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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피아·파인토피아… 부끄러운 '나랏말싸미' 10.9 세계일보
어설픈 영어 붙인 마구잡이 조어… 행정구호 218곳 중 104곳 ‘외국어’
전국 지자체가 내세우고 있는 ‘행정구호’ 중 절반 가까이가 외국어 문구로 이뤄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 중에는 해당 언어를 쓰는 외국인조차 뜻을 알기 어려운 구호도 있었다. 세계일보와 한글문화연대가 8일 전국 지자체의 행정구호를 전수 조사한 결과, 행정구호를 가지고 있는 지자체 총 218곳 중 104곳(47.7%)이 외국어가 들어간 문구를 쓰고 있었다.
외국어 문구가 들어간 전체 행정구호 중 84.7%(88곳)가 영어 문구였다. 한·영, 한글·한자 혼용은 각각 7.7%(8곳), 6.7%(7곳)를 차지했다. 한자로만 이뤄진 구호를 쓰는 곳도 1곳 있었다.
◆미국 도시를 방불케 하는 지자체 행정구호
영어 행정구호를 쓰는 지자체가 가장 많은 지역은 경기 지역으로 나타났다. 경기 지역 중 외국어 행정구호를 쓰는 지자체는 ‘클린(Clean) 광주’, ‘오투(O2) 군포’, ‘베스트(Best) 김포’, ‘판타지아(Fantasia) 부천’, ‘두 드림(Do Dream) 동두천’, ‘시티 오브 마스터즈(City of Masters) 안성맞춤 도시 안성’ 등 16곳에 이르렀다. 행정구호가 있는 이 지역 지자체는 총 30곳으로 절반 조금 넘는 곳이 외국어를 쓰고 있는 셈이다.
부산 지역은 ‘브라이트(Bright) 강서’, ‘스마일!(Smile!) 금정’, ‘싱 싱 싱(Sing Sing) 동구’, ‘체인지 모어(Change More) 남구’ 등 12곳으로 경기보다 그 수는 적었지만 비중은 80%로 훨씬 높은 비중으로 나왔다. 강원, 경남 지역도 모두 11곳으로 외국어 행정구호를 쓰는 지자체가 많은 지역에 속했다.
비교적 널리 알려진 영어 단어를 이용하는 지자체가 많다 보니 비슷한 문구도 많이 발견됐다. 부산 금정구와 강원 춘천시는 각각 ‘스마일!(SMILE!) 금정’과 ‘스마일(Smile) 춘천’을, 울산시와 경남 김해시는 ‘울산 포 유(for you)’와 ‘김해 포 유(for you)’로 거의 똑같은 문구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지자체들은 “세계를 상대로 하는 브랜드이기에 영어를 쓴다”고 설명했다.
◆외국인도 이해 못하는 영어구호도 수두룩
일부 지자체의 영어 행정구호는 외국인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표현이어서 글로벌시대의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영어를 사용했다는 지자체의 설명을 무색하게 했다.
소나무의 일종인 춘양목을 지역 상징물로 정하고 있는 경북 봉화군은 소나무를 뜻하는 영어 단어 ‘파인(Pine)’과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Utopia)’를 합쳐 ‘파인토피아(PINE TOPIA) 봉화’를 만들어 사용 중이다. 봉화군은 ‘파인(PINE)’의 영어 철자에 각각 ‘사람(People)’, ‘농·산업(Industry)’, ‘자연(Nature)’, ‘흥미진진한 문화(Exciting)’ 등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지만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도 알 수 없는 견강부회식 설명이었다.
대구 남구의 ‘드림피아(Dreampia) 대구 남구’, 경북 울진군의 ‘마린피아(Marinepia) 울진’, 서울 도봉구의 ‘그린피아(Greenpia) 도봉’ 등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마구잡이식 조어로 구호를 만들었다. 경남 밀양은 ‘용’을 뜻하는 우리말 ‘미르’를 영어 단어에 합쳐 해외 홍보 효과가 의심스러운 ‘미르피아(Mirpia) 밀양’이라는 기상천외한 구호를 사용하고 있다. 정인환 한글문화연대 운영위원은 해당 구호에 대해 “너도나도 영어식으로 튀어보이려다 구호 본연을 역할 못하게 된 경우”라고 지적했다.
8일 서울 용산구 국립한글박물관을 찾은 학생들이 대형 훈민정음 이미지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다. 이재문 기자
◆아름답고 알기 쉬운 한글 행정구호
반면 우리말만으로 우수한 구호를 만들어낸 지자체도 있다. 충남 공주시의 ‘흥미진진 공주’, 강원 홍천군의 ‘맛있는 휴식 홍천’, 전북 부안군의 ‘자연이 빚은 부안’, 장수군의 ‘장수만세’, 전남 영광군의 ‘천년의 빛 영광’, 경기 용인시의 ‘사람들의 용인’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정 위원은 “정부 지자체가 누구를 위해 각 지역 브랜드 가치를 높여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어설픈 영어 이용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야 할 것”이라면서 “각 지자체 주민과 소통을 생각해서라도 가장 현명한 답을 한글에서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때 민주주의 보루였던 나라, 퇴행을 거듭하는 이유 10.7 미디어오늘
[박상현 칼럼] 자조적 패배주의의 확산, 국민은 없고 밥그릇 싸움만 있는 무늬만 민주주의
겨울이 시작되던 어느 날, 새롭게 만들어진 국립묘지의 헌정식에 두 명의 연사가 초대되었다.
한 사람에겐 2시간, 다른 한 사람에겐 2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엄밀하게 말하면 연사는 한 명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저 인사만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역사는 뒤에 올라온 사람의 2분만을 기억한다. 미국의 존재 목적을 정의했다는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은 그렇게 탄생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던 어느 실험의 이야기.
링컨의 짧은 연설은 이렇게 끝난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땅에서 사라져서는 안 된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흔히 앞부분,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만 인용되곤 하지만, 링컨이 그 연설에서 정말 강조하고 싶었던 말은 뒤에 있었다. (그런 미국의)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지 말라는 것. 그는 남북전쟁 중에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미국과 민주주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 영화 '링컨'의 포스터.
미국의 독립전쟁은 미국에서는 "미국혁명(American Revolution)"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혁명이라면 프랑스혁명이 워낙 길고 험해서 더 유명하지만, 사실 미국은 프랑스보다 일찍 혁명에 성공했다. 혁명 후에도 왕정과 공화정을 오고 간 프랑스와 달리 실패 없이 대통령제를 꾸준히 유지했던 유일한 나라기도 하다. 근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전 세계적으로 희망이 안 보이는 처절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런 실험에서 유일하게 버티던 최전방이 미국이었고, 100년을 못 채우고 무너질 위기를 맞았다. 그게 남북전쟁이었다.
미국혁명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스페인(1820), 러시아(1825), 프랑스(1830)의 민중봉기들은 왕정 하에 모두 무너졌고, 1848년에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봉기들 역시 굳건한 구체제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혔다.그리고 1861년 미국의 내전,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역사학자 앨런 겔조(Allen C. Guelzo)에 따르면 그런 미국을 지켜보던 당시 세계 열강, 즉 구체제 왕정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눈엣가시 같은 나라, 이상한 정치실험을 한답시고 남의 나라의 고분고분한 국민들에게 왕정에 대한 반감을 심고 들쑤시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그런 미국이 반으로 쪼개져서 서로 싸우면서 무너지고 있는 모습은 유럽의 왕족들에게는 민주주의라는 체제의 지속 불가능성에 대한 확인이었고, 자신들이 직접 정부를 세우려는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가르쳐줄 예화였다.
링컨은 그렇게 조롱하는 열강들 앞에서, 희망을 잃어가던 국민 앞에서 미국의 미래만이 아닌, 앞으로 등장할 민주주주의의 미래가 걸린 호소를 한 것이다. 우리가 무너지면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가 무너진다는 절절한 호소가 게티스버그 연설이었다.
링컨은 인류가 성공한 적 없는 이 체제가 살아남으리라 정말 확신했을까? 링컨은 무모한 낙관주의자가 아니었고, 전쟁의 결과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를 버티게 한 것은 사명감이었다. 미국의 건국 리더들에게는 어떤 사명의식이 있었다. 미국은 다른 나라들과 다르고, 달라야 하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보루"라는 자부심이 유럽의 역사 깊은 강대국들 앞에서 미국인들을 당당하게 했고, 그런 믿음과 사명의식이 여러 차례의 국가적 위기를 견뎌내게 해주었다. (인생에서 위기를 겪어 본 사람들은 안다. 때로는 황당하고 근거 없어 보일지라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힘든 시기를 버티는 유일한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미국의 그런 사명감이 때로는 제국주의로 돌변해 몹쓸 짓도 많이 했지만, 링컨이 남북전쟁 같은 위기를 버티게 해준 힘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버텨낸 미국을 보며 유럽을 비롯한 세계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고, 왕정을 무너뜨리며 차례차례 민주주의로 들어섰다.
그런 점에서 링컨의 사명의식은 옳았다. 풍전등화였던 미국의 민주정부가 조금만 더 버텨주면,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 정부도 유지될 수 있음을 전세계에 보여줄 수 있으면 다른 나라들도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될 터였다. 링컨은 민주주의의 세계적인 확산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지만, 우리 모두는 그의 사명감의 혜택을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설의 진정한 성공은 연사의 중요성에 있지도 않고, 화려한 문장에 있지도 않다. 링컨이나, 마틴 루터 킹 목사, 넬슨 만델라의 연설에 우리가 아직도 감동하는 것은 그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에 기반한 사명감을 가졌고, 그 사명감을 실천하며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시대를 내다 본 사람들의 사명감은 동시대인들은 물론, 후세까지 감동시킨다.
민주주의의 미래를 지켜낸 그들을 보면서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그런 사명감을 가져볼 수 없을까? 한국도 한때 세계 민주주의의 자랑이었다. 유교문화를 가진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독재를 민중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진정한 의미의 정권교체가 가능한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일본과 중국은 일당 집권, 일당 독재가 불가피해도 한국만큼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뤄낼 수 있는 나라라고 기대되던 아시아 민주주의의 보루였다.
▲ 2010년 12월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여·야 의원들이 단상을 지키기 위한 몸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 연합뉴스
하지만 언제부턴가 사실상 일본식의 일당 독점이 불가피하다는 자조적 패배주의가 국민들에게 퍼지고 있다. 여당을 봐도 야당을 봐도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필요에 따른 정권교체는 불가능하고 그냥 이대로 유사(類似) 민주주의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지금 집권여당과 야당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선절차 논의의 어디에도 민의에 대한,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을 보존하려는 집념만 보인다.
연설에서 링컨은 남북전쟁을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는 이 나라, 아니 민주주의로 잉태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가진 모든 나라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전쟁을 하고 있다.” 남북 간의 내전을 개별 국가의 문제가 아닌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사명으로 승화시킨 링컨과, 민주주의적 절차의 문제를 자신의 정치적 생존 문제로 보는 이 땅의 정치인들을 보면서 우리가 왜 아직도 국부(國父)논쟁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국정교과서 밀어붙이기]아버지 박정희 명예회복 위한 ‘박근혜의 역사 다시 쓰기’ 108경향
ㆍ유신 때처럼 국정 교과서 강행
ㆍ‘박정희 본색’ 점점 더 노골화
2013년 교육부의 수정명령을 받았던 금성출판사, 미래엔, 천재교육, 지학사, 두산동아, 비상교육이 펴낸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6종.
한국 사회와 정치권을 양쪽으로 쪼개며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역사 전쟁’의 진원(震源)은 청와대다. 박근혜 대통령이 보수언론들마저 반대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면서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過)는 덮고 공(功)은 키우려는 뜻이 역사 수정 배경에 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최근 새마을운동을 극찬하는 등 부쩍 ‘박정희 본색’을 드러낸 것은 그 전조라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 사후 ‘은둔 18년’과 정치인 시절 불쑥불쑥 드러낸 ‘역사 해석·기술=집권자의 관점·의지’라는 박 대통령의 역사관을 감안하면 예고된 ‘역사 전쟁’이기도 하다.
■뚜렷해지는 ‘박정희 본색’
박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 시절을 자주 되새기고 있다. 새마을운동을 되살려낸 것이 단적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새마을운동은 개도국 개발협력의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밝히는 등 새마을운동 세일즈에 힘썼고, 현재까지 새마을운동 띄우기를 계속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5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교육과 새마을운동 관련 행사에 주도적으로 참여를 함으로써 유엔의 개발 달성 노력에 기여를 했다”고 했으며, 7일 제7차 국민경제자문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새마을운동으로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발판을 마련했듯이 이런 구조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8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임 대사 신임장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국정 역사교과서도 박정희 시대 유산이다. 해방 후 검정제였던 한국사 교과서는 1974년 유신체제하에서 국정으로 전환됐다. 박 대통령은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에 많은 오류와 이념적 편향성 논란이 있는데 이런 것이 있어선 안될 것”(2015년 2월, 교육문화분야 업무보고), “교육현장에서 진실을 왜곡하거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2013년 6월, 수석비서관회의) 등 꾸준히 국정화 추진 의지를 밝혀왔다.
■뿌리는 박 대통령 역사
박 대통령은 정치권에 입문 때부터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적극 반박해왔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 서술을 놓고 줄곧 ‘왜곡’이란 인식을 드러냈다. 최근 일들은 박 전 대통령 명예회복을 하려는 박 대통령 의중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 박 대통령은 1989년 박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은둔생활을 벗어나면서 “억울하게 자꾸 만들어 뒤집어씌우는 누명, 왜곡시킬 대로 시켜진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데 힘쓰면서 언론 매체를 통해 알리고 홍보해왔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 때인 2005년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유신시절 공안사건을 재조사하자 “조금 지나면 또 과거사가 돼 국민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했으며, 2007년 1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에 대해 “나에 대한 정치공세”라고 비판했다. 대선후보 때인 2012년 7월 한국신문방송편집인 초청토론회에선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5·16이 초석을 만들었다”고도 했다.
다만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막판 ‘과거사 논란’이 거세지며 지지율이 급락하자, 9월24일 기자회견에서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피해자 가족들에게 사과했다. 현재 청와대 기류와는 정반대의 말을 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시 박 대통령의 사과가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이 나온다.
