유기농 음식을 먹거나 회원들이 싸 온 음식을 나눠 먹었다. 마흔 명 가까이 되는 전체 강사 중 지역 강사가 60%가 넘는다.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런 강좌가 전염병처럼 번지면 내로라하는 전문 강사들이 밥을 굶을지도 모른다. 더 재미있는 원칙 하나가 있다. 강좌를 들으려면 회원은 월 1만원씩 내야 하고 비회원은 누구나 공짜라는 원칙이다. 회원들에게 특혜는커녕 차별이 심하다. 그러나 그 단체는 그것이 인문학의 본령이라고 주장한다. 모임의 취지를 알리는 카페에도 비슷한 설명이 있다. ‘배우고 익히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닦기 위함이지 지적 과시나 처세의 수단이 될 수 없다. 닦음으로 행하고 행함으로 닦음을 심화한다.

 

4명의 주 강사와 역시 4명의 보조 강사가 등장한 강좌 중에 우리동네 보통명사(名士) 이야기 마당이라는 것이 있었다. 4명의 주 강사는 요리사, 향교의 전교, 음식정의 활동가, 장애인 돌봄이였다. 진득한 자신의 삶을 얘기하는 보통명사들에게 참석자들은 공감을 보였다. 그 공감이 각별했던 것은 늘 보던 이웃의 진면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기는 누구나 강사가 될 수 있는 곳이다. 마이크를 잡으면 강사고 앞에 앉으면 청중이다.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었다는 동학농민군 딱 그 모양새다. 양반 상놈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지 않으냐고 외치던 동학농민군처럼 강사와 청중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보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 단체는 평생 처음으로 강사님소리를 듣는 사람을 마구 양산해 내고 있는 셈인데 아직까지 부실 강사 시비는 없다. 내년에는 이런 흐름을 더 강화한다는 소문이다. 인문학이 땀내 나는 농업노동과 결합해서 서로 더 건강해지는 농민생활인문학 닦음과 행함의 송년잔치는 그렇게 이어져 가는 모양이다./ 전희식 | 농부·‘아름다운 후퇴저자 경향 14.12.10

 

변화를 이끌어내는 다수의 힘

한 달 새 도쿄, 몬트리올, 서울과 구례를 오갔다. 사회경제적 위기와 생태 위기라는 거대한 수렁 앞에서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례로 가는 기차 밖, 갈색 풍경이 안온하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있는 도시인의 눈에 그렇다는 얘기지, 농민들 마음에는 삭풍이 불고 있을 것이다. 공군 1호기에서 기자들을 불러 한·FTA, ·뉴질랜드 FTA 협상 타결을 자화자찬하고 국회 비준을 압박하는 대통령 앞에서 어느 누구의 마음이 편할 텐가?

 

111일 도쿄행 비행기를 탔다. ‘서울선언 연구회의 초청이다. 지난해 11월 국제사회적경제포럼(GSEF)에서 채택된 서울선언의 뜻을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의 법제화를 꾀하는 모임이다. 나는 서울선언의 초안을 만든 사람으로서 초청됐다. 한국 협동조합의 모델이 일본의 생협이었는데 그 주역들이 우리에게 한 수 배우겠다는 것 아닌가? 일본 메이지 대학에 250여 명이 모였다. 서울선언의 6가지 의의를 살폈고, 사상사적으로 신용협동조합의 의미를 되짚었다. 80만 인구의 도쿄 세타가야(世田谷) 구가 빈집을 활용해 빈민과 노인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햇빛 발전소를 보급한 얘기는 흥미진진했다.

 

전공투가 궤멸한 뒤 학생운동가들은 각 지역으로 스며들었고 일본의 생협과 노동자협동조합의 든든한 기초를 다졌다. 하지만 노()투사들은 컴퓨터 조작에 미숙해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감사 동영상은 띄우기도 힘들었고 몇 번이나 중단됐다. 누가 이들을 이을 것인가? 보름 뒤 서울에 다시 모인 70여 명의 노활동가들에게 나는 내년엔 기필코 후계자들로 하여금 발표를 시키자고 제안했다.

 

도쿄에서 20시간 걸려 캐나다 퀘벡에 도착했다. 한국의 지역단체장 15명은 하루 먼저 퀘벡에 도착해 사회적 경제의 실체를 익히는 중이었다. 퀘벡 주정부와 샹티에(제작소라는 뜻으로 퀘벡의 사회적 경제 단체연합)가 함께 사회경제정책을 만들고,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조직이 실현하는 사회 혁신이 시작된 지 10년이 됐다. 퀘벡 모델은 캐나다 전역에 이식됐고 이들은 국가복지를 뛰어넘는, 시민의 자치복지라 부를 만한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는 폴라니 학회에서 폴라니 사상에 기초한 다원주의 경제모델을 발표했다. 300쪽이 넘는 <협동의 경제학>서울 사회적 경제 5개년 계획을 파워포인트 문서 26장으로 줄였지만 15분 동안 영어로 발표하는 건 내 능력을 넘어선 일이었다. 더구나 게임 이론과 생물학으로 재해석한 폴라니라니, 92세의 폴라니 레빗(칼 폴라니의 딸)이나 프레드 블록에겐 쟤 뭐야?” 싶었을 것이다. 몬트리올의 학회 역시 백발이 성성한 68세대들이 주역이었다. 그래도 발표자의 반쯤을 채운 터키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유학생들의 젊음이 반짝였다. 발표 마지막에 나는 주제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러분은 폴라니를 연구하지만 우리는 서울에서, 남한에서, 그리고 통일 한국에서 폴라니를 실천할 것이다.”

 

중견 기업 하나가 도시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1115일 서울로 돌아오니 제2회 국제사회적경제포럼 및 국제사회적경제협의체 창립총회가 이틀 뒤로 다가와 있었다. 작년에는 볼로냐, 퀘벡, 도쿄 등 8개 도시와 9개 사회적 경제 단체가 참여했는데 이번에는 13개국 19개 도시, 44개 단체, 3개 국제기구가 서울에 모였다. 사회경제적 위기와 생태 위기라는 거대한 수렁 앞에서 전 세계의 사회적 경제 조직과 사람들이 새로운 비전으로 뭉쳤다. 캐나다 칼 폴라니 정치경제연구소의 마거릿 멘델 소장과 박원순 서울시장은 내년 봄에 칼 폴라니 연구소 아시아 지부를 서울에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서울의 GSEF는 원주, 광주, 제주, 그리고 구례로 번져나갔다. 나는 핀란드의 산타매키 ICA 이사, 그리고 마틴 로페스 몬드라곤 대학 교수 등과 함께 구례의 아이쿱 자연드림파크로 갔다. 아이쿱의 농식품 클러스터는 지리산과 섬진강, 공방(공장)과 주거, 극장과 카페가 어우러진 말 그대로 공원이었다. 아이쿱의 조합원 수는 67년 만에 이륙 지점을 지나 J커브를 그리며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있다. 네트워크와 혁신 이론이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다. 기적은 구례에서도 일어났다. 작년부터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전남도지사와 구례군수 모두 젊은이가 모여드는 새로운 모델을 찾았다고 입을 모았다.

 

아이쿱은 아마 기업 규모로는 1000대 기업에도 들지 못할 것이다. 그런 중견 기업 하나가 군 전체를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다면, 한국 전체를 생산과 복지의 공동체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업이 주도한 구례뿐 아니라 지자체 주도의 완주, 시민단체 주도의 원주도 있고, 이 모두를 아우른 서울이 있다. / 정태인 (칼 폴라니 연구소 창립 준비위원 시사인 37814 11.29

 

에너지 살림 도시의 꿈

도시의 삶은 화려하고, 자유분방하고, 모험적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도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사람들도 꽤 있다. 도시는 발전과 팽창, 경쟁과 신분상승의 욕망이 응축된 공간이기도 하다. ‘기회의 땅을 누리려는 열망이 없었더라면, 38억명의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현상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의 얼굴은 이중적이다. 소외와 경쟁, 갈등과 삭막함은 도시적인 삶의 또 다른 모습이다. 모든 도시에는 전통과 현대, 역사와 미래, 절망과 희망이 공존한다. 초고층 빌딩과 슬럼가를 구분 짓는 것은 신시가와 구시가의 시각화된 차이만은 아니다. 그곳에는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 도시화의 그늘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도시에서 밀려난 패자들의 목록이 있다면, 맨 앞자리에 놓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연이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숲이 가득한 도시에서 자연의 원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도시는 미국의 언론인 빌 매키벤이 <자연의 종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이 자연과의 오랜 대립 속에서 자신의 승리를 선언한 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도시가 주목을 받는 것은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곳에서 살아가는 도시 인간(Homo Urbanus)’의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역할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지구를 도시 행성으로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도시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도시는 전 세계 에너지의 75%를 쓰며 이산화탄소의 80%가량을 내뿜는다. 더군다나 도시는 식량과 에너지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외부와의 연결이 끊기는 순간, 하루도 버티기 힘든 곳이 바로 도시다.

 

이렇듯 냉정한 현실 앞에서 세계의 도시들은 지속가능한 도시로의 탈바꿈을 서두르고 있다. 최고의 녹색도시를 꿈꾸고 있는 밴쿠버, 2층 굴절버스의 천국으로 불리는 쿠리치바, 전기자동차 수도를 꿈꾸는 샌프란시스코, 난방에너지의 대부분을 재생에너지로 공급하는 뮌헨과 오슬로, 2020년까지 탄소중립도시 실현을 선언한 코펜하겐 등이 본보기다. 이들 도시에는 공통점이 있다. 도시가 바뀌면 국가가 바뀌고, 결국은 또 다른 세계가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우리나라에도 같은 꿈을 꾸는 도시들이 많다. 대표 주자는 단연 서울이다. 서울과 인근 지역을 오가는 버스에는 에너지를 아껴 쓰는 당신이 원전 하나 줄이는 발전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서울시가 몇 년 전부터 시작한 원전 하나 줄이기의 가치관이 담긴 슬로건이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무심코 이 글귀를 발견했을 때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당신도 발전소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당당한 선언에서, 에너지 시민주권시대의 개막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원전 하나 줄이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전력자립률은 3% 수준에 불과했다. 지금은 5%대를 향해 가고 있다. 작년 전국 평균 에너지소비량이 증가한 것과 달리 서울에서는 전력, 도시가스, 석유 소비가 모두 줄어들었다. 시민들이 생산절약이라는 두 바퀴 수레를 끈질기게 밀어 올려 거둔 성과다. 하지만 아직은 첫발을 뗀 것에 불과하다. 시행착오도 있었고 앞으로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만큼 얼마 전 서울시가 원전 하나 줄이기의 후속편으로 에너지 살림도시 서울을 들고 나온 것은 도시혁신의 새 역사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에너지 분야에서 일자리를 만들고 에너지 나눔 공동체를 실현하겠다는 구상은 에너지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기본 조건이라는 명제와 닿아있다. 서울의 에너지 살림도시실험은 도시화의 그늘을 걷어내기 위해 이제 막 시작된 꿈이다. 옥상과 아파트 베란다마다 햇빛나무가 자라고 시민 모두가 발전소의 주인이 되는 꿈을 다른 도시들도 함께 꾸었으면 한다.

안병옥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경향 14.11.26

 

우리 이데올로기, 경제 인종주의

’(미국 재벌들의 해외 하도급 기업의 저임금 노동자나 이민자)을 과도하게 착취해 수익성 회복에 나선 미국과 달리, 한국 신자유주의는 자국민 임금 근로자 절반 이상을 현대판 천민으로 강등시켜 집중 착취하는 것을 뜻했다.

 

미국에서 종족적 인종주의와의 투쟁에서 흑인·백인 운동가들이 연대했듯이, 한국의 경제 인종주의와의 투쟁을 비정규직·정규직들은 다 같이 해야 마땅하다. 설령 본인이 정규직이라 해도 그 자녀가 비정규직이 될 확률이 높은 게 오늘날 한국이다.

 

나는 지난 열흘 동안 특강을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돌았다. 미국의 현실을 보면서 늘 떠올랐던 것은 한국의 현실이었다. 돌이켜보면 두 나라의 관계는 가히 숙명적이라 하겠다. 미국은 신자유주의의 본산이라면, 한국은 신자유주의의 모범사회다. 어떤 면에서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은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사회다. 예컨대 인문학 경시 풍조는 한·미 양쪽 대학의 공통점이지만 비인기 학과를 아예 없애도 되는 한국의 기업형 대학들에 비해서는, 미국 대학들의 인문학 고사 정책은 점진적이다. 한국 대학들의 과감한 시장주의를 선망하는 미국 대학 당국자들도 똑같이 하고 싶어하지만, 학생·교원들의 저항이 훨씬 거세기에 그리 손쉽게 인문학 말살정책을 쓰지 못한다. 그만큼 미국에서 저항의 중심으로서의 대학의 구실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신자유주의 정책 강도가 더 높기 때문이기도 한다.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약 35년의 역사를 가진다. 1970년대에 두드러진 기업 수익성 위기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단기 이윤의 최대화를 뼈대로 한다.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사실상 동결 내지 인하당하고, 외국의 저임금지대에 맡길 수 있는 모든 생산을 다 국외로 빼돌리는 것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의 기반이다. 이에 비해서 한국의 신자유주의는 미국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불과 약 17년의 역사를 가진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미국 이상으로 신자유주의화를 감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속도가 빠르고 정책의 강도가 매우 높았다는 뜻이다. 그게 어떤 의미인가?

