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명절이 달갑지 않다. 그럼에도 이런 날이 아니면 가족친지들의 만남이 어렵다는 측면에서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 어쨌든 올해 추석은 월말이 같이 동반된 추석이다 보니 급여 챙기랴 떡값 만드느라 맘 고생이 많았다. 그만큼 아내에게 미안했다. 이사회비 미납 임원에 대한 원망이 있었고 또 한편으론 어려운 가운데서도 맘과 정성을 낸 분도 있어 평가가 엇갈린다. 어쩌면 진짜 어렵웠을 것이다 믿고 싶다. 한 조직이 유지되기 위해선 책임을 공유하는 그룹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그야말로 이름만 걸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라도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으로 구분된다. 안타깝게도 후자 그룹은 극히 소수다. 그들을 출혈을 계속 강요할 수 없다. 돌파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늘 고민이다만 마땅한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고 그런 명절날 분위기를 바꾸는 존재는 새로운 세대들의 출현이다. 막내여동생의 딸 나정이와 오촌 동생의 둘째 아이 승현이의 등장은 이씨 집안의 활력소다.
특히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하여 삼촌내외분은 어쩔 줄 모른다, 추석 전날 밤 족보를 뒤적여 보았다, 陜川李氏 典書公波 천년의 세월을 더듬어 보았다. 조상과 미래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 합천 이씨(陜川 李氏)는 경상남도 합천군을 본관으로 하고 경주이씨에서 분적 했다. 始祖 李 開는 신라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 알평(謁平)의 39세 후손이다. 현재 15개 파가 있는데 전서공파가 가장 번창하였다. 전서공파의 시작은 10대손 李守全에서 비롯되었다. 주요 집성촌은 합천, 산청, 하동, 사천, 함양, 거창, 논산, 군산과 더불어 내고향 의령이다.
중시조 이개(:경주김씨)에서 내 중심의 직계 흐름을 따라 가 보았다. 꽤나 재미있었다. 열거해보자면 2대 仁榮(: 안동권씨) > 3대 衛(鄕南박씨) > 4대 安悅 5대 文通(牛峰이씨) > 6대 仲甫 > 7대 蓋 > 8대 自光 > 9대 綿 > 10대 守全 > 11대 景芬 > 12대 佶 > 13대 憺 > 14대 云皓 > 15대 斯昉 > 16대 智老(강진안씨) > 17대 順生(문화유씨) > 18대 允良 > 19대 希曾 > 20대 彭年(성산이씨) > 21대 天受(사천김씨) > 22대 胤緖 > 23대 亨源(전의이씨) > 24대 又新 > 25대 昌祉(광주노씨) > 26대 鳳瑞(창령성씨) > 27대 陽柱 > 28대 東贊(강진안씨) > 29대 廷樑(안동김씨) > 30대 家榮(밀양손씨) > 31대 志澤(강릉함씨) > 32대 命鉉(순흥안씨) > 33대 炯實(파평윤씨) > 34대 昌基(달성서씨/신안주씨/신창표씨) > 35대 鎬俊(경주최씨) > 36대 在淳(김해김씨) >37대 내 아들로 이어진다.
지금의 고향땅 신촌마을에 터잡아 산 이는 32대 명현 고조부와 33대 형실 증조부인 듯하다. 형실 증조부 슬하에 相基, 東基, 昌基, 在基 4남과 두세분의 할머니를 두셨던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는 모두 오형제인데 3남2녀다 . 이중 둘째 삼촌은 지난 90년대 중반 돌아가셨고 막내 삼촌이 계신다. 삼촌의 아버지에 대한 각별함은 참 배울게 많다.
언제나 그렇지만 차례를 지낸 다음 손님 접대가 마무리될 즈음 세시에서 네시 사이 처가집으로 향한다.
우리집 유일한 이동수단인 마티즈가 노후화되어 에어컨이 고장났다. 그래서 늘 다니던 14번 국도 대신 김해시내를 관통하는 김해대로를 이용했다. 14번 국도상에는 3~4개의 김해터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어컨이 작동안되기 때문에 차창을 열어 놓고 가야했기 때문인데, 아들 두 놈이 투덜거렸다. 차를 바꾸자고 ㅡㅡ 사실 올해 초 금연을 시도하며 한달 소요되는 담배값 만큼 새차 구입에 따른 비용분담을 약속했는데, 선금 비용을 조달 할 수 없어 무위로 끝났다. 그 결과 담배는 계속 피우는 꼴이다. 그렇다고 빚을 내 차를 구입할 만큼 절박하지도 않았고 이럭저럭 아직은 잘 굴러 다니는 차를 계속적으로 이용중인 것이다. 아무튼 이럴 때 나는 말이 없어 진다. 달리 할말도 없고 거기다 운전도 못하니 .... 해서 아이들이 가난한 아비를 놀려도 차창 너머로 헛 웃음을 날리며 순간을 넘길 뿐이다.