새누리, ‘국사교과서 국정화’ 박차…‘전교조명단 공개 망신’ 조전혁도 투입108 민중의소리
‘종북숙주’ ‘월북하라’ 막말 의원 등 포함 특위 구성…지도부 “DNA 오염” “좌파 전유물” 총공세
새누리당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8일 김무성 대표를 필두로 총공세에 나서는 한편, 당내 특별위원회 구성을 마무리했다. 특위에는 '전교조 명단 공개'로 망신살을 산 인사나 '종북 숙주', '월북하라' 등 '색깔론' 막말로 물의를 빚은 의원 등이 대거 투입됐다.
"DNA 오염", "좌파 역사학자 전유물" 교과서 총공세
이날 열린 최고위원회의는 한국사 교과서를 겨냥한 성토장을 방불케 했다. 김무성 대표는 국정교과서 체제보다 현행 검정체제가 오히려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고 획일적 역사관을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국정교과서를 '국민통합 역사 교과서'로 칭하면서 "친일·독재를 미화한다는 주장은 얼토당토않는 호도에 불과하다"고 야당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이인제 최고위원도 "친일과 독재를 미화할 사람이 지금 어디 있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청원 최고위원은 "호도된 역사로 국민통합을 와해시키는 정치적 선동", "DNA가 오염되고 소실" 등의 격한 표현을 써가며 비난을 쏟아냈다.
김을동 최고위원은 "역사 교과서는 좌파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김정훈 정책위의장도 친일·독재 미화 논란을 일으킨 교학사 교과서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겨냥, "좌파 진영", "좌파 단체", "좌파 언론"으로 몰아붙이며 "통합 역사교과서(국정 교과서)를 '권위주의의 산물'이라고 매도하는 세력이 보여준 행태는 한 마디로 다수의 횡포"라고 비난했다. 이정현 최고위원은 교과서 관련 국회 국정조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역사교과서 특위' 구성과 함께 첫 회의 시동
'전교조 명단 공개 망신', '종북 숙주 막말' 인사 등 대거 포함
새누리당은 또한 이날 당내 기구인 역사교과서개선 특별위원회를 띄우면서 교과서 국정화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특위 위원장은 김을동 최고위원, 간사는 교사 출신 강은희 의원이 선임됐다. 특위 위원으로는 국가정보원 제2차장 출신 김회선 의원을 비롯해 박대출·박인숙·염동열 의원 등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현역 의원과 조전혁 전 의원과 전희경 자유경제원 사무총장, 조진형 자율교육학부모연대 대표 등 원외 인사들이 투입됐다.
조전혁 전 새누리당 의원ⓒ뉴시스
보수 시민단체인 자율교육학부모연대의 조진형 대표 역시 전교조 공격에 앞장서 온 인사이다. 조진형 대표는 한국사 고등학교 교과서 7종에 독재체제에 대한 긍정적 서술을 명령한 교육부 수정심의위원회에 연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수정명령에는 전두환 정권 당시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관련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다니!" 등 독재정권을 부정적으로 표현한 내용을 빼라는 지적이 포함돼 있었다.
전희경 자유경제원 사무총장은 최근 '교과서 전쟁'의 선봉에 서 있는 인물이다. 전 사무총장은 지난 9월 25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헌법 가치에 충실한 교과서라야 한다' 토론회에서 "전교조와 좌편향 세력이 오랜 시간 전투를 준비했듯 그 반대편에서도 이 사태가 교육전쟁의 분수령임을 인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국사 교과서를 향해 "배울수록 비뚤어진 아이들만 양산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전 사무총장이 적을 둔 자유경제원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비영리법인으로 보수 성향으로 분류된다. 자유경제원은 최근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연속 토론회를 진행하면서 '이승만 띄우기'에 나서 왔다.
박대출 의원은 '색깔론'으로 논란을 빚은 인물이다. 지난 2013년 11월 20일 대정부질문이 있던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대출 의원은 야당 의원을 향해 "종북 말고 월북하지"라고 야유를 한 것이 문제가 돼 해당 의원에게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올해 3월 9일에는 대변인으로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 관련해 논평을 하면서 "종북 숙주"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염동열 의원의 경우에는 황당 발언으로 빈축을 샀다. 염 의원은 지난해 1월 8일 jtbc '뉴스9'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선진국 가운데 교과서를 국정으로 가는 경우는 없다는 얘기도 있는데 어떻게 보느냐'는 손석희 앵커의 질문에 "그렇게 보지 않는다"며 "러시아나 베트남, 필리핀 등이 국정 교과서를 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국정 교과서를 쓰고있지만"이라고 답했다. 개발도상국과 북한 등을 '선진국'에 포함시킨 것이다.
특위는 이날 출범과 함께 첫 회의를 열었다. 김을동 위원장은 모두발언에서 "지금의 검·인정 체계는 국민 분열과 왜곡된 역사관을 주입하는 특정 진영의 투쟁논리로 전락한 지 오래"라며 "특위를 중심으로 역사교육의 비정상을 정상화로 이끄는 데 사활을 걸겠다"고 밝혔다.
'유령도시' 된 후쿠시마의 출입금지구역 108 세계일보
2011년 3월11일 일본을 뒤흔든 동일본 대지진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방사능 오염수가 대량으로 유출돼 원전 인근에 살던 17만명 중 16만명이 대피했다. 이 중 약 12만명은 아직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원전 사고로 유령도시로 전락한 후쿠시마의 출입금지구역 모습이 7일(현지시간) 처음 공개됐다.
이날 영국 일간 미러 등은 폴란드 사진작가인 아르카디우스 포드니신스키(43)가 지난달 후쿠시마를 찾아 찍은 출입금지구역 사진을 보도하며 “제1원전 인근 출입금지구역은 잡초 등이 무성한 황무지로 변모하고 있다”고 전했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반경 20㎞ 이내 지역은 허가를 받은 자 이외에는 출입을 금지하는 경계 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주민들이 떠난 이후 잡초는 주인 잃은 차량 수십 대를 에워쌀 정도로 무성하게 자랐다. 4년여 전 모습 그대로인 것도 있다. 차뿐 아니라 자전거 수십 대도 자전거 보관소에 방치돼 있다. 한 교실의 칠판에 쓰인 수업 계획과 대지진으로 아수라장으로 변한 도서관과 슈퍼마켓도 그대로 남아 있다.
후쿠시마의 방사능 오염도 여전하다. 포드니신스키는 “출입금지구역에서 대규모 방사능 오염 제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방호복을 입은 인부 2만명이 정화제 스프레이를 이용해 출입금지구역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경제, 낡은 틀 머물다 '총체적 난국' 10.8 내일
주력산업 위기인데 새 먹거리 대안 지지부진
취업난과 빚에 허덕이는 국민 … 삶의 질 추락
한국경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더 짙어졌다.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수출부진과 내수침체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취업난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가계빚은 신흥국 가운데 최고수준으로 증가하며 빚에 허덕이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정부의 경기부양책은 이제 더 이상 약발이 먹히지 않는 총체적 난국이다. 한국경제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주력산업은 위기상황인데 여전히 재벌 중심 수출주도 산업에만 목매는 낡은 성장 방정식에 빠져 새로운 대안을 찾기는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신흥국과 선진국 사이 샌드위치 = 1일 산업통상자원부는 9월 수출액은 435억달러로 1년 전보다 8.3% 줄었다고 밝혔다. 9개월 연속 마이너스 행진이다. 8월엔 작년 동기 대비 14.7%나 줄면서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한 직후인 2009년 8월 20.9% 하락 이후 6년 만에 최대 폭으로 떨어졌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2분기 제조업 생산증가율은 -1.5%로 3분기 연속 감소추세다. 2013년 7대 주력품목의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은 한국이 4.7%로 중국의 11.7%와 일본의 5.3%를 밑돌았다. 일본·중국의 기술과 가격경쟁에서 밀리는 '넛크래커 현상'이다. 일본을 넘어서지 못하고 중국에 추격당하며 샌드위치로 전락한 한국경제의 모습이다.
우리 경제는 그동안 정부 주도로 수출 중심의 제조업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제조업은 중국 등 글로벌 경제의 회복 지연과 수출경쟁력 저하로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연구실장은 "중국, 인도 같은 신흥국의 추격이 거세지면서 앞으로 자본재산업 부문의 수출경쟁력은 더 급격하게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새로운 산업 안 보여 = 경제전문가들은 현재 우리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낡은 성공방정식인 재벌의존, 정부주도 등에 안주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재벌의존형 성장모델은 한계에 봉착했고 이젠 중소·중견기업들이 주도하는 혁신주도형 성장 모델을 구축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최근 미국 독일 일본 등 기존 제조업 강국들은 첨단 스마트 지식기반 경제로 넘어가면서 세계시장을 재편하고 장악해가고 있다. 중국도 일부 산업에서는 한국의 기술을 넘어서고 세계 최초를 창조하는 단계까지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최근 산업구조를 보면 새롭게 등장해 성장을 주도하는 산업이 보이지 않는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전기전자나 철강, 화학, 자동차, 조선 등 주력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를 대신해 우리 경제를 이끌어 갈 산업이 마땅치 않다"며 "산업생산 추이를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생산증가율이 낮아지는 가운데 산업간 성장격차도 줄어들면서 신규 사업기회가 크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청년들의 취업난이 더욱 심각해지는 원인이 새로운 산업 부재로 신규일자리 창출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가계빚 신흥국 최고 수준 … 삶의 만족도 최하위 = 경제위기가 지속되면서 저생산성, 저임금, 빈곤의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주요 신흥국 가운데 가장 심각하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우리나라 GDP(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소규모 자영업자 부채 포함) 비중은 지난해 말 현재 84%로 신흥국 평균 30%의 2.5배에 달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전인 2007년 말에 비하면 한국의 GDP 대비 가계대출 비율은 7년 만에 12%p 상승했다.
문제는 가계빚을 갚을 길이 앞으로도 막막하다는 점이다.
임금상승 가능성은 거의 없는 가운데 취업자 증가세는 둔화되고 있다. 지난해 53만명에 달했던 취업자 증가수는 올 들어 30만명대에 머물고 있다. 수요부진과 노동공급 둔화를 고려할 때 내년 취업자 증가 수는 20만명대로 둔화될 것으로 보이며 실업률은 3% 후반을 기록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삶의 만족도는 최하위권으로 떨어지고 자살률은 최상위 국가가 돼버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올해 발표한 '2015 더 나은 삶 지수'에 따르면 삶의 만족도 지수는 10점 만점에 3.8로 29위(지난해 25위)로 하위권이다. 11개 지표 가운데 교육(4위), 시민참여(4위)는 높은 편이었으나 공동체성을 나타내는 사회적연계 지표가 36위로 최하위다. 일과 삶의 균형(33위), 건강(31위), 환경(30위)도 낮은 수준이었다. 11개 부문을 모두 합친 전체 순위에서 한국은 올해 27위로 작년보다 두 단계 떨어졌다.
최근 한국 사회에는 '헬조선, 조선불반도'와 같은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헬조선은 헬(Hell:지옥)과 조선의 합성어로 한국이 지옥과도 같이 희망이 없는 사회라는 의미이며 조선불반도는 한반도 전체가 지옥이라는 뜻이다. 듣기에 불편하고 자조섞인 이 단어는 한국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낡은 공식 깨고 '인본경제'로 가자
한국경제가 갈림길에 섰다. 내수·수출 부진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부와 경제주체들이 낡은 공식의 함정에 갇혀 있다는 점이 위기의 뿌리다.
40여년간 우리 경제를 이끈 '성공 방정식'이었던 △재벌의존체제 △정부주도경제 △양적 성장주의 △모방추격형 산업모델에 대한 집착을 끊지 않으면 끓는 물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어갈 수 있다.
한국경제가 빠져 있는 대표적 낡은 공식은 재벌의존체제다. 재벌 중심 수출주도 성장 전략은 70년대 이후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끈 가장 핵심적인 전략 중 하나였다. '한강의 기적'을 일궈 한국경제를 글로벌 경제규모 10위권으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안겼다. 그러나 이 전략의 유효기한은 이미 지났다. 이명박정부의 법인세 인하 및 고환율정책은 전형적으로 재벌기업의 수익성을 높여 낙수효과를 기대한 정책이었지만 먹히지 않았다.
재벌기업들은 투자보다는 돈을 쌓아두는 쪽을 택했다. 지난해 10대 그룹 96개 상장사의 사내유보금은 504조6000억원으로 사상 최대다. 이들이 투자에 나선다고 해도 일자리나 경제성장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해외생산 트렌드와 ICT혁명 및 기계화로 대기업의 일자리 창출 효과는 제한적이다. 오히려 재벌의존체제의 부작용인 양극화 확대는 인구구조변화라는 구조적 문제와 겹치며 내수 침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정부주도 경제전략도 바닥을 드러냈다. 정부의 지나친 개입이 민간 부문의 변화와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 게 1990년대부터다. 특히 디지털혁명시대에 들어선 이상 정부의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도 우리 정부는 양적 성장에 집착하며 단기부양책에 여념이 없다.
박근혜정부는 성장률 숫자에 연연해 부동산 부양책, 사상 최대 추경 등을 시행했지만 소비심리는 요지부동이다. 오히려 가계부채만 키워 지난해 6월 이후 은행 가계대출은 1년간 65조7000억원이 증가했다. 국내총생산의 5%를 넘는 정책금융은 좀비기업을 양산해 혁신적인 기업을 몰아내는 부작용만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 진 KDI 대학원 교수는 "한국 정부의 문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너무 많이 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만 과거의 공식에 목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방추격형 성장모델이 한계에 다다르며 '메이드 인 코리아'의 위기가 깊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주력산업인 반도체·조선·자동차·철강 등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진국의 설계내용을 모방, 개량하면서 생산하는 방식이 효과적이었다. 삼성·LG·현대차·포스코 등의 제조업 핵심기업들이 소니·노키아·신일본제철을 따라잡았던 과정이 바로 그런 방식이었다. 이제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빠른 추격자)'가 아닌 '퍼스트 무버(First Mover·시장 선도자)'로서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이 필요한 지점에 왔지만 여전히 추격 단계의 전략과 관행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한민국의 희망을 찾기 위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산업화 시대에 성장의 주체를 대기업·재벌로 봤다면 디지털혁명시대에는 인적자본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창의적 사람을 길러내고 이들을 중심으로 혁신적인 중소기업 생태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돼야 한다.