 

금융자본·기술생산의 중심인 미국과 달리 한국은 제조업 국가다. 그만큼 미국과 달리 저임금지대로의 생산 이전은 한국으로서 쉽지 않다. 한국의 국내총생산 가운데 제조업 비중은 1980년대 말 이후로 계속해 약 30~31%였으며, 이 수치는 줄어들지 않았다. 반대로 지속적인 생산 이전의 결과로 미국 제조업의 비중은 13%에 불과하다. 또 한국과 달리 역사적으로 이민자들의 나라로 성장해온 미국은, 신자유주의 시기에 이민자들의 저임금 노동에 대한 초착취를 통해 이윤율을 부분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거의 노예 신세에 가까운 약 1100만명의 불법 체류자를 비롯하여 미국의 총인구에서 1세 이민자들은 거의 15%를 차지하는데, 이는 대다수의 유럽국가와 견줘도 높은 수준이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아무리 외국인의 수가 늘어난다 해도, 아직도 외국계 인구의 비율은 2.9% 정도다. 그렇다면, 미국만큼 외국인 착취도 공장 이전도 하지 못한 한국 정부·자본의 미국보다 더 강한 신자유주의 조처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에게 흔히 비정규직 양산으로 알려진 이중 노동시장을 만든 것이야말로 미국 등 세계체제 핵심부와 또 다른 준주변부 국가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 도입의 핵심이다. 정규직-비정규직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고용 형태의 차이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기업사회다. 기업·직장을 떠나서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적 시민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의료·교육 등 본인의 생존과 자녀의 성장에 가장 필요한 사회적 서비스도 무료가 아니며, 또 실업수당부터 국민연금 내지 기초생활수당까지의 각종 사회적 임금들은 그 지급 기간이 짧거나 조건이 까다롭거나 생활이 불가능한 작은 액수다. 결국 (정규직) 직장이 없는 이상 한국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측면에서 전체 근로인구의 절반 이상이 되는 비정규직층의 양산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조처는 단순히 고용시장의 악화는 아니었다. 새로운 현대판 천민계급을 만들어 그 천민들에 대한 초착취를 통해 이윤 위기의 타파를 시도한 것이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미국 재벌들의 해외 하도급 기업의 저임금 노동자나 이민자)을 과도하게 착취함으로써 수익성 회복에 나선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는 자국민 임금 근로자 절반 이상을 현대판 천민으로 강등시켜 집중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뜻했다. 경제식민지 확보가 미국에 비해 훨씬 더 어려운 한국의 자본은, 결국 자국민의 상당 부분을 식민화한 것이다. 이 자국민의 식민화 과정은 우리 일상 속의 통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미국에 가서 느낀 점은, 아무리 형식상으로 인종차별이 1960년대의 투쟁으로 철폐됐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미국 사회가 여전히 인종피라미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백인이 다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아니지만 특권층의 절대다수는 여전히 백인이다.

 

<포천>지가 선정하는 미국 5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중에서 흑인과 아시아인, 라틴(중남미)계는 합해서 4%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나머지 96%의 미국 경제계 지배자들은 백인이다. 미국 전체 인구 중에서 백인은 62% 정도만 차지하는데도 말이다. 앵글로색슨 계통의 백인들이 여전히 지배층의 뼈대를 이루는가 하면, 내가 여행한 캘리포니아의 일상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대부분의 서비스노동자들은 전부 라틴계다. 심지어 엘에이의 코리아타운에 가도, 한인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나 가게에서 서비스노동을 도맡아 임금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은 대개 라틴계다. 철저하게 종족계급(ethnoclass)별로 서열화돼 있는 미국 사회에서 예컨대 한국인을 포함한 동아시아 출신들은 대개 기술자와 중소기업인의 중간계층에 해당된다. 얼핏 보면 성공한 마이너리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느 수위 이상으로는 집단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성장하기가 힘들다. 노골적 인종차별은 퇴조를 보여도, 인종적 경계선들은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자유주의 시대에 더 강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한국인들을 천민화시켜 착취하는 한국은 어떤가? 우리 상전국가의 고질적인 인종주의에 상응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철저한 경제 인종주의다. 한국은 혈통주의 사회인데도, 혈통주의는 그 사회적 차별의 구도를 전혀 결정짓지 않는다. 내가 한국에서 만난 비한국인 노동자들 중에 한국에서의 차별과 폭력에 가장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오히려 바로 같은 혈통인 중국 조선족과 탈북자들이었다. 타자든 자국민이든 한국에서의 차별구도는 명확히 경제본위다. 물론 호남인에 대한 지역차별이라든가 지방대 내지 고졸 출신에 대한 학력차별 등 지연·학연에 따른 차별의 구조는 옛날부터 상당히 복잡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신흥 천민계급의 출현에 따라 이 모든 차별관계들은 주변화되고, 비정규직에 대한 살인적 차별은 차별구도 전체의 중심에 서게 됐다. 그리고 이 차별의 심도는 미국에서의 인종주의보다 더하면 더하지 절대 덜하지 않는다.

 

몇 주일 전에 서울 압구정동의 한 부촌 아파트에서 음식물 던지기 등 주민으로부터 동물과 같은대접을 받고, 잔심부름과 언어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결국 분신자살한 이만수 열사를 기억하는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전국 25만명의 경비노동자들이 당해야 하는 차별은, 1960년대 이전의 미국에서 흑인들이 감수해야 했던 일상적인 모욕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모범적 신자유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의 경제 인종주의는 오늘날 미국의 종족적 인종주의를 오히려 능가할 수준이다. 그 피해자는 경비노동자뿐인가? 대개 비정규직인 은행·증권·생명·손해보험회사 등 금융권 직원 중에서 고객응대 업무 담당자의 66%나 고객의 폭언에 시달리고 있다는 게 최근 발표된 조사 결과다. 노인이나 여성일 가능성이 높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괴롭히는 것은 한국에서 현대판 양민이라고 할 시민’, 즉 중산층의 대중적인 기분풀이가 된 셈이다.

미국에서 종족적 인종주의와의 투쟁에서 흑인·백인 운동가들이 연대했듯이, 한국의 경제 인종주의와의 투쟁을 비정규직·정규직들은 다 같이 해야 마땅하다. 백인이라고 경제적 몰락을 언제까지나 막을 수 없듯이, 영구적인 정규직도 없다. 설령 본인이 평생 정규직이라 해도 그 자녀가 비정규직이 될 확률이 높은 게 오늘날 한국이다. 우리가 과연 경비노동자에게 반말을 해대고 음식을 던지는, 불안 노동자에게 분신 이외의 저항수단이 없어진 사회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인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4.11.25

 

국가의 안위가 걱정스럽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무기한으로 연기한 조처는 기형적 군사주권을 방치하는 것이다. ‘비정상의 정상화에 역행하는 박근혜 정부의 정상의 비정상화행보와 다를 바 없다.

지난 102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46차 한·미 안보협의회에서 양국 국방장관은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보 정세는 물론 한국의 연합방위 능력을 감안할 때 이전에 합의했던 2015년 환수는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아예 시간을 특정하지 말고 여건에 기초한 환수 협의를 하자는 게 이번 합의의 특징이기도 하다. 청와대는 이를 국가의 안위라는 현실적인 관점에서 냉철하게 내린 결정이라며 정당화했다. 과연 그럴까?

 

무엇보다 염려되는 것은 미국의 군사 지원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미 연합사령부를 창설하고 전시, 평시 전작권을 미군에 넘긴 가장 큰 이유는 인계철선 논리였다. 만일 북한이 6·25와 같은 대규모 남침을 감행할 경우, 연합사라는 기제를 통해 미군의 자동 개입을 담보하자는 구상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이 지상군 69만명, 전투기 2000, 항공모함 5개 전투단과 함정 160여 척을 전쟁 개시 100일 이내에 한반도에 투입한다는 작전계획(작계) 5027’은 하나의 신주단지처럼 간주되어왔다. 이번 결정도 전작권이 환수되어 한·미 연합사령부가 해체되면 작계 5027’에 따른 대규모 군사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 내려졌다고 할 수 있다.

 

주한 미군을 인질로 삼겠다는 인계철선 논리는 우리의 동맹 미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또한 미국의 현실에 대한 몰이해도 문제다. 2013년 기준으로 미국 지상군 총병력 수는 63만명, 전투기 수는 3135, 그리고 항공모함 수는 9척에 지나지 않는다. 엄격히 말해서 작계 5027에 의거한 대규모 병력 지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유사시 미국이 개입을 회피하고 주한 미군까지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한국의 국가 안위는 크게 위태로워질 수 있다. 이번 결정은 국가 안보에는 설마가 없다는 기본 원칙을 간과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두 번째, 한국군 전력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문제다. 매년 30조원 이상의 국방비를 쓰는 한국군이 북한 전력에 뒤진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게다가 북한 핵을 포함한 비대칭 위협에는 미국이 확대억지 전략 차원에서 우리에게 핵우산을 공여해주고 있잖은가. 여기에 한국군의 미비 전력에 대해서도 미국이 보완 전력을 공여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사실 2009년 이후 미국 측은 한국군이 작전통제권 전환을 충실히 준비해왔고, 연합방위를 주도할 만한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누누이 강조해왔다. 심지어 지난해 6월 싱가포르 샹그릴라 대화에서 미국 국방장관은 한국군이 사령관을 맡고 미군이 부사령관을 맡는 새로운 형태의 한·미 연합사령부 구성가능성까지 언급한 바 있다. 이는 한국군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한국군-주력군’ ‘미군-지원군이라는 전작권 환수 이후의 연합방위 현실을 제도적으로 반영하겠다는 의사 표현이기도 하다. 이런 기회를 스스로 내팽개치고 무기한 연기라는 선택을 한 우리 군당국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작전 투입 결정은 미군 장성이, 책임은 군통수권자인 한국 대통령에게?

또한 정부는 전작권 환수와 군사주권을 별개의 사안으로 보는 것 같다. 이는 주권 개념의 심각한 왜곡이다. 군사주권을 특정하고 있는 헌법 제741항의 국군통수권에 따르면 대통령은 군정권과 군령권을 행사한다. 여기서 군정권은 군대의 편성과 조직을 관장하는 행정권한을, 군령권은 군의 작전을 지휘·통제하는 명령권한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 대통령은 군에 대한 절대적인 군정권을 행사하며, 군령권 중 작전지휘권 역시 한·미 연합방위의 틀 안에서 미국 대통령과 공동으로 행사한다. 다만 작전통제권은 미국 대통령의 지휘를 받는 한·미 연합사령관에 이관되어 있기 때문에 국군통수권의 일부가 미국에 양도된 셈이다.

 

작전통제권이 중요한 이유는 한·미 지휘부가 전쟁을 결정하고 작전명령을 내리게 되면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권한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한반도에 전쟁이 나면 미군 장성인 한·미 연합사령관이 한국군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방식으로 전투할 것인가를 최종적으로 결정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평양지구 전투에 한국군 지상군을 대거 투입했다가 전사자가 수천명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걸 누가 책임져야 할까. 투입 결정은 미군 장성이 내리고 책임은 군통수권자인 우리 대통령이 져야 하는 역설적 결과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이번 전작권 환수 무기한 연기 조처는 기형적 군사주권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표방하는 비정상의 정상화에 역행하는 정상의 비정상화행보와 다를 바 없다. 걱정스럽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시사인 37514.11.20

 

가난한 그대 이름은 여자

여성가족부는 중산층 중심의 여성 정책을 제외하면 존재감을 확인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지난 5월 통과된 양성평등기본법은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에 가깝다.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제4차 세계여성대회가 열렸다. 세계여성대회는 유엔이 주최하는 여성대표자회의 성격으로, 정부기구(GO)와 비정부기구(NGO)가 모두 참여해 관련 의제를 논의하는 자리다. 특히 베이징 여성대회는 성 평등 사회를 목표로 한 12개 주요 관심 분야에 대한 행동강령을 채택한 것으로 유명하다.

 

12개 분야는 여성의 빈곤, 교육과 훈련, 건강, 폭력, 군사적 갈등, 경제, 권력과 의사결정, 인권, 미디어, 환경, 여성 발전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여아(girl-child). 각국의 여성 지도자와 활동가들은 5년마다 그 이행 정도를 평가하고 향후 실천 방향을 모색해가고 있는데, 내년이 바로 또 한번의 기점인 베이징+20’이 되는 해다. 이를 위해 국내 상황을 진단하고 평가하는 NGO 차원의 워크숍이 여러 차례 열렸다.

 

아직 총체적인 진단과 점검이 마무리된 상태는 아니지만 향후 10년의 비전과 과제를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 기대한다. 각계각층 여성들이 당면한 현실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핵심 키워드를 뽑는다면 보수 정권, 신자유주의 후유증 등을 들 수 있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심각한 중심에 여성의 빈곤화가 놓여 있다.

 

송파구 세 모녀의 죽음은 필연적이었다

기초생활 수급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남성보다 훨씬 높았으며, 여성 가구주의 절대빈곤율(20.1%)이 남성 가구주의 절대빈곤율(5.1%)4배에 이른다. 여성 전체 노동자의 약 40%일을 해도 가난한근로 빈곤계층에 해당한다. 인구 고령화로 인한 여성 노인의 증가는 여성 빈곤화의 또 다른 축이기도 하다.

 

고용 평등과 관련해서도 여성 일자리는 양적으로는 늘어났지만 질적으로 낮아졌고, 비정규직 종사자 수의 성별 격차는 더욱 늘어났으며, 남녀 간 임금 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각종 통계는 왜 우리 사회에서 송파구 세 모녀의 죽음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여성민우회 세입자 주거권 액션단의 활동을 보면 이러한 여성의 빈곤화가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많은 비혼 여성 가구주들은 드라마 속 깔끔한 오피스텔과는 거리가 먼 열악한 주거 여건을 견뎌내고 있다. 집주인이 언제든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 수도 있는 무방비한 보안 상태와 곰팡이·습기·해충·냄새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한 조건이다.