아내의 고향 김해 한림도 갈 때 마다 달라 진다. 변함없는 풍경이라면 처가집 마당에서 바로 내다 보이는 문전옥답과 화포천이다. 저 논에서 거둬들이는 쌀이 우리 식구의 주요 식량원이다. 장가 든 이후 아직 이렇다 할 쌀값 한번 안내고 늘 공짜로 밥을 먹는다. 해서 참 죄송시럽고 뭐라도 보탬이 되는 기회가 있다면 두 팔 걷어 붙이고자 한다. 게다가 사위가 벌이가 신통찮아 딸과 손자들 변변치 못한 생활을 하는 것 알면서도 그러려니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화포천에도 가을이 오고 있다. 천변 버드나무며 왕버들이 잎이 단풍이 스며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때에 낚시대를 들운 태공들도 제법 보인다. 명절 한 가운데 아니든가. 낚시광이라고 해야하나 아님 철저한 연휴의 즐김인지 모르겠다만, 왠지 그 모습이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
해가 서편으로 기울면서 드리운 빛도 엷은 주황색이다. 어느 집에선가 명절을 맞아 나 처럼 처가집에 왔든가. 딸 내외가 차에서 선물 꾸러미를 꺼내는 동안 아이가 할머니하고 뛰어 간다. 그 소리 듣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걸음에 달려나와 두 팔 벌여 외손녀를 안아주는 모습 참 정겨운 광경이다. 아마 자주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나 도 예전에 그랬던 기억이 난다. 특히 여름 방학 때면 나의 행선지는 늘 고향이었다. 흙 먼지 자욱히 일어키며 달리던 완행버스가 고향 주막에 서면 마음이 설레었다. 그리고 섬안들로 달려 간다. 할매하고
처가집 철길 뒷편 빈집이 한 채 있다. 마침 메밀꽃이 만개했고 소나무의 붉은 수피가 저녁놀에 더욱 뷹다
모정마을 산책길에서 만난 석류들 입안에 침이 고였다.
참죽나무가 서 있는 풍경
멀리 낙동강도 저녁놀을 담아 흐른다.
정감있는 마을 골목과 큰길들 모든게 그림이다.
골목은 너무 넓어도, 너무 좁아도 그렇다. 성인 키 만큼한 폭의 골목길은 생활사의 진수다.
모정마을에도 대숲이 많다. 때마침 새들도 둥지로 돌아갈 시간, 대숲에 깃든 수백 마리의 참새떼가 조잘된다. 장난기가 발동하여 대나무를 흔들었더니 한꺼번에 날아 오르며 내는 날개짓 소리가 귀를 채운다.
어느 집 문을 열고 그 집을 훔쳐 본다. 비질로 깔끔한 마당이며 겨울 군불을 지필 장작더미에 세워둔 참깨는 잊혀진 풍경이다.
집집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과 제풀에 떨어진 감이 지천이다.
텃밭 콩이며, 고추, 파, 상추가 가득하다. 저녁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풍경이다.
하마 떳을 보름달이지만 작약산 능선에 가리어 더디 모습을 드러낸다.
이윽고 솟아 오른 달이 에나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오히려 화포천에 뜬 달이 더 또렸했다. 막내와 조카들을 데리고 밤 마실을 다녀 왔다.
일찍 눈을 감았다. 새벽강을 보기 위해서 였는데, 자다말고 오줌 마려 나섰던 길에 마당에 환환 발빛에 반해 하늘 올려다 보먀며 몽유병 환자처럼 마을을 배회했다.
드문 일이다. 그리고 이 또한 흔치 않은 일이기에 즐겼다.
그 달빛 만으로도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산과 들, 마을이 안개에 파 묻힌 아침
저전거 바람을 일으키며 일대를 돌아 다녔다. 마주하는 바람이 좀은 찹다는 느낌이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했다.