선진적인 인적자본 중심의 '인본경제'로 가야 한다는 뜻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재벌투자에 의지한 성장, 정부가 펌프질하는 방식은 이제 끝났다"면서 "인적자본에 투자하고 노동친화적 성장정책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 성장주체로서 인적자본을 지목했다.
단기 부양책에 대한 유혹을 부추기는 양적 성장주의도 넘어서야 할 낡은 공식이다.
김종인 전 경제수석은 "환경의 변화로 성장률이 떨어지는 것은 세계 모든 나라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서 "자꾸 저성장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2%대 성장을 정상으로 받아들이고 경제민주화 등으로 사회를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의 역할변화도 시급하다. 이주호 전 교육부장관은 "큰 정부니 작은 정부니 논란은 더이상 필요 없다"면서 "민간과 수평적으로 일할 수 있는 혁신조직으로서의 정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한국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이끌었지만 이제는 낡아버린 과거의 성공방정식을 과감히 버리고 우리만의 새로운 성공방정식을 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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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에 미련 못버리는 정부 = 부동산 정책은 대표적이다. 역대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박근혜정부는 출범초기부터 부동산 관련 세금을 깎아주고 정책자금을 지원하는 등 부동산 경기에 대한 집착을 보여 왔다. 특히 최 부총리 취임 이후 LTV(주택담보대출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 규제를 대폭 완화했고, 이는 '빚내서 집을 사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따라 주택매매거래량은 빠르게 증가해 지난해 연간 100만건을 돌파했다. 연간 주택매매거래량이 100만건을 넘어선 것은 2006년 이후 8년만이다. 올들어 거래량은 더욱 늘어 8월까지 81만6000건에 달했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의 온기는 소비확대와 내수진작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치솟는 전세값을 견디다 못해 등 떠밀리듯 대출을 끼고 집을 산 이들이 대부분인데다 대출 부담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집값이 오를 것이란 기대감이 사라진 까닭이다. 정부는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면 소비가 늘어 경기가 활성화된다는 낡은 공식에 머물렀지만 국민들은 개발연대에나 가능했던 부동산 호황기는 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부의 부동산 부양책은 경기회복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 채 가계부채라는 우리경제의 최대 위험요인만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성장률에 얽매여 재정확대했지만 = 전통적인 경기부양 수단인 재정확대정책도 마찬가지다. 최 부총리 취임 이후 정부는 '46조원+α'의 거시정책 패키지를 내놓고 자금을 쏟아 부었다. 2015년 예산도 확장적으로 편성해 정부 지출규모를 20조원(5.5%)이나 늘렸다. 한은을 압박해 금리도 네 차례나 낮췄다.
하지만 경기 개선 효과는 크지 않았다. 성장률은 지난해 2분기 이후 5분기 연속 0%대에 머물러 있고, 국민들의 체감경기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재원이 부족한 개발연대에는 정부 재정투입은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경제가 어느 정도 성숙해지면 재정효과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재정투입이 늘어나는 만큼 민간 영역의 수요가 줄어드는 등 '구축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확장적 재정정책은 나랏빚만 늘려놓았다. '2015~2019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내년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37조원으로 GDP(국내총생산) 대비 2.3% 수준으로 급증하고, 국가채무는 645조원을 넘어 사상 처음으로 GDP의 40%를 넘어서게 된다.다급해진 정부는 재벌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있다. 이 또한 역대 정부에서 익히 봐왔던 일이다. 처음부터 의지가 약해보였던 경제민주화는 뒷전으로 밀렸고, 규제완화가 이를 대체했다. 올 들어서는 노동시장을 개혁해 청년 일자리를 늘리겠다며 재계가 요구해온 고용유연화를 몰아붙이고 있다. 박 대통령은 비리 기업인에 대한 사면권을 엄격히 제한하겠다던 공약마저 깨고 최근 재벌 총수들을 사면하고, 대형 건설사들에 대한 행정제재를 풀어줬다.이를 통해 정부는 재벌 대기업의 투자·고용확대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 지는 불확실하다. 재벌 대기업들이 정부의 특혜를 받거나 압박에 못 이겨 투자와 고용확대를 약속해놓고 나중에 흐지부지되는 일이 과거 정권에서도 반복돼왔기 때문이다.
뻔뻔한…공안의 역습 10.4 경향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고영주, 고문·조작 ‘부림사건’ 주역
ㆍ황교안·박상옥 등 반성도 없었는데 ‘중용’…민주주의 ‘퇴행’
박근혜 정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수구 세력’의 망언이 도를 넘고 있다. 급기야 1980년대 대표적인 고문 조작사건으로 꼽히는 ‘부림사건’ 수사검사가 국회에서 야당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 검찰 공안 분야에 종사했거나 고문·조작·은폐 수사 등으로 물의를 빚은 인사들을 박근혜 정권이 중용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장(66·사진)은 지난 2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한다”며 “문 대표가 부림사건 변호인을 했고 그 사람들(부림사건 관련자)과 평생 동지가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 이사장은 1981년 독서모임 대학생 등 22명을 이적표현물 소지 및 학습, 반국가단체 찬양·고무 등으로 구속 기소한 부림사건 수사에 참여했다. MBC 대주주인 방문진은 MBC 사장 임명·해임권 등을 갖고 있다. 고 이사장은 방문진 감사를 거쳐 지난 8월 이사장에 임명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를 맡고,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된 부림사건은 2014년 대법원 재심에서 수사기관의 불법 연행과 피의자 고문 정황 등을 확인하고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불법 연행돼 22~61일간 구금 상태에서 자백을 강요받은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고 이사장을 비롯해 1980년대 당시 수사에 참여한 검찰이나 유죄 판결을 내린 판사 어느 누구도 사과와 반성이 없었다.
사실을 왜곡하고 민주주의 퇴행을 야기하는 일들이 이처럼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것은 과거 공안사건 담당 검사를 ‘애국자’로 여겨 요직에 배치한 박근혜 정권의 책임이 크다. 대표적인 공안검사로 ‘초원복집 사건’ 등에 연루된 김기춘씨는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았다. 공안사건을 담당하는 서울중앙지검 2차장 등을 거친 황교안씨는 법무부 장관에 발탁된 뒤 국무총리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검 공안부장을 지낸 박한철씨는 헌법재판소장에 임명됐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검사였던 박상옥씨는 지난 5월 대법관이 됐다.
문재인 대표는 지난 3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문제는 박근혜 정부가 (고영주 이사장 같은) 이런 분들을 많이 중용하는 것”이라며 “이런 극단적인 편향이야말로 우리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내부의 적”이라고 적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박주민 변호사는 “편협한 이념과 사고를 가진 구시대 공안검사들이 요직에 등용되고 이런 인사들이 과거에 대한 반성이나 피해자에 대한 사과 없이 오히려 자신을 합리화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며 “1970~80년대로 완전히 되돌아간 느낌”이라고 말했다.
한국 치킨집 3만6천곳…전세계 맥도날드 매장보다 많다 10.5 연합뉴스
한국 자영업의 상징인 치킨집이 해마다 늘어 전 세계 맥도날드 매장 수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5일 통계청의 프랜차이즈 통계(16개 업종)에 따르면 2013년 현재 치킨전문점 수는 2만2천529개로 편의점(2만5천39개) 다음으로 많았다. 통계청이 집계한 치킨전문점은 공정거래위원회에 가맹점으로 등록된 상표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프랜차이즈 형태가 아닌 개인사업자를 포함하면 더욱 늘어난다.
통계청 관계자는 "치킨전문점은 원래 표준산업분류상 피자·햄버거와 함께 하나의 항목군으로 분류됐지만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지금은 치킨집만 따로 떼어내 집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프랜차이즈 뿐만 아니라 주판매 품목이 치킨이면서 호프집 등 타업종을 병행하는 곳까지 합치면 치킨집은 3만개를 훌쩍 넘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의 2013년 조사에 따르면 국내 치킨전문점수는 10년간 연평균 9.5% 늘어나 약 3만6천개에 달한다.
이 연구소는 당시 KB카드 개인사업자 가맹점을 상대로 치킨전문점 현황을 분석했다. 통계청의 표준산업분류 체계를 기본적인 토대로 닭강정, 불닭 등 치킨을 주판매 업종으로 하는 사업체를 더했고 닭갈비, 찜닭, 삼계탕, 닭 꼬치 등을 파는 곳은 대상에서 제외했다.
KB경영연구소의 분석대로라면 한국의 치킨집은 유명 패스트푸드 업체인 맥도날드의 전 세계 매장 수(3만5천429개·2013년)보다도 많다.
한국에서 치킨집이 우후죽순 늘어나는 것은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가 은퇴 후 생계형 창업으로 치킨전문점을 많이 선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치킨집은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쉽게 문을 열 수 있다는 점에서 은퇴자들이 많이 몰린다. 실제로 한국의 전체 자영업자 수는 하락 추세이지만 치킨전문점이 포함된 숙박 및 음식업점 수는 해마다 늘고 있다. 숙박 및 음식업점 수는 2013년 기준 68만6천225개로 2006년(62만1천703개)에서 6만5천개 가량 늘어났다. 베이비붐 세대 은퇴자들이 창업에 몰리면서 자영업자의 평균 연령대도 상승하는 추세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50세 미만 자영업자 수는 2007년 324만명에서 2013년 246만명으로 줄었지만 50세 이상 자영업자 수는 같은 기간에 289만명에서 328만명으로 39만명 늘었다.문제는 50세 이상 자영업자들이 창업의 성공 가능성을 크게 보는 것보다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업으로 내몰린다는 데 있다.
중소기업청의 실태 조사(2013년)에서 자영업으로 뛰어든 동기에 대한 질문에 '생계유지 위해서(다른 대안이 없어서)'를 꼽은 응답자가 전체의 82.6%에 달했다.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해 자영업을 시작한 비율은 2007년 79.2%, 2010년 80.2% 등 해를 거듭할수록 늘고 있다.
한정된 내수 시장을 놓고 생계유지를 위한 개인사업자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창업의 쓴맛만 보고 문을 닫는 사례도 많다. 국세청에 따르면 2004∼2013년 개인사업자 창업은 949만개, 폐업은 793만개로 이를 단순 비교하면 생존율은 16.4%에 불과했다.
폐업률을 보면 치킨집이나 커피전문점 등 음식점이 전체의 22.0%로 가장 많았다.
주 현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진입 장벽이 낮은 치킨집 등의 창업이 많지만 그만큼 경쟁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며 "예전에는 '월급쟁이'의 꿈이 빨리 돈을 모아 가게를 하나 차려 나가는 것이었는데 과거 10년간 자영업은 '월급쟁이들의 무덤'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편도족·좀비기업·깔세·지여인…불황이 빚어낸 씁쓸한 조어들 10.4 경향
한국 사회가 저성장 속에 저출산 고령화, 실업 등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불황이 빚어낸 신조어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편도족’ ‘깔세’ ‘좀비기업’ ‘피딩족’ ‘푸피족’ 등이 대표적이다.
‘혼밥족’은 혼자서 밥먹는 사람들의 줄임말이다. 1인 가구의 증가를 반영한다. ‘혼밥족’ 중에서도 편의점에서 도시락으로 한끼를 해결한다면 ‘편도족’이다. ‘편의점 도시락 족(族)’이라는 뜻으로 돈은 없고 바쁘고 혼자 있다보니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이나 컵라면, 도시락 등을 사서 끼니를 해결한다. 지난 8월 대형마트 판매액은 6.6%, 백화점 판매액은 5.0% 증가하는 데 그쳤지만 편의점 판매액이 36.9% 늘어난 것도 편도족 증가의 영향으로 보인다.
부동산 시장에서는 최근 ‘깔세’가 늘어나고 있다. 깔세란 보증금 없이 몇 달치 월세를 미리 내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다. 깔세 점포는 별도의 상호없이 ‘눈물의 폐업처리’ 등 자극적인 문구를 내걸고 장사를 하다 사라지는 점포다. 지하철 상가나 창고형 매장이 주로 이용됐지만 최근에는 전통시장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어려운 자영업자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수익을 내지 못하면서도 금융지원을 받아 계속 연명해 나가는 기업은 ‘좀비기업’으로 불린다. 살아 있는 시체인 ‘좀비’가 연상된다는 이유에서다. 통상 이자보상배율(영업이익을 이자비용으로 나눈 것)이 1 미만인 곳이 해당한다. LG경제연구원이 최근 628개 비금융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부채상환능력을 분석한 결과, 좀비기업은 2010년 24.7%에서 올해 1분기 34.9%로 크게 늘어났다. 경쟁력이 없어 저금리의 정책자금 지원이라는 산소호흡기를 떼면 언제든 죽지만 경제에 미칠 충격 등을 생각해 정부가 차마 메스를 대지 못하고 있다.
20대 취업난을 반영하는 조어로는 ‘인구론(인문계 구십%가 논다)’ ‘문송(문과여서 죄송합니다)’ ‘지여인(지방대 여자 인문대생)’ 등이 많이 쓰인다.
불황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유복한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도 새로 등장했다. ‘피딩족(Feeding族)’은 과거 쌓아놓은 경제적인(Financial) 여유를 바탕으로 육아를 즐기고(Enjoy) 활동적(Energetic)이면서도 헌신적(Devoted)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말한다. 손주를 위해 소비를 아끼지 않기 때문에 ‘할마(할머니+엄마)’ ‘할빠(할아버지+아빠)’로 불리기도 한다.
여유를 갖고 사는 고령자를 뜻하는 또 다른 용어로는 ‘우피(Woopie·Well-off older people)족’이 있다. 중위소득(총 가구를 소득 순으로 순위를 매긴 후 정확히 가운데 있는 가구의 소득)의 150% 이상인 중산층과 상류층 노인들을 뜻한다. 반면 경제적 여유가 없는 노인들은 ‘푸피(Poopie·Poorly-off older people)족’으로 불린다. 중위소득의 50% 미만인 빈곤층 노인들로 독거노인의 70%가 이에 속한다. 현대경제연구원 연구를 보면 지난해 우피족과 푸피족의 시장소득 격차는 13.4배에 달했다.