 

이들이 원하는 주거 조건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저 바깥과 구분된 덜 춥고 덜 더운 집, 햇빛이 들고 환기가 되며 하수구 냄새와 곰팡이가 없는 집, 결로 걱정 없이 보일러를 틀 수 있는 집, 욕실과 부엌의 물을 동시에 쓸 수 있는 집, 이부자리를 깔고도 움직일 공간이 있는 집,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집 등 참으로 소박하다. 하지만 정작 이러한 집이 그들 차지가 되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이처럼 베이징 이후 20년의 현주소는 여성 빈곤이 심화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등 적극 대응해야 할 여성가족부가 거의 손을 놓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예산·인력·실행의지 면에서 총체적 난국을 드러내고 있다. 복지와 관련된 주무부처를 설득하기에도 역부족이다. 성폭력과 가정폭력 등 여성폭력 예방, 일과 양육을 병행해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중산층 중심의 여성 정책을 제외하면 존재감을 확인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여성가족부는 군 가산점 위헌 판결 이후 꾸준히 확산되어온 인터넷상의 여성 혐오 코드와 맞물려 세간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런데 지난 5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퇴행의 극단을 자초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여성발전기본법의 전부개정안인 양성평등기본법이 그것이다. 법안의 취지는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의 지위를 전면 부정하는 것에 가깝다. 이로써 여성에 대한 격차 해소 전략 및 지원책이 모두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질 높은 일자리도, 의사 결정 구조의 책임과 권한도 모두 양성에 평등하게 배분하겠다는 것인지, 그 결과 상위 10%62.8% 이상의 부를 지배한다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함께 균등한 행복을 나누는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인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베이징 이후 20년을 진단하고 평가하는 과정에서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정책위원 시사인 37214.11.5

 

천안함 사건이 주는 반면교사

여야의 세월호 특별법 합의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이 탐탁지 않다. 행정부와 입법부에 대한 불신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천안함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월호로 마비되었던 정국이 여야 합의로 간신히 파국을 면했지만 시민사회의 반응은 탐탁지 않아 보인다. 가족들의 참여를 배제하고 수사권·기소권이 보장되지 않은 세월호 특별법으로는 진상 규명이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는 결국 행정부와 입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국민 정서의 반영이 아닌가 한다. 왜 이들은 국가를 믿지 못하는 것인가? 천안함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2010326일 우리 영해 안에서 46명의 젊은이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천안함 침몰 사건. 이명박 정부는 북한 잠수함에서 발사한 어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정부의 발표를 믿는 것이 도리다. 그러나 수많은 국민은 아직도 이러한 정부 발표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정부가 조작했다고 보지는 않지만 조사 과정과 절차에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먼저 부적절한 조사 주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들 수 있다. 천안함 사건의 일차적인 조사 대상은 군이다. 그러나 피고의 처지에 있어야 할 군이 조사의 주체가 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진 민주국가라면 천안함 사건의 조사 주체는 마땅히 입법부가 되었어야 한다. 입법부가 초당적인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철저한 진상 규명을 하는 게 정상이다. 물론 국회는 천안함 침몰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여당의 비협조 때문에 별다른 성과 없이 단 두 번 열리고 두 달간의 활동을 끝냈다. 이러한 입법부의 직무유기와 조사 주체의 문제는 국민의 의구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정부의 조사 속도도 문제시된다. 사건 발생 후 채 두 달도 안 된 520일 정부의 최종 결과가 나왔다. 아무리 확실한 증거가 발견됐다 하더라도 그렇게 서둘러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서두르다 보니 조사 결과에서 구멍이 발견되고 의혹이 가라앉지 않은 것이다. 미국 9·11 사태의 경우 의회가 초당적으로 조사하는 데만도 2년이 걸렸다. 2000812일 북해 바렌츠 해에서 침몰한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의 사고 원인을 조사하는 데도 12개월이 걸렸다. 성급한 발표가 조사 결과에 대한 신뢰성을 훼손했다고 볼 수 있다.

 

조사 결과 발표 이후의 정부 태도 또한 혼란을 더했다. 국방부 당국자들은 합동조사단 발표 뒤 더 이상 의혹 제기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증거가 나왔다라고 자신했지만, 그 이후 국내외 과학자들이 숱한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이러한 의혹에 국방부는 공개 토론을 피한 채 취사선택된 의혹에 대해서만 우호적인 매체들을 통해 일방적으로 해명하곤 했다. 게다가 합조단의 조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던 과학자들과 이에 동조하던 일반 시민들을 배척하고 적대시하기에 이르렀다. 국민의 의구심을 풀어주는 것이 정부의 존재 이유라 한다면 그 구실을 제대로 못했던 것이다. 이런 국가를 어찌 국민이 신뢰할 수 있겠는가.

 

천안함 침몰에 대해 함장에서 대통령까지 책임진 사람 있나

이명박 정부는 북한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북한은 이를 부인하며 남북기본합의서에 의거한 조사단을 보낼 터이니 공동조사를 하자고 제의해왔다. 정부는 이를 단칼에 거부했다. ‘범인이 어디 감히 공동조사 운운하느냐는 이유에서다. 북한 소행이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왜 이들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모든 국민이 보는 앞에서 그들에게 따지고, 묻고, 책임을 추궁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범인도 변론의 권한이 있는 것 아닌가.

 

또한 당시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는 영국·스웨덴 등이 참여한 객관적 조사를 세계 주요국들이 인정했다. 진실이 확실하게 규명된 것이고 논란은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라고 강변했다. 국제적 여론 조성을 통해 국민을 설득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러한 주객전도의 접근법 또한 국민의 의구심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합동조사단의 발표대로라면 천안함 침몰은 경계 실패이자 초동대응의 난맥상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당연히 관련자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해 문책하고 처벌해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천안함 함장, 해군 관계자,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 하나 책임진 사람이 없고 처벌을 받은 자 또한 없다.

 

이쯤 되면 국민들이 왜 천안함 사건에 대해 아직도 의구심을 품고 있는지 이해할 법하다. 세월호 유족들, 그리고 일부 시민이 성역 없는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외치는 이유도 천안함 사건이 주는 반면교사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세월호 비극의 진실을 규명하고 국가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국회는 세월호 진상 규명에 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시사인 36914.10.9

 

생태학의 두 얼굴

강원도 평창에서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가 시작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초등학교에서 자연이라는 과목이 왜 사라졌지?” 아이에게 물으니 과학 과목으로 바뀐 게 벌써 오래전이라고 한다. 내용이 달라진 건 별로 없다니까 자연과 과학의 이름만 바꿔치기한 셈이다.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들에게 자연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모르긴 몰라도 암기만 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자연이었을 것이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유기물의 구성 원소인 탄소(C), 수소(H), 산소(O), 질소(N)를 쉽게 외울 수 있는 팁까지 알려준다. “CHON()티를 날려버려라! 어때, 간단하지?” 자연을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문은 많지만 대표선수는 생태학이다. 인간과 자연을 연결해주는 생태학은 오늘날의 인간관과 세계관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자연과학으로서의 생태학과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환경운동가 빌 메키번은 <자연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하는 자연의 종말이 세상의 종말은 아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물론 이전과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이전과는 다른것은 실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인식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뜻한다.

 

따라서 문제는 자연관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변화는 생태학에서도 감지된다. 전통적인 생태학의 탐구 대상은 인간의 활동을 배제한 자연이었다. 하지만 자연을 인간의 영향을 완벽하게 받지 않은 순수 그 자체로 규정하는 순간, 지구에는 자연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딜레마에 빠져들게 된다. 결국 현대생태학은 문화와 기술을 포함해 인간의 활동을 자연현상의 일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 도시생태학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도시라는 삭막한 공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일부 생태학자들은 오늘날처럼 자연환경이 파괴되어 있는 조건에서 인간의 간섭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라고 강변한다. 이들의 시각으로 보면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의 구분은 불가능하며,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자연을 보호하는 길이라는 믿음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들은 자연의 정원화(庭園化)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문화를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인간에 의해 변형된 인공 자연도 자연에 포함될 수 있다면, 보호해야 할 자연과 보호하지 않아도 좋을 자연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게다가 하천을 복원한다면서 벌이는 대규모 토목공사, 미생물 농약과 약용 판매를 위한 실험곤충의 대량증식, 수만마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치어 방류, 이건 어떻게 봐야 하나. 이처럼 선의를 가장한 인간의 개입은 자연으로 회귀하기 위한 선택일 수 있지만, 뒤집어보면 자연을 더 확실하게 지배하고 싶은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자연에 내재된 가치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창조하거나 조작할 수 없다. 인간의 손길이 닿아 정돈된 자연은 진품이 아닌 위조품에 불과하다. 복제된 예술품이 제아무리 진품과 비슷해 보인다 해도 그 가치는 결코 진품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오랜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위조품도 진품처럼 여겨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과 숲에 깃들어 살던 과거의 정령들까지 불러올 수 있을까.

 

왕사스레나무, 개벚지나무, 노거수, 금강제비꽃, 노랑무늬붓꽃. 생물다양성협약 총회가 열리는 평창 인근 가리왕산에서 올림픽 활강스키장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종들이다. 과학이 자연을 대체할 수 없듯이 사후 복원으로는 이들을 온전히 되살릴 수 없다. 생물다양성을 정말 지키고 싶다면 이 야만부터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안병옥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경향 14.10.1

 

폐쇄사회와 그 우군들

, 검찰, 정치권의 문제를 살펴보면 공통 원인은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 폐쇄성이다. 한국 사회는 열린사회와 정반대되는 곳을 향해 가고 있다. 인간 가치가 실종된 결과다.

철학자 칼 포퍼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민주국가의 핵심은 열린사회다. 열린사회란 무엇을 말하는가. 금기가 없는 사회를 가리킨다. 알아서는 안 되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되며,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 많은 사회는 죽은 민주주의, 즉 폐쇄사회다. 열린사회는 비판과 토론이 자유로운 시민사회로서 공존을 지향하는 사회다.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사회이며 진영 논리가 지배하는 분열된 사회가 아니라 합리적 논의가 가능한 사회다.

 

그러나 걱정스럽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러한 열린사회와 정반대되는 곳을 향해 가고 있다. 문제의 핵심을 도외시한 채 진영 논리가 똬리를 틀면서 사회를 분열로 치닫게 하고 있다. 요소요소마다 마치 야누스처럼 양면적이고 대립적인 모습이 뒤덮고 있다. 한편으로는 집단 우울증에 걸린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안하고 까닭 모를 미안함이 드리워져 있다. 세월호의 비극이 아직도 진행 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입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사회

다른 한편으로는 광기가 날뛴다. 세월호 유족들을 끊임없이 조롱하고, 병영 내에서는 병사들이 동료 병사를 잔혹하게 때려서 죽이는가 하면, 이것이 두려운 병사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인간 존엄성을 경멸하고 인간 생명의 가치를 외면하는 사람들로 인해 상처입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만 경제가 발전하고 국방이 튼튼해지고 결과적으로 국민행복시대가 온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이 설마있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 희망은 아득하다. 3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은 굳이 대통령의 약속이 없더라도 법치국가에서 당연한 일이다. 또한 검찰이 믿을 만하면 법대로 처리해도 문제될 것이 하나 없다. 하지만 불행히도 검찰에게 맡길 경우 용두사미가 될 것이 우려되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악순환이며 검찰의 자업자득이다.

 

20046, 이라크에서 김선일씨가 한국군 철수를 요구하는 반군에게 납치되어 참수당했다. 당시 박근혜 의원은 국회에서 다음과 같이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다. “국가가 가장 기본적인 임무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은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분노하며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난 2014년 오늘 과연 박근혜 정부에 이러한 비판을 한다면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대한민국 군도 바뀌어야 한다. 군 내무 생활은 내가 복무하던 40년 전의 군대와 대동소이한 것 같다. 군이 점점 국민과 절연되고 괴상한 모습의 이질적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군인도 인간이고 군대가 무법지대는 아닐진대, 병사들을 병참 물품처럼 여기는 군대 문화라면 이러한 군대를 국민의 군대로 사랑할 리도 없고 자식을 군에 보내는 부모는 많은 자책을 할 것이다. 강한 군을 위해서는 구타도 허용될 수 있다는 사고를 당연하게 여기는 군 지휘관이 있다면 이들이 바로 문제 장교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한국군에는 관심사병이 수만명이라고 한다(설마 사고 발생 시 면책을 위해 관심사병을 많이 지정하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군대의 폭력 문화를 견디지 못해 관심사병이 되었다면 본래부터 이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린 학생들이나 신입사원들까지도 해병대 캠프에 보내고 이를 견뎌내야 진짜 사나이로 취급하는 폭력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젊은 사람들의 적응력을 문제시한다면 이것은 정상인을 비정상이 아니라고 나무라는 것과 같다.

 

군의 문제, 검찰의 문제, 공무원과 정치권의 문제 등을 살펴보면 공통 원인은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 폐쇄성이다. 민간에 의한 군 감시가 군 보안을 이유로 철저히 봉쇄되고, 반드시 장성 출신만이 국방부 장관이 되어야 하며(참고로 독일 국방장관은 의사 출신인 여성이 맡았고, 유럽연합에는 모두 세 명의 여성이 자국의 국방을 책임진다), 퇴직 공무원이 산하단체 임원 자리를 독차지함으로써 부패가 만연하게 되는 것이 대표 사례이다. 이처럼 폐쇄성을 유지하려는 것은 그러한 독점성이 그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사회는 인간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인간 대신에 자본, 공존 대신에 경쟁만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인간 가치 실종사회의 결과가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마치 오염된 자연환경에서 괴물이 등장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박상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시사인 36414.9.5

 

세월호와 JTBC

방송심의소위원회가 JTBC 다이빙벨 보도에 대해 관계자 징계 및 경고의견을 제출했다. 무책임한 오보는 가볍게 넘어가면서 정부 비판적 보도에만 강도 높은 제재를 가하고 있다.



단원고 2학년에 다니는 세월호 생존 학생들이 12일 동안 약 40를 걸어 국회에 도착했다. 이날은 ‘4·16 세월호 참사가 꼭 3개월째를 맞는 날이었다. 세월호 특별법 상정을 기대했던 임시국회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시점이기도 했다. 국회에 도착한 학생들은 조건 없는 진실 규명에 적극 나서주지 않는 어른들을 꾸짖기라도 하듯 우리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 진실을 밝혀주세요라고 적힌 노란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회기 내 특별법 상정은 결국 무산되었다.

 

학생들은 이 도보 행진을 약 2주 전부터 자발적으로 기획했다고 한다. 교사와 부모, 시민들이 이들의 뒤를 따랐다. 마음의 상처로 가득한 이들에게는 친구들을 위해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위로이고 치유일 것이다. 국민들의 마음에도 이들이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부채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도 성역 없는 진상 조사라는 결정이 아직도 성사되지 못한 배경에는 오로지 청와대 사수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정부·여당의 탓이 크다.

 

행진을 줄곧 지켜보았던 한 기자에 따르면, 716일 행진 내내 JTBC 취재진이 이들의 선두에 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월드컵으로 인해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는 상황에서도 JTBC는 진도 현장을 굳건하게 지켜온 대표적 언론사이기 때문이다. 78일 저녁 메인 뉴스 시작 멘트는 세월호 참사를 잊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세월호 참사 84일째. 그만해라, 지겹다는 말이 악플보다 더 아프다고 유가족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의 마음을 굳이 이해하려고 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만큼 아픈 사건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만해선 안 되는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선 아직도 11명의 희생자가 바다에 있고, 사고 원인도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며, 온 나라를 뒤집어놓듯 했던 유병언씨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국정조사도 특별법도 정쟁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진도 해역은 다가오는 태풍 너구리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진도 팽목항에 나가 있는 기자를 먼저 연결하겠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 마음이 담기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JTBC가 또다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중징계를 앞두고 있다. 학생들이 국회로 간 716일 오후 벌어진 일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산하 방송심의소위원회는 JTBC ‘다이빙벨 보도에 대한 의견 진술 절차를 거친 후 관계자 징계 및 경고의견을 본위원회에 제출했다고 한다. 이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내릴 수 있는 법정 제재 중에서도 가장 강도 높은 제재에 속한다.