화포천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 것도 20년째다. 문득 어쩌다 한번 가게 되는 산골 내 고향을 떠 올렸다. 그리웠다.
고향에도 강이 있다. 낙동강의 지천인 유곡천이 있고 집 앞을 흐르는 시내물이 상곡천이다. 상곡천은 유곡천으로 흘러 들어 하나가 된다. 문득 생각자니 그 의령 골짝에서 흘러 온 물이 김해 한림 낙동강의 화포천변 김해김씨 처자를 만나 연을 맺었다. 거리를 따져 보니 물길로 79km 약 200리가 조금 넘는다.
고향의 강에는 조약돌이 많다. 여기는 뻘이다. 유구한 세월 겹겹 흘러 내리던 낙동강의 유기물이 쌓여 형성된 퇴적토가 김해들녁이다. 산골과 평야지대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언제였던가 대학동기 중에 박미출 이란 친구가 있었다. 그의 형은 박병출시인이다. 형제가 다 시를 썼는데 아무튼 어쩌다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깜깜한 밤이었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데 이른 아침 눈을 뜬 다음 마당에서바라 본 풍경이 그대로 머리속에 인화((印畫)되어 있다. 회상하건데 그날도 아침 안개가 자욱했고 그 안개가 벗겨지면서 김해평야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야말로입이 벌어지는 장관이었다. 그 친구 집은 들 가운데 있었는데 산이 보이지 않았다. 그 놀라움이 새삼스럽다. 그런 풍경을 이제는 만나기 힘들 것 같다. 김해평야도 옛말이다. 곳곳에 농공단지가 들어섰고, 농경지가 공업지역 상업지역 주거지역으로 바뀌면서 옛모습은 더 이상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비포장 강득길도 콘크리트로 바뀌었다.
그 길에 가시박이 기세를 몰아 둔치를 점령해 나가고 있다.
금곡교 앞의 정촌마을은 70년대의 새마을 지붕으로 남아 있다. 주로 고속도로변이나 철로변 마을에 시범적으로 조성한 주택단지다. 새마을지붕이라 하니 좀 어페가 있다만 다시말해 새마을 지붕이란 슬레이트 지붕인데 여기선 그 시절의 대표적 보여주기식 주거형태를 말하기 위해 사용했다. 지붕처머가 우리네 전통 선과는 달리 뽀쭉하고 날렵하다. 그렇지만 나도 한때는 그란 집을 동경했다. 어쨌든 정촌마을 옆에는 폐교된 금곡국민학교가 있다. 아내와 처남들이 이 학교를 다녔다.
화포천 하류부 처가집 뒷편 광주노씨들의 재실이 있다. 회화나무 몇 그루 늘 봐도 보기 좋은 풍경이다. 그런데 얼마전 일대를 주택업자가 매입하여 옹벽을 쌓고 집터를 만들어 버려, 이제는 접근이 어렵다. 주택업자들의 농어촌 진출이 샛길을 없애고 낮선 문화를 이식한다. 기존에 터잡고 살던 사람들이 현대식 건물에 부러움을 담아 보내며 어쩌다 한번씩 들리는 그 자손들이 제 태어나고 자란 집을 개조하는 명분을 주기 때문이다. 어차피 생활권은 현재 뿌리 내린 도회의 삶이다 보니 고향집은 별장처럼 휴가철 이용 숙소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마을을 둘러싼 지형과 주변 환경은 고려함이 없게 되고 일대는 잡종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실패작이다.
아이들도 마땅히 놀거리가 없다. 그래서 저마다 스마트 폰에 깔린 게임과 ㅆ름하거나 텔레비젼 앞에 모여 시간을 보낸다. 아니면 우리집 큰 아들같은 나이대는 아예 잠을 잘 뿐이다. 예전같으면 여기서 나고 자랐다면 동기동창생들과 마을을 돌며 술추렴에 어울려 놀기라도했던 모습이지만 더이상 그런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이 아이들에게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나마 차례차례 한 가족씩 떠나면 아이들은 심심해 견디지 못하고 빨리 집에 가자고 성화다.