교황 "결혼은 이성 간의 결합"... 동성결혼 '반대' 10.5 오마이뉴스
시도느 개회 미사서 원칙론 강조... '커밍아웃' 신부 종무 박탈
▲ 프란치스코 교황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 개회 미사를 보도하는 BBC 뉴스 갈무리. ⓒ BBC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근 가톨릭 교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동성결혼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혔다. AP, BBC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교황은 4일(현지시각)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개회 미사에서 "교회의 가족 형태는 일시적인 유행이나 다수 의견으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대 교황과 달리 동성애를 포용하는 행보를 펼쳐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전날 시노드 개회를 하루 앞두고 교황청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폴란드 출신의 고위 성직자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전격 선언하며 논란이 커지자 직접 진화에 나선 것이다.
교황은 "사랑하는 창조물을 만드신 하느님은 남성과 여성의 사랑으로 가득한 결합을 보기 원하신다"라며 "남성과 여성의 결합(결혼)은 서로의 여정과 유익한 선물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교황은 교회에서 의미하는 진정한 부부가 이성 간의 결합이라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면서도, 규율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교회가 더욱 환영하고 너그럽게 받아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호소했다.
교황은 "교회는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도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라며 "문을 닫아버린 교회는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저버린 것이며, 다리가 아닌 장애물이 되려는 교회와 같다"라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과감한 진보적 행보와 가톨릭 내 보수층이 충돌한 가운데 전 세계 추기경과 주교 300여 명 모이는 이번 시노드에서 이혼·재혼·동성애 관련 논쟁이 더욱 격렬해질 것으로 보인다. 고위 성직자의 전격 '커밍아웃'에 교황청이 그의 종무를 박탈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원칙론을 내세우면서 가톨릭이 과연 시노드를 통해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일베, 성매매·음란 등 유해게시물 최다 적발돼" 10.5 노컷뉴스(연합)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가 성매매·음란 등 유해성 게시물로 가장 많은 제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5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이개호 의원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일베는 2013년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총 2천907개의 게시글이 적발돼 게시물 삭제, 이용 해지 등의 시정조치를 받았다. 일베에 이어서는 '디시인사이드'가 2천507건으로 많았고 '루리웹'이 144건, '보배드림' 123건, '네이트판' 109건, '웃긴대학' 88건 순이었다.
일베 게시글의 위반 유형을 보면 성매매·음란글이 873건으로 단일 유형으로는 가장 많았다. 이어 불법 식·의약품 관련 게시글 122건, 권리침해 44건, 도박 24건, 문서위조·장기매매·개인정보 판매 등 기타 법령위반이 1천844건이었다. 삭제 조치된 게시물 중에는 자신이나 타인의 알몸 사진을 올려두고 버젓이 성매매를 제안하거나 특정 지역·직업·사회적 신분 등을 차별·비하하는 글도 있었다.
청와대의 허망한 ‘정권 재창출 작전’ 104 경향
여권이 여당 대표의 공천룰 합의를 두고 벌집 쑤신 듯 어수선하다. 청와대 직할부대를 자임하는 친박계에선 “오랑캐(야당)와 야합” “쿠데타” 등 날 선 언어들이 난무한다. 청와대까지 가세해 한바탕 난리법석이다. 친박계 표현대로라면 바야흐로 ‘골육상잔’의 드라마가 펼쳐질 참이다.
김무성 대표의 ‘부산 합의’를 두고 ‘위화도 회군’이란 말이 나올 정도니 권력 주류 중 주류들의 이런 요동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다만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준다’는, 적어도 표면적으로 외면하기 어려운 명분에 이처럼 소동 외엔 마땅한 방도가 없는 권력 주류의 왜소함이 씁쓸하다.
모든 정치적 소동엔 ‘복선’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추석을 앞둔 여권의 가장 심각한 화두는 ‘반기문(潘基文)’이었다. 돌연 재부상한 ‘반기문 대망론’은 여권 차기후보 1등인 김무성 대표의 곤경과 맞물린 것이었다. ‘마약 사위’ 건이 불거지고, 친박계가 ‘김무성 불가론’을 드디어 꺼낸 때였다. 태풍의 전조마냥, 여권이 그냥 무탈하게 지나가진 않을 것이라 짐작은 했다.
이 와중에 박근혜 대통령은 3박4일 미국 뉴욕 출장 내내 7차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만나 친분(?)을 과시했다. 유엔이란 국제외교 무대에 그 모습이 어떻게 비쳤는지는 관심 밖이지만, 적어도 의도대로 국내엔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반기문 대망론’은 그렇게 이번 추석 어느 때보다 큰 보름달만큼 커지고 커졌다. 어느새 반 총장은 ‘외교대통령’이란 생소한 개념으로 포장되고, 내치(內治)는 친박계가 지원하는 소위 ‘반 대통령, 최경환 총리’설로까지 발전했다. 이대로라면 다음 대한민국호(號)를 책임질 권력은 ‘반(半·절반) 권력’인 셈이다.
어느 정권이나 정권 재창출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권력 영속’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어느 팔레스타인 시인은 희망이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이라 했지만, 권력에 ‘정권 재창출’은 ‘실현할 수 없는 희망’일 것이다. 진시황이 ‘영생’을 좇았듯 말이다.
열린우리당이 17대 총선 압승을 거둔 지 나흘 만인 2004년 4월19일, 노무현 대통령은 김근태 원내대표를 은밀히 청와대로 불렀다. 모처럼 온기가 돈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김 대표는 나와 같은 중도진보고, 김혁규 전 경남지사나 정동영 의장은 중도보수가 아니냐”며 ‘김혁규 총리’ 카드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김 원내대표는 “그러면 나를 도와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지만, 노 대통령은 묵묵부답이었다. 노 대통령의 차기 구상이 시작됐다고 알려진(2006년 1월8일 윤태영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 그 시점이다.
2009년 여름 무렵 사석에서 만난 이명박 정권 한 핵심 인사는 불쑥 ‘젊은 총리’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김태호 경남지사가 어떠냐”고 했다. 정확히 김 전 지사가 총리 후보로 지명되기 1년 전이다. 그는 말미에 “박근혜 (전) 대표에 맞설 만한 카드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하지만 성공한 예는 극히 드물다. 김대중 정부에 이은 노무현 정부 탄생이 그나마 가까운 사례겠지만, 민주당 분당을 생각하면 그마저도 성공으로 보긴 어렵다. 정권들마다 인물·세력·정책 등 갖가지 방편을 동원해 실험해보지만 결과는 모두 허사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 모든 실패를 보며 ‘확실한 자기 사람’으로 차기 관리를 택한 듯하다. 그것도 대권후보 한 명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떤 ‘세력’의 도모를 꿈꾸는 듯하다. 왕조적 열정으로 무장한 ‘TK(대구·경북)’라는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다. 정권은 끝나도 ‘TK의 군주’로 여권의 정치적 상왕은 가능할지 모른다.
권력 영속의 욕망은 그러나 논리적으로도 백일몽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정권 재창출의 평가는 국민의 몫이다. 정치권이 어떤 무대를 만들어도 마지막은 국민 평가란 현실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국민의 이목을 모두 가리지 않는 한 성공하기 어렵다.
둘째, 어찌어찌해 잠시 국민 이목을 가리는 데 성공해도, 새로운 권력은 늘 과거 권력을 부인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치권 유행어는 ‘배신’이다. 배신을 안 당하려 기를 쓸수록 배신 확률이 높다는 암시만 줄 뿐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무서운 것은 시간이다. 바로 ‘망각’이다. 이게 결정적이다. 지나간 권력은 점점 관심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망각’의 늪을 피하려 기술을 부릴 수 있지만, 그럴수록 관심보다는 짜증과 실망만 만들어내기 쉽다. 결국 그건 배신과 망각, 몰락을 더욱 앞당기는 길이다.
청와대발 정권 재창출 ‘작전’은 오히려 ‘망조’의 신호탄이기 십상이다. 박 대통령의 세력 만들기가 ‘못난 자식(친박)들 국회 취업시키기’ 같은 꼴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꼬리내리기냐, 작전상 후퇴냐’…아리송한 김무성의 ‘우선공천’10.5 경향
김무성 대표는 5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전략공천의 폐해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를 없애고 정치적 소수자와 현저히 경쟁력이 낮은 지역, 취약지역을 우선 추천지역으로 하자는 것”이라면서 “당헌·당규대로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우선공천’ 적용 가능성을 시사한 언론 인터뷰를 부연하는 것이었다. 최고위원회의에서 한 발언은 ‘우선 추천’이 ‘전략공천’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당 안팎은 물론 일반적으로 전략공천과 같은 제도로 평가받는 ‘우선공천’ 가능성을 시사한 것 자체가 ‘김 대표가 뒤로 물러난 것’이라는 해설이 힘을 얻고 있다......김무성 대표가 “정치생명을 걸겠다”고까지 한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는 사실상 물 건너간 상황이다.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로 격론이 벌어진 지난달 30일 의총 이후에도 “내가 있는 한 전략공천은 없다”고 몇 차례 공언한 김 대표가 이름만 다르고 사실상 내용면에서 사실상 전략공천과 같은 우선공천을 거론한 것 자체가 ‘국민에게 공천권을 돌려 드린다’는 대의명분을 크게 훼손한 것이란 비판이 당내에서부터 나온다.
5일 국회 새누리당 당대표실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김무성 대표가 서청원 최고위원의 발언을 듣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당장 ‘같은 편’으로 분류됐던 친이계 출신 정병국 의원이 이날 아침 거세게 비판하고 나섰다.
정병국 의원은 이날 평화방송 라디오에 출연, “만약에 (김 대표의 우선공천 실시 가능 발언이) 사실이라고 하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서 “(새누리당은) 상향식 공천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조항때문에 그동안 공천을 사천을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정병국 의원은 이어 “특별한 계파가 우위에 있을 때 자기들에게 유리한 공천을 하면서 ‘공천 학살’ 이런 얘기가 나왔다”면서 “그렇게 공천 받은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는게 아니라 결국 공천권자를 바라보고 정치를 했기 때문에 그동안 정치가 불신을 받았던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부산영화제서 영화인들 '세월호 피켓 시위'
[여기는 BIFF] 4일 박석영 감독이 시작... "우린 잊지 않았다"
▲ 4일오후 6시경 부산 해운대 영화의 전당 부근에서 '세월호의 조속한 인양'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진행한 박석영 감독(왼쪽). ⓒ 성하훈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월호 피켓 시위가 시작됐다.
4일 오후 6시경 영화 <스틸 플라워>로 초청받은 박석영 감독이 동료 PD와 함께 해운대 영화의 전당 부근에서 피켓을 들었다. 피켓엔 "세월호 인양! 아직 세월호에 사람이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날 약 한 시간가량 시위를 한 박 감독은 <오마이스타>에 "상업-독립 영화를 아우르는 영화인 연대 모임에서 해보자는 말이 나와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 감독은 "(사고 이후) 바뀐 게 아직 아무 것도 없고, 유족 분들도 힘들어 하고 계신다"며 "시위를 한 것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조속하고 성의 있는 인양 작업을 촉구하고 유족 분들에게 영화인들이 그 사건을 잊지 않고 있다며 힘을 실어 드리기 위해서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박 감독은 "시간이 맞아서 첫 번째 시위자가 됐는데 다른 영화인도 피켓을 들 예정"이라며 "시간과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영화제가 열리는 해운대 부근 곳곳에서 마음이 맞는 분들이 피켓을 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영화인들이 사회문제를 놓고 연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2011년엔 정지영·권칠인 감독 등이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을 응원하는 시위 및 가두행진을 했고, 같은 해 김꽃비 등의 배우도 레드카펫 행사에서 피켓 시위를 했다. 지난해엔 영화의 전당 부근에서 영화인들이 '진상규명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1123인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미국의 대외 정책은 자본가들이 만든다 10.5 프레시안
['전쟁 국가' 미국] '제국의 두뇌 집단' 미 외교협회(CFR) ①
외교협회와 미 대외 정책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주된 목적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가 아니었다. 세계를 미국 주도의 단일한 자본주의 체제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금융과 제조업 및 농업의 대외 진출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전쟁 목표는 미국 정부가 수립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금융가, 대기업가, 그리고 이들을 위해 복무하는 국제변호사와 학계 인물들로 구성된 외교협회(CFR : Council on Foreign Relations)라는 민간 조직이었다. CFR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과 평화 연구(The War and Peace Studies)'라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2차 대전 후 세계 정치경제 질서의 밑그림을 만들어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대체로 이 밑그림에 따라 재구성됐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로렌스 슢과 윌리엄 민터가 공동 저술한 <제국의 두뇌 집단 : 외교협회와 미국의 대외 정책(Imperial Brain Trust : 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을 바탕으로 CFR이 미국의 대외 정책에 미친 영향을 몇 회에 걸쳐 알아보기로 한다. 이 책은 1977년 먼슬리리뷰(Monthly Review)에서 간행됐다.
▲ <제국의 두뇌 집단: 외교협회와 미국의 대외정책>, 로렌스 슢·윌리엄 민터 공저
1921년 창립된 외교협회(CFR : Council on Foreign Relations)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교 관련 싱크탱크다. 특히 2차 대전에서 1970년까지 약 30년간 미국의 대외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진짜 국무부'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J. P. 모건, 록펠러 등 세계 최강의 금융 재벌 및 대기업 임원, 학계 저명 인사와 정부 고위 관리, 기업 변호사와 언론인 등 미국의 최고위 인사들로 이루어진 CFR은 2차 대전 발발 직후부터 6년간 지속된 '전쟁과 평화 연구(The War and Peace Studies)'를 통해 전후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세계자본주의 체제 구축을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 이를 위한 국제기구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그리고 유엔 창설을 주도한 것도 바로 CFR이었다. 일본에 대한 핵공격 결정, 미국의 핵전략 수립, 베트남 전쟁 개입, 중국과의 화해에도 CFR은 주도적 역할을 했다.