 

전해지는 이유는 해당 보도가 정부와 해경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조장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통령 스스로 해체를 선언할 만큼 썩을 대로 썩은 해경에 대한 분노 유발이 도대체 왜 문제라는 것일까. 이는 세월호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한 보도, 국민의 공분을 산 탑승자 전원 구조 오보 등에 대해서는 권고 수준의 가벼운 결정으로 일관하는 위원회가, 유독 정부 비판적인 보도에 대해서만 강도 높은 법정 제재를 의결하는 구태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JTBC다이빙벨 보도가 완전무결한 내용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방송 뉴스에서 이루어진 인터뷰이고, 당시 상황은 혹시라도 존재할 수 있는 생존자 구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시점이었다. 이 때문에 정부의 보도자료에 의존한 단순 받아쓰기 수준인 탑승자 전원 구조’ ‘대대적인 수색 상황 펼쳐져같은 유의 무책임한 오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저널리즘적 가치를 담고 있다.

 

세월호 생존 학생들의 도보 행진 현장에서 물러나야 했던 MBC 기자

도보 행진 과정에서 학생들은 따라오는 MBC 기자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촬영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쓰실 거예요?”라고. MBC 기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벗어났다고 한다. 이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드러난 가슴 아픈 우리 언론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아마도 그 기자의 머리에는 이 동영상의 편집 결과에 대한 회의적 예측이 담겨 있었을지도 모른다. ‘기레기(기자+쓰레기)’로 전락한 기자 처지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중 무엇이든 정정당당함, 떳떳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처럼 어린 학생들조차 존재 의미를 반문하는 언론과, 해결 가능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언론 중 누가 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존재인지를 되묻고 싶어진다.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정책위원) 시사인 35814.7.24

 

나는 왜 사민주의자가 아닌가?

한국 진보정치는 기반을 잃어가는 느낌이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기초의회 의원 당선자 수를 합산하면 137명이나 됐다. 그때는 집권여당인 한나라당 기초의회 의원 수의 약 10% 정도 돼 그나마 가시적 소수역할이라도 했다. 그러나 지난 지방선거에선 통합진보당과 정의당, 노동당의 기초자치의원 당선자 수를 합해 불과 51, 새누리당에 비해 3% 정도 될까 말까 한다. 노동당 당원인 나로서도 늘 위기감을 느끼지만, 가면 갈수록 노동당뿐만 아니라 모든 진보정당들의 존재감이 없어진다.

 

진보정치의 위기는 하도 복잡한 현상인지라 제대로 설명하자면 단행본 한권쯤 써야 한다. 당연히 진보의 지리멸렬해짐을 전부 진보주의자 자신들의 탓으로 다 돌릴 수도 없다. 노동자로서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노동계급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갈수록 지배자들이 조종하는 노동자들의 분열이 심화된다. 단순한 노동자란 이제 없다. 정규직이 있는가 하면 무기계약직, 기간제 계약직, 촉탁직, 파견직, 임시직, 알바 등등이 있을 뿐이다. 새로운 신분제로서의 신자유주의적 고용체제는 이제 그 복잡한 서열로 조선시대 신분제를 능가할 정도다. 고용의 범주들을 넘어서는 연대가 어려워지는 만큼 그런 연대를 기반으로 하는 계급정치도 어려워진다. 지배자들에 의한 끝 모를 비정규직의 양산과 함께 정규직의 노조들이 탄압받고 위축된다. 예컨대 지금 각급 학교 교직원의 42%나 이미 비정규직이고 그 비중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동시에 이번 정권의 탄압을 집중적으로 받는 전교조 조합원의 수는 장기적으로 감소 추세다. 2003년에 9만명이 넘었지만 지금 6만명 정도다. 관리자들이 조장하는 노동자층 분열, 노조 탄압, 그리고 노동운동의 위축 속에서 계급정치의 기반이 파괴돼간다. 거기에다가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식의 교육이나, ‘경쟁의 승자를 모범으로 내세우는 언론의 역할까지 생각하면 한국에서의 산자유주의 내면화의 과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체제가 만들어내는 환경의 문제도 엄연히 존재하지만 우리 자신들의 오류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과연 진보라는 우리들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이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사회의 상은 어떤 것인가? 이러한 차원에서는 집권여당과 주류 야당 사이에 사실 그다지 차이가 없다. 인권 보호나 사회서비스, 대북정책 등의 차원에서는 차별성이 있다 하더라도 사회경제적으로는 양쪽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 모델을 기본적으로 뜯어고칠 생각 없이 그 모델을 어느 정도 보완할 복지를 이야기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여야 양당에는 지역기반이라는 게 있는 이상 굳이 이데올로기가 체계화되지 않아도 그다지 상관없을 것이다. ‘지역개발 예산과 땅값 상승을 기대하는 유권자들의 표는 어차피 몰리기 때문이다. 비주류 중에서도 한참 비주류인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매력 포인트는 없다. 그렇기에 이데올로기나 미래 비전에 더욱 신경쓸 수밖에 없다.

 

한국 진보의 역사적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한국전쟁 이후 진보의 기원이 진보당이라면 조봉암이 영국 노동당을 벤치마킹해 이데올로기적 체제를 잡았으며, 또 거기에다가 평화통일 등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1950년대 이후부터 한국에서 진보는 사민주의와 통일, 반전, 평화, 반제국주의 지향의 조합을 일컬었다. 그러나 이처럼 비교적 온건한 혁신계 이데올로기라 해도 이승만·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살인적 탄압을 받았으며, 결국 그 과정에서 일부분이 급진화의 길을 걸어 1976~79년의 남민전 등 일부 조직들이 궁극적 사회주의국가 건설 계획을 들고나왔다. 광주항쟁 이후 급진화 경향은 한층 강화돼 1980년대의 진보는 철저히 반자본주의적이었다. 단 그 일부는 동구식 현실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았는가 하면, 또 한 경향은 동구 사회의 유교적, 총동원형 버전인 북한을 다소 이상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동구의 몰락과 북한의 급격한 약화는 한국 진보의 미래 비전을 망가뜨리고 말았다.

 

동구도 북한도 빛을 잃은 대신 부상한 것은 -1950~60년대의 혁신 정당들이 이미 지향한 바 있었던- 사민주의였다. 물론 1980년대 운동의 여열이 남아 있는 만큼 한국 진보의 사민화과정은 전혀 단순하지 않았다. 예컨대 2000130일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의 강령은 본래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사회주의에 대한 긍정적 언급을 담고 있는 등 일반 사민주의 정당보다는 적어도 강령상으로는 급진적이었다. , 실제 정책 개발의 중심에는 강령상 명기된 재벌 해체는 아니고 대표적인 사민주의적 의제, 즉 무상 교육·의료와 부유세 등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분열 과정에서는 강령마저도 후퇴해 그 후속 정당의 강령에서는 대개 사회주의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생산수단 사회화 등에 대한 언급도 없어지거나 완화됐다. 결국 핵심으로 남은 것은 재분배, 즉 복지에 대한 약속들인데, 보수정당들마저도 -기만적이긴 하지만- 이제 복지 의제를 전유해버린 상황에서 진보정당의 차별성은 약해졌다. 너나 나나 핀란드식 교육이니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이니 들먹이고 있는 판에 도대체 진보만의 독특한 정체성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부터 떠오르게 됐다.

 

제조업 이윤율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사회기반시설은 물론 교육이나 의료 분야에까지 손을 뻗쳐 민유화하는 것은 자본가에게 사활의 문제다. 공공 부문을 식민화하지 않고서 저들의 이윤율 유지가 힘들기 때문이다. 노동력이 일회용 부품이 돼버린 시절에, 과연 사민주의적 계급대타협이 현실적이기나 한가?

 

1990년대 이후의 진보는 1970~80년대의 급진적 경향들을 뒤로한 채 사민주의로 회귀해버렸지만, 이미 자본주의 체제도 사민주의 진영의 구체적 모습도 완전하게 달라졌다. 아직도 제조업의 이윤율이 높았던 1950년대 같으면 자본가들도 운수수단이나 전기 등의 안정적 운영·공급이란 차원에서 발전소나 철도 등 사회의 기본시설에 대한 국유화 정책에 그다지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윤율이 높은 제조업의 정규직 고용이 계속 늘어날 수 있었던 만큼 그 이윤의 일부분이 세금으로 납부돼 노동자들이 공공 부문에서 의료·자녀교육서비스 등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자본으로서 꼭 반대할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기업은 회사 복지에 돈을 들일 필요가 없어 부담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950년대와 같은 분위기에서 조봉암과 그 동지들이 현실적 강령으로서 그 당시의 제3세계 사민주의자들의 모토인 생산에 대한 합리적 통제민족자본 육성’, ‘계획경제’, ‘교육에 대한 국가보장제등을 들고나올 수 있었다. 실은 아시아의 대표적 사민주의자라고 할 인도의 네루 수상은 그 재임 기간 (1947~64)에는 대체로 그런 정책으로 일관했다. 사민주의가 한국으로서도 현실적 대안이었기에 1956년의 대선에서 조봉암은 유효표의 30%나 얻을 수 있었다.

 

최근 사민주의자들이 조봉암 시절의 계획경제를 삭제한 채 재분배만 이야기하지만, 자본의 저항이 완강한 만큼 이것마저도 타협이 아닌 매우 급진적 투쟁으로 쟁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깨져버린 사민주의 꿈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본에 대한 공세를 기축으로 하여 사회의 모든 약자를 총집결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러나 과연 지금은 어떤가? 제조업 이윤율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자본가로서는 이제 사회기반시설은 물론 교육이나 의료 분야에까지 손을 뻗쳐 민유화하는 것은 거의 사활의 문제다. 공공 부문을 계속 식민화하지 않고서 저들의 이윤율 유지가 힘들기 때문이다. 자본 이동이 자율화돼, 늘 저세율 지대로 빠질 수 있는 자본에 고세율을 강요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공장 해외 이전이나 노동력 수입이 가능한 글로벌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자 의료·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은 자본가에겐 전무하다. 노동력이 그저 일회용 부품이 돼버린 이 시절에, 과연 사민주의적 계급대타협 같은 것은 현실적이기나 한가? 최근 사민주의자들이 조봉암 시절의 계획경제를 삭제한 채 재분배만 이야기하지만 자본의 저항이 완강한 만큼 이것마저도 타협이 아닌 매우 급진적인 투쟁만으로 쟁취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진보로서는 이미 깨져버린 사민주의 꿈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본에 대한 공세를 기축으로 하여 이 사회의 모든 약자들을 총집결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우리는 우리 생존권을 위해 자본가로부터 비정규직을 고용할 자유나 공장 해외 이전을 할 자유, 공공 부문을 민영화할 자유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선언하고 계급투쟁의 전선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투쟁의 끝에 자본주의를 넘어선 미래의 자세한 비전을 명확하게 보여야 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4.7.8

 

학피아, 학살의 종범들

필자가 여태까지 들은 노엄 촘스키의 명언 중 이 말은 가장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최악의 학살자는 현장에서 직접 살인을 벌이는 졸개들이라기보다는, 멀리에서 정장을 입고 조용한 사무실에 얌전히 앉아 있는 고학력자 출신의 지휘자다.” 이번 세월호 학살도 마찬가지다. 주류 언론들이 도망친 선장 등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지만, 비정규직이기도 한 선장은 촘스키가 이야기한 졸개에 불과했다. 고물 선박 구입과 관련된 규제를 풀고 선박에 대한 감독을 해운업자 조직에 맡기는 등 과적 운항을 상습화시킨 조용한 사무실에서의관피아야말로 이 학살의 원흉임을 이제는 삼척동자도 알게 된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관피아보다 훨씬 더 그늘에 가려 있는 초대형 조직은 바로 학피아, 즉 정부·기업들과 긴밀히 유착돼 있는 학계다. ‘규제완화등 관피아가 추진하는 범죄적 정책들의 골간을 학피아가 만들어내고, 곡학아세하면서 합리화하기에 이번 학살의 원인을 논할 때 학피아를 빠뜨릴 수 없다.

 

그러나 관피아와 함께 이 학살이 일어나도록 공을 들였으면서도, 관피아보다 훨씬 더 그늘에 가려 있는 초대형 조직은 바로 학피아, 즉 정부·기업들과 긴밀히 유착돼 있는 대학가 내지 학계다. ‘규제완화등 관피아가 추진하는 범죄적 정책들의 골간을 학피아가 만들어내고, 곡학아세하면서 합리화하기에 이번 학살의 원인들을 논할 때 학피아를 빠뜨릴 수 없다. 하지만 국내는 아니지만 일단 대학 교원인 나 자신에 대한 반성문을 쓰는 입장에서 학피아 문제를 본격 거론하기 전에 몇가지 단서를 달아야 할 것이다.

 

첫째, 나는 국내 대학의 모든 정규직 교원들을 뭉뚱그려 학피아로 보려 하지 않는다. 그들 중에서도 주류에의 편입을 거부하고 노동운동에 앞장서는 작지만 큰용감한 소수는 있다. 하지만 변혁을 지향하는 소수는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조직체로서 학계·대학가는 대한민국에서 신자유주의 도입의 전위대 노릇을 해왔다. 또 밑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대학사회만큼 신자유주의 원칙이 철저히 적용되는 곳도 드물다.