아무튼 참 씁쓸한 명절의 뒷모습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감나무에 터 잡은 호랑거미 한마리 꽁무니에서 실을 뽑아내고 있다. 실은 '방적기'와 연결된 실샘(silk gland)에서 만들어져 나온다. 거미는 이 실샘으로 집을 만들고 이동하고, 사냥을 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인 거미줄을 뽑아낸다. 건드리면 뚝 힘없이 끊어지는 이 거미줄이 실은
강철이나 나일론보다 질기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곤충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거미라고 한다. 기록을 보면 4000㎡의 밭에 약 200만 마리의 거미가 살고 있다고 한다. 거미들이 1년간 잡아먹는 곤충들의 무게를 합치면 주변에 살고 있는 농부들의 몸무게를 모두 합한 것보다 무겁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오마니뉴스 최오균) 약 4억 년 전에 곤충과 함께 지구상에 등장한 거미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4만여 종이 기록되어 있고, 우리나라에도 600여 종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전봇대의 버팀줄을 타고 오르는 환삼덩굴 , 군락으로 있을 때는 우북하니 누워서 기는 형태인데 외줄기로 줄기를 뻗친 전혀 다른 모습이다. 장소와 조건에 따라 식물들도가끔 낮선 얼굴로 다가 설 때가 있다.
아침해가 안개를 걷어갈 즈음 마당에서 저마다 쌀을 털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쌀을 찧기위해서는 정미(精米)소를 가야 했다. 일명 방앗간이다. 흔히 도정(搗精)이라 하는데 낟알을 찧어 껍질을 벗기고 그 속에 있는 등겨층을 벗기는 일이다. 시골에서는 가을걷이 후 아들 딸 들에게 나누어 줄 요량으로 미리 쌀가마니를 찧어 놓기도 했는데, 지금은 가정용 정미기계가 보급되어 필요한 만큼 찧으면 된다. 편리한 세상이다.
새삼스럽지만 한 숟가락의 밥을 먹기 위해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은 흔히 쌀미 米 자를 통해서 풀이되는데 ‘팔십 팔(八十 八) 즉, 여든여덟 가지의 힘든 작업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쌀이 될 수 있다’ 해서 만들어진 글자이다. 쌀농사 짓기가 그만큼 힘들고 고되다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 신(李紳 780-846)은 그의 시에서 벼농사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鋤禾日當午 (서화일당오) 호미로 논을 매다 보니 점심때가 다 되었네
汗滴下禾土 (한적하화토) 땀방울은 벼와 땅바닥을 적시는데
誰知盤中飡 (수지반중손) 누가 저녁상 밥의 의미를 알겠는가
粒粒皆辛苦 (입입개신고) 한 알 한 알에 맺혀 있는 그 고충을
요즘이야 기계화 된 농법을 통해 그 과정은 상당부분 생략되긴 했지만 그래도 한톨의 쌀을 얻기위해 들이는 품은 실로 고되다.
쌀의 어원: ‘벼’라는 말은, 인도에서 가을에 익는 벼종류인 ‘브리히(Vrihi)’라는 말이 만주 지방의 여진 말인 백미(白米)를 뜻하는 ‘베레’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벼’로 정착되었다. ‘쌀’이란 말은 인도의 겨울에 익는 벼인 ‘사리(Sari)’가 어원으로, 이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사리(舍利) 또는 보살(菩薩)이 되고 ‘ㅂ’자 발음이 없어지면서 ‘살’ 로 발음되다가 다시 ‘쌀’로 변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설(이춘영 교수)도 있다고 한다 (토종 씨드림 안완식의 글 중).
아무튼 보통 쌀 농사는 3월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크게 파종, 모내기, 수확 순으로 볼 수 있는데 모내기 후 60일에서 길어도 70일을 넘지 않고 수확하게 된다. 벼포기 하나당 약50개에서∼200개의 꽃이 피고 벼꽃이 핀 그때의 상황에 따라 그 해 수확될 농사가 반은 결정된다. 위 사진은 처가집 논에서 찍은 장면으로 벼가 낱알의 무게에 못이겨 고개를 숙이고 있다. 모내기 후 약 50일정도가 경과했을 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옛날에는 이렇듯 벼가 익은 뒤 벼를 벤 다음 논바닥에서 말리고 어느정도 마르면 다시 타작(혹은 탈곡 :脫穀)하고 가마니에 담아 낸다. 그리고 달구지나 구르마(리어카) 경운기에 실어 방앗간으로 간다. 거기서 한참을 기다렸다 순번이 돌아 오면 도정에 들었다. 나락을 투입구에 쏟아 부으면 정선기(精選器)와 석발기(石拔機-벼에 섞인 돌을 골라내는 기계), 현미기를 거쳐 아래 풍구(벼에 섞인 쭉정이, 겨, 먼지 등을 바람으로 날려서 제거하는 기구)와 공중 풍구(윗풍구)를 통과한다. 그 다음 정미기를 거치면서 껍질이 깎이고, 분리기를 거치면서 깎인 나락과 덜 깎인 현미가 별도로 분리되어 정미기로 되돌아온다. 정미기로 되돌아온 벼를 연마기를 거치게 하면서 싸라기와 쌀알을 걸러주면 도정 작업이 끝나게 된다.