역대 미 국무장관 중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헨리 키신저가 외교 전략가의 경력을 쌓은 것도 CFR에서였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역시 CFR 출신이다. CFR은 미 대기업의 해외 팽창이 곧 미국의 국익이라는 동의(consensus)를 창출함으로써 대외 군사 개입의 근거를 만들어냈다. 미국 기업의 해외 진출을 위해서는 때에 따라 군사적 강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8년 베트남전의 실패가 분명해지면서 CFR은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됐고, 1970년대 이후 CFR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FR은 여전히 미국의 대외 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CFR이야말로 진짜 국무부다"
CFR은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를 발행하는 단체로 잘 알려져 있다. 외국 국가 원수를 초청해 연설을 듣는 미국 저명 인사들의 사교 모임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대중 대통령도 CFR에서 연설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책 <제국의 두뇌 집단>이 발간된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CFR의 구체적 활동 내용은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활동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CFR의 활동을 추적한 이 책의 저자들은 CFR이 2차 대전 후 미국의 세계 지배를 이끈 '제국의 두뇌 집단'이라고 말한다. CFR이 2차 대전에서 1960년대 말까지 미국의 대외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외교협회 회원들은 미국 정부, 기업, 학계, 언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들로 구성돼 있다. 협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 대외 정책의 기본 개념을 설정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다" (<뉴욕타임스>, 1966년 5월 15일)
"외교협회는 미 대외 정책의 주류 세력(Establishment)" (<뉴스위크>, 1971년 9월 6일)
"외교 협회는 미국의 어떤 민간 단체보다도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다" (언론인 시어도어 화이트, <대통령 만들기>(1965년))
"외교협회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민간 단체로, 종종 이 단체야말로 '진짜' 국무부라는 얘기를 듣는다" (마빈 칼브와 버나드 칼브. <키신저>(1974년))
"미 국가 안보 기구의 책임자가 되길 원한다면 외교협회 회원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리차드 바넷, <전쟁의 뿌리>(1972년))
CFR의 막강함은 이 단체의 구성 인원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이 책이 쓰여질 당시(1976년) CFR 의장은 미국 최고 갑부인 데이비드 록펠러였다. 또 록펠러 이전 1940년대까지 미국 최대 금융 재벌이었던 J. P. 모건 등 뉴욕의 국제 금융가들이 회원이었다. 1953~1961년 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 비밀공작을 통한 외국 정부 전복 등 은밀한 대외 정책을 수행했던 알렌 덜레스는 1927년부터 그가 사망한 1969년까지 42년간 CFR 회원이었으며 총재를 역임했다. 그의 형 존 포스터 덜레스 전 국무장관(1953~1959년)도 CFR 회원이었다. 알렌 덜레스의 뒤를 이은 존 매콘을 비롯하여 리차드 헬름스, 윌리엄 콜비, 조지 부시 등 1970년 중반까지의 CIA 국장 모두가 CFR 회원이었다. 케네디 정부와 존슨 정부 당시 대외 정책 담당 고위 관료의 절반 이상이 CFR 회원으로 충원됐다.
미국의 양대 신문인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의 사주 아서 설즈버거와 캐서린 그레이엄, 그리고 <타임>, <라이프>의 헨리 루스를 비롯해 월터 리프먼, 데이비드 할버스탐, 제임스 레스턴 등 쟁쟁한 언론인들도 회원이었다. 하버드대, 존스홉킨스대 총장 등 쟁쟁한 학자들도 포함됐다. 한마디로 CFR은 미 금융 및 산업계의 부자들과 정·관계의 권력자, 그리고 학계 언론계의 최고 브레인들이 모여 미국의 세계 경영을 주도하는 단체였다.
미국에서 주류세력(Establishment)이란 말은 20세기 초에서 1960년대까지 미 정계와 경제계를 좌지우지했던 뉴욕 등 동부 지역의 정치 및 경제 주도 세력을 지칭한다. 미국 주류 세력의 대부로 통하는 존 매클로이(1895~1989년 : 변호사 겸 은행가, 2차 대전 당시 전쟁부 차관보를 시작으로 CFR 의장, 세계은행 총재, 독일 고등판무관, 체이스맨해튼은행 총재 역임)는 "대외 정책과 관련해 사람이 필요할 때면 CFR 회원 명부를 뒤적여 뉴욕에 전화를 걸면 됐다"고 말한다. <뉴욕타임스> 출신의 저명한 언론인 시어도어 화이트는 "외교 협회는 한 세대에 걸쳐 민주, 공화당을 막론하고 차관보급 이상의 고위 외교 관리를 선발하는 인재 풀"이었다고 지적한다.
케네디가 CFR의 장관 천거를 받아들인 이유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한 CFR의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우선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초기 인선 과정. 미국에서 주류 세력은 앵글로색슨계 백인에 개신교도이어야 했다(WASP :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케네디는 아일랜드계 이민 3세이며 가톨릭교도로 주류 세력의 일원이 아니었다. 따라서 1960년 대선에서 간발의 차이로 닉슨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주류 세력의 신임을 얻어야 했다.
이 때문에 그가 가장 먼저 장관직을 제의한 사람은 공화당원이며 CFR 회원이자 존 매클로이와 쌍벽을 이루는 주류 세력의 거물 로버트 로벳(1895~1986년 : 전쟁부 차관, 국무부 차관, 국방부 장관 역임)이었다. 로벳은 건강을 이유로 제의를 고사했고 대신 국방 장관에 로버트 맥나마라, 국무 장관에 딘 러스크, 재무 장관에 더글라스 딜론를 천거했다. 케네디는 로벳의 천거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 속사정에 대해 케네디의 핵심 측근이었던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케네디의 인맥에는 한계가 있었다. (…) 특히 뉴욕의 금융계 및 법조계에는 아는 인물이 거의 없었다. 이곳은 오랫동안 민주, 공화 양당에 주류적 사고를 하는 유능한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인재의 보고였다. 이러한 인재 충원이야말로 미국 주류 세력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핵심 비결이었다. 주류 세력의 원조는 엘리후 루트와 헨리 스팀슨, 현재의 지도자는 로버트 로벳과 존 매클로이다. 주류 세력의 전위조직으로는 록펠러, 포드, 카네기 재단, 그리고 CFR, <뉴욕타임스>, <포린어페어스>를 꼽을 수 있다.
뉴욕의 주류 세력은 케네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 그러나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마당에 주류 세력은 그를 도울 용의가 있었다. 케네디 역시 대통령으로서 그들의 도움을 받을 준비가 돼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류세력의 의심을 불식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뛰어난 외교 전략가 키신저와 브레진스키를 배출한 CFR
무명의 하버드대 교수였던 헨리 키신저를 미국 최고의 외교 전략가로 키워낸 것도 CFR이었다. CFR은 1954년, 당시 31살의 키신저에게 미국의 핵무기와 대외 정책에 관한 연구를 맡겼다. 그해 1월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CFR 모임에서 천명한 아이젠하워 정부의 핵심 외교 정책 '대량 보복 전략'에 대한 이의 제기였다.
당시 덜레스는 제3세계 등에서 소련이 도발할 경우 핵무기에 의한 대량 보복으로 맞서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소련이 게릴라 전술 등의 저강도 도발을 할 경우에도 핵공격으로 대응할 수 있겠느냐는 게 CFR의 문제의식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베트남군에게 패배했을 당시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으나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키신저는 3년의 연구 끝에 1957년 <핵무기와 대외 정책>이란 책을 펴냈고, 이 책은 외교 관련 서적으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됐다. 무려 14주일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것이다. 키신저는 이 책 하나로 단숨에 미국 외교가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키신저의 처방은 소련의 저강도 도발에 미국은 반(反)게릴라 전술(Counter-Insurgency) 등 재래식 전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처방은 케네디 정부에서 '유연 대응 전략'이란 외교 방침으로 현실화된다.
▲ 1983년 방한한 헨리 키신저. 일정을 마치고 출국하기 전 김포공항에서 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61년 키신저는 "내가 대외 정책에 관해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은 CFR을 통해서였다. 이후 나는 CFR과 지속적 관계를 유지했고 이 단체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세월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고 술회했다. 1969년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키신저는 닉슨과 포드 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중국과의 역사적 화해, 소련과의 군비 통제 협상 시작, 베트남전 종결 등 미국 외교사에 화려한 발자취를 남겼다.
키신저의 지인이며 CFR 회원인 한 인사는 "CFR 참여는 키신저의 생애에서 하버드대 입학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면서 키신저는 "CFR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내준 지원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그의 개인적 성장에서 CFR이 갖는 중요성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CFR 참여가 키신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CFR을 통해 외교 전략가의 입지를 굳혔을 뿐만 아니라 미국 최고 갑부인 록펠러 가문과 인연을 맺었고, 나아가 록펠러 가문의 비서와 결혼까지 했던 것이다.
키신저는 CFR의 터줏대감(1922년 <포린어페어스> 창간부터 50년 간 편집인을 역임) 해밀턴 피시 암스트롱에게 "당신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냈습니다(You invented me)"고 고백했다고 한다.
브레진스키 역시 CFR을 통해 외교 전략가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73년 CFR의 후속 조직으로 만들어진 삼각위원회(The Trilateral Commission)의 사무총장으로 일했으며 삼각위원회의 전폭적인 지지로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백악관 국가안보좌관으로 발탁됐다. 키신저가 중국과의 화해로 소련과의 대결에서 미국의 우위를 만들었다면, 브레진스키는 소련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끌어들임으로써 결국 소련 해체에 이르도록 한 장본인이다. 미국 외교사에 중대한 발자취를 두 인물이 CFR을 통해 배출된 것이다.
CFR과 팔레비 그리고 카스트로
CFR은 1922년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전 총리를 뉴욕에 초청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외국 지도자들을 불러들여 이들의 강연을 들었다. 1959~74년 25년 동안 초청된 외국 정상은 무려 59명에 이른다. 영국의 에드워드 히스, 해롤드 윌슨 총리를 비롯해 독일의 루드비히 에어하르트,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총리,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세 다얀 총리 등이 그들이다. CFR의 영향력은 외국 지도자와 관련한 다음 두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란의 독재자 팔레비 국왕(재위 1941~79년)은 CFR을 통해 록펠러 가문 등과 인연을 맺은 뒤 미국 최고위 인사들의 극진한 대접과 전적인 지원을 받은 반면, 쿠바의 카스트로는 혁명 직후 CFR과의 첫 상견례에서 사이가 틀어진 뒤 미국과 적대적 관계로 돌아선 것이다. 팔레비 국왕은 1949년, CFR 회원인 알렌 덜레스가 주선한 뉴욕에서의 '사적인 만찬'을 통해 넬슨 록펠러, CIA의 전신 전략첩보국(OSS)을 창설한 윌리엄 도노반, 언론 황제 헨리 루스 등 최고위층 인사 100여 명을 만난다. 1953년 CIA 최초의 해외 비밀 공작인 이란 모사데크 정권 전복 이후 실권을 장악한 팔레비 국왕은 이후 닉슨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중동의 군사 맹주로 떠오른다.
닉슨 정부는 1972년부터 팔레비가 원하는 대로 미국의 최첨단 무기를 판매했다. 또한 이란의 비밀경찰(SAVAK)을 도와 팔레비의 철권통치를 유지시켰다. 이란에 대한 최첨단 무기 판매는 미국의 해외 무기 판매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전에는 최첨단 무기를 우방국에도 판매하지 않았었다. 이는 베트남 전쟁 패배 이후 각 지역의 안보는 그 지역 국가들이 맡는다는 '닉슨 독트린'에 따른 것이었다. 즉 이란을 중동의 군사 강국으로 키워 지역 경찰로서 미국의 역할을 대신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1973년 1차 석유위기 이후 악화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만회하기 위한 목표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팔레비는 이란의 모든 석유 수출 대금 및 미제 무기 수입 대금을 오로지 록펠러 가문 소유의 체이스맨해튼은행을 통해서 했다. 1979년 이전 체이스맨해튼의 한 해 예금 중 절반이(150억 달러) 이란의 석유 대금이었다고 한다. 팔레비 국왕과 록펠러 가문 사이에 끈끈한 유착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 유착관계가 1979년 11월 미 테헤란 대사관 인질 사건 및 이란 이슬람 혁명의 단초가 된다.
1979년 1월 이후 해외를 전전하던 팔레비 국왕에 대한 미국 망명 허용이 미 대사관 점거의 빌미가 된 것이다. 1978년 11월에 시작된 반정부 시위로 팔레비 국왕은 1979년 1월 해외 망명길에 오른다. 이후 이란의 반정부 세력 내에서는 세속파 대 이슬람파 간의 암투가 벌어진다. 당시 아볼 하산 바니사드르가 이끌던 세속파 혁명 정권은 친미 노선을 유지했다. 반면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은 반미 노선이었다. 이 과정에서 1979년 10월 팔레비의 미국 망명이 허용되자 이를 미국의 반혁명 음모로 파악한 이슬람 세력이 미 대사관을 점거하면서 444일간의 인질극을 벌였고 이를 통해 이슬람 세력은 세속파 정권을 몰아내고 혁명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다. 1953년의 모사데크 축출 공작이 미 대사관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런 의심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팔레비의 미국 망명 허용이 당시 카터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록펠러 가문 및 이들의 심복인 키신저와 브레진스키가 밀어붙인 결과였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오랜 친구인 팔레비를 위해 대통령의 반대를 무릅쓰고 팔레비의 미국 망명을 허용한 것이다. 만일 팔레비의 미국 망명이 없었다면 미 대사관 점거도 없었을 것이고, 이란에는 미국에 적대적이지 않은 세속적 민주 정권이 들어섰을 것이다.
한편, 1959년 1월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 혁명에 성공한 피델 카스트로는 1959년 4월 CFR의 초청을 받아 뉴욕 프랫하우스에서 연설을 했다. 당시 미국의 경제계 인사들은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성향을 의심했으며 실제로 그의 정치 성향이 어떤지를 알기 위해 그를 초대했다. 카스트로의 연설에 대한 CFR 회원들의 반응은 적대적이었다고 한다. CFR 회원들은 카스트로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 쿠바 국민들의 시민적 자유를 보장할 것인지, 특히 쿠바 내 미국인 재산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 피델 카스트로. ⓒ프레시안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카스트로는 "여기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신체의 자유인가 아니면 음식 한 접시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회원 한 명이 "쿠바는 얼마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경제 지원을 통해 쿠바를 매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카스트로는 "우리는 당신들의 돈을 원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존중을 원한다"고 답했다.