 

둘째, 대한민국 학계라고 해서 꼭 특별한 것은 아니다. 정학(政學경학(經學) 유착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 식민 모국을 보라. 이미 1969년에 촘스키는 베트남 침략의 원흉으로 아서 슐레진저(1917~2007)나 새뮤얼 헌팅턴(1927~2008)처럼 효율적인 제3세계 개입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어용 정치학자들을 지목했다. 1973년에 촘스키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정치외교학 계통 논저의 95% 정도는 미국 재벌기업의 이해관계와 대외정책의 연관성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재벌들 앞에서 이 정도로 얌전하게 구는데는 당연히 대학가의 이해관계가 있다. 전체 미국 대학이 수령하는 연구비의 약 60%를 재벌이 움직이는 국가가 대주고, 6%를 사기업들이 직접 대주고 있다. 많은 대학의 경우 기업들의 지원은 거의 결정적이다. ‘진리 탐구상아탑의 자율성은 옛말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다른 나라라고 해서 본질적 차이는 그다지 없는데 하필이면 한국 학계를 특별한 문제로 삼는 까닭은 무엇인가?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관피아와 함께 학피아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 명문대학의 전임교원들은 사회 귀족으로서의 신분을 과시한다. 미국이라고 해서 폴리페서가 없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언급한 슐레진저와 같은 사람들은 사실 그 정의에 그대로 부합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만큼 폴리페서들이 판치는 세상도 참 드물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공공기관 고급 임원 중 교수와 연구원 출신은 24%나 됐다. ‘재벌정부라는 누명을 썼음에도, 사기업 임원 출신은 약 8%에 그쳤다. 박근혜 초기 내각에서는 연구원 출신만 약 28%에 달했다. , 두 극우적인 신자유주의 정권의 공통점이라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바로 고급 두뇌들이 추진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유독 교수 출신 장관따위가 많은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 특기할 만한 이유는 바로 학벌 카스트 제도의 작동 방식이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이라는 세 대통령의 하나의 공통점을 지적하자면, 그들 중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서울대 마피아라고 호칭할 수 있는 학벌조직이 대한민국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각각 임명한 정무직 공무원 중 서울대 출신 비율은 47% 정도였으며, 이명박 시절에는 고려대 출신에 약간 밀린 결과 40%로 깎이긴 했지만 그대로 우세를 유지했다. 특정 대학이 국가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에서 그 대학 전임교원의 정치·사회적 비중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둘째, 그 어느 나라에서도 대학들이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편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지만, 그 일부(성균관대·중앙대 등)를 아예 재벌기업이 소유하는 한국만큼 저질스럽고 졸속적인 신자유주의화를 볼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예컨대 정부의 정원감축이나 특성화 사업에 발맞추느라고, 도살하듯이, 학생의 의견을 무시해 가면서 여러 대학에서 벌어지는 학과 통폐합을 보라. ‘비인기라고 해서 독일·프랑스어, 사회학이나 철학 등의 학과들을 폐품 처리하듯이 단숨에 없애버리는 것은 과연 학술적 전통이 있는 대학에서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영어 논문광풍이나 유명 해외 학술지광풍을 보라. 내가 있는 오슬로대학을 포함해서 세계 대부분의 대학들은 교원들이 학술 활동을 영어로 하는 것을 유도하고, 교원들의 영미권 유명 학회지 논문 게재를 선호한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영미권 학계의 패권이 강한 것은 현실이다. 한데 외국의 유명 학술지에 논문을 실었다고 하여 그 저자로 돼 있는 교수에게 수천만원의 포상금을 내놓는 대학은 한국 말고 과연 어디에 더 있는가? 더군다나 국내의 논문생산 시스템에서 상당수 교수들이 대학원생이나 비정규직들을 무상 착취해 가며 논문을 만드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국내 대학들을 기초 상식이 없고 기본 인권도 지킬 줄 모르는 신자유주의적 착취공장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장하준 교수는 케임브리지대에 취직할 수 있어도 국내의 명문대경제학과 같으면 취직하기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학과 교수들은 비정규직 양산부터 규제완화까지 서민들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데 앞장섰다. 학피아의 주변부에 속하는 인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고질적인 현실도피다.

 

세월호 학살로 귀결된 대한민국의 신자유주의화를 이끈 것은, 학피아의 하나의 중심이라고 할 명문대들의 경제학과였다. 거기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는 고사하고 제도주의 학파 등 온건 케인스주의자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온 시장주의자 일색이다. 시장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큰 인기를 얻은 장하준 교수는 케임브리지대에 취직할 수 있어도 국내의 명문대경제학과 같으면 취직하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학과 교수들이 역대 정권에 의해서 가장 자주 정무직으로 등용됐으며, 비정규직 양산부터 범죄적인 규제완화까지 서민들의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데 앞장섰다.

 

경제학과들을 점령하다시피 한 시장주의자들의 범죄성이야 노골적이지만, 학피아의 주변부에 속하는 인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고질적인 현실도피다. 예를 들어 여러모로 가장 현재성이 강할 수도 있는 역사학을 보라. 최근의 문화 중시와 같은 포스트모던 추세로 한참 뜨고 있는식민지시대 영화 연구로 지난 10년 동안 적어도 50개 이상의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그러나 삼성가의 자본축적 경위나 그 과정에서의 식민지 당국이나 독재정권과의 유착을 본격적으로 다룬 저서 내지 논문은 3~4편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차피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민족주의는 학계에서 비판의 대상에 올라도, 한국 대학에 대한 자본 지배의 현실은 거의 학술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국가와 자본의 명령대로 인문학은 가만히 있는것이다.

 

세월호에서 수장당한 아이들에게, 시장주의와 순응주의가 당연시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서온 고등교육기관 교원인 우리가 속죄하자면, 이제라도 학피아의 테두리를 안으로부터 과감히 부숴야 한다. 국가와 자본을 끊임없이 문제시하고 도전하는 학문만이 새로운 학살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실학이 된다. ‘가만히 있지 않기를 실천하고 가르쳐야 우리에게 속죄의 길이 열릴 것이다. 착취공장으로 전락한 대학의 틀 안에서 안주하는 순간 우리도 종범이 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4.6.10

 

침몰하는 발전국가의 신화

세월호 참사 이후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국가에 대한 국민감정은 탄식을 넘어 분노로 치솟고 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국가의 침몰원인은 발전국가신화에 내재되어 있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우리가 동시에 목격한 것은 국가라는 제도의 침몰이었다.” 얼마 전 연세대 교수들이 채택한 시국선언문의 한 대목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로 530일 현재 172명이 구조되고, 288명이 사망, 16명이 실종되었다. 국가는 침몰하는 세월호에 갇혀 공포와 절망 속에 절규하던 꽃다운 젊은이들의 생명을 구해내지 못했다. 예견된 재앙의 예방도, 효과적이고 입체감 있는 구조 활동도, 유족들에 대한 사후관리조차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정부 당국자들이 우왕좌왕하며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만이 국민들 뇌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국가, 이 실패한 국가의 자화상에 대한 국민감정은 절망과 탄식을 넘어 분노로 치솟고 있다.

 

1970년대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졌던 강하고 효율적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국가의 이미지 때문에 더욱 그렇다. 산업화와 압축 성장을 통한 한강의 기적,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 ‘하면 된다는 슬로건 아래 무에서 유를 창조한 대한민국, 이 모든 것이 강하고 효율적인 한국형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때문인 것으로 부각되어왔다. 이는 이미 현대 한국의 가장 자랑스러운 국가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발전국가란 무엇인가? 이는 정부가 개발을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최우선의 국가 목표로 설정하고, 모든 가용 자원을 동원해 이 부분에 집중 배분하는 국가 형태를 지칭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상충하는 이해관계의 단순한 조정자나 자본가 계급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능동적 행위자로 개발 목표 달성을 위해 수시로 시장에 개입하고, 필요하면 시장과 시민사회를 통제하고 동원하는 기능까지도 행사해왔다.

 

학자들에 따르면 한국형 발전국가는 세 가지 구조적 특성을 보인다. 첫째는 행정수반의 강력한 지도력이다. 행정수반은 자신이 속한 정당은 물론 입법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유스러웠을 뿐 아니라 시민사회 위에 군림해왔다. 또한 관료들에 대한 엄격한 수직적 통제와 지휘를 통해 관료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 관료 기관 간의 수평적 소통과 합의를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둘째, 발전국가론자들은 국가와 기업 간의 유기적 연계망 구축이 국가 구조 못지않게 경제성장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평가한다. 혈연·학연·지연으로 촘촘히 엮인 사회 연계망을 통해 정부와 업계 지도자들은 정보 공유를 극대화하고 거래 비용을 최소화해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구도하에서 국가는 시민사회를 조직·통제·감독하고 심지어는 명령하는 초월적 지위를 누려왔다. 시민사회의 정치·사회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에 효율적·지속적으로, 그리고 일관성 있는 정책 결정이 가능했고 이를 효과적으로 실행해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가 결정하면 국민은 따른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일방통행적 등식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조국 근대화와 총력안보 담론도 이런 맥락에서 뿌리내렸다.

 

발전국가의 세 가지 특징, 더 이상 설 자리 없어

역설적으로 현재 우리가 목격하는 국가라는 제도의 침몰은 그 원인이 성공적이라는 발전국가의 신화 속에 내재하고 있다. 행정수반의 독점적 지위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기정사실화했고 청와대 눈치 보기에 급급한 행정관료들을 양산해내고 말았다. 게다가 한국형 발전국가와 유교자본주의의 가장 큰 자산으로 여겼던 사회 연계망은 정경 유착과 권언 유착의 복마전이 되었고 관피아라는 기형적 제도를 야기하고 만 것이다.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우월적 지위와 명령, 동원 관행은 시민들의 맹목적 순응을 사회화시키는 동시에 국민을 향한 소통과 설득의 논리를 실종케 하기도 했다.

 

이번 사태의 시사점은 분명하다. ‘실패 국가의 함정을 피하려면 1970년대 발전국가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민주화·세계화 시대에 행정수반의 일방적 리더십, 관료체제의 우월적 지위, 폐쇄적인 사회 연계망, 그리고 명령형 발전국가는 설 자리가 없다. 국가 개조의 핵심은 이러한 변화된 환경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가, 대통령직, 그리고 관료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 제도 개혁보다는 대통령이 진정으로 국민을 어려워하고 그들과 소통하며 더불어 대안을 찾을 때 출구가 열릴 수 있다. 깨어 있는 시민, 국가를 감시하고 지도하는 시민으로 거듭날 때 국가의 실패를 막을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시사인 35114.6.10

 

 

물러설 수 없는 자동차 탄소전쟁

나는 웬만해서는 자동차를 타지 않는다. 출근은 자전거로 시작해 버스나 지하철을 거쳐 가벼운 걷기로 끝을 맺는다. 퇴근은 그 역순이다. 출장도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면 기차나 고속버스를 이용한다. 환경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서? 그런 점도 있지만 솔직히 그게 더 편안하고 좋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타면 감수해야 할 것이 많다.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아이들의 환한 얼굴도, 바람에 서걱거리는 나뭇잎 소리도, 점점 불어나는 뱃살을 약간이나마 뺄 기회도 모두 포기해야 한다. 자동차로 갈 수는 있어도 느낄 수는 없다는 것은 진리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이자 환경운동가인 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길을 걸으며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도서관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하지만 나는 카맹은 아니다. 엄격한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독일에서 운전면허도 땄고 간단한 부품 정도는 갈아 끼울 줄도 안다. 지구 위에서 자동차를 남김없이 몰아내야 한다고 외치는 근본주의자도 아니다. 자동차 문명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따라서 자동차를 모는 사람들을 무턱대고 탓하지 않는다. 그래도 생각해볼 문제는 있다. 어떤 차를 어떻게 타느냐다.

 

자동차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요즘 큰 차와 작은 차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 때문이다. 발단은 이렇다. 지난해 3월 국회는 저탄소차협력금제도 도입을 담은 대기환경보전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이산화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자동차 구매자들은 보조금을 받고, 많이 배출하는 자동차 구매자들은 부담금을 물게 된다. 대형차를 타는 사람들로 하여금 중소형이나 경차로 바꿔 타도록 유도해 자동차들이 내뿜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보자는 취지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대기업들이 반발하면 국회에서 어렵게 내린 결정도 경제부처들이 뒤집는 일이 다반사다. 일부 언론도 가세하고 있다. 어제 한 경제신문의 사설은 온난화가 심각하다는 등식조차 의심받고 있다며, 제도 도입에 찬성하는 쪽을 환경주의 탈레반이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수면 위로 마치 자동차업계, 경제관료, 친기업 언론의 거대한 카르텔이 등장하는 것을 보는 느낌이다.

 

이들은 기후변화가 세계경제를 침몰시킬 수도 있다는 경제학자들의 경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많은 나라에서 도입하고 있는 제도가 아니다, 수입차에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다, 국내 자동차산업 경쟁력이 악화된다며 이런저런 반대논리를 펴고 있지만 본질은 딱 하나다. 중대형차를 많이 팔아 막대한 이윤을 챙겨왔던 업계의 이익구조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저탄소차협력금제도가 몇몇 국가만 도입한 제도라지만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중대형차 비율은 30%대 수준이다. 72%인 우리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정상적인나라들에서는 제도 도입의 동기가 약한 게 당연하다는 뜻이다.

 

국산차가 수입차보다 일방적으로 불리하고 국내 자동차산업 경쟁력에 타격을 준다는 주장도 설득력 없기는 마찬가지다. 자동차업계와 산업부는 역차별 운운하기 전에 먼저 답해야 한다. 현대기아차가 유럽에 팔고 있는 차들보다 국내에서 시판되는 차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훨씬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정부부처가 내놓고 큰 차 타기를 부추기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할 것이다. 어쩌면 이 논란은 평형수를 줄이고 화물과 승객은 늘려 돈을 더 벌려는 선사와, 침몰하는 배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조하려는 승무원 사이의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인지도 모른다. 큰 차 모는 사람들을 죄악시한다고? 아니다. 이건 세월호 참사를 겪은 대한민국의 예의와 책임에 관한 문제다./ 안병옥 |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경향 14.6.1

 

기업국가를 해체하라!

정부가 해운업 감독 책임을 방기하고, 기업은 이윤을 위해 고객과 노동자 생명을 볼모로 잡는다면 이는 사고가 아니다. 살인이다. 삼풍과 세월호 참사는 구조적으로 거의 흡사하다. 삼풍 붕괴를 가능케 한 국가와 기업 사이의 관계 구도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기업국가를 해체하라!

정부는 살인마다!” “아이를 살려내라!” 아이를 먼저 보내는 체험을 하지 않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아픔으로 넘치는 유가족들의 이 외침 속에 이번 사태의 본질이 그대로 담겨 있다. 사이비 언론인들은 교통사고따위를 들먹이지만, 해운업 감독의 책임이 있는 정부가 그 책임을 방기하고, 기업은 이윤을 위해 고객과 노동자의 생명을 볼모로 잡는다면 이는 사고가 아니다. 살인이다.

 

사고야 어디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지금 사는 스칸디나비아에서도 1994년에 탈린과 스톡홀름 사이에서 운항했던 페리인 에스토니아호가 침몰돼 852명이 사망하는 20세기 최악의 선박사고가 났다. 그러나 왜 에스토니아호 희생자들의 유가족 중에서는 그 누구도 정부는 살인마!”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에스토니아호를 소유했던 에스트라인이라는 회사는 공무원들과 결탁하여 상습적 과적 운항 등 각종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에스토니아와 핀란드, 스웨덴 해양구조 당국은 특혜 업체를 위해 초동대응을 늦추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스토니아호 참사가 말 그대로 사고였다면, 이번 일은 궁극적으로 국가와 기업에 의한 간접적 대량살인으로밖에 볼 수 없다. 살인마라는 표현은 맞다.