도정료는 나락 한가마 80kg에 대부분 5kg 정도의 쌀로 대신했다. 나는 리어카로 실어나른 경험이 있다. 도정하면서 나온 등겨와 왕겨도 거두어 와서 거름에 써거나 소 나 돼지 먹이로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 그 햇살로 지은 밥은 윤기가 흐르면서 고소함을 넘어서는 특유의 냄새를 풍겼다. 그 가마솥밥 냄새가 그립다.
처가집의 논은 바로 집 앞에 있다. 그야마로 문전옥답이라 할 수 있다. 면적은 2,809m² 약 850평 (밭은 제외) 정도로 네 마지기가 조금 넘는 땅이다. 그외 논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집 앞 논은 늘 보던 땅이라 이참에 소출(所出)을 계산해 보았다. 대략 한마지 200평 논에서 평균 80kg 네가마가 생산된다. 네마지기 조금 넘는 면적이니 16가마에 한 두가마 더하면 년간 18가마 정도가 나온다.
kg 로 환산 하면 1,440kg으로 장인장모, 여기에 큰처남 네식구, 작은처남 네식구, 우리집 네식구 총 18명이 이땅에 기대어 산다. 비록 쌀의 소비가 1인당 연간 1980년 166kg에서 2011년 71.2kg, 2014년 65.1kg으로 급감했다지만 쌀은 여전히 우리의 주식으로 특히 네 가구 중 우리집의 소비가 많았다. 하긴 우리집도 요즘 추세로 본다면 큰아들과 내가 먹는 집밥은 거의 한끼 내외 정로 줄었다만 지난 20년을 무상 보급받아 왔다. 참 고맙고도 미안한 노릇이다.
도정을 해서 현미로 뽑은 것이다. 지난해 수확한 쌀이다. 건강을 생각해 현미밥을 먹지만 흰쌀밥이 내는 맛에는 처진다. 아이들도 그냥 흰쌀밥 먹어보자고 조른다.
등겨는 퇴비와 섞여져 거름으로 논밭에 다시 뿌려질 것이다. 석유화학 제품이 생활용품으로 잡기 전에는 모든 것이 순환고리를 가졌다. 이제 논 농사에서는 그 순환고리가 끊어지고 있다. 화학농법에 길들여 질 수록 땅은 황폐화되고 수질마저 위협받는 상황이다. 거기다 버려지는 것들 농약병, 비닐 등으로 인해 농토는 몸살을 앓고 있다.
도정을 하고 난 뒤 막내 아들과 조카들을 데리고 한림공설운동장으로 갔다. 그 하늘에 황조롱이 부부 거침없다.
아이들의 체력이 요즘 말로 저질 체력이었다. 가지고 할 땐 좋아라 하던 아이들도 막상 운동장에 풀어 놓고 뛰게 하니 15분을 넘기지 못했다. 딱한 노릇이다. 운동량이 부족한 생활이 강요된 결과다. 또한 좋지 못한 먹을거리에 무방비로 노출되다 보니 아이들의 비만이 증가일로에 있는 것이다.
어쨌든 몸을 많이 놀려야 되겠다는 생각에 귀가 차 부르기를 유보한 채 한림역까지 걷게 했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가는 길에 아내가 다녔다는 금곡국민학교에 들렸다. 학교는 오래전에 폐교했고 사설 자연놀이학습체험장이 임대하여 이용중이었다. 버즘나무들은 아내가 학교에 다닐 때도 있었다고 했다. 간만에 와 보는 모교에서 아내는 잠시 옛 생각에 젖었다. 학교는 2층 콘크리크 건물에 작은 운동장을 깔고 있었다. 실제 작았다. 그럼에도 운동회가 있는 날에는 인근 주민들이 죄다 모여 그야말로 잔치같았다고 했다. 그랬던 학교들이 곳곳에서 문을 닫았다.