이후 가시 돋친 설전이 오갔고 카스트로는 "나는 당신들의 친구가 아님을 알겠다"고 말한 뒤 회의장을 나갔다고 한다. 카스트로는 미국 최고 엘리트와의 관계에서 그들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후 카스트로는 쿠바 내 미국인 자산을 국유화했고, 미국은 경제 봉쇄를 단행했으며 1961년 피그만 침공을 시작으로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위한 온갖 공작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이 책의 저자들은 "CFR이 원하는 것은 세계에 걸쳐 기존 재산 관계의 현상유지"라고 말한다. 즉 세계 어디서든 자신들의 재산권이 존중되는 것이 미국 지배 계층의 최우선 관심사라는 것이다.
CFR의 탄생 : 영미의 세계 지배를 위한 브레인
CFR은 1921년 7월 29일 뉴욕에서 공식 출범했다. 두 단체가 합병한 결과였다. 하나는 1917년 9월 윌슨 대통령의 개인 보좌관 에드워드 하우스 대령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의 장기적 대외 정책 구상을 위해 결성한 '탐구(Inquiry)'라는 연구 조직이다. 여기에는 미국 지리학회 회장(1915~1935년)과 존스홉킨스대 총장(1935~1948년)을 역임한 미국 최고의 지정학자 이사야 보먼(1878~1950년)을 비롯한 학계 인사와 언론인과 변호사 등 150명이 포함돼 있었다.
'탐구'의 연구 책임자는 당시 28세의 젊은 언론인 월터 리프먼이었다. 이 가운데 보먼과 월터 리프먼, 변호사 알렌 덜레스 등 21명이 1919년 1월 윌슨 대통령과 함께 파리에 갔다. 20여 년이 지나 리프먼은 미국 최고의 언론인이 됐고(냉전 'Cold War' 란 말은 그가 만들어냈다), 덜레스는 CIA 창설(1947년)을 주도하고 8년간(1953~1961년) CIA 국장을 지냈으며, 그의 형 존 포스트 덜레스는 국무장관(1953~1959년)을 맡는 등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탐구' 측 인사들은 1919년 5월 30일, 파리 마제스틱호텔에서 영국 '라운드 테이블' 인사들과 만나 양국에 각각 '국제관계연구소(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회원에게 최신 국제 정세를 알려주며 양국의 대외 정책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는 것이 설립 목표였다.
라운드 테이블은 19세기 후반 남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와 금 채굴로 어마어마한 부를 쌓아올려 아프리카의 최대 실력자로 군림했던 세실 로즈(Cecil Rhodes, 1853~1902년)에 의해 1891년 창설된 비밀조직이다. 골수 제국주의자인 로즈는 영어권 세계의 단일 제국을 건설한다는 엄청난 야망을 품고 있었다. 로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재 세계는 여러 나라들로 조각나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땅들도 갈라지고, 정복되고, 식민화됐다. 밤하늘 창공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류가 결코 닿지 못할 저 광대무변의 우주를 보면서 나는 차라리 저 별들을 합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필생의 야망은 대영 제국의 세력권을 더욱 넓히는 것, 그리하여 문명화되지 않은 지역 전체를 영국의 지배권 아래 두는 것이다. 미국 땅을 되찾아오고 (독일을 포함한) 앵글로색슨족을 하나의 제국 아래 통일하는 것이다."
이 거창한 야망을 위해 로즈는 1891년 대영 제국의 보전과 확장을 위한 세계적 차원의 비밀 기구 창립을 제안했다. 라운드 테이블의 창립 목적은 대영 제국의 세력권을 단일한 제국 정부 아래 통합시킨 '유기적 연맹(organic union)'을 설립하는 것, 나아가 이 제국에 다른 국가들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필요 자금은 로즈가 유산으로 남긴 로즈 신탁(Rhodes Trust)에서 충당하도록 했다. 클린턴 대통령 등 미국의 유력 정치인들이 받은 로즈 장학금도 바로 이 로즈 신탁에서 나온 것이었다. 1960~70년대 아프리카의 백인 지배 국가로 악명을 떨쳤던 로디지아(Rhodesia, 1965~1979년)도 로즈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로디지아는 현재의 짐바브웨다.
▲ CFR 홈페이지 갈무리.
라운드 테이블에 관한 연구서를 펴낸 캐롤 퀴글리(1910~1977년, 미 조지타운대학 교수)에 따르면 이 조직은 보어전쟁(1899~1902년)을 일으켰고, 1890년대 초부터 50년 간 영국 최고 권위지인 <더 타임스>를 지배했다. 또한 1차 대전 당시 영국의 전쟁 목표 설정 및 국제연맹 창설 등 전후 처리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나아가 1920~1939년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을 주도했다. 유화 정책은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파탄 났고, 1945년 총선에서 라운드 테이블이 지원하던 처칠의 보수당 정권이 패배하면서 라운드 테이블의 영향력이 약화됐다고 한다.
보어전쟁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네덜란드계 정착민인 보어인들과 영국이 벌인 전쟁이다. 당시 영국은 인구 50만에 병력이 7만에 불과한 보어인들을 상대로 무려 4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3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21만 명을 강제수용소에 가둬 2만 명이 사망케 하는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1910년부터 잡지 <라운드 테이블>을 발간했는데 편집진과 필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라운드 테이블 지도자들 상당수가 파리 평화조약을 위한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파리에 왔다.
마제스틱호텔 모임을 주도한 사람은 미국의 역사학자 조지 루이스 비어와 '라운드 테이블'의 지도적 인물인 역사학자 라이오넬 커티스였다. 비어는 '탐구' 소속인 동시에 '라운드 테이블'의 미국 측 회원이었다. '라운드 테이블'은 미국에도 회원을 두고 있었는데 '탐구' 소속으로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한 J. P. 모건은행의 토마스 라몬트, 로즈 장학생인 휘트니 셰파드슨 등이 라운드 테이블 회원이었다. 즉 영국 라운드 테이블 측에서 미국의 유력 인사들을 끌어들여 영-미 공동의 세계 경영을 위한 연구 조직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1918년 6월 뉴욕 금융가 및 기업가와 이들의 조력자인 국제 변호사들의 사교클럽으로 결성된 CFR이다. 이들은 국제 문제에 관심이 있으며 값비싼 만찬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가진 뉴욕의 유력 인사들로 '장래의 통상 활동과 관련해' 외국 정치인 등 저명 인사들의 강연을 듣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의장은 전쟁부 장관, 국무부 장관, 상원의원을 역임하고 노벨 평화상(1912년)을 수상한 공화당의 정치 거물 엘리후 루트(1845~1937년)였다.
루트는 슐레진저가 미 주류 세력의 원조로 꼽은 바로 그 인물로, 19세기 말까지 아메리카대륙의 지역 맹주에 머물러 있던 미국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 필적하는 세계 열강으로 도약케 한 장본인이다. 루트는 1870년대 초부터 30년간 대기업의 자문변호사로 활약했다.
이 시기는 남북 전쟁 이후 철도 건설 등 급속한 산업화에 의해 강도 귀족(robber baron)으로 불리는 대부호들이 속속 탄생하던 시기였다. 작가 마크 트웨인은 대부호들의 천박한 행태를 비꼬아 이 시기를 금칠한 시대, 즉 도금시대(Gilded Age)라고 불렀다. 또한 산업화에 따른 과잉생산으로 두 차례 심각한 공황(1873, 1893년)이 발생하면서 미국 경제의 해외 팽창이 절실한 때였다.
30년간의 기업 변호사 생활에서 루트는 미국 대기업의 필요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해외 진출이었다.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필리핀을 식민지로 획득하고 쿠바를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들면서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해외 진출을 시작했고, 이와 함께 열강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스페인 전쟁 직후 전쟁부 장관(1899~1904년)에 임명된 루트는 군 합동참모회의와 육군대학을 창설하는 등 군 현대화 작업에 앞장섰다. 미국 경제가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택에 미국은 중국, 필리핀, 카리브해를 비롯한 중남미 지역에 대한 군사 개입을 단행할 수 있었다.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이 '자본가의 조폭'으로 활동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루트는 또한 미국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인식했고, 미국 엘리트들 간에 이러한 국제주의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CFR은 바로 이런 필요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부자와 권력자, 그리고 지식인들을 한데 모아 20세기 미국의 대외 진출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탐구'와 라운드 테이블의 마제스틱 호텔 합의 후 영국은 왕립국제문제연구소(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일명 Chatham House)를 설립했지만 미국 측의 연구소 설립은 진전을 보지 못했다. 때마침 1918년 결성된 CFR도 1920년부터 활동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1921년 2월부터 탐구 측과 CFR이 협상을 벌여 7월 말에 합병이 성사됐다(1922년의 회원은 약 300명). 모임의 명칭은 CFR Inc.로 결정됐다.
합병으로 출범한 CFR의 명예의장은 엘리후 루트, 의장은 존 데이비스(1873~1955년)였다. 데이비스는 윌슨 정부에서 법무부 차관과 주영 대사를 역임한 뒤 1924년 대선 후보로 나섰던(캘빈 쿨리지에게 패배) 민주당의 정치거물이었다. CFR과 '탐구'의 합병이 재력과 두뇌의 결합을 의미한다면,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치 거물인 루트와 데이비스를 지도자에 앉힌 것은 미국의 대외 팽창을 위한 초당적 합의를 겨냥한 것이었다.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국제연맹에 대한 미국의 가입이 의회에서 거부된 것은 루트와 같은 공화당의 정치 거물을 설득해내지 못한 탓이라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계속)
문재인과 안철수는 답하라, "누구 편이냐?" 9.14 프레시안
[서리풀 논평] 정당과 '혁신'의 앞날을 묻는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
평범한 사람들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선거다. 또, 선거를 통해 정치 행위자인 정당을 만나기 때문에 그 때나 되어야 비로소 정당을 경험한다. 이것이 한국 정치와 정당의 현실이라면, 정당은 아직 일상이라 할 수 없다.
선거가 한참 남았는데도 정당(또는 정당이 되려는 세력)이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른바 제1야당의 혼란과 난맥이 두드러진다. 국정 감사 와중에 이번 주가 정점을 찍을지도 모르겠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하는 말 한 가지. 홀로 비판받을 일은 아니니 당사자들은 억울해 하지 마시라, 무릇 정당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반면교사로 삼을 뿐이다.
또한 미리 말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한참 떨어진 자리에서 관전평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과 보건의료의 현실 역시 지극히 정치적이라고 할 때 정치의 실력은 우리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 시끄러웠던 메르스, 지리멸렬한 후속 대책을 보라. 응급실 개선은 어디로 가고 공공 병원의 앞날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정당과 정치가 오늘과 같지 않았다면 후속 조치 또한 다르리라 확신한다.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첫 번째 현상은 계파 또는 정파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현대 정당이 박정희 시대의 여당이나 유신정우회 같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나누어 다투고 경쟁하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 한국의 메이저 정당들의 파당은 나누고 나누어진 기준이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친박'과 '비박'은 무엇이며 '친노'와 '비노'는 또 누구인가. 이름부터 그렇지만 이런 잣대가 무슨 정파라고 할 수 있는지 민망하다. 하다못해 매파와 비둘기파라는 소박한(?) 구분이 여러 모로 더 낫다.
유력한 정치인을 중심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오래된 전통이라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언제까지 이런 일을 답습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과거에는 정치 자금이라는 현실적 이유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닐 텐데 왜 그러는지 큰 수수께끼다.
두 번째는 '혁신'의 정체를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느 정당이든 무슨 힘든 일만 있으면 '환골탈태'와 개혁과 혁신을 내세운다. 지금의 제1 야당도 선거 후에 참패를 반성한다면서 '혁신위원회'를 만들지 않았던가. 여당이 과거에 천막 당사를 만들고 내세웠던 것도 마찬가지다.
당명, 로고, 간판, 당사를 바꾸는, 딱 거기까지. 혁신과 개혁이 요란하지만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다. 무엇을 혁신하겠다는 것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혁신된 미래의 모습은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이해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면 누가 친절하게 설명해 줄 것을 부탁한다. 친노가 어쩌고 비노가 어떻다는 말이 언론에 보도되니 그러려니 할 뿐, 혁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혁신하려고 하는 것은 정당의 지향성인가 정당을 구성하는 방식인가, 그도 아니면 유권자를 대표하는 방식인가. 만약 내부 사람만 알면 되는 것이면, 내세우지 말고 그냥 조용하게 내부 일로 하시라.
셋째로, 경쟁의 방식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집권을 바라는 경우는 당연히 정당끼리 경쟁해야 하고, 정당 안에서도 유력한 정파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경쟁을 피할 수 없다. 흔히 정치를 대안과 가치에 대한 경쟁이라 하지만, 지금의 정당이나 정치 지도자는 무엇을 어떻게 경쟁하고 있는가?
현실 정치의 이성은 오래되고 익숙한 정치 지형(예를 들어 연고)에 의존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여당은 그렇다 치고, 기존의 질서 안에서 늘 불리할 수밖에 없는 야당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실망스럽다. 토대가 충분치 않다는 것은 오래 된 이유였다. 터무니없는 핑계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여론 조사로 정당의 의사 결정을 대신하는 웃지 못 할 상황, 이 조차도 현실의 정당 조직과 구성원을 떠올리면 이해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참인가.
세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을 열거했지만, 상세한 것까지 포함하면 보탤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의 핵심은 한 가지로 모인다. 한국 정당, 그 중에서도 오늘 말하는 제1 야당의 갈등과 경쟁, 투쟁, 그리고 혁신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정당은 뿌리부터 '제대로' 바뀌어야 한다!
혁신의 방향을 주장하기 전에 냉소를 먼저 짚어야 하겠다. 우리가 정당 혁신을 요구하는 것은 여전히 좋은 정치와 정당을 필요로 하는 엄혹한 현실 때문이다. 임금 피크제, 청년 실업과 일자리, 자영업의 몰락, 복지 후퇴, 국민건강보험료 부과…. 크고 작은 사례는 열거하기에도 벅차다. 요컨대 우리의 고단한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정당을 우회할 방법이 없다. 냉소와 조롱이 아니라, 현실 정치를 압박해야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
또 한 가지, 늘 그래 왔다고 무력함과 '소용없음'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 일이다. 정치라면 우리보다 훨씬 더 관성과 경로가 공고할 법한 유럽 국가들을 보라.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은 이미 집권당이고, 스페인의 포데모스는 2014년 창당 20일 만에 당원 수 3위의 거대 정당이 되었다. 영국 노동당도 이제 막 '극좌' 제러미 코빈이 당 대표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적 옮음이나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과 맥락이 다르지만, 기반부터 요동하는 다른 공간은 기득권과 관행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는 좋은 교훈이 되고도 남는다.