 

군사독재 시절의 정부나 기업이 노동자 목숨을 초개처럼 여겼다. 박근혜가 자랑스러워하는 그 아버지 시절 산업화의 현장은 처참한 전장을 방불케 했다. 그 최대 국책사업인 경부고속도로를 보라. 위안부 피해자,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보상 권리를 팔아먹고 일본과 관계 정상화해서 얻은 차관과 베트남에서의 미국 침략의 현장에 한국 군인들을 팔다시피 하여 보내서 미국으로부터 받은 돈으로 1968~1970년 동안 했던 그 공사의 정치적 의미가 커서 정권은 계속 공기 단축을 재촉했다. 도로 공사에 익숙하지도 못한 노동자들이 최저가의 노후장비로, 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살인적 속도로 작업하다가 줄줄이 죽어나갔다. 경부고속도로 공사의 대가는 노동자 77명의 산재사와 수백명의 부상이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물론 한 푼의 국가배상도 없었다. 단 시공사 차원에서 사망자 한명당 그 당시 돈으로 50만원, 즉 오늘날 돈으로 500만원 정도 주었다. 이는 조국 근대화시절에 노동자 목숨의 값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타살의 구조는 지금까지 왜 그대로인가?

 

도살장 같은 이 국가는, 1987년 이후에 민주화됐다기보다는 기업에 의해서 사유화됐다. 관료집단이 기업을 관리하는 구조는, 기업이 상납 등을 통해서 관료들을 관리하면서 이용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기업의 목적이 오로지 이윤이다 보니 이러한 변화에 따른 것이 90년대 중반의 여러 대형참사였다. 502명의 목숨을 앗아간 1995년의 삼풍백화점 붕괴는 대표적이었다. 더 많은 이윤을 내려는 삼풍그룹이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먹여가면서 상가 건물을 무리하게 백화점으로 개조하고, 그 백화점의 매장 공간을 최대한 넓히려고 벽을 헐어버려 건물을 부실하게 만들고, 거기에다가 건물이 무너지려는 징조가 보여도 계속 영업 지속을 강행하자 얼마든지 살릴 수 있었던 수백명을 죽이고 말았다. 구조적으로 삼풍백화점 참사는 이번 참사와 거의 그대로 흡사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삼풍백화점 붕괴를 가능하게 한 국가와 기업 사이의 관계 구도가 그동안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달라진 게 있다면 1997~98년 환란을 계기로 국가는 더욱 기업국가 방향으로 변모돼간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의 구호인 기업하기 좋은 나라대로, 사기업의 이윤은 국가의 유일무이한 목적이 됐다. 기업국가로의 전환이 쉽고 자연스러웠던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기업가와 고위직 공무원들이 서로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다. 혼연일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노회찬 전 의원이 삼성으로부터 명절마다 천만원가량의 떡값을 챙겼던 검사 7명의 명단을 발표해도, 사법 처리 당한 게 검찰청의 삼성 장학생들이 아니고 바로 노회찬 의원 자신이었던 것은, 이 사회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준다. ·판사가 재벌의 사위가 되고, 퇴직한 공무원이 평소에 관련했던 업계로 내려가 한자리를 하는 사회에서는 국가기업은 이미 하나다.

 

국가의 총력이 사기업의 이윤 창출에 동원되는 기업국가, 기업사회로서의 한국은 1997~98년 이후 승승장구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구난 현장에서야 국가는 턱없이 부실해도 국가와 하나가 된 주요 재벌들의 이윤실적들은 계속해서 세계 재계의 부러움을 사왔다. 최근 몇년간 세계공황 등으로 기업매출증가율이 연간 2%에 그치고 수익성은 악화돼도 한국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대기업 대주주들의 배당금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예컨대 삼성의 이건희는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으로부터 20111091억원, 20121034억원, 지난해 1079억원 등 불황 속에서도 어마어마한 배당금을 받아왔다. 10대 그룹 대주주 10명이 상장계열사로부터 받은 배당금은 최근 4년 동안 약 1조원이나 되는데, 대한민국 전체의 1년간 실업급여 예산은 38600억원 정도밖에 안 된다. 즉 약 70만명 이상이 되는 공식 실업자들이 받을 돈의 약 30%에 해당되는 금액을, 최고 부자 10명이 개인적으로 챙겨가는 셈이다. 이런 현대판 귀족사회에서 과연 국가가 서민의 목숨에 무슨 가치라도 부여하겠는가?

 

기업국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공성의 부재다. 기업국가에서는 공공기관이 챙겨주어야 할 서로 평등한 민주시민은 없다. 그저 기업으로서 필요한 인간부품들이 있는가 하면, 필요가 없어져 폐기처분되는 폐품들이 있다. 이번 참사의 피해자 같은 아이라면 아직 쓸만한 부품이 되지 못하지만, 더 이상 기업으로서 이용가치가 없는 노인들 같으면 바로 폐품으로 취급받는다. 한국에서 특권층·중상층이 아닌 이상 노인으로 산다는 것은 처벌에 가깝다.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거의 49%로 산업화된 국가 중에서는 최악이고, 프랑스(5%)나 독일(10%)은 물론 미국(14%)과도 비교조차 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빈곤율은 산업화된 국가 중에서는 가장 빠른 속도로 악화돼간다. 이명박 정권 초기에 44%였는데 이제는 노인들의 거의 절반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국민연금이 극도로 부실한데다가 기업들이 나이 든 사원들을 너무나 쉽게, 국가의 어떤 제재도 없이 퇴출시키는 게 원인 중의 하나다. 2007년에 명예퇴직과 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65만명이었다면 작년에는 87만명이 됐다. 일회용 제품처럼 쓰였다가 버려지는 노동자는 빈곤노인이 되고, 가면 갈수록 삶이 빡빡해지고 각개약진, 각자가 그 생존의 길을 알아서 가는 게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그의 가족들도 그를 외면하게 된다.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는 수많은 노인들에게 자살만이 유일한 탈출로 보인다. 2000년에 10만명당 34명이었던 65살 이상 한국 노인의 자살률이 이제는 80, 즉 세계 최악이다. 유럽에서는 노인자살률이 내려가고 있는 중이지만, 한국에서는 정반대이며 중국이나 싱가포르 등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리 별다른 대책도 없다. 알아서 죽으라는 것이다. 저질 기업국가 아니면 이런 죽음의 행렬이 가능하겠는가?

 

기업국가 해체만이 우리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기업 본위의 사회를 인간 본위, 노동자 본위의 사회로 바꾸는 일에 다들 함께 착수하고, 기업국가 해체를 위하여 다 같이 반란자가 되지 않으면, 구명보트를 탈 만큼의 특권층이 아닌 대한민국호 승객의 대다수를 기다리는 것은 수장일 뿐이다.

 

노인들과 함께 기업국가의 또 다른 커다란 피해자층은 바로 이번 참사 속에서 희생된 아이들과 같은 또래의 청소년, 청년들이다. 한국만큼 아이들이 불행하게 사는 나라는 없다. 기업들의 쓸만한 부품으로 가공돼야 할 그들은 살인적 경쟁에 휘말리면서 심신의 황폐화를 일찌감치 당한다. 한국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절반 이상이 가끔가다가 자살 충동을 느끼고, 3분의 1은 간헐적으로나마 우울증을 경험한다. 그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늘 명하는 기업국가는, 그들에게 그 어떤 미래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기업국가 해체만이 우리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기업 본위의 사회를 인간 본위, 노동자 본위의 사회로 바꾸는 일에 다들 함께 착수하고, 기업국가 해체를 위하여 다 같이 반란자가 되지 않으면, 구명보트를 탈 만큼의 특권층이 아닌 대한민국호 승객의 대다수를 기다리는 것은 수장일 뿐이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4.5.3

 

폭력 사회

계급사회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다. 폭력이 없으면 불평등한 사회의 유지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회의 유형에 따라 그 사회 내의 위계질서 유지를 위한 폭력의 형태도 달라진다. 계급의 발생 이후 오늘날까지 계급적 폭력을 시대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노골적이며 신체적인 전통사회의 신분적 폭력은 평민 이하의 신분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어야 했다. 노예나 농노가 주인의 채찍을 일상적으로 두려워해야 했던 것이다. 정의를 가장한 지배자들의 폭력이 그 지배자들에게 위엄을 높여주는 것은 전통사회다.

18~19세기 부르주아 민주혁명 이후에는 적어도 시민의 타이틀을 단 유럽 사회의 주류, 즉 중산층 이상의 백인 남성 성인들은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했다. 커다란 진보임에 틀림없지만 문제는 그들의 신체적 자유는 사실상 그들만의 특권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가난뱅이나 흑인 등 식민화 당한 유색인종’, 그리고 여성이나 어린이들은 여전히 신체적 폭력에 노출돼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의 각종 변혁운동들은 또다시 폭력의 지형을 바꾼다. 가면 갈수록 비주류에 대한 주류, 시민계층의 폭력이 어려워진다. 내가 사는 노르웨이만 해도, 비서구인 이민이 시작됐던 1970년대에 유색인종들에게 대놓고 인종적 모욕을 하거나, 학교에서 이민자 자녀들을 때리고 괴롭히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폭력은 물론이거니와 인종적 폭언만 해도 벌써 소송감이다. 그 사이에 그만큼 신체 자유가 백인만의 특권에서 일반적 권리로 확산됐다. 학교든 집안이든 어린이에 대한 일체 체벌 등의 학대도 스웨덴에서는 1979년에, 노르웨이에서는 1987년에 각각 전면 금지됐다. 태어나자마자 어린이도 시민이 된 셈이다. 노르웨이 군대에서는 약 9%가 각종의 괴롭힘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물리적 폭력 피해율은 약 1% 정도이며, 심한 구타 등은 최근 수십년 동안 들어보기가 힘들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원자화된 개개인에게 공포를 안겨주고 경제적 생존을 불안하게 함으로써 경제적 폭력을 행사한다고 할 수 있지만, 핵심부나 준핵심부의 산업화된 사회들은 과거와 같은 신체적 폭력을 점차 멀리하게 되는 추세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적어도 시민들에게 신체의 자유를 가져다준 민주혁명은-비록 미완의 형태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1987년에 일어났다. 박종철을 죽인 신체적 폭력은 그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미완의 혁명이었던 만큼, 그 효능도 당장 느껴지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민이라고 할 정치범들은 계속 고문을 당해야 했지만, 김대중 집권 이후에는 사형집행의 정지와 함께 시민에 대한 고문도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 한데 시민으로 개념화되지 않는 빈민 출신의 잡범이나 탈북자 등 이 사회의 주변분자들에 대한 광의의 폭력이라 할 수 있는 강압수사 관행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물론 1990년대 중후반은 하나의 기점이 되어서 한국 사회의 주변부도 점차 탈폭력화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1994년만 해도 416명에 이르던 연간 군내 사망자(사고사, 자살, 가혹행위로 인한 사망 등을 포함하여) 수는 2000년에 이르러 182명으로, 거의 두배 이상 떨어져 그 뒤에도 계속 하강곡선을 그었다. 한국 사회의 병영화가 한창이던 1975년에 1555명이나 군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커다란 개선이 아닐 수 없다. 2010년부터 진보적 교육감에 의해서 시작된 학생인권조례 공포는, 한국 사상 최초로 교내 체벌을 금지해 피훈육자의 신체를 훈육자의 물건으로 다루었던 관행을 깬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에서도 늦게나마 시민뿐만 아니라 사실상 ‘2등 시민의 위치가 강제로 부여된 사회의 주변층까지도 점차 신체적 자유를 얻어가는 것이다.

 

시민’, 즉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 남성들은 이제 폭력의 악몽을 거의 벗어났지만, ‘시민들이 하기 싫은 일들을 대신 해주고 시민들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해주는 외국인 노동자나 여성, 어린이, 빈민, 강제 징집당한 군인 등은 계속해서 그 악몽 속에서 산다.

 

하지만 또 하나의 분명한 것은, 탈폭력화의 조류와 함께 이에 대한 역류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민’, 즉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 남성들은 이제 폭력의 악몽을 거의 벗어났지만, ‘시민들이 하기 싫은 일들을 대신 해주고 시민들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해주는 외국인 노동자나 여성, 어린이, 빈민, 강제 징집당한 군인 등은 계속해서 그 악몽 속에서 산다. 가난한 가정 출신의 한 학생이 체벌당해 결국 뇌사에 빠져 숨진 그 다음날에 교사의 학생 폭행이 계속 이어졌던 최근 순천 금당고의 사건이 잘 보여주듯이, 교육 현장의 훈육자들은 아직까지도 학생의 신체를 그 누구도 물리력으로 건드릴 권리가 없는 그 학생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주로 어려운 가정의 출신들이 가는 학교나 일반 운동부 선수들의 (코치나 선배로부터의) 폭력 피해율은 지난 9년 동안 78%에서 28%로 뚝 떨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잊을 만할 것 같으면 돌연히 새로운 스포츠계 내지 체대 내 폭력 사건들이 또 터진다. 체대가 모델로 하는 군에서는, 젊은이들은 여전히 폭언과 폭력 속에서 지배자들이 원하는 진짜 사나이로 순치돼야 된다. “군 구타가 사라졌다는 말이 얼마나 새빨간 거짓말인지, 며칠 전에 음식 먹던 한 사병이 선임병의 구타로 기도가 막혀 사망하게 된 끔찍한 사건이 벌어져서 세상이 다 알게 된 것이다. 매우 축소된 것으로 보이는 몇년 전의 조사 결과로 봐도 군에서의 구타 피해율이 14%에 이른다.

 

아주 걱정스럽게도, 군에서의 진짜 사나이들의 잔혹성은 오히려 극우 정권하에서 더 짙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권위주의 정권의 막바지인 1990년에 군에서의 연간 자살자는 172명이었다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하의 구타 근절 캠페인 등이 주효해 2005년에 64명으로 줄었다. 일반 사회의 자살률이 급증했음에도 구타 근절에의 노력이 군 자살자 수를 축소시킨 것이다. 그러나 요즘 몇년간 군 자살자는 다시 소폭으로 증가돼, 2011년에 97명이나 됐다. 도대체 몇명의 젊은이들이 폭력과 폭언 속에서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져 이 사회가 만들어낸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다 접어 극단적 선택을 해야 우리가 총력안보가 아닌 생명과 평화를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학생, 운동부 선수, 여성, 징집당한 젊은이 등 이상으로 한국에서 신체적 폭력에 노출된 이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체벌당한 학생이나 구타당한 군인의 사망은 그나마 뉴스라도 되지만, 구타당한 외국인 노동자의 사망은 아예 보도되지 않거나 짧게 단신 보도된다. 지난 214일에 28살의 인도네시아 선원이 한국 어선에서 조업 중 구타로 사망했는데, 그는 배멀미를 지나치게 하고 몸이 약해 일을 못했다는 이유’(?)로 상습 구타를 당해 결국 십이지장이 파열돼 복막염으로 죽은 것이다. 나도 학생 시절에 구타를 당해봤지만, 십이지장이 파열될 정도의 상습 구타라는 게 어떤 것인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선원뿐인가? 외국인 선원들에게 한국 어선은 거의 해상 고문실처럼 체험된다. 언어폭력까지 포함하면 피해율은 94%에 이르며, 구타 피해율은 43%나 돼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내무반이라 하겠다. 한국 어선에서 피부색이 까만 외국인에 대한 폭력성의 정도는, 200년 전 미국 남부 백인들 목화농장에서의 흑인 노예들에 대한 폭력을 방불케 할 수준이다.