2015년 교육부의 통계자료 전국 폐교현황에 의하면 도심은 학생수 200명 이하, 읍면지역은 60명 이하가 폐교 대상이 된다. 그 결과 강원지역 436곳, 경북 660곳, 전남 789곳, 경남 540곳 제주 28곳 등 총 3,595곳이 폐교 조치 되었다. 학교 통폐합 정책은 1982년부터 추진되었다. 1980년대에는 180명, 1990년~2005년까지는 100명 그리고 2006년부터는 60명으로 강화되었다. 학교 폐교는 농어촌 인구 공동화의 최종 결과믎이다. 그것은 빌어 먹어도 도시가 살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농어촌 환경이 도시와 견주어 부러울 것이 없다면 어찌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인가. 딱한 노릇은 그나마 유지되던 도심지역 학교 조차 향후 5년 뒤 2020년이 되면 농어촌 학교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데 지금보다 학생수가 25%나 감소하게 되기 때문이다. 저출산이 야기한 결과의 도래다. 통폐합 되다 보면 이동거리의 확대 등 여러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악순환의 고리가 생성되는 것이다. 불편을 강요할 수는 없다.
농업 포기라는 치명적 정책 오류의 극복이나 개선의지가 없다면 절망적이다. 농어촌 노령화와 공동화는 가속화 되고, 종국에는 지역 사회의 피폐를 야기할 것이다. 하기사 논 한마지기 쎄빠지게 지어봤자 년간 100만원에도 못미치는 이따위 현실에서 어떤 미래를 기대할 것인가.
뭐 폐교의 재활용을 통해 지역의 복합문화공간으로의 변신도 있다만, 예컨데 공연장, 갤러리, 창작촌, 박물관, 수련시설 등으로 변화를 도모하면서 주민소통공간으로 거듭나는 폐교가 있기는 하다만 어찌되었건 본질은 더이상의 학교의 폐교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역이 미래를 도모할 수 있고 현재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농촌은 은퇴부부들의 노후생활 대상지가 아닙니다. 농촌공동체를 활성화하려면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야 하고, 그럴려면 반드시 학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영광에 들어올 때 자기자식들 도시나 해외로 유학 보내지 않고 시골학교 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지역운동에서 학교는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남 영광 농촌공동체 '여민동락' 대표 강위원 광주광역시 광산구노인복지관 관장(오마이뉴스)
농어촌지역 초등학교는 국민생활에 필요한 가장 초보적인 일반교육을 실시하는 곳이다. 그 역사는 과거 서당으로 거슬러 오른다. 근대적 학교는 갑오개혁이후 1883년 원산학당의 설립 후 1895년 서울 수하동 소학교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보다 본격적인 정부주도하의 초등교육은 일제 강점기 일제가'황국신민의 학교'라는 의미에서 국민학교를 개설하면서 일반화 됐고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1996년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초등학교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런급해듯 오늘날 초등학교는 도시나 농어촌을 막론하고 기로에 섰다.
앞서 언급했듯 이제 농촌인구의 급감과 고령화는 상식이다. 현재의 농민과 농촌문제는 역대정권의 농촌 포기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현실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라도 선회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의 국가가 단순히 경제적인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인 관점에서도 안정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농촌의 규모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준으로 유지돼야 한다. (…) 특히 한 나라의 사회적, 문화적 수준을 계속 높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의 수가 언제나 일정한 수준으로, 그들이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과 끊임없이 접촉하는 것을 통해 우수한 문화적, 인간적 조건이 창출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적 공통자본: 우자와 히로후미 >(이병천 옮김, 필맥 펴냄), 55쪽)
차를 타고 이동하기에 화포습지를 보자고 했다.
저 산 아래 봉하마을이 있다. 늘 지나친다. 그가 보고 싶다.
한때 한림면 화포천 일원의 습지를 샅샅히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셔널트러스트 이곳만은 지키자에 신청하기도 했지만 상위 입상은 못했다. 나름 좋은 호평을 받았지만, 주최측에서 이듬해 다시 신청하라 했지만 일정에 쫒기었든지 허지부지 되었다.
그리고세월이 흘러 화포습지는 또 다른이들의 노고로 주목받는 장소로 거듭났다.
거미는 아직도 집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장모는 아들 딸에게 줄 보따리를 준비하느라 그 사이 밭에도 다녀오고 꿀밤도 한 다리이나 주워 왔다. 주머니가 가벼워 맘 한켠이 무거운 추석이었지만 다들 건강함을 확인했던 추석이기도 했다.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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