지연과 학연, 그리고 수많은 연고를 넘어선, 가치와 지향을 중심으로 한 정당과 정파, 그리고 이에 기초한 혁신을 촉구한다. 현실의 어려움과 토대의 한계를 말하지 말라. 그런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현실 정치의 전문가인 그대들이 할 일이다. 다른 모든 현실 정치의 요소는 여기에 복종해야 한다.
가치와 지향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호하다면, 보건의료에서 몇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정치의 이념과 비전이 한 분야에만 홀로 관철되기 어렵다면, 보건의료의 지향은 또한 경제와 노동, 교육, 복지에 연결된다. 다른 분야에서 무엇을 물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기 바란다.
보건의료의 가치가 포함하는 구체적 내용은 2014년 2월의 <서리풀 논평>에서 '안철수 신당'에 물은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힌다. (☞관련 기사 : '신당'은 무엇을 하려는가)
첫째, 건강과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적 사회 보장과 민간 보험의 역할 분담, 보건의료 공급의 주체와 방식(예를 들어 공공 병원), 보건소와 지방의료원, 국립 병원의 역할, 민간 병원이 기여할 바에 명확한 입장이 있어야 한다.
둘째, 보건의료 영리화, 산업화, 시장화에 대한 명확한 태도를 묻는다. 이것이 정권과 정부의 정치경제적 노선이라고 이해한다면 어느 정당도 모호한 태도를 가져서는 자격이 없다. 보건의료는 상품과 산업, 영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기본권이자 삶의 질, 또는 복리인가.
셋째, 불평등에 대한 입장이 중요하다. 다른 배분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건강의 분포도 정의의 핵심 질문이다. 소득 불평등이 더욱 깊어질 것이 뻔한데, 혁신된 정당은 성장을 위해 불평등을 감수할 것인가, 온 힘으로 저항할 것인가.
정파가 나누어지고 이들 사이에 경쟁과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혁신은 더욱 더 그렇다. 다만, 그 경쟁과 투쟁, 그리고 혁신은 가치와 지향을 중심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혁신도 현실 정치를 핑계로 한 정략일 뿐이다.
내침 김에 보태자. 이제 '신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길 텐데, 이들에게도 같은 것을 묻는다. 지역 연고와 개인의 친소 관계, 당선 가능성, 이런 것 말고 당신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만들든 뭉치든 헤어지든, 이것만은 명확히 밝혀 달라.
KT&G 간부, 협력업체에 1억원어치 술값 달아놔 10.6 노컷뉴스
KT&G 현직 간부가 협력업체 앞으로 1억원어치의 술값을 달아놓거나 법인카드를 대신 쓰고, 명품을 받는 등의 갑질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KT&G 비리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김석우 부장검사)는 거액의 금품과 향응을 주고받은 혐의로 KT&G 신탄진제조창 생산실장 구모(46)씨와 담뱃갑 인쇄업체 S사 대표 한모(60)씨를 구속기소했다고 6일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구씨는 2007년 5월부터 올해 4월까지 협력업체 지정을 돕고 납품단가를 유지해주는 대가로 S사로부터 7억6천94만원 상당을 챙긴 혐의(배임수재)를 받고 있다.
구씨는 제조기획부 과장이던 2007년부터 수출용 '에쎄 스페셜 골드'의 인쇄방식 변경을 돕고 납품단가 인하 폭을 줄여주는 대가로 S사에서 1갑당 3원씩 계산해 6억2천700만원의 리베이트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구씨와 함께 이 돈을 챙긴 KT&G 전 부사장 이모(60)씨는 지난달 15일 구속기소됐다. 부장으로 승진한 2011년부터 구씨는 인쇄물량을 늘리고 납품기일을 연기해주는 등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대가로 공짜술을 마시는 등의 향응을 제공받았다. 구씨가 대전의 유흥주점에서 술을 마시면 S사 영업부장이 나중에 계산하는 방식으로, 2011년 11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9천485만원의 술값을 지출했다. 구씨는 S사 법인카드를 넘겨받아 2천211만원을 긁는가 하면, 300만원어치 백화점 상품권과 498만원 상당의 명품 지갑도 받기도 했다.
S사 대표 한씨는 구씨 등에게 줄 뒷돈을 마련하려고 회삿돈 12억500만원을 빼돌린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도 있다.
日 노벨상 23명째…기초과학분야 정책적 육성·한 우물 파는 장인 정신이 뒷받침
일본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과학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 지식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재확인했다.
오무라 사토시(大村智·80) 일본 기타사토(北里)대 특별영예교수가 5일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결정돼 일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는 23명(미국 국적 취득자 2명 포함)이 됐다. 이 가운데 20명이 자연과학 분야의 수상자다. 작년에는 아마노 히로시(天野浩) 나고야대(名古屋大) 교수 등 3명이 '청색 LED' 개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야마나카 신야(山中伸彌, 왼쪽에서 6번째) 일본 교토대 교수가 2012년 11월 28일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것을 축하하는 저녁 식사 모임에서 일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 등과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된 일본인은 유도만능줄기(iPS)세포 개발 등으로 수상자가 된 야마나카 신야(山中伸彌) 교토대 교수(2012년)와 면역 항체의 다양성 해명으로 도네가와 스스무(利根川進) 미국 매사추세츠공대 교수에 이어 세 번째다. 역대 수상자 23명의 구성을 보면 물리학상 10명, 화학상 7명, 생리의학상 3명, 문학상 2명, 평화상 1명으로 과학분야의 수상 비율이 단연 높다.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1907∼1981)가 중간자의 존재를 예상해 194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66년 만에 과학분야에서 20명의 수상자를 배출한 것이다.
한국이 IT를 비롯해 과학과 연계된 산업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 외에 수상 실적이 없는 것과는 크게 비교된다.
역사적으로 일본이 아시아국가로서는 빨리 근대화를 시도하며 서구 과학을 수용한 것이나 1995년에 과학기술기본법을 제정해 과학 연구 예산을 확대한 것 등이 과학 기술 연구의 저변을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과학분야의 노벨상 수상자의 출신 대학(학부)은 도쿄(東京)대(4명)와 교토(京都)대(6명)에만 몰리지 않고 나고야(名古屋)대(3명)가 많다.
그러나 홋카이도(北海道)대(이하 1명), 도쿄공업대, 도호쿠(東北)대, 고베(神戶)대, 도쿠시마(德島)대, 야마나시(山梨)대, 나가사키(長崎)의과대(현 나가사키대) 등도 수상자를 배출한 점에 비춰보면 자연과학연구에서 특정 대학 독식이 상당히 완화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 작은 차이까지 꼼꼼하게 챙기면서 한우물을 파는 일본 특유의 직업 정신이나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분야에 몰입하도록 하는 사회 분위기도 노벨상 수상에 유리한 환경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학사출신의 민간 기업 회사원이던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씨가 2002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은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일본 과학계 사정에 밝은 이들은 장인 정신을 존중하는 중소기업이 일본 과학 기술 연구를 뒷받침하는 힘이 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일본의 노벨 과학상-왜 일본은 노벨 과학상에 강한가(책과 나무·161쪽·홍정국-최광학 공저)'라는 제목의 책을 최근 발간한 홍정국 재일한국과학기술자협회 회장은 올해 초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오래된 중소기업을 일본 노벨 과학상의 토대로 꼽았다.
그는 100년 넘게 한우물을 판 회사가 일본에 7만∼8만 개 있다면서 "이들이 핵심 기술을 몇 백년 간 유지했지만 똑같은 상품만 만든 것이 아니라 원천 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TPP, 한국만 빠져서 큰 일? 엄살이 심하네 10.6 미디어오늘
누울 자리나 보고 발을 뻗자… 이미 10개국과 FTA 체결, TPP 실익 불분명
미국과 일본 등 12개 회원국이 참여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5일 타결됐다.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8%, 교역량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경제 블록이 탄생했다. 조선일보는 6일 1면 기사에서 “한국만 빠진 슈퍼 경제동맹이 등장했다”고 평가했다. “환태평양 경제동맹의 낙오자가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한국경제는 사설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고 매일경제는 “주저 말고 대세의 흐름을 쫓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이왕 늦은 것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TPP 회원국 대부분과 FTA(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상황이라 TPP에 가입해서 얻는 실익이 확실치 않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한국은 12개 회원국 가운데 일본과 멕시코를 제외한 나머지 10개국과 FTA가 체결돼 있어 TPP 가입은 한일 FTA 체결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한일 FTA의 이해득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와 분석조차 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한겨레는 “정부와 경제단체 등에서 TPP 가입에 조급증을 내고 있지만 기존에 촘촘하게 짜놓은 FTA를 활용하는 게 낫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무리하게 TPP 가입을 추진하다 12개 참여국의 승인을 모두 받는 과정에서 비싼 입장료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경향신문도 “한국 입장에서 TPP 가입은 이익의 극대화보다는 손실의 최소화 측면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핵심 쟁점은 자동차 산업에 미칠 영향이다. 당장 일본이 자동차 부품을 미국에 수출할 때 붙었던 관세 2.5%가 철폐된다. 상대적으로 국내 자동차 부품 업체들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애초에 미국이 관세를 부과하는 자동차 부품이 많지 않은 데다 한국은 내년부터 관세 없이 미국에 자동차와 부품을 수출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이 TPP에 가입하거나 하지 않거나 달라질 게 없는 조건이다.
베트남과 캐나다 등이 완성차 관세를 철폐하기로 했지만 이 역시 한국은 이미 FTA를 체결하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 상대적으로 일본 자동차의 경쟁력이 높아지겠지만 이 역시 TPP에 가입하거나 하지 않거나 감수해야 할 조건이다. 오히려 TPP에 가입하면 일본 자동차 부품과 일본 완성차가 국내 시장을 잠식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국내 자동차 산업에는 TPP 가입이 득보다 실이 더 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조선일보 10월6일 사설.
IBK투자증권은 6일 보고서에서 “미국과 멕시코 등에 이미 한국 완성차와 부품 업체들이 동반 진출해 있기 때문에 실제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실제로 현대·기아차의 미국 공급량 가운데 현지 생산 비중이 현대차는 53%, 기아차는 47%에 이른다. 내년에 기아차 멕시코 공장이 가동되면 현지화 비중이 더욱 높아진다. 일본 자동차의 관세 철폐가 큰 의미가 없는 상황이다.
흥국증권 이승재 연구원은 “완성차의 경우 국내는 내년부터 미국 수출 관세가 철폐 되지만 일본은 30년 동안 단계적으로 철폐될 가능성이 높아 아직은 국내 업체가 유리한 상황”이라면서 “자동차 부품은 일부 영향이 있을 수 있지만 일본산 자동차 부품의 경우 관세 철폐 범위가 50%에서 80%로 확대됐지만 변속기와 기어박스 등 미국 기업이 보호하는 핵심 부품의 관세는 협정이 발효되더라도 당장 철폐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현대증권 채희근 연구원은 “2.5% 관세 철폐면 현지 공장 생산이 있더라도 1% 정도는 가격 경쟁력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한국 업체들 원가 경쟁력은 아직 훨씬 우위에 있기 때문에 관련 국가들에서 해외 수주에 큰 타격은 아닐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채 연구원은 “장기적으로 현지화율이 계속 높아지는 추세라 피해 강도도 점차 축소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상당수 언론이 한국이 TPP에 가입하지 않아 엄청난 불이익을 볼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전문가들의 분석은 대체로 차분하다. 흥국증권 안영진 연구원은 “직접적인 실효성 보다는 방어적 차원에서 가입을 검토할 필요는 있다”고 설명했다. 이왕 가입할 거라면 1차 회원국이 됐다면 좋았겠지만 2차 가입 과정에서 기존 회원국들이 무리한 조건을 내세워 참가비용이 늘어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istock.
TPP 출범을 보도하는 언론의 주장은 다분히 과장됐을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당장 TPP에 가입하지 않아서 낙오할 상황도 주저 말고 쫓아가야 할 상황도 아니다. TPP가 출범한다고 해서 기존의 FTA 효과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미국-일본의 경제 동맹에 합류하기 위해 중국과 협력을 다음 순위로 미룰 이유도 없다. 기업들은 비교적 조용한데 언론이 앞장서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 이미 개방할 대로 개방돼 있다. 자유무역의 첨병이라고 할 만큼 웬만한 나라들과 FTA를 체결해 왔다. TPP를 놓쳐서 세상이 뒤집힐 것처럼 떠드는 것도 한심하지만 가입만 하면 엄청난 성장을 담보할 것처럼 장밋빛 전망을 늘어놓는 것도 무책임하다. TPP는 미국과 일본의 잔치다. 굳이 그 자리에 숟가락을 못 놓아서 안달할 일도 없고 서둘러 밥그릇을 갖다 바칠 일도 없다.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TPP가 위력적인 변화를 불러오겠지만 필요하다면 한국도 일본이나 멕시코와 개별적으로 FTA를 체결하면 된다. 특히 일본의 경우 양국의 관세가 철폐될 경우 국내 산업이 받게 될 타격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가볍게 끌려다니기 보다는 오히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신중하게 줄타기하면서 존재감을 높이는 전략도 검토할 수 있다. 언론의 냉정한 분석이 아쉽다.
고영주, 박근혜 ‘친북행위’는 뭐라고 말할 건가 10.5 미디어오늘
[김종철 칼럼] 방문진 이사장의 ‘보컬 테러’… 증거도 없이 ‘주장’부터 하고보는 ‘한국판 매카시즘’
고영주가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쏟아낸 ‘보컬 테러(입으로 하는 테러)’에 관한 뉴스를 보고 ‘이 나라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하는 참담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박정희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정권 시기에도 그 어떤 언론사 경영자나 언론 관련 공공단체의 책임자가 국민의 대의기구인 국회에서 고영주처럼 ‘보컬 테러’를 태연히 자행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고영주가 국회에서 펼친 ‘보컬 테러 시리즈’는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장병완의 질문이 시발점이었다. “2013년 1월 프레스센터에서 ‘문재인은 공산주의자이고,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적화되는 것을 확신한다’고 발언했느냐”는 물음에 고영주는 단호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2013년 1월은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한 달 전이었다. 문재인은 그 발언이 ‘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고영주를 상대로 민형사소송을 제기했다. 고영주는 같은 당 의원 홍의락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문재인이 왜 공산주의자인지에 관해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저는 부림사건 재판 당시 (담당 검사였는데) 문재인 변호사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노무현 자서전인 ‘노무현의 외로운 전쟁’에 노무현이 문재인이랑 무료 변론했다(고 나온다). 두산백과사전에도 똑같은 내용이 있다. (···) 또 네이버 블로그 중의 부림사건에도 ‘인권변호사 노무현, 문재인’ 이렇게 나와 있다.”