 

우리는 병영형 신자유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드문 주변자들에 대한 폭력은 이 사회의 주된 특징이다. 따라서 폭력 근절 투쟁은 궁극적으로 안보주의적 신자유주의와의 정면 투쟁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탈폭력화 시대에 한국의 ‘2등 시민이나 비국민’(외국인)들이 계속 최악의 신체적 폭력에 노출된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신자유주의적 격차사회와 박정희식 군사문화의 중첩이라 하겠다. 돈과 이 있어 좋은 학교 가고 군에서 좋은 보직을 받을 수 있는 젊은이야 시민답게 신체적 자유를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가난한 외국인, 학생, 병사는 기합, 얼차려, 주먹놀림에 노출될 확률이 훨씬 더 높다. 우리는 병영형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드문 주변자들에 대한 폭력은 이 사회의 주된 특징이다. 따라서 폭력 근절 투쟁은 궁극적으로 안보주의적 신자유주의와의 정면 투쟁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진짜 사나이들의 순치된 신체들이 경쟁적 돈벌이에만 몰입돼야 하는 곳에서는, 주먹이 계속 군림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4.4.15

 

한국적 특색의 신자유주의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흥미로운 현상 하나가 발견된다. 우리가 흔히 선진국이라고 높여 부르는 세계체제 핵심부 국가들은 과거에 국민국가의 상징이었던 징병제를 줄줄이 폐지한다. 애당초 일본과 한국 징병제의 모델이었던 독일은 2011년부터 징병제를 폐지했으며,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프랑스 징병제는 이미 2001년에 없어졌다. 유럽에서 징병제가 아직 남은 나라들은 그리스나 스위스, 덴마크, 오스트리아, 핀란드, 노르웨이 등 정도인데, 노르웨이의 경우 실제 현역 복무율은 이제 20%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 명목상의 징병제는 존재해도 대다수 남성들은 9개월에서 11개월 정도의 의무 복무를 실제로는 하지 않는다.

 

핵심부, 즉 북미,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 징병제는 이제 거의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지만, 터키나 한국 등 일부 준주변부 국가에서는 오히려 징병제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주의 분위기가 유지될 뿐만 아니라 강화되기까지 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눈에 띈다. ‘군기 풀린노르웨이 따위와 대조적으로, 한국 남성들의 현역 복무율은 89% 정도다. 거기에다 세계의 산업화된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대체복무제는 여전히 없다. 지난해 말 한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68%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도의 도입에 찬성했음에도 박근혜 정부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 아니, 그 반대로 안보주의 광풍으로 군사주의적 분위기를 부추기는 데 혈안이 되고 있다.

 

201424, 한 사설 극기훈련캠프에서 화생방 훈련을 받으면서 연기가 가득 찬 방에서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괴로워하는 초등학생들의 사진이 여러 매체에 게재돼 파문을 일으켰다. 10살 안팎의 아이들에게 고문을 방불케 하는 전쟁훈련을 시키고도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 캠프 운영 업체나 학교 당국 등을 보면, 광적 군사주의의 분위기란 무엇인지 실감난다. 초등학교부터 아이들로 하여금 미래의 군인이 되게끔 심신의 준비를 미리 시켜놓는 이런 극기훈련캠프나 해병대캠프는 전국적으로 수십개나 있으며, 그들은 이번 정권의 안보주의 바람을 타고 성황을 이룬다. 작년 여름처럼 그런 곳에서 고교생 5명이 사고사를 당해도 그 영업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미래의 총알받이 준비 과정이라는 숭고함(?)이 아이들의 고통을 정당화시키는 모양이다.

 

한국 보수주의자들이 열심히 벤치마킹하려는 핵심부 국가들에서 신자유주의를 수반하는 극단적 개인주의는 징병제의 원리와 정면충돌한다. 사회에 더는 기대지 못해 무한경쟁의 질풍노도를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젊은이들로서는, 그들에게 가면 갈수록 복지서비스를 덜 해주는 국가를 위해서 인생의 소중한 1년을 왜 낭비해야 하는지 도저히 납득되어지지 않는다. 또 일면으로 신자유주의 시대 전쟁들의 대부분은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하거나(아프가니스탄) 많은 자원을 보유하는(말리: 우라늄; 이라크와 리비아: 석유 및 가스) 주변부 국가들에 대한 불법 침략의 형태를 띠기에 명분 없는 자원 약탈에 동원되기 어려운 징병제 군대보다 명분에 무관심한 살인전문가 집단인 모병제 군대는 훨씬 편하기도 한다. 결국 지배자의 이해관계와 피지배층의 성향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징병제, 국민집단 전체의 군사화가 그 종언을 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유럽과 사뭇 다르다. 19876월에는 일시적으로 혁명적 상황이 조성됐지만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만큼, 즉 민주혁명을 거치지 않은 만큼 한국에서 피지배자들은 국가와 감히(?) 거래를 하지 못한다. 한국의 공공 복지지출(국민총생산의 약 9%)은 프랑스(33%)나 스웨덴(28%)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렵고 터키(12%)보다 더 낮은 수준인데도, 즉 산업화된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낮은 편에 속해도 한국 젊은이들은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국가를 지키려고 내가 왜 21개월이나 고생해야 하냐고 공공연하게 따지지 못한다. 우리가 국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사회적 계약을 맺어 거래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에 여전히 복속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일면으로 한국 지배자들은 유럽과 달리 군대를 군사적 도구로만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군사 대치 중인 북한에서도 군에서 특권층에 속하지 않는 젊은 남성들을 정치적으로 사회화시키는 것처럼, 남한에서도 군은 일차적으로 제2고등학교, 즉 사회화기관이다. 거기에서는 무기그 자체보다는 신체의 유순함, 즉 구령에 따라서 조건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여지는 것을 익히고, 나아가서는 별다른 개인적 평가 없이 윗사람의 말을 무조건 듣는 것, 어떤 불합리한 상황이 만들어져도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 그리고 때가 되면 남 위에서도 군림해보는 것을 배운다. 폭언과 무의미한 명령에 지쳐서 반항심이라도 생긴다면? 군목이나 군법사, 군신부에게 가서 적응과 인내야말로 신 내지 부처님의 뜻이라는 의미의 인내심 주사를 맞아 계속 버티면 되는 것이다.

 

유럽 같은 핵심부든 한국 같은 준주변부든 신자유주의 시대는 개체들의 원자화, 개개인의 소외와 고독의 증폭, 그리고 사회적 연대의 파괴를 똑같이 의미한다. 그러나 각 지역의 경제적 상황, 그리고 각국 지배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그 구체적 사정은 서로서로 꽤나 다르다. 상당히 탈산업화된 유럽에서야 지배자들은 국가 자체까지도 상대화시키는 개인주의의 범람을 허용할 수 있지만, 아직도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력이 뒷받침해주는 제조업의 제품을 팔아서 자본을 축적해야 하는 한국 재벌들로서는 일단 피지배자들을 일차적으로 훈련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 아직도 임금근로자 중에서는 400만명이나 4대 사회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아 질병과 실업, 산재에 그대로 노출돼 있으며, 평균 연간 노동시간이 세계 최장인 2092시간에 이르고 연간 산재 사망자가 2000명이나 넘어 터키, 멕시코에 이어 세계 3위를 자랑(?)하는 한국에서는 피지배자들의 절망적인 반항적 움직임이나 대규모 반항 행동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줄이고 약탈과 배제를 당하는 이들이 여전히 맞교대나 끝이 보이지 않는 야근, 특근, 잔업을 순순히 받아들이게끔 하자면 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들에게 일찌감치 조건반사적 복종의 훈련, 즉 순치 훈련을 군에서 시키는 것이다. 한국 군대는 군사기관인 동시에 종속적 신자유주의를 지탱해주는 유순한 인력의 양성기관이다.

 

고통스러운 기마자세3시간이나 참아내고 100야간행군을 견뎌야 한다. ‘우리 회사 사랑을 신체적으로(?) 익히는 고통스러운 훈련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가끔 인터넷에서 공개돼도 해당 기업 관계자들은 우리 전통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에게 전국 병영화는 비공식적 국시에 해당된다.

 

그러나 꽃다운 나이에 연애나 즐기고 취업준비나 해야 하는 청년들을 사회와 격리시켜 반복적인 복종 훈련을 시키는 것은 사실 개개인으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매우 가혹한 처사다.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끔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맞다, 바깥 사회까지 군사화시켜야 병영 속에 갇히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일반사회 전체에서 군기 잡는분위기는 박근혜 정권 이전에도 있어왔지만 안보주의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힘입어 강화됐다. 신자유주의 시대판 새마을운동이라고 할 각종의 극기훈련은 초등학생부터 초로의 직장인까지 종종 받아 한시적 유사 군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병영을 방불케 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무릎을 굽히고 양팔을 앞으로 쭉 뻗은 고통스러운 기마자세3시간이나 참으면서 주인인식을 복창해야 하는 신한은행의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이나 100야간행군을 골자로 하는 국민은행의 연수 프로그램은 웬만한 군사훈련을 능가할 정도다. ‘우리 회사 사랑을 신체적으로(?) 익히는 고통스러운 훈련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가끔 인터넷에서 공개돼도 해당 기업 관계자들은 우리 전통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나는 사실로 미루어봐도 우리에게 전국 병영화는 비공식적 국시에 해당된다.

 

한국적 신자유주의는 개개인의 원자화와 군사주의의 조합을 특색으로 한다. 국가와 군대, 그리고 기업의 조직문화는 소외된 개개인을 같이 연결시키면서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사회통념으로 만든다. 수평적 연대를 통해 이 괴물적 행태에 맞서지 않으면 우리 자손들은 대대로 기마자세기업사랑을 외치며 살아야 할 것이다.

 

한국적 신자유주의는 개개인의 원자화와 유신시절 식 군사주의의 조합을 특색으로 한다. 국가와 군대, 그리고 기업의 조직문화는 서로로부터 소외된 개개인을 같이 연결시키면서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사회통념으로 만든다. 우리가 수평적 연대를 통해 이 괴물적 행태에 맞서지 않으면 우리 자손들은 대대로 기마자세기업사랑을 외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14.4.15

 

저주받으리라, 법률가여

이해할 수 없는 검찰의 수사, 법원의 판결을 자주 접한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집세와 공과금을 남길 정도로 준법적이었던 모녀의 소망과 바람은 우리 사회의 법에 얼마나 반영돼 있을까.

헨리 소로는 <시민불복종>에서 법에 대한 존경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강조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의 실정법은 정의를 온전하게 구현하고 있지 못하기에 실정법에 정의를 반영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법에 대한 존경은 과잉 강조되고, ‘정의에 대한 존경은 과소 강조되고 있다. 위정자나 실력자들 입에서는 법을 지켜라는 말만 나오지 정의를 지켜라는 말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정의라는 단어가 현실의 권력에게 위협적이거나 성가신 의미를 지니게 된 탓이리라.

 

전통적 정의론은 정의를 재화의 공정한 배분으로 파악한다.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로 요약되는 배분적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공정한 배분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야유한 것처럼, 일반 서민에게만 적용되는 정의는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을 기는 정의이고, 군주들의 정의는 원하는 것은 다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를 억압하거나 이용하는 데 쓰이곤 한다.

 

지배계급의 의사와 이익만이 일방적으로 법에 반영되는 시대나 체제와 달리, 시민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현대 국가에서는 각 계급·계층·집단의 의사와 이익이 법에 반영된다. 네오마르크시즘적 표현을 쓰자면, 법은 계급투쟁의 공간이자 절충물이다. 그런데 권력, 재력, 지식, 인맥 등에서 강자 또는 가진 자의 의견이 약자 또는 가지지 못한 자의 의견보다 더 많이 관철될 것임은 분명하다. 얼마 전 생활고에 시달리던 60대 어머니와 30대 두 딸이 반지하방에서 동반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피살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집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간 도덕적이고 준법적 인간이었던 이들 모녀의 소망과 바람은 우리 사회의 법에 얼마나 반영되어 있을까.

 

우리 법조계에서는 법률가가 중용’(golden mean)을 취해야 한다는 말이 널리 통용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중용이란 것이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대립하는 측으로부터 기계적·산술적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용가운데가 아니라 정확함을 뜻한다. 예컨대, 독재와 민주 사이, 제국주의와 식민지, 억압과 자유 사이 중간에 서서 양비론또는 양시론을 펴고 타협을 말하는 것이 중용은 아니다. 그러한 태도는 황금’(golden)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도금칠한 중간치일 뿐이다. 요컨대, 중용은 현실의 부정의와 부당함을 직시하고 그것을 고쳐서 최상·최적의 현실을 만들기 위하여 부단히 고민하고 행동하는 심성과 자세를 뜻한다.

 

중용의 은 가운데가 아니라 정확함을 뜻해

 

연합뉴스 26일 오후 서울시민청 이벤트홀에서 열린 '손배· 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손잡고' 출범식에서 조국 서울 법학대학원 교수가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노동운동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가압류 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자발적 시민모임인 '손잡고'는 손배 가압류의 부당성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피해자를 돕기 위한 모금, 사회적 연대은행 만들기 운동도 전개할 계획이다. 2014.2.26.


일찍이 순자는 중용의 핵심을 저울에 비유하여 겸진만물이중현형(兼陳萬物而重縣衡)’이라고 했다. , “만물을 다 같이 늘어놓고 곧고 바름을 재고 헤아리는 것이다. 서양에서의 정의의 상징인 디케도 저울을 들고 있다. 중립이라는 명분 아래 저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힘의 차이, 사회와 법의 모순과 문제점을 외면하면 현실의 불균형은 방치될 수밖에 없으며, 그 경우 중용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만약 현실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법은 균형을 다시 맞춰주어야 한다.