그리고 고영주는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문병호가 같은 취지의 질문을 하자 “초안만 준비한 게 12쪽이다. 국가보안법 폐지하려고 같이 애쓰셨고 한미연합사 해체하는 데 관여하셨고, 연방제통일을 지지하셨다”고 대답했다. 문재인이 그랬는지 사실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에서 그런 움직임을 보인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라는 뜻이다.
▲ 지난 2일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국회 미래창조과학부 국정감사에 출석했다.
부림사건은 1981년 9월 부산에서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이 영장도 없이 불법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한 뒤 기소된 ‘용공조작 사건’으로 1천만 명 이상이 본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되었다. 부산지법은 재심을 청구한 5명에 대해 2014년 2월 무죄 판결을 내렸고, 대법원도 무죄를 확정했다. 그런데 당시 담당검사였으며, 서울남부지청 검사장을 지내고 변호사 개업을 한 고영주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노무현이 문재인이랑 무료 변론했다’는 이유로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라고 단정한 것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는가? 부림사건의 피고인들이 어떤 사상을 가졌건 간에, 그리고 그들이 고문당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변론을 맡은 사실만으로 ‘공산주의자’가 된다면 앞으로 그 어느 변호사가 두려움 없이 법정에 설 수 있겠는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홍의락이 국감장에서 “문재인이 무료변론 했다고 해서 공산주의자인가?”라고 고영주를 힐난하면서 “같이 활동하고 밥 먹고 가족이 같이 자고 밥 먹고 그러면 공산주의자가 되나”라고 물을 지경이었다.
고영주는 국감장에서 융단폭격 같은 ‘보컬 테러’를 계속했다.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0년 3월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뒤 '친북반국가행위자인명사전' 편찬을 주도한 바 있는 그는 서울시장 박원순, 새정치민주연합 전 상임고문 김근태, 서울대 교수 조국을 비롯해서 우상호·이인영·오영식을 그 인명사전에 올린 이유에 대해 “선정 작업에 관여하지는 않았다”면서도 “사람이 아니라 행위를 보고 판단하는 거라, 과거에 (친북)행적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사회에서 ‘공산주의자’ 또는 ‘친북행위자’라는 낙인이 찍힌 정치인들이 치명적 타격을 받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고영주는 명확한 근거도 없이 단순한 추정을 바탕으로 그런 주장을 태연히 했다.
국회에서 고영주의 ‘보컬 테러’는 전 대통령 박정희에 관한 우상호의 질문에서 묘한 ‘반전’을 보였다. “문재인 대표를 부림사건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규정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도 여순 반란사건 등을 보면 공산주의자 아니었나”라는 물음에 대해 고영주는 “그 당시에는 공산주의자”였지만 “이후 전향했다”면서 “대한민국 사회에 기여를 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확언했다. 그렇다면 문재인도 ‘전향’을 해야 면책 받을 수 있다는 뜻인가?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는 고영주의 공언이 공정함과 균형감각에 바탕을 둔 것인지 아닌지를 검토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2년 5월 10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한 바 있는 당시 국회의원 박근혜(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하자. 객관성을 담보하려면 박근혜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위즈덤하우스, 초판 15쇄, 2012년 1월 13일)의 기록을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02년 방북, 김정일위원장과 기념촬영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베이징 도착 이튿날, 고려항공 여객기를 타고 평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공항 대기실에 머무는 중, 일행 한 명이 급하게 들어오며 소식을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특별기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걸 타고 오시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196쪽)
“5월 13일 저녁 공식일정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던 중,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다. 곧이어 김정일 위원장이 내가 머물고 있는 백화원영빈관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화원영빈관 내 별도의 회의실에서 한 시간 동안 단독 면담을 할 것이라고 했다.
속기사 한 명이 배석한 상태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마주 앉았다. 그는 솔직하고 거침없는 사람이었다.”(198쪽)
김정일은 남측의 대통령도 아닌 국회의원 박근혜를 그렇게 파격적으로 대접했다. 그렇다면 고영주의 눈에는 박근혜가 당연히 ‘친북행위자’로 보일 것 아닌가? 단순한 추정으로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로 모는 사람이니 말이다.
고영주는 국감장에서 자신이 방문진 이사장이 된 데 대해 “이사장을 하겠다고 말한 적도 없고 시켜달라고 누구한테 부탁한 적도 없다. 우연한 기회에 맡게 됐는데, 제게 맡기신 분은 의미와 목적이 있어서겠죠. 맡은 것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방문진 이사장이 ‘청와대 낙하산’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아는 기자들은 그 말을 ‘박근혜 정권에 대한 충성 서약’으로 해석하고 보도했다.
고영주는 “국사학자 90% 이상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좌편향”이라는 ‘판정’까지 내렸다. 1950년 2월 미국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가 연설을 통해 “국무부가 온통 공산주의자의 첩자들로 가득하다”고 폭탄선언을 한 뒤 미국사회를 휩쓴 매카시즘과 일맥상통하는 ‘한국판 매카시즘’이다. 매카시는 한동안 선풍적 인기를 끌었지만 터무니없는 주장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방송문화진흥회는 MBC 주식 70%(박근혜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정수장학회가 30%)를 보유하고 그 방송사를 관리·감독하는 기구이다. 그렇게 중요한 조직의 책임자가 가뜩이나 추락을 거듭하고 있는 MBC를 ‘공정한 방송, 자유로운 언론’으로 되살릴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의 ‘보컬 테러’를 이유로 고영주에게 사퇴를 요구한다고 해도 그는 요지부동일 것이다. 앞으로 민주체제가 세워져 MBC의 지배구조를 합리적으로 혁신하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수밖에.
“권력은 돈·대통령으로부터 나온다”는 응답이 “국민”의 3배 106 경향
[헌법 제1조]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ㆍ[헌법 제21조] ①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ㆍ헌법기관 자처 여당도 대통령 눈치
ㆍ삼권분립·공무원 정치중립 위태
ㆍ권력의 주인이 무시당하는 현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나와서 어디로 가지?/ 그래,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아무튼 어딘가로 가기는 가겠지?’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시 ‘바이마르 헌법 제2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질문은 2015년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1945년 개정 이전 바이마르 헌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국가권력의 뿌리가 국민이라는 것을 첫 조항에서 강조한 것이다. 국민에게서 나온 권력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과 입법을 담당하는 국회의원 등에게 위임된다. 국민이 직접 뽑아 일정 기간 권력을 부여한다. 헌법은 위임한 권력이 절대화하지 않도록 행정·사법·입법권이 서로 견제하는 ‘삼권분립’과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 등을 규정했다.
그러나 지난 1년간 한국 정치의 주요 사건들을 돌아보면 권력의 주인이 잊혀지거나 권력의 ‘정거장’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경우가 유독 많았다.
국회를 견학하러 온 시민들이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헌법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입법권은 국회에 속하며, 사법권은 법원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대통령과 재벌에 권력이 집중돼 있다고 믿는 시민들이 많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퇴행 일로를 걷고 있는 ‘헌법 제1조’
“헌법 제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우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찍힌’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지난 7월8일 원내대표를 사퇴하며 한 말은 정치판에 ‘헌법 제1조’ 논란을 불러왔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여당이 속전속결로 원내대표를 찍어내는 것이 ‘민주공화국’에 맞지 않다고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여당의 한 의원은 “집권당으로서 체모(體貌)가 망가진 것은 물론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도 무너뜨렸다고 국민이 비판할까 두렵다. 삼권분립 붕괴 사태 아닌가”라고 토로했다. 헌법기관임을 강조해 온 여당 의원 스스로가 국민과 헌법보다 ‘권력자’ 눈치만 봤다는 고백이었다.
국민에게서 나온 권력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의혹도 끊이지 않았다. 청와대 핵심 비서관들을 지칭하는 ‘문고리 3인방’이 일반명사처럼 회자됐다. 청와대 스스로가 정윤회씨를 비롯한 비선권력의 폐해를 지적하는 문건을 작성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검찰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청와대 문건을 유출한 혐의로 전직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비서관과 행정관을 기소했지만, 문건의 진위에 대한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2015년 전후의 한국 사회와 권력행사 방식은 대단히 퇴행적”이라고 말했다.
■헌법이 금지한 선을 넘나드는 정치권력
삼권분립 원칙에 빨간불이 들어온 지 오래다. 청와대가 새누리당이 논의 중인 내년 총선 ‘공천룰’을 두고 “우려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면서 조목조목 직격하고 나선 게 대표적이다. 여야 대표가 논의해 의견을 모은 공천 방식에 여의도 밖의 대통령이 대놓고 개입한 것이다.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했던 1990년대로의 ‘회귀’라는 비판이 터져나온다. 지난 3월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 김재원·윤상현·주호영 의원을 대통령 정무특보로 임명한 것도 위헌 및 국회법 위반 논란을 일으켰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현역 의원의 정무특보 임명이 국회법 위반은 아니라면서도 “삼권분립의 기본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라 생각한다”면서 여운을 남겼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도 허물어지고 있다.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은 새누리당 연찬회에서 ‘총선 승리’ 건배사를 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역시 여당 의원들 앞에서 “내년엔 잠재성장률 수준인 3% 중반 정도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해서 당의 총선 일정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최근 이들 발언이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 위반은 아니라고 했지만 정 장관에 대해 ‘강력한 주의’를 촉구했다.
사법부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들어 황찬현 감사원장(전 서울중앙지법원장),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전 춘천지법원장), 이성보 국민권익위원장(전 서울중앙지법원장) 등 현직 고위 법관들이 연이어 행정부 고위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법은 아니지만 이 역시 삼권분립 정신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법관들이 행정부 고위직으로의 ‘영전’을 염두에 둘수록 정권의 비위를 살필 개연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합법적 파업도 형사 처벌하는 나라
ㆍ‘비폭력’ 파업 업무방해죄 기소 비일비재
ㆍ처벌 면해도 거액 손배소로 노동자 옥좨
‘합법적인 파업도 한국에선 형사재판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한국가스공사 노동조합 황재도 지부장(49)은 2009년부터 5년간 재판을 치르며 이 사실을 실감했다. 가스공사 노조는 2009년 회사 측과 단체협약 교섭을 했으나 결렬됐고 중앙노동위원회의 조정에도 실패했다. 노조는 찬반투표를 거쳐 파업을 결의했다. 노조원 1200여명은 하루 동안 출근하지 않고 민주노총이 개최한 집회에 참가했다. 모든 것이 단체협약 교섭 과정에서 노동자가 할 수 있는 행위였다. 그러나 검찰은 업무방해죄를 적용해 노조를 기소했다. 1심은 무죄를 선고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정당한 파업행위가 아니라고 봤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원심을 깨고 사건을 수원지법에 돌려보내면서 황 지부장 등이 적법한 절차를 거쳤다고 판단했다. 황 지부장은 “재판은 이겼지만 노조원들은 심적·물적으로 많이 힘들었다”며 “합법적으로 파업을 해도 정부는 불법으로 규정하고 검찰은 업무방해로 기소한다”고 말했다.
노조가 파업으로 인한 업무방해 혐의로 형사법정에 서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경향신문이 1990년부터 지난 2월까지 24년여간 대법원의 쟁의행위 관련 형사사건 전체 판례 287건를 분석했더니 업무방해죄를 적용한 경우가 169건(58.9%)에 달했다. 다른 수단을 동반하지 않고 파업만 했음에도 집단적 업무방해죄로 기소된 경우가 71건이었고, 이 중 54건에 유죄가 선고됐다. 업무방해죄는 “위력을 사용하여 사람의 업무를 방해한 경우”를 처벌할 수 있게 한 죄목이다. 집단적 위력을 발휘해 교섭력을 높이려는 파업의 전제와 상충되는 측면이 있어 이를 강조하면 헌법이 보장한 노동기본권이 위축될 위험이 높다. 2011년 대법원이 “불법파업이라도 ‘전격성’과 ‘막대한 손해’가 인정되지 않으면 업무방해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한 뒤 업무방해죄의 적용이 다소 완화됐다. 하지만 ‘막대한 손해’를 어떻게 규정할지에 대한 부분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그리고 검찰은 지금도 절차를 지킨 다수의 파업행위를 업무방해죄로 기소한다.
형사처벌을 면하더라도 기업들이 제기한 거액의 손배소송은 헌법상 쟁의권을 막는 족쇄로 작용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기업들은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손배·가압류 등의 방법으로 민사소송을 걸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해 기준으로 산하 사업장 노동자에 대한 손배 청구액이 1306억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한진중공업 김주익씨, 두산중공업 배달호씨 등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도 생전에 손배·가압류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했다.
"초4 때 대학 결정"… 대입 설명회에 몰리 는 초등 학부모들 10.6 한국
잦은 교육과정 개편 탓 불안감에 "미리 트렌드 맞춰 학업계획 짜야"
참석자 3명 중 1명은 초등 학부모… 고입 설명회 찾는 발길도 급증
지난 8월 한 입시업체의 2016학년도 대입 수시전형 입시설명회장. 수능 100여 일을 앞두고 코앞에 닥친 올해 수시 입시 전략을 설명하는 자리였지만 고3 부모가 아닌 A씨(44)도 현장을 찾았다. 고등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 자녀를 둔 그는 2013년부터 3년째 입시업체들의 입시설명회를 찾고 있다. 그는 “입시 경향을 알면 첫째뿐 아니라 7년 뒤 둘째의 학업계획까지 미리 짤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말했다. 고입은 물론 대입과 관련한 입시설명회를 찾는 초등학생 학부모들이 늘고 있다. 영재교육원, 국제중에 들어가기 위해 유아ㆍ초교 저학년부터 입시 경쟁을 시작하는데다, 잦은 교육과정 개편으로 인한 부모들의 불안감이 불러온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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