 

기울어진 저울로 무게를 잴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추를 이동하는 것이다. 이 때 사회적 약자의 상황과 경험이 고려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표현을 빌리면, 이러한 고려 없이 억압의 경험에 포함된 감정들로부터 강제된 거리두기를 하면서 이루어진 중립성기이한 화성인 같은 중립성일 뿐이다. 이 점에서 20세기 초 미국 연방대법관으로 재직한 벤저민 카르도조가 퇴임하면서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은 지금도 유의미하다. “법관으로 재임 중 중립적이었다고 생각한 판결은 나중에 보니 강자에게 기울어진 판결이었고, 재임 중 약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한 것은 나중에 보니 중립적이었다.”

 

근래 이해할 수 없는 검찰의 수사, 법원의 판결을 자주 접한다. 법률가들은 자신이 진정한 중용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아니면 중립의 이름 아래 한쪽 편을 들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저주받으리라, 법률가여. 너희는 지식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가지고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까지 막았다라는 예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시사인 34014.3.20

 

보수 언론의 세 모녀 자살 보도, 구토와 욕지기가 나온다

복지를 포퓰리즘으로 왜곡시킨 건 바로 언론

안녕하십니까. 요즘 저는 무시로 치미는 구역질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 모녀 자살 앞에 꼬리를 문 위선자들로 메스꺼운 욕지기가 자주 밀려옵니다.

 

그 비극이 일어난 지 20일이 넘었지만 지금도 뭇사람의 가슴을 적셔서일까요. 세상을 뜬 세 모녀를 들먹이는 무리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어제는 직전 국무총리가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며 세 모녀의 참극을 언급했습니다. 미국에 머물다가 귀국한 김황식은 사람이 죽어가는 서울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서울을 만들겠다고 부르대더군요. 국무총리로 제법 장수를 누리던 때의 성찰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역겨운 위선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숱한 정치인들이 애도를 표했지요. 물론, 그들 모두 위선자라는 비판은 매도일 터입니다. 더러는 진심으로 눈물 흘리는 정치인도 보입니다. 가령 민주당 대변인이 떠오르지요. 세 모녀가 남긴 유서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울컥 하더군요. 중단된 브리핑을 다시 시도했지만 카메라 앞에서 또 목이 메었습니다. 끝내 브리핑을 마무리 못하고 서면으로 논평을 냈지요

민주당 대변인의 격정을 폄훼할 뜻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저 뿐일까요. 세 모녀의 자살 앞에서 저는 10년의 세월을 넘어 참여정부 시절의 참극이 겹쳐졌습니다. 수도권의 부평에서 일어났지요. 가난과 빚에 절망한 30대 여성이 세 아이를 고층아파트에서 떨어트리고 투신자살했습니다. 아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는 주민 증언이 아프게 메아리칩니다.

 

11년 전, 그 참극이 벌어진 뒤 이 나라에는 저마다 국민을 섬긴다는 대통령이 들어섰습니다. 당시 집권 초기였던 노무현을 비롯해, 국민성공시대를 약속한 이명박에 이어 국민행복시대를 공약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지요.

 

명토박아 간결하게 증언합니다. 아무 것도 나아진 게 없습니다. 그들은 현실의 엄중함마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현직을 볼까요?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 자리에서 세 모녀를 지칭한 뒤 이 분들이 기초수급자 신청을 했거나 관할 구청이나 주민센터에서 상황을 알았더라면 정부의 긴급 복지지원 제도를 통해 여러 지원을 받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정말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이형. 정말 안타깝고 마음이 아픕니다. 아니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이미 몇몇 언론이 지적했지만, 궁금합니다. 조중동에 의존하는 박근혜 정부는 지금 이 순간 어떨까요. 세 모녀가 기초수급자 신청을 했어도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아무 것도 받지 못한다는 진실을 알고 있을까요. 아니, 그런 사실에 작은 관심이라도 있을까요?

 

더구나 대통령은 그 발언에 이어 진정한 새정치는 민생과 경제를 챙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우리 정치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주장했지요. 그 와중에서도 야권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과연 저 대통령에게 세 모녀의 자살과 같은 참극을 막을 능력 또는 의지, 아니 마음이 있을까요. 회의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는 게 정상이겠지요.

 

그렇다면 희망은 야권일 텐데 기대해도 좋을까요. 마침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이 모여 새정치민주연합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새정치민주연합은 기존의 민주당보다 조금 더 중도를 지향하며 오른쪽으로 간답니다. 과연 그렇게 해서 세 모녀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요? 늘 흔들려온 민주당 노선이 새정치연합으로 더 우왕좌왕할 가능성은 한낱 기우일까요. 진보세력은 어떤가요. ‘이석기 구하기에 매몰되어 있거나 모래알처럼 흩어져있습니다.

 

그래서이지요. 희망은 어쩌면 언론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평의 일가족 참극과 달리 세 모녀 자살을 비교적 자세히 보도한 신문과 방송에서 정치적 또는 정책적 대안을 의제로 설정하는 열정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니, 진정성 담긴 성찰도 없습니다. “세계 1위 할 게 없어 자살률 1’ 9년째 하나제하의 깐죽대는 사설에서 조선일보(312)자살은 마음의 병에서 비롯되지만 국가의 노력에 따라 상당 부분 구원해줄 수 있다고농축 농약 판매 규제, 자살 사이트 폐쇄, 고층 아파트·옥상 출입 통제, 교량 안전망을 열거했습니다.

 

자살이 마음이 병에서 비롯된다? 세 모녀 자살을 애도한 입에서 그런 주장이 무람없이 나올 수 있을까요? 사설도 구조적 문제를 딱 한번 언급하긴 했습니다. 여기서 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면글면 싸워온 사람들을 조선일보가 어떻게 보도해왔던가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터입니다. ‘복지라는 말과 포퓰리즘또는 세금폭탄을 등식화 하며 여론을 호도해온 부라퀴들, 누구인가요?

 

정직하게 말합시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서민이 이 눈물의 골짜기를 참담하게 떠날까요. 얼마나 많은 정치인, 언론인들이 위선의 극치를 언죽번죽 드러낼까요. 이형. 욕지기 일어나는 저 행렬에서 형만은 만나지 않기를 기대하며 고백합니다. 꼬리를 물고 있는 위선의 행렬, 그곳에서 먹물 손석춘도 발견하고 있습니다. 다시 메스꺼운 구역질이 불쑥 밀려오는 까닭입니다./ 손석춘 언론인·건국대 교수 /미디어오늘 14.3.18

 

삼성의 세 얼굴

삼성은 대한민국 전체가 키워낸 기특한 자식이다. 그런데 글로벌 기업다운 품격을 갖추었는가? 국민이 오냐오냐하는 심정으로만 대하다간 공망의 길에 접어들 우려가 크다.

 

첫 얼굴-20049월 모스크바 공항.

고 노무현 대통령은 20049, 34일 일정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당시 청와대 동북아 비서관으로, 시베리아를 관통해서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철도·가스관·IT망을 꿈꾸던 나는 TSR-TKR(시베리아 철도와 한반도 철도) 연계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일주일 전에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모스크바 시내로 가는 대로변에 삼성과 LG의 광고 깃발이 끝없이 걸려 있었다. 모스크바 시내 곳곳의 광고탑, 무엇보다 아파트 바깥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에 박혀 있는 이들의 붉고 푸른 로고는 나를 뭉클하게 했다.

 

이렇듯 삼성은, 특히 해외에서 만난 삼성은 말 그대로 내셔널 챔피언이다. 김연아의 연기를 보고, 또는 싸이의 춤을 따라하며 열광하는 외국인들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삼성은 우리의 자부심을 북돋우는 존재다.

 

둘째 얼굴-20141월 서울.

삼성의 입사 시험에는 매년 20만명 이상의 지원자가 몰린다. 과열을 걱정했던 것일까? 지난 115일 삼성그룹은 서류전형을 부활시키고 대학총장 추천을 받겠다고 발표했다. 일주일 뒤에는 대학교별 추천 인원을 공개했다. 계열 대학인 성균관대가 115, 경북대가 100명이고 부산대 90, 전남대 40명이었으니 곳곳에서 대학 서열화’ ‘지역 차별’ ‘남녀 차별등 다종다양한 비난이 일었다. 결국 삼성은 2월 초 총장추천제를 유보했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삼성은 은행보다도 인기가 없는 직장이었다. 삼성은 5공화국 때부터, 특히 외환위기 이후에 무섭게 성장해 내셔널 챔피언이 되었고 이제 서울대나 연세대·고려대에도 인원을 할당할 정도가 되었다. 삼성은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자기 광고의 카피를 입증하듯 독보적 1위임을 만천하에 선언한 것이다. 이제 시장의 힘에 의해 삼성으로 돈과 사람이 몰려가는 시대다.

 

셋째 얼굴-20142월 한국.

먼지 한 톨도 허용하지 않는 반도체 산업의 클린룸은 청정 이미지를 뽐내지만 실은 대단히 위험한 곳이다. 머리카락 2000분의 1 폭의 간격으로 회로가 촘촘히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합선을 막기 위해 끝없이 화학약품으로 먼지를 씻어내야 한다.

 

이 때문에 삼성반도체나 LCD 회사에 근무했던 노동자들이 백혈병·골수암 등 불치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이들을 대변하는 단체 반올림에 신고한 피해자만 138, 사망자도 56명에 이른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반도체에 다니다 200523세의 나이로 백혈병에 걸려 숨진 황유미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이 영화는 개봉일인 26일 오전 현재, 7% 정도의 예매율로 당당히 예매율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실제 상영관은 전국 112개로 여느 1위 영화의 2분의 1 내지 3분의 1에 불과하다. 영화관들은 왜 뻔한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영화를 내걸지 않는 것일까?

 

삼성은 시장에서만 승리한 게 아니다. 정부는 2012년 한 해 동안, 조세감면 등 간접 지원을 빼고도 1684억원을 직접 지원했다. 2위인 현대자동차의 883억원에 비하면 두 배에 가깝다. 김용철 변호사가 4년 전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밝혔듯이 삼성은 경제부처와 검찰, 국회, 그리고 사법부까지 돈으로 구워삶았다.

 

우리가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보아야 하는 이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고 그래서 망한다. 이 진리는 기업에도 적용된다. 물론 절대 권력자가 스스로 민주주의를 실천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스스로 글로벌 기업다운 품격을 갖추지 못한다면 시민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하청단가를 낮춰서 초과이윤을 얻지 못하도록 경제도 민주화해야 하고 기업 단위에서는 노동조합의 설립이라는 기본적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자신의 기업에서 일어난 사고를 외면한 채 돈으로 매수하거나 끝없는 법정 투쟁으로 몰고 가는 파렴치함을 응징해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국가의 모든 부분을 부패하게 하는 불법 행위를 즉각 중단시켜야 한다.

 

삼성은 대한민국 전체가 키워낸 기특한 자식이다. 하지만 국민이 오냐오냐하는 심정으로 상상의 공생에 머물다가는 공망의 길에 접어들 공산이 크다. 우선 <또 하나의 약속>을 보는 것으로 현실적 공생의 첫걸음을 내딛자.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시사인 14.2.13

 

환경운동가의 비행기 여행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왔다. 며칠 머무르다 돌아간다. 한국과 독일을 왔다 갔다 하며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양이 6000가까이 된다. 한국인의 일년 평균 배출량이 12000정도 되니 독일여행 한번에 그 절반을 내놓는 셈이다. 여기 온 목적은 온실가스를 적게 내놓는 건축방식을 좀 배우려는 것인데, 이를 위해 온실가스를 잔뜩 쏟아냈으니 모순일지 모른다.

 

독일의 생태경제를 연구하는 어느 학자는 50살이 넘은 지금까지 한번도 비행기를 탄 적이 없다고 한다. 이유는 비행기 여행이 지구생태계 파괴에 대한 무책임의 극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5년 전부터 그는 채식도 하고 있다. 당연히 자동차도 없다. 자전거가 그의 주된 이동수단이다. 그렇다고 그가 아주 조용하게 정적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단히 왕성하게 강연활동을 하고, 자기 지역에서도 이런저런 일을 벌이면서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일년에 100번 정도 강연을 하는데, 들어오는 요청에 다 응하면 수백번이 넘게 강연을 다녀야 한다. 강연 장소까지는 기차와 버스를 타고 간다. 따로 강연료를 요구하지는 않고 이동과 숙식에 들어간 비용만 받는다. 그는 녹색성장이나 녹색뉴딜 같은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런 프로그램도 결국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가져오고 환경을 파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지구를 살리기 위한 활동을 한답시고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가로지르는 나같은 사람도 녹색성장이 지구를 살리고 좋은 삶도 가져다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위선적으로 보일 것이다. 기후변화를 더 이상 진행시키지 않는 적정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2700인데, 한번의 비행으로 그 두배를 내뿜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번에 만난 건축가와 그의 부인은 그와는 조금 다르다. 나이가 70이지만, 이들도 자동차가 없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한다. 제철 음식과 지역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고, 고기는 가능한 한 적게 먹는다. 소비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는 건축물을 실현하기 위해 활발하게 일을 벌이지만, 비행기는 잘 안 탄다. 그래도 비행기 여행이 무책임의 극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가 즐겨 쓰는 말은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사람은 그 문제의 일부가 아니다이다. 여기에는 비행기를 가끔 타더라도 그것이 기후변화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는 활동에 불가피하게 필요한 일이라면 탈 수도 있다는 뜻도 담겨 있다.

 

사실 말과 글을 가지고 환경위기에 대해 우려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은 독일의 그 학자와 같이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기 일을 해나갈 수 있다. 그가 정말 그런 일을 하면서 진정으로 만족을 느끼려면 비행기 타는 것을 거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직접 집을 짓는다는 실제적인 활동을 통해서 환경위기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려는 사람은 비행기를 타야 할 때도 있다. 필요한 건축자재를 먼 곳에서 가지고 와야 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온실가스가 많이 발생한다. 그래도 배출량의 대차를 따졌을 때 감소 쪽이 훨씬 많이 나온다면 장거리 이동도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후면 완공될 세번째 에너지독립 주택에 들어갈 자재는 대부분 바다를 건너 왔다. 목재는 북미대륙, 단열재의 원료는 중동에서 들여온 것이다. 창과 환기장치, 스테인리스 나사못 같은 것들은 유럽에서 생산되었다. 보통집에 비해 짓는 데 에너지가 더 많이 들어간 셈이다. 그렇지만 이 집이 50년 사용되는 동안 보통집보다 에너지를 훨씬 적게 쓰게 된다면, 먼 곳에서 재료를 들여오는 것도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는 비행기 여행이 무책임의 극치라고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만큼 위기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그래도 그런 결론에 도달할 때의 출발점은 비행기 여행이 원칙적으로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것이어야 한다 /이필렬 |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경향 14.1.22



Crocodile Rock (Elton John)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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